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장길산 4

一字師 2024.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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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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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황석영

출판사:창작과 비평사

봉사자:김일민, 진석호

 

2부 군도()

1장 대소두령(계속)

 

6

해주서 신천, 송화 방향으로 넘어가는 학령 못미처 해지점에는 주막이 서너 채 있었는데,

그중에 마방까지 달린 나무리집이 제일 컸다. 나무리집에는 특히 중화참에 손님이 많이 끓

었으니, 해주서 오다 보면 그때가 맞춤하였기 때문이었다. 봇짐장수, 등짐장수는 물론이요

마바릿짐을 실은 상고들이 들락날락이며 술과 밥을 청하였다. 그들은 한둘씩 학령을 넘지

않고 스물 남짓 모여서 학령으로 출발하는 것이었다.

"어이 떠날 동무들 안 계시우?"

", 여기 나갑니다."

"거긴 몇이우?"

"다섯이외다."

"아직......좀더 기다립시다."

등짐장수들 한 패거리가 지게를 모아놓고 길동무들을 모으는 중이었다. 누군가 초행인 듯

한 괴나리봇짐의 나그네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아니 어째서 사람들을 모으구 그러시우...... 범이라두 나옵니까?"

"허허, 이 사람이 아직 어둡구먼, 학령에 도적이 나온단 말이우."

"그럼 한 열 명쯤이면 되었지 까짓 길도적이 무서워 스무 사람이나 모은단 말이우?"

"그저 작대기나 휘두르는 놈들이 아니랍디다. 너덧 명이서는 대적도 못하고 열 사람쯤이

래야 우리는 오합지중인데 칼이나 한번 휘두르면 모두 쫓겨 흩어지게 되지요. 그러니 한 스

무 사람이 되고 보면 감히 건드리지는 못한답디다."

"...... 그 참 말세로다. 도대체 여기 포교들은 안 나오우?"

"왜요, 장교가 나와 있지마는 오히려 두려워서 학령까지 나갔다가 도적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 쫓아오는 시늉이나 보이군 합디다. 아니면 돈을 거두어 포졸들과 동행할 수도 있지요.

도적들두 벙거지를 보면 감히 덤벼들지는 못하니까요. 허나 헛돈을 쓸 수야 있겠수."

장사치들은 중화가 끝난 패거리들과 합대하여 드디어 학령으로 떠나갔다. 잠깐 사람들의

무리가 끊기고 주막 안이 한산해졌는데 조촐한 내실 행차가 도착하였다. 앞에는 말 탄 선비

가 끼끗한 도포에 부채 펴들고 가죽신 신고서 점잖게 앉았고 뒤에는 번쩍이게 옻칠한 부담

농이 두 짝이나 실린 말이 마부에 견마 잡혀서 따라왔다. 그리고 이인교에는 발이 쳐져 있

었고 가마 옆으로 늙수그레한 여종이 따르는 것이었다. 주막 주인이 눈썰미 빠르게 뛰쳐나

와 선비의 말고삐를 쥐며 꾸벅하였다.

"나으리, 어서 오십시오."

", 느이 주막에 술맛이 어떠하냐?"

", 인근에서는 저희 나무리집을 모두들 감로정이라구 합지요."

"마방이 있는가?"

"...... 꼴을 배불리 먹이고 솔질 솰솰 하여드립니다. 아주 순종입니다그려."

"내행이 들 만한 곳두 있는가?"

"염려 마시구 뒤채루 들어가십시오."

곧 마부며 중노미가 호들갑을 떨면서 달려나왔고, 마부가 먼저 부담농을 내리려 하니 구

종한 마부가 가슴을 밀어냈다.

", 이 사람이 어디다 손을 대어. 이게 모두 은자 만 전이여."

하고는 간신히 부담농을 내려놓고 이인교를 메고 뒤채로 돌아 들어간 보꾼들이 오기를 기다

리며 지키고 섰다. 마부는 만 전이라는 바람에 감히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고는 말을 끌고

마방으로 갔다. 이윽고 보꾼들이 돌아와 합세하여 부담농을 끙끙대며 메고 갔다. 그들 행차

가 모두 뒤꼍으로 사라지자. 술을 먹고 있던 장사꾼 패거리 중의 누군가가 말했다.

"들었나. 은자가 만 전이라네."

"행차의 규모를 보아하는 보통 양반이 아닌 모양이지. 정승판서의 혈육붙이는 되겠구먼."

"말로만 들었지 만 전을 본 적은 없는데, 구경이라두 했으면 좋겠다."

"대상들끼리 주고받는 어음쪽은 본 적이 있지."

중노미가 돌아 나오며 젠척하였다.

"말두 마슈. 아마 채금터에 권리 가진 양반일 게유. 시시때때루 수금하여 가거든. 내실을

뵈오니 정말 끼끗하고 예쁘게 생기셨습디다."

아까부터 행차가 들이닥치던 것이며 그들의 오가는 수작을 지켜보고 앉았던 장정 서넛이

서 서로 눈짓들을 하였다. 그들도 행색은 장사치 차림이었으나 모두들 기골이 떡벌어진 것

이 졸연치 않아 보였다. 나무리집 주인이 나오면서 그들 곁을 지나는데, 장정 중의 하나가

거친 목소리로 불렀다.

"어이, 나 좀 보세."

주막 주인은 금방 얼굴에 핏기가 가시면서 주춤 섰다.

"언제들 내려왔어......"

"쉬이...... 요즘 산에 기별두 않구 소식이 감감이더니 배지에 기름이 많이 오른 모양인걸."

"추수기라 요즘은 손님이 더욱 많아서 그간 뜨막하였네."

", 그래서 우리가 자릿세두 받을 겸 마실삼아 왔는데...... 저어기 도포짜리는 어디까지

가는 것들이여?"

"왜들 그래, 점잖은 선비신데......"

주인이 얼버무리자 장정 중의 하나가 멱살을 턱 잡아 조이면서 씹어 뱉었다.

"오밤중에 식구들 몰살당하구 불에 타 죽구 싶어?"

"그 댁 가형이 평안감사라네. 섣불리 건드렸다가 어쩌려구 그러나."

", 병장기 가진 거 없지?"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주인을 놓아주었다. 양반댁 행차는 다시 나무리집을 나섰

는데, 그때에 모두들 만류하며 구종배들에게 말하였다.

"학령을 넘으려면 좀 지체해서 묻어가시게. 도적이 출몰헌다우."

"더구나 내행이 기신데 봉변당하시면 어쩌려구 그러시나."

구종배들은 코웃음을 날렸고, 선비까지도 오히려 재촉하여 말하였다.

"지금 같은 태평성대에 백주 도적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설사 있다한들 감히 양반을 어쩌

."

모두들 선비의 헛기개를 비웃으며 쑤군덕거렸다. 그들의 행차가 멀찍이 간 뒤에 주막에

남았던 장정들이 슬슬 일어나 뒤따라 걸었다.

학령이 보이는 숲 어귀에서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양반의 행차로 접근하였다. 그중의 하

나가 교꾼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오시는 행차길래 이 험한 고개를 단출히 넘으시려우?"

"한양서 송도 들러 평양으루 가우. 댁네들은 뭣하는 사람들요?"

"우리는 장사 다니는데 송화장을 보러 갑니다. 감히 고개를 넘지 못하다가 높으신 양반의

행차를 보고 따라 나선 것이올시다. 서로 상조하여 위협이 오면 물리칠까 하지요."

선비가 말께서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되었네. 하나라두 많으면 든든하이. 고개를 넘어가서 술잔 값이나 후히 줄 테니 가

마를 잘 지키게."

", 그리하겠소이다."

장정들은 그들 일행 모르게 서로 흡족한 눈웃음을 나누었다. 그들이 해지점에서 학령으로

출발한 지 활 세 바탕 간격쯤 떨어져서 등짐과 봇짐을 멘 두 사람의 장사치가 주막을 나서

서 뒤를 따랐다. 그들은 멀리 보일락말락하는 가마 행차와 길동무가 된 네 사람의 장정들을

조심스럽게 간격을 두어 쫓아가고 있었다. 멀리 달마산의 연봉이 구름에 휩싸여 떠 있었으

며 학령에서 뻗어내린 골짜기 계곡으로는 며칠 사이에 내린 비로 불어난 벽계수가 우당탕

퉁탕대며 흘러내렸다. 학령을 넘어가는 고개 초입은 짙은 녹림으로 길이 묻혀 어두컴컴해

보였는데, 내왕이 끊긴 숲에는 떨어진 나뭇잎들이 두껍게 깔려 있었으며, 헝클어진 나뭇가지

들은 음산하게 보였다.

양반은 역시 맨 앞에서 말을 타고 갔으며, 그뒤로 부담농을 실은 말을 끌고 마부가 따랐

고 가마를 멘 두 사람의 교꾼 옆으로는 늙은 종이 따라갔는데, 장정들 네 사람은 가마와 부

담마 사이에 바싹 붙어서 걸어갔다. 그들이 쉬지 않고 학령의 고갯마루에 오르니 멀리 용문

산으로 뻗은 구이령의 맥이 북으로 줄을 이어 뻗쳐 있고 동으로는 탁 트인 어루리벌과 장재

이벌이 펼쳐졌는데, 서편으로는 짙푸른 서해바다가 보였다.

", 장관이로다. 이제는 산바람이 제법 싸늘하군. 인마가 모두 곤하였으니 좀 쉬어서 가

."

하며 말에서 내렸다. 그가 다가가 가마의 발을 걷어올리니 흰 저고리에 남치마를 받쳐 입은

젊은 부인이 가마에서 밖으로 나왔다. 장사치들은 저희끼리 섰더니 은연중에 부담마와 사람

들을 둘러싸는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양쪽의 산등성이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리는 듯한 인기

척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선비가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짜른 칼이며 몽둥이를 봇짐에서 꺼내는 장정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꼼짝 마라.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자리에 꿇어앉아라."

그러나 선비는 어디서 기운이 솟았는지 앞에 섰던 자의 배를 발길로 차올렸고 마부와 교

꾼들도 제각기 이놈 저놈을 잡아 옥신각신하다가 뿌리치고는 학령의 북쪽 고갯길로 달아나

는 것이었다. 장정들이 그들을 쫓았으나, 멀찍이 달려 내려가면서 돌팔매질을 하였다.

"얘들아. 올라오너라."

뒤에서 이르는 말대로 그들이 뒤쫓기를 멈추고 돌아왔는데 빈 가마가 놓여 있고 부담마는

목을 지키던 일당들이 거두어 잡아놓았다. 일당들을 거느린 자는 두건을 질끈 동이고 장창

을 비껴든 작달막한 사내인데,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듯하였다.

"부두령님, 여기서 계집을 못 보셨수?"

"계집이 있었는가?"

", 틀림없이 저쪽으로 달아나지 못하였습니다. 근처에 숨어 있을게요."

장정들 여남은 명이 이리저리 숲 사이를 뒤지는데,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그쪽으로 몰려가 보니, 여자가 장도를 빼어들고 흙투성이가 되어 넘어져 있었다. 먼저 발견

했던 자가 말하였다.

", 계집이 어찌나 독살맞은지 손만 대이려 해두 칼로 제 몸을 막 그어댑니다."

부두령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하였다.

"꽃을 꺾는 놈이 닭 모가지 비틀 듯 해서야 되겠느냐. 잠깐 내버려 두어라."

하고는 멀찍이 물러나서 삥 둘러싸고는 노를 잘 쓰는 졸개를 불러 뭔가 귓속말로 일러주었

. 명주 노를 손에 펼쳐든 졸개가 나와, 여자에게로 다가들더니 매듭을 지은 올가미를 휙

던졌다. 손목에 걸리는가 싶었는데 재빨리 당기는 바람에 여자는 손을 앞으로 쳐들고 넘어

졌다. 졸개는 노를 잡은 힘을 늦추지 않고 사정없이 당기고, 부두령이 달려가서 팔을 지끈

밟고, 장도를 빼앗았다. 여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꿈틀거리자, 부두령은 껄껄 웃으면서 여자

를 잡아 일으켰다.

"두령께서 간밤에 무릉도원을 봤고나. 서리 맞은 연시 같은 계집이로다."

그는 여자의 팔을 비틀어 잡고서 학령 고갯마루로 올라왔다.

"어찌할깝쇼. 오늘은 벌이가 컸으니 그만 들어갈까요. 이제 곧 인적이 끊어질 모양이우."

"그래라. 은자 만 전에 선녀 같은 계집을 얻었으니, 잉어를 낚을 적엔 미꾸리는 버리는 법

니다. 자 모두들 산채루 돌아가자."

그들은 결박지은 여자를 가마에 밀어넣고 부담마를 이끌고 달마산 연봉을 타고 넘었다.

그들이 능선을 넘어갈 때, 아까부터 은밀하게 뒤를 따르던 두 사람의 장사치들은 숨어 있던

풀숲에서 기어나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산줄기를 타고 올랐다. 그것은 강선흥이와 백운산

두령 변가였으니 여태껏 벌어진 일들은 모두 그들이 모의한 것이었다. 선비는 첫봉이였고,

마부는 둘봉이, 교꾼들과 여종은 각각 변가의 졸개와 모친이었으며, 그리고 잡혀간 부인이란

다름아닌 고만이였다. 두 사람은 도적들의 뒤를 밟아 달마산 연봉을 넘어 성터가 있는 곳까

지 나아갔다. 가파른 산길 끝에 두 골짜기가 토성으로 막혔는데 활 모양의 문 구멍이 보였

. 변가가 선흥이의 등을 쳐서 함께 엎드리도록 하였다. 엎드려서 자세히 살펴보니 토성

위에 사람의 머리가 두엇쯤 보였다. 엎드려서 자세히 살펴보니 토성 위에 사람의 머리가 두

엇쯤 보였다. 토성의 양끝에 두 놈이 망을 보고 서 있었다. 그곳은 비탈이 가파른 쪽이니 아

래편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으면, 개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살필 수가 있었다.

"달마산이 철옹 산채라더니, 과연 듣던 대로군!"

하며 변가가 혀를 내둘렀다. 선흥이도 감탄을 하였다.

"내가 수돌이를 만날 적엔 구이령에서 졸개들 너덧 명과 작대기 들고 설치더니, 어느결에

형세가 저리되었군. 저 토성을 쌓으려면 한 달은 족히 걸렸겠는걸."

"아니우, 원래 토성의 기초는 있던데요. 저것이 해서 북편을 가리는 병풍 같은 지점이란

말요. 산채 자리로 저만한 데가 없습니다."

변가와 선흥이는 숲에서 비탈 쪽으로는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지형을 살피고만 있었다.

변가가 오른쪽의 숲이 연이어진 등성이를 살폈다.

"저쪽으로 올라가봅시다. 혹시 벽 너머를 내려다볼 수 있을지두 모르오."

변가를 따라서 선흥이도 잽싸게 숲속을 뛰어서 오른편의 능선으로 올랐다. 역시 그쪽은

눈에 뜨이지 않을 만큼 숲이 깊고 후미졌으나 아래로 내려갈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산의

아래 부분은 딱 끊긴 듯한 바위 절벽이었다. 그러나 골짜기 안이 훤히 내려다보였는데, 문을

통하여 숲 사이로 제법 훤한 길이 뚫려 있었고 절터 비슷한 곳에 옹기종기 초가지붕들이 보

였다. 초가를 감도는 계곡의 물이 신천 방면으로 흘러내려가는데 제법 물살이 빠르고 깊어

보였다. 산채는 저절로 천험의 요새지가 되어 있었다.

"저쪽은 툭 틔었으니 못 가고, 이쪽은 올라와봤자 절벽이라 내려가지 못하우. 반대편에서

오를려면 저쪽 내를 건너야 하는데, 물리 제법 깊은 모양이우."

변가가 혀를 차면서 달마산 산채의 든든함에 새삼 감탄을 하였다. 강선흥이는 한참이나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더니 내의 위를 따라서 고개를 올렸다.

"물이란 원래가 높은 곳에서 낮은 데루 흘러내려가겠군."

변가도 그 뜻을 알아채고,

"위쪽으로 갈수록 내가 얕고 좁아지겠지요. 가만있자, 구이령을 넘어서 저 반대편 산등성

이를 돌아오면 쉽게 들어오겠군......"

하며 수를 냈다.

"우리가 학령에서 예까지 뒤를 밟아 왔으니까 그렇지. 아예 초입부터 방향을 반대쪽에 잡

으면 길은 영 딴판이라니까."

", 이젠 묘안이 섰수. 길잡이는 내가 할 테니 염려 놓으슈. 어서 내려가봅시다. 허서방이

큰어미고개서 아이들이랑 기다리구 있을 게요."

변가와 강선흥이는 산을 내려와 오던 길을 되짚어 구이령 줄기를 타고 들판을 향하여 내

려갔다.

달마산 패거리들은 가마를 앞세우고 기세등등하여 산채로 들어갔다. 그중 복판에 자리잡

은 초가의 번듯한 마루 위에 수돌이가 앉아 있었다. 얼굴이 창백하고 눈이 날카로웠으며 얇

은 입술이 몹시 붉었다. 끼끗한 무명 바지 저고리에 윤기 도는 가죽 배자 입고 팔목에 토시

끼고 행전을 날렵히 둘렀으며, 고개를 갸우뚱 눈썹은 잔뜩 찌푸렸는데 가느다란 수염이 길

게 위쪽으로 뻗쳐 있었다. 졸개들이 가마를 내려놓자, 수돌이는 여자처럼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가마는 웬거냐?"

", 지나는 양반의 내실 행차를 덮쳐서 잡아온 마님짜리올시다."

수돌이는 빙긋 웃었는데 얼굴은 잔뜩 찌푸린 채였다. 부두령이 졸개들에게 손짓하며 말하

였다.

"그뿐이 아니올시다. 부담에 은자 만 냥이 들어 있지요."

", 수고했다, 수고했어. 당분간 벌이는 폐하기루 하자. 방귀가 잦으면 똥 나온다구......

무 수지를 맞추다간 화가 되는 법이다. 어디 부담을 이리 가져오너라."

졸개들이 끙끙대며 부담을 들어다가 수돌이 앞에 내려놓았다. 수돌이는 놋쇠 고리를 젖히

고 부담 뚜껑을 열었다. 붉은 보자기가 나왔다. 수돌이가 칼로 보자기를 찢어 헤치다가 눈을

번쩍 떴다.

"이게 뭐냐?"

"은절편을 보셨구먼요. 그게 모두 은입지요."

부두령이 부담 속은 들여다보지도 않고서 히죽거리자 수돌이가 그의 상투를 덥석 잡아당

겨 부담농에다 머리를 끌어박았다.

"그래, 나는 이런 은자는 본 적이 없으니 네놈이나 실컷 봐두어라."

모두들 놀라서 들여다보니 붉은 보자기에 몇겹으로 싼 물건은 다름아닌 돌멩이였다.

"이놈들 모두 참새 골을 삶아 먹었고나. 대개 거금을 가지고 원행하는 자들이란 피화할

방책을 도모하는 법이다. 일부러 부담을 드러내어 한눈을 팔게 하고서 돈은 다른 곳에 숨겼

을 것이다. 이제 은자 만 냥이란 것은 어찌 알았더냐?"

딴은 수돌이의 말을 듣고 보니 구구절절이 지당 부처님 말씀이라 모두들 고기 눈이 벙벙

하여 쓸개 씹은 것처럼 입맛을 다시고 서 있었다.

"은자 만 냥이 들었다고 광을 친 것은 물건 임자가 분명하렷다?"

"...... 그러하오."

주막에서 행객의 동정을 살폈던 자가 풀이 죽어서 대꾸하였다.

"모두들 녹림처사는 그만두고 기방에 나가 창기년들 소고의나 빨아주고 연명하여라."

졸개의 뺨을 서너 차례나 후려치고서도 수돌이는 성이 가라앉지를 않는 모양이었다. 이어

서 부두령의 귀쌈까지 후려갈겼다.

"이놈아, 너는 일찍이 재령서 군노로 있을 제 살인하여 갈 곳이 없다가, 내가 거두어 살려

주었거늘...... 하는 짓이란 게 매양 이꼴이냐."

"두령, 계집에게 물어보시우. 무슨 사장이 있는 듯하오."

여하튼 수돌이가 계집이라면 빡하고 밝히는 것은 분명한 모양이라, 노기가 좀 수그러졌다.

가마의 발을 들치고 여자를 끌어내는데 고만이는 속으로 이제부터 수돌이를 녹여야겠다 싶

어서 곱게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고 미태를 부렸다. 수돌이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 이게 누군가. 작년 그러께 상제께서 내치신 항아가 바로 자네로다."

고만이는 설핏 눈을 들어 곱게 흘기고는 다시 머리를 아래로 처박았다. 수돌이가 안달이

나서 턱을 치켜들려는데, 고만이는 찬바람이 쌩하니 불도록 머리를 휘저어 뿌리치며 종알거

렸다.

"...... 저리 옹졸한 것두 사내라구 수염이 났네."

말본새로 보아하니 계집이 안방마님짜리는 아닌 것이 분명하였고, 어디 기방물림이나 여

비 출신으로 작은집 구실에 아직 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양이었다. 수돌이도 슬쩍 농치는

기분이 되어 한결 마음을 놓고 수작을 붙였다.

"내가 어찌 옹졸하냐?"

"약한 아녀자를 이리 칭칭 묶어놓구 희롱하는 사내가 어찌 대장부여요?"

"그 참 말은 바른 말이로다. 얘들아, 이 마누라님 결박을 풀고 상방에 모셔들여라."

졸개들이 줄을 풀자, 고만이는 팔을 몇번 움직여보고 나서 흐트러지지 않은 매무새로 사

뿐히 마루에 올라섰다. 수돌이가 그만 정신이 아뜩하여 고만이의 가무잡잡한 얼굴을 보느라

고 정신이 없는데, 그녀는 한숨을 폭 내리쉬더니만 구슬 같은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주위를 물려주셔요."

눈물에 홀림목()까지 써서 아뢰니, 수돌이가 아무리 천성이 잔인한 자라 할지라도 계집

앞에 온 삭신이 사그라지는 판이라 다급하게 말하였다.

"얘들아, 너희는 물러가서 약주나 들어라. 그리구 술상 좀 보아오너라."

수돌이는 그가 기거하는 방으로 고만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도둑의 두령 방치고는 제법

호사스러워 어느 대갓집 사랑채 못지않았다. 한쪽에는 열두 폭 병풍이요, 그 아래 보료와 안

석이 있고 벽에는 대궁과 환도가 나란히 결렸으며 미끈한 세목 돗자리가 거적 대신 깔려 있

었다. 오동 화로는 물론이려니와 은주전자에 오소리 가죽의 털요가 개켜져 있으며, 삼층장이

놓여 있고, 사방탁자 위에는 산과와 떡이 그득 담겨 있었다. 과연 달마산 두령 수돌이는 고

을 원님을 부러워하지 않을 만도 하였다. 수돌이와 고만이가 마주 않자, 고만이는 다시 눈물

을 찍어냈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은 말을 쫑알대는 것이었다.

"이내 팔자가 이리도 기박할 줄이야 뉘 알았겠습니까. 기왕에 하늘의 비단이 이리로 풀어

져서 두령님과 상면케 되었으니 내 더 이상 무얼 주저하겠습니까. 저는 주인으로부터 버림

을 받은 것이올시다. 일찍이 해주 교방에서 관기로 불려 나가 있었는데, 수청든 진사와 연이

닿아 관아를 사하고 물러앉았지요. 한 석삼 년 살림을 보았는데 자식이 없었지요. 그 가형이

평안도 관찰사라 하여 엄히 이르기를 식솔을 데리고 평양으로 오되 소실을 거느린다는 것은

유생으로서 용납 못할 일이라 하여 주인이 좌불안석이시더니, 드디어 계교를 낸 것이올시다.

이제 생각해보니 만 전은커녕 아예 나를 노중에다 내칠 수는 없으니 적환을 자초한 것입지

. 저두 애초에는 일부종사 먹은 마음 피가 맺히도록 다져두고 있었사오나, 이제 모든 형편

을 알아채고 보니, 의리지정이 쓸데없소이다. 두령께서 이 미거한 계집을 거두어주신다면 기

박한 팔자를 고쳐볼까 하여요."

수돌이가 듣고 보니 입끝 말끝에 조리가 서 있고 앞 뒤 순서가 맞아떨어지는지라, 별반

의심 없이 흡족하여 고만이의 손목을 턱 잡아끌어 어깨를 안았다.

"거 듣던 중 반가운 말이로고나. 그따위 졸장부 사낼랑은 미투리 벗어 던지듯 팽개치고

나와 살자꾸나. 비록 도방 대처와는 달리 한가하여 답답하기는 하겠지만, 여기에 없는 것이

뭐 있겠느냐. 원하는 대로 털어다가 호강을 시켜주마. 그러면 그렇지, 노장은 병담을 아니하

고 양고는 재물을 심장한다는데, 만 전을 지녔다고 장광설하였으니, 실로 보물이 자네임을

몰랐구나. 나도 그동안 염복이 박하여 늘 홀로 지내기가 가을걷이 뒤의 허재비만 같더니 이

제 짝을 만나 화락하게 되었다. 이 아니 경사냐......"

수돌이가 양물이 말을 듣지 않아 계집이라면 은근히 겁을 집어먹으면서도, 그럴수록 늘상

원망스럽고 오매불망하는 것이 역시 계집의 속살이라 이런 반갑고 흐뭇할 데가 없었던 것이

었다. 대번에 미닫이를 드르륵 밀어제치고 냅다 고함부터 내질렀다.

"얘들아, 이리 좀 오너라!"

졸개가 달려오니 수돌이는 한바탕 깔깔대며 웃고 나서,

"내 오늘 가인을 만나 속현하게 되었으니, 술 내고 음식 장만하여 오늘밤을 흐벅지게 놀

도록 준비해라."

졸개들이 그런 말을 전해듣고, 술 먹고 질탕하게 논다는 말만 반가워서 모두들 환성을 지

르고 부산하게 일들을 벌였다. 술을 거른다 전을 부친다 밥을 한다 떡을 한다 하여 산채의

아낙들은 모두들 제 세상 만난 듯 정신들이 없고, 수돌이는 새옷을 꺼내 입고 역시 새옷 입

고 곱게 화장한 고만이와 상을 마주하여 술을 들었다. 산채에서 별다른 격식이 있을 리 없

어 음식상을 벌여놓고 차서를 정하여 둘러앉은 뒤에 수모의 부축으로 맞절을 하고 나서 술

석 잔을 음복하는 것으로 성혼이 대략 치러졌다. 수돌이는 그러나 못내 밤을 치를 일이 걱

정이다. 연신 색시 쪽을 돌아보며 기색을 살폈고 모두들 철모르는 계집이 고자를 만나 비뚤

어진 마음보를 잘못 덧들이고는 곧 수돌이의 칼날에 비명횡사할 것을 염려하였다. 부하들은

내 모른다 네 방귀, 하는 식으로 법석대며 술을 퍼마시고 타령에 잡가에 춤까지 추어, 어느

덧 삼경 어름이 되니 떠올랐던 반달도 산마루로 잦아들고 야기가 썰렁하였다.

"밤이 깊었는데 들어가 주무시지요."

고만이가 은근히 잡아끄는데 수돌이는 그럴수록 난감하였다. 음심은 용연처럼 깊었으나

양물은 아이들의 고추만이나 하게 움츠려 있으니 어찌하랴. 짐짓 만취한 체 비틀거리며 일

어나 안방에 깔아놓은 금침 위에 가서 엎어져버린다.

"아이 서방님, 이러시면 저는 첫날밤부터 앉은말뚝이 되오리까. 옷을 벗겨주셔얍지요."

하면서 고만이가 수돌이의 손을 끌어다 제 가슴에 넣어주는데, 팽만한 젖을 손에 쥐고 심장

이 무사한 사내자식이 있겠느냐. 수돌이가 취한 체했던 태도를 싹 바꾸어 오랫동안 주려왔

는지라 물컹 젖가슴을 잡으면서 달려드는데 고만이는 다시 제물에 자빠지며 다리로 수돌이

의 아랫도리를 휘감았다. 수돌이가 한 손은 가슴에 두고 한 손으로는 치마솔기를 더듬어 귀

를 찾아 쑥 집어넣고는 고쟁이 위로 그곳을 더듬는데, 고만이는 에그머니 속삭이며 허리를

비틀어 들어온 손을 사타구니로 꽉 물어버려 놓아주지를 않았다. 수돌이가 양물에 약간의

힘이 올랐다고는 하나 곧 무골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고만이가 바지춤을 더듬다가 그만

소스라치며,

"에고 서방님, 이게 뭣이오니까......"

외마디 소리를 지르자, 수돌이는 제풀에 탁 나가자빠져 천장을 바라보며 멋쩍게 대꾸하였다.

"신근에 병이 들어 합환의 정을 나눠본 지가 벌써 수삼 년이 지났네."

하고는 다시 고만이에게로 덤벼들어 목을 조여 잡고서 야무지게 새된 목소리로 을러댔다.

"만약에 이 일로 나를 조롱하거나 피한다면 가죽을 벗기고 거기를 오려내어 씹을 테여!"

보통 계집 같았으면 첫 번 실망에 정이 뚝 떨어지고 두 번 협박에 소름이 끼쳐서 곧 진저

리를 쳤겠으나, 고만이도 내심으로는 벌레가 몸에 붙은 것 같았지만 꾹 참아 겉으로 내색은

커녕 슬픈 목소리를 꾸며대어 달랬다.

"서방님두 어쩌면 그리두 소갈머리가 밥주발만하오. 비록 양물이 작다 하나 귀를 후빌 적

에 못 보셨수. 이자는 가늘어도 구석구석을 비벼주지요. 절구가 넓고 공이가 작다 하여 곡식

을 못 찧는 바 아니요, 돌리고 부딪쳐서 구하는 것을 얻지요. 주눅이 드셔서 이제 운우지정

까지 못하게 되셨으니, 이는 매정하고 성급한 계집들만을 만난 탓이어요. 오늘은 이만 주무

시고 낼부터 소첩이 지성으로 모셔서 천하의 오입장 기술을 알려드리리다."

하며 부드럽게 뺨도 치고 귓밥도 만져주고 입술도 대어주니, 생전에 수돌이란 놈이 이러한

노숙한 계집은 만난 적이 없는지라 그만 봄볕에 응달 얼음이 풀리듯 슬근슬근 녹아버리고

말았다. 이어서 고만이는 윗목에 준비해둔 술상을 끌어다가 화주를 그득히 부어 권하였다.

"어서 이 술 드시구 푹 주무셔요. 오늘은 저도 피곤하여 서방님 팔을 베고 세상모르고 자

고 싶어요."

"과연 백년해로할 연분일세."

수돌이가 자기 제삿날이 될 줄도 모르고 두꺼비 벌레 삼키듯 널름널름 받아서는 한 잔이

석 잔이요 석 잔이 열두 잔이 되도록 들이켰다. 드디어 눈빛이 게슴츠레해지고 혀가 굳어서

힘이 축 늘어질 쯤 되어서 수돌이는 그만 마른 짚단 바람에 넘어가듯 금침 위에 코를 박고

넘어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강선흥이와 첫봉이 형제와 변가 일당들을 합하여 아홉 명의 백운산 패거리들은 토성이 막

아선 학령 쪽으로 오르지 않고, 큰어미고개에서 구이령 줄기를 타고 달마산의 북록으로 올

라갔다.

그들은 초저녁부터 오리기 시작하여 삼경 어름에는 탄다릿내를 따라서 상류 쪽으로 올라

가 토벽이 끝난 곳의 얕아진 계곡을 건넜다. 토성 위에 번을 서는 자들의 눈을 피하여 산채

로 들어가는 오솔길 양편 숲속에 그들은 숨어서 기다렸다.

"저 토성에 있는 놈들은 변서방이 맡소. 우리는 산채로 기어들 테니까."

"산채 앞의 외나무다리에도 번 서는 놈이 있을 게요."

첫봉이와 변가가 말하는데 선흥이가 나섰다.

"수돌이는 내가 때려 잡지."

의논이 정해지기를, 변가는 칠성이를 데리고 토벽을 기어올라 망지기 두 놈을 해치우기로

하였고, 둘봉이가 졸개 한 명을 데리고 숲속을 기어가 다리 앞의 망지기를 덮치기로 하였으

, 첫봉이는 나머지 졸개 세 사람과 더불어 달마산 졸개들이 제각기 잠든 집에 불을 싸지

를 작정이었다. 강선흥이는 먼저 수돌이를 잡아놓기로 하였다. 선흥이는 굵직한 참나무 몽치

를 가졌는데, 변가는 환도, 칠성이는 짜른 비수, 첫봉이는 역시 환도, 둘봉이는 시퍼렇게 갈

아놓은 낫을 작대기에 매어 들었으며, 졸개들도 제각기 쇠스랑이나 장창을 지녔다. 모두들

어둠 속을 노려보는데 이윽고 캄캄한 가운데 불빛이 나타나며 좌우로 서너번 오락가락하였

.

"고만이가 성사하였구나!"

선흥이는 몸을 잔뜩 구부리고 어둠속으로 잦아들었고 분담했던 패거리들도 제각기 상대를

찾아서 바삐 흩어졌다. 선흥이는 길을 피하여 호가가 네 채나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당을

멀찍이 돌아서 불빛이 보이는 맨 위 쪽 초가로 접근하였다. 마루에 등잔을 손등으로 가리우

고 섰는 고만이가 보였다. 선흥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날세......"

하자 고만이는 등잔불을 훅 불어 껐다. 선흥이는 고만이의 뒤쪽에 활짝 열어젖혀진 미닫이

로 주저하지도 않고 성큼 들어갔다. 선흥이가 어둠에 눈이 익었던 터이라 이불 위에 큰대자

로 자빠진 수돌이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술에 취하여 곯아떨어졌다 한들 명색이 화적의

두령인 수돌이는 인기척에 놀라 상반신을 벌떡 치켜드는데 선흥이가 참나무 몽치를 휘두를

것도 없이 맨주먹으로 수돌이의 이마빡을 보기 좋게 후려갈겼다. 수돌이는 걷어챈 삽사리

모양 뒤로 발랑 까져버린다. 선흥이가 놈의 행전을 벗기고 바지까지 훑어내린 다음에 그것

으로 입막음과 뒷손결박을 지웠다. 그리고는 수돌이의 이마가 깨져서 끈적이며 주먹에 묻어

나온 피를 그의 가슴팍에다 쓱쓱 문질렀다. 고만이가 들어와서 곁에 쭈그리며,

"우리 허서방은 어디 있수?"

하면서 첫봉이의 계집 행세를 하는 꼴이 같잖아서 선흥이도 외입장의 말투를 써보았다.

"제미...... 언놈의 골즙은 뭐 꿀물이나 감홍로라두 된다든가, 아무거나 내어 먹지."

고만이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짐짓 토라져서 받아넘겼다.

"가이새끼도 생피하고 상놈도 항렬이 있는 터에 말인가 떡인가, 흥 참 별꼴이 각색일세."

그러나 고만이는 속곳 바람인 채 옷을 입을 기색이 아니었다. 고만이가 열려진 미닫이를

닫으려는데 선흥이는 발을 쳐들어 막았다.

"놔두오...... 불을 지르자마자 뛰어나갈 판이니."

고만이는 죽은 듯이 엎어졌던 수돌이가 조금씩 꿈틀거리자 그의 벗겨진 궁둥이를 토닥이

며 종알거렸다.

"에그 가엾어라. 그러게 계집 후릴 근력이 없으면 밀구렁에 달래든지, 흐물대는 건 쭉 뽑

아서 포도청에 쇠좆매 대신 바치든지, 아니면 꼬치에 꿰어 말렸다가 한양 구리개에다 팔아

두 돈냥이나 받지 않아."

선흥이가 보통 때 같았으면 방바닥을 두드리며 허리를 꺾을 법도 하건만 참으로 고만이의

농지거리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침이 없으니 혀를 찰밖에 없었다.

"! 옥문도 시냇물 건널 적엔 쪽, 한다더니 말이 되우 많네. 지금 어느 경황이라구 음기

를 돋구구 지랄이람."

고만이는 선흥이의 시큰둥한 반응에 그제서야 팽하니 돌아앉아 속곳 위에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선흥이는 어둠속에 화광이 비치기만 기다리며 미닫이 앞을 지키고 앉아 있었

.

변가는 칠성이를 데리고 토성의 왼편 등성이로 올라갔다. 사람 두어 길 높이의 토성은 아

래가 두루뭉술하였으나 위에는 간신히 둘이서 끼여 설 만하였으니, 양편에 통나무에다 나뭇

가지를 엇갈려 묶은 외사다리를 놓아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다. 망지기는 등을 토담에 기대

고 앉아 졸고 있는 모양이었다. 맞은편에도 희끗한 사람의 자취가 보였는데, 그쪽이라고 눈

을 뜨고 지키고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변가가 이쪽 놈을 덮치는 동안 칠성이도 오른편 망

지기를 향하여 쪼르르 달려갔다. 변가가 대번에 환도를 두 손에 잡고 상대의 배에 박았고,

그자가 목구멍에 걸린 듯한 낮은 신음소리를 지르면서 앞으로 쓰려졌다. 칠성이가 제 먹이

를 들이칠 찰나인데 놈은 급히 깨어나 장창을 곧추 겨누었다. 칠성이가 비록 급습은 하였으

나 짜른 비수로 어찌 대적하랴, 미처 찔러 들어가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서버렸다.

"...... 저 밥쇠 같은 자식!"

변가가 시체에서 칼을 뽑으면서 당황하여 부르짖으니 망지기는 곧 자세를 바로잡아 장창

을 수평으로 겨누고 좁은 토벽 위의 두 사람을 내몰았다.

"어어...... 애걔걔."

칠성이가 뒤로 몇걸음 물러나며 짜른 비수를 속절없이 휘저어대는데, 막무가내로 파고든

창날이 사정없이 칠성이의 배와 등판에 맞창을 내버렸다. 칠성이는 산속이 떠나가라고 고함

을 지르며 쓰러지고, 변가는 과감하게 칠성이의 허우적거리는 몸을 젖히고 달려들어가면서

장창 가진 자의 어깨를 비스듬히 베었다. 칠성이와 망지기가 함께 토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

. 변가는 이미 습격이 들통났음을 깨닫고 재빨리 성벽을 뛰어내려 첫봉이들과 합세하려고

오솔길을 뛰었다.

계곡 앞의 다리에서 번 서는 자를 노리던 둘봉이가 바위 뒤에 숨어서 상대를 노리는데,

워낙에 사방이 트인데다 아래는 자갈이라 대뜸 달려들지 못하고 틈만 노리는 중이었다.

때에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려왔고, 상대는 두리번거리며 잠깐 주위를 살피는데 곧 뒤이어서

골짜기가 울리도록 높다란 비명이 들려오자, 그자는 창을 들고 산채 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었다. 그가 막 지나자마자 둘봉이가 치솟으며 작대기에 잡아맨 낫으로 등을 찍어 넘겼다.

망지기들을 해치우기는 하였으나, 이미 산채를 누군가 습격한다는 것은 탄로가 난 일이라

졸개 셋을 거느린 첫봉이는 불을 지르고 기다리고 할 여유가 없었다. 우선 눈에 띄는 대로

병장기 거머쥐고 쫓아 나오는 두 녀석을 칼로 베었다. 졸개들은 미처 막지 못하여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달마산 패거리들에 둘러싸였고, 그중 하나가 쇠몽치에 결딴이 났다. 어둠속에

서 이리저리 무리를 이루어 몰리고 쫓기고 하는 중에 변가와 둘봉이와 졸개도 섞여들었다.

그러나 도적들은 저희 마당이고 수도 훨씬 많았다. 누가 붙여놓았는지 관솔 횃불이 훤하게

타올라 상대를 알아보기가 훨씬 쉬웠다. 첫봉이네가 더욱 불리해졌다. 그들은 모두 다섯 사

람으로 줄어 있었다.

초가집들이 세 채가 나란히 있었는데 그 양쪽 가녘에 횃불을 비춰든 놈이 둘이 서 있었

, 가운데 마당에는 활 모양으로 벌려 선 달마산 패들이 번득이는 환도며 장창이며 쇠몽치

들을 겨누고 다가들었다. 백운산패 다섯은 첫봉이가 정면 가운데 서 있는데, 오른편에 변가

왼편에 둘봉이 그리고 양쪽 가녘에 두 사람의 졸개가 허술한 농기구를 잡고 막아섰다. 달마

산 패서리의 부두령은 드디어 마음이 놓였는지 껄껄 웃어젖혔다.

"허허허, 난 또 저승사자가 온 줄 알았더니, 백운산의 들쥐새끼들이구나. 그뒤에 제법 깊

은 골짜기가 있으니 하나씩 뛰어내려 육젓이나 되어라."

하면서 좌우에 손짓하여 벌려진 열을 죄었다.

"모두 무기를 버리구 그 자리에 꿇어앉으면 살려주겠다."

부두령이 자신만만하게 얼러댔는데, 그때에 뒤쪽에서 찌렁찌렁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누가 살려달라는가 두구 보자."

모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거구의 장정이 저희 두령 수돌이의 목덜미를 빈 자루 잡듯이

가볍게 쳐들고 한 손에는 몽둥이를 건들거리면서 섰다.

"모두 항복하지 않으면 이놈을 선 채루 꺾어버릴 테여."

수돌이는 아랫도리를 벌거벗었고 뒷결박에 입막음을 하고 있었는데, 장정이 덜미 잡은 손

을 우쭐거릴 적마다 발끝이 달싹달싹 쳐들리는 것이었다. 부두령이란 자, 하 어이가 없어져

서 멀거니 바라보다가 그래도 병장기 잡고서 한번 휘두르지도 못한 채 내던지기는 싱거웠던

지 담보도 크게 열에서 빠졌다.

"이놈은 내가 맡을 테다, 너희는 저놈들을 밀어붙여라."

", 그놈 과연 배알이 있는 놈이로다."

선흥이가 아직도 몽둥이를 건들거리며 태연히 선 채로 중얼거렸고, 부두령은 장창 자루를

쥔 양손에 침을 한번 뱉고서는 슬슬 겨누면서 걸음을 떼었다. 마당에서 첫 합이 붙는지 환

도가 서로 부딪는 쇳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격려라도 받은 듯이 부두령이란 놈이 장창을

좌우로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며 선흥이에게 달려들자 횃불 들고 쇠몽치 들었던 양편의 두 놈

도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병장기 들었으되 무술이 따로 있나, 그저 휘두르고 찌르고 내려치는 것이 고작인 바에야

힘센 놈이 염라 태수렷다. 선흥이가 휘두르는 참나무 몽치가 어찌나 세었던지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는 듯하며 허공에서 빡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부두령의 펄떡거리던 몸짓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자는 버얼써 면상을 얻어맞고 박살이 나서 땅에 처박혀 있었다.

"또 덤빌 테냐?"

선흥이가 고함을 지르니 달마산 패들은 모두 멈칫하였다.

"대항하는 놈들은 모두 이 꼴이 될 게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장연의 강선흥이란 사람이

."

도적들 사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선흥이는 참나무 몽둥이도 땅에다 내던지고

두 손을 툭툭 털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손에 든 걸 모두 내버려라."

하나씩 둘씩 환도와 장창이며 몽둥이를 발 아래 떨어뜨린 달마산 패들 사이로 첫봉이와

변가가 헤치고 들어가 그것들을 거두어들였다. 선흥이가 말하였다.

"나두 일찍이 양민으로 굽히고 살려구 애를 쓰다가, 관의 침탈을 피하여 만부득이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몸붙일 곳을 찾던 중에 너희 산채가 기중 든든하고 포실하다기에 주인이 되

러 올라왔으니, 내 수하가 될 놈들은 여기 남을 것이요, 싫은 놈은 다른 곳으로 떠나거라.

해치거나 막지는 않을 터이다."

병장기를 모두 내던진 달마산 졸개들이 우물쭈물하더니 뭔가 얘기가 오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하나 둘씩 무릎을 꿇었고 그중에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다시 절하며 말하였다.

"저희들은 이미 식구들과 이별하고 고향을 떠난 지가 수삼 년이 되었습니다. 아니면 죄를

짓고 경을 친 놈들이라 다시는 양민이 될 수 없습니다. 저희 중에는 남의 사노로서 주인집

을 도망 나온 놈들도 많습니다. 모두 근거를 잃은 사람들이니 이제 어디루 누굴 찾아가겠습

니까. 바라옵건대 강장사께서 우리를 거두어주신다면 모두 수하가 되어 산채에 살고자 합니

. 저희 두령이 되어주신다면 기꺼이 모시겠습니다."

선흥이가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모두의 생각이 그러한가?"

이어서 예, 하며 달마산 졸개들은 소리를 합하였다. 선흥이는 다시 앞으로 나섰던 자를 가

까이 오도록 불렀다.

"네 이름이 무엇인가?"

"업복이라구 합니다."

업복이란 사내는 제법 나이꼴이 들어 보였는데 아직 소두령이었던 모양이었다.

"양식은 충분한가?"

", 두어 달치는 장만되어 있습니다."

"학령말구 또 목 지키는 데가 있나?"

"신천 다락내 못미처서 한 군데가 있고, 해주 지경 문산 고개에 또 한 군데가 있습니다만,

역시 학령목이 제일 짭짤합지요."

첫봉이와 변가가 선흥이 곁으로 올라왔다. 선흥이가 업복이에게 일렀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았으니...... 모두들 재우도록 하여라. 인사는 나중에 서루 나누기로 하

......"

"이놈들이 두 마음을 품지 않을까?"

변가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는 모양이었다. 곁에서 업복이가 흘리는 말이었다.

"이제 산채가 장사님들 손에 쑥밭이 되어 임자가 바뀌는 판인데, 어느 누가 감히 대적하

려 하겠습니까. 모두들 직심은 있는 아이들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뒷전에 나와서 서성대던 고만이가 첫봉이를 발견하고 반색을 하며 달려들어 소매를 부여

잡았다.

"어디...... 다친 데 없수?"

", 임자는 수돌이허구 신접살림 재미를 좀 보았는가."

"아이 이런 능청 보아. 제 계집을 써서 묘안을 내고서도 미안하단 말은 없구......"

지분덕거리는 고만이를 밀어 세우며 첫봉이가 중얼거렸다.

"가만있자, 이 사람이 안 보이는걸."

"누구요...... 아니, 그러구 보니까 우리 오라버니가 어디 가셨나?"

첫봉이가 변가에게 다그쳤다.

"변서방, 칠성이는 어찌되었수?"

변가는 할말이 없는지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당했소이다."

"뭐예요...... 어찌되었다구요?"

고만이가 갑자기 변가에게 달려들어 저고리 자락을 잡아당겼다. 선흥이가 고만이를 떼어

첫봉이에게로 밀어주었다.

"죽은 사람이야 지금 와서 애통해해두 소용없어. , 업복이하구 몇이서 시체를 수습허

."

고만이가 몸부림을 치면서 곡을 터뜨리고 첫봉이는 위에서 꽉 껴안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서 연신 달래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다 험한 산사람 노릇을 하려니 저승이고 이승이고 창졸간에 오락가락하지 않

. 내가 있잖어. 나두 식구를 하룻밤 사이에 잃은 사람이여."

첫봉이는 고만이를 껴들고 초가의 뒤꼍으로 데리고 갔다. 선흥이가 결박된 채로 마당에

나둥그러져 있는 수돌이를 내려다보면서 걱정하는데 변가가 불쑥 나섰다.

"그 자식일랑 내게 맡기시우. 내가 그놈께 포한이 많소이다. 온갖 설움을 당하며 쫓겨다녔

으니 이번엔 내 손으로 목을 쳐야겠수."

"...... 벌써 반죽음이 되어 손대구 뭐구 할 필요가 없겠네."

선흥이가 그래도 보기가 딱하여 한마디 던지자 변가는 환도를 주욱 뽑았다.

"아니오, 이놈은 성정이 간사하여 그냥 두었다가는 화근이 되고 맙니다."

"둘봉아, 네가 데리고 가서 계곡에다 던지구 오너라."

선흥이가 이르니 둘봉이는 짜른 칼을 집어들고 다가서서 수돌이의 결박을 풀었다. 그리고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우니 수돌이는 비틀거리면서 걸었다. 둘봉이는 수돌이의 꼴을 보니

차마 칼날을 날릴 생각이 사그라지는 것이었다. 수돌이는 달마산 산주라기엔 너무 초라하였

, 머리가 깨져서 처참한 몰골이 되었으니 그냥 내버려두어도 성한 몸이 될 것 같지는 않

았다. 둘봉이는 수돌이를 앞장세워서 계곡의 끝에 보이는 풀숲으로 데려갔다. 다리 옆에 서

서 발길을 한번 냅다 지르면 수돌이는 낙석 구르듯이 떨어져 급한 물살에 쓸려 내려갈 것이

었다. 그는 칼을 이손 저손으로 옮겨 잡으면서 망설였고, 고개를 돌려서 그런 양을 보던 수

돌이가 목이 콱 잠긴 소리로 애원하였다.

"살려주."

"나두 내 뜻이 아니니 원망 말어라."

"그냥 보내주시면...... 다시는 산채에 얼씬을 않겠습니다."

둘봉이가 칼을 내려뜨리고 스스로 혀를 찼다.

"젠장할...... 나두 모르겠네."

하는데 수돌이가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았는지 둘봉이의 아랫배를 무릎으로 쳐올리고는 외

나무다리를 향해 뛰었다. 둘봉이는 숨이 턱 막혀서 뒤로 넘어졌다가 간신히 일어났다. 그가

칼을 집어들고 쫓으려는데 벌써 수돌이는 외나무다리의 중간을 뒤뚱거리며 건너는 중이었

. 둘봉이가 이제는 놓쳤구나 하는데 뒤에서부터 장창이 날아가 수돌이의 등을 꿰었고 그

는 소리를 지르며 다리 아래 어둠속으로 먹히어 들어갔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군."

둘봉이의 뒷전에서 변가가 말하였다.

"아무래두 아우님이 살려 보낼 것 같아서 내가 뒤를 따라나왔소. 탑벌서 백운산에 올라온

이래로 우리가 저놈 등쌀에 하루도 편하게 발뻗고 자지 못했고, 학령 같은 좋은 목까지 빼

앗겼지. 칠성이두 목숨을 잃었는데 수돌이놈을 살려 보낼 수야 있나."

그날부터 달마산에는 주인이 바뀌었건만 누구도 선흥이에게 대적하거나 모반하려는 눈치

는 보이질 않았다. 졸개들은 그야말로 천하에 몸붙일 데 없이 세상을 등진 자들이라 누가

통솔을 하건 관계하지 않았으며 또한 선흥이가 성질이 수더분하고 마음 씀새가 굵직하여 졸

개들께 너그러웠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미더워하였다. 선흥이와 첫봉이들은 애초부터 계획

해왔던 불타산의 심백이네 산채를 들이칠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 선흥이네는 이제 백운산과

달마산 식구들을 합하여 그 가솔까지 친다면 근 삼십 남짓 되는 도당을 이루게 되었다.

록 작은 형세라 할 수는 없으되 불타산의 심백이네 일당은 그래도 사노와 중놈들이 반이 넘

으니 기강이 제법 서 있었고, 또한 심백이가 두령통솔을 잘하였으므로 섣불리 넘볼 수는 없

는 노릇이었다. 불타산 지리와 사정을 잘 아는 달마산의 소두령 업복이와 백운산 변가가 선

흥이, 첫봉이에게 많은 허실을 알려주었다. 특히 첫봉이와 변가는 함께 이마를 맞대고 계교

를 짜내는데 둘의 묘안은 속내가 잘 맞아떨어졌다.

일찍이 불타산에는 견불사, 천불사, 해림사, 자비사, 임해사, 칠봉사 등의 절이 있었는데,

특히 임해사는 청석산 봉수대에서 고산 사거리에 이르는 너른들을 사찰 전장으로 소유하고

있어서 부유하였고 천불사는 불타산 기슭 창암골에 있었는데 목감원과 용두원 근처에 토지

가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주지들은 고을 수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몰락한

사류나 향족보다는 제법 권세가 있었다. 창암골 서쪽 불타산의 높다란 바위 봉우리가 모여

서 대를 이룬 곳에 불타산성의 유지가 남아 있었다. 산성 안쪽에는 임진란 때에 많은 사람

들이 피난하였던 깊숙한 바위굴이 있었으며, 곁에 천년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물론 인근 사람들은 그곳에 수상한 자들이 살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산성 가운데 통

나무를 잘라 찱덩굴과 진흙으로 세운 귀틀집들이 몇채 서 있었고, 암자에서는 가끔 법석이

는 가무 소리가 들릴 뿐 예불을 드리는 기색은 없었다. 이곳이 바로 심백이 일당의 산채였

던 것이다. 관에서도 소문에만 접하였을 뿐 실제로 충돌을 일으키거나 관인을 상해한 적이

없으므로 오히려 덧들일 것만 걱정한 터수여서 심백이네는 옹진, 강령 등지로 나아가서 부

잣집 털이를 하였고, 백주에도 가사장삼을 하고 노상에 섰다가 등짐장수나 차인패를 벗겨먹

기도 하였다.

심백이에게는 실로 중요한 자가 있었으니, 일찍이 수양산 망해사의 보경선사 밑에서 행자

노릇을 때려치우고 떠날 때 짝패가 되었던 십년 연상의 법호라는 걸승이었다. 심백은 여환,

묘정과 더불어 보경선사의 제자였다. 묘정만이 불가의 정도 수행에 들어섰고, 여환은 민간의

잡도라 하는 것과 섞여 들어갔으며, 심백은 스스로도 파계승임을 자처하였던 것이다.

심백이 사노의 소생임은 이미 알려져 있거니와, 보경선사는 특히 도망쳐 나온 노비들을

불제자로 많이 거두었는데 묘정이 그러했고, 여환이 역시 사노였으며, 훨씬 전부터 종적을

알 수 없는 길산의 친아비 보라는 이도 그의 구제를 받았던 것이다. 심백이 행자 노릇을 때

려치운 것은 보경선사가 지적한 대로 속계에 대한 원한이 깊이 사무쳐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중이 민가에 재를 올린다는 구실로 드나들며 젊은 과부와 사통하여 생겨난 생명

이었다.

그들은 갓난 심백이를 절에 맡기고 행방을 감추어버렸는데 절의 밥붙이들이 천덕꾸러기로

길렀다. 그러나 심백이는 자라나면서 눈치가 빠르고 행동에 조심스워서 곧 노승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으며, 말년에 쓸쓸히 보내는 노스님들께 어리광을 부리며 손자처럼 자라나다가 자

연스럽게 동승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승려들로부터 그 몸이 원래 불륜의 씨요,

한 사노들에게서 자라났다 하여 조롱과 멸시를 받았고, 철이 들면서는 아무와도 친분을 나

누지 않는 음울한 자가 되어갔다. 심백이는 그러나 겉으로는 조용하고 행동이 조심스러운

승려였다. 그가 수양산 망해사에서 수양중에 보경선사께서 그를 평하기를,

"심백은 총명하여 화두를 던지면 즉시로 깨닫고 답하는 듯하나, 실지로는 겉으로만 그럴

듯 꾸밀 뿐이요 알맹이가 없다. 진심이 빠져 있으니 법의를 걸치고는 있으되 그것도 시늉뿐

이로다. 원한이 가시면 크게 깨우칠 것이요, 그대로 지닌다면 스스로에게나 중생에게나 독약

과 같은 자가 될지도 모른다."

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과연 그 평은 심백에게 꼭 들어맞아서 재령 묘음사의 태자원에서 주

승을 살해하고 재물을 탈취하여 법문을 일단 떠났던 것이었다.

그와 짝패가 되었던 걸승 법호는 일종의 기인이었으니 체구가 왜소하여 팔다리가 짧고 머

리는 앞뒤로 튀어나와 남보다 컸으며, 늘 말없이 염주알만 헤아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늘고

긴 눈은 언제나 반짝이며 주위를 끊임없이 살피는 듯하였다. 그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

으나, 관북의 세습 무녀의 자식이라는데 대단한 야심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두통

을 앓고 있어서 뒤로 벌렁 자빠져 발작을 일으키고 몸서리를 치다가 깨어나곤 하였으니,

런 고질병이 법호가 한군데 몸담고 수행하지 못하고 객승으로 떠돌아다닌 이유가 되었을 것

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음울한 성정이 서로 통하였던지, 심백이는 법호가 발작을 일으

킬 적마다 곁에 붙어 앉아 간병을 극진히 해주곤 하였다. 심백이가 걸승과 사노 몇 명을 이

끌고 불타산 계곡을 찾았을 적부터 법호는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있었다. 심백이

는 우선 천불사 주지라는 자가 도가 높거나, 바르게 수행하였다면 그런 일이 없었겠으나,

기도 밑이 구리고 불자로서 차마 하지 못할 부녀자 사통을 하고 있었으니 어쩌지 못하고

심백의 행패를 감수하였다. 심백은 천불사의 암자인 창암골 천년암의 승려들을 쫓아 내려보

내고 들어앉아, 한편으로 법호를 보내어 주지를 달래었다. 탐욕스런 주지는 법호의 권유대로

심백을 절 장토의 마름으로 삼았다. 천불사의 토지를 소작해 먹는 양민 가호가 용두원에서

마리포까지에 삼십여 호나 되었으니 수완 있는 마름이 필요하기도 하였다.

심백이는 다시 임해사 주지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한편 핍박하고 법호를 보내어 구슬려서

고산 사거리 근처의 사찰 장토를 관할하게 되었다. 심백이는 그로부터 천불사, 임해사 두 주

지들의 멱통을 딱 움켜쥐었고, 불타산 기슭의 양민들까지 그 생살 여탈권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그야말로 불타산의 천왕이 된 심백이는 천년암을 본거지로 하여 옹진, 강령 등지를

드나들며 벌이를 하였고, 장물을 처분하기 위해 송도나 양주까지 원행을 나가는 형세를 이

루었다.

법호가 지난번에 마바릿짐을 싣고 양주로 나갔다가, 화승총 다섯 자루를 구입하여 왔으니

활이나 창, 칼 따위가 고작인 예사 화적패와는 비교가 안되게 병장기를 갖춘 셈이었다. 심백

이는 이제 비좁은 산골짜기를 벗어나 해안으로 뻗어나가기를 원하고 있었고 조니포와 소래

골이 밀상의 목임을 알고는 우선 첫봉이네를 덮쳤던 것이었다. 그는 법호의 권유대로 마리

포 쪽에 배를 대어놓고 송도의 예성강과 강화의 경강 어귀와 평양의 대동강 어귀를 오르내

리는 주상들을 덮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아직 형세를 불리기에는 불타산은 별로 좋은 자리

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서를 달리는 연봉은 해서에서 가장 길었지만 골이 깊지 못하

고 높은 주봉이 거의 없었다.

그에 비하면 달마산은 그 연봉이 동서로는 장산곶에서 재령까지 이르고 남북으로는 해주

문산에서 구월산의 꼬리인 추산 마루턱에까지 닿았다. 또한 월당강의 지류인 돌여울만 건너

면 바로 멸악산에 이르니 이것이 멸악산백의 잔등을 타는 까닭이었다. 불타산도 그에 잇닿

아 있기는 하나 워낙 장연 읍치에 가까운 것이 흠이었지만, 달마산은 그 줄기가 장연에도

닿아 있고 해주계에도 닿아 있으며 송화계 신천계 재령 쪽으로까지 뻗쳤으니 관할이 애매한

것이 이점이었다. 해서에서 구월산은 골짜기가 깊고 험하여 유리하고, 멸악산은 외진데다 연

봉이 많아 유리하지만 달마산은 바로 너른 어루리벌 나무리벌 등을 끼고 있으며 감영 관역

에 닿아 장사치의 발길이 그침이 없어 화적의 소굴로는 가장 포실한 곳이기도 하였다. 심백

은 서쪽으로 달마산 수돌이를 내쫓고, 동으로는 마리포까지 나아가면 일세의 대적당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달마산 산채의 주인이 이미 바뀌어버렸다는 것은 심백이네

서도 아직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는 다만 무뢰배 출신의 수돌이란 자가 매우 용렬하여 졸개

들의 기강도 형편없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차디찬 늦가을 비가 추적지근하게 내리고 있는 후선방의 원마을에는, 툇마루를 길 밖으로

낸 작은 주막이 한 채뿐이었고 행객은 뜨막하여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워낙에 한적한 곳인

데도 해주로 나가는 이끼여울나루터가 시오 리 밖에 있어서 하루 건너 두어 패거리 지나치

는 행객이라도 주워볼까 하여 생겨난 주막인 듯싶었다. 하기는 원이 있으니 주막이 없을까.

주막에는 늙수그레한 사내가 곰방대를 물고 한가하게 앉아서 비가 내리는 길을 내다보고 있

었다. 그는 곰방대를 빼어내고 부엌에서 군불을 넣고 있는 아내에게 말하였다.

"...... 모를 일일세. 때아닌 엽사가 오는군."

검댕 묻은 얼굴로 눈을 비비면서 주막집 여자도 함께 길 쪽을 내다보았다. 머리에 두건

질끈 동이고 가죽 배자에 행전 날렵히 쳤으며 어깨에 전통 메고 창을 든 장정 두 사람이 걸

어오고 있었다.

불타산 산중에는 사슴이 많아서 약재인 녹용과 그 가죽 때문에 겨울철에는 엽사들이 원마

을이며, 남창방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원마을 사람들은 겨울에 다른 백성들이 하지 않는 부

역이 있었으니 바로 사슴몰이에 동원되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이러한 부역은 오차포에서도

있었는데 매잡이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주막집 사내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눈이

아니라 비가 질척하게 내리는 날에 때이른 엽사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덫을 치기도 하고 총

을 놓기도 하여서 사슴을 잡는데 몰이꾼도 없이 활과 창을 든 엽사가 사슴 사냥에 익숙한

원마을 사람의 눈에는 더욱 이상하였다.

"패거리 없이 다니는 사람들두 있습디다 뭐...... 무슨 수로 잡든지 우리가 상관할 게 무어

?"

아낙네는 주인에게 그렇게 대꾸하였다. 이윽고 두 사냥꾼이 다가서더니 아니나다를까 마

루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여보슈, 예가 주막이우?"

", 그러하오."

"어이구 추워. 온몸이 다 젖어서 뼈까지 얼었겠다."

그들은 이빨을 부딪치며 마루에 쭈그려앉으려다가 한 사람이 부엌을 넘겨다보았다.

"저기...... 불 좀 쬐지. 우선 옷을 말려야겠어."

"그럽시다."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군불을 때서 뜨뜻할 텐데."

주막 주인이 말했지만,

"아니우, 옷을 말려야지. 그동안에 탁주하구 뜨거운 국밥이나 좀 말아다 주시오."

하며 부엌 안으로 웅숭그리고 들어갔고, 주막 아낙은 깔깔대며 웃었다.

"아이고 우리 조왕대감님께서 오랜만에 남정네를 들이시니 별일이우, 그대신 불이나 좀

때슈. 너구리 잡겠어."

"잡긴 뭐든지 잡아야지."

"자아, 곰이 되나 범이 되나 아무거나 한 마리만 잡아보세."

그들은 시시털털하게 농을 하면서 불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하나는 사십이 넘어 뵈는 중

년의 엽사이고 또 하나는 아직 장가도 안 든 떠꺼머리였다. 아낙네가 국밥을 말고 대접에다

탁주를 가득 따라 소반에 올려놓고 부르는데 그들은 연신 솔가지를 넣으면서 손짓을 하였

.

"이리로 가져오시우. 한번 불을 보니 우리 마누라보다두 떨어지기가 힘드네."

"날씨두 젠장할......"

주모가 소반을 들어다 아궁이 앞에 놓으면서 다시 수다를 떨었다.

"참 살다 보니 또 이런 손님들은 처음 겪네. 부엌 봉당에 상을 내기두 처음이려니와 비

오는 가을에 엽사란 더더욱 처음이우."

"아픈 이가 있어서 용을 급히 구할 일루 그리되었소."

"그래 사슴은 보았어요?"

"웬걸요, 산에 나무가 성벽처럼 섰는데 어디 뚫고 들어갈 길이 보여야지. 물가에 덫만 쳐

놓구 내려오는 길이오."

"그럼 천상 묵으셔야겠수."

"술 좀 더 주오."

"넉 잔이우. 방 좀 치워놔야겠네."

아낙네가 밖으로 나가려고 돌아서다가 에그머니 하면서 주저앉았다. 박박 깎은 중머리에

수염만 잔뜩 기르고 기골이 떡벌어진 녀석의 상판이 쓱 들이밀어졌던 것이다. 그는 부엌 바

닥에 웅크린 두 사냥꾼을 험상궂게 훑어보았다.

"뭐야......?"

그는 헛기침을 하면서 아낙네에게 물었다. 주모는 저도 따라서 힐끗 뒤돌아보고 나서 대

답한다.

"보면 모르슈? 스님 때문에 간이 떨어질 뻔했어요."

"애는 안 떨어지구?"

"망측해라......"

그의 뒷전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두엇이 더 있는 성싶었다.

"여보, 댁들 어디서 왔수?"

텁석부리의 중이 엽사에게 물었다. 나이 든 축이 대꾸하는데,

"건 알아 뭣에 쓰시려우. 스님은 어느 절에 기신데?"

중이 송충이 같은 검은 눈썹을 쓱 치키며 코바람을 몇번 킁킁거렸다. 아마도 전의가 생기

면 그러는 버릇인 모양이었다.

"때아닌 사냥질이 괴이하여 묻는데...... 원산 말뚝처럼 뻣뻣해, 어디서 왔느냐니까?"

"행패를 놓는군. 여보 남이야 지게를 지구 제사를 지내든 무슨 참견이우? 우리가 무슨 지

렁이 갈빗대루 보이슈, 함부루 내대지 마우."

"허허허......"

어이가 없는지 중대가리는 수염이 가득 덮인 입을 주욱 찢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고는 뒤를 돌아보고 제 일행들에게 의향을 물었다.

"어찌...... 소매를 걷어봐?"

그의 어깨 너머로 기웃이 넘겨다보던 상투잡이가 깔깔 웃으면서 만류하였다.

"그만둬, 어서 가서 갑리나 받아와야지. 공연히 용두원서 시끄럽게 할 거 뭐 있나."

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하였다.

"물을 만하니까 물어본 거야. 남의 골에 들어왔으면 물정도 좀 알아보구 고분고분해야지.

공연히 귀때기라두 맞아 볼따구니나 터지면 행로에 밥 먹기두 귀찮구, 어디 과객질하려도

면상 불량하여 낭패여, 어디서 왔어?"

총각이 중년 엽사의 옆구리를 꾹 찌르고는 공손히 대답하였다.

"스님의 말씀이 거칠어 좀 놀란 김에 실례를 하였습니다. 저희는 옹진서 왔는데 저의 혈

족의 존장 어른께서 지병으루 돌아가시게 되어 녹용을 급히 구하려고 찾아 나선 길이올시

."

"진작 그럴 것이지."

그들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제각기 껄껄대며 사라졌다. 아낙네가 그제서야 기를

펴고 술을 푸면서 중얼거렸다.

"애구, 이 고장서 살려니...... 천불이 아니라 천마라니까."

중년 엽사가 물었다.

"저자들이 도대체 뭣들이오, 중이요, 관헌이오?"

아낙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죽여서 소곤거렸다.

"중두 아니고, 관리두 아니라오, 저이들이 바루......"

하는데 마루에 앉았던 주인이 꽥 고함을 질렀다.

"입 조심해여, 뭘 조잘거리는 거야!"

아낙네가 찔끔해서 되돌아 나갔다. 엽사들은 잠자코 술만 마시더니, 이윽고 총각이 음성을

낮추어 말하였다.

"변두령, 저것들이 불타산 패거리가 틀림없수. 뒤를 따를까......"

"아니, 그냥 내버려두지. 오가는 소리를 들으니 이 마을에 용무가 있는 모양인데 다시 돌

아올 듯하군. 우리가 달마산 정탐이 오늘루 사흘째인데 이젠 뭣 좀 얻어걸리젰지."

"그럼요, 오늘 같은 날씨에 나라두 술을 안 넘기면 오금이 쑤실 게요."

변가는 둘봉이에게 일렀다.

"아우님은 방에 들어가서 자는 척하구 엿들어보우. 내가 슬그머니 뒤쫓아가 살피구 올 테

."

변가는 바깥으로 나서면서 제 고이춤도 쓸어보고 길바닥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가만있자...... 전대를 빠뜨렸으니 산에다 두고 온 모양이군!"

변가의 눙치는 소리에 주모가 실색을 하며 혀를 찼다.

"온 저런, 노자 잃고 타처에서 걸식하려구 그러시나. 어서 냅다 쫓아가봐요. 초동이라두

어슬렁대다가 줏어가지나 않았는지 야단났네."

"술값 안 떼어먹을 테니 조바심치지 마슈."

변가는 일부러 퉁명스레 내뱉고는 그자들이 올라간 마을길로 바삐 걸었다. 그는 얼마 안

가서 두리번거리며 찾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 중놈의 거친 목소리와 아낙네며 아이들의 울

음소리가 떠들썩했던 것이다. 이엉이 아예 잿빛으로 바래소 폭 주저앉은 두어 칸짜리의 초

가집 울타리 밖에는 조심스럽게 모여든 동네 사람들이 기웃거리며 서 있었다. 변가도 어렵

잖게 그 틈에 끼어들어 울타리 틈으로 마당을 살폈다. 중대가리는 그 집 가장인 듯한 허약

한 사내의 상투를 잡아 흔들며 호통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래 시작을 지어 처먹었으면 땅세도 내야 되거니와 곡식은커녕 쭉정이조차 바치질 않은

데다, 벌써 상달이 넘어 한 해가 다 가도록 장리빚을 갚지 않으니 그 불어난 갑리는 장차

어찌할 터이냐? 갑자기 도주공이 현신하여 금덩이라도 내려준다더냐?"

사내는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고 볼이 패어 병색이 완연하였는데 그가 이리저리로 상투를

당길 적마다 머리를 내돌리면서 두 손을 모으고 애걸하는 것이었다.

"그러게 제가 지난 봄에 뭐라 하였습니까. 작인으루 계속 땅을 부치게 해줍시사구 주지스

님께두 간청하였는데 작년 빚을 채 갚지 못하였다 하여 땅의 진전만 남겨두고 절반은 쇠똥

이네루 떼어 주지 않았습니까. 묵정밭만 가지고는 저희 식구가 먹지도 못할뿐더러 농량도

대일 수가 없습니다. 저 혼자 허리가 부러지도록 농사를 지어보았으나, 지난 여름 내내 앓느

라고 소출도 형편없어 올해 농사는 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제발 덕분 살려주시려거든,

명년까지만 기한을 주십시오."

중놈은 여전히 상투를 잡아 슬슬 흔들면서 말하였다.

"어 그놈 중생이 고해에 든 것을 언제는 몰랐던 모양이로구나. 네 전생에 죄가 많은데다

더욱 같지 않게 해사한 계집을 거느린 탓이다. 여편네를 원으로 보내라구 몇번이나 주지스

님께서 이르셨는데 듣지 않았으니 농지를 떨구었지."

"애 에미를 보내면 아이들은 누가 기릅니까?"

"잠깐 올려 보내랬지, 누가 네 계집을 빼앗는다구 하더냐. 그저 식전에 올라와 밥짓고 빨

래하고 허드렛일이나 시키려는 게여. 그걸로 빚을 탕감해준다는데...... 그놈 참 까다로운 팔

자소관은 어쩔 도리가 없구나. 여하튼 우리는 땅세도 못 받았고 장리빚도 받지 못하였으니

검징해서 가져가야겠다."

나머지 두 사내들은 우는 아이들과 방에 엎드린 아낙을 밀치고 초라한 세간살이들을 뒤지

기 시작하였다. 사내 중의 하나는 다시 마당으로 나와 부엌의 봉당을 이리저리 굴러보고 귀

를 기울이며 돌아다녔다. 물독이 세워진 곳을 살펴보고 힘을 넣어 독을 옮겨놓고는, 그곳이

다른 봉당 바닥처럼 딴딴하지 않고 흙덩이가 일구어진 것을 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

.

", 여길 팠구나. 어디 두드려볼까."

발로 몇번 굴러본 그자가 외쳤다.

"여기다 묻었군. 찾았네 찾았어."

다른 자가 달려들어 호미로 그 자리를 파려 하자 아낙네가 뛰쳐나와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일방 빌고 일방 울고 애걸하여 그런 참상이 없었다.

"이걸 파가시면 우리는 겨울에 시래기죽도 끓여 먹지 못하구 굶어 죽습니다. 제가 원으로

스님을 찾아가 뵙겠습니다."

"우린 몰라. 그때 가서 곡식을 달라구 직접 말해."

구경하고 섰는 변가도 도적놈이기는 매일반이었으되, 원래가 탑벌두내리의 농투성이가 전

신이라 놈들이 검징을 하여도 야차와 같이 하는구나 싶었다. 또한 변가도 계집 밝히는 데에

는 남에게 그리 뒤지지는 않는 터에, 울며 애처롭게 몸부림치는 아낙네를 보아하니 들쳐진

치맛자락 사이로 속살이 뽀얗고 목소리가 높다란 것이 제법 눈에 뜨이는 인물이라 한결 분

심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판국에 뛰어들었다가는 일은 모조리 박살이 나는지라 지켜볼밖

에 별수가 없었다. 좌우간 불타산 놈들은 그 아낙을 발로 차서 뿌리치고 호미를 날리었고,

한뼘 깊이도 채 안되어 짚더미가 더부룩히 솟아나왔다.

"장미가 여기 있었구나. 이놈아, 쥐새끼처럼 제 먹을 것만 챙겨두고, 작료를 안 내구 버틸

작정이었더냐."

곡식자루를 파내자 온 가족이 초상을 만난 듯 눈물과 곡성이 낭자한데, 중 차림의 도적은

솥을 떼어내며 걸걸한 목소리로 대수롭잖게 지껄였다.

"이 고장서 밥알 넘기구 살구 싶으면 느이 마누라를 원으루 보내라. 그러면 무슨 방도가

생길 게다."

그러나 사내는 대꾸 없이 마당에 퍼질러앉아서 진기가 죄다 빠진 듯이 허공만 바라볼 뿐

이었다. 그들이 몰려나오는 기미가 보이자 마을 사람들은 일시에 흩어지더니 제 집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자들은 텅 빈 길로 낄낄거리며 몰려나왔다. 변가도 잠시 집 뒤편에 은신

하여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한참 뒤에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두 양주가 넋을 잃

고 마당에 주저앉아 있는데 아이들이 악머구리 들끓듯 울어댔다. 변가가 헛기침을 하고 기

다렸으나 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런 딱할 데나 있나."

하면서 변가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전대를 끌러서 주인 사내에게 내밀었다.

"이걸루 우선 지내보시우."

사내가 눈이 번쩍, 귀가 움찔하여 전대를 잡고 이리저리 매만졌다.

"두어 냥은 될 게요."

"아니 이런 고마울 데가, 손님은 뉘십니까...... 뭣 때문에......?"

"나는 아우와 함께 불타산에 사슴잡이를 하러 왔지요. 우연히 지나다가 딱한 모양을 보게

되었소이다. 아니...... 포악한 수령이 있는 고을의 나졸 사령들도 저보다야 나을 테지요. 도대

체 저자들이 무얼 하는 사람들입니까?"

변가의 물음에 사내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 고장에 처음 오셨다니 모르시는 것이 당연하지요. 우리게서는 거의가 불타산 천불사

의 사철 장토를 부쳐 먹구 살지요."

"저 사람들이 포악을 부리는데도 관가에서는 가만있단 말요?"

"세곡 외에도 상납 진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당연히 모른 척합지요. 실상 관전을 붙인

다 한들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전에는 그래두 원지기가 나와서 독촉을 하고 대개 딱한

사정은 보아주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천년암에 불한당들이 몰려오고부터는 작폐가 극심해졌

습니다. 관에서두 대강 알지만, 수령의 임기 동안에 별일 없으면 모른성하고서 지나려는 것

입지요."

사내가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나, 변가의 귀에는 그런 하소가 들어올 리 없었다. 변가는 가

장 궁금한 것이 있었다.

"헌데...... 듣자하니 천불사 주지라는 자가 세간에 살림집이 있다면서......?"

", 용두원 원사 담을 사이에 두고 바로 뒷집이 살림집입니다. 계집이 둘이나 되지요.

도적놈이 색심이 그치지 아니하여 이제는 유부녀 겁간까지 서슴지 않는 게올시다."

하고 나서 사내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길게 내쉬는 것이었다.

"사내자식이 정말 무슨 꼴이란 말입니까. 처자식을 고생시키는 것두 못할 짓이려니와 항

차 남의 탐욕의 핍박까지 받아야 하니...... 하늘 아래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습니다그려."

변가가 다시 물었다.

"그래 주지라는 놈이 시방 원의 뒷집에 내려와 있수?"

", 큰 재가 있거나 여기서 권세 있는 토반 향족이 온다면 반드시 절에 올라가지만 한

달에 달포쯤은 여기 머물지요."

"천년암에는 불한당들이 몇이나 되우?"

"스물 남짓 된다 하는데, 몇몇은 승적을 가졌던 놈들이라 합디다."

변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서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가,

"우리가 오늘 아무래두 사처를 잡아야 할 터인데...... 돈을 낼 테니 하룻밤만 재워줄 수 있

겠수?"

사내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저희 식구가 굶어죽을 지경에 이렇게 큰 돈까지 거저 내주셨는데, 주무시는 것이 별 대

수입니까. 불편하시겠지만 저희 염려는 마시구 오십시오."

변가가 사내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내가 시키는 일을 하면 열 냥을 드리리다. 조금 궂은 일이라두 하겠소?"

"암 하다뿐입니까, 뭐든지 시켜주십시오."

변가가 다시 말하였다.

"거기가 좀 죽어줘야겠소이다."

"......?"

사내가 갑자기 느닷없는 소리에 겁에 질려서 뒤로 물러나 앉았다. 변가는 그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면서,

"허허 이 사람...... 누가 정말로 죽으라는 게요. 실은 나는 저 달마산에서 온 사람이오."

"달마산에서 오셨다니요......?"

변가가 그의 귓전에 대고,

"화적 몰라? 우리는 대적당인데 천불사를 도모하려구 내려온 게야."

라고 속삭여주었다. 사내는 잠깐 입을 벌리고 뻥한 표정이더니 간신히 알아들었던지 애매하

게 에...... 하며 얼버무렸다. 변가가 말하였다.

"그러니 댁이 손 좀 써줘야 되겠소. 우리가 일만 성사한다면 톡톡히 보답하지. 내가 자세

히 가르쳐줄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해주오."

사내가 열이 나서 내대는 것이었다.

"그 도야지 같은 땡초놈을 요정을 낼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내 주막에 다녀와 자세히 일러줄 터이니 바깥 출입을 삼가구 기다리시우. 누가 찾아와두

사립을 잠그고 안에 들어앉아 있으슈."

변가는 사내에게 단단히 다짐을 두고 주막으로 돌아갔다. 불타산 패들은 술잔을 걸치고

주막을 떠났는지 툇마루에는 주인집 사내만이 앉아 있었다. 변가가 둘봉이를 찾으니 방에

들어가 구들장을 지고 있던 그가 고개를 내밀었다.

", 한숨 잘 잤네...... 어서 들어오슈. 불알이 녹적지근하고 배가 부르니, 염병난 동네에

도깨비 팔자요."

변가는 우선 묻기부터 하였다.

"불타산 아이들은 들렀다 갔소?"

"그놈들 선 채루 몇주발씩 들이켜구 방금 일어서는갑디다."

"뭣 들은 말 없지......?"

"처음에는 저희끼리 갑리가 어떠니 계집이 어떠니 하며 중구난방으로 떠듭디다. 그러다가

수군거리는데, 오늘밤에 천년암 작은스님이 내려온다구 그럽디다. 용두원에서 주지와......"

변가가 둘봉이의 말을 끊고 다그쳐 물었다.

"방금 뭐라구 그랬소...... 천년암 작은스님이라니?"

"낸들 어떤 중놈인지 압니까?"

변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랄병이 있다는 난쟁이 중놈 말이로군. 옳지 이놈들 이제는 댓진 먹은 뱀이로구나!"

"무슨 좋은 수라두 났단 말요?"

"불타산에서 심백이를 때려 잡으려면 그 중놈을 먼저 해치워야 하우. 제 발로 인가에 내

려온다니 일은 벌써 반나마 성사된 거나 다름없소."

"하여튼 내가 듣기로는 그 중이 주지하구 용두원서 만나기루 된 모양입디다. 말을 끌구

와야겠다구 투덜거리는데, 마리포까지 길이 멀다구 불평을 하더군요."

", 장토의 수세가 끝나 시작세의 셈을 하려는 게로군. 그자들은 오늘 용두원에서 묵을

게요."

둘봉이가 연신 문을 빼꼼히 열고 길 쪽을 내다보며 조바심을 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올 때가 되었는데 걸음이 늦군."

변가도 함께 기웃거리며 걱정을 하였다.

"남창방까지 오지 못한 모양이로군."

"달내방에서두 아무 기별이 없으니 차질이 날까봐 걱정이우."

"오는 날이 장날이라구 기회는 이만한 날이 없을 텐데......"

변가는 입맛을 다시며 앉았고 둘봉이는 벌렁 누워버렸다.

"잠이나 한숨씩 자둡시다. 까짓 안 오면 내일루 미뤄두 되겠지."

"...... 물론 의논이 정해지겠지만 내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이거 낭팬걸."

그들은 누구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을씨년스러운 비가 계속해서 추적추적 내리는데

원마을에는 청솔가지 타는 매캐한 연기가 뽀얗게 싸고 돌았다. 어둑어둑해져서 봇짐을 멘

나그네가 비에 후줄근히 젖어 주막을 찾아들었다.

"에이 몹쓸 날씨로다. 걷이 끝난 뒤의 비는 병드는 액우라더니 참으로 모질게 춥네."

일부러 큰 소리로 중얼거리는데 두 사람이 안에서 듣자 하니 첫봉이의 목소리가 틀림없었

. 둘봉이도 헛기침을 하면서 방문을 열고 가래 뱉는 시늉을 하였다.

"낭패로세. 비가 그치질 않으니 꼼짝없이 일박 하겠군."

"주모, 여기 술하구 요깃거리 좀 내 주오."

나그네 행색의 첫봉이가 둘봉이를 모른 체하면서 외쳤다. 안방에서 이른잠을 자던 주모가

눈을 비비면서 나왔다.

"예예, 어서 오셔요. 밥은 없으나 술하구 장떡이 남았어요."

"아무거나 따끈히 데워만 주오."

주모가 둘봉이와 변가가 배를 깔고 엎드린 방을 들여다보았다.

"손님들 주무시구 가시려우?"

"아따 누가 밥값 안 낸다우. 아까부터 두 양주가 자꾸만 캐구 야단일세."

"...... 여기 손님 한 분이 또 오셨으니 동석하시지요."

"그야 어렵지 않지. 봉노에 내 자리 네 구들이 따루 있나. 어서 들어와 섞이시우."

"실례하우."

짐짓 예를 나누면서 첫봉이가 들어왔다. 주모가 관솔불을 켜서 들여주었다. 셋은 아무 말

이 없다가 주모가 술상을 들여놓고 안방으로 물러간 뒤에 그들은 목소리를 낮추어 얘기를

시작하였다.

"어디 와 있수?"

변가가 물으니 첫봉이는 첫 잔을 달게 마시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남창방에서 몇 명씩 나누어서 임집을 찾아 과객질을 하였소. 나는 궁둥이두 붙이

지 않구 내쳐서 오는 길이오."

"강두령네두 달내방에 닿았는지 모르겠네. 그쪽은 머리 수가 많으니 아마 과객질두 못하

구 산에서 비를 만났을 게요. 고생이 심할 텐데."

변가가 생각한 대로 안을 내어보았다. 그는 아까 불타산 패거리들이 시작세를 받으러 마

을에 내려와 민가에서 행패를 놓던 일이며, 봉두원에 법호가 내려온다는 것과 마을 사내를

끌어들일 계획을 말하였다.

"아무래두 우리는 타처의 객이니 꾀를 쓰기가 불리하겠소. 그자를 앞잡이 세워서 두 중놈

을 사로잡읍시다."

"좋은 생각이오."

"사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진한 것으로 꾸미고는 초상집을 만든단 말이우. 초상집에 동

네 사람들이 모이는 거야 누가 뭐라겠소."

첫봉이가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보더니 드디어 무릎을 치는 것이었다.

"음 그렇게 도모하면 되겠군. 내가 가서 아이들을 데리구 올 테니까 그동안에 변두령은

문상객 노릇을 허슈."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중인데, 밖에서 주인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오는군."

주막 여자는 오늘따라 늦손님이 모여드는 것만 반가워서 늦게 도착한 업복이도 봉놋방으

로 들여밀었다. 선흥이네는 모두 열댓 명이나 되어서 달내방 어름의 세 마을에 분산하여 상

단 패거리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큰두령께서는 원을 치든지 불타산을 덮치자구 하십니다."

업복이가 말하자 첫봉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불타산을 차지하자면야 아무래두 무슨 대순가. 야습을 해버리면 되지. 허나 이번 일

은 심백이를 사로잡자는 것이니 실수가 없어야지. 심백이를 산 채루 잡으려면 함정을 파구

덫을 놔야지 몰이를 해서는 놓치거든."

"심백이놈 잡히기만 해봐라. 내 손으로 심장을 헤쳐서 어머니 원수를 갚을 테다."

둘봉이가 이를 갈았고, 첫봉이도 눈을 빛내면서 중얼거렸다.

"어머니하구 세봉이 산소 앞에서 그놈의 목을 벨 테다."

첫봉이가 남창방으로 되돌아가서 기다리는 칠팔 명의 졸개들을 초상집으로 데려오기로 하

였고, 업복이는 선흥이가 거느린 졸개들을 주막에 대기시켜놓기로 하고서 제각기 왔던 길을

되집어갔다. 변가와 둘봉이는 우선 할 일이 있었다. 발소리를 죽여 안방 문 앞에 가서 귀를

기울여보니 사내의 코고는 숨소리가 드높았는데, 아마도 두 양주가 초저녁잠에 곯아떨어진

듯하였다. 변가가 먼저 방문을 슬그머니 열고 들어섰고 둘봉이도 뒤를 따랐다. 변가가 주막

집 사내를 덮쳐서 버선으로 잎을 틀어막고 이불 홑청을 좔좔 뜯어내어 북북 찢어서는 손목

과 발목을 단단히 동여맸으며, 둘봉이도 아낙네를 결박하였다. 이불을 들씌워놓으니 꿈틀거

리는데 변가가 지끈 밟아주며 나직하게 얼러대었다.

"가만히 잠자면 모르되 공연히 애달캐달 수를 썼다간 창날 맞구 뒈어지는 게여. 사정이

있어 이러는 것이니 하룻밤만 고생하시게."

그들은 방을 나와서 문고리를 걸고 굵은 나뭇가지를 두어 개 겹쳐서 끼워놓았다.

"우리가 옆방에서 새우는데 꿈쩍하면 댓바람에 쫓아들어와서 창으루 쑤셔버릴 테다. 거푸

말해두지만 잠이나 자란 말야."

변가가 다시 다짐을 두었으니 그들이 빠져나오려면 날이나 새어야 엄두를 내어볼 것이다.

두 사람은 변가가 마음을 잡아둔 사내의 집으로 찾아갔다. 변가가 삽짝 앞을 돌아 안방을

눈짐작하고서 가까이 다다가서 조용히 불렀다.

"여보슈, 문 좀 열어."

아낙네가 재빨리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내요, 아까 왔다 간 사람이우."

아낙네가 종종걸음으로 뛰어나와 삽짝을 열어주었고 그들은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사내는

이 궁리 저 궁리로 간을 졸였는지 곰방대를 연달아 피워대어 방안에 담배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아주머니두 좀 뵈입시다."

여자가 수줍은지 입을 가리고 들어와 윗목에 앉는데, 과연 가난한 농투성이의 아낙으로는

아까울 만큼 절색이었다.

"다름이 아니고 오늘 이 집에서 초상을 좀 치러야겠소이다."

영문을 몰라하는 그 부부에게 변가가 이러저러한 안을 내어 설명해주고 나서,

"그리된 연후에 댁네들은 여길 떠나서 우리 달마산 아랫녘에다 그럴싸한 주막을 내어줄

테요. 이젠 아이들도 주림을 면하게 되겠구려."

하면서 달래었다. 부부는 캄캄칠흑에 일점 광명을 만난 듯이 서로 마주보며 기뻐하였다.

과연 일이 시작되는데 우선 낭자한 곡성이 조용한 원마을에 퍼져나갔다. 아낙네는 아예

집 밖의 마당으로 나와 퍼질러앉아서 땅을 두드리며 푸념 사설을 섞어서 늘어놓는 것이었

.

"아이고오 모질어라, 이내 신세가 모질구나. 언제는 이밥에 고기 반찬으루 살았나, 한칸

두옥 비바람에 북풍한설 겨우 가려 조밥에 나물죽으루 오순도순 살았더니 그나마도 터주가

새암하여 이 횡액이 웬말인가. 목을 매잤드면 말이나 남기구 갈 것이지 새끼들은 어찌하고

혼자만 간단 말요. 모질어라 모질어라 이년의 팔자가 모질어라."

방성대곡을 하는데 이곳 저곳에서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쑥덕쑥덕하며 혹은 눈물을 적

시고 혀를 두드리며 울타리 가녘으로 둘러서는 것이었다.

 

후선방의 용두원으로 내려오는 삼거리 길에 장정 세 사람을 거느린 승려가 나타났다.

는 짝달막하고 눈은 길고 가늘어 뱀과도 같은데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회색 승복에

긴 염주 드리우고 주홍빛 가사를 걸쳤다. 그의 곁에는 화승총을 가진 장정이 하나 따르고

나머지 둘은 늘어뜨린 손에 환도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삼거리에 이르러 곧장 용두원의 고

설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와 있던 불타산 졸개들이 마루에서 저녁을 먹다가 모두들 일

어나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법사님, 오십니까?"

그는 댓돌에 올라서지않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지스님은 안 나왔는가?"

"...... 뒤채에서 기다리구 계십니다. 셈을 맞출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법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채로 돌아가려니 졸개들이 물었다.

"법사님, 오늘밤 예서 묵을 겁니까?"

", 늦을 것 같다. 너희들은 납료를 받으면 곧 산으로 올라야겠다. 두령께서 기다리신다."

법호는 뒤채로 갔고, 기다리던 상노아이가 그를 맞아들였다. 주지는 승복 대신에 어울리지

도 않는 끼끗한 학창의를 입고 갖은 음식을 통영반 위에 그득히 벌려놓았는데, 곁에서는 소

실 행세하는 과수댁이 앉아 술잔 시중을 들고 있었다. 어느 호족이나 고을 수령에 못지않는

호사였다.

"허허허, 어서 오시오. 좀 늦으시길래 먼저 실례하였소이다."

"날씨가 궂어서 계곡이 미끄럽더군요."

"자아, 우선 한잔 쭉 하시고 속을 푸시지."

법호는 뻣뻣하게 마주 앉아 소매를 들어 일단 사양하였다.

"그보다두 납료 셈을 끝내야겠습니다. 아이들을 올려 보내야 하오."

", 내가 잊고 있었구려."

하면서 주지가 문권이며 장부를 꺼내어 펼쳐놓았다. 법호는 그것을 한 장씩 살피면서 소출

과 시작료와 납세액을 따지고 붓을 들어 계산을 해 보았다.

"소출이 천칠백 석이면 돈으로 팔백오십 냥이요, 면포로는 백 스물한 필이오, 따라서 우리

에게 줄 납료가 이백오십 냥이로군."

주지는 펄쩍 뛰었다.

"시작료를 빼긴 하였으나, 그 팔백기십여 냥에서 납세액을 제하고 원의 관리비를 빼고 사

찰수리비며 경비를 제하면 별로이 남는 것두 없는 터에 다만 시작 관리한 수고료 이백오십

냥은 너무 과하오."

법호는 눈을 깜박이면서 주지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귀찮은 듯이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우리의 납료를 얼마쯤 준비했소이까?"

"글세...... 뭐 백 냥에다 무명 오십 동을 쳐두었습지요."

법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끝으로 상머리를 잡아 슬쩍 치켜들었다. 상 위에 그득

히 놓였던 술병이며 주전자, 주발, 대접, 양푼 등속이 와르르 몰리면서 주지의 무릎 위로 쏟

아져 내려갔다. 주지는 당황하여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뒤로 물러나 앉았으나 그의 새

하얀 학창의는 얼룩얼룩 더럽혀졌다. 법호가 웃음을 그치지 않으면서,

"스님은 성급하기두 하십니다. 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자시려 하니, 그 좁은 입으루 다 들

어가겠소이까. 적게 마시고 조금 드셔야 양생에 좋습니다."

어르듯 말했다.

"...... 이 아까운 음식을...... "

주지는 과수댁이 쓸어담는 음식들을 낭패한 기색으로 내려다보았고, 법호가 펼쳐놓았던

문권들을 간추리면서 은근히 힘을 주어 말하였다.

"우리 천년암에는 입이 많소이다."

과수댁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저희 성님께서 원으로 진작 큰상을 내보냈어요."

"보살님, 소승은 곡주를 못하오니 꿀물이나 한 대접 타다 주시지요. 그리구 주지스님께는

따로이 새 주안상을 차려다 드리십시오. 새 자리가 될 것이니 주안상두 바꿔야지요."

하며 법호는 싱긋이 웃었다. 주지는 어쩌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임해사와는 어찌하기루 되었소?"

물으니 법호가 거침없이 지껄였다.

"원래 절이 망하려면 새우젓장수가 먼저 길을 낸다 하옵니다. 바른 승려라면 모르되 구천

지옥에 떨어져 억겁을 보낼 더러운 중놈들이 가련하여 부처님께 공양을 드려주기로 하였지

. 남의 살을 부비며 허벅지에 코를 박구 지내는 값은 따루 쳐서 받아얍지요. 즉 몫이 세

가지이니 한 몫은 탐욕스런 재주의 것이요, 하나는 수도하는 승려의 몫이며, 또 하나가 부처

님 몫이올시다."

주지는 법호의 뜻을 알아듣고 있었으나, 응낙하면 거의 반타작이 되겠는지라 모면할 길을

궁리하느라고 좌불안석이었다. 소실과 처가 아까보다 더욱 떡벌어진 주안상을 차려 맞들고

들어왔다. 주지가 준비해 두었던 돈 열 꿰미와 무명 오십 동을 내어 방에다 쌓으니 제법 큼

직한 무더기가 되었으나 법호는 힐끗 바라보고 말하였다.

"우선 이것만 받아두고...... 열흘 안으로 공양미를 받으러 오겠소이다. 미곡 일백오십 석과

무명 스무 동을 준비해두십시오. 대자대비하신 석존께서 스님의 재물을 너그러이 받아들이

실 게요. 우리 천년암의 부처님은 특히 영험이 있으시니까."

주지는 얼결에 법호가 내어민 약조장에다 수결을 하였다. 법호가 술을 따라주면서 물었다.

"여기 내려보낸 저희 아이들이 곧 쓸 만하시지요?"

"글쎄 뭐...... 수세는 잘하는데 좀 난폭하여 걱정이우."

"그놈들이 다 스님의 덕을 믿고 그러지 않습니까. 듣자하니 꽤 아리따운 유부녀가 있답디

."

주지는 계면쩍은지 안주를 집적이며 우물우물하였다.

"뭘 공연히 그 사람들이 내게 연분을 맺어준다구 나서서 설치는구려."

법호가 미닫이를 열고 내다보았다.

"여봐라......"

그러나 마당에 섰을 상노는 보이질 않았고 대문 밖에서 뭔가 시끄러운 소리들이 전해왔

.

"저게 무슨 소리요......"

여자들도 마루로 나와서 귀를 기울이더니,

"저게 무슨 방정맞은 곡성일꼬."

"누가 우는 모양이어요."

하며 제각기 신을 꿰는 것이었다. 한참 뒤에 상노 아이가 쫓아들어왔다. 주지가 물으니,

여인이 문 밖에 와서 머리를 풀고 몸부림을 치며 통곡을 하고 있다고 아뢰었다.

"웬년이 여기가 어디라구 찾아와서 감히 방자한 울음소리를 낸단 말이냐?"

주지가 노하여 고함을 버럭 질렀고, 상노가 다시 말하였다.

"아까 산어른들이 시작세를 내지 않는 집에 검징을 나갔다가 겨우살이하려고 숨겨둔 곡식

을 빼앗아왔답니다. 그래서 그 집 사내가 목을 맸는데 여인네가 하소하러 온 것이라구 합니

."

"그년이 제발루 찾아왔단 말이냐?"

주지가 금방 알아듣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벌써부터 그가 욕심을 품어왔던 계집인데 지아

비가 있는지라 감히 어찌할 도리가 없더니, 불타산 패거리의 무지막지한 행패가 주효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리 개운한 기분은 아니어서 주지는 혀를 차며 도로 주저앉았을 뿐이

었다. 그때에 마을 사람 하나를 앞세우고 험상궂게 생긴 중놈이 뒤채로 들어왔다.

"이 사람이 우리에게 헐 말이 있다구 합니다."

주지와 법호는 원주가 앞세워 들어온 마을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자는 가장 장한 듯이

떠벌리는데,

"아무래두 어딘가 이상합니다. 갑자기 초상이 나자마자 웬 낯선 사내들이 너덧 명이나 모

였는데 시방 저문 밖에 구경꾼들과 함께 섞여 있습니다. 일가 친척이 초상난 줄 알고 일시

에 모여들 리두 없잖습니까?"

"정녕 이 마을에서 처음 보는 자들인가?"

법호가 묻자. 마을 사람은 분명히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법호는 친히 소매를 떨치며

일어났다. 그가 앞채로 돌아 나가니 대문간에 졸개들이 몰려서서 음담으로 농을 던지고,

, 여자의 행역하는 소리가 떠들썩하였다.

"비켜라......"

법호가 날카로운 눈으로 밖을 살피는데, 어둠속에 구경꾼들이 몰려 서 있었다. 여인은 더

욱 악을 썼다.

"이놈들아 하늘 같은 가장을 죽여놓구, 너희들이 얼마나 잘사나 두구 보자. 이 야차 같은

놈들아, 무도한 놈들아, 피를 빨아두 유분수지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년 농사를 지어 흉작이

되었는데 쌀 한톨 남기지 않구 긁어갔으니 너희가 인두겁을 쓴 마군이지 어찌 불자란 말이

. 천벌이 무섭지 않느냐."

법호가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고 침착하게 말하였다.

"저년을 잡아들여라."

졸개들이 희희닥거리며 여인을 붙잡으려고 하자 여인은 펄쩍 일어나더니 바로 그때를 기

다리기나 한 것처럼 뒤에 섰는 군중들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졸개들이 여자의 뒤를 따

라서 우우 몰려갔고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법호가 대문 쪽에 다가섰던

장정의 그림자를 보고 마음속으로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바짝 다가선 그의 손에는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법호는 칼끝이 옆구리로 아프게 파고드는 것을 느꼈고, 여자를 잡으

려고 몰려든 졸개들의 뒤에 사내들 몇이 달라붙는 것을 보았다. 법호의 옆구리에 칼을 댄

장정이 그의 등을 밀었다.

"입 딱 막구 안으루 들어가시게."

법호가 옆걸음으로 대문간에 들어서니 장정은 그를 으슥한 그늘 속으로 끌어들였다.

"자네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긴 용두원이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법호가 끌려들어가며 슬쩍 건드려보았으나 장정은 대답 대신 칼을 더욱 아프게 몇번 쑤셨

.

"잠자쿠 있지 않으면 산적꽂이가 되는 게여!"

달아나는 아낙네를 좇아 밖으로 몰려나간 심백이네 졸개들은 용두원 구경꾼들 틈에 섞였

던 장정 몇사람과 숲에 숨어 있던 몇사람이 일시에 몰려나와 그들을 앞뒤로 둘러싸고 몽둥

이를 휘둘렀다. 맨손에 여인을 희롱하려고 방심해 있던 터이라 손을 휘젓고 발을 들어 막는

시늉으로 뒷걸음질해보건만 오래 노리던 자들의 예기를 꺾을 수가 있나. 어깻죽지며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고 뒤로 넘어지거나 무릎을 꺾고 주저앉았다. 여인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

리며 일어났고, 칠팔 명의 장정들은 널브러진 자들을 일으켜 옆에 끼고 원의 고설대문 안으

로 조용히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어둠속에서 툭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멀찍이 달아나버린 뒤라 용두원 앞길

은 괴괴하였다. 원의 안채 쪽에서도 뭔가 수런대는 소리가 들리며 한 떼의 사내들이 몰려나

왔다. 뒷담을 넘어 들어와 뒤채를 이 잡듯이 뒤지고 원의 안채까지 뒤짐을 하고 나오는 모

양이었다. 그들은 먼저 대문을 닫고 빗장을 단단히 질렀다. 어둠속에 은신했던 자가 법호의

등덜미를 호되게 밀어내니, 법호는 제물에 앞으로 고꾸라지며 안에서 밀려나오던 사내들의

발 아래 엎어졌다. 강선흥이가 법호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이놈이 누구냐, 심백이는 없는가?"

법호를 잡았던 첫봉이가 말하였다.

"지랄병 들린 중놈인데, 심백이의 오른팔이다. 주지는 어떻게 되었니?"

"두 계집과 주지를 잡아서 대들보에다 나란히 매달아두었다."

"여기 졸개들 네 놈을 끌어왔수."

변가와 둘봉이가 묶인 놈들을 가리켰다. 업복이들은 안채에 있던 두 졸개를 묶어서 끌고

왔다. 그들은 졸개를 굴비두름 엮듯 하여 광에다 처박아두고 직이를 세워두었다. 첫봉이가

말하였다.

"용두원을 소리없이 덮쳤으니 이제 반쯤 성사한 셈이다."

"여기서 불타산으로 바루 쳐들어갈까?"

"그럴 필요 없다. 그놈을 이리로 불러 내려오게 해야지."

"원은 아이들께 맡기고 우리는 뒤채루 갑시다. 요기 좀 해야지, 하루 종일 비 맞구 저녁까

지 설쳤더니 새벽 호랑이 몰골일세."

업복이가 말하여 그제사 그들은 서성대기를 멈추고 머릿수를 헤어보고 일을 나누는 등 싸

움의 끝막음을 해두었다. 원에 졸개들이 들어가 쉬도록 해주고 큰 소리로 잡담하지 못하도

록 단속을 하고 나서, 선흥이며 첫봉이 등등의 두령급들은 뒤채로 법호를 끌고 갔다. 주지의

어울리지 않던 학창의는 찢겨져 뒷결박이 되어 있고 발이 동동 마루 끝머리 위까지 들씌워

서 묶어버렸으므로 고쟁이 바람의 두 다리만 달랑 떠 있었다. 첫봉이가 말하였다.

"계집들은 건넌방에 처박아두고, 그 중놈은 이리로 끌어오너라."

모두들 방안에 들어서자 떡벌어진 다담상을 대하더니, 걸귀들린 듯이 달려들어 닭다리도

뜯고 전도 움켜 넣으며 한동안 희희낙락하였다.

"어 그 자식, 이렇게 처먹으니 중놈이 수신할 생각은 않구 계집 밝힐 생각이나 하지."

변가는 역시 취재에 밝아서 이방 저방을 돌아다니며 재물을 걷는데, 마침 시작세의 셈이

있던 때이라 원의 곳곳마다 돈과 곡식이 쏟아져 나왔다.

"변두령 눈이 과연 부엉이 밤눈보다두 밝구려."

재물을 보자 첫봉이도 즐거워서 이리저리 돈꿰미를 헤아리고 무명도 풀어 헤치면서 말하

였다. 선흥이는 코가 쑥 빠져서 고개를 숙이고 앉은 법호에게로 술을 따라 내밀어주었다.

"자네두 한잔 들게."

그러나 법호는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하였다.

"곡차는 못하오."

"어 그놈 과연 법도를 아는 놈이로구나. 불자가 모름지기 그래야지."

"보아하니...... 어느 산에들 계시우?"

"그래 꼴이 화적당이란 말이렷다. 범 잡는 담비요 구렁이 성님에 이무기라고, 우리는 느이

같은 좀도적들을 잡으려 다니는 분들이다."

선흥이와 법호가 수작을 나누니, 첫봉이가 재물 살피기를 멈추고 돌아앉았다.

"나는 조니포의 허초봉이란 사람이다. 느이 일당들께 아우와 모친을 잃었단 말야. 원한은

심백이놈에게 있지. 너하군 상관이 없다. 그러니 심백이만 잡게 해주면 재물도 나누어주려니

와 무사 방면할 테니 시키는 대루 하겠느냐?"

법호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이고 앞에 꿇어앉은 주지가 입을 떼었다.

"저놈과 심백이는 등과 가슴 같은 사이인지라 안되오. 내가 도와드리리다."

첫봉이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손수 주지의 결박을 풀었다.

"과연 대사의 말이 옳소. 스님은 이들과 아무 관계가 없으니 우리들과 동모하면 이득이

있을지언정 해가 되지는 않으리다."

주지는 풀린 손을 매만지며 법호를 두려운 듯이 힐끔거리는 것이었다.

"후환만 없다면야...... 관에다 발고하기두 어려운 일은 아니었소. 허나, 사찰의 장토에 묶인

몸이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갖은 핍박을 당해왔소이다. 장사들께서는 어디서 오셨습

니까?"

"그런 건 자세히 알 필요가 없구...... 심백이를 끌어내릴 수를 생각해보우."

주지가 다시 우물쭈물하더니 첫봉이에게 바짝 다가앉아 귀에다 입을 대고 속삭였다.

"심백이가 저놈을 친삼촌같이 여깁니다. 저놈이 변고를 알려 내려오라면 틀림없이 올 것

입니다. 서신을 쓰도록 하십시오. 소승이 보아드리리다."

첫봉이 생각에 글을 아는 자가 일행 중에 한 사람도 없으니 그것은 불리하였다.

"우리가 대사를 믿어두 좋을까......"

"아니 올해의 소출을 다 바쳐두 저놈들만 여기서 내몰아주신다면 바랄 것이 없소이다."

첫봉이가 이 궁리 저런 꾀를 생각해보고 나서,

"오며 가며 사십 리 길인데 곧 날이 새버리겠는걸. 그리구 날이 새면 동네것들 중에 은밀

히 가서 고하는 자가 있을 게란 말이지."

하면서 변가와 선흥이를 불러 의논들을 하였다. 변가가 말하기를,

"아무래두 민가 근처에 어물거리다가는 우리에게 불리하우. 이왕 내친걸음이니 원이나 털

어먹고, 아이들을 깨워서 일방 산을 타고 산채로 돌아가고 심백이는 강두령과 우리 몇이 꾀

를 써서 잡읍시다."

하고 안을 내었다.

"심백이가 워낙에 의심이 많구 의뭉한 놈이우. 또한 졸개들두 조련이 잘되어 만만치가 않

."

용두원을 덮치는 데는 성사하였으나, 심백이를 끌어낼 의견은 좀체로 모아지지 않았다.

"우리끼리 조용히 얘기하자."

첫봉이가 선흥이와 변가를 따로 밖으로 불어내어 은밀히 수작을 하는데 먼저 변가가 말하

였다.

"허서방은 너무 저 주지놈을 믿지 마우. 우리는 남의 동네에 와 있단 말유."

첫봉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려면 내가 그런 궁리가 없겠수. 양수겸장을 불러야지. 턱없이 믿을 수야 있나. 주지

는 후환이 두렵기는 하지만 심백이네가 패망하는 것을 원하기는 할 게요. 그러나 승산이 훤

히 내다보일 때까지이고 불리하면 곧 저쪽을 돕겠지."

"뭘 콩이야 팥이야 하구들 있어. 까짓 심백이란 놈은 내 밥인데 그냥 불타산으루 올라가

자니까."

선흥이가 못내 답답하여 투덜거리자 둘봉이는 조금 서운해진 모양이었다.

"사로잡아야지 손가락 하나 다쳐선 안된다. 산 채루 조니포루 끌구 내려가서 제사를 지내

야겠다."

"적당히 때려 잡고 한편은 꾀를 써서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군."

첫봉이가 말하였다.

"아무래두 이건 우리 식구로 말미암은 거사이니 몸 좀 버릴 각오를 해야겠네. 지난번 달

마산 때에는 고만이가 수고를 하였고, 이번엔 내가 하지."

"네가 하다니, 무슨 얘기냐......"

"심백이네 천년암으루 찾아올라갈 작정이다."

변가가 어이없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게가 무슨 사돈댁이라두 되는 줄 아시우. 실은 우리가 정면으루 맞서서 쳐들어가두 피차

에 살상이 큰데다 지세 불리하여 이길 둥 말 둥이오. 저쪽에는 아직두 화승총이 세 자루나

있습니다."

"땅꾼이 뱀을 무서워하면 개구리 무엇보다두 못하다오. 내가 짐짓 잡힌 체하여 심백이를

끌어내릴 테니, 이렇게 하여보자."

첫봉이가 차근차근 얘기를 꺼내었고, 선흥이는 그의 고육지책을 듣고 나서 걱정이 되었는

지 말리는 것이었다.

"내가 올라가구 사로잡는 것은 네가 하여라. 심백이가 너를 그냥 두지는 않을 게다."

"아니여, 너는 장연서두 소문난 장사요 네가 잡혔다면 심백이가 분명히 의심을 할 게다.

, 서둘러야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산채에 닿아야 된다."

결국 첫봉이의 안을 따라서 주지와 첫봉이가 먼저 산에 오르기로 하였다. 그들은 주지의

진심을 알 수가 없으니 우선 용두원에 잠복할 뜻을 보였고, 만일 주지가 변심하여 심백이에

게 사실을 고하면 그의 살림집은 물론이요 원을 불사르고 두 계집들도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단단히 협박을 해두었다. 변가가 첫봉이를 결박짓는데 둘봉이는 이것이 혹시 가형과의 마지

막 작별이나 아닌가 하여 안절부절 못하면서 안을 바꿀 것을 몇번이나 권하였다.

", 조니포에서 그래두 이 첫봉이가 대국인들과 거래하며 잔뼈가 굵은 놈이다. 까짓 사노

의 새끼가 절밥을 먹어 염불이나 배웠다구 나보다 세사를 알랴. 두고 보아라. 동래서 의주

가는데 정주서 새 말 탄 격이다. 내일은 금사사에서 네봉이도 데려다가 어머니와 세봉이 산

소에 가는 게야."

"그렇게 묶여서 어찌 산길을 올라가려우."

"단단히 묶어주게."

변가는 밧줄을 첫봉이의 몸에 꽁꽁 둘러 결박의 매듭을 맺었다. 선흥이가 법호의 목에 걸

린 염주를 벗겨서 결박지은 첫봉이의 목에다 걸어주면서 동행할 주지에게 주의를 주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여기서 대사를 기다릴 테지만, 만약에 중화참까지 심백이나 거기가 오

질 않으면 두 보살짜리는 하는 수 없이 베일 테유."

"여부가 있겠습니까마는, 소승도 전정을 고치는 일이온데 사력을 다하겠소이다."

첫봉이와 대사가 용두원을 나선 뒤에 한 식경쯤 지나서 선흥이네들은 원에다 불을 밝혀놓

은 채로 몇사람씩 나누어 조용히 원마을을 빠져나갔다. 선흥이 일당은 법호와 그 졸개의 한

놈만을 포박하여 앞세우고 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후선방을 지나니 청석산 봉수대로 나아가는 산줄기와 불타산의 산줄기가 만나는 가파른

비탈길이 나왔다. 비탈길을 넘으면 곧 성제골인데 골짜기가 후미지고 상수리나무와 소나무

가 빽빽하여 바윗돌과 물뿐인 험한 길을 행로로 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계곡을 건너 천

불사와 임해사로 갈리는 산등성이 아래 노루목이라는 좁다랗고 긴 샛길이 있었는데 양쪽은

잔솔밭이 우거진 급경사의 비탈길이었다. 변가와 둘봉이가 정탐을 해두었던 길목이었고 끌

고 온 졸개에게 확인하니 그 역시 노루목이라는 대답이었다. 노루만이 다녀서 생긴 길이라

는 곳인데 잡초가 무릎께에 오도록 무성하여 길인지 냇물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들은

물이 불어난 계곡을 간신히 건너 노루목채 못미처서 숲속에서 다리쉬임을 하며 후리채를 치

기로 하였다. 비는 그쳤건만 하늘에는 별 한점 보이질 않았다.

"아무래두 노숙할 일수인데......"

"따져보랴 준비하랴 가며 오며 시간이 걸릴 터인즉, 어두워도 좋고 밝아져서 와도 좋소.

천불사에서 용두원으로 내려오려면 이곳이 지름길입니다. 일전을 겨루기엔 이만큼 유리한

곳이 없겠소이다."

변가와 선흥이가 얘기를 나누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결박지어져 앉았던 법호가 뒤

로 벌렁 나자빠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굶주린 역마처럼 발길질로 땅을 헤집고 몸을 뒤틀

면서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차차 가래질이 잦아지면서 발을 주욱 뻗고 무

릎을 덜덜 떨다가 딱 그쳐버리는데 혼절한 모양이었다. 어두워서 표정이나 눈알딱지가 보이

지는 않지만, 발광을 일으킨 듯하였다.

"지랄병에는 매가 직효라는데 올라타구 따귀를 올려붙일까요?"

졸개 하나가 아는 채를 하였으나,

"느이 조상 중에 의원 해먹다 죽은 귀신이 씌웠니?" 곰의 발바닥 티눈 뽑을 걱정이나 하

여라."

하며 변가가 코방귀 면박을 주었다.

"또 깨어나서 소리지를지두 모르니 입막음이나 해두지."

선흥이가 졸개의 두건을 풀어 법호의 입에다 묶어놓는데 그는 말뚝처럼 굳어 있다. 그들

은 각기 진을 벌이는데 물살 사나운 계곡 건너편에 활 가진 자를 네댓 명 박아두고 양편 등

성이에는 장창이며 병장기가진 자들을 열댓 명 벌여놓았는데 선흥이와 둘봉이가 멀찍이 앞

을 질러가 역으로 들이치기로 하였다. 앞은 거꾸로 겨눈 궁시의 촉처럼 그들의 등뒤를 예리

하게 노리며, 뒤는 멀찍이 틔워놓았으니 물살 빠른 계곡 안으로 몰기 위해서였다. 달마산 산

채의 노를 잘 던지는 자를 궁수들과 함께 붙여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선흥이와 둘봉이가

무슨 남다른 병법이나 설진을 알까마는 싸움판에는 여러 차례를 겪은 놈이 상수인 까닭이었

.

결박된 첫봉이와 주지가 불타산 창암골에 도착한 것은 거의 오경 무렵이었는데, 그들이

올라가는 도중에 딱딱이 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더니 여러 초소로 전해져서 횃불이 천년암

주변의 곳곳에서 일렁거렸다. 그들의 등뒤와 앞으로 거뭇거뭇한 그림자들이 나타나 수하를

하는 것이었다.

"내다, 덕현이다."

"그 옆은 누구요?"

"심두령을 바삐 뵈어야겠다. 큰 우환거리가 생겼다."

그들은 수군수군하며 그들을 데리고 산성 안쪽의 천년암으로 데리고 갔고, 발짓 빠른 자

가 달려가 전했는지 심백이가 암자 밖에 마중을 나오고 있었다.

"주지께서 웬일이시우?"

주지는 슬그머니 첫봉이의 뒷결박지은 손을 꾹 눌렀다 놓으며,

"시방 밑에서는 야단법석이 났소이다. 이자를 아시겠소?"

하는데 심백이는 졸개가 들려준 횃불을 쳐들고 첫봉이를 보자마자 과연 눈을 둥그렇게 뜨는

것이었다.

"...... 이놈이  멍구미에서 밀상질해먹는 놈인데."

"이놈과 남대천의 강선흥이란 놈이 짝패가 되어 읍내 왈짜들 몇을 거느리고 용두원을 습

격하기루 하였답니다. 초저녁부터 또 한 놈과 주막에 들어 염탐을 하다가 주모의 고경으로

원의 아이들이 잡아 문초하였지요."

"납료를 받으러 간 법호가 소식이 감감하기에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나 하였더니......"

심백이는 물끄러미 첫봉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놈 참 운수치고는...... 시래기 스무 동두 못 먹구 황천에 멱감을 팔자로구나. 예가 어디

라구 얼씬대는 게냐? 불타산이 무슨 시골 저자의 어물전인 줄 알았군. 갯가놈이 산에 올랐

으니 안줏감밖에 쓸 데가 없겠다. 그런데...... 아이들 모두 놓아두고 주지께서 몸소 위험한

행보를 하시다니...... 법호가 그리 시킵니까?"

"아니오, 내가 자청하였지요. 저놈들이 원을 들이친다는데 달군 쇠절판에 얹힌 형국이라,

천신만고하며 오는 길이오. 법호는 아이들과 함께 원을 지켜야겠답디다. 그래두 작대기나마

휘둘 줄 아는 장정이 한 손이라두 더 소용에 닿지, 우리 같은 수도인이야 뭐 보탤 일이 있

어야지."

심백이가 머리를 끄덕였다. 주지란 놈 용두원이 위급하다니 제 한몸 빼쳐 나와가지고 장

한 듯이 지껄인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꼭 믿기지는 않아서 다시 떠보는 말을 흘

렸다.

"법호가 몇자 적어주었을 텐데......"

"문초를 하고 나서 워낙 놈들이 가까운 곳에 있는지라, 그럴 경황이 없었지요. 지금 남창

방에서 패를 나누어 대기하구 있답니다."

"이놈을 다시 한번 족쳐보아야겠군. 산길을 오르고도 눈구녕에 제법 독기가 보이는걸.

게 풀릴 때까지 두드려놓아야겠다."

심백이 중얼거리는데, 곁에 섰던 졸개가 첫봉이의 가슴께를 손짓했다.

"두령님, 이건 법사님 염주가 아니오?"

심백이 그제서야 첫봉이의 목에 늘어진 염주알을 손바닥에 놓고 살펴보았다. 곁에서 주지

가 능청을 떠는데, 그는 단단히 협박을 받은 뒤에, 못되어도 가슴에 걸린 생선가시 같은 심

백과 법호를 내쫓거나 죽일 수는 있겠다는 승산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게 법호스님의 것인가요. 과연 세심한 분이올시다."

"...... 급하긴 급한 모양이로다."

심백이가 앞뒤의 이치를 스스로 맞춘 양이 적실하였다. 그는 발끝에다 침을 뱉고는 첫봉

이를 노려보며 한손으로는 산발한 그의 머리를 잡아 휘어감고 흔들며 속삭였다.

"감히 여기까지 왔으니 손님 대접은 각별히 해주겠다. 만약에 용두원에 무슨 일이 생기면

산 채루 다비를 치러줄 것이니 염불이나 외우고 있거라."

심백이는 졸개들에게 지시하였다.

"이 손님을 우리 산채에서 제일 넓은 방에다 모셔두어라."

첫봉이가 졸개에게 끌려가며 심백의 뒤통수에다 대고 내일이 네 제삿날이다 외쳐주고 싶

었건만 아직 미끼를 입에 넣은 찰나가 아니어서 안달을 지그시 누르기로 하였다. 가슴속에

는 기쁨이 절반이요 식구들의 죽음에 대한 원한이 엇갈려서 첫봉이는 몇번이나 후루루 하면

서 밀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끌려간 곳은 암자 뒤편의 벼랑 밑인데 시큼한 두엄 냄새

가 풍겨오는 곳이 그리 깨끗한 장소는 아닌 모양이었다. 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는

데 발밑이 푹푹 빠지는 것이 잿더미인 것 같았다. 졸개가 그를 나무 말뚝에다 단단히 묶으

면서 우롱하여 말하였다.

"객사가 허술하여 안됐네마는 시장기는 걱정없을 걸세. 지천으루 깔린 것이 음식이니까."

첫봉이는 졸개가 사라진 뒤에야 거기가 높다란 뒷간의 바로 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

나 첫봉이는 그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들이 차차 멀어져가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연신 입을

벌려 벙긋대었다.

심백이가 역시 꼼꼼한 자라, 먼저 남창방을 살필 오를 뽑아 내려보내고 곧 용두원으로 내

려가는 지름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국 없는 조반을 먹은 듯이 무언가 미진하고 속이 더부

룩하니 걸음이 가볍지 아니하였다. 심백이는 장약을 잰 총을 들고 짜른 환도 허리춤에 찌

르고서 맨 뒤에 따라갔다. 날이 부잇부잇 밝아오는데 비 그친 새벽의 멧새들이란 그 울음이

더욱 청명하고 나는 것도 높이 뜨는지 숲속이 재깔 법석하였다. 그들이 나무를 건드리고 지

날 적마다 간밤 비에 매달린 물방울이 여름 소나기 쏟아지듯 하는데 어느참에 성제골 노루

목 가까이 당도하였다.

"물이 불었을 텐데 고산 쪽으로 넘어가서 용두원으루 돌아가지요."

졸개가 가까이 들리는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걱정을 하였고, 심백이는 그렇지 않아도 께

름한 판에 늘 다니던 길을 피하는 것은 더욱 못할 일이라 역정을 내었다.

"이놈아, 물에 쓸려 내려가면 곧장 마리포까지 갈 테니 가서 소금짐이나 져올 테냐, 열 걸

음두 못 되는 내를 건너기 싫다구 세 배가 넘는 길루 돌아간단 말이냐."

그들은 노루목의 초입에 들어섰다. 오솔길 끝에 계곡의 물이 보이는데 바위들이 드문드문

드러난 꼴이 수장을 지낼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노루목이 끝나는 솔밭에 묶여 재갈을 물리어 뻗어 있는 법호는 실상 광증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주위를 자기에게서 돌리고자 거짓 발광을 해 보였던 것이었고 동이 틀 때까

지 뻣뻣이 널브러져 있었으니, 선흥이네 패들은 모두들 법호의 몸뚱아리를 툇마루 기둥에

걸린 종자 수수 모양 대견치 않게 버려두고 있었던 것이다. 법호는 두런거리며 다가오는 인

기척에 귀를 바짝 모으고 있었다. 법호는 몸을 뒤틀어 엎드려서 땅바닥을 기었다. 뒷결박지

은 두 손과 재갈 물린 입이 부자유스러울 뿐이요 두 다리는 어디라도 뛰어갈 수가 있었다.

그는 우선 어깨에다 턱을 연신 비볐는데, 입에 묶인 무명 두건을 벗겨 내리기 위해서였다.

턱에 힘을 넣고는 당기고, 다시 느슨히 입을 다물며 재갈물림을 풀어나가다가 드디어 어깨

에 비벼서 턱 아래로 볏겨 내렸다. 법호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눈짐작해보는데, 머리 위

의 높직한 곳에 선흥이네 패거리들이 두 패로 나뉘어 숨었고, 선흥이는 앞서 나가서 숨은

모양이었다.

법호가 기절한 척하고 내버려진 덕으로 진 친 형세는 소상히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이제

사는 길은 노루목을 통과해서 여울을 건너지 않고 혼자서 달아날 위인은 아니었다. 이제 몇

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불타산도 빼앗기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나게 될지도 몰랐다.

심백이가 없었다면 법호 자기는 부랑하던 그해 겨울에 얼어 죽고 말았을 몸이었다. 그는 거

뭇거뭇한 사람의 몸집이 노루목으로 들어선 것을 보았다. 반쯤 들어설 때까지 사방이 쥐죽

은 듯하여 그들에게 알려주려는 법호는 침도 삼키지 못하였다. 이윽고 낯익은 심백이의 삭

발한 머리가 보이자, 법호는 자기도 모르게 우선,

", 심두령!"

하고 고함을 힘껏 내질렀고, 그 소리는 좁은 계곡에 메아리가 되어 여러 겹으로 울려퍼졌다.

"이쪽으루 뛰어......"

심백이 금방 법호의 목소리에서 찬물 맞은 듯이 몸을 움츠렸는가 싶더니 졸개들을 밀치고

앞으로 뛰는데, 뒤늦게 매복했던 달마산 패가 창이며, 활을 내리쏘았다. 그리고 양쪽에서 환

도를 휘두르며 수명의 살촉처럼 뾰족이 진을 쳤던 입구로부터 불타산 패거리는 훨씬 벗어나

있었다. 심백이 얼결에 앞으로 다가선 법호의 뒷결박을 칼로 끊어내고 뛰는데 등뒤에서 시

윗시윗 하면서 스쳐가던 화살 중에 두 대가 한쪽은 어깻죽지에 또 한쪽은 허벅지를 꿴다.

"어이쿠...... 나 죽네."

심백이가 주춤하면서 다리를 구부리자 법호가 날렵하게 그의 배 아래로 파고들어 등을 갖

다 대고 거의 업다시피 하며 일깨웠다.

"두령...... 잡히면 끝장이네."

하는 법호의 소리에 심백이는 허튼거리는 다리를 딛고 일어나 법호의 안내대로 계곡을 따라

서 아래로 내려가다가 드디어 함께 얼싸안고 급류로 떨어졌다.

"잡아라, 저쪽이다."

"건너편을 막아라!"

둘봉이가 억척스레 외치며 쫓아갔고, 건너편에 숨었던 궁수와 졸개도 강 건너 불 보기 모

양 속수무책, 물을 따라서 나란히 뛸 뿐이었다. 선흥이도 고함을 지르며 뒤를 쫓았건만,

참 뒤에 바위 끝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둘봉이와 마주쳤을 뿐이었다.

"어떻게 되었니?"

"이를 어쩌냐. 두 놈이 여기서 떨어져 저 아래로 삽시간에 흘러가 버렸다."

"이런 물에 살아날까?"

"그렇긴 하나...... 눈으루 보구 시신이라두 건져야지."

둘봉이는 바위에서 물까지 높이가 제법 되는지라 계속해서 넘어지고 고꾸라지며 험한 계

곡을 따라서 뛰어내려가는데 뒤로 멀찍이 선흥이가 따라갔다. 아직 부윰한 새벽이라 물속은

시커멓고 가운데쯤에 간간히 울뚝불뚝 솟은 바윗덩어리들이 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

이었다. 건너편에서 따르던 졸개들도 이제는 글렀다 싶어졌는지 뒤로 멀찍이 떨어져버렸는

, 근 오릿길이나 쫓아 내려오던 둘봉이가 한숨을 턱 내쉬면서 힘없이 주저앉았다. 선흥이

도 그 옆에 가서 주저앉으니 둘봉이는 돌연 얼굴을 찌푸리고 비죽비죽하더니 고개를 무릎에

박고 낮게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얘얘, 이런 물살에 휩쓸렸다간 벌써 이리저리 휩쓸리고 부딪쳐 콩가루가 되었겠다. 손두

안 대구 코풀었지 뭐냐. 조금 더 있다가 느이 언니와 함께, 슬슬 시신이나 찾으러 다니자.:

선흥이가 둘봉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래었건만, 둘봉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달포가 넘도록 갖은 고생을 겪으며 이제 막 잡은 것은 놓쳤으니, 무슨 낯으로 어머님께

제사를 드리겠냐. 언니는 또 나를 얼마나 원망하겠어."

"그게 어찌 네 잘못이냐. 내가 법호란 놈이 속임수로 광증을 낸 것을 모르고 단속을 소홀

히 하여 그리되었지."

둘봉이가 소매를 들어 낯을 씻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 바위 아래 계곡의 급한 여울 속으

로 뛰어들려는 동작을 하였고 선흥이가 허리를 꽉 껴안았다. 선흥이가 기운으로 말리는 바

에야 둘봉이가 한 발도 떼어놓을 수가 없는데 선흥이는 그를 달랑 들어서 멀찍이 끌어다가

주저 앉혔다.

", 느이 식구가 횡액을 당한 뒤에 함께 세상을 등지기루 하구 적굴에 들어왔는데, 그깟

일루 목숨을 버려서야 되겠니. 제놈이 아직 팔자가 그리되지 않아 살아 갔다 한들, 피차에

숨어 사는 신세는 매일반이다. 조선 팔도에 뛰면 어디루 뛰겠냐. 더구나 놈이 이 근방을 멀

리 벗어나지 못할 테니 곧 잡힐 게다."

"언니는 산채 올라가서 무사한지 모르겠네."

"어서 돌아가보자. 변서방이 졸개들 단속을 잘해놓았을 테니 별 걱정은 없다만, 천년암 쪽

이 궁금하구나."

선흥이가 둘봉이를 달래어 심백이 찾기를 만류시키고 노루목으로 되돌아가는데, 둘봉이는

아무래도 미진하여 연신 계곡의 여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거진 건널목쯤에 가까워서 선

흥이의 발에 무엇인가 걸리는 것이 있어 허리를 굽혀 내려다보니 화승총이었다.

", 여기서 물속으루 뛰어내렸구나."

선흥이가 총을 집어들었고 둘봉이는 눈짐작으로 여울 건너편을 살피니, 여간해서 건널 수

가 없을 만하였다. 계곡의 넓이가 삼사십 보는 됨직한데, 물이 깊어 무릎을 넘는다 하여도

빠른 물살을 거스르고 건너기는 불가능한 일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계곡에는 물소리만이 가

득 차 있었고, 둘봉이가 아까보다는 훨씬 쾌활하게 말하였다.

"일단 불타산에 올랐다가 오늘 하루 품을 내어 샅샅이 골짜기를 뒤져야지. 만약 못 찾으

면 제놈이 살아 도망갔을 테니, 갈 만한 곳을 탐문하여 끝내 뒤쫓을 게야."

그들이 노루목으로 가니, 변가가 불타산 패거리의 시체와 다친 놈들이며, 항복한 졸개들을

수습하고 있다가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심백이놈은 어찌되었수?"

"물에 빠져 뒈져버린 게요. 자취가 없으니......"

선흥이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불타산 패들은 거지반 화살에 맞고 창

칼에 상하여 어떤 자는 팔을 동이고 어떤 자는 다리를 싸맸는데, 모두들 대보름에 석전놀이

서 얻어터진 팔매꾼들 같았다. 그들 중에 성한 자만을 따로 묶어놓았는데 시체는 이미 치워

져 구덩이에 묻혔다. 노루목에 아침 햇살이 발갛게 비껴 있는데 싸움을 치른 사내들의 옷에

묻은 피와 함께 일종의 살기가 감돌았다. 선흥이는 그런 광경을 둘러보면서 문득 지나간 달

포 동안의 행각이 지겨워지는 것이었다. 기껏 가형에게 숨어 살더라도 바로 살아가리라 장

담하였던 것이, 고작 이런 따위의 생활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던 선흥이었다.

"저쪽은 몇 명이나 식었나?"

"다섯 놈이 밥숟갈 놓았소."

"우리는......"

"하나 죽고 둘 상했소이다."

변가와 업복이가 제각기 말하였다. 선흥이는 대뜸 잡힌 불타산 패의 턱을 손끝으로 치켜

들며 물었다.

"주지와 함께 암자로 올라간 사람을 어찌하였는가?"

"뒷간 암굴에다 가두어두었습니다."

"산채에는 몇이나 남아 있나?"

", 한 네댓 명 있습니다."

"...... 앞장을 서라."

선흥이네는 잡은 놈들을 둘로 나누어 먼저 선흥이와 둘봉이가 한 패를 이끌고 곧장 올랐

, 한참 뒤떨어져서 업복이와 변가가 쫓아갔다. 산채로 들어서니 불타산성 어름에서 망보던

자들이 병장기를 겨누며 몰려나오다가 형세가 그런 게 아님을 알고는 모두들 달아나기 시작

한다.

"이놈들 달아나면 끝까지 쫓아가 젓을 담을 것이요. 그 자리에 엎드려 투항하면 살려준

."

그래도 막무가내로 뛰는 자들에게 화살을 날리니 한 놈이 등판을 정통으로 꿰이고 거꾸러

지는데, 다른 자들도 주춤주춤 서버린다. 그들을 업복이와 변가에게 맡기고 둘봉이는 달려가

서 첫봉이를 찾았다. 뒷간 아래 두엄 더미 사이에서 재와 오물의 범벅이 되어 있던 첫봉이

가 달려들어오는 아우를 보자 첫마디가,

"심백이 끌어왔냐?"

였는데 둘봉이는 눈길도 마주치지 못하고 못 들은 양하면서 줄을 풀었다.

"심백이를 산 채루 끌어왔냐니까......"

둘봉이가 실없이 고개를 흔드니, 첫봉이는 아우의 옷깃을 움켜쥐고 외쳤다.

"그럼 시체를 끌어왔니?"

둘봉이는 더욱 말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고, 첫봉이가 믿기지 않아서 다그쳐 물었다.

"놓쳤단 말이냐?"

"......"

"...... 쇠새끼."

첫봉이가 댓바람에 주먹을 휘둘러 아우의 면상을 후려갈기자 그는 두엄더미 속에 자빠졌

. 첫봉이가 다시 멱살을 잡아 일으키려니, 뒤에서 선흥이가 목덜미를 잡아 떼어 말렸다.

"걔 잘못이 아니여."

"놓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조니포를 버리구 산속을 헤매구 다녔는데...... 저런 팔삭둥이

같은 놈은 뒈어져야 해여."

"내가 실수로 놓쳤다니까."

첫봉이가 다시 돌아서며 선흥이의 뺨을 힘껏 후려쳤고 선흥이는 말뚝처럼 우뚝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달아나는 걸 보구 뒤를 쫓았는데...... 급류에 떨어져 휩쓸려가버렸어."

둘봉이가 말하였고, 선흥이는 묵묵히 서 있다가 두 형제들에게서 떠났다. 첫봉이가 뛰어나

오더니 그를 앞질러서 암자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어디 가니?"

선흥이가 묻자 첫봉이는 험상궂은 얼굴로 대답하였다.

"놈의 시체를 찾아내야겠다."

선흥이는 쓰다 달다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변가와 주지가 암자에서 그들을 기다리

고 있었다. 둘봉이가 선흥이의 뒤로 다가들며 말을 걸었다.

"선흥아...... 미안허다. 우리 언니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알구 있다만...... 나는 아이들을 데리구 달마산으루 돌아갈 작정이다."

선흥이가 비록 첫봉이 형제의 원한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너무 제 원수 갚을 일에만 골

똘하여 주변 사정을 생각지 않는 것이 섭섭하고 잘아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삼십여 인

이나 되는 일당 모두가 첫봉이의 원수 갚는 일에 나서고 있는데, 첫봉이가 그런 것에 미안

한 마음 정도는 내보일 만도 하였던 것이다. 첫봉이와 변가와 주지가 암자에서 시체 찾을

일과, 만일에 살아 달아났을 경우 심백이가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를 의논 중인데, 둘봉이가

쫓아와 말을 전하는 것이다.

"강두령이 아이들을 데리고 산채를 내려가구 있수. 달마산으로 돌아간답니다."

그러자 변가도 당황하여 일어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산성 마루로 달려내려가는 것

이었다.

"두령, 어쩌자구 여기서 떠납니까?"

변가가 선흥이께 물으니,

"달포 동안에 아이들이 너무 지쳤네. 달마산에 돌아가 며칠 푹 쉬구나서 뭐든지 해볼 방

도를 생각해야겠어. 이곳은 우리 물이 아니니 어물거릴 것 없이 떠나는 겔세."

"두령...... 달마산, 불타산, 백운산이 우리 수중에 떨어져 큰 형세를 이루었는데 패를 쪼개

시렵니까?"

"누가 패를 쪼갠댔나. 나는 달마산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지."

첫봉이도 쫓아나와 그제서야 제 잘못을 깨닫고 선흥이를 만류하였다.

"선흥아, 너무하는구나. 동무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일러주어 알도록 해야지 무턱대구 우

리와 헤어진다는 건 또 뭐냐. 우리가 헤어지면 서로 등을 기댈 곳이나 있다더냐. 내가 잘못

하였다."

"그럼 이 자리에서 약속할 수 있느냐?"

"뭘 말이냐?"

"다신 심백이 일로 싸움을 벌이거나, 뒤쫓거나 애달캐달할 생각을 마라. 일단 잊어버리

...... 뒤에 수소문하여 처치할 수도 있잖으냐?"

첫봉이가 잠깐 망설이다가 말하였다.

"좋다...... 그 대신에 산채가 있어두 세 군데나 될 것이니 나는 변서방과 더불어 당분간 불

타산에 있겠다."

변서방도 말하였다.

"불타산과 달마산으로 패를 나눕시다. 서로 연락을 끊지 말되 일단은 산채를 수중에 넣어

두어야지 그냥 버려두면 다시 후환이 자랄 겝니다. 그러니 강두령은 여길 떠나더라도 일단

며칠 묵으면서 일이 정리되는 것이나 보구 계시지요."

하여서 선흥이도 불타산에 며칠 더 머물기로 하였던 것이다.

법호와 심백은 급박하게 뒤를 쫓는 기척을 등뒤에 바싹 달고서 계곡을 달리고 있었으나,

부상한 심백이가 자꾸만 주저앉아 곧 잡힐 지경이 되었다. 법호가 겨드랑이를 끼며 심백이

를 일으켜보았으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었다.

"안되겠소. 삼촌은 나를 버리구 뛰시우."

법호가 심백이를 다시 껴들어 올리면서 간곡히 말하였다.

"두령, 예서 개죽음당할려구 불타산에 들어왔나. 어찌되었든 살구 봐야지."

"틀렸어...... 다리에 힘이 없어 디딜 수가 없어. 어서 삼촌이나 살아가시우."

그때에 둘봉이가 뛰어내려오고 있었고, 법호는 물에 휩쓸려 죽을 작정하고서 심백이의 허

리를 끼고 나뒹굴었다. 가을 새벽의 물이 뼈를 녹이듯이 차가웠다. 떨어지자마자 법호와 심

백은 몇번 자맥질을 하면서 아래로 쓸려 내려갔고, 법호는 온 힘을 다하여 부상한 심백이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한 스무 발짝 될 만한 거리를 순식간에 쓸려 내려갔던 두 사람은 물

굽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곳에 걸렸으니, 사태가 져서 아래쪽이 이빨 자국처럼 깊숙이 패어

있었고, 수초가 무성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법호는 삐어져 나온 나무뿌리를 잡고서 심백을

그 후미진 구멍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머리만을 내놓고 수초 사이에 숨어 있었다. 온몸이 얼어들어와 손에도 차차 맥

이 없어져가는데 나무뿌리를 놓기만 했다간 다시 휩쓸려 내려갈 판이었고, 저들의 눈에 띌

것이 분명하였다. 물 위에서 화살을 맞아 고슴도치 꼬락서니가 되어 가라앉고 말 것이었다.

숨어 있는데, 그들의 머리 위에 와서 주고받는 둘봉이와 선흥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심백

이는 이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나, 가끔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를 내었는데, 법호는

발각될까 하여 심백이의 입을 한 손으로 막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들이 자리를 뜨는 듯하

더니, 이윽고 주위에는 물소리뿐이었다. 법호는 혼절한 심백이를 끌고 기슭의 나무뿌리와 돌

을 붙잡으며 안간힘 끝에 비교적 나지막한 곳으로 오를 수가 있었다. 그는 늘어진 심백이를

질질 끌고 갈대가 거의 키를 넘도록 자라난 곳까지 기어갔다. 어서 심백이를 회생시켜 이곳

을 빠져나가야 하겠는데 그는 안색이 검푸르고 사지가 뻣뻣하여 의식이 없기는 고사하고 버

려두었다가는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더구나 다른 패거리들이 부근을 샅샅이 뒤지기라도 한

다면 꼼짝없이 잡히고 말 것이다. 법호는 우선 심백이의 옷을 벗기고 옷자락을 찢어 심백이

의 살 맞은 다리를 동이고 어깻죽지에 아직도 부러진 채 박혀 있는 화살을 뽑았다. 그리고

코를 빨아주니 조금씩 화기가 돌아오는 듯하였고, 얼음덩이처럼 굳어진 손을 비벼주고 발을

제 겨드랑이에 넣어 비비니 조금씩 온기가 돌면서 심백이가 가늘게 눈을 떴다.

"두령!"

"삼촌, 여기가 어디요?"

"우린 살았네. 어서 달아나야지."

심백이 고개를 끄덕였고, 법호는 다시 아까처럼 심백을 들쳐업고 용두원 쪽을 피하여 마

리포를 목표로 정하고 으슥한 길을 택하였다.

"헌데 어디루 가잔 말이우. 이 꼴루 불타산에 올랐자 죽는 길밖에 없고...... 어디 가서 그

런 형세를 다시 가지려면 여태껏보다 열 밴 힘이 들 텐데 좀도적이 되잔 말유. 차라리 어디

명산 대찰이나 털며 돌아다닐까...... 예미랄."

"양주로 가세."

"양주엘......? 거긴 한양이 바루 코앞인데 뭣허러 찬물 맞은 강아지처럼 거기 가 기신거

."

"양주 어름이 시방 큰 대처가 되어 있다는 걸 두령이 나보다두 잘 알잖아."

"글쎄 돈 갖구 도방 살림이지, 대적이 그릇되면 노름판에서 개평 뜯는다더니 그 신세나

되려우."

법호가 빙그레 웃었다.

"내 다 궁량이 닿는 데가 있어 그리 가자는 게여. 남이 닦는 터에 주추를 놓으면 대들보

차지는 맡아놨지 않는가. 우리를 받아줄 데가 있으니 마음놓고 다리 주욱 뻗는 게여."

심백이가 제 허벅지의 부기를 만져보고 다리를 꺼떡거려보면서 내뱉었다.

"까짓 아무려나 합시다. 공수래 공수거, 억만 겁을 윤회하는 중생인데......"

 

7

한양으로 들어가는 경강의 수로와 삼남서 올라오는 강화 수로, 그리고 북의 내륙 임진강

과 엇갈리는 요지에 있는 교동섬은 강화와 함께 각처의 선상과 뱃사람들이 뒤를 이어 모여

들고 흩어지고 하였다.

서울의 경주인들도 이들과 거래하기 위하여 뱃길로 찾아와 묵어 가는 바람에 각 나루터의

선창은 일종의 도회 저자바닥으로 변하곤 하는 것이었다. 바다와 강에는 각종 상품과 쌀을

실은 배들이 개미떼처럼 들끓어 쌀을 천여 석 이상이나 실을 수 있는 큰 배만도 삼백여 척

이 넘게 드나들었으니 쌀 백여 석에서 어물, 소금 등을 싣고 다니는 배들은 수천 척이었다.

교동 북나루는 북으로 해서의 내륙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예성강의 수로가 입을 벌리고

있으며 동으로는 임진강이, 그리고 강화 수로를 감돌아 마포 경강으로 뻗어 들어간 한강의

어귀가 그물의 콧줄같이 닿아 있고, 바다로는 관서 해서에서 오는 배가 경강으로 들어갈 때

꼭 지나야 하는 곳이다.

북나루 입석산 아랫녘의 주막거리가 교동 읍내만큼 번화하였는데, 술과 밥을 팔고 재워주

기도 하며 급히 빌릴 배까지 내주고 배를 관리 또는 수리도 해주는 여각이 여럿이었다.

각의 방마다 뱃사람들이 들락날락하고, 떠나는 자들이 방을 비우면 곧 잇달아서 다른 패거

리들이 들이닥쳤는데, 실상은 마포 여각 객주에서 물품의 위탁판매를 기다릴 사람들이 대부

분이라, 북나루에서 묵는 자들은 보통 하룻밤, 길어야 이틀을 넘기지 아니하였다.

"아니 배를 대어놓으라기에 벌써 사흘이나 기다렸는데 이거 왜 이리 늦는 게야?"

아침상을 물린 듯한 자가 밥상을 들고 마루로 나오면서 마침 다가오는 뱃사람에게 퉁명스

럽게 말하였다. 키가 훌쩍 커서 남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높아 보이고 얼굴은 볕에 그을려

시커먼데 어깨가 앞으로 구부정히 처져 있어서 더욱 우람해 보인다.

"도사공 성님, 행수께서 통기하신 일이니 다 연유가 있겠습죠."

"나는 배를 비우고 벽란나루에 오를 일이 있단 말야. 송도에 우리 의형이 계시거든."

"이번에 취재가 많은 듯하니 도사공 성님두 한몫 잡으실 게요."

", 내가 한 몫을 잡든 두 몫을 잡든 네깐 놈이 무슨 상관이냐. 어서 나루터에나 갔다 오

너라. 오늘은 무슨 기별이 있든지 나타나든지 하겠지."

도사공과 뱃사람이 수작을 나누는 중인데, 그들 일행인 듯한 다른 자가 들어오며 외쳤다.

"도사공 성님, 경강에서 강주인이 오셨습니다. 빨리 나오시랍니다."

"그래, 간밤에 별일 없었지."

"한금이란 놈이 훈련도감 군선의 수군 녀석과 티격태격하다가 두 놈을 물에 던졌습지요."

도사공은 낯을 잔뜩 찌푸렸다.

"또 투전을 벌였고나. 너는 단속을 하라구 내보냈더니, 아랫것들과 어울려 투전 시중이나

드느냐. 그래...... 어찌되었어?"

"뭐 아침에 사화를 하구...... 쌀 한섬 내어 인정을 썼습니다."

도사공은 금방 화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이를 지그시 물었다.

", 아주 막되어가는구나. 너희 마음대로 위탁받은 물품을 내어 관에 인정을 쓴다구......?"

"성님 기왕에 나눠 먹을 것을 미리 좀 차용하였기루 너무 화내지 마십시다."

우대용은 꾹 참고 대꾸를 하지 아니하였다. 사실 그는 춘득이네 패에 도사공으로 들어온

지 겨우 서너 달밖에 안되는데, 그것도 강화에서 여각을 하고 있는 배행수의 소개를 받아서

였다. 사공들은 도사공의 감독을 받고, 그의 지시를 따르게 되어 있었으나 패거리에 들어간

것이 그들보다 훨씬 늦고 일의 돌아가는 형편에 어두우니 자연히 깔보게 되었던 것이다.

사공은 울컥 치밀려는 화를 애써서 가라앉히며 그들과 함께 북나루로 나아갔다. 그는 네 척

의 배를 맡고 있었는데 두 척은 천오백 석짜리 배요, 나머지 두 척은 오백 석짜리의 중배였

. 나루터에는 배가 여러 척이었는데 제마다 배의 소속을 구분하는 기다란 깃발을 돛대 옆

에 걸어두고 있었다. 춘득 삼 사 오의 깃발이 걸려 있는데, 그 곁에 길고 비좁은 돛단배가

대어져 있었다. 그들이 모래밭으로 내려가니 기다리던 강주인이 반색을 하며 쫓아나왔다.

"어이구 처음 뵙겠수. 윤원주외다. 전에 도사공과도 형제처럼 지냈지요."

"우대용이우."

"선주께서두 평안하시겠지요. 저두 석서방에게서 도사공이 새로 들어왔단 소식은 들었지

. 헌데...... 그전에도 경강은 드나드셨던 모양이우. 오시자마자 그 댁의 제일 큰 배 두 척을

맡으셨으니."

"예전에 해서 쪽에서 주상의 아래서 일보던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선적된 것이 미곡이 천 석하구......"

"소금입니다."

강주인은 잠깐 하는 듯한 시늉으로 눈짓을 하면서 우대용을 사공들에게서 떼어 함께 걸으

면서 말하였다.

"다 아시겠지만 미곡이란 워낙에 이문이 박해서 말이지요. 아마 선주께서두 잘 아실 게요.

화수를 먹이지 않고는 큰 이문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여기 대기시키도

록 기별을 보낸 겁니다."

"아니 화수를 먹이다니요?"

눈만 껌벅이는 우대용의 얼굴을 강주인은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 모르시는구만. 미곡에다 물을 타서 양을 불리는 게요."

"관에서 검사가 나올 텐데, 그들이 눈치를 못 챌 리가 없수."

강주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검사용의 백 석만은 그대루 두어둡니다. 그리구 까짓 거 내가 인정을 조금만 찔러주면

모두 눈을 감지요. 대동미란 어차피 나라에 들어갈 것이니 우리 같은 장사치가 조금씩 나눠

먹는다구 무슨 국고가 바닥이 나지두 않을 게란 말이지."

우대용이가 한참이나 눈을 껌벅이며 잠자코 있다가 제 궁리가 되었는지,

"까짓 거 그럴려면 몽땅 떼어먹지, 그런 구차스런 짓을 벌인단 말이요?"

하고 말했다.

"몽땅 떼어먹는 수두 있소. 허지만 시방은 그런 때가 아니외다. 고패는 워낙에 큰 사고루

처리되니 길게 보아서는 그리 좋은 방법이 못 되지요. 화수를 먹는 것이 오히려 짭짤하고

오래간단 말요. 이번이 처음이라 잘 모르실 테지만, 내 다 일러드리리다. 아마 아랫것들은

전에두 해본 경험이 있어서 시키면 다 알아서 할 게요. 도사공, 하루라두 빨리 저것들을 잡

아놓아야지 안 그러면 꼭두각시가 되어 어느 겨를에 물에 처박힐지 모르게 됩니다. 내가 이

르는 말을 잘 들어두시우."

우대용의 느낌에도 아래 사공들이 은근히 자기를 가벼이 여기고 있는 눈치는 채고 있었

. 특히 부도사공격인 대두라는 자가 제 마음대로 쌀섬을 내어 노름도 하고 술도 사마시는

데 꺼리지 않아 이번뿐이 아니라, 전에도 종종 그러고는 시치미를 뗐던 것이었다. 선주인 유

춘득은 우대용의 유능함을 알아서 대번에 도사공에 붙였거니와, 강화의 배행수와는 자별한

사이였으니 남이 보기에도 그리 버젓한 장사치는 아니었다. 유춘득은 경강의 강주인들 사이

에서 괴이한 인물로 소문나 있었다. 그것은 춘득이가 고패로 돈을 벌고 한양의 쌀값을 이리

저리 조정하여 철마다 수만 전을 벌어 오늘의 선단을 마련했기 때문이었고, 그 수하 사람들

이 대개 주먹다짐에 능하여 싸움이 터졌다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춘득

은 강화 성내에 살고 있었는데, 달곶이와 갑곶이에는 그의 조선소가 있었다. 우대용의 생각

에도 화수먹이는 도사공이 임의로 처리할 일인데, 그가 물정에 어두우니 대두사공과 아랫것

들의 불만이 쌓였던 모양이었다.

"화수를 하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떨어지게 되우?"

"글세 한번 따져봅시다. 대개 햅쌀은 물을 한 병에서 한 병 반까지 타지만 묵은 쌀은 두

병에서 세 병까지도 탈 수가 있소. 검사용으로 백 석은 빼어놓으니...... 구백 석이로구만,

은 쌀과 햅쌀이 각각 몇 석이오?"

"묵은 쌀이 육백, 햅쌀은 사백 석이지요."

"그렇다면 묵은 쌀에서는 오륙십 석을 빼돌릴 수가 있고, 햅쌀에서는 열댓 석을 뺄 수가

있을 게요. 쌀이 물에 붇기를 기다리자면 하룻밤이면 충분할 거외다."

"그래 우리께는 얼마를 주시려오?"

"까짓...... 반분합시다그려."

우대용이 아무리 물정을 모른다 하나 사리로 따져보더라도 반분은 너무 불공평하였다.

주인은 혼자고, 자기네는 열다섯이나 되지 않는가.

"강주인은 혼자서 반을 차지하고, 우리들은 고것을 여러 몫으로 나누라는 게요?"

"허허 모르시는 말씀...... 나두 다 차지하는 것이 아니외다. 선혜청에 납부할 제 서리들과

나누어 먹어야 하오. 차차 알게 되겠지만 투식도 있으니, 한 삼 년만 착실히 긁어모으면 도

사공두 선주가 될게요."

"아무튼 화수먹이는 언제 할 거요?"

"시방은 남의 눈도 있으니 그냥 정박해 있다가 밤에 하십시다. 내 이미 미곡상을 통해놓

았으니 밤에 쌀을 실으러 배가 올 게요. 우리는 쌀섬을 준비해두었다가 실어 보내고 물을

먹이면 끝나오. 우도사공은 인덕이 있는 모양이오. 나 같은 사람과 손을 잡으면 빈틈이 없을

거외다."

대용이가 강상을 오르내리기 서너 차례에 아무것도 모르고 짐이나 부려주고 대시 짐을 실

으러 떠나고 하면서 박한 운임을 내어 가끔 탁주통이나 비우는 것이 고작이더니 이제 가욋

돈 만지는 법에 눈뜨게 되었다.

그날 날이 어둡자마자 횃불을 준비하여 선미와 선두에 밝게 켜놓고서, 선복의 판자를 들

어내고 차곡차곡 쌓여 있는 쌀섬에서 말 가웃 되게 덜어내어 다른 섬에 채워 백사장으로 날

라다가 쌓기 시작하였다. 쌀을 적당히 비워내고는 십여 개의 물병을 준비하여 번갈아 쌀에

다 들이부었다. 쌀을 덜어낸 곳은 물을 부어놓고 다시 쌓는데 묵은 쌀과 햅쌀을 구분하여놓

았다.

"이렇게 해두면 정량이 넘도록 불어날 게야."

"풀자마자 성내루 흩어져 나가면 문제가 없겠는데......"

"도사공은 괜한 걱정이구랴. 압다, 쌀에서 싹이 나든 쉬가 끓든 내 입에 들어가지 않는데

무슨 상관이오."

사공들도 오랜만에 화수먹이로 돈버는 것에 신이 나서 지칠 줄도 모르고 배를 오르내렸

. 쌀섬 비워내기를 계속하는 중에 중선 하나가 다가와 물에 대었고, 강주인의 수하인 듯한

차인 하나가 뛰어내렸다.

"이것이우?"

"그래, 어서 실어라."

사공들이 쌓아놓았던 쌀을 강주인의 중선에 옮겨 실었다.

"얼추 다 되었나. 혹시 화수 먹이지 않은 섬이 있나 잘 살펴보오."

"검사미 백 석뿐이외다."

그들은 강변에 앉아서 잠깐 쉬었다. 강주인과 우대용이 셈을 시작하려는데 대두사공이 불

쑥 끼어드는 것이었다.

"몫이 어떻게 되우?"

강주인은 우대용에게 상을 찡그려 보이는데, 대용은 별 반응이 없이 그를 묵인하는 눈치

를 보였고, 강주인은 하는 수 없이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대꾸하였다.

"반반일세."

"경강 십년살이에 강주인과 도사공이 반분한단 말은 또 처음이로군."

대두가 우대용을 향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자, 강주인이 물었다.

"어찌...... 너무 많단 말인가?"

"고패두 아닌 화수에 반분이란 다 무에요. 우리 숟집이 몇 개나 달려 있나 헤아려보우."

강주인이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모래를 털고 일어섰다.

"싫으면 그만두게......"

"기왕에 덜어내고 물까지 부었는데, 처음 흥정대루 하지."

우대용이가 말하니, 대두는 침을 거세게 내밷으면서 이죽거렸다.

"내 원...... 어디서 보도 듣도 못한 촌놈이 도사공이랍시구 기어들어 와서는......"

그러나 우대용은 못 들은 체해두었다. 티격태격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실상 그는 주상의

도사공 노릇에 점점 넌더리가 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먹을 일이 많은 곳에 인심은 없더라

, 도대체가 사공들끼리도 우애가 없었고, 선주의 신임을 받거나 강주인들께 신용이 있어

유능한 사공들은 동무들의 질시 때문에 그 자리를 배겨날 수가 없었다.

"어쩌겠소...... 짐을 다 내릴까?"

"어서 셈이나 하우."

"그러면 육십 석에 열 석이니, 칠십 석이고...... 서른다섯을 셈하면 되겠군. 내 지금 사금파

리 어음을 내줄 테니 우리 여각에서 찾아다 쓰시려오?"

그리하마 하여 우대용은 깨어진 사금파리 한 쪽을 받았다. 목숨 수()자가 절반으로 갈라

진 것이었는데, 미곡 삼십오 석이라 쓰고 강주인이 수결한 종이에다 쌌다.

"그럼 나는 남의 눈도 있고 하니 먼저 마포루 올라갈라우."

"명일 오후에 대지요. 혹시 내가 못 가더라두 대두에게 지불해주시지요. 운임두 함께 말이

."

"운임은 좀 늦어질 게요. 아무래두 선혜청 검사가 끝나야 할 테니."

강주인은 곧 그 밤에 돌아갔다. 우대용이 대두를 불러 사금파리 어음을 내주며 말하였다.

"명일 오후에 가서 받기로 하였네. 나는 송도에 들를 일이 있으니, 자네가 알아서 해."

대두가 서슴치 않고 어음을 받아 챙기고는,

"미리 약조를 합시다. 몫을 어떻게 나눌라우?"

하였다. 우대용이 은근히 짜증이 나서 귀쌈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었으나 자기 때문에

도사공직에 오르지 못한 자인지라 매사에 아니꼽기도 하겠다 싶어서 그냥 참아두기로 하였

.

"자네가 아이들과 적당히 나누어 먹게. 선주 어른께는 내가 얘기를 할 테니."

"선주 어른께 얘기를 하겠다구...... 그러면 모조리 바쳐야 합니다."

"법이 그러하면 알려야지."

뒤에서 쑤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사공들이 대두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두가 팔을 걷어붙이는 것이었고, 다른 자들도 각각 우대용이를 둘러싸는데 자못 공기가 험

악하였다.

"우리는 당신 같은 도사공 아래선 일을 해먹을 수가 없고, 우리가 모두 그만둘 수도 없으

니 오늘밤에 아예 결판을 내야겠소."

"왜들 이러는 게야?"

"화수는 미곡에만 먹이는 줄 알아, 너두 짠물 좀 먹어봐라."

대두가 달려들어 우대용의 멱살을 잡자, 주위의 사공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그의 다리며

허리를 붙잡았다. 대용이가 드디어 분을 내어 앞에 선 대두의 면상을 앞이마로 처박으며 양

쪽 두 사람을 잡아 박치기를 시키니, 대번에 온몸이 자유스러워진다. 대용이가 분이 머리끝

까지 올라 노로 쓰는 기다란 장목을 집어 휘두르는데 사공들은 의외의 기세에 놀라 흩어지

고 대두는 코피가 흐르는 면상을 싸쥐고 달아났다. 우대용이가 처음부터 대두 사내를 찍어

놓았던지라 장대를 내던지고 뒤를 쫓는데, 그제서야 대두는 도사공을 설건드린 것을 알고는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었다. 대용이가 제 쪽에서도 바라고 있던 참인데, 대두는 물에 자신이

있어 설마 물에서야 도사공이 나를 당할까 싶었던 모양이었다. 대두가 물을 차고 배의 뒤편

으로 헤엄쳐 나가는데 대용은 이미 자맥질을 하여 수면에는 보이지 않는다. 배 주위에 횃불

의 빛이 일렁거리고 남은 빛이 수면을 부옇게 비추고 있었다. 사공들은 모래사장에 모여서

서 이제 도사공이 하백의 동무가 되어 끌려나올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용이 반평생을 포구에서 헤엄질로 자라왔고 땅에서보다도 행동거지가 자유자재인데 대

두는 그의 자취가 보이질 않으니 물 위에서 사지를 저으면서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며 살

폈다. 대용은 자맥질하였다가 그대로 다가가 바로 대두의 몸 밑에 이르러 허리를 꽉 껴안으

며 물위로 고개를 내밀어 호흡을 삼켰다가 내리누르면서 물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대두가

대용을 잡으려 하나 그는 등뒤에 찰싹 붙어서 대두의 목을 팔로 죄었다. 대두가 버둥거리자

이번에는 슬쩍 놓아주는 체하며 함께 떠올랐다가 수면 위에서 벌떡 솟구치며 다리를 쳐들어

대두의 목을 휘감았다. 대용은 대두의 목을 허벅지에다 끼고 죄면서 물 위에 제 머리만을

내놓고 숨을 쉬면서 한참을 죄어주었다. 잠시 후에 요동을 치던 대두가 팔과 다리를 늘어뜨

리는가 싶자 대용은 그제사 다리로 죄었던 그의 목을 풀었다. 그리고는 그의 상투를 잡아끌

고 대용이 물가로 헤엄쳐 나오니 대두는 아직 숨을 돌이키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용이 그의 허리를 꺾어 물을 토하게 하고서 등판을 두드려대는데 대두가 다시 손발을 허위

적거리며 기침을 터뜨렸다.

"어때...... 정신 좀 들었나?"

대두는 고개를 돌려 우대용을 돌아다보고는 황급히 내빼려고 몸을 일으켰으나 물속에서

기운을 모두 빼냈는지라 도로 털썩 엎어지고 말았다. 멀리서 어슬렁거리는 사공들을 향하여

대용이가 부드럽게 말했다.

"여보게들 이리루 오게. 이 사람을 데려가야겠어."

그러나 사공들은 좀체로 다가오지 않았다. 도사공을 물속에 처박아 혼을 내려던 것이 못

내 계면쩍은 모양이었다.

"어서 오지 못하겠어?"

대용이 벌떡 일어섰다. 서로 찌르며 꾸물거리던 사공들 중에 둘이 슬슬 다가왔다.

"이 사람을 데려다가 더운 물이라두 끓여서 먹여."

"...... 어디루 데려갈깝쇼?"

"선실에다 눕혀둬. 배를 띄워야겠으니......"

"오늘밤 묵었다가 내일 경강으루 오르는 게 아닙니까?"

"강화루 가야겠네. 달곶이에다 대어."

대용이가 일단 귀선할 뜻을 비쳤고, 사공들은 거기 가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으

므로 서로 쑤군거렸다. 그러나 이미 기세는 꺾인 판이라 말없이 대두를 들어 첫 배로 올라

갔다. 닻을 올리고 돛을 펴니 배가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하였다. 배는 북나루를 오른편으

로 돌아서 예성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십자 수로를 지났다. 강상에는 휘영청 달이 떠서 물을

밝게 비추었고, 강변에 자라난 갈대의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써늘하였다. 멀리 당두포와

승천장의 불빛이 흘러 지나가는데, 물살은 더욱 빠르고 거세어졌다. 승천장이 지나서도 한

식경이 넘도록 강화 수로가 보이질 않아서 우대용은 선미를 향하여 물었다.

"어떻게 된건가. 강화 물목이 여태 멀었나?"

사공들이 쑤군대다가 하나가 자못 험상궂은 태도로 말하였다.

"벌써 지났수. 성님이 아무리 도사공이라지만, 운임도 받지 않았는데 귀선은 불가하우."

"...... 이런 멀쩡한 사람들 보았나. 다 생각이 있어서 돌아가자구 한 게야. 자네들이 내

도사공 소임을 마뜩치 않게 여기는 눈치라, 그만 춘득이 성님께 가서 다른 사람을 세우라구

할 작정이야. 어서 배를 돌리게."

대용이가 그렇게 말하자, 모두들 머리를 모으고 쑥덕이는데 뒷전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

리더니 대용에게 물먹은 대두가 선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잘못되었소. 이제 다시는 도사공 성님께 대들 생각두 없구 열심히 할

테니 귀선은 맙시다."

대두의 생각에도 비록 야물어 뵈지는 않는 우대용이라 할지라도, 어음을 받아 선선히 내

어준 것이며 물 위에서 끌어내 간호하게 해준 것이며가 사내로서 다 사리에 맞는 행동인지

, 자기가 그릇되었음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선하게 되어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혹시 선주에게서 내쳐지는 것도 근심거리였던 것이다. 선주를 속여 화수먹이를 주

장한 자기네가 배를 놓치면, 적어도 인근에서 배를 타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나두 짠물 먹구 뼈대가 굵어진 사람이지만, 경강에는 유선주네에 오고는 처음이니 모르

는 일이 많네. 내 요미가 겨우 한 달에 너 말이요, 자네들이 말 가웃에서 두 말에 지나지 않

으니 참으로 박한 급료일세. 비록 의자와 집물대가 몇석씩 나온다 하나 술먹을 엄두도 못

낼 판이지. 그러나 내가 사리를 따져본즉, 강주인이 화수 먹은 쌀을 나누자 하였으나 선주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비록 강주인이 잘 단속한다더라도 몇차례 해먹으면,

디어 그의 다른 요구도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겠어. 일단은 유선주에게 나중에라도 알려

줘야 될 걸세."

우대용이 말하자, 대두가 공손히 대답하였다.

"그런 점은 염려 마십시오. 으레껏 선주는 우리들이 아무 짓을 않더라도 뭔가 해먹는 줄

알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알려져서 문책을 하면 그때에 몇석쯤 내놓으면 되지

. 우리두 모두 처자가 있는 놈들이니 그래두 풀칠을 해얍지요."

"알겠다. 여하튼 대두가 나를 많이 가르쳐다오."

"...... 기왕에 지나간 일이나, 어제 강주인이 반분한 것은 너무 과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는 사금파리 어음을 받지 말고 즉석에서 쌀로 나누도록 하십시오. 분명히 그자는 기일을 끌

게요. 무명이나 어음을 받지 말고 꼭 쌀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이라두 불만이 있으면 내게 말하여라. 나는 구태여 도사공직을 놓더라도 강화에 배

가진 이가 있으니 낭패가 될 것두 없다."

우대용이 다짐을 해두려고 선인들께 물으니 모두들 입을 합하여,

"모시구 일을 하겠습니다."

"사실 전에 있던 도사공은 탐욕이 커서 혼자 이를 독차지하였습니다."

"우리 분별이 모자랐소."

하면서 대꾸를 하였다.

"대두는 뒷배에 옮겨 타고, 다른 아이들께도 의향을 묻게."

우대용이 지시하니 대두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아무래두 배를 밤섬에다 대일 것이니, 그때 말하지요."

뒷배도 한 마장쯤에 쫓아오고 있었으며, 그보다 멀찍이 중선 두 척의 불빛이 깜박이고 있

었다. 배는 이제 임진 수로에 접어들고 있었는데 사공들이 분주히 노를 잡고 나섰다. 역류가

거세어지는 것이 썰물때인 모양이었다. 배가 거칠게 뒤흔들리며 앞으로 나갈 줄을 몰랐다.

게바위나루를 돌아서 취이포로 들어서니 역류는 여전히 심하였으나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

고 풍향이 바뀌어 다시 배는 뒤뚱거리기를 멈추었다. 과연 대용이 보기에도 사공들의 배 다

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강 양안으로는 산이 한 점도 보이지 않는 너른 평야인지라

달빛에 드러난 하늘과 땅이 꼭 바다 가운데 나와 있는 듯이 보였다. 새벽녘에 경강 어귀인

송산을 지났다. 멀리 오리섬과 행주산성이 보이고, 선유봉의 둥근머리가 안개 속에 떠 있었

. 우대용이 대두에게 물었다.

"배를 밤섬에다 대인단 말이지?"

"...... 거기 대일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 선단의 연고지가 원래 거기였으니까요. 마포와

서강에 모두 여각 객주가 흔천이지만, 우리에게는 서강 쪽이 훨씬 유리합니다. 나중에 차차

아시겠지요."

"대두의 집이 강화 아니던가?"

"밤섬입니다. 우리 아이들 중 태반이 강화와 교동에 집이 있지요."

선유봉을 감돌아 햇빛을 마주 받으며 서강 앞을 지나니 잔잔한 물은 강바닥의 자갈이 비

칠 정도로 맑고, 밤섬의 언덕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회나무가 빽빽하였다. 백사지가 노량진

어름에까지 끝간 데 없이 펼쳐지고 밤섬에서 여의도까지에는 풀밭이 드넓어서 황새와 염소

가 어울려 돌아다녔다. 마포의 동막거리와 서강을 건너다보는 밤섬의 동자머리에는 작은 정

자가 한강 물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들은 배를 동자머리 앞에다 대놓고, 밤섬의 자갈밭으로

올라갔다.

큰 배는 몇척 없고 중선과 작은 나룻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바로 건너편 토정과 마포

강안에는 큰 범선들이 강의 아래위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강 건너 마을에서마다 흰 연기들

이 자욱하게 번지는 중이었다. 동자머리의 언덕 뒤에는 제법 운치있는 괴석이 삐죽삐죽 솟

아 있고 강변에서부터 파들어온 넓은 인공호가 있었다. 거기가 밤섬의 조선장이었다. 아침부

터 일을 시작한 선장들의 망치소리가 요란하였고, 곳곳마다 나무에 대패질을 하느라고 분주

하였다. 조선장보다 높직한 곳에 걷이가 끝난 수수밭이 있었고 그 위편에 넓은 빈터가 있고

흙과 짚으로 지은 고가 여러 채 서 있었다.

"우리네는 여기서 거래하는 것이 기중 안전합니다. 동막거리나 서강에서는 시전인과 관의

기찰이 심하지요. 여염의 이로는 여기가 값이 후합니다."

"사람들이 별루 보이질 않는데?"

"가만 계십시오. 아직 시간이 일러 그렇습니다. 밤만 되면 여기두 시끌법석해집니다. 우선

저희 집에 가서 요기나 하시지요."

"아이들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겠나?"

"제가 아까 모아놓고 누누이 타일러주었지요. 아마 동자머리에서 밥들을 지어 먹고 빨래

나 할 것입니다."

우대용과 대두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빈터를 지나서 거기부터 붉은 흙이 깔린 길을 걸어

올라갔다. 밤섬의 높은 언덕 아래 뱃사람들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몇몇 진척

들이 들어와 모래와 야산을 일구어 콩과 수수를 심고 염소를 기르거나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더니 경강이 장시로 번창하면서는 조선장이와 깍정이들이 껴들어왔다. 나름대로 먹고 살

기가 나아져서 마을에는 밥을 굶는 집이 별반 없었다. 동구 밖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색댕기

를 주렁주렁 달고 섰는데 한 칸짜리 당집이 보였다. 대두가 마을로 들어가니 아는 사람들이

모두들 한마디씩 말을 걸었고 어디선가 서너 명의 장정들이 그들을 따라왔다. 대두의 집은

담장과 마당이 제법 훤칠한 다섯 칸 집이었는데, 키질을 하고 있던 아낙네가 반색을 하였다.

"이번에는 꼭 스무 날이 걸렸구려."

"...... 미곡을 실었지. 우리 도사공 성님이셔. 아직 조반 전이니 밥 좀 해주어. 자네들은

조반들 먹었나?"

"우리야 새벽밥을 먹었지. 동막에다 배를 부리고 왔던 참이라."

장정들은 모두 사공인 모양이었다. 팔뚝이 울퉁불퉁하고 걷어붙인 장딴지마다 알심이 박

여 있었다. 그들은 아낙네가 펴준 멍석 위에 둘러앉았다.

"이번에 새루 모시게 된 우리 도사공 성님일세. 앞으루 자네들두 신세를 많이 질 것이니

인사들 올리게."

장정들이 제각기 대용에게 인사를 올렸다. 대두가 대용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경강에서 비린 밥을 제법 먹었다는 이들입니다."

"그리구 특히 이 사람은 저와 사촌지간인데 수로라면 모르는 데가 없고, 배를 부리는 재

간이 가히 훈련원 무사가 말 다루듯 합니다. 헌데 이제는 바다로 나가지 않고 이 손바닥만

한 경강에서 나룻배나 젓고 있습지요."

대두가 가리킨 자는 체격이 왜소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어깨도 홀쭉한 볼품없는 체

격이었다. 낯바닥은 새까만데 온 피부가 기름을 바른 듯이 반질거렸다. 눈가녘에 가느다란

주름들이 잡혀 있고 미간이 찌푸려져 있는데 대저 수부라는 것이 먼 항로를 목측하느라고

그런 인상이 되는 법이었다. 해로는 많이 다녀본 우대용이 정말 뱃놈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자의 이름이 박성대였는가 싶었는데 다리를 절었다. 대두 석범철과 함께 삼남 해로를 수

년간 다녔다는 것이었다. 우대용이가 궁금하여 물었다.

"나두 해로를 다녀봐서 알지만, 바다를 본 놈은 강바닥에선 숨통이 막혀서 멱두 감지 않

는 터인데, 어째서 큰 배를 안 타시우?"

박성대는 그냥 턱을 쓸며 벌죽히 웃을 뿐이고, 다시 대두 석서방이 말을 해주었다.

"시방 이 사람의 왼다리는 뼈가 없습니다. 배가 부서져서 백날 동안이나 떠돌아다녔지요.

그뒤로는 진저리가 나서 배를 안 탑니다."

대두의 말이 자기에게 합당치 않았던지 박성대가 은근히 말머리를 잡았다.

"그런 게 아니여...... 진저리는 뭘, 배 없는 놈이 고생을 해봤자 모두 남 좋은 일이나 시키

는데, 구태여 목숨을 걸 필요가 없어서 그러는 게야. 시방 이 바닥에서두 저만 부지런하면

한 삭에 열 냥 장사는 되니 이만하면 우리네가 요족하지. 까짓 거 내 배만 있다면야 북경으

루 건너가지, 사행선이 장연 풍천에서 출발하는데, 상사는 고사간에 서장관이나 역관 몇만

줄을 넣어봐, 대번에 천금을 만진다네."

우대용이가 이미 범법하여 옥에 갇혀 대시수에서 회자수까지 해먹은 이력이 있는지라 그

답게 물었다.

"뱃길에 도적은 없습디까?"

"왜 없겠소. 황해는 각국의 황당선이 많아서 화포로 단단히 무장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왜선, 당선, 호선이 다투어 출몰하는데 조금만 약점을 보이면 곧 포를 쏘고 화전을 놓아 공

격을 하지요. 그러나 자본 가지고 하는 일에 남아가 성즉승천이요, 패즉입지인데 한번 걸어

볼 만합니다. 특히 남경의 비단을 거두어오면 백 배의 이문이 남는다오."

"대개 수로가 어떠하오?"

"무슨 수로 말이오?"

"그러한 배들이 들어올 제는 어디루 들어오느냔 말이우."

"그야 송도루 들어가는 예성강 수로와 경강 수로겠지요. 아니면 해서에서 바루 장연에 닿

거나 해서의 대동강 수로를 탑니다."

우대용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대두 석서방이 박성대에게 말하였다.

", 그 사람, 물에 빠졌던 고생담이나 한번 해보아."

두 사람의 다른 경강 사공들도 자꾸 재촉하여 성대가 얘기를 꺼냈으니, 우대용이 듣기에

도 그 경험이 과연 장하여 일찍이 조선 사공으로는 제일 먼 바다로 나갔던 듯싶었다.

"이제 삼 년이 되었소. 추석을 갓 지낸 때였으니 아마 이맘때쯤이었을 거외다. 그때는 청

국에 가는 길도 아니고 삼남에서 미곡을 싣고 도감선을 앞세워 올라오고 있었지요. 아마 서

산 앞바다까지 왔었겠지요. 서편 하늘을 바라보니 붉은 해가 잠깐 비쳐 나오고 한가닥 구름

과 안개가 물결 사이에서 일어나 구름 그림자와 햇빛이 명멸하여 끓어오르다가 이윽고 오색

영롱한 구름이 반공에 떠서 구름 사이로 무슨 기운이 우뚝 솟아올라 완연히 공중 누각이 나

타납디다. 멀어서 잘 분간은 안됐지요. 한참 만에 햇빛이 구름에 가리우고 누각의 형상이 변

하여 만층성곽이 되어 수평선으로 뻗쳤다가 사라지니, 그게 신기루라오. 모두들 큰 폭풍우가

올 거라고 짐작은 했소. 이윽고 모진 바람이 일어나며 거센 비가 퍼부우니, 외로운 배가 갈

데가 없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눈앞은 먹구름에 싸이고 산 같은 파도에 가리워 아무것두

보이질 않습디다. 사공들은 맨 먼저 미곡을 차례로 집어 던졌지요. 까짓 고패도 하는 터에

목숨이나 살자 하고 던지며 일방 물을 퍼내는데 쪽박 몇 개로 당할 수가 있겠소. 밤이 점점

깊어져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는데 배 안은 물이 허리에까지 차오릅디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물을 퍼내는 중에 날이 밝았소. 그렇게 삼주야를 생쌀을 씹으면서 파도와 싸운 뒤에

폭풍이 걷혔으나 사방은 망망대해요,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었소. 사흘 만에 밥을 지

었는데 밥을 보아 길흉을 점치고자 했더니 밥이 과연 잘되어 모두들 마음을 좀 놓았지요.

방향을 알아야 돛을 다룰 것인즉 그대로 두어두니 배가 빠르게 나아갑디다. 저녁녘에 이상

한 새가 높이 떠서 울며 지나가니 새의 꼴을 본즉 낮에는 해상에서 놀다가 저물면 반드시

물가로 돌아가 잘 것이고 육지가 멀지 않은 것 같았소이다. 밤이 깊어 안개가 걷히고 하늘

이 맑으며 바람은 잠자고 달은 밝은데, 중천에 큰 별이 떠 있었지요. 그 별을 보면 명이 길

어진다는 남극노인성인 듯싶었소.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다시 안개가 끼었다가, 오시

에 걷혀서 보니 배가 북쪽으로부터 바람을 따라서 작은 섬으로 가까이 가고 있습디다. 모두

들 소리를 지르고, 날뛰며 기뻐했지요. 배를 대고 언덕으로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목측으로

대략 남북은 길어 사오십 리 가량이며 동서는 한 십리 되겠습디다. 작은 내가 흐르는데 물

맛이 상쾌하고 잡목이 무성하여 들쑥나무와 잣나무가 많고 암석 사이로 굵은 대가 듬성듬

, 노루와 사슴이 무리를 지어 노닐고 까마귀와 까치가 숲에서 날아다녔소. 섬 중앙에 산

봉우리 셋이 서로 빼어나 높이가 오륙십 길이고, 물줄기는 중봉에서 나와 굽이굽이 긴 시

내를 이루어 동쪽 바다로 빠졌지요. 문득 시내로 큼직한 귤 한 개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시내를 따라 두 마장쯤 올라가니, 과연 귤나무 두 주가 섰는데, 푸른 잎에 그늘진 사이로

 

 

 

 

 

 

 

 

 

귤이 붉게 익어 있습디다. 서로들 다투어 따먹고 나머지를 옷자락에 싸서 돌아왔지요. 들쥐

를 잡고, 마도 캐고, 땔나무를 해 모으고, 바닷물을 달여 소금도 만들고, 바다에 나가니

전복이 흔천이라 이백여 개를 따다가 초막 아래다 장만했지요. 행장을 털어내니 겨우 멥쌀

한 섬과 좁쌀 닷 말뿐이어서 우리 사공 열이서는 부족한 식량이라, 마를 잘게 썰어 식량

약간과 섞어 밥을 짓고 전복으로 회를 쳤지요. 헌대 실상은 그 섬에 굉장한 보화가 있었지

. 흔천인 전복은 껍질을 까보면 대개가 빈탕이었으나 개중에는 진주가 나왔는데 광채가

뽀얗고 크기가 제비알만합디다. 일행 중에 경주인이 있어 값을 가늠하기를 백 냥은 넉넉히

받으리라 하였지요. 우리는 다투어 전복을 캤는데, 한 사람 앞에 여남은 알의 진주를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시방도 그 섬의 위치는 모르거니와 대해로 나가자면 적어도 그런 이를 탐

해얍지요. 대를 베어다 옷을 찢어 기폭을 만들어 달아 높은 봉우리 위에 세우고, 땔나무를

산마루에 쌓고 불을 붙여 지나가는 배들에게 표류한 사람들이 구원을 요청함을 알렸습니

. 얼마 안 지나서 한점 돛대의 그림자가 동쪽 바다 저 멀리서 오고 있습디다. 사공들이

서로 나무를 더 쌓고 불을 붙여 연기를 피우고 봉 위에서 깃대를 흔들며 소리를 모아 크게

외쳤습니다. 날이 거의 저물어서 그 배가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데 배에 탄 자들이 머리에

푸른 수건을 쓰고 윗도리는 명색 검정 것을 걸쳤으나 아랫도리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

으로 보아 왜놈이 분명했소. 그 배가 섬을 그냥 지나쳐 가는데 냉랭하게 아무 구해줄 의향

이 없어 보입디다. 모두들 아우성을 치니 문득 그 배에서 작은 배를 내놓는 것이었소. 작은

배가 섬에 닿자 십여 명 장정이 해안으로 올라오는데, 허리에 긴 칼을 찼고 기색이 사나워

보였습니다. 저들이 우리 총중에 뛰어들어 글을 써 물었소.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주인이 대답을 했지요. 조선인인데 여기까지 표류해 왔다. 자비를 베풀어 우리 여럿의 목숨

을 살려다오. 상공들은 어느 나라 분이며, 지금 어디로 행하느냐. 우리는 남해불로 장차 서

역을 향해 행하는 길이다. 너희들이 보물을 우리에게 바치면 살려주겠거니와 그렇지 않으

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모두들 찢어진 옷차림과 수척한 몰골을 들이대

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음을 호소하였지요. 그자들이 서로 지껄이는데 말소리가 재잘거려

서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소. 그러다가는 저들이 칼을 휘두르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어 경

주인을 발가벗겨 나무에 거꾸로 매달고 우리들도 붙잡아 옷을 벗기고 결박을 지은 다음에

소지품을 이 잡듯 뒤져서 양식과 의복만 남기고 채집하였던 진주와 전복 등속을 빼앗아 서

로 지절대며 작은 배를 타고 돌아가버렸습니다. 모두들 결박을 풀고 보니 마치 재생을 얻은

셈이었소. 모두 봉우리로 달려가 깃대와 불은 없애버릴 양으로 나서는 것을 내가 말렸지

. 지나는 배가 모두 해적은 아닐 테고, 남방인이라고 모두 왜놈처럼 잔인하지만은 않을

테니 틀림없이 우리를 살려줄 사람들도 있을 테란 말이오. 한번 체했다고 아예 밥을 안 먹

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누군가가 말하기를 남쪽에 구름과 안개 사이로 아득히 보

이는 곳이 아마 유구국에 틀림없으니 칠팔백 리 상거요, 북풍만 잘 만난다면 밥 세 끼에 갈

수 있다구 했지요. 앉아서도 굶어죽을 바에야 뱃놈이 물에서 죽는 게 나으리라 싶습디다.

두들 좋다고 찬동하여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돛대와 노를 만들고 갑판을 보수했지요.

사흘이 못 되어서 멀리 서남 해상으로 세 척의 선단이 동북간으로 지나가고 있는 게 보입디

. 깃대를 흔들고 연기를 올리고 사람 살리라는 아우성을 치며 두 손 합장하고 머리를 조

아려 빌었지요. 선박에서 대여섯이 작은 배를 내어 타고 오는데 모두 홍색의 화포로 머리를

싸고 소매가 좁은 푸른 비단옷을 입고 있었지요. 그중 수염을 덥수룩히 하고 머리에 둥근

건을 쓴 사람이 글로 물었지요. 그래 다시 경주인이 나서서 필담을 하였는데, 조선 사람으로

표류해 왔다고 답하니 너희 나라에 중국인 망명객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습디다. 명나라 유

민으로 우리나라에 망명해 온 분이 과연 많고, 우리나라에서 우대하여 그 후손 중에 벼슬하

는 이도 많다고 답을 한 것 같습디다. 그들은 일찍이 명인이지만 안남으로 이산한 지 오래

라는 것이었습니다. 팥을 무역하러 일본으로 가는데 돌아가고 싶거든 자기네를 따라서 일

본으로 가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차례로 작은 배에 태워 본선에 바꿔탔지요. 향긋한 차와 배

갈을 주고 미음과 죽을 먹이더니 우리를 방 둘에 나뉘어 자도록 해주었소. 배에는 머리를

기르고 관을 쓴 사람과 삭발하고 수건을 쓴 사람이 있는데 왜 다르냐니까, 명인들이 많이

안남으로 망명하였는데 삭발치 않은 스물한 명은 모두 명인이라는 것이었소이다. 또 배가

닿았던 섬을 물으니 유구국 지역인 호산도라고 그럽디다. 우리가 배를 두루 둘러보건대 참

으로 조선술에 대해 조금 안다는 내게도 탄복이 될 정도로 신묘합디다. 배는 굉장한 저택

처럼 방이 무수히 많고 난간과 창살이 연달아 겹겹이 문이었고, 기명 집물이며 병풍 휘장

서화가 한결같이 정교를 극했습디다. 명인이 우리를 안내하여 선복으로 층계를 타고 내려

가니 폭이 백 보에 그 길이는 배나 되었소. 닭과 오리들이 사람이 접근해도 놀라 달아나

지 않고, 다른 편에는 땔감과 기물 등속이 많이 쌓여 있었지요. 또 따로 크기가 열 섬쯤 들

어 보이는 항아리 같은 물건이 있었는데,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지고 옆으로 구멍을 뚫어

그 구멍을 손가락 크기의 붉은 칠 한 나무못으로 막아놓았습디다. 그 나무못을 뽑으니 물

줄기가 힘차게 뻗쳤소. 물통인데, 물통에 채워진 물은 풍족히 쓰고도 마르지 않고 더해도

잘 넘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다시 한 층계를 내려가니 미곡과 비단 등의 백물을 많이

저장해두었고, 한편은 막아서 양과 오리, , 돼지 등의 육축을 사육하여 식량이 풍족합디

. 한 층계를 더 내려가니 배 밑이 나왔지요. 그 배는 전부가 사층인데 사람은 제일 상층

에 있어 선실이 쭉 연하여 있으며, 그 아래 삼층은 선반을 매고 여러가지 물건을 품목에 따

라 가지런히 수장하여 부족함이 없었지요. 배 밑바닥에 작은 배 두 척을 매어 놓았는데,

한 척은 이미 탔던 것이었소. 배 밑에는 물을 담아 작은 배를 띄워두고 널짝 문이 있어 바

다로 통하는데, 반은 물속에 잠기고 반은 물 위로 드러나 마음대로 개폐하여 작은 배가 그

곳을 통해 출입하게 되어 있습디다.

널짝 문을 개폐할 때에 바닷물이 배 밑을 통하여 들어왔다가 도로 수통으로 해서 배 밖으

로 쏟아져 나가는데 폭포 소리를 내었소. 그 수통의 길이는 두 길이 넘고 둘레는 한아름이

넘으며, 위는 크고 아래가 가늘어 나팔 같고 가운데로 구멍이 뚫리고 밖은 곧아 밑으로 한

쌍 고리가 있으니, 그 고리를 안고 좌우로 돌아 소리를 내면 배밑의 물이 수통을 통해 빠져

나가는 것이었소. 실로 썩 신기하여 본업이 사공인지라 또 배워두려 하였건만, 저들이 보여

주지 않습디다. 과연 대해를 다니는 무역선이라면 그만은 해야겠습디다. 층계를 따라 두층을

올라오자 상층이 나서는데 오르고 내리는 길이 서로 달랐지요. 우리네가 미곡 천여 석을 싣

는 배만 큰 줄 알았지 그렇게 오묘히 만든 배는 처음 보겠습디다. 그런 배만 있다면 한번

해로 장삿길을 열어볼 만하지요. 내게 밑천이 있으면 그런 배를 만들어 띄워보는 게 소원이

. 하여튼지 그 이튿날 서남풍이 크게 일어 파도가 산같이 일어나는데, 그들은 과히 난색도

없이 백포돛을 높이 달고 쏜살같이 나아가 밤에도 계속 항해하였소이다. 드디어 일본 수로

와 조선 수로가 갈리는 곳에 이르러 우리는 배에서 내리게 되었지요. 뒤에 이끌고 왔던 우

리들의 나뭇잎 같은 배로 옮겨 타고 날이 저문 바다를 갈 제 소아가 부모를 잃어 갈 바를

모르는 형상이었습니다. 이튿날 오후에 바람이 급히 불어 배가 나는 듯이 행하여 흑산 큰

바다로 떠가고 있었소. 이윽고 어두운 구름이 모여들고 사나운 비가 몰아쳤지요. 황혼 무렵

에 더욱 거세어진 파도는 하늘에다 방아질하고 폭풍이 바다를 키질하였습니다. 그곳은 가장

험악한 물길입디다. 암초들이 어지러이 물결 사이로 뾰족뾰족 나와 있고 파도가 사나워 바

람이 잠잠한 날도 흔히 배가 난파하는데, 심지어 성난 바람이 바다를 말아 사나운 파도가

하늘에 닿았으니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습디다. 모두들 휘항을 벗어 머리를 싸매고 노끈

으로 허리를 감는 것이었소. 어지러이 통곡들을 하면서 몸을 동이는데, 대개 사후에 몸과 얼

굴에 손상을 덜받기 위한 조처지요. 시체나마 온전한 꼴이 되자는 겁니다. 고물에서 키를 잡

다가 바람과 파도에 날려서 두 사람이나 목숨을 잃었지요. 아무도 더는 배의 방향에 관심들

이 없어져서 여기저기 잡을 만한 물건들에 매달려서 속절없이 파선될 때만 기다릴 뿐이었습

니다. 갑자기 선판이 부서지는 소리가 벽력같이 들려서 모두들 배가 부서짐을 알았지요.

데 한참을 기다려도 배가 아주 깨어지지는 않았던 모양이었습니다. 머리를 들어 간신히 앞

을 바라보니 큰 산이 눈앞에 다가서 있었소이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깎아지른 벼랑인데 배

가 쓸리고 부딪쳐서 곧 가라앉을 모양이었소. 성난 파도가 암벽을 두드릴 적마다 집채만한

물결이 마주 덮어씌웠지요. 밤이 깜깜하고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중에 우

리는 다투어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나 앞은 기어오를 수도 없는 절벽이라 파도에 밀

려 자맥질만 수없이 할 뿐이었지요. 나는 마침 배에서 떨어진 널쪽을 잡고 매달렸는데 드디

어 열 길 쯤은 높아 보이는 파도가 쏴아 소리를 내면서 뒤에서 밀려옵디다. 나는 널쪽을 놓

치면 죽으리라 짐작하고서 끈으로 내 몸을 묶어두었었는데, 과연 파도가 반쯤 기울어진 배

를 삼키고 밀어붙여 절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고, 나도 절벽에 호되게 부딪는데, 그때 정

신을 잃었소. 한참 뒤에 다시 정신이 들어 보니 벼랑 가녘을 따라 흘러 작은 바위에 걸쳐

물벼락을 맞고 있는지라 해안까지 천신만고 끝에 닿았소. 당초 배에 탔던 이가 경주인 합하

여 열이었는데 물속에 뛰어내릴 제는 여덟 명, 그리고 나말고는 다른 사공이 한사람 더 살

았지요. 나는 추위와 굶주림에다 절벽에 부딪칠 때 다리를 상하여 기어서 언덕을 올라갔지

. 나중에 들으니 몇사람이 벼랑을 오르다가 실족하여 다시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었

습니다. 천신만고 민가를 찾아 거기가 신지도진에 속한 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후

바다에는 한번도 나가지 않구 있습니다."

박성대는 표류기를 얘기할 때 담담하고 자상하게 설명은 하면서도 스스로 원망이라든가

처절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아직도 항해에 대하여 깊은 열망을 간직하

고 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대용이 물었다.

"그 다리는 전혀 쓰지 못하우?"

", 무릎뼈가 부서져서 부목을 대구 지내는데 견딜 만합니다."

대용이 새삼 볼품없는 성대의 새까맣고 작은 체구를 바라보며 실로 감탄하였다. 그가 만

나본 중에 이처럼 뱃놈다운 자를 일찍이 알았던 적이 없었다.

"이제 듣구 보니 이녁이 다시 바다로 나가지 않는 것은 배가 없기 때문이었구려."

"그러우...... 누가 밑천이라도 대어준다면야 뚝섬에 나가, 강원도에서 내려오는 가장 질이

좋은 재목을 뗏목째로 받아다가 손수 배를 지어보겠수."

곁에서 대두도 말하였다.

"예서는 아까운 사람입지요. 내 종제라서가 아니라, 이 경강 어름에 이만한 사공이 한둘이

아닙니다."

"참으로 좋은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앞으루 잘 사귀어봅시다. 나두 형세가 곤하여 시방은

남의 밥을 먹구 있으나, 그만한 기개가 있는 선인들과 동무 하여 바다로 나가구 싶은 생각

은 남보다 많은 사람이우."

그들은 조반을 먹고 나서 경강 저자에 관해 더 얘기를 나누었다. 대용과 대두 석서방은

나룻배를 타고 마포 동막거리의 강주인을 찾아가 사금파리 어음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성대가 나룻배를 저어 그들은 한강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올라갔다. 과연 경강의 마포인지라

사설 창고들이 강변에 즐비하였고, 각종시전에서 나온 가가들이 열을 지어 늘어섰는데 여각

과 객주의 크고 작은 집채들이 촘촘하였으며, 색주가 와 주막과 간이 술청이 용수 씌운 장

대며 발 달린 등이며를 펄럭이면서 늘어서 있었다. 여각으로 강주인을 찾아가니 곁꾼들이

창고 앞을 들락거리고 있었는데, 강주인은 여각 주인방에서 관리인 듯한 손님과 상담을 주

고받고 있었다.

"주인장, 평안하오?"

하면서 우대용이 주인 방 앞의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주인은 콧등에도 기별이 가지 않은 듯

멀뚱히 볼 뿐이었다. 대두가 다시 고개를 디밀며,

"어음 새기러 왔소이다."

하니까 강주인은 아무 대답 없이,

"수돌아, 수돌아......"

중노미를 부르는 모양이었다. 소년이 뛰어오자 턱짓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송가에게 가서 저이들 어음을 지불해주도록 하여라."

그들은 속으로 괘씸한 마음이 일어 울끈불끈하는 것을 참고 중노미의 뒤를 따르니 창고에

서 곁꾼들을 지휘하던 건장한 체구의 차인에게로 데려갔다.

"뭐야?"

"어음 지불을 하랍니다."

대두가 말없이 사금파리쪽을 내어주니 하인은 그것을 받아들고 창고 곁방으로 들어가 장

부를 내어 이리저리 들치면서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해보니 분명히 주인이 신표

의 반쪽을 보내어 확인을 해줄 만한데 무턱대고 자기에게로 보낸 것은, 지불을 흐지부지하

라는 말없는 지시임을 스스로 알고서 일부러 장부를 들치는 시늉을 했던 것이었다.

"이게 우리 여각의 어음이란 말요?"

차인이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사금파리를 내미는 것이었다. 대용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여보, 그러면 어디 장바닥에서 줏어다가 지불해달라는 줄 알우?"

하였으나 대두 석서방이 팔꿈치로 우대용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제가 나섰다.

"여보, 지금 입고시키는 이 쌀의 내역이 무어요?"

"이거야 선혜청에 입고시킬 쌀이지."

"대동미를 싣고 온 사람들이 바로 우리요. 그 어음은 댁네 주인이 내준 것이지만...... 우리

는 아직 운임도 받지 못하였소."

"글세 운임이야 장부에 나와 있으니 모두 지불하겠지만, 이 어음은 모르는 일인걸."

"좋소...... 내가 주인께 가서 얘기하지."

대두는 우대용을 기다리게 하고서 다시 주인 방으로 찾아갔다. 강주인은 혼자서 장부 정

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주인장, 우리에게 주신 사금파리 어음을 지불해줘야겠소이다."

주인은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대두를 바라보았다.

"...... 무슨 어음인데?"

"허허, 우리네가 성미가 느긋하니까 다행이우. 만일 저 밖의 물먹은 쌀을 퍼들고 포도청에

달려가면 어쩔라우. 까짓 우리 같은 사공놈들이야 곤장 맞고 유배 수천 리에 내쳐지면, 원래

가 달랑 두 쪽이라 입에 풀칠하고 연명하기는 마찬가지외다. 허나...... 주인장 같은 대고께서

야 집안이 적몰되고 가산은 모두 몰수되어 알거지가 될 터이니 누가 손해겠수. 화수먹이에

나누기로 한 미곡을 내달란 말이우."

그러나 주인은 빙글빙글 웃는 것이었다.

"이미 서리가 나와서 검사를 마치고 입고 수결까지 끝났네. 화수든 화목이든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물건이 변하는 거야 창고에서 다반사인 일인데, 그것을 내가 어찌 알겠나. 어서

가서 운임이나 받아다가 춘득이께 갖다 주어."

눈치를 보아하니 강주인은 우대용이 현장에서 미곡을 받지 않고 어수룩하게 수걱수걱 사

금파리 어음을 받았을 때, 이미 다른 마음을 먹었던 모양이었다. 사금파리 어음이 문자로 적

힌 것도 아니요, 상인들끼리 물건을 내주고 받거나 산지에서 물품 대금을 지불할 때 서로

사상하기 위하여 주고받는 것인지라 거래가 없는 사공들께 버틸만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화

수먹이는 그 현장에서 완전히 거래가 끝나는 것인데, 실기를 하였으니 이미 관의 검사도 끝

나고 물품의 소유주가 관이 된 이상에는 이제 와서 화수를 먹인 것이 그리 문제될 시기가

아닌 셈이었다. 주인의 배포를 대두는 금방 눈치채었다. 이윽고 고개를 떨군 채 우두커니 섰

던 대두가 무슨 생각을 하였던지 더 이상 콩이야 팥이야 따지지 않고 말하였다.

"운임 지불이나 해주오."

"아 그야...... 운임은 지불해야지."

강주인이 송증을 내주었고, 대두는 지그시 이를 물고서 돌아섰다. 운임은 곧 차인에 의해

서 지불되었으나, 어음의 반쪽은 그야말로 장바닥에 너저분한 사금파리로 떨어지고 말았다.

대용이 뒤늦게 제 어리석은 실책을 확인하고서는 대두에게 중얼거렸다.

"미안하이...... 내가 원체 경험이 없어놔서 일을 낭패시켰네."

그러나 대두는 태연히 말하였다.

"곧 받아낼 터이니 염려 마십시오."

"무슨 수로 저 배짱을 꺾겠는가?"

우대용이 실망하여 힘없이 말하였으나, 대두 석범철은 다시 다짐하였다.

"두고 보십시오. 밑이 구리기는 제놈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인데, 내놓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하리다. 도사공 성님은 어서 돌아가서 소금짐을 풀어 밤섬장을 먹이시우. 성대가 잘 살펴

줄 거외다."

"자네는......"

", 저는 여기 동막에서 노는 아이들을 만날 작정입니다."

성대가 석서방의 뜻을 짐작하였던지 우대용을 이끌고 강변으로 내려갔다.

"잘 해결될 겝니다. 천수라는 자가 있는데 전에 훈련원을 다녔었지요. 시방은 군문에서 나

와 중도아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제법 협기가 있는데다 동막거리 본바닥에서 잔뼈가 굵었

는지라 아무도 그를 함부로 여기지 못합니다. 아마 천수가 나서면 잘 해결될 게요."

이어서 성대는 자기가 아는 천수의 행각 한 가지를 꺼냈다. 어느 절기에 서울에 담배가

품귀해서 한 줌의 값이 서 푼이나 나갔다. 영남사람이 논밭을 죄다 팔아가지고 담배를 샀는

, 그 본전이 오백 냥이나 되었다. 그는 담배를 싣고 저물어서 남문 밖에 당도하였고, 길에

서 탕건에 창의를 입은 늙은이를 만났다. 이게 담뱃짐이오? 그렇소. 지금같이 담배가 동이

난 때에 세 바리면 삼천냥은 문제없소. 당신은 참 때를 잘 만났구랴. 내 이번 서울이 초행이

, 서울 장안에 사고무친이라 객주를 정하는 등 제반 절차를 좀 가르쳐주시우. 저런......

행에 이런 중화를 가져왔소? 날 만나지 못했던들 아주 낭패할 뻔했구랴. 나만 꼭 따라오시

. 이렇게 되어 두 사람은 동행하여 입성하고 시내를 배회하다가 통금 임박하여 자기 집으

로 데리고 가 담배도 잘 간수해주었다. 새벽종이 울린 직후 그 사람이 안에서 나와 하는 말

이 이러했다. 당신의 불소한 물건은 하루 이틀에 다 팔 수는 없소. 당신 망아지가 일없이 놀

고 있고 용산호에 우리 나뭇짐 운반해 올 것이 있으니 수고스럽지만 바로 조반을 자시고 말

을 끌고 가서 싣고 오시면 어떻겠소? 하는 것이었고 담배장수도 말하였다. 그래도 좋겠지마

는 우선 용산길도 모르니 곤란할 듯허우. 그러나 주인 늙은이는 자기 집 종을 안동해서 가

라는 것이었다. 말을 배불리 먹여서 시골 사람은 그 집 하인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때 파루

를 갓 넘겨서 멀리 있는 사람은 어슴프레 분간이 안되는 시각이었다. 청패에 와서, 그 하인

이 살짝 내빼버렸으니, 담배장수는 하인을 잃어버리고 그 집으로 되돌아가자 하여도 어두운

밤에 얼핏 하룻밤을 자고 나온 집이 기억될 리가 없었다. 해는 돋아오는데 진퇴양난이었다.

다만 말고삐만 쥐고 길거리에서 허둥지둥하며 대성통곡하는 것이었다. 원래 한양 인심이 이

렇듯 간교하였으니, 오는 사람 가는 손이 하나같이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한양 물정을 모르

는 시골 사람을 어리석게 여겼다. 그때에 동막거리서 밤새껏 놀다가 청패의 동무네로 해장

을 하러 가던 천수가 이곳에서 부딪쳤다. 천수는 시골 사람의 하소연을 듣고 나더니 껄껄

웃어제쳤다. 당신의 잃어버린 담배를 내 전부 찾아주지. 담뱃값을 반분하겠소? 담배장수는

뛸 듯이 기뻐하여 만약 찾기만 하면 다 드려도 시원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천수는 담배

장수가 끌고 왔던 세 필의 말 중에서 가장 늙은 말을 골라 고삐를 풀어 앞서 가게 하고,

이서 그 말들의 걸음을 따라 시내를 쏘다녔다. 말이 문득 어느 집 문전에 당도하여 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천수가 이 집이냐고 물으니, 담배장수가 한참 대문과 골목을 이리저리 살

펴보다가 과연 그 집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천수가 심호흡을 깊숙이 하고 나서 발길로

대문을 지르며 주인을 큰소리로 외쳐 찾았다. 주인이 안에서 나오자 천수가 담배장수를 돌

아보며, 숙박한 집의 주인이 맞느냐고 물으니 또한 맞는다고 대답하였다. 주인이 돌아가는

형편을 보아 눈치를 채고서 얼른 대꾸하는 것이었다. 어디 갔다 이제 오우? 우리집 하인이

아까 먼저 와서 말하기를 길이 어두워 서로 잃어버렸다고 합디다. 그래 여기서 기다리던 차

였소. 어쨌든 돌아왔으니 천만다행이오. 그러나 천수가 눈을 부라리며 주인을 몰아세웠다.

네가 어떤 사람이길래 감히 모궁으로 실어가는 담배를 중간에서 가로채고 마부를 유인하여

따돌렸느냐? 내는 기찰포교를 지내는 사람인즉, 우선 담배 동을 전부 내놓아라. 천수의 기세

가 당당하고 언사가 날카로우니 포교의 서슬이 서 있었다. 주인은 듣고 나서도 한참이나 멍

청히 서 있다가, 단 한마디의 핑계도 붙이지 못하고 담배 여섯 동을 고스란히 져내오는 것

이었다. 천수가 먼저 묶음을 헤쳐보고 나서 외쳤다. 아니...... 이중에 싸두었던 돈 삼백 냥은

어디루 갔어? 주인이 하 어이도 없고 답답하여 담배장수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담배 동을

애초에 들여올 땐 돈 있단 말이 없었고 또 애당초 묶음을 풀어보지 않고 지금 비로소 꺼내

오는 것인데 돈 운운하다니 심히 맹랑하오. 그러나 이미 둘이서 짰던지라 담배장수는 기세

좋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제는 내가 말을 하지 않았으나, 내가 실은 모궁의 마름이오.

토에서 바치는 담배와 함께 삼백 냥을 가져왔더랬소. 지금 돈이 없다고 하면 주인의 소위를

알 수가 없소. 천수도 부추겨서 말하였다. 나는 모궁에서 부탁받고 기찰하러 왔다. 오래 기

다려도 담배바리가 오지 않는다고 걱정이더니 드디어 이 사람이 빈손이 되어 돌아왔는데,

분명히 한양 시정배에게 사기를 당한 꼴이다. 만일 주인이 돈을 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포도

청으로 데려가 전후 사실을 따질밖에 도리가 없다. 한번 버텨볼 테냐? 천수가 그럴 듯한 얼

굴로 눈을 부라리며 주인의 멱살을 휘어잡아 흔들어놓으니 그는 겁을 집어먹고 두 손을 들

어 비는 것이었다. 집주인은 시정에서 밥술깨나 먹는다는 상놈인데, 돈 말이 백지에 허황하

게 지어낸 소리인 줄을 빤히 알면서도, 이미 약점이 잡혔으니 변명할 도리가 없고, 만약 발

악해보다가 어떤 풍파가 닥칠까 두렵기도 하여 울며 겨자 먹기로 생돈 삼백 냥을 물어냈다.

"천수는 그런 자입니다. 입담 걸고 술 잘 먹고 또한 동무간에 의가 좋아서 남의 곤경이라

면 팔을 부르걷고 뛰어와 거들지요. 구변 좋고 수완 있으니 동막거리에서는 모두들 천수를

가리켜, 어사라구 합지요."

우대용이 마음에 상쾌한 생각이 일어나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과연 호협한 사람인 모양이오. 이따가 밤섬장으루 데려왔으면 좋겠군."

"아마 화수 먹인 미곡을 찾아가지구 올 겁니다. 천수라면 능히 강주인의 거짓 배짱을 발

라낼 것이외다."

대두 석서방은 역시 동막거리의 중도아요 왈짜인 홍천수를 만나려는 것이었다. 반분한 서

른다섯 섬의 곡가가 현 시세로 백사십 냥이었으니, 절대로 강주인에게 와식을 시킬 수는 없

는 노릇이었다. 그는 중도아들이 잘 모여드는 동막거리의 목로 술집인 째보집으로 찾아갔다.

마당 위의 온돌에서는 물이 설렁설렁 끓고 있는데, 아침 해장을 하려는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서서 왁자거리고들 있었다. 우선 대두 석서방은 젓가락을 집어 안주를 숯불 위에 올려

놓고 두 잔 술을 청하였다. 양푼을 끓는 물속에 담아 빙빙 돌리면서 술을 데우고 있는 주모

에게 석서방이 물었다.

"홍천수 만났수?"

"칠패 홍서방 말이우...... 저기 저이에게 물어봐요."

그가 돌아보니 과연 낯익은 칠패의 어염 중도아들이 둘러서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천수 안 왔수?"

"그자식 요새 제 코앞의 밥알 떼기두 귀찮은 형편인데 왜 찾으슈? 뭐 넘길 거 있으면 내

가 후히 처리해드리리다."

천수의 동료인 듯한 사내가 엉뚱한 소문을 전하는데, 홍천수는 거의 달포째나 동막거리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디에 있수?"

"남문 밖 석우에서 재미를 단단히 본답디다."

곁에서 듣던 자가 제 술잔을 두드리며 끼여들었다.

"압다 맨입으로야 알려줄 수가 있나. 술을 석 잔씩 돌리슈. 그러면 우리가 자세히 일러드

릴 테니......"

석서방은 흔쾌히 응낙하였다.

"그럽시다. 까짓 거...... 여기 술 석 잔씩 올리시우."

진안주가 다시 석쇠에 올라 지글거리며 타오르는데, 중도아들은 눈살을 찡그리고 안주를

뒤집으며 말을 이었다.

"그 친구 얼이 나갔단 말이우. 우리두 걱정을 하구 있던 참이외다. 시방 새참을 먹느라구

신은 나겠지만 이제 큰코를 다칠 거외다."

"어떤 유부녀와 사통을 하구 있습디다. 관서루 감사를 따라서 비장이 되어 간 사내의 여

편네인데 자색이 제법 곱지요. 젓갈을 사러 칠패에 나왔는데 어찌어찌하여 홍서방과 눈이

맞았습죠. 우리가 다 아는데 어찌 그 권속들이 모를 것이오."

"석우의 어디냐니까요?"

석서방은 대개 짐작이 가는 얘기였으므로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의 재촉하는 말에,

"당고개 삼거리에서 어비장네 집이 어딘가 물으시우."

석서방은 이내 째보집에서 나왔다. 천수의 근황을 듣고 실망이 되기는 하였으나 어음을

다지기 위해서는 그를 만날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는 동막거리서 만리창 쪽으로 올라갔다.

고개 둘을 넘으니 곧 석우가 지척인데 삼거리에 나섰다. 행인에게 물으니 비장의 집을 손가

락질해주는데 포실하고 대문도 번듯한 기와집이 천변가에 서 있었다. 대두가 문고리로 대문

을 두드리며 하인을 찾으니 계집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예가 어비장 댁이냐?"

"그런데...... 누굴 찾으셔요?"

"너희 손님을 만나고자 한다."

대두의 말에 계집아이는 행색으로 보아 상것임은 알겠는지라 대수롭잖게 흘겨보고 나서

문을 도로 닫는 것이었다.

"얘야, 문 좀 열어라. 여기에 칠패 홍서방이 있단 말을 듣구 왔다."

"그런 사람 없어요. 부녀자뿐인 집에 와서 괜한 소란 피우지 마셔요."

하녀는 딱 잡아떼는 것이었다.

"허허, 다 알구 왔대두 그러는구나. 이 집에 홍서방이 들어온 지가 열흘이 넘는데 그래두

잡아땔 작정이냐."

이때에 더욱 안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 누구여?"

듣다 못한 홍천수가 하는 수 없이 쫓아나온 모양이었다. 남의 동네에 와서 이목도 있었으

니 비장의 계집이 등을 밀어낸 듯하였다. 석서방은 반가워서 다짜고짜 말하였다.

"나 범철일세. 문 열지 않으면 숫제 고함을 지를 테야."

"망할 자식 같으니......"

투덜거리며 홍천수가 대문을 열었다. 그가 들어서자 홍은 대두를 안으로는 들일 기색이

없이 중문간에 세워두고 물었다.

"니 애비가 숨이 넘어간다드냐, 예가 어디라구 찾아와서 법석이야. 언놈이 가르쳐주데?"

"칠패 중도아들간에 소문이 짜하니 돌았으니 조심해여, 이 외입장아."

"헛 말세로다. 귀천이 유별한데 훈련원 다닐 제는 천상이요, 이제는 떨어진 적선이 틀림없

. 네 따위 사공 천류가 맞대놓구 싸라기 말이냐?"

그는 백두에 홑것 바람인 석서방의 행색이 계집뵈기에 좀 창피했던 양이었고, 석서방은

기왕 같은 시정아치라 그의 꼴이 아니꼬웠다.

"뭔일인데...... 빨리 뱉어놓구 나가봐."

"자네 돈벌이할 일이 생겼네."

"돈벌이......?"

천수가 하품을 하면서 맞받고 나서 중얼거렸다.

"까짓 몇푼벌이에 예까지 달려와. 나는 해동 때까지 장바닥엔 안 나갈 작정이야."

석서방은 품안에서 쓸모없이 되었던 사금파리 어음을 꺼내어 내밀었다. 그리고는 그를 지

그시 노려보면서 속삭였다.

"얼마짜리인 줄 아나?"

"...... 한 오십 냥이나 하겠지."

"그 스무 배일세."

과연 석서방의 꼬임은 적중하여 천수가 입을 딱 벌렸다.

"...... 천 냥이란 말이지."

"몇푼벌이에 끼일 생각 없으면 얘기 그만두지."

"아니야...... 실은 나두 갑갑하던 차에 좀이 쑤셔서 종루에나 나갈까 하던 참이여. 그 어음

에 무슨 내력이 있겠구먼. 이를테면 다지는데 기러기를 만들었다든가, 와식을 했다든가......"

과연 홍천수는 눈치가 재빠른 자였다. 석서방은 말을 꺼냈다.

"동막거리의 강주인 녀석이 어음지불을 않고 와식을 해버렸네."

홍천수는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뒷전에서 그들의 쑥덕공론을 지켜보던 하녀

에게 일렀다.

"내 의관을 내오너라."

석서방이 천수의 어깨 너머로 넘어다보니 갓과 중치막을 내어주는 여인의 자태가 마루 끝

에 보였다. 과연 자색이 아름다웠고 살빛은 가무스레한 철색인데 눈두덩이 푸르죽죽한 것이

사내를 몹시 밝히게 생겨먹었다. 계집은 잊지 않고 역시 천수의 어깨 너머로 석서방을 흘낏

하고는 대수롭지 않았는지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천수는 제법 한량인 것처럼 갓과 겉옷

을 걸치고 나섰다.

"내력이 어찌된 어음이길래 천 냥짜리란 말야?"

함께 걸으면서 천수가 석서방에게 물었다.

"실은 화수를 먹였네."

석서방이 대답하자마자 천수가 걸음을 멈추면서 가래침을 돋구어 뱉었다.

"이런 제미할...... 화수먹이에 천 냥 어음이란 가당치 않으니 날 속였구나!"

석서방은 천수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시정아치의 의리란 게 뭔가. 이럴 때 좀 도와줘야지. 실은 백사십 냥짜리, 미곡으로 치면

서른다섯 섬일세. 우리 여러 사공들이 나눠보았자 하룻밤 색주가의 용챗돈이지만, 강주인께

와식을 시켰다가는 전례가 되어 동막거리에서 한풀 꺾이는 셈이 되네. 끄떡하면 잘라먹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자네에게 많이 줄 수는 없고 한 이십 냥 잔푼벌이나 시켜줄 테

."

"나 원 드러워서...... 이 손 놓아."

하면서도 천수는 돌아가지 않았으니, 기왕에 내쳤던 걸음이요 큰 선단의 사공들과 난전 중

도아들은 워낙에 등과 가슴처럼 밀접한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그따위 사금파리 어음을 받게 되었는가?"

"이번에 우리 선단에 도사공이 새루 왔는데 경강의 시속을 전혀 모르는 이란 말야. 화수

를 먹이구 현장에서 곡식을 나누어야 할 텐데 그만 강주인에게 속아서 어음쪽을 받게 되었

. 강주인은 서리와 짜고 모두 입고시켰으니 캐내어도 이미 늦은 일이라, 배짱이 생긴 걸

. 그리구 우리네는 공모했을 뿐 아니라 선주에게도 속여야 할 일이거든. 꼼짝없이 서른다

섯 섬을 먹힐 형편일세."

"물정 어두운 놈이 어찌 도사공이 되었으며 자네는 만년 대두 노릇을 할 작정인가?"

석서방이 천수의 비양대는 말에 변명하였다.

"선주로서는 그럴 듯한 의견일세. 나 같은 경강 토박이로 도사공을 삼았다가는 어떤 헛물

을 들이켜게 할지 모른단 말이거든. 이번에 온 사람은 경강 항운이 겨우 두어 번 되었는데,

비록 물정은 어두워도 진짜 뱃놈일세. 아랫것들에 대하는 마음 씀씀이며 물정에 터가는 것

이 그렇게 장부다울 수가 없네. 예전에 해주에서 장삿배를 부리던 사람이라는데 처음에 티

격태격했지마는, 가만 두고 보면 아주 사내라니까. 자네두 만나서 사귀어보게."

"어느 바닥에서 쥐 잡던 녀석인지는 모르지만, 너 같은 알짜 깍정이가 마음을 주었으니

괜찮은 모양이구나."

"그렇다니까......"

"가만있자, 우선 강주인놈을 꾀어들일 궁리를 해야겠구먼, 어디 백사십 냥만 받아내서야

쓰겠나. 기왕에 해내려면 된통 기러기를 씌워야지. 한 오백 냥은 우려내게 되겠지."

두 사람은 만리창을 돌아서 마포 동막거리로 내려갔다. 홍천수가 걸으면서 몇가지 안을

궁리하는 듯하더니, 드디어 작심이 되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며칠 여유가 있는가?"

"여기서 아무래두 다시 운반 청부를 맡아낼 것이니 사나흘은 걸리겠지. 강화 달곶이로 일

단 떠났다가 다시 달포나 지나야 돌아올 게야."

"사나흘 여유가 있다면 기일은 넉넉하네. 이틀 안으루 어음을 다져서 찾아주지. 째보네 목

로루 가볼까."

그들은 동막에 이르러 칠패 중도아들이 모여드는 목로 술집으로 찾아갔다. 모두들 홍천수

의 노리끼리한 근황을 아는지라 제각기 음담으로 농지거리를 던졌다.

"그건 비장 마누라께 떼어 맡기구 왔나."

"인석아, 깜박 잊어 어란인 줄 알고 구워 먹을라. 얼른 가서 도로 차구 오게."

"궁둥이가 성한가. 더운 물을 맞아서 헐었을 텐데......"

"저런 망할 자식을 보았나. 이놈아, 내가 가이새끼라더냐. 외입쟁이가 오랜만에 뒷문 출입

을 하기로 새암은 그만 부리려무나."

천수도 대꾸하면서 싱글거렸다. 그가 구석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중 늙수그레한 자 두 사

람을 불러 나란히 앉았다. 잔술을 시켜놓고 우선 구운 청어를 씹으면서 천수가 말하였다.

"공돈 좀 벌어보지 않을 테여?"

두 사람은 모두 아잇적부터 강바닥에서 굴러온 이들인지라 벌써 돈얘기가 나오자 눈이 가

늘어지고 몸이 저절로 천수에게로 바짝 기울었다.

"무슨 일인데......?"

"어음을 다져야겠어."

하면서 천수는 석서방에게서 넘겨받은 사금파리쪽을 내보여주었다.

"수결한 문건이 함께 있어야지."

"그게 있으면 돈벌이두 안되게. 강주인 모모가 와식을 해버렸단 말이거든. 천상 여우잡이

를 시키든지, 신을 바꾸든지 해야겠단 말이야."

"여우잡이는 시간도 걸리고 담보도 많이 들지만 신바꾸기가 그럴 듯하지."

그들이 저자의 변을 쓰니 석서방은 도무지 알아들을 재간이 없었다.

"무엇으루 할까?"

그들이 묻자 천수가 석서방에게 되물었다.

"우리에게 넘길 물품이 뭔가?"

"소금하구 조기일세."

"그걸 쓰면 되겠구만."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는데 공론의 겉은 대강 서로 전하고 받은 양이 뚜렷하였다.

"나그네 하나 실어오게."

"개비쇠가 칠패 쪽으로 나오니까, 사오도록 허지."

"내가 오늘 하룻동안에 다 박아놓을 테니 내일 이맘때 다시 만나기루 하고...... 제사는 내

일밤에 지내자구."

"갈 테여?"

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오늘 할 일이 많은 사람이야. 기왕에 장바닥 출입을 하였으니 오랜만에 투전판이나 좀

둘러보구 갈까."

천수와 석서방은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여태껏 무슨 꿍꿍이속들인지 벙벙하던 석서

방이 천수에게 대뜸 묻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들이 그 모양인가. 나두 경강 물을 먹은 지가 한두 해가 아닌데 시정아치

들 변은 워낙에 수수재끼 하는 듯만 여겨지거든."

천수는 말없이 껄껄 웃었다.

"여우잡이는 뭐구, 신바꾸기는 뭔가?"

"그걸 가르쳐줬다간 우리네 칠패 동무들 밥줄 끊어지게? 자네는 어서 밤섬에 가서 선적한

물건을 풀지 말도록 일러두란 말야."

석서방은 점점 알쏭달쏭하였다.

"아니 도와주긴커녕 이젠 남의 장사까지 망칠려나."

그러나 홍천수가 정색을 하고서 대답하였다.

"이득 없는 일에는 부자지간에두 삼가는 게 시정아치의 도덕이야. 자네는 건더기 건져 먹

고 우리는 국물을 들이켜면 되는 게지. 도움은 무슨 도깨비 사촌이란 말인가."

과연 홍천수는 미리 경우까지 밝혀두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석서방도

그러한 한양 깍정이의 성깔을 잘 아는지라 계면쩍게 대꾸하였다.

"압다, 이빨두 튼튼한데 자꾸 새겨주어 고맙네. 염려 말어...... 우리는 백사십 냥만 찾아내

면 되니까......"

"나중에 딴소리하면 정리에 곰팡이 스네. 얼른 가서 일러둬."

석서방은 적이 마음을 놓고서는 강을 건너갔다. 천수는 석서방이 가르쳐준 강주인 여각으

로 향하였다.

먼저 그들이 변을 써서 논의한 내막은 이러하였다. 강주인이 배짱으로 어음을 와식해버렸

으니 이쪽에서는 속임수로 돈을 받아내고,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쪽 자신의 약점을 이용

하여 발고하지 못하게 하는 방도를 쓸 작정이었던 것이다. 먼저 여우잡이란 것은, 특정 물품

을 조작하여 물가의 변동을 심하게 하고 나서 일정 상인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일이나,

또는 금품을 빌려서 갚고 또 빌리고 거짓 신용을 얻고나서 대금을 횡령하는 따위의 속임수

를 일컫는 것이었다. 즉 향간에 떠도는 재담으로 여우털 개잘량 마련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온 변이었다. 여우란 놈이 단 것을 놓아하는데 참외를 심어도 제일 잘 익은 것만

을 골라가며 파먹는 것이다. 시설이 하얗게 뿜어진 곶감은 여우가 가장 좋아하며, 그것이 여

남은 개만 있으면 여우를 가죽 한점 상하지 않게 잡을 수가 있다. 우선 곶감을 실에 꿰어

여우 다니는 길목에 나지막하게 매달아둔다. 의심 많은 여우는 처음에는 여러번 망설이다가

결국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따먹게 된다. 여우는 일단 무사함을 알게 되고 같은 식으로 사

날 동안에 서너 개쯤 먹인다. 결국은 못 견디도록 맛을 들이자는 수작이다. 다음에는 조금

높이 매달아준다. 그러면 앞발을 들고 일어서서 따먹고, 다음날 조금 더 높이 달아매면 간신

히 뒷발로 버티고 서서 따먹는다. 그리고는 마지막 날에 튼튼한 끈에다 삼봉낚시라고 삼면

으로 갈고리가 달린 큼지막한 낚시를 곶감으로 싼다. 그리하여 깡충 뛰어올라야 겨우 따먹

을 만한 높이로 매달아 둔다. 드디어 그해 겨울은 볼따구니를 덥히며 삼동을 넘기게 되는

것이다. 한번 써먹되 두 번은 못 쓸 방법이며 안면이 없는 쪽은 모르되 빤히 바라보고 지낼

바닥에서 쓸 책략이 못되는 것이다. 그리고 칠패 사람들 말대로 보다 시간이 많이 먹힌다.

또한 신바꾸기의 내력은 이러하다. 장날 저녁때 조금 호젓한 산길의 오르막길에다 고급 꽃

신 한 짝을 던져두고, 고개를 넘어서 얼마쯤 내려가다가 또 한 짝을 떨구어 놓으면 그럴 듯

한 일이 생긴다. 장에서 늦게 소를 몰고 오던 장꾼이 고개를 오르다가 신을 주워서 이리 보

고 저리 보았으나, 아무리 새 거라도 외짝은 소용이 없어 그냥 내버리고 고개를 넘는다.

루턱을 지나 고개를 다 내려오고 보니 또 신발 한 짝이 있는데, 틀림없이 바로 아까 보았던

그 짝이다. 그것과 맞추면 한 켤렌데, 꽃신 한 켤레가 어디야, 마누라한테 선심 써야지. 그래

서 넘어갔다 오자니 소를 몰고 왕래하기엔 번거롭고 시간이 걸린다. 하는 수 없이 무인지경

에다 잠시 소를 매어두고 먼저 한 짝을 찾아 넘어간다. 그러면 그동안에 숲속에서 나와 소

를 끌고 줄행랑하는 것이다.

그런 속임수로 말하자면, 속은 자가 억울하게 여기기보다는 스스로의 탐욕을 부끄럽게 여

기도록 되어 있으니 어디 가서 하소하기도 난처한 노릇이다. , 공것 바라는 상대방의 약점

을 이용하여 꼼짝 못하게 우려낼 작정이었다. 나그네 한사람 모시기로 하였은즉, 칠패에 나

와 도는 김포교를 끌어들일 모양이었다. 이제부터 천수가 강주인놈을 꾀어들이면 다 된 일

이었다. 여각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물주와 거간들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었고, 주인 방에서

는 상담이 오가는지 담배 연기가 자욱하였다.

"주인장 계시우?"

", 홍서방 오랜만이오. 기간 동막에는 뜨음한가부데. 어디...... 다락원에 나가 있었소?"

"아니올시다. 몸살이 나서 좀 쉬었지요."

"방금 배오개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요즈음 북어가 안 들어온다며?"

", 우리야 어찌 알겠소. 아마 어물전 사람들이 난전 막는답시고 단속이 심한 탓이겠지

."

그러나 실은 칠패 동무들이 다락원에서 판을 친다는 것을 천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가 틀어박혀 있는 사이에 칠패에서는 북어를 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직은 물주가 두

어 사람이 있어서 천수가 얘기를 꺼낼 계제가 아니었고, 강주인도 그가 할 일 없이 찾아왔

을 리는 만무하여 슬슬 북어 얘기를 꺼내어 천수를 떠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수는 곧 말

머리를 돌려버렸다.

"내 기왕에 부가옹의 집에 왔으니 점심 요기나 하구 가야지. 아직 중화들 안 자셨지요?"

"그렇게 되었나, 이거 원 하는 일 없이 밥숟갈 놓자마자 또 금방 점심때가 되었군."

하고 강주인은 치부책과 주판을 밀쳐놓고 놋쇠 방울을 흔들었다. 사동놈이 달려나왔다.

"점심상 내오너라."

잠시 후에 사동이 와서 물었다.

"저어 오늘 점심은 온면이랍니다."

"거 좋지. 그리구 바침술집에 가서 약주 두어 되 받아오너라."

뒤이어 둥근 원반에 온면 네 그릇이 나오는데, 맑은 민물조개 우린 국물에다 고춧가루 듬

뿍 풀어 먹음직한 메밀 온면이었다. 시원한 나박김치가 대접에 올라 있는데 장사치들이란

식사에 호사스럽건만, 워낙에 동막거리의 습속이 담박하여 점심치고는 보잘 것이 없었다.

부러 천수가 이죽이기를,

"아니...... 하루에 들고 나는 돈이 얼마인데, 겨우 강바닥에서 건진 조개국물에 우린 막국

수란 말이우. 내 지금 육것을 못 먹은 지가 오래어 목구녕에서 먼지가 풀풀 나오."

강주인도 그가 일부러 그러는 줄을 알면서도 호기를 부리는 것이 제법 큰 상담인 모양이

거니 여겼다. 그래 다시 사동에게 술상을 따로 내오라 이르니 약주와 산적구이를 개다리소

반에 받쳐 내왔다. 점심상을 물리고 술잔을 나누면서 얘기가 오가는데 역시 지방에서 올라

온 이들과 강주인만이 떠들 뿐이요 천수는 시종 아무 말이 없었다.

"어이 낮술이 슬슬 오르는데 한숨 자볼까. 그저 가가방 낙이라는 게 낮잠 빼면 전옥서 죄

인 신세라니까."

하며 손님을 물릴 기미를 내보이니 두 물주가 곧 알아먹고 사처방으로들 물러갔다. 천수가

그래도 얘기를 꺼내지 않으니 강주인이 담배 피울 준비를 하면서 그를 흘끔거리는 것이었

. 강주인은 쌈지에서 쇠와 돌을 꺼내고 깃을 돌에 껴들어 쳐서 곰방대에다 담았다. 천수도

대 한 죽을 빌어 함께 담배를 태우는데, 꿀물에 적셨던 것이라서 남초의 냄새가 향긋하였다.

천수가 슬쩍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내었다.

"구문 받아가지구야 장사가 되겠습니까. 입고료만 하여도 삼사 부요구문이라야 오 부에

지나지 않으니 그야말로 티끌을 모으는 격이겠지요."

"뭐 경강 장사치가 다 그렇겠지. 갑자기 당화를 들여다 폭리를 남길 수도 없는 일이고......

홍서방 무슨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군."

"서강에 내가 잘 아는 자들이 있는데, 다락원 난전꾼들과도 긴밀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

. 가격을 조절하는 거야 손바닥 뒤집기로 잘하는 사람들입지요. 전에 미곡을 투식했던 적

두 있습니다."

여각 주인은 탐탁치 않은 얼굴로 담뱃대를 탕탕 두들기며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런 자들과 어울렸다간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는데......"

"실은 그 사람들 내게 흥정을 주선해달라구 합디다. 물건은 조기 백 동과 소금 삼백 석입

니다."

"동막과 서강과 용산 삼개에 깔린 게 여각 객주인데 하필 날 찾는 이유가 무어요?"

강주인은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저 건성으로 듣고 있을 뿐이었고, 홍천수가 조

금씩 엿보여 애를 달굴 양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믿을 만한 전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은 그 배의 사공 중에 선주에게 원한 있는 자가

화물을 투식하고 강상에서는 아예 발을 뺄 모양입니다. 그래서 서강에서 몰래 배를 몰아 윗

강 여각으로 오를 모양이지요. 동작진을 지나 한강진에다 대놓으면 주인장께서는 거기서 대

금을 치르고 짐을 부려서 내려놓게 하신단 말씀입죠. 그리고는 그 물건을 마포루 가져올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윗강 여각 주인과 타합하여 잡곡과 약초 등속의 관동 물산을 바꾸어 오

신다면 아무도 모를 것이고 뒤도 깨끗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시세는 거의 절반 이하로 후

려칠 수가 있으니 유리합니다. 떳떳한 거래가 아니지만, 그래서 큰 이윤을 얻을 수 있지 않

습니까?"

주인은 매우 동요가 된 듯하였다. 연신 헛기침을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이리저리 따져보고

계산을 해보는 기색이 뚜렷하였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던 그는 천수를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또 망설이는 것이었다.

"글세...... 그것이 어디 믿을 수가 있는 일이라지."

천수는 담뱃대를 털어놓고 주저없이 일어섰다.

"담배 잘 탰습니다. 나는 또 일이 바빠서 가봐야지요. 다른 전주를 물색해야겠소."

천수가 속으로는 영 글렀는가 싶어서 조마조마하며 여각을 나서려는데, 사동이 쫓아나와

주인장이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그가 되돌아가니 이미 주인은 작심을 하고 난 뒤라 빙글대

며 웃는 얼굴이었다.

"사람 참...... 성미두 급하긴, 아니 인사 한마디 없이 휙 가버리면 공연히 개미의 굴혈을

쑤셔놓는 거나 매한가지 아니우."

"맺고 끊어서 대답을 하셔야지 글쎄 절세 하시니 얘기가 되겠습니까. 그러게 장사로 치면

깐깐하고 분명한 강경 상고와 송도 상고가 제일이라더니."

"기왕에 나를 찾아왔으니 아예 말을 끝맺어놓지."

홍천수는 다시 주인과 마주 앉았다.

"실은 나 같은 사람이야 중간에서 거간 노릇이나 하였으니 구문을 좀 받아먹으면 그뿐입

지요. 저쪽에서 얘기한 가격만 맞으면 흥정을 붙여드리겠습니다."

"얼마를 내랍디까?"

"사백 냥은 주셔야겠습지요."

주인은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다.

"투식하는 물품에 제 가격을 꼬박 받으려는 게요? 그렇다면 아예 포도청에 가서 알아보시

."

"그래두 현 시세보다야 백 냥은 싼 셈입니다."

"나는 그 가격을 언문하여 반절만 냈으면 좋겠는데......"

"이백 냥을 내신단 말씀이죠?"

"자칫하면 장물아치 와주가 되는 판인데 그 가격밖에 못 내겠소."

",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나두 중간에서 구문은 먹어야 되겠으니, 아예 삼백 냥으루 하

십시다. 그 이하는 절대 안되겠습니다. 자아 하시겠수 마시겠수?"

홍천수가 다시 일어서려는 기색을 보였고, 강주인도 속셈으로는 소금 삼백 석과 조기 백

동에 삼백 냥이란 거의 세 배의 이윤이 남는 장사인지라 흥정을 박아두기로 작심하였다.

"글세, 그렇게 결정은 하겠지마는 시방 생돈을 냉큼 던져줄 수야 없소."

"암 그렇겠습지요. 저쪽에서두 돈을 미리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배를 몰아서 한강진에 대

어놓고 물건을 다 내린 다음에 그 자리에서 돈을 받겠다는 것입지요. 다만 문건을 한 장만

써달라구 합디다."

"문건이라니......"

"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일껏 배를 부려 물건을 내려놓은 뒤에, 주인장께서 갑자기 마

음이 변하여 매매를 하지 않겠다든가 대금을 깎자든가 하면 낭패를 보는 것은 서강 사람들

입니다."

주인은 다시 따져보는 눈치였다.

"신용 가지고 장사하는 것이지, 무슨 다짐이 따루 필요하겠나."

"바루 그래서 나를 내세운 것입니다. 물론 신용이 제일입지요마는, 물건의 내력이 그런 것

이라 흔히 부정한 장삿속에는 신의가 없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까짓 거 얼마짜리 물건을 얼

마에 사기루 하였다,라구 쓰시면 될 텐데 뭘 그리 망설이시우."

주인은 입맛을 쩝쩝 다시고 나서 지필묵을 꺼내들었다. 천수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고

나서도 못내 마땅치 않은 기색이었다.

"이 끝에다 수결을 하시고 인장을 눌러주십시오."

"수결에 인장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우?"

"허허, 이것이 수표나 어음두 아니구, 다만 계약 문건에 지나지 않는데 어디에 하자가 있

는가 한번 보시고 형식으루 맺어두십시다."

주인은 두 번 세 번 읽어보았지만 그냥 계약하겠다는 내용에 지나지 않으니 다른 까탈로

피할 도리가 없고 눈앞에 다가온 폭리는 놓칠 수가 없었다.

"까짓 거 그리합시다. 가격두 삼백 냥으루 명시해두었으니 더 내란 말은 없겠지."

"그렇다니까요. 주인장께두 아주 유리한 문건이 되겠습니다. 내가 보관하구 있다가 매매가

다 끝난 다음에 말소해버립지요."

홍천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아 그러면 내일밤에 한강진에서 만나십시다."

문건을 챙겨 넣으면서 홍천수가 말하니 주인은 따라 일어나며 말하였다.

"일이 어찌될까 모르니, 내일 저녁때에 미리 들러주오."

"그리하겠습니다."

천수는 가뿐한 걸음으로 동막에 나왔다. 그는 우선 잘 아는 자모전가에 가서 문건을 보여

주고는 돈 오십 냥을 빌렸다. 그리고는 바침술집 겸 화초방 노름방에 찾아가니, 내로라 하는

경강 왈짜들이 모여 앉아 투자를 놀고 있었다.

"여어...... 나는 한판 안 끼워주나?"

놀이에 정신을 팔고 있던 자들이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칠패 왈짜와 마포 건달

이 그를 향하여 손짓을 하는데 대개는 외지에서 왔더라도 출입이 잦으니 낯이 익게 마련이

었다.

"이리 조이구 앉아."

"판은 오십 냥이 기준이야. 돈이 없거든 개평이나 뜯어서 술이나 한 잔 먹구 가든지."

그러나 천수가 절렁거리는 엽전꿰미를 풀어내놓자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었다. 두를 잡고

있는 자는 천수가 보기에 낯이 설었다. 낯바닥은 굵은 손가락만큼한 구멍이 뻥뻥 뚫린 왕곰

보에 눈은 째어진 뱀눈에다 연상 큰 입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그가 판을 그러모으고 있는

지 무릎 아래에는 돈이 수북이 깔려 있었다. 주시위는 한쌍으로 놀게 되는데 짐승의 뼈를

갈아 점을 찍고, 한 점과 넉 점에는 주홍색을 칠한 것이다. 한 점에서 육 점까지의 점을 맞

추어 그 점의 수인 사위로 끗발을 겨루는데, 높은 패를 잡았던 자가 머리가 되어 납작하고

깊은 종지에 주사위를 담아 허공에서 흔들다가 방석 위에 내려찍는다. 너머지 사람들은 제

각기 알맞은 곳에다 돈을 태우고 머리가 패에 맞추어 자기가 먹거나 돈을 내주거나 하였다.

곰보는 머리 위에서 주사위를 흔들면서 연신 중얼거렸다.

"자아 사위다 사위, 백두산이냐 태백산이냐 금강산이냐, 백에 아에 중일 중이 중삼 중사

중오 중륙이로구나. 어허, 하늘에서 돈비가 쏟아질 제 와드드드...... 에랏 차!"

곰보가 종지를 엎어 방석 위에다 누르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아, 찔러야 판이요, 먹어야 끗발이외다. 어서 태쇼 태."

천수는 육에 질렀다. 중은 믿을 수 없으니 끗수나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제각기 스물한 가

지의 패에다 맞추어 돈을 지르고 나서 곰보가 종지를 슬쩍 들었다.

"자아, 백이오."

하고 나서 그는 백과 아에 질렀던 제 돈을 챙기고 다른 자들의 돈도 그러모았다. 천수가 몇

번 더 그 판에 질렀으나 물주의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자의 투자 솜씨가 과연 절묘하

였다. 천수는 문득 의심이 들어서,

"여보, 이번 판만 놀고는 다음 판부터는 돌려태기로 바꿉시다. 물주잡기는 재미가 없는

......"

하고는 곰보는 싱글거리며 웃기만 하였고, 곁에 앉았던 눈자위가 어글어글한 자가 불쑥 말

하였다.

"여보, 여태껏 놀아왔는데...... 댁은 끝판에 끼여가지구 웬 잔말이 많아."

"손짓과 재간이 다른 터에 한 사람만 사위를 잡으니 묘하지 않소."

"아니, 그럼 내가 헛손질했단 말야?"

두를 잡았던 곰보 사내가 가느다란 눈을 찌푸리고 곁눈질로 노려보면서 천수에게 지그시

으름장을 놓았다. 천수는 워낙 제 바닥인지라 이 낯선 두 사내들의 노는 꼴이 아니꼽기도

하여 냉소를 떠올리며 말하였다.

"댁이 헛손질을 했는지 내가 어찌 알겠어. ...... 눈썹만 뽑아도 똥싸겠군. 물주잡기가 재

미없으니 돌려태기루 노는 게 어떠냐는데 뭐 잘못됐어?"

"불쑥 끼여들어서 바지랑대를 올리면 꺾어지는 수가 있어."

곰보가 다시 말하는데도 천수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 싱글거리면서 주사위 종지를 제 앞으

로 끌어갔다.

"어때...... 돌려태기여 물주잡기여? 하자는 대루 할 테니......"

좌중을 둘러보니 그 두 사내를 빼고는 모두 칠패 마포의 토박이들인데다 돈냥을 잃은 터

수여서 제각기 말하였다.

"물주잡기는 오래 놀았으니 돌려태기루 놀지."

"내는 꼭 한바퀴 돌리고는 쭈욱 손을 놓았다니까......"

"그쪽에서 웬간히 땄으니 그냥 일어서지는 못할 거외다."

곰보가 자기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보면서 말하였다.

"여보, 내가 시방 잃은 돈이 스무 냥이 넘는데 누구보러 땄대."

천수는 더 이상 타시락거리지 않고서 물었다.

"할 거요 말 거요...... 돌려태기."

곰보의 곁에 앉은 퉁방울눈이 제 동무를 부추겼다.

"까짓 거 하자꾸나. 주사위에 눈코가 따루 있나."

모두들 돈을 태워놓고 기다리자 그들도 엽전을 내던졌다.

"자아, 여기부터 돌아가우."

천수가 투자 종지를 두 손에 맞잡고 허공에서 흔들면서 그들에게 물었다.

"어디서들 오셨수?"

곰보는 말이 없는데 눈 큰 자가 부드럽게 대꾸하였다.

"노름방에서 항렬 따지기요. 강물 먹구 다니는 사람이외다."

"물먹기에두 다 구분이 있지. 언내 오줌도 있고, 개구리 용갯물도 있단 말이우."

좌중의 사람들이 낄낄대며 웃음을 터뜨렸으나 곰보가 지그시 분을 누르면서 중얼거렸다.

"우리가 바루 개구리 용갯물이니...... 어서 주사위를 박기나 허우."

달그락달그락 허공에서 돌리다가 천수가 공중에서 휘익 돌리며 방석에다 따악 내려엎었

. 그는 아직 종지를 들지 않고 눌러둔 채로 돈을 판에다 더 내던졌다.

"안 보고 올이를 두 배루 치겠수."

하고 나서 자신만만하게 종지를 떼었다. 과연 일점이 나란히 나왔다. 스물한 가지 패에서 끗

수를 빼면, 일곱 가지의 고점이 남는데 그중 붉은 칠을 한일점 두 자는 쌍백이라 하여 패중

에서는 끗수의 제일 윗자리이고 중륙 이하는 모두 맞터버리는 것이다. 중륙밖에는 쌍백을

누를 수가 없다. 모두들 한차례씩 잡고서 내던지는데 끗수가 나오고 중삼패가 하나 나왔으

니 아무래도 판은 더욱 늘어날 모양이었다. 곰보가 투자를 던지는데 보니, 역시 중사였다.

"자아, 돈을 태라구."

판돈은 처음에 탠 것에서 올이를 따라 받고 나서 다시 판넘이가 되어 판돈을 한바퀴 더

실었으니 보통 때의 세 배가 될 만큼 커진 것이었다.

판돈이 커졌으니 모두들 투자 던지는 손짓이 신중해질밖에 없었다.

"노름에 서북방이 길하다 했는데 내가 바루 그 자리구먼."

천수는 슬슬 상대방을 까스르며 천천히 주사위를 돌렸다.

"얼싸 오늘도 심심허니 주사위타령이나 하여보자. 일 이 삼 사 오륙에 사륙 가보요, 이승

저승이 오락가락 천리안의 쌍백이요, 이리 굴러 저리로 굴러 운우지정이 새큰새큰 두 다리

포개어 중이요, 천하가 위상할 제 삼강이 번듯한 중삼이요, 왕후장상 가진 영화 북망에 묻혀

중사요,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 인륜이 벌여 있는 중오에 기왕 썩어질 몸 삼정승 육판서

에 정승부인이 따로 있나 노름 노는 우리 신세가 최상이로다. 중륙이오. 건 개평 타령하는

놈 네 성을 갈고, 따고 가는 놈 불알을 뽑으니, 공중에 뜬 패를 잡아 술안주나 하여보게."

홍천수가 가세 좋게 주사위를 때려엎고서 슬쩍 들쳤다. 역시 너스레를 치며 오래 골랐던

탓인지 중륙이었다. 그리고는 올이를 쳐버리니 모두들 패를 잡기를 포기하고 입맛들만 다시

는 것이었다.

"까짓 잃기는 매일반이다!"

곰보도 제법 노름방을 굴러다녔는지 가가 죽지 않고 천수의 올이를 받아 돈을 태고 나서

주사위를 잡았다. 그는 곁눈질로 제 동무에게 찔끔해 보이고 나서 슬슬 휘저으며 주사위 패

를 고르다가 위로 번쩍 쳐들어 멈추었다. 달그락, 하면서 아래로 내려꽂아 여는데 아직 자리

를 잡지 않은 주사위 한쪽이 팽그르르 돌다가 엎어졌다.

"중륙이다. 과연 솜씨가 다르구먼!"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혀를 내둘렀다. 홍천수가 보자하니 종지를 마주 잡을 제 손

가락을 올려 점을 세고 한 손가락은 주사위 한 곳을 눌러 고정시키고 다른 패는 거의 육자

에 맞춤하여 정확히 공글리는 수를 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대개 일류의 주사위잡이란

처음에 투자방에 주사위가 자리를 잡을 때 그 모양을 새겨두고 나서, 흔들어 섞을 때 그 소

리와 회수와 방향을 정확히 어름하여 패를 고르는 것이었다. 그러니, 상대편은 재간이 아니

라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여보, 맞잡이루 하지 말구 한 손으루 고릅시다. 워낙에 판이 크니 공으루 먹을 수야 없

."

천수가 이제는 곰보와 단둘이서 붙게 되어 미리 다짐을 해두었으나, 곰보도 금방 그 뜻을

눈치채고 맞받았다.

"주사위가 산 물건두 아닌 터에 운수로 패를 잡는 것인데, 두손잡이를 하든 외손잡이를

하든 무슨 대수요. 다 제 격식대루 하는 것이니 참견 마우."

"아무렴...... 돌려태기에 법식 따루 있나. 다 재간껏 먹는 게지."

눈 큰 자가 말하니 천수가 그를 눌러두노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댁에는 아까부터 이 방안의 무슨 송곳이오? 베잠방이에 좆 튀어나오듯 왜 불쑥 나서는

게야."

"그래 그래, 남의 판에 여포네 장비네 따지지 말우. 우린 진중에서 관망이나 허지."

"여하튼 우리는 중륙 웃돈이나 챙겨둬야겠군. 오늘 왜 이리 패가 안 나와."

좌중이 시끌덤벙할 때, 곰보가 먼저 주사위를 잡게 되었다.

"자아, 판돈 그러모으세......"

하면서 곰보 곁에 나란히 앉은 호안의 사내가 수북이 쌓인 엽전을 자기네 앞으로 미리 모아

놓는 것이었다.

"어허, 자리 어지럽히는군. 그 손 치우슈."

하더니 천수가 곰보의 종지 잡은 두 손목을 딱 거머쥐었다.

"투자방에 손가락은 왜 집어넣어......"

"......"

곰보가 잡힌 손을 홱 뿌리치니 주사위가 퉁겨져서 벽에 가 부딪고 떨어졌다. 그는 종지를

쥐었던 손에 침을 퉤 뱉어내고 잠깐 천수를 노려보았다. 성내에서 닳고 닳은 천수가 그쪽

눈치를 모를 리가 없어 방석에 손을 대고 여차직하면 날아올 종지를 막을 태세를 취하고 그

자리에서 문까지를 눈어름하여보았다. 역시 그쪽에서도 자칫하면 방에 갇혀 몰매를 맞겠다

는 공산이 컸는지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말았다.

"나 온...... 드러워서, 마패는 하난데 출또야 소리는 사방일세. 기분 상하여 노름 못하겠

!"

"그러면 노름판의 법도는 아니지만 개평이나 드릴까?"

천수가 판돈에서 몇닢 쥐어 쩔렁거리면서 말하였다.

"먼저 허우."

곰보가 내뱉었고 천수는 여전히 냉소를 지우지 않고서 받는 것이었다.

"내가 선을 잡구 판이 텄으니, 댁네가 할 차례요."

이미 판돈은 적잖이 탰고, 판을 물리기에는 사내의 배포에도 심히 어줍잖은 것인지라 곰

보는 적이 난처한 모양이었다. 사위 점을 만지는 것도 그른 일이라 투자하기가 켕긴 것이다.

천수가 화초방의 주인을 불렀다.

"와주 삼촌, 새 것 한벌 가져오우."

주인이 다른 색자를 가져왔고, 천수는 판돈에서 몇푼 집어 주었다. 딸그랑 하는 소리가 났

는데 천수가 종지에다 주사위를 떨군 것이었다.

"잡으슈."

곰보가 종이를 잡는데 모두들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손가락 조심허우. 구멍이라구 다 집어넣는 게 아니우."

곰보는 천수의 빈정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한 손으로 종지를 흔들다가 탁 엎었다. 누군가

가 꿀꺽 침을 삼키는데, 그는 차마 패를 개봉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종지 바닥을 내려다보았

.

"달근이...... 뭐 하는 게야!"

곁에 앉았던 범눈깔이 애가 달아서 곰보의 무릎을 짚었다. 그가 종지를 열었다.

"가보로군."

천수가 패를 일러주기나 하려는 듯 가벼이 내뱉었다. 동네 마실꾼들의 판이라면야 가보패

도 그럴싸하겠으나, 적어도 마포 동작 저자의 화초방이고 보매 가보짜리로는 판돈을 먹기가

어려운 법이다. 천수는 종지에다 주사위를 담아서 슬슬 휘돌리기 시작하였다. 최소한 끗수만

면한다면 판돈은 그의 것이었으니, 패를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천수는 달그락하면

서 제자리에 주사위를 모은 듯하더니 그대로 잽싸게 엎었다. 그는 종지를 엎어둔 채로 손을

떼어 돈을 그러모으면서 옆 사람에게 말하였다.

"간이 작아 내 눈으로 못 보겠으니, 자네가 대신 좀 봐주어."

종지를 들어내자 일점 나란히 쌍백이었으니, 가보를 살짝 눌러버린 것이다.

"이런 망할......"

눈 큰 자가 중얼거리며 방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치자 천수가 눈썹을 곤두세우고 치켜다보

았다.

"노름판에서 성미 올리면 방기가 나가서 오래 못 가우. 뒷간에 가서 배 좀 싹이구 오시

."

그럴 때 마주 앉았던 곰보가 발길을 들어 천수의 가슴팍을 걷어찼고 엽전들이 좌르르 흩

어졌다. 좌중의 사람들이 우우 일어나려는데 곰보는 재빨리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어 천수의

옆구리에 갖다 대었고,

"황가야, 돈 모아라."

하며 제 동무에게 말하였다. 모두들 멍청히 보고 있을 때, 눈 큰 자가 무릎걸음으로 돌며 방

바닥의 돈들을 손끝으로 솰솰 빗질하였다.

"여긴 동막이여...... 무사할까?"

천수가 넘어진 채로 고개를 들어 곰보와 돈 긁는 녀석을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전

대에 대강 쓸어넣은 놈이 일어나며 발길로 호되게 내질렀다.

"노름돈에 임자 따루 있데? 아무려나 먹기는 매일반이다."

동료가 먼저 나가고, 곰보는 덤벼들까 말까 멈칫 주춤 불뚝대는 노름꾼들에게로 칼날을

휙휙 둘러서 위협하며 뒷걸음을 쳤다. 드디어 문을 닫자마자 우르르 뛰쳐나가는데 천수는

발길에 채어 숨이 막혀 상판이 까맣게 죽어가지고 입을 벌리고 누웠다가 가까스로 큰 숨을

몰아쉬었다. 일어나려니 머리에 핏기가 가시고 핑글 돌면서 감감해지는 허공에 요지경 무늬

가 오락가락하였다.

"...... 삼촌, 삼촌!"

화초방 주인이 사색이 되어 쫓아들어왔다.

", ...... 한 대접 주오."

주인이 떠다 준 냉수를 들이켜고 한참이나 가슴을 내리쓸고서야 간신히 숨을 되잡은 천수

가 밖으로 나섰다.

"낯선 객은 들이지 않는 겐데, 아마 거기 동무들이 째보네 목로에서 만나 동행한 모양이

."

변명 비슷이 중얼대는 주인을 밀치고 천수는 뒤늦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오자마자 장바

닥이다. 마침 오후의 입고하는 분주한 때이라 곁꾼과 사공들이 저자의 위아래에 하얗게 깔

려서 오가고 있어서 동석했던 패거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서

강변으로 나갔다. 큰 배들이 강 가운데 빽빽이 떠 있고 그 사이로 거룻배들이 이리저리 들

락거리는데 선창에는 중선과 소선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나룻배 몇척이 강을 건너는데

모두가 희끗희끗 사람들도 곳곳에 타고 있어서 도무지 뒤통수만 가지고는 가려낼 수가 없었

.

"제미 붙을...... 기러기로구나!"

천수가 맥을 놓자니, 쫓아나왔던 패거리의 둘이 선창 좌우에서 마주 올라온다.

"밖으루 나오니 행인에 묻혀 어느 놈의 뒤꼭지인지 알아볼 도리가 있어야지. 그래 둘은

장바닥 안으루 뛰구, 우리는 이리루 나왔는데 없네그려."

"글세 애당초 밖으루 나와서 우물쭈물한 것이 탈이라니까......"

천수는 노기가 머리털 끝까지 뻗쳐서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씹어댔다.

"누가 끌어들였어. 보면 몰라, 바닥이 다른 놈들은 해코지해두 뒤볼 일이 없으니...... 꼭 저

리 나온단 말여."

"가서 물어보세, 어디 것들인지 알게 되겠지."

그들이 화초방 앞으로 터덜터덜 내려오니 뒤를 쫓아나갔던 나머지 두 사람도 맥이 풀려서

되돌아오고 있었다.

"누가 데려왔어?"

다짜고짜로 천수가 화를 내자, 그중의 하나가 우물쭈물 말하였다.

"누가 알았나, 째보네서 술 먹구 있는데 쩨보하구 안면이 있는 모양이더만, 우리가 한판

보자고 일어서니 따라나오면서 끼워달라잖나."

", 째보가 안단 말이지?"

천수는 노름방으로 들어가 제 돈을 챙겨가지고 나왔다. 오십 냥 중에 삼십여 냥이 비었으

, 잃은 돈도 아니고 따기를 작정하고 탰던 돈에다 자리 밑에 두었던 돈까지 빼앗겨서 더

욱 분통이 터졌다. 그는 목로에 가서 대뜸 째보를 잡고 물었다.

"그놈들을 안다며?"

목로 주인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두리번거렸다.

"아니...... 밑도 끝도 없이 그놈들이라니, 홍서방 애비여, 아들이여?"

천수가 안주 목판을 주먹으로 쾅 내려쳤고, 마른안주들이 쏟아져 내렸다.

"농담하지 말어...... 좀 전에 노름판에 끼워 보냈던 두 녀석 말이지, 곰보하구 눈깔 둥그런

놈을 안다면서......"

주인은 우선 쏟아진 우포와 어포를 집어 올리면서 천수의 날카롭게 째진 눈초리를 흘끔거

렸다. 장바닥의 왈짜와 티격겨렸자 장사 망칠 뿐 아니라, 공연히 얻어터져 망신이라도 당하

면 손해인지라 주인은 그냥 참고 목판 아래를 쓸기만 하였다. 천수가 다시 쟁개비에서 끓는

물을 천천히 한바가지 퍼서 들고 부추기며 물었다.

"확 끼얹어서 데쳐버릴라, 말 안할 테여?"

"...... 글쎄 이 바닥서 드나드는 게 한둘이라야지."

"곰보하구 눈 크구 얼굴 둥그런 놈 말이여. 우리 아이들이랑 합석해서 노름판에 섞였는데

파투를 놓구 판돈을 긁어서 튀었어."

주인은 그제사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 황회 얘기로군. 그 곰보는 나두 처음 봤어. 예전에 동작진서 밥집을 할 제 광대들

하구 자주 들러서 내가 잘 알지, 광주 있다든데......"

"거여야, 송파야......?"

"낸들 알어. 그냥 어디서 뭐 하냐니까 광주 있다드만."

천수는 술을 시켜서 화를 달랬다. 그는 안주를 오래오래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황회라...... 어디 두고 보자."

천수는 술 한 되를 단숨에 비우고 일어섰다.

"주인장, 이건 외상이여."

"이러면 안되는데......"

"거기 때문에 낯선 놈들이 끼여가지구 파흥이 되었고 돈까지 없앴으니...... 나중에 생각나

면 주지."

겉으로 불평을 하지 못하는 주인의 시선을 휑하니 팽개치고 천수는 밖으로 나왔다. 그는

나루터에 나와서 서강으로 나갈까 하다가 우선 밤섬에 들러 석서방네 물건을 살펴두리라

작정하고서 작은 주낙배 한 척을 빌렸다. 천수가 올라타니 사공은 배를 내어주면서 삯을 달

란 말도 못하고 빨리 가져오라는 말만 하는 것이었다.

"제미, 경강 바닥에 깔린 게 배인데 내 오늘 처음 빌려 타는 모양이다. 성질나면 돌을 실

어서 그냥 잉어 궁전이나 만들어버릴테!"

천수가 주낙배를 능숙하게 저으면서 밤섬으로 내려가는데, 서강과 동막에서 밤섬의 난장

을 보려고 크고 작은 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미 늦은 오후가 되어서 해는 서편으로 떨

어지는 중이고 강심에는 번진 햇살이 만 조각으로 쪼개지고 부서졌고, 여의도 백사주에 오

르고 내리는 새떼의 왕래가 분주하였다. 밤섬 동자머리 쪽에는 배가 정박해 있었고, 조선장

에 망치 소리가 요란하였다. 거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나, 이미 배에서 부려낸 어물과

소금짐이 여러 무더기로 간이 창고 앞에 쌓여 있었다. 천수는 석범철이네 집으로 올라갔다.

울바자로 들어가 두리번거리는데, 건넌방에는 석서방과 낯바닥이 시커멓고 체격이 우람한

자가 함께 목침을 베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여 일어나, 사공 팔자가 거북이 팔자라더니......"

석서방이 눈을 비비면서 깨어 일어났으나, 곁에 누웠던 자는 입맛을 다시며 돌아누워버렸

.

"노는 좆 물에나 주저앉겠다고, 배가 쉬는데 사공이 뒤빠지게 다닐 일이 있나. 그나저나

우리 장사는 아예 망쳐버릴 셈인가?"

석서방이 해를 올려다보며 어림짐작해보는 모양이었다.

"글세, 내일밤 제사를 끝내구 나서 칠패 아이들께 좋은 가격으로 넘겨줄 테니 걱정 말게."

"시방 저녁때가 다 된 모양이군. 어찌되었어?"

"주인놈이 끌려들어왔지."

하면서 천수가 문건을 꺼내어 펼쳤다.

"삼백 냥짜리 계약 문건일세. 나중에 쟁송이 일어나두 놈은 꼼짝없이 장물아치로 될 것이

니 이젠 손 안 대구 코풀게 되었네."

"물건을 볼 테여?"

"나중에 도매할 제나 살피지, 지금 내가 무슨 상관이야."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중인데 우대용이도 그들의 말을 귓전에 들었던지 일어나 앉았

. 석서방이 천수에게 대용을 소개하였다.

"우리 도사공 성님이시네. 이쪽은 동막거리의 왈짜인 홍천수라는 불상놈입죠."

대용이가 꾸뻑하며 치사를 올렸다.

"이번에 우리를 도와줘서 고맙수. 앞으루 잘 사귀어보십시다."

천수가 보아하니 낯바닥이 시커멓고 눈에 붉은 기가 있는 것이 그리 호쾌한 인상은 아니

었고, 말씨도 어리숙하게만 들려서 그리 대단하게 여겨지질 않았다.

"경강서 사람 사귀는 게야 돈밖에 좋은 물증이 없소이다. 나두 그런 사람이니 미리 잘

알아두시우."

하면서 되는 대로 받아넘겼으나 우대용은 딱히 알아듣겠다는 내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

.

"장소는 한강진이니 미리 숨어서 기다려야 될 걸세. 서강 아이들이 배를 부르러 오면 두

말 없이 내어주고 신호는 등불을 강에다 던져버릴 것이니 물건을 인수하는 중간에 뛰어들

. 포교가 오게 되어 있네."

홍천수가 설명을 하니 석범철이 말하였다.

"삼백 냥이라면 우리가 백오십 냥을 먹으면 되겠군. 포교는 자네들이 나눠주도록 허게."

천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털 뽑아 그 구멍에 박겠구먼. 아니 어떤 쓸개 빠진 놈이 문건대로만 우려내겠는가. 상대

는 경강의 몇째 가는 부고란 말이여. 내일밤 자시 무렵에 서강 아이들을 보내겠네. 물건을

보여주면 배를 비워주고 소선으로 뒤를 따르도록 허게. 그리고 강상에 떠서 기다리다가 뱃

전에 불빛이 보이다가 강으로 떨어질 제 나타나 소란을 피우게. 포교는 미리 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아무 염려 말고."

이르고 나서 홍천수가 일어섰다. 석서방이 그를 만류하며 말하였다.

"왜 벌써 갈려구! 기왕 밤섬 온 김에 동자머리 나가서 술이나 한잔 걸치지."

"아니야, 미리 만나서 다짐을 받아두어야지. 내 오늘 재수가 옴 붙은 날이여. 일찍 들어갈

라네."

천수가 침을 뱉으면서 투덜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나 원...... 벼룩이에 뭣 물린다구, 오늘 화초방에서 판돈 털렸어."

"노름하구 잃은 거야 뭐 대수여, 자네 솜씨루 털릴 적두 있구먼."

천수는 세삼스레 화가 나는지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솜씨로야 팔도 어느 바닥에 나가두 자신이 있네. 낯선 놈들인데, 비수를 대어놓구 판돈

을 긁어갔어."

"놓쳤나?"

"광주놈들이라니 언젠가 만나겠지."

다시 내일밤 약속을 다짐하고서 천수는 우대용을 향하여 머리를 꾸뻑해 보이고 나갔다.

대용과 석서방은 아무래도 사공들 일이 염려되어 동자머리로 나가보기로 하였다. 마을을 벗

어나 강변으로 나가니 당터가 있는 사당에는 큰 저자가 벌어져 있었는데, 거개가 소금과

해물들이었다. 시전 사람들은 없고 중도아들과 봉수꾼들, 훈련도감 군졸들, 지방 장사치들만

이 들끓었으니 가히 난장 중에도 가장 버젓한 난장이라 할 수가 있었다. 시전에서는 밤섬

동자머리의 난장 때문에 어물전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고 불평들이 자자하였으나 물품의 일

부를 시전에 넘겨주어 전매하는 시늉을 보이니 어찌할 수도 없었다. 다락원에서는 주로 동

해의 해물을 다루었고 경강 부근의 난전에서는 서해의 산물을 매매하였는데 칠패와 이현의

중도아와 다락원 난전꾼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밤섬의 늦장은 초하루와 보름이 기중 큰 장

이라서 인근의 무뢰배들도 그저 놀러 건너오기도 하였다. 우대용과 석서방이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자니 박성대가 훈련도감 배꾼들과 어울려 어포와 소금을 흥정하고 있었다.

"어때 시세가 좋은가!"

", 지난 달보다 가격이 눅었네, 칠패놈들이 워낙에 설쳐대니 우리네야 부스러기나 구경

을 하는 셈이지."

박성대의 말대로 칠패 중도아들은 배째로 흥정을 나누고 있었다. 물주가 열립군을 내세워

서 입찰을 시키는데 미리 매매인이 결정되어 있는데다 거의가 칠패의 왈짜들이라서 다른 자

들은 지어보지도 못하고 뒷전에 몰려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장거리를 지나 조선장 쪽으

로 내려가는데 앞서 나갔던 홍천수가 연신 두리번거리며 바삐 쫓아 올라오고 있었다. 석서

방이 그의 가슴을 탁 건드리며 물었다.

"아니...... 서강으루 건너간 불 알았더니 어딜 가는 게야?"

", 잘 만났다. 내가 방금 그 곰보놈을 봤단 말이야. 배를 띄우고 떠나려는데 그놈들이

나룻배에서 내렸거든. 잡히기만 해봐라. 여기서야 제놈들 옴치구 뛸 데두 없지."

천수는 득의양양하여 연신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우대용과 석서방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

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홍천수의 뒤를 따라서 저자바닥을 맴돌았다. 어물이 가득 쌓여 있는

간이 창고 어름에서 천수는 드디어 패랭이 차림의 낯익은 뒤꼭지를 발견하고는 대뜸 뛰어가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러면 그렇지...... 이놈, 잘 걸렸다."

다락원 왈짜들과 얘기하고 있던 고달근이가 뒤를 돌아다보고 당황하여 천수의 손길을 뿌

리치며 물러서는 것이었다.

"댁이 뉘셔......"

", 이놈이 시치미를 떼는구나. 이놈아, 내 돈 내놓아."

고달근이는 황회를 서강에다 남겨놓고 혼자 건너왔던 판이라 무작정 뻗대기로 작심을 했

던 것이다.

"이놈아, 뭘 멀뚱히 보고만 있느냐. 어서 긁어간 내 판돈 내놓아라."

홍천수가 다시 고달근이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으나, 달근이는 제 잡힌 손목을 이윽히 내

려다보다가 침착하게 대꾸하였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수. 백주에 애매한 사람을 붙들구 이 무슨 행패유."

천수는 탁 기가 질렸다. 무턱대고 쥐어박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얼른 손목을 놓고 달근

의 가슴과 옆구리께를 더듬더듬 훑는데, 달근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며 주위를 둘

러보았다.

"이 사람이 아주 실성했고만."

그는 천수의 가슴팍을 탁 떠밀어내고 정말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면서 주위

사람들께 말하였다.

"아마 노름판에서 돈냥이나 잃구 실성한 모양일세."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다락원 패거리들이 홍천수를 알고 또한 달근이와는 송파에서 낯

을 익혔는지라, 어느 편을 들고 나설 수는 없고 하여,

"깢일로 서루 언성 높일 게 무에요. 그러지들 말구, 줄 것이 있으면 주고 받을 건 좋게 좋

게 받으시우."

"여기서 법석거릴 일이 아니라, 시정아치의 얼굴두 있는데 주먹다짐해서야 쓰겠수."

하면서 건 입들을 놀리는 것이니, 천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달근이를 잡아 메어치려

고 와락 멱살을 잡는데, 동작 빠른 것으로는 소싯적부터 한가락이 있던 달근인지라 손길을

탁탁 쳐내면서 뒤로 빠져나갔다.

"정말 얼러볼라구 이러는 거야."

"여러 말 말구 내 판돈 내놓아."

사람들이 자꾸만 몰려들게 되니 더욱 기승이 나는 것은 천수 쪽이고, 달근이는 어쨌든 저

지른 짓이 있고 제 바닥도 아니어서 뒤가 차츰 허전해질밖에 없었다. 끼어들까 말까 주춤대

며 섰던 석서방이 한 꾀를 내어 가운데로 끼어들며 고달근에게 말하였다.

"이것 보우. 내가 보아하니...... 노름 판돈 몇푼 가지구 이러는 모양인데, 저쪽으루 가서 상

의를 해봅시다. 나는 밤섬 동자머리서 부비구 사는 사람이우."

달근이가 언뜻 보니 석서방이 볼품없어 보였으나 뒷전에 팔짱을 끼고 묵묵히 서 있는 얼

굴 시커먼 사내의 눈자위가 불그레하여 자못 불량해 보였다. 어쨌든 토박이들께 당하는 수

가 없겠다고 느낀 달근인지라, 곧 응낙을 해버렸다.

"좋소, 그럽시다."

석서방은 길길이 뛰는 천수의 옆구리를 꾹 찔러주고는 웃는 얼굴로 달근의 소매를 잡아끌

었다. 그는 속으로는 이놈 한번 겪어보아라 하며 자못 공손하게 그를 데려갔다. 동자머리 너

머 한적한 모래사장으로 그를 끌고 내려가던 석서방이 갑자기 딴죽을 걸어 고달근이를 넘어

뜨리려고 밀어붙였다. 그러나 고달근이는 그런 낌새를 진작부터 알아채고 있어서 발을 슬쩍

빼면서 석서방의 목덜미를 휘감아 겨드랑이 아래 바짝 끼워버렸다. 달근이가 비수를 빼어

그의 목에다 겨누고 뒤따라 내려오던 천수와 대용에게 말하였다.

"순순히 말루 해라. 나두 남의 동네에 와서 인심 잃구 싶지는 않아."

"아니 저 망할 자식 보아라!"

홍천수가 바로 달려들지는 못하고 석서방을 끌어안은 고달근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고,

우대용은 역시 아무 말 없이 관망하고 서 있었다. 홍천수가 연신 어깨를 추스르며 말하였다.

", 백날 붙잡구 있어봐라. 네가 밤섬을 빠져나갈 듯싶으냐. 이놈아, 호랑이 아가리에 대

가리 디민 게야."

달근이가 주위를 도는 천수를 따라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구슬리듯 말하였다.

"이것 봐, 까짓 노름판에서 결이 나면 사내자식이 그런 장난두 할 수 있지 않느냐. 순순히

돌려달라면 몰라두, 지금 내가 지니구 있지 않으니 네놈들이 무턱대구 행패 부린다구 나올

돈이 아니다. 너 칠패에서 밥 먹는다며? 칠패라면 언젠가는 다락원에 나오지 않겠냐. 다락원

에는 깔린 게 맨 우리 아이들이다. 내 지금 여기서 코피 한번 터져 보았자 강물에 세수하면

그뿐이야."

"그래 코피가 터질지, 골이 깨질지 한번 겪어보려무나."

홍천수가 두 팔을 휘저으며 달려드는데, 고달근이는 껴안은 석서방을 슬쩍 비틀어 앞세우

면서 칼끝으로 그의 목을 꾸욱 찔러주었다. 석서방이 다리를 버둥대며 죽는소리로 엄살을

부렸다.

"어이구 나 죽네...... 홍서방 사화하구 돈 받아라. 제발 부, 부탁이다."

천수는 달려들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에 서버렸다. 우대용이가 슬슬 걸어나와 고달근이에

게로 나섰다.

"...... 거기 서 있어."

"그 손 놓아. 내가 좋은 말루 타협을 붙일 테니 그 사람 놓아주오."

"얘기허우."

"긁어간 판돈을 돌려주겠수?"

"순순히 돌려달라면 강 건너 서강에 가서 주리다."

고달근이가 시원스럽게 응낙하였으나, 홍천수는 아직도 우물쭈물 믿기지 않는지 연신 손

을 마주 잡고 비벼댔다. 우대용이 씩 웃고 나서 다시 말하였다.

"개싸움에는 뜨거운 물이 제일이지만, 사내들 싸움에는 북을 치라구 했수. 이 사람이 아무

래도 결이 삭지 않을 것이니, 둘이서만 한번 얼러보겠수? 우리는 구경이나 할 테요."

고달근이 저자바닥의 싸움이라면 벌써 사추리가 불끈하는 성미인지라 우대용의 말을 대번

에 알아들었다. 그는 자기도 힝하니 웃으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석서방을 앞으로 홱 밀어

냈다. 석서방이 모래 위에 곤두박질을 하며 쓰러졌다. 대용이는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아서

어서 싸워보라는 시늉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고, 홍천수는 예전에 훈련원이라도 다닌 한양

본바닥의 싸움패답게 두 손에 침을 뱉고 짚신을 벗어 던졌다. 달근이가 그 누구에게 지려

하겠는가, 역시 안성 모가비답게 악착스런 몰골이 되어 상대방의 볼때기 살이라도 한점 물

어뜯을 양으로 이를 악물고 나서는 것이었다. 만일 두 사람이 논에서 물꼬 시비라도 벌이는

농사꾼이었다면, 아마 힘자랑이 위주가 되어 서로 허리를 붙들고 넘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었다. 그러나 달근이나 천수는 둘 다 대처의 장터에서 뼈가 굵은 자들이었다.

구나 홍천수는 일찍이 주먹다짐뿐만 아니라 창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는 훈련을 받은 사람

이다. 비록 울긋불긋한 전북을 벗어 던졌다고는 하나, 칠패에서 천수라면 밤에 사방등이 뜨

고 순라꾼이 위세를 부리고 다닐 때도 그를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포교들도 그는 예외로

다루었을 정도였다. 비록 죄를 지어 군문에서 내쫓겼다고는 하나 그는 벼슬아치들의 댁에

인사를 다니기도 하여 함부로 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먼저 둘이서 노려보다가 천수가 현각허이라 하여 몸을 솟구쳐 두발당성을 뛰면서 발로 달

근이의 면상을 차올리면서 달려들었다. 고달근이가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옆으로 슬쩍 비켜서

니 천수는 제풀에 털썩 떨어지며 다시 자세를 바꾸었다. 달근이는 속으로 생각을 고쳐 먹

기를, 놈이 붙잡으려 한다면 살판질로 공중잡이나 할까 하였으나 놈은 우선 제 면상을 터뜨

리려고 주먹을 내두를 것이니 이리저리 피하면서 기운이나 빼주리라 작심했던 것이다. 홍천

수가 복호에서 다시 중사평으로 권을 뭉쳐서 창으로 곧추 찔러 들어가듯 주먹을 들이대며

엄습해 들어가자 고달근이는 주먹을 팔꿈치로 엇갈려 지나가게 하면서 옆으로 한걸음 비

켜났다. 천수가 그대로 돌아선 채로 작지로써 사뿐 다리를 굽혔다가 튀어오르는 반동으로

허리를 비스듬히 꺾으며 뒷발질로 달근이의 배를 휘둘러 찼다. 달근이가 몸을 완전히 피하

였는가 싶다가 역습을 미처 막지 못하고 헉하면서 옆으로 넘어졌다. 천수는 틈을 주지 않고

몸을 날려서 달근이의 몸 위에 덮치는데 달근이가 밑에 깔렸다가는 천수의 양주먹에 면상이

으깬 감자처럼 될 판이었다. 달근이는 등골이 시릴 정도로 조바심이 생겼으나 배를 호되게

얻어맞아서 숨을 돌리기가 힘이 들었다. 천수가 그의 몸 위에 덮칠 때 달근이는 얼른 손을

뻗쳐 천수의 고의춤에 질러 넣고 그것을 손아귀에 잡아넣는 데 성공하였다. 잡은 채로 힘을

주어 농부가 오이를 따듯이 비틀고 뽑으니, 홍천수는 입을 딱 벌리고 눈은 흡떠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손은 빳빳이 펴서 쳐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달근이가 그런 틈을 잡아 홍천수

를 제 몸 위에서 휘딱 밀어내고 일어났다. 천수는 무릎을 꿇고 제 것을 움켜쥐고는 말도 못

하고 아, 아아 하면서 한참이나 쥐어짜는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석서방이 대용을 믿고서 격

분하여 말하였다.

"이 쇠새끼야, 왈짜 싸움에 낭심을 쥐는 법이 어디 있냐."

달근이는 곰보 낯바닥을 일그리고 실실 웃고 서 있었다. 천수가 일어나서 제자리걸음으로

겅중겅중 뛰어 시큰하고 뻐근한 고통을 털어내는 시늉을 하였다.

"빨리 하자, 우물쭈물하면 아예 뽑아서 말뚝을 박을 테야. 산적구이루 유지에 싸두었다가

내년 이맘때 네 제삿상에다 올려줄까."

우대용이는 저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빙글대기는 하면서도, 달근이란 놈의 꼬락서니가 몹

시 얄미웠다. 아직 뜨거운 맛을 보지 못하고 낭심이나 훑어대는 것은 조무래기 소악패들이

나 할 짓이지 싸움깨나 했다는 왈짜 무뢰배의 도리가 아니었던 때문이었다. 몇번 겅중거린

홍천수는 상대방에게로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달근의 싸움방법이 무지막지하다는 것을 그

제사 깨닫고 가까이 접근하려 들질 않았다. 잡지 않고 떨어진 채로 한번에 넘어뜨릴 생각인

천수는 발끝을 움칠움칠하면서 천천히 움직였고 달근이는 여전히 실실 웃으면서 그를 바라

보았다. 홍천수가 멈추는 듯하자마자, 발을 성큼 떼어 뛰면서 몸을 휘익 돌려서 왼쪽 다리를

들어 달근이의 목을 바라고 찼다. 돌려목차기로 대들었건만 달근이는 상체를 숙이면서 그의

등뒤로 빠져나갔으며, 이어서 연장된 동작으로 천수가 다시 순란부 자세로 오른발로 달근의

가슴팍을 올려찼다. 달근이가 잽싸게 허리를 꺾어 뒤로 재주를 넘는데, 천수가 워낙 분김에

잇달아 공격하여 달근이를 잡자고 하니 오화전신 자세로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를 우회전하

면서 짓쳐들어갔다. 달근이가 천수의 발에 걸리며 뒤로 주저앉는데 바야흐로 천수의 차돌

같은 정권에 면상이 옹기처럼 깨어질 판이었다. 달근이가 역시 아까처럼 순간적으로 모래를

한움큼 집어서 천수의 안면에 뿌렸다. 천수가 헛손질하면서 눈을 비비는데 달근이는 재빨리

돌아 나가 천수의 상투머리를 잡아 젖히면서 한 팔로는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는 앙칼지게

뒤로 홱 젖히니, 홍천수가 두 손을 허공에 내저으며 넘어졌고, 두 다리가 땅에 늘어진 천수

는 뛰고 찰 겨를이 없었다. 달근이는 놓아주지도 않고 그와 함께 넘어져서 목덜미를 안은

채로, 쌈 싸먹을 제같이 입을 크게 벌리고 고갯짓을 두어 번 하면서 그대로 천수의 면상을

물어버렸다. 크게 벌려진 달근이의 이빨 사이에 천수의 귀와 볼때기가 한입에 낼름 물려 있

었다. 천수가 뻗은 채로 두 다리를 덜덜덜 떨면서 아그그 소리가 처량한데, 달근이는 물었던

입을 떼고 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다시 입을 벌려 고갯짓하고 나서 같은 자리를 또 물

었다. 물고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질긴 힘줄 섞인 갈비라도 뜯듯이 좌우로 이그지그 흔들어

대니 천수는 두 다리를 모래 속에 파묻어 헹가래를 치면서 비명만 내질렀다. 그때에 보다

못한 우대용이가 뒤로 다가들어 고달근이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달근이가 천수를 문 채로

눈동자만 위로 흡뜨고 치켜다보는데, 우대용이는 사정없이 주먹으로 달근이의 뒤통수를 내

려쳤다.

"에그......"

고달근이가 우선 상투 잡았던 손을 놓았고, 이어서 입을 헤벌리면서 홍천수의 얼굴에서

미끄러졌다. 달근이가 대용이의 주먹 한방에 널브러졌는데 코에서 두 줄기 피가 스물스물

흘러내리고 있었다. 석서방이 달려가 역시 혼절한 천수를 흔드는데 온통 바지께가 흠뻑 젖

었다.

"하두 급하니......"

방뇨를 해버렸던 것이다. 우대용이가 그 꼴을 보고 혀를 찼다. 천수 얼굴은 아예 흙빛이고

머루알만한 땀방울이 이마에서 가슴팍까지 돋아나 있는데 귀때기가 반나마 찢어졌고 볼에는

바느질 자국처럼 호기치기 모양의 이빨 자국이 찍혀 살이 들떠 있었다. 석서방이 늘어진 달

근이의 배를 힘껏 짓밟았는데 달근이는 꿈틀하고는 그대로 죽은 듯하였다. 석서방이 당황하

여 우대용에게 말하였다.

"성님, 이놈이 밥숟갈 놓은 모양이우."

대용은 여전히 혀를 찼다.

"역시 대처놈들이 악착스럽군."

우대용이 고달근의 머리통을 쳐들며 석서방에게 말하였다.

"거 다리 좀 맞들지."

"뭐하시게......?"

"물에다 던지면 정신이 좀 들겠지. 정신이 들어서 폴짝거리거나 이빨을 드러내구 날뛰면

아예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기루 하구....."

석서방이 달근이의 늘어진 다리를 들어 올리면서 투덜댔다.

"뭘 처먹었는지 드럽게 무겁네!"

그들은 강변에 서서 마주 쳐들고 하나아 두울 좌우로 추스르다가 물속으로 냅다 던져버렸

. 달근이는 네 활개를 펴고 무릎쯤에나 닿을 만한 강의 가녘에 궁둥방아를 찧었다. 물보라

가 높이 일어나며 달근이가 물속에 배를 잠근 채 앉아서 두 손을 내저었다. 그는 만취한 자

가 그러듯이 머리를 좌우로 호되게 흔들고 손에 물을 움켜쥐어 낯을 씻었다.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 작당해서 패기냐......?"

정신이 들어 해대는 소리가 고작 그런 말이라, 지켜보던 우대용이는 달근이가 제법 독기

는 끈질긴 놈이라 여겼다. 대용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였다.

"아예 귀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사람 병신 될 것 같길래 내가 말렸수."

"이놈아, 너 사람 팼지?"

놈자를 붙이는 달근이에게 대용은 끝내 공손히 빈정거렸다.

"글세, 말리느라구 알밤 한 대를 드렸는데 주무시니 낸들 어찌허우."

고달근이는 비칠거리며 물에서 나왔다. 패랭이 꼭지는 진작에 부러지고 옷은 몽땅 젖어

행색이 광통교 밑의 깍정이 같았다. 달근이는 이미 상대편 시커먼 사나이의 위인을 짐작했

는지라, 더 이상 타시락대려고 하질 않았다. 뒤늦게 천수도 정신을 가다듬었으나 안면이 삽

시간에 부어오르기 시작하여 이빨 자국이 찍힌 볼은 팽팽해졌고 오른쪽 눈자위도 둥글게 부

풀었다. 마치 고질 치통에 턱 비뚤어진 사람 꼴이었다. 고통 때문에 주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텐데 강변에 서 있는 달근이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저 가이새끼를...... 때려 잡지 않구 뭘 하는 게여."

달근이는 아무래도 불리하다 싶었는지 슬금슬금 모래사장을 모로 걷는데, 우대용이가 어

깨를 턱 잡았다.

"어디 가우?"

"맞상대가 다 끝났으니 강 건널라우."

"주고 가셔야지. 삼십 냥......"

달근이는 잠깐 우대용이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응낙하였다.

"그럽시다. 서강에 건너가서 동행에게 받아주겠수."

석서방이 홍천수를 데리고 왔는데, 달근이가 마음을 놓지 못하고 연신 돌아다보았다. 홍천

수는 볼거리가 맹꽁이 배처럼 부어올랐어도 못내 부당했던 싸움이 분한 모양이었다.

"여하튼 경강은 내 바닥이다. 돈 받구 나서 어디 두구 보자."

고달근이가 걸음을 멈추며 버티었다.

"안 갈 테유. 저 자식이 자꾸 사람을 핍박하니 내가 여기서 몰매를 맞는 게 낫겠수."

우대용이가 달근이의 어깨를 잡아 은근히 손아귀에 힘을 주어 꾸욱 눌렀다. 달근이는 무

릎과 삭신에 기운이 빠져서 자지러졌다.

"...... 이거 놓구 말하슈."

"내게는 암수가 안 통하우. 쥐새끼가 쇠발굽을 백날 물어봤자, 한번 쿵 내디디면 찍하는

게요."

대용이 달근이를 눌러놓느라고 슬쩍 눙치면서 잡았던 그의 어깻죽지를 놓아주었는데,

근이는 벌써 어깨가 뻐근하고 견골이 삐었는지 도통 오른팔을 쳐들 수조차 없었다. 과연 좀

처럼 맞설 수는 없는 상대였다.

"우리 집에 가서 된장이라두 붙이구 가자."

석서방은 홍천수가 염려되었던지 그렇게 제안을 하였고 천수도 그 꼴로는 아직 벌건 저자

로 나가기가 난처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우대용이를 신용할 수 없었다. 그런 눈치를 알

아본 석서방이,

"이 사람아 우리 도사공 성님이 없었으면, 자네 귀는 모래밭에서 싹낼 뻔했어. 귀나무가

자랄 걸 한주먹에 구해냈지. 성님께 저 자식 맡기구 우리 집에서 좀 누웠다 가지."

"저놈을 놓치면 안되는데...... 동막으루 끌구 가서 화초방에다 처넣구 주발 뚜껑을 태워야

할 텐데."

주고받는데 우대용은 귀찮은 생각이 들어서, 부탁한 일만 없다면 이런 대처 소악패들의 싸

움에 참견하고 싶지가 않았다.

"자네가 강주인 문건두 해결해야겠으니, 우리가 배 띄워 강화 나가기 전까지는 한식구 아

닌가."

하는 석서방의 말에 홍천수도 딴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 순순히 그를 따라 갈라섰다.

수가 우대용에게 처음 인사할 때보다는 훨씬 기가 죽은 공손한 태도로 말하였다.

"도사공께서 꼭 돈을 받아다 주시우. 그리구 그놈 놓아 보내지 말구 다시 끌구 와야 합니

. 우리 동무들이 벼르고 있으니까."

우대용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벼슬을 뜯긴 쌈닭처럼 목이 죽 빠진 홍천수가 석서

방네 집으로 돌아갔고, 대용과 달근이는 다시 동자머리로 나왔다.

"아이구...... 이거 웬일일까. 팔이 쑤셔서 움직일 수가 없네."

달근이가 제 어깨를 주무르고 걸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대용에게 약은 눈을 굴

리면서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 저놈들과 댁은 별루 친분이 깊은 듯하지 않네요."

우대용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원래가 경강 사공이 아니외다. 장사차 올라왔수."

"그럼 마음을 놓았습니다."

대용은 식은 소리 하지 마우. 사내가 약속은 지켜야지. 내가 아무리 달갑지 않더라도 저자

들과 언약을 하였으니 노름 판돈은 꼭 받아야겠는걸."

"예예! 아 물론입지요. 서강 건너가서 드린다니까요. 이거, 오랜만에 아랫강 내려왔다가 망

신이우."

대용이가 말이 없으니 고달근이도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실은 나두 경강 장사치와는 인연이 먼 사람이우."

하면서 대용을 살폈고, 그는 못마땅하게 입맛을 다셨다.

"경강이든 송도든, 하여간에 저자 소악패는 팔 걷구 나서서 비틀던 사람이니 자꾸 말시키

지 말우."

우대용이가 네 따위 조무래기 시장 건달과는 상대 않겠다며 아주 욕을 보이는 말을 하니,

달근이도 조심성 없이 제 정체를 드러내버리고 말게 되었다.

"여보, 사람 우습게 보지 마우. 나 솔부리 있는 사람이우."

그러나 우대용이는 솔부리인지 솔방울인지 개코도 관심이 없는지라 한 귀로 듣고 흘려버

리는 것이었다. 고달근이와 황회가 아랫강에 내려온 것은 장물 때문이었다. 물론 송파에서

묘옥을 시켜 처분할 수도 있었으나, 솔부리의 주인인 복만이의 귀와 눈을 속이기가 어려웠

던 것이다. 정원태는 암자를 떠나 양주에 나가 있었는데 신도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근이와 황회는 먼저 시동이를 보내어 서강의 장물아치를 알아보게 하였고, 전갈이 오자마자

물건을 작은 배에 싣고 내려왔다. 물건은 대개가 귀금속 방물류인지라 한양 성내의 세도가

에나 먹일 수 있었으니, 처분하고 수금이 끝나려면 넉넉잡고 한 달포는 바라보아야 했던 것

이다. 대개 화물을 적재한 해상선이 아랫강에 정박하고 화물주가 전부터 지정한 객줏집을

찾아가 판매를 위탁하고, 객주는 물품을 창고에 반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내 전도가로 통

지하고 물건이 매진될 때까지 화물주를 유숙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난전 먹이는 자들은 전도가에 통고 없이 직접 물건을 떼어다 소비자들에게 먹이

는 것이었다. 여하튼 서너 달에서 길면 반년 가까이도 걸리는 것이 여각 객주의 장사이고

보면, 물주가 반 경강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달근이와 황회는 며칠 동안

은 서강 장물아치의 주막에서 뒹굴고 있었으나 드디어 좀이 쑤셔서 동막의 노름방을 찾아갔

던 것이었다. 일을 저지른 것은 고달근이었으나, 황회는 못내 께름직하여 달근이에게 자꾸만

잔소리를 하였었다. 달근이가 밤섬에 건너갔던 것은 묵어 있던 주막 이웃집의 칠패 중도아

들 중에 양주서 낯익힌 자들이, 중간 거래하는 구경이나 하고 바람도 쏘일 겸 잉어회로 술

이나 한잔씩 걸치고 오자는 그럴 듯한 제의 때문이었다. 이제 달근이는 먹인 물건의 제값을

받고 경강 근역을 떠나가 전까지는 아무런 소동에도 말려들지 말아야 했다. 그는 고분고분

판돈을 돌려주기로 아까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으나, 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커먼 사내가

얕잡아보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배겨날 수가 없었다.

"솔부리가 어떤 덴지 소문두 못 들었수?"

우대용이 대수롭지 않게 픽 웃으며 되물었다.

"거 보아하니...... 외입장들과 창기년들이 무더기로 붙어 돌아가는 동네인 모양이우."

고달근이가 그 말에는 기분이 몹시 상하였다.

"아직 귀딱지가 덜 떨어졌군. 여보, 남이 일러주어 모르면 물을 것이지 외입장이란 다 무

어요."

대저 주먹깨나 흔들 줄 안다는 자들에게 가장 심한 욕이 있으니, 외입장이라는 말이었다.

달근이가 비록 사당년들의 모가비 노릇은 하였으되, 스스로는 협객이라 자처하는 판에 어디

서 보도 듣도 못한 벽지 촌놈이 손아귀심깨나 있다고 사람을 아예 낮춰보는 것이 아닌가.

달근이가 눈을 부릅뜨고 말하였다.

"여보, 똑똑히 알아두시우. 솔부리는 적굴이야. 경강 어름에서 떴다 하면 팔도의 장사치들

이 몸서리를 친단 말이우."

대용이는 그를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도적치고는 쓸개가 빠진 작자로군. 입이 잰 꼴을 보니 댁네도 명이 길지 못하겠어.

내가 비록 장사는 다닐망정 관가에 연줄도 없고 또한 본시 뱀같이 싫어하길래 망정이지,

번쯤 포교에게 입을 놀리면 어떻게 하려구 함부루 발설하구 방정을 떠는 게요?"

달근이가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딴은 옳은 말이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동자

머리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대용은 거룻배의 덕판에 버티고 앉았고 달근이는 창막이

판자에 걸터앉았다. 배가 이물부터 뭍으로 닿을 것이니 대용이가 앞을 가로막은 셈이라 달

근이는 은근히 애가 달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고달근이는 이 시커먼 사내를 떼어놓아야 하

였다. 우선 황회는 고사하고 시동이에게도 체면이 서지 않을 노릇이었다. 또한 서강 장물아

치 모선이가 알면 다시는 거래하는 데 뻣뻣하게 나갈 수도 없을 것이었다. 배가 닿자 대용

은 다시 배에서 내려 팔짱을 끼고 서서 달근이가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달근이가 앞장을

서자 한발짝 뒤에서 우대용이가 바짝 따라붙었다. 군데군데 서강 부자들의 기와집이 늘어서

, 객주며 주막이 드문드문한 곳에 이르러 고달근이는 드디어 우대용이의 소매를 잡고 사

정해보았다.

"...... 이렇게 하십시다. 바로 저 집이 내가 묵어 있는 주막인데 동무들의 눈도 있고 체

면이 말이 아니니 잠깐 여기 서서 기다리시우. 내가 심십 냥을 곧 챙겨가지고 나오리다."

"안되겠수. 나는 길눈이 어두워서 시방 왔던 길두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는걸. 공연히 사정

봐주다가 댁네가 내빼버리면 삼십 냥을 내가 물어내란 말이우?"

고달근이가 혀를 찼다.

"허허, 벽창호로군. 여보 이 꼴을 좀 보우. 옷은 다 젖었지, 패랭이는 망가졌지, 누가 봐두

싸운 몰골인데 댁이 날 싸구 졸졸 따라다녀보우. 둘 다 망신이여."

"일없다니까......"

우대용이 딱 자른 말에 고달근이는 연방 속으로 중얼중얼 갖은 욕을 다 씹어대면서 주막

으로 앞서서 들어갔다. 달근이가 중노미에게 술을 시키고 혼자 일어서니 우대용이가 따라서

일어났다.

"어디루 가우?"

"...... 나 참!"

"서투른 짓 하지 말어......"

"시방 저 안 채 우리 방에 가서 돈 가져올라구 그러우."

우대용이는 잠자코 그의 뒤를 따라갔고, 주막 술청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마침 시

동이와 황회는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황회가 수저를 놓고 말하였다.

"아니 어딜 쏘다니다 이제 오냐."

하다가 그는 달근이의 옷 버린 꼬락서니와 그뒤에 따라 들어온 시커먼 상판대기를 보고는

슬그머니 밥상에서 물러나며 일어섰다. 달근이가 황회를 부추기느라고 눈을 꿈벅이며 말하

였다.

"동막에서 노름 판돈 받으러 왔다네. 삼십 냥 내어주어......"

황회가 넌지시 시동이를 불렀다.

"시동아......"

시동이도 이미 수저를 놓고 있었으므로 신을 꿰고 슬금슬금 술청으로 나가는 문쪽으로 걸

어갔다.

"잠깐......"

우대용이 시동이의 팔을 꽉 움켜쥐자 역시 쪽을 못 쓰고 주저앉는다.

"아마 샛문 닫으러 가는 모양인데, 나 달아날 사람 아니다."

하고 나서 우대용이가 손가락으로 황회와 고달근이를 똑바로 가리키며 나직하게 얼러대었

.

"미리 말해두는데, 번거롭게 굴면 그냥 안 둔다. 너희들 솔부린지 솔방울인지의 도적놈들

이라니 계집년들같이 한 입에 두 마디 하지 않겠지."

"...... , 솔부리?"

황회가 놀라서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서 고달근이와 우대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대

용이 말하였다.

"내가 아느냐...... 느이 짝패가 그리 말하길래 그런 줄이나 알지. , 어서 돈 내주어. 어물

거리고 싶지 않으니까......"

황회가 껄걸 웃더니 마루 아래로 슬그머니 내려섰다. 시동이는 팔을 붙잡고 상을 잔뜩 찡

그리고 섰다가 슬슬 나뭇짐 곁에 다가들어 굵직한 몽둥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달근이도 제

패거리가 아예 박살을 내려는 눈치를 채고서 품안의 비수를 움켜쥐고 황회의 행동만을 기다

렸다. 우대용이 그런 낌새를 모를 리가 없어서 재빨리 앞 뒤 사방을 둘러보고 말하였다.

"번거롭게 굴지 말렷다. 나는 싸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여. 까짓 노름 판돈 몇냥에 피 보

구 싶지 않다."

황회가 허리끈을 질끈 동였다.

"우리하구 똑같은 사람일세. 같은 사람들끼리 인사나 트자는 것이지...... 피까지 볼 수야

있나."

시동이가 먼저 겁도 없이 우대용이의 뒤통수를 바라고 몽둥이를 내려치며 으악 소리 호기

있게 내지르면서 등뒤로 달려드는데, 우대용이는 재빨리 옆으로 피하여 한달음에 마루 위로

성큼 뛰어올라갔다. 황회가 기운 믿고서 맨손으로 달려드는 것을 발을 쳐들어 정강이께를

힘껏 내자니 황회는 총 맞은 토끼 모양으로 폴싹 주저앉았다가 얼결에 마당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달근이는 이미 뜨거운 맛을 보았는지라 칼을 빼들고 연신 마당에서 서성거릴 뿐이었다.

시동이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마루 위로 뛰어올라 갈 때, 대용이는 그 몽둥이를 어깨로 턱

받았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견골이 뻐개져서 주저앉았겠으나, 대용은 전혀 데시근하게 보이

지도 않으며 그대로 손을 뻗쳐 시동이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움켜잡고는 그대로 앞으로

주욱 당겨서 고권을 뭉쳐서 명치끝을 쿵 내지르니 대번에 낯바닥이 새하얗게 질리고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마루 아래 늘어졌다.

"...... 맨주먹 가지고 때려 잡겠으나, 우물거릴 틈이 없어서 두어 번 휘두르고 가련다."

우대용이가 몽둥이까지 쥐고 마루 아래로 내려서니 고달근이는 벌서 시동이가 당하는 꼴

을 보았는지라, 칼을 내버리고 어마 뜨거라, 하며 샛문 밖으로 달아나고 황회는 저도 몽둥잇

감을 찾느라고 나뭇짐 앞에 달려갔다.

"그래, 누가 박살이 나는가 보자꾸나."

황회가 몽둥이를 들고 달려드는데, 대용은 마루 위의 밥상을 그대로 발길로 내질러버렸다.

황회의 면상에 쏟아진 밥상에서 국물과 밥알이 주르르 흘러내렸고, 주춤하는 사이에 대용의

몽둥이가 휘익 날아서 황회의 아랫도리를 후려갈겼다. 싸움에 법식이 따로 없어 우대용이로

말하자면 대소 수십 전을 겪었으니 척 보아서 이미 싸움판의 끝장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구구 하면서 넘어진 황회가 고개를 번쩍 쳐들고, 우대용이의 안색부터 살폈으나, 대용은 이

미 몽둥이를 마당에 내던진 뒤였다. 그는 쓰러져서 신음하는 황회를 본 체도 않고 우선 그

들이 묵고 있는 방문을 차고 들어가 엽전 세 꿰미를 내어 걸린 옷을 끌러 내리고 둘둘 감았

. 그가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말하였다.

"삼십 냥 갖구 간다. 나는 너희들과 아무 원한이 없고 판돈을 찾아다 준다구 약속하여 지

키는 것이니, 포한 갖지 말어라."

우대용이는 마당으로 지나가려다가 널브러진 황회의 앞에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보았다.

"더운물 찜질이나 하구 한 보름 누워 있거라. 기골이 있으니 대번 낫겠지. "

하고는 휘적휘적 샛문께로 나갔다. 명색이 주막을 내고 서강에서 은밀히 장물아치를 하는

집이니, 조무래기 소악패들이 밥붙이로 붙어 있게 마련이라, 고달근이는 아예 황회가 고택골

로 가는 줄 알고 나가서 외출하였던 모신이와 그 떨거지 식구들 중에 눈에 뜨이는 서넛을

데리고 술청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우대용이는 돈뭉치를 싸들고 나오다가 그들과 부딪치

고는 입맛을 다셨다.

"비켜라."

그러나 모신은 역시 직업이 직업인지라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서강 바닥에서 토박이로 살아온 술장수 모신이라구 합니다. 어디서 오신 뉘시온지

?"

우대용이가 그들을 한참 노려보다가, 역시 점잖게 말하는 것이었다.

"...... 이름자를 남길 것두 없는 사람이우. 내 동무들이 동막에서 노름 판돈을 강탈당하

여 찾아달라길래 받으러 왔소이다. 그냥 순순히 주었으면, 개평 술이라두 걸치구 가려던 참

이었소. 헌데 귀찮게 굴기에 잠깐 소란을 피웠소이다."

모신이 풍채 좋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사유가 있었구먼요. 그렇다면...... 여기 고서방이나 댁이나 모두 우리 집 손님인

데 술이나 한잔 하구 가시지요."

"내가 그럴 틈이 없소이다. 시방 숙소가 밤섬에 있는데 기다리구들 있소."

"이놈아...... 네가 뭔데 인사치레도 무시하구 그리 뻗대느냐."

모신의 곁에 섰던 자가 입을 일그리고 험상궂게 내뱉었고, 우대용은 대꾸 없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 강화 춘득선단에 도사공으루 있는 우가올시다."

모신이가 끄덕였다.

", 선인이시구먼. 아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허구두 안면이 생길 텐데, 이거 인사가 늦었

습니다. 좀 앉으시지요."

하여 우대용이는 하는 수 없이 돈뭉치를 놓고 술청 마루에 걸터앉았다.

"거기두 앉지......"

하면서 우대용이가 고달근의 손목을 잡아 우악스레 끌어 앉혔다. 달근이는 피하지 못하고

곁에 앉았는데 못내 계면쩍은 얼굴이었다.

"저 안에 두 사람이 조금 다쳤으니 살펴보아주시우."

모신이가 제 사람들을 눈짓하여 물리치고, 우대용, 고달근과 함께 셋이 둘러앉았다.

"전에 어디 계셨습니까? 내가 춘득이 성님과는 동막에서 한 오 년 함께 컸지요."

"...... 나는 해주 임유학 아래 있었소이다."

모신이가 고개를 기웃이 하고서 한참 생각하다가, 제 무릎을 탁 쳤다.

"해주 임유학네가 그때 모두 패가하구 말았지요. 지금은 신복동인가 하는 이가 선상단을

운행하구 있는 모양인데. 혹시...... 옥에 갇혔던 분 아니시우?"

우대용은 속이 뜨끔하였다. 과연 모신은 서강에서 굴러먹은 자라, 선상에 관한 것을 소상

히 알고 있었다.

"해주 임유학네 하니까 이제 우서방에 관하여 뭣 좀...... 들은 것이 생각나는군요."

우대용은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이 없고, 고달근이가 말하였다.

"그럼 그렇겠지...... 내 보아허니 그저 범상한 이가 아니더라니까."

대용은 그 말에 눈을 치뜨고 흘겨보다가,

"언젠가 임자 만나 혼뜨검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구먼."

하였고 모신은 일어나서 손수 청주를 걸러서 내왔다.

"우리 이렇게 알게 된 것두 강상의 의리이니 서루 돈독히 사귀어봅시다. 고서방은 일부러

광주서 왔지마는, 우서방은 도사공 직임을 가졌으니 이제는 경강이 본바닥이구려. 경강서 이

모신이를 모르고서야 어찌 서운해서 되겠수."

그러나 우대용은 대처의 장물아치 와주 따위와 기분이 맞지 않았으므로 사양을 하며 일어

섰다.

"나두 남의 부탁으로 여기 왔는지라 가봐야겠소이다. 가두 되겠수?"

"아따 참, 누가 막는답디까. 이런 판에서야 밥 먹구 손질 좀 하는 것두 보양이 되는 일인

...... 그런데 누가 부탁을 합디까?"

우대용이 주저하다가 말해버렸다.

"홍천수라는 사람이우."

하자마자 모신은 껄껄 웃어제쳤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천수는 우리 아우뻘 되는 사람이우. 나허구는 친동기간이나 다름없

. 우리 이렇게 된 김에 여기 천수까지 데려다 놓고 한잔 먹읍시다."

우대용이 돈뭉치 쌌던 옷가지를 풀어서 고달근이에게 내밀며 일어났다.

"이거 당신 옷이지? 틀림없이 삼십 냥만 가져가니 잘 보아두오."

"그냥 가시기요......"

고달근이가 가장 서운한 듯이 말했다. 우대용이가 달근의 그런 양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

음을 머금었다.

"그냥 안 가면, 당신 다리몽갱이라두 분질러주구 갈까?"

"...... 망신일세. 부러진 팔십에 이런 창피할 데가 있나. 여보, 정말 송파장은 아예 안 보

실라우?"

달근이도 은근히 아니꼬워서 이죽거렸으나, 우대용이 말하였다.

"글세 광주에도 볼일이 생기면 갈 거요. ...... 날 벼르시나?"

"아니 뭐 안면이 생겨서 인사나 차리려구 그러지."

우대용이가 문 앞에서 대꾸하였다.

"우리는 노름 따위는 하지 않으니, 판돈 긁을 생각일랑 마우. 나루터에서 만나면 다시 물

이나 먹여드리지. 실례가 많았소이다."

대용이 모신을 향하여 꾸뻑해 보이고 주막집을 나서는데, 아까부터 작대기 들고 기다리던

모신의 밥붙이들이 수작하는 꼴을 듣고 저희끼리 분심이 일어나, 뒤를 노리고 있었다. 주막

집 문지방을 나서자마자,

"이놈 죽어봐라!"

하면서 두 놈이 작대기를 후리며 좌우에서 달려들었다. 대용이가 슬쩍 다리를 굽혀 주저앉

으며, 갖고 있던 엽전 꿰미를 휘둘러 추를 날리듯이 때리니, 한 놈은 이마에 맞아 얼굴을 싸

쥐었고 다른 하나는 팔뚝에 맞어서 자지러지며 몽둥이를 떨어뜨렸다. 그런데 노끈이 끊어져

서 꿰었던 엽전꿰미가 산지사방으로 좍 흩어져버리니 우대용은 줍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둘

러볼 뿐이었다. 모신이 쫓아나왔다.

"어이구, 우리 아이들이 늘 하던 장난을 한 모양이우. 얘들아, 일어나서 돈 수습해드려라."

그들은 엉기적대며 땅 위에 흐트러진 엽전을 주워모아 열 냥을 맞추어 꿰미를 꿰었으며

우대용은 무뚝뚝하게 내려다보았다.

"춘득이 성님이 과연 인덕이 있으시오. 이런 도사공을 만났으니 장사는 더욱 불 일어나듯

할 게요."

모신이 대용에게로 가까이 다가서서 또 한마디 덧붙였다.

"앞으로 내놓고 처분하기 곤란한 물건이나, 당화가 들어오면 내게 맡기시우. 거뜬히 팔아

드리리다. 그리구 난처한 일이 생기면 천수를 통하여 알려주시오. 힘 닿는 대루 도와주겠

."

우대용이도 모신의 자기에 대한 호의가 진정임을 느끼고는 마음이 풀어져서 공손하게 대

꾸하였다.

"실은...... 홍천수와도 오늘 초면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외다. 경강 사정이 어두우니 앞으루

많이 부탁하겠수. 그나저나 만부득이 남의 집에 와서 소란을 부려서 죄송허우."

", 늘 있는 일인지라, 여기는 포교들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싸움이 일어나두 모른 척하

는 판이외다. 여기는 내 살림집도 아니고, 사나이들 거처에 발고랑내와 주먹다짐은 걸승 고

의에 이 끓듯 당연한 게 아니우."

과연 경강 와주답게 호기있게 웃어대며 우대용이의 등을 툭툭 두드리는데, 대용이도 별로

불쾌한 마음이 없었다. 그가 돈을 수습하여 강변으로 내려간 뒤에 모신은 술청 안으로 들어

서며 혼자 중얼거렸다.

"경강살이 반평생에 시원스런 놈을 봤네."

"그놈을 그냥 뻣뻣이 걸어가게 두다니요. 주발 뚜껑을 태우는 것은 고사하고 똥장군이라

두 먹여야지요."

마빡을 얻어맞아 터진 상처를 수건으로 연신 찍어누르고 섰던 모신네 곁꾼이 말하였다.

그러나 모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찼

.

"네가 오늘 운이 좋았다. 해주 우대용이라면 예성, 임진 양강 사공은 물론이요, 강화 주상

들 간에도 작살 하나루 용을 꿰인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이여. 아마 경을 쳐서 어딘가

숨어 있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내가 명색이 왈짜 밥을 먹는다고 자기를 밝혔고나. 발설하지

말구 앞으루 찾아오는 일이 있거든, 네 삼촌을 만난 듯이 깍듯하게 모셔라."

모신이 그렇게 얘기하는 데에는 어떤 제 나름의 깊은 생각이 있어서였다. 대저 경친 놈이

범상한 세상살이는 할 수 없는 법이었고, 따라서 우대용이 같은 자는 지금은 도사공으로 죽

은 듯 엎드려 있지마는 언젠가는 다시 경을 치고 세상을 아예 등지게 될밖에 없었다. 그러

고 보면, 자기 같은 자가 그와 거래하게 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만약에 우대용이가 공연히

건들대는 조무래기 소악패였더라면 모신은 가차없이 스스로 나서서 그를 망구에 옭았을 것

이었다. 망구에 옭아놓고 발가벗긴 뒤에 땅바닥에 주발 뚜껑 두 개를 엎어놓고, 허공에서 헹

가래를 쳐서 뚜껑 위에다 동댕이를 칠작시면 그놈의 허리는 의금부 낭청의 쇠좆매처럼 늘어

져 흐느적거릴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똥장군에서 국물만 떠서 목구멍으로 넘긴 뒤에 나룻

배에 실어다 버리는 것이었다. 고달근이는 모신의 그런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겉으

로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간이 부대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초승달이 희부옇게 떠 있었으나, 강상에는 안개가 자욱히 깔리고 있었다. 작은 거룻배 한

척이 서강을 건너서 밤섬 동자머리로 다가들고 있었는데, 동자머리에 대어진 수많은 배들

사이로 짐을 실은 대용이네 중선이 헤치고 나왔다. 다가온 거룻배가 등불빛이 좌우로 흔들

거리는 것을 보고, 중선 옆에다 바싹 대었다.

"신 바꾸러 왔수?"

뱃전에서 사공하나가 기웃이 내려다보며 말하였고, 거룻배에 타고 온 홍천수가 대꾸하였

.

", 갖바치 여기 있소?"

"어서 타슈."

하여서 천수는 제가 데려온 자를 배에 오르도록 하였다. 중선에는 사공 네댓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수가 뜸 속을 들춰보면서 물었다.

"이게 물건이우?"

"앞의 것이 조기요, 뒷것은 소금입니다."

"도사공과 대두는 먼저 갔소?"

", 저녁밥을 먹고는 곧장 한강진으루 떠났습니다."

"잘되었군."

중선에 있던 춘득이 선단의 사공들은 모두 내리고, 천수와 동막의 왈짜 패거리들만이 남

았다.

", 오랜만에 배를 부려보는군."

"나는 초저녁잠이 많아. 한숨 잘 테니까, 닿으면 깨우게."

천수는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뜸 속에 들어가 위에 덮인 거적 위에 드러누웠다. 중선은

가운데에 물건 싣는 뜸 지붕이 있고, 이물대 고물대의 쌍돛대가 달린 만장이배였다. 사공들

은 용총줄을 당겨서 돛을 올리고 아딧줄과 모릿줄을 거머쥐어 바람을 잡았다. 뒤에 앉은 자

가 키와 고물대를 맡고, 앞에서 이물대를 맡았는데 배는 옆으로 비뚤어진 채 슬금슬금 움직

이다가 방향을 잡아 동막 쪽으로 사선을 그으면서 미끄러져 갔다. 강 복판은 흐름이 거세어

역류를 타게 되니 경사가 완만한 쪽의 강변을 따라서 오르다가 바람을 잡아 다시 사선을 그

으며 삼개를 돌아나갈 모양이었다. 안개가 자욱하여 이물대에 매달아놓은 수박등의 불빛도

침침하여 뱃전 가녘의 물밖에는 전방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배는 동막을 지나고 용산 삼개를 감돌아 노량나루로 접어들어 다시 사선으로 가녘을 타고

올라갔다. 동작나루에서 서빙고를 바라보게 되니 여기서부터는 윗강 구역인 셈이었다. 강주

인이 투식한 물품을 한강진에서 사겠다는 것은 이렇게 구역도 다를 뿐 아니라 윗강 물건의

취급하는 내역이 다르니 막바로 거래하여 투식 물품의 깨끗지 못한 뒤처리도 해두려는 생각

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배가 한강진에 이르러 약속대로 천수는 깨어 일어나 한강진 나루터

로 들어가지 않고 강변을 오르면서, 수박등을 좌우로 크게 천천히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러나 불빛 한번 휘둘러 답해주는 곳이 없었다.

"...... 이상한걸. 주인놈이 혹시 무슨 낌새를 채었나?"

천수가 마음이 초조하여 패거리에게 말하였다.

"지금 여기가 분명히 한강진이지?"

"그래, 조금 더 올라가면 두모포야."

", 배를 다시 돌릴까?"

"천상 두모포까지는 가야 반대 바람을 잡아 감돌아 나오게 될걸."

천수는 다시 수박등을 열심히 휘저었다.

"저기 불빛이 보인다!"

이물대 아래 있던 자가 천수에게 불빛이 보이는 곳을 알려주었다. 지척을 알 수 없는 어

둠 가운데서 두 점의 불빛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으며 키를 돌려 방향을 잡고는 이물대의

돛을 내리고 고물대의 돛도 반쯤 내렸다. 배가 서서히 강안으로 다가갔고 뭍에 가까워지자

돛을 완전히 내리고 닻을 던지는데 두 발이나 들어가니 가녘인데도 제법 깊은 모양이었다.

횃불을 밝혀 든 자가 물가로 내려와 배에다 소리쳤다.

"바람발이 좋습디까?"

"바람은 좋은데 너무 훤하우."

하고 나서 천수가 약속대로 수박등을 물에다 던져버렸다. 이어서 육지의 이곳 저곳에서 불

이 켜지고 아무 말썽이 없음을 알게 된 강주인이 곁꾼들을 데리고 물가로 나왔다. 밑이 편

편하고 기다란 거룻배가 떴는데, 덕판에 횃대가 꽂혀 있었고, 양쪽에 삿대잡이가 나란히 서

서 부지런히 배를 끌어나오는 것이었다. 천수만이 거룻배에 옮겨 타자, 그를 뭍으로 데려다

주었고, 강주인이 반색을 하였다.

"뒤탈 없을까?"

"에이 그런 염려는 뒷전으루 싹 밀쳐놓으슈. 저기 배의 사공들과 함께 왔는데 돈만 받아

가지고 아예 내뺄 모양입디다. 우리가 여기서 거래를 끝내구 가면 세상에 어느 놈이 소금하

구 석수어 임자를 안단 말이우?"

"수고하였소."

"어서 대금을 주셔야지."

천수가 손을 내밀자 역시 강주인은 꼼꼼한 사람이라 고개를 내저었다.

"물건을 다 내리구 나서 드리지."

"...... 보나마나 수량이나 헤어보면 될 텐데 뭘 그러시우?"

"안 가져왔단 말이우? 그럼 오늘 돈 못 주겠는데, 내일 가게루 받으러 오지."

천수는 망연히 서서 맥을 놓고 있다가 짐짓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것처럼 제 가슴을 치고

침을 뱉었다.

"...... 온 정말 드러워서 못해먹겠군. 그러면 물건을 도루 싣구 가려오. 장사꾼이 이녁뿐

인 줄 아슈."

"글세 누가 돈을 안 낸대야 말이지. 문건까지 만들어주었잖소."

주인은 역시 여유가 만만하였으니 물건이 이미 한강진에까지 닿았은즉, 다시 끌고 가기는

어려운 일이라 배짱을 부려보는 것이었다. 천수가 계약 문건을 안 가져왔다고 하니 그놈 잘

되었다 하고는 돈 지불을 미루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나 홍천수는 그대로 다른 생각 있

어서 문건 내주기를 뒤로 미루려는 것이었다. 이미 칠패 김포교와 만나서 의논을 해두었는

, 개비쇠께서 재량대로 얼마를 떼어 잡수시든 그는 알 바가 아니었다. 정작 돈을 우려내는

것은 강주인의 가겟방에서 은밀히 해낼 일이었다. 홍천수는 맥살이 풀렸다는 듯이 자갈 위

에 쭈그리고 앉으면서 말하였다.

"그럼, 좋소이다. 어서 물건이나 내리슈. 물건 다 내리구 일단은 돌아가지요."

"...... 진작 그럴 일이지. 내일 오정때 와서 함께 중화나 드십시다."

강주인이 지시하니 곁꾼들이 대어놓았던 거룻배에 올라탔고 중선으로 다가갔다. 우르르

올라가서는 뜸에서 소금짐과 절인 조기를 내려다 거룻배에 쌓기 시작하였다. 선복이 가득

차자 배가 다시 뭍으로 대어졌고, 허벅지께까지 빠지면서 곁꾼들은 섬을 등에 짊어지고 자

갈밭에다 따로따로 쌓아나갔다.

"올 때가 되었는데......"

강주인이 중얼거렸고 홍천수가 물었다.

"누가 온단 말이우?"

"...... 알 거 없수."

강주인의 말에 홍천수가 다시 다그쳤다.

"알 게 없다니...... 시방 이게 어떤 물건인데, 모르는 사람을 끌어들인단 말요?"

"딱두 허네. , 이 물건을 아예 여기서 처분하려구 그러는 게요. 그래서 윗강 여각의 물

품과 맞바꾸어 동작으루 나가야 안전할 게 아니우."

천수는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떨떠름하게 말하였다.

"공연히 나중에 가격 깎아치지 마시우. 삼백 냥입니다. 나는 갈라우."

"아니...... 물건이나 다 부린 다음에 가야지. 수량이 틀리면 어째......"

"설마 그렇기야 하겠수. 분명히 헤아려두었고, 저 배에 사공들이 있으니 잘 알아 하겠지

."

"여긴 탈 배두 없을 텐데."

홍천수가 강주인에게 안심시키느라고 지어 말하였다.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 한강진으루 내려가서 주낙배나 한척 빌려타지요. 화초방에서 오늘

큰 판이 벌어지는데, 내가 여기서 섬이나 헤아리구 섰다면 말두 안되는 노릇이지."

"거참 애가 닳겠구려. 하긴 이녁이야 중도 거간꾼이니 현물이 있는 터에 뭐 어떻겠소."

강주인이 다른 일 같았으면 펄쩍 뛰었겠으나, 이제 상대편에서 신을 내지 않으니 가격을

깎아치는 것은 더욱 수월한 것 같았다. 수량이 틀린다고 한들 저희들이 어쩌랴 싶었던 것이

. 노름 좋아해 패가망신하지 않은 녀석이 없고 궂은 일 피하여 안방 장사만 하는 놈치고

재산 붇는 일 없다더니, 네놈도 경강에서 중도아 노릇으로는 이미 캄캄한 놈이로구나 하면

서 강주인은 은근히 흥겨워졌다.

"자아, 내일 봅시다."

홍천수가 흥얼대며 소갈머리 없게 강변을 따라서 휭하니 가버렸다. 거의 짐이 내려져 무

더기가 커졌을 무렵인데, 마상이배 한 척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불빛을 따라 거슬러 올라

오고 있었다. 배에는 우대용이와 석서방과 포교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배를 저어

잠시 강 건너편에서 대기하기로 하였다. 석서방이 중얼거렸다.

"천수가 갔는가 모르겠네?"

"벌써 갔을걸. 이젠 짐을 거의 다 부린 모양인데."

포교가 원래 포졸을 거느리고 기찰 다니게 되어 있으나, 욕심이 있어 나온 것이라 혼자서

포장의 수결 새긴 통부만을 지니고 나왔던 것이다. 쇠도리깨도 필요 없었고, 갓에 중치막 차

림이었다.

"필시 한강진에서 거래하는 상인이 오면 배가 대일 것이니, 그때에 덮치는 게 좋겠군.

네들은 곁꾼들이 설치지 못하게 대강 눌러놓아."

"그놈들이야 달아나두 상관없지만, 윗강 장사치와 강주인은 꼭 붙잡아두어야 합니다."

그들은 강 건너편에서 횃불빛이 일렁거리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룻배가 중선에서

사람 하나를 태우고 다시 뭍으로 갔다.

"좀 늦을 모양인가. 천상 집에는 못 들어갔군."

포교가 투덜거리는데, 중선만큼 커 보이는 거룻배 한 척이 강상으로 저어 올라오고 있었

.

"저 배가 닿자마자 쫓아갑시다."

석서방이 중얼거렸다. 배가 주춤주춤하더니 강변에 대어지는 모양이었다. 석서방은 노를

천천히 저어 마상이를 몰아 나갔다. 강 중간에 오자 훤하게 불이 켜진 언덕빼기 아래 자갈

밭에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자세히 보였다.

"막바루 대지 말구 저쪽에다 대어놓고 눈치채지 않게 들이닥치세."

포교가 말하여 석서방은 방향을 엇비슷이 틀어서 한 우명 거리로 아래쪽에 배를 대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납신 굽혀서 거래가 터지고 있는 강변까지 다가가는데, 자갈 밟는 소리에

곁꾼 하나가 고개를 어둠속으로 주욱 뽑으며 외쳤다.

"게 누구야?"

하는 수 없이 석서방이 멈칫거리며 일어섰다.

"웬놈이냐?"

"이리루 끌어와."

곁꾼들이 그러는데, 석서방의 뒤에서 우대용이도 불쑥 일어났고 그들은 불빛 속으로 다가

섰다.

"주인장, 평안허우. 이제는 남의 물건까지 투식하는구려."

강주인이 그제서야 우대용과 석서방을 알아보고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아니...... 이게 자네들 상품이었든가?"

"그렇소, 남의 어음 지불두 해주지 않구 잘라먹더니, 이제는 조무래기 도적들까지 시켜서

화물째로 먹으려는 게요?"

석서방이 말하였다. 그러나 이내 주인은 말투를 바꾸었다.

"얘들아, 잡아두어라."

강주인의 생각으로는 사공놈들이 현장을 잡긴 하였으나, 관헌이 없으니 나중에 극구 발뺌

을 하면 어느 놈이 뱃사공의 말을 믿으랴 싶었던 것이다. 설사 죽여서 발에 돌을 달아 내던

진다 한들 아무도 알 바 없겠지만 다른 자의 눈들이 많으니 약점을 잡힐까 두려울 뿐이었

. 좌우간 모면하려면 이들 두 사람을 때려 잡는 수밖에 없었다. 곁꾼들이 삿대와 돌멩이를

그러쥐고 어느 놈은 닻을 거머쥐고 달려드는데, 금방 살전이 벌어질 듯하였다. 칠패 김포교

는 만일 죽고 다치는 일이 생기면 자기에게도 몹시 불리한 일이라 슬그머니 일어나서 걸어

나갔다. 모두들 바라보는데 의관이 번듯하다. 김포교가 중치막 자락을 제치고 나무쪽 통부를

치켜들어 보이면서 말하였다.

"우포청의 김포교다. 이제 보니 너희가 파리가 아니라 떼참새로구나!"

혼자서 임집이나 터는 졸적이 아니라 떼를 지은 대적당이라는 말이었다. 그제는 정신이

번쩍 든 윗강 여각주가 소매를 앞세우고 뛰기 시작하였고, 아랫강 강주인은 낼름 거룻배로

뛰어올라타며 소리쳤다.

"얘들아, 가자!"

우대용이는 물론이려니와 민물은 고사하고 짠물까지 먹은 석서방이 그들을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석서방은 그들이 내던진 삿대 하나를 주워들고 길게 수평으로 후리면서 내리

쳤다.

"끼놈들 어디를 가니?"

한 놈이 다리에 맞아 깽깨미를 뛰는 것을 다시 등판에다 후려치니 자갈밭에 복날 개처럼

꽁지를 주욱 빼며 널브러졌다. 그 혼란중에 윗강 곁꾼들은 달아나지 않고 관망하는데 포교

가 달려가 윗강 강주인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내려왔고, 동막 여각 강주인은 삿대를 연신 꽂

아대며 멀찍이 강변을 떠나고 있었다.

그때에 누군가가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우대용이가 웃통을 훌떡 벗어젖히고 거룻배

의 뒤를 쫓는 것이었다. 물장구를 세게 치면서 팔을 둥그렇게 앞으로 휘저어 허수아비가 우

쭐우쭐 춤추는 시늉의 앞거리로 재빠르게 쫓다가 다시 곁으로 물을 차면서 모재비로 바꾸었

. 당황하여 손짓이 맞지 않는 삿대질에 뒤뚱거리는 배가 어찌 대용의 큰 바다를 헤치던

헤엄질에 당하랴. 바로 두 길 정도에 배의 꼬리가 보이는데 우대용이는 고개를 삐죽 들었다

가 처박으면서 그대로 물속에 자맥질하여버린다.

삿대질하던 자가 두리번거렸고, 대용은 배의 바닥으로 헤어 나가서 왼편으로 치솟으며 삿

대를 한 손에 잡아 그대로 당기니 어어, 하면서 곁꾼놈이 삿대를 잡은 채로 상체를 기울였

. 두 손으로 그자의 손목을 잡은 우대용이가 발길로 뱃전을 휙 차면서 끌어내리자, 배는

반대편으로 뒤뚱거리면서 저만큼 밀려가고 곁꾼은 물에 거꾸로 처박혔다. 상대가 처박힌 사

이에 재빨리 고개를 빼내어 한호흡 그득히 들이쉰 우대용이가 그의 두 발목을 제각기 틀어

쥐고는 말 그대로 물귀신 모양 아래로 주욱 끌어들였다. 놈이 발질을 해보려 하나 워낙에

우악스런 손아귀인지라 빼치지를 못하고 끌려드는 것을 잠깐 놓아준 우대용이 다시 물 위에

솟으며, 이번에는 두 허벅지 사이에 그자의 머리를 꼭 끼우고는 손으로 물장구를 쳐서 제

목만 내놓고 상대를 타 눌렀다. 밑에서 요동이 더욱 심해지고 꿀럭꿀럭 물방울이 솟아오르

니 놈이 좋이 한 동이는 될 만큼 물을 마신 모양이었다. 대용이가 다시 고개를 빼어 뒤뚱거

리며 멀어져 있는 거룻배로 헤어 나가 뱃전을 잡았고 뒤쪽에서 삿대질하던 곁꾼놈이 물에서

솟아오르는 대용을 보자 삿대를 빼어 머리 위로 번쩍 쳐들었다. 대용의 몸이 떡판이 될 것

인데, 그는 상대의 다리를 잡아 홱 제쳤다. 곁꾼이 뒤로 벌렁 드러눕자 그 틈을 타서 우대용

이 팔을 휘청 꺾어서 선미 위에 올라섰다. 대용이 두 손을 벌리고 버티어 서자 곁꾼이 다시

삿대를 잡고 일어났다. 그는 장창 휘두르듯이 수평으로 비잉 돌려서 우대용이를 때리는데

그가 창막이 판자를 집어들어 턱, 가로막았다. 워낙 휘청거리던 긴 작대기인지라 거센 타격

과 물먹은 판자를 이기지 못하여 딱 소리를 내면서 중동이가 부러져 나갔다. 배는 좌우로

거칠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곁꾼놈이 부러진 삿대를 쥐고 침을 뱉더니, 무지막지하게 좌우로

휘둘러대며 달려들었다. 몽둥이를 수직으로 내려치면서 달려드는 것을 우대용이가 창막이

판자에 슬쩍 걸터앉으며 발을 들어 새을자를 그리면서 다리 사이를 엇질러주니 뱃전에 걸치

면서 나뒹굴었다.

"에구구......"

틈을 볼 사이가 있나, 다른 발을 들어 황문 빗장이 질린 곳을 턱 차주었다. 곁꾼은 가볍게

물속에 처박혀서 헤푸제푸거리는 것이었다. 두 녀석 모두 강변것들이니 개헤엄이나마 헬 것

이라 충분히 뭍으로 달아날 수 있겠으므로 우대용은 건져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행

여나 믿고 있던 강주인은 우대용이의 사정없고 빈틈없는 동작을 보자마자 그만 만정이 똑

떨어져서 물에 텀버덩 뛰어들고 말았다. 뛰어들기는 하였으되 물에 뜰 재간이 있나, 그대로

들쑥날쑥하면서 수면을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우대용이는 제 얼굴의 흠뻑 젖은 물을 훑어내

리면서 잠시 내버려주었다. 강주인은 몇번이나 자맥질을 하면서 수면을 들락날락하며 손을

내저었고, 우대용이는 무심하게 제 얼굴을 연신 씻어내리며 뱃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인이 손을 뻗쳐 매끄러운 뱃전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다가는 다시 물에 잠기면서 뭐라고

비명을 내질렀다. 우대용이 몇번이나 자맥질을 더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손을

뻗쳐주자마자 강주인은 무턱대고 두 손으로 움켜잡고 매달렸다. 우대용이가 그의 팔을 꽉

잡아주면서 빈정거리는 것이었다.

"어디...... 나는 뭐 용궁장을 보러 가시나 했구먼."

", 살려주오."

"남의 물건을 투식하였으니, 맹물도 좀 들이켜봐야 공것이 배만 부르다는 걸 알지."

"...... 살려......"

강주인은 더 이상 매달리지 못하고 스르르 손의 힘을 푸는데 우대용이가 짐짓 손을 놓는

듯 강주인의 머리가 수면에 거의 잠기기까지 내버려두니 그는 다시 허우적대기 시작하였다.

"우리 어음을 그냥 떼어먹고 이제는 좀도적까지 시켜서 투식매매를 하였으니 동막서 장사

는 다했군."

"...... 제발...... , 돌려주리다."

우대용이가 못 이기는 체하고 강주인을 끌어올리니 그는 뱃전에 상반신이 걸리자 문어가

광주리 기어넘듯이 스르르 넘어와 선복에 느슨히 늘어져버렸다. 우대용이가 바닥을 더듬어

삿대 한자루 찾아 쥐고서 천천히 거룻배를 뭍으로 끌어나갔다. 이미 곁꾼놈들은 산지사방으

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고 윗강 여객주만이 포교에 잡혀서 무릎이 꿇려 있었으며 대용이네

사공들은 미리 약속한 대로 물 위로 떨어져 제각기 야음을 틈타서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와주를 사로잡았소."

대용이가 의관이 엉망이 되어버린 강주인을 앞으로 밀치니 강주인은 연신 거친 숨을 내쉬

면서 어깨를 떨어대고 있었다.

"이놈들, 죄가 한두 가지가 아니니 장형에다 귀양 천 리는 넘겠고나. 오라를 받아라......"

포교가 으르딱딱이며 옷자락을 열고 붉은 포승줄을 꺼내어 펼치니, 맥놓고 앉았던 강주인

이 두 손을 쳐들어 싹싹 맞비비면서 애걸하였다.

"나으리 동막 장사치로 대를 물린 놈입니다. 비록 죄는 지었다 하나 그 연유를 들이시고

징치를 해주십시오. 저희가 포도청에 끌려가 형국을 받는다 한들 나으리 심사에 무엇이 개

운하시겠습니까. 한번만 들어보시고, 딱하게 되었다 여기시거든, 감히 방면해주실 수 있으리

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두 실은 약재와 곡물과 어염을 물건으로 바꾸자 하여 까닭도 모르고 나왔

을 뿐이지, 그것이 투식인 줄은 몰랐소이다."

그때에 석서방이 앞으로 나섰다.

"나으리, 이자들의 몸을 뒤짐해보십시다. 분명히 무언가 물증이 더 나올 게요."

하니, 포교는 이미 제 앞으로 끌어다 놓은 강주인의 돈꿰미를 집어들었고, 자갈밭 위에 가지

런히 쌓여 있는 어염의 섬과 약초 곡물이 담긴 광주리며 섬을 가리켜 보였다.

"여기 그 배의 도사공이 있고 물건이 있으며 또한 거래자가 있으니 더 이상 발명할 바두

없겠네. 자네들하구 이자들이 함께 포도청으로 가서 추심을 해보아야지."

"자네들 물건이 틀림없는가 살펴보게."

포교가 지시하여 우대용이와 석범철이 이리저리 어염짐을 들척이고 나서,

"저희 것이 틀림없습니다. 투식하려던 놈들을 잡아야겠소이다."

하고 석범철이 말하자 포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내 이 두 눈으루 똑똑히 보아두었으니 잡고 말고 할 것두 없네. 네 이놈들, 어떻

게 약조하였는지 낱낱이 일러보아라."

강주인이 이미 속아넘어가 걸려든 것을 눈치채고 이제는 어음이나 되박아주고 곤경을 빠

져나가면 되리라 믿었다. 포교에게 뜯기는 것이야 경강 장사치로서 흔히 있는 일이니 투자

라 치부하여도 될 일이었다.

"실은 제가 그만 꾀임에 넘어간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이 사람들과 거래가 있어서 어음

을 내어준 일이 있었는데, 그만 지불하지 못하였소이다. 그래...... 이 사람들이 그 일로 앙심

을 먹고 경강 왈짜로 돌아다니는 홍천수라는 자를 넣어 저를 이런 구렁텅이에 밀어넣었구

. 이미 저질렀으니 발명할 길이 따로 없으나, 무턱대구 포청에 떨어지기는 억울하오."

강주인이 횡설수설 늘어놓았으나, 포교는 이미 상세히 알고 있었는지라 강주인의 입을 호

통으로 딱 막아버린다.

"닥쳐라...... 이제 네 입으로 발설하였으니, 그 어음의 내력이 어떠한 것인지 들어봐야겠

."

포교가 다그치자 강주인은 자기가 실언하였음을 알아차렸다. 선혜청 입고미에 화수먹이를

하여 떼어먹은 쌀값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대답이 없느냐......"

", 그것이, ...... 지난번에 밀렸던 운임전이지요."

강주인은 차마 화수를 하여 나눠 먹은 돈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어서 어물어물 운임전이라

변명하였고, 때를 놓치지 않은 석범철이 사금파리쪽을 내밀어주면서 말하였다.

"...... 삼백 냥이올시다."

"뭐라고...... , 삼백 냥?"

"그럼 얼마란 말이우?"

강주인은 다급하게 일어서며 석서방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대들었다.

"백사십 냥이지, 어째서 삼백 냥인가?"

"허어, 생눈깔을 뽑겠고나."

포교가 다시 으르딱딱거렸다.

"얼마야. 삼백 냥인가, 백사십 냥인가?"

우대용이가 말하였다.

"허긴 남의 물건까지 투식하려던 사람이니 백 냥이든 이백 냥이든 우기는데야 어찌하겠

."

포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백 냥 내주어야 되겠군. 헌데 어째서 여태껏 지불하지 않았는가?"

강주인은 하는 수 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삼백 냥이라고 하니 제 입장으로서는 그나마 다

행한 일이었다.

"어쨌든, 어음을 지불했든 않했든 나중에 따질 문제이고 이 사람들의 물건을 도적과 공모

하여 투식매매하려다가 적발되었으니, 두 사람 모두 가산은 구몰되고 아예 장삿길이 막힐

터일세. 서로 좋게 타합을 보겠는가 아니면 포청으로 가서 밝혀보겠는가."

상인 두 사람은 제각기 엎드린 채 포교의 다리를 부여잡으며 애걸하였다.

"그야 물론 타합을 해얍지요. 묵인만 해주신다면 저희에게는 하늘같은 은혜를 내리는 셈이

올시다."

과연 그들은 꼼짝없이 걸려들고 말았는지라, 어찌하든 곤경을 빠져나가려 하였다.

", 좋게 결판을 내겠단 말이렷다. 하면... 강주인 자네는 돈냥을 내어주면 될 것이고, 그쪽

에서는 물건을 내겠는가, 돈을 내겠는가."

포교가 윗강 여각주에게 은근히 말을 비치자, 그는 얼른 일어났다.

"예예, 까짓 잡곡과 약초 따위 몇섬이올시다. 제가 가격이 좋다길래 물건을 싣고 나오기는

하였으나, 투식매매에 끼여든 것이 적실하니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기왕 싣고 나온 것이

니 저 사람들게 내어 주겠습니다."

포교가 우대용이와 석범철에게 물었다.

"자네들은 이것으로 족하겠나."

", 저희두 사실은 소금짐이 물에 젖고, 싣고 옮기는 불편이야 말로 할 수가 없지마는 저

쪽 주인께서 그렇게 경우있이 나오는데야 어찌하겠습니까. 이 물건을 모두 싣겠습니다."

포교는 다시 강주인에게 돈꿰미를 들어 보이며 말하였다.

"이 돈은 물건값인 모양인데 얼마에 사기로 하였나?"

"삼백 냥을 준비하였습니다만, 거간을 섰던 홍천수가 계약문건을 가져오지 않아서 지불하

지 않았습니다."

포교가 대용이네를 돌아보며,

"자네들 어음이 삼백 냥이랬지, 찾아가게나."

하였으나 석서방이 돈꿰미를 거두어가면서 대꾸하였다.

"우리는 이자에게 포한이 많습니다. 어음을 다져주지 않아서 지체하느라고 장사에 많은 손

해를 입었고 이제 물건까지 싣고 나르고 하는 중에 많이 훼손하여놓았으니 어디 이런 억울

한데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대용이가 미리 짜놓은 대로 석서방의 하소를 가로막았다.

"비록 밉기는 하여도 우리가 이미 윗강 여각주에게서 물건으로 받았으니 더이상 바라지 않

겠습니다. 다만 그자를 죄주고 안 주는 것은 나으리의 인정에 달려 있으니, 우리는 더 상관

하지 않겠소이다."

포교가 대용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과연 도사공의 언사가 정연하네. 그러면 물건을 모두 옮겨 싣고 갈데로 가보게나."

", 덕분에 어음도 다지고 물건도 찾게 되어 막대한 손재를 면하였습니다."

수작을 나누고 나서 포교는 강주인과 함께 거룻배에 올랐다. 강주인은 물에 빠졌던 곁꾼

아이들을 수습하여다가 다시 삿대를 잡게 하고 아랫강으로 내려가는데 아직 완전히 방면된

것은 아닌 셈이라 잔뜩 주눅이 들어 창막이에 뭉쳐져 구겨 박혀 있었다. 포교가 말하였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일단 돌아가서 푹 쉬시게. 이만이라두 하였으니 다행이 아닌가.

... 홍천수가 내게 기찰당하여 뒤를 밟히다가 조금 전에 잡혔네. 그자가 갖고 있던 계약문

건은 내가 지니구 있지."

"아이구 그렇게 되었구먼요."

맞장구를 치면서도 강주인은 속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요놈들 끼리끼리 짜고서 나를

기름틀에 깻묵 눌러대듯 하는고나, 하는 느낌이었다. 투식매매를 하던 현장에서 적발이 되

, 이제 문건마저 포교가 지녔다니 자신의 어리석은 실수나 탓해볼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적게 뜯기고, 어서 백지로 돌려야만 하였던지라 강주인은 대뜸 나온다는 말이

인정전이었다.

"제가 인정을 쓰겠습니다. 제발 없던 일로 해주십시오."

포교는 그 말을 듣자 껄껄 웃어체치는 것이었다.

"문건만 말소하버린다면 이녁이 투식매매하였다는 물증이 어디 있겠나. 내가 돌려주기는

하여야겠지만, 거기 적힌 대로 삼백 냥은 지불되어야겠지... 홍천수를 방면해준다 하더라도

놈이 거간까지 붙이고 득이 없이 싸돌았으니 가만있을 리두 없겠네. 한 오십여 냥 집어주

...나머지는 내가 다른 포교들과 나누어 쓰도록 해야겠어."

강주인은 분명히 억지로 돈을 물어낸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달리 해볼 도리가 없었다.

돈을 그대로 물어내어야겠으나, 가산이 몰수되어 패가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싶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낼 수 밖에 없었다. 좋다. 돈은 내놓지... 그러나 어디 네놈들 편안히 그

돈을 넘기는가 두고 보자. 강주인은 춘득이네 도사공 녀석과 홍천수와 포교의 세 사람이 짰

다는 것을 휜히 눈치채고는, 나중에 어찌해서든지 욕을 되돌려주리라 마음먹게 되었다.

"좋습니다. 삼백 냥을 내드릴 테니 문건을 돌려주십시오."

"이 사람아, 시방 어떻게 돈이 되겠는가. 내일 아침에 홍천수를 보내도록 하지."

"아닙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밤을 넘기지 말고 해결하십시다. 우리네두 이런 일루 하

루라도 골치를 썩고 싶지가 않습니다."

강주인이 그렇게까지 나오는데야 포교로서도 더 이상 뭐라고 달리 말하지 못하였다. 강주

인이 말하였다.

"이렇게 하십시다. 내게 사방 돈이 없으니 아예 미곡으로 가져가시지요. 시세를 따져서 배

에다 부려드릴 것이니 그게 더욱 좋지 않겠소이까?"

포교가 돈 세 꿰미를 받고는 싶었으나, 미곡으로 준다니 차마 이러쿵저러쿵 따질 염치가

없었다. 그러마고 응낙을 하여 동막까지 내려갔는데, 이미 샛별만이 호젓하게 남아 하늘에는

밝은 기운이 뻗치고 있는 새벽녘이었고 강에도 엷은 안개가 깔려 이었다.

동막에 닿자마자 주인이 고의 열쇠를 곁꾼들게 내어주면서 아직 납부하지 않은 세곡 중에

서 일흔다섯 섬을 내어주라 지시하였다. 포교가 강주인에게 말하기를,

"서로가 남의 눈도 있으니 밤섬 동자머리에다 미곡을 부려주면, 내가 곁꾼을 통하여 계약

문건을 보내도록 하겠네."

하였고 강주인은 쾌히 응낙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달 장사를 완전히 망친 것이었으나, 미곡

으로 셈하여 주는 것만도 다행이어서 얼른 포교를 쫓아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말이 일흔다

섯 섬이지, 작은 상고 같았으면 아예 거덜을 내고 판셈을 하게 될 물건이었던 것이다. 판셈

이라는 것은 장사치가 망할 적에 자기와 거래하던 자들을 모아놓고 집채에서 여편네 속곳이

며 자질구레한 종지 보시기까지 모아다 놓고 일일이 따져서 공평히 나누어주는 것을 말하였

. 이때에 채권자가 납득을 하지 않거나 끝까지 지불해달라며 관청에 고발하면 하는 수 없

이 가속을 관비나 사비로 박아 때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몰인정하게 판셈을 받아낸

장사치는 신의를 잃어서 다른 장사꾼들이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강주인이 세곡 중에서 낸

일흔다섯 섬은 결국은 화수를 먹인 쌀인데, 포교가 그 내력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는 조반

후에 동자머리에서 우대용과 홍천수를 만나기로 하였으므로 근처 객주의 빈 봉노에 가서 늦

잠에 빠져버렸다.

강주인은 세곡 일흔다섯 섬을 실어 동자머리로 내보내고서 동막 장터의 열립한 사람을 불

러들였다.

"자네 목청만 쓰지 말구 급주나 한번 뛰어보려나. 내가 노자와 품은 후히 주겠네."

"글쎄요... 워낙 요즘은 장이 한산해서 고작해야 시골 봇짐꾼이나 몇 명 끌어들이구 있습니

."

", 그렇다면 잘되었네. 강화 달곶이까지 급주를 뛰어주어. 내가 서신 일봉을 써줄 테니

검점만 받아오면 되네."

강주인은 그냥 삭여버리기에는 너무 분한 노릇이라 우대용이와 그의 사공들에게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었다. 춘득이에게 그들이 화수에 공모하였다고 알려주면 세상이 뻔히 아는 노릇

이비만, 도사공을 내몰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날짜와 금액을 소상히 적어서 봉함하면서 강

주인은 급주로 산 열립군에게 말하였다.

"이 편지를 쓰는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자네도 모르는 이라구 그러게. 서강에서 만나 서신

을 전하라길래 돈 받구 방자를 섰다구 말이세. 달곶이 가면 유춘득이란 선주가 훤하니 알려

져 있을 것이니 꼭 본인에게 전하란 말이야."

강주인은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해두면서 일단 일을 벌여볼 심산이었다.

급주가 일봉 서신을 품에 넣고 강화를 향하여 떠난 뒤에 강주인은 차인 행수를 불러서 선

혜청에 입고될 쌀 중에서 화수를 먹은 쌀을 모두 다른 곳으로 비워내고 묵은 쌀섬을 채우도

록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내일이나 모레나 동자머리에 나가 그들이 보낸 쌀이 거래되는가를

살펴보라고 일렀다. 화수를 먹은 일흔다섯 섬이 어차피 싸게 거래될 것이고, 그런 물건을 매

입한 중도아는 이어서 소상인들에게 속여 팔 것이며 밥을 짓는 성내의 아낙네들이 혀를 찰

즈음에는 이미 물건을 팔아버린 자는 종잡을 수가 없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결국은 물주와

중도아가 짤밖에 없는데, 강주인은 중도아 몇사람을 꾀어서 물주를 망칠궁리를 하였던 것이

. 물주라면 결국은 홍천수와 칠패 포교일 것이었다.

"제놈들이... 나를 씌워놓고 어디 얼마나 오래 배부른가 두고 보라지."

강주인은 일단 그런 계획을 세워놓고는 잡사 제쳐두고 훈련원 장교들이 자주 모이는 군창

어름으로 나가기로 하였다. 그는 이어서 좌포청의 포도부장인 정모의 집도 방문할 셈이었다.

그는 소란을 피워서 이목을 집중시킨 뒤에 홍천수와 칠패 포교를 올가미에 얽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는 은근히 곁꾼들을 풀어 홍천수의 거처를 찾게 하고, 그를 놓치지 말고 감시하라

일러두었다.

우대용이와 석서방은 일단 포교와 홍천수가 돌아온 뒤에 셈을 하여 몫을 나누기로 하고서

윗강에서 실어온 약초는 구리개 쪽으로, 잡곡은 서강 모신이네로 먹였다. 아무래도 하루 이

틀은 더 묵어야 할 모양이었다. 투식이랍시고 거짓 배를 몰앗던 칠패 중도아들이 나서서 소

금과 조기를 칠패와 배오개에 직접 먹였는데, 그러고도 어음 다진 삼백 냥이 남았으니 과중

하게 득을 보아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도 있었으나, 홍천수가 워낙 호기있게 나가는지라 무

슨 일이 있으랴 싶었던 것이었다. 절름발이 박성대가 종형인 석서방의 부탁으로 상품을 싣

고 서강과 삼개를 오르내렸다. 중화참이 훨신 지나서야 홍천수가 먼저 그리고 포교가 각각

따로 동자머리에 도착했고 천수는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낮술이 벌겋게 올라 있었다. 밤섬

동자머리 조선장 앞에는 나무 아래 멍석을 펴놓고 잔술을 파는 주모들이 있었는데, 홍천수

는 벌써 해장술이라고 계속해서 들이켠데다가 서강에 건너가서 모신과 상담을 하면서 닷 되

좋이 마신 뒤라 게트림을 하면서 술 먹기를 사양하였다. 우대용이와 칠패 포교가 새삼스러

운 인사를 나누었고 석서방은 서강에서 건너올 박성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여튼 이번 일은 꿈도 꾸지 않고 호박을 잡았소이다."

홍천수가 흡족해서 나무에 기대고 널브러져서 큰소리를 쳤고 석서방도 함께 맞장구를 쳤

.

"그야... 누가 하는 일인데. 칠패의 천수가 그만 일이란 손 안 대구 오줌 털기지 뭐여."

", 무슨 얘기야. 아무리 남을 씌우는 일이지만, 다 뒤가 있는 법이라구. 우리 같은 배짱에

도 거의 육백여 냥이 넘는 대금을 먹기는 좀 켕긴단 말야."

"육백 냥이 넘을지 안 넘을지는 한번 따져보구 나서 얘기합시다."

우대용이의 말에 포교가 손을 꼽았다.

"하여튼지 돈 세 꿰미 받았고."

"그건 우리 어음 다진 것입죠."

석서방이 나섰으나, 홍천수도 지지 않았다.

"인석아, 그게 어디 삼백 냥이냐. 백사십 냥이지. 그나마도 그 돈이 뼈빠진 돈이드냐. 너희

끼리 화수 해처먹은 돈이었지."

"아무려나 삼백 냥이로군. 그리고 윗강 여각주가 내놓은 약초와 잡곡은 어찌 흥정되었나?"

", 서강의 모신이가 구리개에다 먹였는데 대략 삼사백 냥은 떨어진답니다."

"그뿐입니까. 문건을 내어주고 미곡을 실어 왔으니 거의 천 냥입지요. 천 냥이라면 소상은

벌써 밑바닥 휜히 드러내구 쪽박 찼을 겁니다."

포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입맛을 다셨다.

"너무 과했는걸..."

그러나 석서방은 혀를 찼다.

"아니, 까짓 투식매매를 눈감아주고 천 냥을 먹은 것이 무에 과합니까. 더구나 밑이 구리기

는 제놈들이 우리보다 한술 더 뜨는 셈인뎁쇼."

"내야 칠패에 틀허박혀 나오지 않으면 포교 누구인지 알 것이 무에있나. 그러나 자네들이

야 앞으로도 동막 출입을 해야 될 터인데."

홍천수가 일어났다.

"성님, 그런 염려는 놓으십시오. 그나저나 동막서 실어 보낸 쌀섬은 어디다 부려놓았습니

?"

"아까 일단은 백사지에 쌓아두었는데, 아이들 중화나 마치구 나서 석서방네 집으로 옮겨둘

셈일세."

우대용이가 말해주자 홍천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성큼성큼 배가 대어 있는 모래사장으

로 내려갔다. 과연 미곡 일흔다섯 섬이 차곡차곡 샇여 있었고 대용이네 사공 하나가 지켜

서서 번을 들고 있었다. 홍천수가 다가가서 쌀섬을 이리저리 툭툭 두드려보다가 밑부분에

배어나온 물기에 누이 갔다. 그는 무심코 넘겼다가 그 다음에도 또 그 위에도 똑같은 꼴로

물기가 배어나오고 거뭇거뭇 곰팡이가 피어난 것을 보자, 당황한 표정이 되면서 쌀섬의 주

둥이를 뜯기 시작하였다.

천수가 뜯긴 쌀섬 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한웅큼을 퍼내어 만지작거리면서 살펴보았다.

직 속 끝이 아니라 거죽에서 퍼냈는데도 바삭바삭한 느낌이 가질 않고 부옇게 떠 있는 듯하

였다. 손가락으로 비벼대니까 곧 부스러져버리는데 불어버린 쌀이 분명하였다. 홍천수는 느

긋했던 술기운이 한꺼번에 깨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게 눠야?"

홍천수는 다시 그 밑의 쌀섬을 뜯고 이번에는 손을 푹 찔러넣고 후벼내어 한줌을 꺼냈는데

쌀에 물기가 축축하였고 개중에는 파릇파릇 변색한 쌀알도 섞여 있었다. 그는 쌀을 한줌 쥔

채로 그들의 술자리쪽으로 뛰어올라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우리가 속았단 말여."

"뭐야... 뭘 가지구 그래."

석서방이 홍천수의 손에 쥐어진 쌀을 집어서 입에다 털어 넣고 씹어보다가 후두두 뱉어버

렸다.

"아니... 화수 먹은 쌀 아녀."

"반값두 못 받겠는걸."

홍천수는 낙담하여 포교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반값이 다 무에요, 작자가 나서질 않을 게요."

", 내가 일을 그르쳤군."

포교도 손바닥에 올려놓았던 변질된 쌀을 털어내면서 계면쩍어하였다.

"어쨌든 쌀은 쌀이니까."

박성대가 이어서 말하였다.

"까짓 거 팝시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띠가 되긴 마찬가지유."

"나는 자신 없는데. 이걸 팔아치웠다간 칠패와 동막에서 완전히 내몰릴 게여. 그 성화를 어

찌 당할라구..."

"그놈이 끝까지 우리를 골리누나!"

석서방이 분하여 주먹을 쥐며 말하였으나, 우대용이는 무덤덤하게 대꾸하였다.

"어음 다진 것이 삼백 냥, 구리개와 서강에 먹인 것이 또한 삼백 냥, 그것만으로도 우린 배

가 불렀소이다. 내 지금 다짐을 하는데, 우리 찾을 돈 백사십 냥하구 어염집이 약간 훼손된

것을 따져서 시삼십 냥쯤 쳐서, 일백오륙십 냥만 내주면 더 이상 염염거리지 않을 거라우."

홍천수가 슬그머니 석서방을 돌아다보았다.

"그래... 이만 돌아가겠다 그 말이우?"

석서방은 도사공 우대용이의 말이 있었는지라 대꾸 없이 슬며시 돌아앉는데, 우대용은 일

단 박성대에게 물었다.

"우리 물건값은 언제 다 풀릴 듯하오?"

"... 아시다시피 유선주 앞으루 어음이 갈 것이니 다음 행선 때에 와서 받아가시면 될 게

."

"글세 그 어음이 언제 떨어지겠수?"

"오늘 저녁에라두 제가 한바퀴 돌아서 수결을 받아오지요."

성대의 말을 듣고 난 우대용이가 홍천수와 포교에게 말하였다.

"우린 기일이 벌써 이틀이나 늦었소이다. 달곶이에 오늘이라두 돌아가야 하우. 그러니 미리

백육십 냥만 내주시면 모두 바라지 않구 훌훌 떠나겠소이다."

"도사공 성님..."

눈앞에 대금을 두고서 다 버려두고 떠나자니, 석서방은 다시 우대용의 처사가 안달이 나도

록 답답하였다.

"자네는 가만있게... 우리가 경강 식구들두 아니구 강화에 적을 둔 뱃놈인 바에야, 일을 마

쳤으니 돌아가야 옳지 않은가."

그때에 밑에서 쌀섬을 지키던 대용의 사공이 헐레벌떡 뛰어올라왔다.

"대두 성님... 임자를 좀 보잡니다."

석서방이 둘러앉은 일동을 쓱 훑어보면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누가... 뭘 허러 보재."

사공이 뒷전을 손가락질하였다.

"저어기, 팔 거냐구 그럽니다."

모두들 바라보니 나눗배가 물가에 비스듬히 대어졌고, 패랭이에 배자 걸친 자와 갓 쓴 이

가 나란히 뱃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있어... 내가 가서 한번 찔러보구 올 테니까."

홍천수가 눈을 빛내면서 일어났으나, 석서방이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낯선 놈들인데 섣불리 매매하였다가 화근덩어리가 되면 어쩔려구 그러나."

"에이 사람이 순 먹통이로구먼. 장바닥에서 거래하는 일이야 빤한 바닥이니 이미 글러버린

일이지만 낯선 촌놈들이라면 무에 걱정인가. 내가 살살 캐묻고서 만만하면 몽땅 씌우고 오

."

홍천수가 먼저 모래사장으로 내려가고 그뒤로 석서방과 박성대가 눈치를 보느라고 슬그머

니 따라붙었다. 우대용이는 다시 포교에게 말하였다.

"내가 동무의 주선으로 그아마 남의 도사공질이라두 하면서 밥을 얻어먹는 주제에, 사욕으

루 귀선 날짜를 자꾸 넘길 수는 없소이다. 그러니 백육십 냥만 다져서 주시우. 박서방이 어

음이라두 끊어주면 오늘 저녁에 떠나겠수."

"아무려나 정 그렇다면 헐 수 없지. 그 대신 몫은 바라지 말게."

우대용이가 포교의 말에 너털웃음을 떠뜨렸다.

"실은 데리구 있는 사공 아이들이 고생에 비하면 급료가 박하여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지

. 화수라도 해서 술값 잔푼벌이를 하려는데 내 어찌 말리겠소이까. 이제 그것을 찾았으니

나는 아무 욕심두 없소."

"석서방은 그런 눈치가 아니던데."

뭔가 아래쪽에서 한참이나 말을 주고받던 천수가 뒷전에 박성대와 석서방을 끌고 돌아왔

. 대어졌던 배는 물가를 떠나 다시 강심으로 헤쳐 나아가고 있었다. 석서방이 참지 못하고

천수를 앞질러 올라오며 연신 벙글거리는 것이었다.

"잘되었습니다. 일이 풀리느라구 그런 봉이 걸려들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반값은커녕 바

른 시세로 고스란히 받아내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덩달아 좋은 얼굴이 되어 천수를 바라보자니 성대는 뒷전에 시무룩히 섰고 홍천수

가 점잖게 입을 떼었다.

"내일 거래하기루 되었습니다. 정말 동기 머리얹는 날이 신연 사또 부임날이라구... 우리가

찾던 사람들입지요. 저 사람들은 관동 사람인데 담뱃짐을 실었답니다. 거간을 넣으면 구전이

많이 뜯기고 믿을 수도 없어서 직접 물주를 찾아 다니는 중이었답니다."

그러나 박성대가 끼여들었다.

"헌데... 이상합니다. 물산으로 맞바꾸자니까. 그것은 한사코 마다하며 돈으루 사겠다구 합

니다. 돈으루 사면 그야 우리네가 이익이지만 너무 손쉽고 척척 맞아떨어지는 일이라 께름

칙합니다."

"젠장할... 장가드는 놈이 아들 볼 일까지 걱정한다더라. 맞전으루 팔면 봉잠은 건데 뭘 따

지구 지랄이여."

석서방이 성대를 조롱하였는데 대용이는 그를 한쪽으로 불러내어 조용히 타일렀다.

"우린 오늘밤에 여길 떠나야겠네."

"뭐라구요? 목전에 대금을 두고 떠나다니요."

"안 가겠으면 말게. 좌우간 나는 배를 띄울 참이니까."

"성님 근 천 냥이나 되는데, 한몫씩 나눈다 쳐도 이백 냥이 넘습니다. 중농의 일년 농사입

지요. 내게는 쑬쑬한 장사밑천이 됩니다."

석서방이 우대용에게 사정했으나, 그는 더 이상 설득하려 하지 않고,

"그러면 자네는 선단에서 빠지도록 하게. 다른 이를 대두로 올리도록 허지."

라며 잘라 말하였고 석서방은 더욱 무엇을 잡을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

에게도 가짓 거 뱃놈 노릇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대뜸 말해버렸다.

"떠나시우. 나두 인제 여편네와 애들을 데리구 경강에서 붙어 돌아갈라우. 성대가 배를 내

려 거룻배 운임을 뜯어먹구 사는 판이데, 나 같은 연안 주상의 대두놈이 배를 안 탄다구 풀

칠 못하겠소."

홍천수와 포교는 화수의 미곡을 관동 사람들게 넘길 일을 의논하고 있다가 우대용의 말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고, 칠패 포교가 전대를 끌러서 돈 한 꿰미와 육십 냥을 치러주었다.

"이거 섭섭한데..."

"아니올시다. 내가 뭣 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몰라두 이젠 일이 다끝났으니 귀선해야지요."

우대용이가 돈을 받아가지고 석서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건 화수값인데, 산 삼십 냥쯤 차례가 돌아갈 걸세. 받을 텐가?"

"아니 도사공 성님이나 쓰시지요."

우대용이 더 이상 권하지 않고서 배가 대어진 물가로 나아가 사공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개중에는 동막에 놀러 나간 자들도 있었으나, 배에서 낮잠을 자거나 동자머리에서 밥을 짓

다가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우대용이는 우선 석서방 다음 차서의 사내를 지목하여 일렀다.

"석서방이 집안일로 선단을 그만두게 되었네. 귀선하여 선주께 말씀 올려 정해야 할 일이

지만, 오늘부터 우리 선단의 사공 대두는 자네가 맡아주게. 그리고 가욋돈이 얼마 생겼는데,

모두 똑같이 나눠 쓰도록 하게."

"도사공 성님은 안 쓰시려오?"

대두로 지목된 사내가 돈꿰미를 받아 들고 우대용에게 다시 내밀었다. 그도 돌아가는 눈치

로 대강의 일의 진행을 알고 있었으며 원래가 이런 벌이에는 도사공과 대두가 그 반나마 먹

고 나서 나머지로 사공들을 호궤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대용이는 그중에 엽전

닷 푼을 집어서 술자리로 되돌아가며 말하였다.

"나는 이거면 되었네. 해질 녘에 배를 띄울 것이니 준비들 해놓게."

술자리로 돌아오니 그들은 미곡 매매할 의논을 모두 마쳤고, 성대가 일어섰다.

"도사공, 서강 모신이네루 건너갈 참인데 함께 안 가시려오? 어음을 몇군데서 받아 와야지

."

"나는 여기서 술이나 조금 더 먹고 한숨 푹 잘라우. 밤새껏 배를 부리게 될 테니까."

거래와 일이 모두 끝났으니, 거기 있을 필요가 없는지라 홍천수와 칠패 포교는 일어서고

우대용과 석서방만이 남았다. 우대용은 잠자코 술만 들이키는 중인데 석서방이 그의 빈 잔

에 술을 따르며 입을 떼었다.

"성님 죄송헙니다."

"... 사람 일이 다 그렇지."

"저두 뼈빠지게 노질을 하여 이제 겨우 선단의 대두가 되었습니다만, 이 급료 가지고는 입

신할 겨를이 없겠습니다. 거룻배나 한척 마련하여 성대하구 둘이서 미곡 소매나 할까 합니

."

"자네가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겠지만, 하긴... 나두 섭섭한 가운데 할 말이 있네.

사람이 다른 건 몰라두 자기에게 혜택을 주었다면 조금이라두 갚아보려는 성의는 보여야지.

물론 선주가 자네를 고용하여 몇해 동안 부려먹기는 하였으나, 그래서 굶지 않구 처자식을

살리지 않었는가. 이제 다른 이익이 있어서 그만둔다면 가서 뵙고 사유라도 말하고 인사를

차리는 게 도리일 게야."

우대용이 한마디 찌르니 석서방은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내가 시방 자리를 떴다 하면 천수가 알은 체나 할 줄 아십니까. 이런

기회에 사공 노릇도 때려치우고 해얍지요. 일간 찾아가 뵙고 선주에게 인사두 올릴까 합니

. 도사공 성님이 귀선하시면 중병이 들어 집에 누웠다구 잘 말씀해주십시오. 정말 면목 없

습니다."

"내게야 면목이구 자시구 할 게 있나. 사람이 성심이 있어야 제 마음두 편하다니까. 나는

그렇게 살라네..."

우대용이는 석서방을 비난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섭섭한 구석이 있어 그리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람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 누가 자기를 감영의

회자수 옥에서 꺼내주었을 것인가. 그는 이번에 귀선하면 짬을 얻어내어 송도 박대근이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성님 경강 오르실 적마다 저희 집에 묵으십시오."

석거방이 자기 딴에도 부끄러워져서 우대용이의 손을 잡고 말했으며 대용은 슬그머니 손을

뽑았다.

"그래 또 만나지. 실은 나두 남의 도사공질이나 하는 생활이 지겨워 지는군. 어디 좋은 여

자가 있으면 눌러앉아 살림이라두 하구 싶네."

"정말이우... 내가 중신 서드리리까?"

우대용이는 픽 웃었다.

"괜한 소리여."

성대가 저녁녘에 어음을 받아가지고 돌아왔고, 우대용이는 예정대로 배를 띄웠다. 눈치를

아는 사공들은 석서방이 의리부동한 뱃놈이라하여 콧등도 돌리질 않았다. 선창에 홍천수와

박성대가 나와서 우내용을 전송하였다. 돛을 올리고 대선이 먼저 나아가고 뒤따라 중선 두

척이 미끄러져 나갔다. 서강을 벗어나자 바로 선유봉이 지나갔고, 한강수로와 임진강이 맞부

딪치는 게바위나루까지 밤새껏 항해할 모양이었다. 서편 하늘에 놀이 가득 찾는데, 새떼가

천천히 날아가고 있었다. 우대용은 이물에 앉아서 들판을 건너다보았다. 마을마다 아득한 놀

에 잠겨서 저녁 짓는 연기를 뽀얗게 올리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펴고 깊은 숨을 몇번이나

들이마셨다. 바람 가운데 물풀의 냄새가 싱그럽게 전해져오는 듯하였다.

", 시원하다!"

바람은 시원한 게 아니라 늦가을의 싸늘한 기가 있건마는 대용은 경강 저자바닥의 그 아수

라판이 지겨웠다.

작년 몇 달을 보냈던 구월산의 인적 없는 설원이 눈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우대

용은 다시 물건을 싣고 경강으로 되돌아올 일이 한심스러웠다.

"길산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고..."

그는 탈옥하여 눈길을 길산이와 함께 도망치던 날을 생각하였다. 그는 강변이 차차 어두워

져서 별들이 초롱초롱해질 때까지 뱃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달곶이 갯가에는 연기와 안개가 한데 어울려 바다 쪽을 가리고 있었다. 맞은편의 나루터에

서는 서로 고함쳐서 사공을 부르는 소리로 아침의 정적이 깨어지고 있었다. 곳곳에 대어놓

은 크고 작은 배에서 아침을 짓는 연기가 곧게 올라갔고 바람이 없는 수면은 가끔 물새가

차고 오르는 파문이 넓게 퍼져갈 뿐이었다. 아까부터 선창에 나와서 서성거리는 사내가 있

었다. 그는 높직하게 치켜올라간 대선의 뱃머리께에 걸터앉아서 강화수로를 내다보고 있었

. 양쪽에 안개를 슬슬 끌어내리고 있는 산벼랑과 언덕들이 보이고, 물의 가운데 편은 공짜

기처럼 툭틔어져 있었는데 가금씩 그곳을 가로지르고 주낙배가 천천히 하얀 물을 어지럽히

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해가 더욱 높직이 떠오르자 안개는 차차 걷혀서 나무숲 사이로 스러지고 빛조각들이 수면

위에 가득 찰 무렵이 되었다. 대선 한 척이 천천히 수로를 따라 헤쳐 나오는 것이 보였고

양쪽에 늘어선 사공들은 돛을 내리고 노를 젓는 것이 보였다. 뱃머리에 걸터앉았던 자가 이

마에 손차양을 하고서 배를 살피다가 깃발을 확인하더니 재빨리 배에서 뭍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달곶이 선창과 조선창을 지나서 바닷가를 따라서 한참이나 뛰었다. 드디어 울창한 송

림이 걷혀나가고 강화성의 석벽이 감돌아 나간 곳에 안쪽으로 툭 트인 들판이 나타났는데,

산 뒤편으로는 목재 벌채장이 드넓게 널려져 있었고 들판의 막다른 곳에 마을이 보였다.

는 가운데 자리잡은 기와집을 향해 뛰었다. 벌써 대문은 활짝 열어젖혀져 있었고 마당쇠도

비질을 끝냈으며 조선장들이 목수 도구를 옆에 끼고 마당으로 모여드는 중이었다. 그는 조

선장이들을 앞에 세우고 뭔가 지시하고 있는 사내에게로 뛰어갔다.

"대목 어른, 배가 들어옵니다."

", 경강 나갔던 배가 틀립없데?"

", 세 척이 같이 들어오구 있습니다."

"알았다."

그는 사람들을 세워두고서 바깥마당을 돌아 사랑채가 있는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대목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잠시 기다렷다.

"게 누구냐?"

", 저올시다."

장지문이 열리고 졸음이 가득 찬 얼굴의 중년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우선 목을 몇

번 휘돌리고 가래침을 돋구어 마당에다 호되게 뱉어냈다.

"우가가 배를 몰고 오는 모양입니다."

"그래? 하루 늦었구만."

", 원은 이틀 늦은 셈이올시다."

"준비는 해두었겠지."

"모두 바깥마당에 모여 있습니다."

춘득은 맨저고리에 가죽 배자를 걸치면서 몇번 몸서리를 쳤다.

"집안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구 벌채장으루 끌어다 두어라. 내가 가기 전에는 함부로 손찌

검들 하지 말구."

"우가만 족칠까요?"

"아니다, 이번 행선에 나갔던 놈들을 모조리 잡아두어라."

대목은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는지,

"마주 대들면 어찌할까요?"

하였고, 춘득이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놈들이야 걱정할 게 있겠느냐. 아마 우가놈이 소문에도 힘깨나 쓴다 하였으니, 그놈

만 잘 단속하면 될 게야. 어서 나가서 목을 지키구 섰다가, 도사공놈과 대두놈을 잡아두어

. 아예 도방에서 발을 못 붙이도록 할 테니까."

춘득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대목이 나가서 마당에 모여든 조선장이들 중에 젊고 팔팔

한 자들만을 집어내어 칠팔 명의 대오를 짜고나서 제각기 맞춤한 몽둥이들을 집어들고 동구

로 나갔다. 출항을 기다리는 사공들도 갯가에 많이 있었으나 아무래도 나중에 일을 함께 하

거나 낯익힌 자들이 있을 것이므로 내켜 하지 않을 것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춘득이는 전갈

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소세를 마치고 아침상을 받았다. 그는 내심으로 우대용을 믿음직하게

여겨왔고 경강서 보내온 일봉 서신을 받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거싱다. 춘득이는

경강을 오르내리는 도사공들이 선주의 눈을 속여서 화물을 임의 처분하거나 부당한 이를 남

겨서 취재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자기의 경험에 의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특히 도사

공들에게는 급료를 후히 내리고 선단에서 그중 충직하고 믿을 만한 자들을 지명하였던 것이

. 우대용이가 비록 경을 쳤다는 것은 소문으로 짐작하고 있었으나, 몇번의 삼남행로에서

보인 근실함이 그런 꺼림칙한 인상을 씻어주기에 족하였다. 춘득이는 도사공들이 세곡을 운

반하다가 강주인들과 짜고서 물을 먹이는 일은 길게 볼 때에 몹시 위험한 짓이라 여겨왔다.

그것은 일반 시정배를 상대로 하는 게 아니라 직접 관아에 연줄이 닿아 있는 짓이기 때문이

었다. 일반 시정아치와의 노릇이라면 나중에 술 한잔 먹고 타합도 보고 서로 이해 관계에

따라서 접고 접어주고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관이란 위법을 용허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번만 걸려든다 하여도 선주는 패가망신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경강의 강주인들은 본바닥에

있으니 재량껏 때와 경우에 따라서 위험을 미리 방지하고 모면할 길도 있었으나 배만 가지

고 위탁을 받아 운항하는 선주로서는 꼼짝없이 당 할밖에 길이 없었다. 춘득은 우대용이가

그런 분별없는 짓을 저질러 경강에서 일봉 서신이 날아들게 한 것부터가 괘씸하였다. 한번

호되게 본보기를 보이지 않고서는 다른 도사공들을 다룰 수가 없을 듯하였다. 이제 겨우 서

너 차례의 행선에 벌써부터 주인을 속이려는 자를 내버려 두어서는 안되었다. 아예 강화 바

닥에서 밥 한 끼니도 못 먹게 내쳐야만 대 선주의 위신이 서는 일이었다.

둥구 밖에 지키고 섯던 자들이 바라보니 우대용이와 대두 사내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옵니다, 와요."

"헌데... 범철이가 안 뵈는걸."

대목이 길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무대용이는 이번 출행 나가서 받아온 경강의 어음과 세

곡의 운임을 챙겨가지고, 선주에게 계고하려고 장부와 돈과 어음을 작은 피농에 간직하여

짊어지우고 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길 가운데로 대목 사내가 뛰어나오더니 다자고짜로 우대

용의 팔을 붙잡았다.

"모두 잡아라."

하는데 숨었던 조선장이들이 뛰쳐나와 대두 사내를 잡았고, 우대용이께로 두어 놈이 가세

하여 좌우 팔을 잡고 늘어졌다.

"어라... 자네들 이게 무슨 짓인가?"

우대용은 놀라서 영문을 모르는 채 손짓이 거칠어져 있는 조선장이들을 두리번거렸다.

"순순히 따라오면 몰라두 공연히 날뛰면 병신 될 줄 알아라."

우대용은 대목의 그 말에 하 어이가 없어져서 허공으로 고개를 들고 허허대며 웃을밖에 없

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잔소리 말어."

대용이는 한동안 그들이 끄는 대로 몇걸음 걷다가 양쪽에 매달린 자들을 홱 뿌리쳤다.

사람이 대번에 자빠지고 대목이 몽둥이를 쳐들었다.

", 이놈이 오히려 사람을 치는구나."

그어나 우대용이는 잽싸게 대목의 면전으로 파고들어 몽둥이를 쥔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왜 이러는지 얘기하라니까."

대용이가 틀어쥔 손에 힘을 넣어 아래로 당겼다가 그의 등뒤로 비틀어 올리니 대목은 어깨

를 움츠리고 고개를 떨구면서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거냐, 덤벼라."

몽둥이는 쥐었으나 모두들 순박한 목수들인지라 차마 사람의 몸을 후려치지는 못하고서 저

놈 저놈 하면서 움찔대는데, 대용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 자네들하구 원한 없네. 주먹다짐하기 싫으니, 우선 왜 이러는지 알아얄 게 아닌가?"

"우린들 아나, 주인 어른이 시키니까 이러는 게지."

대용은 그 말을 듣자 대목의 비틀었던 팔을 놓아주었다. 대목은 일단 뒤로 물러나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선주께서... 나를 징치하라든가?"

"화수질은 엄하게 금지되어 있잖은가."

대목은 그렇게 말해주고 나서 우대용의 몸 위에 삼밧줄을 감았다. 대용은 묵묵히 서서 제

몸이 단단히 결박되도록 내버려두었고, 대목이 등을 밀자 터벅터벅 벌채장을 향하여 올라갔

. 그들은 벌채된 나무 밑둥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공터에 와서 나무에다 대두 사내와 우

대용을 묶어놓고 춘득에게로 사람을 보내었다. 우대용이가 대목을 돌아다보며 말하였다.

"이 사람은 석서방 대신 귀선하면서 대두로 지명하였으니, 이번 일에는 아무 죄가 없네.

아주게."

"내가 그걸 어찌 알아. 선주께서 오실 테니 얘기하려무나."

대용은 혼자 생각에도 기가 막혀서 다시 허탈하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사실 구월산에서 길

산이, 대근이들과 결의를 할 적에도 갯가에 나가 배를 타며 살리라 작심하였지 세상을 등지

고 화적당이 될 뜻은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어찌하든 강화에 발을 붙여 떳떳한 선주가 되

어 평탄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까짓 매 몇대 때리고 선단에서 내몰 것이

틀림없었다. 수걱수걱 매를 맞아주고 내모는 대로 봇짐을 꾸려서 강화를 떠날 작정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춘득이가 전갈을 갔던 자를 앞세워 올라오고 있었다. 대목과 장정들은

땅에다 네귀퉁이에 말뚝을 박았다. 춘득이는 대용의 앞으로 와서 잔뜩 노려보다가 말을 걸

었다.

"세곡에 물 타는 걸 누가 가르쳐주던가. 내가 그러던가?"

우대용은 매나 몇대 맞고 말리라 하여 구구이 변명을 않고 입을 다물었다.

"몇 섬이나 내어 얼마를 받았나?"

대용이 다시 입을 다물고 섰자니 선주는 입맛을 다시면서 대목에게 눈짓하였다. 모두 우르

르 달려들어 대용을 나무에서 끌어내리고 엎드리게 한 다음에 네 귀퉁이의 말뚝에다 사지를

붙들어매었다. 우대용은 저항 없이 뼈가 없는 사람처럼 묶는 대로 팔을 내어주고 다리를 벌

려 주었다. 주인이 다시 대용의 머리 위에 쭈그려앉아서 조용하게 말하였다.

"나는 자네를 듬직하게 믿구 잇었다. 그래서 모처럼 경강 행선을 시킨 게야. 자넬 소개해준

소싯적 동무의 체면두 있구, 또 나는 남을 한번 믿으면 좀체 의심하기 싫어하는 버릇이 있

단 말일세. 그러잖아도 경강 행선은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이 많아서 자네 같은 근실한 사람

이 잘 맡아서 해줄 것으루 믿었네. 헌데 이게 뭔가... 주인과 나라의 눈을 속여서 장사치와

짜고 화수질이나 하다니. 지금이라두 안했다구 한마디만 해주면 곧 삼남 행선으루 내보내겠

."

"화수를 했습니다. 백육십 냥을 받아 선원들게 골고루 나누어주었소."

"자네는 얼마나 먹었나?"

"다섯 푼을 내어 막걸리를 사마셨지요."

"다섯 푼이라고..."

"그러면 사나이 기왕 그런 짓을 하였으니 몽땅 먹으라는 말씀이우. 아이들이 급료가 박하

여 술잔이나마 들고 싶어두 발발 떱디다. 용챗돈을 벌자는데 어찌 도사공이 눈을 부릅뜨고

말리겠소이까."

"그러면 대두란 놈이 가르쳐주던가. 자네는 경강 행선이 초행이라 물정을 모를 텐데."

"아닙니다, 내가 경강 강주인께 그런 얘기를 듣고서 승낙했지요. 대두로 나갔던 석서방은

선단에서 빠지겠답디다.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지요. 귀선할 제 내가 대두로 지명하였소이

."

선주 춘득은 잠깐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우대용을 징치하고

선단에서 몰아낸다는 것을 벌써 사공들은 휜히 알고 있을 것이며, 다시 그가 버젓한 도사공

으로 나선다면 선주 알기를 개차반으로 여길 게 분명하였다. 또한 선례를 남겨서 다른 도사

공들이 온갖 부정을 저지를 것도 막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선주는 우대용의 떳떳하고 사내

다운 처신에 마음이 동하여 그를 내몰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는 속삭였다.

"어떤가... 자네는 모르는 일이라구 하게나. 그러면 석범철이가 일을 저지르고 선단에서 내

뺐다구 할 테니까."

우대용은 엎드린 채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올시다. 주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더욱 면목이 없소이다. 귀선하면서 생각해보았지

. 강화를 떠날 작정입니다."

하고 나서 대용은 뒷전에 물러선 장정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어서 때려라. 뭣들 하구 섰니."

춘득이 팔을 들어 장정들을 말리고 나서 다시 소곤거렸다.

"한 반년만 사공으로 내게 붙어 있게. 내가 보아서 다시 도사공을 맡길 테니."

"사양하겠소이다."

춘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런가... 여하튼 그렇다면 자네를 더 이상 내 사람으로 붙들어 두진 못하겠군. 급료는

선창에서 받아가도록 허게. 그리구 오늘 안으로 강화에서 떠나게."

그는 우대용에게 물러나 대목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그리고는 매 떨어지는 소리를 등뒤로

하고서 춘득은 언덕을 내려갔다. 뭇놈이 달려들어 작대기를 내리치는데 대용은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서 매를 맞았다. 드디어 오십여 대를 맞고 나니 전신에 땀이요, 바지는 갈갈이

찢어지고 터진 살갗에서 피가 흘러 궁둥이와 허벅지에 흥건하였다. 모두들 매를 거두는데

위에서 시킨 일이라 후려치긴 하였어도,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께끄름하여서 대목이며 조선

장이들은 어색한 얼굴로 외면을 하였다.

"이젠... 다 때렸나."

고개를 들고 묻는 대용의 몸 주위에 그들이 내던진 몽둥이들이 투덕투덕 떨어졌다. 대목이

손짓하자 두엇이 남아 우대용의 결박된 사지를 말뚝에서 풀어냈고 다른 이들은 모두 시선이

라도 부딪칠까 저어하여 서둘러 내려갔다.

"걸을 수 있겠나?"

그의 겨드랑이를 껴올려주면서 한 사람이 말했고 우대용은 얼굴을 찌푸리고 간신히 일어났

.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고 걸음을 뗄 적마다 허리 아래가 흔들리는 듯하여 허벅지가 쓰라

렸다. 그는 엉거주춤 궁둥이를 빼고 걷는데 두 사람이 좌우에서 부축해주었다.

"이건 참 목불인견일세. 우리네야 예서 밥을 먹으니... 시키는 일을 마다할 수도 없구."

"놓게, 나 혼자 걸어가겠네."

대용은 고통을 참느라고 악물었던 이를 열고 훅 한숨을 토해내고 나서 꼿꼿이 펴고 걸었

. 터진 상처가 금방 부어오르기 시작하여 허벅지가 쓸릴 적마다 불에 덴 듯이 아렸다.

의 뒤로 한걸음쯤 떨어져서 남은 자들이 따라왔다. 동구 앞에 이으렀을 때,

"이보게... 갈아입구 가게."

하면서 옷보퉁이를 들고 또다른 조선장이가 쫓아왔다. 바지와 저고리 일습이었으니 아무래

도 피묻고 찢어진 옷차림으로는 안되겠어서 대용이도 말없이 보퉁이를 받아 옷을 갈아입었

. 그가 옷을 갈아입을 때, 함께 행선 나갔던 사공들이 코가 죽 빠져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다른 도사공과 대두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들은 우대용

에게 정이 있는지라 모두들 고개를 돌려 뭔가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는 양

하였고, 그중 배포 있는 자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도사공 성님, 잘 가슈."

", 수고들 허시게."

그러나 새 도사공이 그자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철썩 갈겨주었다.

"이 자식아, 왜 한눈 팔구 지랄이야. 나눠 먹은 돈푼만큼 곤장을 맞을 녀석들이."

우대용이는 그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바라보고 섰다가 저고리를 꿰었다. 따라오던 자들은

그가 선창 쪽으로 나가자 더 따라오질 않았다. 새옷에 피가 다시 배어들기 시작하였으므로

대용이는 헌옷을 북 뜯어서 궁둥이께에다 두툼하니 안을 대었다. 그까짓 매 오십 대 맞았다

고 사람이 이렇게 삭신을 못 쓰고 흐늘거려서야 될 말이냐고 대용은 다시 허리를 펴는 것이

었다. 참으로 잘 되었다. 이렇게 남의 밑에 들어 눈칫밥이나 죽이면서 대갈머리가 다 굵었으

니 역시 버릇은 못 고칠 모양이었는데, 운이 좋았다고나 할 것이다. 도대체 주인이란 돈냥이

많아 생겨난 놈이지, 내게 이리하라 저리하라 할 놈이 어디에 있다. 하나 많은 사람들과의

의리를 매로 때웠으니 이제는 나도 어지간히 사나이가 되었나 보다. 대용은 선창으로 걸어

가며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보았다. 대근이 성님이나 찾아볼까. 그러나 이런 몰골이 되어

송도로 기신기신 기어들기는 싫었다. 그는 장연서 헤어졌던 강선흥이를 떠올렸다. 자꾸만 함

께 행상을 다녀보자던 선흥의 앳된 볼따구니가 생각났다. 대용은 장연 선흥이네를 들러서

며칠 쉬었다가 함께 구월산에라도 올라가보기로 작정을 하고 보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그는 선창사공들의 흘끔거리는 눈총을 받으며 뱃방으로 절뚝절뚝 다가갔다.

뱃방은 귀선한 사공들이 밥도 붙여 먹고 잠도 자는 곳이었다. 널찍한 방들이 연이어 붙은

초가였는데 선단의 겸인이 나와서 잡무를 보고 있었다. 우대용이 찾아가자 그는 두말 없이

급료를 쌀로 내주었고 대용은 그 자리에서 다시 돈으로 바꿨다.

"어디루 가려나..."

"해서에 아는 이가 있으니, 그쪽으루 가볼까 합니다. 기간 신세가 많었수."

대용은 다시 선창으로 나왔고, 대부분의 사공들은 그를 동정하는 눈치였다. 겸인이 나가서

누군가에게 일렀는지 낯익은 사공 하나가 다가와서 말하였다.

"우리는 평양까지 오르는데 삯전 없이 타도록 허시게."

"아무려나... 가는 길에 몽금포에다 내려주면 되겠네."

"들어가서 좀 누워 있지. 선단은 오늘밤에 떠나니까."

"고마우이."

대용은 지친 몸을 이끌고 뱃방의 불이 잘 든 아랫목에 가서 엎드렸다. 온몸이 부어올라서

오싹한 한기가 들었고 식은땀이 옷을 흠뻑 적셨다. 대용은 오후 내내 깊은 잠을 잤다. 오후

부터는 한기와 식은땀은 가신 대신에 신열이 올라서 갈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저녁

해질 무렵 하여 서도행 배가 떠날 채비를 마치고 도사공이 직접 우대용을 데리러 왔건만 그

는 이미 인사불성이라 열에 뜬 입술만 달싹이며 누워있었다. 하는 수 없이 선단은 그냥 떠

나버렸다.

겸인은 아무래도 안되겠기에 선주 춘득이네로 전갈하여, 우대용이가 장독이 들어 앓고 있

으므로 강화를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렸다. 춘득이는 내심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약도 지

어오고 꿀물도 보냈다. 대용은 사실 매를 맞은 탓도 있었으나, 경강을 떠나면서부터 고뿔이

단단히 들어 몸살기가 있었는지라 엎친 데 덮친 것이었다. 꼬박 사흘을 앓고 나자 그는 간

신히 기동을 할 수가 있었다. 춘득이네서는 겉으로는 모른 척하였으나, 그가 어서 강화에서

나가기를 은근히 바라는 양이었다.

나흘이 지나서야 대용은 처음으로 아침밥 한 그릇을 너끈히 비웠고, 자꾸만 속이 헛헛하여

밥을 양푼째로 갖다 놓고 퍼먹었다. 게다가 겸인이 이별주랍시고 받아다 준 막걸리 서너 되

를 들이켰고 자기의 노자를 내어 닭도 한 마리 삶아 먹었다.

"참으로 아저씨의 후의로 객고를 면했소이다. 이놈의 팔자가 사나워서 시방은 은혜를 갚지

못하나, 언제 뵐 날이 있을 게요."

", 내야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감. 황해를 오르내리는 사공들 중에 우리 뱃방서 몸조리하구

가는 이가 얼마나 많게. 여하튼 취재앤 장사가 제일이니 아무거나 시작해서 부지런히 해보

시게. 시방 우리 선주도 예전에는 경강서 중도아 다니던 이야."

마침 해주까지 오르는 배가 있어서 우대용이는 그 배를 타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성내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인지라, 일단 용댕이서 내려가지고 옹진이나 풍천 쪽으로

오르는 배를 갈아타리라 작정하였다. 강화서 북나루로 돌아나가기까지 물살이 거센 역류인

지라 지체하였을 뿐 백석을 돌고부터는 창망한 바다였다.

우대용은 과연 자기 같은 놈이 물을 떠나서 육지에 장사를 다니며 살 수 있을까 스스로 의

심하였다. 더구나 산골짜기에 처박혀 화적이 되는 것은 워낙 성깔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

였다. 그는 너른 바다를 보자마자 온갖 원한과 고통으로 맺힌 사람의 사는 일이 일시에 풀

려버리는 것 같았다.

 

홍천수와 석범철 등은 관동 사람들게 미곡을 팔았는데 시세보다 훨씬 싸기는 하였어도 쌀

의 질이 아예 반나마 못쓸 것이고 보니, 제 가격보다는 훨씬 많이 받아냈던 셈이었다. 천수

는 다시 남문 밖 석우의 어비장네 집에 틀어박혔고, 석범철은 성대와 함께 목재를 사서 몸

소 거룻배 한 척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집에 늘어붙어 있자니 마누라는 물론이요,

아이들도 좋아서 일터까지 졸졸 따라 나서다가 석서방의 호통에 놀라 달아나는 것이었다.

성대와 석서방은 동자머리에서 하루 종일 망치질과 대패질을 하면서 날을 보내었다. 이제

배가 다 되면 그들은 경기 인근의 촌으로 다니며 반찬거리나 방물이나 엿 같은 주전부리를

싣고 다니며 아낙네들에게서 쌀을 거둬다 경강의 소매가게에 먹일 작정이었다. 그렇게 허리

끈 졸라매고 두어 해 하다보면 밑천도 늘 것이고 어엿한 미곡상을 이룰 듯하였다. 쌀을 팔

고 나서 한 닷새나 되었을까. 그날도 석서방과 박성대는 동자머리 조선장에다가 말을 건네

게 되었는데 이자가 그러는 것이었다.

"서강서는 법석이더구만."

", 또 쌈나서 누가 뒈졌나?"

"그런 게 아니라... 며칠 전부터 서강 일대에 화수 담근 쌀이 돌아서 성내의 소상들이 몰려

들어 따진다네. 개중에는 아마 바꿔간 사람두 많지마는, 두어 말이나 한 섬지기루 들여갔던

사람들은 뭐 안면이 있는가 당이 있는가. 그래서 아낙네들이 성내 미전에 한둘씩 모여들어

악다구니를 쓴다네."

성대와 석서방은 어랍쇼 하는 눈으로 서로 흠칫하여 마주보았다.

"오늘 가봤더니 몇몇 가게는 벌써 문 닫아 걸구 자취가 없는 게여."

"... 또 포교들 살 판이 났구먼."

고작 그렇게 중얼거린 석서방은 이내 대패질이 서툴러져서 관솔자리에 딱 걸려 손을 놓치

고 말았다. 동네 사람이 가버린 뒤에 박성대가 도구를 챙기면서 말하였다.

"아무래두 심상치 않은 듯허니, 내가 서강으루 건너가봐야겠군."

", 물먹인 놈들이 비단 우리뿐인가. 가끔씩 그런 쌀이 성내루 퍼지는 때가 있지. 우리네

야 늘 하던 대루 지방 장사치께 먹였는데 벌써 강원도 어딘가에 짐을 풀었을 게야."

"혹시 또 아는가. 지금 소란을 일으킨 쌀이 바루 우리 것인지 모르지. 아니면 그만 다행한

일이 없지마는, 만에 하나라두 우리 것이면 모두 목에 칼쓰고 남도나 북관 천리루 끌려갈

판이야. 종형두 갈 테여?"

"온 별 할 일두 없는 모양일세. 네나 가보아라. 나는 들어가기 전에 주낙이나 놓고 반찬거

리라두 건져 가야겠다."

박성대는 물에다 손을 씻고 바지춤에 훔치면서 물가로 나아갔다. 그는 아무래도 뭔가 심상

치 않은 느낌이었다. 처음에 거래를 할 적에도 관동서 왔다는 자들이 담뱃짐을 싣고 왔다고

하였으며 물건은 어디 있는지 자취도 없고 오히려 물건으로 맞바꾸려 할 터인데 유독 자기

네 미곡을 골라서 현금을 내고 사가는 것이 못내 의심스러웠었다. 그는 홍천수에게 미심쩍

은 의사를 밝혔으나 천수는 터럭만큼의 의심도 없이 껄걸 웃어대며 성대의 조바심을 놀려대

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는 말썽이 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드디어 걱정거리가 눈앞에 다가

온 것이라고 대뜸 느낄 수 있었다. 성대는 조바심을 치면서 서강으로 건너갔다. 서강에서 배

오개로 나가는 길목에는 삼남을 거쳐서 올라온 곡물과 갖가지 과물 등속이 멍석이나 거적대

기마다 가득히 쌓여 있었고 미전 쪽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다투고 있는 게 보였다.

성대는 슬그머니 구경꾼들 틈을 헤치고 소란스런 미전 앞으로 뚫고 들어갔다. 인근 소매상

인들이 팔뚝을 부르걷고 닫혀 있는 가게의 덧문을 발길로 차며 떠들어댔다.

"아니! 언놈들은 쥐새끼처럼 미리 빼어 처먹구, 어떤 놈들은 쓸개가 없어서 싹을 낼 쌀로

낭패를 당허는가."

"우리가 동네에서 받으 수모루 치면 조상 욕까지 먹어가며 내쫓기게 되었구먼. 안 그런가,

사람 먹는 것으루 그따위 짓을 하구선 봉패는 우리가 당하란 말이지."

"끌어내. 끌어내다가 치도곤이를 앵겨서 포도청으루 끌구 가야 한다."

"끌구 가구 말구가 없네. 아예 우리 손으로 저자에서 목을 쳐야 허네. 하늘에서 낸 곡식으

루 도적질하는 놈들인데 날벼락을 맞아 급사를 해두 오히려 남지."

"부숴버려라."

"그리구 돈을 물어내라구 해라."

"내는 돈이구 뭐구 다 쓸데없네. 그저 모가지를 홱 비틀어버려야지."

"여보슈, 찬찬히 따져보구 어떤 놈들이 물먹인 쌀을 서강에다 풀었는지 장본인을 찾아냅시

."

", 여기 군자 났네. 군자 났어. 당신이나 천천히 따지구 앉아 있으슈. 우리는 전의 주인놈

을 잡아다 주리를 틀 테니."

아낙네들도 떠들었고, 다른 상인들은 티가 저희께로 날아들까 하여 슬슬 외면들이나 하였

, 몇몇 소매상인들은 드디어 내려진 덧문을 발길로 내지르다가, 어디서 주워왔는지 도끼를

가져다가 아래 걸린 꺽쇠를 쾅쾅 빠개고 있었다. 꺽쇠가 빠져나오자 덧문을 들치고 들어가

닥치는 대로 가겟방이며 안채를 휘젓더니 드디어 안방 깊숙이 앉아서 달싹거리고 있던 중도

전 주인의 멱살을 잡고 장바닥으로 끌어냈다. 성대가 바라보니 아직은 그것이 자기네와 거

래했던 자가 분명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미곡을 산 자들이 서강에 풀

었더라도 어차피 그들은 중도아들일 테니 성대가 얼굴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이놈, 어서 그 쌀이 어디서 들어왔는지 말 안할 테여?"

"미안허우, 우리네야 그저 습관대루 배에서 내려진 쌀을 넘겨받구 팔았는데 어찌 안단 말

이우."

", 이놈이 아직두 따끔한 맛을 못 봤구나."

하더니 그중 기가 오른 자가 댓바람에 주먹을 쥐어 볼따구니를 호되게 후려치니 코피가 터

져버렸다. 흰 저고리 앞섶에 흘러내리는 피를 보자 사람들은 흥분하여 여기저기서 욕지거리

를 하며 상인을 차고 때리고 하였다. 집안에서 아낙네와 노인이 나오더니 뭐라고 악을 쓰면

서 사람들을 말렸다.

"우리께 쌀을 넘긴 이가 동막에 있단 말예요. 동막에 가서 알아보면 될 게 아네요. 우리두

욕을 본 사람이란 말예요. 왜 생사람을 패구 야단이에요."

"뭐라구... 동막에 누구요?"

"동막에 가서 칠패서 나온 중도아들을 찾아보란 말예요."

"가만있어... 우리 쌀은 다 못쓸 것이니, 여기 쌓인 것으루 나누어 내가야겠수. 자 들어냅시

."

상인들은 제각기 안으로 몰려들어가 쌀섬을 끌어내고, 분주하게 퍼내어 흩어지기 시작하였

. 동막으로 몰려가기 위하여 물가로 내려가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리에

섞여서 쌀을 퍼내가느라고 수라장이었다. 박성대는 드디어 이 소란이 그냥 흐지부지할 것

같지가 않았고 조급한 마음이 되어 인파를 헤치고 물가로 뛰어내려갔다. 성대는 우선 석범

철에게 목격한 일을 얘기해주고 나서 홍천수를 찾을 작정이었다. 성대가 밤섬으로 건너가

석서방의 집으로 찾아가니, 그의 처가 저녁을 짓느라고 연기가 가득 찬 부엌에서 눈물을 줄

줄 흘리면서 밖으로 나왔다.

"아주머니, 큰일이 났습니다. 종형 안 들어왔습니까?"

", 아침에 일하러 나갔는데, 동자머리에 없던가요?"

"종형 들어오면 천수를 꼭 찾아보라구 전갈해주십시오."

성대는 동자머리로 나가서 석서방을 찾았으나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아마도 주낙

배를 끌고 선유봉 근처로 나간 모양이었다. 그는 더 꾸물거리지 않고서 동막으로 나가는 거

룻배를 탔다. 동막에서는 서강에서 두셋씩 무리를 지어 몰려든 상인들이 칠패의 중도아들을

찾느라고 째보네 술청 안으로 몰려들어가 법석중이었다. 성대는 슬며시 끼여들어 째보를 찾

았다. 그는 워낙에 수많은 사람들의 물음에 답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성대가 칠패 사람 하

나를 발견하고 슬그머니 팔을 잡아끄니 그는 술청 안을 빠져나가려다 흠칫 놀라는 시늉이었

.

"어이... 홍천수 못 봤나?"

"난 또 누구라구. 그나저나 이게 보통 일이 아닐세. 아마... 물주를 잡아내기 전까지는 조용

하지 않을 게여. 천수야 시방 석우에서 비장의 계집을 끼구 자빠져 있을 텐데. 소문에 듣자

허니, 천수가 관동놈들하구 화수먹은 미곡을 팔아먹었다면서?"

"그런 소문이 났는가?"

"허허... 소문이 났을 정도가 아니라니까. 동막에서는 언제부터 소문이 났다구. 천수가 일흔

다섯 섬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사실은 썩은 쌀이라구 알려져 있었단 말일세. 그러니 관동 장

사치라는 것두 실은 누군가 씌우려구 구렁을 판 놈들이란 말야. 중도아들 몇과 짜구서 서강

에서 시전까지 풀어버렸을걸. 제정신이 있는 놈들이라면 그럴 리가 없지."

역시 칠패 중도아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성대는 드디어 걱정하던 대로 자기네가 꾀였

다는 것을 알았다. 중도아가 말하였다.

"자네들 혹시 누구한테 해코지한 적이 없는가?"

"뭐 장사하다 보면 어디 곧이곧대루 할수만 있나. 가끔은 씌우기도하구, 어쩌다 속일 적두

있지."

"그럴 게야. 잘 생각해보게나. 누군가 일부러 중도아들을 내세워서 일을 꾸몄을 테니. 아마

두 지금쯤은 서강에서 시정배들이 싸전을 들쑤셔놓은 소동을 포도청에서 알구 있을 게여.

어서 천수한테두 알리구... 하여튼 몇 달가나 경강 어름에 나타나지 말라게."

"가만있어... 천수한테 우선 알려야겠는걸. 그자만 잡히지 않으면 우리까지는 모를 테니까.

홍천수가 나서서 거래를 했으니 제일 먼저 그 사람을 잡으려 들 게란 말이야."

성대는 일단 석서방에게는 알려두었으므로 석우의 어비장네를 찾아가 어서 피하라고 알려

줄 셈이었다.

홍천수는 역시 어비장네 안방 깊숙한 데서 푹 잠겨 있었다. 비장의 게집은 천수가 한번 나

가면 도통 돌아오지 않으니 아예 안방에다 붙들어두고 출타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단속을 하

고 있었다. 천수도 기왕지사 단꿀에 젖었는지라 구태여 밖에 나올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나이가 계집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것은 마치 게를 주워 먹으러 갯가로 나온 여우처럼 되는

법이다. 게를 잡노라고 갯벌 가녘에서 차츰 바다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앞발이 빠지고 이어

서 앞발을 빼려고 힘을 주는 사이에 뒷발이 빠진다. 그런 김에 게나 먹자고 구멍을 주둥이

로 쑤셔대는 동안에 사지가 스물스물 갯벌 속에 틀어박히고 드디어 밀물이 들어오는 것이

. 그때에는 아무리 목놓아 산을 불러보아야 옴쭉달싹을 못하게 된 뒤이다. 해변가에서 여

우가 꼼짝 못하고 빠져 죽는 일이 흔한데, 과한 외입장이들이 모두 그런 형국인 셈이었다.

어비장의 처가 나이 스물일곱에 빼어난 미모인데다, 또한 수완과 솜씨가 뛰어나서 재물도

모았고 제 남편을 평안감사 수하로 들여 출세시키기까지 하였다. 워낙에 비장 별감배의 처

라는 것이 또한 화냥기 있기로는 장안에서 알려진 사실이니 모두들 혼자 있는 그 여인을 호

시탐탐하였으나 운좋게 들어앉은 것은 홍천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도둑질 외입이라 그의 동

무들은 모두 저러다 큰코 다치리라고 씩둑싹둑해오던 터였다.

홍천수가 위인이 꾀도 있고 장사수완도 남 못지않은데다 시정 무뢰배 중에 제법 주먹도 쓴

다 하였으니, 가히 비장 처의 샛서방으로서는 제격이었다. 일찍이 그가 칠패에서 어비장 처

의 소문을 듣고 미리 알았으며 직접 하녀를 데리고 어물을 사러 장바닥에 나온 그 여인을

보고는 그만 내심으로 작정해둔 바가 있었다.

"그 마누라님 어디 사시온지 여쭈어라."

"장사하는 이가, 어찌 여염 아낙네의 집을 묻는가고 여쭈어라."

"좋은 비웃이 있어 헐케 갖다 드리려 한다 여쭈어라."

그렇다면 석우 당고개 삼거리에 오셔서 어비장네를 찾으시면 된다여쭙지.

이런 수작들이 대강 오간뒤에 홍천수는 단김에 뽑는 쇠뿔이라고 비웃을 살집 좋은 놈으로

꿰어 들고 저녁때 당고개 삼거리에 출도를 했던 것이다. 어비장 처가 혼자 있다는 것은 장

바닥에 나와 쏘다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거니와, 수작을 나눌 때 눈을 모로 떠서

살짝 눈웃음을 던지는 시늉부터가 헤프기 짝이 없었다. 칠패 어사또 홍천수가 그런 기미를

놓칠 리가 없어, 그날따라 장사 일찌감치 때려치우고 화주 두어 병으로 색정을 달래놓고는

어비장네를 찾았던 것이었다. 설마 언놈이 먼저 침을 발라 지금쯤 끼구 자빠져 있는 것은

아니렷다 하고는 제법 목청을 가다듬어 호기있게 불러대었다.

이리 오너라!

뉘시오니까?

갓 올라온 비웃드렁이 있어서 가져온 칠패 사람이라 여쭈어라.

사방이 어두워 캄캄한데 부녀자만 있는 집안에 들일 구 없으니 내일 오시라고 여쭈오.

하면... 대문을 조금만 열고 이것이나 받아 들여가거라.

하녀의 삐죽이 내밀어진 손에 비웃두름을 넘겨주고 나서 홍천수는 이제 첫걸음은 뗀 셈이

라 여기며, 내일을 염두해 두고 돌아섰었다. 그러는데 저녁 첫술이 깨는 중이라 으스스해지

면서 소피가 몹시 마려웠던 것을 깨달았다.

천수는 대문 옆에서 몇발짝 걷다가 돌아선 채로 그 집의 바깥벽에다 물건을 들이대고 오줌

을 내갈겼다. 역시 한창때이고 워낙 오줌을 참았던 판이라 오줌발이 드세어 싯 쏵 하고는

후두둑거리며 담벽에 튀는데, 마치 오뉴월 삼복에 한줄금 비껴가는 왕소나기 쏟아지는 양하

였다. 그리고는 그 물건을 목탁 치듯이 털털 털고 나서 흠칫 몸서리를 치고는 소중히 고의

춤에 쑤셔넣었다.

천려일실, 칠패 어사 홍천수도 바로 그 짓이 적장의 목을 뎅강 날리게 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의 바로 등뒤로 대문이 다시 열리며 하녀가 급히 찾는 것이었다.

잠깐 들어오시랍니다.

홍천수는 까닭을 몰라 멍청히 섰다가 허 참 고개를 갸웃해보고 나서 중문간으로 어정어정

들어섰던 것이다. 실은 어비장댁으로서도 첫걸음에 찾아온 외간 남자를 덥석 들여놓을 수는

없어서 한 두어 번쯤 내퉁겨보리라 작정하고는 그대로 돌려보냈던 터인데 바로 들창문 바깥

에서 사내의 기침소리와 꾸물럭대는 기척이 들렸다. 어디 이사내의 짓거리나 보아두자고 살

그머니 고개를 들어 내다보는데, 바로 코밑에 길쯤한 육근이 서 있고 거기에다 세찬 오줌발

이 벽을 두드리는데, 마치 돌을 뚫는 듯하여 침을 삼키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지 않을 도

리가 없었다. 음욕을 이기지 못한 비장댁이 마루로 뛰쳐나가 하녀에게 급히 일렀고, 하녀는

그 속을 몰라 쫑알거리면서 대문을 열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천수는 의외에도 월장의 정을

나누게 되었다 싶어 성큼성큼 마당으로 들어섰다. 예전에 홍의에 초립 쓰고 다닐 때는 색주

가마다 그의 단골 창기들이 있어서, 뒤를 보아주고 공술에 공짜 외입까지 다니던 이력이 있

는지라 아무리 여염 여인이건만 그 여자를 대함에 기탄이 없었다.

허허허, 맨손인줄 알구 방한하더니 비웃을 보구 나서 마음이 변했소이까?

저 그게 아니라...

하면서 비장댁은 안방 쪽을 손가락질하여 보이는 것이었다.

족제비만한 쥐가 다락에 있어서...

쥐를 잡아달라는 게요?

그저 쫓아만 주셔요.

, 대장부 신세가 갑자기 고양이루 둔갑을 하는구먼.

천수가 미투리 벗어 던지고 마루로 올라서서 뭣 손에 걸리는 게 없는가 두리번거리더니 비

장댁이 대뜸 다듬이방망이를 쥐여주는 것이었다. 천수는 마치 그 방 임자나 뒤듯이 기침을

하고 나서 미닫이를 쓱 열었다. 그 사이에 비장댁이 하녀에게 이르는 소리가 등 너머로 들

려 왔었다.

, 너는 팥죽이나 사먹구 오렴.

이악스런 하녀가 눈치를 채고 배시시 웃으면서 나간 뒤에 비장댁은 몸소 대문 빗장을 걸고

쇳대까지 끼워 단단히 문단속을 해두는 눈치였다. 철퇴로 쳐도 삽시에 부서지진 않을 듯하

였다. 비장댁이 들어서니 천수는 다락문을 열고 기웃거리다가,

쥐가 어디에 있단 말이우?

넌지시 능청을 떨었고 비장댁 역시,

제가 올라가서 들쑤실 테니까 아래서 잡으셔요.

하며 암내를 풍기는데 어느결에 눈자위가 불그족족해졌고 숨소리가 커져서, 장안 외입쟁이

홍천수는 이건 뜻밖에도 건드리면 곧 터질 물꼬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덥석 손

을 잡아 쥐거나 우악스레 껴안는 것은 비례일뿐더러 구름과 비의 즐거움을 모르는 풋고추

동자의 소행일지니 홍천수는 꽁무니에 바짝 힘을 주며 억지로 참았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음행을 벌이기가지는 그 음기를 더욱 독하고 진하게 올려놓아야 되었다. 비장댁이 다락에

올라서서 상반신을 들여놓고 장목비를 거꾸로 쥐고 새된 소리로 쉿쉿 하며 이리저리 쑤시는

체를 하였다.

어디... 나갈 데가 없으니 나두 해볼까.

천수도 곁에 나란히 올라 한 손에 쥔 방망이로 쿵쿵 찧어보면서 몸을 슬그머니 비장댁에게

갖다 대었다. 비장댁이 저도 은근히 밀면서 허벅지를 대어주는데 곧 살이 더워지기 시작하

였다. 천수가 다른 손으로 다락턱을 받치는 듯하여 여자의 아랫배께에 손등을 대어보니 오

르락내리락은 고사하고 숫제 베틀에 바디가 왈가닥달가닥하는 것만 같았다. 몸에 불이 난

여자가 사뭇 풀린 눈길을 들어 원방스러이 흘기며 암팡지게 내쏘았다.

이이는 소피는 제법 장히 보시면서 쥐두 못 잡네.

천수가 속으로는 네 요년 한번 겪어보아라 하면서도 부러 계집의 음기를 돋우느라고,

아무래두 저기 고미다락 끝에 틀어박혀 숨은 모양이니 올라가봅시다.

하고는 방망이를 들고서 턱을 넘어 올라가버리니 이런 벽창호가 없을 것이었다. 고미다락

구석으로 올라간 천수가 슬쩍 눈치를 보니 비장댁은 독기가 오르 대로 올라서 쌔근거리고

있었다.

어두운 데서 뭘 잡는 다구 그래요.

쥐가 원래 구석을 좋아한단 말이우...

하는 수없이 여자가 따라서 올라왔고 천수가 느닷없이 손가락질하면서

쥐 봐라 쥐!

하니까 비장댁은 에그머니 소스라치며 천수가 가리킨 아랫도리께를 움츠리고 그에게 달려들

었다. 다락에서 떨어지는 케케묵은 먼지가 부엌에 가득 찰 것이었다.

아이, 무서워라.

비장댁은 아랫배를 더욱더 천수에게로 찰싹 붙여왔고 천수는 끄응하면서 계집의 허리를 죄

어 안았다.

쥐가 그 사타리 사이루 들어간 모양일세.

에그... 난 몰라.

천수의 농지거리를 받으면서 비장댁이 다리를 꼬아 천수를 죄면서 앙탈을 하였다. 천수가

계집의 치마를 걷어올리고 속곳을 푸는데 일변 끄르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주무르니 벌써

비장댁은 열이 올라 인사불성이었다. 계집이 천수의 목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어서... 잡아줘요.

천수는 드디어 제 몸을 넣었다. 장안의 이름난 건달 외입쟁이와 남편을 변방에 보내고 주

려왔던 음녀가 합환하였으니 세상에 그런 야단이 없었다. 다락의 나무판자는 끊임없이 출렁

거리고 삐걱거렸는데 드디어 진동 때문이었는지 부엌에서 뭔가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 나는 모양이었다.

아이구 이놈의 쥐, 깊게두 들어갔구나.

어서... 잡아... 줘요.

천수가 쉽사리 계집을 달착지근하게 해주지 않고서 슬슬 놀다가는 쉬고 다시 놀고 여유를

작작하니 비장댁은 드디어 숨이 턱에 닿아서 천수의 어깨를 잡고 흔들더니 인정 사정 없이

덥석 깨물었다. 천수가 비명을 내지를 일이언만, 이런 때에야 어디 팔이나 다리 하나를 떼어

간들 알기나 하랴. 구워 먹든 지져 먹든 놀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음사가 한바탕 흐드러지

게 치러진 뒤에 계짐은 눈을 감고 아직도 비몽사몽지간을 헤매고, 천수는 슬슬 바지를 추스

려 입고서 다락을 내려왔다. 음사 한 번에 만족할 천수도 아니고 보면, 조금 두었다가 낭심

아래 뻐근한 기가 가셔진 다음에 다시 어우러질 수는 있으나, 원래가 꿀이란 많이 먹으면

독약이라. 오늘은 이만 아껴두고 며칠 뒤 다시 와서 첫술 뜨는 기분으로 다시 놀기로 작심

하였으니, 아마 월장의 정도 매 처음 입맛이 으뜸일 것이었다. 입맛 잃지 않고 두고두고 한

술씩 떠먹으려는 천수의 속셈을 계집이 알 리가 없었다. 천수가 쓰다 달다 말이 없이 슬그

머니 안방 미닫이를 여는데 다락에서 그제야 정신을 수습하고 내다보던 비장댁이 소리를 꽥

질렀다.

어디 가요?

집에 가네. 왜 더 남았어?

아니 저이가...

천수가 마당으로 내려서서 미투리를 꿰는 참인데 치마를 대강 궁둥이에 걸친 비장댁이 버

선발로 내달아나왔다. 돌아선 천수의 허리를 잡은 여자가 다시 손을 넣어 그의 아랫도리를

꼭 움켜잡았다. 천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차마 붙잡을 수는 없으니, 이거라두 떼어놓구 가요.

천수는 못 이기는 체하고 다시 비장댁에게 끌려들어갔다. 그 뒤로 천생 음골인 홍천수는

석서방과 더불어 경강에 나갔을 때 사흘간을 빼놓고는 거의 날마다 여념이 없었다. 그날따

라 홍천수는 초저녁부터 바깥 나들이가 하고 싶어서 안달을 했던 것이었다.

내 의관 좀 내주어.

뭐할려구요, 어딜 나가신다구 그래요.

칠패에나 좀 나가볼까 하구...

계집은 입을 비쭉거렸다.

, 술 잡술라우. 술이라면 탁주에 약주에 화주에 감흥로 계당주, 시키는 대로 받아올 수

있어요.

누가 술 먹는댔어?

그럼 노름이오... 가보잡기 하리까 오방때리기 할까요, 주사위를 놀까요. 쌍륙의 틀이 있으

니 제가 상대해드립지요. 뭣하러 하릴없이 칠패에 나간다우?

천수는 할 말이 없었다.

제미 이건 뭐... 사내자식이 아예 옥에 갇힌 죄인 노릇두 아니구, 의관 안 내줄 테여?

못 내드려요. 또 어디 가서 어떤 계집이나 건드리려구... 얘야, 쌍륙틀이나 들여와라.

홍천수는 입맛을 다시며 도로 주저앉았다.

원 밝히기는 되우 밝히네. 아예 이러질 말구 방물전에 가서 각신이나 하나 참한 걸루 사다

놓구 꽂아놓구 앉아 지내지. 이거야 원 생사람이 좀이 쑤셔서 죽겠구먼.

밖에 나다녀봤자 다 그게 그겁니다. 당신은 내가 없으면 벌써 대꼬챙이가 됐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란 말예요? 그렇게 계집이라면 눈에 불을 켜구 달려드는 분인데, 창기방에 가봐요.

먹지 돈 털리지 탕정하지, 그렇다구 이건 아침에 술국을 끓여주나 꿀물을 타주나, 빼앗기느

니 양기뿐인데 배리배리 말라비틀어지겠지.

에이, 나로 말하면 칠패에서도 소문난 완력인데 임자를 만나서 이젠 근기를 모두 빨리었네.

하다가 홍천수는 자지러졌다. 비장댁이 홍천수의 넓적다리를 꼬집어 비틀었기 때문이었다.

, 근력 없다는 이가 대낮에두 두어 차례씩 속곳을 벗겨요?

비장댁은 갸름하고 해사한 얼굴에 음탕한 홍조를 띄웠다. 눈자위의 푸르스름한 그늘도 그

런 때는 발그레해지는 성싶었다. 허리는 잘록하고 궁둥이는 짝 벌어졌는데 앙탈을 부릴 제

면 그 아랫도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감창소리로 친다 하면 모기의 날갯짓에서

시작하여 암소가 배앓는 소리로까지 소란해지는 것이다. 특히 막판에 지르는 소리는 연신

에고지고였다. 요분질로 볼작시면 좌우로 궁둥이를 흔들다가 나중에는 맷돌이 돌아가듯 돌

고는 이어서 등이 삿갓반자처럼 휘어지며 사뭇 버나를 돌리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힘이 빠

져 일시에 와드르르 무너지고는 살살 흔들어대는 요분질로 바뀌었다. 어쨌든 홍천수는 장안

에서 숱한 계집들을 겪어보았으되, 비장댁과 같은 골수의 음녀를 만나지 못하였었다. 하녀가

쌍륙판을 들여다 주었고 절편 등속의 주전부리도 내왔다. 그들은 마주 앉아서 말을 판에다

늘어놓고 주사위를 던지기 시작하였다. 초저녁이 그렇게 해서 지나가고 드디어 비장댁이 천

수의 다리께를 살살 어루만지면서 흥흥거렸다.

뭐야... 또 쥐 잡아달라구?

아랫목에는 노상 이불이 깔려 있었으니 그대로 붙안고 들어가면 되는 판이었다. 벌써 비장

댁은 아래위 홀딱 벗어버리고 이불 안에 들어갔고 홍천수도 지겨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

었으나 마다하는 성미는 아니었으므로 따라 들어갔다.

박성대가 좋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당고개를 넘어 석우에 이르렀을 때는 바로 두 연놈이

환합으로 이미 이승을 떠나 있던 참이었다. 그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니 하녀가 빗장도 지

른 채로 문 안에서 목소리로 만 물어왔다.

"누굴 찾으시나요?"

"이 댁에 홍서방이 계시느냐?"

"안 계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여주인이 이르기를 서방님의 동무 되는 어른이란 거의 모두가 저자바

닥의 왈짜 무뢰배들이니 아예 문간에도 들이지 말고 쫓아 보내라던 것이었다.

"여기 있는 줄을 번연히 알구 왔는데 없다니, 그 무슨 말인고."

"안 계시다니까요. 여주인 홀로 있는 집에 외간 남자가 올 까닭이 없잖아요."

성대는 그렇지 않아도 다리를 절뚝이며 십 리쯤 되는 길을 왔는지라 순간 화가 치밀어 대

문을 내차고 말았다.

", 아무리 양물이 좋다 하나 환난이 코앞에 있는데 사내를 끼고 도는 계집이 어디 있다

드냐."

"애걔걔, 어떤 상놈이 남의 문전에 와서 해괴망측한 소리를 다 하네. 부녀자들끼리 빈집을

지킨다손 어디 와서 행패야. 당장 순라를 불러 포청에 떨어뜨릴 테야."

박성대는 침을 탁 뱉으며 돌아섰다.

"뒈지든 말든 나두 모르겠다. 그 양물이 썩어져서 개미밥이 될 테니 두고 보라지."

성대는 못내 화가 식질 않아서 다시 동막 쪽으로 투덜거리며 돌아가다가 탄식하였다.

"천수는 인제 장하에 죽는 몸이로구나!"

그는 일단 서강의 모신이네로 가서 석서방과 만나 잠시 몸을 피할 의논을 하기로 작정하였

.

자정이 훨씬 넘어서 홍천수는 벌거벗은 채로 비장댁을 끼고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사방

이 괴괴한데 그 집 밖에는 네댓 명의 포졸과 포교가 서성거렸다.

"대문을 두드려볼까요."

포졸 하나가 포교에게 속삭였으나 그는 말렸다.

"아니다, 이곳 지리에 밝은 놈이니 분명히 담이나 지붕을 타고 달아날 것이다. 너희들이 뒤

꼍으로 해서 마당에 들어선 뒤에 내가 들창문을 부시구 뛰어든다."

포교가 지시하여 두어 사람이 담을 따라서 돌아 나갔고 하나는 대문 앞에 섰다. 포교가 손

짓을 하니 대문에 섰던 자가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천수는 어렴풋이 잠을

깼고 비장댁은 불안하여 일어나 앉으며 이불로 가슴께를 감쌌다. 여자가 건넌방의 하녀에게,

"... 누가 왔나부다."

할 때 천수도 눈을 멀거니 뜨고 일어났다. 두 연놈이 모두 사통을 한 죄가 있는지라 아닌

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크게 뜨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천수가 벌거숭이로 빠져

나가 우선 바지부터 황급히 꿰면서 물었다.

"혹시 관서에서 임자 서방이 온 게 아닐까?"

문 두드리는 소리는 아주 당당하였다. 건넌방에서 하녀가 나가는 기척이 들려왔다. 잠시 후

에 문간에서 하녀가 말하였다.

"누구셔요?"

"어서 대문을 열어라. 관에서 나왔다."

"무슨 일루 그러셔요. 여긴 여자뿐이에요."

"시끄럽다, 어서 열지 안흥면 부시구 들어간다."

그 소리에 홍천수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자기를 잡으러 온 것 같지는 않았으나 뭔가 이

집에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임자네 서방이 무슨 일을 저지른 모양일세."

오히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천수는 다락으로 기어올라갔다. 집뒤짐 할 때 걸린다 한들 그

런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대문이 열리고 포졸들이 들어섰고 그는 불문곡직 안방 미닫이

를 벌컥 열었다.

"홍천수 어디 갔느냐?"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발발 떠는 비장댁에게 육모방망이를 쳐들면서 포졸이 말하였다.

"저어... 그런... 사람이 우리 집에 왜 오겠어요."

포졸이 다시 문지방을 밟고 지켜 선 채로 뒷담 쪽에 숨어 있는 포졸들을 불렀다.

"어이, 코 떨어졌다."

하자 포졸 두 사람이 담을 넘어 들어왔다. 범인이 꼼짝없이 잡히게 되었음을 이르는 말이었

. 포졸은 안방에 들어서자마자 방에 널려진 홍천수의 저고리를 보았고 다락을 주의 깊게

살펴두었던 것이다. 포졸 하나가 들창에다 대고 부엉부엉 하고 암호를 말하였다. 포교는 다

시 지키던 곳을 버리고 대문으로 돌아 들어왔다. 포졸들이 육모방망이를 치켜들고 다락문을

열었다.

"그 안에 있는 줄을 다 아니, 순순히 나와서 포승을 받아라."

천수는 고미다락 끝에 웅크리고서 포졸들이 어째서 자기를 잡으려는가를 잠깐 생각하여보

았다. 천수가 뒤늦게 화수를 먹인 쌀을 관동 사람이라 자칭하는 이들에게 팔아 넘겼던 일을

떠올리고, 제 이마를 쳤을 적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천수는 부엌 바로 위에 있는 다락의 창

을 열었다. 마당으로 뛰어내려 담을 넘어갈 작정이었다.

"못 나오겠느냐."

어쩌고 하면서 포졸의 검은 몸집이 다락으로 올라섰고, 천수는 다락의 창에서 거의 거꾸로

떨어지듯 하였다. 이제 성큼 일어나 마당을 가로 건너지르는데,

"끼놈, 어딜 달아나느냐."

버럭 소리치며 천수의 등뒤로 포교가 달려들었다. 그는 미처 뒤 돌아볼 틈도 ㅇ벗이 포교가

휘두르는 쇠도리깨에 어깻죽지를 되우 얻어맞았다.

"어이쿠..."

천수가 휘청하면서 한 손으로 어깨를 만지며 주저앉았다. 마당으로 우르르 몰려내려온 포

졸들이 그를 에워싸고 오라를 지었다.

"단단히 모양을 내어라."

그들은 천수의 팔을 뒤로 돌리고 두 손목과 팔뚝을 몇번이나 돌려 감고 묶었다. 포졸 하나

가 허리춤에서 종이광대를 내어 천수의 머리에 씌우려 하였다. 삼첩지로 만든 커다란 봉지

에다 두 눈이 닿을 만큼 구멍을 뚫은 것이다. 천수가 한숨을 푹 쉬면서 그들을 올려다 보고

말하였다.

"헌데... 무슨 죄루 이러는지 이유나 알려주오."

", 그놈 죽을죄를 저지르고 도리어 우리에게 묻는고나."

"이놈아, 유부녀와 사통하구 다니는 죄만 하여도 본부가 등시포착이면 박살당할 죄이다."

포졸들이 제각기 지껄였다. 그들은 저녁 내내 칠패에서 홍천수를 수소문하여 다니면서 이

미 그의 근황을 소상히 알아내었던 것이었다. 강주인이 투서할 때 제일 먼저 찍은 것이 칠

패 김포교와 홍천수였으니 강화 춘득선단의 도사공과 대두는 그 다음 문제였다.

"종이광대를 얼른 씌워라."

천수는 아직도 긴가민가하여 되물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봤수. 하도 죄가 많아 그러니 잡혀가는 이유나 알자는 말씀이우."

"화수 먹인 쌀을 팔아 처먹고도 그리 뻔뻔할 수가 있느냐. 이놈아, 시방 동막에서는 집을

부수고 사람을 상해한 소동이 일어났다. 이제 잡혀가면 알 일이지만, 경강 무뢰배를 모두 쓸

어버리라는 대장의 분부가 내렸다."

", 누가 발고했는가요?"

"누군 누구야, 중도아들이 들구 나섰지. 그자들두 너희께 속아서 쌀을 냈다가 소상들과 성

내 사람들이 몰려들어 봉변을 당하였다.."

"우리는 관동 사람들게 팔았는데..."

포교는 짐작이 있어서 껄걸 웃었다.

"저고리나 입혀줘야지, 이거 반벌거숭일세."

포졸이 천수의 저고리를 가져다가 결박된 몸 위에 그냥 얹어주고 머리에 종이 광대를 씌워

버렸다. 뒤늦게야 정신이 들었던 비장댁이 뚜쳐나와 포교의 옷자락을 잡고 애걸하였다.

"나으리, 돈이든 피륙이든 제게 있으니 한번만 살펴보아주십시오."

포교는 계집의 탯거리를 흝어보며 은근히 마음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네 이 고얀 년, 외간 남자와 사통하였으니 상풍 음녀로 사헌부에 발고해야겠다. 게다가 죄

인을 숨겨주기까지 하였으니 입이 아래위 두 개로는 발명할 길이 없으렷다."

"죽여주오."

비장댁이 뒤를 핼끔하였더니 하녀가 전대에 돈꿰미를 넣어 뭉쳐가지고 포졸 한 삶에게 떠

맡기는 것이었다.

"이거 왜 이러지..."

"그저 살려줍시오. 남의 눈이 있어 전옥서 근처에 얼씬도 못할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해줍

시오."

압송할 때 치사를 드리는 것으로는 조금 과하였으나 약점이 약점인지라 포교는 할 바를 모

르는 포졸에게 일렀다.

"정성이나 받아두어라."

홍천수가 비록 입이 있고 할 말이 가슴을 비집고 터져 나오건만 종이광대를 썼으니 비장댁

의 얼록진 얼굴만 뵈일 뿐이었다. 또 보세, 하였건만 웅얼웅얼 막혀서 흘러내릴 뿐이었다.

그러나 건달 홍천수도 돌아서서 당고개 삼거리를 내려가며 그제서야 칠패의 처자식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는 새삼 마누라가 보고 싶었다. 얼마나 복통이 터지랴, 허구한 날 노름질과

외입질로 동분서주했던 그로서는 마누라가 이런 일을 아예 몰라버리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기다리다가, 어디 원행 상단에라도 따라붙어서 돌아가지 못하는 줄로 여기면 다행일 것 같

았다. 여하튼 운이 나쁘면 포청 안마당에서 실려 나갈 것이고, 기껏 좋았자 얼굴에 자자되어

몇천 리 길의 유배로 내쳐질 것이었다. 그러나 홍천수는 역시 장안 무뢰배답게 마음 편히

받아들이기로 작정했다.

"제미... 외입질은 이제 끝이로다!"

석범철은 주낙을 놓아 반찬거리를 잡아가지고 일찌감치 집에 들어갔었다. 저녁을 먹고 나

서 마누라는 옷가지를 꿰매고 앉았으며, 그는 곰방대를 물고 앉았다. 가끔씩 마을 개가 컹컹

짖어댔다.

"찬바람 불기 전에 배가 다 되어야 할 텐데."

"그나저나 어쩔 작정으루 선단을 그만뒀어요. 이나마 식구가 밥이라두 먹구 사는데, 참 뱃

보두 좋아."

"... 못 먹으면 까짓 도둑질이라두 할 테니 임자 밥 굶을 걱정말어."

아내는 한숨을 쉬며 기가 막히다는 듯이 혀를 찼다.

"말하는 것 좀 봐. 언제는 내 주릴 걸 걱정을 했남. 이건 삯바느질이다, 주낙질이다, 수수농

사에 조농사다, 미친년 헤갈하듯 하며 새끼들 길렀는데 아주 장한 듯 말허시네. 참 가슴이

턱턱 막혀서... 몇푼 벌이두 못허면서 이건 술 먹지 노름 허지, 집에는 두어 달에 한번 코빼

기를 비칠까 말까 하더니 그나마 집어치우구 집에서 빈둥거리니 허는 걱정이우."

석서방도 딴은 아내를 고생시켜온 것이 남보다 못하잖던 터이라 입맛을 다셨다."

"임자는 내가 집에 붙어 있는 게 그리 싫은가. 내일이라두 당장 짐싸들구 팔도 유람이나

갈까 보다."

"어이구, 맘대루 하시구랴."

"가만있어. 배만 다 되면 장사를 부지런히 해서 경강 부고가 되어 보일 텅니 그때 호강할

꿈이나 꾸게."

이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부부지간의 수작이 오가는 가운데 밤이 깊어졌고, 아이들이

깨어나 칭얼대고 석서방은 마누라를 집적거리기도 하면서 잠이 들었던 것이다. 이웃집 건넛

집의 개들이 극성맞게 왕왕대는 소리에 석서방이 문득 눈을 뜬 것은 동녘이 부옇게 트여 안

개는 자욱하고 땅 위에 서리가 단단히 엉겨 있는 즈음이었다. 아래가 묵지근하고 오줌보가

가득 차서 춥지만 안 일어날 수가 없어, 석서방은 흐드득 진저리를 치면서 바지를 추스르고

봉당으로 나섰다. 뒤곁에 있는 오줌독에다 갈기느라고 집 모퉁이를 돌아 나가는데, 흘낏 누

구인가 울바자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동네 사람이 새벽에 반찬거리라도 잡으러 나

가는 것이겠거니 여기다가 오줌을 누면서 되짚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옷 색깔이 검

정이었던 듯싶었다.

가만있자 하고 나서 울바자 사이로 기웃거려보니 검정 옷자락과 털벙거지가 보이는데 세

사람이었다. 모두 육모방망이에 주홍빛 오라를 차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중 키가 크고 뼈

대가 억세어 보이는 자가 서슴없이 사립문을 안으로 밀어붙이는데 문이 비스듬히 기울어지

며 떨어져버렸다. 석서방은 더 이상 우물대지 않고서 뒤꼍의 울바자를 쥐어뜯고서 빠져나갔

. 그리고는 마을 뒤로 정신없이 뛰었다. 어제 박성대가 찾아왔더라니 분명히 탈이 난 것이

었다. 하여튼지 잡히지 않는게 상수였다.

안개가 뛰는 발길과 흔드는 손길에 휘적휘적 엉겨왔고 서리 내린 아침 공기는 그의 홑옷

을 뚫고 차갑게 감겨왔다. 석서방은 밤섬 동자머리를 등뒤에 도고서 여의섬의 백사지 들판

을 향하여 뛰었다. 마른 풀이 무성한 곳에 이르러 그는 몸을 숙이고 우선 쭈그려앉았다.

위에서는 물새들이 우짖으며 가끔씩 허공을 지나가고 마른 풀이며 갈대며 억새를 비집고 가

녀리게 스쳐가는 바람소리만이 들려왔다. 석서방은 아예 잡힐 테면 잡히라지 하는 심사가

되어 뒤로 절펀히 누워버렸다. 어제 성대가 일러준 대로 미리 가솔들을 데리고 광주나 강화

어름으로 은밀히 피할 것을 너무 방심하였다. 뒤쫓는 포졸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석서방은 두어 식경이 넘도록 마른 풀 속에 누워 있었다. 해가 높직이 솟

으니 늦가을의 냉기도 가시고 제법 따사하여 절로 졸음이 왔다. 여하튼 백주에 마을로 돌아

가기도 그렇고 더구나 강을 건너 서강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라 배도 고프고 무

료하기도 하지만 서린 전옥서에 갇혀 악구머리 끓듯 하는 남칸 북칸에서 신참례를 치르는

일보다야 한결 윗길이로다, 생각한 석서방은 설깨었던 새벽잠을 다시 청해보기로 하였다.

한참이나 자고 나서 눈을 떴으되 이제 겨우 정오쯤인가 해가 바로 정수리 끝에 떠 있었고

오랜만에 끼니를 놓친 탓이라 회가 요동을 치는 것이었다. 그는 바람에 불려 저신에 쓰인

모래를 털고 일어났다. 여의섬 들판부터 우뚝 솟은 밤섬 동자머리까지 인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마을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아이들은 여전히 뛰놀고 닭이 마당을 오가고 있었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한가한 걸음걸이로 그의 집이 내다보일 만한 것까지 다가갔다. 사립

문은 떨어진 채였고, 달랑 둘뿐인 안방과 건넌방의 방문도 휑하니 열려 있었다. 그리도 무엇

보다도 종종걸음을 치며 마당을 오락가락할 그이 아내가 보이질 않았다. 그는 비어 있는 집

을 보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이제껏 비슬거리던 걸음이 변하고 성큼성큼

집 쪽으로 걸어갔다. 열려진 방문을 보니 온통 뒤죽박죽이요, 어떤 놈이 홧김에 걷어찼는지

항아리와 대독이 깨져서 부엌은 온통 간장과 물에 홍수가 나 있었다. 그는 혹시 아이들이라

도 남아 있을가 하여,

"얘들아, 어디 있니."

라고 불러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때에 등위에서 누군가가 소매를 덥석 잡았다. 소스라쳐

서 뒤를 돌아보니, 옆집의 아낙네였다.

"에그... 큰일날려구 여기서 서성거리슈. 어서 저희집으루 가십시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어서... 가십시다. 애들이 우리 집에 있수."

하여 석서방은 뒷집으로 쫓아갔다. 주인은 석서방과 소싯적 동무이며 동막에서 원행 다니는

상단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친척이나 다름없어 장떡 한 쪽을 부쳐도 담넘이를 해오는 사이

였다. 그 집안의 안방으로 들어서니 딸은 잠들어 있었고,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은 큰놈이

눈을 번 듯 뜨고서 반겼다.

"아부지, 엄마 잡혀갔어."

"갓난애는 안구 갔어요. 그놈들이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고, 서방을 잡을 때까지 잡아둔다구

합디다."

석서방은 큰놈을 무릎에 앉혀두고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 애들 좀 맡겨둡시다. 내 발루 포도청에 자수하면 에미는 곧 나올 게요. 신세는

나중에 갚지요."

"에유, 무슨 말씀이셔요. 신세라니오. 자수하면 애들 엄마는 나오겠지만, 그러면 또 아낙네

혼자 어찌 삽니까. 차라리 애들 엄마가 잠시 고생하구 나올 때까지 기다리시우."

"아닙니다, 그 고생을 어찌 견디겠습니까. 내가 오늘밤 안으루 자수를 하든지 아이들을 데

려가든지 하지요. 하루만 맡아주십시오."

아이들을 부탁하고 석서방은 축 처져서 옆집을 나섰다. 동자머리로 나아가 사람들의 시선

을 피하며 한적한 곳에 가서 배를 띄우고 서강으로 건너갔다. 모신네 주막으로 갔는데 앞의

술청에는 술꾼들이 많아서 뒤꼍으로 돌아가 안채에 들어섰다. 오락가락하던 모신네 밥붙이

가 그를 보자 눈을 번쩍 떴다.

", 여긴 웬일이슈?"

"주인 어른 기신가."

밖에 나가셨는데요."

"박서방 오지 않았든가?"

"가만있으슈..."

하고 나서 그가 잠깐 술청으로 나갔다 들어오더니 앞장을 섰다.

"작은댁네 계시답니다."

중노미가 서강의 저자를 피하여 일저리 돌아서 그럴 듯한 집 앞에 이르렀는데, 비록 초가

였으나 집채가 덩그러니 크고 마당이 번듯하였다.

"이게 뉘 댁인가?"

"... 저희 주인 어른 소실 댁입니다."

겉보기에만 임집이지 토담에 대문이 딸려 있는데, 무슨 객줏집 같았다. 대문을 두드리고 문

이 열리고 하는 중에 건너다보니 뒤편에 또 잠긴 문이 있었고, 마당 세 귀퉁이마다 제법 큼

직한 광이 있었다. 서강 저자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모신이가 장물을 쌓아두는 곳인 모양이

었다.

마방이 외편에 딸렸는데 튼튼해 뵈는 나귀 두어 마리가 매어져 있었고, 아마 급주용인 듯

다리가 기쭉하고 허리가 잘쑥한 준총이 한 마리 있었다. 실상 주막은 거래를 트는 곳에 지

나지 않고 왈짜 건달들이 나와 놀며 안면이나 익히는 곳인 모양이었다. 사실은 이 집이 모

신이와 장사처인 듯하였다. 덩치 좋은 하인들이 두툼한 섬이나 보에 싼 물건들을 져나르고,

모신이는 일일이 그것들을 어디에 두어라 무엇은 빼내라 하며 지시하고 있었다. 주막의 중

노미가 다가가 허리를 굽신하면서,

"주인 어른... 밤섬 석서방이 오셨습니다."

하니까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석서방과는 몇번 거래가 있었고, 특히 홍천수와 어

울려 노름도 하였으므로 그리 친하지는 않아도 서먹한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모신이가 석

서방을 천수에 비해서는 그리 신통치 않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 오셨군, 아능로 들어가지."

그들이 함께 사랑채에 들어서니 목침을 베고 무료히 누웠던 성대가 반기며 일어났다.

"종형, 잡히지 않았구려."

"대신 애 에미가 끌려갔어."

"형수씨가... 천수도 잡혔어."

박성대가 그렇게 말하면서 모신이를 바라보니 그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람을 보내어 형편을 알아보게 했더니 석우에서 어젯밤 잡혀갔다네."

석서방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니까 귓전에 얼핏 전해 듣긴 하였으나 설마하구 넘겨버렸단 말이야. 누가

찔러넣은 게 분명한데."

모신이가 껄걸 웃었다.

"허허, 아직두 잠귀신이 들었군. 이봐 정신들 차려. 언놈이 그런 골탕을 먹구 가만있겠나,

동막 강주인이라면 물에 닳고 돈에 닳고 사람에 닳아서 반들거리기가 차돌멩이 같단 말여.

내 소견에는 그러네. 애시당초 자네들이 화수 먹은 쌀을 받아온 것두 잘못이구, 관동 상인이

란 것두 허방을 파놓은 게야."

"그 쌀을 사다가 헐값에 중도아들에게 풀었단 말일세. 아마 나중에 말썽이 나면 홍천수를

대주라고 그랬겠지. 그리고는 일변 소상들을 쑤셔 놓고, 한폄으로는 투서를 써내었겠지.

란이 일어나니 즉각 잡으러 나온 게여."

모신이가 역시 장물아치답게 소상히 꿰어내니 알 듯 말 듯하던 성대와 석서방도 일시에 이

치가 훤하여지는 것이었다. 석서방이 중얼거렸다.

"내 이놈을 당장 쫓아가서 쳐죽이기 전에는 자수 못하겠군!"

모신이 눈을 휘둥그래 떠 보였다.

"뭐여! 자수를 헌다구... 마누라가 잠시 잡혀갔다구 제 발루 포도청을 찾아간단 말이지."

"그럼 어쩝니까. 애새끼들을 봐서라두 어서 나오게 해얍지요."

"걱정 마시게... 아무리 큰 죄를 졌다 하나 대역죄가 아닌 다음에야 애매한 식구들을 오래

붙들어두지는 못하네. 내가 어찌 힘을 좀 써 줄 테니까 당분간 숨어 있도록 허게."

"천수는 글렀지요?"

박성대가 묻자 모신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칠패 포교두 함께 잡힌 모양인데, 아예 도적놈의 괴수로 떨어져버렸다네. 제가 운이 좋으

면 귀양 나가는 길에 도모를 하고, 아니면 전옥서의 귀신일세."

하고 나서 모신이가 석서방에게 물었다.

"실은 내가 댁네 도움이 필요하네. 강화에 가면 그 우가 성 가진 도사공을 끌어낼 수가 있

는가?"

"... 무슨 일루 그러시우?"

박성대는 자세히 알고 있는 듯 모신이 대신 입을 열었다.

"배나 한척 부려볼가 하신다네."

"뭐 장사를 하시게...?"

"내가 뭐 새삼스레 주상으루 나서겠나. 그저... 댁네들 배한척 마련해주고 좋은 물건으루 벌

어다 주면 되어. 그런데 그 도사공이 온다면 마음 턱 놓구 내맡길 수가 있지마는..."

아직도 석서방은 무슨 소리인가를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모신의 뜻은 이러하였다. 그는 경

강의 유일한 장물아치이니만큼 광주 송파의 좀도둑이나 양주 인근의 난전꾼들이나 하여튼

수상한 놈들이 없으면 버젓한 장사는 이가 박하여 나설 생각도 없는 터였다. 진물은 역시

해상에 있다고 여겨졌고, 언젠가 믿을 만한 사람들만 만나면 연관을 갖고 싶어하였던 것이

. 관에 쫓기거나 아예 등을 돌린 자들을 만나지 못하였더니 일이 잘 풀리느라고 그들의

강주인의 함정에 빠져버린 게 아닌가. 그는 잘 맞아떨어졌다고 혼자서 무릎을 두드렸던 것

이다. 뱃값은 한번 성사에 다 갚아낼 것이고 그 다음부터 그들이 해상에서 덮쳐낸 물건들만

위탁하여 팔아도 금방 부가옹으로 일어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성대가 조선에 능하며 석범

철은 배를 잘 운항할 것이며 한번 본적이 있으나 도사공 우서방은 능히 두목의 기량이 있어

보였다. 강화에서 난다 하는 뱃놈들을 모아 무장선이 이루어지면 서해의 그물 같은 수로는

모두 그들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두 살자구 하는 일이니, 그렇게 의심스러워 마시게. 배를 사서 고치든지 아예 새루 만들

든지 마음대루 하게. 돈은 얼마든지 낼 테여."

"뱃값만 갚으면 된다 그거요?"

성대가 다시 말참견을 하였다.

"답답하기는... 배를 타구 적당질을 하란 말이여."

"무어... 그러면 수적 노릇을 한단 말인가."

"수로가 좋기로는 강화도 좋고 임진 예성 수로두 좋지. 관선은 그만두고 사상의 배만 털어

두 일 년에 대여섯 차례면 금방 대금을 만지게 될걸. 어쨌든 그 우서방이 오면 의논이 확정

되겠지만, 여기 박서방두 물길이라면 손금 보듯 하잖은가. 이봐, 석서방 기왕에 이리되었으

니 아예 경강 살림을 걷어치우지 그래. 오늘이라두 당장 강화루 떠나게."

"집사람 일을 졸보아주시면 마음놓구 떠나겠습니다만..."

드디어 석서방이 그렇게 응낙을 하였고, 박성대도 곁에서 거들었다.

"대금만 되면 그담에는 까짓 거 남경 장사나 하지 비좁은 경강 바닥서 비벼봐야 소상을 면

치 못할 테고..."

모신이는 노자로 좀 많은 열닷 냥을 내놓았다.

"우서방만 데려와보게. 뱃놈들 모으는 거야 그자가 다 알아서 하겠지. 그리구... 내가 지금

이라두 사람을 보내어 손을 쓰겠네. 자네 집사람두 곧 나오겠지."

"동막의 그놈들... 경강을 떠날 제 요절을 내버려야지."

석서방은 이미 저녁때가 다 되었건만 노중에서 묵기로 하고서 모신이네 작은집을 나섰다.

 

우대용이는 멍구미에서 내려 용우물 강선흥이네 집을 찾았다. 마침 점심참이라 선흥이 형

수는 아버지와 더불어 밭에서 돌아왔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상을 보던 중이었다.

"안녕허세요. 선흥이 어디 갔습니까?"

선흥의 어머니는 멈칫 놀라서 우선 그의 등뒤에 따라붙은 사람들이 없는가부터 살폈다.

"절 모르십니까. 그전에 선흥이허구 같이 와서 달포나 묵고 갔지요."

"... 겨울에 말이지요?"

선흥이 어머니는 그제야 대용을 알아보는 듯하였다.

"어서 거기 마루에 좀 걸터앉으슈."

"..."

"아이, 그간 별고 없으셨에요?"

선흥의 형수가 대용을 대뜸 알아보고 반색을 하였고, 대용은 얼른 일어나 선흥 아버지께

인사를 올렸다.

", 그래 어디서 오는 길인가?"

"강화에서 옵니다. 거기 선단에서 도사공으루 밥을 먹구 있습니다."

"허허, 저걸 어쩌나... 선흥이는 오래 전에 집을 나갔는데."

"아니... 집을 나가다니요?"

"아버님두, 먼길 오신 분 낙담하시겠어요. 어서 좀 올라오시지요. 시장하실 텐데 점심 자셔

야지요."

선흥의 형수가 먼저 부산을 떨면서 대용에게 마루 위로 올라앉도록 재촉하였고, 그도 얼결

에 선흥의 행방에 대해서는 더 묻지 못하고 덤덤히 앉아 있었다.

"안되었네. 선흥이 동무라니 하는 말이지만... 그놈이 없고 보니 집구석이 그냥 휑하니 빈집

같군."

"형님하구 함께 행상 나갔나요?"

"큰아이는 봉산 올라갔지. 집엔 나허구 마누라허구 저애들뿐이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선흥이 아버지는 입맛을 쩝쩝 다시는 것이었다.

"있었지... 그놈이 부역 나가서 관리를 두들기고는 관가에서 봉욕을 치렀지. 그뒤로 세상 살

맛이 없어졌는지 집을 나가버렸다네. 말썽이 더 이상 없었기에 식구들은 무사했지마는..."

우대용은 그야말로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선흥이만은 착실하게 행상을 하여

장가들 준비도 하고 버젓하게 세상살이를 하고 있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역시 그도 여염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집 동네를 떠나버린 게 아닌가. 대용이 물었다.

"선흥이가 어디루 갔는지 식구들은 모르십니까..."

"저희 형하고는 무슨 말이 오갔던 모양이지만 우리께는 통 알리질 않아서 모른다네. 그래

두 별루 걱정은 안되는군. 그 녀석이 워낙에 밖으로 싸다니길 좋아해서 그전엔들 어디 집구

석에 붙어 있었나. 제 몸 하나는 잘 벌어 먹구 살 게여."

우대용은 선흥이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구월산에 찾아갔거

나 송도의 박대근을 찾아갔는지도 몰랐다. 대용은 갑자기갈 바를 잃어 어디로 갈 것인가 막

막해졌다. 이렇게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송도의 대근이 신세를 지러 가기는 싫었다. 동무가

없는 집에서 지체하기도 뭣했으므로 그는 점심이나 얻어먹고 곧 떠나리라 마음을 먹었다.

점심상이 들어오는데 모처럼의 손님인지라 이밥에 굴비도 올랐고 갯가가 가까워서 밑반찬이

대개 해물이었다.

"... 명절 같구먼."

하면서 선흥의 아버지가 중얼거렸고 상을 들여놓은 어머니가 돌아서서 치맛귀를 싸쥐었다.

"에이그, 우리 선흥이가 이번 겨울은 춥지 않게 배걿지 말구 넘겨야 할 텐데. 몹쓸 자식 같

으니..."

"어머니, 보름이 아직 멀었지요?"

물때를 아는 우대용인지라,

"나흘 남았습니다."

하니 아낙은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용선 아부지가 곧 오시겠네요."

"벌써 날짜가 그리되었던가. 인흥이가 보름에 돌아온다네."

아버지 말에 어머니도 손가락으로 꼽아보더니 맞는다고 대답하였다.

"형님께서 아직두 염장에 나가시나요?"

"그 일은 그만두었네."

대용이 집안을 대강 둘러보니 어딘가 집꼴이 그전보다 나아진 듯하였다. 토담도 허물어진

데 없이 번듯하고 지붕의 이엉도 말끔하였다.

"소금짐을 벗으시면 무얼 팔러 다닙니까?"

"대처에루 방물을 팔러 다니지. 튼튼한 종마를 하나 사서 훨씬 장사가 수월해졌다네."

우대용이는 역시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물을 판다면 밑천이 좀 들기는 하겠지만

이는 많이 남겠기 때문이었다.

"인흥이가 워낙 약골이라 상행에서 돌아오면 며칠씩 앓아 눕곤 했는데, 이젠 거저 먹기라

. 견마나 잡고 걸어다니면 된다우."

그의 어머니가 대견한 듯이 자랑을 하였다. 점심상을 물리고, 대용이는 그냥 주저앉아 있기

도 이제는 면구스러워서 봇짐을 챙겨서 일어났다.

"왜 갈려구?"

"가보아야지요. 선흥이가 보구 싶어서 왔는데 없으니..."

"그게 무슨 소리여, 한 사날이구 열흘이구 볼일 없으면 푹 묵었다가 가지, 이젠 걷이두 끝

나구 그저 심심풀이루 늦채소나 돌보는 중인데, 나허구 얘기두 하구."

"그러셔요, 용선 아버지 오시면 반가워하실 텐데요."

우대용이 선흥의 식구들게 하직 인사를 하고 나오려니, 인흥의 처가 주르르 따라나오는 것

이었다.

"어유, 아주머니두 들어가십시오."

"그게 아니에요..."

하고 여자는 사립문 가에서 식구들이 멀찍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고 나서 이었다.

"저어... 삼촌을 만나신다며 이렇게 급히 가시면 어떡해요."

우대용이는 아직도 형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집에 없는데 제가 밥이나 축내구 있으면 뭐합니까..."

"실은 저어... 삼촌이 산에 있어요. 용선이 아부지는 가끔 만나시는가 봅니다."

"산에 있다니요... , 구월산 말씀이군요. 혹시 거기가 아닌가 생각했더니만..."

"아니에요, 라루 학령 너머 달마산에 가시답니다."

"달마산이오? 그렇다면 저쪽 아득하게 보이는 산 말인가요."

"거긴 천불산이랍니다. 삼촌네 동무들이 있다지요. 절대루 입 밖에 내지 말라구 용선 아부

지가 다짐을 우었는데, 제가 보기엔 괜찮을 듯하여 발설하는 거예요."

우대용이는 들판 너머로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솟아올라 첩첩한 산들을 망연히 바라보았

. 산에 범을 잡으러 올라갈 리도 없고 농사를 지으러 갔을 리도 없으니, 틀림없이 세상을

등진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다고 입산 수도행도 아니고 보매 산에서 작당하여 녹림처사가

된 것이 분명하였다. 우대용이는 어쩐지 슬프면서도 다른쪽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인제 구월

산에서 의형제를 맺은 뒤에 끝까지 입산하지 않았던 선흥이도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었다.

나는 어찌할 것인가... 다시 강화로 찾아가 춘득이께 빌붙어 급료에 감지덕지하고 경강에 나

가서는 장사치들의 눈치 단련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그곳도 제 마당이 아니었다. 이미 경

치고 탈옥한 몸으로서 고향 해주에 돌아가면 포촉되어 즉시 박살될 것이었다. 대근의 상단

을 찾아가 신세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길산이가 그리웠다. 금강산으로 떠난다는 길

산의 행방을 쫓아 자신도 수도에 나서고 싶었다. 대용은 길산이 비록 비슷한 또래이긴 하였

으나 어쩐지 형처럼 느껴졌었다. 그는 한참만에 산줄기에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래 관에서는 아무런 기미가 없습니까?"

"삼촌이 달마산에 올랐다는 것 아무도 모릅니다. 그랬다가는 저희 식구는 당장에 연루되어

감영으루 끌려갈 거예요. 전부터 달마산이나 불타산 어름에 수상한 이들이 산다는 소문이

나있지요."

선흥이 형수와 우대용이가 서서 얘기하고 있으려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가와서 함께 만류

를 하였다.

"이럴 거 없다니깐 그러네. 아니 강화서 장연이 물길이 수백여 리인데 점심 먹구 일어선다

니 이거 인정이 아닐세."

"어서 들어가우. 선흥이 동무면 인흥이헌테는 동생이구 우리게는 내 자식인데 이럴 수가

없수."

선흥의 형수도 대용이께 나직히 말하였다.

"들어가시지요. 며칠만 지내시면 용선 아부지가 장삿길에서 오실 테구. 삼촌두 만나시게 해

드릴 거예요."

대용이는 역시 정처 있는 발길도 아니고, 선흥이도 꼭 보아야겠기에 그 집서 며칠 묵기로

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인흥이가 올 때까디 대용은 기다려보기로 하여 선흥이가 쓰던 끝방을 치우고 들어

앉았다. 그냥 우두커니 밥만 죽이고 앉았기도 송구스러워서 용선이와 나무도 하러 다니고,

멍석도 짜며 날을 보내었다. 뭔가 반찬거리라도 하겠노라고 궁리해보건마는, 토끼사냥도 아

직 이른 철이데다 덫을 꾸밀 줄도 몰라 역시 갯가놈 표를 내느라고 방게를 주으러 나섰다.

소쿠리와 손갈퀴를 가지고 조니포 갯가로 나갔는데, 원래가 조개나 굴이나 방게 줍기는 아

녀자들의 일인지라 쑥스럽기도 하였다. 이틀 동안에 두어 섬은 실히 넘도록 방게를 주워다

가 장에 절여두었으니 해동까지 온 식구가 먹을 만하였다. 사흘째 되던 날 첫눈이 내렸다.

천눈이란 내리자마자 녹든지 잠깐 나부끼다가 마는 것이 고작인데 오후 늦게까지 탐스러운

눈송이가 펄펄 내려왔다. 하늘과 땅은 나부끼는 눈으로 가득 찼고, 초가지붕에도 고봉 밥사

발처럼 탐스러운 눈이 내리덮었다.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저녁을 일찍 마치고 대용은 제 방에

군불을 넣고 있었다. 사방이 어둑어둑하여 아궁이 속의 불빛이 제법 훤하게 땅바닥에 어른

거렸다.

"주인 계시오, 말 좀 물읍시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용선이가 나가는 모양이었다.

"뉘를 찾으시는데요...?"

"이 댁에 혹시 손님 한분 오시지 않었니?"

어라 이건 또 뭣들인가. 우대용은 군불을 넣다 말고 벽 모퉁이로 돌아가 얼른 몸을 숨겼다.

우선 뒷담을 넘을 곳을 보아두고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그들의 말을 들었다.

"오셨든 말든 뉘를 찾으시냔 말요?"

", 다 알구 왔다. 이 집이 소뿔 뽑은 총각 장사네 집이지?"

"강화에서 온 우서방이 왔을 게다. 우린 그이 동무되는 사람들이다."

"오셨다가... 아침에 떠났수."

용선이가 믿기지 않아서 따돌리려는 모양이었다.

"... 한발 늦었군!"

"이런 낭패가 어디 있나. 그러게 그냥 경강으로 돌아가쟀더니, 강화서 예가 어디야. 인제

돌아가려면 고생문만 훤하군."

", 그이가 어디루 간다구 말은 없던?"

"몰라요... 아침 식전에 슬그머니 가버렸거든요."

"산삼 찾기로군."

"... 새어버린 방귈세."

", 너희 집엔 어른두 안 계시냐. 말이나 묻구 갈련다."

그래도 헛발을 돌리기가 미진한지 다른 자가 사립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용선이가 가로막

았다.

"글세 찾는 사람이 없다는데, 물어보나마나 똑같아요. 나가슈, 자꾸 이러시면 동네 사람들

을 부를 게유."

"온 배라먹을 자식 같으니... 이 녀석아 우리가 무슨 저승사자라두 된대, 왜 이리 겁을 먹구

야단이야."

어쩌고저쩌고 승강이하는 소리가 잠시 들리다가 그들은 툴툴거리며 문가를 떠났다. 아까부

터 우대용은 그게 누구들인가를 잘 알면서도 혹시나 하여 동정을 살피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는 문으로 가보았다. 용선이가 나직하게 말하였다.

"아저씨, 잘했지요?"

"그래 아주 잘 했다. 내 동무들인 모양인데 혹시나 하여 떠보느라구 잠자코 있었지."

우대용은 밖으로 나가서 그들 두 사람 외에 누가 또 없는가를 확인하였다. 그들은 연신 뭐

라고 투덜대면서 마을길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우대용은 싱긋 웃고 나서 외쳤다.

"석서방 어디 가나?"

"..."

그들이 돌아보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한참이나 서 있었다.

"왜들 그러구 섰어. 무슨 도깨비라두 보았나?"

석서방은 손을 호호 불면서 다가왔다. 그의 뒤에는 다른 대의 대두 노릇을 하던 사공이 서

있었다.

"안녕합쇼?"

"자네들이 웬일인가..."

"말두 마시우.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경강서 천리길을 마다 않구 찾아왔

는데 허탕을 치게 만들다니요."

"우리 집은 아니지마는 잠깐들 들어오시게. 거참 모를 일이군. 무슨 수로 나를 찾아냈는

?"

"그러니 수로에나 밝은 놈들이 뭍에 올라와 이 고생이지요."

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선흥이네 집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고 내다보던 선흥의 부친

이 걱정할까 싶어서 대용은 그들을 손짓하며 말하였다.

"저하구 함게 일하는 사공들입니다."

"... 그런가. 추울 텐데 어서들 들어가게."

대용은 한끼니 하룻밤이라도 폐가 됨이 송구하여 뒤통수께에 손을 대고 말하였다.

"이거... 이런 부산스러울 데가 없습니다. 주막두 멀고 하니 그냥 신세를 끼치겠습니다."

"아니우, 그런 걱정일랑 아예 마우. 저녁들은 자셨는지 모르겠네."

"아무거나 요깃거리가 있으면 됩니다."

염치 좋게 석서방이 대꾸하였고, 그들은 시린 발을 얼른 아랫목에다 묻고 잠깐 진저리를

쳤다.

"어이구 좋다, 구들목이 따뜻하니 슬슬 잠이 오는데..."

우대용은 그들이 경강과 강화를 떠나 이곳까지 자기를 찾아온 내력이 종내 궁금하였다.

"천수가 잡혔수. 그리구 성대하구 나는 달아났지요. 대신 마누라쟁이가 덜컥해서 포도청에

들어 있습니다."

우선 한숨을 돌렸는지 석서방이 말을 꺼내었다. 그는 우대용의 반응을 보느라고 조심스럽

게 말을 계속하였다.

"그 강주인놈이 우리께 기러기를 쓰고 나서, 앙갚음으로 화수미 중도를 하여 투서질을 하

고 소상들을 들쑤셨수."

"그럴 테지... 저자판이란 원래 돌고 도는 판이니까."

"도사공 성님두 경강에서 포착되면 덜컥 갑니다. 강화에까지 기별이 닿았더랍니다."

"아주머니와 애들이 걱정이로군. 그런데 여긴 어찌 찾았나?"

석서방은 모신네 작은집에서 의논이 이루어진 사정을 밝히고 우리도 배를 장만할 기회라고

말하였다. 그는 강화에 갔다가 우대용이 축출된 소문을 듣고 아예 춘득이 선단 도방으로는

얼씬도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함께 온 사공 물치를 시켜서 백방에 알아보니 그가 해서 장연

으로 방금 떠났다는 소식을 얻었다. 우선 박성대는 모신이께로 되돌려 보내고 관서로 가는

배를 타고 뒤를 쫓았다는 것인데, 석서방은 대용이 늘 말하던 장연의 총각 장사네 집을 어

림짐작했었다는 얘기였다.

"장연서 황소 뿔 뽑은 총각 장사네가 어디냐니까, 모두들 선흥이 말이로군 합디다. 떠났다

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었지요. 헌데 어찌 그 사람은 없는 모양이지요?"

"걔가 집에 없으니 나두 이 집에 묵어 있을 면목은 없네만, 형이 내일 온대서 기다리구 있

던 참일세."

석서방이 옆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사람 아시지요?"

"본 듯하네. 삼남 수로를 다녔지."

우대용은 물치라는 사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성님을 많 뵈었습니다. 그렇잖아두 선단 일이 아니꼬워서 때려치우려던 판인데, 석서

방이 좋은 일거리가 있다구 그래서 동행했습죠."

"물치가 제 아래 사공들 몇을 빼내어 오겠답니다."

"그래, 모두 수적질을 하겠단 말인가?"

"먹구 살려면 무슨 짓을 못합니까?"

우대용은 심드렁하니 대꾸하였다.

"아무튼 배를 장만해주겠다는 모신이와 타합하여보구 나서 결정을 하세."

그날은 염치 불구하고 선흥이네서 묵었지만 아무래도 세 장정이 구들장 지고 빈둥거리기는

못 견딜 노릇이었다. 그런 눈치를 챈 석서방이 노자에서 닷 냥을 내어 용선이를 시켜서 가

용에 쓰시라고 전해주었다. 그러고 나니까 한결 미안한 감이 덜해져서 하루를 더 묵게 되었

는데, 그날도 인흥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서 떠납시다. 나는 시방 마누라를 옥에 떨구고 온 사람이우."

하면서 석서방이 재촉하였으나 대용은 강선흥이를 만나지 못하고 장연을 떠나기가 싫었다.

하루만더 기다려보자 하여 그날 밤 다시 주저앉게 되었는데 한밤중에야 인흥이가 당도하였

. 우대용은 밖에서 시끌 법석하는 소리를 듣고 깨어나 문을 열고 나가보았다. 인흥이는 가

족들에 둘러싸여 말짐을 내리고 있었다.

"어이 추워, 학령에 눈이 어찌나 많이 왔던지 그만 묶여버렸지 뭐야."

"성님, 어랜만입니다."

"누군가...?"

"전에 왔던 삼촌 동무에요."

곁에서 그의 처가 보탰으나 인흥이는 잘 몰라보는 것 같았다.

"첫봉이나 둘봉이가 올 리두 없구."

"해주 살던 우대용이올시다."

", 우서방이구먼, 반가우이... 우리 선흥이가 늘 보구 싶다구 하데."

우리 멀리서 온 주인은 요기를 하느라고 안방에 있다가 늦어서야 우대용이만을 건넌방으로

불러들였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들 앞에서 선흥이의 얘기를 꺼내기가 꺼림칙했던 모양이었

.

"선흥이가 산에 있다면서요?"

인흥이는 잠시 대답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되었네. 그애가 남달리 뛰어난 데가 있어서, 나는 무장이라두 보낼까 했었지. 하다

못해 군진의 장교 노릇을 못하겠는가. 그저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 어릴 적부터 행상에 나

서서 갖은 고생을 다했지만... 기어코 양민 노릇을 못하구 말았지. 나는 그애 생각을 할 적마

다 아버님 뵐 면목이 없다네. 헌데 어찌하다 보니 이제는 그애의 도움으루 집안 형편두 많

이 피었어. 참 우스운 노 일세. 나는 그애가 집을 나갈 때 손찌검까지 하였지만, 보내준 상

목이며 패물을 팔아서 전답두 샀다네. 행상질두 요번 겨울로 끝일세. 정말 할수 없는 세상이

라니까..."

"선흥이를 만날려구 성님을 기다리구 있었지요."

"내일이라두 나허구 올라가면 되지만... 눈이 많이 와서 고생이 심할 게야."

"아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달마산 어디인지나 가르쳐주십시오. 방금 원행에서 돌아오셨

는데 내일 또 집을 나가시면 식구들께두 죄스럽구요."

"실은 부모님들두 선흥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신다네. 내가 오는 길에 학령서 기

별은 받았지만 산에 오르지는 못하였네."

"어디루 가면 끈이 닿게 될지나 가르쳐주십시오."

인흥이는 성큼 얘기를 해주기가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같이 왔다는 사람들두 데려갈 건가?"

"아닙니다, 저 사람들은 어디 주막에라두 남겨놓지요. 허지만 관에서 찾는 자들이라 별루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인흥이는 그제서야 말을 꺼냈다.

"학령 밑에 해지점이라구 있네. 거기 가면 나무리집이라는 주막이 있는데 달마산 패거리가

두엇씩 나와서 망을 선다네. 주막 주인께 물으면 될 게야. 내가 쓰는 신표를 줄 테니 가져가

."

하더니 인흥이는 품속에서 무명 쪼가리 하나를 꺼내었다. 헝겊 위에는 꼭두서니 빛깔로 달

마라고 주서되어 있었다.

"신표를 보여주고 선흥이를 만나러 온 누구라고만 얘기해주면 될 걸세."

대용은 그 신표를 받아 넣었다.

"관에서 기찰하지 않습니까?"

"왜 해지점에는 포교두 나와 있긴 하다네. 그렇지만 전부터 있어오던 좀도적들이거니 여기

. 우리두 명년에는 장연을 떠날까 한다네. 봉산으루 이사를 가야겠어. 이번에 갔던 일두

땅을 보러 갔던 걸세."

대용이는 날이 새자마자 석서방과 물치를 데리고 선흥이네 집을 나섰다. 장연서 달마산을

가려면 제일 빠른 길이 남대천을 따라 동북으로 오르다가 구이령을 넘는 길이었다. 그러나

학령 해지점에 가서 통기를 하려면 돌아서 가야만 하였다. 목감원과 갈현을 지나 해지점가

지가 구십여 리 길이니 천상 중화는 금동서 먹고 오후 늦게 닿을 모양이었다. 석서방은 바

다로 가는 길이 자꾸만 멀어지자 안달이 나는 듯하였다.

"어이구, 돌아 나오려면 미투리가 댓 켤레는 떨어지겠수."

대용이가 생각해보고나서,

"자네들은 먼저 강화에 가서 아이들 몇 명 빼내어 경강으루 올라가지 그러나. 내 곧 뒤이

어서 갈 테니..."

하였으나 석서방은 우대용이가 빠지면 이제 모든 일이 틀어지고, 천하에 갈 데 없는 외토리

가 되는 셈이라 이내 말을 돌리는 것이었다.

"아니우, 동행하였다가 같이 갑시다. 왜 자꾸만 우리를 떼칠려구 허우."

"그러면 육로를 택하여 해주를 거쳐 예성나루까지 가서 강화로 가는 길이 어떻겠나?"

두 사공은 아무래도 뭍을 걷는 일이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성님 꼭 오시겠수?"

"그래, 뒤따라간다니까..."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해보고 나서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이 길루 조니포에 가서 기다릴 테유. 노자두 얼마 없으니 성님이 오시잖으면 야반

도주를 할 팔자유."

"늦어두 한 사날이면 되돌아올 게다. 조니포에서 만나도록 허지."

우대용은 그들과 헤어져 거름을 재촉하였다. 새벽길을 떠났던 보람이 있어 오후에 검단천

을 지났다. 예정보다는 그래도 빨리 해지점에 도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먼길을 걸어보

지 않았는지라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고, 미투리 뒤꼭지 닿는 뒤꿈치께가 벌겋게 까져버렸으

며 감발은 똘똘 뭉쳐져서 더욱 발을 죄었다. 그는 절둑이며 해지점마을로 들어갔다. 나무리

집은 한산하였는데 패를 지어 학령을 넘어가는 것이 상례이기도 했지만 때가 워낙 어중간했

기 때문이었다. 보부상 몇이 뒤에 처진 일행을 기다리는지 문가에 앉았고 말짐 가진 상고가

두엇이었다. 대용은 상투 바람에 무명 수건 두르고 동저고리에 짐도 없는 차림이니, 얼핏 보

아서는 부근의 농군이나 금골의 채금꾼인 듯 보였다. 그가 구석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

니 그럴 듯한 자들은 보이질 않았고, 소매 속에 두 손을 엇갈려 찌르고 부엌 앞족 마루에

앉은 자가 눈에 띄었다.

"술 한잔 주어."

대용이 말을 던지자 그는 느릿느릿 다가와서,

"안주는 뭘루 할라우?"

"무엇 무엇이 있나?"

"싸라기죽하구 배냇것 튀긴 국물하구 있수."

툭 던지는 말이 알쏭달쏭 들어보지 못한 수작이라 대용은 고지식하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안주치고는 모를 말일세."

그자는 댓진이 올라 시커먼 이빨을 드러내며 쓱싹 웃고는 역시 느릿느릿하게 지껄였다.

"반절 뚝 잘라서 말하는 사람이 먹는 안주요."

대용이는 이것 봐라 하는 눈으로 치켜보았다가 자기도 싱긋이 웃고 말았다. 행세는 중노미

이건만 아마도 산에서 내려온 자라 믿어졌다. 아예 나무리집의 밥붙이 노릇을 하는 모양이

었다. 그자가 보기에도 장사치나 행객은 아니고 인근 녀석인 줄 아는 모양이었고, 무엇보다

도 우대용의 시커먼 얼굴에 제법 기분을 돋군 듯하였다.

"내가 거기와 입씨름할 여가가 없는 사람이오. 이 집 주인 좀 불러주지."

우대용은 정색을 하고 말하였건만 그자는 아예 마루에 다시 주저앉아버리면서 중얼거렸다.

"... 공술 먹을라구."

그때에 집 뒤에서 돌아 나오던 중년의 사내가 그런 꼴을 보고는 혀를 차며 다가왔다.

"노중에 무고하십니까. 술 드시겠소?"

"상전 같은 중노미두 다 있구려."

하니 주막 주인인 듯싶은 그자는 손을 입가에 대고 말하였다.

"내 아우놈인데 성미가 개차반 망종이지요."

"술은 이 집 별호가 감로정이니 소주로 주고... 실은 길을 좀 물으러 왔소이다."

", 어디 사는 누굴 찾으시오?"

우대용은 말 대신에 전대에서 무명 쪼가리를 꺼내어 내 밀었다. 주인이 그것을 펴보더니

대번 안색이 달라지고 주위를 살폈다. 그는 뒷전에 앉은 중노미 시늉에게 가서 그것을 힐끔

내보였다. 역시 그도 당황하였는지 얼른 일어났다. 주인은 슬그머니 빠져버리고 망 서는 자

가 다가와 정중히 허리를 꺽으면서 말하였다.

"이곳은 쉬어 가실 데가 못 되니, 뒷방으루 가시지요, 손님."

우대용이 그의 뒤를 따라서 뒷방으로 들어가 앉으니 그가 물엇다.

"무슨 일루 오셨습니까?"

"산에 오르려네."

"누굴 아십니까?"

"선흥이는 내 의제일세."

", ... 모라뵈엇습니다. 피곤하시면 묵으시고 웬간하면 오르시지요."

망 서는 자는 아가와는 기색이 전혀 달라져 있었다. 제 두령이 워낙에 알려진 장사이니 척

보기에도 우대용이가 보통 사람은 아니리라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런지 시커먼

낯바닥이며 옥니박이로 야무지게 다문 입술이 독해 보이는 것이었다. 우대용이는 술 한잔

먹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질펀히 한숨 자고 싶었으나, 지척에 선흥이가 있는 듯하여 조바심

이 날 지경이었다.

"그냥 올라가지. 해 떨어지기 전에 닿을까..."

"여기서 곧장 지름길을 타면 거기 가서 저녁 드시기 맞춤일 겝니다. 우리가 터놓은 길이

따루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대용이가 끄응하며 일어나려는데 중노미 행세가 먼저 일어났다.

"잠깐, 목이나 축이구 계시지요. 다른 사람이 모시러 올 겝니다."

그자가 나간 뒤에 주인이 몸소 소주 한 병과 안주를 들여주며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그리

고는 은근히 속삭였다.

"산채에 오르시면 두령께 말씀 좀 잘해주십시오. 요즘은 행객이 뜨막하여 벌이가 신통칠

않습니다. 밥붙이를 셋씩이나 두자니 여간 힘겨운 게 아니올시다."

대용은 그저 건성 고개를 끄덕이고 앉았다. 술을 거지반 비웠을 때 역시 다른 장정 하나가

고개를 꾸벅이며 나타났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몇 리나 되는가?"

"예서 학령까지가 십리 길인데 달마산 밑까지와 어슥만한 거리입니다."

대용은 장정의 뒤를 따라서 검단천의 말라붙은 자갈밭을 거슬러 올라갔다. 가끔씩 헐벗은

언덕과 척박한 야산이 지나갔다. 달마산 연봉이 남서로 꼬리처럼 비죽이 내밀어진 곳에서

그들은 험한 비탈을 미끄러지며 올라갔다.

"어이구.. 길이 험하군."

"이 고비만 넘기면 수월합니다."

역시 능선에 오르자 길은 유연하게 오르내리고 훨씬 걷기도 편하였다. 나무가 울창하고 잗

다란 관목이 막아서 있는 숲으로 접어들자 마른 달대가 키를 넘어서 도저히 어디로 갈 것인

지 방향을 못 잡을 판인데, 대용은 겨우 안내하는 자의 상투꼭지만을 표적삼아 걸었다. 후미

진 골짜기로 들어섰는가 하였으나, 어느만큼부터는 나무들을 쳐내어 길이 곧게 뚫려 있었다.

늘 다니던 자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을 듯하였다. 드디어 높은 언덕이 가로막힌 곳이 보였

, 그 부근은 툭 트인 공지였다. 그들이 언덕으로 다가가는 중에 대용은 비로소 그것이 언

덕이 아니라 두어 길 높이의 토성임을 알았다. 좁다란 골짜기 사이를 막은 것이었다. 그들은

틈틈이 나무나 풀을 심어 산과 비슷이 해두어서 가까이 이르기 전에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둥그런 문 앞에도 나무를 심어 눈을 속이도록 되어 있었다. 성벽 위로 한 사람이 나타났고

안내하던 자가 외쳤다.

"손님 오셨다."

"신표 있나?"

대용이가 얼른 무명 쪼가리를 꺼내어 옆사람에게 넘겨주었다. 문에서 장정이 나와 신표를

확인한 뒤에 그들을 들어가도록 하였다. 달마산성의 옛 자리에 수돌네가 보수를 한 곳에다

선흥이들이 다시 안벽에 돌을 쌓아올려 더욱 견고히 해 주었던 것이다. 역시 뒤로는 계곡

물이 가로막혔고 양쪽은 가파른 언덕인데, 가운데에 산채가 있었으니 수돌네가 있던 때와는

달리 집 앞으로 돌벽을 두르고 이어서 왼쪽 산의 연봉에까지 이어놓았으니, 여차직하면 한

편 막아내고 한쪽으로는 북의 추산 마루턱이 닿는 연지봉까지 달아날 수가 있었다. 우대용

은 산채의 형세가 크고 견고함에 은근히 놀랐다. 그들이 아래로 내려가자니

"대용이 성님..."

하면서 선흥이가 달려나왔다. 대용이도 선흥이를 보자 와락 달려들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성님이 아예 아우를 잊었는 줄만 알었소."

선흥이는 두령임에도 행상 시절의 차림대로 허름한 무명 바지 저고리에 행전 두르고 미투

리를 꿴 형상이었고, 다만 표정은 변하여 눈자위에 불그죽죽한 기색이 떠돌고, 어딘다 어른

스러웠다.

"매냥 보구 싶더니 이제사 왔네그려."

마구 반말은 하지 못하고 우대용은 달마산 두령이 되어 있는 선흥이에게 하게를 놓았다.

"어서 들어가십시다. 난 또 가형께서 급히 볼일이 있어 오신 줄 알구 집안에 무슨 우환이

있었나 했지요."

"식구들은 모두들 평안하시더군."

선흥이는 우대용의 두 손을 마주 잡고 반가워하면서 수돌이가 기거하던 제일 안쪽의 초가

사랑으로 데리고 갔다. 산채는 크건만 졸개들은 스물이 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마주

앉았고 선흥이가 아래로 내려가 문안 인사를 올리니, 우대용이도 황급히 일어나 맞절을 하

였다. 자리를 잡고 앉은 뒤에 우대용이 물었다.

"구월산에는 더러 올라가 보았나?"

"길산이 성님두 없는데 거긴 뭘 얻어먹으러 갑니까."

"갑송이 성님은 뭘 하시는지..."

"그래 누굴 보내어 은근히 갑송이 성님만 모시고 송도에나 다녀올까 합니다. 대근이 성님

께서 우릴 몹시 궁금해하실 거유."

"나두 들러볼까 했다만, 이 꼴루야 어디 노잣돈 얻어내러 가는 듯하여 발길이 가지질 않

."

"대근이 성님은 그런 분이 아니니 염려 말우."

"듣기로는 금년 중에 성혼을 치른다더니 어찌되었다던가?"

"아마 아닌갑니다. 장연으루 기별이 왔을 테지요. 해를 넘기는 모양이지요."

밀린 얘기를 나누자니 두서가 따로 없어 서로의 지난 얘기를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

는 두사람이었다. 대용이가 불쑥 말하기를,

"선흥이 너두 많이 변하였구나."

선흥이는 뒤통수를 긁으면서 예전처럼 순진하게 씨익 웃었다.

"웬걸요, 면목 없습니다. 별수없이 도적놈이 되구 말았지요."

"도적놈의 형제이니 기왕에 잘된 노릇이다. 우리 성미나 주먹 가지고야 배알이 있는 놈치

고 양민으루 살 세상이냐. 차라리 처자식 없는 우리 신관이 편하지, 죽지 못해 한세상 사는

게야."

정 많은 강선흥이는 나직하게 내뱉는 대용의 말에 저절로 여러 가지 분심이 일어나, 어느

덧 눈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족들이 없으니 나 같은 놈은 훨훨 돌아다니기라두 한다만, 이것두 하루 이틀이 아니고

보매 어디 든든한 산채나 너른 땅이 있어야겠더라."

우대용이가 은근히 앞날이 걱정되었던지 말하였고 선흥이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대용이가 다시 말하였다.

"언제까지나 도적놈 노릇이나 할 수는 없을 게다 저 묵관 쪽에는 인적이 없는 황무지가 많

다는데..."

"길산 성님이 보구 싶소."

"나두 그렇다. 금강산에 아직두 묻혀 있는지... 참 인흥 언니가 그러는데 느이 봉산으로 이

사간다더라."

", 들었수. 땅을 조금 마련하여 봉산으루 이사를 가라구 했지요. 또 누가 압니까. 관군이

내가 여기 있는 걸 알면 식구들을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 테지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

리 이사를 가시라구 말씀을 드렸더니, 봉산 가시던 길에 들렀습니다."

대용이 물었다.

"헌데 산채 꼴은 철옹성인데 어찌 녹림처사들이 별반 보이지를 않네. 어디 벌이 나갔는

?"

"원래는 사십여 명이 되지만 패가 나뉘었지요. 달마산에는 열여덟 사람이 남았습니다.

건너 불타산에두 그만큼은 됩니다."

하고 나서 선흥이는 백운산 변가네와 합세하여 수돌이네를 달마산에서 몰아내던 얘기며,

어서 심백이와 법호가 있던 불타산 천불사를 첫봉이 형제와 점령하던 얘기를 차근차근 늘어

놓았다. 산채가 두 군데나 자리를 잡게 되니 자연히 불타산에 남자거니 달마산으로 옮기자

니 하는 의견이 분분하여, 드디어는 두 산채에 같이 분거하였다가 여차직하여 관군의 토벌

을 받으면 서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되었다는 것이었다. 불타산에는 첫봉이 형제와 그

를 따르는 졸개들이 남았고, 달마산에는 강선흥이와 변가와 원래 수돌네 패거리였던 졸개들

이 옮겨 왔었다.

"우리 아이들은 학령에서 작은 목을 잡고 있구요, 더러는 천봉산을 타고 재령으루 나가거

나 용문산 줄기로 하여 신천까지 가기두 합니다. 대개는 칠팔 인이 한 대오를 이루지요.

화나 문화나 안악으로 넘어가지 말라구 엄하게 일러두었수. 혹시 구월산 성님들과 의리가

상할까 해서지요. 특히 장연계에는 얼씬두 않습니다. 헌데... 불타산 쪽이 걱정입니다. 그쪽은

뛰어봤자 우리께루 오거나 아니면 장산곶으로 가서 바다에 빠질밖에 없고, 장연 읍치에 너

무 가깝거든요. 아주 장연배때기 위에 솟아 있는 셈이올시다."

"그러면 산채를 폐하라구 이르면 될 게 아니냐."

"몇번이나 권유는 했지요마는, 첫봉이는 원래 내 소싯적 동무거든요. 제법 발끈하는 성미를

꺾을 수가 없습니다. 그 녀석이 계집을 잘못 만났습니다. 고만이라는 음탕한 계집인데 애초

에 수돌이네를 들이 칠 적에 미인계를 썼습니다. 그때에 백운산서 둘이 배가 맞았지요. 그년

이 첫봉이를 꼬드겨서 산채를 내놓지 말라구 부추깁니다.기왕이면 두령의 마누라가 되겠다

는 수작입니다."

우대용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나중에 후환거리가 되겟구만."

"성님 강화 구석에서 사공질하지 말구 나허구 여기서 같이 지냅시다."

선흥이가 대용의 속도 모르고 말하였고, 대용은 빙그레 웃었다.

"실은 나두 이제부터는 도적놈일세. 산도적은 아니지만..."

"아니... 성님이 도적이라뇨?"

강선흥이가 놀라서 되물었다.

:경친 놈이 버젓이 세상살이를 하려던 게 잘못이지."

하고 나서 우대용은 경강에 장사 나갔던 일부터 여러 가지 얘기와, 관에 쫓기는 신세임을

밝히고 나서 모신이의 제안에 대하여 말을 꺼내었다.

"그 사람이 배를 내겠다구 하데. 내 생각으로는 퇴선을 사서 수리하는 것이 나을 듯하군.

아무래두 새루 지으려면 날짜두 잡아먹을뿐더러 나무가 마르지 않아 무거울 게란 말이지.

더구나 싸움을 하려면 배가 느려서는 곧 잡히거나 지구 말거든. 헌데... 사공이야 강화에 나

가면 우락부락하구 노질 잘하는 녀석들이 쌨지만, 배 대일 곳이 있어야지."

강선흥이가 곰곰 생각을 해보더니,

"몽금포에는 벌채장만 피하면 으슥한 곳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쪽은 물길이 경강과 너무 멀잖은가, 예성 수로나 교동이나, 아니면 강화 부근이

좋을 텐데, 얼마 동안 숨을 근거지가 없단 말야."

강선흥이가 밖에다 외쳐서 졸개를 불러보았다.

"변두령 계시느냐?"

"... 탑벌에 내려가신 모양입니다."

"허허, 거긴 자주 내려가지 말랬는데 무슨 일루 또 내려갔어."

"모르겠습니다."

"변서방이라구 여기 부두령이 있는데 전부터 백운산에 피해 있어놔서 부근 형세에 소상합

니다. 저녁이면 올라올 것이니 한번 의논해보시지우."

"뭐 그럴 것 없네. 아무래두 해서는 멀단 말이야."

강선흥이가 딴에는 먼저 산에 올랐는지라 제 소견을 말하였다.

"숨어 사는 놈들에게는 멀고 까깝고가 문제가 아니올시다. 일단 경강 어귀에서 벌이를 해

가지고 뛰어서 어디엔가 한 달포씩 숨어 있어야 할 게유. 그러구 나선 소선에다 짐을 옮겨

싣고서 장물아치에 먹여야지요."

"근처에 무슨 섬이 없을까..."

"멍구미에 몽금성이 있긴 하지만, 그쪽은 짐상들로 일대에 소문이 나 있지요. 이러시는 게

어떻습니까. 일단은 장산곶 후미진 곳에다 배를 대이고 불타산 천불사에서 은거하도록 하지

."

"마땅한 곳을 알아볼 때까지는 신세를 좀 져야겠군."

그날은 늦어서 달마산 산채에서 쉬도록 하고 이튿날 선흥이와 대용이 둘이서 불타산을 오

르기로 의논하였다. 역시 저녁때에 변가가 졸개 하나와 더불어 산채로 돌아왔고, 그는 선흥

이로부터 한참이나 닥달을 받는 듯하였다.

"두령.. 제발 한번 부탁입니다. 내 탈벌에 원한이 있는 부자놈이 사는데, 꼭 털어야 속이 시

원하겠수. 내 그놈에게 대를 물려 소작을 지내다가 땅까지 떨구고 말았수. 이번에 내려간 것

두 정탐을 하려구 갔었지요."

"안된다니까, 바로 코앞에서 그럴 수는 없네. 감영에서 우리를 치기로 작정만 한다면야,

일이라두 당장 군병들을 벌떼같이 모을 수가 있어."

그들은 한동안 옥신각신하는데, 우대용이가 한몫 끼여들었다.

"그 고을 백성들게 포한이 많은 놈이라면야, 들이치고 미곡을 나눠주어 인심을 쓰면 감히

이쪽을 함부로 치지는 못할 게야."

"시방은 겨울입니다. 눈이 많이 내리면 옴치구 뛰지두 못하지요. 겨울이나 넘길 작정입니

."

"장연말고는 인근에 악족한 부자놈이 없수?"

우대용이 변가에게 물으니 강선흥이가 말하였다.

"그건 또 어째 물으시우?"

우대용이는 심중에 생각나는 바가 있었으나, 선흥이에게 면목이 설듯하지 않아서 잠시 망

설였다. 선흥이가 보통 사내 같았다면 남의 산채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을 고까워하였

겠으나, 이미 형제지의도 맺었고 우대용의 사람됨을 아는지라 궁금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두 있수?"

우대용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내었다.

"실은 모신이가 우리에게 배를 내주겠다 하였으니, 장사치란 워낙 믿을 수가 없네. 내가 임

유학 밑에서도 있었고 춘득이네도 있었지만 종내에는 끝이 좋지 못하였어. 아무리 도량이

넓은 자라 할지라두 장사꾼은 이를 탐하는 자란 말야. 비록 모신이와 처음에는 손을 잡구

거래를 하게 되겠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그자들은 내 몰라라 하구 오히려 우리에게

덮어씌울 게야. 장물아치가 어디 그자뿐이겠나. 우리가 직접 상단에 줄을 가져두 되겠지.

근이 성님두 있잖은가...?"

강선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듯한 말씀이우."

잠자코 앉았던 변가가 말하였다.

"이러면 어떻습니까. 경강에서 탈취한 물품은 송도 임방에 먹이고, 해서나 관서 해안에서

벌이한 것은 경강에 먹이지요. 그러니까 교동쯤에 소선이 드나드는 뱃방 한 군데를 정하여

놓고 일에 나서는 병선은 장산곶 근처루 정하시지요. 아이들은 일이 끝나면 불타산 천불사

산채에서 은거하도록 하구요."

우대용은 변가의 얘기를 듣자 무릎을 탁 쳤다. 역시 변가가 나잇값을 하느라고 기중 그럴

듯한 안을 내었던 것이었다.

"소선 두어 척만 모신이께 드나들도록 하면 되겠군. 그리고 송도 나갈 배 두어 척, 합하여

뜸지붕 있는 배를 네 척만 신세를 져야겠어."

"그렇지요. 일 나가는 배가 경강에 나타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변두령의 안이 이치가 딱 들어맞는구려. 퇴선을 구입하였다가는 나중에 배를 본 자

가 모양을 그려서 올리면 훈련원서 대번 알아보니까. 지방 수군들도 대개 어디 배인지 랑

수가 있을 테고... 나는 그냥 장물아치의 신세를 지는 것이 뒤가 께름하여 건조비 마련할 길

을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얘기가 되고 보니 더욱 모신이께는 소선 너덧 척이나 마련

하라 해야겠군."

"그렇지요. 경강서 얼씬거리던 놈들께는 절대루 큰 배를 보이지 마십시오."

묵묵히 앉았던 선흥이가 입을 떼었다.

"좋다, 성님 배 만들 비용을 내가 벌어드려야지."

"강두령, 재령 쪽이 어떻겠수. 재령에 궁방전을 관리하는 집강과 도장이 있는데, 이들에 대

한 백성의 원성이 자자한 모양입니다. 장연 쪽은 하는 수 없이 내 포한을 눌러 참겠으나,

대신 닭이라구 남의 고장에 어슷비슷한 놈들이 있으니 분풀이를 해야겠수."

강선흥이도 우대용을 위하여 흔쾌히 화적질을 나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면, 불타산에는 비용이 마련된 다음에 올라가기루 하십시다."

"한 닷새 걸릴까?"

"충분허우."

"그러면 조니포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으니 노자 좀 들려서 아무나 보내주게."

 

8

우선 들이칠 대상을 확실히 정하고 방비의 허술한 점과 관병의 눈을 피할 방도가 의논 되

었다. 변가는 백운산 시절부터 데리고 다니던 졸개로부터 재령의 악독한 집강 동춘만과 그

의 아래 도장들이며 마름들의 갖은 횡포에 대하여 듣고 아는 바가 많아서 그를 끄집어내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재령 나무리벌 궁장토의 전호 소작인이던 졸개는 동춘만의 집 사정을

낱낱이 꿰고 있었다. 그들은 일단 작당을 하지 않고 간격을 두어 하산하기로 하였다.

대강의 계획을 변가가 짜는데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우대용과 선흥뿐이며 졸개들은 영

문을 알지 못하였다. 드디어 준비가 끝나서 졸개들이 선흥이를 따라서 달마산을 떠나는데

그들은 그들은 재령으로 연이어진 천봉산 줄기를 타고 신천 경계를 지나 삼지강의 아래편

돌여울가지 나갈 참이었다. 선흥이를 위시한 여남은 명의 졸개들이 모두 장사꾼처럼 패랭이

에 봇짐을 지고 네다섯씩 짝을 지었다. 한나절이나 뒤처져서 변가는 갓에다 도포를 입고 술

띠를 두르고 검고 싱싱한 오류마를 타고 하인과 마부를 거느리고 산채를 떠났다. 그의 뒤로

는 역시 갓 쓰고 중치막 입고, 두건 질끈 동인 장정 서넛을 거느린 우대용이가 따라갔다.

그들은 뱀내에서 신천 나가는 길로 접어들어 재령 외곽을 돌아 송림산 기슭에 이를 것이

었다. 송림산 끝에서 달마산까지는 한줄기의 동서로 달리는 같은 맥이었다. 변가와 우대용의

일행은 누가 보기에도 신분을 애서 감추고 먼길을 가는 높은 벼슬아치로 보였다. 탄다릿내

부근에서 포교의 기찰을 받았을 때에도 변가는 고분고분 대답하고 우대용은 필요 이상으로

굽신거리니 오히려 포교가 겁을 집어먹는 것이었다. 주막에 들면 모두들 자리를 피하여주었

, 어떤 자는 일부러 고을의 폐단을 들으라는 듯이 소리 높여 지껄이기도 하였다. 평지를

간다하나 신천부터는 외길로 들어섰으니 백여 리 길에 저녁때에야 도착할 수가 있을 것이

었다. 청수내가 갈려 나간 너른 나무리벌을 내다보고 앉은 부천골에 도착하니 때맞추어 저

녁 짓는 연기가 마을 송림 사이에 가득히 비껴 오르고 있었다.

주막이 있을 리 없으니 촌가에서 하룻밤 묵을 작정이었다. 변가 일행은 그대로 부천골로

들어가고, 우대용은 그곳을 피하여 망월동으로 들어갔다. 먼저 변가는 동구에서부터 과객질

을 하였으나 좀체로 받아주지 않는 고로, 그중 낡고 허름한 서너 칸짜리 초가의 사립을 밀

치고 성큼 들어갔다. 부녀자들만 두엇이 부엌과 마당에서 서성거리다가 다짜고짜로 들어서

는 그들 일행을 보자 서슴치 않고 험구를 하는 것이었다.

"아니, 보아허니 행색이 점잖은 양반이신 모양인데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는 법이 어디

있소?"

"양반이 다 무에야. 양반은 뭐 민가에 돌입하라는 것들인가."

제각기 떠들어대니 그중 졸개 하나가 맞받았다.

"시방 이것이 어느 분의 행차라구 감히 행역인가?"

"행차를 하려면 관가나 역원으루 찾아가시구려."

아낙네는 제법 기개가 있었다. 역시 집안을 둘러보니 부지런히 농사를지어 집꼴이 짜인 중

농의 집안인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에 노인 하나가 뒷전에서 들어서며 기침을 하고 나서 물

었다.

"어떤 분들이시오?"

"주인장, 이거 예가 아닌 줄 아오만 마루나 헛간이라두 빌립시다."

변가가 직접 나서서 점잖게 얘기하니 그 노인은 일행을 주욱 둘러보았다. 필시 미행하는

벼슬아치들처럼 보였고, 그들의 정중한 태도가 더욱 불안하게 여겨졌다.

"날이 저물었으니 한데로 쫓아낼 수야 있겠습니까. 그 대신 식량만은 내어주시면 여자들을

시켜 저녁을 짓도록 하겠소이다."

하면서 맨 가녘의 방을 치워 묵도록 해주었고, 변가는 용벌 산다는 집강 동춘만의 근황을

물었다. 이튿날 송림산 줄기를 타고 도착하여 돌여울 주막에서 묵었던 강선흥이와 망월동

부천골서 제각기 묵었던 우대용, 변가 일행은 청수내가 두 갈래로 흘러가는 용벌의 뒷산 숲

에서 만났다. 그들은 서로 얻어들은 소문을 주고받으며 들이칠 것인가 속임수를 쓸 것인가

를 의논하였다.

용벌 궁방전의 집강 동춘만은 원래가 무과를 통하여 첨사까지 지냈던 자였다. 위인이 군

영 진에 있을 적부터 속은 간교하나 겉으로는 강직함을 표방하였다. 눈은 뱀눈이요, 머리가

작고 용렬하게 생긴 용모였지만, 한번 품은 생각은 가차없이 진행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하는 상대를 꺾었다. 이런 자가 대개 윗사람에게는 언제나 반심을 품고 아랫사람을 믿

지 못하는 법이니 정이란 티끌만큼도 없는 까닭이었다. 무인으로 진장 첨사가 되었다면 많

이 오른 편인데, 몇해전에 변서의 옥이 있었을 때 연루되었다가 스스로 다른 자들의 죄상을

조작하여 발고하고 오히려 상을 받기까지 하였었다. 그는 출신이 한양인지라 지방에 마련해

둔 전장이 따로 없었지만, 해서에서 진장을 지낸 경험이 있어서 재령 나무리벌 밤곶이에 내

려갔다. 내수사와 연을 달고 전 첨사로서는 지나치다 싶은 궁가의 감관을 자청하였던 것이

었다. 궁에서는 오히려 행정 수완이 뛰어난 자를 원하고 있던 판이라 그를 미더워하였었다.

드디어는 도장으로 주저앉더니 오 년 만에 청수방까지 내려와 용벌을 먹어버렸던 것이었다.

처음에 용벌 부근의 그의 땅이란 갈대투성이였던 청수내 천변의 황무지 약간이었다. 그는

그것을 개간 한답시고 어물쩍하다가 차례로 용벌의 민답을 잠식하였던 것이었다. 용벌은 동

춘만의 것이었다. 그는 용벌의 대지주이면서 나무리벌의 궁가 소작을 관리하는 도장들의 우

두머리 집강이 되었다. 나무리벌에는 약간의 민답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왕가의 궁과 세도가

들이 차지한 전장들뿐이었다. 동춘만은 평년작이나 흉년작이나를 막론하고 가혹하게 작료를

거두어 궁가에 수완을 보였고, 조금이라도 불만을 표시하거나 납부가 늦어지거나 능력이 없

어 보이는 전호는 즉각 징계를 하였다. 그는 맨주먹을 들고 와서 수만전을 모았고 자신의

광대한 토지까지 장만하였는데, 그가 관리하는 토지가 나무리벌에는 삼사십 리에 연하여 있

었고 관리하는 농우는 사십여 마리나 되었다. 그는 하인과 고공의 명의로 궁가의 소작권을

모두 빌려두었다가 다시 양민들에게 팔거나 이중으로 소작시켜서 중간 착취를 하였다. 민답

은 그에게 위임하여 부쳐 먹지 않으면 그 고장에서 발붙이고 살지 못하게 해 놓은 뒤에,

래고 얼러서 헐값에 사들였다. 피해 입은 논에 대하여 따로이 재결 수세를 하고 진전은 좋

은 논 대신에 수세하였다. 소작권을 마음대로 주었다가 빼앗는 사이에 약한 전호들이 납료

이외에 거둬주는 잡비를 착복하였다. 마름들을 시켜 소작료를 받아들일 적엔 말감고가 되질

을 속이도록 하였다. 실제로 땅이 쓸모없어 세를 면할 땅에도 유토면세전으로 남징하였다.

동춘만은 용벌에 대담하게도 아흔 칸의 기와집을 짓고서 따로이 사옥까지 만들고 마름 이외

에도 십여 명의 장정들을 거느렸으니 본읍 수령도 그의 권세에는 당하지 못하고 인사를 내

려올 정도였다. 그는 토호로서의 뿌리를 박아버린 셈이었다. 그의 권세는 궁가에 대한 과도

한 상납과 간지에 의하여 쌓아올린 부에 의해서 날로 용벌에 굳어져갔다. 궁가에서도 동춘

만의 양민에 대한 수탈과 행악을 대강 알고 있었으나 워낙에 그 운영이 빈틈이 없는지라 당

연한 폐단으로 눈감고 있었다. 어찌 사람 사는 세상에 이런 압제를 받고서, 숨쉬고 큰 소리

내기를 마다하는 이가 없을 수 있으랴. 몇몇 마을에서 다섯 집씩 짝을 만들어 작료를 낼 때

연대 책임을 지게 하여 치밀히 조직하고 마름과 도장들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를 하건만,

연중에 항거하는 농민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웃집과 친척들이 서로 감시하도록 뽑은 다섯

집의 우두머리 주비들 사이에서도 마름에 대항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처음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이를테면 논의 소출이 제각기 다른데 상등답은 한 두락에 서 말이 나오고,

등답은 한 말이 나오는데 그 지품들을 동일하게 낯추는 방법이 있었다. 실제로 농사짓는 자

라 할지라도 그 논을 다루어본 자가 아니면 지품을 짐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비옥한

땅에다 조도를 심고, 척박한 땅에는 만도를 심어서 수확에 차질이 나게 하였다. 병작을 하는

농민들은 민답과 궁답을 함께 짓다가 차차 궁답을 먹어 들어가 제 논을 늘려나가기도 하였

. 명목상으로 임자와 작인이 반타작이었으나 벼를 잘라 볏단을 묶을 때 큰 단과 작은 단

을 묶어놓는 것이었다. 감사가 끝난 다음에 다시 재타작을 해서 붙어 있던 알곡을 털어먹기

도 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이 이렇게 남겨먹는 곡식의 양이란 가을 들판의 참새떼가 겨우 낟

알 몇되 축내듯 하는 짓이었다. 징수가 가혹하고 땀흘려 농사지어 모두 빼앗겨버리니 그렇

게라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연히 마름의 감시하는 눈초리에 핏발이

서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집강 동춘만은 도장들을 핍박하였고, 도장들 또한 마름을 들볶았

. 그들은 징수한 작료가 모자라면 솥이건 그릇이건 누더기이건 가리지 않고 차압하였다.

또한 몇몇 농민들은 둑이 무너져서 월당강의 흙탕물에 논이 침수되기도 하였는데 다음해를

위하여 구호는커녕 집을 비오게 하고 들판으로 온 가족을 내쫓기도 하였다. 그러니 유민이

되기 전에 간혹 어떤 장정들은 작당하여 마름이나 동첨사네 밥붙이들과 몽둥이다짐도 벌였

으나 잡혀서 악형을 받거나 동춘만의 사옥에 갇혔다. 따라서 집강의 사옥에는 언제나 죄없

는 죄수들이 득시글거렸다.

집강 동춘만에게도 한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한양 궁가에서 내려보내는 궁감의 눈

에 벗어나서는 안되는 점이었다. 궁감은 차지라 하여 내수사에서 오랫동안 왕가 살림을 맡

은 전수 중에서 신임받는 이가 뽑혀 오게 마련이었다. 그는 궁차라는 장무 노복들을 동행하

게 되어 있었다. 대대 소작료 징수가 가을에 이루어지니, 신선한 바람이 불면서 도착하여 서

리가 비칠 때까지 머무는 것이 상례였다. 연중 한번만 장토에 내려오느냐 하면 그렇지를 않

고 개중에는 탐욕스런 자가 있어서 무슨 궁의 개축 비용이다, 누가 경사났다, 모귀인이 왕손

을 가졌다, 유람중이다 하는 갖가지 핑계를 대고서 일 년에 서너 차례씩 집강을 찾았다.

감은 그때마다 동춘만에게서 막대한 뇌물을 먹을 수가 있었다. 동춘만이 제 전장에서도 막

대한 소작료를 먹을 뿐만 아니라 갖은 부당한 방법으로 장토를 관리하고 있음을 궁감들이

잘 알기 때문이었다. 궁감이 내려오면 집강 동춘만이네 집은 돌연 잔칫집으로 바뀌고, 귀로

에는 짐을 실은 나귀가 줄을 지어 따라갔다. 갖은 특산물들이 궁인들의 선사품으로 실려갔

, 그때마다 소작지의 양민들은 특산품을 징발당하느라고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대개

이때에 설치는 것은 집강네 겸인인데, 궁감의 세 기니 음식에서 밤에 잠자리에 수청드는 기

생을 붙이기까지 온갖 정성을 다하는 것이었다. 옹주라든가 부마라든가 상궁 나인들께로 진

상할 뇌물이 실려가는데 일반 주전부리에서 완상할 기화요초라든가 매, , 여우 같은 짐승

들가지 잡아 보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이 너른 땅의 관리인 노릇을 오래 해먹을 수가

없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수탈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지고 항거하는 자가 늘어가니

사옥이 넘칠밖에 없었다. 이러한 소문이 인근 사방에 자자하건만, 왕가에 직접 줄을 대고 있

는 동춘만의 권세를 넘볼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달마산 화적떼들 사이에 의논이 정해지기를 속임수와 습격을 병행하기로 하였다. 선흥이

가 거느린 장사꾼 차림의 패거리는 남고, 변가와 우대용이가 차인 노복을 거느린 차림으로

용골 동춘만이네 대궐 같은 집으로 향하였다. 먼저 우대용이가 하이 둘을 거느리고 바삐 나

아가 동첨사네 솟을삼문 앞에 이르렀다. 가운데 문은 굳게 닫혀 있으되, 옆문이 열렸고 건장

한 자가 문 옆에 지켜 서 있었다.

"집강 어른 계시냐?"

"첨사 나으리께선 출타중이시오. 어디서 오신 뉘시오니까?"

우대용은 먼저 마음이 한결 놓였다. 서투른 짓을 하느라고 갓에 중치막에 잔뜩 모양을 내

었건만, 망건 두른 이마가 가렵기 작이 없고 긴 옷자락이 거추장스러워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내수사 서리다. 시방 신임 궁감 나으리를 모시고 전장을 둘러보러 내려오는 길이다."

"어이쿠! 몰라뵈었소이다."

하더니 놈은 허리를 굽히고 연신 기면서 그를 안내 하였다. 바깥행랑채에서 그가 소리쳐 겸

인을 불렀다. 겸인은 낮잠을 자던 중이었는지 부스스한 모습으로 뛰어나왔다.

"궁감으로 내려오시는 전수 어른을 맞을 채비를 하게."

겸인은 서렁줄을 당겨서 하인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나서 큰사랑으로 대용을 안내하였다.

큰사랑은 동춘만이가 ㅆ는 곳이지만 궁감이 내려오면 언제나 자신은 안사랑으로 피해 가던

것이다 잠시 후에 변가가 의젓하게 궁차들을 거느리고 대문으로 들어서고 거침없이 큰사랑

으로 들어가 앉았다. 아직 글방도령인 열다섯살짜리 동춘만의 아들이 아비 대신 현신하였으

, 무료하던 아낙네들은 점심 준비를 하느라고 법석을 떨었다. 겸인은 차마 마루에도 오르

지 못하고 섬돌 아래 부복하여 내수사 서리라는 우대용의 하명을 기다렸다.

"각 도장들을 현신하라 이를까요?"

우대용이가 서리 시늉은 하고 있지마는 어쩌는 게 좋을지 몰라서 하는 수 없이 변가에게

들어가 물었다.

"도장들을 불러 인사를 드린다는데..."

"한 놈이라두 낯을 익히면 좋을 게 없수. 덮어놓고 불가하다 이르고 시방 내려온 것을 수

령에게도 극비로 하라 이르시우. 그리구 어서 동춘만을 부르라구 허시우."

우대용이가 변가의 말을 듣고 나와서 자못 불쾌한 안색으로 말하였다.

"공연히 떠들석할 것이 없다. 내수사에서는 은밀히 장토 관리하는 실정을 알아보고자 내려

온 것이니 도장들은 물론이요 본읍 안전께도 알릴 필요가 없으시다는 전수 나으리의 분부

. 그리고... 어서 집강 어른을 오시도록 하여라. 귀로의 일정이 빡빡하여 지체할 여가가 없

으시다."

", 알아 모시겠습니다."

겸인이 큰사랑을 물러나오며 스스로 기미를 살피자니 추수도 다 끝난 한가한 겨울철에 아

무 기별도 없이 내려온 낌새로는 뭔가 궁가에서 책을 잡으려고 온 것이 분명하였다. 누군가

본읍 수령이거나 암행어사 하여튼 일반 백성이라도, 뭔가 밑구린 사연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으면 투서라도 들어간 성싶었다. 겸인은 하인들을 불러모아 큰사랑에 잡인의 범접을 엄

금시키고 사옥으로 나가는 문을 굳게 닫아놓으라 이른 뒤에 밤곶이에 나간 동춘만이 급히

오도록 사람을 보냈다. 갖은 산해진미가 미어지도록 올라 있는 다담상이 큰사랑에 들여지고

급히 돌여울서 온 기생이 곁에 앉아 술을 쳤다. 변가와 우대용이가 상을 따로 받았고, 궁차

역할의 졸개들은 마루에서 저희끼리 상을 받았다. 기생이 술을 쳐서 두 손으로 맞잡아 올리

건만 변가는 소매를 들어 뿌리쳐 내렸고, 술잔이 기생의 섬섬옥수에서 동그라져 치마를 적

시었다.

"에그머니..."

"이 집 주인은 도대체 어딜 갔길래 네 따위들이 술을 따르느냐. 우리는 여기 행락하러 온

것이 아니다."

변가의 언동에 따라서 우대용이가 꾸짖었다.

"물러들 가거라!"

기생들이 게눈 동작이 되어 옴찔하더니 뒷걸음질로 재빨리 빠져나갔다. 변가가 속으로는

술과 고기를 마음껏 포식하고 싶건마는, 나중에 엄포를 놓을 생각으로 꾹 눌러 참았다. 그는

국물을 조금 뜨고 전 나부랭이 두어 개 집었다 놓았으며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설렁줄

을 당기니 마루 아래 주추와 더불어 붙어 있던 하녀가 고꾸라지며 대령하였다.

"상을 물리랍신다."

상이 내려온 꼴을 보니 술은커녕 음식조차 건드린 흔적이 보이질 않았다. 정말 무슨 일이

있기는 있을 모양이라고 하인배들은 저희끼리 쑥덕거렸다. 동춘만이네 집구석이 불안하게

끓고 있는데, 오후 늦게야 동집강 본인이 전갈을 받고 허겁지겁 당도하였다. 그는 우선 안사

랑에 들어가 겸인의 귀띔을 받게 되었으니, 궁감이 대개 어떤 자인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

.

"말씀 맙쇼. 얼굴은 시커멓고 우락부락한 것들이 어쩌다가 궁가에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장꼬장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궁감으로 내려온 자의 직함이 뭐라더냐?"

", 저희끼리 하는 소리가 전수 따위인 모양입니다."

"... 전수라..."

동춘만이 물러나와 집강 노릇을 하고 있더라도 출신이 일개 진을 다스리던 첨사인지라 제

깟 것이 아무리 서슬이 푸르다고 하지만 자기의 위의를 당하랴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태

껏의 예로 보아 한양 궁가에서 내려왔다는 자들이 대개 첫날은 야차요, 둘쨋날은 손님이다

, 샛쨋날은 동무요, 돌아가는 날은 딸 두고 가는 사돈이 될 게 뻔하였다. 첫날은 적당히

굽신거리고 둘쨋날은 주색을 겸하여 진을 빼고, 샛쨋날은 뇌물을 먹이고, 마지막 날에는 궁

가에 가는 봉물에 붙여 청탁을 넣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팔팔하고 기개가 있다손 치더라도

대개는 둘쨋날쯤 가서 물에 불린 북어 꼬락서니가 되게 마련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인심이란 어디 가나 고만고만한 형국으로 돌아가는 법인데, 제깟 놈들

이 별수가 있으랴."

동춘만은 우선 정자관도 벗고 맨상투 바람에 구겨진 중치막 차림으로 큰사랑으로 내려갔

. 겸인이 앞장서서 달려가 통자를 넣었다.

"집강 어른 현신이ㅗ."

현신이라 함이 가당치 않지마는 대개의 궁감들이, 네 이놈 동춘만이 옛적 첨사라고 시방

집강을 까먹으면 마음껏 능멸하리라 다짐했다가는, 드디어 그런 첫마디에 이것 봐라! 마음

이 누그러져 고쳐 먹게 되던 것이었다. 변가가 전호의 눈칫밥으로 중년 뼈대가 굵었으니 금

세 알아채고 큰기침을 앞세우며 마루로 나섰다.

"주인 없는 집에 실례가 많소이다. 내수사 변전수요."

"아이구 이렇게 먼길로 누추한 고장을 찾아오셨으니, 영광이외다."

"원 별말씀을.. 오면서 둘러보니 아주 포실한 고장입디다."

"그게 모두 성은입지요?"

"태평성대올시다."

변가의 수작이 제법 격에 척척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소리가 내려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년 파종 전에 전호의 호구조사와 토

지대장을 다시 정리한다 하여 미리 의논도 할 겸 온 것이올시다."

미리 내려왔다는 말에 동춘만은 우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러면 그렇겠지, 네가 미리

내려와서 내게 귀띔을 해주고는 돈냥이나 얻어가려는 수작이고나 여겨졌다.

"아무렴요... 나중에 황급하여 차질이 나느니 예서 기간을 넉넉히 잡으시고 앞뒤를 맞추는

것이 일의 순서입니다."

변가는 어조를 바꾸어서 그를 똑바로 노려다보며 말은 우대용에게 던졌다.

"자네 이 댁 겸인을 불러서 토지대장을 가져오라 이르게."

우대용은 영문을 모르는 채로 읍하고 나가니, 동춘만은 그제서야 상대가 녹녹치 않음을 느

꼈다.

"지난번 추수 뒤로 번잡한 일이 많아 대장을 미처 정리 못하였습니다."

"... 그냥 보십시다."

변가는 일부러 딴청을 부리다가 빙긋 웃으면서 말하였다.

"도장들과 마름을 다루자니 송사가 많겠지요?"

"어리석은 백성이라 골칫거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올시다."

"내 듣자허니 집강 어른 댁의 사옥이 죄인으루 넘친다구 합디다."

"항조하는 놈들이나, 공공연히 소작인들을 선동하고 다닌 주비놈들입니다. 일단 처리가 된

자들은 본읍의 옥에 보내고, 갚아낼 능력이 있는 자들만 남겨두었지요. 이러지 않고서는 도

저히 관리가 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내가 연전에 둔전도 관리하고 읍치에도 경험이 있어놔

서 내수사와 궁의 제반 수납과 봉물 진상을 해내는 것입니다."

변가는 그들이 인근에서 들었던 소문을 염두에 두었다.

"듣자허니 이곳에서 직접 백성들을 징치하여 주뢰 틀고 단근질하고 장형을 가하는 등,

느때에는 죽어 나가기도 했다는데 사실이오?"

동춘만이 변가의 말을 들으니 집안 식구끼리의 내밀한 약조 사항이라 덮어두고, 전장과 수

확에 대해서만 얘기를 해야 될 터인데 꼬치꼬치 묻는 것이 생트집만 같았다.

"그런 일은 재령군수가 알아서 하는 일이겠고... 어찌 도장들 현신이나 받으시렵니까?"

우대용이가 눈치껏 말하였다.

"토지대장을 보이라지 않습니까?"

동춘만이 집강으로서 아니꼽기는 하였으나, 전수의 장계 한 장이면 즉각 파면되며 따라서

엄청난 수세의 이권도 잃게 되는지라 하는 수없이 설렁줄을 당겼다. 그러나 진자 궁감이라

할지라도 미리 궁차를 내려보내어 실정을 살피게 하고, 전호의 속내를 캐어 준비를 한 연후

에 대장을 알아보게 되어 있거늘, 하물며 변가나 우대용 같은 자들이 어찌 알아보랴. 그저

엄포나 놓자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동춘만이 내놓을 대장은 언제나 감사에 대비해놓은 완전

무결한 것이요, 실은 내밀한 것에 정말 대장을 감춰두고 있으리란 짐작들을 하였다.

과연 겸인이 날라온 두루마리더미는 질서정연히 정리되어 있었고, 어느 방 어느 골에 토

지가 몇 결이며 소출이 얼마이고 전호가 몇이라는 식으로 자세히 적혀 있었다. 변가는 두루

마리를 두어장 집어서 대강 훑어보는 체하였다. 동춘만은 그러는 꼴이 가소로워서 혼자 느

긋한 심정이 되어 이 어리석은 전수와 서리 나부랭이를 마음껏 조롱하는 기분이었다. 변가

는 그것을 한옆으로 밀어놓았다.

"나중에 궁차 아이들을 보내어 장지를 살피게 하게, 내일은 함께 재령군수를 만나러 가십

시다."

동춘만은 그러면 그렇겠지, 감사는 무슨 감사야,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이제는 아주 은근히

말하였다.

"저희 고장이 풍광이 좋기로 알려져 있으나, 시방은 겨울철이라 유람 다니실 데가 별로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쓸 만한 기생들이 있으니 흥겹게 쉬십시오. 이 집은 모두 전수 어른의

집이거니 여기시고 즐기십시오."

하고나서 변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겸인에게 말하였다.

"악공을 부르고, 돌여울 기생들을 불러라. 그리고 궁감 어른을 따라온 궁차들에게는 모두

열 냥씩 나눠주도록 하여라."

"그리 과히 할 것이 없소이다. 우리는 따로 사처를 정하여 쉬겠소."

변가가 짐짓 말하니 동춘만은 펄쩍 뛰었다.

"민가에서는 물 것도 많고 불편하여 쉴 데가 못 됩니다. 또한 제 체면이 말이 아니올시다.

오늘은 마음껏 행락을 하시라니까요."

그들이 수작을 나누는 동안 아가부터 우대용은 중요 문건이 들어 있는 궤나 문서통이 어디

에 있는가를 살피고 있었다. 다시 잔치 준비가 진행되고 날은 저물어갔는데, 변가로서는 이

집안에서 시간을 끄는 것이 몹시 불안하였다. 이제 동춘만과 마주 앉아 한담을 나누어야 되

겠으나, 어쩌다 궁가의 귀인들 얘기가 나오다 보면 말을 맞추기가 어렵겠기 때문이었다.

춘만은 또한 그 나름대로 눈앞의 부정을 가리우기에 급급하여 전수 일행을 의심해볼 여가가

없었고, 그가 오기 전에 겸인 등이 영접하며 궁감의 도첩 따위를 살펴본 것으로 믿고 있었

. 그러나 궁차로 꾸민 달마산 졸개중에 겁없이 들이켠 자로 취한 자가 있어, 마당을 오락

가락하는 계집종 하나를 눈독 들이다가 안마당까지 뒤쫓아가 덥석 껴안고 말았다.

"에그머니나..."

질겁을 하여 주저앉으니 졸개는 낄낄거리며 땅바닥에 자빠뜨리고 위로 올라탔다. 마침 지

나가던 하인이 그 꼴을 보고는 분을 참지 못하여 발로 등을 밟아 버렸다. 마당에서 왁자지

껄하며 다투는 소리와 계집종이 째지는 듯한 고함소리에 모두들 우르르 몰려나가보니 졸개

놈이 비수를 빼어들고 휘둘러 몸집 좋은 하인에 대항하는 중이었다. 하인은 벌써 팔을 찔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우대용이 큰일났다 싶어서 졸개에게로 다가서서,

"칼을 버려라!"

하였으나 졸개는 이미 포악해져서 성깔을 누르지 못하고 짓씹었다.

"너는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길래, 남의 패에 끼여들어 이래라저래라 하니. 저리 비켜..."

우대용이 틈을 주지 않고 옆으로 비켜 나가면서 곧추 찔러 들어오는 칼을 피하면서 졸개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잡아서는 그대로 뒤로 홱제쳐 꺾으며 주먹으로 뒤통수를 내려치니 개

구리 패대기쳐지듯 캑하면서 엎어져버린다.

"이놈을 끌어다가 포박해두어라. 날이 새면 멍석말이로 징치하겠다."

뒷전에 서서 구경하던 졸개 둘이 달려들어 혼절한 놈을 질질 끌고갔다. 그런데 마당에 둘

러섰던 둥춘만네 집 사람들은 모두 말없이 그들을 노려보기만 하였고, 겸인은 그제사 정신

이 들었는지 안사랑으로 또르르 달려갔다. 동춘만에게 본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우대용이

큰사랑으로 나가니, 변가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거 큰탈이오, 눈치채지 않았을까?"

"선흥이가 초경 무렵에 이 집 건너편에 매복하여 있겠다 하였으니, 지금쯤 와 있는지두 모

르지. 변두령은 마음을 놓고 시간을 끌어보우."

"동춘만이 눈치를 챘으면 일은 글렀소. 이 집에는 그가 기르는 힘센 장정들이 스물 남짓

된다오."

우대용이가 별안간 웃통을 훌훌 벗어젖히더니 중얼거렸다.

"나르 징치하시우. 아이들을 시켜서 나를 때리며 꾸짖노라면 제놈들이 꼬치꼬치 묻지는 못

할 거외다."

하는 수 없이 변가는 응낙하고서 목청을 높여 네 명의 졸개들을 모두 모아서 호통을 쳤다.

"이놈을 마루 아래 끌어내리고 형장을 갖추어라."

모두들 머뭇거리다가 우대용을 주르르 끌어내려다가 땅바닥에 엎드리게 하니 대용은 꼼짝

않고 엎드렸다. 드디어 굵다란 작대기로 사정없이 우대용을 두드리는데 대용은 비명을 높이

지른다. 동춘만이 하이들을 단속하여두고 큰사랑으로 돌아 나와보니 벌거숭이의 서리라는

자가 벌서 반죽음이 되는 참이었다.

"네 이놈, 궁노 하나를 다루지 못하여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났으니, 서리는 무엇을 하는

직임이냐. 예가 한양이었다면 너는 살아남지 못하였으리라."

변가가 동춘만이 나타나자 더욱 엄히 다스리는 체하였고, 동가 자신이 보기에도 웃통이 벗

겨진데다 흙투성이로 널브러진 서리는 곧 죽을 듯이 보였다. 공연히 제 집에서 관인 하나가

죽어 나가 좋을 것이 없겠다 싶어져서 동춘만은 황급히 변가에게로 쫓아 올라갔다.

"궁감, 참으시오."

"아닙니다. 위엄을 갖추고 공명정대한 예를 보일 내수사의 관리들이 이런 거동을 보여서

면목이 없소이다."

"하긴 아랫것들이 술에 취했던 모양인데, 그렇다구 우리가지 파흥이 되어서야 쓰겠습니까.

더욱이 서리는 아무 죄도 없으면서 저런 형을 당하니, 주인 된 사람으로서 오히려 죄송 천

만이외다."

변가는 한참이나 씨근거리다가,

"하인들 방에다 처넣어두어라!"

라고 내뱉었다. 변가를 떼말리다시피 해서 큰사랑으로 데려간 동춘만이 담배를 권한다, 술상

을 들인다, 악공과 기생을 동석시킨다며 법석이었다. 자연히 변가는 침울한 안색이 되어 별

반 얘기가 없고 동춘만이 혼자서 떠들었다. 바야흐로 하인들도 큰사랑 쪽에는 얼씬 않고 안

채에서도 상 물리는 일만 남았으므로 계집종 몇만이 대기중이었다.

하인들도 저희끼리 손님 덕을 입어 술깨나 좋이 마셨다. 그동안에 우대용은 슬그머니 빠

져나와 졸개들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나서 행랑채에서 솟을대문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삼문 옆 헛간의 어둠속에 숨어 거 바깥을 살펴보았다. 작은문의 빗장을 열고 내다보니 길

쪽은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대용이 허리춤에서 부시를 꺼내어 몇번을 쳐대니

저편에서 불똥이 퍼렇게 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문을 닫아놓고 기다리자니, 인기척

소리가 다가왔다. 그는 다시 문을 열었다.

"성님, 나요."

선흥이가 신호를 보고 다가온 것이다.

"슬슬 들어와, 아무래도 좀 늦어지는 것이 더욱 좋겠지만 변두령이 자신이 없는 모양이데."

대용은 집의 위치를 여기저기 알려주었다.

"이쪽은 행랑채다. 하인놈들은 그 가운뎃방쯤에 모여 있고, 오른편이 큰사랑, 그뒤가 안사

, 그리고 제일 끝이 안채야. 장정놈들 중에 재간이 있는 자들은 외편 끝의 서기사에 기거

하는데 자네가 애들 몇 데리구 가게. 나는 행랑채를 맡을 테니 사랑과 안채에는 먼저 들어

온 우리 아이들이 맡아서 할 게야."

선흥이의 뒤를 따라서 달마산 화적패 열댓 명이 스물스물 문 안으로 들어서서 헛간 앞에

죽 붙어 서 있었다. 모두들 손마다 환도와 장창등의 병기를 쥐고 있었다.

"서기사는 들이치는 즉시 닥치는 대루 죽여야 해. 집강놈이 전 첨사이니, 아마도 장정들이

란 게 무예 조련이라두 받은 자들일 게야."

"알았수..."

선흥이가 손짓을 하여 하나씩 중문간을 통과하여 서기사 쪽으로 달려나갔다. 대용은 그들

이 서기사를 들이칠 적에 왼편의 행랑채를 급습할 작정이었다. 선흥이가 서기사의 쪽문을

밀어보니 안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누군가가 왼편 행랑채에서 나오기만 하면 벽에 붙어 선

이들 무리를 발견할 것이었다. 선흥이가 문 곁에 나란히 있는 방을 살피고 오른편의 방문이

바깥쪽으로 트인 것을 보았다. 그는 우선 졸개 몇 명을 그리로 들어가게 하였고 침모나 표

모 등의 늙은 여자가 두엇 누운 것을 이불째로 덮어 눌러두도록 하였다. 안쪽으로 들어간

졸개가 방문을 열고 나와 문의 빗장을 빼내었고 그들은 차례로 서기사 안으로 스며들어간

뒤에 문을 닫았다. 그런 모양을 보고 우대용은 나머지 졸개들을 광 앞의 마당에 적당히 벌

려 서도록 하고는, 또한 몇은 행랑의 연이어진 마루에 올라서도록 해놓고 자기도 마루 위로

올라갔다. 행랑쪽의 하인들을 둘러쌌고, 서기사에 있을 장한들을 선흥이가 막아놓았으니 이

제 집강네 집은 완전히 수중에 들어온 셈이었다. 약속대로 우대용이 먼저 행랑채의 그중 크

고 너른 가운뎃방으로 다가갔다.

술동이가 비었는지 한 놈이 뭐라고 투덜대면서 문을 여는 참이었다. 한쪽으로 붙어 섰다

가 그가 뒤로 미닫이를 닫고 마루로 한걸음 내딛자 마자 대용은 그의 목 아래로 팔을 끼우

면서 한 손으로 머리 꼭지를 주먹으로 내질렀다. 그리고 마루 아래로 밀쳐주니 기다리던 졸

개가 받아서는 섬돌 아래 조용히 눕혀놓았다. 대용은 문 밖에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중얼거

렸다.

"모두들 나오게..."

안에서 두런거리던 소리들이 뚝 그쳤다. 그리고는 그중 하나가 문을 열면서 되물었다.

"누구여, 무슨 일인가...?"

그러나 어둠속에 몸을 가린 우대용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대용은 문 곁에 몸을 감추

고 다시 속삭였다.

"집안에 대적이 들었네, 조용히들 나오라구."

방안에 앉았던 칠팔명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고 문가에 앉았던 자들부터 영문을 모른 채

로 엉거주춤 바깥으로 나섰다. 나서 보니 드문드문 어둠속에 사람의 태가 보이자,

"웬놈들이냐?"

제법 호기있게 내지르며 그들은 제 동료들을 두리번거렸다. 마루 위에서 노리던 달마산 패

거리들이 일시에 그들을 둘러쌌고 그들 중에 몇은 대담하게 마루 아래로 뛰쳐내려갔건만 대

부분은 질겁을 하여 뒷걸음질로 방으로 밀려들어갔다. 마루 아래로 내려섰던 자들은 곧 들

이대어진 환도와 창날에 두 손 놀릴 틈이 없이 주저앉아버렸는데 그래도 힘을 믿고 손발을

재게 놀리면서 고함치던 자는 가차없이 창에 꿰이었다. 다른 방에서도 한두엇씩 뛰쳐나왔다

가는 대부분 병장기에 무릎을 꿇었다. 대용은 문을 가로막고 서서 조용히 말하였다.

"나라에서 하명한 일이니, 너희들이 반항 않으면 해치지 않을 것이로되 추호라도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단칼에 베일 것이다. 행랑채 광의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는가?"

수노인 듯한 늙은이가 고분고분 답하였다.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방안에 모아놓은 자들을 하나씩 줄줄이 엮어서는 행랑채의 광에다 빠짐없이 처넣었

.

선흥이는 수돌 밑에서 오랫동안 달마산 적당 노릇을 해왔던 날렵한 자들만을 데리고 서기

사 안마당에 들어섰다. 비록 급습이라 하나 상대는 녹녹히 볼 수 없는 첨사의 무사들인지라

선흥은 왼쪽 부엌과 안채로 들어가는 오른편 문가에 졸개들을 벌려 세우고, 혼자서 칼을 들

고 마당에 버텨서서 소리쳤다.

"불이야, 불 불!"

선흥의 고함소리가 들리자마자 제일 먼저 열린 것이 겸인이 기거하는 안방 쪽이었고 이어

서 건넌방의 두 방문이 이리저리 열렸으며 문곁의 끝방 문도 열렸다. 겸인이 마루로 뛰어나

오며 선흥이를 대충 짐작으로 하인인 듯 여겨서는,

"어디 어느 곳이냐. 아이들은 모두 불 끄러 나섰느냐?"

하면서 마루 아래로 내려와 바삐 신을 꿰는데, 선흥이는 그가 늙은이인지라 그냥 내버려두

자니 방안에서 먼저 그의 손에 들린 칼을 본 모양이었다.

"칼 들었다.!"

"웬놈이냐?"

방마다에서 무사 장정이 뛰쳐나오는데 선흥이가 쓱 휘둘러보자 하니 모두 다섯이다. 그들

은 각자가 환도를 빼어들고 있었으며, 특히 끝방에 있던 자는 엄파 쇠몽치를 들고 있었다.

어둠속에 숨어 있던 졸개들이 그들을 덮치며 달려드는데 쇠 부딪는 소리가 요란하고 불빛이

번쩍였다. 소몽치를 가진 자는 안채로 나가는 문 곁에서 뛰어나오는 졸개들의 칼날을 받아

치며, 연이어 하나를 쓰러뜨리고 마당 가운데로 나왔다. 선흥이에게로 곧장 달려들어 쇠몽치

를 휘두르니 선흥이는 날카로운 기세를 대적하지 못하고 연신 허리를 뒤로 꺾거나 좌우로

몸을 비키면서 뒷걸음질하였다. 부엌 벽 앞에까지 밀려갔는데 쇠몽치가 위로부터 곧추 내리

꽂혔다. 선흥이가 옆으로 비켜나면서 한 손으로는 상대의 가슴팍을 떼밀었다. 부엌 벽이 쇠

몽치에 맞아 와르르 무너졌고, 상대는 선흥이께 밀려서 뒤로 호되게 궁둥방아를 찧으며 나

가떨어졌다. 선흥이가 틈을 주지 않고 금강보운 자세로 칼을 쳐들었다가 내리치는데 상대는

도두로써 엄파를 들어 가로막았다. 챙겅하면서 칼날이 쇠에 부딪혀 중동이가 부러지고 말았

.

"너는 이제 죽었다."

상대가 엄파를 다잡고 손에 침을 뱉으면서 일어났다. 선흥이는 부러진 칼을 내던지고 잠깐

두리번거리다가 마루 위로 뛰어올랐다. 상대는 쇠몽치를 월야참선으로 휘두르며 마루로 다

가왔다. 선흥이 두리번거리다가 머리 위에 걸쇠에 매어달린 문짝을 보았다. 놈이 신방돌을

딛고 툇마루에 한 발을 걸치는데 선흥이가 허공에 매달린 문짝을 손에 잡아 아래로 당겨버

렸다. 걸쇠가 빠져버리며 문짝이 상대의 면상을 치면서 떨어져 나갔다. 그자가 뒤로 자빠지

는 틈을 타서 선흥이는 떨어진 걸쇠를 쥐고 마루 아래로 뛰어내리면서 가슴팍을 밟으니 놈

이 머리를 들었고, 선흥이가 사정없이 걸쇠 꼬챙이를 목에다 찍었다. 상대는 고함을 지르며

온몸의 기운을 잃었다. 한결 부드러워진 상대의 팔을 잡아 반쯤 일으켰다가 그대로 신방돌

위에 내리치니 상대는 머리를 돌에 부딪고 잠잠하여졌다. 선흥이가 엄파 쇠몽치를 손에 집

어 들고 보니, 자기에게 이렇듯 알맞은 무기가 따로 없었다. 아직도 뒤엉클어져 싸우는 졸개

들께로 뛰어가, 닥치는 대로 쇠몽치를 휘두르니 환도를 휘두르던 자 하나가 등덜미를 맞고

등뼈가 대번 부서져서 주저앉아버렸다.

"... 살려주오."

다섯 중에 셋이 죽고, 문 쪽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자들이 무기를 버리고 꿇어앉는 것이었

. 겸인이란 자는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머리에는 번철로 가리우고 달달 떨고 있었다. 선흥

이는 발길로 안채의 문을 내질러버렸다. 문짝이 와지끈했으나, 좀체 부서지지 않자, 선흥이

가 엄파를 쳐들어 문 가운데를 후려치니, 빗장이 부러지고 문짝이 뻥 뚫리면서 문이 화들짝

하니 열리는 것이었다. 안채로 돌아 나가기도 전에 미리 들어가 부녀자들을 한방에 모아놓

은 졸개 두명과 부딪쳤다.

"그쪽은..."

"모조리 안방에 처넣고 문고리에 숟가락을 질러놓았습니다."

"너희들이 지켜라."

안채 맞은편이 안사랑이요, 그 건너편이 또한 큰사랑인데 다시 문간이 있었다. 먼저 들어간

우대용의 일행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집안의 곳곳에 졸개들을 경계로 세워두고 우

대용과 강선흥이는 큰사랑으로 올라갔다.

이미 집안의 시끄러운 기미를 알아챈 동춘만이가 몸소 나와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때

마침 기회를 엿보던 졸개 두 명이 마루로 올라섰고,

"이놈을 묶어라!"

변가가 상을 차며 일어나 외치니, 동집강은 얼른 피하며 문갑 위에 세워둔 환도를 집어들었

던 것이다. 졸개 두 명이 가진 무기가 모두 환도이고 보매 동춘만과 일전을 겨루어야 했던

것이었다. 변가가 기생들이 일어나 비명을 지르는 틈을 타서 방을 빠져나오려니 동춘만이가

정확하게 변가의 등을 노리고 칼날을 날렸다. 변가는 기생의 몸 뒤로 숨었고 칼을 맞은 것

은 그의 짝이던 기생이었다. 변가는 다시 안석을 집어들어 두 번째로 날아드는 칼을 받았고

칼이 솜뭉치를 헤치며 비스듬히 베고 지나갔다. 변가가 그때에 한 손으로 오동 화로의 귀퉁

이를 들어 동춘만에게 던졌는데 그는 재를 면상에 뒤집어썼던 것이다. 동춘만은 과연 무장

답게 성난 호랑이처럼 칼을 휘둘렀다. 변가는 방안에서 간신히 빠져나왔고, 졸개 두 사람과

더불어 그가 방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춘만은 보이지 않는 눈을 연신 소매로

비벼대면서 방안에서 칼을 쥐고 헐떡거리는 중이었다. 우대용과 강선흥이가 큰사랑에 올라

간 것은 바로 그런 때였다.

"너희 집은 완전히 우리 손에 들어왔다. 칼을 버리구 나와라."

선흥이가 문턱에 비켜서서 어두운 방에다 대고 중얼거렸으나, 동춘만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어쩌는가 보려고 비죽이 고개를 들이미니 아니나다를까, 쌩 하면서 칼날이 꼬끝을 스

치도록 정확하게 지나갔다. 선흥이는 얼른 뒤로 비켜났고, 우대용이가 선흥이를 뒤로 가만히

잡아끌고는 제가 나섰다.

"집강, 우리는 나라의 명을 받잡고 이곳 전장의 폐단을 다스리러 온 사람들이오. 이러면 자

꾸 죄가 커지니 얼른 나와서 어사또의 분부를 받으시우."

"어사또라구... 거짓말 마라. 너희는 화적당 아니냐."

우대용이가 목청을 드높여 껄걸 웃었다. 그리고는 짐짓 변가에게 말하였다.

"아사또, 마패를 보여주십시오."

변가가 어리둥절해 있는데 우대용이가 변가에게서 무엇을 받는 듯하면서 손바닥을 펼쳐들

고 문가에 내밀었다.

"이거 보시우, 출도에 칼을 빼어들다니 나중에 그 죄를 어찌 다 받으시려우. 우리는 궁감이

며 궁차가 아니외다."

동춘만은 의혹을 견디지 못하고 그 손 안의 것을 자세히 보려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의

희끗한 몸이 보이자마자 대용이가 발을 올려 힘껏 돌려찼다. 동춘만이가 가슴을 쥐며 앞으

로 고꾸라지는데 대용은 다시 무릎을 올려 안면을 호되게 올려차버린다. 동춘만은 얼굴을

번쩍 치켜들며 뒤로 넘어갔다. 우대용은 그의 터진 안면에서 묻어난 무릎 위의 핏자국을 내

려다보더니 우선 나동그라진 칼을 집어 올렸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부시를 쳐서 넘어진 등

잔을 세우고 불을 붙였다. 악공들은 벌써 달아나다가 행랑채 앞에서 잡혔고, 기생 하나는 몸

이 성한채로 방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또다른 하나는 북새통에 동춘

만의 칼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넘어져 있었다.

"이리 나오너라."

우대용이가 기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말하였다. 기생이 겁에 질려 고개를 들지 못하

고 무릎걸음으로 문가까지 기어 나왔다.

"방안을 말끔히 치우도록 해라. 아무 일 없을 것이니 무서워하지 마라."

졸개가 들어와서 넘어진 기생을 들쳐보았다.

"식었습니다."

"리워라..."

방안이 정돈된 다음에 대용과 선흥이와 변가는 나란히 큰사랑에 마주 앉았다. 혼절한 동춘

만이를 우물가로 끌어내다가 정신을 돌리게 하여 데려오라 일렀는데, 다시 한 졸개가 내달

아 말하였다.

"별당채에 사옥이 있는데 근 여남은 명이 갇혀 있습니다."

"아픈 사람은 없던가?"

", 노인 한 사람이 병이 들어 앓고 잇구요, 장형을 당했는지 어떤 사람은 인사불성이올시

."

"그 사람들을 데려오너라."

곁에서 변가가 덧붙였다.

"이제부터 나는 아이들을 데리구 집뒤짐이나 하겠습니다. 재산 점고를 샅샅이 하여 무엇이

얼마나 되는가를 알아야지요."

변가가 나간 뒤에 선흥이가 대용에게 물었다.

"성님, 이러다간 시간이 오래 걸리겠수. 하룻밤을 가지고는 뒤 보고 밑 닦을 틈도 없겠는

."

"내일 하루는 예서 지낼 생각을 해야지."

"아니... 내일 낮에 말이우?"

"우리네야 조선비나 장만할라구 거사하였지만, 이제 여기 와서 물정을 보니 동가란 놈이

여간 도적놈이 아닌데, 인심이나 흠뻑 스구 가지, 활빈당 ㅗ릇을 해야겠어."

선흥이가 껄걸 웃었다.

"까짓 거 그리합시다. 기왕 치러낸 일인데 백주 천하에 훤히 드러내는 게 우리 뱃보에두

맞소."

졸개들과 여러사람들이 큰사랑 마당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처음에는 관인인

줄 알았다가 화적패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는 어딘가 마음이 놓이질 않는지 모두 입을 다물

고 대답을 회피하였다. 우대용이가 그들을 모구 큰사랑 마루 위에 올라안제 하고 나서 입을

떼었다.

"우리는 산림에 숨어 사는 사람들이오. 진작부터 재령 동춘만이의 악행을 듣고 징치하려고

벼르던 중이었소. 약간의 재물은 우리 살림에 보태기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청수내 분들게

나누어드릴까 하오. 듣자하니 동가의 사옥에 갇혀 있었다는데, 각자 어찌되어 여기 잡혀 왔

는지 말해주고 또한 집강이 어떻게 치부를 하였는가를 알려주오."

그러나 의심이 많은 약한 백성들인지라 평생을 함께 사는 것도 아니어서 오늘 입을 떼고

내일 앙갚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벙어리 시늉이 났겠다는 성싶었다. 그들은 모두 집강 동춘

만과 그의 수하인 도장 마름들에게서 온갖 핍박을 받다가, 항조하거나 고지식하게 소확을

속이지 못하고 납곡을 덜 내어 갇혔던 백성들이었다. 오히려 마음 속에서는 대대로 참았던

울분이 부글부글 끓고 있지마는,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비록 저들이 화적당

이 아니고 중앙관부의 관리라 할지라도 그들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잘못이 시정된다 한들

저들은 곧 떠나가버릴 것이고 농군들은 땅에 발을 붙이고 숱한 세월을 또 살아나가야 하는

까닭이었다. 더구나 저들이 옳은 것을 내세우기는 활빈의 무리라 하지만, 나라와 국법에 등

을 돌린 자들이니 그들이 기 댈 수 없음은 당연하였다.

예로부터 치정하는 이들이 정전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았거늘 그 법이 이치로는 비록 아름

다웠으나 능히 시행한 자가 없었다. 백성들 스스로에게서 나와 위와 더불어 시행되는 제도

라면 작은 폐단은 막아낼 수가 있을 터이나, 법이라는 것이 명분은 그러하면서 실상은 위에

서 편리한 대로 시행되어 애초의 아름다운 뜻이 가리워져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정전이란

옛 성왕이 천하를 공유로 하고, 지리를 고르게 하여 백성에게 준 것이었다. 한 농부가 전지

백 묘를 국가로부터 받는데 구백 묘가 한 정이 되고 정의 팔면에 있는 백묘씩은 모두 사전

으로 하여 여덟 집에서 함께 공전을 경작하였다. 또 공전 안에서 이십 묘를 털어서 집을 짓

는다는 것이었다. 그때 천하에 땅을 받지 못한 사람이 없어서, 모두 우러러 섬기고 아래로

기르며, 살아 있는 이를 봉양하고 죽은 이를 장사 지내기에 족하였다. 까닭에 풍년에는 배부

르고 따뜻하게 지내는 즐거움을 이루고 흉년에도 떠돌다가 죽는 고난을 면하였다.

정전이 폐지된 뒤로부터는 전지를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있게 되었으니, 재물 있는 자가

마음껏 사들이고, 세력 있는 자가 차지하고 권력있는 자가 빼앗았다. 땅 있는 자가 반드시

경작하지도 않고, 경작하는 자가 반드시 땅을 가지지 못하였다. 부유한 자는 땅이 많고 수확

도 커서 밭두둑이 잇닿아 끊임없고, 가난한 백성을 종같이 부렸다. 경작이나 수확에도 나서

지 않으면서 부유한 즐거움을 앉아서 누리나, 가난한 자는 송곳 세울 만한 땅도 없으니,

자의 땅을 빌려 힘껏 갈고 김매며 겨우 그 수확의 반을 얻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삯갈

, 날품 김매기를 하고 날짜를 따져서 값을 받을 뿐이었다. 또한 빌릴 땅이 없고 빌릴 집도

없으면 혹은 빌어먹고 혹은 떠돌아 흩어지며, 혹은 하는 수 없이 도적이 죄어버리는 것이다.

까닭에 뜻 있는 자들은 누구나 세상 임금이 선대의 법을 능히 회복하지 못하여 서민의 살림

을 마련하는데 있어 빈부를 고르게 하지 못한 연고로, 혹은 교만하여 간특한 짓을 하고 혹

은 곤궁해서 간사한 짓을 하며, 아울러 어지럽게 되어도 능히 구제하지 못함을 탄식하게 되

었다.

대개 부유한 자들이 땅을 갑자기 빼앗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천하에 부유한 자는

적고 대부분이 가나한 백성들이니 원망하는 자는 반드시 드물고 즐거워하는 자가 반드시 많

을 것이다. 진실로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서 단연코 시행한다면 무슨 어려

움이 있으리요. 대저 변혁이란 근본부터 되지 않고는 어려운 것이니 하물며 화적당 몇사람

에 있어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겸인을 불러들여라."

사옥에 갇혀던 사람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우대용이 지시하였고, 졸개가 나가서 겸인

을 끌어왔다. 선흥이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양전 문건이 어디 있는가?"

"아까 내왔던 것입니다."

"이놈, 죽고 싶으냐? 그건 전수 따위에게나 내보이는 것이고 너희 집강이 은밀히 숨겨두고

보는 문건이 있지 않느냐. 만약에 숨긴다면 당장 목을 베겠다."

우대용이 변가와 더불어 서리 노릇을 하였던 가락이 있는지라 제법 요령있게 따지고 들어

갔다. 끌어왔던 졸개가 환도를 시르릉 빼어들더니 겸인의 뒷덜미에다 칼날을 대어주었고,

는 자라모가지 움츠러들 듯 한껏 머리를 어깨 사이로 집어넣었다.

"열을 헤일 제까지 말하지 않으면 목을 쳐내어라."

선흥이가 말하니 졸개가 칼날을 갖다 댄 채로 수를 헤아리는데, 채 다섯을 넘기지 못하여

겸인이 부르짖었다.

"그 방안에 있습니다."

"방의 어디 말이냐?"

"사방탁자 아래편을 보면 고리 없는 서랍이 달려 있습니다. 밑에서 밀어내면 열리는데 그

안에 문서통 몇 개 있습지요."

겸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대용이 뛰어들어가 사방탁자 아래편의 숨겨진 서랍 안에서 문

서통 다섯을 찾아내었다. 개봉하여보니 과연 문건들이 나오는데 앞에 몰려 앉았던 사람들이

서로 수군거리며 동요되는 기미를 보였다. 변가의 말대로 그 문건만 손에 넣으면 동춘만은

화적패와 마찬가지로 관과 국법에 등을 대게 되는 셈이었다.

"이젠 되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것만 한양 궁가에다 바치면 동가는 꼼짝없

이 패가망신이다."

우대용이가 그들에게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이것 보시우. 동집강의 갖은 악행이 여기 이문서에 다 나와 있수. 그러니 서슴지 말구 우

리 일을 도우시오."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겟소이까?"

그들 중에서 젊고 팔팔한 사내 하나가 고개를 들고 말하였다. 선흥이가 대답해주기를,

"동가의 죄상을 낱낱이 얘기하여주오. 그런 연후라면 우리와 더불어 무슨 짓을 하든 제놈

이 관가에 발고하거나 악행을 저지르지는 못 할게요."

하였다. 이치가 앞뒤로 맞아떨어지니 그들은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글을 아는 이가 있수?"

", [소학]권이나 떼고 언문을 아는 노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에 수건을 조여매고 동료들에 기대어 있는 노인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좋소, 그러면 낱낱이 글로 적어서 우리에게 주시우."

대용이나 선흥이가 변가가 글 따위를 알아먹을 리가 없건만, 동집강을 몰아세우고 그로 하

여금 달마산 패가 떠난 다음의 행동을 경계해주기 위함이었다.

"몇몇이 의논하여 자세히 쓰시우."

네댓 사람이 사랑 안으로 들어가 엎드려서 수군거리며 장고하는 사이에 졸개가 들어와 보

고하였다.

"동춘만이가 깨어났습니다."

대용과 선흥이는 잠깐 의논해보고 나서 변가와 더물어 징치하기로 하였다.

"그냥 가두어두어라. 대신에 어서 변두령 오시라구 하여라."

변가가 들어와 각 방에 있는 물건들을 일일이 점고한 것을 알렸다.

"큰사랑 저 건너편의 대광에는 미곡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였고, 행랑채의 두 광에는 농

기구와 재목 같은 물건들이라 별것이 없고, 안채의 광에는 꿀이며 어염이며 각색 과물에다

잡곡, 약초, 젓갈 등등의 없는 것이 없습니다. 특히 안채 대방의 삼층장과 가께수리에는 금

붙이와 옥과 구슬 등속의 패물이 함으로 하나 가득이며, 돈은 이방에 있다구 그럽디다."

변가가 두리번거리니 강선흥이가 그를 큰사랑 안으로 밀면서 말하였다.

"어디 찾아보우."

변가는 큰사랑에 들어서서 두리번거리더니, 장지문을 열고 다락을 등잔으로 비춰보았다.

리고는 한아름 되는 반닫이가 넷이나 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변가와 선흥이가 방으로 끌어내리는데 선흥이까지도 무거워서 기운을 쓰느라고 목줄을 세

울 만하였다. 자물쇠를 쳐내버리고 뚜껑을 여니 한 반닫에는 절편만한 은자가 차곡차곡 들

었는데 수천 냥이 될 듯하였다. 나머지 세 군데에는 돈꿰미가 업구렁이 서리듯 차곡차곡 쌓

여있었다. 대용이 잠깐 들어와서 넘겨다보니,

"여기서 다 가져갈 것 있나. 은자 들어 있는 반닫이 하나면 되겠군."

하였으나 변가가 돈을 눈앞에 두고 욕심이 생겨서 손으로 돈꿰미를 집어 올리고 쓰다듬고

하면서 말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유. 우리가 십여 명이 되는 인원이요, 더구나 마구간에는 준총이 여러 마리

인데 이런 것들을 두고 가다니요."

"포한을 주어서는 안되우. 보아하니 동춘만이가 몇 년간 모아둔 것들인데, 바닥이 나고 보

면 원한도 깊어질 뿐 아니라 이 고장 사람들이 또 갖은 악역을 치를 게요."

그러나 선흥이는 뒷전에서 동집강의 악행을 글로 적다가 놀라서 기웃이 들여다보는 사람들

을 보고 나서 말하였다.

"성님, 기왕에 내친 김이니, 우선 이 사람들게 한꿰미씩 나누어줍시다. 그리구 비록 우리가

가져가지는 못한다 할지언정 집강놈에게 그대로 돌려줄 수는 없수. 모두 나누어줄라우."

달마산의 두령이 그러하니 우대용이로서야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미

닫이에서 선흥이가 돈꿰미 꺼내는 것을 내려다 보았다. 변가와 선흥이가 돈을 꺼내어 방안

에 있던 자들에게 우선 나눠주었다.

"이건 도둑질이 아니라, 뺏긴 것을 다시 찾아가는 셈이니 어서들 가지시우."

그들은 모두 두 손으로 감지덕지 받아서 진짜인가 이리저리 살피기도 하다가 다시 밀어내

놓는 것이었다.

"저희가 처자식만 없다면야 장수님들을 따라 나서겠습니다만, 저희는 이 골서 땅 갈구 살

아야 합니다."

선흥이가 다시 돈을 밀어주며 말하였다.

"여보 걱정마우. 우리가 내일은 인근 사방에 댁네를 보내어 미곡을 나눠줄 참이우. 나중에

는 청수내 사람들치고 동집강의 물건을 받지 않은 자가 없게 될 것이니 아무 상관이 없을

거외다."

그들이 집강의 악행에 대하여 낱낱이 적어서 올렸는데, 선흥이도 변가도 우대용이도 도무

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밖으루들 나가지. 그러구 우선 큰 소리로 여럿 앞에서 읽어주시우. 그 다음에 동춘만이를

잡아다가 징치하고 잠깐 눈이나 붙여둡시다."

사랑 대청으로 나가 둘러앉은 뒤에 의논된 글을 읽도록 하였으나, 글을 작성한 노인은 연

방 잔기침을 터뜨리며 일기를 주저하였다. 달마산 패들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도 연하여

읽기를 재촉하니 노인은 더듬거리며 읽어 내려갔다.

"재령 청수방 용벌에서 전호로 있는 저희 백성들이 용벌의 대지주이며 재령 나무리벌 궁방

장토의 집강인 동춘만의 행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나이다. 동집강이 장토의 관리를 맡아오며

위로는 나라를 속이고 아래로 약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핍박하여 재물을 모았으니, 그 알

려진 방법이 여러가지가 되지만 겪은 바를 취하여 오직 뚜렷한 사실만을 논합니다. 집강은

평년에는 장리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흉년에는 또한 궁가에서의 면세를 이용하고 백성들

의 환자 태우기를 빌려 이를 취하였습니다. 장리는 어느 고장보다도 그 자모지리가 혹독하

여 꾸어 먹을 때는 비록 봉밀이나, 갚을 적에는 독약과도 같습니다. 연기를 하면 그런 사이

에 이자는 자꾸 불어나 드디어 사전을 내놓지 않을 수가 없으니 용벌의 땅이 집강에게 먹힐

제는 모두가 헐값이나 공짜로 넘어갔습니다. 파종기에 소작권을 다시 나눌 제가 되면, 그나

마 반타작과 고세율에 허덕이는 전호는 서로 땅을 얻지 못하여 아우성을 치게 됩니다. 이는

집강이 식솔과 노비의 이름을 빌려 이미 소작권을 모두 궁가로부터 빌려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연 땅을 못 얻어낸 전호들은 서로 먼저 더 많이 얻어내려고 반타작에다 갖은 역까

지 자청하고 세부담까지 자청하는 것이며, 그나마도 떨굴까 하여 여러 특산 곡물을 바치고

집강이 요구하는 여하한 조건마저 다 응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강은 소작권을 빼

앗고, 빼앗은 소작권을 빙자하여 이중으로 작취하는데 조세와 종자 곡식에다 그나마 반타

작 수확이니, 지조를 바치고 봄철에 고리로 꾸어간 환자 곡싣을 갚고 나면 그해를 넘기지

못하여 굶주리게 됩니다. 국가에 바치는 조세까지 부담하였으니 이를 갚으려면 다시 손에서

피가 나도록 한 필의 베라도 짜내어 보상하여야 합니다. 그러고도 틈틈이 공물 수납에 응하

, 명년의 소작지 취득에서 집강의 지적을 받아 전지를 떨굴까 하는 근심 때문입니다. 실제

로 그의 사옥에는 조세와 소작세의 기일을 어겼다 하여 갇혔다가, 그 식솔들이 가마솥을 팔

고 온갖 날품을 팔아 메우고 풀려나오는 일이 비재합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망월동의

모는 집강 아래서 날뛰는 도장의 성화에 이기지 못하여 어린 두 여식을 내놓아 저들에게 바

쳤으며, 선비 모인은 대들다가 곡괭이에 얻어맞아 야밤중에 암장되었습니다.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고자 하여도 어느 밤중에 느닷없이 들이닥쳐 잡아다가 때려 죽여도 쉬쉬하는 고장이

되었으니, 서로 알면서도 감히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얼굴을 돌릴 뿐이올시다. 다섯 집마다

주비라 하여 뽑아놓고 서로 살피게 하더니, 만약에 그중에 사망자가 나거나 질병이 들어 지

조를 부담치 못하게 되면 주비가 나서서 벌충을 하게 되고, 재앙은 백성들에게만 있을 뿐이

, 하늘도 범접을 못하는 악폐가 버젓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동리 주비와 일반 백

성들 사이에 믿지 못하는 마음이 널리 퍼져서 적막하기가 호환에 비운 절같이 되었습니다.

이는 어느 고을을 맡고 있는 탐관오리도 감히 저지르지 못할 바이고, 수령의 비호를 받은

아전이라 할지라도 하늘이 무서워서 범하지 못할 터임에도, 중앙에서 어명을 받잡고 내려온

암행어사도 감히 지적하여 아뢰지 못하고 감사는 아예 이곳을 모른 척합니다. 이는 실로 궁

가의 장토라하여 왕실과 척을 지어 혹시 주상의 미움을 받을까 저어함이니, 백성을 자식으

로 하시는 상감의 뜻이 아니실 것입니다. 주비들 중에 항조할 뜻이 있어서 몇몇 마을과 더

물어 수확을 숨기고 타작을 미루기도 하지만, 이는 오직 장리와 조세의 부담을 면해볼까 하

는 도명의 소치이며, 탐욕으로 훔치는 바가 아니올시다. 집강 수하 사람들의 악형을 받고 사

옥에서 죽은 식자가 몇이 되는데, 특히 부천골의 전 약정이던 모학생은 마을 사람들과 더불

어 노적을 지키다가 처자식이 먼저 사옥에 갇히자 스스로 제 소출 곡식을 불지르고 뛰어들

어 자진하였습니다. 집강에서 도장으로, 도장에서 마름으로, 마름에서 다시 몇몇 천한 주비

들에게까지 몇겹으로 뜯기어 이제는 도산할 길만 남아 있는 백성들이올시다. 고을 수령은

집강의 심복이나 다름없고, 그 권세와 부는 실로 영상의 그것을 넘는 정도입니다. 뜻있는 이

와 백성을 사랑하는 고귀한 이는 이 청원을 널리 굽어살피십시오."

머뭇거리던 노인은 점점 읽어나감에 따라 목소리도 맑아지고 비분할 곳에서 힘차게 강조하

니 끝 구절까지 뜻이 수월하며 막힐 데가 없었다. 모두들 듣는 중에 절로 눈물이 솟구쳐서

사랑 대청 위에 모여 앉은 자들이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었다. 선흥이와 변가는 누구보다

도 잘 아는지라 주먹을 쥐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며 부르르 떠니 그들 자신이 철들기

이전부터 겪어오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에라... 이 고장에서 살지 않으면 그뿐이지. 달아날 생각을 해서라두 내 포한을 갚고야 가

리라!"

"나두 용벌을 어차피 떠날 참인데... 동춘만이 놈의 가죽을 벗기리라."

농군들이란 의뭉스럽고 느리기가 곰 같은데, 일단 성이 나면 닥치는 대로 쓸어버리고 뭉개

버리는 기세가 또한 곰 같은 법이다. 이제 곰이 뒷다리를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었으니 동춘

만의 목숨이 바로 초개였다.

"동춘만을 끌고 오라..."

변가가 명하여 잠시후에 그가 끌려들어오는데 우대용이께 맞은 안면이 터지고 부어서 펑퍼

짐하였고, 도포의 앞자락은 벌겋게 되었으며 봉두난발에 맨버선발이었다. 사옥에 갇혔던 백

성들이 보기에도 너무 초라한 몰골이어서, 예전에 밭두렁 멀리로 지나가기만 하여도 자기도

모르게 밭고랑 사이로 숨거나, 길 위에 엎드려서 고개를 못 들던 그러한 위세가 아니었다.

"형구를 갖추어 징치합시다.. 내가 집장사령이 될라우."

"아니우, 정치구 뭐구 따질 거 없이 단매에 요정을 내버립시다."

그러나 강선흥이가 작성된 글을 가지고 마루 아래로 내려가 그의 눈앞에 들이대었다.

"내 죄상이 낱낱이 적혀 있다. 그리고 숨겨둔 문서도 우리가 찾아내었다. 저 사람들이 삶아

죽여도 네 죄는 하늘을 찌를 것이다. 겸인이 다시 읽으라."

겸인은 벌벌 떨며 글을 읽는 동안에 선흥이는 동춘만이의 상투를 잡아 뒤로 젖혀서 그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추지 못하도록 하였다. 동집강을 징치하는 중에 너무 흥분한 사람

들이 행여 목숨을 앗을까 염려하여 우대용이 나서서 그에게 뒤볼 생각을 못하도록 으름장만

놓기로 하였다. , 나라에서도 모르는 은서를 빼앗았으니 여차직하면 금부에 올릴 것이고

동민들의 투서까지 첨부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옥에서 풀려난 백성들 중에 적극 나섰던 자들

과 함께 입산하겠다 하였으나 돈을 나누어주었으니 다른 고장으로 떠나라고 신중히 타일러

두고 나서 날이 새기 전에 부근에 있는 도장들만 모으도록 하였다. 혹시 소문이 새어나가

그들이 관군을 데려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겸인을 불러서 도장과 마름을 급히 소집하라

이르면서,

"만약에 그들에게 귀뜀을 하거나 관군이 보이기라도 하면 집에 있는 네 식구들은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다짐을 두었으니 겸인이 감시역의 마을 사람과 더불어 그들을 데리러 나갔다. 그리고는 마

을 사람들을 시켜서 용벌의 이곳 저곳에 퍼져 있는 작인들게 나라에서 높은 관리가 내려와

구휼미를 무상으로 내준다는 것을 알리도록 하였다. 만일을 염려하여 강선흥과 우대용은 졸

개들을 데리고 동집강네 집을 나서서 청수내가 갈리는 동구 밖과 송림산 어름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물론 갇혔던 사람들도 짝을 지어 고개에 올라 들판을 망보도록 하였다.

드디어 날이 밝아서 도장과 마름들이 모두 새옷을 입고 집강에게 현신하러 들어서는데 오

는 족족 줄줄이 엮어다가 광에다 가두었다. 겸인은 가두지 않고 백성들을 맞아 의혹을 사지

않도록 구휼에 얼굴을 비치게 하였다. 하나 둘씩 어슬렁거리고 감히 들어오지는 못하고 기

웃거리던 사람들 중에 저희 동무 되는 자들이 목에서 풀려나 행랑채 앞에가 쌀섬을 부리는

광경을 보더니 용기를 내어 두엇이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지게를 가져왔느냐니 빈손이었

.

"아니 빈손으루 한 두어 줌 움켜갈려구 그러나, 돈이나 닷 냥 받으시게. 지게든 송아지든

가져와서 섬으루 가져가게."

"아니 이게 어찌된 세상이야. 역성에 천지개벽이 오늘인가."

"동집강이 파면되고 의금부에 끌려간다네. 재산의 반은 몰수되고 절반은 백성들 차지여."

그럴 듯이 얘기하니 그들은 나는 듯이 집으로 달려가 지게를 지고 나서는데 그뒤에 수십여

명이 붙어 섰다. 변가가 나서서 동집강네 외양간에서 기중 살집 좋은 황소 한 마리를 잡도

록 하여 몰려든 이들에게는 점심가지 호궤하니 그런 잔치가 없었다. 오후가 되어 우대용이

먼저 졸개들을 데리고 청수내에서 돌아와 용벌을 벗어나기를 재촉하였다. 준총 다섯 마리를

모두 끌어내어 은자가 들어 있는 반닫이 한 개와 패물과 옷감을 실어놓으니, 사람들의 무리

에 뒤섞여서 하나씩 동구 밖으로 빠져나가게 하였다. 우대용과 변가가 맨 뒤에 남아서 동춘

만이를 만나 다시 다짐하기를,

"우리는 멸악산에 있는 녹림당이다. 문서와 탄원서를 가지고 가는데, 만약에 관군이 토포하

려거나 뒤를 쫓으면 기필코 이엇을 한양에 가져다가 발고하겠다. 재물은 또 모일 것이니,

을 사람을 들볶다거나 악행을 저지른다는 소문이 나기만 하면 곧 청석고개를 타고 조개여울

을 건너 여기를 다시 들이칠 것이다. 자중해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진휼한 것이니 스스로

공덕비를 세울 생각이나 하여라."

라고 눌러두었다.

그들은 지체없이 집강의 집을 나섰다. 동춘만에게 단단히 협박을 하고 나서 우대용과 강선

흥이는 송림산 아래녘까지 나아갔다. 아무래도 그 많은 수의 장정들이 함게 버젓이 한길을

갈 수는 없었으므로 의논을 하였다.

"의관으로도 성님과 변두령이 양반의 행색이니 구종배처럼 졸개들을 거느리고 재령 삼거리

로 해서 학령 아랫녘까지 가시우. 우리는 산줄기를 타고 달마산 연봉가지 나아갈 테요."

"그러나 말이 다섯 필이나 되고 짐이 그득히 실렸는데 나중에라도 소문이 나면 흔적이 밝

혀 질 게야."

우대용이가 그렇게 말하니 변가는 잠시 궁리하고 나서 안을 내었다.

"이러면 어떻겟수... 은자 실은 말을 강두령과 우서방이 맡고 나머지 짐이며 아이들은 내가

데리고 산줄기를 타지요."

"길도 없는 산비탈을 어찌 말을 끌고 오른단 말이우?"

역시 의논이 되기를 강선흥이와 우대용이 은자를 실은 말과 다른 포목짐을 실은 말을 끌고

졸개 서너 명을 데리고 뒤처져서 따라가다가 재령 군계 어름에서 말을 버리고 짐들은 각자

나누어 짊어진 뒤에 산줄기를 타기로 하였다.

"까짓 도중에 포교의 기찰이라도 있으면 베어 죽이고 갑시다."

선흥이가 배포 좋게 말하였다.

"하는 수 없지. 은자만 건져 가도 이번 거사는 해서 곳곳에 소문이 날 만큼 큰이리여."

"뒤쫓으면 변두령이 두어 식경만 막아보시오."

그러나 변가는 여유가 만만하였다.

"무슨 그런 걱정까지 허시우. 토지대장과 투서는 가지고 있지요?"

우대용이가 제가 끌고 있는 말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하였다.

"이 부담 속에 단단히 챙겨두었네."

"그것만 우리손에 들어 있으면 감히 잡으려거나 앙갚음하려 대들지는 못할 거요. 동춘만이

가 아마 명년 봄까지는 한양서 날벼락이 떨어질까 하여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거외다."

먼저 선흥이와 대용이 말짐을 끌고 떠났는데, 대용은 그래도 행색이 양반인지라 포목짐을

내리고 안장에 올라 앉았다. 견마까지 잡히고 짐진 구종배까지 옆에 붙었으니 어느 고을 수

령의 친척붙이라도 되어 선사품을 얻어가는 양이었다. 선흥이는 맨 뒤에 은자 들어 있는 부

담 실은 말을 끌고 갔으니, 짐 위에 거적을 둘둘 말아 감추어서 겉보기에는 길양식인 듯하

였다. 그들이 서너 마장 갔을 무렵을 짐작하여, 변가는 뒤로 멀찍이 발검음 날랜 자를 망보

기로 처지게 해놓고 뒤따라 떠났다.

수라장이 되어버린 동춘만이네 집의 대문과 중문과 방문이며 장지문들은 활짝 열려 있었

, 마당에도 집 주위에도 사람의 기척이 끊어졌다. 청수방 백성들은 일단 불안한 중에도 명

절을 맞은 듯하여 쌀과 돈을 받아 흩어진 뒤에 각자의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바깥으로 나돌

지를 않았다. 이제나저제나 마름과 도장의 무리들이 작당하여 집뒤짐을 하는 게 아닌가 가

슴을 졸일 뿐이었다. 아름드리 통나무가 빗장 대신 받쳐진 광 안에서는 묶인 자들이 몸으로

치받느라고 쿵쾅대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용골 사람 중에 마음 약한 자가 있어 혹시나 후환

이 어떨까하여 슬그머니 집안으로 들어섰고 광문을 열게 되었다.

광문을 받쳐놓았던 나무들을 치우니 문가에 몰려 서서 밀어붙이던 자들이 묶인 채로 우르

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서로 결박을 풀고 나서 광마다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아낙네

들은 모두 넋이 나갔고, 동춘만이는 엊저녁에 우대용에게서 얻어터진 면상이 부어올라 콧날

이 펑퍼짐하게 죽어서 볼품없는 몰골이었다. 그는 눈이 부신 듯 한참 동안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수라장이 되어버린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낙네들은 뒤늦게 정신

이 들어서 곡성을 터뜨렸고, 서기사 쪽으로 달려갔던 장정들이 다치고 죽은 자들을 끌어냈

으니, 그들도 한권속인지라 분심이 일어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소란 피우지 말고 아녀자는 모두 안채로 들어가도록 하여라. 그리고 자네는 시체를 수습

하고 잃은 재물이 얼마나 되는가 점고해보아라."

동춘만은 겸인에게 이르고 나서 역시 흙 발자국과 부서진 기구들로 너저분한 큰사랑 마루

에 걸터앉아 있었다. 도장들 몇이 다가와 아뢰었다.

"그놈들이 얼마 가지 못했을 테니 동민을 일으켜서 뒤를 쫓읍시다."

"저희는 읍에 나가 재령 관아에 적경을 알리고, 관병을 끌어오겠습니다."

그러나 동춘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럴 틈이 없다. 읍내까지 갔다가 오는 사이에 도적들은 벌써 산속으로 자취를

감출 게다. 그보다는 너희 중에 잽싼 자를 내어 도적들의 뒤를 밟아보도록 해라. 산채가 어

디 있는가를 알게 된다면 내 온 재산을 털어서라두 토포를 하구 말 테니까..."

"저희가 가겠습니다."

"그놈들이 멸악산 화적패가 틀림없습니다. 저희끼리 멸악산이 어떻구 하는 말을 들었습죠."

동춘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산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면 하는 수 없지만, 지금 산성 쪽으로 쫓아간다면 곧 뒤꼬리는

밟을 게다. 멸악산의 어느 봉우리 어느 골짜기에 있는가만 알아 오너라. 논 열 두락을 떼어

주마. 그리고 옥에 가두었던 자들을 며칠이라도 인근 사방의 야산과 마을을 뒤져서 잡아내

도록 해라. 이놈들을 대매에 때려 죽일 테다."

겸인이 불러가지 않고 마루 아래에서 우물쭈물하며 말하였다.

"나으리... 이번 일에 큰 낭패거리가 있었소이다."

"뭐냐... 패물이나 은자 따위는 또 생기겠지. 흉년 만나 농사 망친것쯤으루 접어두구 말지."

"그게 아닙니다. 옥에서 나온 놈들이 적당과 공모하여 투서를 작성했답니다. 그리고 숨겨두

었던 토지대장을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동춘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적들이 그렇게 협박을 하여서 나두 그런 줄은 안다. 하지만, 그런 따위는 걱정할 게 없

. 미리 궁에다 봉물을 보내어 만일을 대비할 수도 있고, 까짓 집강 노릇을 그만두면 될 게

아니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 잡듯이 뒤짐을 하여 쌀이나 돈을 가져간 자는 도로 바치게

하고, 만일 감추는 자는 즉시 잡아오너라."

동춘만이네 하인배들과 장정들이 도장이며 마름의 지휘를 받아 청수방의 몇몇 마을을 뒤지

기 시작하였고, 그중 영리하고 동작 빠른 자 두명은 멸악산 방향을 바라고 길을 떠났다.

들이 떠나고 나서 거의 해가 넘어갈 즈음해서야 군의 관병들이 당도하였다.

우대용과 강선흥이는 땅거미가 덮일 무렵에 이미 신천계를 벗어나 송화계의 수유고개로

나아가고 있었으며, 변가는 나머지 졸개들과 더불어 말을 버리고 등짐을 지고서 천봉산 줄

기에 올라 있었다. 수유고개에 오르면 곧 달마산인데 학령과 마찬가지로 망대가 있어놔서,

두셋의 졸개들이 마중을 나와 조력하였다.

변가와 일행들은 천봉산 줄기를 타고 연이어 달마산으로 향하였으니, 그들의 행적을 누가

보았다손 치더라도 능동산과 다락다리 부근까지가 고작이었다. 엉뚱하게 멸악산 방향을 짚

어 조개여울과 청석재를 더듬어 쫓았던 동집강네 사람들은 얼마 못 가서 곧장 돌아왔으나,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우대용과 선흥의 일행은 전혀 반대 방향으로 대를 나누어 갔고, 더구나 행색은 양반의 나

들이 차림이거나 장사치의 차림새였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재령 청수방은 시끌

법석하였고, 백성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기를 재령에 의적이 났다며 술렁이었다. 나라도 징치

하지 못할 자들을 의인들이 나서서 다스렸다는 소문이었으니, 군의 수령들도 모두들 그런

일이 자기네 고을에서도 일어날까 겁을 내었고, 백성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은근히 두려워

하였다.

밤이 으슥해서야 재령 나갔던 달마산 패거리는 산채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워낙에 많은

재물도 털었고 겪은 일이 대견한지라 피로한 줄을 몰랐다. 대강 털어온 재물을 서열대로 나

누어주고 끌어온 말을 잡아 밤늦도록 마신뒤에 사흘간을 산채에서 푹 쉬었다. 그러고는 변

가만을 남겨두고 선흥이와 우대용이가 졸개 두 사람께 짐을 지워 불타산의 첫봉이께로 갔

. 배를 댈 곳을 임시로 정하였으니, 우선 아쉬운 대로 멍구미섬과 장산곶 사이의 좁다란

만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울창한 송림 사이로 내륙의 큰 내와 바다가 만나는 움푹하고 으슥

한 곳이었다. 그리고 당분간 불타산에서 은거하기로 하였다. 첫봉이는 내켜 하지는 않았으

, 선흥이가 겉으로 드러내고 불쾌한 기색을 보이니 할 수 없이 응낙을 하였고, 그의 처가

되어 있는 고만이는 다른 패가 들어오면 산채가 위험할까 하여 제 서방을 달달 볶았다.

중에서도 둘봉이만이 우대용을 따르고 그가 수적질을 나가면 저도 데려가 달라고 조를 정도

로 친숙하게 대하였다.

 

일단 조니포에서 석서방과 강화 대두를 데리고 떠났던 대용이는 모신이네 소실 집으로 가

서 조선장이 박성대를 만났다. 그는 은근히 모신이를 믿지 못하여 그저 소선이나 몇척 마련

해달라 부탁하고는 교동으로 나아가 배를 만들기로 하였다. 석서방은 모신과 함께 이리저리

나다니더니 드디어 제 식구가 풀려나와 대용으로부터 돈을 받아 먼저 교동으로 출발하였다.

그는 아내를 시켜 박성대의 모친과 더불어 교동에다 작은 주막을 내놓기로 하였다. 그믐께

에 강추위가 몰아닥쳐서 경강은 꽁꽁 얼어붙었고, 우대용과 박성대가 모신이네를 떠나려는

참인데 모신이 반색을 하면서 그들이 묵어 있는 뒷방으로 내려왔다.

"좋은 소식이우. 방금 포청에 연을 달구 있는 자가 알리는데, 홍천수가 회령으루 관노가 되

어 끌려간답니다."

"그게 뭐... 좋은 소식이오?"

우대용이가 신통찮은 느낌으로 중얼거렸으나, 박성대는 반색을 하였다.

"그 자식이 반병신이 되어 사람 구실을 못할 줄 알았더니, 끌려갈 기운이 남은 걸 보면 아

직두 몸이 성한 모양일세."

"북관길이라면 서린방 전옥서에서 끌려나와 흥인문을 나갈게요. 뭔가 방도가 있을 듯허우."

모신이가 말하였고 박성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해냅시다. 홍천수가 칠패와 마포에서는 인심을 잃었으나, 그만한 재간꾼도 얻기느 힘들

게요. 기실 경강을 오르내리며 장물을 소선에 실어다 넘길 일을 해낼 자는 홍천수밖에 없지

."

박성대의 말이 그럴 듯하였고, 모신이가 어째서 홍천수의 구명을 애쓰려는지 짐작할 만하

였다.

"구명 비용은 내가 대겠수. 우선 그 식솔을 피하도록 주선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홍서방이

달아나더라도 그 가족이 핍박을 받지 않을 거외다."

우대용이 듣고 보니 기왕 재령의 대사도 치렀고 수적으로 나서는 바에 못할 짓이 없었으

, 더구나 홍천수는 자기네가 필요로 해야 될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일은 모대인이 꾸미시지요. 내가 이 댁 아이들 몇을 데리구 나가서 도모해보겠소이다."

우대용이 처음 태도와 달리 적극적으로 나오니 모신이가 말하였다.

"아니오... 이런 일에 우서방까지 나설 거야 없습니다. 내가 빼어다가 예성강으로 하여 교동

에 가 있는 석범철이에게로 보내두겠소. 두분은 오늘밤에 양화나루를 건너 육로루 떠나시

."

"정 그렇다면 우리는 가겠습니다. 허나 보름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야 할 테니 좀이 쑤셔서

그러는 게요."

"홍서방하구 함께 갈 테니 그동안 좋은 선재목이나 골라놓으슈."

모신이는 우대용이가 불려와서도 반색은커녕 어딘가 자기네를 의심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

으므로, 마음속으로 자못 섭섭하였다. 조선 비용은 따로 장만이 되었다며 사양하였고, 겨우

소선 네 척을 준비해 주기를 요구 조건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교동에서 배를 짓겠다

고만 할 뿐, 기착지를 어디로 정한다든가 인원은 몇 명이라든가 절대로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모신이는 혹시 우대용이가 경강 무뢰배인 자기를 믿지 못하여 따돌리려는 게 아

닌가 싶었고, 이럴 때에 홍천수를 끼워넣어 장물의 거래선을 끊지 않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

각했던 것이다.

날씨가 계속 매섭게 차갑더니 해를 넘기면서 꾸물꾸물 흐려져서 눈발이 자주 비치는 날씨

가 되었다. 홍천수는 이미 태형 백 도에 살아남았으나, 그전에 반짝이던 눈의 총기는 사라지

고 건달의 날렵한 활기도 잃어버려 곧 중년에 접어든 사내처럼 보였다. 그뿐인가, 희고 번듯

하여 이목구비가 선명하던 얼굴에는 무참하게도 자자형이 가해져서 이마빡과 콧잔등에는 곰

보보다 더욱 흉측한 먹점이 무수히 찍혀져 있었다. 그는 북관의 진 만호 아래 수종드는 관

노로 집행이 떨어진 뒤로는 줄곧 칼을 벗고 지내었다. 그의 순박한 아내는 전옥서 앞에 와

서 서성거리는 숱한 아녀자들과 더불어 이리저리 쫓기면서 밥을 대었고, 흉측한 몰골을 대

할 적마다 외면하고 눈물을 닦아냈다. 해가 옥창에 비스듬히 비껴드는 늦은 아침나절에야

잡인의 옥마당 출입이 허가되어 그날도 아내가 밥을 들이미는데, 웬일인지 아내는 새옷을

입었고 머리도 말끔히 빗어 넘겼다. 홍천수는 아내의 휜한 몰골을 보자,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년이 필시 샛서방을 만나지 않았다면, 갈 데 없는 깍정이에 종놈 팔자가 되어

버린 남편을 두고 안색이 저럴 리가 없겠다고 그는 놀라버렸던 것이다. 홍천수의 아내가 옥

창살 앞에 다가앉아 옥리가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속삭였다.

"여보, 우리는 오늘 칠패를 떠나요."

홍천수는 뜨던 밥술을 놓고서,

"뭐라구..."

하고는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사실 그가 지내온 사정으로 보나, 지금의 꼬락서니로 미루어

서도 아직도 팽팽하게 젊은 아내가 단심을 가질리도 없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는 시

무룩하게 말하였다.

"내 귀양살이를 마칠 때까지 어찌 기다리겠나. 어서 좋은 사내 만나 속형하오. 아이들이나

굶기지 말구."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시우. 서강의 모대인이 왔습디다. 당신이 내일 식전에 길

을 떠날 게라면서..."

아내는 머뭇거리며 주위를 다시 살폈다.

"흥인문을 나서면 곧 누가 뒤를 쫓을 거예요. 다락원에서 몸이 아파 걷지 못하는 시늉을

허시구 걷질 마셔요."

홍천수가 구명될 방도가 있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얼결에 목소리가 커졌다.

"어디서 말인가...?"

"양주 다락원 말이에요. 난전이 서잖아요. 아마 무슨 꾀가 잇기는 있는 모양입디다."

홍천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아내의 손을 부여잡고 한참이나 흐느꼈다.

"내가 당신 볼 면목이 없소. 그나저나 어디루 가서 어찌 산단 말이오. 이 몰골로는 누구든

경친 놈이라 하여 알아보고 능멸하며, 조그만 일이 생겨도 관에서 데려다 치도곤이를 줄 터

인데... 공연히 식구를 고생시키느니 북관 가는 길을 영 마지막으로 작별을 허는 게 낫겟소."

아내는 홍천수의 그런 양에 저도 따라서 눈물을 질금거리며 말하였다.

"여보 어찌 다 방도가 없겠수. 우리는 이 길루 교동에 나갑니다. 석대두하구 박서방이 다

생리 도모할 방처를 해놓았다지요. 내일 꿈이나 잘 꾸시고 부디 잊지 마셔요, 다락원이어

."

홍천수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밥 들일 시간이 넘어 아내가 물러간 뒤에 홍천수는 이

제는 끝장이로구나 했던 심정이 사그라져, 새로이 바깥 세상을 활개칠 용기가 솟아났다.

차피 버젓이 양인 한 잡배로는 살지 못할 형편이니 어디 으슥한 산속이나 섬에 찾아가 화전

갈이라도 하여 처자를 먹여 살릴 작정을 하였다.

이튿날은 눈발이 비치었다. 새벽에 옥리가 와서 그를 칸에서 꺼내어 관통교를 건너 졸루

를 지나갔다. 그는 팔목에 포승을 지고 있었지만, 발길로 내차고 달아날 수도 있었다. 달아

나 보았자 자자가 되었으니 곧 시정배들 눈에 발각되어 되잡힐 것이 틀림없었다.

흥인문을 나서니 동북방에서 오고 가는 상인들이 이곳저곳에 무리지어 모여 있어, 그를

구출해갈 자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옥리는 그를 흥인문 밖의 주막으로 데려갔다.

주막 안에는 울긋불긋한 철릭이며 검정색 더그레를 입은 군병과 군노들이 몇몇 보였다.

중 장교인 듯한 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홍천수의 신병을 인수하였고, 옥리는 수결을 받고 돌

아갔다. 장교가 일렀다.

"내가 대강 들었다. 우리 진의 잡인으로 온다니 이제부터는 군례에 따라 행동하라. 만일 조

금이라도 한눈을 팔거나 하면 매를 때려서 엄중히 다스릴 것이다. 이제 상장께서 오시면 현

신하고 아뢰어라."

새로 부임해 가는 진 영장이 드디어 흥인문을 나서서 오는데, 곁에 자제인 듯한 소년 하나

가 따르고 있고, 짐을 진 노비 한쌍이 걸어서 따라왔다. 경저리가 주막에 쫓아들어와 진장의

도착을 알리니, 장교는 군졸과 노자들을 휘동하여 길가에 도열하여 서 있었다. 진장은 젊은

오명마에 올라탔는데 말 치장이 호화스러웠다. 번쩍이는 광안 붙인 굴레를 씌웠고, 갈기마다

주홍 상모를 꼬아 붙였으며 안장은 수달피에다 등자는 은이며 밀치와 꼬리털에도 장식이 붙

어 있었다. 몸치장 또한 볼 만하여 구슬상모의 전립에다 붉고 푸른 구군복에 전복 걸쳐 입

, 손에는 등채 들고 허리에 환도 차고 띠에는 기다랗게 병부 주머니가 늘어졌으며 또한

전통과 동개에 꽂은 활을 함께 메었다. 차림새는 그러하건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잔기

침이 연방이라 채신머리가 없어 보여 무인이라기보다는 어느 촌 관가의 책방짜리로나 되어

보였다.

"전도 문안이오."

장교가 말탄 진장께로 나아가 환도를 받쳐들어 이마에 올려붙이며 고개 숙여 군례를 드렸

.

"그래 진영에 별일이 없느냐?"

", 별무하옵니다."

진장은 경저리를 가까이 오게 하여 쇄마전이 얼마나 걷혔는가를 묻고, 거기서 얼마를 떼어

본가에 보내라 일렀다. 쇄마전은 여비이니 나라에서 다 주게 되어 있건마는 향청에서 백성

들로부터 거둬주는 폐단이 생겨서 부임 첫길부터 관리는 수입을 올리게 마련이었다. 전관에

게 부임시켜준 대가도 치러야 하고 병판에게는 뇌물을 바치고 도목에 올랐으니 빚이 있을

것은 뻔하며 잡다한 궐내 행하를 치르게 되니 비용이 많이 드는 법이었다. 진장이 아랫것들

을 일일이 헌신받고 안면을 익히는데 군졸들과 노자들 차례가 되었고 자자당한 홍천수도 끼

여 서서 예를 올렸다.

"가만있거라, 너는 원래 진에 있던 자인가?"

홍천수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저하니 곁에 섰던 수노가 머리를 조아려 아뢰었다.

", 실은 형조에서 판결이 떨어져 관노로 박힌 자올시다."

"도형수란 말이냐?"

하고나서 진장은 눈살을 찌푸리고 등채를 들어 휘저었다.

"물러가라, 그리고 전도는 어서 앞장을 서고, 길을 떠나야겠다."

부임행차가 나아가는데 수노가 앞장서서 권마성이라 하여, 물렀거라 쉬이 비켜라, 어쩌구

하면서 나아갔고 그뒤로 전도가 환도를 차고 눈을 부라리며 걸었다. 좌우로 역시 병장기 든

군졸이 지키며 걸었고 아전이 배행으로 따라붙었으며 뒤에 구종배들이 짐 실은 말을 끌고

혹은 등짐을 지고 뒤를 따랐으며 맨 뒤에 장정 노자 하나와 내행인 계집종이 따라왔다.

령은 제 아비 뒤에 약간 처져서 말에 탔는데 온갖 성외 풍물이 신기한지 연신 돌아보고 하

여서 뒤쪽에서 따라오던 구종배들이 서로 속삭여 비웃었다.

"상장의 풍채를 보아하니 복색만 그럴 듯할 뿐이요 인물은 볼품이 없어, 꼭 쥐새기 같은

것이 병졸 아이들깨나 두드리고 들볶아치겠구나."

"대개 첫 대면이 중한 법인데 부자가 함께 채신이 없어 보이니, 여정이 길고 고되겠구나."

안암내를 건너서 수유고개를 지나 양주로를 가는데 삼각산은 흰눈을 가득 이고 있었으며,

멀리로 도봉산의 이빨 같은 연봉이 우뚝 솟아 있었다. 다락원이 도봉산 어름이니 홍천수는

노비들에 끼여 걸으면서 혹시나 뒤를 쫓는 자들이 없는가 하여 몇번이나 돌아다보았다.

전에 멀찍이 떨어져서 행상차림의 사내들과 마바릿짐을 끌고 오는 상고들이 보였고, 앞에도

부담을 실은 말을 끌고 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중에 누가 자기를 빼내간다는 것인지

천수는 도무지 알아볼 재간이 없었다. 들판의 동북방향으로는 수락산의 밋밋한 산봉우리가

보였다. 다락원에 가까워오는지 북어를 몇두름씩 실은 마비리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오고 있

었다. 벌써 난전의 거래가 시작되었던 모양이었다. 앞에 가는 수노가 권마성을 외치며 벽제

하는 소리가 드높았는데, 마주 오던 자들은 양옆으로 길을 비켜나 읍하며 기다리는 것이었

.

그들이 다락원으로 들어가는데, 때마침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서 청어, 북어 등

속의 건어물과 포나 조개류나 버섯이나 약재 같은 것들이 다락원에 급작스레 번성한 주막들

앞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홍천수가 저자의 가운데쯤에서 드디어 결심한 대로 배를 싸쥐

며 주저앉았다. 진장 댁의 가노가 놀라서 그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어 올리며 소리를 쳤다.

"이 자식아, 엄살 부리지 마라. 상장께서 아시면 당장에 등채에 맞아 대갈통이 뚫어질 게

."

"아이구 더는 몯 걷겠소. 창자가 몇겹으로 꼬여서 상하 좌우로 땡기는데 걸음이 다 무에

."

홍천수는 허리를 반절로 접고 사타구니 사이로 상투꼭지를 처박아 끙끙대면서 모로 넘어져

버렸고, 가노가 그의 궁둥이를 호되게 걷어찼다.

"이놈, 경치고 관노가 되어 끌려가는 놈이... 네 따위를 베어 죽이고 간댔자 혀 한번 두드릴

사람이 있는줄 아느냐."

뒤에서 술렁거리자 배행하던 아전이 무엇인가 하여 쫓아 내려왔다.

"무슨 일이냐?"

가노가 그를 일으키다가 다시 놓아버리면서 말하였다.

", 갑자기 뱃속이 뒤틀린다며 넘어져서 이 지랄이올시다."

"떠나기 전에 뭘 먹였느냐?"

"대궁밥을 물려주었습니다."

아전이 혀를 찼다.

"관격이 들린 것이로다. 평위산을 가지구 있겠지."

진에서 올라온 군노 하나가 자기 짐을 가리켰다. 이렇게 지체를 하게 되니 자연히 앞에서

도 알게 되어 행렬이 멈추었다.

"저 뒤에서 무슨 일이냐?"

아전이 황공하여 어쩔 줄 몰라하면서,

"관노 한 놈이 관격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평위산 한 첩을 먹이는 중이올시다."

진장은 아랫것들의 일인지라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행렬이 멈춰있는 앞으로 동이를 머

리에 인 아낙네가,

", 따끈하고 구수한 동지죽이오. 동지죽 드시오. 동지죽..."

하면서 지나니 장꾼들이 삽시에 몰려들어 나도 주시우 나도 한그릇, 하면서 제각기 사발을

들고 좌판이나 짐 곁에 앉아 사먹는 것이었다. 보기에도 과연 그럴 듯하여 김이 무럭무럭

오르고 찹쌀지단이 하얗고 후루룩 쩝쩝 소리가 요란하였다.

"거 먹음직하게 보이는구나."

마침 꼭두새벽에 나와서 꾸무룩한 겨울길을 걷다가, 남들이 죽 먹는 광경을 보게 되매 시

장기는 물론이요 우선 속이 떨리던 판이라 모두들 입맛을 다셨다. 도령이 한마디 중얼거리

니 견마 잡았던 하인 하나가 저도 먹고 싶던 중에, 상전 코밑이 내 목구멍이라고 한마디 거

들었겠다.

"맛이야 기가 막힙니다. 저자바닥의 동지죽은 코를 빠뜨이며 먹는 맛입죠."

", 한그릇 가져오너라, 마상에서 한술 뜨련다."

해놓고 보니 앞에 있는 엄친께 또한 예가 아닌지라 머뭇머뭇하다가,

"아버님, 한기가 드시지 않습니까?"

인사 겸 여쭙고는 입맛을 다셨다. 진장이 집 같으면야 누가 보든 듣든 아랑곳없이 그저 한

사발 홀짝하고 싶건마는 말 치장이며 구군복 본새에 영장의 체면이 있는지라 큰기침 해놓고

한다는 소리가,

"엥 아랫것들이 있는 데서..."

하고는 말에서 천천히 내렸다. 그가 내리니 도령도 내리고 전도 군관도 따라왔다.

"비켜라, 물렀거라."

하며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 주막에 들어서서 안방을 치우게 하고 들어 앉으니, 군관이 영을

받아 도령에게는 따끈한 동지죽 한 사발을, 영장에게는 컬컬한 농주에 우거지곰국을 대령하

였다.

"아이들도 더운 것을 먹이도록 하여라."

아전이 나와서 노자를 내어 하인배들까지 죽 한그릇씩 돌려 주어 모두들 여기저기 앉아서

희희낙락하며 죽을 먹었다. 원래 관노로 박힌 도형수 홍천수는 수노의 소임이나, 그는 미처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형식상으로는 수노가 말 그대로 우두머리이지만, 실상은 상전의 가노

가 노비들 중에서도 제일 입김이 센 법이었다. 관노들이야 관가의 사무 절차에 따라 명을

받들지만 가노는 소싯적부터 상전과 한몸인 식솔이기 때문이었다. 가노는 홍천수의 몰골이

다소 가련하여 그에게 평위산을 먹이고 행차가 멈춘 틈을 타서 쉬도록 해주었다.

주막의 부엌 아궁이 앞에다 앉혀놓고 불을 쬐도록 하였으니, 한기가 가득 찬 배를 덥혀주

려는 뜻이었다. 만약 수노였더라면 그대로 아랫배나 걷어차버렸을 터이나 가노처럼 임집 더

부살이란 인정이 있게 마련이었다. 제각기 둘러앉아 죽을 퍼먹으면서 가노는 이따금 빤히

보이는 부엌 쪽을 힐끔거렸다. 행여 그의 모습이 없어지면 당장에 쫓아갈 태세였다.

홍천수는 불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이제나저제나 무슨 수가 나겠지 틈만 엿보던 터인데,

슬그머니 곁문으로 웬 사내가 쭈그리고 들어와서는 옆구리를 툭 치면서 속삭였다.

"뒤꼍으루 나가슈."

홍천수는 눈치라면 캄캄칠흑에 깨알인지 모래알인지 분간하는 재간인지라 더 되물을 필요

없이 그대로 앉은뱅이걸음으로 부엌을 슬쩍 빠져나와 얼굴을 소매로 잔뜩 가리고 주막 뒤꼍

을 돌아 나갔고, 어떤 자가 기다리다가 홑청을 널름 씌워서는 둘둘 말아서 등에다 업는 것

이었다. 홍천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딘가로 쑤셔박히고 보니 내행으로 꾸민 가마속

이었다. 잠시 후에 목소리가 들리는데,

"나 모신일세. 포를 쓰고 꼼짝 말구 있게."

하는 것이었다. 홍천수는 다시 홑청을 둘러쓰고 쭈그려앉았다.

모신이 다락원에 온 것은 그들의 행차 전날이었으니, 흥인문 앞에 졸개가 망을 보며 기다

렸고 삼각산 어름부터 앞질러 당조하여 천수 구해낼 준비를 갖추고 있던 터였다. 일부러 죽

장수에게 돈을 주어 행렬 근처에서 어른거리게 하고 졸개와 난전꾼들을 시켜서 죽 사먹는

법석을 떨게 하여 천수의 엄살로 멈춘 행차를 아예 주저앉게 만든 것이었다.

그들이 다락원을 택하였던 것은 반수 이상이 칠패에서 나온 난전꾼들이라 홍천수를 동정

하는 이가 많았고, 우선 인총이 빽빽하여 어떻게든 빠져나올 빈틈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장 일행이 뜨거운 음식으로 한기를 잠시 달래는 사이에 임기응변으로 천수를 빼내리라 계획

하였는데, 천수가 부엌 아궁이 앞에서 불을 쬐게 되었으니 바로 잘 맞아떨어진 일이었다.

신이는 홍천수를 가마 안에다 처넣고 나서 하녀 하나만을 그 옆에 지키고 섰도록 해두었다.

그가 사람들을 휘동하여 가마를 메고 출발하지 않은 것은 의심을 받을까 해서였다.

천수가 달아난 것을 알고 나면 곧 군졸들이 풀려나와 장터뒤짐을 하거나, 출발한 자들을

뒤쫓아 수색하게 될 터인데 공연히 눈에 띄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모신이 갓에 도포

차림으로 장죽 엇비슷이 빼어물고 사람들 틈에 서 있었는데, 여차직하면 달려나가 수색하는

자를 꾸짖기 위해서였다. 아니나다를까 진장이 주막에서 나오고 구종배들이 짐을 고쳐 지고

말고삐를 잡는 등 떠날 채비가 한창인데, 가노는 아직도 부엌에 쭈그려앉은 홍천수를 불렀

으나 아무 대꾸가 없어 쫓아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자식아,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네 따위가 더운 데 찬 데를 가리느냐."

하면서 어깨를 잡아 제치는데 그자는 눈을 멀뚱이 뜨고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어안이

벙벙해진 가노를 오히려 질책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 자식이 눈깔에 곰팡이 슬었나. 이놈아, 네가 보아하니 천예인 모양인데 얻다 대구

욕지거리야."

"! 이런 변고가 있나..."

"미투리가 해어져 발감개가 얼었기로 불을 쬐다 보니, 별놈 다 보겠군."

"여보, 예서 방금 불쬐던 사람 못 봤수. 얼굴에 먹점이 찍혔소이다."

짐짓 홍천수 대신 쭈그렸던 자가 일어나 삿대질을 하였다.

"비어 있는 부엌에서 불 좀 쬔 것이 무슨 범법 사유라두 된다드냐. 왜 이리 딱딱거려...

이 상전이 높은 분이면 너두 높은 놈이라드냐."

가노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이 물러나가 곧 아전에게 사실을 알렸고, 아전은 군졸을 앞세우

고 주막으로 들어서서 부엌과 뒤꼍과 마당을 이리저리 뒤지고 다녔으며, 방금 가노와 말다

툼했던 자를 찾으려 하였으나 그도 어디로 슬그머니 새어나갔는지 자취가 없었다. 주막 주

인에게 물으니 그의 대답도 또한,

"오고가는 장꾼들이 가끔씩 들어와 언 발을 녹이고 가는데 어느 놈인지 우리가 어찌 알겠

습니까."

하는 식의 애매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아전은 먼저 진장께 고하고 나서 어쨌든 형조에서

넘겨진 죄인이니 버리고 떠날 수도 없어서 이리저리 주막을 살피고 다니는데, 그런 일은 장

사치들이 딱 질색이라 제 가끔 입이 있는 대로 한두 마디씩 불평들을 지껄이니 더 이상 뒤

지고 다닐 신명이 풀어져버리게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중도에 병들어 죽는 수도 많으니 뒈

진 것으로나 해두자며 아전은 다시 행차 곁으로 돌아갔다. 관노 한 녀석에 행차를 마냥 늦

출 수는 없는 일인지라 장교가 다시 장터를 건성 뒤짐하고 나서 그들은 떠나갔다. 제깐 놈

이 달아나 봤자 한양 성내에서는 나다닐 수가 없을 테고, 언젠가 되잡혀 중벌을 받으려니

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다락원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모신이가 데리고 온 졸개들게

명하였다.

"얘들아, 가자."

이제까지 장꾼들 사이에 끼여서 우왕좌왕하던 칠팔 명의 곁꾼들이 다가왔다. 그중에서 둘

을 골라내어 이인교를 걸머지게 하고는 모신은 나머지 졸개들에게 모두 돈 열 푼씩을 나누

어주고 나서 성내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들은 양주서 위탁받은 장물을 넘겨받아 볼일도

겸사하여 끝낸 다음이었다. 모신이 말 위에 오르고 뒷전으로 가마가 따르는데 길은 유명산

을 곁에 두고 분수원 사거리로 나오는 오십 리 길이었다. 다시 분수원서 북으로 바꾸어 파

주를 우회하여 탄포에서 임진 수로를 지나는 배를 잡아 교동으로 향하게 되었다. 홍천수는

이미 자자당한 이마에 두터운 두건을 동여 가리웠고 안색은 꺼칠하였으나 전처럼 해끔한 건

달기가 가신지라 어딘지 뚝뚝한 믿음성이 있어 보였다.

예성 임진 수로와 강화해협이 만나는 요지의 북나루는 벌써 우대용 일당에게는 집동네와

도 같아서 구석구석 새새틈틈을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교동 북나루에 석서방댁이 와

서 주막을 개설하였고 다시 홍천수의 식구들마저 와서 얹히게 되었으니 초가 두채가 널찍하

였으나 군식구들이 많아 밥이나 술 손님보다도 제 식솔이 먹어치우는 형편이었다. 우대용과

박성대가 교동의 서쪽을 나돌아다니며 좋은 선재목이 있는 송림을 찾아다니더니 드디어 서

쪽의 수정산 아래녘에서 맞춘한 숲을 발견하였다. 곧고 둥치 굵은 소나무들이 햇빛을 가리

우고 빽빽이 늘어섰는데 바다 쪽은 수심이 깊고 파도가 잔잔하여 배를 띄우기에 적당하였

. 그러나 문제는 수영에서 겨우 이십 리 상거이니 가끔 지나는 관선에도 주의해야 되고

낮에는 도저히 작업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배의 건조는 나무가 나는 곳에서 해야 되

었으니 재목을 으슥한 곳으로 나른다 할지라도 물길이 멀면 또한 곤란하였다. 그들이 교동

에서 교동에 내려온 사이에 진척된 일이 그쯤이었을 때 모신이가 홍천수를 건져가지고 북나

루에 당도하였던 것이었다.

홍천수는 뛰어나와 부여잡고 우는 아내를 달래느라고 정신이 없다가 사람들 눈에 띄겠다

며 뜯어말린 석서방과 뒤늦게 반가운 상봉을 하고 나서 사내들끼리 주막 뒷방에 모여 앉았

. 우대용이는 교동에서 배를 짓는 것은 이젠 그른 일이라며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박성대

는 석서방의 의견에 찬성하였으니, 어차피 삼강의 수로를 휘어잡으려면 어느 정도는 관의

묵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대용이는 기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장산곶으로 올라가자

고 주장하였다. 장산곶이 비록 선재를 쉽게 구할 수 있기는 하지만, 워낙에 관선의 벌채장으

로 알려져 있어서 만약 포착되면 모면하기가 어려우리라는 것이 모신의 의견이었다. 교동의

수정산 기슭은 후미진 곳이기도 하려니와 이쪽에서 건조하여 나중에 선착지를 해서로 옮긴

다면 그 더욱 안전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박성대와 우대용은 머리를 맞대고 배를 어찌 만들 것이가를 날마다 궁리하였다. 우선 배

가 날렵하고 가벼우며 관선보다는 무장이 잘되어 있어야 하였고, 겉모양은 어디서나 쉽게

몰 수 있는 세곡 조운선과 닮아야만 하였다. 대개 관선들은 속도와 견고함을 함께 지니기

위하여 나무못과 쇠못을 섞어서 절반씩 쓰는 법이었는데, 수명은 한 삼사 년쯤 차이가 나던

것이다.

그러나 박성대는 배 전체를 나무못으로만 쓰기로 제안하였으니, 무엇보다도 배의 속도를

중시한 것이었다. 그 대신에 기항하여 은거할 동안 수시로 석회를 바르고 불에다 긋르리며,

자주 수선할 작정이었다. 다른 배들처럼 노상 떠 나다니며 긴 항해를 하는 게 아니요, 일이

있을 대만 슬그머니 나타났다가 후딱 해치우고는 은거지로 달아나게 될 것이니 배가 그렇게

쉽사리 노후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또한 박성대느 안을 내기를 강화에 모신이를 보내어 주

상들이 쓰던 중선 몇척을 사오게 하라는 것이었다. 새 나무만을 쓰면 튼튼하기는 하여도 나

무를 건조할 기일이 많이 걸리게 되며 배가 물을 먹게 되면 더욱 속도는 줄 것이기 때문이

었다. 따라서 몇 년쯤 운행한 주선들의 판자를 뜯어서 배의 침수 부분을 짓도록 하며 골격

과 갑판은 새 나무로 쓰자는 것이었다.

박성대는 다시 근심거리는 덧붙였다.

"배만 지어서 어찌합니까. 까짓 일반 조운선이야 창칼 가지구 눈만 부릅떠도 쉽사리 제아

할 수가 있지만 무장한 관선을 만나면 꼼짝없이 침몰되구 맙니다. 그러니까 화포가 있어야

허우."

"야밤에 관창을 습격하여 전함의 무장을 탈취해 올 수 없을까?"

"공연히 덧들여서 배도 만들기 전에 잡히구 맙니다. 어디서 화포창을 만나면 될 듯한데...

소분두 못 들으셨습니가. 전라도 변산이 오래 전부터 수적들의 소굴루 유명합지요."

"나두 들은 적은 있지."

"그자들이 주로 삼남서 올라오는 세곡선을 잡아먹구 살지요. 무장이 대단하다 그럽디다.

맹하구 민첩하기가 왜구들 같다지요. 모두들 화승총에다 대포를 배에 장치했답니다. 우리는

총은 ㅇ벗어두 포는 가지고 있어야지요. 원래 홍서방이 이런 데는 훤하니 한번 물어봅시다.

무장만 든든하면 봄철부터는 일을 나갈 수 있을 게요."

홍천수를 불러 물으니 역시 그는 소상히 알고 있었다.

", 그런 일이라면 내게 맡기슈. 우리 모대인두 잘 아는 사이지만 이도장이라구 숨어 사는

이가 있지요. 시방 파주에서 주막을 하구 삽니다. 그 사람이 화약은 물론 화포에 대하여는

훈련도감의 화포장이나 약장들보다두 더욱 잘 압니다. 은밀히 화약도 팔고 화승총도 만들어

파는데 상단이나 포수들의 주문을 받습지요."

하면서 홍천수는 의외에도 이경순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경순이라면 묘옥이를 따라서 고

달근의 안성 사당패에 끼여들어 당진까지 갔다가 살인을 하게 되었던 사람이다. 이경순이

여주 이방을 살해하고 달아난 뒤 집안은 적몰되고 관에서도 계속 그 행방을 찾다가 흐지부

지되었더니, 양주에 잠시 은거했다가 파주로 나가 주막을 열었던 모양이다. 그런 사정까지야

홍천수가 랑 턱이 없었으나 다만 그가 어떤 죄를 저지르고 숨어 사는 이라는 것은 눈치를

채었던 것이었다.

"지금 당장 찾아가 부탁할 거야 없지만는 대강 배의 건조가 이루어질 즈음하여 나하구 함

께 찾아가보세."

우대용은 천수의 말을 듣고 한시름을 놓았다. 모신이는 일단 서강으로 돌아갔다가 강화로

나악 중선 두어 척을 사오기로 하였고, 우대용과 석범철, 박성대 등은 그들에게 따라붙인 강

화 사공들을 동원하여 벌채를 나가기로 하였다. 톱이며 밧줄이며 등속의 활목도구와 목수도

구를 챙기고, 그간에 먹을 식량, 쇠솥, 식기 등을 지고서 그들은 교동의 서해안을 따라서 수

정산 기슭으로 돌아 내려갔다. 수정산은 말포 어귀로부터 일직선으로 서쪽을 향하여 흘러온

형상인데 해안 근처에 우뚝 솟은 주봉이 있고, 다시 바닷속으로 그 맥이 숨었다가 맞은편

에 작은 서도가 삿갓 둘이 겹친 듯이 솟아나왔다. 그들은 벌채장으로 맞춤한 송림을 골라놓

았으니 수정산과 싹머리 사이의 움푹한 뻘밭 가녘에 있는 평지에 빽빽한 숲이었다. 그들은

먼저 산 아래에 움을 팠고, 그 위에는 솔가지로 지붕을 엮었다. 여기서는 벌채할 동안만 기

거할 곳이며, 벌채가 끝나 배를 짓는 것은 서도 뒤편을 택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벌채된 통

나무들을 엮어 뗏목을 만든 다음에 바로 앞의 서도로 끌고 가서 거기서 판자를 만들고 다듬

어 배를 만들 작정이었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수정산의 둘째 봉에 한 사람을 올려

보내어 망을 세우고 관선이 지날 때면 일단 작업을 그치고 숲속에 숨기로 하였으며, 만약

발각되어 추궁을 받으면 수영 비장을 끌어대어 관선을 위탁받아 건조하는 중이라고 둘러댈

판이었다.

그날로부터 벌채가 시작되어 둥치가 굵고 굳은 소나무만을 골라서 잘라냈다. 다행히 원하

는 만큼의 나무가 벌채되는 동안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그들은 열흘 만에 작업을 서

도로 옮겼고 이미 모신이가 끌어온 중선들도 해체되어 재목으로 변하여 서도의 비좁은 모래

밭에 쌓여 있었다. 벌채에 동원되었던 인원들 중에 절반은 북나루로 돌아갔고, 우대용과 박

성대와 그리고 목수일에 경험 있는 자들만이 곁꾼으로 남았는데, 박성대는 과연 조선장으로

도 나무랄 데가 없어서 배의 구조에 관하여 모르는 일이 없었다.

수군 진영에서 가장 큰 배는 다락을 올린 전선이었는데 승선 인원이 백육십여 명이나 되

는 규모였다. 너무 쓸모없이 크기만 하여 바람이 자면 곧 움직이지 못하거나, 또한 바람이

거세면 조종하기가 어렵고, 간조 때와 물이 얕은 곳에서는 움직이지 못하니 큰 바다에서나

수전에 적합할 뿐 연안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다는 게 박성대의 의견이었다. 이쪽에서 규모

는 작지만 날렵하고 가벼운 배로 맞서면 마치 황소가 쥐를 잡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는 것이

었다. 배를 경쾌하게 하려면 먼저 파도의 위험을 무릅쓰는 한이 있더라도 배 밑을 날카로이

하며 좁고 길게 만들어야 하였다. 그리고 판자를 두 겹으로 붙이는 갑조법이 견고하기는 하

여도 항행에는 둔하므로 차라리 단조로 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선체를 조직할 때 판자의 틈

을 짓이긴 마로 두텁게 막고서 그 위에는 어유에 갠 석회를 바르면 훨씬 가볍고 간편하였

. 대부분 수영의 관선들이 소형 선박들이었는데, 큰 전선이 건조 비용도 많이 들고 수심

관계로 정박 사정이 곤란하며 실제 연안의 기찰에도 불필요한 까닭이었다. 소형 선박으로

병선과 사후선의 두 종류가 있는데 어선이나 상선을 감독 기찰하기에 사후선이 알맞은 고로

대부분의 경강 수로의 관선은 그배였다. 사후선에는 키잡이 한 명에 노꾼이 네 명이며 포수

는 없고 장교가 타게 되어서 이쪽에서 무장만 하면 대번에 격파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박

성대는 그보다는 규모가 나은 병선을 가늠하고 있었다. 병선에는 대개 키잡이 하나, 노꾼이

열넷, 포수가 둘로서 모두 열일곱 명으로 성원이 되는데 포수를 더 늘려서 스물 안팎으로

무장을 강화할 작정이었다. 해서의 황당선을 추격하는 배가 거의 병선인데 이쪽에서는 최소

한 관군의 그것을 제압할 수가 있어야 하였다.

길이를 마흔 척으로 잡고 높이는 여덟 척, 너비는 여섯 척에, 선두는 네 척 반이며, 선미

는 네 척으로 잡았다. 돛은 중심 부분에 둘을 나란히 달게 하고 돛대를 수시로 접었다 올렸

다 할 수 있도록 하여서 싸움이 일어나면 돛대를 접어버리고 접전하도록 하였다. 또한 해서

의 병선들은 대부분이 갑판에다 방패를 세워두고 그뒤에 숨어서 포수가 방포하도록 되어 있

으니 이쪽에서는 뱃전의 노꾼 자리와 포수 자리를 층이 지도록 하여 전투시에는 아래로 내

려앉아 숨도록 하였다. 그리고 숨는 자리 바깥쪽으로는 번철만한 크기의 놋쇠판을 띄엄띄엄

부착시켜서 탄환을 막을 셈이었다. 키잡이 한 사람을 빼고는 모든 노꾼과 포수가 구별 없이

일시에 젓고 일시에 싸우도록 하여, 배에 타는 일당 스무 명 남짓이 하나라도 빈자리가 없

도록 할 것이었다.

작업은 새벽부터 시작하여 정오까지에 그치고, 불을 다루는 일은 주로 낮에 하였으며,

데서 일반 상선의 자취가 비치기라도 하면 작업을 중단하고 나뭇가지로 재목과 선체를 가려

두었다. 배의 골격이 있는 곳은 모래밭을 판 뒤에 물이 넘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다 쪽으

로 높은 둑을 쌓고 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작업을 하였다. 나중에 배를 띄울적에 바다로부터

물길을 내어 둑을 터뜨린 뒤에 물길을 따라 배를 끌어낼 작정이었다. 박성대는 노상 서도에

틀어박혀 있었고 일기가 험하거나 추워지면 일단 수정산 아래녘의 움에 대피하곤 하였다.

골격에 판자를 대기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나서 배가 대략 겉모양이 이루어졌다.

우대용은 홍천수와 더불어 패랭이에 행전 치고 감발하여 보부상 차림새를 하고서 교동을

출발하였다. 이제 남은 일은 모두 박성대와 석범철이가 계획에 따라서 알아서 할 것이라,

들은 별로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모신이가 정확히 알려주어 그들은 파주 임진강변의 문산

포로 이경순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홍천수가 빠져나왔던 길을 되짚어 역으로 밟아나갔는데, 과연 에성과 임진강과 경강의 삼

강 수로와 강화 교동간의 해협 수로는 저자바닥처럼 대소선으로 바글거리는 듯하였다. 개중

에 겉보기에도 화물이 풍성하고 값나갈 듯한 것을 가득 실은 대선이나 중선을 만나면 홍천

수는 연상 침을 삼켰다.

"저런 것을 먹으면 반년은 일 나가지 않고 빈둥거리며 지낼 게유."

우대용이는 그의 신명이 한창이 되면 조용히 혀를 차서 주의를 주곤하였다.

"우리 배의 형상이 기중 날렵하고 단단하게 여겨집니다. 하여튼지 나섰다 하면 아마 이 수

로께가 좀 시끄러울 테지요."

그러나 우대용이는 해주서 나다니던 예성 임진의 수로들을 지나치며 물굽이와 여울과 한적

한 곳이며 번잡한 곳을 다시 확인하여보았다.

문산포는 파주 읍치서 이십 리 가량 떨어져 있고, 이 부근의 가장 중요한 임진나루와 함

께 하류에 있는 저포나루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또한 한강이 굽이쳐 흘러 임진 수로와 역류

하여 맞닿는 어귀가 삼십여 리 서남쪽에 트였고, 한미산 아래로부터 흘러내린 광여울이 임

진강으로 흘러가다가 강처럼 넓게 터져나간 지점에 있는 주막거리가 바로 문산이었다.

 

이경순은 양주 천보산의 작은 암자에 숨었다가, 시일이 지나자 전생이와 더불어 다락원에

나가 장사를 하면서 정착할 곳을 찾았다. 처남 집으로 가금 전생이를 보내어 살피게 하였는

, 포교가 어쩌다 들러서 기찰을 하고 간다더니 나중에는 아예 찾기를 그만두었는지 아무

일도 없었다. 드디어 이경순은 보부상이며 난전꾼들과 북쪽으로 오르내리는 상단 사람들과

도 안면이 생기게 되어 교통의 요지인 파주 문산포에 정착을 하였던 것이다. 한 해가 넘어

가도록 그는 여주의 나루터에서 군졸의 칼에 맞아 비명횡사한 아내를 이장시키지 못하고 있

었다. 맨손으로 파헤친 강변의 무덤이었으니 큰물에 떠내려가지나 않았는지 자못 걱정이 되

었으나, 버려두고 달아나온 고향을 되밟을 수가 없어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 아니하였다.

런대로 주막이 번창하여 마방도 딸리게 되고 역의 퇴마이긴 하였어도 말도 두어 필이 생겨

서 세마도 놓았고, 중노미에 마부까지 고용살이하는 자도 서넛이 불어났다. 전생이의 도움이

컸던 고로 경순은 그를 친동기간 대하듯 하였는데, 전생이는 또한 그 나름대로 주인에 대한

예를 버리려고 하질 않아서 두 사람의 고집이 이상스런 예절을 만들어내고는 하였다. 이경

순이 여보게 아우, 하면 전생이는 예 성님, 하지 않고 불러 게십니까 도장 어른, 으로 받았

. 그런 관계가 지워지지 않더니, 한번 이경순이 술에 만취하여 전생이의 뺨을 치면서 호된

주정을 하였었다.

이놈, 너는 정이 없기가 돌산 위에 덮인 얼음장 같은 놈이로다. 온천산에 식구의 정을 나

눌 사람은 이제 너뿐인데, 끝까지 주종을 고집하니 나는 적막하여 어찌 살란 말이냐. 차라리

이리 살지 말고 가산 나누어 흩어지자꾸나.

전생이 또한 이경순의 목을 잡고 울면서, 아무리 주인께서 가산 적몰되고 부인은 비명에

가셨으며 이제는 한갓 길바닥의 객점주가 되었다 할지라도 제게는 은인이올시다, 하는 것이

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경순의 고집이 이겨서 주종 관계를 피하고 말았으니, 전생이는 경순

의 아우가 되었던 것이다. 여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경순은 주막 뒤에 작은 풀뭇간을 만들

어두고 연철장과 수철장의 숙수 하나와 조역 두 사람을 두어 농기구나 그릇 따위를 만들었

.

도자기 가마를 지으려도 흙과 나무를 구득할 조건이 적당치 않으니 경순은 옹기와 사기

를 구워내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그 대신에 경순은 일꾼들을 모두 보내고 풀뭇간에 전생

이와 함께 틀어박혀, 총포를 만들어내어 큰 이윤을 얻을 수가 있었다. 매우 믿을 만한 사람

이나 파주 근처에 연고가 없는 타처 사람들에게서 주문이 들어올 때만 응하였는데, 값은 부

르는 대로였다. 기실 주막을 열어둔 것은 풀뭇간을 숨기려는 눈가리개에 지나지 않았다.

꾼들이 낮에는 무쇠로 솥이나 호미나 낫을 만들지만, 밤에 그들을 돌려보낸 뒤부터는 주문

받은 총포의 총열을 달구어내는 것이었다. 이경순은 앞으로 석삼 년만 부지런히 돈을 벌면

여주에서 잃었던 것들을 거의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손님의 내왕이 잦아지는 정오

무렵부터 저녁녘까지 그는 술청에 나와 앉아서 몸소 들고 나는 손님들을 접대하였다. 그러

나 그때가 더욱 경순으로써는 못 견딜 시간이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곰방대 빼어물고 중노

미를 불러 지시하고, 말도 돌보고 하면서 바쁜 듯해 보이지만 가슴속은 웬일인지 텅 빈 것

만같이 허전하였다.

섣달 그믐께에 미처 은둔처로 돌아가지 못한 거사패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문산포를

헤매다닐 적에 경순은 그들을 거두어 공짜로 재워주고 먹여주고 한 적이 있었다. 그중 어린

사당의 해사한 얼굴과 젖은 눈이 꼭 묘옥이를 보는 듯하여 이경순은 절로 가슴이 메어지는

듯하였다. 그 일이 있고부터 경순은 문득문득 묘옥의 얼굴을 떠올리는 버릇이 생겼던 것이

. 술청에 나와 앉았다가도 그런 잡념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워 견딜 수 없을 때 경순은 슬

그머니 주막의 제자리를 떠났다.

그리고는 광여울을 따라서 헐벗은 갯가를 거슬러 오르며 밤이 되도록 헤매고 다녔다.

녁녘에 지는 해는 임진강의 아래쪽에 벌겋게 걸려 있고, 바람은 눈 덮인 빈 들판에 스치는

데 까마귀들이 나뭇가지에 드문드문 앉아서 적막하게 울부짖었다. 구름은 흰머리의 묏봉우

리와 맞닿았고 조수로 빠지는 여울물 흐르는 소리가 투명하였다.

경순은 광여울의 광탄원까지 갈 적도 있었고, 임진나루까지 걸어갈 적도 있었다. 전생이는

주인의 그러한 마음을 알고 있는지라, 새 연분을 맺어주노라고 양주의 창기 하나를 불러다

주막에서 머물며 주모 노릇도 하라 일렀건만 경순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장기는 발끈하여

떠나버렸었다. 그 대신에 주모로 들어앉은 것이 파주 마산역 역졸의 늙은 과부인 석정 어미

였다. 장사일이 잘되면 가셔지리라 여겨졌던 이경순의 허탈증은 날이 갈수록 드러날 뿐이요,

더욱 말수가 적고 우울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우대용과 홍천수가 큰마음을 먹고 찾

아간 문산포 주막에는 그날도 주인은 보이지 않고 전생이가 대신 나와서 손님을 영접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자리 깔린 대청에 앉자, 전생이가 다가와서 말하였다.

"뭘 드시렵니까...?"

"이 댁 주인장 계시우?"

"어디서 오신 뉘십니까?"

"우리는 서강 객점주 모신이의 동무 되는 사람이외다. 쇠를 좀 사러왔소."

전생이는 슬그머니 그들의 곁에 걸터앉았다.

"쇠라니요, 여기는 수철점두 아니구 술과 밥을 파는 곳입니다."

"공연히 그러지 마시우."

하고 나서 홍천수는 바로 눈썹 위에까지 쓰고 있는 무명 두건을 위로 슬쩍 올려 보였다.

마에 자자된 먹점이 흉하게 드러나자, 전생이는 말없이 일어섰다.

"잠깐만 기다려주시지요. 성님은 시방 마실 나가셨소이다."

그들은 술국에 마른안주를 놓고 탁주를 석 되쯤 갈라 마셨는데, 도통 아는 체하는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참다 못한 홍천수가 주막의 뒤꼍으로 나갔다. 전생이는 마당 앞에서 서성대

고 있었다.

"여보, 이거 사람 대접이 너무하지 않소. 주인을 만나려고 불원천리 찾아왔는데, 부르러 가

는 기색도 없으니 우리가 무슨 박다 남은 말뚝이우..."

전생이가 공손히 대답하였다.

"죄송합니다. 성님께서는 대개 점심을 드시구 나가셨다가 저녁녘에야 돌아오십니다. 이제

거의 오실 때가 되었으니 좀 기다리시지요. 헌데 무슨 쇠를 구하러 오셨는지?"

"총과 화포요..."

전생이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요즈음 철물값이 과하여 비용이 많이 들겠는걸. 그러면 화약은 있습니까?"

"유황만 얻을 수 있다면, 따로이 만들 사람이 있소."

"석유황도 싸게 구입할 길을 가르쳐드리지요."

홍천수가 안쪽을 손가락질하며 말하였다.

"우리 성님이 우선 사오백냥을 가져왔으니... 그거면 되겠소?"

전생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뒷방으로 모시겠다는 것이었다. 우대용과 홍천수는 비로소 뒷방

에 드는 것이 허용된 셈이었다. 따로이 지어져 있는 헛간이 바로 풀뭇간인 모양이라, 쇠를

두드리고 달군 쇠를 물에 식히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내다보니 헛간 앞으로 방금 빠진 삽날

이라든가 낫, 호미 따위 등이 늘어세워져 있었다. 규모가 보통 동네에 흔히 있는 대장간처럼

보잘 것이 없어 저기서 무슨 화포가 나오랴 싶었다.

"저 외팔이에 외눈박이는 이 집의 무언가?"

우대용이 의아하여 물으니, 홍천수는 아는 대로 원래는 이도장의 종인데 면천하여 아우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그가 군기시의 종이었는데 화포, 총통, 화약을 다루는 데 솜씨가 잇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날이 거의 저물어서야 밖에서 기침소리가 들리더니 전생이가 누군가와 소

곤거리는 기척이 들리고 잠시 후에 문이 열렸다.

"내가 이경순이외다."

두 사람은 엉거주춤 일어나 박명 속에 서 있는 키 큰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날

카로운 눈으로 두 사람의 행색을 재빨리 살펴보았고, 서로 방바닥에 손을 짚고 읍하며 인사

를 나누었다. 홍천수가 먼저 말하였다.

"한양 서강의 모대인을 아십니까?"

이경순은 잠깐 기억을 더듬는 듯하였다.

"몇번 뵈온 적이 있는 듯허우."

"나두 그 사람을 따라와서 술 한 잔을 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가 양주에 계실 적이우.

패에서 건어물을 좀 해봤지요."

"... 그러시던가..."

딱히 반색하는 표정도 없이 이경순은 고개만 몇번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말없이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홍천수는 애가 달아 우대용과 이경순을 연신 번갈아 둘러보다가,

"실은 뭣 좀 흥정거리가 있어서 찾아왔수."

하고 불쑥 꺼내었다.

"우리 집에서 약간의 철물을 다루기는 허지요. 내가 밖에서 아우에게 들으니 보통 철물이

아니든데, 어물장사에 그리 요긴한 듯하지는 않습니다."

이경순이가 침착하게 말하였고, 잠자코 앉았던 우대용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얘기하

였다.

"하늘 아래 떳떳이 고개 들고 양민으로 살 수 없는 것이 한이긴 하오만, 우리는 버젓한 놈

이 아니외다. 그저 이 사람의 말을 듣고 막연히 찾아오긴 하였으나, 실은 털어놓자면 우리는

수적질을 나서려는 놈들이우. 딸린 식솔도 많고 몸붙일 데가 없는 장정이 스물 남짓인데 이

제 막판에 몰려 있는 셈이지요. 어찌됐든 살아보다가, 세월이 지나면 더러는 버젓한 짓두 하

게 될지 모르오. 비용이 얼마가 들지는 모르지만, 총포와 화포가 필요허우."

"물에서라면 오히려 호포가 유리하겠군."

이경순은 응낙의 말을 그렇게 하고 나서, 전생이를 불렀다.

"등록을 가져오너라."

전생이가 문서함을 가져왔고 이경순은 한 장씩 펼쳐들고 짚어가며 설명 해주었다. 병선의

규모라면 육 척이 넘는 거대형의 포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한 방향밖에는 쏠 수가 없으므

로 있으나마나 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천지현황의 포들은 포신도 길 뿐 아니라 한 방에

소요되는 화약이 삼십 근이나 되어 소모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한 대형포들에는 동차가 부

설되어야 하는데, 그 위에 대포를 장치하고 쏠 때에 앞으로 밀어내고 쏜 뒤에는 안으로 끌

어들이는 식이었다. 이유는 그러한 포들이 무게도 그러려니와 탄환과 화약을 포구로부터 장

전하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불랑기 같은 대포가 포의 후미에서 장전하기는 하지만 역시 배

위에서의 이동이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주로 공성에 쓰이는 각종 완구나 진천뢰는 곡사이므로 수전에서 별 쓰임새가 없었다.

함 규모가 아니라 병선 정도이니 빠르고 정확하게 타격하고 필요에 따라서 화력을 집중시키

기도 하며, 전후좌우로 아무 곳이나 공격 목표를 정할 수 있는 소형포가 유리하였다. 호포의

길이가 일척 구촌이요, 무게는 서른여섯 근이며, 주로 근거리의 직사포이니 배의 크기에 따

라 단 방 두 방 세 방을 임의로 선택하여 선복의 판자를 때려부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호포 네 대는 좀 과하고, 두 대쯤만 장치한다 하여도 장정 이백의 힘을 얻는 거나 마찬가

지요."

"비용이 얼마나 들겠소?"

우대용이가 물으니 이경순은 오히려 홍천수에게 말을 걸었다.

"서강의 모대인과 잘 안다구 하셨지요?"

", 신세진 일두 많구 해서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습니다."

"시방도 칠패에 계십니까?"

홍천수는 어찌 대답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기왕에 우대용이 허심탄회하게 바른 말을 하였는

지라 자기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실은 장사일로 율에 저촉되어 경을 쳣소이다. 당분간은 한양에서 떠나야지요."

"그럼 안되겠군..."

하면서 이경순은 고개를 저었고, 우대용이가 얼른 눈치를 채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부탁이 있다면, 이 사람말고도 한양 성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사

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소이다."

"여인 하나를 찾구 있소."

"까짓 것 요즈음 성내에 살기만 한다면야 사흘 안으루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비록

관에 발견되면 포박될 몸이지만 칠패 동무들이 날이면 날마다 어물을 지고 온 성내로 풀려

나가니 다방골 열두 골목일지라도 안바당의 삽살개가 털빛이 무슨 색인지두 알아내지요."

이경순의 울적한 얼굴은 잠시 밝아지는 듯하였다.

"만약에 그 여인을 찾는다면 비용을 받지 않구 호포 두 대와 화승총 열 정을 만들어드리리

."

이경순은 갑자기 묘옥의 얘기를 꺼내려니 가슴이 묵직하고 여주 남한강의 밤이 떠올라 입

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녀를 업고 당진을 달아나오던 새벽이 생각났고 당진서 배를 타고 내

륙으로 들어오던 날이 잊혀지질 않았다. 그리고는 피묻은 아내의 숨진 얼굴까지가 겹쳐졌다

가 다시 묘옥의 해사한 얼굴로 변하는 것이었다. 경순은 띄엄띄엄 묘옥의 용모와 나이와 내

력을 간단히 얘기하였다.

"마포든 서강이든 경강으로 올라간다고 했다니, 젊은 주모가 있는 주막집은 모두 찾아봐야

할 것이오. 아니면 어디 색주가에 창기로 얹혀 있는지두 모르는 일이지요. 그러니 광통교와

서대문 밖의 색주가도 뒤져야 할 게요."

얘기하는 동안 이경순은 몇번이나 말을 끊었다가 천장으로 얼굴을 들었고, 눈에 반짝이는

것이 비치는 듯하더니 두 뺨으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우대용은 그 중년 사내의 무덤덤한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감동

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사내의 눈물이 어찌 사내다움을 덜게 하는 것이기만 하겠는가.

는 고생과 죽는 고생, 정 붙이고 정 떼이고, 만나고 흩어지고, 하는 살아 있음의 고통을 겪

은 자는 눈물을 남겨두어야 하고 그 눈물이야말로 마지막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용

은 망연히 앉아 있는 이경순에게 대답해주었다.

"염려 마우. 우리가 수소문한다면 열흘 안으루 찾아낼 거외다. 만약에 한양에만 있다면 까

짓 술집이 몇이나 되겠소?"

이경순이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지요... 한양에 있다면 말이지요. 거기서도 떠났다면 다시는 만날 길이 없는 셈이오."

우대용은 방안에 들어설 때부터 이경순의 서글서글한 인상이 좋았고, 그의 꾸미지 않는 태

도와 분명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대용이 늘상 접해본 장사치들의 간교한 태도가 그에게서

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대용은 다만 자기가 여색에 미혹된 적이 없으며, 본시 여인은 그저

밥이나 해주고 애나 낳는 것들로 알고 있는지라, 창기까지 되었다는 여인을 애타게 찾는 이

경순이 이상스레 보이기는 하였다. 대용은 남을 빈정거리기보다는 좋은 면을 보면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하려는 편인지라, 흥정으로가 아니라 사내끼리의 정리로 그 여자를 찾아주고 싶

었다

"모신이라는 사람이 경기 일대에 조그만 저자바닥이라도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는 제 수족

을 보내지 않는 곳이 없다니, 내가 함께 행보하여 우겨서라도 주인장의 원을 풀어드리리다."

우대용이가 다만 위로하는 뜻으로 겉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서 얘기를 하니,

이경순은 처음 보는 낯바닥에 검은 자가 미덥기는 하여도 좀 계면쩍어지는 것이었다. 손님

으로 찾아온 상대방에게도 미안하고 나잇값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경순은 얼른 일어

섰다.

"주안상을 올릴 터이니, 잠시들 앉아 노시우. 나는 긴히 만날 사람이 있어서 잠시 다녀오겟

소이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 전생이가 주모에게 주안상을 들려서 방에 들어섰다. 홍천수는 여

태껏 궁금했는지라, 이경순이의 내력에 대하여 이것저것 묻게 되었는데, 전생이도 이제는 이

마에 자자 흔적까지 있는 그를 의심하지 않아 술술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여주에서 사분원

을 경영하던 일이며, 안성 사당패와 알게 된 일, 처음에는 자식이나 하나 보자며 묘옥을 찾

아다니던 일이며, 또한 살인을 하여 이방의 간계에 넘어간 일들과, 그의 처가 칼 맞아 죽던

일 등등을 얘기하여 홍천수와 우대용은 혀를 차기도 하고, 한숨도 쉬며 주먹을 부르쥐기도

하였다. 이윽고 이경순이 돌아와 합석하였을 적에는 이미 들은 것이 상세하여 몇 년 지기처

럼 그가 낯익어 보였다.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던 이경순도 우대용의 허심탄회한 태도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 관한 강직한 적의라든가, 또는 어린애 같은 천진함으로 인하여 저절로 말문이 열려

그에 관한 내력도 묻고, 나중에는 나이가지 따져서 자연스레 하게를 놓게까지 되었다. 이경

순이 여주를 떠나고부터 그렇게 대취했던 날이 없었다. 우대용은 문산포를 떠나면서 말하였

.

"요 건너 장단 지나 수십여 리 지경이 송도인데 우리 성님이 계십니다. 한담 잘하고 술 잘

먹고 인정이 많지요. 다음에 올 제는 경순이 성님 모시구 우리 대근이 성님 댁에 놀러 가십

시다."

그 정도가 되었으니 경친 놈끼리 첫눈에 가슴이 통했던 모양이었다. 이경순이 비록 중인이

기는 하여도 행세는 양반 부럽지 않게 하여, 여주를 떠난 뒤에도 잡류들과 섞이지 않아 명

색이 주막 주인이요 하는 짓은 낙백선비와도 같았다. 외롭고 쓸쓸하기가 남의 영에 붙잡힌

항장 같더니 그렇게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그날부터 묘옥과 만날 생각을 염두에 두고서 안방 치장부터 일러두는데 도배도 새로 해

놓고 한양까지 사람을 보내어 방물도 사들였다. 해서에서 돌아 나오는 상고들게 좋은 쇠와

동철을 부탁해놓고는 우선 등록에 따라서 흙을 구워 포의 모형을 떠내고 화승총은 이미 제

작을 시작하였다.

재령의 수철점에서 나온 무쇠는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 몇번이나 다시 제련해야만 하였

. 무쇠만 가지고는 열과 폭압을 견딜 수 없으니 동래 쪽에서 올라오는 동철을 구득하여

함께 섞어 제련하였다. 벌건 쇳물을 원형 판에 부어 한쪽 반면을 떠내고 다시 다른쪽 반면

을 판에서 떠내어 열을 가한 뒤에 붙이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나서 통째로 포 전체를 불에 달구고 물에 식히는 과정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주에 이경순과 전생이 둘이서만 풀뭇간을 지키며 작업을 계속하였다. 경순이 주로 숙수가

되어 일을 하였고, 전생이는 한 팔이 없으니, 풍구로 숯불에 바람이나 넣으며 잔일거리를 도

왔고, 석유황, 염초 등을 가지고 화약을 개었다. 아직 시사를 놓아보지는 않았으나 겉모양은

네 다리가 달려 고정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뒤편의 화약과 포환을 쟁이는 곳은 넓은 측면

에 불구멍이 뚫렸는데 머리와 눈 같았고, 포구는 점점 좁아지는 것이 몸통의 꼬리 같으니

호랑이가 뛰려고 움츠린 모양이었다.

호포가 제작된 다음에는 총열이 달구어졌으니 김지의 승자총은 예로부터 알려져 있던 것

이나 그와는 달랐다. 승자총은 총신이 짧고 구멍이 얕아서 위력이 조총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은 왜란부터 밝혀진 일이다. 뒤에 이필종 등이 조총의 장점을 취하여 승자총을 개량하였

는데 나중에 군기시에서 조준 장치와 방아틀이 있는 화승총이 더욱 개량된 형태로 나왔던

것이다. 총열은 구경이 돈닢만하고 길이는 대금에 맞먹었으니 뒤에 달리는 나무판과 합치면

어른의 팔 기장보다 훨씬 길었다.

이경순이 총포의 제원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전생이의 도움이 컸던바 있었다. 총 열 자

루와 호포 두 대를 만드는 데 불과 보름이 걸렸으니 이경순은 하루도 빠짐없이 밤을 새웠던

것이다. 낮에는 쓰러져서 정신없이 자고 저녁녘에 일어나면 풀뭇간을 비운 뒤에 전생이와

더불어 새벽까지 작업을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이경순은 묘옥을 못만나게 될지도 모

른다는 조바심 때문에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일이 끝난 날 새벽에 이경순과 전생이는 호포

를 청룡포와 황룡포로 명명하였다. 그래서 화구 아래편에 음각으로 제작 기일과 포의 이름

을 새겨넣었다.

"시사를 놓아봐야겠다."

경순이 화포를 제작한 것은 처음인지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포를 쳐들어보며 말하였

.

"포성이 제법 클 텐데 어디서 방포를 한단 말이우?"

"임진강을 건너서 정자포를 지나면 들판이니 인적이 드문 곳이다. 지금 나서서 한 시오 리

걸어나가면 될 게다."

경순은 전생이에게 호포를 짊어지우고 포환이며 화약 등속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임진

강변의 삭막한 들판에는 흰눈만이 어디에나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집 앞의 광여울

에 내려가 작은 조각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과연 동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 장단과 송

도 사이의 들판에는 행인은커녕 기러기와 바람소리만이 있었다. 들판의 이곳저곳에 구부러

진 소나무들이 한두 그루씩 띄엄띄엄 서 있었는데, 경순은 그중의 나무 하나를 보아두고 그

앞 오백 보쯤에 떨어져 호포를 내려놓았다. 곧 화약과 포환을 재어넣고 부시로 불을 붙여서

방포하니 폭음이 일어나며 나무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나무둥치의 중동이가 부러져 나갔

는데, 칼로 벤 듯하지는 않고 삐죽삐죽한 나무속이 드러났으니 포환의 충격으로 꺾어져 나

간 것이었다. 경순은 나무를 쓰러뜨리고 뒤편 땅속 깊이 박힌 포환을 살피면서 말하였다.

"이 정도라면 웬만한 배는 관통되어 가라앉을 것이다. 배를 격파하려면 포환을 장전하고

인마를 살상시키려면 작은 무쇠 연환을 장전하면 되겠다."

"화약을 충분히 쓴다면 지금보다는 위력이 더할 겝니다. 포석을 걱정하여 제가 화약을 다

쓰지 않았어요."

"길이도 맞춤하고 무게는 겨우 서른여섯 근이니 말등에 싣거나 줄에 매어 짊어지고 다닐

수도 있겠지. 우서방이 반가워하겠구나."

이경순은 이렇듯 일을 빈틈없이 마쳐놓고서 우대용이 올 날짜만을 기다렸다. 즉 그 날짜란

묘옥이 함께 오는 날이거나, 아니면 그 거처가 알려지거나, 최소한 소식이라도 알려지는 날

을 의미하는 것이다.

약속한 날짜가 하루 이틀 넘어가더니 닷새가 지나서야 서강 모신에게서 사람이 찾아왔다.

"저희 주인께서 좀 오시랍니다. 좋은 소식이 있답니다."

"그래, 우서방도 너희 집에 계시냐?"

"벌써 달포가 넘도록 들락날락하셨지요. 서강의 결꾼들이 한양 근방의 색주가는 모두 뒤지

고 주막은 물론이요, 은밀한 바침술집까지 모조리 수소문하였습니다. 허나, 찾지를 못하고

손을 들어버리구 말았었는데. 오늘 아침 느닷없이 파주엘 가서 모셔오라구 그러십니다."

이경순은 행여나 하였다가 그러면 그렇겠지 내가 쓸데없는 과욕이었고나, 스스로 탄식하였

. 어쨌든 기별이 왔으니 경순은 한양엘 다녀오기로 하였다. 말을 내어 모신이 보낸 자로

견마를 잡게 하고 저녁때 까지는 들어갈 요량이었다. 전생이가 쫓아나와 경순을 잡고서 당

부하였다.

"성님, 소식을 얻지 못하더라도 심기를 든든히 가지십시오, 그리구 정 못 견디시겠거든 어

디 창기 집에라두 가셔서 실컷 놀다 오시우. 저는 날씨만 풀리면 혼자서라두 여주로 나가

아주머님 시신을 모셔올랍니다."

전생이의 말에 경순은 다시금 자책을 느꼈고, 묘옥을 만나든 못 만나든 이번에 나가서 아

예 그 일까지 마무리를 지으리라 작정하였다.

오후 늦게 출발하여 삼각산이 보이는 다락원 근처에 왔을 적에 날이 저물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성내로 들어가지 않고 흥인문 곁을 우회하여 이태원을 지나 용산 삼개로 빠졌다.

변을 따라 걸어서 모신네 주막에 당도한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모신이는 작은집에 나갔으

므로 없었고 우대용이 안채 쪽에서 자고 있다가 뛰어나왔다. 마주 앉자마자 경순은 다급하

게 물었다

"좋은 소식이 있나?"

"가만 계십시오...오늘 성님이 못 오시는 줄 알었수. 성님을 잘 안다는 자가 여기 와서 묵고

있습니다."

우대용은 지난 스무날 동안의 온갖 행각을 간단히 추려서 얘기하였다. 모신이 알고 있는

한양성 안팎의 주막과 색주가를 모조리 찾아다녔으나 경순이 말한 그런 여인은 보이질 않았

.

"홍제원서는 별감배들하구 자리 시비로 주먹질까지 하였수."

그들이 찾기를 포기하고 있던 중 그전부터 모신이와 거래가 있어 드나들던 자가 있었는데,

등잔 밑이 어둡더라는 것이었다.

우대용이 얘기를 하는 중인데, 방문이 벌컥 열렸고, 누군가 문턱에 서서 껄껄 웃었다.

"살아 있으니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오랜만이우."

경순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누구시든가...?"

"제미랄...누구긴 나지."

하면서 그 사내가 등불빛이 비치는 방안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방금 자다 나왔는지 상투머리는 흐트러졌으나 얼굴에 뒤덮인 곰보 자국은 여전하였다.

"아니...다 달근이."

"왜 아뉴, 당신 땜에 모가비질두 못해먹게 된 고달근이우."

달근이가 황회와 더불어 광주서 거래하지 못할 물건들을 가지고 모신을 찾아왔을 때, 우연

히 모신이가 거여 송파의 주막집 사정을 묻고 사람을 찾는다는 말을 꺼냈다가 묘옥의 얘기

가 나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우대용이 이경순의 얘기를 하게 되어 달근이는 바로 그가 당진

에 함께 연희 나갔던 안성 사당패의 모가비였음을 밝히게 되었었다.

"집안이 적몰되었다는 걸 들었지, 난 어디 북관에 가서 숨어 사는 줄 알았더니 겨우 파주

?"

고달근이는 예전 같지 않으므로 마음놓고 이경순에게 말을 놓았다.

"이 사람아, 묘옥이가 시방 어디 있는가?"

"그게 어디 맨입에 나올 말인가. 그애가 비록 몸값이 없이 우리 패에 끼여들었지만, 이녁

때문에 당진서 그 수라장이 벌어졌으니 관재수 액땜할 값은 받아내야지."

지분거리는 것을 은근히 밉게 본 우대용이 고달근이를 흘기면서 말하였다.

"시방 송파에서 색주가를 열구 있답니다."

이경순은 달근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지금이라두 당장 가세. 배를 띄우면 새벽녘에는 닿겠지."

"허 여전하구만. 여보 나두 볼일이 있어서 여기에 온 게야."

"내일 아침에 내려가봅시다. 먼길을 오셨으니 피로할 텐데."

우대용이가 그렇게 안심을 시켰고, 고달근이는 꼬치꼬치 캐묻는 이경순의 안달이 재미있었

는지 자꾸만 요리조리 빼면서 약을 올렸다. 그러나 경순의 태도는 변함이 없어 달근이도 어

느덧 지분거리는 재미가 없어져서 순순히 대꾸를 하게 되었다.

"묘옥이네 주막에는 창기가 넷이나 되우. 송파 들르는 장꾼이면 묘옥이네 술집을 모르는

자가 없지. 다른 색주가에서는 계집 내놓는다는 핑계루 술은 싱겁고 안주는 먹을 것이 없는

법인데, 그 세 가지가 모두 인근에서 으뜸이라더군."

이경순은 무엇보다도 장사에 성공한 묘옥이 자기 따위를 어때 생각 할 것인가가 걱정이었

. 아무리 천성이 착하다 할 지언정 창기는 흐르는 물과 같으니 이미 마음이 어느 사내에

게로인가 흘러가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묘옥이 지금도 여주에서 사람을 보내

어 혹시 그가 잡혀오거나 무슨 기별이 없는가 수소문한 적이 있었고, 그의 아내가 비명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강변에 나가 대굿도 벌였다는 것으로 보아 묘옥이도 경순을 달리 생

각하는 양이었다. 그러나 묘옥의 그런 행동은 다만 도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묘옥은 경순을

따르고 순종하며 그에게 안기기까지 하였으나, 마음을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경순이 묘옥

을 애타게 찾는 것은 바로 그녀가 한번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는 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애가 아직도 혼자 있는가...?"

이경순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어 중얼거렸고, 고달근이가 히죽이 웃었다.

"넘보는 놈팽이들이 한둘이 아니지. 그나저나 내게는 아뭇소리 없이 그냥 넘어갈 건가.

느결에 머리 얹는 값두 없이 재취를 얻는 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수."

경순은 고달근이의 비아냥대는 말을 상대하지 않았다. 우대용이도 그만 달근의 말버릇에

기분이 상하여 입맛을 다시면서 흘겨보았다.

"두 사람이 허물이 없는 사인 줄은 몰라두 좀 듣기가 거북한걸."

"허허허, 물론입죠. 이 사람이 일찍이 우리 사당패의 으뜸 손님이었거든. 모가비야 이런 손

님 믿구 살지. 내일 길안내를 할터이니 내 부탁두 들어주오."

하고나서 달근이가 우대용을 바라보며 다시 말하였다.

"그리구...노형은 우리 솔부리에나 놀러 가십시다. 황서방두 노형을 산채에 모시겠다구 별릅

디다."

우대용은 그들 고가와 황가가 지난번에 홍천수로 하여 혼찌검이 난 뒤에 은근히 결기를 품

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솔부리인가 솔방울인가 데려가서 코피 터칠려구 그러우?"

그러나 달근이는 눈을 크게 뜨며 펄쩍 뛰었다.

", 무슨 말씀이 그리 무지막지허우. 앞으루 서강 모대인 신세를 피차에 함께 지어야 할

사인데, 타시락댄다구 쥐뿔이나 뭐가 유리하겠소. 서루 돕구 삽시다. 실은 황서방하구 나허

구 솔부리에서 패를 갈라 나가려는 참이지요. 우리두 거기 얹혀 지내기가 갑갑하여 그러는

게요. 기왕에 여기 이도장두 만났으니 어디 산채나 열까 하구 그러우."

이경순은 잠자코 않았더니 의관을 벗으며,

"피곤하군...그만잡시다."

하여 달근이를 쫓아내려 하였고, 우대용이도 의향을 알아챘다.

"그러지요. 노형은 이제 그만 내려가우. 날이 새면 깨우러 가리다."

달근이가 물러간 뒤에 두 사람은 불을 끄고 누웠는데 이경순이 말하였다.

"호포 두 대와 화승총 열 자루를 다 만들어 놓았네."

", 잘되었군요. 저놈은 내가 별로 신용을 하지 않으니, 절대루 우리 얘기는 해주지 마십

시오."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데...좀 경망스럽지. 그애를 잘 돌보아주었다니 고마운 일이군."

우대용은 그들과 동행하기가 싫어서 나중에 경순이 돌아오면 함께 파주로 가서 물건을 싣

고 교동으로 돌아갈 작정을 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이경순은 고달근이와 함께 경강에 배를

띄워 광주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송파 저자의 혼잡은 여전하였다. 달근이와 함께 객주거리로 헤치고 나아가 묘옥이네 주막

앞에 이르니 삽짝 앞에 주기가 걸려 있었고, 아직 손님은 없고 밥 손님이 들기 시작하는 모

양이었다. 주막 안에는 국밥을 시켜먹는 장사꾼이 몇 있을 뿐이요, 묘옥이는 보이질 않았다.

이경순은 노랑 저고리를 보자마자 그것이 혹시 묘옥인가 하여 숨을 흑 들이키며 그 자리에

멈추었다.

"왜 그래, 오금이 저리시나?"

고달근이가 이경순의 소매를 잡아끌었고, 돌아다본 여자는 이 집의 창기였다. 그 여자는 치

마를 감싸쥐며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아저씨, 어서 오셔요. 큰성님을 부를까요?"

참기가 이경순의 안색을 살피고 키들거리면서 뒤꼍으로 돌아가는 데, 이경순은 이미 벌건

얼굴이 되었다. 기역자의 초가에 바깥쪽은 술청으로 쓰고, 뒤편의 방들은 장쇠 할머니와 함

께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경순은 큰 마당을 등뒤로 돌리고 앉아 있었으며, 고달근이는 삽짝

을 바라보며 앉았다. 이경순이는 가슴이 터져나갈 듯 한데, 빤히 속셈을 들여다보는 고달근

이는 연신 히죽거리고 있었다.

묘옥은 풍로에 약탕관 올려두고 활활 부채를 부치지만, 아침부터 뭔가 짚을 수가 없으되

공연히 일손이 잡히질 않아 모두 건성이었다. 물동이를 내리다가 박살을 내었고, 타진 치마

솔기를 꿰매다가 바늘에 호되게 찔렸던 것이었다. 어느결에 약이 넘쳐서 지글거리는 소리가

요란하였으나 묘옥은 넋을 잃고 계속 부채질을 하다가,

"에그... 얼 나갔네!"

하며 재빨리 뚜껑을 잡으니 몹시 뜨거워 땅바닥에 동댕이를 쳐버렸다.

손가락을 불다가 묘옥은 스스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웬일일까... 간밤 꿈 탓인가 몰라."

묘옥은 다시 쪼그려 앉으며 한숨을 푹 몰아쉬었다. 이제 그녀의 눈가에는 깊은 그늘이 가

셔 있었고 볼에 홍조가 퍼져 있으니 신관이 전보다는 한결 핀 때문이었다. 아직도 몸매는

흐트러지지 않았고 머리카락의 검은 윤기도 여전하였으나 다만 표정이 전보다 훨씬 익어서

아기를 낳고 새댁을 면한 아낙 같았다. 묘옥은 장쇠 할머니가 밤새 헛소리를 하여 새벽녘까

지 찬물수건을 갈다가 닭이 울고 나서 잠깐 눈을 붙인 둥 만 둥했었다.

눈앞이 어슴푸레한데 끝간 데 없는 들판이 있었고 아득한 들판 가득히 장다리가 한창이었

. 흰 장다리꽃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허공중에 흰나비 범나비가 가득히 떠서 까불

랑거리는 게 보였다. 길을 가는데 맞은편에서 얼굴을 알 수 없는 봇짐 진 사내가 휘적휘적

다가왔다. 안달이 나고 애가 키워서 견딜 수 없다는 느낌이 가득 찼을 때 그 다가온 사내가

얼굴을 들었다. 어디서 보았던가, 그는 휘익 지나쳐갔다. 묘옥은 한참이나 뒤척거리며 알아

내려고 애를 쓰다가 문득 잠이 깨었다. 묘옥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방문을 바깥으

로 힘껏 밀었다. 먼 데서 새벽배가 떠나는지 배따라기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꿈이 얄궂기도 하다..."

그 낯선 사내는 송화의 광대였던 듯싶었다. 아니 질끈 동인 두건, 행전 친 다리, 괴나리봇

, 그리고 날카로운 눈길이 틀림없는 길산이 그 사람이었다. 처음 꾸어보는 꿈이었다. 아침

내내 뭔가 마음이 허황하게 비어서 원경을 바라보듯 지향점이 없었다.

"성님...손님 오셨수."

묘옥은 뒷전에 와서 불쑥 해대는 말에 퍼뜩 놀랐다.

"솔부리 아저씨 오셨어요. 어떤 분을 모시구 왔는데...반가운 손님이래요."

묘옥은 돌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뿔싸, 꿈이 맞는구나. 놀라는 일은 이젠 싫다고 묘

옥은 가슴을 내리쓸었다.

"반가운 손님이라니..."

묘옥은 마음보다는 훨씬 침착하게 되물었다.

"몰라요...처음 뵙는 분인데 아주 점잖아 보여요. 의관도 멀끔한 걸 보면 강 건너 솔부리 사

람은 아닌 모양이죠."

묘옥은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고 옷매무새를 살폈다.

"약은 조금만 더 달이면 될 게다. 네가 먹여드려라."

묘옥은 뒤꼍에서 돌아 나가다가 부엌 옆에 잠깐 서 있었다. 마루 위에 드문드문 앉은 사람

들을 살피다가 달근이의 곰보 면상을 알았고, 등을 돌리고 앉은 사내에게 시선이 멎었다.

옥은 그가 누구인지 집어낼 수가 없는 채 주춤주춤 앞으로 걸어나가는데, 달근이가 얼른 알

아보고 말하였다.

"아따, 주모 얼굴 보기가 이렇듯 어렵구먼."

묘옥은 경순의 바로 등뒤에까지 다가왔으니, 곧 상기둥 앞이었다.

이경순은 묘옥의 지분 냄새가 등뒤에서 끼쳐오고 있음을 느꼈다. 달근이도 그때는 농지거리

할 맛이 없는지, 싱긋이 웃고 반쯤 남은 술잔에 첨작하여 마셨다. 이경순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잘 있었느냐...?"

묘옥은 상기둥에 기대었다가 신방돌께에 스르르 쪼그렸다. 경순은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가까스로 눌러 앉히며 다시 고개를 돌려 술잔을 쳐들었다. 묘옥은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느

꼈는지 일어나서 이경순에게 말하였다.

"나으리, 안쪽으루 옮기시지요. 여기는 잔술을 파는 곳이라 춥습니다."

"괜찮겠느냐..."

"어서 내려오십시오."

이경순이 숫총각처럼 수줍어 우물쭈물하니 고달근이가 먼저 일어났다.

"가서 밀린 얘기들이나 하지. 우린 정담있는 처소에선 오금이 저리고 삭신이 근지러워서...

, 건넌방 비었으면 나는 거기 있을란다. 느이 집 아이나 하나 보내다우."

묘옥이가 흐트러진 신발 중에 얼른 경순의 미투리를 바깥쪽으로 나란히 놓았다.

육바라기며 삼미투리에 마른신도 있었건만 묘옥이 어찌 알았으랴. 기중 끼끗하고 뒤축이

빳빳이 서 있는 것을 골랐는데 경순의 미투리였다. 신발이 주인을 닮는다는데 정인의 눈썰

미는 그 임자를 알아보는 것일까.

묘옥이 앞서서 뒤꼍으로 돌아 나가고 경순은 뒤를 따랐다. 묘옥은 제 방문을 열어놓고 기

다렸다. 경순은 들어서서 묘옥의 손길과 체취가 배어 있는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경대하나

없고, 윗목에 작은 반닫이와 함이 나란히 놓였으며 나무 촛대와 오지 화로가 있을 뿐이었다.

경순이 아랫목에 앉으니 묘옥은 들어와서 옆으로 방문을 닫고 나서 일어섰다.

"기간 평안하셨습니까?"

조용히 주저앉으며 문안 인사를 드리는 묘옥을 경순은 뜨거워진 눈시울로 묵묵히 대하였

.

"그래, 혼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으냐?"

"고생이여 나으리께서 막심하셨겠지요. 이 몹쓸 년은 내내 포한이 되어 도장 나으리의 은

혜를 갚지 못하면 서서 죽는 몸이 될 뻔하였습니다."

"이리 가까이 내려오려무나."

묘옥이 아미를 숙이고 앉았더니, 경순은 제가 다가앉아 손을 잡았다. 마치 정 노래가 고즈넉

하게 들리는 듯하였다.

길까 보다 임한테로 멈살러 갈까 보다, 왕백이 신짝을 터덜털 끌면서 임을 따라 갈까 보다.

어찌 살까나 정든 임 그리워, 임이 날 괄세하더라도 불원천리 갈까 보다, 아무래도 임을 위

해 병이 나리외다.

꿈이 와서 보이는 임은 신이 없다 하건마는, 오매불망 그리우면 꿈아니고 어이보리, 멀리멀

리 그리운 임아 혼이라 말고 보여다오. 바람은 살라랑 꽃 따러 가고 구름은 살라랑 비 실러

가고, 나도 언제 저 구름같이 살라랑거리고 임 찾아 나설거나.

배는 고파 등에 붙고 방은 추워 턱이 딸딸, 간밤에 성튼 몸이 불과 같이 병이 나서, 먹는

것은 차운 냉수 찾는 것은 임이로다. 바람 불어 쓰러진 남이 눈비 온들 일어나며 임으로 들

린 병이 약을 쓴들 일어나랴.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구나."

이경순이 묘옥의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젖혀주며 말하는데, 묘옥은 그냥 맡겨두었다가 살그

머니 손을 빼고 무릎걸음으로 물러나 앉았다.

"부인께서 비명에 떠나셨다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셔요. 시방 어디서 오시는 길이어요?"

"파주에서 주막을 열구 있다. 전생이가 다 맡아 하고 나는 그저 마실이나 다닌단다."

"빨래는 누가 해드리나요. 돌보아주는 이라두 있습니까?"

"...주모가 있긴 있다만..."

묘옥은 사는 물정을 뼈저리게 겪어 알고 있는 여인인지라 빨래 소리를 발설해 놓고는 콧마

루가 시큰하여 저절로 옷고름이 올라갔다. 아낙없는 사내의 설움은 속곳 빨래에 절어 있는

법이다. 어려서는 똥 묻고 오줌 밴 데를 엄마가 빨래하여주고, 나이 들면 마누라가 넘겨 맡

는 셈이건만, 혼자 남은 사나이의 속곳 빨래처럼 썰렁히 외로운 물건은 없는 것이다. 은밀한

데를 나눌 곳이 없으니 잠자리 빈 것은 고사간에 꿈도 휑뎅그렁하니 비어 있다, 또한 혼자

남은 계집의 밥상처럼 차디찬 것이 없나니, 누구를 위해 찬을 짓고 누구와 함께 먹을꼬.

"묘옥아...내 오늘 예서 묵어 가도 좋겠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집은 도장 나으리의 집이올시다. 여주강을 떠나올 제 부인께서 대

금을 장만하여주셔서 이만이라도 이루어놓았지요. 하지만...제가 빈몸으로 떠들어와 문전걸식

한다손, 흉악한 팔자가 준동하여 나으리 댁을 적몰하여놓고 결초보은이라도 부족하지요."

경순의 말은 밥 한끼에 숙박하자는 말이 아니요, 너를 가슴에 안아보고 싶다는 것이었으나

더 말을 하지 못하였다. 묘옥이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 술상을 보아왔고, 감홍로를 찰찰 넘

도록 따라서 권하였다.

두 사람의 기미를 잘 아는 식솔들은 안채 쪽으로는 얼씬도 아니하였고, 장쇠는 공연히 수

줍어져서 제 할미 앓아 누운 방에도 들어가지를 못하였다. 밤이 이슥하여 잔별이 수북한데

완연한 봄밤이라 흉년에 죽은 계집아이 혼이 들씌운 소쩍새는 벌써부터 목이 메어 조떡을

달라고 보채었다. 조떡 조조 조떡떡조떡...

묘옥은 경순을 금침 위에 남겨두고, 혼자 나와서 마당을 서성거렸다. 이미 술청 손님들은

모두 돌아가고 불마저 꺼졌는데 어느 무심한 식구인가 코고는 소리만 드높았다. 묘옥은 샘

에 두레박을 담가 찬물을 길어 올렸다. 묘옥은 물동이에다 샘물을 그득히 길어 부었다. 동이

를 이고 뒤꼍의 헛간 구석으로 갔으니, 청석돌을 편편히 놓아 몸을 씻는 곳이었다. 묘옥은

치마끈을 풀어놓고 저고리를 벗었다. 속치마와 속적삼을 벗으니 단속곳이 나왔으며, 헝겊신

과 버선을 벗고 나서 고쟁이 바람이 되었다. 이윽고 온몸을 벗은 묘옥은 청석돌 위에 꿇어

앉았다.

"물을 주오 물을 주오 용소심네 물을 주오. 동해바다 용왕님은 서해수를 당겨주고 서해바

다 용왕님은 남해수를 당겨주고 남해바다 용왕님은 북해수를 당겨주오."

표주박으로 물을 떠서 무릎에 끼얹고 팔에 끼얹으니 한기가 머릿속을 찌르는 듯하였다.

시 가슴으로 등으로 아랫도리로 정갈한 냉수를 끼얹으며 중얼거렸다. 한기가 지나가자 나중

에는 살갗에 끼친 오한보다는 샘물이 오히려 뜨뜻하였다. 이곳 저곳을 씻고 나서 몸이 얼얼

하여 묘옥은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전신이 가뿐한데 하늘의 잔별들은 맑고 차갑게 반짝였

. 묘옥은 다시 샘물을 길어 대접에 담아 소반에 받쳐들고 자세 갖춘 뒤에 빈손을 쳐들어

둥글게 합장하며 절을 세 번하고 나서 꿇어앉아 손바닥을 비비며 빌었다. 묘옥은 해주 송림

방의 말바위에 가 있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은 그녀의 앞에는 평면적인 어둠이 깊은 바다처럼 펼쳐졌고 귓가에 파도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왔다. 길산을 이제는 저승의 인연으로 돌리고 말았은즉, 자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살아 있는 경순을 또한 어찌하랴. 묘옥은 오늘밤 몸과 마음을 다 함께 그에게

닿게 하려는 참이었다. 묘옥은 합환전에 그의 가슴에 연비를 새기고 떠나간 길산의 영께 하

직 인사를 올리려는 것이었다. 지난 새벽의 꿈도 꼭 들어맞았다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경순

이 나타나매 길산이 꿈에 보였던 것이다, 창기가 뒷전에 와서 반가운 손님이 오셨다고 할

때 묘옥은 계집의 직감으로 이경순이 나타난 줄을 알았다. 대개 과부가 애지중지한 자식의

일을 꿈꿀 적에 망부가 나타남과 같은 이치가 아니던가. 꿈에서는 저승이요 깨어나면 이승

이니, 본디 속인이란 덧없는 꿈 안에선 살 수 없고 훌쩍이고 먹고 마시며 돌아다니는 세상

안에 사는 지라, 마음도 세상의 것이어든 따로 잡아둘 데가 있겠느냐. 이제 거두어 살아 있

는 이에게 모두 주련다고 묘옥은 작심하였다. 작심이었으되 슬펐다. 그녀는 빌기를 그치고

자그맣게 노래를 읊조리며 바로 콧잔등에 우수수 쏟아질 듯한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모란꽃이 피거들랑 다시 오려마 다시 오렴 연지 곤지 단장하고 다시 오려마 다시 오렴 초

가삼간 집일망정 금실 좋으면 그만이지 호강없이 살지라도 마음만은 너를 주마 모진 바람

고이 피해 다시 오려마 다시 오렴 쪽도리를 고이 쓰고 다시 오려마 다시 오렴 소금 반찬 밥

일망정 맘 맞으면 그만이지 백년해로 살지라도 사랑만은 너를 주마 당사실에 복을 차고 다

시 오려마 다시 오렴 색가마에 올라앉아 다시 오려마 다시 오렴 기화요초 없을 망정 웃고

살면 그만이지 호사없이 살지라도 내 가슴은 너를 주마."

까불거리는 잔별과 영롱한 왕별들 사이에서 별똥이 주욱 흘러 지나갔다. 묘옥은 젖은 눈을

감고 앉았다가 소반을 치웠다. 그리고는 헛간에서 새끼줄을 꺼내어 삽짝을 돌아 나갔다.

송이 어우러진 야산까지 가서 다른 여인들이 하는 대로 연줄을 걸었다. 묘옥은 길산의 영과

하직하고 이제 경순에게 모든 것을 바치기 전에 합환방수연리지의 정성을 드리려는 것이었

. 일찍이 당진 가던 노중에서 고달근이가 해우채를 받아 묘옥은 경순에게 몸을 맡긴 적이

있었다. 그때에는 손님 받는 사당으로 마음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으며, 이를 아는 경순도

끝끝내 묘옥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묘옥은 연줄을 매어놓고 나서 부시를 쳐서 소지

에 불붙여 올리며 나무를 왼쪽으로 돌아 나갔다. 우리는 저 음양나무에 맨 연줄처럼 얼크러

져 끊이지 않는 연분의 부부가 되려 하옵니다 하는 소망을 비는 것이다. 연리목에 치성을

드리는 사이에 묘옥의 육신은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손끝을 태우기 전에 놓아버린 소지가

힘없이 흐느적이며 날아가 땅바닥에 사그라졌다. 묘옥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볼에 열기가 올

랐다. 그녀가 삽짝으로 들어서려는데 마당에 희끄무레한 자취가 보였다.

"묘옥이냐...?"

", 어찌 나와 계십니까?"

"바람을 쐬러 나왔다."

묘옥이 경순의 팔을 붙들고 등을 살그머니 밀면서 속삭였다.

"그만 들어가 주무셔야죠."

묘옥이 어디가서 무엇을 하다가 오는지 모르는 경순이었으나 그러한 태는 그의 오관을 콕

콕 찌르는 듯 하였다. 방안에 들어서자 묘옥이 경순의 앞으로 다가서며 청하였다.

"나으리께서 치마끈을 풀어주십시오."

경순은 머뭇거리며 그녀의 검은 눈을 내려다보았다.

"오늘부터 저는...나으리의 계집이어요."

경순은 떨리는 손을 자제하며 치마끈의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묘옥은 스스로 저고리를 벗

었다. 단속곳 바람으로 묘옥은 웅숭그리고 이불안에 쪼그려 앉았고 경순도 저고리를 벗고

드러누웠다. 두 사람은 한동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 나가서 치성을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묘옥이 팔을 뻗쳐 그의 덥수록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무슨 치성을 드렸니..."

"저희를 잘 맺어달라구요."

하면서 묘옥은 경순의 겨드랑이 아래로 파고들었다.

"나으리...안아주셔요."

경순은 중년 사내답지 않게 떨고 있었다. 그의 손길은 마디마다 떨리고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경순은 자기도 옆으로 돌아누워 파고든 묘옥을 안았다. 거칠지 않

게 포근히 감사 안고는 한 손으로 묘옥의 미끈한 등을 쓸어주었다. 묘옥의 손이 경순의 바

지춤을 끌어내릴 때야 경순은 흐슨한 묘옥의 단속곳과 고쟁이를 벗겼다.

묘옥은 스스로 허리를 들고 다리를 구부려 그 껍질 뭉텅이를 발치의 이불자락 밖으로 밀

어냈다. 맨살들은 서로 닿아 부딪치자 팔딱팔딱 살아나서 춤을 추는 듯 하였다. 다리들이 엉

키고 가슴은 서로 밀착되어 절로 좌우로 비벼대는데, 묘옥은 경순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며

한 손으로는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경순이 위로 오르고 몸을 섞으면서 묘옥의 머리를 끌어

안았으나 재간 부리거나 서두르지 않고서, 어미새가 알을 깃 안에 감싸듯이 두 팔로 묘옥의

머리를 안고서 부드럽게 애무하였다.

 

강경 시진포에 누만 전의 부자가 있었으니, 여각에 객주에 상선이며 상단이며 갖추지 않

은 것이 없는 대상이었다. 모두들 강경 원부자라고 불렀는데, 삼남의 상인들은 강경 가서 그

와 거래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으며, 심지어는 송상들까지도 그의 성명은 익히 들어 알

고 있을 정도였다. 그가 오늘과 같은 부를 누리게 되었던 것에는 위로 한양 세도가인 모 가

문의 입김에 크게 덕을 본 데 있다고 하였다.

지금은 호조판서로 있는 이의 아우가 아직 젊었을 때 원씨와 인연이 닿게 되었다는 것이

었다. 판서 아우가 일찍이 벼슬에는 뜻이 없고 가세를 이용하여 거금을 벌어보고자 하여 돈

을 놓아 변리를 불리기도 하고 남에게 장사밑천을 대었다가 물화를 늘려 받기도 하면서 치

산을 해나가더니, 한번은 한량패들과 더불어 주연을 베풀어 노는 자리에서 비아냥거리는 말

을 들었다.

사내 대장부로서 그만한 세도를 등에 지고 십만 전을 차고서 도회로 돌아다니며 대리를

취하지 못하다니 차라리 우리처럼 무과에나 오르는 게 낫겠소이다.

까짓 벼슬이야 마음만 내키면 내일 당장에라도 조보에 오를 수가 있네. 그러나 가형이 이

미 출사하여 나가 계시니, 나는 가산을 도주공만큼 일으켜 놓아야겠어. 설사 재상이 되었단

들 밑구멍이 송곳처럼 될 정도로 빈한하여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벼슬이라는 것은 요즘

세상에는 재산 없으면 고작 해보았자 당상관에 오르기도 전에 외직 몇번 돌다가 내쳐지고

마는 게야. 그 이상이 되려면 식객도 거느려야 하고 따르는 파당도 있어야 하네. 그러려면

가산이 있어야지. 그래 도회지란 어디 말인가?

송도, 평양, 의주, 동래, 원산포, 함흥, 전주, 강경 등지를 꼽지요.

그의 전장이 마침 충청도에 있었으므로, 십만 전을 말 여섯 마리에 싣고 떠나 강경으로 내

려갔다. 마침 봄과 여름이 바뀌는 철이라 해물이 한창이고 선박이 즐비하였고 인마가 구름

처럼 몰려들어 안개 낀 집들은 벌집처럼 부산하였다. 그는 눈이 어지럽고 마음은 산란한데,

갈만한 곳을 찾지 못하여 말을 언덕의 풀밭에 매어두고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이때 해진

패랭이에 허름한 옷을 걸친 곁꾼 차림의 사내가 멀찍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다.

내가 바로 원씨였는데 한양 서방님이 말을 걸었다.

당신 어디 사오?

바루 강경 살지요.

강경이 대도회지란 말을 듣고 돈을 싣고 와서 보니 누구를 주인으로 삼아야 할지, 어떤 물

건을 사들여야 할지 막연하오, 어떡하면 좋을지?

우리 집이 요 아랜데 옹색하고 누추한 대로 처소를 정하시고, 물건을 사들임에 당해서는

의당 사람들이 경쟁하지 않는 걸 골라야지요.

그럼 내 당신 집에 묵으리다. 그리고 당신에게 돈을 맡길 터이니, 당신 임의대로 해보시오.

드디어 십만 전을 몰고 원서방을 따라 게딱지집에 당도하니 집이란 말뿐이어서 달랑 단칸

방짜리 초가에 문도 없고 말을 세울 곳도 없었다. 그는 하룻밤을 묵으면서 원서방의 위인됨

을 잘 살펴보고 짐짓 일어나면서 말하였다.

돈은 이미 당신 수중에 맡겼으니 내 더 이상 관여하지 않으리다.

이런 말세에 사람을 어찌 믿는다고 방임하십니까. 여기 계시면서 일이 되어가는 걸 보셔야

.

당신이 속이지 않는다면 내가 간들 달라질 일이 무엇이요, 당신이 만약 속이려 한다면 또

한 내가 여기에 머무른다 한들 무엇이 이로워지겠소?

하고는 한양 서방님은 말을 채찍질하여 떠나갔다. 원씨가 뒤쫓아가 말고삐를 잡고 물었다.

언제쯤 다시 내려오십니까?

내 평생에 지방 출입은 해보지 않았고, 이번 먼 걸음은 나로서는 괴이한 일이라 다시 오지

않겠으니 알아서 조처하시오.

성명은 뉘시며, 서울 어느 방, 어느 동, 어느 골목에 사시는지요?

그는 자기 집과 가문에 대하여 짤막이 얘기해주고 나서 떠나간 후 일자무소식이었다. 원씨

는 만인이 경쟁하는 바가 해물에 있고, 연초는 지천이라 남아 쌓여 통 거래가 없음을 보고,

십만 전을 모두 풀어 연초를 사들였다. 그것을 견고하게 포장하여 이곳 저곳 완옥에 보관하

였는데, 맡긴 집만 백여 군데가 되었다. 이듬해 연초가 품귀해져서 값이 열 배로 뛰어 일약

백만 전을 벌었다. 따로 이십만 전을 떼어놓은 나머지의 팔십만 전으로 시진포에다 여각을

차리고 밭을 장만하고 노비와 마소를 정비하여 졸지에 부호가 된 것이었다. 이에 원씨는 한

양의 세도권문인 서방님의 집을 찾아갔다.

서방님의 돈을 이용하여 일년만에 열 배의 재물을 모았습니다. 댁 앞으로 본전의 두 곱을

정하여두고도 팔천 냥이 내 몫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처럼 졸부가 된 터에 감히 와서 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그려. 저와 동행하여 내려가셔서 상단 묶는 일을 보시고, 남방의 방물을

사들여서 배로 실어 보내고 서방님은 육로로 상경하시지요. 내 기필코 해운하는 화물로 열

배의 이득을 다시금 보시도록 해드리리다.

하더니 과연 곁꾼으로 장바닥에서 반평생을 보낸 원씨의 경험과 판서댁의 자본 및 권세가

서로 맞아떨어져서 상권을 잡는 일은 손바닥 뒤집기와도 같았다. 더구나 한양 모 댁이 점점

위세를 더해가며 형은 돈을 주무르는 호조의 판서직에 오르고, 원씨와 줄이 닿게 되었던 아

우는 선달에서 선전관으로 출사하게 되어 차츰 탄탄대로가 되어갔다. 그 무렵에 한양 벼슬

아치들은 혹은 가노, 겸인 등속의 밥붙이들이나 시골 먼 친척 아니면 원씨 같은 지방 저자

배들과 결탁하여 이를 도모하는 일이 흔하였다.

강경은 삼남의 심장부였으니 그곳의 상권을 장악한 원씨와 호조판서의 결탁은 가장 이상

적인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강경은 원래 은진현에 속해 있으며, 공주 부여를 감돌아 내려오

는 금강 줄기가 더욱 넓어져 휘돌아 서해로 나아가는 중간지점이었다. 따라서 모든 상거래

는 거의 수로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송상이나 한양의 주상들이 강경을 드나들 적에도 바로

서해 수로를 타고 들어왔다. 원씨네서는 수시로 상선을 띄워 삼남과 경강을 왕래 하였는데,

그중에 일년에 두 차례씩 중선 두 척으로 호위한 상행이 있었으니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즉 사업의 반년 이익 중에서 분배금과 각종 진물을 진상하는 봉물이 실려 있었으며, 그 봉

물짐은 한양 판서댁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먼저 한양에서 무장한 가노를 거느린 판서댁의

겸인과 서기가 강경으로 배를 타고 들어오면 틀림없이 사나흘 뒤에는 밤늦게 금강 수로를

세 척의 배가 빠져나갔다. 바야흐로 여름으로 접어들어 산야의 물산이 처음 나오는 때가 첫

상행이게 마련이었다,

강경산 봉수대를 감돌아 나오며 금강 수로는 서쪽으로 뻗어나가며 강의 폭도 넓어져서 물

살이 여간 빠른 게 아니었다. 특히 바다로 나가는 어귀는 간만의 차가 심하여 물때를 이용

하면 삽시간에 바다 한복판까지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중선 두 척이 배의 앞뒤를 지키게

마련인데, 변산반도 쪽에서 가끔씩 수적의 일당들이 금강 물목을 덮치러 나오는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도망 노비로 조직된 수적들이었는데 형세가 강고하여 관군이 여러 차례 토

벌을 하였건만, 멀리 내륙으로는 지리산까지 적굴을 두고있다는 것이었다. 금강 물목만 벗어

나면 교동 강화 수로까지는 별일이 없었으므로 전라수영에서 관선들이 몇척 나와 부근의 도

서 주위를 순찰하곤 하였다.

원씨네 상단의 차인 행수가 대선에 타고 직접 물길을 살폈고, 한양댁의 서기와 겸인은 각

각 중선에 타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하여 그들은 서해 어귀에 도착하였다. 몇척의 어선들이

살같이 빠르게 물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행수가 고물에 서서 살피며 도사공에게 물었다.

"관선은 나와 있는가?"

", 저쪽 섬돌이에 두 척이 나와 있는 모양입니다."

"앞 배와의 간격이 머니 좀 늦추게 하라."

대선에서 고함을 쳐서 앞서 가던 중선이 속력을 늦추었고, 뒷배도 바짝 대선에 가까이 다

가왔다. 서해로 빠져나오고서도 주위에 수상한 배가 없는가 하여 그들은 경계를 게을리 하

지 않았다. 아래쪽에 십여척의 대선단이 팽팽히 돛을 올리고 나아가는게 보였다. 깃발을 보

니 전라 수영의 전선이 선도하고 있는 세곡선이다. 중선에서 북을 올리고 기를 올려 강경에

서 나가는 배임을 알리도록 하였다. 원씨 댁 차인 행수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이젠 되었다. 대선단에 끼였고 호송하는 전선도 함께 있으니 경강 수로까지는 별일이 없

겠고나."

그들은 세곡선의 옆을 따라붙었다. 일기는 고른 편이고 바람도 알맞게 불어왔다, 가끔씩 고

깃배가 그들을 비켜 먼 바다로 나아갔다. 그들은 아산 앞바다를 지나 일로 북으로 향하였다.

일단 교동에서 배를 대었다가 임진 수로를 통하여 경강으로 거슬러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강화와 교동이 갈리는 곳에서 세곡선단과 헤어졌다. 그리고는 내쳐서 교동의 서쪽

을 돌아 북나루로 들어갔다. 사흘 밤낮을 보내고 저녁녘에 삼강 수로의 정박지인 북나루에

당도한 것이었다. 그들이 선창으로 진입할 때 야거릿배 하나가 재빠르게 쫓아오며 앞에 탔

던 사내가 외쳤다.

"저희 객주에 드십시오. 배도 돌보아드리고, 숙식비도 절반입니다. 한양에 기별을 보내실

급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그에 답하는 이가 없더니, 작은 배의 사내가 계속 말을 걸었다.

"삼남에서 올라오시는 길입니까?"

사공하나가 무심코 대꾸하였다.

"강경 원대인 댁에서 올라오는 선단이오."

작은 배의 사나이는 자기네 유숙할 손님이 아니라고 믿었는지 다시 방향을 돌려 바다로 다

른 배들을 쫓아 사라졌다. 먼저 중선이 포구에 대어지고 곁에 큰 배가 그리고 다시 중선이

대어졌다. 닻을 내린 뒤에 수직할 자들만이 남고 원씨네 선단 사람들은 북나루에 올랐다.

들은 자기네 단골 주막에 들어 물때를 기다릴 참이었다. 그들이 주막에 들어 봉놋방을 잡고

앉아 몇은 눈을 붙이고, 또한 몇몇은 대청에서 술을 마시는데 서너 명의 사내들이 들어와

맞은 편에 섞여 앉았다.

"어이구 컬컬하다. 술 좀 가져와라."

"그나저나 돌려태기를 하다가 그만두었으니 여기서 계속하지."

"술이면 술이고 노름이면 노름이지 잃구나서 무슨 잔소리야. 얌전히 술이나 먹으라구. 물때

에는 나가서 배를 띄워야지."

그러나 노름 얘기를 꺼냈던 자가 허리춤에서 딱지를 꺼내서 차곡차곡 간추리며 패를 떼어

보더니 다시 전대에서 돈을 꺼내어 무릎에 쌓아놓았다.

"젠장할, 돌릴 테면 돌려..."

"돈을 내놓아야지."

어찌구 법석을 떨면서 그들은 제각기 엽전꿰미를 끌러놓고 앉아서 돈을 태는데 절그렁 소

리가 요란하였다. 그렇잖아도 무료하던 판에 원씨 댁 사공들은 기웃이 넘겨다보더니 이윽고

도사공 되는 자가,

"여보, 나두 한판 끼입시다."

하였고, 돈을 긁어모드던 자가 쾌활하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한판 아니라 몇판이라두 끼이슈. 동만 던지면 누구나 패 잡구 먹는게여."

돌려태기란 패를 나누어놓고 석장으로 잡아 가보를 찾는 것이니, 딱지를 나누는 자는 제

패거리를 슬며시 돌아다보더니 주욱 돌려주고,

", 오늘 일진이 잘 맞아떨어지네. 이런 끗발이면 배는 타지 않아두 되겠구나. 한 푼 두

푼 세 푼 모두 여섯 푼 던졌다. 나는 다 샀수."

"나두 사지."

그의 동료들도 제각기 돈들을 태니 새로 낀 도사공은 제 패를 들여다보고는 눈꼬리가 빳빳

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일삼오 가보였던 것이다. 패를 까고 도사공이 판돈을 모두 긁어가니

곁에서 넘겨다보던 다른 사공들도 끼이고 싶어서 바짝 다가앉았다. 그런 판이 두어 차례 돌

아가고 나니 도사공 앞에 엽전이 수북이 쌓여갔다. 나중에 들어온 세 사내들은 툴툴거리면

서도 종내 자리를 뜨지는 않고, 엽전꿰미를 계속 뽑아 던졌다.

드디어는 마루에서 술 먹던 자들이 모두 판에 끼여들어 가보잡기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도사공과 그 패거리들은 돈을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다가 도사공이 나중에는 스물스물 돈이

나가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한 꿰미를 모두 날리고 말았다. 그는 분이 올라서 다시 몇사람에

게 밑천을 구걸하여 태워놓고 패를 까기에 정신이 없었다. 노름판이 한창 무르익어 있었는

데 갓 쓴 차인 행수가 큰기침을 하면서 대청으로 나왔다.

"아니 물때가 되었을 텐데 배를 띄울 생각들은 않구 뭘 하는 겐가?"

그러나 도사공은 그쪽에 얼굴도 돌리지 않고서,

"어디, 물때가 한번 가면 안 온답디까, 괜찮습니다."

건성 대답하니 차인 행수는 노기가 벌써 안면에 가득하여 주막 주인을 불렀다.

"밀물 때가 되었소? 상행인데..."

"때가 된 게 뭡니까. 벌써 시작했는데요..."

"아니, 그러면 상행 배는 모두 떴는가?"

", 벌써 배들이 포구를 떠나더군입쇼."

차인 행수는 노름판이 되어 있는 돗자리 방석을 홱 들쳐서 엎어버렸다.

"배를 띄우지 못하겠나?"

"허 이런 경우가 있나. 여보, 아무리 당신네 아랫사람들이라 하나, 남의 노름판을 뒤집는

실례가 어디 있소."

다른 패 중에 두건을 깊숙이 내려쓴 사내가 차인 행수에게 얼굴을 붉히며 대들었고, 그의

일행도 들고 있던 패를 동댕이치며 일어났다.

"젠장, 우리가 무슨 댁네 노복이라두 된다우. 무슨 행패야..."

행수는 판돈을 모두 발로 밀어내면서 그들을 오히려 꾸짖었다.

"이놈들이 감히 누구에게 대고 성을 내는 거야. 어디서 봉놋방이나 노리고 다니면서 사공

들 급료나 후리쳐내는 모양인데, 당장 잡아다 승선을 시켜서 경강까지 끌구 갈까. 아예 한양

포도청에다 떨구어버릴 테다."

그들은 곧 풀이 죽더니 슬금슬금 판돈을 추려서 일어나려 하였다. 도사공이 아직도 제 밑

천을 건지지 못하였느지라 그중 한 사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딴 돈 내놓아라."

그러나 아예 사그라진 줄 알았던 그들은 다시 열을 내어 도사공의 멱살을 마주 잡고 대들

었다.

"별놈 다 보겠군. 누가 땄는지 알 수도 없고, 설사 그렇다손 파흥을 해버리고 판막음시킨

것은 네놈들인데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도사공이 멱살을 잡히는데 다른 사공들도 참지 못하여 제각기 다른 자들을 붙들고 실랑이

가 벌어졌다. 행수는 혹시 망신이라도 당할까 하였는지 몇번 호통만 내지르다 뒷전에 물러

났다. 이러느라고 또 한 식경쯤이 덧없이 지나간 연후에야, 주막 주인과 그들 일행 중의 뒤

늦게 나타난 자들이 가운데 들어서 사화를 붙여 다툼은 끝이 났다. 곧 판돈을 공평히 나누

어 갖자는데 합의를 본 것이었다. 행수는 겸인과 더불어 배가 뜨는 시각이 늦어지는 것에

안달을 하였으나, 도사공이 워낙 수로에 소상하고 문제없다는 장담이 거듭되어 그들은 늦은

대로 닻을 올리고 선창을 떠났다. 아직은 만조인지 임진 예성 수로가 합치는 북나루와 승천

사이의 십자 수로에는 사주와 암초가 보이질 않았다. 물은 육지 가녘에서부터 흐름이 완연

한 복판으로 돌며 굽이치는데 바닷물이 가세하여 익숙한 사공도 소용돌이 가운데서 물길을

잡기가 힘이 들었다.

강물은 역류하고 강화 북단으로 가느다란 흐름이 있으니 외줄기 수로를 타고 오르다가 임

진 수로의 중반에 가서야 겨우 바다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동남풍이 순조로이 불

로 새벽별이 비치매 갑자기 급한 바람이 일거나 비가 올 날씨는 아니었다. 호위하여 왔던

중선 두 척은 교동 북나루 선창에 남고, 조운선만이 경강으로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십자 수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참이나 갈팡질팡하다가 겨우 수로가 안정되어 강화 북단

의 승천나루 앞을 지나는데 물이 썰기 시작하였다. 돛은 올리나마나 소용이 없고 노꾼 열둘

이 죽을 힘을 다하여 노를 저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맘때에 그들은 임진 수로 깊숙이 들

어가 있어야만 하였던 것이었다. 해암나루에서 동남으로 접어들면 곧 경강 수로가 나오는데

강화 수로마저 통과하지 못하였으니 여울에 빠진 가랑잎과도 같았다.

"하는 수 없다. 배를 돌려서 다름 물때를 기다려야겠다."

차인 행수의 닥달을 각오하며 도사공이 명하였다. 다시 서쪽을 바라보고 선수를 돌리자 배

는 급류를 뱃전에 받아 기우뚱거렸다.

"키를 바로 잡고 돛을 내려라!"

돛을 내리고 방향을 돌리니 그제서야 썰물이 실린 배가 쾌적하게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거의 십자수로에 이르렀을 즈음 맞은편의 예성강구 당두포 산봉우리 아래쪽에서 날

렵한 배 한 척이 엇비슷이 그들의 수로에 접어들어 나란히 다가왔다. 강경 상단의 조운선에

서는 배의 자취만 어렴풋이 느꼈을 뿐 거의 어떤 형상의 배인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물살이

빠른데다 양편에 열 명씩의 노잡이가 가세하여 저으니 배는 잔잔한 웅덩이 위로 미끄러지는

물뱀과도 같이 다가왔다.

"관선인가...빠르기도 하다."

도사공이 의아하여 중얼거렸으나 배가 두어 길 거리만큼 다가오더니 노를 접었고, 뱃전에

불쑥 머리를 드러낸 장정들의 자태가 보였다. 조운선에서는 더욱 정체를 몰라서 얼떨떨하는

중인데 뭔가 휘익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와 이쪽 뱃전에 투덕투덕 떨어졌다. 그것

은 밧줄에 매어진 여덟자 꺾쇠였다. 줄을 당기면서 장정들이 일어났고 그들은 아무 소리 없

이 이쪽 뱃전으로 날렵하게 뛰어넘어오기 시작하였다. 그제서야 도사공이 외쳤다.

"수적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서 뱃전을 넘어 들어온 자들이 사공 두어 명을 단칼에 베어 넘겼다.

그들은 아무 고함도 없이 뚜렷하게 목적한 대로 행동하였다. 우선 몇 명은 화승총을 겨누고

선실 입구가 있는 판자 앞과 이물을 막아섰고, 나머지는 반항하려는 사공들을 혹은 칼로 베

고 찌르며 견제하였으며 그중 하나가 잽싸게 뛰어가 고물대의 키잡이를 꿇어앉히고 대신 자

리를 차지하였다. 그제서야 저쪽 배에서 한 사내가 건너 뛰어와 명하였다.

"배를 떼어놓고 앞장서라."

밧줄들이 걷혀지고 돛대를 뒤로 완전히 젖혔던 그 배에서는 두 돛대를 올리고 돛을 올렸

. 십자 수로는 저만큼 벗어나 있었으며 교동 앞의 너른 바다가 펼쳐지는 중이었다.

"네가 이 배의 도사공이냐?"

무장도 하지 않은 두목인 듯한 사내가 꿇어앉은 사공들 틈에서 도사공의 목덜미를 잡아 일

으키며 물었다. 도사공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그는 계속 말하였다.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목숨은 물론이려니와 배도 온전히 보내주겠다. 그대신 조금이라

도 맞서려는 기미가 보인다면 모두 하백 앞으로 수장을 지내주마. 이 배가 경강으로 오르는

본선이 틀림없는가?"

", 그러하오."

"호위선은 북나루에 있는가?"

"그렇습니다."

"차인 행수와 한양 사람들은 이 배에 타구 있으렷다."

그는 이 배의 내막을 소상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졸개를 지시하여 선복 판자 아래

의 선실에 있는 자들을 끌어내라 일렀다. 그들이 타고 왔던 배는 앞서서 천천히 헤쳐 나가

고 있었다. 가끔씩 고깃배가 자나갔으나 어둠속을 항해하는 사이좋은 두 배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행수와 서기 겸인을 모두 끌어내고 그들을 갑판에다 무릎 꿇게 하고

는 단단히 결박을 지었다. 그리고는 선복에 실린 봉물짐들을 갑판으로 지어날았다. 날이 부

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포로들을 비좁은 선실 판자 아래로 몰아넣고 바다 가운

데서 닻을 내리고 배를 멈추었다. 연안의 유두곶을 돌아 나간 해서 지경인 반니도 부근 해

역이었다. 수적들은 갑판으로 끌어내었던 봉물짐을 가까이 대어진 자기네 배에다 옮겨 실었

. 그리고는 쌍돛을 올리고 서북방을 향하여 나아가더니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리고 말았

. 파도에 부서진 햇살들이 여러 수만 조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약탈당한 강경 상단의 배

는 정오 무렵까지 한가하게 바다 가운데 떠 있었다. 어선단도 지나가고 세곡선도 지나갔으

나 평화롭게 떠서 찰랑대는 그 배를 별로 이상스레 여기지 않았다. 마침 해주서 용매섬을

지나던 사후선이 반니도를 돌아 나가다가 그 배를 발견하였다. 사후선의 임무란 해로의 기

찰에 있으므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다가가게 되었다. 군관이 하나, 키잡이와 노꾼과 포수를

합하여 병졸 여섯인데 연안 순시선이었다. 가까이 가보니 갑판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어 비

워진 배가 적실하였으나 사후선 규모로는 예인도 불가능하여다. 표류한 배치고는 너무도 말

짱하였으므로 군관이 몸소 올라가 수색하다가 선복 판자 아래서 묶인 사람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제각기 입을 열어 수적에게 약탈당하던 일을 상세히 말하였다.

"혹시 청인이나 왜구의 배가 아닙니까?"

"아니오, 우리네와 똑같은 행색입디다. 실로 행동이 기민하고 잔인하여 손써볼 틈도 없었지

. 사공 셋이 죽었습니다."

"거침없이 베어 죽이고는 곧 바다에 던져버렸지요. 삼남 해역에만 수적이 극성한 줄 알았

더니 바로 경강의 코앞에서 당했소이다."

수군 장교는 아직도 믿어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배는 어떻게 생겼습디까?"

대꾸하던 겸인이 도사공을 돌아다보았다.

"글쎄요, 어두워서 자세히 살필 틈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관선인 줄 알았지요."

"관선이라면 전선을 말하는가?"

"우래 배보다는 뱃전이 낮고 좁은 것으로 보아 병선만이나 할까요?"

군관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좌우지간 우리가 교동까지 호송을 해드리지."

단단히 혼이 난 강경 상단의 사람들은 기진맥진하여 북나루에 당도하였고, 이어서 급주를

한양으로 보내어 사건의 전말을 판서 댁에 알리는 한편 강화유수에 통기하여 수적의 적경을

알렸다. 그러나 수영진장과 만호는 흔히 인근의 강과 바다에서 일어나는 좀도적들의 짓이거

니 믿고 있어서 대단치 않게 여겼다. 따라서 그뒤에 몇번 상선이 습격을 당했을 때까지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드디어 그해 가을 무렵하여 평안도에서 올라오던 상선들이 약탈을 당하여 해서의 사후선

두 척과 병선 한 척이 소청 근해에서 수색을 하다가 수상스런 배를 포착하게 되었다. 그 배

는 얼핏 보아 흔히 있는 상단의 중선과도 같았으나 그보다는 폭이 좁고 기름하였다. 쌍돛을

잔뜩 부풀리고 북쪽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우선 북을 울리며 방향을 잡아 뒤를 쫓았으나

여느 배 같으면 관선의 정지 신호를 받고 멈추어 지시를 기다릴 터인데 아무런 반응도 없이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병선이 앞장을 서서 그 배를 추적하였다. 대청을 지날 때까지 비

슷한 간격으로 추적은 계속되었으나 황당선의 속력이 비상하여 따라잡지 못하였다. 햇무리

가 보이고 구름이 서향하니 반드시 비가 올 조짐이 보였다.

대청도의 기암절벽이 수중에 솟아 기관을 이루어 수평선에 병풍처럼 서 있었다. 곧 이것

이 매의 떼가 몰려와 사는 분암이었다. 앞에서 달아나던 배가 서쪽으로 방향을 돌리더니 분

암의 벽을 향하여 달리는 것이었다. 병선에서는 그 배가 상륙할 곳을 찾는 줄 알고 잘되었

다며 쫓아나갔고 두 척의 사후선도 병선을 따라서 나가다가 황당선이 돌아 나간 섬의 반대

편으로 접어들었다. 배의 앞뒤를 찔러 포위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황당선 쪽에서 바라던 일이었으니 화력의 분산으로 하나씩 상대할 수가 있

었던 것이다. 병선은 서향을 잡고 분암을 돌아나가는데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져서 절벽

을 때리고 마주쳐 밀려나오는 물결 때문에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비가 부슬부슬

뿌리기 시작하였다. 분암의 돌출부를 돌아 나가면 그 안쪽에 배를 댈 만한 작은 만이 있었

. 병선에서는 포수들을 이물간 앞에 붙여두고 적당한 거리에 배가 나타나면 방포할 작정

이었다. 분암 돌출부를 돌아서 들어가는데 그때에 겨우 천여 보 앞에 황당선이 떠 있었다.

그 배는 돛대를 모두 내리고 만 안에 고요히 떠서 병선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다.

요란한 폭음이 들리며 포탄이 날아와 뱃머리를 맞추었는데 이물간이 부서져 나간 것은 물

론이요, 거기 엎드려 있던 포수도 즉사하였다. 호포 한 방으로 병선의 무장을 해제시킨 수적

들의 배는 연이어 노를 저으며 만을 빠져나가 병선의 측면이 보일 만한 곳까지 가서 다시

방향을 돌렸다. 수군들은 뱃전에 붙어서 화승총을 내놓고 쏘았으나 상대편 배의 노꾼들은

상투끝도 보이질 않았고, 번철만한 방갑이 앉은 자리마다 붙어 있어 총탄이 맞아도 소용이

없었다. 다시 번쩍하고 폭음이 들리며 병선은 진저리를 치듯이 흔들렸다. 키가 달린 선미 쪽

의 딸따리 받침이 날아가버렸다. 이제 배는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장님이 되어버린 것이다.

부서진 선미로부터 물줄기가 새어들어왔다. 간단히 포 두 방으로 관선을 제압한 적선은 바

로 가까이까지 다가왔다가 엇비슷이 방향을 틀어 뒤로 빠져나갔다. 수군들은 제각기 환도와

장창을 꼬나잡고 엎드려서 단병접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나 배가 차츰 기울고 스며든 물

이 선미의 밑창에 찰랑거렸다.

적선에서는 화승총 한방 쏘지 않고 그대로 섬 주위를 돌아 나갔다. 사후선 두척은 포성을

듣고서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알고는 방향을 돌려서 다시 동북방으로 섬을 돌아 나오는 중이

었다. 그러나 키잡이와 노꾼이 도합 대여섯에 포수도 없는 사후선이 민간 세곡선이나 어선

도 아닌 무장선을 어찌 기찰할 수가 있으랴. 병선만을 믿고서 마주 내달아오는데 앞에 문득

나타난 배는 적선이었다. 이미 방향조차 돌리지 못할 거리였다. 두 사후선은 각각 좌우로 벌

어져서 적선의 날카로이 치솟은 선수를 피하기에만 여념이 없을 정도였다. 황당선은 유유히

진로를 계속하여 그 사후선들의 가운데로 다가왔다. 수군들은 솔개미 바라보는 병아리들마

냥 무력하게 겁에 질려서 옆으로 빠져나가는 배를 올려다보기만 하였다, 좌우로 열 대의 노

가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비는 더욱 거세어졌는데 사후선은 가랑잎같이 흔들거리건

만 그 배는 돛을 전부 내리고 화살처럼 저어서 섬을 빠져나갔다.

대청도 앞바다의 작은 충돌로써 해서 일대와 경강 어귀에 수적이 발호한다는 것이 증명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관선에서는 기찰을 하려도 워낙에 그쪽 해로에 갖가지 조운선 세곡선

어선들이 많아서 수적의 배가 어디서 나타나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수적들은 정

확한 내사를 하고 어느 배가 무엇을 싣고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알아내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덮쳐 빼앗고는 곧 광대무변한 바다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관선이 가끔 외떨어진 어

선이나 상선들을 정지시키도 수색할 적도 있었으나, 그들이 딱히 수적의 도당인지 분간해낼

도리가 없었다. 해서의 포와 도서에 있는 수군 진영이나 강화 교동 근처의 영에서는 두어

달에 한두 차례씩 일어나는 수적들의 습격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심지어는 그들이 서해

근방에 가끔씩 출몰하는 왜나 청의 수적들이 아닌가 여겼다가, 적경을 고한 상인들에 의하

여 변산 일대의 수적들과 같은 아조의 백성들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너른 바다에서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배 한 척을 찾기란 짚더미 속에서 좁쌀 한 알을 집어내듯 어려운 일이

었다. 따라서 서해를 항해하는 배들에게 선단을 이룰 것과 각별히 경계하여 자위하라는 주

위를 줄 따름이었다. 수적들이란 곧 우대용의 일당이었으니 두목이 대용이요, 항해를 책임지

는 도사공은 박성대가 맡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따로 중선과 소선이 한 척씩 있었으니 약탈

한 물건을 송도나 강화로 부리러 가는 것이었다. 그 배들은 석범철이가 맡아 운영하였으며

교동의 주막에는 석서방의 식구와 홍천수의 식구가 있었는데 홍천수는 주로 모신이와 연락

하여 물건을 한양에다 먹였다. 그들의 선착지는 예정하였던 대로 장산곶을 지나자마자 불타

산의 또다른 산줄기가 닿은 으슥한 만이었다. 조니포와 멍구미섬은 위로 시오 리 가량 나아

가서 있었다. 그들은 오차포를 지나서 소금바위섬이 있는 어름에 배를 대어놓고 밤이 되기

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일단 어두워진 연후에 장산곶을 몰아 나가는데 배에서 횃불을 올리

면 선착지에서 역시 불빛으로 신호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배가 송림 사이의 비좁은 만에

대어지면 거기서 개천처럼 파헤쳐진 인공수로를 통하여 밧줄로 배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배가 완전히 숲 안에 들어오면 솔가지로 이리저리 덮어놓았다. 거기서 중선이나 소선에 약

탈한 물건들을 옮겨 싣고는 밤을 타고 해주, 송도, 경강 등지로 그때의 시세를 따라 운반해

나갔다. 벌써 반년 가깝도록 장산곶 부근의 숨겨진 선착지를 이용하였으나, 아무래도 기찰군

관이나 밀고자에게 뜨일까 하여 우대용 일당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뚝 떨어져

관서까지 올라가 으슥한 무인도를 정하기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의 산채에 빌붙어 더부

살이를 하자니 불타산 두령인 첫봉이의 눈치가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해에 벌써 대여섯 차례의 벌이를 통하여 자기네 은거지를 가질 만큼 형세가 불

어났다. 벌이를 하고 나서 산채에서 은거하던 어느 날 강선흥에게 전갈이 왔으니, 송도서 박

대근 행수가 왔다는 것이었다. 우대용은 인편에만 소식을 전하고 있다가 드디어 그가 달마

산을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부랴부랴 해지점으로 나아갔다. 달마산 산채에서 우대용은 박

대근과 이갑송을 만났다. 선흥이는 그들을 부여잡고 어린아이처럼 느껴 울었다. 세월은 그들

로 하여금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한 것이다.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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