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산 2
지은이:황석영
출판사:창작과비평사
봉사자:유선호,이동현
제2장 수초(계속)
옥은 객사 건너편에 있었는데, 원래 영에서 군기고로 쓰던 것을 개축하여 옥으로 바꾼 건
물이었다. 일자로 길게 지어진 두 채의 기와집이 마주보고 섰는데, 사방에 돌담을 쌓아 막아
놓고 네 귀퉁이에 옥리들이 번을 서고 있었다. 죄수들의 가족들이 감옥 부근 일가에 들어
밥을 붙이면서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옥전거리는 언제나 음식장수들이 모여들게 마련이었다.
관에서 죄수에게 먹일 양곡을 내는 법이 없으니 가족이 없는 죄수들은 동료나 옥리들이 먹
다 남은 찌꺼기 음식으로 겨우 연명하다가 굶어서 죽는 수밖에 없었다.
좌옥 우옥이 있는데 우옥은 좀도둑이나 부녀자들이 갇힌 곳이요, 좌옥은 전과자와 강도와
살인자들의 옥이었다. 창고로 쓰이던 일자집의 앞쪽 벽을 완전히 허물고 굵은 나무 칸막이
로 막았으니 옥마당에 서서 둘러보면 좌우옥의 구석구석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길산은 좌옥
의 가운데 칸으로 끌려갔다.
제일칸은 전과자의 칸이요, 제이칸은 살인 도형수의 칸이며, 세 번째 칸은 관리로서 중죄
를 지은 자들의 칸이었다. 가장 중한 형벌이 역시 참형인데, 그 다음에 목숨을 구한다 할지
라도 사람 구실을 못하게 만드는 중형이 있었다. 이른바 다섯 가지 벌이라 하여 세인을 경
계하였으니 쪄서 죽이든, 사지를 토막내든, 목을 치든, 사형을 대벽이라 하였고, 불알을 까버
리는 궁형, 발꿈치를 베어내는 월형, 코와 귀를 베어내는 의괵형, 그리고 바늘 수십 개를 묶
어서 이마와 얼굴을 꼭꼭 찌른 뒤에 먹물을 넣어 변상에 벌표를 한 자자형이 있었다. 감옥
안에도 죄수들끼리 정한 자리가 있었으니 이른바 삼칸이었다. 남쪽이 일칸, 북쪽이 이칸, 동
쪽이 삼칸이었고 감옥 안에는, 맨땅바닥에 널빤지를 깔아놓은 청이 있는데, 대개 연장자와
고참자는 청 위에 올라앉고 신참자와 연소자는 청 아래 앉도록 되어 있었다. 옥졸이 칼 쓰
고 차꼬 찬 길산을 끌어다 좌옥 이칸에 처넣는데,
"쌀과 무명을 낼 수가 있는가?"
물었으나 길산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옥졸이 발길로 내차며 그를 희롱하였다.
"신참 행하도 못할 놈이 살인은 뭣 땜에 저질렀느냐. 우리는 법대로 시행하거니와 옥 안
엣놈들이 너를 그냥두지 않을 터인즉 열흘이 못 가서 장작개비가 되어 나올 것이다."
옥문이 육중한 소리로 열리자 죄수들의 눈이 모두 길산에게로 집중되었다. 옥졸이 길산을
안으로 떼밀고 쇠를 채우면서 다시 희롱하는 말을 던졌다.
"귀한 객이 오셨으니 행수는 잔치를 베풀어 접대하라."
옥졸이 물러가고 길산은 스물 남짓 되는 죄수들을 잠시 대려다보았다. 모두들 상투가 풀
어헤쳐져 사방으로 산발되었으며 얼굴을 오랫동안 닦지 않아서 눈알만 번뜩이고 있었다. 길
산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여 엉거주춤하다가 간살 앞에 앉으려고 궁둥이를 내리는데 청 위에
앉았던 의복이 멀끔한 자가 호통을 내질렀다.
"이놈, 남의 집에 들어왔으면 예법을 지켜야지 어디에 앉으려느냐. 고이헌 놈이로다. 여봐
라 색장, 어서 거행하라."
청의 가운데 자리에 앉았던 자는 의복도 깨끗했고 머리도 봉두난발이 아니라 말끔하게 틀
어올린 상투 그대로였다. 나이는 한 오십 되어 보였으며 제법 어깨가 다부지고 체격이 탄탄
해 보였다. 색장이라 불린 사내가 좌중에서 일어서는데 키가 보통 사람보다 두어 뼘은 더
커 보였으며 눈알이 퉁방울 같고 수염은 뺏뺏이 곤두서서 체격은 고사하고 상통만 척 보기
에도 매우 우악스러워 보였다. 힘깨나 쓸 것 같은 그 사내의 목소리는 외모와 걸맞게 질그
릇 깨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예, 간장 어른 불러 계시오."
"추국청을 벌려라, 법대로 시행하리라."
길산은 빙그레 웃으며 그들이 주고받는 수작을 듣고 있었다. 색장이란 자가 다가와 길산
을 눌러 앉히려고 두 팔로 어깨를 잡고 힘을 썼다. 길산은 짐짓 힘을 주어 버티고 서 있었
다. 그의 어깨를 내리누르던 색장이 말했다.
"어랍쇼, 이놈 보게. 말뚝처럼 꿈쩍두 않네."
길산이 껄걸 웃어 대답했다.
"대체 왜들 이러시오, 앉으려니까 앉지 말라 해서 서 있는데 이거 장난이 너무 심하지 않
소."
"허 이놈이... 감영 전옥의 규칙을 모르는구나, 꿇어앉아 추심을 받으라."
"나는 다리가 아파서 꿇지 못하겠소. 어디 앉혀보시구려."
청 위에서 간장의 짜증난 말이 떨어졌다.
"색장은 무얼 꾸물대는가. 빨리 꿇어앉혀라."
색장이란 자가 손을 쓱 비비고 나서 길산의 어깻죽지를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아래로 짓
누르며 힘을 쓰는데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고 두 다리는 억세게 버키면서 팔이 부들부들 떨
렸다. 길산이 마주 힘을 쓰며 연신 빙글거렸다. 내리누르던 색장은 기운으로 못 견디겠는지
상대를 위로 치켜들려고 한 손을 길산의 사타구니 아래로 집어넣으려는 모양이었다.
"예끼 놈!"
길산이 목에 쓰고 있던 나무칼째로 휘익 돌려서 색장의 뒷덜미를 후려갈겼으며 그는 에쿠
소리와 함께 죄수들을 향해 앞으로 넘어졌다.
"몰매를 놓아라."
청에서 간장이 떠들고, 죄수들이 일어나 길산의 몸을 잡으려고 우왕좌왕하는데 두어 놈이
길산의 발길질을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여러 놈이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안쪽으로 피해 들
어가자 자리가 널찍해졌는데 길산은 청 위로 쫓아 올라갔다. 당황해서 몸을 빼치려는 간장
의 멱살을 날렵하게 틀어쥔 길산이 바닥에 밀어 목통을 죄면서 말했다.
"다 같은 도적놈들끼리 추심이 웬말이며, 너 따위가 무슨 색장이니 간장이니 하느냐. 나는
곧 죽을 사람이매 시끄럽게 굴지 마라."
길산이 그를 옆으로 밀어내치고 청에 앉으려는데 소란한 기척을 눈치챈 옥졸들이 감옥 밖
에 모여들었다.
"어느 놈이 난동을 부리는가?"
죄수들 속에서 고하는 자가 있었다.
"신참이 말을 듣질 않습니다."
"저놈을 끌어내라."
옥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길산을 끌고 나갔다.
길산은 좌우옥의 끝에 가로질러서 지어진 옥리들의 숙소로 끌려갔는데 옥사장인 듯한 장
교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란을 부린 것이 바로 이놈인가?"
"방금 들어온 광대 자식이올시다."
"광대라면... 살여울서 잡힌 그놈이란 말이지."
길산은 뻣뻣하게 대답했다.
"기왕에 죽을 놈인데 귀찮게 다루지 마시오."
"네가 장길산이란 놈이냐?"
"그렇소."
"음, 그렇다면 용댕이 우대용이를 아는가?"
"얘긴 들은 적이 있으나 안면은 없소이다."
"그가 너를 보고자 한다. 말썽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있겠다면 관곡을 내어 먹여줄 터이
니 옥내의 규칙을 지켜라."
하고 나서 옥사장은 옥졸들에게 말했다.
"외자수의 칸으로 이놈을 데려가거라."
옥졸들은 길산을 끄로 제일칸의 곁에 따로 간막이를 해놓은 작은 옥으로 데리고 갔다. 옥
졸들이 간살 앞에서 외쳤다.
"대용이, 네가 찾던 자가 왔다."
한편 문이 열리고 죄수가 마주 나오며 길산은 안으로 떠밀려 들어가는데 얼굴이 시커먼
자가 대뜸 길산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어서 오슈, 오늘 아침부터 종일을 기다렸소이다."
"용댕이 우서방 말은 오래 전에 들은 적이 있으나 이런 데서 만나리라곤... 뜻밖이오. 댁이
어찌 나를 알며 어떻게 내가 잡혀온 것을 알았소?"
"좀 앉읍시다."
옥 안에는 그외에도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모두 신수가 멀쩡하고 산발한 머리는 뒤로 가
지런히 넘겨 무명끈으로 질끈 동여매었다. 하나 한결같이 인상이 험악하고 눈빛이 날카로웠
다.
"인사를 합시다."
먼저 우대용이와 길산이가 맞절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과는 반절을 나누었다. 우대용이가
말했다.
"송도 박대인을 아시오?"
"예, 오늘 새벽에 살여울에서 헤어졌으나 무사히 송도로 향했는지는 나두 모르겠소. 거기
서 혼자 잡혔으니까."
"아마 지금쯤은 연안 근처에 갔을 거외다. 아침에 용댕이 사창 군관에게서 연락이 왔소."
하고 나서 우대용이는 제가 잡혀 들어온 앞뒤의 사연을 대강 얘기했으며, 박대근이가 용당
포 사창 수직 포교를 통하여 뇌물을 써서 자기를 회자수로 빼돌려 구명해준 사실을 말하였
다. 또한 통기한 자의 말에 의하면 살여울을 건너간 박대근이 차인을 용당포로 보내어 길산
이 잡힌 사실을 전했고, 길산의 급식비로 어음을 들여놓았다는 것이었다. 우대용이는 회자수
로서 당분간 목숨을 부지하겠지만 길산은 이미 한달 안으로 참수당할 판결이 내려졌으므로
송도부중이 아니라 직접 한양에 손을 써서 구명을 하겠다는 전갈이 있었다.
"옥사장이란 자는 내가 갇힐 때부터 많응ㄴ 뇌물을 주어 인심을 얻어 놓은 사람이오. 앞
으로 박대인이 사창군관과 옥사장을 통해 연락을 해줄 것이니 장서방은 몸이나 튼튼히 하고
서 기회를 봅시다."
"꼼짝없이 죽는 목숨에 세상이 적막하더니 이젠 달리 생각하게 되었구려. 그나저나 내 방
의 놈들이 신참례를 하길래 혼을 내던 참이었소."
"그놈들 내가 잘 아는 강령 뱃놈들이오. 옥중 관습이라고 놈들이 행패를 했나 보우. 근성
은 모두 착한 백성인데, 몹쓸 죄를 짓고 이판사판이 되어 악착스러워진 거요. 어쨌거나 오늘
은 우리 방에서 함께 지내고 내일부터 이칸으루 건너가우. 소문이 옥내에 파다히 돌고 나면
섭섭히 대하지는 않으리다."
우대용이가 껄걸 웃으면서 말했다. 우가의 방에 함께 있던 회자수 중의 하나가 가는 쇠끝
을 들고 다가앉더니 길산이 차고 있는 차꼬의 쇠구멍에 끼워넣고 이리저리 비틀었다.
"우선 그 칼과 차꼬를 벗겨드리리다."
"옥리들이 꾸짖지나 않겠소."
"저들은 우리를 감히 괄실하지는 못합니다."
차꼬와 칼이 차례로 벗겨져나가자 길산은 상을 찡그리고 사지를 펴서 기지개를 켰다. 곤
장 맞은 궁둥이와 무르팍과 인두질당한 등때기가 몹시 쓰라리고 아팠으나, 워낙에 기력이
왕성한 나이인지라 그리 못견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장하고 목이 말라서 견딜 수가 없었
다.
"뭐, 요깃감이나 없수?"
"아직 밥때가 안되었으니 기다려야 하우. 가만있자... 회자수가 옥내에서 주린다는 법은 없
으니 먹을 게 있습지요."
우대용이가 널빤지 아래에 손을 깊숙이 넣어 부시럭거리더니 종이에 겹으로 싸둔 뭉텅이
를 꺼내었다. 종이를 끄르는데 콩 박은 무리떡이다.
"딱딱하지만 꼭꼭 씹다 보면 입맛이 제법 살아날 게유."
"이거 참 염치가 없소이다. 물도 한모금 마실 수 없소?"
"동이에 남았나?"
"다 떨어졌네. 까짓 거 옥졸에게 부탁하지."
동료 회자수가 창살 앞에 서서 번 서고 있는 옥리에게 외쳤다.
"봅시다. 물 좀 떠와야겠는데..."
"아예 옥바닥에 우물을 파든지 해야겠군. 젓국을 처먹었나, 물은 자주 찾구 지랄이야."
"젠장맞을 싫으면 그만두어. 술이나 한동이 들여주든지."
"술 처마시구 밤새 잠 못 자게 행악하려구, 물이나 떠다 주는 게 내 속이 편하지. 에이 더
러워서 느이들 망나니 자식들 땜에 어디 옥리 노릇 해먹겠어. 나라님보다 더한 상전이니."
"수틀리면 참수 귀신 붙어버리라구 악담할 테여."
길산이 듣고 보니 옥리와 망나니의 농지거리가 도통 기탄이 없어서 마치 한통속과도 같았
다. 우대용이가 말했다.
"의아할 게 없소이다. 우리가 행악질을 하거나 소동을 일으키면 저희들도 귀찮고 우리네
일이 비록 천역이되, 쓰임새로는 막중하니 깔보지 못하게 되어 있소."
"형을 집행하여보았수?"
"이 두 사람들은 삼 년이 넘었으니 수십 차례 될 것이나 나는 꼭 한번 참례했소이다. 참
말 못할 짓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기가 끔찍한 일이오. 일테면 제 목숨 붙이느라고 남의 목을
치는 사람 백정인 셈이우."
길산이 물을 말을 잊고 묵묵히 앉았는데, 회자수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래두 살아야지요. 나는 이제 육 년을 채울 것이며 이 사람은 칠년을 채우게 되면 풀려
날 것입니다. 회자수 십 년이면 제정신 가지구 세상 밖에 나가는 자가 드물지만, 혼만 똑똑
히 차리면 마빡에 먹물이나 들이구 세상을 등져 숨어 사는 수가 있소이다."
옥졸이 물을 떠다 주어 길산은 한편 달게 마시고 굳은 떡을 씹어 온종일 주렸던 배를 채
웠다. 그들이 저녁밥때를 기다리는 중에 자연히 신세타령들이 나오게 되어 먼저 감옥에 오
래 있었던 두 회자수가 번갈아 얘기들을 하였다.
"나는 원래 본관이 배천이고 평산서 사령질을 다니다가 검수역말로 나아가 마방직을 했던
사람이외다. 하루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부담마를 정돈하고 땅거미질 무렵에 술이나 한잔 마
시려고 역참거리를 내려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한줄금 비칟거란 말이오. 그래 비를 피하여
잠시 어느 민가의 처마 끝에 무료히 서 있었수.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로 아랫도리가 금
방 젖어버렸지요. 그냥 비를 맞으며 걸을까 하고 막 처마밑을 나서려는데 길가 퇴창문이 드
르륵 열리더니 계집의 반쯤 가리운 얼굴이 나온단 말입니다. 여보셔요. 바쁘지 않으시다면
저희 집안일 좀 도와주구 가시지요. 목소리가 청아하고 손짓이 은근하여 나두 모르는 새 겹
대문 안을 들어섰지요. 일이란 별것이 아니고 광에 있는 쌀섬을 져다 빈 뒤주에다 쏟아 넣
어달란 것입니다. 일을 해주는데 계집이 연해 추파를 던지고 집에 남정네가 없어서 하며 눈
치를 보입디다. 알고 보니 계집은 평산 아전의 첩인데 근래 서방의 거동이 뜸하여 적조했던
탓이라 음욕을 이기지 못한 듯합니다. 물을 것 없이 술상을 차려 마시고 농탕질을 하다가
자리를 깔고 한참 행음을 놀았지요. 자리 속에서 그년의 허릿짓이며 감창소리가 얼마나 대
단한지 세 번을 거듭했소이다. 밤이 거의 삼경이 되었을 무렵인데 문 밖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요. 계집이 당황하여 나를 다락으로 밀어올리며, 주인이 왔어요. 포착되면 큰
일이오. 수선을 떱디다. 그년이 발가 벗은 몸 위에 간신히 치마와 저고리를 꿰고 나가 제 서
방을 들이는데. 시골 아전치고는 늙은이가 풍채있고 점잖습디다. 내가 다락에서 엿보고 있자
니 계집은 새침하게 토라져서 제 서방을 면박 주는데, 이 밤중에 어인 일루 평산서 달려왔
수. 큰마님께나 가실 일이지. 독수공방 한이 맺힌 내게 와서 어쩌시려오. 이렇게 수작질하며
타시락거리다가 서방이 제 계집을 희롱하려 하는데, 계집은 백방으로 거부하고 순종하지 않
는 것이었소. 아마 그동안 뜨음했던 서방의 애간장을 태워 다음을 경계하려나 보다 여겼는
데 실은 나중에 알구 보니 그게 아닙디다. 나를 끌어들인 것두 처음부터 계획이 있어서였지
요. 아전이란 자가 전장이 제법 많고 장사를 하여 점포를 두셋 가지구 있는 터에 슬하에 딸
만 자매가 있었지요. 첩의 소생이 있었는데 아마도 아전의 자식이 아닌가 봅디다. 아무튼지
술상을 차려 제 서방을 대취케 하여놓고는 다시 치마를 걷어올리고 음사를 한판 더 벌이는
데, 계집이 한편으로는 입을 벌려 감창소리를 내고 손을 뒤로 뻗쳐 뒤꽂이를 뽑습디다. 매서
운 독부지요. 뒤꽂이를 세워 서방의 목줄기를 노려 대번에 깊숙이 찔러넣는데 한참 그짓을
벌이던 자가 긴 신음 한 소리에 사질를 뻗습니다. 이년이 검불 떨어내듯 사내를 밀어 내렸
지요. 나를 다락에서 내리우더니 피가 낭자한 시체를 손가락질하면서 이 시체를 치웁시다.
나는 도적이 들었다고 할 터이니... 만약에 댁이 거절하면 소리쳐 사람들을 부르겠어요. 계집
의 얘기가 아전이 이미 늙어 사는 재미도 없으나 재산을 떼어 받으려면 이런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도리없이 걸려들구 말았지요. 오밤중에 난데없는 시체를 치우게 되었으니 정욕은
고사하고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립디다. 계집의 말이 이제 당신과 연분을 맺어 백년해로 하
여보자는 것이었으나, 시체를 치우고 난 뒤에 새벽 선잠을 꺠어 문득 마음속으로 깨달아지
는 바가 있습디다.
나는 한갓 음욕을 채우려고 몸을 그르친 바 되었거니와 계집은 외간 남자를 끌어들여 제
하늘 같은 가장을 죽인 뒤에 시체 치우는 일로 공모하여 영영 묶어버렸으니 나는 완전히 수
노가 되었구나. 앞으로 이런 잔인한 년이 또한 전철을 밟지 않으란 법도 없겠거늘, 사람이란
위우친 다음엔 고쳐야 하는 법이다. 내 차라리 이 계집을 죽여버림만 같지 못하리라 작정하
고서 자고 있는 년을 식칼로 쳐죽여버렸지요. 그리고는 벌거숭이 채로 도망을 나와버렸으나,
그 집안에 검정 더그레와 벙거지를 그대로 두고서 동저고리 바람으로 나왔으니 발각되지 않
을 리가 있겠소이까. 잡혀 죽게 되었다가 사실이 밝혀지게 되어 회자수로 쓰였던 것이오."
본관이 배천인 회자수가 전력을 대략 얘기하고 나자, 다른 회자수도 얘기를 꺼내었다.
"나는 보다시피 경친 놈이올시다. 전에 두 번이나 옥살이를 했던 적이 있지요. 봉산서 원
래는 옹기장수를 하다가 골패에 손을 대어 돈에 쫓기게 되었소이다. 원래 손이 빠르고 눈치
가 맑아서 오히려 장사보다는 도적질에 능하게 되었수. 장터에서 남의 뒤짐을 했는데 봉산
부엉이라면 왈짜패들은 모두 압니다."
길산이 잠깐 말을 막았다.
"만동네 형제를 아시우?"
"알다뿐입니까. 그자들은 내게 돈냥깨나 얻어 썼습니다. 원래 내가 골패잡이를 하며 투전
을 시작했을 적에 손끝으로 패를 더듬어 맞히느라고 날마다 손가락 끝을 물에 담가서 단련
시킬 적부터 장사 생각은 집어치워버렸소이다. 우리네가 솜씨 자랑을 해 보일 적에 빈 대접
에 콩알을 가득 담아 어깨와 다리로 해서 몸 뒤오 올리고 내리고 돌려도 한알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손맵시를 부드럽고 날렵하게 합니다. 또한 그뿐이 아니오. 담넘기, 기둥타기, 지
붕타기, 지붕뚫기, 개피하기, 장롱과 패물함과 온갖 광의 열쇠를 쇠끄틀 하나로 열기에도 능
해야 하는데 한창때에는 서도에서 이 봉산 부엉이만한 도적이 없었소이다.
제일 처음에 잡힌 것이 옹진서였지요. 장물아치 맡은 자가 물건을 옮기다가 포교에게 발
각되어 잡히고 추심중에 매를 못 이겨 나를 찍어 냈습니다. 일년 동안 살고 나서 이렇게 이
마에 먹물을 찍혔습니다.
두 번째는 관아의 담을 넘어들어가 봉물짐 하나를 슬쩍했습니다그려. 한동안 색주가에 박
혀 떵떵거리며 지냈건만 한량패들과 시비가 붙어 싸움질 끝에 꼬리를 잡혔지요. 포교가 와
서 창끝으로 기방의 천장을 꾸욱 찔러 올리는데 대국 비단이 주르르 풀어져 내리지 않겠습
니까. 심한 매를 맞고 삼 년을 살았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년 전에 이 해주 저자에서 평양 상고의 돈전대를 빼냈다가 동행 상
인들꼐 띄어 뭇매를 맞고 잡혔습니다. 이미 세 번째이니 십년 동안 망나니 노릇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요."
봉산 부엉이와 배천 사령인 두 회자수의 전력 얘기가 대강 끝나고 나서 밥때가 되었다.
옥졸들이 풀려나와 우선 칸마다 지켜 섰고 옥 마당으로 음식장사치와 옥바라지하는 사람들
이 몰려들어왔다. 옥바라지하는 가족들은 옥졸의 죄인 점고에 따라 하나씩 나와 반합과 찬
합을 건네고 특히 관원이 들어 있는 삼칸 쪽에는 개다리소반이나마 번듯한 밥상도 들여갔
다. 옥졸에 뇌물을 쓰고 옥전거리 임집에서 밥을 대어 먹는 죄수들도 저녁을 들여 먹는데
그 층이 다담에 못지않는 것에서부터 주먹밥 개떡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었다. 회자수칸
에는 옥사장이 내리는 관밥이 있게 마련인데 점심에 먹고 남은 밥과 젓국이 고작이라 아예
물리고 그 대신에 용당포서 떠날 때 행수 선인이 입금시킨 것과 박대근이가 우대용이와 길
산이RP 넣은 어음 탓으로 옥전거리 주막집의 그럴 듯한 밥을 대어 먹었다. 주막 주인 사내
가 직접 날라온 겸상밥이 옥 안에 들어왔다. 국과 밥은 물론이요, 비린 것까지 끼였는데 상
위에는 따로 막걸리도 한병 얹혀 있고 식후 연초랍시고 남초에 곰방대까지 올라 있었다. 밥
을 먹으며 한편으로 주막집 사내와 우대용이 수작을 하는데, 그가 바깥 소문을 전해주는 것
이었다.
"김서방, 어찌되었나, 집행은 한다든가?"
"낼 모레라구 하데. 일감 생겨서 좋겠구먼."
"예미랄, 일감은 또 뭔 소리여?"
"좌우간에 바람 쐴 일이 생겼지."
"그나저나 딴것보담 압송한단 소리는 못 들었어?"
"누구를..."
"내야 이리되었지만, 이 장서방 말이야."
"장서방... 오라, 내 정신 좀 보게. 송도 어른이 부탁하신 그 양반말이로군. 아까 사창 포교
가 들렀어. 장계 올린 것이 떨어질려면 달포는 끌겠다더군."
"그놈에게서 얼마 맡았나?"
"백냥 받아두었네. 한 석 달 먹을 건 되니까... 염려없어. 저 양반 물고 치른 뒤에 자네 양
식값으로 챙겨두지."
"뭐라구, 이놈?"
길산이 상 위를 수저로 때리며 외치는데, 우대용이는 저대로 화를 냈다.
"그 찢어 죽일 놈 같으니... 박대인이 어음을 냈다면 못 되어도 삼백 냥은 될 터인즉 다
짤라먹었구나."
"두 사람 다 노염을 풀라구. 내 초면에 입바른 소릴 하는게 아니라 오늘 들어오신 장서방
은 듣기에 신생원하구 원한이 있다며? 그 사람이 눈을 시뻘겋게 뜨구 노려보는데, 만약에
형방께서 돈깨나 먹고 슬쩍 눈을 감는다 할지라두 옥에 찾아와 죽이려 할 것이요, 더구나
살인 대적이라 장계까지 올랐는데 정승도 구명해내지 못합니다. 그저 참형 당하기 전까지
신관이나 편히 지낼 꾀를 쓰시우. 내 술을 못 들일까, 계집을 못 들일까, 돈만 좀 쓰면 원님
부럽잖게 옥살이시키리다. 그리고 우서방... 분기내는 것은 모르는 소치여. 어디 돈 삼백 냥
이라면 사창포교 그 사람 혼자 먹는가. 형방 비장께 한 백 넣고 옥사장가 자기가 종히 오십
냥씩 나누면 내게 떨어진 약시대가 백 냥으로 계산이 맞아떨어진다구."
잠자코 듣고 있던 길산은 한숨을 쉬며 밥상에서 물러났고, 우대용이가 창살 사이로 팔을
뻗어 주막 사내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래 말 잘했다. 원님 부럽잖게 호강시켜준댔지? 오늘 내 방에 손이 들었으니 술상 보아
올 테냐?"
주막 주인이 껄걸 너털웃음을 웃었다.
"아니, 이자가 뭘 믿구 이리 드센 척하구 야단이야. 가만있어. 내 이따가 늦은 밤에 약주
한동이 들여줄 테니까, 그보다두 이리 귀 좀 대어봐."
우대용의 귀를 잡아당긴 사내가 재빨리 속삭였다.
"사창포료 말이 송도 사람 전갈에 자네들을 늦어도 겨울을 넘기게 하진 않을 거라데. 우
선 저기 장서방이란 손을 구명해내는 일이 급하네. 송도 분은 한양에다 줄을 대겠다구 하지
만서두 아예 싹수가 글른일이여. 그렇다구 자네처럼 내정 돌입한 적당을 과실로 살인한 것
두 아니요, 관군과 싸워 살상시켰으니 죽는 건 꼼짝없네."
"그래 무슨 수라도 있단 말인가?"
"있긴 꼭 한가지 방법이 있네."
어느결에 우대용이가 바싹 긴장하여 길산을 곁으로 손짓해 불러 앉혔다. 막상 반응이 이
렇게 되자 주막집 사내가 슬쩍 딴전을 피우면서,
"있긴 있는데... 자네들 얼마나 낼라나? 돈이 있어야지."
"돈... 양식값두 근근할 정도루 엄청난 판인데 우리가 옥 밖이라면 도적질이라두 하겠지만
갇힌 놈들이 무슨 돈이 있는가."
"허허, 옥에 갇힌 자가 들보를 뽑는단 말두 있네. 하다못해 마누라까지 팔 건 팔구 보는
게야. 더구나 자네들껜 뒤가 든든하지 않나? 지금 세상에 송상이라면 오품 벼슬까진 바꿔
앉힌다잖아. 돈 가지구 안될 일이 어디 있겠나. 역적질하는 것두 아니구 살인난 옥사나 줌
바꾸려는 겐데."
길산이 제 목숨값이 흥정되는 데에 고지식한 성미가 발동하여 퉁명스레 내뱉으며 물러나
앉았다.
"고만들 두슈. 까짓 죽으면 흙 한줌이긴 빠르나 늦추나 매일반인데, 공연스레 관원들과 구
차히 흥정하긴 싫소이다. 술이나 좀 마시게 해주면 고맙겠수."
우대용이가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 얼마쯤이면 구명이 되는데?"
"동 천냥이면 되어."
"뭐라구? 천냥이 뉘 집 워리새끼 이름인 줄 알어."
"참, 이게 보통 돈이람야 팔도 행상을 휘젓고도 남을 대금이지만, 사람의 목숨값이란 말
야. 자네들은 그저 시름놓고 앉았으면, 내가 송도루 쌍급주를 사서 급히 놓을 테니 그 송상
댁네나 일러달란 얘길세. 벌써 두 사람 양식대로 누백 냥을 썼으니 자네들께 애착이 단단허
달밖에. 틀림없이 아깝다 않고 구명해줄 걸세. 이 사람아, 비록 옥살이는 해두 우선 목숨이
붙어남구 봐야지. 북망산으루 가구 나면 여름 한철의 구더기보다두 못한 게야."
우대용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가 말했다.
"하긴 자네 말이 옳지만, 까짓 사람 백정이나 하며 살아간들 무엇하겠나."
"내가 옥전거리서 이 장살 해오며 한둘을 겪어온 사람이 아닐세. 우선 연명이 급하구 그
다음에 날을 봐야 하는 법일세."
"날을 보다니..."
"아니 예서 참말 옥살 맞은 아수라귀신이 되구 싶어?"
"그럼 어째... 날구 기는 재주가 따루 있어야지."
"이봐, 옥사장의 연중 녹이 얼만지나 아는가. 나락 두어 섬이야."
"자네들 돈냥이나 나올 듯싶어 귀띔해주는데, 옥사장의 후생 팔자나 고쳐줄 듯싶다면 두
몸이 광명 천지에 나서는 것쯤이야 여반장일세."
"그렇다면 구명보다두 탈옥쯤 시켜주어."
"쉿... 목소리 한번 크다. 지금 성내에서는 아무데두 도망 못 가네. 천상 궁방전으루나 수
철장으루 노역을 나가면 몰라두 읍성 안에서는 잡히구 마네."
"언제 노역을 나가나?"
"이제 곧 겨울이니 해 안으룬 틀렸네. 봄이 되면 노역들을 내보낼게야. 그때까지 우선 구
명이나 해놓고 틈을 보아야 하네."
"내가 놓인 몸이라면 강화나 마포를 뒤져 우리 행수 선인을 만나 몸값을 받을 수가 있겠
건만 아무튼 송도루 기별은 해야겠지. 송상 배대인 댁을 찾아서 차인 행수 박대근이란 양반
에게 대이도록 하게나."
"쉿 옥졸이 온다. 내 이따 술 들일 적에 다시 와서 의논을 허지."
옥졸이 각 칸마다 옥바라지들을 몰아내며 끌칸으로 다가왔다. 그는 옥사장이 평소 우대용
이께 대하는 것이 너그럽고 또한 새로운 죄수를 합방시키는 것에 더욱 기가 죽어서 마구 대
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어떻게 저녁은 다 먹었나?"
"지에 막 끝나서 상을 물리는 참일세. 번 끝나면 우리 주막으루 오게나. 주안상 봐둘 테
니..."
"우리 먹을 술이 있어?"
"암 있다뿐인가. 낮에 새루 걸러논 약주가 한 독인데."
너스레를 치는 주막 주인은 역졸이 쇠를 따주어서 상을 들어 내갔다. 모두들 물러가자마
자 다시 한번 각방의 죄인 점고가 있고 나서 조용해졌다. 옥마당에 큰 모닥불이 피어올랐고
번이 갈려 나갔다. 대용의 방에 있는 네 사람은 각자 기대어서 주막 사내가 넣어준 곰방대
한죽을 돌려가며 피웠다. 우대용이가 길산에게 대를 넘겨주면서 말했다.
"장서방, 사람이 우선 살구 봐야 하오. 송도에 통기하여 구명할 방도를 뚫어봅시다."
길산이 상처가 닿지 않도록 꾸부정히 앞으로 숙이고 앉아서 길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글세, 비록 박대인과 형제지의를 맺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그이께 구명을 요구할 만큼
큰 은덕을 입혀드린 바가 없소이다. 사나이가 무슨 염치루 아무 사유 없이 신세지기를 바라
면서 목숨에 연연하겠소."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외다. 돈이야 쓰구 나면 곧 벌 수도 있구, 물질은 갚을 수나
있지만, 장서방과 박대인께서 형제의 의리를 맺었다 할 제 돈냥이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그
어른두 이 얘기를 들으면 가소로이 여길 것이오. 주막 사내가 비록 허풍이 심하고 간교하기
는 하지만 감옥 사정에 저만큼 밝은 자의 제안이니 확실한 구명책이 있을 것이오."
길산이 침통하게 앉았을 때 봉산 부엉이와 배천 사령 출신의 두 회자수가 나서서 말참견
을 하였다.
"우리가 예서 더러운 목숨을 잇고 있는 것은 그나마 회자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냥
죄수였다면 굶어서 한 달이 못되어 죽었을 거요."
"관에서 남겨주는 한밥을 먹다가, 이제 우서방 덕분으루 밥에 술에 호강은 하오만 참으로
목숨이 모진 것이지요."
봉산 부엉이가 얘기를 계속하였다.
"다른 놈들은 목이 잘려 황천으루 가고, 어떤 놈들은 반병신이 되어 나가고 귀양으로 내
쳐지구, 관노루 부려 나가구 하여 옥 안에서 서너달을 넘기는 자가 드물건만 우리네는 십
년을 기한하구 남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자처할 생각두 없지 않아 몇번이나 목을
배달고 죽어버릴려구 했으나, 이제는 십년 세월을 기다리게끔 되었소이다. 우선 장서방두 살
구 볼 생각을 해두시오. 헌데 이건 우리 생각인데 저 주막집놈을 믿진 마시우. 돈냥에 닳구
닳은 놈이라서 언제 배신할지 모릅니다. 지금 두 분께 뒤가 든든하단 낌새가 있으니까 저리
다정하게 아첨을 붙이지만, 나올 게 없을 듯하면 당장에 송장이 되어 나가두 거적 한 장 덮
어줄 위인이 아니외다."
"여기 죄수가 모두 몇이나 되오?"
길산이 묻자 배천 사령이 말했다.
"글쎄올시다. 시골 군옥이라면 토옥이니 한 열 명 남짓이면 가득 찰 것이며 서울 포청의
전옥서에는 수백 명이 끓는답디다. 그래두 해서 감영의 옥이니 줄잡아 오십은 넘을 것이오."
"글구 나는 인원이 많으니 대략 반 년부터 석 달짜리루 쳐서 늘상 삼사십 명은 되겠구
먼."
하며 우대용이가 셈을 잡았고,
"아니우, 좌옥만 쳐서두 그쯤은 되고 우옥에는 온갖 잡죄인이 들락날락하는데 사흘 걸리
에서 보름 걸이까지 좀이나 많습디까."
봉산 부엉이가 가장 그럴 듯이 얘기하여 남은 두 사람의 회자수는 역시 옳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옥 사람들이야 거지반 약한 백성들인데, 우리게 비하면 그야말루 법 없이 살 수 있는
양민들이지요. 밥때 되어보시우. 옥바라지하는 이들이 모두 아낙네거나 늙은이들 아닙디까."
얘기를 주고받는데 갑자기 바로 옆방에서 창살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칸에 고택골이오."
번을 서던 옥졸이 느릿느릿 걸어와서 일칸 앞에서 수작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예, 창물아치 영감이오."
"사흘 전부터 운신을 못하구 드러누웠더니 여하튼 오늘 안으루 죽은 모양이우. 자리를 좁
힐려구 밀어붙이는데 뻣뻣해서 죽은 걸 알았습니다."
옥졸이 몇사람 더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자물통을 따면서 투덜되는 소리도 들렸다. 봉
산 부엉이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저 영감태기 죽은 지 며칠 되었소."
"그럼 시방은 썩어내렸겠구먼."
"뭣하러 시체를 방에 껴들라구들 알리지 않았을까?"
봉산 부엉이가 다시 설명을 하였다.
"저 영감이 일찍이 옹진서 좀도적들의 장물을 넘겨 팔아왔는데, 돈냥이나 모았다지요. 나
두 거래깨나 있어 잘 아오만 그 왜 하루 아침때 저녁때 두 번씩 반합을 들이던 이가 양자
노릇하는 총각이오. 일칸놈들이 영감 죽고 나서 앓아 누웠다며 총각을 속이고 반합 받아먹
는 재미루 신고를 않더니 아까 밥 먹으며 내다보니 총각이 오늘은 아 왔습디다. 어제 저녁
이 마지막이었으니 죽은 걸 눈치챈 게 분명하지요. 이제 차압두 끊겼으니 제놈들이 시체를
방에 두어둘 까닭이 있나요."
옥졸이 놀라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썩은 송장인거. 이놈들아, 거적 및 깊숙이서 썩어나는 시체를 이제 알리느냐. 모두
대장으로 치도곤이를 주리라."
하며 떠들어대는 옥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방의 간장과 색장이 언놈이냐, 이리 나서라."
함부로 매우 치는지 에구 지구 하는 소리와 매 떨어지는 소리가 부닥이며 들려왔다.
"들구 나서라."
회자수칸의 네 사람은 창살에 붙어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적에 둘둘 말아 들린 시체
의 축 늘어진 목과 뻣뻣한 팔이 허공중으로 뻗쳐있었다. 길산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어디 야산에라두 묻어나 줄까?"
"쳇... 묻긴 뭘 묻소."
"그럼 화장하우?"
"내다 버리지요. 전에는 순명문 밖을 지나 동강방 부근에 다 버렸는데 역병이 한번 있고
부터는 송림방까지 차부를 시켜서 실어다가 썰물 때에 바다에 던진답니다. 연고 있는 시체
는 동강방에 내다 놓고 며칠 말미를 주어 수습해가도록 하지요."
시체가 옥마당을 지나 우옥의 뒤로 들려 나가는 게 보였다. 어느덧 달이 높이 솟아올라
모닥불이 희미해질 정도로 새하얗게 우옥의 기와 지붕과 그너머 높다란 담장 위와 마당에
내리깔렸다. 담그림자가 길게 남쪽에서 북으로 엇비슷이 드리워져 있었다.
"슬 생각이 나는데 이자가 좀 늦는걸."
우대용이가 투덜거렸고, 봉산 부엉이가 맞장구쳤다.
"저자의 말을 믿지 마우. 내 네 해를 예서 망나니로 썩었지만, 여태껏 감영 옥내에서 탈옥
했다거나 파옥했단 말은 듣지 못하였소. 셋인가가 뛰었다가 성내에서 잡혀 죽고 총 맞아 죽
은 일은 있었수."
"구명시킬 방도야 있겠지."
"그건 모르죠."
다시 주위가 조용해지고 달이 창살 틈으로 나타나자 옥내에서 가느다란 울음소리나 노랫
가락이 흘러나왔다. 한 칸인 듯하더니 이어지는 노래에 화답하고 끊기면 곧 뒤를 이어서 사
방에서 노래가 일어났다. 노래가 끊긴 곳에서는 푸념하는 중얼거림과 울음소리가 시작되었
는데,
"아이구 하늘이여 죄없는 내가 죽어지면 부모님은 어디 가 의지하며 처자는 뉘게로 간단
말이오."
"이놈의 세상아, 한많은 내 육신이 무슨 쇠로 만들어서 달리고 두드리고 식힘이 이다지도
대단하냐."
"어마님 날더러 어찌하라구 이제는 뭘 바라구 살라구 애통해 돌아가신단 말요. 어마님 시
신 하나 수슴하지 못하구... 눈은 감으셨습니까요."
"에이 이년아 네년이 후살이 갔다구 내가 서러워할 줄 아느냐, 이 찢을 년아 발길 년아."
"배고파 죽겠다. 나 밥 좀 다우, 밥 좀 줘. 배고파 미치겠다. 너희들만 처먼구, 너희끼리만
처먹구, 에이 이년들 느이 지아비 가장은 이렇게 굶겨 죽이기냐. 밥 좀 다구."
이런 한탄 속에 건너 옥에서 청아한 여인 죄수의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길산이도 어느
결에 감정이 동하여 함께 따라서 흥얼대는데, 제 목소리와 여수의 목소리는 곧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먹히어버리는 것이었다.
바람소리인 듯 물소리인 듯 나지막하게 옥에서 담장 밖으로 퍼져나가는 노랫가락 소리가
해하얀 달빛ㅇ르 더욱 처연하게 하였고, 특히나 여인들의 떨리는 목청은 듣는 이의 가슴을
찌르고 헤쳐놓았다.
석산에 피는 꽃은 해마다 피건마는 가신 님 어이하여 풀같이 못 되는고 채금터 깊은 골에
금 캐러 가셨는가 오색돌 고이 갈아 장사로 가셨는가.
하고 나면 다른 창살의 어둠속에서 곧 받아 다른 곡조가 되어 나왔다.
남산 밑에 남도령아 서산 밑에 서처자야 하늘가에 올라가서 뿌리 없는 낭굴 캐어 별당 안
에 심어 놓고 그 낭굴랑 크고 커서 한 가지에 해가 열고 한 가지에 별도 열고 해를 따서 겉
을 대고 달을 따서 안을 대고 금낭 하나 지어놓고 중별 따다 중침 놓고 상별 따다 상침 놓
고 외무지개 끈을 달아 임 줄라고 지은 영낭 임을 보고 영낭 보니 임 줄 뜻이 전혀 없네.
이렇게 정한 노래가 나오고 사는 일의 모진 것을 탄하는 노래도 나오는데,
명이 짧은 무덤은 있어도
서러워 죽은 무덤은 없네
죽은 이라 헤치어 묻어
산 이들은 근심이구나
본디 저녁 어둡는 집에
오늘이라 밝은 때이랴
어둡거든 밤이라 말리라
빔더 아니 어두워러라.
노래들은 느리고 길게 신음소리처럼 이어졌다. 어둠속에서 밝은 바당을 건너 두터운 벽을
뚫고 멀리 멀리로 퍼져갈 것만 같았다. 잠시 노래가 끊길 적에 먼 곳에서 밤새 우는 소리들
이 들렸고 서내의 개 짖는 소리와 어디선가 삼현육각 소리도 들려왔다. 길산네 곁방에서 누
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무삼 죄로 매를 맞아 죽단 말가. 한달 만에 죽은 사람 보름 만에 죽은 백성 두견
새 우는 소리 가는 빗소리에 영혼이들 아니 울랴. 불쌍하다 저 귀신아 가련하다 저 귀신아
용천검 비껴들고 일산 앞세워 전배 서며 아침 저녁 여닫을 제 피나게 울어예니 빈 산위 조
각달과 소슬바람에 버들가지 날리는데 원통하다 우는 소리 밟혀 죽을망정 찍소리나 하오리
라. 고개 들고 눈 부릅떠 꾸짖으며 쓰러질제 망하리라 망하리라 망할 것을 알고 가네. 입 살
은 놈 눈 살은 놈 귀 살은 놈 치죄하여 죽일 계교 차릴 적에, 어마님 거동 보소 청상 과부
기린 자식 악형함을 보기 싫어 혀를 물고 먼저 가니, 애달프다 권세 영욕이여 너희 죄가 누
대에 미치리라.
노랫가락 반 푸념을 겸하여 탄식하는 음성이 들리는데 길산이 듣기에도 소리에 능하거니
와 사설 또한 사람의 간장을 태우는 듯하였다. 길산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옥벽을 쿵쿵 두
드렸다. 토벽에서 흙덩이가 우수수 떨어진다.
"거 소리하는 사람이 뉘시오?"
노래가 끊기고 잠시 조용해졌다가,
"그리 묻는 사람은 또 뉘시우?"
착 가라앉은 사내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오늘 추심을 받고 들어온 문화 사람 장서방이란 사람이오."
"허허허 그곳은 회자수의 칸인데 댁네가 내 목을 칠 게 아니오. 칠때는 치더랃 부탁이나
한가지 해둡시다. 작두의 날을 갈아 부디 단칼로 쳐주시오. 이 사람은 헛되이 과거공부로 이
십여 년을 허송하고 지사질로 여기저기 떠돌다가 관원을 찔러 죽인 죄로 참형을 기다리는
가평의 김학생이외다. 내 시체를 수습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속참행하는 없을 것이오만
말마디나 주고받은 인연으로 고통 없이 죽게 집행허우."
길산이 대답할 말을 잊고 앉았는데 대용이가 말했다.
"여보슈. 아마도 댁네가 감영 집행 판결이 떨어진 사람인 모양인데 이 밤과 다음 밤을 지
내고 내게 차례가 온 모양이오. 내가 당신의 목을 치게 될 텐데 원망일랑 마우, 다 더러운
목숨들이우."
"다만 좋은 세상을 못 보고 가는 것이 한스럽소. 곧 좋은 세상이 올거외다. 나는 두루 우
리 산천을 보고 다녔는데 산의 맥은 길고 줄기차건만 하천이 협착하고 장대하지 못하오. 이
것은 인물이 많으나 뜻을 두루 펴지 못함과 상통합니다. 장한 인물들이 뿔뿔이 흩어지니 모
여서 힘을 합치는 이만 같지 못하오. 이제 w3ls인이 오는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진인이라니..."
"허, 미륵으로 환생할 정진인도 모르시오. 요즘 민간에서는 이씨가 진하여 정씨의 세상이
온단 말이 널리 퍼져 있소이다."
"세상이 바뀐단 말이오?"
"그렇소. 우리가 왜인들의 난에 일차 시달리고 대명은 이미 오랑캐의 나라로 바뀌어 또
한번 난리를 겪었소이다. 조정은 이미 썩어서 기운이 다하였소. 새 세상이 오지 않고서는 백
성들은 모두 살 길이 없소이다. 송도에서 정씨 성을 가진 분이 일어나 옳응ㄴ 세상을 일으
켜 세우리라는 소문도 못 들었소?"
"댁네는 이제 한번 해를 보고 죽을 몸이어든 세상이 바뀌어 무슨 소용이 있수."
"내가 해를 한번 쳐다보고 죽는단들 해가 뜨지 않을 리가 있소이까. 사나이가 죽어 이름
이 남는 것도 귀하다 말들 하지만, 세상에 끼친 바가 없을진대 허명이오. 세상에 살면서 헛
된 공부로 허송하였으되 좋은 일을 못하 죽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구려. 좋은 세상이 오
면 댁네도 남의 목을 베면서 연명하지 않고 광명 천지에 바로 살 수 있지 않겠소."
이때에 배천 회자수가 버럭 고함을 지렀다.
"그렇다. 너는 글줄이나 읽고 남의 모자리나 써주고 밥술을 먹었으되, 옳게 살아 억울하게
죽는달 말이렷다. 나는 흉악한 살인죄를 지어 갇히고 망나니가 되었으니 네 목을 쳐서라도
살아야 되겠다. 죽여줄 때 큰소리치지 말려무나."
봉산 부엉이도 욱하여 함께 외쳤다.
"그래 나는 거듭 세 번이나 죄를 짓고 이마에 먹물 들인 도적이다. 너두 대살죄를 면치
못함이 분명 살인 대죄를 지은 놈이어늘 우리들의 행사를 비웃지 마라. 되도록 무딘 칼로
오래오래 베어줄 테다."
벽 너머에서 도형수의 한숨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내가 댁네의 회자수됨을 비웃는 것이 아니오. 댁네를 회자수로 만든 세상을 한탄하는 것
이외다."
길산과 대용은 서로 말없이 벽에 기대어 앉았고 봉산 부엉이와 배천 사령도 저쪽의 말을
곰곰이 씹어보는 눈치였다. 우대용기가 침울하게 말했다.
"저 사람과 그만 얘기하지."
마당을 건너오는 사람의 자취가 보였고, 주막집 사내가 술 한병을 들고 다가왔다. 옥족들
도 회자수칸에는 별로 성화를 부리지 않았다. 진주라 하여 사람 백정 망나니의 기를 눌러준
다며 죽는 가족들에게서 행하 돌은 거두어 술을 먹이는 게 항례인데, 그들 자신이 술을 사
먹는 것은 더욱이나 묵인되었다. 볼장 다 본 놈이란 형을 받는 자가 아니고 그것을 집행하
는 망나니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회자수 망나니는 회광이라고도 부느리 미친 도때비란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제 손에 죽을 사람의 목숨을 앞에 두고 밤을 새우는 거짓 미친 자
들의 외로움을 그 누가 알랴. 죄지은 선비의 가냘픈 탄식 몇마디에 가슴이 떨려 그 짐승 같
은 사내들은 생각이 복잡하였다.
주막집 사내가 술을 넣어주며 길산을 구명시킬 방도를 얘기하는데, 사고무천ㄴ의 도형수
한 사람을 설득시켜 기왕지사 죽을 목숨이니 그동안 밥이나 먹여주겠다며 대신 참형당할 것
을 청 들인단 것이었다. 목숨이 붗어 있는 한 먹어야 하고 이왕에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나
으니 길산의 이름으로 먼저 처형을 자청할 자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었다. 참형수를 바꿔치
고 나서 기일을 끌며 지내다가 회자수로 될 적에는 죽은 자의 이름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주막집 사내가 이러한 구명의 방법을 누누이 말했으나 길산은 거의 듣지 않고 있
었다. 어쩬지 제 목숨이 너무나 치사스럽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들여진 술을 모두 나
누어 마시고 청 위에 거적을 덮고 누워 잠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방에서 노랫소리와 앓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가 그치질 않았는데, 봉산 부엉이와 배천
사령은 곧 코를 골며 잠이 들었으나 길산은 오만가지 생각에 눈이 더욱 말똥하여졌다. 이리
눕고 저리 뒤체며 생각하는데 죄가 없는 사람들도 술은커녕 밥도 제대로 못 먹어 죽어 나가
는 판이고, 저 선비만 하더라도 죽음을 두려워 않고 좋은 세상에 대한 원망을 얘기하는데
참으로 얼마나 구차히 목숨에 매달려 있는 것이냐. 더구나 자기는 사람을 여럿 죽인 죄를
분명히 저지른 자이니 조용히 앉아서 죽을 날을 기다리자, 박대근이에게 신세를 질 필요는
없다. 눈보라 속에서 죽어 길에 묻힌 어머니의 낯선 얼굴이 여러 사람의 얼굴에 겹쳐서 떠
오르다가 그것은 묘옥의 하얀 얼굴로 바뀌었다.
"묘옥이..."
하는 중얼거림이 밖으로 세어나왔고 가슴속까지 함뿍 젖어들 듯한 달이 묘옥의 얼굴처럼 창
살 사이에 걸려 있었다. 목숨이 치사스레 매달리지 않으련다.
옥졸이 회자수칸에서 길산을 나오도록 하여 좌옥 이칸으로 옮겨 가도록 했다. 다시 칼을
쓰고 발목에는 차꼬를 차고서 옥문을 나서는데 우대용이가 그의 등뒤에 대고 말했다.
"장서방 몸조심 허슈. 밥은 주막에서 매끼 붙여줄 거요."
"우서방두 건강히 지내우."
그가 좌옥 이칸으로 들어서는데 죄수들 가운데서 술렁임이 일어났다. 길산은 잠시 옥문
가에 서서 그 여럿의 번쩍이는 눈을 내려다보았다. 여러 죄수들의 상좌에 청 위에 올라앉은
서너 명의 죄수들이 있었는데, 거기 수염이 뻣뻣이 곤두서고 눈망울이 커다란 자와 의복이
깨끗하며 상투까지 틀어올린 자가 있었다. 얼마 전 약간 혼을 내준 색장과 간장이었다. 길산
을 마음속으로 작정해둔 바가 있어서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말하였다.
"신참 문안드리오. 저는 어디에 앉는 것이 좋겠소이까?"
간장은 곁에 있는 색장과 다른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색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간장은 다른 사내와 한번 더 눈을 맞춘 뒤에 말했다.
"이 청 위로 올라오우."
길산이 머뭇거리며 청 위에 올라가 걸터앉자 색장이란 자가 퉁명스레 물었다.
"망나니칸의 우서방을 잘 아우?"
"어제 처음 인사를 나눴수."
"어제는 우리가 좀 심했던 모양이오만 원래 옥규가 그래놔서... 내 뒤통수가 조금 터졌수."
"미안하게 됐수."
청에 올라앉은 자는 모두 네 사람이 되었다. 간장이 말했다.
"다 같은 목숨들인데 사이좋게 지냅시다. 우리 인사 틉시다. 나 강령의 손가요."
"문화 장서방이올시다."
"내는 강령 배씨유."
"재령 양선달이오."
색장과 다른 사람이 각각 말하였다. 양선달은 나이 오십줄에 들어서 보였는데 신수가 좋
아 보이는 것이 막되게 살아온 것 같지가 않았다. 얘기를 나누는 중에 길산이 눈치채기로는
양선달이 바로 색장과 간장의 밥을 함께 붙여주는 물주인 것 같았다. 덕택으로 양선달은 힘
깨나 쓰는 두 사람의 보호를 박고 있는 듯하였다.
관원을 찔러 죽이고 잡혀 들어온 지사 김학생의 참형이 집행되는 날이 왔다. 아침부터 옥
마당이 술렁대더니 밥때에 회자수칸에는 난데없는 술과 고기가 들어왔다.
"우대용이와 부엉이가 오늘 집행에 나간다."
술을 들여준 옥졸이 알려주었다.
"그래서 한 밥인가..."
"오늘 감참관은 형방 비장 나리이시고, 관찰사 어른의 자제 되시는 한양 도련님이 특히
참과하신다. 착오 없이 거행하라는 분부시다."
"마당은 어디야?"
"그야 ... 주내방 사거리 저자이지."
"언제..."
"삼한육각 울리구 나서 곧 나갈 걸세."
봉산 부엉이가 표주박 그득히 술을 퍼서 벌컥이며 마셨다.
"제길 술맛 나는구나."
우대용이는 술을 들고 있는 봉산 부엉이와 배천 사령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안 마시겠어. 간밤의 꿈자리가 뒤숭숭하든데 어찌 번을 바꿀수 없을까?"
"망나니가 꿈자리 가려가며 옥살이하게 됐남. 취해놓지 못하면 집행 때 낭패를 본다구."
"피맛을 보아 도깨비가 몸에 씌면 칼질두 잘 나가구 죽는 이두 편한게야. 공연히 께름칙
한 것 따지다간 자네 비루먹어 말라 죽네. 나두 처음에 밤잠을 도통 이룰 수가 없더구먼. 온
갖 허깨비가 보여서 전신을 식은땀으루 목욕을 하군 했지."
부엉이와 사령이 제각기 말하였다. 부엉이가 술을 떠서 우대용이께로 내밀었다.
"여게 좀 마셔두게. 주내방 저자에 나가 칼춤이나 한번 그럴싸하니 추어야지, 뭘 그러구
앉았어."
우대용이 술항아리 쪽에 돌아앉더니 거친 손길로 탁주를 퍼마시기 시작했다. 길청이 열리
는 소리가 들리면서 잠시 후에 군졸들이 옥의 정문으로 몰려들어왔다. 죄수를 저자로 압송
해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옥졸이 회자수칸의 자물쇠를 따주며 우대용과 봉산 부엉이를 나오
도록 하였다. 집행 행렬이 출발하기 전에 옥사장은 그들 두 망나니에게 날이 널따란 작두를
내주었다. 맨 앞에 망나니가 서로 그 뒤에 좌우를 갈라선 군졸들이 번쩍이는 창검을 치켜들
고 따랐으며 두 열의 가운데로 옥졸에 포위된 사형수인 김학생이 섰다. 그는 짤막한 나무칼
을 썼고 팔뚝이 잔뜩 묶여 있었다. 행렬의 맨 뒤에 고수가 간간이 북을 메기며 따라왔다.
주내방 사거리 저자에는 길 복판에 나무 기둥이 세워지고, 감참관으로 나선 형방 비장이
저자의 모퉁이에 있는 점포 좌판을 걷어치운 평상 위에 관찰사의 젊은 자제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길 가녘으로 수많은 장꾼들과 부근 촌사람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앉거나 서 있었는
데, 그들 앞에는 포졸을 거느린 환도를 찬 포도군과들이 엄한 자세로 섰다. 행렬은 똑바로
군중들의 가운데로 헤치며 나아갔다. 이미 취기와 군중들로 흥분하기 시작한 봉산 부엉이는
맨 앞에서 작두칼을 휘두르면서 겅정거리는 것이었다.
"에이잇, 베일까 말까."
그가 칼을 휘두르며 군중들게 가까이 가면 놀란 군중들이 으아 소리를 차며 흩어졌고, 창
검 든 군졸은 망나니를 안쪽으로 내몰았다. 돌아서면서 부엉이는 입을 죽 찢고 희광이 웃음
을 터뜨렸다.
"히히 헤헤헤 히히히..."
부엉이는 칼로 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 보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하여 웃었다. 봉
산 부엉이는 작두칼을 쳐들고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는 우대용의 옆을 지나치며 재빨리 속삭
였다.
"웃어... 입을 벌리구."
우대용이는 저도 모르게 목구멍 속에서 웃음이 솟아나오고 있음을 알았다.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고 있었다. 육신이란 무엇인가, 목숨은 또한 무엇이냐, 오랜 세월을 피맛을 보고 해묵
어온 작두칼이 그의 손안에서 무당의 신대처럼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에이잇! 히히히..."
옥졸들이 사형수를 감참관 앞에 꿇어앉혔다. 감참관은 감영의 판결이 떨어진 문서를 펼치
고 간단한 집행 심문을 하는데 이름과 관향을 확인하고 판결 내용이 틀림없는가를 옥사장에
묻고 나서 거행을 명하였다. 북이 천천히 느린 박자로 두드려지고 있었다. 봉산 부엉이는 양
손에 화살 두 대를 잡고 껑충껑충 뛰면서 형장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북소리가 크게 한번
들리자 무릎 꿇린 죄수에게로 부엉이가 달려들었다.
화살로 사형수의 양쪽 귀를 꿰는 것이다. 귀가 맞창이 뚫렸으나 이미 넋이 반쯤은 QK져
나간 사형수는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몸을 꿈틀거렸을 뿐이었다. 옥졸 하나가 다가와 죄
수의 얼굴에 회칠을 해주었다. 북이 또 한번 울리자 봉산 부엉이는 죄수의 귀에 꿰인 화살
을 꼬나잡고 저자 쪽으로 끌고 나갔다. 구경꾼들게 회술레를 돌리는 것이다. 회술레가 끝나
자 죄수는 다시 형장에 끌려와 기둥에 두 팔이 높직이 묶이고 머리를 틀어 위로 잡아맸는데
죄수가 마음대로 목을 가누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우대용이와 부엉이는 작두칼을 좌우로
번쩍이며 죄수의 주위를 넘나들며 껑충거렸다. 부엉이가 낄낄대면서 구경꾼들께로 나아가
손을 벌리고 돌아다녔다. 군중들도 이것이 관례인 줄알고 망나니가 제 앞에 가까이 오기 전
에 돈닢을 땅에다 내던졌다. 행하를 거두고 다니면서 부엉이는 연신 하늘을 향하여 웃어댔
다. 감참관이 속히 거행하라 일렀건만 부엉이는 들은 척도 않고 계속 행하를 거두고 eisuT
으며 드디어는 감참관에게까지 나아가 손을 내밀었다.
"헤에..."
그사 손을 내민 쪽은 젊은 도령이었는데 놀란 나머지 핼쑥해진 젊은이가 뒤로 물러나 앉
으며 말했다.
"비장, 이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감참관인 비장이 재빨리 대꾸했다.
"예, 속참행하라구 원래는 가족들에게서 받게 되어 있으나 저 죄수는 아무도 없으니 우리
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하고 나서 비장이 상을 찌푸리고 고함을 쳤다.
"이놈 태장을 맞고 싶으냐? 속히 거행하라."
"헤에..."
콧등으로도 여기지 않고 망나니는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젊은도령이 주머니를 끄르고
엽전 댓 닢을 꺼내어 내던지자 그제사 부엉이가 물러났다. 북소리가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
다. 우대용이와 부엉이는 물동이에서 물을 퍼서 입에 머금고 연신 칼날에다 뿜어 보였다.
"에헤헤헤! 히히히..."
단칼에 베지 않고 오래오래 죽이는 것이 바로 망나니의 특권이었다. 부엉이는 칼을 죄수
의 목에 댔다가는 떼곤 하는 것이다.
봉산 부엉이가 한참이나 죄수를 놀리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칼을 쳐들었던 우대용이가 번
뜩 내려혔다. 좌우로 손목이 묶여 있던 죄수의 몸이 빈 쌀자루 구겨지듯 털썩 무너져 내렸
다. 기둥 위에 붙들어매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목은 달랑 매어달렸다. 눈은 부릅뜬 채이고 얼
굴의 근육들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일그러졌던 표정이 한순간에 정지해버리면서 머리는 기둥에 매달려 흔들흔들했다. 잘린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저자의 마른 땅 위에 콸콸콸 번져나갔다. 역졸이 삼태기에 재를
담아 뿌렸다. 그리고 근처 주막에서 다시 술 한동이가 날라져왔으며, 망나니들이 행핫돈을
받아 갔다. 부엉이와 우대용은 작두칼을 빼았기고 발목에 쇠사슬이 채워졌다. 망나니가 집행
뒤에 피맛을 보아 발광할까 염려해서였다. 집행된자의 시체가 감영에서 나온 의원에 의하여
형식적으로 검시되었다. 거적에 둘둘 말린 시체가 수 끄는 수레에 실려 나갔다. 두 망나니는
턱과 가슴으로 술을 줄줄 흘리면서 연거푸 들이켰고 옥족들도 속을 가라앉히느라고 함께 잔
을 나누었다. 봉산 부엉이는 몰려드는 구경꾼을 향하여 연신 이빨을 드러내고 눈을 희뜩러
기며 짐승 같은 소리를 질렀다. 시체는 송림방을 향하여 멀어져갔다.
우대용이 회자수칸으로 돌아온 뒤 그대로 곯아뗠어져 잠이 들었는데 깨어난 것은 어스름
한 저녁때였다. 아침까지도 미친 숭을 내던 봉산 부엉이는 구석자리에 초라하게 쪼그려앉았
고, 배천 남은 행하로 들어온 술을 마셨고, 대용은 아까 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죽은자의
얼굴을 도무지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다만 속히 죽여달라고 부탁하던 사내 목소리가 뚜렷
하게 기억되었다. 대용은 부엉이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부엉이는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
박고 골똘히 무슨 생각엔가 잠겨 있었다. 우대용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웠다.
"여보게 시방이 저녁인가 아침인가?"
말을 붙였으나 봉산 부엉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네 어디 아픈가..."
다시 한번 묻자 그제야 고개를 드는 봉산 부엉이의 얼굴에는 물기가 번져 있었고 눈빛이
번들거렸다. 우대용이는 더 이상 할 말을 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에 발짝 소리가 가까
워지더니 옥졸이 다가와 발길로 칸살을 탕탕 차면서 말했다.
"너희들을 누가 찾아왔다."
대용이 칸살에 매달리며 머리를 내미는데 누군가 그의 손을 덥석 잡는다.
"우서방, 날세. 얼마나 고생이 많은가"
대용이 자세히 보니 박대근이 상단의 차인으로 따라다니던 사내였다. 평시에 용댕잇개서
거래 관계로 서로 안면을 텄던 사이였다.
"어, 이게 웬일이야?"
"문화 장서방은 어디 있나?"
"저 둘째 칸에 있네. 헌데 다쳤다던 대인께선 어찌됐나?"
"내가 떠나올 제 방금 도착하셔서 분부 내리시데. 까짓 장독쯤이 인삼 한근 달여 먹으
면 거뜬할 걸세. 박대인께선 자네와 장서방 일루 여간만 걱정하시는 게 아닐세. 그 때문에
내가 일부러 왔네. 장서방을 일단은 대시수로 만들어놓잔 분부일세. 대시수는 봄과 가을에만
집행하게 되니 이 겨울 안으로는 별일 없을 게 아닌가."
우대용이 차인에게 말하였다.
"허나 구명이 된다 한들 이 꼴인데, 제길 겨울이 온다구 무슨 뾰족한 수가 날까?"
"아무튼 기일을 끌다 보면 묘책이 생기겠지. 시방은 박대인이 일어나려면 짧게 잡아두 보
름은 넘어 걸릴 게야."
"예서 파옥은 안되네. 시골 읍의 토옥하군 다르네. 적어두 감영의 전옥이란 말야. 군졸과
포수가 풀려나와 사방의 대문을 막아놓으면 수십명 작당해두 빼치기 힘들고 설령 한둘을 빼
낸다 할지라고 인명이 많이 상할 것일세."
"다 방법이 있다니까. 옥전거리 주막 주인놈이 이상한 소리를 하데그려."
차인은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놈은 옥전에 붙어서 죄수들 등을 치는 간교한 놈일세. 어쩌면 신복동이네 끄나풀일 걸
세. 그쪽엔 아예 얘기두 꺼내지 말게나. 내 박대인의 분부루 형방 앞으우 나가는 선사품을
가져왔네. 장서방의 구명쯤은 잘될 꺼야. 그러면 나는 저쪽에 들렸다가 가려네. 기간 몸조심
잘하게."
"안부 전해주어."
차인은 좌옥 이칸으로 올라가 장길산을 만났다. 길산은 만나자마자 박대근이의 안부부터
급히 물었다.
"어찌되었소? 성님께선 차도가 있으슈?"
"배대인이 친히 의원을 붙여주었소이다. 그뿐요, 송도엔 갖은 약초에 대국 약재가 쌓였으
니 그만한 병쯤이야 한 열흘이면 거뜬하겠지요."
"총을 맞은 갑송이는..."
"예, 고약을 붙이고 행수 어른과 함께 기거하구 계시는데 거기 얘기를 잠꼬대까지 합디
다."
"걱정 말라 전해주시우."
"하인이 길산의 머리 가까이 다가들며 속삭였다.
"구명이 될 듯하오. 섣달 그믐을 넘기지 않아 우서방과 장서방을 건져내시겠다구 다짐하
십디다."
"같이 연희 나왔던 우리 식구들은 송도루 가지 않았습디까?"
"행방을 전혀 모르구 있소이다."
"여기에 잡혀 추국을 받다가 내가 갇힌 뒤에 곧 풀려났다는데 서도나 북관 쪽으루 올라간
모양이로군. 갑소이더러 몸이 다 나아 길을 걸을 수 있거든 재인말에 가서 부모님들은 안심
시키도록 일러주시우."
"아마 지나는 길에 이리 들를지도 모르겠수."
길산이 잠깐 생각한 뒤에,
"그리구 되도록 밥 붙여주는 주막을 바꾸게 해주오. 그자가 마음에 들지 않습디다."
"예, 대강의 얘기는 들었소. 내가 형방을 통하여 놈이 섣불리 굴지 못하도록 해놓으리다."
차인은 말을 전하고는 곧 옥을 나갔다. 길산이 청으로 돌아가 안즌데 간장이 넌지시 물었
다.
"어째 장서방은 뒤가 든든한 것 같우."
길산은 대꾸없이 앉았다가 퉁명스래 받았다.
"아는 체 마시우."
"어떻게 파옥이라두 해줄 듯허우?"
이번에는 곁에 앉았던 색장이 물었고, 양선달은 곧장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우리네가 아무리 대시수라고는 하나 일생에 한 철이란 촌음과도 같지요."
간장이 상을 찡그렸다.
"거 오십이면 오래 살았는데 뭘 찔찔 짜구 그러우."
길산이도 감옥 안의 생활에 익숙해졌고, 국문받을 때에 입었던 화상과 매에 터진 상처도
딱지가 앉았다. 몸이 풀리니 식욕이 왕성해져서 밥 할멈이 날라다 주는 매끼니를 먹어치우
고 때로는 회자수칸에서 보내온 술도 마셨다. 과연 돈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옥사장은
길산이에게 매우 관대하였다.
송도서 보낸 차인이 사흘 걸러 찾아와 바깥 소식을 통기해주었는데, 형방 비장이 길산을
대시수로 바꿔주겠다고 약조를 했다는 것이었다. 차인은 주막거리 임집에서 아예 묵으며 길
산의 집행 날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차인이 찾아온 다음날부터 길산은 밥붙이를 바꾸었다.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느라고 옥전거리에서 방을 얻어 떡도 팔고 밥도 붙여주는 할머니를 차
인이 대주었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한 것이라고 길산은 생각했다. 첫날 매를 맞고
들어와 주위의 참상을 대하고는 차라리 집행 날짜를 바랐었지만 배부르게 먹고 건강을 회복
하니 한 열흘 남짓 남아 있는 제 목숨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었다. 해질 무렵 서쪽 하늘에
번진 저녁놀의 남은 빛이 차차 꺼져갈 적에, 길산은 전에는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사는
일과 죽는 일에 관해 생각했다. 하루의 끝은 놀에서 박명으로 침침한 땅거미로 그리고는 어
느결에 갑자기 캄캄한 어둠으로 이어졌다. 어둠이 깃들자마자 깊어진 가을의 벌레 소리와
더불어 땅속에서 울려퍼지는 듯한 산 송장들의 가냘픈 노랫소리와 신음소리가 감옥 담벽 안
을 가득 채웠다. 길산은 밤새껏 잠을 설치며 이리저리 돌아눕다가 새벽닭이 울 즈음해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고, 누군가 흉몽에 시달린 자의 비명 섞인 잠꼬대 소리에 놀라서 벌떡 깨
어 일어나곤 하였다. 서리가 지붕마다 허옇게 내려 덮일 무렵이라 새벽에 옥내로 스미는 냉
기가 뼛골을 후비는 듯했고 창살 가녘으로나가 드러누운 돈 없고 힘없는 죄수들의 떨며 앓
는 소리가 끊임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심한 것은 사흘 전에 잡혀 들어온 사십대의 사
내였는데, 국문을 받는 중에 입은 상처가 날로 더해져서 온몸이 부어 있었다.
"어, 그놈 되우 엄살 떠는구나. 이거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나."
하며 간장이 참다못해 일어나 앉았다. 색장이란 자도 자도 따라서 일어나며,
"조용하도록 해줄까."
"정말 목을 졸라버리든지... 무슨 방도를 써야겠네."
색장이 이리저리 널브러진 사람들의 몸을 건너뛰어 앓는 사내에게로 갔고 창살 바깥을 살
폈다. 간장이 속삭였다.
"그깐 놈 죽는 게 나을 테니 없애버려."
"물... 물 좀."
인기척을 느낀 사내가 간신히 중얼거리는데 색장은 재빨리 그를 타고 앉아 목을 졸랐다.
캑캑대는 소리와 함께 간신히 뿌리치려고 손을 내젓는데 색장은 힘을 주어 내리눌렀다. 길
산이 이상한 기미를 알고 깨어나더니 한걸음에 청에서 달려 내려오면서 발뒤꿈치로 색장의
등골을 내리찍었다.
"어이쿠!"
색장이 나동그라져서 사람들 위로 넘어졌다. 소란에 놀란 다른 죄수들이 기겁을 하며 일
어나 구석으로 몰려 섰다. 길산이 색장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가 다시 면상을 쥐어박는
데 단번에 입술이 터지면서 앞니가 부서져 내렸다.
"간장... 네 이놈, 혼좀 나봐라."
"나는... 모르는 일이오."
간장이 앉은걸음으로 벽에 붙어 앉아 다가느는 길산에게로 손을 내저어 보였다.
"이놈, 약한 자에 잔인하고 강한 자에 비굴한 네놈이 무슨 옥규를 잡는 간장이란 말냐."
"용서하우."
길산이 말을 더듬는 간장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나서 양선달을 잡아 끌어내렸다.
"모두 죽기는 마찬가지다. 저 사람을 여기 눕혀라."
길산이 앓는 사내를 번쩍 들어다가 청에 눕혔다. 그는 잠깐 씨근대며 앉아 있다가,
"이제부터 우리 칸에서 간장이니 색장이니 하여 남을 침학하는 일이 있으면 내 가만있지
않을 테요. 늙고 아픈 사람은 청에 앉히고 우리네 펄펄한 놈들은 바깥쪽으로 나와 앉는 것
이 이치에 맞소."
하고 나서 길산은 사내가 누웠던 썰렁한 창살 가까이 가서 앉았다. 이미 날이 밝았으니 다
시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색장이나 간장이란 자가 저마다 성깔을 죽이고는 있으되 길산에
대하여 앙심을 갖게 된 것만은 숨기지 못할 사실이었다. 특히 색장은 빠진 앞니를 손바닥에
들고 연신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면서 타는 듯한 눈길로 길산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아침밥때가 되어 옥전거리에서 기다리던 백성들이 제각기 음식을 장만하여 옥내로 들어왔
다. 그러나 좌옥에 화서 보니 밥을 제대로 먹는 죄수는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일반 죄인들
중에서도 시름시름 앓다가 굶어죽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밥때가 되면 가족이 있거나 밥
붙이를 대고 있는 자들끼리 옹기종기 창살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사고무친이거나 가족에
게서 버림받는 자들은 뒷전에 밀려난 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동료 죄수
들이 동정하여 밥덩이를 덜어주기도 하고 남긴 것을 얻어먹기도 했으나, 워낙에 수가 많고
보니 모두들 밥때에만은 서로 마주보려 하지 않았다. 가끔 뒷전에 섰던 자들이 등뒤로 덮쳐
밥을 움켜쥐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간장과 색장에게서 뭇매를 맞고 쫓겨갔다. 그래서
뒤를 대일 식구도 없고 힘도 없는 자들은 뒷전의 어둠속에 꾸겨박혀서 아무도 몰래 죽어갔
다. 왕성히 먹어치우고 있는 자들도 그가 언제 가족에게서 버림받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우
옥에서는 버림받은 가장이나 부녀가 옥으로 찾아오던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밥때마
다 시끄러웠다. 바깥에서도 굶고 있으니 갇힌 자를 돌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상풍음녀
의 경우였으나 개중에는 얼굴깨나 해끔하여 옥리들게 눈을 맞추고 관밥을 얻어먹고 연명하
는 여자들도 있었다. 모두들 관사비로 팔려갈 신세들이니 족히 몸을 내줄 만하였다. 길산이
갇힌 좌옥 이칸에서도 굶는 자가 네댓 명이나 되었는데 옥에서 버리는 음식 찌끼로 간신히
목숨을 이어나가는 판이라 눈이 퀭하고 수족은 넓은 소매 안에 작대기처럼 솟아 있고, 목이
길쯤하게 삐어져나온 몰골들이었다.
길산이 할멈에게서 밥과 소채가 들어 있는 바가지를 넘겨받고 첫술을 뜨는데, 할멈이 옷
고름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것이었다.
"어째 그러우?"
"아무래두 우리 아이가 오래 못 살 것 같소."
하며 할멈은 한숨을 쉬었다.
"몹쓸 병이 들었소. 며칠 전부터 몸을 잘 쓰지 못하더니 실성기를 보입니다. 음식을 배앝
는 고로 죽을 주면 넘길까 하였으나 바닥에 자꾸 쏟아버립디다. 고사나 지내줘야겠어요. 아
마 몹쓸 망나니귀신이 씐 모양이지."
"그게 다 밖에 나가면 나을 병이우."
"옥송이나 빨리 열려서 차라리 귀양으루 내쳤으면 제정신을 찾을 텐데... 아무래도 세상엔
벌써 인연이 끊겼나 보오."
노파는 창살 속의 어둠을 향해 젖은 눈으로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아들이 죽으며 나두 아마 살지 못할 거외다. 내 들어 있는 집이 옥졸의 집인데 그 계집
에게 댁네 뒷바라지를 부탁하여 두지요."
"원 별말씀두 많으슈."
그들이 이러한 수작을 나누는 중에 뒷전에서 다투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돌아보니 양선달
이 그의 여종이 들인 밥을 남겼고 그를 두고 밥붙이 없는 주린 죄수들이 서로 밀치고 닥치
는 판이었다. 먼저 그릇을 잡은 자가 가슴에 껴안고 있었으며 비틀 걸음으로 달려든 자들이
그것을 서로 뺏으려는 중이었다.
"밥 남은 것 있수?"
길산이 묻자 할멈은 고개를 저었다.
"아예 밥 나눠줄 생각 마우. 내 코가 석자라구, 상여 목도를 거들어서 죽은 사람 삽디까?"
"할멈 입 닥치슈."
곁에 앉았던 색장이 발끈하면서 할멈에게 눈을 부릅떴다.
"아침부터 재수없이 거 무슨..."
길산이 제 밥을 조금 남겨 할멈에게 다시 내밀었다.
"여기 물을 부어 밥물이나 꺼룩하게 내어주."
하면서도 길산의 심사는 편안치 않았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 지금 자기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 제 등뒤에서 굶어죽어가고 있는 자를 두고 모두들 밥때를 넘기지만 지금 이런 판국
에 굶어죽건 목 잘라 죽건 죽기는 매일반이나, 자기의 죽는 일을 앞에 두고 남의 죽음이 심
기에 걸려 밥술을 넘길 수가 없다니, 그런 불편은 밥붙이를 갖고 있는 모든 죄수들이 느끼
고 있었다. 반대로 주린 자를 뒤에 둔 그들은 더욱 식욕이 왕성해졌고 자신들의 보다 편안
한 식욕을 위하여 제 밥에서 고시레를 떠내듯이 남겨서 뒤로 밀어주는 것이었다.
길산이 노파가 짓이겨준 밥물을 들고 앓는 사내에게로 가니, 사내는 희미한 눈을 떠서 그
를 올려다보았다.
"이것 좀 들겠소?"
길산이 바가지를 쳐들어 보였으나 사내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길산이 무
력하게 그것을 내려놓자 다른 죄수가 아무 말 없이 끌어다가 손으로 건져서 후루룩거리며
들이마셨다. 길산이 자리르 뜨려는데, 병자가 손을 뻗어 길산의 저고리 자락을 잡아당겼다.
"응... 고맙소이다."
병자는 나약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고마울 것 없수. 오늘 아침은 속이 좋지 않아 아무래두 버릴 것이기에..."
길산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댁은 병으로, 내는 집행으로 열흘을 못 넘길 목숨들이오."
하고는 껄걸 웃었다. 병자도 하얗게 열에 들뜬 입술을 달싹이며 미소를 짓고 부드러운 표정
으로 물었다.
"뭘루... 잡혔수?"
"관원과 무뢰배를 셋이나 베었소이다."
중년의 병자는 끄덕이는 시늉을 하였다.
그가 마른 삭정이 가지처럼 뻣뻣한 손을 내밀어 길산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금년에... 몇이오?"
"예, 을미생이올시다."
"지금 거긴... 내가 나선 싸움에 되놈들꼐 끌려나갔을 나이겠군."
병자는 눈을 감고 있더니,
"후통강에서 송가라강까지 올라갔지. 오랑캐들게 강제로 끌려가서 싸웠소. 나선이란 서양
국의 별종들인데 오랑캐와 땅싸움을 합디다. 세상의 끝까지 안 가본 데가 없소. 병자년 난리
통에 태어나 태평성대에 죽는다 하지만, 이것이 태평성대는 아닌 듯하오. 댁네는 뭘 해서 먹
고 살았수?"
"하천 중의 광대요."
"나두 구경 많이 했지. 소리 잘하오?"
"잘은 못하나, 흥은 아오."
"춤도?"
"탈박놀음이 좋습디다."
"허... 그 참 김이나 매다가 땀들일 때 그늘에서 탁배기 한잔 마셔봐. 어깨춤 다릿짓 신명
에 농사 다 버리지."
병자는 정말 풍악이라도 잡혔다는 듯 입을 벌죽거리며 박자 소리를 흉내내는 것 같았다.
길산이 물었다.
"어디 살우?"
"서흥 잔벌서 양반네 땅 갈구먹구 살던 사람이오."
"헌데 어쨰 처자식이 없수."
"둘 다 사노비로 팔려갔소. 환곡이랍시고 도적놈같이 몇곱절 빼앗아 가려는 나졸을 광이
로 찍어 상하게 하고 나는 처작식들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하였소. 내 땅은 아니지만 정든
고향과 집을 버리고 어디루 갔겠소. 대처에서 장사라두 얻어걸릴까 하여 황주로 갔소이다."
병자는 숨차하면서도 얘기를 털어놓았다. 황주에서 얻어걸린 일거리란 가진 것이 없으니
고작해야 저자에서 짐을 부리는 짐꾼이나, 장이 서면 점포 모퉁이에 서서 사람을 불러주는
곁꾼 노릇을 하여 간신히 처자를 부양했다. 큰달골에서 토굴을 파고 살았는데 그 동네는 촌
에서 농사를 짓다 못하여 대처를 찾아온 유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토박이
들의 괄시가 심하였고 큰달골 움마을은 자주 포교들의 기찰 대상이 되었다. 사는 사정이 험
악해지니 순박한 농군이더라도 차차 생활에 악착스러워졌다. 사내들이 일거리를 찾아 나가
면 부녀자와 아이들은 구걸과 품팔이를 하노라고 사방 동네를 싸돌아 다니는 것이었다.
그가 하루는 양반댁에서 서찰을 받아 강서 쪽에 방자를 다녀오는데 산쏙에서 노루 사냥꾼
을 만났다. 화승총을 갖고 있었으며 제법 총포를 잘 쏘듯이 이야기했고, 예전에 조총수의 조
련을 받고 싸움까지 해본 그는 엽사의 총을 빌려 장끼 한 마리를 쏘아 떨굴 수가 있었다.
그와 곧 의기 투합하여 사냥질을 다니기로 하고서 산속을 헤매고 다녔는데 벌이가 괜찮았
다. 하루는 물정 모르고 첨사 일행의 사냥터에 끼어들었다가 잡혀가 볼기를 맞고 총포마저
빼았겼다. 알고 보니 사냥꾼은 군적에서 달아난 자라 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의 움집
으로 피하여 함꼐 숨어 지내게 되었다. 사내가 둘씩이나 아무 일도 못하고 누워 뒹굴고 있
으니 밥이 입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이놈이 안달이 나서 자꾸 나를 꼬드기는 것이었소. 우리 꼭 한번만 강도를 하자 그것이
오. 주린 배가 나라님이라고 언놈이 마다하겠소. 황주서 제일 큰 여각을 밤에 뚫고 들어갔소
그려."
그는 밖에서 망을 보았고, 엽사가 먼저 들어가 주인을 식칼로 위협하고 돈냥을 빼앗았다.
갑자기 순라꾼의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그들이 달아난 골목에서 뛰쳐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업결에 달아나려는 순라가,
"네 이놈, 뭣하는 놈이냐?"
하고 등뒤를 덮쳤고, 그는 돌아서면서,
"칼이나 받아라!"
하며 순라의 배때기를 푹푹 쑤셔버렸다. 그러는 동안에 다른 조들이 들이닥쳤으며 그는 사
방에서 던져진 투승에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두 그 녀석처럼 칼로 내 배를 긋고 가는 것인데... 아주 독하구 야무
진 놈이었소. 생각해보면 참으로 덧없는 인생이 아니겠소. 누구에게 말이라도 전하고 싶지
만... 쓸데없는 노릇이지요. 여보 젊은이, 만약에 내가 오늘밤에라도 죽게 되면 넋걷이라도
불러주오. 진혼이 못 되면 또다시 구천을 떠돌며 행악을 저지를 나쁜 귀신이 될까 두렵소/"
"그게 무슨 행악이우? 내 댁네 말을 가만 듣는 중에 한 생각이 떠올랐소이다."
"무슨 생각..."
길산이 병자의 손을 꼭 쥐어주며 낮게 말했다.
"나는 꼭 살아야겠소. 어찌됐든 살고 나서 여기서 도망갈 테유!"
사내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길산을 올려다보면서 애타게 말하였다.
"내 몸이 회복되어 건강해지면 날 데리구 같이 가주오!"
"그럽시다. 함께 달아납시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사내의 머리가 옆으로 떨어지며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아니오, 사람은 자기 죽을 때를 아는 모양이오. 내... 오늘밤... 넘기지 못할 것만 같구려."
사내의 말은 틀림이 없어 보였는데 이미 혀가 까부라지고 숨소리가 죽이 끓는 듯한 탁한
소리로 가라앉아 있었다.
과연 그날 밤에 사내가 운명하였다. 죽는 마지막 순간에 가서 사내는 눈에 총기를 빛내며
길산에게 속삭였다.
"죽지 마우... 달아나오. 달아나면 황주 가서... 소식이나..."
혀가 점차로 굳어지는 말소리이다가 딱 끊기며 사내에게서 기가 빠져나갔다. 길산은 한
많은 그 사내의 육신을 무릎에 얹고 한참동안이나 앉아 있었다. 다른 죄수들은 모두 잠이
들었거나 깨었어도 잠든 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죽을 사람들이라 남의 죽음을 대하기가
싫은 것 같았고 그만큼 죽음은 그들과 가깝게 붙어 있었으므로 이미 구경거리도 슬픔도 아
니었다. 길산의 넋걷이소리가 나직하게 옥 안에 울리고 있었다.
"넋이야 넋이야 넋이로구나. 암흑천지에 가는 넋이야. 넋일랑 넋반에 담고 몸에 시체는 관
에 담고 북망 산천을 돌아가니 한심하고 처량하다.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에 저승일세.
이 터전에 각인 각성 열에 열 명이 댕기시더라도 뉘도 탈도 보지 않으시는 영부정 영부정
가망해, 산 간 데 그늘이요, 용 계신데 소이라, 깊숙컨만 모래우에 해소로도. 넋이야 넋이야
넋이로구나. 암흑천지에 첫 넋이야. 넋일랑 넋반에 담고 신에 시체는 관에 모셔 세상 나오신
상제님 놀고나 갈까. 서낭당의 뻐꾹새야 울지를 말어라."
길산이 옥에서 달포를 지내는 중에 문득 설움받는 백성의 삶을 스스로 깨우치게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헌헌장부로 되어진 지금까지 받은 온갖 수모는 자신이 오직 천출 광대이기
때문이려니 하여 세상의 귀천과 빈부를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남칸 살
옥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의 숱한 사연을 보고 듣는 가운데, 일찍이 박대근이와 초대면하
여 그가 포부를 말할 적에 느끼지 못했던 점이 이제 와서 환히 보이는 듯하였다. 지금까지
자기가 무턱대고 관원께 느끼던 적개심이나 양반 호족들에게 가졌던 원한은 얼마나 우직하
고 무모하였던가를 알았다. 이제부터는 보다 더욱 지혜롭게 더욱 강하게 되어야만 할 것이
다. 불행히 황해감영 남칸에서 참수 귀신이 된다면 모르되, 꼭 살아 나가게만 된다면 그는
세상을 알고 지혜를 갖추어 진실로 강한 사나이가 되리라는 결심을 하였다. 주먹과 칼날을
휘둘러 싸움에 능함을 자랑삼는 것은, 마치 곰이나 범이 이빨과 발톱을 내세우는 짓과 다름
이 없을 것이었다. 힘은 지혜로움만 같지 못하니 맹수가 함정에 빠지는 격이요, 지혜는 또한
덕에 미치지 못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여럿의 마음을 움
직이려변 마음이 올바를 것이요, 따라서 마음을 닦아야 할 것이었다. 아, 여기서 내 미욱하
고 짧은 젊음을 마칠 수는 없구나.
집행 기산이 다하였으나, 밖에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더니 옥졸이 와서 자물통을 따면서
외쳤다.
"죄인 장길산은 칼과 차꼬를 가지고 나오라."
"왜 그러시우?"
길산이 영문을 몰라서 주춤거리는데,
"나오라면 빨리 나올 것이지, 어째 꾸물거리는가."
재촉이 심하였고 뒤에는 환도와 창을 겨눈 다른 옥졸들의 서슬이 푸르렀다. 길산이 벗어
두었던 칼롸 차꼬를 들고 옥 밖에 나오자 옥졸들은 달려들어 칼을 복에 씌우고 발목에는 차
꼬를 채웠다.
"너를 독칸에 넣으라는 엄명이시다."
길산이 돌아서는데 그의 등뒤로 색장의 텁석부리 얼굴과 돼지 같은 양선달의 머리가 창살
로 내밀어지면서 제각지 떠들었다.
"이놈아 꼴 좋게 되었다. 걸핏하면 사람을 치더니 네 목은 강철인가 하였다."
"그 광대 천출이 양반을 수모하였으니, 부디 참수하지 말구 대매에 때려 죽이슈."
길산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음을 멈추어 그들의 외침을 들었다. 다시 간장이란 자가 나
서서 색장과 양선달을 뒤로 끌어들이고는,
"저승에 가서 만날 텐데 그리햐면 쓰는가. 여보, 먼저 가서 자리나 잡아놓으슈, 덕 좀 보
게."
낄낄대는 소리가 들리자 옥졸이 조용하라고 윽박질렀건만 길산은 그들에 덩달아 너클웃음
을 웃었다. 옥졸 하나가 마음에 Tm였던지 부드러운 어조로 길산을 위로하였다.
"여게 맘놓으시게. 이칸이 협소하여 불편할 듯아여 옥을 옮기는 겔세."
"괜찮소이다. 이미 살인 대죄를 지은 대장부가 그깐 일에 안달할 리가 있겠소. 집행이 내
일이지요?"
하니 혹졸은 헛기침을 몇번 하고 나서 서로 미루다가 한 사람이 대답한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내일 집행할 자의 이름이 장길산이라네."
길산이 큰 죄를 짓고 옥에 갇혔다는 소문은 진작에 재인말에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다. 문화
관아에서 포졸들이 풀려나와 온 재인말의 남자라면 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다가 문초를 하
였다. 관대들이 틀림없이 화적패들과 내통을 했을 것이란 추측 때문이었으며 실상은 감영
의 관문을 핑계로 하여 재인들이 화전 개간해놓은 토지를 현감이 빼앗으려는 꿍꿍이 속이었
다. 만약에 원래가 유민지배인 관대의 무리를 내몰고 그땅을 관전으로 바꾸어놓으면 같은
결수만큼의 비옥한 토지를 착복할 수가 있는 셈이었다. 대지주와 짜고서 세입의 전부를 관
아기 먹고 천한 무리들을 화적으로 내몰면 현감은 자신의 수입이 늘어나는 셈이었다. 그는
새봄이 오기 전에 광대들이 문화 경내에서 떠나기를 명하였다. 첫째로 풍속을 해친다는 것
이며, 둘째로 궁벽하여 화적패와 서로 내통하기 쉽다는 것이며, 셋째로 농사에 게으른 자들
에게 농토를 맡길 수가 없다는 등의 이요였다. 문화현감은 감영에 계를 올려놓고 관찰사의
하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뿐만아니라 길산의 어미 아비를 토옥에하옥시켜놓고 국법에
준하여 도적의 친족을 관노비로 처분한다는 것이었다. 관문이 감사에게서 왔는데 떠나기를
원하는 자만을 보내되 신역에서 벗어난 자들만을 놓아 보내고 농사를 짓고 국세를 납부하며
걸립하지 않겠다는 자들은 토지를 그대로 맡겨 농사를 권유하도록 조치하라는 내용이었다.
연감의 분부가 아전을 통하여 득달같이 재인말에 전해졌으나, 연희로 철마다 걸립하여 살던
광대들 사이에는 의견이 엇갈려 서로 아무 작정도 못 짓고 갈팡질팡하였다. 젊은이들은 재
인말에서 달아나 먼 대처로 나가고 싶었으나 신역이 있는 고로 길산과 갑송의 부모처럼 제
혈족에 죄가 내릴까 하여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나 가족 전원이 떠나기로 결정한 집은 밤
사이에 봇짐을 싸서 어디론가 소리없이 떠나갔다.
길산의 양어미 무당의 신딸이던 봉순이는 두 양주가 관가에 잡혀간 뒤, 까막내 갖바치 박
서방네 집에 가 있었다. 거기서 길산의 누이와 봉순이가 번갈아 읍내를 드나들며 늙은 두양
주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작은 잿말의 묘옥이도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자세히 수소문하여 알고 있었건만 봉순이나
그 누이처럼 앞에 나설 수 없는 제 처지를 괴로워 하였다. 어서 달려가 임을 보고 싶은 마
음에 밤마다 베갯머리가 흠씬 젖을 정도였으나 묘옥은 우선 그의 부모님들을 돌봐드리리라
작정하게 되었다. 관아에서 터처로 두 분을 보내기 전에 얼마쯤의 돈이라도 장만하여 잡숫
고 싶은 음식이라도 넣어주고 싶었다. 그날부터 묘옥은 인근 부촌으로 나다니며 날품을 팡
랐다. 어느날 온정마을의 부잣집에서 하루 종일 잔치일을 거들다가 까막내 쪽으로 올라오는
데 멀리 들판으로 사람들의 무리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묘옥이 처음에는 무심하다
가 그들이 가까워져 살펴보니 통장고와 구슬상모와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연희 나갔던 패가
분명하였다. 묘옥은 그들 틈에 길산이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행여나 하는 그리움에 눈시
울이 화끈하여 정신없이 마주 달려나가며 소리쳤다.
"여보아요!"
광대패들이 주춤주춤 걸음을 멈춘다.
그쪽에서 먼저 달려오는 그녀를 알아보았고, 패거리 중에 큰돌이가 나서며 말했다.
"길산이 찾는 모양인데, 여긴 없수."
묘옥이 그제사 좀 부끄러워져서 할딱이는 숨을 가라앉히고 나서,
"함께 가셨던 패가 아닌가요?"
"응, 우린 을대니까... 하여튼지 갑대나 을대나 간에 길산이가 감영에 갇혔다는구려."
"무슨 소식 없던가요?"
큰돌이가 제 패거리를 돌아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해주 관싯날에 길산이와 나하구 수룡이네 팔문이네가 모두 만나기루 했었는데 우린 용댕
이서 만났지. 해주 바닥이 발칵 뒤집혔데. 그래 포졸들을 피해서 갈대밭에 줌었다가 신평서
잡혔더. 풀려나오는 길에 길산이가 갇혔다는 걸 알았소. 모두들 코가 석 자나 빠졌지요. 갑
송이 는 어디로 달아났는지 모르지만 무사할 것이고, 길산이는 살인을 한데다 양반댁 내정
돌입한 일로 화적죄까지 뒤집어썼대요."
묘옥이 가슴을 죄며 물었다.
"그건 대강 알아요. 판결이 어찌 났답니까?"
큰돌이가 우물쭈물하더니 몸을 돌리면서 곁에 사람에게 미루었다.
"나는 잘 모르니... 자네가 말하게."
"왜 공연히 날더러 미루구 그래/"
묘옥은 부끄러움도 잊고 큰돌이의 소매를 잡아 흔들었다.
"그분이... 죽게 되나요?"
큰돌이가 하는 수 없이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참수형이랍디다."
살인 대적죄를 지었으니 참수형이 뻔하건만 묘옥은 국법이 제 마음이나 되는 것 같아 행
여 귀양형이나 내릴 줄로 믿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놀라지 않고 묘옥은 다시 물었다.
"집행 일자가 어떻게 나왔나요?"
"거야 낸들 알 수 있겠소. 관찰사와 형방이 아는 일이지. 허나... 오래 끌지는 않을 거외다.
그냥 살인수는 봄 가을로 처형한다지만 도적은 한양서 장계 떨어지면 곧 죽인답디다."
하고 나서 큰돌이는 멍하니 선 채로 까막내의 흘러내려가는 물을 바라보는 묘옥에게 물었
다.
"마을은 별일이 없소?"
"네..."
"관가에서 조용히 있더냐 말이오?"
"포졸들이 몰려와 여러 사람을 잡아갔었지요. 모두들 고생했대요. 여러 집이 대처루 떠났
어요."
광대들이 서로 우리집은 괜찮으냐, 누구네가 떠났냐는 등으로 중구난방 질문을 던졌으나
묘옥은 벌써 그들 곁을 떠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탄식을 주고받았다.
"길산이 결기 땜에 못 살 고장이 되었구나."
"누가 아니래. 예서 쫓겨나면 어느 골 수령이 우리를 발붙여줄까나..."
"떠들 것 없네. 정 살 수 없으면 산에 들어가 녹림당이라두 짜자구."
"터전을 닦아놔야 도적질두 하는 게야. 살 길이 막연하게 됐구먼."
묘옥은 아무 정신 없이 타박타박 걸었다. 작은잿말의 밭두렁과 그 너머로 동구에 섰는
노송이 보였으며 어느결에 묘옥의 흐려진 눈앞에 길산의 낯익은 걸음걸이가 나타났다. 달빛
을 온몸에 받으며 길산은 다가오고 있는 듯하였는데 묘옥은 뛰는 가슴으로 그를 기다렸다.
다시 제정신이 들었을 때는 아직 훤한 저녁이었고 소나무 밑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
서야 묘옥은 울음을 터뜨렸다.
묘옥이 자기 설움에 겨워 마음껏 울고 난 뒤에 다시 길산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우물
쭈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처형되기 전에 감영 옥으로 찾아가 손이라도 잡아보아
야만 원이 없을 듯하였다. 제 몸에 찍혀 있는 연비의 또렷한 글자, 정표를 해준 사내, 거친
세상을 살아오며 처음으로 마음까지 바치었던 유일한 남자, 그러나 어쩐지 인연이 박하여
멀리 떠나버릴 듯 스스로 조바심치게 하더니 먼저 저세상으로 가는 사람이 아닌가. 그가 죽
고 나면 묘옥은 더 이상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게 될 것 같지 않았다. 가자, 해주로 가서 마
지막으로 서방님의 모습을 뵙고 그리고는 속세를 떠나리라. 삭발하고 절에 의탁하여 평생
청정하게 살다가 가리라. 묘옥은 그날따라 적막해 보이는 손돌네 초가삼간으로 들어섰다. 퇴
창문이 밖으로 밀쳐지며 곰방대를 물고 있는 손돌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제 오냐?"
"예, 아버님 시장하시지요. 얼른 저녁 지어 올릴게요. 온정 나갔다가 비린 자반을 조금 얻
었습니다."
"얘, 네 눈이 왜 그러하냐? 퉁퉁 부었구나."
묘옥은 얼른 손돌의 시선을 피하여 부엌으로 들어갔다.
"너 울었구나."
묘옥이 대답을 못하자 손돌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해주서 기별이 온 모양이구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길산이가 어찌되었느냐? 그의 부모가 옥에 갇히었으니 화적질이라도 했더란 말이냐. 그
녀석이 성깔은 팔팔하되 남의 재물을 탐내거나 인명을 가벼이 알 놈은 아니다."
이때에 부엌에서 입술을 물고 참고 섰던 묘옥이 흐드득하는 소리를 내어버리니 손돌은 당
황하여 맨발로 뛰어내려와 부엌으로 들어선다.
"길산이놈이 어지된다더냐. 숨기지 말고 바른대로 말하여라."
"참수형을... 달포 안으루 집행한대요."
"누가 그러더냐?"
"을대로 나갔던 큰돌 아저씨네 패가 돌아왔어요."
"알겠다."
손돌이 묘옥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네 마음이 상하였구나. 내일 식전에 해주로 떠나거라."
"예... 하오나 소녀가 은혜를 저버리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아니다. 이젠 나도 이 재인말도 모두 기한이 다한 것 같구나. 여기 다시 돌아올 생각을
말아아. 관에서 재인말을 폐촌시키고 남은 자는 권농하여 관전의 소작인을 만든다더라. 우리
들의 업을 저들이 미워하는 것이니 남아 있을 필요가 있겠느냐. 어서 너 갈 데로 찾아가 새
로 살아라.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너를 보내는 것이 이리도 박절할 수 있겠느냐."
"아니어요. 다 죽게 된 저를 활인하여주셨음은 낳아주신 부모보다 더합니다."
"그래, 어서 밥이나 맛있게 지어 먹자꾸나. 그동안에 내 어디 다녀올 데가 있다."
"어딜 가셔요?"
"까막내에 다녀오겠다."
손돌이 까막내에 가려는 것은 제 장의감으로 간작한 무명과 죽은 아내의 초라한 패물 몇
가지를 팔아 묘옥의 조자를 마련해주려는 것이었다.
묘옥은 모처럼 쌀밥을 지어 아랫목에 묻어두고 국은 남은 잿불 의에 얹어 식지 않도록 해
놓고는 곧 여장을 꾸리었다. 그동안에 모은 품삯이 한 이십 냥 되었는데 열 냥은 내어 길산
의 누이에게 전해주고 그 부모에 차입이나 들이라 할 것이며 나머지 열 냥으로 자기 노자를
할 작정이었다. 어찌되었거나 해주 가서 길산을 만나 맛있는 음식이라도 들여주고 노자 떨
어진 뒤에는 산속으로 들어가버리면 그만이었다. 온정서 구해온 쌀 서 되에서 두 되를 내어
방아에 찧고 오가리를 켜켜이 넣어 호박떡을 쪘다. 육포나 영계는 대처에 가서 할 요량을
했다. 묘옥은 속이 허한 자에 마늘을 넣은 닭활개국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이슥
해서야 약간 취기 어린 손돌 노인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손돌이
앞섶을 헤치더니 돈 한 꿰미를 내어주었다.
"옜다, 네 혼수 비용인 셈치고 가지고 가거라."
"이 많은 돈이 어디서 생겼어요?"
"온정말에 이잣돈을 놓아두었는데 삼년 지나니 원금 빼고 스무 냥이더라. 반만 받아왔다."
"제게두 약간의 노자가 있습니다."
"그동안 내 곁에서 고생 많이 했지. 그게 품삯으로는 모자나는 돈이다."
묘옥이 정색을 하고서 말하였다.
"아버님 말씀이 너무 박정하십니다."
대답 없이 손돌이 수저를 놓더니 벽을 향해 목침을 베고 누웠다.
"술 몇잔 했더니 피곤하다. 너두 어서 건너가 일찍 자거라. 새벽길 놓치겠다. 그리구 새벽
에 떠난 제는 날 깨우지 마라. 못 일어날 듯하니..."
손돌이 일부러 그러는 짓인 줄 잘 아는 묘옥은 상을 들고 나왔다. 대강 괴나리봇짐을 꾸
려놓고 나서 묘옥을 남장으로 갈아입었다. 초립동이 행세를 하며 갈 작정인데, 천상 날이 저
물어 봉놋방의 뭇 사내들 틈에 끼여 자려면 여자의 몸에 위험이 많을 듯해서였다.
"하, 도화살이 떠나지를 않는구나."
사랑하는 사내를 이제 죽음의 길로 떠나 보내는 묘옥은 저절로 장탄식을 하는데, 일부종
사는커녕 창기의 신세에서 헤어날 수가 없는 자신의 팔자소관이 끔찍하도록 미워졌다.
이튿날 아직 컴컴한 새벽녘에 묘옥은 길 떠날 차비로 방을 나섰다. 손돌의 방 앞에서,
"아버님, 소녀 떠납니다."
라고 불러보았으나 손돌은 잠이 깊이 들었는지 코를 드높이 고는 소리만 들려왔다. 손돌이
밤을 꼬박 새우며 이 생각 저 걱정으로 몸을 뒤채다가 묘옥이 나오는 기색을 알고 짐짓 건
성 코를 골고 있었던 것이다.
"부디 오래오래 사십시오."
묘옥이 삽짝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손돌 노인은 황급히 마루로 나섰다. 담에
가려 아직 길목에 나선 묘옥이 보이질 않았다. 잠시 후에 초립 쓰고 봇짐을 멘 묘옥의 음영
이 나타났고 길 저쪽으로 멀어져갔다. 손돌은 고적감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묘옥을
구완해내어 부녀의 정으로 지내오긴 하였으되 손돌은 저도 모르게 묘옥을 여식으로가 아니
라 여인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손돌 노인은 무녀 출신이었던 그 아내의 기박한 운
명을 사랑했음과 마찬가지로 묘옥의 슬픔을 사랑하였다. 길산과의 연분은 손돌 노인께는 한
괴로움이었으나 묘옥의 행복은 자신의 소망이기도 하였었다.
묘옥이 떠나가고 말았을 떄 이 늙은 광대는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어졌는가를 깨닫고
태산이 무너지듯 주저앉아버렸다.
"모두 떠나가는구나!"
그는 한참이나 현기증이 가시기를 기다리다가 북이며 탈박이 들어있는 버들고리를 마당으
로 끌어냈다. 그는 오랫동안 자기 손때가 묻고 표정마다 그의 솜씨가 깃들 탈들을 차례로
들여다보았다. 그것들은 모두 제 분신들의 얼굴인 것만 같았다. 무섭게 부릅뜬 눈, 짓궂고
장난스러운 입, 억센 코, 곰보 얼굴, 하얀 얼굴, 찌그러진 얼굴, 새카만 얼굴, 모두가 그의 서
러운 광대의 인생처럼 여러 모양으로 흘러 지나갔다. 희노애락의 수많은 나날들이 탈의 표
정 속에 정지되어버린 듯하였다. 그는 부시를 쳐서 불꼴을 일구어 탈박을 하나씩 태우기 시
작했고 그의 눈은 빛나고 입술에 경련이 떠오르며 차차 열광해가는 기색이 보였다. 아득하
게 장단 맞추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는데, 그것이 제 머릿속에서 부서져라 두드려지고 있었
다. 손돌 노인은 타는 탈박을 방속에 던졌다. 문 창호지에 옮은 불이 널름대며 타오르기 시
작했다. 손돌은 싱긋 웃고 나서 회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염주를 목에 걸고 송낙을
얹었다. 그리고 늙은 중의 탈박을 얼굴에 썼다. 북을 들어 잔약한 소리로 두드리다가 박자를
맞추어서 힘껏 후려치며 몸짓으로만 춤사위를 잡았다. 그동안에 불길은 더욱 커져서 바자작
대는 소리로 널름널름 지붕 위로 올라갔다.
동녘은 훤히 맑아 있고 집 타는 연기가 맑은 하늘로 퍼져가고 있었다. 손돌은 북과 북채
를 불 속에 던져 넣고 기다란 한삼을 등뒤로 경쾌하게 내뿌리면서 다리를 들어 굽혀 펴기를
반복하며 깨끼리사위를 한바탕 추고 돌아 갔다.
"어허, 얼쑤."
늙은 광대의 마지막 연희는 그 장삼소매를 휘젓는 품이며 돌아 나가는 동작이며가 능숙하
고 힘차서 아름다웠다. 도도리장단에서 굿거리곡으로, 다시 타령곡으로 춤의 동작이 바뀌다
가 잦은타령조로 되었다. 학이 날아가듯 소매를 양쪽으로 너울거리기도 하고, 마당 가녘으로
빙빙 돌기도 하다가, 제 몸이 불꽃이나 되었는지 솟구쳐 꿈틀대며 위로 치솟는 것이었다. 여
다지와 곱사위춤에서는 좌우로 흩뿌려지며 모이는 한삼자락이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인
듯하더니, 솟구쳐지자 동작은 거칠고 열기가 있어 보였다. 온 집에 불이 붙어 활활하는 불바
람 소리가 들렸고 초가지붕 위로 붗꽃이 널름대며 퍼져갔다. 춤이 고조되어 몇번인가의 도
약이 거듭되더니 마치 퇴장할 때이듯,
"잘 놀구나 가오..."
긴 말가닥과 한삼 자락을 할결같이 뒤로 끌면서 손돌 노인은 재빨리 불 속에 몸을 감추었
다. 불이 집 전체를 휩쓸어 맹렬히 타올라서 집채의 윤곽이 불 가운데 묻혔을 무렵에야 작
은잿말 사람들은 외따로 떨어진 총대 노인의 집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물을 끼얹는다 하여
도 다 타버린 즈음이었다. 서로 아무런 말들이 없건마는 광대들은 총대인 손돌의 집이 타고
있는 의미를 아는 듯 침통하게 둘러서서 불길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재인말에서의 생활은
이제 모두 끝난 것이다. 그들의 연희 출행 앞에는 돌아올 기약 없는 길만이 뻗쳐져 있는 것
이었다. 거처를 잃었으니 이제는 떠나는 길만이 남아 있었다. 불길이 자취를 감추고 잿더미
속에 숯이 벌겋게 드러났을 때까지 마을 광대들은 지켜보고 서 있었다.
묘옥은 까막내를 따라서 걸었는데 무더리내에 이르자 시장해졌으므로 호박떡을 조금 내어
아침 끼니를 때웠다. 묘옥은 까막내에서 갖바치 박서방네에 들러 돈 열 냥을 삽짝 너머로
던져두었었다. 봉순이와 박서방댁이 길산네 부모들게 좋은 음식을 넣게 하기 위해서였다. 묘
옥은 봇짐이 이상스레 무거워서 헤쳐 보았다. 묘옥이 거절하였던 노자를 잠든 사이에 손돌
노인이 넣어두었음을 알았다. 무더리서 장호령까지가 삼십 리요, 장호령에서 학령까지가 이
십리 길이었건만 계속 험한 산길이요, 영이 둘이나 겹쳤을뿐더러 고개도 많이 있었다. 장호
령서 대모현 사이에 있는 주막에 들어가 얼른 중화 하고 학령을 바라고 걷는데 발바닥에 물
집투성이요, 고개를 오르내리느라 기운이 진하여 꼼짝할 수도 없었다. 해가 아직 남아 있기
는 하였으되 여자의 걸음으로 온종일 칠십 리를 걸었고, 마땅한 숙소를 찾으려면 해지점 사
거리까지는 가야만 그럴 듯한 주막이 있다는 것이었다. 묘옥은 선뜻 학력을 넘을 용기가 나
질 않았다. 도중에서 날이 저물거나 호젓한 곳에 걷다가 봉변당할까 두려웠다. 하는 수 없이
숙소를 찾으리라 작정하고 산길 초입에서 되돌아섰다. 밭고랑 너머로 집 한채가 보였다. 묘
옥은 과객질을 하기로 마음먹고, 생솔나무 울타리 앞에 서서 애써 굵은 목청을 지어 외쳤다.
"주인 계십니까..."
윗방에서 한 남자의 얼굴이 나오더니 묘옥의 아래위를 쓱 훑었다.
"주인은 왜 찾나?"
"하룻밤 묵어 가게 해주십시오."
"거 아직 해가 높직이 걸렸는데 학령 넘어가 해지점 주막을 찾아갈 것이지... 우린 과객을
재우지 못해."
"고갯질이 험하여 도중에 날이 저물면 낭패할까 그래서 청하는 것입니다. 길양식도 낼 수
있고 돈도 있습니다."
"보아하니 총각인 모양인데, 우리넨 집꼴이 이래봬두 양반이야. 상사람이면 상놈의 집을
찾아가야지."
애초에 사람을 욕을 보여 쫓으려는 수를 쓰는 것이었다. 묘옥은 아무 말 없이 그 집을 떠
나 마을 쪽으로 향해 걸었다. 한 마장쯤 더 내려가니 제법 포실한 마을이 나왔고 솟을대문
이 높직한 기와집이 보였다. 다시 사람을 찾는데 문틈으로 누군가 내다보는 듯하고 나서 해
사하게 생긴 하녀가 문을 조금 열고 말했다.
"왜 그러셔요?"
"하룻밤 묵어 갈까 해서 그러오."
"보통 때 같으면 모르지만 집안에 환난이 있어놔서 어렵겠어요."
"아무리 환난이 있다 한들 이렇게 큰 집에 광이나 마구간이라도 있을 것이요, 하다못해
조밥에 푸성귀라도 없겠소. 지쳐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구려."
"글세 안된다니까요."
하며 대문을 닫으려는 것을 묘옥은 별 생각 없이 계집아이의 손목을 잡고 말았다.
"아이그머니나!"
비명에 묘옥이 깜짝 놀라 손목을 놓는데 부끄러워진 하녀는 이미 문안으로 멀찍이 달아났
다. 묘옥은 망설이지 않고 열린 대문으로 해서 마당에 들어섰다. 제법 중문까지 있는 큰 집
이었다.
중문간에서 하녀가 밖을 손짓하며 나오고 건장한 하인 두엇과 도포에 유건을 쓴 점잖은
선비에게 허리를 굽혔다. 무어라 사과의 말도 하기 전에 선비가 정중히 말했다.
"계집아이가 경망을 부린 모양인데 죄송하오. 어디 숙소를 찾구 계십닊?"
묘옥은 붕변을 당할까봐 순간 겁을 먹었으나 선비의 태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 해주까지 가는 길인데 하루 종일 걷고 보니, 학령을 넘을 일이 아득하여 염치불구하
고 돌입하였습니다. 어디 마구간이라도 좋으니 밤이슬을 피하게만 해주신다면 천만 고맙겠
습니다."
선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하게 말하고 있는 묘옥을 찬찬히 훑어보었다.
"원, 마구간에서 사람이 묵을 수야 있겠소. 우리 별당이 비어 있으니 묵어 가도록 하시오.
얘, 손님을 안으로 모셔드려라."
선비가 지시하자 마당쇠가 묘옥을 안으로 인도했다. 후원문을 밀치고 들어가는데 석등과
괴석이며 연못과 돌다리를 꾸며놓은 것이 시골 토족의 지체로는 지나칠 정도였다. 방에 들
어서니 문갑이며 병풍이며 서화들이 모두 다 천출 묘옥에게는 처음 보는 것들이라 오히려
마음이 산란하였다. 또한 과객질하는 사람에 이리도 접대가 은근하니 혹시 무엇을 바라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한참이나 좌불안석하고 누마루를 오가기도 하고 걸려 있는
서화들을 들여다보며 공연히 서성대는데, 마당쇠란 놈이 번쩍이는 놋대야와 사기대접에 세
숫물과 양칫물을 각각 들여다 놓으면서 연신 벙글대는 얼굴로 말했다.
"손님 소세하십시오. 그러구 저... 사주가 어찌되시는가 알아오랍니다."
"사주요? 그건 뭣에 쓰게..."
"예, 저 우리 서방님께서는 역풀이를 좋아하시는데 손님이 오시면 꼭 팔자를 보아드려야
직성이 풀리십니다."
묘옥이 적당히 사주를 대어주자 마당쇠는 몇번이나 속으로 중얼중얼 되씹어보고 나서 안
으로 사라졌다. 어둑어둑해지자 마당쇠가 다시 나타나 별당이 훤하도록 등을 걸고 방안에는
밀초 한쌍을 밝혀놓았다. 계집아이 둘이서 떡벌어진 다담상을 내오는데 갈비와 제육에 탕반
이 곁들였고 각종 볶음이며 어회 등속과 산나물에 전과 과일까지 있어 어느 재상의 생일 잔
치를 만난 듯하였다. 기명이 깨끗하고 음식이 정갈하여 묘옥을 감히 수저를 대기가 황홀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하루 종일을 험산준령을 넘어왔으니 시장기에 쑥개떡을 내어 주어도 꿀맛일 텐데
다담을 대하니 속이 느끼하여 몇점 집어 먹는 중에 벌써 배가 부른 듯하였다. 뒤이어 하녀
가 생률, 대추, 배, 송이무침 등의 상큼한 안주와 술병을 얹은 소반을 따로 차려다가 상 옆
에 밀어내어주었다. 다담상을 내가려는 하녀를 보니 문간에서 시비하던 계집아이였으므로
묘옥은 아는 체를 하였다.
"아까는 내가 실수로 그리했네."
계집아이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외면한 채로,
"어리석은 계집이라 경망을 부렸으니 손님께서 해량하십시오."
같은 여자끼리 목청을 바꾸어 점잔을 부리자니 묘옥이도 등에서 땀이 솟는 기분이었으나
내친걸음이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 마음이 풀렸다니 고맙군. 헌데 아까 내가 들은즉 이 댁에 무슨 환난이 있다더니...
무슨 일이지?"
"환난이라뇨... 쉰네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 걸요."
"내가 유숙을 청했을 때 네가 집에 환난이 있어 객을 받을 수 없다고 얘기하지 않았니?"
"아, 네에, 그건요 별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요. 우리댁 작은아씨 일입지요. 다만 축객하려
고 제가 과대히 말씀드렸던 거예요. 손님은 마음놓으시구 푹 쉬었다 가십시오?"
하며 계집아이가 다담상을 들고 달아나듯이 나가벼렸다. 묘옥이 비록 창기 노릇을 했을망정
술을 들 생각은 없어 배 한 쪽을 집어 먹고는 피곤하여 길게 누워보려는 참인데 밖에서 헛
기침으로 인기척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들어서는데 아까 너그러이 대해주던 젊은
주인이었다.
"저녁은 드셨습니까?"
묘옥이 황급히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 주인을 맞았다.
"예, 염려 덕분에 오히려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마음놓으십시오. 원래 제가 한양서 자라다가 궁벽한 시골로 퇴향하고 보니 적적
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소. 그래 손님을 좋아하지요. 옛 벗의 집에 오신 것이나 다름없으니
제 집같이 하십시오."
묘옥이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고 예를 올린다.
"평양 사는 김막동이올시다."
주인도 함꼐 맞절을 하면서 인사를 허하였다.
"강초시오. 헌데 초립을 쓰시고 머리상투를 올리지 않았으니 아직 장가 전인 모양이오."
"예, 봉양할 식구가 많아 아직 성혼하지 못하였습니다."
젊은 주인이 술상을 앞으로 내밀고 다가앉으면서 잔 들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우리 술이나 들면서 얘기하시지요."
"아닙니다. 저는 이날 여태껏 술을 가까이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그렇기로 술 석 잔을 못 드시겠소. 내 석 잔만 드리고 더는 권하지 않으리다."
하면서 술을 따르는 것이었다. 묘옥을 잔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총각은 어디루 가시는 길이오?"
"제가 농사는 못 짓고 장사를 다니는데, 이번 길에서는 약재나 좀 해올까 하구 해주를 거
쳐 송도엘 다녀올까 합니다."
"임방 동무도 없이 혼자 행상을 다니는구려."
"뭐 밑천이 있어야지요."
"하여튼 그 나이에 자수성가하시려고 꽤 애쓰시는데, 나두 실은 내 힘으로 입신한 사람입
니다. 허나 장가는 드셔야지. 가내가 안정되어야 돈도 모이고 힘도 덜 드는 법이오."
"저같이 미욱하고 무지한 밥쇠에게 어느 규수가 시집을 오겠습니까?"
"원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꼭 학문을 하여야만 똑똑한 사람이랄 것은 아니외다. 내 김총
각의 행동거지를 모아하니 법도에 맞고 참으로 인물이시오. 생기기는 귀공자 같으신데
초립에 행상인 차림이라 나두 이상스러워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묻는 것이오."
"대대로 농사나 짓고 그더 못하여 행상으로 먹구 살던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저 같은 아
랫사람을 예로 대하시니 더욱 어렵습니다."
젊은 주인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김총각은 사람의 팔자소관을 어떻게 생각허시우?"
불쑥 물어오는 주인의 말에 묘옥이 대답할 말이 없어 잠깐 머뭇거리는데, 다시 그가 말했
다.
"사람의 팔자란 미리 알고만 있으면 방비할 수가 있소."
하는 및도 끝도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묘옥과 주인은 무덤덤히 앉아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술을 묘옥에게 권하지 않았다.
"봉양할 식구들이 많다니 대체 총각은 돈을 얼마쯤 벌구 싶소?"
"예... 뭐 별루 많이두 원치 않습니다. 하루갈이 밭과 논 열 두락에 집 한 채쯤이면 됩지
요."
젊은 주인 양반이 자꾸만 엉뚱한 말을 걸어오므로 묘옥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당히 둘
러대고 있었다.
"자아 그러면 피곤하실 텐데 내가 일찌감치 무러가야 되겠군."
주인은 일어서서 장지문을 열고 마당쇠를 찾았다.
"손님 자리 보아드리고 술상은 내가거라."
신을 끌고 나가려던 주인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되돌아서며 새삼스럽게 물었다.
"참, 김총각이 어디서 산다구 그랬소?"
"평양 산다구 했습니다."
"평양 무슨 골이오?"
거 참으로 별스럽게도 꼬치꼬치 묻는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묘옥은 적당히 꾸며 대답했다.
"예, 윗물골이오."
"음, 윗물골이라..."
젊은 주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채로 사라졌다. 마당쇠가 자리를 깔아주고 술상을
내가면서,
"손님 복 텄소이다. 편히 쉬시우."
라는 까닭 모를 소리를 던졌다. 묘옥은 밤도 늦은데다 거짓말을 꾸며대며 신경을 쓰느라고
몹시 피곤했으므로 이불 위에 털썩 누워버렸다. 손끝 하나 달싹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무거웠고 저절로 눈까풀이 내려앉았다. 밖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쏴하는 소리
만이 들려왔다.
집주인 강초시는 원래가 가난한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지각이 들며부터 과거급제를 목표
로 공부를 해왔던 사람이었다. 신념이 굳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
람이었다. 세 번을 연거푸 낙방한 뒤에 공부에 뜻이 없고 오히려 세태를 좇아 재물을 쌓아
입신을 하리라 결심하게 되었다.
부친을 비롯하여 한참 일할 나이의 젊은이들인 두 형제가 날마다 책과 씨름을 하였으니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고생만 하던 노모가 죽고 부친마저 그뒤를 따르자 강초시는 십
년을 기한하고 차산하여 패가된 집안을 일으킬 것을 식구들 앞에 선언하였다. 아우는 남의
집에 일꾼으로 맡겼으니, 아무리 양반이지만 굶어죽는 판에 신분 지체를 따질 여유가 없었
다. 두 누이동생은 먼 친척집에 비녀나 다름없이 내버려두고서 가산을 정리하니 오십 문의
돈이 되었다. 이 반냥의 돈을 가지고 미역을 사서 때마침 풍년인 면화를 바꾸러 다녔다. 그
리고 인물이 박색인 중인의 여식을 아내로 얻었는데 사람됨이 근검해서 함께 재물을 모을
만하였다. 모은 면화로 강원도의 귀리 백여 석을 사두고 십 년을 두고 귀리죽으로 끼니를
에울 준비를 해두었다. 강초시는 거추장스런 의관을 벗어 내던지고 적삼에 잠방이 차림으로
주야로 아내의 길쌈을 돕거나 자리도 치고 도롱이도 엮으면서 한시도 일손을 놓지 않았다.
한양에서 소식을 들은 동접배가 찾아오면, 절대로 안에 들이지 않고 양반의 체면과 예의
를 이미 버린 사람이니 상종하지 마시라며 쫓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바쁜 틈을
내어 찾아온 아우조차 문간에 들이지 않았다. 강초시 부부가 작심한지 이년에 길쌈과 날품
으로 마련한 밑천이 수백 냥에 이르렀다. 그 돈으로 한양 사람의 논 열 두락과 밭 하루갈이
를 사들였다. 강초시는 남의 손을 빌려 땅을 가는 것이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성의도 없겠
다 싶어서 소에 쟁기를 붙여 논에 들어가서 토박이 농군을 맞아 잘 대접해서 두둑에 앉혀두
고 쟁기질을 배웠다. 논이건 밭이건 수십 번 갈아 땅을 깊숙이 파헤치고 길가 주막에서 행
인들의 대소변을 받아다가 두엄더미를 산더리처러 장만하여 수시로 뿌려주니 땅이 비옥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출이 많아 열두락의 소출이 거의 백여 석에 이르렀다. 또한 어영청
의 둔전으로 여러 해 묵어 있던 황무지를 개간하여 메밀과 보리, 콩을 심어 육칠백 석을 거
두었다. 해를 거듭하여 논으로 일구로 별를 심는데, 이때에는 이미 넉넉히 일꾼을 부릴 만하
였다. 강초시는 어영청에 가서 묵은 땅을 개간한 사실을 아뢰고, 마름의 영구권을 얻어냈다.
이로부터 재산이 매달, 매해 늘어나서 오륙 년 동안에 논밭이 늘어나, 십 년이 되던 해에는
인근 사방 골에 그의 토지가 안 걸린 데가 거의 없는 만석꾼으로 입지하였던 것이다. 농사
를 경영하여 치부하였으나 환로에 나가지 않으면 대접을 받지 못하므로 초시 직함을 따두었
던 것이다. 이러한 강직하고 의지 굳은 형의 뒷바라지로 아우는 정시에 무난히 급제하여 홍
패를 받고 벼슬길에 올랐다. 이로부터 강초시는 십 년이나 고생한 식구들을 행복하게 해주
는 데 전력을 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척집에 맡겨두었던 누이들을 데려다 언니는 선전관으로 발신한 무인에게 시집을 보냈
고, 동생은 판서가 여럿 났다는 경기도의 향족 집안에 시집을 보내주었었다. 만난을 극복하
고 뼈를 깎는 고통을 참으며 입신한 그에게는 식구들 아무에게도 그러한 고생을 겪게 해서
는 안되었다. 그에게는 한 걱정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묘옥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별당으로 누군가가 신 끄는 소리가 다가왔다. 잠시 장지
문 밖에서 서성대는 듯하더니 문이 열렸다.
나이는 스물 안팎으로 보이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한 소복의 여인이 방안으로 머뭇머뭇
들어섰다. 키는 중키요, 얼굴은 오목조목 예쁘지는 않아도 깨끗하고 점잖게 생겼으되, 다만
눈두덩에 푸른 기가 도는 것이 곧 그 소복의 사연에 일치해 보였다.
여인이 잠든 묘욕의 곁에 다가앉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긴 한숨을 연거푸 내리쉬었다.
"어쩌면... 이리 잘난 사내를..."
여인이 묘옥의 홍조가 번진 뺨을 살그머니 만지다가, 안채 쪽에서 두런대는 인기척에 놀
랐다. 놀란 긴에 저도 모르게 묘옥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묘옥이 실눈을 떴다
가 퍼뜩 깨어 일어나며,
"누... 누구..."
하는데 여인이 재빨리 손을 뻗쳐 입을 가려주며 속삭였다.
"손님, 빨리 달아나세요. 생명이 위험합니다."
"다... 당신은 누, 누구요?"
"손님을 죽이려구 합니다."
묘옥은 완전히 잠이 깨어 자기가 남자의 옷을 입고 있음을 깨달았고, 이곳이 낯선 고장의
과객질한 숙소임을 알았다.
'당신이 누구시냐구 물었소."
"아까 여기 오셨던이가 제 오라비올시다."
"그분이 어째서 날 죽이려 한단 말이오?"
"글세 어서 피하셔요. 제가 저녁나절에 중문 뒤에 숨어서 손님을 뵙고는 여태껏 애가 달
아 잠들지 못하고 있었어요. 자, 어서..."
두런두런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인이 촛불을 불어 껐다.
"하인들이 몰려오기 전에 어서 뒤뜰루 달아나요. 뒷담 쪽에 가까이 가면 등나무넝쿨이 있
을 것이니 그걸 타구 담을 넘어가셔요. 되도록 멀리 가셔야 할 겁니다. 뒤쫓아갈 테니까요."
"고마워요, 아씨."
묘옥은 옷차림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초립과 괴나리봇짐을 손에 들고 섬돌에 내려 미투
리를 꿰자마자 담으로 달려갔다. 정신없이 넝쿨을 잡고 담을 오르긴 올랐는데 아래가 까마
득해 보여서 도저히 뛰어내릴 자신이 없었다. 부들부들 떠리는 것을 참고 다리를 하나씩 내
려뜨리고 걸터앉는 참인데, 뒤로 하인들이 별당 대문을 젖히며 몰려들어오는 게 보였다. 다
급한 김이라 묘옥은 뛰어내렸고 역시 겁을 먹은 탓인지 그만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일어
서서 뛰려고 힘을 주는데 시큰하여 다시 넘어졌다. 발을 주무를 새도 없었다. 겅정거리면서
상한 발을 쳐들고 깨금발을 치면 ㅜ띠었다. 도망갔다느니 잡으라느니 하고 주고 받는 얘기
소리가 먼 데까지 들려왔다. 마을을 벗어나 무턱대고 낮에 내려왔던 학령의 고갯질을 바라
고 뛰는데 돌아보니 집 앞에 네댓 개의 횃불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친 여자의 걸음을 장정
걸음이 따라잡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곧 묘옥의 자취를 발견하고 더 이상 떠들지도
않고 곧바로 쫓아왔다. 처음에 유숙을 청하였던 외딴집 앞에 와서 묘옥은 또 넘어졌고 그만
큼 거리가 좁혀졌다. 그제서야 묘옥은 미련하게도 길을 따라서 뛰고 있음을 깨달았고 더구
나 학령의 깊은 숲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저편에서 죽이기가 안성맞춤이 되리라 판단하였
다. 어디 마땅한 곳에 숨거나 인가에 들어가 도움을 청하고 안되면 숨겨달라고 사정할 생각
이 났다. 묘옥은 길에서 벗어나 움푹한 곳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개천이었는데 물이 거의
배에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물의 흐름을 따라 몸을 띄우다시피 하고 아래로 자꾸만 내려갔
다. 뒤쫓던 자들의 갈 바를 잃었는지 서로 흩어지면서 저쪽이라는 중, 여기라는 둥,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묘옥은 우선 안심은 할 수가 있었으나 살에 와닿는 물의 냉기가 지독하여
온몸이 얼어붙는 듯하였다. 물이 차차 얕아졌다. 묘옥은 기진맥진 물속을 텀벙대며 뛰다가
개천 건너편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불빛 한 점을 발견했다. 묘옥은 엉금엉금 기어서 낮은 둑
위로 올라갔다. 먼 곳을 오르내리는 횃불에 우선 주의를 하고 나서 거의 기다시피 콩밭을
지나 불빛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보기보다는 제법 멀었고 가끔 불이 가리워지는 것으로 미
루어 앞에 숲이 있는 모양이었다. 과연 불빛은 숲 가운데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땅
위로 간신히 지붕만 내밀어져 있고 들창문이 땅에서 두어 뼘의 높이에 뚫려 있는 움집이었
다. 묘옥은 움막의 거적문을 다급하게 들쳤다.
"누구요?"
하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먼저 묘옥의 귓전을 때렸다.
"살려주세요.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뭐라구..."
밖에서 들려오는 여럿의 발짝 소리를 들었는지, 제정신이 없는 묘옥을 누군가가 끌어다가
구석에 처박고 잡동사니를 들씌워주었다. 묘옥의 머리 위로 다른 묵직한 짐들이 얹히는가
하자, 험상궂은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이리루 총각놈 하나 왔지?"
"어, 난 또 누구라구. 이 밤중에 무슨 일여."
"낯선 젊은 놈 못 봤어?"
"젠장할, 이 깜깜한 밤중에 움막 속에 틀어박혀서 젊은 놈이구 늙은 놈이구 살펴보게 됐
어. 나는 요 사흘째 바늘끝밖엔 아무것두 못 봤다."
"허 참 이놈이 어디루 달아났지?"
"무슨 일이야... 도적 들었나?"
"알 것 없어. 멀리는 못 갔을 텐데... 여보게, 여기두 없네. 그래 그쪽으루 가봐."
제 동료들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조용해졌다. 묘옥이 꿈틀거리니까 다른 목소리가 소
곤거렸다.
"아직 꼼짝 마시우. 다시 올지두 모르니까."
역시 다른 자들이 다시 한번 들러서 살펴보고는 다짐을 두었다.
"나중에라두 여길 찾아오면 잘 꼬드겨서 붙잡아놔, 알겠지."
"글세 알았다니까. 헌데 무슨 일이냐구. 누가 겁간이라두 하러 들어왔어?"
"입 닥쳐 이놈아. 뉘집에 대구 그따위 말버릇이야."
"아니 이놈이..."
"그만 가세. 미안하오, 영감."
하인배들이 사라지자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쓸개 빠진 놈들 같으니, 색시 어서 나오게."
묘옥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으로 화들짝 놀랐다. 그의 머리 위에서 짐들이 내려지고 묘옥
은 희미한 등잔불 아래 드러났다. 비록 남장은 했건만 총각처럼 땋아서 두건으로 질끈 동였
던 머리가 풀어헤쳐져 있었고, 몰에 젖어 찰싹ㄷ 달라붙은 옷 위에 부푼 가슴의 윤곽이 드
러나 있어 누가 보든지 그가 여자임을 간단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곳은 갖바치의 움집
이었는데 부자가 나란히 앉아 밤을 새워 신을 꿰고 있는 중이었다. 늙은이가 턱짓으로오지
화로를 가리켰다.
"쯧쯧, 온몸이 젖었구만, 거기 말리시게."
젊은이는 묘옥의 여자다운 수줍음을 안다는 듯 줄곧 시선을 바늘에 대고서 쳐들 줄 몰랐
다. 묘옥이 화롯가로 다가앉으면서,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늙은이는 모를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묘옥에게 물었다.
"헌데 강초시가 그리 야멸찬 사람은 아니건만 무슨 연유로 댁네를 죽이려 했누..."
"저두 모르겠어요."
하고 나서 묘옥은 해주 가는 길에 학령을 밤에 넘을 일이 걱정되어 초저녁부터 아예 과객
질을 나섰다는 얘기부터 차근차근 꺼내었다.
"음, 여인네가 혼자 길을 가려면 남장을 입어야겠지, 그래서..."
묘옥은 처음부터 웬일인지 강초기사 깍듯이 대하더라는 얘기를 했다. 계집종이 환난이 있
다면서 축객을 하더니 어쩐지 젊은 주인이 나와서는 별당으로 모셔두고 귀히 대접하던 일,
마당쇠가 사주를 물어가던 일, 술상을 놓고 주인과 얘기하던 일, 돈이 얼마나 필요하냐는 둥
사는 데가 어디냐는 둥 동행이 없느냐는 둥 꼬치꼬치 몰어서 여자라는 행색이 탄로날까봐
궁색했던 일, 그리고...
"잠을 잤지요. 곤히 자구 있는 중에 누군가 와서 깨우지 않겠어요. 난데없는 소복한 여자
가 나타나서 달아나라구 그러는 거예요."
"음, 이제 훤히 알겠구먼."
늙은이와 젊은이가 서로 눈을 맞추었고, 젊은이는 아예 일손을 놓아 버렸다.
"그게 보쌈이란 겁니다."
"보쌈이오?"
"그렇지. 청상과부들 액땜을 그렇게들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오." 하며 이번에는 늙은이도
일손을 놓아버린다.
"그 작은아씨란 여자가 얼마 전에 과천으루 시집을 갔었지. 신랑이 본시 몸이 약하고 고
질병이 있어서 제대루 남편 구실두 못하고 죽었소. 강초시가 제 식구에게는 끔찍하게 해주
는 사람이라 시집 귀신 만들지 않으려고 당장에 교꾼을 내어 데려다 놓았어. 헌데 사주를
꿰고보니 팔자소관이 남편을 셋이나 잡아먹는다구 나와 있더란 말이야. 우리게선 이
미
thands이 짜하게 돌았을걸. 자, 이 양반이 누이를 다시 시집 보내자니 또 과부신세가 될 것
이요, 아니 보내자니 평생을 음양의 이치두 모르고 살아갈 게 너무 애처롭다 그런 얘기여.
해서 액띰을 하겠단 묘한 궁리를 했겠지. 지나가는 타관 사람을 꼬여다가 사주단자를 지어
서 형식으루 예를 갖춘 뒤에 세상모르게 죽여버리는 게요. 오늘밤 댁네가 총각 차림으로 그
런 곳엘 제 발로 찾아들었으니 안성맞춤이었겠지. 그래 댁네는 그 과수댁의 셋째 남편 노릇
ㄱ만 하고는 객사 원혼이 될 뻔했소. 아마 강초시 같은 사람은 재물이 재일이니, 댁넬 죽여
놓구 그 거짓 고향으루 돈냥이나 보낼 생각이었겠지. 사람 속두 모르구 다 피차에 좋은 일
이려니 여겼던 게요. 아무리 팔자를 고친다지만 그 과수댁 당사자야 얼마나 끔찍한 생각이
들었겠소. 더구나 댁네가 남장을 입어놓고 보면 신선 같은 미남자일 테고... 그래 요놈은 살
려주자 했겠지."
늙은이가 연신 웃어대며 이야기를 했고, 묘옥은 마치 여우에 홀린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제가 실은 계집이라고 밝혔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을 걸 그랬네요."
"아니지, 여자라 밝혔어두 댁네는 죽었을 거야. 말이 나가서 소문이 밖에 퍼지면 저희 가
문이 위태로울 테니까. 이왕지사 작정 내린 대로 죽였을 거요."
"제 팔자 고치겠다구 남의 목숨을 끊다니요"
"다 복에 겨우면 그리되는 게요. 말 타면 견마 잡히구 싶다잖소."
"아버지, 지난번에 그 집에 녹피혜를 전하러 갔더니 웬 도령이 별당에 앉았데요. 가만 살
펴보니 빈천한 집에서 소년을 사온 모양입디다. 그때엔 그냥 강초시가 후사가 염려되어 양
자를 들였나 생각했었지요. 며칠 후에 신값을 받으러 갔을 때엔 총각이 보이질 않았어요. 참
이상하다구 생각했지요."
"죽였겠지."
늙은이가 말했고, 묘옥은 그제서야 두려음이 실감되어 덜덜 떨기 시작했다.
"닭 울 녘이 지닜겠지요. 어서 떠나야 되겠습니다."
묘옥이 길을 떠날 것을 서두르며 일어서자 늙은 갖바치가 만류했다.
"이렇게 어두운데 학경을 넘으려고? dhten 젖었으니 한기에 견디지 못할걸..."
"동이 트면 제가 길안내를 서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눈이나 좀 붙여 두시지요."
젊은 갖바치도 친절하게 말했으므로 묘옥은 다시 주저앉았다. 그들이 가죽을 꿰매면서 서
로 얘기를 주고 받는데 묘옥은 끄덕끄덕 졸면서 듣는 둥 만 둥했다.
"엊저녁에 큰우물골에 거사패가 들어왔습디다. 사당들이 어찌나 고운지 총각놈들 애가 달
아서 밤새껏 사처 근처에 서성거리데요."
"그 모가비는 내가 잘아는 사람이다. 안성 높을쇠 달근네 패라구 여러 장터를 돌아다닌
사람은 대개들 알구 있지. 고달근이는 무동이 때부터 나다녔으니 나보담 위또래까지 모두
얼굴을 알걸. 달근네 여사당들은 기생들 뺨치게 절색이고 가무가 뛰어난데, 거의 도망친 비
녀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지."
"아버지, 그 패거리가 하루 더 묵으면 구경 좀 갑시다."
"미쳤구나... 일거리가 산더미 같은데, 언제 신 다섯 죽을 재가에 넘기려느냐."
어느새 묘옥은 화로 곁에서 잠이 들고 갖바치 부자는 부지런히 가죽 꿰는 작업을 계속했
다.
"에그머니... 벌써 이렇게 되었네."
날이 훤해진 다음에야 잠이 깬 모욕이 놀라서 후닥닥 일어났고, 갖바치 부자가 조밥 한
그릇을 밀어주었다. 그들은 아침을 먹는 중이었다.
"걱정 마시오. 아직 사람이 나다닐 때는 아니니까. 조반 마치고 영을 오르면 맞춤일 게
요."
늙은이가 말했다. 묘옥은 머리도 가다듬고 두건도 단단히 동인 다음 추립을 쓰고 행전을
조여맸다.
조반 뒤에 따라 나서려는 젊은이를 끝내 사양하고서, 일러준 대로 큰길을 피하여 숲속으
로 들어갔다. 골짜기가 깊어진 다음 가파른 산길을 올라 길에 들어섰다. 나무들이 거지반 낙
엽을 떨구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으나 울창하여 굽돌아진 길 앞은 잘 보이지 않았
다. 달마산 줄기가 남북을 가로지르고 동서쪽으로 백운산과 불타산에 이르고 다시 바다까지
치밀어 가서 연지봉과 장산곶을 이루게 되어 있었다. 또한 남북으로는 구월산 줄기의 끝에
서 수양산에 이르니 학령은 참으로 녹림당들에게는 그럴 듯한 요충의 지점이 아닐 수 없었
다.
해서를 횡으로 가르고 지나가는 멸악산맥의 연이은 산줄기는 구월산 줄기처럼 깊은 골짜
기와 숲이 많고 길이 여러 곳으로 통하여 세상을 등진 자들이 숨어 살기에 적당했다. 더구
나 학령은 풍천, 은율, 문화, 송화의 여러 읍에서 해주로 닿는 직로의 가운데 지점이었으므
로 포도 군관이 해지점을 근거로 산길을 순찰하였다.
묘옥은 굽이굽이 도는 영 넘어 길을 올라 달마산에서 내달은 등성이가 왼편에 보이고 오
른쪽으로 백운산, 불타산으로 닿는 등성이가 보이는 영 중턱에 이르렀다. 사방은 잣나무와
도토리나무, 사철나무의 짙은 숲인데 어디선가 낙엽을 밟는 사람의 발짝 소리가 들렸다. 겁
이 덜컥 생긴 묘옥이 걸음을 빨리하는데 좌우 등성이에서 맨두건 바람에 몽둥이를 든 장한
두엇이 우뚝 일어섰다.
"이놈, 게 섰거라."
섰거라 했다고 그 자리에 섰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 묘옥은 귀떨어지면 내일 줍자고
내리막길을 달음질쳤다. 뒤에서도 뛰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쫓아오면서 그들은 각기 위협을
하는데,
"이놈 서지 않으면 박살을 낼 테다."
"달아나면 너는 다 살았다."
순간 묘옥은 눈앞이 캄캄하였다. 정면 길 가운데에 날이 시퍼런 환도를 빼들고 섰는 텁석
부리 사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묘옥이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몽둥이를 든 두 녀석은
뛰지도 않고 싱글거리면서 걸어왔고, 앞에 섰던 털보도 칼을 두어 번 뿌리쳐 보인 다음 느
릿느릿 다가섰다.
"잘 걸렸다. 안 그래두 피맛을 보지 못한 내 칼이 마수거리를 기다리던 참이다."
묘옥은 장딴지와 무릎에서 저절로 기운이 빠져버려 스르르 주저앉아, 괴나리봇짐을 벗어
그들의 발 앞에 던졌다.
"달아나지 말라구 몇번이나 일렀지. 이젠 살아갈 생각 마라."
"어디 우선 봇짐이나 뒤져볼까."
"어이 묵직한데."
그들은 봇짐을 끌러보고 돈꿰미가 두 줄이나 있는 것을 보자, 입이 주욱 찢어졌다.
"아침 해장치고는 꽤 배가 부르겠네."
"대강 치워버리구 내려가지. 달마산 수돌네가 목 잡으러 나오면 가만있지 않을 테니."
"생피할 놈들, 멸악에나 자빠져 있지 예까지 와서 남의 목을 빼앗아..."
"시끄럿, 쓸데없는 소리들 말구 내려가."
털보가 두 놈을 윽박지른 뒤에 묘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그 여자의 턱에 슬그머니
칼끝을 대어 치켜들었다.
"어디 보자. 허허 그놈 참 계집처럼 예쁘게 생겼고나. 어디부터 베어주랴. 헌데 웬 상놈이
이렇게 속살이 희단 말이냐. 가만있자..."
칼을 거둔 털보가 묘옥을 훑어보다가 다리를 포개고 얌전히 앉은 모습을 확인하고 픽 웃
었다. 그의 입가에서 웃음이 가시는 듯하자 와락 달려들어 묘옥의 저고리 앞자락을 움켜쥐
었다. 묘옥이 본능적으로 비명을 내지르는데 새된 여자 목소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털보는
묘옥의 가슴을 더듬고 나서 앙탈하기 시작한 여자를 가볍게 들어 안고 후미진 고랑으로 내
려갔다.
"내 이런 봉을 봤나! 이년아 사지를 찢어 죽이기 전에 가만 있거라."
"사... 사람... 살려요."
"네년이 소리쳐봤자. 듣는 이는 우리 아이들뿐이다. 공연히 곱으로 당하지 말구 얌전하게
한번만 주면 봇짐두 찾아주지."
잡초가 무성한 풀숲에 묘옥을 내던진 털보는 묘옥의 바지를 끌어내리려고 허리끈을 찾았
고, 묘옥은 눌린 상체를 빼치려고 버둥대면서 한손은 바지를 꼭 잡고 놓질 않았다. 기왕지사
천기가 사내를 가릴 것인가마는 이제 묘옥은 예전의 묘옥이 아니었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
랑하는 지아비를 찾아나선 아내와 같았던 것이다. 혀를 깨물고 죽을지언정 그 어느 사내의
몸도 닿게 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여자의 힘에는 한도가 있는지라 우악스런 사내의 힘을
당하지 못하여 저고리는 찢기고 아래도 속곳이 드러났다.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나
머지 놈들도 이 뜻밖의 광경을 보고 희희낙락하여 제 두목을 도우려고 풀숲으로 들어섰다.
"다리 좀 잡아, 다리를."
텁석부리는 거친 숨을 내쉬며 다급하게 외쳤다. 다른 두 놈이 묘옥의 다리를 슬쩍 비틀어
잡고는 막 끌어내려지는데 길 위쪽에서,
"거, 뭐하는 짓이냐!"
하는 찌렁찌렁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텁석부리는 아직 정신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고 묘옥
의 다리를 누르고 있던 두 놈이 벌떡 일어났다. 덩치가 제법 크고 어깨가 탄탄해 보이기는
하였으나 지게에 물건을 얹은 품이 혼자서 시골 마을로 장사나 다니는 녀석이 분명하였다.
행상꾼이 다시 호통을 쳤다.
"까짓 계집 하나에 사내 셋이 달라붙어 바둥대누나."
"저놈이 죽지 못해 환장했나."
"감히 장사치 녀석이 달마산주를 몰라보구..."
두 놈이 번갈아 시선을 마주쳤고, 텁석부리도 못내 아쉬운 듯이 속을 드러낸 채 죽은 듯
이 자빠진 묘옥의 몸 위에서 일어나 환도를 집어들었다.
"사지를 토막 내주마."
행상꾼은 지게를 벗어 작대기에 받쳐 세워놓고 무언가 한 줌을 집어 들었다.
"예끼 놈들, 희한한 구경을 하노라 말참견 좀 했기로서니... 에 더럽다 더러워, 부정 탄다
부정이요 부정이오. 쉬이..."
사내가 손에 쥔 것을 아랫녘의 세 도적에게로 뿌리는데 바로 소금이다.
"저 망할 자식 같으니!"
"등골을 분질러놔라!"
몽둥이를 든 두 놈이 행상꾼의 양쪽으로 다가섰고 환도를 비껴든 털보는 잠시 관망하고
서 있었다. 행상꾼은 전혀 놀라는 빛도 없이 싱글벙글하는데, 두건으로 동이지도 않은 더벅
머리가 등뒤로 늘어져 있었다.
"어허.. 이러지들 말자구. 나는 그저 지나가다 구경이나 하려던 참인데 잠자코 지나가기가
아까워서 그만, 실수했네."
"어린 놈이 입만 살았구나."
"소금장수 반십 년에 별별 것을 다 봤지만, 청천백주에 사나이 세 놈이 계집 하날 같이
깔구 앉은 꼴은 또 처음 봤군."
더 이상 지지재재할 것도 없이 두 놈이 제깐엔 악에 받친 고참을 내지르며 몽둥이를 휘두
르고 달려들었다.
"어!"
황소라도 그런 매를 맞고는 뼈다귀가 으스러졌겠는데 의외에도 행상 총각은 양손에 몽둥
이를 턱 받아 쥔 것이다. 양쪽의 몽둥이를 잡고 섰는데 두 놈이 서로 죽을 힘을 다하여 당
기건만 꼼짝도 않는다.
"이놈들아 똥 싸겠다. 헛기운 쓰지 말어라."
총각이 별로 힘도 주지 않고 슬쩍 잡아채니 두 도적이 고꾸라지며 몽둥이를 놓쳐버렸다.
"뭘, 이까짓 작대기 따위로 그렇게 항우 같은 소리만 냅다 질러댄담."
총각은 벌벌 기어서 몸을 빼쳐나가는 놈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굵기가 한주먹 감은 넘
어 뵈는 몽둥이 두 개를 포개어 잡고서 끙 한번 힘을 주었다. 웃는 얼굴인 채 잠깐 입이 다
물어졌나 싶었는데 우지직하며 몽둥이 두 개가 대번에 꺾어졌다.
"옜다, 가져다가 느이 집 뒷간에 부춛대루 박아놓고 된똥 나와 힘쓸 때마다 붙들구 용써
봐라."
두 녀석은 완전히 기세가 죽어서 제 두목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네놈의 목을 치지 못하면 내 불알 찬 사내가 아니다."
기세 좋게 환도에서 쌩 소리가 나도록 좌우로 휘둘러 a보이며 털보가 소금장수 총각에게
로 달려들었다.
"어어라... 나는 맨손이여. 다칠라, 그 위험한 짓 그만두게."
뚝심깨나 믿고 있는 듯한 총각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농지거리를 하면서도 뒤로
물러섰다. 날이 시퍼런 환도는 들었으되 검술 한번 배운 적이 없는 두목은 무지막지하게 휘
둘러대면서 총각을 덮쳤다. 총각은 뒷걸음질치기도 하고 옆으로 빠져 달아나기도 하면서 칼
날은 피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텁석부리에게서 멀찍이 달아났다. 털보가 의기양양하
여 칼을 연신 내리찍으면서 쫓아갔다. 총각이 잠시 구부리더니 길가에 박힌 다듬잇돌 두어
배 됨직한 바윗덩이를 쑥 뽑아냈다. 총각은 짚덤불 다루듯 가볍게 머리 위로 치켜들며 텁석
부리에게로 마두 섰다.
"칼 치우지 못해..."
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입을 뻥하니 벌린 채 섰던 텁석부리가 칼을 늘어뜨리고 섰더니
돌아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총각은 바위를 쳐들고 성큼성큼 따라간다.
"이 자식아, 어디로 도망가니."
"아이구 미련한 놈 다 보겠다. 네까짓 거하구 상대 안할란다."
"바위 찜질이나 맞아봐라."
에잉 하면서 총각이 쳐들었던 바위를 냉큼 집어던지는데 달아나는 털보의 다리 장딴지에
가서 떨어지며 그는 애고 소리 한 번에 앞으로 고꾸라진다. 오른발을 바위가 찍어눌렀는데,
갈 데 없이 다리뼈가 요절이 나버린 모양이었다. 총각은 숨결 한번 거칠게 내쉬지도 않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와서 도적의 상투를 꺼들어올리고 쇠스랑 같은 손바닥을 펴서 번쩍 치켜
들었다.
"옳지 주먹으루 치면 뒈질 테니까 따귀나 몇대 때려줄까."
"아이구 장사님, 살려주... 목숨만 살려주시우."
그렇지 않아도 총각의괴력에 정신이 아뜩한데다 왼쪽다리를 바위에 찍혀 눌린 털보는 이
빨을 맞부딪치면서 싹싹 빌었다. 멀찍이 섰던 도적들이 제 두목이 당하는 꼴을 보고 나서
달아나는데, 총각이 그 자리에 서서 고함을 꽥 내질렀다.
"쫓아가 모가지를 뽑아놓기 전에 게 섰거라. 거리 섰어!"
주춤하더니 두 놈이 발을 떼지 못하고 서버렸다. 총각이 또 한번 외친다.
"이 우애 없는 놈들, 제 동무를 버리구 달아나면 어쩌느냐, 이리와!"
두 도적들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비실비실 무릎들을 꿇고 엎드러졌다.
"비록 눈은 있으되 분별이 모자라 경거망동하였습니다."
"천하장사를 몰라 뵙고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어서 이 녀석을 끌어내라."
바윗덩이를 치우니까 피에 흠뻑 젖은 털보의 발목은 아주 으스러졌는지 너덜대고 있었다.
"너희들 달마산 패거리냐?"
사색이 되어 빌고 엎드린 세 도적을 내려다보며 총각이 물었다.
"예, 저희는 본시 탑벌 두내리 사는 농투성이들인데 마름에게 빌렸던 땅을 빼앗겨 먹구
살 길이 막막하여 백운산에 들어가 이짓으루 부모처자를 봉양하구 있습지요."
다른 자가 다시 늘어놓았다.
"여기 학령이 원래는 저희 백운산에서 나와 지키던 목인데 달마산 아이들이 수 많은 것을
믿구 우릴 밀어냈습니다.그래 저희는 식전부터 오정 때까지 한둘 지나는 행인의 봇짐뒤지기
루 연명하구 있습니다."
"백운산에 너희 같은 놈들이 몇이나 되니?"
"백운산엔 저희말구 너덧 명 있을 뿐이고, 그보다는 불타산 천불사 근처에 도망한 종놈들
이 패를 짠 천불사태가 있습니다."
총각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제법 큰소리를 쳤다.
"응, 천불사패라면 해적질두 나가는 심백이 식솔들이군. 달마산엔 수돌이가 있을 게구...
그 자식들꼐 내 이름을 대어봐라, 모두 내 하수뻘 되는 놈들이니까."
한 녀석이 용기를 내어 총각에게 물었다.
"장사의 존함이 뉘십니까?"
"나는 장연의 소금장수 강선흥이란 사람이다."
총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음소리만 내고 있던 털보가 말했다.
"어이구, 그러면 남대천 자갈밭에서 황소뿔을 잡아 뽑았다는 그 강총각입니까?"
소금장수 총각은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도적들은 완전히 기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인근
에 왁자한 소문이 나 있는 장사에게 걸려 이만이라도 다행이거니 여겨 한숨들을 내쉬었다.
남대천 자갈밭에서 싸움하는 황소들의 가운데 로 달려들어가 양손에 뿔을 잡고 떼어 말리고
는, 그중 끝내 날뛰는 놈을 붙잡아 태기를 쳐버린 소금장수 강총각은 도적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천불사의 심백이와 달마산 수돌이는 강선흥이와 술먹기 내기도 했던 사이였
다.
"물건이나 뺏으면 그만이지 아낙네를 겁간하면 어쩌누. 어서 그 다친 사람 데리구 가거
라."
총각이 받쳐놓았던 지게 앞으로 돌아가며 말하자 도적들은 이제 살았다는 동작이 되어 발
목 부러진 텁석부리를 양쪽에 부축하고는 게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지게를 지려던 강선흥이
가 그제사 풀숲에 쓰러진 아낙네 생각이 나서 뭐라 혼자서 툴툴대며 아래로 내려갔다. 강선
흥이 내려가니 찢어진 옷자락을 추스르고 있던 묘옥이 경계의 눈빛으로 쏘는 듯 바라보며
일어났다.
"무서우 마우. 도적놈들은 달아났으니까 그 옷이나 좀 갈아입으슈. 그래 가지고 어디 사람
들 앞에 나서겠수?"
묘옥은 대답 없이 돌아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고 초립을 얹었다. 바지는 흙이 묻어 털
어내면 말짱하겠으나 저고리는 온통 찢어지고 고름도 떨어져 나가 입을 수가 없었다. 묘옥
이 새 저고리르 꺼내며 돌아보니 총각은 길 멀찌감치 물러섰는지 보이질 않았다. 그 여자가
복장을 단정히 하고서 길 위에 올라 소금이며 미역이며 굴비두름을 가득 얹은 지게를 진 총
각을 살피고야 그가 도적의 일행이 아니라 행상꾼인 줄로 알게 되었다.
"욕을 보고 죽게 된 것을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묘옥이 단정하게 허리를 굽히며 치사를 했지만 총각은 지게를 지고 앞서 걸어가며 내외하
는 말투로 건네왔다.
"거 아무리 남복을 했다지만, 이렇게 호젓한 길을 다니려면 동행을 구해야지, 욕을 보아
싸다구 말허우."
"죄송하다고 여쭙니다."
소금장수 총각과 묘옥의 내외하는 수작이 오고갔다.
"어디까지 가시느냐구 여쭈오."
"해주까지 가는데 오늘 해 안으로 닿아야 한다구 여쭙니다."
"어째서 그 먼 길을 혼자서 가시느냐구..."
"우리 댁 어른이 도적으로 몰려서 해주 저자에서 참수형을 당하시게되어, 먼빛르로 얼굴
이라두 볼까 하여 찾는 길이라구 여쭙니다."
"허 그 참 딱한 사연이라 하오."
강선흥이 박대근이와 아우 형 하는 사이라서 길산이가 만났다면 대번에 기억해낼 수도 있
었건만 두 사람 모두 알 턱이 없었다. 갑송이의 기운이 맞간다고 박대근이 여러번 자랑해오
던 아우였던 것이다. 선흥이가 인정이 뚝뚝 돋는 말씨로 얘기했다.
"거 같잖게 내외 말투를 쓰자니 거북해서 안되겠소. 그저 댁네 시동생 만난 셈치구 이물
없이 말하슈. 나 지금 해주에 물건하러 가는 길이니 댁네를 데려다 드리리다."
묘옥이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숙여서 사례를 올렸다.
"정말 고마워요."
강선흥이가 묘옥이 동행하여 영을 내려와 해지점에 이르렀는데 아직 점심 먹을 시각은 아
니지만 중간에 마땅한 곳도 없어서 이른 대로 주막을 찾기로 하였다. 겉보기에는 보상과 부
상이 사이좋게 장사 다니는 것만 같았다. 하나는 광대뼈가 불거지고 얼굴이 시커먼 쇠도적
놈처럼 우락부락한데 다른 하나는 선비같이 해사하고 얌전하여 기아한 대조를 이루었다. 아
직 길 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넘을 시각이 이른지라 마당 안이 텅 비었으려니 생각했는데,
주막의 싸리 울타리로 다가서자 여럿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서
니 사당패들이 마침 점심을 먹는 중인데, 거사 몇사람과 여사당들이 마루와 마당의 멍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툇마루에 포교와 포졸 두엇이 앉아소 먹걸리잔을 들고 여사당들과
농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강선흥이와 묘옥은 멍석 한쪽에 주저앉으면서,
"요깃거리 좀 주오."
선흥이 말하니 주모가 다가온다.
"국밥하구 탁배기두 좀 하시려요?"
"국밥 둘만 말아주구, 막걸리 두 되쯤 주오."
묘옥이 선흥이와 마주 앚아 옆에 시선을 주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타령을 낮은
곡조로 흥얼대던 사당 하나가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인물일세! 저리 잘난 사내는 처음 보겠네."
묘옥이 얼결에 얼굴을 들어 바라보니 녹의홍상 받쳐 입고 얹은머리에 붉은 대기 길게 드
리웠는데 눈가에 요염한 기가 서려 있었다. 묘옥과 눈이 마주치자 여사당은 입가에 웃음을
흘리면서 종알거렸다.
"행하를 안 주어도 정분이 나겠네."
거사가 그 소리를 듣고 돌아보는데 다른 사당들도 맞받아 속삭였다.
"에그, 저런 사내나 따라가 어디 들어앉아 살았으면."
술상이 올라와 묘옥이 국밥을 뜨는데 사당 하나가 몸을 기울이며 말을 건넸다.
"여보셔요, 술 한잔 주시겠어요."
강선홍이 부급뜬 눈으로 바라보다가 껄걸 웃고는 묘옥이 대신 술을 권한다.
"그래라, 한잔 마셔라."
"누가 총각보구 달랍디까, 저분에게 그랬지."
"얘, 이것아 술맛이 인물 따라 간다더냐. 한잔 먹어라."
사당이 받으려 하지 않고 묘옥의 쪽만 바라보는데 곁에 앉았던 거사가 핀잔을 주었다.
"무슨 짓이야, 모가비님께 혼찌검 당할려구 그래?"
"얘, 너 이리 와서 술 좀 따라라."
툇마루에 앉아 사당의 거동을 복 있던 포교가 말하였다. 흘긴 눈으로 포교롤 노려보면서
사다잉 새침하게 받았다.
"나리는 행하도 주실 리 없으니... 싫소이다."
"이년아 행하를 누가 안 준다더냐, 어서 술 좀 쳐다우."
불그레하게 술기가 오른 포교가 비실비실 웃더니 성큼 퇫마루에서 내려와 사당의 손목을
붙잡아 끌었다.
"에그, 이 손목 놓아요."
"이년, 말 안 들으면 민가에서 상풍한 죄로 끌어다 가두리라."
"언제 내가 상풍했나요?"
"모르는 행인에게 버젓이 드러내놓고 매음을 하려 드니 여기가 놀이 마당두 아닌데, 상풍
이 아니고 무엇이냐."
포교가 막무가내로 사당의 손목을 잡아끄는데, 다른 사당들은 모두 제가 봉변당할까 두려
워 움츠리고 있었으며, 거사들은 또한 제 계집이 아닌 외사당인지라 포교의 하는 양을 방관
하고 앉았다. 강선홍이 참지 못하고,
"나리, 거 너무 심하우. 나리두 상풍하시는구려."
"뭐야... 네놈은 누구냐?"
"보시다시피 장사 다니는 사람이요."
"그래 장사 다니는 녀석이라면 무엇을 파느냐 짐뒤짐을 해봐야겠다."
"마음대루 하슈. 소금하구 미역에 조기 몇두름 있을 뿐이오. 그나저나 거 손목 좀 놓아주
시지요."
"이 건방진 놈 보아라."
포교가 사당을 놓고 강선흥이의 멱살을 잡더니 대뜸 뺨따귀를 철썩 올려붙였다.
"어..."
눈에서 불이 번쩍 나도록 얻어맞은 선흥이가 드디어 분기를 참지 못하고 포교를 달랑 들
었다.
"명색이 포교라면 도적을 잡아야지, 어디서 건주정이야. 나중에 관가에 가서 토설할 셈치
고 혼 좀 나야겠어."
강선흥이는 포교가 지푸라기 뭉치나 된다는 듯이 위로 번쩍 치켜들고 뺑뺑이 맴돌기를 시
켜주고 나서 땅에다 쿵 내려놓았다. 어지럼증에 비틀대면서 포교는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강선흥이를 멍청히 올려다보았다.
"이놈이 학령에 출몰하는 화적패가 틀림없다. 달려들어 오라를 지워라!"
포교가 벌떡 일어나 쇠도리깨를 허리춤에서 빼어내면서 말했다. 포졸들이 육모방망이를
잡고 손바닥에 침을 뱉고 나서 강선흥이를 둘러 쌌다.
"여러 거사님들, 나중에 말 좀 해주시우. 내 이 나리님들 버릇 가르칠 테니."
거사들이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은근히 즐거워하였다. 포교가 멍석에 차려진 밥상
을 발길로 걷어차내고 강선흥이께로 달려들었다. 한꺼번에 와락 달려들 기세들인데, 마침 싸
리문으로 들어서던 사당패 모가비 고달근이가 가운데로 들어섰다.
"아이구, 나리들 이거 웬일들이슈?"
고달근이의 목소리는 마치 솥바닥 긁는 소리처럼 되게 갈라졌다. 고달근이는 검은 얼굴이
심하게 얽어 있었다.
그는 방금 해지점 사금터에 찾아가서 광부마을의 공연 허가를 얻어 가지고 돌아오는 길어
었다. 고달근이는 문 밖에서 소란한 소리에 이미 주인께 물어 대강 자초지종을 알고 있었다.
"나리 고정하시우."
"음 달근이 왔느냐. 이놈 너희 사당 사나를 불러 술 한잔 쳐달랬는데, 내게 욕을 보이는
구나. 너희들두 모두 상풍 혐의루 잡아가야겠다. 우선 이 행상놈을 때려잡고 나서..."
달근이는 눈짓으로 제 패거리를 문 밖에 내몰도록 하고 보퉁이에서 무명을 꺼내어 취한
포교를 달랬다.
"나리 술값이나 하시지요.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만..."
포교는 곁눈질로 무명을 내려다보고 나서 제 졸개들에게 받아두도록 하였다. 강선흥이 잔
뜩 손을 벌리고 포교의 도리깨를 막을 태세를 취하고 있다가 휑하니 돌아서더니 지게를 지
는 것이었다.
"이놈아 어디루 갈려느냐."
"죄지은 일 없으니 나는 가겠소."
"공무중인 포교를 꼬나잡고서 죄가 없다...?"
"이거 왜 이러슈. 나두 감영엔 아는 이가 많다우. 내가 누군고 하니 장연 사는 강선흥이
요."
"소금장수 강선흥이냐?"
"글세 당장 굶어두 남의 쌀 한톨 넘보지 않는 사람더러 화적이라니 화가 안 나겠수. 좌우
간 시비가 모두 끝났으니 나는 갈라오."
머쓱해진 포교를 남겨두고 강선흥이는 주막을 나섰다. 나와 보니 묘옥이와 사당팯르은 밭
둑길에 웅기중기 앉고 서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년들 너희 때문에 벙거지 나부랭이와 시비할 뻔하였다. 추파를 던지려면 나 같은 대장
부께 던져야지."
"강선흥이 주절대며 그들께로 다가서는데, 고달근이가 따라왔다.
"여보 총각 나 좀 봅시다."
"왜 그러우?"
"당신 땜에 상목 한 필을 빼앗겼으니 조기 몇두름 두고 가슈."
강선흥이 어이없다는 듯 껄걸 웃어젖힌다.
"별꼴 다 보겠군. 제 발이 저려서 뇌물 쓴 것을 누구보구 물어달래. 여보 중화 자신 것 얹
혔수?"
고달근이도 객지 물을 평생 먹은 사내라 만만치 않았다. 곰보 얼굴이 시뻘겋게 되었으나
그는 꾹 참고서 점잖게 나왔다.
"사리를 따져보시우. 우리 아이를 포교가 희롱했다손, 댁이 중뿔나게 나설 게 무어요. 예
서 사다닝 터지면 혹시 망르 놀이에 지장이 있을까 하여 수습했는데 이건 모두 총각 때문이
아니오. 당신 관가루 끌려갈 것을 무마해주었으니 어서 굴비 서너 두름 내놓우."
강선흥이도 코웃음을 치고 섰더니 지게를 벗으려고 어깨를 구부렸다. 그러나 벌써 눈치를
첸 고달근이가 손을 내저었다.
"댁네 성깔만 울락불락했지 도통 물정을 모르는 구먼. 여기선 남의 눈두 많으니까 또 벙
거지들 밥벌이 시켜줄 게야. 청산내 모래밭에서 얼러보지."
"좋두룩 해. 만약에 씨름을 해서 내가 이기면 거기 갖구 있는 상목을 모두 내게 내놓구
거기가 이기면 이 지게째 몽땅 내줄 테여."
고달근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우린 씨름 같은 건 안해."
고달근이는 강선흥이를 깔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따위 기운 자랑은 않는 성미라서..."
"좋아 한바탕 싸워보잔 말이지. 허리뼈가 부러지거나 다리가 꺾어져두 원망 말라구."
"누가 부러지는가는 실지루 해봐야지. 헌데 보아하니 면홍각두 못한 주제에 누구에게 대
구 반말지거리야?"
"겨루는 마당에 반말 온말 가리게 됐나?"
"이 사람아, 그래두 예의 는 있는 법인데... 나는 거의 반팔십 된 사람이야."
"이기는 사람이 성님이지 나이가 무슨 소용이래."
둘이 쓸까스르는 어조는 험악하기보다 어딘가 장난스러운 데가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볼
적에는 오랜만에 만난 소년들이 서로 젠척하며 타시락대는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묘옥이도
곁에 따라가면서 그들의 어조가 자못 흥겨운 데 안심을 하였다. 사당패들은 콧노래를 흥얼
거리며 두 사람의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왔다. 청산내 모래밭이 내려다뵈는 둔덕에 이르러
다른 사람들은 남고, 웃통을 벗어 던진 강선흥이와 고달근이가 아래로 내려갔다. 강선흥이
먼저 손을 뻗쳐 달근이를 잡으려고 덤비자 그는 공중 곤두질로 휘익 떴다가 선흥의 반대편
으로 섰다.
"여기야, 여기!"
선흥이 다시 내달으며 달근이를 잡으려고 손을 뻗치자 그는 뒤로 넘어지듯하다가 팔랑개
비처럼 재주를 팔딱 넘으면서 멀찌이 물러섰다.
"싸움하겠다더니 다람쥐처럼 도망만 다니면 젤인가?"
선흥이 투덜대면서 아예 잡을 생각도 않고 코를 gpd 풀더니 둔덕 위로 슬슬 올라가는 것
이었다.
"쳇, 이따위 싱거운 싸움질은 못하겠네."
이때 뒤로부터 달려온 달근이가 뛰어오르면서 선흥의 목덜미를 끌어안아 꺾으려고 힘을
썼다. 힘은 썼으나 선흥이 기운에는 당할 상대가 없는지라 한번 손을 뻗쳐 달근이의 앞섶을
잡자마자 바싹 끌어 앞으로 메다 꽂았다. 달근이가 보통 사람 같았으면 엉치뼈가 으스러졌
겠지만 워낙에 살판에서 곤두질로 익힌 몸매라서 다리를 세워 버티며 일어선 자세였다. 선
흥이 잡았던 앞섶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머리 위로 치켜들어 공중잡이로 한참동안 맴을 시
킨 뒤에 멀찍이 휘익 내던졌다. 달근이가 거꾸로 박히기는커녕 오히려 제 몸을 솟구쳐 껑충
뛰어올라 두어 바퀴를 돌고서 똑바로 서버렸다.
"아따, 거 희한한 재주일세."
"집어던지지 말고 우리 뭐 병장기라두 가지고 싸워보지."
"옳지. 나는 병장기가 따로 없으니 나무나 한그루 뽑아 쓸까?"
고달근이는 강선흥이가 두 뼘 굴기는 좋이 되어 뵈는 나무를 흝어잡이로 수월하게 쓰윽
뽑는 것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강선흥이 나무의 잔가지를 툭툭 쳐내고
중둥이를 뚝 꺾어 손아귀에 쥘 만한 길이로 만들어 쥐었다. 그제서야 고달근이가 허리띠 뒤
에 꽂고 있던 장죽막한 길이의 말채를 뽑았다. 그가 말채에 칭칭 감긴 채찍을 털어내듯 하
고 나서 허공으로 죅 흩뿌리니 쌩하는 날카로운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세 팔 길이쯤
되는 채찍이 윙윙거리며 돌아갔다.
선흥이가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달려드는데 달근이의 휘두른 채찍이 휭 날아가 선흥의 뺨
을 때렸고 붉게 피맺힌 자국이 생겨났다. 선흥이 얼굴을 찡그리고 주춤했으며, 이어서 채찍
은 선흥의 몽둥이를 잡은 손등을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어디를 때려주랴. 콧잔등, 귀, 눈알까지 마음먹은 대로 떼어주겠다. 납방울을 떼었으니 망
정이지 달아두었더라면 제 살점이 한움큼씩 떨어졌으리라."
"까짓 당나귀 궁둥이나 두드리는 것으로 내뚝심을 당하겠나?"
강선흥이 앞으로 몇걸음 내닫는데 다시 날아든 채찍이 그의 콧잔등을 호되게 때리고 지나
갔다. 거의 눈마저 네 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날아든 채찍이 강선흥의 사지를 곳곳마다 찟
어놓았다. 분기탱천한 성흥이가 전신에 채찍을 맞아가며 파로들어 몽둥이를 휘둘렀다. 고달
근이는 여유있게 뒤로 물러서며 채찍을 휘두르다가 채를 잡은 손을 뒤로 뿌리치지 않고서
앞으로 내민 채 힘을 끊으니 채찍의 끝이 몽둥이에 뱀 서리듯 겹겹이 감겼다. 휙 낚아채는
데 그만 불시의 일이라 선흥이는 몽둥이를 놓쳐버렸고, 퉁겨오른 몽둥이가 드놓이 올라갔다
가 멀찍하게 떨어져버렸다.
"자, 이젠 졌으니 굴비두름을 내어놓아라."
고달근이가 곰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떠올리고 양양하게 말했다. 그는 말채를 땅에 늘어
뜨리고서 한번씩 퉁겨 보이곤 하였다.
"잡히기만 하면 병아리처럼 모자기를 비틀어줄 테다."
선흥이 제 결기를 이기지 못하여 두 팔을 앞으로 내뻗고 벽력 같은 고함 소리로 덤벼드는
데, 고달근이는 재빨리 채를 들어 휘둘렀다. 채찍이 선흥이의 안면을 또 한번 후려갈기는 듯
하다가 앞으로 뻗친 손목에 휘감겼다. 선흥이 한번 휘감긴 채찍을 잡자마자 두어 번 틀어서
웬만한 힘에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움켜잡았다. 달근이가 당황하는 기색이 농후해졌고 선흥
이는 채찍을 몇번 당겨보고 나서 껄껄대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어디 마음대루 휘들러보아라."
달근이가 두 손으로 말채를 당기는데 선흥이는 전혀 기운도 쓰지 않건만 꿈쩍도 않는다.
강선흥이가 휙 당기자 달근이의 손에 채가 빠져나왔고, 그는 돌아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끼놈... 어딜 달아나니?"
강선흥이가 태산처럼 덮쳐 달근이의 몸을 두 팔째로 껴안고 쳐들었다가 땅바닥에 메어쳤
다.
"어이쿠!"
강선흥이는 전혀 몸을 사릴 틈도 없이 멱살을 잡아 위로 치켜들었다.
"어디에 처박아줄거나?"
청산내의 모래밭을 두리번대던 선흥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사당패와 묘옥이가 한데
어울려 않은 둔덕 위로 올라왔다. 사당패들은 저희 모가비가 봉패를 당했는데도 전혀 개의
하지 않고 키들대며 웃고 있었다. 강선흥이가 그를 치켜들고 둔덕을 올라 밭고랑을 따라갈
때에야 사람들은 그가 어디로 가려는가를 알고 배를 잡으며 웃어댔다.
"얘얘, 이젠 좀 놓아다우. 내 상목 쓴 거 물어내라지 않을 테니."
"가만 좀 있어. 좋은 거 먹여줄게."
"뭘 먹여준단 말이냐?"
"난생 처음 먹는 것이니 좋은 보신 될 게다."
"내 잘못되었네. 내려놓아주면 상목 끝동 떼어내어 술 사줌세."
"헤헤, 잘못 요동치면 등뼈 부서져. 자, 조금만 더 가자구."
선흥이가 달근이를 쳐들고 가는 곳은 바로 밭고랑 가에 패어 있는 거름구덩이였다.
명년 봄을 위하여 모아놓은 거름에 더께더께 굳은 딱지가 앉아 두꺼비 잔등 같았는데 물
기라고 조금도 없어 보였다. 선흥이는 구덩이 앞에 서서 달근이를 금방 내꽂기가 못내 아깝
다는 듯이 몇번이나 추스려 보았다.
"거꾸로 박아주랴, 아니면 곧추세워주랴?"
"여... 여보게 상목 다 내줄 테니 던지지 말게. 나는 옷이 단벌이여."
"가이새끼! 옷 버릴 걱정이네. 네 입으루 밥알 들어갈 일이나 걱정하렴."
"던질려면 멀찍이 서서 던져야 힘이 가지 이 사람."
"멀찍이서 던지면 또 메뚜기 사촌 모양 팔딱팔딱 뛸려구... 에라, 실컷 처멀어라!"
인정사정없이 선흥이는 거름구덩이에 고달근이를 내팽개쳤다. 다리와 팔은 위로 쳐든 채
달근이는 궁둥이부터 떨어졌다. 두텁게 덮여 있던 인분의 거죽에 균열이 갈라지면서 속으로
누런색이 드러났다. 드러난 것도 잠깐이요, 진흙에 돌맹이 박히듯 달근이는 아래로 쑥 빠져
들었다가 몸을 가누며 일어나는데 이미 얼굴의 반쯤이 인분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빠지지 않으려고 허우적대면서 구덩이에서 기어나오는데,
"망할 자식 같으니, 쇠도적눔 같으니, 날아가는 화류병을 콱 잡아다가 자모전가에 맡겨놓
구 이자만 조끔씩 뜯어 대대손손이 물려받을 자식 같으니."
"에, 더럽다 퉤퉤, 무서운 게 아니라 드러워서 너하군 싸움 안할란다."
"이놈아 기왕이면 꺼내다가 저 냇가에두 던져다우."
"별놈 다 보겠네. 아랫녘말에 물맛 버릴까봐 못하겠다."
강선흥이 실컷 놀려대고 나서 휘적휘적 밭에서 나가버린다. 겨우 구덩이에서 기어나온 고
달근이가 엉거주춤 선 채로 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분풀일 했으면 굴비라도 내놓고 가. 우리 식구 길양식 허게."
"언제 네 녀석이 재주 팔았데?"
강선흥이가 사람들께로 와서 지게를 지려다 말고 웃음기 어린 얼굴로 고달근이를 돌아다
보았다. 그는 씩 웃고 나서 웃음판이 터진 사당패의 가운데로 선뜻 굴비 두 두름을 꺼내어
던져주었다.
"똥 처먹은 자식은 주지 말구, 거 색시들이나 먹어라."
"고마워요, 총각."
달근이가 궁둥이를 뒤로 빼고 양팔을 좌우로 쳐들고 엉기적걸음을 걸어오다가 다시 소리
쳤다.
"얘얘, 가지 말아라."
강선흥이는 지게를 지고 둔덕을 내려가다가 돌아보았다.
"왜 불러... 이번엔 오줌이 먹구 싶냐?"
"이름이나 남기구 가거라. 어디 사는 뉘 집 자식이냐?"
"선흫이와 달근이는 서로의 하는 짓들이 별로이 고깝지 않고 시원스러워 인사를 나눌 기
분이 내켰던 것이다.
"장연의 소금장수 강선흥이다. 너는 누구냐?"
"허 이놈아, 장유유서한데 말 좀 놓지 마라, 나는 안성 고달근이다."
"상판대기가 정말 드럽게두 생겨먹었구나."
"이놈 내는 천생이 곰보딱지라서 그렇지만 네 녀석은 꼭 밀물에 걸려나온 망둥이새끼처럼
눈깔은 불거지고 주둥이는 하두 두터워 썰면 세 접시는 좋이 나오겠다."
"누가 재담하재? 나는 간다."
"강선흥이와 묘옥이 함께 둔덕을 내려가니 사단패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떠들었다.
"총각들 안녕히 가시게."
"잘난 서방님 해주서 봅시다."
묘옥이 못내 말을 걸고 싶어하던 애사당을 돌아보고 웃어주니 그 여자는 아예 자지러져
버렸다.
"애고 내 간장 다 녹네!"
강선흥이도 농을 던질 기분이 났는지 묘옥에게 넌지시 말하였다.
"저년들이 댁네와 정분을 맺으면 맷돌이 될 줄 모르는가베."
중화 시각을 해지점에서 많이 흘려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걸을을 재촉하였다. 해지점에서
해주까지가 칠십 리 길이었다. 미륵한 중턱을 넘어 뱀고개를 지나 돌못에 이르니 먼길을 처
음 걷는 묘옥이 q라이 부르트로 물집이 생긱데다 절뚝거려서 자연히 길이 늦어지게 되었다.
워낙 걸음 빠른 강선흥이의 뒤를 좇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수양선의 서쪽 줄기인 문산에서 시작한 돌못내의 굽이치는 물결이 길을 따라서 계속되는
데 왼편은 전나무와 은행나무의 울창한 숲이었고, 숲 가운데 서원의 기와지붕들이 보였다.
그들은 영유벌이 내려다보이는 안장고개 마루턱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해주서 나오는 듯한
장꾼들이 넘어오다가 역시 고갰마루에서 그들의 곁에 앉아 다리쉼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
은 저희끼리 얘기하는 중에,
"자네, 주내방 사거리에 갔었나?"
"아니, 나는 근양문 앞에서 재가에 들렀다가 왔지."
"이 사람하구 주내방 사거리 저자에 나갔다가 차마 못 볼 꼴을 보았네그려."
"사람이 죽었다며?"
"허허 참 목숨이란 별게 아니더군, 칼로 내리치니 모가지가 뚝 떨어지는데, 몇번 꿈틀대다
가 그만이더군."
"그런 걸 왜 보구 섰었나. 나 같으면 아예 얼씬도 않았을 거야."
"군관들이 나와서 기둘을 꽂구 설치길래 뭔가 해서 기다리구 섰었지. 참형받는 죄수가 끌
려나올 줄 알았나."
"하필이면 저자바닥에서 사람의 목을 칠 건 또 뭐야."
"이 사람아 그래야 모두들 구경하구 중죄를 짓지 않잖나."
"아니, 그보담두 사방이 통한 네거리에서 죽은 귀신이라야 발동을 못하거든. 길에서 죽으
면 텃귀신이 못되는 법일세."
"하긴 장사치가 저자에서 참형하는 걸 보구 나면 이문이 많이 생긴다네."
"재수 좋겠구먼. 그나저나 나는 우리 집사람이 요번 산달인데 안 볼걸 그랬어."
하면서 얘기들을 나누니 곁에 앉았던 묘옥의 귀가 번쩍 열리는 듯하였고, 이를 짐작하는
강선흥이도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주에서들 오십니까?"
묘옥이 물었고, 강선흥이도 잇달아 말을 걸었다.
"오늘 주내방서 참수형이 집행되었소?"
"예, 그러합디다."
묘옥이 아득해지는 감정을 억제하면서 바싹 다가들었다.
"죄수의 이름이 뭔지 아시오?"
"글세... 화적죄를 지었다는... 뭐라든가?"
"사람을 셋이나 죽였답디다. 한 목숨으로는 모자라지. 제 모가지가 서넛 된다면 모르되...
죽어 마땅하지."
"이름은 모르시나요?"
"예, 죽은 도적의 이름을 알아 무엇하겠소. 저자에 죄명과 죄수의 이름이 걸렸는데 자세히
봤어야지."
묘옥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바삐 일어났고 강선흥이도 지게를 지고 따라 일어섰
다. 묘옥은 벌써 눈물이 글썽해져서 앞이 보이질 않았고, 마음만 급하달뿐 맥빠진 다리로는
걸음이 걸려지지 않았다. 강선흥이가 묘옥을 위로했다.
"너무 염려 마오. 혹시 다른 사람일지두 모르지요. 또한 판결 송시가 끝났다 할지라도 나
라에서 좋은 일이 생기면 모면할 수도 있지 않겠소. 나두 해주 가면 아는 이가 많으니 어떻
게든 옥바라지에 도움이 되도록 해드리겠소."
묘옥은 억지로 눈물 어린 얼굴을 들어 끄덕이며 강선흥이의 말에 대꾸했다. 그들은 파장
이 되어가는 주내방에 황혼 무렵에야 당도하였다. 드믄드믄 주막의 등롱이 내걸려 있었고
아직 돌아가지 않은 장꾼들과 숙소를 찾는 장사치들로 저가는 시끄러웠다. 그들은 주막에
들어가 국밥을 시켜 놓고 중노미에게 말을 시켜보기로 하였다.
중노미 사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귀찮아하여 두 닢의 돈을 주고 나서 죽은 죄수가 누구인
가를 물었다.
"글쎄올시다요. 이름이 뭐라든가... 음. 하여튼지 광대랍니다."
"광대요? 어디 강령이나 운진 아니래요."
"아니오. 옳지 문화에서 나온 광대라구 그럽디다.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질 않네."
묘옥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장길산... 아니었나요. 문화 광대 장길산."
"맞았어요. 어떻게 아슈? 문화 광대 장길산, 화적 살인 대죄인이라구 그럽디다."
묘옥은 기운이 빠져서 넋을 잃고 앉았는데 강선흥이가 아무래도 안되겠던지 대신 물었다.
중노미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게 느꼇음인지 자기도 침울한 내색을 하면서 대답했다.
"연고가 있으면 동강방에 재다 놓구 찾아가도록 하지만..."
"연고자가 없었을 게요."
"그럼 송림방으로 가보우. 차부가 싣고 나갔을 테니까."
강선흥이는 시체가 바닷물에 잠겨 있음을 알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중노미가 엽전 두
닢어치의 얘기를 모두 끝내고 손님 시중을 나섰다. 강선흥이 말없이 술을 마시고 앉았는데,
묘옥이 봇짐을 들고 일어났다.
"저는 이제 가봐야 되겠습니다."
"아니 어디루 가신단 말씀이우. 숙소도 마땅한 데가 없을 텐데..."
"공연히 장사일루 바쁘신데 저 때문에 낭패가 많으셨을 줄 압니다. 저는 해주에 아는 분
이 계셔서 그리루 찾아가 자고 내일 고향으로 돌아갈랍니다."
"내 되짚어갈 제 모셔다 드릴 수도 있는데 그리 서두르시우."
"아닙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내내 복 받으셔요."
강선흥이는 안되었든지 뒤통수를 긁으며 방연히 서 있었다. 묘옥은 누구하고도 제 슬픔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묘옥은 차부가 실어갔다는 길산의 시체를 찾아서 송림방을 향하여 걸었다. 연고자 없는
시체는 바다에 버린다 하였으니 그 근체 어디에라도 찾아가서 길산을 삼킨 물결이라도 만나
고 싶었던 것이다.
해창을 지나다가 수직 군사를 만났다. 묘옥이 사내의 목소리를 꾸며 물ㄹ었더니 그는 아
래위를 훑어보고 나서 되물었다.
"화적놈이 버려진 데는 알아 뭐한다구 물어."
"예, 우리 가형인데 진작부터 마음을 고치지 못하여 식구들의 애를 먹이더니 드디어 관에
잡혀 죽었습니다. 허나 인생이 불쌍하여 재라도 올려줄까 하고 여줍는 것이오."
수직 군사도 묘옥의 고분고분한 말에 더 이상 까탈을 잡으려 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고자가 있음을 관가에 알렸으면 시신이나마 수습했을 텐데, 안됐군."
"예, 소식을 뒤늦게 들었습니다.
"산길을 타구 쭉 나가시오. 마을이 하나 나오고 저길 지나 솔밭을 따라가노라면 깎아지른
벼랑이 나오는데 말바위라고 그러지. 말바위 꼭대기가 바로 기요."
"근처에 어디 절간은 없는지요."
"절이라... 가만있자, 송림방 부근에 사자암이란 암자 하나가 있을거요."
묘옥은 곧 지쳐서 쓰러질 것만 같은데도 간힌히 기운을 내어 산길을 오르니, 저녁놀의 남
은 빛이 멀리 퍼져 있는 수평선이 바라다보였다. 먼 해변 마을에서는 연기가 올라왔고 소나
무와 측백나무 숲에는 짙은 어둠이 덮여 있었으며 바다 위로 검은 수면을 뒤집고 픝어지는
물결이랑의 힌 거품들이 내다보였다. 마을에 방금 켜지기 시작한 관솔불의 희미한 빛들이
들판 가운데 점점이 빛나고 있었다. 묘옥은 새삼스럽게 솟는 눈물을 닦지 않고 오fot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향을 떠나던 새벽에 내다보던 중화의 갯가와는 달랐다. 이제는 가슴이
두근거릴 것도, 무서울 것도, 미지의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저 고해와 같은 세상이 그녀의 어
두운 등뒤로 흘러 지나간 것이었다.
그녀는 마을을 지나 송림 사이를 헤맨 끝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로 지어진 사자암을 찾아
냈다. 누구 주승에게 허통을 넣을 것도 없이 승려는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마침 부엌 봉당
에 질펀히 앉아서 군불을 때고 있는 중이었다. 불빛이 어른거리는 아궁이를 들여다보고 있
는 불승은 몹시 외로워보었다.
"스님."
묘옥이 찾았으나 그는 여전히 아궁이 속의 불빛에 눈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스님."
"무슨 일인지 말씀하시오."
승려는 여전히 아궁이를 향한 채로 조용히 말했다.
"기도를 드려줍시사구 찾아뵈었습니다. 시주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승려가 고개를 돌려 묘옥을 돌아보았다.
"나는 혼자 공부하는 행자라서 염블은 폐하고 있소이다. 암자를 찾지 마시고 수양산의 큰
절루 찾아가보시지요."
"그런 게 아니라 실은... 저는 계집입니다. 주인이 억울하게 참수형을 당하시고 송림방 말
바위께에서 버려졌다 하온데 넑이라도 걷어갈까 하여 스님을 찾았습니다. 가엾고 한맺힌 혼
을 부처님께서 거두어주시도록 도와줍시오."
묘옥은 다시 깊숙하게 허리를 굽혔다.
"벌써 기도는 드렸소이다."
승려가 그제사 일어나 마주 합장하면서 부엌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저기 언덕길이 환히 올려다보이지요. 가끔씩 감영 전옥에서 나오는 수레가 참
형단한 시체를 싣고 이곳을 지나갑니다 오늘도 지나갔지요."
하더니 승려는 누더기로 기운 회색 장삼을 걸치고 앞장을 서는 것이었다.
"아낙이시라니 그럼 소승이 행보를 하겠습니다. 길안내를 해드리지요."
"스님, 고맙슴니다."
그들이 송림방을 지날 때에 귀신의 울음 같은 밤바람이 부르짖으면서 숲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승려는 가지고 나섰던 싸릿가지 홰를 쳐들고 여러번 부시를 쳐서 불길을 일으켰다.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바윗길이 가파르고 험해졌다. 승려가 뒤떨어진 묘옥에게로 횃불을 높
이 쳐들어 비춰주면서 물었다.
"주인장의 죄목은 무엇이오?"
"예, 감영에 줄을 댄 무외배들과 싸웠다고 화적죄를 씌웠어요."
"설령 화적질을 했다 치더라도 별 죄 될 것도 없소이다. 먹지 못해 굶어죽는 되가 더욱
크지요. 나두 가끔 도적질을 합니다."
하면서 승려는 나직하게 웃었다.
"스님께서 도적질이라니요..."
"우리네는 신선과는 달라서 소나무껍질이나 풀뿌리를 캐먹고 학을 타고 다니지를 못하지
요. 그렇다구 도학 하는 선비처럼 글로 끼니를 때우지도 못합니다. 밭을 일구어서 곡물도 내
어 먹지만 하도 척박하니 농사가 제대루 되어야지요. 그래 가끔 성내 부잣집을 찾아가 도적
질을 한답니다. 재물이 많은 자들은 그것을 잃을까 염려하여 우리네보다 근심 걱정이 많으
니까요. 그만큼 신심도 깊지요. 신심이래야 별게 아니라, 물건인 부처님상이나 부적 따위들
에 꼼작 못하는 것입지요. 소승은 주로 부적을 그려 팔기도 하고 주역도 보아줍니다. 이것이
도적질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소. 내 양식감만 조금 남기고는 모두 해남골서 조개 줍고 사는
가난뱅이들게 나눠주는데... 시주 받아 대들보를 올리고 기와를 얹어 찬란한 금불상을 들어
앉힌 절을 지어 무엇하겠소이까. 다 도적질 밑천을 장만하는 짓이지요."
묘옥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승려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하였다.
"이런 저녁에 많이 배우지요."
파도가 때리고 마주쳐 부서지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찬 절벽을 향하여 두 사람은 올라갔
다. 승려에게는 익숙한 길이었는지 습기에 젖어 미끄럽고 비탈진 바윗길을 그는 앞장서서
재빨리 올라갔고, 묘옥은 몇번이나 넘어질 듯한 몸을 가누곤 하였다. 바람으로 횃불의 볼꽃
이 뒤로 바싹 잦혀져서 금방 사그라질 듯 팔딱였다. 말바위에 오르니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
래로 날뛰는 바다의 흰 물결이 요란하게 벽을 때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바다 저편은 이미
캄캄한 어둠이었는데 괴물 같은 파도 가 연이어 몰려오고 있었다. 묘옥은 이 너른 물 밑 어
딘가에 잠겨서 깊은 바다 밑바닥으로 흘러갔을 정든 사내의 덧없는 육신을 생각하였다. 그
녀는 바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서 눈을 감았다. 곁에서 목어를 EOflaus서 나직하
게 읊조리는 승려의 염불소리가 들렸다.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이니 시고로 수보리야 보살은 응이일체상하고 발 아뇩
다라 삼먁삼보리일세."
죽은 자에게 넋이 있어 애절한 뜻에 닿는다면 바다 위에서 떠올라이 벼랑 끝에 화답해 올
지도 몰랐다. 그러나절벽을 때리는 바다의 포효하는 소리만이 들려왔고, 세상의 온갖 찌꺼기
들을 쓸고 핥고 어루만져서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파도는 마치 세월과도 같았다. 묘옥의 가
슴속에서는 이미 첫밤의 더럽고 끔찍한 상처가 닳아져 없어진 것처럼 길산을 잃은 슬픔도
곧 뭉개어져 세월에 씻기어 사라질 것이었다.
"나막 살바다타 아다바로기제 옴 삼바라 삼바라 훔 나모 소로바야 다타아다야 다냐타 옴
소로소로 바라소로 사바하..."
묘옥은 물결에다 제 기구한 몸을 떠내려 보내어 어딘가 아무도 모를 기슭에 도달하고 싶
었다. 그 여자는 순간적으로 벼랑에서 뛰어내리려는 동작으로 몸을 굽히며 앞으로 나섰고
승려가 재빨리 묘옥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억센 힘으로 묘옥을 끌어당겨 벼랑 끝에서 물러
서게 하였다.
"슬픔에 잡히지 마시오."
묘옥은 온몸에서 맥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승려가 염불을 그치더니 차분하게
얘기를 꺼냈다.
"목숨이란 돋는 햇빛에 스러지는 이슬과 같은 것이지만 영롱하게 초목을 적시듯 아름답고
귀한 것이오. 부처님께 마음을 의지하고 병든 아이를 간호하는 일처럼 제 인생을 사시오. 건
강하게 살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나누어주어야 하오. 알고 보년 이렇게도
소중하게 쓰일 목숨을 함부로 저버린단 말이오."
"스님, 저는 더럽고 천한 창기였습니다. 이젠 달리 살아갈 길도 없습니다. 또다시 색주가
에 얹히든지, 아니면 죽든다, 끝으로 니승이 되는 길이 남았습니다. 거두어주시겠습니까?"
"아니되오. 승려와 창기가 무슨 다를 바가 있겠소. 불심은 모두 같은 것이오. 댁네는 진흙
탕에 빠져 있다더라도 본성을 잃지 않을 사람이오. 거짓이 없는 마음과 부처와 같은 평안한
사랑을 행하도록 애쓰며 살아가시오. 댁은 이미 많은 것을 베풀었는지도 모르오. 잃은 것이
아니라 보시한 것이니 찾으려 하지 마오."
"잃은 것은 다시 찾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요."
"잃어버릴 것이 엇ㅂ도록 모두 베풀어버리시오. 남는 게 없다면 얻으려고 안달을 하지도
않을 테니까."
승려는 길게 한탄하듯 웃고 나서,
"이 미욱하고 병든 것이 또 한번 날마다 되풀이하던 법문이랍시고 장광설을 폈소이다. 나
무 관세음보살..."
묘옥은 어느덧 마음이 가라앉아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괴이하게도 사람을 안
정시키고 힘을 내게 해주는 이상한 중을 향해 물었다.
"스님은 누구십니까?"
"까짓 천한 땡중에게 누구냐구 물어 무엇하실려오?"
"스님의 법명을 일러주십시오."
"여환이라 하오."
여환이라는 승려는 다시 목어를 때리며 염불을 외었다. 밀물이 시작되자 파도는 점점 높
아져갔고 벽을 때리는 물보라가 절벽 위에까지 끼쳐 올랐다. 아우성치는 파도소리를 뒤에
두고 그들은 말바위를 떠났다. 송림방으로 되돌아오자 여환스님은 묘옥에게 권유했다.
"마땅한 사처가 없다면 소승의 암자에서 묵어 가십시오."
"아닙니다. 제 염려는 마셔요. 성내에 가서 묵겠습니다. 여환스님의 말씀은 언제나 지니고
살아가겠습니다. 이제 참말 강한 계집이 될 것만 같습니다."
"불쌍하고 천한 것들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부세의 인연으로 뵙고 소승은 물러가오."
승려는 누더기 장삼을 쉬적이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묘옥은 송림을 벗어나서 하염없이
산길을 걸었다. 사방 천지로 길은 달리고 있건만 제 초라한 몸을 붙일 산천은 아무데도 없
었다. 묘옥은 문득 해지점에서 만난 고달근이네 사당패를 떠올렸다. 지금쯤은 사금터 부근
마을에서 놀이를 끝내고 쉬고 있겠지. 내일 정오에는 주내방 사거리 저자에서 연희를 놀것
이었다. 정처없이 흘러다니며 이 저자 저 고을에서 노래와 춤을 파는 물풀과도 같은 생활이
떠올랐다. 묘옥은 벼랑 위에서 제 몸을 던저 물의 흐름에 맡기려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끝간데 없는 길 위로 떠나보내고 싶었다.
묘옥이 주막 봉놋방에서 장꾼들에 섞여 새우잠으로 설친 이튿날 점심때가 되어서야 고달
근이네 안성 사당패가 주내방 저자로 들어섰다. 저자 임방을 통하여 놀이 허가를 얻어내고
곧 놀이판이 이루어지는데 묘옥은 모가비 고달근이를 찾아갔다. 달근이는 첫눈에 묘옥이 여
자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불알 없는 총각이 왜 날 찾나?"
"저두 패거리에 끼워주셔요."
"그 황소 아재비 같은 미욱한 녀석은 어디다 떼치구 그래."
"길동무였는데 헤어졌지요. 패거리에 끼어주실래요, 어쩔래요."
고달근이는 유쾌해서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키들키들 웃어대며 묘옥의 어깨를 두드렸다.
"노래나 춤은 할 줄 알아?"
"색주가에서 삼 년을 굴러먹었지요."
"허 그 참 잘되었군 그래. 우리네 거사 한 놈이랑 짝지어주지. 노래나 부르고 팔도강산 유
람을 다니겠다, 가는 곳마다 제 맘에 닿는 대로 님도 만나겠다, 그야말루 봄바람같이 훨훨
날아 다니는 팔자지."
"헌데 소청이 한가지 있어요. 나는 사내라면 딱 질색이거든요. 거사대신 애사당 하나와 인
연 맺게 해주셔요."
고달근이는 찌푸린 눈으로 묘옥을 한참이나 살펴보았다.
"어쩐지 남장을 했더라니... 뭐야, 맷돌이란 말여? 자네가 수동무를 하고 홍령이가 암동무를
한다 이거지. 그럼 행하는 자네가 물어낼 텐가?"
"행하라니요?"
"꽃장사를 해야지. 허나 재예만 출중하다면, 우리 청룡사에 시주나 들게. 홍련이는 자네가
계집이라면 몹시 실망할 게라. 이름이 뭐여?"
"묘옥이에요."
"해주엔 뭣하러 왔나?"
"어디 기방에나 붙일까 하여 왔는데 적당한 곳이 없군요."
고달근이는 맞춤한 사당을 하나 얻게 되어 몹시 흡족한 기생이었다.
"잡가나 춤은 할 줄 알겠지."
"춤뿐인가요, 잡가에 타령에 엮음도 하지요."
"자 오늘은 첫날이나 주막에 가서 기다리게. 아마 저녁때엔 신참례를 톡톡히 치를지두 모
르니 푹 쉬라고."
"내일 떠납니까?"
"떠나야지. 날마다 떠나는 게야."
묘옥은 고달근네 사당패에 끼여들어 남쪽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 3장 비증비욕
송상 배대인네 집은 남산 아래 있었는데 깊은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아흔 간이 넘는 대가
였다. 배대인은 아들 하나를 두고 딸을 셋이나 낳았는데 그 귀한 아들마저 배냇병신이었다.
장성하여 이십세가 넘었건만 아직도 징징 울며 보채고 옷에 멋대로 방분하는 바보였고 가족
들은 배대인이 늘그말에 아들을 보겠다고 산삼을 많이 먹어서 그리 되었다고 말들을 하였
다. 위로 두 딸은 같은 상신 신분의 부잣집에 시집을 보냈고 이제 십팔세로 접어든 막내딸
이 후원 별당을 지키고 있었다. 세 딸 중에서도 막내는 영리하고 정숙한데다가 특히 배대인
이 귀여워하게 된 것은 이재에 밝았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십육세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배대인 행상단에 차인으로 다니는 자가 있었는데 마누라는 일찍부터 배대인네를 드나들며
여러 가지 잔시중을 들곤 했었다. 특히 귀엽고 활발한 막내딸에게는 유모처럼 정이 각별하
여 설빔도 손수 지어주었고 관등졸이나 다리밟기 같은 때에는 제 등에 업고 나가서 구경을
시켜주는 것이었다. 한데 어느해에 삼남 쪽으로 행상을 나갔던 그의 남편이 객줏집에서 노
름을 하다가 지방 불량배의 칼을 맞고 죽어버렸던 것이었다. 과부가 되어 혼자 살아가기에
는 또한 남은 자식이 여럿이요, 늙은 부모가 벼느리만을 바라보고 남아 있으니 앞이 캄캄한
일이었다. 이런 일을 알고서 막내딸은 그 아비 배대인께로 아나가 백 냥쯤 도와 줄 것을 청
하게 되었었다.
"우리 송상은 돈 알기를 목숨보다 중히 여긴다. 아무 까닭 없고 노력 없는 일에 백 냥은
커녕 일 전도 내어서는 안된다. 그 여편네가 당장 굶어서 죽는 것도 아니니 부지런히 품을
팔아 살아가면 될 것이다."
하며 배대인이 거절을 하였으나, 막내딸은 또라지게 응수하는 것이었다.
"누가 거저 쓰쟀나요, 이자까지 붙여서 한달 안으루 갚으면 되지요."
"이자를 붙인다... 그렇다면 내 백 냥은 내어주마. 그 대신에 담보를 잡아야겠다. 네까짓
게 담보 잡힐 만한 물건이라도 있느냐?"
"예, 있습니다. 제 나이 이제 십육세이오니 이팔이 넘어 성혼을 시켜주시겠지요?"
"그래서..."
"다른 건 몰라두 노리개며 패물은 해주시겠지요."
"그거야 앞으루 몇 년이 지나야 할지 모르지 않느냐?"
"각서를 받으십시오. 만약에 제가 백 냥을 갚지 못하게 되면 혼숫감은 물론 패물도 받지
않겠습니다."
배대인이 어린 계집아이의 소견으로 거래하는 법과 신용을 나누는 일과 바른 일에 열을
내는 것을 보고 은근히 마음속에 기특하여 응낙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어찌하나 시험해보고
싶어서 두말 없이 각서를 받고 제 딸에게 돈 백냥을 내주었다. 막내딸은 돈을 가지고 사랑
에서 나가더니 거의 갚을 기한이 차도록 한번도 나타나는 적이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긴 이번 일로 네가 이재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이다음에 살림 경제를
꾸릴 적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배대인은 아예 백 냥이 돌아올 것은 바다지도 않고서 기한이었던 날을 맞았다. 그날 저녁
에 계집아이가 맨손으로 들어왔다. 배대인은 짐짓 얼굴에 노기를 꾸며서 꾸짖었다.
"이년, 돈 백 냥을 어찌 할 테냐?"
"아버님 너무 서둘지 마시고 고정하십시오."
하더니 뒤에 감추고 있던 어음을 펴서 내미는데 백이십 냥짜리가 아닌가. 배대인은 그것
이 가짜인가 하여 이리저리 뒤적였으나 낯익은 거래인의 수결이 있으니 틀림없는 어음이었
다.
"누가 만들어주더냐. 네 어미가 곤경을 면해주려고 만든 모양이구나."
"아니올시다. 제가 아버님께서 꾸어주신 백 냥으로 삼백오십 냥을 벌어 그중 원금을 제한
이백삼십 냥에서 이백 냥은 이천 아주머니 주막을 열 밑천으루 드리고, 삼십 냥을 제가 부
린 차인들 행상비로 지불 하였습니다."
배대인은 놀라고 궁금하여 딸에게로 바싹 다가 앉으며 은근하게 묻자, 막내딸은 빙글거리
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돈을 얻어 나가는 즉시루 사람을 시켜서 요즘 시중 약재 중에서 가장 헐값인 것이 무엇
인지 알아오게 하였지요. 납가새 풀뿌리인 택사가 지천인데 한 근에 이 전이요, 두 근에 삼
전, 엿 근은 오전이라구 하데요. 재가에 남아 있는 아버님 차인들 중에서 다섯 사람을 임시
로 고용하여 송도 곳곳에 있는 약국에서 택사를 사들이게 했어요. 약국 주인들은 얼씨구나
하고 모두 털어내 주었지요. 열흘 동안이나 이렇게 사들이구 나니까 택사가 완전히 동이 나
버렸어요. 며칠 있다가 약국을 돌아다니며 택사를 찾으니 한근에 여덟 돈으로 값이 뛰었어
요. 택사를 약간 덜어서 풀었는데 약국에선 두어 전의 이문 때문에 다투어 사갔지요. 고의로
약간을 내어서 그 값에 전부 거두어들이니까, 일년 중에서 서너 근 팔릴까 말까 하던 택사
가 거래가 활발해진데다 동이 나고 품귀해지니 다시 열흘 뒤에는 한 근 값이 이십 전으루
올랐지요, 매번 사느흘 또는 대엿새 사이를 두어 번갈아 차인들을 바꾸어 많이 사들이고 적
게 내니 값이 나날이 올라가 한달 사이에 한 근 값이 오십 문이나 되었습니다. 그저께부터
차인들이 약국거리를 싸돌아다니며 선전하기를 지금 시골 약국에서는 택사가 급히 소용되어
값을 묻지 않고 많이 사들이려 한다구요. 그리곤 마바리에 싣고 나간 돈꿰미를 내보였답니
다. 약국 주인들은 단 한 근의 재고도 없는데 현금을 보고는 모두 애가 달아서 이런 판국에
택사만 있었다면 이득이 클 텐데 공연히 팔았다며 아쉬워했다지요. 그래서 바로 어제부터
택사를 삼사십 전 가격으로 냈더니 약국 사람들은 씨가 말랐던 뒤끝이라 반가워하고, 게다
가 시골 약국에서 급히 구한다는 소문네 너도 나도 사들이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백 냥으로
삼백오십 냥을 벌게 되었습니다."
배대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딸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나서 조금도 기쁜 빛을 띠지
않으며 말했다.
"백 냥으로 삼백오십 냥을 벌어들인 것은 잘한 노릇이다. 그러나 이문 니백오십 냥에서
성실항 노력이 깃들지 않았으니 이러한 재물은 뿌리가 없어서 또한 쉽게 나가버릴 돈이니
라."
"한달 동안 차인들이 저자를 헤맸는데 성실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인 말씀이십니
까.?"
"첫째, 속임수를 쓰지 않았느냐. 헛소문으로 거래를 활발하게 사여 일단 이문을 보았으되
신용응 잃어 다시는 그런 이들과 거래를 트지 못할 것이다. 장사는 신의를 쌓아올리지 않으
면 도적질 같은 짓으로 지탄박게 되는 게야. 둘째로, 싸고 헐한 약재를 택한 것이 잘못이다.
부는 풍족한 자에게서 얻어야 하고, 일반 가난한 자들의 원망을 받으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쉽게 취하여 쓰는 약재를 매점하였으니 피해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
다. 끝으로 셋째는 상도를 타락시킬 위험이 있었다. 이런 축재가 알려져 그 방법이 널리 퍼
지면 시장은 마비되고 말 것이니라. 허나 그 용은 그릇되었으되, 취재는 제법 잘하였다."
이리되어서 배대인은 그의 막내딸을 팔푼이 아들보다 훨씬 믿음직스럽게 여겼던 덧이다.
떠한 파주 박진사의 서자라는 박대근이가 상단에 나타나 유능한 수완을 보여서 행수를 시킬
적에, 배대인은 그들이 좋은 배필이 될 것이라고 은근히 작정해두었다. 인품도 그러려니와
허우대도 멀끔하여 누가 보기에도 믿음직했고, 자신이 늙어 더이상 사업을 하지 못할 적에
는 데릴사위로 집안을 맡기려는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배대인의 대근에 대한 신임은 두터
워져갔으며 주위 친척들이나 상단 사람들도 모두 박대근이를 젊은 주인처럼 여기게끔 되었
었다. 박대근이가 갑송이와 더불어 몇사람의 치인들에게 업펴 초주검이 되어서 나타나자 배
대인네는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배대인은 박대근의 상단이 제법 높은 이득을 올리고 돌
아왔지만 관원들과 다투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몹시 노하여 대근이를 따라갔던 늙은 차인들
을 단단히 꾸짖었다. 갑송이과 박대근이는 바깥 사랑채를 썼는데 갑송이도 외로웠고 해거
둘이 한방을 쓰면서 몸조리를 하였다. 그동안에도 박대근이는 갇혀 있는 길산이 염려되어
잇달아 사람을 해주로 보내서 기별을 알아오게 했었다. 그리고 은밀히 교제용의 돈냥과 물
건을 감영 쪽에 들이밀었던 것이다.
한단 만에 갑송이는 약간 절뚝이며 걷게 되었고, 박대근은 오랫동안 쉬고 좋은 약재를 달
여 먹은 효험이 있었는지 전보다 더욱 원기 왕성해졌다. 먼저 보냈던 차인에게세 해주 길산
의 소식이 없어 궁금하던 중에 방자를 놓아 보냈더니 곧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때는 이
미 늦가을에 접어들어 정원의 나무는 잎이 모두 떨어지고 아침 저녁으로 지붕과 담에 두터
운 서리가 덮였다. 갑송이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마당에 나와 공연히 정원석을 이리저
리 옮기며 기운은 썼고, 박대근은 오랜만에 병서를 읽으면서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해주
서 돌아온 자가 중문 안으로 들어서자 갑송이가 와락 달려들어 그 소매를 잡는다.
"그래 어찌됐다든가?"
"서방님 어디 계십니까?"
"이 사람, 우리 길산이가 아직 무사헌가?"
갑송이가 손목을 잡고 무지막지하게 흔들어놓으니 방자니느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아이구 손목 부러지우. 장총각은 무사하니까 내 손목두 좀 무사하게 해주오."
마당이 시끌덤벙하여 미닫이를 열었던 박대근도 그 말을 들었는지라, 얼굴이 활짝 펴지면
서,
"그래 참수형 집행은 연기가 되었는가?"
"예, 해주서 머무는 김차인 말루는 형방이 적극 손을 써서 대시수로 머물렀답니다. 헌데...
장총각 이름으루 다른 참형수가 죽었지요. 시방 해주서는 장길산이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합
니다."
대근과 갑송이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박대근이는 중얼거렸다.
"음, 계획한 대루 되었군."
"나두 이젠 전보다두 더욱 힘꼴이 땡겨서 못 견디겠으니 파옥하러 가십시다."
벌써부터 길산을 만날 생각과 담장 안에서 썩는 나날이 좀이 쑤시고 진력이 나 있던 갑송
이가 신이 나서 말했다. 박대근이는 방자를 놓았던 자에게 두둑이 주어 보내고는, 갑송이와
겸항하여 반주를 들면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였다. 형방과 옥사장에 손을 써서 다른 참형
수로 일단 죽음을 바꾸어놓았으나 길산의 목숨이 몇 달 연장되었을 뿐이고 차일피일 끌다가
감영에서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즉시 죽는 몸이라 시각을 지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감영의 옥을 친다는 것은 무리일뿐더러 큰 날리이니 조정에서도 가만
있지는 않게 될 것이오. 다만 내게 한가지 꾀가 있은즉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고 있는 참이
었소."
"어떤 꾀유?"
박대근이는 대답 없이 웃기만 하였다.
"내 차차 알려주리다. 헌데 아우님 다리는 어떻소?"
"쳇, 돈닢만한 흉터만 남았지요. 이젠 나무둥치를 한꺼번에 서너 개 뽑아 보일 수가 있
수."
"좀이 쑤시는 모양이지. 어떻소, 요 며칠 상간으루 구월산에나 좀 다녀오지 않겠소?"
박대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송이는 벌써 달려내려가 신이라도 꿸 태세로 궁둥이를 들
썩이며 말했다.
"아이구, 우리 성님이 오늘에사 내 심사를 조금 알아주시네. 가는 길에 아주 해주 들러서
길산이 얼굴도 보구 재인말두 휘둘러보구 오지요."
"안되오. 해주 쪽으로는 절대루 가지 마오. 섣불리 거기 들렀다가 주내방 패거리에 들키기
라두 한다면 길산이도 아우도 모두 위험할 테니까. 신가네 패거리가 우리 얼굴을 알고 있거
든. 아예 연안길을 가지 말구 평산길루 돌아서 문화루 들어가오. 그리구 재인말에 갈 때에도
절대루 낮에 닿도록 하지 말구 밤에 들어가오. 장총각이 화적으로 몰렸고, 아우님은 잡히지
않았으니 필경은 두 아우님네 부모님께서 곤경을 치르고 있으리다. 내가 구월산 가서 마감
동이를 찾아보라는 것은, 그의 도움을 얻어 옥에 갇혔을 부모님을 꺼내어 안돈 시켜 놓으란
얘기외다."
조목마다 옳은 얘기를 하는 고로 갑송이는 잔뜩 풀이 꺾여 맥없이 중얼거렸다.
"우리 길산이는 그럼 어찌됩니까?"
"글세 내 앞으로 한달 안에 장총각을 살려낼 터이니 염려 말래두. 식구들 일은 감동이와
의논하면 능히 해낼 수가 있을 거외다."
"내일 당장 길을 떠나겠수."
"아니.. 그전에 아우님이 한 번쯤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 며칠 더 있다가 떠나기루 하
우."
"내가 송도서 만날 사람이 어딨수?"
"언제 기운 겨루어보겠다던 내 아우 강선흥이 생각 안 나오?"
"그 아이가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우리 객주에 들르는데, 이번 달에는 틀림없이 송도엘 올
게야. 선흥이두 만날 겸 우리가 그동안 집구석에서 밥만 죽여왔으니 흠뻑 놀아볼 겸해서 며
칠 더 있다가 떠나오. 그리구 오늘 저녁에는 나하구 어디 갈 데가 있소."
"어디 기방에라구 데려갈려우?"
"허허, 아우님이 한달 동안 박혀 지내노라구 도인이나 된 듯싶구려, 우선 사람 하나를 만
나 보구 기방에 놀러 가도록 허지."
박대근이와 갑송이는 그날 저녁에 의관 정제하고서 청교방으로 나아갔다. 주막에 들러 박
대근이 술청 안을 휘둘러보다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젊은 사내들에게
말을 걸었다.
"느이 사또 어디 갔느냐?"
"예, 행수 어른 나오셨수? 학선이 성님두 요샌 죽을 맛입니다요."
"어째 사또 나리두 그리 죽을 맛이라면, 우리네 따위 천한 백성은 하나두 살아남지 못하
겠다."
그들은 박대근이의 곁에서 눈을 부라리고 섰는 갑송이가 못내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그들
은 갑송이가 중앙에서 나온 무슨 포도부장쯤이나 되는 줄 여기는 눈치여서 대근을 밀어내고
슬슬 꽁무니를 뺄 태세들이었다. 대근이가 곁눈질로 갑송이를 쳐다보고 나서,
"맘들 놓게. 내 아울세... 학선이 있는 델 좀 가르쳐주어."
"가르쳐주었다간 우리가 경을 칩니다요."
"갑자기 그 성님을 행수께서 무슨 일루 찾으십니까?"
하고 그들은 발뺌들을 하였다. 박대근이가 주모에게 청하여 다시 약주 술에 고기 닷 근을
내오게 하고 나서 말했다.
"내 한턱 쓸 테니 잘들 마시게나."
"어유 이거 무슨... 술을 이렇게까지..."
"내가 학선이를 찾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 때문이야."
박대근이가 말하자 두 사내는 영리한 눈을 반짝이며 서로 마주보고나서 다른 하나가 지그
시 눈을 감고 끄덕여 보였다. 한 사내가 앞장을 서면서 말했다.
"절 따라오십시오."
"학선이가 죽을 맛이라니 또 뭘 저지르구 몸을 피하는 중인가?"
"그게 아니라, 고용을 사는 중입니다."
"아니... 깍정이로 이름나서 뺀뺀한 사또가 고용을 살다니 거참 천지개벽할 일일세. 그간에
마음을 고쳐먹구 일손을 잡았단 말야?"
"글세 따라와보시면 안다니까요."
그들이 안내하는 자를 따라서 청교방을 벗어나 성내로 들어갈 때, 어언 주위를 살피니 홍
등이 즐비하게 걸려 있고 풍악소리가 일어나는 못골 근방이었다. 송도 또한 돈 흔코 계집
흔한 고장이라 기방이 유명한데 못골의 기루에는 절색이 많았었다. 박대근이가 무엇을 알아
챘는지 싱겁게 웃읍을 터뜨렸다.
"또 노름빚에 몸이 잡혔구먼."
"이거 큰탈이 났습니다. 이번에는 자그만치 백오십 냥이니 못 살아두 이삼 년은 살아야
탕감이 되겠네요."
몸집 작은 사내가 약삭빠른 눈을 굴리며 호소하는 눈짓으로 대근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박대근이는 그의 말이 구실일 뿐 사실은 학선이가 다른 기생을 물고 기둥서방으로 들어앉아
투전판의 자릿세를 받는다는 것을 대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몸 잡은 년이 언년이냐?"
"헤헤헤 그야 행수 나리두 아다시피 춘래 아니겠습니까."
"허, 그 서방에 그 계집이로다."
사내는 등이 내걸린 대문 앞에 이르러 길게 불렀다.
"이리 오너라!"
안에서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성맞춤으루 되었네. 사람도 찾고 기방에도 오게 되었으니 오늘 아우님이 놀 복이 터졌
구려."
박대근이가 말했으나 갑송이는 뭔가 심사가 틀렸는지 툴툴거리며 받았다.
"보아하니 건달 오입쟁이 녀석을 만나려나 본데, 그따위 것들하고 우리넨 성깔이 맞지 않
아 난 갈라우. 요담 강선흥이가 오면 그때나 놀지요."
"선흥이두 좋겠지만 이학선이란 놈두 제법 재미나는 놈이니, 아우님은 곁에서 꼴이나 보
며 노시게."
계집아이가 대문을 열더니 앞서 있는 학선의 부하를 보고 대뜸 코방귀를 뀌어버렸다.
"쳇 지까짓 게 뭔데 오너라 가너라야."
"예끼 년! 내 등뒤에 누가 오셨나 봐라. 배대인댁 서방님이시다."
"에그머니 행수 나리 오셨네."
하며 하녀가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으로 들어서며 대근이 물었다.
"학선이 예 와 있는냐?"
하녀가 새침해져서 말했다.
"허구헌 날 뒷방에서 나오지두 않구 지내시는데 우리 아씨 속을 얼마나 썩이는지 몰라
요."
몇패거리가 와 있는지 방안이 제법 화들짝하니 웃음판이 벌어져 있었다. 그들은 장지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박대근이는 윗목에서 가야금 줄을 고르던 춘래에게 인사를 건넸다.
"평안하오. 무사한가?"
"서방님 어서 오십시오."
"선래손들 좀 조입시다."
먼저 와 앉았던 자들이 아무 소리 없이 자리를 내며 물러났고, 잠시후에 졸개의 전갈을
받은 학선이가 부리나케 달려나왔다. 좋은 옷을 입고 돈피 배자까지 걸쳤는데 신수가 멀끔
하여 과연 송도의 이름난 건달 값을 할 만하였다. 키는 중키에 콧날이 번듯하고 칠흙 같은
수염이 멋지게 늘어져 있으며, 눈은 총명했고 입에는 언제나 냉소가 흐르는 듯한 인상이었
다. 학선이는 벌써 댓돌 위에서 방안의 사람들 얼굴을 재빨리 확인하고서 그중에 갑송이가
낯선 얼굴임을 알고는 잠깐 노려 보았다.
"자네 오랜만일세. 요즈음 깨가 서 말이라며?"
"성님 오랜만이우. 내 요새 몸값 치러내느라구 밤을 날마다 새워 몰골이 말씀이 아닙니
다."
"밤마다 골패쟁이들 셈판해주느라구 벌이가 짭짤하다든데."
"에이... 거 밤참 심부름하느라구 붙어 앉아서 행하 받아먹는 돈이니 오죽하겠습니까?"
"함께 술 한잔 어떤가?"
학선이는 아직 낮잠이 덜 깼다는 듯이 선하품 시늉을 해 보이면서 일부러 관심이 없는 체
해 보였으나, 송도의 이름난 차인 행수 박대근이의 용건이니 몫이 클 줄을 알아 적이 궁금
한 기색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말했다.
"뒷방에 아직 투전 손님이 들지 않았으니... 그리루 자리를 옮깁시다. 우린 호젓한 델 좋아
하는 성미락서."
"두 손을 들면 딱 소리가 나는구먼. 그렇게 허지."
그들은 학선이의 안내로 뒷방에 둘러앉았다. 잠시 후에 춘래가 왔으나, 학선이는 눈초리를
날카롭게 뜨고서 슬쩍 한마디 던지는 것이었다.
"누가 투전판에 계집을 끼운대. 이 방에 아무두 들이지 말어."
술상이 들어오기까지 박대근이는 장사 나갔던 얘기만을 늘어놓았고, 학선이도 천연스레
맞장구를 치고 앉았다."
"사실은 내 자네에게 부탁할 말이 있네."
박대근이 학선이를 향하여 말했다.
"내게 부탁할 일이라면 뭐 좋은 일은 아니겠군."
학선이는 눈을 교활하게 빛내면서 대근이와 갑송이를 재빨리 살펴보았다.
"자네 요새두 벌이가 신통찮을 땐 가어사 노릇을 하는가?"
"에이 그야 벌써 오래 전 이야기입지요, 요즈음은 관에서두 어찌나 까다로워졌는지 여간
해 속지를 않습니다. 그저 예전에 한양서 판서 댁에 청지기로 있을 제 눈 귀 동냥한 지식으
루 제법 대감 흉내를 냅니다만, 고작해야 속는 것들이 시골 양반이나 아니면 말단 하리들입
죠. 그래 부탁할 일이란 뭡니까?"
박대근이 잠깐 뜸을 들이듯 학선이를 건너다보았다. 학선이도 송도서 웬만한 오입쟁이라
면 모두 알고 있는 건달이었다. 원래가 한양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대갓집 통인 노릇을 하
다가 판서 댁에서 겸인 노릇을 하더니, 워낙에 투전을 좋아하여 판서가 외임 나갈 때 빌렸
던 호조돈 삼백 냥을 모조리 날려버리게 되었었다. 하는 수 없이 내킨 김이라고 다시 오백
냥을 빼돌려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위인이 엉뚱하고 배포가 있는데다 영리하여서, 가끔 제
부하 몇 명을 거느리고 지방으로 나다니면서 어사또 흉내를 내는데 제법 그럴 듯하다는 것
이었다. 그가 한바퀴 돌아올 적이면 많은 봉물을 벌어서 가지고 왔고 남의 청탁까지 해결하
여 오는 수도 있었다. 박대근이는 진작부터 이러한 학선이의 행각을 들어왔고, 딴엔 쓸모가
있을 녀석이라고 점찍어놓았던 것이다.
"부탁할 일이란 다름이 아닐세. 자네 금부도사 행세를 좀 해볼 수 없나?"
박대근의 말에 학선이는 비윿 웃음을 머금었다.
"흥, 누가 옥에 갇힌 모양이구려."
"그렇다네. 옥에서 빼돌려야 할 사람이 있네."
"금부도사라... 옥은 어디며, 죄수는 몇이우. 설마 한양 전옥서는 아니겠구. 만약 한양이라
면 저두 용빼는 재주가 없소이다."
"황해감영 옥일세. 죄수는 둘, 모두 대시수일세."
학선이가 고개를 저었다.
"감영 옥이라면 난 못하겠수. 더군다나 대시수라니 시일을 끌다간 꺼내기 전에 죽을 수도
있잖습니까."
"허, 경비는 얼마를 쓰더라두 내가 모두 뒤를 댈 테니까 뽑아내기만 하게."
"감영 옥이라.. 삼백 냥 내우."
"그렇게 많이 드는가."
"대시수 둘에 삼백 냥이람 너무 싸지요. 싫으면 그만두슈."
"좋아... 내겠네."
이때 곁에서 잠자코 앉아 술을 들이켜던 갑송이가 눈을 부릅뜨며 투덜거렸다.
"순 도적놈의 심보로군. 삼백 냥이면 팔자를 고칠 대금인데 까짓 거짓 행세 한 번에 무슨
놈의 돈이 그리 많이 든단 말야."
학선이가 갑송이에게서 돌아앉으며 박대근에게 말했다.
"내 아까부터 이자의 목자가 거슬려서 께름칙했소이다. 이자를 내보내구 얘기하든지, 아니
면 나는 일 않구 손을 뗄 테유."
박대근이 갑송이의 옆구리를 슬쩍 찔러주고 나서 학선이를 달랬다.
"이봐 참게나. 서루 내막을 알게 되면 모두 친해질 사람들인데."
"쳇, 내가 자리를 비킬 테유."
하며 갑송이가 일어서려는 것을 다시 박대근이 만류했다.
"아우님은 왜 그리 참을성이 없소. 길산이 일은 어찌하려우?"
정색하고 은근히 꾸짖는 박대근의 말에 갑송이는 굳어진 얼굴로 연방 술만을 들이켜며 앉
아 있었다. 그런 꼴을 보고 학선이는 실실 냉소를 흘리더니 박대근에게 말하였다.
"착수금을 내우. 요새 돈이 말라서 죽을 지경이더니 어디 성님 덕 좀 봅시다."
"좋지. 내 우선 이백 냥을 보낼 테니 준비를 하게나."
"당장에 저는 한양으루 올라갈랍니다."
"한양에..."
"예서도 송도부에서 새어나오는 기별을 얻어 볼 수는 있소이다. 새루 임명된 벼슬아치들
의 전신 내력을 알 수는 있지요. 허나, 그것으로는 감영을 속이기가 아슬아슬합니다. 관찰사
라면 높은 벼슬이니 조정 내막을 대개는 휑하니 알겠지요. 도사는 종오품이요, 중한 직함입
니다. 직접 의금부 근처에서 며칠 묵으면서 내막을 소상히 알아내어 착수를 하겠습니다. 천
상 겨울쯤에나 일이 시작될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박대근은 학선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빈틈없는 생각일세. 그럼 나는 자네만 믿구 있겠네."
"성님께서 부탁하셨으니 망정이지, 믿지 못할 상대라면 절대루 그런 위험한 노릇을 못합
니다."
"자네에게 이런 일쯤이야 손 뒤집기 아닌가."
"그게 다 예전에 돈 떨어져 죽지 못해서 몇번 해봤던 짓입지요. 그저 시골 군수의 봉물이
나 빼먹었을 뿐이구요, 해주 같은 대처에서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고 나서 학선이는 평안도에서 가어사로 행세하며 횡행할 때 자기가 잡은 다른 가어사의
얘기도 하였다.
"참 신났던 것은 용강 관아에 어사 출도를 했던 일이지요. 좌우간에 수령의 볼기를 쳤다
니까요. 마패가 없겠습니까, 역졸도 너덧 명 꾸몄겠다, 저 밖엣녀석들은 그때 서리 노릇을
했지요. 떡 들어서며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고 나니 태수는 간 곳이 없고 아전붙이들도 모두
달아나서 동헌이 텅 비었습니다. 한참이나 기세등등해서 기다리노라니 그제서야 하나 둘씩
나타나 현신하는데, 문서를 모두 압수하고 관인과 병부를 몰수한 다음에 봉고하였지요. 제꺽
파직당할 판이니 그 수령이 어찌되었겠습니까? 관복을 입고서 거적을 깔고 엎드려 죄를 비
는데 참으로 가관입디다. 놈이 부임 기간동안 부정을 해처먹은 것이 도함 천 냥 돈이 넘는
데 반을 뜯어냈지요. 그런데... 우스운 것은 바로 그 이듬해에도 부근 읍에서 해먹었는데도
소문이 없더란 말이지요. 서로들 창피하여 쉬쉬하는ㄴ 것이겠습죠."
"그 혼찌검 당한 관리들이 얼마나 자네를 욕했을까?"
"그러니 제 명이 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따가 우리집 사람들은 시켜서 착수금을 보낼 테니 내일 당장 한양으로 올라가도록 허
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송도 건달 학선이가 의금부의 내막을 탐지하러 한양으로 떠나간 며칠 후에 갑송이와 박대
근이는 행상단에 같이 나갔던 차인들 몇과 어울려 들놀이를 나갔다. 박대근이 그 식객으로
갑송이를 데리고 있었지만 한번도 송도부중을 돌아본 적도 없으려니와 원래 나돌아다니던
사람을 담 안에 가두어놓다시피 했으니 미안하기도 했었다. 또한 길산이 일도 그러하고 이
제 재인말에 돌아간다는데 한번 헤어지면 또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므로 들놀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찬합에 갖은 안주를 꾸리고 풍로도 가지고 갔으며
약주를 한 동이나 지워 갔다. 술 쳐주고 흥 돋울 기생도 두 명을 따라 잡혔다. 천마산 기슧
에는 절승지가 많은데 특히 박연폭포가 뛰어났고 여름철에는 곳곳에 놀이하는 한량들이 들
끊었다. 낙엽으로 발이 푹푹 빠지는 산길을 돌아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난 다음에 폭포가 내
다보이는 시냇가 반석에 자리를 정하였다. 그들이 술을 데우고 안주를 익히며 이제 술자리
가 점점 흥겨워질 무렵인데 의관 정제하고 혈색 좋은 양반 한량패들이 길에 나타났다. 그들
은 위쪽에서 뭔가 쑥덕이는 듯하더니 글보다는 한량짓에 가까울 도포 차림의 허우대 커다란
사내가 굵은 음성으로 외쳤다.
"너희들은 어디소 온 누군데 남이 맡아둔 시회 자리를 가로챘는가?"
대번에 나오는 말씨가 또라진 반말지거리였다. 박대근이 침착하게 한량들을 살펴보니 기
세등등하고 의관이 깨끗한 품이 양반집 부스러기들인 모양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산천에 임자가 따로 있단 말도 없거니와, 시회를 연다면 선비들일시
분명할 것이오. 예를 잃고 풍류를 어찌 알며 산천을 다툼하여 시는 지어서 무얼 한단 말요."
라고 박대근이 점잖게 꾸짖었다. 그중에 하나가 좀 겸연쩍었던지,
"여보게 그만두세. 다른 곳으루 가면 될 게 아닌가. 지난번에 왔었다구 어디 게가 우리 자
리루 정해놓았나."
그러나 처음에 반말로 소리치던 자는 박대근의 말에 더욱 비위가 상했고, 다른 자들도 은
근히 얄밉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뭣하는 놈들이길래 우리가 누군 줄도 모르느냐?"
"그래 뭣들이냐 너희들은?"
갑송이가 버럭 고함을 쳐서 대꾸했다.
"허 망신일세. 다른 데루 가자니까."
"가만있어. 이놈들... 이 어른은 진사님이시고 이분은 유수의 아우님 되시고, 이분은 전 판
관의 자제분이시고..."
늘어놓는데 박대근이 말릴 틈도 없이 갑송이가 제 머리만한 돌을 들어 물가에 집어던졌
다. 풍덩하면서 높이 튀어오른 물벼락이 끝에 바짝 다가서서 외치던 사내의 전신을 씌워버
렸다. 도포는 물론 얼굴까지 어지럽게 물을 뒤집어쓴 사내는 뒤늦게 뒤로 물러섰다. 박대근
일행이 그 꼴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어 모두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린다. 갑송이도 너털대
면서,
"우리는 장사나 하러 댕기는 불상놈이다만 너희처럼 겉만 멀쩡하고 예의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다. 공연히 깊은 산중에서 호소할 데도 없이 망신당하지 말구 냉큼 없어져라. 내가 팔심
깨나 쓴다구 하는 사람이니 자꾸 건드리면 모두 물에다 처박질러줄 테야."
하고 윽박지르니 선비들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는데, 시비를 붙였던 자가 못내 분한 모양
이었다.
사회패들이 놀이판에서 쫓겨가며 저희끼리 공론들을 하는데, 과연 망신은 큰 망신이었다.
"당장 내려가 나졸들을 풀어 잡아들이랄까?"
"별 죄두 없이 잡아달랠 수야 없지."
"염려들 말게. 내가 장교들 몇 명을 데려다 놈들을 기찰해본 다음에 욕이나 좀 보이려네."
"처음에 말씨 부드럽게 나오던 자는 누구야. 그 정도라면 우리가 알듯한데."
"글세... 아마 양반은 아닌 듯 싶으이. 양반이라면 내가 알아봤겠지."
"이놈들 반상의 구별도 못하고 욕을 보였으니 혼을 내야겠어."
"엥이, 그나저나 오늘 시회는 망쳤네."
"어서 내려가서 장교 두엇과 나졸 몇만 보내라지."
그들은 산긴 어귀에 이리저리 흩어져 앉아서 사람을 보내어 부중의 장교가 오기를 기다렸
다. 누구의 말이라 거역하랴. 송도 세도가 자제들의 시회를 망친 상놈들을 혼찌검내기 위해
육모방망이를 든 나졸 서넛과 인솔한 장교가 나타났다. 장교 일행이 선비들의 앞장을 서서
시냈가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막상 그 장소에 당도하여 대면해보니 그 또한 아무리 상
인일지라도 송도부에서는 막볼 수 없는 배다인 댁의 박대근이 아닌가. 장교는 입장이 난처
했다.
"아니 난 또 뉘시라구. 박행수가 웬일요?"
"군관은 웬일이우?"
"내야 무뢰배들이 양반들 시회터를 침범했다구 그래서 이렇게 허겁지겁 달려오지 않았
소."
"날 잡아가우."
"에이 거참.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게 되었네. 저기서 양반들이 바라보구 있단 말요. 가
서 사과를 드리구 자리를 옮기시우."
"못하겠네..."
"글세 한양서 온 유수 아우의 친구들입니다. 자세가 여간만 심하질 않다우."
"유수를 누가 먹여 살리는데..."
"글세 송도 관아에서야 박생수를 깔보는 사람이 있겠소마는... 어찌하우."
"어서 꺼지지 않으면, 네놈부터 거꾸로 처박아주겠다."
갑송이가 술김에 팔뚝을 걷으면서 일어섰다. 박대근이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으나, 상대편
에서는 마침 거리가 없어 망설이던 참이라 안면 없는 갑송이가 불쑥 나대니까 얼싸 좋다며
달려들었다.
"허 이놈 봐라. 공무로 나선 관원에게 행역질을 하네. 네 이놈 한번 맛 좀 보아라."
이리 치고 저리 달려들 판국인데 박대근이는 제 고장 일일지라 막무가네로 싸움을 말린
다. 아무래도 송도서 말썽을 부릴 필요는 없었고 관아의 주목을 받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었
다. 장교가 아무리 날래다 한들 갑송이의 적수가 아니라서 휘둘려 잡히자마자 물속에 내던
지어져 급류에 미끄러지며 열댓 걸음이나 떠내려갔다. 갑송이가 두 팔을 벌리고 나졸들에게
로 달려드니 그들은 이미 눈으로 보았는지라 오금아 살려라고 달아났다. 이런 싸움은 드디
어 박대근이를 몹시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나졸 중의 기억력 좋은 자가 얼마 전에 황해감영
에서 전갈된 화적 일당의 화상과 그 특징 등을 생각해냈던 것이었다. 더구나 상인배들과 어
울렸다니 어림짐작으로 한번 들이쳐서 잡아다 족쳐보자는 의견을 올렸다. 관아에서는 부장
이 직접 나서서 병력을 대기시키고 그날 밤을 기다렸다.
놀이에서 돌아와 취흥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 박대근이와 갑송이는 사랑에서 다시 조촐한
주안상을 놓고 마주 앉아 술을 들고 있었다. 달이 휘영청하니 밝아서 나무 그림자가 문 위
에 찍혀 있었다. 밤이 이슥해졌는데 갑자기 때문 바깥에서 소란스런 기척이 들렸다. 박대근
이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중인데 하인들이 뛰어들어왔다.
"큰일났습니다. 지금 문 밖에 포도군사들이 겹겹으로 둘러싸고 문을 열랍니다."
낮의 일도 있는지라 박대근이는 별로 놀라지 않고서 일렀다.
"잠깐 지체하도록 하여라. 재촉하면 집에 앓는 아녀자가 있어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방을
옮기구 나서 군사를 들이겠다구 핑계를 대어라."
하고 나서 박대근이 갑송이를 재촉하여 돈 한 꿰미를 꾸려준 다음에 뒷담께로 데려갔다. 바
깥에 군졸들이 가진 횃불이 가득 차 있는 듯하였다.
"내 말대루 구월산에 가오. 길산이가 나올 때쯤 하여 내 한번 들르리다. 몸조심하시오."
"성님께 누를 끼치게 되어 정말 면목없습니다."
"선흥가 오면 만나구 가길 원했더니 아직 둘의 인연이 닿질 않은 모양이오. 자 어서..."
"길산이 꼭 부탁드립니다. 성님 나 가우."
갑송이는 담을 뛰어넘어갔다. 박대근이가 그제서야 바삐 대문 쪽으로 달려가 차분하게 물
었다.
"이 밤중에 웬일루 집을 수색하겠단 말요?"
"어서 문을 여시오. 화적을 숨겨놓구 있다는 발고가 들어왔소이다. 통부도 떨어졌으니 거
역하면 중벌을 받으리다."
박대근이 서슴지 않고 대문을 활짝 열었다. 전립에 철릭 입고 환도를 빼어든 부장이 살기
등등하여 들어서는데 뒤로부터 군졸이 몰려들어 집안 사방으로 흩어졌다.
"내실도 뒤지려오?"
"하는 수 없소."
"화적을 숨겨놓았다구 누가 고합디까?"
"낮에 당신과 들놀이를 하던 자 중에서 화적으로 수배된 자와 용모가 흡사한 자가 끼여
있었다 하오."
"응... 기정이 말이로군. 그애는 우리 차인 중의 하나요. 지금 당장 불러드리리까?"
"불러주시오."
"그러면 집안에서 군사들을 모두 거두시오."
"좋소이다."
그의 지시에 따라 사방으로 흩어졌던 자들이 모두 사랑 앞마당으로 되돌아 나왔다. 배대
인네는 온 식구가 간이 졸아들어서 모두들 벌벌 떨고 있었다.
"가서 기정이 좀 들어오라구 전해라."
박대근이가 은근히 지시하는데 하인이 부리나케 나갔다가 돌아오더니,
"시방 안 계시답니다. 친척에 초상이 나서 시골 갔다는데 사흘 뒤에난 돌아온답니다."
박대근이는 난처한 기색으로 부장의 소매를 잡았다.
"이거 헛걸음하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틀림없이 내가 데리구 있는 사람이니 사흘 뒤에 스
스로 자수하여 치죄를 받도록 이르지요. 그보다는 일부러 나오셨으니 저희 집에서 소찬이나
마 안주하여 술 한잔 하구 가십시오."
"아니되오. 범인을 포착하러 나온 관헌이 어찌 술을 마신단 말요. 그보다는 기정이란 자가
나타날 때까지 당신을 인질 잡아야 되겠소이다."
부장은 못내 뻣뻣하게 닥달하는 것이었다. 그때에 안체 쪽에서 계집 하인들의 어깨 너머
로 내다보고 있던 배대인의 막내딸 귀례가 사람들을 헤치고 나섰다.
"아무리 상인의 집이라 한들 사람 사는 집인데 법도가 없이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우리
집은 일찍이 송도에서 이렇듯 수모를 받아본 적이 없거늘, 부장은 어너 부에 계시길래 이리
자세가 심하시오."
목소리가 또렷하고 꾸짖는 어조에 힘이 있었다. 부장이 고개를 들어 보니 양반댁 규수에
못지않도록 기품이 있고, 영리해 뵈는 처녀였다.
"아녀자가 나설 일이 아니니 처자는 안으로 들어가오."
"얼핏 들으니 양반들게 실수한 우리 집 차인의 일로 오신 모양이군요. 그런 일이라면 낮
에 사람 한분을 보내어도 이쪽에서 예의를 갖추어 사과드리고 관가의 벌을 기다리게 할 터
인데 무슨 역적의 집이라고 아닌 밤중에 군사를 풀고 횃불을 밝히고 집뒤짐을 하니 이것이
유수나리의 지시란 말입니까? 사또께서 부임하실 적에 비용을 우리네 상단에서 댔고, 지금
도 적지 않은 봉물을 한양으로 보내드리고 있는 줄 압니다. 아무리 관장과 백성의 우의라지
만 인정이 있는 터인데 이런 의리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내 아버님을 대신하여 사또께 하
소하여 만약 지시가 없었다면, 부장께서 경을 치도록 할 테야요."
"허허, 그 처자 말씨 한번 고약스럽게 하는구나."
귀례의 세찬 기세에 기가 죽은 부장은 그렇게 입속으로 중얼거리고서 박대근이를 향하여
말했다.
"화적이 숨어 있다는 적경을 받고 급한 김에 이렇게 되었으니, 양해하시오. 그자가 돌아오
는 즉시 관가에 보내어 판결을 받도록 해주시고, 오늘 일은 피차에 없었던 일루 합시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바장이 군사들을 휘몰고 나가 버렸다. 박대근이는 기왕에 혼사에 관한 얘기도 있었고, 그
성미도 잘 아는지라 미소를 머금고 귀례를 바라보았다. 귀례는 돌아서서 안채로 들어가며
들으라는 듯이 종알거렸다.
"까짓 하리 하나 구슬리지 못하면서 무슨 상단의 행수 노릇을 한다구 그럴까?"
"사내들 일에 아낙네도 아닌 미혼 처자가 불쑥 나선 게 장한 일인 줄 아는 모양이네."
"요즈음 시정의 친구를 사귐이, 마치 손을 뒤집어 구름이요, 엎으면 비가 되는 경박한 세
상인데 너무 친구만 좋아하지 마셔요."
하고는 안채로 달아나버리는 귀례를 향하여 박대근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배대인이 좀 들어
오라는 지시가 있어 박대근이도 안사랑으로 들어갔다. 배대인은 박대근에게가 아니라 부장
의 무례한 짓에 대하여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대근이가 하리 따의를 상대할 일이
아니나 양반의 앙심은 귀찮은 일이니 자기가 직접 찾아가 사과하겠다고 배대인을 가라앉혔
다. 박대근이 제 방에 돌아와 누웠는데 새삼 막내딸 귀례의 얼굴이 눈앞에 섬삼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명년 봄에 귀례에게 장가들 일을 작정하고 있었다.
2
갑송이는 한밤중에 배대인네 집에서 뛰쳐나오자 내처 밤길을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벽란나루를 건너 해주로 향하고 싶었지만, 박대근이의 만류도 있고 하여 역시 언전한 길을
택하기로 하였다. 일단 길을 떠나고 나니까 새삼스럽게 재인말에 대한 걱정이 생겨나는 것
이었다. 금천 가까이 당도하자 어느결에 날이 새는 중이었다. 갑송이는 봉놋방에 들어 아침
을 먹은 뒤 해가 높다랗게 뜨도록까지 눈을 붙였다.
평산서 늦게 중화 하고서 밤늦어 금교역말에 들어갔다. 때마침 첫눈이 팔팔 흩날려오고
있었다. 길산이는 옥에 갇히고 재인말을 쑥밭이 된데다 혼자서 눈 내리는 추겨울 밤길을 걷
자니 뚝뚝한 갑송이의 가슴에도 썰렁한 수심이 가득 차는 것이었다. 서흥까지 밤새껏 걷고
싶었으나 배도 출출하고 더욱 날씨 탓인지 목도 컬컬하여 마방이 줄지어 선 주막거리를 찾
아들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금교역에는 역졸이나 역마가 몇 있었을 뿐이고, 사람의 자취가
끊겨 한산하였다. 그는 주막으로 들어섰다. 술청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 좀 보세! 여기 아무도 없나?"
미닫이가 열리며 곰방대를 문 사십줄의 주모가 빼꼼히 내다보았다.
"장사하시게."
"올라오슈. 날씨두 춘데."
"거 방이 뜨뜻하우?"
"아랫목이 절절 끓어."
"그럼 염체불구하고 구들목 신세 좀 집시다."
갑송이는 주모가 앉았는 방으로 서슴지 않고 들어섰다.
"술 좀 주오."
"밥은 안 드시게?"
"밥 샛길 틈이 있어야지. 술 반 말에 닭이나 두어 마리 삶아 내오우."
주모는 입에 곰방대를 문 채로 밖을 향해 중노미를 불렀다.
"천둥아! 이애 천둥아. 아니 이 녀석이 어딜 가서 자빠졌어?"
주모는 곰방대를 뽑아내고 다시 불러본 다음에 몸소 술상을 보러 나가려구 투덜대며 일어
났다. 그때에 아이 소리 듣기에는 나이가 많아 뵈는 중노미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아이구 큰일났수. 좀 나와봐요."
"왜 이리 수선을 떨구 지랄이람."
"저 뒤... 뒷방에서 사, 사람이 죽어요."
"뭐라구!"
"뒷방에 들어온 선비 있잖아요. 목을 맬려나 보우."
"이 녀석아 그러면 이리루 달려올 게 아니라 쫓아들어가 말릴 일이지. 아유 큰일났네."
"방문이 안으루 잠겼습니다."
아랫목에서 꺼벅거리고 앉았던 갑송이도 얼결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세 사람은 신발을
꿸 사이도 없이 주막 뒤꼍으로 돌아갔다. 갑송이는 중노미가 손짓하는 방 앞으로 가서 문짝
을 흔들었다. 문고리째로 빠져나오면서 퇴창문이 벌컥 열렸다. 셋의 고개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목에다 옷고름을 휘감은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갑송이는 뛰어 들어가 손비의 목
에 감긴 옷고름을 풀어주었다.
"죽지는 않았구먼."
"에그 하필이면 우리 주막에서 이런 짓을 할 게 뭐람. 까닭없는 송장 치구 그 살은 누가
맞으라구."
"떠들지 말구 어서 냉수나 한바가지 떠오시게."
사내는 얼굴이 새파랗게 되었으나 맥이 완전히 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냉수를 사내의 얼굴에 뿜어주고 손발을 주무르니 차차 화색이 돌기 시작했고, 잠시 후에
는 한숨을 토하면서 눈을 떴다. 사내는 제 목을 만져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모가 성깔을
올리면서 삿대질을 했다.
"아니 이건 누굴 찬밥 멕일라구 이러는 거야. 뒈질려면 곱게 길에 나가 논두렁이나 베든
지 할 것이지."
"아 소란 피우지 마슈. 가서 술이나 빨랑 데워와요."
"나 참 길가에서 술 팔고 먹구 살려니 별꼴이 다 많어."
주모와 중노미가 사라진 뒤에 방안에는 갑송이와 사내만이 남았다. 갑송이는 그가 겸연쩍
어할 것 같아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고 덤덤히 앉았는데, 기력을 읽고 누어 있던 사내가 인
사를 차리려는 지 알어나 앉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갑송이가 그를 만류했다.
"아아 누워 계슈. 번거로이 인사를 차릴 필요 없소이다."
사내는 다시 뒤로 누웠다.
"누구신지 모르오나 쓸데없는 선행을 하셨소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또 한번 겪게 되
었소."
"에이 여보. 보아하니 우리네 같은 천출은 아닐 듯싶은데 멀쩡한 사람이 목을 맨단 말요.
참말 죽고 싶다면 내일 내가 저 산속에 데려가서 목을 쳐드리리다. 그 대신 수고비는 줘야
하우."
갑송이가 비아냥거리며 사내의 비위를 긁었건만, 그는 조용하게 누워 있었다.
주모가 그 방으로 술상을 날라왔다.
"거 고기두 놓지만, 국물도 뜨뜻하게 한사발 갖다 주시게."
갑송이는 날라온 국물을 사내의 앞에 밀어놓고,
"어찌 정신이 좀 들었으면 이거나 좀 드시우."
사내는 그대로 누워 있었으나 갑송이가 억지로 일으켜 벽에 기대게 하였다. 그는 갑송이
가 술을 연달아 들이켜는 양을 구경만 하더니 드디어 제 잔을 내밀었다.
"나두 한잔 주시오."
갑송이와 사내는 마주 앉아서 묵묵히 술잔을 주고받았다. 갑송이가 물었다.
"어디루 가시는 길이오?"
"봉산으루 갑니다."
"게가 댁이시우?"
"그렇소."
"보아하니 양반이신 모양인데..."
"선고께서는 작은 벼슬을 하셨으나 내 위인이 우매하여 아직 출신하지 못한 학생이올시
다."
"예끼 여보. 우리 같은 불상놈두 이렇게 눈을 멀정히 뜨구 살아가는데, 댁네 같은 양반이
이런 추태를 보인단 말요?"
사내는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부끄러워서 뭐라구 발명할 말두 없소이다."
"나는 지나던 나그네이매 댁에게 사연을 묻는 것도 우습지마는 또 혹시 압니까. 우리 같
은 상놈의 말두 쓰일 데가 있을지..."
"자꾸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내야 외양이 이렇달 뿐이지 실은 농사를 짓고 자리를 자
고 나무를 해서 살아가니 양반이랄 것도 없소이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길래?"
"한양서 오는 길입니다."
하고 나서 사내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리쉬었다.
"한양서 죽어버릴 것을...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나는 식년시를 다섯 번, 별시를 세 번이나
보았지만 그때마다 보기 좋게 낙방을 했습니다. 과거를 보느라고 젊음을 허송세월하였지요.
이제 나이 사십줄에 접어들어 가산은 기울 대로 기울고 훈장 노릇으로 코흘리개들의 설경료
나 받아 사는 처지에 돈 삼백 냥을 몽땅 날리고 말았소그려. 그 삼백 냥이란 우리 집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전답과 가옥을 담보로 잡혀 빌린 돈이지요."
"그 나이에 점잖으신 양반 나리가 투전이라두 했단 말이오?"
"차라리 투전이나 했다면 운수려니 셈치구 생각이나 않게요. 그만 간교한 도적에게 속아
모두 털리구 말았지요.구사의 길을 트려다가 말이우. 어디 작은 직함이라두 얻어걸릴 줄 알
았지요."
"평생을 글을 읽으셨단 분이 과거를 보시던가 해야지 돈냥으로 벼슬을 얻으려 하우."
갑송이의 빈정대는 말에 사내는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모르는 말이오. 요즈음 과장은 순전히 아수라들의 저자나 같지요, 고관바가의 자제가 아
니고는 과거는커녕 글귀 하나 제대로 적어낼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소."
"제길 그따위 글을 읽어 뭘 하우. 사나이는 논 매고 밭을 갈든지 나무를 해서 땀흘려 먹
구 살면 되는 게지. 그래 벼슬자리 하나 못 얻어 자진할 사내라면 아예 내가 목을 쳐드리겠
다니까. 환도가 없으니 이집 부엌에 가서 식칼이라도 빌려올까?"
"참으로 부끄러우나 지당한 말이오. 허나 저간의 내 행적을 모두 얘기하면 사정은 족히
이해하리다."
봉산 선비는 먼저 과장의 얘기를 꺼내었다. 식년시 때가 다가오면 몇 달 전부터 없는 살
림에 요리조리 경제하여 우선 여비를 마련한다. 그리고 수년간 읽은 글들을 다시 총정리하
고 조상의 사당에 기도를 드리고 나서, 몇 년간 고생해온 아내에게 금의환향을 다짐하고 길
을 떠난다. 양반의 신분으로 환로에 나가지 못하면, 상놈이 받는 것보다 훨씬 큰 수모를 견
디며 살아야 하고, 이제는 상민들도 땅이 많거나 돈이 많으면 마음대로 양반을 부릴 수가
있는 세상이었다. 남의 머슴을 사는 양반들도 있는 판이었다.
어쨌든 이런 자칭 선비들이 식년시 때마다 전국 각지에서 한양을 바라고 몰려드는데 적을
때에는 팔구만이요, 낳을 적에는 십오만이 넘었었다. 한양 성내 사람들보다도 과거 보러 오
는 자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객주 주막마다 시제라든가 이번 과거의 동향에 대한 뒷소문으
로 가득 차 있다. 이번 장원은 어느 판서의 자제라는 둥, 승지의 작은사위라는 둥 글귀는 벌
써 지어져 시관에게 가 있다는 둥의 별의별 소문이 들끓는다. 시골 향족의 자제들은 하인들
을 서넛씩 데리고 와서 전 날 밤부터 과장의 놓은 자리를 잡아 교대로 맡아 지키게 한다.
또는 글씨 잘 쓰는 자를 데리고 와서 과장에 동행하거나, 시깨나 읊는 자들로 글귀의 작을
채우기도 한다. 한양 불량배들은 이러한 선비들의 행각을 잘 알기 때문에 자리다툼과 시고
내는 일과 대필하는 일등에 관한 거래를 터주러 각 객주집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돈냥깨나
있는 자들은 이들을 고용하는데, 대개는 과장에서 각 선비들이 고용한 불량배들이 서로 자
리타툼으로 때리고 차는 소동이 비일비재하였다.
"시고를 낼 때에 시관 가까이 있는 자가 아니면 한번 읽히게 할 수도 없소이다. 그 많은
것을 어지 다 보겠소. 그저 성명이나 확인하고 첫귀를 읽을까 말까지요. 또한 알려진 가문이
나 향족의 자제들은 제 이름을 미리 써서 시관에게 많은 선물과 함께 넣어두지요. 이십여
년을 과거로 허송세월했는데 집안은 기울고 조상에 뵐 면목돠 없어, 그냥 직함이나 따서 가
족들과 일가들게 체면이나 내세울 생각을 했었지요. 우리 선친과는 동문수학인 어른이 교리
벼슬을 하고 계시는데 그이를 찾아 뵙고 부탁을 드려보리라 작정했소. 그래서 아무리 아는
분이지만 돈은 있어야겠기에 내 전답과 가옥을 담보로 봉산 자모전가에서 돈을 삼백 냥이나
빌렸지요. 그 돈으로 장사나 했더라면 큰 이를 보았을 것을... 돈을 마바리에 싣고 한양성을
찾아들었는데 교리 댁에 가서 청지기께 허통을 넣으니 그 어른이 저를 만나줘야 말이죠. 청
지기가 말하길 우선 백 냥만 자기를 통해 넣으라는 겁니다. 오십 냥으로는 진귀한 당화를
사서 나리마님께 들여놓고 나머지 오십 냥으로는 산삼을 사다 올리겠다구 그럽디다. 하도
고마워서 나중에 직함이 떨어지면 꼭 사례를 하마 다짐하며 돈은 내주었지요. 그자가 사흘
뒤에 다시 찾아와 당신 직함이 결정되었다며 교리 어른 혼자 하시는 게 아니라 다른 교리가
또한 계시고 판서도 계시니 각각 오십 냥씩 일백오십 냥만 넣으면 모두 깨끗이 끝난다는 것
입니다. 두말 없이 내주었지요. 한 닷새 지나서 그자가 술과 고기를 사가지고 와 내게 술을
권하면서 축하를 해주는 거요. 벼슬자리가 생겼다는 얘기지요. 그러니 관복도 지어야 하고
인사도 다니려면 선사품을 준비해야 하므로 돈이 좀 필요할 거라는 말에 모두 일임하겠다며
돈 오십 냥을 선뜻 내주었지요. 그래서 내가 전답 가옥을 잡혀 마련했던 돈 삼백 냥은 모두
날아가 버렸습니다. 헌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 청지기 사내가 나타나질 않습디다. 나중에 애
가 달고 의심이 부적 생겨서 주위에 물어보니 모두들 조롱하여 말하기를 대가에 겸인 청지
기가 하나둘이 아닌즉 어느 자에게 당했는지 알게 뭐냐는 것입니다. 공연히 양반 댁에 와서
있지도 않은 돈 떼였다고 행역질 말고 다음에 조심하는 게 상수라는 것입니다."
"거참 한양놈들이 순전히 날강도 놈들이군."
갑송이가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그래 삼백 냥을 바쳐 벼슬자리가 나오면 그 돈 삼백 냥을 국록으로 갚는답디까. 아니지,
모두들 우리네 같은 상놈들의 목통을 조르고 비틀어서 우려내시겠지. 그깐 생각하면서 글은
뭣 땜에들 읽는지 모르겠네."
"혼자서 지난 세월을 생각해보고 나니 부끄럽고 욕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디다. 고향에
가봤자 남은 땅도 없고 집마저 쫓겨나게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처자를 대하겠소. 그래서
자진할 생각을 먹었지요."
갑송이가 껄걸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일이 있소이다. 내 나리께 돈을 마련할 방도를 일러드리겠수."
"뭔데요?"
"같이 구월산으루 들어갑시다."
"구월산엘?"
"그렇소, 구월산에 들어가면 댁네 같은 글 잘하는 사람이 있어야 될듯하우."
갑송이가 말했지만 선비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구월산에 들어가 무엇을 하우."
"녹림당이 되자는 게요."
"그렇다면 명화적이 되잔 말이오?"
갑송이가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과거로 허송세월가고 가산을 날려 자진해 죽는 일보다는, 의로운 녹림당으로 그릇된 재
물을 많이 가진 자에게서 배앗고, 포악한 관원을 징계하는 일이 더욱 낫지 않소."
선비는 별로 놀라지는 않았으나 잠깐 마음이 내키는 듯한 눈치를 보였다. 실상 그로서는
막다른 길이었고, 이십여 년이나 억눌러온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우직한 갑송이의 소견에도
이십여 년이나 하루도 빼지 않고 글을 읽은 선비라면, 비록 산채의 두령인 마감동이가 글도
알고 꾀도 있지만, 선비 족이 훨씬 일을 도모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선비가
상 위로 머리를 가까이하면서 되물었다.
"그래 힘도 없고, 병장기 하나 다룰 줄 모르는 우리 같은 책상물림을 데려다 뭣에다 쓴단
말요?"
"힘 따위야 나 혼자서도 이 집 기둥뿌리를 뽑아 던질 수가 있소이다. 댁네의 궁량을 빌리
잔 얘기우."
선비는 혼자 중얼거렸다.
"위로 임금에 충성하고 아래로 백성을 보살피는 성현의 가르침에 어긋나서 도적이 된
다..."
"그거 다 책에만 있는 소리지, 실행이 없는 세상이우. 오히려 우릴 가르쳐서 그런 일을 행
하느니만 같지 못하겠수. 내키지 않으면 그만두시오."
"우선 생각해볼 여유를 주시겠소? 집에 노모도 계시고 처자가 딸렸으니 가볍게 결정할 일
이 아닌 듯하오."
갑송이가 낮고 강한 어조로 다짐을 했다.
"우리가 나눈 얘기를 혼자서만 새기시오. 아무래두 봉산까지는 함께 가야 할 터이니..."
"여부가 있겠소. 당신이 나를 살렸는데, 내 어찌 그런 의리를 배신 할 수가 있겠소."
"우리 작당하기로 결정이 되면 한잔 다시 나누기루 합시다."
"내 만약 댁을 따라 구월산으루 들어간다면 가족을 수습할 수가 있겠소?"
"염려 마오. 모두 안돈시켜드리리다."
갑송이는 선비를 혼자 남겨두고 뒷방에서 나왔다. 그는 주모를 불러 선비와 자기의 숙식
비를 함께 치렀다.
손님이 없던 끝이라 주모는 희색이 가득하여 접대하는 뜻으로 술 한상을 더 차려주었다.
이튿날 아침에 갑송이가 뒷방으로 건너가니 선비는 벌써 일어나 의관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갑송이는 퇴창문을 벌컥 열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어찌하기루 작심했소?"
"함께 가십시다."
갑송이는 빙긋 웃었고 선비는 어제처럼 초췌한 몰골이 아니라 점잖고 침착하게 미소를 지
었다.
"재주가 없으나마 도와드리겠소. 허명과 썩은 생각에 잡혔던 나는 어제로 죽은 것이고, 기
왕에 그릇된 세상이니 그릇된 대로 이름이나 남기려오. 세를 키워서 팔도를 걸치는 녹림당
으루 만듭시다. 나 김기라하오."
"이갑송이우. 봉산 거쳐서 구월산으루 가십시다."
이갑송과 김기는 서흥과 검수역을 거쳐서 봉산에 닿았다. 갑송이가 주장하여 김기만이 제
집에 들러서 그 밤을 지내고 이튿날 식전에 지진나루를 건너 안악으로 향하기로 의논이 되
었다. 김기는 집에 들러서 우선 쌀 섬이라도 들여놓고, 가족들에게는 평양으로 장사를 떠난
다며 안심을 시켰다.
이튿날 걸음을 재촉해서인지 갑송이와 김기는 아직 해가 높다랄 때에 배고개를 넘어 고심
산을 지나 실토봉으로 올랐다. 투구봉 기슭을 돌아 구월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아사봉 아래
편의 된목이골에 이르니 이미 사방이 컴컴해져 있었다. 된목이골의 분지에는 불빛이 몇 점
보였다. 두 사람이 앞으로 더욱 나가려는데 문득 번을 서는 자의 군호 소리와 함께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황급히 바위 뒤에 몸을 숨겼고, 갑송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 이갑송이란 사람이다. 느이들 마두령의 성님뻘 되는 사람이니 활을 거두어라."
어둠속에서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앞으로 나오시오."
그들이 앞으로 걸어나가자 일시에 사방에서 창과 칼을 겨눈 자가 다섯이나 뛰쳐나와 두
사람의 앞뒤로 둘러쌌다. 어둠속에서 창을 비껴든 사람이 마주 달려나왔다.
"무슨 일이냐?"
"예, 부두령이십니까? 누가 두령님을 뵈러 오셨습니다."
"누군데..."
부두령이라니 전에 박대근이께 창으로 대어들던 안주의 오만석이가 틀림없었다. 평안진군
의 초장이었던 사내다. 갑송이가 얼른 손을 잡으면서,
"나 이갑송일세. 만석이 아닌가?"
하노라니 그쪽에서도 알아보고 반긴다.
"아이구 성님이 웬일요. 소문은 들었습니다. 자 어서 들어가십시다."
오만석이가 그들을 안내하여 산채로 들어가는데 전보다 더욱 형세가 커진 것이 초가가 세
채이더니 이제는 여섯 채로 늘어나 있었고, 졸개들도 군율이 엄정해 보였다. 그들이 공회소
로 쓰이는 초가에 다가들 때 벌써 전갈을 받은 마감동이가 툇마루로 나왔다. 갑송이가 가까
이 가자 감동이는 맨발로 뛰어내려왔다.
"성님이 왠일이야. 어서 오우."
"아우 잘 있었나?"
"소문은 들었수. 길산이 성니밍 해주에 갇혔다며. 대근이 성님께서 무슨 연락을 주시리라
믿구 좀이 쑤시는 걸 참구 있었다오."
"다 나오게 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 말어."
그들은 모두 들어가 자리에 앉았고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갑송이가 말했다.
"나두 녹림당으로 좀 끼워주겠나?"
"여부가 있수. 성님이 오셨으니 나는 두령자리를 물리겠수."
"아냐 그럴 것 없네. 나야 식객으로 밥이나 먹여준다면 내 힘써 도와주겠네."
그들은 한참이나 두령이 되라거니 아니라거니 옥신각신하다가 김기의 말에 가벼운 다툼을
그쳤다. 김기가 말하기를,
"규율이 있는 곳에는 서열이 있게 마련이오만, 그것이 귀찮다면 제일 제이 두령을 각각
맡으시고 그때 그때마다 의논하여 일을 정하면 될 것이오."
"내가 내일은 재인말루 내려갔다 오겠네. 그전에 길사이 보모님을 옥에서 구원해낼 일을
짜야겠어."
"아이들 데리구 문화 광아를 들이칩시다."
라고 오만석이가 말했고, 마감동이는 고개를 저었다.
"관아를 들이치면 세상의 이목을 모으게 되니 별루 놓지않아. 또한 서루간에 죽고 다치는
자가 많이 나올 테니 우리가 손해구... 속임수로 빼내어와야지."
다시 김기가 말했다.
"내일 이두령이 재인말에 들르실 제 감옥 내막을 대강 알아오시우. 그리고 나서 의논해두
늦지는 않겠소. 사실 시골 군의 옥이래야 두어칸도 못 되는 토옥인데 사람을 많이 풀어서
섣불리 형세나 드러낼 팰요는 없겠지요."
"자 날씨두 추운데 먼길을 오셨으니, 술이나 실컷 마십시다."
감동이네는 그동안에 평안도, 강원도를 넘나들며 화적질을 거듭하여 재물이 풍족했고 이
제는 입당한 졸개들도 수가 많은데다 만석이와 감동이가 조련을 시켜서 제법 병장기들도 익
숙하게 다룬다는 것이었다. 여러 얘기가 오가던 중에 갑송이가 선비 김기와 만나게 된 얘기
를 꺼내니 마감동이는 선뜻 돈을 봉산으로 보내어 잃은 땅과 가옥을 되찾아 감기의 가족들
이 걱정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갑송이는 이튿날 산채에서 하루 종일 머물렀다가, 연락시킬 졸개 한 명을 데리고 광대산
줄기를 따라 재인말로 내려갔다. 큰잿말에는 빈집이 많이 있었고 눈이 덮인 밭고랑에는 강
아지마저 뛰놀지 않았다. 갑송이는 걸음을 재촉하여 우선 큰돌네 집으로 향하였다. 뜨락에
들어서서 헛기침을 했더니 부엌에서 뭔가 부스럭대던 큰돌의 처다 기웃이 내다 보았다.
"아니, 이게 누구유?"
"형수씨, 안녕하슈. 큰돌 성님 어디 갔나요?"
하는데 방문이 열리면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군가? 나 여깄네."
"웬일이오. 어디 아프오?"
큰돌의 아내가 말하였다.
"글세 무슨 병인지 온몸이 퉁퉁 붓고 옴짝달싹 못하네요."
갑송이는 윗목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을이 어째 이 모양이 되었소. 겨울인데 출행들 나갔을 리두 없구."
"출행이 다 뭔가. 관에서 이번 겨울 안으로 우리를 재인말서 모두 쫓아낸다네. 미리 떠난
사람들이 많다네."
"총대 어른은 안녕허시고..."
"안녕이 다 뭔가. 돌아가셨네. 그 묘옥이란 아이가 여기서 떠나던 날 집에 불을 지르시고
는..."
갑송이가 차차 마음이 격해하면서 다급하게 물었다.
"우리 집엔 별일 없지요?"
"자네 노모께선 요새 고생이 말이 아니라네. 낙상을 하셨는지 몸을 못 쓰신다네."
"이젠 예전의 재인말이 아니군."
"다 빼앗겨버린거나 마찬가지야. 여기는 명젼 봄부터 둔정으로 몰수 된다네."
"좋다. 내 눈을 멀쩡히 뜨고서 이대로 물러가지는 않으리라. 문화현감을 쳐죽이겠어."
갑송이가 일어섰다.
"좌우간 며칠만 기다리우, 모두들 이사를 시켜놓고 일을 벌여야지."
갑소이는 우선 제 집에 들렀다. 마당에는 치우지 않은 눈들이 그대로 지저분하게 녹아 있
고 퇴락한 울타리가 군데군데 뚫어져 있었다. 갑송이는 노모가 계신 부엌에 딸린 안방의 퇴
창 밖에서 기침을 몇번 해보았다.
"게 누구요?"
하는 말소리가 이미 기력이 쇠잔하여 집안의 모습처럼 썰렁하게 여겨졌다. 갑송이는 눈시울
이 뜨거워졌다.
"누구시우?"
끙하며 일어나 앉는 소리와 함께 창이 밖으로 열렸다.
"어머니, 접니다. 갑송이요."
"응, 인제 오냐?"
어머니는 마치 마실 나갔다가 돌아노는 때처럼 갑송이의 귀가를 담담하게 맞았다. 그녀
자신이 예전에는 연희를 돌아다니던 굿중패였기 때문이었고, 재인말의 흔한 관습이기도 하
였으며 무엇보다고 그들은 길 위에 서 있는 생활을 잘 알아왔기 때문이었다.
"관에서 시끄럽게 굴더라. 길산이하구 어울린 게 너 아니냐구 말이다. 끝까지 네가 북관
쪽으로 올라갔다구 발뺌은 해두었다만."
"어머니 고생되시죠. 이제 재인말을 떠납시다."
내야 재인말이든 한양이든, 저어기 되 땅에서라두 못 살 거 있겠냐. 아무 데나 좋다. 산
있고 물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살 수 있어."
"어머니 그러면 대강 짐을 꾸려두십시다."
갑송이는 기동이 불편한 어머니가 일러주는 대로 초라한 세간살이 중에서 정 버리기 아까
운 물건들을 추려 싸놓았다. 잠시 앉았노라니 문화 고을에서 정탐하던 졸개가 돌아왔다.
"다 알아봤습니다. 장두령께서 처형당했다는 소문이 있기 전에는 파옥을 두려워하여 경계
가 엄중했답니다. 그렇지만 요즈음은 또 재인말이 아직 정돈되지 않아 광대들이 소란을 부
릴까 걱정하는 모양입니다. 아마 조금이라두 이상한 기미가 있으면 군졸을 풀어 마을을 아
예 쑥밭을 만들 것 같습니다."
"너는 이 길루 마두령에게루 가서 낱낱이 아뢰고, 나는 이사시킬 준비를 서두르겠노라 일
러라. 내일까지 모두 이사를 시킨 다음에 모레쯤에 들이칠란다."
"관아루 쳐들어가게요?"
"아예 불을 확 싸질러버려야지."
"이번엔 큰 판을 치르겠네. 벌써부터 팔뚝이 욱신거리네요."
졸개는 그 길로 된목이골로 돌아갔다. 갑송이가 제 동무들을 찾아다니는데 이미 많은 광
대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뒤라 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결단을 못 내리고
정든 땅을 버릴 수가 없어 주저앉아 있는 중이었다. 갑송이가 이미 이사할 곳을 정해두었다
고 말을 꺼내면서, 떠나기 전에 문화현감의 버릇을 고치자 하니 모두들 찬성해 왔다.
다시 그는 까막내 갖바치 박서방네로 찾아깄다. 길산이의 누이와 박서방 외에도 여태껏
읍내를 드나들며 옥바라지를 해온 봉순이가 함께 있었다. 봉순이는 그동안에 어느덧 계집아
이 티를 벗고 이제는 쳐녀꼴이 완연하여 갑송이가 막말을 주고받기에도 거북스러웠다. 갑송
이가 들어서니 봉순이는 부엌으로 달아났고, 건너편 토방에서 가죽을 꿰매던 박서방이 뛰어
나왔다. 봉순이는 툇마루에 와서 귀를 기울이고 섰고 박서방과 갑송이와 길산이 누이 셋이
서 둘러앉아 해주 소문을 주고받았다.
"여기서는 길산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자아했었네."
"어머니나 아버지두 그 얘기는 숨겨서 잘 몰라요. 어제두 길산이가 놓여나서 돌아왔냐구
몇번이나 물으시더래요."
박서방과 길산의 누이가 말했다. 갑송이가 물었다.
"옥리는 몇 명이나 됩니까?"
"뭐, 둘씩 번을 들어 교대루 지키는갑데. 허나 관아 안에 있으니 파옥하려면 싸움을 벌여야
할걸."
"까짓 놈에 썩은 군졸들이야 나 혼자서라두 문제없습니다. 그보다는 일단 까막내를 떠납
시다. 얼마 동안 구월산에 가 있다가 마땅한 곳이 생기면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살기루 하구
말이우."
"글세, 파옥을 정 해낸다면 우리가 예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네."
"길산 오빠는 감영 옥에서 나오게 되나요?"
봉순이가 얼굴은 내밀지 않고서 밖에서 물었으며 갑송이도 내외 말투 비슷이 대답해주었
다.
"이번 겨울 안으루 나오게 된다지."
"몸은 건강하데나요?"
"그전보다 더 팔팔하다우."
봉순이가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억지로 묻는 것 같았다.
"묘옥이란 여자가 해주로 떠났다는데 옥에서 만났대나요?"
"그런 얘기는 못 들었다구..."
봉순이는 길산이 묘옥을 좋아했고 묘옥이도 길산이를 제 서방으로 여기고 있음을 누구보
다도 잘 알고 있었다. 봉순이는 장충이아ㅗ 안무당이 자기와 길산이 두 사람을 이미 성혼시
키려고 작정했다는 눈치도 알았다. 어릴적에 무당의 신딸로 들어와서 철없이 자라나면서 길
산이를 사내로 생각하지 못했던 봉순이였으나 어느결엔가 길산이를 그리운 남자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봉순이는 눈물이 글썽글썽해가지고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마감동이와 오만석이가 졸개들 십여 명을 데리고 재인말에 내려왔는데, 김기도 뒤따라 들
어섰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재인말 사람들의 은밀한 이사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간단한 세
간들을 싸짊어지고 구월산 아사봉의 된목이골 산채로 들어갔다. 반나마 어디론가 흩어져 버
린데다, 구월산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가족들이 있어서, 한 열댓집 정도가 된목이골로 들어
간 것이다. 나머지 광대 식구들은 바닷가의 광대들이 모여 사는 강령이나 옹진 등지로 떠나
갔다. 하루 만에 재인말은 인적이 끊어지고 빈집만이 남았다.
갑송이와 김기를 비롯하여 감동이, 만석이 등은 연희 나갈 때 계회장으로 쓰이던 마당에
모여 있었다. 김기는 도포에 통영갓을 쓰고 옥관자 달고 녹피혜를 신었으니, 누가 보기에도
한양서 유람 나온 높은 관리쯤으로 여겨질 만했다. 그에게는 졸개 둘을 구종배로 붙였다. 나
머지 사람들은 모두 봇짐을 하나씩 짊어지고 머리에는 패랭이를 썼으니, 보부상 패거리의
행색이었다. 장사꾼으로 변장한 갑송이 등이 먼저 신천서 문화로 나가는 큰 행길로 나아갔
고, 김기는 뒤미처서 말에 올라 거드럭거리며 따라갔다. 문화읍에 도착하여 김기는 객사를
찾아 갔다. 수직하는 자에게 허통을 넣자 이르니, 그들은 어리벙벙하는 것이었다. 시중들던
졸개 하나가 김기의 눈짓에 따라 호통을 쳤다.
"이놈들, 이분이 누군 줄 아느냐. 영의정 김수흥 대감의 사촌 되시는 분이다. 어서 수령께
현신하라 일러라!"
누구의 말이라 거역을 하랴. 먼저 이방이 달려나와 문안을 드렸고, 잠시 후에 관복을 단정
히 차려 입은 문화군수가 와서 현신하였다.
"원로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저희 동헌으루 들어가시지요."
"아니오, 내는 객사에 있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외다. 공무가 아니라 그저 갑ㄱ바하여
바람이나 쐬려고 유람을 나온 것이니, 사또는 너무 괘념하지 마오."
"이곳은 시골이라 사람 구경을 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손님이 오시면 제가 친히 모
시곤 합니다. 어서 저와 같이 드시지요."
김기는 그들이 관아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고 있었고, 그것이 당초의 계획인지라 더 이상
버티지 않고 사또를 따라 들어갔다. 좌정하여 조정 얘기며 서인이며 남인 쪽의 지면 있다는
인사들에 관하여 얘기하는데, 영상이 서인이며 또한 그들 일파가 득세하는 세월임을 알고
있는 수령은 연신 복제의 기년설이 타당함을 역설하였다. 몇 년간이나 계속되어온 조정의
예송을 관리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깁기는 능숙하게 기년설의 정당한 이론
적 근거를 들어가며 설명을 해주었다.
"자리를 안으로 옮기시지요. 부끄러우나마 작은 자리를 장만하였습니다."
사또가 은근히 청하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떡벌어지게 차려놓은 다담상 주위에 관기
서넛이 앉았고, 악공도 뒷전에 앉아 음률을 잡히고 있었다. 술잔이 오고가는 중에 차차 취흥
이 무르익어 사또가 먼저 말하기를,
"보아하니 거기나 나나 연수도 비슷한 듯하고, 또한 초시를 치른 해도 같으니 막역지우로
지냅시다."
하였고, 김기도 서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압다, 그러지. 자네 내게 잘 보여야 내직을 얻어 하지. 내 한양 올라가면 아저씨께 말씀
드려서 적당한 자리를 보아주겠네."
"황공합니다."
"이 사람, 막역지우로 하랬다가 어찌 말도 못 놓고 그리 설설 기는가?"
김기가 방자하게 상대방을 우롱하였으나 지방 수령은 조정의 권위있는 자에 줄이 있는 이
낯선 손님에게 그의 관운이 걸려 있는지라, 아첨이 실로 노골적이었다. 밤이 이슥하여 다담
상은 다시 바뀌고 기생들의 춤과 소리도 여러 차례 돌아갔는데, 문득 마당에 사람들의 기척
이 들려왔다. 무심코 문을 열고 내다보던 기생이 질겁을 하여 외쳤다.
"에그 웬 사람들이 마당에 가득 찼네."
사또가 술잔을 내려놓고 따라 일어서려는데, 기다리고 앉았던 김기가 품안에서 두어 뼘짜
리의 날카로운 비수를 뽑아 그의 뒷덜미에 갖다 댔다.
"꿈쩍 말아라..."
"에...? 무, 무슨 짓요?"
사또는 상머리에 두 손을 얹은 채 벌벌 떨고 있었으며, 기생년들은 방구석에 한데 몰려
서서 고개를 처박았다.
"잘 모셨소이까?"
밖에서 우렁우렁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지금 모시고 있소이다."
문이 열리며 날이 시퍼런 환도를 든 장한이 들어서는데 마감동이었다. 그는 우선 상에 얹
히 술주전자를 들어 꿀꺽이며 한참을 마신 뒤에 안주 몇쪽을 태연히 집어서 맛을 보았다.
김기가 물었다.
"어떻게...?"
"예, 약속대루 관가 대문 밖에서 부엉이 소릴 냈더니 아이들이 열어줍디다."
마감동이가 달려들어 사또의 몸을 묶었다. 그들은 결박지은 수령을 동헌마루로 끌어냈는
데, 벌써 관아를 점령하고 나졸들의 무기를 뺴앗을 화적패들은 이어서 창고를 뒤져 피륙과
곡식석들은 들어내고 있었다. 한편으로 갑송이가 옥을 부수고 길산의 부모를 데리고 나왔다.
장충은 그동안에 몰라보리만큼 늙고 쇠약해져 있었다. 김기가 데리고 들어갔던 졸개들이 대
문 빗장을 빼어놓고 군호를 보내자 관가 앞에 숨어 대기하던 구월산 패거리들이 일시에 몰
려들어와 미처 창칼을 쓸 새도 없이 군노 사령들을 제압해버렸던 것이었다. 그들은 무명과
돈만을 가려내어 마바리에 그득히 실었고, 곡식은 밖에 내어 저자 복판에 멍석을 깔아놓고
그 위에 산더미처럼 쏟아놓게 하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 광경을 보고는 자루나 함
지를 들고 나와 다투어 퍼가는 것이었다. 관가 전체가 명화적에게 점령당한 것은 모르고, 사
람들은 암행어사가 문화 고을에 출도했다고들 속삭였다.
김기가 갑송이와 감동이, 만석이 등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다담상을 동헌으로 내다 놓고
술잔들을 돌렸고, 미처 달아나지 못한 기생가 악공들에게 곁에서 흥취를 돋우도록 하였다.
사또가 결박지워져 섬돌 아래 꿇어앉혀지자, 먼저 감동이가 호통을 쳤다.
"네 이놈, 고을 수령이란 백성에게는 어버이와 같은 자리인데 어지하여 죄없는 양민의 땅
을 빼았고 내쫓으려 하느냐. 재인말을 관전으로 귀속시킨다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강탈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냐?"
"아닐세, 지역이 외져서 규찰하기가 어렵고 또한 거기 사는 자들이 모두 유민들이라 감영
에서 그렇게 지시가 내려와 복명했달 뿐이네."
갑송이가 벽력같이 소리치며 일어난다.
"네가 그렇게 계를 올린 게 아니더냐. 재인말은 일찍이 인조대왕 연간에 재인청을 설치하
시고 우리 같은 연희꾼들을 모여 살도록 하신 이래로 우리가 대대로 살아온 고장이다. 비록
재인청이 폐하였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어 먹은 땅인데 너 같은 쥐새끼 같은 도적놈이 지주
부가와 짜고서 관전과 우리 화전을 바꿔치려는 게 아니냐. 너야말로 실로 국고를 좀먹는 도
적이다."
하면서 갑송이는 감동이의 환도를 집어들어 쑥 뽑고는 한달음에 뛰어 내려갔다.
"이놈 당장에 모가지를 베어버리리라."
"살려주오!"
갑송이가 칼을 위로 번쩍 치켜들자 수령은 목을 움츠리며 질겁을 했고, 감동이가 뛰어가
갑송이의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매나 때려 징치하지. 이따위 놈의 피를 칼에 묻힌단 말이우."
"가만있어. 기왕에 뽑은 칼이니 그냥 집어넣을 수야 있나."
갑송이가 우악스런 손길로 수령의 머리에 얹힌, 꿩털 꽂힌 갓을 잡아 뜯어냈다. 그리고는
사또의 머리를 향해 쌩 소리가 나도록 칼을 휘두르고는 칼집에 철컥 넣어버렸다. 상투가 잘
려버린 사또의 머리카락이 안면으로 흐트러져 내려왔다. 망보기로 나갔던 졸개 하나가 급히
달려들어와 보고를 했다.
"신천 쪽에서 관군이 삼십여 명쯤 들어오고 있습니다."
"적경을 알린 자가 있었군."
김기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갑송이에게 말했다.
"반씩 떠나고 한편 싸웁시다."
김기와 오만석이가 빼앗은 재물을 실은 마바리와 길산네 부모를 모시고 관가를 바져나갔
고, 그들은 송화 나가는 추산 줄기를 타고 구월산으로 향하기로 하였다.
병장기를 익숙하게 다루는 자들 이십 여명을 거느린 갑송이와 감동이는 군노 사령들이며
아전붙이와 수령을 상하 구별 없이 관가 창고에 가두고 자물통을 잠갔다. 그리고는 관가 대
문 위에다 김기가 써주고 간 방문을 붙여두었다.
'억울한 백성들을 대신하여 악독한 관리를 징계한다. 창고의 재물중에서 국고에 들지 않
은
수령의 사재는, 백성에게서 부당히 빼앗은 것이므로 찾아가노라. 구월산 활빈도.'
처음에는 대적하여 싸울 필요 없이 추격하는 자들을 늦추기나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기
왕에 관가를 점령하여 위세를 보였으니 아예 신천 군사들에게도 형세의 강함을 알리는 것이
이치라 하여, 갑송이네들은 마주 나가서 싸우리고 하였다.
그들은 문화 읍내의 어귀에 있는 점포와 민가에 흩어져 숨었고, 동작 빠른 졸개 서너 명
이 제각기 무기를 들고 관군을 향하여 나갔다. 신천서 오는 군사들은 관가를 빠져나간 통인
아이의 적경에 따라서 날랜 자들만 뽑혀서 짓쳐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들이 길 좌우로 벌리
고 문화읍내로 들어오는 중인데 바로 길 저편에 도적으로 뵈는 무명 수건을 질끈 동인 장정
들이 환도와 창을 꼬나잡고 기다리고 서 있었다. 지휘하는 장교는 그 꼴을 보고는 하도 어
이가 없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원, 문화에는 지푸라기들만 있는 모양이구나. 저것들도 제깐엔 도적들이라고 무기를 들었
는데. 누가 쫓아가 사로잡겠느냐?"
포졸 몇이 화살을 메겨 쏘는데, 살이 서너 대 날아가자 벌써 꽁지가 빠져라고 뛰기 시작
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잡으려는 군사들이 제각기 앞을 다투어 쫓으니, 마치 동네 아이들 석
전 놀이판이 된 듯하여 군열이 어지러워졌다. 장교는 연방 문화 관아의 군사들을 비웃어대
며 매사냥이라도 나온 기분으로 어슬렁어슬렁 부하들의 뒤를 쫓아갔다. 그들이 제각기 뛰어
서 읍내 저자의 어귀로 막 들어섰으나 앞서 달아난 도적들 넷은 이미 자취가 없었다. 장교
가 그제사 이상한 예감이 들어 환도를 뽑으려는 참인데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면서 살
한대가 날아와 그의 뺨을 뚫었다. 꽂힌 화살은 그의 볼을 꿰뚫고 다른 쪽 뺨으로 맞창을 내
었다.
"에구구..."
장교가 턱을 감싸쥐고 주저앉았고 연이어 쏟아지는 홪살에 포족 수명이 맞아 쓰러진다.
화살은 양쪽에 늘어선 포점과 민가의 지붕에서 쏟아지고 있었는데 이미 앞뒤의 행길로는 병
장기를 든 장한들이 뛰쳐 나와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텁석부리의 눈알 큰 자가 쇠 깨어
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모두들 무기를 버리고 그 자리에 앉는 자는 살려준다. 저항하면 언놈이든 어육을 면치
못하리라."
초가지붕 위에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자들이 양쪽에 칠팔 명 서 있었다. 독 안에 든 쥐
가 어쪄랴. 등등한 기세로 문화 고을을 도우러 나왔던 신천 군사들은 모두들 풀이 죽어서
제각기 들고 있던 병장기들을 내던지고 땅바닥에 주저않았다. 활을 든 자들은 제 위치에서
꼼짝도 않고 앞뒤를 막아섰던 자들이 내던진 무기를 하나씩 수습하였다.
"신천으로 돌아가거라. 만약에 우리 뒤를 밟는 자가 있으면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니 아
예 쫓을 생각 하지 말아라!"
갑송이가 호통을 쳤다. 군사들은 무기를 빼앗기고서 맨몸이 되어 짓쳐들어오던 기세는 어
디로 갔는지 비 맞은 허재비 꼴로 돌아서서 달아났다.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문화 읍내 사
람들은 모두들 방문을 꼭꼭 닫아 걸고 문틈으로 이러한 광경을 구경하였다. 뒤를 막아섰던
감동이가 다가오자 갑송이는 말하였다.
"아예 관가에다 불을 싸질러버리구 갈까?"
"그럴 필요는 없어. 공연히 일을 크게 벌여놓으면 토포군이 우리를 끝까지 추적할 테니까.
이만큼으로 겁이나 주었으면 됐지. 성님 빨리 물러납시다."
"문화 수령이 화적을 접대하고 손님으루 모셨지. 동헌 아래 꿇어앉아 목숨을 구걸했지. 보
통 망신이 아닐세."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오히려 소문이 안 나도록 쉬쉬할걸."
"어지간히 분풀이는 했지만, 그동안 받아온 수모를 생각하면 좀 미흡하이. 몇놈의 모가지
를 그냥 뎅겅해버렸으면 가슴이 시원할 텐데."
"건지산을 넘어서 내고개를 타고 갈까, 아니면 추산 마루로 해서 수렛고래를 돌아갈까?"
감동이가 퇴로를 정하지 못해 망설이는데 갑송이는 말하였다.
"추산으루 가지. 광대산을 지나다가 재인말에 남은 집들을 불이나 싸질러놓고 터줏대감께
하직인사나 해야지."
"핑계김에 또 술 한잔 먹겠군."
그들은 대오를 정비하여 문화 읍내를 빠져나왔다. 오백 보쯤 앞에는 정탐을 내세워 사위
를 살피게 하였고 맨 뒤에 갑송이와 감동이가 따라갔다. 이십여 리를 채 못가서 추산 마루
턱이 나왔다. 산의응달진 골짝마다 희끗희끗한 눈자취가 남아 있었다.
"아무래두 오늘 안으루 된목이골에 닿지 못하겠는걸."
"수렛고개에 가면 우리 아이들이 몇 명 나와 있는 토막 한 채가 있긴 한데 거기서 밤을
지내지."
"수렛고개서 된목이골까지야 한달음인데 쉬긴 뭣허러 쉬어."
갑송이와 감동이는 그렇게 얘기를 나누면서 행렬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내 잠깐 재인말에 내려갔다 와야겠어. 마을을 그대로 두고 떠날 수가 없네."
"그럼 어떡헐려구?"
"수렛고개 토막서 만나지."
"아이들 데리구 내려갈려우?"
"혼자 갔다 오겠어."
갑송이는 그들에게서 떨어져 광대산을 내려왔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는데 연기 한점 없는 마을에는 겨울 저녁의 스산한 바람만이 지
나가고 있었다. 컹컹대던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열려진 미닫이며, 퇴창문이며, 남
겨진 그릇이나 장독이 더욱 비어 있는 집들을 적막하게 하는 것 같았다.
"예미랄... 이젠 도깨비만 남겠구나."
중얼거리며 갑송이는 쭈그리고 앉아 부시를 쳐댔다. 초가지붕에서 한움큼 뽑아낸 지푸라
기에 불을 일구어 그것을 마른 소나무 가지에 옮겨 붙였다. 그는 불을 들어 지붕에 갖다 댔
다.
바싹 마른 초가는 한꺼번에 불꽃을 오리며 타올랐다. 그는 그 다음 집에도 불을 붙였다.
하나씩 둘씩 불이 댕겨진 집들이 타기 시작하자 재인말은 연기로 가득 차버리고 말았다. 광
대들의 설움과 한이 서린 삼간짜리의 집들은 거센 불길 속에서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온
마을의 집들에 불이 붙자 갑송이는 마을 큰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불길을 바라보았다. 마을
의 행사를 치를 때마다 춤판이 벌어지던 마당 한가운데에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힘차고
경쾌하게 두드려대는 풍물소리가 먼 곳에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듯하였다.
갑송이는 매운 연기에 숨이 막혀 기침을 터뜨리면서 불타는 마을길로 걸어나갔다. 큰돌이
네 집도, 길산이네도, 박쇠네도, 육발이네도 모두모두 타고 있었다. 그는 작은잿말마저 불을
지르고 떠나고 싶었으나, 까막내가 가까우니 혹시 관군이 나왔는지도 알 수 없었으므로 그
냥 광대산을 오르기로 하였다. 그는 산으로 오르며 타고 있는 재인말을 몇번이나 돌아다보
았다. 회색 연기가 광대산 주위로 퍼져 올라오고 있었다. 갑송이는 주먹을 들어 뺨 위로 흘
러내린 눈물을 쓱 닦았다.
"제기 매우니까... 눈물이 나는구나."
그들이 일궈놓은 밭고랑에는 녹다 남은 눈이 얼어서 희끗희끗했고, 서낭나무에는 색 바랜
헝겊들이 매달려 펄럭이고 있었으며, 불이 붙은 당집에서는 기와가 튀는 소리도 들려왔다.
귀신들께서도 집을 잃으셨으니 아무래도 광대들의 몸을 따라서 구월산으로 옮겨 오실 것이
었다.
갑송이는 밤길을 더듬어 수렛고개로 나아갔다.구월산으로 산줄기가 바뀌는 둔덕에서 반짝
이는 불빛들이 여러 점 보였는데 화톳불인 듯하였다.
"어이!"
갑송이가 고함을 치자 마주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성님이야?"
하는 감동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다 보니까 재인말서 불길이 오릅디다."
다가간 갑송이에게 감동이가 말했다.
"까짓 땅두 뺏겼는데 그따위 굴속 같은 오막살이는 남겨 뭐해여. 다 불싸지르구 말았지."
"잘했수."
"우리네가 언젠 집 두고 살았나. 길바닥이 내 집인데."
"뭐, 이제야 좋은 동네 이루게 되었지, 안 그러우?"
"그렇지만 어른들은 구월산 산채에서 살긴 싫어할 게야."
"염려 말우. 살기 좋은 데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함께 찾아봅시다그려."
토막에는 졸개 세명과 작은두령 하나가 목을 지키고 있었는데 지나는 장사치나 양반네들
의 봇짐과 부담을 뒤지고, 봉물이 오르고 내리는 소문을 주워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방도
한 칸이요 집이 협소하여 눈을 붙이기도 어려웠으므로 술이나 한잔 마신 뒤에 잠시 쉬었다
가 밤길을 걷기로 하였다. 토막의 소두령이 술 한 병과 자개 박은 찬합을 들여놓으며 갑송
이께 문안을 올렸다.
"새로 오신 두령님, 인사 올립니다. 별 것은 아니고 화주하구 육포인데, 어제 양반의 부담
에서 털어낸 것들입지요."
"응, 잘 먹겠네."
하고 나서 갑송이는 찬합 뚜껑을 열며 물었다.
"부근에 우리네를 알고 있는 사람들두 사는가?"
"예, 은율 탑고개 쪽에 꼭두래가 몇대 있고, 구월산 월정사에는 사당패들이 오래 전부터
있습지요. 그자들은 우리를 압니다."
수렛고개 초장의 말에 갑송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월산 사당들은 우리두 저자에서 부딪친 적이 있으니 대강은 알고... 은율의 꼭두패 얘
기는 처음 듣겠는걸."
"예, 원래가 경기지방에서 떠돌던 자들이라는데 얼마 전에 일대가 찾아와 움막을 지어놓
고 모여 산다고 함니다."
곁에서 감동이가 말했다.
"성님 구월산 월정사에는 풍열이라는 괴승이 있답디다."
"괴승이라니...?"
"낸들 아우. 아마 사당패를 두어 대 거느리구 있는 모양인데, 무예가 제법이구 병서도 많
이 읽었다데. 그 땡중이 가르친 중놈들두 무술이 썩 높은 걸루 소문이 났수."
절의 중들이 무예를 익히는 것이 흔한 일이라, 산중의 큰 절에서는 자위하기 위하여 젊은
중들이 무장을 하고서 산사를 지켰던 것이었다. 갑송이가 다시 물었다.
"월정사에는 중놈들이 몇 명이나 되는데?"
"뭐 늙이이들 빼구 나면 한 이십여 명 될 게야. 왜 그러우?"
"절에서 쫓아내버리는 게 앞으로 유리하겠네."
"아니우. 서루 소 닭 보듯이 모른 체하는 게 낫지요. 여태껏 그래왔는걸."
"하여간에 김기하구 의논해서 월정사를 어찌할지 결정해야지. 서루 친척이 된다면 다행이
지만, 그쪽을 끈으루 해서 토포군이 들이치면 우린 꼼짝없을 게야. 모조리 죽여버리든지..."
갑송이는 사납게 눈알을 부릅떴으나, 마감동은 싱긋이 웃었다.
"흥... 제 동네에서 인심 잃은 놈 잘되는 거 봤어? 월정사 일은 내게 맡기라구."
그들은 졸개들이 해 올린 늦은 저녁으로 요기를 하고 나서 다시 산줄기를 타고 내고개를
지나 구월산 연봉을 타넘었다. 밤새껏 산길을 오르내려 사십리 길을 걸어 된목이골에 당도
하니 날이 샐 무렵이었다. 자고 있던 오만석이와 김기가 마중을 나왔고, 먼저 도착하여 노숙
을 하던 광대들도 모두 깨어 일어났다. 부녀자들은 집안에 들어가 밤을 지내는 모양이었다.
김기와 오만석, 마감동, 이갑송 등이 둘러앉아 의논들을 시작하였다.
김기가 말하였다.
"구월산은 동으로 안악, 북으로 은율, 서로 송화, 남으로 문화와 신천에 둘러싸여 있소이
다. 동쪽 줄기는 월호산에서 끝나 월당강에 막혀 있고, 서쪽에는 바다에 끊겼으니 위의 네
군이 둘러싸면 마치 조롱에 든 새의격이요, 연못의고기와 같소이다. 그러하니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일이외다. 그것두 가난하고 약한 백성들의 인심을 얻어놓아야 이나마의 산채라
도 그 형세를 불려나갈 게요. 또한 다음으로 이들 각 군현의 장교나 아전들 속에서 우리와
통할 수 있는 자들을 찾아내야 하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 군현의 요로에 있는 주막을
손에 넣거나, 누막 주인을 끌어들여야 하고 또 감영길과 한양 나가는 길에도 주막을 여는
것이 유리하외다. 이는 다 살피는 데 요긴한 때문이요."
김기의 말은 조리가 있고 이치에 맞았으므로,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다시
김기가 말하였다.
"우선은 주막을 잡아 우리 아이들이 운영하는 일이 급하고, 그 다음에는 인근 관아의 하
리들과 통해야 하오. 이 일은 내게 맡기시우."
갑송이가 말했다.
"어쨌든 우리 망르 사람들이 자리를 잡아야겠소이다. 은율 탑고개쪽에 꼭두패가 몇대 어
울려 산다 하니 그들 총대와 의논하여 정착을 시킬 테유."
"구월산에서 뒤를 보아주겠다면 그 사람들두 별루 반대하지는 않을거외다. 산채를 여기에
둔다는 것두 차차 생각해봐야겠수. 자비령 산채두 손에 넣어야 하구, 멸악산 산채두 우리 콧
김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는 감동이의 말에 갑송이가 말하였다.
"우선은 길산이가 옥에서 나와야 할 테니, 천천히 형세를 길러나가야지. 길산이가 나오면
대근이 성님이 사람을 보낼 테니까."
"날이 밝는 대루 이두령과 마두령이 탑고개에 나가보시우."
"그러지요. 나를 알구 있을 테니 괄시는 못할 게요."
마감동이가 광대들을 탑고개에 정착시키는 일은 제게 맡기라고 큰소리를 쳤다. 늦은 아침
을 먹고 나서 갑동이와 갑송이는 아사봉을 넘어 은율로 나아갔다. 탑고개로 가는 가파른 외
길 아래엔 눈이 쌓여서 시냇물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탑고개 위에 오르니, 향나무와 잣나
무들이 빽빽한데 몰아치는 북풍이 볼을 베고 지나는 듯하였다. 탑고개서 송화로 나가는 길
을 따라 내려가지 않고 중도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니 골짜기 가운데 큰 봉우리가 우뚝 섰는
데, 나한암이었다. 나한암이 가로막고 서 있어서 그곳은 아주 비좁고 험해 보였으나, 계곡의
협로 위에 걸린 외나무 다리를 건너 봉우리 뒤편으로 돌아드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바깥쪽에서 볼 때는 작은 내로 골짜기가 꽉 차서 집은커녕 사람 하나 서 있을 수 없을 듯했
었다. 그러나 나한암 뒤에는 널찍한 분지가 있었고, 개천은 그 분지의 오른편 끝 벼랑가로
감돌아가고 있었다. 마을이 아니라 성곽을 세울 만한 넓은 터전이었다. 감동이가 중얼거렸
다.
"이 부근인 줄은 나두 알았지만, 이렇게 후미진 곳일 줄은 몰랐는걸."
집 열두어 채가 작은 언덕 아래 옹기종기 자리를 잡았는데, 숲의 한쪽은 화전을 일구어
마치 부스럼 떨어진 자취처럼 흙이 드러나 있었다. 감동이와 갑송이는 마을로 들어갔다. 그
들이 동구로 다가갈 때 얼핏 보이던 사람의 자취가 차차 가까워짐에 따라 하나 둘씩 늘어나
더니 칠팔 인이 버티고 서서 그들과 마주 서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나서서 그들에게 외쳤
다.
"어디서 오시는 손이우."
두 사람은 아랑곳없이 다가갔다. 그들은 몽둥이며 팔매칠 돌멩이들을 쥐고 있었다. 또 앞
선 자가 외쳤다.
"이 마을서는 바깥 사람을 들이지 않으니 고개너머루 나가시우."
"우리가 누군 줄 모르우?"
갑송이가 나서면서 말했다.
"나는 재인말 이갑송이란 사람이구, 여긴 구월산 녹림패의 마감동이우."
마을 사람들은 저희끼리 수군거린 뒤에, 앞으로 나섰던 자가 다시 물었다.
"구월산의 마두령이 무슨 일로 우리 마을에 오셨소이까?"
"허, 아무리 외방객을 꺼려한다 하지만 너무하오. 일부러 찾아온 사람을 이렇듯 길바닥에
세워놓고 용건을 물으려 하시오?"
마감동이가 말하자 갑송이도 몇걸음 나서면서 말하였다.
"문화 광대산 아랫녘에 재인말이 있었다는 것쯤은 아시우? 우리는 몇대째나 게서 살아왔
지만, 재주 팔아 사는 놈들의 의리가 이렇다는 소문은 듣지 못하였소."
"하두 외떨어진 곳이라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니 너무 섭섭히 생각 마슈. 뭐
가진 것 없수?"
"뭣 말요?"
"환도나 무슨 병장기가 없느냐구요?"
"없소이다."
앞섰던 자가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총대 댁으루 모시지."
그들이 허락할 기색을 보였으므로 감동이와 갑송이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광대들이
안내하는 대로 두 사람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그중 커다란 초가로 들어갔다. 마을 장정들
의 대부분은 마당에 옹기종기 섰고, 앞서 나와서 말을 걸었던 자와 또 한 사람의 젊은이
와 그리고 행수인 듯한 노인만이 갑송이, 감동이들과 마주 앉았다. 서로 인사를 건넨 뒤에
갑송이가 찾아온 뜻을 얘기하였다.
"우리 재인말은 문화 관아에서 관전으로 몰수하는 바람에 모두 뿔뿔이 흩어져 폐촌이 되
었소이다. 아직 거처를 잡지 못한 식구들이 서른 나뭇 되는데, 이 마을 행중에 끼워 함께 살
도록 해주시면, 모두 여기 법도를 좇아서 한패가 되기를 원합니다."
총대 되는 노인은 근심 어린 얼굴로 묵묵히 앚았다가,
"여기 계신 구월산 마두령의 소문은 우리 같은 광대들뿐만 아니라 화전 부락들에서두 다
잘 알구 있소. 문화 재인말이 폐촌된다는 것이며, 파옥한 일이며, 구월산 기슭에 파다하게
퍼졌지요. 우리네야 겨울에나 잠시 머물러 지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줄곧 길에서 사는 사
람들입니다. 떠돌다 보니 아이들 기를 일도 그렇구, 겨울을 나는 일도 큰 문제여서 몇패를
끌구 이리루 찾아들어온 것이오. 출행 나가면 이 마을엔 아녀자 몇만 남게 됩니다. 어쨌든
관에서 찾고 있는 재인말 패거리가 우리 마을에 들어온다면 우리두 좇겨나거나 그나마 연명
해왔던 연희두 못 나가게 될 게요."
라고 하였고 갑송이가 말했다.
"염려 마시오. 해서 도중에만도 우리네 같은 각색 광대들이 수십여대 있지 않소. 더구나
광대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구 있습니다 사당패다, 걸립패다, 괴뢰패다, 굿중패, 뭐 재주 몇
가지 익혀가지고 떠도는 무리가 삼남에는 더 많답디다. 그러니 한때 관에서 기칠이 심하달
지라고 이 마을 사람들을 화적 취급은 하지 않으리다."
노인은 한참이나 무릎을 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감동이가 다시 말하였다.
"구월산 기슭에서 우리들과 통하지 않고는 살기 힘들 게요."
"월정사의 풍열스님을 만나보셨습니까?"
"아직 못 만나봤소이다."
"한번 만나보시지요."
"풍열이란 중이 당신네와 무슨 상관이 있소? 그 땡초가 이 동네의 임자란 말이우?"
괴뢰패의 총대 노인의 말에 아니꼬워진 갑송이가 되물었고 노인은 화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우리 패거리 중에서두 몇이 월정사 거사루 들어 있소이다. 이 나한암 아래에 마을 자리
를 정해주신 것도 풍열스님이시지요. 우리 네두 월정사의 불사를 도와드리구 있지요."
감동이는 뭐라고 욕지거리를 하려는 갑송이의 팔을 지그시 누르고서 물었다.
"그렇다면 풍열스님께서 허락한다면 되겠소?"
"만나보시겠소?"
"지금 당장 찾아갈 참이오."
"그러면 우리두 마음이 놓입니다."
마감동이와 갑송이가 졸개들을 데리고 와서 힘으로 마을을 빼앗고 재인말 사람들을 정착
시킬 수도 있었고, 또는 다른 곳에 터를 정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제 동네서 인심을
잃는 일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하여 마을을 빼앗는 것은 그른 의견으로 정해졌던 것이다.
또한 이미 살고 있는 광대마을에 정착을 하는 것이 뒷소문도 없을 테고 출행을 나가 더라도
지장이 없을 듯해서였다. 재인말의 광대들은 대대로 기예를 물려받으며 살아오던 자들이었
으나 갑송이의 말처럼 일반 농군들이 광대로 업을 바꾸는 일이 많았다. 흉년이 들어 굶주리
거나 소작붙이를 잃은 사람들이 구걸이라도 하여 먹고 살기 위해서 대처의 저자나 향시를
떠돌았다. 그러다가 몇가지 춤과 노래와 재주를 익히게 되면 광대를 자처하게 되는 것이었
다. 탑고개에 모인 자칭 괴뢰배들도 그런 유의 광대였고 선대적부터 재인청에 올라 있던 재
인말의 광대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나라에서 차차 이러한 유민지배에 대한 탄압
과 규제가 심해지면서, 이들은 연희 종목에 따른 잡다한 패거리를 이루어 절과 시장와 해변
을 전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패거리와 패거리는 서로 구별하기 어렵도록 명화적이나 걸인
또는 행상 등의 생업 수단을 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갑송이와 마감동이는 탑고개서 다시 구월산으로 찾아들어갔다. 아사봉의 남측을 따라서
넘는데 된목이골의 북쪽 골짜기 쪽에 월정사가 있었으므로 갑송이는 투덜거렸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먼저 그 땡초중을 찾아갈 걸 그랬지."
"어휴 추워, 맞바람이로구나."
암벽 아래로 빽빽이 늘어선 적송이 매서운 겨울바람에 윙윙 울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얼
어붙은 눈에 몇번이나 미끄러지면서 절벽 사이의 조도를 기듯이 지나갔다. 계곡 아래로 소
나무 숲 사이에 절의 문루가 붉게 내다보이고 있었다. 절 뒤편의 둔덕에는 여러 채의 통나
무 귀틀집이 있었는데, 아마도 사당패들이 겨울을 나는 마을인 것 같았다. 절 마당에는 아무
도 보이지 않았다. 대웅전과 지부십대왕을 모신 명부전이 좌우로 벌려 있고 대중방의 문들
도 굳게 닫혀 있었다.
"아니, 무두 어디로 갔게 이리두 조용허지?"
"좌우간 풍열인가 하는 중놈을 만나서 겁을 좀 줘야겠다."
그들이 대웅전을 돌아가니 대갓집의 큰 창고만이나 한 부엌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아나네
셋이서 점심을 짓느라고 불을 때는 것이 보였다.
"말 좀 물읍시다."
"에그머니... 깜짝이야!"
갑송이의 거친 목소리에 아궁이 앞에 쭈구리고 앉았던 보살 여인이 호들갑을 떨면서 일어
났다.
"말 좀 묻자니... 누가 잡아먹소. 놀라긴 예미랄. 풍열이 어디 있소?"
"풍열스님은 왜 찾아요?"
"글세 어딨냐니까..."
"여기 안 계셔요. 어디서들 오셨수?"
갑송이가 빙긋 웃더니 절 마당의 왕모래를 한줌 쥐고는 부엌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아니 여자만 있는 부엌엔 왜 들어오구 야단이야. 어서 나가지 못해요."
그중 나이 들어 뵈는 여자가 불기 옮은 부지깽이를 들어 쑤셔대는 시늉을 하며 갑송이를
막아섰다. 감동이는 팔짱을 끼고 빙글대며 구경하고 서 있었다. 갑송이는 부지깽이를 휘두르
는 여자의 손을 가볍게 잡아 비틀었고, 여자는 비명을 내지르며 부엌에 주저앉는다. 갑송이
는 킬킬거리면서 큰 독만한 쇠솥의 뚜껑을 철그렁 열었다. 밥이 끓고 있는데 갑송이가 왕모
래 움켜쥔 손을 쳐들고 말하였다.
"어디 이 절 중놈들 점심이나 좀 굶겨볼까. 아냐... 반찬이 없을 테니 간 좀 맞춰줘야지.
헤헤헤 풍열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면 얌전히 나갈 테여."
"아이구, 저런 도적놈 보아."
"풍열스님은... 달마암에 계셔요."
구석에 웅크리고 서로 부여잡고 떨고 섰던 여자들 중의 하나가 바삐 발설하였다.
"헤헤 진작 그럴 게지. 아주머니들 미안허우."
갑송이가 너스레를 치면서 부엌을 돌아 나오는데, 왠 구척 장신의 사납게 생긴 행자 하나
가 감동이의 뒤편에 넌지시 서면서 굵은 음성으로 말하였다.
"손님들은 뉘신데 이 행패요?"
감동이와 갑송이가 바라보니 회색 물들인 승복은 입었으되, 중 같다기보다는 꼭 쇠도적놈
같은 얼굴이었다. 눈썹은 마치 송충이 기는 듯 하고, 머리는 깎아서 반들거리지만 돼지털 같
은 수영이 멋대로 자라나 있으며, 목덜미에서 헤쳐진 저고리 앞섶의 가슴팍에까지 온통 시
커먼 털이었다. 원래가 불한당이란 상대방의 눈만 보고도 척 동류임을 알아보게 되어 있는
지라, 상대의 말이 아무리 곱다 한들 예의로 먹힐 리가 없는 법이었다. 갑송이가 침을 퉤 뱉
고 나서,
"온 저런 것도 중이라구 꼴에 승복을 걸쳤네."
하고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손님들이 뉘시냐구 물었소이다."
키 큰 승려는 다시 공손히 허리를 굽히면서 말하였다. 마감동이가 마주 예를 올리면서 대
답한다.
"예, 저희는 풍열스님을 만나뵈러 온 사람들입니다."
승려는 감동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갑송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부엌에 들어가신 것을 뵈오니 몹시 시장하신 모양인데, 여기엔 입에 맞는 음식이 없소이
다. 대신 저 아래루 가보십시오. 소승이 손님께 맞춤한 음식을 내드리겠습니다."
"허 그래? 그냥 갈려구 그랬더니 점심을 대접한다는데 사양할 수야 있나. 한상 떡벌어지
게 절밥이나 먹구 갈까?"
갑송이도 심심하건 차이고 더구나 승려의 몰골이 그냥 넘기기에는 제법 농을 쳐보도록 괴
이쩍게 생겨먹었으니 입담 자랑이나 해볼 생각이었다. 쇠도적 같은 승려가 법당 앞마당에서
마을 쪽을 손짓한다.
"바로 저쪽에 가면 손님의 동무들이 두 분이나 사당마을 쪽인데 도야지의 꿀꿀대는 소리
가 들려왔다. 마감동이가 팔장을 풀고 웃음을 참느라고 돌아섰고, 갑송이는 귓전이 시뻘개졌
다.
"어...? 이놈이 욕을 하잖나."
그제서야 털 많은 승려의 두툼한 입술이 주욱 찢어지며 온통 이빨이 드러났다. 씩, 한번
이빨을 내보였다가 다시 감춰지는데 전혀 표정이 없었다. 갑송이가 팔을 걷어붙였다.
"한번 겨룰 테여?"
마감동이가 나서서 갑송이의 가슴을 떼밀며 승려에게 말했다.
"고만둡시다. 우리는 구월산 산채에서 온 사람들인데 풍열스님을 만나서 상의할 일이 있
소이다."
승려는 여전히 공손했다. 그러나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줄곧 갑송이의 미간에 꽂히고 있
었다.
"도적놈들이 산간의 도인은 찾아 뭘 해?"
하고 나서 그가 갑송이께 말하였다.
"보아하니 힘을 많이 믿는 모양인데, 소승도 평소부터 무예를 좋아하여 겨루기를 즐겨합
니다. 한번 지도해주신다면 영광이겠소이다."
마감동이도 그 말에는 아니꼬워서 말소리가 거칠어질밖에 없었다.
"이 중놈들이 된목이골 감동이네 녹림패를 뭘루 아는 게야?"
"무도한 도적놈으루 압지요."
감동이와 갑송이가 대번에 달려들 기세로 벌려 서는데, 승려가 한걸음 물러나며 손을 쳐
들었다.
"내가 한마디 외치면 지금 선방에 들어 수도중인 대중이 모두 병장기를 들구 나와서 손님
들을 족칠 테니,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외다. 그러지 말구 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칠성암
아래 우리 수련장이 있으니 거기서 한판 얼릅시다."
"멱 따는 소릴 내지르려무나. 한꺼번에 모가지를 비틀어놓을 테니까."
"좋다. 그리루 가지."
갑송이는 당장 싸움을 벌일 기세였지만, 마감동이가 즉시 찬성하였다. 그들이 대웅전 앞마
당을 지나는데, 어느 틈에 보살 여인이 전했는지 선방에 남아 참선중이던 승려들 십여 명이
하나 둘씩 몰려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마당으로 내려오지는 않고 웅기중기 둘러서서 내려다
볼 뿐이었다. 갑송이가 그들을 향하여 큰 소리를 내질렀다.
"너희들두 모두 내려오너라. 박치기를 시켜줄 테니."
그러나 그들은 덤덤히 구경만 할 뿐이었다. 세 사람이 계곡을 따라 올라갈 적에 나이든
승려 하나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칠성암 아래에는 밭터인 듯한 너른 마당이 있었고 계곡
건너편에는 과녁이 있었으며 작은 일자의 헛간이 있었는데 벽이 없는 헛간 안이 들여다보였
다. 헛간 안에는 창이며 봉이며 환도며 활이며 철퇴 같은 병장기가 나란히 정돈되어 걸리고
세워져 있었다. 먼저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털보 승려가 앞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갑송이에
게 말하였다.
"자아, 손님의 손에 맞는 것으루 하나 골라 잡으십시오."
갑송이는 몇번 써보았던 터라 눈에 뵈는 대로 철봉을 손에 들었다. 승려가 빙긋 웃으면서
다시 물었다.
"손님께선 진정 살전을 원하시오?"
"그럼 살전이잖구. 피맛을 좀 봐야겠다."
갑송이가 철봉을 윙윙대며 휘두르니까 승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바라보다가
"소승은 불자이오니 함부로 살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진기는 피하시지요."
"왜 겁이 나는 모양이구나. 이 땡초놈아!"
"예, 겁이 납니다. 혹시 파계를 할까 해서 말이우. 보아하니 봉을 다루는 법두 모르구 힘
만 믿고 있으니 내 월도에 목이 떨어질게요."
갑송이가 분노하여 철봉을 잡아 눈앞에 가로 들었다.
"이놈아 구경 좀 해봐라. 이 쇳대가 어떻게 되는 지 볼 테냐?"
철봉을 양손에 잡을 갑송이가 볼을 부풀리며 기운을 쓰는데 굵다란 철봉의 중동이가 구부
러지기 시작한다. 팔을 부들부들 떨던 갑송이가 목덜미에 핏줄이 드러나게 끄응 한번 힘을
썼다. 엄지와 검지의 한 둘레나 되는 굵은 철봉이 햇빛에 녹을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렸다.
"땡초야. 네 허리를 이 꼴루 만들어줄까?"
휘어진 철봉을 발 아래 던지면서 갑송이는 호흡 한번 헐떡이지 않고서 말했다. 마감동이
도 놀랐고, 곁에 따라와 섰던 중년의 승려도 놀랐으나, 털 많은 승려는 눈빛 하나 흐트러지
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두 보여드리겠소이다."
승려가 빙긋 웃더니 중년 승려에게 눈짓을 하였다. 중년 승려가 헛간으로 들어가 두 뼘
둘레의 통나무 하나와 빨래판만큼이나 되어 뵈는 넓적한 구들돌을 들고 나왔다.
"뭐하는 거냐?"
승려는 갑송이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서 우선 구들돌을 한 손에 받쳐서 세우고 허리를
구부렸다.
"작은 재주이오나 한번 보여드릴까 하오."
승려가 정권을 세웠다가 호흡을 끊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데 허리가 휙 돌았다가 온몸
의 중량을 속도에 놓는 듯하였다. 돌에 부딫치자마자 주럭은 다시 재빨리 뒤로 당겨지니, 속
도만 남고 거기서 실렸던 힘은 절도 있는 타격으로 바뀌었다. 돌이 마치 흙처럼 부서져 나
갔다. 갑송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흥, 택껸이로구나. 택껸 모르는 광대 모았느냐. 그따위쯤은 나두 대가리루 해낼 수 있다."
승려는 다시 말없이 통나무를 쳐들었다. 눈앞에 들고서 잠깐 노려보다가 고개를 위로 쳐
들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이더니 목줄을 당겨 앞으로 처박는데, 역시 당긴 만큼 뒤로 빼
는 속도가 거의 같았다. 부러진 통나무가 내동댕이 쳐졌다. 승려는 합장하여 공손히 말했다.
"목봉으로거나 아니면 맨주먹으로 겨루자면 모르되 진기살전은 우리 계율 때문에 사양하
겠소이다."
"좋다. 작대기루 하자꾸나. 뼉다귀를 부숴서 병신을 만들어줄 테니..."
중년의 승려가 헛간에서 다시 두 자루의 목봉을 내어오는데, 끝에는 솜 넣은 가죽뭉치가
씌워져 있었다. 월정사 승려들의 단련용인 모양이었다. 중년 승려는 그것을 두 사람에게 건
네기 전에 가죽뭉치에다 숯칠을 하고 나서 말했다.
"규칙은 급소에 닿아 칠해진 쪽을 패로 보고, 봉에 맞아 넘어지거나 봉을 빼앗겼을 때에
도 패로 봅니다. 다만 서로 동시에 공격하여 접촉되었을 때에는 무승부로 정합니다. 대련은
십 합이올시다. 자, 그러면 마주 서십시오. 나무 관세음보살."
갑송이는 목봉의 중간을 잡고 수평으로 쳐들고 서 있었으며, 승려는 봉의 끝부분을 잡고
서 가죽뭉치가 땅에 닿을 듯한 자세로 마주 서 있었다. 승려가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으므
로 갑송이도 얼결에 답례하고 서 두어 걸음 내디디며 봉을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휘둘러
쳤다. 승려가 아래에서 위족으로 쳐올리며 봉으로 찌르는데, 갑송이는 허리를 굽히면서 등뒤
로 빠져나간 봉끝을 어깨에 얹은 채로 승려에게로 파고 들었다. 갑송이가 발을 쳐들어 승려
의 허벅지를 잣밟았다. 승려가 옆으로 고꾸라질 때 갑송이는 봉으로 그의 머리통을 노리고
후려갈겼다. 승려가 맞받아 쳐올렸다. 그가 일어 나면서 가로 들었던 봉을 옆으로 휘익 돌려
치니 곧 적수세였다. 갑송이가 옆구리를 호되게 얻어맞고 헉 소리를 내면서 물러섰다.
갑송이는 쥐마회를 하면서 재빨리 승려의 측면을 찔러 들어갔고, 승려는 십면매복세로 공
결을 맞받으며 다시 반격하고, 반격하는가 하다가 곧 물러서면서 봉은 앞으로 내어밀어 거
리를 유지시켰다. 뒤로 일 보 물러나는 체하다가 단번에 지남침이 되어 앞으로 곧게 찌르면
서 연이어 삼 보 나아왔다. 갑송이는 봉의 끝을 잡고 길어진 막대를 수평으로 펴들어 상하
좌우로 맞받아내는데 선인봉반의 자세였다. 승려는 그 공격과 방어의 기교가 뛰어났고, 갑송
이 쪽은 공격에 있어서는 힘이 월등하며, 방어할 때엔 그 몸짓이 가락에 저절로 맞춰진 춤
사위처럼 본능적이었다. 목봉의 부딪치는 소리가 숲속에 가득했는데 칠성암에서 승려 몇이
나와 구경하고 서 있었고, 더 위쪽의 달마암네서는 오샙대의 늙은 중이 빙그레 웃음을 띠고
서 계곡을 따라 내려왔다. 두 사람의 대련은 점점 더 치열해져서 모두 전신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들은 삼 합째에 이르러 서로의 어깨와 다리를 각각 후려치고 물러났다. 한참이나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던 늙은 중이 외쳤다.
"대련을 멈추어라!"
갑송이와 승려는 서로 공격할 자세 그대로 정지하여 위를 올려다보았다. 회색장삼 위에
붉은 가사를 어깨에 둘렀는데, 기다란 사장을 짚고 있었다. 그가 바로 월정사의 주지인 풍열
이었다. 풍열스님은 갑송이와 마주 서 있는 승려에게 말하였다.
"옥여야, 손님을 모시구 올라오너라."
"아직 대련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옥여라고 불린 승려가 대답하니, 풍열은 나직하게 웃으면서 다시 말하였다.
"승부는 이미 정해졌다. 옥여야 네가 졌느니라."
옥여가 사나운 눈길을 들어 갑송이 쪽을 노려보고 나서 퉁명스레 물었다.
"스님, 아직 아무도 급소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글세 손님들 모시구 올라오라니까. 너희들이 내 참선을 방해하였으니, 이제 내가 대련을
방해한들 어떠하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풍열은 돌아섰고 칠성암에서 나와 서 있던 몇몇 늙은 중들도 그에게 예를 올렸다. 옥여가
갑송이와 감동이를 향하여 공손히 말하였다.
"손님들 달마암으로 오르십시오. 이분이 큰스님이십니다."
"대련은 그럼 다음으루 미룰까?"
상대방의 철저한 공손함에 이젠 혼자서 씨근대기도 쑥스러워진 갑송이가 부드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옥여를 선두로 갑송이와 감동이는 달마암으로 올라갔다. 계곡의 가파른 바위 그루터기 위
에 지어놓은 삼간초가였는데 거기서 풍열스님은 상좌 하나를 데리고 기거하고 있었다.
"올라들 오시오."
예의고 염치고 따지지 않는 갑송이도 흰머리가 듬성듬성하며 눈빛이 쏘는 듯한 이 중에게
는 무엇인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점이 있어서 고분고분하게 선방으로 올라갔다. 눈치 빠른
마감동이가 두 손을 합쳐 예를 올리자 갑송이도 우물쭈물 흉내를 냈다. 네 사람이 마주 앉
자 마감동이가 먼저 인사를 올린다.
"소생은 구월산 된목이골에 사는 마감동입니다."
"이갑송이우."
"이 절의 주승으루 있는 풍열이외다."
하고 나서 주지가 다시 물었다.
"헌데 무슨 일로 소승을 찾으셨소?"
마감동이가 얼른 대답했다.
"예, 실은 탑고개에 갔다가 스님을 찾아뵈라기에..."
"뭐, 여러 말루 길게 끌 것이 없겠소이다."
갑송이는 뻣뻣한 자세로 풍열을 마주보며 말했다.
"실은 저희는 본시 양민이었으나, 얼마 전에 관가의 침학으로 도적놈이 된 사람들이우."
풍열은 눈을 감고 염주를 한낱 두낱 헤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디 정착할 곳이 없나 찾던 중에 탑고개에 유민들이 모여서 산다기로 더부살이
를 청하였던 것입지요. 그랬더니 댁의 허락을 맡으라구 합디다. 까짓 것 쫓아들어가 몇놈 베
어 리구 불을 싸지르면 온 마을이 금세 비워질 것이지만, 인심 잃기 싫어서 타협하러 온
거유."
어찌하겠냐는 어조로 갑송이가 눈알을 부라려서 풍열을 노려보는데, 순간 이마빡이 번쩍
하면서 정신이 아뜩해진다.
"어이쿠!"
갑송이는 얼결에 머리를 감싸쥐었다. 애놈 대갈통만한 목어가 그의 미간을 호되게 치고는
방바닥에 굴러떨어진 것이다. 여간하여 엄살을 떨 갑송이가 아니건만 하도 놀가고, 워낙에
미간은 급소 중에 급소라서 잠시 눈앞이 보이질 않았다. 풍열은 그렇게 때리고 나서는 다시
다정한 자식을 타이르는 듯이 부드럽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이놈 갑송아, 너는 천성은 순직하고 착하다마는 어리석은 놈이다. 그 어리석음이 큰 죄이
니 매를 좀 맞아야겠다."
갑송이가 당황한 중에도 화가 치밀어 주먹을 쥐어 단매에 풍열의 면상을 처박으려는데,
이번에는 숨이 칵 막히면서 앞으로 고개를 처박고 엎어졌다. 풍열의 일지관수, 곧게 뻗친 손
가락이 상반신을 내미는 갑송이의 목젖을 날카롭게 찔러버린 것이다. 갑자기 기를 끊긴 갑
송이가 곧 안색이 개파래지면서 눈을 까뒤집고 사지가 굳어졌다. 마감동이는 풍열의 가벼운
동작 하나로 곰 같은 갑송이가 혼절해버린 모양을 보고 엎드려서 사정을 하였다.
"스님... 버릇없이 굴었기로서니 제 성님을 죽이시렵니까.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옥여는 제 스승의 하는 양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풍열이 축 늘어진 갑송이를
끌어다가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하였다.
"입산시키면 훌륭한 승려가 될 것이다."
"순직함은 간교함보다 더욱 불심에 가까우니라. 그 성품은 어리석은 범부에 있어서도 덜
하지 않고, 성현에 있어서도 더하지 않고, 번뇌에 머물러서도 어지럽지 않다고 하시던 육조
혜능의 말씀을 아느냐. 육조께서도 일찍이 글 한자 모르는 무지산 나무꾼이었느니라. 내 이
녀석을 행자로 들이고 싶구나. 허나 아직은 아무 말도 말아라. 이는 틀림없이 비구가 될 것
이다. 그것도 아주 덕이 높은 비구가 될 것이니라."
풍열은 작은 대나무통을 꺼내어 그 속에서 쇠침을 꺼냈다. 쇠침을 단전과 비중과 인중에
다 차례로 놓으니 검은 피가 반점이 되어 나오고 이내 기맥이 통하여 안면에 화색이 돌았
다. 그제사 한숨을 휘이 토해낸 갑송이가 눈을 멀뚱히 뜨고서 뚜릿거리는데 풍열이 말하였
다.
"그래 이젠 정신이 좀 들었느냐?"
갑송이는 머리통이 지끈거리고 사지의 기운이 쪽 빠진 듯하였다. 어찌되었던 영문인가를
몰라 속으로 따져보는 중에 그제사 주지승에게서 뭔가 날카로운 것으로 찔리었다는 걸 깨달
았다. 갑송이는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스님 잘못했수."
"무엇을 잘못했느냐?"
갑송이는 그저 뭔지 알 수 없게 기운을 빼어버린 괴승의 술법에 놀라 저자의 무뢰배 예의
로 강한 자에 드리는 인사를 건넸을 뿐이었다. 그러하니 제가 잘못한 점이 딱히 떠오를 리
가 없었다.
"감히 스님을 치려구 한 것이 잘못이지요."
"예끼, 이 녀석 또 맞을 테냐?"
"에구구..."
갑송이가 제물에 놀라서 뒤로 궁둥이를 빼면서 손을 쳐들어 막는 시늉을 하였다. 풍열은
빙그레 웃었다. 감동이와 옥여도 킬킬 웃어댔고, 갑송이는 얼굴이 붉어져서 두 사람을 향하
여 사나운 눈알을 부릅떴다.
"무얼 웃구들 지랄이여."
"네가 무엇 때문에 내게 맞았는지 모르느냐?"
"거 아시면 속시원히 이래저래 잘못되었다구 가르쳐주시우. 스님을 치려구 한 건 잘못이
아니라니 그럼 제게 한 차례만 맞으시든지요."
"허허 이놈 보아라. 네가 맞은 연유란 바로 이렇다. 네놈의 입으루 말하듯이 너희는 가난
한 양민인데, 관가의 침학으루 할 수 없어 도적이 되었다지 않았느냐?"
"그러우."
"그러하면 너희와 똑같은 처지인 탑고개 광대들을 죽이고 불을 지르겠다는 말이 잘못이
냐, 잘한 일이냐?"
"그건... 잘못이구려."
하고 나서 갑송이가 투덜댔다.
"하오나, 그놈들이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면 그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내가 사람을 보낼 테니 탑고개에 정착하는 일은 염려 놓아라. 그리고 마두령이라구 했
나? 너희는 도둑질을 하되 작은 장사치의 봇짐이나 가난한 백성의 것은 털지 말고, 탑학한
부자와 더러운 관리의 재물을 털어 그 절반은 내게 바치도록 하여라. 이 구월산에서는 중생
의 고를 모르는 것들은 살 자격이 없느니라."
갑송이가 더욱 두 눈이 커졌다.
"아니... 도적질한 물건을 중이 먹자니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군. 이제 보니 복색만 스님
이지 우리네와 사촌지간이구려."
풍열은 껄걸 웃었다.
"불신은 곧 중생이니, 우리 부처님께서 너희 도적질한 재물을 받을 것이니라. 그 재물은
포학한 과리와 그릇된 부자들의 것이지만, 가난한 백성들 가운데서 도적질하거나 빼앗은 물
건이니 부처님 뜻대루 돌려주어야만 ㄴㅏ다. 그렇게 하겠다면 모르되, 안 그런다면 내 곧 월
정사의 승병을 일으켜서 너희 된목이골을 치겠다."
감동이가 말하였다.
"우리두 그저 무도한 도적이 되기는 원치 않는 바이옵니다. 녹림패라면 의협이 있어야 한
다는 생각으루 패를 지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겠다는 의논은 벌써 정해졌습
니다."
"음, 좋은 일이다. 전부터 빈민구제를 해오는 비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시키도록 하면 편
이할 것이다."
갑송이는 아직도 골치가 지끈거리는지 제 골통을 손가락으로 눌러대면서 중얼거렸다.
"거 무엇으루 때렸길래 혼절을 했었누. 기운 다 사그라지는 모양일세."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기운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오뉴월
폭풍이 분다고 풀잎이 꺾어지더냐. 힘과 움직임은 매 일각에 따라서 적절히 변하는 것이다.
내 너를 기절시키는 데이 검지손가락 하나로 창호지를 뚫는 힘을 보태어 살짝 밀었을 뿐이
다."
"저두 그런 것 좀 가르쳐주시우."
"먼저 사람을 활인 해내는 법을 아렴ㄴ 사람의 사법두 알게 되는 것인데, 너는 아직 활인
할 생각이 없는 놈이니 사람 목숨의 중함을 먼저 깨우쳐야겠다."
곁에서 묵상을 하듯 꼿꼿이 앉아서 듣고만 있던 옥녀가 풍열스님을 향하여 물었다.
"스님, 아까 이 사람과 소승이 대련을 할 적에 어찌하여 제가 졌다구 말씀하셨습니까?"
"음, 너는 삼 년 동안이나 여기서 무예를 익혔다. 내가 보았을 적에 갑송이는 병장기 한번
잡아보지 않은 천래의 역사일 뿐이었다. 허나 그 무예의 자질에 있어서 옥여는 갑송이를 당
할 수 없더구나. 갑송이는 막는 것과 찌르는 것 모든 동작이 몸에 붙어 있어서 마치 손가락
이 가까이 가면 저절로 감겨지는 눈꺼풀과 같고 물 것이 깨물면 날아가 때리는 손바닥과 같
더구나. 옥녀가 오히려 그의 힘을 이용하여 한번만 공격했으면 이겼을 것이다. 공격과 방어
가 거듭되니 갑송이는 그 가락을 몸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하니 옥여 네가 진 것이 아니
냐?"
옥여는 머리를 숙였고, 풍열이 갑송이에게 물었다.
"너같이 우악스런 사내가 어찌 음률을 아는 듯하니, 춤을 출 줄 아느냐?"
갑송이는 겸연쩍어져서 뒤통수를 긁었다.
"헤헤, 실은 저는 근두자올시다."
"그런 줄 알았다."
풍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송이가 문득 입맛을 다시면서 중얼거렸다.
"제길헐 컬컬해 죽겄네! 거 절엔 탁배기두 한잔 없나?"
"저 아래 거사마을에 가서 한잔 얻어먹구 가려무나."
마감동이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하였다.
"저희들은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갑송이도 덩달아 일어났다.
"스님, 좋은 말씀 많이 배웠수."
"자주 놀러 오너라. 된목이골이면 봉우리 하나 사이니까."
갑송이와 감동이는 옥여스님을 따라서 월정사 아래 계곡에 자리잡은 사당마을로 내려갔
다. 귀틀집 칠팔 채가 있는 사당마을에는 해끔하게 생긴 계집들이 산골 아낙답지 않게 고운
화장을 하고서 얹은 머리 위에는 색댕기를 매고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옥여를 본 사당들
은 공손히 허리 굽혀 합장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스님, 평안하십니까?"
"어, 자네네 혹시 곡차 담은 것 없는가?"
"예, 어서 들어오셔요."
"모가비는 어디 갔나?"
"제가 불러다 드릴게요. 웬분들이신가요?"
사당은 옥여의 뒤에 섰는 갑송이와 감동이께로 연신 추파를 던지면서 물었다. 옥여는 빙
그레 웃고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왜, 정분이라두 맺으려나?"
"혹시 또 압니까요. 좋은 연분이 닿을지... 어서들 올라가 계셔요. 제가 술을 걸러 올리지
요. 제 동무들을 불러올까요?"
갑송이가 계집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우악스럽게 말하였다.
"술이나 빨리 가져와라. 너희들과 노닥거리러 온 게 아니여."
"에이그, 참 뚝뚝도 하셔라. 곁에서 술을 쳐드려야지, 사내들끼리 앉아 안주도 변변치 않
은 터에 술맛이 나시겠나요?"
"어, 그년 말두 많어. 어서 술독째 내오너라."
갑송이의 무뚝뚝한 말투에 찔끔한 사당이 부엌 쪽으로 내빼버렸고 옥여가 감동이와 말을
주고받았다.
"이서방이 승려두 아닌 터에, 계집 보기를 원수같이 아는구려."
"원수같이 아는 게 아니라 저렇게 생겨먹었으니 똥 뀐 놈이 화낸다구, 지레 피하는 겁지
요."
갑동이의 농을 듣고 갑송이는 토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아우처럼 옴 오른 낯짝은 아니어. 계집 생각이 나거든 안방에 가서 지분거리구 오지 그
래."
'성님이 내 해우채 좀 내줄라우?"
"내가 어디 기둥서방인 줄 알아. 네 오입값을 내주게."
그들은 농지거리를 하면서 토방에 둘러앉아 있었다. 모가비 임가라는 자가 뒤에 거사 두
엇을 거느리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ㅣ가의 머리는 상투잡이였으나 승복에다 염주까지 걸
고 있었다.
"스님이 여긴 웬일이시우?"
"아, 절에 손님이 오셔서 곡차나 대접하자구 이리 모셔왔네."
"그러시면 저희 집으루 모시지요."
"아무려면 어떤가. 술이 있으면 되었지."
모가비 뒤에 따라왔던 거사가 말하였다.
"아 그러믄요, 편히들 기십시오. 여긴 우리 집입니다."
"백련이 짝이 자네든가?"
"예, 그리구 홍도두 여기 있습죠. 어찌... 불러다 술시중 들라구 할까요?"
옥여는 그들은 손짓해서 올라오도록 하였다.
"아닐세, 올라들 와서 세상 얘기나 좀 듣지."
"어유, 저희들이 뭘 안다구 세상 얘깁니까."
"자네들은 전국에 안 가본 데가 없으니 얘깃거리두 많겠지. 앉아서 얘기들이나 허지."
그들은 못 이기는 체 토방으로 들어섰다.
"심심허니 애기나 해보라니까."
"원 참 옥여스님두, 무슨 얘깃거리가 있다구 늘 만날 적마다 그러십니까?"
하며 모가비 임가가 말하자, 거사 하나도 사양한다.
"우리네가 지껄여봤자 음담패설입지요."
갑송이와 감동이는 묵묵히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어넣었는데, 옥여는 놓인 술잔에 입도
대지 않고 그들에게 얘기만을 독촉하였다.
"그럼 지난 가을에 우리 행중에서 실지루 있었던 일 하나를 말씀드릴까요?"
"그래 해보게나."
"우리가 한양 올라갔을 적이지요. 남촌 초동의 어느 마당에다 놀이판을 벌여놓고 한판 벌
이는 참이었지요. 웬 이목이 수려한 미동자 하나이 구경을 하는데, 놀이가 다 끝나구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갈 생각을 않는 것이었습니다그려. 우리가 하두 이상히 여겨서 물었지
요.
여보 총각, 어째서 갈 줄도 모르고 거기 서 있소? 집을 모르면 우리가 데리다 드리리다.
했는데도 그 총각은 여전히 꼼짝도 않고서,
나 같은 사람이 집에 간들 무엇하오.
하며 대답할 뿐이었지요. 제가 거동을 보고는 저렇게 잘생긴 미동은 구하기 어려우니 잘 꾀
어다가 행중에 넣어 무동을 시키면 벌이도 좋으리라 생각했었지요. 그래서는,
얘야, 네 성명이 무엇이며 네가 집에 가도 별 재미가 없다니 우리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노래나 부르고 산천경개나 구경하면 어떠냐?
하니까 그 소년은 즉시 응낙하더군입쇼. 그래서 제가 그 소년에게 기예를 가르쳐주니 위인
이 영리하여 동료들의 뜻을 잘 받아주고 재주를 금방 익혀서 우리 행중의 사랑을 받았습니
다. 그러니까 그것이 지나간 봄의 일입지요. 해서 그애는 우리 사당 아이들보다도 더욱 돈벌
이에 요긴하였소이다. 절에서 가져간 부적도 잘 팔릴뿐더러 아이들이 몸을 팔지 않아도 제
법 벌이가 되었지요. 이것이 모두 그 무동이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무동이의소문이 향촌
에 널리 퍼져 있어 모두들 그 애를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헌데 한가지 이상한 일은 다른
때엔 그렇지 않다가도 밤 되어서 잘 때만 되면 언제든지 여러 사람들과 같이 자질 않고 으
레 문을 꼭 잠그고 혼자 기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괴이하게 여겨서 여러번 그러지 말라
구 타일러도, 다른 일에는 거역하는 일이 없다가 그 일만은 듣질 않았지요. 정 그렇다면 행
중을 떠나겠다구 그러잖습니까. 우리네 함께 다니며 가락이나 맞춰주는 거사들은 모두 제
사당이 있는지라, 내 생각하기를 저놈은 아직 어린 소년이지만 음양의 화합을 이루지 못하
여 애를 태우는가 하여 우리네 애사당과 짝을 맞춰주기루 했습니요. 그애가 바루 도화라는
아이입니다. 이 사람 집에 같이 살구 있지요. 제가 오 년 전에 원주서 흉년 든 농가에서 다
섯 냥에 사들인 계집아이였습니다. 스님께선 꾸짖으시겠지만 기왕지사 헐벗고 굶주려 죽게
된 집안에 사느니, 저희 부모도 구명시키고 저도 우리 틈에 끼이면 비록 몸은 천하나 밥을
주리는 일이 없으니 잘된 일 아니겠습니까. 하여튼지 이년이 그때에는 늘상 제 부모가 자기
를 팔았다 하여 포한을 품고서 놀이판에 나서서 곱게 노래는 하여도 절대로 웃는 법이 없었
습니다. 그러니 저희들께는 아주 밉상이었습죠. 그렇게 웃지두 않던 도화가 버들쇠 소년이
행중에 들어온 뒤부터는 언제든지 웃음을 띠고 그 앞을 떠나기 실허하며 흔히 은근한 말로
속삭일 적두 있구 애달픈 표정으로 바라볼 때두 있었지요. 헌데 짝을 맞추어주었는데도 역
시 그 녀석은 도화라는 년을 버리구 저 혼자 풀밭이나 헛간에서 잠을 잔단 말입니다. 우리
들두 은근히 궁긍하여 버들쇠 총각과 도화가 어떻게 되는가 지켜봤습니다. 허허 가을이 다
되도록 아무 변화가 없습디다.
그러니까 그것이 지난 추석이었던가요? 경기도 어름에서 썰렁한 추석밤을 새우는데 나중
에 알았지만 이년이 버들쇠의 곁으로 파고든 모양입니다. 헌데 이 녀석이 자꾸 돌아눕기만
하니 도화도 아무리 사모는 하지만 여자의 오기가 있는 터에 너무 사내를 밝힐 수야 있겠습
니까. 그래 하염없이 울고 앉았으니까 우리 거사 하나가 그 울음소리에 잠이 깨어서는 슬쩍
일러주었지요. 사내란 술을 마시면 계집 생각이 나는 법이니 몰래 술을 먹이구 정을 맺도록
하라구 말입니다.
자, 이 지경이니 아무리 애사당이라지만, 사내가 많은 철광산이나 저자에 나가면 계집이
모자라는 터에 한 년이라두 아쉬운데, 이년이 해우채를 벌 생각을 해야 말이죠. 추석 이튿날
은 달도 밝았고 음식도 푸짐하여 놀이판이 아주 흥청댔지요. 달 밝은 상당산성에서 두견새
가 울어예는데 참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처량해지는 밤이었지요.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
도화가 그날 밤에 단단한 결심을 했던 모양입디다. 둘이 숲속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데, 어린
것들이라 그 정경이 더욱 아기자기했지요. 우리들두 그날 밤에 성사가 되지ㅏ않으면 버들쇠
놈을 쫓아 낼 작정이었거든요. 도화와 버들쇠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다가 서로 울기도 하
고 웃기도 하다가 어느덧 술이 만취가 되었죠. 헌데 술자리가 치워지자마자 버들쇠놈은 전
처럼 헛간으루 들어가더니 역시 고리를 딱 걸어 잠그었단 말입니다. 도화가 정말 노했지요.
제아무리 철석 간장일망정 이럴 수야 있겠는가 하고, 저 사람이 여자라 한다면 수염자리가
보일 리 없고, 남자로서 자기 애타는 심정을 몰라준다면 차라리 죽여 미련을 끊음만 같지
못하다며 살기등등했지요.
결심한 도화가 행중에서 쓰는 큰 칼로 버들쇠가 자는 방문을 곁쇠질 하여 열고 들어가보
니, 서창의 달빛이 낮같이 환한 방안에 홀로 누운 버들쇠가 술에 취하여 사람 들어오는 것
도 모르고 곤히 잠들었고, 베갯머리는 눈물로 젖어 있더랍니다. 도화가 염치 가리지 않고 버
들쇠의 곁에 달려들어 허리띠를 끄른 다음 그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지요. 어, 이게 웬일이
란 말입니까. 지금까지 미소년인 줄로만 생각했던 것도 한바탕 꿈이요, 도화는 허전한 마음
으로 손을 꺼냈다는 것입니다. 있을 것이 잡히지는 않으나 버들쇠는 분명히 소년이었습니다
그려. 도화는 비로소 버들쇠가 혼자서 잠자리를 버티는 이유를 알았습죠. 도화는 봄부터 버
들쇠를 사모했던 정회가 이렇듯 허무하게 끝난 것도 야속하거니와 버들쇠의 처지가 불쌍해
졌지요. 그래서 도화는 다시 밖으로 나가 칼을 더욱 날카롭게 갈아서 방으로 들어갔지요.
이 한 칼로 내 팔자는 정해진다. 버들쇠가 죽어지면 나도 살인한 죄로 따라서 죽을 것이
요, 천만다행히도 그가 완전한 사내로 되어진다면 내 소원을 그밖에 다시 없다.
라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도화는 버들쇠 총각의 바지를 헤쳐 내려놓고 불룩한 살주머니를 사정없이 죽 쨌단 말입니
다. 버들쇠가 놀라서 저를 죽이려는가 하여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잠이 깼습니
다. 도화는 버들쇠가 고함을 지르거나 말거나 계속 째어보니 피가 낭자한 가운데 살 속에서
사내의 것이 튀어나와 있더란 말입니다. 버들쇠는 벌떡 일어나 흘러내린 피를 씻을 사이도
없이 도화를 껴안았지요.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요. 도화와 버들
쇠는 서로 껴안고 웁디다. 평생을 불구자로 보낼 줄 알았던 버들쇠도 감격했던 것입지요. 도
화가 반 울며 웃으며 하는 말이,
그런 까닭으로 쌀살하게 구는 것을 모르고 내가 사내들게 몸을 팔아 더럽게 여기는 줄 알
았어요. 당신을 몰인정한 사람으로만 알고서 죽일 작정으로 문을 부수고 칼을 들고 들어왔
건만...
이튿날 행중이 길을 떠나는데 두 사람의 거동을 보니 애틋하고 살뜰하여 젊은 것이 부럽
습디다. 헌데 이것들이 정을 알고 새내 계집의 재미를 알게 되니 머물러 사는 세간의 생활
이 그리워지지 않을 리가 있겠소이까. 나는 짐짓 모르는 척해두었건만 아마도 달아날 생가
가을 하구 있는 게 틀림없습디다. 실은 저두 어렸을 적에 애사당과 정분이 나서 둘이 도망
쳤던 적이 있었지요. 허지만 우리 거사패와 사당이란 것들은 팔자에 역마살이 진동하여 양
민의 생활을 이룰 수가 없지요. 한 두어 달만 정착해보면 좀이 쑤시고 갑갑하며 견딜 수가
없게 되어 훌쩍 떠나게 되지요. 계집은 계집대로 다른 사내와 눈이 맞거나 여하튼지 역마살
과 도화살을 면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날부터 도화와 버들쇠는 의논을 했던 모양입디다.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난 탓으로 이 몹쓸 구렁창에 빠졌으나 당신은 아마 몸이 불구임에 상
심이 되어 이런 패거리에 빠졌군요. 이제는 정로를 밟아 다시 살으셔야죠.
저 구렁이 같은 모가비가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데, 언제 어디로 빠져나간단 말요.
하, 이렇게 의논들을 했답디다. 버들쇠는 알고 보니 양반댁 도령이었지요. 즉 사대부댁 외
아들이었다 그것입니다.
우리 부모가 나를 퍽 귀엽게 여기시면서도 한편으로 늘 섭섭하게 한숨 지으시는 것을 보
았지만, 어려서는 몰랐다가 십오세가 넘으면서 부모의 뜻을 확실히 알게 되었지. 그래서 나
도 병신 된 한스러움이 날로 깊어져 공부를 하려 새도 머리에 들지 않고 멍하니 섰거나 이
것을 잊으려고 놀기만 했었소.
라구 얘기를 하더랍니다.
부모님들도 내 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는데, 그날 사당패가 초동 집 근처에서 판을 벌였기
에 구경을 갔다가 도화의 거동과 노래에 그만 정신을 잃어서 멍하니 서 있었지. 모가비가
가자 하여 깊이 생각지 않고 서슴없이 따라 나섰던 것이외다. 실상은 도화를 따라 나선 것
이었지, 그 뒤 도화의 눈치를 짐작은 하였으나 그럴수록 내 병신 된 것을 감추려고 쌀쌀히
굴었던 것이오.
나중에야 이들이 빠져나갈 계획을 했던 것을 알았지요. 양반의 아들인 버들쇠와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습니다. 우리가 광주서 송파를 휘둘러보고 있던 어느난 두사람은 우리의 눈을
피하여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들은 사람을 앓으면 각 향시를 떠도는 무리들
게 통문을 보냅니다. 행중에서 발을 뽑겠다면 누가 안 놓아줄까봐서 밤을 타구 달아나버렸
단 말입니까. 해서를 골짜기마다 돌고 보니 곧 겨울입디다. 그래서 월정사루 들어왔는데, 그
도화란 년이 먼저 와서 기다리구 있었다 그겁니다. 그래 일부러 매도 때리지 않고 뭣 때문
에 도로 왔느냐구 살살 캐물으니까, 다음을 기약하구 헤어졌다는데 필시 버림을 받았던 모
양입디다. 우리네가 겪어봐서 알지만 정분의 맛을 본 사당은 이미 장사에는 소용이 없습니
다. 내쫓았지요. 이제 너는 우리 행중과 아무 관계가 없느니 떠나가서 네 마음대로 살아라
하구 말입지요. 허 그랬더니 도화란 년이 울음을 터뜨리며 말하기를 그 양반댁 아들이란 총
각은 이미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총각이 죽게 된 얘기는 바로 이렇습니다.
초동의 유승지 댁으로 두 사람은 찾아갔었더랍니다. 유 총각이 없어진 뒤에 승지댁에서는
그가 병신 된 것이 한이 되어 물에라두 빠져 죽었으나 싶어 한강에서 토정이까지 다섯 줄기
를 샅샅이 훑어보아도 전혀 자취두 없더라지요. 할 수 없이 지면 있는 자가 지방관으루 내
려가면 수소문하여 알아달라고 부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병신된 것으로 하여 더
욱 애처로운 아들은 집으로 돌아오질 않았으니, 유승지는 양자를 들이게 되었답니다. 총각과
동갑이며 그에 못지않은 미남자에다 글도 열심히 읽는 시골 선비의 막내아들을 양자로 들여
놓았고, 그해 식년시에는 과거도 보여 초시를 따고 이어서 홍패까지 받았답니다. 유승지는
가내에 엄명하여 버들쇠 총각이 행방을 감춘 사실을 절대 함구하도록 하고서, 양자를 버들
쇠 총각으로 못박아 바깥 사람들이 눈치 체지 못하도록 했다지요. 이제는 과거에도 나아갔
고 또한 남자의 구실을 하여 대도 이을 수 있는 아들이 생겼으니 승지댁은 전화위복이 된
것입지요. 헌데 이렇게 모든 일이 정해진 다음에 사라졌던 총각이 이상한 꼬락서니로 나타
났단 말입니다.
양반의 아들이 유랑 광대패가 되어 가무를 팔아왔고, 게다가 창녀 애사당까지 달고 돌아
왔으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승지댁에서는 모처럼 고생 끝에 돌아온 아들
을 바깥사람에 모물도록 하고 안데는 들이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승지는 그의 부인이 알게
되면 일에 지장이 있을까 하여 안채에 알려지지 못하도록 하인들 단속을 단단히 해놓았지
요. 그날 밤에 힘깨나 쓰는 하인 네뎃 명이 사랑을 덮쳤답니다. 그들은 불문곡직 버들쇠와도
화를 자루 속에 넣고 밧줄로 꽁꽁 묶은 다음에 밖으로 떠메고 나갔지요. 이제는 그가 돌아
온 것이 바로 양반댁의 환난이 되어버린 것이었습죠. 원래 유승지의 지시는 마포에 내다 버
리라 하였으나 그중에 유총각을 동정하는 노비가 있어서 삼개쯤 가서 풀어주며 멀리 떠나라
고 권고하더랍니다. 도화는 다시 행중에 돌아가자 하였으나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양반댁 도
령이 어디루 가겠습니까. 도화가 잠든 틈을 타서 그자는 강에 투신하구 말았습죠. 사당년들
이란 아무리 나이가 어려두 사는 게 모질다는 걸 아는지라 아주 독합지요. 도화는 강에서
버들쇠의 시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답니다. 서강에서 시체가 떴다지요. 도화는 동작나루에
있는 아는 사당패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여 소년의 시체를 수습하였답니다. 이렇게 기담 비
슷하게 지껄이기에는 참으로 가슴아픈 얘깁지요. 네, 우리 아이들은 별의별 일을 다 겪은 것
들입니다."
그 애처로운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옥여는 여러번 한숨을 내쉬었고, 감동이는 눈시울이
그렁그렁해졌으며 무뚝뚝한 갑송이도 연신 헛기침을 했었다. 갑송이는 타관에서 노숙하던
밤의 쓸쓸함을 잘 알고 있던 광대였으므로, 더욱 도화와 버들쇠의 얘기가 가련하게 들렸던
것이었다. 옥여스님이 입을 떼었다.
"그래 그 도화라는 아이가 지금도 여기 있다는 말인가?"
모가비 임가는 머리를 조아렸다.
"예, 그러하옵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도화는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버렸지요. 저러다가
는 아예 밥사당이 되어벌릴 모양입니다."
"짝을 맞춰주지 그러나?"
"마음이 잡히지 않았습죠. 이 겨울이 지나 다시 출행하게 되면 좀 달라지겠지요."
마감동이가 불쑥 물었다.
"도화가 그런 마음씨라면 얼굴은 제법 절색이오?"
임가가 빙그레 웃었다.
"절색 아닌 사당이 있답디까? 몸이 천하여 그렇제 생기기는 모두 나라님 뒷궁 마마님들
뺨을 치게 생겨먹었지요."
"내 중신 좀 서리까?"
마감동이의 말에 모가비 임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중신이라뇨?"
"우리들 중에 총각이 많으니 서로 인연을 맺게 하자 그 말이지."
"아아, 좋지요. 우리 패거리하구두 어슥만하니 서루 지체두 떨어질게 없겠습지요."
지체가 거의 같단 말에 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갑송이가 은근히 궁금해
졌던지 감동이의 무릎을 꾹 찔렀다.
"누구게 중신을 선다구 그래?"
"누구긴 누구여... 바루 우리 성님이지."
"내게..."
하며 눈을 휘둥그래 떴던 갑송이가 씩 웃었다.
"이 자식아 내는 고자여. 여자라면 천성이 아주 뱀처럼 여기는 사람이란 말이여."
"거참 알맞은 연분이네요. 도화는 아마 고자하구 맞도록 돼 있는갑네."
임가 까지 농을 치자 갑송이는 얼굴이 시뻘개졌다.
"망할 놈 같으니... 제놈이 장가들구 싶으니까, 공연히 나를 부추기구 지랄이네."
했으나 갑송이는 그리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임가도 그것을 아는지라 슬쩍 말을 내어보았
다.
"첨 뵙는 분께 실례올시다마는, 생각이 있으시면 작수성례를 주선해 보오리다. 가끔가끔씩
월정사에 들르시지요. 지금 당장이라두 도화년을 데려와 상머리에 앉힐 수가 있지만 덧들이
는 것보다는 은근히 정을 들게 해야 될 듯합니다."
"거 이사람두 별소릴 다 하눈."
어쨌든 사당마을에 내려온 감동이에게는 새로운 일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마감동이는
도화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쩐지 갑송이의 우직하고 순박한 성미에 도화의 슬픈 그늘이 걷혀
질 듯한 느낌을 가졌었다. 갑송이도 도화를 한번 보고 싶었으나 총각다운 수줍음으로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옥여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어섰다. 이튿날 탑
고개로 이사를 할 일이 바쁜지라 두 사람은 옥여의 만류를 마다하고 된목이골로 향했다. 갑
송이는 아직 모르는 도화의 흰 얼굴이 어렴풋이 눈에 삼삼하였다.
3
산채에 머물러 기다리던 광대들은 은율 탑고개로 이사를 갔는데, 이미 월정사 쪽의 전갈
을 받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나서서 우선 집을 세울 동안 기거할 움막을 파는 일을 돕기로
하였다. 노인과 아녀자들이 지낼 집 한채를 비워주기도 하였으니, 이제는 외래자로 생각하지
는 않는 듯싶었다. 이사를 한 뒤에도 갑송이는 산채를 떠나려 하지 않았는데, 드디어 광대
짓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었다. 길산이에 관한 소식이 궁금하여 당장이라도 해주로 떠나고
싶었고 박대근이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단단히 다짐받은 말도 있어서 무료하게 산채에서 뒹굴거나, 옥여를 만나러 월정사
를 들렀다가 탑고개 나한암 동네로 가서 자고 오고는 하였다. 다행히도 이사 무렵부터 날
씨가 풀려서 엉성한 대로 바람을 막을 만한 귀틀잡이 여러 채 섰다. 하루는 탑고개서 자고
된목이골 산채에 오르니 마감동이가 몹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째 죽 먹은 시어미 상판대기냐."
"아무래두 마음이 안 놓이네. 성님은 그자를 믿우?"
"그자라니 누구 말여?"
"누구긴 누구겠소. 김가인가 하는 책상물림 말이지."
갑송이는 어쩐지 가슴이 철렁하여 눈을 휘둥그래 떴다.
"아니 김기가 뭘 저질렀나?"
"슬쩍 없어져 버렸소."
감동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두 달아난 것 같우. 큰일인걸... 산채를 훤히 알구 있으니, 관에 찔러바치면 우리
는 몰이사냥을 당할 게유."
"아뭇소리 없이 꺼졌단 말야?"
"그런 건 아니지만..."
하고 나서 감동이는 얘기했다. 갑송이가 탑고개로 내려간 뒤에 김기가 의관을 차리고서 마
감동의 방으로 찾아왔더라는 것이었다. 봉산엘 다녀오겠다는 것인데, 이유를 물으니 아무래
도 노모가 걱정되어 밤마다 잠이 오질 않는다는 얘기였다. 구것은 아마도 갑송이가 제 모친
을 업고 탑고개로 이사시키던 광경을 보고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졸개 하나에 상목을 짊어지워서 따라붙였수."
"뭐 걱정할 일인가. 제몸이 편해지면 우선 부모의 생각이 나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글쎄 그건 맞는 얘기유. 헌데 어떤 생각이었는지 따라간 졸개놈을 따돌려버렸단 말이외
다."
"따돌리다니..."
"그 바보 같은 녀석이 배고개에서 안악으로 내려가다가 김기를 잃어 버리구 방금 되돌아
왔거든. 도중에서 쉬어 가자더래요. 그래서 쉬고 앉았으려니 그자가 목이 마르다며 물을 떠
달라구 그러더라지. 이 녀석이 표주박을 꺼내들고 비탈 아래를 내려갔다가 올라가보니까 상
목두 없어지구 김기두 자취가 없더라데. 부근을 한참 해매다가 하는 수 없이 되돌아왔다지.
그래서 어찌할까를 몰라서 망설이는 중이우."
"전에 약조했던 바를 아우가 지켰나?"
갑송이는 문득 김기가 산채에 들어올 때 집안의 안돈 문제를 걱정했었고, 마감동이가 한
기백 냥 봉산으로 보내겠다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감동이는 몹시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우선 다른 일로 정신이 없었고, 아니 제깟 것이 무엇인데 다같이 숨어 사는 처지에 그런
거액을 요구한단 말요."
갑송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애초에 김기를 만나 이리루 데려올 적에 집안 얘기를 듣고서 딱하기는 하면서
도, 한편 아우께는 몹시 미안하데. 그러나 돈은 그가 먼저 달란 얘기는 없었잖나. 오히려 아
우가 반갑고 사람 만난 기분에 선뜻 그렇게 맞장구를 쳤을 뿐이지. 섭섭하고 기대에 어긋나
서 되돌아설 수도 있는 일이지."
"되돌아선다는 데 문제가 있소. 놈이 어쩌면 관가에 발고를 할지도 모른단 말유."
갑송이도 침울하게 생각에 잠겼다가 벌떡 일어났다.
"자네 갓하구 도포 좀 내주게."
"어쩌시게..."
"뒤를 밟아야지. 내가 어느 집인가는 몰라두 동네는 알구 있어. 수소문하면 단번에 알아낼
게야. 눈치를 보아서 정 발을 뽑을 생각이라면..."
"어쩌겠수?"
"없애버려야지."
"김기는 원래 궁량이 깊은 사람이니 벌써 그럴 줄을 알구, 그물을 쳐놓지 않았을까?"
"음, 그럴지두 모르지..."
감동이의 말을 듣고 나니까 갑송이도 조바심과 울화가 단번에 치밀어서 김기가 보이기만
하여도 즉시로 박살을 내어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감동이가 말하였다.
"좌우간에 우리 산채를 알고 있는 자를 살려둘 수는 없수."
"내가 해치우고 오지. 처음부터 내 잘못이었으니..."
"책상물림들은 우리하구 종자가 틀려서 의리보다는 이해가 앞서는 자들이우, 그러니 평생
을 글이나 읽구 보내지."
"내가 그만 워낙에 무식하여... 일이 경솔히 되었구먼."
감동이가 안에서 갓과 도포를 내주면서 말하였다.
"성님, 가겠으면 혼자 가지 말구 만석이를 데려가우."
"에이, 봉산 가면 다 아는 이들이 있는데 만석이 데려가면 귀찮기만 허지."
"가시는 길에 말동무라두 삼으시구려."
"필요없어, 거 두 뼘짜리 단검이나 한자루 내줘. 안 가겠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목을 뎅
겅 베어서 차구 올 테니까."
갑송이는 비수를 가슴에 품고서 된목이골을 나섰다. 산을 타지 않고 곧장 부처고개로 내
려와 안악 가는 큰길로 들어섰다. 한내를 건너는데 일단의 군사들이 지나는 사람들을 기찰
하고 있었다. 그쪽을 피하여 다시 산길을 타고 가자니 실토봉 길을 오를 일이 아득하였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갑송이 나름으로 꾀를 낸 것이 바로 기찰포교의 행세였다. 살피자니
군사들의 몇몇이 길 아래 화톳불을 피워놓고서 주위에 둘러앉은 것이 보였다. 남은 서너 명
이 행인들의 봇짐과 몸을 뒤짐하는 중이었다. 갑송이는 그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대뜸
불가에 모여 웅크린 포도 군사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놈들! 모두 이리루 올라오너라."
무턱대고 고래 고함을 질러놓았는데 포졸들은 갑작스런 호통소리에 멍한 표정들이었다.
"뭣들 하구 있느냐. 냉큼 올라오지 못할까?"
그들은 아직도 납득이 안 가는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
고는 다시 쑤군거렸다. 그중 용기가 있어 뵘직한 자가 우물쭈물 물었다.
"나리는 뉘십니까?"
"어허, 이놈들 아주... 바닷가 똥강아지 호랑이 몰라보듯 하는고나. 너희들이 왜 여기에 나
와 있는고?"
"예, 보시다시피 행인을 기찰중입니다. 구월산 일대에 화적떼가 발호하여 일전에는 문화
고을이 기습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감영에서 나온 기찰포교다. 구월산 일대를 정탐하는 중인데 너희는 도적을 잡아야
할 놈들이 불가에서 애녀석처럼 불알이나 굽고 있으니 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곤장을
좀 때려주고 가리라."
버젓하고 점잖게 꾸짖으니 포졸들은 모두 송구하여 코를 쭉 빼고 둘러서 있었다. 다른 자
가 숙인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서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저희들두 처음에는 부처고갯목을 열심히 지키면서 오가는 자들을 살폈으나, 며칠 되
고 보니 끼니도 거르고 교대도 되지 않는 터에 날씨는 추워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
다. 가엾이 여기시고 이번만은 덮어주십시오."
갑송이도 그들의 홑것 더그래 자락을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냥 지나갈까 하였으나
또한 그렇게 하기도 난처하였다. 의심을 받겠기 때문이었다. 아주 기를 죽여놓지 않으면 혹
시 댁이 어느 고을 무슨 직함에 있느냐고 꼬치꼬치 물어올지도 몰랐다.
"이놈들 안되겠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너희 사또 어른을 대신하여 곤장을 때리구 가리라.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려라."
갑송이의 추상 같은 재촉에 포도 군사들은 우물쭈물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는 갑송이
가 창대를 들어 거꾸로 잡고서 궁둥이를 호되게 몇차례씩 두들겨주었다.
"군율이 해이한 놈들에게는 매가 약이니라."
군사들을 잔뜩 겁을 주고서 갑송이는 휘적휘적 안악길로 나아갔다. 안악 읍내로 들어가지
않고 들길을 지나쳐 월호산 봉수대 옆을 지나 월당강이 가로막은 지진나루로 나아갔다. 구
월산록은 안악에서 끝나 있으므로 나루에는 진별장과 포졸 네댓 명이 지키고 있을 뿐이엇
다. 어쨌든 구월산 사방의 군읍에서는 도적들이 내려올 만한 길목을 철통같이 막고 있는 모
양이었다. 나루를 건너 봉산까지 사십 리를 걷는 사이에 날이 저물었는데, 워낙 된목이골서
늦게 출발했던 탓이었다. 읍내 쇠전거리로 들어가 기웃거리는데 코가 납작하고 광대뼈가 유
난히 튀어나온 불량하게 생긴 자가 마주 지나치다가 아는 체를 하였다.
"아이구 이거, 갑송이 성님 아뉴?"
갑송이는 얼결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누군가?"
"누구긴... 나 만동이요. 아따 봉산 만동이 형제를 잊으셨수?"
"쉬잇... 어디 사처라두 우선 정하구 들어가 얘기하세."
"원 성님이 그 어울리지 않는 복색에 사처까지 찾아 구색을 갖추시니, 저는 나귀라두 대
령해야 되겠소이다."
"그런 게 아냐."
"걱정 마십시오. 우리두 재인말이 폐촌되구 길산이 성님이 감영 옥에서 돌아가셨단 소문
을 알구 있습니다. 저희 집으루 가십시다."
만동이는 그 아우 천동이와 더불어 봉산 쇠전거리에서 잔뼈가 굵은 이름난 불량배였다.
봉산 저자를 드나드는 장사치들치고 그들 형제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일찍이 길산이와 갑송이는 그들 패거리와 싸움 재주를 겨룬 적이 있었다. 갑송이는 하릴없
이 주막 봉놋방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기찰에 걸려들기보다는 만동이네서 묵는 게 나을 성싶
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갑송이가 인사조의 말을 던졌다.
"천둥이두 잘 있나?"
"그 녀석은 요새 평안도에 가 있습니다."
"평안도엔 뭣하러?"
"예, 잠채잡이를 하러 다닙니다."
"자네는 왜 여기 있나?"
"아우가 애들을 데리고 나가서 산을 파서 재물을 얻는데, 저는 여기 봉산 저자에 남아 장
사를 해야 되지 않겠소이까."
"백정 노릇은 안하는가?"
"그따위 일은 해서 뮛합니까. 저자에서는 우리가 화척이었음을 아는 자가 이젠 별루 없지
요. 우리는 그래두 사민 중의 세 번째인 공입니다요."
"느이 형제가 그렇다면 나는 두번째 농이다."
갑송이의 말을 듣자 만동이는 낄낄대며 웃었다.
"에이 성님네들야 사민 중에두 없는 도가 아닙니까."
"이 녀석아 혓바닥 간수 좀 해라. 도는 그중 으뜸이니라. 큰 도는 바로 조정에 있는 벼슬
아치들이고, 따지고 보면 입국하는 호걸들이 모두 도이다."
"헤헷 구월산에서 신주 나겠네요. 나두 충렬 공신으루 한자리 끼워넣어주오."
"농지거리 그만두자. 누가 들으면 큰탈나겠군. 자네 집이 정말 괜찮은가?"
"염려 마우. 우리 집이야 늘 타관에서 오르내리는 잠채꾼들이 들락날락합니다."
만동이네 집에 이르러 보니 제법 덩치가 큰 초가인데 앞채와 뒤채로 나누어져 있었고, 길
에 면한 앞채는 대장간이었다. 토벽으로 세운 도가니 속에 신탄의 불빛이 시뻘겋거, 손풀무
가 세 대나 있었다. 웃통을 벗어붙인 살집 좋은 사내 넷이서 번갈아 쇠를 두드려대고 있었
으며, 아이놈 몇이 둘러않아 풀무질을 해서 도가니의 쇠를 녹이고 있었다. 갑송이가 의아하
여 만동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풀뭇간은 언제 이렇게 이루었나?"
하니까, 만동이가 목소리를 낮추어 갑송이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쇠뿐이 아닙니다. 금두 있습지요. 돌에서 뽑아내려면 제련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난해부터 이렇게 풀뭇간을 세웠지요."
"흐음 취재가 막대하겠느걸."
"일손두 없구 관가의 기찰두 심하여 많이 못하는 것이 한입지요."
"굴은 많이 있는가?"
"각지에 있답니다. 대개 지방 토호들이나 수령들이 나라 모르게 해 먹는데 우리네야 그저
그 찌끼를 줏어온다뿐입지요."
그들은 안채로 들어갔다. 마당에 마구간이 있었는데 짐 벗은 골격 좋은 말들이 줄줄이 매
어져 있었고, 사랑에는 장한들이 칠팔 명 들끊고 있었다. 갑송이가 보기에도 만동이네 형제
는 이제 봉산 저자의 단순한 무뢰배가 아닌 듯하였다.
갑송이는 이러한 처지의 만동이가 어찌해서 자기처럼 세상을 피해야하는 녹림패를 예전의
의리로 대하려는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만동이가 끄는 대로 큰사랑에 마주 앉았
다. 떡벌어진 다담상을 두 계집이 맞들고 들어왔느데 풀뭇간 주인의 밥상으로는 과분한 것
이었다. 갑송이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음식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자네 예전의 만동이가 아니로군."
"예? 성님 그 무슨 말씀이우."
"쇠전거리서 봇짐장수들 뒷덜미나 치던 자가 아니라 이제는 배부른 자가 되었단 말여."
"사람이야 어찌 변하겠습니까. 아직두 길산이 성님이나 갑송이 성님하구의 의리는 잊지
않구 있습니다."
"그걸 누가 믿어... 자네 서투른 수작하는 건 아닐 테지."
술을 따르던 만동이가 잔이 넘치도록 주전자를 기울인 채로 딱하다는 듯이 입맛을 연신
다셨다.
"길산이 성님은 아마 제 심정을 아셨을 겁니다. 성님은 다 좋은데 그놈의 의심하는 버릇
은 아직두 못 버리셨구려."
"의심이 아니야. 풀떼기 먹던 자가 이밥 먹으면 우선 뒷간 다니기가 수월하여지고, 뒷간
다니기가 편해지면 세상살이두 편해지구, 그러면은 관아에 발길이 닿는 법이다. 네 이 고을
아전붙이들 하구두 오삭가삭 하렷다."
만동이는 역시 입맛을 한참이나 다시더니,
"성님 제게두 꾀가 있구, 세상 사는 이치를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성님을 길가에서
만나 반가워한 것은 물론 옛 의리도 의리려니와 제게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소이다. 제 말씀
을 듣고 나서두 의심이 가신다면 당장에 제 집에서 나가셔두 붙들지 않겠소이다."
"그래 무슨 생각이여?"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잠채잡이를 합니다만 노중에 험로를 지나며, 각 곳에 들끊는 좀도
적패에게 바치는 통과세로 거지반 다 빼앗깁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좋은 굴자리가 있더라도
세력 있는 그곳 잡채꾼들과 다투게 되니 수가 적고 약한 저희 아이들은 넘보지도 못하지요.
또한 자금을 들여서 더욱 많이 파낼 수 있으나 돈이 모자랍니다. 헌데 이런 세상에서야 돈
있고 힘있는 놈이 제일인데, 구월산에 기시는 성님들과 통하시니 저희들과 손을 잡으시면
위험을 무릅쓰지 않더라도 취재가 많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두 다 그런 생각으루 그렇지
않아두 구월산에 가서 산속을 헤매서라두 만나뵈려던 참이었지요. 정말 속내를 털어낸 말씀
입니다."
"그런 얘기라면 나는 잘 모르겠네. 내야 아직두 산채에서 더부살이 하는 몸이니까. 여하튼
자네 얘기는 재미있구먼."
"자, 그 얘기는 뒤로 미루고, 길산이 성님은 정말 돌아가셨습니까?"
"아니야, 아직은 무사하시지."
"그러면 산채에 와 계십니까?"
"차차 알게 될 걸세. 길산이만 오게 되면 여러가지루 협조할 일이 많겠지."
"그야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어째 봉산에는 무슨 일루 오셨습니까? 벌이 앞전의 정탐을
나오셨다면 제가 세세히 일러드리리다."
"사람 하나를 잡아 죽이러 왔구먼."
갑송이가 서슴지 않고 말하자 만동이는 목을 움츠렸다.
"어디... 봉산 사람입니까? 힘깨나 쓴다면 제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우리네하군 씨알이 다른 놈일세. 그놈이 책상물림이여."
"어디 산답니까?"
"뭐라더라... 동선령고개 어름에 도림골이라던가?"
"예, 여기서 가깝습니다. 혹시 이름을 아십니까?"
"김기라구 얼굴이 길고 하얗게 생겼는데 훈장질을 했다더군."
"제가 아이들을 시켜서 잡아다 드릴 테니, 성님이 직접 가실 필요두 없습니다."
"아닐세, 그리되면 나중에 소문이 나서 자네가 곤란해질 게야. 그보다는 자네 아이를 하나
보내어 정탐을 시키지. 아무 일이 없으면 나혼자 찾아가서 만나겠네."
"만나서 정말 사람을 죽이시려우?"
"속을 떠봐야지."
만동이가 잠깐 나갔다가 들어오더니 동선령 기슭의 도림골로 사람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저녁을 마치고 술잔을 나누는데, 도림골을 다녀오는 자가 들어섰다. 갑송이를 대신하여 만동
이가 물었다.
"그래 살펴보았느냐?"
"예, 김기라는 사람네는 그 집에서 쫓겨나 마을 뒤의 언덕빼기에다 토굴을 파구 삽디다."
"그쪽에두 가서 살폈느냐?"
"그러믄요. 가까이 가서 보니 거적을 쳐놓았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두런두런하는 것이 그
선비가 있는 듯하옵니다."
"알았다. 수고했다."
갑송이가 일어나 신을 꿰는데 만동이도 따라 내려서면서 말하였다.
"어쩔라우, 내 성님을 따라가리까?"
"고만두어, 아침 식전에 들르지. 둘이 올지 아니면 혼자서 올지 모르겠지만."
"잘 다녀오슈. 그건 그렇구... 아까 제가 말씀드린 일두 있구 하니, 구월산 오르실 젠 저두
데려가주시우."
갑송이는 만동이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글세 나중에 봐서..."
그는 만동이를 된목이골로 안내하기는 께름칙하였다. 그의 말대로 이제 그들은 류가 다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중에 봉산을 오락가락할 적에 그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리
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도림골에 이르러 만동이의 하인이 일러준 뒷산으로 올라갔다. 과연 흙이 드러난 언덕 아
래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발자국 소리를 죽여서 불빛으로 다가갔다. 그
는 거적을 조금 들치고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안쪽에 짚북더기를 두툼히 쌓은 자리에는 노모
인 듯한 할머니가 누워 있었고, 김기는 그 옆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김기의 처인 듯한 부인
네가 까물대는 등잔머리에 붙어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갑송이가 아무리 기다려도 그
들은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갑송이는 더 이상 엿들으려 하지 않고 가슴에 품은 비수를
옷 겉으로 쓰다듬어보고 나서 큰기침 소리를 냈다.
"거 누구요?"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드렸을 때 갑송이는 거적을 들치며 안으로 상반신을 들이밀었
다.
"갑송이 왔소."
여자가 질겁을 하며 김기의 뒤로 숨는데, 김기가 허리를 굽힌 채로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이두령이 무슨 일루 이렇게 몸소 내려오셨소?"
갑송이는 안으로는 상반신만 들이민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어서 좀 앉읍시다."
김기가 갑송이의 손목을 덥석 잡고 끌어 앉혔다. 갑송이는 다시 아무 말 없이 김기를 건
너다보았다. 김기가 고개를 숙이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모전가에 둔을 갚지 못하여 이 꼴이 되었습니다."
갑송이는 한참이나 묵묵히 앉았다가 불쑥 물었다.
"가족을 안돈시키는 일두 우선 급하고, 어서들 구월산으로 가십시다."
그러나 김가는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다.
"저는 못 갑니다. 마두령께도 이해가 가도록 전언하여주십시오."
갑송이는 가슴에 손을 넣으려다가 질린 얼굴로 앉은 노파를 둘러보았다. 노파의 더 안쪽
으로는 짚더미에 싸인 어린아이 셋이서 갓난 짐승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갑송이는 울컥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일어났다.
"좀 보십시다."
김기도 갑송이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고, 그의 아내가 뒤따라 나오며 소리쳤다.
"여보, 이 밤중에 어디 가셔요?"
"당신은 어머님 모시구 안에 있어. 내 잠시만 다녀올 테니..."
갑송이는 그들의 실랑이하는 말을 귓전에 들으며 앞서서 언덕을 올라갔다. 갑소이는 맞춤
하다고 생가되는 곳에 와서 뒤로 돌아섰고 김기도 마주 섰다. 갑송이가 말했다.
"구월산에 가지 못한다면..."
"내 뜻은 아니지만 노모가 이곳을 떠나시기를 반대하시니 어쩔 수가 없게 되었구려."
갑송이는 김기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품안에 감추고 있던 비수를 꺼내들었다.
"못 가겠다면 나으리의 모가지라두 가져가야겠소이다."
김기가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듯 무릎을 꿇더니 땅바닥에 털썩 주저 얹았다.
"신의를 배신한 죄 죽어 마땅하오. 베시오."
갑송이는 칼을 쳐들고 머리를 내민 김기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인연이 없었다면 모르되 혈당이 되자고 약조하지 않았소. 일단 녹림패로 작당
이 되었다가 온다 간다 말 없이 산채를 나갔으니 당신이 관군에게 내통한 것과 다름이 없
소. 우리는 앞으로도 나으리를 믿을 수 없어 화근을 끊고자 합니다. 원망 마시우."
김기가 고개를 숙인 채로 침통하게 내뱉었다.
"좋소이다. 그러나 과거로 허송세월 보내는 동안에 고생한 부모 처자는 죄가 없으니 내가
이대로 죽어지면 천추에 씻지 못할 불효가 되오. 내게두 사정이 있고 핑계가 있으니 죽기
전에 한번 이야기나 하도록 해주겠소?"
"당신의 목을 가져가는 대신에 가족들이 살아가도록 처음에 약조했던 빚값은 우리가 탕감
해주겠소."
김기는 고개를 흔들더니 이윽고 거칠게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것이었다.
"비록 빚이 탕감되어 살 방도가 생긴다 하더라도 우리 집안이 받은 원한과 수모는 씻기지
않을 거외다."
갑송이가 칼을 쳐든 채 망설이고 있는데, 김기의 아내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언덕을 올
라왔다. 여자는 저돌적으로 곧장 달려와서 뒷걸음치는 갑송이의 다리께를 붙잡고 쓰러졌다.
"나으리, 무슨 일로 저희 주인을 죽이려 하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출사하지 못하여 세상
을 못 만난 죄로 갖은 수모와 포학을 당하여 심신이 기진한 이를 죽여 무엇하시겠습니까?
저를 죽여주십시오."
김기가 그의 아내를 떼어내려고 뒤에서 잡아당겼다.
"어머님 곁에 있으라니까, 이 무슨 행역인가."
"못해요. 당신이 화적들의 꾀임에 빠져 녹림당이 되었다지만, 이제 다시는 못 가십니다."
갑송이가 쳐들었던 칼을 내려뜨렸다.
"아주머니, 댁의 주인께서 구월산으로 돌아오시겠다면 칼을 거두겠소이다. 허나 못 가신다
면 우리들도 다 법도가 있으니 산에서 맹약한 대루 목을 칠 수밖에 없지요. 주인께서 입산
하시면 아주머니도 노모를 모시고 들어와 인근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 수가 있습니다."
김기의 아내는 제 남편을 위에서 가리우듯 팔로 막으면서 울부짖었다.
"우리 부부는 어디에 가서 산다 한들 두려울 것도 꺼릴 일도 없습니다. 다만 노모께서 몰
락한 양반의 지체와 패가해버린 가문을 되찾기 전에는 고향을 떠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묘자리만 남긴 선산까지 모두 빚으로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갖은 포학을 당했으며
주인의 다정했던 동접 선비님들께서는 무고에 의해서 장형을 당하셨습니다."
묵묵히 서 있던 갑송이가 비수를 다시 칼집에 넣고 품속에서 찌르고 나서 자기도 땅바닥
에 쭈그리고 앉았다.
"좋소이다. 산에서는 그러한 저간의 사정을 모르고서, 다만 나으리가 우리를 관가에다 밀
고하려는 것으로 알구 있지요. 이 댁의 포한을 풀고서 가산을 다시 일으키게 된다면 다시
입산하시겠습니까?"
김기는 아까처럼 담담하게 말하였다.
"내 심정은 그냥 훌훌 떨쳐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버리고 싶소이다. 다만 어머님을 설득하
는 데엔 조금 시일이 걸릴 것이오."
"나으리가 이 고장에서 맺힌 사연이 있는 듯하온데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이오?"
"참으로 부끄러워서 내가 꺼내지 못하였던 일이 있소이다마는, 이제 무엇을 주저하겠소."
김기는 허공을 우러르며 한참이나 제 분노를 삭이는 듯하더니 얘기를 시작하였다.
"참으로 갯벌에서 게를 줍다가 광주리를 잃은 꼴이오. 자전에서 혀로 밭을 갈다가 오로지
곤욕만 받은 꼴이 되어버렸소이다. 일찍이 이두령과 노중 주막에서 만나 내 생명을 건졌고,
세상에 쓸모없는 폐물이 유익한 제목이 될 성부른 느낌도 가졌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지금
세상의 선비라는 이들이 모두 그릇된 세상을 한하며 광기와 자학으로 나날을 보내구 있습니
다. 내게는 봉산에만도 세 사람의 동문 수학한 절친한 벗이 있지요. 나와 또 한 사람은 그간
과거 준비를 하며 훈장으로 연명하였고, 또 하나는 의생이며, 다른 하나가 지사였소이다. 가
진 실력이 빼어나고 일세를 뒤엎을 경륜도 있지만, 조정은 벌족 수십여 가의 각축장이 되었
으며 과거는 있으나마나 합니다. 내가 주막에서 자진하려다 이두령의 제지를 받고 회생하여,
이제는 깨우쳤지만 그릇된 세상을 혁파하지 않고서 그릇된 벼슬자리에 들어가겠다고 평생을
발버둥친다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노릇이오. 글자깨나 읽었으니 우리 벗들은 모두 과거를
보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못한 채 쥐꼬리만한 수입을 바라며 훈장, 의생, 지사질로 연명하며
갖은 수모를 당했습니다. 천자를 떼고 난 아이들에게 초보적인 글을 가르치는 것이 생활 중
의 생애로 되었지요. 아동들의 미둔으로 이렇게 저렇게 가르치다 보니 자기 공부는커녕 생
가도 차츰 희미해졌습니다. 옛 성현께서 일찍이 말씀하신 속수오정니례의 보수도 예나 이제
나 같으므로, 내가 청하는 것은 언제나 조 일 석, 전 일 냥뿐이었소이다. 그런데 제자배의
아비 되는 자들중에 금력이나 권력깨나 있다는 향족 토반 부스러기들은 감투를 비뚜름히 쓰
고 수염을 곤두세우며 고성대언으로 모욕을 주곤 합니다. 이 양반이 물정을 모르는구. 시절
이 이 같은데 예조란 무엇이며 의자란 다 무슨 소리요. 천리 행상으로도 빈 채찍만으로 돌
아오고, 일년 머슴을 살고도 빈손으로 가는 터에 당신 문자가 그 값이 얼마길래 동짓달 모
립값이오. 이렇게 욕하며 어깨를 걷어붙이고 눈을 부라리며 욕질을 하는데 마치 쥐가 얼굴
돌리듯 하고 호랑이가 덮치는 듯 사납지요. 만약 그들이 조가 없고 돈이 없어서 예조를 낼
길이 없다면 비록 해가 새도록 훈장을 하여도 원통하지 않으나, 그런 자들일수록 쌀을 곳간
마다 쌓아두고 썩이며 돈냥은 궤 속에 차고 넘치는 형편입니다. 그렇게 한두 해를 살아오는
동안에 세상에 대한 깊은 원망과 불신이 가슴 깊이 맺히게 되었소이다. 참으로 몰락한 선비
로서 우리가 향족 토반이나 벼락 부자들게 당한 수모는 헤일수가 없습지요. 그러나 그중에
서도 원한이 깊은 자가 둘이 있으니, 하나는 예전에 내수사의 노비였다지만 지금은 부상으
로서 호적과 공명첩을 사들인 여첨지라는 자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봉산관아의 죄수질을
다니는 서가라는 자가 있습니다. 원래가 향소 벼슬이란 중인들이나 해먹는 말직이언만, 백성
들을 착취하기에는 이보다 적당한 업이 없으니 몰락한 시골 선비들 중에는 신임 수령이 올
적마다 운동을 하여 이방이나 병방을 맡아 조세와 군역의 이를 탐하는 자들이 많은 법이지
요. 사실 서가는 우리 동접의 벗이었습니다. 서가도 우리처럼 십여 년을 과거에 실패하고 가
난에 허덕여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자가 친구를 배신하고 작은 이익과 말직을 탐하게 된
연유가 있었습니다. 이두령의 말처럼 먹물깨나 먹은 자를 믿을 수 없음은 바로 그 깨인 지
능이 세간의 고난을 간교하게 넘기려는 데로 쓰여지기가 쉬운 때문이지요. 그것은 또한 배
운 놈은 약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책상 앞의 신고는 알지언정 산야에서의 노고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자연히 생활에는 허황한 뜻을 가지기가 쉽다는 말이지요. 은어 뱃바닥같이
희고 고운 손을 가진 자가 어찌 우직하고 순박한 백성의 고난을 함께 겪을 수가 있겠소이
까."
김기가 서가라는 자가 친구들을 저버리게 되었던 날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몇해 전의 유
월 중순 찌는 듯한 여름날이었다. 땐는 흉년이어서 논밭의 곡식이 말라 죽고 논은 드러난
바닥이 갈라지고 터져서 먼지가 풀썩거렸다. 흉년이라 제 먹을 것도 없는 터에 학동을 사당
에 보낼 부모는 없는지라 김기는 빈 마루에 홀로 앉아 하릴없이 글을 읽고 있었다. 사흘 동
안에 두 끼를 먹었는데, 한번은 겨를 섞어 끓인 멀건 미음이요, 또 한번은 황토와 밀 한줌과
송기 껍질을 섞어서 쑨 죽이었으니 먹었다고 할 수도 없는 끼니였었다. 아이들은 쇠잔한 기
력을 다하여 울며 보채고, 노모는 누워서 헛소리를 하는 중이었다. 낭랑히 소리내어 자구에
운은 달 기운도 없는 김기에게 그의 처가 다가섰다. 처는 무엇인가 보에 싼 물건을 내밀었
다.
"여보, 당신두 참으로 딱하오. 어머님과 아이들이 굶주려 사경을 헤매는데 읽는 글이 머릿
속에 들어가십니까? 과거에 붙기 전에 가솔은 모두 죽고 말겠소."
"허어... 군자로서 식사하는 데는 배부르기를 바라지 않고 거처하는 데는 편안하기를 바라
지 않는다는 성현의 말씀도 모르오. 무슨 수가 생길 테지, 설마 굶어죽기야 할라구. 가서 나
물이나 좀 뜯어오우."
"나물을 뜯으려도 기운이 있어야지요. 안방에서 마루를 건너오는데도 한식경이 걸린 듯하
오. 뭘 잡수셔야 글두 읽으실 테니 읍내 가서 장이라두 보아오시구려."
하며 그의 처가 보를 던지는데 펴보니 한 묶음의 머리타래였다. 얹은 가체를 즐길 대가의
아낙이 탐내어 사들일 만한 탐스러운 머리카락이었다. 김기는 별반 감동도 없이 수건을 쓴
아내의 머리를 힐끗 올려다 보고 나서 그것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도림골서 읍내까지 시오
리 길을 걸어가는데 흉년의 붉은 해가 중천에 솟아 땅을 뜨겁게 태우고 있었다. 햇빛만이
붉은 게 아니라 말라서 먼지가 풀썩이는 황톳길은 더욱 붉었다.
그는 간장에 물을 타서 몇모금 들이켜고 나온지라 몸이 허하여 땀은 비 오듯 하였다. 읍
내 장거리에 도달했는데 저자는 한산했고 물물교환이 간혹 있을 뿐이었다. 방물은 사치품인
지라 머리타래를 곡물로 바꾸는 일은 하루 종일 가봤자 이루어지지 못할 듯싶었다. 교환은
곡물과 옷감끼리가 고작이었는데 역시 곡물을 가진 자가 교환의 주도권을 잡았다. 누구 하
나 찾아와 거들떠보는 자가 없더니 일찍 파장이 되었다. 그는 들고 있던 아내의 머리타래를
다시 보에 싸들고 읍내를 나서다가 평안도로 나가는 어는 벼슬아치의 내실 행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댁 하녀가 길을 묻다가 말이 오가게 되어 마침 가체를 구하려던 내실마님이 김기
의 물건을 사게 되었는데 길양식을 내었느지라 쌀 닷 되밖에 내주니 못하였다. 김기는 쌀보
를 들고 먹지 않아도 배부른 마음으로 걸음을 빨리하였다. 오랜만에 쌀을 갖고 보니 문득
같은 처지로 굶주리고 있을 벗들이 생각나서 도저히 집으로 가는 걸음이 가벼워지질 않았
다. 김기는 저도 모르게 같은 훈장질로 고생하는 친구 서선비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마을에는 지사 노릇 하는 또다른 친구도 살았고, 이웃 마을에는 의생하는 선비가 살았
던 것이다. 김기가 서선비의 집에 당도하니 그들 두 양주와 아이들이 차례대로 방에 누워서
기력을 아끼고 있는 중이었다. 김기는 쌀자루에서 두어 되 남짓을 덜어내어 나물죽 끓이기
를 청하고서, 이어서 부근에 흩어져 사는 동접 친구들을 불러모으도록 하였다. 가난으로 서
로의 방문도 꺼리고 적조했던 벗들과 만나 오랜만에 학문에 대하여 토론하고 싶었던 것이
다. 주림 중에 맛난 음식이 있고, 벗이 있고, 또한 학문을 놈할 수 있으니 과연 가난이란 벗
들끼리 더욱 다정하게 만드는 또다른 새로운 벗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해서 네 사람의 친
한 동접이 마루에 모여 앉아 고담준론을 나누고 있을 적에, 서선비의 아내는 부엌에서 취사
를 시작하였다. 화제가 자연히 흉년을 지나는 백성들의 곤궁에 관한 걱정으로 번졌다가 다
시 종정의 속수무책인 무능한 정치를 비난하게 되었고, 이윽고 봉산군수의 탐학한 정사를
공공연히 비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군수는 이번 흉년에도 수천 냥을 벌었다는군. 이를테면 환자 갚을 때 붙인 구호미 있잖
은가. 다른 대장을 만들어 머릿수를 많게 하여 빼돌리고 국세는 물지 않는다네."
"그뿐인가, 부호들에게서 진발미를 거두어서 착복했다네. 읍내에 가면 솥을 걸어놓고 멀건
겨죽이나 한그릇씩 나누어주는데, 기민을 구제한다고 흉내만 내는 짓이지. 환난이 거듭될수
록 벼슬아치들은 배를 불리는 게야."
"군역도 그렇지 않은가. 이런 흉년에는 모두 면제해주도록 되어 있건만 불알 차고 나온
놈은 모조리 들어 있어 무명을 내야 한다네."
"그런 놈은 감영에 발고하여 봉고파직을 당하도록 해야 되네."
"그렇지, 우리 같은 유생이 글을 써서 알리지 않으면 누가 군수 같은 높은 벼슬아치를 벌
하겠는가?"
"아예, 감영에 올리지 말고 한양에다 상소문으 띄우지."
"향읍 수령이란 백성의 생사 여탈을 쥔 자리인데, 모두들 다투어 외임을 맡으면 평생 먹
을 자산을 장만하는 데만 눈이 시뻘겋게 되어 있으니 아마도 관제가 잘못된 모양일세."
"잘못된 것이야 우리가 벌써 여러번 치른 과거부터가 썩어 있지 않은가."
"혁파되지 않고서는 사람이 다스림을 받을 어진 세상이 아닐세."
"몇년 동안 조정에서는 상례를 가지고 쟁송을 벌여, 그 남은 피가 파당을 갈라 골고루 젖
어 있다네. 원래 성현께서 예를 논하실 제 사람의 생활에 맞는 규범을 그때마다 적절히 정
한 것이지, 어디 형식에 매이라던가?"
"그렇지... 실제로 사는 일과 멀어진 학문은 형식에 기울게 마련이고, 형식에 기울면 고집
스러워지고, 그러면 정지되어 썩으니, 지금의 현실과 멀어진 학문은 곧 썩은 관료와 손을 잡
게 되게 마련일세, 나는 차라리 학문을 때려치우고 싶다네."
"아니, 백성을 위한 학문을 해야지. 우리가 글을 앍는 동안 그들은 땀을 흘렸으니, 그 글
로써 갚아야지."
"내 재미있는 경험담을 해볼까. 어느때, 옹진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 마침 시골 툇마루에서
이슬을 피하게 되었다네. 그날이 마침 제사여. 옳다 잘되었다. 객지에 나와서 술과 고기를
좀 얻어먹겠구나 싶었지. 제사 구경을 하노라니 축문이고 지방이고 뭐고 없더군, 그도 그럴
것이... 무지한 농투성이가 글을 알겠는가, 예법을 배웠겠는가? 이 자가 밖으로 나가더니 두
손을 앞으로 하여 정중히 허리를 구부리며 문간으루 들어선단 말이야. 그러더니 연신 뭐라
고 중얼거리면서 음식을 들었다 놓았다 하더군. 나는 자는 체하구 실눈을 뜨고서 보구 있었
네. 그러더니 제 아내를 끌고 들어가 제상 앞에서 흐드러지게 방사를 벌이는 모양이더군. 생
각들 해보게. 재삿상을 펴놓고 방사를 하다니 그것이 어찌 성현이 가르친 예의인가. 나는 도
저히 참을 수가 없데그려. 잡아서 그 고을 관가에라도 일러 고약하게 상풍한 죄를 다스리겠
다고 결심을 하였지. 그래서 방사가 끝났을 제 일어나 의관을 차려 입었네. 두 연놈이 일어
나더니 다시 제상에 절을 하고 나서 아까처럼 정중하게 두 손을 앞으로 치켜들고 밖으로 나
갔다가 들어오더군. 나는 다짜고짜로 호통을 내질렀네. 네 이 고약한 것들 같으니 무슨 그따
위 제사가 있단 말이냐 했지. 그랬더니, 그자가 하나도 놀라지 않고서 공손하게 절을 하더
군. 즉, 그자의 말에 의하면 높게 배우신 선비와 자기네 같은 불학무식한 것들의 예법은 다
르게 마련이라더군. 그자는밖에 나가서 제사를 받아 잡수시러 오시는 귀신을 모셔들인 걸
세. 모셔다가 손수 음식을 권하며 꼭 생시에 하던 대로 약주까지 공손히 따라드린 뒤에, 이
제껏 자식이 없어 귀신께서 돌아가실 적에 걱정하시겠으니, 부부 합환하는 것을 실제로 알
려드린 것일세. 그리고는 다시 배웅하고 돌아온다는 얘기였지. 나는 그자의 말을 듣고 문득
화를 냈던 내가 부끄러워지데. 그렇지, 그 앞에 가서 축문을 멋진 문장으로 지어 읽고, 곡을
해대고 절을 연거푸 해댄다고 귀신인들 편할 리가 있겠는가? 아마도 음식이 목에 걸리겠지.
중요한 점은 그 마음일세. 생시처럼 모신다는 그 마음으로 보면 무지한 농군의 제사는 성현
의 가르침을 가장 합당하게 따른 것이 아니겠는가."
"거 훌륭하고 지당한 말씀이로군. 실생활의 사정에 따르지 않은 공론이란 아무것도 배우
지 않은 농부의 지혜에도 훨씬 못 미치는 것일세."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썩은 정치와 받아들여지지 않는 관제의 모순에 이르렀을 때, 여태
까지 잠자코 앉아서 김기와 다른 두 선비의 말을 듣기만 하던 서선비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우선 제대로 먹고 제대로 입고 나서 백성도 있고, 나라도 있는게 아닌가. 나는 이
젠 가난한 학문의 길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 졌네."
그때에 지사 하는 선비가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돌아앉으면서 말하였다.
"조금씩 안락함을 참으며 도를 실천함이 과거를 준비하는 일보다 더욱 중대하고 귀한 일
일세. 몸을 닦음이 보다 원대한 일이요, 벼슬을 하자는 것은 그 수단을 얻자는 뜻이 아니겠
나. 벼슬을 얻어 호의호식 할 생각으로 글을 읽는다면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 학문도 망하
고 몸도 망치며, 가문도 패가해버릴 걸세."
바로 그때에 부엌에서 서선비 아내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서선비를 선두로 모두
들 방문을 밀치며 뛰어나가 보니, 그 아내가 피투성이로 뒹굴고 있었다. 기력이 없는데다 마
침 한여름이라 마른 마무가 없으니 빈 뒤주를 뜯어 식칼로 땔나무를 다듬던 모양이었다. 칼
로 나무를 쪼갠다는 것이 실수하여 선반에 늘어진 제 젖을 찍었던 것이다. 피투성이 가슴에
찢은 옷자락을 싸매면서 서선비가 길게 탄식하였다.
"내 어찌하든 이 가난의 원수를 갚으리라!"
하는데 서선비의 눈에는 핏발이 섰고 이는 굳게 아물려 있었다. 참지 못한 지사와 의생이
제각기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며 한마디씩 하였다.
"자네는 분명히 선비의 몸을 버릴 인간이니 차후부터는 상종하지 않겠네."
"가난에 여한을 품은 자는 비록 제 처자에게도 사람됨을 잃는 법일세."
그래서 두 선비는 우의를 끊겠다며 훌훌 나가버렸고 김기는 서선비의 독하게 부릅뜬 눈
앞에 멍하니 섰다가 제 집으로 돌아갔다. 그해의 흉년은 곧 전염병을 몰고 와서 아이들이
죽어갔다. 해를 넘기자 다시 환난은 지나갔건만 서로의 마음을 잃어버린 벗들은 다시 모이
지를 않았다. 서선비가 봉산군수와 바둑 친구가 되어 오락가락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가운데
김기는 한양으로 떠났던 것이다.
김기는 한양으로 떠날 때 전부터 고리대금업으로 악명이 높던 도림골의 여첨지에게로 찾
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가거나 집안에 긴히 써야 할 돈이 급히
필요할 때에는 으레껏 여첨지의 자모전가로 찾아가던 때문이었다.
여첨지는 앞에도 김기가 말했듯이 원래 내수사의 노비였었다. 소문에 의하면 제 주인을
팔고 면천된 다음에 받은 상금으로 치가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자였다. 즉, 제 주인의 정적인
우의정 대감께 주인의 비위 사실을 고하고 집안이 구몰된 다음에 황해도 땅으로 도망쳐 왔
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력은 곧 권력과 잇닿는 세월인지라 첨지의 공명첩을 사들인 뒤에 지방 세력가로
변해버린 것이다. 여첨지의 횡포는 봉산 부근의 일반 백성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김
기는 제 집 문서를 들고 여첨지를 찾아갔느데, 만약 그가 벼슬자리를 얻어 돌아오게 되면
그가 심한 행패는 하지 못할 것이고, 빚을 갚아 낼 자신이 있었다. 의외에도 여첨지는 선선
히 빚돈을 내주었을 뿐 아니라, 안장 올린 나귀까지 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은근히 수작
하기를, 만약에 한양 가서 환로를 트시거든 자기의 취재를 도와달라고 하였다.
자기는 다른 것은 원하지 않고, 다만 자비령 남녘의 궁방전의 관리를 맡게 해달라는 것이
었다. 아니면 둔별장이나 고직의 이권을 부탁드린다고 하였다. 여첨지의 뜻은 백성의 곡물
수세를 가로채겠다는 얘기였다. 묵묵부답, 돈만 받아가지고 나온 김기는 만약에 운이 좋아
내직에 품이 높은 벼슬이 떨어진다면 손을 써서라도 그 돼지를 벌하리라 결심하였다. 하나,
그가 두어 달이나 한양서 지체하며 돈을 떼이는 사이에 봉산에서는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었
다. 두 가지의 일이 서로 관련을 가지고 일어나게 되었었다. 지사일을 하던 선비가 봉산군수
의 탐학한 정사를 발고하는 글을 적어 감영에 보냈는데 그것이 군수의 아는 자에 가로막혀
되돌아왔던 것이었다. 지사 선비의 글에는 봉산 유생 대여섯 사람의 성명이 적혀 있어서 모
두들 득달같이 풀려나온 나졸들에 의하여 결박지어져 관가로 끌려갔다.
한양 가서 없는 김기만을 빼놓은 동접 선비들과 평소에 불만이 많던 선비들이 모두 그 글
에 관련되어 곤경을 치르었다. 그때에 서선비가 친구들을 배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형
국을 받는 자리에서 친구들이 역모를 꾀했다는 무고를 터뜨렸고, 좋은 이용거리가 생겼다고
믿은 사또가 이 사건을 모역에 관한 것으로 다루게 되었다. 서선비는 곧 풀려났고, 지사 선
비나 의생 선비, 훈장 선비 등등 그의 친구들은 매에 못 이겨 숨지고, 풀려나온 사람들도 반
병신이 되었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달포를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일단 어긋난 사람이란
애초부터 그릇된 길을 걷던 사람보다 더욱 악행을 거듭하게 마련이니, 그것은 사람이 결국
제 자신과 싸우게 되는 때문일 것이다. 제 자신이 밉고 부끄럽고 자책으로 견디지 못하는
그만큼, 세상이 온통 자기를 비난하고 있다는 외로움에 싸이는 것이다. 배신하는 자는 스스
로를 쏜다. 그가 행하는 모든 짓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 화살이기 때문이다. 동료
선비들을 무고에 의하여 살해한 서선비는 치욕스럽게도 중인이나 얻어 하는 좌수직을 타내
게 되었다. 아전이 탐욕스러운 고장의 정사가 어지럽기로는 마치 쥐가 가득 찬 대가의 부엌
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선비는 일단 향소의 좌수가 되자 그가 뼈저리게 겪었던 가난의 원수를 갚기 시작하였
다. 여첨지는 기한이 되도록 김기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집과 몇뙈기 안되는 밭을 차압하였
는데, 나졸을 거느린 서선비도 동행을 하였다. 이야기가 거기에 이르자 고개를 숙이고 듣기
만 하고 있던 김기의 아내가 갑송이를 향하여 말했다.
"첨지와 좌수가 둘이서 왔었어요. 나졸놈들이 세간살이들을 모두 마당으로 내던졌지요. 저
는 아이들을 달래노라구 정신이 없었고, 어머님이 손이 발이 되도록 여첨지께 빌었어요."
그들은 마당에 끌어낸 세간들 중에서 농짝이나 문갑 같은 좀 깨끗한 물건들은 모두 압류
하였고, 쓰잘 데 없는 옹기와 고리들을 내주는 것이었다.
초겨울의 찬바람이 씽씽 불어대는데 갈 곳도 없는 김기의 가족들은 울부짖으며 사정하였
다. 가족들을 내려다보던 여첨지가 문득 김기의 열일곱살짜리 맏딸아이를 내려다보더니 다
짜고짜로 손목을 덥석 잡아 끌어내는 것이었다.
과년한 처녀의 손목을 잡는 것도 포악한 짓이려니와 이를 말리려던 김기의 아내가 달려들
어 여첨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니 그자는 발길을 들어 아랫배를 내질렀던 것이다. 김기의
노모가 서선비에게 달려들어 웃자락을 붙잡고 호소하였다.
"여보게 자네는 일찍이 내 아들의 친구가 아니던가. 이 늙은 것을 봐서라두 좀 말려주게."
그러나 서선비는 노모의 손을 뿌리쳤고, 김기의 노모는 땅에다 엉덩방아를 찧고 자빠졌었
다. 서선비가 말하기를,
"내 비록 한때에는 친구였다 하나, 관가의 밥을 먹는 이상 사감을 가질 수 없소. 또한 그
자들이 대개는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역적임을 아지 못하였으니 이제 와서 어찌 친구
의 우의를 논하겠소이까? 나는 관가에서 나온 좌수이지, 여기 놀러 온 게 아니외다."
행악을 부리는 여첨지보다도 냉랭하고 침착한 서선비가 더욱 끔찍해져서 김기의 가족들은
하릴없이 울기만 하였다. 몸부림치는 김기의 맏딸을 나졸들에게 지워 끌어가면서 여첨지가
말하였다.
"네 주인이 오거든 계집아이를 담보로 데려간다 해라. 빚돈을 따져보니 밭과 집으로는 탕
감하기 어렵겠다. 관가에서도 허락한 일이다. 만약에 다음 기한을 어기면 계집아이는 색주가
로 넘겨버릴 것이다."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김기 부부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했고, 갑송이도 분노가
끓어올라 몇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아니 그렇다면 더욱 우리들이 힘을 합쳐 쳐죽일 생각은 않구, 오히려 구월산엘 한사코
가지 않겠다는 건 또 뭐요. 이놈들을 당장에 때려 죽이지 못한다면 차라리 온 가족이 자진
하는 게 낫겠소."
"이두령은 모르시는 말씀이오. 노모께서는 가문을 생각하고 계신 거요. 우리 집안이 그래
도 옛날에는 벼슬길에 올랐던 적이 있었고, 몸을 닦고 학문에 정진했던 유생의 집안이지요.
헌데 내가 만약에 구월산에 들어가 녹림패가 되어버리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구몰되고 어머
님 당신 대에 와서 화적의 집안이 되어버린다는 게요. 다시 과거공부를 하여 높은 벼슬을
하기 전에는 이 고장을 떠나는 것은 안된다는 말씀이지요."
"가문은 뭐 말라비틀어진 게요. 요즘 세월은 악독한 자가 득세하는 판인데. 여러 말 할 거
없수. 원수는 갚아야겠는데, 저놈들을 요정을 내면 나리가 무사하지 못할 게요. 이 길로 온
가족을 구월산에다 이사 시키고 그 여식두 찾아와야 될 게 아니오."
"어머님 생전에는 못할 짓이지요."
"염려 말우. 내 우격다짐으루 들쳐업어다 모실 테니."
"여보! 그애를 찾아오셔야죠. 이제 어느 세월에 다시 과거공부를 하실 테유."
"이미 벼슬할 생각은 없소. 다만 어머님을 거역하기가 어려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뿐이지."
"이 고장을 떠나자구 말씀드리고 공부는 계속하겠다구 하시면 어머님께서 응낙하실 거예
요."
김기의 아내가 애걸하였는데, 그녀는 봉산에서의 생활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었다. 김기의
처는 남편이 도적패에 끼였다기에 끔찍하고 두려워서 노모와 함께 적극 만류했었다. 그녀는
갑송이의 험상궂은 몰골에 더욱 놀랐지만, 이제 보니 비록 도적이라 하는 말씨와 행동거지
가 충직하고 인정이 있어 보였다. 김기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뼈에 스밀 정도로 지극한 사
람이었다. 그는 모친이 살아 계시는 동안은 구월산 화적이 될 수 없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비록 객주에서 갑송이를 만나 부끄럽고 격한 기분에 산채까지 동행은 했었지만 늘 마음 한
편으로는 자기 대에 와서 난신적자의 가문이 된다는 꺼림칙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던 것이
다. 비록 객주에서 갑송이를 만나 부끄럽고 격한 기분에 산채까지 동행은 했었지만 늘 마음
한편으로는 자기 대에 와서 난신적자의 가문이 된다는 꺼림칙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던 것이
다. 한참 동안이나 세 사람의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나서 갑송이가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일어섰다.
"좋소이다. 이제 나으리의 마음을 알았으니 더이상 권하지는 않겠고, 녹림패의 의리를 고
집하여 칼을 뽑지두 않겠소이다. 그러나 다만 가족들의 정상이 딱하니 조용하고 아늑한 마
을에 이사를 하여 안돈시켜드리리다."
"이두령의 은혜를 두 번이나 입었으니 어찌 다 갚겠소."
"자, 이 밤을 타구 어서 가십시다."
세 사람은 언덕을 내려갔다. 김기의 노모가 놀랄까 하여 갑송이는 멀찍이서 걸었고 김기
가 노모를 업었다. 김기의 처는 누더기와 사금파리만 남은 세간이 버려지는 것을 안타까워
했으나, 갑송이가 인도하는 마을에는 집도 있고 땅도 있다 하여 아이들만 들쳐업고 뒤를 따
랐다. 갑송이는 만동이네 집에 들러 일꾼을 내어 들 것을 만들어 김기 노모를 편히 모신 뒤
에 구월산으로 오르지 않고 산아래를 돌아 수렛고개의 토막으로 향하였다. 갑송이는 구슬리
고 달래어 김기의 가족을 끌고는 나왔으나, 산채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우선 김기의 가족
을 은율 탑고개에 안돈시킨 다음에 김기를 설득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토막에 당도한 것은 동이 훤히 밝아서였다. 만동이네 일꾼들을 거기서 되돌려 보
냈는데, 혹시 지형과 요소를 알아 관에 밀고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토막에서 아침을 지
어 먹고 나서 졸개들을 내어 들 것을 지게한 뒤에 은율 탑고개로 내려갔다. 노모는 답답한
토굴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흰 눈벌판과 평화스럽게 연기가 오르는 마을의 굴뚝들을 대하자
한결 가벼워진 듯 희희낙락하였다. 김기가 갑송이의 둥뒤에서 웃음기 어린 말투로 중얼거렸
다.
"이두령이 기운만 장사인 줄 알았더니, 또한 모사이시구려."
"나는 한번 마음먹은 것은 꼭 해내구 마는 성미지요."
"이두령, 봉산을 떠나올 제부터 나는 알구 있었소. 부처고개를 넘어 오며 작정을 해두었
소."
"무슨 말씀인지..."
"어머님을 속이더라두 살아 생전에 편히 머셔드리고 싶소이다. 이미 나는 관을 거역하고
녹림패에 발을 담그었던 사람이오. 그동안 믿음을 갖진 못했으나 기왕에 이리되었으니... 구
월산으로 가더라도 원행장사를 나간다구 어머님께 거짓소리를 해야 합니다."
그제서야 갑송이도 얼굴이 환해져서 웃음을 머금었다.
"염려 마오. 우리 모친도 계시고 길산이네 부모님도 계시니 이웃하여 친척같이 지내시리
다."
그들이 탑고개를 넘어 나한암을 돌아 괴뢰배마을로 들어서니, 이미 먼 곳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 몇 명이 살피러 마주 나왔다. 그들은 이제는 갑송이를 제 동네 사람으로 여기고 있
어 인사말들을 건네며 반겼다. 새로 지어진 재인말 사람들의 집들 쪽으로 다가서니 큰돌이
며 광대들이 새로 오는 가족들을 동네 사랑으로 모셨다. 아무리 장한들이라고는 하지만 백
여 리를 밤과 한나절에 걸쳐 걸었으니 몸이 바위처럼 무거웠다. 김기네 식구들은 따뜻한 구
들과 아늑한 이부자리에 누워 쉬는데, 모두들 다시 사는 듯이 즐거워하였다. 특히 그의 노모
가 산천경개가 좋다 하여 자꾸 뜨락으로 나가려는 양을 보고는 김기도 눈시울이 뜨거워졌
다.
김기는 집이 정해질 때까지 사나흘 탑고개에 모물기로 했고, 갑송이만 된목이골로 돌아갔
다. 모두들 궁금히 기다리고 있다가 수렛고개 소두령의 전갈을 받고서 마감동이는 느긋해져
있었다. 갑송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감동이는 여첨지네 자모전가와 집을 들이칠 것을 제
안했다. 우선 김기가 돌아오면 상의하여 거병하기로 의논을 하고 나서, 갑송이는 봉산 읍내
쇠전거리서 만동이를 만났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 녀석이 요새 잠채잡이를 하여 가산이 풍족하다네. 천동이가 평안도에 나가 있다는군."
"뭐...쇠요, 그이오?"
"금두 있다더군. 풀뭇간이 제법 그럴싸하던데."
갑송이는 만동이가 요청했던, 잠채를 호위해주고 재물을 나누자던 이야기를 덧붙였다. 감
동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우리 형세가 그 정도까지는 못됩니다. 산마다 숲마다 터가 다른데 남의 목을 잡으
려면 우리가 팔도에 두루 걸릴 것이 없어야 될 겁니다. 만동이가 아직 녹림당의 물정을 몰
라서 그러지요."
"그럴 거 같데. 이제 산채를 올린 지가 얼마나 됐게? 하다못해 자비령과 멸악산까지만 세
력이 닿는다 해두 일세의 활빈도가 될 텐데."
"우리가 기실 활빈도를 자처하고는 있으나, 아직은 형세가 조금 자라난 화적에 지나지 못
합니다."
"차차 커지겠지, 뭐."
"길산이 성님이 나오시면 송도 행수 성님과 의논하여 각처에 산채를 나눕시다."
"길산이는 세상이 이렇게 바뀐 것을 모르고 있을 거야."
하면서 고개를 쳐드는 갑송이의 눈은 금방 어두워졌다. 밖에서 쉴새없이 바람을 불어대더
니 드디어 한밤중부터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하였다.
그날 밤부터 이틀 동안이나 눈이 펑펑 쏟아졌고 사흘째 가서야 말끔하게 개었다. 눈이 강
산같이 덮였는지라 된목이골은 마을의 자취도 없이 사라진 듯하였다. 눈이 강산같이 덮였는
지라 된목이골은 마을의 자취도 없이 사라진 듯하였다. 나무들도 온통 눈송이를 뒤집어썼고,
골짜기는 펑퍼짐하게 변하였다. 지붕만이 남아 마을의 흔적을 드러낼 뿐이었다. 두령부터 졸
개에 이르기까지 방안에서 뒹굴던 산채 사람들은 모두 뛰어나와 눈을 치우고 길을 내느라고
아침부터 소란을 벌였다. 졸개들은 덫을 놓으러 간다고 설쳤고, 오만석이도 고기맛을 보겠다
며 졸개 몇을 끌고 사냥을 나갔다. 갑송이는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나서 탑고개에나 다녀오겠
다고 작정했다.
"월정사를 들러 탑고개에나 다녀올까?"
"눈이 많이 쌓였을 테니 며칠 있다 내려가도록 허시잖구."
"도무지 답답해서 원. 김선비는 왜 안 올라오는 거야. 어서 봉산을 들쑤셔버리구 싶은데."
"사냥이나 나가실라우?"
"우리네는 먼저 나갔으니, 우리두 아이들 몇 명 데리구 실토봉 쪽으루 가봅시다. 큰 짐승
이 걸리면 다행이구, 없어도 사슴이나 노루새끼쯤은 만나겠지."
"그럼 슬슬 움직여볼까."
갑송이와 감동이가 각기 장창을 하나씩 꼬나들고 궁수 두엇을 거느리고서 된목이골을 나
섰다. 골짜기에는 눈이 많이 쌓여서 무릎까지 빠질 정도였으나 등성이에 오르니 바람 탓인
지 별로 눈은 깊지 않았다. 이 등성이에서 저 등성이로 오르내리며 그들은 특히 골짜기 쪽
이나 얼어붙은 개천 가녘을 살피며 뒤져나갔다.
"여기 있습니다."
아래편에서 족적을 살피던 졸개가 외쳤고 모두들 미끄러지며 비탈을 내려갔다. 과연 큼직
한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으며 다시 그 자취가 실토봉 북면 골짜기로 이어지고 있었
다.
"눈이 그친 뒤이니 얼마 안됐을 게다. 바싹 쫓아라!"
그들은 발자국을 따라서 오 리는 좋아 될 만큼 걸었다. 골짜기가 후미지고 제법 험하였다.
잣나무와 향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 가운데를 들어서는데 무엇인가 거친 숨소리가 들리며
오른쪽으로 내달아 튀었다. 거의 송아지만한 멧돼지였다. 어금니가 한 뼘도 넘게 솟아나와
있었다. 감동이가 외쳤다.
"크게 둘러싸라!"
갑송이는 별로 흥이 나질 않았으나 기왕에 나선 김이고, 또한 실물을 보니까 잡아야겠다
는 생각이 들어서 멧돼지가 달려간 쪽의 등성이로 뛰어올라갔다. 멀찍이서 아래로 내몰려는
생각이었다. 갑송이가 등성이에 올라선 갑송이는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갑송이가 등성
이에 올라서며 무심코 실토봉 남면의 분지를 내려다보니 웬 사내하나가 부지런히 아사봉 쪽
으로 걷고 있었다. 작은 봇짐을 등에 짊어졌고, 가죽 배자 간편한 차림에 개잘량까지 덮어썼
는데 가끔씩 멈춰 서서는 주위 지형을 살피는 것이었다. 꼴을 보아 초행일시 분명한데 이런
겨울철에 삼 캐는 놈도 아닐 테고, 구월산 깊은 골에 민가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놈은
분명히 관에서 나온 정탐꾼인 듯하였다. 그는 감동이를 손짓하여 부르고 나서 낯선 사내를
손가락질하였다.
"틀림없이 기찰포교나, 응모한 정탐꾼인 듯하네."
"하여간 나오긴 잘 나왔수. 놈이 아사봉 기슭에 이를 때 잡아 죽입시다. 우리가 먼저 가서
지형이 좋은 곳을 지켜야겠수."
"사로잡아야 허네. 죽일 땐 죽이더라두 뒤를 캐봐야지."
마감동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한가지 꾀가 있소이다."
그들은 멧돼지 잡을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졸개들을 거두어 아사봉 쪽으로 바삐 움직
였다. 그들은 된목이골로 들어서는 산기슭에서 양쪽의 숲에 눈구덩이를 파고 숨어서 낯선
사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감동이가 한 졸개에게 낮게 속삭여 무엇인가 지시했고, 졸개는 길
가운데 나아가 눈밭에 엎어져 있었다. 잠시 후에 입김을 길게 헉헉 토하면서 사내가 나타났
다. 어슬렁대며 올라오던 사내가 길 위에 자빠진 사람을 보더니 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주위
를 둘러보았다. 그는 다시 헛기침을 뱉고 나서 자빠진 사람 곁에 다가서서 물끄러미 내려다
보더니 손으로 흔들어보았다.
"여보쇼, 여보 죽었소 살았소. 정신차리슈. 안 일어나면 갈 테요."
그래도 자빠진 졸개는 죽은 듯 널브러져 있는데, 갑송이와 감동이는 놈의 하는 짓거리가
우스워서 어금니를 꽉 물고 참았다. 이제 졸개가 가슴에 감추고 있는 단검을 사내의 배에
들이대면 양쪽 숲에서 뛰쳐나가 적당히 몽둥이 찜질을 한 다음에 묶어 데려갈 작정이었다.
한데 어떻게 된 녀석인지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침을 퉤 뱉는 것이었다.
"압다 그러면 누가 구해줄 줄 알구. 나두 모르겠다."
혼자 투덜대면서 다시 길을 가는 것이었다. 감동이는 제 꾀가 어긋난 것이 못내 서운하여
곧 득달같이 쫓을 자세로 엉거주춤 일어나는데, 사내가 우뚝 멈추는 것이었다. 감동이는 재
빨리 다시 눈구덩이에 엎드렸다. 사내는 사람이 쓰러진 곳으로 되돌아왔다. 옳지 그러면 그
렇겠지. 아무리 금수 같은 놈이라도 이런 산속 눈밭에 쓰러져 얼어 죽어갈 사람을 버리고
갈 수는 없겠지. 감동이는 사내의 동작을 기다렸다. 그러자 이 녀석은 슬슬 돌아가서는 한쪽
발로 쓰러진 자를 지그시 밟고서 행전을 벗겨내리는 것이었다. 산채의 졸개들은 대개 토끼
나 사슴 가죽으로 무릎 아래까지 덮이도록 행전을 치고 있었다. 사내가 돌아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발로 밟힌 자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드디어 꿈틀대기 시작했다.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행전을 벗기면서 중얼거렸다.
"살아나는 척한다구 놀랠 줄 알구. 하여튼지 행전을 얻었으니, 이제 겨울은 머리부터 발끝
까지 모의 일습으로 따뜻하게 보내겠군."
쓰러진 자의 털행전을 벗기려 하니 어이없고 무도하여 도적들이 보기에도 기가 찰 정도였
다. 참다 못한 갑송이가 얼결에 소리를 질렀다.
"어... 저 도적놈 보아라."
일어나려고 버둥대는 졸개를 한 발로 지그시 누르고서 개잘량 쓴 객은 껄걸 웃어젖혔다.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저 뒤에 어지러운 발자국을 보아라. 거기서 똥 싸니? 궁둥이 얼
기 전에 어서 일어나려무나. 행전 뜨뜻해서 좋겠네!"
그자는 발길로 거짓 쓰러졌던 자를 탁 내지르고서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마
감동이가 멧돼지를 노리던 장창을 비껴들며 외쳤다.
"게 섰거라!"
개잘량은 씩 웃어대며 돌아선다.
"왜 그래, 뒷지 주랴?"
갑송이도 힝 웃음을 날린다.
상대편이 느긋하게 나올 때에는 한쪽도 느긋해지는 반면에, 전의는 차차 고조되는 봅이다.
마감동이는 외치기는 하였으나 놈의 짓거리가 그리 만만한 놈은 아닌 듯이 보였다.
"자아 섰다. 어쩔래? 그 털토시 벗어 주겠니? 어이 육실허게는 춥네. 느이는 산속에서 토
깽이나 잡구 사는 놈들일 테니 털 달린 것 있으면 이 대처 한량에게 좀 다우."
갑송이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어슬렁어슬렁 길손에게로 걸어갔다.
"농담은 그만둬라. 너 어디서 뭣허러 여길 왔느냐?"
"토끼 잡으러 나온 창으루 나를 찌르겠다는 네놈들은 뭔데?"
마감동이가 창을 곧추세운다.
"이놈이 맞창이 나구 싶어 안달났군. 성님, 아예 모가지르 비틀어서 눈구뎅이에 장사를 지
내주슈."
갑송이가 털배자를 벗어서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뜨린다. 개잘량은 뒤로 몇걸음 물러나며
손을 내저었다.
"이거 왜 이러느냐. 나는 지금 점심을 굶어서 기운이 쪽 빠진 사람이여."
그제서야 둘러섰던 졸개들과 마감동이가 픽픽 코웃음 소리들을 냈다. 아마도 갑송이의 기
세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버린 게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갑송이가 팔짱을 끼고서 상대를 찬
찬히 훑어보았다.
"혓바닥만 미꾸리처럼 살아가지구 팔딱대더니 왜 어디 아프냐?"
사내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뱉었다.
"쳇 또 사람 하나 죽이게 되는군. 아예 죽더라두 내 원망 말어라."
"그래 누가 뒈질지는 조금 있으면 알게 된다."
사내가 깊숙이 눌러 썼던 개잘량을 벗었다. 더벅머리가 어깨 너머로 축 눌어졌다. 총각은
좀 쑥스러워졌는지 겸연쩍게 입을 헤벌리며 웃었다.
"난 또 뭔가 했더니 젖내 나는 강아지새끼로구나."
"머리만 올리면 다냐. 너두 상판을 보아하니 이삭 팰 철인데."
총각이 웃통을 벗어 던지며 투덜거렸다.
"어이 추워. 귀찮아 죽겠네."
몸집이 우람하여 갑송이와 비등해 보였으므로, 역시 총간놈이 믿는 구석은 있었겠다고들
여겼다. 총각이 좌우로 팔을 휘둘러보더니, 의연하게 갑송이 앞으로 나서면서 물었다.
"뭐야, 맨손이여?"
"그럼 맨손이지 네까짓 것에 작대기라도 들란 말이냐?"
"죽고 살기루 싸우겠는가?"
제법 살기 띤 어로조 총각이 말하자 갑송이는 어이가 없어서 껄걸 웃었다.
"그래 죽을 때는 죽더라도 네 기운 자랑이나 보자꾸나."
"너부터 보여다우."
총가은 허리에다 두 팔을 얹고 버티고 서서 갑송이의 약을 올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갑송
이는 전혀 성낸 기색 없이 점잖게 꾸짖었다.
"허, 이놈의 버르장머리 좀 보아라. 그 더펄머리 올리구 나면 어른대접 해주지. 좆밥도 가
시지 않은 녀석이... 아주 후레자식이로구나."
"맺은 놈이 푼다고, 너희들이 먼저 싸움을 걸었으니 어디 힘자랑을 해보려무나. 괜찮으면
내 엎드려 성님이라구 빌겠다."
갑송이는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서 말했다.
"너두 똥깨난 뀐다는 모양인데, 어느 촌바닥에서 무뢰배 노릇이나 하였구나. 그러니까 싸
움판의 예의두 모르지."
"에이 귀찮아. 좋다, 그럼 두 눈구녁으루 똑똑히 봐두어라."
총각은 연신 귀찮다고 투덜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굵기가 세 뼘은 되어 보이
는 나무둥치를 눈짐작해 보았다. 그리고는 길 옆에 박혀 있는 한아름드리 바위를 툭툭 차보
더니, 두 손으로 잡고서 끄응하면서 번쩍 치켜들었다. 갑송이가 팔장을 낀 채 흥미있다는 듯
주시하고 있었다. 마감동이와 졸개들은 놈이 느긋하게 큰소리치던 대로 과연 힘이 센지라
어쩐지 불안해졌다. 총각이 바윗돌을 머리에 쳐들고 서너 걸음 뛰면서 대번에 나무둥치를
향하여 내팽개치니, 육중한 소리가 들리면서 나무가 휘청하며 휘어진다. 총각이 갑송이 쪽을
돌아보며 씽긋 웃었다. 갑송이도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고것두 기운 쓴다구 마빡에 힘줄을 세우며 지랄일세."
총각이 휘어진 나무에 상반신을 기대고 어깨로 힘껏 치니까 우지직 거리면 나무가 반대편
으로 넘어졌다. 중동이가 딱 부러진 것이었다. 갑송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고하였다. 너는 바위까지 쳐들구 법석을 떨었지만 내 정말 기운을 보여주지."
갑송이는 부러진 나무 곁에 섰는 비슷한 굵기의 소나무를 견주어보았다. 두 손으로 휘어
잡고 몇번 좌우로 흔들어대니 밑둥 근처에 눈이 쏟아져 내린다. 갑송이는 나무 밑에 기운
쓸 발디딤을 만드느라고 우선 눈을 이리저리 헤쳐놓았다. 맨땅이 나오자 발뒤꿈치를 콱 박
고 서서 두 팔로 나무를 얼싸안았다. 등과 어깨에 구불구불한 근육이 곤두섰다. 한참이나 힘
을 쓰는데 눈을 헤집으며 흙덩이들이 솟아올랐다.
"에에잇!"
한꺼번에 기운을 쏟으니 나무가 뿌리째로 뽑혀 올라왔고, 갑송아가 안았던 팔로 비틀어버
리는데 뿌리 끊어지는 소리가 투두둑거렸다. 갑송이는 뽑힌 나무를 쳐들어 머리 위에서 이
리저리 돌려 보이다가 멀찍이 던져버렸다. 호흡이 약간 거칠었으나 갑송이는 곧 가라앉히고
서 총각의 앞에 돌아섰다. 총각은 기세가 좀 풀려 있었다. 그러나 오기는 아직 남았는지라
아까보다 훨씬 자신 없어진 어조로 중얼댔다.
"뚝심 센 소가 어디 날랜 범 이기는 것 봤남."
"그래 뭘루 상대해주랴?"
"씨름으루 하자."
총각이 두 손바닥에 침을 뱉어서 쓱쓱 비벼보면서 말해다.
"이놈아, 이런 눈구덩이에서 무슨 씨름이야? 주먹다짐으루 네 골통을 계란 으깨듯 할 터
인데."
"싫으면 관두라지. 길구 짜른 건 대봐야 안다구 힘겨루기에 씨름말구 뭐가 있어?"
"진 놈이 그래두 성님 소리 하긴 싫어서... 좋다 하자꾸나?"
마감동이와 졸개들은 비록 갑송이가 천하장사라는 말은 들었으되 여태껏 직접 본 적은 없
었더니, 총각과 기운겨룸 하는 양을 보고는 완전히 안심을 하게 되었다. 갑송이가 졸개들에
게 명하여 눈을 치우고 판을 정리하라 일렀다. 판 수습이 된 연후에 두 사람이 마주섰다.
"샅바가 없으니 통씨름으루 하자."
총각이 말했다. 씨름은 왼씨름, 오른씨름이 있는데 이는 서로 고개를 엇돌리는 방향을 이
름이요, 샅바 없이 바지허리를 잡고 할 적에는 통씨름이라 하는 것이다. 총각이 갑송이의 허
리를 한 손에 잡고 다른 손은 허벅지에 얹었고 갑송이도 그와 같이 하였다.
"그래 안쪽으루 걸든지 밖으루 걸든지 네 재간껏 해보려무나."
씨름에는 크게 나누어 팔재간과 다리재간, 들재간이 있으니, 우선은 그 동작의 재빠름과
경험에 승부가 나는 것이요, 가진 기운이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버티고
돌아가는데 갑송이가 총각의 허리를 껴안고 허리치기를 노리면서 꺾으면, 총각은 턱밀치기
로 버티었고, 안낚시를 걸면 외로뒤집기 동작을 취하면서 발을 빼었다. 갑송이가 드디어 기
운을 믿고서 배지기로 총각을 번쩍 쳐들었다. 이제 옆으로 후릴 순간인데, 달싹 쳐들린 총각
이 슬쩍 덧걸이재간으로 갑송이의 힘에 그대로 편승한 채 가슴으로 슬쩍 밀었다. 둘이 붙안
고 넘어지는데 갑송이가 먼저 궁둥방아를 찧고 나가떨어졌다. 총각의 재간이 몹시 민첩하고
익숙하여 갑송이가 아무리 나무를 통째 뽑는 기운이 있더라도 씨름에는 당하지 못할 듯하였
다. 총각이 재빨리 일어나더니 달아날 자세로 몇걸음 물러섰다.
"봐라, 내가 이겼지?"
"이놈 어디루 가느냐, 섰지 못하겠어."
"나는 간다. 판막음 되었는데, 어째서 자꾸 또 하자구 성화여."
갑송이는 슬슬 분통이 치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놈아 그따위 속임수로 씨름을 했으니 두 판으루 승부를 내어야지."
"삼판 양승으로 할까아? 기운 빼면 배고파지는데 점심 줄 테여?"
갑송이가 벼락같이 소리치며 달려들어 총각의 가랑이에다 손을 넣고 한 손은 멱살을 잡아
번쩍 치켜들었다.
"에구구구!"
덩치가 비슷하여 곰 같은 총각이 썩은 짚단처럼 들려져 버둥댔다.
"자아 점심 처먹어라."
갑송이가 힘껏 내던지니 총각은 골짜기의 깊은 눈구덩이에 거꾸로 처박혔다. 두 다리만
허공으로 나와서 버둥대던 총각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눈으로 범벅이 된 낯을 씻으면서 눈
을 부릅떴다.
"네, 비록 기운이 세기는 하나, 이제는 사생 결단을 할 터이다. 나는 두 장연서는 황소의
뿔을 뽑은 강선홍이라면 모를는 자가 없다."
"뭐라구... 이름자가 뭐랬느냐?"
"왜 함자를 알구 나니 불알이 저려서 그러느냐. 강선흥이랬다."
"네가 장연 사는 소금장수 강선흥이냐. 송도 박대근 행수를 알겠구나."
그제서야 총각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비쳤다.
"구월산 기시는 분들이우?"
"나는 이갑송이다."
"아이구! 이거... 갑송이 성님이네. 우리 대근이 성님께서 갑송이 성님을 찾아 만나보라구
신신당부를 하셔서 제가 지금 찾아오는 길이 아니우. 아우 인사받으슈."
강선흥이 돌연 무릎을 꿇더니 눈바닥에 머리를 붙이며 엎드려 절을 한다. 갑송이도 얼결
에 엉거주춤하여 주저앉았다.
"강총각 일어나시게. 이럴 거 없수."
"제가 성님께 무례히 굴었으니, 이제 대근이 큰성님 뵈일 낯두 없습니다. 매를 때려주시
우."
해라 정도가 아니라, 상말의 욕지거리를 주고받던 자들이 정중한 예의로써 점잖게 수인사
하는 꼴들이란 자다가도 웃을 노릇이라서 마감동이와 졸개들은 킬킬거리며 구경하고 섰다.
갑송이가 선흥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 대근이 성님은 별일 없으신지? 내가 떠나올 제 일이 위급해 보이더니..."
"잘 무마가 된 모양입니다. 요새는 권력보다 금력이 더욱 세니까요. 송도서 그 댁을 건드
릴 자가 어디 있겠소이까. 대근이 성님은 명년 봄에 혼사를 치르실 때까지는 행상두 나가지
않을 모양이라, 요즈음 차인들을 데리구 슬슬 매사냥이나 다니십디다."
"혹시 해주서 별 소식이 없습디까?"
"아직 뵙지는 못했으나 해주 옥에 갇혔다는 그 길산이 성님 말씀이군요. 두 성님의 얘기
는 큰성님께 귀가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내가 송도서 떠나올 제 한양 갔던 송도의 건달 패
거리가 도착했습디다."
"음, 학선이패 말이로군."
"예, 맞습니다. 가어사 해먹었다는 학선이란 사내가 한양서 내려왔지요."
"그렇다면 며칠 안 가서 무슨 좋은 일이 나겠구먼."
"열흘 뒤에 구월산서 큰 잔치를 할 것이니, 며칠 놀고 있으라구 그러십디다. 길산이 성님
이며 또 뭐라더라... 용댕이 뱃사람이라든데."
"우대용이 아니우?"
"예, 우가라구 그럽디다. 이제 사흘 지났으니 한 이레 남은 셈입니다."
갑송이가 너무도 신이 나서 입을 크게 찢고 웃는 얼굴로 마감동이를 돌아보았다.
"이봐, 들었지? 이레가 지나면 길산이가 온다는군. 자아, 산채루 올라가지."
마감동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헌데 멧돼지는 놓치구, 손님을 잡았구려."
"아무거나 하나 잡았으면 됐지. 만석이가 뭔가 많이 잡았을 테지."
하고 나서 갑송이가 잊었다는 듯이 강선흥이에게 감동이를 손가락질해 보이면서 말했다.
"둘이 인사하시게. 이 사람은 우리 산채의 두령으루 있는 마감동이여. 나는 실상 이 사람
의 식객이지."
"안녕허우."
고개를 뻣뻣이 쳐든 채 강선흥이가 겨우 내뱉었다. 마감동이는 내심 몹시 불쾌하였으나
주인 된 체면으로 꾹 참았다.
"나 마감동이외다. 어서 오슈."
감동이가 인사를 하고 나니 강선흥이는 벌써 갑송이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감동이는 더
욱 불쾌했다. 어쨌든 서열이 정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산채에서 처신하기가 어려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뭐라고 불쾌한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기도 어쩐지 좀스러운 듯하여,
마감동이는 앞으로 이레 뒤에 모두들 모일 때에 어떤 결정을 내려두리라 혼자서 작정하였
다. 벌도 식구가 많아지면 분가를 하는 법인데, 하물며 녹림패에서 졸개들에 비해 두령이 많
아지면 손발이 맞지 않고 일러기도 큰 것만을 노리게 되니 그만큼 나라의 포토하려는 뜻이
커질 것이다. 오만석이는 사슴 두 마리와 토끼 스물 남짓을 잡아와 그들이 올 때만을 기다
리고 있었다. 오는 길에 아직도 말을 제대로 놓지 않는 갑송이에게 강선흥이가 말하였다.
"말 좀 놓으시우. 듣기가 아주 무겁소."
"왜 상소리로 욕을 보일 때는 언제구..."
"그야 모를 때엔 나라님두 욕하는 법이우. 아까는 길에서 만난 무뢰배끼리의 예법이고 시
방은 대근이 성님께서 맺어주신 의리루 형제가 아니우."
강선흥이 제아무리 대근의 지시에 따라 호형한다지만 저보다 기운 없고 싸움질 못하는 자
에게 형이라고 부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실지로 대적했을 때 갑송이가 나무둥치를 맨손으
로 뽑아내는 광경에는 완전히 기가 죽고 말았던 것이다. 오기로써 버티며 난처한 판을 벗어
나려는데 서로의 이름이 밝혀졌으니 자연스럽게 성님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박대근이가 범
처럼 날래고 곰처럼 장사인 문화의 두 광대에 대하여 얘기하더니 과연 듣던 대로 이갑송이
는 무서운 역사였다. 따라서 아직 보지 못한 장길산이란 광대의 날랜 재간까지 미루어 생각
할 수가 있었다. 강선흥이도 일찍이 장연의 남대천 모랫벌에서 싸움하는 황소의 뿔을 잡아
떼어말린 장사였으나 어딘가 갑송이에게는 미치지 못할 바가 있음을 스스로도 알았다. 오만
석이와도 인사를 나누었지만 선흥이는 역시 뻣뻣했다. 마감동이나 오만석이께 전혀 굽히는
기색이 없으니 더군다나 떠꺼머리인 선흥이를 그들이 좋게 볼 리가 없었다. 갑송이만이 선
흥이와 어울려 탑고개로 놀러 갔다. 김기와도 인사를 나눈 뒤에 선흥이는 다시 오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선흥이는 말했다.
"나는 아직 도둑놈이 되기는 싫우. 그저 성님네들이 좋아서 사귀러 온 것이지, 녹림패에
가입하려는 건 아니외다. 제게는 장연에 부모님들이 계시고, 또한 장사에두 이력이 나서 밥
술께난 먹구 지내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같은 녹림패루 취급하지 마우."
선흥이가 된목이골을 싫어하는 것을 아는 갑송이도 아예 모두들 모이는 날까지 산채에 가
지 않겠다며 탑고개에 주저앉았다. 그러니 자연히 세 사람이 술타령밖에는 할 짓이 없었다.
김기의 원한 풀이는 더욱 큰 일인 길산이의 탈옥이 무사히 끝난 다음에 벌이삼아서 한판 벌
이기로 작정이 되었다.
그들은 정 심심하면 가끔씩 은율 읍내의 주막에 나가서 놀고 오는 적도 있었다. 며칠 사
이에 갑송와 선흥이는 친동기간처럼 도타운 정이 생겨서 호형호제하는 데도 별 격식이 없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4
송도에서는 박대근이 한양서 돌아온 학선이패를 기다리다 못하여 안달이 낫었다. 벌써 사
나흘이 지나도록 학선이가 남산 아랫녘엔 얼씬도 않는 것이었다. 잠깐 밤중에 들러서 곧 해
주로 떠날 준비를 하겠으니 성님은 아무 말씀 마시고 돈이나 내시라 하여 백 냥을 받아가고
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이놈이 일이 옹색하여지니 용챗돈을 얻어가지고 줄행랑을 놓았구나!"
박대근이는 탄식하면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혹시나 남의 눈에 띄어 중대한 사업이
수포로 돌아갈까 염려해서였다. 어쨌든 청교방을 찾아가본 다음에 학선이가 달아난 것이 확
실하다면 차인들을 부근에 풀어서라도 기어코 잡아 분풀이를 할 셈이었다. 날이 어두워진
뒤에 박대근이는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서 청교방으로 나아갔다. 일부러 부막거리를 피
하여 샛길로 해서 성내 쪽으로 들어갔다. 못골에 이르니 때마침 한량들이 색주가로 몰려들
무렵이라 홍등에는 불이 켜지고 대문은 활짝 열렸는데 계집들의 방자한 웃음소리가 흐드러
지게 들려오고 있었다. 박대근이가 춘래의 집을 찾아 기억을 더듬는데, 아무리 부근을 헤매
어도 맞힐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못골 초입서부터 하나 둘씩 집뒤짐을 하며 대문을 살
폈건만 모두가 기억에 들어맞질 않았다. 공연히 색주가를 기웃거리며 우왕좌왕하노라니 문
간의 계집들 눈에 띄지 않을 재간이 있겠나. 계집들이 지분으로 얼룩진 상판을 문간에 내밀
며 한마디씩 건드려본다.
"나으리, 창기에 절개 지키시렵니까. 아무 문간으로나 들어서시지요."
"칠년 왕가뭄에 팔아버린 아낙 찾으시오, 아니면 이빨 뽑아준 정인을 찾으시오?"
색주가에 들어서서 눈을 휘둥그래 뜨고 문마다 살피니 창기들의 농지거리를 듣는 게 당연
한 일이었다. 박대근이가 원래 선비가 아니요, 팔도를 헤매며 온갖 산전수전을 겪은 장사치
라 그따위 계집들의 입담에 얼굴을 붉힐 사람은 아니었다.
마침 색주가에서 나오는 아이놈을 만나 춘래의 집을 물었다.
"그 집에 가봐야 소용없습니다."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었다.
"왜 어디루 이사를 갔느냐?"
"아니오, 요즘 며칠 동안 대문을 닫아걸고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음, 그 자리에 있긴 있단 말이지?"
아이가 손을 들어 홍등 사이에 어두컴컴하게 끼여 있는 한 대문간을 가리켰다.
"저 집 아닙니까. 춘래가 고뿔이 들어서 며칠째 몸조리를 한답니다. 손님, 아예 저희 집으
루 들어오시지요."
박대근은 아이놈이 가르쳐준 대로 대문 앞에 이르러보니 문이 굳게 잠겨 있고, 문설주에
걸린 홍등에서 불이 꺼져 있었다. 대근은 춘래네 집을 찾지 못했던 이유를 그제사 알았다.
"이리 오너라!"
그가 대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안에서 한참이나 지체하는 듯하더니, 뭔가 수습을 하는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나서 나직한 여자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누구셔요?"
"음, 학선이 있느냐?"
빗장이 빠지더니 문이 열리는데 몸소 춘래가 나와 서 있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행수 나리."
"학선이 집에 있느냐구?"
춘래가 재빨리 대문을 닫으면서 뒤꼍을 손짓했다.
"있다뿐입니까. 지금 저 뒤에서 굿을 벌이구 있습지요."
"왜 고뿔이 걸려 장사를 못한다더니..."
"말씀 마십시오. 저희는 이틀 밤낮을 꼬빡 새우느라구 고뿔보다 더한 생앓이를 하였습니
다."
"이틀 밤을?"
춘래가 눈을 곱게 흘기면서 박대근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이 참 행수 어른두... 직접 시키신 일을 모른 양하십니까. 저희는 관복을 일곱 벌이나
짓고, 제반 행구를 차리노라구 혼났다니까요."
박대근이는 그제서야 춘래의 말을 알아들었다. 학선이는 역시 치밀한 녀석이라 해주 갈
채비를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안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문 쪽을 지켜보
던 계집종이 뒤꼍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박대근이도 뒤꼍에 막 들어서려는데 머리 위에서
별안간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남칸 죄인을 향쇄 족쇄하여 꿇리라."
박대근이 머리를 치킬 사이도 없이 사릉장이 양쪽에서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마루 위에는 주립 쓰고, 홍철릭 입은 도사가 앉았는데 그 위엄이 기히 삼엄하고 저승사자
처럼 서슬이 곤두서 있었다. 마루아래 나장이 흑단령을 입고서 주장을 세워 들었으며 나졸
들은 양쪽에서 사릉자을 뒤로 걸어메고 있었다. 박대근이 한편 놀랐으면서도, 감탄하여 크게
웃었다.
"학선이 자네 수고가 많았구나."
"어서 올라오십시오."
금부도사 차림의 학선이가 일어나며 박대근을 맞았다.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그러잖아두 사람을 성님 댁으루 보낼까 하던 참이었소."
"어디... 당장이라도 떠날 수가 있겠는가?"
마주 앉자 대근이 물었고, 학선이는 문갑을 뒤적이더니 공문서 한 장을 꺼내서 펴들었다.
"어제야 간신히 인장 위조가 끝났습니다."
"그것이 무슨 문서인가."
"예, 의금부 관인과 판의금의 인이 박힌 죄수 압송장이올시다."
"길산이와 대용이를 어찌 꺼내올 수가 있겠는가. 감사가 뜻대로 속아넘어갈까?"
"허허 무슨 말씀이오. 이 학선이가 한양 가서 맹물만 마시다 온줄 아오. 나는 판의금 댁
하님의 정인이었소."
"금부의 내막을 소상히 탐지해냈단 말이지?"
대근의 물음에 학선이는 그 풍채 좋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판의금뿐만 아닙니다. 지의금 동의금과 십도사에 문사랑청의 식구들에서부터 작은댁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일이 없고 형조의 내막까지 뚜르르 꿰고 있습니다."
"한양 올라갔던 보람이 있었군."
"보십시오. 내일, 그리고 모레까지는 죄수들을 빼돌리겠습니다. 너희들두 올라오너라."
학선이가 퇴창문 밖으로 서리를 지르니,밖에 섰던 나장과 나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한 녀석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인젠 이 갑갑한 털벙거지와 더그레를 벗어두 되겠습니까?"
"안된다. 완전히 익힐 때까지 좀더 연습을 해둬야겠다. 사릉장 다루는 것두 그렇고... 어이
나장, 자네는 나졸들이 죄인을 꿇린 다음에 무엇을 하라고 그랬었지?"
"죄목을 외치라 하였던가요?"
"예끼 이놈, 내가 위에서 하는 말을 받아 복창 거행하라구 그랬잖느냐."
"성님, 저희들두 이젠 지쳤습니다. 좀 쉬어가며 합시다."
"그래, 행수 성님께서 오셔서 점심을 들려던 참이다."
춘래와 계집종이 겸상과 원반을 차례로 들고 들어왔다. 학선이와 대근은 상을 마주하고
반주로 몇잔 걸치는데, 학선이가 한양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였다.
학선이 한양에 이르러 먼저 한 일은 판의금 댁을 알아내는 일이었고, 알아내자마자 사직
골의 대감 댁 앞에다 사관을 정하였다. 그리고는 데려간 부하들과 함께 그 댁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일일이 파악하고, 손님의 말구종배들이나 교꾼이 잘 들르는 목로에 파묻혀 그
들과 사귀면서 자세히 정탐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학선의 부하들은 판의금 댁 하인들과
절친한 술친구가 되어버렸고, 의금부의 관원 부스러기들과도 안면을 트게 되었었다. 어느 저
녁때에 학선이 심심하여 그의 오른팔인 아귀쇠와 더불어 투전을 노는데, 마흔장짜리 가보잡
기를 하고 있었다. 부하가 급히 뛰어와 방문을 벌컥 열고 고하기를,
"사또! 판의금 댁에 은등자에 은방울 올린 호마 한 필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학선이는 쌍교자가 나갔다든가, 글방 도령이 외출에서 돌아왔다든가, 아침에 허청
에 앉아 면회를 기다리던 꾀죄죄한 선비가 이제 자리를 떴다는 얘기처럼 무심히 들어 넘겼
었다. 한참이나 투전에 열중했던 학선이가 갑자기 패를 던지며 아귀쇠에게 일렀다.
"그 말의 내력을 급히 알아오너라."
학선이는 무슨 꿍꿍이속인지 아귀쇠를 대감 댁에 보냈고 잠시 후에 돌아온 부하가 알아본
바를 상세히 고하였다.
즉 병판에게는 십오세 된 딸이 있었고 판의금의 아들이 이제 아홉 살인데 얼마 전 술자레
에서 언약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제 두 집안이 사돈이 되는 것은 정해놓은 일이었고, 마
침 병판에게 북방에서 공물로 말 한쌍이 바쳐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병판은 장래의 사돈
에게 말 한 필을 보내어 그 정리를 표시하는 것이라 하였다. 얘기를 듣고 난 학선이가 고개
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아귀쇠야, 하나만 데리구 나서라."
하고 나서 학선이가 아귀쇠의 귀에다 대고 뭔가 잠시 동안 소근거렸고, 아귀쇠는 알아들
었다는 둣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쪽에서 널 알아보면 만사가 끝나는 거여. 감쪽같이 하여라."
아귀쇠와 부하는 재빨리 사관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광통교 다리께에 가서 삼패 기생년
하나를 급히 물색하여, 그들이 지적하는 행인을 끌어들여 무조건 만취하도록 해주면, 술값
외에 은자 열 냥을 주리라 약속하였다. 어느 시러베년이 거절을 하랴. 술 팔고 돈 받을 욕심
에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이 손가락질하기만 기다리며 애를 태우는데, 역시 학선의 예언대로
판의금 댁의 수노가 옆구리에 가죽함을 끼고 어정어정 걸어왔다. 학선의 말에 의하면 선사
품을 받았으니 사돈지간에 틀림없이 답례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시 답례가 있을 것
인즉 판의금 댁의 수노가 갈 것인데 그자를 후려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병판 댁이
모싯골이니, 사직골서 가려면 빠른 길이 적선방을 지나 종루로 해서 광통교를 지날 것인즉
목을 지키라는 얘기였다.
"바로 저기 보퉁이를 옆에 낀 녀석이다."
아귀쇠가 지적하자마자 기생년은 수자리 가서 오랑캐와 싸움하다 돌아온 제 서방이나 마
중하듯, 허겁지겁 뛰어나가 무조건하고 팔을 덥석 잡았겠다.
"아이 서방님 얼마만이셔요. 그래 통발길을 않으시긴가요?"
판의금 댁 수노가 입이 쩍 벌어져 어안이 벙벙하더니, 이윽고 정신을 차려 뿌리쳤다.
"자네가 날 어찌 안다구 이 요살을 떨구 야단인가. 내 수중엔 한 닢두 없네. 깝데기를 벗
겨봐야 재작년 그러께 알 깐 서캐만 우수수하리."
"차암 서방님... 아무리 노류장화인들 치마폭에 사연이 있더라고, 어디 까짓 쇳뎅이에 좌우
되겠습니까요. 오늘 쇤네는 장사하지 않을랍니다."
"글세 이거 벼락 맞은 쇠고기가 너저분한가, 왜 길에 나와 서서 남바쁜 사람 붙잡구 까실
르구 그래. 아무리 그래보아야 호조돈 얻어올 사람두 아니라니까."
아귀쇠와 부하는 바깥 길로 난 들창문에 구멍을 뚫고 숨죽여 내다보고 있었다. 기생이 다
시 허리를 비틀면서 수노의 옆구리에 바짝 붙어 매달렸다. 제깟년이 돈냥이나 준다니까 저
지랄이지만 평소에 구종배나 노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이었다.
"허허 이거 꽉 물렸네!"
수노란 녀석이 분냄새와 교태에 녹았는지 뿌리치지도 못하고 이끌려 왔다.
"꼭 한 잔이여. 내 시방 급한 볼일이 있단 말일세."
"서방님 꼭 한 잔만... 예전에 서소문밖에 있을 제 제가 서방님을 뫼신 적이 있다니까요."
하긴 홍제원과 모화관 부근에 하천들을 상대하는 색주가가 많이 있었으니 수노란 놈도 거
기에 몇번 걸음을 했던 기억이 있는지라 알딸딸하면서도 그러려니 믿는 눈치였다.
"얘, 여기 다담으로 큰상 차려서 들여라."
기생년 재치있게 떠들어대면서 드디어 판의금댁 하인을 꾀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놈이
아무리 목전에 다급한 일이 있다손, 미녀와 술을 버리고 어디로 가랴.
술잔이 거듭되자 수노는 차차 심부름에 대한 생각은 잊고, 퍼질러앉아서 기생의 허벅지난
주무르며 밤을 새울 듯한 지경이 되었다. 염라대왕도 주색에 빠지면 저승사자가 묘지로 압
송 간다는데, 아무리 눈치가 빠릿빠릿한 놈이지만 술에 장사 있나. 눈꺼풀이 게게 풀리고 혀
가 비틀어졌으니, 기생이 이쯤이면 되겠다 싶어 손뼉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손뼉소리가 들리
자마자 문간방에서 기다리던 아귀쇠와 부하가 안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그 녀석 아주 인사불성이군."
"술값하구 상금...?"
기생년이 손을 내미는데, 아귀쇠는 서슴없이 돈꿰미를 방바닥에 던진다.
"누... 누구여..."
눈을 멀거니 뜨고서 연신 딸꾹질을 하면서 수노가 말했고 두 사람은 대답 없이 보에 싼
가죽함부터 슬쩍 빼앗았다.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주절대는 판의금 댁 하인 녀석
의 팔다리를 두 사람이 들고서 색주가를 나갔다. 원래가 광통교 부근은 깍정이들의 잠자리
여서 그 아래로 던져버리니 곧 검은 그림자들이 다가와 수노의 옷을 벗겨가버렸다. 아귀쇠
와 부하가 사관에 돌아가 학선이에게 가죽함을 바치고, 일의 자초지종을 얘기하였다. 학선이
는 흡족해서 두 사람에게 용채를 두둑이 던져주고는 곧 가죽함을 열어보았다. 함 속에는 아
이놈 팔뚝만이나 한 산삼이 두 뿌리나 들어 있었고 녹용이 한재 들어 있었다.
"이제 그 녀석은 죽은 목숨이다. 감히 두 대감의 교분에 흙칠을 하고 답례품을 잃었으니
마땅히 거적에 말려 타살되리라. 너희는 문밖에 나가서 살피다가 그자가 돌아오면 즉시 알
려라."
학선이는 이르고서 자리에 들었다. 새벽녘에 번을 서던 자가 와서 벌거숭이의 수노가 방
금 돌아왔다고 알렸다. 학선이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잠을 자는 것이었다. 적
당한 시각이 되어 학선이는 복장을 단정히 하고 머리에는 상사람처럼 패랭이를 얹은 뒤에
옆구리에 가죽함을 끼고 판의금 댁 대문간의 허술청으로 찾아갔다. 녹사에게 판의금께 통자
하여줍시사 청하니 녹사는 학선이의 주제를 보고는 코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학선이가 더
이상 승강이하지 않고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그럼 하는 수 없군. 만약에 판의금 대감께서 오늘 아침에 역정을 내시는 경우에는 저쪽
맞은편에 있는 사관으로 나를 부르러 오시우."
녹사가 수염을 비틀고 서서 코바람 소리를 냈다.
"별 미친놈 다 봤네!"
대감이 아침에 일어나 의금부로 나가시기 전에 담배 한 대를 태우는 중인데, 문득 어제
병판에게 호마에 대한 답례품을 보냈던 생각이 났다. 하나 어찌된 일인지 여태껏 그 결과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대감이 적이 불쾌하여 설렁줄을 당기는 손짓이 거칠었다. 마당쇠가 달
려오고, 살림 맡은 청지기를 부르라 일렀다. 청지기가 와서 뵙자마자,
"이놈들 심부름을 시켰으면 일의 선후를 말해야지 어찌 아무런 뒷말이 없느냐. 심부름을
보냈느냐?"
"예예, 산삼 두 뿌리와 녹용 한 재를 보내드렸습니다."
"확인을 하였느냐?"
"아직 소인은..."
"그 수노란 놈을 부르라!"
대감의 호령이 추상 같았는데 하인은 거의 죽을상이 되어 뜰 아래 부복하였다. 대감이 마
루 위에서 소리쳤다.
"네가 심부름을 갔었드면 일의 내종을 고해야지 어째서 나타나지도 않았는가?"
"소인이 죽어도 남을 죄를 저질렀으모로 못 들어왔습니다."
"무슨 죄냐?"
"예, 답례품을 가지고 모싯골로 가는 도중에 그만... 술을 두어 잔 하고서 정신을 잃었던
고로 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놈, 그것이 뉘게로 가는 물건인데, 그따위 버릇을 가르치더냐. 도중에 술을 먹고 정신
을 잃었다? 그 무엄한 놈을 단매에 때려 죽이라!"
수노를 타살하고자 형틀이 벌어지는데, 녹사가 가만히 생각하니 아무래도 식전에 찾아왔
던 자가 심상한 일로 온 것은 아니고, 이제 생각하니 옆구리에 함을 가졌던 듯싶었다. 녹사
가 나중에라도 통자 넣지않은 죄책도 면할 겸, 대감께 자기 빈틈없음을 알릴 겸 하여 마루
아래로 나아가 아마도 잃은 물건을 찾을 수 있으리라 아뢰었다. 대감이 즉각 행형을 중지하
고 직접 녹사를 사관으로 보냈다. 녹사가 함을 내어주기만 원하였으나 학선이는 신을 꿰고
나와 앞장서면서 말하였다.
"지금 댁에서는 난리가 나서 사람이 하나 죽을 모양일 텐테... 내 직접 습득한 자로서 대
감을 뵙고 구명을 청할까 하오. 하인들의 생사는 그 노주의 감정에 달렸으니, 잃었던 물건을
보고 또한 외인이 청하면 노염을 부실 게유."
녹사가 들으니 이치가 가장 합당하여 주인께 생색내려던 것이 머쓱해져버렸다. 학선이가
판의금 대감께 현신하는데 대처의 오입쟁이로 잔뼈가 굵었으니 그 얼굴이며 태가 과연 남에
게 좋은 인상을 줄 만하였다. 학선이는 공손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아뢴다.
"제가 급한 볼일이 있어 성문 열릴 즈음 하여 광통교 쪽으로 식전 길을 재촉하는데, 마침
깍정이들 두엇이 거적대기에 무언가 싸가지고 갑디다. 새벽이니 걸을 달아가는 길도 아니겠
고 하여, 무심코 고개를 돌려 유심히 살피는데 거적 틈으로 함이 보이질 않겠습니까. 이것은
분명 귀한 댁의 물건을 도적질한 것이라 믿고 그놈들을 불러 세우고 두드려준 다음에 함을
빼앗았습니다. 열어보니 참으로 진귀한 약재가 있는지라 주인에게는 더욱 소중할 듯하여 하
는 수 없이 안에 있는 일봉 서신을 읽었습니다. 그리해서 허술청에 와서 녹사에게 통자를
넣었던 것입니다. 감히 서찰을 개봉하여 읽은 죄 죽어 마땅합니다.
대감은 함을 열어보고 물건을 확인한 다음에 마음이 몹시 흡족하였다.
"너는 어디 사는 누구냐?"
"예, 양주 살던 유가올시다. 본시 소인의 아비는 아전질을 했사옵고, 집안이 기운 뒤에 저
는 한양 와서 어느 댁 청에라도 붙일까 하여 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올시다."
"네가 중인의 자식이니 글은 알겠구나."
"예, 아옵니다."
"음, 그렇다면 오늘부터라도 책실에서 일하도록 하여라."
하고 나서 수노는 매를 때려 광에 가두어 사흘을 굶기라 하는데, 학선이가 은근히 품하였
다.
"소인 황공하고 무엄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비록 저 사람이 죽을 죄를 지었다고는 하오나,
벌은 잃은 것에 내리는 것이요, 이미 찾았으니 소인께 일자리를 주시듯 저 사람도 사합시는
것이 도리인 줄로 아뢰오."
학선이는 판의금 대감 댁에서 책실을 맡아보게 되자, 졸개들을 모두 송도로 돌려보냈다.
책실에 있으니 의금부의 돌아가는 사정을 한눈에 짐작할 수가 잇었고, 더구나 수노는 학선
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그가 묻는 대로 의금부와 형조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었다. 더구나
학선이는 수노의 여동생인 하님 여비와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그 여자는 정경부인과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난 소꿉동무였고 말이 종이지 친형제와 다름이 없는 사이였던 것이다. 판
의금 댁의 책실과 안방을 소상하게 꿰고 있었으니, 학선이가 진짜 도사 보다도 더욱 의금부
의 사정을 아는 셈이었다. 학선이가 거기까지 얘기를 마치자, 흥미 깊게 듣고 있던 박대근이
가 껄걸 웃었다.
"미친놈 같으니... 네가 이렇게 늦어진 것은 바로 그 여비와 통정하느라구 그랬구나. 재미
는 봤으니 내가 주었던 착수금은 도로 내놓아라."
"어유 무슨 말씀이슈. 밤에 슬쩍 빠져나오는데 그동안에 깊은 정이 생겨서 정말 발길이
내키질 않습디다."
"어디 내일 해주로 가겠나? 일을 급히 서두르지 않으면 우리 아우들은 모두 엄동에 얼어
죽을 게야."
"내일 새벽밥을 지어 먹고 떠나겠습니다. 성님두 가실려우?"
"부하 하나를 내 집에 보내어 기별이나 해다오. 그럼 뒤따라 구월산으루 가겠다."
"장길산이와 우대용이를 꺼내어 구월산까지만 데리고 가면 된단 말씀이지요?"
"그렇지. 내일쯤이면 모두들 만날까?"
"아닙니다. 내일 저녁은 객사에 들어 하룻밤 쉬고 모레 죄수를 인계받아 압송하여 나올
작정입니다."
"그러면 기별 보낼 필요두 없겠군. 글피쯤에 내 구월산으루 가겠네."
"구월산서 뵙게겠습니다. 어찌... 저희들 연습하는 거나 더 보구 가시렵니까?"
박대근이는 그냥 일어났다.
"일찍들 재우지 그래. 내일은 정말 피곤할 텐데."
"성님이 안 보시겠다면 저희두 그만두겠습니다."
박대근이는 춘래네 집에서 나왔다. 이제 길산이와 대용이가 나오게 되면 당분간 구월산에
근신시켜두었다가, 삼남 쪽으로 내려갈 상단을 만들 작정이었다. 북으로는 선흥이와 갑송이
가 있으니 또한 염려될 바가 없을 듯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학선이네 패거리들은 행상의 차림으로 송도를 떠났다. 벼란나루를 건너 연
안으로 해서 삽교에 이르기까지는 관복을 꺼내 입지 않을 작정들이었다. 그들은 부담을 얹
기에는 화화스러운 백마 한 마리를 끌고 갔는데 행인들이 보기에도 장사치들이 백마에다 짐
을 올려놓은 꼴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말의 장식은 떼었으니 꾸며놓기만 하면 훌륭할 것 같
았다.
드디어 삽교를 지나 석장승에 이르렀다. 그들은 길에서 내려가 숲속으로 들어갔다. 보따리
속에서 온갖 변장할 옷이며 무기들을 꺼냈다. 학선이는 주립을 쓰고 홍철릭을 걸쳐 입었다.
부하들도 한 놈은 나장, 그리고 나머지 넷은 나졸로 차림새를 바꾸었다. 금부도사로 변한 학
선이가 백마에 올라앉았고, 그 뒤를 나장이 거느린 네 명의 나졸들이 따르는데 지나던 사람
들은 모두 그 위엄스러운 행렬에서 비켜았다. 그들은 해주 군관이 나와 있는 우름내 쪽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학선이 일행이 우름내를 건너니 마침 나와 있던 군관이 금부도사의 행차
를 보고서 놀라 뛰어와 군례를 드렸다.
"원로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오냐, 너희 감영은 아직 멀었느냐?"
"해운정이 바로 저희 송별하는 곳입니다. 우름내서 성내까지가 삼십리 되겠습니다."
"안전께서도 무고하신가?"
"평안하십니다."
백마 위에서 군관과 수작을 나누는 학선은 의연하고 빈틈이 없었다. 그들은 주내방을 지
나서 순명문을 향해 나아갔다. 이미 주내방을 들어설 때부터 금부도사가 해주에 떴다는 전
갈이 관아로 득달같이 들어갔고, 도사가 감영에까지 온다는 것은 즉 역모에 관한 형옥이 있
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역모에 관련된 자를 한양으로 압송하기 위해서 금부도사가 출현하면,
아무리 관찰사라 할지라도 그가 지목하는 죄인을 잡기 위해서 군졸들의 지휘를 맡기게 되는
것이었다. 그들이 순명문 앞에 당도하자 미리 전갈으 받았던 중군과 형방 비장이 나와 있었
다. 그들은 군영 옆의 객사로 안내되었다. 형방이 죄수압송장과 의금부의 공문서를 받아 관
아로 들어갔다. 관찰서에 밉에는 정삼품의 목사가 있었고 종사품의 무관 만호 등이 있게 마
련이었다. 그리고 감영에도 도사가 한사람씩 있어서 지방 관리들의 규찰을 맡아 보았다. 해
주감영의 도사가 객사로 학선이 일행을 찾아왔다.
"처음 뵙겠소이다."
학선이는 이미 그에 대해서도 뒷조사를 해두었는지라 서슴지 않고 말하였다.
"안녕하시오. 외직이 어떠하오?"
"한양에 가고 싶소이다."
학선이가 미리 해주도사의 입을 막아놓으라고 한마리를 찔렀다.
"들으니 동관께서는 현령을 지내셨다니 치민도 잘 아시겠구려. 요사이 임반 백성들 중에
불충한 색각을 품는 자들이 있다하오."
"허허 제가 현령이었다는 것은 ㄸ 어찌 아시오? 의금부에 계신지 얼마 안되셨을 터인
데..."
"예, 형조에서 좌랑을 하다가 지난 가을에야 올랐습니다."
학선의 말을 듣고 난 해주도사는 다소 가볍게 여기는 눈치로 변하였다. 이제 막 정육품
좌랑 벼슬에서 종오품 도사로 순서를 밟은 신출내기이기 때문이었다. 눈치를 채고서 학선이
가 말하였다.
"환로에 오른 지 여태껏 형옥에 관한 일만을 하여 사헌부와 형조와 의금부에서는 저를 모
르는 사람이 없소이다. 이번에는 어명을 받잡고 역모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두 죄인을 압
송하러 내려왔소이다."
학선이의 어명이란 말이 떨어지자 도사는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다.
"압송장의 내용에 본즉 이미 장계를 통하여 신원이 알려졌다는데 어떤 자들 말씀이오?"
"그자들은 형조에서도 파악한 바와 같이 지금 감영 옥에 갇힌 우대용이라는 자와 임춘삼
이라는 자요."
"예, 저두 대략 보아 알고 있습니다."
"서울에 압송하여 판의금과 각부 판사 지사 대감들을 모시압고 추국을 열라는 지엄한 붑
부를 받잡고 왔소이다."
"지금 형옥이 일어나고 있소이까?"
"그렇소, 하루가 급합니다. 내일 사또께 현신하여 말씀드리고 곧 압송 거행할 테니 동행을
바라오."
길산이 독칸에 갇히고 나서야 곳에 갇혔던 자가 자기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는 것을 알았
다. 송도 박대근이가 우선 길산의 목숨을 살려놓기 위해서, 옥사장에 돈을 쓰고 대시수로 바
꾸었던 기뿐 마음이 아니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백성들의 피나는 사연
을 알았고, 혼자서 차입되는 음식을 먹으며 편히 지내는 것이 몹시 괴로울 뿐이었다. 할 수
만 있다면 감영 옥을 모두 깨뜨리고 갇힌 사람드롸 함께 먼 북방으로 달아나고 싶기도 하였
다. 어쨌든 그는 옥에서 생각이 많이 자라났다. 만약에 바깥 세상에 나가더라도 제 일신을
버려, 좋은 세상을 만드는 공부를 하리라 작정하였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무력하고 어리석
은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모통 때처럼 저녁이 끝나고 비교젹 마람이 들이치지 않는 구석의
짚덤불 속에 몸을 파묻는 중인데, 바깥에서 발짝 소리와 불빛이 가까워졌다. 그는 재빨리 일
어나서 칼을 목에 걸고 쇠를 채웠다. 그에겐 차꼬를 벗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지금 이러한
시가에 옥을 방문하는 자가 있다면 틀림없이 옥사장보다도 높은 관리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
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전립을 쓴 머리가 다가오고 있었으며 그 뒤로 옥졸과 옥사장에 굴러
싸인 산발한 죄수가 끌려오고 있었다. 길산은 어둠속에서 눈을 빛내며 바깥을 살펴보았다. 끌려
오는 죄수는 다른 자가 아니 회자수 우대용이었다. 형방이 옥내를 들여다보면서 말하였다.
"이 자가 임가가 틀림없으렷다?"
"틀림없습니다."
"우가와 임가를 함께 가두어두고 철저히 감시하라. 내일 한양으로 압송하랍시는 도사 나
으리의 엄명이시다."
쇳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칼과 차꼬를 찬 우대용이가 안으로 떼밀려 들어왔다.
"두 명씩 교대로 지키게 하여라."
그들이 멀어져갔다. 우대용이가 길산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속삭였다.
"허허, 이제 대시수로 되어 탈옥할 날을 기다렸더니 한양으로 끌려 가면 꼼짝없이 죽었수.
박행수도 나라님이 아닌 바에야 용 뺄 재주가 없을 게야."
길산은 옥문 앞에 입초를 선 수직 옥졸에게 눈을 주고 나서 소곤거렸다.
"감영서 한양으로 이송하는 꼴이, 틀림없이 중대한 형옥이 일어나 모양이오."
"헌데 하필이면 또 노형과 나란 말이우?"
"그 참 이상하군. 나는 지금 장길산이가 아니라, 살인한 임가라느 사람인데 압송당할 까닭
이 없습니다."
길산과 대용이 그렇게 수작을 나누는 중인데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대다보니 옥사장이었
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길산이를 찾고 나서 두 사람의 수직 군사를 잠깐 비켜나게 하였
다.
"장총가... 이거 안되었네. 내 자네에게 부탁이 한가지 있어서 왔구먼."
"내게 무슨 부탁할 게 있겠소."
"다름 아니라, 내가 바깥의 부탁으로 자네를 당장 집행당하게 하지 않노라구 대시수를 대
신 집행하도록 주선했었네. 그래서 자네가 임가성 가진 살이자가 되었더니 이제 한양서 큰
형옥이 죄수가 바뀐 것이 아려지면 나는 끝장일세. 아무래두 죽을 목숨이니 산 사람께 선심
좀 쓰소."
"아무리 목숨이 초개 같은 팔자라 하나, 대장부의 신의가 있수, 옥사장이 나를 잘 돌봐주
었거늘 내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옥사장을 찌르겠소이까. 염려 마시우. 내 임가라는 백성의
이름으로 죽으리다."
길산이 까다롭게 굴지 않고 선선히 옥사장의 청을 받아들이자 옥사장은 연신 허리까지
구부렸다.
"장총각 고마우이. 우리 소리들이야 자네들게 무슨 포한이 있었겠나. 다 먹고 사느라구 돈
냥두 받구 그랬지."
"내 가진 것이 있으면 더 남기고 가고 싶지만 빈손이오그려."
옥사장도 가난한 백성의 한 사람인지라 곧 목이 메었다.
"뭣 청할 것이 있으면 말허게. 내가 어떻게든 들어줌세. 계집이라두 넣어주겠네."
하자마자 우대용이가 목에 쓴 칼을 휘둘러 옥문 창살을 후려치면서 고함을 질렀다.
"얼른 비켜라! 이 쥐새끼..."
"우서방 좀 참으시우. 아무려나 죽을 놈들이 남에게 섭섭허게 대하여 뭣한단 말이오."
길산이가 우대용이를 말리면서 옥사장께 말했다.
"고맙소. 계집은 그만두고 술이나 한동이 들여주오."
"그러지. 셋이서 이별주라두 나누세."
옥사장이 총총이 사라지고 씩씩거리는 우대용에게 길산이 침착하게 물었다.
"노형은 어째서 노여워하시우?"
"산 놈들이 간사하기가 망하는 나라의 환관보다 더하오. 제놈이 일찍이 우리를 빼주리라
해놓고서는 돈냥을 엄마나 처먹었소이까. 이제 우리가 한양 올라가면 죽는 것보다도 금부의
잔혹한 형국을 받을 것이 더욱 끔찍한 터에, 제 발밑 걱정이나 하노라구 궁지에 몰린 사람
들을 놀려대니 화가 안 나겠소."
길산은 손을 더듬어 우대용의 손목을 잡고 한 손으로 그의 손등을 가볍게 두두렸다.
"진정하시구려. 내가 성을 갈면서까지 대시수가 되는 것을 원했던 것은 노형과 똑같은 심
정이었소. 어느땐가 탈옥할 기회가 찾아올 줄 알았소. 이제 곰곰 생각해보니 구차한 목숨을
붙이려고 몸부림쳤던 것 같소이다. 딴에는 보다 대장부다운 일을 하리라고 마음먹으면서 더
욱 살고자 했으되, 다른 죄수들의 정상을 보니 너무 욕심이 많았지요. 이제 섭섭한 마음 없
이 불경이나 외우면서 한양으로 끄려가겠소이다. 저 옥사장은 한갓 가난한 소리에 지나지
않으니 우리들로 하여 처자가 배를 불렸다면 또한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오."
우대용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주먹 같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
다.
"내 살아 나간다면 꼭 신복도이를 단숨에 때려 죽이리라!"
"술이나 먹고 잠을 푹 자둡시다. 내일 길을 걸을려면 기운이 남아돌아야지."
"죽기를 감수하겠단 사람이 기운은 남겨서 뭣에다 쓸라우?"
"글쎄 혹시... 우리가 길에서 놓여날지 누가 안단 말이오?"
"무슨 낌새를 잡았소?"
길산이는 대답 없이 익숙한 솜씨로 차꼬와 칼을 벗어서 손 닿기 쉬운 곳에 세워놓았다.
우대용이 침을 삼키면서 다시 한번 거칠게 물었다.
"놓아날 방도가 있단 말이우?"
길산은 목소리를 낮추어 중얼거렸다.
"한번 생각해보시오. 어딘가 그럴 듯하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점들이 있단 말요. 두 가지
로 생각할 수가 있소."
"뭐가 두 가지요? 우리가 한양에 끌려가면 죽거나 아니면 귀양가는 일 말이우?"
"그런 말이 아니라, 우리가 내일 옥 밖으로 끌려나가면 그것이... 탈옥일지도 모르겠소."
길산의 속삭이는 말에 대용은 어이가없는지 입을 딱 벌리고 눈망울을 크게 번뜩였다. 길
산은 계속해서 말하였다.
"너무 믿지는 말고 내 이야기를 가벼이 들으시우. 죽고 사는 일을 담담하게 생각하고 보
면 전혀 탈옥의 가망이 없는 건 아니니까. 뭔가 이상하지 않소? 노형이 한양에 아는 벼슬아
치가 있을 턱이 없고 또한 물꼬를 시비로 동리 사람을 쳐죽인 임가란 자 역시 천출 농민이
니 한양의 형옥에 관계가 닿을 리가 없소."
"그건 그렇군."
하면서 우대용이는 그제사 고개를 끄덕였다.
"금부도사가 감영에 내려온 것은 필시 역모에 관한 옥일시 분명하외다. 헌데 우서방은 임
가를 아시우?"
"전혀 모르우. 어떻게 생겼는지두 모르겠수."
"그것 보시오. 내가 임가를 대신하여 대시수로 급한 행형을 모면한것이나, 노형이 회자수
가 되어 참수형을 일시 모면한 것은 우연히 그리된 것이 아니라, 송도 박행수의 입김 때문
이었소."
우대용이는 재빠르게 속삭였다.
"어 이제 생각나는군. 노형 대신에 내가 얘기하리다. 이제 또한 역모에 관련되어 우리가
한양으로 압송을 가게 되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니라..."
"쉿... 누가 오는군."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옥사장이 옥졸에 들린 술동이와 안주 찬합을 마련해서 옥 앞에 왔
기 때문이었다. 길산이 말하였다.
"답답하여 잠시 칼과 차꼬를 벗었소이다."
"어 괜찮애. 우서방두 벗지 그러나?"
"내 것은 새 것이라 손에 익질 않소이다."
옥사장이 창살 안으로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이리 가까이 대게나. 벗겨줄 테니까."
그는 대용의 칼과 차꼬를 차례로 벗겨주었다. 술동이에서 탁주를 한 표주박 그득히 퍼서
먼저 길산이에게로 내밀었다. 길산은 단숨에 마셨고 옥사장이 말하였다.
"송도서 무슨 기별 없는가?"
"전에 밥집을 대어준 뒤로는 통 소식이 없소이다."
옥사장이 혀를 찼다.
"감옥 뒷바라지란 부모 처자식 간에두 죽을 사람은 버리게 되는 법이지."
우대용이가 술잔을 건네받으면서 옥사장에게 물었다.
"헌데... 경비하는 나졸은 몇이나 됩니까?"
"아까 객사 앞에서 보니 나장까지 합쳐서 다섯이더군."
"까짓 여차직하면 때려 죽이구 달아나야지."
옥사장이 교활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그러게나. 자네들 기운이라면 호젓한 산길 같은 데서 열 놈인들 못해내겠나. 그래 어디쯤
으루 달아나게..."
길산이 짐짓 대답하였다.
"고향이 해서도이니, 삼남으루 내칠지 모르겠소. 허나 십중팔구는 한양에 갈 게요."
두 사람은 옥사장이 특별히 들여준 술을 마시자 한기가 훨씬 덜해졌다. 짚덤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서 그들은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나누었다. 길산이 말하였다.
"박대근이란 사람이 일을 엄벙뗑하는 사람이 아니외다. 밥집을 대어 주고 옥사장에 뇌물
까지 쓰던 사람이 일시에 소식을 끊을 리가 없소. 원래 송상들이란 허투루 돈을 쓰는 사람
들이 아닙디다. 일에 조리가 있고 꼼꼼하게 마련이지. 한양서 형옥이 있어 우리가 끌려가게
됨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이고... 아니면 그가 빼내어가는자두 모르겠소."
"이야기가 그럴 듯은 하오만, 우리 뱃놈들은 풍랑을 겪어놔서 합쳐 달아납시다. 둘 중에
하나라두 살겠지."
"자 이젠 눈을 좀 붙여볼까?"
그들이 취기를 빌어 잠을 청하는데, 사방의 감옥 속에서는 춥고 굶주림에 떠는 죄수들의
신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턱에 받친 신음소리가 밤새껏 들려오는 듯하였다. 한밤
중에 북풍은 거세게 불엇고, 아귀가 어긋난 문틀과 지붕에서 들리는 삐걱이는 소리에 한빙
지옥이 지상으로 올라온 것만 같았다.
갑자기 옥 안이 훤해졌다. 어렴풋이 잠이 들었던 길산은 실눈을 뜨고서 옥 창살 바깥을
내다보았다. 사방등을 치켜든 무장의 융복자락이 불빛에 울긋불긋 드러나 있었다.그는 들으
라는 듯이 큰소리로 외쳤다.
"졸지 말고 엄중히 경계하라. 두 역적들을 놓치거나 무슨 짓을 하게 한눈을 팔았다간 모
두 어육을 면치 못하리라!"
밖에서 수직하는 군사들의 굽신거리는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안을 들여다보던 나장이
역시 큰 소리로 호통을 친다.
"누가 임가고 누가 우가냐?"
깨어난 길산이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내가 임가요."
그때에 나장은 참으로 이상한 동작을 하는 것 같았다. 손을 안으로 내밀어 가까이 오라는
듯 끄덕거렸던 것이다. 길산은 믿기지 않는 채로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니 이런 천하에 고얀 놈들 보았나. 어째서 저놈들이 칼과 차꼬를 벗고 있느냐? 내 손
수 채워두어야겠다."
나장은 그렇게 외치면서 연신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길산이 어기적 대면서 그러나 마음
은 급하여 거의 깨끼발걸음으로 다가서는데, 그의 손 안에 뭔가 종이를 쥐여주고 난 나장은
길산이 둘러쓴 칼의 자물쇠를 잠그는 체했다.
"네 이놈, 내일 아침 도사 어른께서 잠시 국문을 벌일 것인즉 이실직고하지 않고서 애를
먹이면 압송은커녕 예서 물고장을 낼 터이다. 알아듣겠느냐?"
"예..."
길산이 날카로운 눈을 들어 나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나장은 눈을 끔쩍인다. 그리고는
날쌔게 손을 뻗쳐 길산의턱을 밀어붙이니, 스스로 차꼬를 차고서 다리가 자유롭지 못한 터
이라 길산은 나무등걸처럼 뒤로 나가떨어졌다.
"어, 대매에 때려 죽일 역적들 같으니!"
투덜대면서 나장이 사라진 뒤에 길산은 땀에 젖은 손을 펴서 꼬깃꼬깃한 종이 쪽지를 펴
들었다. 그것은 상단의 체장이었는데, 행수 박대근이란 서명이 씌어 있었다. 송도 임방에서
나온 행상 증서였고, 길산이 비록 글을 모른다 하나 낯익은 것이었다. 곁에서 잠이 깨어 일
어났던 우대용이도 그것을 함께 들여다보며 기뻐했다.
"송도 체장이로군! 그러면 그렇지."
"저 나장이 우리에게 이것을 알리려는 연유는, 혹시 국문할 때에 우리가 일을 그르칠까
염려해서요. 잘 생각해서 해냅시다."
길산이 말하였고, 우대용이도 잠들 생각을 잊고 벽에 기대어 앉아 못내 감탄하는 것이었
다.
"대근이 성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구 있었지만, 참으로 처하의 대장부로군!"
"자 일찍 자둡시다. 내일은 먼길을 걷게 될 것 같소."
그들은 짚더미에 몸을 파묻고서도 못내 잠이 오질 않았다. 길산은 아버지와 갑송이의 얼
굴을 떠올렸고, 애인촌의 낮은 돌담이며 광대산 솔숲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리고는 탐스럽게
피어난 박꽃 같은 묘옥의 희고 둥근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녀의 젖은 눈동자와 벗은
가슴이며 젖무덤 사이의 연비 자국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까막내의
자갈길을 걸어가는 묘옥의 뒷모습을 보고 길산은 큰 목소리로 외쳐 불렀다. 묘옥은 한번 살
짝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고는 재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길산이 온 힘을 다해서 부르짖으
며 따라갔는데, 묘옥은 점점 멀어지더니 고개를 넘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빈 길 위에서
허덕이면서 길산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묘옥이 다시 고개 끝에 나타났고, 길산은 또
뛰어 쫓아갔다. 그러나 그는 끝내 묘옥의 옷자락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묘... 묘옥... 묘옥이..."
길산이 눈을 떴을 때 그의 눈가에 번져내린 눈물이 뺨을 타고 귓가로 흘러내려왔다. 길산
은 또렷해진 눈을 들어 부옇게 밝은 옥 바깥을 내다보았다. 눈송이들이 탐스럽게 나부껴 내
리고 있었다. 팔랑거리며 날아든 눈이 감옥 창살 앞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 빽빽한 눈보
라속에서 문득묘옥의 자취를 본 듯하여 길산은 상반신을 일으키고 창살앞으로 다가갔다. 그
는 창살을 두 손에 움켜쥐고 애타게 하늘 저 끝을 내다보았다. 눈, 끝없이 날아 내려앉는 눈
송이의 떼가 맞은편 돌벽을 지나칠 적마다 흰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묘옥이 아
니라 무심하게 흩날리는 눈보라였다.
"눈이 오는군..."
어느틈에 깨어난 우야용의 굵다란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고, 길산은 흠칫 몸서리를 쳤
다. 길산은 창살을 잡고 앉아서 아무 생각도 없이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에게는 놓여난다는
일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얼마나 그리던 바깥 세상인가마는 그의 가슴속에는 곁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수많은 죄수들의 넋걷이해주던 자신의 창소리가 꽉 들어차 잇는 듯하였다.
"나는 무거운 짐을 짊어졌고나!"
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온 세상의 옥을 모두 깨치리라. 아니면 나가지 않느니만 못하다."
길산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괴었다.
옥졸들이 부산하게 오락가락하고 나서, 선명한 융복이 마당을 가로질러 다가왓다. 칼 차고
주장을 치켜든 나장과 그들을 감영 선화당 앞에 끌어갈 군사들이었다. 옥사장이 맨 앞에서
다가서더니 옥문을 열었다. 차꼬와 칼을 기다리고 있던 길산과 대용은 둔한 동작으로 옥문
을 나섰다. 나장이 주장대 끝으로 그들의 등을 쿡쿡 찔렀다.
도사 학선은 관찰사가 선화당으로 나오기 전에 찾아가 현신하고서 죄수를 압송해가는 이
유를 아뢰야만 했다. 그러자니 자연히 조정의 분위기를 은밀히 꺼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관찰사는 주위를 모두 물리고 학선이아 마주 앉았다.
"그래 이번 형옥이 그다지도 큰가?"
"예, 위로는 당상관 이상에서 아래로는 저들과 같이 상놈들도 있는데 팔도에 두루 미쳐
있습니다."
"허허 천인공노할 놄이다. 요즘같이 성은이 두터운 태평성시에 어찌 모반의 무리가 조정
에까지 스며들었단 말인가."
"이번에 귀도에서 압송해가려는 두 놈은 서북 변방에 나가 있는 몇몇 첨사와 만호에 기맥
이 닿고 있어 몹시 중대합니다. 무장들인만큼 일찍 알아내어 포토하지 않으면 거병할지도
모르옵니다. 그래서 이번 압송의 일을 비밀로 하여 백성들이 모르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소문이 나면 역적들이 일이 틀린 줄을 알고소 북방을 소란하게 할 테지요."
"그렇겠지. 내 다 좋은 수가 있네. 그 관복들을 벗고 하인배 차림으로 가되, 우리 아이들
을 내어줄 테니 교자를 내어 두 놈을 태워가면 어느댁 내실 행차인 줄 알 걸세."
"참으로 묘한 생각이십니다. 그러면 국문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사또께 뵈이고 그대로 떠
나겠습니다."
"그래, 헌데 내가 판의금 대감과 병조판서와 내 동문인 지의금과 승정원의 도승지 되는
이들에게 작은 선사품을 보낼까 하니 전달해주겠는가?"
"예, 틀림없이 알아 거행하겠습니다."
"판의금께서는 지금도 목면산 아래 계시는가?"
"아니옵니다. 지난 가을에 작은댁마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집터가 불길하다 하여 사직골
쪽으로 이사하셨습니다. 사또, 이번 저희 판의금대감께서 병조판서 대감과 아주 긴밀한 사이
가 되신 것을 모르시겠지요?"
"긴밀한 사이라니... 뭔가?"
"예, 이번에 두 분은 서로 사돈을 맺으셨습니다."
"음, 거참 경사로군. 그런 경사를 알고서도 내가 모른 척할 수야 있나. 진물을 보내드려야
겠군."
원래 외관이란 삼 년씩이나 조정을 떠나 있으니, 요즘처럼 세력의 판도가 조변석개하는
때에 어느 쪽이 유리한가 모르는 관찰사로서는 서울 소식을 통기하는 사람이 올 적마다 꼬
치꼬치 물을밖에 도리가 없었다. 학선이가 대강 알고 있는 대로 낱낱이 아뢰니, 관찰사도 근
래에 들었던 소식을 확인하고 다시 새로운 소식에 접하였다.
"아뢰오, 죄인을 선화당 아래 꿇려놓았습니다."
문 밖에서 해주도사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 곧 나가겠다. 그리고 곧 교자 두 채를 준비하고 날래고 걸음 잘 걷는 군사 십 인을
평복으로 나오게 하여라."
"교자 두 채와 평복 군사 십 인을 대령시키겠습니다."
관찰사는 관복을 입고서 뜨락을 건너 선화당에 올랐다. 학선이는 날카롭게 두 죄수의 인
상을 훑었다. 박대근에게서 설명을 들은 대로 하나는 얼굴이 새카맣고 털이 없는 우가요, 또
하는는 갸름하고 가뿐한 몸매에 눈이 어글어글하고 수려하게 생긴 장가라는 자가 틀림없었
다. 관찰사는 선화당 마루에 앉아 있었고 학선이는 계 아래 부복해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고개를 들랍신다!"
관찰사의 하명을 나졸들이 사릉장을 들어 두 사람의 턱을 치켜올렸다.
"용모파기를 올려라."
해주도사가 압송장과 함께 들어 있던 용모파기를 내어밀어 올렸고 관찰사는 거기 적힌 인
상에 대하여 알아보려는 듯이 찬찬히 훑어보았다. 교자를 멘 네 사람과 무기를 감춰 가진
여섯 사람 합해서 열 사람의 군사가 선화당 앞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다시 명하였다.
"국문은 폐하고, 모두들 이번 압송의 건은 나라에 중요한 옥송이 일어났으니 절대로 함구
하요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해두어라."
모두들 허리를 구부렸고, 학선이가 가까이 다가서며 아뢰었다.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남의 눈에 띄기가 쉽고, 또한 노중에 경비만 낭비하게 되는 셈입
니다. 제가 데려온 나졸들로 충분하오니 교꾼 네 사람 외에는 모두 물려주시옵소서."
"아니다, 본도에서 압송해 올라가는 중죄인들을 소홀히 다루어 보낼수는 없다. 의금부에서
죄인 인수를 확인해주어야 할 것이니 아무래도 우리 무장이 필요할 것이다."
곁에 섰던 중군이 아뢰었다.
"사실 너무 지키는 자가 많아도 번거롭습니다. 그보다는 무예가 뛰어난 날랜 무사 두 사
람만 차출하여 경비를 맡기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음, 그게 좋겠군. 아뢴 대로 하라."
학선이가 깊숙이 예를 올렸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한양에 닿아야겠기에, 관례를 일일이 찾아 거행치
못하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오, 괜찮다. 봉물은 틀림없이 가는 대로 자네가 직접 전하여라."
"분부대로 관복을 벗고 내실 행차를 가장할까 하옵니다."
"어서 출발하라."
학선이는 우선 두 죄수의 칼을 벗기고 그 대신에 붉은 오라로 두 팔을 꽁꽁 묶게 하고 차
꼬는 그대로 채워둔 채 가마에 오르게 하였다. 그들은 선화당을 물러나와 객사에 들러서 감
영에서 준비해준 평복을 갈아입었다. 학선이는 갓에 도포 차림의 선비로, 나장은 수노로, 그
리고 나머지는 모두 구종배로 붙이었다. 잠시 후에 역시 갓과 도포 차림의 젊은 장교 두 사
람이 환도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학선이에게로 찾아와 군례를 드렸다.
"구례는 차후로는 절대로 하지 말라. 그리고 집안의 어른에게 대하듯 하면 되느니라. 너희
는 두 교자의 양쪽 옆을 호위하고 나졸들은 봉물을 지키게 하여라."
이르고서 타고 왔던 백마에 올라 천천히 성문을 나섰ㄷ. 누가 보기에도 양반댁 내실이 친
정에 나들이라도 가는 모습이었다. 학선이는 행렬의 뒤에서 천천히 말을 몰아 쫓아갔다. 나
장으로 차렸던 아귀쇠가 뒷전으로 처지더니 그의 말께로 다가와 나란히 걸으면서 낮은 소리
로 말하였다.
"성님, 어떻게 할깝쇼?"
"아직 너는 나장임을 잊어선 안돼, 이 녀석아."
"저는 정말 밤새 불알이 저려서 영 고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감영 객사에서 칼 차고
호령하기는 또 이번이 처음이올시다."
"이놈아, 이번에는 어사또보다두 서품이 아래고 연습까지 했는데 무엇이 그리 어렵더냐?"
하선이가 나장을 손짓하여 더욱 가까이 오도록 하였다.
"우리가 어디쯤 가서 중화를 하겠냐?"
"가만있자, 예서 연안까지가 일백이십 리 아니우? 하룻길이니 청단서 중화를 하면 맞춤하
겠네."
"그렇지, 청단서 바루 코앞이 세여울 아니가. 청단하구 세여울 사이에서 저놈들을 떼어버
리자."
나장이 걱정스러운 듯이 목덜미를 움츠렸다.
"헌데 성님, 환도 한번 잡아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저 범 같은 무장을 해치울랍니까? 더
구나 교꾼들은 모두 조련받은 군사 아니우."
"내가 시키는 대루만 하여라."
하면서 학선이가 말께서 상반신을 굽혀 나장의 귓가에 뭐라고 잠깐 속삭였다. 나장이 듣
고 나자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귀쇠야, 대처 건달이 주먹 가지구 도모하는 법 보았느냐. 송도 학선이가 까짓 장교 나
부랭이와 붙을 수야 없지."
"성님 말이 참으로 지당하오!"
두 사람이 뒤에 처져서 낄낄거리는 양을 보고 가마의 양쪽 옆구리를 호위해 가던 해주 장
교 중의 하나가 걸음을 늦추었다.
"나으리 무슨 일이십니까?"
"음 아니다, 나장이 재담을 하였기로 웃는 중이다."
"오늘 저녁은 연안 객사서 묵으셔야죠?"
"그래 그래, 행자에서 너희들 여비들 두둑히 내어 술값을 줄 터이니 민박이나 나가거라."
"아이구 나으리, 군무중에 음주하여도 되겠습니까?"
"너희들은 공연히 한양까지 원행을 하는 것이니 필요없이 고생할 건 없지 않느냐? 밤 수
직은 우리 나졸 아이들에게 엄히 서도록 하겠다."
해주 장교가 제 동료에게 의금부 도사의 분별있는 처사를 칭송하였고, 그들은 자기네를
뽑아낸 중군을 원망하였다. 우름내를 건너 석장승으로 나가는데, 눈길이 험하였 청단까지 시
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들은 청단골서 관창 부근의 주막에 들어가 국밥을 시켜 요기를 하
였다. 학선이가 나졸 한 사람에게 지시하기를,
"죄인들에게도 한그릇씩 먹도록 해주어라. 원래 우리들 대궁밥이나 주면 주고, 말면 말게
되어 있지마는 아무리 역적놈들이라 하나 인정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길산이와 대용에게도 국밥이 돌아갔는데 그들은 오라를 졌으므로 나졸이 한사람씩 맡아서
일일이 떠먹여주어야 했다. 나장과 겸상하고 있던 학선이가 넌지시 말하였다.
"우리가 떠난 다음에 뒤미처서 오너라. 그리구 상 밑에 그것이 있으니 얼른 수습에 넣
고..."
중화를 대강 마치고서 행장을 수습하여 주막을 떠나려는데, 나장이 나졸에게 짐짓 큰 소
리로 투덜거렸다.
"에이 하필이면 막 떠나려는데, 배가 살살 아프구나. 내 일을 보고 급히 쫓아갈 터이니 나
으리께서 찾으시면 그리 여쭈어라."
나장은 급한 듯이 되돌아가 뒷간에 그냥 쭈그려앉아서 그들이 멀찍이 떨어져갔을 때쯤하
여 나왔다. 그가 주모를 불렀다.
"거, 팔팔 뛰는 화주가 있나?"
"예, 있긴 있는데 값이 좀 비쌉니다."
"값은 고하간에 얼른 주게."
"예서 드시구 가실려우?"
"아닐세. 호리병값도 칠 터이니 두 병으루 나누어 주게나."
주모가 술병을 채워서 내밀었다. 나장은 문밖에 나와서 한쪽 병에다가 학선이가 넘겨주
었던 비상을 터넣었다. 나장은 병 무늬를 눈여겨보고서 일행의 뒤를 급히 따라갔다. 일행은
눈이 뒤덮인 들판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는데 멀리 재령으로올라가는 삼거리가 보였다. 거리
에는 누구의 것인지 기왓장도 떨어지고 현판도 기울어진 쇠락한 정자 한 채가 서 있었다.
일행은 정자 주위에다 말과 가마를 대어놓고 기다리고 있었으며, 나장이 다가서자 학선이가
역정이 일어난 얼굴오 꾸짖었다.
"무엇 하노라구 이렇게 지체하는가. 압송에 나장이 소홀히 한다면 아랫것들을 어찌 단속
하겠느냐?"
"아이구, 점심을 너무 급히 먹었더니 배가 살짝 아파서요."
"세여울서 물이 썰거나 밀리거나 어느 쪽이 건너기 쉬운가도 알아야하고, 또한 때도 맞추
어야 개를 건널 게 아니냐."
나장이 서슴지 않고 웃는 얼굴로 지껄였다.
"제가 다 알아놓았습니다. 주모의 말이 물이 썰면 뻘에 빠져서 도저히 건널 수가 없고, 밀
려야만 나룻배가 뜬다고 하옵니다. 아직 밀 때가 아니랍니다."
"허, 낭패로구나."
"물이 밀 때까지 천상 기다려야 될 터인즉, 속이 차면 분명히 병이들어 앓아눕게 될 것
같습니다. 소인이 미리 다 알아서 이렇게 화주 두 병을 사가지구 오는 길이올시다."
"안주는 있느냐?"
학선이가 좀 누그러진 어조로 말하니 나장이 말께로 가서 부담농을 내리고 찬합을 꺼내었
다.
"육포에 홍합말림에 아주 그럴 듯합니다."
학선이가 정자에 앉아서 화주 한 잔을 드는데, 과연 설경 가운데 앉은 풍류가 그럴 듯하
였다. 시조도 흥얼대고 무릎도 치면서 학선이가 취흥을 돋우니 누 아래 섰는 사람들도 속이
떨린데다 점심참에 막걸리 한사발 들이켜지 못했으므로 저절로 침들이 넘어갔다. 호리병 반
병쯤이나 좋이 비우도록까지 학선이는 아무에게도 한잔 건넬 생각을 않았다.
"커어, 이렇게 수려한 산천에 좋은 술에 참으로 기생년만 있다면 개골산이 따로 없겠구
나."
한 잔 놓고 한참씩 지껄이고 두 잔 놓고 감탄하는데, 아무리 아랫것들이라 해도 은근히
부아가 치밀게 되었다. 학선이가 드디어 제 잔을 허공으로 치켜들면서 말했다.
"자아, 이 좋은 감흥을 혼자서만 누려도 정말 취흥이 아니니라. 그렇지 나장은 한잔 들
라."
나장이 소매를 붙잡고 나와 한잔 받아 돌아서서 들어붓는데, 아주 맛나게 입맛을 다셨다.
해주 장교들도 이제나저제나 기대를 하는 판인데, 학선이가 술잔을 내밀었다.
"오, 내가 자네들을 잊었었구나. 한잔씩 차례로 받게나."
장교가 술잔을 내밀어 술을 받으려는데 병이 비워진 것 같았다.
"그 새 병을 가져오너라."
"첫잔은 사양하겠습니다."
"아니다. 의붓자식이 세상에 젤 서러운 법이니, 내 너희들부터 차례로 한잔씩 돌리리라."
학선이가 술잔을 돌려주는데, 앞서 잔을 받아 마셨던 장교들이 갑자기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가슴을 쥐어뜯다가 쓰러지면서 입과 코로 피를 토해냈다. 교꾼으로 따라온 군사들
중에서 아직 술잔을 들지 않은 셋이 멍청히 그것을 내려다보는 중에 학선이가 소리쳤다.
"덮쳐라!"
기다리고 있던 학선의 부하 나장 아귀쇠가 단도를 빼어들어 한 놈의 등을 찍었고 또 하나
는 나졸들의 사릉장에 머리통을 얻어맞았다. 간신히 몸을 빼친 마지막 남은 군졸이 눈이 뒤
덮인 벌판을 바라보고 뛰기 시작했다. 아구쇠가 뒤를 쫓으려는데 학선이는 죽은 장교의 환
도를 뽑아들며 말했다.
"내가 해치우지."
학선이가 재빨리 말에 올라 달아나는 군졸의 뒤를 쫓아갔다. 군졸은 연신 뒤를 돌아보면
서 뛰는데 워낙 눈길이 미끄러워 넘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 뛰고 또 엎어지니, 얼마 못 가
서 학선이가 탄 말이 바로 등뒤에까지 다가들었다. 학선이가 환도를 쳐들었다가 군졸의 어
깨에서 아래로 죽 그어내렸다. 핏방울이 튀어오르면서 군졸은 앞으로 고꾸라 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학선이는 말을 몰아 지나 되돌아 달려오면서, 이번에는 군졸의 배를 바라고 힘껏
찌르니 칼을 배에 박은 채로 쓰러지고 만다. 대번에 흘러나오기 시작한 피가 눈을 붉게 적
시면서 번져갔다. 학선이는 말에서 내려 잠깐 동안 시체를 내려다보더니 가래침을 돋구어
뱉었다. 그가 칼을 뽑아내어 눈에다 비스듬히 박았다가 몇번 씻어낸 후 발끝으로 눈덩이를
죽 떨어내고는 칼집에 꽂아 넣었다. 안장에서 줄을 꺼내어 시체의 다리에다 묶고는 그냥 말
뒤에 질질 끌고 정자로 돌아갔다. 둘은 타살되었고 장교와 다른 군졸은 독살되었으며, 마지
막 하나는 칼을 맞고 죽었다. 학선이는 다시 한번 목을 길게 빼어 가래침을 뱉어냈다.
"재길... 대근이한테 피값을 따루 받아야겠군."
학선이도 오랜만에 사람을 죽이고 보니 그리 좋은 기분이 들 리가 없었다. 그는 손에 묻
은 핏자국을 한움큼 쥔 눈으로 씻으면서 가마를 턱짓했다.
"두 사람을 풀어줘라."
학선의 부하들이 가마 문을 열고 길산이와 대용이를 나오게 하고는 오라와 차꼬를 풀어주
었다. 길산은 우두커니 서서 그들이 하는 양을 내려다보았다. 우대용이가 기지개를 한번 늘
어지게 하더니,
"고맙소, 용댕잇개 우대용이우."
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학선이는 대답 대신에 풀려난 두 사람을 힐끗 돌아보았다.
"인사는 나중에 차차 하기루 하구... 얘들아, 시체를 모두 누마루 위로 올려라."
그들이 시체 수습을 하는데 두 장교와 군졸은 턱밑에 피를 토해냈으며, 벌써 얼굴에는 푸
릇푸릇한 두드러기가 돋아나 있었다. 눈이 부릅떠져 있고,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하나는 아귀쇠의 단도에 등과 옆구리를 찔리고 죽었으며, 다른 하나는 졸개들에게 참나무
사릉장을 머리통에 맞아 골통이 깨어져 있었다. 말에 끌려온 시체를 끝으로, 모두 누마루 위
에 쌓아올려진 것이다. 눈 위에 번진 핏자국과 시체는 끔찍해 보였다. 학선이가 말했다.
"정자를 태워버리자."
부시를 치고 불을 살려 유지에 붙인 다음 누마루 위에 던지니, 바람맞이 강변에서 오랫동
안 바싹 말라 있던 나무라 곧 옮겨 붙었다. 정자는 흰 연기를 올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동안 학선이와 졸개들은 어지럽게 번진 핏자국들을 눈으로 덮었다.
"자아 얼른 피하지."
"어느 쪽으루 갑니까?"
"이 삼거리서 공수원쪽으로 일단 가서 거기서 방향을 정하기루 합시다."
학선이는 우대용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고서 말에 올랐다. 그들은 걸음을 재촉하여 세여
울 삼거리를 떠났다. 드디어 온 정자가 타오르는지 큰 불길과 연기가 높이 치솟은 것이 멀
리서도 보였다. 아귀쇠가 학선이에게 말하였다.
"성님, 임자가 틀림없이 달려올 것인데, 아직 타지 않은 시체를 보면 관가에 고경할 겁니
다."
학선이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런 머저리 같으니... 이놈아 그 정자의 꼴을 못 보았느냐. 현판도 떨어지고 기왓장도 반
나마 부서져 있지 않더냐. 틀림없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이다. 이런 날씨에 불기가 보인다
고 그 벌판에 강바람을 쏘이러 나올 놈이 어디 있겠느냐."
대용과 길산은 오랜만에 행보하는 셈이라, 이렇게 훨훨 들판을 가노라니 마치 다시 태어
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장봉산 줄기를 넘을 적에 비로소 보행을 멈추고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다 타버렸군..."
고갯마루에서 세여울 편을 바라보니 들판 가운데는 흰 연기가 곧게 퍼져 올라가고 있었
다. 눈 위로 드문드문 솟은 바윗돌 여기저기에 걸터앉자, 학선이가 먼저 고개를 끄덕여 수인
사를 건넸다.
"나 송도 이학선이우."
"문화의 장길산이라 하우."
"우가요."
학선이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얘들아, 부담농에서 이분들 의관을 꺼내어라."
곧 패랭이와 의복 일습과 배자를 꺼내어 두 사람 앞에 벌여주었다.
학선이가 말하였다.
"공수원에 이르면, 사람들의 눈도 많고 앞으로 먼길을 가실 테니, 아예 여기서 의관을 갈
아입으슈."
"고맙소, 대근이 성님은 어찌 지내시우?"
"여태껏 두 분 때문에 골치를 썩이더니, 이제 한시름 놓았겠지요."
"송도로 가시렵니까?"
"예, 우리는 그럴 작정이오만, 두 분은 구월산으루 가시우. 그렇게 말하면 어딘지 안다고
그럽디다. 거기서 모두 모이기루 했답디다."
우대용과 장길산이 상투를 틀어올리고 패랭이를 얹고 나서, 의복까지 새 것이요 털배자까
지 입어놓으니 멀쩡한 원행 나그네 차림이 되었다.
"뮛 병장기 하나씩 가지실라우?"
"필요없소. 오히려 거추장스럽지."
"공수원서 술이나 한잔씩 걸치고 헤어집시다."
세여울 삼거리에서 공수원까지가 삼십 리 길이었으니 얼마 걷지 않아 인가를 만나게 되었
다. 공수원은 배천이나 금천이나 재령, 신천을 오가는 관원들이 묵어 가는 관의 객줏집이었
다. 마방이 있고 봉노와 큰 방이 여럿 있는 기와집 한 채가 네거리 모퉁이에 지어져 있었다.
원에는 원주가 있고, 부근에 땅을 주어 그것으로 원을 운영하게 하는 것이었다. 대개는 원주
가 중이게 마련이었다. 공수원 원주는 부근에 있는 동고사에 있었으니, 동고사의 중 하나가
나와서 원을 지키고 있었다. 중이 문 밖으로 쫓아나오면서 물었다.
"묵어 가시렵니까?"
"아니다. 날씨가 추워서 잠깐 기한이나 면할 작정이니, 술을 좀 내오너라."
그들ㅇ느 아직도 장작불이 아궁이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큰 방에 모두 함께 들어가 앉았
다. 길산과 대용이 따뜻한 구들에 앉았으려니 실로 쾌적하여 저절로 잠이 왔다. 술상이 들어
와 서로 권커니잣거니 하면서 마시는 중인데,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떠들고 있는
것은 원을 지키는 중의 목소리인 듯했다. 그들은 처지가 처지인지라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
다. 중이 또다른 승려 차림의 중을 떼밀어내며 외치고 있었다.
"나가라면 나갈 것이지 무슨 잔말이 많아. 예가 어디 네 따위 것들을 들이는 덴 줄 알아."
"아니 불자로서 이러한 몰인정한 처사가 어디 있소?"
객승은 누더기의 장삼을 입고 있었는데, 바랑 메고 탁발을 들고 있었다. 그의 뒷전에는 아
낙네와 어린 계집아이가 서로 부축하여 서 있었는데,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아낙
네가 스르르 미끄러져 쓰러지고 말았다.
"내가 돈을 드릴 테니, 두 사람을 거두어주오."
"네 따위가 돈이 어디 있단 말이야. 더구나 부처님까지 들먹였으니, 너 같은 보도 듣도 못
한 땡중이 어디 와서 야료를 부리는가."
형편을 짐작한 학선이가 문을 닫으려는데, 길산은 조용히 말했다.
"문 좀 엽시다."
"예? 왜 그러우."
"좀 엽시다."
학선이가 어리둥절하면서 문을 열었다. 길산이가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여보, 우리 나으리께서 무슨 일이냐구 여쭈오."
중이 돌아서더니, 그 살집 좋은 얼굴에 노기가 등등하여 객승을 손가락질하면서 말하였다.
"허, 이자가 어디서 걸인 모녀를 데리고 와서 묵어 가게 해달라니, 여기가 어디라구 저런
상것들을 들이겠소이까, 양반 나리들게 불쾌하게 해드려서 심히 죄송합니다."
하더니 다시 중을 떼밀었다.
"자, 썩 나가지 못해!"
밀려나던 객승이 고개를 들어 그들 일행이 있는 방에다 대고 외쳤다.
"약한 것을 어여삐 알고 가엾은 것을 긍휼히 앎은 사람으로서 상하 귀천이 없거늘, 더구
나 백성의 윗자리에 있는 양반들로서 이런 처사를 하신단 말이오?"
길산이 말하였다.
"우리 나으리께서 그 사람들을 안으로 들이랍시오."
"예? 그렇지만..."
"숙박비를 두 곱으로 주신다 하오."
"아이구... 원주께서 아시면 제가 큰일납니다만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객승이 봉놋방에다 두 모녀를 들여놓고는, 다시 그들의 방 앞에 다가와 합장 배례하였다.
"이런 보시를 하셨으니, 전정에 복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소승 물러가겠습니다. 나무 관
세음보살."
객승이 등을 돌려 나가려는데 길산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를 불러 세웠다.
"스님, 잠깐만 보십시다."
돌아서서 나가려던 승려가 발을 멈추고 길산을 바라보았다.
"스님, 추운데 요기나 하고 가시지요?"
"고맙습니다만, 갈 길이 바쁩니다."
길산이 다시 묻는다.
"어디까지 가시는 길입니까?"
"해주까지 가오만, 앞으로 오십 리 길이니 한밤중에야 이르겠소이다."
"저희들도 곧 떠날 작정입니다. 요기를 하셔야 길을 가시지."
두 사람이 수작하는 것을 듣던 학선이가 끙하고 돌아앉으면서 투덜거렸다.
"이런 망할... 제 주제를 생각해야지, 낯선 중놈은 끌어들여 무얼하겠다는 게야."
우대용이가 다시 바깥을 내다보더니 기겁을 하였다.
"아니... 저건 결성 송림방에 있는 중이로군!"
학선이가 우대용이를 돌아다보며 눈을 크게 떴다.
"무어라구? 댁네와 안면이 있단 말이지."
하는데 이미 바랑을 벗어든 중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중은 좌중을 향하여 우선 정중하게
합장 배례하고 길산이 손짓하는 자리에 앉았다. 길산이 손수 국과 밥을 퍼서 상 위에 올려
놓아주면서 말하였다.
"많이 드십시오. 그래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중이 식사를 하면서 대답하였다.
"예, 온정서 옵니다. 자모산을 지나 도여울께서 저 모녀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자주 돌아
다니는 고로 유민지배를 많이 만난답니다."
"스님 계시는 절은 어디길래 몸소 시주를 얻으러 다니시오?"
"송림방 사자암에서 혼자 수도하는 중입니다. 사실은 온정의 어느 부자가 아프다고 해서
부적을 팔러 갔었지요."
길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두 부적 한 장 그려주우."
승려가 문득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부적을 그려드리지 않더라도 액운은 이미 멀리 갔소이다."
길산이 어쩐지 자꾸만 묻고 싶어졌다.
"액운이 멀리 가다니오?"
승려가 수저를 멈추고 잠시 길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장에 갇혔던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니 천지가 내 것 아니겠습니까?"
"허..."
학선이가 눈짓을 했고, 알아챈 아귀쇠는 품속의 단도를 쥐며 문 앞을 막고 앉았다. 여차직
하면 승려를 찔러 죽일 셈이었다. 학선이는 길산이 쓸데없이 낯선 사람을 들여 본색을 드러
내는 얘기나 지껄이는 것이 못마땅했다.
"거 대강 자셨으면 어서 길이나 가시오. 승속이 다른데 웬말이 그리 많아."
아귀쇠가 불평을 터뜨렸다. 학선이가 심기가 자못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상좌에
까치다리로 앉아 장죽을 빨고 있었다. 길산이 아귀쇠에게 은근히 위압적으로 말아였다.
"듣기가 좀 거북하우. 아무래두 상 물리면 떠날 터인데..."
중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챘는지, 좌중을 한바퀴 휘둘러보더니 수저를 놓았다.
"손님들께선 어디까지 가십니까?"
길산이 학선이 쪽을 한번 돌아다보고 나서,
"우리네 하리들은 상관께서 가시는 곳을 따라가 뿐입니다."
중이 길산에게 빙긋이 알지 못할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눈은 못 속이십니다. 감영 옥에서 나오시는 길이 아닙니까?"
학선이가 나직하게 외쳤다.
"묶어라."
졸개들이 좌우로 달려드는데, 길산이가 팔을 휘저어 막았다.
"잠깐... 당신은 누구요?"
"예, 해주 송림방 사자암에 기거하는 행자 여환이란 사람입니다. 내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해서의 길은 하도 돌아다녀 내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니, 가장 안전한 길을
가르쳐드리고자 하였을 뿐이외다."
그제서야 구석에서 묵묵히 앉았던 우대용이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알아보시겠소?"
"아무렴, 알아보다뿐입니까. 용댕잇개에 계셨지요. 신가놈의 모함에 빠져 갇힌 소문이 결
성골에 파다합니다. 아까 방안에 들어설 때부터 눈여겨보았소이다."
학선이가 벌떡 일어섰다.
"내 아까부터 참자 참자 했더니 하는 짓들이 실로 어리석소. 나는 일을 끝마친 터이니 이
길로 떠나겠소이다. 얘들아 노자 한꿰미 내주어라!"
아귀쇠가 먼저 나가고, 학선이는 졸개들과 같이 마당으로 내려섰다. 길산이 마루 끝에까지
쫓아나와 말하였다.
"너무 노엽게 생각 마시오. 언제 또 만납시다."
"내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소. 내게 대한 말은 절대 꺼내지 마우. 소문이 한두 입씩 건너
다 보면 우린 장사 다하는 거니까..."
아귀쇠가 말에 실린 부담에서 엽전 한 꿰미를 꺼내어 마루에 던지고 가버렸다. 학선이가
끝으로 말하였다.
"감영서 나온 봉물은 우리가 나눠 쓸 작정이오. 길 가기 편하도록 말 한필 두구 갈까?"
"아니 그만두오."
"이 길로 금천으로 해서 송도로 들어갈 터인데, 아마 박행수께서는 벌써 구월산으루 떠났
을 거외다."
"잘 가우. 또 만나게 될 거요."
"글세... 우리네야 돈 주고 일시키면 언제든 만날 수 있수."
학선이는 졸개들을 거느리고 백마에 오르더니 동쪽 길을 향하여 떠났다. 길산이 돌아오니
우대용이와 중 여환은 용당포의 뒷얘기들을 하는 중이었다. 길산이 물었다.
"스님, 우리가 감영 옥에서 나온 것은 어찌 알았소이까?"
"그야 간단하지요. 당신이 고개를 내밀고 말을 걸 때에 보았소만, 목에는 칼에 쓸린 자취
가 남아 있습디다. 그리고 이분이 눈에 띄길래 대번 알았지요. 좌우지간... 장길산이란 이름
은 소승도 많이 들었던 이름 같소이다."
곁에서 우대용이가 대신 말하였다.
"다른 대시수가 저 사람의 이름으루 주내방 저자에서 대신 참수당했기 때문에 해주 바닥
에 이름이 났을 게요."
"참... 그렇군.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연이 있소이다."
우대용이와 길산은 영문을 몰라서 서로 마주 바라보았다.
"당신의 아낙이 날 찾아왔던 것 같소."
길산이 놀라서 물었다.
"내 아내라니오?"
"장뭣이라는 살인 도적이 참형되었다던 날 밤이었서. 남장을 한 여인네가 내 우거루 찾아
왔었지요. 주인의 넋을 위무하겠답디다."
"묘옥이..."
길산의 눈에 물기가 가득하게 괴었다. 여환이도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묘옥이 찾아왔던
날 밤의 일을 얘기하였다. 둘이서 말바위에 올라 갔던 일, 그 여자가 뛰어내리려는 것을 만
류하던 일, 이제는 아무 곳에도 붙일 데가 없다며 한탄하던 일들을 자세히 말하는데, 길산은
두 빰 위로 굵은 눈물방울을 주르르 흘리고 있었다.
"참, 묘한 인연두 다 있지."
여환이 염주를 헤아리면서 탄식하였다.
"어디루... 간다고는 말 없습디까?"
"글쎄올시다. 낙심천만인 모양이 지금도 눈에 선하오."
무덤덤히 앉았던 우대용이가 한 손을 길산의 어깨에 얹으면서 두드렸다.
"장서방, 어서 길이나 갑시다."
길산은 주먹을 들어 눈을 닦아냈다.
"스님께서는 앞으로도 사자암에 계실 작정인가요?"
"아닙니다. 저두 곧 그 자리를 떠날까 합니다. 혹시 송도 덕물산 근처루 가게 될지두 모르
겠소이다."
길산이 한참 주저한 끝에 다시 말아였다.
"송도 가시면... 내게 기별을 주십시오. 이것은 분명히 스님과 내가 깊은 인연이 닿은 모양
입니다."
"글세 말이오."
"송도의 배대인 댁이라면 모두들 압니다. 그 댁의 차인 행수루 있는 박대근이란 분께 내
얘기를 하면 소상히 일러줄 것이오."
우대용이가 봇짐을 꾸리면서 재촉하였다.
"자, 같이들 나가지."
셋이서 마루로 나오는데, 원의 중이 다가왔다. 그는 처음보다는 약간 뻣뻣해져 있었다. 학
선이 일행이 떠난 뒤라 얕잡아보았던 모양이었다.
"저것들은 어찌하실려오?"
"여기서 하룻밤 묵게 할 수 없소?"
길산이 물으니 중은 아예 안되겠다며 손을 내저었다.
"원에서 보통 장사치들도 아니고 저런 걸인을 도저히 재울 수는 없수."
"돈을 두 배 더 얹어 드리면 되겠소?"
"두 배 아니라 열 배가 되어도 안됩니다."
실랑이가 벌어지는 중에 미닫이가 열리면서 봉노에 들었던 아낙네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기한을 좀 면했으니 걸을 수 있습니다."
여환이 묻는다.
"정말 괜찮겠소?"
"예, 따뜻한 국을 마시고 아랫목에서 등을 데웠더니 기운이 나는군요."
아낙네는 계집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을 쏘이자 아이는 다시 몸을 옹송그리
고 발을 굴렀다. 길산이 문득 계집아이를 내려다보더니 학선이가 내주었던 개털 배자를 벗
어서 들씌워주었다.
"아이구 이런 고마울 데가..."
하는데 이번에는 우대용이가 제 것을 벗어서 아낙네의 얇은 등뒤에 얹어주는 것이었다.
"이러시지 마십시오. 어린 것은 몰라도 저야 괜찮습니다."
"염려 말구 입으시우. 우리는 별루 추위를 타지 않습니다."
여환이 아낙네에게 물었다.
"그래 아직두 해주엘 갈 생각이오?"
"죽으나 사나 해주엔 가야 합니다."
"해주에 간다 해도 도회지 인심은 오히려 시골보다 더하오."
"이 아이를 맡겨야겠어요."
"아이를 맡기다니요?"
"교방에 넘길까 합니다. 그럴 수밖에 저 혼자서는 도저히 굶겨 죽이고야 말겠어요."
아낙네가 눈물을 지었다. 길산이 여환이 대신 물었다.
"어찌하다가 이렇게 두 모녀만 남아 유리걸식을 다니우?"
"땅을 빼앗기고 폐농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살아계실 적에도 끼니를 에우기가 어렵
더니, 해전에 역병으로 쓰러진 뒤 품팔이로 연명을 해오다가 견디지 못하여 대처로 찾아가
는 길입지요."
곳곳마다 이러하니, 과연 깊은 산 험한 골짜기마다 녹림패들이 들끓을 수밖에 없는 일이
었다. 길산이 받았던 노자 중에서 열 닢을 빼내어 주었다.
"얼마 안되지만 받아주십시오."
걸인 모녀가 백배 사례하였다. 여환과 그들은 네거리에서 헤어지게 되었고, 여환이 길산이
께 안전한 길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이 길로 죽 올라가시면, 선바위 네거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도득산 고개를 타고 수철원을
지나면 곧 신천, 문화경계입니다."
"예, 거기서부터는 내가 더욱 잘 알 게요. 곧 추산 마루턱에 닿지요. 그곳은 내 고향입니
다."
"언제 다시 만나뵙겠소이다."
"어쩐지 깊은 인연인 듯하오."
그들은 네거리에서 각각 서북으로 갈렸다. 공수원에서 입석까지의 길은 대부분 인가도 없
는 쓸쓸하고 한적한 산길이었다. 창금산까지는 어사천의 상류인 개천을 따라서 길이 계속되
었다. 창금산 고개는 제법 험악하였다. 사방이 바늘끝 같은 전나무숲이었고, 길은 좁고 바윗
돌이 울퉁불퉁했다. 창금산 고갯마루에 오르는데, 해가 서쪽으로 꼴깍 넘어가고 말았다. 고
개 위의 바람은 마치 떼귀신의 울음소리처럼 처연하였다.
"어, 이러다간 얼어 죽고 말겠군."
우대용이가 헉헉대면서 중얼거렸다.
"빨리 고개를 내려갑시다."
길산이가 앞서서 눈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무래두 선바위 가서 묵어 가야겠소."
"앞으로 삼십 리 남았군. 오십 리 길이랬으니..."
우대용이가 헉헉거리다가 더 이상 못 걷겠는지 무릎을 꿇었다. 길산이 되돌아와 그의 겨
드랑이를 끼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정말 얼어 죽는 게요."
"지친 게 아니라, 잠이 와서 못 견디겠군."
"자아, 내 어깨를 짚으라구."
길산이 대용을 부축하여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제 주위는 캄캄한 어둠속이었고, 사
방에 뒤덮인 눈만 희끗희끗 보이고 있었다. 숲과 벌판에는 인가의 불빛 한점 보이질 않았다.
대용이 비틀거리면서 길산의 옷깃을 잡았다.
"내 빰을 몇대 때려주우. 도무지 정신이 들질 않는군."
길산이 대용의 빰을 호되게 몇차례 갈겼다. 대용이 머리를 거칠게 흔들어보았다.
"좀 낫군."
그들은 가까스로 창금산을 내려와 얼어붙은 내를 건넜다. 멀리 야산 끄트머리쯤에 마을의
불빛들이 건너다 보이고 있었다.
5
탈옥한 지 사흘째가 되어서야 그들은 추산 줄기에 닿을 수가 잇었다. 두 사람은 아직 어스
름한 새벽녘에 추산을 타고 넘어갔다. 광대산에 이르자 길산은 재인말로 내려가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멀리 재인말의 소나무숲이 내려다보였고 까막내의 넓은 자갈밭과 갈대숲
위에는 흰눈이 덮여 있었다.
등성이 위에 멈춰 서서 한참이나 애타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길산이 말하였다.
"우서방, 미안하지만 저 아래 행보 좀 해야겠소."
우대용이 끄덕였다.
"상관없수. 아무래도 다 저녁때에나 구월산에 당도할 텐데."
그들은 눈에 미끄러지면서 광대산을 내려갔다. 그러나 사람이 살았던 자취란 돌담과 주춧
돌뿐이었다. 마을은 흰누이 뒤엎인 들판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일 년에 두 차례씩
서낭굿을 벌이던 뒷산 빈터에는 낡은 오색 댕기를 매단 신목이 여전히 거대하 뿌리를 눈 속
에 박고 서 있었다. 길산은 그 쓸쓸한 빈터 위로 바람이 일어 눈가루가 흩날리는 모양을 바
라보았다.
"재인말은 이젠 완전히 없어지구 말았구나..."
우대용이가 이리저리 거닐다가 눈을 발로 파헤치더니 길산에게 말했다.
"이것 보우. 타다 남은 서까래인데, 마을 집에 온통 불이 났군."
"모두 떠난 뒤에 누군가 불을 질렀겠지..."
길산은 서낭굿을 열던 날 밤의 활기에 들떴던 자신을 생각해보았다. 모닥불이 이글거리고
있었으며 한심자락은 하늘에서 나부끼는 날개처럼 불빛 속에서 어른거렸고, 탈박들은 웃고
울고 성을 내었다. 군무가 빈터를 가득 채울 무렵에 사람들 틈에서 나타난 묘옥이 그의 손
을 잡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신목 뒤편에 눈송이들을 가득 얹고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잔솔밭을 넘어다보았다. 길산과 묘옥이 첫 정분을 맺었던 곳이었다. 그는 서낭나무의 둥치를
이리저리 쓸어보았다.
"아래루 내려가볼까?"
"장서방, 어서 산으루 오르지..."
"잠깐만, 까막내를 먼발치서만 보구 갑시다.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으니까. 이 동네는
우리가 몇대째나 살아온 고향이거든."
길산이 앞장을 섰고 우대용이도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뒤를 쫓아갔다. 그들은 타버린
기둥과 부서진 기왓장이 뒹굴어 다니는 마을을 곧장 질러서 까막내 쪽으로 나가는 송림을
향하여 걸었다. 그들은 작은 잿말이 보이는 모퉁이 길에 이르렀을 때, 길산이가 갑자기 걸음
을 멈추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만있자. 누군가 뛰는 소리가 들렸는데..."
"나는 아무 소리두 못 들었소."
"분명히 우리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소. 그것두 하나가 아니라 둘쯤은 되는 것 같던데..."
그러나 한참이나 기다렸는데도 나무숲을 흔드는 바람소리뿐이었다. 사방에는 흰눈이 덮인
벌판과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맑게 갠 하늘은 차갑게 새파랬다. 후닥닥하는 소리가 들리
더니 장끼와 까투리 한쌍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때에 하늘 위에서 딸랑거리는 방울소
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 봐, 누군가 있다."
날아오른 꿩을 향해서 매가 일직선으로 쫓아 올라가고 있었다. 방울 소리는 매의 발목에
서 들리는 소리이니, 틀림없이 그 부근에 관원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날에 한가하게 매사냥
을 나온 자라면 송화현감이 틀림없을 것이었다.
"너무 내려온 모양인걸."
길산이 중얼거렸다. 대용이도 걱정이 되는지 자꾸만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아까 들었다던 인기척이 그럼 몰이꾼이겠군."
"우리를 먼저 보았을지두 모르지."
과연 재인말의 조밭터에는 송화원이 사졸들과 아전 몇 명, 그리고 기생을 데리고 나와서
매사냥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간단한 차림에 왼손에다 가죽 토시를 두르고 또 한 마리의
매를 얹고 있었다. 매사냥을 나오기 전에 보통 피 묻힌 목화씨를 먹이게 마련이었다. 매가
피냄새를 맡고 목화씨를 먹고 나서는 다시 모두 토해내게 된다. 속이 빈 매는 그래서 배가
고프니까 꿩을 보기만 하면 날아가 덮치는 것이다. 몰이꾼들이 꿩을 공중에 날려 올리면 매
잡이가 손을 위로 치켜올려주면서,
"후여이!"
하고 외치는데, 매는 그 팔목의 내친 힘으로 훌쩍 날아오르는 것이다. 송화현감은 젊은 신
관이었다. 그는 임지로 오기 전부터 구월산 기슭에는 수상쩍은 자들이 출몰한다는 얘기와,
옆고을 문화군수가 화적떼들에게 상투를 잘리는 망신을 당했다는 뒷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
는 문화군수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언젠가는 녹림패들의 근거지를 알아내어 들이칠 작정이
었다.
그는 겨울날의 무료한 한나절을 참지 못하여, 해서의 산혐에서는 아주 흔한 매사냥을 나
오게 되었고, 한두 번 해보는 중에 아주 맛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그가 매를 튀기려고 이제
나저제나 기다리는 참인데 몰이를 나갔던 군사 두엇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나왔습니다, 나왔어요."
"이놈들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느냐. 뭐 범이 나왔단 말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재인말에서 웬놈들이 내려와 까막내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
다."
"뭐라구...?"
"분명히 두 놈인데 산에서 내려오는 모양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다른 자가 말했다.
"하나는 여기 살던 장충의 아들 길산이란 놈이 틀림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안좌수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길산이는 감영에서 참수당해 죽었는데... 그럼 도깨비가 나왔단 말야?"
"그래두 틀림없이 길산인 걸 어쩝니까? 제가 헛봤을 리두 없구요."
젊은 사또는 제 화승총을 가져오게 하였다.
"화약과 연환은 쟁여두었느냐?"
"예, 승에다 불만 당기면 나갑니다."
"마침 잘되었다. 오늘은 화적사냥이나 해보자꾸나. 이방은 저쪽 재인말 뒤의 서낭나무 있
는 곳에 잠복하여 이쪽에서 몰면 막아버려라. 그리고 나머지는 까막내 쪽에서 올라오는 송
림의 좌우편에 숨었다가 덮쳐라. 그리고 통인과 나는 저쪽 광대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을 지
키지. 누구든지 놓치지 말아라. 그리고 절대로 사로잡아야 한다."
매사냥을 나왔던 관원들은 돌연 포도하는 자들로 변하여 곳곳의 요로에 목을 만들고 걸려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산과 대용이 어쩐지 불안하여 까막내 쪽에서 걸음을 돌릴 즈음
이었다.
길산과 대용이 바쁘게 재인말 동구로 들어서는데, 양쪽 숲에서 몰이 하던 작대기와 환도
를 든 사령 네 명이 뛰쳐나왔다.
"웬놈들이냐?"
"이놈들, 꼼짝 말고 순순히 포승을 받아라!"
"어..."
두 사람은 주춤하고 나서 서로 돌아보았다. 사실 그들은 두 사람을 너무나 얕잡아보았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가 날래기는 들짐승과 같았고, 모두 한번에 대여섯쯤은 간단히 해치우
는 싸움꾼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대용이가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한판 붙어볼까."
"그냥 달아납시다."
길산이 말하면서 다짜고짜로 몇걸음 뛰어나가 앞장서서 길을 막았던자의 면상을 휘익 돌
려서 걷어차버렸다. 단번에 모가지가 옆으로 돌아가면서 나자빠지는데 이미 터진 코피가 왈
칵 눈 위에 쏟아진다. 길산은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뛰었고 우대용이도 한꺼번에 달려드는
사령들의 방망이를 팔뚝으로 막아내며 뛰었다.
사령들이 방망이를 휘저으며 달려들었으나, 방망이가 모두 좌우로 비켜나는 길산의 어깨
사이로 흘러내리고, 대신에 앞과 옆으로 내지른 정권에 명치와 인중 급소를 맞아 실신해 흩
어졌다. 대용은 곧장 앞으로 달려드는 자를 슬쩍 비켜나며 그 궁둥이를 호되게 걷어차서 뒷
전에 고꾸라지게 하였다. 다시 두 무리가 합세해서 달아나는 자들을 쫓았다. 그들은 멀찍이
뛰어서 간격을 넓혀놓은 뒤에 헐떡이면서 잠깐 쉬었다. 길산이 이마의 땀을 소매로 씻으면
서 말하였다.
"어휴 더워! 고향에 온 액땜을 단단히 하는군."
우대용이는 코를 헹 풀었다.
"그러게 내 뭐랬소. 한번 버린 것은 계집이든 집이든 다시 찾는 게 아니여."
길산은 밑에서 아우성치는 사령들을 내려다보았다.
"자, 빨리 산을 탑시다."
그들은 등성이로 뚜어올랐다.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방포 소리가 들렸다.
"어이쿠!"
대용이가 제 왼팔에 손을 갖다 대면서 비명으 질렀다. 송화현감이 맞은편 등성이에서 화
승총을 놓은 것이었고, 연환은 대용의 왼팔에 날아와 박힌 것이다.
"포수다. 얼른 화승에 불 대기 전에 뛰어!"
그들은 등을 낮게 숙이고 광대산 나루턱을 향해 뚜어올라갔다. 다시 방포하는 소리가 들
리는데 연환이 지나가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전을 스치는 듯하였다.
"포수는 다행히 한 놈이로군."
잠깐 엎드렸던 길산이 소리가 들린 방향을 노려보고 나서 재빨리 산마루턱에 올라섰다.
이제는 아래편이 내려다보이질 않았다. 그들은 뛰지는 않고 잽싼 걸음으로 광대산 줄기를
타고 갔다. 오르내리고 고개가 아직도 넷이나 되었다. 마지막 연봉이 잇닿은 산등성이에 이
르니 멀리 북편 하늘을 막아선 수렛고개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 바라다보였다. 길산이 우대
용에게 말하였다.
"우서방, 팔은 괜찮우?"
우대용은 옷깃을 찢어 팔뚝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는데 흘러내린 피가 손등에까지 이르러
말라붙어 있었다.
"온 어깻죽지가 저려오는걸."
"이젠 다 왔군. 여기서 된목이골까지는 인적이 끊긴 곳이니 쉬엄쉬엄 갑시다."
그들은 수렛고개에 산채에서 길목을 지키러 나온 패거리가 있는 것은 알지도 못했다. 구
월산 산채에서는 배고개와 수렛고개, 부처고개의 세 군데에 토막을 지어놓고 서너 명씩 내
보내두고 있었던 것이지만, 길산과 대용이 초행인만큼 그런 곳을 알 리가 만무하였다. 그들
이 구월산 연봉에 오르는 등성이길을 타려는 참인데, 양쪽 바위에서 화살이 수십여 대가 날
아왔다.
"허, 갈수록 태산이네."
그들은 투덜대면서 우선 바위 틈에 뛰어가 몸을 숨기고 주위의 동졍을 살폈다. 어디선가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놈들,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자리에 보따리 풀러놓구 도루 내려가거라!"
길산과 대용은 서로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호랑이 없는 동산에 토끼가 주인이라더니, 이
좁은 골짜기에도 조무래기 도적패가 있는 모양이거니 여겼던 것이다. 길산이 소리쳤다.
"어디 앞으루 나와봐라. 인물을 봐서 그럴 듯하면 고분고분 보따리 풀러놓구 내려가마."
숲 사이에서 장검을 비껴든 자가 쓱 나섰고, 양쪽에서 활 가진 두놈이 화살을 시위에 먹
인 채로 상반신을 쳐들었으며, 보다 더 위쪽에는 장창을 짚은 허우대 커다란 자가 서 있었
다. 길산은 손을 뻗쳐 나뭇가지 하나를 뚝 꺾었다. 다시 잘반을 꺾어서 단봉 두 개를 만들어
쥐었다. 우대용이가 속삭였다.
"나는 저 장창이나 뺏어 쓸까?"
그들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길산이와 대용이도 바위 틈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적당한 거리에서 둘러싸고 멈춰 섰다. 장검을 빼어든 자가 말했다.
"자, 보따리를 풀어놓았으면 죽기 전에 어서 내려각거라!"
"우리는 구월산으루 올라갈 일이 있는걸. 어디 막아보아라..."
길산이가 다시 괴나리봇짐을 등에 걸머지면서 빈정거렸으며 장검을 쳐든 자는 하도 어이
가 없어 제 동료들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들었지, 막아보라는데?"
위쪽에 서서 장장을 짚고 있던 자가 크게 호통을 내질렀다.
"뭘 집적대면서 지체하느냐. 난도질을 쳐버려라!"
대용이도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길산이가 만류하면서 앞으로 나갔다.
"우서방은 그냥 앉아 있수. 이거 해 다 넘어가겠는걸. 그래 좋다. 대시수 노릇에 뼉다귀가
모두 굳어버린 줄 알았더니 하루에 두 차례나 몸을 풀어 노골노골해졌는걸."
"그 뼉다귀에 살점 붙어 돌아가나 보자꾸나."
장검을 쳐든 자는 길산의 정면에 나서고, 좌우로 벌려 섰던 놈들은 모두들 짧은 환도를
움켜쥐고 천천히 다가들었다.길산이는 한 손에 그러뒤고 있던 막대기를 양손으로 나누어 쥐
고 팔을 축 늘어뜨린 자세였다. 그들이 길산의 쌍검무 솜씨를 알 리가 없었고, 잽싼 동작도
못 보았으니 제법 간덩이가 큰 왈짜로나 여겼는지도 몰랐다.
"칼 받아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장검이 곧장 길산의 가슴으로 파고들었으나, 길산은 왼쪽 단봉으로
칼날을 엇비슷이 밀어내면서, 그대로 칼이 지나가 그의 몸집이 가까워졌을 때에 오른쪽 단
봉으로 뒷골을 호되게 내리쳤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땅에다 꽂으면서 상대가 엎어져
움직이지를 않는다. 길산이 그의 등을 지끈 눌러 보이면서 말했다.
"아주 고택골로 보낼까 하다가 인생이 가엾어서 잠깐 잠들게 해놓았다. 두 번째 덤비는
놈은 뼈마디를 부러뜨릴 것이고, 세 번째 녀석은 아주 밥숟갈으 놓게 해줄 작정이다."
장검깨나 쓴다고 날마다 휘둘러대며 애꿎은 나뭇가지를 베던 자가 단 한번의 동작으로 벼
락맞은 장승 꼬락서니가 되었으니, 남은 자들이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길산은 그들을 둘러
보고 나서 두 손에 쥐고 있던 막대기를 내던졌다.
"너희들 상대할 틈이 없다. 우리는 마감동이를 찾아가는 길이다. 너희 두령께 구월산 주인
의 동무 되는 이가 지나가더라고 이르면 그리 꾸짖지 않을 것이다."
장창을 겨누었던 자가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지면서 다급하게 물었다.
"방금 마두령이라구 했지요?"
"그래 이젠 지나가두 괜찮겠니?"
"아이구 맙소사, 장길산 두령님 아닙니까?"
그자가 장창을 버리고서 달려 내려와 엎드렸다.
"진작 말씀하실 일이지, 어찌 저희 같은 것들을 놀리시오."
"네가 누구냐?"
"예, 이곳 수렛고개 토막을 지키는 소두령이올시다. 산채서 하달이 내려왔는데, 장두령께
서 지나시면 안내하여 모시고 오랍시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다른 졸개들도 모두 칼을 버렸다.
"너희들의 토막이 어디냐? 여기 다친 사람이 있으니, 잠깐 쉬고 중화라도 하구 가야겠다."
길산이 말하자 그들은 모두 분주해져서 일어나 앞장을 섰다. 뒤통수를 얻어맞았던 자도
혹을 비비면서 일어나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보는 것이었다. 토막에 들어가 데운 술로 우선
속을 덥히고, 길산은 단검을 청하여 화롯불에 달구었다. 그리고는 우대용의 팔을 찔러서 살
속에 박힌 연환을 파내는데, 대용은 눈썹을 움찔움찔하면서도 화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
고 따르어 조금씩 마시면서 참아냈다. 길산이 연환을 꺼내어 손바닥에 내밀어 보이면서 중
얼거렸다.
"총을 가진 포수가 십여 인 이상이 되면 제아무리 용 빼는 재주로도 맞설 수 없겠는걸."
"내 바다루 나가게 되면 청인들에게서 많이 살 수가 있을 거유."
"글세 내가 구월산에 있게 될지 모르겠소."
"나두 해토까지만 여기서 보신을 하다가 나갈려우. 아무래두 제 놀던 데서 놀아야지... 나
는 갯가 출신이니 갯가루 나가야겠수."
소두령이 어물과 구운 굴비에 토장국에다 기름이 잘잘 흐르는 이밥을 지어 한상 차려 들
어왔다. 길산이 인사조로 말하면서 수저를 들었다.
"우리 때문에 공연히 욕보네."
"아니올시다. 장두령께서 산채에 오시면 제일 큰 성님이시라고 모두들 그러셨지요. 저희들
이 눈이 삐어 봉변을 당하셔서 뵐 낯이 없습니다."
"여기서 벌이는 어떤가?"
"요즈음은 거의 일손을 놓구 있습죠. 일테면 망이나 보구 있는 셈입니다."
"밥 먹구 곧장 산으루 오를 텐데, 전에 온 적은 있지만 눈이 이렇게 덮였으니 길을 찾을
까 모르겠군. 한사람 붙여주겠나?"
"염려 놓으십쇼.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점심을 든든히 먹고 나서 구월산으로 올랐다. 산길 사십 리라 해도 장정들의 나는
듯한 걸음이라 아직 겨울 해가 질 듯 말 듯할 즈음에 된목이골로 들어섰던 것이다. 앞선 자
가 망보는 자에게 손을 휘저어 보이고서 외쳤다.
"해주서 장두령이 오신다!"
길산이 당도했다는 전갈이 득달같이 산채로 전해졌고, 공회 사랑에 둘러앉았던 박대근이
를 위시해서 갑송이와 마감동이, 강선흥이, 오만석, 김기 등이 차례로 뛰어나왔다. 역시 제일
앞장서서 달려나오는 것은 이갑송이었다.
"길산아!"
갑송이가 뛰어와 길산의 어깨를 안고 흔들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길산이도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말없이 갑송이의 손을 마주 잡았다. 박대근이가 다가와 길
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장총각, 얼마만이우."
"대근이 성님..."
나오는 사람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그들은 모두 공회 사랑으로 몰려갔다. 대근이와
대용은 저희끼리 용당포의 뒷소식들을 나누었다. 모두들 빙 둘러앉자, 우선 인사가 시직되어
우대용이는 박대근을 빼놓은 모든 사람과 인사를 텄다. 길산이도 김기와 강선홍이는 초면이
었으므로 인사를 나누었다. 밖에서 돼지를 잡는 소리가 요란했고, 부처고개서 불러 올린 아
낙네들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갑송이가 길산에게 말했다.
"부모님들두 모두 안녕하시다. 오늘은 여기서 새우고 내일 같이 탑고개루 나가자."
"파옥하여 모셔오느라구 너 혼자 고생이 많았다."
"고생은 뭘, 감동이가 수고 많았지."
곧 잔칫상이 들어오는데, 각종 전에다, 노루고기, 산적, 탕, 산나물, 떡, 과일에 산채서 담
근 송엽주가 들어온다. 박대근이 한잔 제일 먼저 따르어 길산에게 권하였다.
"우리 고생한 아우님 드시게."
"정말 여러 가지루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이젠 나왔으니, 송도에두 놀러 오구 허시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장사가 여러 가지 있을
테니까."
곁에서 아무 말 없이 노루고기를 열심히 뜯고 있던 강선흥이가 길산에게 말을 걸었다.
"한번 죽었다 살았다지요?"
"그랬었소."
"참형당했다구 해주 바닥에 얘기가 파다했습니다. 헌데 나는 도무지 모를 일이 한가지 있
습니다."
"무슨 일이오?"
"글세 성님의 아낙이라는 여자를 학령서 만나 해주까지 데려다 준일이 있소. 나중에 대근
이 성님께 여쭤보니 아직 미장가랍디다."
"장가는 들지 않았으나, 처와 같은 여자가 있었소."
"아, 그랬구먼요."
하고 나서 강선흥이가 학령서 도적떼들에게서 묘옥을 구원해내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길산은 여환이 하던 말과 맞추어보고 나서 묘옥이가 송림방 말바위를 다녀간 뒤에 해주에서
어느 곳인가로 흘러갔음을 알았다. 길산은 또한 손돌 노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
었다. 이야기가 앞으로 산채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하는 데에 모아지자, 마감동이가 심
중에 품었던 말을 꺼내었다.
"아무래두 구월산에만 붙어 있어서는 이 형세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벌써 인근 읍에서
는 여기에 우리들이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읍 수령들이 거병을 건의하고 우리를
일시에 사방에서 협공해오면 꼼짝없습니다. 그러니 산채의 형세도 늘릴 겸, 다른 데에도 소
굴을 잡아야 합니다."
김기가 말하였다.
"지금 우리가 터를 잡을 만한 곳은 해서에서 꼭 두 군데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비령이니
사방에 포실한 읍이 있고, 특히 봉산과 황주는 전국의 물산이 모이는 대처입니다. 자비령은
꼭 우리가 거점을 잡아야 되겠지요. 또 한 곳은 어디냐, 즉 멸악산이올시다. 서흥, 평산, 신
계를 끼고 재령 어루리벌과 나무리벌을 서쪽에 내다봅니다. 토호들이 많이 살지요. 그러나
멸악산 산채의 흠은 유사시 타도로 월경하기에는 좀 떨어져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박대근이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더니 말을 꺼내었다.
"지금의 형세로는 그 세 곳만 장악한다 하더라도 우선 숨을 돌릴 것이오. 나중에 형세가
커지면 위로 의주에서 남으로 동래에 이르기까지 발을 뻗읍시다."
다시 김기가 말하였다.
"요즘 세상에는 녹림당을 하는 것도 대의가 있어야 하오. 우리가 일찍이 원칙을 세운 바
가 있으나 다시 의논을 해봐야겠소이다. 산채를 구월산과 자비령과 멸악산 세 곳으로 일단
나누기로 하는데, 저마다 일이 조금씩 달라야 합니다. 또한 각 산채마다 아전이나 지방 토호
를 끼고 민가에 내려가 있는 사람이 있어야겠소이다. 이를테면 객주를 벌인다든가, 여각을
잡는 것이오. 구월산 산채는 형세가 형세이니만큼 은율과 송화, 그리고 안악에다가 거점을
만듭시다."
"은율엔 탑고개에 우리 식구들이 있으니 장날마다 내려보내면 될 게요."
갑송이가 말했고 길산이도 거들었다.
"송화 무더리 장터에다 주막을 하나 개점하는 것두 괜찮겠네."
"구월산 산채서는 평안도 지경까지 넓혀가면 되겠소. 그리고 자비령은 함경도와 강원도를
맡고서, 봉산에다 객점을 열어놓읍시다."
"봉산에는 만동이 형제가 있지요. 그자는 금 잠채를 다니는데 제법 벌이가 좋은 모양입디
다."
갑송이의 말에 대근이가 말하였다.
"광산을 잡아 철과 금을 캐내는 것도 좋은 일이오. 우리는 관에서 정말 토포하징 않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선 절대로 안됩니다. 도적질은 소규모로 정말 세상에서 지탄받는
악덕한 상인이나 토호를 상대로 하는 게요. 그리고 우리가 나서서 직접 이재도 취해야 하오.
방법은 여러 가지 있소. 사전을 찍어도 되겠고, 변방에 나가 밀무역을 해도 되며, 잠채잡이
를 하여도 되오. 물력은 힘이오."
김기가 말하였다.
"그 다음에는 멸악산 사채인데, 이곳은 송도에서 제법 가까운 곳이오. 연안까지 뻗친 산맥
을 타고 내려가 예성강을 건너면 곧 송도가 되니까요. 객주를 평산에 열고 자비령과 구월산
서 보내온 장물들을 송도에서 처분할 수가 있습니다. 아까 박행수의 말씀대로 무력을 쓰는
자는 정예로 스무 명쯤만 있으면 되고 나머지는 취재에 나서는 것입니다."
"대를 셋으로 나누면 되오. 상단, 연희단, 그리고 녹림패로 말이오."
길산이 말했다.
"산에 들어가면 녹림당, 시장에 나가면 보부상, 그리고 떠돌아다닐제엔 광대로 변실할 수
가 있습니다."
"우리 아래에 객주를 전국 요로에 가지게 되면 아마도 큰 형세로 자라날 것이오."
김기가 말하였다.
"이런 일들은 기실 십 년이 걸릴지, 이십 년이 걸릴지 예측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선 중
요한 것은 이 겨울 안으로 자비령과 멸악산에 산채를 잡아놓는 일이오."
"임자가 없을까?"
박대근의 물음에 마감동이와 강선흥이 각각 대답하였다.
"자비령에는 저희께서 떨어져 나간 일대가 목을 잡고 있는데, 우리가 들어가면 저항은 좀
할 겝니다. 그러나 곧 흡수시킬 수가 있겠지요."
"멸악산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오나, 그 연봉인 달마산과 불타산 것들은 제가 좀 압지요.
달마산 수돌이와 불타산의 심백이패는 한 여남은 명이 됩니다. 특히 심백이네가 형세가 크
지요. 그놈들을 시켜서 멸악산을 잡도록 하면 자연히 패거리로 들어오게 될 겝니다."
그때에 길산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나는 실상 산채에 머물 수가 없는 몸입니다."
라고 말을 떼었다. 강선흥이도 말하였다.
"그건 나두 마찬가지요."
마감동이 놀라서 술잔을 상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들이우?"
길산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내가 여러분들의 깊은 은혜를 입고서, 이제 와서 발뺌을 하려는 것은 아니올시다. 그러나
옥에 갇혀 있는 동안 나는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였지요. 이다음에 더욱 큰 일을 하기 위해
서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기도 하지만, 나는 지금부터 팔도를 뒤져서라도
찾아내야 할 사람이 꼭 두 사람 있습니다. 하나는 옛날에 수양산 망해사에 입산하여 지금은
어느 절엔가 있을 나의 생부 보라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내 아내가 되기로 정하였던 묘옥
이라는 여자입니다."
박대근이가 침착하게 말하였다.
"음, 내가 듣기로는 장서방의 앞선 얘기가 더욱 그럴 듯하오. 우선 이 형세를 유지한 채로
자비령과 멸악산에 거점을 잡는 것은 좀 뒤로 미룹시다. 서루 연결만 가지면 언제든지 실현
할 수가 있을 게요."
밤이 깊도록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우선 이갑송이는 탑고개의 괴뢰패와 월정사의
사당패를 모아 박대근 상단과 연결을 가져두기로 하였다. 또한 우대용이와 강선흥이 함께
장연으로 갔다가, 거기서 주상들이 모이는 강화도로 나갈 셈이었다. 구월산 산채에는 김기와
마감동이와 오만석이만 남을 모양이었다. 갑송이가 말하였다.
"길산아, 내일은 탑고개로 내려가 동네 사람들과 한잔 하자꾸나."
"그래, 아침 일찍 내려가자."
박대근이가 여태까지 계속된 얘기의 끝막음을 하였다.
"우선 우리들의 포부는 다 나왔으니, 몇 년 뒤로 물려놓기루 하지만, 그냥 헤어질 수야 있
나. 형제의 의를 맺기루 합시다. 그리구 늘 잊지 않았다가 종래에는 힘을 합칠 수가 있게 되
겠지."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김기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려면 날을 받아야지."
"날은 받아 뭘 허우. 우리가 대근이 성님과 길산이와 셋이서 의를 맺었을 때에두, 만나서
의기 투합되자마자 술상을 벌여놓은 자리에서 해버렸는걸."
박대근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다른 형제들오 많이 늘었으니 아주 기억에서 떠나지 않게 법식을 찾아서 해두는 게
좋겠소."
김기가 손을 꼽아보며 뭔가 헤아리고 나서,
"어, 모레쯤이 아주 좋겠군. 길일이오."
"그러면 모레 정오에 여기서 간단한 회식을 가집시다."
밤이 늦고 술도 어지간히 취했으므로 모두들 물러가 자는데, 박대근이와 길산은 늦도록까
지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과연 듣던 대로 학선이란 놈의 재주가 놀랍군."
"감영을 속인 재주이니, 그 정도라면 한양에 데려다 놓아도 무슨 짓이든 해낼 만합디다."
"헌데, 언제 길을 떠나시려오?"
"예, 새설을 쇠고 나서 곧 나갈까 합니다."
"어떻겠소. 일 년에 한번씩 설은 우리 집에 와서 지냅시다."
"글쎄요, 몇 년을 떠돌게 될지 기약할 수는 없으나 약속은 지키지요."
"정말 입산하시겠소?"
"예, 사람 공부를 하고 싶소."
이튿날 갑송이와 길산은 아침 일찍 된목이골을 나서서, 탑고개로 내려갔다. 그들이 집에
이르니, 마당에 나와 섰던 갖바치 박서방이 길산을 발견하고서 안에다 소리쳤다.
"길산이가 옵니다. 길산이가..."
하고는 박서방이 삽짝 밖으로 뛰어나왔고 장충과 그 처와 누이가 하꺼번에 마당으로 몰려
나오는데 부엌에 섰던 봉순이느 코를 싸쥐고 돌아서서 눈물을 짓는 모양이었다. 장충이 뛰
어 나와 길산의 뺨을 쓸면서 반가워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 재인말을 떠난 뒤에 폭삭 늙
어서 기력도 많이 쇠잔해 보였다.
"길산아, 이놈아 죽기 전에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구나."
"불효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지요."
"이렇게 편히 있지 않느냐. 자 어서 들어가자."
무당인 그의 어머니는 눈에 총기는 보였으나 역시 몸은 많이 쇠약해져 보였다.
"내가 점을 쳐보니까, 네가 설 전에 온다구 하더라. 정말 꼭 맞았지 뭐냐."
그들이 마당으로 들어가는데 봉순이는 말 한마디도 못 건네고 부엌에서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갑송이가 먼저 그녀를 보고는, 요즘은 전처럼 농지거리를 못하므로 내외 말투 비슷
이 던졌다.
"길산이가 왔는데, 뭐 숨바꼭질하나베. 얼른 나와 인사하라구..."
봉순이는 돌아선 채로 잠자코 서 있었다. 길산이나 갑송이가 그 까닭을 알 리가 없었고,
집안 사람들은 알고 있는 듯하여 뭐라고 재촉하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길산이가 부
엌을 기웃하며,
"봉순이두 이젠 어른이구나. 잘 있었냐?"
하며 봉순이의 대답을 기다리고 우물쭈물하는데 장충이 그의 팔을 끌었다.
"어서 들어가자."
그들이 방에 들어가 앉으니 토방이긴 하였으나 깨끗한 거적이 깔려 있었고 대들보도 튼튼
해 보였다. 재인말 있을 적보다는 그래도 어쩐지 썰렁해 보이는 살림이었지만 그렇다고 궁
기는 전혀 드러나 있질 않았다.
"그동안 감옥에 계셨던 독은 모두 빠지셨습니까?"
"음 뭐 날마다 노닥거리면서 동네루 마실이나 댕기니 갑갑해 죽겠다. 마두령과 갑송이가
잘 돌봐주어서 아무것두 부족한 것이 없었다."
길산의 어머니가 말해다.
"이젠 구월산에 쭉 있게 되겠지."
"글쎄요. 설 지날 때까지는 집에 있다가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어딜 다녀와?"
"예, 저... 공부를 해볼까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제 이름 석자도 읽을 줄을 모르니, 글
도 알아야겠구요, 세상도 알고 싶습니다."
무당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안되겠다. 굿을 한번 하든지. 네 역마살이 또 발동을 하는구나. 광대가 모두 역마살에 피
가가 낀 팔자라 하지만, 너는 아무래두 큰 청계씨가 들씌었어."
장충이 담뱃대에 불을 붙이다 말고 슬그머니 역정을 내었다.
"아니 왜 이렇게 소란을 피워. 그보다 어서 점심을 짓고, 술 담가놓았던 거 파내구 닭두
한 마리 꾸어다 잡으라구 그래."
그의 어머니가 나가고 나자 장충은 길산의 손을 쥐며 새삼스럽게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 부탁이 한가지 있는데 들어줄 테냐?"
"아버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버님 시키는 대루 하겠습니
다."
장충은 바싹 마른 손으로 제 눈등을 씻었다.
"그래... 전에 수양산 망해산에는 들러보았느냐?"
"아뇨, 해주에 도착하자 그 사단이 일어나서 수양산에는 올랐었지만 절에는 들를 수가 없
었습니다."
"네 부친은 분명히 살아 있을 것이다. 중들은 요절한단 일이 없으니까."
하고 나서 장충은 자신있게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떳떳하다. 너를 이렇게 키워냈으니까. 비록 제대로 입히고 먹이지 못하였
으나, 사람으로서 그른 일과 옳은 일을 구별할줄 알고 사내다우면 되는 게 아니겠냐. 나는
네 어머니를 저승에서 만난다면 자랑을 할 테다."
길산이도 눈앞에 안개가 끼어서 눈을 껌벅거리니,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장충이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내 마음에 꺼림칙한 것이 있다. 그게 뭔고 하니... 네가 아직 미장가라는
얘기로구나. 네가 성혼을 하여 일가를 이루면 아비는 그 이상 바랄 게 없이 내일 당장 눈을
감아도 편안하겠구나."
길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장가요...?"
"그래, 내 부탁이란 바로 그뿐이다."
"갑자기 말씀하셔서 지금... 저는 어리둥절합니다."
장충은 나직하게 웃었다.
"이 녀석아, 인연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여. 내 아주 맞춤한 규수를 점찍어놓았느니
라."
"어디 사는 누굽니까?"
"녀석두... 산에 은거하는 사람들이 본 따지고 고향 따지게 되었느냐. 바루 저 부엌에 있던
규수 말이여."
"예? 봉순이요..."
"왜, 마음에 드냐. 봉순이는 네 어미의 신딸로 들오와서 여태껏 오누이나 다름없이 커왓다
만, 그럴수록에 서루 성깔두 알구,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두 잘 아니까 부부인연으로 그만
큼 어울리는 짝두 없지 않니, 이를테면 우리는 오늘까지 봉순이를 우리 집의 민며느리루 여
겨왔다."
"아버지 그렇지만... 저는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장가든다구 할 일 못하냐? 여러 말 할 것 없다. 장가를 들 테냐, 말 테냐?"
밖에서 갖바치 박서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씀 다 끝나셨습니까?"
"아직 안 끝났네."
장충이 길산의 손을 다시 잡으면서 말했다.
"내 말을 들어라, 헛된 생각 말구. 내 네가 무슨 맘을 먹구 있는지 다 안다. 그러나 사람
의 일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고, 또한 되어서도 안된다. 너 손들 노인이 신천
서 활인해왔던 그 어린 창기를 마음에 접어두고 있는 줄 내 다 안다, 그렇지만 이건 아비의
마지막 부탁이야. 너 봉순이와 혼인하겠느냐?"
길산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대답도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왜 대답이 없느냐? 우리두 이젠 다 살았구나. 생전에 나두 손주를 보구 싶다. 네가 이번
설을 쇠고 집을 나간다면 언제 돌아오게 될지도 기약도 할 수가 없잖으냐? 어쩐지 나는 날
이 갈수록 몸이 틀려지는 것만 갑다."
길산이 고개를 떨군 채로 간신히 말을 꺼냈다.
"아버님... 아무리 아녀자와의 언약일지라도 저는 파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 여자와는 연비
로 다짐까지 했습니다. 언약뿐만 아니라 정분을 깊이 맺었으니 봉순이와 혼인을 한다 하여
도 저는 신랑의 자격도 없고, 두 사람 모두에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일이 됩니다."
장충은 노여움과 섭섭함으로 수염을 떨면서 길산을 노려보았다. 그는 손으로 방바닥을 치
면서 소리쳤다.
"이놈아...! 나는 너를 그따위로 키우지는 않았다. 그래 겨우 생각한다는 것이 고작 창기
냐? 그따위 소견머리라면 당장 내 눈앞에서 썩 없어져라."
길산이 머리를 조아리며 장충의 손을 잡으면서 달랬다.
"아버님, 고정하십시오."
장충은 제 노여움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는지 몇번이나 숨을 모았다가 다시 목소리를 평
온하게 하여 길산을 다그쳤다.
"나는 네가 비록 천출 광대의 밑에서 자라나, 재주나 팔아가며 세월을 보냈을지언정 장차
는 큰 일을 해낼 사나이루 믿구 싶었다. 그건 내 아버지의 소망이었고 또한 이렇게 허무하
게 늙고 쇠약해진 나의 소망이기두 하다. 너만은 보통 광대로 허송세월하여서는 안된다. 우
리는 늘 그래왔어. 태어나는 아이가 고추라도 달고 있으면, 모두들 입을 모아 우리의 여한을
풀어줄 것을 축수 기원하곤 하였다. 네 말로도 너는 시방 집을 나가서 글도 배우고 세상 공
부도 해보겠다는 놈이, 고작 한때의 정분을 잊지 못하여 부모의 원을 거역한단 말이냐. 내가
알기로도 그 손돌이네 집에 있던 창기는 인물도 어여쁘고 네게 다정도 하였겠으나, 사람의
생활이란 것은 정분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나라. 그 여자는 집안의 안해와 어머니의 구실
을 잘해낼 여자는 아니다. 집안이 바로 잡아져야 바깥일도 마음먹은 대루 할 수가 있는 게
야. 좋도 않고 싫도 않은 것이 바루 여편네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에 결정을 하여라. 만약에
네가 아직도 그 창기를 잊지 못하여 봉순이와의 혼인을 마다한 다면, 나는 너를 아들로 생
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 식구들을 데리고 이 탑고개마을을 떠나련다. 내가 재인말을 떠
나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이곳에 온 것은 모두 너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한달음에 말을 하던 장충은 갑자기 감정이 격해지는 듯 여윈 손을 들어 짓무른
눈가를 훔쳐냈다.
"너는 내 자랑이었다. 나는 너를 내 어깨에 얹고 무동춤을 가르치면서, 언젠가는 이 아비
보다 더욱 재간이 출중한 광대가 되리라 믿었고... 이제는 역시 너는 광대로 그칠 놈이 아니
란 걸 믿고 십구나. 너는 내 소생은 아니지만, 나를 그대로 꼭 빼어닮은 장충의 아들이다.
나두 여사당의 버린 살덩이로 태어나 젊을 적엔 왈짜깨나 부리면서 행패도 많이 저지르곤
하였다. 그렇지만 어리석고 나약한 탓으로 이렇게 천출을 면치 못하고 늙어버리구 말았구나.
나는 네 대답을 기다리지 않겠다. 너 하고 싶은 대루 어서 떠나거라. 차라리 대면하지 않는
다면 이 늙은이의 안달도 곧 가라앉겠지."
장충은 돌아앉아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길산은 한참만에 드디어 무거운 입을 떼었
다.
"아버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장충은 돌아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길산의 안타까움
을 알기는 하였으나, 사람의 사는 일이란 그런 안타까움은 아주 조그만 부분이며 세월이 감
에 따라 부질없이 스러지고 말 것임을 안다는 듯하였다. 다시 바깥에서 갖바치 박서방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두 안 끝나셨습니까?"
"응... 다 끝났네. 술상 들여오게."
박서방과 갑송이가 주춤거리며 들어왔다. 그들은 두 사람의 무거운 분위기를 짐작했는지
말없이 앉아서 무심한 듯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길산의 누이 박서방댁과 어머니 까막
내 무당이 상을 맞들어 들여왔다. 갓 지은 조밥에 닭국과 막걸 리가 한상 그득히 올라 있었
다. 박서방댁은 곧 나가고 무당은 길산의 옆에 지키고 앉아서 닭고기를 골라주기도 하고 김
치를 얹어주기도 하면서 연방,
"많이 먹어라. 너 밥 먹는 것 오랫동안 못 보았다. 어서 더 먹어라."
하는 것이었다. 길산의 밥 한 그릇이 금방 비워지자 그녀는 목청을 돋우어 마당에다 대고
외친다.
"얘, 봉순아 거 양푼에 한그릇 그득히 더 담아 내오너라."
밖에서 신 끄는 소리가 들린 뒤에 문이 빼꼼히 열리고 밥그릇을 받든 봉순이의 손만이 들
어섰는데, 무당은 문을 벌컥 열었다. 봉순이는 온 빰이 붉어진 채로 서 있었다. 장충이 그런
양을 바라보며 수저를 멈추더니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봉순이가 오늘은 세수를 한 열 번 했는가 보다."
"예...?"
무당도 함께 거들었다.
"얘가 우리 길산이가 오니까 갑자기 각시티가 나는구나?"
봉순이는 치마를 싸줘며 달아났고, 박서방과 무당은 큰 소리로 웃었으며, 갑송이와 장충은
빙글빙글 웃었으나, 길산이 본인만은 고개를 밥그릇에 처박고 수걱수걱 밥만 떠넣을 뿐이었
다. 막걸리잔이 한순 돌고 났을 때 장충이 제 마누라를 향하여 말을 떼었다.
"길산이가 마음을 정했다는군. 이제부터 바삐 서두른다 하여도 열흘은 걸릴 것인즉 해를
넘기지 말고 혼사 치를 준비나 하지."
"아이그 인륜지대사를 어찌 그리 후딱 해넘길 수야 있나요. 설이나 쇠고 해동이나 되어서
치러야지."
"아닐세... 길산이가 설을 쇠고는 곧 먼길을 떠난다니 해 안에 해버려야지."
"아니... 떠나긴 어딜 간단 말이냐. 이제 겨우 자리를 잡고 살림이 막 시작된 판인데..."
길산이 제 일을 가지고 콩팥 하는 것을 한참이나 듣고만 있다가 말하였다.
"혼인이란 별게 아니라, 다정한 사람들 앞에 팔자를 맺게 되었음을 알라고 사주를 얽는
일인데, 시방 산에는 제 뜻맞는 동무들이 대강 다 모여 있습니다. 이런 기회에 치르는 것이
제게나 동무들에게나 복이 되겠지요. 앞으루 사흘 안에 혼사를 치르도록 해주십시오."
무당이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냐. 사흘 말미에 어찌 혼인 준비를 하겠느냐."
그러나 장충은 별로 반대할 의사가 아니 모양이었다.
"허긴 그렇다. 먼 타관에서 데려오는 색시두 아니구, 한집안에서 자라난 사이니까. 격식
차릴 것두 없이 작수성례를 지내면 어떠하냐. 더구나 네 의향이 동무들이 모인 자리를 놓치
고 싶지 않다하니, 마음에 작정이 된 이상에는 어물거릴 필요가 없느니라. 네 뜻대루 하자꾸
나."
장충의 말에 까막내 무당댁은 펄쩍 뛰면서 다시 반대했다.
"길산이도 내 자식이요, 봉순이도 어릴 적부터 내 신딸로 키운 자식인데 천생연분으로 데
릴사위 겸 민며느리나 마찬가지여요. 이런 인연을 맺는 경사를 작수성례로 치르다니, 그 무
슨 섭섭허신 말씀이유. 내는 못허겠수."
박서방이 싱글대면서 무당을 만류한다.
"장모님, 어디 말이 작수성례이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작정이 된바에야 속히 치르자는
말씀이지요."
"아닐세. 내 자네들 혼사 때에도 대굿 열 마당만큼이나 떡벌어지게 지내주었지만, 이번 혼
사는 내 사위 겸 아들과 내 며느리 겸 딸년의 인륜대사인데 소홀히 넘길 수는 없네."
"아따! 그러면 대갓집 못잖게 격식 모두 갖추어 지내. 하여튼 길산이 말대루 사나흘 안으
루 치를 테니까 알아서 해여."
장충이 면박을 놓아 입을 막아놓자 무당은 벌써부터 조바심이 생겨서 자리에서 들썩이면
중얼댔다.
"에그... 큰탈났네, 큰탈났어. 오늘밤부터 꼬빡 새워야겠구먼..."
길산이와 봉순이가 혼인한다는 소문이 재인말서 탑고개로 이사온 광대들 사이에 퍼졌고,
아낙네들이 곧 모여들어 분주하게 준비들을 시작했다. 갑송이와 길산이는 다시 산채로 나가
는 중에 월정사에 들르기로 하고서 나한암을 돌아 넘어갔다. 조도를 지나고 적송의 숲으로
들어설 때 앞섰던 갑송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길산아, 나두 장가들구 싶다."
"들려무나."
길산은 시큰둥하게 대답했고, 갑송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째 대꾸가 신통칠 않은걸."
"나는 아버님 말씀은 거역할 수가 없어. 그분은 나를 당신 손으로 몸소 받아낸 분이니까."
"장가들기가 싫으냐?"
길산은 말없이 걸어갔고, 우두커니 섰던 갑송이가 다시 물었다.
"봉순이가 별루 마음에 내키지 않는 모양이구나."
"봉순이는... 내 누이야."
"묘옥이 때문이로구나?"
길산이는 대답 대신 먼 산봉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구름 사이로 첩첩이 연봉을 아득
한 시선으로 내다보았다. 길산이 시선을 거두면서 말머리를 바꾸었다.
"풍열이란 중이 그렇게도 도가 높단 말이지?"
"아무튼 괴짜쇠여. 꼬치꼬치 마른 늙은이가 손가락 하나로 나를 기절시켰다니까."
"음, 일지관수로군!"
"그뿐이 아니야. 옥여라는 중은 승복을 입었다뿐이지 우리네와 똑같더란 말야."
"어쨌더나 정착을 하게 해주었으니 인사는 드려야지."
그들은 절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법당 문을 밀치고 나오는 것은 옥여스님이었다.
"이두령 어서 오시오!"
옥여는 이제는 친숙해진 갑송이께 합장 배례도 하지 않고 웃음으로 말을 건넸다. 갑송이
가 길산을 돌아보고 나서 말했다.
"오늘은 나허구 제일 친한 동무를 데리고 왔소이다. 곡차 톡톡히 내야 허우."
"암, 사당마을에 내려가면 어디 곡차뿐이겠소."
갑송이가 벌죽이 웃었다.
"저 보라니까. 멀쩡한 승복을 입었을 뿐이지 우리 같은 왈짜라니까."
세 사람은 목청을 합쳐 껄걸 웃었다.
"풍열스님 계시우?"
"예, 계십니다. 헌데 이두령의 동무하고는 인사시키지 않을려오?"
"아이구, 인사허슈."
길산이 재빨리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드렸다.
"장길산이우."
"옥여요."
하고 나소 옥여는 문득 생각이 났는지 길산에게 되물었다.
"감영 옥에 갇혔던 분이시오?"
"예, 그렇습니다."
"이두령한테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월정사 뒤의 계곡을 올라 달마암에 이르렀다. 선방 마루에는 동승이 나와서 내다
보고 있었다.
"스님께 손님이 오셨다고 여쭈어라."
"스님께선 지금 주무십니다."
동승의 말을 듣고 난 옥여는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허허, 단잠을 깨워드릴 수는 없고 기다리기도 그렇고, 어쩐다?"
"제기 내가 깨우겠수. 주승이면 주승이지 낮잠이 다 무에야."
갑송이가 툴툴거리며 마루 위로 성큼 올라섰다. 그는 만류하려는 동승을 아랑곳하지 않고
미닫이를 벌컥 열고 걸걸한 목소리로 사뭇 고함을 쳤다.
"스님! 스님... 갑송이가 왔습니다. 일어나우."
갑송이의 큰 소리에도 꿈쩍 않고 풍열은 목침을 베고 누운 채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풍열스님, 일어나라구요."
갑송이가 풍열의 가슴을 거칠게 흔들자, 그제서야 그는 눈을 뜨고 멀뚱히 올려다보더니
일어나 앉았다.
"단잠을 깨워드려서 죄송허우. 그렇지만 스님, 추운데 기다릴 수두 없구 그냥 돌아갈 수두
없지 않습니까? 제 동기간 같다는 길산이하구 함께 왔습니다."
풍열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연거푸 터뜨렸다.
"허허... 백일몽이로다."
"무슨 잠을 그리 곤히 주무십니까?"
"응, 곡차를 과히 들었더니 몹시 취했던 모양이다."
"아니, 선방에서 곡차라니오?"
"그래 이 녀석아, 불심은 세상 만물에 다 있느니라."
하고 나서 풍열은 새로운 얼굴을 향하여 잠깐 쏘아보았다. 길산이 넙죽 업드리며 두 손바
닥을 위로 향하여 받드는 불자의 예를 올린다.
"저희를 탑고개마을에 거두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풍열은 염주알을 헤아리면서 딴 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저희들도 연희를 나가게 되면 월정사의 불사를 돕겠습니다."
풍열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길산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광대인가?"
"예, 그렇습니다."
풍열은 빙그레 웃었다.
"자네가 탑고개마을에서 패거리들과 함께 연희를 나간단 말인가?"
길산은 대답하기가 난처하였다.
"글쎄올시다... 저는 이곳을 떠날 작정입니다만, 우리 재인말 사람들은 모두 그러기를 원하
구 있습니다."
"언제 떠날 것인데..."
"예, 설을 쇠고는 나갈까 합니다."
"그때까지 내게 자주 놀러 오너라. 내 자네에게 이를 말이 있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길산을 따뜻한 시선으로 건너다보면서 다시 말하였다.
"금강산에 가본 일이 있나?"
"근처까지는 갔으나, 입산하지는 않았습니다."
"금강산에는 내 스승이 계시다. 자네를 받아줄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로는 자네는 그분
께 꼭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곁에서 옥여가 한마디하였다.
"스님... 운부대사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난번에 가서 뵈었느냐?"
"예, 간신히 만나뵐 수가 있었습니다. 스님께선 암자에 계시질 않습니다. 그 어른이 금강
산에서 어딜 가셨는지 몰라 벽곡을 하면서 보름을 기다렸지요."
길산은 머리를 조아렸다.
"스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여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스님 분부대로 운부스님을 꼭
만나구야 말겠습니다."
"아니다. 자네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너희들을 기다리시는 것이다."
하고 나소 풍열이 갑송이에게 말했다.
"갑송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지 않으려느냐?"
갑송이는 눈을 크게 뜨고는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예? 중이 되라구요. 에그 나는 싫소이다. 길산이는 장가들구, 나 혼자 총각 귀신 못 면하
구 까까중이 되어요?"
풍열과 옥여가 껄걸 웃었다. 풍열이 웃으면서 혼잣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사람마다 제각기 걸맞는 팔자가 있는 법이다. 길산이는 비승비속으로 우리와 인연이 있
으나, 갑송이는 비구가 되어야 할 팔자이니라, 네게 곧 불가의 깊은 인연일 찾아들 것이다."
"에이, 그런 일 없습니다요."
"어디 두고 보아라."
옥여가 길산에게 물었다.
"혼인을 하시오?"
길산이 대신 갑송이가 주워섬겼다.
"내일 모레가 저 녀석 장가드는 날이우. 동갑네에 나보다 생일두 늦은 녀석이 버르장머리
없이 장가가 다 뭡니까. 나두 장가들려우. 옥여스님, 전에 말이 나온 대루 그 도화라는 애사
당하구 정분 좀 나게 해주오."
"왜, 그때에는 한사코 마다하시더니, 허긴 장가가 좋긴 좋은 모양이오."
길산이 풍열에게 고개를 숙이며 일어났다.
"집안일이 끝나고 나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모레라구 그랬나?"
"예, 탑고개서 할 터인데... 스님두 오십시오."
"그래 고기라두 몇점 얻어먹으러 갈거나."
그들은 달마암을 내려왔다.
"사당마을 가서 곡차 내야 허우."
갑송이가 옥여에게 지분대는데, 길산이 말했다.
"그냥 된목이골루 올라가지. 거기두 술이 있지 않겠나. 만석이가 잡아놓은 짐승 고기도 있
을 테구..."
"이 자식아 너는 장가를 들지만, 내야 눈요기라두 해야겠다. 사당 아이들이나 먼발치서라
두 보구 가야지..."
옥여가 승려답지 않게 갑송이의 등판을 철썩 두드렸다.
"좋소이다. 이두령이 오늘따라 그렇게 계집을 밝히니... 하는 수 없이 내가 중신을 들어야
겠군."
"헤헤 승려가 중신을 든다면 복록은 이미 무르익은 일이로다."
그들은 그렇게 농지거리를 하면서 월정사 사당마을로 내려갔다. 그들은 마을 어귀로 들어
서는데 이미 그들을 발견한 모가비 임가가 마중을 나오고 있었다.
"어이구, 오랜만에 내려오셨습니다."
임가가 우선 갑송이께 그렇게 인사를 올리고 나서 옥여에게 정중히 합장 배례하였다. 옥
여가 말하였다.
"자네 오늘 어깨가 무겁게 되었네."
"예예, 알겠습니다. 담가놓은 술이 어디 저희 것입니까. 스님께서 맡겨놓으신 것이지요. 저
희는 술을 통 입에도 못 댄다니까요."
"이 사람아 그게 술이 아니라, 승려가 마시면 곡차가 되는 법일세."
"곡차 몇잔 따위루 제 어깨가 무거워서야, 어디 월정사 사당말을 폐하시려구 그런 말을
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오늘은 이두령이 그 도화라는 아이를 보구 싶어한다네."
"내가 다 그럴 줄 알구 버들쇠와의 기구한 사연을 말씀드렸지요. 이두령과 성례가 되고
보면 저는 이른 사위를 보게 되는 셈이군요. 그뿐입니까, 거사 하나 그럴 듯한 장사를 거느
리게 되는 셈이 아닙니까."
갑송이가 수줍고 쑥스러워져서 얼굴을 돌리고 있다가 똥 뀐 놈이 먼저 성낸다고 벌컥하였
다.
"내가 어째서 자네의 사위이며, 또한 뭣 땜에 자네 수하의 거사가 되는가?"
"아니오. 이를테면 내 딸이나 같은 도화년과 성례를 하게 되면 그렇다는 얘깁지요. 싫으면
그만두시우. 누가 불러두 내가 오지 말라면 안오니까요."
갑송이는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나, 도화가 보고 싶기는 한 모양
이었다. 그들이 동네 사랑에 가 앉고, 임가는 지난번에 동석했던 거사 하나를 불러 뭔가 숙
덕거렸다. 길산이도 이제는 갑송이가 말하던 도화라는 사당에 관하여 궁금한 생각이 들어
은근히 조바심이 생겼다. 잠시 후에 여자 둘이 마당에 나타났는데, 백련이라는 나이 든 사당
과 그뒤에 앳된 사당이 보였으니 그가 도화임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곱게 화장을 했고, 머리
위에는 붉은 댕기를 매고 있었다. 그들이 술상을 받쳐 마루 위에 올려놓고는 잠시 분부를
기다리는 둣하였다. 임가가 방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너희들 인사드려라. 옥여스님도 와 계시고 구월산 산채의 장사 두분도 내려오셨다."
그들은 땅 위에 사뿐히 앉으면서 인사를 하는데,
"부처님 공덕으로 만물초목 생기한데, 백련이 문안드리오, 관세음보살."
"흐름을 따라 성품을 얻으니, 기쁨도 근심도 없는 도화 문안드리오, 나무 관세음보살."
"이리루 올라와서 두령님들게 술을 따르어라."
임가가 지시하자 백련과 도화는 방안에다 술상을 들여놓고 마루 위에 단정히 앉았다. 먼
저 갑송이가 잔을 비우자 백련이 술병을 드는데, 임가가 다시 말하였다.
"이두령께는 도화가 한잔 따르어라."
도화는 눈을 곱게 내리깐 채로 병을 들어 갑송이의 잔에 들어붓는데, 갑송이의 잔 잡은
손이 어느결에 간간이 떨리고 있었다. 도화의 안색은 병색이 깃들이고 수심이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으나, 마치 서리를 맞은 잔국처럼 사람의 마음을 애달프게 하는 것만 같았다.
갑송이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 또다시 내밀었다. 역시 눈을 내리깐채 도화는 침착하게 갑송
이의 빈 잔을 채웠다. 좌중의 사람들은 그런양이 처음엔 우스웠으나 갑송이의 표정이 너무
도 숫되고 진실하게 보여서 웃지를 못하였다. 길산이가 이런 딱딱한 분위기를 해소라도 시
키려는지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를 내어 백련에게 술을 청하였다.
"자아, 내게두 한잔 주오."
백련은 도화와는 달리 산전수전을 겪은 사당인지라 한 손으로 술을 따르는데 또 한 손은
소매 끝으로 따라가는 듯 마는 듯하고 이마는 약간 숙인 채로 눈을 들어 상대의 시선에 맞
추었다가 술잔을 잡은 손에 머무는 것이었다. 임가가 껄걸 웃어대며 농을 던졌다.
"얘 백련아, 헛물켜지 마라. 이쪽의 장사님은 낼 모레 장가가신단다."
백련이는 임가를 돌아보더니 방긋 웃으면서 받는다.
"물이 너르면 송사리와 청룡이 더불어 모여들고, 산이 깊으면 토끼 대호가 함께 서식하나
니... 대장부 너른 품에 그만 못하여, 아녀자처럼 정든 임 한 가슴에 족하십니까?"
길산은 무덤덤하고 옥여가 빙그레 웃었다. 그도 또한 농이 나온다.
"낙수가 돌에 구멍을 뚫는다더니... 백련이는 가히 보살이로구나. 무엇이든 한 가지에 이른
자는 모두 불심을 아는 모양이구나. 허나 승려가 주를 가까이 하고 심지어 색마저 나란히
할 수야 있겠느냐. 이젠, 물러들 가거라."
갑송이가 세 번째의 잔을 내미는데, 그제서야 눈을 깔기만 하고 있던 도화가 얼굴을 쳐들
어 갑송이를 바라보았다. 갑송이의 얼굴이 취기 때문이 아니라 수줍음과 정으로 벌겋게 달
아 있었다. 백련이가 먼저 마루에서 내려섰고, 도화도 따라 내려갔다. 그들이 다시 합장 배
례하고 돌아섰을 때, 임가가 갑송이의 팔을 툭 치면서 말하였다.
"어떠시우, 이두령... 마음에 흡족하시다면 내 중신을 서리다."
갑송이는 우선 잔부터 널름 비우고는 성급하게 말하였다.
"나 장가들라우!"
길산이 물었다.
"정말이냐?"
"당장 어머님께 여쭙고 데려올 테다."
"허, 이두령의 마음은 그렇고... 저쪽의 심정이 어떨지두 모르고서 어찌 그리 자신이 만만
하우."
옥여가 한마디하자 갑송이는 제 손으로 술을 콸콸 따르어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말했다.
"까짓... 말을 안 들으면 잡아다가 아내를 삼으면 되지, 뭘 꺼릴게 있수?"
"저런, 성미하구는 내 원..."
그때 임가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멀리 간 백련이를 불렀다.
"백련아, 이리오너라."
삽짝 밖으로 나갔던 백련이가 핼끔 돌아보더니 곧 되돌아왔다.
"왜 그래요?"
"우리가 네게 청이 한가지 있다. 도화가 네 말을 잘 듣지 않느냐?"
"예, 성님 아우 하며 지내온 지가 여러 해 되었어요."
임가는 갑송이를 보고 나서 계속하였다.
"여기 계신 이두령과 도화를 성례시킬까 하여 네게 청하는 것이다. 도화에게 한번 권하여
보아라. 이번 일이 성사가 된다면 아마 구월산 산채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게다."
"보통 졸장부나 향리의 초부 머슴도 아니고 저렇게 기골이 장대하신 장사님을 마다할 어
느 시러베딸년이 있겠습니까. 제가 오늘 중으루 설득하여 꼭 성사를 시킬 터이니 상급은 더
도 말고 옷이나 한벌 해줍시오."
임가는 백련이는 돌려보내고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 이런 혼사는 또 처음이오만, 만약에 형제 같은 두 분이 같은 날 같은 시에 혼례를 지
낸다면 그에서 더 큰 복이 없겠수. 하여튼지 오늘 안으루 제가 탑고개에 기별을 드리지요."
길산이 말하였다.
"아니오. 우리는 오늘 저녁에 구월산 된목이골서 지낼 텐데 내일 지나는 길에 다시 들르
지요."
"그러면 더욱 좋습니다."
장본인인 갑송이만이 얼굴이 벌개져서 술만 연거푸 들이켜고 있다. 옥여가 말했다.
"내 속세에서 혼인하는 것을 몇번 보았거니와, 오랜만에 아는 이들의 혼례를 보게 되었구
려. 축수 염불이나 길게 해드리리다."
길산과 갑송이가 된목이골을 향해서 멀어져간 뒤에 임가는 백련이네 집으로 넌지시 가보
았다. 백련이는 짝거사가 있었으나, 거사 없는 애사당인 도화와 각심이를 한집에 데리고 있
었다. 마른 왕골로 자리를 짜고 있던 백련이의 거사가 모가비를 보고는 일손을 털고 일어섰
다.
"웬일이우?"
"가만있게... 도화를 시집 보내게 되었어."
"예? 갑자기 그 무슨 말씀이우?"
"지금 백련이하구 얘기하구 있지?"
"모르겠수. 저 애가 그 버들쇠하구의 일이 있고부터는 장사에도 나서지 않았고, 몸을 사려
온 참이우. 아마 아무하구두 가까이하려 않을 것이외다."
"그러니까 차라리 구월산 녹림패들의 인심이나 사두자 그 얘길세. 이갑송이라는 재인말
광대 있잖은가, 그자와 성혼시키려네."
"의문이올습니다."
"무슨 말이야?"
"도화는 다감한 아인데다 버들쇠처럼 나긋나긋한 사내가 어울릴 것인즉, 그 곰 같은 놈의
아내가 되었다가는 아마 시름에 겨워 두어 달두 못 살겠수."
"사람의 일이란 더구나 남녀간의 정분이란 하늘두 모른다구 했네."
백련의 서방 되는 거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나중에 화를 불러 그들의 노염을 사느니... 아예 성례시키지 마시우."
"무슨 화가 있다구 그러는가?"
"글세... 그런 일이 있습니다요."
임가는 거사의 말을 듣고 좀 꺼림칙하기는 했으나 약조한 일인지라 그대로 백련에게 맡기
기로 하였다. 백련은 드디어 도화의 마음을 잡아 내는 데 성사하였다.
길산이 봉순이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갑송이도 덩달아서 도화와 장가를 들겠다고 설쳐
대어, 된목이골에서는 아예 잘된 노릇이라고 쌀다섯 섬과 상목 열 필을 비용으로 보내주었
다. 하는 수 없이 길산이네서 갑송이의 혼인까지 도맡게 되었는데, 갑송이네는 노모 한 분이
계실 뿐 식구가 아무도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재인말에서부터 서로 도움을 주고받던 광
대들인지라 모두들 길산이네로 모여들어 일을 도왔다.
혼인날이 되어 된목이골에서 날짜를 기다리고 있던 박대근이를 비롯하여 김기, 강선흥, 우
대용, 마감동, 오만석 등등이 탑고개로 내려왔다. 옥여와 모가비 임가며 거사 몇 명과 백련
이와 몇 명의 여사당들도 내려왔다. 그들 스스로의 생각에도 양반댁 혼례를 그대로 따른다
기도 우스운 노릇인지라 사주단자며 택일이며 함이며를 모두 약하고 초례만을 대강 치르기
로 하였다. 신랑들은 사모관대 대신에 초립에 중치막 차림이요, 신부들은 원삼 족두리가 아
닌 치마 저고리에 얹은머리 그대로이다. 된목이골 졸개들이 이틀 동안이나 눈 덮인 냇가를
싸돌아서 겨우 잡아온 생기러기를 붉은 보를 씌운 함의 머리에다 붙들어맸는데 발목에는 청
실홍실을 묶었다.
길산네 삽짝은 임시로 모두 젖혀버렸고 위에는 차일, 아래는 멍석을 깔았으며 병풍 대신
에 멍석을 세워 둥글게 가리워놓았다. 또한 중앙의 끝 쪽에 독좌상을 남향에 정면으로 벌여
두었는데, 와룡 촛대 한쌍이 좌우로 벌려 서 있었고, 맨 앞에는 대추와 밤과 약과가 놓여 있
으며, 그 뒷줄에 달떡이 스물한 개씩 두 접시, 또한 콩과 팥이 담긴 그릇 한쌍이 나란히 놓
였다. 상 좌우에는 찹쌀로 빚어 물들인 수탉과 암탉의 모양이 동서로 놓여 있었다. 독좌상
앞에는 다시 작은 소반을 내밀어 두었으며 청실홍실을 얽어맨 술잔과 주둥이 높은 주전자와
꼭지 숟가락이 벌여 있었다. 길산네는 시가와 처가가 겸하여 있는 형편이고, 갑송이가 데려
오는 도화도 부모 없이 자란 고아인지라 간단히 약하여 이렇게 초례만을 치르려는 것이었
다.
길산이와 갑송이가 의젓하게 멍석을 밟으며 걸어 들어오니 구월산 두령들이 소리지르며
농을 던졌다. 물론 보통 때처럼 막 놓는 농지거리는 못하고 제법 점잖은 투였다. 길산이와
갑송이가 기러기에 두 번 절하고 나서 다시 독좌상 앞으로 가서 섰다. 신부들은 이미 아녀
자들의 부축을 받고 나와 서 있었다. 신부들은 동쪽에, 신랑들은 서쪽에 마주 섰다. 신부들
이 먼저 두 번 절했고 신랑들이 한번 답례하였다. 한번 더 이사가 오고간 뒤에 수모로 나온
아낙네가 술을 따라 양쪽에 권하였다. 곁에서는 옥여가 목어를 두드리면 큰 목청으로 염불
을 외쳤다. 그 자리에서 초례는 끝나고, 안방에서 길산이 부모와 갑송의 어머니가 함께 신부
들의 인사를 받기로 되어, 봉순이와 도화는 수모들에게 끌려갔다.
이제부터는 술 먹고 놀다가 저녁때에 첫날밤을 지내는 일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길산이와
갑송이는 답답증을 견디지 못하여 초립고 중치막을 벗어버리고 말았다. 상사람인지라 흠이
될 것도 없었고 예를 차린댔자 알아볼 리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잔치의 절차가
있었는데 멍석 위에서 곧 광대희가 벌어질 모양이었다. 이미 앞줄에는 삼현육각을 가진 자
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길산과 갑송이를 위시해서 된목이골 패거리와 월정사에서 온 사람들
이 합석아여 둘러앉았다.
"자아, 두 면총각들 술 받으시우. 젠장할 이거 상풍이 이만저만이 아닐세."
박대근이가 술을 따라 건네면서 투덜대자 갑송이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되물었다.
"아니, 상풍이라뇨?"
"삼십이 넘은 내는 아직두 헛상투를 올린 총각인데, 아우님들이 벼락치듯 장가를 드니 하
는 말이오."
"에이, 성님이야 배대인댁 막내딸 귀례 아씨가 있지 않우."
"거 너무 되바라져 내주장이 심하겠어."
"벌써부터 안눈치를 보시다간, 이담에는 사타구니에 주머니 차구 다니게 되겠수."
아직 안면이 없는 월정사의 옥여와 구월산 두령들이 인사를 나누었다. 길산이는 말없이
앉아서 술만 기울이고 있었는데, 김기가 가장 연장자인 박대근이에게 말하였다.
"박행수... 오늘 형제지의를 맺어놓기루 하였는데, 시방 거행을 하는 게 어떻겠소?"
"그럽시다. 차서는 정해졌지요?"
"예, 정해졌습니다."
나이가 가장 아래인 강선흥이가 불평을 터뜨렸다.
"까짓 밥그릇으루 차서를 정한다면야 북망에 갈 늙은일 데려다가 머리를 삼지 뭘."
박대근이가 핀잔을 주었다.
"무슨 말이냐. 나이두 나이려니와, 윗사람의 구실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그것은 또한 나
이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요, 재간이나 기운으로만 되는 것두 아니다. 너는 나이도 제일
아래고, 구실도 그러한데... 일테면 장서방한테 성님 대접을 받구 싶으냐?"
강선흥이와 입을 불쑥 내밀고 투덜거렸다.
"아이구 저 말씀 보시게. 누가 길산이 성님이 고까워서 그러는 것이오?"
"그럼 누가 고까우냐? 나냐?"
강선흥이가 마감동이와 오만석이 등 된목이골 임자들 쪽에다 눈을 흘기고 나서 수군수군
하는 말투로,
"제미... 어서 보도 듣도 못한 화적 아이들게 성님이 다 무에요?"
박대근이 굵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선흥이의 말을 귓결에 들은 마감동이가 술잔으루 상
머리를 꽝 두들겼다.
"뭐라구? 이런 뒤통수에 쇠똥두 떨어지지 않은 녀석이..."
김기가 손을 내저었다.
"여보게 참게, 강총각 그러면 못쓰오. 여기 마두령은 비록 기운에 있어 강총각에 못 미칠
지는 모르나, 구월산 산채의 두령이고, 많은 식구를 거느린 사람이외다."
갑송이가 눈을 부라렸다.
"못써 이 녀석아. 너 글을 아니?"
강선흥이는 모두들 자기에게 눈알을 부라리자 금방 수그러져서 어깨를 움찔 올리고 고개
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알았수. 잘못했으니 그만들 해두슈."
갑송이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핀잔을 주었다.
"까짓 황소의 뿔을 뽑았다구 장한 게 아니여."
"세상에는 다 법도가 있는 것이다. 마두령은 너보다 몇배는 덕이 있는 사람이다. 장서방과
이서방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김선비까지도 모두 수습을 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글을
알건 모르건 중요한 것은 내가 보기에 네 성님 될 구실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실이다. 알겠
느냐?"
강선흥이는 여럿의 핀잔을 받고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차서가 정해졌는데
역시 나이나 기운으로가 아니라 앞으로 도모할 일의 구실에 따라서 깊이 숙고하여 정해진
순서였다.
제일 처음이 박대근, 그 다음이 김기, 그리고는 차례로 장길산, 이갑송, 우대용, 마감동, 오
만석, 강선흥이 되었다. 김가가 뒷에서 술을 마시던 졸개들게 손짓하여 제상을 차려오게 하
였는데, 보통 해주반 위에 백지를 덮고 중앙에는 향로가 놓였는데, 흰 사기 탕기와 주전자가
나란히 있었으며 나중에 태울 고사문 이 접혀져 놓여 있었다. 집사 역을 맡은 김기가 지시
아여 일제히 분향재배한 뒤에, 김기가 제상의 사기 탕기를 내려놓고, 제 손가락을 장도로 베
어 피를 내었다. 모두들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사기 탕기에다 쏟아냈고, 김기가 그것을 두
손으로 제상 위에 다시 바쳤다. 그가 고사문을 읽기 시작했다.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 은율 탑고개에서 형제의 의를 맺고 피로써 천지신명께 맹서하나
니 차마 저버리는 자가 있다면 천벌을 내리시라. 송도 박대근, 봉산 김기, 문화 장길산, 문화
이갑송, 해주 우대용, 한양 마감동, 안주 오만석, 장연 강선흥 등이 감고하나이다."
김기는 그것을 들어 소지하였다. 다음에는 탕기에 모았던 피를 주전자에 다시 부었다가
흔든 다음에 탕기에 한 잔을 따라 제상에 바치고, 또 한차례씩 재배하였다. 끝으로 탕기에
그득 찬 술을 돌려 한모금씩 음복하고 나서 모든 순서가 끝이 났다. 박대근이는 제상이 물
려지자 가장 손윗사람으로서 한마디 말을 꺼냈다.
"이제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눈 형제요. 앞으로 그 의리를 배신하는 자가 있다면 천지신명
을 대신하여 다른 형제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벌하리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러한 맹서까
지 하는 것은 옳은 일을 하자는 것이지, 결코 악행을 저지르자고 한 것은 아니외다. 앞으로
수십년이 지난 뒷날에까지 이러한 매약을 잊지 말구 살아야 허우."
길산과 갑송이의 혼례에 더불어서 그들의 의형제를 맺은 것은 참으로 앞뒤가 잘 맞아떨어
진 노릇이었다. 이튿날 박대근이는 송도로 떠났고 우대용과 강선흥은 장연으로 함께 떠나갔
다.
길산이는 거의 날마다 눈 덮인 산을 쏘다니며 사냥에만 열줄한 듯하였다. 갑송이는 도화
와의 살림 재미가 마치 꿀맛인지 집안에만 틀어박혀 도통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김기는
은연중에 딸을 구원해내고 원수를 갚기 위해 봉산을 들이칠 것을 원하고 있었으나, 마감동
이는 눈 녹을 때로 미루어 거사하려 들지 않았다. 설을 쇠고 나자 어느덧 바람이 훈훈해진
듯하였고, 산골짜기의 두터운 얼음이 녹아 시냇물이 불어가고 있었다. 길산이는 며칠 안으로
집을 나갈 작정을 하고서 그제사 문득 월정사의 주지 풍열스님의 생각이 났다.
길산은 남의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월정사 뒷길을 돌아 달마암으로 올라갔다. 계곡을 흘
러내려가는 시냇물 소리와 새 울음이 가득했고 달마암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동승은
툇마루 양지쪽에 쪼그리고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었다.
길산은 달마암을 지나 등성이를 타고 올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큰 암벽 아래 가사 장삼
의 풍열스님의 뒷등이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풍열이 내려다보는 곳은 절벽이 툭 터진 아래편 들판 쪽이었다. 길산은 풍열이 참선에 잠
겨 있는 줄 알고 조심조심 아래로 내려갔다. 풍열은 중얼거렸다.
"누구냐?"
길산은 풍열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탑고개의 길산입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길산이 풍열의 곁에 가도록 노승은 들판 저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서 길
산이 바라보니 들판 가운데 붉은 색의 깃대가 꽂혀 있었고, 승려들 서넛이 사람들 가운데
끼여 있는 게 보였다. 들판에서 밭고랑 사이로 뚫린 길의 끝에 고개가 보였는데 그 고갯마
루로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자세히 보니 모두들 어깨나 머리에 뭔가 운반하고 있
었다. 길산이 물었다.
"스님, 저 아래 웬 역사입니까?"
"춘궁의 보시를 하구 있다."
월정사에서는 이달부터 시작하여 보리가 팰 무렵까지 양곡과 피륙을 내어 인근 읍의 난민
들게 내어주고 있었는데, 가을에는 다시 사당패와 시주승을 동원하여 거둬들이는 것이었다.
관가의 환자처럼 이자를 붙이거나 못 쓸 것이 아니라서, 월정사의 춘궁기 보시는 구월산 사
방의 빈민들게 잘 알려져 있었다. 길산이 문득 생각나서,
"스님, 김선비가 상목과 돈을 보냈는데 거두셨습니까?"
"옥여와 감동이가 저 아래 함께 내려가 있다."
길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자꾸만 괴롭고 쓸쓸하여 하릴없이
산을 쏘다니며 사냥질에 허지한 자기가 부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풍열은 친근한 미소를 지
으며 길산의 옷자락을 당겨 앉도록 하였다.
"그래 장가를 든 재미가 어떻드냐?"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떠돌고, 한시도 집에 있지 못하겠습니다. 사나이가 가솔을 갖는
일이 어디 아내를 품에 안고 잠자리에 드는 일뿐이겠습니까. 저희 부부는 심지어 몸도 여태
섞지 못하였습니다."
풍열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허허, 그참 불쌍한 우바새로다. 정욕의 방향이 어긋난 것이 아니더냐? 중생으로 방향을
바로잡아야 천지에 가득 차는 사라을 가지게 되느니라."
길산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정한 때문에 집을 나가려는 것은 아니올시다. 우리네 같은 천한 백성들에게 좋은 짓을
할 사람이 되겠다고, 옥에 갇혀서도 참형을 당하는 일을 스스로 탄하였습니다."
"천한 백성? 네 중생이 무엇인지를 안느냐?"
길산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간신히 말하였다.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합니다. 그러나 저나, 제 아비나 제 어미 같은 모든 사람들 아닙
니까?"
"전에도 말했듯이 중생은 곧 불신이다. 네가 스스로 가장 아껴하듯 중생은 곧 네 자신이
니라. 정토가 어느 하늘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응로 온 세상이 밝아지는 때에 이르
러 마침내 현세는 극락이 되는 것이다."
"그때에 오는 부처가 미륵님입니까?"
"그렇다. 미륵은 제 혼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보살들의 실행과 더불어 오게 된다.
보살은 누구냐. 중생 중에서 그들에의 사랑을 깨달은 자들을 보살이라고 한다. 지장께서 성
불을 멈추시고 지옥문 앞에 가서 눈물을 흘리는 연유가 바로 그것이다. 중생들이 모두 지옥
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언제까지나 중생 그대로 있어,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아퍼하고, 굶주
리며, 헐벗은 채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보살도이니라. 지장보살뿐만 아니라 아난
존자께서도 만일 한 중새이라도 성불치 못하였으면 끝내 부처가 되지 않으리라하였다. 이러
한 여러 보살들의 원력이 쌓여서 중생들 스스로 깨달을 즈음에 미륵불이 찾아오시는 것이
다. 구세불은 저 혼자 오시는 게 아니라. 마치 가을바람에 익어 떨어지는 실과와 같다. 새
세상을 맞이하는 것은 보살들의 실행에 달렸다."
길산이 말했다.
"스님, 저는 승려가 아닌 고로 보살도를 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풍열은 눈을 감고 잔잔히 웃음을 머금었다.
"비승비속...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세가 되어 미륵이 나타나는 삼천 세가 지나면 절에
는 가승만이 남고, 진승은 시은하여 저자 사람들의 생활 속에 더불어 있다 하였다. 일찍이
비승비속으로 보살도를 행하였던 유마거사가 있었느니라. 유마힐은 어느날 병을 칭하고 누
워 있었는데, 문수보살께서 병을 묻자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일체 중생이 병이 들었으므로
나도 병이 들었나니, 만일 일체 중생의 병이 없어진다면 나의 병도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은 종생을 위하여 죽음을 함께 하는 것이요, 생사 때문에 병이 있는 것이니, 만일 중생
이 병을 벗어나면 보살도 병을 벗어날 것이다. 보살행이란 보살된 자가 언제라도 중생을위
하여 살고, 중생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을 이름이다. 중생이 병을 앓으면 보살도 함께 아프
고, 중생이 옥에 갇힐 땐 보살도 함께 옥에 있으며, 중생이 지옥의 고초를 겪으면 보살도 중
생과 더불어 지옥에 따라가 고초를 겪는 것이니라.
허허 내 일찍이 입만 살아서 헛된 육신이 이렇게 실행 없이 늙기에 이르렀다. 길산아, 너
는 유마거사와 같은 자가 되어라. 유마힐께서는 완전히 속인이었다. 장사도 하고, 술집에도
갔고, 도박도 하였으며, 세사의 모든 찌꺼기에 스스로 접촉하여 도를 구하고 행하였다. 부처
를 버리지 않고 범인의 성품을 지니기 어려웁고, 번뇌를 그대로 간직한 채로 열반에도 드는
것은 더욱 어려우나, 그것이 유마의 도행이었느니라. 가장 큰 것은 성불이 아니요, 중생과의
사랑이니... 그 사랑이 익으면 자연히 이루어지는 일이다.
요즈음 시속을 보아하니, 오히려 나는 보살도가 더욱 행해져서 불원간에 미륵이 나타나시
리라 믿는다. 전조 고려 적에는 부처님의 상을 들고서 탐욕스런 승려들이 왕족과 권문 세도
가의 발밑에 엎드려 아부 아첨하면서 기름지게 하였었다. 관등 때에도 돈닢이 없으면 촛불
한점 공양드릴 수가 없으며, 아프고 빈궁한 자에게도 목어 한번 때려주지 않고서 부처의 상
으로써 나라르 지킨다 하였으니, 그것은 부처가 아니라 환술사가 환을 친 꼭두각시이며, 재
물 도깨비이니라. 이제 아조는 불교를 천시하고 왕궁에서 몰아내었으며, 사도로서 멀리하는
바람에 겨우 중생들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니라. 천해진 부처, 권력자가 싫어하는 부처야말로
보살이 일어날 수 있는 중생의 불이 아니고 무엇이냐. 사랑의 실행이 없이 어찌 참선에만
잠겨 있어서 깨달음을 얻겠느냐. 계율만을 앞세우고, 사람들의 생활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면, 그 누가 따라오겠느냐. 깨달음이란 중생들과 사랑을 몸소 행하는 가운데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느니라. 농부가 피땀을 흘려서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다 보니 어느
결에 아, 이삭이 열렸구나라고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깨달음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는 중에 깃든 깨달음이다. 번뇌 없는 사랑을 행하며, 평등한 사랑을 행하며, 다
툼없는 사랑을 행하며, 차별없는 사랑을 행하며, 부서지지 않고 견고한 사랑을 행하며, 청정
하고 끝없는 사랑을 행하며, 스스로는 방편에 따라서 사랑을 행하고, 진실한 마음은 깨끗하
므로 감출 것 없이 사랑을 행하며, 조잡한 행위를 하지 않으므로 깊은 마음의 사랑을 행하
며, 거짓이 없으므로 진실한 사랑을 행하며, 부처 되는 자의 즐거움을 얻게 하므로 마음 편
안한 사랑을 행하느니라. 이 모든 것이 보살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분별로써 아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도중에 있는 모든 마음 전체이니라."
길산이 물었다.
"풍열스님, 중생에게 고통을 주고 괴롭게 하는 자에게도 자비심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
까?"
풍열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가 앞서서 달마암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면서 대답하였
다.
"네가 말하는 뜻을 나는 안다. 사랑을 행하는 방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부처님께서도
인연 없는 자의 구제는 버리라 하셨느니라. 가엾은 자들의 적은 바로 부처가 멸하고자 하는
것이요, 부처가 원하지 않는 세상은 보살해으로써 바꾸어야만 한다. 나는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뒤늦게야 보살의 이치를 깨달았다. 그러나 깨달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그 실행에 있
어 게을리하여 겨우 흉내만을 내고 있는 가승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 가르침을 주신 어른이 누굽니까?"
"금강산에 계시는 운부대사이시다. 네가 큰 뜻을 가지고 있다니... 그 어른을 찾아뵈어라."
그들은 달마암으로 돌아갔다. 동승은 풍열스님이 돌아오실 때를 가늠하여 차를 달이고 있
었다. 차를 마시면 풍열은 다시 운부스님의 얘기를 꺼냈다.
"운부께서는 속년이 내 연배이시나, 불가에는 나보다 십 년이 위이시다. 우리들 승려들 사
이에서는 그가 멸망한 명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송조의 명신 왕조의 후예라고도 하는 모
두 허랑한 소문이다. 고향은 전라남도 강진인데 어려서는 학문에 정진하였고, 일찍이 소백산
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나 이외에도 많은 젊은 승려들이 그이에게서 배웠으니, 곧 보살도이
니라. 너는 곧 운부대사를 찾아뵙도록 하여라. 내가 네게 우리의 스승을 닿도록 하는 것은
네 얼굴에 나타나 곧은 기상으로 짐작이 있어서이다. 금강산 장안사를 찾아가면 일여라는
젊은 승려가 있는데, 옥여와 동문이다. 일여를 만나면 운부스님의 행적을 가르쳐줄 것이다.
내 일봉 서찰을 써주겠다.
"스님 고맙습니다. 꼭 세상 공부를 하여 쓰임새가 훌륭한 거사가 되겠습니다."
지필묵을 갈아 정성껏 쓴 편지를 내밀면서 풍열이 말하였다.
"이 편지를 일여에게 보이면 잘 가르쳐줄 것이다."
길산은 그것을 소중히 품안에 간직하고 재배를 올렸다. 풍열은 눈을 감고 염주알만을 헤
아리고 있었다.
먼 곳에서부터 징고 장고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작은 무리가 제 집 문
전에 몰려 서 있는 게 보였다. 길산이 큰기침을 하며 들어서니 구경꾼들은 길을 비켜주었다.
굿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장고와 징을 치는 사람은 장충과 큰돌이였다. 판에서 홍철릭 자
락을 허공에 펄럭이며 잦은 가락의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애기무당을 면한 봉순이였다. 봉순
이는 주립을 썼는데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작은 입술은 숨이 거칠어져서 달싹이고
있었는데 눈빛은 이미 입신한 듯하였다. 봉순이가 겅정겅정 뛸 적마다 날개 같은 붉은 철릭
자락 아래로 작은 버선발이 핼끔핼끔 나오고 하는 것이었다. 길산의 어머니는 머리에 흰 띠
를 질끈 동이고 평상복 차림으로 앉아 북으로 가락을 이끌면서 좌무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업성주 복성주요 와가 성주 대가 성주, 낮 되면 햇내를 마다하시니 밤 되면 찬 이슬을
마다허시구 초부정에 내리시구 이부정에 내리셔서 대문밖에 나섰더니 오늘날 무슨 정성이
리, 성주 받어 구제허시구 지신 받어 아누허는 정성이랴."
봉순이가 사설 한 대목을 종알거리고는 다시 한삼을 휙휙 좌우로 뿌려대며 겅정겅정 뛰기
시작했다. 길산이 몸을 돌려 집 밖으로 나서려는데 모친이 언제 발견했는지 밖으로 쫓아나
와 소매를 잡는 것이었다.
"얘, 어디 가니?"
"이 북새통에 제가 어디 집에 있겠습니까? 갑송이헌테 마실이나 댕겨오겠습니다."
"얘야, 이게 누구를 위해서 하는 굿인 줄이나 아느냐. 네 마음이 자꾸 허랑부유하여 그 역
마살을 가라앉히려구 벌이는 노릇이다. 봉순이가 벌써 몸을 받았으니 대구하여 풀고 나가거
라."
"싫습니다."
청송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야속한 애야, 봉순이가 요새 날마다 눈물로 밤을 새운단다. 봉순이가 내 업을 받아 몸
주까지 이었는데, 네가 화랭이 노릇은 않을지언정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잔소리 말구 네가
이곳의 대주이니 어서 들어가자."
길산이는 할 수 없이 청송댁에 끌려서 마당의 판벌임 가운데로 들어섰다. 봉순이가 그를
보더니 춤을 추면서 주위를 맴돌았다. 봉순이는 양손에 고리 달린 언월도를 휘두르고 있었
다.
"어허, 네가 누구냐. 이 요사스런 년, 한 많구 원 많어 가던 영산이 어허, 청춘 영산에 소
년두 영산이요, 두령두 영산에 호구도 영산이라. 원주도 영산에 집두 영산이니 애문 사람 씌
워 살 놓지 말고서 아무쪼록에 뒷전 고픈 배나 불려 가거라. 에헤! 이래 탈이 없구 저렇게
탈이 없어. 문전에서 달래구 보채는 수전 없이 꿈자리 몽사에 비끼는 수전 없이 받들어서
도와주리다. 집안은 진중에 참방에 범허구 내 방에 범허구 마당은 지신 네 귀에 범했던 상
문, 오늘 여상문에 남상문에 동자상문에 도령상문, 문전에 숨어 보구 엿보던 상문이면은 몸
수에두 꺼린 상문, 재수에두 꺼린 상문."
다시 봉순이의 춤이 계속되었다가 그녀는 제 서방의 몸을 이리저리 쓰다듬으며 푸념을 계
속하고 있었다.
"동에 동창 뜨는 달은 서에 서창 감동하고 어제 오신 군자님은 자는 것이 잠이로다. 내
옥에는 날티 들고 순령에도 불티 들어, 초가에도 양반 살고 와가에도 상놈 살고, 비단에도
얼이 있고 대단에도 얼이 있어, 물명주 한삼 소매 반만 들고 내다보니 님이 따로 있으랴 떠
오르는 반달이라. 닭아 닭아 우지 마라 날아 날아 새지 마라. 주야로 시름겨워 월명동창 홀
로 앉아 삼사경 깊은 밤을 허도히 보내면서 잠 못 들어 한하는데 그린 사람 있건마는, 북풍
한설 몰아칠 제 안아주던 우리 님아. 산은 높고 골 깊은데 슬피 우는 저 두견은 남을 보면
시침 떼고 날만 보면 슬피 우니, 우리 님의 마음인가. 원수 같은 이내 시샘 칼로 써억 베이
려 하오나 정한에 병이 들어 떨어지지 않는고나. 달 가는 데 구름 가고, 비 가는 데 바람 가
니, 님이 가시면 나도 가오."
길산이 봉순이의 사설을 듣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코허리가 시큰하여졌다. 비록 몸주를
받은 귀신의 사설이라 하나, 그 가락은 바로 봉순이 자신의 가락이엇고 마음을 주지 않는
서방에 대한 애소였던 것이다. 길산은 멍석 위에 앉았다. 봉순이가 다시 춤을 추고 나와 예
전 화랭이 하던 버릇대로 한 자락을 풀어댔다.
"미륵님의 수화 근본을 알았으니, 인간 근본 말아여보자. 옛날 옛 시절에 미륵님이 한쪽
손에 은쟁반을 들고 또 한쪽 손에 금쟁반을 들고 하늘에 축사하니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금
쟁반에도 다섯이요 은쟁반에도 다섯이라, 그 별이 자라나서 금별은 사내 되고, 은별은 계집
으로 마련하고, 은별 금별이 자라나서 부부로 마련하여 세상 사란이 나왔어라. 미륵님의 세
월에는 섬들이 말들이 잡수시고 인간 세월이 태평하고 그리했으되 석가님이 내려와서 이세
월을 앗아 뺏자고 마련하와, 미륵님의 말씀이 아직은 내 세월이 분명하다. 미륵님이 말하기
를 네 내 세월 알겠거든 내기를 시행하라. 더럽고도 까다로운 석가야, 그러거든 동해 중에
금병에 금줄 달고 석가는 은병에 은줄을 달아라. 미륵님 말씀이 내 병의 줄이 끊어지면 네
세월이 되어지고 너의 병의 줄이 끊어지면 네 세월이 아직 아니노라. 동해 중에 석가님 줄
이 끊어져서 석가 내밀기를 내기 시행 한번 더 하자. 압록강 두만강에 강을 붙이겠느냐, 미
륵은 동지 채를 놀리고 석가는 입춘 채로 놀리니라. 미륵님 채질에 강이 맞붙어 석가님이
졌구나. 석가님이 내기 시행을 청하되, 나와 네가 한방에 누워 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 내
무릎에 올라오면 내 세월이요, 네 무릎에 오라가면 네 세월이다. 석가는 도적심사를 먹고 나
서 반 잠을 자고 미륵님은 찬 잠을 자벼렸구나. 미륵님 무릎위에 피어오른 모란을 석가님이
가져다가 제 무릎에 꽂았더니 더럽고 까다로운 세상이 되었구나. 내 무릎에 꽃이 피엇으나
네가 가져갔으니 꽃이 시들어 열흘이 못 가고 십 년을 못 가리라. 미륵님이 석가의 성화에
못 이기어 세상을 넘겨주고 떠나실 제, 네 세상이 다해지면 나는 다시 찾아오마 하시니 미
륵님 길 떠날실 제 잡지 못함이 한이로다."
장충이 다시 거리굿 사설을 늘어놓으면서 굿마당이 대개 파했을 즈음에는 저녁 무렵이었
다. 길산은 명이 아침에 집을 나가기로 작정하여 장충에게 그 뜻을 밝혔던 것이었다.
장충은 건넌방에서 곰방대를 물고 앉았고, 청송댁은 그 옆에 두통이 나서 목침을 베고 무
웠다. 봉순이 탈진하여 안방에 드러누워서 않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길산은 홀로 마루에 앉
아서 사방이 차츰차츰 어두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수양산 망해사를 둘러볼 작정이었다. 그의 친부 보에 대한 수소문을 해보기 위해서였다. 그
리고 묘옥이도 찾아보고 싶었으나 이 너른 천지에 그 여자가 어느 향시 어느 주막에 얹혀
있는지 감감하고 막연한 노릇이었다. 묘옥은 자기가 해주 주내방 저자에서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잇을 것이었고, 이미 작심을 달리하여 다른 사내를 만났든가 아니면 창기로 되
돌아가 웃음을 팔고 있을지도 몰랐다. 길산은 캄캄하게 불 꺼진 집안에서 청송댁과 봉순이
의 앓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 삽짝 밖으로 나왔다.
갑송이네 집으로 가는 도중에 김기의 집이 있었으므로, 거기 들러서 셋이 앉아 술잔이라도
들며 울적한 심사도 달래고 마지막 회포도 풀리라 마음을 먹었다.
먼저 김기네 세 칸짜리 초가집에 이르니 삽짝 안에서 개가 짖었고 방문이 열리면서 김기
의 아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성님 계십니까?"
"예, 된목이골 올라가신다구 아침에 나가셨어요."
"혼자 가십디까?"
"아니오. 아침에 누구 소두령을 보냈습디다."
길산은 산채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가 여겼다. 아마 봉산 들이칠 것을 진행하는 모양인데,
일부러 길산에게는 알리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며칠 새로 길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였다. 그는 다시 돌아서서 갑송이네로 향하였다. 그가 마당 안으로 들어
서는데 집안은 불이 꺼져서 캄캄했다. 집을 비웠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일찍들 잠이 들어버
렸는가 하여 길산이 잠시 망설이고 섰는 중이었다. 방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
었다. 거친 숨소리와 고양이 울음 같을 소리였다. 길산은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를 깨닫고 자
기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멋쩍었는지라 얼결에 헛기침을 내뿜으며 돌아섰다. 안에서
소리들이 딱 멈추는 것이었다. 그는 마당을 나가려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방안에 갑송이가 있다면 당연히 주인 된 자로서 누구냐고 물었을 법하련만 갑자기 소리가
그치는 것은 묘한 일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헛기침을 내어보았다. 역시 도화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거 누구세요?"
"예, 나 장서방이우. 갑송이 있습니까?"
문은 닫혀진 채로 우물쭈물하는 도화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아침에 김선비님이랑 같이 된목이골 올라가셨어요. 아이, 저 혼자만 있어서 들어오시라구
할 수도 없구..."
"알았소이다."
길산은 짐짓 나오는 발소리를 크게 내면서 마당을 나섰다가, 다시 살그머니 마당 안으로
들어서서 귀를 기울였다.
뭔가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사내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웃음소리도
났다. 길산은 분노로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짓도 할 수가 없었다.
"갑송이놈... 팔자가 드세기두 하다!"
길산이는 답답한 가슴을 안고 그대로 돌아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길산은 다시 마을의 골목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건넌방은 불이 꺼져 있
었고 안방문은 심지가 낮춰진 등잔의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길산이 방으로 들어
서니 봉순이는 새옷을 갈아입고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윗목에는 술 한 병과 나물이며
전을 몇점 올려놓은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고 봉순이는 새로 밤단장을 한 것 같았다. 길산이
선 채로 멀뚱히 내려다 보다가,
"아프다더니... 왜 그러구 앉았어?"
하며 무뚝뚝하게 내뱉고는 손수 개켜진 이불을 내려놨다. 그는 이불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불 끄구 자세..."
봉순이가 고개를 들더니 눈에 원망이 가득 어린 시선으로 길산을 바라보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내일 떠나신다죠?"
길산은 대꾸 않고 드러누워 봉순이를 등지며 돌아누웠다.
"아무리 제가 싫다더라도 너무하셔요. 이러실 것을 어째서 혼인하셨나요. 아버님 어머님이
얼마나 걱정을 하시게요. 꼭 중한 죄를 지은 것만 같아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저는 몇번
이나 혼자 나가버리려구 했어요. 그렇지만, 올 데 갈 데 없는 저를 이렇게 키워주신 부모님
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죠. 지금이라두 제가 싫어서 집을 나가신다면 이 몸이 오늘밤으루
대신 나가겠어요."
"자네는 내 아낙일세. 내가 나가는 것은 대장부의 뜻을 세워보겠다는 것인데, 어는 못난
놈이 제 아내가 싫어 집을 나가겠는가."
길산은 스스로 긴 한숨을 토해내며 일어나 앉았다. 그는 윗목에 차려진 술상을 끌어당겼
다. 봉순이는 눈에 물기가 가득한 채 입술을 꼭 다물어서 흐느낌을 삼켰다.
"어려서부터 이 댁의 신딸로 점지받아, 저를 낳아주신 부모의 얼굴도 모릅니다. 제가 듣기
에 서방님께서도 저와 같은 신세라는 것을 까막내 성님에게서 들었지요. 저는 서방님을 친
오빠보다도 더욱 가깝게 생각하며 자라났어요. 공연히 이렇게 눈물이 나네요. 서방님과 제가
부부가 된 것이 이렇듯 서러운 일인 줄은 저두 몰랐습니다."
길산이도 술을 넘기는데 명치끝이 타는 듯하였다. 대저 부부의 인연이란 하늘의 월하노인
이 적승을 맺어서 이루어진다지만, 광대인 자신과 무당인 봉순이의 두 사람이 세상에서 버
려진 살덩이로 자라나, 똑같은 운명을 겪으면서 이제는 봉순이를 가엾은 누이동생으로 여길
밖에 없었고, 그것은 사랑하는 정과는 또다른 정이었다. 길산이 덤덤하게 말아였다.
"내가 나가서 아주 안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 번씩은 들를 터이고, 길어야 오
년, 짧으면 석삼 년일세. 그때까지 부모님 모시구 잘 있으면 되는 게야."
"한가지 여쭤볼 게 있어요."
길산은 말없이 아내의 물음을 기다렸다. 봉순이가 시선을 내리깔면서 말하였다.
"묘옥이라는 여자... 생각하시지요?"
"묘옥이...?"
그 이름을 듣는 순간에, 길산은 갑자기 등에서 목덜미까지 소름이 쭉 끼치며 지나갔다. 남
의 음성으로 듣는 묘옥의 이름은 그의 뇌리에 박혀 있던 그림자가 아니라 바로 곁에 다가온
음성으로써 생생해진 것이다.
"저는 재인말 살 적부터 동네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문을 들어 알았어요. 또한 그 여자가
부모님들이 문화 옥에 갇히셨을 제 옥바라지를 할 돈냥을 보태주기두 했구요. 서방님께서
참형을 당하셨단 소문이 돌자마자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손돌 어른은 집에 불을 질러 자
진하셨지요. 저는 그 여자를 원망하구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서방님께서 늘 먼산만 바라
보시구 저를 가까이하지 않으시니 제가 곁에 있는 것이 불편하여 집을 떠나시는 것만 같아
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네요. 저야 무당으루 어딘들 못 가겠어요. 이 길루 떠나서 덕물산
최영 장군 사당직으루 가면 혼자서 살아갈 수가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자네와 나는 어쨌거나 부부일세. 부모님들 모시구 기다리면 되는 게
야."
"몰라요..."
길산은 술병을 비우고 나서 제 손가락으루 불을 탁 집어 껐다.
"잡시다. 나 내일 식전에 나갈 테니까, 길 채비나 해주어."
"다 해놨어요. 마두령이 노자 보태라구 상목 댓 필과 돈 삼십 냥 보내왔어요."
봉순이는 어둠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곧장 코를 골아버리는 길산을 봉순이는 원망스
럽게 매만져보다가 옷을 벗고 곁에 드러누웠다. 봉순이는 돌아누운 길산의 어깨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때였다. 길산은 끙하며 돌아눕더니 봉순이를 거칠게 끌어안는 것이었다.
6
닭 울 녁이 되어 길산은 눈을 떴다. 곁을 보니 어느결에 제 팔에는 아내가 편안하게 잠들
어 있었다. 길산은 살그머니 머리를 들어 팔을 빼내고 베게를 받쳐주었다. 그는 윗목에 꾸려
진 커다란 보퉁이 속을 매만져보고 나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아직 날은 새지 않았
다. 그는 헛간으로 들어가서, 지난 겨울에 혼자서 구월산을 헤매며 사냥질을 다닐 때 쓰던
병장기 중에서 두 뼘짜리 단검을 골라내어 허리춤에 찔렀다. 초립 쓰고 도포 입고 보따리를
메고서 그는 쥐죽은 듯한 집을 빠져나왔다.
그는 탑고개를 넘어 송화로 해서 곧장 해주로 향할 작정이었다. 나한암 뒤로 돌아가는 비
탈에 이르러 잠깐 동안 마을을 내려다보는 중인데, 누군가가 동네 어귀를 나와 걸어 올라오
는 중이었다. 맨저고리 바람에 상투잡이 차림이었다. 길산은 아무 생각 없이 돌아서려다가
문득, 어젯밤 갑송이네 집에 들렀을 때의 수상스런 인기척에 생각이 미쳤다. 마을 사람이면
이런 새벽에 산길로 오를 리가 없었다. 더구나 차림새가 뒷간에 나가는 듯한 꼴이었는데 산
으로 들어오다니. 길산은 길에서 비켜나 짙은 나무 그늘에 몸을 감추고 서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들릴 즈음에 길산이 짐짓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
다.
"이놈, 게 섰거라!"
"에...?"
사내는 그 자리에 주춤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놈, 네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구 나오는지 내 다 안다."
길산은 나무 그늘 속에서 슬쩍 빠져나와 앞에 버티고 섰다. 갑자기 사내가 뒷걸음질을 치
더니 되돌아 아래편으로 뛰어내려가는 것이었다. 길산은 비탈 위에서 길로 나는 듯이 내려
뛰며 사내의 등판을 발끝으로 내리찍었다. 사내가 헉하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사내는 한참 동안이나 숨이 통하지 않는 듯 입을 벌리고 버둥거렸다. 길산은 그자의 뒷덜
미를 잡아 끌어올렸다. 사내가 겨우 턱에 걸린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살려주시오!"
길산은 그의 멱살을 잡아 나무 밑에 콱 꼬라박아놓고서 물었다.
"이놈 바른 대루 말하여라. 유부녀와 통정한 자는 즉시 박살을 하여도 무방하다는 것을
잘 알겠지.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사내는 고개를 쳐들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예... 도화의 주인 되시는 구월산 이장사님이십니까?"
"이놈 이제 보니... 유부녀인 줄 알고도, 더군다나 그 서방 되는 이가 누구인 줄 알면서도
이런 짓을 저지르러 밤이슬을 맞구 다니는구나. 내 너 같은 놈은 당장에 불알을 발라버려서
함부로 통정하지 못하도록 해줄 테다."
길산이 단검을 주욱 빼들어 사내의 바지를 훑어 잡았다. 사내는 죽는소리로 비명을 내지
르며 길산의 두 다리께를 부여안고 사정을 하였다.
"누구신지 모르오나 제 말도 좀 들어보신 연후에 죽인다 하셔도 억울하지는 않으리다."
"그래... 이실직고해보아라."
"저는 은율 읍내에 사는 배서방이라구 합니다. 일찍이 가산이 수백석지기는 되므로 읍내
에 밥술깨나 먹는 자들이 자주 모이게 되어 답청도 다니고 꽃놀이며 사냥질도 몰려다녔습니
다. 얼마 전에 저희 한량패들은 시냇물이 녹고 날씨도 쾌청하여 탑고개 쪽으로 사냥을 나왔
었습니다. 지금 생각하기에는 요 너머 골짜기였던 것 같은데, 거기서 그여자가 혼자 빨래를
하구 있습디다. 취한 김에 호젓한 산속에서 여인을 만나고 보니 은근히 음심이 동하여 수작
을 건넸지요. 아... 그런데 이 여자가 오히려 추파를 던지면서 인적이 없는 숲으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정을 통하고는 가끔 아이를 보내어 날짜를 알려옵니다. 어제두 남편이
출타하여 밤새 집을 비운다는 기별이 왔길래 제가 달려왔던 것입니다. 내 본시 음란하 짓을
몹시 탐하는 자는 아니오나, 한번 저지르고 나서는 도무지 그 생각에 잡혀 빠져나올 수가
없고 조마조마한 마음이 오히려 음심을 날로 일으킵니다. 만약 장사께서 저를 용서해주신다
면 내 다시는 탑고개로 나오지 않으리다."
길산이 듣고 보니 배서방이란 자보다는 갑송이의 계집이 더욱 음란하고 죄가 많다는 생각
이 들었다. 당장 뛰쳐내려가서 갑송이 대신 도화하는 년을 쳐죽이고 싶었으나, 길산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갑송이가 제 계집을 얼마나 어여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길산이었다.
"내 누군 줄 아느냐. 나는 문화에 사는 장길산이란 사람이다."
은율의 한량패인 배가는 그의 이름을 듣고 또 한번 놀랐다. 길산은 장터의 소악 무뢰배들
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의 최근의 행적은 한 이야깃거리였기 때문이었다. 배서방은 머
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있었다.
"다시는 얼씬거리지 않도록 하여라. 만약에 내 눈에 다시 뜨이면 불알을 바르긴커녕 아예
통째로 뽑아 내팽개칠 것이다. 이갑송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은율 너희 집에 짓쳐들어가
불을 싸지르고 온 가족을 몰살시켜버릴 테니 알아서 근신해라."
"예, 목숨만 살려줍시오."
길산은 엎드려 빌고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고 섰자니 어쩐지 마음이 한없이 공허해지는 것
이었다. 갑송이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고, 그와 함께 한스런 세상을 탄하며 밤새껏 술이라도
퍼마시고픈 심정이었다. 길산은 중얼거렸다.
"얼른 없어져라!"
사내가 일어나 길산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절뚝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갑송이도 나처럼 지붕 없는 자가 되겠구나."
길산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한참이나 탑고개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마음은 길 떠나
는 자의 새로운 각오와 결의로써 굳은 심지가 싹트는 중이었고, 한편 돌아보면 이제까지 묵
어왔던 지난 생활의 찌끼로 해서 착잡해지는 것이었다. 어느 누가 초가삼간과 처자식 거느
리는 재미와 이웃 사귀는 맛을 마다할 리가 있으랴마는, 길산의 가슴속에는 체념하고 한으
로 세월을 삭이며 장충처럼 늙을 수만은 없는 어떤 뜻이 불처럼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
한 뜻을 어찌할 것인가는 길산이 자신도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뜻은 강한 반면에 펴
나갈 길은 애매하니, 자연히 세상에 흔천으로 깔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은 바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서고 있었다. 그에게는 묘옥이가 살 속으로 박힌 멍 같은 회한인 것과 마
찬가지로, 아내인 봉순이마저 혼인하던 그날 밤부터 하나의 회한에 지나지 않았다. 아뿔싸,
짐만 더욱 무거워 가는고나... 하는 느낌이었다. 이제 갑송이의 처 도화의 간통을 목격하자
그에게는 마을이, 사람의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날이 새면 깨어나 흩어질 새벽 꿈과 같이
더없게 느껴졌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의 덧없음과, 먼저 죽고 나중 남는 정 가진 사람들의
헛된 슬픔들이 떠올랐다. 묘옥의 연비를 새겨넣은 젖가슴과 따뜻한 살의 감촉과 숨결은 지
금 어느 곳에서 숨쉬고 울고 웃으며 떠돌고 있는가. 아득하게 멀고 또한 문득 가까운 사람
의 인연이여. 세상의 사랑하는 계집과 사내가, 다정한 부부가, 화목한 가족이, 친한 벗들이
얼마나 장구한 세월을 함께보낼 수가 있을까. 취산의 인과가 바람에 불려 날아가는 콩깍지
처럼 스스로의 뜻이 아니다. 슬픔과 아픔은 잠깐이며 산 자는 밥 먹고 코골며 죽은 자는 풀
아래 썩는다.
이제 흩어진 사랑는 계집과 사내는 제마다 다른 지붕, 다른 이부자리에서, 또는 먼 저자에
서 각각 자기 석 자 남짓의 육신이 겪은 언저리의 생활에 관한 꿈을 꾸며 잠들어 있다. 간
혹 상대를 그려보아도 확실하게 떠오르지 않고 만지려도 닿질 않아서, 이제는 잘라져 없어
진 제 손톱 같은 잃어버린 망상의 끄트머리일 뿐이었다.
하면서도... 그럴수록 더욱 묘옥이 곁에 있었으면 하는 원망은 떨쳐지지 않았다. 길산은 고
치를 찢고 우화하는 나비처럼 자기에게서도 떠나버리고 싶었다.
그는 탑고개 위에 올라서서 은율 쪽의 깊은 골짜기와 안악으로 치달려 솟은 구월산이 컴
컴한 하늘 속에 훤하게 떠 있었다. 길산은 주춤거리며 모을산 굽이로 돌아 내려갔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택한 길은 은율로 해서 수렛고개를 넘어 해주로 곧장 가는 길이었다. 해주에
서는 수양산 망해사에 들러 친부 보의 수소문을 해보는 일이 있을 뿐이었다.
"발걸음도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가..."
길산은 걸으면서 원정요 한 가락을 느리게 뽑아냈다. 그는 수렛고개를 넘어 해주길로 곧
장 걸어서 문산의 서원마을에서 과객질로 그날 밤을 묵었다.
아침 일찍 수양산에 올라 망해사를 찾으니 봄볕이 못 위에 가득히 내려 있고, 돌다리에
이끼가 싱싱하였다. 길산이 사람의 기척을 찾아 이리저리 거니는데 젊은 중이 나타나 물었
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승을 찾습니다."
"주지스님께서는 지금 출타하시고 안 계십니다."
"그 스님의 법명이 보경이십니까?"
젊은 중은 머리를 저었다.
"보경대사를 찾으신다면 그이는 이미 안 계십니다. 재작년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길산은 갑자기 막막해지는 느낌이었다.
"돌아가셨다구요?"
"지금 계시는 주지스님은 신광사 계시던 노 스님이십니다. 무엇 때문에 오셨는지는 모르
오나, 제가 보경스님의 상좌로 어릴 적부터 곁에 뫼시며 자라난 사람입니다. 잠깐 누추하지
만 제 공부방으로 들어가시지요."
"예, 고맙소이다."
길산은 젊은 중이 안내하는 대로 뒤를 따라 들어갔다. 길산은 간략하게 자기 내력을 이야
기하고 그의 친부인 보가 보경선사와 내왕이 있었고, 추노를 피하여 불가에 들어 지금 승려
가 되었을 테니 혹시 보경 선사에게서 들은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젊은 중은 한참이나 묵
묵히 길산의 얘기를 듣고 나서는,
"글쎄요, 잘은 알 수 없습니다만, 관서의 묘향산에서 두 분 스님들이 자주 왕래하시군 했
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 중에 손님의 친부라는 분이 있었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고 나서 그는 말하였다.
"소승은 묘정이라 합니다. 저두 일찍이 양주 사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세상에는 감히 나가
지 못하고 산문에 눌러앉아 보경스님의 가르침을 받았지요. 보경스님께서는 당신도 비명 횡
사한 노비의 자식이어서 도망한 남의 종들을 곧잘 숨겨주시곤 하셨지요. 대개는 삭발하고
입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손님의 부친이라는 분이 입산하셨다면 틀림없이 내왕이 있
으셨을 것입니다."
"관서 묘향산의 어느 절에 그 두 분이 계시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도안스님이라는 것은 기억이 납니다."
"막연하군요."
"손님, 그분은 이미 불가에 들어 속연을 끊은 사람이온데 찾아 무얼 하시렵니까. 잊으시지
요."
길산은 잠자코 앉았는데 묘정스님이 나가더니 나물죽 한 그릇을 소반에 받쳐들고 들어왔
다. 길산은 못내 사양하다가 점심 요기로 먹으면서 문득 사자암의 중 여환이 생각나서 그에
게 물었다.
"혹시 여환이라는 승려를 아십니까?"
묘정은 잠시 말을 않고 있다가 안다 모른다는 확실한 대답 없이 중얼거렸다.
"불법을 펴는 데는 방편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 방편을 너무 과도히 내세우면 법이 죽지
요. 무엇에나 지나친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길산은 무슨 말인지 잘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묘정은 다시 말하였다.
"여환과 저는 어릴 적에 경전 공부를 함께 배웠던 적이 있습니다. 보경스님께서는 여환을
평하여 바위산과 같은 기세가 있으나 너무 경사가 급한 것이 흠이라 하였소이다. 지금 그는
해주에서는 외롭게도 사도로서 정해져 있습니다.
"사도라니요?"
"예, 그는 부처님을 뫼시는 승려가 아니올시다. 혹시... 요즈음 송도를 비롯하여 향시마다
떠도는 정진인 얘기를 모르십니까? 마찬가지로 불자들 중에도 오래 전부처 진인을 뫼시거나
스스로 진인을 칭하는 자들이 많지요."
길산은 풍열의 말이 떠올랐고, 스스로도 깊이 느낀 바가 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길산은 말을 돌려서 묘정이란 젊은 중에게 물었다.
"스님은 혹시 금강산에 계신 운부대사의 얘기를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글쎄요..."
"보경선사께서는 생전에 그분 말씀을 안하시던가요?"
"우리 큰스님은 노비 출신의 제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악에 빠져서 도적의 괴수
노릇을 하구 있는 장연 불타산의 심백이란 자도 보경스님의 제자이십니다."
"스님은 줄곧 이 망해사에만 계시지 말고 탁발 챙겨들고 방랑해보시지요. 중생을 널리 아
는 것두 수행일 테니까요. 저는 지금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왜... 출가하는 길입니까?"
"아닙니다. 속인 그대루 보살도나 배울까 합니다. 육신은 노비의 몸에서 나와 신분은 천출
광대이니, 이대로가 좋습니다. 묘정스님께서도 여환 같은 동문 승려를 너무 탓하지만 마시고
좀 만나시도록 하시오."
"아... 여환이 암자르 폐하고 떠난 것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는 얼마 전에 암자를 그대
루 버린 채 맨몸으로 어디론가 떠나버렸습니다. 소문에는 그를 따르는 여자가 있었다고도
합디다."
"음, 곧 해주를 떠나겠다더니... 벌써 가버렸군. 한번 마나볼 작정이었는데 그냥 떠나야겠
군요. 묘향산의 도안스님이 제 생부 보라는 분의 행적을 알 거라구 하셨던가요?"
"예, 그럴 겁니다. 향산 도안선사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찾아뵙게 될 것입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혹시 내달쯤에 도안선사께서 들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여쭈어볼까요?"
"저는 금강산 장안사의 일여라는 승려를 통하면 연락이 될 듯합니다. 혹시 소식이 닿으면
말이나 전해줍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길산은 망해사를 내려왔다. 해주 저자에서 혹시 신복동이의 패거리들을 만날까 햐여 고개
를 숙이고 지나갔다. 주내방을 지나면서는 당장 신가네로 짓쳐들어가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
으나, 한편으로는 그가 수많은 더러운 관리나 탐학한 부자들 중의 미미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 너무 생각이 작다고 눌러버렸다. 길산은 해주서 신평 사거리와 까치내를 건너 공수
원에 닿는 길을 택하기로 하고, 금천, 토산, 안협을 거쳐서 평강을 지나 단발령을 넘는 길을
생가했다. 그리 서두를 일도 없건마는 한시라도 빨리 해주 지경을 벗어나고 싶어서 길산은
한달음에 공수원을 지나고 금천으로 향하였다. 금천서 하룻밤 묵을 작정이었다. 그가 온정
다섯거리를 지나는데 웬 처자가 큰 소리로 그를 불러 외치면서 쫓아왔다. 자세히 보니 장옷
도 쓰지 않은 몽당치마의 차림새가 어느 시골 부잣집의 하녀인 모양이었다. 남녀가 유별하
다 하나, 그를 다급하게 부르니 일이 몹시 급하기는 급한 모양이었다.
"날 불렀수?"
길산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며 묻자, 그 여자는 허리를 굽히면서 말하였다.
"누구신지 모르오나 곤경을 당했으니 제발 좀 도와주셔요."
"저는 적암골 구봉산 아랫녘에 사는 초시 댁 교전비입니다. 방금 장정들이 달려와서 저희
댁 서방님을 잡아갔습다."
"어느 쪽으로 갔나?"
"저어쪽, 배천으루 갔을 거예요. 향관 다니던 별감네 하인들이니까요."
"뭣 때문에 그 사람들이 주인을 끌어갔는가?"
"혼사 때문에 그러지요. 저희 댁은 일찍이 선대에 몰락하여 서방님과 아씨마님과 제가 근
근히 살아가구 있습지요. 근래에 중매가 들어와 우리 서방님과 배천의 낭자가 인연을 맺게
됨에 그 아씨를 탐하던 별감네 아들이 협박을 하다 못하여 서방님을 끌어가는 것이올시다."
재빨리 얘기하면서도 하녀는 연신 황의산 쪽을 손짓해 보이면서 애를 태웠다. 길산이 짐
을 벗어서 길 위에 내려놓고,
"내 당장 쫓아가서 그놈들을 떼치고 너희 주인을 구해오겠다."
하면서 배천으로 향한 황의산 구릉을 향하여 뛰었다. 여자가 뒤에서 외쳤다.
"황의산 언덕을 막 넘었을 겁니다. 꼭 구해주셔요."
길산은 무음천 내를 건너서 잔솔밭길을 한참이나 뛰었다. 둔덕을 오르니 그러잖아도 따사
한 봄날씨에 온몸이 땀에 젖었다. 황의산 줄기의 낮은 언덕에 오르니 앞으로는 산등성이가
멀리 가로막혔고 들판이 펼쳐졌다. 언덕 너머에 뭔가 떠메고 가는 사람들의 무리가 있을 법
도 하건만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이상한데...?"
길산은 그제서야 길바닥에 풀어놓고 온 제 보따리가 생각났다. 다시 돌아서서 내를 건너
온정 다섯거리를 바라고 뛰는데 이미 길 위에는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길산은 어이없이 픽
웃으면서 걸음을 천천히 바꾸었다.
"속았구나!"
주위에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돈과 피륙이 제법 들어 있었으니, 계집은 단단히 횡재를 한
셈이었다. 길산은 은근히 부아가 어디 가서 말을 붙여볼 데도 없었다. 하릴없이 두리번거리
다가 금천쪽으로 나가는 길가에 초가집 몇채와 창고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거기 가면 수
세를 맡은 둔별장이나 관원이 있을 것이지만 길산이 그들에게 수작하기도 우스운 노릇이었
다. 그가 내친걸음이라 금천 쪽으로 어리벙벙하 채로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농군 두엇이
호미를 메고 걸어오고 있었다. 길산은 그들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혹시 이 근처에서 나이는 열대여섯 되고 얼굴이 총명하게 생긴 처자를 못 보
았소?"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뭔가 알겠다는 듯이 히죽히죽 웃었다.
"허허, 뭐 잃어버리셨소?"
"내 보따리를..."
둘은 소리르 높여 껄걸 웃었다.
"댁뿐이 아니외다.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그게 무슨 얘기요?"
"서녀라면, 평산 군내에선 멸악산 화적들보다 더욱 유명짜합지요."
다른 농부가 말했다.
"서녀는 그 오라비와 같이 산다는데, 별호가 오공랑입지요."
길산이 은근히 기이하고 재미가 있어 보따리 잃은 생가보다는 한번 만나고 싶어졌다."
"음, 오누이 도적이로군, 그들이 어디 사는지를 아오?"
"어디 사는지 알면 평산 관가에 가서 고해바치구 상금이라두 타먹게요? 한번은 금천 장날
에 두 오누이가 떴다는 말을 듣구, 포도 군사들이 에워쌌다가 오공랑에게 혼찌검을 당하구,
둘이는 달아나버렸지요."
그들의 얘기에 의하면, 그들은 연안, 배천, 금천, 평산 등지로 출몰하면서 행인의 봇짐을
상대에 맞는 교묘한 수단으로 탈취하거나, 밤에 부잣집의 담장을 넘는데 오누이가 함께 할
때도 있고, 따로 일할때도 있다는 것이다.
누이는 영리하여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는 일이 능수이며, 오빠는 몸이 나쌔어 높은 데 오
르내리기, 뛰어넘기는 물론이요, 걸음이 비호 같다는 것이었다. 또한 자고라는 무기를 잘 써
서 지네와 같다는 뜻으로 오공랑이라는 별호가 붙었다는 것이었다. 자고라는 무기는 대마무
끝에 철침을 꽂은 작은 표창인데, 옛적 전국시대의 세객 소진에게서 유래된 것이었다.
소진이 일찍이 공부를 할 때에 졸음을 참느라고 재 다리와 무릅을 바늘로 찔렀다는 데에
서 무기의 이름을 자고라고 붙이게 된 것이다. 대개는 마상에서 대련중 습격할 때나, 자신이
부상당하여 몰렸을 때, 중과부적일 경우, 아니면 아녀자나 아이들의 취할 것이라 하여 정당
하게 취급되지 않는 무기였다. 그런데 오공랑이 신통한 것은 꼭 사람의 하반신에 자고를 던
질 뿐 절대로 목숨을 해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 가난한 백성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두
사람을 잡으려는 관가의 기찰이 심하여 한적한 길가에 나타나 원행하는 장사치들을 노린다
고 했다. 길산은 들을수록 오공랑이란 총각과 처녀를 만나고 싶었다. 멸약산 화적패에도 가
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면 꽤나 재주에 자신이 있는 듯싶었다.
"혹시 무슨 소문이라두 들은 게 없소?"
"글쎄요... 멸악산 줄기인 모란산에 산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지만, 누가 아나요? 바루 저기
요. 한 시오리 길 됩니다."
"모란산 근처에 마을이 있습니까?"
"예, 월봉골과 방골이 있는데, 월봉골에는 괴이쩍은 자들이 많이 산다 하고 방골에는 뱃놈
들이 많이 살지요."
"괴이쩍은 자라니...?"
"뭐, 유민 나부랭이들입니다. 남의 초상에 가서 곡을 해주는 곡재인이며, 매잡이, 염간들
따위지요."
길산은 빙긋 웃으면서 혼자 작정을 하였다. 도이 도적의 심사를 모르랴. 오공랑과 서녀가
은신하기 쉬운 곳은 월봉골일시 틀림없었다.
"여러가지루 고맙수. 내 가진 게 없어 탁주값두 못 드리구 그냥 가오."
"어딜 가시게?"
"모란산 기슭을 찾아보려오."
"에그... 혼잣몸으로 갔다가 괜시리 자고에 맞아 상허지 말고 그냥 길이나 가우."
길산은 대답 없이 돌아섰다. 그의 짐작으로는 아마도 월봉골은 이리저리 몰린 천민이 갈
데 없이 모인 탑고개마을과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월봉골은 모란산과 자모산, 월봉산의 사이에 움푹 틀어박힌 첩첩산골이었다. 서녀는 보따
리를 메고 제법 큼직한 초가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안방에서 목소리만이,
"누구요?"
했고, 서녀는 보따리를 마루에 올려놓고 안방 문을 열었다. 부인네가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동이고서 이부자리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오라버니 아직 안 왔어요?"
"운봉산 새읍에 간다구 나갔는데..."
집안엔 농이며 화문석이며 끼끗하고 부엌에도 각색 기명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데, 광
에는 쌀과 마른반찬이 그득했다. 겉보기에 소농의 집 같으나 안에는 토호의 집 부럽지 않을
만큼 윤기가 도는 살림이었다. 서년는 길산의 보따리를 풀어보고 나서 깜짝 놀랐다. 부근 저
자에 나가는 장꾼의 보따리인 줄 알았더니, 돈이 세 꿰미에 상목이 닷필이요, 더군다나 붉은
봉투의 서찰까지 있었다. 어쨌든 횡재를 하였으니 서녀는 앞으로 한 달쯤은 벌이를 나가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오라비가 오면 자랑을 하리라 생각하면서 그녀는 보따리를 건넌방에
들여놓고 저녁을 짓걔 시작했다. 밥의 뜸이 들 무렵하여 그 오빠 오공랑이란 자가 들어섰다.
"응, 일찍 등어왔구나. 내 오늘 좋은 것 모구 왔다. 송골 쪽으루 오는데 어디 해주서 오는
상여인 모양인데, 만장과 차일이 제법 장하더라. 송골에 명당 났는가베."
서녀가 건넌방 문을 열어 보였다.
"뭐 굴총 하실려우? 그따위 짓 안해두 돼요. 봐요. 돈 세 꿰미에 상목이 닷 필이면 한살림
장만했지?"
"허! 이게 웬거냐. 너 오늘 어디 가서 목 잡았니?"
"온정 다섯거리. 겉보기엔 기골이 장대하구 제법 결기가 있어 뵈데. 그래서 범꽁무늬를 좀
시겼지."
범꽁무니란 길산이 당한 경우를 뜻한다. 소금장수가 빈집 굴뚝에서 자다가 범의 꼬리를
잡았는데 범이 놀라서 뛰는 바람에 꼬리르 놓으면 죽는 팡이라 함께 끌려다녔다. 산 넘고
물 건너 눈 맞고 비 맞으며 몇달을 끌려다니다가 홀로 가는 중을 만났다. 내 지금 소피가
마려워 죽겠으니 일을 볼 동안만 스님이 잠깐 잡구 계시우. 중이 그러라 하고 꼬리를 잡자
마자 소금장수는 달아나버렸다. 이제는 다시 객지 나가 고생 않겠다며 소금장수는 달아나버
렸다. 이제는 다시 객지 나가 고생 않겠다며 소금장수는 귀향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삼
년이 지난 어느해 봄에 밭을 갈고 있는데 맞은편 들판에서 뭔가 후닥닥거리며 달려오고 있
었다. 자세히 보니 누더기를 걸치고 머리와 수염이 자란 중이 범의 꼬리를 잡고 뛰는 판이
었다. 막 곁으로 지나칠 제 여보 뭣하러 여태 잡구 다니오? 나처럼 남에게 씌우지. 하니까
중은, 여보 놓으려도 놓을 겨를이 없시다. 하더라는 얘긴데, 남에게 곤경을 씌우라는 말이
범꽁무니인 셈이다.
"거참 의리있는 길손일세. 이 많은 재물을 남겨두고 네게 범꽁무니를 당했으니 아무래두
지나친 것만 같다."
"아이 도적질에 무슨 지나치구 않구가 있어. 오빠 오늘밤에 도깨비 마실 나갈라우?"
"그래, 삽하구 곡괭이를 가지구 나가야겠다. 상여 꼬락서니가 어느 대갓집 내실 것인데,
갖은 물건이 들었을 게야. 너두 함께 가줘야겠다. 관솔불을 밝혀줘야지."
"막을 지어놓지 않았을까?"
"얘얘, 요즘 세상에 막 짓고 묵는 효자가 어디에 있겠니? 그런 사람의 묘는 파보나마나
보잘 것이 없단다. 효성 있는 자란 원래 가난하니까 말이다."
오누이는 송골에 묘구 도둑질을 하러 가기로 작정을 하였다. 저녁 마치고 나서 두 오누이
는 송골로 나갔다. 달도 뜨지 않아서 온 산천이 두터운 어둠에 싸여 있었다.
"이 골짜기루 올라갔는데..."
그들은 산등성이 중턱에서 새로 쌓아올린 봉분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었다.
"오라버니, 삼우제를 지낼려구 식구들이 송골에 남었을지두 모르잖아. 불은 밝히지 말아
요."
"그래 우선 봉분을 파헤치구 나서 광중에 들어간 뒤에 불을 켜자."
두 오누이가 합력하여 사초를 걷어내고 봉분을 까뭉갰다. 천벌을 받을 일이로되, 그들은
어려서부터 무수한 무덤을 파헤쳐서 묘구를 훔쳐 온지라 농군이 마치 봄갈이하둣 하였다.
한 키가 넘도록 파노라니 아직은 굳지 않은 석회가 나온다. 석회를 파 던지고 곡괭이로 내
려찍는데 관에 가서 부딪치느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오공랑이 관을 곡괭이로 뻐갰다.
"안으루 내려와서 불 좀 밝혀라."
서녀는 겁도 없이 제 오라비와 함께 광중에 내려서서 관솔불을 밝혔다. 관 뚜껑을 뜯어내
니 장포에 싸인 시체의 허연 모습이 나타났다.
"까짓, 수의나 무명 따위는 건드리지 말아요."
"왜, 가져다 빨아서 팔면 그것두 돈이다."
오공랑이 장포를 벗겨냈다. 장포, 염포, 황포에 포백, 천금을 모두 끄집어내니 비단과 무명
이 관속에서 수북하게 나왔다.
"야... 내 이렇게 실하게 지낸 장사는 처음 보았다. 상주가 못돼도 삼품 벼슬은 되겠구나.
아마 크마님인 모양이다."
"옷은 벗기지 말아요."
"그래 옷은 그만두자. 아니... 비단인데 그래, 너 비단값이 얼마인줄이나 아니."
시신 위에 얹힌 죽은 이의 생전에 입던 비단옷들을 모조리 걷어냈다 그리고는 세체의 금
비녀를 빼냈다. 금첩도 빼냈고, 금이자 도 빼냈다. 저고리에서 칠보노리개를 떠어냈으며 은
과 옥으로 장식된 나비잠도 떼었다. 손가락에서 옥으로 된 쌍가락지를 빼어냈고 구슬을 박
은 녹피혜도 벗겼다. 시체는 이제 걸인의 시신이나 다름없이 벌거숭이가 되어버렸다. 부장품
걷언기를 모두 마치고 오공랑이 위로 올라가려는데 서녀가 허리춤을 붙잡았다.
"반함주는 버리실라우?"
"어이구 그건 기분 나빠서 못하겠다. 그냥 두구 가자."
"이거 봐요. 이렇게 갖은 보물이 나왔는데 그런 대갓집에서 반함주를 엽전 따위루 물렸겠
수?"
"그래 네가 해라. 난 못하겠다."
서녀가 코바람 소리를 내더니,
"흫, 누가 무서워할 줄 알구? 이 할망구야, 살아서 호강하구 그런 보배를 저승까지 갖구
가서 뭘 할 테야. 배고픈 사람이 좀 먹구 살아야겠다."
서녀는 굳어버린 시체의 입을 작대기로 벌려 버텨놓은 다음에 손가락을 안으로 후벼넣었
다. 시체의 입에 가득 찬 쌀을 후벼파다가 서녀는 드디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에그머니 이게 뭐야?"
서녀의 손바닥 위에는 굵기가 앵도알만한 진주가 놓여 있었다.
"진주로구나. 하여튼 우리두 이젠 당분간 일을 안 나가두 먹구 살겠다."
"금비녀, 금이자, 칠보노리개, 은옥 나비잠, 쌍옥가락지, 그리고 진주예요. 아마 한 오백 냥
은 넘을 거야."
"묘가 이 정두루 장한 걸 보면, 꽤 높은 집안일시 분명하다. 아마 내일쯤에 도둑을 찾느라
구 난리가 날 게다."
"오라버니, 오늘밤에 아예 짐을 싸두었다가 월봉골서 떠납시다."
"어머니가 저렇게 통 기동을 못하시니 걱정이로구나."
그들 남매는 굴총질을 끝내고 묘구를 걷어 싸들고 송골로 빠져나왔다. 월봉골은 원래 방
골과 마찬가지로 모래와 자갈투성이의 못쓰는 황무지였다. 방골은 해주와 송도와 한양으로
드나드는 뱃사람의 식구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고, 월봉골은 하나 둘씩 몰려든 유민들이 개
간을 하여 생긴 마을이었다. 따라서 농사의 소출이 보잘 것 없으매, 사람들은 매를 잡으로
다니거나 소금밭을 갈거나, 아니면 두 오누이처럼 좀도둑질 또는 근처 부촌으로 품팔이나
구걸을 나다녔다. 서녀와 오공랑이 진작부터 금천, 배천, 평산의 군읍에서 이름이 나 있었으
나, 제마을 부근에서는 숟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더니 이제 바로 이웃 마을에 새로 생긴 무
덤의 묘구를 털었으니 근처 마을이 발칵 뒤집힐 것이었다. 오공랑이 말하였다.
"잘되었다. 월봉골을 떠나고 싶어도 구실이 없더니... 내일 당장 대처루 뜨자꾸나."
"그래요. 그동안 모아놓은 패물이라면 그럴 듯한 객주나 주막집 하나쯤은 열 수 있을 게
야."
그들이 모란산 기슭을 돌아 월봉골로 들어서서 집으로 향하는데 먼발치서 보니까 집 쪽에
불빛이 보이질 않았다.
"웬일이냐, 어머니가 벌써 주무실 리는 없을 텐데..."
"글쎄요, 나올 때에 우리가 불을 켜놓구 왔잖아요."
"캄캄한데..."
그들은 어쩐지 불안해졌다. 오공랑이 허리춤에서 한묶음 차고 있던 자고를 세 자루쯤 꺼
내어 쥐고 누이에게 속삭였다.
"나는 사립문 밖에서 살필 테니... 네가 먼저 들어가보아라."
서녀는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어머니... 주무셔요?"
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서녀는 내키지 않았으나 주춤거리며 마루에 올라서서 더듬더듬 미닫
이를 잠고 열었다. 문을 여는 참인데, 안에서 우악스런 손이 불쑥 나오더니 서녀를 안으로
잡아끌었다. 그녀는 안으로 고꾸라져 들어가면서 소리르 지르기도 전에 홑이불 자락에 씌워
졌다. 뭔가 묵직하게 누르면서 굵은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찍짹 소리를 냈다간 멱통을 도려낼 테다."
밖에서 동정을 살피던 오공랑은 안이 다시 쥐죽은 듯해지자 뭔가 심상치 않은 기미를 알아
처렸다. 그는 삽짝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뒤꼍으로 해서 싸리 담장을 헤치고 기어들었다. 집
뒤를 돌아서 건넌방 툇마루 옆에 바싹 붙어서서 마루쪽을 잠깐 넘겨다보고 있었다. 저도 모
르는 사이에 가슴이 뛰었고 호흡이 가빠졌다. 미닫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공랑은 어둠
을 통해서 바라보았으나 안방문이 빼꼼히 열렸을 뿐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참지 못한 오공
랑이 먼저 외쳤다.
"언놈이냐? 밖으루 나와라!"
대답 대신 안에서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드려왔다.
오공랑은 자고를 양손에 쥐고 그가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드디어 마루 위에 휘끗한 사람
의 모습이 보였다.
"에잇..."
그는 양손에 거머쥔 자고를 재빠르게 날렸다. 날아간 표창에 분명히 맞은 듯한 상대가 넘
어지기를 기다리는데 다시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거 독침 빠진 지네로구나."
"누... 누구냐?"
오공랑이 허리춤에서 다시 자고를 뽑아 겨누면서 물었다.
"보따리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네가 감히 죽고 싶어서 제 발루 기어들어왔구나."
오공랑이 연거푸 자고 표창 두 대를 날렸다. 자세히 보니 상대는 초립을 벗어서 손에 들
고 날아드는 자고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오공랑은 그 별호대로 한번 자고를 뽑았으면 실수
없이 상대편을 쓰러뜨리곤 하였었다. 그에게도 이렇게 담이 크고 재빠르게 막아내거나 피하
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상대편은 마루 위에서 한 손에 자고가 몇개 꽂힌 초립을 쳐들고 우
뚝 섰을 뿐이니 오공랑은 차차 초조해졌다. 우뚝 선 자가 웃음기 어린 목서리로 놀려댔다.
"바늘이 몇 대나 남았니. 아직 남았으면 한꺼번에 던지렴."
오공랑은 기가 처서 던지지 못하고 자고를 움켜쥐고 틈을 노렸다.
"똥 싼 주제에 매화타령이라구, 도적놈이 보따리 내놓을 생각은 않구, 그따위 표창질이나
하구 있느냐, 내가 오늘 고놈의 손모가지를 꺾어주고 가련다."
"에라, 칼침이나 받아라!"
오공랑이 자고를 날렸으나 그 순간에 상대는 몸을 굴리더니 마루 아래로 떨어져서 그의
세 발짝쯤의 거리로 다가들었고 갑자기 발을 휙 쳐들어 낭심을 올려찼다. 하체에 맥이 쭉
빠진 오공랑은 에구구 하는 소리를 자지러지게 내지르며 땅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도
포 입은 키 큰 사내는 모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오공랑의 손을 틀어쥐었다.
"이놈, 버릇 보아서는 아예 종자를 내지 못하도록 부자지를 터뜨릴까 하였으나 노모 봉양
할 팔자를 헤아려서 살짝 건드렸다. 자 일어나거라."
아이구 나 죽네!'
오공랑은 엄살이 대단하였다. 뱃살이 켕겨서 다리를 디딜 수가 없었다. 더구나 사내가 우
악스럽게 팔을 비틀어대니 뼈가 곧 퉁겨져 나갈것만 같았다.
"성님, 이 팔 좀 놓고 말씀허시우."
"인석아, 내 언제 너 같은 아우 둔 적이 있다더냐?"
"인척 혈육이 따루 있수. 내 재간이 좀 있다 하나, 구들 장군이라 성님 같은 분을 몰라뵈
었소이다."
"그래 이제는 땅냄새가 고소하냐?"
"어이구 손 좀 놓아달라니깝쇼."
그는 껄걸 웃고 나서 손을 탁 놓아주고는 초립을 휘저었다.
"아까운 초립만 상해놨으니 의관값을 톡톡히 받아야겠다."
그는 바로 수소문하여 월봉골을 뒤지고 다녔던 길산이었다. 길산이 마루에 올라가 앉으니
서녀와 오공랑이 부산을 떨며 불을 밝히고 땅바닥에 꿇어 엎드린다. 이불을 들쓰고 벌벌 떨
고 있던 그들의 노모도 방안에 엎드려서 빌었다.
"그저 나으리, 이 늙은 것을 보아 용서해주십시오."
"일어들 나시게. 모친께서 걱정하시네."
길산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였다.
"나으리 봇짐 얼른 내드려라."
오공랑이 말하자 서녀는 슬슬 눈치를 살파다가 툇마루로 건넌방에 올라 길산의 보따리를
내어 밀어놓고는 다시 낼름 엎드린다. 길산이 보따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마루 아래를
향해 말하였다.
"나두 산림에 처한 사람으로서 이런 세상에 자네들이 벌이를 탓할 생각은 없네. 돈이 궁
하다면 모두 두고 갈 것이요. 옷이 없다면 상목두 놓구 가려네. 다만 섭섭한 것은 곤경을 호
소하여 도와주려고 협기를 내는 사람을 노리는 점일세. 힘으로 빼앗거나 방심한 틈을 노리
는 것은 모르되 남의 의협심을 우롱해서야 되는가."
오공랑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다.
"제 누이가 아직 물정을 몰라서 어른을 그런 식으로 속였습니다."
길산이 더이상 탓하지 않고,
"내 자네 집을 찾느라구 싸대다 보니 요기를 놓쳤네그려. 아무거나 좋으니 끼니 때울 것
이 있으면 좀 내요게나."
하니 서녀가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사 쌀 씻고 칼 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밥 뜸이 들 동안에
군입이나 다시라고 내온 탁주와 나물을 가운데 놓고 오공랑과 길산은 다시 마주 않았다.
"몸조심 해야겠네. 자네들이 모란산 기슭에 사는 것을 원근에서 대강은 아는 모양이데. 내
나름대루 짚어서 월봉골루 찾아들어 먼저 곡재인을 사러 온 시늉을 하였지. 좋다구 나서는
중에 두 여인네를 사서 초상집으루 데려가는 척하다가 후미진 곳에서 협박을 하였네. 내가
기찰포교는 아니고, 멸악산 산채서 내려왔는데 입당을 시키려 한다구 말일세. 그래서 집을
알아내어 숨어서 기다리구 있었지. 모친을 놀라게 해드려서 미안허네."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절례루 인사를 올립지요. 강일득입니다."
"어째... 오공랑이라면서?"
"그야 세간에서 지어준 별호입죠. 성님 앞에 별호를 쓸 수가 있겠습니까? 제 주이를 서녀
라구들 하지만 실은 끝춭이올시다."
"쟤들 위루 사남매가 있었다우."
"모두들 어드루 갔습니까?"
"얘길 하자면 길지요. 맏딸아이는 낳자마자 어디론가 팔려가구... 그때는 상전댁에 솔거해
서 있었지요. 둘째를 낳으면서 외거하게 되었는데. 주인의 탐학이 어찌나 심한지 맏아들은
주인에게 맞아 죽고, 우리 식구는 달아났습니다. 추노에 쫓겨서 나는 저것들이 자연히 도적
이 되구 말았습니다. 생각하면 죽느니만 못한 인생인데 이렇게 욕되게 살아 있습니다그려."
"에이 그만두슈. 죽긴 왜 죽는단 말예요."
말득이가 제 어미에게 면박을 주고 나서 술을 따랐다.
"술이나 드십시오."
길산은 이 식구에게 문득 정이 생겨서 눈앞이 그렁그렁하여지는 것이었다. 밥상이 들어오
는데 끝춘이가 정성을 다하여 차린 듯, 시골의 다리 부러진 소반이 아니라 반듯한 해주반에
나물과 비웃이며 기름진 내음이 가득하였다. 끝춘이의 눈은 총명하게 반짝였고 보따리를 도
적질한 것이 못내 부끄러운지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시지요."
"자네두 들지."
길산이 상머리에 다가앉으며 말하니 말득이는 남은 술병을 밥상 위로 옮겨 주었다.
"아닙니다. 우리는 아까 나갈 제 미리 먹었습니다."
말득이는 길산이 식사하는 모양을 잠잠히 바라보다가,
"그런데 성님은... 멸악산에 기십니까?"
길산이 수저를 놓았다.
"헛 내 참 이런 정신 보았나. 나는 구월산 사는 잘길산이란 사람일세."
"예에... 성님두 구월산 녹림당이십니까?"
"자네 혹시 자비령 있던 마감동이를 모르나?"
"모릅니다. 저희 남매는 시골 장바닥에서 좀도둑질로 컸고, 원래 제성질이 패거리 짓는 것
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멸악산에도 패가리가 있어서 절더러 자꾸 올라오라지만, 두령
되는 자가 포악하여 군식구들을 절대루 용납하지 않는 답니다."
길산은 나물과 비웃에 푸성귓국을 한데 부어서 삽시간에 먹어버렸다. 역시 양은 차지 않
았으나 남은 배는 탁주로 채우게 될 모양이었다. 길산은 병째로 들어 탁주를 들이켰다.
"실은 나두 화적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일세. 지금은 뜻한 바 있어 금강산으로 수도행을 떠나
는 길이네. 내가 보따리 생각보다는 자네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엎섰지. 구월산에 여러 재
간 있는 두령들이 있는데, 모두 산채에서 떨어진 마을에다 식솔을 거느리구 있네. 아무래두
예서 꼬리가 길어지면 밟힐 걸세. 내가 찾은 집을 기찰포교라구 못 찾겠나. 시방은 관에서
자네들을 찾을 열신이 생겨나지 않아 괜찮지만, 앞일을 어찌 알겠는가?"
다시 안방에서 듣고 있던 모친이 끼여들었다.
"말득아, 그 어른의 말씀을 잘 들어라. 에미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그 구월산 마
을에 가서 이웃으루 마실두 댕기면서 한가하게 살구 싶다. 예서야 남의 눈을 파하느라구 밤
낮으루 안절부절이 아니냐."
"헛참, 어머니는 가만 누워계셔요. 왜 자꾸 끼여들구 그러슈."
짜증을 내고 나서 말득이가 제 잔을 내밀었다.
"한잔 주십시오."
길산이가 술을 따라주자 그는 단숨에 죽 들이켜고는,
"성님... 안 그래두 오늘 해주의 대갓집에서 명당을 쓴 묘를 털었습니다. 지방 수령들이 아
마 눈이 벌개서 잡으러 나설 모양이올시다. 지금 길산이 성님 마음이야 저두 한당에 끼워주
겠다는 말씀이나, 산채 사람들을 어찌 믿겠습니까?"
"그건 염려 말게. 내 신표를 내주면 모두들 자네를 친동간처럼 대해줄 게야. 무지막지하구
잔인한 화적패가 아니라네. 이봐. 나느 출신이 광대일세."
"허, 그 어른 광대치구는 입이 뭐워서 꼭 진중의 장교 같네."
말득이 어머니가 말하자 길산은 웃었다.
"내가 이래보여두 사설을 풀거나 춤을 추면 모두들 허리르 꺾습니다."
두 사람은 마루에 상을 마주 받고 앉아 있었으며 끝춘이와 그들 모친은 안방 문가에 나란
히 앉아 있었다. 말득이는 길산의 손을 잡으면서 말하였다.
"성님만 믿구 저희 식구는 구월산으루 솔가해 가겠습니다. 거기 가면 새 동무들두 많이
사귀겠지요."
"언제 떠나려나?"
"오늘 당장 떠나겠습니다.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나가야죠. 이러 줄 알구 평소부터 푼푼이
모아두었던 돈과 상목이 있습니다. 그러구 이제는 한밑천을 잡았습니다."
"내 것두 가산에 보태어 쓰게."
"에이 천만에 말씀이올시다. 사실 끝춘이의 벌이는 세간에서 말하듯 취도적이지요. 아까는
끝춘이가 그릇된 방도로 성님의 보따리를 훔쳤으나, 또한 그 때문에 성님을 뵙게 되 않았습
니가. 저희두 한창 벌이 좋을 때엔 부상대고의 수입 부럽지 않았습니다."
길산은 빙그레 웃었다.
"자네 재간이 자고 표창질말구 또 뭐가 있는가?"
예, 절더러 모두 오공랑이라구 하는 데엔 두 가지 연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고를 잘 던
진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리가 여럿 달렸다는 것이지요."
"다리가 여럿이라니...?"
"성님 도대체 남의 집 담치기나 굴총을 하는 놈이 안전을 도모하는 길은 무엇이겠수. 사
세 부득하면 냅다 뛰는 것이지요. 자고를 던지는 것두 저을 일단 쫓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
해서입니다. 저는 사람의 상체에는 한번도 던지지 않았습니다."
"잘 안 맞던데 그래..."
"에이 그거야 누구든지... 제 굴에 들어온 적에게 사정 보아 덤빌놈이 어딨슴니까? 아무튼
제가 뜀박질에는 표창질보다 더욱 자신이 있습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성님의 보따리를
짊어지구 동트기 전에 해주에 닿을 수도 있어요."
"음, 자고 표창질과 뜀박질이라..."
"끝춘이와 어머니는 전부터 이 월봉골을 떠나 대처루 나가서 주막을 내어 살자구 그럽니
다."
길산은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끝춘이와 그 노모가 봉산쯤에 다 주막을 내놓고 오
가는 장사치와 관리들을 염탐할 수가 있겠고, 말들이는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기별을 전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구월산 가면 다른 사람보다 김기라는 사람을 찾게. 그 사람에게 봉산 나가서 주막을 내
겠다구 얘기하면 세세히 살펴서 주선해줄 걸세."
"성님 신표를 주셔야지요."
"글세... 신표는 내가 글을 모르니 아무것도 쓸 수가 없고, 가만있자... 그렇지. 내가 심산유
곡으로 들어가는 놈이 무슨 병장기가 필요하겠나. 단검을 내주겠네. 모두들 이걸 보면 내가
틀림없이 보낸 줄 알 테니까."
길산은 보따리에서 짧은 환도를 꺼내어 말득이에게 내주었다.
"아이구 장창을 가져두 모를 텐데... 요걸 가지구 어찌 장정들 여럿을 상대하십니까. 우리
네야 줄행랑을 놓으면 그만이지만 성님은 달음박질두 못할 텐데요?"
"혀가 짧다구 침발두 짧으라는 법이 있나? 한 자 모자라면 두 걸음 더 나아가면 되는 게
지."
말득이는 길산의 단검을 받아놓고 누이를 돌아보며 재촉을 하였다.
"얘, 밤참 한번 더 지어야겠다. 길양식두 챙겨놓구..."
"응, 오늘은 저녁을 세 번 짓겠네."
말득이가 다시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헌데 어머님이 허리를 다쳐서 기동을 잘 못하시는데, 며칠 저에 뒷간에서 낙상을 하셨지
뭡니까."
길산이 말하였다.
"염려 말게. 내가 공순원까지 업어다 드릴 테니 거기 가서 세마를 내게나."
"에이 성님이 업으신다뇨. 제 모친인 걸요."
"아니야. 새벽까지는 공수원에 닿아놓아야 하네. 간밤에 그런 대묘를 굴총했다니 그 혈족
들의 성화가 여간 아닐 걸세. 지방 수령들두 당분간 자리가 편치 않을 게야."
끝춘이는 주먹밥을 만들고 말득이는 모아놓은 각종 패물과 무명, 비단 등속을 한짐 싸놓
았다. 그들 어미는 번듯한 농이며 반닫이나 세간 등속을 버리고 가는 것이 못내 아까워서
쓸어보고 만져보며 푸념을 하였다. 말득이가 짐 챙기는 일을 마쳤고 끝춘이는 따로 길양식
을 자루에 담아 쌓아놓았다. 길산은 지게 위에다 삼태기를 얹고 그 위에 이불을 둥글게 깔
아서 그들 노모가 앉기에 편하도록 만들었다.
"자아 어서 떠나지."
길산이 재촉하자 말득이가 제 어미를 안아다가 지게 위에다 앉히고 졸다가 떨어지지 않도
록 띠로 둘둘 감아주었다. 길산과 말득이가 서로 지게를 진다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말득이가 지게를 짊어졌다. 길산은 그들의 재산 보따리를 자기 봇짐 위에 얹어 저었고 끝춘
이는 길양식 봇짐을 메었다.
"불을 확 싸질러버리구 갈까?"
문을 나서려던 말득이가 중얼거렸다.
"얘야, 두고 가기두 서러운데 어찌 제 집이 타는 꼴을 보며 가겠느냐. 아서라."
"그냥 가지, 불빛 보구 월봉골 사람들이 쫓아오면 자네 식구나 야반 도주를 했다는 소문
이 날 것이고 관가에까지 들어갈 걸세."
그들은 조용히 월봉골의 동구를 빠져나왔다. 밤을 타고 걸어서 공수원까지 오심 리 길을
새벽닭이 울 적에 닿았고, 공수원서 북으로 향한 신천길로 내려갈 참이었다. 초립이 망가진
길산은 말득이네서 방갓을 빌어서 쓰고 있었으니 상을 당한 사람 행세를 하면 되었다. 원의
삼문 앞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한참 만에 문이 열리는데 동고사원지기 중이 아니라 사노가
부스스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방 하나 주게. 그리고 아침에 마부 딸린 말 한필 세내도록 해주게나."
길산이 말하니 사노는 그들의 아래위를 쓱 훑고 나서,
"어느 관아에 기십니까?"
하고 묻는다. 길산이 삿갓 아래로 말을 던졌다.
"이보게 우리도 명색이 양반이다. 시골 아전배하군 지체가 달라."
"양반이 뭐 얼굴에 씌어 있나요. 공문이 없으면 비록 삼정승 육판서를 지낸 양반댁 행차
라 하여도 원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대신에 봉놋방에서 두 배를 물고 쉬어 가시지요."
"봉놋방밖엔 없는가?"
"그 곳에만 불을 땠습니다. 다른 데는 모두 냉골입니다."
말득이가 봉노도 좋다고 하여 숙박비와 세마비를 미리 치르고 봉노에 들었다. 넓은 방안
이 쩔쩔 끓고 있는데, 벽에 기름 등잔 하나가 까무룩히 졸고 있고 안에는 장사치인 듯한 사
내들 댓 명이 이리저리 흩어져서 잠들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저고리를 벗어 웃통이 벌겋게
드러나 있었다. 안내하는 사노에게 길산이 물었다.
"이봐, 다른 봉놋방은 없나?"
"예, 바로 옆방에 아낙네들만 자는 방이 있습니다. 대부인과 애기씨는 그리로 모시지요."
그제서야 길산과 말득이는 안심을 하고서 방으로 들어섰다. 그저 잠깐 피로를 풀고 갈 작
정이니 편안한 금침을 찾는 것은 아니로되, 따뜻한 구들을 지고 등판이라도 녹이려는데 마
땅한 자리가 없었다. 다섯중에 셋은 아랫목 쪽에다 다리를 두고 누웠으며 둘은 그들과 엇갈
려서 횡으로 누웠으니 빈틈이 있다 해도 미닫이 바로 밑이거나 아니면 그들의 발밑이었다.
말득이가 횡으로 드러누운 사람 중의 하나를 흔들어 깨운다.
"보시우, 좀 일어나우."
그자가 끄응하면서 돌아눕더니 눈을 번쩍 뜨는 것이었다.
"뭐야...?"
"미안하지만 좀 조입시다."
말득이가 조심스럽게 말했으나 사내는 대번에 반말지거리였고 게가가 험구를 빼놓지 않았
다.
"거 아무 데서나 자빠져 자지 왜 깨우구 지랄이여."
말씨가 거칠고 목자가 불량한 것이 농투성이는 전혀 아니고, 장돌뱅이도 아닌 듯하였다.
봇짐꾼들이란 대개 봉놋방의 예의를 알아놔서 주가 들어서며, 실례허우, 하면 편히 허우, 하
고 답하며 자리를 내주게 마련이었다. 말득이는 길산을 올려다보며 씽긋 웃었고, 길산이는
봇짐을 진 채 미닫이 아랫목 공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말득이가 아주 뻔뻔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아무 데서나 자야겠군. 소제 좀 치워볼까."
말득이는 거칠게 내깔기던 사내의 두 다리를 덥석 잡더니 다짜고짜로 옆으로 주욱 끌어냈
다. 사내가 얼결에 끌려가며 어이없다는 소리를 냈다.
"어이... 이 망할 자식 보게."
말득이는 시침을 뚝 떼고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댁에서 봉놋방을 몽땅 샀단 말유? 같이 좀 살아야지."
"이 자식이 함부루 누굴 까실러?"
하면서 사내가 말득이의 귀쌈을 노리며 손바닥을 쳐들어 내리치려는데 길산이 손목을 턱
잡았다. 바로 곁에 누웠던 우통 벗은 자도 그제사 눈을 떴다. 길산은 사내의 손목에서 관절
급소를 눌러놓으니 죽는소리를 치면서 맥을 잃고 만다. 곁의 사내가 벌떡 일어나 길산에게
덤비려는데, 말득이가 재빨리 다리를 뻗어 딴죽을 걸면서 손으로는 궁둥이를 호되게 갈겨버
렸다. 그는 사지를 펴고서 나란히 잠든 제 패거리들 위에 사정없이 엎어졌다. 뭐야, 왜그래,
하면서들 아직 졸음에서 덜 깬 사내들이 일어났다. 그들 중의 하나가 눈을 부비고 살피더니
외치는 것이었다.
"저 자식 오공이 아냐?"
"평산 서녀 오공이의 그 오공이 말인가?"
"그래 쥐새끼처럼 힘두 없는 녀석이지."
길산이 의하하여 말득이를 바라보니,
"멸악산 패거리유."
하며 말득이가 대답한다. 장한들은 오공이란 말에 화적이 좀도적에게 당하랴 싶었는지 맨손
으로 우 하니 일어섰다. 길산은 반대로 슬그머니 쪼그려앉으면서 갑자기 발끝으로 딴죽을
거는데, 콩기름 잘 먹인 구들방이 빙판만큼 미끄러워서 대번에 두어 놈이 나가떨어지고 서
로 부딪쳐 다시 넘어졌다. 말득이는 방구석에 팔짱을 끼고 서서 빙글거리며 구경하고 섰다.
그제서야 사내들은 봇짐 속에서 짤막한 철봉과 칼 등을 끄집어냈다. 길산이 눈썹을 곤두세
우면서 방문을 발로 차 내던졌다.
"이놈들이 정말 경을 칠 놈들이군!"
활짝 열려진 방문으로 밤바람이 싸늘하게 끼쳐왔다. 말득이가 허리 춤을 더듬어 자고 표
창 두 대를 꺼내어 겨누니 길산이 말렸다. 길산은 문턱에 서서 말하였다.
"나두 녹림패의 도리쯤은 아는 사람이다. 맨손 든 사람에게 병장기를 빼어드는 것이 합당
하냐?"
"합당하구 않구는 우리 알 배 아니니 워선 어육이 되고 나서 너 혼자 생각해봐라."
길산은 문턱에서 뒷걸음질로 바깥 마당에 내려뛰었고 말득이도 봉놋방에서 뛰쳐나왔다.
"좋다, 정 그렇다면 살전이다. 한 두어 놈 숨통을 끊어주지."
아무래도 무기를 가진 길산은 좁다란 방안에서 날뛰다가는 실수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므
로 길산은 앞마당으로 그들을 끌어낼 생각이었다. 사내들은 모두들 살기등등하여 우르르 몰
려나왔다. 그들 중에서 하나는 아직 나오지 않고서 문지방에 서서 내다보며 말하였다.
"여보게들 지금 티격태격해보았자 우리 일만 낭패일세. 놈을 죽일것까지는 없고 사로잡아
서 묶어놓았다가 일을 끝내고 돌아갈 때 처치 하기로 허지."
다른 자가 철봉 가진 손에 침을 퉤 뱉으면서 씨부렸다.
"까짓 죽여서 방안에 처넣구 이불을 덮어두면 되어."
"옆방에 동행하는 아녀자가 있는 모양인데."
"그것들두 죽이든지 끌구 가서 부려먹든지 하면 되잖나."
길산이 마당 가운데 버티고 서서 보자니 뭔가 수군수군하는 꼴이 모의를 하는 중이라서
가소로운 생각이 들었다. 옆방 문이 배시시 열리더니 서녀 끝춘이가 툇마루로 나섰다. 끝춘
이는 처음에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다투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원의 큰채 쪽에서는 깊은
잠이 들었는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끝춘이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고 하품을 하였다.
"이 좋은 구경을 놓칠 수야 있나. 어디 싸워봐요."
사내들은 서녀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슬슬 길산이와 말득이를 멀쩍이서 둘러쌌다.
짜른 칼을 가진 자가 셋, 철봉을 가진 자가 둘이었다. 길산의 좌우로 칼 가진 자와 철봉 가
진 자가 넷이 덤벼들었고, 말득이는 깔보았던지 한 놈이 다가들었다. 말득이는 한편으론 길
산이를 믿고는 있었으되 이쪽은 표창밖에는 가진 것 없이 맨손이고, 저쪽은 살인을 떡 먹듯
하는 무기 가진 화적패들인지라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들이 싸울 태세로 둘러서자마자
서녀가 망을 열고 들어가 제 어미를 간신히 부축하여 끌고는 문간 앞에다 모셔놓았다. 여차
직하면 달아날 태세였다.
길산에게로 다가든 놈들이 번갈아 엇갈리며 좌우로 훌쩍 뛰더니 양쪽에서 칼을 내리치고
휘두르며 덮쳤다. 한 놈이 말득이에게로 달려드는데 그는 자고를 휙 날려서 상대의 목줄기
에다 꽂았고 목에 자고를 맞은 녀석은 한 손으로 뽑아내고 안간힘을 쓰면서 말득이를 내리
쳤다. 간신히 피한 말득이가 멀찍이 뛰어 담장 위로 껑충 뛰어올랐고 상대가 또 따라갔다.
길산은 좌우로 달려드는 상대를 맞아 칼을 비켜서 어깨 사이로 빠져 나가게 하면서 돌아
서서 머리를 그의 얼굴에다 처박았다. 처박으면서 또한 왼편으로 달려드는 자의 눈을 이지
관수로 올려 찔렀다. 둘이 동시에 저저앉았다.
담장에 올라섰던 말득이는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자에게,
"이번엔 눈깔에다 박아주랴?"
하며 위협하여 주춤 서서 얼굴을 감싸는 그자의 무릎에다 자고를 날렸다. 어이쿠 소리를 내
지르며 그자가 무릎을 싸쥐고 궁둥방아를 찧었다.
길산이 맨손으로 둘을 넘어뜨리는 것을 보자 남은 둘은 동작이 몹시 신중해졌다. 쓰러진
자 중에서 안면서 길산의 뒤통수 박치기를 당했던 자는 입과 코가 엉망으로 터진 채 기절해
쓰러져 있고 눈을 찔린 자는 앞이 보이질 않는지 더듬거리며 기어다니고 있었다. 칼 가진
자는 몇번 허공에다 칼날을 긋고 흩뿌려보고 나서 머리 위로 쳐든 채 빙빙 돌리면서 길산의
오른쪽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철봉을 가진 자는 정면에 내세운 쇠막대기 끝으로 길산의 머
리를 겨누고는 발을 움칫거리고 있었다. 말득이는 무릎을 상하여 주저앉은 자에게로 뛰어내
려 목에다 자고를 갖다 댔다. 떨어뜨린 칼을 집으려는 것을 꽉 밟고 나서 말득이가 물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득이가 자고를 목젖에 대고 지그시 눌렀다.
"아까는 설맞아서 뽑아냈겠지만 이번에는 아주 맞창을 내줄까?"
"살려다우."
"뭘 하러 여기 묵어 있는지 말해라."
"어떤 사람의 부탁으로 누굴 없애러 왔다. 우리는 벌써 돈을 받았다."
그들의 툭탁거리고 있던 사이에 서녀 끝춘이는 벌써 제 어미를 문곁에 남겨두고 빈 봉놋
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사내들이 봇짐뒤지기를 끝냈던 것이었다. 그녀는 한 봇짐에서 묵직한
은자가 들어 있는 부담을 발견하여 가슴에 싸안아다가 저희들 봇짐 옆에 쌓아두었다. 견디
지 못하게 되면 오공랑 말득이를 시켜 자고로써 다리를 상하게 하여 뒤쫓을 수 없도록 해놓
고는 봇짐을 가지고 모친을 모셔 달아날 셈이었다.
길산은 옆으로 찔러 들어오는 자의 손목을 잡아채어 자기의 자세를 낮추었다가, 팔을 뒤
로 돌려서 꺾었다. 그는 철봉을 휘두르며 다가선자의 가슴팍으로 차 내던지면서 가운뎃손가
락의 관절을 산 모양으로 뾰족이 내민 용두권으로 뒤통수를 쥐어박았다. 앞으로 철봉가진
자를 덮치면서 그자는 찍짹 소리 없이 대번에 혼절하였고, 또 하나는 제 동료를 안고 넘어
졌다. 길산아 한걸음에 뛰어 족도로써 쓰러진 상대의 허리를 찼다. 숨이 막힌 듯 그자는 맥
을 놓고 늘어졌다. 길산은 널브러진 네 사람을 둘러보고 나서 말득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자에게로 다가섰다.
"이놈들이 어떤 사람을 죽이려구 기다리던 중이랍니다."
말득이가 말하자 길산은 그자의 상투를 잡아 뒤로 젖히면서 물었다.
"누구냐, 양반을 죽이려느냐?"
"예…… 송도의 사족이랍디다."
"그래 책상물림 하날 죽이려구 다섯이서 그 진기를 감추고 몰려다니느냐?"
"아닙니다. 그 선비의 동행 되는 정학이라는 자가 천하장사여서 대적하기가 쉽질 않답니
다."
"이놈들 내 간섭할 바는 아니로되, 선비 한나 죽이는 것으로 몸값을 받아 그래두 녹림패
라구 할 수 있겠는가. 사주한 자는 누구냐?"
"그건 저희들두 모르는 일이오."
길산이 둘러보니 맞고 늘어진 자들이 기력을 회복하여 하나 둘씩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
은 모두들 버티고 서 있는 길산을 보자 달아나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앉아서 뭉개는 중이었
다. 말득이가 길산의 소매를 당기며 속삭였다.
"성님, 저것들을 봉노에다 쓸어넣구 어서 여길 떠납시다."
길산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말득이가 떨어진 칼을 주워들고 위협하면서 그들을 내
몰았다.
"모두들 방으로 들어가. 우물거리면 아예 떼죽음을 시켜둘 테여."
그들은 슬금슬금 봉놋방으로 몰려들어갔고 말득이가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엥이 잠만 설치구 어느새 날이 샜네!"
그들은 이 소동을 알 리 없는 사노를 깨워서 마부를 불러오도록 하였다. 마부와 말이 아
직 나오지 않았는데 봉놋방의 문고리가 덜걱대면서 안에서 소리치는 것이었다.
"우리 좀 보시구 가우."
"장사님들 잠깐만 보구 가우."
말득이가 사노의 눈치를 살피니 그도 역시 놀랐는지 그제서야 두 사람의 아래위를 훑어보
고 대문가에 섰는 끝춘이와 노모 쪽을 살폈다. 말득이가 길산의 눈짓을 받고 방문 곁으로
가서 물었다.
"무슨 일루 우릴 부르느냐?"
"아이구 아예 저희를 처죽이구 가실 일이지 은자를 빼내 가시면 저희는 산채에 돌아가 단
매에 즉사합니다."
"저희 두령하구 미리 약조가 되어서 그 은자를 저희가 전해받은 것이올시다. 빈손으로 돌
아가면 저희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말득이는 그제서야 일의 내막을 알고서 뒤를 돌아보고, 끝춘이 편을 향해 네 짓이냐는 조
로 손가락질을 해 보였다. 끝춘이가 방실방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니 말득이는 한달음에
은자가 들어 있는 부담을 들어 봉놋방 속에다 팽개쳐주었다.
"어이구 정말 고맙소!"
앞에 나와 앉은 자는 그렇게 말했으나 뒷전에서 씹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오공인지 공알인지 어디가 만나기만 했단 봐라. 모가지를 비틀어버려야지."
말득이가 분은 났지만 이미 날이 밝아 남의 이목이 많으므로 그냥 참고 돌아섰다.
"피차에 밑 구린 놈들이니 그냥 간다만, 억울하면 언제든 구월산으로 찾아오너라."
벌써 마부가 젊고 탄탄해 뵈는 황마 한 필을 끌고 나왔으므로 그들은 모친을 안장에 앉히
고, 앞뒤로 봇짐을 실었다. 길산이는 체 봇짐을 추려서 짊어졌다.
"나는 다시 되돌아서서 금천으로 가야겠네."
말득이가 길산의 소매를 부여잡으면서 만류했다.
"아닐세, 모친을 모시구 가야지 그게 말이 되는가. 더구나 원행에 아녀자들만 보낼 수야
있나."
"끝춘이가 다 알아서 할 겝니다. 성님, 제가 봇짐을 져다 드린다니까요."
"글세 안되여. 내가 자네들을 창금산까지 배웅하구 돌아서지."
그들은 서로 가겠다거니 안된다거니, 옥신각신하면서 북으로 곧장 보이는 창금산을 향해
걸었다. 견마 잡힌 말은 앞장서 갔고, 지게를 지었을 때보다 훨신 행보가 빨라졌다.
"이 길루 곧장 신천, 안악을 거쳐서 실토봉 기슭까지만 견마를 잡히고, 거기서는 마부를
돌려보내게. 된목이골이라는 곳을 찾아 헤매노라면 누군가 산사람 중에서 포착하는 자가 있
겠지. 그러면 김기와 마감동이를 만나러 왔다고 말한 뒤에 내 단검을 신표로 보여주면 될
걸세."
"허참, 내가 단발령까지만이라두 모셔다 드린다니까."
말득이는 더 이상 조르지는 못하고 길산이의 말에 순종하였다. 창금산 고개를 오르기 전
에 길산이 다시 이르기를,
"구월산에서 혹시 내게 급히 전할 일이 생기거든, 금강산 유점사의 승 일여를 찾아 묻게."
"예... 제가 자주 성님 뵈러 입산하겠습니다."
"아무 일 없이 올 건 없지. 그리구... 끝춘이두 좀 보세."
끝춘이가 다소곳이 걸어와서 고개를 숙였다.
"잘 가거라. 이젠 길가에 나서서 행인의 봇짐을 털어내는 일은 그만 두어. 아녀자에겐 맞
지 않는 일이다."
끝춘이는 대답하였다.
"나으리 같으신 어른을 만나면 또 범꽁무늬를 시키겠어요."
길산과 말득이는 목청을 합하여 껄껄 웃었다.
"산채에 가면 펄펄 뛰는 총각 장성들이 쌨으니, 가장 마음에 드는 신랑을 골라서 성례나
올려라."
길산은 그들의 어미에게 예를 드리고 나서 돌아섰다. 그가 멀어질 때까지 말득이네 세 식
구는 한참이나 서있었다.
"성님, 내 새달에 금강산 행보할랍니다. 기다리슈."
길산은 먼 데서 외치는 말득이의 고함소리에 맞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걸었다. 하
루걸이가 지체되었으나 전혀 헛발길을 한 것은 아니라고 길산은 생각했다. 김기가 봉산 염
탐에 내놓을 객점주와 걸음 빠른 방자를 얻었으니 반가워할 것이었다.
공수원으로 되돌아오는데 이미 마을에서는 아침 짓는 연기가 자욱했고, 길산은 조반 전이
라 시장한데다 밤새 눈 한번 붙이지 못하여 어디 사랑 신세를 질까 하였다. 새벽에 저지른
일이 있어 다시 마주치거나 원에서 보게 되면 혹시 시끄러워질까 염려되어, 길산은 내를 끼
고 돌아 멀찍이 공수원 사거리를 피하였다. 돌여울 못 미쳐서 한 기와집을 찾아들었는데 주
인 사내가 나와서 곧 방한한느 것이었다. 봇짐에서 돈닢을 꺼내 조반만을 부탁하니 못 이기
는 체하며 응낙하였다. 거기서 아침을 먹고는 머습방에 들어가 잠깐 눈을 붙였다. 양지가 남
향 마당에 널찍이 자리잡을 무렵하여 길산은 깼고 정오쯤에 돌여울로 나오게 되었다. 그가
행전을 풀고 버선짝을 벗고는 바짓가랑이를 걷는 중인데, 시골 아낙인 듯한 중년 여인과 아
이들이 황급히 물을 건너오는 것이 보였다. 길산이 의아하여 잠깐 서서 기다렸다. 물을 건너
온 여자가 시키지도 않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건너가셨다간 봉변을 당하십니다."
다시 건너편에서 농기구를 든 농부가 황급히 건너왔다. 길산이 아낙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요?"
"저 건너 방골고개 아래서 무뢰한들이 싸움을 하구 있어요."
"몇 사람입디까?"
"아주 사내들이 버글버글해요."
길산은 문득 짚이는 데가 있었다.
길산이 돌여울을 건너 숲 사잇길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내닫고 소리가 들
려왔다. 그는 슬그머니 숲으로 해서 그들의 근처로 다가갔다. 길 옆의 제법 너른 공테에 사
내들이 모여 있었다. 수건들을 질끈 동이고 무기를 가진 자들은 역시 새벽에 길산에게 된
경을 치렀던 그 멸악산 패거리들이었다. 남의 일에 끼여들 형편은 아닌고로 곧 피하여 길을
가야 겠으나, 아까 그들이 말하던 천하장사의 일이 궁금하였기 때문에 길산은 두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봇짐을 내려놓고 까치다리를 하고 주저앉았다.
우람하게 떡벌어지고 눈이 부리부리한 장한이 맨손으로 서 있었고, 그의 등뒤에는 가냘픈
선비 하나가 찰싹 붙어 있었다. 패거리 중에 둘은 이미 넙치가 되었는지 쓰러져 있었고 남
은 셋은 악착스럽게 싸고 도는 중이었다.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던 자가 잽싸게 장한의 뒤로
돌아 지나가며 칼을 휘둘렀다. 뒤에 붙어 섰던 선비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넘어졌고, 장
한은 빠져나가려는 자의 뒷덜미를 잡아채더니 한 팔로 휙 휘둘렀다. 과연 놀라운 힘이었다.
사람의 몸뚱이가 짚단처럼 장한의 한 팔에서 휘둘러졌다가 메어치기를 하자 땅바닥에 거꾸
로 박히는데 전혀 요동도 없이 숨이 끊어진다. 목이 부러진 게 틀림없었다. 아직 주위를 돌
던 두 놈은 선비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것을 확인하자 슬슬 뒷걸음질을 치더니 달아나
는 것이었다.
"생색을 좀 내어야겠군."
길산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나서 자기 쪽으로 내달려오는 자에게로 성큼 일어섰다. 놈은
주춤했다가 길사의 얼굴과 마주치자 저승사자와 만난 꼬락서니가 되어 옆으로 새려고 몸을
돌리는데 길산이 큰걸음을 떼면서 발꿈치로 그의 장딴지를 밟았다. 제풀에 고꾸라진 녀석을
잡아 일으켜 빈터로 끌고 나가는데 그가 사색이 되어 빌었다.
"너무하십니다. 기왕 살려주신 목숨을 여기까지 따라와서 죽이시렵니까. 한번만 더 살려줍
시오."
길산이는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하나, 남의 자객질로 은자까지 받은
것은 산림처사의 도리로 보아 야비한 노릇이라 생각되었다. 길산은 그저 그 장한과 사귀고
싶은 마음이 일었을 따름이요, 또한 어떤 사연인가 궁금하기도 하였다. 쓰러진 선비를 살피
고 있던 장한이 인기척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경계의 빛을 띠고 길산과 잡힌 사내
를 번갈아 살폈다. 그가 두 손을 벌려 보이면서 물었다.
"댁은 누구요?"
길산은 장한의 앞으로 사내를 밀쳐내면서 말하였다.
"지나가는 행인이외다. 잠깐 보자 하니 당신네는 수가 적고 이들은 많길래..."
장한은 한 손으로 사내의 멱살을 잡은 뒤에 퉁명스레 말하였다.
"이젠 참견 말구 길이나 가우."
길산은 그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갓은 뒤로 벗어서 목에 걸었고, 도포를 걸쳤으니 상인으
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어딘가 우악스럽고 어색하여 점잖은 티가 없었다.
"길은 가겠소마는 항자불참이랬으니 말을 묻고 살려 보내시우."
"남이야 죽이든 살리든 웬 참견이우. 댁네가 관인이오?"
"관인으 아니오마는 그럴 연고가 었어서 그러오. 내가 살려주기로 작심하고 붙잡았으니
말이나 물어보우."
장한은 멱살을 잡아쥔 놈보다는 길산이 더욱 마음놓이지 않는 눈치로 여차직하면 달려들
태세였다.
"먼저 댁네 말이나 들어봅시다. 무슨 연고란 말이우?"
길산은 하는 수 없이 픽 웃고 만다.
"어, 그 사람 굳이 내 말을 하자면 듣겠소? 무섭다가 드럽다가 측은한 것이 무엇인지 아
우?"
"여보 시방 누가 댁네와 수수께끼 한댔어?"
장한이 멱살 잡았던 자를 아래로 눌러서는 한 발로 지그시 밟아 꼼짝 못하도록 해놓고는
아마도 길산을 붙잡으려는 기색이 보였다. 길산은 일부러 히죽대며 말해다.
"무섭다가, 드럽다가, 측은한 게 다름아니 바로 댁네를 두고 하는 말이오. 즉 호랑이가 똥
싸고 죽는 게여."
"허, 이놈이 욕을 하네. 이 자식아 훈수 두는 재미로 노중객사 한다더라. 생겨먹기는 똑
말라비틀어진 당나 뒤 좆 같은 놈이 꺼떡거리네."
길산은 실소를 금하지 못하였다. 저절로 이빨 새로 웃음이 실실 터져나오는 것을 어쩔 수
가 없었다.
"이놈아 너는 어떻고... 개오줌 맞은 장승 같은 놈이다. 그나저나... 말이나 얼른 묻고 먼저
다친 사람이나 구완해라."
다친 사람을 보살피라는 말은 그럴 듯한였던지 사내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쓰러진 선비
를 내려다 보았다.
"게서 꼼짝 말고 섰거라. 조금 있다가 버릇을 단단히 고쳐줄 테니."
"네나 주자르 놓지 말렴."
장한은 잡았던 놈을 버리고 선비에게로 가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흔들어댔다. 길산이 달
아나려는 놈을 막아서고는 사내에게 말하였다.
"여보게 우선 이놈한테 말을 캐고, 내가 그이를 구완하지."
장한이 딴은 그럴 듯하여 되돌아서서 다짜고짜로 놈을 잡아 따귀를 쳤다. 에구구 소릴 지
르는데 뺨에 시퍼런 손자국이 생기며 이빨 두어대를 뱉어내는데 손길이 무지막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참말 곰의 사촌일세. 말을 캐려면 엿 주고 달래야지... 그러다가 혀까지 빠지겠군!"
길산이 참견하는데 사내는 역시 모른 체하고 다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당장에 이실직고하지 않고, 모르쇠로 버티면 대갈통을 부실테여."
"장사님... 모르쇠 안할랍니다. 다 말씀을 드립지요."
잡힌 자가 오뉴월 쇠파리처럼 앞발을 싹싹 비벼댔다. 길산은 봇짐에서 표주박을 꺼내어
물을 뜨러 갔다. 물을 떠가지고 돌아오니 잡힌 놈은 부지런히 주워섬기고 있으며, 사내는 침
울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길산이 선비에게 물을 넘겨주고 이마에 끼얹으니 맥이 끊겼던 그
가 눈을 떴다. 그는 잠깐 놀라는 기색이었다. 길산이 그의 가슴을 밀어주며 말하였다.
"염려 놓으슈, 나는 길 가던 행인인데, 도와드리는 게요."
"정학이는... 오디 있소?"
"저쪽에서 지금 당신을 해친 놈을 잡아 말을 캐구 있수."
"고맙소..."
"어디 상처는 심하지 않우?"
길산이 어깨를 살피니 옷이 찢기고 그 속에 베어진 살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게 보였다.
선비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칼날이 깊이 닿지는 않았던 모양이오. 내 도포를 좀 벗겨주오."
길산이 선비의 도포를 벗기는데 우선 다치지 않은 오른편 팔을 빼고 제일 끝으로 왼팔을
빼어냈다.
"도포를 찢으시우."
"정말 찢어두 되겠서?"
"예! 찢어서 왼편 어깨를 좀 싸매주오."
길산은 도포를 널찍하게 찢어서 선비의 가슴에서 어깻죽지로 싸매주었다.
"학이... 자넨 괜찮나?"
선비가 그 장한에게 물으니, 그는 주둥이가 피투성이인 사내를 끌어다가 꿇어앉혔다.
"이분께 낱낱이 아뢰어라. 말 한 마디라두 빼놓았다간 살아남지 못할 테니."
"아이구, 다 말씀드립지요."
정학이라고 불린 장한은 자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매부, 이런 천인공노할 노릇이 어디에 있수. 만준이 아저씨가 이일을 꾸민 모양이우."
"큰형님께서...?"
그럴 리가 없다고 거칠게 고개를 흔드는 선비를 바라보던 정한이란 자는 도적의 모가지를
틀어쥐었다.
"이놈아 얼른 말 못하겠니1"
"예예... 그저 말씀드린다니까요. 지난 그믐께였습니다. 최만준이란 해주의 선비 한 분이
노자 하나를 데리고 산채에 올라오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두령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왔던 하인이 은자 오백냥을 지니고 왔으니, 가서 일해주고 받아오라며 공수원으로 가라더군
입쇼. 그래서 다섯이서 무턱대구 내여왔습니다. 과연 공수원서 하인이 기다리구 있었지요.
든자를 받기 전에, 그자는 오늘 오후쯤에 지나는 나그네 둘이 있는데 그중 체구 작은 선비
를 요절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용모를 세세히 알려줍디다. 곁에 함께 가는 자가
천하장사이니 될 수 있는 대루 갑자기 달려들어 틈을 주지 말라구 그럽디다. 그래서 그날
꼬박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저께로군요. 일을 못하고 돌아가면 두령
의 질책이 심할 것이 두려워서 우리는 공수원서 어제도 하루 종일 망을 보며 기다렸지요.
그러다가 저기 서 계신 장사님 일행을 마나 혼뜨검이 난 것입니다. 그래도 기다린 바에야
일을 해녀려고 공수원서 내려와 이쯤에서 자리를 잡구 기다렸지요. 오늘도 못 만나면 그냥
돌아갈 셈이었습니다."
"그래 최선비와 너의 두령은 어찌 아는 사이냐?"
"예, 선비께서 일찍이 해주 신부자 나으리와 막연한 친구지간이더니, 두 분이서 멸악산으
루 행보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양반께서는 당화를 들여오고 우리 장물두 빼돌리는데, 두
령이 여간만 귀히 여기지 않소이다."
"허허, 역관으로 연경을 드나들던 사람이 도적의 장물아비가 되었구나. 더구나 혈육을 나
눈 형제를 죽이려 하다니 지하에 계신 선친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나는 참으로
덕이 없는 사람이다."
정학이라는 장사가 제 가슴을 치며 덩달아 분노하였다.
"이 죽일 놈들이 매부를 서출이라고 매양 능멸하더니, 이제는 죽이기까지 하려는 모양이
구려. 당장 해주로 되돌아가서 그놈의 집안을 쑥밭을 만들어버립시다."
길산이 잠자코 곁에서 듣노라니 알 만한 사연이었다. 그도 말을 붙였다.
"나두 해주 부상 신볻이께는 포한이 있는 사람이우."
선비는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복동이야 원래가 상인 출신이니 모르겠지만, 선친께선는 사간원정언을 지내시고 백형
자신은 사역원의 직장까지하신 분이 도적들의 밀무역을 대행하고, 장물을 사고 팔아 부를
탐하는 자가 되어버렸구려."
"자신이 그러면서 어찌 가친 성묘도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그건 고사하고 이젠 매부의
목숨까지 빼앗으려고 하다니요."
정학은 주먹을 불끈쥐었다. 길산이 최만상의 사연을 들어보니, 그들 두 매부 처남은 며칠
전에 해주 최만준의 큰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최만상은 일찍이 사간원 정언 최승의 양첩자
였다. 어려서는 과거공부를 하려다가 그 뜻의 어리석음을 알고 의술을 배워 내의원 참봉이
되었다가, 송도로 와서 의원을 내고 있었다.
워낙에 솜씨가 좋고 사람이 자상하여 주변 사방에 신통하다는 이름이 높다니, 어언간 재
물이 모여 이제는 제법 밥술깨나 먹는 처지가 되엇다. 일찍이 그의 모친 길씨는 최승이 죽
은 뒤에 제 아들 만상의 집에 있더니 얼마 전에 작고했던 것이다. 만상의 어미가 운명할 적
에 유언하기를,
"내가 남의 첩살이를 하노라고 평생을 큰댁 그늘에서 눌려 지냈고, 이제 너로 하여금 제
사에도 참여치 못하며 부친 성묘도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미가 죽어도 눈감지 못할 철
천지한이다. 망부께서 이 몸을 해주와 송도에 각각 갈라져 황천에서도 흩어져 있게 되겠구
나. 부탁이니, 내 죽거든 네 아버님 계신 근처에라두 묻어주렴."
하였으니 만상은 제 신세와 어머님의 서러움을 아는지라, 곧 유언을 봉행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시신을 모시고 크댁으로 가서 선영에 묻어주기를 요청해야 되겠으나, 잘못
했다가는 큰형 만준의 불호령을 받은 하인들에게 멍석말이로 몰매를 맞아 죽기 십상이었다.
강원도 고서에 사는 처남 정학이 진작부터 쌀 열 가마를 실어놓은 수레를 짚더불 꼬느듯 하
는 장사인지라, 그와 동행하기로 되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문틈으로 내다보고 들어지도 않으련느 것을 이 아이가 떼밀어 열었지요. 한번
미는데 대문 빗장이 부러져버렸으니까."
심히 다투지 않고도 그들은 사랑에 인도되고 맏형 만준과 서제 만상은 자리를 함께 할 수
가 있었다. 첫날은 말다툼으로 끝났고, 만상이 온 집안의 멸시와 수모의 눈초리를 견디며 닷
새를 묵는 동안에 사랑 아랫목의 모친 시신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드
디어 만준이 나타났는데 집안일로 시끄러우면 피차에 망신이라, 조용히 재종대부와 삼종대
부 등의 친척 어른들을 찾아 다니며 의논을 해보았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만준을 귀찮은 얼동생을 없애려고 멸악산을 찾았던 것이었다. 드디어 결정이
나서 수양산 기슭의 선산 선친의 무덤 아래편에 만사의 어머니 묘를 쓸 수가 있었다. 그날
큰댁 어머니는 독기를 품고 온 식구들에게 악다구니를 썼는데, 만준이 뭐라고 타이르자 어
쩐 일인지 곧 화기가 돌았다는 것이었다 정학이 눈알을 부라리고 곁에 서 있어서 아무도 그
들의 장례를 방해하지 못했고, 선친의 제사 때마다 오겠다고 다짐까지 해두고서 길을 떠나
오게 된 것이었다.
"매부! 돌아가서 그놈들을 싹 쓸어버립시다."
정학이 다시 거칠게 투덜거리자 최만상은 고개를 저었다.
"안된다. 큰형님이 비록 나를 없애려고 화적들과 내통하였지만 내게는 피를 나눈 형제이
고 윗사람이다. 다행히 내 상처도 대단치 않아서 고약을 붙여두면 곧 아물겠지."
하고 나서 최만상은 길산에게 물었다.
"헌데 손은 어디까지 가시오?"
"금강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허허 그 참 잘되었군요. 내 처남이 고성에 사는데 동행하시구려."
정학이 아니꼽다는 듯이 길산을 흘겨보았다. 그는 잡힌 사내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일어서라. 네깐 놈은 내 손으로 쳐죽이기두 아깝다."
길산이 파짱을 끼고 서서 참견을 하였다.
"그자를 어찌하시려우?"
"어찌하긴 뭘 어찌하오. 금천까지 끌구 거서 관가에 넘기겠수."
길산의 눈썹이 곤두섰다.
"내가 댁네와 농치자구 지분거리는 게 아니우. 내 손으로 잡아 데려 올 제 댁네들께 말이
나 물어보라구 하였던 게요. 내 이미 그자에게 방면해주리라 약속했은즉 그 손을 놓으시우."
정학의 매부 최만상이 상을찌푸리며 일어났다.
"손의 말이 옳다. 놓아주려무나."
정학은 사내를 앞으로 탁 떼밀었다.
"그래 놓아줬수. 그러나 댁네가 아까부터 내 심사를 뒤틀어놓으니 어디 한번 어러봅시다."
"좋소. 댁이 고성까지 간다니... 내게 지면 호형하기루 하고서 내 봇짐을 져다 주어야 하
우."
길산이도 빙글거리면서 그의 앞에 마주 섰다. 최만상이 길산에게 허리를 굽혀 사과를 드
렸다.
"제 처남이 성깔이 있어놔서 저리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손께서 참으십시오. 우리를 도와
주셔서 그 은혜를 갚지는 못할지언정 싸움이라니 당치 않소. 학아, 네가 이따위로 말썽을 부
린다면 내 다시는 너를 보지 않겠다."
길산이 오히려 웃는 얼굴로 말하였다.
"염려 마시오. 댁의 처남이 제 보기에 제법 결기가 있고 또한 협기도 있어 뵙니다. 사내들
의 장난이거니 여기고 곁에서 구경이나 하시우."
"잔말 말구 싸울 준비나 허우."
정학은 벌써 도포와 초립을 벗어 던지고 저고리까지 벗어 던졌다.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우람하여 웬만한 사내라면 그 떡벌어진 어깨에 벌써 겁을 집어먹을 만하였다. 길산은 초립
과 도포만을 벗고서 두 손에 침을 뱉어 두어 번 비벼보고 나서 빈터 가운데로 나가서 섰다.
정학이 어깨를 구부리고 어슬렁대며 걸어나왔다.
"아까는 우리가 서로 상소리를 주고받았으나, 정식으로 이름이나 나누구 겨뤄봅시다."
정학이 의외로 예의 바르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길산이도 빙긋 웃으면서,
"그럽시다. 나는 문화 사람 잘길산이라 허우."
"나는 고성 수자리골 산는 정학이오. 헌데 뭘루 할까. 서로 떼밀기 하려오, 아니면 씨름으
루, 아니면 그냥 치고 박겠수?"
"그 세 가지를 차례루 다 해보지."
정학은 길산의 대답을 듣자 어이없다는 듯이 허공을 바라보며 너털 웃음을 웃었다.
"지렁이가 용을 건드리는 격일세! 판은 이쪽 나무께에서 저쪽 바위 앞에까지 벌이기루 하
구... 허리뼈 부러져두 난 모르오."
정학이 앞으로 나서면서 손을 벌렸다. 길산이도 그 팔을 마주 부여 잡으면서 중얼거린다.
"범 잡아먹는 담비가 있수. 너무 큰소리는 치지 마오."
두 사람은 황소처럼 달려들어 서로의 팔을 끼어잡고 버티고 섰다. 장학은 팔에다 아무 힘
도 넣지 않고 서서 길산을 지분거린다.
"어디 밀어보우. 혹시 내 몸이 봄바람에 말똥 굴러가듯 할지 알우?"
"댁이 먼저 밀지. 맞서봐야 여포 장비요."
정학은 눈썹을 곤두세우더니 두툼한 입술을 불쑥 내밀었다. 길산이도 어깨를 부풀리며 힘
을 냈다. 길산이 밀기 시작하는데 장학은 역시 꼼짝도 않는다. 다만 발끝이 달싹달싹 들리는
데 그자신도 적이 놀란 모양이었다. 주춤거리며 그의 발이 뒤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어... 제법 기운을 쓰네."
그가 두어 발짝을 뒤로 물러서더니 처음 겪는 일인지 제 매부를 돌아보았다. 최만상은 싱
그레 웃으면서 구경하고 않아 있었다. 길산이 정학을 밀어보니 과연 철벽과도 같은 몸집이
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길산이 처음에 밀었을 때 이미 궁둥방아를 찧고 나가떨어졌거나 아니
면 팔뚝이 꺾어져버렸을 텐데, 발끝만 조금씩 닐려나갔을 뿐이었다. 그가 속으로 은근히 감
탄하는 중인데 정학이 기운을 썼다. 입술은 불쑥 내밀고 눈썹을 꼿꼿하게 치키고 팔뚝에 근
육을 부풀렸다. 길산은 도저히 마주 버티지를 못하고서 저절로 뒤로 한 발을 빼어 밀어냈다.
장딴지에 알심이 불뚝 솟았다.
"아뿔싸..."
다른쪽 다리마저 뒤로 밀려나갔다. 한번 다리를 뒤로 빼자 버틸 균형을 잃은 길산은 되돌
릴 틈을 잡지 못하여 뒤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정학은 길산을 밀어내면서 빙글빙글 웃었
다.
"내가 바로 담비여..."
길산은 처음에는 한 발짝 두 발짝씩 떼어놓다가 두 다리로 버티었건만, 주르르 미끄러지
기 시작했다. 드디어는 정학의 엥이... 하는 소리와 함께 길산은 황소에 떼밀리는 초동아이처
럼 뒤로 밀려났다. 그의 머리가 길산의 아랫배로 파고들어와서 발이 살짝 들릴 정도였다. 돌
아다보니 곧 바위의 앞이라, 정학의 머리와 바위 사이에 끼여서 절구 속의 낱알처럼 으깨질
모양이었다. 길산은 드디어 암수를 쓰기로 작정했다. 기운에는 이미 정학을 대적할 수가 없
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오른손으로는 정학의 팔꿈치 관절 아래편의 곡지 급소를 누
르면서 왼손은 빼어 손목 안쪽의 내척니를 끊을 듯이 잡아 쥐어 비틀었다. 곡지 급소는 어
깨의 힘을 빼어 마비시키는 곳이며, 내척니는 가슴과 배의 힘이 빠지는 곳이었다. 길산이 늙
은 광대들에게서 배운 대로 급소를 눌러놓으니 이제까지 펄펄 뛰는 황소 같던 정학이 입을
반쯤 벌리고서 빈 자루처럼 스르르 주저앉는다. 마치 사태난 언덕같이 그의 육중한 몸이 무
너져버리자, 길산은 손을 탁 놓고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왜 그러우, 뒤를 놓쳤수?"
"쳇... 웬일인지 맥이 쑥 빠져버렸네."
"내 어쩐지 너무 대번에 기운을 뺀다 싶더니. 자, 이번은 임자가 졌수."
"이상한 노릇일세..."
정학은 제 팔을 휘두르며 어깨를 두드려보기도 하고, 허리를 뒤로 굽히기도 하였다. 몸은
아무렇지도 않았건만 서로 잡았던 팔과 손목이 저려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자 다음엔 씨름이랬지? 우리 통씨름으루 합시다."
길산이 정학과 씨름을 하게 되었으나, 재간도 잘 모르고 기운도 달리니 스스로 생각하기
에도 승산이 없었다. 한가지 생각하여둔 것은 정학은 기운이 장사니까 맞닥뜨리자마자 들재
간으로 번쩍 치켜들어 내동댕이 칠 게 틀림없었다. 회목바치기나 던지기, 동이배지기 등으로
기운을 쓸 것이었다. 길산은 한가지 수를 생각하여두었다. 정학이 길산의 바지 허리띠를 양
손에 잡았고, 길산은 한 손으로만 잡고 다른 손은 놀려두었다. 역시 정학은 잡자마자 길산을
번쩍 쳐들었다. 길산의 두 다리가 뜨자 정학은 무릎을 세워서 하반신을 걸어노고 젖히기로
넘기려 하였다. 길산은 노려두었던 손을 안수로 하여 정학의 턱을 위로 힘껏 쳐올렸다. 역시
그는 길산을 안은 채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길산은 얼른 정학에게서 일어났다. 정학은 어이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멍청히 길산을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그를 가로잡아 머리
위로 번쩍 쳐들었다.
"그따위 암수로 승부나 내려는 놈은 박살을 내어 마땅하다."
그때에 구경하던 최만상이가 나와 정학을 달랬다.
"손을 내려놓아라, 내가 보기에두 너는 상대가 아니다. 곰과 범은 그 기운은 다르나, 범이
훨씬 용첩하지 않더냐."
"나는 별수도 모르거니와 이제 아무 재간이나 부려보려무나. 내가 너를 땅에다 패대기를
칠 것인데 두어 달 고생하다가 죽으려느냐, 즉사를 하고 싶으냐. 네가 성하여 두 발로 걸으
면 내 당장 네 앞에 엎드려 호형하겠다."
길산은 그의 머리위로 쳐들려서 껄걸 웃어젖혔다. 더욱 분노가 치민 정학이 사정없이 바
위에다 내던졌다. 던지기는 하였으되 광대인 길산이 공중뛰기를 못하랴. 그대로 몸을 솟구쳐
번개곤두를 두 바퀴 돌고 나서 땅 위에 척 무릎을 굽히며 떨어진다.
"잘하면 살 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렷다. 땅개비가 떴다가 용틀임으로 떨어지는데, 눈 깜
짝하면 놓치는 재간일세."
하고는 얼이 빠진 두 사람 앞에서 살판 수수잎틀이로써 뒤로 훌떡 넘으면서 몸을 뒤집기를
십여 차례나 하니 빈터를 돌게 되었다. 길산은 조금도 헐떡이지 않고서 두 사람 앞에 섰고,
최만상이 웃으면서 처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또 겨룰 거없이 형이라 하여라. 보아히니 성례도 올렸고 네 손위가 되기에 부족하
지 않은 둣하다."
정학은 못마땅한 듯이 땅에다 침을 퉤 뱉고 나서 엎드렸다.
"우리 인사허우, 성님이라 부르리다."
길산도 그제사 농기를 싹 없애고는 마주 엎드렸다.
"천하장사를 농하여 무례하였소. 같이 동무하십시다."
"아니오. 실은 내가 상투를 올렸으되 아직 장가 전이고 미욱한 사람입니다."
그때에 최만상이 보다 못하여 두 사람을 일으켰다. 길산과 정학은 언제 싸웠느냐 싶게 함
께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사내들 싸움이란 등이 없는지라, 그들이 길 위로 나섰을 때엔
장나기가 싹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함께 길을 가는 동안에 동기간처럼 친해져서 서로 반말지거리를 놓게 되었다. 저
녁 무렵에 금천에 닿으니, 송도까지는 아직도 칠십 리 길이라 아무래도 묵게 되겠기에 최만
상은 금천 객주에서 묵어 가기를 원하였다. 길산이 말하기를,
"나는 아직도 걸을 수 있으니 토산까지 나아가다가 도중에서 과객질이나 하려우."
그러니까 곁에서 정학은 길산과 헤어지게 되는 것이 서운하여 연신 제 매부의 눈치를 살
폈고 최만상도 그런 그들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나 혼자 송도로 들어갈 테니 학이는 장서방하구 금강산으루 동행해라."
"어이... 혼자 가시겠어요?"
"살갗을 조금 베었을 뿐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냐. 어서 가거라. 며칠 동안 나 때문에 원행
을 하여 참으로 수고가 많았다."
정학이 길산과 동행하는 것만 마음에 내키어 별로 인사도 차리지 않고서 선뜻 그러라고
대답해버렸다. 최만상은 객주를 잡기 전에 길산에게 말하였다.
"오늘 동행하면서 보아하니, 장서방은 참으로 인물이시오. 내가 송도 만월골에 살고 있으
니, 꼭 찾아보아주십시오. 금강산에서 나오실제 저 아이에게 기별하면 내가 무슨 일이든 도
와드리리다."
하고 나서 최만상은 장길산의 손목을 꼭 잡아주었다.
"나두 송도에 의형이 있어 가끔 들를 겝니다. 가게 되면 찾아뵙지요."
"학이는 좋은 아이입니다. 내 처남이어서가 아니라, 오늘 두 사람이 어울리는 모양을 보니
내가 송도루 데리고 가지 못하겠소이다."
최만상은 다시 정학을 불러서 당부했다.
"집에 가거든 장모님께 안부 여쭙고 누님이 사월에 나들이를 갈 게라고 여쭈어라. 이제
셋째를 낳고 몸이 풀렸으니 보교를 탈 수 있을게다. 작년부터 조르는 것을 내가 보내지 못
하였다."
최만상은 객주에서 그날 밤을 지내고 아침에 세마를 내어 타고 송도로 들어갈 모양이었
다. 그들은 헤어졌다. 길산이 그날로부터 부지런히 걸어서 토산, 평강, 금성을, 지나 단발령
을 넘게 된 것은 사흘 뒤의 오후였다. 산하에는 바야흐로 춘색이 가득 차서 진달래와 철쭉
이 다투어 피어났고, 들판에는 보리가 패고 있었다. 단발령은 금강산의 관문이라 높은 골에
는 아직도 잔설이 녹지 않은 채 덮영 있었다.
굽이굽이 도는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마루턱에 이르러 동편을 내다보니 한 선경이 눈앞에
와서 마주 닿았다. 타는 불꽃 머리 같고, 옥을 깎아놓은 듯한 삐죽삐죽한 산봉우리들이 첩첩
이었다. 단발령에서부터 금강산 사이에는 삼십여 리나 되는 너른 들판이 주욱 계속되고 있
었다. 장안사 계곡에서부터 유점사 계곡으로 빠져나가는 거리가 육십 리 길인데 골짜기와
산줄기는 수백 군데로 돌고 뻗고 하였다. 길산의 가슴속에는 뿌듯하고 이상한 감회가 가득
차오는 것이었다.-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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