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장길산 1

一字師 2024.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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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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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황석영

출판사: 창작과비평사

봉사자: 김영준, 삼성자원봉사팀

 

서장 노상

황해도는 동으로 황해도에 인접해서 마식령 산맥의 산세에 닿고, 남은 예성강을 지경으로

경기도의 들판과 만나며 북은 대동강을 건너 평안도를 바라보는데 서쪽으로는 바다로 솟아

나가 중국의 산동을 마주보고 있다. 들판도 있으나 험한 산에 골짜기도 깊고 ,오랫동안 경부

에 가까워서 예부터 관의 혹정에 민감했으며, 도둑이 많아 조정을 괴롭히곤 하였다. 팔대

명산의 하나이며 태곳적 단군의 도읍지인 구월산은 그 줄기가 남서쪽으로 우회하여 추산을

따라 불타산에 이르고, 막바지로 그친 곳에 장산곶이라는 험한 해안 마루턱이 있으니 옛 노

래에,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도 상봉에 님 만나보겠네

갈 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서낭님 조른다.

하던 곳이 그곳이다. 그곳에 지방민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어 기록

하였으되, 기암 절벽이 바다 가운데까지 둘러서 있고 골짜기가 깊게 뚫렸는데 곶은 백여 리

에 이르고 수세가 거꾸로 휘돌아서 근처의 임당수는 뱃길이 몹시 험하였다. 금색으로 반짝

이는 명주실처럼 가는 모래가 수십리에 깔렸는데 밤새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해변의 사구

가 나날이 이동하는 것이었다.

갯가에 게딱지같은 집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마다 아름드리 해송이 몇백 년씩

나이를 먹으며 자라고 있었다.

산세가 험하고 모래가 대부분인 해변에서 농사라야 수수나 기장 따위가 고작인 어촌 사람

들은 진작부터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열흘 길, 보름 길, 어떤 때엔 한달 이상씩 걸리는 긴

뱃길에서 풍어의 기쁨은 쉽게 잊혀지는 대신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풍랑에 삼켜져서 그 슬

픔만이 오랫동안 남아 있곤 하였다.

마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곳 바닷가에는 매가 날아와 살았으니, 나라의 응방에서 이 지

방 매를 특산품으로 정하여 관가에 바치도록 하였는데, 특히 대청도의 이른바 해동청 보라

매는 사람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어를 만드느라고 잡힌 고기를 얹은 마을의 지붕마다 잡새가 날아와 피해가 심했으나,

이 마을에 매가 드나들고부터는 얼씬하지 못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더욱더 매를 소중하게

알았다. 그들은 먹이를 주어 매를 돌보고 둥지도 지어주었으며, 고깃배가 출어하기 전날의

풍어제 때에는 매를 가장 귀한 제주로 알게 되었다.

새벽에 주변의 섬으로 놀러 나갔던 매는 황혼녘이면 돌아왔다. 그리고는 마을 상공을 늠

름하게 한바퀴 돌고 나서 당솔나무에 앉아 쉬거나, 마을의 지붕에 내려와 아이들의 찬탄 섞

인 웃음소리를 들으며 사귀다 갔다. 고깃배가 출어하면 매는 한나절 거리는 좋이 됨직하게

따라왔다가 해변으로 돌아갔고, 그들이 만선의 북을 두드리며 포구로 돌아오면 벌써 매는

날씬한 날개를 펴고 황포의 돛 위에 날아 앉거나, 마을 부녀자들에게 그들의 무사 귀환을

알리기 위해 재빠르게 날아가는 것이었다.

어느때 타국의 화선이 지나가다 물을 구하기 위해 포구 앞에 며칠 동안 정박하게 되었는

, 장삿배뿐만 아니라 간혹 다른 나라의 어선들이 연해에까지 침입해서 어장을 유린하곤

했으므로,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어서 떠나주기만을 무력하게 기다렸다. 뱃사람들은 식량을

원하고 교역하고자 했으나 원래 곡물이 귀한 마을 사람들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관리가 나와서 식량을 징발해 주고자 했는데 그때에 그는 매를 보았던 것이다. 관리는 그

매를 화주에게 주어 가물을 얻으리라 작정하게 되었다. 관리가 마을 사람들에게 매를 잡아

오도록 명령하였다. 총명한 아이가 있어, 매를 그물에 씌워 다치지 않도록 한 다음에 당집에

다 은밀히 숨겨두었다. 당집을 건드리면 동티가 날까 염려한 마을 사람들이 발분하겠으므로,

민원을 살까 두려워한 관리는 그대로 돌아갔다. 식량과 물을 내륙에서 간신히 조달한 타국

의 상선도 떠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빼앗길 뻔한 매를 당집에서 꺼내어 날려주기 전에 의논을 하였다.

이것은 우리 마을의 매요.

아무렴, 우리 마을을 지키는 매지.

하마터면 남에게 빼앗길 뻔했소.

표를 해둡시다.

마을 사람들은 매의 오른발에 붉은 색실로 매듭을 묶어준 다음 놓아주니, 매는 다시 자유

롭게 떠올라 마을 상공을 한바퀴 휘돌아보고 나서 바다로 나갔다.

조기떼가 연평을 경유해서 대청 소청 앞 바다를 지나가는 철이 돌아왔다. 벌써부터 먼 곳

에서 갈매기들이 모여들고 있는지, 새벽바람을 타고 먼바다에서 울부짖는 갈매기들의 음울

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어망을 짜고 배를 수선하고 돛을 기웠는데 어계의 총대

되는 사람이 주도하여 별신굿을 벌일 준비를 서둘렀다. 당산나무 밑에 들맞이를 하고 나서

삼신제를 지낸 다음, 바닷가에 각종 제물을 펼쳐놓고 용왕제를 지내고서, 오색 융복에 전립

을 쓴 무당이 밤굿을 벌였다. 몰려온 고기는 잡아야 하지만 일기를 헤아릴 수 없으니 살아

돌아오기도 딱히 기약하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이튿날 새벽에 출어기를 올린 어선들

이 바다로 나갔고, 매도 그들의 머리 위를 선회하면서 전송했다.

보름 뒤에 배가 만선이 되어 돌아왔으니, 온 마을이 들끊는 듯한 잔치가 벌어졌는데 그것

은 험한 바다에서 되살아온 신생을 위해서였다. 한데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마을에서 매가 없어진 것을 뒤늦게 알아쳐렸다.

출어할 무렵인지 귀환할 때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매가 마을에서 사라져버려서 잔치

끝의 마을 사람들은 모두 슬프고 서운하여 사방으로 매를 찾아 나섰다. 아이들의 이야기로

는 매가 바다로 날아간 지 사흘이 넘었다는 것이었다. 온종일을 찾아다니다 드디어 땅거미

가 내려 덮였는데 한 사람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뭔지 보인다, 매 같다!

모두들 바람이 거세게 불어대는 저녁 바다를 향해 뛰어갔다.

아득한 수평선 위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바다와 하늘의 바깥쪽은 우중충하게

어두워지고, 수평선을 중심으로 가느다란 놀의 띠가 겹겹이 드러나 안쪽으로 향할수록 감빛

이 짙어질 그런 무렵이었다.

어둠과 빛의 경계를 그 점들은 들락날락하였는데, 재빠르게 위로 아래로 도는 듯이 보였

. 파도와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박명 속에 가느다랗던 놀이 차차 사라져가고 어둠 속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두 점들은 가

까워졌는데, 어느 아이가 외쳤다.

둘이다. 싸우고 있다.

하늘에서 싸운다.

하나는 우리 매다!

매는 자기보다 몸집이 두어 배는 되어 보이는 날것과 맞붙었다가는 다시 떨어져 돌고,

맞붙어 날개를 치는 것이었다. 매는 수리를 피해서 뭍을 향해 물러서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하나가 위로 휙 날아오르면 더불어 올랐다가 바다를 향해 떨어지면서 서로 엇갈려 잠깐 멈

칫해서 부리와 발톱으로 치고는, 치는 사이에 날개를 푸드득이는 소리가 바람소리 가운데

똑똑히 들렸다. 매는 수리 공격을 막아내면서, 될 수 있으면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의 머리

위로 가까이 날아오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매와 수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끊임없이 날개를 치면서 뭍으로 다가왔다. 이제까지 보고

만 서 있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도 결기가 가득차서 일시에 목청을 합쳐 고함을 질렀다.

매와 수리가 일단 흩어졌는데, 매는 아래로 낮게 날아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날개를 치면서

한바퀴 돌고 나서 다시 수리에게로 쫓아 올라갔다. 매가 날개를 퍼덕이며 지나갔을 때,

죽지에서 흩뿌려진 피가 잔치옷으로 갈아입은 마을 사람들의 흰옷 위에 점점이 번져갔다.

매가 수리를 향하여 일격을 가하려고 달려들 때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목청을 합쳐 고함

을 질렀다. 허공에서 매와 수리의 깃털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수리는 매의 거세어진 기세에

당하지 못하고 목을 움츠리더니, 상대를 버리고 바다 쪽으로 달아났다. 매가 사람들의 고함

소리에 힘을 얻어 수리 뒤를 바짝 쫓아갔다.. 수리가 중심을 잃고 아래로 방향을 바꾸는데

매는 위로부터 곤두박질치면서 수리의 머리를 쪼았다. 치명타를 받은 수리가 물에 처박혔고,

매는 다시 위로 드높게 날아올랐다. 마을 사람들의 환성이 크게 일어났고, 매는 사람들의 머

리 위에서 자랑스럽게 맴돌더니 지친 듯이 마을 어귀의 당솔나무 가지 위에 내려앉았다.

마을 사람들은 먹이를 준비하고 풍악을 잡히면서, 매가 그들의 어깨 위에 다정하게 내려

앉기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매는 다른 때처럼 사람들의 팔뚝에도 내려와 앉

지 않고 나뭇가지 위에서 날개만 몇 번 퍼덕여 보였을 뿐이었다.

주위가 완전히 캄캄해질 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횃불을 밝혀 들고 매가 내려오기만을 기다

렸다. 횃불빛에 드러난 해송의 깊숙한 구멍 속에서 이번에는 구렁이가 기어 나왔다. 구렁이

는 비늘을 번쩍이며 사리를 풀고는 나무를 타고 꿈틀꿈틀 기어올라갔다.

마을 사람들이 안타깝게 불렀건만, 어둠 속의 매는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구렁이가 나

무 꼭대기를 향해 기어올라간 뒤에 한참 동안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더니 이윽고 폭우가 줄기차게 쏟아져 내려왔다.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였다. 빗소리와 우렛소리 속에서 밤새껏 퍼덕이는 날갯소리가 들려왔다.

동녘이 뿌옇게 밝을 즈음에, 지쳐서 나무둥치 아래 둘러앉은 사람들 앞에 토막 난 구렁이

의 시체가 떨어져 내려왔다. 나뭇가지에 걸친 채로 날개와 부리를 땅으로 축 늘어뜨린 매의

형상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어째서 매가 나무에서 끝내 내려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날렵한 아이를 시켜 나무 위에 오르도록 하였다. 올라간 아이가

죽은 매에 손을 대려다가 분한 듯이 외쳤다.

실매듭이 나뭇가지에 걸렸어요.

남에게 빼앗길까 하여 매가 마을의 소유임을 표하느라고 매어놓은 오른쪽 발목의 붉은 실

매듭이 매를 죽게 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매와 맺은 인연을 그저는 믿지 못하여 매듭

으로 확인을 해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 인연 때문에 매는 밤새 싸웠고 기진하여 죽게 되

었으니.

일찍이 외병이 국토를 점령했을 적에 백성 중에 병을 일으킨 대장이 여럿 있어 그들과 오

래 항전했었다. 한 의병장이 허수아비 같은 관군과도 대적해서 싸우다가 어느 싸움에 대패

아여 병을 해산하고 민가에 숨어 있었다. 그가 장산곶 어부 집에 숨었다가 매의 죽음에 크

게 깨우친 바가 있었다. 그는 밤새껏 잠들지 못해 뒤척이다가, 이 신뢰하지 못하는 마을 사

람들의 작은사랑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고 눈물을 흘렸다. 매가 기세를 펴지 못하고 매듭에

걸린 채 죽어버린 연유와 같게도, 그는 다른 대장들처럼 피살되었다. 그가 장산곶을 떠나 남

몰래 귀향했는데 병이 해산된 뒤부터 노리던 자의 눈에 발각된 바 있었고, 포상금을 탐한

동료가 밀고를 했던 것이다. 수심과 괴로움으로 번뇌에 가득 찬 밤을 지새우고, 겨우 곤한

잠에 빠졌을 무렵 힘으로는 대적하지 못하리라 믿은 외병들이 무리지어 급습하여 부락에 불

을 질렀다. 달아나지 않고 고감히 단신으로 뛰쳐나오는 의병장을 수십여 인이 장살하였다

한다.

어찌 백성의 가엾은 뜻을 위해 죽은 자가 그뿐이었겠는가, 흐르는 물과 같이 연면한 산맥

같이 앞뒤로 끊임이 없건마는, 여럿과 맺은 관계가 마치 저 장산곶 매의 발목에 묶인 매듭

과도 같았고, 그 장한 뜻의 꺽임은 뒤댈 바탕이 부족하매 분한 노릇이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날 서낭나무는 둥치를 떨고, 내부에서는 구렁이가 꿈틀거리는데 가지에 걸린 매가 날지 못

하여 깃을 퍼덕이는 안타까운 여러 밤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서장 로 상

 

 

 

 

개성에서 육십여 리를 오르면 예성강 동편으로 전포나루, 서편으로 벽란나루가 있는데,

포나루는 배천으로 직통하는 길목이요, 벽란나루는 연안에 가장 가까운 길목이다. 그러나 원

래 연안 길은 감영이 있는 해주로 통하는 직로여서 전포 쪽보다 벽난나루 쪽이 훨씬 번화하

고 행객의 왕래가 잦았다. 벽란나루와 금곡포는 주상과 행객의 무리가 사방에서 그칠 새 없

어 풍물과 인심이 언제나 새롭고 활기로웠다.

대보름이 지난 지 이틀 뒤라서 얼음이 풀린 나루터는 마치 봄철을 벌써 맞은 듯 부산스러

웠다. 개성에서 대목을 보고 나오는 장사치들이 많았고, 또한 올라가고 내려오는 벼슬아치들

의 봉물짐들이 강변의 양안에 열을 지어 배를 기다리고 있어서, 상사람들의 도강은 오후가

되어서나 시작될 모양이었다. 송도의 보름놀이가 제법 장하였는지 부근 읍의 한량들도 몇몇

씩 짝을 지어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아낙을 거느린 양반네도 나귀를 타고 나룻가를

서성댔고, 관노에게 짐을 부리게 하면서 연신 담뱃대로 가리키며 소리지르는 아전배들도 있

었다.

나룻가의 객관 앞뜰과 정자 근처에는 제법 큰 저자가 벌어졌다. 술장수, 떡장수, 엿장수

같은 허드레 음식 좌판이 대부분이었는데 부상들이 등에 지고 있던 보따리를 풀어 배를 기

다리는 잠깐 사이에 판을 벌여놓은 것이었다. 날씨는 우중충했으나, 바람은 그리 불지 않아

서 강변이 별로 춥지는 않았다.

"어허, 쫄깃쫄깃 찹쌀엿, 하박하박 사탕엿, 울퉁불퉁 대추엿, 호초양념에 밤엿이라. 송도

문전의 기둥 같고 금강신 비로봉같이 두리뭉실 굵고도 헐한 엿이 싸구려. 파장 늙은이 막걸

리 팔 듯, 색주가 큰애기 궁둥이 팔 듯 ,막 팔아요. 겨져주는 엿이요." 엿장수가 타령

조로 읊조리며 누각의 아래위로 오르내렸고, 떡장수도지지 않는다. 떡장수 사내는 맨상투

에 무명 두건만 질끈 동이고서 한 손을 들어 휘저으며 고함친다.

"이치 저치 시루떡, 늘어졌다 가래떡, 오색가지 기자떡, 쿵쿵 쪟네 인절미, 올기쫄기 송기

, 도리납짝 송편떡, 떡 사요 떡이오, 정월 보름에 달떡이오, 저 건넛말 과수댁네 밤잠 새워

요리 빚고 조리 뭉친 대추 왕밤에 약밥이오."

양반님네들은 높다란 벽란정 위에 자리를 깔고 앉아 의관 정제한 채로, 기다란 장죽에 불

을 댕겨 담배를 태우며, 도선하기를 기다렸다. 거리낄 것 없는 상사람들은 저희끼리 모여 앉

고 둘러서서 술도 마시고 떡이나 엿을 먹으면서 송도 대보름놀이 쇠던 얘기에 강변이 왁자

지껄 하였다. 특히 잔술을 파는 간이 술청 앞에는 사내들이 둘러앉거나 서서 떠드는 소리에

어디보다도 분위기가 걸찍했다.

"그래서 말일세. 내가 이년을 그냥 물고를 내리라 작정하고 미닫이를 차구 들어갔더니,

글세 고것이 겹치마두 벗고 고쟁이 바람으루 누워서 기다리는 게야." "참 나두 답교놀이에

나가보는 건데 객줏집서 투전 벌이느라구 깜박잊었지 뭔가. 열 닢이나 잃을 걸 괜시리 골패

잡았다가 낭패 봤네. 그 뿐인가. 수철전 앞에서 돌팔매를 날리는데 어깻죽지만 되우 얻어맞

았지. 그나저나 이번 대보름엔 자네가 젤루 흐벅졌으니 연안 읍내 가면 한잔 사여."

"말두 마라 이녀석아. 새벽녘에 월 장한 사람이여. 남정네가 비장인가 지에민가를 다닌다

는데 걸렸으면 허리뼈 부러졌으리. 사내가 용력이 있구 담이 차야 남의 살도 부벼보는 게

."

"그러게 한잔 사아."

"아따, 화주 한잔에 패가랄 리두 없으니 안달하지 말구 처 마셔." 이렇게들 한담이 오가

는데 기골이 떡벌어진 장정 두 사람이 멍석을 덥석 밟으며 술자리 사이로 들어섰다. 하나

는 패랭이에 바지저고리 차림이요, 또 한 사람은 도포에 갓을 썼는데, 수염이 뻣뻣하고 눈꼬

리가 사나운 것이 꽤나 험상스레 보였다.

"술 좀 주우."

패랭이 쓴 사내가 말했다. 술파는 아낙이 앞치마에 손을 비비면서 눈웃음을 친다.

"거른 청주를 드릴까요, 아니면 막걸리를 하실라우?" 패랭이가 갓 쓴 자를 돌아본다.

"뭣 드실려우?"

"거 아무거나 값이 눅은 걸루 들지."

"막걸리 두 잔씩 올립니다."

"그러우, 나는 안주대신 술국이나 퍼주오."

"자아 넉잔 나갑니다."

둘은 멍석 한옆에 가 쭈그리고 앉아 술에 곁따른 장떡 안주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수군수

군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래, 대강 둘러보았나?"

", 어디라 할 것 없이 관이며, 객사며, 누각 위아래 흝었으나 그 년은 뵈질 않습니다."

"하면...... 어제 강을 건넌 게 아닐까. 틀림없이 보름날 밤에 나갔단 말이지?" "그렇지요.

날 저녁때까지 골방에서 길삼을 했으니까요, 답교놀이 나가셨던 작은아씨하고 종년들이 돌

아오구서야 방이 빈걸 알았습죠."

"늦었는걸. 어제 벌써 건넌 모양이네. 우리네가 추노를 한두번 해봤어야지." "아니오,

럴 틈이 없습니다. 이년이 처음에는 장단 가는 조현역참에까지 갔다가 북으로 되짚어 올라

갔으니 아직 못 건넜을 게요."

"못 건넜다면 걱정할 것 없네. 내 눈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 포교 질 십 년인데 까짓 계

집종 한 못 잡을까, 더구나 만삭이라니......"

갓 쓴 사내는 행색이나 어조로 보아 기찰포교일시 분명했고, 패랭이 쓴 자는 대갓집의 겸

인임이 틀림없었다. 겸인이 말하였다.

"나리마님두 여길 꼭 수직하라구 그럽디다."

"장단 가는 방향에서 어째 북쪽으루 돌아왔을꼬. 더 멀리 달아날 터인데." ", 그년이 원

래는 외거 노비로서 지아비는 시노질 다녔죠. 헌데 우리 댁네서 소송을 오래 끌다가 연놈

을 데려오게 된 겁니다. 노자가 많아서 남자를 장단 고을 이진사네루 팔아버렸읍죠. 헌데 계

집이 달아난 뒤, 득달같이 수소문하여 그자의 동무되는 조현역참의 역노를 주뢰 틀어보니

계집이 다녀갔다는 애깁니다. 지아비 되는 자가 먼저 해주나 강령 쪽으로 달아났으니 틀림

없이 만날 게란 말이죠."

"두 연놈을 다 잡을 테니 두고 보게."

"그러면야 저두 수청 잡인으루 체면두 서구요, 나리께선 스무 냥은 어김없이 받으리다."

그들은 두 잔씩 더 청해 마시고 나서 일어섰다. 겸인은 팔짱을 끼고 나각 앞 길가에 버티고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고, 기찰포교는 나루로 내려갔다. 나룻가에서는 이제 부담마

들을 식기 시작하고 있었다. 짐을 내리어 싣고 나서 공간에다 말을 태우는데 뭍에서 뱃전으

로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아 말들이 버둥거렸고, 사공과 일꾼들은 말고삐를 쥐고 쩔쩔매고

있었다.

배가 닿는 사장 부근에는 새끼줄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안에 환도를 찬 도승과 털벙거지

포졸들이 서서 나루를 관리하고 있었다. 기찰포교는 새끼줄을 타넘고 들어갔다. 포졸 하나가

그의 아래위를 흝으며 물었다.

"뭐요, 무슨 일이오?"

"수고가 많네."

포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 앞을 지나 세립 쓰고 철릭 입은 키 큰 도승에게로 갔다.

"뭔데....."

도승은 가까이 온 의관 반듯한 사람을 힐끗 살피고 나서 포졸들에게 묻는 시늉이었고 포교

가 허리춤에서 통부를 꺼내어 쓱 내밀어 보이며 말하였다.

"송도 군영의 안포교올시다. 다름 아니라 퇴관하신 유부사 댁 사비가 도망중이라 잡으려

하오."

도승은 상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 우리더러 예서 조사해달란 말이오?"

"도승별장께서 도와주셔야지."

"부장께서 직접하슈. 우리는 지금 종년 하나 잡을려구 나루를 지키는 게 아니외다. 한양으

루 올라가는 봉물 관리에두 눈코 뜰 새가 없소, 게다가... 보시우."하면서 별장은 품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어 펼쳐 보였다.

"근자에 권문 세도가나 호반가에서 의탁해온 도산 노비들의 용모파기 외다. 그 뿐인줄 아

. 이쪽은 포청에서 내려보낸 공문 중에서 도경을 넘는다고 짐작된 범법 도적들의 것인데

모두 몇이나 되나 헤아려보오. 자그마치 삼십여 인이 넘는데, 이걸 펼쳐들고 일일이 대조하

여 도강시킨다면, 아마 배를 기다리는 자들이 저 강변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할걸." "

성깔 한번 급하시군. 물론 내가 직접 기찰하계는데, 그대신 나는 평복을 했으니 포졸 두어

사람 붙여달란 말씀이외다."

도승은 떨떠름하게 그것만은 응낙을 했고 포졸 두 사람을 불러 기찰포교의 지시를 받도록

해주었다. 이제 정자에서는 겸인이 서서 나루터의 행객들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고, 도선목에

는 기찰포교의 날카로운 눈이 있으니 새가 아니라면 강을 건널 수가 없을 것이었다.

나루터 초입에 초막을 친 음식장수들이 많았는데. 밀전병이라든가 죽을 팔았다. 수수에 칼

제비를 넣은 남매죽이 특히 잘 팔렸다. 모두들 안팎으로 훌훌 쩝쩝 소리가 요란한데 멍석을

세워 가려놓은 안쪽에는 주로 아녀자들이 많았고 바깥쪽엔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작은 봇짐을 등에 지고 뒤꼭지가 떨어진 미투리를 신은 초라한 여인이 나루터에서 황급히

뛰어왔다. 그 여자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붉은 흙으로 더럽혀진 복색에 머리가 흐

트러졌고, 입술은 까맣게 말라붙었으며, 자기 발끝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만삭이 되어 누가

보기에도 몹시 애처로운 형상이었다. 여자는 두리번거리더니 초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죽을

푸느라고 쇠솥 위에 몸을 구부렸던 노파가 인기척에 허리를 펴다가 상을 찡그렸다. 다른 여

자들도 잠시 먹기를 멈추고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그 그리 급히 들어오면 먼지 나네. 뭐 죽 사먹을라우?" ", 한 그릇 주셔요."

"돈을 내야지."

여자가 한닢 건넸다. 여자는 연신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노파는 앙금을 헤치고 국자를 푹

담가서 칼제비 건더기를 건져내어 여인에게 내밀었다.

"그 몸으루 먼길 가는가베."

"?"

"먼길 가느냐구."

"."

하고 나서 죽그릇을 든 채 망연히 앉았던 여인이 물었다.

"오늘은 배가 없나요?"

"왜 없어? 지천으루 깔린 게 밴데."

"그럼 어째 사람들이 이렇게 만이 기다리지요?"

"새해니 그렇지. 그믐에 묵었던 봉물짐들이 들이닥치니까 엽때껏 배가 쉴 틈이 없구먼.

월이 지나가야 좀 뜸해질걸. 게다가 그제가 보름이었으니 더 번잡스럽다구. 인제 좀 있으면

모두들 건너기 시작할 테지만 차례 기다리기가 여간 고되야지." "나루가 여기밖엔 없나

?"

"있기야 위로 올라가면 두어 군데 있지만 배가 드물지. 죽 식겠수. 어서 들지 그래."

파가 주의를 주자 그제서야 여인은 먹기 시작했다. 머리를 숙였다가도 사람이 들고 나는

기척이 있을 적마다 고개를 후딱 젖혀 살피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 양을 바라보던 노파가

나직하게 혀를 차면서 고갯짓을 하였다.

"어디까지 가우?"

"? 관서루 갑니다."

"어이구 끔찍히 멀구먼. 해서를 넘기도 먼 길인데."

여인이 묻지도 않은 말까지 했다.

"저어.... 쥔어른이랑 온 가족이 지난 여름 역병으루 몰사하셔서...... 살 수가 있어야죠.

정에 돌아갑니다. "

"멀리루 시집갔었구먼."

"게서 살다가 쥔어른이 파주에 공장이 일을 얻어 이사갔지요." "에그 딱해라. 그러니 그

갈 데 없이 소년 과부에 유복자를 낳겠구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죽그릇이 비었고 주

위에 사람도 없어졌다. 노파가 국자에 건더기를 가득히 떠서 부어주면서 여인에게로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나두 눈치는 밝은 사람이야. 나루를 건널 테면 내 입이 무거워야 되겠네....." 여인이 죽

그릇을 떨어뜨리고 앉은걸음으로 몇발짝 뒤로 물러났다. 노파가 황급히 속삭였다.

"노잣돈 가진게 있겠지?"

여인은 여차직하면 바깥으로 몸을 빼치려고 반신을 엉거주춤 일으킨 채였다. 노파가 손목

을 잡아끌어 앉혔다. 여인이 손을 뺐다.

"무슨 말씀이온지...."

죽장수 할미는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다 아네. 여염집 여인이 그 몸으루 노상에 나올 리가 없구 ,주제가 그러면서 돈 내

구 요기를 해?"

노파는 갑자기 여인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검지손가락을 살피고, 입술을 들쳐보았다. 여인

은 잡힌 손을 홱 뿌리치며 물러나 앉았고, 할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골무에 굳은살 아닌가. 공장이 여편네가 바늘로 굳은살이 생겨? 또 그 젊은 나이에

앞니가 상할 리두 없구, 내 이빨은 빠져서 없지만, 실을 잘게 찢노라구 마를 뜯어내다 보면

그렇게 된다네."

여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노파가 말하였다.

"다 안다니까. 안채 행랑살이가 얼마나 혹심한지..... 속량이 안되면 달아나기라두 해야지.

우리네두 면천한 사람일세."

할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여인이 냉정을 되찾았는지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발고할 작정이세요?"

"글세..... 생각 좀 해보구. 어디서 오는 길인가?"

"송도서요."

"가깝군.....언제?"

"그제 저녁에요."

"그런 줄 알았어. 나루터에는 지금쯤 추노하는 사람들이 지키구 섰을 걸세." 여인이 갑자

기 보퉁이를 뒤지더니 헝겊에 싸고 또 싸맸던 은가락지를 꺼내어 내밀었다.

"할머니 한번만 살려주셔요. 어떻게 저를 좀 강을 건너게 가르쳐주셔요. 머리칼루 신을 삼

아드리는 한이 있더라두 꼭 보은하겠습니다."

"이 가락지 얼마나 되겠나, 마흔 푼은 되겠지. 돈은 없어? 한 냥만 내어. 우리 영감이 벽

란도 수직 사공이니 건네어줌세."

"돈이 조금 있긴 하오나, 남편을 찾기까지 걸식을 할 수도 없고, 노자를 다 내어주면 이

추운 겨울에 저는 어찌합니까?"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손님이 밀어닥쳤다. 두 사람은 얘기를 끊고 있었는데 아직

타협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여인은 제 마음대로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죽장수 할미의 속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손님들 중에 몇이 춥다고 솥을 얹은 불가에 모여들었는데, 그들

은 재인 광대 패거리였다. 노파가 농지거리를 던졌다.

"..... 동장군 살을 맡았나, 오뉴월 복철에 학질 객사한 영산이 씌었나. 무가 춥다구 장부

들이 솥을 싸구 돌아, 이깟 날씨에."

"말두 마슈, 닷 발 되는 내 불알이 지금 앵도알 같수. 좀 구워야지." "할머니, 죽 한 그릇

씩 바삐 퍼주오. 이렇게 길을 가다간 방귀깨나 먹구 사는 신선 되기 꼭 알맞겠네, !"

"그이들 입담 한번 요란하네. 송도 보름놀이들 갔다 오슈?" ", 놀이를 다니다니, 에이

그게 무슨 소리요. 연년해해 날이면 날로 시시때때로, 산 높고 물 좋은 데 구름 같은 동네에

신선 같은 행장으로 거칠 데 없이, 경사난 데 기뻐하고 초상난 데 슬퍼하며 먹기는 아주

조금식 먹고, 똥은 대자로 싼다고 남들이 모두들 수군수군대는 그런 사람들이라오.'

저희끼리는 별로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없는데 노파 혼자 못 견디게 웃고 나서 죽을 푸기

시작했다. 그들의 행색은 대부분이 두건 아니면 구슬상모 털벙거지에다 통장고, 퉁소, 꽹가

, 징에 북, 피리, 해금 등의 풍각제구들을 지녔다. 누비 저고리에 붉은 전대 둘러차고,

제 넝마옷에 의관은 귀 떨어진 패랭이를 쓰고 가얏고 둘러멨으니, 얼핏보아 그들이 광대패

라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었다. 그들 중 몇은 아직도 술이 덜 깼는지 죽사발을 앞에 놓고 눈

꺼풀이 쳐져서 꺼떡꺼떡 졸고 있었다.

"보퉁이를 내게 맡겨놓게."

그들의 행장에 적이 마음을 놓은 노파가 다시 여인에게 말했다.

"왜요?"

"글세 맡기라면 맡겨. 밤배를 타구 월강하도록 해줄 테니까." "싫어요 "

"..... 그러면 갈데루 가보아. 내 말 한마디면 임자는 끌려가구 마는 게야." 여인은 겁에

질려서 할미를 노려보았고, 달라는 대로 봇짐을 내어주고 말았다. 노파가 보퉁이를 빼앗더

니 초막 밖으로 나갔다. 여인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한창 죽을 퍼넣고 있는 재인 광대

패거리를 살펴보다가 한 사내에 눈이 멎었다.

"저어..... 어디까지 가시나요?"

"그건 왜 묻소? 대답혀면 뭐 죽이라두 한 그릇 더 사줄라우." 그렇게 되묻는 자는 눈이

어글어글하고 입술도 두툼한 거이 신의있고 인정스러워 보이는 사내였다. 어깨가 떡벌어진

장신 체구에다 때묻은 고의 적삼, 육승포에 왼골 전대로 허리를 질끈 동였는데, 등에 북을

걸머진 것이 수재인은 못 되어도 아주 빼놓진 못할 재인일시 분명하였다. 그는 한눈에 여

인의 부른 배와 파리한 모습을 훑어보고 나서, 농기를 싹 걷어치우고 여인의 발치에 쭈그렸

.

"여기 계신 게 아니우?"

"죽 사먹으러 들어왔어요."

"헌데 왜 저 할미가 댁네의 봇짐은 뺏소? 내 아까부터 강을 건넌다는니 못 간다느니 소릴

듣고 이상스러웠소."

여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모두 내던지듯이 말해버렸다.

"면천 못해 남편을 찾아 달아나는 길이어요. 해주로 해서 강령으루 가볼 참입니다. 제 남

편의 동무가 해주 감영서 관노를 사는데, 거기 가서 물으면 소재를 알 듯 합니다. 나루에 추

노하는 사람들이 지키구 있어서 도강을 못하는데, 저 할머니가 기미를 알고 저를 핍박합니

. 가진 돈이 있다면 내어주고 입을 막겠으나...."

"고이한 할머니로군. 동냥 대신 쪽박을 깨다니....." 사내는 잠깐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가 제 일행에게로 돌아가 수군대는 것이었다. 마침 할미가 돌아오자 그들은 말을 뚝 끊었

. 역시 눈치로 늙어온 죽장수 할멈인지라, 날카로운 눈으로 여인을 노려보는데 광대 두엇

이 갑자기 달려들어 입을 막고 넘어뜨렸다.

"같은 처지에 동정은 못할망정 추노하는 놈들보다 더한 네 따위 늙은이는 죽어 마땅하

.!"

북을 짊어진 광대가 할멈의 입을 수건으로 동여놓고 끈으로 손과 발을 묶었다. 노파는 그

저 사지를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 동안에 몇 사람이 죽을 먹겠다고 들어서려 했건만,

다 팔았다고 하여 초막 앞에서 돌려세우곤 하였다. 노파 위에 헌 삼베 가사를 덮어버리고

나서 젊은 광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젠 됐군. 저 만삭으로는 남의 눈에 뛰어 안되겠는데." 나이 듬직한 광대가 누더기의

남복 저고리와 헌 패랭이를 내밀어주었다.

"이것 입도록 허게. 그러구 이 무명 수건으로는 얼굴을 싸매도록 하고." 재인패들은 저희

끼리 둘러앉아 의논을 하던 참이었다.

"그러니 여자는 내가 등에 업겠네."

"혈육을 찾는 사람을 다시 붙잡아 종살이시킨다는 놈들은 인두겁을 쓴 아수라 같은 놈들

이여."

"우리께 해나 없을까."

"까짓 드러나면 떼를 지어 뿌리치구 달아나지 무슨 걱정이야?" "하여간에 무사히 건너긴

건너야지."

"재담 한판 벌여서 사람들 정신을 쏙 빼놓은 틈에 건너가지." 여인이 옷을 갈아입는 듯

하더니 그들이 돌아선 사이에 변벽이 되었다.

"허허 다른 데는 다 몰라보겠지만, 배가 큰일인데....." 북을 짊어진 광대가 말하여싿.

"관계없습니다. 그 아낙을 내가 둘러업을 테니까요. 예서 잠시만 기다리라 하십시오. 우리

는 나가서 한판 벌일 테니.'

광대들이 풍악을 잡히면서 행길로 쏟아져 나가는데, 땅재주를 뱅글뱅글 돌아서 근두자가

먼저 나아가고, 탈꾼들은 귀면을 쓰고 우쭐거리면서 가고, 검무자는 쾌활하고 씩씩한 동작으

로 쌍수도를 맞부딪치며 신나게 돌아갔다. 삽시에 구경꾼들이 그들의 양쪽을 따라서 모여들

었고, 그들은 차츰 나룻가로 나아가 백사장 위에서 판을 벌였다. 먼저 화랭이 출신의 광대

하나가 나가서 거리굿 재담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번 읊조리고 나서 춤추고 소리하고 또 읊

어대는데, "혹간 심심하면 소리도 한 장단 쓱 가르치고 ,장기 기박도 가르치고, 바둑도 가

르치고, 가르치다 소성하면 욕도 한마디 가르친다.

양반이라고 좋은 말만 배울 수가 있느냐. 욕을 한마디 쓱 하여도 나는 꼭 좋은 욕만 하는

, 이런 욕을 하는구나. 어어..... 니 에미 씹을하다 좇이 부러질 놈들. 이런 욕을 한번씩 가

르치는데, 내가 사전에 나루터 행객 어르신 들게 dd해를 빌겠거늘, 태곳적부터 자고이래로

삼년들이로 해 내려오는 굿이라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르신네들 귀가 째진 이녁이라 잘

아시지만, 이 거리는 상욕을 많이 들어야 그저 수명 장수하시고 거리귀신 만나 여로에 다복

하시고 귀인 만나 벼슬하시고 거리굿에 씹자깨나 들어 알성급제 하시고, 가만있자..... 뭐라더

, 씹자깨나가 아니라 식자깨나로 했는데.

자아 이러니 내가 한양 과거를 안 볼 수가 있겠느냐. 보긴 봐야겠는데 유자불노동이요,

자 무식하니 끼니가 있겠느냐 행자가 있겠느냐. 목침 베고 누워 쉬느니 한숨인데, 마누라가

건너와서 손을 잡는구나. 깃만 남은 저고리에 다 떨어진 누비 바지 .앞만 남은 몽당치마 끄

을고 와서 하는 말이, 유자 봉양하느라고 이내 꼴이 웬말이오. 방아찧기, 의관짓기, 떡만들

, 술거르기로 품을 팔아 서방님 글공부에 뒤를 대는데 노잣돈이 마지막이오. 우물쭈물하더

니 돈을 가져오는데 엽전 두 돈 오 푼을 내놓는구나. 하도 놀라 눈을 부릅뜨고 추궁하니 서

방님 간밤에 송도 부상이 견마 잡혀 지나다가 아랫방에 묵었는데, 서방님 모르는 새 하룻밤

밑엣품을 놨소.

이래서 한양 과거를 본답시고 올라가는데, 거리마다 국밥도 많고 막걸리도 흔천이오. 갖은

떡에 갖은 실과에 이것 저것 먹다보니 엽전 두 돈 오푼이 거덜이 나는구나. 문절걸식으로

과거날을 기다리니 꿈을 잘 꾸고 줄을 잘 잡아 고관대작네 행랑에 기별이 갔구나. 행랑살이

십 년 만에 네 소원이 무엇인고 물으시니, 이내 몸이 객지 와서 같은 괄세 갖은 봉욕을 다

치르고 벼슬을 한들 무엇할까. 소원은 다른게 아니고 밥 잘 먹고 똥 잘 뀌는게 소원이올시

. 그런 소원말고 선달이 어떠하냐. 선달 선달 좋다지만 선달 벼슬 못할 내력이 있소이다.

내가 안 그래도 주야장천 서서 잘 다니는 놈이 벼슬까지 서게 되면 다리 부러질까 못하오.

그러면 급제 벼슬이 어떠한고. 급제급제 하지만 급제 벼슬 못할 내력이 있습니다. 내 성미가

급한 놈이 급제까지 해놓으면 내 칼에 내가 죽을 까 못하오. 그러면 초시 벼슬이 어떠하냐.

내가 초시 못할 내력이 있소. 우리 뒷집 자근쇠 이사간 날이 하필 윤동짓달 십이 초하룻날

이라. 내가 약은 괭이 밤눈 어둔 격으로, 무거운 것 덜하라고 촛병 하나 얹은 지게 모과나무

아래 떠억 받쳐놓고 쉴제, 깜몸이라. 초시까지 얹히면 무골육신이 되겠소. 그러면 이 사람아

더도말고 이방이 어떠한고. 그 내력 한번 들어보소. 안 그래도 내 치근이 나빠 음식 옳게 못

먹는 판에 이방을 해놓으면 이가 몽땅 빠져 못하게소." 이렇게 기나긴 사설로 꼬집는 소

학지회가 자못 흐드러져 방자한 웃음이 가득 찼다. 광대는 곧 이어서 소리로 들어가 구성

지게 한 마당을 뽑아 넘기고 나서 걷이로 들어갔다.

"에라 맨입에 싱거워서 못하겠고나. 장승 앞에 용두질이지 이건 어디 제 에미 씨부랄 것

들 같으니라고. 그러게 상놈들이란 형틀에 달고 매우쳐야 돈냥이나마 나오것다. 상놈들은 모

두 물렀고 선달 급제 초시 참봉 좌수 진사 이방까지만 남았거라. 허허 이제 우리 초라니 시

주 나가신다. 저녀석 시주 나가라니 좆부리만 덜렁 내놓고 뭣하는 게냐? 무어라구, 퇴관 토

반 향족 호상 송상 강상에 사둔하고도 팔촌 막내딸을 찾는다? 그래 고년은 찾아서 무얼 할

테냐. 밭에다 씨 박고 물 준다네 허허 우리 초라니가 사추리 밑이 근질근질 몽둥이는 서당

훈장에 풍월짓으로 꺼떡꺼떡, 장가갈 때가 되었다고 저리 생지랄인데 쌀이 되나 돈이 되나

혼수좀 보태주소."

노잣돈을 거두는데 송도서 나올 때부터 놀이 기분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관중들이라 길술

깨나 들이켜고 나서 흥겹기도 하여 서슴없이 염전을 내고 길양식이나마 덜어냈다. 소리꾼이

더 한번 너스레를 떨고 나서, "자아 이만하면 마당씻개로는 족하렷다. 손님네들 그러면 이

번에는 무슨 놀이로 모시리까."

이미 어깻짓으로 신명을 달래던 한량패들 서넛이 벌건 상판을 흔들면서 고함을 질렀다.

"어름이나 덜미 한판 맞추지."

"늘난봉가 한 장단이 어떠하냐."

"아니다, 다 그만두고 탈판에 재담이나 벌여보아라." "예예, 어름이나 덜미는 청도 없고

포장도 없으니 불가하고, 살판 검무 탈판에 재담은 가하오. 우리네 아바이 같고 주인나리

같은 손님네들 돈 내고 쌀 내고 이제 술 한잔 더 내시면 차례로 모두 보오리다. "

"까짓 것, 판이 바뀔 때마다 너희 패들게 한잔씩 돌릴 터인즉 신명껏 놀아보아라." 의관

은 번듯하나 체통에 어울리지 않게 촐싹거리며 목소리도 체신없어서 어느 골 아전 같은 되

다만 양반이, 하인을 보내어 술동이를 가져오게 했다. 먼저 살판이 시작되는데 저고리 위에

꼭 끼는 개가죽 배자 입고, 팔뚝에 검은 토시 감고 행전을 단단히 친 날렵한 자가 거꾸로

서서 걷다가 몸을 뒤채며 뒷곤두치기, 한 팔로 섰다가팔바꾸기, 앉은채로 모말되기, 발 하나

로 몸을 평평히 하여 뺑뺑이치기, 온갖 각색 들짐승 날짐승 병신의 흉내내기 등등에 박장대

소가 터졌다. 살판 땅재주가 걷혀 나가고 벙거지에 철릭을 떨쳐 입은 젊은이가 칼춤을 추

며 나왔다. 살판을 하고 나온 장신의 사내가 자기네 재인 패거리들 중의 연장자인 듯한

초로의 가객에게 말하였다.

"거 나루 벌이도 쏠쏠하우. 이 모양으로 노며 가노라면 해주 가서는 아예 단오까지 비럭

질 안해두 되겠네."

"그나저나 어찌할 텐가."

"뭣 말이우?"

"저기 남장시켜놓은 아낙 말일세."

"그 할미는 어쩔태여?"

"까짓 거 누가 눈치나 체겠수. 묶였서 초막에 백혀 있는데. 다 건널때까지 누굴 하나 곁에

붙여 지키게 합시다."

그들이 뒷전의 도강목을 살펴보니, 포졸이나 도승까지도 모두 광대판에 정신이 팔리는 모

양이었다. 벽란정 위에서는 양반네들이 난간 가녘에서 내려다보고 있고, 나루터의 일꾼들과

관노 하인 녀석들 모두가 웃기도 하고 다릿짓으로 장단을 맞추는 꼬락서니도 보였다.

봉물짐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나룻가에 부담나귀와 말이 불어나나는 것으로 미루어 곧

사람들을 실어나르게 될 모양이었다. 기찰포교가 아무리 눈썰미가 재빠르다 하지만 거듭 늘

어나는 행객들의 새새 틈틈이 가려 보기가 더욱 어려워질 모양이었다. 아예 겸인이란 자는

누각에서 내려와 구경꾼 사이를 파고 돌며 살폈으나 사람들틈에 아낙네들은 보이지 않았다.

별로 득이 되거나 손 될 리 없는 그는 드디어 뒷줄에 끼여 서서 탈판의 재담을 보다가,

느덧 빨려들어 껄껄거리며 웃어대고 있었다.

광대 중의 하나는 보부상 차림으로 패랭이에 태조대왕 구완하던 목화솜 두어 송이 고목에

꽃 피어난 듯 붙여놓고, 거기다 시커멓게 그을은 천하 상놈의 상판대기 탈박을 썼다. 또 하

나는 삼베로 그럴 듯이 만들어 먹물들인 정자관을 쓴 꼴인데 수염도 희고 상판도 허여 멀쑥

하여 햇빛 못 보고 글깨나 읽은 양반일시 분명하였다. 닭의똥 사위로 경쾌하고 우스꽝스런

춤이 몇바퀴 돌아간다.

"샌님 샌님 큰댁 샌님, 작은댁 샌님, 샌님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저리이리 다 다녀보아도

못 보겠더니 여기 와서 만나보니 안녕하고 절령하고 무사하고 태평하고 아래위가 빼꼼합

?"

"네 이놈, 양반을 만났으면 절을 하는게 아니라 뭣이 어쩌고 어째?" "예예, 절이오? 알지

요 압니다. 한양에 일러도 새절 덕절 도곡사마곡사, 물건너 봉원사 합천 해인사 염주원 염주

대 구월산 월정사, 황주에 성불사 이런 절 말씀이우?" "이놈, 누가 그런 절 말이냐?"

"그럼 무슨 절이우."

"절 모르느냐. 모르면 배워야지."

"절도 배웁니까.? 배웁시다. "

"미륵님을 가로 잡아 번쩍 들어라."

"번쩍 들어라"

"구부려라."

"구부려라."

"이놈, 몸짓으로 하랬지, 누가 입내만 내라더냐. 아하 이놈이 ....." "아하, 이놈이."

"이놈을 패줄까."

"이놈을 패줄까."

"이놈아 그만두자 그만둬."

"아이구 어려워라."

"허허 그럼 초판부터 다시 하자. 내가 할 테니 따라 해라. 번쩍 들고 꾸부리고 번쩍 들고

꾸부리고....."

"에헴 어어 모시고 가시고 잘 있었느냐?"

"이놈, 양반의 절을 받어!"

"양반에게 절을 받으면 명이 길다 합디다. 어휴 내 힘들어서 양반 안하겠수. 상놈 하겠수,

상놈."

이때에 도정이 물가에 서서 소리쳤다.

"나루 건너시오, 배 났소. 배 났으니 어서들 건너시오." 정자에 앉았던 양반네들이 하인

을 찾는 소리가 시끄러웠고, 구경꾼 사이에 잠시 술렁임이 있었으니 상사람들은 오히려 강

건너는 일보다 흥 깨어지는 일만 두려워 보였다. 결국 나룻가에 모인 것은 먼길 가는 부상

들과 송도에 다녀가는 어르신네들이 대부분이고 아낙네들도 끼여섰다. 살판꾼은 그런 광경

을 보고서 패거리의 수광대에게 넌지시 말하였다.

"이 틈에 먼저 건너가볼라우."

"그러게, 금곡말 나귀집 앞에서 만나세."

"거 장삼 춤옷이나 벗어 주소."

"자신 없으면 아예 뒤쳐졌다가 밤배를 타든지. 무슨 사단이나 나면 우리 패 모두가 길 못

가고 낭팰새."

"여하튼지 금곡말서 만납시다."

살판꾼은 베장삼을 뭉쳐 들고 초막이 늘어선 나루 저자 쪽으로 올라갔다. 무동이 춤을 추

던 총각 광대가 묶어서 옷을 덮어 가려놓은 노파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건너구 일행이 건너게 될 때까지 잘 지켜야 헌다. " "염려 말우, 나갈 때 한 주

먹을 앵기면 강 건널 사이는 푹 자겠지." "남장을 하고 있던 여인은 내외할 것도 없이 살

판꾼 사내의 저고리 자락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숙여 진정으로 감복한 마음을 드러냈다.

"저를 해주까지만 데려다 주신다면 우리 두 양주가 만나는 날부터 나리의 종살이를 몇해

고 해서라도 이 하늘 같으신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은혜랄 수 없소. 오죽하면 그 몸으루 야반도주를 하였겠소. 우리가 관아에 들락거려보아

잘 알지마는, 요사이 나라에서는 면천한 사람들의 예전 문서까지 뒤져내어 다시 환천시키구

있답디다. 우리 비렁뱅이 광대들이야. 그러러니 하니까상관 않지마는, 절대루 잡히지 마시우.

부디 쥔 만나거든 산으루 들어가 화전이나 일구며 사슈." "이렇게 고마우실 데가 ..... 나리

는 어디 사시는 뉘시여?" ", 우리는 나리가 아니외다. 정처없이 돌아 다니는 하천 광대

들이우. 밥 주고 재워주는 데가 우리집이고 마을이지요. 겨울을 날 때엔 문화 광대산 아랫녘

에 우리가 모여 지내는 골짝이 있소이다. 이 사람으로 말하자면 해서 광대 손돌네 패거리

의 장충이라고 풍류 즐기는 한량들은 모두 압지요. 우선 이걸루 얼굴을 싸매시오. " "얼굴

을 싸매요?"

장충은 아낙네의 얼굴 반쯤을 천으로 동여맸다. 그리고 나서 화덕 아래에서 다 타버린 숯

을 골라내어 물을 끼얹고 식기를 기다렸다가 집어들었다.

"얼굴이 나온 데는 이걸루 환칠을 하는 겁니다. "

구경만 하고 있던 총각 광대는 연신 옳지, 그렇지 하면서 무릎을 쳤고, 여인은 충이 하라

는 대로 수걱수걱 따라 했다. 말뚝 벙거지 쓰고 바지저고리에 얼굴 반쯤은 천으로 칭칭 감

았는데, 나머지 얼굴에는 숯으로 환칠을 해놓았으며, 붉은 띠를 벙거지 위로 늘어뜨렸으니,

광대 중에도 제일 상스런 무자리 걸립 광대 꼴인데다, 만삭의 몸을 감추려고 장삼까지 씌웠

. 장충은 넓적하고 튼튼한 제 등판을 돌려 댔다.

", 내등에 업히시우."

뜻밖의 말에 여인이 몹시 부끄러워하며 우물쭈물하자, 충이 싱겁게 웃으면서 아강을 달랬

.

"같은 남정네끼리 뭐가 부끄럽소. 댁네는 내 아우란 말이우." "죄송합니다."

"여자를 업어본 게 한두 번이 아니우. 거사질 다니던 내력두 있으니까. 자 빨리 없히시

.' "그럼....."

아낙이 그의 등에 구부리자 충은 깍지를 끼어 잡고 일어서며 총각 광대에게 일렀다.

"인석아, 잘 티켜."

", 나를 허재비루 아나."

장충은 여인을 업고 나루터를 따라 내려갔다. 춤판이 계속되고 잇는 정자 앞 뜨락에는 날

라리의 높은 가락과 장고장단 소리가 어우러져 가득 차 있었고, 구경꾼들이 신바람 나서 장

단을 맞추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장충은 놀이판 앞을 지나 도강목으로 내려갔다.

도승별자은 부담 관리가 끝나 한시름 놓았는지 대나무 평상에 앉아 병술을 마시고 있고,

포졸들도 서너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 슬그머니 끼어든 모양이었

. 기찰포교는 물가에 대어진 뱃머리 앞에 다가서서, 오르는 사람들과 특히 머리쓰개를 깊

숙이 내려쓴 아낙네에게는 까다로이 굴었다. 마침 배에 오르던 부부가 있어서 포교는 낡은

갓에 때묻은 중치막 차림인 선비에게 양해를 구하였다.

"송구스럽지만 기찰할 일이 있어서 그러하니 아주머니의 쓰개를 잠깐만 벗게 해주오."

 

아마도 공부중인 유생으로 보이는 그 선비는 대번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턱을 떨 정도로 노

기가 솟았다.

"남의 실인의 의복을 함부러 벗으라니..... 남녀가 유별한데 이러한 법이 어디에 있는가.

자네는 어느 군영의 포교인가?"

다짜고짜 반말지거리에 아니꼬웠으나, 형세가 형세인 만큼 기찰포교는 참을 수밖에 없었

.

"양반께 작폐가 될 줄은 아오만..... 지금 추노하는 중이라서 그러니 아량있게 생각해주시

."

"망신이로고! 내 비록 가난하고 줄이 없어 관직에 현달하지는 못했으나 . 이름없는 선비라

고 업수이 여기는 자가 없었다. 네 이놈, 어느 군영에 있느냐. 내 어찌하든 통기하여 네놈의

목을 자르리라."

유생이 비록 힘이 없다 하여 붙일 순 없으되, 떨굴 수는 있음을 아는 포교인지라 마주 대

거리 못하고 우물쭈물 말하였다.

"허어 ..... 추노중이라 하지 않소."

"너희 눈구녁에는 남의 유부녀가 시골 토반의 천비로만 보이느냐?" 한참 그렇게 옥신각

신할 적에, 드디어 도승별장이 술잔을 쾅 내려놓고 일어났다.

"용서하시오, 노기를 진정하시고 승선하십시오."

"벽란도의 별장은 예서 무얼 하는 rps. 배천군수가 나하고 동문수학인데, 내 반드시 이

런 행패를 전하겠네."

"예예, 좋도록 허우. 사공, 좋은 자리 내드려라."

하고 나서 도승은 포교에게 말하였다.

"보시우. 당신 때문에 내 평판만 나빠지겠소. 기찰을 하려면 이런 폐단 없이 하오. 사전에

내 허락을 받구 나서 검색을 하든지 기찰을 하란 말요." 포교는 입맛이 쓴지 찍소리를 못

하고 섰는데, 선비는 한번 더 소리 높이 꾸짖고 배에 올랐다.

먼저 그러한 양반네들이 뱃머리의 덕판이나 이물 부근의 가로 판자에 편안히 자리를 잡았

. 장사치들은 창막이 판자에다 봇짐을 쌓고 뱃전 가녘에 쭈그렸으며, 가로 판자가 없는 중

심부의 물속의 하인배들이 발을 담그고 앉았다. 고물 위에는 사공이 노를 잡고 섰으나 빈자

리가 많아서 아직 배가 가득 찬 것은 아니었다. 사공이 물가의 말뚝에 걸었던 바를 풀고 닻

을 건져냈는데, 장삼을 입고 축 늘어져 있는 아낙을 업은 장충이 죽는소리로 엄살을 떨면서

앞으로 나섰다.

"어이구우! 우리 아우 좀 살려주. "

"저리 비켜라. 아직 순서가 아니다. 네놈들 탈 자리가 어디 있단 말이냐." 사공이 힐책하

면서 삿대를 드는데, 장충은 물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가 뱃전을 잡았다.

"사공놈이 사람 괄시를 이리하여 쓰겠느냐. 중환자가 있어서 그러니 좀 태워다우." 사공

은 어이업다는 듯 삿대를 놓고 도승의 쪽을 바라보았다. 포졸이 외쳤다.

"뭐냐?"

장충은 등을 돌려 업힌 사람들을 보이면서 울상을 지었다.

", 보시다시피 제 아우가 두창이 번져 머릿속까지 고름이 꽉 찼소이다. 바삐 강을 건너

의원께 보이지 않으면 오늘 중에 죽을지두 모릅니다."

팔짱을 끼고 그들을 이윽히 노려보던 기찰포교가 손짓하며 불렀다.

"잠깐 이리 오너라. "

"아닙니다요, 이 배를 놓치면 우린 언제 배를 타게요." 곁에서 포졸이 말했다.

"염려마라. 배는 태워줄 테니..... 사공, 배를 대어놓게." 기찰포교가 장충의 아래위를 날카

롭게 흝어보았다.

"네 행색으로 보아 광대가 분명한데 어찌 패거리와 따로 도강하려느냐." "언제 놀이판이

끝날 때를 기다리며, 언제 우리 건널 차례까지 지체 하겠습니까. 바삐 나루를 건너 연안 읍

내 의원을 뵈려 합니다."

도승도 장충의 차림새와 머리를 싸매고 죽은 듯 엎드린 광대를 바라 보는데 곁에서 포졸

이 말하였다.

"저 자가 조금 전에 근두짓을 보였던 살판꾼입니다." "그러한가."

도승이 짐짓 엄한 목소리를 꾸며서 물었다.

"네 이놈! 그 다친 놈이 네 아우라면, 싸움을 벌이거나 행패를 놓고 달아나 오는게 분명하

렸다."

"아니올시다, 싸움이라뇨. 지난 보름날 밤에 송도서 재주를 팔고 파하여 거리로 나오다가

석전꾼들 가운데 끼여 그만 돌팔매를 맞았습니다. 길고 뾰족한 옹기 조각을 맞았는데 시방

제정신이 아닙니다요."

"배에 타고 있던 양반들 중에 아까 봉변을 당한 선비가 뱃전으로 몸을 기울였다.

"거 태워주세. 병이 위급하다니..... 맥을 잃기 전에 고름을 빼야 할걸." 술 취한 한량 한

사람도 그들 광대의 정상을 보고서 곧 나선다.

"재인들이 무슨 작폐한 사례도 없는데, 배를 가려서 태울 거야 있소? 더구나 중환자라니

태워줍시다."

도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타거라."

장충이 뱃전을 잡고 오르려는데 기찰포교가 어깨를 탁 잡았다.

"타는 건 좋은데....."

"예에?"

기찰포교는 빙긋이 웃었다.

"그 안면에 싸맨 베를 풀어 보여라."

장충은 가슴이 털컥했고, 엄살을 떨면서 사정하였다.

"아이구 바람이 들면 어쩌라구 그러십니까. 나리는 동기간두 없으시우." 도승은 처음부터

남의 직무에 끼여들어 이래라저래라 하는 포교가 못마땅했는데다가, 보잘 것 없는 선비의

험구도 들었고, 이제 자기가 승낙을 했는데도 가로막고 나서는 포교가 고까웠다.

"여러 말 할 거 없다. 어서 태워줘라."

"예예, 나으리가 참말 명관이십니다."

장충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올라타자 사공이 삿대로 모래를 밀어냈다.

른 배가 다시 와서 닿자 포교는 그쪽에 모여드는 사람들께로 눈을 팔아버렸으니, 여인네들

도 일일이 기찰하기가 어려운 판에 더구나 광대 형제에게까지 세밀히 검색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배가 강상에 두둥실 뜨고 사공은 노를 잡아 저으면서, 고물 위에다 환자를 내려놓는

장충에게 청하였다.

"바닥의 물이나 좀 퍼주오."

"어유 발 시려워. 헌데 날 안 태웠드면 누굴 시킬려구 그리 잡아뗐수." "어찌 내 속 마음

이었겠소. 멋대루 배를 부리다간 도승의 호통이 여간 아니라오." 장충은 여인에게 잠깐 업

드려 있도록 등판을 꾹 눌러주고 나서, 바닥에서 스며드는 물으 바가지로 자꾸 퍼냈다.

가 강 복판에 이르자 물살이 빠르고 거세어 보였다.

"지난달에는 걸어서 건넜는데, 날씨가 조금 풀리니 벼락같이 녹네그려." "살얼음이 제일

어렵지. 조수 때문에 안 그런가."

"여보게, 자네 아우를 더 안쪽으루 앉히게. 떨어지계어." 한량들이 제법 인정있는 체를

하였다. 포창에서 나오는 돛단배들이 가득 실은 화물위에 포를 씌우고 바다를 향해 미끄

러져 나가고 있었다. 사공이 목청을 드높여 어깨를 좌우로 기우뚱대며 소리 한 자락을 뽑았

.

어여노디엇차 어여노디어 청산 송림이 노 끝에 부서진다.

어여노디엇차 어여노디어 우리 님 나를 버려 심양으로 팔려 가네.

어여노디엇차 어여노디어 차마 죽을 망정 잊기야 하려는가.

어여노디엇차 어여노디어 나 가는 줄 알았드면 불원천리 오련마든.

어여노이엇차 어여노디어 우리님 나를 버려 심양으로 팔려 가네.

가락이 어찌나 청승맞고 애잔한지 강바람이 물을 스치고 지나는데 더욱 썰렁하였다. 여인

은 긴 장삼 소맷자락에 이마를 묻고 아무도 모르게 눈시울을 닦았다.

강을 건너자마자 강변은 갑자기 쓸쓸해진 듯하였고, 포창과 부근 도강목에만 배가 오락가

락할 뿐 넓은 들판 위로는 단정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못자리만 남은 논바닥

과 개울가에서 학의 떼들이 끼룩끼룩 우짖으며 구부러진 노송이 위로 올랐다가 다시 잔설이

깔린 산등성이로 선회하곤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내리겠어요"

장충이 여인을 업고 내쳐서 걷는데, 등 뒤에서 사내의 목을 잡았던 그 여자는 수줍은 듯

이 말하였다.

"그럽시다."

그들은 먼지가풀 썩이는 들길을 따라서 시종 말없이 걷기만 했다. 여인은 뒤꼭지가 끊어

진 미투리 때문에 걷기가 불편한 모양이었고, 장충도 물에 젖은 발이 몹시 시려웠다.

"쉬어 가려오?"

"아닙니다, 갈 길이 먼데 어서 가지요."

"아무래두 뒤쳐진 사람들과 만나려면 천상 기다려야 허우." "약속한 곳에 가서 쉬지요."

그들은 역사와 마방의 기다랗고 썰렁한 집채들이 줄지어 섰는 금곡 마을로 들어섰다.

람의 왕래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져녁나절이나 되어야, 밤을 묵어 가는 도강객들이

있을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주막거리의 객줏집들을 지나갔고, 약속 장소인 나귀집 앞에 이

르렀다. 해주까지 나귀를 놓는 세마 집이었다. 낮은 토담 앞에 고삐 맬 말 뚝이 여맂어 섰

, 빤히 들여다뵈는 앞마당의 마구간에는 굴레와 안장을 벗긴 말과 나귀가 대여섯 필 여물

을 먹고 있었다. 장충은 봉놋방에 달린 길가 툇마루에 걸터 앉으며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다리쉬임 좀 하구 갑시다."

"그러시우."

안에서 말털을 빗기던 객점 마부가 돌아보지도 않고 코대답을 하였다. 이 툇마루에서 쉬

어 가는 행객들이 워낙에 흔했던 모양이었다. 나귀집 앞에 삼거리가 갈려 있는데, 위로 배천

가는 길이요, 아래로 연안 가는 길이며, 그 반대편은 송도로 가는 길목이었다. 여인이 툇마

루에 쪼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고서 장충은 말하였다.

"좀 누워 계시우."

"괜찮습니다."

"예서 해주까지가 대략 백오십리 길인데, 장정 혼자서 열심히 걷는다면 하루가 꼬박 걸리

지만, 일행이 있으니 이틀은 걸릴 터이오. 더구나 그런 몸으로는 하루 오십 리가 고작일 게

."

"공연히 저 때문에 노정에 지장 되겠어요. 제게 약간의 노자가 있는데 나귀 한 마리를 세

내어도 좋습니다."

"우린 오갈 데 업이 떠도는 광대들이니 아무도 말을 세주진 않소이다."하며 장충이 아낙

을 위로 하였다.

"염려놓으슈. 내 지게나 한 짝 구해 오리다. 그게 피차에 길 가기가 좋겠구먼. 남은 눈에

도 별로 의심받지 않을 게요."

여인은 이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더니 한참 뒤에 울먹이며 말하였다.

"저같이 천한 계집이야 당장 죽어 티끌이 되는 것을 원하는 바이지만, 제 아이는 반드시

아비를 만나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해주 어느 어름에 있다는 거나 아시우?" "글쎄요..... 조현역참의 강모라

는 이가 그분 길 떠나던 날 밤에 났답니다. 그런데 떠나면서 제가 만약 찾아오면 해주의 수

양산에 있는 망해사에 가서 수소문을 해보라구 하더랍니다.

거기 노스님을 어릴 적부터 잘 안다면서 불목하니로 지내며 기다리다가 삼년이 차도 제가

안 오면 입산 수도하겠노라구요. 하지만 도주에 무슨 일이 있어서 관서로 계속 가셨는지두

모르지요."

"그보다도 얘기를 듣고 보니 추나하는 자들이 걱정이우. 댁네들 역으로 해마다 포를 바치

게 될 터인즉, 문서를 고치려고 도산되었음을 관에 직고하면 추쇄도감에서 전도에 영을 내

릴 거요. 얼마 전에 송도 관아에서 들으니, 오랑캐를 친다며 강화성을 새로 샇는 데 보내어,

죽을 신역을 치르게 하는 판이랍디다. 지금 삼 대 전부터 면천 속량했던 사람들도 여차직

하면 추쇄하여 대속하게라도 할 판이란 말이오. 그 역참 사람이 행방을 안다면 그리 안전하

지는 못할 거요. 도산 노비에 관련된 자는 심지어 속량된 먼 친척까지도 침해를 받는다오.

차라리 다른 사람을 보내어 저쪽 형세를 살핀 연후에 찾아가도 늦지 않을 게요. 그래야 아

이라도 온전히 기를 수 있지 않겠수."

여인은 장충의 자상하고 인정 많은 도움으로 하여 이제는 그를 대하는 마음이 마치 오라

버니를 만난 듯하였다. 드문드문 행객들이 지나기 시작하더니 연안, 배천 방향의 길을 차츰

사람의 왕래가 잦아지고 있었다. 때는 벌써 점심때가 훨씬 지난 뒤였다. 새벽기르을 떠난 사

람들로 서는 나루에서 많이 지체된 셈이었다. 한두 가지씩 신변사를 얘기하던여인은 일단

말문이 터지자 걷잡을 수가 없는것 같았다.

여인은 부고가 누구인지, 고향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낳자마자 비적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적성에서 난리 전까지 살았다는 것뿐이었다. 안채

행랑에서 어머니라는 웬 젊은 여자와 함께 자던 기억이 있었다. 바깥어른이 출타하기만 하

면 안채에서 어머니를 데려다가 심하게 욕설하고 매질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비오는 날 밤에 횃불을 밝힌 남자들이 후원의 연못물을 퍼내고 어머니의 시체를 건

졌었다. 다른 늙은 여종이 어머니 대신 여인을 길렀던 것 같았다.

여덟살 나던 해에 호란이 일어나 강원도 쪽으로 피난했는데,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그 집

안이 관채로 일시에 몰락하게 되어 자신의 몸은 관아에 압수되었고, 아무개 귀인의 궁토가

있는 파주 근방 마름 밑에서 수십여 명의 노비들과 함께 농사와 길쌈 일을 했다. 거기서 그

여자는 열 다섯 살까지는 음식으로는 겨와 뜨물만 먹고 잠은 움막의 맨땅에서 자면서 밤낮

으로 무명 짜는 일에 혹사되었다. 여기서 첫 번째 남편 두남이란 사람과 알게 되었다. 두남

은 그때 이미 나이 삼십이 넘어있었고, 전란에 발을 잘려 군노질을 못하게 되어 축사의 일

을 맡은 자였다. 그들은 감관의 지시로 집단 움막을 떠나 농토를 분여받고 신공을 바치며

솔거하게 되었다. 십오세에 성혼하여 십칠세에 딸아이를 하나 낳았다. 이 년 동안 그런대로

가족들은 행복하고 평화로웠다. 을유년에 나라에 옥사가 있었고 모귀인의 궁토는 다른 부로

넘어갔는데, 노비문서의 정리 때에 그들 가족은 이 궁방전을 떠나 금교역말로 옮겨가 사내

는 역에서 말을 돌보고 여인은 표모질과 바느질품을 하며 객사 밖에 외거하여 살았다. 이때

가 가장 평화스럽던 나날이었다.

평안도에 첫 벼슬을 가는 진장 첨사가 지나다가 우연히 말이 여독에 지쳐 병들어 죽자,

그날 번이었던 역노 두남을 심히 문책하였다. 오랫동안 한량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모처럼

환로에 나선지라 공연한 까탈로 위엄을 보이고 싶었던 듯하였다. 장 오십에 북관으로 내치

게 하였는데, 두남은 백리도 못 가서 중도에서 죽고 말았다는 전갈이 왔다. 딸아이는 다서살

이 되자마자 양주 관아를 통해 어는 권문의 혼자 남은 대부인 댁에에서 장차 사환비로 쓸겸

고적함을 달랠 겸 하여 앗아가버렸다.

추위와 굶주림과 마소 같은 학대와 가혹한 매질은 참아낼 수가 있었으나, 그같이 가족을

한꺼번에 앗기는 일을 당하자, 여자는 식음을 전폐하고 골방에 누워 죽기만을 기다렸다.

때에 움막을 찾아와 미음을 끓여 넣어주던 역노 보와 살게 되었는데, 보는 역노들 사이에서

도 기골이 훤칠하고 사람 됨됨이가 온후하여 은근히 존경을 받던 자였다. 원래는 신계에서

농사짓던 양인이라는데, 세사에 소흘하여 부농의 일꾼이 되었다가 불행하게 천인으로 떨어

진 사람이었다.

개성 유부사 댁과 관아 사이에 오랫동안 구채로 쟁송이 있어오더니, 작년에 문득 판결이

나기를 유부사 댁이 승소하여 남녀 노비 두 쌍과 관전 십결을 찾아가게 되었다. 남편 보는

그전부터 항상 말해오기를 만약 당신과 헤어지게 된다면 함께 월경이라도 하여 되 땅에 달

아나 살자고 여러 차례 입버릇처럼 일러왔었다. 아이 ㄹ 가진 기미가 있었으나, 두 사람은

오히려 슬퍼하였다. 그들은 유부사 댁으로 가게 되었는데 남의 사삿집 행랑살이가 얼마나

고되고 가혹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과연 그댁에 이르자마자 남편은 장단으로 되팔려갔다.

거기까지 얘기하던 여인은 갑자기 눈에 광채가 돌면서 결연히 중얼거렸다.

"물레를 젓고 삼을 찢으며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는 중에도 언제나 혼자서 제 몸을 만지

며 아이에게 다짐했습니다. 네가 태어나기 전까지 에미가 면천하지 못하여 아비의 얼굴마저

모르게 한다면, 차라리 낳기 전에 에미와 함께 목숨을 끊어 버리자구요. 그러면 죄 많은 에

미는 구천 지옥으루 돌아갈 테지만, 아가의 깨끗한 혼은 하늘로 올라가 후생에는 양반댁 도

련님으루 태어나지 않겠습니까. 종년이 낳은 자식은 언제나 종이 되고 또 그 자식도 종 아

닙니까. 하물며 사람의 혈육지정까지 끊게 만드는 이따위 세상을 어찌 살게 한단 말입니까."

장충은 머리를 떨구고 여인의 긴 사연을 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말 없이 객점 안으로 들어가

지게 한 짝을 헐하게 사왔다. 받침목에다 거적 두어 장을 얹어 사람을 태울 만하게 만들었

.

행객들이 몰려들어 점심상을 들여가고 내가고 하는 통에 그들이 봉노 툇마루에 앉았기가

심히 난처하게 되었을 무렵 하여, 손돌네 패거리들이 벌써 신명ㅇ르 적당히 달래놓고 피로

한 걸음걸이로 삼거리에 당도하였다. 손돌이 장충에게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자들 우리가 건널 적에도 기찰이 심하든데, 샛다리 가서 또 지키지 않을려나 모르겠

."

"깐놈들 속이기야 염려없지만.... 그 죽장수 할멈은 어찌했나?"총각광대가 신이 너서 떠들

었다.

"어찌하긴 뭘, 나올 때 주먹으루 뒤통수를 한 대 질러주니 얌전하게 뻗어버리더군. 지금쯤

정신이 들어 법석을 떨 게야."

"어서 여길 떠야겠네 헌데 길에서 출산하면 이 일을 어쩐다?" "자네 사람인가?..... 다 운

수에 맡기세."

하다가 손돌은 장충의 다정한 마음을 짐작하고 민망해졌다. 사당이었던 그의 어미는 충을

밭고랑에서 낳았던 것이었다. 광대란 길에서 낳아 길에서 살다가 또한 길에서 죽으면, 창부

라는 귀신이 되었다가 미친 사람에게 붙어서 텅처없이 헤매게 만드는 법이었다.

"무어가 걱정이야, 길에서 낳은 놈과 애비 모를 자식은 수광대가 된다는데." "거 무슨 말

이오?"

"어허 세상 천지가 온통 길이라네, 길이라네. 얼떨떨 떠르르거리고 길놀이를 가는구나.

가세들."

"예 갑시다. 주인장 내가 왔소. 내가 오니 난데없는 초상일세. 찬밥이 웬말인가. 가이 짖어

반기는데 풍류 모르는 짐승이로다. 일곱 해 왕가뭄에 뺑뺑 뺑뺑이를 돌아서 죽지 않고 내

왔소. 갑시다아."

그들은 연안을 바라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하였다. 장충은 지게 위에 여인을 앉히고 일행

의 가운데쯤에 끼여 걸었다. 처음에는 먼지 바람이 불고 구름이 모이더니 겨울비가 추적추

적 내리는 것이었다. 저녁나절이 되어서는 날씨가 더욱 추워지면서 비는 진눈개비로 변하여,

젖은데다 뻣뻣이 얼어붙는 옷 속으로 한기가 뼛골에 사무치는 듯하였다. 여인이 오한에 떠

는 느낌이 지게를 진 장충의 어깨위로 전해져왔다. 해가 언제 떨어졌는지 모르게 재빨리 떨

어져버리자 바람과 진눈개비가 한층 심해졌고 여인은 지게 위에 축 늘어져서 앓는 소리만

가냘프게 내지르고 있었다.

번지항다리를 지나서부터는 신음소리를 내던 여인이 잠잠하였다. 장충은 걱정이 되어 지

게를 내리고 여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고개가 뒤로 축 처지는데 살펴보니 눈에 흰창이 드러

났고, 낯빛이 흑색과도 같았다.

"어이구 큰일이네! 사람 죽겠수."

일행들이 달려와 여인을 끌어내렸고 맥을 짚어보던 손돌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죽지는 않았네. 기절한 모양일세."

"어디 방에라두 들여다 눕혀야 할 텐데....."

장충은 진눈깨비가 몰아치고 있는 캄캄한 들판을 두리번거렸다.

"이 사람아, 인가엘 가야지, 여기는 냇가여."

"냇가라면 집도 있을 법허우."

장충은 지게를 버리고 이번에는 맨등판에 여인을 업었다. 따뜻한 기가 좀체로 느껴지질

않았다. 어름꾼 사내가 말하였다.

"예가 분명히 번지항다리요?"

"지나왔지."

"그러면 부근에 나허구 안면 있는 집이 있을 듯하니 성님들은 걱정마시오." "어딘데....."

"고개 하나 넘어서 냇가길루 죽 따라 올라가면 자갈목이라구 제법 큰 동네가 있습니다.

내 재작년에 거기 선다님 댁 환갑 잔치 때 놀아주구 한 열흘 묵었는데, 동네 인심이 우리

패들에게 아주 후하게 해줍디다."

"거 잘됐네."

미끄러운 고개를 넘어서자 큰 내의 지류인 작은 시내가 나왔고 옆으로 나란히 소로가 통

하여 있었다. 그들은 자갈목의 동네 불빛들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한결 추위가 가신 듯하였

. 마을로 옹기종기 들어가려니 어둠속에서 갑자기 장정 네댓이 내달아 길을 막으며 호통

을 쳤다.

"웬놈들이냐?"

"..... ....."

"예라니 거 남짓말놈들 아니냐?"

손돌이 헛기침을 하고 나서 일행의 앞으로 나섰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손에 손에 몽둥이

나 농기구들을 들고 있었으며, 아까부터 누구인가를 지키고 기다리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송도서 해주로 가는 길이외다. 일행 중에 환자가 생겨서 하룻밤 묵어 갈까 하고

입촌하던 길입지요."

그들은 손돌네 일행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저희끼리, "아닌데 그래. 그놈들이 큰길루 버젓

이 올 리는 없잖은가." "글세..... 옳아, 재인패들이구만."

"재인패들야?"

수군거리더니 한 사내가 치켜들었던 몽둥이를 내리고 나서며 하겟말을 고쳐서 물었다.

"재인패들 같은데..... 누가 행수시우?"

"내올시다."

손돌이 대답했다.

"이 마을에 어디 연고 닿는 데라두 있수?"

손돌 대신에 어름꾼이 나섰다.

"있다마다요, 이 동리 선다님께서 풍류를 즐기셔서 저희가 해마다 찾아와 놀아드렸습니

."

"선달? 큰나리, 작은 나으리?"

"저어 ....."

반가워서 나섰던 어름꾼은 머뭇거렸고 동네장정이 말했다.

"아마 감나무집 박선다님인 모양인데..... 그 어른 작년에 작고하셨소. 그리고 시방은 우리

동리에 우환이 있어놔서 외객은 받질 못하오."

"그 댁에 가면 곧 숙박을 허락할 겁니다. 제가 작은 서방님과두 안면이 있습니다." 장충

도 야속하여 조금 노기를 띠워서 말하였다.

"에이 여보슈! 설혹 생판 모르는 동리에 왔다 해도 이런 법이 없고, 우환이 있다면 필시

이 이 고장에서 있은 일이니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일인데.....더구나 친면이 있는 집을 찾겠

다는데두 부둑부둑 축객하려 든단 말이오. 이 추위에 사람이 죽어가는데 촌 인심이 그럴 수

가 있소?"

"그럴 만한 사영이 있수. 여기 그 댁 하인이 있으니 직접 물어보시구랴."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나서는데 어름꾼이 자세히 살피고 나서 반색을 하였다.

"인제 살겠네. 날세 나..... 서방님두 안녕하시구....." "글세 모른달 수야 없지만서두.....

금 그럴 형편이 아닐세. 작년 여름에 이 일대에 염병이 크게 돌아서 우리게에 온통 떼과부

가 났지. 우리 댁서두 큰선다님 작은선다님 모두 돌아가셨네. 헌데 이 동네보담 지체두 낮구

비천하게 사는 남짓말놈들이 동네를 깔보구 과수 겁간을 들어오지 않았겠나. 어젯밤에는 작

은아씨가 아예 홑이불에 싸여서 오리쯤 갔다가 장정들이 뺏어왔지. 그런 일루 모두들 외방

객을 꺼린다네." 광대 패거리들은 모두 낙망하여 어두운 하늘만을 바라보고 섰는데, 한 사

람이 보가가 딱했던지 동네 어귀에 있는 물방앗간이라도 괜찮다면 안내를 해주겠다는 것이

었다. 급한 김에 남의 칙간이건 안방이건 가릴 틈이 없어, 우선 이 진눈개비와 바람을 피해

야 하였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따라서 방아실이 있는 개천의 상류로 올라갔다. 물받이

바퀴는 시내를 떠나 빼어져 있었고, 어둠속에 물 흐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방아실 문을 열

어주며 마을 사람이 말했다.

"저기 쌓인 짚하구 나무루 불을 때시우. 그 대신 집을 뜯거나 불을 내면 큰코 다치리다."

"고맙수."

우선 진눈깨비를 피하니 천만다행이었다. 헐어내린 흙벽의 수수깡 사이로 찬바람이 몰아

쳐 들어왔으나, 여러 사람이 들어서니 헛간 안은 갑자기 훈훈해진 듯하였고, 그런대로 밤을

지샐 만은 해 보였다. 바람이 들이칠 적마다 문과 기둥의 아귀가 엇갈려 삐걱대는 을씨년스

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가려던 마을 사람이 그래도 안된 생각이 들었던지 돌아서서 물었다.

"어디 길양식들은 있으슈?"

", 있긴 있소만..... 식기가 모자라니 좀 빌려주셨으면 고맙겠수." "내 가서 상의를 해가

지고 요깃거리라두 좀 가져오리다." "그렇다면..... 정말 고맙겠수."

그들은 잠시 볏짚 위에 늘어져서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듣고 있었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제기랄 놈의 동네 같으니..... 온갖 잡귀 역귀 제신 장군들이 몽땅 몰려와서 폐촌될 동네

같으니라고, 이런 괄시 또 처음일세."

"이 사람아 광대는 축객을 당해두 춤을 춰야 하는 법이여. 그리 악담하는게 아닐세." "

이 모르겠수. 어서 죽어 청계씨나 되어갖구설랑 젯밥이나 얻어먹으러 다니구 싶수." 이렇게

자탄이 오고갈 때, 장충은 혼절한 여자의 손발을 열심히 비벼주었고, 손돌은 짚을 밀어내고

마른 땅 위에 불을 살구었다. 포근한 불빛이 땅바닥에 깔리면서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찼다.

여인이 정신이 들었는지 다시 신음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약간 움직였다. 장충은 반가워서

여자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정신 차리슈, 정신 차려요!"

한참이나 반응이 없던 여인이 몸을 뒤채면서 가냘프게 중얼거렸다.

"수고스럽지만..... 자리를 좀 만들어주시겠어요? 심상치 않은 게, 아이를 낳을 거 ..... 같아

."

장충은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 동료들을 벽이 허물어진 쪽으로 모두 내쳐 몰고, 아늑한 구

석에 짚덤불을 끌어모았다. 손돌이 혀를 찼다.

"큰일났군, 겪어봤어야지....."

여인은 진통을 참느라고 이를 악물었고, 구슬땀이 이마와 콧등에 송송 배어나와 있었다.

손돌이 어찌할 바를 몰라 여인의 머리맡에서 서성대는 장충에게 말하였다.

"동네 사람이 올 텐데 해산 도울 노파나 청해보게나."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수. 허지

만 소문이 나면 해주에 이르기도 전에 잡힐 게요." "어쩌려나?"

"내 한번 받아보지요. 어찌한다구 들은 적은 있으니까..... 사람 낳는 일인데 사람이 못할라

구요."

"우리가 도울 일이라도 있나?"

"물이나 좀 데워주오."

마을 사람 몇이 오지 함지에다 국밥을 넣어서 가져왔다. 그들도 아무리 광대패라지만 안

면 있는 사람들을 마을에 들이지 않고 방앗간에 재우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이거 참 송구스레 되었소. 마을에 근심이 있는 탓이니 어서 요기들이나 허슈." "저 아픈

분은 무슨 병이우?"

그들은 구석에 쪼그려 누운 몸집 작은 사내를 가리켰다. 손돌이 대수롭지 않게 여인을 돌

아보고 나서 말했다.

"나루에서 찬 떡을 먹고 관격이 들린 모양이니 곧 나을 거외다." "우리 마을 훈장님께서

약을 다소 준비해 계신데, 체할 때 먹는 평위산 한첩 달여 보내드릴까....."

"염려마슈. 이제 우리는 곧 잘 테요."

"그럼 편히들 쉬시오. 낼 아침에는 선다님 댁에서 조반 대접을 잘해 주실 거요. 밝아서는

객을 들여도 괜찮다니....."

마을 일꾼들이 돌아갔다. 손돌네 패는 늦저녁을 들었고, 여인에게도 국밥을 권했으나 도리

질을 하며 들지 않을 뜻을 보였다. 여인은 자기의 저고리 소매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밖으

로 터지려는 신음을 삼키는 것 같았다.

"..... 도와..... 주셔요."

여인이 나약하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충은 우물쭈물하는데 손돌이 두 사람을 불

러 장삼을 붙들고 돌아서 있게 하였다. 가리운 옷 안에 장충과 여인만이 남게 되자, 여인은

그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 충은 두렵고 당황하여 연신 침만 넘기고 있었다.

손돌은 입속으로 중얼중얼 삼신기도를 드리며 앉았고, 다른 자들은 비워진 오지 함지에다

물을 그득히 부어 데웠다. 총각 광대는 기도를 하여도 남들이 다 듣도록 타령조로 느적지근

하게 주워넘겼다.

"어진 삼신할머니, 앉아서 구만 리 장천을 넘겨보시고, 서서 천하에 굼벙이까지 굽어보시

는 삼신 할머니, 태워주신 아기 기왕지사 떨굴 양이면 궁둥이 허리뼈를 널푼하게 열어주고,

허벅지 두덩살도 찌이꺽 열어주고, 캄캄 힐흑 음지를 휘황 광명 양지로 열어주어, 그저 지에

미 욕보이지 마시고, 가뭄에 비오는 듯이, 논에 물을 내듯, 장마에 해 나오 듯, 배 꼭지 떨어

지듯, 사흘 변비에 곱똥이 물똥 되듯, 그저 좍좍 쑥쑥 떨어지게 해줍소사." 여인의 다급한

비명이 들리더니 조용해졌는데, 옷자락을 들고 돌아섰던 자들이 고개를 돌려 들여다보고 나

서 한숨을 내쉬며 끄덕였다. 조바심을 치고 있던 손돌이 놓칠세라 그들을 다그쳤다.

"어떻게 ..... 낳았나?"

"쉬이 ..... 지금 충이가 이빨로....."

그자는 태를 끊어내는 시늉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턱을 옆으로 젖혔다.

"끊었어? 거 피는 흝어내고, 입속에 들은 건 내뱉으면 안되네, 꿀꺽 삼켜야지." "꿀꺽 삼

키라네."

"삼켜야 애 명이 길지."

볼기 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아이가 힘차게 울었다. 저고리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린 장충이 자기 개가죽 배자에 핏덩이를 싸안아가지고 일어났다. 손돌은 무릎걸음으로 주

춤하며 물었다.

"뭐야..... ?"

", 고추요. 그놈 울음소리 한번 요란하다."

"누가 듣겠네."

"어디..... 정말 아들인가..... 나두 보자."

불안에 짓눌려 있던 광대들이 장충의 두 팔 좌우로 몰려들어 희닥거리기도 하고, 어르고

만져보려고 손가락을 내미는 자도 있었다.

"부정 탄다! 저리 못 비켜?"

"압다 누가 잡아먹는대. 조것 보게, 발톱두 있네."

"어이구우! 거 뉘 자식인지 연장 하나는 잘 생겼다." "이놈아 축수를 해주도 첫마디에 연

장 소리가 뭣 하는 수작이여. 네 따위 사당 오입쟁이가 될까봐?"

"그저 사내는 밥 잘 먹고 연장 세야 하느니라."

"살결이 거무틱틱하고 입이 크니, 근석 걸찍한 수광대 감이로구나." "아니야, 털이 많고

뼈다구가 억세어서 바구리를 잘하든지 씨름을 잘하든지, 좌우지간에 왈짜가 되겠는데."

"떠들지 말어, 이 자식들아."

"낄낄낄, 압다 불알 찬 산파 주제에 뻑시기는 ..... 젠장할." "이놈아 니 애비두 받아낸 사

람이여. 네놈 대갈통이 함지박만해서 뽑는 데만 석달 열흘이 걸렸다, 낄낄낄."

"다 전생에 연분이 있는 게라니."

"흰소리 작작 해라."

"도수장에 매여서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데 암만해두 낯이 익더란 말야. 고놈이 천상 장충

이 상판이여."

"낄낄 낄낄."

이렇게들 희희낙락하는 중에 손돌이 장충의 땀에 젖은 이마와 귀밑을 닦아주며 자꾸 벙글

거렸다.

"정말 욕봤네 욕봤어, 충이는 의인이여."

광대들의 소박한 인정과 태어난 아기의 맑은 울음으로 뭉쳐진 훈훈한 기쁨이, 삭막하고

을씨년스럽던 방앗간 안에 가득히 번졌다.

"가리웠던 옷자락은 여인의 아랫도리에 덮여졌는데, 하혈이 심한지 밖에까지 붉게 배어나

왔다. 여인은 눈을 감고 입을 벌린 채 헐떡이이고 있었다. 손돌이 아이를 받아 안고 함지의

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조심스레 씻겼다. 장충은 멀건 국밥을 들고 여인의 머리맡에 앉았으

, 그 여자는 얇아 보이는 눈꺼풀을 내리깐 채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인의 이마에

손을 대어보니 냉기가 있는데, 산후별증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국물이라두 좀 넣어주리까?"

장충의 말에 여인이 눈을 가느다랗게 열었다. 입술이 하얗고 눈에 총기가 없었다. 여인은

실눈을 떠서 장충을 올려다보고는 두려운 듯이 제 어깨 아래를 살폈다. 장충이 물었다.

"얘기 말이우?"

여자가 그렇다고 눈을 내리깔아 보였다. 장충은 손짓하며 웃었다.

"저기 ..... 아들이오, 아들?"

여자가 떨리는 손을 가슴 위에서 치켜드는데, 장충이 손을 가져가니 움켜쥐며 바르르 떨

었다. 그리곤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눈두덩에 솟은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두런거리던 광대들도 조용해지고, 손돌이가 배자에 싸인 아기를 안아다 여자의 옆에 뉘어주

었다. 여인은 아기의 착 달라붙은 머리털 몇오라기를 손가락 끝에 쥐어보았다. 여자는 한참

이나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표정에는 변화가 없고, 다만 눈물이 눈꼬리를 지나 귀밑머리

를 적셨다.

새벽녘에 여인은 좀 나아졌는지 고개를 움직이기도 하고, 총기가 살아난 눈빛으로 아이를

보기도 하더니, 입을 움직여 무엇인가 말하려고 애를 썼다. 장충이 오물거리는 여인의 입가

에 머리를 숙였다.

"그런 맘 아예 먹지 마슈. 살아야지..... 저렇게 잘난 아들을 낳고 왜 죽는단 말유. 내가 해

주까지는 무슨일이 있더라도 데려다 줄 테요. 뭐라구? 애 아버질 못 찾으면..... 우리 같은 걸

립 패거리가 온전히 기르기나 하겠수. 댁네나 마찬가지 신세인데. , ..... 이 국이나 좀 들

고 기운을 내슈. 글세 알구 있다니까. 해주 수양산....." 여자가 걸그렁대는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몇마디를 던졌다.

"..... 망해사..... 역노...... 신계 사람..... " 여자의 손이 툭 떨어지고 검은 눈동자가 고정

되었다. 마치 가까스로 이어왔던 생명력이 아이를 무사히 출산하고 나자 심지가 닳아버린

등잔의 마지막 불티처럼 사그라진 것만 같았다. 장충은 장삼자락을 펴서 여자의 안면을 덮

었고, 손돌이 죽은 여자에게서 아기를 안아 불 곁으로 데려갔다. 아기는 장충의 개가죽 배자

에 싸인 채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허탈하게 여인의 곁에 앉아 있던 장충이 중얼

거렸다.

"참으로 인연이 모질기두 허우."

"그러게 말일세. 삼십삼천 도솔청왕께서 이 적막 천지에 하필이면 우리에게 살덩이를 던

져주셨으니....."

"나두 아마 이렇게 태어났을 거요."

"아비 되는 사람을 못 찾게 되면 어쩔 텐가?"

"우리 광대산 재인 말루 데려다 기르지요."

장충은 어쩐지 자기의 출생에 관하여 생각이 났고, 지나온 세월들이 서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는 제 부친이 누구인지 어디 살았는지 전혀 몰랐고, 어머니조차 장충의 아버지가 딱히 누

구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장충의 어머니는 색줏집 갈보보다도 더럽

고 천하다는 여사당이었던 것이다. 남의 머슴이나 장돌뱅이나 고작해야 관노 녀석들을 상대

로 몇푼 안되는 행하를 받고, 하룻밤 안겼다가 정처없이 다른 고장으로 떠나는 신세였었다.

어머니의 행하를 빨아 먹으며 거사질을 했던 사내만도 대여섯이 갈렸으니, 그가 숱한 남

자들 중 누구의 자식이었는지 모친이 모르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의 동무 되는 사당패

들이 둥그렇게 서서 치마폭으로 가리고 밭두렁에다 장충을 떨구었던 것이다. 장충의 어미는

길에서 낳은 갓난아기를 재인들게 맡겨 놓고는 서너 달씩 각처를 헤매고 다니는 것이었다.

장충은 열살 남짓까지 절의 보살 손에서 자라다가 광대산으로 옮겨가 무동 노릇을 하며 잔

뼈가 굵었었다. 장충은 자라나서 두 번 먼발치로 그의 어미를 보았고, 마지막에는 모가비 되

는 사내가 모친이 강원도 땅에서 노중 객사했다며 머리카락 한 줌을 쥐여 주던 것이 어머니

에 관한 기억의 전부였다.

장충은 그의 팔 안에 갓난애의 부드러운 약동이 전해오는 것을 느끼며, 이상스레 새로워

지는 서러운 마음으로 이 새빨간 살덩이를 안고 있었다. 손돌이 불쑥말했다.

"자네 내자두 좋아하겠군."

"데려다 기르면 십상이지만, 해주까지 백여 리 길에 거기서 문화까지가 같은 거리인데.....

차라리 자신 없으면 해주에 맡길라우."

"해주에 우리 연고라야 기방이 고작 아닌가?"

"그애들 중에 양자 넣어줄 사람이 있을 겁니다. 관기로 나가 있다가 부잣집 권문가에 첩

으로 들어앉은 퇴기들이 많지 않습디까?"

"들일라구 할까아."

"첩으로 들어앉은 퇴기란 게 원래 자손이 바르게 마련이뇨. 아무리 서자란들 대갓집 애첩

의 양자나 되어보우. 우리네하군 아예 팔자가 갈리는 게유." "아무튼, 제 애비를 찾아야 하

. 핏줄이란 무서운 게야." "딴은 그렇소. 해주까지 가서 결정을 내리지요. 길이 멀어서 큰

일이군." "이렇게 태어난 꼴루 미루어, 쉽게 죽을 놈은 아닌갑네. 가며 가며 인가가 나올

적마다 동냥젖이라두 돌려가며 얻어먹이세."

먼 데서 닭 우는 소리가 잇달아서 들려왔고, 개 짖는 소리도 들렸다. 그들은 비로소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빨리 이 마을에서 떠나야 함을 깨달았다. 손돌이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깨기 전에 어서 가야겠네."

"그러지, 빨리 행장을 꾸리세."

장삼으로 덮어놓은 여인의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던 장충이 혼잣말로 , "데려다가 양지바

른 곳에 묻어줘야지."

"하자, 손돌은 난색을 지었다.

"가엾은 인생일세. 그래야 뒤탈이 없겠지만. 어디 우리에게 연장이 있어야지." "산야에 아

직 잔설이 녹지 않았을걸."

"장충이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여느 겨를에 땅 파고 흙 덮고 하겠수. 우리 식대루 묻으면 되지." 광대패는 그들의 동료

가 길을 가다가 죽으면 길에다 얕게 파묻고 잔돌멩이들을 그러모아 덮어주는 것이 상례였

. 지나는 해인들은 이 무덤을 알아보고 가엾은 광대의 넉을 위로할 겸, 행로에 재앙도 물

리칠겸 하여 저마다 돌멩이를 던져주고 가는데, 얼마 안 가서 길가에는 자연스럽게 돌무더

기의 탑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광대가 죽은 자리에는 창부라는 익살맞고 심술궅은 도깨비

가 지랄병을 물려줄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법이었다. 길이란 광대들이 태어나는 곳이자 살

아가는 동안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이며, 죽는 곳이며, 묻히는 곳이었다.

손돌과 장충의 수작을 곁에서 듣고 있던 어름사니가 제안을 하였다.

"죽은 사람 장사 지내는 것보담두, 산 애기 먹여 살릴 궁리를 해둬 야지. 돌림으로 젖 얻

어먹이는 일이 쉽진 않을 게유. 잠깐만 지체해서 우리 길양식으로 지닌 귀리를 내어 미숫가

루라두 준비해둡시다."

"그러세, 추렴젖을 못 얻어먹이면 꼼짝없이 꽃귀신 만들리." 그들은 하늘이 부옇게 되었

을 때에야 자갈목마을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아기는 손돌이 찬바람을 쐬지 않도록 품안

깊숙이 감싸안았고, 장충은 지게를 지고 갔다. 산 사람을 메고 왔던 지게 위에 이제는 거

적으로 말아 묶은 시체를 메고 그들은 싸늘한 새벽길을 걸었다.

얇게 덮였던 진눈깨비가 얼어서 바스락대며 미투리 틈을 비집고 부서졌다.

연안읍을 돌아서 봉세산 줄기가 주지곶으로 내닫는 고개 마루턱에 그들은 여인의 시체를

묻었다. 아기는 털배자 안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시체 위에 피뭍은 장삼을 덮어주고

그 위에 거적 한 장을 둘둘 말아 묶은 다음에 얼어붙은 흙을 덮고, 굵직한 돌맹이들을 얹었

. 마지막으로 표적 돌을 얹으면서 가객인 손돌이 나직하게 명복을 빌었다.

"허허! 가는구나, 훌쩍 떠나가는구나. 한도 많은 험한 세상, 몸은 두고 넋만 간다. 넋이야

넋이로다.

쉬어 가오 쉬어 가오, 몬지 같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떠나갈 제, 일망대해에 스러지는 거

품이며, 장강 천리에 흘러가는 잎이로다.

설어라 서러워라, 인생 일장춘몽인데 하룻밤을 울고 가는 두견새가 네로구나. 에헤, 넋이

야 넋이로다."

키가 껑충한 소나무들이 이리 구불탕 저리 구불탕 총총한 숲을 이룬 봉고개 마루턱에 어

느 한 많은 비녀의 돌무덤이 이루어졌다. 그 여자의 보퉁이 속에 있는 것은 아마도 역노 보

의 신물인 듯, 삼베에 여러 겹으로 싼 은가락지 하나와 포목 몇필, 엽전 두 꿰미, 그리고 갈

아입을 무명 저고리 치마가 한 벌이었다.

그들이 봉고개를 내려올 때 아기는 우연히도 그참에 깨어나서 맹렬하고 왕성하게 울며 보

챘는데, 마치 제 어머의 초라한 육신이 묻힌 곳을 떠나지 않으려는 듯하여 광대들의 정 많

은 심금을 울려주었다.

안개가 골짜기마다 내려 퍼져서 떠오르는 햇살에 흩어지고 있었다. 손돌네 패는 해주를

바라보고 계속 걸었다. 아직 정월이라 장꾼들이 드문 노상은 한적하였다. 그들과 낯이 익은

마을에서는 놀다 가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손돌네는 지체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들은 샛다리에 이르러 부근 창고지기의 아낙에게서 동냥젖을 얻어먹였다. 아낙네가 말하기

, "내 이렇게 젖 빠는 힘이 세차고 많이 먹는 아기는 처음 보았소." 했으니 아기가 건강

하여 별탈이 없는게 다행한 일이었다. 그날 밤이 되어서야 손돌 일행은 해주에 도착하여 용

당포에서 묵었다. 장충은 패거리가 떠나기 전에 아기 일로 하여 아침 일찍 수양산에 올라갔

.

망해사는 산성의 후미진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과연 신계 사람 보를 예전부터 잘 안

다는 노승이 있었는데, 그를 만난 지 수년이 지났고 아직 온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 추

노가 급박해져서 관서 방향으로 계속 올라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노승은 장충에게서 보의

아내가 노중 객사햐였다는 말을 듣자, 나무관세음보살 하고 나서 말하였다.

"아기를 노승에게 맡기십시오. 산 아래 신도의 집에 기탁하겠소이다." "그럴 필요는 없습

니다. 저두 집과 가정이 있는 몸이니 제가 데려갈까 합니다. 다만 아버지 되는 사람에게 이

애를 전할까 했지요."

장충은 막상 아이의 혈육이 없음을 알고는 도무지 남에게 내맡길 수가 없었다. 노승은 고

개를 끄덕이며 합장을 하였다.

"뜻이 그렇다면 천만다행이오. 인정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복을 받으리다." "우리두 처음

에는 아이 일이 난감하여 어디 소실댁의 양자로나 넣을까 했습니다. 걱정은 다른 것이 아

나라, 저희도 천업으로 빌어먹는 터에 자라서도 저희 같은 천생이 되겠기에 말입니다."

"정이 두텁다면 누구 손에 자란들 어떻겠소. 더구나 그것은 부처님께서 점지한 인연이요."

", 하루 사이에 이 어린것과 뗄 수 없는 정이 들어버렸습니다." "어디 사는 뉘시오?"

"문화 광대산 재인말에 사는 장충입니다."

"애 아비에게서 기별이 온다면 틀림없이 전해주리다." 장충은 길에서 맺은 이 기이한 인

연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아마도 구월산의 산신께서 그들 부부의 소망을 가엾게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딸 하나를 낳고는 여태 태기가 없는 장충의 처는 무녀였다. 그러니 자

연히 관계가 그리 잦지 못하였고 후사를 걱정하던 참이었다. 장충은 아내가 이해하도록 잘

타일러서 이 아이를 제 아들로 키을 생각을 해두었다.

구월산 줄기가 송화와 문화를 가로지르고 수렛고개에 이어진 산이 광대산이었다. 까막내

를 건너 십여 리 들어가면 논은 없고 고작해야 화전이나 일굴 정도의 척박한 땅이 골짜기

사이에 틀어박는데, 빽빽한 송림 사이에 광대들이 모여 사는 삼십여 호 남짓의 마을이 몇군

데 있었다. 부근 현의 사람들은 이곳을 재인말이라 불렀다. 손돌레 패거리는 대보름놀이로

비웠던 마을에 돌아오며 날라리를 불어동네에 알렸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들 장승백이까지

마중 나와서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그 마을에서 세 패거리가 나갔는데 손돌네는 가장 늦게

돌아왔던 것이다.

장충의 처는 이미 해주에서 재인들 편으로 전해진 풍문을 듣고 그간의 사연을 대충 알고

있었다. 장충의 처는 술 권할 사이도 없이 아이를 빼앗아 위아래로 어르면서 기뻐했다. 그들

부부는 낙산암에 올라 산신각에 축수를 드린 뒤에 시주를 바치고 이름을 지었다. 성은 장충

의 장씨 성을 따르고, 산의 정기를 타서 믿음직하고 꿋꿋한 사내가 되라는 뜻으로 길할 길,

메 산 이라 불렀다.

길산의 나이 칠팔세 남짓에 장충은 수광대가 되었고, 자기 패거리를 이끌고 해서지방을

떠돌며 살았는데, 이때부터 길산은 무동으로서 이미 뛰어난 광대의 자질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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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재인말은 까막내를 건너 광대산의 계곡이 시작되는 송핌 앞에 자리잡고 있었다.

울가이어서 무성하게 자란 갈대밭 너머로 개간한 땅이 늘어나 이제는 계곡의 위쪽에 있는

큰잿말보다 호수는 적지만 조밭의 경작지는 넓었다.

손돌이가 문화 광대들의 총대가 된 것은 어언 십년이 넘었고, 그는 연희를 떠나지 않게

된 다음부터는 늘 작은 잿말에 틀어박혀 농사나 짓고 틈틈이 광대의 어린 자식들에게 기예

를 가르치며 소일하고 있었다. 그는 늦게 봤던 외아들을 잃고 나서 재작년에 상처까지 하게

되어 재인말 사람들이 모두 동정할 정도로 외로운 신세였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묘옥이가

밥시중도 들어주고 빨래도 해주며 말상대도 되었으니 손돌 노인께는 늘그막에 무남독녀를

느닷없이 점지받은 거나 한가지였었다. 그렇게 호의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젊은

축들은 손돌 노인과 묘옥의 사이에 무슨 별스런 관계라도 있는가 싶어 입방아를 찧곤 했는

, 남녀 모두가 묘옥의 뛰어난 미모에 대하여는 의견이 일치했던 것이다.

손돌은 신천 우산포 부근의 어루리벌에 사는 심부자 댁에 잔치 초대를 받아 갔었다. 심부

자는 원래는 남의 머슴살이로 출발했다가 중농으로 일어서고 다시 관전의 소출을 관리하는

고직으로 있다가 둔별장이 되면서 일년에 곡식 백오십여 석씩 착복해서 일시에 부농으로일

어선 사람이었다. 그가 남의 머슴을 살 때 손돌이와 다정히 지내더니 둔별장이 된 뒤로는

다시 안면을 바꾸었다가 피차에 함께 늙어지고 환갑을 맞게 되자 친구 겸 광대가객으로 자

리도 흥겹게 할 겸 하여 새삼스레 불렀던 것이었다. 불려간 손돌은 워낙 상대의 신분을 잘

알지만 이제는 참봉직까지 공명첩으로 얻어낸 사람에게 하게도 놓지 못하고 끝내 불편한 자

리를 지키다가, 어둡자마자 원행을 핑계로 빠져나왔었다.

잔칫집에서 들려준 땅만 비추는 작은 발등거리불을 비춰 들고 손돌은 객사 화산관 앞에

이르렀다. 훈련원과 군기고로 가는길이 갈리는 삼거리 앞에 여러 채의 색주가가 있었고,

악소리와 계집들의 간드러진 웃음이 요란했다. 지금 밤길을 걸어 추산 마루턱을 넘어간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었으나, 손돌은 심가의 집에 도저히 하룻밤도 묵지 못할 정도로 마음

이 불편하였던 것이다. 이왕 내친걸음이니 문화에 가서 옛날에 함께 한량굿으로 기방을 드

나들던 퇴기 소향의 집에 들를까 하는 마음이었다. 색주가의 수박등 매달린 홍문 앞을 지나

려는데 안에서 수군대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무엇인가 허연보에 싼 것을 거적에 말

아 멘 두 사내와 포주인 듯한 색주가 기생어멈이 쫓아나오는 것이었다.

천사산 깊은 골에다 던져버리구 오게.

술상 봐놓구 기다리슈.

그래, 그 골칫거리만 처분해주면 해골머리가 개운할 거여.

수작을 주고 받더니 앞뒤로 거적대기 만 것을 둘러멘 사내들이 성큼성큼 읍내를 빠져나가

는 것이었다. 손돌은 짐작한 바가 있어 두 사내의 뒤를 멀찍이서 따라갔다. 죽령방 부근에

이르러 사내들은 천사산 마루턱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손돌 노인도 그들을 따라서 산길로

올랐는데 중턱에 이르니, 홀연 길이 텅 비어 그들의 자취가 보이질 않았다.

웬놈이 뒤를 밟느냐?

하는 소리가 버럭 나더니 숲 양쪽에서 두 놈이 한번에 달려들어 손돌 노인을 덮쳤다.

운 쓸 것도 없이 노인은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한놈이 머리만한 돌을 들어 허리를 부숴뜨릴

기세로 번쩍 쳐들었다. 이 머리만한 돌을 들어 허리를 부숴뜨릴 기세로 번쩍 쳐들었다.

손돌은 정신이 아뜩해서 두 손을 저으며 고함텼다.

잠깐 내 말 들으시오.

말은 무슨 말을 들어.....

연유나 압시다. 뭣 땜에 이러시오?

곁에 섰던 자가 고개를 숙여 손돌을 찬찬히 살피더니 말했다.

노인인데..... 그만해두지.

손돌이 놓치지 않고, 나는 이 고장 사람도 아니고 문화에서 묵어 갈까 하고 길 가던

사람이오. 당신네가 도적이 아니라면 행인에게 이러는 까닭이 무엇이오?

이 고장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그들은 잠시 속삭이며 무엇인가 의논을 해보더니 한 사내가 말했다.

그럼 길을 가슈.

손돌이 그제야 일어나 옷자락을 털고 꺼진 채로 들고 왔던 발등거리를 찾아 펴고 부러진

몽당초를 찾는 체 지체하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남의 눈을 꺼리는 일이 있나 본데..... 혹 도움을 드려도 좋겠소.? 그들이 겉보기엔 기세가

사나울망정 차림새로 보아 술집 중노미나 머슴들이 분명하니 무턱대고 사람을 해코지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의 일에 상관 말구 길이나 가오.

젠장 공연히 놀랐네. 채 죽지두 않은 사람을 내다 버리라니. 이거 사람이 할 짓이야.....

인석아 말 조심해..... 어서 가라니까, 이 늙은이가 경을 칠려구 이래.

그러는 중인데 그들이 길섶에 내려놓았던 거적이 흔들리면서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려왔

. 한 녀석이 투덜거리며 고개 아래로 내빼는데, 난 모르겠다. 니가 알아서 버리든지 파묻

든지 해라.

다른 녀석도 겁이 난 듯 거적을 피해 돌아섰다.

어라! 저놈이..... 어이 여보게.....

두놈이 차례로 달려 내려갔다. 손돌이 거적을 헤쳐보니 속곳 바람의 여자가 실신한 채 늘

어져 있었다. 몸이 뜨겁고 숨을 쉬는 게 아직 살아 있음이 틀림없었다. 손돌은 잠깐 망설였

. 그도 고개를 쫓아 내려가며 숨찬 목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여보, 여보, 내 말 좀 들으시우, 뒤탈 없게 할 터이니..... 내 말 들어요.

어둠속에서 마주 외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뭐요.....

아직 죽지는 않은 사람인데 인명을 살리구 봅시다.

곧 죽을 거요. 내일 아침엔 시체가 됩니다. 거 역병 앓은 사람이라 버려두 무방해서 버린

거요.

나는 의원 해먹는 사람이오. 회생시킬 수가 있는데 문화까지만 업어다 주겠소? 열 냥 드

리리다.

정말..... 열 냥 있수?

하는 목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과연 그들은 돈 열 냥 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해서 되돌

아온 것이었다.

문화에 가서 모른다면 안되니..... 우선 돈부터 내우.

그러지, 하지만 닷 냥 먼저 주리다. 남은 닷 냥은 문화 가서 드리겠소.

우리두 뒷맛이 썩 좋진 않았는데 홀가분하게 됐군.

두 사내는 멋쩍은 듯이 거적대기를 들치고 여자를 홑이불에만 싸서 업고 손돌의 뒤를 따

랐다. 맨몸으로 따라오는 사내가 손돌의 곁에 서더니 변명조로 중얼거렸다.

쥔 여편네가 어찌나 극성인지 할 수 업이 나섰지요.

색주가의 여종이오?

아니우. 신천서 그래두 제법 인물이라는 창기입니다. 헌데 두어 달 전에 겨드랑이에 종창

이 나더니 시방은 가슴께까지 온통 번져 버렸답니다. 계집이야 흔천이고, 벽촌 농가에 가면

서로들 사가라구 아우성인데 의원을 부른답디까? 색주가 인심이 혹독하지요. 인사불성이

된 것을 골방에 사흘쯤 처박아 두었는데, 우리 주모가 송장 치겠다며 아무도 몰래 산에 갖

다 버리라구 하잖습니까. 그러니 그 집구석에서 밥 빌어먹는 처지에 우리가 어쩝니까.

종창이라면 멀쩡한 병인데 산 사람을 내다 버린다니 천인공노할 노릇이군.

그들은 덕천리에 이르렀고 퇴기 소향의 집을 찾아갔다.

우린 갈라우. 닷 냥 내슈.

줄 테니 염려 마오. 사람이나 들여놓구 가야지.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안에서 신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중문 안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셔요?

음 손돌이란 사람인데, 안어른 계시냐?

손돌 어른이라굽쇼?

그래, 재인말서 왔다구 여쭈어라.

하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신 끄는 소리와 호들갑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오라버니가 웬일유. 읍내 출입을 다 하시구.

문이 열리면서 소복을 입은 다정한 차림새의 오십대 부녀가 나왔다.

소향이 신세 좀 질라구 왔지.

신세는 뭐..... 그런데 밖에 누구하구 같이 왔수?

,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어서 안으로 들이시오.

두 놈이 머리와 다리를 맞들어 대청에 부려놓고 나가는데 뒤따르던 자가 손돌의 곁을 지

나며 손을 내민다. 닷 냥을 떨구어주니 어둠 속으로 내빼면서 그래도 뒤가 구린지 한마딨

기 외쳤다.

복 많이 받으슈.

열 냥이면 계집 하나 싸게 샀수!

고연 놈들.....

손돌이 중얼거리자 소향이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어서 들어갑시다. 아니..... 온통 중치막에 흙칠이니 무슨 일이 있었구려." 소향은 원래 재

령의 관기였는데 스물여덟에 속신 하고소 맞임개 부자의 소실로 들어앉았다가 아들 둘을

낳아주고 이제 주인 잃어 삼년상을 입고 있는 중이었다. 마음이 착하고 일찍이 규중에 들

어앉아 아이를 기른 탓으로 기생의 티는 보이질 않았다. 큰 아들은 의주와 평양을 오가는

장사꾼이고 작은 아들은 약산의 철광에서 감관으로 있었다. 손돌이 대강의 이야기를 전하

자 소향은 하녀에게 아랫방에 불을 넉넉히 넣으라 이르고는 하인을 시켜 의원을 불러 오도

록 했다. 불빛에 보니 여자의 온몸과 안면이 굴골을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부어있었고,

열에 들뜬 채 인사 불성이었다.

의원이 와서 맥을 짚어보고 종처를 살피고 나서 말했다.

지금 함부로 째었다간 생명이 위태하겠소. 그보다는 멍울을 가라앉이구피가 돌도록 해야

됩니다. 나쁜 피를 고름으로 만든 뒤엔 저절로 창구가 터지지요. 우선 경락에 피가 뭉쳐 있

으니 흩어지게 하려면 뜸을 떠서 나쁜피를 잡아먹게 해야 되오. 그 다음엔 압통점을 찾아내

어 진통이 되게 침을 놓아줍시다.

질료를 마친 두에 의원은 처방한 약재를 보내겠다며 하인을 데려갔다. 처방전이 되돌아왔

는데 쇠비름 한줌과 사향, 황백 가루와 복룡간 두 냥쭝을 보냈다. 계랑네 개어 종처의 시발

점인 겨드랑이와 멍울이 섰는 가슴께로 집중해서 붙이라는 것이었다. 날이 밝아 의식이 돌

아오면 우엉씨와 감초와 딱지꽃을 한데 우려내어 따뜻이 데운 꿀물을 섞어 먹이라는 것이었

. 그리고 냉수 찜질을 해주어야 된다고 했다.

손돌은 소향의 집에서 묵었고, 마음 착한 소향은 밤새껏 그 천한 여자의 몸을 씻기고 머

리에 찬 물수건을 얹어주며 간호했다. 열이 차츰 내려갔고 이틎날 아침에는 의식을 되찾았

. 손돌은 환자를 소향에게 부탁하고 재인말로 돌아가며 나중에 꼭 갚으리라 치사를 해줬

으나 소향은 빙긋 웃기만 했다.

저두 모처럼 활인을 거들게 되어 기뻐요.

몸조리만 잘 시키면 건강해질 것인, 자네가 거두어두고 잔일이나 시키면 좋겠네.

알아서 하죠.

이틀 사흘 지나든 동안에 종처의 고름이 터지고 창이 아물기 시작했는데, 부기가 빠져 수

척해진 여자는 본 얼굴로 돌아오자 수려한 미모를 드러냈다. 처음에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

더니 열흘지나 기동하게 되고부터 소향과 함께 바느질도 거들며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여자는 금년 십팔세이며 이름은 묘옥인데 어릴 적에 김씨 성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며 태

어난 곳은 중화였다. 그 아비는 양인이로서 조부가 유학이었으나, 가업을 세우지 못하여 일

찍이 배를 두어 척 사서 쌀을 싣고 다니며 행상을 했었다. 묘옥이 아홉 살 나던 해의 일이

었다. 네 살과 두 살 짜리 남 동생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처녀 적부터 중화에서 소문난 절색

이었다. 그 아비의 동무 중에 양서방이란 자가 있었는데 평안감영에 아는 이가 있어서 현에

나아가 장교질을 다녔다. 그는 진작부터 묘옥의 어머니를 은근히 탐내고 애만 태워왔던 것

이었다.

어느날 밤 대여섯 명의 포교들이 집을 둘러싸고 장삿길에서 돌아온 묘옥의아버지를 체포

했다. 영문도 모르는 어머니는 어린것들을 감싸안고 땅을 치며 울었고 아버지는 무슨 죄길

래 이러느냐고 고함을 쳤으나 포교들은 모양을 내어 팔을 뒤로 꺾고 목과 어깨와 두 손목을

붉은 밧줄로 꽁꽁 묶었다.

죄목은 그맘때에 대동강 어구인 남포 앞바다를 횡행하며 관선의 곡식과 무역선을 습격하

는 수적 패거리들과 내통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아무리 변명했으나 그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다는 장교 양서방이란 친구가 매우 불리한 증언을 했었다. , 거의 십여 년이나 남포에서

부터 해로로 예성강구까지 왕래하면서 한번도 적당들의 피침을 받은 바가 없다는 것과,

가 겨우 곡식 행상으로 가산이 꽤 부유하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증거로서 초도에서

늘 사람이 오가는데 그가 주상들이 수적당들게 바칠 통과세를 미리 거두었다가 내준다는 것

이었다. 묘옥의 아버지는 일단 중화에서 문초를 받고 감영으로 끌려 올라갔다.

평안감영에서는 오랫동안 초도 부근의 수적당에 골머리를 앓아왔던 터이라, 잡혀온 묘옥

의 아비를 엄중히 공초했다.

그가 변명하기를 남포에서 예성강 어귀까지 오가는 동안 그의 배가 한번도 습격받지 않은

것은 원래 장사의 규모가 미곡 몇섬에 지나지 않는 영세적인 소상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습격할 까닭이 없이리라 했다. 또한 가산이 부유하다 함은 말이 안되고 그저 밥술이나 먹는

형편인데, 박한 쌀장수의 이윤으로 오로지 부지런히 여러 고장을 나다닌 탓이라 했다. 그리

고 초도에서 사람이 왕래한다든가 통과세를 걷는다는 것은 전혀 사실 무근인데 간혹 타지방

의 거간이 오면 집에 재우거나 물건을 소개했을 뿐이라며 누누이 밝혔지만 중화군수의 장계

도 있고 하여 용납되지 못했던 것이다. 심한 고초를 겪은 후에 두 달 만인가 있다 풀려나

왔으나 장독이 온몸에 번져 소주에 탄 똥국물까지 마셨고 삼도 달여 먹고 했는데 시름시름

앓더니 반신불수가 되어 누워서 지내는 산 송장이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묘옥이네 모녀는 두 어린것고, 꼼짝 못하고 의식 없이 누워 미음이나 받아 먹고

대소변도 못 가리는 남편을 봉양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품팔이를 해야만 되었다. 먹는 것은

밀기울이요, 입은 것은 속곳 위에 겨우 짚 북더기로 살을 가렸다. 이러한 가난 속에서 양장

교가 드나들기 시작했고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어 집안 형편이 풀리게 되었는데, 어느날 밤

에 인기척으로 잠이 깬 묘옥은 남녀가 도란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굵다란 남자의 목소리

, 그러니 나를 따라서 선천으로 가잔 말일세. 내 이번에 첨사를 따라 진정이 되어 영전

하게 되는데, 자넬 호강시켜주지.

저이야 이젠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나, 그래두 새끼들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걱정말ㅇ, 내 달아아서 처리해줄 테니까.

큰년은 이제 장성했으니 어디 좋은 소실자리나 얻어주면 그게 제 복이겠죠만, 새끼들은

참말 흉년에 시루에다 씌워 내다 버리듯 할 수도 없어요.

울기는 젠장..... 그런 걸 복철이라구 하는 게야. 내 소실자리하구 양자자리를 주선해볼 테

니 염려 말라니까.

양장교와 어머니의 목소리라는 것을 묘옥은 대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치가 떨리도록 분하고 서러워서 제딴에는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며 불끈 일어났다. 방문을

살그머니 열고 부엌에 내려가 식칼을 찾아 들고 두 연놈을 찔러 죽이리라 작정을 했는데 안

에서 발짝 소리를 들었는지 사내가 목소리를 죽였고, 그 어미가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밖에 거 누구냐, 묘옥이냐?

묘옥은 칼 든 손을 불불 떨며 한참이니 그러고 서 있었다.

빨리 들어가 자거라. 밤공기가 차겠다.

묘옥은 툇마루에 칼을 떨어뜨리고 토방 앞을 떠나 집 밖으로 줄달음 질을 쳤다. 방 두 칸

에 헛간 하나 있는 집이니 그들이 정을 통하고 있던 곳은 바로 환자의 방이었던 것이다.

식 업슨ㄴ 살덩이지만 환자는 미음을 떠넣어줄 때마다 입맛까지 다시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

. 묘옥은 맨발로 정신없이 동구를 향해 뛰어갔다. 해풍이 거세게 몰아쳐 불어오고 있었다.

묘옥은 단번에 돌아가서 집에 불을 싸질러버리리라 다짐해보면서도, 실상은 어머니마저 아

버지만큼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른 몫의 길쌈과 밭을 매는 당찬 구석이 있었으되, 묘옥이는 누가 보기에도 아직 어린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결에 오리정에서 묘옥은 갯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조수가 밀

려나가고 있었다. 소금짐과 미곡을 싣는 배들이 창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안개 사이로 맞은

편의 낯선 야산이 아물거렸다. 묘옥은 해송이 어우러진 언덕에 앉아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

. 집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쪽으로 결심이 굳어갔다. 이다음에 세월이 오면 꼭 양가

놈의 원수를 갚으리라고 혼자서 중얼거려보고 나서 당돌하게 뱃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는 진

으로 나갔다. 그들은 갯가를 맨발로 헤매고 있는 눈물 흔적의 작은 계집아이에게 곧 주의를

집중하게 되었고, 그중에 묘옥의 아버지와 함께 장사를 다녔던 사공 하나가 대뜸 알아보았

.

네 웬일로 여기 나와서 서성대느냐?

묘옥은 대꾸 없이 닻줄 박힌 사장에 앉아서 모래만 뿌리고 있었다.

부친은 그냥 그대로냐?

어젯밤에..... 돌아가셨어요.

라고 묘옥은 갑자기 꾸며댔다.

쯧쯧, 차라리 잘되었다. 그런데 여긴 누굴 찾으러 나왔니? 아저씨, 저 배좀 태워주셔요.

? 네 어머닌 집에 계시지?

..... 외갓집 가야 해요. 장사 비용두 없어요.

음 심부름을 간단 말이구나. 가만있자, 우리 배는 오늘 떠나지 못한단다. 내가 누구한테

말해줄 테니..... 아무 배나 얻어 타겠니?

묘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출발하는 배가 대동강의 조수를 타고 흘러 급수문을 지나

고 배곶을 지나 옹진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너는 보산나루에서 내려라.

, 아저씨 고맙습니다.

묘옥을 실은 배는 돛을 올리고 삭시진을 떠났다. 강안으로 흐르듯 지나가는 산천에 눈도

돌리지 않고 묘옥은 모진 결심을 했다. 내 반드시 양가의 목을 베는 날이 올 때까지 무슨

짓으로라도 살아가리라.

옹진에 닿은 배에서 내렸을 때, 묘옥은 두 끼나 거푸 굶고 맨발이었으며 옷 주제도 말이

아니어서 완전히 흉년의 거지 같은 몰골이었다.

수군본영이 있는 붕소리에서 묘옥은 비석거리 앞의 작은 객줏집에 부엌데기 일을 얻을 수

가 있었다. 남자는 배를 부려 경강 상인과 미곡 부리는 일을 하러 다녔고, 주인 여편네는 아

침부터 저녁까지 봉놋방과 술청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리는 부지런한 여자였다. 그러나 성격

은 온화하여 묘옥이와 정이 붙자 친딸처럼 대해주었다. 평화스러운 가운데 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기유년에 큰 가물이 들었고 이듬해인 경술에는 온 팔도가 대 기근 가운데 떨어졌

. 유민은 고을마다 넘쳤고 민심은 흉흉했다. 객줏집들도 모두 문을 닫아 걸고, 남은 곡식

으로 제 식구끼리 연명하느라고 길고도 지리한 여름을 견디었다. 길거리마다 산협에서 몰려

나온 농민들이 가족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서 음식을 구걸하고 다녔는데, 아이들은 아무데나

버려졌다. 이런 중에도 여유가 있는 축은 곡식을 비축해놓고서 모리를 하기에 바빴던 것이

.

묘옥이가 얹혀 있던 집에서도 관에서 내준 구호용 진미마저 바닥나자 맹물에 진간장을 타

마시며 견디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물로만은 견딜 수가 없게 되어 묘옥이와 그 집 아이

들은 들로 개구리와 메뚜기를 잡으러 다녔고, 메도 캤으며 찐드기흙을 파다가 송엽을 넣어

서 흙떡까지 먹었다. 이러는 중에 강령 고을에 색상이 와서 젊은 처녀들을 사들인다는 소문

이 났고, 정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저희 여식을 팔아 여름을 날 궁리도 하게 되었다. 죽는

일보다는 사람이 살아갈 방도를 취하게 되느라고 객줏집 여자가 강령에 나가서 묘옥을 흥정

해왔었다. 얼굴과 나이가 맞춤하여 묘옥은 다른 계집아이들과는 달리 조 열 되에 팔렸다.

여자란 첫 번째의 남자가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상대가 좋건 싫건 별 관계 없이, 여자는

남자를 알았던 그때의 자기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묘옥의 첫 번째 상대는 어둠과 그리고 수렁에 빠지는 것 같던 치욕 그 자체였다. 오래 굶

주려 몽롱해진 가사 상태에서 그녀는 툇마루의 나무 판자가 삐걱이는 소리를 들었다. 헛기

침 소리도 들은 것 같았고 속삭이며 히히닥거리는 여러 사내들의 목소리도 들은 것 같았다.

어둠속에서 우람한 사내의 몸집이 장승 도깨비처럼 우뚝 서 있었던 듯했다. 열려진 문으로

어둠 위를 흘러 지나가는 개똥벌레들의 음산한 빛 조각들이 내다보였다. 어둠이 그녀의 옷

을 벗기고 그리고는 덮쳐 눌렀다. 묘옥은 사지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 얼굴을 옆으로 돌리

고 눈을 감았다. 때에 전 베개에서는 여러 사람의 머리카락 냄새가 났고, 그 위에 눈물을 끊

임없이 적셔야 했다. 장승 도깨비 같은 자가 옷을 추스르고 나가자 또다른 몸집이 들어섰다.

묘옥은 이제는 사뭇 눈을 똑똑히 뜨고 올려다보았다. 검정 더그레 자락이 희미하게 보였는

데 그는 들어올 때부터 끈을 푼 바짓자락을 잡고 있었다. 또다른 자가 들어섰다. 그는 묘옥

의 몸을 신기한 듯이 쓸어보기도 하고 손에 거칠게 쥐어 보기도 했다. 묘옥이 드디어 참아

왔던 오열을 터뜨리자 사내가 중얼거렸다.

미안하구만, 군역 나와서 내리 삼 년을 여자 손 한번 쥐어보지 못했다네.

오래된 못에서 꿀럭이며 솟아오르는 물방울철럼 그 피로하고 주눅든 음성은 묘옥의 서러

움을 가라앉혔다. 그날 밤에 겪은 네 사람의 사내가 그 여자에게는 동일한 한 사람으로 여

겨지는 것이었다. 묘옥은 이러한 여러 밤을 거치면서 평산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안성골의

잠채하는 금광 주변에 있는 창가에 팔렸다. 거기서 하천 광부들의 노리개 노릇을 하다가 신

천으로 옮겨온 것이 일년 전이었다.

소향은 비오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오히려 모질고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는 묘옥의 흐트러

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이 사람아 참말 모질고 독하기도 허이. 그험한 고초를 겪으면서 자진하지 않구 살아

온게 용하네. 이젠 나하고 같이 살지 뭐. 이것두 인연인데.

묘옥은 바늘을 들어 짧아진 등잔의 심지를 돋구었다. 그리고 동정에 침착헤게 바늘을 꽂

으면서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저는 은혜와 원한으로 한 세상을 살아온 여자예요. 길에 내버려져 죽고야 말 천

한 목숨을 살려주신 어른의 은혜에 꼭 보답해여만 합니다. 그 어른께서 늙마에 홀로 계시다

니 삼 년 동안 몸종 노릇이라도 하여 보은하겠습니다. 그리구 언제라도 이 한맺힌 원수는

갚겠어요. 그때까지는 제가 세상에 살아야만 하고, 그래선지 쉬이 죽어지질 않는군요.

소향은 저 연약하고 작은 여자의 어디서 그렇게 서릿발 같은 매서운 집념이 솟아나는지

놀라웠다.

원수는 무슨.....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그 사람들도 이제는 죽었을지두 모르네. 다 전생의

죄이려니 잊고서 음덕을 쌓노라면 나처럼 마음이 편안해질 거야.

아닙니다. 제가 작년에 평산을 떠나면서 중화 고을에 들러 수소문을 다 해보았습니다.

연놈들은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버려둔 채 선천으로 떠나서 아버지는 돌보는 이 없이 누

운 채로 돌아가셨답니다. 동생들은 경강 상인들이 어디론가 데려갔다는데 종으로 팔아치웠

을지두 모르지요. 들리는 얘기로는 선천서 어머니가 젊은 계집에 밀려 버림을 받았답니다.

아마 저자를 헤매며 유리걸식을 하다가 미쳐서 죽었을 거예요. 양가놈은 지금 관에서 나와

강서엔가 산다는데 아주 대가를 이루었답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태언난 것이 못내 한

스럽지요.

묘옥은 한달 동안 소향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 부기도 빠지고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으며,

더구나 술 없고 사내 등쌀에 시달림 없는 안정을 갖게 되자 한창 나이의 규수처럼 피었다.

소향이 함께 지내자고 달랬지만, 묘옥은 끝내 손돌 어른께 찾아가겠다고 주장하게 되어 하

는 수 없이 심부름하는 자를 딸려서 문화 작은 잿말로 보냈다.

손돌 노인은 찾아온 묘옥을 보자 몹시 당황했다. 남의 눈이야 제 맘이 그렇지 않으니 꺼

릴 게 없다더라도, 우선 지나는 인심으로 가볍게 마음 써준 일로 종을 자처하며 들어선 묘

옥의 고집이 너무 지나치다고 느꼈던 때문이었다. 묘옥은 손돌 노인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부엌에 들어가더니 그릇을 내어 씨고 걸레로 방의 묵은 때도 벗기고, 쌀을 안쳐 밥도

짓고 그리고는 상을 보아 마루에 놓은 뒤에 호미를 찾아 들고들로 나가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조받을 매고 돌아와서는 저녁에는 인근에서 바꿔온 면화의 씨를 고르고 물레를 자았

.

손돌은 적막하고 흉가 같던 집안에 사람의 기척이 생겨나 온통 따스한 훈기가 감도는 것

을 느꼈다. 손돌이 묘옥을 돌려보내려던 생각은 겨우 하룻동안에 부드러운 감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묘옥이 찾아온 이튿날 아침에 손돌 노인은 지게를 지고 서립문을 나서다가 부엌에서 밥을

안치고 있는 묘옥에게 말을 건넸다.

얘야, 내가 솔가지를 좀 쳐올 테니 먼저 밭에 나가지 말구 기다려라.

예 아버님, 아예 진지를 들구 나가시지요.

아니다, 나무가 없는데 뭐.....

손돌은 눈꺼풀이 뜨거워졌다.

손돌과 묘옥의 수양부녀 관계는 그렇게 자연스레 이루어졌던 것이다.

장충의 딸이며 길산의 누이인 박서방댁은 자주 오락가락하며 묘옥과 가깝게 지냈다. 묘옥

의 됨됨이가 전신은 창기일망정 얌전하고 상냥했으므로 누구에게든 인심을 잃지 않았고 공

연히 비쭉대던 마을 아낙네들도 빨래터나 우물가에 끼워주고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게 되었

.

길산이는 송화 읍내의 색주가에서 박대근이, 갑송이들과 헤어져 혼자서 밤길을 걸었다.

송에서 까막내에 이르는 오솔길은 중천에 높이 솟은 달빛으로 구불거리며 뻗어나간 것이 훤

히 보였다. 들판에 희게 피어난 갈대꽃과 소나무잎사귀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소리로 길

산은 취중의 흥취가 쾌적하였다.

"새벽 서리 지는 달에 외기러기 슬피 울 제 반가운 님의 소식 행여 올까 바라더니, 창망

한 구름밖에 빈 소리뿐이로다."

흥얼흥얼 노래하면서 갈대밭을 돌아드는데, 까막내마을의 불빛이 점점이 가물거리고 있었

. 길산은 내처 큰잿말로 올라가기에는 밤이 너무 늦다 싶어 까막내 누이 집에서 자고 갈

작정을 했다. 까막내와 작은 잿말은 개천의 이편 저편이었는데, 까막내는 주로 갖바치라든가

옹기쟁이, 수철쟁이 같은 장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다.

길산이 누이의 집 앞에 불 꺼진 집은 고요했고, 마루 밑에서 쫓아나온 삽사리가 컹컹 짖

어댔다.

"쉬이, 형님 계시우....."

불은 꺼진 채로 안방문이 열리면서 아낙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길산이냐?"

", 나야"

"네가 웬일루 이 밤중에 내려왔니?"

"아니 장에서 오다보니 길이 늦었수."

"누이가 삽짝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느이 매부는 봉산 나가셨어. 비단신하구 가죽신 열 켤레를 약조한 날짜에 대이겠다며 황

급히 나갔는데, 여태 안 돌아오네."

"발걸음이 잽싼 양반이니 길 걷기에 늦춰졌을 리는 없구. 뭐 어디서 좀 놀다 오겠지." "

그 양반두 노름 좋아해 야단이다. 그저 개뼉다구만 봐두 골패짝인 줄 알구 덤벼들 거야." "

어머닌 가셨수?"

"낮엔 무꾸리가 모두 끝났대. 올라가셨지 뭐. 저녁은 먹었니?" "자리나 빨리 깔아주어.

곤해 죽겠네."

", 너 총대 어른 만났뵜지?"

"지난 봄 연희 떠날 때 이후론 통 뵙지 못했네. 여름내 농사 거드느라구 뭐 틈이 났어야

. 잘됐군. 낼 아침에 인사 문안이나 드리고 올라가야겠네." "총대 어른이 너를 여간만 생

각는 게 아니란다."

"나두 알어. 헌데 참, 누가 왔다면서..... 새댁이라든가?" "새댁이 아니야. 너두 왜 들었지.

신천서 다 죽게 된 창기를 구완해 냈다는 소문 말이다." "들었어."

"그 여자가 지금 총대 어른을 보살펴 드리구 있는데 정말 어느 집 규수에 못지 않더라.

하두 참해서 그 여자가 언제 창기 노릇을 했는지 못 믿겠데." "뭐 태어날 때부터 창기가

따루 있겠수? 그게 다 성정 나름이구 사람 나름이지." 하면서 길산은 은근히 그 여자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새벽녘에 그들은 잠이 들었는데, "문 열어! 빨리 문

좀 열라니까."

하고, 밖에 와 찾는 낯익은 목소리에 얕이 잠들었던 박서방댁이 먼저 깨어났고 뒤이어 길

산이가 일어났다.

"형님 목소리 같은데."

"아니, 저이가..... 무슨 일이 있었나."

두 사람이 달려나가 문을 여니, 온통 땀과 흙투성이의 박서방이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도

리질을 하였다.

"어휴,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냉수나 한 대접 가저와."

박서방은 떠다 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더니 그제사 좀 가라앉는 모양이었다.

"안악 부처고개에 화적 났네. 그것두 서너 명이 아니라, 수십명이야." "구월산 깊은 골에

화적대가 몇대 있다는 소린 들었지만, 정말인 모양이네." "정말이여. 내 한두 놈씩 고개를

지키는 녀석들은 겁이 안 나더니만 이건 작당이 여럿이더라니까. 점심때 한천을 지나면서

간밤 닭이 울 무렵에 안악 외촌의 부잣집 두 채를 분탕질하고 불을 놓았다는 소릴 듣구두

설마했었네. 헌데 오후 좀 늦어서 부처고개를 지나오는데 포교들이 쪽 깔리구 삼엄하더란

말야. 보니까 고개 아래 장사꾼들의 시체가 즐비한데 거적을 덮어놓더군. 참상이 눈뜨고 못

보겠데. 좀 꺼림칙했지만서두 뭐 내야 신 판 돈 몇냥 가진바에 두려울 것 있겠나. 내처 걸어

서 내고개 능선을 타구 수렛고개를 타넘는 지름길을 택했지. 거기서 말일세..... , 그놈들을

딱 마주쳤지 뭔가. 짐들을 지구 숲속으루 떼지어 지나가다가 그대루 맞닥뜨린 거야. 잡혔

. 그냥 사정없이 쳐죽이려구 달려드는 것을, 나두 지금 관에 쫓겨서 피신하는 중이라구 덤

벙댔지. 그랬더니, 하긴 떳떳한 놈이 밤에 깊은 산길을 돌아다닐 리가 없다구 공론이 돌아가

. 머리 되는 놈인가가 짐을 지구 자기네를 따라오더군.

짐을 지구 한참 뒤따르다가 숲이 울창한 골에 들어서자 그대로 산비탈 아래루 뒹굴어버렸

. 몇놈이 쫓아 내려오는데, 나는 개천으루 뛰어들어가 급류를 타구 내려왔어. 마을이 보이

길래 정신을 차리구 살펴보니 온 정말이더군."

"어디루 가는 길이었을까?"

"아마 구월산 아사봉으루 들어가는갑데."

"구월산에 여러 패거리가 있다는 건 벌써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일 아니우. 우리게서두

왜 재작년에 장단서 사람을 패죽이구 달아난 놈이 화적당에 들어 있는데 제 모친을 만나러

왔던 적이 있잖우."

"여하튼 생고생을 했네. 밤길 걷질 말아야겠어."

그들은 근자에 부근에서 일어난 도적들에 관한 소문을 얘기하다가동이 훤히 트고서야 자

리에 들었다.

길산이는 이튿날 느지막이 일어나 작은 잿말로 올라갔다. 손돌 노인의 초가에 이르러 열

린 삽짝 안을 들어서니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물려진 상이 치워지지 않은 채로 마당의 삿

자리 위에 놓여 있고 마루 위에는 벗겨놓은 콩껍질이 너저분했다. 길산이가 안방 쪽을 기웃

이 넘겨다 보는 중인데 등뒤에서 여자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셔요?"

길산이는 대답없이 돌아서서 여자를 쳐다보았다. 머리를 곱게 빗어 제머리로 얹어두고 화

장기없는 얼굴은 해말간데 볼이 붉고 이마가 훤칠했다. 무명 옷차림일망정 몸매가 나긋나긋

해 보였다. 길산이는 우물쭈물하며, "저어, 총대 어른 계신지요....."

하며 눈길을 거두었으나,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묘옥의 시선에 눈을 맞추었다.

"채소밭에 거름을 주고 계신데 곧 돌아오셔요. 좀 앉으셔요." 길산은 마루에 걸터앉았다

묘옥의 떨어져 앉아 콩깍지를 까고 있었는데, 길산은 얼결에 말을 붙였다.

"올해 조농사가 아주 실하게 되었는데요. 이삭이 크고 굵어서 평년보다 섬지기나 더 나오

겠습디다."

", 환곡 넣을 만큼은 빠지겠지요."

하고 나서 묘옥이 머리를 돌려 이윽히 길산을 넘겨다보았다.

"지난 봄에 신천 교탑거리에서 탈판 노신 적 있으시지요?" "지난 봄뿐인가요. 여러 차례

됩니다."

"그때 구경 나갔었어요. 동행에게 들어서 큰잿말 사신다는 rjten 알구, 또 까막내 언니에

게서두 들었어요."

길산이는 공연히 머리를 긁었는데, 대번에 얼굴이 화끈 달았다. 할말이 없어 무덤덤히 앉

았는데, 여자가 부엌 시렁 위에서 삶은 햇밤이든 소쿠리를 내다 주었다. 소쿠리를 길산이 앞

으로 내밀면서 묘옥은 누나처럼 환히 웃었다.

"무료하실 텐데, 이거나 들어보세요."

고개를 들어 눈길을 맞추지 않으려고 외면하며 쩔쩔매는 길산의 순박한 모습을 보자,

옥은 방글방글 웃었다.

"어제 무더리 가셔서 큰일을 치르셨다죠?"

"? 큰일은 무슨..... 장터에 타관 무뢰배가 행패를 놓아서....." "싸움두 잘하시나 봐요.

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한 걸요." "총대 어른두 아십니까?"

"그럼요, 전하는 분의 얘길 듣고는 한참 동안 웃으셨어요." "거 참 낭팰세! 꾸중하시겠는

."

울타리 밖에서 잔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손돌 노인이 들어섰다. 머리와 수염이 온통 하얗

고 허리는 구부정했으나 아직 눈빛이 총총하여 정정해 보였다. 한 손에는 뒤웅박을 매단 막

대와 거름을 비운 나무통을 들고 있었다.

"기간 평안하셨습니까?"

길산이 밤을 입속에 가득 넣은 채 엉거주춤 일어났고, 손돌 노인은 웃는 낯으로 끄덕였다.

"그래, 모두 별일들 없지....."

"예에, 그저 그러루합니다."

"그저 그렇긴..... 타처 사람들을 두들겨 보냈다면서?" "아니..... ..... 해주서 장꾼들이....."

"거참 얘기만 들어두 재미있더군. 그래 간밤엔 질탕하게 놀았겠군." "아뇨, 까막내서 잤습

니다."

"손돌 노인이 마루에 올라앉자, 길산은 박대근이와 의논한 것에 관하여 대략 얘기했다.

묵히 듣고 난 손돌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상인과 약계를 맺고 연희를 하게 되면 이익은 많겠지만, 마을 살림은 폐하게 될 게야.

렇게 되면 일년 사시사철을 뿌리없이 헤매게 될텐데, 이 마을에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

들은 반대할 게다. 더구나 우리는 반은 관에 매인 몸들이 아니냐." "송상 수하루 들어가서

일부는 장사두 하구 일부는 연희에두 나가구 하면 될게 아닙니까."

"아니다, 관의 허락없이 호적을 함부루 송도부에 옮길 수도 없잖은가. 조상적부터 대를 이

어 살아오던 고향을 버리는 것도 그렇구......"

"고향이라야 토방 몇칸에 땅 서너 뙈기인 걸요. 그리고 언제까지 우리네 재인들이 관의

눈치나 보며 살겠습니까. 시방은 세월이 다릅니다. 듣자 하니 거사패도 있고 괴뢰배들도 있

는데, 요즘은 모두 장사도 하며 재주도 팔고 합니다. 이왕 내놓고 팔 바에야 광대 물주인들

어떻습니까."

손돌은 한참이나 상체를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가, "정 그렇다면 젊은이들끼리 상의해서

이번 철에 한번 상인들과 같이 나가보지 그래." "해주 관시놀이에 나가기 전에 문화, 신천,

안악장들을 어디 한바퀴 휘돌아볼까 합니다." "벌이가 괜찮고 그 사람들도 믿을 만하다면

이번 출행 계회가 있을 때 한번 의논들을 해보도록 허지."

"이만 올라가겠습니다."

", 점심때가 가까웠는데 밥이나 먹구 올라가잖구." "아닙니다. 집에서두 기다릴 테구 갑

송이두 돌아왔을 텐데 만나서 얘기를 들어봐야죠." 길산이가 나오려니 부엌에서 물 묻은

손을 치마폭에 감싸쥔 묘옥이 달려 나왔다.

"아이, 지금 막 밥을 안쳐놨는데 점심 들구 가시잖구." 길산이는 그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손돌네 집을 나섰다. 좀 멀어졌겠다 싶어 뒤를 돌아보니 사립 앞의 텃밭 모퉁이에 서서 이

쪽을 바라보고 섰는 묘옥의 작은 몸이 보였다. 묘옥은 길산이가 돌아보자 부리나케 울타리

너머로 사라져버렸는데, 그는 어쩐지 뜨거운 물을 삼킨 때처럼 명치가 후끈거렸다. 큰잿말로

올라가는 양쪽의 숲속에서 벌어진 밤이 떨어지는 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3

 

 

 

박대근이와 길산이네가 추산 마루턱에서 만나 함께 문화 읍내로 들어가자고 약속한 날이

되었다. 큰돌네 패에서 네댓명, 장충네 패에서 길산이, 갑송이를 위시한 칠팔 명이 일대를

이루어 행장들을 차리고 길을 나섰다. 새벽에 광대산에 올라 등성이를 타고 추산 마루턱으

로 내려갔다.

등성이를 걷고 있는 그들의 아래로 안개가 흩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한 시오리 걷고 나니

까 계곡 옆을 지나는 샛길 쪽으로 포교가 포졸들을 거느리고 앉았다가 황급히 흩어지는게

보였다 육모방망이가 아니라 창과 환도를 가진 꼴이 제법 삼엄하였다. 포교가 바위에 일어

서서 그들을 향해 외쳤다.

"왠놈들이냐?"

그들은 모두 더 나아가지 못하고 뚜릿거리고만 있는데, 재차 고함이 들렸다.

"어디서 오는 놈들이냔 말이다."

"재인마을서 오는 길인데, 왜요.....?"

앞섰던 큰돌이가 대답했다.

"광대들이라구?"

"예 읍내장에 가는 길입니다."

털벙거지들끼리 뭐라구 잠깐 수군대더니 또 외쳤다.

"한 놈씩 이 앞으로 지나가거라. 일일이 기찰해볼 테니....." "온 제미랄 ..... 기찰은 다 뭐

, 보문 모르남. 뒤져봐야 두 쪽인데 호통질은....." "저 뒤에 막 쳐 놓은 꼴 봐라. 밤새우고

지킨 모양인데." 수군대며 큰돌이 먼저 그들께로 다가갔다. 길 양쪽에서 창끝이 당장 꿰일

듯 노리며 큰돌의 좌우로 불쑥 솟았다. 여차직하면 맞창을 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 어유 이거 이러지들 마슈. 공연히 실착했다간 산적꽂이 되겠네." "뒤져봐."

포졸 하나가 잽싸게 달려와 장고통을 멘 큰돌의 아래위를 주욱 흝었다. 전대도 한번 불끈

쥐어 흔들어보고 행전도 주물러본다.

"그 다음....."

하는 식으로 광대들 전원이 몸뒤짐을 당했다. 갑송이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체 왜들 이럽니까요?"

그들의 호패를 일일이 조사하고 나서, "화적당이 출몰한 걸 모르는 모양이군."

하며 포교는 돌아서버리는데 나이든 포졸 하나가 나서서 설명했다.

"이 사람들아, 죽구 싶어서 그래? 큰길루 다녀야지 산으루 떼지어 다니다간 먼 데서 살

맞아 죽는다구."

"화적패가 구월산 중에 드문두문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뭐 가진 게 있어야 낯짝이라두

보지요."

"자그마치 스무명이 떼를 지어 다닌다는데 요사이 자비령 쪽에서 패가 갈려서 구월산으로

옮겨 왔다는 게야."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수작하고서 그들은 등성이를 넘었다. 아래로 송화와 장연서 오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가

보였고, 대근이네 상단이 숲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쉬고 있는게 보였다. 짐 벗은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보상들은 모여 앉아 담배를 피웠다. 박대근이가 마주 나왔다.

"약속을 지켜줘 고맙수. , 이건 우선 약조금인데 다섯 꿰미 오십냥이우." "원 이렇게 후

하게 주십니까."

큰돌이가 엽전꿰미를 받아들며 황송해하였다. 쌀 몇말에 하룻밤을 새워 잔치 흥을 돋우고,

부역 대신에 관아에 불려가 갖은 조롱과 멸시로 해내야 되었던 연희 때와는 달랐기 때문이

었다.

"자 모두들 가세."

그들은 술렁술렁 짐을 지고 말에 싣고 하면서 문화쪽으로 내려갔다. 우선 보상들이 앞서

고 뒤에 짐 실은 말들이 따라갔고, 사이사이에 자위하는 장정들이 한 사람씩 끼여 섰다.

산이와 갑송이, 대근이는 맨 뒤에 쳐져서 쫓아갔다. 길산이가 말했다.

"헌데 소문 들었습니까. 자비령 쪽에서 산사람들 패거리가 구월산으로 옮겨왔답니다. " "

, 객줏집에서 들어소. 보나마나 농사짓다 주림을 참지 못해 작당한 오합지졸들이겠지.

그만한 놈들쯤은 스스로 막아낼 준비가 되어 있수."

"만만히 여겨지진 않습디다. 내 매부가 만나서 혼쭐이 빠졌던 모양인데 우두머리의 덩치

가 제법 장하더랍니다."

박대근이가 껄걸 웃어젖혔다.

"장총각답지 않게 겁을 먹는 거요?"

"성님은 우릴 뭘루 보우?"

갑송이가 불끈했고, 길산이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마을에서도 몇 년 전에 죄를 짓고 산으루 들어간 자가 있었습니다. 헌데, 새루 왔다

는 자들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갑디다. 인명을 가벼이 아는 짓으로 보아 지금 산중에는 그

자들 뿐일 것이오. 기왕에 서넛씩 식솔을 거느리던 자들은 죽었거나 다른 데루 밀려났을 게

란 말이지요."

박대근이가 말했다.

"장총각..... 도적 중에도 큰 도적이 있습니다. 시골 부자나 살상하는 그런 도적이 아니

....."

"큰 도적?"

박대근이가 빙긋 웃었다.

"차차 사귀면서 내 얘기해 주리다."

박대근이는 더 이상 얘기를 계속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천읍 외곽인 죽령방 부근에 이르

러 읍내로 들어가지 않고 짐을 풀었다. 대근은 차인 하나에게 부담을 지운 말을 끌게 하고

서 아전을 만나러 관아로 들어갔고, 큰돌이네는 풍류를 잡히며 읍내 장터를 길놀이하고서

죽령방의 풀밭으로 돌아갈 적정이었다.

죽령방의 드넓은 풀밭에는 곧 장을 벌일 준비가 되었고, 각종 연희를 위한 놀이판이 치러

졌다. 피리와 날라리의 방정맞게 들까부는 소리와 장고와 꽹매기 때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앞세우고, 광대들이 더덩실 춤을 추면서 문화 읍내를 빠져나와 죽령방으로 향했는데, 읍내

사람뿐만 아니라 장을 보러 나왔던 장꾼들과 들일 하던 초군 농부들이 호미를 던져두고 그

들의 뒤를 따랐다.

박대근이는 향청에 들어가 문화의 이방이란 자를 만났고, 부담마에 실어온 선물을 바쳤다.

이방은 그것으로는 부족한 표정이어서 파장뒤에 장세 오십냥을 따로 바치리라 했다. 이방은

흡족하여 상방에 통인을 시켜 현감께 아뢰고 개시를 허가했다.

광대들이 죽령방에서 놀이판을 벌이고 새 장도 선다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번져서 드디어

정오쯤에는 훈련원을 지나오는 길이 사람들로 하얗게 뭬워졌다. 놀이는 오전 한차례 그리고

오후에 한차례 있을 예정이었고, 파장 정에 씨름판을 벌이기로 했다. 박대근이는 갑송이의

힘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우승한 자에게는 젊고 힘센 나귀 한 마리를 내리리라 공표했는데,

그 나귀는 상단의 재가막 옆에 오색실과 조화며 구리방울로 장식되어 매어져 있었다. 읍내

의 장이 무더리에서처럼 몽땅 죽령방으로 옮겨온 형편이었다. 한편에서는 거래가 활발한데,

놀이판 주변의 신명은 이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드높이 부풀어 있었다. 음식장수와 술장수

들이 놀이판의 사방에 와서 멍석들을 깔아놓았고, 관객들은 놀이판 주위에 빽빽이 안고 서

고 했는데, 탈판을 보아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대개는 모두들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신들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춤사위가 바뀔 적마다 사람들 중에 흥이 센 자가 뛰쳐

나와서 광대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하였다.

다음 마당으로 넘어갈 때 길산이는 땀에 흠뻑 젖어 놀이판 뒤의 개복청으로 돌아와 탈박

을 벗고 탁주 한 사발을 마셨다. 박대근이가 다가왔다.

"이만 하면 기천냥 이문은 문제없을 듯하오. 내 당신들게 백냥 더 주리다. 무더리 때보다

훨씬 장이 번성했고 이번 장에는 특히 사슴가죽을 많이 구했소." "씨름판은 어떻게 되었지

?"

"끝날 때가 되었수."

"그리로 가봅시다."

그들은 연회장을 천사산 쪽으로 보이는 개천가 모래밭에 세워진 씨름판으로 갔다. 낮술을

들이켜서 불콰해진 사람들이 제 동무를 응원하는지 고래 고함을 내지르고들 있었다.

빙 둘러앉은 가운데로 모래를 두텁게 깐 씨름판 위에서 웃통을 벗어 부치고 다리에 샅바

를 감은 두 장정이 황소처럼 씨근대며 돌아가고 있었다.

"메태기를 쳐버려라!"

"뭘해, 걸어 걸어! 안으로, 그렇지."

갑송이는 이미 뽑혀진 다섯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앞줄에 버티고 앉아 있었는데 상대는

둘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자도 갑송이보다 몸집은 작았으나 눈꼬리

가 매섭고 목은 짧으며 어깨가 다부지게 벌어진 것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 사내의 뒷전

에 장정 서넛이 않아서 떡을 돌려 먹고 호리병에 담아온 술을 나눠 마시고 하는 품이 일행

인듯하였다. 그들의 차림새로 보아 농부들은 아니고 보상들인 것 같았는데 패를 떠나 별개

로 다니는 자들인 모양이었다. 드디어 심판을 보는 박대근이네 행수 차인이 나서서 말했다.

"자아, 이제는 끝으로 남은 두 장사가 나와서 결판을 내겠소. 이긴 사람은 저기 천리를 달

리는 청노새 한 필을 상물로 받게 되오. 자아 투전 걸오볼 사람은 양쪽 멍석에 돈들을 걸어

두시오."

"좋다, 난 열 푼을 동편에 건다."

"나는 서편 닷 푼이오."

"몸집 보아서는 저쪽이 우세하지만 이쪽은 동작이 날렵하니 승패를 가리기가 곤란한데.....

하지만 이쪽을 거네. 우리 어울려서 내지. 누구 스무 돈 곱내기할 사람 없수?" "좋소, 이기

면 사십 문..... 나는 저쪽에 걸었수."

상사람이나 양반 한량들이나 구별없이 뒤섞여 돈을 멍석에 내던지는데, 관리하는 자가 지

표를 셈대로 몇 장씩 나눠주었다. 서편에 자기네 일행과 앉았던 장정이 일어나며 눈짓을 하

니 뒷전에 앉은 자가 슬쩍 그자의 손에 무엇인가 건네주며 속삭였다.

"감동이..... 손 안에 꾹 움켜쥐고 알았지?"

"글세 알았다니까."

감동이란 정정은 그 이름대로 온몸이 까맣게 차돌처럼 반들거리는데 상대들 바라보며 빙

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가 손 안에 쥐고 있는 것은 끝이 뾰족한 자갈 돌맹이였다. 커다란 손

에 끝을 감추고 주먹을 쥐고 있으니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털이 곱게 빗겨

진 청노새를 마치 자기 것이나 되었다는 듯 싱그레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갑송이도 픽 웃으

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의 샅바를 쥐고 허리를 굽혔다. 심판은 두 사람의 자

세가 안정되자 두 손으로 등을 탁 두들겼다. 그러자마자 갑송이는 샅바를 잡은 손에 힘을

넣어 상대를 번쩍 치켜들었다. 힘으로는 결코 상대가 되지않았다. 다리 걸어 후리는 것조차

필요가 없을 듯 했다. 감동이는 안간힘을 쓰면서 가까스로 허리를 굽히며 궁둥이를 뒤로 죽

뽑아냈다. 그는 한 손으로만 갑송이를 잡고 남은 손은 몸의 중심이라도 잡으려는 듯이 공중

에서 흔들흔들하고 있었다.

"어어.....라랏차차....."

하며 갑송이가 다시 끌어당기면서 들어 태기를 치려는 순간인데, 감동이는 휘젓고 있던 돌

듯 손을 뒤로 치켰다가, "에에에라라랏차!"

고함소리로 엄벙뗑하면서 갑송이의 무릎관절뼈 위에다가 모질게 콱처박았다.

"어이쿠."

갑송이의 육중한 상체가 기우뚱하는가 싶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감동이의 발걸이가 스리

슬쩍 파고들며 기울어진 종아리를 휘감고 밀어냈다. 갑송이는 감동이를 부여안은 채 뒤로

태산이 무너지듯 넘어갔다. 감동이는 앞으로 쳐박힐 때 모래땅을 짚으며 쥐고 있던 돌맹이

를 모래 깊숙이 넣어버렸다. 관중들의 감탄소리와 내기에 이긴 자들의 환호가 떠들석했다.

"신묘한 기술이다!"

"문화에 장사났네, 항우 손자 났어."

"덩치가 크면 고기값이라두 할 것이지, 뜨건 물 맞은 개좆 사그라지듯 폴싹 넘어지니.....

젠장할 돈 잃었네."

궁둥이를 땅에 대고 어이없이 멍청하게 퍼질러앉았던 갑송이가 그제서야 벌떡 일어나며

감동이라는 자의 손목을 왈칵 쥐었다.

"끼놈! 네 손안에 뭘 가지고 있나 보자."

감동이란 자는 두 손을 활짝 펴 보이며 욕설을 터뜨렸다.

"이런 멧돼지 같은 놈아..... 졌으면 곱게 물러날 것이지 골딱서니엔 똥만 가득한 놈이 웬

시비야 시비는 ....."

갑송이는 아직도 분간이 안되는지 벌겋게 부풀어 오른 무릎을 내려다 보다가 이번에는

자신있게 감동이의 허리를 끼였다.

"허리를 삭정이 꺾듯 아주 분질러 놓을 테다."

"어어 ..... 이놈이 씨름에 지니까 생사람에게 행팰세." "저런 예의 없는 놈을 봤나. 풍퓨

잡치게 씨름판에서 싸움질이니." "저런 놈은 무리매를 놓아서 관가루 넘겨야 한다."

감동이의 일행이 소리치며 일어섰으나 갑송이는 이미 상대를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고 있

었다. 박대근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끝난 승부다! 말을 내줘라."

"갑송아 내려놓아."

길산이의 말이 들려오자 갑송이는 노기를 참느라고 붉어진 얼굴로 상대를 거칠게 내려놓

았다. 감동이는 어지럼증으로 갈피를 못 잡고 비슬대면서 서 있었다. 갑송이가 길산이께로

다가들며 투덜댔다.

"내 무릎 좀 봐라. 저 녀석이 손에 돌멩이를 감춰 들고 있다가 박은거야. 이런 씨름판이

어디 있냐."

"알구 있었다. 물증이 없으니 네가 진 게야."

"노새를 내 줘야 잖아. 나한테 건 사람들게 면목도 없구 말야." "정 그렇다면 나중에 골

탕을 먹이자."

씨름판이 끝났어도 사람들은 내깃돈 헤아리기에 흩어질 줄을 몰랐고, 감동이 일행은 청노

새를 끌고 장터 가운데를 헤치고 나아갔다. 그들은 읍내의 주막으로 갔는데, 역시 장사치 차

림의 사내가 두 사람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손짓하여 불렀다. 술상머리로 끼여

앉으며 감동이가 말했다.

"그 녀석 곰처럼 힘만 셌지, 새대가리더군."

"그예 지분덕거려놓았군."

"화해가 되면 사귀어서 길동무가 되란 말야. 그리군 사처에도 같이들고 주막에도 함께가

..... 안악까지만 동행을 하란 말야."

"길마다 포교들이 좍 깔려서 오가는 사람 기찰이 자심하답디다." "걱정없네. 어디 사람

얼굴에 표가 싀어 있다든가. 우리께 담뱃짐이 있으니 그거 다 싣구 슬슬 뒤쫓아가지."

"장사치구 꾸미구 화연봉 쪽으로 먼저 떠났네. 거 봉수대 마루턱에 후미진 골이 있네." "

잘 되겠군 양산마루를 타구 배고개만 무사히 넘어가면 자취두 없을테니." "이자들이 아마

신천으로 빠지든지 아니면 이 길로 안악으루 들러서 봉산 황주 가서 짐을 풀어 송도루 보낼

텐데 그때 들이치는 게 낫지 않을까." "봉산부터는 우리 구역이 아니구, 또한 자비령 패거

리들께두 의리가 아닐세. 더구나 월당 나루를 무슨 수로 넘나들겠나."

"진에서 군졸들이 모조리 풀려나오고, 각 현마다 포졸을 풀었다는데....." "까짓 거 마주

치면 배어 죽이고 달아나지 뭐 대수야." "하여튼 우리는 감동이 자네만 믿구 화연봉으로

뒤쫓아갈 테니까....." "염려 마슈. 내 꾀가 들어맞을 테니."

앉았던 두 사내들은 술잔을 놓고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꾸리더니 주막을 나갔다. 감동이

가 중노미에게 소리쳤다.

"여보 술상 물리구..... 장국밥이랑 탁주 너 되 너비아니 두 근 구워 내오슈." 그들이 밥에

술에 부지런히 먹고 났을 때 죽령방에선 파장이 되었는지 장꾼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자네는 나가서 상단이 어느 객주에 묵는가 알아보게" 감동이가 지시했고, 한 사람이 주

점 밖으로 뛰어 나갔다. 얼마 후에 돌아온 자가 말했다.

"그자들은 건너편 찔레 울타리의 초가하구 그 옆집에 나누어 들었는데, 시방 저녁 먹는

중이데."

"알았어"

감동이네들은 담배 한 대씩 담아 피우고 나서 사방이 제법 어두컴컴 할 때 일어섰다.

"슬슬 가보까."

그들은 일행이 남겨둔 장사보따리를 노새 등에 얹고서 길을 건너갔다. 길게 연이어 달린

방마다 보상 차인패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식사중이었고, 길산이, 갑송이, 대근이 등이 술

청에 나와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게 쉽게 눈에 띄었다. 감동이는 노새를 마당의 말뚝

에 매고 일부러 행보에 거드름을 피우며 술청으로 들어섰다.

"어어 피곤하다. 술이나 한잔 걸쳐 볼까아....."

국솥에 젓고 있던 주모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 손님 모셔라아."

마주 내다보던 갑송이가 술잔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감동이는 그들이 앉아 있는 방의 건너편 대청으로 올라 앉았다. 술잔을 내려놓고 씨근대

던 갑송이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이놈아, 술을 처먹겠으면 조용히 마실일 이지, 네놈이

이 주막을 온통 샀다더냐?" 길산이도 놈이 답삭대는 꼴이 같잖아서 상대를 지그시 노려보

고 있었는데, 박대근이만은 노새 한 마리는 잃었을 망정 그자의 영리해 보이는 짓거리가 재

미있었다. 그는 두고 보겠다는 심정으로 양편을 관망했다. 감동이가 갑송이의 거친 시선을

피하며 술을 날라오는 중노미에게 말을 걸었다.

"얘 주막에다 갓난애를 키우면 어쩌느냐, 규중에 재워야지." "애기라닙쇼?"

"거 애기가 똥을 쌌나 본데..... 그러니까 강아지가 핥을려구 방안에 들어갔지." "강아지

..... 점점 모를 소린뎁쇼."

"저 건넌방에서 깨갱이는 소리가 요란하다. 똥은 뒷간에 많으니 거기 가서 포식하라구 일

러라."

중노미는 감동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눈을 흡뜨고 사나운 기세로 벌떡

일어서는 갑송이를 보았다.

"강아지가 아니구..... 손님인뎁쇼."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술청 안의 손님들이 중노미의 고지식한 말에 폭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두 사람의 감정이 그럴 수밖에 없게 된 연유를 씨름판에서부터 보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갑송이가 문지방을 넘어 툇마루로 해서 대청 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 이놈이 욕을 하네!"

"인제 잘 보이는군. 아까 청노새를 내게 바친 장사로구먼. 허긴..... 참 서글픈 생각이 드는

구만."

갑송이는 여차직하면 당장 개다리 소반을 발길로 걷어찰 기세를 하고 서 있었으나 감동이

는 여전히 마당 쪽을 향한 채 주절거렸다. 갑송이가 감동이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 잠깐 내려가자. 이번네 정말루 겨뤄야겠다."

"허허, 슬프다 슬프구나."

"니 애비가 급살탕이라두 맞았느냐 무에 슬퍼, 슬프긴....." 감동이가 한 숨을 푹 쉬고 나

서 갑송이를 쓰윽 올려다 보았다.

"노여움을 푸시우, 한번 실패는 병가의 상사라구 했수, 헌데 내 요속눈썹 보이지요?" "

깔이 실지렁이 꼬랑지로 째진 녀석에 눈썹두 있데?" "글세 아무튼, 요 속눈썹 가운데 흰털

한 가닥이 있을 거요. 흰털의 내력을 듣겠수?" "그래 지껄여봐라."

"내 일찍이 백두산 기슭에서 사냥을 업으루 지내온 사람이우.너구리, 오소리, 산토끼,

, 멧돼지 닥치는 대루 잡아 고기는 먹고 털은 벗겨서 팔았지요. 그렇게 삼년을 지냈는데

하루는 그믐날 밤에 산신이 내려왔습니다."

"산신이면 호랑이 말이지....."

", 허연 도포를 입구 와룡관을 쓴 신선으루 둔갑하구 와서 호통을 친단 말야. 네 이놈!

이 무엄한 놈, 네가 삼년 동안 이골 저골을 뒤지며 내 먹이를 쓸어가는 통에 내 때아닌 기

근을 만났은즉 이젠 하는 수 없이 네놈의 멱통을 끊어놔야겠다. 한단 말이지." 성질 단순한

갑송이는 어느덧 감동이의 노는 꼴이 밉질 않아서 상머리에 털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술청

안의 손님들도 모두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산신께 꼼짝없이 물려 죽게 생겼데. 그래서 애걸복걸, 저는 지금 과수댁이던 모친상을 입

구 채 여섯 달두 못되었습니다. 더구나 혈육이라군 이 몸 하나이니, 제가 죽고 나면 제사는

누가 드릴 것이며 묘막은 누가 지킵니까. 사정했지."

"산신은 효자에 약한 법이라니."

"산신이 상을 찡그리고 한참이나 생각중이더니..... 좋다, 그러면 너를 고이 살려줄 테니 이

길로 산을 떠나거라. 그러고 평생 사냥질해처먹을 생각은 말아라. 큰일났네. 배운 버릇이 덫

놓고 함정 파고 활 쏘는 짓인데, 그래 꺼이꺼이 통곡을 하며 연유를 말했지. 산신은 그놈 참

말썽 많고 사연 많은 놈이라며 제 눈썹 한 가닥을 쓱 뽑더구만." "그 녀석 제법 옛말 잘하

누나."

"이 눈썹이 무슨 소용이 닿습니까. , 그 눈썹을 붙여줄 테니 청맹 판수질이나 해쳐먹고

다시는 애꿎은 짐승을 때려잡을 생각은 말아라 이르더군. 그래서 요 내 속눈썹에 백털이 끼

여들었단 말이야."

"흰 눈썹이 점쟁이짓에 무슨 효험이 있는데."

"이 백털이 눈가에 달라붙고 나서는 세상이 다르게 보여." "어떻게.....?"

"사람의 전생이 훤히 보일뿐더러 내생두 또렷이 보이데. 그뿐야, 저자에 나가면 거북이가

떡을 팔구 있잖나..... 잔나비가 저울을 달구, 메기가 쌀됫박을 되는가 하면, 참새가 술을 팔

구 말이지."

"예끼, 이 사람."

"그래 아까 씨름판에서 자넬 쓱 보니까, 전생이 본래 종로 도자전 태생이더구만." "아니

고작 장신구였단 말야."

"성질내지 말구 들으라구. 어떤 물건이었지. 헌데 어느날 별궁에서 꽃 같은 나인이 찾아와

자넬 사갔네. 그래서는 향내나는 치마폭에 감춰두고 요긴할 적마다 자넬 써먹었지. 수십 년

을 쓰다가 물리고, 또 물려져서 그러니까 자네가 태어나기 꼭 일년 전에 자넬 애지중지했던

궁녀는 선왕과의 관계가 있은 뒤라, 곧 상복 벗자마자 승방에 들어 죽고 화장되었지. 그때에

자네도 함께 탔거든."

"이 사람아 도대체 그 물건 이름이 뭐여?"

"화낼까봐 말 못하겠군. 어쨋거나 자네는 염라대왕께 호소를 했지. 이거 남들은 최소한 가

이새끼나 염생이라두 태어나 가는데 내리 수백 년을 음침한 데나 드나들며 오수로 목욕하고

천덕꾸러기로 지냈으니, 이제는 제발 광명천지에 두 발로 걷는 사람이 되게 해 주소서 그랬

. 딴은 그동안에 갖은 곤욕을 치렀으니 사람으로 나가거라. 자넬 떡 보니까 그 눈물겨운

과거지사가 한 눈에 보인단 말야. 그래서 내가 슬프다고 탄식한 걸세." "그 물건이 뭐냐니

."

"말해줄까 말까. 술 한잔 따르게나."

다른 이들도 호기심이 발동하여 고개를 갸우뚱댔고, 더욱이 장본인 갑송이는 은근히 애가

달았다. 성급히 술 한잔을 따르는데 반 잔 쯤 넘쳐 흘러버린다.

"내가 물건 이름을 말해주기 전에 한가지 약조를 하세그려. 점잖고 풍류있게 웃을 것.

..... 마음에 들면 동무삼아 한 잔을 살 것..... 어떤가?" "망할 자식, 그래 좋다."

감동이는 나직하게 낄낄 웃고 나서 말했다.

"그것이 바루 도자전에서 파는..... 참나무로 깎은 각좇이여!" "이놈아, 그따위 욕지거리가

어딨냐!"

갑송이가 술상을 번쩍 치켜들며 일어섰다. 막걸리 사발이 굴러떨어지고 국이 쏟아졌다.

내려치려는데, 감동이는 두 손을 치켜들어 막는 시늉을 했다.

"성님..... 약조는 지켜야지."

낄낄대던 술청 손님들은 웃음 소리가 여럿 속에 석이게 되자 마음놓고 광소를 터뜨렸다.

길산이도 팔짱을 낀 채 쿡쿡 웃었고 박대근이는 숫제 주먹으로 방바닥을 치며 웃는데 눈물

이 비칠 정도였다. 그런 양을 휘둘러보던 갑송이도 하는 수 없이 픽 웃어버렸다.

"젠장할 생쥐 같은 놈 . 자아, 술이나 쳐마셔라. 얘야, 한상 다시 내오너라." " 나 마감동

이란 놈이우."

"성명을 듣고 보니, 너두 천하 상놈의 천출일시 역력하구나. ,, 그럴 거 없다. 우리말 놓

. 나는 광대질 해 먹는 이갑송이다."

건너편 방ㅇ에서 박대근이가 가득 넘치는 술잔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아우님, 그 새 동무 데리고 이리 오우. 나두 재미난 내력 가진 술좀 마셔보게." "이 무슨

망신이람. 다 네놈 때문이야. 언제건 수틀리기만 해봐라....." "엥이 이젠 흰 털 눈썹을 뽑

아야지. 전생이 훤하게 내다뵈니 사람 사귈 맛이 있어야지." 그들은 합석했다. 감동이의 일

행 두 사람만 저희끼리 따로 남고, 길산이, 대근이, 갑송이, 감동이 넷이 둘러앉았다.

"나는 송상 배대인네 상단을 끌구 다니는 박대근이란 사람이우." 박대근이가 열리하게

눈을 반짝이는 감동이에게 호감을 가지고 인사를 건넸으며, 길산이도 말했다.

"문화 재인말 사는 장길산이우."

마감동이는 그 새까만 얼굴을 환히 펴서 반색하며 말했다.

"재인 말아 장씨 성 가진 솜씨 빠른 총각이 있다더니 당신이오그려." 하면서 갑송이를

향해 말했다.

"그러구 보니 갑송이 성님과 길산이 성님 두 분이서 무더리를 쓸었구먼. 우리두 소문에는

척하면 삼척이지요."

박대근이가 감동이와 그의 일행의 행색을 견주어 보며 물었다.

"차림새 보아하니 장사치인 모양인데..... 어느 임방의 동무시우?" ", 우리야 대상부고가

아니라서, 그저 무시로 돌아다니는데, 체장은 송도 상청에서 오래 전에 받은 것이 있지요."

그들 상인들이 인사를 틀때에는 먼저 허가받은 체장을 올려놓고 보여주며 시장의 조합과

같은 감영 임방의 어느 소속임을 밝히는 법이었다. 감동이는 비록 구월산 화적패의 모사꾼

이었으나, 처음보다는 훨씬 박대근이며 갑송이며 길산이가 마음에 들었다. 박대근이가 말했

.

"우리 상단에 들어오면 좋겠군. 금년에 몇이우?"

"..... 갑오생입니다."

"세 분이 모두 고만고만한 또래로군. 어떠우..... 우리 상단을 따라오면 잘 돌봐줄 텐데,

갖구 나왔소?"

"담배를 두어짐 가져 왔습니다."

감동이는 내심으로 일이 척척 맞아들어감을 기뻐했다. 이대로 합대해서 안악 근교까지만

가게 되면 상단의 재물을 모조리 털어내기는 여반장일 것이었다.

"넣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진요."

"댁은 보아하니 무슨 재주가 있는 모양인데...."

박대근이가 감동에게 물었다.

"재주가 뭐 있겠습니까. 그냥 먹구 살려구 자그만 봇짐장수나 다니는 형편에....." "아니야,

저런 총각 같은 장사를 골탕 멕이려면 보통 재주로는 안 될 일이지." 갑송이가 불쾌해져서

끼여들었다.

"이 사람이 씨름할 때에 손아귀에다 자갈돌멩이를 쥐구 았었단 말이우. 그걸루 무릎을

쥐어박는 바람에 잠깐 얼을 놓았지."

"사실이오?"

"..... 맞습니다. 허나 혓바닥은 짧아도 침발은 길더라고, 기운 없는 장사가 날려니 꽤를

썼지요. 이긴 건 이긴 거니까....."

"망할 자식 같으니."

그들은 모두 껄껄 웃었다. 몸집은 작았으나 감동이는 말주변도 좋고 사근사근하여 박대근

이의 눈에 들었다. 그는 관아 출입을 시킬 자를 물색하던 참이라 감동이의 출현을 반가워했

.

큰돌이가 관아에서 심부름을 나온 전령과 함께 들어왔다.

"관가에서 우릴 부른다는데."

"무슨 일요?"

"와서 한판 놀아달라는 게야. 한양에서 우리 사또 동접 되는 분이 오셨는데 연회가 벌어

졌거든."

"물론 행하는 없겠지. 우리 골 사또 나리께서 부르시니....." "제미할 것! 좀 쉴려구 그랬

더니, 지금 가면 새벽까지 시달리겠네." 박대근이도 상에서 물러나 따라 일어섰다.

"장총각 , 이총각은 가지 말구 남은 사람들이나 가서 놀라지. 우린 내일 안악 가서 장세울

의논들이나 하구."

큰돌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익살담이나 가창은 어찌되겠으나 탈판이 없어서야 되겠나. 말뚝이는 역시 길산이가 기

중 낫지 않아."

"하긴 그렇지. 우리가 빠지면 싱거우니 가긴 가야겠네." 갑송이와 길산이는 제 패거리들

과 함께 주막을 나섰다. 그들은 발등거리를 든 상노를 앞세우고 관아로 들어갔다. 연회가

벌어진 대청위에 문화 현감과 그의 동접이라는 서울 양반이 상좌에 나란히 앉았고 진사,

생원 등이 합석해 있었다. 관기들은 간드러진 소리로 웃기도 하고 시조도 읊어가며 술을 따

르고 있었다. 그들은 길산이네가 들어가 읍하고 서자 곧 놀이를 지시했다.

마당에 멍석이 펴지고 꽃등이 추녀마다 내걸려졌다. 그리고 사또는 멍석 옆에 작은 술상

을 차려주게 하였다. 그러나 광대들은 어느 누구도 술 한잔 마시려 하지 않았다. 행하 없는

놀이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저녁이었고, 양반 잔치 자리란 원래 신명이 과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재미도 없었다. 그들은 밀 약속한 대로 갑송이와 큰돌이가 상대가 되어 익살담을 주

고받았다. 재물을 우려내려고 상놈을 괴롭히다 오히려 봉변을 당하는 양반의 얘기가 내용이

었다. 길산이도 취발이춤을 한바탕 해 보였고, 타령도 읊었다.

"이편 저편 홍문 안에 새젖골 취발이란 놈 귀롱 가지 꺽어 들고 늙은 중놈 뺏어내고 양소

무 어리고 만지면서 농락한다. 엔엔이 에헤요 에어어야, 에에야헤 어허야 에휘디오."

러나 역시 기분은 시큰둥하지 장터의 상사람들과 어울림만 같지 못 하였다.

박대근이네 상단은 신천을 거치지 않고 막바로 안악으로 향했는데, 감동이는 사하에 데리

고 있던 둘 중에 하나를 앞서 연락차 보냈다.

보부상단 으로 꾸민 구월산 화적패 노가 일당은 화연봉 고개 아래의 주막에 들어앉아 감

동이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때가 다 되어 새벽 식전에 문화에서 출발

한 감동이의 졸개가 도착했다. 노가는 벌써 송상 차인패의 갖가지 희한한 재물을 차지한 기

분이 되어 반주로 너덧 되의 탁주를 들이켰다.

그는 스물 남짓한 부하들과 화연봉 중턱으로 올라갔다. 문화 고을이 북쪽으로 빤히 내려

다 보였고ㅓ 신천과 문화 방향에서 오는 쌍갈래 길이 남쪽 벌판 한 가운데서 만나고 있었

. 예상대로 화연 고개는 상단을 습격하기에 가장 맞춤한 장소였다. 산은 온통 상수리와 소

나무의 빽빽한 숲이었고, 험한 산세가 안악읍의 오른편을 돌아 배고개로 해서 구월산 에 잇

닿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 아래 후미진 곳에 짐 실을 말을 숨겨두고, 좁은 길 양쪽 바위 뒤

에 병장기 가진 졸개를 숨겼다. 그리고 노가는 포교의 철릭과 전립 차림으로 갈아입었으

, 두사람의 부하에게는 포졸의 복색을 입혔다. 노가는 환도를 차고서 부하들이 숨은 숲을

ㄹ 지나서 고개가 먼 곳까지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바위 위에 올라가 앉아 기다렸다.

어루리벌이 망망하게 펼쳐진 들판 가운데로 박대근이의 상단은 천천히 길을 가고 있었다.

맨 앞에 향도 차인이 두명 나란히 갔고, 그뒤로 짐을 실은 부담마들이 따랐으며, 다음에는

짐을 지게나 등판에 짊어진 보부상들이, 그리고 맨 뒤에 나귀를 탄 박대근이와 길산이네 광

대패가 따라갔다. 그들은 일단 삼거리 주막에서 늦은 점심들을 먹고나서 곧 바로 안악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그들이 고개를 오르는데, 앞서 간 향도잡이와 부담마들은 이미 마루턱을

넘어간 뒤를 따라서 박대근이와 광대들이 고개에 오른때였다.

"잠깐 섰거라!"

하는 호통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박대근이는 그렇지 않아도 소문이 뒤숭숭하고 장소

가 후미진 곳이라, 날카롭게 긴장하면서 물ㅈ미장을 쳐들었다. 그는 싸악 하면서 지팡이 속

에 감춰진 긴 환도를 빼들었다.

"포교요, 저 바위위에 셋이 있는데."

뒤따르던 감동이가 숲에 가려진 바위를 가리켰다. 박대근이도 포교복색을 알아보고서 환

도를 다시 꽂았다. 그들은 바위에서 천천히 길 아래로 내려오는 포교와 포졸들을 기다리느

라고 길 위에 잠깐 서 있었다. 다가온 포교가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서서 외쳤다.

"너희들 뭣 하는 놈들이냐?"

"송도 상단입니다."

"체장은가졌느냐?

", 새봄에 송도 도방에서 발행한 체장이 있습니다." "이리 내놔 보여라."

박대근이는 품안에서 태극 무늬가 찍히고 상청위빙신사라고 씌어지고 송상 아무개와 관부

의 날인이 되어 있는 체장을 내보였다. 포교 차림의 노가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쑥 훑어

보고는 내주었고 포졸들을 시켜 광대들의 몸을 수색하게 하고서 호패도 내놓아보라 지시했

. 그들이 기찰당하는 동안 고개 아래에서는 잠복하고 있던 화적들부담마를 습격하는 중임

을 아무도 몰랐다. 차인들은 병장기에 눌려 모두 넋을 잃어 물건들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있

었다.

그러나 화적들이 부담마를 끌고 숲으로 달아날 적에 뒤따라 내려갔던 보부상들이 가만있

을리 없었다. 곧 뒤이어서 저놈들 잡아라. 도적이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박대

근이가 눈치를 채고 환도를 뺴들고 외쳤다.

"포교라면 통부를 보이시오."

노가는 잇달아 환도를 빼들었으며, 포졸들도 장창을 꼬나들고 광대들을 가로막았다. 노가

가 뒷걸음치며 말했다.

"덤비면 사정없이 베일 테다. 뒤쫓지 마라."

길산이와 갑송이 등 싸움질에 자신이 서는 자들만이 광대패에서 뛰어나와 길 좌우로 재빨

리 갈라섰다.

"어딜 달아나느냐!"

박대근이가 노가에게 달려드는데 감동이와 그 부하 한 놈이 제각기 봇짐 속에서 두어 뼘

길이의 칼을 빼어들고 좌우로 회두르며 광대들의 접근을 막으면서 비탈위로 뛰어올랐다.

이제 감히 덤벼들 자세를 취하는 것은 박대근이와 길산이, 갑송이 세 사람뿐이었다. 대근

이가 칼을 곧추세워 파고들자 노가는 막아 내리치며 허공을 싹 베는데 대근의 패랭이 중간

이 날아갔다. 칼이 몇번 부딪쳐 날카로운 소리랠 냈다. 길산이와 갑송이는 맨손으로 감동이

와 포졸 차림의 뒤를 따라 빽빽한 관목숲이 가려진 비탈로 오르는데, 그들은 이미 능선을

타고내빼고 있었다. 두목인 노가는 박대근이에게 제법 날카롭게 칼질을 해보이고 나서 몇걸

음 뛰더니 날렵하게 나뭇가지를 잡고 휘청했다가 골짜기의 무너져 내린 구덩이를 뛰어넘어

등성이로 뛰어올라갔다. 고개 아래서 대근이네 몇 사람이 쫓아 올라오며 소리쳤다.

"부담을 모두 털렸습니다. 둘이 창에 찔렸어요."

"산 위로 쫓아 올라가게. 자네들두 아무거나 병장기를 잡게나." 갑송이는 굵다란 몽둥이

를 꺾어 들었고 길산이는 단검을 손에 쥐었다. 그들은 와와 소리치며 산등성이로 쫓아 올

라갔다. 산을 타고 사는 놈들인지라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소 울음소리가 들릴 거리의 두

배나 쫓았는데 기척이 보이질 않았다. 그들이 능선 둘을 타넘자 봉수대 오른편으로 비탈을

달려 내려가는 도적들의 후미가 보였다. 봉수대에서 진군들에 발각되면 길이 끊길 터이라

우회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달려 내려가자 뒤를 맡은 네뎃 놈이 마주 달려나왔다.

박대근이는 창을 치켜들고 달려드는 자를 한걸음 비켜나며 엇비슷이 베었다.

목덜미께에서 어깻죽지가 깊이 잘려나가며 쓰려진다. 후미에 감동이가 보였는데 길산이는

달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서 두어 척을 몸째 날리면서 감동이의 목을 껴안았다. 그들은 골

짜기 아래로 몇번이나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굴러 떨어져갔다. 갑송이는 환도 휘두르는 두 놈

을 무지막지한 몽둥이로 대적하면서 단김에 골통을 깨부숴버렸다.

혼자 남은 자가 칼을 버리고 주저않았다. 그 사이에 다른 놈들은 숲 사이로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길산이가 얼굴이 엉망으로 터져 피투성이가 된 감동이의 뒷덜미를 잡아가지

고 골짜기 위로 올라왔다.

"해골을 부셔놓을 테다!"

갑송이가 몽둥이로 휙 내리치는데 길산이는 손바닥으로 받아내며 말했다.

"이놈 죽이면 낭팰세. 아예 구월산으로 짓쳐들어가야지." "이리 끌어오우."

"이 자리에서 당장 쳐죽인대두 할말은 없수."

길산이에게서 얻어맞아 코와 입이 터져 피투성이가 된 감동이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

. 갑송이는 몽둥이를 쳐들어 부르르 떨면서, "골통을 바숴버려야 할 텐데. 내 어쩐지 요

놈 쌍통이 처음 볼 때부터 새까만 생쥐 같더라니."

박대근이는 피묻은 환도를 풀잎에 씻고 나서 집어넣었다. 화적들의 자취를 찾으려고 골짜

기 아래로 내려갔던 차인들이 돌아와서 말했다.

"물을 건넌 것은 분명한데, 숲으로 길이 끊겨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통 알수가 없습니다."

"그만둬라, 두 놈을 잡았느니 일이 잘 되었다."

그들은 마감동이와 졸개를 함께 삼줄로 묶었다.

길산이가 박대근에게 물었다.

"관가에 넘기시려오?"

"아니오."

박대근이는 길산이를 가까이 불러 속삭였다.

"우선 짐들을 정리하구 나서 모두들 안악으로 들여보내죠. 우리는 차인 몇 사람을 데리고

저놈을 앞세워 추적합시다."

길산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놈 눈치가 좀 뉘우치는 것 같습니다. 달래면 말해줄 듯도 합니다." "어쨌든 예서 기다

리시오. 내가 사람들을 모두 보내놓고 올 테니까." 박대근이는 올라가서 행수 차인에게 상

단을 이끌고 안악으로 들어가라 지시하고 아무도 화적당에 약탈된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말도록 일렀다. 그는 차인들 중에서 젊고 팔팔한 장정 다섯을 가려 환도 몇자루와 몽둥이

로 무장시켰다. 그리고 양식거리도 한 이삼 일분쯤 넉넉하게 마련했고, 술 한 통에 어포 약

간을 준비했다. 그가 양식 지운 장정들을 데리고 골짜기로 내려가니 길산이가 부드럽게 몇

마디 물었고 감동이가 수월히 대꾸하고 있었다.

"나두 의리는 아는 놈이우. 며칠 안되었으나 성님들하고 성깔두 맞구 그래서 사실을 말해

버릴까 하는 생각두 들었수."

"헌데 어째 말하지 않었니?"

갑송이가 눈을 부라리자, 감동이는 어이없이 피식 웃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사람 좋은 거야 일하군 상관이 없네. 댁네는 재물 많은 장사꾼이 우리

네야 그 물건 빼앗자는 도적놈이 아니우."

"이눔아 도적질두 좋아, 어째서 속였느냔 얘기여. 도둑에두 의리가 있구 땅꾼에도 꼭지가

있는 법이다."

", 주린 호랑이가 원님 알아볼까. 좌우지간에 미안허게 됐수. 아예 물고를 낸들 하는 수

없고 관가에 넘겨두 좋지만..... 내게두 복잡스런 사정이 있수." 박대근이가 물미장 환도를

뽑아 칼끝을 감동이의 목젖에 댔다.

"산채루 안내해라. 아니면 당장 쑤셔버릴 테다."

"허허, 너무 만만히 알지 마시우. 게가 범의 아가리요." 박대근이가 칼자루에 힘을 주어

지그시 누르자 피부가 터지며 피가 흘러내렸는데, 감동이는 입술을 약간 찡그렸을 뿐이었다.

길산이가 조용하게 말했다.

"칼 치우슈."

박대근이는 잠깐 길산이 쪽을 바라보다가 칼끝을 거두었다. 모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우리들 정말 관가에 넘기지 않을 작정이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던 감동이가 불쑥 물었다.

"안 넘길 테다."

하고 나서 박대근이는 말했다.

"넘길 것두 없이 내 손으로 베어주지."

"그 재물이 아깝소?"

"까짓 거야, 장사란 게 원래 이익 손해가 늘 따라다니게 마련이지. 허나 여태껏 이 박대근

이의 상단이 송도 차인패들간에 화적 만났다는 일이 없는 걸루 유명하다." "! 그따위 허

명에 사람의 목을 벤단 말이오? 잘못 봤군." 딴은 감동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박대근이

는 입을 다물어버렸고, 길산이가 말했다.

"우린 자네 성품이 좋아져서 동무가 되지 않았나. 갑송이가 화를 낸것두 자넬 동무로 알

았기 때문일세. 자넨 미리 꾀를 써서 우리 행로를 연락해주지 않았나. 자네두 들었다면 우리

재인말 사람들이 어떻다는 건 잘 알 걸세."

감동이 곁에 함께 묶였던 졸개가 외쳤다.

"우릴 관가에 넘기지 않구 놓아준다면 내가 모두 말하겠소." "잠자쿠 있어!"

말리는 감동이에게 졸개가 대들며 원망했다.

"노가놈 따위에 충성 바칠 거 뭐 있수. 그 찢어 죽일 놈이 부두렁을 산채서 쫓아낼라구

안달하는 판인데."

졸개의 말에 의하여 두령인 노가와 부두령 감동이가 불화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무슨 사정이 있군 그래."

길산이가 슬쩍 던지자, 감동이는 한동안 뜸을 들였다가 한숨을 푹 쉬고 나서 얘기를 꺼냈

.

"두령이란 자가 덕이 없고 마음이 좁아서 졸개 아이들을 몹시 학대 하오. 재물에는 터무

니없이 욕심이 많아 상대를 가리지 않는데다 혼자서 차지할려구 그러거든. 나는 살생을 몹

시 꺼리는ㄴ데 그자는 닥치는 대루 사람을 죽인단 말요. 구월산으로 옮겨온 뒤부터는 나하

구 사이가 별루 안 좋았지. 계획두 모두 내가 하고 아이들 데리고 살피러 다니기두 하는데,

내 약산골 서낭테에 장이 섰을 때두 갔었수."

"그렇다면 뭣 때문에 그런 자의 수하에 있나?"

"자비령 있을 제 내가 노가보다 뒤늦게 입산했고, 또 즈어 삼촌 되는 자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수. 그래서 오히려 울끈불끈하는 아이들을 누르며 참아왔었소. 내가 노가를 죽이길

망설이는 것은 패가 갈릴까 해서지요. 그러잖아도 자리잡히지두 않은 산채에서 패가 갈려

싸움이 붙으면, 고향두 없는 우리가 서로 떼죽음할 게요." 박대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놈을 베어버리지. 그러면 자네는 손두 안 대구 코푸는 격일세, 의리 상할 것두 없

. 이사람이 협기가 있으면 활빈두 하고 의적질을 해서 이름이 남는 법이여. 내 진심이루

재물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원래 협기를 좋아해놔서 그것이 상하면 참을수가 없네." 묵묵히

듣고 있던 감동이가 뒤로 묶인 제 팔뚝을 내려다보며, "이것 좀 푸시우."

하더니 결심이 된 듯 말했다.

"산채를 위해선 노가를 없애야겠소."

길산이가 단검으로 감동이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감동이가 일어나 제일 먼저 길산이를 향

해 꿇어앉아 머리를 숙였다.

"성님 절 받우."

길산이는 당황해서 주저앉아 맞절을 하면서 감동이의 손목을 잡았고 갑송이는 어리둥절해

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길산이가 말했다.

"같은 또래끼리 더구나.... 자넨 상투잡이고 나야 떠꺼머리 총각인데 말이라두 놓자." "

니우. 우리네 도적놈들두 법도가 엄하우. 진 놈이 아우요. 모자라는 놈이 수하가 되는 법이

니까. 갑송이 성님두 절 받우."

"뭐여? 나두 성님뻘 되나. 야야 쥐새끼야. 나하구는 막 트구 지내자. 사람이 거북살스러워

어디 살겠나."

"아니우, 작은성님은 되지."

감동이는 박대근에게는 말없이 절만을 했다. 대근이 야박했대서가 아니라 대상부고의 손

발이 되어 장사나 다니는 게 마음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도적과 상인의 사이란 아무래

도 늑대와 황소의 그것처럼 미묘한 관계라고 감동이는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박대근

이 쪽은 워낙 대범하여 감동이의 그런 태도에는 개의치 않았다.

"자네 자비령 있었다며?"

", 거기 한 이 년 있었수."

"강선홍이 알겠군."

"소금장사 다니는 그 뚝심 좋은 녀석 말이우?"

"그렇지."

"노가하구 나하구 길목을 지키다가 그자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지요." "녀석이 내 아울

."

".......?"

"나하구 의형의제하는 사이지."

"그럼 이........감동이란 놈하구두 그리합시다. 참 세상 넓구두 좁군." "이 사람아, 나는 송

도 제일가는 부상이 되려네. 그래 재물이 많이 생기면 자네들과 나눠 쓸 셈이지."

"그만두우. 우린 벼슬아치나 인색한 부잣집을 털어두 밥술깨나 족히 들 수가 있으니까."

박대근이 껄껄 웃었다.

"내가 부상이 될 테니까, 자넨 나를 털러 오면 되잖나." 하는 말에 모두 웃었다. 조금 전

까지도 살벌하던 분위기가 사내들의 너른 도량으로 스러져서 흐뭇하게 바뀌었다. 길산이

말했다.

"자아, 이젠 일어서지, 쫓아가려면 벌써 십여리는 뒤떨어졌을 테니." 감동이가 그들이 내

려왔던 골짜기 위의 화연봉 고갯마루를 가리켰다.

"염려 마슈. 노가 일행은 산줄기를 타구 안악 북쪽의 양산 등성이를 돌아서 배고개로 내

려갈 거요."

"그렇겠지, 산세로 보아서는......"

"배고개만 지나면 구월산 동봉의 초입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화연봉 고개를 넘어 큰내

를 건너 배고개 쪽으로 질러가는 거요. 배고개만 끊어놓으면 꼭 만나게 되어 있소." "아직

여유는 충분한 셈이로군요. 여기서 배고개까지야 평지로 이십리 아닌가." "그렇소. 저놈들

은 산길을 타고 오십리는 걸어야 할 테고, 더구나 부담들을 짊어졌으니까, 아마 땅거미질 때

쯤 고개를 지날 게란 말이우."

그들은 감동이의 말이 가장 그럴 듯하여 배고개를 바라고 들판을 향해 걸었다. 월당강의

줄기가 나무리벌과 어루리벌 사이를 흐르고 지나는데 이 광활한 들은 문화, 신천, 재령,

, 그리고 봉산까지에 걸쳐서 끝없는 수전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한길을 버리고 논

두렁을 따라 벌판을 일렬로 서서 가로질렀다. 누렇게 익은 벼들이 바람에 물결졌고, 참새를

쫓던 농부들은 장사치 차림의 여러 사내가 엉뚱하게 논두렁을 걷는 꼴을 보고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큰내 삼거리에서 포졸들에게 조사를 당했다. 상단에서 일행을 놓치고 뒤따라가는

길이라며 대근이 체장을 내보여서 말썽 없이 지났다.

그들이 배고개에 당도한 것은 아직 해가 높다랗게 떠 있는 늦은 오후였다. 그들은 의논에

따라서 행인이 지나다닐 길을 피하기로 했다.

동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산길 소로가 내려다보이는 등성이에서 기다리다가 위에서 아래

로 덮치기로 했다. 그리고 양산 쪽에서 이어지는 능선을 살피도록 감시할 사람을 높다란 바

위 꼭대기에 붙여두었다.

노가 일당은 그때에 양산을 넘고 있었다. 산이 높아질수록 깔리기 시작한 낙엽에 발목이

묻혔고 높이에 따라 층층이 여러 색깔의 단풍이 물들어가고 있었다.노가의 뒤를 따라오던

자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잡힌 게 아닐까요......"

"까짓 장사치 몇놈을 당하지 못하고 잡힐 바엔 죽는게 나아." "아닙니다. 칼솜씨며 싸움

벌이는 기세가, 모두 만만치 않습니다. 아무래두 돌아가서 조력할 걸 그랬나 보우."

"운이 나빴어....."

노가 일당은 모두 지쳐 있었다. 노가가 심하게 재촉했고 상인 패거리의 뜻하지 않던 완강

한 저항에 질려 계속 쫓기는 걸음이었던 때문이었다.

앞서서 길을 살피며 나아가던 자가 멈추라는 손짓을 하고 나서 숲속을 살피더니 잽싸게

나무 사이로 달려갔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양이 보이다가, 어느 나무하던 총각의 멱살을 틀

어쥐고 그는 일어섰다. 그 자가 총각을 노가에게로 끌어왔다. 노가가 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너 어디 사는 놈이냐?"

"수삼골 살아요. 나무하러 왔어요. 왜들 이러세요........" "우리가 누군지 알지?"

"사냥 다니는 포수 양반들인가요. 산속으로 장사 다니시는 건 아닐테니요." "이놈, 우리가

구월산 화적패다."

", 작년 여름에두 약초를 캐러 갔다가 산어른들 뵜지요. 구월산엔 숨어 사는 이들이 많

으니까요."

", 산어른이라구...... 그런 녀석들은 못 봤는데, 자네들 봤나?" 도적들이 낄낄대며 웄었

.

"자아.......너 혼자 산에 왔냐?"

"아니오, 요 아래하구 이 길 앞에 어디 둘이 더 있을 거예요." "그래? 여기서 큰 소리루

불러, 이리 오라구 말이지." 하고는 뒤를 보며 눈을 끔쩍하고 나서 말했다.

", 그 부담 상자에서 반합을 꺼내봐. 맛난 게 있을 테니, 얘들 배고플 텐데 조금 나눠주

구 가지."

이를 듣고 마음이 놓인 총각아이는 핼쑥했던 얼굴에 핏기가 되살아 났다. 그애는 입가에

손을 대고 자기 동행들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는 음성이 들리고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머리를 땋아 늘인 떠꺼머리 소년

둘이 양쪽 숲에서 뛰어나왔다.

그들은 주춤 섰으나, 동행의 아이가 낯선 사람들 틈에 앉아 유과를 먹고 있는 걸 보고는

곧 다가왔다. 노가는 그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훑어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또 없니........ 너희들말구느."

", 셋이서 언제나 함께 나무하러 다니거든요."

그들이 다투듯 반합에 손을 넣어 마른고기며, 포육, 유과 등을 집는데 노가는 슬그머니 칼

을 뽑았다. 졸개들은 침을 삼키고 서 있었다.

노가가 말했다.

"일어서라."

".......?"

아이들이 뒤를 돌아보며 엉거주춤 일어났을 때 노가는 늘어뜨렸던 칼을 재빨리 쳐들었다

가 옆으로 비스듬히 주욱 그었다. 두 소년이 먼저 뽀얀 피를 퉁기며 나뒹굴었고, 나머지 설

맞은 아이가 옆으로 넘어졌다가 깊은 상처를 입은채로 한쪽 팔과 다리고 가재처럼 기어갔

. 노가가 차갑게 뱉었다.

"찔러줘라."

곁에섰던 자가 창을 꼬느어 달려가 아이의 등에 창을 꽉 내리꽂았다.

"애들은 죽일 거까지야 없잖소."

약산골과 문화에서부터 감동이 일행이었던 자가 말했다.

"뭐라구..... 그럼 네가 대신 골루 가구 싶냐?"

노가는 핏방울이 점점이 번진 칼을 쳐들었고, 상대가 두손을 앞으로 내밀며 뒷걸음질 쳤

.

", 아니..... 내 얘기는 어두워질 때까지 구월산 쪽으루 데리구 가다가, 밤이 되어 놓아보

낼 수도 있다는 얘기우."

"이거봐, 저놈들이 아래 내려가면 분명히 우릴 봤다구 나불거릴 게야, 저래놔야 후환이 없

, ! 가랑잎으로 덮어주고 빨리 내치자."

그들은 두어뼘 깊이로 쌓인 나뭇잎을 긁어내어 세 소년의 시체를 누인 다음 다시 잎을 그

위에 수북이 덮었다. 노가는 칼을 꽂으며 침을 뱉었다.

그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불만이 있는 졸개들도 노가의 그렇게 야멸찬 칼날 아래 꿈쩍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가는 구월산 골짜기를 샅샅이 뒤져내어 자기네와 동업관계에 있는

자들의 초막이 발견되면 밤에 야습을 해서 몰살을 시켜야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그가 구월

산 동남쪽의 골짜기들을 완전히 자기 구역으로 장악하기 위해서 진작부터 둘셋씩 짝지어 살

아오던 자들을 더덕골에 모아다가 죽여 화장을 해버린 것은 두어 달 전이었다.

"정말 뒤탈 없을까요? 부두령이 상단 사람들게 잡혔다면, 틀림없이 관가루 넘어갔을 텐

..... 토포군이 치러 오면 어쩝니까?"

부하 하나가 노가에게 걱정스럽게 말했고, 노가는 호통을 쳤다.

"이눔아, 토포 군사가 오면 네놈부터 죽여버릴 테다. 잡힌 놈은 뒈어져두 알 바가 아니구,

산채를 옮기면 그뿐이야. 그 넓은 산속에서 우릴 잡으려면, 작년 그러께 대동강서 방생시킨

고기 칠산 앞바다서 찾는 격이야. 어이, 빨리들 걸어라, 어둡기 전에 배고개를 넘어 구얼산

초입에 닿아야 한다."

그들은 지친 걸음으로 양산 등성이를 타고 배고개를 향해 걸었다. 봉우리가 둘이 우뚝 솟

았는데, 그들은 첫째 번 봉우리를 넘고 있었다.

길산이, 감동이네들은 배고개서 깊숙이 들어가 둘째 번 봉우리의 중턱에서 기다리고 있었

. 골짜기 사이로 뚫린 길이 그들의 발 아래를 지나 배고개 쪽으로 내리막길이 되어 장연

가는 길과 만나면서, 고심산으로 연결되어 서북이로 치솟아 있었다.

그들은 봉우리 위의 높다란 소나무 위에 감시하는 자를 올려 보내고 술과 어포를 내어 저

녁의 시장기를 메우고 있었다. 해가 구월산의 우뚝 솟은 아사봉 끝에 걸려서 남은 빛은 하

늘가에 남았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산허리엔 어둠이 깔릴 무렵이었다.

"옵니다!"

감시하던 차인이 외쳤다. 그들은 아래가 훤히 바라보이는 비탈위로 올라가 동쪽 산등성이

를 내려다보았다. 석양을 정면에 받으며 걸어오는 열댓병의 노가 일행이 보였다. 아래로는

짙은 숲그늘로 컴컴했으나, 노출된 등성이로 걸어오고 있는 그들의 행적은 멀리서도 아주

또렷하게 보였다. 그들은 등성이를 따라서 둘째번 봉우리의 왼편을 돌아오고 있었다. 그 길

이 잠시 후에 골짜기의 샛길로 이어질 게 눈짐작으로도 뻔했다.

"자아 목을 지킵시다."

박대근이가 지시했다. 갑송이와 길산이는 왼편 바위 뒤에 숨고, 박대근이는 오른쪽 송림

사이에 차인들을 데리고 숨었으며, 감동이는 그들의 후미를 끊기 위해 비탈에 가서 엎드려

있었다. 비탈에 엎드린 차인 하나가 그들이 다가오면 앞쪽으로 작은 돌맹이 하나를 던져 신

호하도록 했다. 이제 노가 일행이 이 그물 속에 들어오면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할 형국

이었다.

노가 일행이 감동이와 몇 사람이 엎드린 비탈 아래로 들어섰다. 돌맹이 하나가 송림으로

날아갔고, 박대근이와 차인들은 각기 칼을 뽑아쥐었다. 길산이와 갑송이는 건너편 숲에서 그

들이 무기를 가다듬는 것을 보고 화적패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았다. 갑송이는 몽둥이를 불끈

쥐었고, 길산이는 짧은 단도를 손가락에 벼리어 보았다. 화적패가 감동이들이 숨은 산비탈

아래를 지나갔다. 그들의 불규칙한 줄이 샛길로 들어서며 한 줄이 되었고, 노가는 세 번째쯤

에 서 있었는데, 후미가 비탈 아래로 완전히 들어섰다. 선두가 소나무숲가 바위가 있는 아주

좁다란 길에 이르렀을 때, "이놈들!"

하는 찌렁찌렁한 고함소리가 들리면서 박대근이를 선두로 무기를 든 차인들이 소나무 숲

에서 뛰어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왼편 등성이로 오르지 못하도록 길산이와 갑송이가 바위

위에 우뚝 섰는데, 그들의 뒷길로 몇 사람을 거느린 감동이가 우르르 쫓아 내려왔다.

"여기가 바루 저승골이란 곳이다. 달아날 놈들은 어서 나서봐라." 감동이가 환도를 휘두

르며 후미에서 달려드는 자를 맞았다.

"흩어져라."

노가는 소리지르며 박대근이 앞으로 나섰다. 도적들이 전후좌우로 일시에 흩어지는데,

낙에 저쪽은 준비하고 지키던 판이요 도적들은 얼결에 당하는 기세를 어쩔 수 없었던지 무

기를 쳐들긴 했으되 허둥지둥하는 꼴이 완연하였다. 더구나 좁다란 아래편 길에 몰렸으니

대적하기에는 워낙 불리한 처지였다.

박대근이의 장검이 졸개의 창을 맞받아 쳐내리며 노가에게로 짓쳐들어갔다. 노가는 뒷걸

음질쳐서 왼쪽 비탈로 올라서는데, 뒤에서는 감동이가 소리를 지르며 패거리 가운데로 쳐들

어왔다.

"너희는 무기를 버려라. 노가놈만 베어 죽일 테니,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겠다." 라고 감

동이가 외쳤으나, 대부분은 그의 말을 믿지 못했고 더군다나 감동이가 상단과 한패거리가

된 것을 보고는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감동이는 뒤에 섰던 졸개 두엇과 붙어서 칼질을

하다가 맞은편에서 창을 꼬나들어 찌르고 들어오는 자를 슬며시 비켜서서 목덜미를 내리쳤

. 어이쿠 하며 자빠진 놈을 밟고 넘어가며 그가 소리쳤다.

"보아라! 칼등으로 내리쳤다. 너희를 헤치려는 게 아니라. 노가를 죽이려는 거다." 박대근

이는 대적한 졸개들 셋을 좌우로 베고 노가 앞을 싸고도는 자는 직선으로 찔렀다.

가슴께가 맞창이 나면서 쓰러질 때 노가가 칼을 들어 박대근이를 바라고 내리쳤다. 쨍겅 하

는 소리가 났다. 곁으로 파고들어온 길산이가 노가의 칼을 단검으로 맞받아 막은 것이었다.

노가는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길산이에게로 달려들었다. 길산이는 잽싸게 칼날을 피해

상체를 숙이고 껑충뛰기도 했다가중간을 가르며 들어오는 노가의 칼날을 단검으로 막아냈

.

갑송이는 몽둥이를 휘두르며 도적 무리의 가운데에서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몽둥이에 당하지 못하고 도적들이 뒤로 밀려났고, 감동이와 차인들이 그들을 차차

압축해 들어갔다.

박대근이는 창을 제법 잘 다루는 자와 칼 가진 자를 상대해서 싸우고 있었다. 상대는 창

법을 제대로 익힌 듯 했다. 먼저 지남침으로 공격해 들어오더니 대근이 날렵하게 비켜나자

백원법으로 퇴거하면서 다시 기룡으로 갑자기 바꾸어 급습했다.

박대근이가 상체를 뒤로 넘기려는데, 이미 창끝이 뺨을 부욱 찢고 지나갔다. 박대근이는

뒤로 넘어졌고, 상대가 적수의 자세를 취하면서 차응ㄹ 비스듬히 헤워 박대근이의 배를 꿸

듯이 들어왔다. 박대근이는 몸을 굴려 피하면서 창을 장검으로 받아냈다.

길산이는 칼을 날렵하게 쓰는 노가에게 쫓겨 뒤로 물러났다. 노가가 칼을 위로 쳐들어 반

월도의 선으로 내리그으려는 순간, 쌍수의 자세로 단검을 세워 칼 쥔 손목을 다른 손으로

잡은 채 엇비슷이 퉁겼다. 쨍 하면서 칼날이 단검 위에 머무르는 사이 두 팔로 힘껏 밀어올

리니, 노가의 하복부가 완전히 드러났다. 틈을 놓치지 않고 내뻗은 길산이의 억센 왼쪽 다리

가 나랑가 노가의 옆구리에 가서 꽂혔다.

"에쿠쿠쿠!"

노가가 칼 든 손을 뒤로 젖히며 넘어가는데 연이어 길산의 오른발이 노가의 칼 든 팔목

을 후렸다. 칼이 노가의 손 안에서 뿌리쳐지면서 공중으로 날아갔다. 길산이는 노가의 넘어

진 몸이 땅에 닻자마자 우선 정권으로 노가의 인중 급소를 질렀는데, 앞지가 부러져 턱 아

래로 흘러내렸다. 길산이는 단검을 노가의 목덜미에 재빨리 갖다 댔다.

"꿈쩍하면 목을 도려낸다."

장창 가진 자와 붙었던 대근이는 일장 오척의 나무 창한을 노리고 그자가 철우경지의 자

세로 휘두르는 것을 반대편으로 비스듬히 내리쳤다. 역시 창자루가 댕겅 부러져나갔다. 보병

창이란 말 탄 자를 공격하거나 여럿이서는 유리할지 몰라도 검객에게는 맥을 추지 못하는

법이었다.

창자루가 잘라져 나갔건만 상대는 두려워하지 않고 남은 자루를 봉으로 써서 공격해 왔

. 박대근이는 그자의 창술이 훈련원에서 십팔반 무예를 통해 익힌 것임을 잘 알 수 있었

. 창봉을 휘두르며 다가드는 상대에게 박대근은 짐짓 뒷걸음 치는 체하여 공격을 허용했

. 그의 봉이 팔랑개비처럼 돌아 정수리 쪽으로 내리 박히는데, 대근은 칼날을 세워 봉을

퉁겨 사이를 만들고 잇달아 상대의 팔꿈치를 칼 등으로 후려쳤다. 반사적으로 팔이 쳐들렸

다가 보응ㄹ 떨어뜨리며 그자는 팔을 움켜쥐었다. 관절을 얻어맞아 당분간은 팔을 쓰지 못

할 것이었다. 그자는 당황하지 않고 두 손을 척 내려뜨린 채 박대근이를 노려보기만했다.

근은 쳐들었던 칼을 슬며시 내리며 말했다.

"네 재주가 아까워 차마 베질 못했다. 이름이 뭐냐?" 상대는 무방비의 자세로 서서 말없

이 노려보기만 했다. 칼과 창을 내던지는 소리들이 들렸고 갑송이와 감동이가 빈손이 되어

버린 도적들을 땅에 주저앉히고 있었다. 길산은 아직도 뒤로 벌렁 자빠진 노가가 꼼짝 못

하도록 그의 목덜미에 단검을 갖다 대고 있었다. 노가가 꺾여 버린 것이 부하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제일 큰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감동이가 나섰다.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사람의 짓에는 의리와 도량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우리가 비록

나라에 죄를 짓고 고향을 떠나 산림에 숨어 살며 도적질을 하되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거늘

자비령에서 떠나온 이후 여태까지 어떠했는가. 닥친즌 대로 사람을 죽였고 어려운 장사치나

나그네의 보따리마저도 빼앗았다. 반항하지 않는 자도 베어 죽였으며 불까지 지르고 일가를

패망시켜버린 일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얻은 재물은 어찌되었는가. 한 사람의 축재에 모두

자취를 감추고 우리는 술 한잔 제대로 마시질 못했다. 이는 누구의 탓인가. 한 집안이 잘 되

려면 그 가장의 인품 여하에 달렸듯이 우리의 우두머리라는 자가 용렬하여 일이 거듭되어

우리가 인심을 잃고 보면 산속의 다람쥐새끼조차 우리를 적대할 것이고 우리는 멀지 않아

갈 데 없이 죽고 만다. 내가 산채의 기강을 다시 바로 잡을 것이니 너희들은 나를 따르겠는

."

감동이의 말이 끝나자 마자 박대근이와 상대했던 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말은 번지르르하니 그럴 듯 하지만, 네 놈은 식구의 의리마저 저버린 놈이 아니냐? 뭣 때

문에 아무 상관도 없이 장사꾼 패거리를 끌어들여, 이제까지 함께 죽고 살기루 맹세한 형제

를 배반하느냐? 이것이 녹림당의 의리란 말이냐?"

"말 잘했다. 나와 두령이 서로 다투게 된다면 분명히 산채는 두 패로 갈라지게 될 것이요,

우리는 피투성이가 되도록 서로 살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번 두령의 실책을 참아왔다.

헌데, 여기 계신 이분들은 우리네처럼 협기와 의리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청했다. 너희들을 살상하지 말고 내게 이런 기회를 주기를 부탁했다. 극악무도한 자를 산채

에서 내쫓고, 인화하는 녹림당이 되자는 것인데 이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지 어재서 배신이

된단 말이냐? 좋다, 말할 자가 있으면 나서서 말해봐라." 말을 꺼냈던 자는 입을 다물었고,

다른 자들도 잠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졸개들 중에서 감동이의 연락을 맡았던 자가 나서

서 말했다.

"부두령의 얘기가 맞소, 저자는 포악한 사람이오. 아까도 양산마루를 넘다가 떠꺼머리 총

각애들을 셋이나 베어 죽여서 낙엽 아래 묻고 왔소이다. 우리가 부처고개에서도 시골 장꾼

들을 몰살시킨 적이 있소만, 나는 그 뒤 밤만 되면 악몽에 시달리오. 우리가 덕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탓이오."

감동이와 함께 상단에 잡혔던 자도 말했다.

"이분들은 관아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그보다는 우리네 같은 자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협

객들이셔. 내가 한 사날 지나며 겪어봐서 잘 알지. 우리 산채는 다른 이를 두령으루 모셔야

하네."

이렇게 되자, 다른 모든 졸개들은 서슴지 않고 떠들기 시작했다.

"노가 놈의 목을 쳐버려야 해."

"죽여라!"

"그가 재물 숨긴 곳을 안다."

"산채에서 혼자 내려가버릴 작정이었어."

그 창봉을 제법 쓰던 자가 다시 나서며 감동이에게 말했다.

"둘이 싸우시오. 저항 못할 자는 베는 법이 아니니까." "좋다."

감동이는 환도를 빼어들고 길산의 앞으로 나섰다. 길산은 노가에게서 물러났고 노가는 턱

으로 흘러내린 피를 소매로 쓱 문지르며 일어나 앉았다. 감동이가 떨어진 장검을 주워 노가

앞으로 던지며 말했다.

"어서 들고 나서라."

노가는 칼을 집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박대근이며 길산이, 갑송이 등을 둘

러보고 나서 부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놈을 쳐죽이고 나면 너희는 어쩔수 없이 나를 따르게 될 거다." 감동이는 칼을

쳐들고 노가의 주위로 돌아가며 대꾸했다.

"큰 소리 치지 마라. 그 애 호박 같은 대갈통을 두 쪽으로 내줄 테다." 노가도 칼을 몸과

수평이 되게 옆으로 벌려들고 휘저으면서 감동이의 빈틈을 노렸다. 노가는 장검이나 쌍수

도를 쓰게 되었고, 감동이는 길이도 짧달막한 예도이니 무술검으로 대적하게 되었다. 원래

칼을 쓰는 데 있어서 쌍수도란 단칼에 필살시킨다는 법으로, 공격하기에는 유리하지만 다

음 자세를 취하기까지의 동작이 느리고 칼 방향의 선을 쉽게 바꿀 수가 없아 방어에는 좀

불리한 검술어었다. 예도로서 하는 무술검은 자세에 변화가 많고 칼의 방향을 여러 가지로

빨리 바꿀 수가 있는 대신에 장검의 직도를 막아낼 수가 없는 약점이 있었다. 자연히 무술

검은 동적이 되고 쌍수도는 정적이 되게 마련이었다. 노가는 장검을 두손으로 잡고 왼편으

로 곧추세워 들고 감동이의 측면으로 천천히 도는데, 발은 안전하게 옆으로 펴서 땅에 댄

채로 끌고 갔다. 감동이는 예도를 정면으로 불숙 내밀어 칼끝을 통해 상대를 겨누어보며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돌렸다.

 

1장 재인촌

1

재인말 사름들은 연희가 없는 철에는 공동으로 경작하는 조밭이나 매며, 여가를 공장이

일로 보냈다. 그들이 주로 많이 만드는 것은 왕골이나 버드나무 가지로 만드는 반짇고리,

리짝, 소쿠리, 키 같은 것들이었고, 베틀에 쓰는 바디라든가 참빗도 만들었다. 그들이 평상시

에 유기 수공품을 만들고, 또한 그것으로 부역을 삼게 된 것은 하도 까마득한 예날이어서

그들 자신도 언제부터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갈대나 버드나무가 자라난 천변과

강가를 따라서 머물곤 했던 것이다. 유기를 만드는 자들은 광대들 뿐만 아니라 백정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은 신분의 한 표시였었다.

"길산아, 야 길산아!"

장충은 툇마루에 나서며 생솔 울타리 옆에 엇비슷이 대어 지은 헛간 쪽으로 고개를 뽑으

면서 외쳤다. 얼마 전까지도 길산이 버드나무 가지를 다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인기척이

없었다.

"아니, 이 녀석이 어딜 간 게야. 송화 무더리장을 봐얄 텐데..... 이러단 놓치겠군." 안방,

윗방 그리고 마당 한편에 따로 지은 마누라의 신당에서도 아무 소리가 없었다. 물론 장충의

처야 일년이 열두 달이면 반 넘어 나가 사는 사람이고 그 점은 장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

. 하지만 봉순이마저 보이지 않았다. 봉순이는 몇해 전에 그들의 딸을 까막내 사는 갖바

치 박서방에게 여읜 뒤로 마누라가 신딸이랍시고 데려온 열일곱살짜리 처녀였다. 장충은

그동안 만들어온 바디와 참빗을 망태에 그득히 담았다. 물주에 일정량을 납품한 나머지는

저자에 내다 파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막연하게 집 밖을 향하여 외쳤다.

", 게 누구 없느냐?"

어디선가 대답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울타리 삽짝문이 벙긋 열리면서 봉순이가 쫓아

들어왔다.

"어디 갔었니?"

"텃밭에 가갔댔어요."

봉순이는 파와 고추를 소쿠리에 가득히 담아 갖고 있었다.

"네 엄마는 청송서 아직 안 왔니?"

"아직 올 때가 안됐어요. 어쩌면 낼 오신댔는데."

"뭘 까짓 무꾸리루 밤을 세워..... 길산이 찾아오너라." "오빠는 동무들 데리러 나간댔어

."

"장에 가야 할텐데. 얘가 모르나....."

"동무들이랑 함께 장에 간대요."

"누구 말이냐?"

"아이 참, 누구겠어요. 갑송이 오빠하구 큰돌이 아저씨죠." "거 비슷한 놈들끼리 어울리는

게 무슨 사단이 있는 모양이로군." 봉순이는 배시시 웃고 나서 자랑조로 말하였다.

"오빠가요, 무더리 수철전패들 버릇을 고쳐놓겠다구 그러던데요 뭐." 장충은 고개를 끄덕

이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기도 빙긋 웃었다.

"저희 세 놈이 무슨 수로 무더리 장터 패거리를 당할라구." 하며 일부러 코웃음을 치는

장충의 말에 봉순이는 시무룩해졌다.

"지난 장날에 큰돌 아저씨가 허리를 삐어 와서는 다음 장날엔 꼭 같이 가자구 신신당부를

했대요."

"익소 패거리란 하다못해 아전 뒷배경이라두 있는 놈들인데, 타관두 아니구 제 고장에서

싸움질 해봤자, 권세 없는 놈들 손해란 걸 모르구....." "길산 오빠가 그놈들 얼굴을 모르니

까 데리러 갔지요, ..... 당을 지어 대적하자구 갔나요. 모두들 그런대나요."

"뭐라구....."

"황주, 봉산, 문화 장터의 무뢰배들은 길산 오빠 이름만 들어두 꽁무니를 뺀다구요." "

따의 권술이나 조금 익혔다구 조무래기들 두드려서 뭣해." 이제부터 바빠질 텐데 연희나 맞

추어볼 게지. , 그러다 관가에 끌려가서 옥살이라두 해보란 말야." "장정들이 재인 말은

몰라두 길산 오빠는 안대요."

"허허 녀석두 참!"

고갯짓을 하면서 자랑스레 얘기한 봉순이는 점심으로 개떡을 찌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충은 남초를 쌈지에서 내어 곰방대에 담고 한모금씩 천천히 빨면서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일부러 봉순이 앞에서 길산의 얘기를 떨떠름하게 받는 척하였으나, 기실 내심으로는

길산을 든든하게 여기고 있었다. 어디엘 가나 제 고장이 따로 없이 양식을 구걸해온 그들로

서는 심지어 어린아이에게서까지 철저하게 천인의 대접을 받게 마련이었다. 밥술이라도 얻

어먹으려면 유들유들하고 교활한 들개 같은 사나움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명년에는 장가를 들여야 할 텐데....."

갓 오십줄에 들어선 장충의 귀밑머리는 제법 흰 오라기가 생겨났고, 예전의 팽팽하고 울

퉁불퉁하던 근육들은 모양뿐이지 근기가 빠져서 느슨해져 있었다. 요즘 젊은 광대들은 재인

말에 싫증을 느껴 거사질이랍시고 사당패에 끼여들기도 하고, 저자의 괴뢰배가 되어 삼남으

로나 북관으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자가 많았다. 하긴 장충도 젊을 적에 구월산 기슭을 떠

나 송도 굿중패에 끼여들었던 적이 있었고 덕물산에서 소무질을 하던 지금의 처를 만났던

것이다. 처는 은근히 장충이 굿거리의 잽이 노릇이나 하며 걸립 행각을 그만두어 주기를 바

라는 눈치건만, 신명 많고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라고 느끼는 장충은 자연히 봄 가을이 되

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구나 장성한 길산이가 탈판이나 재담의 상대역이 될

때는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장충은 길산을 데려오던 해에 울타리 곁에 회초리처럼 가느다란 버드나무 한쌍을 심었는

, 시방은 굵기가 두 뼘은 되고 늘어진 가지가 대문 위를 덮을 만큼 크게 자라난 것이다.

그는 곰방대를 뒤집어 툇마루 턱에다 탕탕 두르려 털고 나서 방안으로 들어서며 봉순이에게

말하였다.

"내 것은 챙기지 말아라."

"장에..... 안 가시게요?"

"오늘은 집에서 탈박이나 새로 만들고, 북도 낡았으니 손좀 봐둬야겠다. 곧 길 떠날 때가

될텐데."

"오빠가 일낼까봐 그러셔요?"

"아니다, 세 녀석이 작당을 해서 가는데, 내가 끼이면 녀석들이 재미없어할 게야." 장충

은 선반에서 고리짝을 내려놓고, 묵은 탈박이며 나무 파는 장도들을 내어 숫돌에 물을 치

고 날을 갈았다. 그는 오랜만에 장터에 나가려 했으나 마음이 변했던 것이다. 혹시 길산이

가 아비를 짐스러워하여 장터에서 행동하기가 불편할까 염려하였던 때문이었다. 광대가 장

터나 도희에서 본바닥놈들에게 괄시받고 꿀리기 시작하면 패거리의 연희에도 지장이 많을뿐

더러 재인들 사이에서도 행세할 수가 없게 되는 법이었다. 광대는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해온

가족 같은 단결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들끼리만 통하는 은밀한 법이 있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패거리를 단단히 결속시키기 위해서는 춤과 노래에 잡재주뿐만 아니라 주먹질에도

능해야만 하였다.

절에 승병이 있어 외적과 화적에 스스로 방어를 하듯, 저희끼리 작당하여 다니는 보부상

이나 광대패들도 간단한 권술이며 칼질을 익히게 마련이었다. 장충은 젊었을 적에 거사질을

하던 시절, 절의 노스님에게서 태껸과 단검쓰기를 배웠었다. 그가 배운대로 길산에게 땅재주

나 탈춤을 가르치는 틈틈이 그것을 배우도록 하였는데, 워낙 재간이 몸에 배어서인지 대번

에 익히고 말았던 것이다. 길산은 타고난 몸짓으로 삽시에 그 형을 모두 익혔고, 언젠가 어

느 마을에서 양민 아이들에게 흠씬 맞은 뒤로 더욱 열심히 단련한 듯하였다. 큰잿말에 머물

게 되는 여름과 겨울마다 산기슭에 모래더미며 말뚝을 세워놓고 남몰래 단련을 몹시 하는

눈치였었다. 길산은 매처럼 날래었고, 차돌같이 단단한 장정이 되었던 것이다.

장충이 묵은 탈의 먼지를 털고 모양을 견주어 보고 있는데,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삽짝이 열렸다.

"아버지 송화 장날인데 잊으셨어요?"

목소리가 걸걸하고 어깨는 탄탄하며 중키에 날렵한 몸매의 총각이 쾌활하게 들어섰다.

충은 그냥 코대답으로, "알구 있다."

하면서 일손을 멈추지 않는데, 길산은 문가에 와서 들여다 보았다.

"그럼 뭘 하세요. 장에 내갈 물건들은 다 챙겨놨는데요." 길산이는 땋은 멀리를 질끈 동

인 무명 두건으로 감쌌는데, 볼때기에 구레나룻이 시커멓고 하관이 쪽 빨랐다. 살결은 가무

잡잡하고 콧날이 고집스레 섰으며, 눈이 크고 부리부리한 것이 여간내기로는 보이질 않았

. 얼핏 보아서는 뼈대가 억센 머슴 같지만 역시 뚜릿거리는 눈빛에 총기가 있어 뵈고 동

작이 가벼워 보여서 젊은 창우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누구하고 같이 왔니?"

장충은 탈을 만지작거리며 삽짝 밖을 살폈다. 길산이는 머뭇거리더니, "저어..... 밖에 큰

돌 언니 하고 갑송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걔들두 무더리에 같이 가냐?"

"..... ..... 이번 장은 저 혼자 보구 올까요?"

", 너희끼리 가서 재미를 보겠단 말이구나."

장충의 말에 길산은 뒤통수를 긁적이는데 길산과 차림새가 비슷하고 덩치는 훨씬 우람한

총각과, 꼭대기 뾰족한 말뚝 벙거지에 동저고리 바람인 사내가 뒤따라 들어섰다. 앞선 총각

이 갑송이인데 툇마루를 향하여 턱을 치켜든 채로 상체를 굽신하였다.

"안녕합쇼."

이어서 들어선 큰돌이란 광대도 수인사를 건네고서 격의없이 툇마루에 와서 엉거주춤 주

저앉았다.

"아저씬 장에 안 갈 테요?"

장충은 큰돌이를 흘끔 보면서 혀를 찼다.

"이런 지지리 못나긴..... 호환 당한 놈이 애꿏은 고양이 밥그릇 찬다고, 어디 가서 맞구 다

니다가 애들은 왜끌어모아?"

"말씀 마슈, 내 까딱했으면 다시는 마누라 재미두 못 보고 칠성판 짊어질 뻔 했수." "

구석에서 경을 칠 바엔 아예 문화 광대란 말 내지두 말어. 송도나 한양 가면 내로라 하는

건달들이 저자에 깔렸으니까."

큰돌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뒤에 섰는 두총각을 돌아보고 나서, 열을 올려 말하였다.

"나두 장정 두엇쯤은 어깨넘이루 내치는 놈이우. 송화 본바닥놈들이 아닙디다. 해주 바닥

무뢰배들이래요. 요새 구월산 서쪽의 장연, 풍천, 은율 장을 모조리 쓸구 다닌답디다." "

렇다면 황주 여각놈들이나, 봉산 만동이 형제들이 아니구먼." "큰돌이가 열을 내서 말하였

.

"얘기를 하자면 길지요. 하여튼 뭇놈들이 나를 들어 헹가래를 쳐서는 개구리새끼 팽개치

듯 개굴창에다 콕, 했단 말이어요. 내 오늘 장에 나가면 그놈들을 그냥 두지 않을 랍니다."

길산이 물건 든 망태기를 걸머지며 말하였다.

"아버지 다녀올게요. 남초나 한근 사다 드릴까요?"

"피우다 남은 게 있다. 그보다는 시끄러운 일 내지 말구..... 알아서 처신해라. 재인이란 남

의 손가락질 받기가 쉬운 게야."

길산이는 봉순이에게도 싱글거리면서 물었다.

"너는 뭣 사다 주랴?"

"! 갑사댕기, 아니면 호박엿!"

봉순이는 길산이가 자기에게까지 물어준 것이 반가워서 냉큼 대답하고는 얼굴이 붉어졌

, 곧장은 부엌으로 달아났다. 갑송이가 놓치지 않고 부엌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놀려대

었다.

"댕기라면 이뻐지구 싶어서 그렇다지만, 머리통이 떡메 자루만한 것이 엿은 또 뭐냐?" "

누가 갑송 오빠더러 사달랬나."

"내가 댕기 사다 주랴?"

"싫어요, 우리 오빠가 사다 준댔어."

"댕기 달구 님 보러 가렴."

"점점..... 누가 뭐, 님 본댔나?"

"시끄럽다, 갑송아 가자."

길산이는 봉순이를 지분거리는 갑송이에게 지그시 누르는 조로 말했고, 장충도 부엌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 말만한 년이....."

큰돌이가 새삼 분이 나는지 안색이 굳어져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내 지난 장날에 공친 것은 오늘 곱배기루 받아내어 약주 한잔 받아오지

."

"자넨 그 큰소리 좀 치지 말게. 이번엔 또 어디가 부러져서 오는가 내 두고 보겠네." "

예 그럴 바엔 낭심을 뽑아서 무더리 바닥에다 태질을 치구 죽겠수." 끝으로 따라가던 갑송

이가 입을 히쭉 찢고 나서 봉순이에게 한마디 던졌다.

"큰돌 아씨 낭심 뽑아 던지면, 낼름 주워다가 너를 줄 테니 회 쳐 먹아라이잉." 갑송이는

헤헤대며 이미 삽짝을 빠져나갔고, 봉순이 혼자 발을 동동 굴렀다.

"난 몰라 몰라..... 저런 숭칙한 게....."

세 사람은 등짐과 망채를 지고 큰잿말을 나섰다. 큰잿말은 광대산 줄기가 치솟은 골짜기

아래 자리잡았는데, 사방이 작은 구릉과 산줄기로 둘러싸였고, 그 사이로 비좁은 밭뙈기가

있었는데 양옆은 짙은 송림이었다. 고개를 넘으면 온정말이 나오고 이어서 까막내를 따라

청송 까지의 시오리 길이 온통 갈대로 뒤덮여 있었다. 고개를 넘고 까막내에 이르니 짐을

지거나 머리에 인 사내와 아낙네들이 보였다. 갈대가 안개처럼 자욱이 뒤덮여 있었다. 고개

를 넘고 까막내에 이르니 짐을 지거나 머리에 인 사내와 아낙네들이 보였다. 갈대가 안개처

럼 자욱이 뒤덮여 있었다. 햇밤 망태를 짊어진 사람, 또는 콩이거나 팥을 짊어지거나 쇠등에

나락을 심은 사람, 닭 두어 마리를 꿰어들고 마누라가 달포를 걸려 짜낸 무명을 짊어진 사

람들이 골짜기에서 밭두렁 너머로 들판을 지나 하얀 점을 이루어 두어 점, 서너 점씩, 모여

들고 있었다. 어서 가자고 소리치기도 하고 지난 장의 시세가 어땠느냐고 묻기도 하면서,

절이 달라 오래 만나지 못했던 두레 동무가 오랜만에 서로 가족의 안부나 그 동네 친척의

근황을 듣기도 하였다. 함지나 버들 바구니에 물건을 인 아낙네들은 유난히 불거진 앙가슴

을 내밀어 한 손은 머리 위에 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재빨리 휘저으며 걷는데, 부푼 무명

치맛자락 중에도 궁둥이 부분이 뛰는 암탉의 꽁지처럼 뒤뚱거렸다. 아이들마저 곁에 따라붙

어 제 어미의 짐을 덜 양으로 한 보따리씩 연약한 등에 짊어졌건만, 장 구경 나가는 게 즐

거운지 연신 주의를 돌아보며 아무에게나 씩 웃곤 하는 것이었다. 업힌 아이는 축 쳐져서

엄마의 허리 아래 간신히 매달린 채 흔들거리면서 잠을 잤다. 길산이들 세 사람도 까막내를

지나면서 작은 잿말 사람들을 만났다. 앞선 자가 먼저 큰돌이에게 말을 건넸다.

"지난 장날에 무더리에서 싸움질 했다며 ?"

"수가 많으니 당할 재간이 있나. 독불장군이 따로 없네." "수는 무슨 놈의 수야, 예미랄

..... 장거리에서 얻어맞을려면 광대 밥술 놓아야지." "큰소리치지 말어, 이 자식아. 남의

분은 나는데..... 다리 몽갱이를 분질러버릴까 부다." 길산이가 웃으면서 물었다.

"우리 매부는 오늘 안 나왔나?"

", 참 박서방은 메칠 전에 봉산 나갔어. 자네 누이는 뭐 모친이 굿 벌린다며 청송 올라

가데."

"그나저나 오늘 장바닥이 좀 흐드러 질라나. 요샌 무더리장두 한물갔데." "은율, 풍천으루

경기가 옮아가는 모양이지. 이젠 신천장으루 봐야겠어." "헌데 총대 어른은 요즘 어떤가?"

"손돌 영감 말여?"

"그래, 작은 잿말루 물러앉으시곤 통 못 뵈었네."

"그 영감 요새 깨가 서말이지. 까막내에 하루갈이 조밭이 있잖나. 올여름부터 김매는 사람

이 하나 더 늘었어."

"그게 그 얘기로고만."

"무슨 얘기....."

큰돌이가 알겠다는 듯이 껄걸 웃었다. 그는 길산의 어깨를 치며 말하였다.

"총각이 그런 건 자세히 알아봐 뭣해. 손돌 영감이 샛밥을 먹는단 말여. 신천서 애숭이 은

근짜 기집 하나를 얻어왔다는 겡야."

"제길 난 또 무슨 얘기라구, 유종이 걸려서 다 죽게 되어 색주가에서 내다 버린 아이를

데려다 활인해내었다는 얘기 아닌가. 총대 어른이 그럴 분이 아니야." 길산이는 다소 불쾌

해져서 그들의 말을 막았다. 작은 잿말 사람은 애매하게 덧붙였다.

"기집이 제법 해사하든데 그래. 한집에 살구 있으니, 장성한 아들두 없는 터에 그게 시아

버지 며느리 사이두 아니잖겠나?"

"쓸데없는 소문들 내지 말어."

그들이 청송골을 지나는데 몇몇 장꾼들이 마주 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파장하여 돌아올

시각도 아니건만, 그들은 곡물자루나 미투리짝에 싸리비 등속을 그대로 지닌 채였다. 처음에

몇사람은 그냥 지나쳤는데, 드디어 갑송이가 앞에 오는 장꾼에게 물었다.

"벌써 파장이 되었수?"

곡물자루를 짊어지고 오던 사람이 장으로 향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손을 홰홰 내저었

.

"장이나마나, 아예 가지두 마슈. 거긴 장시가 아니라 시방 난리터요." 큰돌이가 일행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것 보라니 그놈들 짓이라니까."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제각기 떠들었다.

"우리네야 뭐 알았나요. 아침나절부터 가서 자리들을 잡고 앉았는데, 갑자기 장터가 소란

스러워 지더란 말이지요, 으레껏 있는 주정꾼 녀석인가 보다 했지요. 조금 있더니 웬 험상궂

은 장정 서넛이 나타나더니 가진 물건을 재가에 넘기라는 겁니다." "재가.....?"

"글세 말이오. 우리야 농사짓는 틈틈이루 장보러 다니는 놈이, 물주를 알겠소 재가를 알겠

. 도회지 공장이꾼도 아니구요, 어언이 벙벙해서 재가란 게 어디냐구 그랬더니, 거 왜 사

거리 앞에 우물집이라구 주막이 있지 않습디까. 거기 묵고 있는 모양이데요." "그렇다니

....."

"아씬 가만 있수. 그래서요....."

"내 물건 내가 파는데 뭐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했더니..... 안 그러면 장세를 내랍디다.

신네가 뭔데 장세를 내오 하니까 나라법이라나요. 감영에서 하달이 내려와 동헌 앞에방이

붙어 있답디다. 아마짜구 있는 모양입디다."

"나는 재가라구 우물집에 수걱수걱 가봤지요. 곡물은 따루, 과물 따로 쌓아놨는데, 순전히

화적이나 다름없습디다. 팥 서너 되를 빼앗기다시피 넘기구 왔지요. 말감고 녀석이 됫박질을

하는데 손재주가 어찌나 매정스러운지 석 되밖엔 안되구 거기다 가격이 몇문이나 차이가 지

더란 말이오. 그래서 안 팔겠다니까, 법으루 사사로이 못 판다며 차압을 한다구 으르딱딱이

는데..... 이런 분한 노릇이 어디 있소. 여계야 송도나 해주 같은 도회지가 아닌 바에야 난장

친 것도 아니구 읍내장에서 도적놈들이 판을 친단 말예요." 그중에서 빈손인 자 하나가 끼

여 있다가 가만히 일러주듯 말했다.

"무더리루 들어가지 말구 약산골 서낭터루 가면 제 값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거긴선 뭐

든지 다 삽디다. 수레가 세 채에 마필도 여럿인데, 아마 송상 차인들인갑디다." "이젠 거기

두 글렀수. 무더리 각다귀패들이 거기 가서 싸움을 벌여서 사람들이 꽤 상했답디다. 그 서낭

터 있던 이들두 만만치는 않았는지 무더리패가 둘이나 업혀갔답니다." 길산이가 묵묵히 장

꾼들의 얘기를 듣더니 중얼거렸다.

"서낭터에 목을 잡구 있는 자들은 우리가 이를 얻을 축이고, 무더리에서 설치는 놈들은

그 반대렸다...... 아마 읍 장터로 다니며 아전들을 꾀어서 수지를 맞추는 놈들인 모양이오."

"아예 가지두 마슈. 대부분이 헐값에 팔아넘기거나 장세를 치뤘는데, 우리처럼 뒷전에 섰다

가 슬그머니 내뺀 장꾼들은 얼마 안돼요."

"아유 어쩌나!"

"이걸 팔아야 소금을 사는데....."

"이 먼 길에 헛걸음 했네."

아낙네들은 말만 듣고도 벌써 길가에 주저앉아 풀을 뽑아 뿌리며 푸념들을 시작하고 있었

.

"어디 물건을 팔아볼까."

길산이 앞서며 말했고 갑송이도 별렀다.

"재값을 안 주기만 해봐라."

순박한 아낙네들은 이미 낙망하여 반나절이나 넘게 짚어오던 길로 되돌아섰고, 나머지 사

람들도 청송서 약산골로 갈라지는 길목에서 값을 후히 준다는 차인들이 벌인 장으로 찾아들

갔다. 큰돌이와 갑송이, 길산이 세사람만이 회봉산 아랫녘 무더리의 왕모랫벌을 향해 내쳐

갔다. 아직 소식을 모르는 인근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쉬회천의 푸른 물이 맞은편 암벽 사이로 철철 넘쳐 흘러가고 있었다. 무더리 장터는 읍내

에서 조금 떨어져 있긴 했으나, 신천, 장여느 풍천, 은율의 사거리가 모인 지점이고 따라서

정기 장시가 섰으며 그런대로 주막거리가 번성했는데, 우물집, 대추나무집 등의 도회처럼 번

듯한 주막집도 있었다. 말이 주막일 뿐 여각과 다름없어 지붕은 기와에 방이 여러 컨이었고

창고에다 마방까지 곁달린 주막들이었다.

사근다리께에 왔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려 섰고 누군가 맞는지 어이구 데이구 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세 사람은 무더리로 들어서는 다리 앞에서 잠깐 멈추었다.

뚝심깨나 있을 성싶은 장정 네댓이서 다릿목을 지키고 있는데 한 녀석이 굵다란 지겟작대

기로 어떤 농부를 두드려 패는 중이었다. 삼베 자루가 떨어져서 땅바닥 위에 콩이 너저분하

게 널려 있었고 아무도 말리는 자가 없었다. 텁석부리에 맨상투 꼴의 억세게 생긴 놈이 떠

들고 있었다.

"뭘 보는 게야, 무더리루 되돌아가잖구. 가져온 것들은 무엇이든 우물집 재가에다 넘기구

가야지, 그냥 들구 내빼왔다간 정갱이뼈가 바숴질 게야." 길산이 그놈의 곁으로 다가들며

웃음지어 물었다.

"장서는 것도 허가를 받아야 합니까요?"

"물론이지. 우리는 해주감영서 인가를 받아 나온 사람들인데, 이제부터는 시골 장터라두

지정된 재가에 팔고, 지정된 입전에서 사야 되게 법이 생겨 있다구." 길산이는 아직도 헤실

헤실 웃음을 흘리며, "저 약산골 서낭터에두 큰 장이 섰담요.....?"

사내는 눈을 크게 떠부라리며 길산을 쓱 내리훑고는 얼버무린다.

"모르는 일인데, 설사 그렇더라두 난장 트러 다니는 녀석들이니 관아에서 모조리 잡아들

일 게야. 너 짊어진 게 무엇이지?"

", 이건입쇼..... 참빗하구 바디하구 반짇고린뎁쇼. 저 친구는 돗자리 다선 장하구 애바구

니 몇틀입죠."

좀 말랐으나 역시 독하고 야멸차게 뵈는 자가 팔짱을 끼고 섰다가 앞선 사내에게 일렀다.

"재가에 갈 것도 없이 물건 내려놓구 돌아가라구 그래" 사내가 길산의 어깨에 걸린 새끼

망태를 느닷없이 움켜잡았다. 길산이는 싱긋 웃고 나서 망태줄을 잡고 뻣뻣이 견디면서 대

꾸했다.

"왜 남의 물건을 공으루 뺏으려구 허슈."

팔짱 끼고 섰던 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길산을 노려보았다.

"이놈아, 몰라서 물어. 너희 유기장들은 관아의 물주에게 모두 공납하게 되어 있지 않느

. 어째 사사로이 장시에 내다 파느냐. 그런걸 압류하러 나온 사람들이 바루 우리네 같은

사람들이다."

곁에 섰던 큰돌이도 전에 한번 당한 적이 있는지라 소리쳐 말했다.

"여태껏 정해오기로는 우리가 황주 물주에게 납품하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저자에 내어 팔

아왔는데, 대처두 아닌 촌에서 단속이 웬말이며 당신들은 관인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권리

루 이러시오?"

"여러 말 할 거 없다. 우리는 해주 여각에서 허가받고 나온 사람들이다." 보아하니 관에

연줄깨나 닿아 있는 무뢰배가 분명하였고, 아마도 부근 장읍을 돌아다니며 동헌에 손을 써

야 고작해야 이배들게 이익을 나눠주기로 하고 장시의 수탈을 일삼는 자들인 모양인데,

법 사람깨나 칠 줄 안다는 자신들이 만만하였다. 지겟작대기로 사람을 패던 자가 느닷없이

한 소리를 내지르며 앞서 있는 길산이에게 덤벼들었다.

"이눔, 죽어봐라!"

길산은 후려치는 작대기를 재빨리 비켜 서며 황소같이 내닫는 사내의 안다리를 발끝으로

걸어 슬쩍 퉁겨주니 놈은 제 힘을 견디지 못하여 앞으로 고구라져 면상을 모랫바닥에 갈아

버린다. 곁에서 구경하며 두려워 떨던 장꾼이 개구리 뻗듯 하는 놈의 꼬락서니를 보고 참지

못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길산이도 껄걸 웃어대며 태연히 서 있었다.

"허 성미두 참....."

"저놈 죽여라."

"먼저 사람을 쳤다."

하며, 남은 패 네 놈이 단번에 소매들을 걷고 어깨를 숙이며 한꺼번에 달려들 자세를 취

했다. 몽둥이를 가진 자도 있었고, 오장으로나 여겨지는 그 비쩍 바른 사내는 품안에서 짤막

한 쇠몽치를 꺼내 들었다. 길산은 여전히 꿈쩍 않고 버티고 섰으며 갑송이는 왼편 다리 난

간을 막고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어느 놈이든 덤벼라. 저 개굴창에 거꾸로 집어던져서 송사리나 실컷 먹여줄 터이다. 고기

에 주린 녀석은 나서라."

큰돌이는 전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지라 아직은 제 동무들에 신용은 가지 않았으나 여

차직하면 내뺄 양으로 사람들이 둘러선 뒷전에 처져 있었다. 길산이 말했다.

"좀 비켜주오. 재가인지 화적굴인지 얼른 구경하구 오게." "이눔아, 사람을 치구 나서 온

전히 돌아갈 성싶으냐." "거 참 모를 일일세. 저 혼자 상판을 땅바닥에 처박은 워리새끼를

남의 탓이라네. 나는 뭐 장에 나도는 개새끼가 똥 먹을라구 그런줄 알았더니 그게 바루 사

람이었던 게지." "뭣들 하니..... 골통을 박살내버려라."

쇠뭉치를 든 오장이 장정들에게 소리쳤다. 길산이 눈꼬리가 빳빳이 곤두서면서 뒤로 몇걸

음 피해 망태를 벋어던졌다.

"갑송아 간다....."

하는 것과 동시에 몽둥이를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든 자가 둘이서 길산이의 골통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길산은 어깨를 휘청 숙이는데 몽둥이가 귓전을 지나 빠져나갔고 길산의 상체는

상대편의 겨드랑이 사이에 파고들어가 있다. 길산의 정권이 그자의 명치에 꽂히면서 오른발

로 또 다른 자의 턱주가리를 휘익 돌려서 차는데 두 놈이 에이쿠 한마디 내지를 새 없이 한

놈은 스르르 무너져 내리고 또 하나는 팽글 돌아서 공중에 휘익 떴다가 떨어진다.

"갑송아, 물 좀 먹여주어라."

"내가 뭐라더냐, 고기에 주린 놈만 오랬는데, 살집이 피둥피둥한 것들이 그리도 남의 살만

탐하느냐, 이놈들."

갑송이는 히죽대며 두 녀석을 한꺼번에 잡아 몇바퀴 뺑뺑이를 시키다가 다리 아래로 내던

져버렸다.

다리를 가고 어던 장꾼들이 차츰 모여들어 서로 손가락질을 하면서 웃어대는 중이었다.

갑송이는 먼저 상통을 땅에다 갈아붙이고 엎드렸던 자가 엉금엉금 일어나자 뺨 한차례 울려

붙이는데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콧날이 옆으로 돌아가며 단번에 주둥이가 터져버렸다.

"너두 송사리나 두어 근 먹구 용궁 형리 앞으로 가거라." 물소리와 웃음소리가 사근다리

위에 가득 찼다. 이제 남은 것은 제법 침착해 보이는 오장 비슷한 놈과 겁에 질린 졸대기

한 녀석뿐이었다. 갑송이가 싱거운 듯 웃고 섰는 길산이 옆으로 썩 나서며 말했다.

"너는 구경이나 해라. 내가 두 놈 다 해치울란다."

"그럴까....."

길산은 벗어 던졌던 망태를 집어들고 통나무 난간에 가서 걸터앉았다. 두 놈이 재빨리 갈

라서며 갑송이의 좌우로 돌았다. 몽둥이를 든 조무래기는 덤벙대는 것 같았으나 쇠몽치를

겨눠 잡은 오장은 안색이 하얗게 되었지만 섣불리 빈틈을 보일 놈은 아니었다.

"에라 이잇....."

몽둥이를 타작도리깨 휘둘 듯 세차게 돌리면서 한 놈이 덤벼들고 오장 녀석은 걸음을 크

게 띄어 갑송이의 옆구리 쪽을 급습했다. 갑송이는 몽둥이 든 자의 아래로 몸을 낮추었다가

달려들어 허리를 억세게 죄어 잡았고 오장의 모가지를 거머쥐려고 팔을 뻗었다. 오장은 갑

송이의 옆구리를 쇠몽치로 호되게 줴지르면서 잡히지 않고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 싸움깨

나 해본 놈일시 분명했다. 쇠몽치에 맞은 데가 몹시 아팠는지 갑송이는 오만상을 찡그렸다

가 얼굴을 붉히면서 잡힌 자를 쳐들어 오장 녀석에게 와락 내던지면서 잇달아 쫓아들어갔

. 역시 오장은 뒤로 궁둥방아를 찧고 넘어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어나려는 그자의

가슴팍을 갑송이의 곰 같은 발이 콱 밟았다. 갑송이는 버둥대는 자의 가슴을 지그시 밝고

서서 껄걸 웃었다.

"어디! 코를 문대어줄까, 아니면 주둥이에서 이빨을 너덧 대 뽑아가질까." "살려주오."

그자는 기진맥진해졌는지 뒤통수를 완전히 땅에 대고 두 손도 땅에 내던진 채 헐떡였다.

길산이가 그 옆에 가서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 일행이 모두 몇 명이냐?"

"발이나..... ...... 치우게 허우. 답답해서 ..... 말 못하겠소." "그놈 날뛰던 짓 보아서는

영 약골일세."

갑송이가 비켜났고, 그자는 휴우 긴 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았는데 이젠 두려운 눈으로 장

터 쪽을 힐끔대며 도망칠 기색이 역연하였다. 길산이 재우쳐 물었다.

"모두 몇 명이냐니까....."

"요번에 아홉이서 나왔소."

"네 출신들이 누구 밑에냐?"

"우리는 해주 한량 신복동 성님의 아우 되는 사람들요" "신복동이? 그러면 재가에 넷이

남았단 말이지."

"아니오, 이 다리는 내 몫이오. 저 사람들은 우리께 딸린 보상들이오." "못된놈들! 하는

일없이 놀구 먹으면서 장사치에 업히고 관아에 줄을 대어 시골 장터를 쓸구 다녀?"

갑송이가 대들어 짓밟으려는 것을 길산이 뒤로 밀어냈다. 그 틈에 달아나려고 후닥닥 일

어서는 자를 길산이가 낚아채어 팔을 비틀어 잡았는데, 녀석은 맥을 추지 못하고 허리를 뒤

로 젖히며 비명을 내질렀다. 길산이 또 물었다.

"약산골 서낭터에 왔다는 자들은 너희들과 관계가 없느냐?" "그자들은 송상 차인들이우.

시골마다 난전을 트러 다닙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관이 그자들을 단속하지 않겠느

?" "이방놈들이 양쪽에서 모두 돈냥이나 먹었으니 그렇지요. 더구나 차인들두 배경이 든

든합니다."

"좌우간에 우리는 제값이나 받구 먹구 살몀 그뿐이다. 장터에 와서 분탕질을 친 것은 네

놈들이니..... , 너희 행수 되는 놈에게 안내해라."

길산이가 그를 앞으로 밀어냈다. 팔이 뒤틀린 채로 걸어가며 오장되는 녀석이 고개를 돌

려 은근히 협박했다.

"우리 패가 그리 만만치 않을 거외다. 공연히 큰코 다치지 말구 물건이나 넘기구 가시오.

두배로 셈해줄 터이니."

따라서 걷던 큰돌이가 곁에서 그자의 궁둥이를 올려차며 촐싹거렸다.

"예끼 이놈아, 누굴 지금 까실르는 거야. 남의 장터에 들어왔으면 소문쯤은 알구 왔어야

. 우리가 누군 줄 아느냐, 재인말 사람이다."

앞서 가는 자는 기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광대패라면 해주에 들를 일이 많을 텐데, 어디 두고 보자." "이 사람이 팔은 떼어두구

갈려는가!"

길산이가 잡고 있는 그자의 팔을 지그시 비틀어주자 어깨를 모로 꼬며 이상한 소리를 내질

렀다.

"두고 봐야 헛일이네. 신복동이가 뉘 집 개 똥구녁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잘못 봤네."

그들은 뒷전에다 구경꾼의 하양 꼬리를 끌고 주막거리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벌써 길가

에 지게나 보따리를 벌이고 물건을 팔던 보부상들 중에 뛰어가 알린 자가 있어서 멀리 뵈는

우물집 앞에는 건장한 사내들이 길을 가로막고 섰는 것이 보였다. 아이들이 떼를 지어 길

산일행의 부근을 따라왔고 물건을 넘기고 나서 터무니없는 가격에 울분을 참고 있던 군중들

이 모여들었다. 한 서름 걸음 남짓해서 길산은 잡은 자의 비틀었던 팔을 바깥으로 휘돌리니

에구구 하면서 그자는 저절로 몸이 돌아 나뒹굴었다가 황급히 저희 패에게로 뛰어갔다.

갑송이와 길산이가 어슬렁대는 걸음으로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갑송이가 한마디 했다.

"느이들이 도적눔이라며?"

그들은 잠잠했다. 우물집 앞에는 멍석이 열 개쯤 벌어져 있었고, 곡물은 곡물대로, 과물은

과물대로, 수공물은 그것대로, 채물은 채물끼리 모아져 무더기를 이루어 쌓여 있었다. 마구

간 앞에는 말 십여 필이 매어져 있는데 그자들이 타고 온 것이 분명했고, 그들 중에 의관

정제 한 자가 두 사람 있는 것으로 바아 하나는 무뢰배의 행수이며 다른 하나는 물주가 분

병하였다. 장부택을 뚤뚤 말아 들고 장죽을 문 자가 바깥마루에서 크게 외쳤다.

"뭐가 이리 시끄러우냐?"

물주 되는 자는 곁에 관노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동헌에서 나온 자인 듯하였다.

길산이 외쳤다.

"댁네들이 무어라구 함부로 양민의 물건을 뺏고 사람을 패고 하시오. 우리는 다만 장보러

온 사람들이오."

"그러면 장을 보구 가면 될 게지 도작이라니 무슨 말버릇이야. 관가루 끌어다가 혼찌검을

내기 전에 얌전히 팔 것은 팔고 살건 사고 돌아가."

"값을 눅게 받은 사람두 많구, 빼앗긴 사람도 여럿이니 그것들을 죄다 돌려주면 짹짹 소

리 없이 가리다."

길산이가 지지 않고 뻗대는데 장정들을 거느리고 섰는 행수인 듯한 자가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총각이 우리 아이들과 다툰지라 아직 결이 삭지 않은 모양인데 값은 섭섭치 않게 셈해줄

터이니 어서 물건이나 내오."

"행수 되는 사람이오? 나는 재인말 사는 길산이라구 하우. 누구 맘대로 이녁서 전매를 맡

으랬수. 사람 패는 자들과는 거래 않겠수."

행수가 입맛을 쩝쩝 다셨지만, 역시 노련하여 함부로 노기를 드러내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 사람..... 고집이 세군."

그때에 곁에 섰던 자 하나가 행수에게 귓속말을 속삭였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산

을 찬찬히 흝어보았다.

"나는 또 송도 차인패들과 함께 온 사람인 줄 알았더니..... 광대패로군. 그래 거래를 않겠

다면 너희들 소원이 뭐냐. 우리와 얼려볼테냐. 시비하러 온것이냐 뭐냐." "그래, 남의 고장

에 와서 판을 치는 놈들의 버릇을 고쳐주러 왔다." "흥 그래..... 네 이름은 나두 이 사람들

게 들어서 기다렸던 참이다." 그들 틈에는 언젠가 길산에게 되우 경을 친 적이 있는 송화

본바닥 악소 패거리가 서너 명 끼여 있었는데 낮술깨나 좋이 얻어마셨는지 상판들이 모두

벌겋다. 쇠전 나와 놀던 도수장이 한 녀석이 삿대질로 길산을 가리키며 떠들었다.

"저런 녀석은 아예 송화장에는 얼씬 못하게 배창자를 갈라놔야 합니다. 이눔아,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요 쥐새끼....."

갑송이가 분을 참지 못하여 그들 무리 사이로 헤집고 들어가자 그들은 좍 흩어졌다. 행수

되는 자는 아예 나서지도 않고 술청 안으로 피해 서며 외쳤다.

"반죽음시켜놔라. 뒤책임은 내가 질테니."

우물집 정면을 향해서 길산이가 서고 갑송이는 뒤편을 지키고 섰다. 술청의 입구에 행수

가 섰고, 물주라는 자는 봉노 마루에 장죽을 물고 앉아 빙긋이 웃으며 관망하고 있었다.

물집 건너편 초가 앞에는 구경꾼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었고 큰돌이는 어디서 주어왔는지 굵

기가 한 뼘은 되어 뵈는 장작개비를 들고 끼여들까 말까 하는 동작으로 연신 어깨를 추스르

고 있었다. 심지어 싸움 났다니까 색주가의 계집들까지 대문마다 몰려나와 있었다.

"덮쳐라!"

행수가 소리치자 손마다 몽둥이나 쇠몽치를 든 장정들이 일시에 우하니 덤벼들었다. 길산

이 몸을 날려 앞에 오는 자의 가슴을 무릎으로 꺾어 차며 다른 손으로 몽둥이 든 자의 팔을

잡아 젖히고서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내리쳤고, 이어서 두발을 솟구치며 엇갈려 뒤에 섰는

자의 면상을 올려찼다.

길산의 빠른 동작에 세 놈이 일시에 코피가 터지고 면상이 일그러져서 나자빠졌고 둘러싼

자들은 잠시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뭣들하느냐, 한꺼번에 덮치지 않구."

행수라는 자가 소리치자 그제서야 몽둥이들을 치켜든 장정들은 선뜻 달려들지 못하고 주

춤거렸다.

"에잇 귀찮아!"

갑송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내달아 우물집 앞에 내걸린 주기의 기다란 막대를 들더니

닥치는 대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무릎을 얻어맞고 깡충 뛰는 놈, 마빡이 터지는 놈, 등줄기를 맞고 앞으로 꼬라박는 놈 등

등으로 갑송이의 무지막지한 기세에 소 건너는 웅덩이에 하루살이 흩어지듯 했다. 서슬들은

제법 퍼렇더니 여남은 명의 장정들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우 몰려서 술청 쪽으로 쫓

겨갔고, 길산이네는 대로에 서서 껄껄댔다. 길산이가 술청 앞을 가로막고 웃어젖혔다.

"어육이 되나 보다 했더니 싱겁기는 꼭 고드름장아찌로구나, 별것두 아닌 놈들이 미꾸리

만 처먹었느냐..... 혓바닥만 살아가지구."

인근 마을에서 장보러 나왔다가 봉변한 양민들은모두 은근히 통쾌하여 길산네와 합세하여

타관 무뢰배를 패주고 싶었으나, 혹시 뒤가 무서워서 덤벼들지는 못하고 무리 사이에 끼여

소리만 질러댔다.

"어이, 이왕 벌려놓은 판이니 아예 쫓어들어가 물고를 내버리게." "그래여, 그 우물집 술

청서껀 주인놈이건 모조리 박살을 내얀다구." "저 행수질하는 놈허구 물주란 놈을 무리매

를 놔야허네." "헌데 저게 누구지?"

"여태 누군지두 몰랐나. 저게 바루 큰잿말에 장사 났다는 길산이하구 갑송이 걔들아냐."

"큰잿말 광대패 말야."

"옳아, 문화에서두 읍내 각다귀들이 혼찌검 당했다는 그애들이구먼." 이 때 행수란 자는

의관을 훌훌 벗어 던지더니 한 손에 포교들이 지니고 다니는 꺾쇠 달린 짤막한 쇠도리깨를

꼬나잡고 분연히 술청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뒤를 따라서 갑송이에게 쫓겨갔던 자들도 우르

르 몰려나왔다. 물주도 이제는 형편이 옹색함을 짐작하고 있었다.

쇠도리깨를 치켜든 행수와 맨손의 길산이가 마주 섰다. 갑송이는 깃대를 잡고 슬슬 휘두

르며 졸개들이 다가서지 못하게 마당을 막아섰다.

"네가 사람을 잘못 봤다."

행수가 쇠도리깨를 힘차게 쌩 휘돌려 보이며 중얼거렸다. 길산이는 발 앞꿈치를 들고 두

손은 활짝 펴서 막을 태세로 그자의 왼편으로 돌아갔다.

"잘못 보기는 뭘 잘못봐, 허재비 무서워 나락 못 먹는 참새 봤나. 그 쇳뎅이 무거워서 아

무짝에두 쓸모없겠다. 가서 말 꽁무니나 쑤시렴."

"이놈이....."

"어렵쇼!"

약이 올라 애고추처멀 달아오른 행수가 쇠도리깨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ㅏ길산이는

슬쩍 앉은걸음으로 피해서 행수의 뒷전으로 빠져나가며 궁둥이를 호되게 걷어찼다. 행수는

앞으로 고꾸라질 듯하다가 간신히 바로 섰다.

"싸움을 하려면 마빡을 앞세워야지, 암내 난 삽살개 모양 꽁무니는 왜 내대느냐." 길산

이가 연상 상말로 행수의 비위를 후벼댔다. 싸움이란 성질 먼저 올리는 놈이 덤벙대다 지는

법이다. 약이 오르면 그만큼 눈썰미가 느려져서 빈틈이 많은 것이었다. 쇠도리깨를 휘두르

다 요리조리 피하는 길산의 동작에 그자도 이제는 제법 뜸을 들였다. 길산의 주위를 빙빙

돌더니 골통을 바라고 일직선으로 내리치면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옆으로 휘둘렀다. 좌우로

몸을 비키던 길산이가 하마터면 옆구리를 얻어맞고 갈빗대가 주르르 부서져 나갔을 것을 휘

청 상체를 뒤로 꺽으며 손목을 절도있게 후려갈겼다. 역시 쇠도리깨가 퉁겨나가 뱅글뱅글

돌며 멀치감치 떨어졌고 길산이는 도리깨를 찾아 돌아서는 행수의 왼팔을 잡아채어 척추

뒤로 바싹 꺾었다.

"어이쿠."

행수가 놓인 팔은 휘젓고 허리를 굽히며 꽁무니를 하늘로 치켜든 채 용을 썼다.

"그래..... 쇠도리깨 줏어다가 신복동이 밑구멍이나 쑤셔주려무나." 길산이가 팔을 쓰윽 끌

어다가 탁 놓아주며 함께 궁둥이를 내찼다. 행수는 댓 걸음 앞에 가서 개구리처럼 납죽

뻗었다. 뭉그적대며 일어나려는 것을 큰돌이가 장작개비로 내리칠 기세로 달려드니 길산이

가 외쳤다.

"내버려두. 꽁무닐 세 번까지 차주지만 그담엔 평생 칙간엘 못 가도록 해줄 테니....."

미 싸움이 아니었다. 맞은편 초가 앞에 빽빽이 늘어선 사람들이 동네 홀아비 잔칫날이라도

만난 듯 흐희닥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맞상대는 어림없을 뿐만 아니라, 해주서 왔다는 악

소 패거리들은 오물로 낯 씻은 격이 되었다.

갑송이가 한참 동안 깃대 휘두르는 짓에 역증이 났는지, 휘 내던지고서 몽둥이가 빗발치

는 틈을 곰처럼 내달아 두 놈의 멱살을 잡아 뺑뺑이를 치니 접근을 못했다.

"에라..... 염라대왕 덕담이나 듣구 오너라."

하며 양쪽으로 태질을 쳐버리니 둘이 한꺼번에 상투가 말뚝이 되어 땅바닥에 곤두박질했

. 그리고는 다른 놈을 찾아 팔을 수리 날개처럼 벌리고 달려드는데 쫓겨 흩어지는 자들의

애걔걔 소리가 마치 똥 본 오리새끼들 같았다.

물주는 드디어 가죽신 찾아 신고 장죽은 빼어 던진 다음 갓도 비뚜름하니 쓰고 마루를 내

려서는데 와들거리는 두 팔 소매가 몸보다 앞서갔다. 물주가 관노를 재촉하여 뒷문으로 빠

져 달아나며 이르기를, "어서 바삐 달려가 책방 나리께 여쭈어라. 사령 몇만 보내어 저놈들

을 잡아들이라구." "한참 재미가 관운장 대목인데 왜 날더러 가라우?"

"이놈..... 가라면 빨리 뛰지 않구."

"내가 동헌 전령이지 어디 해주 양반 전령이우. 말을 빌려두 꼴값은 세마 임자가 내는 법

인데..... 내 지금 뛰면 조반 먹은 거 모두 띠 되우."

눈치가 멀건 관노 녀석은 물주의 애간장을 태우느라고 일부러 털퍼덕 주저앉아버렸다.

주가 턱수염을 떨며 내려다보는데 호통을 칠까말까 하다가, 말고는 중치막 자락을 젖히고

바지끈에 달린 비단 주머니에서 세 닢을 꺼내어 땅에 던졌다.

"옛다, 어서....."

"예예, 벼락같이 전합지요."

관노가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갔다. 행수라는 자는 아예 땅바닥에 두다리 뻗고 앉아서 어

이없는 듯 길산을 바라보았다. 길산이도 그자가 완전히 싸울 마음이 움츠러든 것을 알았다.

"왜 덤비지 않느냐?"

"우리가 성님을 몰라봤습니다."

"너 같은 아우 둔 적이 없는데."

"성님께 우리가 졌수."

"일어나라, 그리구 너희 물주를 불러와."

갑송이는 이미 몽둥이들을 내던지고 우물집 토담이나 술청 문지방, 마루 밑에 여기저기

쭈그리고 앉은 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들어가서 주막 주인의 멱살을 비틀어 잡아끌고 왔

.

"물주는 없는데."

"뒷문으루 달아났네."

"관노가 달려갔으니 사령들이 올걸세. 귀찮게 당하지 말구 빼치게." 구경꾼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거들어주었다. 길산이가 말했다.

"장터 싸움질엔 먼저 시비를 붙은 놈이 죄지, 우리야 무슨 죄가 있나. 대처두 아닌데 난전

이란 말두 안되지. 달아날 필요 없다."

"내가 쫓아가 잡아오지."

큰돌이가 우물집 토담을 돌아 밭고랑으로 질러서 뛰어갔다. 길산이는 허리를 두드리고 팔

을 주무르며 앉았는 행수에게 물었다.

"해주서 몇이나 왔니?"

"우리 패 다섯하구 해주 물상객주 차인 중에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 합해 모두 스물하나

."

"어디 어디 장을 봤느냐?"

"장연장 두 번, 풍천장 세 번, 이곳 송화장이 두 번째요." "너희 접주란 자가 신복동이

?"

"아니오, 그분은 해주 성님이구..... 뒤에 큰성님이 계십니다. 복동이 성님은 한양서 별감

다니다 내려온 분인데 해주서 큰 색주가를 세 채나 열구 있습니다. 우리네야 그분 밑에서

밥술 얻어먹을 뿐이지요."

"그따위 색주가 주인놈이 무슨 한량이라구 시골 장터를 쓸러 다니느냐. 너희 큰성님이란

자의 명자나 알아보자."

"개성 사는 최생원이라는 것만 알지 뵌 적이 없습니다." "나를 똑똑히 봐두어라. 우리가

달포 뒤에 해주 관시 놀이에 갈 작정이니 너희 성님들 모두 데리구 마중 나오너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 우리 성님두 들으시면 사귀구 싶어하실 게요." 그때 큰돌이

가 물주를 앞세워 오는데 제법 의관을 갖췄노라고 두려움을 억누르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

이 완연했다. 길산이 아니꼬워, "거간꾼 꼴에 양반이랍시고 갈짓자 걸음이로군, 들으시오.

지금까지 눅게 셈한 물건은 누가 누구인지 알수 없으니 장터 사람 모두에게 일반으로 두

푼씩 내어주고, 빼앗긴 사람들 물건은 돌려주오."

"할테야 말테야?"

갑송이가 곁에서 몽둥이를 쳐들며 으르딱딱이니 물주가 자라목처럼 머리를 움츠리며 황급

히 말했다.

"내주겠소, 다 내주겠소."

사람들이 우물집 앞에 긴 뱀의 꼬리가 되어 모여 섰다.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라 장에 와

서 아무것도 사고 팔지 않은 사람들도 끼여들고 싶었으나 워낙 아는 얼굴들이라 구경만 하

고 섰다. 행수와 졸개들은 무덤덤히 섰고, 물주는 울상이 되어 엽전꿰미를 파했다.

관노가 동헌에 들어가니 길청은 비었고 책방의 회계 생원도 보이질 않았다. 현감은 기생

들을 데리고 무학정에 갔다는데 책방이 함께 따라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동헌에서 정자까

지 활 한바탕 거리다. 관노가 그대로 질청 앞을 뛰어나오는데 향청에서 나오던 안 이방이

그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 났느냐?"

관노는 속으로 이 늙은 여우가 낌새라도 챘나 싶어 읍하며, "뭘요, 일이 나긴요"

"어디 가느냐?"

"책방 어른께요."

"이놈! 바른대루 직고하렷다. 무슨 일이냐?"

원래 책방이란 지방수령이 금전 출납관계라든가 관문서의 정리라든가를 시키기 위해서 부

임할 때 믿음직하고 명민한 자를 골라 데려오게 되는데, 이른바 사또의 오른팔격이 되는 것

이다.

그러나 이방이나 병방 일을 맡는 아전벼슬이란 그 고장 사람으로 지방사정을 꿰고 있는

자들이라 책방과 이방의 사아란 원래가 눈치와 직책으로 버티는 앙숙지간이 아닐 수 없었

.

"이실직고하라니."

"무더리 장터에서 싸움이 났습니다"

"싸움이 났다면 병방에 알려 사령을 풀 것이지 책방 어른은 왜 찾느냐?" "..... .....

주 물주 어른이 바삐 통지해달라구 해서....." "괴이하다. 장사아치가 무슨 일로 책방을 찾는

?"

"예전에..... 안면이 있답디다."

"예끼 이놈, 보아하니 네놈이 책방 어른을 속이고 장사치께 용채돈깨나 받아먹은 모양이

로다. 누구와 누가 싸운단 말이냐?"

"장꾼 패거리하구 큰잿말 길산이가 붙었습니다."

"그래 알았다. 냉큼 가서 알려줘라."

관노가 무학정 쪽으로 내달았다. 안이방은 슬며시 웃었다. 책방의 약점도 잡았고 무엇보다

도 그가 일으 크게 벌이지 못하고 속만 앓게 될 것이 고소했기 때문이었다. 책방 찾는 관노

가 정자에 이르니 위에는 주석이 벌어졌는데, 악공 셋이 풍악을 잡혔고 책방과 사또와 청송

의 부가옹 나리인 듯한 중늙은이, 그리고 기녀가 각각 붙어 앉아 술을 따르는데 셋 중의 한

년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시조를 뽑고 있었다. 사또는 취기 어린 눈으로 늙은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고을에 내가 온 지도 이제 반년이 넘었소이다. 헌데 여기 부민가가 몇 호나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소를했소."

"청백리란 그래야 합네다."

곁에서 책방이 초를 친다. 부가옹은 어쩐지 자리가 불편한 듯 연신 빈 젓가락으로 고깃점

만 집었다 놓았다 할 뿐이었다. 사또가 은근히 눈치를 보였다.

"내 처음 환로에 나서며 부임할 시 요로에 쓴돈이 이천 오백 냥이올시다. 내 돈 천 냥에

다 한양 전가에서 변릿돈 빌려 쓴 게 천오백 냥인데, 이자 독촉에 졸리어 가족들이 여간 괴

로워하지 않고 있소이다.

사또의 의도가 은근히 돈냥이라도 우려내려는 것임을 알고 있는 부가옹은 그런대로 관리

가 갈릴 적마다 매해 가을이면 겪어오던 터라, 고장의 이권을 잡는 것으로 돈 뜯긴 벌충을

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 추수에 환곡이 모두 납부되면 우선 댁네들게 싸게 놓을 것이

니 어른께서 오백냥만 돌려주오. 내 수결했다가 증서대루 명년에는 꼭갚을리다." 노인은 사

또보다 더욱 노련했다.

"곡식이 흔천인 올해 같은 풍년에 환곡을 거둘 생각은 없소이다. 그리고 오백냥을 사또나

리께 꾸어드릴 수는 없소이다. 다만 제 충정으로 아시고 오백 냥을 쓰시는 대신에 청이 한

가지 있소."

"무엇이오?"

"밤골에 있는 관전의 닷새갈이를 소인이 명년 일 년만 사용하게 해주오." "허허, 그러면

관곡은 뭘로 충당하게....."

"충당할 방법이야 이방께 물으면 많겠지요. 소인은 관전을 빌려 담배 모종을 낼까 하는데,

물론 담배에 약이 차면 그 즉시로 천오백 냥에다 오백 냥을 보태어 이천 냥을 드리리다."

"거 흔쾌해서 좋소. 이 고을 부자 인심이 노인장만 같다면 감사 부럽지 않겠소." "부자가

어찌 소인뿐이었겠습니까?"

"꼽으면 스물은 넘지요."

하며 책방이 자리를 피해 일어났다.

사또가 속으로 헤아리기를 이런 식으로만 한다면 올가을에도 만 전은 틀림없이 거둘 것이

, 상납은 오천으로 흠뻑이리라 싶었다. 이들의 구구하고 부정한 상의가 계속되는데 책방은

누 아래 관노의 손짓을 보고 무더리에 무슨 사단이 있음을 짐작하였다. 책방은 관노에게서

장꾼 패거리와ㅗ 길산이가 싸우던 일을 듣고 물주가 사령을 풀어 잡아들이기를 청하던 얘기

도 들었다. 기왕에 해주서 온 거간꾼에게서 일백냥을 받아 사또 몰래 착복하였으니 모른달

수야 없었으나, 만약에 임의로 나서서 저들을 잡아들인다면 소문도 소문이려니와 상민들이

떼거리로 동헌에 진정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큰잿말이란 문화에서도 골치로 아는 유민촌인데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고, 건드려

봤자 일을 내고 달아나면 잡을 수도 업을 테니 관에서는 대범히 모른 체하는 게 십상일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되었다. 부랑배들이 장터에서 싸우기란 여름날 소나기 지나가듯 하는 일이라,

네 쫓아다닐 필요 없다. 내 닷 냥 줄테니 가서 술이나 사먹고 푹 쉬어라." 관노는 얼결에

엽전 다섯 푼을 받아 넣고 신이 나서 달아났다. 노인네 망령은 고기로 달래고 아전 명령은

쇠로 달랜다더니, 역시 돈 먹은 놈이 장땡이었다. 책방은 오히려 길산이네가 민원을 눌러주

었으니 인심 잃지 않고 돈 먹게 되어 다행한 노릇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중얼

거렸다.

"하지만 언젠가 혼은 좀 내야지."

길산이네는 해주 패거리가 우물집에서 보따리를 싸는 꼴을 보고서야 무더리를 나섰다.

론 자기네 물건도 넘겨 기어이 종전과 같은 값을 셈해 받은 뒤였다. 해주 무뢰배들은 기가

팍 죽어서 장보러 나온 아낙네들에게 매우 고분고분하였다. 장터가 다시 활발해져서 보통때

보다 훨씬 늦게 파장될 모양이었다. 그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챙기고는 탁주라도 한잔

씩 들까하는 참인데, 뒤에서 장꾼 하나가 따라왔다. 그는 뛰어오며 숨차서 말했다.

"여보..... 큰잿말 사람들..... 좀 보세."

"왜 그래..... 다 끝났는데 어째 불러."

하며 갑송이가 다가오는 장꾼에게 눈을 부라렸다. 사내는 세 사람의 표정이 딱딱한 걸 보

고는 머쓱해졌다.

"으르딱딱거리는 제미할..... 호랑이 포수질만 해먹었나. 여보 우리 행수 어른이 약산골 서

낭터에서 보자는데."

"약산골.....?"

"글세 거기서 같이 사귀구 싶은 사람이 있다는군."

"모르는 장차치가 놀이판 생각이 났나..... 우린 왜 찾어?" "글세 나쁜 일은 아닐 테니 같

이 가세나."

"가지 뭐 ..... 우리두 서낭터 새 장을 구경가려던 참이니까." 약산골 서낭터 너른 마당에

는 무더리에 못지않게 번듯한 장이 서고 있엇따. 오히려 입전도 더욱 많았고 행상들도 제

법 모야 있었으며, 각설이패에 걸립승까지 끼여들었는데 아마 무더리 장시가 무뢰배들 손

아귀에 넘어갔다는 소문이 나서 장꾼들이 아예 약산골로 몰린 모양이었다.

서너 명이 둘러 안을 만한 은행나무 고목이 공터 가운데 자리잡았으며 키가 멀쑥한 소나

무들이 군데군데 섰는 사이로 간이 주막의 멍석 차일들이 가득 찼고 떡장수, 엿장수, 부침장

, 생과물장수들이 입전과 좌판 뒤에 촘촘히 들어앉아 있었다.

짝지어 다니는 각설이패는 누더기 장삼에 뚫어진 방갓을 눌러쓰고 한 녀석은 발장단을 쳐

대면서 타령을 읊었다. 그들은 동이술을 파는 멍석 앞에 가 서서 소리를 지른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왔네, 내란 놈이 이래봬도 정승 판서 자제요. 팔도

감사 마다하고 돈 한 푼에 팔려서 각설이로 나섰네. 품바품바 잘헌다. 각설이라 역설이라 동

설이를 짊어지고 지리구 지리구 돌아왔네. 여편네라 안악장, 불알 뽑힌 연안장, 밤마다 해주

, 지팽이 짚고 봉산장, 술 달라고 송화장, 구멍이 나 파주장, 과부 설운 양주장. 초당 짓고

한 공부가 실수없이 잘헌다. 동삼 먹고 한 공부가 기운차게 잘헌다. 시전 서전을 읽었는지

유식하게 잘 헌다. 논어 맹자를 읽었는지 자왈자왈 잘헌다. 목구멍에 불을 켰나 훤하게도 잘

헌다. 뱃가죽도 두꺼우니 일망무제로 나온다. 냉수동이나 먹었는지 시원시원 잘하고, 뜨물동

이나 먹었는지 걸직걸직 잘하고, 기름동이나 먹었는지 미끈미끈 잘헌다. 대목장을 못 보면,

이전 저전을 못 보면, 올해같은 대풍년, 요즘 같은 태평성대에 논두락이나 베겠구나. 한발

가진 깍귀에, 두발가진 까마귀, 세 발 가진 통노귀, 네 발 가진 당나귀, 먹는 귀는 아귀라.

품바나 품바나 잘헌다."

사기전에서는 각색 그릇을 벌여놓고 지겟작대기로 두드리며 외치는데, "결새 고운 안성

유기, 장맛 나는 서흥옹기, 살결 좋아 전대야, 따뜻하다 초벌화로, 훤하구나 놋촛대, 밥맛

난다 놋그릇, 정화수에 사기 주발, 정 두텁다 쌍요강, 시원하다 죽화타구, 죽절병, 오동병,

대모병, 거북병, 자아, 각색 기명이 나왔소." 그 혼잡이 송도나 해주의 장시 일각을 떠다 놓

은 듯 대처를 방불케 했다.

"자아 담배요, 심심초요, 남방초요, 인축은 물론이요 버러지도 집이 있고 음양이 있는데

구색 갖춰 담뱃대가 없을 쏘냐. 대 하나 보우. 부산죽, 서천죽, 소상반죽, 양칠간죽, 각죽,

, 시산용죽, 백간죽이오. 이름 좋은 금산초, 장광 좋은 직산초, 빛이 좋아 상관초, 서초 양

초 장절초, 숭숭 썰은 풋담배요."

"길주 명천 가는 베, 회령 종성 고운 베, 합사주, 통해주, 곱토주, 물명주, 문주, 아랑주,

진나이, 고양나이, 만경세목, 홍양세목, 베건 명주건 무명이건 모두 있소. 천이나 바꾸오.

화에 헌옷 바꾸오."

"무시로전이여, 만물전이로구나. 조리에 솔이다. 시루밑에 바가지, 방비, 수수비, 싸리비,

빨래몽치, 다듬몽치, 홍두깨에 떡메요, 삼태기나 고무레, 이남박, 나무주걱, 돌절구, 쇠절구,

나무절구, 나막신, 맷방석, 짚항아리, 채반이며 치룽에 채독일세." 장단을 맞추어 떠들어대

는 행상들의 타령조가 흥겨웠고 길산이네는 이러한 입전 좌전의 끝에 막을 치고 재가라는

장막을 드리운 곳을 간신히 찾아낼 수가 있었다.

장막앞에는 거적 위에 따로따로 사들인 물건을 무더기로 쌓아놓았는데 뒤편에는 굴레 벗

은 마필이 여러 마리 였으니, 과연 송도의 차인들답게 규모가 큰 상단이었다. 아마도 무더리

장터에 나타난 해주 무뢰배들과 충돌을 피하가 위함인지, 아니면 원래 그들은 있어오던 장

시를 피하여 새 장을 트는 것을 유리하게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패랭이에 목하송이를 풍채있게 달고 바지저고리 차림에 가뿐히 각반만 두르고,

불고 난 질빵 천을 어깨에 척 둘러멨는데 용자 쓴 골패가 달랑 매달려 있었다. 안내했던 장

꾼이 그들 앞으로 가서 두리번거리니 용두 새긴 기다란 물미장 지팡이를 짚은 텁석부리의

건장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나이는 한 서른 두엇쯤 났을까 싶은데 형상은 우락부락할망

정 웃는 모습이 제법 착해 보였다.

"분부대루 데려왔수."

하며 사내가 소개를 하자 그는 웃는 얼굴로 길산이와 갑송이, 큰돌이를 번갈아 살폈다.

"나두 들었소. 방금 무더리에서 해주 사람들과 싸운 분들이오?" 갑송이가 아니꼽다는 듯

시큰둥하게.

"그러우."

"인사합시다. 나 파주 사람 박대근이오. 시방 송도 배대인 아래 행수루 있수." "우린 재인

이우."

갑송이가 그렇게 퉁명스레 받았으나, 길산이는 꾸뻑하고 나서 정중하게 수인사를 건넸다.

"문화 사는 장길산이라구 합니다."

그들은 멍석 위에 모여 앉았고, 수하 사람 하나가 청주와 어물을 곁들여 소반에 받쳐 내

왔다. 박대근이가 술 한 잔씩을 죽 돌린 다음에 말했다.

"내 광대산 재인 말에 솜시가 번개 같다는 장정의 소문을 들었더니, 그게 바루 장총각이

었구려."

"지난 봄에 길산이가 황주로 연희 갔을 때, 그놈들과 한바탕 얼렀지요. 혼자서 뭇놈을 두

드려 주었으니 소문두 날 법할 게요."

큰돌이가 자기 일인 듯이 나서서 황주에서 여객가를 휩쓴 만동이 형제가 길산이께 녹고

나서 무릎 꿇어 빌던 일을 낱낱이 얘기했다. 그리고 덧붙여 봉산 약수골 주막 패거리가 길

산이네 놀이판을 훼방놓다가 혼찌검 당하던 일과, 무더리에서 아까 벌였던 무용담도 신나게

지껄였다. 재가에 물건을 넘기러 왔던 작은잿말 사람들이 길산이네가 차인패와 맞술을 드는

양을 보고 떠들었다.

"아니 언제 무더리에서 일루 날아왔네. 관가에 끌려간 줄 알았지." "재인패가 상가 무서

워했지, 언제부터 관가 무서워한대?" 라고 큰돌이기 받았으며, "해주 것들 코가 석 자나

빠져서 장연길루 내빼데."

"무더리는 시방 완전히 파장이더만. 우물집 쥔이 길산이를 꼭 보겠다네." 하며 작은잿말

사람들은 떠들었다.

그들은 갑을 후히 받고 벙글대며 돌아갔다. 작은 잿말 사람 하나가 뭔가 생각났는지 돌아

서며 물었다.

"자네들 이번 가을 출행 계회에 나올건가?"

그들은 모두 재인계 계원이었는데, 철마다 이틀씩 모임이 있었고 여기서 연희 지방을 분

담하고 손발도 맞춰 보는 것이었다. 큰돌이가 대답했다.

"작은골이 큰골루 올라와야지, 이번 계회는 큰잿말서 열라네." "이 사람아 총대 손돌 어

른이 작은골에 계시는데 무슨 소리여. 아무리 출행을 끊었다지만, 우리게선 어른인데."

"잘들 가게."

"그래, 길산이두 지나는 길에 까막내 좀 들러 이 사람아." "그러잖아두, 누이 보러 들를

참요."

그들이 돌아가자 다시 화제의 중심이 박대근이에게로 돌아갔다.

박대근이는 파주에서 제법 내로라 하는 소과급제인 박진사의 서자로 태어났는데, 어려서

는 철없이 무과라도 치러볼 양으로 활터에도 드나들고 환도도 휘두르며 애달캐달했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세상 물정을 깨닫게 되면서 서로 좋아하던 처녀도 생기게 되었으나, 워낙

에 서얼 나부랭이로는 격이 틀려 통혼을 한다기도 어리석으며 벼슬 소망마저 허망한 노릇임

을 알았다. 고작해야 별감이나 얻어 다니며 기녀의 딸년이나 데리고 사는 빤한 장래를 깨닫

고보니 세상이 싫어져서 이십여 세에 집을 떠나왔다는 것이다. 숨어 사노라고 강도로 건너

갔다가 그 당시 송상 차인패의 접주 노릇을 하던 자의 눈에 들어 송도 부자 배씨의 수하로

들어가서, 주로 관아 상대와 지방 객주 상대의 궂고 험한 일을 맡아오며 십년 세월을 보냈

. 이제는 시대에 쫓아 난장을 트러 다니는데 제법 이골이 났다는 것이었다. 박대근이는

남북 이름난 장시가 열리는 지방관속들 중에서 안면이 있는 하리배가 많았다. 대근이가 자

기 물미장을 주욱뽑는데, 시퍼런 날이 나타나니 겉은 지팡이지만 실은 환도였다.

"이런 걸 가지구 다니지만 조무래기 무뢰배나 장거리 소악배를 베일 수야 있겠소. 화적이

나 만나게 되면 모를까."

"행수란 놈이 은근히 우리를 위협하는데 해주서 색주가 한다는 신복동이란 놈의 명자를

내댑디다. 우리가 게서 보름 뒤에 관시놀이를 나가기루 했거든." 길산은 잠자코 있는데,

돌이가 그런 얘기를 꺼냈다.

박대근이는 껄걸 웃어젖혔다.

"신복동이가 손재주나 기운으루 젠척한다면 우리 협기로는 벌써 동무를 삼았겠수. 하지만,

그 녀석은 감영의 줄을 잡아 세도를 부리는 잔나비 같은 재주로 돈을 모았지요. 내 참. 경서

한 장 읽어보지 못한 것들이 생원은 무슨 말뼉다귀란 말요." "댁네가 그 패거리와 오전에

싸웠다든데....."

"보상들끼리 주먹다짐이 오간 모양이오만 위에선 서로들 모른 체 하구 있는 거요. 우리두

이 골 이방께 상납을 올렸고, 제놈들도 다른 관리에게 돈냥이나 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

리 그래봤자 우리가 유리하지. 제놈들은 강압적으로 폭리를 노리니 아무리 촌사람이라도 성

정이 있는데 길지 못할 것이오, 우리네는 이 짓이 벌써 십여 년째인데 한번도 남의 물건을

턱없이 사고 판 적이 없소."

묵묵히 듣고 있던 길산이가 물었다.

"그런데..... 무슨일루 우릴 만나려는 거요?"

", 내가 황주서 댁의 소문을 듣고 자세 물었지요. 다름이 아니라 내게 새 장사의 계획이

있는데 동업을 할까 해서 말이오."

"우리네야 호구지책으로 광대 재주나 팔고 간간이 유기장이 일어나 할 뿐인데 무슨 수로

장사에 동업을 하겠수."

"바루 그거요. ..... 사람 모으는 재주 말이외다." "놀이판이오?"

"그렇지. 고작해야 놀이판이나 찾아다니며 장터를 기웃거려서 겨우 밥술이나 먹으니,

재주가 얼마나 값이 싸오. 그러니 광대 물주를 해보시오." "광대 물주요?"

"우리네 상인과 약계를 맺고 놀이의 주문을 맡으면 될 게 아니오. 우리는 사람이 많이 모

이는 것이 유리하고, 댁네는 놀이판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게요. 더군다나 장총각 같은

장사가 있으면 장세를 소악 패거리에 바치게 될 염려도 없을 것이고, 거래도 활발해질 테

....."

재인말 광대 셋이 모두 대근의 말이 그럴 듯이 생각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박대근이가

계속해서 말하였다.

"시험하는 셈치고 우리 가는 길에 두 장터만 다녀가잔 말요. 문화를 거쳐 신천 안악으로

해서 황주 봉산으루 가는데, 댁네들 가까운 고장이니 안악까지만 동행을 해보는 게 어떠냐

하는 생각이우. 응낙한다면 내 당장 약조금을 내리다. 당신네 연희를 물건인 듯 직접 저자에

내다파는 게요."

길산이 곰곰 생각에 잠겼다가, "참 좋은 생각이슈. 그러나 우리두 뫼시구 있는 수광대

어른이 계시니 그분 의견이 어떨지요. 우리두 한량들에게 불려다니며 주석에서 온갖 수모

를 당하는 일은 이젠 지겨워졌소.

패거리가 뿔뿔이 흩어져 봄가을로 걸립ㅇㄹ 다니지만, 겨우 풀칠하는 주제에 여축은 감히

생각두 못하오. 광대패를 모아 약조금을 받고 연희의 가외 수입은 함께 나누면 참으로 당신

네 상단이나 우리 재인들도 피차 유리하겠소."

"물론이지. 내년에는 우리 배대인께 여쭈어 재인방을 열도록 할 것이니, 재인들을 모두 모

아서 늘 이삼 대씩 머무르도록 하면 좋겠고..... 동네도 아예 송도 근처로들 옮기시오." "

은 사람들이야 찬성을 하겠지만 처자권속이 딸린 노인네들은 재인말을 떠나려 하지 않을 거

외다."

박대근이는 자기가 너무 한꺼번에 여러 얘기를 꺼냈다 싶어 곧 거두면서 술잔을 쳐들었

.

"자 그건 그렇고..... 우리 파장 뒤에 읍내에서 흐벅지게 놀기루 하구, 여기서는 우선 목들

이나 축입시다."

광대패나 장사치나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고 진기한 체험들이 많은지라 자연히 주고받는

얘기에 피차 흥이 났다. 그들의 얘기는 겪어본 싸움 상대나 도적들과의 무용담에 머물렀고,

어느 지방엔 누가 세다는 둥, 그자의 특기나 버릇이 어떻다는 둥, 안면이 있다 친하다 처음

들었다 등등으로 의견이 일치하기도, 엇갈리기도 하였다. 박대근이가 말했다.

"여태 겪어본 중에는 역시 강선홍이가 제일 셉디다. 나하구 의형의제하는 사이인데, 본시

강령 사람이지요. 시방은 장연 고을서 소금장수를 다니는데 소금 다섯 섬을 지고 태산 준령

도 넘어다닐만큼 힘이 장사요. 아마 스무 섬이라두 지겠지만 지게가 못 견디어 못 질 게요.

장총각은 시방 몇이우?"

"스물넷입니다."

", 그러면 두 살 차이로군. 그애가 금년 스물둘인데, 벌써 삼 년 전에 갯가에서 싸우는

황소를 뿔을 잡아 헤쳐놓았다구 그럽디다."

갑송이가 경쟁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중얼거렸다.

"강선홍이를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네. 누가 세나 한번 판가름해보게." "아마 만나면 좋

은 동무들이 될 게요. 선홍이가 기운 자랑은 잘 않지만, 나만 만나면 신이 나서 겪은 얘기를

하는데 자비령을 넘다가 도적떼와 싸운 얘기는 그중 진진합디다." 대근이의 의제에 대한

자랑이 거듭되매 갑송이가 넌지시 결기가 돋쳐서 일어섰다. 그는 옷고름을 풀고 저고리를

벗어 던졌다. 털투성이의 넓은 가슴팍이 부풀어서 씨근댔다.

"나두 기운 자랑은 좀체 안하지만, 못 참겠수!"

하고 두리번거리더니 장막줄이 매어진 소나무 둥치를 바라보고 걸어갔다. 길산은 빙긋이

웃었고, 대근이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선홍이 자랑이 지나쳤네. 남의 포장 무너뜨리지 말구 이리 오시오." "밥알이 곤두

서서 못 참겠수. 내 이 나무를 뽑아 보이리다." 갑송이가 손바닥에 침을 퉤 뱉어 비비고 나

서 나무둥치를 두 팔로 둘러 안고 허리 굽혀 바짝 조이며 힘을 썼다. 버티고 선 두 다리가

곤두서며 발끝이 땅속으로 비집어 들어갔다.

얽힌 뿌리들이 뒤틀리더니 붉은 흙덩이를 매단 채로 나무가 우지끈 봅히면서 밑둥까지 번

쩍 들렸다. 구경하던 장터 사람들과 좌판을 벌였던 장사치들이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며 흩

어지자 갑송이가 나무 밑둥을 놓았다. 사방에 장막의 끈을 달고서 소나무가 일직선으로 쓰

러져 내려왔다. 장막이 찢어지며 술상이 엎어지고 박대근이와 길산이, 큰돌이는 포장을덮어

쓸 판인데 부욱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광목 포장이 좌우로 갈라졌다. 박대근이가

앉은 채로 물미장 환도를 뽑아 재빨리 그었던 것이다. 세 사람이 제각기 포장 자락을 젖히

고 일어나자, 갑송이는 벌거숭이 배를 철썩철썩 두드리면서 웃어댔다.

"꼭 삼태기에 모가지 걸린 붕어새끼들 같네."

대근이와 길산은 옷자락을 털고 마주보며 웃었고, 큰돌이가 투덜거렸다.

"기운 많이 늘었구나."

길산이가 갑송이를 추켰고 박대근이도 포장을 겉으면서 쾌활하게 말했다.

"그만하면 우리 강선홍이와 어슥만 하겠수. 그나저나 얼마 쓰지두 않은 새 차일을 찢어놨

으니 물어내소."

"압다 찢은 거야 환도 가진 사람 탓이지 내 탓유..... 나는 나무 좀해갖구 가려던 참인데."

장터 한 구석에서 잠깐 일어났던 이런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여전히 장은 붐비고 활기를

띠어갔다.

"기분이 그렇지 않으니 우리 읍내 들어가서 한판 놉시다." 박대근이는 차인 중의 머리

되는 자를 불러 알아서 파장시키라 이르고는 길산이네를 데리고 송화 읍내로 들어갔다.

자가 있는 큰돌이만은 염려되었던지 그들과 헤어져 큰잿말로 돌아갔고, 갑송이와 길산이

는 박대근이의 호방한 됨됨이에 끌려 밤새껏 마시기로 작정하고 객사인 가화관 뒤편에 있

는 색주가 연루에 이르렀다.

진홍색 단청 올린 꽃대문 옆에다 싸릿대로 엮은 용수 위에 갓모를 얹어서 장대 위에 꽂아

세웠으며, 울긋불긋 색종이 꼬리가 달린 화사한 수박등이 걸려 있었다. 여자 두엇이 문 앞에

나와 서서 땅거미가지고 있는 객사 건너편 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잡가를 흥얼대고 있었

.

"초저녁부터 웬 청승이냐?"

수작을 내치며 박대근이 앞장서서 다가서니, 짙은 화장에 모란송이처럼 얹은 머리를 울리

고 푸른 저고리 붉은 치마, 노랑 저고리 붉은 치마를 떨쳐 입은 창기들이 사내들의 양팔을

끼면서 맞장구 쳤다.

"님을 기다리자니 그렇지요. 빨리 오시지..... 어머 문화 재인들 오셨네!" "그래 무고한

..... 주모는 평안하구?"

하며 길산이도 문 안으로 들어섰다. 대개 기방과 재인들이란 서로 기예를 배울 적에 안면

이 트는 법이고 술자리에 불려 나가면 같은 처지라 자연히 친숙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색주

가의 주모들이 으레 관의 퇴기들 물림자리라서 당연히 늙은 광대들과 퇴기들은 소꿉동무와

한가지였던 것이다. 장죽을 비뚜름히 물고 붉은 댕기를 늘어뜨린 연루집 줌가 대청으로 나

서다가 그들을 보자 반색을 하며 섬돌로 내려섰다.

"아니 장총각이 웬일이래..... 요새는 통 발걸음이 없어서, 그러잖아두 가객 몇사람 모셔올까

하던 중인데."

"평안하오? 오늘은 놀이 나농ㄴ 게 아니라 한잔 걸치러 왔으니, 손님이우." "아무렴 그럴

적두 있어야지. 에구, 오늘 또 손발 맞는 놀이에우리 집이 나라님 생일 잔치 만났네!"

기생 중에도 색주가 창기는 몸을 파는 짓이 본업인데 어릴 적에 팔려오기도 하고, 몰락한

농가의 소녀를 유인하거나 죄인들의 딸을 데려 오기도 하며 또는 사비들을 몸값을 내주고

사들이기도 한 여자들이었다. 상방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는지 떠들썩했고 그들은 아랫방에

인도되어 앉았다. 잠시 앉았더니 청정한 과실 소반이 들어와 입가심을 했고, 술상이 들어왔

. 들어와 앉는 창기마다 반절을 하면서 인사를 올린다. 박대근이가 상좌에 앉아서 수작했

.

"이름은.....?"

"매옥이요."

"향심이올시다."

"관향이 어딘가?"

", 포천입니다."

"장단입니다."

"그래, 좋은 고장이로다."

성미 급한 갑송이가 빈 잔을 쳐들며 재촉했다.

"어 빨리 술 좀 쳐주게, 허고 ..... 노래 한자리 읊으시게." "술이나 한순 돌아얍죠."

곁에 앉은 월선이란 창기가 주전자를 받쳐들어 술을 가뿐히 쳐올렸다. 갑송이가 벌컥 비

워버리고서 술잔을 탁 내려놓았다.

"이거 무슨 술이 심심하고 맛없고 맺힌 데 없이 탁 풀어진 것이..... 꼭 뜨물에 담갔다 건

져낸 개구리 좆맛이다. 다른 술없냐?"

"왜요, 우리집 약주 맛이야 구월산 이서에선 제일인데요." "송엽주두 있구 연엽주가 있는

..... 보통들 약주로 드십니다." "아뭇소리 말구 팔팔 뛰는 화주로 가져오너라."

길산의 옆에 앉았던 매옥이 좁은 저고리 소매 끝에 한 손을 슬그머니 쫓아오다 마는 듯하

며 술잔을 들어올린다.

"인사주로한잔 올립니다."

길산은 무덤덤히 앉았다가 말 없이 받아서 털어붓는다. 박대근이가 청하였다.

"그래, 화주로 바꿔오지. 그리구..... 여기 날밤에 호도, 대추며 청술레 푸른 배는 두어두

..... 뭐 요깃거리를 내오너라. 우리가 아직 져녁 식전이다." "갈비찜에다 제육하구 생선매

운탕에 꿩구이를 내오지요." 중노미가 부리나케 오가며 술과 안주를 덧붙였다. 드디어 술이

서너 순배 돌아가 세 사람은 모두 거나해졌다. 대근이 맞은편을 향하여 청했다.

"여봐라, 노래 하나 청해보자."

", 잡가를 할까요. 시조루 할까요?"

"허 둘 다 해보아라. 창가에서 시조 듣기는 또 별나구나. 읊어봐라." 하나는 소고 내려놓

고 박자를 맞추고 다른 둘이서 한귀씩 맞받으며 시조를 읊었다. 길게 끌리는 여음이며 종

장의 감칠맛이며 아마도 퇴기인 주모가 교습깨나 시킨 양이었다.

누운들 잠이 오며 기다린들 님이 오랴.

이제 누웟은들 어느 잠이 하마 오리.

차라리 앉은 곳에서 긴 밤이나 새오리라.

이제는 북치던 향심이가 자작 박자를 맞춰가며 내리 읊는다.

"비는 오신다마는 님은 어이 못 오시나. 구름은 간다마는 나는 어이 못 가는고. 우리도 언

제 구름비 되어 오락가락하리오."

잇달아서 계속하는데, "우리 둘이 후생하여 네 나 되고, 나 너 되어 내 너 그려 끓던 애

를 너도 날 그려 끓어보렴. 평생의 나 설워하던 줄을 돌려보면 알리라."

할제 박대근이가 능숙하게 말했다.

"이젠 엮어라."

서슴지 않고 매옥이가 나서며 사설시조로 엮어 내려갔다.

"역시 엮음이 우리 취향이로다."

흥취가 났는지 박대근이는 잔질이 잦아졌고, 길산은 벌컥벌컥 들이켜는데도 여전히 덤덤

했고, 갑송이는 갈비를 뜯기에 바빴다.

서슴지 않고 매옥이가 나서며 사설시조로 엮어 내려갔다.

"역시 엮음이 우리 취향이로다."

흥취가 났는지 박대근이는 잔질이 잦아졌고, 길산은 벌컥벌컥 들이켜는데도 여전히 덤덤

했고, 갑송이는 갈비를 뜯기에 바빴다.

"벽사창이 어른어른커늘 님만 여겨 뚝 나서보니 님은 아니 오고 명월이 만정한데 벽오동

젖은 잎에 봉황이 와서 긴 목을 휘어다가 깃 다듬는 그림자로다. 마침 밤일새망정 행여 낮

이런들 남 우일 뻔하여라."

"이총각두 엮음새 한수 해보우."

"그럴까..... 어디 그동안 목청 상허지 않았는가 떨어봐야겠군." 갑송이가 우람한 체격대로

굵고 거친 소리로 엮는다.

"얽고 검고 키 크고 살찐 구레나룻 별로히 길고 넓죽한 놈이 밤마다 품에 들어 좁고 작은

구멍에 큰 연장 넣어두고 홀근홀근 홀레들일 적에 애정은 커니와 태산으로 덮누르는 듯 잔

방귀 터질 게 젖 먹던 힘이 다 들겠구나. 아무나 이 님 데려가 백년을 동주하고 영영 아니

온들 어느 개딸년이 시앗 새음 하리오."

엮음이 끝나고 지름시조로 접었닥, 이윽고 잡가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길산이도 능숙하게

소리를 훑어냈다.

"까마귀 멀리 가고 늦게 뜬 노고지리 우짖을 제 지리지리 지리 뱃종 지리지리 보리밥도

먹고지리 조밥도 먹고지리 장가도 가고지리 아이도 낳고지리 뱃종뱃종 하는구나. 남녀노소

안면부지 고하귀천 가릴 이 없이 그저 보는 대로 쪽박 들어 권하되 진지 좀 잡수시오 탁주

한잔 드세나 수인사를 건네니 남전북답 산산골골 처처에 이 고장 인심이 으뜸이로다.

노총각 양반댁 고용살이 일뼈만 굵어서 어언 서른이 넘었는데, 때는 마침 이앙모이 내는 때

라 농자 천하지대본이라 기를 세워들고 풍물 잡혀 내려갈 제 서로 다투어 모심이에 흥이 난

.

꽹꽹 칭가징 닐리리리 칭가징 꽹꽹 칭가징 허허후후야 날아가는 갈까마귀야 잔솔밭을 넘

어 굵은 솔밭으로 넘어 나가는 구나. 허허후후야 갈까마귀야 야이후후, 동무네야 벗님네야

어서 하세 바삐 하세 점심도 늦어가고 술도 늦어간다. 산천초목은 젊어가고 우리 부모는 늙

어간다. 갈까마귀는 날아가고 털벙거지에 총 든 포수 재를 넘어 쫓겨간다. 논두락엔 남정네

밭고랑엔 아낙네가 개울로 갈려서 일한다. 김매는 처자 중에 과부 하나이 있어 자색이 명월

이라 개참봉 반양반네 첩으로 팔려갔다. 첫날밤도 새이지 못해 늙은이가 급살탕을 맞아 뒈

어지니 소년 과부가 되었구나. 저 노총각 저 과부 거동 볼작시면, 모심이하는 짬에 상사는

내를 건너 밭고랑에 박히는데 두 눈에서 불이 훨훨 불두덩이 울끈불끈 가슴은 퉁퉁 뻐적지

근하여 터질 듯, 목구멍에 침이 말라 오뉴월 대한에 바닥난 우물이며 고이춤 사타리는 중놈

에 삿갓처럼 불뚝 솟아 찔러대는데 애꿎은 모판에 손구녕만 나는구나.

과부 이 눈치 채고 나서 가슴에 불티 앉아 솔솔 바자작 솔솔 바자작 타들어간다. 눈꼬리

에 추파 꼬리가 아홉 개로 구미호가 실렸으며 입술은 쫑긋 물기가 밴밴한데 숨결은 쌔근발

딱 풀을 뽑는다기 치맛자락 솔기를 뜯어 속살이 다 나오것다.

총각아 총각아 저 눈 돌리게 참새 같은 앙가슴이 갈라지겠네.

저 님네 앙가슴 갈라지면 태산 같은 이내 몸이 들어앉겠네.

이내 팔자 기박해 상부를 했네. 이십 안팎에 에레섯 살에 출가를 하니 이팔은 십륙이 열

살 먹어 아버지 돌아가고 세 살 먹어 어머니 돌아가고 모란 같은 내 얼굴에 개나리꽃만 피

어 삼단 같은 내 머리가 싸릿대로 되었구나.

청사초롱에 불 밝혀라. 청사초롱 님의 방에 님도 눕고 나도 눕고 저 불 끌 이 누 있을꼬.

치정이 은근하고 애틋하여 남 모른 줄 알았더니 느티나무 가지 새로 서톀바람을 알아보

, 너른 들 솔밭 너머 연기 보면 마을 알 듯, 스리슬쩍 발 달린 소문이 갯가에 안개 퍼지듯

되었구나. 빨래터에 속닥속닥 우물가에 초싹초싹, 길쌈장에 씩둑 철커덕 쌕둑 철컹, 짚신 꼬

며 이래야 비비비 저래야 비비비, 장기 두며 그랬군 장군야 잘했군 멍군아, 소 몰면서 여차

여차 낄낄낄 저차저차 낄낄낄, 풍문이 이러하니 과부 설운신세에 치정은 고사하고 우환이

되었구나. 들보에 띠를 걸고 버선발을 날릴 적에, 나는 간다 나는 간다. 정든 님을 두고 간

. 나는 죽어 꽃이 되고 님은 죽어 나비 되면 양춘가절 호시절에 꽃핀 나를 찾아오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님을 버리고 나는 간다. 내가 죽어지면 맷돌짝이 되어지고 님은 죽어지면

위짝이나 되어지면 어랑어랑 정한이여, 어랑 어이요 어랑어랑." 과연 길산의 소리는 관록이

있어놔서 낮았다가 높아지며 흐느끼고 날뛰다가 다시 잔잔해지고 중중모리 잦은 모리가 휘

들어지는데 계곡 사이를 우당탕 흘러내려가는 시냇물과 같았다.

"잘한다!"

박대근이가 감탄을 했고, 어느 틈에 문을 열고 들어섰던 주모마저 눈시울을 붉혀가지고

앉았다가, "내 재인 신명을 많이 듣고 보았건만 장총각은 아버지보다 낫소. 춤은 또 얼마

나 하게." 질세라 신이 돋친 창기들이 다투어 논는데, 청이 없어 장고춤을 휘날리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그들의 술자리는 모르는 결에 자시 어름을 넘겨서야 물리게 되었고,

대근이가 기어이 같이 자고 가자는 것을 갑송이만 떼어놓고 길산이 혼자 나섰다. 길산이는

순라에들키지 않게 객사 앞길을 피해서 향교의 담을 끼고 읍내를 빠져나왔다. 달빛에 길

이 하얗게 구불거리고 있었다.

 

수장

1

신복동이의 졸개들이 해서 장터들을 휩쓸다가 해주로 돌아온 것은 길산이네가 재인말을

떠나기 사흘 전이었다. 행수 되는 자는 제법 상리가 많았다고 의기양양했으나, 송화 무더리

장터에서 본바닥 광대들께 톡톡히 망신을 당한 사실이 이미 신복동이의 귀에 들어가 있던

것은 몰랐다.

물주로 따라나갔던 신복동이네 집의 겸인이 도착하여 짐을 풀자마자 그 사실을 일렀던 것

이다. 포교와 비장 나부랭이들과 술을 마시던 신복동이는 상단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상

을 찌푸렸다. 그는 곁에 와 섰던 몸집이 좋은 부하에게 일렀다.

그 행수로 나갔던 덕이놈을 당장 끌어와라.”

......? 덕이를요?”

소두령 노릇두 못할 녀석이 행수 노릇하고, 내 얼굴에 먹칠까지 했으니 그냥 둘수는 없

.”

밖에서 네댓 명이 또 들어왔다. 그들은 우르르 몰려나갔다. 활 한바탕 거리에 신가의 여각

창고가 있는데, 덕이라는 행수는 물건을 풀어넣는 중이었다. 그들이 몰려가자 덕이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아무 일두 않구 색주가나 노름방에 붙어 앉았으면 제일이여? 이 사람들아 밖에 나가서

벌어올 생각들을 해봐야지.”

그나저나 생원나리가 보자우.”

그래, 내 물건 다 챙겨놓구 올라갈래는 참이다.”

시방 빨리 가야겠는데......”

이놈들아, 네놈들이 뭔데 빨리 가구 말구야.”

텁석부리에 가죽 배자를 입은 자가 팔짱 꼈던 손을 쓱 뽑더니 삿대질하며 말했다.

이게 죽을려구, 이놈 저놈 하구 있네. 이놈아, 너는 오늘부터 행수고 지랄이고 쪽박 차

게 되었다.”

뭐라구......?”

애들아...... 모양을 내여라.”

우르르 달려들어 아직도 그 기분이 진가민가하던 행수를 앞뒤로 잡아 치고 박으니, 여럿

의 매를 견딜 수가 없어 행수는 땅바닥에 엎어졌다. 팔을 뒤로 돌려 밧줄로 칭칭 동여매고

는 텁석부리가 홧김에 면상을 두어 번 내지르는데 코피가 터져버렸다.

이눔, 타관서 온 놈이 쇠도리깨 조금 돌릴 줄 안다구...... 금방 행수질 해처먹더니 꼴 좋

.”

...... 왜 이러는 거냐?”

몰라서 물어. 쓸개 빠진 놈, 촌것들께 얻어터지고 장터를 쫓겨난 놈이 무슨 염치루 신생

원 아래 붙어 있으려느냐? 일으켜 세워라. 끌구 가자.”

그들은 덕이를 잡아 일으켜 화풀이로 어제까지도 눌려 지냈던 행수사내를 툭툭 발로 내지

르면서 신가의 대청 앞으로 끌고 갔다. 신가는 이미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나서 친히 매

를 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들이 안마당으로 우르르 몰려들자 신복동이는 말했다.

그놈을 멍석에 말아라.”

덕이 뒤에 섰던 자가 발을 걸어 휘딱 쓰러뜨리고는 멍석에 굴렸다. 멍석과 사람을 함께

뚤뚤 말아가자 다리와 머리만이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덕이가 고개를 흔들며 애원했다.

생원나리,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제가 상리를 못 봤습니까, 물건을 잃었습니까, 왜 이

러십니까?”

이눔, 너는 우리 해주 신씨 여각의 체면에 먹칠을 한 놈이다.”

신복동이가 매를 들어 멍석 위를 닥치는 대로 두어 대 내리치는데 행수의 비명이 터졌다.

다시 매를 쳐들자 행수 덕이가 고함을 쳤다.

생원께서는 고정하시구 내 말을 좀 들으시우!”

뭐냐, 이눔.”

구월산 광대들 중에 다른 자들은 하나도 염려할 것 없아오나, 이갑송이란 놈과 장길산

이란 놈이 있사온데 그 기운과 무용이 훈련원 장교들보다두 월등합디다. 그자들을 잡아서

혼을 낼 꾀가 있습니다. 생원나리, 제발 제발 좀 들으시구 용서하우.”

신가는 매를 천천히 휘저으며 빙긋 웃었다.

그자들을 내 앞에 잡아오겠느냐?”

예예, 뭐 잡아오구 말구두 없습니다. 그자들이 며칠 뒤에 관시놀이에 나올 것인즉, 조금

만 화를 가라앉히시구 얽어맬 궁리나 하옵시면 됩니다.”

만약에 해주에 오지 않으면...... 망신을 만회할 길이 없을 터인데?”

하오면...... 제가 놈들의 마을을 쑥밭을 만들어버리지요. 생원나리의 함자를 욕되게 하진

않겠습니다.”

신복동이는 끄덕였다.

그래, 우리 체면을 되돌릴 기회가 있다면 잘되었다마는 이왕 그르쳐놓은 일이니......

차례만 맞아라.”

어리구 생원나리!”

, 헤아려라.”

신가가 매를 들어 십장을 치는데, 일곱에 가서 매가 부러져 버렸다. 다시 장목을 가져오라

이르고, 나머지 석 대를 채웠다. 매가 끝난 연후에 신복동이는 다시 웃는 낯이 되었다. 그는

매우 잘생긴 남자였다. 얼굴은 희고, 턱은 뾰족한데 입술이 유난히 붉었으며, 눈이 크고 차

가워 보였다. 눈가와 입에는 언제나 야릇하게 비웃는 듯한 냉소가 실려 있었다. 턱의 모양처

럼 뾰족한 턱수염과 코밑의 가느다란 수염은 그의 전체적인 인상을 더욱 날카롭게 해주는

것이었다. 의관은 이름난 오입쟁이의 행색으로 번듯하고 귀티가 났는데, 다만 흠이 있다면

왼쪽의 손가락이 엄지에서 차례로 셋이나 잘라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왼손을 항상 넓은

소매 안에 감추어 늘어뜨린 채 잘 움직이지 않았다. 매에 혼찌검이 나서 땀투성이가 되어

주저앉아 있는 행수 덕이에게 신가는 말했다.

, 들어오너라. 네가 할 일이 있느니라.”

하고 나서 신가가 텁석부리 사내를 손짓했다.

막개두 같이 들어오너라.”

신가는 마치 글을 읽고 난 선비처럼 조용한 걸음걸이로 안마당을 빠져나갔다. 행수와 막

개라는 사내가 뒤를 따랐다. 그들이 밖 사랑채에 가서 좌정하고 들어앉자, 신가는 다시 인자

한 가친이 그의 어린 자식들께 대하듯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너희들 용당포 임유학을 아느냐?”

, 그 우리께 삼천 냥을 빚진 주상이 아닙니까?”

그렇지, 채무관계를 청산해놓아야겠다.”

관원을 몇 데려가면 되잖습니까?”

아니다, 우선 임가놈을 없애버려야겠으니...... 너희들두 머리를 짜내야 되겠다.”

막개가 제 가슴을 치며 웃었다.

생원 어른...... 까짓 것 쇠몽치루 해골을 바숴놓지요. 밤에 기어들어가서요.”

어리석은 소리...... 함부루 죽일 순 없다.”

신생원이 놋재떨이 위에 얹힌 장죽을 끌어당겨 입에 물었다. 막개가 재빨리 가죽 배자 주

머니에서 부시를 꺼내어 척 켜서는 불티 붙은 것을 담배에 붙여주었다. 신가는 주욱 빨아들

이고 나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돈 삼천 냥 때문에 위험한 놀음을 하려는 게 아니여.”

하긴 신가의 말이 맞았다. 그는 해주에서는 제일 화련한 색줏집을 셋이나 운영하고 있었

으며, 순명문 밖 삼거리에 있는 여각은 송동의 것에 비할 만큼 장사 규모가 큰 것이었다.

리고 세겹 담장과, 행랑채, 바깥채, 안채로 나누어진 집은 어느 높은 벼슬아치에 비겨도 꿀

릴 데가 없었고, 여각에 딸린 주막에서는 밤마다 도박이 성행했는데, 전은자모가도 겸하고

있었다. 그러니 신복동에게는 삼천 냥쯤은 있으나마나 한 돈이었다. 매를 맞아 기가 죽어 있

던 행수 덕이가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샌님, 돈 삼천을 못 같을 상대가 아닌뎁쇼. 돈은 별문제겠지요.”

시비의 핑곗거리는 되지.”

신가가 말했고 막개도 거들었다.

, 나중에라두 밝혀질 때 차용증을 관에 보일 수가 있습니다.”

임유학은 용당포에서는 가장 성공한 주상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배를 열세 척이나 가지

고 있있고, 특히 송도의 부상들에게 신용이 돈독했다. 하여튼 해운 쪽으로는 해주에서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육로 행상을 막 개업하기 시작한 신복동이에게 있어서는

해운마저도 탐나는 장사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해주에 임가가 있는 한 그는 송상에게 잇

댈 끈이 없었으며, 행상 중에는 순명문 밖의 그의 여각을 지나쳐서 곧바로 용당포로 나아가

임가의 객주에서 묵는 상인들도 많았다. 비록 신가가 감영에 안면이 두텁다고는 하나, 임가

도 만만치 않게 개점세를 내고 있었다. 신가는 송도의 시전 상인들과 관계를 맺기를 원했는

, 그 이유는 임가가 사상들과 연줄이 있어서 그들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언제나 관에 붙는

일이 이롭다는 것이었다. 눈에 가시 같고, 명치에 걸린 찹쌀 알심 같은 임가를 어쨌거나 망

쳐주고는 싶었건만 그쪽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의 수하에는 거친 물결을 타는 뱃놈 나름의

사나운 사내들이 여럿 있었던 것이다. 특히 우대용이란 자는 배를 부리기에 명수인데, 힘이

세고 성질은 표한하며, 원래는 강령에서 고기잡이하던 놈을 임가가 데려다 놓았다는 것이었

. , 그를 데려오게 된 동기가 우대용이의 작살 솜씨를 보고 비범함을 알았기 때문이란

소문이었다. 물가에 서서 작살을 쳐들고 몇각을 노리다가 번개처럼 찍어 올리는데 펄펄 뛰

는 농어가 한꺼번에 두어 마리씩 꿰이더란 얘기였다. 수십 길 물속을 제 집 안방같이 드나

들며, 아침 구름만 척 올려다보아도 그날 뱃길을 안다는 자였다. 그런데 임가는 인색한 사람

이었다. 부리는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잔뜩 잃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신복동이가 덕이 쪽을

지그시 바라보며 은근하게 말하였다.

이번 일은 역시...... 자네가 적임이군. 성사가 되면, 내 만회루의 운영을 자네께 일임하겠

.”

분부만 허십시오.”

신가는 말을 꺼내기 전에 막개와 눈을 맞추어 씽긋 웃었다.

우선 그 삼천 냥 얘기를 해야겠지.”

그 얘긴 제가 헙지요.” 하며 막개가 나섰다.

임유학에게 팔푼이 같은 건달 애숭이 하나가 있는 건 잘 알겠지. 말하자면 임가의 화근

덩어리란 말야. 그 녀석이 우리네 기방 출입을 하다가 취련이란 년에게 홀딱했거든. 이년을

시켜서 골패판으루 끌어내왔지. 초저녁에 시작을 해서 따게 했다간 잃게 하고, 돌려주고 뺏

기를 여러 차례 한 뒤에 간신히 본전만을 찾게 했단 말이야. 그러니 안달이 났지. 아니나달

...... 이튿날 오백짜리 어음을 가져와서 세 판에 몽땅 털렸어. 열이 났지. 취련이년을 통해

서 채은 천 냥을 빌려가도록 해주었지. 그날 저녁나절에 그 녀석이 삼천을 털렸네. 우리가

담보 없이 돈을 내주었겠어. 그 머저리가 하인을 갯가로 보내어 경강으로 올려 보낼 화물의

사금파리 어음 쪼가리를 제 아비의 분부인 듯 빼내오게 하였단 말이지. 사금파리 어음이라

면 자네두 알지. 오천 아래로는 없는 법일세.”

덕이가 낄낄 웃어댔고, 신복동이는 글귀를 생각하기라도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상체를

앞뒤로 꺼떡거리며 앉아 있었다. 덕이가 물었다.

임가는 그걸 아는가?”

아는 정도가 아니야. 제 아들을 친히 매로 다스린 뒤 골방에 가두었다더군. 한양에 통기

해서 어음을 바꾼 모양이야. 이쪽으론 얼씬두 않거든.”

삼천 냥은 날랐군!”

천만에...... 멍텅구리가 제 손으로 각서까지 썼어. 그러니, 각서와 사금파리 어음을 엮어

서 고발하면 송사는 이겨놓은 거지. 돈을 빌린 것과 노름은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어음 보

고서 돈 안 내줄 놈이 어딨으며, 그 돈 가져다가 계집 밑구멍에 틀어박든, 노름을 하든,

자에 뿌리든, 녹여서 개편자를 박아주든 우린 알 배가 아니라구.”

그렇군......”

이야기는 뻔하잖나. 시비가 붙어두 일단은 우리 쪽이 말발이 선단 말이거든. 우선 오늘

이라두 당장 찾아가서 개판을 쳐놓고 여러 사람 있는 데서 시비의 원인을 밝혀놓는다 이거

. 그러고 나선 자네가 좋은 기회를 잡아 임가를 박살을 내버린단 말야.”

허나 돈 삼천에 살인이면...... 나는 꼼짝없이...... 안 그렇습니까, 샌님?”

눈을 감고 장죽만 빨고 있던 신복동이가 눈을 크게 뜨고 덕이를 노려보았다.

이 옹졸한 놈! 설마 내가 네깐 놈을 오라지게 해놓고, 이득을 구하려 하겠느냐.너는 저

자의 도리도 모르는 놈이다. 다 방법이 있느니라. 감사가 신연때 쓴 부채가 있어, 관전을 우

리 자모가에 넣어두고 변리를 놓고 있는데, 그것의 원금이 꼭 삼천이다. 그래서 액수를 맞췄

. 우리께 있는 임가 아들놈의 각서를, 감영에서 입금된 내역이 적힌 초일기와 명심록의 원

금에 맞추어놓으면, 그자들은 감영의 돈을 횡령한 것이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임가를 꼭

죽이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 기동을 못할 병신만 만들어놓아라. 좋은데가 있지 않느냐?”

샌님, 참으로 신인처럼 묘한 꾀입니다. 저는 그럼 마음을 푹 놓고서 그 영감태기의 허리

뼈를 딱 분질러놓습지요.”

그래, 닷새 말미를 주겠다. , 계당주가 익었을테니 맛이나 좀 볼까?”

신가는 하인 부르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딸랑거니는 쇠방울소리가 들리자, 마당쇠가 뛰어왔다. 신가는 술상을 조촐히 차려 내오도

록 이르고서, 문갑에서 사금파리 어음을 싼 주머니와 각서를 꺼내어 덕이에게 내밀었다.

감영의 관전이 원금이라는 걸 임가 쪽에서 알면, 돈을 당장 갚을 게다. 갚고 나면 일은

모두 글러버리는 게야, 네 사삿돈이라구 외치며, 핍박하여 임가의 분통을 잔뜩 건드려놓으란

말야. 될수록 구경꾼이 많으면 더욱 유리할 것이니까.”

염려 마십시오. 그래서 틈을 보아 임가의 골통을 깐 연후에 허리뼈를 부러뜨리지요.”

아니야, 그자를 물고를 내는 것은 아무도 안 보는 데서 해야지. 그러니 며칠 뜸을 들이

는 게 좋을 게야. 오늘은 소란만 피우고 오게나. 취련이년두 함께 데려가라구. 너는 취련이

서방 행세를 한단 말이지.”

곁에서 막개가 물었다.

샌님, 그런데 임가가 창피하여 돈을 갚아버리면 어쩝니까?”

원금이 관의 변릿돈인 줄 모르는 한, 임가는 돈을 절대로 갚지 않을 거야. 더구나 임가

는 아들이 사기 노름에 걸려들었다구 생각하거든. 헌데...... 염려가 되는 것은 우대용이란 놈

이 송도에서 올라왔는지 모르겠어. 저희 상전이 당하고 나면 펄펄 뛸 게란 말야.”

덕이가 제 가슴을 쥐어박으며 외쳤다.

에이, 샌님 걱정 마십시오. 까짓 뱃놈이 거슬리신다면 아예 배때기를 푹 쑤셔서, 발끝에

돌을 매달아 용당포 깊은 물에 던져버릴 게유.”

아니야, 나는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야. 놈이 들썩이기만 하면, 감영에 손을 써서

얽어 넣으면 간단하지. 좌우지간에 유리한 건 우리 쪽이야.”

그때에 술상이 들어왔다. 신생원은 마당쇠를 불러 말했다.

만회루에 가서 취련이 좀 들오라구 일러라.”

아닙니다, 제가 이 길루 나가서 데리구 가지요.”

덕이가 일어서는 자세로 엉거주춤하며 말하자, 신가는 고개를 흔들었다.

술 한잔 하면서 좀 기다려. 내 취련이가 오면 함께 단단히 일러둘 말이 있으니까.”

신생원이 두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었고, 막개와 덕이는 황송해서 기가 죽은 시늉이 되어

술을 마셨다. 신복동이는 명심록과 초일기를 문갑에서 내어 차질이나 틀린 데가 없는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초일기라 함은 매일 금전출납이나 여러 가지의 거래를 기재하는 것으로,

금전이 들어오는 것은 상으로하고 나가는 것은 하로 쓰는데, 단순히 거래만 행해져 실제로

금전의 수급이 없는 경우에는 내역만을 입하품기등으로 쓰게 되어 있었다. 큰 여각이나 객

주는 물론 상인은 누구나 초일기와 명심록이 필수 장부였다. 임가를 반죽음시켜놓은 뒤에

그 아들이 쓴 각서와 사금파리 어음, 그리고 관전의 이자를 놓은 내역이 적힌 이 장부를 감

영에 제출하여 폭행을 합법화할 것이었다. 신가는 장부를 덮으며 빙글빙글 웃었다. 해주에서

임유학이 없는 용당포라면, 이제부터는 자기가 경강 해운을 독점하게 될 것이었다. 임가가

장사에서 손을 떼면, 신복동은 달포 안으로 송도와 한양의 해로 행상들의 신용을 얻어 낼

자신이 서 있었다.

, 술 좀 들게나!”

신복동이는 연신 빙글거리며 웃었다.

샌님, 취련이가 왔습니다

마당쇠가 장옷을 쓴 기녀를 데리고 들어왔다. 취련이는 허리를 구부리고 섬돌 아래 읍하

고 서 있었다.

, 잠깐 올라오너라.”

취련이가 방 문턱에 무릎을 세우고 앉자 신생원이 여태까지의 계획을 낮은 목소리로 일러

주었다. 얘기가 모두 끝난 뒤에 신가는 다짐했다.

그러니 자네는 덕이의 아내 노릇을 해얀단 말야. 또 덕이가 오늘 거기서 낭패하여 봉변

을 당하게 됨직하면, 자네가 임가 아들놈과의 관계를 떠들어대며 악다구니를 쓰게. 만약에

임가가 망신을 견디지 못하여 돈을 내주게 되더라도 너희는 크게 떠들며 소란을 피우다가

땅에 던지고 오란 말이지. 그러면 오늘 할 일은 끝난다. 내일 새벽에 담을타넘구 들어가서

임가를 덮치고는, 그 길루 관가에 자수를 허게. 뒤에는 우리 변리놀이 장부와 어음이 있으

, 감사를 은근히 난처하게 만들면...... 오히려 수월히 처리될 테지.”

여하간 덫에 딱 걸린 오소리새끼올시다. 우리는 슬슬 가죽이나 벗길 궁리를 허면 되겠

군요.”

나귀를 내줄 테니 이 아이를 태우고 시방 나가도록 하게.”

취련이와 덕이가 읍하고 나갔다. 신생원은 다시 글이라도 암송하는 듯 상체를 흔들거리며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막개가 틈을 보아 말을 걸었다.

나리...... , 여쭐 게 있습니다.”

뭐냐?”

...... ...... 외람된 말씀이오나, 제가 아이들의 머리가 되어 샌님을 모셔온 것이 벌써

십 년이 넘었습니다요. 덕이놈이야 싸움깨나 한다구 타관서 데려온 놈이 아닙니까. 이번에

송화 무더리 장터에서 애숭이 시골 무뢰배에게 망신까지 당하였으니, 싸움 솜씨도 그리 신

통치 못한 게 분명합니다. 헌데 그따위 놈에 이렇게 중요한 일을 시키시고, 더구나 성사가

틀림없는데...... 만화루의 운영을 맡기신다니, 저는 모르겠거니와 밑에 아이들의 불평이 높아

질 것입니다.”

신생원은 상체를 흔드는 채로 잠잠히 듣고 있다가 또 차가운 웃음을 빙글거렸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일석이조란 말일세. 덕이 녀석은 임가를 해치는 데 쓰고,

우대용이는 덕이를 처치하는 데 쓴다 그 말이지. 우대용이란 놈이 성질이 표한한 뱃놈이니

분을 참지 못하여 덕이놈을 그냥 두지는 않을 게 아닌가. 살인죄를 지게 되면 관에서 우가

놈을 없애줄 것이고, 우리는 용댕이 앞바다를 손에 넣게 되는 게야.”

나리...... 아무래두 저희는 샌님 앞에선 관세음보살 손바닥의 잔나비올시다. 참으로 제갈

량 윗길 가십니다.”

막개가 머리를 휘휘 내저으며 감탄을 했으나, 신복동이는 눈을 감은채 말했다.

자네 여각으루 나가봐. 짐 푸는 일을 감독해야지. 그리구 아이 하나를 덕이네 뒤로 딸려

보내어 동정을 살피구 오도록 하게.”

, 소인 물러가겠습니다.”

막개가 나간 뒤에 신복동이는 사랑채에서 나와 안채로 들어갔다. 갓과 도포를 내어 의관

을 갖추고 나갈 채비를 했는데, 감영에 현신할 작정이었다. 덕이란 놈이 용당포에 가서 난동

을 부리는 동안 관의 아전비장 나부랭이들을 끌어내어 부용당에서 한판 흐드러지게 놀 작정

이었다. 신가는 나귀에 안장을 얹어 순명문안으로 들어갔다.

신복동이 생원을 모칭해온 것은 거의 십여 년이 되었으나 원래는 양주 관아의 통인으로

어릴 적부터 술수가 뛰어나 아전에까지 입신했었다. 양주는 경부에 가까워 아전이 이를 얻

기엔 빡빡한 고장이라 생기는 것이 없어 신복동은 조정에 연줄이 드센 원이 충정도로 나아

갈 때 향리직으로 편승하였다. 그 고울의 아전 출신이 아니고는 맡지 못할 직이었으나 신가

는 원의 심복으로서 백성들에게서 재물을 수탈하는 데 능란하여 최적의 하수인이었던 때문

이었다. 도서원이란 직임은 지방의 조세를 받아들이는 직책을 맡은 아전직의 우두머리를 말

하는 것이었다.

공주 도서원은 생기는 것이 많다고 하니 그 자리를 제게 줍시오.

공주는 향리가 드센 고을이네. 도서원이란 이속들의 노른자위 같은 자리인데, 어찌해서 타

처 출신 아전에게 넘겨줄 텐가. 그 일만은 관장의 위엄으로도 안되는 일일세. 하며 사또가

난처해하는 것을 신가는 은근히 졸라대었다.

사또께 빼앗아줍시사고 여쭘이 아니올시다. 제가 두어 달쯤 미리 내려가 살며 저를 이안

(아전명부)에 올립지요. 이안에만 오르면 안 될 까닭이 있겠습니까?

내가 내려간들 그리 쉽게 이안에 붙여질까 모르겠네.

사또께서 도임하신 뒤에 백성들의 송사에 판결문을 불러주실때 형리가 미처 받아쓰지 못

하거든 죄를 주거나 도태시키시고, 또 이따위 무능한 자를 형리로 불러 썼다는 이유를 들어

이방을 치죄하십시오. 매번 이처럼 하시면 자연히 도리가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보시

는 공문서가 제 손에서 나온 것이면 잘했다고 칭찬해 주십시오. 이러기를 며칠 하고 명을

내려 형리를 뽑되, 현직에 있는 자와 물러나 있는 자를 가림없이 문필이 감당할 만한 자는

모두 취재에 들게 하시면 저를 첫째로 뽑으실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제게 도서원 자리르

주신다면, 삼 년 안으로 나으리의 평생을 안락히 보내실 재물을 마련해드리리다.

이리되어 신가는 먼저 공주로 내려가 아전 출신임을 내세워 주막에 기거하면서, 군현의

아전 서리배가 사무를 보는 길청을 드나들며 그들과 술친구가 되었다.

신가가 원래 사람이 영민하고 붙임성이 있어 문자와 셈에 능통하니, 여러 이속들이 그를

대접하여 길청 고지기에게 기식하며 길청에서 잠을 자도록 해주고 제반 문자를 그와 상의하

는 것이었다.

신가와 미리 짰던 신관이 도임하여 관청에 가득 밀린 민소에 제사를 부르는데 형리가 미

처 받아쓰지 못하면 반드시 잡아내여 곤장을 엄히 쳐서 하루 사이에 벌을 받은 자가 부지기

수였었다. 상관께 보고하는 공문이나 전령에 있어서도 반드시 트집을 잡아내어 엄하게 다스

리고, 또 이방을 잡아들여 형리를 잘못 택했다는 이유로 날마다 치죄하였다. 그래서 길청은

날마다 시끄러웠으며, 아전들은 감히 관장에 가까이 나가는 자가 없었다.

문서가 들고 나가는데 만일 신가의 필적이 들어가면 반드시 무사하였다. 이 때문에 길청

의 여러 이속들은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일을 신가와 상의하게 되었

으며 신가는 자연스럽게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원님이 모른 체하고 이방에게 분부하기를,

내 서울서 들으니 너희 고을이 원래 문향이라 하더니, 이제 본즉 가위 한심하구나. 형리에

적합한 자가 단 하나도 없다니, 길청에서 일하는 아전과 읍내 사람들에 문필이 쓸 만한 자

들은 모두 시험을 보여 뽑아 들이라.

이방이 명을 받고 나가서 여러 이속과 문필이 있는 사람을 시험 보이는데 신복동이가 원

의 눈에 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방이 아뢰었다.

신복동은 본읍의 아전이 아닐, 다른 고을의 퇴임 아전인데 저희 길청에서 우거하며 도와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문필이 기중 뛰어나고, 퇴임 아전이라니 이역을 맡겨도 무방하겠다. 그를 이안

에 올려라.

신복동이 도서원을 맡아 아전의 우두머리 노릇을 할 때, 책망이 내리거나 벌을 받는 사례

가 없었다. 신가는 기생 한 명을 첩으로 들이고, 집을 사서 살림을 차렸다. 날마다 문서를

들이고 낼 때마다 바깥 소문과 실정을 기록하여 백성의 숨은 일이나 서리의 부정을 사또에

게 은밀히 보고해서 그들 외의 다른 자의 부정은 용납하지 않았다. 하리배들의 약점을 손

안에 쥔 이상, 그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둘의 소득이 부임 첫 해에 거의 만오천 냥에 달

했는데, 신복동은 오천을 제가 착복하고 만 냥은 사또의 본가로 올려 보냈다. 그 부정의 방

법은 교묘해서 누구도 까탈을 잡을 수가 없게 하였는데 백성을 직접 수탈하지 않고 권력을

이용해서 이권을 얻거나 간접적으로 이서배들의 부정을 묵인하고 상납을 받아먹는 수를 썼

던 것이다.

신복동이 천래의 간교한 술수를 발휘하여 부정을 하는데 겉으로는 국법에 어긋나는 바가

없었다.

은결이라 하여 토지대장에 올리지 않은 논밭을 이용하였다. 잡초가 우거진 황폐한 밭과,

홍수에 무너지고 사태가 난 밭이며, 백성들이 흩어져 내버리고 간 밭을 관아에 기록된 원정

의 총결수에 메워놓고서, 기름지고 수확량이 좋은 논밭을 대장에서 빼돌리는 것이었다. 따라

서 수확량이 모자라니, 그 과중한 충당량을 백성들이 메워야 하였다. 세를 수납할 때가 되면

먼저 온 고을 안에서 가장 좋은 전지만을 뽑아서, 그것은 은결에 빼돌려놓고, 그리고 나서는

황무하고 온갖 나쁜 논밭만을 나라의 세금을 징수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돈을 받고 부잣집

의 풍작된 논밭을 거짓 재해지로 보고하고, 그 세를 정말 재해를 입은 가난한 백성들의 논

밭에 전가하기도 했다. 또는 재해를 답사할 때에 자기 혼자서 재해를 더 많이 잡아두었다가

돈을 받고 농군에게 팔아먹기도 했다. 수확량의 잉여분을 모았다가, 백성들의 세를 감하여

대신 납부해주고 그 다음에 변리를 붙여서 곱으로 만드는 법도 있었다.

민적 옮겨놓기, 군적을 빼주기, 풍현과 약정을 시켜서 군전과 세액을 횡령 착복케 하고 상

납을 받기, 규장각책지가, 새로 원이 올 때의 부임 여비인 신관쇄마비, 갈려 갈 때의 귀향

여비로 구관쇄마비, 신관 부임 때의 관아수리비, 민고전, 표선전 등등의 수많은 명목의 잡부

금을 빼돌리는데 물론 원호적의 수를 속이거나 가중부과하는 것이었다. 풍년에는 이리저리

생기는 것이 많아서 좋고, 흉년에는 또한 재해로써 세액을 감면해주게 되니 착복할 거리가

생겨서 좋았다.

사또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이미 신복동이 빼돌린 돈은 이만 전이 되었다. 사또가 떠나

기 며칠 전 신가는 먼저 자취를 감추었는데, 신관이 오게 되면 추궁받아 모두 환상시키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가 원과 짜고 한 일이니 더이상 그의 행방을 궁금하게 여기는

자도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귀임하는 원은 만오천 냥을 벌었고, 신복동이는 이

만삼천 냥을 긁었다.

신복동이가 한양 양반과 갈라지더니, 배천의 안면 있는 관리에 손을 써서 관전을 빼돌려

담배모를 심었다. 거름을 두껍게 깔고서 모판 덮는 가자를 매고 그 안에 담배씨를 파종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미곡 판매를 벌이는데, 특히 관의 비축미를 빼돌려 팔고 나서 감영의 재

고 조사가 있을 때엔 수량을 채워 빌려주었다가 다시 거둬들이는 수를 써서 폭리를 남겼다.

거듭 두 해 만에 신복동이는 배천의 제일 가는 갑부가 되었으며, 이어서 해주로 옮겨가 색

주가를 벌여놓고, 여각을 꾸며서 부고를 자처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족보를 도감을 통해서 사들였는데, 평산 신씨 가문의 세종 때 정승

신개의 후손으로 하여 뒤로는 인조 때 장군 신경원의 먼 친척으로 해놓았다. 그리고 홍패도

없이 자신이 소과 급제한 생원이라 일컬어 당당한 양반의 열에 끼여들게 되었다.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물론 장사라 번청하여 대 부가옹이 되려는 것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그는 한

양의 정승 댁에 길을 뚫어 고을 현감자리나 하나 맡아보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가 만일 한

고을의 수령이 될 수만 있다면, 조정에 나아가 출세 영달하는 것은 여반장이리라 믿었다.

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행수 덕이는 제가 중임을 맡게 된데다 일이 잘되면 해주 색주가의 노른자위인 만회루의

운영을 맡아보게 된단 말에 가슴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더구나 이것은 함정에 이미 빠진

노루새끼를 잡는 일처럼 성사가 뻔하지 않는가.

그는 코끝으로 타령을 흥얼대며 나귀의 고삘르 잡고 갔다. 취련이는 안장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혼들거리며 아무 말이 없었다.

덕이가 나귀의 볼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 녀석아, 네가 지금 누굴 태워는고 하니...... 이 어르신네의 애첩에 만회루 기방어멈을

태웠다 그 말이다.”

......”

취련이는 장옷을 깊숙이 쓰고서 덕이 쪽은 흘낏도 하지 않고 코방귀를 뀌었다.

, 어째서 코바람을 내느냐. 임가놈만 물고를 내버리면, 너희 만회루 바깥채앤 내가 들

어앉는다. 그리되기만 한다면 너는 이제 머릿기생이 아니라 어엿한 기모루 올라서는 게야.”

참 나, 기맥혀 죽겠네. 나는 뭐 언제나 기방에서 사내들 까실림이나 받구 있나. 보아요,

나는 생원나리 작은방으루 들어앉을 텐데 혼자서 신명일세.”

에라 이년...... 무엄한 소리 지껄이지 마라. 네 따위가 감히 샌님의 소실루 들앉아?

의논이 되었으니, 오늘밤엔 손님 받지 말구 이 행수님이나 기다려라.”

잡소리 그만 하시구 길이나 보아요. 견마를 잡았으면, 좀 고분고분 해야지.”

고이헌 계집이로다.”

그들이 이렇게 시시껍절히 주절대며 용당포로 내려가려는데, 결성을 나서니 해주 앞바다

가 훤칠하게 펼쳐져 있었다. 포구 쪽에는 각종 어선과 상선이며 나룻배가 가득 차 있고 오

색 깃발에 큰 돛을 올린 관선들이 바다 바깥쪽을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동쪽으로 광석

천 물이 실처럼 흘러내려가는 포구 안쪽에 즐비한 기와집의 지붕들이 내려다보였다. 임가의

객주는 이곳에 두어 채 있었고, 살림집은 좀 떨어져서 결성포 못 미쳐서 있었다. 객주는 포

구에 가까워 자칫하면 임가 수하의 뱃놈들에 봉패당할 염려가 있었다. 덕이는 광석천 쪽으

로 내려가지 않고 곧장 임가의 살림집이 있는 결성포 방향으로 향한 채 비탈길을 지나갔다.

길가에서 사공인 듯한 노인과 마주쳤으므로 덕이가 물었다.

여보슈, 용댕이 사슈?”

, 왜 그러우.”

용댕이 임부자 알지요?”

바루 우리 동네 살우.”

그 양반 시방 집에 기신가요?”

내 그 댁 사랑에서 나오는 것두 아닌데 어찌 알겠수. 하오마는 대개는 집에 기십디다.

더구나 집안에 우환이 있는갑디다.”

우환이라니?”

그 댁 큰서방님이 내로라는 한량인가 봅디다. 해주 나가서 주색잡기와 투전을 했다구

임대인께서 성이 나셨지요.”

거 남의 집안일을 영감님은 어찌 그리 소상히 꿰시우.”

우리 딸내미가 그 댁에서 품을 팔거든요. 안 그대루 그 댁 큰서방님과 나리 어른 사이

가 나쁘다구 온 해주 바닥이 다 알지요. 헌데...... 그 댁에 가슈?”

그렇소.”

허 낭팬걸. 공연히 헛소리했네.”

염려 마우. 우린 먼길 가는데 게서 며칠 기식이나 해볼까 하는 참이우.”

가거들랑, 아예 아는 내색 하지 마오.”

덕이와 취권은 임유학의 솟을대문 앞에 이르렀다. 덕이는 높다란 처마를 쓱 올려다보고

나서 일부러 무지막지하게 대문을 발과 주먹으로 요란하게 두드렸다. 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리건만, 덕이는 고함을 내질렀다.

이놈, 임가놈아...... 불쌍한 계집의 돈을 울궈냈으면 갚아줘야 할게 아니냐. 임가놈 나오

너라.” 하자마자 대문 안께가 소란스러워지면서 여럿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웬놈이 남의 집 대문을 부수려고 소란이냐.”

문이 열리면서 서넛의 하인이 울레줄레 문가로 나섰다.

이 집 큰서방님짜리를 만나러 왔다. 비켜라.”

하인들이 알겠다는 듯이 서로 눈을 맞추는데 덕이가 그들 사이를 가르며 안으로 들어가려

는 몸짓을 했다.

어어, 감히 여기가 어디라구 함부루 생떼야.”

보슈, 큰서방님은 지금 안 계셔.”

덕이가 막무가내로 안으로 제 몸을 쑤셔넣으려고 버둥댔고, 하인들은 양쪽에서 그의 겨드

랑이를 끼고 버티었다.

괜히 매나 흠씬 맞구 나서, 나중에 의원 찾지 말구 좋은 말 할 때 가슈.”

이놈들, 이 집 주인을 만나야겠다. 아들 빚은 애비 빚이 아니라드냐?”

덕이가 일부러 힘을 쓰지 않고 발을 허우적대며 악을 쓰니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걸음을 멈추고 서서 구경했다.

놔라, 이놈들아.”

이놈이 정말 죽을려구 환장을 했군.”

그놈 보아하니 허우대가 멀쩡한 놈이 마누라 아랫구멍을 팔아 제 윗구멍을 처막는 놈이

로세. 이놈 떠들 것 없다. , 줴박질러라.”

곁에서 관망하던 청지기가 하인들께 걸찍한 패설 섞어 분부했다. 덕이의 겨드랑이를 끼고

있던 자들이 그의 가슴팍을 치면서 둘이 일시에 떠박지르니, 덕이는 빈 자루처럼 풀썩 나둥

그러졌다. 나둥그러졌을뿐만 아니라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하는 시늉으로 입만 딱 벌리고 나

자빠져 있었다. 취련이가 손발을 맞추느라고 우선 비단 찢기는 소리로 비명을 내지른 다음

에 달려와서 덕이를 부축하는데 이미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했다.

애고...... 우리 서방님, 계집 몹쓸 년 만나 이 괄시가 웬말이오.”

놓아라, 이년...... 그러게 내가 뭐라더냐. 이제는 봉양해드릴 부모님도 안 계시고 빚도 모

두 갚았으니 기적을 떠나 애들 맡긴 사촌 댁으로 돌아가자고 그리했지. 잘되었다. 십년 동안

먹도 않고 쓰도 않고 온갖 천작을 하여 마련한 전 재산을 금수 같은 파락호에게 모두 뜯겼

으니, 이젠 알거지로구나.”하며 부부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우는데 그 소리와 짓이 제법 처

량하고 구슬퍼서 아무리 남의 일이라지만 차마 못볼 정경이었다. 더구나 임가네 맏아들이라

면 뜨르르한 건달이요, 시방도 제 아비가 골방에 가두었다는 소문이 동네 안에 파다하고 보

면 누구나 그들 기생 부구가 침탈당했거니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 두 사람, 혀를 차

더니 이윽고 속삭이는 말로 임가네 욕을 지껄인다. 그맘때에 덕이가 활활 털고 일어났다.

좋다, 내 아무리 천한 기부라지만 네놈들께 이런 모멸을 당하구 돌아서진 않겠다.”

덕이가 하인들이 막아선 대문으로 다가서자 그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허 그놈, 독사 아가리에 콧잔등 넣는구나.”

자는 범 코침 주지 말구, 네 계집 데리구 가서 일찜감치 방굴이나 굴러라.”

취련이가 제법 곱상하게 생긴데다, 덕이의 나자빠진 양을 깔보던 하인들은 마음을 턱 놓

고 팔짱을 끼고 섰다.

끼놈들.”

덕이가 한 녀석을 오른발 딴죽을 걸며 왼쪽 목을 치니, 그놈은 살판소의 곤두박질 재주나

벌이듯 공중잡이를 했다가 처박힌다. 다른 놈이 멈칫하는 것을 멱살을 잡아 바싹 끌어당겨

마빡으로 박치기를 하자 코피를 콱 터뜨리며 주저앉는다. 이렇게 두 장한을 단매에 보내고

나니 남은 하인 두엇과 청지기가 안색이 변하여 뒷걸음질쳤다. 구경꾼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밖에 없는 것이 덕이야 소싯적부터 여러 고을을 싸다니며 소악패 노릇을 해서

싸움하는 요령이 제법인 반면에 하인들이야 쌀섬이나 지라면 모를까 주먹질엔 능하지 못하

고 더구나 상대를 너무 가벼이 알고 방심했던 탓이었다. 닫히려는 대문을 밀치며 덕이가 행

랑채를 돌아 쫓아갔고 취련이도 뒤를 따랐다.

이놈들, 돈 뺏어먹고 사람 치는 놈의 집구석에 불을 확 싸지르련다. 게 섰거라!”

덕이가 사랑채 앞 바깥마당에 선 채 고래 고함을 지르자, 역시 퇴창문이 후닥닥 열리면서

정자관을 쓴 임유학의 뻘겋게 상기된 얼굴이 나왔다.

웬놈이 백주에 남의 집에 돌입해서 이리 떠드는고.”

어른은 누구시오. 임유학 어른이시오? 아니라면 잠자쿠 계시우.”

덕이가 슬쩍 누그러든 어조로 우물거리자, 임가의 수염이 떨리면서 호통이 떨어졌다.

이 고얀 놈! 양반에게 욕을 보이면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아느냐.”

양반이시면 가도를 세우시오.”

온 저런, 박살을 낼 놈이......”

양반의 아들이면 모두 불쌍한 계집들 돈이나 우려먹는답디까.”

으음......”하며 임가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체통을 찾아 노기는 띠었으되 나직하고

강력한 말씨로 고쳐 물었다.

그래 네가 온 연유가 무엇이냐?”

빚돈 삼천 냥을 받으러 왔소이다. 헌데 이 댁에서는 언제나 남의 돈을 빼앗고 사람이나

때려 쫓아 보내는 모양입디다. 용댕이 임부자 댁이라구 해서 우리는 뭐 재물 모은 사연이

기이한 줄 알았더니, 세상에 이리로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 어디 있습니가.”

이놈...... 돈이란 무슨 돈이냐?”

만회루에서 이 사람께 빌려간 삼천 냥 말입니다.”

좌우진간에 빚은 모르겠다마는, 있다 한들 네가 간여하는 까닭이 무어냐?”

, 소인은 저 계집의 기부 되는 사람이올시다.”

천하에 몹쓸 놈이로군. 너희들은 신복동이 수하에 있는 것들이 분명하렷다. 이 못된 연

놈들, 그래 물정 모르는 양가의 소년들을 꾀어내서 사기투전을 시키고 노름빚돈까지 지우느

. 세상에 어느 못난 놈이 투전장이가 내어준 빚돈을 잃고 갚겠는가. 삼천이 아니라 세 품

도 못 주겠다. 너희 주인에게 가서 일러라. 직접 받으러 오면, 내 인근 촌로들 앞에서 소상

히 밝히고 내주마 하더라고.”

덕이가 놓칠세라 고함을 지른다.

우리께 사금파리 어음도 있고 댁네 자식이 몸소 수결한 각서도 있소이다. 그래두 잡아

떼시려오.”

허튼 소리 마라. 아무리 계집의 손으로 빚돈을 내주었단들, 너희 업주가 누구인가? 신복

동이가 전주이니 직접 오라구 해라. 너희들은 내가 모르겠으며 한 푼도 내어줄 수가 없어.

냉큼 나가지 못하겠느냐.”

임가는 마당에 모여든 하인들께 말했다.

빨리 저것들을 내쫓아라. 뭣들 하느냐.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무리매를 놓아두 괜

찮다. 양반에게 행악한 죄는 중형이니까.”하고 나서 퇴창문이 거세게 닫히며 임유학은 모습

을 감추었다. 덕이가 소리를 질렀다.

권세 없고 비천한 놈은 돈을 떼여도 주인이 찾아주지 않으면 못 받는단 말이오? 계집이

웃음을 팔아 한푼 두푼 모은 것을 파락호 아들놈은 잘라먹고 제 아비는 비호하는구나.”

여럿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덕이를 잡아끌고 행랑채 앞을 지나 중문을 나서고, 대문께에

이르러 냅다 밖으로 던져버렸고 취련이 역시 질질 끌려서 문 밖에 쫓겨 나왔다. 대문이 육

중하게 닫히고 빗장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모양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모두 덕이네 거

짓 부부에 동정을 하고, 임가의 인색함을 은근히 비방하였다. 덕이가 다음일을 우하여 가장

억울한 체 울상으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이구 장사해처먹는 공명첩 양반이 백성의 등을 치는구려. 아이구...... 내가 죽일 놈이

, 국으루 호전이나 갈며 주림을 참을 것을 거듭 흉년 호환에 아이들은 차례로 일고 남은

목숨이며 부모님이나 풀칠하겠다구 대처루 나왔더니, 배운 재주라곤 땅 파먹는 일이라, 걸식

을 하다 못해 병이 들어, 마누라를 기적에 넘기구 말았수. 진작에 죽을 것을 그래두 하늘이

낸 목숨이라, 자진하지두 못하구 아내의 웃음 판돈냥이나 모아 낙향하려든 참인데, 저 도적

들이 빼앗고 주질 않으니 세상에 우리에겐 국법도 없단 말이우.”하며 덕이는 땅을 치며 통

곡하는 시늉을 벌이는데, 취련이가 온몸에 꼿꼿이 힘을 주고 덕이의 무릎에 쓰러져 실신하

는 모습을 보인다.

허어, 목불인견이로고!”

사정을 듣구 보니 참 불쌍가구만.”

관가루 가서 호소해보시우. 여기서 이런다구 저 수전노가 눈썹 하나 까딱 않을 게요.”

보시우. 거 아낙들 중에 누가 좀 나와서 손발 좀 주물러요.”

구경꾼들이 제각기 떠들었고, 늙수그레한 부인 하나가 눈자위가 불그레해져서 달려나와

취련의 손발을 주물러주는데 연신 한숨에 혀를 두드려댄다.

하이구, 세상에 이럴 수가...... ? 참 하이구.”

그때에 대문이 다시 열리더니 하인들이 한떼거리 몰려나와 구경꾼들의 등을 떠밀었다.

가요 가. 무슨 구경 났어, 이거?”

나중에 얼굴 봐뒀다가 여쭈면 괜히 경칠 게요. 가서 볼일이나 보슈.”

하인 하나가 나귀를 끌고 와 고삐를 덕이의 코앞에 내밀며 윽박질렀다.

되잡아들이기 전에 냉큼 이 동네서 나가. 우리네는 그래두 성깔이 느리지만, 포구에서

뱃사람들 들이닥치면 뼈마디 부러질 게야.”

놔둬, 대용 성님께 걸려서 물귀신 되라구. 이 자식아, 그분하테 잡히면 너는 성한 몸으

룬 못 나가. 성미가 개백정이여.”

하인들의 말이 으름장만은 아닌 성싶었다.

패가망신한 놈이 죽은들 두렵겠느냐. 내 어찌하더라도 이 원한을 씻으리라.”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덕이가 끄응 일어났고,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하인들도 더 심하게

행역은 못하고 무덤덤히 서 있었다. 덕이는 취련을 부축하듯이 끼어안고 고삐를 쥔 채 절뚝

이며 마을에서 나갔다. 비탈을 넘어서자 취련이는 손뼉을 치며 깔깔 웃었다.

아이, 이제 보니 행수의 짓이 꼭 창우 뺨치게 잘하는구려.”

호들갑 떨지 마라. 관가에 끌려가서 해내던 남지기다. 그나저나 잊는 일이 벌어져도 소

문은 우리께 유리하것다. 감사두 약점이 있으니 우리 편을 들 게고...... 임유학을 아주 물고

를 낸다 해두 중죄는 받지 않겠구먼, 그저 유배 천리는 될까......”

용댕이루 우리 샌님이 나오시게 되면, 저 집은 날 달라구 그래야지.”

예끼 이년...... 나리의 작은댁들이 자그마치 셋이요, 네년은 기중 못생기고 배운 것두 없

는 년인데, 용댕이 나와서 작은댁 노릇을 해여? 아예 만회루 기모자리루 편하게 작정하여,

오늘밤엔 나를 모실 준비나 해둬라.”

취련은 금방 토라졌고, 덕이는 식은죽 먹듯 해치운 일이 대견해서 돌아가는 걸음이 자연

빨라졌다.

그날 밤에 신가의 사랑에 덕이와 막개가 둘러앉았다. 일의 앞뒤를 듣고 난 신복동은 매우

흡족해하였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아주 잘되었어. 허나, 내일 임가놈을 덮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니 잘

해내야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소인의 경험으루 본다면, 일이 이쯤 되었으니 아예 임유학을 죽여

버려두 될 듯합니다.”

흐음...... 죽인다?”

그렇지요, 쇠몽치루 골통을 한번만.”하며 덕이가 내려치는 시늉을 하고 나서,

임가가 병신이 되어 살아 있게 되면 실상 실권은 그 큰마누라가 쥐게 되니, 제멋대로는

못할 것입니다. 허나, 아주 죽어버리면 유산은 자연히 서자인 그 바보놈에게 넘겨질 테니까,

우리가 먹어치우기엔 매우 쉬워지겠지요.”

나는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야.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까지는 감가사 적당히 보아

주겠으나, 살인이 나면 서울로 장계를 올리게 될텐데 피차의 입장을 생각해둬야지. 임가가

없는 용댕이란 대들보 빠진 집채와 같네. 자식놈이든 마누라든 별 상관이 없네. 그러니 임가

를 아주 죽여야 일만 커질 따름이여. 죽지 않을 정도루 아예 병신을 만들어 놓으라구. 평생

드러누워 미음이나 받아먹도록끔...... 그 허리를 말이지...... 분질러놓으면 충분해.”

신복동이 조심스럽게 얘기를 마치자, 덕이도 산전수전을 겪은 무뢰배 출신이라 만만치 않

았다.

알겠습니다. 분부대루 시행합죠. 그런데...... 소청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뭐냐......”

만약에 뒷일이 시끄러워져셔 수습하기가 난처해진다면, 소인은 달아나야 되겠습죠?”

그래서......”

달아날 때에 이왕 빚돈으루 말이 나왔으니 돈 삼천 냥과 취련이를 내주십싱. 조용해지

면 다시 찾아와 샌님 밑에서 돕겠습니다만......”

곁에 앉았던 막개가 기분이 상하여 덕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람두 걱정이 많에. 시끄럽긴 무에 시끄러워. 취련이가 빌려준 걸루 된 돈의 원금이,

실상은 감사의 것이라구 장부에 적혀 있단 말이야. 감사가 우리께 맡겨서 변리놀이를 하던

돈이라고 슬쩍 귀뜸만 해주면, 감사는 꼼짝없이 우리 편을 들어 일을 무마하려구 애쓸 게

.”

말썽이 없다면 또다른 소청이 있습니다, 샌님.”

덕이는 막개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막개는 그의 말을 막으

려고 불끈해서 덕이를 만류했다.

아니 이 사람이...... 떼를 쓰는 게야 뭐야?”

가만......”

신복동이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두 사람의 실랑이를 막았다.

그래 자네의 소청이란 뭔가?”

, 저 앞전에 말씀하신 만회루의 영업권에 대해서인뎁쇼. 제가 취련이와 열심히 해볼

테니 진정 맡겨주시겠습니까?”

신복동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껄껄 웃었다.

, 소청이랄 것두 없구먼, 당연하잖은가. 자네말구 또 누가 적임자가 있겠어. 다 알아서

할 테니, 내일밤 일니나 실수 없도록 하게.”

임가를 습격하는 시간은 새벽 파루가 해주 성내에 퍼질 무렵으로 정했다.

이튿날 신복동이는 역시 감영 벼슬아치들과 어울려 수양산으로 단풍놀이를 나갔는데,

는 일부러 밤새도록 그들과 골패를 벌이며 보낼 작정이었다. 덕이는 순명문 밖 주막에서 혼

자 술을 마시며 밤이 이슥해지기를 기다려서 용당포 쪽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덕이는 막개

가 벌써 포구의 주막에 당도하여 은밀히 파루 때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모르고 있었다.

개는 은밀히 신복동의 지시를 받고 포구에서 누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막개는 빈 대청에 앉아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다가, 주모를 손짓해서 불렀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주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술은 더 없수. 밤이 깊었으니 문을 닫아야지.”

술 달라는 게 아니라, 뭣 좀 물여볼려구 그러오.”

주모가 앞지마에 손을 씻으며 막개에게 가까이 왔다.

우대용이를 아슈?”

알다마다, 우대용일 모르면 용댕이 사람이 아니지......”

쉬이, 그렇게 큰 소리루 떠들지 말구.”

막개는 입가에 손가락을 세워 들었다가 다시 속삭였다.

할멈, 돈벌이해볼라우?”

돈벌이......?”

내 시키는 대루만 하면 닷 냥 드리리다. , 이건 술값 두 돈이구......”

막개가 작은 꿰미에서 술값을 빼내어 던지자, 주모가 아직은 미심쩍은 얼굴로 연신 막개

의 허리춤을 넘겨다보면서,

우서방을 찾으려구 허슈?”

아니, 그 사람께 말 한마디만 전해주면 되우.”

그깟 일에 닷 냥을? 아이 모를 일일세.”

우가는 지금 어딨수?”

뭐 그 사람야, 배 띄우지 않을 젠 언제나 저어기 갯가에서 뱃사람들이랑 술을 마시거나

투전을 하지, 어계방에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갑디다.”

그러면, 내 오늘밤 할멈네서 좀 잡시다. 내 이따 새벽녘에 할멈에게 말을 전해달라 부탁

할 것이니...... 자아 닷 냥에 더 얹어서 남은 일곱 냥 모두 가지시우.”

막개가 남은 꿰미를 인심 쓰듯 건네주니, 주모는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구, 참으루 대인이셔. 이 많은 돈을 선뜻 내주시네. 염려 마슈, 내 과부를 호려내라

두 해낼 테유.”

술이나 좀더 주우.”

, 알이 통통 밴 자반아치를 맛나게 구워 올릴 테니, 술은 탁주루 하실라우 화주루 드

실라우?”

화주 반 되 주시오.”

주모가 자반을 굽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막개에게 물었다.

우서방을 잘 아슈?”

듣긴 여러번이나 만난 적은 없소. 힘깨나 쓴다면서요?”

그 임대인이 부리는 뱃사람 중에 제일 힘꼴이 세답디다. 연평 사람이지요.”

까짓 놈, 뱃놈이 뭍에 올라오면 별거 있겠나.”

수군 다니다가 임대인이 군적을 빼주었답디다. 술 잘 먹고, 성질이 개차반인데, 약한 사

람들께는 아주 부드럽지요. 댁두 용댕이 와선 그 우서방과 인사를 해둬야 편리하겠구먼.

데 전하라는 얘긴 도대체 뭐유?”

가만 있수. 어련히 내가 알릴 때가 되면 말하지 않을까봐?”

문을 닫아야겠네.”

문을 닫으슈. 가만있자...... 우대용이가 틀림없이 포구에 있을까.”

걱정 마시래두. 내일 배가 한양으루 올라간다구 버얼써 낮에 선적이 끝났어요. 아마 투

전이나 벌이구 있겠지.”

한편, 인시쯤에 덕이는 광석내를 따라 결성골로 내려갔다. 임유학의 커다란 기와집 지붕이

내려다뵈는 언덕빼기에서 그는 성내와 부근의 각 절에서 들려올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은 불빛 한점 없이 캄캄했다. 닭이 여러 차례 울고 나서 먼 데서 종소리가 들리더니,

달아 산사의 동종 때리는 소리가 간격을 두고 울려퍼졌다. 덕이는 검은 보자기로 얼굴을 감

싸고 두 눈만 내놓았다. 그리고는 고양이걸음으로 임유학의 담을 향해 내려갔다. 담이 한키

반이나 되도록 높아서 맨손으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가 없어 보였다. 그는 긴 담벽을 따라

한바퀴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안채와 바깥 사랑채, 행랑채 사이에는 다시 중문과 담장이 있

겠으니, 사랑채에 가까운 곳으로 넘어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덕이는 사랑채의 처마끝이 삐

죽이 올라간 옆에 섰는 소나무 가지를 눈여겨보았다.

그는 품안에서 닷 발짜리 삼승줄을 꺼내어 돌멩이를 매달고 휘휘 돌려 나뭇가지에 걸었

. 매듭을 탄탄히 지어서 여러번 당겨본 뒤에 서너 번 끌어당겨서 담 위에 올라섰다. 담장

의 기와가 밤이슬에 젖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는 줄을 담 아래로 넘겨두고는

사뿐히 미끄러져 마당에 내려섰다. 행랑채에 불빛이 보였는데, 코고는 소리가 높직하니 수직

하는 하인들도 이제는 잠든 모양이었다. 그는 허리춤에 찔러넣고 온 짤막한 쇠몽치를 꺼내

들고 사랑채의 대청마루로 올라섰다. 그는 미닫이를 조용히 열었다. 어둠에 익은 눈으로 아

랫목에 누운 임유학의 흰 수염과 그 머리가 들어왔다. 단매에 쳐죽이는 일이 아니라서 설맞

고 소리를 지를 것이 걱정이었다. 우선 머리를 치면 혼절할 테고 이어서 척추 허리께를 내

려갈길 작정을 했다. 그는 쇠몽치를 번쩍 쳐들었다. 잠든 사람을 스스로 인기척을 느꼈음인

지 끙하면서 돌아누웠다. 덕이는 주저하지 않고 쇠몽치를 가볍게 내리쳤다. 잠결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자는 헉하는 소리만 내고는 꼼짝하지 못했다. 이어서 덕이는 이불자락을 젖히고

임유학의 허리께에 곧추세운 쇠몽치로 지끈지끈 내려박았다. 통나무도 부저졌을 텐데 육순

이 넘은 노인의 허리뼈쯤이야 부러지다 못해 박살이 났을 것이었다. 찍짹 소리없이 일이 끝

났다. 덕이는 이불의 임유학의 머리끝까지 덮어놓고 잠시 바깥 동정을 살폈다.

파루가 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막개는 잠든 주막집 노파을 깨웠다.

보슈, 할멈 일어나요. 일어나. 시방 우대용이께 말 좀 전해주어야겠어.”

하필 신새벽에 심부름시킬 건 또 뭐유.”

우대용이께루 쫓아가서 임대인을 때려 죽이려던 놈이 방금 달아났다구 전하슈.”

, 아니...... , 누가 맞아 죽어요?”

임대인 댁에서 도망친 놈이 지금 용댕이고갤 넘을 테니 광석내 앞에서 목을 지키면 된

다구 전해주면 됩네다.”

광석내요?”

그렇지 방금 결성골에서 나왔을 테니까. 내 여기서 기다릴 테니 냉큼 다녀오슈, 또 닷

냥을 더 드리지.”

사색이 되어 있던 주모가 닷 냥이란 말에 발걸음이 떨어져서 꽁지에 불 달린 들쥐처럼 뛰

어나갔다. 갯가에는 배에 매어단 불이 휘황하게 밝혀져 있었고, 해창과 어계방 쪽에도 관솔

횃불이 대낮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주모가 방문을 벌컥 열었을 때, 제각기 손에 쥔 패에 열

중한 장정들은 아무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주모가 우선 소리를 질렀다.

여보아요! 큰탈났수, 큰탈이 났어.”

장정들이 일제히 어리둥절해져서 문 밖에 섰는 주모를 쳐다보았다. 입빠른 자 하나가 실

없는 소리를 던졌다.

, 죽은 영감 귀신이 찾아와서 합환하자구 졸라댑디까?”

미친 녀석 같으니, 농하자구 달려온 줄 알어? 우서방 어디 갔수?”

좌중에서 한 사람이 일어났다. 검은 배자 받쳐 입고, 머리는 검은 수건으로 질끈 동였는데

빰에 기다랗게 상처가 났으며 콧수염이 뻣뻣하게 곤두서서 입술을 덮고 있었다. 걷어올린

다리에는 털불숭이가 무성했는데 바닷바람에 그을려 몸 전체가 벼룻돌처럼 단단하고 시꺼먼

몰골이었다.

왜 그러우?”

내뱉는 목소리가 섬술깨나 좋이 마실 듯 싶게 거칠고 탁했다.

댁네 대인 어른을 언놈이 죽이려다 방금 달아났대요. 광석내 쪽으루 갔다구요, 빨리 쫓

아가 보라잖아요.”

우대용이가 우물쭈물하지 않고 후닥닥 뛰쳐나오며 제 등뒤에다 소리쳤다.

빨리들 가보자.”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우대용이는 끝이 두 가닥으로 갈라진 고기잡이 작살을 찾아

들고 있었다.

주모, 정말이지?”

압다, 거짓 소리 했다간 외상값 다 떼이게?”

외상 정도가 아니라, 우릴 놀렸다간 초가삼간에 불을 확 싸질러버릴 테여.”

그들은 갯가에서 광석내를 향해 달려 올라갔다. 우대용은 결성골서 나오는 자가 어느 길

을 택하는지는 제 손바닥 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우대용이네 뱃놈들은 광석내의 물이 겨우 발목에 차오르는 얕은 목을 건너가서, 용당포와

해주성 밖의 경계가 될 언덕을 막고 지켜 잇었다. 낯선 고장의 갯가에서, 타관 뱃놈들과 무

수한 싸움을 치러온 그들인지라, 누가 말하지 않아도 숨소리마저 죽인 채 엎드려 있었다.

결성골에 들어온 자는 누구든지 이제는 보쌈 항아리 안에 들어오느 피라미새끼였다. 들어

올 적엔 쉬이 들어왔으나, 아무도 용댕잇개 앞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었다. 그들은 목소리

를 낮춰 수군거렸다.

임대인 나릴 노리는 게 언놈들이겠어...... 신가놈들이 온 모양이야.”

억지 채무로 마인을 주었다던데, 그놈 아닐까.”

복동이패는 원래 용댕잇개로는 넘어오지 않기루 되어 있어. 잡아봐서 틀림없으면, 이번

엔 우리가 주내방 신씨 여각으루 쳐들어가야지.”

웬일일까, 지난 이태 동안 서루 아무 말썽이 없었는데.”

이봐, 감사가 갈렸잖나. 우리 임대인께 줄이 닿던 양반은 경부루 올라가셨단 말야.”

그때 광석내 건너편에 희끗한 사람의 자취가 나타났다.

, 저기 누가 온다.”

나타난 자는 허리를 굽혀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더니 내를 건너오는 것이었다. 그가 내를

건너 고갯길로 들어서는 참에, 장정들이 후다닥 양쪽에서 뛰쳐나갔다. 우대용이가 질그릇 깨

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위협했다.

이눔, 게 꿈쩍 말고 섰거라!”

?”

덕이가 놀라서 발을 멈추고 두리번대는데 벌써 상대편의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덕이도 피

해 뒷걸음치면서 쇠몽치를 꺼내들었다.

느이들 왜 이러느냐?”

네 이눔...... 임대인 집에서 도망 나오는 길이지?”

그래, 빚돈 받으러 갔었다.”

잡아랏!”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드는데, 덕이의 쇠몽치 쓰는 솜씨도 제법인지라, 머리와 어깨를

제각기 얻어맞고 에쿠지쿠하면서 되떨어진다. 덕이가 이리 뛰고 저리 피하면서 쇠몽치를 휘

둘러대건만 워낙 상대의 수가 대여섯 되고 보니 달아날 길이 막연했다. 더구나 우대용이가

작살을 내던지고서 달려드니 그 우악스런 기세에 덕이는 우선 기가 죽어버렸다. 덕이가 쇠

몽치를 휘두르며 내달으면 우대용이는 몸을 유연하게 흔들어 피하면서 오히려 몽치 자루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틈을 노리던 우대용이가 앞발을 널름대더니 덕이의 정강이뼈를 콱

내질렀다. 덕이가 휘청하면서 무릎을 꿇는 사이에 우대용이의 억센 손아귀가 덕이의 몽치

든 손목을 조여잡아 이끌면서 배때기의 허릿바를 틀어 힘을 썼다. 덕이가 버둥대면서 공중

에 쳐들렸는가 싶자,

에라잇, 니미랄 거.”

우대용이가 투덜대면서 땅바닥에 메태기를 쳐버렸다.

어이구......”

얼굴을 왕모래에 갈고 처박혀서 버르적대는 덕이의 뒷덜미를 잡아 끌어올린 우대용이가

우선 박치기로 상대의 면상을 으깨놓고 주먹으로 연신 가슴팍을 쳐올렸다. 상대가 늘어지자

그래도 성이 차지 않는지, 작살을 들어 등을 겨낭하고 번쩍 쳐들었다.

...... 참아.”

한 사람이 우대용이의 팔을 붙들고 또다른 사람이 그의 허리를 껴안아 뒤로 끌어냈다.

사람 죽이겠다.”

말린 사람이 핀잔을 주니, 우대용이는 씨근거리면서 침을 퉤퉤 내뱉었다.

까짓 놈 죽으면 대수야. 발목에 돌이나 두어 개 달아 바닷물에 내 버리지.”

그래두 죽으면...... 살인이다.”

아따, 아무리 고리게 굴었어두 임유학은 우리 주인이여. 시방 이놈이 죽였는지두 모를

텐데...... 살인자를 쳐죽인들 어떨라구.”

사유를 알아야 쟁송에 유리하지.”

그들이 이렇게 다툴 적에 덕이를 끌어올리던 장정이 소리쳤다.

여보게들, 이리 와보게.”

뭐야, 왜 그래.”

이놈이 죽은 모양이야. 축 늘어졌어.”

모두 달려들어 덕이를 더듬는데, 우대용은 다시 성을 내며 발길로 호되게 걷어찼다.

이놈, 엄살 떨면 속을 줄 아느냐.”

그러난 늘어진 놈은 꼼짝도 않는다. 그뿐 아니라 구린내가 고약하게 풍겼다. 방분해버린

모양이었다.

어이 구려, 이거 무슨 냄새야.”

허 변을 놓쳤으니...... 틀림없이 절명했네. 여게 불을 켜봐.”

그제사 우대용이는 만져보기 시작했고, 한 사람을 부시를 꺼내어 마른 잎을 모아 불을 붙

였다. 불빛에 드러난 덕이의 몰골은 끔찍했다. 눈을 흡뜨고 있었고 코는 으깨져 콧날개가 찢

어져 너덜댔는데, 입도 터져서 흘러내린 피가 목덜미를 타고 저고리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 그놈 어이없이 뒈졌네.”

우대용이가 꺼림칙해졌는지, 얼굴을 돌리면 투덜거렸다.

단매 석 대에 뒈어질 놈이 설치기는 왜 오줌 맞은 개구리새끼처럼 폴짝거려......”

, 이 일을 어찌한다.”

뭘 어찌해. 지금 서둘러서 바다에 내다 버려야지.”

우대용이가 주장했으나, 처음부터 말리던 자가 짜증을 냈다.

그러게 내가 뭐랬나. 사람 죽인다구 그랬잖아. 자넨 그 성미 때문에, 언제나 일을 그르

쳐놓는단 말야. 자네 벌써 이게 몇 번째야, 네번째지. 여긴 타관이 아니란 말야. 이제 어쩔

테야. 이놈이 신가놈의 수하라면, 가만있지 않을 게야. 우선 대인 댁으루 가봐서, 대인이 죽

지 않았다면 자넨 이 고장서 달아나야 해. 만약에 나리가 죽었다면, 자넨 자수해서 곤장이나

맞구 두어 달 옥살이나 나오는 게 나을 테고. 하여튼 나리 댁으루 가보자.”

이놈은 어떡할까?”

끌구 가야지.”

젠장맞을...... 누가 그리 쉽게 뒈질 줄 알았나.”

우대용이는 침을 퉤 뱉고 나서 덕이의 시체를 등에 짊어졌다.

재수 옴 붙은 날이네. 어유 망할 자식 같으니. 웬 똥냄새가 이리 구리냐.”

그들이 한데 몰려서 광석내를 건너고, 결성골로 들어가는데, 한떼거리의 사람들이 횃불을

켜들고 마주 달려오다가 주춤 서버렸다.

누구야......”

대인 댁 하인배들이로군.”

웬인들이냐?”

하인들은 그제사 마음을 놓았는지, 마주 다가왔다.

큰일났고. 웬놈이 집에 들어와서 주인나리를 패구 달아났소.”

그래, 돌아가셨나?”

시방 식구들이 의원을 부르러 보냈는데, 어찌된지는 자세히 모르겠소.”

그들 틈에서 청지기 사내가 나섰다.

돌아가시지 않구 숨은 붙어 계시네. 그래 그놈을 잡았나?”

주상단의 총대 선인 되는 자가 근심스럽게 말하면서 우대용을 돌아보았다.

잡긴 잡았는데...... 자네 곤란하게 되었구면. 신가네 패가 잠자쿠 있진 않을 걸세.”

청지기가 우대용이께로 횃불을 비추다가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에키! 이게 뭐야. 송장 아녀?”

, 주먹으루 두어 대 패니깐 뻐드러지잖어. 정말 송장 치구 살인났다니까.”

청지기가 총대 선인에게 물었다.

그래, 어쩔 셈인가들?”

인제부터 의논을 해봐야지. 어이 누가 이 사람들 따라가서 주인나리 어떠신가 알아보구

. 우리는 대용이 처신 문제를 생각해볼 테니까.”

하인들은 되돌아갔고 그들은 용댕잇개의 어계방을 향해 돌아섰다.

거기 가면 더욱 남의 눈에 뛰기가 쉽지 않나.”

그럼, 이런 판국에 송장을 떠메고 우환이 난 집으루 들이닥친단 말야? 더구나 그 집서

송장이 나와봐. 신복동이놈만 기승이 나는 게지.”

어이, 무거워.”

우대용이가 덕이의 송장을 다른쪽으로 바꿔 메면서 투덜대자, 총대 선인이 말했다.

이 사람아, 기운깨나 쓴다면서 사람 한 몸이 무겁단 말야?”

내 손에 죽은 놈이니 기분이 나빠 그렇지.”

그들은 갯가를 따라 걸어갔다. 뱃사람 일행이 포구로 나가는데, 주막 앞에서 서성대던 노

파와 마주쳤다. 주모가 겁도 없이 냉큼 나섰다.

어찌들 됐수, 그놈을 잡은 게유?”

떠들지 말어. 나중에 관에서 조사 나와두 모른 체하란 말이야. 입 잘못 놀렸다간 용댕이

서 장사 다 해먹는 줄 알라구.”

아니 이이들이 내가 뭐랬다구 이렇게 살기각 등등해서 겁을 주구 야단인감.”

주모는 뒤처져 가는 우대용이가 메고 있는 송장을 보자,

에그머니나!”

하며 주저앉았다. 우대용이 걸음을 멈추고 번들거리는 눈으로 돌아다보자 주모는 턱을 떨

며 주막 쪽으로 달아났다. 노파가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 한쪽에 칼을 빼어들고 숨어

있던 막개가 마주 나오며 물었다.

잡혔습디까?”

주모는 숨을 한참이나 몰아쉬고 나서,

아이그...... 말두 마우, 오줌 쌀 뻔했네. 잡힌 게 뭐야. 그 우서방이 둘러멘 게 틀림없이

송장이더라니까.”

지금 어디루 갔수?”

몰라요. 아마 저희 어계방으루 갔거나, 배루 갔겠지.”

막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척척 맞아떨어지는군. 할먼, 여게 포도군관이 나와 있는 데가 어디유?”

이 용댕잇개에서 한참 올라가면 관선이 대이는 선창이 있지요. 게서 털벙거지 몇사람

본 듯하우.”

막개는 주막을 나서려다 말고, 돌아서서 허리에 감았던 나머지 돈꿰미를 풀었다. 막개는

뒷일을 위해 주모에게 입막음을 해놓고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멀리 계방 쪽의 불빛이 반짝

이고 있었다. 그는 멀찌감치 돌아서 관선이 대이는 해창 쪽으로 뛰었다. 해창거리 초입에서

막개는 역시 순라꾼을 만날 수가 있었다.

누구야?”

, 여기 포교나리가 어디 계십니까?”

무슨 일이오?”

살인이 났소.”

살인이라구......?”

하더니 순라가 앞장서서 뛰어갔다. 길 밖으루 툇마루가 달린 수군청 앞에서 그가 어느 방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나리, 일어나우.”

뭐야......”

살인 났답니다.”

안에서 부시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포졸 세 사람과 포교가 뛰쳐나왔다. 포교는 어둠에

익지 않았는지 두리번대며 물었다.

누군가...... 고자가.”

, 소인입니다.”

어디야?”

용댕잇개 계방이랍니다. 저두 지나가다 얼핏 봤는데, 뱃사람들이 시체를 떠매구 그리루

갔습니다.”

곁에 섰던 포졸이 말했다.

임유학네 패거리 아닐까요?”

그렇겠군.”

나리 저 좀 봅시다.”

포졸이 포교를 끌고 비켜가서 얘기를 했다.

임대인 댁 사람들이라면, 나중에 우리 입장이 곤란합니다. 사실 우리네가 그 댁이 없으

면 어찌 밥술이나 먹겠습니까요. 허고...... 우리도 이런 때 슬쩍 눈감았다가 나중에 은근히

비쳐보시면 돈냥깨나 쏟아져 나올 듯합니다.”

글쎄 나두 그런 생각이지만, 저기 목도한 놈이 있으니 뒤가 께름하구나.”

분명 여기 놈이 아닐 거올시다. 미적미적하다가 나중에 조사해보고 나서 오히려 허위로

고했다면 으름장을 놓으면, 잠잠히 예서 떠나겠지요.”

그들이 이렇게 수군거리며 청을 떠나지 않으니, 현장 포착을 원하는 막개는 자연 애가 달

았다. 그가 참지 못해 포교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아니 어쩌시려오. 살인한 당들이 물중을 없애는 걸 기다리는 게요?”

이거 놓아라. 너는 어디서 온 놈이냐?”

허 보자 보자 했더니...... 내는 주내방, 신생원 어른의 수하 사람이오. 부장두 잘 알고,

형리 어른두 잘 아우. 감사께 이 관내 일을 소상히 여쭐 수도 있소이다.”

...... 그러시우?”

빨리가서, 현장을 덮치지 못할 때엔, 내 가만있지는 않으리다.”

당황한 포교가 그제서야 동작이 빨라지면서 뛰기 시작한 막개의 곁을 따랐다.

실은 허위 고자가 많아서요. 또한 우리두 여기서는 진장나리께 일일이 고해야 하니 어

려운 점이 많습니다.”

좌우간 빨리 가십시다.”

그들은 계방 쪽을 향해서 뛰어갔다. 계방 주위에는 이미 횃불이 모두 꺼졌고 그들의 등뒤

에 새벽빛이 부옇게 밝아와 바다가 훨씬 선명해져 있었다.

저쪽입니다.”

포졸이 배가 닿는 선창 쪽을 가리켰다. 검은 그림자들이 부산을 떨며 돛을 올리려는 중이

었다. 막개가 포교를 잡아 세웠다.

잠깐, 내 말 좀 들으시우. 저놈들이 내 얼굴을 알고 있으니, 혹시 번거로울까 해서 그러

. 가서 살인자 한 놈만 잡아 감영에서 압송 나올 때까지 잡아두시오. 내 지금 돌아갈 테니

......”

포교가 처음보다는 훨씬 고분고분한 태도로 물었다.

염려 마시오. 헌데, 죽은 자가 누구요?”

우리 신씨 여각의 차인 행수로 있는 사람이외다. 빨리 가서 잡으시우.”

막개는 그들이 선창 쪽으로 달려 내려가는 모양을 확인하고서 돌아섰다. 일이 이렇게 척

척 맞아떨어졌으니, 이제는 용댕이에서 어물거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포졸들은 선창으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뱃사람들은 벌써 닻을 감아 올리는 중이었다. 포졸

하나가 달려가서 닻줄을 마주 잡았고, 포교는 환도를 썩 빼어들고 소리쳤다.

모두 배에서 내려라.”

뱃전에 섰던 자가 할 바를 모르고 섰을 때, 포졸 두엇이 날렵하게 뛰어올라가 육모방망이

를 흔들면서 그들을 내몰았다. 막 떠나려던 배가 대어졌고, 내려진 널판자로 포교가 올라갔

. 선인 행수와 우대용이는 선미 쪽에 선 채로 배에 남아 있었다. 포교가 뭍에 남은 포졸에

,

한 놈도 달아나지 못하게 묶어놓아라.”

이르고 나서 배에 오른 포졸에게 명했다.

배 안을 샅샅이 뒤져봐.”

대체 뭣 땜에 이러시오?”

행수 선인이 별로 자신없이 물었다. 우대용이는 여차직하면 바닷물에 뛰어들 자세로 고물

께에 바짝 붙어 서 있었는데, 포교가 다가서더니 다짜고짜로 환도의 끝을 등뒤에 대면서 앞

으로 내몰았다.

"배에서 내려"

"왜 그러냐니까요?"

"몰라서 묻는가?"

"그 양반, 참 야속하게 구는구려. 우리가 평소에 섭섭히 해드린 적이 없는데 이게 웬 난

리요."

포졸들이 이물에서부터 차례로 뒤지다가 선복 아래로 내려가 화물이 쌓인 창고를 뒤지고

나서 올라왔다.

"아무것두 없습니다."

"뭐요. 혹시 당화라두 있는가 해서 그러시우. 우리가 실은 건 미곡과 객주에서 거둬들인

잡화밖엔 없수."

포교는 대꾸하지 않고, 발끝으로 멍에 아래 덮은 판자를 들었다. 무엇인가 삐죽이 솟아나

와 있는데, 마대 자루였다. 포교가 칼을 두 사람의 등판에 겨누고 자기는 한눈팔지 않고 포

졸들에게 지시했다.

"멍에 널판을 들쳐봐라."

포졸 하나가 엎드리며 판자를 들치는데, 우대용이가 그를 발길로 차내면서 뱃전을 건너뛰

었다. 앞으로 쫓으려는 포교를 행수 선인이 밀치면서 함께 넘어졌다. 포교는 넘어지면서 외

쳤다.

"투승 던졋!"

대용은 널판자를 후닥닥 뛰어내려갈 때, 이물 쪽에서 내달은 포졸이 오라를 펼쳐 던졌다.

원을 그리며 날아간 붉은 줄이 대용의 상체를 둘러씌웠고, 포졸이 익숙한 솜씨로 잡아챘다.

조여든 오랏줄은 대용의 목을 졸라맸고, 그는 널판자 위에서 보기 좋게 나가떨어지며 물속

에 텀벙 빠졌다. 포졸이 이를 악물고 줄을 당겼다. 포교가 행수 선인을 밀어젖히며 일어났

. 넘어졌던 포졸은 달려가 줄 잡은 동료와 합세했고 다른 포졸은 육모방망이로 행수 선인

에게 실컷 홍두깨 모시기를 해주었다. 포교가 뱃전으로 상체를 기울여 물 밑을 내려보았다,

"놈이 배 밑바닥에 붙어 있다. 사정 주지 말고 당겨라."

대용이는 줄 끊을 시간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렸으나, 물속이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더구나 목에 꽉 죄어든 명주 밧줄은 거의 그의 숨통을 끊어놓을 정도였다. 그가 물

위로 펄쩍 솟았고, 포졸들은 개 잡듯이 그를 끌어올렸다. 이미 뻣뻣해진 우대용이를 끌어내

어 목에서 줄을 끄르고, 대신 팔을 뒤로 돌리고 팔꿈치 사이에 나무를 끼우고 상투와 두 팔

과 나무를 한데 묶는 곱사배기로 모셨다. 그런 뒤에야 대용은 숨통이 뚫렸는지 긴 숨을 토

해냈다. 포교가 그를 정면에서 바라보며 조용하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식직고하여라, 네놈이 주내방 신씨 여각의 차인을 죽였지?"

대용은 상투가 뒤로 젖혀 매어져 있으므로 고개를 들어 위를 향한채 눈알만 간신히 아래

로 치뜨고 대답했다.

"언놈인지는 모르나, 우리 주인 어른을 반죽음시켜놓고 도망가는 자를 몇차례 패주었소."

"얘들아, 그 판자에서 마대를 끌어올려라."

포졸들이 멍에 판자를 들추고 마대 자루를 끄집어냈다. 자루를 찢고 들여다본 포졸이 말

했다.

"송장입니다."

그는 시체에서 피가 묻은 자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네가 죽였지?"

"그리된 모양이우."

우대용이를 뭍으로 끌어내자 행수 선인이 맞은 어깨며 다리를 주무르는 시늉으로 다가와

포교에게 호소했다.

"에이 여보 나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철마다 어욕이며 쌀섬에 술까지 내리시는 우리 대

인의 은덕이 기신데...... 우릴 이리도 괄시하기요?"

포교는 뭍에 올랐던 사람들을 풀어주라 이르고 나서 처음과는 딴판인 얼굴로 오히려 행수

선인에게 사정했다.

"나두 어쩔 수가 없네그려. 살인이란 조정에까지 장계가 오르는 중죄인데, 어찌 적경을 받

고 나서 모른 체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게 누구요? 적경을 고한 자가....."

"발설하기 난처하네."

"주막집 할멈입디까?"

"아닐세, 좌우간 모조리 살인죄로 얽지 않는 것을 평시의 의리루 생각해주게나, 우린 대용

이만 넘길 테니까, 그러구..... 시체는 갯가에서 건졌다 하겠으니 어서 배를 몰구 행상이나 다

녀오지. 돌아올 때쯤엔 아마 잠잠해져 있을 거야."

포교의 자세한 말이 일리는 있으되, 그냥 배를 몰고 떠나기엔 하도 억울한 것 같아서 행

수는 자연 노기를 띠었다.

"놈들이 고육지책을 쓴 게 분명합니다. 이 죽은 녀석이 주인 나리를 쇠몽치로 깨구 달아

나는 걸 우리가 잡았지요. 주막 노파가 와서 대인을 죽였다구 하길래, 모두들 살기가 등등했

었수. 죽은 놈이 입을 열리 없으나.... 모두 신복동놈이 시킨 짓일 게요. 먼저 상해한 자를 쳐

죽인 것이 그리 중죄란 말요?"

"자네들이 불리하지. 죽은 자는 임대인께 채권자가 아닌가?"

"억지 채무지요."

"어찌됐든, 소문에는 임유학 어른이 양민의 재물을 피침하였다고 짜아하데그려."

포교의 말에 의해서 모든 것이 분명해졌고, 행수 선인이 우대용이의 묶인 몸을 잡아 흔들

며 탄식했다.

"이 사람아..... 자네가 성미만 조금 느긋했던들, 이젠 꼼짝없게 되었네."

"내 걱정일랑 말고, 어서 뱃길이나 떠나."

"까짓 놈에, 이런 형편에 장사는 다 무에야."

한탄하고 섰는 행수 선인을 밀쳐내면서 포교가 은근히 속삭였다.

"기왕 망해가는 집안 장사는 뭣할라구 해.... 어서 배나 몰구 가지."

그들은 갯가에 남았고, 포졸들은 앞뒤로 대용이를 둘러싸고 해창 쪽으로 올라갔다. 포교는

포졸 하나를 감영에 통기하도록 띄웠고, 자신은 직접 대용이를 감시하며 청에 남아 있었다.

혹시나 뱃사람들이 몰려와 그를 탈취해가기라도 한다면 신생원의 현재 영향력으로 보아 자

기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겠기 때문이었다. 우대용이는 이젠 곱사배기 엮음이

아니라 상좌 무반의 장군 모심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목에 나무칼을 쓰고 발에는 족쇄까지

찼는데다, 호위장도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민가에서 포교의 밥을 날라왔다. 겸상이었는데,

그것은 물론 안면이 있다는 포교의 호의에서였다. 포교가 수저를 들며말했다.

"끌러주고 함께 먹고 싶지만 달아나면 내가 경을 치겠으니 할 수 없네, 내 다 먹구 자넬

먹여줌세."

"고맙수, 밥은 필요없구...... 술이나 한말쯤 시켜주시우."

"누구 망하게....."

"젠장, 술 한말엔 겨우 목줄기나 축이는 건데...... 참말 취토록 멕일라우?"

"거 왜 사람을 쳐죽이구 남까지 귀찮게 만들어, 이거."

"누가 죽을 줄 알았나, 홧김에 두어 대 패구 보니까 녀석이 똥을 싸구 죽어 자빠졌습디

."

"자네보담두 죽은 놈은 더 불쌍하게 되었어. 신생원 쪽에서 아예 범잡을라구 내어논 토끼

새끼 미끼였거든."

"어째 그러우."

"사람 공연히 숭어처럼 펄펄 뛰기만 하구, 세간의 간사한 꾀는 이해를 못하네그려, 신생원

네서는 용댕이 선창이며 객주가 탐이 나는 게야. 헌데, 기운깨나 쓰는 자네하구 상재가 비상

한 유학 어른이 골치란 말일세. 돌멩이 하나루 새를 세 마리 잡은 게란 말야, 이 미련한 사

람아, 신생원네 사람이 또 하나 넘어와서 주막에서 약조된 시간을 기다리구 있었어. 우린 그

자가 알려주어 잡으러 갔다니까, 자네 이런 사실을 안다 해두 감영에 들어가 발명해보았자

죄를 덜어내는 데엔 아무 보탬이 안될 게야, 공연히 형과 국문만 오래 끌 뿐이지, 까딱하다

간 사거리로 굿하러 끌려나가기 전에 옥중 원혼이 될지도 모르이."

우대용이는 훨씬 침울해진 표정이었으나, 그렇다고 기가 꺾인 것 같지는 않았다. 포교가

술을 시키려는 참인데, 행수 선인과 뱃사람 몇이 뜨락에 들어섰다. 뱃사람 하나는 커다란 부

담농을 어깨에 메고 있었으며, 행수 선인이 그것을 마당에 내려놓도록 일렀다. 그가 우대용

이께로 다가와 손을 덮석 잡았다.

"대인 댁에 갔던 자가 돌아왔는데, 목숨은 붙어 있으되 사람 구실은 못하겠다더군, 우리는

배를 몰구 떠나려네. 대인 나리네 집안은 이젠 다 되었어. 신가네서 가만있지 않을 거야."

우대용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서들 떠나...... 내야 운이 나빠서 이리된 것이니."

"이건 자네 몫일세. 우리가 실은 잡화에서 기중 값나가는 것으로만 골랐어."

"목숨이 어찌될지두 모르는 판에 뭣하러 가지구 왔어. 나눠 가질 게지."

"여하튼지 우리가 다시는 용댕이에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네. 비단하구 무명일세. 옥에 있

는 동안 밥이나 대먹도록 하게."

행수 선인이 부담농의 뚜껑을 열어 포교에게 내밀었다.

"우리는 떠나겠수 비단에서 절반은 우리의 마지막 성의라 생각하구 받아두슈. 그리고.....

대용이 옥에 있는 동안 옥사장에 손을 써서 뜨뜻한 밥이나 끼니 거르지 않게 넣어주시구

."

포교는 비단과 무명을 보자 눈이 휘중그래졌고, 좋아서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나두 인정이 있는 사람일세. 자네들은 일이 터지기 전에 용댕이에서 떠난 것으르 보고를

올리지. 그리구 대용이는 일두 걱정을 말게나, 내 어찌어찌 손을 쓰면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

있을지두 모르겠네."

포교가 부담농을 받아 기거하는 방에다 깊숙이 감추었다. 밥상 날라왔던 아낙이 큰 동이

에 찰찰 넘치게 탁주와 안주를 개다리소반에 받쳐서 가져다 놓았다. 포교가 한 바가지를 그

득히 떠서 대용의 입에 대어주니, 그는 목이 말았었는지 단숨에 들이켜버렸다.

"어 술맛 이렇게 단 줄은 몰랐네!"

"..... 이별주가 없을 수 있나, 자네들두 한잔씩 돌리구 떠나게."

포교가 술을 권했으나 뱃사람들은 사양했다. 행수 선인이 우대용이께 바짝 다가와 귓속말

로 속삭였다.

"우리는 강화에 가려네. 일단 거기서 여각을 잡아 경강을 오르내리며 장사를 하다가,

풀리면 송도루 올라갈까 한다네, 예성나루에 있게 될지두 모르겠어. 며칠 뒤에 송도 배대인

댁의 박대근이가 용댕이에 올 걸세. 내 자세한 얘기는 어계방 사람들께 미리 고해두었어.

탁이네만, 겨울 동안 목숨이나 부지하도록 해여. 봄이 되어 우리네가 자릴 잡으면 무슨 수가

생겨도 생길 것일세."

포교가 걱정스런 듯이 말했다.

"빨리들 배를 띄우게. 감영서 몰려나오면 내 입장이 아주 난처해지니까."

뱃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갔고, 행수 선인은 마지막으로 술 한 바가지를 푹 떠서 우대용

이께 먹여주었다. 우대용이 꿀꺾이며 바가지를 비우는데, 둘 다 비감한 마음이 되어 눈물이

솟아나왔다. 행수 선인이대용의 묶인 손을 잡아준다.

"명심하게. 국문받을 때 그저 수걱수걱 고분고분하여 모두 시인을하구...... 자네가 살인한

것은 사실이니까. 우선 형벌이나 적게 받도록 해두게. 박대근이두 와서 소식을 듣게 되면 도

와줄 걸세. 의리를 소중히 아는 사람이니까."

우대용이는 그저 고개만 연신 끄덕거렸다. 그들은 포구를 향해 멀어져갔다. 포교와 대용은

권커니잣거니 하면서 술 한 동이를 비웠다.

우대용이는 잠시 후에 감영에서 나온 포졸들에 둘어싸여 성내로 압송되었다. 감사기 의관

을 갖춰 입고 동헌으로 나오기 전에, 신복동이가 현신을 아뢰었다. 감사는 짚이는 바가 있

, 주위를 물리친 다음 신복동이와 은밀히 마주 앉았다. 감사가 말했다.

"그래, 듣자하니 죽은 자가 자네 수하 사람이라며....?"

", 그러하옵니다. 소인이 경영하는 만화루 기생 취련이란 계집의 기부되는 자인데, 이번

에 육로행상으로 원행을 다녀왔습지요. 헌데 용당포 임유학의 자식이 주색잡기에 빠진 자여

서 삼천냥을 취련이께 빚지게 되었습니다. 그 돈을 받아내려고 기부란 자가 임유학을 찾아

갔으나, 갚아주기는 커녕 오히려 뭇매를 뚜드려 쫓아버렸지요. 여기에 원한을 품고서 그날

밤에 침입을 하여 임유학을 상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수하인 우대용이란 잔인한 자가 포

착하여 때려 죽이게 된 것입니다."

", 그러니까 죽은 자는 용당포 임가를 상해만 하였단 말이지?"

", 그러하옵니다."

"임가가 누구의 채무자인가?"

"그야 문서상으로는 취련이의 채무자로 되어 있습지요. 더구나 그 아들이 담보물로 선적

한 물품의 사금파리 어음을 잡혔으나, 빚돈을 재촉받자 화주에 통기하여 무효로 하였답니다.

그러나 삼천 냥은 허공중에 뜨게 되었고, 취련이란 계집은 그자가 수결한 채무각서를 가지

고 있습니다."

감사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신복동이를 빤히 건너다보았다.

"말하자면 임가 부자가 공히 사기를 했단 말이로군. 그 빚이 노름에 날린 것이라며?"

신복동이도 싱긋이 웃고 나서 머리를 조아렸다.

", 영감마님의 자모지리는 이제 두 곱절이 되어 금 육천에 이르렀사옵니다. 행운이 성하

게 되오면 이달 안으로 만전은 족히 될 것입니다. 원금 장부에 그렇게 기입해놓겠사오니,

제든지 환전하셔도 될줄로 아옵니다."

"그래...... 자네는 무얼 원하는가?"

"황공한 말씀이나, 돌보아주시는 천은을 입어 이제 해주에서는 육로행상으로 크게 일어났

으나, 아무래도 경강을 오가는 해운에는 못 미치는가 하옵니다. 용당포에서 객주와 선창을

개점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감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 법대로 조처할 것인즉, 소신대로 해운에두 손을 대보게나. 그리고 내가 경기

도 어름에다 제위답을 장만하려 하니, 자네네 차인들 중에 용의주도한 자를 골라 내려보내

도록 해주겠나?"

"아믄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늦어두 달포 안으로 구입하여 제반 문서를 바치겠습니다."

", 그러면....."

감사가 대청으로 나서며 대기하고 섰던 비장을 불러 지시했다.

"용당포 임유학의 자식놈을 잡아들이라 하여라, 그리고 살인한 자의 도당들도 빠짐없이

잡아 대령하라, 그 연후에 추국청을 열리라."

", 분부대로 시행하오리다."

감사의 지시는 득달같이 전해져 털벙거지들의 한떼거리가 용당로로 몰려갔다. 이제부터

신본동이 이외의 다른 자는 부고 노릇을 못해먹도록 된 것이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모든 감

사의 처사가 국법에 따른 것이려니 알았다.

우대용은 살인죄로 사형이 결정되어 하옥되었고, 취련과 임유학의 아들이 대질하여 어음

과 각서를 증거로 내보이게 되니 판결이 내렸다. 즉 삼천 냥의 자모지리를 이 할 가산하여

빚을 갚고, 벌과금 삼천을 별도로 감영에 납부할 것이며 물의를 일으켰으니 용당포의 객주

개점을 폐한다는 것이었다. 임가의 아들은 담보물 사기로 옥살이나 귀양을 면하게 된 것만

이 다행이어서 당장에 육천육백 냥을 장만하여 감영에서 풀려나오기로 하였다. 그러나 육천

냥이 넘는 돈은 부상인 임씨가에서도 큰 돈이었는데, 납부 기일은 닷새밖에 여유를 주지않

았었다. 더구나 아직 수금되지 않은 돈도 많건만 이러한 소문을 듣고 모두가 약삭빠르게 모

른 체하는 것이었다. 지방의 화주나 경주인께 통기하여 환전토록 해야겠는데 당사자인 임유

학이 의식불명인 채 산 송장이 되어버렸으니, 설령 통기를 한다더라도 이젠 응해올 리가 만

무하였다. 또한 행수 선인과 몇몇 원행 장사에 밝았던 뱃사람들이 막대한 잡화와 미곡을 실

을 채 달아나버려서 현금 육천육백 냥을 물어 내는 일은 임씨네에서도 난감한 일이 되어버

렸던 것이다. 임씨네에서는 신복동이께 사람을 보내어 남은 배와 객줒집을 고스란히 넘겨줄

것이니, 빚돈 삼천육백 냥과 관에 갖다 바칠 삼천 냥을 탕감해 달라 하였다. 신복동이는 좀

두고 보자며 일러 보내놓고 차일피일 날짜를 끌어 납부기일 바로 전날이 되었다. 감영의 판

결날짜를 어길 수 없게 된 임씨네서 할 수 없이 집까지 넣어 육천육백 냥으로 결정하고는

신복동이께로 넘겨주고 말았다. 임씨네서는 모든 산과 토지를 마름들에게 맡겨둔 채로 온

가족이 용당포를 떠나갔다. 신복동이는 사건이 생긴 지 채 열흘도 못 되어 임유학 대신에

용당포의 해운까지 독점하게 되었고 이제는 명실공히 해서의 제일 가는 부상대고가 된 것이

.

선창과 객주는 해주 본바닥 무뢰배 출신인 왈짜패의 막개가 운영하게 되었고, 임씨네 집

은 해로 장사를 다니는 자들을 상대로 한 객주가로 변모되었다.

만화루의 일개 창기이던 취련은 자기의 소원대로 색주가로 변모된 임씨네 기와집에 열 명

의 창기들을 거느리고 들어앉았다. 그제서야 임유학이 수전노라고 욕하던 결성골 사람들도

어렴풋이 이번 사건이 신가의 술수에 의한 함정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밖

으로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막개는 전에 임유학 아래서 배를 타거나 객주에 붙어 있던 차인들 중에 쓸 만한 왈짜를

댓 명쯤 골라내어 그대로 제 밑에 거두었다. 선창 어계방에는 죽은 차인 행수 덕이와 함께

지방 행상을 나갔던 무뢰한 꺽돌이란 자를, 행수 선인의 오른팔로 함께 있도록 하였다. 우대

용이가 하던 역할이었다. 용댕잇개에는 이제는 그들과 앙숙지간이던 주내방 신씨네 왈짜들

이 설치게 되었던 것이다.

 

2

박대근이네 상단이 봉산서 올 때 두 패로 나뉘어 한 패는 금교역으로 해서 예성강을 건너

송도로 들어가는 길을 택하고 또 다른 패는 해주로 나와 용당포에서 선편에 짐을 보내게 되

었는데 박대근이가 인솔하여 해주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그들이 용당포에 닿은 것은 예

정보다 하루 앞당겨진 관싯날 이틀 전이었다. 저녁 무렵 그들이 나귀를 줄줄이 이끌고 용댕

잇고개를 넘는데, 누군가 길목에 지켜 앉았다가 마주 달음질쳐 오는 것이었다.

"송도 배대인 댁 분들이슈?"

머리타래를 늘어뜨린 총각놈이었다. 그는 장사 패거리 중의 아무나 붙잡고 묻는 것이었다.

"여기 박대근이란 어른이 기십니까?"

"우리 행수 어른이네."

"그분 좀 봅시다."

박대근이 후미로 따라오다가 앞으로 나섰다.

"자네가 누군데 날 찾나?"

"벌써 열흘째 이제나저제나하며 매일 여기 나와서 기다렸수, 허니....... 돈 내요."

총각 녀석 지리하게 기다리던 것은 참말인 듯 반갑자마자 손부터 내밀었다. 박대근이 영

문을 모르면서도 하 어이가 없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나서,

"이 사람아, 자네가 누구냐는데 돈이라니?"

"오 참...... 내 임대인 나리 객주 하실 제 중노미 해처먹던 놈이우. 우리 행수 선인 아저씨

가 떠나면서......"

총각의 말이 점점 엉뚱해서 박대근이가 말을 막았다.

"가만, 무어라구 했느냐. 임대인 나리가 객주할 적이라면...... 지금은 하지 않는단 말이냐?"

", 온 해주 바닥이 발칵 뒤집힌 것두 모르시구 장살 다닙니까, 그분네는 쑥밭이 되려 버

얼써 며칠 전에 온 식구가 소리두 없이 이살 가버렸수. 이거...... 이걸 전할라고 내가 말뚝

장승 모양으루 이 고개를 지켰다우." 하면서 총각이 허리춤에서 꼬깃꼬깃해진 봉서 한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박대근이 펴서 읽어보니 행수 선인의 글인데 대략의 사건이 적혀있고 우

대용에 관한 부탁이 씌어 있었다. 어떻게 손을 써서 사형을 연기시켰다가 귀양쯤으로 면하

게 해줄 수 없는냐는 것이었다. 강화로 갈것인즉 거기서 만나면 모든 경비는 돌려주겠다는

부탁이다. 그러나 간략히 적어놓은 내용으로는 우대용이가 살인한 일이 어째서 임유학네가

패가하게 된 일과 관계가 있는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용당포는 신복동이네가 모조리 독점하게 되었단 말이냐?"

총각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주내방에서 몰려온 놈들이 어찌나 우리를 못살게 구는지, 전에 대인 댁에 몸붙이던 자들

은 모두 여길 떠났습니다. 저두 나리가 노자나 좀 주시면 송도 대처루 떠날 참입니다."

"그럼 어계방에는 누가 있느냐, 알 만한 사람이 있겠느냐?"

"두엇 남아 있지만, 꺽돌이란 놈의 지시를 받으니 똑같은 놈들이지요"

"그래 그거 참 낭패로다."

박대근이 짐 속에서 무명과 엽전 한 꿰미를 후하게 내어주니, 총각이 놀라서 뒷걸음쳤다.

"아니올시다. 이건 너무 많구요, 그저 한 냥만 주십시오."

"가져가거라. 사흘 길 방자질에두 조가 닷 말이니라. 그리구 네가 옛주인께 대한 의리가

있음을 기특히 여겨 이러는 것이니 노자 하여 떠나거라."

총각은 그것들을 받아 몇번이나 절을 꾸뻑이고서 고개를 넘어갔다. 박대근이는 전처럼 선

창으로 나아가 행수 선인과 직접 만나려 하질 않고, 우선 결송골 들어가기 전에 있는 주막

으로 가기로 정했다. 주막에 가서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아본 다음에 아예 육로로 내치든지

전과 같다면 객주에서 일단 거래를 틀 작정이었다. 그들이 파도소리가 요란한 갯가에 이르

니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박대근의 일행은 마바릿짐을 끌고 용댕잇개 앞을 지나 결성골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주막

에 당도하였다. 주모가 뛰어나와 호들갑을 떨면서 그들을 반겼다.

"아이구, 손님들 어서 오시오."

"이 집에 마구간은 있소?"

"웬걸요, 한두 마리라면 빈 외양간이 있는데. 거기다 나귀를 매어두겠지만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마당에 들여놓지두 못하겠는걸."

"사립 바깥에 말뚝 박아 매어놓으시우."

노파는 손님들을 놓치지 않을 셈으로 사립문을 열고 나귀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박대근

이 그것을 막으면서,

", 서두르지 마오. 방이 몇이나 있습니까?"

"아주 큰 방 하나하구 작은 방이 둘 있습니다."

"역시 이 집은 좁구 작아서 안되겠네. 잠깐 요기나 하구 가겠어."

"예예, 그러십시오."

주모가 분주하게 다른 아낙과 머슴이랑 어울려 술상을 차린다 생선을 굽는다 국을 데운다

하며 대청과 부엌을 오르내렸다. 박대근이 보냈던 자가 돌아와 어계방은 그전 그대로이고

주상들로 들끓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객주로 갔던 차인이 돌아와서 물품의 위탁비가 종전

보다 좀 박하기는 하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다는 것이었다. 박대근이는 그에게 시

켜서 물건을 넘길 것은 객주에 가져가고 해운할 것은 선창에 부치라고 일렀다. 우선 저녁들

을 먹고 나서 일부는 마바리를 끌고 결성골로 들어가고, 박대근이는 선창에 나가기로 하였

. 사람들을 보내놓고 나가려던 대근이 주모를 불렀다.

"주모, 뭣 좀 물읍시다."

"! 뭔데요?"

"우대용이 일을 알구 있소?"

"아이구 우린 그런 거 모릅니다. 딴일이랑 몰라두 그건 묻지 마슈."

주모가 기겁을 하여 물러서려는 것을 박대근이 소매를 꼭 잡고 물었다.

"우대용이가 살인을 했다는데, 임유학은 또 어째서 반신불수가 되었소?"

", 그 사람이 빚돈을 갚지 않고 버티다가, 그 꼴을 당한 뒤에 우대용이가 그자를 때려

죽였다우, 임유학 얘기는 예서는 못하게 되어있수. 공연히 경친답니다."

"여기에 신복동이가 나와 있소?"

"신생원 나리는 여기 안 계시구. 그 대신 전에 주내방 차인 하던 사람이 회계 어른으루

나와 계시우."

"주내방 차인? 그자를 지금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겠소?"

"결성골 용정루엘 찾아가보슈."

"결성골 용정루..... 처음 들었는데."

", 게가 전의 임대인 댁이지요."

박대근이는 짧게 신음했다.

"나쁜 놈들! 남의 집을 빼앗아 창가를 만들다니...."

"아유 무슨 말씀이 그렇게 어패가 있으슈. 빼앗긴 뭐, 그 바보 같은 작은 임씨가 헐값에

팔았지."

박대근이는 눈을 부릅뜨고 노파를 건너다보다가, 음식값을 치러주고는 나서려는데 노파가

불렀다.

"나이, 셈이 맞질 않는데요."

"뭐요, 밥 겸상 열에 술 한 말이면 셈이 꼭 맞는데."

"아니...... 또 있잖우. 얘기값을 주셔야지."

"그래?"

박대근이는 두말 않고 닷 푼을 내던졌다.

박대근이의 상단 사람들이 선창에 이으러 물품을 위탁하느라고 행수 를 찾는데, 어계방에

서 꺽돌이가 나왔다.

꺽돌이는 상단 사람들을 쑥 훑어보고 나서 물었다.

"어디 임방 동무 되시우?"

". 송도 배대인 댁입니다."

"송상이시우?"

", 경강 마포의 강주인에게 물품을 부치려 하오."

꺽돌이는 어둠속에서 서 있는 나귀들의 머릿수를 눈짐작으로 헤아렸다.

"몇 바리요?"

"이십 바리가 넘습니다."

"한 척 값을 내슈."

"한 척이라니..... 전세를 내란 말이우?"

"그렇소, 다른 짐들이 모두 떠나버렸으니, 배를 낼 수가 없소이다."

박대근이네 차인이 고개를 저었다.

"한 척 값이라면, 화물에 비해 너무 비싼걸."

"아예 물건을 우리 객주 여각에다 위탁매매해버리든지, 아니면 다른 화물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슈."

박대근이가 도착하자 그들은 분개하여 제각기 떠들었다.

"행수 어른, 이곳 놈들은 순전히 도적들입니다. 말짐 이십여 바리에 배 한 척 값을 내랍니

."

"물건을 저희 객주에 넘기랍니다." 박대근이가 나섰다.

"인사 틉시다. 나 송도 임방의 박대근이우."

꺽돌이는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인사는 트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당신네들 송화서 난장 텄지?"

"우리네는 관에 개시세를 내고, 장을 설치했소이다. 송화에두 갔었소."

꺽돌이가 그제사 생각이 났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구 보니까 약산골서 장을 텄던 사람들이군."

"알고 있소. 무더리에서 장을 냈었지요?"

꺽돌이가 다짜고짜로 박대근이의 멱살을 잡았다.

"네 이놈들 잘 만났다. 여기 우리가 있을 줄 몰랐지. 어디 한번 맛좀 보아라."

박대근이는 멱살 잡은 손을 틀어쥐고 뻣뻣이 버티면서 부드럽게 말하였다.

"장사하는 자들이 원행 나가면 서루 경쟁하게 마련인데, 이거 이러지 말자구. 댁네들두 송

도 들를 것 아닌가."

"잔소리 마라 이놈. 너희들이 문화 광대 패거리와 안악장까지 갔다는 것 알구 있다. 우리

가 얼마나 별렀는지 아느냐."

", 이 사람들 상대 못하겠군."

박대근이도 은근히 부아가 솟아올라 상대를 쥐어박으려는 참인데 누군가 그들 사이를 가

르며 뛰어들었다.

"왜들 이러나, 이러지들 말게."

"말리지 말어. 저놈들께 빚 받을 게 있단 말야."

"자넨 좀 가만있어. 장사하는 사람들이 쓴 것 단 것 가려서는 오래 못 가네."

하고 나서 그는 박대근이를 향하여 허리는 굽혔다.

"손님, 욕보셨습니다. 나는 여기 선창서 행수 선인을 맡아보는 사람입니다."

"나 모르겠소? 박대근이오."

"아이구 참 오랜만이올시다. 내가 이번에 선창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는 이가 있으니...... 마음을 놓았소. 짐 좀 부칩시다. 종전대루 말이오."

"그러시지요. 반 척 값만 내십시오."

"좋소. 그러면 송증을 써서 객주로 보내주오. 우리는 거기서 묵을 테요."

"차인으론 누가 동행하시게?"

"이 사람이 갈 거요." 하며 박대근이 차인 한 사람을 지정해주었다. 새로 된 행수 선인이

말하였다.

"그럼 이분은 남아서 물품과 송증을 확인해주실까요. 내일 새벽 조수 때에 배가 떠납니

."

박대근이가 선인의 소매를 끌어 사람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다음에 낮은 목소리로 물었

.

"우대용이의 사형이 확정되었소?"

새 행수 선인은 뒤를 힐끗 돌아보고 나서 대답했다.

"확정되었답니다. 아마 한달 안으루 주내방 사거리서 집행할 모양이오."

"무슨 수가 없겠소?"

"글쎄요. 나는 이미 신씨네 사람이 되었으니 주인을 배반할 수야 있겠습니까만...." 하며

망설이는 선인을 박대근이 달래었다.

"댁이야 예전 안면으루 내게 말해줄 뿐인데 배신이랄 게 있소."

"이번 일은 모두 우대용이의 살인으로 해서 신생원이 유리하게 된겁니다. 그러니 신생원

쪽에서는 대용이를 한시바삐 처치하는 게 원입지요. 그 사람을 빼내는 것은 바다에서 여의

주를 건지는 일과 같소."

"무슨 통기라두 넣어볼 구멍이 없을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소마는, 저쪽 관선 선창에 가면 포교가 나와 있습니다. 그이가 맨

처음에 현장을 포착하여 대용이를 압송했으니, 무언가 알 수 있을지두 모르겠소."

"고맙소."

"내가 그러더란 말은 아예 하지 마시우."

박대근이는 상단 사람들을 객주로 보냈다. 선창에는 꺽돌이란 자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객주 쪽에 먼저 간 모양인데, 박대근이는 시비가 벌어질까 몹시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고분고분 눌러 참으면서 상대를 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신신당부를 해

두었다.

그가 포교를 만나 우대용이에 관하여 물으니 포교는 단번에 경계하는 빛을 보였다.

"여보, 사형이 결정된 자를 내 어찌 알겠다구 묻는 거요?"

"우가는 나허구 친동기간이나 다름없는 사이라서 그럽니다. 비록 도형수노릇을 하게 된다

할지라도...... 어떻게 봄까지만 목숨을 부지할 길이 없겠습니까?"

포교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젓기만 하는 것이었다.

"나두 장사치들 중에는 꽤 알려져 있는 사람이올시다. 만약에 구명할 길을 알려주신다면

그 은혜는 쪽 갚겠소."

한참이나 묵묵히 생각에 잠겼던 포교가 입을 떼었다.

잠시 노리고 섰던 두 사람 중에서 감동이가 서너 걸음 크게 뛰며 윽박해 들어갔다.

노가의 장검이 원을 그리며 휘익 날았다. 쨍겅 하는 소리가 들리며 칼날이 마주쳤다. 감동

이는 반대편으로 휘둘러 오는 노가의 칼날을 피해 그의 등뒤로 빠져나갔다.

노가는 자기 뒤로 빠져나가는 감동이를 치기 위해서 휘둘렀던 칼을 그대로 세우며 아래로

내리쳤다. 감동이가 재빨리 옆으로 비켜나며 예도를 노가의 가슴팍에 꽂을 듯이 찔렀다.

가는 칼날로서 상대의 칼끝을 옆으로 뿌리쳤고 끼이꺽하는 칼날 엇갈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두 사람은 칼을 잡은 채 몸이 닿도록 가까워 졌다. 두 사람 모두가 진땀으로 가슴께와 등판

이 흠씬 젖어 있었다. 벌써 네 합이 지났다.

두 사람이 다시 떨어질 적에 노가가 장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는데, 감동이의 옆구리가 그

어지면서 갈라진 무명 적삼 위로 피가 배어나왔다. 노가는 자신만만하게 감동이에게로 뛰어

들면서 쳐든 칼을 자기 머리 위에서 회전시켜 상대의 목을 바라고 엇비슷이 베려는 찰나였

.

감동이가 한 쪽 무릎을 꿇어 파고들며 노가의 배에 예도를 꽂았다. 노가의 손에서 장검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자기 배를 내려다보았다. 감동이는 다시 팔목에 힘을

주며 칼을 상대의 몸속으로 깊이 박았다. 노가가 다리를 푹 꺾더니 뒤로 넘어졌다. 감동이가

발로 그 가슴을 내지르며 칼을 쑥 뽑아내자, 피가 일직선으로 솟아오르며 감동이의 얼굴과

가슴에 튀었다. 감동이는 소매로 제 얼굴과 피를 닦으면서 뒤로 천천히 물러났고, 노가는 다

시 움직이지 않았다 감동이가 몇몇 졸개들을 지적해내며 말했다.

"시신을 수습해서 묻어주어라."

감동이는 박대근이에게 다가가서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나서 말했다.

"거 술 한 잔만 주슈."

박대근이가 쪽박에 술을 따라 내밀자 그는 벌컥벌컥 맛나게 들이켰다. 노가의 시체가 치

워졌다. 감동이가 이제는 좀 홀가분해진 낯으로 말했다.

"산채로들 올라갑시다. 며칠 놀다들 가시우."

"글세..... 우리는 장삿길이 바빠서 어쩌지?"

박대근이가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갑송이가 말했다.

"모처럼 사귄 놈을 이런 데서 놓아 보낼 수야 있수? 아주 진을 빨아 먹구 가야지." "

채로 가십시다."

"아따 그러지 뭐. 구월산 녹립당의 행수 두령께서 초대하시는데 우리가 마다할 리가 있

."

하면서 박대근이도 웃었다.

"그런데 자네들 칼솜씨가 제법이데그려. 아무래두 훈련원 위영서 배운 것 같데. 그렇지 않

고서야 노가나 나네가 검을 본떼있게 다룰 리가 없지." "내막은 차차 얘기하지요"

"그러구 저기 키 큰 자는 창술을 제법 알더구만."

", 그자는 본시 평안진군의 초장이었수. 상관을 패 죽이구 쫓기다가 우리 패에 들어온

사람인데, 됨됨이가 아주 근직하우."

감동이가 그 자를 손짓해서 불렀다.

"어쩌려나, 부두령이 되어 나하구 산채일을 도와주겠나. 아니면 떠나려나? 거취는 자네 마

음대루 하게."

"두령이 없으니, 의당 성님이 산채를 칻을 것이고, 나두 불만은 그리 없수." 하고 그자가

말했고, 박대근이가 웃는 얼굴로 말을 붙였다.

"나는 고향이 파주인 박대근이란 사람이오. 우리 알구 지냅시다." "안주의 오만석이우."

길산이와 갑송이도 차례로 오만석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박대근이는 길산이, 갑송이들과 구월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차인들을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그는 한 사람을 불러서 일렀다.

"내가 내일 안악 읍내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장시를 열지 말라구 전하게." "예 그럼 저희

는 배고개서 한내를 끼구 안악으루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구 우리 일을 절대루 아무에게두 얘기하지 말게. 어둡기 전에 빨리들 출발해야지.

디 상한 사람은 없나."

"뭐 정갱이 조금 삐구 허물 벗겨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수작들이 오갈 때에 화적

들이 지고 왔던 짐들을 차인들 앞에다 쌓아놓기 시작했다. 박대근이 감동이에게 물었다.

"이 사람아, 이게 뭔가."

"잘 알면서 뭘 물으슈. 내 아무리 숭악한 도적놈이기로 형제지간에 그럴 수 있수? 다 돌

려드리는 게유."

"결이 나서 뒤쫓아왔다가 자네 산채의 기강을 잡는 일을 도운 것이네. 재물 찾아갈 생각

없네. 그렇다면 아예 자넬 묶어 포도 군사를 앞세우고 산채를 들이쳤을 게 아닌가." "공연

히 그러지 마슈. 나두 이런 물건은 못 받겠수." 감동이는 팔짱을 끼고 뒤돌아서버렸다.

대근이가 우물쭈물하는 쫄개들에게 말했다.

"여보개들, 빨리 짊어지지 않구 뭘 꾸물대나..... 모두 산채루 가져가게." 졸개들이 다시

부담을 짊어지려는데 감동이가 몹시 비위가 상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이놈들아, 범이 아무리 날고기를 좋아해두 저희 고기는 서루 가리는 법이다. 그 짐에 손

을 대면 손모가지들을 모조리 잘라버리겠다."

곁에서 빙글빙글 웃고 섰던 갑송이와 길산이가 보다못해 그들 가운데로 끼여들었다. 먼저

갑송이가 말했다.

"온 도적놈과 장사치 사이에 말은 드럽게 많네, 예미랄 거, 말은 보태구 떡은 떼랬다구 그

부담짐들이 싫거든 날 주오. 내 몽땅 지다가 화식전에 이름이나 올리게." 길산이가 대근이

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럴 거 없이 되찾은 재물 중에서 골라 이 사람들게 선물을 하시죠. 또 자네들두 그렇

잖나. 사람이 사귀고 의를 맺었으니 이런 물건을 주고받는 게 그렇게 의기가 상할 노릇두

아닐세."

박대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포목 한 짐과 어포 한 짐을 내어놓었고 나머지는 모두

차인들이 지고 내려가도록 했다. 그가 감동이에게 말했다.

", 이러면 되었나?"

"고맙수."

감동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곁에서 잠자코 섰던 만석이가 그들을 재촉했다.

"자아, 빨리 떠납시다. 아사봉까지 가려면 많이 늦었으니....." "골짜기가 벌써 어두워졌는

. 산채엔 누가 남아 있나?" "갑득이가 다섯쯤 데리구 있수.우리가 오늘 들어가는 줄 알

거요." 만석이를 앞장세우고 졸개들이 뒤따랐고 감동이는 길산이와 함께 뒤로 떨어져서 걸

었다.

그들은 배고개의 장연길을 가로질러고심산 초원속으로 들어갔다. 산줄기가 부드럽게 한내

의 상류와 나란히 가다가 구월산 연봉의 시작이 되는 실토봉에서부터 산세가 험난해지는 것

이었다. 이미 주위가 캄캄해졌으나 곧 떠오른 반달로 드러난 등성이가 굽이굽이 잘도 보였

. 고심산과 실토봉을 잇고 있는 낮은 구릉에 도착한 그들은 풀밭에 앉아 술로 목을 축이

며 잠깐 쉬었다. 거기서 투구봉과 아사봉 사이의 분지인 된목 이골까지는 산길 삼십리 거리

였다. 달빛이 부옇게 비친 장재이벌의 은띠 같은 한내천을 내려다보며 박대근이 중얼거렸다.

", 좋은 산천이로다!"

"도적놈이 살기엔 참 아까운데지."

갑송이도 말했다. 감동이가 핀잔을 주었다.

"도적놈의 성님두 도적이여. 뭐 도적이 따루 있는 줄 아는가베." "아무렴 내가 제놈 같을

라구....."

"그렇지, 출신이 원래 각좆이니까."

"..... 이 낯짝 새까만 잔나비새끼가 사람을 우롱하는구나." 그들의 지분대는 꼴이 제법

다정하여 주위에서는 참견 않고 웃기만 하는데, 길산이 감동이에게 물었다.

"그래 아우는 도적놈이 따루 없다고 했것다. 어째서 그러한가." "아 그야 뻔한 이치 아니

.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큰 도적질 아닙니까. 벼슬아치들은 권력을 도적질해서 가족들과

친척과 저희 연줄로 끼리끼리 해처먹고 허울 좋은 과거까지 독차지하는 데다, 이제는 조정

에 인재가 끊겨 재주 있는 자들이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옥에 갇히거나, 숨어지 살지

. 임금님부터 재상까지 화적보다 더 큰도적놈들이지 뭐요. 백성들은 헐 벗고 굶주리는데

쥐새끼 같은 무리들은 세도 권문에 아첨하여, 많은 뇌물로 감사나 병사를 사들여 수령직임

을 맡으면 들인 밑천을 백성들에게서 뽑아내려 하지 않우. 함부루 국법을 우롱하고 멋대로

부정해서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내고, 자기네는 호박이다 금붙이다 비치다 옥이다 갖은 박

물을 몸에 두르고는, 가엾은 백성의 가난을 향하여 게으른 탓이라고 낭비하지 말고 부지런

하라 닥달하니 참으로 적반하장이지요. 사리사욕에 눈이 팔렸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옅고, 형벌은 가혹하여 그 모진 매에 얼마나 많은 자가 병들고 죽었겠수. 이런 놈들은 제

고향에 재산과 토지를 늘리고 뇌물로서 상납하여 자리를 지키는데 급급하지요. 그러나 벌은

커녕 오히려 지위만 높아지고 , 간혹 실수하여 물러나게 되더라도 방게와 꽃게가 옆으로

기어가긴 마찬가지라고 저희끼리 비호를 해주지요. 자리가 바뀌어도 그놈이 그놈, 도적놈이

도적놈을 뽑는 식이니, 이런 놈들은 도적의 작은 두령이지요. 부저, 향족, 토반들은 금력으로

줄을 대어 귄세에 힘입고 모리하고 국세나 까먹고 걸핏하면 양민의 등을 치니 두령의 졸개

들입니다. 각 고을의 내외관속들은 문서를 거짓으로 꾸며 무리한 세납과 명목없는 잡부금

을 거두고, 교묘하게 속여서 국고를 축내는데 이놈들은 도적의 손발이 아니고 뭐요. 그뿐이

아니오. 자칭 학사라고 뻐기며 큰갓에 넓은 도포자락으로 거들먹거리는 선비라는 자들은

무식한 백성 보기를 오뉴월 뒷간에 구데기 대하듯 하고, 진서깨나 읽을 줄 안다고 백성들

의 소박한 풍속을 허식으로 고치질 않나, 이름이나 얻엉보려고 이 솟을대문 저 사랑으로

주린 개 장바닥 싸돌 듯 하니 이런 놈들은 도적의 뇌수라, 가장 해로운 놈들이지요. 이렇게

도적들이 허울 좋은 나라의 중심이라 행세하는데 말이우." "그친구 재담만 잘하는 줄 알았

더니..... 과연 구월산의 두려잉로군." 듣고 있던 박대근이가 무릎을 쳤다.

길산이는 감동이의 그와 같은 열띤 얘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기웃이

하고서 앉아 았었다. 감동이는 계속해서 말하였다.

"세상은 도둑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어있는데, 법이 무너진 판국에 무슨 법으로 우리를

다스린다우. 빼앗기고 밟히다 못해 산속에 들어와, 남의 많은 재물 중에 조금만 꺼내어 굶주

림을 면하겠단 우리는 무엇이오?"

"가장 째째하고 비겁한 도적이지."

"느닷없이 박대근이가 맞받았다.

"겨우 남의 재물을 뺏어 주림이나 견디겠다고 사내 대장부가 산속에 들어와 있는가. 아닐

..... 백성을 돕는 녹림당이 되어야 하고, 힘을 길러 저 도적들을 없애야 하지. 내가 재물의

참뜻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것일세. ..... 팔도에 두루 덮이는 막강한 힘일세. 겨우 장정 몇

명 거느리고 남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이밥에 반찬 좀 낫게 먹으려거든 도적 소릴 꺼내지도

말구 고을 관장에게루 자수해서 일찌감치 장교질이나 터보도록 하게." 박대근이의 말은 강

경했지만 열기가 있어놔서 감동이가 대답을 못했다. 묵묵히 앉았던 길산이 감동에게 물었다.

"아우는 혹시 글을 아는 게 아닌가?"

감동이는 대신 만석이가 대답했다.

"알다뿐이우. 우리가 자비령서 옮겨올 제 감동이 형님이 가어서 노릇을 해서 월당나루를

건넜수. 무슨 글이든 척척 읽구, 관아 사정두 훤하지요." 박대근이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

덕였다.

"도대체 자네는 무엇이었나?"

"사노였수." 라고 감동이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의 집 종이 어찌 글을 알겠나?"

"그럴 만한 사연이 있수."

하고 나서 감동이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한숨부터 쉬었다. 그는 갑자기 솟구치는 눈물

을 어쩌지 못하고 저고리 자락을 들어 비볐다.

감동이는 한양 숭례문 안의 금동에서 교리 벼슬 하는 집의 여비 양갑에게서 태어났다.

의 노비문서에는 오직 솔비양갑고부모명부지라는 글 밑에 노감동병신생모사비양갑이라고 적

혔다. 감동의 나이 십삼세 때에 그는 동갑내기인 주인 아들의 방자 노릇을 했는데 어렸을

때부터서당에 모시고 다녔고 늘 곁에 붙어 있게 되니 학문을 알고 싶었다. 양반 도령이 글

을 읽을 때엔 곁에서 그 소리를 따라서 외곤 했었다. 워낙에 성의가 있고 배우고 싶은 마음

이 간절하니 자구의 뜻이야 어쩔 수 없으나 글줄은 주인 아들보다 훨씬 정확히 욀 수가 있

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말하여 소학을 얻어 새벽마다 서당을 몰래 찾아다녔다. 그리고는 공

부가 시작될 때까지 문 앞에 가서 섰다가 아이들이 방안에 가득 차면 미닫이 밖의 댓돌에

단정히 끓어앉아 글을 따라서 읽었다.

"그는 부질 없는 고생을 왜 했었는지 모르겠수. 어리석은 탓이었지요." 그러나 교리댁에

서는 그의 어머니밖에는 감동이가 글을 배우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

대신 일찍 일어나서 마등을 쓸고 장작을 패 놓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노력으로 십육세

까지에 사서쯤은 모두 스스로 읽을 수가 있었다.

"허지만 남의 집 종이 글을 안다는 것은 가장 참기 어려운 괴로움이 한가지 더 늘게 되었

다는 거뿐이지요."

그의 나이 열여덟에 교리 댁에서는 계집종을 들이고 감동이와 성혼을 시켜주었다. 향분이

라는 열여섯살짜리인데, 얼굴이 무척 아름다웠고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서 교리댁에서는 과

천까지 나가서 그 여자를 사왔던 것이었다. 교리댁 맏서방님도 같은 무렵에 시골 토반인 진

사댁의 규수를 맞아들여 성혼을 했는데, 여자는 질투가 몹시 심했었다. 감동이와 향분이는

고달픈 행랑살이 중에도 제법 금실이 좋아 집안 사람 모두에게 호감을 주었었다.

그러나 교리 댁 서방님이란 자는 원래 오입쟁이깨나 된다는 한량을 자처했고 좋지 않은

무리들과 더불어 글보다는 기방과 색주가에 드나들기를 제 집처럼 하였다. 이대 여종 향분

이의 미모는 이들 사이에서도 제법 알려져서, 서로간에 탄식들을 하면서 그렇게 잘난 미인

이 종의 몸으로 천출 감동이 같은 놈과 사는 것이 못내 아깝다고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하루는 사랑에서 감동이를 불러갔다. 만서방님은 그를 불러 앉히고 은근히 돈꿰미를 내주

면서 이 길로 안성으로 내려가 과물을 한바리 사들여 오라는 것이었다. 곧 제사가 있게 되

는데, 서울전에서는 가격도 들여 오라는 것이었다. 곧 제사가 있게 되는데, 서울전에서는 가

격도 비싸고 물건도 오래 묵은 것들이니 양반가에서는 종을 시켜 지방 장시에서 직접 물건

을 구매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감동이는 아무 생각없이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안성으로

내려갔다.

그가 출타한 뒤에 서방님은 곧 일을 벌였다. 즉 향분이를 문밖청패쪽에다 심부름을 보내

고서, 자기는 같은 또래 한량패들과 뒤쫓았다. 기다리던 자들이 그 여자를 마대에 씌워 용산

에 객줏집의 은밀한 사처엣다 털어놓았다.

여기서 서방님은 수월하고 편안하게 향분이를 건드려 놓았다. 남의 집 여종으로서 그만한

인물과 팽팽한 나이에 몸을 온전히 지켜 왔을 수는 도저히 없었으니, 향분이가 정결한 몸으

로 시집을 간 것은 아니었으되, 본 성품은 정숙하기가 재상댁 규수에 못지 않았다. 그렇건만

남의 아녀자로서 외간 남자에게 그런 일을 당하여 향분이는 곧 자진할 결심이었지만, 그 결

심은 곧 스러져버렸다. 그에게서는 이미 첫아기의 태기가 있었던 것이었고, 임신한 여자의

목숨에 대한 애착은 실상 이런 재난이나 봉욕에 비해 너무나 강렬하였다.

그들이 저녁에 따로따로 집에 도착하였는데, 이런 기미가 맏며느리씨의 귀에들어가지 않

을 수가 없었다. 그날은 잠잠히 지나가고, 이튿날 서방님이란 자는 아침 일찍 서대문 밖으로

볼일을 보러 나간 뒤에 며느리씨는 거적을 깔아놓고 향분이를 매우 치며 자백하기를 강요하

였다. 안성에서 과물을 말 가득히 싣고, 감동이가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같은 동료 종

이 감동이에게 그런 대강의 이야기를 귀띔해주었다. 감동이는 골방에 틀어박혀 찢어지는 듯

한 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소리없는 눈물만 흘렸었다. 감동이의 모친은 향분이가 장형

을 당하고 있는 안마당과 바깥 행랑채를 속수무책으로 오락가락하면서 애만 태웠다.

그날 밤이 되어 향분이가 매로 터져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골방에 돌아왔을 때, 감동이는

거기 없었다. 그는 목멱산 깊은 숲속에 앉아 이 절망고 분노를 가라앉히며 한나절을 보냈던

것이ㅏ.

그러나 인간의 도리와 세상의 법도를 글을 통해 알고 있는 감동이는 들끓던 분노가 사그

라들자, 도대체 상하와 주종의 의리 관계를 인간의 법도로써 알아온 자기의 온 청춘이 얼마

나 덧없고 몽매하였던 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정이 넘은 밤에 회현방 뒤를 돌아 금동 교리댁의 담을 타넘어 들어갔다. 지친 향

분은 잠들어 있었고, 안채에도 불이 완전히 꺼져 있었다. 감동이는 어둠 속에 잠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드디어 결심이 되자, 그는 아내의 여린 목을 움켜쥐고 힘꺼 졸랐다. 잠들

었던 아내가 몇번 몸을 버르적거리다가 늘어졌다.

감동이는 광에 들어가 낫을 꺼내들고 사랑채로 가까이 갔다. 술에 곤드레가 되어 들어온

서방님은 코를 골며 깊이 잠든 기색이었다. 근 미닫이를 열고 방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등잔

에 불을 켯다. 그가 조용히 서방님을 깨웠다. 그자는 졸린 눈을 들어 감동이와 그의 손에

들린 낫을 보자 금방 삭신이 사그라진 듯 궁둥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이 사람아..... 왜 이러나, 자네와 나는 동기간이나 다름없이..... 함께 자라난 사이가 아닌

..... 그 낫 좀 거두게!"

감동이는 이미 단조롭고 착 가라앉은 기분으로 그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온 하루에 걸쳐서

굳혔던 터이라, 동요 없이 그를 내려다 보았다.

"내 너를 단번에 쳐죽일 것이로되, 만일에 잠든 자를 죽인다면 첫째 죽는 고통을 모를 것

이요, 둘째 네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잠결에 죽어 넋이 편안할 것이며, 셋째 내가 네 죄에 대

해서 정당한 심판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너를 깨운 것이니, 네 죄를 알고 있겠지?"

서방님짜리는 손을 비비고 턱과 입술을 떨며 절박하게 말했다.

"향분이가 평소 내게 마음이 있어 추파를 보내어 내가 그만 저지르지 못할 실수를 범했

. 내 더욱이 자색이 아름다운 비녀를 수소문하여 자네께 내릴 것인즉 이 사람아..... ?

발 고정하시게."

"네 이 더러운 놈! 네가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 성인의 가르침을 배워 실천하기는커녕

아직 글귀를 깨우치지도 못하였구나. 부흥귀, 시인지소욕야나, 불이기도로 득지어든 불처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느냐. 너 같은 놈은 살아서 나라와 백성을 해치고, 더욱이 너희가 말하는

주인과 종의 의리 관계마저 깨뜨린 놈이다. 그런 짓으로 세상을 더럽히며, 앞으로도 계속 너

의 높은 지위와 문벌을 이용해서 행악을 끼칠 놈이니 내 일찌감치 죽여주마." 하며 감동이

가 낫을 치켜들자, 갑자기 뛰어 일어나며 그자가 필사의 고함을 쳤다.

"사람 죽인다앗! 사람 죽여....."

돌아서는 자의 등을 감동이는 낫으로 내리 찍었다. 이미 고함은 터져 나간 뒤였다. 감동이

는 앞으로 엎어졌다가 일어서며 부르짖는 자의 머리와 목을 번갈아 찍었다. 그는 저고리와

손바닥에 온통 피칠을 하고서 미닫이를 열었다. 벌써 마당에는 온 집안의 종복들과 가족이

뒤어 나와 있었다. 감동이는 죽어 늘어진 서방님짜리의 다리를 질질 끌어 땅바닥에 차 내던

지며 낫을 견주고 뒷걸음 쳤다.

"하늘을 대신해서 아녀자를 겁간한 도적을 내 손으로 처단했다. 상하고 싶지 않은 자는

길을 비켜라."

교리가 턱수염을 떨며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한번에 달려들어 꼭 붙잡아라!"

교리의 호통소리에 주춤거리던 하인들이 감동이 앞을 가로막으며 에워쌌다. 그는 후원 담

을 타넘어갈 궁리를 했는데, 그러자면 피를 보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여러개의 중

문이 겹겹이 닫혀졌고 마당은 동료 종놈들로 가로막혀 있었다. 감동이는 이를 악물고 낫을

치켜들며 에워싼 하인들의 무리 가운데로 쑤시고 들어갔다. 앞에 걸리는 대로 낫으로 내리

찍었다. 가슴팍을 정통으로 찍힌 청지기 사내가 짐승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감동이가 낫을 치켜들어 휘두르며, "나는 이왕 피맛을 본 놈이다. 달아날 길이 있다면 모

르되, 가로막는 자는 누구든 죽여버리겠다.!"

라고 고함을 치니 , 꼭 잡아야 할 이유도 없고 상하고 싶지도 않은 동료 종들은 비슬비슬

비켜났다. 감동이가 몇걸음 발을 내디디며 곧 달려들태세로 교리 영감을 향해 부르짖었다.

"내게 입혀주고 먹여준 은공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피차가 짐승이 아니라 하늘의 이치

에 따른 인생으로서 젊은 주인이 너무나 황음무도 하였소. 남의 아내를 욕보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부정의 죄로 형장까지 가했으니 주인의 덕을 잃은 것은 고사하고, 천륜의 도를 더럽

혔으니 내가 국법을 앞서서 처형을 한 것이오. 내 스스로 밝은 세상에서 숨고자 하는데,

인께서는 가문을 생각하여 시끄럽지 않게 수습하는게 좋으리다." "..... 저런..... 발칙한 도

적놈이 있나."

감동이가 에잇 소리를 내지르며 상을 험하게 꾸미자, 주인 영감은 온몸을 풍 걸린 듯 떨

면서 엉금엉금 대청으로 기어 올라갔다.

"얘야 , 감동아....."

어둠속에서 울고 섰던 그의 모친이 밝혀진 횃불빛 아래로 들어서며 그를 찾았다. 세상 천

지에 혈육이라고는 아비를 알 수 없는 자기뿐인 그 서럽게 늙은 비녀를 보자 감동이는 목에

더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어머니..... 멀리 가겠습니다."

"이 몹쓸 것아, 이런 끔찍한 일을 어째서 저질렀느냐." "어머니....."

감동이는 마당을 가로지르고 뛰었다. 하인배는 모두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지라 그

를 잡고 싶기 보다는 어서 쫓아 보내려고 건성으로 소리만 지르며 뒤러 멀찍이 따랐다.

당쇠 한 녀석이 바짝 쫓아 감당이의 허리를 껴안으려는 것을 다른 동료가 슬쩍 딴죽을 걸어

넘어뜨렷을 쩡도였다. 그는 키가 넘는 후원 뒷담을 바라고 나뭇가지를 붙잡아 휘익 솟구쳐

간신히 두 발을 걸쳤다. 그가 담 위에 올라섰을 때 횃불을 든 동료들이 모여들었고, 모친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감동아 먼데루 가거라!"

그는 담을 뛰어내려 캄캄한 회현방의 뒷길을 돌아 목멱산 기슭을 타넘고 광희문 부근의

등성이 쪽에 성벽이 안으로 낮은 곳을 택해서 빠져나갔다. 그가 성내를 빠져 나가자 그제서

야 길게 파루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활인서 부근이었다. 대로를 피하여 주로 들판이나 산

길을 택해서 양주에 닿았고, 이틀뒤에 굶주리고 지친 몸으로 철원 부근의 야산을 헤매다가

사냥질 다니는 엽수 들과 알게 되었다. 그들에 휩쓸려 몰이꾼 노릇을 하며 달 반을 따라다

니다가 서흥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동선령을 정사꾼에 묻혀서 걷다가 대적 조대립의 잔당에

습격을 당했다.

조대립이라 하면 부사를 습격하여 살해했을 정도의 형세가 대단했던 대적이었는데 당시의

자비령에는 그와 함께 거사를 했던 임태룡이란 두령이 잔당을 거느리고 있었다. 임태룡은

감동이의 정상을 알고 나서, 더구나 그가 글을 잘하고 영민함에 곧 모사로 올려 곁에 두게

되었다.

임태룡은 본래가 훈련원의 교련관 이었다. 그가 갑진년에 남한산성의 별장이 되어 갔다가,

이듬해인 을사 정월의 대화재 때에 책임 추궁을 당하여 그의 상관과 더불어 죽게 되었었다.

임태룡의 나이 서른다섯에 그러한 중죄인이 되어 서울로 압송도중에 호송병을 때려눕히고

달아나 도적떼이 들어가게 되었다. 임태룡은 훈련원에서 싶팔반 무예를 정식으로 조련하던

무장이었으므로 그 재주가 뛰어났으나, 출신이 겨우 양인에 지나지 않아 크게 쓰이지를 못

했던 것이다. 임태룡은 그의 조카인 노가와 감동이에게 제독검이며 본국검이며 왜검이며 등

등의 검술을 가르쳐주었었다. 그가 지나해에 사냥을 갔다가 시름시름 앓더니 세상을 떠났고,

동선령목에 진군의 검색이 심해지게 되어 그들은 의논 끝에 자비령을 뜨기로 결정을 보았엇

. 결국 노가와 감동이가 떠나기를 원하는 자들을 추려 구월산으로 옮겨왔고 자비령에는

소두령을 하던 자가 십여 명의 졸개들과 남았다. 나머지는 임두령이 죽자 뿔뿔이 흩어져 갔

던 것이었다. 그것은 노가의 성정이 잔인하고 도량이 협소함을 알고 그의 수하에 있기를 졸

개들이 싫어했던 까닭이었다. 감동이는 그의 전력을 낱낱이 얘기하고 나서, "내가 비록 하

찮은 도적이라 하나 은덕을 입은 분의 조카 되는 사라믕ㄹ 베어버렸으니, 한편으로는 의

리마저 잃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박대근이가 말했다.

' "마두령은 하나는 알구, 둘은 모르네. 작은 의리는 베이고, 큰의리를 세워 의적의 실행

을 하면 은덕을 준 임태룡이에게도 올바른 보은이 되는 셈일세." "정말 그렇 수만 있다면

야 오죽 좋겠습니까만..... 요즘은 관군의 토포가 민활하여 세력을 펴기가 힘들 것 같습니

."

"세력이 커진다는 것은 다름이 아닐세. 옹색한 대로 견디면서 민심을 얻어야 하네." 길산

이가 주엋ㄴ에 솟아오른 반달을 보면서 말했다.

"제법 쉬었으니, 달이 지기 전에 어저 길이나 갑시다." "식구들이 모두 곤하여 길가기를

싫어하우."

부두령 오만석이가 제의하였으나, 마감동은 길을 떠나자면서 말했다.

"만일에우리가 이 부근에서 노숙하게 되면 대낮에 실토봉을 넘어야 하네. 그런데 얼마 전

에 우리가 그 연봉인 부처고개에서 장꾼들을 습격했으니, 틀림없이 관군이 수색중일 걸세.

구월산 투구봉까지만 가도 안심이 될 테니 어서 가지." 그들은 몸을 꾸부리고 풀위에 널브

러져 잠든 자들을 깨웠다. 갑송이도 길산이 옆에 벌렁 드러누워 코를 거세게 골면서 잠들

어 있었다. 길산이가 흔들어 깨우니 갑송이는 투덜대면서 일어났다.

"도적놈들과 동무를 삼으니, 꼭 부엉이 모양 밤길만 가게 되는구나." "도적놈 소리 이제

그만 좀 하지."

"아따 그럼 도적놈들보고 도사님이라 부를까"

그들이 밤길을 재촉하여 실토봉을 돌아 투구봉 기슭을 오르는데, 먼 평원에 여러 개의 화

톳불이 내려다보였다. 감동이가 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 보우. 틀림없이 토포군이 번을 서는 꼴이우. 낮에 지나다간 봉패할 뻔했군." 그들

이 아사봉 아래의 된목이골에 당도한 것은 거의 오경이 넘었을 시각이었다. 찌를 듯한 암

벽의 사이를 굽이굽이 돌아나가니 한눈에 탁 트인 분지가 나타났다. 통트는 새벽빛에 물든

풍켱이 자못 신선의 계에 들어선 듯하였다. 거의 반나마가 초원이고 찌를 듯한 아름드리 나

무숲이 자라난 가운데 세 채의 기다란 초가가 보였다. 망을 보는 자가 양쪽 바위 위위 막에

서 꽹과리를 치자, 초가에서 칠팔 인이 일시에 뛰어나왔다. 그들은 낯선 사람들과 함께 감

동이가 두령이 되어 돌아온 것에 놀라는 듯했으나 저희끼리 말이 돌았는지 곧 정중해졌

. 그들은 각기 방을 나누어 오후 늦게까지 늘어지게 잤다. 그리고는 그날 밤이 새도록 술

판이 벌어졌다. 박대근이, 길산이, 갑송이와 감동이, 만석이가 차례로 앉았고 다른 멍석 위에

졸개들이 상을 받고 앉았다.

"전에 우리 마을에서도 어떤 사람이 살인하고 화적당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 다

른 패거리가 있다는 소문은 못 들었나?"

길산이가 감동이에게 물었다.

"이 부근에 서너 명씩 짝을 이루어 살던 자들이 있었으나 모두 노가 에게 잡혀 더덕골에

데려다 죽이고 화장을 시켜버렸수. 혹시 그들 중에 끼여 죽임을 당했는지두 모르오만.....

정사 쪽에 가끔 많은 무리들이 모이곤 하는데, 거사패라구 합디다. 계집들두 많은 모양이우.

그리구 은율 쪽으로 한 패거리가 더 있는 것 같고, 헌데 월정사 쪽에는 우리에게 득이 되는

바가 많아서 서로 참견을 않구 지내지요."

", 월정사에 사당들이 모이는 것은 우리두 알구 있네." "그 절에 매우 도가 높은 스님

이 있다구 그럽디다."

"허긴 스님들은 우리네처럼 천한 놈들을 늘 감싸주니까." "앞으루는 우리 산채에서두 공

양을 드릴 작정이우."

"좋은 생각이네."

박대근이도 말했다. 갑송이가 술을 동이째로 한숨에 들이켜고 나서 투덜댔다.

"이건 뭐야. 모처럼 술맛이 나는데 앉아서 고리타분한 얘기나 지껄일 거냐. 노래두 부르구

한바탕 흐드러지게 놀자꾸나."

"그러지, 산을 내려가기 전에 일출 구경두 하구."

흥이 오르자 그들은 춤도 추고 재주 자랑도 벌였다. 갑송이의 힘자랑도 나왔고만석이의

창술, 박대근의 일도단마로써 나무를 베는 검술, 그리고 길산이는 양손에 단검을 쥐고 황창

무를 추었다.

이튿날 그들이 헤어지게 될 때에는 감동이는 특히 갑송이와 길산이에 정이 들어 눈물을

보이며 섭섭해 했다. 된목이골을 나설 때에 바람이 송림을 헤치는 소리가 주위에 가득 차

있었다. 길산은 말했다.

"우리가 출행 나갔다가 겨울 동안에는 줄곧 재인 말에 머무는데, 그 때 와서 사냥질이라

두 하세. 아우두 놀러오구."

"내 꼭 재인말루 성님들 보러 내려가리다.

길산이네 광대들과 박대근이의 상단은 안악장을 벌이고 나서 월당강의 지진나루에서 헤어

지게 되었다. 큰돌이가 이끄는 광대패는 안악서 먼저 재인말로 돌아가고 길산이, 갑송이는

박대근이와 밤새껀 여러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나루터에서 배에 오르기 전에 박대근이 말

했다.

"이번 장삿길은 무엇보다도 아우들을 여럿 갖게 되어 내 틀림없이 큰 부가옹이 될 성 싶

. 아마도 예상보다는 빨리 이 박대근이의 상단이 생길 거요. 송도 가서 꼭 광대 물주 한

번 되어보우. 지방 장시를 모조리 쓸어버립시다."

"글쎄요, 우리네는 그러고 싶지만, 어디 노인네들이 허락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대

장부사는 일이란 게 ..... 날마다 제 처지에만 매달려서야 되갰습니까." 길산이가 말하자 갑

송이도 껄걸 웃으면서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거참 통쾌한 말이로구나. 사나이가 인정하구 의리를 빼면, 귀 빼구 쫒 뺀 당나귀 아니라

."

"그냥 헤어지려니 목이 말라 안되겠구.s"

박대근이 못내 아쉽다는 듯 뒷전에 섰던 차인 행수를 불렀다.

"여게 거 술 좀 가져오게. 이별주가 없을 수 있나."

그들은 강변 자갈 위에 털퍼덕 주저앉아 화주 한 병을 털어 붓기 시작했다. 박대근이가

허공을 한참이나 올려다보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아우님들, 내 예말 하나 하구 가리다."

"옛말, 조오치."

"일찍이 한양 땅에는 일 않고 놀고 먹고 좋은 입성에 허우대만 멀끔하여 약간의 입답재조

와 계집 호리는 솜씨를 가지구서 기생년들 구둥 서방이나 하는 놈들이 무수하게 있소. 기중

에 내 아는 오입쟁이 한 녀석이 있었는데 이 자가 다방골에서 서문 밖 홍제원, 남문 밖잰배

에이르기까지 한 집 건너 두 대문 세 기방에 드나들며 기생년들 오줌을 잘잘 싸도록 만들었

거든. 하여튼 이렇게 주지육림을 헤매다가 반평생을 보냈지. 나이는 들지, 양기는 쇠락하고,

다리는 후들후들 한번 올라갔다 내려오면 눈앞에 안개가 서리고 일월성신 북두칠성이 뱅뱅

돈단 말이렸다. 한 입 건너고 두 몸 건너 소문과 내력이 파다히 알려지니 제깐 놈이 몸붙일

곳이 있나.

에라,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는데 오입쟁이의 말년에 어디 기댈 곳은커녕 맞아 죽기

나 꼭 알맞은지라, 한양을 떠나리라 작정하고서 팔도강산 유람을 나섰소.

물은 흐르는데 그름 가는 곳은 어드메뇨, 허망한 인생이로구나! 예전엔 뒤 보아주는 무뢰

배나 있었건만, 일시에 몰락하니 어느 년 하나 배꼽 맞추잔 일없고, 어느 놈 술 한잔 사는

이 없어 저자에서 따귀를 맞아 입술과 코피가 터져도 혀끝 한번 두드리지 않는구나! 간혹

글을 가다가 들밥 먹는 농부들 틈에 기웃기웃 기장밥이나, 보리밥이라도 얻어걸릴까 논두락

을 걸어가건만, 제놈이 여름철엔 시원한 데 찾아 놀고, 겨울철엔 따뜻한 데 찾아 쉬어 놀고

쉬고 일 한번 못 해본 놈이 손가락은 산수 냉천에 은어 뱃바닥같이 새하얗고. 매끄럽지.

본 농부님네들 천하지대본 장대 세워놓고 만정이 똑 떨어져 에이, 여보 양반이 들밥을 자시

다니, 그냥내쳐 길이나 가요, 한단 말이우.

이렇게 흘러 다니는 중에 혜의파립 꼴이 되고, 몰골은 폭삭 늙어, 오래된 과부 월경서답

꼴로 벽촌서 논두락을 베게 되었는데, 사람이 고생을 좀 해보니까 절이 조금씩 들어간 지라,

내 어디 가서든 남들처럼 땀흘리고 일하여 내 밥 찬아 먹으리라 작심하잖았겠소.

걷다보니 저어기 두만강 변경에 회령까지 갔것다. 성문을 지나는데 방이 붙었거늘, 명필을

구하오, 글을 써주면 오백냥을 주리다 하는 소리였지. 견물생심이요, 사람은 근본에 따르더

라고, 이 파락호가 사심이 안 들리 없었수.

찾아갔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날아갈 듯 서 있는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 세가지

가 있소그려. 산에 범이 무섭고, 미친놈 칼자루 잡은 것이 또한 무섭고, 무식한 놈 돈 가진

것은 더더욱 무섭거든. 이 부가옹 나리가 금병풍을 가졌는데 글씨 받아 치장하려고 잔뜩 기

다리다가 자칭하여 찾아든 파락호에게 버선발루 뛰어나왔것다.

허어 흠, 허어 흠, 우선 심기를 돋워야 하니 서른 날만 잔탕 놀게 해 주오. 그날부터 산해

진미에 말 타고 칼 잘 쓰는 북변기생 모두 모아다 풍악을 잡혀 연일 잔치 하니 서른 날이

마치 무릉도원의 일각이라 .

허어 흠, 허어 흠, 이번에는 붓을 골라야 하는데 수종 드는 예쁜 종년 하나 붙여두고 몸

보신 좀 하게 해주오. 서른 날 동안 양기를 길러야 하오. 서른 날이 또한 옹기장수 지겟작대

기 치듯 지나갔겄다.

흐음, 허어 흠, 이번에는 먹을 한동이 갈아둬야 하니 과수댁이나 하나 넣어두고 먹시중이

나 들게 해주오. 서른 날이 더욱 남가 일몽이라.

드디어 안달이 오른 주인 양반 의심이 부쩍 들어 재촉하고 볶아치며 핍박할제, 이제 열흘

말미를 주겠으니 그때까지 하지 않으면 관가루 넘기겠단 말이렸다.

열흘이 흉년의 뻘건 해보다 더욱 길어 ! 밤마다 엎치락 뒤치락 이 궁리 저 궁리 저 술수

생각 중에 달아날 길밖에 업어졌지. 그래 마지막 밤이 되어 옷을 주섬주섬 싸들고 발끝걸

음으로 일어서는데, 허 갈 데가 없구나, 두만강 끝에 와서 어디로 간단 말이냐. 이날 짧은

밤이 사나이의 평생이라, 눈앞에 다가섰으니 발이 떨어져야지.

까짓 거..... 쓰고 말리라. 결단하자마자 일어서서 왕붓 꼬나들고 항아리 그득한 먹을 푸욱

찍어서 병풍 끝어세 저쪽까지 한일 자를 주욱 긋고는 문지방에 발이 걸려 고꾸라지니, 섬돌

에 해골이 깨져 피가 낭자했단 말이우.

, 이 꼴이 되어 주인양반 노기 충천했으나 별도리가 있나. 오다 가다 걸리 건달놈께 병

풍 버리고 엉뚱한 송장 치우게 되었지.

헌데, 몇텬 있다가 강 건너 되 사람 중에 박물군자 하나이 지나가다 보니 남쪽으루 훤한

서기가 뻗쳤어. 서기를 따라 부가옹 나리 대문 앞에 이르렀지. 문을 두드려 사유를 말하고,

박물이 있는가 물었더니,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다가 버린 병풍이 광에 있소. 보여

주오. 그래, 데려가 광문을 여니 이 박물군자 무릎을 탁 치더란 말이우. 커 사람 한목숨 들

었고나.

그 오입쟁이 녀석, 미루고 미루다가 온 평생이 코앞에 왔은즉 물리칠 재주가 있나. 마지막

기를 몽땅쏟았으니 억만 전의 박물이 되었지. 허허 어떠우? 내 얘기가. 사내의 목숨이란 아

주 귀한 것이우."

"거참 그럴 듯한 예말이로굿."

"헤어질 때가 되니까, 더욱 흥이 나는 모양이구려. 어젯밤엔 소리한 가락 안 뽑더니만."

 

길산이는 남은 술을 병째로 들어 꿀꺽꿀꺽 마시고 나서, "두고두고 피차의 흥이 많아질

텐데 어서 강을 건너가오." "그럽시다. 우리 그러면 보름 뒤에 해주 관시놀이 때에 만나기

루 하고..... 저기 부담마를 가져가요. 표목이 조금 있소."

"우리의 게회에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아직두 해주 용당포 뱃사람들과 왕래가 있으시우?"

", 철마다 거기 들르면 우리가 풍어제를 놀아줍니다." "하면 ..... 그 어계방에서 만납시

."

상단은 봉산을 바라고 월단강을 건너갔다. 길산이네는 보수로 이백냥과 적지않은 포목을

얻어가지고 재인말에 돌아왔는데, 나이든 광대들은 이제 그들의 연회가 상인들과 밀접한 관

계를 갖게 되었음을 어느정도 이해한 것 같았다. 늙은이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길산의 아비 장충이었다.

 

4

출행 계회날은 큰잿말과 작은잿말이 온통 떠들썩 했다. 우선 큰잿말의 뒷산 등성이 빈터

에서 사냥굿을 벌일 예정이었다. 돼지도 잡고 술도 빚고 갖은 과물에 떡을 쳐서, 재인말의

아이들은 명절 때보다 더욱 행복해 보였다.

새벽에 큰잿말에서는 모두들 재수를 준비했고, 부녀자들이 작은잿망에서도 거의 올라와서

하루 종일 음식을 장만했다. 밤이되자 집집마다 종이등을 켜서 매달았다. 자정이 가까워 졌

으나 아이들도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다. 광대들은 맨 앞에 용등을 앞세우고 좌우 사방으로

관솔 횃불을 밝혀서, 청룡 황룡이 그려진 붉고 푸른 깃발을 펄럭이며 뒷산으로 올라갔다.

터에는 이미 당집 문이 열려 있었고 거기서 스무 발짝쯤 떨어진 신목에는 색색이 댕기를 가

득 달아서 새롭게 치장해놓았다. 또한 돌무더기 앞에도 촛불밝힌 작은 세상이 놓였다.

제관은 손돌 노인이었는데, 화려한 색동 더그레에다 벙거지를 쓰고 있었다. 제상이 초가의

당집앞에 차려졌다. 돼지 대가리와 각색 과물, 떡이 놓여 있었고 당에는 종이 연꽃이 두 송

이 새것으로 바뀌어졌다. 굿에 참가할 광대들이 화려한 각색 빛깔의 더그레에다 탈을 쓰고

있었으며 장충의 아내와 큰돌의 아내를 위시한 무녀 여섯이 홍철릭 차림에 벙거지 비껴쓰고

신칼, 부채, 놋쇄방울 등을 각기 들고 있었다.

제관을 앞세우고 풍물을 잡히면서 마을의 구석구석에 축수를 하며 돌아다니는 데서부터

굿이 시작되었다. 워낙 광대들의 마을인지라 남녀노소 없이 모두들 풍물에 맞춰 고개짓 어

깨짓하며 풍물의 뒤를 길게 줄을 이루어 쫒아다녔다. 이글거리는 관솔 횃불빛에 들어난 원

색의 옷자락과 탈이 제 모습을 찾아 선명하게 어둠속에서 떠올랐다.

북과 장고는 떵 더쿵 꿍떡하며 풍물을 이끌었고, 가끔씩 징소리가 장중한 여운으로 흥겨

운 놀이 기분을 엄숙한 의식의 분위기로 감싸는 것이었다. 대금과 날라리 소리가 불꽃의 바

깥에 너울대는 뾰족한 불의 혀끝같이 날름대면서 별이 쏟아질 듯한 하늘위로 날아 올라갔

. 그들은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일일이 축수하고 나서 다시 뒷산 당터 앞으로 올라갔다.

당터의 사방에 어른 키만한 모닥불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징소리가 울리고 제관인 손

돌 노인이 당에 들어가 산신님, 서낭님, 창부님께 각각 술울 올이고 세번 절하고 나서 축문

을 잀었다. 그것을 불살라 허공위에 살풋이 놓아 보낸 다음에 무악이 흥겹게 흐트러지며 당

굿의 신내림 춤이 시작되었다. 당주 무녀인 당충의 아내가 부채와 방울을 흔들어대며 뛰어

나왔다. 부채를 떨고 방울을 요란하게 흔들며 온 몸을 솟구쳐 마당을 빙빙 돌아 나서다가,

펄쩍 뛰어서는 그 자리에서 널을 뛰듯 겅정거리다가 다시 원무를 했다. 춤의 사위가 바뀌며

고조될수록 무악이 빨라지고 동작은 거칠고 강렬하게 계속되다가 온몸을 뻗쳐 부들부들 떨

다가 드디어 입신하면서 뒤로 뻗뻗이 넘어졌다. 넘어져서도 사지를 버둥대며 이리저리로 꿈

틀거리는데 마치 악형을 당하는 지옥의 악귀처럼, 또는 생의 괴로움을 몸으로 재현하는 듯

그 괴로움은 또한 황홀한 듯이 무녀의 동작위에 가득찼다.

"아아르르르르....."

하는 황홀경의 신음 소리와 함께 무녀가 벌떡 일어서서 전신을 떨다가 다시 넘어졌다. 이제

는 사뭇 땅에 온몸을 붙이고 몸부림치면서 땅을 긁고 기어갔다.입에는 거품이 가득 차 있고,

눈빛은 이미 지상에서 떠나 명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기어가고 있는 동작은 버림받은 사

랑을 찾아, 필사적으로 추적하는 한의 춤인 것 같았다. 너는 나를 버릴지라도 끝내 쫒아가

안기고 말리라. 나를 짓밟아도 , 나를 찢어도, 나를 병들게 해도, 나를 때려도, 나를 싫어해

, 내게서 모든것을 빼았아도, 내게 욕을해도, 침을 밷어도, 그리고는 끝내 나를 죽인다 해

...... 기어가는 동작의 끝에서 무녀가 다시 일어섰다.

어어어헉! 허헉, 아르르르르.”

또 쓰러진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꼼작없이 업드려 있다가 드디어 환희의 신생이 되면서

되살아났다. 춤이 경쾌하고 힘차게 계속되다다, 땀투성이와 흙범벅인 얼굴로 새된 목소리가

낮고 굵게 흘러나왔다. 부정거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앉아서 본 부정 서서 들은 부정 누 들은 부정에 귀들은 부정이오. 손으로 만진 부정 입

으로 옮긴 부정머리끝에두 백나비 센나비 부정이오. 머리 풀어서 발상두 부정이며, 은하수

곡성두 부정이오. 산에 올라서 산 머구리, 들에 내려서 땅 머구리, 네 발 가진 짐승에 살생

두 부정이오. 재인말에 벌로 품은 처사로서 수많은 인간이 넘나들 제 따라들은 부정에 묻어

든 영정이오. 마루 넘어오던 부정, 재 넘어오던 부정,신실히 적적이 물리쳐줍소사. 시위를 하

소사. 부리 영산은 산에 영산. 산에 올라서 낙락장송은 늘어진 가지에 목을 매서두 자결 영

산이오. 들루 내려서 만경창파에 둥실 빠져 수살 영산이며, 낳구 가고 배고 가시구, 서상 사

발에 손에 들고 허튼 머리를 빗어 끼고, 청치마 옆에 끼고, 거적자리를 옆에 끼고, 가위 실

패를 허리춤에 넣고서, 울고 가던 하탈 영산, 거리거리에 객사 영산, 총포 밎고 칼마조고 가

던 영산, 불에 타서도 화덕 진군에 가던 영ㅇ산이며, 부스럼 뜨결에 가던 영산이요. 폐병에

가던 영산, 냉병에 가던 영산, 주마창에 가던 영산, 오늘 많이 먹고 걸게 먹고 옘병 속병에

가던 영산, 모늘 다 이 정성 들인 끝에 이터전에 원주 영산, 집주로 있던 영산, 많이 먹고

이러니 탈이 없고 저러니 탈이 없이, 오늘은 그저 고픈 배 불리고 마른 목 적셔 가고, 진거

는 먹고 가고 마른 거는 싸서 질빵 걸어 지구 가구, 여영산은 똬리 받쳐 이구 가구, 동자 영

산은 오질 앞에 싸가지고, 인정 받고 노자 받아 좋은 데로 천도를 허소이다.”

무녀는 부정거리로 당에 내려올 신의 길을 깨끗이 씻어내리는 동작으로 사방에 술과 음식

을 조금씩 뿌려주어 잡귀를 배웅했다. 이어서 방울을 처들어 예리하게 떨어대며 허공에서

땅을 향하며 신을 받아 내리는 동작이 시작되었다. 공수가 내리는 기미를 보였다. 공수란 신

이 무녀의 몸에 완전히 깃드는 망아 입신지경에 귀신의 말을 하게 되는 상태이다. 무녀는

양손에 백지를 갈라서 쥐고 북편 어둠속에다 절을 계속했다. 저 구월산 삼성봉에 계신 태고

조 단군께 영험을 기원하는 것이다. 무녀가 가망 청배 첫구절인 초가망, 이가망, 삼가망을

선소리로 매기자 잽이의 굿거리장단이 나온다.

장충이 북을 두드리고 있고 그 여자의 신딸인 봉순이가 무동이 복색을 곱게입고 앉아 장

고를 때리고 있었다. 가망머리와 말명거리가 끝나고 이어서 보순이가 찬란한 색동옷에다 남

빛 철릭을 받쳐 입고서, 머리에는 붉은 말뚝 갓을 쓰고, 두손에 삼지창과 언월도를 각각 들

어 휘두르며 경쾌하게 마당으로 뛰쳐들어왔다. 송도 덕물산 산신 최영장군을 모셔들이는 것

이다. 참관하는 이들은 돼지비계를 성계육으로 하여 질근질근 씹어 삼켰다. 네 이 용렬하고

비열하게 권세를 도적질한 자여, 충신을 배반하고 간교히 입국한 자여, 헌 것보다 새 것이

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새 것이 새롭지 않으므로 인해서이다. 물이 흐르기를 바꾸어 거스르

지 않기 때문이다. 씹혀라, 씹혀져라.

안산은 여덟에 밖산은 열세 위라. 일곱지 명산에 제불지 제천이다. 신덕물 후 덕물에 송

악은 상지 어마 장군에 백마신령 아니시라. 대소마 대장군님, 나라 충신에 임장군님, 덕물산

에 최영장군님 아니시랴. 제주 한라산에 여장군님 아니시리, 황해도 평산에 신장군님 아니시

, 검은 땅에 헌 백석 마누라백섯 아니시랴.”

이글대며 타오르는 불꽃 너머로 창칼 부딪는 소리가 날카롭고 무동 복색의 봉순이의 날렵

하고 맵시있는 두발이 끊임없이 마당을 돌고 있었다. 상산 노랫가락이 낙랑하게 울리고 나

서 봉순이는 끝으로 무동춤을 질펀하게 추고 들어 갔으며 다른 무녀가 거리를 받아 별상거

, 대감거리, 제석거리를 연이어 풀어나갔다. 다음 처녀귀신의 호구거리와 군웅거리가 봉순

이 비슷한 차림의 처녀무에 의해서 엮어졌다. 밤은 이미 깊어 새벽의 찬 이슬이 내려 덮이

건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거리를 뜨지 않고 함께 신 들린 듯 빌고 또 빌었다. 드디어 그

들 관대의 귀신인 창부거리가 시작되었다. 광대의 귀신은 한편 청계씨라고도 하는데, 이때에

무당의 선소리와 함께 귀면을 쓴 탈광대 셋이 뛰쳐나와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돌아갔다.

삼이 하늘에서 내려온 날개처럼 불빛속에 어른어른 날아다녔고, 탈은 모닥불 가까이에서 갑

자기 나타났다가 다시 어둠 가운데 잦아들곤 하는 것이었다. 무녀는 언월도와 삼지창으로

그들을 찌르려고 달려들었다.

무녀가 탈광대들을 찌르려고 다가서면 광대들은 뒤로 물러섰다가소맷자락으로 무녀를 때

리며 껑충 뛰었다. 무녀는 그들을 마당구석으로 몰아냈다가 맵시있는 뒷걸음으로 끌어올려

얼싸안을 뜻 했다가는 다시 그들을 버리고 원무로 마당을 빙글빙글 돌아갔다. 탕광대들도

모닥불을 훌쩍훌쩍 건너뛰며 경쾌하게 앉았다가 솟구쳐 번갈아 다리를 바꾸면서 맴을 돌았

. 무녀가 소리를 매기는데 탈광대들은 온몸을 흔들어 광대의 정령답게 미친듯한 난무로

마당을 가득히 채우기 시작했다.

어허 창부 만신 몸주대신 창부 안산 광대, 밖산 청계, 부리 창부, 신에 창부, 적성 창부,

일년허고도 열두달에 횡수 창부, 놀고 나서 신사덕에 구관덕을 입혀주고 놀고 나오.

어어어 꿋자, 창부씨, 광대씨 돌아왔소. 황해도 봉산 광대, 우리가 모두 일년 홍수 창부,

대주에 몸주 창부 기주에 직성 창부, 일년 열두달에 홍수 창부가 만사망 셈겨주고 떼사망

셈겨주고, 일년 홍구 막아주거들랑, 우리 광대씨 청계씨가 놀구 나오.

어어허! 우리가 만사망 은산에 은을 뜨고 재물산에 재물 뜨고 철양산에 철양떠서 만사망

셈겨줌세, 어어얼씨구나 저절씨구.“

탈박과 부녀의 어우러진 춤이 아까처럼 다시 전투의 형세로 바뀌었다.

에익!”

···에에!”

소매로 치고 창칼을 뿌리치고, 다시 흩어지며 무녀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창부의 넋이 씌

운 세 사람의 관대는 곤두박질치며 차례로 빠져나가고 무악이 가라앉으면서 탈관대 하나만

남았다. 남은 광대는 신명의 극치로 황홀경에 정신을 잃고 뒤로 번듯이 쓰러졌다. 쓰러진 광

대를 이리저리로 쓰다듬으며 무녀의 넋두리가 계속 되었다.

어떤 광대가 올라왔다. 황해도허구두 구월산 광대, 해주 송도로 한양 경성을 올라올 제,

놈틀 밭틍을 건너올 제, 돌두 굴러서 구렁 메우고 마무두 꺽어 다리를 놓고 한양 성내를 올

라왔네.

얼씨구 좋다. 절씨구나, 아니나 노지는 못하리라. 이렇게 좋은거는 처음 보것다. 세월아 네

월아 오고가지를 말아라. 장난에 호걸이 늙어나 간다. 인생 한번 늙어지면 다시나 젊지는 못

하리라. 이 때나 안놀구 언제 노나. 백설 같은 흰나비는 부모님 양친을 여의었는지, 수단장

을 곱게하고 장다리 밭으로 날아들고, 얼쑹덜쑹 호랑나비는 금잔디로만 날아든다. 황금 같은

꾀꼬리는 황의 금갑을 떨쳐 입고 양위 청산을 반겨든다. 얼씨구 좋다, 절씨구나. 앞내 버들

은 초록장이요, 뒷내 버들은 누룩장. 얼씨구 좋다, 절씨구나. 흐르느니 물결이오 솟치느니 고

기로다. 뒤는니 족족은 잉어로다. 굵은 고기는 솎아치구, 잔고기는 나우 칠 제, 얼씨구 좋다,

절씨구나.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사람이 늙기엔 바람결 같고 인간의 세월은 흐르는 물인데

아니 놀구는 언제 오나.“

무녀의 창부거리는 청계귀를 몸에 받아들이는 공수와 창부타령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살 물림 치레를 바치고서 무녀가 혼절한 광대를 끌어안아 올렸다. 무녀와 광대는 일시에 한

몸이 되어 지금 막 천상을 향해 떠날듯이 살풋 발꿈치를 들어올리며 일어섰다.

 

어어허... 꿋자. 창부씨스구씨가 일년 열두달에 횡액을 막아다가 어주월강에 소명하고 우

리 재인말 총총히 신사덕을 입히시고 그저 상덕 물어 도와줍시다.”

무녀가 언월도와 삼지창을 챙겅챙겅 맞부딪치며 넓은 홍철릭 자락과 색동 옷소매를 나부

끼며 원무를 하는 둘레로 깨어 일어난 탈광대가 힘차게 맴을 돌았다.

탈광대는 창부의 넋에 합쳤다가, 새로운 힘을 옮겨받고 드디어 정결한 넋으로 되살아난

것이었다. 무녀가 조밥을 한 움큼씩 주ㅣ어다가 관대의 몸에 던졌다. 무녀는 들어가고 혼자

남은 탈광대가 좌우로 팔을 휘저으며 경쾌하게 마당을 돌았다.

탈을 쓴 길산은 폭포수를 거스러오르는 물고기처럼 어깨와 허리를 뒤틀면서 허공에 솟구

쳤다가 주저앉을 듯 땅에 구부리기도 했다. 머리를 땅에 처밖고 다리를 학의 걸음처럼 옴찟

옴찟 뛰기도 하고, 다리를 들어 행가래를 치면서 뒷걸음질치다가는 다시 솟구쳐올라 환희의

도약을 하였다. 꽹가리와 북과 징소리가 차차 빨라지면서 그의 원무는 거칠어졌다. 살과 근

육들이 뒤틀리고 헤처진 앞섶은 땀에젖어 가슴이 번들거리는데, 길산은 피가 손가락 끝에서

온 몸으로 재빨리 흘러 불두덩께에 가서 꽉 차는 것만 같았다. 그가 모닥불을 뛰어넘고 곤

두박질로 훌쩍 공중을 날아 군중사이로 처박히면서 무악이 딱 그쳤다. 길산이는 땀으로 흠

뻑 젖어버린 바무 탈박을 벗고 헐떡이면서 잠시 앉아 았었다.

목 축이세요.”

희고 긴 손에 잡은 표주박이 그의 얼굴앞에 내밀어져 있었다.

그는 막걸리를 주욱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 올려다 보았다. 묘옥이 치마 앞자락을 싸쥐고

서 있었다. 질산이는 땀에 범벅이 된 얼굴을 처들고 싱긋 웃었다.

잘 먹었수.”

모옥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웃움기가 머물다가 사라졌다. 그 여자의 볼에는 모닥불의

남은 빛이 어른어른 비치고 있었다.

한 잔 더 드릴까요?”

더 주오. 목이 되우 마른 걸.”

모옥은 표주박에 찰찰 넘는 막걸리와 비계 몇 점을 손바닥에 가지고 왔다. 길산은 두 다

리를 주욱 펴고 벌렁 자빠진 옆에 묘옥은 쭈구리고 앉았다. 표주박을 건네주며 그 여자는

자기의 손을 폈다.

안주두 몇점 드셔요.”

길산은 이번에는 단숨에 들이키지 않고 한모금씩 쉬었다. 그는 묘옥의 손바닥에서 비계

한 점을 집었다. 묘옥은 자기도 한 점 집어 씹으면서 말했다.

굿이 이렇게 장한 것은 난생 처음 봤어요.”

경비 때문에 떡은 커녕 술도 못 담그고 맨숭맨숭하게 굿을 지내다가 이번 철에는 장사

치들 덕으루 크게 벌이게 된 것이지.”

다 끝났어요?”

아니 아직 뒷전거리가 남았어. 그 다음엔 무갑놀이를 서야지. 그때엔 거기두 신명내서

놀아보우.”

아이, 보기만 해두 신명이 나는 걸요.”

, 술맛 좋네!”

길산은 다시 안주를 집었다.

술 더 드시구파요?”

밤새 껏 마실텐데 뭘, 거기도 좀 드오.”

아냐요, 제가... 드릴려구 약주 한 동이 걸러서 감춰놓았어요. 신목 뒤에 안주랑 차려서

놓을 테니 와서 드셔요.”

길산은 눈을 곱게 깔며 딴청하고는 낮게 속삭이는 묘옥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얼결에 안주

집던 짓으로 묘옥의 손가락을 더듬었다. 손가락들이 파르르 경련하더니 그의 손 아래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묘옥은 사내들의 술시중을 드는 아낙네들 틈으로 바삐 숨어버렸다. 길산은

잠깐 자기의 두툼한 손을 펴고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뒷전거리가 시작되는데 북두칠성은 벌써 서편으로 기울고 산 주위에 밤이슬이 촉

촉하게 내려 덮이고 있었다.

장충의 북 메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되었고 그의 처의 뒷전 수공도 차분하게 엮여져 나

왔다.

어어... 꿋자. 부리 걸립에 신에 걸립이다. 여걸립 남걸립 아니시리. 에에... 성주 걸립에

직서 걸립에 홍수 걸립이라. 오늘 모두 신사덕 입혀 도와주고 걸립에게 놀고 나서 상덕 입

혀 도와주마. 어어... 꿋자. 여터주에 남터주라, 두령 터주에 처녀 터주 아니시리.

여터주는 여디리구, 남터주는 남디릴 적에 동에 사망 셈기시구 서에 사망 셈기시구, 동서는

사방에 재수 후여 들여먹구 남구 쓰구 남도 도와서 셈겨주자.

어어... 꿋자. 여사당에 남사당이라. 물위에 서낭에 물아래 서낭이라. 오냐, 해묵은 서낭에

달 묵운 서낭, 청색 무색에 따라 든 서낭, 홍두깨는 통비단이여, 물 아는 채단에 따라 든 서

낭 아니시리. 이번에 몸수에두 꺼린 서낭, 재수에두 범한 서낭, 문전에서 찾던 서낭, 다 제쳐

도와주고 상덕입혀 도와주시마.“

부채를 탁접고 나서 방울 든 손과 합장하여 사방에 재배 올리고서 무녀가 외쳤다.

자아, 무감 나서라. 얼씨구씨구...”

몰려 섰던 재인말의 광대들과 아낙네에 아이들까지 당터 마당 가운데로 뛰쳐나갔다. 마을

사람들의 군무가 불빛에 뒤섞여 타오르는 들불같이 땅에 가득히 번졌다. 손과 어깨와 다리

가 모두 불꽃이 되어 너울거렸고 음률은 끈처럼 그들의 사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군무

는 제각기 모양은 다르되 불길이 그런 것처럼, 합쳐지자 땅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힘의 덩

어리 인듯 했다. 이 덩어리는 땅이 그 자체에서 아름답게 피워 올린 이삭의 무리처럼 땅에

다 뿌리를 대고 있는 생명력이었다. 아까까지도 그렇게 지상에서 솟구치려던 굿춤이 어느결

에 땅에 붙어 돌아가고, 그땅을 전신으로 받아들이는 춤이 되어 있었다. 그 들의 두발은 탄

탄하게 땅을 딛고 서서 차고 비비고 끌어나갔다.

어어 얼쑤 절쑤!”

갠지개 잰지재, 갠지개...”

으따, 으따, 에헤, 에요.”

길산은 중앙에서 빠져나와 한차례 바깥을 돌다가 어깨짓을 하며 팔을 엇갈려 휘날리고 다

가오는 묘옥과 마주쳤다. 묘옥은 발끝을 치마 아래로 살풋이 들고 돌아 나갔고 길산은 그

뒤를 쫒다가 옆으로 돌아 다시 마주 섰다. 묘옥은 이마에 몇가닥 늘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올리며 환히 웃었다. 그들의 마주선 너깨춤 동작이 잠간 계속되다가 길산이 앞서서 둘

레를 돌아 나가자, 묘옥은 몸을 빙글 돌리면서 길산의 발치께를 사뿐사뿐 따라갔다.

길산이 돌아섰다. 다시 묘옥과 마주서서 동작을 주고 받았다. 그들 가운데로 무수한 사람

들이 엇갈려 지나 갔지만 동작의 교차는 그들만이 은밀하게 감지하는 갓 같았다. 갑송이의

커다란 몸집이 그들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며 껄껄대었다. 이번에는 묘옥이 돌아서서 반대쪽

으로 추어 나갔고 길산은 그 주위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이리저리로 돌아 나갔다. 괘앵...

는 징소리가 날적마다 묘옥이 빙글 돌았다. 묘옥은 차차 마당가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춤추

는 사람들 틈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자 어깨짓으로 걸어나오는 길산을 바라보며, 소매를 들어

이마의 땀을 씻었다. 묘옥이 뒷걸음 치면서 길산이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목마르지요? 저쪽으로 가셔요.”

그 여자는 총총걸음으로 앞서서 걸어갔다. 모닥불에서 벗어나자 주위가 갑자기 캄캄해진

듯했다. 묘옥은 길산의 발짝 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면서 발을 재게 놀려 신목 아래로 걸었다.

묘옥은 자기의 가슴이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누가 듣지나 않을까 부끄러워졌다. 묘옥은 귀

와 볼이 뜨거워져 있었고 술 몇잔을 마신뒤에 불더미 곁을 춤추며 돌아서인지 다리가 휘청

거렸고 어지러웠다. 그러나 그 어지러움은 꿈에 구름 사이를 날아가던 때처럼 몽롱한 느낌

이었다. 신목의 짙은 그늘 아래로 들어오자, 풍악 소리는 한층 멀어졌고 먼 곳에서 울고 있

는 부엉이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고즈넉했다. 신목은 어른 팔로 세아름이나 되는 거구였는

데 앙증맞게 오색 댕기를 달고 있었다. 회나무에서 떨어진 마른 잎들이 버석이는 소리를 냈

. 뒤에는 짙은 잔솔밭이었다.

여기예요!”

어휴, 어두워.”

묘옥이 여인답게 손을 내밀어 길산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개다리 소반위에 제상에서 가

져온 여러 가지 안주와 술동이가 있었다. 길산이 쭈구리고서 술울 퍼서 한 잔을 걸치자 묘

옥이 말했다.

편히 앉아서 드세요. 체하시겠어요.”

길산은 낙엽위에 털썩 앉고 말하였다.

이거 좌우간 입으로는 들어가 주는구만.”

춤 신명은 누구 따라갈 사람 없겠어요.”

거기두 참 맵시있게 추던걸.”

길산은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사레 들려서 기침을 요란하게 터트리자 묘옥이 그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말했다.

아이 좀 참으셔요. 누가 듣구 이리로 쫒아오겠어요.”

오면 나눠먹지 뭘...”

그걸 빼돌리느라고 얼마나 혼났는데... 제상 아래로 치마폭을 거머쥐구 한참이나 오르내

렸어요.”

손돌 어른은 어디 가셨수?”

첫거리 보시고 일찍 들어가 주무셔요. 노인넨 밤공기가 나쁘잖아요.”

커어, 정말 술 맛이 좋군.”

저봐요, 누가 이리루 와요.”

누군가가 아낙네와 함께 신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빨리 저쪽으로 숨어요.”

오면 어때. 어흠.”

아이 참, 눈에띄면 손가락질 받는데두요. 맛있는거 빼돌렸다구 욕해요.”

다가오는 사람들도 아마 여자가 음식을 감추어 제 서방을 먹이려는 모양이었다. 다급했던

지 묘옥이 길산의 손을 잡아끌었다.

상 들고 오셔요.”

길산은 묘옥의 뒤를 따라 신목뒤의 잔솔밭으로 들어섰다. 머리가 밖으로 나오기 때문에

허리를 굽혀야만 했다. 솔잎에 매달렸던 찬 이슬이 어깨위로 쏟아져 내려왔다.

이쪽으로 오셔요.”

달이 이미 서산에 기울어 숲속은 캄캄했다. 그들은 마른 잎사귀와 풀이 푹신하게 깔린 작

은 소나무 아래 앉았다. 거기서는 굿터의 소음이 아득하게 들려왔고 그쳤던 벌레 소리가 잠

시 후에는 더욱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묘옥은 두 다리를 세워 무릎앞에 두 손을 깍지

끼워서 앉아 있었으며, 길산이는 남은 술과 안주를 부지런히 먹어치웠다. 그를 지켜보던 묘

옥이 말했다.

언제 출행 나가셔요?”

오늘 하루는 푹쉬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날거요.”

가시면 오래 걸리나요?”

별일 없으면 한 두어 달... ...서리내릴 때쯤엔 오게 될거요.”

그렇게 오래요...?”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겨울에 양식 걱정없이 지내지.”

묘옥은 턱을 구부린 무릎위에 얹고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가 ,

저는 겨울을 나구... 재인말을 떠날 작정이예요.”

... 이 마을이 싫우?”

묘옥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무릎에 묻어버렸다.

아니예요, 여기서 아주 오래 살구 싶어요. 하지만 저는 꼭 해야 될 일이 있거든요.”

무슨일이요?”

누굴 찾아야 해요. 그 일만 끝나면 저는 이런 세상에 살구 싶지가 않아요. 산에 깊숙이

들어가 약초나 캐며 혼자 살래요.”

아마 갑갑한 모양이군. 대처에서 누구 정분난 사람이 있었던 게요?”

정말 그런게 아니예요. 어릴적에 집을 나오면서부터 결심한 일이였어요.”

그 사연은 차차 듣기로 합시다.”

, 그래요.”

묘옥은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길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길산은 표주박을 동이

에 넣었다가 바닥이 완전히 들어난 것을 알았다.

, 어느틈에 술을 다 마셨군.”

더 드시게요?”

아니... 무척 많이 마셨소. 속이 제법 후끈거리는데.”

속이 불편하진 않으셔요?”

괜찮소.”

많이 돌아다니셨으니 잘 아실 거예요.”

무얼 말이요?”

어디나 사람들의 집이 있고 놈밭이 있고... 그리고 부부의 인연이 있고, 예쁜 아가들이

있지요. 어디서나 제 고장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떠돌아다니노라면 인생살이를 가

볍게 알게 되지요. 몸은 흘러다녀두 마음만은 꼭 붙잡아둘 일을 항상 생각해야 했어요.”

우리네는 마음을 붙잡아둘 필요가 없소. 까짓, 우리의 세상두 아니니까. 그냥 한바탕 놀

려대고 떠나면 어느 고장이든 쉽게 잊어버리구 맙디다.”

우리 세상이 아니라구요?”

그렇지. 우리네 같은 천한 놈들의 세상이 아니요.”

묘옥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갑자기 지난 세월의 설움이 몬견디게 터져서, 역성을 들어

줄 사람을 만난 어린아이처럼 묘옥은 소리없이 물었다. 그때에, 그 여자는 어둠속에 서 있던

장승 같은 몇사람의 사내를 생각했다.

길산이 어둠속에서 더듬어 묘옥의 얼굴을 만졌다. 묘옥은 허겁지겁 길산의 우악스런 손을

맞잡아 얼굴을 부볐다.

길산이 묘옥의 작은 어깨를 끌어안으니 그 여자는 사내의 가슴팍을 파고들며 울음을 죽였

.

저는 세상에서 제일 천하구 더러운 계집이에요.”

길산은 묘옥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엔 수심도 많네... 더욱 영롱해진 새벽별들이 먼 마을의 들창인 듯 가물대고 있

었다.

꼭 않아주세요.”

묘옥이 두손을 모아 길산의 가슴에 붙여 기대면서 말했다. 그는 여자를 감싸듯 껴안았다.

먼 곳에서 울던 부엉이 소리가 끊겼다. 이어지면서 차차 가까이 들리더니 그들이 숨은 솔밭

에 날아와 오랫동안 울었다. 묘옥은 실신하듯 길산의 어깨에서 미끄러지듯이 한팔로 길산의

목을 감은 채로 젖은 풀 위에 비스듬이 누웠다. 길산이 묘옥과 함께 나란히 눕는데 묘옥은

그의 저고리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쓰다듬었고, 길산은 묘옥의 무명치마를 젖혀 올렸다.

길산이 묘옥의 속치마를 끌어내리는데 그 여자는 이마를 그의 가슴에 꼭 붙인 채로 몸을

이리 곰실 저리 곰실 뒤틀었다. 묘옥은 속바지가 끌어내려가자 속곳만 남아 두 다리의 맨살

이 드러났는데 묘옥은 길산의 목을 조여 안은채 눈을 감고 있었다. 길산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묘옥의 옷고름을 이리 당기고 저리 푸는데 묘옥이 그의 목에 휘감았던 팔을

풀고 손을 내려 길산의 바지끈을 끌렀다. 묘옥의 저고리 자락이 활짝 젖혀졌다. 두 살이 닿

자마자 부끄러움은 어느결에 멀어지고 이제 묘옥의 손놀림이 대담해지고 익숙해지기 시작하

여 길산의 저고리를 젖히고 온몸으로 맞부볐다.

만첩 청산 늙은 범이 살찐 암캐를 물어다 놓고 이가 없어 먹지는 못하고 흐르름흐르름 아

웅 어루는 듯, 북해의 흑룡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색구름 사이에서 넘 노는 듯, 단산의 봉황

이 대열매를 물고 벽오동 사이로 넘나드는 듯, 연못 깊은 곳에 청학이 난초를 물고서 오송

간에 넘노는 듯, 두 몸이 칡넝쿨 처럼 어우러져 풀어질 줄을 모르고 감겨만 드는데, 묘옥은

길산의 탄탄한 어깨에 손톱을 찍어 누르면서 몸을 열었다. 봄비 내린 찰흙 속으로 뻗어내리

는 넉센 소나무 뿌리처럼, 그의 신근이 묘옥의 열린 몸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잔솔밭 위를

지나는 바람소리가 제법 스산했고,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 가끔씩 솔잎이 떨어져 그들의 벗

은 몸위에 내려앉았다. 길산의 춤사위가 용틀임에서 깨끼리장단의 허리잡이춤으로 바뀌었다.

녹수청산 깊은 골에 청룔 황룡이 굼틀어졌다... 떠덩, 떠덩, 떠떠꿍덩.

그들의 춤은 허리잡이에서 다시 마당을 온통 질타하는 듯한 취발이의 난무로 떠올랐다.

묘옥의 허리는 활처럼 휘어져 길사의 몸을 따라 붙어 올러갔고 옥문은 온천처럼 열에 끓었

.

길산의 연장은 마치 정월대보름의 끌고 당기는 동아줄처럼 팽팽했다. 묘옥의 두 다리가

길산의 허리깨에 둥글게 감겨져서 풀어질 줄을 몰랐다, 별이 쏟아져 내려오는데, 처음에는

한두 낱씩나중에는 수십낱, 몸짓이 거세어질수록 별들은 우박처럼 와르르르 쏟아져 내려왔

. 묘옥은 하늘처럼 믿음직하고 산처럼 든든한 내 서방님 품에 이제사 안기는 것만 같았다.

일찍이 살 섞는 것이란 자연의 하나인 사람이 그 품성대로 따른 일이언만, 고귀한 사람들

은 번거로이 형식과 치장을 좋아하여 생명을 스스로 체면치레의 족쇄로 채운 격이었다.

습에 반상의 구별이 달라서 양반의 사랑은 헛기침과 곁눈질에 거드름으로 묶여 이었지만,

상사람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듯 건겅하게 들판에서, 노밭 고랑에서, 토방에서, 솔숲에서,

낟가리 속에서, 그리고 부엌에서 거침없이 섞었다. 가난한 지붕 아래 헐벗고, 주린 아이들이

태어 났지만 그들의 힘은 바로 많은 아이들이어서, 저 먹을 것은 타고 난다고 스스로 굳게

믿었던 것이다.

길산은 묘옥에게 팔을 베어주고 오랫동안 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들의 귀에 다시 벌레우

는 소리가 들려왔고 땀이 식어서 몸이 차가워졌다. 묘옥은 길산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이

퉁탕대는 소리를 들었다.

저를...”

하고 나서 묘옥은 망설였다. 색주가에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이었다. 헤아릴 수도 없는

사내들의 손자국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 삑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둠속에서 길산이 지

그시 팔을 죄어 끌어안자 저도 모르게 용기가 솟았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믹게 되었던

것이었다.

언제나... 곁에 거두어 주세요.”

길산은 대담없이 묘옥의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헤치고 빰을 쓸어주었다. 묘옥은 또 눈물이

솟아나왔다. 길산의 두툼한 손가락들이 묘옥의 눈 아래로 번진 눈물을 훔쳐주었다.

헤어지게 되어도... 죽게되어도... 몸은 더러워도 제 마음은 서방님뿐이에요.”

묘옥이 모든 수줍음을 털어내고 말했으며 길산이도 무뚝뚝하게 말했다.

같이 살면 되는 거지 뭐.”

아닙니다. 저는 어쩐지 서방님을 오래 모실것 같지가 않아요.”

그래... 겨울을 나구 여길 떠난단 그말인가?”

, 그렇지만 저 서역 구만리에 가시더라두 찾아내구 말겠어요.”

같이 떠나지. 새해부터는 나두 여길 떠나서 광대 물주나 하며 돌아다닐 셈이니까. 길에

서 살면 된다오.”

이번 출행에 너무 오래 나가 계시지 말구 빨리 오세요.”

놀러 가는게 아니라, 벌이하러 가는 것이니 그게 말대루야 되겠나.”

오늘저녁엔 작은 잿말루 내려와 주무세요.”

풍악이 그친 걸 보니 출행 의논들을 하는 모양이군.”

조금난 더 있다가 내려가요.”

묘옥은 길산의 어깨에 매달리면서 말했다.

저녁에 오시겠어요?”

글쎄... 어떨지 모르겠군. 내야 괜찮지만.”

아이 참, 누가 보구선 정분났다구 소문낼까봐 염려되죠?”

그런게 아니오.”

밤에 까막내까지 나가서 기다리구 있을께요. 달 뜰 때쯤 오세요.”

이번 출행에는 재가 패거리를 끌구 나갈 모양인데... 미리 오리정 밖에 나와 기다리면

같이 길을 떠날 수가 있소.”

아니에요. 계집이 따라다니면 행로에 번거로운 일이 많을 거예요.”

뭘 어떨라구, 모두들 우리 또래이니 말이 날 것두 없구... 남복을 입으면 되지 않아?”

무슨 재주가 있어야지요.”

잽이를 하지 뭐.”

가셨다가 빨리만 돌아오셔요.”

그때에 버석대며 낙엽 밟는 발짝 소리가 들리더니,

길산아, 길산이 거기 있냐?”

하는 갑송이의 굵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길산이는 당황해서 잠깐 망설이며 숨을 죽였다.

어라, 얘기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길산이 어딨어?”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길산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갑송이가 말했다.

게서 뭘 하는 거야. 똥 누냐?”

아니... .”

묘옥이도 따라 일어섰다. 갑송이는 놀란 모양이었다.

"아이구 애 떨어지겠네. 거 기침이라도 할 것이지. 길산이 니 아버지가 찾더라. 의논에 빠

질 수야 있나."

"그래, 곧 가지."

"정말 몰랐다. 널 찾느라구 동네에두 내려갔었어."

갑송이는 겸연쩍은지 머리를 긁으며 뺑소니를 쳤다. 묘옥은 앞서 걸어가는 길산을 뒤에서

꼭 끌어안고 말했다.

"저는 .... 지금부터 ...."

길산은 대답대신 팔을 그 여자의 등에 얹고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오늘 달 뜰 무렵에 오셔요."

묘옥이 마을로 내려가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솔밭을 나서자 모닥불가에서 두런두런하는

마을 사람들의 얘기 소리가 들렸다. 아녀자들은 모두 쉬러 내려갔는지 당터는 한산했다.

닥불은 거의 사그라져서 벌겋게 숯불이 되어 있었고, 술동이들은 말끔하게 비워졌다. 손돌

노인 대신에 장충이 장로가 되어 의논을 끌고 나갔다. 길산이 슬그머니 사람들 틈에 끼여

앉으려는데, 장충이 그를 발견하고서 말했다.

"계획에 빠지면 어쩌느냐, 그래 여지껏 너희가 보부상단과 연희 동행을 하겠다던 의견에

관해서 얘기를 했다. 광대 물주가 무엇인지 말해보아라.“

", 상인과 약계를 맺고, 우리 제주를 장사에서 파는 것입니다. 송도 임방 아래 우리두

방을 열고, 주문이 오면 금전을 받고 놀아주면 되겠지요. 이제는 지방 장시가 안 서는 곳이

거의 없기 떄문에 그쪽이 유리합니다. 쌀이나 몇되씩 얻고 잔칫집을 돌아다니던 일은 요즘

시세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두 보부상 사람들처럼 농사두 짓지 않구 일정한 거주지 두 없을 게 아니

?”

그렇지요. 일단은 대처루 나가야지요.”

우선 대를 나누겠는데, 길산이가 갑대를 거느리고. 큰돌이가 올대, 수룡이가 별대, 팔문

이가 정대를 맡아 갑 을 대는 대처러 돌고, 병 정 대는 촌으로 돌아서 관시놀이 때에 해주

서 일단 모입시다.”

"관시놀이가 며칠이던가?"

그믐께가 되겠구먼.”

우리가 거기서 박대근이라는 그 보부상단을 만나기루 약정하였습니다.”

그래? 허면 관시놀이 때에 그이들과 만나 잘 타협해봅시다. 약빠른 사람들이니 무슨 좋

은 궁리가 나올지두 모르겠군.”

가만있자. 그믐께에 해주서 모인다면 동서남북 방향에서 서 남 대는 괜찮겠지만 동 북

대가 멀리 갈 수가 없겠습니다.”

해주서 흩어질 적에 타도루 나가기로 합시다. 그동안은 해서에서만 돌지.”

그들의 회합은 날이 휜하게 새어서야 끝났다. 모두들 흩어져 오정까지 자느라고 재인말은

죽은 듯했다. 오후부터는 대가 나뉜 대로 광대들이 모여서 놀이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출행

계회는 모두 끝났다.

길산이 탈박이며 악기 등속을 꺼내어 손질을 하는데, 실산의 모친과 봉순이는 깊숙이 간

직해두었던 정빽미를 빻아 떡을 쪘다. 장충은 이번 출행에서 빠지기로 했던 것인데, 못내 좀

이 쑤시는지 출행준비를 하고 있는 길산에게로 건너와 함께 탈박을 손질했다. 장충이 말했

.

"이번 연희에서 돌아오면 너두 새봄엔 장가를 들여야겠다.”

장가요?”

, 싫으냐?”

어이 싫기는..... , 그게 싫구 좋구 하는 건가요?”

네 나이가, 이미 늦었다. 벌써 성혼했어야 하는 건데, 우리는 이미 작정해둔 바가 있느니

.”

정해두었다뇨?”

길산이 재우쳐 묻자, 충은 어물어물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 저 뭐 그만 나이까지부모들이 성혼시킬 생각을 안해뒀겠느냐.”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

나두 늙었구.... 또 네가 아낙을 갖게 되면 내 말해줄 게 있다.”

아버지는 아직 정정하신데, 무슨 그런 말씀이세요.”

장충은 큰기침을하고 나서 길산의 손을 잡으며 은근하게 말했다.

혹시 마음에 둔 처자라두 있느냐?”

예에?”

어디 눈 맞은 처녀라두 있느냐구?”하고나서 충은 싱긋이 웃었다.

너 봉순이를 어찌 생각하느냐?”

......봉순이요?”하다가 길산은 너털웃음을 떠뜨리고 말았다.

에이......봉순이야 제 누이동생이구 쪼끄만 계집아인 걸요. 아버님두.....”

장충은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길산의 우람하고 단단한 몸을 볼때마다 연안의 자갈목이

란 동네에서 겪은 밤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 울음소리와 연한 살덩이의 꿈틀거림과 두 손

에 흠뻑 묻었던 피, 그리고 자신의 이빨로 끊어낸 탯줄과 목구멍을 넘어가던 쓰디쓴 탯국물

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여인이 죽어가며 자기의 손을 꼭 잡고 부

탁하던 여윈 손의 마지막 힘은 잊혀지질 않았다. 장충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크게 내쉬며

탄식했다.

허어, 화살과 같은 세월이다!”

아버지 건너가 쉬세요. 저는 또 동무들 만나러 나가봐야죠.”

그래 그래, 놀이는 뭘루 정했느냐?”

, 아무래두 장터에서는 한량들보다 상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살판이나 어름으루 뛰어야

겠어요.”

요즘은 괴뢰배와 거사패들이 부쩍 늘었다더라. 대처마다 많이들 몰려다닌다듣데. 그 사

람들 우리네 같은 재인이 유민으로 정처를 잃은 모양이야.”

그렇겠지요.”

나라에서 재인청을 없애더니.....”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두려울 것 없습니다. 언제는 우리가 뭐, 정처를 가지고 귀한 대우

받으며 살았나요. 고작해야 척인데, 아이들도 우리께는 경어를 쓰지 않지요. 그따위 호적으

루 뭘 해요. 저는 어서 이 재인말을 떠나구 싶은 마음뿐입니다. 이나마 땅뙈기에 거할집이

있으니 자꾸 마음이 약해져 매달리게 되는 겁니다.”

너는 아직 젊다. 나두 젊어서는 그랬지. 그러나 나이를 좀 먹어보면 알게 된다. 관이란

게 아주 허수룩하고 연약한 듯하지만 의외로 강대하단다. 바늘 들고 황소를 찌르려 마라.”

황소를 잡으려면 망치를 만들어야 하고, 범을 잡으려면 함정을 파야죠. 저는 꼭 이 재인

말을 언젠가는 아주 떠나버릴 작정입니다.”

너희 동무들두 모두 그러하냐?”

대게는 다 그런 생각이니다.”

아니다. 부지런히 벌어서 어수룩한 북관에 가서 공명첩을 사구, 땅을 사서 토호 노릇하

며 부귀를 꾀하는 길이 더욱 빠를 게다.:

아버지의 오랜 소망임을 우리는 압니다. 허나, 지금 평생을 보내시고도 이밥에 비린 반

찬 한번 못 드시고 천대나 받으며 조발 몇이랑에 굴복해서 여기 눌러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내 일생을 후회하지는 않겠다.“

장충은 눈을 스르르 감고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나는 후회하질 않아,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거칠고 험한 세월을 껄껄대며

살아왔다." 하고 나서 충은 길산의 손을 잡아주고 일어났다. 그는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말했다.

해주 가거든 수양산에 좀 둘러보아라. 산성 기슭에 망해사라는 큰절이 있느니라. 거기

가면 ..... 아직두 살아 계실지 의문이다마는 보경선사라는 노승에 관하여 묻고, 신계 사람 보

가 어디 있느나구 물어봐라. 세월이 너무 오래됐긴 하지만.... 기억하실 게다.”

신계 사람 보요?”

그래, 장충이라는 문화 광대가 보낸 사람이라면 혹시..... 무슨 말이 있을지두 모르겠다.

내 처음 노스님을 만나뵌 것이 이십 년이 넘었고, 그 다음에는 팔 년 전에, 그리고 삼 년 전

에는 다른 이가 전해주는 소식만 들었다.”

보란 누굽니까?”

..... 네 작은아버지뻘 되는 사람이다. 어쨌거나 그가 살아 있나, 살았으면 어디 사는

가를 알아봐라.”

, 유념해두겠습니다.”

장충은 만약에 길산의 생부가 살아 있다면, 이제 성인이 된 길산이가 만나야 할 것 같았

, 더구나 장가를 들게 된다면 그가 누구의 살붙이인지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길산은 탈박을 차곡차곡 접어서 봇짐에 쌌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곧 달이 떠오을 것

이다. 그가 마당으로 내려서자 봉순이가 부엌에서 뛰어나왔다.

오빠, 떡 먹구 나가, 팔을 두툼히 뿌려서 아주 맛있을 거야.”

...... 바쁘다, 바뻐.”

길산의 어머니도 부엌 밖으로 나와 손짓했다.

아직 김이 덜 들었지만, 맛뵈기루 한점 떼먹구 나가거라.”

어버지나 많이 드리셔요. 저녁은 갑송이네서 먹을게요.”

동네 사랑서 자지 말구, 저녁엔 들어와라. 내 할 얘기두 있구.”

길산은 모친의 목소리를 뒤에 두고 밖으로 나섰다. 사랑에는 총각들이 모여서 어제 남은

술추렴을 다시 벌이고 있었다. 동네를 아주 거덜을 내버리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길사은

들어가지 않고 갑송이만을 불러냈다.

나 작은잿말 냐려가는 길이다. 오늘 거기서 묵을 거 같은데, 혹시 집에 가서 나를 찾거

나 하지 말어.”

이 자식, 젊은 놈이 벌써부터 개구녕 트구 다니는구나! 온 동네방네에 광을 퍼칠까 부

.”

농지거리는 그만두자. 내 다녀올 테니 집에서 누가 찾아오더라도 먼저 잔다구 해서 돌

려보내라.”

......나 참, 똥 뀐 놈이 성낸다구 공연히 지랄이네. 알겠다 이놈아, 실컷 지분거리다 와

.”

농치지 말라니까.”

그래 빨리 가라니!”

곰퉁이 같은 녀석.”

길산은 낄낄거리는 갑송이를 딴죽을 걸면서 슬쩍 밀어붙이니,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땅에

주저앉아서도 갑송이는 손가락질하면서 웃어댔다. 길산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겸연쩍게 쓰다

듬으며 돌아섰다.

달이 뜨고 있었다. 만월에 가까워져 한입 베어문 부침개 같은 모양이었다. ㅏㄹ은 산허리

위로 한뼘쯤 올라왔는데 그 빛이 까막내의 수면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달빛은 까막내의

수면과, 갈대밭 위에 내려앉아 흔들렸다. 멀리 작은잿말의 불빛이 뵈는 동구 앞에 이르렀을

, 길산의 앞으로 내닫는 묘옥이가 보였다.

해가 지자마자, 나와 있었어요.”

총대 어른은 뭐 하셔?”

"저녁 드시구 일찍 자리에 드셨어요."

밤공기가 서늘한걸.”

그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후미진 산비탈길을 지나 곧장 손돌의 외딴 초가로 내려갔다.

손돌이 거처하는 바깥방에는 불이 꺼져 있고, 부엌이 달린 안방에만 관솔불이 희미하게 켜

져 있었다. 묘옥이 발끝걸음으로 마루에 올라 미닫이를 열고 들어오라는 시늉으로 손짓했다.

방 아랫목에는 이미 간소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수수로 담가 거른 막주와 산나물무침

몇가지가 올라 있는데, 콩가루를 두텁게 묻힌 인절미도 한접시 놓여 있었다.

, 웬 인절미가 다 있소.”

쉬이...... 찹쌀이 어찌나 귀한지 송화 나가는 분에게 무명 끄틀을 주구 한됫박 사오게 했

어요. 드셔요.”

우리집에서두 리루떡을 좀 했는데, 바삐 오느라구 맛을 못 봤지.”

이거 모두 잡수셔요. 그리구 이만큼 더 있으니까, 내일 떠나실때 봇짐에 놓어두고 요기

하셔요.”하면서 묘옥은 술잔을 채워주고 손수 떡을 집어 길산에게로 내밀었다. 그는 묘옥의

손가락이라도 물듯이 널름 받아 우물거렸다.

노인이란 원래 잠이 없는 법인데, 너무 일찍 주무시는걸. 혹시 다 아시구 잠든 척 하는

것 같우.”

아네요. 어제부터 몸이 불편하시다구 문화 나갈 일두 그만두시구 종일 누워 계셨어요.”

그들은 처음에는 목소리를 낮췄으나, 술잔이 거듭 오고 감에 따라 차츰 말이 많아지고 목소

리가 들리더니, 나지막한 기침이 터졌다. 길산이와 묘옥은 뚝, 하는가 가득 낀 것 같은 손돌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 누가 왔느냐?”

묘옥은 제 가슴에 손을 얹고 황급한 기색으로 안정부절 못했다.

누가 왔느냐구......”

미닫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손돌 노인의 얼굴이 그들이 마주 앉은 방문 사이로

나타났다. 길산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읍하며 일어섰다.

총대 어른...... 안녕하십니까?”

으음, 자네가 윈일루 내려왔나?”

길산은 머리를 긁으며 섰고 묘옥은 앚은 채 고개 처박고 저고리고름만 만지작거리고 있었

. 손돌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둘을 번갈아 살피고 나서 아랫목에 가서 앚았다.

그래, 큰잿말에선 출행 갈 준비가 다 끝났나?”

예에......”하고 나서 길산이 곧 나갈 자세로 미닫이에 손을 대며 인사를 드리려는 참인

, 손돌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거기 좀 앉게, 이리 가까이.” 하고 나서 그는 빈 잔을 잡고 묘옥에게 청했다.

너두 이리 가까이 와서 내게 술 좀 따라주렴.”

묘옥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아 술을 쳐드렸거, 실산은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손돌은 술

한잔을 비울 때까지 웃는 얼굴인 채 말이 없었다.

한잔 더 따라라.”

다시 두 잔을 마시고 나서 손돌 노인이 말했다.

너희들이 이러한 사이임을 전혀 몰랐구나. 하긴 너희들 모두 내 자식같이 생각하구 있

. 이렇게 연분이 생겨나는 것두 아마 하늘의 뜻이겠지. 그런데, 너희들 정녕코 부부가 되

겠느냐?”

잠자코 앉았던 묘옥이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어찌 그것까지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길산아,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만나고 흩어짐은 참으로 묘한 일이다. 내가 신천서 묘

옥이를 활인해낸 것도 그러하고...... 네 아비 장충이가 너를 받아낸 일두 그렇고, 또한 너희

가 이 밤에 함께 있는 일두 그리하다. 둘다 성인이고 보면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은 못

되지만, 남녀의 정분이란 장난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이리 만난 것도 팔자소관이고, 이미 서

로의 평생에 끼여든 짖이 아니겠느냐. 내 묘옥이의 일은 들어서 잘 알고..... 길산이 네게도

해줄 말이 있다. 네 아비가 아무 말씀도 없더냐.”

무슨 말씀요......?”

, 네 이미 소년이 아닌즉 알아둬여 할 일이 있다. 허나 네 아비가 아직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 내 막상 입을 떼기가 거북하다만 아마 내가 얘기를 해줬다면 장충이 그 사람두

홀가분할 게다. 너는 재인말 태생이 아니다.”

길산은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예에, 연안 어디 길가에서 테어났단 얘긴 들었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너는 광대의 피를 받은게 아니란 말이다. 너는 장충이의 친자식이 아

니었어.”

예에? 친자식이 아니라뇨......”

손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묘옥이까지도 숙였던 고개를 쳐들고 두 사람을 바라보

며 긴장해서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우리가 송도서 대보름놀이를 하구 돌아오던 때였지. 벽란나루에서 추

노에 쫒기는 어떤 여종을 만나게 되었지.”

손돌은 눈을 감고 상체를 흔들거리며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그는 그가 아는 만큰의 여인

의 냐력에 대해서 얘기했다. 손돌 노인의 얘기를 듣고 있는 길산의 눈에는 물리가 그렁그렁

하게 가득 차 있었다. 노인은 길산이 태어나던 날 밤의 일을 상세히 얘기했고, 그의 모친이

죽던광경을 말해주었다.

핏덩이인 자네를 충이가 안고 길을 걸었지. 자네 모친은 그 한 많은 몸이 봉세산 중기

가 주지곶으로 내닫는 봉고개 마루턱에 묻혔지. 참으로 생명은 좋은 것이여. 이렇게 훤칠한

장부가 되었으니. 묘옥아 술 한잔 다오. 그리구 이 사람께두 따라라.”

길산은 방 한구석을 노려보며 손돌 노인의 일러주던 말을 되씹고 있었다.

너희들 내 앞에서 두 손을 잡아라.”

길산은 멍하니 앉았다가 고개를 흔들어 눈에 가득 괴었던 물기를 떨어냈다. 묘옥이 길산

의 손을 찾아 그러쥐었다.

손돌은 두 사람의 손목을 합쳐 쥐고 말했다.

이제 너희들의 연분은 팔자소관이니라. 어버이께서 내려준 살과 피가 한 몸이 되었다.

부디 부세에서는 헤어질지라도 죽어져서 구천 지옥에서는 두 사람의 넋은 끊기지 않을지어

.”

묘옥과 길산은 손목을 마주 대고 서로의 맥이 뛰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손돌

노인은 그들 앞에 술잔을 나란히 채워주고 나서 일어섰다.

, 이제는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구나. 잘들 자거라.”

손돌은 밭은기침을 떠뜨리면서 다시 마루를 건너갔다. 잠시 후에는 깊이 잠든 손돌 노인

의 규칙적인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무셔요.”

멍하니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고 앉은 길산의 손을 잡아 흔들며 묘옥이 말했다.

길산은 어느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이ㅛ었다. 얼굴은 검게 그을리고 옷은 남루하고 배

가 만삭으로 불러 있는데, 추노에 쫒겨 절뚝이면서 길을 가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광대뼈와 콧잔등을 더듬거렸다. 이 살과 뼈를 준 서러운 부모들은

물론이요, 세상에 띠끌처럼 떴다 가라앉아가는 천한 사람들의 생애가 무슨 신기한 이적처럼

느껴졌다. 그는 갑자기 묘옥을 껴앉았다. 그리고는 부숴버릴 듯이 두 팔에 끌어안고 힘껏 조

였다. 묘옥은 빰을 길산의 가슴에 부벼대면서 안겨 있었다.

내일 아침에 나하구 함께 떠나지.”

지금은 그러시지만 곧 귀찮아지실 거예요. 저는 서방님 계신 부근에 늘 있엤어요. 그걸

루 만족해요.”

묘옥이 살그머니 길산의 가슴을 밀며 일어나서 자리를 깔았다. 묘옥은 관솔불 등잔을 불

어 끄고 나서 옷을 벗었다. 저고리와 치마를,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이불 속에 들어가 속바지

와 속곳을 벗었다. 매끄러운 팔을 뻗친 묘옥이가 길산의 손을 잡아끌며 속삭였다.

서방님! 주무셔요.”

길산이 아이처럼 수줍어하며 이불자락 아래 몸을 널자, 묘옥이가 잡아끌어 가까이 오게

한 뒤에 길산의 저고리를 풀어헤쳤다. 길산은 알몸인 묘옥의 상체를 쓰다음을 적에, 요옥이

제 얹은머리를 풀어내였다. 실산은 묘옥의 풀어헤친 머리털을 쥐고 길게 입을 맞추는데,

옥이 길산의 바지를 벗겨내리고 다리들이 아래에서 매듭처럼 꼬이며 서로 엇갈려 휘감았다.

길산이 입맞춤으로 묘옥의 가슴께를 어른거르는데, 묘옥의 젖은 엎어놓은 옥잔 위에 복사꽃

잎이 내려와 앉은 듯했다. 둘의 운우지정은 처음보다 침착해져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쓰

다듬고 부벼대고, 그 손짓이 은근하였다. 묘옥이 목구멍을 딛은 채로 가슴이 울려나오는 듯

한 소리를 내며 이불을 발끝에 걸어 걷어내버렸다.

두 사람이 얼싸안고 이불 젖혀진 자리 위를 이리로 아둥바둥, 저리로 아둥바둥, 비비고 떨

며 몸서리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어찌 남녀의 교합이 저러한 연분에 갑하는 유일한 일

이겠는가마는, 사랑하는이의 살이란 제아무리 팀닉해보아도 서로가 믿기어지지 않는 법이라.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뺨도 한번 덥석 물어보고, 귓밥도 잘근자른 씹어보고, 아랫입술 윗입술을 엇갈려서 빨았다

, 코에 코를 맞대어 비벼보는데, 이마를 마주쳐 들여다보니 캄캄칠흑 속에 두 점 동자별이

반짝이는구나! 젖은 팽팽하여 꼭지가 굳어졌고, 아랫배는 암탉의 가슴이요, 허벅지는 물위로

퍼얼떡 속구치는 가물치인 듯, 뒤틀린 허리가 춘삼월에 늘어진 수양버들인데, 뒤로 돌려 안

으니 목덜미가 톡 치면 부러질 백옥병의 주둥인지 아슬아슬하고, 등판은 연화 사이에 띄운

태을선녀의 꽃배인 듯 파초선인 듯 가녀리고, 궁둥이는 동산에 떠오른 만월이요 삼천갑자

동방삭이 서왕모께 훔쳐 먹던 천도처럼 찌르면 터질 듯이 무르익어, 에라 못 참겠다, 되돌려

안고 섞으니 눈앞이 아뜩하다. 몸이 섞여 핏줄이 곤두서며 터질 듯이 일어선다. 에헤요,

친 물은 빠르게 흘러가는구나. 콸콸 콰르르릉 퐁퐁 쿨럭쿨럭 아득하게 떠내려가는구나. 이골

물 저골 물이 합수하여 와당탕 퉁탕 흘러나가는데, 산굽이 들굽이로 이리 휘휘 돌고 저리로

넘실넘실 굽이쳐서 잔잔히 흘렀다간 다시 급해지며 쏴아 몰려가다가 스리스을쩍 층암 절벽

으로 휘들어진다. 떨어져 내리 때 우르르르 콰앙 출출 좌르르 컬컬 릏러 이 바위 때리고 저

바위 부딪쳐서 막힌 듯 터지고 헤쳤다간 다시 모인다. 묘옥이 길산의 허리를 끊어져라고 당

길때, 길산의 몸짓은 더욱 거세어져 장마 뒤의 물방아 공이처럼 힘차게 내려찧었다. 여자하

고도 회한 많은 여자는 조금만 찔러도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눈물 주머니라서, 사내가 못되

게 굴 적은 물론이요, 너무 좋아져도 노상 울음일밖에...... 귀밑을 타고 흐르는 묘옥의 눈물

이 삼베 씌운 베갯잎을 흠뻑 적시었다.

길산은 묘옥의 가슴에 머리를 얹고 눈을 감은 채였고, 묘옥은 한 팔로 길산의 머리를 안

고 다른 팔로는 울퉁불퉁한 등을 쓸며 어둠속을 향한 채 울고 있었다. 그 여자는 해송이 어

우러진 바닷가에 앉아서 먼 고장으로 떠나갈 배를 기다리던 밤이 생각났다. 안개 속에서 바

다와 강이 합치는 중화의 쓸쓸한 갯벌과 마을이 보이는 것이었다. 장독에 반신불수로 산 송

장이 되었던 아버지, 그리고 양장교와 어머니의 축축한 웃음소리, 옹진에서의 갯줏집 부엌데

기 시절의 굶주림, 강령으로 색상에 팔려가던 저녁, 무엇보다도 어둠속에서 어둠속에서 자기

에게 차례로 달려들던 너덧 명의 장승 도깨비 같던 우람한 몸집들과, 그 뒤의 캄캄한 하늘

위로 흘러 지나가던 개똥벌레의 음산한 빛조각들이 자꾸만 되살아 떠오르는 것이었다.

, 모질어라......”라고 그녀는 생각했는데 흐드득하는 어깻짓과 더불어 저도 모르게 중

얼거려졌다. 길산은 묘옥의 가슴에 기댄 채 꼼짝도 않았다. 묘옥은 이 사내의 마음이 쫏을

수도 없는 저 머나먼 길 위에 떠돌고 있음을 알았다.

꼬부라진 길, 비탈길, 굽이굽이 영을 넘는 높다랗고 먼 길,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벌판

의 길, 숲길, 산길, 수많은 길을 이 사내는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등이, 괴나

리봇짐이, 행전을 친 다리가, 미투리가, 멀어져갔다. 그리고 먼 곳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

처럼 광대들의 풍악이 희미하게 건너왔다. 지는 해를 향하여 걷는 나그네의 그림자같이 이

사내의 자태는 쫒으면 쫒을수록 멀여져가는 것이었다. 묘옥은 본능적으로 남자를 분간할 줄

알았다. , 이 사람은 저 물과 같은 사람이다. 저리도 밤새껏 잠을 깨워놓고 두런두런 도란

도란 하염없이 흘러내려가는 까막내의 물소리처럼 문득, 가버릴 사람이로구나. 묘옥은 고개

를 옆으로 돌리고 까막내의 물소리처럼 문득, 가버릴 사람이로구나. 묘옥은 고개를 옆으로

돌라고 까막내의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물아 흘러가거라. 두런두런, 도란도란, 두런두런,

란도란.

길산은 묘옥의 가슴에 모리를 기대고 그녀가 숨쉴 적마다 오르내리는 파동에 실려 있었

. 무당인 양어머니가 언젠가 일러준 도솔천이라는 세상인 것 같았다. 그를 낳고 쫒기다 길

에서 죽어간 가없은 어머니는 이젠 이미 그곳에 이르지 못하나, 아니 그 자신도 이를 수는

없으되 뼈의 곳곳에 스며 있는 목숨의 씨는 계속해서 자라나 한걸음씩 도솔천에 가까워질지

도 몰랐다.

저때에 세존께서 한 음성으로 백억이나 되는 다라니문을 말씀하시고 마치심에, 그때에 대

중 가운데에 한 보살이 있으니 이름은 미륵이라,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때를 응하

여 백억 다리니법문을 얻었는지라, 미륵이 죽어 다시 태어나는 세상은 반드시 도솔타천일

것이니, 그제사 이루어지리라. 그때에 대지가 지극히 평탄하고 거울처럼 밝고 깨끗하며 대지

안에는 곡식이 풍족하여 백성이 평안하고 모든 마을과 마을의 닭이 우는 소리가 서로 접하

여 있느니라. 이때에 아름답지 아니한 꽃이며 과실의 나무는 말라서 없어지고, 추하고 악한

것이 또한 스스로 소멸하여, 달고 아름다운 과실나무의 향기롭고 가장 좋은 것만이 그 땅에

피어나느니라. 기후가 화창하고 적당하여 사시의 계절이 순조로우므로 사람의 몸에 여러 가

지 병환이 없으며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 커지지 아니하고 은근하여

서 사람이 평등하여 모두 한가지 뜻으로 서로를 보게 되매 기쁘고 즐거워하며, 착한 말로

서로 오가는 뜻이 똑같아서 차별함이 없느니라. 이때에 백성들이 부귀영화를 일컬어 서로가

말하기를, 옛날에 사람들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서로 상하게 하고 해롭게 하며 가두고 때리

어 무수한 고통이 있었는데 이제는 부귀가 쓸모없는 돌조각과 같아서 아끼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더라.

잠들었어요?”

묘옥이 길산의 머리를 흔들었다. 길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방금 주무시는 것 같았어요. 숨소리가......”

꿈꿨어.”

무슨 꿈이에요?”

몰라, 잠깐 깜박했던 모양이군. 어딘가 갔었는데...... 그렇지, 도솔천.”

, 미륵님 세상이오.”

옛말루 어머니한테 하두 여러번 들어서......”

미륵님은 안 와요. 그건 정말 꿈을 꿨네요.”

먼 데서 닭의 홰치는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길산이 고개를 들었다.

날이 샜나봐.”

벌써 가시게요?”

묘옥이 길산의 몸을 꼭 잡았다.

가야지. 가노라면 해가 뜰 텐데.”

아니에요. 닭은 한밤중에두 곧잘 우는 걸요.”

길산은 벌떡 일어났다. 그가 옷을 주섬주섬 꿰고 나자, 묘옥이 따라 일어나 이불자락으로

벗은 몸을 가리고 길산을 애타게 올려다보았다.

가시기 전에 부탁이 있어요.”

그녀는 가슴을 가리도록 치마만을 걸쳐 입고 웅숭그린 자세로 재빨리 부엌으로 뛰어나갔

. 길산이 영문을 몰라 앉았을 때에 묘옥은 간장 종지를 들고 돌아왔다. 종지 안에는 솥 그

을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묘옥이 반짇고리에서 바늘을 찾아내더니,

제 왼쪽 가슴 위에, 서방님의 길할 길자 넣어주셔요.”

묘옥이 치마끈을 풀어내리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길산은 바늘

을 들고 연약한 살갗으로 가져갔다가 차마 찌르지 못하여 손을 내렸다.

어서 찔러넣으셔요.”

길산은 바늘의 끝부분을 잡고 살 위를 한번 두번 찍다가 멈추었다. 묘옥이 길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더 깊이 찌르라니까요.”

길산의 찔러나가는 바늘자국마다 피가 방울져 흘러나왔다. 묘옥의 목덜미에서 맥이 팔딱

이는 것을 길산이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선비사까지 되었고 입구의 첫 획을 찍는데 벌써

길산의 눈이 아물거렸다. 한 줄기로 모아진 피가 가슴을 타고 흘러 치마끈에 머물다 번져갔

.

검정 넣어주셔요.”

묘옥은 아직도 고개를 돌린 채였다. 길산이 약손으로 침에 갠 그을음을 찍어 상처위에 두

드렸다. 검게 길자가 나타났다. 묘옥은 무명끈을 찾아내어 가슴에 동였다. 저고리를 입은 묘

옥이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중얼거렸다.

계집이 제 몸에다 연비함은 저승에 가서도 임을 잊지 못한다는 정표입니다. 참으로 제

한은 서방님의 상투를 올려드리지 못함이어요. 다른 착하고 정결한 아낙이 있어 서방님의

머리를 빗겨드리고 동곳을 꽂아드리겠지요.”

길산은 멋쩍게 웃었다.

동구 밖으로 나가서 상투를 올리지. 아무래도 이 나이에 떠꺼머리로는 망신스러워서....

..”

길 가시다 요기하셔요.”

묘옥이 송화에서 무명으로 바꿔온 찹쌀로 만든 인절미를 겹겹이 싸서 손에 들려주었다.

길산이 마루 끝으로 나서는데 손돌 노인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길산은 방문을 보고 꾸

뻑했다.

총대 어른, 갑니다. 안녕히 계십쇼.”

응 가나? 잘 다녀와.”

길산이 까막내를 건너 고개를 넘을 때까지 묘옥의 작은 몸은 삽짝앞에 붙박힌 듯 지켜 서

있었다.

광대들이 모두 행장을 갖추고 재인말을 떠나는데, 가족들이 작은잿말에서도 한참이나 떨

어진 오리정까지 쫓아와 그들을 배웅했다. 그중에는 부자가 함께 연회에 나가는 경우도 있

었고, 형제들이 모두 각 대에 분산되어 떠나는 일도 있었다.

오리정 앞에서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서 이별주를 들었다. 길산은 장충과 무당댁을

모시고서 술 한잔을 마셨다. 길산의 모친이 가슴속에다 부적과 나무로 깍은 관음보살상을

넣어주었다.

에따, 이건 몸에 질병이 범접하지 못하는 부적이니라. 그리고 이거는 먼길 가는 사람들

을 지켜주시는 관세음보살님이란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헌데 어제는 어디서 잤니. 봉순이하구 나하구 새벽까지 기다렸다. 네게 할 말이 있댔는

......”

무슨 말씀인데요?”

네 혼인 말이다. 이번 출행에서 돌아오면 성혼을 해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는 길산을 이윽히 들여다보던 그의 모친이 말했다.

너 간밤에 잠을 안 잤구나. 눈 속이 붉은걸. 혹시...... 어느 계집이랑 정분이 난 게 아니

.”

아닙니다.”

...... 내 눈은 못 속인다. 너 어젯밤에 작은잿말 내려갔었지, 그렇지?”

.”

작은잿말의 누구냐......? 너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봉순이와 혼인해야 한다.”

길산이 대답없이 시무룩하게 앉았는데 비켜 앉아 곰방대를 뻐끔거리던 장충이 그의 처를

힐난했다.

, 길 떠나는 사람에게 혼인말을 꺼낸다구 귀에 들어오겠나...... 여하튼지 나가면 그 욱

하는 성미 좀 버리구, 싸움질하지 말아라. 요즈음은 세월이...... 우리네 같은 유민에게 아주

가혹해져가는구나. 관에서 우리네를 싫어한다. 제발 말썽 피우지 말구......”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버님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나서 길산은 다정한 눈으로 장충을 바라보았다. 제 탯줄을 이빨로 끊어냈다는 아버

, 돌림젖을 먹이며 길을 가던 아버지, 생모를 추노에서 구해준 아버지, 그리고 친혈육보다

더한 정을 주었던 그를 바라보는 사이에 길산은 갑자기 고맙고 감격스런 마음이 되어 장충

의 어깨를 안았다.

아버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입신해서 편히 모시게 될지......”

이 녀석아 이게 무슨 짓이냐.”

다 알구 있습니다. 제가 도망하던 비녀의 소생이란 얘기를 들었습니다.”

장충이 길산을 밀어내고, 찬찬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누가 그런 소릴 하더냐.”

손돌 어른께 들었습니다.”

장충은 한숨을 내쉬며 짧게 내뱉었다.

지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충이 돌아앉았고, 그의 모친이 눈물을 찍어냈다.

이날 엽때껏 너를 남의 자식이라구 생각한 적은 없단다.”

장충이 돌아앉은 채 말했다.

사람이 제 도리는 지켜야지, 망해사에 꼭 들러 네 아비 보라는 사람의 소식을 물어봐라.

그리구 연안의 봉고개에두 가보구......”

, 하지만 저는 두 분의 아들입니다.”

길산은 떨쳐내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에 광대들은 길을 떠났다.

"나두 인정상 가엾어서 옥사장께 부탁하여 하루 두 끼를 넣어주고 있소이다. 그런데 그것

두 며칠이라면 모르되, 경비가 이만저만 드는게 아니오. 댁네가 돈을 좀 쓰겠다면 목숨을 연

명시킬 길이야 있지요."

"어떤 길입니까?"

"희광이로 뽑히는 것이지요."

"희광이라니, 사람 죽이는 망나니 말입니까?"

"그렇소, 대개 사형이 유예된 자로 말썽을 부릴 기미가 없으면, 옥사장이 남은 식량으로

먹이면서 형 집행 때마다 부려먹지요."

포교는 박대근에게서 돈냥이나 나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이전 행수 선인이 배를

몰고 떠날 때 받았던 포목으로 처음 며칠간을 우대용이의 사식비로 넣어주었으나, 아무도

알 리 없은즉 혼자 착복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포교가 말하였다.

"관내의 전과자를 회자수로 미루었다가 별일이 없으면 오래 살려두는데, 우대용이가 만약

회자수에 임명된다면 명년 말까지는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외다."

"누가 회자수로 임명하우?"

"그건 형방 비장의 소관이지요. 옥사장이 청원하면 비장이 허락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회자수 망나니가 되면 식사도 관에서 시켜주고, 감옥 안에서도 비교적 자유롭소. 다만.....

왕에 죽을 목숨이 다른 자의 목숨을 치는 일로 연명하게 되는 것이 좀 께름할 것이외다."

"어쨋든 상관없겠소. 나는 우대용이의 사형 집행 연기만을 바라고 있으니까. 어떻게 손 좀

써주시구려."

"글쎄..... 들은 바에 의하면 벌써 강도 전과자 하나와 불알 발린 형을 당한 종놈이 내년의

망나니 회자수로 결정이 내려진 모양이오, 우대용이를 살리려면 그중 하나를 죽여야겠지요.

죽이는 방법이야 많소. 밥에 독을 넣어도 될 것이고 몰래 끌어내어 비공개로 처형시킬 수도

있지요. 아무래도 죽을 놈들이니까. 한데 경비가 좀 들겠소이다. 우선 옥사장에게 돈 좀 주

어야 할 것이고, 형방에 뇌물을 써야 하오."

"얼마쯤이면 되겠소?"

"글쎄요...... 기왕에 있는 망나니를 없애버리는 일까지 해내야 하니까, 모두 합쳐서 삼백

냥쯤 올리시오."

박대근이 헤아려 보건대 포교는 절반쯤 떼어먹을 것이겠고, 옥사장이란 하리이니 고작해

야 한 오십 냥 먹을 것이며 나머지는 형방 비장께로 갈 것이었다. 석방도 아니요 회자수로

서 집행만을 연기시키는데 삼백 냥은 몹시 지나친 가격이었다. 박대근은 고개를 저었다.

"터무니없군! 감영 포청에 직접 찾아가 형방에 직접 여쭐까 하오."

하고 나오자, 포교는 몹시 난처하고 당황해진 기색이 되었다.

"꼭이 얼마쯤 준비되었소?" 돌아가려던 박대근이가 말하였다.

", 이백오십 냥 있소이다."

"이백오십 냥이라....."

포교는 뭔가 속으로 꿍꿍이속을 따져보더니 하는 수 없이 응낙했다.

"이백오십으루 결정합시다."

"지금 내게 아무것두 가진 것이 없으니, 결성골 객주로 갑시다. 내거기서 수표를 떼어 주

겠수."

포교는 군말없이 박대근을 따라 나섰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포교가 물었다.

"한데 댁네는 뉘시길래 우대용이를 살려줄려구 애를 쓰는 거요?"

"예전 의리 떄문이외다. 내 아무리 장사를 다닌다 할지라도, 거래를 하던 자가 죽게 되었

는데 어찌 모른 척할 수가 있겠소."

"면회해보겠수?"

"시켜주실 수 있습니까?"

"내 감영 있는 동료들께 알선해드리리다. 모레가 관싯날이니, 어쩌면 감옥청 안으루 출입

이 가능할지두 모르겠수."

"감형은 어렵겠수?"

"그것은 감사나으리릐 뜻에 달렸소이다. 절대루 그런 일은 안될 거요."

그들이 결성골 객주에 이르니, 차인들은 모두 싸구려로 물건을 넘겨 손해를 톡톡히 보았

다고 투덜거렸다. 더구나, 객주놈들의 행패가 두려워 모두들 봉놋방에 처박혀 있었고 감히

술청에 나가는 자가 없었다. 박대근이 이백오십 냥 수결하여 포교에게 내주었다. 포교는 수

표를 접어 넣으면서 자신있게 말하였다.

"두고 보시우. 내일이면 우대용이가 당장에 회자수로 임명이 될 게요. 내 지금 이 길로 당

장 감영에 들어가야겠군."

"내 술 한 잔을 사리다. 마시고 가시우."

"아니....... 좋소이다."

포교가 바삐 가버린 뒤에 박대근이는 역시 출출하여 그냥 자기도 뭣해서 술청으로 나가보

았다. 술청은 몹시 소란했다. 마당에 불이 훤히 밝혀졌고 멍석 위에는 술상이 즐비했으며,

한쪽 평상 위에서는 한참 골패놀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박대근이는 마루 위로 올라가 자리

를 잡고 앉았다. 중노미가 다가와 주문을 청했다.

"열 푼어치 술을 다우, 안주는 돈육이 좋겠군."

"열 푼어치는 팔지 않습니다. 스무 푼어치 자시지요."

"그러려무나."

중노미가 시원스레 고함을 내지르며 오가더니 개다리소반을 받쳐들고 왔다. 박대근이가

첫 잔을 한번에 비우고, 자작하여 술을 따르는 중인데 갑자기 평상 위의 투전판이 소란스러

워졌다.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소? 패가 바뀌었단 말이우. 판돈은 전부 내 거요."

패랭이 차림의 보부상인 듯한 자가 격한 목소리로 따지면서 좌중에서 일어났다.

"이 자식이 눈깔은 포청에다 빼놓구 나왔나. 어디서 생트집이야."

판돈을 긁어모으던 험상궃은 개가죽 배자 차림의 사내가 맞받으며 함께 일어섰다.

"속임수다, 속임수. 내 돈 내놔."

", 이놈이 노름판에서 판돈 게워내라네."

개가죽 배자가 벌떡 일어나 장사꾼을 힘껏 떼밀었다.

"돈을 잃었으면, 판에서 얌전히 물러나, 코피 터지기 전에...."

장사꾼도 제법 성질이 있는지 상대편을 붙잡고 늘어졌다.

"어어? 이놈이 돈 잃고 시비를 거는구나."

개가죽 배자가 고개를 푹 숙이는가 했다가 치솟으며 장사꾼의 면상을 들이받았다. 에쿠,

소리를 지르며 그가 벌렁 나자빠지자 그자가 발로 짓이기려고 쓰러진 자의 가슴팍을 향해

발을 쳐들었다.

"애걔걔!" 하면서 나둥그러진 것은 개가죽 배자 입은 사내였다. 뭔가에 발목이 걸려서 제

힘에 겨워 앞으로 고꾸라져 박힌 것이었다. 개가죽 배자가 콧등을 땅에 문대고 엉금엉금 일

어서려는데, 등뒤에서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낯선 키 큰 녀석이 빙글거리

고 있었다. 박대근이가 쫓아나와 늘 갖고 다니던 물미장 지팡이로 그의 다리를 슬쩍 걸어버

렸던 것이었다.

"이놈 봐라."

"미안하게 됐소이다. 어쩌나 마당이 혼잡한지 지나가다 걸린 모양이우."

"일부러 딴죽을 걸고 나서, 사람을 놀리기까지 하기냐."

그자가 벌떡 일어나 박대근이를 바라고 덤벼들었다.

"어허! 몹쓸 손이로고."

박대근이 비양대면서 뒤로 몇걸음 물러났다. 개가죽 배자는 달려들 자세를 멈춘 채로 제

패거리를 돌아보았다.

"어디서 온 말뼉다구인지 아직 주내방 솜씨를 모르는 모양이로군."

"문 앞을 막아라."

"헛간에 끌어다가 때 좀 벗겨줘야겠다." 하면서 투전판의 패거리들이 박대근이를 빙 둘러

쌌다. 상대편들이 팔뚝을 걷고 눈알을 부라리며 다가들건만 박대근은 여전히 싱글거리는 표

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서 물미장을 짚고 서 있었다. 박대근이 말하였다.

"그래 송도서 온 말뼉다구인데, 내 한 사람에 다섯은 너무하지 않수."

".... 송상 차인이로군. 네 이놈, 해주 용댕이가 예전 같은 줄 알았더냐?"

"나는 싸움은 질색인 사람이외다. 투전판에서 남의 골을 빼먹는 짓두 싫어하우. 우리두 댁

네들 손님인데 이러지들 마슈."

"여러 말 할 것 없다. 쳐라."

서너 놈이 한뭇에 대근의 팔다리 면상을 바라고 달려드는데, 대근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물미장을 들어 정면에 오는 자의 가슴팍을 쿡 찌르고 나서 휘익 돌려 앞으로 새어나가는 자

의 뒷덜미를 호되게 후려갈겼다. 한 놈은 에쿠 하면서 궁둥방아를 찧고 뒹굴어 숨이 막혔는

지 꼼짝 못하였고, 또 한 놈은 앞으로 꼬라박힌 채 머리를 감싸고 비척거렸다. 삽시에 벌어

진 광경이어서 남은 세 놈이 감히 덤벼들지를 못하고 비슬대다가, 일시에 쪼르르 흩어지더

니 부엌과 광에서 쇠스랑과 식칼을 들고 나왔다. 박대근이는 마당 가운데 꼼짝 않고 서서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넘어졌던 놈들도 재빠르게 기거나 몸을 굴려 멀어지자 벌떡 일어

서서, 제각기 낫이며 지겟작대기를 잡고 마당 가녘을 돌고 있었다. 넘어졌던 자는 터진 입술

에서 흐르는 피를 소매로 쓱 문지르며 낫을 잡고 그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박대근이의 눈

이 잠깐 사이에 표독한 빛을 띠면서,

"나는 하나, 너희는 다섯이다. 네놈들 정녕 피를 보아야겠느냐."

말하자마자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면서 물미장의 환도를 뽑았다. 대근은 뽑은 칼을 들어

허공에서 땅으로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두어 번 뿌리쳤다. 호되게 당한 놈들은 멈칫거리

면서 감히 달려들지를 못했다.

"저놈...... 환도를 가졌다."

"내가 말하지 않더냐, 너희는 다섯이고 나는 혼자다. 맨손으로 덤비면 모르거니와 무기를

든다면 내 쾌히 베어주리라."

한찬을 노리던 자들이 아직도 무기를 놓지 못하고 동작을 딱 그친 채 기가 죽어 있자,

근은 고개를 들어 크게 웃었다.

"그래 불알이 천 근쯤 되느냐. 왜들 그러고 섰어, 조무래기 왈짜패 들을 어찌 이 칼로 베

겠느냐, 허나.... 이왕 칼은 뽑은 것이니....."

박대근이 웃음을 그침과 함께 칼을 곧추 내뻗었다. 그리고는 달음박질로 한걸음에 내달으

며 마당 가녘을 일시에 훑었다. 장검의 날에 어딘들 빈틈이 있으랴. 칼바람 한 번으로 꽉 채

운 뒤 박대근은 물미장에 환도를 꽂아넣었다. 술청 안은 쥐죽은 듯하였고, 장사치들은 넋을

잃고 마당을 바라보았다. 박대근이 웃음을 터뜨렸다. 객줏집 토담가에 둘러섰던 자들은 목을

한껏 움추린 채 서 있었다.

목이 날아간 줄 알고 있던 자들이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 와들거리기 시작했는데, 어딘지

이상했다. 머리카락들이 안면을 덮으며 흐트러져 내렸던 것이었다.

잘린 상투가 그들의 발 밑에 떨어져 있었고, 흐트러져 내리는 머리카락에서 빠진 동곳이

얼굴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허허, 그놈들 상투를 잘라놓으니 꼭 종루저자의 화냥년 꼴이로다."

달려들던 자들이 얼이 빠진 채 제 머리꼭지를 움켜쥐고 씨근대는 판인데 밖에서 왁자지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술청 안의 길손들은 모두들 이제야말로 큰 싸움이 벌어지리라 짐작

하고서 제각기 숨을 곳을 찾아 뒤꼍으로 다락으로 몸을 피하느라고 법석이었다. 객줏집 홍

대문이 와지끈 젖혀지면서 용댕잇개의 꺽돌이가 여남은 명을 이끌고 들어서는 중이었다.

채에서 낌새를 알아챈 박대근이의 상단 보부상들이 저마다 작대기며 병장기를 찾아 들고 안

에서 뛰쳐나왔다. 박대근이 그들을 돌아보며 꾸짖었다.

"무슨 짓들이냐. 여기는 험산 준령두 아니고 화적이 나선 것도 아니다. 뻔히 감영이 내다

뵈는 대처에서 병장기가 무슨 소용에 닿겠느냐. 소란 피우지 말구 사처에 물러가 있거라."

했으나 보부상들은 물러갈 기세가 아니었고 오히려 여기 와서 당한 괄시를 풀어보려는 모양

이었다. 짜른 환도며 쇠몽치나 포청의 쇠도리깨를 가진 자들을 거느린 꺽돌이가 문 앞에 팔

짱을 끼고 버티어 서 있었다.

", 좋다. 남의 마당에 와서 떡을 치려는 모양인데. 나락값이라두 받아둬야지. 인명이 상

한단들 관은 우리께 더욱 가깝단 말이야. 시정 무뢰배 싸움질에 포청이 눈 하나 꿈적할 것

같으냐. 여기서 한 놈두 몸성히 나가지는 못하리라."

"그래? 더욱 잘되었군. 이놈들이 화적떼인 모양일세. 장사치를 괴롭히는 떼도둑이니 사정

두지 말구 물고를 내버려라. 자아..... 덤벼보아라."

상단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대근의 좌우에 벌려섰다. 보부상단이 유사시에 자위할 수

있도록 관에서 허락한 것은 멀리는 태조대왕 시절부터였다. 그들이 패랭이에 목화솜을 달고

다니던 것은 부상자의 치료용이기도 했고, 뒤에 와서는 화승총의 화약제조에 쓰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때로는 암행어사나 군장의 수행도 했었다. 박대근이는 막대한 상업자금을 가지

고 관에 줄을 대고 있는 송상의 차인 행수로서 지방 무뢰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만 말썽이 일어나게 되면 그는 그 지역에서의 행상권을 박탈당하게 될 뿐이었다. 지방 장터

나 객주에서 상인이나 무뢰배가 다투는 일에 관이 상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는 지방관아의 중요한 세원이었고, 지방 유력자의 비호 아래 있는 무뢰배나 거주가 일정

치 않은 자들의 분쟁을 규찰하기에는 관아의 행정력이 미약했던 것이다. 따라서 각지에서

날뛰는 난장꾼들을 어느 정도 관의 무능 아래서 번성했던 것이다. 지방 장시에서의 송상들

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하여 있었다. 그런 형편이니 박대근이 무뢰배들께 꿀릴 이치가 없었

. 꺽돌이는 쇠도리깨를 들고 상대편을 노리면서 싸움을 과연 벌일 것인가 망설이는 중이

었다. 박대근이 말했다.

"그래 나오는 기세는 장익덕이 모양이더니, 어찌해서 파리 삼킨 두꺼비 꼴이 되었느냐."

창피를 당한데다 기세까지 눌리고 보니 아무리 벽지의 소악패라도 욱할 것인즉, 더구나

대처의 왈짜패로서 참지 못할 일이었다. 꺽돌이 앞뒤 가릴 새 없이 한달음에 내달으며 대근

의 앞으로 나셨다.

"네놈의 해골을 바수기 전에는 내 여기서 물러나지 않겠다."

꺽돌이 쇠도리깨를 휘젓고 달려들자 대근은 물미장은 잡은 채로 좌우로 비켜서다가 내려

치는 것을 받아냈다. 하지만 제놈이 일찌기 무더리 장터에서 길산에게 혼찌검이 났으니 그

솜씨로 환도깨나 쓸 줄 아는 박대근이를 당할 재간이 있나, 단번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주저

앉는데, 틈을 주지 않고 대근의 물미장 지팡이가 꺽돌이의 목젖을 찔렀다. 꺽돌이는 그 자리

에서 숨통이 막혀 파랗게 죽어 자빠졌다. 대근이 침착하게 꺽돌의 등을 지그시 밟고 서서

천천히 환도를 빼었다.

"나는 평산에서도 억보라는 소악패를 잡아 이마에 표시를 하여 경계한 적이 있다. 또 한

번 네놈 면상에 칼줄을 그어주겠다."

문간에 물러섰던 자들이 꺽돌의 뒤를 이어 달려들 판인데 사람들을헤치며 누군가 마당으

로 들어섰다.

"행수, 잠깐 칼을 거두오."

소동이 일어났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온 용당포 회계 막개였다. 그는 말쑥한 도포를 입고

말총갓을 점잖게 쓰고 있었다. 그리고 맨손이었다. 박대근이 칼날을 거두면서 그를 바라보았

. 예의에는 예의로 상대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막개가 허리를 굽혔다.

"인사합시다. 나는 주내방 신생원 아래서 용당포 회계를 맡고 있는 사람이오."

박대근이 쓰러진 꺽돌에게서 비켜서며 답례했다.

"송상 배대인 댁 차인 행수입니다."

"우리 손님이신데 아이들이 무슨 행패를 한 모양이지요? 워낙 장사에 서툴러서 혈기로 방

자하게 군 모양이나, 저자의 상사로 아시고 노기를 푸시지요."

막개는 노련한 사내였다. 구변이 좋은 만큼 속셈도 깊고 싸움에도 능란한 자였다. 자기를

드러낸 곳에서 강대한 적을 치는 일이 얼마나 불리한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박대근이는

한눈에 그가 임유학을 제거한 장본인임을 알아챌 수가 있었다. 그 침착한 예의며 만만치 않

은 눈빛으로 보아 과연 오래 묵은 대처의 왈짜패다웠다.

"상도를 아시는 양반 같수. 내가 벌인 싸움도 아니니 거두지요."

박대근이 자기 사람들을 돌아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그만들 물러나게, 이젠 끝난 모양이니....."

막개도 선창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기절한 꺽돌이의 얼굴에 냉수를 뿜어 정신을 차리게 했

. 회생이 되자마자 그래도 선창의 실력자랍시고 놈은 벌떡 일어나 대근에게로 달려들었다.

막개가 큼직한 손으로 그의 뒷덜미를 잡아끄는데, 한 손에 견디지 못하여 뒤로 질질 끌릴

정도였다. 막개가 속삭였다.

"이놈...... 뒤통수를 치랬지. 누가 콧잔등을 물라더냐."

막개는 꺽돌의 등을 밀어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집을 찾아온 손님께 행패를 했으니, 이제 가는 길로 네놈을 혼내겠다. 대죄하고 있거

."

막개가 대근에게 말했다.

"누추하지만 저희 용정루에 모시겠습니다. 오늘 봉변하신 값으루 제가 톡톡히 한턱 쓰지

."

박대근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보다는 우선 청이 있소이다. 우리가 일부 잡화를 객주에 넘겼으나, 제값을 받지 못하였

. 일반 시세대로 셈하여주신다면 제가 한잔 사지요."

"좋소이다. 앞으루 계속 거래할 분께 손해를 끼친다면 주내방 여각의 신용이 말이 아니지

. 어떻게....... 선편으로 화물은 부쳤습니까?"

", 송증만 받으면 됩니다."

막개가 객주의 점주를 불러 지시했다.

"가서 거래한 장기를 가져오너라."

대강 훑어보고 나서 막개는 새삼스럽게 혀를 찼다.

"정말 손해를 드렸군요. 눈짐작에도 차액이 백여 냥은 되는 것 같습니다. 곧 돌려드리도록

하지요. 자아 가십시다."

박대근은 막개를 따라서 결성골로 나갔다. 홍등이 걸린 예전 임유학의 기와집에서는 여자

들의 웃음소리와 풍악소리가 요란하였다. 막개와 박대근이는 취련이를 사이에 두고 안채에

마주 앉아 술을 들었다. 대근이 처음에는 방심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술을 들었으나, 취기가

오름데 따라 소리도 한가락씩 하게 되고 곁에서 술을 치는 취련에 게도 농지거리를 던지게

되었다. 막개가 넌지시 설렁줄을 당긴 뒤에, 새 술병이 들어왔다. 은밀히 상 아래 들이밀 적

에 취련이 냉큼 집어들어 술잔이 아니라 아예 대접에다 둘을 나누어 퐁퐁 쏟아놓았다.

"원래 화해술이란 양자가 벌주이오니 콧김 막고 단숨에 드소서."

박대근이 알맞게 취한 김에,

"이게 무슨 술이냐?" 하며 턱밑으로 가져가는데 취련은 대접을 받쳐주며 대답했다.

", 서도 명주 감홍로이옵니다."

"화해술은 벌주라? 그거 좋다! 박행수 두십시다."

막개도 자기 앞의 대접을 들어 마셨고, 박대근이도 계피 냄새 나는 달콤한 술을 꿀꺽꿀꺽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나 막개는 박대근이 마시는 사이에 다른 대접에다 자기 술을 재빨리

쏟아놓고 나서 상에 요란히 내려놓으며 입바람 소리를 냈다. 대근의 천성이 침착하고 용의

주도 하건만 한가지 흠이랄 것은 사람 사귀기를 즐겨하는 점이었다.

원체 뒤가 없는 성미이고 보니, 싸움한 상대편에서 예의를 갖추어 대하는 것에 마음이 풀

어졌던 것이었다. 더구나 술자리에서는 술을 사양하지 않는 버릇이었으며, 그만큼 웬만해서

는 취하지 않는 때문이기도 하였다. 박대근이 잔을 내려놓는데 역시 입에서부터 명치까지

온통 불을 삼킨 듯하였다.

"거 술이 보통이 아니로다."

"아이, 대장부가 이깟 술 한 잔에 뭘 그러셔요. 하루 삼백 잔은 못 되어도 석 잔은 채우셔

야지."

"벌주치고는 아주 호강이구려. 감홍로를 대접째로 들이붓는데, 우리가 제법 호걸 숭내를

내게 되는 모양이오."

막개도 어물쩍거리며 술 따른 대접을 쳐들었고 박대근이 벌컥이며 들이마셨다. 아니나다

를까 반 대접을 넘기지 못하여 손이 풀려 그릇이 상 위에 엎어졌다. 그가 손을 맥없이 떨어

뜨리는데 이미 눈에 총기가 사라지고 눈꺼풀이 반쯤 내려 덮었다. 막개가 빙긋 웃으면서 박

대근에 게 물었다.

"술이 별로 세지 않은 것 같소이다."

"....... 에 술이 어쨌다구?"

박대근이 간신히 상머리를 짚으면서 얼굴을 쳐들려고 애썼다.

"이놈....... 주내방의 맛 좀 보아라."

막개가 박대근이의 볼따구니를 손끝으로 두드리면서 빙긋대었다.

"뭐라구, 자네 뭐라구 그랬나."

"쓸개 빠진 놈."

박대근이 몸을 가누려고 애를 쓰면서 궁둥이를 들다가 그대로 상에 머리를 처박더니 움직

일 줄을 모른다. 막개가 박대근의 상투를 잡아 뒤로 젖혀 보고 나서 취련에게 말했다.

"약을 너무 탔던 거 아냐?"

"보통 때보다는 좀 많이 탔어요."

애먹이는 술꾼들에게 몽혼처방을 준비하여 술에 타서 재우는 것은 색주가에서 가끔 있는

일이었다. 취련이 손뼉을 쳤고, 밖에서 투닥거리는 발짝 소리가 들리더니 꺽돌을 위시한 패

거리들이 미딛이 밖에 우르를 몰려 섰다.

"광으로 데려가거라."

막객의 말이 떨어지자 꺽돌과 몇몇 장정이 송장처럼 늘어져버린 박대근이의 몸을 맞들고

방에서 나갔다. 그들은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어 늘어진 박대근이를 광으로 데려갔다. 관솔불

을 밝히고 광문을 단단히 잠근 다음, 줄을 내어 대근의 두 손목을 묶고 그 줄을 대들보에

걸었다. 팽팽히 당겨서 높직하게 매달리게 되자 줄을 기둥에 매어놓았다. 박대근이는 두 손

목을 쳐들고 공중에 매달린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막개는 멀찍이 서서 팔짱을 낀 채 구

경을 하였다.

"정신이 날 때까지 찬물을 끼얹어주어라."

꺽돌이가 옷통을 벗어 던졌다. 그는 이 무력해진 상대에 벌써부터 흥분이 되어 연신 볼을

떨고 있을 정도였다. 큰 동이에 떠놓은 물을 바가지로 떠서 대근에게 뿌리기 시작했다. 다리

는 모아진 채 흠칫거리더니 눈을 떴고, 떴다가 다시 감고 물을 뒤집어쓰면 또 눈을 떴다.

번 거듭되다가 박대근이 완전히 젖어버리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어 대고 나더니 부릅뜬 눈

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밑에서 이를 악물고 흥흥대면서 꺽돌이가 씹어서 말하였다.

"정신이 들었느냐? 무어 내 얼굴에 표적을 해준다구? 네놈이 다시는 해주 바닥에 발을 들

여놓지 못하도록 아예 무릎을 꺾어줄 테다. 그뿐야, 다신 칼질을 못하게 손가락 하나 남기지

않을거니까."

꺽돌이는 몽둥이를 들었다가 차마 아까웠는지, 그것을 내던지고 나서 맨주먹이 되었다.

"어이, 줄 좀 낮춰줘."

줄이 풀려지자 대근의 발이 땅에 한 치쯘 남기고 뜰 만한 높이가 되었다. 꺽돌이 힘껏 대

근의 아랫배를 쥐어박았다. 헉 하면서 허리가 휘청했다가 다시 꼿꼿해졌다. 꺽돌이 발을 들

어 대근의 옆구리를 호되게 걷어찼고 줄에 묶인 그의 몸이 팽그르르 돌아갔다. 상투를 잘렸

던 놈들이 뒤에서 차례를 내달라고 보챘다. 막개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이놈들아 개는 천천히 두드려패서 잡을수록 고기맛이 나는 게야. 밤새껏 두드려서 말랑

말랑하게 된 연후에 우리게서 쫓아내버려라. 주내방서 하던 그대루 시행해야지."

둘러섰던 자들이 와르르 웃었다.

"꼭 그대루라면 잊은 것이 있소이다."

"무엇이냐?"

", 계집의 월경서답 말이우."

다시 한번 폭소가 터졌다.

"그래, 창기년들께 가서 얻어오너라."

축 늘어진 채 묶여 있는 박대근을 둘러싼 자들이 목청을 합쳐 폭소를 터뜨렸다.

"제일 묵을 걸루 얻어와라."

"계집의 밑씻개를 주둥아리에 처박으면 삼 년 횡재한다더라."

"그놈 오늘밤에 운수대통이로다."

막개가 좌중을 제지하고 나서, "고개를 들도록 해주지." 하고 조용히 말했다. 졸개들이 달

려들어 몽둥이로 박대근의 턱밑을 치받쳐올렸다.

"이제부터 너희 송상패의 버릇을 가르칠 텐데..... 다시는 해주에 얼씬거릴 생각을 마라.

산 쪽으루 가든지, 직접 평양으루 올라가든지 다 좋은데, 해주에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가

르쳐주겠다."

막개가 말하는 동안 완전히 정신을 차린 박대근이 부릅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웃통

을 벗어버린 꺽돌이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 가슴을 부풀리며 뛰어나왔고, 기방에 나갔던 자

가 계집 월경대를 손가락 끝에 걸치듯 들고서 달려 들어왔다.

"농 밑에 처박힌 걸 끌어내느라구 혼났네. 한 보름은 묵었을 게야."

"이리 줘. 내가 저놈 아가리에 틀어박을 테니..."

꺽돌이가 그것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돌리며 버둥대는 박대근의 앞으로 다가섰고, 허공에

떠 있던 대근의 다리가 간격을 맞추어 솟구치면서 꺽돌의 면상을 걷어찼다.

"어이쿠!" 꺽돌이 뒤로 폴싹 주저앉았는데 턱주가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무엇들 하느냐."

몇은 꺽돌을 부축해 올렸고, 막개가 그들의 앞으로 몽둥이를 던져주었다. 꺽돌이 터진 입

술을 소매로 쓱 닦아내고서 일어나면서 집어든 몽둥이로 박대근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그리

고는 미친 듯이 등이며 가슴을 난타질했다. 박대근은 이를 악물고 간간이 신음소리를 내면

서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막개가 뒤에서 꺽돌의 몽둥이를 빼앗았다.

"성급히 굴지 마라."

"아주 때려 죽여버릴 테유."

"주린 놈이 체하는 게야. 범은 아주 천천히 노려가며 조반을 든단 말일세."

막개는 몸소 물동이를 들어 박대근의 머리서부터 들이부었다. 대근이 몸서리를 치면서 떨구

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맹수처럼 이빨사이로 으르렁거렸다.

"내가 살아만 나간다면..... 너희들을 그냥 두진 않으리라!'

"허 그놈 참 담대한 놈일세."

"그 담을 쥐새끼 불알만큼 만들어줄 테니 염려 마시게."

"두 발 묶어라. 이제부터는 답교맛이 어떤가 즐기라구."

완강하게 두 다리를 휘젓는 대근의 배를 몽둥이로 힘껏 내지른 꺽돌과 상투 잘린 자들이

달려들어 두 다리를 묶었다. 그리고는 줄을 늦추어 다리 사이에 몽둥이를 바깥쪽으로 돌리

고 비틀었다. 악물린 대근의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가 실신할 듯하면 머리

를 뒤로 잡아당겨 휘게 하고서 두 놈이 번갈아가며 무릎과 몽둥이를 차례로 밟으며 널을 뛰

었다. 이러한 악형이 동틀 무렵까지 계속되어 박대근이는 완전히 기를 잃고 빈 자루처럼 늘

어져버렸다. 몰골로 보기에도 그는 수개월 동안은 기동조차 못할 정도가 된 것 같았다. 꺽돌

의 벗은 몸은 땀으로 번질거리고 있었다. 그는 발길로 박대근이를 툭툭 건드려보았다.

"임가 모양 힘을 못 쓰게 아주 허리뼈를 분질러놓읍시다."

막개는 반대했다.

"아니여, 호랑이는 죽은 고기는 먹지 않는 법이다. 날이 샜으니 송상 패거리에게 내다 줘

. 다신 얼씬거리지 못할 테지. 그리고 다른 장사치들두 우리 용댕이를 깔보진 못할 테니

."

박대근이의 옷은 갈가리 찢어졌고 사이사이로 터진 상처와 말라붙은 피딱지가 보였다.

색은 검푸르게 죽어 있었는데 그들이 양쪽에서 끌어올렸으나 두 다리가 너덜너덜하여 땅에

질질 끌렸다. 막개가 말하였다.

"남의 눈에 띄겠구나. 타관 상인배들은 괜찮지만 결성골 사람들 눈에 띄면 인심을 잃는다.

거적에다 말아서 지고 가거라."

"이젠 그 문화 광대 패거리만 타작하면 우리 빚은 모두 갚게 됩니다."

"언제지?"

"관시놀이는 내일 저녁 모레 새벽까지입니다."

"다른 놈은 건드릴 필요가 없느니라. 기중에 제일 날랜 자가 누구인가?"

"....장씨 성을 가진 길산이라는 총각 광대 하나이 있는데, 권술도 잘하고 단검도 제법

휘두를 줄 안다 합니다."

"여럿이 패싸움을 벌일 게 아니라, 머리를 써서 잡을 생각들을 해둬라. 나두 내일은 생원

나리께 들어가 여쭤야겠다."

"이 정도면 소문은 제법 나겠지요?"

"그럴 게다. 용댕이 와서는 우리께 대적하기보다 타협하는 것이 낫다고들 여기겠지. 시골

장터의 조무래기 소악 패거리들과 다르게, 너희들두 함부로 날뛰지 말구 체통있게 처신들

하여라. 사람을 치는 일두 거듭되고 소문이 많아지면 자연 격이 떨어지는 것이야. .....

보기 싫은 것을 빨리 내다 버려라."

그들은 박대근이를 거적에 말아 어깨에 메고 결성골을 나섰다. 그들이 자주 객주 근처에

왔으나, 아무도 대근이의 행방을 염려하여 기다리는 자가 없었다. 화해술을 마시러 색주가에

갔으니 아무래도 밤을 새우고 돌아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용댕이 패거리들은 곤히 잠

든 송상패들의 방문을 요란하게 열고는 박대근이를 거적대기째로 던져넣어주면서 방안의 어

둠에다 대고 떠들었다.

"빨리 용당포에서 나가거라. 날 밝을 때까지 어슬렁대는 놈이 있다면 모조리 잡아서 이

꼴을 만들어주겠다."

"너희가 객주에 위탁한 화물에서 차액은 우리 동무 상투 잘린 값으로 제하여두겠다."

"아니...이게 무슨 끔찍한 변고요!"

방금 잠에서 깨어난 보부상과 차인들은, 헤쳐진 거적 위에 벌렁 나자빠져 혼절한 자기네

행수를 보자 우르르 모여들었다. 회계 차인이 박대근이의 코에 귀를 바짝 들이대고 숨이 붙

어있는가를 확인하였다. 전혀 낌새가 없는 듯하여, 그는 다시 대근의 가슴에 머리를 얹었다

가 재빨리 고개를 들고 제 동료들에게 다급하게 말하였다.

"아직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수. 회생시켜봅시다."

"아니우, 그자들의 말을 못 들었수? 해가 뜨기 전에 용댕이서 나가라는 게요/."

"그러면 성내를 채 못 가서 행수 어른은 숨이 끊길지두 모르오. 우선 손쉬운 대로 회생이

나 시킵시다. 그렇지, 분탕을 끓여서 흘려 넣어주면 되겠네."

차인 한 사람이 마개를 단단히 막은 호리병을 들고 뒷간으로 달려갔다. 그는 줄에 맨 호

리병을 푹 담가서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건져냈다. 병 속에는 맑은 분수가 고여 있었는데,

기에 계란과 화주를 섞어 휘저은 다음에 박대근이의 입을 벌려 흘려 넣었다. 분탕이란 원래

심한 타박상을 입은 경우에 응급처치로 쓰게 되는 처방이었다. 차인들은 둘러앉아 박대근의

가슴과 배를 문지르고 고개를 뒤로 젖혀놓았다. 한참 뒤에 호흡이 터지면서 신음소리가 들

려오기 시작하였다. 박대근이 회생한 것이다.

", 모두들 짐을 챙겨서 여길 떠납시다."

"우선 의원을 보여야 할 텐데...."

"안되여. 의원을 보이려면 성내루 들어가야겠으나, 주내방 패거리들이 보면 우리를 그냥

두지는 않을 걸세. 그보다도 박행수를 잘 아는 분이 수양산 정각사에 주지로 계신데, 몇이

가서 도움을 청하세. 행수 어른은 거기서 정양토록 해놓고 우리는 바삐 송도루 가야허네."

차인들은 박대근이를 데리고 가서 곁에 시중들 사람들을 정하고서 용댕이 객주를 떠났다.

그들이 성내에 들러 의원에게서 고약치료를 받게 한 뒤에 수양산에 오른 것은 한낮이 기울

어서였다. 정각사 주지수님과 박대근이는 한고향 사람이었고, 대근이 장삿길에 해주를 지나

게 되면 꼭 한번씩은 들러 만나거나 밤새워 얘기하고는 헤어지는 사이였다. 절에서는 깨끗

한 방을 치워 내주고 상좌승까지 붙여주어 시중에 불편이 없도록 해주었다. 고약을 붙였건

만 대근의 몸은 퉁퉁 부어올랐다. 열기 때문에 입술이 새카맣게 말라붙어 있었다. 눈을 뜬

대근이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한참이나 생각중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내게 귀한 약속이 있는데......어기지 않도록 도와주게."

"무슨 약속이신지요. 저희가 전하고 오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용당포 어계방에서 문화 장총각과 이총각네 사람들은 만나기루 했었네.

마도 그 사람들은 이런 일을 모를 것이니....잘못했다간...나처럼 크게 당할 게란 말일세. 누가

달려가서 주내방 앞 사거리를 지키구 섰다가, 용당포로 나가는 문화 재인들에게 사실을 알

려주고 두 사람을 내게 데려오게."

", 착오 없이 시행하리다."

차인이 나는 듯이 산을 내려가 주내방 쪽으로 나갔다. 과연 명일이 관시일이어서 해주의

장사치들은 물론이고 여러 지방 행상과 객주, 점주들이 거래를 트고 물건도 구입하려고 몰

려왔고, 남촌 서촌의 비렁질하는 각설이도 모두 모여들고, 한량들이나 구경하는 좋아하는 총

각들이 들끓고 있었다. 이런 혼잡 가운데서 차인은 길 위에 벌여놓은 노천 주막에 앉아 탁

주를 마시며 문화 광대 패거리를 기다렸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는 주내방 사거리에 곳곳마

다 색등이 켜지고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거리굿을 벌일 참인지 사거리 가운데 제단이 차

려지고 있었다. 차인이 그쪽으로 주의를 돌리고 섰는데 누군가가 곁을 지나다가 그의 어깨

를 치면서 말하였다.

"이거 박행수 수하 차인 아니시우?"

차인이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문화 광대 중에서 낯을 익힌 사람이었다. 차인은 반가운

김에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장총각이 지금 어디에 계슈?"

차인이 낯익은 문화 재인말의 광대를 붙잡고 물었다. 광대는 뒤편에 울레줄레 섰는 자기

패거리들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큰돌네 패요. 길산네 패는 아마도 돌다리께에 있을거요. 말고개에서 만나 함께 점

심을 지어 먹었으니까. 인제 관시놀이가 시작되면 이곳 주내방 사거리루 내려올 거외다."

"혹시 용당포루 나가지 않았겠수. 우리네와 거기 선창서 만나기루 했었은데...."

"그렇더라도 틀림없이 주내방은 거쳐가야 할 게요. 길이 이곳뿐이니."

"연희장 근처서 기다리면 꼭 만나지겠구먼."

차인은 재인말의 큰돌네 패를 따라 연희장 근처에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점포의 주인들

이 돈을 거두어 놀이터와 청과 자리를 만들어놓고서 주변에 간이 주점을 개설하여 놓았다.

사방에서 인파가 밀려들고 있었다. 강령이나 배천에서 올라온 다른 파의 광대들고 있었고,

양주에서도 두어 패 내려온 것 같았다. 그리고 전국의 장터를 찾아 떠도는 거사패와 괴뢰패

들도 끼여 있어서, 장터에는 울긋불긋한 광대들의 연희옷으로 가득 메워졌다. 그들은 밀려드

는 대로 주최하는 점주들의 대표에게 참가를 알리고 미리 행하를 타내었다.

어두워지면 해주의 개시를 기념하기 위한 흐드러진 잔치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박대근이

의 차인이 그때에 인파의 혼잡 속을 헤치며 다가오고 있는 기다란 청기의 글자를 알아보았

. 앞장서서 기를 들고 오는 것은 분명히 덩치가 커다란 이갑송이었다. 그들은 요란하게 풍

악을 잡히면서 연희장으로 오고 있었다. 차인은 구경꾼들의 어깨를 젖히며 가운데로 뚫고

나아갔다. 패랭이에 통장고를 메고 짓치며 지나가는 길산의 모습을 보자 다짜고짜로 장고채

를 잡은 길산의 소매를 붙잡았다.

"여보 장총각, 일이 났소."

길산이 곧 그 차인을 알아보고 행렬에서 비켜서며 말하였다.

"왠일이우. 우린 여기서 연회 순서를 알아보고 용당포에 다녀오려든 참인데."

"용당포엔 아예 가지두 마우. 댁네들이 송화 무더리 장터에서 혼을 내주었던 무뢰배들이

쫙 깔렸습디다."

"대근이 성님은 어디 계시우?"

차인이 주먹으로 눈물을 씻어내면서 말하였다.

"그놈들께 얻어맞아 초주검이 되셨소이다. 시방 수양산 정각사에 누워 계시는데 한 두어

달은 기동을 못하실 것 같소."

길산은 침울한 낯으로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좀 기다리슈. 내 갑송이를 데리구 오리다."

길산이는 언제 상투를 올렸는지, 패랭이 아래쪽의 머리 뒤꼭지가 위로 틀어져 올라가 있

었다. 길산이 갑송이를 불러 뭔가 속삭이자 갑송이가 먼저 바삐 뛰어왔다.

"대근이 성님이 다쳤다구? 어디우, 그놈들이 누구냔 말요?"

"용당포 객주와 선창에 있는 놈들입니다."

"당장 달려가서 모조리 밟아 죽여버릴 테요." 하며 씨근대는 것을 길산이 팔을 붙잡고 조

용히 눌러놓았다.

"우선 대근이 성님부터 만나보구 자초지종을 들어보자. 그 뒤에 놈들을 찾아가두 늦진 않

을 게다."

"들어보구 자시구 할 거 없다."

"대근이 성님이라구 그렇게 생각없이 당하기만 했을 리 있겠냐? 여긴 대처야, 시골 읍내

하군 다르다. 만사 조심하지 않았다간 관밥이나 먹게 된다."

길산은 투덜대는 갑송이를 달랜 뒤에 차인을 따라 수양산으로 올라갔다. 정각상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밤이 깊어 보름달이 산머리로 훤히 솟아올라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객방의 문이 열리며 대근을 간호하던 차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장총각 모시구 오나?"

", 이 총각두 오시네."

"아이구 어서들 오시우. 여태 기다리시다가 지금 막 잠이 드셨소."

갑송이 짚신을 후닥닥 팽개치듯 벗어던지며 방안으로 뛰어들더니, 삭신을 못 쓰고 누운

채 퉁퉁 부어오른 환자를 대하고는 곧 목을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에그 성님, 이게 무슨 변고유. 다 죽게 되었구려."

길산이 다가앉아 박대근의 손을 잡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과연 세 사람이 정이 남달리

두터워진 게 확연하였다. 박대근이는 겨우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따라서 흘린

눈물이 베겟잇을 적신다.

"내가 어리석을 탓으로 아우님들게 걱정을 끼치나 보우."

길산이 부어오른 박대근이의 몸을 만지면서 물었다.

"어째....의원은 보이셨습니까?"

"음 한 두어 달 기동하지 말구 누워 지내랍디다. 이곳 주승이 나와 잘 아는 사이인데 제

법 의술을 아는 모양이오. 교꾼을 세내어서라도 어서 송도루 돌아가야 할 형편이나, 아우님

들 일이 걱정이 되어 미루고 있었소."

"저희들이야 별일 있겠습니까. 타관 병환에 수심이 깊더라고, 어서 송도루 가셔서 정양하

셔야지요."

"아니도, 신복동이네 패들이 해주 바닥에 온통 깔렸는데, 벼르고 있습디다. 관시놀이에는

나가지 말구 나하구 함께 한 닷새 여기 머물렸다가 내 부기가 좀 빠지면 송도루 갑시다.

대 물주에 관해서두 우리 배대인과 의논할 겸...."

갑송이가 큰 소리로 말하였다.

"아니우, 성님이 이 꼴이 되었는데 형제지의를 맺은 우리가 꼬리를 감추고 내뺄 수야 없

습니다. 신가놈들을 모조리 잡아 다리 몽갱이를 꺾어놓을랍니다."

길산이도 곧 맞받았다.

"해주는 대처입니다. 신복동이 외에도 다른 상인들이 많이 있을 테고, 감영에 줄을 앗긴

자들의 원망이 드높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관시놀이라면 각처의 장사치 행상이 모이는 법

인데, 그들 가운데서 신복동이 패거리가 우리들게 혼찌검이 났단 소문이 돌면 모두 통쾌히

여길 것입니다. 그냥 물러난다면 다른 데서 난전을 트기에도 어려워질지 모르지요."

"글쎄 나두 아우님의 생각과 같으나, 저들의 수가 워낙 많은데다 남의 터에 들어와놓고

보니 섣불리 손을 쓸 수도 없게 되었구려. 더구나 그전에는 우리네가 임유학의 패와 가까이

지냈더니, 그들이 함정에 빠져 패가한 뒤로 신씨 여각에서 득세하여, 송상 알기를 술청 바닥

의 술찌끼 정도로나 대하려 하오. 우대용이라구 의기있는 장정이 있었건만 시방은 옥에 갇

혀 언제 죽을지두 모르오. 겨우 손을 써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또한 아우님들까지 일을

벌이면 이제 무슨 사단이 일어날지 모르겠구려. 정면으루 대적했다가는 감영의 규찰에 걸려

들 것이니, 해주 무뢰배를 징치하였음을 세간에서 알도록 하면 될 것이오."

박대근의 말을 듣고 나서 길산이 안을 내었다.

"저들이 우릴 별러 왔다면, 틀림없이 오늘 사거리 장터를 지키겠지요. 우리는 관시놀이에

나가지 않을랍니다. 그 대신 용당포로 스며들어 그 막개라는 자가 있다는 색주가를 습격하

지요."

"아니....기왕에 저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려면 아예 주내방의 신복동이네 집을 찍는

게 나으리다."

"그렇겠군. 신복동이를 잡아 사람이 없는 산속에 끌어다 놓고 치죄하여 벌한 뒤에, 읍내에

다 광을 퍼뜨리고 달아나면 되겠군요."

"그게 좋은 생각이오!"

그들이 신씨 여각을 들이칠 공론들을 한 뒤에 나서려는데, 박대근이 간신히 상체를 일으

키려다 자지러지는 신음만을 발하고 다시 쓰러졌다.

"일을 끝낸 다음에 이리루 오겠소. 교꾼을 세낼 거 없이, 우리가 짊어지구 송도까지 모셔

드리리다."

"아우님들 조심하우. 특히 사거리 연희장 부근에는 얼씬두 마우."

"제게 다 생각이 있습니다."

길산이 나올 적에 그들을 데려왔던 차인을 불러내어 당부하였다.

"우리는 사거리루 가지 않구 여각으루 갈 터이니, 댁은 우리 패거리께 사정을 전하고,

일 새벽에 모두들 데리구 연안 가는 길루 나가서 기다려주시우."

", 행수 어른께 여쭙고 그렇게 하리다."

길산이와 갑송이는 악기 등속이 든 짐을 정각사에 벗어두었다. 그들은 만일의 경우를 생

각하여 짐 속에서 반 팔 길이의 짜른 칼과 오줌독에서 두어 해 묵었음직한 단단한 참나무

몽치를 제각기 찾아들고 수양산을 내려왔다. 그들은 돌다리께서 주내방 사거리로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막바로 근양문 앞을 돌아 순명문 쪽으로 질러 가는 길로 돌아섰다. 순명문 앞

의 객주거리에 신씨 여각과 집이 잇달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둘 다 의관을 벗어버리고

간편하게 바지 저고리에 행전을 단단히 치고서, 주막에 들어가 요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

었다. 마당의 평상 위에 않았으려니, 맞은편으로 신생원네 솟을 대문이 빤히 건너다보였다.

장정들이 들락거리고 잠시 후에 사인교가 세 채나 나와서 관시놀이가 벌어질 사거리 쪽으로

올라갔다. 순명문 앞은 비교적 한산해져 있었다. 모두들 사거리에 구경나간 모양이었다.

생원네서도 하인배들과 아녀자까지 구경 나가는 눈치였다. 말 끄는 구종배와 호위 둘을 거

느린 생원이 솟을 대문 앞에 이르렀다. 아마도 감영에 들어가 비장붙이들과 교제하다가 저

녁을 먹으려고 들른 모양이었다. 갑송이가 일어서려는 것을 길산이 잡아 앉혔다.

"왜 그래, 지금 덮치지 못하면 저놈은 곧 나와서 관시놀이 구경 갈텐데."

"아니다, 남의 눈에 띄면 득달같이 졸개들이 달려올 테니, 우리가 안방으로 따라 들어가는

게야."

"지금 곧 가야 한다니까."

"좀더 한산해지길 기다리자."

그들은 탁주를 두어 되 나누어 마시고 나서, 주막을 나왔다. 여각 앞은 보다 더 한산해져

있었다.

길산이와 갑송이는 솟을대문 앞에 서서 잠깐 망설이고 있었다. 갑송이가 속삭였다.

"문을 왈칵 밀어붙이며, 까짓 빗장은 부러져버릴 게야. 어때, 대문을 부시구 드어갈까?"

"가만있어." 하며 갑송이를 제지하고 나서, 길산이 목청을 돋워 외쳤다.

"이리 오너라!"

그러나 문 안은 괴괴하였다. 다시 한번 길산이가 크게 찾으니, 그제서야 툴툴대는 소리와

함께 문 앞으로 인기적이 다가와 목소리만 들렸다.

"뉘시우?"

"급하오, 이 댁에서 송도루 놓았던 방자 도착이오."

제놈이 서신 연락 다니는 방자란 말에 의심없이 삐끄덩 문을 여는데 빗장이 풀리자마자

두 장한이 왈칵 밀며 들어섰다. 소리지를 새도 없이 갑송이의 주먹이 아랫배를 쥐어박았고,

욱 하며 꺽인 놈의 뒤통수를 다시 한번 박으니 날벼락에 썩은 솔나무 부러지듯 앞으로 꼬라

박힌다. 길산은 다시 조용하게 대문 빗장을 걸어 잠그고, 갑송이가 넘어진 놈을 질질 끌어다

가 행랑채의 기다란 툇마루 아래 굴려 넣었다. 그들은 재빨리 양쪽으로 갈라섰다. 길산은 대

문 오른편으로 나가 중문을 엿보며 섰고 갑송이는 행랑채를 돌아 바깥 사랑마당을 건너갔

. 갑송이가 방들이 연달아 붙은 사랑채를 살피고 나서 아무도 없다는 시늉으로 손을 내저

어 보였다. 사랑방 뒤로는 잇닿은 누마루가 안채 부엌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인기척 소리

가 들리자 갑송이가 먼저 사랑채 툇마루 아래 숨었고, 길산이는 젖혀진 중문 뒤로 뛰어들어

몸을 감추었다. 하인 두 사람이 후원 별당에서 나와 바깥마당을 지나고 중문을 통과했다.

산이 나와 마루 밑에서 기어나온 갑송이에게 별당 쪽을 가리켜 보이고, 자기는 종문 안쪽을

손짓하였다. 갑송이가 별당 문 안으로 사라졌다. 길산은 중문에 들어서서 한눈에 대청 툇마

루에 잇대어진 세 칸의 광을 바라고 잽싸게 뛰었다. 그는 건넌방 툇마루에 가장 가까운 끝

엣광 속에 잠깐 숨어 있었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계집종 두 년이 부엌에 있었고 사환비인

듯 싶은 계집아이가 숭늉을 받쳐들고 안방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중치막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안방에서 저녁을 끝낸 신복동이가 담배라도 한죽 태우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사환비가 부엌으로 들어갈 때를 기다렸다. 계집아이가 빈 쟁반을 들고 섬돌을 내려 부

엌으로 들어갔다. 저희끼리 무슨 재담이라도 나눴던지 재깔대며 웃을 즈음에 길산은 고양이

걸음으로 툇마루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발을 끌면서 연달아 붙은 두 칸의 방 앞을 지나 대

청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만일 누군가 중문에 들어서든가, 안마당을 지난다면 길산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길산이는 주저하지 않고 안방의 미닫이를 싸악 열면서

뛰어들었다. 한 손으로는 품 안의 단검을 빼어들며 다른 손으로 뒤의 미닫이를 닫았다.

"왠놈이냐?"

장죽을 떨어뜨리며 보료 위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신복동이가 외쳤다. 그의 아내가 입을

딱 벌리고 질린 얼굴로 방구석에 쫓겨갔다. 물린 밥상을 살짝 건너뛴 길산은 일어나려는 신

가의 상투를 잡아 뒤로 당겼고, 팽팽해진 목줄기에 차가운 칼날을 대며 힘주어 속삭였다.

"꿈쩍하면 모가지를 도릴 테다."

"으으....., 누구냐?"

사지에서 힘을 쭈욱 빼내고 겁에 질려 흰창이 드러난 눈알을 위로 치뜨면서 신가가 중얼

거렸다. 신가 여편네가 방구석에서 떨고 섰는데 언제 소리를 지를지 몰라, 길산이가 오금을

박아 놓는다.

"찍짹 소리 했단 봐라, 네 서방의 모가지는 기우젯날 돈생원 꼴이 될 터이다. 이불을 내려

. 어섯!"

아낙이 와들거리며 이불을 내렸고 길산은 신가의 상투를 잡아 끌어 일으켜 세웠다. 아낙

네가 다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이불자락을 움켜쥐고 앉았을 때, 길산이 다시 속삭였다.

"부엌에 있는 년들은 모두 관시놀이 구경에 내보내라. 딴소리 하면 칼 들어간다."

신가 여편네가 입술을 달싹여보았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기는커녕 깔딱하는 딸꾹질이 대신

솟구쳤다. 길산이 신가의 상투를 더욱 팽팽히 당기면서 칼날을 곧추세워서 지그시 눌러대니,

신복동이가 참지 못하여 이빨 새로 다급하게 내뱉었다.

"이년아, 빨리 부르라는데 뭣하구 섰니."

"이애.........자근년이야, 자자..자근년이야!"

기척이 들리며 마루 아래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님 불러 계시와요?"

"........"

"마님 어디 불편하셔요?"

"....아니다. 느이들 사거리 저자 나가서 구....경하구 오너라."

"아이 정말이어요? 그럼 쇤네들 바삐 다녀오겠습니다."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그동안 좀이 쑤셔 안달하던 종년들이 말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

게 재잘거리며 중문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길산이 신가를 잡은 채 미닫이를 열고 동정을 살피고 나서 후원 쪽을 향하여 날카로운 휘

파람을 날렸다. 이미 별당을 샅샅이 뒤져보고 나서 안채를 살피고 있던 갑송이가 부엌 옆의

문을 밀치고 들어와 안방으로 다가왔다. 길산이 턱짓으로 여자 쪽을 가리켰다.

"홑청을 뜯어 저 아씨마님을 잘 모셔라."

갑송이가 이불 홑청을 좔좔 뜯어낸 뒤에 끝을 주욱 찢어서 아낙의 손발을 묶었다. 그리곤

발에서 버선을 벗겨서 입에다 틀어박았다.

"한숨 푹 자구 나면 몸에 아주 이로울 게요."

갑송이는 묶인 여자 위에 이불을 들씌워놓았고, 신가를 묶기 시작했다. 역시 남은 버선 한

짝을 입에 틀어넣으려는데 신가가 부르짖었다.

"어디....두고 보자!"

"두구 봐야 똥 쌀 놈은 바루 자네여, 자아 한대 잡수시게."

갑송이는 퍽하며 배지를 쥐어박아 몸에서 기력을 뽑아놓은 다음, 축늘어진 신복동이를 남은

홑청에 둘둘 말아 어깨에 짊어졌다.

", 별당 뒷문으로 나가자."

"별당엔 누가 없든?"

"애새끼들뿐이여."

그들은 잠깐 마당을 살펴본 뒤에 부엌 옆문을 지나 별당으로 들어섰는데, 그때에 하인 서

넛이 짐바리를 메고 안채의 광으로 운반해갔다.

"들킬라. 빨리 나가자."

그들은 후원 나무숲으로 해서 뒷문에 닿았다. 뒷문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걸쇠에

걸리 자물통이 녹이 꺼끌꺼끌하게 슬어 있었다. 불빛이 훤한 별당 쪽에서는 아이들의 글 읽

는 소리며 늙은이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길산은 자물통을 잡아 비틀었고, 붕어자물통이 걸

쇠째로 나무에서 뽑혀 나왔다. 그들은 인적이 전혀 없는 뒷담 아래서 다시 집안의 동정을

살피고서 곧장 순명문을 왼쪽으로 멀지감치 우회하여 노인정을 바라고 뛰었다. 해주성을 돌

아 수양산 기슭에 닿기 위해서였다.

놀이판이 벌어진 사거리 저자 한 가운데서 높다란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장작불뿐만

아니라 구경꾼들이 저마다 들고 나온 발등거리로 해서 주위는 대낮처럼 밝았다. 탈광대들의

탈판이 끝나고 사이사이에 거사패들이 나와서 근두질이라든가 어름을 탔다. 이미 문화큰돌

네 패와 길산네 패는 연회를 포기하고 저자에서 빠져나간 뒤였다. 즐비한 초가의 간이 주막

마다 손님들로 들끓었고. 자릿세를 미리 내고 놀이판을 겹겹으로 싸고 둘러앉은 구경꾼들도

주막에서 날라온 술과 안주로 서서히 취해가고 있었다. 주내방 패거리들은 돌다리서 오는

길목과 적동방서 오는 길목, 그리고 근양문에서 순명문으로 가는 길이 합쳐지는 쌍머리고개

앞을 제방 쌓듯 막아놓고서, 막개와 꺽돌이가 패를 나우어 사거리 주막과 저자 속을 뒤져냈

. 그러나 문화 길산네 패는 이미 씨알머리도 없었다. 막개가 놀이판 뒤의 개복청을 턱짓하

면서 꺽돌이께 지시했다.

"저자들은 어디냐?"

"강령패들입니다."

"지금 나가 노는 것을은....?"

"창하는 계집들이 있으니.....거사패가 분명하우."

"강령패에서 한놈 데려오너라."

꺽돌의 졸개들이 달려가 영문을 모르는 중년의 광대 하나를 멱살 잡아 끌고 왔다."

"페엣 페페페! 무슨 일이 생겼쉐가? 이 양반들이 뒤 한번 달라구 이러나....이 몸은 오늘

아침에 왕고추 반찬으로 먹구 나온 사람이니 페엣 페페, 아예 후장 딸 생각은 마슈."

탈박을 쓴 채로 엮어내리는 광대의 사설이 제법 약을 올릴 만하다. 그러나 막개는 빙글대

면서 말하였다.

"끼놈, 뉘 앞에서 패설을 씹느냐. 평생 뒤만 대주다가 오장이 썩더니 주둥이까지 진물렀구

."

"? 아닌뎁쇼......소인은 워낙에 맵고 신 음식을 좋아하와 암동모는 못 되옵고 주로 수동

모가 되었삽기, 이제 나리를 뵈온즉 그 수염이 깊고 울창하와 문득 소인이 귀빠지던 일이

생각나옵니다."

"이놈 봐라. 음담은 좋다마는 남의 입을 들어 욕을 하는구나."

막개가 서슴지 않고 광대의 낭심을 올려차니 광대가 겅중겅중 뛰면서 죽는 소리를 내질렀

.

"탈박을 벗어라."

급한 중에도 매맞을 일이 두려워 광대가 탈박을 머리 위로 젖히자,

"문화놈들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물었는데, 본성은 잃지 말더라고 대답이 또한 재담이

.

"어디 있긴 어디 있습니까요. 용궁 선봉장으루 서해 용왕님을 모시구 있다가 엊저녁에 냉

큼 낚시에 걸려 저어기 사거리 주막집 초장 속에 담겨 있지요."

꺽돌이가 다시 광대의 궁둥이를 호되게 걷어찼다.

"페잇, 페페페......아이구 아파, 문어가 어딨냐니 대답이야 분명하지요."

"이놈아 귓구멍이 뚫렸으면 잘 새겨 들어라. 문화 광대 패거리들이 아무도 뵈질 않으니

모두 어디로 갔느냔 말이다."

", 천성이 길을 좋아하아 비럭질 석삼 년에 한뎃잠 자기와, 가는 곳마다 욕을 먹고 매를

맞아, 약하고 천한 백성이 느느니 조동아리 살뿐이올시다. 허니......볼따구니에 재담살만 불어

나고 이빨은 튼튼치 못하와 잘 새기질 못합니다."

광대의 능청은 매를 가지고도 어쩔 수가 없어서 막개도 중치막 자락을 젖히고 엽전 두 푼

을 꺼내어 던졌다.

"허는 수 없는 손이로다. , 이젠 얘기하겠느냐?"

"무얼 말씸이우?"

"길산네 패 말이다."

"오오, 구월산 아래 사는 아이들 말이웨까? 벌써 땅거미 어름에 여기서 떠났소이다."

"가만있자......"

주춤거리던 막개가 그제서야 제 이마를 찰싹 두드리더니, "아뿔사!" 그는 자기패에게 당황

한 어조로 외첬다.

"모두들 생원 어른 댁에 가보자."

그들이 사거리를 빠져나와 주내방 쪽으로 몰려 가는데, 벌써 두어 놈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오는 중이다. 막개가 짐작하고 그 자리에 서버렸다.

"집에 ...... 집에 화적이 들어......"

"나리가 어찌됐느냐?"

"나리께서는......잡혀가셨습니다."

막개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느 길로 쫓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해주

는 사방으로 길이 통하는 물길 가운데 뜬 편주와도 같은 대처였다. 신천, 송화, 장연, 옹진,

강령, 재령 등의 읍이 모두 주위에 접해 있었다. 그는 하인들에게 우선 떠오르는 대로 지시

하였다.

"이 길로 감영에 들어가 고하여라. 화적이 들어 나리가 인질이 되었으니 영병을 모조리

동원시텨서 잡아달라 아뢰어라."

막개는 꺽돌이에게 말하였다.

"너는 사거리 목을 지키구 섰는 아이들을 풀어 길산네 광대패가 어디루 지났는가를 보았

다는 자들을 찾아내어라. 만일에 자시가 지날 때까지 방향도 못 잡아내면 너의 신근을 잘라

버릴 터이다. 알겠는가?"

꺽돌이 정말루 뿌리가 빠진 놈처럼 황황히 달아났다. 막개가 그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쳤

.

"종적을 잡은 즉시 순명문 앞에 모여서 대기하여라."

막개는 한달음에 객사를 지나 동헌을 바라고 뛰다가 구슬상모에 철릭을 입고 환도를 차고

훈련원서 나오는 병방 비장과 부딪쳤다.

"나으리, 어디 가십니까?"

"이 사람아, 자네 어른 댁을 대적이 범했다네. 목을 잘라 갔다면서? 사또께 현신하고 포졸

을 풀 모양일세."

이리 수작하며 동헌에 닿으니, 벌써 부용당에 밤놀이 나갔던 감사는 책방을 대신 보내어

포졸을 내어 각수요로하라는 영을 내린 뒤였다. 정병 오십여 인에 십여 명의 총포수까지 끼

였으니 화적이 관내에 들어와 사람을 납치해 갔다는 사실에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감영에

서는 우선 파발을 띄워 해주성 외곽의 파수 진장들께 길을 막도록 하고 나서, 남산에서 시

작하여 우이산 줄기와 그 맞은편 수양산 기슭을 수색해 나가기 시작했다.

해주서 바깥으로 나가는 요로마다 행인을 규찰하는 진이 있으되, 북으로 신천 가는 조화

골이요, 서쪽으로 장연, 옹진 길이 갈리는 영유벌 삼거리, 동으로 평산으로 빠지는 까치내와

남으로는 연안 가는 길의 돌장승백이 못 미쳐서 신구 감사가 갈리는 영송 지점인 우름내 등

등이었다. 순명문 앞에 모인 주내방 패거리들은 막개의 지휘에 따라 주내방 사거리에서 시

작하여 돌다리 쪽으로 짚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벙거지와 장한들이 이리저리로 휩쓸고 다닐

적에 이미 저자바닥에는 문화 길산네 패와 큰돌네 패가 사실은 화적떼와 작당하여 신복동이

를 죽였다는 소문이 번져가고 있었다.

주내방 패거리와 저자의 좌판장수들에게서 수소문을 할 적에, 초저녁에 문화 광대 패거리

들이 용댕이 쪽으로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성골 쪽으로는 나아가

지 않고 남산 가녘을 길게 우회하여 연안가는 길로 빠진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들이 우왕

좌왕하며 추적을 하는 사이에 시각은 이미 새벽이 되었으니 서둘러서 추이방 학밭거리로 내

달았다. 산속을 뒤지던 감영 군졸들도 통기를 받아 뒤이어서 남로를 향하였다. 막개가 거느

린 이십여 명의 신가네 장한들은 학밭거리 주막에서, 얼마 전에 광대패로 보이는 자들이 우

름내 해변을 따라 내려갔다는 얘기를 들어 더욱 추적을 재촉하였다.

한편 길산이와 갑송이는 수양산 아래턱에서 차인들의 들것에 들려 내려온 박대근이와 만

났다. 갑송이가 메고 있는 홑이불 속의 신가는 벌써 제정신이 들었는지 사지를 버르적거리

고 있었다. 갑송이가 꿈틀대는 신가를 어깨에서 땅바닥으로 몰인정하게 내비치면서 말했다.

"성님......쥐새끼를 잡아왔수."

박대근이는 나뭇가지에 줄을 엮은 들것에 꼼짝도 못하고 누운 채 목 쉰 소리로 대답했다.

"어서 그 보를 풀으시게."

갑송이가 홑청을 훌떡 벗겼으나, 신가는 맨상투를 사타구니에 처박고 고개를 들어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네놈을 징계하리라."

길산이 말했고, 갑송이는 벌써부터 매를 고르느라고 이 가지 저 가지를 꺾으며 부산을 떨

었다. 신복동이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어둠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살피려 애쓰면서 떨리

는 목소리로 물었다.

"댁들은......뉘시길래! 나허구 무슨 웬수가 졌다구 이러는 거요?"

박대근이 누워서 그를 바라보면서 나직하게 웃었다.

"우린 천한 백성이다. 일찍이 네놈들의 악행을 들었으되, 썩은 관리들의 비호로 징치할 바

가 없더니 이제야 기회가 온 모양이로구나. 이제 네 죄를 말할 터이니 들어보아라. 원래 재

물이란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모으는 것이니, 물건을 사거나 바꾸는 일에서 정당할 일이요,

또한 작은 이를 골고루 나누고 나머지를 모아야만 실로 하늘의 뜻에 합당한 재물이 되는 것

이다. 남에게서 훔치지 않고 남에게서 빼앗지 않으며 남을 속이지 않을뿐더러 나아가서는

그것이 여럿을 위하여 쓰여짐이 가하다. 무릇 장사치라는 것은 애초부터 농공의 아래로 가

장 천역인데, 그것은 생산이 근본이요 교역은 그를 돕는 일일 뿐이기 때문이어서 성현이 정

한 바이다. 그러나 이제 시세가 재화를 중히 여기게 되어 반상을 막론하고 상업에 종사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재물이란 소리를 모아 대리를 이루는 것이니, 장사치는

민생의 근본이 되는 생산을 돕는 일임을 스스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는 지방 장시를

횡행하며 가난한 백성의 산물을 위협으로 침탈하였으니 그 축재의 그릇됨이 첫째이다.

상업이 성행하는 것은 물화가 풍부하게 생산됨에 있고, 물화가 무성히 되는 것은 관이 깨

끗하여 백성의 생활을 보호함에 달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놈은 오히려 썩은 관리와

결탁하여 영세 행상들의 판로를 막고 혼자 저자를 독점하였으니 그 축재의 그릇됨이 둘째이

.

하늘이 사람을 낳으매 모두가 먹고 입는 것이 마련되어 있는 법인데, 물자를 만드는 일과

물자를 쓰는 일이 형평하다면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 천하의 법도이다. 장사를 하는데 민생

에 중한 물산은 그 이윤을 도모함을 너그러이 하며, 당화나 방물과 같은 사치품에 이를 넉

넉히 남겨 상도의 평정함을 추구할 일인즉, 너희 여각 객주에서 폭리하는 물산이 무엇이더

. 너 같은 간상배가 대저 물가를 비싸게 하는 장본인이다. 그러니 행상은 몇날 며칠을 돌

아다녀도 그 이윤으로 먹을 길이 막연하고 자연히 교역이 침체하여지는 것이니 아니냐.

리로써 네 혼자의 이윤만을 도모한 나머지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탐욕스런 부

자는 너희 상행위에 결탁하여 더욱 재화를 늘리니 네 재물의 그릇됨이 그 셋째이다.

그뿐이더냐. 재물을 여럿 사이에서 도적질하듯 빼앗아 권세를 사고 팔며 관에는 야비한

아첨으로 뇌물을 바쳐 국세를 좀먹고 관리를 타락시키며, 백성에게는 혹독하고 선행에는 침

을 뱉으니 네 놈 간상의 죄 무수하여 차례를 따지기도 어렵구나.

일찍이 요순시절에는 치세와 인심이 공히 순박하여 광물을 녹이고 바닷물을 쪄서 소금을

굽고, 물고기를 잡으며, 미역을 따고, 누에를 치며, 베를 짜고, 나무를 심어 과실을 거두고,

닭과 돼지를 치고,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들이 모두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민산은 하늘의

뜻 가운데 있었다. 이제 난세에 모든 사람의 도의가 혼란하여 비록 남의 물산으로 이윤을

도모한다 할지라도, 종내에는 그 이를 도와준 백성의 것으로 되돌려주어야 마땅할 것인즉,

내 이름없는 장사치로서 백성에게 돌려줄 자산을 모으려는 뜻을 품은 지 오래더니 너 같은

자를 죽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정한 대명률도 아닌즉 곤장이나 때리고 갈 터이니 달게

맞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아라."

낮게 그리고 위압적으로 줄줄 이야기하고 난 박대근이는 작대기를 네댓 개 꺾어 들고 있

는 갑송이에게 말했다.

"태 삼십만 치시오."

". 집장사령 시행하겠소."

말이 떨어지자 신복동이가 재빨리 기어서 멀찍이 피하는 것을 차인 둘이 달려와 팔과 두

다리를 내리눌렀다. 갑송이가 대근의 차근차근한 징계의 말에 자신이 더욱 생겨 제법 엄숙

한 기분으로 매를 날리기 시작했다. 길산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갑송이의 사정

없이 치는 매가 떨어질 적마다 신가는 자지러지는 고함을 쳤다.

"이놈아, 네 직접 맞아보니 기분이 어떠하냐? 아예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것이로되 인생

이 불쌍하여 곤장이나 몇대 치겠거늘 대장부답게 맞아라."

세엣, 네엣, 다섯 하면서 수를 헤아려나가다가 스물에 이르러 신가의 궁둥이가 터져버렸

. 매가 삼십에 가까워질수록 신가의 신음이 가냘프게 들렸다.

"이놈을 벌거벗겨 신평 사거리에다 묶어놓자. 남북을 오가는 행인들이 모두 보아줄 테니

."

매가 그치자 길산이 말했고, 모두들 그럴 듯이 여겨 수양산 아랫녘을 떠나 신평골 쪽으로

내려갔다. 사거리에 인가 몇채가 있었으나 모두 불이 꺼져서 캄캄하였다. 그들은 입을 틀어

막고 손발을 묶고 벌거벗긴 신가를 길가 버드나무 가지에 높다랗게 매달아 놓았다. 이제 날

이 밝아 해주 저자에서 사람들이 밀려나오면 이 해괴한 꼴을 볼 것이었다. 나무둥치에는 박

대근이 미리 써두었던 방을 붙였으되, 징치 해주간상무뢰배 신복동이라 쓰고 나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괴롭혀온 쥐새끼를 만인에 대신하여 징계하노라고 밝혔다. 그들은 신가를 길가

에 버려두고, 큰길을 피해서 들판을 따라 우름내 상류 쪽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앞에 길산이

가 나서고 두 사람의 차인이 메고 있는 들 것 위해 누운 박대근이와 맨 뒤에는 갑송이가 따

라왔다.

"모두들 우름내 상류 살여울로 모일 겁니다. 살여울을 건너 청태산 마루를 지나 삽다리까

지만 간다면 관군이나 주내방 일당을 걱정할 건 없겠지요."

길산이 말하자 박대근이가 들 것 위에 누운 채로 걱정하였다.

"신가놈을 혼내주어 마음이 후련하나, 틀림없이 감영이 발칵 뒤집혀 있을 거외다. 내 생각

으로는 두 분 아우님들과 함께 일단 정각사로 돌아가 한 달포 지냈다가, 잠잠해진 형편을

보아 송로로 가는 것이 나을 듯하우."

"아니우. 이왕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우리는 북관 쪽으로나 연희를 돌아야겠습니다. 명년

봄까지 광대 물주 일은 미뤄두십시다."

"우리가 연안까지 성님을 모셔다드리구 올라가겠습니다."

그들이 우름내에 가까워질수록 바다와 인접한 강변은 질퍽질퍽 빠지는 뻘밭과 수렁으로

변해갔다. 달이 져서 캄캄한데다 안개까지 자욱하여 사위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살여울이란

원래 바닥의 요철과 물의 경사가 급하여, 하류 쪽 바다로 내려가는 흐름이 빠르고 거칠뿐만

아니라, 물이 썰면 드러나는 바위가 많아 배도 다니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썰물 때에 얕은 물길에 익숙한 지방 사람들은 바짓가랑이를 걷고 건널 수가 있었다. 제일

깊어보았자 가슴께가 고작이었고 대개는 무릎 정도의 깊이로 얕아지는데, 물속의 깊은 웅덩

이가 곳곳에 있어 헛딛거나 미끄러지면 위험하였다. 또한 얕은 곳이라도 상류의 사태흙으로

이루어진 진수렁에 빠지면 기동을 못하고 익사하는 적이 있었다. 살여울의 양안은 흰 꽃을

달고 있는 갈대와 왕골이 사람의 키를 훨씬 넘도록 빽빽하게 자라나 있어서 안개와 어우러

져 음침한 풍경이었다. 강변에 나가서 수위를 살펴본 차인이 돌아와 아직 물때가 이르다고

알렸다. 그들은 갈대밭에 앉아서 물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거기서 만나기로 했던 길산네

광대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막개가 거느린 신가 패거리와 통기를 받고 수양산 쪽에서 급히 방향을 돌려온 포수를 포

함한 삼십여 명의 포졸들은 우름내를 향하여 몰려 들었다. 우름내나루에는 네 사람의 포졸

을 거느린 기찰군관이 있었다. 그들은 도사공의 초가 앞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무리에 얼이

빠진 모양이다. 지휘하던 별장이 말했다.

"파발을 받지 못했는가?"

"방금 받고 나루를 지키는 중이요."

"광대패가 이리로 왔을 텐데?"

"못 봤습니다."

"허수아비 같은 놈들......" 하고 나서 별장은 다시 물었다.

"분명히 밤늦게 배를 띄운 적이 없겠지?"

", 이와 같이 밤이면 배를 끌어다 땅 위에 엎어놓고 말뚝에 사슬을 끼워 쇠를 채워둡니

. 열쇠는 제가 관리하지요."

"그렇다면 강을 건너지 못했으니 이 부근에 있을 것이다. 관솔불을 밝혀 강가 아래위를

세세히 뒤져라."

도사공 집에서 횃불을 장만한 포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갯가에서 흩어졌다.

"나으리, 여깁니다."

한 포졸이 상류 쪽에서 외쳐서 별장은 그리로 달려갔다. 뻘흙이 발목에까지 푹푹 빠지는

곳이었다.

"저 보십시오. 발자국입니다."

훤히 비춰진 햇불빛으로 진흙 위에 어지럽게 찍혀진 여러 사람의 발자국이 보였다. 발자

국들은 곧게 상류를 향하여 계속되고 있었다. 별장이 말했다.

"자국이 선명하고 물이 고였으니 방금 지나간 것이다. 일대는 마른 땅을 택하여 질러가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발자국을 따라간다."

막개가 저희 패거리를 끌고 밭에서 나가 강변의 자갈길을 뛰어올라갔다. 불을 비춰든 포

졸의 뒤를 따라서 별장이 거느린 포졸들은 넓게 퍼져서 뻘밭 가운데로 찍혀진 발자국을 쫓

아갔다. 갯가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서너 걸음 떨어지면 곧 앞사람 자취를 잃어버리게 되므

로 별장이 군호를 정하였다. 물이 썰기 시작하여 새로 드러난 갯벌은 더욱 질척했으므로 행

군이 늦춰졌다. 어디선가 물을 차는 듯한 텀벙대는 소리가 들렸다.

", 무슨 소리가 들렸다."

별장이 나직이 말했고, 횃불의 뒤를 따르던 포졸들도 발을 멈추고 기다렷다. 앞의 어둠속

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뛰어가는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횃불을 꺼라. 도적들이 가까울 때 내가 소리치면, 포수들은 화약을 내어 터뜨려라. 화광

으로 포촉할 수 있겠지."

그들은 횃불을 끄고 어둠속을 내달았다. 발자국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과연 물이

덜 빠진 작은 웅덩이가 있었고, 그곳을 지나니 짙은 갈대숲이이었다. 세찬 강바람으로 갈대

가 부벼대는 쏴아하는 소리만이 주위에 가득차 있었다. 도망하는 자들이 갈대숲 속으로 들

어간게 틀림없었다. 별장은 잠깐 망설이다가 부하들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쯤인가?"

", 조금 더 올라가면 살여울입니다."

"살여울이라......"

"살여울에선 물이 빠지면 걸어 건널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 도적들이 모이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군. 여울목을 아는 자가 앞장서라."

큰돌네와 길산네의 두 대가 합쳤으니 광대들의 수는 이십 명이 넘었다. 개중에는 길산이

와 갑송이의 공연한 싸움질에 휩쓸렸다고 불평하는 자들도 있었다. 차라리 포도군사에게 자

수하여 자기네의 죄없음을 밝히자는 자들도 있었다.

"언제는 죄 있어서 가는 곳마다 의심을 받고 규찰당하구 했던가. 더구나 이번에는 길산이

가 화적 소리까지 듣게 되었으니, 우리만 잡히고 그들이 내빼는 날에는 숨은 곳을 대라고

닥달받다가 물고장 받기 맞춤일세. 잡히면 죽는 게야." 라는 큰돌의 일리있는 말에 모두들

혼비백산하여 뛰고 있었다. 억센 갈잎에 팔과 얼굴이 긁혔고 이미 너덜너덜해진 짚진 바닥

을 파고든 부러진 갈대의 줄기가 발바닥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갈대

밭 속을 헤매는 중에 그들은 방향을 분간 못하여 이리저리로 달려가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

다가 문득 앞이 터지는데 바라보니 강변을 떠나 풀이 자라난 뭍 쪽으로 나와있었다. 마침

인기적이 들려 광대들은 누가 시키기도 전에 갈대밭 속에 엎드렸다. 희끗희끗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뛰어 지나갔다.

"뭐야, 벙거지들이 아니잖나."

"해주 왈짜들이겠지. 가만있거라......보자, 우리가 꼭 길산이와 갑송일 만날 필요가 있나.

이길루 내빼어 감영 관역을 벗어나는 게 좋겠다."

"그렇지! 재령으루 해서 안악 쪽으루 빠지세."

"지금 모면한단들, 관에서는 우리가 문화 재인말서 왔다는 걸 알 텐데 뒤가 깨끗할 까?

차라리 날이 밝으면 감영으루 헌신하여 죄없음을 밝힘만 같지 못할 걸세."

"그때는 또한 그때구 시방은 우선 모면함이 급하이. 불족산을 타구 재령으루 넘어가세나."

"걸립두 못해먹게 됐구먼."

"하여튼 뒷소문이 들릴 걸세. 형편 보아가며 촌읍에서나 놀이를 팔지 뭐."

그들은 의논을 정하고 나서 강변을 따나 신평 쪽으로 되돌아갔다.

빠르게 빠져나가던 물살이 늦춰지고 살여울의 여울목에는 드문드문 모래톱과 갯벌이 드러

나고 있었다. 초조하게 자기 동료들을 기다리던 길산이가 말했다.

"지금 지체했다가는 다시 물이 불어나기 시작할 텐데...... 웬일일까?"

박대근이의 차인이 재촉했다.

"우선 건넙시다. 댁네 사람들은 아마 추적이 급박하여 잡혔거나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오."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그들이 갈대숲 속에 얼마 동안 기다리며 앉았을 때, 길산이가 잠들어 곯아떨어진 갑송이

의 입을 막고 흔들어 깨웠다.

".......?"

"방금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뭐야, 바람소리 아냐."

"가만있어...... 저 봐! 누군가 갈대를 헤치고 오는 중이다."

박대근이가 재빨리 말했다.

"그렇군, 어서 뛰어 건넙시다."

갈잎이 서걱대면서 쓰러지는 소리가 차차 똑똑하게 들려왔다. 차인 하나는 들 것을 버리

고 대근을 등에 업었다. 길산이 앞장서서 여울목을 바라고 뛰었고 차인 한 사람과 갑송이가

잇달아 뛰기 시작했다. 길산은 물속에 들어섰다. 그때에 뒤에서 화광이 충전하며 사위가 훤

희 밝아졌다. 고함소리와 함께 총 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맨 뒤를 따르던 갑송이가 어이쿠

하면서 허리를 꺾었다.

"맞았다!"

앞으로 고꾸라지며 갑송이가 소리쳤고 여울을 건너던 길산이 되돌아섰다. 그가 갑송일를

일으켜 비스듬히 떠메는데 뒤에서 포졸들의 고함소리가 터졌다.

"빨리 뛰자!"

일으켜 세웠어도 비틀대는 갑송이에게 길산이 애가 달아 말했으며 남은 차인이 뛰어와 갑

송이를 부축했다. 박대근이를 업은 차인은 벌써 여울목 중간에 서 있었다.

"다시 방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어서......"

몇걸음 다리를 끌며 갑송이가 따라 뛰는데 세 사람이 한데 뭉쳤으니 추적하는 포졸들의

걸음을 당할 수가 없다. 뒤로 바짝 쫓은 별장이 환도를 뺑 휘두르며 소리쳤다.

"도적들 꼼짝 마라!"

다급해진 길산이가 갑송이 곁을 떠나며 차인에게 말했다.

"업구 뛰시우." 하자마자 단검을 빼어들고는 사나운 기세로 군사들을 향하여 마주 달려갔

. 감영의 정예 군졸이지만 쫓기던 자가 맹호처럼 맞달려드니 화급하게 좍 흩어진다. 길산

이 무리 사이로 뚫고 들어가며 별장의 칼날을 받아쳐 넘기고는 포졸들의 장검을 후려치고

두엇을 베면서 뛰는데 다시 갈대밭 방향이다. 포도 군사는 완전히 대오가 흐트러져 잠시 방

향을 잃었다. 대근이와 갑송은 차인들의 등에 업히고 부축당하여 여울 건너 짙은 안개 속에

스며들었다.

방포 소리와 화광을 보고 달려온 주내방 패거리들이 길산을 뒤따라 잽싸게 흩어져 갈대밭

속으로 쫓아들어갔다. 숨어 있는 자나 뒤쫓는 자나 모두 숨을 죽이고 서로가 먼저 움직이기

를 기다렸다. 별장은 길산이 숲에서 뛰처나와 다시 여울을 건너지 못하도록 갈대숲이 끝난

곳을 따라서 포졸들을 풀어놓았다. 숲 안에서는 오랫동안 아무 기척이 없었다. 바람에 불린

갈잎이 서걱대는 소리만이 스산하게 들려왔다.

길산은 가만히 엎드려서 그들이 먼저 움직여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날이 새기 전에

갈대밭을 따라 이곳에서 더욱 멀리 달아날 작정이었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잡힐 경우도 생

각해보았다. 해주의 세력자인 신복동이께 모욕을 주고 포졸을 몇명 베어버렸으니, 잡히게 되

는 경우에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틀려버린 일이었다. 서걱이는 소리가 들리다가

멎었다. 바람에 불리는 소리는 그 박자가 길고 짧아 불규칙하지만 사람의 몸이 헤치는 소리

는 규칙적이다. 마치 빗소리 가운데서 낙숫물 소리를 분간하는 것과 같았다. 멎었던 소리가

다시 들리더니 사람의 숨결 소리가 들렸다. 길산은 땀내가 끼치는 어둠속으로 칼날을 날렸

. 부욱하면서 베어지는 소리와 비명이 들린다. 길산은 넘어지는 상대를 밟고 다른 방향으

로 뛰었다. 사방에서 부산하게 갈잎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번뜩하는 것을 맞받는데

챙캉하는 소리가 칼날이다. 무릎으로 올려차고는 몸을 날려 갈대밭 속에 꼬라박고는 재빨리

기어갔다.

막개는 비명소리가 들리던 곳을 향해 뛰다가 옆에서 뛰는 기척을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칼

을 들이밀었다. 사람이 넘어지는데 멱살을 잡아 쳐들어보니 제 졸개였다. 상대는 하나인데

이쪽은 수가 많으니 아무래도 불리했다. 그는 움직이기를 멈추고 손뼉을 쳤다. 그의 주변으

로 울쑥불쑥 부하들이 나타났다. 그는 둘을 지적하고는 모두 나가라는 시늉으로 뒤편을 가

리켰다. 두 사람의 부하만을 남기고 모두 내보낸 막개는 칼 쥔 손을 위로 향해 몸에 찰싹

붙인 채 배밀이로 갈대숲 속을 기어나갔다. 그는 곧장 기어나갔고, 꺽돌이와 다른 졸개는 좌

우로 각각 돌아 나갔다.

길산이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다렸다가,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을 알고는 상대편이 방법을

바꾸었음을 알았다. 길산은 칼을 위로 곧추세운채 하늘을 향하고 누워 있었다. 땅에 가까우

니 인기척을 느끼기에는 가장 좋은 자세였고 몸을 솟구칠 때에도 다리만 한번 펄쩍이면 곧

방어와 공격을 겸할 수가 있었다. 갑송이네들은 무사히 여울목을 건넜으니 지금쯤은 석장승

고개를 넘고 있을지도 몰랐다. 감영이 발칵 뒤집혔는데 재인말은 어찌될 것인가. 그는 어느

결엔가 묘옥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새겨 넣어준 연비 자국이 떠올랐다. 당분간

재인말의 어느 누구도 만날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해주로 들어오기 전에

봉고개 마루턱에 있다는 어머님의 돌무덤에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그는 만

일에 자기가 이 살여울엣 무사히 몸을 빼쳐 달아나게 된다면 동쪽으로 길을 잡아 북관을 향

할 작정이었다. 아니면 낮에는 숨고 밤에만 산길을 타고 재인말에 은밀히 들렀다가 구월산

의 감동이에게 몸을 의탁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길산은 아직 세상도 모르고, 사내

가 해야 할 일에 대한 깨달음도 전혀 없이 고작 세상을 등지고 도적질이나 하면서 살아가기

는 싫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박대근이의 넓은 포부와 도량을 존경하였고, 심지어 노릇을 하

던 아잇적에는 머릿광대가 그의 원이더니, 박대근이를 알고 나서는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도

록 하는 어떤 신념이 생겨났던 것이었다.. 그는 동쪽을 염두에 두었고, 지금쯤은 살여울의

물살이 거세어져 남하할 길이 완전히 막혔음을 알았다. 잡혀서는 안된다. 그는 칼을 곧추세

운 채로 위로 달려들지도 모르는 상대편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왼쪽으로 인기척이 들렸다. 길산은 꼼짝도 않고 누워서 적이 다가오는 데로 칼을 향했다.

그의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서 갈대가 흔들렸다. 그가 몸을 굴릴 적에 상대편도 알

아채고는 상반신을 훌쩍 일으키려는 찰나에, 나무를 뛰어오르는 살쾡이처럼 아래에서 위로

칼을 쑤시면서 상대편의 무릎 아래에 찰싹 달라붙었다. 칼날이 꽂혀진 상대가 길게 부르짖

으며 길산의 어깨 위로 늘어지는데, 그는 벌떡 이러나면서 칼을 뽑고는 잽싸게 갈대숲을 뛰

었다. 부르짖음과 갈대 흩어지는 소리를 들은 막개가 방향을 잡고 그를 쫓았다. 길산이 움직

이면 막개도 움직였고 그가 잠잠하면 막개는 절대로 먼저 움직이지 않고 끈기있게 기다렸

. 날이 새어 불리한 것은 길산이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길산은 갈대 사이에서 일어났다. 댓 발짝 앞에서 우뚝 일어서는 상대편의 몸이 보였다.

산은 적의 환도를 대적하기 위해서 단검을 역으로 쥐었다. 막개는 산시우 자세의 첫 동작으

로 칼을 제 가슴 앞에 수평으로 겨누었다가 천천히 돌았다.

"이야......!"

진전살적의 자세로 칼을 아래로 후펴치면서 삼진을 거듭 두 곱으로 뛰면서 즉시로 멈추고

돌아서서 곧장 찔러 들어왔다.

후려쳐 벨 때 흩어진 갈대잎들이 허공에서 날아 내려왔다. 길산은 칼날을 받아치지 않고

서 몸을 비틀어 피했고, 상대가 돌아서며 찌른 역습에는 양각으로 무릎을 꿇으면서 머리 위

로 칼날이 자나가도록 하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막개가 호흡을 고르면서 다리 아래 갈대들 사이로 칼을 내려뜨려

감추고 몇각인가 기다렸다.

길산은 단검 쥔 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 다른 한 손은 수도로 써 제 시선 정면에 펼쳐 적

을 가늠했다. 바람소리와 숨 고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둘이 한꺼번에 동시에 달려들었다. 갈대가 좌우로 어지럽게 갈라진다. 막개의 칼이 길산의

허리를 향해 날아드는데 길산은 단검으로 비스듬히 받아내면서 떨어져 물러나지 않으니 그

대로 둘의 몸이 밀착되었다. 칼날이 엇갈리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렸다. 베어진 갈대잎이

그들의 흩어진 머리 위에 수북이 내려앉는다.

길산이 도봉으로 권을 바꾸면서 막개의 목을 쳐내자, 막개는 팔굽으로 맞받았고 다시 길

산이 쇄골 처넣기로 재차 공격하자, 막개는 수도를 쳐들어 머리 위로 막으면서 발을 차올려

길산의 사타구니를 공격했다. 길산이 무릎을 꺾어 상대의 발을 맞받는다. 길산의 주먹이 막

개의 비장급소를 노리고 옆구리에 처박히자 막개는 숨을 헉 들이마시면서 넘어졌다. 길산은

틈을 주지 않고 단검으로 찌르고 들어갔고 막개도 넘어진 채로 두 발을 들어 돌려차기로 길

산의 하체를 퉁겨냈다.

막개와 길산이 나가떨어졌다가 동시에 일어서는데, 길산의 배후로 돌아온 꺽돌이가 쇠뭉

치로 길산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며 뛰쳐나왔다. 길산이 상체를 휘청 숙여 뒷걸음치면서 거꾸

로 쥐고 있던 단검을 수직으로 휙 돌리면서 내리그었다. 배에서 가슴으로 베어진 꺽돌이가

제 공격하던 힘에 못 이겨 앞으로 내쳐 기우뚱하는 것을, 길산의 중지일지권이 창끝같이 날

카롭게 꺽돌의 뒤통수 대구를 강타했다. 넘어지는 꺽돌이에 이어서 막개가 검을 호미로 뒷

전에 꼬리처럼 끌고서 달려들어 제 몸으로부터 바깥쪽으로 회전시키며 할퀴듯 싹 그어내렸

. 바람 가르는 소리만 들렸을 뿐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헤어졌을 때, 길산은 왼쪽 겨드랑이가 따가워서 손을 대어보는데 축축한 피가 옷을 적시고

있었다. 막개는 가슴에서 배로 일직선으로 베어져 옷이 좌우로 찢어져 있었으며 바지는 처

음 칼날이 닿았던 가슴의 깊은 상처에서 흐른 피로 젖어갔다. 동녘에는 부옇게 새벽의 전조

가 번져오고 있었다. 강변에서 물새들이 지절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칼날을 늘어뜨리

고 헐떡이며 서 있었다. 막개가 먼저 재빨리 허리를 굽혀 갈대 사이로 몸을 감췄고 숲을 헤

치는 소리가 들렸다. 길산이도 갈대 속에 몸을 숨기면서 위치를 바꾸고 허리를 낮춘 자세로

기다렸다. 막개의 남은 부하들과 포졸들이 그들이 싸우던 장소를 포착하여 양쪽으로 그물처

럼 숲을 싸고 있었다. 길산은 덫에 걸린 맹수처럼 배를 벌떡이며 숲 사이에 몸을 감추고 있

었다. 정면에서 풀 끝이 갈라지고 있는 게 보였다. 길산이 무릎을 숙였는가 했다가 퉁겨 일

어나며 몸을 날려 갈대의 키를 넘어 뛰쳐올랐다.

길산의 솟구쳐오른 몸은 이미 상체가 앞으로 나가 있었고, 곧추세운 단검은 백사농풍으로

마치 독사의 딱 벌린 아가리 위로 솟아나온 이빨처럼 곤두서 있었다.

막개가 몸을 피하려고 발을 뗐으나 이미 먼저 움직인 자의 공격인지라 등을 깊숙이 찔리

면서 길산과 함께 나뒹굴었다. 길산이 단검을 뽑아내어 다시 공격하려 들자 막개는 환도를

간신히 쳐들고 앉은걸음으로 바삐 뭉개어 몸을 빼쳤다. 길산은 적을 버리고 갈대숲을 뛰었

.

그가 갈대를 헤치고 움직이는 곳을 따라서 총 놓은 소리와 함께 탄환이 몇방 날아왔다.

감영 군사들은 곧잘 호랑이사냥에 동원되었었고 지친 맹수를 몰아나가는 법을 잘 알고 있었

. 즉 포위를 든든히 하고서 맹수가 나오면 물러서고 들어가면 다시 다가들며 둘러싼 거리

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주위가 희끄무레하게 밝아졌으나 사방은 아직도 짙은 안개 속이었다.

길산은 그제사 자기가 갈대숲 속에서 싸우는 동안에 위치가 발각되고 완전히 포위되어 있음

을 알았다. 그는 목이 바싹 탔고 입술을 꺼칠하게 말라붙었으며, 어느 쪽을 향해야 될지 분

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에 연기 냄새가 나는 듯하더니 바자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더운 불길이 주위에 솟았

. 포졸들이 맞불을 놓아버린 것이다. 줄기차게 불어대는 서북풍을 타고 불길이 재빠르게

번져왔다. 연기가 가득 찼다. 마른 갈대 타들어오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침착한 발자

국처럼 다가왔다. 길산이는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터뜨렸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열기 때

문에 온몸이 쓰라렸다.

그는 남쪽을 얼핏 생각해냈다. 살여울을 향하여 뛰자. 물에 뛰어들어 급류를 타면 혹시 잡

히지 않고 살아남을지도 몰랐다. 그는 남쪽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사방은 벌써 키가

넘는 불의 혀가 벽처럼 일어나 너울거리고 있었다.

길산은 아랫배에 힘을 주어 호흡을 끊고 불을 향해 뛰었다. 불속을 지날 때에, 그는 전신

에 큰 몽둥이의 타격을 맞은 것처럼 아뜩하면서 의식을 잃었다.

그가 불탄 자리에 떨어져 뒹굴자마자 벌떼처럼 달려든 포졸들의 병장기가 온몸에 겨누어

졌다. 머리는 누렇게 그슬렸고 온몸은 칼자국과 갈대에 긁힌 상처투성이였으며, 타버린 재

위에 뒹굴어 검은 그을음에 더러워진 길산의 가슴 위로는 창검의 끝이 내이누르고 있었다.

길산은 차차 정신이 들어 눈을 떴다. 그는 땅에 편안히 누워서 써늘한 바람을 몇번이나 깊

숙이 들이마셨다.

"묶어라......"

들여다보고 섰던 별장이 지시했다. 길산은 손을 뒤로 묶이고, 팔꿈치 안으로 긴 막대기를

끼워서 두 다리 사이에 겨우 간격을 떼어 매어진 줄에 겹겹이 묶였다. 줄 끝을 쥔 자가 조

금만 힘을 써서 당겨도 나뒹굴 형편이었다. 포졸들은 죽을 꺽돌이의 그을린 시체와 거의 반

주검이 된 막개를 끌어냈고, 부상자들을 수습하였다.

"물 좀 주오."

끌려 일어난 길산이가 말했고 별장은 그를 마주 바라보더니,

"나루에 가서 술 한잔 사주마." 라고 대꾸하였다. 자고이래로 상대가 대적일 때에는 예우

하여주는 것이 관의 습관인즉, 별장은 길산이 밤새껏 갈대숲 속에서 치러낸 싸움에 은근히

놀라고 있었다. 그들은 지쳐버린 길산이를 앞뒤로 둘러싸고 대오를 정비하여 우름내나루로

내려갔다.

날이 훤하여 길산을 체포한 감영 군졸의 무리가 나루에 당도하여보니, 이미 형방 비장이

몸소 나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장은 험상한 몰골로 끌려오는 길산의 숙인 턱을 채

찍 끝으로 쳐들어보고 나서 말했다.

"네가 화저패의 일당이냐?"

"아니오."

길산은 뚜릿뚜릿한 눈알을 부라리고 대답하였다.

", 그놈 목자 한번 불량하고나. 네 이놈, 대살을 면치 못할 죄를 지은 놈이 눈을 부라리

면 어찌하겠는가. 네놈의 일당들은 모두 어디로 달아났느냐?"

"모르오, 나는 본래 연희나 팔구 다니는 광대이지 화적패가 아니우. 저자의 소악 패거리들

이 침학하는고로 분김에 싸움을 벌인 것이 커졌을 뿐이외다."

비장이 별장에게 물었다.

"장교, 상한 군졸이 없는가?"

", 군졸 두엇이 부상해꼬, 신생원 댁 장정이 셋이나 죽고 다쳤습니다."

"보아라, 네 모가지 하나로는 아예 큰 죄를 감당하기 어렵겠다. 여봐라. 즉시 감영으루 압

송하여라."

길산이 다리를 뻣뻣하게 버티면서 말했다.

"당장에 장살을 당하여도 여한이 없사오나, 왈짜의 협기를 빌어 한 말씀 여쭙시다."

"허 그놈 맹랑한 놈이로다! 왈짜의 협기라니...... 까짓 짜른 칼이나 쓴다고 네놈두 협기를

찾느냐. 허나 곧 효수당할 몸이니 가긍히 여겨서 듣겠다. 말해보아라."

길산이 껄껄 웃어젖혔다.

"과연 명관이시오. 하옥으로 내쳐져 죽기 전에 기회는 지금 단 한번이니......술이나 양껏

먹구 싶소이다."

"좋다. 내게 그러한 궁량이 전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세상이 아다시피 소리의 녹이 작아

네게 술을 살 형편이 못 된다. 돈이 있다면 사먹는 것은 허락하겠다."

비장쯤이라면 제법 한량을 자처하던 자들이고 왈짜의 예를 모른 양 할 수는 없고 보매 형

방 비장은 길산의 청탁을 받아들였다. 그는 곧 길산의 행전을 내어 우름내의 주막에서 돼지

고기와 술 한 동이를 내오게 하였다. 길산이 아랫도리는 차꼬에 묶이고 두 손만이 놓여나

땅에 주저앉아서 술을 마시는데, 그 짓거리가 대적 살인한 자답지 않게 기탄이 없었다.

"커어, 술맛 한번 좋구나. 사나이 평생에 고작 저자 무뢰배들 몇을 베이고 죽는 일이 부끄

럽다만, 이렇게 물 좋은 경개를 두고 술을 들게 되어 비장 나으리께 치하하겠수."

"발칙한 놈, 네 놈의 치할 받자니? 어서 서둘러 처먹어라. 감영에서는 형틀에 동헌 좌기하

고 네놈의 고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글쎄, 어육이 될 때는 되더라도 먹는 일에 죄 따루 있답디까? 이 술은 내가 주인장이니

비장 나으리가 손이 되어 대작 좀 하십시다."

길산이 하도 맛나게 고기를 씹고 술을 마시므로 비장도 민망하여 돌아서버렸다. 길산이

술 한 동이를 거의 비울 적에 소리 한 가락을 풍류있게 후려넘긴다.

"적막강산에 술잔을 들고 나서 취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대장부 가는 길이 광풍 위에

낙엽이라, 미친 세월 거친 날에 배 주리고 잠 못 이뤄 하마 떠났으니 내일은 어디메냐, 슬픈

노래 긴 한숨을 동무삼아 떠돌다가, 어찌타 깨어보니 묶여 있는 몸이로다."

"술을 다 비웠느냐?"

"그리됐나 보우."

", 인제 일어서라."

길산이 형방 비장의 독촉으로 일어났는데 말술을 좋이 비우고도 걸음새가 흩어지질 않았

.

"그놈 술 한번 세구나." 하며 비장이 감탄하였고, 곁에 섰던 별장이 초를 쳤다.

"날래기가 범 같습디다. 저놈 하날 잡느라루 삼십여 명이 갯가를 둘러싸구 온 밤을 세웠

."

"내 보기에두 광대라기엔 인물이 잘났네. 죄만 없다면 내 수하 장교루 거두어 포교를 시

켰으면 맞춤이겠네."

"허기사 해주서 신생원이 상인들께 포학이 심하였고."

"좌우지간에 우리네야 사또 수족이니 그런 말 함부루 입 밖에 내지 말게."

그들이 길산을 이인교에 태워 엄히 묶어서 압송하여 성내로 들어올 때, 길가에서 구경하

는 백성들이 마치 대갓집 담장 둘러치듯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 신평 사거리에서 벌거벗고

묶여 있던 신복동이가 행인들에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그를 벌한 것이 바로 문화의

젊은 광대라는 사실도 알려져 있었다.

동헌 길청에는 감사가 친히 나와 앉았으며, 좌우편으로 형장 갖춘 집장사령들이 추상같이

벌려 서서 길산이 형틀에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문이 시작되었는데 말귀가 어긋날

적마다 사정없는 매가 무릎 위에 떨어졌다.

"네 관향이 어딘고?"

"본시 천한 광대로 태어났으니 관향이 따루 있을 리 없고, 문화 재인말에서 태어나 거기

살구 있습니다."

"광대마을이라면 관에서 허락하여준 너희들 부락이냐?"

", 저희 선조 때에 재인청에서 윤허하여준 고장이올시다."

"호적에는 들어 있느냐?"

"유기장이 역을 지구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너희 마음대로 제 고장을 떠나 각처를 돌아다니는고."

"윤허하여준 곳이 땅을 부칠 데가 없어 고작 조갈이나 하는 터에, 양식이 달려 부득불 걸

립을 해서 먹구 살아갑니다."

"음 그런가. 광대들의 마을 이야기는 처음 들었는데 사후 조사할 수 있도록 기록하여두라.

네가 감히 감영 관내의 양가에 침입하여 양반과 부녀를 능멸하고 가산을 탈취하였다지.

아하니 그놈이 화적이로구나!"

"아니올시다. 실은 신생원을 혼이나 좀 내주려고 하였소이다."

"이놈, 어찌 천민이 양반을 능멸한단 말이냐."

"양반이 그 구실을 못하고, 사람 같지 않을 때에는 관에서 다스려야 하온데 관이 방임하

니 무지한 백성이라도 어찌 참겠습니까. 신생원은 저자에서 완력으로 모리를 취하는 간상배

올시다."

"그놈 아가리를 못 놀리게 매우 치라."

"예에이."

나졸들이 득달같이 매를 들어 길산의 차꼬에 묶인 무릎을 때렸다. 길산은 매를 맞으며 입

술을 굳게 다물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네 일당들이 모두 몇이었더냐?"

"소인 혼자였소."

"저놈...... 거짓 소리를 하는구나. 신가의 말에 의하면 여러 놈이라는데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로 속이려느냐. 그놈이 이실직고할 때까지 태형을 멈추지 마라."

다시 뭇매가 퍼부어졌다. 국문이 계속되는 중에 앓아 누운 신복동이가 올린 자술서가 길

청에 들어왔고 길산이 더이상 발명할 길은 없게 되었다.

"네놈과 함께 신가네 규방을 침입한 자가 누구냐?"

"저자에서 사귄 사람이니 얼굴을 보면 알겠으되 이름은 모르오."

"신가네 장정 하나이 증언하기를 너희가 송화 무더리 장터에서도 행악을 저질렀을 때 함

께 있었다 한다. 이름을 대지 못하겠는가?"

"모릅니다."

"좋다. 그렇다면 너희 광대 패거리가 산다는 문화군수에 통기하여 너희 가속을 모두 잡아

들이고, 마을을 폐하여버리라 이를 터이다."

잠시 잠잠하던 길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죄를 지은 소인이 잡혔으니, 죄없는 사람이 피침되어 무얼 하겠습니까. 죽여줍시오."

"살인한 사람이 자그마치 셋이나 되는데, 육시의 형도 면키 어려우리라. 형국이 극심하여

지기 전에 어서 동범인을 이실직고하라."

감사가 손짓하니 인두를 꽂아넣은 오동 화로가 나왔다. 형리가 길산의 저고리를 등뒤로부

터 부욱 찢어내렸다.

"공연히 신고하지 말고, 샅샅이 아뢰어라."

옆에서 집장사령이 인두를 뽑아들며 말했고, 형방 비장이 외쳤다.

"네 동무를 잡노라고 너희 가속과 마을 사람들이 닥달을 받을 것이다. 광대마을은 지금

당장이라도 영을 내려 관지로 몰수할 수가 있다. 어서 아뢰지 못할까?"

길산이 고개를 떨구고 한동안 생각하다가,

"이갑송이라구 소인과 같은 광대요."

"이갑송...... 광대란 말이지? 그래 이갑송이와 양반가를 내전 돌입하여 무엇을 강탈하였는

?"

"아무것두 훔치지 않았소. 다만 신가를 홑청을 씌워 떠메구 나왔을 뿐이며 곤장 삼십 도

를 때렸소이다."

"무엇 때문에 곤장을 때렸는가?"

"간상 무뢰배를 많은 저자 사람들을 대신하여 벌하려 하였소이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관가에 와서 고할 것이지, 어찌 흉악한 무리를 지어 사람을 치는

?"

"신생원이 감영에서 비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다 알구 있소이다."

"...... 저런 무도한 도적놈이! 뭣들 하느냐."

감사의 노성이 터지자마자 붉게 달구어진 인두가 길산의 등을 지져댄다. 살 타는 냄새가

고약했고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길산의 음울한 신음소리가 터졌다. 다시 국문이 계속되었다.

"너희 광대 패거리들은 신평골 너머서 모두 잡혔다. 너와 이갑송이가 일을 저질렀고, 어울

린 장사치들이 있었다는데, 송상 차인패가 아니냐."

"연희 내려올 제 도중에서 사귄 사람들이오."

"그들은 너희와 공모하지 않았단 말이지."

"다만 길동무로 같이 왔을 뿐이외다."

감사가 지시했다.

"이갑송이의 얼굴을 기억하는 자를 화공에게 붙여 화상을 꼼꼼히 그리게 하여 각 고을로

돌리도록 하라. 또한 송도유수에 통기하여 송상 차인배들 중에 어느 임방 놈들인가를 탐문

하게 하여라."

길산을 사형수로 하여 삼문 밖으로 내쳤다가 한양에 올리는 장계가 떨어진 다음에 주내방

사거리 저자에서 목을 쳐서 죽인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길산의 목숨은 이제 겨우 달포 남짓

남아 있는 셈이었다. 의식이 까무룩해진 길산의 늘어진 다리와 목에 차꼬와 나무칼이 씌워

져 하옥되었다.-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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