장편소설
임꺽정 봉단편 4
-홍명희
임꺽정 : 봉단편:벽초 홍명희 소설
제 5장 게으름뱅이
1
이튿날 봉단이는 다른 때나 일반으로 일찍부터 기동하였지만 김서방은 늦잠을 자고 아침밥 때에야 일어났다. 장모가 눈살을 찌푸리며 “우리가 화초사위로 두고 볼 처지가 못 되니까 인제는 일을 좀 해봐야지. 해가 한나절까지 자빠져 잠이나 자서야 쓰나!” 하고 잔소리 마디나 좋이 하더니 그날부터 일을 시키기 시작하였다. 처음 며칠 동안은 내외가 버들일하는 옆에서 잔심부름을 시키며 고리를 트는 법, 키를 겯는 법, 이 법 저 법 가르치고 우선 키바탕을 결어 보라고 맡기는데 처음 솜씨에 시초와 끝은 어렵다고 장인이 겯다 둔 것을 내주었다.
버들잎을 물고 죽을 처지에 태어지나 아니한 김서방이 팔자에 없는 버들잎을 물게 되니 일이 잘 될 까닭이 없다. 회창회창하게 가는 채를 골라서 뽑다가 분지르고 씨로 먹이는 채를 날로 놓은 노끈에 얽히게 하여 분질러서 키는 한 뼘도 겯지 못하고 버들채는 줌으로 분질렀다. 장인이 이것을 보고 “이 사람 고만두소. 공든 채가 아까웨. ” 하고 일거리를 빼앗아 가니 김서방은 무안한 것을 감추려는 듯이 “손이 굳어서 잘 되지 않아요. ” 발명하였다. 말썽 많은 장모가 듣지 않았으면 모르되 듣고서는 가만히 있을 일이 아니라 “손이 아니라 두툼발인가? 방망이로 쳐 이겨서 풀솜같이 만들지 굳은 게 걱정이야?” 김서방을 망신 주고 “아따, 처음이라 그렇지. ” 사위 두둔하는 주삼이를 “처음을 보면 끝도 알지. 사위 봉양하려면 늙게 신세가 고될 판이야. 잔소리 말고 정신이나 차려요!” 두 말 못하게 윽박았다.
이로부터 김서방이 장모에게 박대받기 시작하여 나날이 자심한 구박을 당하게 되었다.
김서방이 잠시라도 편히 앉았으면 그 장모는 없던 심정이 저절로 나는 듯이 무슨 일이든지 불러 시키고 시킨 일이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욕설을 예사로 내놓았다. 주삼이도 구경은 안해의 편이라 김서방을 구박할 때는 장모가 선봉대장 격이요, 장인이 후진중군 격이었다.
주팔이가 종종 와서 보고 유세객의 구변으로 형수와 형을 달래지만, 그 힘이 오래 가지 못하므로 항상 봉단이가 김서방을 싸고 도느라고 애를 썼다. 그리하자니 따라 볶이는 것이 봉단의 신세라 남모르게 눈물을 흘릴 대가 많건마는, 그래도 남편과 둘이 서로 대하면 웃음도 웃고 실없는 장난도 자아내고 하여 지성으로 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김서방은 젊은 안해의 얼굴이 야위고 팔목이 가늘어지는 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장모의 마음을 사보려고도 하였으나, 살이 끼었든지 사이가 종시 좋아지지 아니하여 나중에는 나는 나대로 할 터이니 너는 너대로 하라는 뱃심을 가지지 아니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장모가 심악하다고만 말하지 못할 점도 없지 않아 있었으니, 김서방이 일치고 힘들여 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배우지 못한 일을 먹지로 하노라니 서투르기도 하겠지만, 모든 일을 마음에 하치않게 여기는 것이 남의 눈에 보이었다.
우선 버들일만 하여도 밤저녁에 봉단이가 손을 붙잡고 가르치다시피 하였으니 어지간하면 며칠 안 지나서 잘은 못하더라도 시늉만은 내련마는 달포가 지나도록 봉단의 입과 손을 빌게 되고, 나무를 해오라면 종일 산에 있다가 다 저녁때 내려오되 큰 키에 짊어진 나무가 까치집만밖에 아니 되어 봉단이까지 어이없게 하고 또 거름을 쳐내라면 맞빨이밖에 없는 고의 적삼에 더러운 칠을 하여 봉단의 수고를 끼치고야 말게 되니 데릴사위로 놓고 보면 주삼의 안해가 아니라도 장모로 뛸 사람이 없지 아니할 것이다.
김서방이 일손이 느릴 뿐이 아니라 게으름을 부리어서 조만한 잔소리가 아니면 당초에 일을 잡지 아니하는 까닭에 주삼의 안해가 게으름뱅이라고 별명을 지어서 김서방을 부를 때에 “게으름뱅이 게 있나?” 하면 김서방도“네. ”대답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삼의 내외 외에는 이 별명을 쓰는 사람이 별로 없던 것이 차차로 기근방에 퍼져 나중에는 게으름뱅이 사위가 조명이 나서 주팔이까지도 김서방보고 농담하려면“게으름뱅이 사위. ”부르게 되었다. 이 별명을 입에 올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오직 봉단이 하나뿐이었다.
어느 날 밤에 봉단이가 김서방과 마주 앉아서 수수께끼로 마음을 위로하는데 ‘장도 장도 못 먹는 장이 무어냐, 강도 강도 못 건너는 강이 무어냐’ 서로 걸고 풀고 하다가 김서방이 “뱅이 뱅이 못 쓰는 뱅이가 무언가?” 걸고 봉단이에게 풀라고 하니 봉단이는 잠깐 양미간을 찌푸리다가 얼른 다시 펴며 “못 쓰기는 누가 못 쓴대요? 게으른 데는 게을러도 게으르지 않은 데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요?” 하고 소명한 눈 속에 웃음을 머금었다.
2
김서방 내외가 자려고 누워서 겉잠도 채 들지 아니하였을 때 횃불빛이 창에 비치며 십작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김서방이 “화적인가?” 의심하며 일어나려고 하니 그 안해가 “가만히 누워 계세요. ” 남편을 말리고 “우리 집에 무슨 화적이 들겠소. ” 하고 자기부터 천연하게 누워 있다. 조금 있더니 삽작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나고 뒤미처 안방문 앞에서 두런두런 사람의 말소리가 났다.
봉단이는 그제야 비로소 일어나서 벗어놓았던 치마를 찾아 입은 뒤에 창문을 바스스 반쯤 열고 내다보더니 “고원댁 오빠요?” 소리를 높여 물으며 바깥으로 나가고 김서방은 ‘돌이가 어째 밤중에 왔노?’ 의심하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돌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또 장모와 장인의 말소리가 들리고 얼마 있다가 여러 사람의 신발소리가 나고 또 삽작문 닫는 소리가 나더니 안해가 방으로 들어오며 “주무세요?” 묻는다. 이때껏 자는 것같이 누웠던 김서방이 “아니. ” 하고 일어나 앉으며 “돌이가 어째 왔던가?” 물으니 봉단이는 등잔불을 다시 켜며 “ 고원댁 아주머니가 지금 곧 운명하실 것 같대요. 그래서 어머니를 뫼시러 왔세요. 아버지하고 내외분이 다 가셨세요. ” 대답하였다.
그날 밤은 젊은 내외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마음놓고 웃고 이야기하다가 밤을 밝히다시피 하고 이튿날 김서방이 코가 비뚫도록 늦잠을 자고 나 보니 해는 벌써 아침때가 기울었고 봉단이는 집안을 깨끗하게 치위놓고 앉아 있다. 김서방은 너무 늦게 잔 것이 염치없이 머리를 긁으며 “오늘이야말로 별명을 들어 싸군. ” 혼잣말하듯 하니 봉단이가 세숫물을 떠다 주며 “얼른 세수하시고 점심 좀 잡수시지요. 나는 배가 고파요.” 하고 상글상글 웃었다. 돌이가 상게 되는 덕에 김서방은 단지 며칠 동안이라도 장인 장모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맘 편히 지내었다.
주삼의 내외가 상가에서 돌아오던 날 저녁때 주삼의 안해가 양식이 없어진 것을 보고 “연놈이 들어앉아서 밥만 해처먹었니? 양식이 어째 이렇게 없어졌니?
” 야단치는 것을 봉단이가 “한 끼에 두 끼 밥 먹지 않았어요.” 조금 불쾌히대답하였더니 그 어머니가 하늘이 낮다고 뛰면서 “이년, 서방맛을 되우 안다. 그 게으름뱅이가 양식 도적놈이야! 감추려면 감추어지니?” 욕설을 내놓다가 봉단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쪽쪽 울기는 왜!” 하고 혀를 차면서도 딸을 불쌍히 생각하였던지 욕설은 그치고 “여보, 원수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구려.
내일 장날 키 죽이나 갖다 내서 서속 몇 말을 바꾸어 와야겠소. 죽을 채우자면 키가 몇개나 부족이오?” 주삼을 보고 물었다. “만든 것이 반 죽밖에 없어.” 하는 남편의 대답을 듣고 딸을 돌아보며 “우리가 들을 맡을 터이니 둘은 네가 맡고 나머지 하날랑은 게으름뱅이더러 밤내로 결어노라고 해라. 못 해놓으면 내일 아침밥은 다 먹을 게니 알아 하래라!” 구별하는데 봉단이가 상을 찌푸리며 “나는 오늘 골머리가 아파 일 못하겠어요. 만일 억지로 하라시면 하나나 맡지요. ” 앙탈하다시피 하여 주삼의 내외가 세 개를 맡고 젊은 내외가 각각 하나씩을 맡게 되었다.
일거리를 각각 나눠 가지고 방으로 들어간 뒤에 김서방은 봉단의 전하는 장보의 말을 들고 “나는 내일 아침밥을 안 먹을 작정하지, 밤을 꼬박 새우더라도 다 겯기는 틀렸으니까. ” 하고 채를 골라놓는 안해의 시중을 들어주다가 “골머리가 아프다더니 어떻소?” 하고 머리를 짚어보려고 하니 봉단이가 살그머니 짚으러 오는 손을 막으면서 “관계찮아요. 개수를 줄이려고 아프다고 했어요.” 하고 잠깐 방그레 웃었다. “꾀병이 일쑤구려. ” “언제 누가 꾀병합디까?” “우리 혼인 전날 밤에는 그게 무슨 병이오? 능청스럽게 꿈 이야기까지 꾸며가지고, 보기에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하는 짓은 여...” “여... 무어요?” “호. ” “잘하시오 잘해. 당신 그러다간 지각 나자 망녕 나겠소. ” 젊은 내외의 속살거리는 말은 밤이 이슥토록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식전에 주삼의 안해가 아랫방에서 나온 키 두 개를 한두 번 뒤치고 제치고 하더니 “서방 대신 해주려고, 여호 같은 년 아프다고 어미를 속여!” 딸에게 귀먹은 욕을 해붙이었다.
3
김서방이 아침밥을 먹은 뒤에 그 장모가 부르더니 장인과 같이 가서 장을 보아 오라고 하여 김서방은 키 한 죽과 고리 몇 짝을 지게에 짊어지고 주삼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함흠은 대처라 장이 크다. 각 촌에서 모여드는 장꾼들이 길이 메어 가는데 그중에는 숯짐이며 장작짐을 지고 가는 두메 사람도 있고 새끼 걸빵으로 곡식말이나 무명필을 걸머지고 가는 촌 농군도 있고 소를 네뎃 바리 혼자서 몰고 가는 소장수도 있다.
“감사 행차냐? 길 중간을 잡고 오게. 키짐 저리 비켜라!” 소장수의 볼멘 소리에 김서방은 놀라서 길을 피하다가 등에 잘붙지 아니하는 지게가 삐딱하며 길옆으로 오던 농군의 머리가 킷불에 스치었다.
“이 자식, 정신 차려!” 농군의 호령을 듣고 김서방은 미안한 듯을 말한다는 것이 “다쳤어?” 무심히 반말을 하였더니 그 농군이 대번에 얼굴을 붉히며 “이놈의 새끼! 백정놈이 반말은... 버릇을 배워라!” 하고 껑청 뛰어 김서방의 뺨을 갈겼다. 김서방이 난생 처음으로 당하는 일이라 기도 막히거니와 슬그머니 분이 나서 그 농군을 떠다박지르니 “백정놈이 사람 친다!” 농군이 외치며 “백정놈이 사람 치다니?” “백정놈이 무어 어째?” 하면서 두메 장꾼이며 촌 장꾼들이 김서방의 옆으로 모여들었다.
활 반 바탕 가량이나 앞섰던 주삼이가 이때 마침 길가 밭고랑에서 똥을 누다가 밑도 채 씻지 못하고 괴츰을 움켜쥐고 쫓아와서 “이 사람 무슨 짓인가?” 일변 김서방을 나무라며 “몰라서 그렇소이다. 난데 사람을 사위로 얻었더니 위인이 데퉁궂어 걱정이올시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 농군에게도 절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도 절을 하고 꾸벅꾸벅 정신없이 절을 하였다. 주삼의 적 덕으로 뭇매질이 나지 않고 여러사람이 헤어지는데 “백정의 사위놈이 양민에게 손을 대다니 무엄하기도 짝이 없지. 도대체 세상이 망했어. ”소장수가 지껄이니까 그 농군은 더러운 손자국을 털어 없애려는 것같이 옷을 털며 지껄이는 소장수를 쳐다보고 나서 “제기. 간밤에 꿈자리가 사납더니 마수거리로 창피 보았네.” 혼자 중얼거리었다.
그때부터는 주삼이가 가끔가끔 뒤를 돌보아 김서방이 조금만 떨어지면 “빨리 오게. ” 불러가지고 앞뒤에 붙어 가는데, 김서방의 고개는 줄곧 아래로 숙었었다. 읍 어귀에 들어서자, 주삼이가 길을 비켜 우뚝 섰다. 뒤에 오던 김서방이 따라서 멈추고 고개를 들어 보니 갓을 쓰고 소매 달린 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한 오십 된 채수염 자리 하나가 아이 하나를 뒤에 따리고 천천한 걸음으로 이편을 몇 걸음 앞으로 나가다가 채수염 자리가 가까이 온 뒤 허리를 구부리고 공손히 “집강 나으리, 주삼이 문안드립니다. ” 하니 수염 자리가 구부린 주삼의 등을 내려다보며 대답은 “오오. ” 뿐이다. 그 수염이 그대로 지나가려고 몇 걸음 나가다가 무슨 생각이 나는 듯이 돌아서며 “이애 그 동안 댁의 따님이 근친을 와서 계시다가 수이 가실 터이다. 그런데 댁 안에서 엿을 담을 그릇이 없다고 하시더라. 이삼일 안에 동고리 몇 벌을 댁으로 가져오너라. ”주삼에게 분부한다. 주삼이가 “녜에. ” 대답하고 “저기 가지고 오는 것이 있었는데 물건을 보시겠습니까?” 말하여 “어디 이리 가져오너라. ” 수염의 분부가 떨어진 뒤 “여보게, 짐을 이리 가지고 오게. ” 김서방을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김서방이 지게를 버티어 놓는 것을 보고 “문안 여쭙게. 향곳말 도집강 나으리시어. ” 일러주며 곧 일변으로 수염에게 “사위올시다. ” 여쭙는다. 김서방이 말없이 허리를 구부리는데 고개는 치어들이었다. 그 고개가 수염의 비위에 맞지 아니하든지 “오오. ” 한마디도 없이 “그놈 낫살이나 먹었구나. ” 하며 수염을 쓰다듬고 주삼이가 지게에서 내려놓는 동고리를 아이더러 집어오라 하여 받아들고 보더니 “이것은 장치구나. 굵어 못 쓰겠다. 맞춤으로 해오너라. ” 말은 주삼에게 하고 물건은 아이에게 도로 준다. 그리하고 주삼이를 바라보며 “네 아우놈 지금도 공부하느냐?” 묻고서 미처 대답도 듣지 않고 “백정놈이 공부하여 무엇하노.” 또 수염을 쓰다듬이며 “허허, 허허.” 틀스럽게 웃고 돌아서서 다시 천천한 걸을음 내놓았다.
4
주삼이가 초장에 행패 잘하기로 유명한 감영 장교 하나를 만나서 고릿벌과 킷개를 공히 빼앗기고 파장머리에 나머지 물건으로 콩과 서속 몇 말을 바꾸어서 김서방을 지워 가지고 어두컴컴한 때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상을 치운 뒤에 주삼이가 안해와 마주 앉아서 김서방의 봉변하던 일을 이야기하고 “내가 조금만 늦게 갔어도 뭇매질이 났지. ” 괴춤 쥐고 쫓아간 공로를 자랑하니 그 안해는 사위가 봉변하여 가엾다고는 말할 생각도 아니하고 “족가리가 성해서 걱정이든가 경을 치든 말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 시비를 말렸다고 도리어 남편을 나무랐다. 주삼이는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여편네란 종시 소견이 부족해. 사람이 경을 치면 물건이 성할까. ”
꾸벅꾸벅 절한 것이 사위보다도 물건을 중히 여긴 까닭이라고 말하였다. 일기가 추워졌다. 사람마다 겹옷을 입고 오륙십만 된 사람이면 도톰한 가을 차렵을 입을 때다. 김서방은 아직도 홑것을 입고 식전 저녁으로 벌벌 떨고 지내는데, 남의 이목도 좀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주팔이가 형수에게 간곡히 말하여 새 무명으로 겹옷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옷을 짓는 동안에 장모의 입에서 나오는 “키는 경치게도 크다. ” “안팎 쉬인뎃 자나 드니 옷도적놈이다. ” 이따위 말에 김서방의 귀는 따갑기도 하고 가렵기도 하였다.
김서방이 새옷을 얻어 입던 날이다. 전날부터 아프다고 머리를 동이고 다니는 주삼이가 김서방을 불러서 “도집강이 아랫말 사람 편에 동고리 재촉을 하고 오늘 안으로 가져오라더라네. 내가 갔으면 좋겠으나 몸살이 나서 못 가겠으니 자네 좀 갔다 오소. 향곳말 가서 도집강댁이 어디냐고 물으면 어린아이라도 잘 알 것일세. 고리를 받고서 쌀말을 주거든 황송합니다 하고 받아가지고 오소. 그리고 내가 아파 누웠단 말도 잊지 마소. ” 이르는데 옆에 있던 장모는 “새옷 값으로 남이 주는 쌀이나 잘 가지고 와야 해. ” 쌀을 내버리고 오기나 할 것같이 미리 사살하고 봉단이는 김서방의 뒤를 따라 삽작문 밖에까지 나오면서 “고분고분히 구세요. 첫째 말씨를 조심하세요. 혹 또 봉변하시리다. ” 김서방이 언어행동이 공손치 못한 것을 걱정하여 다정한 말소리로 신신히 당부하였다.
김서방이 도집강의 집을 찾아왔다. 문간에 들어서서 사람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둘러보자니 “누가 왔나 부다. 좀 내다봐라.” 큰방에서 도집강의 목소리가 나고 아랫방에서 “녜.” 대답 소리가 나며 하인인지 머슴인지 세차 보이는 사나이 하나가 아랫방에서 뛰어나왔다. 그 사나이가 김서방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어디서 왔어?” 반말을 하건마는 김서방은 존대하여 빰 맞는 법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양주삼이게서 동고리를 가져왔습니다.” 대답하였다. 그 사나이가
튼방 앞에 나아가서 이 뜻을 말하자, 큰 방 창문이 열리고 도집강이 내다보며 “인제 가져왔단 말이냐? 주삼이놈 어디 있느냐?” 말에 체증기가 있다. 김서방이 뜰 앞으로 나아가서 “주삼이는 앓아 누워서 대신 왔습니다.” 하고 허리를 구부리니 도집강이 한번 큰기침하고 “동고리 몇 벌이냐?” “세 벌이올시다.”
“이리 가져오너라.” 하여 그 사나이가 두손으로 드리는 동고리를 받아가지고 위짝과 밑짝을 한두 번씩 들었다 놓았다 하더니 “일껏 맞춤으로 해바치란 것이 이 모양이란 말이냐!” 말에 호령기가 있고 “이니마 그대로 두고 가래라.” 하고 창문을 갑자기 도로 닫았다.
김서방은 두고 가라고 하지만 쌀 주기를 바라고 주저주저하고 섰다가 “왜 아니 가고 섰어?” 묻는 사나이의 옆으로 가까이 가서 “쌀은 아니 주십니까?”
말하였더니 창문이 화닥닥 열리며 “ 그놈 무엇이라니? 쌀? 이따위로 물건을 해바치고 쌀을 달라?” 하고 동고리들을 집어서 마당으로 동댕이치며 “이놈, 무엄한 놈 같으니! 쌀을 달라?” 개 꾸짖듯 꾸짖는데 김서방은 안해의 고분고분하라는 말을 생각하고 속을 썩이어서 붉어진 얼굴빛을 보이지 아니하려고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잘못했습니다.” 사과하였더니 도집강이 “이놈, 그래도 무슨 잔소리야!” 호령하고 아무개를 불러라, 멍석을 말아들여라, 매를 해오너라, 채수염을 흔들며 야단치기 시작했다.
5
이교리인 김서방이 도집강의 강호령을 받고 멍석말이 매를 맞게 되었다. 매를 맞는 것도 유만부동이다. 멍석말이에 볼기를 맞는 것은 회초리로 종아리 맞는 것과는 물론 다르고 형문으로 정강이를 맞고 난장으로 발끝을 맞는 것과도 서로 같지 아니하여 어려서부터 늙어 죽기까지 양반으로 당할 까닭이 없는 일이다.
당할 까닭이 없는 일을 꼼짝없이 당하게 된 김서방이 기가 막히어 얼빠진 사람같이 서 있자니 “그놈을 거기 굻려 엎지 못한단 말이냐!” 도집강의 호령이 내리며 그 수하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상투를 잡고 끌어다가 뜰 앞에 꿇리었다.
김서방이 분한 것도 참고 부끄러운 것도 참고 또 가소로운 것도 참고 찬찬한 어조로 발명하여 보았다. “동고리를 갖다 드리라고 해서 가지고 왔고 쌀을 주시거든 받아오라고 해서 주시지 않느냐고 하인에게 물어본 것이 무슨 죄입니까?
대체 양반은 ...” 발명이 미처 끝나지 못하여 도집강의 입에서 “ 그놈의 주둥이를 쥐어지르지 못하느냐!” 하고 호령이 떨어지며 세차 보이던 사나이가 주먹으로 김서방의 볼을 쥐어질렀다. 김서방은 아픈 것보다도 창피에 창피를 더 당하지 아니하려고 입을 다물었다. “그놈을 올려매라!” 도집강의 호령 한마디에 거행하는 군들이 김서방을 끄어다가 말아노은 멍석 위에 잡아 엎지르고 무명 바지를 무릎깨가지 까뭉기었다.
“되우 쳐라!” 연하여 신칙하는 매가 하나, 둘, 열 개에 그치었는데 김서방은 엄살 한마디도 아니하고 곱게 맞고 일어났다. 도집강이는 ‘죽을 때라 잘못했습니다.’ ‘살려 줍시사’ 비는 소리를 못들어서 양반의 세력이 깎인 것같이 생각하였던지 “ 그놈은 저 기둥에 붙들어 매놓고 주삼이놈을 가서 잡아오너라. 앓아 누웠거든 떠메어라도 잡아오너라! 수하 사람에게 분부하여 보내더니 보리밥 두어 솥 지을 동안이나 지난 뒤에 주삼이가 죽을상을 하고 잡히어 들어왔다.
도집강의 불호령 소리가 주삼의 애걸하는 소리를 내리누르며 주삼이는 김서방이 맞던 멍석 위에 너부죽이 엎드리게 되었는데, 주삼이가 발둥질을 치니까 “잔뜩 동여매라!” 라는 호령이 내리고 주삼의 팔다리가 새끼로 동여매지니까 “매를 쳐라!” 호령이 내리었다. 매가 늦은 볼기살에 떨어질 때마다 주삼의 입에서 ‘애구, 애구’소리가 입에 벅차게 쏟아져서 ‘도우 치라’는 호령이 없이 매 열 개를 맞고, 나중에 장독예방으로 짚신발이 맷자리를 밟아 비빌 때에 주삼이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앞머리를 멍석에 비비었다.
“너희의 사위는 관가로 보내서 더 족칠 것이나 십분 용서한다. 동고리는 가지고 가거라!” 도집강이 호령기가 남은 목소리로 이르니 쭈그리고 앉은 주삼이가 “황송하온 말씀이오나 해 바친 물건을 도루 가지고 가옵느니 이 자리에서 매를 열 깨 더 맞아지이다.” 애걸하다시피 하여 동고리는 바치고 쌀은 구경도 못하고 김서방과 함께 도집강의 용서를 받았다.
주삼이는 다리를 끌고 김서방은 고개를 숙이고 도집강의 집에서 나오니 주삼의 안해가 남편의 뒤를 쫓아와서 문 밖에 서 있다가 뒤에 나오는 김서방을 붙잡고 “이 자식, 이 길로 다른 데로 가거라!” 내 딸이 사위 없겠니? 관비박지, 관비 박아 염려 마라. 나 같은 사위 두었다간 우리가 비병에 맞아죽겠다. 천하에 망할 자식! 우리 따라오지 말고 어서 다른 데로 가! 장모의 욕설에는 귀가 익은 김서방이지만 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하릴없이 그 내외의 뒤를 따라가노라니 얼마 아니 가서 주삼의 안해가 들쳐서며 “이 자식, 다른 데로 가라니까 왜 따라와! 그래도 안 갈테냐!” 하며 김서방을 떠다 민다. 김서방이 주삼이가 혹시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주삼의 얼굴을 다라다보나 주삼이는 입을 떼지 아니한다.
“갈 데가 있어야지요. 그리하고 가더라도 봉단이하고 같이 가야지요.” 김서방 이 말을 하자, 주삼의 안해의 손이 번개같이 김서방의 귀밑을 올라오며 “무엇이 어쩌고 어째! 봉단이하고 같이 가? 봉단이는 내 딸이야. 경칠 자식, 망할 자식! 쇠껍데기를 쓰고 도리질을 칠 놈의 자식!” 갖은 욕설이 다 나왔다.
6
김서방이 주삼의 안해에게 잔생이 곤욕을 당하고는 뒤를 따라올 용기가 없어졌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섰다가 길 옆 풀밭에 주저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쉬기도 하고 멀리 가는 주삼의 내외를 바라보며 쓴 입맛을 다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서방은 열 번 고쳐 내쫓긴다 하여도 갈 데는 주삼의 집뿐이라 무슨 별 생각이 있었으랴. 봉단이를 가서 보고 전후 사정을 이야기해야겠다, 또 주팔이를 만나보고 신세 조처를 의논해야겠다, 이리 생각하고 몸을 일어서 주삼의 내외를 멀찍이 따라왔다.
주삼의 집에서 활 두서너 바탕이 착실히 되는 곳까지 주팔이가 나오다가 형과 형수를 만나게 되었다. 주팔이는 마침 형의 집에를 왔다가 혼자 울기만 하고 있는 봉단에게 대강 사정을 듣고 향굣말을 향하여 오던 것이다. “형님 오시는구려.” 반갑게 형에게로 쫓아오니 형은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고 형수는 내달으며 “사람이 까닭 없이 경을 쳐도 분수가 있디 않수. 매 열 개에 헐장한 개 없습디다. 바깥에서 매질 소리를 듣고 있자니 사람이 치가 떨려 어디 견디겠습디까? 도집강인지 부집강인지 그 늙은 녀석이 무슨 원수요? 물건은 그저 먹고 사람은 초주검을 시키니 도대체 사위 하나 망한 놈을 얻었다가 죽을 봉변 다 하오그려.
”남은 말할 틈이 없도록 혼자 길게 떠들었다. 주팔이가 없는 틈을 간신히 얻어가지고 “김서방은 어디 있습니까?” “쫓아버렸소.” “쫓다니요?” “그럼 그 자식을 그냥 둬요?” “그럴 수야 있습니까.” 말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이후에 그 형수의 긴 사설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럴 수라니요? 그 자식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고 참기도 많이 했소. 이런 일이 없더라도 인제는 더 참지 못하겠소. 아재 탓하는 게 아니지만 사내답게 생겼느니, 사위 재묵으론 더 고를 수 없느니 하던 그 자식이 허울뿐인 하눌타린 줄이야 누가 알았소. 그런 망할 게으름뱅이가 천하에 또어디 있겠소. 일을 저지르지 않는대도 첫째 게으름뱅이가 집에 두고 먹이고 입히지 못하겠소. 그 중에 그 자식이 봉단이하고 같이 간다지요. 사람이 귓구멍이 막혀 죽겠지. 그래 귀싸대기를 한번 훑어 주었더니 아무 말도 못합디다. 우리가 오다가 돌아보니까 길가에 주저앉았습디다. 만일에 그 자식이 또 좇아와서 집에 발을 들여놓으면 다리뻑다귀를 통겨줄 작정이요.” 이때껏 듣고만 있던 주삼이가 “고만 집으로 가세나. 가서 이야기하자.” 안해의 말을 가로막고 앞서서 몇 걸음 나갈 즈음에 입맛만 다시고 섰던 주팔이가 “여보 형님, 먼저 가시지요. 나는 이따가 오리다.”
뒤에 떨어지며 “아주머니 다시 생각을 잘해 보시지요. 그리고 차차 이야기하십시다.” 형수에게 말하니 형수는 “다시 생각할 일이 다 따로 있지요.” 머리를 뒤흔들며 형의 뒤를 따라갔다.
주팔이는 김서방의 일이 궁금하여 찾아가 보려고 뒤에 떨어진 것이다. 나오던 길로 얼마 더 나오지 아니하여 풀기 없이 걸어오는 김서방을 만났다. 김서방에게 전후곡절을 자세히 듣고 나서 “공으로 동고리를 빼앗으려는 자에게 쌀 말을 하였으니 그럼 풍파가 아니 날 리 없지. 대체 양반이란 것이 행세가 양반이라야지 날도적들이 양반은 무슨 양반일꼬? 그라나 도집강 같은 것은 부족괘치야. 날 도겆의 소굴은 서울이지그려.”
주팔이가 김서방의 소조를 가없게 여기는 끝에 양반 논란이 나온 것이건만, 서울 양반인 이교리에게는 이 역시 소조라 이교리인 김서방이 주팔의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지며 간신히 “그렇지요.” 대답하고 “그런데 내 일은 어찌하여야 좋을까요?” 자가의 앞일을 의논하니 주팔이가 입맛을 다시며 “그렇지 않아도 지금 형수를 보고 말을 하였지만, 형수의 성미가 성미라 얼른 말을 들을 것 같지 아니하니 며칠 동안 내게 와서 지내보소. 어떻게 하든지 말썽없이 되겠지.” 말하여 김서방을 데리고 오다가 “봉단이를 보려다간 형수 손에 큰코다치기 쉬울 게니 형님 집으로 올 생각 말고 바로 우리게로 내려가소. 나는 잠깐 다녀갈 것이니.” 말하여 김서방은 자기 집으로 보내고 혼자 형의 집에 와서 집안이 너무 조용한 것을 괴상히 생각하면서 삽작문 안을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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