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장편소설 임꺽정 봉단편 5 -홍명희

一字師 2023.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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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임꺽정 봉단편 5

-홍명희

임꺽정 : 봉단편:벽초 홍명희 소설

제 6장 축출

1

주팔이가 윗방 문을 열고 본즉 형은 누워 있고 형수는 방을 훔친다. “인제 오시우?” 인사하는 형수에게 “네.” 대답하고 “봉단이는 어디 있습니까?” 물으니, 형수는 머리를 흔들며 “난 모르지요. 그년이 이 방을 훔치다가 말고 새촘하고 나가더니 다시는 들어오지 아니하니까 어디 가서 눈물을 짜내는지도 모르지요.” “아주머니가 김서방의 말을 하신 게구려?” “방을 훔치면서 그는 왜 아니오나요 묻기에 쫓아버렸다고 말했더니 맹랑스럽게 걸레를 톡 내던지고 나갑디다.” 주팔이는 형수와 말하던 것을 그치고 봉단이를 찾으려고 집 안을 둘러보다가 아랫방 문을 와서 열었다.

봉단이는 머리를 싸고 누워서 문 여는 소리가 나도 곰짝달싹 아니하다가 “이 애 봉단아!” 부르는 주팔의 목소리를 듣고야 겨우 일어 앉는데, 얼굴에는 눈물 흔적이 있고 얹은머리는 풀어져 내려왔다. 주팔이가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니까 봉단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걷어 얹으며 아랫목 자를 주팔에게 비켜 주고 삼촌이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리는 것같이 주팔이 얼굴을 치어다보았다. 주팔이가 김서방에 들은 전후사실을 이야기하고 “김서방은 죄도 없이 도집강에게 매를 맞고 죄도 없이 네 어머니께 내쫓겼다. 그 사람의 일도 딱하고 가엾지만 대체 너는 어찌 할 셈이냐?” 조카딸의 의견을 물으니 봉단이는 눈물이 맺거니 듣거니 하며 “지금 그가 어디 있습니까? 바깥에 왔습니까?” 김서방의 있는 데를 알려고 묻는다. 주팔이는 그때 마침 바깥에서 형수의 기척이 나는 것을 듣고 “그 사람도 사람이지 여기 오려고 하겠느냐? 정히 갈 데가 없으면 서울로라도 도루 가겠지.” 봉단이 묻는 말에 동이 닿을 듯한 대답을 하고서 한번 기침을 하더니 앞창문을 열고 가래를 배앝다가 마당에서 무슨 치임개질을 하는 체하고 있는 형수를 보고 “아주머니!” 불러서 “이리 오시지요.” 방으로 들어오라고 권하였다. “언제 들어가고 말고 할 새가 있어요. 저녁을 해야지.” “벌써 저녁할 때가 되었나요? 나도 집에 좀 가봐야겠군.” 하며 주팔이는 일어서서 형수에게 들리지 아니할 만큼 나직이 “아직 며칠 동안 내게 와서 있으라고 했다. 말썽없게 되고 안 되기가 제일 첫째 네게 달렸어.”말끝을 힘지게 맺고 봉단이를 내려다보았다. 봉단이는 외손을 벌려서 엄지가락과 장가락으로 관자놀이께를 누르니 자연히 손바닥으로 얼굴이 가리어진다. 그리하고 나서 “저를 만나보기 전엔 어디로든지 가지 말라고 해주세요.” 삼촌에게 부탁하니 “그것은 내게 부탁도 할 것이 없다. 그 사람 역시 너를 보기 전엔 어디로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더라.”

주팔이는 말이 끝난 뒤에 멀찍이 서 있는 형수에게도 들릴 만큼 “사람은 몸 성한 것이 제일이야. 몸조심해라.” 봉단에게 이르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날 저녁에 봉단이는 밥짓는 데도 내다보지 아니하고 밥 먹는데도 내다보지 아니하고 아랫방에 누워 있었다. 저녁이 끝나고 어두컴컴한 뒤에 그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와서 "이애 자니?” 하며 봉단의 몸을 흔들다가 자지 않는 표가 나니까 “어디가 아프냐?” 하고 머리를 짚어보면서 “어지간만 하거든 일어 앉아서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말하니 봉단이는 대답이 없이 일어나 앉았다.

봉단 어머니가 등잔불을 켜놓고 앉아서 딸을 타이른다.“게으름뱅이를 내쫓은 것이 부모라도 야속하냐? 그 자식의 지저구니로 말하면 백번 내쫓아도 마땅하고 내쫓은 것이 조금 과하다고 하더라도 이왕 그렇게 된 것을 다시 불러들일 수가 어디 있니? 쏟아 엎지른 물은 다시 담지 못한단다. 너같이 소견이 넉넉한 애가 그게야 벌써 잘 알고 있을 테지. 게으름뱅이 생각 마라. 너의 삼촌은 나더러도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더라만 다시 생각할 것이 무어냐? 천하에 사내가 게으름뱅이 하나뿐이란 말이냐? 게으름뱅이는 질동이니까 깨져도 아깝지 않다. 놋동이사위를 얻어주마. 나이도 알맞고 난밖 사람이 아닌 서방이 좋지 않겠느냐? 서방과 손그릇은 손때 먹일 탓이란다. 정만 들이고 보면 첫서방이나 둘째 서방이나 매일반인 법이다.” 봉단이가 잘 듣지도 아니하는 말을 끝이 없이 지껄이는 판에 주삼이가 어느 틈에 일어나서 "무슨 이야기들이야?“ 하며 창문을 열고 들어섰다.

 

2

주삼이가 ‘아이구’ 하고 거북살스럽게 앉더니 안해와 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딸을 보고 “너의 어머니 하는 일이 종시 생각이 부족해. 게으름뱅이는 내쫓아도 좋지마는 너더러 말이나 한번 할 것인데.” 하고 잠깐 안해를 돌아보며 “홧김에 미처 생각을 못한 것이지만.” 뒤를 두고 말을 이어 “말도 없이 한 것이 너는 야속할 터이지. 그렇지만 이왕 그렇게 된 일이니 네가 마음을 삭여라.”

점잖게 말하는 폼이 미리 말만 하였다면, 봉단이가 저녁밥을 안먹을 까닭이 없을 것같이 생각하는 모양이다. 봉단이는 말을 듣는지 마는지 고개를 숙이고 앉았을 따름이요, 주삼의 안해는 봉단에게 향하여 “부모 자식 사이에 간격이 있을 턱이 있니? 야속하거든 야속하다고 말을 해라. 너도 어미 애비가 하루 편히 못 지내고 죽도록 고생받이만 하게 되면 마음이 원통할 터이지?” 하고 잠깐 남편을 돌아보며 “서방과 무쇠솥은 새것이 언짢다지만 너만한 인물이면 서방

없이 늙겠느냐? 또 감영 관비로 들어가도 게으름뱅이 데릴사위보다는 나을 게다. 눈초리가 처진 감사나 만나게 되면 남부럽지 않게 호강을 할 것이요, 예방비장의 눈에 들면 음식을 노놔 먹을 게니 너도 좋고 우리도 좋지...” 봉단이가 듣다 듣다 듣기가 싫어서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가 아파서 누워야겠어요.” 하고 앉았던 자리에 쓰러져 낯을 벽에 대고 누우니 뒤에 앉은 주삼이 내외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주삼의 안해가 괘씸한 일을 억지로 참는 듯이 ‘응’하고 남편과 함께 일어서 나갔다.

가을 긴긴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아침때가 되었다. 주삼이 내외는 아침밥을 먹는데 봉단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어제 아랫방에 누운 채로 오늘도 일어나 나오지 아니한 것이다. 주삼이는 딸이 굶는 것을 걱정하여 “조죽이라도 쑤어서 그 애를 먹게 하지.” 말하였으나 그 안해는 자애 많은 어머니가 도리어 범범한 사나이 같이 “몇 끼나 굶나 가만히 내버려 두고 보지. 제가 좋아 굶는 것을 누가 성가시게 먹어라 먹어라 한단 말이오.” 하고 자기 먹을 밥만 먹고 있다.

아침때가 훨씬 지난 뒤에 봉단이는 그 부모가 방에 들어앉은 틈을 타서 슬그머니 집에서 빠져나와 아랫말로 내려왔다. 여러 끼를 굶은 까닭이든지 또는 너무 속을 상한 까닭이든지 머리가 내둘리고 걸음이 잘 걸리지 아니하여 평일 같으면 한두 번 왔다갔다 할 만한 동안에 간신히 주팔의 집에를 당도하게 되었다. 이때 김서방은 주팔이와 같이 뜰 위에 놓인 들마루에 앉아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는 중에, 삽작문께 들어서는 해쓱한 봉단의 얼굴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박힌 듯이 서서 있고 주팔이는 뜰 아래도 쫓아내려가서 “너 오느냐?” 하며 비실거리는 봉단을 붙들고 올라왔다.

“여기 좀 앉으려무나.” 들마루에 앉히려고 하니 봉단이는 고개를 흔들어 싫다 하고 숙모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팔의 안해는 나이가 주팔이보다 7년 위일 뿐이 아니라 하나 기르지 못하는 여러 번 아이 낳기에 사람이 곯아서 봉단의 어머니보다도 더 늙어 보이고, 거기다가 병객이라 조만한 일이 아니면 꿈쩍거리지 아니하고 방에 들어앉았는 사람이다. 질녀의 몇 끼 굶은 이야기를 듣고 “그래서야 몸이 부지하느냐?” 하고 나무라면서 바깥으로 나와 한참 꾸물거리어서 되지 않은 조죽 한 그릇을 쑤어 가지고 들어왔다.

봉단이는 죽을 먹은 뒤에“작은어머니, 나를 좀 눕게 해주세요.” 하여 얼마 동안 누워 있다가 주팔이가 김서방과 같이 방으로 들어오매 봉단이가 일어 앉는데, 앉아 있는 봉단의 눈에도 눈물이 어리고 서 있는 김서방의 눈에도 눈물이 어리었다. “하룻밤이 십 년 같더냐? 봉단이 너는 여자라 연약한 심장에 눈물 흘리기 쉽지마는, 김서방 자네는 늠름한 대장부가 눈물을 흘리다니 남보기 창피치 아니한가.” 주팔이가 소리를 높여 웃으며 손으로 김서방의 어깨를 치니 김서방은 겸연쩍은 것을 감추려고 억지로 웃으면서 “누가 눈물을 흘려. 실없은 소리 고만두어.” 하며 앉을까 말까 주저하는데 주팔이가 그 안해를 눈짓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봉단이를 내려보며 “만일 아주머니가 아시고 쫓아오신다면 나도 난처하거니와 너의 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조금만 쉬어가지고 올라가게 하여라.” 말하고 다시 김서방을 돌아보며 “십년적회를 잠시라도 풀어보지.” 하고 웃으면서 자기 역시 밖으로 나갔다.

 

3

김서방이 봉단의 옆으로 와서 너무 가까이 붙어 앉으려고 하니 봉단이는 말이 없이 몸을 움직이어 조금 사이를 비키었다. 김서방이 면구스러울 만큼 봉단의 얼굴을 들여보다가 “하룻밤 새 환형이 되었구려. 이리 좀 누우.” 하며 자기의 무릎 아래를 가리키니 봉단은 잠깐 머리를 흔들어 싫다는 뜻을 보이고 입을 열어 나직한 목소리로 “장독이나 없으세요?” 물으며 양미간을 곱게 주름잡는다.

김서방은 장독이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여보, 내가 말씨를 조심 아니해서 그런 봉변을 한 것이 아니오. 동고리만 받고 다른 말이 없이 가라기에 그대로 오려다가 남이 주는 쌀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고 장모에게 구박받을 것이 생각나서 쌀 말을 하였었소. 말을 하나마도 쌀을 주지 않느냐고 넌지시 하인에게 물어보았는데 그것이 죄목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불분이 발명하며 봉단을 돌아보니 봉단이는 손으로 턱을 고이고 윗니로 아랫 입술을 지그시 물고 있는데, 눈물 방울이 옷깃에 떨어진다. 김서방이 얼마 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내가 당하는 것은 나의 팔자니까 하릴이 없지마는 이래저래 어린 안해의 맘을 상하게 하니 사내 쳇것으로 염의가 없어.”혼잣말하듯이 말을 하며 봉단의 턱 고인 손을 만지려고 하니 봉단이는 살그머니 손을 옆으로 치우면서 김서방을 돌아보고 “어디로 갈 생각은 마세요.” 당부하는데 말보다도 그 눈이 더 은근히 당부한다.

이때 밖에서 큰기침 소리가 나더니 주팔이가 문을 열고 들여다보며“해가 점심때가 기울었다. 집에 가봐라. 그리고 굶는 것이 장사가 아니니 밥을 먹도록 해라.”말하니 봉단이는 “녜.” 대답하고 슬며시 김서방을 돌아보며 “가겠어요.”하고 일어섰다. 김서방이 봉단의 뒤를 따라나섰다. 봉단이가 “고만 들어가세요.”말하면 “들어가지.” 대답하면서도 차츰차츰 따라왔다. 아랫말서 거의 중간이나 넘어왔을 때 봉단의 어머니가 멀리서 휘적거리며 내려오는 것이 봉단의 눈에 뜨이었다. 봉단이가 “저기 오는 이가 어머니 아니라고?”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김서방이 “그렇구면. 잠깐 어디로 비켰다가 지나가신 뒤에 갑시다그려.” 하여 내외 두 사람이 사잇길로 빠져서 시냇가로 나왔다.

버들잎은 이미 떨어졌고 시냇물은 보기에도 차도록 맑아졌다. 가을 여편네의 집안일이 바쁜 까닭인지 빨래꾼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아니한다. 내외가 맘놓고 어깨를 겯고 시냇가로 올라오다가 처음 대면하던 빨래터에 와서 김서방이 봉단의 손목을 쥐며 “여기가 우리에게 연분이 깊은 곳이라 잠깐이라도 앉았다 갑시다그려.” 말한즉 봉단이도 싫다고 아니하여 언덕 위 풀밭의 양지바른 곳을 골라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첫째로 김서방의 눈이 가는 곳은 봉단이가 잎사귀를 따던 버들가지다. 가지는 전과 같이 늘어졌으나, 성하던 잎사귀는 지금 다 떨어지고 다만 누른 잎새 하나가 매달려서 가는 바람에도 지금 곧 떨어질 것같이 한들한들한다.

김서방은 손으로 그 잎새를 가리키고 봉단을 돌아보며 “전날 그 잎새는 당신의 근본을 드러낸 것이 아닐지라도 오늘날 저 잎새는 나의 신세를 그려낸 것이다. 당신은 부모가 있고 친척이 있고 또 나중에...”하 고 말을 그쳤다가 다시 이어서 “당신에게는 나 하나 있고 없는 것이 대사가 아니지만, 나는 그렇지 아니하여 당신에게서 떨어지면 다시 붙을 곳이 없는 사람이오.” 신세를 한탄하니 봉단이가 성낸 눈초리로 김서방을 흘겨보며 “당신이 말이요, 무어요? 당신이 그런 말을 진정으로 한다면 나는 당신을 잘못 믿었소.” 하고 입술을 악물었다가 다시 김서방의 얼굴을 치어다보며 “당신이 나를 못 믿으시는 게지? 사람의 맘을 몰라주어도 분수가 있습네다.” 하고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울음을 내놓았다. 김서방이 처음에는 어찌할 줄 몰라서 어리둥절하다가 나중에는 울지 말라고 봉단의 어깨도 흔들고 봉단의 얼굴을 치어들고 옷소매로 눈물도 씻겨 주었다.“내가 말을 잘못했어. 울지 말고 내 이야기나 좀 들어주어.” 하여 봉단의 울음을 그쳐놓고 김서방은 자기의 근본과 신세와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김서방이 아니요, 이교리인 것은 물론 말하고 자기가 다른 안해가 없는 것도 빼지 않고 말하였다. 김서방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는 봉단이는 “좋은 세상이 되면 다시 나가실 수 있겠지요?” 물어서 “암, 그렇지.” 하는 김서방의 대답을 듣더니 한참 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김서방에게 향하여 시름없이 묻는다. “대체 양반도 없고 백정도 없는 세상은 없나요?”

 

4

얼마 동안 김서방이 말이 없이 앉았다가 두 다리를 뻗고 두 팔을 벌리고 기지개를 켜더니 한 팔을 봉단의 무릎에 감고 비슷이 누웠다. 봉단이가 손으로 김서방의 머리를 긁어주며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팔이 감긴 무릎을 가만히 흔들면서 “여보세요, 좀 일어나 앉으세요. 인제는 내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정이 듣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니 김서방은 “무슨 이야기?” 하며 벌떡 일어 앉았다.

봉단이는 무릎을 도사리고 얼굴빛을 고치고 나서 “당신이 녹록한 사나이가 아닌 것은 미리부터 짐작한 바이지마는 삼한갑족의 양반인 것만은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줄을 미리 알았더면 뒷일을 한 번 더 생각하였을 것인데, 그리 못한 것이 당신에게 속은 셈입니다. 당신은 잠시 액회를 면하시려고 만리전정을 생각지 않으실 리가 없으셨겠지요? 좋은 세상이 되는 날에는 백정의 사위가 우세거리요, 망신거리지요? 그때 나를 어찌하실 생각이세요?” 봉단이가 한 마디 묻고 김서방의 눈치를 엿보고 두 마디 묻고 김서방의 얼굴을 살핀다.

김서방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나는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나 들려준다구.” 하고 힘없이 팔을 들어 봉단의 어깨에 깊이 걸치며 “남편에게 좋은 세상이면 안해에게도 좋을 것이고 안해에게 좋지 못한 세상이면 남편에게도 좋지 못할 터이지.” 하며 걸친 팔의 손가락 등으로 봉단의 볼을 간지르듯 문지르니 봉단이는 가만히 그 팔을 잡아 어깨에 내려놓으며 “서울 양반에게 좋은 세상이 시골백정의 딸에 좋을지는 누가 알아요? 도리어 좋지 못할는지도 모르지요.” 하고 긴 한숨을 짓는다.

김서방이 정색하며 “여보!” 불러놓고 잠깐 동안 말이 없다가 맘에서 우러나 오는 듯한 말로 “장래의 좋은 세상이 올는지 말는지 지금으로는 모르는 일이거니와 설혹 온다손 잡더라도 그대를 버리고 나 혼자 누릴 생각은 없소. 저기 하늘이 내려다보시오.” 하며 손을 위로 치어들어 하늘을 가리키니 봉단이는 김서방의 얼굴을 이윽히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하늘보다도 당신을 믿습니다.” 말하는데 새침하던 얼굴에 웃음이 떠돌았다. 김서방이 다시 정색하며 아까와 같이 “여보!” 불러놓고 한참 동안 말이 없으니 봉단이는 김서방이 무슨 말을 하려나 의심스럽게 생각하며 그 입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김서방이 한번 점잖게 기침하고 나서 입을 열어 말한다. “장모가 당신을 낳지는 못하였을 것이고 토하여 놓은 모양이야. 그러한즉 장모는 토끼로다.” 하고 껄껄 웃으니 봉단이는 말을 기다리던 보람이 없어졌다. “실없으시기도 하시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실없는 소리 하는 것을 언제 들어보았나?” “내게 실없으신 건 체모 손실 아닌가요?” “어린 아해에겐 실없은 소리 좀 해도 괜찮은 법이야.” 김서방은 너털웃음을 웃고 봉단이는 상글상글 웃었다. 내외가 해 가는줄도 모르고 웃고 지껄일 때, 앉은 뒤에서 사람의 발짝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놀라서 일시에 뒤를 돌아보니 주팔이가 온다. 봉단이가 일어서며 김서방도 따라 일어섰다.

“이것이 무슨 잣들이야!” 주팔이가 말하며 내외 앞에 와서 “한참 찾았다. 에, 이 사람.”하고 김서방을 보거 웃더니 봉단이를 바라보며“너의 어머니가 너를 찾아오셨기에 와서 다녀갔다고 말했더니 집에도 오지 않았고 길에서도 만나지 못하였다고 하시고 돌이의 잡에까지 가셨었다. 나는 거기 아니 갔을 것을 짐작하지마는 아는 체하기가 어려워서 아무 말씀을 아니했었다. 거기 가서 허행하시고 오시는 길에 다시 내게 들르셔서 한걱정을 하시기에 내가 너를 찾아 보낼

것이니 염려 마시라고 말씀하여 어머니를 집으로 가시게 하고 이리저리 찾아나선 길이다. 얼른 집으로 가거라. 너무 늦었다. 그리하고 나로서 너에게 어머니를 속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만 김서방 만났단 말은 어머니께 하지 마라. 어머니가 더 역정이나 내시면 너만 더 괴로울 것이다. 머리가 아파서 잠깐 냇가에 와서 바람쏘였다 하려무나. 어서 가거라. 내일 아침때 내가 올라가마.” 주팔이가 봉단이를 좇아보내다시피 돌려보낸 뒤에 김서방의 어깨를 치고 “치골 노릇 작작 하고 다니소.” 웃으면서 김서방과 함께 아랫말로 내려왔다.

 

5

그날 저녁때가 지난 뒤다. 김서방이 시름없이 앉았는 것을 주팔이가 딱하게 여기어서 “쓸데없이 걱정하고 앉았느니 나와 같이 마을 가세.”하여 김서방을 끌고 나서려고 하니 김서방은 “뉘 집에를 가?” 하고 갈 생각이 적은 모양을 보이었다. “돌이 아버지의 고담이라도 들으러 가지.”, “내가 여기 와서 있는 것을 돌이네 집에서 알면 장모도 알게 될걸.” “속이려 한들 길래야 속일 수가 있나? 그러고 내일 아침에는 내가 형님과 형수를 가서 보고 말하려는 작정인즉

지금 돌이 집에서 안대야 밤중에 고자질하러 갈 사람은 없을 게니 염려 마소.”

김서방은 마침내 주팔에게 끌리어 돌이 집에 놀러왔다. 돌이는 일지의 집으로 놀러가고 돌이 아버지가 혼자 방에 누웠다가 두 사람을 보고 반색하며 앉아라, 저리 앉아라, 홀아비 늙은이가 긴긴 밤에 심심하여 죽겠는데 잘들 왔다, 반갑다, 고맙다, 한바탕 호들갑을 떨고 나서 김서방을 바라보고 “아까 누이가 잠깐 왔었는데 무어 쫓느니 쫓았느니 하기에 말이 되느냐고 조만

히 타일러 보냈지만, 워낙 길들지 아니한 생마(生馬)같아 콧등이 여간 세어야지.” 하고 주팔이를 돌아보며 “자네 말은 어렵게 여기는 터이니까 자네가 말 좀하게.” 하고 다시 김서방을 바라보며 “콧등이 센 깐으론 뒤는 싹싹한 사람이지. 저 사람이 말이나 하면 무어 일없이 되지그려” 하고 허허허 웃음을 내놓았다.

얼마 뒤에 주팔이가 이야기나 한자루 하라고 늙은이에게 청한즉 “이야기를 하라, 무슨 이야기를 하나? 우리 조상 이야기나 김서방에게 들려 줄까? 주팔이 자네는 귀에 젖도록 들은 이야기라 재미가 없을걸.” 하고 늙은이는 또 허허 웃었다. 주팔이도 웃으면서 ‘나 아니 드은 이야기가 무어 있겠소. 아무 이야기나 하시오. 보물이나 또 한 번 구경합시다그려.“하니 늙은이는 “자네가 이야기에 쐐기나 치지 말게.”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본래 강원도 통천(通川)사람으로 우리 증조할아버지 때에 북도 경성(鏡城)으로 이사 가서 가근방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몇대를 살아오다가 우리 아버지가 함흥으로 이사를 왔어. 함흥 올때 나는 나이 열살 안이었고 봉단 어머니는 낳기 전이니까 한 오십 년 가량이나 되었지. 그까짓 햇수는 따질 것이 없고 경성으로 이사 간 할아버지의 아버지 되는 고조 할아버지 때 이야기가 정작 이야기야. 우리 고조할아버지는 터지게 잘났던 것이야. 말 잘 타고 활 잘 쏘고 한끼에대되 밥을 먹지 않으면 출출하다고 했다니까 기운도 장사던 것이야. 이 할아버지가 통천서 살 때 최장군이란 이하고 이웃해서 살았는데 젊었을 때부터 정분이 여타 자별하게 지냈던 것이야. 최장군이 유명한 장군이 되어서 경상도 합포(合浦)로 벼슬살이를 가게 된 때 그 부인이 태중이라 따라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는데, 부인은 그 뒤에 사내아기를 낳고 곧 산후더침으로 작고를 했었어. 최장군이 이 소식을 듣고 그 아기를 길러달라고 우리 할아버지에게 부탁하니까 평일 정분에 싫달 길이 없어서 그 때 돌이 갓 지난 우리 증조할아버지의 젖을 노나 멱여 가며 친자식이나 다름없이 길러냈는데 이 아들이 그 아버지보다도 더 유명한 최장군이 된 사람이야. 이 아들 최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고 활을 잘 쏘고 해서 우리 할아버지와 같이 사냥을 다니는데 토끼 노루 할 것 없이 닥치면 놓치지 않더라지. 그중에 놀라운 일은 열서너 살 되었을 때 하루 혼자 활을 메고 나가더니 얼마 뒤에 돌아와서 무슨 검은 줄이 있는 누런 짐승 하나를 잡아놓았다고 해서 여러 사람이 무엇을 잡아놓았나 하고 따라가서 본즉, 큰 송아지만한 호랑이 한 마리를 한 살에 쏘아넘겼더라지. 그래서 여러 사람니 모두 널랐더래. 그게 누구든지 놀랄 일이 아니야? 최장군이 아이 적에 쓰던 활이 지금도 우리의 집에 있지. 윌 집의 보물이야.” 하고 늙은이는 일어서서 시렁 위에 얹은 궤 하나를 들어 내려서 뚜껑을 고이 열고 종이로 싼 활을 모시듯 들어내서 싼 종이를 펴고 김서방을 보이면서 “이것이 우리 집의 보물이야.” 말하였다.

이때껏 ‘그러세요, 그러세요’ 하며 이야기만을 듣고 있던 김서방이 “그 최장군이 최윤덕(崔潤德) 최정승이구려.” 말한즉 늙은이가 최장군의 이름을 어찌다 아느냐고 놀라며 서울 사람이란 다르다고 칭찬하고서 “그래 우리 할아버지가 불원천리하고 그 아버지 최장군에게로 데려다 주었었는데, 뒷날 아들 최장군은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서 대공을 세운 일까지 있었다데. 이 최장군이 병마절도사로 경성 와서 있을 때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경성으로 이사를 갔

던 것이야.” 이때 방문이 열리며 돌이가 들여다보고 “손님도 오고 조상남도 나오셨군.” 하더니방으로 들어와서 “조상님은 뫼셔놓고 손님하고 엿이나 잡수시오.” 하며 얻어가지고 온 엿봉지를 풀어놓았다. 이리하여 늙은이의 이야기는 중간에 그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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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때 주팔이가 형의 집에 와서 보니 윗방 아랫방 할것 없이 방문은 모두 닫히었고 잡안이 괴괴하여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윗방 문을 열어본즉 형은 없고 형수가 포대기 같은 처네 쪽을 덮고 누웠다가 문 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며 “아재요? 잘 왔소. 어젯방을 반짝 새우고 하도 곤하기에 눈을 좀 붙이고 아재에게 가려고 했더니 마침 잘 왔소. 이리 들어와 이야기 좀 들으시오.” 하고 처네를 치운다. 주팔이가 밖에 서서 “형님은 어디 가셨소?” 물으니 그 형수는 “아니 글쎄 들어와 이야기를 들으시라니까 그러오.” 방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하여 주팔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 형수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제 봉단이가 냇가에 있는 것을 불러 보내셨다지? 집에 와서 저녁밥 먹기까지는 천연스럽게 별말 없던 아이가 저녁을 먹고 난 뒤에 저의 아버지와 나를 보고 김가를 도로 불러달라기에 내가 좀 나무랐더니 두말 아니하고 일어서서 아랫방으로 갑디다그려. 그런데 일어설 때부터 눈치는 달랐었어. 그년의 눈치가 수상하다고 우리 내외가 말까지 하였었지. 일어서 나간 뒤에 불과 얼마 동안 안 되어서 형님이 아랫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다고 가본다고 나가더니 아랫방 문을 열자마자 큰일 났다고 소리를 지릅디다. 겁결에 맨발로 뛰어가 보니 그년이 목을 맸습디다. 시렁에 목을 맸습디다. 곧 끌러놓았지만 벌써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요. 주무르고 문지르고 해서 간신히 기운을 돌렸는데 그년이 정신을 차린 뒤부터는 울고불고하며 죽게 내버려 두라고 몸부림을 치며 야단이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미친년 날뛰듯 하는구려. 수건이고 노끈이고 칡껍질이고 무엇이고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다가는 목에 대고 동이려고 하니 가만 내버려둘 수가 있어야지. 형님하고 나하고 그년을 붙들고 앉아서 밤을 새웠소. 형님은 지금도 그년을 지키고 앉았지요.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오? 딸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저 모양이니 그야말로 죽으라고 내버려둘 수도 없고 기가 막히오그려.” 하고 그 눈에 눈물이 도는 것 같았다.

주팔이는 봉단이가 꾀를 쓴 것이로구나. 자기가 입이 닳도록 말하여야 형수의 고집이 풀릴지말지 생각하고 왔었는데, 지금 형수가 봉단의 꾀에 빠졌으니 남은 고집쯤은 풀기가 쉬우리라 생각하며 “큰일날 뻔했습니다그려. 그래도 미리 구하셨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사람이 열에 뜨이면 미친 것 같고말고요. 봉단이가 소명한 아이라 조만한 일에야 미친 것같이 날뛰도록 되겠습니까? 제 맘에는 꼭 맺힌 것이 있어 그런 것이니까 그것을 풀어 주어야지요.” 말하고 걱정하는 빛을 보이니 그 형수는 아직도 김서방을 불러들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그년의 맘에 맺힌 것이라면 잘난 서방이겠지. 모든 것이 김가 망한 놈의 탓인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분통이 터져 죽겠구려.” 열을 내며 고개를 외로 친다.

사위가 장인 장모의 맘에 들고 안드는 것은 둘째나 셋째 일이고, 첫째가 딸의 내외 상득하냐 아니하냐 볼 것인데 사위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상득한 내외의 사이를 억지로 떼려는 것은 옳지 않은 생각일 것이라고 주팔이는 완곡하게 말을 하여 그 형수가 주팔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주팔이는 그 형수의 입에서 김서방을 불러오자는 말이 나오도록 하려고“아주머니가 잘 생각해서 처단하셔야 합니다.” 하고 대답을 기다리다가 형수가 입맛만 다시고 있는 것을 보고 아랫방에를 가보고 오겠다고 일어서 나가려고 하니 형수는 “에이.” 소리 한마디를 내고서 “그애 아버지를 오시래서 의논을 작정합시다.” 하여 주팔이가 방문을 열고 아랫방을 향하여 “형님, 형님.” 불러서 주삼이가 윗방으로 올라오는데 머리는 헙수룩하고 눈알은 붉었었다.

주삼이가 “너 왔구나!” 아우가 온 것을 든든히 여기며 “이야기 들었겠지? 어떻게 하면 좋겠나?” 아우의 소견을 묻는다. 주삼의 안해가 수숙간의 의논한 말을 대강 남편에게 들려주고 “게으름뱅이 그 자식을 다시 불러들여야 될 것 같소.” 말하며 불쾌한 심정을 억제하려는 듯이 방문을 열고 침을 뱉으니 주삼이는 따라서 침을 뱉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더니 질들 생각했군. 사위 내쫓다가 딸 죽이겠어.” 김서방을 불러들일 의논이 쉽사리 작정되었다. 주팔이가 어제 저녁때 김서방이 자기 집에 있는것을 말하니 주삼이는 그 아우를 보고 “찾아다니지 않겠으니 잘되었다. 지금 네가 가서 데리고 오너라.” 말하여 주팔이가 김서방을 데려오게 되었다.

 

[출처] 임꺽정 봉단편 5 - 모이자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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