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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석골서 내행을 박연중이에게로 치송하던 날이 순경사가 재령 도착하던 날과
한날이었다. 청석골 내행이 박연중이 사는 동네에 들어갔을 때 박연중이가 이춘
동이더러만 반갑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싫은 내색
을 보이지 않고 온채집 세 채와 망 일곱과 그외의 방 둘을 억지로 변통하여 근
사십명 일행을 안돈을 시키었다. 박연중이 사는 동네가 땅은 해주에 붙었으나
읍은 재령이 가까워서 재령 읍내장을 보는 곳인데 청석골 일행이 온 뒤 장날 장
에 갔다온 사람이 재령 읍내에 순경사가 와서 묵는다더라고 말하여 다심한 늙은
이 박연중이가 순경사의 동정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맘을 먹고 이춘동이 한온이
두 사람을 불러가지고 의논하였다. 황천왕동이는 내행을 따라왔다가 안돈들 하
는 것만 보고 청석골로 도로 갔었다. 세 사람이 알아볼 도리를 의논한 끝에 이
춘동이가 재령읍에서 멀지 않은 촌에 사는 처남을 찾아가 보고 부탁하게 되었
다. 이춘동이의 처남은 재령서 통인을 다니다가 어느 퇴리의 데릴사위가 되어
처가살이를 하는 사람이라 저의 이력이 있는 위에 장인의 반연까지 있어서 재령
홍살문 안 일은 무슨 일이든지 알아낼 수가 있었다. 이춘동이가 처남 장가갈 때
와서 처남의 장인도 인사하고 처남의 댁도 상면하여 다 아는 처지인데 그 집에
와서 들어가지 않고 처남을 밖으로 불러내었다. “형님, 오래간만이오. 어서 들
어가십시다.” 하고 처남이 집으로 들어가자고 끄는 것을 “내가 길이 바쁜데
들어가면 자연 지체가 될 터이니 못 들어가겠네. 자네가 나하구 같이 읍으루 들
어가세.” 하고 이춘동이가 뒤쪽으로 처남을 끌고 읍으로 들어오며 길에서 온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읍에 들어와서 이춘동이는 어느 술집에 들어앉고 처남은
순경사의 동정을 알아보러 갔다. 처남은 가장 쉽사리 알아보고 왔지만 이춘동이
는 퍽으나 오래 기다린 듯하였다. 이춘동이가 술집에서 나와서 이번에는 자기가
돌아갈 길로 처남을 끌고 오며 역시 길에서 처남의 이야기를 들었다. 순경사가
열이튿날 왔는데 하룻밤 자고 바로 봉산으로 간다고 하더니 열사흗날 아침에 갑
자기 노독이 났다고 누워서 일어나지 않고 봉산군수를 오라고 기별하였던지 열
나흗날 봉산군수가 와서 순경사 사처에서 본군수까지 셋이 한동안 밀담한 후 순
경사는 그날 바로 각처에 관자를 부치고 봉산군수는 그 이튿날 봉산으로 돌아가
고 또 본군수는 그 뒤부터 군사 조발할 준비를 차린다는 것이 이야기의 대강이
었다. 처남이 이야기를 마친 뒤에 “순경사가 지금두 노독으루 앓는다던가?”
하고 이춘동이가 물으니 처남은 고개를 가로 흔들면서 “처음부터 멀쩡한 사람
이 노독이 났다구 핑계하구 한 이틀 동안 자리보전하구 지냈답디다.” 하고 대
답하였다. “가려구 예정한 길을 갑자기 병 핑계하구 한 이틀 동안 안 간 건 무
슨 속내가 있는 일이겠지. 그 속내를 알아봤나?” “재령 장교 김전돌이란 사람
의 누이가 해주 감영 기생인데 순경사가 말미를 얻어주어서 먼저 그 오라비에게
와 있다가 순경사 오던 날부터 밤마다 수청을 든답디다. 순경사가 재령서 유진
하는 건 그 기생 때문이라구 말들 합디다.” “순경사가 기생에게 반해서 묵을
일 없는 데서 묵는단 말인가. 그게 속내 모르구 하는 말들 아닐까?” “무슨 속
내가 또 있는진 몰라두 관가 일을 제일 잘 아는 통방에서 그렇게들 말합디다.”
“순경사 일은 재령 관가 일이 아니니까 통방에서 잘 알지 못하기두 쉽지만 설
혹 알더라두 말을 내서 못쓸 일이면 자네더러 말할 리 없겠지.” “말이 나면
목이 달아날 일이라두 나를 기이구 말 안할 린 없을게요.” “그래 다른 이야기
더 들을 건 없나?” “들은 이야기는 그뿐이오.” “그럼 고만 자네는 들어가게.
나는 나대루 가겠네.” “내가 집에를 잠깐 다녀올 테니 형님 여기서 좀 기다리
시우.” “왜 그러나?” “나두 형님하구 같이 가서 누님 좀 보구 오겠소.” “
이번에는 고만두구 이 다음에 와서 보게.” “누님이 대체 지금 어디 기시우?
그거나 좀 가르쳐 주구 가시우.” “지금은 집두 절두 없이 떠도는 셈일세. 어디
든지 가서 자리를 잡구 살게 된 뒤 자네게 기별함세.” 이춘동이가 처남을 작별
한 뒤는 걸음을 부지런히 떼어놓았다. 부지런히 각 부지런히 오건만 중간 지체
에 하루해가 걸려서 이른 아침 먹고 나온 사람이 저녁 해질 때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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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중이가 한온이와 같이 앉아서 심심풀이로 기묘년의 이문목견한 일을 이야
기하여 들리는 중에 이춘동이가 돌아와서 옛날 이야기는 끝 안난 채 고만두고
이춘동이의 알아온 순경사 이야기를 같이 들었다. 이춘동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한온이는 대번에 “큰일났네. 우리들 여기 와 있는 소문이 순경사 귀에 들어
간 겔세.” 하고 말하고 박연중이도 한온이의 말 뒤를 받아서 “그런 염려가 없
지 않은 걸. 그렇이 않으면 재령 와서 묵을 까닭이 있다구. 기생 때문에 묵는다
는 건 말이 안되는 것이 해주서 친한 기생이면 해주서 데리구 놀지 구차스럽게
말미를 얻어줘서 재령으루 보낼 까닭이 있나. 순경사가 감사에게 절제받는 관원
이 아닌데 감사가 무서워서 해주서 묵지 못할까. 그러구 순경사가 아무리 호색
하는 사람이래두 공무를 돌보지 않구 기생 때문에 묵을 린 만무한 겔세.” 하고
말하였다. 이춘동이가 한온이를 보고 “나두 처음에는 자네 말하는 것 같은 의
심이 들었는데 곰곰 생각을 해보니 그런 건 아닌 듯하네. 만일 우리 여기 와 있
는 것이 소문이 나서 순경사가 알았다면 여기를 벌써 와서 들이쳤지 이때까지
가만 있을 겐가?” 하고 말하는데 한온이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어째 그렇
지 않단 말인가?” “우리의 허실을 자세히 몰라서 선뜻 들이치지 못하는 게지.
” “순경사 휘하의 경병이 오십 명이라두 재령서 군총을 뽑으면 적어두 이삼백
명을 뽑을 텐데 그걸 가지구 조그만 산촌 하나 들이칠 엄두를 내지 못하겠나?”
“마산리는 대처라 오백여 명이 몰려갔나! 내 생각엔 마산리에서 봉패한 것이
전감이 되어서 단단히 준비하느라구 지체하는 것 같애. 우선 관자를 각처에 붙
였다는 것이 각처 군사를 모아들이는 것이겠지 별것이겠나.” “글쎄 자네 말을
들으니 그럴 듯두 한데.” 하고 이춘동이가 박연중이를 돌아보고 “만일 그렇다
면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내 식구두 안전하게 보호할
재주가 없으니 청석골다가 기별해보게.” 하고 박연중이가 대답하였다. 기별을
하려면 한 시각이라도 빨리 하는 것이 수라고 세 사람 의론이 일치하여 이춘동
이가 그날 밤에 밤길로 떠나게 되었다. 두목, 졸개의 손재주 있는 사람을 뽑아
서 도회청 넓은 대청에서 헌 군기들을 수보시키는데 김산이가 일을 하는 것을
동독하고 있는 중에 한눈팔던 졸개 하나가 급한 말로 “마산리 이두령이 오십니
다.” 하고 말하여 “이두령이 오시다니?” 하고 김산이가 밖을 내다보니 이춘
동이가 도회청 옆을 지나서 대장 사랑으로 올라가는데 의복이 휘주근할 뿐 아니
라 사람도 의복같이 풀기가 없었다. 오지 않을 사람의 오는 것이 놀랍고 기운
씩씩한 사람의 기운 숙은 것이 이 더욱 놀라워서 김산이는 황황히 뛰어나오며
“춘동이 자네 왠일인가?” 하고 소리치고 이춘동이가 걸음을 멈추고 서는데 쫓
아오며 또 “자네 어째 오나?” 하고 물었다. “일이 있어 오네.” “무슨 일?”
“한두 마디루 이야기할 일이 못되니 대장 사랑으루 가세.” “대관절 거기 별
연고는 없나?” “아직은 아무 연고 없네.” “그런데 나는 자네 오는 걸 보구
무슨 큰 연고나 있는 줄 알구 깜짝 놀랐네. 식구 없는 내가 이럴 젠 식구 있는
사람들은 더할 것일세.” “내가 맡아가지구 간 식구들을 내버리구 오는 줄루
알았나?” “자네 모양을 보구 방정맞은 생각이 왈칵 났었네.” “내 모양이 무
슨 일을 당하구 오는 사람 같은가?” “자네가 풀기가 하나두 없으니 웬 일인
가?” “어제 밤새두룩 밤길을 걸어오구 게다가 오늘 아침을 잘못 먹어서 지금
기운이 없어 죽을 지경일세.” “기운이 없는데 이러구 섰지 말구 어서 대장 사
랑으루 가게.” “자네는 왜 안 가려나?” “나는 지금 여러 사람 일을 시키는
중이라 못 가겠네.” “무슨 일인가?” “흔 군기 손질시키는 거야.” “내 이야
기는 안 들을라나?” “여럿이 같이 들을 이야기면 나두 오라고 부르겠지. 나는
이따가 부르거든 갈 테니 자네 먼저 가게.” 김산이는 도회청으로 도로 들어가
고 이춘동이만 꺽정이 사랑으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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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정이와 이봉학이가 사랑에 같이 앉았다가 이춘동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
째 오느냐, 무슨 연고가 있느냐 들이 연달아서 묻는 바람에 이춘동이가 꺽정이
에게만 겨우 절 한번 하고 이봉학이에게는 인사 수작도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서 어제 재령읍에 들어가서 순경사의 동정을 알아보고 곧 밤길로 떠나온 사연을
일장 이야기하였다. 꺽정이가 이춘동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이봉학이를 돌아
보고 “식구들은 여기 두었으면 아직은 아무 염려 없는 걸 공연히 피난시킨다구
순경사 손에 갖다가 넣어준 셈이 되었으니 저걸 어떻게 하면 좋은가. 식구들을
이리 도루 데려온단 말인가. 우리들이 마저 그리 간단 말인가?”하고 안식구 피
난시키자고 주장한 이봉학이를 탓하듯 말하니, 이봉학이가 머리를 잠시 숙이고
있다가 치어들고 “형님, 저 이두령더러 말 한마디 물어보구 나서 선후책을 의
논하십시다.”하고 말한 뒤 “순경사가 각처루 관자를 부쳤다니 어디어디 부쳤
다던가?”하고 이춘동이더러 물었다. “모두 다섯 군덴데 첫째 강원도, 그 다음
에......” “강원도 어느 골?” “강원도란 말만 들었소.” “황해도 순경사가 강
원도 수령에게 관자할 까닭이 있나?” “그래두 알아온 아이가 강원도라구 말합
디다.” “그런 관자가 아닐 겔세. 강원도 순경사에게 공문이나 사찰을 부친 모
양일세. 그러구 그 다음엔?” “봉산, 서흥, 평산, 금교 네 군덴가 보우.” “봉
산군수하구 상의하구 또 봉산다가 관자를 할 리가 있다구?” “봉산은 아니오.
” “그럼 한 군데는 어디야?” “어디든가 그 골 이름이 입에서 뱅뱅 도는데.
” “해준가?” “아니오.” “재령서 가까운 신천, 안악, 문화 이런 골인가?”
“그런 군이나 현이 아니고 도호부 같은데.” “황해도내 사도호부의 서흥과 평
산은 들었으니 그 나머지 연안이나 풍천일세그려.” “옳지, 풍천이오. 풍천이
그렇게 얼른 생각이 안 났소.” “우리 식구들 있는 곳을 공격할 작정이면 첫째
해주서 군사를
조발할 것인데 해주가 어째 빠졌을까?” “그 속은 모르겠네.” 그 동안에 이
춘동이 왔단 말을 듣고 황천왕동이, 배돌석이, 박유복이, 길막봉이가 차례로 오
고 맨 나중에 곽오주가 왔다.
먼저 온 다른 두령들은 이춘동이를 보고 “자네 왔나.” “웬일인가?” 이와
같은 간단한 인사만 하고 이봉학이와 이춘동이의 문답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앉
았는데, 곽오주는 와서 앉으며 바로 이춘동이더러 “처음부터 이야기해야 나중
온 사람두 알지, 그 속을 모른다니 그 속이 대체 무슨 속인가?”하고 두덜거리
었다. 이춘동이가 순경사의 수상한 동정을 다시 이야기하여 여러 두령들에게 들
려주는 동안에 이봉학이는 꺽정이와 선후책을 의논하였다. “순경사가 우리하구
식구들하구 따루 떨어져 있는 것을 알구 우리와 식구들을 동시에 공격할 계획인
가 봅니다.” “어째서?” “식구들 있는 데만 공격할라면 강원도 순경사와 약
속할 일두 없을 것이구 또 금교 찰방에게 관자할 일두 없을 것 아닙니까? 내
요랑에는 순경사가 자기 데리구 온 정병과 풍천, 재령 두 골 군총을 거느리구
식구들을 공격하구, 봉산, 서흥, 평산 세 골 수령과 강원도 순경사와 서루 호응
해서 우리를 공격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식구들을 도루 데려오지 못하면
우리가 한 패는 거기 가서 식구들을 보호해야겠네.” “우리가 두 패루 갈리는
건 우리에게 대단 불리하니까 우리가 다 함께 식구들 있는 데루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여기는 어떻게 하구?” “여기는 내버리구 가잔 말씀입니다. 여기
가 전 같으면 그대루 있을 만한 곳이지만 여기 지리와 우리 허실을 샅샅이 잘
아는 서림이가 조정에 귀순한 뒤에는 잠시두 맘놓구 있을 곳이 못됩니다.” “
여기를 아주 버린다면 우리가 어디루 가나 그걸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 “향
일에두 말씀했지만 자무산성을 우선 웅거하구 앉아서 서서히 좋은 자리를 구하
는 게 어떻습니까?” “글쎄, 자무산성을 가서 웅거하다니 있을 집두 없구 먹을
양식두 없는 걸 어떻게 하나?” “지금 토역을 할 수 없으니까 우선 급한 대루
목벽으루 눈비 가릴 의지간이나 더러 만들구 또 산성 근방 동네 백성들을 어르
구 달래서 손아귀에 넣어놓으면 과동할 양식은 어떻게든지 변통이 될 줄 압니
다.” “도회청 회의를 열구 여럿의 의견을 들어보세.” “도회청을 치우구 말구
할 것 없이 이 사랑에서 회의를 여시지요. 지금 오두령하구 김두령만 오면 다
모입니다.” 꺽정이가 가까이 있는 신불출이를 보내서 오가와 김산이를 곧 오라
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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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김산이가 와서 두령 도합 아홉 사람이 자리들을 정돈하고 앉았다. 도
중에 중대한 회의가 열리는 까닭에 여러 두령이 다 정숙하였다. 그중에 몸이 고
단한 이춘동이는 어디 가서 눕고 싶으련만 그런 말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꺽정
이가 이춘동이의 온 까닭과 이봉학이의 낸 계책을 대강 이야기하고 끝으로 청석
골을 아주 버리고 가는 것이 도중의 중대한 일이라 여럿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
정을 짓겠다고 말하였다. 꺽정이 옆자리에 앉은 오가가 꺽정이를 돌아보며 “일
을 소상 분명히 알지 못하구는 의견을 말씀할 수 없으니까 일에 대해서 의심나
는 걸 먼저 좀 여쭤보겠소.”하고 허두를 내놓은 뒤 “지금 식구들 가서 있는
데가 위태할 것 같으면 식구들을 어디루든지 다시 피난시킬 것이지 우리들이 새
삼스럽게 피난갈 까닭이 무엇이오?”하고 물었다. 피난간단 말이 꺽정이 비위에
거슬려서 “누가 피난간다구 말했소.”하고 뇌까렸다. “여기를 버리구 자무산성
으루 간다니 그게 피난가는 게지 무어요.”하고 오가의 들이대는 말에 꺽정이는
대답할 말이 막히어서 이봉학이를 보고 “자네가 말하게.”하고 대답을 떠맡기
었다. “여보 오두령, 나하구 이야기합시다.” “녜, 말씀하시우.”하고 오가가
얼굴을 이봉학이게로 돌리었다. “지금 식구들 가서 있는 데가 위태하니 우리가
가서 보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식구들을 도루 데려오거나 어떻게든지 해야지
그대루 내버려 둘 수는 없지요?” “식구들을 그대루 내버려 두다니 말이 되우.
그런 말은 물을 것두 없소. 다른 말 길게 할 것 없이 대장께 여쭤본 말씀을 다
시 한번 말씀하면 자무산성이구 어디구 안전할 데루 식구들을 다시 옮기는 건
부득이한 일이겠지만 여기서 관군을 대항하기루 작정한 우리가 갑자기 여기를
버리구 다른 데루 옮겨갈 까닭이 무어냔 말씀이오.” “우리가 지금 여기두 지
키구 식구들두 가서 보호하자면 힘이 두 군데루 나누일 텐데 부족한 힘을 두 군
데루 나눴다간 두 군데서 다 낭패보기가 쉬우니까 여기는 아주 비어버리구 식구
들 있는 데루 같이 가서 순경사 대군과 거기서 접전하거나 형편 봐가며 자무산
성을 가서 웅거하구 대항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할 줄루 나는 생각하우.
” “자무산성이 어떤 곳인지 나는 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거기두 안전친 못할
것이오. 우리가 가서 산성 안 백성은 어떻게 잘 처치하더라두 산성 근방 백성들
입에서 소문이 처져나가면 관군이 곧 뒤쫓아올 것 아니오.” “자무산성으루 피
난하러 가자는 줄 아시우? 아니오, 자무산성을 웅거하구 앉아서 관군을 대항하
잔 말이오. 소문나는 걸 저어할게 무어 있소.” “관군을 대항하기루 말하면 여
기가 자무산성보다 훨씬 낫지 않겠소. 다른 설비는 고만두구 군량 한가지만 가
지구 말하더라두 여기는 지금 관군이 수설불통하게 에워싸두 한 달쯤 넉넉 지낼
군량이 있지 않소. 그것만 해두 어디요.”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 승산 없
이 여기 앉았으면 한달 지내구 그 뒤는 어떻게 하우? 서림이가 여기를 목표 대
구 꾀를 내바쳤는데 서림이 모르는 자무산성 같은 데 가서 접전을 하게 되면 서
림이 꾀가 어긋나서 우리게 유리할 것 아니오. 군량으루 말하면 옛날 유명한 장
수는 일부러 없애버리구 대적과 접전한 일두 있답니다. 군량이 넉넉치 못한 게
되려 접전에 이가 될는지 누가 아우.“ ”여기를 버리구 자무산성으루 옮기자는
건 구경 서림이가 무서운 까닭이구려.“ ”서림이의 꾀를 꺽어놔야 우리게 승산
이 많으니까 그 꾀를 꺽잔 말이지 서림이가 무서울 거야 무어 있소.“ ”우리가
다년 근사를 모아서 이만큼 만들어놓은 근거를 헌신짝같이 버리구 다른 데루 간
다는 게 순전히 서림이 때문이니 그게 무섭지 않아두 똥싸는 격이오.“ ”청석
골을 버리구 가는 게 우리게 유리하면 버리구 가는 게지 아깝다구 지키구 앉았
다가 낭패 볼 가닭 있소. 우리가 만일 이번 접전에 지는 날이면 서림이란 놈을
공명시켜 주게 될테니 사람이 애성이 있지 않소. 이번 접전은 어떻게 든지 꼭
이겨야 하우.“ ”서림이가 잘될까 봐.“ 하고 오가가 이봉학이의 말을 뒤받으려
고 말 시초를 낼 때 황천동이로부터 시작하여 맨 나중 박유복이까지 여러 두령
이 모두 이봉학이의 말이 옳다고 떠들어서 오가의 말은 마침내 중동무이되고 말
았다.
오가가 한동안 입술을 빼물고 앉았다가 꺽정이를 보고 “여러분은 죄다 자무
산성패가 되어버려서 다른 의견이 더 없을 모양이구 나 하나만 청석골패루 떨어
졌는데 좋은 의견을 낼 주제가 못되니 대장께서 잘 생각하셔서 얼른 결정지으셨
으면 좋겠소. 일이 결정난 뒤에 나는 따루 대장께 청할 일이 한가지 있소.” 하
고 말하여 “따루 청할 일이 무어요?” 하고 꺽정이가 물었다. “일을 결정지으
신 다음에 나중 말씀하지요.” “먼저 말하나 나중 말하나 마찬가지 아니오. 말
하우.” “말하라시면 먼저라두 말씀하리다. 그건 다른 청이 아니라 만일 여기를
버리구 가기루작성하시거든 나만은 여기 남이 있게 해달란 청이오. 내가 여러분
뒤를 따라가서 조금이라두 조력할 일이 있으면이야 이런 말씀을 어찌 하라까만
쓸데없는 나이는 많구 특별한 재주는 없구 말하자면 도중의 무용지물이니까 옛
소굴의 지킴 노릇이나 하게 해주시우.” “그건 허락하기 어려운 청이오.” “청
해서 허락을 못 받으면 나중에 장령 거역하구 군율이라두 받을는지 모르겠소.”
“오두령두 반심이 생겼소?” “반심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하늘이 내려다
보시지 내가 서림이같이 반복한 놈이란 말씀이오?” “그러게. 장령 거역한다는
게 웬 소리요.” “나는 여기를 버리구 가느니 차리리 여기서 죽구 싶소.” “진
정이오?” “진정이다뿐이오. 나는 청석골서 죽는 게 고소원이오.” “진정 그렇
다면 내가 다시 생각해 봐서 회의 끝난 뒤에 말하리다.” 꺽정이가 오가와 수작
을 그치며 바로 여러 두령들더러 “너희두 다른 의견이 있거든 다 말들 해라.”
하고 말을 일렀다. “오두령이 혼자 뒤에 떨어진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안될 말
입니다.” “안간다구 어거지를 쓰면 목을 빼가지구 가나요 어쩌나요. 할 수 없
지요.” “오두령은 차차 물론하구 졸개들까지두 다 각각 자원을 받는게 좋을
듯합니다.” “자원을 받으면 군기가 문란해집니다. 군령으루 시행해야 합니다.
”“도중 상하 백여 명이 한데 몰려가면 군량 변통이 참말 큰일입니다.” “접
전을 하자면 졸개가 많을수록 좋을 텐데 있는 것들을 두구 갈 까닭이 있습니까.
군량은 노략질해서 먹일 수가 있지만 졸개야 노략질 해서 쓸 수가 있습니까.”
“마산리서 지내보니까 졸개들 없는 것이 되려 주체궂지 않아서 좋습니다.” 여
러 두령이 이런 말들을 옥신각신 지껄일 뿐이고 청석골을 버리고 가는 데 대하
여는 오가의 말과 같이 다른 의견들이 없었다. 꺽정이가 마침내 식구를 보호하
러 가기로 결정을 지어서 말한 뒤에 “오두령의 청은 어떡할까?” 하고 이봉학
이를 돌아보니 이봉학이는 오가의 가고 안가는 것을 대수롭게 알지 않은 듯 “
오두령 생각대루 하라시는 게 좋겠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박유복이가 이봉학
이의 뒤를 받아서 “오두령이 혼자 떨어져 있겠다는 건 망령의 말입니다. 허락
하지 마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을 꺽정이는 미처 대답하기 전에 먼저 오가가
볼멘소리로 “여보게 이 사람. 자네가 이 늙은 놈이 효수당하는 걸 눈으루 보고
싶은가. 자네가 그런 말씀 하는 건 일가에서 방자하는 셈일세.” 하고 박유복이
를 나무랐다. “왜 자청해서 효수를 당한단 말이오. 그게 망령이지 무어요.” “
망령이거나 본정신이거나 하여간 나는 죽으면 죽었지 청석골을 버리구 다른 데
루 가진 못하겠네.” “왜 전에 없이 공연한 고집을 세우시우.”“내가 이번 고
집이 처음 겸 마지막일세.” “처음이구 마지막이구 고집 세울 까닭이 무어요.
나는 까닭을 모르겠소.” “나는 청석골에 살지 못하면 청석골서 죽는 것이 신
상에 편한 가닭일세.” “순경사 난리 치른 뒤에 다시 와서 살면 고만 아니오.
공연한 고집 세우지 마시우.” “내가 남유달리 청석골에 정이 깊어 들어서 잠
시두 떠나구 싶지 않은 걸 어떻게 아나.” 박유복이는 오가의 얼굴을 뻔히 보며
쓴입맛을 쩍쩍 다시는데 황천동이가 박유복이 대신 나서서 “여보 당신이 청석
골에 정이 깊이 들어서 잠시두 떠나구 싶지 않다는 건 멀쩡한 거짓말이오.” 하
고 오가의 말을 타박하였다.
황천왕동이가 타박에 오가는 골을 벌컥 내며 “내가 거짓말을 했으면 사람의
새끼가 아닐세.” 하고 맹세지거리를 내놓았다. “청석골에 정이 들어서 잠시두
떠나지 못하겠단 말이 그래 정말이오?” “거짓말루 알아두 고만이지만 남의 말
을 무턱대구 거짓말이라구 타박하는 법이 어디 있나. 아무리 우리네 무간한 사
이라두 그건 인사불성일세.” “내 생각엔 거짓말이 분명한 걸 어떡하우.” “무
어야, 거짓말이 분명해? 이 사람이 뉘 부아통을 터트릴 작정인가? 분명하거든
분명한 증거를 대게.” “올 여름 광복길은 마누라님 병환 급보를 듣구 경황없
이 간 게니까 말할 것 없지만 작년에 광복 갈 때 어째 그런 말이 없었소? 작년
까지 설들었던 정이 올해 와서 갑자기 깊이 들었던 말이오? 그게 거짓말 아니구
무어요.” 오가가 오금을 박히고 할 말이 없는 것같이 한참 아무 소리 못하다가
풀기없이 한숨을 한번 쉬고 나서 “작년 광복두 나는 가구 싶지 않은 걸 죽은
마누라쟁이가 발동을 해서 마지못해 갔었네. 말하자면 마누라쟁이가 죽을 자리
보러 가는 데 따라간 셈일세.” 하고 스러져가듯 말하였다. “당신이 전에는 판
관사형 구실하느라구 마누라님 꽁무니를 따라 갔지만 지금은 묘지기 노릇하느라
구 마누라님 산수 밑을 떠날 수 없는 게지. 당신이 돌아간 마누라님 위해 세상
에 난 사람인 건 내남없이 다 아는 터인데 그렇게 실토루 말하면 누가 무어라겠
소.” “자네 조롱은 내가 받아 싸지만 내 진정은 자네가 좀 덜 알았네.” “당
신 속울 내가 꿰어뚫구 보듯이 알았지, 무슨 소리요.” “자네가 아무리 소명하
기루서니 내 속이야 나만큼 잘 알겠나. 마누라의 무덤두 내가 여기 있어 수호해
야 묵뫼가 안되겠지만 그 보다두 내가 죽어서 묻힐 땅이 여기니까 나는 여길 더
날 생각이 없네.” “죽어 묻힐 땅이란 게 죽은 뒤 마누라님하구 한 구뎅이에
묻힌 잔 말이 아니오. 내가 덜 알긴 무얼 덜 알아.” 황천동이의 오가 오금박는
것을 빙그레 웃고 보던 꺽정이가 홀저에 정색하고 “도중 공론하는 자리에 실없
는소리 작작 지껄여라.” 하고 황천동이를 나무란 뒤 오가를 돌아보고 “그래
정말 죽기 한사하구 여기를 못 떠나겠소?” 하고 다져 물으니 오가는 선뜻 “내
소회는 다시 더 말할 것이 없소. 인제 좌우간 대장 처분만 바랄 뿐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꺽정이는 청석골을 아주 비어버리고 가느니 한 끝을 남겨두는 것이
마음에 합당하여 “그러면 오두령은 아직 여길 지키구 있어 보우.” 하고 오가
의 청을 들어주었다. 여러 두령 중의 박유복이가 얼굴에 좋지 않은 기색을 나타
내는 것이 꺽정이의 처분을 언짢게 여기는 모양이나 본래 입이 굼뜬 사람이 더
구나 대장의 처분을 거슬려 말하기가 어려워서 말은 못하고 끙끙거리기만 하였
다. 오가가 이것을 보고 “자네가 또 일가에서 방자할 생각인가 앗게 앗게.” 하
고 손을 홰홰 내저은 뒤 곧 꺽정이를 보고 “내가 대장 위해서 청석골 유수 노
릇을 잘할 테니 대장께서 소원 성취하시는 날 나를 송도유수루 승차나 시켜주시
우.” 하고 너털웃음을 내놓았다. 오가 수다떠는 바람에 박유복은 말문이 열리지
못한 채 그대로 막히었다. 꺽정이가 오가의 실없은 말은 대꾸 않고 “누구든지
가구 싶지 않은 사람은 오두령하구 같이 여기 남아 있어두 좋다.” 하고 좌우쪽
여러 두령들을 돌아보니 배돌석이, 황천왕동이, 곽오주, 길막봉이 네 사람은 혹
시 자기들더러 남아 있으랄까 겁내둣이 간다고 뒤떠들고 이봉학이, 박유복이, 이
춘동이, 김산이 네 사람은 잠자코 있었다. 이봉학이는 청석골을 통히 비어버리고
가자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이춘동이는 길라장이로 가야 할 사람인즉 다시 가네
안 가네 말할 나위가 없지마는 박유복이와 김산이는 남아 있을 의향이 있는 것
같이 보이었다. 꺽정이가 먼저 박유복이더러 “너는 오두령하구 같이 여기 있을
라느탸?” 하고 물으니 박유복이는 “아니오 갈랍니다. 오두령은 망령으루 안
간다지만 제야 왜 안가요.” 하고 대답하고 그 다음에 김산이더러 “너는 여기
있을 테야?” 하고 물으니 김산이는 처음에 “가든지 있든지 대장께서 하라시는
대루 하겠습니다.” 하고 두동싸게 대답을 하였다가 접전이 무서워서 갈 생각이
적으냐고 황천왕동이에게 조롱받고 또 다른 사람이 다 간다고 분명히 말하는데
혼자 두동싸게 말한다고 이춘동이에게 책망 듣고 “저두 가겠습니다.” 하고 고
쳐 대답하였다. 꺽정이의 명령이 아니면 오가와 같이 남아 있을 두령이 하나도
없는데 꺽정이가 명령하지 않고 가고 안 가는 것을 두령들 자의대로 하라고 말
하여 오가 하나 빼놓고 두령이란 두령은 다 가게 되었다.
39
두목과 졸개들은 어떻게 하느냐 의론이 났을 때 박연중이 사는 동네 형편이
두목, 졸개를 다 끌고 가면 우선 잠시라도 들여앉힐 처소가 없는데 추운 동절에
한둔도 시킬 수 없고 난처하다고 이춘동이가 말하여 신불출이, 곽능통이 두 시
위 외의 두목, 졸개 십여명만 뽑아서 데리고 가고 그 나머지 팔십 명 사람은 아
직 오두령에게 맡겨두자고 의론이 귀일하였다. 갈 바에는 한 시각이라도 빨리
가는 것이 좋고 또 청석골을 비다시피 하고 가는 것을 가근방백성들에게라도 알
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이날 밤에 밤길로 떠나기로 하고 말과 노새를 있는 대로
다 타고 가는 것이 좋고 또 군용에 쓸 재물을 넉넉히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고
두령 외의 시위들까지 다 부담을 태우기로 하여 대무한 것만 꺽정이가 작정한
뒤 그외의 여러 가지 길 떠날 준비는 이봉학이에게 통히 쓸어맡기었다. 회의 파
한 뒤에 이봉학이가 곧 도중 재물 맡은 박유복이와 도중 살림 보는 김산이를 데
리고 길 떠날 준비를 차리는데 이봉학이는 청석골을 다시 올 생각이 없는 사람
이라 병장기의 쓸만한 것과 재물의 가지고 갈 만한 것을 하나 남기지 않고 다
골라서 부담 속을 채우고 남는 것은 데리고 갈 두목, 졸개의 질짐을 만들게 하
였다. 가지고 갈 물건을 손모아 놓은 것이 너무 많아서 되골라 내놓았건만 부담
스무짝 외에 짐 열댓짝이 착실히 되어서 대개 열 명쯤 뽑으려던 두목, 졸개를
짐짝 수효대로 늘려 뽑았다.
청석골 안이 술렁술얼하는 중에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대장이 탈 황부
루에만 안장을 지우고 두령과 시위가 탈 말과 노새 열 필에는 부담을 실리고 두
목, 졸개 열다섯은 저희들의 질 짐짝을 각기 맡아 가졌다. 혼자 떨어져 있을 오
가가 꺽정이에게 하직하고 여러 두령과 면면이 작별할 때 생리 곧 사별이 될것
같이 앞짧은 소리를 많이 하였다. 황천왕동이가 오가를 조롱하느라고 자발적게
조상하는 시늉으로 곡하는 소리를 내었다가 꺽정이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
다.
섣달 스무남께 가까운 때 밤길을 가자니 춥기야 춥지마는 이삼일 전보다 추위
가 훨씬 풀리고 또 달이 새벽까지 밝은 까닭에 밤길이라도 낮길 못지않게 많이
갔다. 일행이 많고 그중에 무거운 짐을 진 짐꾼이 맣아서 홀가분하게 차린 단신
행인같이 길이 빠르지 못하지만 이튿날 해전에는 박연중이 사는 동네를 대어 들
어갈 수 있었다. 이춘동이 떠나온 뒤 무슨 일이 났는지 몰라서 중로에서 황천왕
동이를 보행으로 먼저 보내보았다. 황천왕동이는 안식구들 갈 때 한번 갔다온
길이라 나는 듯이 가서 보고 저녁때 수십리 밖까지 되마중을 나와서 동네가 무
사하고 백손 어머니가 지난 밤에 순산 생녀하였다는 소식을 알리었다. 노산이고
더구나 오래 단산한 끝에 순산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여러 두령들은 꺽정이에
게 분분히 치하하나 꺽정이 당자는 욕심으로 “이왕 나면 쓸 자식이나 날 것이
지.” 하고 시뻐하였다.
산기슭에 일자로 붙은 동네집이 게딱지 같은 것까지 수효에 넣어 쳐야 열에
겨우 하나 더한 열한 집뿐이었다. 동네 사람은 남녀노소 합해야 불과 이십여 명
이나 배보다 배꼽이 더 틈 셈으로 두번에 온 청석골 일행이 짐승은 치지 말고
사람만 근 칠십 명인즉 아홉 집이 사람 사태에 파묻히지 않을 수 없었다. 양식
은 미리 준비하여 놓은 까닭에 식사는 외려 여차고 방간은 갑자기 늘릴 도리가
없는 까닭에 방에 잘자리 부족한 것이 제일 큰 탈이었다. 여편네는 여편네끼리
사내는 사내끼리 각각 몰려 자고 집집마다 부엌까지 사람이 자도록 변총하였건
만 그래도 주인의 수하 사람과 손의 졸개들 자는 곳은 몸을 눕힐 틈이 없어 서
로 기대고 앉아서 눈들을 붙이었다. 방이 어떻게 째이든지 백손 어머니 해산방
에도 같이 자는 사람이 방안에 그들먹하였다. 여러 사람이 한 방에서 같이 자게
되니 자연히 방문을 수세게 여닫아서 집안의 산모가 촉상이 되었다.
40
청석골 두령, 시위 들은 박연중이 큰집 이간 사랑방에서 자고 꺽정이는 박연
중이를 따라 그 작은집 건넌방에 와서 같이 잤었다. 방이 단간이나 단둘이 자기
에는 비좁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식전 꺽정이가 기침하기 전에 시위들이 와서 대령하고 있었고 기침한
뒤 여러 두령이 와서 문후들 하고 가고 소세하고 조반까지 먹은 뒤 아들 백손이
가 문안하러 와서 일찍 올 것인데 의원 허생원을 불러다가 어머니의 병을 보이
느라고 늦었다고 말하고 어머니의 병을 고모는 산후발이라고 하는데 허생원은
감기로 집증하더라고 이야기하였다. 꺽정이가 안식구들을 찾아보기겸 동네를 한
번 돌아보려고 백손이를 데리고 나섰다. 다른 두령들은 전날 들어오는 길로 식
구들을 찾아보았지만 꺽정이는 박연중이와 사랑방에 같이 앉았다가 잘 처소에
같이 와서 잔 까닭에 와서 본 백손이 외의 다른 식구는 아직 보지 못하였던 것
이다. 백손이 말이 고모도 어머니 해산방에 같이 있다고 하여 꺽정이가 먼저 누
님과 산모를 보려고 해산방으로 오는 중에 이봉학이와 박유복이가 앞에 가는 것
을 보고 “어디들 가나?” 하고 소리하였다. 두 사람은 일시에 돌쳐서서 꺽정이
에게로 마주 왔다.
“황천왕동이가 아까 아주머니를 가 뵙구 와서 밤새 병환이 나서 대단하시더
라구 하기에 우리는 밖으루라두 잠깐 다녀올라구 가는 길입니다.”
이봉학이가 백손 어머니에게 문병하러 가는 것을 말하니 꺽정이가 턱으로 백
손이를 가리키며 “저 자식이 의원을 불러다 뵈니까 의원 말이 감기라구 하더라
네. 대단친 않은 게지.” 하고 대답한 뒤 “그러나 나두 지금 그리 가는 길이니
같이들 가세.” 하고 두 사람과 같이 가는데 백손이는 길인도하라고 앞세우고
두 사람은 뒤에 딸리었다. 꺽정이가 동네 뒷산을 살표보며 천천히 가는 중에 조
그만 집에서 떠들썩하게 지껄이는 사내들 말소리가 들리었다. “대체 이게 무슨
고생인가?” “난리 피난 온 사람들 때메 우리가 난리를 만났네.” “아직 언제
갈는지 모르지?” “언제든지 가긴 가겠지.” “그 따위 오뉴월 쇠불알 같은 소
리 하지 말게. 그 동안 우리는 다 죽으란 말인가. 사람이 밤에 잠을 자야 살지
않나.” “자네들 사정봐서 내가 다 쫓아버릴까. 허허허.” “영감에게 등장을
들어보세.” “영감은 무슨 별수 있는 줄 아나? 영감두 속은 짠 모양이데.” “
그럼 우리가 모두 각각 단봇짐들을 싸세.” 박연중이 수하 사람들이 밖에 지나
가는 청석골 두령들 듣거라하고 떠드는 것 같았다. 꺽정이가 고개를 숙이고 그
집 앞을 다 지나온 뒤 홀저에 걸음을 멈추고 “우리 오늘 가세.” 하고 뒤에 오
는 이봉학이를 돌아보았다. “어디루 가잔 말씀입니까?” “어디루든지 가야겠
네.” “청석골서 올 때두 말씀했지만 자무산성으루나 가시까요?” “자무산성
두 좋으니 오늘 식구들 다 끌구 그리 가세.” “오늘이야 어떻게 갑니까.” “왜
못가?” “산성 안 백성들 처치라든지 양식이나 부정지속 변통이라든지 다 먼저
해놓구 가야 하지 않습니까.” “가 앉아서 처치할 거 처치하구 변통할 거 변통
하면 되지 않나.” “그러구 아주머니를 오늘 어떻게 뫼시구 갑니까. 삼두 아직
안나갔구 더구나 병환중인데.” “갈 수 없는 사람은 아직 여기 남겨두구 가지.
동네 인심이 그악하기루서니 식구 몇간 남아 있는 거야 설마 민주대겠나.” “
오늘 식구들을 다 끌구 가려면 길 떠나기가 자연 늦을 테니 내일 일찍 떠나두룩
준비를 차리게 하구 오늘 선진 한패를 보내서 내일 일행이 들어가기 전에 우선
산성안 집들이나 비어놓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자네는 얼른 가서
선진 보낼 사람들을 작성하게. 나는 연중이 노인한테 내일 떠난단 말이나 하구
자네네들 있는 데루 나감세.”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아주머니께 잠깐 다녀
가시지요.” “나중에 다시 와서 보지. 어서 도루 가세.” “백손아, 너만 가거
라.” 꺽정이가 백손이는 혼자 보내고 이봉학.박유복이 두사람은 다시 뒤에 딸리
고 천천히 가던 길을 바쁜 걸음으로 돌아왔다.
41
이봉학이와 박유복이가 사랑방에 와서 여러 두령 중의 밖에 나간 사람까지 다
불러 모아놓고 상의한 끝에 박유복이.배돌석이.황천황동이.길막봉이.이춘동이 다
섯 두령이 두목.졸개 십여 명을 데리고 선진으로 가기로 대개 작정하고 짐짝에
서 가지고 갈 병장기들을 꺼내놓는 중에 꺽정이가 나와서 갈 사람 작정한 것을
듣고 이봉학이 더러 “자무산성으루 가는데 일체 일을 맡길 테니 자네가 선진을
거느리구 가게.” 하고 말을 일렀다. “아까 의논들을 할 때 유복이두 나더러 가
는 게 좋겠다구 말을 합디다만 나는 여기서 안식구들 길 떠날 준비를 시키려구
빠졌습니다.” “길 떠날 준비야 별거 있겠나. 여기 남은 사람이 시켜두 넉넉할
톄니 염려 말구 가게.” “녜, 형님 분부대구 선진을 밭아가지구 가겠습니다.”
“그러구 오주는 왜 여기 남겨두나. 오주두 마저 데리구 가게.” “그럼 내일 내
행할 사람이 아주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오주를 내행 배행할 사람으루
남겨놨나? 만일 어린애들이나 울면 길에서 미쳐 날뛰라구.” “오늘 산성 아래
동네 도평 가서 동네을 모아놓구 우리 일에 거행을 잘 하두룩 일러두자구 의논
들 했는데 오주가 가서 만일 해거나 부리게 되면 우리 위신이 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주는 빼놨습니다.” “유복이가 가는데 무슨 염련가. 오주를 다잡는데
유복이 윗수갈 사람이 또 어디 있나.”
꺽정이의 말과 같이 곽오주를 다루는 데는 박유복이만한 사람이 다시 없었다.
곽오주가 어린애 우는 소리에 광증이 발작될때 꺽정이의 호령질로도 제지는 되
지마는 박유복이는 곽오주의 뒤를 지성스럽게 쫓아다니며 발작 안되도록 미리
단속하고 혹시 발작되더라도 않는 아이 다루듯 하여 곱게 가라앉히고 꺽정이같
이 큰소리를 내지 아니하였었다.
먼저 가기로 작정한 다섯 두령 중의 이춘동이가 그 모친에게 간단 말아고 온다
고 나가더니 한동안 착실히 지난 뒤에 와서 무슨 말을 할 텐데 입이 잘 떨어지
지 않는 모양으로 주저주저하여 “무슨 할 말이 있나?” 하고 꺽정이가 물으니
이춘동이는 그제야 입이 떨어져서 “나는 내일 내행 갈 때나 가겠으니 오늘 선
진에서 빼주시우.” 하고 말하였다. “오늘 못갈일이 무언가?” “지금 어머니께
가서 나는 먼저 자무산성으루 가니 나중오시라구 말씀했더니 어머니가 억지공사
루 나더러 여기나 그대루 있지 다른 데루는 갈 생각 하지 말라구 말하십디다.
그래서 모자간에 그러니 안 그러니 한참 말다툼을 하다시피 한 끝에 나는 갑니
다하구 나오니까 어머니가 위에 쫓아나오시면서 너는 가거나 말거나 나는 안 간
다, 자식이 어미 말을 안 들으면 모자간 의절이다 하구 소리소리 지르십디다. 공
영한 망령의 말씀이지만 내가 오늘 그대루 가면 참말 뒤에 안 오실는지 모르니
까 사리대루 말씀을 잘해서 의향을 돌려가지구 내일 일행에 같이 가시두룩 할
생각입니다.” “오늘 갈 일행 중에 대궐고갠가 어디루 가는 직로를 잘 아는 사
람이 자네뿐이데 자네가 안갈 수 있나. 가게. 자네 어머니가 다른 데루 가기 싫
다시면 여기 기시게 하구 자네도 나중에 다시 와서 뫼시구 있게그려. 자네가 어
머니을 뫼시구 있거나 우리를 따라오거나 그건 나중 다시 이야기할 셈 잡구 오
늘은 가게.” 꺽정이 말에 이춘동이는 녜 다답을 아니하지 못하였다.
이봉학이가 다섯 두령 외에 곽오주까지 두령 여섯 명과 두복.졸개 열 명을 거
느리고 늦은 아침때 길을 떠났다. 도평을 해 지기 전에 대어보려고 점심참 외에
는 별로 쉬지도 않고 길을 건몰았건만 짧은 해에 칠십리 길을 오자니 자연 일력
이 모자라서 캄캄 어두운 뒤 겨우 대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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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 동네 존위의 집이 동네 중의 제일 잘 견디는 집이고 또 집도 큼직한 것
을 잘 아는 이춘동이가 일행을 그 집으로 인도하였다. 겉으로 위풍을 부리려고
동구 밖에서 봇짐에 싸가지고 온 병장기들을 꺼내서 혹 손에도 들고 혹 몸에 지
닌 까닭에 그 집에서는 아닌밤중에 난리가 쳐들어온 줄 알고 경겁들 하였다. 이
봉학이가 주인을 불러서 하룻밤 자고 갈 뜻을 말하고 경겁하지 말라고 안위를
시켰다. 주인이 늙어서 눈이 어둡든지 또는 놀라서 정신을 잃었든지 처음에는
이춘동이를 보고도 몰라보다가 나중에야 미로소 이춘동이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자네가 마산리서 대장일 하던 춘동이 아닌가?” 하고 아는 체하였다. 주인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첫밗에 배돌석이가 나서서 “아니꼽살스럽게 뉘게다
가 하게야.” 하고 책을 잡고 그 다음에 황천동이가 또 나서서 “마산리 대장쟁
이는 하게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청석골 두령은 하게를 안 받는다. 그 따위 말버
릇을 함부루 하다가는 신털 난 대가리가 모가지하구 작별하게 될 테니 조심해
라.” 하고 얼러대니 동네의 제일 어른 존위 샌님이 구상전을 만난 듯이 벌벌
떨었다.
큰방 둘을 치우고 두령과 두목.졸개가 두 방에 나누어서 헐숙하는데 인심이
몰라서 조심성으로 한 방에 한 사람씩 돌려가며 자지 않고 이날 밤을 지내고 이
튿날 식전에 이봉학이가 주인을 보고 “우리가 이 동네 사람들에게 이를 말이
있으니 온 동네를 다 모을 건 없구 동네의 두민과 동임들만 곧 좀 모아 주시우.
” 하고 분부할 것을 듣기 좋게 부탁하듯 하였다. “동네 사람을 모으면 어디루
모아라구 할까요?” “어디루 모이라니? 이리 모이라지.” “아니 사람이 여남
은 모일 텐데 방이 좁을 듯해서 여쭤보는 말씀입니다.” “한데가 좀 춥겠지만
뭐 오래 걸릴 것 아니니 이 앞마당에 모이게 하우.”
주인이 네 대답하고 갔다. 한동안 지난 뒤에 유수한 동민과 일이삼좌.소임.풍헌
이 다 모였다고 하여 이봉학이가 방 앞 봉당 위에 나서서 마당에 웅긋쭝긋 섰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큰 기침 한번 하고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청석
골 임대장의 부하인 것은 말 안해도 다들 알았겠지. 우리 대장께서 이번에 잠시
피접을 나실 일이 있어서 자무산성에 와서 과동하시기루 작정하셨는데 산성 안
백성들을 그대루 내쫓아두 고만이지만 연부년 흉년에 간신이 구명도생하는 것을
추운 동절에 집을 뺏구 그대루 내쫓기가 불쌍하니 이 동네서 맡아서 곁방살이루
라두 거접들을 시켜달라구. 우리가 맡긴 뒤에 만일 열의 한 집이라두 거산하게
된다면 그 죄는 이동네서 져야 할 줄 알아. 그러구 군량.마초와 일용 제구를 나
중에는 청석골 있는 것을 운반해 오거나 또는 달리 변통할 테지만 우선 당장 쓸
것은 이 동내서 지공할밖에 없는데 파는 물건은 곧 값을 내줄테구 팔지 않는 물
건은 나중에 물건으루 갚을 테야. 물건이 있는대루 성심껏 지공하면 동네에 해
가 없을 거구 만일 있는 물건을 숨기구 없다구 속이러 들면 물건은 물건대로 뺏
기구 죄책은 죄책대루 받을 테니 그리 알라구. 이외에두 일러두구 싶은 말이 많
으나 추운 데 오래 붙잡구 늘께 있나. 고만두지. 동임들만은 우리 아침밥 먹은
뒤에 다시 와서 우리 심부름을 좀 해줘야겠어.” 이봉학이가 말을 마치고 방으
로 들어가려고 돌아설 때 “잠깐 여쭤볼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
이 있어서 되돌아서서 마당을 내려다 보니 동네 사람들 중에 외양이 가장 똑똑
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두 손길을 마주 잡고 봉당 앞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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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동네 삼좌올시다.” “그래 할 말은 무어야?” “저희 동네는 자래
루 빈동이온데다가 더구나 올해 같은 재년을 당하온 까닭에 지금 동네에 조석
끼니를 바루 먹는 집이 열의 두세 집두 안됩니다. 저희 동네 형편으루는 각항
지공두 하기 어렵솝지만 우선 산성 안 열세 집 식구를 맡아서 먹일 도리가 없소
이다.” “내 분부를 거행하지 못하겠다구 방색하는 말이냐.” “방색하려구 여
쭙는 말씀이 아니올시다.” “그려면 무어냐?” “산성 전후 좌우에 있는 동네
가 여럿 아니오니까? 다른 동네는 다 고만두구 여기서 가까운 마산리.사주리 두
동네만 가지구 말씀하더라두 두 동네가 다 저희 동네보다 호수두 많구 또 동네
두 포실합니다. 이 두 동네 사람을 부르셔서 저희와 세 동네가 산성안 사람들을
갈라 맡고 각항 지공을 같이 하라구 분부합시면 동네 부담두 좀 수월하려니와
첫째 분부 거행이 잘될 듯 생각하옵는데 처분이 어떠실지 여쭤보는 말씀이올시
다.” 삼좌의 말이 유리하여 이봉학이는 그 말을 쫓아 마산리.사주리 사람들을
불러오려고 생각하고 “두 동네 사람을 아침 전에 다 불러올 수 있겠나?”하고
묻는데 사람 대접으로 하대하던 언사를 고치었다. “두 군데가 다 오리 좀 남짓
합니다. 지금 곧 사람을 보내면 아침때 지나기 전에 올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곧 사람을 보내서 두 동네 동임들만 오라구 부르게.” "저희 동네 사람만
가두 불러오긴 하겠솝지요만 단단할 성으루 수하 사람들 한둘씩 같이 가게 해주
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사람은 아직 아침밥들을 안 먹었을걸.” “분부만 합
시면 먼저 입시들을 시켜서 같이 가게 합지요.” 이봉학이가 두목 둘을 불러서
각각 졸개 둘씩 데리고 동네 사람들과 같이 가서 마산리, 사주리 동임들을 불러
오라고 분부한 뒤 방에 들어와서 도평 삼좌가 사람이 똑똑하다고 창찬하였다.
아침밥들을 먹고 한동안 지났을 때 마산리와 사주리에 보낸 사람들이 두 동네
동임들을 데리고 와서 도평까지 세 동네 동임들을 한데 모아놓ㄱ 이봉학이가 먼
저 도평 사람에게 이르던 말을 다시 되풀이하여 일렀다. 사람 겨우 일곱이 관군
오백여 명 대적하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과 귀로 들어도 본 이나 진배없이 잘
들을 사람들이라 일 분부 시행으로 녜 녜 대답들 하였다.
이봉학이가 다른 두령들과 상의하여 군량, 마초 기타 물품을 아쉬운 대로 쓸
만큼 몇 섬 몇 짐 또는 몇 개 아주 작정하여 발기로 적어서 세 동네 동임들을
내주며 빨리빨리 수합하여 산성으로 올려보내라고 이르고 일행을 거느리고 산성
에 올라와서 열세 집에 사는 사람들을 세 동네로 몰아 내려보내는데 살림살이
제구중의 긴한 것은 아직 두고 쓰고 긴치 않은 것은 세 동네 사람과 소가 왔다
가는 회편에 보내주기로 하였다. 열세 집의 방 면색이 통히 스물여섯인데 그중
의 가장 널찍한 방이 전에 와서 하룻밤 자던 집 안방이라 이것을 대장의 사랑
겸 두령의 도회청으로 정하여 맥질한 벽에 종잇장을 붙이게 하고 삿자리와 기직
자리를 새 것으로 바꾸어 깔게 하고 그 나머지 방들은 비질만 정하게 시키었다.
두령들로부터 졸개들까지 잠시 편히 앉았지 못하고 이집 저집으로 왔다갔다 하
는 중에 저녁때가 다 되었다. 미처 자리도 잡아놓지 못한 양식섬도 풀고 된장독
도 열고 새로 걸어놓은 가마솥들도 부시어서 칠십여 명이 먹을 저녁밥을 준비하
기 시작하였다. 이봉학이가 곽오주와 이춘동이는 산성에 남아서 두목과 졸개들
의 저녁 준비하는 것을 보살피게 하고 그외의 두령들은 다 데리고 사주리로 내
려왔다. 사주리와 도평과 마산리에서 각각 홰꾼을 열명씩 내서 사주리 홰는 해
주서 오는 길로 나가고 도평 홰는 사주리로 오고 마산리 홰는 산성 너덜에 와서
기다리도록 지휘하였다. 꺽정이는 전날 길 떠날 준비를 다 시켜서 이날 첫새벽
떠났건만 내행이 많은 까닭으로 길이 마냥 늦어져서 사주리도 홰 없으면 캄캄하
여 못 올 뻔하였고 산성은 밤이 삼경이 다 된 때 들어왔었다. 백손 어머니가 산
후탈로 못 오게 되어서 해산 구원하는 애기 어머니도 못 오게 되고 애기는 어머
니와 같이 온다고 아니 오고 백손이는 어머니 옆에 있으라고 못 오게 하고 의원
허생원과 심부름할 졸개 내외를 남겨두고 또 이춘동이의 가족 세 식구를 그대로
남아있게 하여 열 명이 줄어서 상하 소솔이 육십여 명이 되었다. 이날 밤은 되
는 대로 방을 벌려서 자고 이튿날 방들을 정하는데 꺽정이가 자기 방과 소홍이
방으로 방 둘을 쓰고 방이 서넛이나 있어야 겨우 식구를 주체할 한온이에게 방
셋 있는 집 한채를 주고 내외 가진 두령 다섯과 시위 들에게 매 일 명 방 하나
씩 주고 홀몸 두령 셋에게 방하나를 주고 방 스물 여섯의 나머지 방 열셋을 두
목, 졸개 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청석골서 바로 자모산성으로 왔던들 방들이 좁
아서 불편하였을 것인데 해주서 된통을 치르고 온 까닭에 불편하단 소리들이 없
었다. 꺽정이가 이와 같이 자모산성에 와서 구차스럽게나마 자리를 잡았다.
자모산성(하)
청석골에 남아 있게 된 두목과 졸개들이 대개 다 순경사 소문에 놀라고 안식
구 피난네 겁이 났지마는 대장과 두령들을 태산같이 밑어서 겨우 안심들 하고
있었는데 대장과 드령들이 버리고 가니 밑음의 태산으로 진정되었던 마음이 흔
들리고 들뜨고 뒤집히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꺽정이가 떠나기 전에 술렁술렁
하던 청석골이 떠난 뒤에는 곧 난장판같이 떠들썩하여졌다. 오가는 사방 초막에
서 떠들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방문을 닫아 걸고 혼자 누워서 억제할 수 없는
고적한 생각을 마을속으로 곰새기었다. 청석골을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 다 정
이 든 곳이요, 수하 사람은 어중이떠중이나마 수효가 자그마치 팔십여 명이건만
웬 셈인지 자기 신세가 게발 물어던진것 같았다. 처음에 마누라와 딸을 끌고 산
속 깊이 들어왔을 때 딸은 말할 것 없고 마누라까지 호젓하여 못살겠다고 사설
이 많았으나 자기는 지금같이 외롭고 쓸쓸하지 아니하였었다. 자신은 팔자에 없
기에 딸자식 하나 있던 것까지 없어졌겠지만 마누라만 살아 있었으면 이 산속은
고만두고 온 세상에 사람의 새끼가 하나 없더라도 외롭고 쓸쓸할 리가 만무할
게다. 마누라가 죽을 나이도 아니고 죽을 병도 아닌데 죽은 것이 생각할수록 불
쌍하나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사는것은 차라리 죽는 것만도 같지 못하니 살아
잇는 자기가 죽은 마누라보다 더 불쌍하였다. 오가가 술로 시름을 잊으려고 생
각하고 자리에 일어 앉아서 눈물을 씻은 뒤 문간편을 향하고 홍록이를 불렀다.
홍록이는 오가가 하인같이 가까이 두고 부리는 졸개의 이름이다. 문간방이 엎드
려지면 코닿을 데 있는 데 한번 불러서 대답이 없고 두번 세번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이 자식이 첫잠이 깊이 들었나.” 자는 사람이 초풍하여 일어날 만큼
소리를 질러서 불렀다. 그래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허, 이 자식두 떠드는
판에 한 참례 들러 간 게로군.” 오가가 목촛대의 촛불을 떼어들고 마루에 나
가서 찬탁자에서 술병과 데울 그릇을 찾아서 한손에 겸쳐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술을 데우려고 화로를 잡아당겨서 헤쳐보니 불이 거의 다 사위어서 데우기는 고
사하고 냉기도 가실 수가 없었다. 술을 불이 없어 데우지 못하고 안주는 다시
나가 찾기가 싫어서 찬술을 강술로 한 병 다 먹으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가
저리고 속이 떨려서 한병의 반의반도 다 못 먹고 불불이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고만 술이나마 술기운이 몸에 돌며 바로 흔곤이 잠이 들어서 자는 중에 방 밖에
서 소리가 나서 잠결에 “어떤 죽일 놈들이 여기까지 와서 떠드나.” 괘씸하게
생각하고 정신을 차린 뒤 다시 들어본즉 방 밖은 고사하고 초막들에까지 떠드는
소리가 없어진 듯 사방이 괴괴하였다. “꿈을 꾸었던가?” 하고 생각을 돌리고
번듯이 누워서 기지개를 치며 하품을 소리내서 하였더니 방 밖에서 인기척하는
기침소리가 났다. “그게 누구냐?” “소인이올시다.” “누구야?” “홍록이올
시다.” “너, 어디 갔다 왔느냐?” “지금 자다가 나왔소이다.” “아까 내가
목청이 떨어지두룩 불렀는데 그래 자느라구 몰랐단말이냐. 그런 쇠귀신 같은 잠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밀이냐.” “아까는 초막에서들 하두 기탄없이 떠드옵기에
무슨 일이 있나하구 한번 돌아보구 왔소이다.” “너는 지금 무슨 일루 내 방
앞에 와서 기탄없이 떠들었느냐?” “떠든 일 없소이다.” “떠드는 소리에 내
가 잠이 깨었는데 떠든 일이 없다니 무슨 소리냐.” “서산 패두 천이가 소인을
깨우느라구 혹시 소리질렀는진 모르겠소이다만 소인은 들어와서 주무십니까구
두어 번 여쭤보다가 대답이 없으셔서 고만두구 도루 나가려구 하던 차이올시다.
” “천이가 왜 왔더냐? 서산에 무슨 일이 있다더냐?” “여간 일이 아니올시
다. 한 시간쯤 전에 두목 두 놈과 졸개 세놈이 어디루 도망할라구 서산을 넘어
가는 것을 파수꾼이 가루막구 어디들 가느냐구 힐난하온즉슨 그놈들 말이 우리
는 대장께루 간다하구 파수꾼을 미리 제치구 나갔답니다. 천이가 지금 그 말씀
을 여쭈러 왔답니다.” “알았다. 나가 자거라.” “천이가 지금 소인의 방에 있
솝는데 들어오라구 부르오리까?” “고만두구 가라구 그래라.” 다른 처분이 있
기를 바라는지 홍록이가 나가지 않고 한동안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가 “도망질
하는 놈즐을 가만 내버려주실랍니까?” 하고 묻는 것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
면 네가 쫓아가서 붙잡아 올라느냐?” 하고 오가는 평소에 흔히 하는 실없는 말
투로 대답하였다. 완결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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