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장길산 6

一字師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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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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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황석영

출판사:창작과비평사

봉사자:민형석,최의성

 

3부 잠행()

1장 황민

1

곡산 수안 방면에서 뻗어 내려오는 큰 산령이 서흥 봉산을 지나서 황주 극성진에 이르러

끝나는데 서흥 쪽의 북방로는 절령을 지나고 봉산 방면의 길은 동선령으로 향하여 있었다.

원래가 절령의 통로를 국도로 썼으나 너무 험준하고 여름 장마철과 겨울의 강설기가 되면

행로에 매우 곤란하여 결국은 동선령으로 옮겨 절령역은 봉산의 검수역말과 합치게 되니 자

연히 절령길이 두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절령은 봉우리가 높고 험하며 골짜기가 깊어서 병마가 접근하기 어려운 오새지였으니 그야

말로 일부당관 만부막적의 고장이었다. 이곳이 자비령으로 불려지게 된 것은 절령 북쪽에

나한당으로도 일컫는 자비사라는 절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원행하는 사람들이 자비사에 들

러 행로의 무사함을 기원하였고 절에서는 객주 비슷이 숙식처를 마련하여두었던 때가 있었

. 그러나 국도가 동선령으로 옮겨 가게 되매 길은 모두 없어지고 인적도 끊기고 말아 자

비사는 곳 폐허가 되었으며 절령에다 자비령이라는 이름만을 남겨주게 된 것이다. 따라서

동선령에는 문루와 성벽에 높다란 관문이 세워지고 객사와 역사가 번듯하여 북관과 서북에

서 해서로 들어오는 목구멍과도 같았다.

인적이 그리로 몰리게 되어 자비령 부근은 자연히 수상한 녹림처사들이 들끓게 되었다.

찍이 조대립이 은거하였고 그뒤로는 훈련원 교련관 출신의 임태룡이가 차지하였으며 마감동

과 노가 등이 뒤를 이었던 것이다. 노가도 마감동의 손에 죽고 나서 그들이 구월산에 머무

는 동안에 자비령에는 산채의 주인이 여러분 갈렸었다.

경신년부터 자비령 인근의 판도가 달라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춘천 태생의 최흥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흥복은 춘천 느릅나무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상민이었다. 키는 작고 뼈대

도 가늘었지만 성품이 강개하고 민첩하여 제법 인근 돌리에서 왈짜깨나 부릴줄 알았다.

소에는 쾌활하고 소탈하여 모두들 그와 벗하기를 꺼리지 않았으나 일단 성미가 치오르면 누

구도 막을 자가 없어서 끝장을 보고야 마는 까닭에 그와 다투기를 두려워하였다.

양평의 장꾼 하나가 완력을 믿고 읍내 주막에서 중인환시 가운데 그의 코피를 터뜨린 적이

있었다. 최흥복은 그날부터 무려 두달이 넘도록 장꾼의 집을 찾아가 날마다 싸움을 걸었고

힘이 부치는지라 혹은 이마도 터지고 팔이 삐기도 하며 눈두덩에 멍이 시퍼렇게 들기도 하

였다. 장꾼은 드디어 아예 역증이 나고 견딜 수가 없어서 뒤란에 숨거나 이웃으로 피하곤

하였지만, 최흥복은 지치지도 않고서 그 사립을 지키고 앉았다가는 저녁이 되면 돌아오고

이튿날에는 다시 꼭두 새벽부터 나타나 싸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삼경의 액을 만

난 격인 장꾼은 그만 코를 땅에 비비고 빌지 않았다가는 생업은커녕 마누라 자식새끼를 간

수도 못할 판이었다. 제발 사람을 잘못보고 건드렸으니 이만 거두어주십사 하는 말로 닭도

잡고 농주도 걸려서 시화를 청하였으나 흥복은 코방귀를 뀌었다. 바로 첫 번 싸움이 일어났

던 주막에 와서 사죄를 하라는 말이었다. 끝내 장꾼의 완력을 여럿 앞에서 꺾어놓았는데

그로부터 사람들은 흥복을 당초망이라고 불렀으니 고추처럼 독한 도깨비라는 뜻이었다.

최흥복이 고향을 등지고 세상에서 쫒기게 되었던 것은 느릅나무골의 민변을 주동했기 때문

이었다. 마침 때는 추수가 끝난 늦가을철이었다. 해마다 다가오는 위협이 있었으니 그것은

환곡이라는 명목으로 수령이 공공연히 수탈해가는 일이었다. 느릅나무골은 삼십여 호가 되

건만 일년 농사 끝에 거둔 쌀이 많으면 열 섬, 적으면 고작 칠팔 섬이었다. 환곡제도의 의의

는 애초에 흉년이나 천재지변 때에 백성을 구휼하기 위하여 춘궁기에 쌀을 내어주고 가을철

에 거두어들이던 것이었으나, 임진 병자의 난리를 겪고 나서 국가재정이 피폐하여지자 환곡

의 이식을 국비에 보태려고 매관이나 이곡으로 곡식을 확보하여 과세와 이식의 수단으로 삼

게 되었다.

관청과 군영이 보유한 곡식을 빌려주고 이자를 강요하게 되니 구제의 방편이 아니라 착취

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백성의 뜻은 무시하고 대부를 강요하였으며 이자도 엄청나게 높

아 빚에서 헤어날 도리가 없었다. 특히 관료들은 지방의 토호들과 짜고서 그들의 재고미로

써 마음대로 환곡을 조종할 수 있었다. 이자도 그렇거니와 마치 강도처럼 버젓이 훔치는 수

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모곡을 받아내는 것이다. 소위 모라는 것은 새와 쥐에 의하여

축날 것을 예상하고 메우는 것인데, 전혀 백성들의 일방적인 부담이었다. 경모, 영모, 관모가

곳곳마다 관청마다 있었으니 각기 정한 대로 거두어 이정하지 않았다. 언제나 곡식을 내주

면서 미리 모곡을 제하니 손해는 백성들에게 지워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가을에도 다시 모

곡은 모곡을 낳아 백성들이 부담하는 양이 점점 불어났다.

각처 아문의 명색들이 번잡하고 어려워서 단서를 잡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양곡대장의 기

록이 갖가지라 얼른 보아서는 좀처럼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세밀히 파고들어 조목마다 다지

면 앞뒤를 맞출 수 있을 듯하지만, 어쩌다가 실착하여도 양곡을 계산을 정확하게 해내기가

어려워지는 법이다. 계산에 능숙한 관리의 눈에도 그러하고늘, 일반 무식한 백성들이야 속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책잡을 수가 없어 눈뜨고 속아 넘어가는 판이었다. 고금을 통틀어 관

리나 지방 유력자가 백성의 눈을 속여 치부를 하던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인가. 가난한 백성

이 받아서 먹는 것도 애초에 제한한 양이 없고, 부유한 호에도 억지로 주어서 모곡을 받을

계책으로 하였다. 최흥복이네 마을에서도 형편은 똑같아서 열 섬을 넘지 못하는 수확에 받

아먹은 환곡은 수십 섬이 넘었다.

나라 곡식을 함부로 할 수 없다 하여 수령은 기어이 정한 수량대로 받아들이려고 장차를

많이 보내서 온 마을을 독촉하였으니, 백성들은 흩어지고나 호가 비게 되는 것이다. 지적하

여 받을 곳이 없으면 침해하며, 혈속도 없을 듯하면 그 이웃에 와 책임을 믇는다. 채찍으로

낭자하게 치고 가장집물을 배앗으니 난리를 만난 것과도 같았다. 가령 한 섬 벼의 값이 두

냥 돈이 되면, 먼저 한 냥은 받아서 착복하고, 남은 한 냥을 백성에게 억지로 주었다가 가을

을 기다려서 한 섬벼를 갖추어서 바치도록 하였으니 그것이 전환이란 제도였다.

느릅나무골 사람들은 추수를 하자마다 그런 난리를 겪고 나서 작년의 환곡을 갚고 나니 막

상 겨울을 지낼 일이 아득하였다. 마당에는 볏짚과 겨가 어지럽게 늘어져 있고, 논은 텅 비

었건만 양식은 한 돌도 남아 있지 않은 집이 많았다. 흥복이네 집도 여덟 섬을 추수하였는

데 석 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환자를 타가라고 창의 고지기와 사령이 나와서 일렀으니,

모두들 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지게를 지고 나서는 것이었다. 흥복이도 환자를 타가지고 돌

아왔다. 그의 형이 기다리다가 한 섬을 지고 돌아오는 흥복을 보고서 물었다.

"아니... 그것뿐이냐, 더 안 준다던?"

"한 섬만 지구 왔수."

", 또 환자 타는 기한을 준다더냐?"

흥복은 쌀섬을 내려놓고 코를 헹 풀어서 마당에 뿌렸다.

"그런 소리 없습디다."

"헌데 왜 한섬 지구 와서 그만두니? 넉 섬가지고는 우리 식구 농량으루 어림두 없다." "

짓 환자 타오기만 해서 뭘 하우? 내년에는 또 갚아야 되는데. 겨울 동안 장사라두 나갈라

."

그들이 앉아서 한숨을 쉬고 있는데 마을 사람 하나가 등구미에다 한되는 되어 보이는 쌀을

담아 들고 오는 것이었다.

"여보게, 세상에 이런 법이 있나?"

그는 둥구미에서 쌀을 한줌 쥐어서는 흥복이 형제의 눈앞에서 흩뿌려 보였다. 부스러진 싸

라기거나 빈 쭉정이뿐인 곡식이었다.

"이따위를 타려구 이십여 리 길을 점심도 긂어가며 오락가락하였네. 그리구 명년에는 다시

허리 부러지게 지은 기름진 곡식을 빼앗아가겠지. 그나마 모곡이라구 두어 되 가웃이나 얹

어서 받고 이자까지 받겠지."

흥복은 흠짓하였다. 부리나케 제가 타온 환곡섬을 뜯어서 쌀을 쥐어 살펴보았다. 보송보송

하고 질 좋은 쌀이었다. 방아만 찧으면 백옥 같은 쌀이 될 듯하였다. 그는 입에 몇알 넣고

겨를 뱉어내고 씹어보았다.

"우리는 운이 좋았네. 쌀이 아주 고소한걸. 사람 봐가며 환자 내주나?" 그러나 마을 사람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을 섬의 복판에 깊숙이 찔러넣었다. 무엇

을 잡았는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러면 그렇겠지...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아예 야차 같은 놈들인걸." 흥복의 형이 달려

들어 마을 사람처럼 손을 깊숙이 넣었다가 빼냈다. 그의 손에는 굵은 왕모래가 한움큼 쥐

어져 있었다.

"노적가리 태우고 이삭 주웠구나."

"풍년 거지가 더 섧다더니 이런 예미랄 놈들을."

흥복이도 곁따라 손을 집어넣었다가 허탈하게 쌀섬을 발로 내지르고 주저앉았다.

"그래 어쩌려나?"

마을 사람이 물었으나 흥복이 형제는 쭈그리고 앉아 먼산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내다가 팔든지 잡곡하구 바꾸든지..."

마을 사람은 혀를 찼다.

"허허, 눈앞이 명부전이군... 시방 장터에 풀려난 게 순전히 환곡 내놓은 것들일 텐데 눈치

바른 장사치들이 제값을 줄 리가 없지. 고작해야 네댓 돈이나 받을까 말까... 아마 아전놈들

이 사람을 풀어 도로 사들일 게야. 올해 들어간 성한 쌀과 바꾸어치겠지." "팔긴 뭣하러 파

. 이건 내 쌀이 아니니 임자헌테 돌려줘야지." "사람을 모아오시우. 오늘 환자 타온 이들

형편이 모두 비슷할 테니까 혼자 가서 더 드느니

작당이 이러울 게여."

흥복이 안을 내어 느릅나무골 청장년들 이십여 명이 동구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한나

절 내내 기다리다 타왔던 쌀을 지게에 걸머지고 있었다. 모두 소양강의 강창으로 몰려갔으

나 이미 관무가 끝났다고 하여 일단 창고 앞에다 환곡을 부려놓고 그냥 돌아왔다. 이튿날

몰려가보니 쌀은 간데없고 사령들이 풀려나와 무조건 그들을 오라에 얽어매는 것이었다.

"이놈들, 지난해의 환곡도 채 물지 못한 놈들이 감히 관곡에 까탈을 잡아 작당을 하느냐.

관명을 어기고 대드는 놈들은 역적이나 다를 바없다. 너희놈들 환곡을 모두 갚기 전에는 풀

려나가지 못할 줄 알아라."

이러는데 더는 버틸 수가 따로 없어 모두들 애걸복걸 사정하며 하루 종일 빌어서 귀쌈이나

몇대씩 맞고 풀러나게 되었는데, 물론 창고 앞에 부려놓았던 환곡은 다시 찾지 못하였다.

"배가 불러서 하는 짓들이니 명년 춘궁기에 어쩌나 두고 보자. 환자탄다고 얼씬거렸다가는

모가지를 뽑아줄 테다."

느릅나무골 사람들은 모두 코가 석 자나 빠져서 터덜터덜 밤길을 돌아왔다. 흥복이가 비록

성미가 좀 있다 하나 땅 파먹고 사는 쥐뿔도 없는 상놈인지라 관차를 당할 도리가 없었다.

"에라 잘되었다. 이참에 논배미는 팔아치우고 북방으로 올라가 장사나 해볼까?"흥복이는

제 형처럼 농사에만 매달리지 못하였으니, 원래가 무뢰한의 성정이 있었기 때문이어서, 인근

장터를 나돌며 산에서 채집한 잣이나 오미자, 석이버섯 등속을 팔기도 하며, 소양강에 나가

쏘가리를 잡아 주막에 대어주고 용채를 얻어 쓰기도 하였다.

이렇게 느릅나무골의 인심이 울혈하여 건드리면 터질 지경이었는데 뇌성에 벽력이라고 잡

부금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흥복이는 강에 나가고 집에 없었는데 집강과 마을 약정이 찾

아왔다. 호구를 조사한다는 것이었다. 일일이 성명과 나이를 적어 내려가니 흥복의 형이 몹

시 궁금하여 물었다.

"우리 호적이 안에 오른지 하루 이틀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호적을 다시 정리하고 그럽니

?"

"그냥 별게 아니라네. 부사 나리께서 갈려 가시고 새로 오신다네." "갈려 가실 적마다 호적

이 정리되는가요."

"신관 쇄마비가 나올 것이라네..."

"그게 무어요."

"허허. 이사람 송곳 항렬인가. 왜 자꾸 파고들어... 우리 고을을 위해서 부임하시느라고 사

비를 축내어 노자를 하시니 마땅히 우리가 물어야지."

비용을 받는데 장정이 많은 집은 자연히 더 받는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관리들의 토색질에

불만을 억누르고 있던 참이었지만, 집간의 조사에 억지로 응하면서 대들 틈만 엿보고 있었

. 나중에 약정이 돈을 거두러 다니는데 어찌된 일인지 호적장부에는 성이 바뀌어버린 자.

이름이 바뀐자도 있었으며 죽은 자가 살아 있기도 하였다. 원래가 호적정리가 목적이 아니

라 바짐없이 쇄마비를 거두려는 데 뜻이 있었던지라 장부기록에 소홀하였음이 틀림없었다.

또한 도감이란 자가 나중에 밥술개나 먹는 자들의 인정전을 바라고 호적 고칠 구실을 만든

것이었다. 흥복은 드디어 이것이 관리들 쪽의 허를 보인 짓이라 믿었으며, 더구나 수령의 사

삿돈에 관계되었으니 강하게 나갈 만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호적일을 물고 늘어져서 환곡수

납 대에 받은 수모를 갚아보려 하였다. 도감과 색리가 돈을 받으려고 호적대장을 가지고 나

타나니 느릅나무골 장정들이 떼지어 빈터에 모여 섰다가 그들을 막아섰다.

"이 동네 약정은 어디 있느냐?"

약정이 귀띔을 해준 일이라 그는 미리 피해버렸으니 나타날 리가 없었다. 대신에 흥복이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약정이나 마찬가지요."

색리가 귀찮다는 듯이 흥복의 아래위를 내리훑었다. 당초망 최가임은 누구나 아는 터였다.

둘러선 젊은이들의 붉으락푸르락하는 기색을 보니 심상치 않았다.

"쇄마비 내기 전에 그 대장이나 좀 구경합시다."

흥복이 색리가 옆에 긴 장부를 빼앗으려 하니 도감이 제지하며 제법 서슬 푸르게 호통을

쳤다.

"감히 어디다 손을 대느냐. 관가로 끌려가서 곤장에 다리 부러지구 싶냐." 우르르 몰려들어

도감의 갓을 벗겨 짓밟고 색리의 대장을 빼앗았다. 흥복이 호적대장을 얼른 글 아는 이에게

넘겨주니, 그는 일일이 짚어가며 일러주는 것이었다. 아비를 할아비로 바꾸고 아들을 아비로

바꾼것도 있고, 혹은 노를 주인으로 바꾼 것도 있었고, 성을 쓰지 dskg은 것도 있고 또는

성은 썼으되 이름이 없는 것도 있었다.

"하늘 보고 사람이라고 서서 다니는 것들이 남의 조상을 욕보이고 집안을 망치면서 쇄마비

란 또 무엇이냐. 너는 니 에미 애비도 없이 솟았니?"

흥복의 발길질 한 번이 신호나 되는 듯, 마을 장정들이 제각기 달려들어 차고 때리고 짖밟

는 중에 그만 살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대강 분풀이가 끝난 연후에 내려다보니 이미 두 관

리는 식어 있었다.

"본관이 와서 아직 검시하지는 않았으나, 만약 와서 시신을 가져가면 우리는 모두 장하에

죽네."

"마을은 부곡으로 떨어져 영영 천대를 받게 될 게야." 나이 든 축들이 탄식하고 술렁대는

데 흥복이가 나섰다.

"삶은 콩에 싹나우? 나중 일은 모두 내게 미루시우. 이것들을 끌구 강으로 갑시다." 그들은

관리의 시신을 새끼로 묶어서 소양강 사장으로 끌고 갔다. 대는 황혼녘이라 남은 노을이

제법 장하게 강변에 드리웠는데, 마른 나무와 짚을 쌓고는 시신을 올려두고 불을 질러버렸

. 생존의 위협을 받는 무리처럼 힘세고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는 법이다. 완전히 캄캄해져

서 사장에는 불길이 더욱 음산하게 피어올랐고 사람들의 마음도 비장하게 끓어오르기 시작

하였다. 환곡에 부역에 조세에 그렇게 시달리면서도, 거친 손으로 코 한번 힝하니 풀며 돌

아서던 농투성이들이 눈에 불을 켰다.

"이대로 관가로 짓쳐들어가서 사또에게 다지고, 수리를 끌어내어 죄상을 밝혀야 한다."

흥복이가 작은 체구에 제 키만이나 한 작대기를 집어들고 앞장을 서니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찍 그의 뒤를 따랐다. 중도에서 여러 곳의 다른 촌민들이 합세하여 근 오십여 인이 넘었

. 두런거리는 소리와 서로 찾고 부르는 고함소리, 근 오십여 인이 넘었다. 두런거리는

소리와 서로 찾고 부르는 고함소리, 개 짖는 소리들이 마치 대보름에 석전에라도 나가는 양

이라, 사람들은 차츰 두려운 기가 풀려갔다. 취한 자들도 끼여 있게 마련인데 그들은 지나는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끌어들였다. 마침 관리를 타살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관아에서 무장한

사령배가 풀려나왔으며 그들은 보안역 앞의 공터에서 부딪쳤다. 백성들은 조용했지만 무서

운 덩어리가 되어 어둠속에 서 있었고 병졸을 인솔한 장교도 질려버린 것 같았다. 그들 쪽

은 관솔 햇불을 쳐든자들이 있어서 훤하였고 창검이 차갑게 번쩍였다. 백성들 쪽은 더움속

에 희끗한 옷자락만 서로 얽혀 있을 뿐이었다.

"작당하여 관문을 어지럽히는 죄는 참형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더구나 관리를 타

살하였다니 수모 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하리라."

장교가 앞으로 걸어나와 외쳤고, 백성들은 잠잠하였다.

"관리로서 나라에는 해를 끼치고, 백성들은 못살게 하는 데서 나아가, 이제는 강상의 도리

를 깨뜨리고 환부역조하고 귀신을 살려놓고 갓난 늙은이를 만들어 쇄마비까지 걷어 주면 그

런 짓으로 부임한 수령이 어느 정신에 선치를 할 것이오. 죽은 자는 그런 편법으로 부임한

수령이 어느 정신에 선치를 할 것이오. 죽은 자는 그런 편법으로 혼란을 일으켜 사복을 채

우려다 하늘의 뜻으로 죽었거니와, 이제 수리를 불러내어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따져야겠

."

"그렇다면 총대를 뽑아서 명일 조례시에 사또께 현신하라. 모두 물러가고 관리를 타살한

죄인은 스스로 밝혀내어 관가로 끌고 오도록 해라."

"지금 사또께 아뢰고 수리를 잡아내야겠소."

"다시 말하지만 관문을 어지럽히면 모두 참한다."

그때에 누군가가, 아마도 취중이었겠는데 돌팔매를 날려서 장교의 가슴팍을 맞혔다. 장교가

에쿠 하면서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자마자 마치 천지는 캄캄 칠흑이겠다. 머릿수도 많겠다.

분은 났겠다. 그대로 땅바닥을 더듬어 돌멩이건 흙덩이건 집어들어 어림짐작 횃불빛을 바라

보고 던지니 강풍에 땡감 떨어지듯 하였다. 창검이 무슨 소용이랴. 비록 털벙거지 썼으되 정

수리 돌릴 틈바구니 없이 빼곡 들어차서 쏟아지는 돌팔매를 당하지 못하고서 사령배는 어깨

를 쳐올리고 궁둥이 뒤로 빼고 물러나기 시작하였고, ", 달아난다. 아예 삼문을 부수구 들

어가자!"

외치며 범새끼 잡은 포수처럼 기세가 등등해진 사람들이 밀려들어가니, 십여 명의 사령들

은 창검을 고리삼아 뒤로 사리고 뒤기 시작하였다. 진이 무너지면 일정한 거리까지는 수습

불가능이라 하물며 어둠과 분노한 무리를 무엇으로 당할까. 그들이 관가 앞에 이르니 관노

에 육방관속들까지 하다못해 육모방망이 없는 자는 곤장이라도 치켜들고 빽빽이 서 있었다.

새벽까지 멀찍이 지켜 섰던 사람들은 동이 훤하게 터오자, 시장기에 피로에 무엇보다도 싱

겁고 또한 후환이 두려워져 누가 제 얼굴이라도 알아볼가 하여, 소피 보는 척 빠지고, 부르

러 가는 듯 새고, 첩 들어온 뒤 뒤주 밑창 드러나듯 휑뎅그레 줄어들고 말았다. 드디어 관졸

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다른 마을 사람

들은 몰라도 느릅나무골 사람들은 기왕에 화냥년 소리 듣기는 마찬가지라서, 저지른 짓이

있고 보니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 그들은 작대기를 버리지 않고 대룡산으로 밀려

올라갔고 관군들은 사방의 활로를 끊고 그들과 대치하였다. 반나절쯤이나 족히 되었을까,

들의 가족들이 마을에서 하나둘씩 끌려나와 자식이나 형제나 지아비를 부르면서 애소하니

더는 견디지 못하고 반수 이상이 제발로 걸어 내려와 관가로 끌려갔다.

그때에 흥복은 칠팔 인의 장정들과 함께 최후까지 남았다가, 간신히 산을 빠져나가 양구의

깊은 숲속에 숨었다. 소문에 그들 가족이 옥에 떨어지고 그중에는 난장에 맞아 죽은 이들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더 이상 고향을 기대하지 않고 세상을 등지기로 작정하였다. 금화,

원 등지에서 셋이 빠지고 나머지 다섯이 평산, 서흥을 거쳐서 드디어 자비령 심원사 지경에

이르렀다.

노자도 없고 관에 쫒기는 몸이라 몰골이 말이 아닌데 일단 주지에게 겨울 지날 나뭇짐이나

장만하겠으니 며칠 숙식을 시켜달라고 하소하여 달포쯤 지내었다. 그 안에 최흥복은 황주계

를 넘나들며 재물을 털 부잣집을 물색하였다. 황주는 바로 대동강 어귀가 지척이라 미곡상

과 주상들이 많았는데, 드디어는 나무로 나가는 상인들의 행로가 몇군데 정해져 있음을 알

아냈다. 이른 새벽에 다섯이 나가서 삼지포로 나가는 어초내 가를 지키고 있었다. 마침 평양

으로 오르는 포목짐이 나룻배에 실려지는 것을 덮쳐서 간신히 첫해 겨울의 기한을 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심원사 부근 계곡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았는데, 자비령에 오래 전부터 진치고

있던 임태룡의 잔당들과 부딪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의주로 올라가는 대상들을

검수역로인 적암고개에서 덮치던 때였다. 최흥복은 그의 오른팔 격인 매삼이를 데리고 고개

아래 오수내에서 포교 차림을 하고 숨어 있었으며, 나머지 셋은 봇짐을 메고 행상인 듯이

오수원 부근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상대는 마필이 여섯에다 행상은 여남은 명이나 되어

좀처럼 작은 도적은 넘보기가 어려운 형세였다. 그들이 오수내에 이르러 해빙으로 불어난

시냇물을 건널 채비를 하는 중에 맞은편에서 포교 두 사람이 나타나 임가에 손을 대고 외쳤

.

"여보시오, 거길 건널 생각 마오. 가운데 깊은 곳이 있어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인마가

함께 휩쓸리곤 하였소."

상인들이 물을 바라보니 흐름이 빠르고 깊이를 측량할 수가 없어 과연 위험해 보였다.

"우리는 적암고개를 지키는데, 어제도 사람이 빠져 죽어서 아예 이리로 내려온 거요." "

른 곳은 길이 없습니까?"

상인들이 물으니 포교가 동북방을 가리키며 외쳤다.

"냇가를 따라서 위로 쭉 올라가시오. 건널 만한 자갈바닥이 나올 게요." 상인들은 포교 지

시에 따라서 위로 올라갔고 행상 가운데는 흥복의 일당 세 사람도 끼여 있었다. 상인들이

건너다보니 포교들은 마음이 놓이질 않는지 그들과 나란히 개천가를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

. 두어 마장 올라가니 개천이 북쪽과 동쪽의 지류로 각각 갈라지면서 너른 자갈밭이 나왔

, 맑은 물은 겨우 발목쯤에 찰까말까 하였다. 그러나 길에서는 먼 곳이라 적암산이 들판

가운데 빈집처럼 썰렁하니 서 있었다. 포교들은 그들이 차례로 모두 건너올 때까지 지켜보

고 서 있었다. 상인들이 모두 한마디씩 고맙다고 치하를 하고 지나는데 포교가 행상중의

하나를 잡아 세웠다.

"이 사람도 일행이오?"

"아니... 우리 일행이 아니라..."

상인들은 원에서 제각기 끼여든 세 사람을 그렇지 않아도 꺼림칙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래서는 일행이냐고 묻자 자연스레 저희끼리 물려 서니 남은 것은 그들 셋이라 대답이 없이

도 누구나 알아볼 만하였다.

"댁네 일행이오?"

둘 중의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은 우리두 잘 모릅니다. 우리는 임방의 체장을 지니구 있습니다." "보여주오."

다른 포교가 두 사람의 체장을 받아 살피고 돌려주었다. 포교는 잡힌 자의 가슴을 더듬더

니 짤막한 비수를 찾아냈다.

"그렇지... 내가 바로 보았다. 이놈, 너 자비령 화적의 일당이지? 너희들 잡노라구 우리가

이 고생이다."

주먹으로 면상을 줴지르고 곧 포박을 하는데 도둑은 순순히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살고 싶으면 바른 대로 고하라. 너희 패거리가 시방 이 사람들을 노리구 있겠지?" 도둑은

두 손이 뒤로 묶인 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하였다.

"그러하오."

상인들은 서로 놀라서 눈짓을 하며 주위 숲이나 산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네가 정탐꾼인 줄 벌써 눈치를 챘다. 보아하니 먼길 갈 사람들은 발을 버리지 않으려고

일일이 감발 풀고 행전을 벗고 바짓가랑이 걷고서 월천을 하는데, 이놈만 그냥 내를 건넜소

이다."

포교가 손짓하는데 상인들이 바라보니 도둑의 발이 젖었는지라 역시 그렇겠다며 고개를 주

억거렸다.

"너희 패가 어디서 지키고 있느냐?"

"적암고개 마루 양편 숲에 매복하여 있습니다."

포교의 심문에 도둑은 순순히 자백하였고 상인들은 모두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수가 얼마나 되는가?"

"모두 열다섯입니다."

포교는 혀를 차며 상인들을 돌아보았다.

"저들은 모두들 병장기를 가졌고, 우리는 맨손이오."

당하기가 어렵겠다는 얘기였다. 포교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노리는가?"

"말짐을 노리구 있습니다. 평산서부터 기별이 와서 기다리구 있었지요." 포교가 제 동료를

불러 잠시 의논하는데 산을 가리키기도 하고 뒤편 숲을 가리키기도 하다가 상인들에게로 돌

아왔다.

"아무래도 안되겠소. 화주는 나서우."

화주가 나서니 포교는 속삭였다.

"먼저 보상들을 떼지어 보내고 도적들의 눈을 속입시다. 같은 길로는 갈 수 없으니 돌아가

는 안전한 길을 내가 안내하겠소."

"고맙습니다. 검수역말까지만 호송해주시면 인정전이 없겠습니까. 덕분에 적환을 방비하게

되었습니다."

포교가 제 동료를 불러 일렀다.

"자네는 보상들을 끌고 고개를 넘게. 나는 마필을 호송하여 갈 테니까." 다른 포교는 행상

들에게로 돌아가 일렀다.

"도적들과 부딪칠지도 모르니까. 뭐 작대기라두 하나씩 꺾어 쥐시오." "우리두 돌아가는 길

을 택하겠소."

"도적들이 지키는 길로 꼭 가야 할 필요가 없겠수."

행상들이 떠들어대니 화주가 펄쩍 뛰었다.

"그러다간 봉패하구 마네. 도적들이 떼지어 가는 우리를 곧 알아볼게여." "마필만 보전하면

되니까 별 걱정들 마시오. 도적들을 말짐을 기다리노라고 여러분께는 나타나지 않을 테니

."

포교 중의 하나가 행상들을 이끌고 먼저 출발했는데, 체장을 보였던 행상 두 사람은 일행

을 만나러 차라리 원으로 돌아가겠다며 다시 시냇물 건널 채비를 하였다. 화주와 그의 차인

이나 되는 듯한 사내가 마필과 함께 남았다. 포교는 앞장서서 그들을 데리고 북쪽 지류의

시냇가를 따라서 올라갔다. 얼마만큼 올라가니 제법 널찍한 길이 나왔는데 다만 마른 갈대

가 무성하였고 인마가 걷기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한참 가다가 화주가 뒤를 돌아보니 냇물

을 건너간 줄 알았던 두 행상이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저기 보시우, 저 사람들이 우리를 쫒아옵니다."

포교가 허리에 차고 있던 환도를 쑥 뽑았다. 뒤로 따라오던 행상이 댓 발짝 거리로 가가이

다가서자 화주는 이제 포교가 칼을 휘둘러 그들을 잡으려니 여겼다. 두 사내 역시 품에서

짧은 비수를 꺼내들었다. 포교가 말하였다.

"꿈쩍 말아라!"

화주는 입을 벌리고 멍청한 얼굴로 그에게 곧추 내밀어진 칼끝을 내려다보았다.

"앉어... 얼른."

칼끝이 그의 배 위로 지그시 밀어올 제에야 화주는 알아채고 뭉그적이며 주저앉았다.

사내가 차인의 목덜미를 눌러 꿇어앉혔다. 그들은 하나씩 끌어다가 나무 밑에 붙잡아 결박

하였다. 서로 농을 던지고 반말을 나누는 것이 애초에 한통속이었다.

차인이 역시 고지식하고 미욱하게 중얼거렸다.

"여보, 포교가 도적이랑 손을 잡는단 말요?"

포교가 입을 길게 찢고 웃음을 참더니 대꾸하였다.

"구복이 원수라는데, 포교건 도적이건 가리게 되었나. 다음부턴 털벙거지 믿지 말게. 다 우

리 사춘이여."

이어서 짐뒤짐을 하더니 값나가고 부피 작은 것만 골라서 세 보퉁이를 만들어 한놈씩 짊어

지고는 말은 멀찍이 매어두고 휑하니 사라져버린다. 그들은 여계산을 거쳐서 심원사 골로

들어가는 산마루에서 포교 시늉하던 자를 기다렸고, 한 식경도 못 되어 그들이 헐레벌떡하

며 쫒아 올라왔다.

"어찌... 장물은 어떤가?"

"육주비전이 한보따리여. 봉이 세 마리."

"우리는 적암고개에서 도적들의 숨은 행적을 살핀다며 숲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내뺏지."

그들이 횡재한 일은 상인들의 입을 통하여 검수역 바닥에 자자하게 나돌았으니, 여계산 산

채의 정탐꾼은 이것을 즉시 산에다 알렸던 것이다. 임태룡의 잔당 중에 자비령 산채를 물려

받은 자는, 예전 노가의 수하요 마감동의 동무였던 엽사 문점손이었다. 그는 심원사 계곡에

서부터 여계산 연봉에 이르는 여덟 갈래의 골자기에 네 다섯씩 무리를 이룬 소당들을 모두

수하로 잡았으며, 무초령을 근거지로 동선령에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정탐꾼의 전갈에 의하

여 심원사 부근에 새로운 적당이 생겨나 적암고개에까지 나와서는 행상대를 털었다는 것을

알고서 그는 격노하였다.

"도둑 고양이가 범의 먹이를 뺏는 격이로구나. 만일 이놈들이 봉물을 모두 게워내면 또

모르거니와, 도리어 대항하여오면 산에서 쫒아내든지 어육을 만들어야겠다." 문점손이는 곧

졸개들과 의논하여 심원사 패거리를 들이치기 전에 일단 전령을 보내 귀순할 것을 권유해보

기로 하였다. 최흥복이와 그들 패거리는 심원사 계곡의 오두막에다 장물을 은닉해두었다가,

바로 이웃에 있는 황주 패거리들과 의논하여 평양으로 물건을 먹이기로 하였던 것이다.

취한 물건이 나간 뒤에 여계산 문점손이의 전령이 당도하였다. 가파른 산길에 희끗한 사람

의 형체가 보이자 최흥복은 오두막에서 나와 왼편 벼랑으로 나아갔고 다른 하나는 오른편

벼랑에서 활을 겨누었으며 나머지 둘이 환도를 빼어들고 그를 맞을 준비를 하였다. 그가

산채로 올라오는 마지막 굽이를 돌아들자마자 흥복이가 돌을 굴려 내렸다. 어른 몸집만한

바위가 벼랑 위에서 우당탕거리며 굴러 전령이 다가든 산굽이를 치고 아래로 휩쓸고 내려

갔다. 만약에 그의 뒤에 사람이 있었다면 맞고 부딪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간담이 서늘하고 오금이 저린 전령은 간신히 모면하고 나서 나무숲 사이로 들어가 엎드렸

.

"밖으로 나와라! 그 밑은 절벽이니 달아날 길이 없다. 안 나오면 또 바위를 굴려주라."

치는 소리가 있어 머리를 드니 오솔길로 두 사람이 환도를 휘두르며 뒤어내려오고 있었다.

전령은 벌떡 일어섰다.

"까마귀도 동류끼리 먹이를 다투지 않는데 이 무슨 인사가 이러하우?" 달려오던 자들은 환

도를 겨눈 채로 우뚝 멈추었다.

"무슨 소리냐... 어째서 네가 우리하구 동류란 말이냐?" "여계산 문두령의 전갈이오."

마주 달려들던 자가 위에 있는 흥복이게다 외쳤고 흥복이가 말하였다.

"데리고 올라오라."

최흥복은 여계산 문두령이 어느 시러베아들놈인지 알 까닭이 없었다. 끌려온 자를 바라보

니 두건 질끈 동이고 행전 날렵히 쳤는데, 허리에 작은 칼을 질러 넣었고 눈빛이 졸연치 않

아 보였다. 어느 골짜기에 저희처럼 어울려 지내는 무리겠거니만 여기고는 흥복이 물었다.

"여계산에 문두령이란 사람이 있다니 무슨 말인가 들어보자." 문점손의 전령이 그들의 하

는 태도를 살피고 비로소 이자들이 아직 자비령 일대의 판도에 전혀 어두운 신출내기들임을

알아차렸다.

"골마다 맹수가 있고 봉마다 범이 있으며 산맥의 정기를 받은 산신이 있는 것을 아시오.

우리 두령이 바로 그런 사람이외다. 우리는 조대갑 두령에서 임태룡 두령의 뒤를 이어 내려

온 무리요."

최흥복이가 여계산 졸개의 말을 듣자 그만 어이가 없는지 싱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뒷간 개구리가 측신 노릇 한다더니 별놈의 소리를 다 듣겠도다. 골짜기 하나 쥐구

사는 좀도둑 신세에 산신이란 다 무어란 말이냐. 나는 칠성님이시니 천지의 변화하는 속이

나 알아가지구 가거라."

둘러선 흥복이네 식구들이 따라서 웃었지만, 여계산 사람은 눈 하나 까딱 않고 그들의 웃

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우리가 자비령의 터주요 임자나 마찬가지요. 멀리는 신계지방에서 가가이로 황주까지가

우리들의 판도입니다. 우리 당이 십오에 이르고, 일대의 소당들이 모두 팔을 벌려 복속해왔

으니 해서 동쪽의 판도는 우리 여계산에서 쥐고 있소이다. 그런데 댁네들이 여기 들어와 현

신하여 인사도 드리지 않았고, 더구나 적암고개가 바로 우리 지척에 있는 중요한 길목인데

군계까지 넘어와 우리 일을 훔쳐갔소이다. 그래서 두령께서 댁네를 징치하기 전에 녹림의

경우가 있으니 말이나 넣겠다고 나를 보낸 것이우. 가져간 봉물을 모두 가지고 여계산에 와

서 사죄한 뒤에, 우리에게 복속해오면 지난 일은 묻지 않을 게요." "남의 집 제사에 와서 절

하지 말구 어서 돌아가보시게." 곁에 섰던 자가 냉소하였으나, 흥복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장난기를 거두고 정중하게 대답하였다.

"이거 우리가 낫으로 눈을 가린 격이라 잠간 몰라뵈었소이다. 우리가 약하고 어리석은 백

성으로 나라에 죄를 짓고 살 길이 없어 녹림에 들었더니 앞뒤를 모르고 결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수, 식구들을 데리고 문두령을 찾아 뵙고 사죄를 빌 터이나, 지금 봉물이 손에 없으니

어찌할 것이오. 바로 평양으로 장물을 처분하기 위하여 사람을 딸려 내보냈소이다." 전령이

강경하게 말아였다.

"우리 두령께서는 사흘 말미를 준다 하였으니 더 지체할 생각 마오. 안 그러면 자비령서

잔명 이을 길이 없을 게요."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기왕에 봉물을 돈으로 바꿀 것이니, 우리 식구가 환전하여 돌아오

면 그것을 가지고 여계산으로 나가겠소. 정 못 믿겠다면 우리와 함께 여기 머무르시든지..."

"안되오, 쌈은 사흘뿐이오."

"그렇다면 댁네와 내가 함께 여계산에 가서 두령을 뵙고 사정을 말씀드린 연후에 거기 머

무르면서 돈이 오기를 기다리는 게 어떻겠소?"

과연 그제서야 문점손의 전령은 쾌히 응락하였다. 흥복의 생각으로는 아직 자비령의 세력

판도를 모르고 있었으며, 우리 지금 형세가 불리한데 환난을 불러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위세를 부리려고 열 오에 오십여 명의 도당을 자랑하지만 그것은 과장일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에 여기서 기반이 튼튼하고 수가 여럿인 점만은 분명한 듯하니 자기네가 불리할

것은 틀림없었다. 최흥복은 식구들과 더불어 잠시 의논하였다. 세 불리할 제 져주고 나중에

실해진 연후에 도모하는 것이 병법의 순서라 하여 의논이 정해졌고, 흥복과 문점손의 전령

은 함께 여계산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여계산은 자비령 연봉의 허리나 마찬가지라서 예전에

는 산성이 있던 곳이었다.

흥복은 여계산 산채로 올라가 문점손에게로 안내되었다. 문점손이는 작은 키에 어깨가 다

부지게 벌어지고 눈썹과 구렛나룻이 시커먼 사십대의 사내였다. 그는 전령을 따라온 최흥복

의 모습을 보자 그만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소당을 거느린 좀도둑의 우두머리라고는 하나

사내로서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였던 때문이었다. 키도 작고 팔다리에는 힘이 없어 보였으

며 어깨와 가슴도 얄팍해 보였다.

"비록 눈은 있었으되, 어른을 몰라 뵙고 경우없는 짓을 하였습니다. 우리 식구가 환전해와

서 두령께 바칠 때까지 노염을 일단 거두십시오."

최흥복이 마루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비는데, 발길로 한번 내지르면 피를 쏟고 고

택골로 직행할 듯이 보여서, 문은 그만 지나치게 격노했었다는 싱거운 생각이 들었다.

"어서 일어나시게, 녹림의 법도를 몰랐다니 더 이상 탓하지 않으려네. 우리 산채의 상객으

로 며칠이건 묵으면서 사귀도록 허지."

복속을 맹세하고 털었던 재물까지 모두 바치겠다 하여 문점손은 그를 윗방에 머물도록 해

주고 함께 사냥도 다니면서 그와 사귀었다. 사나흘 지내면서 보니 최흥복은 얌전하고 말수

가 적으며 아주 소심하여 마치 대갓집의 청지기처럼 순종하는 양이었다. 문점손은 그를 경

계하거나 미워하기는커녕 매우 예의 바르고 고분고분한 부하가 생겼다고 여기게 되었다.

면에 최흥복은 문에게로 와서 수하가 되기를 자청해 보이기는 하였으나, 당초망 최흥복의

본성을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산채의 형세를 보아하니 자비령의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앉

았으며 봉산과 서흥과 황주 경계에 있어서 유리하였고, 판도 안에는 모둔 상로를 장악하고

있어서 역시 해서의 대적굴이 될 만하였다. 문점손은 흥복이 보기에는 이러한 산채를 손에

넣고 휘두를 만한 위인이 못 되었다. 사나흘 동안 함께 지내며 조심스럽게 얘기도 걸고 행

동거지도 살펴본 바로는 그는 천성이 각박한 자였다. 자기 외에는 아무도 산채의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였고, 끊임없이 주위의 부하들을 의심하였다. 검수역로에 벌이 나갔던 소

두령이 혹시나 자기 모르게 재물을 숨기지 않았는가 하여 몸소 매를 휘두르는 것도 보았다.

들리는 얘기로는 부두령 되는 자의 식솔이 서흥에 산다는데 살 한 톨을 도와주지 못하게 한

다는 것이었다. 얘기인즉 녹림과 여항이 자주 연결되면 관의 기찰이 미친다는 것인데, 그러

면서도 문점손은 평양에다 객주인을 시켜 집과 당을 장만하였다는 얘기였다. 그는 온정이

없는 자였다.

그저 날것에 불과한 기러기의 우두머리도 제 식솔의 안위를 위하여는 늘 먹을 것과 쉬는

일에 절제를 하는 법이거늘, 혼자 탐욕하고 규율에 가혹한 자가 어찌 삼십여 명의 사람을

통솔하겠는가. 다만 그에 대적하지 못하여 눌러 지낼 따름인지라, 항간에 나가 굶주리기보다

는 그래도 이밥을 먹고 따뜻한 방에 잠잘 수 있는 산채 생활을 어쩌지 못하고 지내는 졸개

들이 대부분이었다. 문점손은 엽사요, 따라서 긴창쓰기와 활 쏘기에 능하였고 화승총 두 자

루에 각기 장약을 재어 곁에 두고 지냈다. 마감동이 한양에서 도망쳐 철원 지경에서 만나게

될 사냥꾼 일행 중의 하나인 문점손은 원래가 두령의 자질이 있던 게 아니라, 모두 구 월

산으로 옮겨가고 잔당만이 남게 되어 저절로 두령이 된 자였다. 관군의 토포가 한차례 가시

자 인근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다시 머릿수를 채워갔던 것이다. 황주를 거쳐서 평양까지

나아갔던 흥복의 졸개가 물건을 환전하여 은자로 바꾸어가지고 산채로 올라왔고 최흥복은

그것을 문점손에게 바치며 공손하게 말하였다.

"이것이 재물의 전부는 아닙니다. 장물아치와 나누고 중간에 다리를 놓은 황주 패거리와

나누고 보니 겨우 절반이 될까말까 합니다. 하오나 삼백냥은 실히 되오니 받으시고 저희 식

구들도 산채로 받아주옵소서."

문점손이 여태 벌이도 많이 겪었으나, 워낙 소심하고 묘책이 없어 대번에 백 냥의 세 배나

벌어들인 적이 드물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흥복이란 자가 얌전하고 별반 무예도 없

는 듯하며, 제법 꾀는 있어 보이니 수하에 두고 용병에나 써먹으리라 여겼다.

"내가 최서방을 두고 보니 과연 예의를 알고 마음이 곧은 사람이다. 기왕에 뜻이 그러하다

면 아이들을 데리고 무초령에 들어와 함께 지내도록 하자." 최흥복은 내심으로 이젠 되었다

싶었다. 만일에 반년만 지낸다면 무초령 산채 졸개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모두 모을 수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흥복은 자기의 내심을 심원사 패거리에게 알리고는 곧 무초령으로

손들고 들어갔고, 문이 의심하지 않도록 충심으로 받들어모시는 체하였다. 부두령 을량이란

자도 어언간에 흥복과 가까워져 서로 하게를 놓고 지내게 되니 자연히 속내를 털어놓을 만

하게 되었다. 흥복이 점손을 제거할 뜻을 비치노라고, "곰사냥 해봤나?"

하며 서두를 떼었다.

"때 아니게 사냥 얘긴 왜 물어?"

"곰이란 놈은 잡을 적에 제 기운을 이용하여 잡거든. 긴 창대 하나면 잡을 수가 있지. 곰이

다니는 길목에다 팽팽하게 줄을 매어두고 창대를 곧추세워두거든, 곰이 지나가다가 창날에

부딪친단 말이야. 이게 뭔가 하고 창을 잡아당겨보거든. 튼튼한 삼바로 매어두었으니 좀처럼

당겨질 리가 있다. 화가 난단 말이야. 힘을 써서 제 앞으로 당기지. 곰이 힘을 쓰면 고목 뿌

리도 뽑히는데 밧줄이 무슨 소용인가. 줄이 뚝 끊어지면서 남은 힘으로 창날이 가슴에 꽂힌

단 말이야. 맛창이 뚫리고 기진해서 쓰러지게 되지. 그러면 산 아래 주막에서 슬슬 투전이나

하다가 올라가 양쪽 창끝을 둘러메고 내려오면 되는 거야." "허허, 재담이로군. 세상에 그런

곰이 있을까?"

"말하자면 그렇게 미욱하다는 얘기여. 어리석고 미욱한 자가 저를 해치는 일이 그렇단 얘

기지. 점손이가 사람 무서운 줄을 모르고 제 마음대로 행사를 하는데 우리는 창대 하나만

준비하면 될 걸 가지구 늘상 죽어 지내거든."

"우리 둘이만 그런 불평을 해서 뭘 하나. 모의라두 하다가 누가 귀띔만 해보아. 저 사람이

그냥 둘 성싶은가. 지난번에 부담을 털어서 마른안주로 감흥로를 마셔버렸다구 반죽음이 되

도록 두들기는 걸 보았지?"

"바로 그게 곰이 창날 받듯 하다는 거여. 내게 좋은 안이 있네." 최흥복이 가슴에 품었던

계책을 말하였고 부두령 을량이 곧 기뻐하며 동의하였다. 을량은 점손에게 찾아가서 말하

였다.

"이제 우리 형세는 해서뿐만 아니라, 관북과 관서에까지도 미칠 만하게 되었습니다." 겨우

삼십여 명 남짓한 서투른 작당에 지나지 않는데, 구월산의 길산 일당들 같은 정예도 아니

면서 형세를 말한다는 것은 과장이었다. 그러나 을량은 두령 문점손의 자만을 북돋워줄 필

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돌아오는 아흐레가 두령의 생신이시니, 우리 산채의 식구들에게는 긍지를 갖게 하고

자비령 일대의 다른 소당들에게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서흥 봉산 황주 지계까지 통

문을 돌려서 소당들의 두령들이 하객으로 참례하도록 이르십시오. 저들이 우리에게 겉으로

는 복속한 듯해 보이지만 철마다 들이던 공물도 요즘은 끊긴 형편입니다. 비록 우리 경계를

넘보지 않는다고는 하여도, 저희끼리 벌어들인 재물을 한귀퉁이도 떼어 보내지 않으니, 이는

우리가 징치를 게을리하였던 탓입니다. 하객으로 참례할 적에 각 무리마다 포목 스무 동과

돈백 냥씩을 바치도록 하고, 만약에 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엄중히 문책하여 자비령에서 쫒

아내도록 하십시오. 그냥 두었다가는 그런 자들이 법의 새끼와 같은 화근덩어리가 되어 감

히 대적하여 올까 근심입니다."

문점손이 흡족하여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

"과연 을량의 말이 맞다. 내 이번에 위엄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찌 자비령의 산신을 자처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통문을 여섯 군데로 보내게 하였는데, 이 일을 최흥복이 자원하였다. 최흥복은 우

선 산채로 찾아가 말없이 통문을 내밀고 그들이 당황하거나 성내는 마음의 움직임을 세밀히

살핀 연후에, 의기소침한 자는 불러일으키고, 분노하는 자는 더욱 돋워 점손을 제거할 안을

내놓았다.

"우리가 모두 관을 피하여 산간에서나마 마음대로 살고자 모였거늘, 공물이란 다 무엇이며

귀빠진 날의 하객이란 또 무엇이오. 이는 모두 점손이가 방자하여 녹림의 분수를 모르는 탓

이외다. 비록 우리가 안에서 그를 제거하고 싶기는 하나, 그럴 뜻이 있어도 한식구인지라 서

로 믿기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소이다. 오히려 여섯 패가 모이게 되면 한 작당이 되오니 술

자리에서 힘을 합하여 그자를 처치할 수가 있지요. 일단 내응이 있었음을 알면 부하들도 우

리의 말을 따를 게요."

여섯 파의 소두령들은 모두 기뻐하여 흥복의 안을 받아들였다. 점손의 잔치가 벌어지기 전

날에 모여들기로 작정하였는데 을량이 미리 여계산 입구로 나아가 그들과 모의를 하기로 되

었다. 그들은 모두 공물을 준비하여 왔고, 품에는 쇠몽치와 비수를 간직하여 왔었다. 술자리

에 오르기 전에 몸수색을 하기로 되었으나 이를 을량이 모른 체하였으니, 점손은 자객들 가

운데 떨어진 셈이었다. 흥복이 문가에 앉았고 을량은 미리 병장기 갖춘 부하들을 산채 건너

편 숲에다 숨겨두었다. 술판이 거나해졌을 무렵 흥복이 점손에게로 술을 따라 전하였다.

"자비령 산신께 만수주를 부어 올립니다."

큰 대접에다 술을 부어놓으니, 모두들 한마디씩 하였다.

"과연 호걸이십니다. 단숨에 드옵소서."

"우리네야 그저 월천꾼에 끼여든 난쟁이 격이니, 어디 축에나 들겠습니까?" "대호가 출림하

니 만산이 쥐죽은 듯합니다."

점손은 거나하여 껄껄대며 잔을 들었다. 이때에 흥복이 슬그머니 자리를 떳고, 군호는 그가

잔을 다 비우고 상 위에 내려놓을 찰나를 노리게 되었다. 점손이 두 손으로 대접을 치켜들

고 코를 박은 채 술을 마시는데, 그래도 호걸 시늉을 내느라고 잔을 모두 비우도록 입을 떼

지 않았다. 그동안에 여섯 명의 소두령들이 품에서 비수와 쇠몽치들을 꺼내어 상 아래 움켜

쥐고 있다가,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 취한다!"

하자마자, 일시에 그를 덮쳤다. 상위로 건너뛰는 자, 그의 가슴을 차고 달려드는 자, 그의

곁으로 파고드는 자로 점손은 찍짹 소리 못하고 당하였다.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최흥복이

신호를 보내어 무장한 채 지키고 섰던 을량과 무초령의 일당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그러고

는 더도 두말 없이 여섯 파의 우두머리들을 도륙하여버렸다. 회흥복은 안으로 점손을 제거

하여 무초령 일파의 내실을 다지고 밖으로 다른 패거리의 두령들을 처치해서 후환을 막았던

것이었다. 이것이 경신년에 자비령의 화적당의 판도가 바뀌게 되었던 전말이었다. 그뒤로 사

년여에 최흥복은 명실공히 자비령의 주인으로 군림하였고 가끔씩 만동이네 식구들과 황주

어름이나 수안 근처에서 충돌하는 일이 있었다. 흥복은 당초 두령이라고 불려졌는데 그에게

도 구월산 두령들에 관한 풍문이 전해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때는 갑자년 정월이었다. 안악에서 봉산으로 나가는 길의 가운데를 가르는 월당강은 두껍

게 얼어붙었고, 풀나루에는 인적이 끊겨 백설이 분분한 가운데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그네 세 사람이 눈발 날리는 강변을 향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도포 차림에다 남

바위 쓴 위에 갓을 쓰고서 점잖게 말 위에 올라앉았고, 또 하나는 말고삐를 잡았는데 털토

시에다 개가죽 조끼를 입었다. 그 뒤로 수행원인 듯 패랭이에 등짐을 멘 사내가 따라왔다.

마상의 양반 차림이 눈이 펄펄 내리는 강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가뭄은 좀 면하겠군, 이게 아마 첫눈이지요?"

뒷전에서 등짐을 지고 따라오던 사내가 받았다.

", 첫눈으로는 너무 늦었습니다. 금년 농사가 걱정이올시다." 이렇게 이상한 주종의 언사

로 보아 가반이 분명하였다. 마부가 또한 말하는데, "성님, 나룻가 주막에서 중화 할려우,

니면 건너가서 황뱅이곶서 쉬어 가실라우." "아예 건너가서 하지."

또한 말본새가 이러하니 도무지 하고 있는 꼴과 예의가 걸맞지 않은 노릇이었다. 그들은

바로 김기와 길산과 말득이였다. 마감동과 김선일이와 강선홍이가 장사치로 꾸미고 이미

사흘 전에 봉상으로 떠났으며, 그뒤로 칠팔 인의 졸개들이 역시 뒤를 따랐는데, 그들 세 사

람은 안악 배고개의 말득이네 주막에서 뒤늦게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만동이와의 약속

을 지키기 위해 구월산에는 오막석이만을 남겨두고 산채를 차려야 하였고, 그전에 할 일이

있었다. 나루터에는 예상했던대로 군관이 보이질 않았다. 때가 정월이고 일기가 좋지 않아

행객이 쉽사리 건널 수가 있었다. 황뱅이곶에서 봉산까지가 망망한 벌판이었다. 들 가운데

나직하니 엎드린 고개를 지나니 곧 봉산 오리정인데 길가에 하인배로 보이는 사내가 시퍼렇

게 얼어서 떨고 서 있었다. 김기와 길산이 자세히 보는데 그자가 마주 달려오며 애고, 소리

부터 내지르고 보았다. 만동이네 하인 중의 하나였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그리로 가는 중인데 뭣하러 나와서 서성대느냐?" 길산이 물으니 하

인은 재빠르게 말하였다.

"말씀 맙시우, 가내에 우환이 생겨서 모두 법석입니다. 저희 큰서방님께서 몹시 상하셨습니

."

"우리 식구들 가지 않았던가?"

", 이틀 전에 두령님들 몇이 들러서 주무시고는 곧장 동선관으로 나가셨지요. 거기서 머

무르고 계십니다."

마감의 김기가 물었다.

"너희 주인이 어디를 어떻게 다쳤단 말이냐?"

"곡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갑디다. 구월산 식구들 몇이서 나귀에 얹어 모셔왔는데, 머리를

얻어맞아 정신이 혼미하고 오늘내일 하는 중입니다. 작은서방님께서는 뒤따라서 구월산 큰

서방님들이 오시기로 되었다니 어서 나가서 기다렸다가 모시구 오라구 하셨습니다. 행여 안

들르시구 동선관으루 나가시면 낭패라구요."

길산이 김기에게 말하였다.

"무슨 사단이 난 게로군. 이번 길에 만동이하구 곡산까지 다녀오려구 했더니..." "산천 경개

나 둘러보구 가십시다."

"성님은 봉산 나오기가 싫지요?"

"아뇨, 전혀 아무 느낌이 없소이다. 어디나 똑같은 산천인데요." "도림골에 가보구 싶지 않

습니까?"

길산은 그의 딸을 염두에 두고 말하였으나 김기는 덤덤하게 대답하였다.

"이다음에 볼일이 생기면 장두령과 같이 가지요. 이골은 내 손바닥처럼 훤히 아는 곳이니

두령을 돕기두 수월해지겠소."

최근에 만동이는 평안도까지 올라가던 잠채터를 폐하고 그 대신에 새로이 곡산에서 은줄을

찾아냈던 것이다. 구월산 졸개들 중에 너덧이 나가서 행로를 호송하고 다녔었다. 곡산에서

황주 거쳐서 동선관을 지나는 길이었는데, 그들은 들판에서 몇몇 무리와 작은 충들을 일으

킨 적이 있었다. 길산이네는 동선령에 산채를 내기 전에 자비령 기슭에 최가 성을 가진 자

가 새로이 일어나 판도를 잡고 있음을 대략 눈치채고 있었다. 길산이네는 드러내놓고 벌이

는 도적질보다는 관의 눈을 피하여 세간의 이를 도모하는 것이 훨씬 유리함을 알고 있어서,

만동이의 잠채없에도 꽤 적극적으로 협력해오던 편이었다. 재화가 될 일이라면 무엇이나 하

기로 의논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상고나 토호의 집을 터는 일도 할 것이었

. 그러나 되도록 스스로 무리의 힘을 써서 다른 방도로 취재할 작정이었다. 난전도 벌일

수가 있으며 사주도 하며 변지로 나가 밀상도 할 것이었다.

그들이 읍내 장터 가까이 있는 만동이네 풀뭇간으로 가보니 모두들 아예 초상이나 만난 듯

침울하였다. 김기가 말에서 내래기도 전에 울상이 된 천동이가 신을 거꾸로 신고 뛰쳐나왔

. 그는 우선 길산의 소매를 부여잡고는 인사는 김기에게 하였다.

"샌님도 오십니까."

김기는 포선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있었으니, 장터가 한산하기는 하여도 혹시나 누가 얼굴

알아보는 이라도 있을까 해서였다. 남바위로 뺨을 가리우고 포선까지 펼쳐들었으나 김기는

봉산에 나 다니는 것이 종내 불안한 듯하였다.

"아이구, 저희 언니가 생명이 경각에 달했습니다."

"의원은 보였나?"

", 모두 고개를 흔듭디다."

그들은 안채로 들어갔다. 밖에는 눈이 퉁퉁 부운 부녀자들이 할 바를 모르고 서성대고 있

었으며 사랑 툇마루에 걸터앉았던 구월산 졸개가 일어나 허리를 굽신해 보였다.

"자네두 들어오게."

방에 들어가보니 눈까지 덮이도록 천을 싸맨 만동이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안면은 알

아볼 수 없이 부어올랐고 천 컽으로 검은 고약과 피빛이 배어나와 있었다.

"골을 깊숙이 상하여서 정신을 되찾기도 어려우려니와, 배미탕도 못마실 정도로 쇠약하여

희생할 가망이 없답니다."

천동이가 소매로 눈물을 씻어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김기가 물었고 천동이가 길산에게 말하였다.

"성님, 이 포한을 좀 갚아주시우, 우리 형제가 몇번이나 말씀드렸지요. 자비령에 오시려면

최가를 소탕해야 된다구 그랬지 않습니까. 드디어 후환을 그냥 키웠다가 이런 횡액을 만나

게 되었습니다."

"곡산에 함께 갔었나, 얘기해보게."

길산이 곁에 따라 들어온 구월산 졸개에게 물었다.

", 이번 철에는 두 번째올시다. 요즘은 거의 채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해토가 되기 전

까지는 별루 할 일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지난 가을에 채은한 것을 몇차례로 나누어 실어

내오는 셈이지요. 지난번에 호송을 갔을 적에 우리를 노리는 자들이 있었지요. 성재를 지나

서흥계로 들어서면 가는벌이 나오는데, 산기슭에 대여섯이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일행이

뒤처진 것은 모르고 앞선 말짐을 습격하더군요. 우리가 곧 당도해서 싸움을 벌여 쫓아버린

적이 있습니다. 헌데 이번에는 만동이 성님을 모시구 곡산까지 갈 때에, 서흥으로 해서 신계

를 지나 바루 곡산 가는 길을 잡았는데 누군가 뒤를 밟은 것 같습니다. 신계에서 묵었지요.

우리가 묵은 건넌방에 하인을 넷이나 거느린 양반 하나가 있었지요. 신계에서 곡산까지가

백여 리 하룻길인데 거기서는 길이 별루 험하지 않은 편입니다. 재를 세 군데만 넘어가면

다른데는 별반 어렵지 않으니까요. 그보다는 읍에서 하루 자고 외진 산협으로 꼬박 하루를

들어가야 하는데 곡산의 산길 험하기가 해서에 으뜸입니다. 읍에서도 또한 그 양반이 우리

가 묵는 주막에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튿날 식전에 떠나 잠채터에 이르러 산막에서 자고 이

튿날 저녁에 다시 읍내의 그 주막에 돌아왔는데, 그때까지 양반은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자

가 몸살을 앓는다기에 그런 줄로만 여기고 대수롭잖아 하였더니, 아침밥 먹을 때가 되도록

만동이 성님이 일어나지 않아서 방문을 열어보았지요. 윗목에 싸두었던 짐도 모두 없어지고

성님은 머리에 피가 낭자하여 쓰러져 있었습니다. 주인에게 물으니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

는데, 앓던 양반은 새벽에 떠났다는 것이었지요."

"틀림없이 내막을 소상히 꿰는 자가 미리 계획하였군." 김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졸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급히 의원을 데려다 보이니, 원행하다가는 목숨을 잃는다기에 주막에 그대로 눌러앉아 며

칠을 묵으며 차도가 있기를 기다렸습니다만... 제 소견으로는 가는벌에서 우리를 노리던 자

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은을 싣구 온다는 걸 그때에 알았을 테니까요." "세평이라면 바로

지척에 자비령 맥이 있지 않은가."

김기가 말하였고, 천동이가 덧붙였다.

"글세 따져보나마나 최가네 일당이 분명하다니까요. 수년 전에 문가가 몰락한 뒤에 춘천놈

최가가 자비령의 산주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놈들은 도모할 노릇이 도적질밖에

없으니 그런 곳으로만 꾀가 돌아가겠지요. 우리 처지가 이러니 관가에 발고할 수도 없고,

가의 수족들이 봉산 읍내에도 박혀 있을 겁니다."

김기와 길산은 서로 마주보았다. 길산이 말하였다.

"만동이가 이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그 최서방인가를 만나볼 참이었는데, 곧 만나게 되겠

."

"성님, 부탁입니다. 온 재산을 털어서라도 그놈들을 잡구 말겠습니다. 동선관 성님들이 데

려온 식구들두 당분간 머물게 하시지요."

", 이 사람 너무 속끓이지 말게. 우리는 포교하군 다르다네. 공연히 떼지어 몰려다닐 수

는 엇지. 좌우지간에 동선령에 터를 보아 겨울동안에 역사를 벌이기루 작정이 되었으니.

하는 사이에 짬을 내어 최서방 잡을 궁리를 하십시다." 길산이 말하자 김기가 안을 내었다.

"겨우내 이집에서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는가 보다 했더니 바라지도 않던 사냥을 하게 되

었구먼. 아무래도 그 최씨 성 가진 산주와 만나지 않고는 동선령서 역사를 시작하기가 좀

귀찮아지겠소. 내가 우선 구경해보구 오지요."

"직접 가시게요?"

"강서방하구 같이 설경두 즐길 겸 하여 그 위인됨이나 살피지요." 그날 밤이 으슥하도록

김기와 길산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새벽녘에

천동이네 집을 나섰다. 천동이네서 미리 사처로 잡아둔 동선관의 민가로 가니 마감동이와

강선홍이는 일찌감치 산채 자리를 본다며 나가고 없는데, 두어 명의 졸개와 김선일이가 집

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봉산에 물주를 둔 장사치나 사냥꾼으로 행세하였고 탑고

개서 동행한 부녀자 둘이 주모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다른 손님이 찾아오면 간혹 술과 밥을

팔기는 하였으나 방은 모두 찾다고 거절하였다.

저녁이 되어 산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내려왔는데, 내킨 김에 노루를 두 마리나 꿰어 왔으

므로 저녁감으로 맞춤하니 잘된 일이었다. 그들도 만동이의 불행한 일을 알고 최가인가 하

는 자를 몹시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검수역말을 지나 적암고개를 지나면 필경은 제놈들을 만나게 될 터이니, 내가 한 사나흘

손님 노릇을 하다가 오겠소."

김기가 식구들에게 이리저리 하라고 상세히 일러놓으니, 모두들 그 얘기를 듣고는 배를 잡

고 웃었다.

밤새껏 눈이 내리더니 아침이 되자 활짝 개었으며, 햇빛을 받은 세상은 온통 새하얗게 변

하였고 하늘은 차갑게 푸르렀다. 무초령에서 뻗어내린 적암의 산줄기가 너른 들판을 가로막

아 있는데, 눈을 가득 얹고 섰는 나무들은 가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동선령에서 검수역말로

나가는 길에는 해가 높이 떠서 정오가 다 되어가건만 인적이 뜨음하였다. 구종배 하나 거느

린 양반이 말 궁둥이에 부담과 찬합과 술병을 달고 마상에 올라앉아 건들거리며 오고 있었

. 백설에 뒤덮인 강산을 보고 시흥이 일어났는지 천천히 곡조를 붙여 읊조리면서 가는데,

목소리가 맑고 은은하게 산속에 퍼져나갔다.

적암고개는 별로 길거나 후미진 길은 아니었으나 워낙에 행인이 많아서, 목을 지키는 흥복

이네 패거리들이 늘 대여섯씩 나와 있는 곳이었다. 어떤 날은 아예 나오지 않는 때도 있었

, 또는 나와서도 적당한 벌이 상대를 잡지 못하여 하루 종일 목만 지켰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갈 적도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검수역말과 동선관에 정탐꾼을 박아두고, 오가는 상고

들 중에 적당한 자를 가려서 털어오던 것이었다. 부두령 을량이가 네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친히 나서서 누구인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동선관에서 연락이 왔던 것이었다. 을량은 등덜

미에 환도를 차고 있었으나 다른 졸개들은 맨손이거나 고작해야 몽둥이 따위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상대가 도무지 대적해서 싸울 만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선관에 방이 나붙었는데, 평양 아문에서 오백 냥을 가지고 오는 비장은

객주 우물집에 있는 한양 김초시에게로 전해달라는 내용이 써 있었다. 그런 글을 본 최흥복

이네 정탐꾼이 객줏집 앞을 지키는데 과연 짐을 실은 마필이 도착했고, 구종배가 서둘러서

짐을 꾸리고 마필을 보살피는 꼴을 보고는 명일에 출발하리라 믿고서 산에다 연락을 했던

것이다.

"어이 추워. 이놈의 자식은 동선관에서 아마 기어오는가 보다." "혹시 잘못 알아본 게 아닐

까요. 돈 가진 놈이 팔도의 도적에게 날잡아 잡수오 하고 광을 친 배나 다름없는데, 세상에

그런 아둔한 친구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사이 벌이가 없으니까 관에 나간 놈이 낯을 세우

려고 그러는 게지요."

"한양의 먹물 먹은 자라 하니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도 있겠지. 아마 평안감사하구 친척붙

이거나 동문수학한 동접인지도 모르지."

목을 지키는 자들이 눈 속에서 얼어붙는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데, 먼 곳에서 시

를 읊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있어... 어떤 놈이 소리를 하나."

"오는 모양입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니 고개 굽이를 돌아 나오는 선비 일행이 보였다. 짐을 짊어진 구종배

하나뿐이고 마상에 올라탄 선비가 전부였다.

"뭐야, 두 녀석 아니냐."

"뒤에 누가 따라오는지 자세히 살펴봐라."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수중에 대금을 넣은 기분이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먼저 내려가서 마부나 묶어놓아라."

을량은 졸개들부터 내려보내고 저는 슬슬 미끄럼을 타면서 눈비탈을 내려갔다. 견마를 잡

고 오던 구종배가 먼저 길 아래로 뛰쳐내려오는 도적들을 보고 펄쩍 뛰더니 고삐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하였고, 선비는 말을 돌려 재빨리 되돌아가려고 하건만 말은 좀처럼 돌아서지

못하고 좌우로 굽을 찰 뿐이었다.

"고삐를 잡아라!"

을량이 먼저 달아난 마부의 뒤를 쫓아가며 외치니 졸개들 둘이 달려들어 말고삐를 잡았고

다른 자들은 선비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을량이 쫓아가는데 마부는 몇번이나 미끄러지면서

도 잘도 뛰었다.

"그 자리에 서지 않으면 잡아서 목을 쳐버릴 테다."

을량이 환도를 시르렁 소리가 나도록 뽑아 휘두르며 쫓아가니, 마부가 뒤를 핼끔 돌아보고

는 아예 오금이 저렸는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 싹싹 부벼댔

.

"제발 한번 목숨만 살리시우..."

을량이 마부의 뒷덜미를 움켜쥔 뒤에 으름장을 놓았다.

"네 이 고얀놈, 아랫것이 주인을 버리고 달아나는 의리도 있느냐. 단칼에 베일 것이로되 내

묻는 말에 잘 대답하면 살려줄 것이로다."

"예예... 모두 말씀 올립지요."

을량이 마부의 목덜미를 잡아 흔드는데 보통 놈 같으면 앞뒤로 거세게 흔들리고 비틀거릴

터인데, 놈이 제법 뚝심이 있는지 꿋꿋이 버티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늉은 연상 빌면서

사정하고는 있으되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듯하였다. 슬쩍 바라보는 눈에 웃음기가 실려 있

는 듯하여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너 이칼이 보이느냐?"

"아무렴이오. 두 눈에 똑똑히 보입니다."

"죽기 싫으면 말해라. 돈 오백 냥은 가져왔느냐?"

마부가 눈을 껌벅거렸다.

"돈이라니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가서 뒤져보십시오." "말에 실은 부담은 그럼 무엇이냐?"

"헤헤, 그것은... 선화당에서 내린 용문단이올시다. 저희 큰마님의 치맛감입지요." "만약에

돈이 나오면 너는 눈 속에다 파묻어버릴 테다." 하면서 을량이 마부의 등을 밀어대니 그가

더 걷지 않고 버티면서 재빨리 말하였다.

"돈은 없고... 한양 경주인께로 가서 찾아 쓸 오백 냥짜리 어음은 가지구 있습니다." 을량이

마부의 등을 밀며 재촉하여 물었다.

"그래 어디에 감춰두었느냐?"

"바지 허리끈의 전대 속에다 넣어두었을 겁니다."

두 사람이 고개 위로 오르니 졸개들은 모두 시무룩해 있고, 선비는 눈바닥에 꿇어앉은 채

무덤덤하였다.

"부담에는 비단 한 필뿐이고, 찬합에 육포와 이것 한 병뿐입니다." 졸개들은 이미 싱겁게

육포나 씹고 있었다. 을량이 더 묻지도 않고 선비를 일으켜 도포를 헤치니, 그가 낭패한 기

색이 되어 허리를 구부리며 빼앗기지 않으려 하였다. 더듬어서 전대를 풀어 뽑아내고 뒤집

어보자 종잇조각 한 장이 떨어지는데, 그들이 저자에서 보아오던 반조각짜리 어음이었다.

전문 오백 냥 출급인이라 쓴 백지를 똑바로 자른 반쪽인데 지불한 연후에 그것을 발행한 곳

에 보내어 맞추고 계산하게 되어 있었다. 평양 아문의 인이 찍혀 있었으나 녹림에서는 종

이쪽지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미랄, 이것 한 장을 바라고 여계산에서 삼십리 길을 조반도 설치고 달려왔군..." 을량이

가 칼을 뒷전에 꽃아넣으며 중얼거렸다.

"이놈들을 어찌하우?"

나란히 꿇어앉은 주종을 가리키며 졸개가 묻자, 을량이 마부의 궁둥이를 내질렀다.

"일어서라... 산채로 돌아가야지."

선비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릎의 눈을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말에 오르려고 안장을 짚었다.

을량이가 눈을 부라리며 꽥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게여?"

"나는 다리가 약해서 먼길은 못 걷네. 들으니 삼십 리 길이라며?" 을량은 아무리 목털이를

여러번 해보았으나 이렇게 겁없이 엉뚱한 피탈자는 본 적이 없었다.

", 아주 송화색일세. 여보 댁네는 이제 서리 맞은 구렁이요. 날 샌 올빼미 신세인데, 마상

에 앉아 견마 잡힐려구 그러나?"

을량이 씨부려주건만 역시 선비는 태연자약하였다.

"허 그 사람, 아무리 호전걸육이라 하나, 저러다가는 칡뿌리 캐어먹다 산도깨비 되겠군.

같은 전주를 잘 다루어야 돈 먹을 게 아니오."

하면서 선비가 말에 오르고 마부가 고삐를 잡자 을량은 어처구니없는 중에도 더 이상 말리

지를 못하였다. 을량이 비록 돈을 얻지 못하였다하나, 수중에 관서 감영 발행의 어음이 있으

니 이 먹물을 데리고 가면 무슨 수가 나겠거니 여겼던 것이다. 또한 두령 최흥복에게 확실

히 돈이 없었음을 알려야 하였다. 적암산은 들판 가운데 성처럼 솟아있는데 검수내 옆으로

우회하여 다시 산길을 올랐다. 여계산이 가까워 질수록 길이 험하였고, 선비는 말에서 내렸

. 도적들 틈에 끼어 걷던 마부가 속삭였다.

"산줄기가 길고 굽이만 많았지 별루 험하지는 않습니다." "여하튼 강서방은 먼저 내려갔다

오게나. 나는 오랜만에 자비령의 설경이나 구경할 테니까."

"에이 그저 아까는 자고 두어 대 날려서 눈알이나 터쳐주구 싶더니만 이제 끌려가면 갖은

봉욕을 치를 테지요?"

"나중 생각하구 참아둬야지."

김기와 강말득이 한양 선비 일행으로 가장하였으니 그들은 먼저 범을 보기 위해 굴로 들어

가려는 것이었다. 여계산 산채에 당도하니 산골짜기에나 흔히 있을 법한 와전부락 비슷한

집채가 산속 분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최흥복은 마치 동헌에라도 나와 앉은 듯 마루

위에 올라앉았고, 두 사람은 아래 꿇려졌다. 을량이 쫒아 올라가 반쪽짜리 어음을 내보이며

말하였다.

"몸뒤짐을 해보니 이것뿐이었습니다."

흥복이 잠시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꼭 한양에 가서 경주인을 통해야만 이 돈을 찾을 수 있느냐? 만약 그렇다면 너희는 둘 다

살아남지 못한다. 평안도로 넘어가 객주에다 환전을 위탁할 수도 있겠지..." 김기가 흘깃 고

개를 들어 최흥복의 위인됨을 살펴보니 몸은 비록 작고 평범해 보였으나 음성이 또렷하고

강건하였다. 눈빛이 총명하고 위엄도 제법 있어서 예사 조무래기로는 보이질 않았다. 김기가

최흥복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하였다.

"여보게, 아무리 산간에서 세상을 등지고 산다고는 하나 이런 예의가 어디 있는가. 내 구태

여 반상의 구별은 따지지 않으려니와 장유가 엄연한데 두령은 아저씨나 삼촌도 없단 말인

. 눈 위에 끓어앉히고 당상에서 호통이니 여기가 무슨 관부라도 되는가?" 김기의 말을 듣

자 최흥복은 머리를 쳐들고 껄걸 웃었다.

"네가 사민의 으뜸이라는 자로서 반상의 구별을 따지지 않겠다니 매우 그럴 듯한 얘기인

듯하나, 여기서는 모든 것이 거꾸로다. 이곳은 한양 종루나 감영 저자와는 반대의 세상이다.

갓 쓰고 도포 입고 글 읽는 자가 가장 천하게 대접받는 곳이니라. 너희들이 만들어놓은 세

상을 여기 와서도 시행한다면야, 차라리 분재나무에 목을 매든지 물개똥에 이밥 말아 먹겠

. 너희는 우리가 세산에 있을 적에 가세와 문지가 좋다 하여 갖은 흉한 욕을 주고 세세연

년 벼슬자리를 독차지하여 한번도 우리와 바뀐 적이 없으니, 새삼 반상은 무엇이며 장유는

또한 무슨 금박 올린 개뼉다귀냐. 내 아저씨는 육십객이 넘도록 똥장군을 지느라고 허리가

눌러앉았고, 내 삼촌은 작료를 물어내느라고 궁둥이 살점이 아물 날이 없었다. 네 어찌 감히

혈족을 들어 꾸짓느냐. 우리가 너희 동류의 사가에 잡혀가 수염을 뽑히고 코에 잿물을 받아

처먹던 자들이며 이제야 그 값을 받는 것이다. 이곳은 산간에 비록 은거햐여 있으되, 너희를

징치하는 백성들의 헌부이니 엄숙하게 대하라. 만일 다시 참새처럼 재재거리면 장비 군령처

럼 다스리겠다."

김기가 흥복의 물 흐르듯 하는 꾸짖음을 듣자하니, 그 기개가 써늘하고 앞뒤가 맞아서 절

로 가슴이 시원하였다. 과연 자비령 인근의 두령 노릇을 할 만한 자였다. 김기가 곁은 돌아

보니 강말득이 히죽이 웃고 있었다. 김기는 다시 말하였다.

"어음은 감영에서 나온 것이니 바꾸기는 어렵지 않을 게야. 한데 오백 냥이란 대금인데 수

취인을 확인하지도 않고 내주겠는가. 내가 평안감사와 막역지우라 집안이 기울어 장사 밑천

이라도 하려고 이자 없이 빌려가는 터에, 만약 자네들이 이것을 빼앗으면 나는 앞으로 갚을

능력도 없거니와 환고향도 못하게 되니 차라리 예서 죽는 게 낫겠네." 최흥복이가 대답하였

.

"식구가 몇인가?"

"노모에 어린것들까지 모두 일곱이라네."

흥복이 낮을 붉히며 발끈하였다.

"겨우 일곱 식구에 한양에 집칸이라도 있는 놈이 글 읽는 선비로서 출사한 고관을 찾아다

니며 돈을 빌려? 네 이놈, 오백 냥이 무슨 서속두어 되 값인 줄 알았더냐. 한 마을의 구황을

해낼 만한 대급이다. 백냥으로 시전에 구문을 내면 네 어미 죽을 때까지 세 때 고기 반찬은

해드릴 수 있을 게다. 마누라를 삯바느질이라두 시켜서 호구할 생각을 하든지, 네놈이 경강

에 나가 열립군이라두 해처먹어라. 좌우간 백 냥은 남겨줄 터이다." 김기는 너무 그들을 가

벼이 알았다고 느기기 시작하였다.

"그래 나는 그렇다 치고 자네는 그 어려운 돈을 빼앗아 무엇에 쓰려나?" "무엇에 쓰든 네

가 알 바 아니지만 논설에는 앞뒤가 있으니 대답한다. 우선 우리 산채 식구들이 먹고 살

것이며, 느이놈들을 대적하려면 병장기도 많이 있어야 하니 화승총이라도 구해야겠다."

김기는 나중에 더 얘기를 나누기로 작정하고 지금은 거짓으로 잡혔으니 양반의 구실이나

잘해내리라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좌우지간 내가 저자로 다시 나가야만 환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찌할 터인가?" "그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황주에 거래하는 자가 여럿이니 달포만 기다리면 될 터이

. 그동안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사백냥이라면 너무나 싸군. 생각해보아라. 선화당에 종놈을

재우고 먹인다면 꿈이나 꿀 일이겠는가?"

흥복이와 둘러섰던 그 식구들이 소리를 내어 요란하게 웃었다. 김기가 말하였다.

"달포까지 기다릴 건 없다. 감영에서 온 비장이 어음을 주며 말하기를, 급하면 동선관에서

도 환전할 수 있다 하였으니, 나는 여기에 남고 우리 아이를 보내어 즉시 가지고 올라오도

록 함이 어떻겠는가?"

", 하루라도 여기서 빨리 나가구 싶겠지. 좋다, 만약에 돈이 올라오지 않으면 너는 죽는

몸이다. 오늘은 기왕 늦었으니 명일 날이 새자마자 내려가도록 해라." 흥복이 손짓을 하자

졸개들이 김기와 말득이를 일으켜 세웠다. 김기는 무릎이 시리고 뻣뻣하여 잠시 걸음을 떼

지 못하였다. 그들이 기거할 방으로 데려갔는데 장작을 푸짐하게 땠는지 방은 후끈거렸고

장판도 깨끗하여 지낼 만하였다. 곧 저녁 밥상이 들여지는데 쌀과 서속을 알맞추 섞었고 나

물에 건어도 올라 객줏집 밥상에 뒤지지 않았다. 산골이라 해 저물자 어두워져 밖으로 덧

문이 닫히고 누군가 번을 서는지 오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들이치고 목을 베기에는 아까운 위인이다."

"까짓 놈, 제가 자고라도 한 두어 대 지니고 왔으면 대번에 소경을 만들었든지 목에다 바

람 구멍을 내주었을 텐데요."

김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저 사람은 꼭 사로잡아야 되겠다."

밤이 이슥하여 그들이 잠을 청하려는데 밖에서 덧문의 고리를 벗기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서 문이 열렸다.

"손님, 주무시오?"

제법 말씨가 공손한데 어두워서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김기가 부스스 일어나니,

"나는 부두령 되는 사람이오, 맥 짚을 줄 아오?"

하였다. 부두령이라면 적암고개에서 자기네를 잡아온 자였다.

"의서를 약간 읽은 탓으로 잘은 못 보지만 대강 눈치는 있네." "그렇다면 어서 나와서 우리

식구좀 보아주오. 지금 되우 앓고 있소." 김기가 따라가니 졸개들이 머무는 기다란 일자의

초가였다. 사내 서넛이 둘러앉았는데 그틈에 최흥복이도 보였다. 복통을 일으켜 제비알같은

땀을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것은 아직 앳된 소년이었다. 김기가 들어서자 사내들이 그에게

앉을 자리를 내주었다. 김기가 보아하니 널브러져 신음을 하는데 낯빛이 새카맣게 죽고 입

으로는 거품이 부글거리고 있으니 곽란이 분명하였다. 맥을 짚어볼 필요도 없이 우선 막힌

것을 뚫어 토하게 하고 피를 통하게 할 것이 급선무였다. 손발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

. 습곽란이니 토하거나 아래로 뚫리면 쉽게 기력을 회복할 것이라 별로 자신이 없던 김기

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우선 더운 물에 소금을 타오게."

"어찌, 살아나겠수?"

곁에 앉은 을량이 물었다.

"저녁에 뭘 먹었길래 이 지경인가?"

"번을 서고 와서는 찬밥을 먹었습니다."

그와 함께 산채 어귀로 파수를 보러 나갔던 졸개가 말하였다. 최흥복이가 혀를 차며 부두

령 을량을 꾸짖었다.

"추운 데서 얼어가지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찬밥을 먹게 하다니, 자네는 뭘하고 있었나?" "

급식은 서흥댁이 하지 않습니까?"

"서흥댁을 불러라."

소금믈이 들여지고 김기는 그것을 앓는 자에게 억지로 마시게 하였다. 울컥이며 밖으로 넘

쳐 흐르는데 김기는 그의 목을 젖혀 모두 비우도록 하고 나서 구들목에다 덮힌 손바닥으로

손과 발을 주물러보았다. 거뭇하게 변한 부분을 눈여겨두고는 바늘을 가져오게 하였다. 바늘

을 등잔불 속에 집어넣었다가 서너 군데를 따주고 여럿이 비벼주도록 하였다.

"솔밑 검정을 두어 돈 긁어내어 더운물에 타서 마시게 하오. 아랫목에다 배를 지지도록 하

면 차츰 기혈이 돌기 시작하겠지."

"부르셨습니까?"

밖에서 아낙네의 목소리가 들리자 최흥복이 문을 열고 꾸짖었다.

"서흥댁이 산에 오른 지 어언 일 년이 되어가는데, 아이들게 찬밥을 먹인다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 그것은 제 잘못이 아니올시다. 번을 들러가는 이는 차례가 바뀌어야 내려와서 식사에

참례하는데 늦어지면 저는 설거지를 끝내버리지오."

곽란을 일으켰던 졸개가 항아리에다 한참이나 토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전신을 떨기 시작하

여 두텁게 이불을 들씌워주었다.

"음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파수보러 나간 아이들이 돌아와 식사할 때까지 늦추도록 하게.

오두와 양서방은 군령에 의하여 장 십 도를 내리도록 하고 부두령이 곧 집행하게." 을량이

명을 받고 나갔으며, 최흥복과 김기는 함께 일어섰다.

"고맙소. 어서 돌아가 주무시우."

최흥복은 처음으로 존대를 썼는데, 더 이상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대신에 서흥댁에게 일렀

.

"손님이 무료하실 테니 건포와 송화주로 간단히 술상을 보아 내가도록 하게." 김기가 방으

로 돌아오니 말득이는 그를 불러가는 것이 염려가 되어 잠들지 않고 기다리던 참이었다.

"무슨 일이우?"

"좀도적의 두령으로 섣불리 볼 위인이 아니더라. 제 부하를 생각하고 군령을 세우는 일이

자상하고 엄정하니, 이 산채를 힘으로 덮칠 생각은 말아야 되겠구나." 김기가 방금 보고 온

얘기를 전하니 말득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이 열리면서 조촐한 술상이 들어왔다. 이윽

고 밖에서 곤장을 때리는지 철썩이는 소리와 어이구 데이구 하는 소리가 잠깐 들려왔다.

"번의 교대를 늦게 시킨 소두령과 산채 살림을 맡은 자를 벌주는 모양이다. 헌데... 이곳의

허를 대강 짐작하겠구나."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는 저물 때까지 갇혀 지냈는데 무엇을 보셨다구 그러시우?" 말득이

가 말하니 김기는 빙긋이 웃었다.

"대저 사람의 일에는 치우친 것은 모두 약점이 되느니라. 열 소경에 한 막대라는 말이 있

으나 또한 반대로 독불장군이라고도 한다. 최흥복의 인물됨이 출중한 것은 사실이나 그 주

위에 그를 보필할 자가 없으니 최가가 없으면 무리는 곧 혼란에 빠질 것이다. 부하가 찬밥

을 먹고 배탈이 난 것을 두령이 알아 조치함은 자애를 보이는 일이기는 하나, 너무 세심한

데까지 미치니 다른 자가 주의할 틈이 없다. 최흥복이만 산채를 비운다면 오전에 밥을 먹고

와서 여기 노구에다 살 안쳐 점심 짓기 전에 점령할 수가 있을 것이다." 김기는 말득이에게

다시 주의를 주었다.

"내일 내려가거든 즉시 은자 오백 냥을 준비시켜 틀림없이 올려 보내도록 하여라. 최가와

같은 사람에게는 우선 슨의를 보여주는 점이 긴요하다." 그들이 처음 작정하기로는 일단 어

음을 미끼로 말득이와 김기가 사로잡힌 뒤에 말득이가 그 산채의 허실을 보고 돌아가면

야습을 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어음을 환전하기 위해 말득이를 내려보낼 것이 뻔하

겠기 때문이었다. 김기는 산중을 기하기로 하고서 일단 돈 오백냥을 최흥복에게 틀림없이

전달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댁네가 환전할 객주가 있다 하니 어음에 수결하여 건네시오." 김기는 흥복의 요구대로 두

말 없이 수결하여주었고, 을량이와 세 사람의 졸개가 말득이를 데리고 일어섰다.

"한 사날 걸릴 게요. 오백 냥을 끌어모으자면 봉산이 아무리 대처라지만 쉽진 않을 테니

."

김기가 말하니 최흥복이 소리내어 웃고 나서 말하였다.

"처음에 약속한 대로 당신이 귀향하여 쓸 돈 백 냥은 남겨주겠소. 그러니 앞으로 나흘 동

안에 숙식비로 사백 냥을 받는 셈이로군."

김기도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대꾸하였다.

"천사가 모화관에 든다 하여도 이런 호강이 없겠구먼, 하루 세 끼 서속밥에 비단 금침 없

는 잠자리가 백 냥씩이나 된다니..."

"턱짓으로 아랫것들 부리며 대물림하여 공밥 먹은 것을 당대에 갚으려니 백 냥도 너무 싸

."

최흥복이가 거침없이 받고 나서 졸개들에게 일렀다.

"애들아, 어서 손님을 모셔라. 그리고 뒷간 가는 일말고는 한걸음도 밖으로 나오게 하지 마

."

김기는 별수없이 빈 방안에서 세 때 밥이나 죽이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선관의 구월산 패가 빌려 임시로 차린 주막에는 길산을 비롯하여 마감동, 강선홍, 김선일

등이 모두 모여 있었다. 산으로 올랐을 김기의 하회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중화참이 되어

서 말득이가 낯선 사내들과 동행하여 술청으로 들어섰고, 그들이 의심을 품지 않도록 모두

들 말득이에게 모른 척해두었다. 김선일이가 나서서 주막 주인 행세를 하는데, 말득이 보고

아는 체를 하였다.

"아니 어제 한양으로 떠나시더니 샌님은 어쩌고 당신 혼자요?" ", ... 그만 봉산서 검구

역말을 나가다가 낙마하셔서 지금 객사에 누워 계십니다. 사인교라두 구하든지 해야겠는데

노자도 모자라고... 어음을 환전할 수 있겠지요. 감영 것인데..." 말득이가 눈을 꿈쩍하니 김

선일은 영문을 모르는 채로 우선 받아두었다.

"글쎄요 한번 알아보지요. 동행들이시우?"

", 워낙 대금이려니와 나으리도 불편하셔서 곁꾼을 샀습니다." 말득이가 그럴 듯이 둘러

대니 김선일이가 쓸모없는 어음 쪽지를 들고 길산이들이 묵는 안채의 끝방으로 찾아갔다.

"강서방이 자비령 패를 데리고 온 모양인데, 이걸 환전하랍니다." "몰라서 묻나, 그따위 종

이 쪽지를 바꿀 돈이 어디 있어?" 마감동이가 말하였고 길산이 물었다.

"몇이나 따라왔던가?"

"네 놈이우."

"까짓 지금 당장에 때려 잡읍시다."

선홍이가 소매를 걷으며 일어서려는 것을 길산이 제지하였다.

"삼촌이 뭐라고 전하든가 듣구 나서 해야지. 자네 가서 의논하자구 말득이를 데려오게."

선일은 다시 술청으로 나와 말득이에게 말하였다.

"잠깐 나 좀 보세나."

말득이 대신 을량이가 눈을 부라렸다.

"뭣 땜에 그러우, 어음 보구 돈 내주면 될 터인데."

김선일이도 놈들의 정체를 아는지라 곧 성깔을 올리며 맞서 대꾸하였다.

"상여 메고 가다가 귀창 후비든 말든 임자가 무슨 참견이여. 이게 무슨 동네 송사인 줄 아

. 언제 봤다구 나서서 지랄인가."

"뭐라구, 아니 누구보러 행역질이야."

"그렇잖소. 댁네는 곁꾼으로 고용되었으면 고분고분 시키는 일이나 하면 되는 거여. 댁네가

무슨 화적이 아닌 바에야 환전하는 일에 나서긴 왜 나서." 김선일의 끝마디에 붙은 화적 소

리가 그들을 뜨끔하게 하였던지 일시에 바람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을량이 가보라며 말

득이에게 눈짓을 하며 속삭였다.

"만약 섣부른 짓 했다간 산에 있는 느이 주인이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라." 말득이가 알았

다고 굽신거린 뒤에 술청을 빠져나와 뒤꼍으로 가며 투덜거렸다.

"이런 제미, 어디서 지렁이 갈빗대 같은 놈들한테 덜미질을 당하구 있네." "곁에서 보아하

니 자네 아예 추풍선이 신세일세."

김선일이가 놀려먹는 것도 모른체 구월산 패가 들어 있는 방에 툴툴대며 들어앉았다.

"나 겉은 놈은 성미가 급하여 술수질에 끼웠다간 지레 애간장이 말라버리겠수." "그래 어음

을 정말로 바꾸라니 무슨 뜻이냐?"

길산이 물었다.

"삼촌께서 그리 하라십니다. 최가란 자에게 먼저 신의를 보여주어야 하겠다구요. 그리고 급

습하지 말고 일단 내려오신 다음에 따로이 도모 하신답니다." 길산은 말득이의 얘기를 듣자

더이상 다지지 않았다.

"오백 냥이라면 그저 내주기에는 큰 돈인데, 나중에 찾을 수가 있겠지. 기한을 얼마나 잡았

느냐?"

", 나흘입니다. 헌데 그 최가놈이 백 냥은 생계를 위하여 남겨주겠답니다." 선홍이와 감

동이가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쥐 죽은 데 고양이 눈물이로군."

", 그놈 도적놈치고는 보살이 들어앉았구나."

길산이도 싱겁게 웃어버렸다.

"나흘에 사백 냥이라니 밥값을 받는 셈이로구나."

"그놈이 그리 말합디다."

"우리두 한 열흘 잡아두었다가 천 냥 갚으라구 그럽시다." 길산이 마감동의 말을 듣고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래, 삼촌은 그놈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사로잡으려는 생각이시군." 말득이도 하는 수

없이 털어놓았다.

"위인이 제법이라구 그러십디다."

"천동이에게 가서 오백 냥 주선해달라구 그래라. 그리구 저놈들이 의심을 할 테니 너는 다

른 집에 가서 묵도록 하고, 하루 한번씩, 김서방을 보낼 테니 전할 말이 있으면 김서방에게

말해주어라."

"어이구, 도 저놈들에게 가서 하정배 드리란 말이우?" 말득이가 투덜대니 선홍이가 말하였

.

"염려 마라. 내가 나중에 네 원풀이를 실컷 해줄 테니." "내 원풀이를 왜 성님께 시킨다우.

이놈들 거꾸로 세워두고 오줌장군을 부어줄 테다." 마감동이가 천동이에게 돈을 돌리러 가

기로 하였고, 말득이는 하는 수 없이 술청으로 되돌아갔다. 자비령 패거리들이 잔뜩 의심이

깃든 눈초리로 말득이의 안색을 뚫어지게 살피는 것이었다.

"무슨 쑥덕공론이 많아?"

"돈 오백 냥을 척척 내어줄 세상이우? 아무튼지 쉽사리 되었소. 주인이 봉산 객주에 사람

을 보내어 바꿔주기로 하였소. 우린 사처를 잡아 기다릴 일만 남았지요." 김선일이 다시 나

와서 말득이가 했던 얘기를 되풀이하였고 사처는 빈 방이 없으니 동선관의 다른 주막으로

나가보라 일렀다. 그 말에는 자비령 패거리도 쉽게 동의하였으니 아무래도 낯선주막이 꺼

림칙하였던 까닭이었다. 김선일이와 졸개 하나가 맡아 그들을 감시하기로 되었는데, 그들은

동선관의 군막과 임시 저자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어느 마방으로 들어갔다.

숙박인은 받지 않고 말만 맡아서 먹이도 주고 손질도 해주는 집이었는데, 그 주인이 바로

자비령의 정탐꾼이었던 것이다. 마당에 칸막이 지은 마구간이 기다랗게 지어지고 한편에 편

자나 마구를 수선하는 대장간이 있었다. 여물을 쑤는 냄새와 말똥 냄새가 집안에 가득한데

말털을 빗기고 있던 사내가 반색을 하였다. 그들은 저희끼리 쑤군덕거리고 나서 말득이만

골방 속에 처박아두고 따로이 점심을 먹었다.

사흘을 기다리는 사이에 말득이는 몇번이나 제 맡은 소임이 사나워서 빼쳐 달아나고 싶은

것을 참노라고 애꿎은 소주잔깨나 들이부었다. 사흘째 저녁에 어김없이 은자 오백 냥이 당

도하였다.

김기가 아침을 먹고 무료히 앉았으려니 상방에 오르라는 최흥복의 영이 덜어졌다. 은자가

도착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확인을 끝내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

가니 최흥복이 혼자서 술상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앉으시오. 그동안 심려가 많았겠지요. 약속대로 돈이 들어왔으니 당신을 놓아드리겠

."

최흥복은 완전히 태도를 바꾸어 정중하고 은근하게 그를 대하였다. 그는 잔을 내밀고 술을

찰찰 넘치도록 따랐다.

"비록 대금을 강탈하였으나, 본시 예의는 있는 사람이니 너무 포한을 갖지 마시오." 최흥복

은 웃었으나 김기는 짐짓 얼굴을 굳히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내가 밑으로 내려가자마자 관가에 적경을 고하고 댁네를 토포하도록 한다면 어쩔려고 그

러시오?"

"그래서 애초에는 돈이 올라오면 당신을 죽일까 생각했었소.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기로 하

였소. 우리 아이의 곽란을 보살펴주던 날 변심을 하게 되었지. 그리고 가만히 보자하니 실로

인물이시오. 한양 가거든 부디 환로에 나가 곧은 관리가 되시우. 물론 하산하여 관가에 발로

하여도 좋습니다. 우리 같은 녹림처사가 자비령에 숨어 있음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오.

댁네 하나 때문에 섣불리 거병하여 우리를 토포하게 될까 모르지. 군수가 갈릴 적이면 가끔

씩 토포군 스물 남짓이 공연히 이골 저골 시늉으로만 뒤지는 척하다가 날만 지면 모두 범에

물려갈까 내려가버리는 판이우. 또한 이러한 골이 한두 군데가 아니요. 수백 처가 되는데 댁

네가 앞장서서 되찾아온다 하여도 하룻길로는 안되지. 범은 포수가 오는 걸 아는 한 잡히지

않지요."

김기는 그가 따라주는 대로 연거푸 석 잔을 들었고, 흥복이 또한 말하였다.

"목숨을 살려주고, 이제 돈 백 냥까지 내어주니, 시세 궁박하여 피하여 살고 있으되 분수는

아는 사람이라 여기시오."

김기는 슬쩍 어조를 바꾸었다.

"나도 오죽하면 어릴 적의 동무를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러 다닐 것이오. 내가 보아허니 산

에서 썩기는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오. 내가 지난 사흘 밤을 이리저리 수심 걱정으로 세우며

보내던 중에 내게도 좋고 당신께도 좋은 일 한 가지를 생각해냈소그려." 최흥복이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김기는 말하였다.

"만약에 이 돈이 네 배가 되어서 돌아온다면 어떻겠소?" 최흥복은 한바탕 웃었다.

"그러면 배로 불려서 돌려드리지요. 천 냥을 드리겠습니다." "농이 아니요. 대금을 벌 방도

가 있소. 다만 내가 꺼리는 것은 이것이 국법을 어기게 되고 화적과 공모하는 일이라서 그

러오. 허나 박복한 놈에게는 계란에도 뼈가 있다고, 도무지 이 돈 내놓고는 돌아가지 못할

형편이 되었구료. 내 평생 처음으로 뒷길로 지나갈까 생각하였소."

최흥복은 적이 궁금하였으나 일부러 상 밑에 두었던 백 냥은 지그시 눌러두고 술만 들이켰

.

"너무 그러지 마시우. 누구는 녹림당이 되고 싶어 되었는 줄 아시우. 다 벼슬하는 것들이

가르쳐주어 한 노릇이우. 듣자하니 글줄 읽고 초시나 한 모양인데 거 다 소용없는 일이우.

돈 있으면 두억시니도 부린단 말이오."

최흥복은 무슨 대수가 났는가 하여 김기를 냅다 흔들어놓느라고 자꾸만 부추겼다. 김기는

어렵게 입을 떼는 시늉을 하였다.

"기왕에 내 어음으로 환전을 하였으니, 거기 찾아가 감영을 팔고 무역은을 내라 하고 의주

까지 따라 나설 게요. 그것을 댁네서 도모하고 내게 돈을 돌려주면 될 게 아니오?" 최흥복

이 감탄하는 한숨소리를 내고는 술잔을 탁 내려놓았다.

"... 그 생각을 못하였군! 봉산서 은자가 나올 곳은 곡 한 군데 뿐이오. 혹시 봉산 만동이

네 수철전을 아십니까?"

김기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하마터면 느긋하게 웃음을 지을 뻔하였다.

"내가 난생 처음 원로에 나왔는데 그 강산이 이 강산이라. 어느 골에 김좌수인지 알 게 뭐

?"

"하하, 모르셔두 상관없소이다. 객주에서 아마 만동이네를 통하여 환전했을 게요. 만동이

천동이가 겉으로는 수철전과 풀뭇간을 열고 있지마는, 관서나 이쪽의 산골에 잠채터를 가지

구 있는 걸 우리두 잘 알지요."

김기가 말머리만 퉁겨주었는데 과연 최흥복이는 꾀가 있는지라 스스로 꼬리까지 끌어내는

것이었다. 김기는 어수룩하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몰래 캐어내는 잠채꾼들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거참 묘한 일이로다. 일테면 나라의 땅에서 훔친 재물을 가로채는 일이 되겠구먼." 김기가

선비의 처신으로도 그리 거리낄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은근히 비췄다.

"물론입니다. 먼저 말씀하신 대로 환전해준 것을 치하하고, 되도록 묵으면서 무역은 말을

꺼내십시오."

"여하튼 내 궁리로 할 터이니 걱정 말고... 댁네가 도모하기 좋도록 끌어내기만 하면 되잖

는가?"

하고 나서 김기는 혀를 찼다.

"집을 떠나 몸가짐을 잘못하여 내 이런 곤고한 지경에 이르렀구나. 그런데 당신이 내게 돈

을 내어줄 것을 어찌 믿는단 말이오?"

"강상의 도리가 세상에 있듯이 녹림에도 언약은 피와 같소이다." 흥복이 정색하여 대답하

였고 김기는 조용히 말을 잇는다.

"절반이든 분배든 나는 다 필요 없소. 당신들끼리 한 초의 자웅을 겨루든지 내 알 바가 아

니오. 다만 원하는 것은 내 돈 오백 냥만 되돌려주시오." 흥복은 기뻐하면서 밀쳐두었던 부

담농을 끌어다 열어 보이는데 은자가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소식만 전하시고 사처를 정하여 머물러 계시면 성사를 하자마자 이것을 고스란히 보내드

리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돌려드리고 싶지마는 순서가 그렇질 않아서..." 겉으로는

김기와 최흥복이 이해가 맞아떨어진 듯하나, 기실은 김기의 함정에 흥복이 걸려든 것이었

. 흥복은 김기가 다른 술수를 쓰지 못할 줄 알았다. 돈 오백 냥이 걸려 있기 때문이고,

것은 나라를 등진 무리들끼리의 다툼이니 그로서도 도움을 주기가 훨씬 편하겠거니 여겨서

였다. 흥복은 스스로 흡족하여 생각하였다.

책상물림 따위의 돈을 삼키고 만족한다면 언제나 좀도둑을 면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의 묘

책을 얻어낸 것은 천금을 얻은 것과도 같았다. 그는 김기와 동행할 졸개를 따로이 불러서

일러두었다.

"만약에 선비가 배신할 기미를 보이면 서슴지 말고 해치워버려라." 그러나 김기가 일단 자

기네들과 공모한 뒤에는 관에 발고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흥복은 믿었다. 그는 일전에 친

히 곡산까지 만동이네 일행을 뒤쫒아가서 비록 광석이기는 하나 거의 칠백여 냥에 달할 은

을 탈취하여 왔던 터였다. 이번 일에 성공만 한다면 천여 냥 이상은 거뜬히 손에 들어올 것

같았다. 부두령과 그의 부하들 중에는 강원도 쪽이나 평안도 접경에 식솔들을 데리고 마을

을 이루어 살아가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고, 흥복이 자신도 춘천에 남겨두었던 식구

들이 걱정이었다. 소문에 듣기로는 그의 형은 장하에 죽었고 형수와 조카들은 노비로 박

혀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당의 가족들이 어디엔가 안돈이 되는 것을 바랐지만, 함께 산

채에서 사는 것은 꺼려하고 있었다. 그는 자비령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으며, 이제부터 새삼

스럽게 농사꾼이나 장사치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흥복과 굳은 약조를 하고 나서 김기는 말득이와 최흥복의 오두를 데리고 자비령을 내려왔

. 그들이 구월산 패가 벌이고 있는 동선관의 주막에 당도하니, 마침 중화참에 술청에 나와

앉았던 선흥이와 길산이 반가이 맞으며 일어났다.

"고생 많으셨지요?"

"고생은 무슨... 낮잠만 자다 오네."

곁에 따라왔던 흥복이네 졸개가 당황하여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이분을 모셔다가 광에

다 처넣어두시게."

하며 김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렀다. 졸개는 얼른 돌아서서 술청 밖으로 나가려는데 말득

이가 잽싸게 막아서며 가슴을 턱 밀었고, 선홍이가 뒷덜미를 가볍게 잡아챘다.

"소피 보러 가느냐?"

그자가 기우뚱하며 뒤로 넘어가려는 것을 선홍이가 다시 세워주더니 양어깻죽지를 잡아 돌

이켜 세웠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거라. 이랴 끌끌."

졸개는 도무지 힘을 쓰지 못하고 저절로 뜰안에 밀려들어갔고, 얼떨떨한 중에도 그 우락부

락한 사내들이 포교나 관차가 아닌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 뭣 땜에 이러시우?"

강선홍이가 대꾸 않고 그를 광으로 데리고 가서 다리와 손목을 묶었다.

"이거 왜 생사람 잡으시우?"

선홍이는 껄껄 웃었다.

", 그놈 되우 말이 많다. 산 위에서 우리 삼촌을 손님으루 모셨다길래 보은하느라구 이런

."

"보아허니 관리두 아니구..."

"착한 백성두 아니란 말이지?"

"나중에 큰코 다치지 마슈. 우리는 자비령 패요."

선홍이가 어리없어 졸개의 코를 우악스런 손가락으로 짓눌렀다.

"그래 코 다쳐봐라. 우리가 바루 귀신 잡는 소경이고, 꿩 잡는 매고, 범 잡는 담비에, 소적

잡는 대적이다. 세상에는 어디나 윗길이 있는 법이다. 구렁이 위에 이무기, 이무기 위에 용

이 있고, 닭 위에 꿩, 꿩 위에 매, 매 위에 봉황이 있으렷다." 선홍이가 수다를 떨고 술청으

로 나오니 김기와 길산은 마주 앉아 점심을 들고 있었다. 길산이 선홍에게 말하였다.

"먼저 입막음을 해둬야겠다. 저기 언덕 위에 마구간 보이지? 그 주인놈을 묶어두고 아이들

남겨놓고 오너라."

"날 따라오우."

말득이가 앞장을 서고 선홍이가 졸개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 길산과 김기가 안으로 들

어간 뒤에 선홍이와 말득이가 돌아와서 알렸다.

"주인놈과 마부 둘을 잡아서 처박아두었습니다."

김기가 말하였다.

"이제 흥복이네 산채에서는 동선관 소식에 깜깜절벽이 되었군." 저녁이 되자 동선령에 올

랐던 마감동이와 졸개들이 시퍼렇게 얼어서 되돌아왔다. 그들은 겨우 마땅한 골짜기를 찾

아내어 축대도 쌓고 터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당분간 일은 쉬도록 하지. 우선 토왕부터 잡아놔야겠으니." ", 날씨가 좀 풀려야지 원...

요즘 같아서야 어디 목수일이라두 제대루 하겠습니까?" 길산은 감동에게 아랫목을 내주어

다시 말하였다.

"최가부터 잡은 뒤에 온 식구가 모두 올라가서 빨리 지어놓지. 봄이 되면 얼른 이사를 해

야할 테니까."

"터는 아주 그만입디다. 햇볕도 잘 들고 사방으로 바위가 둘러서 있어 철옹성입지요." ".

이제 흥복이 잡을 안이나 궁리해보지."

그들은 둘러앉아서 우선 관서로 가는 가짜 행렬을 꾸밀 의논을 하였다.

"오랜만에 엄파를 휘두루게 될 줄 알았더니 거참 따분하게 되었는걸." 선홍이가 아예 최가

의 산채를 급습하는 게 아니라 꾀어내는 것으로 계획이 바뀐 것을 알고는 재미가 없어진 모

양이었다. 김기가 말하였다.

"천동이에게는 흥복을 사로잡게 된다구 얘기해주지 말고 말을 끌고 거짓 짐을 싣고 오도록

하게. 그 사람은 꼭 최흥복이를 죽이려 할 게야."

"만동이는 차도가 좀 있던가?"

길산이 선일에게 물었다.

"정신은 돌아왔는데 아직 기동은 엄두도 못 내는 모양입니다." "관서로 가는 행렬에는 나

혼자 끼이도록 하지. 말득이가 먼저 산채로 올라가서 관서로 가는 짐이 동선관으로 출발하

였다고 이르게. 그뒤로 강두령이 아이들 서넛 데리구 쫒아갔다가 최가가 산채를 비우자마자

점령해버리게."

김기의 안에 의하면 그가 완전히 마음을 내던져 복속해오기를 바란다면, 도저히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힘과 꾀를 소모시켜서 진을 뽑아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격에 뒤

통수를 치는 게 아니라 천천히 딴죽도 걸고 이마빡도 지르고 메어치기도 하고 달음박질도

시켜서, 드디어 갈 데 없이 사지를 뻗고 날 잡아잡수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었다. 먼저 근거

지를 점령하여 그가 돌아갈 곳이 없도록 해두고, 일단 가자의 짐을 빼앗겨 그가 방심하고

돌아서도록 한 뒤에 끈질기게 뒤를 위협하며 요소마다 매복해 있다가 거의 저항 못하도록

혼을 내고, 드디어는 제 집에 돌아가 몸붙일 데가 없음을 알게 한다는 것이었다. 김기가 말

하였다.

"먼저 꾀어내고 집을 빼앗고, 뒤를 찌르고 기운을 빼는 법이니, 무릇 짐승을 사로잡을 적에

는 모두 이 협공책을 쓰는 게여."

천동이가 말 다섯 필에 자갈을 넣은 짐을 나누어 싣고 장정들 세 사람과 함께 동선관 주막

에 도착하자, 말득이를 앞세우고 선홍이 일행이 먼저 자비령의 여계산으로 출발하였고, 뒤이

어 길산이 감동이 선일이 등이 따라갔다. 그들이 출몰할 곳은 대강 동선령 고개를 넘어 사

인암을 지난 직후가 될 터이니, 퇴로는 사인암과 천진산 사이의 골짜기로 하여 상산령을 타

고 여계산 기슭으로 빠질 것이 분명하였다. 퇴로가 대략 삼십여 리 길이나, 오며 가며 육십

리요. 산길이라서 평지 백 리를 걷는 것보다 더욱 힘이 빠질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은자

가 들어 있는 짐이 자갈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라 산을 타노라고

온종일 허우적거릴 터였다. 말득이와 선홍이 일행이 먼저 무초령 기슭에 이르렀고, 뒤따라

오르는 길산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득이가 끝없이 이어져나가고 있는 자비령의 연봉

들 가운데 네 봉우리가 정자관처럼 솟아 있는 곳을 가리켰다.

"여기서 길이 갈라집니다. 내가 눈여겨두어서 소상히 알지요. 성님들은 여기서 기다렸다가

최가네가 무리지어 지나가면 슬슬 따라붙으시우."

"착오 없이 하여라. 중화 때까지는 사인암으로 내려가야 된다." 말득이와 선홍이 일행은 내

쳐서 여계산으로 올랐다. 드디어 산채로 오르는 소로가 나오자, 선홍이와 구월산 졸개 네

사람은 숲 사이에 몸을 감추고 말득이만 산채로 올라갔다. 말득이가 입구에 이르자 벌써 파

수보던 자들이 알아보고 마중을 나왔다. 그는 곧 흥ㅂ고에게로 안내되었다.

"새벽에 저희 나으리와 잠채꾼들이 은을 싣고 동선관으로 떠났습니다. 나으리께서는 아무

래도 사인암 근처까지는 가게 될 터이니 한시바삐 연락을 하라십니다." 흥복이가 서둘러 을

량에게 식구들을 모으라 이르고는 이미 손안에 대금이 들어오기나 한 듯이 마루를 서성거

렸다.

"그래 은이 얼마나 되더냐."

얼핏 보니 말짐으로 다섯입디다."

"수고하였다. 천동이놈이 제 언니처럼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구나." "헌데 은을 지킨다며 장

정들을 십여 명이나 샀으니 그게 걱정이올시다." 말득이가 슬쩍 떠보는데 흥복은 자신만만

하였다.

"염려 없다. 열 명이 아니라 백 명이라두 그따위 누런 입가진 밥주머니들은 호통 소리 한

번에 흩어질 테니까."

을량이가 산채의 서른 남짓 되는 자들을 마당에 모아 세웠고, 최흥복이는 그중 늙고 힘없

는 자들 열 명을 추려내어 산채에 남도록 하였다.

"어서 서둘러야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선령을 지키고 있을 것을. 자칫하여 황주로 들어

서버리면 낭패로다."

말득이가 흥복에게 말하였다.

"제 주인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두령이 지체되면 앓는 시늉을 해서라도 사인암에서 머

물며 기다린다 하십디다."

최흥복은 환도와 창을 든 졸개들을 몸소 이끌고 산채를 나섰다. 말득이는 머뭇거리며 말하

였다.

"나으리께서 절더러 여기서 기다리라구 하셨는데요..." "그래라. 내 주인 모시고 예서 며칠

간 푹 쉬었다가 한양으로 떠나도록 해라." 최흥복은 의심없이 빈 죽정이가 되어버린 산채를

뒤에 두고 떠났다. 그들이 완전히 산채가 있는 골짜기를 벗어났을 즈음하여 말득이는 마루

로 나왔다. 그는 졸개들이 머무는 초가에 너덧이 남아 있고 서흥댁의 식구 두엇에다 나머

지는 방심한 채로 파수에 임하고 있는 셋뿐임을 확인하였다. 먼저 바깥에 나와 있는 다섯을

치워버려야 할 것이었다. 선흥이는 흥복이 지나간 뒤에 산채 가까이 바짝 접근해 와서 기

다리고 있을 듯하였다. 말득이는 우선 허리춤의 자고를 쓸어보고는 한 손에 큼직한 돌멩이

를 주워서 소매 사이로 감춰 넣었다. 산채에 오르는 길 양편에 두 사람이 있고 반대편에

한 사람이 있는데 우선 이쪽 녀석부터 해치울 셈이었다. 그는 집 뒤로 돌아가 낮은 목소리

로 번 드는 자를 꾀었다.

"여보, 두령이 나 먹으라구 술상 들여주고 갔는데 같이 안 자시려우?" "번 끝나구 가야지."

"어이 누가 보기나 한다구 그러우. 혼자 벽 보구 마시려니 영 술맛이 맹물이라 그러지.

커니잣거니 해야 취흥이 나겠수."

"되게 추운데."

"속이나 뜨뜻하게 어한하고, 발 좀 녹이구 가면 될 거 아니우. 젠장할 그동안에 어느 도깨

비가 이 까마득한 골에 기어들어온다구 그러우."

"허긴... 어디 목 좀 축여볼까."

그자가 병장기 세워두고 내려오는 기색을 보자 말득이는 얼른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문을 빠끔히 열어두고 기다렸다. 그자가 마루에 와서 머뭇거리는지, "이 사람 어디

갔나..."

어쩌구 하며 올라서는 기척이 들렸고, 말득이는 크, 하는 소리를 냈다.

"거 술 한번 독하다."

다급해진 파수꾼이 방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는데 말득이는 지체없이 그의 멱살을 잡아끌

면서 단번에 정수리를 돌멩이로 내리쳤다.

"요게 바로 벽력주라구, 풍도 염라국 야차들이 즐겨마시는 술이니라." 그는 넙죽하니 뻗어

버린 자의 발목을 잡아 질질 끌어다 구석에 눕혀두고, 밖으로 다시 나왔다.

말득이는 그제서야 허리에 한 손을 찔러넣고 산채 어귀로 슬슬 내려갔다. 양편 바위에 섰

던 자들이 그에게 물었다.

"어디 가려고 그러나."

말득이는 대꾸 없이 무조건 길 아래로 외쳤다.

"성님, 올라오슈."

"... 누굴 불러?'

하는데 몰이라도 하듯이 선홍이와 네 사람이 화다닥 뛰어오르고 있었다. 번드는 자들이 어

이없는 중에 적경을 알리려는 참인데 말득이가 잇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자고를 연달아 날

렸다. 둘이 모두 허벅지와 정강이에 자고를 맞고 넘어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들은 산채

로 쉽게 들어갔고 아랫목에 등 지지며 쾌적하니 낮잠을 자던 자들은 오소리 사냥하듯 하였

. 모두 줄줄이 꿰어서 서흥댁의 초가로 몰아넣으니 최가는 이제 굴혈을 잃은 뱀이었다.

최가가 무초령으로 하여 북편으로 내려갈 제 숨어 있던 길산의 일행중에서 선일이와 마감

동이 두 사람 데리고 그뒤를 따르고 길산은 식구 하나와 더불어 남았다. 밤에 뜸들일 각이

두어 차례 지났을 무렵 말득이가 내려와 산채가 손에 들어왔음을 알렸고, 길산은 말득이와

함께 일단 자비령 산채로 올라갔다.

동선관에는 천구백칠십여 걸음에 이르는 성채가 있었고 요새지었으나 태평성세라 몇사람의

진군을 거느린 장교가 나와서 관문을 관리할 따름이었다. 관을 지나 십 리를 내려가면 사인

암인데 한눈에 북편 황주벌의 수림이 내려다보이고, 자비령에서 갈려져 나와 뭉뚱그려진 글

씨의 적과도 같이 그 남은 산세가 흘러 뭉쳐진 천진산이 동북편에 서 있었다. 절벽마다 얼

어붙은 바위를 비집고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골짜기에 투명하게 울렸고, 벌판에는 해오라

기의 떼가 점점이 날아다녔다. 바로 사인암과 천진산 사잇길이 오 리쯤 되는데 마치 신선이

라도 살 듯이 후미진 곳이었다. 최흥복이가 천진산을 따라서 내려가는데, 그제서야 골짜기

맞은편의 한길에 느릿느릿 움직여 가고 있는 마필들을 발견하였다. 듣기보다는 별것이 아니

라서 고삐 잡은 마부가 말수만큼 다섯에다, 맨 앞에 인솔하는 자가 환도를 찾는데 그게 천

동인 듯싶었고, 몽둥이 가진 자가 둘이요 맨 뒤에 자기네와 내통하였던 한양 선비가 따르고

있었다. 흥복이는 바짝 긴장을 하고서 치달려왔다가 그만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 모기 보구 칼 뽑을 뻔하였다."

"당장 건너가서 덮칩시다."

을량이가 서두르는 것을 말리고 흥복은 골짜기의 입구에 소나무가 띄엄띄엄 섰고 여름철에

는 술 파는 좌고들이 나와 앉는 경천림을 찍었다.

"바로 저기다. 우리가 먼저 가서 기다리구 있어야지." 그들은 바삐 시냇물을 건너고 저쪽

눈에 뜨이지 않도록 질러서 경천숲에 당도하여 좌우로 갈라져 숨었다. 가끔씩 나무 위에서

눈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렸고, 송림을 헤치는 바람소리가 가득 찼다. 천동이를 비롯한 일행

들은 모두 김기에게 들어서 사인암을 지나자마자 자비령 패거리가 자기들을 습격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도적이 나타나면 병장기 가진 자는 모두 뿔뿔이 달아나고 나머지

는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려 목숨을 애걸하기로 되어 있었다. 김기는 앞에 보이는 경천림을

두고 일렀다.

"제놈들이 미리 왔으면 저기서 기다릴 테고, 아직 당도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기다릴밖에

없군."

바짝 긴장하여 숲으로 들어가려니 아니나다를까 양쪽에서 자비령 패거리가 우르르 뛰어나

오며 소리쳤다.

"살구 싶으면 꿈쩍말고 엎드려라!"

"말짐부터 잡아두어라."

사람과 말이 이리저리로 뛰니 도적들은 달아나는 자들을 내버려두고 말고삐부터 잡기 바빴

고 몇몇만이 마부들과 그 틈에 섞인 김기를 한데 모아 꿇어앉혔다. 최흥복은 칼을 그들에게

겨누었는데 김기가 고개를 들더니 눈을 연신 꿈쩍여 보였다. 아는 체하였다간 낭패라는 뜻

으로 알아듣고서, "모두 나무에다 묶어놓도록 하여라."

지시하고 둘러보니 말 다섯 필을 고스란히 탈취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최흥복이는 졸개

들을 모두 수습하여 마바릿짐을 끌고 재빨리 시냇물을 건너 얼른 천진산 기슭으로 빠져나왔

. 칼 끝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은자 다섯 궤를 털어냈으니, 금년 첫마수거리로는 배통

이 뻐근한 과식이었다. 골짜기로 들어서는데 졸개 하나가 뒤를 가리켰다.

"보십시오. 꼬리가 붙었수."

돌아보니 장정 넷이서 그들을 따라 개천을 건너는 중이었다.

"두어라, 아마 은자를 잃어 간이 함지박만해진 모양이다. 우리 뒤를 밟아봤자 산 밖에 난

범이요. 물 밖에 난 고기지 별수 있겠느냐?"

뒤에다 망보기를 붙이고 그들은 무초령을 향하여 깊숙이 들어갔다. 가끔씩 돌아보면 그들

은 없어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면서 줄곧 놓치지 않고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말을

끌고 가기까지는 길이 평탄했으므로 별 문제가 없었으나, 차츰 길이 가파르게 되니 짐을 끌

어내려 각자가 짊어져야 하였다. 한데 뒤에 가파르게 되니 짐을 끌어내려 각자가 짊어져야

하였다. 한데 뒤에 따라붙는 자들이 있어 걸음을 늦출 수도 없고 내버려두자니 문 없는 측

간에 앉은 듯이 영 꺼림칙하였다. 드디어 비탈진 산길로 오르는 초입에 이르자 등에 차고

있던 환도를 뽑아들고 돌아섰다.

"절반은 여기서 짐을 지키고 나머지는 모두 내려가서 베어버리자." 을량 이하 칠팔 인이

따라붙는데 금방 보이던 자들이 자취없이 사라졌다. 한참이나 조심조심 내려가도 흔적이 없

어 흥복이 안을 내어 길좌우에 벌려 숨고 기다리기로 하였는데, 이윽고 저편 길 위에 한 놈

이 나타나 외치는 것이었다.

", 거기 숨은 거 우리가 모르는 줄 아느냐, 너희 소굴을 알아내어 토포군의 선봉이 될 참

이다. 우리 재물을 고스란히 와식할 줄 알았니?"

내다보니 천동이가 칼 빼어들고 서 있는데 과연 꼬리를 내놓은 꿩 꼬락서니라 그들을 잘라

버리지 않고는 이제 더 이상 발을 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잡아라!"

흥복이 외치며 앞장서서 뛰고 모두들 우우하니 몰려가는데 천동이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달아났다.

짐을 내려놓고 쉬고 있던 자들은 갑자기 두엇이 얼굴을 감싸쥐고 나뒹구는 바람에 모두들

벌떡 일어났다. 살펴보니 둘 다 뭘로 얻어맞았는지 얼굴이 꼭두서니 빛깔로 환칠이 되었고

이미 뒤로 반듯이 넘어져 있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기도 하고 고개 위와 숲 사이를 두리

번거리는 중인데 뭐가 쌩 하며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하나가 에이쿠, 소리 내지

르며 주저앉아버린다. 또한 안면이 단청이다. 그제는 더 이상 뚤레거리지 못하고 머리를 잔

뜩 숙이며 눈에다 몸을 던졌다.

"이놈들, 달아나지 않으면 해골 샌다. 또 맞아볼 테냐?"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렸고, 그중

담있는 자가 삐죽이 고개를 들어보니 언덕 위에 웬 사내가 서서 한손으로 뭔가 빙빙 돌리

고 있었다. 아마 저걸 던지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고개를 빼는 것이 별로 유리하지 않다

싶어 숙이려는 참인데 불이 번쩍, 하면서 그만 기가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벌써 넷이 땅냄

새를 맡아놓으니 다른 자들은 아예 사지에 쥐가 나서 감히 일어나 대꾸할 수도 없었다.

사방이 괴괴한데 바람이 눈덩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놀라 뒤털을 세우며 옴찔거렸다.

최흥복이가 완전히 헛걸음치고 되돌아와보니 모두들 눈 위에 코를 박고 엎드려 있는 것이

곰 만난 꼴이었다. 달려갔다 온 뒤라 연신 턱에 닿는 숨을 내리누르면서 중얼거렸다.

"산신께 고사드리나..."

"갔습니까?"

하나가 고개를 내키지 않게 쳐들고 묻는데 뒤늦게야 면상이 터져 기절한 자들을 둘러보고

사태가 불리함을 알았다. 을량이 쓰러진 자의 근처에서 이상스런 물건을 주워올렸다. 원달구

처럼 생긴 작은 무쇠에다 잘룩한 곳에 명주실을 맨 물건이었다. 흥복이 손에 쥐고 핑핑 소

리가 나도록 돌려보며 날카롭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팔매 솜씨가 무서운 놈이로구나."

을량이 쓰러진 자들을 수습하여 끌어올리니 거의 인사불성이었고, 가까스로 기력을 돌이킨

자도 머리에 천근을 올려둔 듯이 고개를 가누지 못하였다. 흥복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니

좁은 골짜기 사이로 해가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들판이라면 아직 석양은 이르겠으나 산간

에서는 노루꼬리만한 겨울빛이라 얼마 후에 어두워질 듯하였다. 해만 지고나면 이쪽이 유리

한 것이다. 최흥복 일당은 지리에 익숙하여 눈을 감고도 길을 찾아갈 것이고, 뒤따르는 자들

은 초행이고 숫자도 적으니 곧 자취를 잃거나 이쪽에서 매복하기만 하면 잡을 수가 있을 것

이었다. 흥복은 설마 산채에서부터 그의 뒤를 쫓아왔다가 바로 코앞에서 자기들의 일동일정

을 살피면서 따라붙은 자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짐작 못하였다.

"여기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자, 그동안에 다친 식구들이 기력을 찾도록 보살펴두어라."

이제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열 사람도 못 되었고 나머지는 짐을 챙기고 머리가 터진 동료들

을 부축하여 가기에도 벅찰 것이다. 흥복은 차츰 불안하였다. 여하튼 짐을 호송하던 자들이

그냥 촌에서 씨름깨나 한다는 뚝심꾼들만은 아닌 게 분명하고, 제법 싸움깨나 치러본 자들

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고작해서 네 사람 정도였으니 맞춤한 장소에서 매복할 참이

었다. 그는 을량을 불러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였다.

"아무래두 패를 나누어야겠다. 자네는 다친 아이들과 짐을 맡아서 내쳐 거북이골까지 가서

우리가 당도할 때까지 기다리게. 우리는 산길을 타고 저놈들을 깊숙이 끌어들여 해치울 테

니까."

"어두워지면 곧 출발하겠수."

차츰 숲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는데 하늘은 아직도 짙은 반물빛이었다. 눈 때문에 나무들의

삐죽삐죽한 자취가 한결 돋보였다. 그들은 일단 말에서 부담을 내려 나누어서 짊어지고 산

길로 올랐다. 숲속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흥복과 을량이 인솔하는 패거리로 각각 갈라졌다.

다섯 짐에 부상자가 넷이니 흥복과 함께 남은 자는 불과 일곱 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

비령 산채에서도 가장 날래고 용감한 자들이라, 웬만한 장정들쯤은 서너 배와 대적하여도

겨룰 만하였다. 흥복은 눈위의 발자국으로 그들이 쫓을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을량이 헤어

져서 갔던 자취를 따라가다가 일단 양편에 잡목이 눈을 쓰고 있는 후미진 곳을 발견하고는

들어가서 숨었다. 모두들 잡담을 금하고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추적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들리느니 산협에 가득 찬 겨울 바람 소리요, 깃을 찾아 숲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멧새들의 지절거림뿐이었다. 아무리 엎드려서 기다려보아도 사람의 자취가 없어 그들은 오

한과 시장기로 눈밭에 앉아 있기가 차츰 지겨워졌다. 흥복은 졸개 하나를 가려냈다.

"나가서 산길 아래를 살피고 오너라."

그러나 흥복은 뒤쫓던 자들이, 선일의 팔매에 맞아 우왕좌왕하는 혼란을 틈타서 우회하여

먼저 산으로 올라, 훨씬 뒤쪽에서 오히려 기다리고 있을 줄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산길 아

래를 살피러 갔던 졸개가 돌아와 말하였다.

"아무런 기척이 없습니다."

"어두워지니 겁이 나서 되돌아간 게로구나. 어서 거북이골로 올라가 합세하여야겠다." 흥복

은 매복을 풀기로 하고는 부하들을 일으켜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차가운 밤바람이 눈을

날려서 얼굴에 사정없이 몰아쳐왔고, 추위와 허기로 창자 속까지 얼어붙은 듯하여 모두가

총총걸음이었다. 거북이골은 건지산의 줄기가 천진산까지 닿아서 상산령과 무초령을 가로

막고 있는 마지막의 구석진 골짜기였다. 거북이골을 지나면 곧 무초령의 초입이고 이어 자

비령의 중봉인 여계산 지경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산줄기를 따라 걷고

있었다. 멀리 가로막힌 산등성이 너머로 자비령의 연봉들이 희끗희끗 보이는데 거북이골은

다시 한 고개를 넘어가서 있었다.

"이제 다 왔다. 거북이골에 가서 불을 피우고 잠시 쉬었다가 산채로 돌아가기로 하자."

흥복이가 부하들을 격려하였고 모두들 고생이 끝나는 것 같아 걸음이 빨라졌다. 그들은 일

단 계곡으로 내려갔다가 상수리나무들이 울창한 산비탈을 바라고 올라가야 했는데 그 아래

가 거북이 골이었다. 계곡에는 눈이 쌓여 바위와 개천과 움푹한 곳이 모두 평평해져서 어느

구덩이에 빠질지 위험하였다.

그들이 거의 산비탈에 당도했는데 앞서 걷던 졸개가 어이쿠, 하며 얼굴을 감싸쥐고 넘어졌

. 연이어 바로 뒤에 섰던 자도 머리에 뭔가 얻어맞아 눈 위에 나뒹굴었다. 홍복과 나머지

졸개들이 주춤하는 판인데 온 산천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 기다린 지 오래다. 모두들 이 골에 장사지내줄 테다." 뿐만 아니라 뒤켠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두령 최가만 잡을 테니 살고 싶은 놈들은 모두 다 달아나도 좋다." 그들은 어둠속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희끗희끗한 눈과 검은 수림과 바위들이 보일 뿐이었다.

"웬놈들이냐?"

흥복은 부하들을 생각하여 제법 대담하게 호통을 쳐다보았으나 다시 잠잠하였다. 우선 골

짜기에서 발을 때려다가는 팔매가 날아올 듯싶어서 옴짝할 수가 없었다. 이런 어둠속에서

사람의 자취를 어림짐작으로 겨냥하여 맞추기란 아무리 솜씨가 귀신 같다 할지라도 가까운

거리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수리숲 안은 컴컴하여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흥복은 일

부러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좋다. 우리에게 은이 있는 줄 아는 모양이지만 벌써 다른 곳으로 빼돌렸다. 싸울 생각이라

면 앞으로 나서라."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식구들은 벌써 짐을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남은건 너희들뿐이다." 흥복

은 목소리가 자기들이 서 있는 오른편 숲속에서 들려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부하들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머리를 낮추고 일시에 숲속으로 뛰어들어가자."

흥복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쥐고 나무숲 사이로 뛰어들며 환도를 뽑았고, 졸개들도 몇발짝

씩 떨어져서 앞뒤로 뛰어들어왔다. 다시 숲 안은 괴괴한데 비탈의 위쪽에서 버석대는 소리

가 들렸다. 흥복은 이를 악물고 미끄러지며 엎어졌다 일어나기도 하면서 뛰어올라갔다. 그때

에 뒷전에서 에쿠 지쿠 하는 소리가 들리고 졸개들이 누구인가와 싸움을 벌이는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흥복이 돌아서려는데 바로 코앞의 나무들 사이에서 사람의 희끗한 자태가

우뚝 일어섰다. 그뿐 아니라 흥복의 오른편에서도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흥복은 칼을 휘

두르며 달려들었고, 상대방은 옆으로 슬쩍 비켜나며 맞받는데 챙컹하는 쇳소리가 들리니 그

쪽에서도 환도를 가진 모양이었다. 흥복이 비록 환도를 휘두른다고는 하지만, 여태껏 같은

환도로 대적해오는 상대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대개의 장사치들은 몽둥이 정도에도 짐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인데, 이러한 진기살전은 그

가 일찍이 검을 다루어본 적이 없으니 이미 승패가 결정된 일이었다. 어둠속을 아무렇게나

베며 이리 뛰고 저리 달려들고 하건만 상대는 능숙하게 몸을 피하였고 뒷전에 나타났던 자

가 헛기합 소리를 내지르는 바람에, 최흥복은 멈칫 몸을 돌렸다. 익숙한 솜씨라면 앞의 상대

와 대적하면서 동시에 뒤를 방어할 터이나 흥복은 그만 옆구리를 훤히 드러내놓고 말았다.

날카로운 타격이 허리를 후려쳤고 흥복은 숨이 콱 막혀서 칼을 떨구고 상반식을 꺽는데 그

의 모리꼭뒤에 또 한번의 타격이 가해졌다. 그는 눈 위에 떠밀리듯 처박혔다.

"묶어서 끌고 가지요."

뒷전에 섰던 김선일이가 말했고, 마감동은 환도를 꽂으며 대답하였다.

" 제 집에 기어들어갈 때까지 놓아두라구 했네. 칼등으루 가볍게 후려쳤으니 곧 깨어나겠

."

선일이 아래에다 대고 휘파람을 불어주었고, 눈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곳 저곳에서 구월

산 패거리 둘과 네 사람을 거느린 천동이가 올라왔다.

"하나는 베었고 또 하나는 혼절했습니다.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지요." "오늘밤

에 산짐승들이 놀라겠다. 산중을 헤매는ㄴ 놈들이 한둘이 아닐테니." 김선일이가 웃으며 말

하였다. 그들은 거북이골에서 먼저 와서 기다리던 자들을 고함소리 몇마디로 흩어져 달아

나게 하였던 것이다.

"누가 베었나?"

마감동이 물었고 구월산 식구가 말하였다.

"총각이 먼저 달려들며 뒤에서 베었습니다."

"최가놈의 모가지를 베어 가야겠수. 우리 언니에게 갖다 드릴랍니다." 천동이가 아무 거리

낌없이 대답하면서 어둠속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흥복을 찾는 모양이었다.

감동이가 천동이의 손목을 잡아 허리 뒤로 바짝 비틀었다. 그리고는 칼을 빼앗아 구월산

졸개에게 넘겨주었다.

"최가의 처분은 자네가 할 일이 아니다. 나중에 죽이든 살리든 우리 성님께 여쭈어보구 해

. , 어서 여계산으루 가야지."

그들은 기절한 흥복을 눈밭에 버려두고 바삐 거북이골을 지나갔다. 얼마 후에 흥복이 정신

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사방이 괴괴하고 먼 데서 짐승의 울부짖음만이 가끔씩 들려올 뿐이

었다. 온몸이 뻣뻣하였고 뒤통수가 깨어지는 듯이 아파서 흥복은 신음을 하며 상반신을 일

으켰다. 목을 쳐들기가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그는 다시 뒤로 넘어졌다. 몸을 뒤집어 팔을 받

치며 가까스로 일어나 뒤덜미를 만져보니 끈적끈적한 것이 모리가 터진 듯하였다. 그는 우

선 눈을 한웅큼 집어서 이마를 문지르고 상처 주위에다 지그시 눌렀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둘러보니 캄캄한 어둠속에 혼자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없느냐..."

흥복은 비틀거리며 고개를 넘어 거북이골로 내려가보았지만 역시 먼저 떠났던 을량의 일행

도 보이질 않았다. 그는 눈 위를 여기저기 살피다가 아무렇게나 나뒹굴어 있는 부담을 발견

하고는 눈속에서 돌멩이를 뽑아내어 뚜껑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판자가 뻐개지고 틈이 벌어

지자 그는 부리나케 손을 집어넣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움켜쥐었다. 그는 손에 쥔 것을 다

시 자세히 살펴보고는 맥없이 던져버리고 말았다. 다른 부담을 부숴서 다시 한번 살피니 마

찬가지였다.

"그랬구나..."

부담마다 가득 들어있는 것은 은이 아니라 자갈돌이었다. 그들은 자갈을 짊어지고 허겁지

겁 달아나느라고 괜한 전력을 모두 소모해버렸던 것이었다. 흥복은 드디어 자기가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누구일까, 관군인가, 관군이라면 그를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

면 봉산의 잠채꾼 만동이 천동이 형제들의 짓인가. 그때에 산채로 잡혀 올라왔던 한양 선비

에 생각이 미쳤고 도무지 궁금하고 통분스러워서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어디서 온 자들일까..."

흥복은 만동이 형제가 이런 묘책을 벌일 위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앙갚음을 해주기 위해서 어딘가에서 데려온 자들인가. 그렇다면 천동이에게 자기가 죽음을

당했거나 사로잡혔을 것이지 이렇게 기절한 채로 눈 위에 버려두지는 않았을 터이었다.

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바라고 이러는가를 도저히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산채로구나!"

흥복은 그제서야 제 무릎을 두드리며 벌떡 일어섰다. 영리하고 재빠르게 보이는 하인이라

는 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와서 선비의 출발을 알렸고 그는 분명히 산채에 남아 있기

로 하였던 것이다. 이제 흥복은 갈 곳이 없었다. 세간에 그의 몸붙일 마을이 없고 산속에도

그는 다만 눈과 헐벗은 나무숲 사이에 맨주먹으로 혼자였다. 이제는 죽으나 사나 매일반이

었다.

"좋다. 어떤 놈들인가 낯짝이라두 보구 죽어야겠다."

다시 다른 희망이 한줄기 빛처럼 지나갔다. 흩어진 식구들이 여계산 부근에서 모여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대로 굴혈을 빼앗기고 근거 없는 경계로 내몰려 나갈 수는 없

는 노릇이었다. 흥복은 문점손이의 최후를 떠올리고는 어금니를 꼭 물었다. 갈 곳은 꼭 한군

데 뿐이었다. 산채를 다시 빼앗든가 아니면 여계산 골짜기에서 죽을 뿐이었다.

"어이... 거기 아무도 없나?"

흥복은 나무숲이나 골짜기에다 연신 외치며 걸었다. 이제는 상대가 몇 명이 나타나더라도

겁날 게 없었다. 흥복은 새벽녘에야 완전히 기진 맥진하여 여계산 어귀에 이르렀다. 그는 다

시 한번 온 산이 울리도록 외치며 자비령 식구들을 불러보았다. 메아리가 한참이나 길게 울

려퍼지고 나자 산속은 보다 더 적막해진 듯하였다. 흥복은 헐떡이며 산체로 오르는 소로에

접어들었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서 웬 사내의 껄껄대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흥복은 뒷등으로

소름이 훑어내려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버티고 서서 외쳤다.

"웬놈이냐, 앞으로 나서라!"

연이어 사방에서 여러 사내들의 죽겠다고 웃어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한 목소리가 응답

해왔다.

", 그놈 깃 빠진 황새요, 도인 앞에 새벽 도깨비 꼴이로다." 흥복은 아무거나 잡히는 대

로 돌을 집어 소리나는 쪽으로 어지럽게 내던졌다.

"도대체 누구냐, 뭣 때문에 이러느냐."

다시 여럿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어서 산채 방비나 해두어라, 네 졸개들이 두령이랍시고

목이 빠져라 기다리겠다." 하는 조롱의 말이 들려왔다. 흥복이 달려 올라가자니 언제 흩어졌

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숨이 턱에 닿아 산채가 들어앉은 골에 들어섰는데 사방

은 고요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하였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 한기가 났다. 하늘에는 차디

찬 새벽별 몇점이 떠 있는데 그가 쓰는 상방에는 불이 켜져 까물대고 있는 게 보였다. 흥복

은 허겁지겁 뛰었다.

"모두 나오너라. 내가 왔다."

외쳤으나 캄캄한 초가에서는 그 누구도 내다보는 자가 없었다. 산채에는 아무도 없는 모양

이었다. 흥복은 자기 방 쪽으로 달려가 마루 위로 올라섰다. 문을 벌컥 열었다.

"이제 오는가?"

흥복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방안에는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 혼자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흥복이 얼결에 뒷덜미로 손이 가는데 빈 칼집뿐이

었다.

"... 누구냐?"

"이 사람아, 누군지 알구 싶으면 서루 인사를 나눠야지." 낯선 사내는 자세를 흐트리지 않

고서 비워두었던 맞은 편 잔에 술을 따랐다.

"자네 기다리노라고 술이 다 식었군. 한잔 들게."

흥복은 문을 연 채로 차마 들어서지도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마당뿐

이었다.

"어서 문 닫게. 불 꺼지겠네."

사내의 말씨는 동기간에 하듯이 부드럽고 여유가 만만하여, 흥복의 상한 짐승같던 결기가

사그라지는 듯하였다. 흥복은 방안으로 들어서며 아직도 그의 어디를 칠까를 노리면서 물었

.

"나는 여기 주인인데..."

"우선 한잔 하세."

사내가 술잔을 들어 마시려는 찰나에 흥복은 놓치지 않고 사내의 면상을 노리며 휘둘러 찼

. 사내가 한편 마시며 왼손을 가볍게 휘둘러 걷어내면서 흥복의 발목을 잡아 슬쩍 힘을

가하여 밀어주자 흥복은 공중에 떴다가 벽에 부딪고 뒤로 넘어졌다.

흥ㅂ고은 머리를 흔들어대며 일어나 앉았다. 그는 분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흥복은 꼼

짝 않고 상 앞에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내가 졌수. 도대체 왜 이러시오. 댁은 뉘시오?"

"많이 아픈가. 이리로 다가앉게."

사내는 덤덤하게 말하였고, 이제는 흥ㅂ고이 쪽에서도 더 이상 싸울 뜻이 없었으므로 슬금

슬금 앉은걸음으로 상 앞에 나아갔다. 아무리 독하고 매운 당초망 흥복이라 할지라도 옴치

고 뛰는 재주와 기량이 미치질 못하는데야, 그 낯선 사내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밤새 고생이 많았겠네. 어서 쭉 들구 나서 내게두 한잔 따라주겠나." 밖에서 두런두런 인

기척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마루 앞에서 말하였다." "성님, 거기 계십니까?"

". 집주인과 한잔 하는 중이다."

저희 끼리 낄낄 웃어대는 소리가 들리고는 또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두 들어가서 마셔야겠수."

"잠깐 기다려라. 내가 이 사람과 인사라두 나눠야지." 하고 나서 사내는 흥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것 참 남의 집에 와서 결례가 이만저만이 아닐세. 나는 구월산 사는 장서방이란 사람이

."

흥복은 내심 놀라서 하마터면 술잔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전에 몇번 구월산 패거리 중에서

장가 성 가진 두령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고, 그의 수하에는 해서에서 난다 긴다 하

는 자들이 모여 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소문에는 그가 감영에서 목이 잘리고도 되

살아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으나, 흥복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사내가 다

시 말하였다.

"이렇게까지 괴롭힐 일은 아니로되, 산간에서는 사람을 사귀기가 쉽질 않아 권도로 해본

일일세."

흥복은 전신에서 맥이 탁 풀려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한숨을 끙하니 쉬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일어나 두 손을 모았다.

"죽든 살든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먼저 인사나 받으시지요." 흥복이 큰절을 올리니 길산이

쪽에서도 맞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손을 잡고 말하였다.

"잘되었네. 이렇게 만나게 될 것을 공연히 툭탁거렸으니 피차에 쑥스러운 노릇일세." 길산

이 밖에 섰던 식구들에게 말하였다.

"어서들 들어오너라."

밤새도록 흥복이를 골리느라고 쫓아다녔던 마감동, 김선일 등은 안색이 꺼칠하였다.

"어이, 춥고 배고파서 두 절의 개 같은 꼴일세."

"나두 한잔 먹어보세."

진저리를 치며 상 앞으로 다가앉는데 선홍이는 잠을 설쳤는지라 연방 하품이었다. 선홍이

와 말득이가 여계산 어귀에서 기다리며 쫓겨 올라오는 졸개들을 잡았고, 이어서 흥복이를

산채로 몰아댔던 것이었다. 그들 중에도 감동이와 선일이가 가장 고생을 하였다.

"아이들은 모두 별일 없겠지?"

길산이 물으니, ", 모두들 저 아래서 지쳐 떨어졌습니다."

감동이가 대답하였다.

"여기 아이들도 잘 호궤하고 뒤늦게 산채로 올라오는 자가 있을 터이니 말득이와 선홍이가

수습해두어라. 그리고 너희들은 몸 좀 녹이고 어서 한잠 붙여두고." 감동이와 선일은 졸려서

눈이 반쯤 감겼는데 길산이 흥복이를 그들에게 소개하니 다 끝났는데도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아서 서먹서먹해 보였다.

"칼은 아무나 휘두르는 물건이 아니우. 허기야 무 토막이나 붕어 모가지 끊어내는 데엔 괜

찮겠지만."

마감동이가 하품을 하면서 중얼거리자 흥복은 그가 바로 칼등으로 꼭뒤를 내리쳐 기절시킨

장본인이었음을 알았다.

"내가 원래 농투성이로 쥐어본 것은 호미와 낫이 고작이요. 몽둥이 한번 제대로 휘둘러본

적은 없으나 여태껏 남에게지지 않고 살았소.

언제든 기회만 준다면 한번 맨손으로 해봅시다."

강선흥이가 곁에서 껄껄 웃었다.

"비록 병장기 쓰는 법은 배우지 않았지만 싸움에는 자신이 있다는 얘기로군." 다시 말득이

가 덧붙였다.

" 얼핏 들으니 조대갑, 임태룡 두령들의 뒤를 이은 자비령 산주라는데, 저이가 누군고 하니

바로 임두령에게서 검을 배운 마두령이란 사람이우."

흥복은 놀라지 않으면서 대꾸하였다.

"들은 적이 있습니다. 팔매를 던진 것은 어느 분이시오?"하는데 정작 선일이는 계면쩍게

웃으며 돌아앉았고, 선흥이가 그의 무릎을 두드려며 말하였다.

"이 사람 짓이지, 아마 소싯적에 참새깨나 잡은 모양인데... 어디 볼태기라두 터졌소이까?"

길산과 흥복이만 웃지 않았다. 길산이 좌중의 농기를 거두려는 듯 조용히 말하였다.

"성흥이허구 말득이는 나가서 돌아오는 자들을 수습하고, 자네는 식구들을 여기 데려와서

서로 얼굴이나 익히도록 하게."

길산이 흥복이네와 일당이 되었음을 은근히 비추자, 흥복은 잠깐 동안 망설였다. 힘과 꾀가

모자라 무참하게 점령을 당하였으나, 구월산의 두령들 틈에 끼여 조롱을 받고 나자 선뜻 나

서기가 창피하였다. 길산이 눈짓하니 선흥이와 말득이가 먼저 남겨둔 파수들에게로 돌아갔

, 감동이와 선일이도 이만 쉬겠다며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최서방..."

길산이 똑바로 흥복을 바라보았다.

"자네 뭣하러 산에 올라왔는가?"

"......고향에서 살수가 없었지요."

"농사를 지었다면서?"

"동네 사람들과 더불어 관리를 살해하였지요."

길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구들을 남겨두고 왔는가?"

"소문을 들었소이다. 형님은 관가에 끌려가 장하에 돌아가시고, 형수와 조카들은 관비와 사

노비로 떨어졌답니다."

둘 사이에는 잠깐 침묵이 지나갔다.

"여기서 작당하여 재물이나 조금씩 털어 살면서 구차한 목숨을 이으려는가, 아니면 자네가

고향에서 농사짓고 살 수 없었듯이 지금도 허덕이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위하여 좋은 일

을 해보겠는가?"

"어떤 일이 좋은 일이 됩니까?"

"자네가 죽였다는 관리들은 하리배인가 도백인가 정승인가... 그들도 양반과 고관의 지시를

받는 자들이 아닌가?"

"그렇습죠."

"그들도 가엾은 백성의 한 사람이다. 만약에 자네와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자들도 자네를 죽

이려 했겠지. 이제는 그저 피하여 숨어 살면서 연명하는 게 아니라 자네와 같은 백성들이

억눌려 살지 않도록 끊임없이 잘못된 제도와 싸우고, 드디어는 백성의 세상을 세워야 할 것

이다. 사나이가 제 집과 마을을 잃고 파가하여 세상에서 숨은 것도 사나운 팔자려니와, 그것

을 제 혼자의 욕심에만 급급하여 이겨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처참한 인생이겠느냐. 출발은

스스로 살기 위하여 일어났으되, 가는 곳은 여럿이 함께 사람다웁게 살아가는 세상을 세우

는 길이다. 약한 백성은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원하나 그 마음이 모이지 않은 때문이

. 식솔들이나 손바닥만한 땅뙈기나 하늘을 가릴 지붕이 있어 대개는 거기에 얽매여 평생

을 한탄하며 죽은 듯이 살아간다. 네 일찍이 분심을 일으켜 썩은 세상을 박차고 나왔으니

얼마나 훌룡한 기회이나? 하는 당연히 자네와 같은 사람이 우리 식구가 될 것이라고 믿고서

산채에 올랐다. 만약에..."

길산은 날타로운 눈을 들어 흥복을 노려보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가리켰다.

"자비령의 좀도적으로 남아 허술한 장사치나 괴롭히고, 모은 재물로는 술과 고기로 느긋한

부가옹의 생활이나 누리겠다면, 당장에 내 손으로 토멸을 하리라!" 흥복은 절로 가슴이 뜨거

워지고 길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아 솟아나는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그는 소매를 들어 얼굴을 씻었다.

"비록 제가 배운 것이 없고, 형세는 궁색하게 몰렸다고 하나 그러한 토멸을 받을 때까지 살

아 무엇하겠습니까? 여태껏 자비령에 올라온 뒤로 큰 뜻을 깨닫도록 해줄 동무나 언니를 만

난 적이 없고, 다만 교만 방자하게 이런 생활에 흡족하여 살았더니, 성님께서 내 좁은 가슴

과 새 같은 머리를 찢고 터뜨려서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듯합니다. 내 비록 재주도 힘도 없

으나, 다만 고지식하게 뜻을 밀고 나가는 진심은 있사오니 아래 거두어주십시오. 이 산채와

식들과 저는 모두 성님께 복속하여 올 겁니다."

"내게 복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할 큰 뜻에 바쳐지는 것이다. 어서 가서 아이들을

데려와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해라."

당초망 최흥복은 혼자서 나갔고 산채에 돌아와 갇혀 있던 부하들을 선흥이와 함께 인솔하

여 왔다. 길산이 마루 위로 나왔고 흥복이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오늘부터 우리는 구월산에서 오신 장길산 두령님의 식구다. 인사 올려라." 하고는 흥복

이 털썩 무릎을 꿇었고 자비령의 식구들도 우르르 꿇는데 길산이 손을 저어 만류하였다.

"모두들 일어나시오. 우리가 여기 온 것은 생각을 모으자고 온 것이지, 여러 식구의 집터를

강제로 빼앗으려 온 게 아니오. 우리는 따로이 동선령으로 나아가 산채를 이룰 것이로되,

림의 도리로 보아 생각이 맞지 않으면 서로 빈번히 다투고 힘을 소모할 것인즉, 온 세상이

우리를 대적하여 없애려 하고 잡으려 할 제 우리가 서로 다툰다면 마치 쌈닭처럼 가마솥에

들어가는 수밖에 더 있겠소. 서로 이웃하여 있으면서 무슨 일에든지 한가지로 돕고 힘을 합

치자는 것이오."

길산이 말을 마치고는 흥복이에게 모두 데려가 쉬도록 이르니, 갇혀서 호된 경을 치리라

두려워하던 졸개들이 모두 안심하고 형세가 든든해졌음을 기뻐하였다. 흥복이 사양한는 것

을 길산이 함께 이끌고 상방에 들어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자, 일시에 긴장이 풀린 흥복

은 대번에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길산은 혼자 일어나 산채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가운

데 날이 훤하게 밝았던 것이다.

다음날 모두들 늦은 아침을 먹었고 길산이 흥복을 불러 조용히 물었다.

"산채 식구가 무려 삼십여 명이 되는데, 모두들 여기 눌러앉아 있기를 원하는지 한번 물어

보도록 하게."

길산이 보기에는 그들의 대부분이 흉년에 고향을 떠나 헤매어 다니다가 입산한 사람들인

것 같았으며, 흥복을 빼놓고는 거의 반수 이상이 거추장스러운 사람들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공연히 놀고 먹기 위하여 모여든 불한당의 무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전부터 자비령의 여러 골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제가 모았습지요. 실상 군식구가 많아

서 벌어먹기가 여간 힘드는 노릇이 아니지만 인정상 떼쳐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원하는 자

들이나 늙고 쇠약한 자들은 세간으로 나가 살도록 하게. 이 산채에 재물이 얼마나 있는가?"

흥복이 손을 꼽으며 궁리해보고 나서 말하였다.

"전번에 오백 냥과 곡산에서 만둥에게서 빼앗았던 은이 대략 칠백여 냥 되는 듯합니다.

곡이 삼십 석, 포목이 이십 동쯤 됩니다."

"허허, 꽤 많이 모아두었구나. 그만하면 우리보다두 부자네. 재물은 모두 자네가 가지려는

것은 아니겠지."

"원 천만에요. 그런 생각을 하다니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서 비축해두고 있습지요.

개는 여기 식구 중에 여염에 남아 있는 가족을 도우려는 자들이 있어 이만 재물도 얼마 안

가서 식량과 고른 분배로 다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몇 차례나 분배를 하였는가?"

", 두어 차례 하였습니다. 대개는 섣달 그믐께에 모두 모여서 의논을 정하지요." "그렇게

하였다면 한 사람에 백여 냥의 차례는 돌아갔겠지?" "아마 이십여 냥씩 돌아갔을 겁니다.

포목으로 받은 자나 미곡으로 받은 자들도 그쯤은 될 게요."

"그만함 책력 보아가며 밥 먹는 팔자는 면하였겠다. 이제 산채의 재물 중에서 사백여 냥을

내어 떠나려는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여라."

흥복은 길산의 지시를 듣고 광을 열어 재물을 낸 뒤에 을량을 시켜 자비령 식구들을 모두

모이도록 하였다. 흥복이 먼저 얘기를 꺼내니 몇몇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제는 그만

여염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말하였다. 또 어떤 자들은 변지에 나가 함께 농토를 마련

하여 모여 살기를 원하기도 하였는데, 을량과 네댓 명의 여계산 문점손의 남은 식구였던 자

들은 자기네가 토박이임을 주장하고 힘이 모자라 밀려나기는 하여도 이런 법은 없다며 버티

었다. 흥복은 우선 떠나려는 자 십여 명을 추려내어 똑같이 이십 냥씩 나누어주고 나서 을

량의 의견에 찬동하는 자들과 자리를 따로 하였다. 흥복은 새로운 안을 내었다.

"장두령께서는 이미 밝혔지만 우리를 식구로서 여기 남아 있어도 좋다 하였고 새 산채를

동선령에다 짓는다고 하였네. 아무래도 식구가 서로 섞일 터인즉, 남을 사람은 남아도 좋으

나 진정 복속할 뜻이 없는 사람은 여기를 떠나야 하겠지." 몇몇 사람들이 다시 남아 있고

싶다는 의견을 표하였고 흥복이는 이 산채에서 구월산 패와 동당이 되고자 함을 밝혔다.

러나 을량은 서너 명의 자기 지지자와 함께 반대하였다.

"좌우간 우리는 여기를 떠나겠수. 그러나 이십냥 가지고는 물러날 수 없지." 그러니까 을량

의 뜻은 이 산채에 기득권이 있었으니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고, 대신에 산채의 재물을 모

조리 가지고 나가 자립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뒷날을 보아 도모해보련다는 의미

도 포함되어 있는 말이었다. 흥복은 그때에 몹시 괴로웠다. 비록 모자란 기량이었으나 그는

이들을 여러해 동안 통솔하며 두령 노릇을 해왔었다. 이제와서 길산의 수하로 들어가기를

자청하기는 하였으나 을량의 주장이 그르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 돌이켜 생각

해본다면, 문점손이나 을량이나가 한결같이 여염의 제 식구들과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자들임에은 틀림이 없었다. 그들은 한번도 대이가 없었고 이제는 최소한도 생존하겠다는

뜻에서마저 벗어난 자들이 아니던가. 오직 재물을 모아 토호나 양반들 못지않게 어느 구석

진 곳에 가서 여생을 호강하며 살겠다는 자들이 아닌가. 을량이와 그의 지지자들이 산채를

놓고 복속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의 뜻이 구월산 패와 다른 까닭이 었고, 이권을 놓친

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좋아, 재물을 모두 가져가도록 하게나. 부족한 두령 구실로 낭패하게 되어 면목이 없네."

그렇게 말하면서 흥복은 마음속으로 자신은 분명히 구월산 장두령쪽이라고 선택을 하였다.

을량과 네 사람은 즉시 돈과 포목을 나누어 꾸려가지고 황급히 떠날 채비를 차렸다. 흥복은

상방으로 돌아갔는데 아무도 떠나는 자들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상방에는 길산과 마감동이

강선흥이가 둘러앉았고 다른 식구들은 이 산채가 마지막으로 정돈될 때까지 엄중하게 사위

를 경계하고 있었다. 흥복이 여태까지의 경과를 얘기하고 나서 을량에 관하여 의견을 말하

였다.

"제가 비록 성님들께 복속하였다 하나, 을량의 태도를 그르다고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가 너무 소견이 좁아서 제 눈앞의 이익만을 바라는 다라운 언행을 보고는 스스로 결정하

고 모든 재물을 내주어 버렸지요."

"아주 잘하였네."

마감동이가 나직하게 말하였다.

"슬그머니 쫓아 내려가다가 해치워버리겠수."

흥복이도 덧붙였다.

"그는 틀림없이 후환이 될 겝니다. 언제든지 산채를 다시 도모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길산

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냥 가도록 두어라. 그자의 언행은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점이 몇가지 있다.

째로 대의를 모르는 자가 의기를 위하여 산채를 찾으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원

래가 도둑질하는 재미로 녹림을 찾는 것이지 세상에서 쫓겨난 자가 아니다. 다만 그가 자네

에게 복속을 조롱하며 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자네가 순순히 재물을 내어주기를 바라고

하는 짓이다. 여태껏 함께 고생한 다른 식구들은 거의 따돌리고 저희 몇몇이서 남은 재물을

차지하려고 오히려 스스로의 탐심은 의기를 내세워 감추는 것이다. 그냥 떠나도록 버려둘지

라도 그들은 쥐새끼임에 분명하니 고작해야 구멍을 파고 숨거나, 저희끼리 싸워서 죽고 상

하겠지, 잘되었다. 이제는 실로 남을 식구만 남았으니 여기서 얼마 동안 함께 지내며 사냥이

나 하도록 하자."

흥복은 길산의 대범하고 정연한 말에 스스로 감복하였다. 을량이 짐을 짊어지고 부리나케

산채를 벗어났으나 구월산 식구들은 그냥 바라보며 내러벼두었다.

저녁때에 김기까지 자비령 산채로 올라왔고, 그로부터 닷새 동안 구월산 패거리는 거기 머

물며 사냥으로 날을 보냈다. 사냥은 부근의 지세를 익히고 새로운 은신처와 알맞은 산길을

찾아내기에는 좋은 방도가 되었다. 짐승이 다니는 길은 그들에게도 관군을 피하는 훌륭한

통행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연봉에는 잣나무와 전나무가 대삼림을 이루고 있었으며 분지

에는 울창한 소나무숲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늘푸른 숲이 밀생하여 있어서 아무리 동절

이라지만 눈 덮인 가지 사이로 들어가면 좀처럼 눈에 띌 것 같지 않았다.

능선을 주로 타고 연봉의 맥을 따라서 이동하는 노루 사슴의 목은 그들에게도 훌륭한 통행

로가 될 것이었는데, 일찍이 최흥복이 천진산까지 나아간 길이 바로 그러한 길이었다. 또한

계곡과 분지를 어슬렁대는 곰의 길은 위급한 때에 잠복할 수 있는 장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

으며, 마을을 내려가 눈 덮인 밭고랑을 뒤적여 지난 가을의 남은 열매를 뒤적거리는 멧돼지

는 산에서 여염으로 나가는 지름길을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녹림에 사는 자들의 겨울철

사냥은 일종의 군사조련이 되었던 것이다. 대개 범이나 곰과 같은 크고 사나운 짐승들은 계

곡으로도 출몰하게 마련이었고 겁 많은 짐승들은 짙은 관목숲이나 험준한 산등성이를 뛰고

숨고 하는 법이었다.

양지바른 남향받이 비탈은 눈이 녹아 축축하고 기름진 냑엽이 드러났고, 골짜기의 굳게 얼

었던 시내도 얼음장 밑으로 가냥픈 소리를 내며 움직여가는 따스한 날씨였다. 그러나 숲 안

에는 아직도 눈이 깊숙이 쌓인 위에 나무에서 녹아 흘러내린 젓은 눈으로 다시 얼어붙어 몹

시 미끄러웠다. 길산은 구월산이 해서의 가운데 외롭게 솟아올라 사방이 읍치 가까이 포위

되어 있으며, 동쪽은 그 맥이 안악의 면전에서 끊기고 퇴로는 대동강의 지류인 월당강에 막

히는데, 서쪽으로는 풍천에서 고장해야 야산이 바다에 먹히었으니, 그들이 오랫동안 웅거할

장소가 못 된다고 진작부터 생각해왔던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자비령 맥은 북으로 곡산 수

안으로 통하며 관서 관북의 찌를 듯한 고원지대로 닿을 수가 있고, 동으로는 관동의 주름살

같은 조밀한 협곡의 회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산줄기의 끝인 극성진에서 오 리 못 미쳐서는 관서의 드넓은 벌판과 인적 없는 하

구에 이르는 대동강의 하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구월산에서는 오래 전부터 전하여 내려

오는 말이 있으되 범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잠시 쉬어 가거나 어쩌다 어긋나서

호환의 법석을 치르는 적은 있어도 쉬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원래가 해서 도중에 호환이

자심하여 감영에서 포수들이 포살하러 출동하는 곳은 수안, 곡산, 서흥, 평산 방면이었다.

것은 대륙에서부터 스며드는 맹수가 산세를 타고 동북방으로부터 내려와 자비령과 멸악산

일대에까지 닿고, 이어서 다시 동북의 산악지대로 하여 중부 산악에까지 이르는 것을 미루

어서도 대략의 지세를 알 만하였다.

길산은 모든 퇴로와 출입로와 은신처가 구비된 자비령을 한시라도 빨리 그들의 생활에 익

숙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최흥복이네 산채는 동선령의 새 산채를 이루기 위한 훌

륭한 숙영지가 되었다. 이 두 산채는 이제 서로 등을 대고 동서편의 양끝에서 적을 안전하

게 방비하게 될 것이다. 모처럼의 사냥은 실상은 놀이가 아니라 지세를 몸에 익히기 위한

조련에 더욱 그 의의가 있었다.

그들은 우선 사냥의 봄위를 무초령과 여계산 사이의 산봉우리와 계곡으로 한정하였다.

침 일찍 밥을 든든하게 먹고서, 길사이 이하 모든 형제들과 구월산 자비령의 졸개들이 모조

리 산으로 풀려나갔다. 마감동이는 이런 때에 사냥에 익숙한 오만석이가 구월산에 남은

것을 탄하였고 달마산 이래로 처음 사냥길에 나선 선홍이는 눈 만난 검둥개처럼 이리 뛰고

저리 내달으며 좋아하였다. 모두들 병장기로는 장창과 몽둥이와 환도가 전부였고, 산채에 있

던 예전 문점손이의 화승총 두자루는 화양이 없는데다 손질한 지가 도래되어 쓸모가 없었

. 길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자비령의 졸개들은 가끔씩 노루를 잡곤 하던 옛적

의 엽사 문가의 총솜씨를 기억하는지라 몹시 아쉬워하였다. 역시 총을 보다 아쉬워한 것은

그것에 혼이 나고 부상까지 당하였던 선홍이였다.

길산이 화승총의 위력을 깊이 느끼고 그것을 스스로 습득하게 된 것은 아직은 후러씬 뒤의

일이었다. 흥복이는 그때에 얼핏 생각하기를, 만약에 문가의 방포술을 자기가 습득했더라면

어둠속의 팔매치던 자를 쉽게 잡았을 것이라 생각하며 쑥스럽게 웃음을 짓기도 하였다.

들은 일단 거북이골 못 미쳐서 있는 너른 빈터에 모였다. 드문드문 아름드리 자작나무와 오

리나무가 서 있었으며 양지바름 곳이라 눈이 알맞추 녹아 있었다. 그들은 지고 온 술항아리

와 노구와 쌀섬을 내려놓았다.

"여기가 복판입니다. 어디서나 쉽게 되돌아올 수가 있지요." 최흥복이가 안내를 하는데,

편 노구를 걸고 성급한 자들은 짐승을 구울 모닥불 터를 고르려는지 돌을 운반하고 법석이

었으며 사냥에서 빠진 자들은 숙영할 임시 움막을 짓기 시작하였다. 길산이 그들을 세워놓

고 대를 나누었다.

"감동이 선홍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북편 골자기로 나아가고, 말득이 선일이는 남은 아이들

을 모두 인솔하여 무초령에서부터 튀기며 몰아 내려오너라." 김기는 산채에 남았는데 천동

이가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말득이가 저희들은 고작 몰이나 하라는 뜻을 알아듣고 입술이

비죽이 나왔다.

"우리가 무슨 쥐 포수요, 낮에 나온 도깨비요, 하릴없이 고함만 지르구 쏴대란 말이우?" "

이놈아, 커도 한 잔이요 작아도 한 잔이다. 토끼든 다람쥐든 자고를 던져 잡으려무나." 선홍

이가 놀려대고는 앞질러 웃음을 터뜨렸다. 길산이 말하였다.

"어쨌든 튀기다가 적당한 놈을 보면 잡도록 하여라. 나하구 흥복이는 거북이골에 내려가련

."

아침 햇살이 비탈 위에 가득한데 산정의 눈이 햇빛을 받아 되쏘는 듯한 백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말득이와 선일이도 하는 수 없이 장창을 들었고 감동이는 환도를 엇비슷이 찼으며

선홍이는 달마산 이래로 지니던 엄파 쇠몽치를 허리에 찼다.

"이따가 중화참까지 빈손이면 아예 술도 밥도 먹을 생각 마라." 기산이 말해주었고 모두들

저희 패가 큰 짐승을 잡는다며 각자의 방향을 따라 흩어져갔다.

흥복이와 길산은 뒤처져서 술항아리에 표주박을 담가 슬슬 취기를 올려두고 있었다. 흥복이

말하였다.

"성님, 우리는 여기서 항아리나 몽당 비워버릴까요?"

"아니, 저 애들 짐작하여 알맞추 나서지."

북풍이 제법 몰아치는가 싶더니 산정으로 오를수록 귓가를 지나는 바람소리가 수천 개의

화살이 스치듯이 날카로이 곤두서 있었다. 바람을 등에 지고 오르는 길이라서 한결 나은 편

이었다. 그들은 일단 불규칙하게 올라가서 내려올 때 횡대로 진을 벌일 셈이었다. 위로 오를

수록 낮은 쪽의 전나무와 잣나무들이 눈 사이로 바늘 끝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꼴이 보였

. 선일이는 일행에서 제일 가녘 쪽을 걸어 올라가고 있다가 나란히 모여져서 찍힌 발자국

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왼쪽의 것이 한뼘쯤 앞이었고 오른쪽은 그 바로 뒤에 찍혔는데,

눈 위에 인두 자국처럼 보이는 것이 굽 달린 짐승인 듯하였다.

"어이, 여기 뭔가 있는데..."

다가와 살펴본 졸개 하나가 말하였다.

"사슴이우, 방금 인기척에 놀라 달아난 게요."

하더니 그는 눈짐작하여 거의 열 발이나 가서 똑같은 자취 둘을 가리켰다.

"저기서 예까지 건너뛰었수. 소리내지 말구 쫓아갑시다." 그들은 발자취를 따라 올랐고 산

정에 거의 다 가서 발자취는 우회하여 비스듬하게 등성이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등성이를

타넘었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이니 잘 뛰지 못하지요. 큰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내려갑시다." 그들은

크게 벌려 서서 소리를 워이 워이 내지르면서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과연 그들의 왼편 등

성이에 우뚝 서서 고래를 돌린 사슴이 보이더니 눈을 뒷발로 차면서 높이 솟아올라 나무숲

위를 뛰어넘어 사라졌다. 그들은 예상대로 비탈길에 내몰았다고 좋아하며 산 아래로 몰려

내려갔다. 가끔씩 놀란 장기가 날아올랐고 산토끼가 그들의 사이를 뚫고 산 위로 미친 듯이

뛰어올라갔다. 그들은 무초령의 다른 계곡으로 내려갈 때까지 다시는 사슴을 볼 수가 없었

. 어쨋든 그저 배회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여전히 벌려 선 채로 소리를 냅다 지르면서

계곡으로 내려갔다. 그때에 뭔가 시커먼 것이 덩굴사이에서 나오더니 눈을 뽀얗게 일으키

며 질주하여 사라졌다. 걸음이 빠른 말득이가 장창을 서투르게 끼고서 달음박질을 치는데

눈 위로 어지럽게 흩어진 발자국이 보이는 것이다. 계곡 아래쪽에는 선홍이와 감동이가 방

심하고 앉았다가 위에서 들리는 말득이의, "그쪽으로 간다! 놓치지 말우."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검은색과 잿빛이 드문드문 섞인 멧돼지였

는데, 황급한 겨를에 보기에도 거의 조랑말이나 되어 보일 만큼 큰 덩치에 코앞으로 휘어져

솟은 흉한 어금니가 실히 두어 뼘은 되어 보였다. 거친 콧김소리가 아주 가깝게 흩어져서

우우하는 건성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말득이가 먼저 심승의 뒷전으로 뛰어가는데 앞에서

도 달려오는 적을 본 멧돼지가 잠깐 멈추더니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돌아섰다. 말득이

는 그 자리에 주춤 섰다. 멧돼지의 흰창이 드러난 눈이 그를 노리더니 곧장 머리를 숙이며

달려왔다.

"아이구나..."

자고 없는 말득이가 어찌하랴. 당황한 김에 어설프게 던진 장창이 날아가 눈위에 맥없이

꽃혔고 그는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말득이가 걸음이 빠르고 동작이 잽싸기 망정

이지 다른 자 같으면 어림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득이는 촘촘히 들어선 전나무숲을 바라보

고 뛰는데 뒤에서 콧김소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멧돼지가 고개를 숙이고 억센 이빨로 그의

궁둥이를 내지르려는 찰나에 말득이는 둥치 굵은 나무의 뒤로 빠져나가 착 붙어섰고 짐승은

방향을 놓치고 몸을 돌렸다. 킁킁거리기도 하고 짧은 다리로 눈밭은 헤쳐보며 두리번거리도

, 밑에서 뛰어올라오는 마감동이와 강성흥이를 보자 이내 목표를 정했다는 듯이 곧장 뒤

어갔다.

정면에는 감동이가 있었고 보다 아래편에는 선홍이가 있었는데, 감동이는 환도를 쥐고 오

르다가 그를 바라고 달려오는 멧돼지를 보자 주춤하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달아날까 옆으로

샐까를 눈가늠해보다가 너무 눚은 걸 알았다. 짐승이 감동이의 사추리를 받아넘기려고 달려

들적에 감동이는 옆으로 피하면서 환도를 내리그었다. 짐승이 울부짓으면서 감동이의 허벅

지게를 들이받고 빠져나갔고, 이어서 선홍이가 한손에 엄파를 치켜들고 섰다가 부상당한 멧

돼지와 맞섰다.

둔중한 어갯죽지에 칼을 맞아서 짐승도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상처는 치명적이긴커녕 대수

롭지 않아 보였다. 멧돼지는 흉포해져서 선홍이를 허공으로 날려 보내려는 기세로 달려들었

. 선홍이가 뚝심이 없었으면 그대로 짐승의 날카로운 어금니를 가슴에 받고 뒤로 나가떨

어졌겠지만, 일찍이 남대천에서 황소의 뿔을 뽑았다는 역사인지라 당황하지 않았다. 선홍이

의 우악스런 손이 멧돼지의 두어 뼘 어금니를 움켜잡는데 발을 디딘 곳이 젖은 눈밭이라 그

는 옆으로 미끄러졌다. 멧돼지는 일단 성을 내어 공격하기 시작하면 좀처럼 노기를 가라앉

히지 않는 짐승이었다. 어금니로 받을 뿐만 아니라 억세고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기도 하

는 것이었다. 음산한 울부짖음과 노기로 퍼렇게 된 눈알이 제법 맹수다운데 선홍이는 한쪽

무릎을 꿇어 버티고 왼손으로 짐승의 어금니를 붙잡아 힘을 쓰면서, 오른손에 들었던 엄파

쇠몽치로 멧돼지의 머리를 강타하였다.

이어서 짐승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고 선홍이가 왼손을 높치면서

다급한 김에 짐승의 허리를 안았다. 멧돼지는 짧고 억센 사지를 버둥대며 머리를 돌려 두어

번 선홍이의 몸을 박으려고 애썼고 선홍이의 가슴팍과 옷자락이 짖기고 살이 긁혀서 피가

흘렀다. 선홍이는 노기가 탱천하여 짐승의 허리를 죄며 한 손에 치켜든 엄파를 연거푸 세

번이나 휘둘러 멧돼지의 머리를 타격하였다. 멧돼지는 마지막으로 끊긴 비명을 내지르고는

전신의 힘을 뽑고 축 늘어졌다. 선홍이가 짐승을 밀어내고 일어서는데 절명하면서 내갈긴

똥이 왼쪽 바짓가랑이에 묻어 김을 내고 있었다. 감동이와 말득이가 다가왔고 선홍이는 투

덜거리면서 눈을 한움큼씩 집어서 오물로 더러워진 옷자락을 닦았다.

"어이구 거의 송아지만하군."

새삼 놀랐다는 듯이 감동이가 넘겨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 녀석아, 우리가 아녔으면 너는 아마 평생 뒷간에도 못 다녔을게야." 선홍이가 땀을 씻

으면서 꽁무니를 돌려 달아났던 말득이를 놀려댔다.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과연 제 기냥에 걸맞는 물건들기리 만나는 모양일세." 말득이가 맞

받으니 곧 선홍이가 사실은 멧돼지와 사촌지간이라는 소리였다.

김선일이와 다른 식구들이 산에서 내려왔다. 모두들 널브러진 멧돼지의 몸집과 흉측한 이

빨을 보고 놀랐다. 처음에 감동이의 칼을 받은 곳은 비록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두터운 비계

살을 비집고 깊숙이 상처를 내었으니 동작을 둔화시킨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고, 더욱이 선

홍이가 얼마나 호되게 내리쳤는지 귀 사이의 불쑥 튀어나온 두개골이 아예 주저앉았고 두

눈은 뭉개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들 헉헉대고 땀을 씻으면서 한참이나 쉬고 나서 짐승의 네 발굽을 묶고 긴 나

무에 꿰었다.

"우리는 이제 사냥 그만 할란다. 느이들은 어서 가서 토끼라두 몇마리 줏어오렴." 마감동이

가 선일이와 말득이에게 말하면서 노획물을 운방하려는 그들을 쫓았다.

선홍이도 짐승을 꿰단 막대를 어깨에 걸머지고 말하였다.

"이건 우리 둘이서 통째로 그슬려서 술안주 할 테니 얼씬할 생각 아예 마라." 말득이와 선

일이를 비롯한 몰이꾼들은 모두 풀이 죽어서 투덜대고 구경만 할 뿐이다.

"좋아, 우리두 한 마리 잡기 전에는 산에서 안 내려갈 테요." 선일이가 침을 내뱉으며 결연

히 중얼거렸다. 그들은 자비령의 토박이 식구들을 앞세워, 노루나 사슴이 왕래하는 등성이

로 멧돼지를 메고 숙영지로 내려갔다.

아직 떠나지 않고 술을 마시고 있던 길산과 흥복은 중화참도 되기전에 노획물을 지고 내려

오는 그들을 놀란 눈으로 맞았다. 흥복은 길산에게 말하였다.

"성님, 우리두 슬슬 일어납시다. 내가 좋은 곳으로 안내할 테유." "서두를 것 없다. 밥이나

든든히 먹고 일어서지."

선홍이와 감동이는 아예 사냥에서 손을 놓으려는지 불을 지피고 말뚝을 세우고 법석대었

. 흥복이와 길산은 대충 점심 요기를 하고 나서 거북이골로 향하였다.

"범이 다니는 길목을 알고 있습니다. 전에 우리 산채 아이들이 여러분 먼발치서 마주친 적

이 있고 두엇이 호환으로 끔찍하게 죽은 적도 있지요. 그리로 나갑시다." 흥복이 안내를 하

는데 거북이골의 가장 구석지고 가파른 북령 계곡을 뒤지려는 것이었다.

나무숲이 빽빽하더니 얼어붙은 시내 양편에 찌를 듯이 우뚝우뚝 서 있는 암벽이 나왔다.

러 형상의 바위에 눈이 덮여서 사방에는 기괴한 산귀가 가득히 늘어선 것 같았다.

그들은 계곡의 안쪽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한참을 오르던 흥복이가 문득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저기 보십시오. 발자국입니다."

둘이 내려다보니 우묵한 계곡 위에 외줄기의 흔적이 보였다. 원래가 범의 걸음걸이는 모둠

발로 찍혀지는데 네 개의 발이 일렬로 모아져 딛게 되어 발자국이 외줄로 나타나는 법이다.

그들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발자국은 간격이 매우 넓었고 거의 손바닥의 두어 배는 될 만

큼 컸으며 앞쪽에 국화 무늬 같은 자취가 또렸하였다.

"얼마 안되었습니다."

"저쪽에서 이미 알았겠구나."

길산이 긴장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맞은편으로 발자국을 따라 올라보니 끝없는 숲인

데 먼 곳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말하지 않고도 이 발자국의 반대편에 굴이 있으리

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나서 되돌아 계곡을 건너 바위가 늘

어선 암벽 사이로 올라갔다. 발자국의 간격은 더욱 넓어지고 있었는데, 길이 가파르게 되면

서 널찍한 바위가 능선 위로 삐죽하게 내밀어진 아래편에 비좁은 터가 내려다보였다. 길산

은 벌써 찬바람 속에 섞인 짙은 노린내를 맡을 수가 있었다. 바로 그 바위 아래 범의 굴혈

이 있었던 것이다. 흥복이 귀를 대고 엎드려 바위를 토닥이며 말하였다.

"이 밑에 새끼들이 있습니다."

"아마 먹이를 찾아 나간 모양이군."

"저것들을 돌멩이로 박살을 시키고 올까요?"

"놓아두거라."

흥복을 말리면서 길산은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그는 문득 살덩이로 내버려졌던 자신에게로

생각이 닿았는지도 몰랐다. 흥복이 다시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자라나면 사람을 해칠 겁니다."

"무릇 정을 상하게 하는 일은 상서롭지가 못한 것이다. 그만 돌아가자." "범을 잡지 않으시

렵니까?"

의아하여 흥복은 묻고 나서 이자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고는 무심결에 픽 웃고 말았다.

어쩌면 눈치가 빠르고 말깨나 그럴 듯이 씹어뱉는 것이 이자의 유일한 재주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닐까. 길산은 흥복의 노골적인 불만의 기색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렇

게나 말하였다.

"새끼가 없는 범을 잡았으면 했는데... 어디 길 잃은 토끼나 노루나 얻어가지구 가든지." "

, 세상에 어미 없이 태어나는 새끼가 있으며, 새끼 없는 어미가 어디에 있단 말이우." "

런 게 있기도 하느니라."

길산은 앞장서서 걸으며 혼잣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무엇이든 어린 것은 가엾지."

흥복은 골짜기의 툭 트인 곳으로 걸어나가는 길산의 뒤를 따랐다. 그의 손에는 지금 장창

이 쥐어져 있었고 길산은 등을 돌리고 방심하여 걷고 있었다. 당초망 최흥복은 스스로 그

언행에 감복하였던 자신을 비웃으며 창대를 고쳐 잡았다. 차라리 이자를 죽여버리고 자비령

을 떠나버리면 욕스러운 생각도 잊혀질 듯하였다. 그러나 그의 무방비한 등은 어찌된 노릇

인지 너무도 당당하여 찌를 수가 없었다. 흥복은 창을 고쳐 잡으며 두 팔을 뒤로 뽑았다.

러다가 길산의 걸음이 비껴져 노리던 곳이 어긋나자 다시 창을 내렸다. 이러기를 서너 차례

하고 나니 두 손에는 미끈한 땀이 베었고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가 이번에는... 하면서 창을 겨누었을 때에 문득 길산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어느

곳을 노려보는 모양이었다. 흥복이도 멈추어 서서 길산이 바라보는 오른편 위를 바라보니

높은 바위를 딛고 서있는 누릿누릿한 짐승이 보였다. 어깨를 바싹 올리고 앞다리를 구부리

고 입을 위로 젖혀 나직하게 짖고 있는 것은 바로 범이었다. 흥복이 얼결에 창끝을 그쪽으

로 돌렸으나 길산은 칼을 빼지도 않았다. 범이 바위로부터 훌쩍 뛰어 계곡 위로 날렵하게

내려섰고 그것은 겨우 스무걸음이 될까말까 한 거리였다. 범이 크게 포효할 적에는 별로 두

려워할 이유가 없으나 지금처럼 소리를 죽이고 고요히 접근할 때에는 매우 위험하였다.

수는 공격할 기세를 곤두세우고 적에게 집중할수록 침잠되는 법이다. 오로지 고요한 가운데

살기만을 내뿜는 것이었다.

범은 어깨와 머리를 낮추며 앞다리를 바짝 구부렸다.

"물러가거라."

길산이 조용하게 타이르듯이 말하였다. 범은 그대로 움츠린 채 도약을 준비하며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마도 제 굴혈이 가까운 곳이라 대단한 위험을 느끼고는

공격하려는 기색이었다. 길산은 그저 덤덤하게 섰더니 다시 이번에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물러가지 못할까."

범이 으르렁거리며 꼬리를 빳빳이 치켜들었고 길산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흥복은

길산을 믿을 수가 없었으며 따라서 이 좋은 곳에서는 피할 데가 없음을 깨닫고 연신 입술을

핥으며 창을 고쳐 잡았다. 그는 이제 길산의 등 같은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산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다. 범이 도약하려던 자세를 풀고 옆으

로 비켜나 높은 바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범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길산

은 바로 그 바위 아래까지 다가섰는데 범이 대번에 내려뛰기만 하면 그의 면상을 한입에 물

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서 돌아가거라."

길산이 손아래 사람에게 이르듯이 중얼거리며 무심하게 바라보자, 범은 다시 훌쩍 뛰어 그

들이 오던 길의 뒤편으로 넘어가더니 재빨리 뛰어서 암벽 사이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한 발

을 들고 바위에 버티고서서 온 산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포효했다. 흥복은 사지가 오그

라붙는 듯하여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서 내려가자. 술이 다 깼구나."

길산은 빙긋 웃는 낯으로 뒤처진 흥복을 돌아보며 재촉하였다.

"아니... 어찌된 노릇이우."

"염려 마라. 아마 해 지기 전에 저것은 새끼들을 다른 굴혈에다 물어 나를 것이니라." "

말이 아니라. 범을 잡으시겠다더니 어찌 그냥 둡니까?" 길산이 다시 앞장서서 걸으며 껄걸

웃었다.

"그럼 너는 어째서 나를 찌르지 않았느냐?"

최흥복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말씀이온지..."

"내가 금강산의 스승에게서 듣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남을 용납할지언정 남에게 용납된 바

되지 말라 하셨다. 너의 별호가 당초망이라면서."

흥복은 저지른 짓이 있는지라 코가 쑥 빠져서 그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고, 길산은 계속 이

야기하며 앞서 걸었다.

"맵고 독하게 끝장을 본다 하여 그런 별호가 붙었다고 네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제는 그 별호를 떼어버리도록 하여라. 작은 배에 큰 짐을 실을 수 없고 너그럽지 못한 자

가 머리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자가 분수를 모르고 억지로 남의 위에 행세를 하면 일도 그

르치고 스스로의 몸도 망치는 것이다."

길산은 더 말하지 않았으나 흥복은 몹시 부끄러웠다. 그들이 숙영지로 돌아가니 아직도 선

일이와 말득이 일행은 산속을 헤매는지 돌아오지 않았고 감동이와 선홍이는 느긋하게 취기

가 올라 있었다. 길산과 흥복이가 빈손인 것을 보자 선홍이는 취한 김에 슬슬 놀려댔다.

"말짐장수 십년 만에 기생을 만나 빈 채찍뿐이라니, 중화 자시고 띠만 잔뜩 품고 오십니다

그려."

길산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모닥불 앞에 다가앉아 잔을 잡았으며, 흥복이가 대신 말하였다.

"범을 보았지만, 새끼가 있다 하여 그냥 배웅만 했지요." 마감동이가 술을 따르며 말하였

.

"적선 하셨구려."

"오늘은 이것이 있으니 모두들 걸게 먹을 수가 있고, 내일 또 나가보지." 길산은 선홍이가

베어준 멧돼지고기를 받으며 대꾸하였다. 그때에 감동이는 흥복이를 넌지시 건너다보고 나

서 주위에 둘러앉은 자비령 식구 몇 명을 바라보았다.

"성님, 이 아이들이 우리 솜씨를 보자고 조릅니다."

그는 사실 선홍이와 더불어 길산이 나가서 범이라도 한 마리 끌어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정작 길산이 맨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오자, 구월산 패나 자기네는 길산을 환히 알고 있어서

별 문제가 없지마는 자비령 식구나 최가는 은근히 실망하지 않겠는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

. 과연 이름없는 졸개로부터 시작하여 구월산 패의 두령이 되었던 마감동이 생각은 정확

하였으니 이미 흥ㅂ고이가 창을 겨누었던 터였다. 녹림후에야 의기라든가 호협이라든가 하

는 덕목이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길산은 웃으면서 감동이를 부추겼다.

"오랫만에 네 검무나 한판 구경하자."

"글세 한 판이구 두 판이구 이처럼 좋은 자리에 못할 바 없지만, 아까 멧돼지에게 허벅지

를 받혀서 제법 상처가 났지요. 절름발이춤은 못추겠수. 성님 한번 해주시우." "그만두자."

길산은 한마디로 밀어내고는 돌아앉았고, 하는 수 없이 감동이가 일어났다. 그는 불편한 다

리를 딛고 일어서며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가 칼을 뽑았다. 감동의 칼은 원래부터 예도이니

활동적이고 변화가 많은 형이 그의 장기였다. 그는 아까부터 노려보고 있었던 전나무를 바

라보고 걸어갔다. 둘레가 서너 뼘이 될 만한 나무인데 키는 여러 길이요 꼭대기 쪽에만 잔

가지들이 다북이 눈을 쓰고 있었다.

"이것은 단칼에 베리다."

도끼를 쓰더라도 수십 번 쳐야 할 만큼 보였으나 감동은 칼자루 잡은 손에 침을 탁 뱉고는

나무와 마주 섰다. 거리는 칼 길이보다 세 걸음쯤이나 멀어 보였다. 모두들 그를 주시하고

있었고, 길산은 문득 박대근이와 처음 만나던 날 갑송이가 나무를 뽑아내던 일이 생각났다.

그대의 부질없던 객기가 그리웠다. 그 시절에는 산다는 것이 아직도 꿈이었으며 단순한 몇

가지의 감정만으로도 온 세상을 나돌아다닐 수가 있었다. 그때의 고통과 기쁨은 요즈음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불자가 되어 떠난 갑송이와 그때의 여러 가지 일들이 여울물의

가랑잎처럼 스쳐 지나갔다.

감동이는 호흡을 고르고 오른발 끝을 세우고는 거리를 재었다. 감동이가 참사세를 취하며

위로 치켜든 뱀의 머리를 베는 동작이되어 앞으로 세 걸음을 디디면서 칼날을 날리며 몸을

왼쪽으로 돌리면서 창룡출수로써 상반신을 꺽으며 뛰어나갔다. 그 두 동작의 가운데는 깃털

하나 기여들지 못하도록 빽빽하였으니 나무둥치를 이미 통과해버린 것이다. 역시 전나무가

바람 방향을 따라 오른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과연 감동이의 칼이 녹슬지 않았구나."

길산이 추켜주었으나 선홍이는 엄파를 움켜쥐며 투덜거렸다.

", 나는 저것보다 두어 배 되는 나무를 날려보낼 수가 있수." "이젠 되었다. 그만 해두어

."

길산이 만류하는데 감동이가 호흡을 흐트러뜨리고 돌아왔다. 그의 뺨에는 기를 쓴 탓인지

홍조가 번져 있었다.

"이젠 성님 차례유. 아무 재조가 되었든 한 가지만 보여주시오." 길산이 망연하여 생각은

무더리 장터와 재인말로 달리는데 선홍이가 그를 깨우쳤다.

"성님 뭘 하우."

"?"

길산은 얼결에 일어섰다. 그러나 기왕에 일어선 김이라 다시 주저앉을 수도 없어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짧은 칼을 뽑았다. 그는 허참, 하면서 멋쩍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일단 판 안에 들어서니 길산의 본색이 원래 광대라 한바탕 놀아보고 싶기도 하였

. 그는 역시 나무 한 그루를 바라고 천천히 걸어갔고, 마치 그것이 놀이마당의 오리목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길산은 가볍게 두 발을 굴러보고 나서 나무 바로 밑에까지 번개 곤두로써

몸을 공중회전하여 다가갔고, 여선참사로 칼을 던졌다가 다른 손으로 바꿔 쥐면서 칼살판을

뛰는데 나무의 전후좌우로 눈보라가 뽀얗게 일어나 그의 몸이 보이질 않았다. 마치 독수리

가 나무 주위에서 힘차게 퍼덕이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살판으로 허공에서 떨어져 발이 땅

에 닿자마자 연이어 용틀임으로 공중에 솟았는데 칼날을 보이지 않았으며, 그런 동장이 서

너 번 계속되다가 취익으로 날개를 벌리고 내려앉은 수리처럼 칼날을 켜드랑이 아래쪽으로

엇갈려 비끼며 가볍게 땅 위에 내려섰다. 나무에서는 가지에 내려앉았던 눈가루가 흩날렸을

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무는 가지마다 눈을 수북이 쓰고서 고요히 섰을 뿐이었다. 그것

은 얼핏 보기에 살판놀이를 겸한 칼춤인 듯이 여겨졌다. 길산은 취익의 자세를 취한 채 얼

어붙은 듯이 구부리고 있었다. 그때에 그의 모리 위에서 눈과 나뭇가지가 일시에 떨어졌고,

길산은 돌아떼기로 몸을 돌리면서 칼을 농품으로 허공에다 어지럽게 흩뿌리고는 동작을 끝

냈다.

그의 키로 두 배쯤 되는 높이에서부터 나무의 가지들은 말끔하게 잘려 있었으며, 또한 그

가지들은 한 팔꿈치 길이만큼 여러 토막으로 잘라져서 길산의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시작

부터 끝막음가지가 일사불란하고 유연한데 감동이가 보여주었던 절도있는 동작들은 보이질

않고, 다만 바깥의 물건과 모든 기가 그의 몸에 찰싹 붙어 돌아가는 듯이 보였던 것이다.

러 동작은 경쾌하고 아름답게 연결되어 있어서 마치 미풍에 오화가 나부끼는 것 같았다.

러나 이 비단근과 같이 연결된 부드러운 동작 사이에는 힘과 기술이 치밀하게 절제되어 있

었다. 그 절제가 너무도 적확하여 잘려진 나뭇가지가 낙하되는 일각이 지체되었던 것이다.

길산은 몸 위로 솟은 흥겨움이 복부를 간질이는 것을 느꼈으나,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는 신

명을 날려 보냈다. 그가 모닥불 가로 돌아올 때까지 좌중은 모두 벙벙하였고, "이제 그만 놀

, 저녁이나 짓도록 해라."

하는 길산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들 그가 자신의 신명을 쑥스러워하는 양을 엿볼 수가 있었

.

닷새 동안 머물며 사냥을 하였던 구월산 패거리들은 무초령과 여계산에서 동선령에 이르는

연봉과 골짜기들을 대략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자비령 산채에서 다시 하룻밤 쉬고 나서 흥

복이까지 끼여 동선령의 새로운 산채를 짓는 곳으로 나아갔는데 자비령 식구들은 이젠 이미

서로 자연스럽게 섞이게 더ㅣ어 졸개들끼리 농지거리도 하고 반말도 나누게 되었다.

이제는 날씨가 포근하여 산정만 남기고는 소나무, 잣나무들이 푸른빛을 드러냈고 골짜기의

음지에만 눈과 얼음이 보였다. 시냇물도 거의 녹아서 계곡을 흘러가는 물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동선령의 집터는 활모양으로 굽어진 산줄기 안쪽의 깊숙한 곳에 있었는데 동북향이라 햇빛

이 들지 않는 점이 흠이긴 하였으나, 녹림의 무리가 은거하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되

어 있었다.

서북편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계곡 위로 드높이 솟았고, 남동편의 산줄기는 구부러져 무

초령과 잇닿았는데 가파르고 숲이 빽빽하여 통행이 어려웠다. 그리고 툭 트인 북동쪽의 바

로 산채 앞에까지 찌를 듯한 삼림이 서 있어서 바람길과 사람의 시야를 막아주고 있었다.

그들은 세 군데에 집터를 보아두었는데 왼쪽 봉우리의 정상 못 미쳐서 돌과 흙으로 튼튼한

토막을 세우고 오른쪽에도 비슷한 망대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산채의 앞에는 살림의

이곳 저곳에다 호랑이 함정 비슷한 허방을 파놓고 숲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두어

길 정도의 토벽을 쌓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산채는 통나무로 널찍하고 튼튼한 귀틀집을 여

러 채 지을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김기가 먼저 와서 지형과 산세를 살피고 정해놓고 일들이었다. 그들은 공사

할 동안에 기거할 움막을 파고 우선 패를 갈라서 벌목을 시작하였다. 모두들 김기와 길산에

게 동선관 주막으로 내려가라고 일렀건만, 두 사람은 이러한 역사가 벌어지는데 빠질 수가

없다며 나무도 자르고 흙도 파는 등 식구들과 똑같이 일을 하였다.

거의 산채 외곽의 공사가 끝나갈 무렵에 떼아닌 봄 우박이 쏟아져 사나흘 동안 움막 안에

서 웅크리고 지내게 되었다. 최흥복이는 제 식구들과 기거하고 있었는데 밤늦게 김기와 길

산이 기거하는 움막으로 찾아왔다.

"성님께 의논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어서 들어오시게. 아이들 중에서 어디 아픈 사람은 없는가?" "모두들 원기 왕성하지요.

집안일을 하는데 탈이 있겠나요. 한데 산채를 다 짓는 데 며칠이나 걸릴까요?"

김기가 손을 꼽아보고 나서 말하였다.

"글쎄 재목은 다 마련돼 있고 귀틀집 네 채니까 앞으로 한 보름이나 스무 날쯤 걸리겠지." "

구월산서 이사오지 않습니까?"

"아직은 어려운 일이지. 식솔들이야 자주 이사 다닐 수도 없고." 길산이 말하고 나서 흥복

을 살피는 것이었다.

"왜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가?"

"아니오. ...춘천에 있는 형수님과 조카들 일이 걱정입니다. 벌써 두어 달 전에 인편에 전

해 듣기로는 형수께서 몸을 붙여 있는 선전관이 조보에 올랐다는데 곧 움직이게 될 모양입

지요. 혹시나 그곳을 떠나 종적을 모르게 될까 하여..." "그런 일이 있었다면 왜 진작에 말하

지 않았는가?"

최흥복은 머뭇거리며 말하였다.

"전에는 부두령 을량이의 눈치도 있고, 아이들도 모두 저와 같이 고향을 떠난 지가 오래되

었는데, 두령 체면에 혼자서 가족들 걱정만 하는 것 같아 내색을 못하였지요. 가형께서 농사

를 짓고 계신다면 모르거니와 이미 장하에 돌아가셨고 형수님과 조카들은 각각 관비와 사노

비로 떨어져 있어, 늘 큰 죄를 지은 듯하여 잠자리가 편안치 않았지요. 기왕에 성님께 일속

이 되었지만, 어찌 감히 입 밖에 낼 수가 있겠습니까?" 길산은 부드럽게 일렀다.

"그래 걱정이 많았겠구나. 네 가족들의 불운한 처지는 곧 우리네 가족들이 진작부터 겪었

던 일이다. 하루라도 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니 어서 누구와 동행하여 다녀오도록 하여라.

간에 형수씨와 조카들이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져버렸다면 어떻게 수소문을 해서라도 건져

내야지."

길산은 흥복을 데리고 움을 나와, 선흥이와 마감동이 묵고 있는 곳으로 갔다. 두 사람은 짚

더미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어서 일어나거라."

감동이가 먼저 일어났고 선흥이는 아직도 잠에 취하여 투덜대면서 돌아누웠다. 길산이 선

훙이의 어깨뼈를 잡고 힘을 주어 흔드니 그제서야 그는 자지러지면서 일어나 앉았다.

"아니 이렇게 날씨가 고약한데, 무슨 수가 났다구 깨우고 야단이슈." 최흥복이는 안절부절

못하며 뒷전에 앉았고 길산이 대충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데리고 와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아무래도 선흥이가 가는 게 좋겠

는데... 감동이는 곧 구월산으루 돌아가야 할테고..."

선흥이는 연신 입맛을 다셨다.

"젠장할, 나두 우리 식구가 봉산 사는데 코빼기를 못 본 지가 일년이 넘었는데, 이놈 저놈

식구만 찾아다녔다간 아예 산채 살림을 폐하는 게 낫겠네." 길산이 은근히 힘주어 말하였다.

"안되겠다. 그러면 너는 잠이나 자구 있거라. 그 대신 내가 다녀올 때까지 일어나서 뒷간에

라두 다녔단 봐라."

"그냥 곱게 추운 데서 불알이나 얼려 돌아오라구 그러시우. 다녀오지요." 선흥이가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길산은 빙긋 웃었다. 날씨가 풀리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그대로 출

발하여 동선관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길 떠날 채비를 하여 명일 새벽에 나서기로 하였다.

"나 때문에 미안허우. 내게는 혈육붙이가 그 조카들뿐이우." "미안허긴 뭐... 갑자기 단잠을

깨워서 그랬지. 헌데 예서 춘천까지가 도계를 넘는 길이니, 이런 날씨에 동장군 살맞은 영

산의 동무가 되겠구만."

강선흥이와 최흥복이는 동선관 주막으로 나아가 한잠 자고, 노자를 취하여 작은 봇짐 하나

씩 꾸려 지고 봉산을 떠났다. 평산을 거쳐 연천, 가평을 지나 춘천까지 주막 밥과 봉노 잠을

자면서 내려가는데, 예성나루를 지날 적엔 벌써 봄볕이 완연하여 볕이 따사한데, 낮에는 등

거리에 땀이 돌도록 덥고 밤에는 살을 에는 듯한 북풍이 불어와서 그런 변덕이 없었다.

두들 올해에는 가뭄 들겠다고 걱정들이었다. 그들이 가평에 당도한 것은 떠난 지 닷새가 되

던 날이었는데, 일단 거기서 흥복은 뒤로 처지고 우선 강선흥이가 먼저 춘천의 느름나무골

로 들어가 형편을 살피기로 하였다.

선흥이가 느릅나무골에 들어가니 쇠락한 초가지붕에 스산한 바람이 지나는데 양지볕에는

헐벗은 아이들이 나와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 산에 뿌리를

캐러 갔거나 언 땅이 녹으며 솟아난 풀을 뜯으러 간 모양이었다. 때는 바로 춘궁의 초입이

었던 것이다. 선흥이는 흥복이 일러준 대로 어림짐작하여 가다가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물

었다.

"얘들아, 깨복이 집이 어디냐?"

"그 댁의 뉘를 찾으시는데요?"

"박서방을 찾는다."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수군수군하는데 심상치가 않았다. 선흥이가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끄

덕였고 길산은 빙긋 웃었다. 날씨가 풀리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그대로 출발하여 동선관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길 떠날 채비를 하여 명일 새벽에 나서기로 하였다.

"나 때문에 미안허우. 내게는 혈육붙이가 그 조카들뿐이우." "미안허긴 뭐... 갑자기 단잠을

깨워서 그랬지. 헌데 예서 춘천까지가 도계를 넘는 길이니, 이런 날씨에 동장군 살맞은 영

산의 동무가 되겠구만."

강선홍이와 최흥복이는 동선관 주막으로 나아가 한잠 자고, 노자를 취하여 작은 봇짐 하나

씩 꾸려 가지고 봉산을 떠났다. 평산을 거쳐 연천, 가평을 지나 춘천까지 주막 밥과 봉노 잠

을 자면서 내려가는데, 예성나루를 지날 적엔 벌써 봄볕이 완연하여 볕이 따사한데, 낮에는

등거리에 땀이 돌도록 덥고 밤에는 살을 에는 듯한 북풍이 불어와서 그런 변덕이 없었다.

모두들 올해에는 가뭄 들겠다고 걱정들이었다. 그들이 가평에 도달한 것은 떠난 지 닷새가

되던 날이었는데, 일단 거기서 흥복은 뒤로 처지고 우선 강선홍이가 먼저 춘천의 느릅나무

골로 들어가 형편을 살피기로 하였다.

선홍이가 느릅나무골에 들어가니 쇠락한 초가지붕에 스산한 바람이 지나는데 양지볕에는

헐벗은 아이들이 나와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 산에 뿌리를

캐러 갔거나 언 땅이 녹으며 솟아난 풀을 뜯으러 간 모양이었다. 때는 바로 춘궁의 초입이

었던 것이다. 선홍이는 흥복이 일러준 대로 어림짐작하여 가다가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물

었다.

"얘들아, 깨복이 집이 어디냐?"

"그 댁의 뉘를 찾으시는데요?"

"박서방을 찾는다."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수군수군하는데 심상치가 않았다. 선홍이가 아이들께로 다가들며 다

시 물었다.

"그런 사람을 모르느냐?"

한 아이가 작심이 되었는지 대번에 말하였다.

"죽었어요."

"누가 죽었단 말이냐?"

"박서방이죠, ."

선홍이가 돌아설까 하다가, "그래, 남은 식구들은 없느냐?"

그러는데 아이들의 뒤에서 방문이 슬그머니 밖으로 열리면서 펑퍼짐하게 부황이 뜬 아낙네

의 얼굴이 나왔다.

"무슨 일로 그 댁 식구를 찾으시우?"

선홍이는 제 봇짐을 한번 추스르고 나서 말하였다.

", 박서방에게 갚아줄 돈이 있어서 왔는데 이거 낭패올시다." "돈이라구요?"

아낙네가 더욱 문을 밖으로 밀쳐내는데 목이 가늘게 야위고 손과 얼굴만 부어 있었다.

낙네는 흐린 눈으로 선홍이를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박서방은 작년에 죽었지요. 그리고 그 아낙이 아이들과 살구 있는데 얼마 전에는 큰아이

가 죽었다우."

선홍이는 이 마을이 기근에 싸여 있음을 눈치챌 수가 있었다.

"아니, 보아하니 춘궁이 모진 모양인데 관가에서는 구황도 아니하고 뭘 하는고, 환자도 타

지 못허우?"

"환자가 다 무엇이오. 우리는 벌써 사흘째나 곡기를 넘기지 않았어요. 지금 주인이 읍내로

죽을 얻으러 나갔는데 우리는 거기에다 송순을 썰어서 다시 끓여서 나누어 마십니다. 이제

는 읍내의 죽가마 앞에까지 걸어갈 기력이 없어 두 양주가 가지 못하고 주인만 나가셨지요.

우리네두 박서방에게 갚을 돈에서 제발 몇푼만 돌려 주시면 강변에 나가 외지의 양식을 구

하겠는데요."

아낙네는 몇번이나 쉬어가며 마른 입술을 핥는 것이었다. 선홍이는 더 말도 않고 봇짐에서

무명 끝동을 떼어 주었다.

"옛소, 노자 하구 남은 거라 과히 많지는 않으나 몇끼니는 넘기겠지." 아낙네가 두 손으로

무명을 받아드는데 부푼 뺨 위로 아무 느낌이 없는 듯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선홍

이가 비록 뚝뚝하고 거친 사람이긴 하여도 문득 코허리가 시큰하여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관장의 목을 베어 나무에 달구 돌아갈까부다."

그는 아낙네가 자세히 일러준 대로 죽은 박서방의 식구들이 남아 있다는 집을 찾아갔다.

삽짝을 뜯어 땠는지 울타리가 쥐 뜯은 자리처럼 듬성듬성하였고, 세간은 보이질 않는데 마

당에 적막이 빈틈없이 들어찬 듯하였다.

"주인 계시오, 아무도 없습니까?"

선홍이가 불러보았으나 건넌방의 열린 문짝이 바람에 건들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선홍이가

다시 한번 마당과 집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굳게 닫혀진 안방문을 잡아당겼다.

"... 누구요?"

하는 희미하고 나약한 소리가 컴컴한 방에서 들려왔다.

"박서방의 동무 되는 사람이올시다."

"들어오시지요."

여인이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키는데 머리는 산발이고 볼과 눈이 움푹 꺼져서 한꺼번에 늙

어버린 듯하였다. 선홍이가 비례를 무릅쓰고 방안에 들어가 앉으니 불기라고는 조금도 없었

. 여인의 옆에는 자그마하게 웅크린 앙상한 아이가 큰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춘궁이 이 마을만 이렇게 심합니까?"

"환자 때문에 연전에 말썽이 난 뒤로 우리 동네에는 환곡을 내주지 않습니다. 이서배들이

느릅나무골이라면 역적의 마을이라고 치를 떤답니다."

"혹시 최서방의 식구들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아시나요?" 여인은 놀란 모양이었다.

"그이네를 잘 아세요? 지금 그 안댁은 관가의 급수비 노릇을 하고 작은 아이를 함께 데리

고 있지요. 큰아이는 송암골 생원 댁에서 사노가 되어 있습니다." 선홍이가 제 봇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실은 제게 노자가 좀 있습니다. 어디서 곡식을 살 수 있을까요?" "이 근방에는 없고 읍내

까지 나가면 웃돈을 주어 구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남은 기운이 없어 송엽도 뜯지 못하

고 백토마저 캐지 못합니다. 큰애가 얼마 전에 죽었을 적에도 묻지 못하고 그냥 뒷산에

버렸지요. 주인도 없는 저희들은 그저 죽는 게 낫겠다 싶어서 이렇게 누웟서 기다리는 중

이지요."

"최흥복이를 아십니까?"

선홍이가 불쑥 물으니 아낙은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하셨지요?"

"흥복이를 아시느냐구요?"

"그이가 아직 살아 계신가요?"

아낙은 상반신을 앞으로 숙이며 되물었다.

"저하구 같이 와서 읍내에 있습니다."

"맙소사... 최서방은 관가에서 매를 맞고 풀려나오던 날 밤에 운명을 하였지요. 느릅나무골

에서 혈기있고 총명한 이는 모두 그때에 결단이 났습니다. 우리 주인도 그러부터 시름시름

앓으며 나뭇짐도 제대루 못지었어요. 우리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깊은 포한을 감추고 삽니

."

아낙네는 소리를 죽여 울기 시작하였다. 관에서 민변으로 작당한 고장에 대한 보복은 당시

에 매우 혹심하였던 것이다. 고장의 등급을 강등시키고 마을을 폐하여버리기도 했고, 아예

양민으로서 살아갈 모든 권리를 방기해버리는 수도 있었다. 춘궁기에 환곡 내주는 일로 말

썽이 생겼다 하여 이서배들은 아예 이 마을을 외면하는 모양이었고, 그 보복이 몇 년 계속

되는 가운데 느릅나무골은 몰라보도록 황폐하게 변한 것이다. 강선홍이는 장연에서 겪은 일

이 있었는지라 그러한 내막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제가 읍내에 다녀오지요. 그리구 흥복이두 데리구 오겠습니다." "그이를 데려오면 안돼요.

누구든지 그이를 보면 발고할 테니까요." "저희 걱정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그이를 보면 발

고할 테니까요." 읍내 주막에서 흥복이와 선홍이는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느릅나무골로

들어갔다. 마을 약정이나 그 측근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그들은 마을 뒷산에서 인적

이 완전히 끊기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마실꾼들도 끊기고 가끔씩 개들만이 짖는 가운데 두

사람은 박서방네 집을 바라고 동네로 스며들었고, 흥복은 어둠속에서도 낯익은 고향의 모습

을 살피느라고 이리저리 삽짝 안을 기웃거리곤 하였다.

"뭘 하나, 어서 박서방네루 가야지."

선홍이가 주의를 주면 흥복은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멈추었다.

"가만있으슈. 목소리는 문식이 할아버지가 분명한데 아직 살아 계시구먼."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해지면 그제서야 황급히 그곳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흥복이네 식구와 가장 자별하

게 지냈던 박서방네 집으로 들어갔고 아까처럼 집안은 괴괴하였다. 선홍이가 먼저 와서 인

사를 텄는지라 예의 차릴 것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낮에 왔던 사람이올시다. 곧 죽을 쑤어드리지요."

"흥복이두 왔는가요?"

흥복이가 더듬거리며 부시를 찾았다.

"아주머니, 제가 흥복이올시다."

"그 위에 관솔이 있을 텐데..."

흥복이 불을 켜서 관솔에 붙였다. 아낙네는 여전히 누워 있었으나 낮보다는 훨씬 정신이

맑은 듯해 보였다.

"아이구... 이게 누구요. 최도령 아니요."

아낙이 손을 내밀었고 흥복이는 여자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낙네 옆에서 아이가 나약하게

칭얼대고 있었다.

"오냐. 내가 죽을 쑤어오지."

선홍이가 밖으로 나가더니 불을 지폈는지 방문이 훤해졌다.

"그 댁 서방님이나 우리 주인이나... 한을 품고 원혼이 되어버렸어요." 아낙은 흥복이의 손

을 움켜쥐고 젖은 순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아낙이라고는 하여도 연배는 흥복이와 비슷한

옆집 며느리라, 내외가 엄정하니 흥복은 어색해져서 슬그머니 손을 놓고 말았다.

"소문은 대강 들었지만, 성님까지 이리되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 와서야 저 사람이 전

하는 말을 듣고는 어찌 가슴이 막히던지."

"우리 주인이 그 댁 서방님과 제일 친한 동무인 것은 온 동네가 다 알구 있잖아요. 거기가

큰 일을 치고 대룡산에서 버티고 있을 제, 애 아버지나 성님두 같이 끌려가셔서요. 모두들

내려오라고 떠들면서 관군이 시키는 대루 했지만, 성님이나 우리 주인이나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요. 내심으로는 어서 달아나기만 바라구 계셨지요. 가기거 남은 사람들

과 밤을 타고 대룡산을 빠져나간 뒤에 마을 사람들 태반이 관가로 끌려갔어요. 처음에는 호

적 문제로 도감과 색리를 살해하게 된 경위를 따지다가 환곡 얘기가 나왔어요. 강창에 떼지

어 몰려갔을 적에 누가 주모했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댁 서방님과 우리 주인이 지목되

었어요. 성님은 곤장을 맞은 위에 밤새껏 압슬까지 당하고는 관가 앞뜰에서 새벽녘에 운명

하셨고, 우리 주인께서는 곤장을 맞고 업혀 돌아와 오랫동안 앓으셨지요. 제대로 잡숫지도

못하고 병고에 시달리다 돌아가시며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 있어요. 처자가 있어 고향을 떠

나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구차한 목숨을 이어왔다구 자꾸 뇌이셨지요. 어찌 이 포한을 말로

다할 수가 있겠나요."

"우리 형수님과 조카를 찾으러 왔습니다."

흥복의 말에 박서방댁은 한참이나 주저하였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저어... 아이들이야 별일이 없지마는 여자란 가장 약한 것이랍니다." 박서방댁이 자세한 이

야기를 꺼리고 있는데 선흥이가 죽을 쑤어 돌아왔다. 아낙네와 아이는 정신없이 먹기 시작

했고, 흥복은 얘기를 붙일 틈이 없었다. 끼니를 에우고 나서야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

.

"내 아니할 말이지만, 거기 형수 되는 이에게는 안타까운 생각이 한두 가지가 아니예요.

록 일시에 관비로 떨어졌다 하나 어디 그럴 수가 있나요. 소문을 들으니 권관의 소실 노릇

을 하여 목숨을 부지한 모양이지요."

"아니 관청에서 급수비를 한다는데, 곧 떠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서둘렀습니

."

아낙네는 돌아앉으며 그제서야 사내들을 의식하였는지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먼저 떠났지요. 벌써 달포가 넘었어요. 지금은 신관이 부임하여 있답니다." 흥복은 얼결에

볼이 화끈 달아올라 강선홍이 쪽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새로 온 자와 살구 있단 말입니까?"

아낙네는 딱히 그렇다 아니다 내색을 않고 있었다.

송암골의 큰조카를 묻자 박서방댁은 쉽게 대답하였다.

"그애는 아이가 총명하여 그리 미움은 타지 않는 모양이지요." 대강 얘기가 끝나고 나서

흥복은 재삼 부탁하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형수와 조카를 데려갈 작정입니다. 우리가 여길 떠날 동안 이 집에서

지낼 수가 있을까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만 하여주십시오."

"그 대신에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아낙네가 물었다.

"헌데... 최도령은 그간 어디서 뭘 하며 살았길래 안색이 훤하구, 또한 상투를 올렸으니 혼

인도 하였나요?"

"아직 미장가이올시다. 저어기 북관에서 장사를 나다니구 있습니다." "그때 대룡산서 함께

달아났던 우리 마을 사람들두 함께 있나요?" ", 저하구 같이 살구 있지요."

박서방댁은 정색을 하고 애소하였다.

"우리 집안이 구몰한 것은 애초에 주인과 댁네 형님이 작당하였기 때문이지요. 최도령 탓

에 죽은 거나 진배없지요. 내가 모른다면 어쩔수 없으나, 살 만한 고장으로 식솔을 데려가는

일을 안 이상은 그냥 있을 수 없어요. 우리두 데려가주셔요. 장사를 다니든 수수나 기장을

심든 물고기를 잡든 우리는 다른 고장으로 떠나야지, 여기서 관의 등쌀에 시달리며 살지는

못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 식구라 모여 떠날 때까지 몸조리나 잘해두십시오." 이튿날 흥복은

상을 만난 듯이 널따란 삿갓을 깊숙이 내려쓰고 진으로 찾아갔고, 강선흥이는 송암골 생원

댁으로 그의 조카를 찾아 떠났다. 춘궁이 비록 느릅나무골에만 닥친 것은 아니라, 다른 마

을도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환곡이 있어 비교적 덜해 보였다. 선흥이가 송암골을 찾아

가 생원 댁 부근을 배회하며 흥복의 조카아이와 닿을 기회를 노리는데, 무턱대고 아무에게

나 얘기를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생원 댁 대문이 바라다보이는 길가 돌 위에 걸

터앉아서 다리 쉬임을 하는 척하였다. 이윽고 웬 사내가 어디 심부름이라도 가는지 망태

를 메고 대문을 나서는 게 보였고 맨상투에 동저고리 바람이 행랑것이 분명해 보였다.

"여보시우, 나 좀 봅시다."

선흥이가 뒤를 쫓으며 외쳤고 사내는 의아해하며 입을 벌리고 돌아보았다.

"나를 불렀수?"

"당신말고 이 들녘에 또 누가 있단 말이우."

선흥이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말 좀 물읍시다. 이 댁에 느릅나무골 최서방의 큰아이가 있다는 게 정말이우?" 사내는 우

선 강흥이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건 왜 물어."

사내가 버티고 서면서 싸늘하게 다시 말하였다.

"댁이 최서방과 어떤 사이인지 모르나 얼른 입단속하고 다른 고장으로 새어버리는 게 살

길이여."

선흥이는 미리 짐작하고 있던 판이라 고의춤에서 엽전 한 꿰미를 끌러내어 그의 손아귀에

쥐여주었다.

"자 받으시우. 어차피 당신도 남의집살이 하는 터에 양반 편들 건 뭐 있수. 사실 나는 막역

지우인데 여기 와서 딱한 소문을 듣고 그 혈육붙이나 만나보고 가려는 게요." "이 사람이

왜 이래..."

하면서도 그는 선홍이가 내어민 돈을 강력히 뿌리치지는 못하였다.

"별로 어려운 부탁을 하는 건 아니우. 다만 지금 되돌아 들어가서 그 아이를 잠깐만 불러

내어 나하고 만나도록 해주오."

"허 이것 참..."

"잠깐 얘기하고는 곧 떠나리다."

"저어기 산 위에 올라가 있으슈."

사내가 결심하였는지 돈을 제 허리춤에 찔러 넣으며 송암골 뒷산을 손가락질하였다. 선흥

이는 그자가 되돌아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산중턱까지 올라갔다. 잠시

후에 소년이 나타났고 두리번거리는 그의 등을 사내가 밀어주고는 바비 헤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이 아직도 두리번대면서 산위로 올라왔다. 선홍이가 불쑥 나서면서 말을 걸었

.

"네가 흥복이 조카냐?"

"아니, 우리 삼촌을 아십니까?"

"이리 앉아라."

선홍이는 소년을 낮은 소나무 관목 사이에 앉혔다. 소년은 안색이 창백하고 눈에는 물기가

가득 찼다.

"느이 삼촌하고 같이 온 사람이다. 삼촌은 네 어머니를 만나러 진으로 나갔다." "삼촌이 아

직 살아 있단 말인가요?"

"그래, 느이들을 데리러 왔다. 고생스럽지는 않으냐?" "저에게 막일을 시키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상노 노릇을 하고 있는데 서기사에 있지요. 모두들 제가 이렇게 나간다면 앞으로

청지기 소임은 틀림없을 게라구 그럽디다. 그러나 아무리 왕후장상의 사냥매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하늘을 훨훨 날아 다니는 참새보다는 못하겠지요. 저는 삼촌을 꼭 따라가겠어요."

아이는 역시 최흥복이를 닮았는지 야무지고 똑똑하였다. 보통 녀석같으면 오히려 느릅나무

골에 살 때보다도 생원 댁 같은 호농의 집에서 배불리 먹고 편히 지내어 고생과 천시투성이

였던 집생각을 잊었을 터 이었다. 또한 남의 노비로 떨어진다는 일이 죽는 일 다음이지만,

다행하게도 너그러운 이들을 만나 도련님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최서방네 식구가 속이 찼구나. 아무렴 그래야지. 남의 종살이 하며 배부르느니 차라

리 장바닥의 각설이가 낫다. 우리는 지금 느릅나무골 박서방네 머물고 있는데 사흘 뒤에 떠

날 것이다. 모레 자정까지 오면 함께 갈 수 있겠지."

"꼭 가겠습니다. 헌데... 어머니두 삼촌을 따라가신다구 하셨답니까?" "그건 아직 모르지.

서방이 그쪽으루 찾아갔으니까." 아이는 소매를 들어 눈시울을 닦았다.

"아마 못 가실 겁니다."

"못 가다니..."

"그냥... 어머니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선홍이가 제법 자상하게 말하였다.

"세상 일이 그렇게 말루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여하튼 모레 느릅나무골로 오너라. 사람들

눈에 띄면 너두 위험하구 느이 삼촌두 잡혀 죽는다."

"잘 알겠습니다."

그들은 일어서서 재삼 약속을 다지고는 헤어졌다. 선홍이는 이런 일에 자기를 보낸 길산을

잠깐 원망하였다. 도무지 세상은 정과 원망이 얽힌 명주실처럼 복잡하게 돌아가는 곳이라서,

자기 같은 신경이 굵은 자는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진의 군사라는 것들은 이같은 태평성세에는 모두들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었다. 장교나 군

사라는 것이 빈말이요. 다 산골의 나무꾼이나 농투성이인데 문서로는 장교가 열 사람에 군

사가 이백여 명이지만 실상은 스무 명도 채 못 되고, 병장기라야 녹슨 창칼 십여 자루와 총

이십여 정뿐이었고, 관사도 돌담에 초가였다. 최서방의 처이며 흥보의 형수인 임씨는 남편이

죽은 다음날 관명에 의하여 진의 급수비로 떨어지는 신세가 되었는데, 마침 혼자 와 있던

권관이 옷이나 빨아주고 식사라도 마련해줄 여인을 찾고 있었던지라, 관사 곁의 삼간초가에

서 시중을 들도록 되었다. 권관이 아침 저녁으로 들락거리며 집안일을 하는 여자를 보매 생

김이 얌전하고 제법 촌여자치고는 깔끔해 보였다. 소문에 들어 관가에 거역한 죄인의 가족

이라 하니 씨내리로 이어온 종은 아님 셈이었다. 하루는 무료한 밤을 지키며 공연히 병서를

뒤적이고 있는데 이웃에서 다듬이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단정한 여자의 몸매와 흰 소복이

눈에 아른거려 권관은 참지 못하고 아랫것들 몰래 이웃으로 슬그머니 다가들어 방문을 열었

. 비록 관비라 하여 그 관장이 생살여탈권을 쥐고는 있으되, 범법자의 아내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씨고 그것은 알았지마는 여생을 이미 포기하고 있었던 터였다.

렇게 진의 관비 노릇을 하다 보면 어느 누가 건드려도 말릴 사람 하나 없고 임자 없는 계집

이니 아무나 넘볼 것을 각오하였다. 임씨는 권관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무리 관비라 하나 여

염에서 지아비를 섬기던 여자이니 떠날 때 떠나더라도 진에 있을 적에는 실인의 대우를 하

여야 동침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임시는 권관의 실인처럼 살았다.

권관은 내심으로 이런 곳에서 무료한 수자리 생활을 달랠 수가 있고 또한 과만하여 떠나게

되면 그뿐이거니 여겨서, 그에게로 나오는 녹봉을 모두 이웃의 임씨에게 맡겼었다. 그뒤로

임시를 감히 진의 물종이라 하여 업수이 여기는 자가 없게 되었다. 임씨는 이전에 양민의

아내라고는 하여도 절기마다 양식이 떨어지고 관차에 시달리던 일을 겪지 않게 되었으며,

무장의 부임지 첩으로서 비록 대가의 살림은 아니로되 유족하고 깨끗한 생활을 하게 되니,

차츰 남편의 횡사된 일과 천역에 떨어진 자기 신세를 잊게끔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어엿한 부부라 군무가 끝나면 권관은 아예 아랫집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고 함께 동침하였

, 임씨도 저녁때가 되면 으레 아이를 재워놓고 지분을 바른다. 옷을 갈아입는다 하여 모실

채비를 차렸다.

대개 선달에서 권관으로 임관이 되면 한십오삭이라 하여 그것을 꼭 치러야 승진을 하게 되

어 있으니, 모두들 임기가 차기만을 기다리지만 이 권관을 임씨와의 살림 재미를 붙여 스스

로 모르는 결에 달수가 찼다. 권관이 진을 떠나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는 일은 기뻤으나,

래도 살을 비비고 살아온 여자를 다시 급수비로 떨구어두고 빠져나갈 염치가 없었다. 그가

워낙 가세도 없는 터에 장원으로 권관 자리는 얻어 하였으나, 벼슬 초임에 외방에서 소실부

터 얻어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라고 넌지시 자르는 시늉을 하였고, 임씨는 이미 내친 몸이

라 쑥스러워하는 빛도 없이 말하였다. 즉 자신은 일찍이 관재수와 도화살이 있어 남편을 장

하에 여의고 관비로 박혔는데, 기왕에 일부종사를 못하는 년이 나으리 까닭에 수절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으리가 더나시면 자기는 다시 신관으로부터 물종 취급을 받게 될 터이다.

라는 바 있으니 부디 속량되도록 하여주고, 신관에게도 나으리와 같이 모시도록 천거해주었

으면 한다.

이렇게 되어 구관은 떠나면서 신임 권관에게 임씨를 천거하여 객고를 달래도록 하였고,

관도 일단 그 여자를 보고는 쾌히 응낙하였다. 주위에서는 모두 숙덕거렸으나, 진의 장교와

사졸들은 때때로 여자에게 술이나 과육을 얻어먹는지라 여전히 진장의 안댁으로 대우를 하

였다.

최흥복이가 진으로 나아가니 관사는 쇠락하였고 수직 군사도 보이질않아 말이 진일 뿐이지

을씨년스러운 절터와도 같았다. 아마도 관사안에는 권관과 장교가 들어앉아 집무할 것이요,

군사 한 명쯤이 아래 일을 볼 것이었다. 과연 박서방댁의 말대로 관사에서 이백여 보 떨어

진 곳에 사립을 두른 초가 한 채가 보였다. 그곳이 바로 그의 형수 임씨가 몸담고 살고 있

는 집이었다. 흥복은 주위에 행인이 없는가를 살피고 삿갓을 내리누른 다음에 바삐 그 집으

로 향하였다. 밖에서 하님을 청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막바로 삽작을 밀고 안으로 들어

가니, 마당에서 흥얼거리며놀던 어린 것이 제 어미를 부르며 툇마루로 뛰어 올라갔다. 임시

는 마침 살림에 보태느라고 바느질품을 팔았는데, 그 대에도 바느질을 하느라고 밖에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흥복이 잠깐 사이에 한눈으로 둘러보니 마당에는 백옥 같은

빨래가 널려져 봄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으며, 장독대에는 양관이 내려앉아 깨끗이 손질한 독

과 항아리가 반짝거렸고 부엌에는 이리저리 마른반찬거리와 전어가 걸려 있었다. 아이의 소

리를 듣고 여자가 안방 문을 열었다.

"에그머니나, 누구신데 소리도 없이 남의 집엘 들어오셔요?" 여자가 깜짝 놀라서 상반신을

내밀며 말하였다. 흥복은 삿갓 아래로 얼굴을 숨긴 채 중얼거렸다.

"절에 가면 중인 체 촌에 가면 속인인 체하는 사람이올시다. 마음이 흔들 비쭉이라 남의

댁에 울타리가 있는지 없는지 내외 구분이 어떠한지를 모르오." 임씨는 흥복의 비양거림을

채 알아듣지도 못했고 그가 시동생인 것도 몰라보는 모양이었다.

"아마 잘못 알고 들어온 모양인데, 이 집은 진보 안전의 사택이니 잡혀서 경을 치기 전에

어서 나가오."

"허허, 산소의 흙이 마르기를 기다린다는데, 동헌 뜨락의 원혼은 구천에서 떨고 댁은 권관

의 안방마님이 어인 일이오?"

그제서야 형수의 눈이 가느스름해지면서 입술이 떨렸다.

"누구신가요?"

흥복이 삿갓을 벗었다. 임씨가 놀라서 문지방을 잡는데, 흥복은 안으로 들어가 우선 정중하

게 인사를 올렸다.

"아주머니, 문안드립니다."

"어인 일이셔요..."

임씨는 시동생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옆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작은조카가 들어와 흥

복을 빤히 올려다보았고, 그는 아이를 끌어다 무릎에 앉혔다. 아이는 극성스럽게 울더니 흥

복이 놓아주자 제 어미에게로 가서 안겼다.

"소문을 듣고 아주머니와 조카들을 안돈시키러 찾아왔습니다." 임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늦었습니다."

"고생이 많으셨지요?"

"벌써 오래된 일이어요. 삼촌이 이렇게 건장하게 살아 계실 줄은 몰랐어요." 흥복은 제 형

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주머니가 여기서 편히 계실 줄은 저두 몰랐습니다." 여자는 눈을 치뜨고 흥복을 쏘아보

았다.

"그러면 절더러 혀를 깨물고 형님을 따라 죽으라는 말씀인가요. 관가에 함께 잡혀가서 형

률에 따라 관비로 떨어질 제 나는 죽은 거나 매한가지였어요. 여기 와서 이 년 동안을 포모

질로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어요. 저것을 업고 엄동에 얼어붙은 시냇가를 해매다닌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어요. 이제는 나두 살아야지요. 관장의 살림을 맡게 되니 내가 왜 농사꾼의

아낙이 되었던고 후회가 되었어요. 나는 내 힘으로 속량할 거예요. 살림에서 따로 떼어 속량

전도 모으고, 이 고장을 떠날 거예요. 다시는 고생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집안을 망쳐놓

고 식구들을 죽게 내버려두고 달아났다가 이제 와서 나를 핀잔 주는 거예요? 나는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아요."

흥복은 고개를 숙이고 여자의 말이 다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주머니, 저는 하루라두 돌아가신 형님과 아이들을 잊어버린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

든지 식구들을 거두어 다시는 고생시키지 않고 모시리라 생각하구 있었습니다. 큰놈은 송암

골에서 남의 상노가 되어 있고 저애도 다만 짐스러운 천덕꾸러기로 자라구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아주머니가 비록 젊다 하나 관장은 임기만 차면 돌아가게 되는데 누구 하나 아주머

니를 거둘 사람은 없을 겝니다. 이렇게 욕스럽게 사느니 제가 숨어 산다 할지라도 차라리

떳떳할 듯합니다. 저하구 떠나십시다. 조촐한 집도 장만하고 농토도 마련하겠습니다. 아이들

생각을 하셔야지요."

흥복의 형수는 다만 치마폭 위에 눈물을 떨굴 뿐이었다.

"형님의 산소가 어딥니까?"

"저어기... 보안역로에 나가는 산길에다 모셨어요. 우리는 끌려다니노라고 경황이 없었고 동

네 사람들이 떠메이다 상여도 관도 없이 묻었지요."

흥복이도 비분하여 주먹으로 눈을 씻었다. 그는 차라리 이런 모양의 식구를 만나는 것이

안타깝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세월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그것은 아무리 곧

고 뜨거운 사람의 마음이라도 조금씩 헐어내고 식혀서, 드디어는 한줌의 식은 재처럼 만들

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심의 세월을 확인하려교 흥복은 달아났던 고향을 다시 찾아온 것

이었다. 그 확인은 참혹하거나 감격스런 것도 아니었고 다만 쓸쓸하고 슬픈 것이었고, 마음

의 무력함을 보는 일은 끔찍하달 수도 있었다. 흥복은 벽 위에 걸린 무변들의 네 갈래로 벌

어진 전복을 보자 전신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버렸다. 어떤 사내가 형수와 더불어 밥을 먹고

같이 자고 소곤거리는 양이 떠올랐다. 이곳은 남의 집이었다. 임씨가 돌연 갈라진 목소리로

부르짖으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어서 나가셔요. 안 나가면 소리를 질러 군졸을 부를 터예요." 흥복은 일어섰다. 그는 나가

기 전에 아이놈을 다시 덥석 안아서 품에 안아보았다.

"느릅나무골 박서방댁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잘 생각하시고 모레 자정까지 그리로 오십시

."

돌아서 나오는 흥복의 등뒤에서 그의 형수가 바느질감 위에 엎드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복은 돌아서자마자 그의 형수가 오지 못할 것을 느꼈고, 작은 조카를 안고 나올까 생각하였

. 그러나 그는 삿갓을 썼고 천천히 삽짝을 나섰다. 그는 잘못 돌아온 것이다. 이미 그가

생각하고 있던 정이 사라져버린 세상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숨어버린 사이에도 다른 사람들

은 또한 다르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을에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들어갔고, 선홍이는 벌써 돌아와 있었다. 아낙네가 기운

을 차렸는지 저녁에 백옥 같은 쌀을 씻어 이밤을 그득히 지어놓았다. 박서방댁은 머리도 단

정히 빗어 넘기고 헌옷이나마 갈아입고 있었다. 처음 볼 적에는 마치 유령과도 같더니, 얼굴

은 굶주림으로 야위었으나 눈이 어글어글하고 살결이 희어서 젊은 아낙의 기색을 되찾은 듯

하였다. 선홍이와 흥복은 마주 앉아 저녁밥을 먹었다. 아낙은 아이를 먼저 재우고 윗목에 얌

전히 앉아 있었다. 선홍이가 대강 송암골에 다녀온 얘기를 하고 나서 큰조카의 칭찬을 하였

.

"아이가 아주 총명하고 심지가 있더구만. 이담에 크면 두령감이더라." 흥복이 수저를 멈추

고 얼핏 아낙네를 돌아보았다. 그는 선홍이의 두령감이라는 말이 걸렸기 때문이었고 박서

방댁에게 경계하는 마음이 일어났던 것이다.

"근심하지 마세요. 만약에 거기서 우리 집에 있다는 걸 관가에서 알기만 하면 온 부내의

군사들이 떨쳐 나설 거에요. 그러면 저희 들두 어육을 면치 못할 거예요. 대강 저두 눈치로

알구 있답니다. 여염을 떠나 숨어 사는 곳이 산속밖에 어디 있겠나요." 흥복은 대꾸 않고 여

자의 새로워진 모양을 눈여겨 보았다. 전에 이동네 살 적에는 울타리 하나 사이로 박서방

댁이 닭의 모이를 주면서 맑은 소리로 불러대는 것이며, 물레를 자으며 부르는 잡가를 듣

기도 하였다. 열일골의 어린 신부가 시집오던 날에 흥복은 나뭇짐을 지고 오다가 먼발치서

본 적이 있었다. 선행도 가마도 없이 그의 아비의 뒤를 따라서 작은 보퉁이를 들고 오던

노랑 저고리의 새댁이 그렇게 조그맣게 보일 수가 없었다. 가난한 홀어머니의 노총각에게

시집오던 색시가 저렇게 천연덕스러운 아낙네로 된 것이다. 그는 춘궁기를 견디며 아사의

문턱에 서 있던 박서방댁이 어쩐지 목구멍이 막히도록 대견해 보였고, 그것은 아까 형수

앞에서 느끼던 무력감과는 정반대의 것이기도 하였다.

"보안역 가는 길에 형님의 산소가 있다던데 잘 아시오?" 흥복이 물으니 박서방댁이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흥복은 이참에라도 얼른 다녀올 생각인데 모처럼이고 마지막인 성묘에 아무

런 제숫거리가 없어 걱정이었다.

"여기 어디 술 받을 데가 없을까요?"

"성묘 가게?"

아뭇소리 없이 밥을 푹푹 떠넣던 선홍이가 물었다.

"이젠 고향에 돌아올 일이 없는데 인사라도 드려야지요." "낼 하지. 맏상주가 올 테니..."

선홍이가 말하자 흥복이도 그게 옳다고 생각하였다. 박서방댁이 재치있게 끼여들었다.

"무명 끝동이 있거든 저를 주세요. 내일 주육이라두 약간 장만을 해보게요." 저녁이 끝나

아랫방으로 니려가 흥복과 선홍이는 나란히 누웠다. 엎치락뒤치락하던 흥복이 불쑥 말을 걸

었다.

"성님. 자우?"

", 졸린걸."

"성님 고맙수. 이렇게 번거로운 행보를 같이 해주셔서." 그러나 선홍이는 아무 대꾸가 없더

니 엉뚱한 말을 하였다.

"저 사람두 데리구 가지."

"누구요... 박서방댁 말이우?"

"그래. 큰조카를 데리구 간 뒤에 수소문할 게 아닌가. 그러면 우리 때문에 저 아낙은 굶어

죽지도 못하게 되어."

"형수가 오지 않으면... 그럴 참입니다."

선홍이가 돌아누우며 중얼거렸다.

"자네 형수는 오지 않아. 아전의 새댁도 사흘만 되면 길청 문 밖에 와서 갖신 사달라고 조

르는 법이여. 사람이 세도를 알면 고기 반찬이 문제가 아닐세." "우리 아주머니는 그런 사람

이 아닙니다."

"그전에는 그랬을 테지... 시방은 아냐. 대갓집의 비부가 정승보다 자세가 심한 게여."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선홍이가 자는 것 같더니 혼잣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하여튼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혈육 거두는 일이지. 이건 어떻게 마음 내키는 대로

후딱 해치웠다간 각박해지기 쉽고, 너무 마음을 쓰면 영 다른 짓은 못하게 되어버린단 말야.

번거롭고 골치 아픈 일이지만 성의껏 해내지 못하면 상심이 깊어지거든. 이번 길에 좋은 걸

배웠내. 남나 할 것 없이 고르게 취하면 옳은 길이 되는 게야. 형수 대신에 저 여자나 데리

구 가서 같이 살든지 돌봐주든지 해여. 나 같으면 그러겠다. 에이, 나두 장가를 들든지 해야

. 이거..."

선홍이는 흥복의 식구 찾아오는 길에 자기를 점직어 보낸 길산에게 어떤 속내가 있을 듯이

여겨졌던 것이다. 자기가 소싯적부터 소금짐이나 지고 훨훨 싸다니면서 주먹질이나 하고,

자 따위는 눈길은커녕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은 게 딱하였는지도 몰랐다. 선홍이는 사실,

자와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어르며 헤벌거리는 사내자식들을 볼 적마다 귀

퉁이를 질러주고 싶을 만큼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홀가분한 떠꺼머리 적에는 활기가 있

고 거칠 데가 없어 웬만한 일에도 팔소매 걷어붙이고 나서던 놈들이, 일단 장가들어 여편네

에 새끼들을 두게 되면 보따리부터 챙기는 꼴이 아니꼬웠다. 한데 사람이 제 집에 근심거리

도 남겨두고 그것을 빌미로 마음도 써보아야 세상에 두루 널린 고통을 자상하게 자기 것으

로 알 것이다. 아무 정 없이 무턱대고 황소의 뿔을 뽑아 어쩌자는 것인가. 이번에는 선홍이

가 물었다.

"자나?"

"아니오. 공연히 돌아왔수. 그냥 자비령에서 먼발치서 생각이나 할걸." "이번에 노자를 다

써버려서 돌아갈 일이 걱정이군. 까짓 것 가평쯤가서 어느 양반의 행차라두 털어야겠구먼,

그래야 자네 식속들 세마라두 태워서 편히 가지." 하루 밤낮을 박서방네서 죽치고 떠나기로

작정한 날 저녁이 되었다. 흥복이가 못내 조바심을 치며 앉았다 일어섰다 하더니 드이어는

삽짝 밖에 나가 큰조카가 오기를 기다렸다. 박서방댁이 선홍이에게 어서 들어와 있도록 해

달라고 당부했건만 선홍이도 말릴 도리가 없었다.

밤이 이슥해서야 인기척 소리가 들리고 흥복이 마주 나서며 불러보았다.

"누구냐... 나 삼촌이다."

아이가 달려와 그의 무릎에 매달렸다.

"삼촌..."

"그래 누구 따라오는 사람은 없니?"

"일찍 잔다구 불을 꺼놓구 있다가 살짝 빠져나왔어요." 흥복이가 소년의 손목을 이끌어 방

으로 데리고 들어왔고, 불 밑으로 가까이 당기며 반가워하였다.

"어디, 어디 보자. 어릴 제 모습이 그대로구나. 너 나를 알아보겠느냐?" ", 여섯 살 적인

데 왜 모르겠습니까. 아버님 생각이 납니다." 그제서야 아이는 선홍이에게 절을 하였고 박서

방댁에게도 꾸벅하였다. 흥복이는 따라 나서려는 선홍이를 말리고 주육이 들어 있는 보통이

를 들고는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떠나기 전에 아버지 뵙구 가자."

"아버지 묘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못 가봤어요. 모두들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외면

하지요. 벌을 받는대요."

"이제는 벌 줄 놈도 없다. 느이 아버지는 훌륭한 농사꾼인데 정승판서는 그이 발밑에도 못

따라온다."

흥복과 조카는 보안대로를 따라서 걸었다. 흥복의 잽싼 걸음을 쫒느라고 아이는 숨을 헐떡

였고, 흥복이 더 지체할 수가 없어서 아이를 냉큼 없어버렸다. 과연 박서방댁이 가르쳐준 대

로 왕소나무 밑에 햇빛이나 달빛도 닿지 않을 음습한 곳에 봉긋한 봉분이 보였다. 위에는

잡초가 마음대로 자라났고 옆으로 물이 흘러내려 범람하면 산소 앞자리가 담길 듯이 보였

. 자리고 뭐고 따지지 않고 아무 곳에나 파묻어버린 것이 분명하였다. 흥복은 보퉁이에서

술 한병과 어포를 내어 봉분 앞에 벌여놓았다.

"어서 뵈어라."

흥복은 아이를 끌어다 산소 앞에 세웠다. 아이는 보아오던 대로 두 손을 이마 위로 쳐들고

절하였다. 삼배를 하고 있는 아이의 뒷전에 서서 흥복은 그 초라한 농투성이의 평생이 무겁

게 자기의 등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그의 어디에서 사창으로 눈을 부릅뜨고 달려가던 의

기가 솟아났던 것일까. 그가 자기와 더불어 대룡산에서 먼 고장으로 달아나지 못하고 산을

내려가 관군에게 스스로 포박되었던 것은, 식솔들 대문일 것이었고 또한 처음에 분기하였던

것도 그들 때문이었으리라. 흥복은 아이가 옆으로 물러선 다음에 이 외로운 사내의 무덤에

삼배를 올렸다.

"좋은 때가 오면 다시 모시리다."

중얼거려보지만 그것이 빈말뿐임을 흥복은 잘 알았다. 그는 술을 붓고 나서 다시 아이와

더불어 삼배를 올렸다. 흥복이 박서방네로 돌아오니 선홍이와 아낙은 길 떠날 채비를 끝낸

뒤였다. 아낙은 밤참을 해두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든든히 자셔두어야 밤길을 걷지요."

아낙은 으레껏 제가 함께 떠나게 되는 줄로 여기고 있어서 흥복이는 가부를 말하지 못하였

. 흥복이는 아이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나서도 얼른 일어나지 못하였다.

"안 갈 텐가?"

선홍이가 벌써 신을 신고 마루에 나가 앉았다가 재촉하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십시다."

"허허, 북두칠성을 보니 자정이 넘었겠네."

흥복은 아이가 자꾸만 어둠속으로 시선을 주는 양을 살피고 있었다. 제 어미를 가다리는

것이 분명하여 떨치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에 뒤꼍으로 돌아 나갔던 박서방댁이 깜짝

놀라서 부르짖었다.

"에그... 웬 횃불들일까. 저기 좀 보세요."

선홍이가 돌아가보더니 다급하게 말하였다.

"이쪽으로 오는군. 동네에서 뭔가 낌새를 알아챈 모양이지. , 빨리 빠져나가야 하네."

복이는 조카를 등에 업었다.

"내 목을 꽉 쥐어야 한다."

"엄마는 못 오시겠지요?"

흥복은 아이를 업고 나서면서 박서방댁에게 말하였다.

"함께 몰려가면 잡히기 쉬우니 새못으로 오시우."

"아니에요. 같이 따라가겠어요."

아낙이 울상으로 발을 굴렀다. 선홍이가 이리저리 찾아다니더니 굵직한 몽둥이를 주워 들

었다.

"새못이 우리 건너온 데가 아닌가. 내가 뒤에서 한바탕 장난치구 갈터이니 그 사이에 모두

데리고 빠져나가게."

흥복이 내키지 않으면서도 밖으로 나서는데 아낙이 그의 소매를 잡아 이끌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저기 동산에만 오르면 안전할 거예요." 아낙네는 등뒤에 아기를 업고 머

리에는 보퉁이를 이고서도 제법 빠른 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흥복이가 돌아보니 선홍이는

몽둥이를 어깨에다 걸치고 오히려 햇불이 일렁이는 곳을 향하여 어슬렁거리며 마주 다가

가고 있었다.

"놓치지 마라. 최가놈과 한패다."

웅성거리는 가운데 드높은 목소리가 들리는데 마을의 약정인 듯하였다. 선홍이는 어디 잡

아볼 테면 잡아보라는 듯이 몽둥이를 휘둘러 보이면서 밭고랑 사이에 우뚝 섰다. 횃불들이

한데 몰려서 천천히 다가들고 있었다.

"최가를 찾아야 한다."

"박가네 집에 숨어 있을 게다."

저희끼리 의논이 분분한데 어느 한놈 달려들지는 못하고 주춤대는 것 같았다.

"어서 잡지, 뭘 구경하구 섰느냐?"

선홍이가 건드리노라고 퉁겨보니 사람들 틈에서 검은 더그레 자락이 나타난다. 군졸들이

끼여 있었다. 아마도 낮에 그들을 발견한 자가 적경을 알리고 데려온 모양이었다. 그때에 앞

으로 나선 두 군졸이 뭔가 검은 작대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부시를 치는지 번쩍이는 빛이

반디처럼 빛나자 선홍이는 그제사 겁이 더럭 나며 상투꼭지께가 서늘하였다.

"총포로구나!"

선홍이가 달마산 토벌대에 호되게 혼난 적이 있어서 얼결에 상반신을 숙이는데 쾅 소리가

간장을 떨굴 듯이 터지며 바람 가르는 소리가 지나갔다. 예미랄... 또 맞는가부다. 선홍이는

겁이 나는 중에도 화승총에는 뒤는게 상책이라 싶어서, 등을 돌리지는 못하고 그대로 횃불

의 꽃밭 가운데로 달려들어갔다. 그의 갑작스런 돌입에 놀란 마을의 장정들이 이리저리 흩

어졌고, 오른편에서 총을 겨누던 자가 체 쏘지 못하고 주저하는 틈을 타서 선홍이가 달려들

었다.

"이놈, 어서 쏘아봐라."

몽둥이로 후리니 허리를 얻어맞은 포수가 숨막히는 소리를 내지르며 넘어졌다. 몽둥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는데, 마을 장정들이라야 모두가 춘궁에 푸성귀죽이나 마시고 양지쪽서 해

바라기하던 사람들이라, 앞으로 내어보는 작대기며 괭이 쇠스랑에 힘이 들어가 있을 리가

없었다. 선흥이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부딪치자마자 맥없이 퉁겨져 나가거나 자루 중동이가

꺾어져버린다. 맨손이 된 사람들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횃불로 던져두고 멀찍이 달아났다.

흥이는 얼른 돌아서서 떨어진 화승총을 포개어 들고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였고 그에

용기를 얻은 마을 장정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따라붙었다. 선흥이는 동산을 바라고 한참

뛰다가 일각이라도 벌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숲으로 들어서기 전에 휙 돌아섰다. 역시 저쪽에서도 소리만 지르며 멈추어 섰다.

흥이는 둘리번거리다가 한아름 되는 바위를 보자 성큼성큼 걸어가서 품에 안았다. 발꿈치와

허리에 힘을 주면서 들어올렸다. 그는 일단 바위를 품에 안았다가 두 손바닥에 올리고는 머

리 위로 번쩍 쳐들었다. 놀라는 소리들이 군중 사이에서 요란하였다. 선흥이는 꼿꼿한 걸음

걸이로 군중을 향하여 걸었다.

"어느 놈이 먼저 인절미가 되려느냐?"

장정들은 불 만난 개미처럼 흩어졌고, 선흥이가 휙 내던진 바위는 멀찍이 가서 육중한 소

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마 이 바위는 두고두고 마을의 얘깃거리가 될 것이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로 아이들 입에 오르내리게 될지도 몰랐다. 느릅나무골 농꾼들이 남대천의 장

사 강선흥이를 알 리가 없었다. 선흥이는 후하고 긴 한숨을 하넙ㄴ 토해내고는 돌아서서 숲

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도 캄캄한 숲속으로 따라 들어오는 자들은 없었다. 그들은 아마 이런

성의를 보임으로써 관에서 받은 역적의 동네라는 오명을 씻게 될지도 몰랐다. 여하튼 선흥

이는 제가 흥복이와 동행하기를 잘했다고 여기면서 새못으로 뛰었다.

"최서방, 어디 있나?"

선흥이가 강변으로 달려가며 고함을 지르니 어둠속에서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못

위쪽에는 신연강과 소양강의 지류가 합쳐지며 가운데에 섬이 생겨났는데, 물살이 빠르고 수

심이 깊었다. 흥복은 새못나루를 미리 알고 있어서 박서방댁과 함께 강변에서 쓸 만한 배를

찾고 있었다. 선흥이가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 내려가니 흥복이 낙담하여 말하였다.

"나룻배는 한 척두 없구... 주낙배 두 척뿐이우, 성님 노 저을 줄알우?" 선흥이가 되물었다.

"내야 저을 리가 없지. 자네는 왜 못 젓나?"

"주낙배는 작아서 우리가 모두 타면 뒤집어지기 쉽습니다. 둘이 타면 꽉 차는 걸요." 곁에

서 박서방댁이 나섰다.

"두 분이서 타구 가세요. 저두 노를 저을 줄 알거든요. 아이들은 내가 데리구 건널게요." "

그게 좋겠군..."

흥복이 배를 물 위로 밀어내는데 선흥이가 아낙네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수?"

"어릴 적부터 탔어요. 강촌 사람이 배를 젓지 못한다면 말이 되나요?" 흥복이가 뱃전을 잡

고 서서 아낙에게 재촉하였다.

", 어서 먼저 가슈."

"어떻게 하실라구요?"

"먼저 건너가라니까."

아낙네가 아이를 업은 채 고물간에 올라탔고 흥복은 머뭇거리는 조카를 번쩍 들어다 허릿

간에 앉혀놓았다. 흥복은 배를 앞으로 밀어냈다.

"건너가서 기다리오."

배가 휘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흥복은 다시 배를 밀어냈다.

"성님이 먼저 오르슈."

선흥이가 올라타고 나서 흥복이가 고물간에 올라탔다. 그때에 여러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횃

불빛이 언덕 위에 나타났다.

"빨리 건너야겠는걸. 혹시 포수가 늘어났을지두 모르잖나." 선흥이가 역시 화승총이 가장

두려웠다. 그것 앞에는 재간이나 힘자랑도 아무 쓸 데가 없었다. 흥복이 노를 젓는데, 주낙

배의 뒤편 옆구리에 설및이라는 넙적한 노를 달아 한 손의 손목을 춤추듯이 위아래로 힘

을 주어 젓는 것이다. 흥복이 원해 강촌 사람이라 배가 뒤뚱거리며 강 가운데로 나아갔고,

강변에는 횃불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이놈들... 게 섰거라!"

드디어 그들을 발견했는지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복이 배를 저어 나가려니 얼마 안

떨어져서 박서방댁이 젓는 주낙배가 앞에 보였다.

"강심이 제일 위험한데, 거기만 벗어나면 될 거요."

흥복이 말하였다. 요란한 폭음이 들리더니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총을 빼앗았는데..."

선흥이가 얼결에 허릿간으로 상반신을 숙이며 중얼거렸다. 연이어 두 방이 터졌다.

"어이쿠..."

선흥이가 방포 소리가 딱 질색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흥복은 침착하게 배를 저어 나갔다.

다시 잠잠해졌다. 사이가 생기자 흥복이 중얼거렸다.

"포수 셋이 붙었군."

"염려 말구 일어나슈."

흥복이 선흥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셋이서 장약을 재는 사이에 우리는 강심을 넘어가겠수. 제아무리 천리안이라 할지라두 겨

냥을 못허우."

선흥이가 엉거주춤 고개를 들었다.

"내가 탄환을 빼내느라구 고생한 걸 생각하면 끔찍하네." 그들의 배는 강의 한가운데를 지

나 차차 저쪽 강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시 방포 소리가 들렸으나 탄환 흐르는 소리는

그렇게 날카롭지가 않았다. 그들은 뭍에 닿았고 선흥이가 허둥지둥 자갈밭 위를 뛰어갔다.

먼저 당도했던 박서방댁과 조카가 그들을 반겼다. 흥복은 배를 다시 물 위로 밀어 보냈다.

어디든 떠다니다가 엉뚱한 곳에 대어지거나 하류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 여기서 밤새 걸어서 춘천 계는 빠져나가야 합니다. 영평까지 가는 길은 질러가기는 하

지만 경계가 너무 멀고, 일단 가평으로 내려갑시다."

"예서 가평까지가 몇 리인가?"

"이십 리를 나아가면 석파령을 넘게 되는데, 그 뒤부터 가평 계가 되지요. 가평서 연천 삭

녕을 지나 도계를 넘어 평산까지 가면 안전하게 되겠지요." 그들은 강변을 따라서 서남쪽으

로 걸어 내려갔다. 석파령에 당도했을 때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모르는 결에 옷이 흠

뻑 젖었고, 아낙은 헌옷가지를 내어 아이를 덮었다. 그들은 새벽녘에 가평 읍내로 들어가지

않고 막바로 한아비내를 따라 오르다가 연동의 주막에 들었다. 포천과 영평으로 갈리는

삼거리였다. 역시 춘궁은 어디엘 가나 심했고, 특히 내륙 지방이 심하여 어떤 곳에는 온 마

을에 사람의 자취가 끊긴 곳도 있었다.

그들이 오후에 연동서 떠나 운악산 줄기가 흘러내려온 굴치를 바라고 넘는데, 맞은편에서

식솔을 거느린 사내들이 내려오는 중이었다. 그들이 먼저 주춤하니 서버렸고 흥복과 선홍이

는 의아하였으나 개의치않고 내쳐서 걸어 올라갔다. 부자인 듯한 중년 사내와 떠꺼머리 그

리고 젊은 가장으로 여겨지는 사내가 셋이었는데, 그들 뒤로 남부여대하여 따라붙은 식솔들

이 어린것들과 처녀들까지 도합 스물이 넘어 보였다. 보아하니 등에 솥이며 거적때기를 짊

어지고 옷이 남루하고 상투가 흐트러져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나 유민이 되어버렸음이 분명하

였다. 선흥이 일행은 어쩐지 그들 가운데를 비집고 지나가기가 꺼림직하였다. 마주 가면서

보니, 뒤에 섰던 식구들이 길 아래로 비켜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사내 장정들이 슬그머니

벌려 서는데, 아니나다를까 호미며 낫이며 작대기 등속을 슬슬 꺼내들고 있었다.

사흘 굶어 도둑이 된다더니, 춘궁에 유민이 변하여 폭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저들이 보기에

도 흥복과 선홍이는 의복이 깨끗하고 패랭이나마 산뜻하여 보상으로 보여지기에 충분했고,

등뒤에 짊어진 봇짐 속에 값진 물건이 들었을 줄로 짐작한 모양이었다. 두어 놈이 일시에

내달으로 불문곡직하고 앞서 가던 선홍이의 골통을 바라고 작대기와 호미를 휘두르며 달려

들었다. 선홍이가 얼결에 한손으로 작대기를 받아쥐고 호미 휘두르는 자를 발길로 내질렀다.

그리고는 작대기 잡은 채로 앞으로 끌어당겨 그자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보따리 끌러라,

쩌구 하면서 위협조차 하지 않는 걸로 보아 그들은 몇번인가 저지른 일이 있어 대수롭지 않

았던 모양이었다. 굶주릴 대로 굶주린 유민들은 남대천의 장사인 선홍이의 적이 아니었다.

여기에다 흥복이까지 싸움터로 뛰어드니 유민들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홍은 멱살을 잡힌 총각에게 메고 있던 봇짐을 선뜻 끌러 주었다. 총각이 얼결에 봇짐을 안

고는 믿어지지 않는지 주춤거렸다.

선홍이가 말해주었다.

"어른이 맞아 번 것이니, 아이들 떡이나 사 먹여라."

총각은 몇번이나 허리를 굽신거려 보이면서 일행들의 뒤를 따라 뛰어내려갔다. 선홍이들은

고개를 넘어 영평을 지나갔는데 그러한 유민의 일행을 몇무리나 만났었다. 도중에는 울타리

가 모두 뜯겨버린 빈집도 많았다. 연천에 이르렀을 때 선홍이가 말하였다.

", 이거 노자가 다 떨어지겠는건.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데 요즘 같아서는 어디 가서 과

객질도 못하겠군."

"아무데서나 집털이를 합시다."

"굶은 놈이 많으면 배 터지는 놈두 있게 마련이다. 걸려들겠지." 제각기 봇짐을 내어 따져

보니 무명이 반 필이요 돈은 서른 푼도 못되었다. 박서방댁이 말하였다.

"저어기 마을이 보이는데 무명을 주고 양식을 얻어 중화라두 지어먹구 가지요." "어디 하룻

밤 유숙할 곳에 가서 아예 잠자리까지 얻지." 흥복이 말에 아낙네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네야 배가 적어 괜찮지만, 두 분은 펄펄 뒤시는 장정인데 끼니를 놓치구 길을 어이

가신다구 그래요. 우선 중화는 자셔야지요. 그리구 저녁때엔 두 분 말씀처럼 어디 부잣집이

라두 털든지..."

"... 이 사람이..."

선홍이는 어이가 없어 박서방댁을 바라보았으나 여자는 개의치 않고 종알거렸다.

"걱정마셔요. 저두 망을 보든지 속이구 들어가서 빗장을 따든지 할테니까요." 흥복이와 선

홍이는 하는 수 없이 너털웃음으로 대꾸하였다. 강이 바라보이는 마을에 들어가니 임진강

의 지류로 흘러들어가는 제법 너른 시내가 나왔다. 밝은 햇살을 받아 바닥에 깔린 자갈이

탐스럽게 비치는데 물 흘러내려가는 소리가 귓전을 말갛게 씻어주었다.

마을의 이름은 그대로 옥계였으니 물소리가 사방에 배어 있는 듯하였다. 그들이 마을로 들

어가 잠깐 밥 지어 먹을 집을 찾으니 모두들 유민 패거리에 한두 번식은 귀찮은 꼴을 당한

적이 있었는지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겨우 동네의 끄트머리에 외떨어진 집에 가서 무명 반

필을 내어주니 전미 너 되밖에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춘궁이라지만 무명 반 필에 쌀이 너 되라면, 평년 쌀값의 네 배나 되는데 너무하

."

하였으나 집주인은 맥없이 웃으며 쌀자루를 거두었다.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 대개가 초근을 섞어 죽을 쑤어 먹는 판인데, 옷은 벗어도 살 수 있

으나 양식이 없으면 어찌 연명하겠소, 시세가 맞지 않으면 다른 집으로 가보시구려." 이제

옥계를 지나면 고내재까지 인가가 없으니 다른 방도가 없어서 그냥 쌀을 받아 밥을 짓기

로 하였다. 주인이 그래도 경우는 있어서 건어와 나물 등속의 반찬을 내주어 중화를 들고

나서 그들은 오후 느지막하게 옥계마을을 나섰다. 북편의 고개를 넘고 나니 한눈에 너른 강

변의 경치가 시원스레 전개되는데 들판에 희끗희끗한 것은 죽 쑤어 먹을 나물이나 다북쑥을

캐는 아녀자들이 분명하였다. 강 건너편에 장경석벽이 병풍처럼 둘러섰고, 맑고 푸른 물이

도영암의 가파른 암벽 사이로 흘러가고 있었다. 강변의 이쪽은 너른 들판이요. 저쪽은 끊긴

산봉우리들이 그림처럼 서 있었다.

선홍이 일행이 이마에 와닿는 훈풍이 가슴을 펴고 즐거워하는데, 문득 어디선가 질탕한 삼

현육각 소리와 계집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소슬한 바람에

푸른 연기가 솔솔 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원래 풍류는 상것들의 것이 아니고 배부르고 할

일 없는 나리들의 것인지라, 봄볕이 따스해지고 푸른 싹이 돋아나니 놀기 좋은 철이 돌아왔

던 것이다.

선홍이가 짐작을 하고서 흥복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행로에 뜻 아니한 육것을 잡숫게 되었구먼."

흥복이도 싱글대며 중얼거렸다.

"잘하면 기생년들의 패물에다 화대까지 걷어 가겠구려." "나두 구경할 테요."

박서방댁과 조카아이가 두 사내를 믿고서 겁도 없이 나섰다. 그들은 선홍이와 흥복이가 무

슨 일을 벌이려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있자..."

흥복이가 머리를 기웃하고서 잠깐 생각하더니 무슨 안을 내어 세 사람에게 속닥거렸다.

홍이와 흥복이는 놀이가 벌어진 곳이 내려다보이는 데까지 가서 한가하게 주저앉았고, 박서

방댁이 아이를 업고 조카의 손을 잡아끌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선비들의 답청놀이가 한창

흐드러졌는데 과연 자리는 좋은 데다 잡아놔서, 아래로 시욱진의 굽돌아 나는 강물과 석벽

에서 떨어지는 쌍줄기 폭포가 내려다보였다. 악공과 기생 셋이 앉아서 해금을 켜고 거문고

를 뜯으며 시조를 뽑았다.

와중은 그래도 마전 연천서 밥술깨나 먹는다는 자들인데 시회랍시고 호남 간지에, 강진향

버루집에, 백옥 연적, 팔신공묵 갖추어 눌러두고 운자를 부르고 야단이었다. 노구에서는 이

밥이 익고 채반에는 쇠고기 닭고기 갖은 어포 등속이 그득하여 감홍로가 한 준이며 갓 나온

잔디 위에 화문석이 깔려 있고 기생들 뒷전에는 미리 맏아두었는지 부담이 놓여 있었다.

서방댁이 후줄근한 표정을 하고서 아이를 앞세워 그들의 앞에 나가갔을 제 한창 시흥이 도

도한 자가 수염을 Tm다듬으며 지껄이는 중이었다.

"난간 나무 빽빽하나 그래도 골짜기 감추고 처마가 훤하여 산을 가리지 않네 물소리 베개

위에 들려오고 구름 그림자 창 사이에 떨어지네."

한잔 술에 노곤하여 목침 베고 누워서 한세상 사노라는 기분이니, 밭고랑에 어느 놈이 꾸

부려 있건 웬년이 산야에서 쑥을 뜯건 상관할 바 아니라는 투였다. 역시 그 입으로 감홍로

가 부어지고 닭다리 하나 들어갔다. 모두들 절귀라고 떠들고 기생년들은 술을 치기 바쁜데,

악공의 뒤에 와서 섰는 것은 무명옷 입고 아이들을 데리고 섰는 촌부였다. 박서방댁은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하였고, 드디어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행이라 모두들 음식 집어

먹기를 멈추었다. 또한 웃음과 말도 멈추게 되어 그래도 속이 있는 자는 어흠, 큰기침하면서

돌아앉고 한 사람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뭔가... 여기는 아녀자 올 자리가 아닌데?"

그래도 박서방댁은 썰렁한 시선으로 음식이 벌여진 다담상을 내려다 보았다.

"허허, 거기 뭣들 하느냐?"

선비 하나가 놀이터 아래편에서 저희끼리 몰려 앉았던 구종배들에게 한마디 하자 그들은

무료하던 참이고 각각 제 주인이 바라보는 판이라 세 녀석이 함께 일어났다.

"이거 여기가 어느 자리라구 와서 청승이야."

"어서 가지 못해."

한녀석은 박서방댁의 등을 밀고 다른 녀석은 조카아이의 손을 잡아 끌었다. 기생이 있다가

그래도 동정이 가는지, "뭐 먹을 것 좀 들려서 보내구려."

한마디 하였고 곁에 앉았던 젊은 선비도 기생의 말에 거들었다.

"밥을 퍼서 찬이랑 주어 보내게나."

또 다른 자가 말하는데 그는 이미 술이 거나해져 있었다.

"가만있거라. 이 자리는 시회하는 곳이고 누구든 한수 읊기 전에는 음식 참예를 할 수가

없다. 거 아무거나 소리라두 한마디 듣자꾸나."

"조오치, 보아하니 살결두 희구 인물이 그만허면 네년들보다 낫구나." 아예 희롱하고 나오

는 자도 있었다.

"아이그 그저 계집이라면 입술을 적시는구려. 아무려면 매란국죽 마다허고 잡화를 탐할 학

사가 어디 있나요?"

"모르는 소리다. 월야에 다소곳한 박꽃도 또한 마다 않으리라." 박서방댁은 그들의 오가는

희롱을 모르는 채 구종배들이 덜어주는 음식을 따로 받아 아이들에게 먹이고 앉았고, 처음

부터 소리를 청하던 자가 비틀걸음으로 일어났다.

"여보게, 그 뉘 마누라인지는 모르되 이런 예가 있나, 춘홍이 가득 한데 잡가가 되었든 타

령이 되었든 한자리 해보라니. 내 술도 한잔 쳐주지."

속 있는 자는 선비 체모에 조금 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웬 초라한 사내 하나가

놀이판으로 다가와서 큰 소리로 외첬다.

"마누라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먼."

하고는 좌중의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그릇에 담긴 음식과 밥을 와락 움켜쥐어 틀

어넣는 것이었다.

"아니, 저런..."

나리가 손가락질 하기도 전에 하인들은 나중에 집에 가서 치를 곤욕부터 두려워 제가 미리

지나치게 나올밖에. 우선 나간다는 게 욕설이었다.

"이런 망할 자식 같으니. 예가 어디라구 초상집 개처럼 얼씬거려." "예가 어디긴 어디야.

휼청 활인서두 아니구 청보에 싸논 개똥 두엄께지." 선비들이 저런 저런, 하면서 손짓 입맛

다시기 바쁘니 하인은 오랜만에 주인들 앞에서 꿩잡은 매의 행세라 신이 나서 손찌검을 하

였다. 볼퉁이를 찰떡 치듯 하는 판인데, 아무리 흥복이가 별다른 재간이 없다고 하나, 한창

시절에 주막거리에서 당초망이란 소리를 듣던 사람이라, 슬쩍 손을 올려 막으면서 손가락

을 비틀어 쥐었다. 그리고는 한바퀴 꺾어서 등뒤로 밀어붙였다.

"글 한다는 것들이 앉아서 굶주린 양갓집 유부녀나 희롱하고 있으니, 겉몰골은 선비로되

속은 썩은 내가 나지 않느냐?"

하고는 발길로 하인의 궁둥이를 호되게 걷어차고 좌중을 향하여 돌아섰다.

"에잇, 냄새나서 못 먹겠다."

흥복이가 씹던 밥알을 좌우에다 대놓고 길게 뱉어버리니 모무들 도포 자락을 들어 안면을

가렸다.

"왜 씹던 밥알이 더러우냐? 너희 오장육부보다는 한결 정갈하다." 궁둥이 얻어맞고 나뒹굴

었던 자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나머지 두 놈이 소매를 부르걷고 달려드는데, 나무 사이에서

선홍이가 두 팔을 벌리고 마중을 나왔다. 이 녀석들이 언제 건넛마을 김풍헌을 본 적이 있

, 이놈이나 그놈이나 한통속이겠거니 여겨 개나 걸이나 잡는다고 주먹을 부르쥐고 덤벼

들었다. 선홍이가 가볍게 두 놈의 옷깃을 잡아당겨 한쪽 팔을 양손에 틀어쥐고는 그 자리

에서 빙빙 돌며 맴돌이를 실컷 먹이다가 좌우로 패대기쳐버렸다. 두 놈이 사지를 허재비처

럼 뻗고 땅위에 구르더니 흙냄새가 고소한 모양이었다.

"봄 낮잠에 불알이 살찌는 게여."

선홍이가 허허대고 돌아와서 우선 궁둥이가 화문석에 붙어버린 듯한 놀이판 가운데로 덥석

들어가 병째로 감흥로를 꿀꺽이며 마셨다. 흥복이는 달아날까 덤빌까 움찔거리는 나머지 하

인 한 놈에게 손가락질하며 조용하게 으르대었다.

"거기... 꼼짝 말구 앉았어."

하인이 널브러진 동무를 두어 번 돌아보더니 엉거주춤 쭈그려앉았다.

"어이구, 이게 다 뉘 댁 광에서 나온 산해진미일꼬."

선홍이가 여로에 나물과 조밥만 대하다가 그럴 듯한 화주와 고기를 만나고 보니 우선 다른

여념이 없었다. 그래도 흥복이가 생각이 빠른지라 다섯이나 되는 선비와 기생 셋과 악공 둘

을 수습해두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고 박서방댁에게 눈짓하였다. 그들은 무엇보다고

선홍이의 몰골이 험상궂어 그가 음식을 대강 먹고는 저 남생이 잔등같은 손으로 상투라도

뽑지 않을까 염려하여 안색이 푸르죽죽 설익은 살구빛이었다.

"성님, 일하구 나서 잡수시우."

흥복이 보다못해 한마디 하니 선홍이는 그제서야 병에 남았던 술을 한모금에 비웠다.

"거참 오라를 지니구 다니는구나?"

선홍이가 선비들의 도포에 휘감은 술띠를 끄르며 말하였다. 그는 술띠를 풀어다가 하인놈

들부터 차례로 나무에 묶어놓았다. 기생은 기생들끼리 묶어놓고는 흥복은 나으리의 갓을 모

두 벗기고 도포도 벗겼다.

"그래놓으니 털 뜯어놓은 병아리 꼴이로구나."

선홍이가 다시 주합을 열며 빈정거렸다. 흥복은 나으리들의 몸에서 값진 것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사정없이 머리를 흩트려놓으니 나으리들은 꼭 하도감 검은 방에서 떨어진 사졸과 같았다.

박서방댁은 한창 기생들의 몸뒤짐을 하는 중이었다. 옥지환 은지환은 물론이요 금박댕기 은

박댕기 노리개에 은장도 향갑 등속을 사정없이 떼어냈다. 선홍이가 기생들의 뒷전에 놓였던

부담을 끌어다 열어보니 돈이 열 냥에 갖은 방물이 들어 있었다.

"이거 이녁 갖다 할라우?"

선홍이가 박서방댁에게 물으니 그 여자는 입을 삐쭉거렸다.

"갓을 줏어다 쓰시지요."

"허허허, 내가 갓을 써? 차라리 목을 베구 말지."

선홍이는 돈만을 끄집어내어 챙겼다. 워낙 장신구와 패물들이라 한데 모았어도 작은 보퉁

이에 지나지 않았다.

"가면서 여기저기 적선해두 되겠다."

선홍이는 진 음식은 놓아두고 마른 음식들만 그러모아 싸기 시작하였다.

", 아주 종이가 부드럽구 야들야들한걸."

붓도 대지 않은 새하얀 호남 간지를 뚤뚤 말아 고기며 전이며 육포를 싸면서 선홍이는 감

탄하였다.

"뒤지로도 아주 좋겠구먼."

선홍이는 나머지 종이까지 꾸려 넣었다.

"가만, 가만... 이거 뭐라구 그려놓았는지 도대체 알아먹을 수가 있나." 선홍이는 절귀라던

시가 적힌 간지를 비뚜름하니 들고서 들여다보다가, "에이, 못쓰겠다."

하면서 머리 뒤로 던져버리니, 물소리 베개 위로 들리고 구름 그림자가 창 사이에 어쩌고

하던 글귀가 봄바람에 휘적이며 날아가버렸다. 박서방댁이 선흥이에게 말을 넣었다.

"아예 그 찬합이랑 반합두 들구 가십시다. 들에 나와 있는 아이들이나 갖다 주게." 역시 제

손가락 찔러봐야 남의 아야 소리 알아듣는다고, 박서방댁은 느릅나무골의 메를 캐던 아이들

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선홍이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큰 손에 찬합 반합을 들었다.

좀도둑 지나간 자리에 쌀변한 물건이 남듯이, 한판 저지르고 사설이 없을 수 있나, 말주변깨

나 있는 흥복이가 돌아서서 파흥된 자리에다 한마디 보태놓는다.

"답청이란 쟁기 잡고 가랭이 걷고 맨발로 하는 이에게나 쓸 문자속이지, 너희처럼 두 다리

뻗고 어깻죽지 주물리는 놈들에겐 당치두 않다. 내가 우선 한수 남기구 갈란다. 긴긴 봄날

배고파, 쑥개떡도 먹고파, 도둑질도 하고파, 봇짐 지고 가고파, 자아 우리는 가네, 고뿔 들면

마누라한테 갈근탕이나 달여달래게."

그들은 갓과 도포를 들고 나와서는 나뭇자기에다 여기저기 걸어두었다. 내쳐서 강변의 들

판으로 나가 선흥이가 번저 큰 소리로 아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잔치 음식이 예 있다. 어서 먹어라!"

아이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그냥 주춤하니 섰을 뿐이었다. 박서방댁이 다시 입나발을

하여 외쳤다.

"이밥에 고기 반찬이 그득하단다. 여기 두고 갈 테니 가져다 먹으려무나." 아이들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중 용기있는 계집아이가 뛰어오는 것이 보이자 그들은 들판 위에 찬합

과 반합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시욱진의 강변으로 지나치는 바람에는 풀냄새가 싱그럽게 실

려 있었다. 그들은 삭녕을 지나 평산에 닿아서야 패물 등속을 팔았다.

노자는 이미 넉넉하였고 도계를 넘어오니 집에 다 온 것같이 느긋한 기분이었다. 흥복의

조카아이가 어린 몸에 수백 리 길을 따라다니노라고 먼길을 걸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흥복이와 선홍이가 아이를 번갈아 업고 가기도 하였는데 평산서 돈이 생긴 김에 서흥까지만

세마를 내기로 하였다. 이번 행로에 선홍이와 박서방댁은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으니, 선흥이

는 그 여자의 시원시원하고 인정 많은 꼴에 저도 모르게 엇구수한 정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선흥이가 무뚝뚝하나마 가끔씩 그런 정다운 기미를 보일수록 아낙네는 웬일인지 그

를 어려워 하기 시작하였다. 가는 길은 엿새가 걸렸는데 돌아가는 길은 더디어서 달포 남짓

걸려서야 그들은 동선관에 닿았다.

동선관 주막에서 하루를 푹 쉬고 나서 그들은 동선령의 새 산채로 올라갔다. 이미 집 두채

가 서 있었고 나머지 집들도 골격이 갖추어져 있었다. 모두들 나와서 그들을 맞았다. 길산이

흥복이의 손을 잡아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 별 고생들은 없었느냐."

"고생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선흥이 성님이 동행해주셔서 여러 가지로 수월하였지요." "

고들 많았다."

길산이 흥복의 조카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쪽에 섰는 박서방댁을 돌아보았다.

"아주머니도 고생이 많으셨소."

선홍이가 박서방댁의 등을 밀었다.

"우리 성님인데 인사하슈."

박서방댁이 수줍은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어서 올라가십시오. 인사 올리겠습니다."

"인사는 무슨..."

길산이 마루 위로 올라갔고 흥복은 그의 뒤에서 나직하게 말하였다.

"저희 형수가 아닙니다. 이웃집의 과수댁인데..."

"왜 고향에 계시지 않던가?"

그러나 흥복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길산이 자리를 잡아 앉았고 박서방댁은 밖

에서 등에 업었던 아이를 풀어 내리니 선홍이가 자연스럽게 받아 안았다. 아이가 제 어미를

떠나 칭얼거리자 선홍이는 혀를 두드려 아이를 달랬다. 흥복이 길산을 돌아보며 싱긋이 웃

었고 길산은 아직 별 느김이 없는 듯이 보였다. 박서방댁이 얹은머리를 두손으로 쓰다듬어

올리고는 길산에게 얌전히 큰절을 올렸다. 길산도 맞절을 하였고 이어서 흥복의 조카아이가

두손을 이마에 올리고 절하였다. 박서방댁이 고개를 숙인 채로 길산에게 말하였다.

"저는 느릅나무골서 최서방네 이웃에 살다가, 최서방이 고향을 떠날 때 사단에 얽혀서 가

장을 잃었습니다. 가장이 돌아간 뒤로 겨우 품을 팔아 연명해오더니, 이번 춘궁에는 온 고장

에 기근이 우심하여 꼼짝없이 누운 채로 굶어죽게 되었다가두 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희생

하였습니다. 의지할 데가 없어 고향에서 죽느니보다는, 노중 객사라도 하는게 나을 듯하여

염치불고하고 두 분을 따라 나서게 되었지요."

길산이 흥복이와 선홍이에게 물었다.

"거기서 별일은 저지르지 않았던가?"

"하마터면 총포에 맞아 물귀신이 될 뻔하였지요. 동네에서 눈치를 챘습니다." 선홍이가 말

하니 길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차피 아주머니께서도 나중에 관의 핍박을 박게 될 형편이었군, 어쨌든 동행하

기를 잘하였으나 보다시피 여기는 여염의 살림도 아니고..." 박서방댁이 고개를 들고 말하였

.

"제가 아무리 소견없는 아녀자라 하오나, 두 분과 함께 수백 리 길을 오면서 모두 짐작하

여 알았습니다. 사내들끼리 있는 곳에서는 빨래나 밥시중을 들어줄 계집이 있어야 살림에

규모가 잡히는 것입니다. 절대루 거추장스럽게 하지 않겠어요." "거추장스럽다니 거 무슨 말

이우. 그렇지 않아두 안식구들을 데려다가 안돈을 시키려는 판인데, 내가 집이라두 지어드리

리다."

선홍이가 성급하게 나서며 제 가슴을 두드렸고, 박서방댁은 눈을 흘기면서 선홍이를 올려

다보았다. 선홍이와 노상에서 친해진 갓난아이가 그의 무릎 위에서 겅정거리며 뛰고 있었다.

길산은 그제서야 박서방댁과 선홍이의 낌새를 눈치채고 흥복이 쪽을 돌아보았다. 흥복이는

바로 맞았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형수는..."

"무관과 살구 있습니다. 함께 오려고 했으나... 벌써 늦었지요." 길산은 여자에게 말하였다.

"여기서 이렇게 산다는 게 기약없는 일이긴 하지만 여염 마을이나 똑같이 사람 사는 도리

도 있고 이웃기리의 정도 두터운 곳입니다. 선홍이가 저렇게 큰소리를 치니 설마 굶기기야

하겠습니까. 다만 여기가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았으니 당분간 흥복이네 가 있든지, 아니면

동선관 주막에 내려가 있으시지요."

"아니어요. 제가 보기에 역사가 있어서 모두 바쁜 모양인데 밥도 짓고 빨래도 해야겠어요.

여기 있도록 해주십시오."

길산은 응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문은 곧 산채에 파다하게 퍼져서 마감동이 김선일

이 강말득의 등은 서로 수군대며 즐거워하였다. 저녁을 먹을 때 박서방댁이 상을 차리는데

말득이가 불쑥 부엌을 들어다보며 농을 던졌다.

"형수, 나는 누룽지를 좋아허우."

밥을 푸던 박서방댁이 형수라는 말에 곧 얼굴이 빨갛게 되어 돌아서는데 선일이도 들여다

보며 덧붙였다.

"형수님, 나는 푸근한 밥을 좋아허니 아래쪽을 퍼주시우." 박서방댁은 다시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돌아선 채로 부엌 안에 웅숭그리고 서 있었다. 선홍이가 마루에 앉았다가 이들의

하는 짓거리를 보고, 여자가 안된 마음이 들어 부끄러움도 잊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아니 저 자식들이 애들처럼 뭐하는 짓이여."

선일이와 말득이는 서로 어깨를 건드리거나 쿡쿡 찌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선홍이가 다

가와 그들을 목덜미를 잡으려니, 말득이가 외쳤다.

"형수, 안 말려줄 거요?"

"젠장 누룽지는 서방님 몫으루 챙기려우?"

선일이도 지껄이며 달아나니 선홍이는 그들을 쫒아가려다가 뒷전에섰던 흥복이와 감동이를

보고는 쑥스러워져서 슬며시 돌아서다가 부엌을 넘겨다보며 한마디 던졌다.

"애나 풀어놓구 하슈."

여자는 더욱 부끄러워져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어서 저리루 가요. 무슨 사내들이 부엌을 기웃거린담." 선홍이는 이제 얼굴이 지지벌겋게

되어 동무들 사이로 돌아왔다. 감동이가 눈짓하여 일부러 무덤덤히 마루에 앉았는데, 선일

이와 말득이가 상을 맞들고 오면서 또 한마디씩 하였다.

"이 가운데 고봉으로 담은 밥은 서방님 차례일세."

"아따 나두 여편네를 붙여두어야지 이러다가는 누른밥이나 한술 얻어먹기두 어렵겠는걸."

선홍이는 아예 입맛을 다시며 대꾸가 없다가 상이 앞에 놓여지자 벌떡 일어났다.

"성님 밥 먹으라구 해야지."

말득이가 받기를, "길산이 성님두 이제는 우리나 매한가지여. 형수께서 구월산에 계시는데

언제 서방님 밥상 들여다볼 틈이 있겠다고."

하는데 선홍이가 드디어 역정이 났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걱정 마라 이놈아, 나 장가들 테니까."

박서방댁은 아예 부엌에서 나오지도 못하였고, 선홍이는 짜장 부아가 돋은 듯이 쿵쾅거리

며 마루 위로 올라갔다. 선홍이가 미닫이를 열면서 불쑥 말하기를, "성님, 나 장가들라우."

하였고 길산이 되물었다.

"그래 누구허구 하려느냐?"

"누구긴 누구요. 춘천댁이지."

"그것 참... 성미가 급하구나. 총각이 어디 너 하나뿐이냐?" "깐놈들 나를 놀려대는 꼬락서

니가 장가가자면 산 호랑이 눈썹 뽑드키 가망없는 자식들이우."

길산은 껄껄 웃었다.

"그놈들이 새암이 나서 그러는 게다. 헌데 춘천댁은 이미 아이까지 낳은 과수댁이고 너는

숫총각인데 밑지는 기분은 없느냐?"

"아니 거 무슨 말씀이우, 춘천댁이 저자의 곤달걀이우. 방물전의 이바진 참빗이우. 애는 아

무나 낳는 게고, 나 대신에 박가 성 가진 이의 살림해주었으니 언년은 뭐 고각에 앉아서 사

타구니 도사리구 풍월한답디까. 다들 저어미가 되어서 이러구러 살다가 이빨 빠진 할망구가

되는 게여. 나는 춘천댁하구 구수하게 살 터이니 성님두 딴소리하지 마슈." "알겠다. 네가

나중에 물르자구 나올까봐 그랬다. 제 마음에 괴어야 궁합이라는데 네가 그토록 춘천댁이

좋다니 과연 연분은 묘하구나. 그런데 네가 막상 장가를 든다 하니 그냥 하품타령으로야

지낼 수 있겠으냐. 이번에 산채가 정돈되고 구월산 식구들도 안돈시킨 연후에 너희 가족들

에게도 통기하여 지내도록 하자꾸나."

"그럼 성님이 좀... 해주슈."

선홍이가 더 말하지 않고서 쓱 돌아앉았고 길산은 알아듣지 못하였다.

", 장가두 대신 들어주랴?"

"... 저 자식들 함부로 농치지 못하게 봉해달란 말이지요." "그래 알겠다. 어서 들어오라구

해라."

저녁밥을 먹고 나서 모두 둘러앉은 뒤에 길산이 아우들에게 말을 꺼냈다.

"이번에 선홍이가 춘천댁과 성혼을 하기로 작정이 되었다. 기왕에 나온 얘기니까 너희들두

남의 일 같지 않게 들어두어라.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산다고는 하나. 대개가

정처없이 떠다니다가 집도 잃고 혈육도 없으니 이런 적막할 데가 어디 있겠느냐. 모무들 볼

썽사나워 헛상투를 틀었으되 이건 도무지 사내들끼리 왁작거리는 것이 부허하여 못 보겠구

. 이제는 제각기 아낙을 맞아 여염의 생활을 해야겠다. 선홍이 장가간 되에 누구든지 인연

을 맺어서 안식구를 거느리도록 해라."

모무들 막상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공연히 사내끼리 둘러앉은 것이 싱겁기 짝이 없었다.

"이제는 춘천댁과 선홍이는 부부나 다름없으니, 공연히 놀리거나 농담하지 말구 아주머니

처럼 대하여라."

장본인 선홍이는 멋쩍어서 천장도 올려다보고 방바닥도 내려다보며 단전을 피우는데, 말득

이가 처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우리 끝춘이는 그럼 누구한테 시집을 보낼꼬..."

"누이가 방년 몇이우?"

김선일이 불쑥 물었다. 말득이가 대견찮게 여겨 그를 힐끗 바라보고는 묵묵부답하였다.

산이 선일에게 말하였다.

"그래 끝춘이를 자네가 본 적이 있던가?"

"본 적은 없습니다만...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길산은 선일의 은근히 바라는 눈치를 알고서 말득이에게 말하였다.

"전에두 얘기했지만 끝춘이 중신은 내가 서야겠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말득이가 별수

없이 머리를 숙였다.

"성님께서 해주신다면야 저두 할말이 없습니다."

마감동이도 새삼 장가드는 얘기가 나오고 보니 어쩐지 심란한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이사나 끝내구 보십시다."

감동이가 말하였다. 그믐께에 가서야 산채가 대강 정돈이 되었고 길산을 비롯한 식구들은

모두 구월산으로 돌아갔다. 오만석은 구월산 산채에 남고자 하였는데 마감동이도 그 생각은

같았다.

김기도 그의 고향이었던 봉산 근처로 식구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꺼려하였으므로 결국 동

선령으로 이사갈 가족이 있는 것은 길산과 말득이뿐이었다. 김기는 식구들을 탑고개에 남겨

두고 혼자서 동선령으로 가기를 원하였다. 이따금씩 은융로 가서 식구들을 돌아보고는 다시

산채로 오르면 될 것이라 하였다. 오만석이와 마감동이도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달려가

리라 다짐하였다. 길산은 산채의 식구들이 나누어지는 것을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아버지

장충과 안무당이 탐고개를 뜨기를 싫어하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구월산에 패거리를 남기기

로 하였다. 장충은 말하였다.

"우리는 이젠 다 늙었다. 또 어디로 가서 새로 정 붙이고 살겠느냐. 우리는 답고개를 떠나

지 않을 작정이니 네 처와 수복이나 데리구 가거라."

그러나 봉순이는 늙은 부모님을 탑고개에다 떼어놓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장충이 달

래었다.

"예서 봉산이 지척인데 뭘 그리 염려하느냐. 우리 걱정은 말구 네 남편을 따라 나서거라."

길산이 더디어 말득이와 선일이와 선홍이를 데리고 구월산을 떠나는 날, 봉순이는 할 수

없이 수복이를 업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 김기는 식구들을 남겨놓고 길산을 따라서 동선령

으로 향하는데, 감동이와 만석이도 일단 선홍이의 혼례에 참례하려고 동선령까지 같이 갔다.

그들이 동선령 산채에 당도한 지 사흘쯤 지나서 곧 선홍이와 춘천댁의 혼례가 이루어졌고,

선일과 끝춘이는 맞선을 보았다. 마감동과 오만석이가 동선령서 며칠을 묵고 나서 강말득이

와 함께 길을 떠났다. 말득이는 송도로 박대근이를 찾아갔다가 우대용이를 만나고 돌아올

참이었다.

 

2

봄부터 기근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사월에 변덕스러운 날씨가 폭풍과 우박을 몰고 와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극심한 보리의 피해가 있었다. 연이어 굶주린 백성들을 역병이 덮

쳐버렸고, 유월이 될 때까지 비는 한 줄금도 비치지 않았다. 이제 가뭄과 기근은 전국을 휩

쓸고 있었다. 굶주림으로 역병이 일어나고 따라서 농사를 짓지 못하며 거기에다 날씨의 변

화로 추수마저 할 것이 없게 되니 흉년은 일 년이 아니라 실상은 몇 년씩 누적되는 법이었

. 팔도가 모두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황해도 지방이 가장 심하

였다. 노상에는 양식을 구하러 다니다가 쓰러져 죽은 자의 시체가 즐비하고 버려진 아이들

이 무리지어 대처를 떠돌았다. 기운이 남은 자는 곡식 한두어되를 빼앗기 위하여 함부로 사

람을 죽이곤 하였다.

흉년의 붉은 해가 메마르고 갈라진 들판을 모두 태워버릴 듯이 이글거렸고, 빈 마을에는

굶어죽은 자와 역병으로 쓰러진 자의 시체들만이 까마귀와 더불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을마다 진휼한답시고 관가 앞에 죽솥을 두어 찾아오는 기민에게 솔잎과 쌀가루 섞인 진휼죽

을 한그릇씩 먹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또한 자식을 팔고, 가족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살 길을

찾다가 스스로 노비가 되는 것을 자청하기도 하였다. 부자들은 양식을 광 속에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굳게 대문을 걸어 잠그고서, 하인배로 하여금 기민이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엄중히

단속시켰다.

간혹 그 가운데 진휼을 원하는 이가 있었으나, 대개는 공명첩을 바라고 하는 일이라 고작

해야 쌀 수십 석이었으며, 그것으로는 한 고을의 백성들이 사나흘 동안 죽으로 연명할 뿐이

었다. 어떤 곳에서는 명년의 농사에 직접 일하게 될 장정들 중심으로 구제를 하여 어린아이

와 노인들이 많이 죽었다. 공명첩과 쌀을 바꾸려는 자도 제법 많아서, 흉년에는 찰방, 별좌,

판관, 첨정, 부정, 통례정, 첨지, 동지 등등의 가설직의 사태가 났고, 양민은 차츰 천민으로,

돈 있는 자는 자꾸만 양반으로 상승되었다. 이제는 돈 가진 자가 천자문 한 권을 읽지 못하

였어도 관 쓰고 도포 입어 스스로 양반임을 자처하게 되었다.

대개 양민으로서 가설직을 살 정도로 재산을 모은 자들이란, 지방관리나 토호들에게 붙어

서 제 주변의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짓밟고 빼앗아 대지주가 된 사람들이었다. 재물뿐 아니

라 공명첩까지 얻게 되었으니 비록 흉년에 수십 여 명에게 죽사발을 먹이느라고 쌀을 약간

축냈다고는 하나, 명년부터는 생존자들을 동원하여 더 큰 재물을 모을 권력까지 얻게 된 셈

이었다.

유월의 막바지에 그야말로 천지는 이위화격으로 불타는 듯하였다. 해안지방에서는 게나

잡어를 주워다가 끓여 먹기도 하였고, 깊은 산속에서는 열매를 얻기도 하였으나, 역시 농사

를 짓던 마을 마다 굶주림이 혹심하여, 뱀이건 개구리건 닥치는 대로 잡아먹다가 기운이 없

고 지쳐서 나무 그늘에 누워 서서히 죽어가곤 하였다.

서흥 중부지방의 객관인 용천관 앞의 넓은 마당에는 임시로 기민을 위한 진휼처가 열렸다.

객관은 낡은 건물이라 기둥과 서까래가 썩고 문이 떨어져 나갔으며, 기와가 파손되어 관원

은 아무도 유숙하지 않아서, 문루와 동헌 서헌에는 유량민들이 땡볕을 피하여 이리저리 눕

고 앉았다.

동헌 앞에 커다란 쇠솥셋이 걸려 있었고, 야전이 친히 관노들을 데리고 나와서 인근 부락

에서 몰려나온 자들의 호패를 점검하고 죽을 퍼 주고 있었다. 이곳에 호적이 없는 자들은

뒤로 미루어지는 것이었고 동네마다 저희끼리 패를 짜두어야만 하였다. 따라서 늦게 오는

자들이나 끼이지 못한 자들도 뒤로 밀려나게 되니, 자연히 언성도 놓아지고 욕설이 오가는

것이었다. 겨울부터 봄까지 변덕스런 날씨로 하여 싹도 내기 전에 농사의 절기가 지나가버

리자 곧이어 입춘이 지나면서부터는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봄은 영영 없어져버렸으며 곧 염천과 같은 무더위가 다가와 그나마 모판을 바라던 백성들

의 가냘픈 기대마저 말려버리고 말았다. 논과 밭에는 자라나는 것이 전혀 없었고 열병까지

나돌아서 들판에는 여름 절기에 아무것이나 생산해내려고 꾸물대는 사람의 자취도 끊겼으며

천지가 온통 붉은 땅뿐이었다. 이제는 풀과 나무뿌리를 캐러 다니는 자들도 없었다. 쑥도 곡

식이 없으니 캐나마나였지만, 명아주 비듬 송화도 절기가 다 지나자 먹을 수도 없이 시들었

고 샘과 개천은 말라 버렸던 것이다. 그래도 죽을 얻어먹으러 나온 사람들은 봄에는 식량이

조금 남아있던 부류였고, 먼 곳에서 온 유민들은 이미 오래 전에 식구들과 헤어져 걸식하며

다닌 지가 오래된 자들이었다.

"어느 동네여?"

나졸이 구기를 솥에 넣어 휘휘 저으면서 앞으로 나오는 자에게 물었다.

", 목감방이올시다."

"거긴 아까 지나갔어. 이따가 죽이 남거든 오고 시방은 율리방 사람들만 앞으로 나와." "

아이구... 간신히 십리 길을 왔는데 이거라도 받아다가 아이들을 먹여야 합니다." 머리가

흐트러지고 안색은 이미 부황이 들다 못해 시꺼멓게 죽은 중년의 사내가, 앞으로 내밀었

던 양푼을 솥 안에 막무가내로 넣으려 하면서 사정하였다.

"저리 못 가? 어디다가 들이밀고 지랄이야."

옆에 섰던 관노가 그를 억지로 줄에서 끌어냈고 뒤에 섰던 자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합

세하여 밀어냈다.

"율리방입니다."

나졸이 구기를 담가서 두 번을 퍼내어 그의 내밀어진 그릇에 쏟았으나 그는 빠져나가지 않

고 사정하였다.

"마누라가 누워 있어 데리고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한 몫만 더 주시우." 그러나 나졸은

구기로 솥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일인 일식일세. 자 다음..."

"아이들도 있습니다."

"내일부터 데리고 나오든지 이따가 저녁때 모두 데려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민은

한정없이 먹으려 하고 구휼미는 이리저리 빼돌려 재고가 모자라, 권분이라하여 관아에서 지

방의 부자 들에게 권하여 구휼미를 내도록 해서 겨우 끓이는 시늉이나 하는 때문이었다.

진곡이 따로있어야 하건만 대개의 수령들은 갖은 명목으로 사복을 채우고 겨우 진휼하는

시늉만 내게 마련이었다. 줄에 끼여 있지도 않던 노파 하나가 깨어진 사기대접을 들고 반

열에 내달러오며 사정하였다.

"나으리, 벌써 이틀이나 아무것도 넘기지 못하였소. 한 구기만 떠주시오." "호적 대조는

하였는가?"

"저희는 신계에 살다가 식구들이 먹을 것을 찾아 모두 흩어지고, 저하고 손자만이 남았수."

나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관노가 그래도 동정하며 말하였다.

"신계 관아로 가시우. 왜 여기 와서 죽을 달라고 허우, 우리 고을 사람들은 먹을 것도 없는

."

"되돌아가려도 걸을 기운이 있어야 가지."

"저리 비켜요. 어이, 율리방은 다 끝났다."

이러한 혼란과 애소가 죽솥 앞에 끊임이 없는데 아직도 기민의 행렬은 동헌 앞뜨락을 지나

문루 아래까지 뻗쳐 있었다. 모두들 땀을 흘리며 그늘에 옹기중기 모여앉아 제각기의 그릇

을 들고 죽을 마시는데, 보릿겨와 모래가 섞인 싸라기에 솔잎을 잘라 넣어 멀겋게 끓인 보

리죽이었다. 요행히 한 그릇을 먼저 타먹었던 타관 사람이 말하였다.

"평산에서는 사또가 바른 이라 흰죽에 푸성귀를 넣었는데 여긴 지독하구만." "진곡으로

남겨둘 것을 모두 사용으로 써버렸을 테지." "이나마도 하루 두 번밖에 주지 않으니,

양 수십 리 길을 걸어다닐 기력도 없어 온 가족이 아예 여기서 노숙한 지 닷새째요."

말하면서 그는 뒷전에 모여 앉아 죽을 마시는 네 사람의 처자를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이

가볍게 비워진 죽그릇을 손가락으로 훑어 빨고나서 탄식하였다.

"망할 놈들... 볏모를 다 뽑으라더니 메밀을 심으라지 않소. 오늘부터 모두 동네로 쫓아낸다

고 합디다. 종자도 안 주면서 덮어놓고 메밀갈이를 하랍디다." "아무것나 종자가 있었더면

그것으로 온 식구가 메밀죽이나마 트림이 나오도록 먹어치우겠다."

"이 달 안을 무엇이든 심지 않으면 가을까지 진곡도 내주지 않는답디다." "이제 추수는

아예 그른 판이니 겨울이 오면 떼죽음이 날 게요." 그들은 한결같이 누렇게 부어오른 얼

굴 위로 콩알만한 땀을 그득히 흘리고 있었다. 죽그릇을 가진 자는 저희끼리 둘러앉았도,

나마도 못 얻어먹은 자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땅바닥에 눕고 문루의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여긴 활빈도가 나오지 않으려는가."

"그게 무어요?"

젊은 사내가 중얼거렸다.

"평산이나 신계에는 진작에 활빈도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나타나 부잣집을 털고 곡식을 나

누어주었다고 합디다. 노상에서 어떤 식구들을 만났는데 너 말 가웃 되게 얻어서 여름을

나게 되었다고 기뻐합디다. 떡해 먹고 이밥 해 먹을 분량은 못 되지만 이같은 흉년에 그만

했으면 아무거라도 섞어서 끼니를 때울 수가 있겠지."

"가히 상제께서 보내신 천군이구려. 벼슬아치들은 아닐테고..." "여보, 벼슬 가진 놈들이

제 밑구녕이 느슨한데, 미쳤다고 우리 대신 부자를 턴단 말이우." "그래두 어사라든가..."

말은 꺼냈던 자는 갑자기 기분이 잡치는 모양이었다.

"... 말 못할 손일세. 여보, 가재는 게 편이라구 어사또가 무엇이 답답하여 자기네에게 어

여삐 하는 토호를 들이치겠소. 고을 원이나 어사나 그게 그놈들이야. 우리가 욱하여 들구일

어날까봐 미리 저희끼리 단속을 하는 게여."

말을 가로막힌 자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쉬이, 큰일날 소리를 하는군. 아무리 허기가 졌다구 일가 구몰할 말을 함부루 내대지 마

."

"제미랄 것, 죽사발도 비었지, 배는 이젠 건더기두 없이 바람만 가득 찬 통장고지, 남아봤

자 목구넝이구 혓바닥인데 사설이나 늘어놓다가 뒈어지는 게 났소." "그러니까 벼슬아치

도 아니고 군사도 아닌 사람들이 쌀을 막 나누어준다 그 말이오?" 타는 듯이 바라는 시선

으로 다가앉으면서 다른 사내가 물었고 타관에서 온 자가 말하였다.

"우리네하구 똑같은 사람들이라니까. 아주 상것들이 분명하답디다. 하두 날쌔고 기운들이

장사라 관군들은 모두 대적하지두 못하구 달아난다구 그럽디다." 징 치는 소리가 들려오

기 시작하였다. 아전은 이미 돌아갔고 나졸들이 관노들을 재촉하여 죽 나누어 주는 일을

폐하고 있었다. 행여나 하고 늘어섰던 자들이 빈 그릇을 흔들며 하소연하였으나 그들은 객

관을 떠나고 있었다.

"이따가 저녁참에들 나오슈. 다 끝났으니까."

죽도 못 얻어먹은 자들은 다시 뙤약볕을 피하여 객사의 처마밑이나 나무 그늘을 찾아 흩어

졌고, 동헌 앞마당에는 비워진 가마솥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솥에 늘어붙어 바닥과 가에 남은 죽의 물기를 손바닥으로 훑어서 부지런히 빨았다.

짓도 자리 다툼이라 밀치고 넘어지고 하는데, 아직은 체면이 남은 자들이 멀찍이서 바라보

며 혀를 차는 것이었다.

"용천관이 아니라 아귀관이로구나."

"이러다가 입추 전에 살아남을 사람 하나두 없겠네." 아까부터 누각의 마루 아래편 바람

맞이가 되는 기둥 뒤에 질펀히 누워서 자고 있던 사내가 부스스 깨어 일어났다. 그는 죽도

못 얻어먹었던지 그릇도 없었고 땟국이 흐르는 조그만 보퉁이를 베고 누었던 것이었다.

의 맞은편에는 그 사내와 발바닥을 맞댈 듯이 길게 뻗고 잠든자가 보였다. 두 사람이 한

결같이 봉두난발에 다 해진 무명옷 차림인데, 어디서 참새나 개구리라도 잡아 구워 먹었는

지 얼굴에 검정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먼저 깨어난 사내는 맞은편 사내의 발을 툭툭

건드렸고, 그가 돌아누우려다가 알아채고는 벌떡 일어났다.

"저 위로 올라가보아."

먼저 깨어난 사내가 손가락을 세워문루의 마루 판자를 가리켜 보이자, 그는 눈을 비비면서

죽 솥 부근을 돌아보았다.

"다 갔군."

그는 일어났는데 몸집이 크고 가슴에 가득한 털이 고름도 없이 돌띠만 질끈 맨 저고리 사

이로 시커멓게 드러나 보였다. 남은 사내는 그가 두고 간 물건을 제 보퉁이 옆에 놓았다.

적을 둘둘 말아 새끼줄로 매었으니 아마도 그것이 깔고 덮고 하는 침구인 모양이었다. 사내

는 아까부터 제 등뒤에서 지껄이고 있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듣고 있

었던 모양이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우리처럼 굶주린 백성은 분명한데 무리를 짓고 감히 일어난 것뿐

이겠지요."

"아무렴, 활빈도가 따루 있나. 이판이 사판이고 칼 물고 뜀뛰기인데." "너 좋고 내 좋

..."

"서흥서 누가 제일 부자고 인색하던가."

"그야 뭐 따루 있어? 도상방 조동지 댁이지. 세평방에서 수하방으로하여 동현령까지 자기

땅만 밟고 온다는 사람이니까."

"이번에 진미 좀 냈을까?"

"어이구 진미가 다 무에야. 그자가 이미 오래 전에 권분에 응하여 동지직을 따냈는데, 사또

의 봉물이라면 떠 몰라도 미곡 한 섬을 안 냈을 걸세." 하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밭은기침을

터뜨리더니 이윽고 숨넘어가는 듯한 소리로 변하였다.

손자를 데리고 나와 죽을 얻어먹지 못하였던 노파였다. 이윽고 토사가 일어나는지 가까스로

머리를 쳐들고 구역질을 하였다.

"또 한사람 가는군..."

애기를 끊으며 누군가 무심하게 지껄였다.

"잔치 음식 먹구 체했다면 평위산 한 첩으루 내려갈 테지만, 이 기근에 쌀 한톨을 구경

못했을 터이니 필시 더위 먹고 빈속에 물을 많이 들이켰겠군. 부황 나고 물에 체하면 죽는

게여."

과연 노파가 몇번 더 자지러지게 토하는데 말간 물기가 한없이 쏟아져 나오는 모양이었다.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기운이 없어 큰소릴 울지도 못하고, 어른처럼 멀거니 바라보

며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기둥에 기대어 여러 사람들의 애기를 듣고 앉았던 사내

가 앉은걸음으로 다 가갔다. 아이는 무력하게 제 할미의 손을 잡고 울고 앉았고 사내가 부

축하여 끌어올렸다.

"놓아두시우."

노파가 가냘프게 중얼거리는데, 바람맞이를 하고 앉으니 한결 나은 모양이었다. 노파의 이

마에는 땀이 번져 있고 입술에 백태가 끼어 말라붙었다. 사내가 봇짐을 끌어다가 손을 쑤셔

넣더니 쌈지 같은 주머니에서 한약 비슷한것을 한줌 꺼내었다. 그가 아이에게 그릇을 내어

주며 부드럽게 일렀다.

"가서 물을 떠오너라."

아이는 할머니만을 바라볼 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구황하는 황랍환이다. 이걸 잡수시면 곧 나으신다." 그러나 노파는 아이의 손을

꼭잡고 놓지를 않았다.

"그만두오. 내가 더 살아서 무얼 하겠소. 저것이 이제 노중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아 죽고

말터이니, 먹을 것이나 있거든 내 보는 앞에서 저애를 먹여주었으면 그게 약이지요." 사내

가 말하였다. 그는 노파의 빈 사발을 들고 문루를 나서서 숲을 향하여 걸었다. 시냇물에 이

끼가 끼고 물때가 덮여 먹지 못하겠고, 아무래도 샘까지 찾아가야 하였다. 마침 샘가에는 그

와 비슷하나 폐의파립의 선비와 구종배인 듯한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쉬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선비가 물었다.

"장두령, 일이 무르익어가오?"

"기다리구 있으시우. 지금 흥복이하구 선흥이가 슬슬 부추기구 있소." 샘으로 물을 뜨러

나온 사내는 길산이었고, 그와 나란히 자는 체하다가 문득 위로 올라간 사내는 선흥이,

리고 사람들에게 다른 고장에 활빈도가 나타났다고 떠들던 사내가 흥복이였던 것이다. 샘가

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는 김기와 말득이였다.

"선일이는 어디루 갔수?"

"방금 객관의 형편을 살피구 오겠다며 그쪽으로 올라갔네." 길산의 물음에 김기는 대답하

고 나서 말득이와 길산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역시 부잦집보다는 관창이 더 낫지 않을까?"

"우리 마음대루 할 수는 없는 노릇이우. 이 고장 사람들의 원한이 가장 많은 쪽으루 택해

야겠지. 저들이 바라는 대루 하십시다. 들어보니 조동지라는 자가 있는 모양인데 제각기 그

를 들어 말하는 것이 서흥에서는 지독한 짓을 많이 저지른 모양입디다." "그렇다면 무리

가 하는 대루 따라 가야겠군. 우리네야 팔짱 끼구 뒷전에 있다가 어지러운 일만 바로잡아

주면 될 테니까."

길산은 샘에서 물을 떠가면서 말득이에게 일렀다.

"너는 우리가 이곳을 떠난 뒤에 관군이 쫓아오면 선일이하구 둘이 남아서 지체시키도록 해

."

" 아무 일도 없으면 어찌할까요?"

"그러면 일단 우리 뒤를 따라오너라."

길산이 물을 떠가지고 용천관의 문루 아래로 돌아오니, 노파는 벌써 기진하여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황랍환을 먹이려 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어버렸던 것이다. 노파가 가물가물

한 시선으로 길산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새끼를... 잘 부탁허우. 제발 거두어서 살려... 주시우." 노파의 턱이 바르르 떨리

더니 눈이 고정되고 모든 동작이 멈추었다. 길산이 눈을 내리쓸었고, 아이는 소리없이 울

기만 하였다.

"여기 사람이 죽었소..."

길산이 그늘의 이곳 저곳에 누워 헐떡이는 사람들에게 외쳤으나, 모두들 머리를 돌려 두려

운 듯이 한번씩 넘겨다보고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자들은 슬그

머니 일어나 되도록 먼 곳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아니... 아무리 굶주리고 지쳐 있다 하나 우리는 하늘에서 낸 곡식으로 밥을 먹고, 두 발로

땅을 딛고 서는 사람인데 인도가 이럴 수 있단 말이오. 이렇게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고

어찌 흉황에 살아남기를 바라겠소."

그러자, 저쪽에서 애기를 나누던 사람 중의 하나가 고개를 들고 대꾸하였다.

"여보, 원래가 인정이란 저 살고 남지기에서 나오는 법인데, 지금 모든 사람의 코앞에 주려

죽은 일이 닥친 형편에 인정과 도리 따위가 무엇이란 말요. 만약이 땡볕에 그 할멈을 끌고

나가 땅을 파고 묻는다 치면, 한 사흘 버틸 원기를 모조리 뽑아버릴 게 아니오. 내 몸 하나

가누기도 벅찬 때에 오죽하면 그 사람들을 가족들이 버렸겠소." 그러나 길산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였다.

"그러면 이대로 앉아서 멀건 보리죽이나 마시면서 차례로 죽어가기를 바라겠소, 아니면 나

허구 같이 쌀을 가지러 가겠소?"

그의 말이 끝나기도전에 여러 사람들 틈에 끼여 있던 흥복이 일어났다.

"여보, 쌀만 구할 수 있다면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소. 어디가서 곡식을 구한단 말

이우?"

"나야 타관 사람이니 어찌 알겠소마는 아무리 흉년이라 하여도, 오십 결이 넘는 토지를 가

진 부자가 어느 고을이나 있게 마련이데, 그만하면 수만 석 지기가 될 것이니 웬만한 흉년

에도 창고는 가득 차 있을 것이오. 이미 이렇게 되면 어느 한 사람의 곡식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것이니 갖는 자가 임자요."

길산과 흥복이 주거니 받거니 수작들을 벌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길산이

노파의 시체를 팔에다 가볍게 들어올리고는 마루 밑을 나와서 동헌의 마당 가운데로 걸어나

갔다.

문루 위에서는 선흥이가 제 가슴을 두드리며 떠들고 있었다.

"이 천동도 지동도 모르는 사람들아! 굶어죽기가 정승 지내기보다두 어려운 법인데, 지척에

다 백옥 같은 양식을 두고 멀건 보리죽을 삼키느라구 다쿠구들 섰어. 느이들은 사람이 아니

라 굼벵이, 무숙이, 바구미, 딱정이, 설설이, 오살이, 쥐며느리들이다. 에이 나는 못 참겠다.

도상방 조동지 네 집에 가서 창고를 부수고 쌀을 꺼내와야겠다." 선흥이가 쿵쾅거리며 누

각에서 내려오자 사람들은 흘린 듯이 그뒤를 따라 내려왔다. 지쳐서 늘어져 있던 노약자들

도 끈이 달린 듯이 무리들의 뒤를 따랐다. 흥복이가 외쳤다.

"도상방으루 몰려갑시다. 오랜만에 이밥을 메어지게 먹어봐야지. 활빈도가 따루 있겠소.

은 놈들이 먹구 살려는 게 바루 활빈도여."

문루의 마루 아래에서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몰려나왔고 처마밑에 늘어졌던 사람들도 천천

히 일어났다. 그들은 비어 있던 마당을 금방 메웠고 뒷전에서 계속 말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길산은 주림에 죽은 노파의 앙상한 시신을 땅 위에 내려놓았다.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아이

가 길산의 곁으로 왔고 길산은 자연스릅게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이 아이는 돌볼 사람도 없으니 관가에서 끼니라도 먹인다면 국법대로 노비가 되고 말 거

. 관가에서 거두어 돌보는데 사십 일이 넘는 자는, 장정과 노약을 불문하고 관노로 박아도

되게 되어 있소이다.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하천으로 살아남기를 도모하는데, 지척에 살길을

두고 서로 사람의 도리까지 저버려서야 될 말이오? 인륜은 대저 형편에 따라 가장 합당한

경우를 쫓는 것이오. 조동지라는 이가 미곡을 수없이 창고에 쌓아두었다 하니 그것을 찾아

먹읍시다. 이는 필시 평년에 우리의 작료를 받아 모아둔 것이 분명하니 우리들의 것이외다.

우리는 수백의 입이고 그자 는 제 한 입을 위하여 편히 보료에 기대앉아 창고에 드나드는

생앙쥐나 염려하고 있으니, 어찌 천지가 바르다고 하겠소. 이 길로 도상방으로 가서 쌀을 꺼

냅시다."

", 가자. 도상 방으로 가자."

선흥이가 군중의 틈에서 외치며 용천관 앞마당을 빠져나가는데 그뒤로 많은 사람들이 우르

르 따라나갔고,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꾸역꾸역 움직여 나가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기운이

남고 젊은 축들은 훨씬 앞서 갔으며 노약자들은 바야흐로 이밥을 배불리 먹는다는 헛것에라

도 씌운 듯이 발을 끌며 나아갔다.

어는덧 동헌 마당에는 길산과 아이와 노파의 시체만이 남았다. 아에 움직일 수 없는 사람

들은 아직도 그늘에서 지쳐 누워 있었으나, 그들중에도 서로 부축하여 군중들의 뒤를 따르

려는 자들도 있었다. 김기와 말득이가 선일을 앞세우고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성님은 나허구 함께 갑시다. 너희는 우선 시체를 묻고, 이 아이를 수습해두어라. 우리가

떠나고 한 식경쯤 되도록 관가의 기척이 없으면 곧 뒤를 따라오도록 해라." 길산이 선일과

말득이에게 이르고는 김기와 함께 도상방을 향하였다. 선일이와 말득이는 주변에 즐비하

게 버려진 사기 그릇 따위를 집어들고 노파의 시체를 맞들고 용천관을 벗어났다. 길 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농로에서 비켜 나무가 뜸한 풀숲에 시체를 내려놓고는 사기그릇을

깨어 둘이서 땅을 팠다. 그들도 힘에 부쳐서 벗어붙인 잔등 위에 방울만한 땀이 가득 솟아

번질거렸다.

"어이구 힘들어... 하루 두 끼 처먹고는 도저히 못할 노릇일세." "누가 아니래, 술 한 잔

을 입에 대어본 지가 벌써 몇 달째야." 선일과 말득이는 번갈아 쉬어가며 땅을 파헤쳤다.

마른 땅이어서 먼지가 풀썩거렸다. 그들은 초여름부터 길산이 내린 율에 따라 하루에 두 끼

의 밥밖에는 먹지 못하였고, 산채에서는 따로이 절량하는 독을 두고 그나마 덜어내는 것이

었다. 녹림당이란 생산하는 자가 아니니 뜻이 없으면 백성의 적이라는 것이었다. 흉년에 녹

림의 무리가 옳은 행적이 없다면 그는 역병보다도 더욱 무섭게 백성을 해치리라는 것이었

. 그들은 말 두 필에 행자를 싣고서 한 달 전에 산채를 떠나 해서의 곳곳을 쏘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곳의 부잣집과 사창을 털었다. 그러나 언제든지 그들은 굶주린 백성들

을 통하여 그런 일들을 해냈다. 이제 두려움은 빈창자뿐인 백성들뿐만 아니라 재 물을 많

이 가진 자들 일수록 견디기 힘든 계절이 되 어가고 있었다. 길산이네가 다녀간 뒤로 평산

에서는 두 부자가 아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비우고 감영이 있는 해주로 피난하기도 하였

.

"애야, 거기 앉아 있거라."

아이가 칭얼거리며 그 자리를 떠나려 하자 말득이가 당황하여 아이를 잡아 앉히고는 허리

에 전대 비슷이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껍질째로 볶은 보리를 한줌 꺼내어 내밀었다.

", 내 길양식이니라."

아이가 앙상한 조막손으로 그것을 움켜 재빠르게 입안에 털어 넣는 것을 보고는 선일이도

자기것을 한줌 꺼내어 주었다.

"너는 틀림없이 우리 같은 녹림당이 될 게다."

혼잣말 비슷이 중얼거렸고 말득이가 되물었다.

"녹림당이라니 어린것에게 당치두 않네."

"그러면 노상에서 부모를 잃고 굶주림 가운데 혼자 남아 할미의 시신을 묻은 적이 있는 아

이가 어찌 양민의 생활을 하겠나. 나두 춘궁의 긴긴 날을 양지쪽에서 해바라기하면서, 늘 우

리에게 납료를 받아가던 관차의 목을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그자들의 대갈통 비슷해 보이

는 돌담의 한 모퉁이에다 자갈을 던져 맞추곤 했었지." 두 사람은 노파의 시신을 맞들어

구덩이에 누이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득이가 아이를 먼저 길가로 데려간 뒤에 선일이가 흙을

덮었다. 아이는 제 할머니가 드디어 땅속에 묻힌 것도

아는지 모르는지, 얼굴이 젖은 채로 보리를 움켜 넣고 있었다.

흉년이 돌아올 적마다 아이들과 노인들은 이곳 저곳에 내버려졌다. 기근 뒤에 살아남아

 

일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흉년이나 난이 일어날 적에 구멍 뚫린 시루

는 아이들을 버리는 도구가 되었으니, 그 안에서 숨을 쉬며 짐승에게 먹히지 말고 고이 죽

으라는 뜻이었다. 당시 북관에서는 맏이를 낳고 나서 그 다음에 나오는 아들은 죽이는 습속

도 있었으니, 조정에서는 이러한 처참한 습속은 살기가 워낙 어렵기 때문이라고 시인하였다.

딸은 색상들이 사러 오면 많은 무명과 바꿀 수 있으나, 아들은 변방에서 군적에 올라 끊임

없이 군포를 물어야 하고 부역에 시달리게 하는 액덩어리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정들기 전

에 죽이려니 갓난아이 적에 생매장을 하는데, 아버지는 구덩이를 파고 어머니는 마냥 울어

서 곡성이 아닌 밤중에 들판을 울린다는 것이었다. 장사가 나면 나라에서 알기 전에 스스로

죽여 없앤다든가 하는 일은 사실은 굶주림 때문에 생겨난 풍문일 따름이었다. 먹고 살기에

도 힘든 집안에 아이가 생겨나면 어깨에 비늘이 돋친 아이가 나와서 나라를 근심하여 죽여

없앤다고 핑계를 대는 것이었다. 이미 인륜을 따질 계제의 삶이 아니었다.

말득이는 아이를 업고서는 뒤처져 내려오니 불볕이 내려앉은 용천관에는 관리라고는 전혀

내비치기조차 아니하였다. 그들은 어디선가 시원한 곳에서 땀을 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쫓아나올 것 같지 아니하군. 뒤쫓아 가세."

선일과 말득이는 도상방을 바라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가다가 보니 무리를 쫓아가다 뒤떨

어져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길바닥에 쓰러진 자도 있었다. 도상

방까지가 삼 십 리 넘는 길이라 도중에 지쳐서 뒤떨어진 이들이 많았다. 말득이와 선일이는

나무 그늘에 앉아서 헐떡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 쌀을 준다는데 왜 이러고들 있수?"

"아이구, 입술이 타구 다리가 휘청거리며 눈앞에 서리가 보얗게 어리는데 걸음을 뗄 수가

있어 야지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아무튼 조동지네로 해안에 당도하면 쌀을 나누어준답디다." "남들은 몰려가서 난입을 하

든지 창고를 부수든지 여하튼 곡식을 낼려구 애를 쓸 터인데 이러구 들 앉았단 말요?"

말득이가 못마땅하여 그들에게 핀잔을 주었고, 중년 사내가 대답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난입이 아니라 아예 그 집구석에 불을 확 싸지르구 싶소. 우리가 그 집의

소작 을 지낸 지가 벌써 이대째요."

말득이와 선일은 두말 못하였다. 저렇게들 애기할 적에야 포한 맺힌 온갖 사연이 쌓여

 

있을 터 였다. 사람들의 말없는 행렬은 동현령 어름을 지나 도상방에 이르고 있었다. 그들은

선적진의 군영에서 동쪽으로 우회하였으니 관군과 일부러 충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

. 맨 앞에는 흥복이 서고 그 뒤로 사람들의 무리가 따랐고 선흥이와 길산은 그들 틈에

끼여 있었다. 김기는 행렬에서 조금 떨어져서 천천히 따라갔다. 치산골은 낮은 야산을 등에

지고 남향받이에다 작은 내를 앞에 끼고 자리잡았으니 과연 이 근처의 토호가 가택을 정할

만한 동네였다.

거의가 쇠락한 초가집인데 동네의 제일 위편에 기다란 반화방담이 보이고 날아갈 듯한 솟

을대문을 낀 칠량짜리 기와집의 학 날개 같은 추녀가 보였다. 그들은 곧장 조동지네 집으로

트인 마을 중앙의 길로 밀려갔다. 한두엇씩 내다보던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하여 여기

저기에서 몰려나왔다. 동네 사람들은 대문 앞에 이르러 옹기종기 둘러선 사람들을 멀찍이서

구경하고 서 있었다. 그들이 난민이라는 것은 옷꼴이나 제각기 간편하게 들고 있는 자루나

식기봇짐 따위로 한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이 가담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만은 아무리 흉년이라 할지라도 겨우 버틸 만한 양식은 있었으니, 조동지가 지산골 자

기 동네에는 진작부터 진곡을 냈던 터였다. 바로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술에 떡에 고기 반

찬을 혼자서 해먹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옛말에 이사를 가려먼 부잣집 행랑 근처로 가

라듯이, 그래도 동네 사람들은 기근을 면했던 것이었다. 몰려들기는 하였으나 워낙에 집꼴이

대단하여 차마 매문을 밀치지 못하고서 주춤거리는 데, 앞장섰던 흥복이가 대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라, 문 열러!"

사뭇 두드리니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틈을 엿보는 눈치였다. 아마도 하복들

인 모양인데 바깥에 빽빽이 늘어선 무리를 보고는 남님으로 짐작하여 기겁을 했던 모양이었

.

"이놈들, 물러가지 않으면 모조리 잡아서 치도곤이를 앵기겠다." 하면서도 그들은 안에서

우왕자왕할 뿐이었다. 사다리를 놓고 올랐는지 담 위로 수노인 듯한 늙수그레한 자가 얼굴

을 내밀었다.

"웬놈들이 백주에 몰려와서 난동이냐, 여기가 어디라구 감히..." 수노는 큰소리를 치기는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의 이글대는 눈총을 혼자 받으려니 정수리께가 서늘하였던 모양이었

.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는 얼굴을 들고 그를 지그시 노려보

고 있었다. 수노가 뒷전에서 웅기중기 구경하고 섰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시 외쳤다.

"게 뭐하구 섰나. 이것들을 동네에서 냉큼 쫓아버려." 동네 사람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나

며 그중 젊은 자들 몇이 작대기를 들고 쫓아나오는데, 선흥이와 길산이 뒤에 섰다가 마주

섰다.

"성님은 가만 계슈."

성흥이가 웃통을 벗어젖히면서 마을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벌써 누가 보기에도 선흥이의

어깨와 팔뚝에 용이 어린 듯 꿈틀거리는 것이, 과연 사내자식이 밥 먹고 힘 쓰려면 저만은

해야겠다고 느낄 만큼 그럴 듯하였다.

"아서라... 누구든지 거기서 세 걸음만 떼면, 다리몽갱이를 분질러서 머리에 이게 해주지."

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멍하니섰는 총각의 작대기를 덥석 잡았다. 상대가 놀라서 지레

겁을 먹으며 작대기도 놓고 물러났고, 선흥이는 그것을 두 손아귀에 쥐어 어깨에다 약간 힘

을 주더니 삭정이처럼 부러뜨렸다. 아무리 몽둥이라 하나 굵기로 보아서는 무릎에다 대어도

한참힘을 써야 할 텐데, 그것을 허공에서 잡고 간단히 꺾어버리는데야 누가 보아도 완련이

대단하였다.

"좀 비켜요 비켜."

마을 사람들의 사이를 비집과 선일이와 말득이가 나타났다.

"김서방! 저놈 입 좀 닫아놔라."

길산이 빙그레 웃으며 담장 위로 내밀어진 조동지네 하복의 머리를 눈짓하였고, 선일은 땅

바닥을 한바퀴 휘둘러보고서는 맞춤한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선일이는 돌멩이를 두어 번 손

바닥에서 추스르더니 한 발을 내디디며 던졌다.

"어이쿠나..."

외마디 소리와 함께 담 위에는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돌이 그의 면상에 들어붙는 꼴을

보았던 것이다. 아마도 사다리를 안은 채 뒤로 나가떨어졌을 터였다.

"문은 부숴버리자."

그제사 흥복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굶주린 무리들이 우 하니 달려들어 제각기 대문을

떼밀었다.

"전부 비켜. 그깐 대문 하나를 가지고..."

선흥이가 무리를 헤치고 다가섰다. 사람들은 설마 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선흥이는 두 손에

침을 뱉더니 대문에다 갖다 붙였다. 그리고는 한 발을 내딛고 다른 발은 버티면서 대문을

밀기 시작하였다. 어깨가 잔뜩 부풀었고 몇번인가 미끄러지곤 하였으나, 선흥이는 잠깐 늦추

어다가 애라 하면서 일시에 힘을 넣었다. 우지직하는 소리가 들렸다. 빗장이 뻐개지는 것

같았다 선흥이는 이번에는 돌아서서 등을 대고 온 몸을 밀어붙였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들

리더니 문이 양쪽으로 벌어 졌다. 사람들은 모두 몰려들어 대문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당에서 주춤거리던 하인배들이 저 마다 작대기나 쇠스랑 괭이 따위를 휘두르며 사람들을

몰아내려 하였다. 먼저 들어갔던 사람들 중에는 머리나 허리를 얻어맞고 쓰러진 자들도 있

었다.

"헛간에 작대기가 많이 있소."

흥복이 대문간의 헛간에서 고무래를 들고 나오며 소리쳤다. 그들 모두가 농기구를 밥숟가

락처럼 써오던 농투성이들이라 제각기 헛간에 몰려가 각종 작댁와 곡괭이, 삽에 낫에다 심

지어는 절구공 이까지 이 손 저 손 들고 나오니 하인배들은 이어 중문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채 중문 을 닫기도 전에 굶주린 자들이 강풍처럼 몰아쳐 들어갔다. 일단 가택 난입

하여 벙장기삼아 농기구를 잡은 기민들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세였다. 앞장

서서 조동지네 사랑채 와 안채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은 대략 오십여 인이 넘었고, 그뒤로도

백여인이 꾸역꾸역 몰 려들어갔다. 하인배 들은 모두 성한 자가 없었다. 마루 밑에 기어들어

숨는 놈, 변소에 뛰어들어 문고리를 잡고 떠는 놈, 하녀들의 방으로 뛰어들어 함께 홑이불을

뒤집어쓰는 놈, 마당에 엎드려 혼절한 채 자빠진 놈, 장독간에 올라 빈독에 상반신만 박고

 

있는 놈, 하여간에 각양각색이었다. 길산은 맨 뒤에서 따라 들어가다가 말득이에게 말하였

.

"너는 여기서 망을 보구 있거라."

길산은 김기와 더불어 사랑채로 나아갔다. 온통 마당과 마루마다 난민들이 뛰어들어 법석

이고 있었다. 아무리 제정신이 없으나 순박한 촌사람들이라 감히 내정 돌입은 못하고서

 

우선 몰려든 곳이 광 앞이었으니, 자연히 사랑채 앞에 더 들어설 틈이 없이 몰려들게 되었

. 길산은 꿰진 짚신을 신은 채로 방안으로 들어가, 복건에 까치 두루마기 입은 손자를 안

고 방귀퉁이에 처박혀 있던 조동지를 끌어냈다.

"이리 나와서 손님 접대 하시우."

길산이 마루 위에 앉히니 김기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거 주인장께 실례가 많소이다. 우리는 이런 흉황에 백성들이 굶어죽는 것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스스로 활빈하기 위하여 일어난 사람들이외다. 서흥의 사정을 보니 수령이 무

능하여 진곡을 비축하지 못하였고, 제민곡이나 영진곡이 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허류

인 것을 위에서는 실제 재고가 있는 줄로 알고 그것을 배정한듯하오. 그러니 백성들은 아무

구휼도 받지 못하고 기약없이 보리죽이나 얻어먹고 있소이다. 영을 기다리지 않고 편의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주는 것은 관과 민이 있는 어느 나라든지 예부터의 도리였소. 이제보니

동지께서는 이미 권분으로 가설직을 얻었으나, 그때에는 사재를 내고 이제 와서 길가에 즐

비한 기민을 모른 체 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외다. 세평방, 수하방, 동현령에 이르기까지

온통 전답을 독차지한 이가 창고에다 쌀을 묵혀 둔다니 될 말이오? 쌀은 하늘이 낸 것이고

사람을 먹이기 위한 것이라 어찌 주인장 혼자의 것이라 하겠소, 이제 진휼에 시기가 있으니

이 사람들이 차조나 메밀이나 늦콩을 대파하려면 농량이 있어야 할 것이오. 지금 양곡을 내

어주지 않으면 겨울에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게요. 다만 그저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

, 이 사람들이 환난을 모두 겪은 뒤에 환곡시키도록 하면 될것이오." 조동지라는 이가 손

자를 안고서 이리 추스르고 저리 추스르며 김기를 바라보았다가 몰려든 사람들을 보았다가

겨우 한다는 말이 이러하였다.

"나도 생전에 피땀을 흘려서 모은 재산인데 일시에 털리고 보면 어떻게 하란 말이오. 더구

나 저들을 한 번도 본적이 없고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터에 환곡이란 다 무예요?"

조동지 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김기가 마루 아래 무리들 틈에 끼여 섰는 흥복에게 지시하였

.

"창고 문을 모조리 열고 양곡이 얼마쯤 되는가를 알아보도록 허게." 흥복이 명을 받고 사

랑채 맞 은편의 담에 잇대어 있는 광으로 달려가니 문이 나란히 넷이나 되는 장광이었

. 중앙의 광문을 바라고 가보니 문마다 맹꽁이자물쇠가 걸려 있는데 누군가가 도끼

를 건네주었다. 두어 번 쳐서 물고리를 쳐내고 광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젖혀진 광문

을 통하여 천장 까지 닿도록 쌓아올려진 쌀섬을 보고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뒤채에두 광이 있습니다."

난민 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쌀을 꺼내자!"

"양곡을 구경하러 온 거냐, 뭐냐?

확자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광에서 가까이 섰던 자들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여려분, 이 쌀은 분명히 우리들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양민들이우. 주인이

진미로 내 놓 고 나서 차례로 얻어가도 늦지 않소."

흥복이 말하였고 마루에 앉았던 김기가 부드럽게 이었다.

"좋게 가져갈 구실을 만들어드릴 참이오. 지금 여러분이 꺼낸다 할 지라도 기껏해야

몇말밖에 는 가져갈 수가 없소이다."

말을 듣고 보니 딴은 그럴 듯하였다. 이렇게 지쳐서 허기지 ㄴ몸으로 쌀 한 섬을 지고

갈 기 운 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우선은 쌀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 그들이었다.

"여보, 구경이나 합시다. 저게 정말 쌀인가..."

흥복이 빙긋 웃더니 자물쇠를 쳐냈던 도끼로 밑둥의 쌀섬을 콱 찍었다. 벌어진 틈으

로부터 낟 알 이 줄줄 새어나오기 시작하였다.

흥복은 두 손으로 그것을 수북이 받아들었다.

"보시우, 백옥 같은 쌀이오..."

그리고 그는 쌀을 사람들에게로 뿌려주었고 모두들 환성을 내질렀다. 흥복은 이어서

 

나머지 세 군데의 광문을 부수고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아래서부터 대강 헤아려나

갔다. 어림짐작으 로도 삼사천 석은 되어 보였다. 다시 사랑채 뒤꼍에 돌아가니 그같은 장

광이 있었다. 흥복은 이 번에도 광문을 모조리 열어젖혀두고 돌아왔다.

"사랑채의 광에만 오륙천 석이 넘는 듯합니다."

김기가 그 말을 흘려듣는 듯이 조동지에게 물었다.

"우리가 더 조사해보아야 알겠으나, 동지 어른의 양곡이 모두 얼마나 되겠소?" 동지는 아

직도 손자를 무릎에 앉힌 채 대답이 없었다. 김기가 마루아래 서 있는 길산을 힐끗 올

려다보고 나서 손자를 턱짓하였다. 길산은 알아채지 못하고 머굿거리는데 김기가 말하였다.

"도련님 때문에 대답을 못하시는 듯허니 우리가 대신 돌보아드리지요." 선흥이가 섬돌을

딛고 올라가 동지에게서 아이를 잡아떼니, 그 손짓의 우악스러움과 인상이 험악하기가 장

승 도깨비 꼴이라 아이는 불에덴 듯이 울어대고 동지가 안색이 변하여 무력하게 두 손을 내

저었다.

"그애에게는 손대지 마시우."

길산은 참지 못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선일아, 그애 어쨌느냐, 이리루 데려오너라!"

선일이가 용천관에서부터 업고 왔던 어린아이를 이끌어다 무리들 앞으로 내밀어주었다.

이는 얼이 나간 듯 마루 위를 멍청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길산이 조용하게 말하였다.

"이 아이를 자세히 보시오."

아이는 맨발이었고 옷은 거의 찢겨 살이 다 드러났고 온몸에 보기에 뜯겨 긁어 부스럼을

낸 자리가 덕지덕지 앉아 있었다. 어린 얼굴에 노란 꽃이 피어 펑퍼짐하고 수족은 앙상하였

으니 어린 애 다운 활기라곤 찾아볼 구석이 없었다. 조동지는 얼굴을 다시 쳐들지 못하였다.

"이 아이의 식구는 모두 굶어서 죽었거나 노중에서 객사하였소. 서흥에는 처처 골골마다

이런 아이들의 시신이 들판에 버려져 있소."

"성님, 이것을 섬돌 위에다 패대기쳐버릴까?"

선흥이가 까치 두루마기에 복건 쓴 어린 양반을 머리 위로 번쩍 쳐들자, 조동지가 턱수염

을 떨며 말하였다.

"... 가만, 내 시키는 대루 하리다. 우리 집에는 쌀이 육천 석에 보리가 이천 석쯤 있소이

. 그 외에 잡곡도 있소."

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다면 쌀 오천 석과 보리 천 석을 진곡으로 내놓으시우. 나머지 양곡으로도 이

집 식구가 석삼 년 동안 잔치를 차리구 살아두 남겠소. 또한 주인장께서는 아무도 떠가지

못할 땅이 있으니 너무 심려하지 마오."

김기가 일어나 방에서 지필묵을 들고 나왔다. 그는 백지를 펼쳐놓고 먹을 듬뿍 찍어서 조

동지에게 권하였다.

"어서 부르는 대로 받아 쓰시오. 도상방 지산골에서 진미를 낼 터이니 기민은 누구든지 와

서 받아가시오. 갑자 유월 초칠일 조동지 그리고 수결을 하든지 인장을 찍으시오." 조동지

가 선흥이 안고 있는 아이를 한번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기가 죽어서 큰소리도 못 내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백지 위에다 시키는 대로 썼다. 김기가 먹물이 마르기를 잠깐 기다

렸다가 길산이 쪽에 내주며 말하였다.

"이따가 용천관앞에 갖다 붙여두도록 하오."

김기는 다시 조동지에게 말하였다.

"이젠 서흥의 관민이 모두 주인장의 진휼하고자 하는 뜻을 알게 되었소. 진휼은 모두 공평

하게 식구에 따라서 양곡을 나누어주되 앞으로 사흘 안에 끝내야 하오. 주인장께서 사람을

보내어 보항을 데려다 협조토록 하여도 좋겠소."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일어났다. 관리가 온다는 데는 모두들 놀랐던

모양이었다. 흥복이 섬돌 위로 올라서더니 팔을 저었다.

"잠깐만 조용히들 하십시오. 우리는 예사 양민이 아니라 깊은 산속에서 숨어사는 녹림당

들이오."

그러나 그들은 더욱 놀랐는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두런거렸다. 김기가 마루 위에서 일어

났는데 폐의파립의 초라한 행색이긴 하였더도 유일하게 먹물 먹은 태가 나도록 점잖게 말하

였다.

"모두 들으시오. 온 나라가 방백 수령들의 학정과 토호들의 강탈에 백성들은 사람다웁게

살 수가 없소이다. 우리는 해서에서 일어난 장두령을 모시고, 당신네와 같은 힘없는 백성들

과 더불어 좋은 세상을 이루고자 녹림산간에 숨어 있는 무리들이외다. 각처를 다니며 활빈

을 하다가 서흥에 이르러, 그 참상이 다른 골보다 더욱 심하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을 이끌

고 이 집에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나라를 등진 도적에 불과하나 여기 있는 쌀은

여러분이 진작에 빼앗긴 것이라 돌려주는데 약간의 힘을 보탠 것뿐이올시다. 급한대로 기

운껏 가져갔다가 나중에 식구들과 더불어 진곡을 받으러 오시오. 남보다 먼저 와서 쌀을

내는 일에 협력하였으니, 이것은 서로를 도운 요미로 생각을 허시우. 나중에 말썽은 생길 리

가 없겠지요. 어째서냐 하면 이미 권분으로 동지의 직함까지 받은 이가 이제 진휼한 일을

새삼 우리 같은 도적들에 미룰 리 가 없겠으니 말이오. 여러분께는 아무런 해가 없도록

우리가 모두 뒷감당은 하리다. , 차례로 가져가게 하시수." 길산이 사람들에게 열을 짓기

를 당부하였고, 흥복이와 선일이도 문 하나씩을 지키고 열을 만들었다. 김기가 다시 사람들

의 뒤통수에다 대고 외쳤다.

"모두 돌아가면 이 일을 널리 알리시오."

김기는 다시 조동지에게 말하였다.

"일이 끝났으니 우리는 이제 돌아가겠소. 진휼이 다 지나간 뒤에 이 고장에 아사자가 훨씬

줄어 내년 이맘때가 되면 주인장은 우리에게 고맙다구 해야 될게요. 환곡이 이보다 더욱 많

이 쌓일 테니까, 알았소? 호방을 데려다가 몸소 진휼에 나서시오. 그리구 저 도련님은 우리

가 며칠간 잘 돌보다드리리다. 양곡이 모두 말썽없이 풀려나간 뒤에 머리끝 한올 다치지 않

구 보내드 리겠소."

조동지가 그제서야 헌흥이가 손자를 빼앗아간 뜻을 깨닫고 당황하였다.

"제발 그애만은... 우리 씨종손이오. 내가 당신네 뜻을 대가 짐작하였으니 어김없이 시행을

하리다. 절대로 자의로 할 것이니 아이는 돌려주오. 발설하지 않으려니와 어기지도 않겠소."

그러나 김기가 엄숙하게 말하였다.

"우리도 혈육의 정을 모르는 배 아니고 주인장의 마음도 믿어 의심치 아니하로. 허나 믿은

수 없는 것은... 재물이오. 재물은 언제나 사람의 진심을 해치고 애초의 뜻을 상하게 하지요.

저 오천 석의 양곡이 주인장의 마음을 배반할지도 모르오. 우리도 인륜을 알고 도리도 가릴

줄 아는 자들이라 어찌 저 어린것을 해코지하겠소. 이 사람들 틈에는 우리들의 식구가 있을

것이니 절대로 딴생각 말고 끝까지 진휼을 하기 바라오." 광 앞에서는 실로 눈물겨운 정경

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어떤 자는 쌀을 쥐어 입에 털어넣고 씹기도 하고 어떤 자는 자루에

담다 못해 옷을 벗어 쓸어넣기도 하고 또 다른 자는 쌀을 놓고 어루 만지며 소리없이 울기

도 하였다.

", 하인들을 불러다 잘 수습하도록 하시오."

김기가 마지막 당부를 하고 나서 내려서니 기다렸다는 듯이 길산을 위시하여 선일이, 선흥

, 흥복이 등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인파에 섞여 대문을 나서는데 말득이가 마주 뛰어들

어오고 있었다.

"저쪽 동구에 털벙거직들이 까맣게 몰려옵니다."

아마도 지산골 사람 중에 누군가가 난민의 돌입을 알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김기는 침착하

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조용히 뒷산을 넘어가자. 우리 손에 종손이 잡혀 있는 한, 조가는 어쩌지 못할 것

이다."

"여보시오, 활빈당 어른들..."

조동지네 집 쪽에서 누구인가가 헐레벌떡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우리를 부르는 모양인데..."

김가가 발을 멈추었고, 그들은 모두 뒷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그 사내르 ㄹ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루들 가시려구요?"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린 도령은 안고 있던 선흥이가 얼굴을 일그림 되물었다.

"댁이 누구여?"

"... 저는 용천관에서부터 따라왔던 사람입니다. 이걸 보시오." 하면서 그는 쌀이 가득 담

긴 자루를 내보였다.

"장사님들은 이 고장이 처음이실 텐데 아무데나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좋은 은

신처를 알구 있으니 진휼이 모두 끝날 때까지 거기 가서 계시지요." 모두 망설이는데 길

산이 대답하였다.

"어서 앞장을 서시오."

사내는 자기를 믿어주는 것만 반가운지 산 위로 올랐다. 김기가 말득이에게 당부를 하였다.

"자네는 여기서 형편을 보았다가 관군이 모두 돌아간 뒤에 조동지네 집으로 들어가 식객을

자청하게. 아마 다른 마음은 품지 못할 테니까."

"젠장 나는 매일 파장이나 보구 다니라는 게로군."

투덜대는 말득이만 남겨두고 그들은 뒷산을 넘어갔다. 산을 한참이나 올라서 동현령으로

들어가니 깊은 골짜기에 찬바람이 일어나고 물이 마르지 않은 제법 큰 사내가 나왔다.

위에 빈터가 있었는데 다 허물어진 집 한 채가 보였다. 앞서 가던 사내가 말하였다.

"바로 여기입니다. 극락사라는 절이 있던 곳입니다. 예전에 주지를 역모에 몰아 죽이고 장

정들을 동원하여 불을 질러버렸지요. 그 뒤로 워낙 사연이 있는 절터라 아무도 올라오지 않

고 낮에는 나무꾼들도 꺼리는 곳이 되어버렸지요."

김기와 길산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 산채로는 아주 그롤 듯한 곳이로군."

서까래가 떨어져서 하늘이 훤히 보였고 벽의 흙이 다 떨어져서 수수깡이 얼기설기 드러났

는데, 방마다 버섯과 잡초가 그득하였다. 선일이가 뒤로 돌아갔다가 뒷방의 찬방으로 쓰던

곳이 그런대로 쓸만하다고 알려왔다. 과연 방은 비좁았으나 구들이 꺼지지 않았고 흙바닥이

긴 하여도 마른 풀을 깔면 그런대로 쓸만해 보였다. 우선 잠든 도령을 안아다가 방안에 뉘

, 선일이가 용천관서 업고 왔던 아이도 함께 있도록 하였다. 모두들 점심을 굶었는지라 우

선 급한것이 밥이었다. 길산과 선흥이는 벌써 시내에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가 더위를 식히고

있었고, 흥복이는 사내와 함께 쌀을 내어 밥을 지었다. 김기는 잠든 아이들의 머리맡에서 쉬

고 있는데, 도령이 먼저 깨어나 다시 칭얼대며 울기 시작하였고 할미를 여흰 아이도 깨어났

.

"애 울지 마라, 아저씨들이 밥을 해준단다."

남루한 차림의 아이가 오히려 복건 쓴 아이를 달랬다.

"싫어, 싫어, 집에 갈 테야."

"나하구 밖에 나가자. 산딸기 따줄게."

아이들은 잠시 후에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김기는 그 아이들의 하는 양을 바라보다가

어언 눈물이 핑 돌았으니, 그들은 아직 반상의 구별이 없는 시적이었던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내려가보겠습니다."

그들은 안내하였던 자가 김기에게로 와서 말했고, 김기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도 그는 갓을 쓰고 연설하던 김기를 이들의 우두머리로 알았던 것 같았다.

"댁이 어디시오?"

김기가 물으니, 사내는 대답하였다.

", 중부방 부근입니다. 아이들이 배곯고 기다릴 듯하온데... 마음이 급하여 더 머물지 못

하겠습니다."

"중부방이라면 읍내가 아니오?"

"용천관서 가까운 곳이지요."

사내는 연신 쌀자루를 등에 올렸다가 내려놓았다가 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오."

김기는 물을 뒤집어쓰고 그늘에서 쉬고 있는 길산에게로 다가갔다.

"장두령, 어찌할까... 저 사람이 돌아가겠다구 하는데." "보내죠."

길산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글쎄... 집이 용천과 부근이라던데, 변심하여 관군을 끌구 올지두 모르잖소." 김기가 걱

정하였으나 길산은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사람이 믿어두 될 듯합니다. 백성들이란 다 착하지는 않지만, 그래두 착한

마음은 많이 남아 있지요. 조동지네 마당에서 나는 그 사람들이 불이라두 싸지르든지 내정

돌입을 할까 은근히 걱정했습니다. 그러면 진휼이 고루 시행되지 못하였겠지요. 보신 대로,

사람들은 쌀만을 다투어 꺼냈습니다. 저 사람은 관군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달아나지 않

고 우리들에게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변심할 자라면 은밀히 관군에게 내려가 우리가 오른

산길을 가르쳐주었을 거요. 보십시오, 저자의 장시치라면 몰라도 농사꾼들은 한 번 마음을

주면 좀체로 바꾸지 않습니다. 그래서 활빈하기가 어렵기도 하지요." 김기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말을 들었다. 길산이 흥복을 불렀다.

"아까 성님이 불러준 방을 어찌하였는냐?"

흥복은 허리춤에서 네모반듯하게 접어 넣었던 방문을 꺼내 주었다.

길산이 말하였다.

"진휼하니까 쌀을 받아가라는 방문이니 이걸 용천관에 붙여야 되겠지요? 저 사람을 보낼

뿐만 아니라, 이걸 갖다가 붙이도록 시켜야겠습니다."

사내가 불려왔다. 길산이 방문을 내주면서 말하였다.

"참 고맙소. 덕분에 여기서 며칠 동안 편안히 지내게 되었으니 이녁도 우리와 같은 활빈행

을 한 게요. 그런데... 이것은 조동지네 일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쌀을 타러 오라는 방문이

, 집에 가시는 길에 좀 붙여주시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내는 얼른 받아 넣으면서 말하였다.

"하지만 낮에는 어렵겠습니다. 제가 오늘밤에 아무도 모르게 내다 붙이도록 하지요."

내는 여럿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나서 쌀자루를 짊어지고 말하였다.

"제가 읍내 형편을 보아 내일 다시 와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길산이 말하니 사내는 멀뚱한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고맙다니요. 이런 일을 보는 건 평생에 처음이올시다. 이렇게 남의 쌀을 가지고 보니,

쩐지 이건 내가 꼭 가졌어야 될 쌀루 보입니다."

"곡식은 요순 시절부터 일하는 이들의 것이외다."

김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서흥 고을의 기민들이 이번 진휼로 살아남게 되었으니 이 은혜는 모두 평생을 잊지 못하

겠지요."

사내는 인사를 올리고 바삐 내려갔다. 그들은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길산이 말하였다.

"다음에는 곡산으로 가자. 곡산은 워낙 산고을이 많은 고장이라 굶주리는 이가 더욱 많을

것이다."

"저 쪽에서는 시작을 했을까?"

선흥이가 묻자 김기가 말하였다.

"마두령 말이 초순 경부터 활빈을 나간다고 하였고 풍열스님은 이미 절의 비축곡을 모두

내여버리고 옥여스님과 더불어 벽곡하고 계시다네."

길산은 어두운 표정이 되어 밥그릇을 내려다보았다. 흉년의 찌는 듯한 하루 해도 쫓겨서

서산 마루턱에 걸렸다. 그들은 묵묵히 밥을 떠넣었다. 연기 한점 오르기 않는 들판께의 마을

이 내려다 보였다.

"내일쯤에 저 마을마다 밥짓는 연기들이 무럭무럭 올라갈 게요." 김기가 무거운 분위기를

털어내 려는 듯이 말하였다.

"... 시원한 탁배기나 한잔 걸쳤으면 원 없겠네."

선흥이가 중얼거리다가 길산의 노리는 눈길과 마주치자 움찔하여 입을 다물었다. 조동지네

집에 들이닥친 것은 장교 이하 십여 명의 포졸들이었다. 그들은 동지네 집에 난민이 돌입하

였다는 발고에 접하자 진압하기 위해 달려왔던 것이었다. 포졸들은 이리저리 피해 달아나는

난민들의 무리를 쫓아가서 서너 사람을 잡았는데 그들은 제 각기 쌀자루에 그득히 백미를

담아 운반하고 있었다. 장교가 그들의 볼때기를 쥐어박으며 문초하였다.

"네 이놈들, 폭도의 당이로구나. 이 쌀을 조동지 댁에서 훔쳐넨게 분명하렸다." "... 아닙

니다.

우린 그 댁에서 주는 대로 얻어왔을 뿐이요."

"저희들이 아닙니다. 장정들이 나와서 창고를 부수고..." 장교는 눈을 번쩍 떴다.

"장정들이라니 그게 왠놈들이냐?"

그들 곁에 있던 자가 발설한 자의 발등은 밟으면서 말을 돌렸다.

"누구긴요. 그게 다 서흥 고을에서 성미깨나 있다는 젊은이들입죠. 동지 어른께 여쭈어보십

. 그분이 저희를 가긍하게 보셨는지 진휼하기로 마음을 정하셨답니다." 장교는 그들을

앞세우고 조동지네 집으로 가니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곡식은 사방으로

흐트러져 있는데 마당으로 가는 하인배들을 보니 풀이 죽어서 모두 입을 다물고 있고, 머리

가 깨진 놈, 눈 생채개 난놈, 부어오른 놈 등등으로 각양각색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였다. 장교가 사랑채로 현신하여 동지를 보자 청하니 그가 나오는데 수심

이 가득하였다.

"난민이 일어났다고 하여 급히 달려오는 길입니다. 별일 없으십니까?" "아무 일도 없네."

"저 창고의 문이 다 부서졌는데 혹시 난동을 부린게 아닌가요." "젊은 아이들끼리 작은

충돌이 있었으나 잘 처리되었지. 우리 고장 사람들이 전부 굶어죽은 것은 차마 못 볼일이

, 여럿이 몰려와서 애소하길래 내가 광문을 열기로 하였네. 자네는 사또께 내 뜻을 알리고

호방을 이리 보내어 동네마다 인구의 다소와 호구의 대소를 보여주었으면 진휼하기에 편하

겠다고 전하게."

"과연 생불이십니다."

장교는 그렇게 맞장구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하긴 하였으나, 굶주린 난민들이

몰려 온 것만은 사실이고 정작 피해를 발고해야 할 주인이 나서서 진휼한다는데야 더 이상

미주알 고주알 따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관군들이 모두 지산골을 떠나자 뒷산에 앉아

내려다보던 말득이는 천천히 조동지 댁으로 발을 옮겼다. 조동지네 집 앞에는 아무도 보이

지 않았다.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는데, 대문은 새빗장이 걸려 굳게 닫혀 있었고 외등

도 내걸지 않은 마당은 캄캄하여 마치 초상집과도 같았다. 말득이는 서슴지 않고 대문을 두

드렸다.

"이리 오너라..."

한참이나 부른 뒤에 발소리가 들리고 잔뜩 주눅이 든 하인의 겁먹은 목소리가 들렸다.

"뉘시우?"

"이 집 도련님을 모시구 있는 사람들이 보내어 왔수." "에그..."

자지러지게 놀란 하인이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황급히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동지네 수노였다. 그는 터진 이마빡에 된장을 붙이고 수건을 칭칭 동

여매고 있었다. 그가 허리를 구부렸다.

"나으리게서 어서 안으루 모시랍니다."

말득이가 그들의 뒤를 따라 사랑채로 들어갔고 말 위에는 조동지가 안절부절 못하며 서성

대고 있었다.

"우리 아이가 어찌되었소... 제발 데려와주시우. 벌써 진휼을 관가에 통기하였소." 말득이

가 마루 아래에 서서 공손히 말하였다.

"진휼이 모두 끝나는 날 저녁때에 도련님을 보내드릴 겁니다." 조동지는 말득이에게 적개

심을 드러내기는커녕 혹시 그의 기분이 상하지나 않을까 몹시 조심하는 눈치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울거나 두려워하지는 않던가요, 헌데 저녁은 드셨소?" "물린 상

이 있으면 적당히 치려주시우, 좀 시장합니다." "애들아, 손님을 바깥채에 모시고 어서 저

녁 차려드려라." 말득이가 다시 물러가기 전에 말하였다.

"내일 새벽부터 기민이 밀어닥칠 터인데 준비를 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어서 진휼이 끝나

야 도련님이 돌아오시지요."

"알겠소. 지체없이 시행하리다. 어디 있는지... 우리 집 아이들을 시켜서 이불이며 음식을

날라다 주었으면 좋으련만, 정말 관가에는 절대로 알리지 않을 덴데..." "염려 마십시오.

리가 비록 산간에 있다 하나 무도하고 몰인정한 놈들은 아니우." 말득이가 바깥 행랑채에

자리잡고 식객이 되었는데, 밖에서는 마당에 멍석을 펴고 나눠주기 편하게 창고의 쌀섬을

내어다 쏟아놓는 일이 시작되었다. 과연 이튿날 새벽 어스름이 부옇게 밝아 올 무렵부터

기민들이 지산골에 몰려 들기 시작하였다. 말득이가 하인들과 더불어 그들을 맞았고, 이들

의 대부분이 어제 쌀을 얻어간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소문을

듣고 날이 새자마자 찾아온 자들이었다. 어둠속에서 희끗희끗 나타나기 시작한 자들이 대문

앞의 빈터를 메우기 시작하였는 데 꼭 유령과 같은 몰골들이었 . 날이 훤해지면서부터는 지

산골로 들어오는 길과 들판이 새장 이라도 선 것처럼 인파에 덮였다. 말득이와 하인들이 나

가서 술렁대는 그들을 동네별로 따로따로 세워두었다. 그들은 두려운 중에도 왜 쌀을 주지

않느냐고 웅성거렸고, 수노가 나서더니 관가에서 호방이 오면 식구가 많은 사람은 더 많이

주고 식구가 적은 사람은 그에 따라 적게 줄 것이니 기다리라 일렀다. 이윽고 호방이 몇

사람의 사령배를 거느리고 당도했을 때는 용천관에 죽을 얻어 먹으려고 모여들었던 기민들

이 나붙은 방문을 복남부여대하여 조동지네 집으로 모여들었다. 말득이가 제안하여 쌀을 나

누어주기 전에 우선 그들의 허기를 구제하는 일도 급하다하여 잡곡과 쌀을 두고 죽을 끓여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햇볕은 어느결에 뜨겁게 내리쬐기 시작하고 줄섰던 자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도 하였다. 드디어 진곡을 나누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의 행렬은 자꾸 불어만

갔다. 당시 서흥을 지나던 이가 백성들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황해도는 어디를 가나 논밭이 쓸쓸하고 촌락은 비어있었다. 제 고장을 등진 사람들의

떠도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고 주민들 역시 불안에 떨고 있었다. 길거리마다 걸인들이 들

끓었는데 늙은 이로부터 아이들까지 여럿이 모여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갓난아기를 길가

에 버리는가 하면 어미와 자식이 서로 길을 잃어 울고불고하는 광경이 비일비재하였다.

들의 용모는 파리하기가 흡사 귀신이다. 아침 저녁으로 우리가 주막에서 음식을 먹으라치면

걸인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둘러 싹 한 술만 달라고 사방에서 아우성이다. 눈뜨고 차마

볼 수 없으며 밥이 어찌 목구멍으로 넘어 가리오. 만약 그들에게 남은 밥을 주면 그들은

형제간, 부부간에도 서로 조금도 사양함이 없었다. 다투어 한술이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다투고 빼앗았다. 이런 형편에서 염치나 인륜같은 것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힘이 센

자는 구걸하다가 얻지 못하면 주인에게 원한을 품고 밤에 몰래 불을 싸지르니, 집 가지고

사는 백성들조차 피해가 막심하였다. 실상 걸인들에게 줄 것이 없지만, 또 안 주자니 보복

이 두려운 것이다. 걸인들은 소, , 닭 등의 아무 가축이든지 닥치는 대로 잡아가며 명화적

의 기습 때문에 새벽에 길 떠나는 것을 모두 삼가고 있었다. 어느 마을이든 외모가 번듯

한 집이 있어 안에 들어가보면 밥을 해 먹은 지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이 농사

철임에도 종자마저 다 먹어치워 사실상 폐농 상태의 농가가 태반이다. 나물캐는 사람들로

산야가 뒤덮여 있으며 겨를 구해다가 나물과 죽을 쑤어 배를 채웠다. 사람들은 부기가 떠올

랐으며 사람의 사는 즐거움을 잃은 지 오래였다.

기민들이 이러하였으니 죽 한그릇 먹었다고 곧 희생될 리가 만무하였다. 저녁 늦게까지 진

휼은 그치지 않았다. 다음날은 전날의 두어 배가 넘을 만큼 인파가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

에는 소문을 듣고 이웃 고을에서 지경을 넘어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말득이는 소노와

의논하여 그들에게도 적당량을 배급하였다. 진휼이 계속되어 사흘이 지나서야 창고가 비워

졌다. 점심때쯤에 흥복이가 동지네 집을 찾아와 말득이와 함께 동지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서흥의 온 백성들은 동지 어른을 일컬어 묵적같은 이가 환생하였다고 칭송이 자자합니다.

일이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서 곧 도련님을 보내드리지요. 그리고 이 댁의 하인 한 사람만

붙여 주십시오. 도련님을 업구 와야 할 테니까요."

동지는 침통한 얼굴로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에 완전히 기진맥진해버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마음에 없는 진휼을 베풀었다고는 하나 벌써 태산 같은 선행으

로 인근 사방에 알려지고 사또는 감영을 통하여 조정에 장계까지 올렸으니, 이제 와서 도적

들의 강압적인 사주를 받았다고 광설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어서 일이 조용히 끝나

종손이 무사히 되돌아오기만 바랄 뿐이었다.

"어서 보내주시오."

동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인배들이 아무리 세상 도리에 어둡다 할지언정, 굶주리는 자

들에게 미곡을 나누어주고 그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대하다 보니 모두들 진휼이 어떠한 일인

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른바 관상가에서 말하는 길기라는 것은 선행을 한 뒤에 마

음의 안정을 찾은 안색을 말하는 것이니, 길흉화복이란 모두 사람이 지어서 스스로 받은 것

이다.

"패가하셨다 여기지 마시고, 서흥 곳곳에 인심을 쌓아 수만 전의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얻

었다고 여기십시오."

흥복은 동지에게 이르고 나서 하인을 데리고 말득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들은 동현령

극락사의 절터에 당도하여 진휼의 과정을 자세히 알렸다.

"아리를 데리구 오너라."

김기가 이르자 선일이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복건도 까치 두루마기도

모두 벗어버리고 더벅머리를 흩트린 채로, 도련님이 아니라 상인의 아이 같은 조동지네 종

손이 웃으며 뛰어왔다. 그 아이는 버려진 아이와 동무가 되어 인근 산골짝을 뛰어다니며 노

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어이구 도련님..."

"싫어, 여기서 놀 테야."

하인이 두 팔을 벌려 안으려 하자, 아이는 달아나며 거부하였다. 하인이 간신히 자아서 끌

어안았나 아이는 동무와 헤어지는 것만 싫어서 발버둥질을 쳤다.

"어서 내려가보게."

하인은 우락부락한 사내들 틈에 끼여 있는 것만 조마조마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내

려가는 데 아이의 칭얼대는 소리만 먼 데가지 들려왔다. 길산이네가 용천관에것 얻었던 아

이도 정이 들었었는지 울먹울먹하는 것이었다.

"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 일을 잊지 못하게 될 거요. 신분의 엄격한 구분은 사람의

정까지 상하게 하고 있으나, 이것은 억지로 되는 짓이라 세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맥없이

무너져버리고, 더구나 국법이 바뀐다면 한 삭도 못 가서 모두 없어지고 말 게요." 김기가

아이의 머 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자 떠나지."

길산이 재촉하였다.

"애는 어찌합니까?"

선흥이가 물으니 길산이 말하였다.

"네가 업어라. 춘천댁이 잘 보살펴주겠지."

 

신천 우산포는 동북 삼십여 리에 걸치는 어루리벌을 끼고 안악의 맞임개와 접하였고 객가

에 수세창고가 즐비하였다. 세곡선이 맞임개로 하여 나무리벌을 지나 월당강으로 접어들어

대동강 수로를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내륙의 맞임개가 세곡선의 집결지가 되었고 월당강 쪽의 지진나루와 밤곶이나루가

나무리벌의 미곡을 실어내가게 되어있었다. 근년에 들어 뻘흙이 자꾸 쓸려 내려와 하상이

높아져서 우산포는 먼저 있던 장소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였다. 보통 때에는 맞임개에서

들어오는 배가 빽빽이 들어차서 어루리벌 너머로 대도회가 내다보이던 것이었지만, 때가

흉년인지라 예년보다 쓸쓸하고 때지어 몰려 다니는 유민들의 무리가 배라도 끌어주고 쌀겨

나 얻으려고 우산포의 갈대밭 곳곳에 노숙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세곡선뿐만 아니라 관북과 관서의 내륙지방에서 내려오는 주상들의 배도 심심치

않게 드나들어 비록 경강에는 미치지 못하여도 객줏집도 있고 선창도 있었다. 그러나 객주

에서는 저희 식구 살아갈 일이 급하여 거의가 장사를 폐한 곳이 대부분이었다. 우산포란

지명은 들판 한가운 데에 크고 작은 두 산이 있는데 그 모양이 엎드린 소의 형상과 같아서

생겨난 것이다. 인근에 큰 마을이 있어 소메골이라 하였다.

소메골에 구씨 성을 가진 양민 부호가 살았는데, 일찍이 우산포에서 객주를 여러 집 운영

하고, 한편으로는 어루리벌에 장토를 마련하여 직접 담배나 목화 같은 물을 생산하고, 돈놀

이와 관서 관북 물화의 교역으로 크게 일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비록 아무런 직함이 없었으

나 재령, 신천 의원과 트고 지내는 사이라, 대가 되면 철철이로 온갖 진물을 올려 바치고

무시로 관가에 드나들어 아무도 그를 능멸할 자가 없었다. 부자에게는 흉년이 따로 없는

 

법이라 때가 마침 구부자의 환갑이었는데, 일가 권속들이 모여들고 인근에서 제법 사노라는

자들이 모여서 흐드러지게 지낼 모양이었다. 사랑 마루에 기다란 다담상이 차려지고 마당에

는 구름 같은 차일에다 멍석을 깔고 가운 데에는 기생과 광대들의 놀이판을 차렸다. 겸인을

시켜서 광대들을 데려오기로 하였고, 특별히 신천 관아에서는 관기를 내보내주었다.

온 집압은 물론이요 소메골에 고기 냄새와 기름 냄새가 진동하였으니, 또한 이 소문을

 

듣고 인근 사방의 각설이꾼 유민배들이 소메골을 찾아 모여들었다. 사랑채 마루의 중앙

상석에 구부자 내외가 앉고 그 좌우로 친지들이 둘러앉았으며, 권속들은 마당의 멍석에 차

례로 앉았는데 혈육붙이들이 나와 술잔을 올리며 수복을 축원하였다. 술잔 올릴적마다 기생

이 지화자를 불렀다. 밖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마당으로 들어서는 자들은 벌써

몸가짐이 건들거리며 각색의 차림과 악기 등속을 지닌 골이 광대가 분명하였다. 그들에게

한상 그득히 차려주고 술 한동이 내어 미리부터 신명을 올려두게 하였다.

"어이구 쉰밥이라두 좋으니 한술만 줍시오."

"덕이 되나 술이 되나 조금만 줍시오."

대문 밖에서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리니 겸이니 하인들을 데리고 나가 멀리 쫓아

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메골 구부자네 환갑 잔치는 이미 인근 사방에 소문이 자자하여 있

었다.

먼저 꽹과리, , , 장고 등의 사물 갖춘 잽이들이 한판 흐드러지게 지쳐 돌아가도 나서

괴뢰배들이 포장을 열고 덜미를 노는 것이었다. 포장 뒤에는 대잡이가 가운데 서고 양쪽에

대잡이손이 앉아서 돕도록 되었다. 구부자는 소식적부터 보아오던 놀음이라 기중 마음에

두었던 대목이 있었는지 친히 광대에게 말하였다.

"꼭두각시거리가 아주 재미있더라. 거기는 두 번을 거듭하여 보아라." 좌중에는 취흥이 슬

슬 무르익어 멍석에 내려앉은 자들 사이에서는 벌써 타령장단이 나오고 법석이었다. 꼭두각

시거리가 포장에서 시작되는데 꼭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었다.

 

아 벼보게, 한상 놀게.

그러세.

자네 우리 마누라 못 봤나?

봤지. 며칠 전에 맨발로 옷도 남루하게 입고 가는 것을 보았소.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고말고, 저 산무퉁이를 울면서 가는 것을 보았네. 불쌍해서 못 보겠네.

여보게, 내가 우리 마누라 나간지가 수십 년이 되어, 우리 마누라를 찾으려고 방방곡곡 면

면 촌촌 참빗 새새 다 찾아다녀도 마누라를 못보겠데. 혹시 이런 데 없나 한 번 불러보겠네.

어디 불러보게.

그럼 불러보겠네. 여보 할멈, 할멈.

여보 영감, 영감. 영감을 찾으려고 일원산가 하루찾고 이강경에 이틀 찾고 삼포주에 가 사

흘 찾고 사법성에 가 나흘 찾고 오강화에 닷새를 찾아도 영감 소식 몰랐는데, 어디서 영감

소리가 나는 듯 나는 듯하구려. 여보 영감, 영감.

저리 저리 절씨구 지화자 절시구, 거기 주가 날 찾나, 거기 누가 날 찾나, 날 찾아올 이 없

건 마는 거기 누가 날 찾나, 지경성지 이태백이 술을 먹자고 날 찾나, 거기 누가 날 찾나,

거기 누가 날 찾나, 상산봉네 노인이 바둑을 두자고 날 찾나, 날 찾을 이 없건마는 거기 누

가 날 찾나, 여보게 할멈, 할멈.

여보 영감, 영감.

만나보세 마나를 보세.

만나봅시다, 만나봅시다.

아고 할멈이오.

아이고 영감이오. 여러해포 만이구려. 잘되었소, 잘되고도 잘되었소. 영감 꼴이 잘되었소.

정주 탕관은 어디다 두고 개가죽 감투가 웬 말이오.

거 다 할멈 없는 탓이오.

잘되고도 잘되었소. 영감 꼴이 잘되었소. 청사 도포는 어디다 두고 광목 장삼이 웬말이오.

그도 다 할멈 없는 탓이오.

여보 영감, 젊어 소싯적에는 어여쁘고 어여쁘던 얼굴이, 네에미 부엉이가 마빡을 때렸나 웨

털이 그렇게 수북하오.

야야 이것 봐, 사내 대장부라 하는 것은 위엄 주세가 우굿해야 오복이 두리두리한 거여.

오복, 육복이라 하시오.

육복 칠복은 어떻고.

칠복보다 팔복이라 하시오.

야야 이년 복타령하러 나왔냐, 야야 이년아 너도 젊어 소시적에 어여쁘고 어여쁘던 얼굴이

율묵이가 마빡을 때렸나, 우툴두툴하고 땜쟁이 발등 같고 보리 먹은 삼닢 같고 비트러지고

찌그러지고 왜 그렇게 못생겼나.

여보 영감, 그런 말 마소. 영감을 찾으려고 방방곡곡 얼레빗 참빗새새 다니다가 먹을 것이

없어서 저 강원도 들어가서 도토리밥을 먹었더니 얼굴이 요렇게 되었소.

아따 그년 능글능글하기도 하다. 야야, 이년아 내말 들어봐라. 너는 빤들빤들한 도토리

밥을 먹어서 그러드냐. 나는 이 앞들의 세모나고 네모난 메밀로 국수만 눌러 먹어도 얼굴

만 매끌매끌 하다.

여보 영감, 오랜만에 만나서 싸우지만 말고 같이 들어갑시다.

야야 이리 와, 아내가 나간 지 수십 년이 되어 늙은 내가 혼자 살수 있던가. 그래 내 작은

집을 하나 얻었네.

옳지 옳지, 내 알았소. 영감이 나간 후로 알뜰살뜰 모아가지고 작은 집을 한칸 샀단 말이지

.

왜 기와집은 안 사고, 이 늑대가 하려갈 년아.

그럼 뭐 말이오.

그런게 아니라 작은마누라르 하나 얻었단 말이다.

옳지 옳지, 내 알았소. 내가 갔다 돌아오면 짐장헐려고 마늘을 몇접샀단 말이죠.

왜 후추 생강은 어떻고, 우라질 년아.

그럼 뭐 말이오.

자 자 이리 와. 작은여편네는 아느냐.

옳지 옳지, 내 알았소. 내가 가면 영영 안 올 줄 알고 작은 여편네를 하나 얻었단 말이죠.

아따 그년 이제 삼일 강아지 눈뜨듯 하느냐.

여보 여보, 기왕지사 그렇게 되었으면 작은마누라 생면이나 시켜주시오. 인사는 시켜줘야

.

아하, 이 꼴에 생면을 시켜달라네.

암요. 시켜주셔야죠. 개천에 나도 용은 용이요 짚으로 만들어도 신주는 신주 법대로 있지

않소.

그럼 생면을 시켜줘야 하나.

시켜줘야지.

그럼 생면을 시켜줄 테니 저리 돌아섰거라.

왜 돌아서라 그러우.

옮는다 옮아.

뭐가 옮아.

얼굴 옮는단 말이여. 저리 돌아서 이쪽을 보면 안돼. 생면을 시켜줄테니 정신 차려 받어라.

무슨 인산데 정신 차려 받으라우.

벽락인사다. 벼락인산가. 용산 삼개 덜머리집네 거드럭거리고 나오는구나. 아이구 요

깨물어 먹을까. 오걸 꼬여 찰까. 그저 그저. , , 이것 봐 저기 큰마누라가 돌와왔다. 인사

해야지. , 그렇게 돌아서면 되나. 어서 가서 인사해요.

 

한참 덜미 마주치기가 진행되는 데 놀이판 뒤로 차례를 기다리던 광대들 틈에는 우락부락

한 사내들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건너편의 마루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말뚝벙

거지에 괴적삼 바람에다 얼굴은 진한 잿빛이요, 광대뼈가 불거진 자가 있었는데 놀이를 끝

내고 나오는 광대들에게 술을 퍼죽고 있었다. 아마도 짐군이나 되어 보이는 자가 곁에서 그

들이 준비할 물건들 을 챙기고 매어주고 하였는데, 그는 키가 훌쩍 크고 등이 꾸부정하며

얼굴이 길쭉한 사내였다.

"대문으로 가보아."

얼굴 시커먼 자가 키 큰 자에게 말하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안마당을 지나 바깥마

당으로 나갔다. 대문 앞에는 두어 명의 하인이 지켜 섰을 뿐이고 모두들 놀이판에 정신이

팔렸는지 계집 종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어이, 낮술에 얼굴이 벌개서 이 무슨 꼴이람. 한숨 자야겠네." 키큰 사내가 중얼거리고

나서 행랑 처마밑 그늘에 가서 쭈그려 앉았다.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돌리는 자가 없었다.

키 큰 사내는 툇마루 아래 걸터 앉아 끄덕끄덕 조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대문 밖에는 아직도 걸인과 유민배들이 흩어지지 않고 햇볕을 피하여 건너편 송림의 그늘

에 웅기중기 둘러앉아 있었다.

"대문이 열리면 곧장 뛰어들어가야 한다."

십여 명의 사내들이 나무 아래 놉고 기대고 하였었는데, 그들 중에 나이 지긋하고 터럭이

희끗희끗한 자가 말하였다. 그는 둘둘 말아 새 끼로 동인 거적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으며

 

다른 자들도 거적이나 망태기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다 한결같이 남루한 복색이었다.

"저 사람들이 쫓아오면 어쩌려우?"

망태기를 가진 자가 저쪽에 둘러앉은 유민배들을 돌아보며 말하자 나이 든 사람이 말하였

.

"쫓아오도록 놔두어. 대문만 닫아걸면 될 테니까."

그들은 훙악소리가 낭자한 구부자네 높은 담장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하였

. 놀이 판에서는 아직도 덜미가 계속되고 있는지 관객의 웃음소리가 굿거리장단이 요란하

였다.

 

문안이오.

문 안이고 문 밖이고 웬 벌거벗은 놈이냐. 대빈상이다. 벌거벗은 놈은 얼씬도 말아라.

허허 상여 뫼시러 왔소.

벌것벗은 놈은 대감상여에 얼씬도 말아라.

다 틀렸다. 다 틀렸어. 벌거벗은 놈은 대감상여에 얼씬도 말라네.

애애, 그럼 좋은 수가 있다.

뭐여.

내 시키는 대로 해여. 상제님이나 상두꾼이나 모두 사타구니 그것 떼어서 아랫목에 묻

고 왔느냐 고 물어봐라.

야야, 경칠러고.

괜찮어.

야 무서워 안되겠다.

너 일곱 동네 장사 아니냐.

허 참, 안되면 그까짓 것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쥐어박고 이승에서 못 살면 저승에서 살

... 야 이거 못하겠다.

이놈아, 내절러봐.

그렇지 해봐야지. 상제님.

왜 그래.

상제님이나 상두꾼이나 그런 것 떼어서 아랫목에 묻고 왔소.

아따 벌거벗은 놈이 말 한 번 잘한다. 네 재주껏 모셔라.

 

포장 뒤에서는 상여가 나가는데다 셋째 거리 들어갈 찰나였다. 광대들 틈에 끼여 있던

 

자가 징을 들어 세차게 두드렸다. 잔치 손님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징소리는

집안에 길게 울려퍼졌다.

행랑채 처마 밑에서 쭉그리고 앉아 있던 자가 일어났다. 하인 하나는 툇마루에 길게 팔베

개를 하고 누웠고, 다른 하나는 중문간에 엇비슷하게 기대어 사랑채 마당을 넘겨다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키 큰 사람은 그들을 눈여겨보고 나서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

은 명주실에 꿴 열 닢의 돈이었다. 키 큰 사내는 그것을 마당 가운데 살그머니 내려놓고

다시 앉았던 자리로 가서 하품을 하고는 큰 소리로 말하였다.

", 이 댁이 과연 부자로군. 마당에 웬 돈이 굴러다니나." 중문간에 섰던 하인이 돌아보

았고 키 큰 사내는 마당으로 걸어갔다. 툇마루에 누웠던 하인도 그 소리에 잠이 깨어 상반

신을 일으켰다. 키 큰 자가 일부러 잽싸게 돈을 주워서는 소매 속애 챙기는데, 두 하인들은

저놈 봐라, 하는 식으로 눈길을 맞추었다.

"어이, 그 돈 내놓아라."

", 줏는 사람이 임자지 왜 이러는 게여."

키 큰 사내가 마당 구석의 헛간 쪽으로 뒷걸음질을 치자, 하인들은 그를 따라서 헛간으로

들어 섰다. 쫓기던 자는 우선 돈을 헛간 안쪽에다 던졌고, 앞섰던 자가 그를 지나쳐 안으로

뛰어드는데 뒤이어 다른자가 앞을 다투며 들어선다. 키 큰 사내는 뒤미처 들어오던 자의

배를 무릎으로 올려 찼다. 그가 입을 딱 벌리더니 배를 안고 무릎을 끓었으며, 다시 이번에

는 돈꿰미를 주으려고 엎드린 하인의 등판을 발뒤꿈치로 내리찍었다. 목에 헉, 걸리는 듯한

숨소리가 들리며 길게 뻗으니, 키 큰 사내는 널브러진 두 하인의 다리를 잡아 헛간 깊숙이

끌어다 두었다. 그는 저고리를 잡아 흔들어 바람을 내면서 유유히 대문으로 가서 빗장을 빼

고 한쪽 문을 열더니 고개를 내밀었다 십 여 명의 사내들이 안으로 우르르 밀려들었다.

들의 뒷전에는 영문을 모르는 유민배가 어리둥절 하여 바라보고만 있었다. 키 큰 사내가 대

문을 다시 닫고 빗장을 지르면서 물었다.

"다 들어왔지?"

나이 든 자가 끄덕였다. 그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거적때기 안에서 환도를 빼내들었다.

"오두령님..."

들어온 사내 중의 하나가 지팡이로 짚고 다니던 기다란 막대를 키 큰 사내에게 넘겨

주었다. 그는 지팡이 막대를 잡아 끝을 비틀어 뽑았는데, 막대기 끝에 창날이 나타났다.

것은 단창이었다. 뒤따라서 다른 자들도 거적 속에서 환도를 뽑았고 망태 안에 숨겨둔 쇠몽

치들을 꺼내들었다.

"너희는 중문을 지켜라."

키 큰 사내가 말하고 나서 나이 든 자에게 일렀다.

"변두령은 밖으로 도명쳐 나오는 것들을 안채로 몰아넣으시오." 그들이 중문을 지나 사랑

마당에 몰려들어갔는데도 아직은 아무도 눈치채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사방의 차일 치고 멍석을 편 담장 밑마다 간격을 두고 빈틈없이 지켜 섰다.

"비켜라..."

얼굴 검은 사내가 광대들에게 이르자 그들은 좌우로 물러났고, 그는 광대들의 봇짐 속에서

칼을 뽑아들고 뛰어나갔다. 그가 멍석의 놀이판 가운데로 뛰어나갈 때까지는 모두들 놀이치

고는 어딘가 이상하다 여길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멈추지 않고서 마루 위로 성큼 뛰어오

르더니 칼끝을 상좌에 앉은 구부자의 턱밑에 갖다 대었다.

"저러..."

"아니 저놈이 환장을 하였나?"

구경꾼 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마루 위에 올라선 자가 한 손을 내저어 보이자

그들의 등뒤로부터 무기를 가진 장정들이 놀이 판 가운데로 뛰쳐나왔다. 상이 엎어지고

 

음식이 쏟아지는 혼잡이 일어나는 중에 마루 위의 사내가 외쳤다.

"꿈쩍 마라. 모두들 이 자리에서 한 걸음이라도 움직였다간 목이 달아난다. 그 대신에 시키

는 대 로만 한다면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거 문자

속이 밝아 안되었소마는 숙불환생이라 하였으니, 이 많은 음식들을 파리에게 내줄 수야 없

."

마감동이 부하들에게도 권하며 술을 들이켰고 옥여가 중얼거렸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으니... 저 빡에 기민들이나 불러다 잔치하구 갑시다." "나중에 뒤

가 귀찮게 되지 않을까..."

오만석이가 걱정하였으나, 감동이는 거리낌없이 응낙하였다.

"걱정 없네. 우리는 배를 탈 테니까 모두 뿔뿔이 흩어지겠지. 변두령, 어서 모두들 안으루

들이 시우."

변가가 졸개 몇을 데리고 대문을 열러 나갔다. 옥여는 감동이가 내어주는 감로주를 잔에

받아들고 차마 훌쩍 넘겨버리기가 아쉬운지 코아래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았다.

"... 아찔한 속세의 내음이로다! 벽곡 수십여 일에 곡차를 마셨다가 육근이 노하여 불심이

사라 지면, 이런 파계가 또 어디 있을꼬, 에라... 나무관세음보살..." 승려 옥여는 염불을 중

얼중얼하더니 첫 잔을 넘겼다.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면서 늙은이 젊은이 아이들 여편네 할

것 없이 구부자네 음식 냄새를 맡고 인근 사방에서 모여들었던 유민의 무리들이 중문 안으

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자 어서 그 상 앞으로 다가 앉으시오."

그리고 감동이는 부하들게 지시하여 안채에 갇힌 아낙들 중에 이 집의 찬모와 하녀 서넛을

나오게하여 부엌과 찬방에 남은 잔치 음식을 모두 내오게 하였다. 백여 명이 넘는 굶주린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어제 본 마을 사람에게 대하듯이 음식도 권하고 자리도

좁히는 것이었다.

"자네들은 계속 풍악도 잡히고 춤도 추게나."

"암 여부가 있겠나. 이제부터 정말 우리 판인데..."

광대들이 다시 나와서 풍물을 두드리고 돌아가니 대기근에 때아닌 빈민 잔치가 벌어진 셈

이었다. 옥여는 술잔을 들다 말고 그러한 광경을 내려다보며 합장하고는 눈을 감고 중얼거

렸다.

"살불생천이라도 미래세중에 용하보리수하에 역득치우하야 발무상도심하리라." "여보,

뭘 그리 중얼중얼하오. 술이 들어가니 관연 중생의 진면목이 훤히 보이슈?" 감동이가 농

을 던지자 옥여는 슬그머니 일어섰다.

"스님, 어디 가우?"

"이 댁에 적선할 물건이 얼마나 되는 가 알아보아야겠소." 감동이도 그 말에는 술잔을 놓

고 환도를 칼집에 넣고는 마루에서 내려섰다. 취흥이 오른 유민들이 본색이 농투성이들이

라 새봄에 논배미에서 배불리 먹고 농주 마시던 때가 생각났는지 모내기 노래를 부르고 흥

겨워하는 것이었다.

연주봉에 점심 광주리 올라간다

오늘 점심 늦어졌다 집에 있는 큰애인들 삶은 팥에 밥 못하리 개똥밭에 잡풀들은 이슬 맞

고 굽힌다네

 

양친부모 모신 앞에 잔을 들고 굽힌다네

골챈 논 쌀을랑은 우리 부모 공양하고

어이허야 더덩지로다

날 오라네 날 오라네 산골 처자 날 오라네

천장미 조밥 새우젓 놓고 혼자 먹기 심심해서 날 오라네 모야 모야 노랑모야 언제 커서 열

매 열고

이달 큭 훗달 크고 칠팔월에 열매 열지

모시적삼 세적삼에 연적 같은 저 젖 봐라

많이 보면 병난다네 살금살금 보고 가자

못다한 일 다 하려나 봉채동곳 잃고 가네

봉채장사 굶어 사나 봉채동곳 내 사줄세

바삐바삐 저 둑까지 얼른 나가 쉬어볼까 어어허야 더덩지로다 불볕을 등에 지고 진흙물에

들어서서

이 농사르 이리 지어 누구하고 먹자 하노

사람마다 벼슬하면 이 농사를 누가 짓나

의원마다 병 고치면 북망산천 왜 생겼나

앞동산에 비 져오다 누역사립 갖추어라

밤이 오면 잠깐 쉬고 잠을 깨면 일이로다

녹양방초 저문 날에 석양풍이 언 듯 불어

호미 메고 앞장국에 그 또한 낙이로다

배야리광지 희저로기 아마도 우리네 점심인가 어어허야 더덩지로다 여보 동모 정신을 차리

소 아차 실수 베폭이 뜨네 어어허야 더덩지로다 오날 해도 다 갔는지 산골마다 그늘일세 해

가 가서 그늘인가 산골 높아 그늘이지

우리 논엔 물채가 좋아 한말지기 열닷 섬 어어허야 더덩지로다 점심 먹고 쉬여들어첫참하

기 나는 싫데

물늬행장 차려놓고 첫가락장기 나는 싫데

오늘 낮에 모인 동모 해 다 지니 흩어지네

석자수건 목에 걸고 내일 낮에 또 만나세 어어허야 더덩지로다

노랫가락이 한창인데 옥여와 감동이가 광이며 방안을 대강 둘러보니 미곡이 수천 석에 돈과

피륙이 만전이 넘는 듯하였다. 그들은 부하들을 휘동하여 우선 돈과 피륙을 행랑채에다 쌓

아 두기로 하고, 광속의 미곡은 날이 어두워지면 모두 우산포까지 나르기로 하였다. 구월산

사람들이 문가에 서서 지나는 기민들을 빼놓지 않고 불러모으니 어언 이백여 명이 넘는 것

같았다.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 잔치를 파하기로 하고 나서 아직도 놀이의 흥이 가시지 않

아 아쉬워하는 이들 앞에 마감동이가 나서서 말하였다.

"우리가 남의 환갑 잔치에 뛰어들어 배불리 먹고 마음껏 놀았소. 이제는 모두 제 갈 길을

찾아야 할 터인데, 이곳에는 우리들뿐만 아니라 양식 없는 굶주리는 이들이 사방에 있소이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시오. 광에 있는 미곡을 모두 합력하여 우산포까지 나릅

시다. 거기서 여러분들에게 고루 나눠드릴 것이오. 그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다른 이들게 나

눠줄 터이니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미곡을 나릅시다." 구월산 식구들이 열 사람쯤씩 대를

나누어 맡아 지휘하도록 하였다. 일단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오만석과 변가가 네댓 명의

부하들과 같이 구부자네 집을 단속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들 미곡 나르는 일에 나섰다.

그들은 광문을 부수고 들어가 섬을 나르는데 앞에는 마감동이가 횃불을 켜들고 행렬을 인도

하였다. 거기서 우산포까지가 지척이라, 질척한 진흙벌을 피하여 둑위에다 길게 미곡을 쌓

았고 거룻배를 다섯 척이나 끌어왔다. 구부자네 객주 앞에는 돛 달린 세곡선 까지 있어 아

예 사공과 함께 끌어다 놓으니 재령 안악 지경인 맞임개까지 하룻밤도 걸리지 않을 것이었

. 미곡이 대충 운반되자 그들은 절반쯤을 갈라놓고 힘에 닿는 만큼 그들이 각자 가져가

도록 하였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함께 나누어 먹어야 나중에 관의 성화에도 무

사할 것이 라고 일러주었다. 그들은 끝으로 남은 미록을 다섯 척의 거룻배와 세곡선에 실어

주기를 청하였다. 일렬로 늘어서서 거룻배에다 우선 미곡을 차곡차곡 싣는데 다섯 척의 뱃

전에 물이 찰랑대도록 실 었는데도 쌀섬은 받도 줄어들지 않았다. 시간은 어언 삼경이 가까

워질 무렵이었다. 국자 모양의 칠성이 하늘에 번듯 넘어졌는데 먼 산 숲속에서는 굶주린

부엉이가 떡해 먹자고 자꾸만 보챘다. 배에 미곡 싣는 일을 끝까지 도와주었던 기민들 삼

십여 명은 강변에서 구월산 일당들과 헤어졌다.

마감동이를 위시한 두령들이 세곡선에 타고 나머지 부하들 중에 기운깨나 쓰는 자들이 둘

씩 짝지어 거룻배에 타고 삿대와 노를 앞뒤에서 밀고 젓고 하였다. 그들은 좁다란 강변을

따라 흐르다가 적당한 곳에서 거룻배를 한 척씩 대어놓고 캄캄한 마을로 올라가 고함을 질

렀다.

"진곡이 강에 있으니 가져가시우."

"모두들 들으시우. 진곡을 강변에 대어놓았소. 마을 이정을 어서 나와서 가져가우." 이렇

게 몇번 고함을 지르고 돌아서서 나오다 보면 집에 하나둘 불이 켜지는 게 보였다. 그들은

미곡을 가득 실은 거룻배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어루리벌 주면의 절량된 마을 어귀에다 떨

어뜨렸다. 맞임개와 마룬내로 갈리는 삼지 수로에 이르렀을 때에는 세곡선 한 척밖에는 남

지 않았다. 여름밤은 짧아 샛별 까무룩한데 들은 마룬내 쪽에 선수를 돌려서 배를 대었다.

천지사방이 조용한 새벽이었다. 이 많은 쌀을 구월산까지 나를 수는 없었고 또한 이대로 두

었다가는 관군이 나와 서 모두 수거해갈 참이라 바삐 서둘러야 하였다. 그들은 둘씩

대를 나누어 마룬내와 맞임개와 오리고개 부근의 사방 십여 리에 퍼져있는 산골마을로 찾아

가 백성들께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적당한 장소까지 운반을 시킬 작정이었다. 마감동, 오만

, 변가, 옥여스님은 마룬내에서 그들이 몰려오기를 기다렸고 이윽고 동이 부옇게 밝아서

사람들이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해가 떠올라 강변의 안개가 걷혀가자 사람들은

더욱 불어나 삼백여 명에 이르렀고 서로 쌀을 많이 가져 가고자 마을마다 기운이 남은 자는

남녀노유를 가리지 않고 몰려 들었다. 마감동이가 세곡선의 뱃전에 올라가 외쳤다.

"모두 잘 오셨소이다. 우리는 해서에서 일어난 활빈당이오. 이 쌀은 어루리벌에서 인색하고

매정하기로 소문난 구부자 집의 곡간에서 끌어낸 쌀이니, 여러분들이 기왕에 수년간의 무거

운 작료로 빼앗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대신 빼앗아 오는 것이니 관차들이 몰려오기 전에

한시바삐 가져가야 되겠소이다. 허나 여기서는 나눌 수 없고 이미 날이 밝았으므로 어디 으

슥한 골이 있으면 그쪽으 로 일단 숨겨두어야 되겠소이다." 마감동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중늙은이가 무리를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마침 마땅한 곳이 있습니다. 마룬내 위편에 사방 시오 리 되는 드넓은 갈대밭이 있는데

우선 그 안에 쌀을 숨겨두었다가 밤에 다시 화연령까지 옮겨놓으면 될 것입니다." 화연령

은 안악 지경이므로 그쪽에 숨겨두는 것이 안전할 듯하였다. 배에다 기다란 삼밧줄을 세

줄로 엮고 이물에다 매어서 모여온 사람중에 젊은이들로 하여금 배를 마룬내 상유로 끌어올

리도록 하였다. 위로 오를수록 내의 폭과 수심이 좁고 얕아져서 배는 몇번씩이나 수초에

엉기거나 모래톱에 얹히고는 하였다. 그럴 때마다 힘을 내어 끌어내니 배는 기우뚱하였

다가 다시 거슬러 오르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이 좁은 수로를 되돌아 나오기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드디어 수면의 수초가 빽빽한 곳에 이르러 배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뭍에서 두어 걸

음밖에 되지 않았으나 워낙 미끄러운 진흙바닥이라 쌀섬을 나를 수가 없어서, 배와 나란히

하여 냇가의 돌로 축대를 쌓아올리기로 하였다. 뱃전과 수평이 되도록 쌓고 나서 거기에

 

통나무와 판자를 가로질러 한 사람이 간신히 왕래할 다리를 만들었다. 쌀을 실어내기 시작

하는데 신천 쪽에서 연화령을 지나 안악으로 나가는 길이 들판 건너편에 대다보였다. 작은

언덕을 향하여 갔는데, 갈 잎에 다리와 허리가 찔려서 베어지고 상처가 나는 줄도 몰랐다.

구월산 일당들은 배에서 내려와 금품이 들어 있는 부담농만을 꾸려 짊어지고 냇가를 따라

올라갔다. 위로 오르면 내의 끝이 바로 구월산의 호입인 실토봉에 닿게 되는 것이다. 옥여스

님만은 그들과 동행하지 않고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남기로 하였다. 구월산 일당들이 떠나

고 기민들이 미곡을 거진 운반하였을 즈음하여 거룻배 두 척이 맞임개를 돌아 마룬내로 올

라왔다. 그것은 구부자에게서 적경을 받고 신천 관아에서 나온 포졸들이 타고 있는 배였다.

포졸들은 멀리에서부터 상류에 배가 멎어 있고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들어 미곡을 운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부지런히 삿대를 밀러내며 거슬러 올라왔다.

"쌀을 빼앗겨서는 안되오.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합시다." 옥여가 몇몇 젊은이들에게 말하

자 그들도 웃통을 벗어젖히고 나섰다. 쌀을 운반하던 자들까지 모두 몰려와 냇가의 이쪽에

늘어서니 포졸들을 지휘하던 장교가 저쪽에 나와서 소리를 질렀다.

"도적들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도적을 잡으러 왔다." "도적들이 어디 있단 말이냐, 이 쌀

은 아무도 못 가져간다. 맞임개로 돌아가라." 이쪽에서도 장정 하나가 나서서 외쳤다.

"소란을 피우면 적당과 동률로 징치한다."

"굶어죽는니 차라리 맞아 죽는 게 낫다. 가까이 오면 그냥 두지 않을 테다." 그러나 거룻

배는 주춤거리며 다가들고 있었다. 그들이 오면 모처럼 들어온 양식을 모두 압수당하게 되

리라는 것은 누구든지 알고 있었다. 몇 사람이 냇가의 자갈을 집어 거룻배를

향하여 던지더니 이어서 돌멩이들이 우박처럼 거룻배 위로 쏟아져갔다.

앞에 나서서 외치던 장교가 뒤로 넘어지고 거룻배는 이리저리 흔들거리다가 포졸들이 좌우

의 뱃전을 넘어서 물속에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흉년의 굶주림에 악이 받칠 대로 받친 백

성이 얼마나 무서운가 그들은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스무 명쯤의 포졸들이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돌팔매에 쫓겨간 뒤에 오후 늦게까지 관헌은 근처에 얼씬도 못하였다. 미곡이 완전

히 비워지자 사람들은 세곡선에다 불을 질러버렸다. 그리고 밧줄을 끄르고 모래톱 너머까지

끌어다 놓으니 물의 흐름을 따라 맞임개 쪽으로 흘러가면서 배는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방금 돌팔매로 포졸들을 쫓아버린 기민들은 하나같이 이 쌀이 자기들의 것임을 확

신하였다. 쌀을 빼앗기는 것은 바로 목숨을 빼앗기는 일과 같다고 그들은 믿었다. 아무도 두

려워하거나 불안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미룬 내의 마을에서 나왔다는 노인이 저도 모르게

삼백여명의 기민들을 이끌게 되었으니, 그는 예전에 묵관에서 장교 노릇을 하던 이였고,

순이 넘었건만 아직도 등줄기가 꼿꼿하고 어깨가 딱벌어져 누가 보더라도 사십대로 여겨졌

. 희끗희끗한 머리에 눈에는 총기가 역력하였다. 구가 구월산 일당들에게 화연령에서 미곡

나우어 주기를 제의했던 사람이었다. 마룬내 노인은 인근 사방에서 몰려온 기민들 중에 의

기가 팔팔한 사람들로 쌀을 온전히 지키고 기민들에게 균등히 나누어줄 동아리를 짰다.

들은 대략 오십여 명쯤이었다. 두 사람을 맞임개쪽으로 내보내어 관군의 동향을 살피게 하

, 나머지는 모두 갈밭 가운데 솟은 언덕으로 미곡을 운반하도록 하였다. 언덕 위에는 굵

직한 노송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서 진휼하기에는 매우 적당하였다. 중화참이 훨씬 지나

서 이 번에는 사십여 명의 관노 사령들이 풀려나와 맞임개에 배를 대고 백사지에 내렸다.

망보던 사람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그들이 강아네 당도하였음을 알렸다. 마룬내 노인이

말하였다.

"대에 뽑힌 사람들은 강변에 나가 지키다가 세 불리하면 달아나는 척하고 갈대밭에 숨으시

. 그리고는 좌우로 갈라져 포졸들이 들어올길을 터놓으란 말이오. 그러면 저들이 안심하

고 언덕 아래까지 쫓아오면 여기서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돌을 던져서 쫓아내고 갈밭에 숨

었던 패가 합세하 여 협공하십시다. 미곡을 차압당하면 어루리벌의 굶주린 백성들은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요."

이윽고 오십여 명이 먼저 세 곡선이 대어졌던 마룬내 냇가로 나가서 늘어서고 언덕 위에

남은 사람들은 아이들까지도 돌을 그득히 무릎 아래 쌓아두고 기다렸다. 아이들과 젊은 총

각들은 꼭 대보름날의 투석놀이나 되는 듯이 희희낙락하며 연습팔매를 한답시고 허공중에

돌을 날려보는 것이었다. 멀리 강변을 따라 뛰어오고 있는 포졸들의 행렬이 보였는데 육모

방망이에 털벙거지 둘러쓰고 더그레를 펄럭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갓 쓴 자가 끼여 있었

으나 그는 아마 친히 난민 진압에 나선 병방인 듯하였다. 그들은 이쪽에서 돌을 쥐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자 멈추었다. 병방이 앞으로 나서더니 그들을 향해 외쳤다.

"작당하여 관군에게 대적하면 포박 효수형에 처하고 그 식구는 관노비로 떨어진다는 것을

모르는가. 비록 흉년이라 하나 엄연한 국법이 있으니 모두 작당을 훌고 흩어지면 죄는 묻지

않겠다. 미곡은 개인의 재물이니 아무도 손댈 수 없다. 어서 물러서지 못할까." 이에지지

않고 사람들이 한마디씩 떠들었다.

"국법이란 백성을 지키기 위하여 있는 것이지 언제 모두 굶어죽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 국

법인가."

"아니... 기순 지경에서는 진휼미가 한 삭마다 나온다는데, 감사에게는 달리 보고하고 쌀 한

톨 진곡으로 내놓지를 않으니 그것을 누가 떼어먹었느냐. 먼저 징치할 자는 고을 수령들이

."

"이런 기근에 아무리 개인 것 이라지만 창고에다 수천 석을 쌓아두고. 저 혼자서 잔치를

벌이는 자의 재물이 어찌 한 사람의 것인가. 곡식은 하늘의 것이다. 하늘을 거역하는 자의

재물을 지키는 것이 관장의 할 일인가?"

이어서 마룬내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원래가 폭민이 따로 없소. 백성이란 날씨와도 같은 것이오. 화창한 볕이 들어 사위에 화평

한 기운이 충만하다가도, 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치면 천군만마 철옹성을 가지고도 막아

낼 수가 없는 게요. 교만 방자이 꾸짖지 마시오. 흉황의 난민들은 언제나 새해의 대사령 때

마다 죄가 없다고 판결이 내렸소. 이는 환난에 있는 백성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조정 대신들

도 잘 알기 때문이오. 제 처자식고 부모를 버리는 지경에 댁네들은 악독한 부자의 재물을

지키려고 오히려 당신네와 똑같은 자들을 몰아내려는 게요? 모두들 이판사판이라 지금 당장

물러간다면 우리끼리 질서를 지켜서 미곡을 균등히 나누어 사경을 헤어날 것이로되, 만약에

쌀을 빼앗으려 든다면 우리도 죽기를 각오하고 지킬테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방은

안면을 잔뜩 찌푸리고 장교를 돌아다보았다.

"쫓아버리게!"

"물러나지 못할까..."

장교가 외치며 포졸들을 이끌고 앞으로 뛰쳐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강변에 섰던 자들이

일시에 돌팔매를 날리니 돌 떨어지는 소리가 화로에 밤 튀는 듯하였다. 포졸 몇 사람이 쓰

러졌으나 첫 번째의 실패로 동헌에서 시달림깨나 받은지라,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면서 육

모방망이를 휘둘렀다. 어깻죽지고 머리고 등판이고 가릴 데 없이 이리 치고 저리 박으니,

돌팔매란 일정한 간격이 있어야 던지게 마련이라 뒤로 밀려나며 서투른 진이 일시에 무너지

기 시작하였다.

"모두들 갈대 속으로 흩어져라."

누군가 고함을 질러서 좇긴 사람들은 갈대밭 가운데로 뛰었다.

그리고는 미리 짜놓은 대로 양쪽으로 멀찍이 흩어져 갔다. 포졸들 쪽에서 보니 갈대가

사방으로 너울거리는 것이 보일 뿐이요, 앞에는 언덕이 솟았는데 희끗희끗한 사람의 자취

와 미곡의 더미가 보였다.

"어서 가서 저곳을 지켜라. 미곡이 저기에 있다."

병방이 외치자 포졸들은 갈대를 헤치며 곧장 언덕을 향하여 내달렸다. 그들이 언덕 밑에

가지 닿을 즈음하여 돌팔매가 날아오기 시작하는데, 마치 오뉴월에 빈틈없이 쏟아지는 장

마비처럼 빽빽하였다. 그들은 갈대 사이에 머리를 박고 숨는다고 허둥지둥하였건만 돌이

사정없이 그들의 등판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병방도 그 틈에서 주먹만한 돌에 맞아 갓이

찢어지고 등판을 펼 수도 없이 호되게 얻어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

면 사람의 허리 정도에 오는 갈대밭에 숙이고 엎드려보았자 발끝까지 훤히 내려다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그것을 깨닫고 병방은 장교를 찾았다.

"어이구 걸을 수가 없네. 날 좀 잡아주게."

"뒤로 몰릴까요?"

그들은 깨지고 터진 상처를 손바닥으로 가리고 허겁지겁 갈대 사이로 빠져나오는데,

시에 우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좌우에서 다시 돌팔매가 퍼부어지는 것이었다. 정신없이 빠

져 나오느라고 병방과 장교는 뒤를 돌아다볼 틈도 없었다. 강변에 나와보니 겨우 칠팔 명의

포졸이 그들을 따라 빠져나왔는데, 육모방망이는 어디로 던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옷은 온

통 피투성이요 털벙거지도 어디다 벗어 던졌는지 맨두건 차림이었다. 이어서 여기저기서

머리가 깨어지고 코가 터진 포졸들이 기어나왔다. 간신히 수습하여 서로 부축들을 하는데,

뒤에서 함성 소리가 일어나며 먼저 쫓겨갔던 자들이 달려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병방

이하 장교도 숫제 싸워볼 생각은커녕 대오를 수습할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강변을 따라

서 쫓기는 오리떼처럼 뒤똥뒤똥 절뚝이며 달려 내려갔다.

관군들은 맞임개까지 가서야 한숨을 돌리고 거룻배 잡아타고 우산포로 돌아갔다. 그 동안

에도 미곡를 나누어준다는 소문이 어루리벌 삼사여 리에 자꾸만 퍼져가서 무리는 더욱 불어

났다. 그들은 아예 온 가족을 이끌고, 갈라져서 먼지만 풀썩이는 어루리벌을 가로질러 마룬

내로 모여들었다. 병방이 돌아가 수령께 자초지종을 고하고 동헌에 엎드려 정죄를 청하니,

이제는 포졸 몇 명 보내어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수령은 고심 끝에 좌수를 불러 앉혀두

고 숙의를 하는데, 결론이 나질 않았다.

"만약에 감영에서 알게 되면 비축미에 포흠이 있다고 당장에 봉고 파직감이요, 또한 내버

려두자니 구아무개가 계를 올릴 것이라 그 또한 안될 일일세. 그뿐 아니라 난민이 일어났다

면 우리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닥달이 올 터이다."

"사또, 염려 마십시오. 지금 구모에게 사람을 보내어 한편으로는 그가 진미를 스스로 내었

다고 권분의 의를 알리도록 하며, 대신에 세를 감면하겠다고 하십시오. 또한 난민들에게는

좌수를 보내어 구휼을 친히 담당하게 해준다면 사또는 양쪽으로부터 원망을 듣지 않게 될

겝니다. 기왕에 팔도의 민심이 흉흉하여 조정은 멀고 사나워진 백성은 가까운 판이데, 수령

의 위의를 세우느니 자애를 보이면서 과만을 적당히 넘기다 보면 다른 직으로 발령이 날 게

아닙니까?"

이방의 그럴 듯한 말을 듣고 사또는 더 이상 관군을 내지 않기로 작심하였다. 이미 그때

는 산간 고을의 수령들은 아예 동헌을 비워버린 자들도 있었고, 백성이 두려워 엄중히 삼문

을 지키게 하고 나다니지도 못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역병이 일어나면서부터 고을 수령이

관가를 비우는 곳은 더욱 늘어갔다. 팔도 가운데 해서의 민심이 가장 흉흉하여 부잣집에서

는 아예 하인들에게 무장을 시키고 난민의 돌입을 방비하는 실정이었다. 사또는 곧 방침을

바꾸자마자 좌수로 하여금 성난 배성들을 무마시키고, 기왕에 나간 살이라면 관가에서 생색

이나 내두려고 결정하였다.

마룬내의 언덕에다 미곡을 모두 쌓는 일이 끝나자, 그들은 자체적으로 결정하여 어느 사람

에게나 닷 말씩 나누도록 하였다. 이미 부황에 견디지 못하고 식솔을 죽인 사람들은 쌀을

두 손아귀에 그득히 쥐고 털썩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은 미처 집에

까지 가져갈 여유가 없어 그 자리에 둘러앉아 쌀을 한 움큼씩 집어서 입안에 털어 넣고 씹

는 것이었다. 굶주림이란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아서 뭉개고 짓밟고 사람답지

못하도록 만드는 가장 무서운 재앙이니, 이것이 사람 사이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피를 흘리

고라도 없애야 할 것이며, 이는 바로 하늘 아래 온갖 만물이 생명의 섭리 안에 자라듯이 하

늘의 뜻을 들어 바로잡아야 될 것인지라.

어허, 백성이 사람다웁게 살고자 하여도 저자바닥 새새 틈틈 처처골골마다 하늘을 가리는

철벽이 가로막고 있으니 어찌 한 고을의 난민뿐이겠느냐. 갈 데 없는 백성들이 가슴으로

떠밀고 주먹으로 두드리고 머리로 치받아서 팔도가 온통 북새통인데, 어찌 흉년의 마른

하늘이나 바라보며 땅을 두드리고 있겠는가. 팔도는 물론이요 한양 백여 리 사방의 기순

지간에 토호와 수령 방백을 습격하는 일이 잦아, 관료는 물론이요 갓 쓴 자의 통행할 길이

끊기는 지경에 이르렀것다.

권분하지 않는 자는 아예 장토를 버리고 식솔들과 재산을 배에 실어 용산, 삼개, 마포 동막

으로 피난을 하든지, 아니면 광문을 열어 기민들에게 미곡을 풀어낼 수밖에 없었으니, 그 즈

음 곡산 고을에서는 산변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대개 일년 농사가 끝나고 관가에 환곡을

할 적에 흉년을 대비한 비축미를 포함시키도록 되어 있었으나, 대개의 수령들은 비축미

를 문건으로만 적어두고 다시 장리로 비싸게 농가에 내놓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막상 흉

년을 당하고 보니 중앙으로 올라간 장계에는 비축미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따로이 진

휼할 미곡이 없어 겨우 보릿겨나 메밀로 끓이 멀건죽이 고작이었다. 곡산에서 살변이 일

어나게 되었던 것은 흉년을 틈탐 수령 서리배와 미곡상인들의 농간이 밝혀졌기 때문이었

. 수령은 이서배를 시켜서 비축미를 빼돌리고 썩은 전두로 구황곡을 대신하였는데 어른

들은 그 죽을 먹고 무사하였으나, 아이들은 배탈이 난데다 극도로 쇠약하여져 이질 설사

를 일으켜서 몰죽음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에 자식을 잃은 어버이들이 울부짖으며 진휼처

로 되어 있는 장터로 몰려가 하소하니, 수령은 시절이 어느때인지도 모르고 그들 모두를

하옥시켜버리고 말았었다. 남은 농군들과, 농토성이나 다름없는 선비들 몇이 작당이 되어 곡

산 장터의 중도아들과 북관 상인들의 여각 객주에 불을 질렀다. 북관에서는 쌀한 되가 무

명 한 필에 거래될 정도로 곡가가 폭등하여 중도아들은 어수룩한 고장의 구황곡을 빼돌려

자자 가격을 어지럽히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뿐이랴. 토호들은 똥값이 되어버린 토지를 늘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구황곡을 빼돌

려 고리를 꾀하고 또한 그 이익으로 땅을 사는 것이니, 흉년이야말로 저들에게는 부를 늘릴

좋은 기회가 되었던 셈이었다. 수령 방백들은 이 틈에 향리에다 제 권 속의 세를 심고자하

여 사돈에 팔촌뻘에 이르기까지 낙향시켜서 장토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

는 백성들은 길에서 죽지 않으면 관가마다의 죽솥앞에서 죽었고, 고향 인근의 산간에 들어

가 작당하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이른바 팔도 기근, 사방 군도 발기라는 당시에 조정 대신들

의 간언에 이같은 사정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곡산의 선비와 농군들은 장바닥이 활활 불

타오르는 가운데 난민을 이끌고 객관을 점령하였다. 수령은 아서배들과 더불어 관아의 삼문

을 굳게 닫고서 나오지도 못하였다. 객관에서는 삼문 앞으로 사람을 보내어 하옥되어 있는

사람들을 전원 내놓지 않으면 삼문을 부수고 들어가겠음을 통고하였다. 하옥된 사람들도 옥

칸살에 매달려 저마다 외치고 부르짖으니, 바깥의 함성과 안의 부르짖음으로 곡산 관아는

낮이나 밤이나 잠드는 이 하나 없었던 것이다. 하리배들은 수령과 백성들의 사이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륵 눈치나 살피는데, 저자의 무뢰배들과 관아의 이속들 간에 의논이 되어 한밤

중에 객관을 습격하였다. 거기서 쌍방에 사상자가 났는데, 이튿날 구황미를 전매하였던 간

상배와 이방을 군계에서 난민들이 잡아가지고 저자로 들어왔다. 격노한 백성들은 고례에 준

하여 그들을 중형에 처하기로 하고서 솥에다 물을 부어 그 안에 앉히고는 차마 끓이지는 못

하고서 장터 다리목에다 벌거벗셔 매달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중형에 처하였다는 소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인근 부호들가 관리들은 새벽밥을 지어 먹고는 보다 치안이 든든한

대처를 찾아서 달아났다. 곡산 수령도 관아의 담을 넘어 달아났는데, 며칠 뒤 들판에서 시

체로 발견되었다. 타고 가던 말은 근처에서 양식 대신 잡아버리고 네 굽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렇게 사방에서 기민들이 들고일어났으니 누가 백성과 같이 있는가 하는 것이 빤히 드

러나게 된 세상이었다. 백성과 등진 자는 팔도의 산하에 발 디딜 데가 없었다. 마룬내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수렁과 의논한 좌수가 통인을 데리고 미곡이 쌓여 있는 언덕에 당도

하자 처음에 난민들은 그가 앞으로 나갈 때까지 묵묵히 길을 틔워줄 뿐이었다. 그는 안

심하였는지 점잖게 석 자 수염을 쓰다듬고 이 고을에서 인망을 잃지 않았음을 새삼 자부

아였던 것이다. 마룬내의 노인이 나와 예도 갖추지 않고서 그와 마주 섰다.

"웬일로 오셨소이까?"

그는 통인 아이에게 들려온 사또의 하명을 받아서 펼쳐들었다.

"사또께서는 고을 백성의 참상에 가슴이 아파서 구부자에게 권분의 의를 밝히도록 하고,

그 대신에 이 양곡을 관가의 진휼미로 정하여 여러분들에게 나누어주라는 지시를 하셨소이

."

말을 하고 나서 좌수가 관문을 읽으려 할 때 노인이 재빨리 가로챘다.

"지금 어느 마당이라고 이런 글을 읽으려 하오. 권분이라니 가당치 않소. 우리의 비축미는

온데간데없고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미곡을 실어 내어오니 포졸들을 보내어 빼앗으려다가,

이제 후환이 두려워 우리를 무마하려는 게요? 미곡이 탈취되었다고 어서 감영에 알리지 그

러오. 당신이 향소의 임을 가지고 수령과 한통속으로 우리를 못살게 굴더니 이제 와서 허

울 좋게 우리편을 드는 척하는 게요?"

곁에 있던 장정들이 나서며 제각기 한마디씩 떠들었다.

"향소 직임은 무슨 직이여. 좌수라는 것이 비 올 때 한 번 쓰다 버릴 도롱이 아닌가." "

이 군노 사령보다두 못한 놈 같으니..."

"좌수란게 저희끼리 시켜먹고 나누어먹는 자리이니 허재비보다두 못하지. 이런 놈을 그냥

보내어서는 안되겠소."

"꼴에 갓을 썼네그랴."

"어익 뼈다귀가 드센 집안의 웃어른이신데, 망신살이 뻗쳐두 유분수지 이게 무슨 꼴이우.

다음부터는 나설 자리 숨을 자리 가려서 나다니시우."

누군가가 갓을 잡아서 죽 찢어 팽개치고 흙손을 백옥같이 빨아서 호남 간지보다도 말쑥하

게 다려 입은 도포 자락을 잡아당기니, 덕망 높은 지방 어른이 그야말로 봉변이었다.

", 이러고도 당신들이 후환이 없을 줄 아는가?"

새파랗게 질린 좌수 어른이 턱수염을 떨며 중얼거렸고, 사람들은 오히려 껄걸 웃었다.

"공연히 나서서 동헌의 개 노릇을 하더니 요즘 같은 세월이 와야 자네들 따위가 백성을

무서워하지."

"자못 양반 행세를 한답시구 구름 같은 갓에 학 같은 도포 입고, 고을 어른이라구 이 사람

저 사람 욕이나 보이더니 거 아주 물에다 처박아버립시다." 이곳 저곳에서 한마디씩 나오

는 말들이 이러하여 좌수는 아예 달아날 셈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뛰었다. 누군가 그

의 궁둥이를 걷어찼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는데 맨상투에 흩저고리 차림이라 누가 보

아도 채마밭이나 맬 촌 늙은이였다. 그저 시골서 밥술깨나 조금 먹게 되면 제 이웃에 사는

사람이나 저보다 못한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살아갈 생각들을 하기보다는 수령의 위의에 붙

어서 관권에 기대어 축재를 하려는 것이 이런 자들의 속성이었다. 쥐꼬리만한 직임이라도

얻으면 그것을 이용하여 다른 이들을 누르고 속이고 위협하며, 온갖 특혜를 누려서 백성

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하는 데에서 나아가 그들을 빨아먹는 쪽에 가담하게 마련이다.

런 하찮은 직분마저 워낙 살기에 편한지라 서로 머리통이 깨져라 하며 달라붙어 각축을 벌

이는 것이다.

가난한 선비들은 그들을 비웃고 능멸하나, 막상 앞에 나서면 그들의 거드름을 고분고분

받아들였고, 그들은 나름대로 시골 선비들을 경멸하였다. 고작해야 논밭뙈기 장만하고 하인

이나 두엇 거느리고 -소학-권이나 떼어본 처지에 하다못해 공명첩을 얻든가 향소 임직이

라도 얻으면 대번에 군자로 변하는 세상이었다. 그래서는 자기네가 없으면 고을의 정사는

다 망쳐질 것처럼, 서리배들에 앞장서서 군수의 공덕비를 세운다. 잡부금을 걷는다 설쳐댔

. 효자열녀라도 제 집안에서 내어 보려고 고시가 있을 적마다 안에 올리고는 하였다. 이런

자들은 백성이 악정을 하는 관리배들보다 더욱 마음속 깊이 미워하는 자들이었다. 좌수가

창피한 꼴을 당하고 내려가자마자 기민들은 곧 그를 잊어버리고 다시 미곡을 나누어주는

일에 열중하였다. 스스로 나서서 나누는 것이니 서로의 사정을 오죽이나 잘 알겠는가. 누군

가가 쌀을 퍼내주며 무심코 한마디하였다.

"해마다 함께 추수하여 우리끼리 이렇게 나누어 먹구 살면 좋겠다. 간섭하는 놈들두 없

고 빼앗아갈 놈들두 없을 테니 요순 시절이 뭐 따로 있나." "그러게나 말여. 농사지은 놈이

배고픈 사정은 제일 잘 알지. 임금두 나서서 농사를 지어봐야 해여."

"허허, 이 사람들 경칠 소리들을 하네. 임금을 욕하면 역적이 되는거야." "백성이 있으니

주상이지, 우리가 다 죽고 보면 제 혼자 궁궐에 앉아 임금 노릇 헐 수 있나?"

"저런 좌수나 참봉이나 선달이나 동지입네 하는 놈들이 백성 노릇을 할 테지." "그것들이

백성 축에 들지. 우리네야 어디 사람인가, 아마 그리되면 그런 잘난 어른들두 모두 달아나버

릴 게여."

하루에 겪은 일이 너무도 큰 일이라서 기민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소원대로 그럴 듯한

말들이 마구 터져나왔다. 누가 일러주지도 않았건만 그들은 무심결에 잘 깨달아 알고 있었

.

좌수가 통인과 더불어 마룬내를 떠나 들판을 허둥지둥 달려갈 때 어찌나 놀랍고 기가 막

혔던지 어서 돌아가 화채그릇에 시원한 꿀물이나 타서 벌컥이며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우

선 갈증이 심하여 침이 마르고 목구멍이 뻑뻑한지라 아무데나 들어가서 냉수 한 사발이라

도 얻어먹으려 하였다. 가까이 외딴 농가가 있거늘 통인 아이를 시켜 물을 얻어오게 하였다.

통인이 달려가 물그릇을 들고 오는데 물빛이 누르끄름 하였다. 좌수 어른 살펴볼 사이도

없이 대접을 들이켜고는 죽을상이 되어서 뱉어냈다.

"에익 퉤퉤, 이 무슨 구린내냐?"

그때에 사립 밖을 내다보던 아낙네가 하도 어이가 없는지 한마디 하였다.

"때가 기근이라 물을 급히 찾길래 그래두 사람 사는 인정이라 진간장을 타서 주었더니,

참 별사람 다 보겠네."

좌수가 망신을 하노라고 그릇을 던지니 사정없이 깨어져 나갔다.

"별사람이라는 그 무슨 말버릇인고?"

아낙네도 아랫입술이 길고 눈꼬리가 치켜 있어 말본새나 성깔에 알심이 들어 있을 법해 보

였다.

"건져주니까 보따리 달랜다고, 왜 남의 대접은 깨구 지랄이여. 저것두 요즘 세상에 곡기를

처먹구 사는 인간인가?"

"아니 저 고얀 것이..."

하는데 안에서 기직이라도 매다 나왔는지 손을 비비면서 사내가 뛰어나왔다. 그리고는 다

짜고짜 나오는 소리가 욕설이었다.

"이 자식아, 지난 사흘간에 먹은 거라군 모밀겨 두어 줌이여. 그렇지만 네까짓 늙은이 모

가지를 비틀어버릴 기운은 남겨두었다. 쌀을 나눈다기에 천지 개벽한 세상인 줄 알았더니

너 같은 놈이 살아 있어 개벽하기는 글렀겠다."

달려들어 좌수의 멱살을 잡고 와락 흔들었다.

"이놈,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러느냐. 내가 이 고을의 좌수 되는 사람이다." 그랬더니

이 농군 멱살을 놓기는커녕.

"오라 네가 바루 좌수란 놈이여? 그래 고을에서 무슨 짓을 어떻게 했길래, 기근에 비축

미가 없어 구휼도 못한다더냐, 너는 얼굴을 보아 하니 이밥에 비린 것이나 먹고 혈기가 버

언하구나. 꼬락서니 아래위로 살펴보니 못된 짓을 하였다가 나같은 상한에게서 특특히 욕

을 본 모양인데, 그릇갑이나 하구 가거라."

일사천리로 중얼거리고는 보기 좋게 양볼때기를 몇대 줴질렀다. 좌수는 불이 나는 듯한

볼을 싸쥐고 뒷걸음질로 달아났다. 백성들의 성난 마음이 이러하여 벼슬아치나 잘난 척하

더 ㄴ자들은 길가에서 하정배를 받기는커녕 감히 물렀거라 섰거라를 외치며 벽제할 수도 없

게 되었다.

해서 지방 곳곳에서 이러한 일들이 생길 때 진원을 살피다 보면 언제든지 활빈당을 자처하

는 장두령의 무리들에 닿아서, 어언 백성들뿐만 아니라 관리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났다.

록 수령들이 장계를 올리지 못하였으나, 이러한 소문은 감영에까지 들어가서 관찰사 이세

백은 각 고을에 장두령이라는 자의 무리에 대하여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몇

몇 유능한 무관들을 통하여 그것이 사실은 구월산 깊숙이 숨어 있는 화적 장길산의 무리라

는 것이 알려졌다.

길산은 일찍이 참형수로 갇혀 있다가 감영의 옥을 탈출한 자라는 것도 알려졌다. 그러나

감사의 임기가 과만이 되어가고 있었다.

구월산의 마감도, 오만석을 위시한 일당들은 연이어 황해도 서남족 지방에 출몰하였으며,

자비령의 장길산 이하 식구들은 동북지방의 관가에까지 나타났었다.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

로 전해진 소문은 계속하여 감영으로 들어갔다. 감영에서는 무관 여섯 사람을 뽑아 구월산

을 탐지하고 그 두령 되는 장길산이란 자의 목을 쳐오도록 지시를 내렸다.

장교들 중에는 김식이란 사람도 끼여 있었다. 그는 한양에서부터 관찰사 이세백을 따라온

자로서 늘 감영과 선화당의 측근에서 감사를 모시고 있었다. 그의 검술 솜씨가 출중하여 이

세백이 고향의 가족에게 전답을 떼어 주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이는 스물여덟이요, 어려서

부터 무과에 오르기가 수원이어서 활터에 나다녔으나 글을 배우지 못하여 포도청 장교 자리

를 겨우 따냈던 것이다. 난리 이후로 훈련원에서는 무엇보다도 단병접전에 유리한 창 칼 쇠

몽치 쓰기를 익히는 십팔반무예를 권장하여, 김식은 정식으로 예도의 기를 닦게 되었는데

그를 가르친 자는 포도관 최형기라는 당대 제일의 무장이었다. 최형기가 십팔반무예를 훈련

시킬 때 김식의 뛰어난 기량을 알아 그를 따로이 집에 유숙시키면서 무예를 전수하고, 삼각

산에 보내어 벽곡 수련까지 겪도록 하였다. 김식은 언제나 검은 조끼에 검은 토시 끼고 한

팔 길이의 예도를 들고 이세백의 서너 발짝뒤를 지키며 따라다녔다.

이세백은 과만을 말썽없이 넘기고 싶었으나 자꾸만 소문이 일어나고 민심이 동용하여 다른

이가 부임하여 오기 전에 황해도에서 큰 난리라도 치르게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리하여 아예 후환을 끊고 나중에 토포사가 파견되어 오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구월산 일대

를 염탐하리라는 안을 내게 되었다. 이세백은 무엇보다도 관리와 부자들이 무서워하는 장

두령이란 인물을 제거해야만 해서에 낭자한 풍문을 일축하게 되리라 여겼다.

이세백의 영이 떨어지자 김식은 감영 군관 가운데에서 제법 무예와 힘이 출중한 자들을 다

섯 명 가려내었다. 그들은 깊은 밤중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나씩 선화당으로

모여들었다. 이세백의 앞에 정좌하고 모여 앉자 김식이 그들을 차례로 뵙도록 하였다. 이세

백은 제법 건장하고 우락부락한 그들을 흡족한 얼굴로 둘러보았다.

"때가 흉년이라 기근에 몰린 백성들의 동태가 어지러운데, 이런 틈을 타고 좀도적들이 일

어난다 하니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구나. 알아보니 구월산 인근에 그 괴수인 장모라는

자가 숨어 있다는데, 너희들은 지체하지 말고 구월산을 속속들이 뒤져내어 그자를 죽여 없

애라. 아마도 군병을 일으켜 토포하려면 그는 반드시 달아날 것이다. 오히려 난민인 체하

고서 그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도모하기에 쉬울 것이다." 김식이 날카로운 눈으로 제 동

료들을 둘러보고 나서 말하였다.

"대감마님께서 보시는 대로 이들은 모두 일당백의 기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는 장사

꾼으로 가장하여 구월산에서 가장 가까운 고을로 찾아들 작정입니다. 한 닷새쯤 묵으면서

살피노라면 그자가 어디에 있으며 일당들이 어디서 사는지 자세히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저희는 그를 유인하여 궁지에 몰아넣고, 제가 단칼에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그리된다면

오죽이나 좋겠느냐, 나는 김서방만 믿겠다. 각 고을마다 장모가 처단되었다는 방을 붙이게

되면 비로소 편한 잠을 자겠구나."

이세백은 은자 삼백 냥을 그들 앞에 내보였다.

"이번 일을 성사하고 오면 너희들에게 상급을 내리겠고, 장모의 수급을 얻어오는 사람에

게는 따로이 이 은자를 주겠다. 발분하라."

"명심하여 봉행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내가 사사로이 도모하는 것이라 아무에게도 발설하여서는 안되느니라. 어느 고

을에서든지 관아 것들에게 내색하지 마라."

", 저희들도 암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어서 떠나거라."

그들은 하직 인사를 올리고 선화당을 나섰다. 김식은 패랭이에 봇짐을 짊어지고, 말 두 필

에 길양식을 실었는데 마부가 둘이요, 나머지 셋도 봇짐을 하나씩 짊어졌다. 그들은 송화를

목적지로 정하고 있었다. 일단 문산을 넘어 해지점까지 가서 오전 내내 쉬고 오후에 다시

길을 가기로 하였다. 해지점에서 송화까지는 제법 노상이 험하여 가끔씩 좀도적이 그들의

봇짐 을 노리고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김식이 나설 것도 없이 다른 장교들이 단칼에 해치워

버리곤 하였다. 저쪽은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하여 거리로 나온 어설픈 도적들인지라 아무것

도 모르고 덤벼들었다가 무참한 죽음을 당하곤 하였다.

그들은 송화에 당도하여 무더리의 몇 안 남은 객줏집에 들었다. 때가 흉년이라 제

가 먹을 양식도 없어 객주 여각 대부분이 집을 비우고 대처로 나가거나 장사를 폐하

였던 것이 다. 그들은 어물을 가져왔다고 핑계를 대고 유숙을 하는데 미곡도 귀한 처지에

어물이 거 래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무더리를 근거로 하여 둘 셋씩 나뉘어서 구월산 일대

를 돌아다니며 인근 백성들에게 풍문을 주워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열흘 남짓 되

어서 그들은 모여 앉아 숙의를 하였다.

김식이 말하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구월산 일당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 은율과 안악이라는데, 은율에는

그들의 식구가 모여 사는 곳도 있다더군. 아예 그곳으로 들어가 보는게 어떨까?" "제가 알

기로는 수렛고개에 그들이 나와서 목을 지키는 데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목을 지키다가

양반이나 부호의 행차를 보면 어김없이 덮친다고 그럽니다. 오히려 그런식으로 저들

을 꾀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다른 자가 말하였다.

"은율에 그들의 식솔들이 산다는 말은 저도 들었습니다만, 우리가 거기에 가면 대번에 탄

로가 날 것이고 설령 가족중의 몇을 잡을 수 있다 하더라도 저들이 잡아가도록 그냥 버려두

지는 않겠지요. 그것은 나중에 토포할 적의 일이고, 지금은 장모라는 두령의 수급을 베는

일이 시급합니다."

역시 수렛고개에서 두령 되는 자를 끌어내기로 의논이 정해졌다. 이튿날 수렛고개를 점령

하기로 작정이 되어 감영의 여섯 무관들은 이른 아침에 밥을 든든히 먹고서 출발하였다.

봇짐 속에는 저마다 환도나 쇠몽치를 감추고 있었다. 말등에는 일부러 그럴듯이 부담농과

짐을 가득 실었으며, 김식은 일부러 전대를 등에다 엇갈려 메었다. 누가 보아도 대금과 값진

물품을 지닌 부상이 북로를 향하고 있으니, 이들이 평양 부고라고 여길 게 분명하였다. 그들

은 들판을 지나서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차차 송림이 울창해졌고 햇빛이 엷어

져갔다.

수렛고개의 중턱에 가까워가는데, 아니나다를까 고갯마루 위에 두 사내가 나타났다. 김식이

봇짐에 끼운 예도를 어루만지면 중얼거렸다.

"봐라, 나타났다."

"우리 뒤에두 있습니다."

곁은 따르던 장교가 말하였고 김식은 땅만 내려다보며 낮게 말하였다.

"돌아보지 마라, 다 알구 있으니까."

"싸움이 붙으면 모두 죽여버릴까요?"

"아니... 한 놈은 살려야 한다."

그들은 모른 척하고 고개를 향하여 그냥 걸었다. 오른쪽의 나무 숲속에서 마른 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쪽에도 두엇이 있는 모양이었다. 오른쪽은 숲인데 왼편은 거북

모양의 넓적한 바위가 가로막은 데에 이르렀다.

"섰거라!"

고개 위에서 기다리던 사내중의 하나가 손을 내밀며 말하였다. 그들은 덤덤하게 도적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앞의 두 사내는 환도를 들고 있었고, 뒤에 선 자들과 오른쪽의 사내들

은 장창을 겨누고 있었다.

"보아하니 돈냥이나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식구가 많아서 먹일 입이 많다. 보따리 모두 내

놓고가면 입은 옷과 의관은 다치지 않겠다. 모두 말짐과 등짐을 내려놓아라." 김식은 팔짱을

끼고 그들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으며, 곁에 섰던 장교들이 턱을 쳐들고 웃었다. 먼저 말을

꺼냈던 자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당황하는 기색이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그는

환도를 죽 뽑았다. 그와 나란히 섰던 자도 칼을 뽑아서는 곁에 늘어진 나뭇가지를 날쌔게

베어 보였다. 껄껄 웃던 장교가 마주 대거리를 하였다.

"언놈이 그따위 꼬챙이 휘두른다구 자라 모가지가 되어 봇짐을 내놓겠느냐. 우리두 쇠꼬

지라면 조금은 쑤실 줄 아는 사람이니 어디 한 번 가져가 보아라." 김식은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고 있었으며, 다른 장교들이 등뒤의 봇짐 속에서 칼과 쇠몽치를 뽑아들었다. 재빨리

벌려 서는 데 쇠뿔 형국이었다. 앞으로 뛰쳐나간 둘이 김식의 좌우로 벌리고 그뒤에는 두

사람이 간격을 좁혀섰으며, 맨 뒤에 섰던 자는 김식과 등을 반대로하여 돌아섰다. 앞의 도

적 두 사람은 칼을 휘두르며 들어왔고 벌려 섰던 자들은 감싸듯이 그들의 좌우를 막았다.

측면으로 창을 찌르며 달려들자 김식은 창날을 비껴가도록 하면서 안으로 몰아넣었고,

역시 뒤에서 뛰어드는 자들도 뿔의 안쪽에다 몰아넣었다.

그러자 상대편 일곱 도적들은 장교들의 벌려 선 진 안에서 서로 부딪치면서 사방으로 등과

옆구리를 드러내게 되었다. 김식이 다리를 굽히며 전신으로 창을 찔러 들어오던 자들의

하반신을 베었고, 다른 자는 하나의 어깨를 베었다. 일시에 셋이 쓰러졌다. 그러나 그들

은 진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시 간격을 두었다. 안쪽에 몰린 도적들이 뒤늦게 싸울 태세로

돌아서는데 진의 안쪽 끝에 섰던 김식이 칼을 흩뿌리면서 비집고 들어갔고, 그들 좌우의

두 장교도 쇠몽치와 칼을 휘두르며 김식과 엇갈렸다. 창날과 칼날로 간신히 받아내며 빠져

나오는 자들을 남은 장교들이 맞아서 칼로 후려쳤다. 김식의 칼날에 하나가 쓰러지고 다

른 자는 쇠몽치에 등판을 얻어맞고 뒹굴었다. 김식은 이어서 위에서부터 적도로 후렸다가

참풍으로 하나 남은자의 목덜미를 베었다. 칼등으로 가볍게 쳤건만 그자는 칼을 떨구며 땅

위에 엎어졌다.

"이런 것들이라면 우리 여섯이서 산채를 점령할 수가 있겠군." 김식이 칼을 집어넣으면

서 중얼거렸다. 부상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왔고, 장교들은 기절한 소두령의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왔다. 그들은 기절한 자를 나무 그늘에 눕혀주고 주위에 둘러앉았다. 김식이 말하였다.

"시체는 따로 치워두고 부상자는 나무 아래에 묶어두어라." 그리고는 소두령의 목덜미를

주무르고 겨드랑이를 비벼주니 그는 한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뜨고 휘둘러

보자마자 달아나려는 듯 벌떡 일어섰으나, 장교 하나가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고 상투를

잡아 젖혔다. 드러난 목줄기에다 차디찬 비수를 들이대고 장교가 낮게 으름장을 놓았다.

"일부러 살려주었으나 두 번 살릴 생각은 없네."

김식이 그 앞으로 다가앉았다.

"우리는 너희 두령을 도모하러 온 사람들이다. 너희들은 아무 해가 없을 테니 염려 마라.

만약에 우리 일을 도와주면 사면은 물론이려니와 상금을 두둑히 내릴 터이다." 소두령은

상투를 잡힌 채로 부르짖었다.

"이렇게 잡힌 게 분하다. 어서 죽여라."

비수를 들이대고 있던 장교가 소두령의 의연한 말투에 김식을 바라보았다. 김식이 빙긋

웃으며 장교에게 일렀다.

"그 사람이 두통이 심한 모양이로다. 머리를 따로 떼어두면 나을 듯하니 어서 이사를 시

키려무나."

장교가 비수를 소두령의 목줄에 슬며시 눌렀고 상처에서 피가 흐르면서 소두령은 고함을

쳤다. 김식이 말하였다.

"정말 죽을지언정 우리를 돕지 못하겠단 말이지."

소두령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렇다. 너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김식이 보아하니 이것은 보통의

좀도둑들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믿는 구석이 없는 다음에야 저토록 뻣뻣하게 기를 내세울

리가 없었다. 김식은 손짓으로 비수를 대고 있는 장교를 비켜나도록 하였다. 그가 장교들에

게 물었다.

"부상자가 몇 명이던가?"

"다리를 베인 자와 쇠몽치로 맞은 자가 있는데 하나는 곧 죽을 듯합니다." 김식이 소두령

에게 말하였다.

"들었는가, 수렛고개의 네 부하들은 모두 죽고 남은 두 사람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우리는

저 둘을 끌고 내려갈 터인데 너는 산채에 가서 네 두령에게 알려라. 내일 정오 무렵까지

송화 무더리 장터에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라고 전하란 말이다. 곁에 누가 있으면 안된다.

그대와 둘이서 오도록... 만약 그가 의기있고 담이 있는 자라면 내가 한 번 겨루어보겠다."

소두령은 이글거리는 눈길로 김식을 노려보며 물었다.

"기찰포교들인가?"

김식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하였다.

"아니다. 너희 두령에게 포한이 있는 사람이 보내서 왔다." "어떤 포한이냐?" 김식의

곁에 있던 장교가 거들었다.

"우리도 너희들처럼 먹고사는 사람들인데 구월산이 탐이 나서 그런다. 우리 두령은 너희

들 때문에 해서에서 몸둘 곳이 없어졌다. 녹림의 법도에 따라 장단을 판가름하자는 뜻이지."

소두령은 장교를 손가락질하면서 꾸짖었다.

"너희가 우리들과 같다면 필시 세간에서 살지 못하여 쫓겨 들어온 백성들일 것이다. 우리

도 수령 방백과 토호들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여 녹림에 숨은 무리들인데, 우리는 여태껏

가진 것 없는 양민과 작은 장사치들을 해친 적이 없다. 너희가 녹림에 있는 자들이라면,

우리일당이 요즈음 해서의 각처에서 활빈하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 두령

은 이러한 의로운 일에 합세하여 우의로 지낼 생각을 못하는가. 내가 구월산에 들어온지

벌써 반십년이거늘, 무예가 닿지 못하여 사로잡혔다하나 우리는 너희 무리를 그대로 용

서하지 않을 것이다."

김식이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허 그놈 말하는 남생이구먼. 너를 소진이 동접으로 믿고 보낼 터이니 네 두령께 모두 전

하여라. 내일 정오 무렵 무더리 장터에 오너라. 늦으면 저 두 놈은 무더리 냇가에 악머구리

잔칫감으로 내줄 터이다."

김식은 그를 돌려서 앞으로 내질었다. 소두령이 몇걸음 비칠대며 곤두박질치려다가 간신

히 몸을 세우더니 그들을 돌아다보았다.

"내일 꼭 간다."

"공연히 꾀쓰지 말라구 하여라."

소두령은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들은 부상당한 두 졸개들을 떠메고 수렛고개를 내려

왔다. 다리를 베인 자는 스스로 옷을 찢어 동였고, 등판을 얻어맞은 자는 목을 쳐들 수

없을정도로 중태였다. 그들은 아랑곳없이 말 등에 가로 걸쳐 싣고서 무더리까지 돌아왔

.

송화 무더리가 어느 고장이라고 구월산의 정탐꾼이 없겠는가. 그들이 무더리 사근다리께

로 올 적에 인적 끊긴 주막거리 앞에서 졸고 앉았던 사내 하나가 고개를 번쩍들었다. 그는

말위에 실린 자들이 누구인가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슬슬 일어나 고름도 떨어져 앞섶

이 훤히 드러난 저고리를 펄럭거리며 그들에게로 나아갔다.

"돈이 되나 양식이 되나 좀 보태줍시오. 처자를 모두 굶겨 죽이고 혼잣몸이 목숨은 모질

어서 이렇게 살아 있소. 조금만 적선하시우."

그들은 사내의 가슴을 떼밀어냈다.

"아이구, 제발 보태줍시오."

사내가 말안장을 잡을듯이 달려들었다. 다리를 다친 자가 눈짓을 해 보이면서 그를 돌아

보았고, 김식이 사내의 등덜미를 잡아 뒤로 젖혔다.

"적선은 해주겠는데, 우리는 장사치가 되어놔서 공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코를 뭉개줄까 이

빨을 뽑을까, 매값은 두둑히 줄 터이다."

"어어... 동냥 물릅시다. 물러주오."

"그래, 물러라."

김식이 껄껄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사내는 흐트러진 상투를 쓰다듬으며 섰더니 그들이

멀어지자 집 옆을 따라서 천천히 쫓아갔다. 그는 방금 구월산 수렛고개의 식구들이 잡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던 것이었다. 그는 장터의 주막거리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대추나무

집앞에 이르러 바깥으로 달린 툇마루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우물집이라는 객주

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사내는 다시 사근다리 쪽으로 향하여 올라갔다. 그는

앉아서 졸던 집의 안 마당으로 들어가 다급하게 외쳤다.

"성님, 큰일났소이다."

미닫이를 열어놓고 누워 있던 중년의 사내가 부스스 일어났다.

"뭐야... 산에 무슨 일이 있다더냐?"

"큰돌 성님, 수렛고개 식구들이 당한 모양입니다."

큰돌은 예전부터 길상이 갑송이들과 재인말에서 함께 살아왔고, 그들이 은율 탑고개로

이사한 뒤에도 같은 마을 사람이 되었더니, 아예 구월산 식구들과 한통속이 되어버렸

던 것 이다. 큰돌이가 비록 기운도 재간도 없었지만 사내들의 거친 싸움이나 의기라든가

하는 일에 신을 내는 성미라서, 다른 광대들보다 먼저 길산이와 그 동무들에게 가담하였다.

길산이 등이 자비령으로 나간 뒤에 큰돌이는 김기의 지시로 송화로 나왔고, 주막을 열었으

나 기근으로 장사를 폐하고 있었다. 말득이가 길산을 따라간 뒤에 안악 배고개 밑의 주막은

변가의 처가 맡았다. 큰돌이는 탑고개에서 식구들을 데리고 아예 이사를 나왔다. 구월산의

동쪽은 안악 배고개 토막과 그 아래 주막에서 살피고, 서쪽은 송화의 수렛고개 토막과 무

더리 주막에서 살피도록 되어 있었다. 무더리 주막과 수렛고개의 일당들은 서로 긴밀하

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관군이 왔냐?"

"뭔지는 모르겠으나 험상궂은 장정들 여섯이 말 등에 우리 식구들 둘을 잡아 싣구 갑디

. 하나는 거의 죽었고 또 하나는 다리를 다쳤습니다." "어디로 가더냐?" "우물집으로 들어

갑디다."

큰돌이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저고리를 입었다.

"이거 큰일났구나."

"산채에 알려야죠?"

"여기서 장정들 몇을 모아 빼내올 수 없을까?"

"안되우. 내가 자세히 살폈는데 쉽사리 볼 놈들이 아닙디다. 목자에 제법 살기가 비치고 등

에는 보퉁이나 거적에 싼 물건들을 짊어졌는데, 그게 아마 병장기가 틀림없을 게요." 큰돌이

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토막의 소두령이 만만한 사람은 아닌데, 식구들이 저 꼴이 되어 끌려가는 것을

맨손으로 보구만 있었을 리는 없겠지. 모두 어육이 된 모양이구나. 어떤 자들일까?" "성님,

이렇게 하십시다. 저는 이 길로 산채에 올라 두령들께 알리고, 성님은 우물집 주인과 의논

하여 그놈들을 사로잡을 궁리를 짜놓으시우. 여기가 어디유, 송화 무더리 장터는 우리 마당

이란 말이우. 후환이란게 있어 서리배도 우리 일은 쉬쉬하는 판인데, 타관 것들이 이 바닥에

서 어쩌겠소."

"그래, 여기 일은 염려 말구 어서 가거라."

큰돌이와 정탐꾼은 밖으로 나왔다. 큰돌이는 마음을 가다듬고 우물집으로 향하였다. 아무리

우물집 주인이 돈을 받았다지만 저들은 곧 떠나고, 그는 여기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닌가. 그가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는 자명한 노릇이었다. 뿐만 아니라 구월산

인근 사방의 민심은 이미 그들의 것이었다. 구월산 일당들이 누구의 편인가를 자신이 너무

도 잘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더리 장터를 올라가는 큰돌이는 차츰 마음이 평온해졌다. 길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방문을 열어두고 더위에 지쳐 늘어진 것 같았다. 큰돌이는

헛기침을 몇번 하고 나서 우물집의 사립문을 밀었다.

"웬놈이냐?"

소리가 벽력같이 들리며 누구인가 큰돌이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앞발을 걸었다.

큰돌이는 눈앞에서 불이 번쩍하는 것을 느끼면서 앞으로 넘어졌다. 두개골 속에 열이 화끈

달아오르는 듯하였다. 잠깐 까무룩하였다가 제정신이 돌아오는데 살펴보니 먼지가 풀썩 이

는 땅바닥이었다. 누구인가 그의 들을 밟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앞쪽을 살폈다. 사내 넷이

서 웃통을 벗고 마루 위에서 점심을 먹는 참이었다. 그들은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돌이는 고개를 돌리면서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어이구, 나 죽네..."

마당을 건너오면서 우물집 주인이 떠들었다.

"이게 누군가. 큰돌이 아니여?"

"아는 사람인가?"

큰돌이의 등을 딛고 있던 자가 물었다.

"아다뿐입니까. 저기 사근다리 앞에서 주막을 하구 있는 우리 계원입지요." "아무두 드나

들지 못 하게 하라니까 왜 말을 안 듣는거야?" 큰돌이를 내려다보며 사내가 아까보다는 덜

험악하게 말하였고, 주막주인이 큰돌이를 일으켰다.

"같은 동네 사람끼리 서로 오삭가삭하는 것을 어찌 막습니까?" "누구든 안돼. 그만한 돈

과 양식을 주었을 텐데."

마루 위에서 김식이 말하였다. 그는 문 옆에 지키고 섰는 자에게 다시 물었다.

"밖에 누구 또 없지?"

"아무도 없습니다."

큰돌이는 독살스러운 눈빛을 해가지고 주막 주인을 쏘아보았다. 주막주인이 그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흠칫하면서 질겁을 하였다. 큰돌이가 말하였다.

"어유... 골이야. 나는 자네가 술이 없다구 해서 술이나 팔까 하구 왔던 참인데, 이런 봉변

이 있나."

큰돌이의 이 말에는 마루 위에 있던 장교들 모두가 귀가 훤하여져서 모두 내려다보았다.

이런 시절에 시골 저자에 술이 있다면 그것은 두엄더미 속에서 옥지환이 나온 격이었다.

인은 큰돌이가 누구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눈길에서 하는대로 따르지 않으면 뒤에 어떤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손님들은 술을 찾는데 양식도 모자라던

판에 술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큰돌이의 처분대로 맡기고자 하였다.

", 그 참 잘되었군. 그렇지 않아두 자네는 장사 수완이 있으니, 오래 묵은 화주라두 한

독쯤 쟁여놓지 않았을까 궁금했었네. 지금 가려던 참일세." "계당주가 한항아리 있다네."

루 위에서 누군가 말하였다.

"무슨 술이 있다구?"

주인이 굽신하면서 되뇌었다.

"계당주라구 그럽니다."

계당주란 계피와 꿀을 넣어서 적어도 석삼년을 넘겨야 맛이 난다는 술이니, 악주중에 도

가장 상품이라 시골에서는 부자의 회갑연에서나 가끔 내놓는 술이었다. 김식이도 술 얘기가

나오고 계당주란 말을 듣자 벌써 혀끝이 짜르르하여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면서 경계심

을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그래, 자네 집에 지금 그 술이 있단 말이지?"

곁에서 주막 주인이 다시 양념을 쳐서 거들었다.

"때가 이래서 겨우 그런 술이지만, 이 사람 주막은 오래 전부터 상고들 가운데 명주의 집

이라구 소문이 났습니다."

"겨우 한 항아리라면 모래 위에 물 쏟는 격이 아닌가. 우선 가져오게." 김식이 큰돌이를

재촉하였다. 큰돌이가 뒤통수를 주무르면서 말하였다.

"헌데 술을 담근 곳이 까막내가 되어놔서 한 시오 리 길이니 저녁참에나 드셔야 할겁니

."

"여하튼 언제라도 좋으니까 많이만 가져오게나."

"값은 얼마나 주시렵니까?"

"허 이 사람, 거북들의 털 깎는 소리로다. 물건을 봐야 돈을 따지지." 큰돌이는 수걱수걱

돌아서도 될 것을 일부러 질겅질겅 씹고 늘어졌으니 저들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돈 필요없소이다. 양식으로 주셔얍지요."

"글쎄 알았다니까."

큰돌이가 다짐을 받고 나오면서도 곁눈질로 주막 안을 살펴보는데 아까부터 부엌 뒷방 쪽

으로 자꾸만 눈이 가는 것이었다. 그 방에는 밖으로 문고리가 걸려 있었고 숟가락이 질러

져 있는 것이 누군가를 가둬 놓은 것이 분명하였다. 큰돌이가 집으로 돌아와 걱정이 태

산 같아졌는데, 얼결에 술 소리는 꺼냈지만 계당주를 구하는 일은 자신이 없었다. 큰돌이가

생각다 못해 주막에 묻힌 독을 모두 열어보니 화주가 반 동이쯤 바닥에 남아 있었다.

"계당주가 따로 있다더냐. 카하고 달착지근하면 되는 게지." 큰돌이는 아내를 불러 의원을

찾아가 계피와 산청을 두어 근 사오도록 시키고 따로 열 냥을 내주며 은근히 일렀다.

"비상을 조금만 달라고 부탁하라구. 아무려면 약 한 줌에 열 냥인데 방문을 허가내느니

어쩌느니 하지 못할 게야."

"그래두 어디다 쓸 거냐고 물으면 어찌하우."

"십년 묵은 담증 때문에 운신을 못하고 누워 있다고 그래." 큰돌이는 아내늘 내보내고

술을 떠 냈다. 맛을 보니 신맛이 약간 있는 듯하여 팥을 내어 솥에다 볶았다. 볶은 팥을

자루에 넣어가지고 술항아리 가운데 담가두었다. 어제 거른 술처럼 맛이 평순 하고 담백해

질 것이었다. 아내가 소용될 약재를 구하여 왔는데 아무래도 비상의 용처가 궁금한 모

양이었다.

"아니, 그 찌꺼기 술은 무엇하러 떠내고 법석이슈. 비상으로 이 염천에 꿩을 잡으려우,

지를 잡으려우?"

"우리 식구들이 잡혔다네."

큰돌이가 연에다 계피를 넣고 빻으면서 중얼거렸다.

"에그머니, 누가 잡혔다구요?"

"수렛고개 식구들이 붕어찜이 되었단 말이여. 모두 결딴나고 둘이 잡혀 있네." 아내가 화

들짝 놀라며 그의 코앞에 주저앉았다.

"그러니 어쩌우?"

"우리가 해치워야지."

"비상을 술에 타서 먹일려구요?"

"해봐야지."

큰돌이는 항아리에 술을 넣어 휘저었다. 금향색의 계핏가루를 타고는 맛을 보았다.

"비슷하군. 계당주가 따로 있나."

"어쩔려구 그래요. 나는 아이들 데리고 청송으로 나가 있을라우." 큰돌이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조심조심 비상가루를 술항아리에 타 넣었다.

"이제 떼죽음이 나겠구나."

"그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두 모르는데 몰살을 시켰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구 그러슈?"

" 염려 말어, 부득이하면 탑고개로 들어가버리지. 내가 무더리에 주막 주인으로 나와서

이만한 일이 라도 해치워야 산채 식구들에게 면목이 설게 아닌가?" 큰돌이는 다시 항아리

속을 휘젓고 나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진한 계피냄새가 코를 찌를 뿐이었다. 큰돌이 자신

도 비상을 탔든 지 녹용 을 탔든지 간에 그 냄새에는 목젖이 동할 지경이었다.

", 냄새 한 번 그윽하구나."

큰돌이는 누리끼리해진 속곳을 뜯어서 항아리를 단단히 봉하였다.

"이따가 어둑어둑해지면 자네가 이걸 이구 가서 값은 내일 와서 받겠습니다. 이러고는 내

려놓고 나오란 말야."

아내가 큰돌의 말에 펄쩍 뛰었다.

"나는 못허우.차라리 당집에 가서 신칼을 물고 오라면 모를까." "나허구 함께 가세나. 이런

일에는 사내보다 계집이 수월한 게야." 큰돌이는 구월산 식구들이 오기 전에 정탐으로 나온

점주의 수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수렛고개가 결딴이 나버린 책임이 꼭 자기에게 있

는 듯만 여겨저서 잡혀 있는 두 사람을 생각하니 안달이 났다.

"자정까지는 당도하겠지만..."

그전에 두 사람을 옮겨두고서 산채 사람들은 저쪽 놈들의 시신이나 거두면 될 듯하였다.

땅거미가 내려덮이고 나서 큰돌이는 못내 마다하는 아내를 달래어 아내의 등을 밀었다.

돌의 아내가 술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들어가니, 역시 삽짝 옆에 장정 하나가 칼을 짚고 지

켜서 있었다.

"이거 뭐요?"

"... 술입니다."

마루에 앉았던 자가 방안에 대고 외쳤다.

"술이 왔습니다."

김식이 마당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서 가져오라게."

큰돌의 아내는 오금이 저려 곧 주저앉을 것 같은 두려움을 억누르면서 섬돌 가까이에 내

려놓고는 돌아섰다. 문 옆에서 따라왔던 자가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봉해 은 헝겊에

술이 배어 계피냄새가 주위에 퍼지자, 서로 입맛을 다시며 감탄을 하였다.

"향기가 진동하는구나."

"혀 끝에 닿는걸."

김식은 나가려는 아낙네의 등뒤에다 대고 물었다.

"값은 안 받을려우?"

큰돌의 아내는 멈칫 섰다가 들을 보인 채로 대답하였다.

"내일... 주인께서... 받으신답니다."

"어 그러한가."

김식이 아낙네가 나간 것을 확인한 뒤에 갑자기 눈꼬리를 빳빳이 치키고는 나직하게 중얼

거렸다.

"혼자 왔던가?"

"아뇨, 저쪽에 그자가 따라왔었습니다."

김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장요가 들고 온 항아리를 제 앞에 놓고 헝겊을 벗겨냈다.

"한 잔도 입에 댈 생각 말아라."

그는 상투꼭지에서 은동곳을 뽑아냈다. 그러고는 술 속에 담갔다가 꺼내어 등잔불빛에

대고 살펴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

그는 푸르게 변색한 은동곳을 장교들에게 내보여주었다.

"이걸 마셨다가 모두 피 토하고 고택골로 직행할 뻔하였구나." 다른 장교가 칼자루를 움

켜쥐고 벌떡 일어났다.

"당장에 그것들을 처치해버려야지."

"두어라."

김식이 장교에게 눈짓으로 앉으라고 일렀다. 김식의 주위로 장교들이 둘러앉았다.

"내가 뭐라더냐. 벌써 오랫동안 놈들이 구월산에 진치고 들어앉아 있었으니 구월산 인근

은 도족들의 판도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송화 무더리라면 구월산 서쪽에서는

가장 오래 된 장터이다. 이 장터 놈들이 모조리 적당이라고 여겨야 한다. 우리는 두령의

모가지만 가져가면 되니까 섣불리 나서지 말아야지. 내일 정오까지 이 주막 안에 꼼짝 말

고 엎어져 있어야 한다."

장교 하나가 김식에게 물었다.

"부장, 만약에 화적들이 떼지어 여길 습격해 오면 어쩝니까?" "이들은 보통의 도적이 아니

. 스스로 활빈의 무리라고 자처한다. 수렛고개에서 소두령 되는 자의 태도를 보았겠지.

아랫것들이 그만하다면야 군율이 어느 정도인가는 짐작할 수 있겠지. 잡힌 두 놈을 살리려

고 갖은 술책을 써올 것이다. 다른 놈들 같으면 잡힌 놈들이 죽거나 살거나 우리를 습격하

겠지."

"어 쨌든 믿을 바는 못되우."

김식이 동곳을 다시 상투꼭지에 꽂았다.

"우리가 기척없이 누워 있으면 그자가 올것이다. 사로잡은 뒤에 그자의 주막도 우리가

점령하여 지킨다. , 나는 이제 자빠질 참이다."

김식이 보퉁이를 윗목에 놓고 누웠다. 다른 장교들도 하나 둘씩 차례로 마루와 건넌방에

드러누었고, 삽짝을 지키던 자만이 마당으로 내려서서 비어 있는 마구간에 숨었다. 장교가

김식에게 속삭였다.

"불을 끌까요?"

"그냥 놔두게."

그들이 넘어져서 침 삼키는 것도 억제하고 한 식경을 보내는데, 건너편 안채 쪽에

서 문이 열리더니 주막 주인이 나왔다. 그는 차마 마루위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마다

에 선채로 넘어진 사내들을 휘둘러보더니 삽짝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큰돌이는 아내와 아이들이 청송의 친척집으로 간 뒤에 줄곧 우물집 건너편에 쭈그리고 앉

아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주막 주인이 슬그머니 나와서 장터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큰돌

이는 바삐 쫓아갔다.

"어디로 가는 게여?"

"아이구 깜짝이야. 자네 집으로 가는 길일세, 이거 봐, 나는 어쩌란 말인가? 그놈들이 술

을 마시고는 모두들 마른안주처럼 뻗어버렸네."

"술을 마시던가?"

"냄새를 맡고 감탄들을 하고 법석이더구먼."

"에이고, 잘코사니야."

큰돌이는 끼들끼들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주막 주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 이거 큰탈이로군. 송장 치울 일을 고사간에 이제 우리 주막은 흉가가 되어버렸으니."

큰돌이는 두려움에 행동거지가 굳어진 주막 주인의 등을 밀며 재촉하였다. 삽짝을 밀

고 들어가니 집안은 고요한데 봉놋방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마루와 마당을 비추고 있었

. 큰돌이는 마루에 넘어진 세 사내를 보았다. 방안에도 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내들이

널브러져 있을 것이다.

"지관을 잘못 만난 탓들이여. 노중객사 원흔이니 내가기 전에 장구춤이라두 추어줘야겠네."

큰돌이가 여유작작하여 이렇게 흰소리를 내지르며 섬돌 위에 오르는데, 마루에 누웠던 사

내들 중에 하나가 상반신을 발딱 일으켰다.

"..."

큰돌이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얼어붙었고, 주막 주인은 하도 놀라서 마당에 궁

둥방아를 찧었다. 사내들이 차례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웃어대기 시작하였다.

돌이는 그야말로 외눈박이 소뿔에 받힌 듯 삽짝을 향하려고 돌아서는데 다른 사내가 마당

을 가로질러 막아섰다. 우물 안의 고기가 되어버린 셈이다. 장교들은 우르르 달려내려와 큰

돌이와 주막 주인의 덜미를 잡아 마루 아래로 끌고 갔다. 김식이가 퇴창문을 열고 내다보며

말하였다.

"내 이미 너희들이 적당과 내통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너희 패거리와 무슨 연락 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직고하라."

"나는 모릅니다. 뒤가 무서워서 이 사람이 시키는 대루 모른 채하구 있었을 뿐입니다."

막 주인이 수없이 이마를 조아리며 말하였으나 큰돌이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앉아 있었다.

", 저놈이 아마도 정승 판서에 턱을 걸은 모양이구나. 굳은 턱은 놓아두고 연한 양물이나

베어 버려야지."

장교가 지체없이 큰돌이의 사타구니를 더듬어 큰돌이의 물건을 비틀어 잡았다.

"... 어이쿠나."

"그놈의 턱이 이제야 노는구나."

큰돌이가 허겁지겁 상대방의 팔뚝을 잡으며 사정하였다.

"말하겠수, 말하겠다니까... 이걸 좀 놓아주오."

"너희 일당들이 어찌하기로 의논하였는가?"

김식이 묻자 큰돌이는 재빨리 대답하였다.

"산채로 사람이 올라갔는데, 오늘밤이 새기 전에 무더리로 급히 내려오라 전하였소." "

어디루 오기루 되었느냐?"

"우리 주막이오."

"이자의 집이 어딘가?"

김식이 물으니 주막 주인이 급히 대답하였다.

"사근다리 앞입니다."

", 장터 초입이로군."

김식은 큰돌이를 재갈 물려 묶어서 두 사람과 함께 끌고 가기로 하였다.

"저 자를 앞세워 우리가 그 집으로 간다. 모두 나서자." 그들은 큰돌이네 주막 주위를 싸

고 산채에서 내려오는 도적들을 맞기로 하였다. 깊은 산에서는 부엉이가 울었고 보름에 가

까운 달이 중천에 더서 지붕과 담장을 부옇게 비춰주고 있었다. 김식을 위시한 감영 장교들

은 인질들을 끌고 사근다리의 큰돌이네 주막으로 옮겨 갔다. 큰돌이네 집은 텅비어 있었다.

그들은 안 방에다 잡힌 자들을 모두 쏠아넣고 김식이만 남았으며, 나머지는 맡은 자리에

흩어져 갔다. 무더리 장터에서 읍치까지가 시오리 길이요, 까막내는 이십리 길이었는데,

월산 방면에서 들어오려면 사근다리를 거치지 않으면 추산을 돌아서 동쪽으로 수십리를 내

려와야만 하였다.

까막내는 구월산 서쪽 수랫고개가 진원이요, 아래로 흘러낼와 두 갈래 물이 합쳐져 수회 천

무더리가 되는 것이다. 구월산 일당들은 무더리로 들어오는 사근다리를 지나야 할 터인 데

큰 돌이가 서투른 짓을 하여 주막까지 점령당하였으니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오다가는 패

하기 십상이었다. 장교들은 다리 건너편에 셋이 잠복하였고 큰돌이네 주막으로 들어서는

울바자 사이에 둘이 숨었다. 그들 모두가 칼과 쇠몽치 쓰는 데는 자신이 있다는 자들이라

감영 군관 중에 뽑혀 나온 것이었다. 김식은 해서에 소문이 널리 퍼져 있는 장두령이

란 자와 겨루는 것이 원이었다. 해서 감영의 옥을 벗어나간 자이니 용첩하기가 보통이 아닐

듯하였다.

김식은 포도관 최형기의 수하에 있을 적에 예도 쓰기에는 그를 당할 자 팔도에 없을 게라

는 칭찬을 들었었다. 한팔 길이의 칼날만 있으면 그는 장비가 살아 온다 하여도 두렵지

않았다. 김식은 무릎 앞에다 칼을 놓고 조용히 앉았으나, 모든 감각은 바깥으로 곤두세워져

모기의 나래짓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가도 알아챌 수가 있었다. 달은 차츰 기울었다. 풀벌

레 소리와 개구리 소리가 사방에서 끊임없이 들여왔다. 주위에서 들려오던 개구리 울음

은 수만 개의 자갈이 서로 미세하게 비벼대는 듯했는데, 몇각이고 연이어 변하지 않고 들리

던 소리가 잠깐씩 사이를 두었다. 김식은 그때 칼자루를 당겨 손아귀에 잡았다. 그것은 마치

움 직이기 시작한 찌를 보고 대끝에 손을 가져가는 낚시꾼과 같았다. 개구리울음은 잠깐씩

사이를 두었다가 한 두 마디로 이어져 다시 산발적으로 퍼져나가고 종전의 평이한 울음소

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반복하였다. 누구인가 저 들판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김식은 칼을

잡고 일어나 삽짝문을 밀고 나섰다. 울비자 사이에 섰던 장교 둘이 그를 돌아보았다.

"온다..."

김식이 소곤거렸고 장교들은 그제서야 긴장을 하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달빛에

드러난 오솔길이 하얗게 보일 뿐이었다. 달은 희봉산 머리에 두어 뼘의 높이로 걸려 있었다.

사근다리 아래 잡초 틈을 드러나 모래밭이 드문드문 하얗게 빛났다. 물은 졸아들대로 졸아

버려서 실같은 개천의 흔적이 구석으로 가늘게 지나고 있었다. 그것마저 위쪽에는 땅속으

로 자취를 감추었는지 달빛의 반사가 거기서 끝나 있었다. 역시 누구인가 다가왔다.

"저기... 옵니다."

그들이 다리 너머를 살펴보니 희끗희끗한 사람의 자취가 움직여 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사근다리로 들어섰는데 세 사람이었다.

", 나서자."

김식은 장교 두 사람을 데리고 길 위로 나아가 다리를 막아섰다. 건너오려던 세 사내가

주춤서면서 뒤를 돌아보는 모양이 보였다. 불과 열 걸음 안팎이었다. 저쪽 다리 입구에도

장교 세 사람이 막아서고 있는게 보였다. 그러나 다리 가운데 둘러싸인 자들은 당황하

지 않았고, 하나가 나직하게 물었다.

"우리 아이들을 맡은 것이 자네들인가?"

"네가 구월산 화적의 두령이냐?"

김식이도 나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번에는 물어보던 자곁에 기다란 지팡막대를 짚고

서있던 키 큰 자가 말하였다.

"무슨 원한으로 이러는가?"

그러나 김식은 대답 대신에 칼을 천천히 뽑았다.

"나는 해서감영의 김식이라는 사람이다. 검에 자신있는 자만 나서라." 다리위의 세 사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중 먼저 말했던 사내가 고개를 젖히고 껄걸 웃었다.

"난 또 뭔가 했더니, 관가 밥을 얻어먹는 개들이로군." 장교 하나가 달려들기 전에 손가락

질을 하며 외쳤다.

"너희들은 앞뒤로 둘러싸였다. 순순히 꿇어앉으면 살려주겠다. 두령만 나와라." 그러나 그

들 중의 하나가 대꾸를 하는데 바라보니 어제 수렛고개에서 사로잡혔던 소두령이었다.

"무더리에는 이미 우리 식구들이 하얗게 들어가 박혔다. 여기가 어딘 줄 알구 찾아들어왔

느냐?"

장교들은 제풀에 놀라서 잠깐씩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두런거리

는 인기척이 들렸다. 큰돌의 주막으로부터 몇사람이, 길 위로 몰려나오는 중이었다. 다리

위의 키 큰 사내는 오만석이요, 또 하나는 마감동이었다. 그들은 기별을 받자마자 산을 내려

와 장교들 쪽에서 이른 대로 소두령과 마감동 오만석 등이 사근다리 쪽으로 나왔고, 다른

식구들은 청송으로하여 무더리의 서쪽 길로 들어섰던 것이었다. 그들은 적이 어디에 숨어

있든 배후나 빈틈으로노리든 거칠 것 없이 막바로 들어오는 판이었다. 김식의 일행이 그들

을 너무나 얕보고 딴 에는 계략을 이리저리 꾸며본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큰돌이가

보낸 정탐꾼은 미처 수렛고개도 못 가서 그들과 마주쳤고, 그간의 일을 고하였으나 마감

동 일행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무더리 장터로 먼저 들어왔던 일행들은 우물

집을 은밀히 덮치고 나서 그들이 큰돌이네 주막에서 은신해 있는 것을 알고는, 마두령의

일행 이 사근다리에 당도할 때까지 울타리와 처마밑에 박혀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김식

이 사세가 그른 것을 알면서 칼솜씨를 믿고서 마감동의 머리를 얻고자 달려들었다.

칼날을 오만석이가 창대로 받는데, 마감동이는 뒤로 몇걸음 물러나며 김식을 끌어들였다.

그는 난간 을 지으며 다리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고, 김식은 오만석의 옆구리로 빠져나

가 난간을 넘어섰다. 만석은 단장을 휘두르며 두 장교를 사근다리 밖으로 몰아냈는데, 연이

어 밀려든 배후의 장교들을 다른 식구들이 맡았다.

아무리 저희가 단병 접전에 자신이 있다 하나 제법 조련을 받고 실전을 여러 차례 겪어온

구월산 일당들을 어찌 당하랴. 둘이 죽고 나머지는 칼을 버리고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렇게 쉽사리 접전이 끝나버리는데, 사근다리 밑에서는 아직 칼날도 마주치지 않은 채 마감

동과 김식이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였다. 그들은 모래밭 가운데 칠팔 보쯤 떨어져 서 있었다.

감동은 칼을 느슨히 늘어뜨렸으며, 김식은 팔을 수평으로 벌리고 칼을 일직선으로 세우고

있었다. 마감동은 움직이지 않는데 옮기기 시작하였다.

김식은 마감동의 왼쪽으로 한 발 두 발씩 걸어나가고, 감동은 칼을 늘어뜨린 채로 서

있으니 비도라하여 아예 검법이 아닌 자세였다. 방어도 공격도 하지 못할 자세인데, 상대

방에게 자기의 기량을 감추어 저쪽에서 공격해 들어올 적의 허점을 틈타 되받아치려는 것

이다. 김식이 아무리 훈련원의 뛰어난 기술을 배웠다고는 하나 마감동의 검을 알지 못하

, 또한 비도의 자세로 서 있으니 막상 달려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싸우는 자들은

마주치는 첫 찰나에 상대방의 기량을 아는 법이었다. 김식이 아까부터 수두 자세로 칼을

수평으로 쳐들고 서 있으면서 적을 가늠해보았었다.

칼을 늘어뜨린 마감동에게는 흐트러지지 않고 단단한 어떤 느낌이 그와 상대방 사이에 물

샐틈도 없이 가득 찬 것 같았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김식은 그자가 보통이 아님

을 느낄 수 있었다. 마감동의 비도는 마치 바람이 그친 들판의 풀과도 같았다. 아니면 비오

기 직전의 연못과도 같았으며 돌 끝에 앉은 개구리의 정지처럼 여겨졌다. 바람이 불면

풀이 거세게 흔들려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눕고 일어서고 할 것이며, 비가 오기 시작

하면 매끄럽던 연못의 수면 위에는 무수한 물방울이 솟아오르고 거친 파문이 일어날 것이

, 개구리는 정지를 그치고 돌에서 펄쩍 솟아올라 긴 혀를 내밀어 나비르 덮칠 것이었다.

김식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따라서 저절로 이루어진 동작이었다. 땅이 있음에 하늘이

있으 며 물 있는 곳에 불이 있고 정한 곳에 동이 있는 것이다. 마감동은 그의 움직임을

유도하였고 그것을 온몸과 느낌으로 받아들여 바람과 비에 춤추는 파도가 될 것이었다.

마 감동은 칼이 도구가 아니라 그의 팔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듯이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그의 살기 는 큰 바위 속에 녹아 있는 옥처럼 마음에 깊숙이 감춰져 있었다.

마감돌은 굳어버린 듯이 서서 스스로를 안으로 밑바닥으로 가라앉혀서는, 살갗과 사지와

감각의 모든 부분만을 열어두어 안에서 무심하게 외계를 내다보는 듯했다. 감동의 측면

으로 돌던 김식이 문득 멈추었다. 그런데 그것은 반 호흡이 나 되었을까, 그대로 칼을 거

두어 두 손아귀에 모으며 마감동에게로 뛰어들었다. 김식은 좌측으로 마감동의 어깨를 내

리치며 엇갈리는데 마감동은 상장으로 칼을 엇비슷이 돌려 다만 칼을 퉁겨낼 뿐이었다.

두 사람이 부딪칠 때 월광이 칼날 에 반사되어 번쩍이다가 투 명한 쇳소리가 들리며 떨어

져 나갔다.

감동은 다시 팔을 늘어뜨린 자세이고, 김식은 칼을 두 손에 쥐고 감동의 왼쪽으로 빠져 나

가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몸을 돌릴 때 그의 왼쪽 옆구리가 비어 있었으니 두 손에 그러

쥔 칼날이 오른쪽 어깨 너머로 수직으로 서 있게 되었던 때문이었다. 그것은 명익의 세

였다. 바람을 가르는 속리가 맵고 차갑게 들리는가 하자 김식은 왼발을 떼어 뒤로 물러

서며 상반신을 숙였다. 왼쪽 옆구 리에서 배로 타는 듯한 통증이 지나갔다. 김식이 내려다

보니 베이진 저고리 자락이 너덜거렸다. 손을 대었다. 축축한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그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했던 마감동의 허를 노릴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제부터 기격으로

그를 혼란의 와중으로 끌어낼 작정이었다.

이와같이 검술이 비슷한 상대끼리의 싸움에는 마음의 기가 제일 먼저 중요하나니 무릇

합치고 변하는 두 칼의 형세는 승패가 간발의 기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반 호흡에도 못 미치는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뭍잡는 능력을 가진자가 이기는 법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반사적으로 기를 잡아채어 쓰는 자는 실로 검을 아는 자이며, 눈을

부릅 뜨고 기를 살펴서 쓰지는 못해도 방어할 줄 아는 자는 검을 배운 자이며, 그것을 볼

줄도 쓸 졸도 모르는 자는 검에 죽을 자라고 도흥경은 -도검록-에서 말하였다.

기를 보고 쓸 줄 아는 길은 맹수가 몰리기 시작하면 동자라도 창을 가지고 쫓을 수 있

, 벌이 독을 내면 장사라도 당황하여 실색하게 되는 것이니, 그 화를 남이 헤아리지 못하

게 하고 속히 변하여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제갈량-심서-에 섰다.

김식은 아까와는 반대 방향에 마감동을 바라봅며 섰다. 그와 엇갈리는 순간에 감동은 돌

아 선채로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내쉬어 북받치려는 긴장과 분노를 흐트러뜨렸

. 옆구리에 베인 상처로하여 몸이 굳어지면 어깨와 팔이 뻣뻣해져서, 상대의 변화무쌍한

칼날을 제 때 받아 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마감동은 시선을 제 발의 서너 발짝 앞에다 떨구고 칼을 늘어뜨린 채 바람소리를 듣고 있

었다. 그 가운데 김식의 숨소리의 변화와 높낮음이 또렷이 들려왔다. 달이 지면 그는 죽는

. 마감동은 이제 자신이 있었다. 판단으로 싸우는 자는 감각으로 대응하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는 검을 배운 이래로 월정사의 풍열스님으로부터 마음을 비우는 법을 다시 배웠

. 칼은 그의 마음처럼 무심해질 것이다. 어둠이 내리면 김식의 칼은 맹목이 되어버려 쓸모

가 없어질 것이다. 김식은 처음과 같이 견적출검으로 칼을 수평으로 쳐들고 조금씩 휘돌리

면서, 오른발을 들어 방향을 바꾸면서, 이내 봉두가 되어 칼을 휘둘러치고 들어왔다. 봉황이

날카로운 부리로 쪼는 것과 같아 서 칼을 휘 둘러 머리와 양어깨를 찍어대듯한 동작으로

재빨리 찌르는 검법이었 다.

마감동은 네 동작이 합쳐진 은망의 세를 취하였으니 이는 바로 봉황에 대항하는 구렁이가

된 셈이었다. 상대가 날카롭고 재빠르니, 이쪽은 유연하게 연결된 검으로 나간 것이

.

구렁이처럼 몸을 전후좌우로 굴신하면서 상대의 칼날을 머리 위로 흘려 보내는 것과 동시에

돌아서면서 그의 사방을 공격하였다.

앞을 향할 적에는 그의 왼손목과 왼발을, 뒤로 돌면서는 그의 오른 손목과 오른쪽 발을 베

, 움 직여 그를 다시 돌아나가며 좌우를 베었다.

칼날이 맞부딪쳐 불빛이 반작거렸고, 쟁겅대는 쇳소리가 들렸다가 그들의 두 몸이 합쳐졌

. 그들은 칼을 맞대고 불어 있는데 칼날이 서로 비벼대어 끼꺽거리는 참을 수 없는 소리

가 났다. 발을 들어 그를 차려고 하자 마감동은 무릎을 굽혀 막으면서 그를 밀어냈다. 김식

은 뒤로 넘어 져가 면서 칼을 옆으로 휙 베어나갔다. 김식이 뒤로 벌렁 자빠졌을 때, 마감

동은 오른편 팔뚝에 쓰라린 통증을 느꼈다. 마감동이 그를 밀어내느라고 상체가 허술해진

순간을 김식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감동은 한 손을 대어보았다. 자상이 별로 깊지는 않았

으나, 찢어진 옷자락 위로 피가 축축하게 배어나왔다. 아무리 죽이고 살리는 싸움이라 할지

라도 사람이란 금수와는 달라서 마음이 있는지라, 이기려는 자는 심정에서부터 상대방의

위에 있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었다. 근병접전 에서는 특히 순간적으로 상대를 제압하거

, 그쪽에서 어언간에 이쪽으로 순응하여 오게 하는 심 치술이 검법만큼 중요한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도 사람은 못 속이나니 밝은 데서야 더욱 더 벌을 받는다.

일찍이 옛글에 바둑을 두는 자의 암수를 경계한 발이다. 이어서 -기경-에서도 말하기를 대

저 바둑의 도는 근엄함이 귀하니 정도로 그 형세를 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궤도를

함부로 쓰고 변사 경망한 운영을 하면 실패한다. 정정당당하게 전략을 세우면 상대의 마음

까지 굴복시키며, 떳떳한 승리에는 원망이 따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돌을 쥐었거나 칼을

쥐었거나 사람 사이의 일은 언제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마감동은 당황하며 일어나는 김식을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두어 걸음 물러나, 그가 다시

완벽한 방어의 자세로 돌아올 순간까지 기다려 주었다. 김식이 옆으로 비스듬히 서면서 요

략세로 칼을 왼쪽으로 숙이고 앞으로 나서려다가 동작을 그쳤다. 그의 마음에 잠깐의 어지

러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마감동에게서 들어올 칼날을 받아 아래로부터 왼편에 가리면

, 상대의 칼날을 위로 치키고는 그대로 비벼대면서, 심장을 찌를 셈이었다. 그러나, 마감동

이 그의 안전한 자세를 위하여 기다려주었고, 다시 처음처럼 칼을 늘어뜨린 비도로 돌아

가자, 여태껏의 자기의 모든 공격과 방어가 마감동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이루어 졌음을 김

식은 느꼈던 것이다. 그의 몸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매어졌으며 그 끈을 마감동이가 잡고

조종하는 듯 하였다. 김식은 언제 나 선수를 치는 듯 하였으나 늘 빼앗기고 있었 다. 그제

서야 김식은 마감동의 비도 자세가 태산 처럼 묵중하고 튼튼함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날렵한 목을 갑옷 깊숙이 집어넣고 있는 거북의 등과도 같았다.

저 동작을 흐트러지게 할 수 없을까. 김식은 마감동에게 매어달린 추와 같이 그의 중심으

로 들어서지 못한 채 자꾸만 밖으로 퉁겨져 나왔었다. 마감동은 아까부터 서 있던 그 자

리에서 앞 뒤좌우 두어 걸음씩 움직였을 뿐이었다. 김식은 공격을 멈추었다. 그는 칼을 정

면으로 모으고 그 칼끝에 감동의 전신을 올려놓고서, 좌우롸 갈라진 그의 형체에 눈을

주고 있었다. 그가 칼날 위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가면 김식은 곧 표두로써 그의 머리를

벽력같이 쪼개며 들어설 것이었다.

사근다리 위쪽의 둑에서는 구월산 일당들이 몰려서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수

의 싸움이란 쥐죽은 듯하다더니 풀벌레우는 소리며 바람소리가 언제보다도 더욱 또렷

하게 들렸고, 사위 공기는 기침소리에도 금이 가버릴 듯 엾은 살얼음이 끼여 있는 것같았

. 둑 위에서 구경하는 오만석은 마감동이 이처럼 신중하게 검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고 생각하였다. 그도 역시 창봉술을 익힌 사람이다. 두 사람의 싸움이 어떻다는 것을 볼 수

가 있었다. 오만석은 수회천의 시냇물을 내려다보다가 얼핏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달의 동그란 모양이 가까스로 완전할 정도로 희봉산 봉우리에 얹혀 있었다. 그렇다, 달이다!

시냇물의 전면에 내려앉아 있던 빛의 편리들은 차츰 가늘게 쫓겨가고 있었다. 마감동은 그

가느다란 빛조각의 띠를 앞에 두고 서 있었고 김식은 희봉산을 향하고 서 있었다. 마감동이

뭔가 기다리던 것은 바로 시냇물에서 빛의 파편이 완전히 사라지는 시각이었다. 그것은 감

동의 등뒤로 달이 지는 때를 의미하며, 곧 어둠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해주 군관 김식과 구월산 화적 마감동의 싸움은 나중에 수회천의 결이라 하여 세간에 알려

졌는데, 지네와 닭으로 비유되었다. 결국 달이 지고 나서 닭은 봉황이 되어 승천하였다는 것

이었다. 새벽닭은 모든 암흑을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식은 칼날 위에 마감동의 전신을 얹고 칼끝을 노리고만 있었다. 그때에 칼끝에 은빛

줄이 짤막하게 줄어든 것을 보았다. 빛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그는 칼끝에서 잠깐 시선을

떼었다. 회봉산 너머로 사라져 가는 달의 반쪽 얼굴이 보였다.

그가 다시 칼끝으로 시선을 모았을 때, 마감동의 전신은 옆으로 두어 걸음 비켜나

가 손가락 하나 길이만큼 떨어져 있었고, 그 대신에 뾰족한 칼끝에 꺾쇠같은 저쪽의 칼

이 걸려 있었다. 김식은 마감동이 늘어뜨렸던 칼을 마치 솥을 쳐들듯이 머리 위로 비스듬

히 치켜올린 것을 보았다. 거정세는 이제부터 바야흐로 자유자재로 치솟고 휘돌아치려는 모

든 자세의 기본형인 셈이었다. 김식은 그때 한기가 온몸에 끼쳐오는 느낌을 받았다. 칼끝에

서 월광이 사라졌다. 뿌옇던 외계는 먹물이 퍼진 듯 캄캄해졌다. 희부옇게 서로의 옷과

자취가 보일 따름이었다. 김식은 눈과 귀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였다. 모래땅 위로 소리없

이 마감동이 움직이고 있었다. 김식은 그의 동작을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상대는 천천

히 돌고 있었다.

마감동은 달아나지 못할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침착하고 집요하였다. 그는 을자 모양으

로 오른편으로 비스듬히 왼편으로 비스듬히 돌면서 김식과의 간격을 좁혔다. 세 번쯤 제자

리에 멈추었을 때, 실로 그것은 멈추었다기보다는 발을 바꾸어 디딘 것에 불과하였다. 칼을

곧추 세우고 창룡이 물을 뚫고 나오듯 일직선으로 김식을 찔러 들어갔다. 김식이 가까스로

칼을 세워 오른 편으로 그의 칼날을 어긋나게 하는데, 마감동은 그대로 칼날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 칼을 엇갈려 비벼 대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쑤시고 들어갔다. 김식이 간신히 칼

을 휘돌려서 바깥으로 다시 걷어내는데 마감동이 그의 측면으로 돌면서 거위 형용과 오리걸

음으로 칼을 흩뿌려쳤다. 김식도 만만치는 않아서 위로 겅중 뛰어올라 날개를 파닥여 오르

는 참새가 되어 멀찍이 떨어지는데, 그의 등뒤를 스친 마감동의 칼날이 밑으로 내리는 김식

의 칼에 부딪쳐 퉁겨나갔다. 김식은 등뒤가 갑자기 서늘해진 것을 느꼈다. 바람에 저고리의

앞섶이 헐렁헐렁하게 부풀어올랐다. 등판이 쓰라렸다. 저고리의 등뒤가 마감동의 칼에 일직

선으로 배어졌던 것이다. 김식은 귓전에 소름이 짜릿 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허리춤을

더듬었다. 진작에 쌍검을 썼더라면 그를 비도의 부동한 동작에서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어둠은 그에겐 아무 지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김식은 단검을 뽑아 왼손에 들었다.

방어와 공격을 한 동작에서 동시에 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단검을 마감동이 눈치채지

않도록 역으로 쥐고 어깨 위로 쳐들었고, 환도를 얼굴 앞으로 세워 들었다. 그는 마감동을

다리 밑으로 유인할 생각이었다.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다리 아래는 나란히 기둥이 늘어

서 있었다. 마감동의 변화무쌍해진 검의 반경을 기둥으로 줄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식은

쌍검으로 그를 역습하려 하였다. 김식은 환도를 얼굴에서 머리 위로 번쩍 쳐들어 아래를 훤

히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마감동이 비어있는 김식의 가슴을 위에서 아래로 베어내리는데 김

식이 역으로 쥐어쳐들었던 단검으로 걷어냈다. 그리고는 다른 손의 환도로 허리를 베었다.

마감동은 그의 칼날이 또 다른 칼에 걸려 멈추자마자, 상반신을 뒤로 마음껏 굽히면서 칼을

거두어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면서 물러섰다.

김식은 재빨리 다리 아래로 뒷걸음질쳤다. 여기서 먼동이 트기까지 이리저리 돌면서 시간

을 끌 작정이었다. 아예 해가 떠오르면 그처럼 자기에게 유리한 일은 없을 듯하였다. 하늘

에는 샛별들이 차츰 빛을 잃어갔고 연달아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르스름한 빛으로

어둠이 엷어져가는 중이었다. 다리 안쪽에서는 바깥의 모래밭가 사람이 잘 내다보였다.

둥은 모두 여섯 개였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통로는 열한 군데였다. 김식은 가운데의 뒤편

기둥을 등에 지고 서 있었다. 그는 눈짐작으로 전면의 통로에 들어섰다. 그는 나름대로 자

기가 다리 밑에 속한 일직선의 세 통로를 맡기로 하였다. 그곳이 그의 동작 영역이 될 것

이다. 감동은 자기의 왼쪽 다리를 힐끗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나서 한 걸음 두걸음 첫 번째

기둥 사이를 지났다. 김식은 쌍검을 엇갈려 들고 가운데 기둥의 한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마감동이 그때에 금강보운으로 달려들자, 김식은 칼을 수평으로하여 받으며 맞은편 기둥으

로 돌아나갔다. 그가 세 번째 기둥 사이로 빠 져나가려는데, 마감동은 자신이 정한 통로를

곧장 나갔다가 되돌아 들어오면서, 맹호가 발톱을 펴고 달려드는 자세로 무릎을 구부리고

상반신을 앞으로 숙이며 칼을 허리뒤로 돌려쥐었다.

김식은 앞에 맞부딪치자 비어 있는 마감동의 허벅지를 단검으로 콱 찌르고 그와 함께 환도

를 위에서 아래로 죽 내리그었다. 그러나 그의 칼은 그냥 흘러내렸고 무엇인가 아래로 지나

간게 있었다.

마감동은 동작을 멈추고 기다렸다. 무릎을 끓고 칼을 앞으로 내밀고 있던 감동의 뒤에서

김식이 털썩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마감동은 뒤로 돌아서서 칼을 칼집에 넣으

면서 김식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앞으로 넘어져서 신음하고 있었는데, 고개는 가까스로 돌

려져 있고 한 손은 땅을 그러쥐고 있었다. 마감동이 그의 쌍검을 당하기 위하여 단도를 자

기의 허벅지로 받고, 그의 왼쪽이 비는 틈을 타서 왼쪽 옆구리를 깊숙이 베었던 것이다.

것은 치명적인 상처일게 틀림없었다. 묵묵히 내려다보는 마감동에게는 저도 모르게 적에 대

한 경외의 마음이 일어났다. 그가 겪어왔던 싸움 중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였다고 그는 생각

하였다. 김식의 신음은 아직도 끊기지 않았고 그쪽에서도 제 뒤에 마감동이 서 있다고 느

꼈는지, 일어나보려고 두 팔을 버티며 안간힘을 쓰는 모양이었다. 마감동은 김식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주고 싶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제 스스로를 세워보지도 못하고, 권력자

와 세도가의 수족 노릇이나하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 적이 누구며 자

기의 편이 누구인가를 깨닫지도 못하고, 권력의 하수인인 자기의 칼이 옳은 칼이라고 믿으

면서 마감동을 공격했었다. 그가 만약에 그 칼이 찔러 들어갈 향방을 미리 깨달았다면 얼마

나 많은 도움을 백성들에게 주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마감동은 칼자루에 다시 손을 대면서

스스로 탄식하였다.

"...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그의 등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여럿이 둑을 내려오는 기척이 있을 때, 마감동은 숨

을 몰아쉬며 칼을 휙 뽑아서 아래를 향하여 날렸다. 짧고 연약한 부르짖음 뒤에 김식은 허

우적거리던 동작을 그쳤다. 마감동이 그의 꼭 뒤 급소를 단칼에 끊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다

리 밑으로 구월산 일당들이 몰려오기 전에 이미 칼을 꽂아 넣었다.

"어디 다친데 없수?"

뒷전에 다가온 오만석이가 물었다. 마감동은 오히려 되물었다.

"죽거나 상한 사람은 없는가?"

"아이들 서넛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수. 저쪽 놈들은 둘이 죽고 하나는 상하고 둘은 사로잡

혔수."

이제 이 녀석까지 밥숟갈을 놓았으니 놈들이 모두 여섯이었구려." 오만석이 얘기하다가 그

가 다리를 절룩이는 것을 알고 저고리 자락을 찢어서 그의 다리에 붙들어매었다.

"상처가 깊은 모양인걸..."

"괜찮다. 잡은 놈들을 이리루 데려오라구 그러지."

마감동의 앞에 살아남은 두 장교가 끌려나왔다. 아직 어둠침침하였으나 짧은 여름밤은

거의 다 지나가고, 새벽닭이 울기가 무섭게 하늘에 뿌연 빛의 전조가 퍼져가는 중이었다.

"너희들은 누구의 명을 받고 나왔는가?"

마감동이 묻자 장교는 제법 분을 내어 말하였다.

"관찰사께서 직접 하명을 하셨다. 너희 두령 장모의 머리를 베어 오라 하셨다." 주위의 식

구들이 어지럽게 웃어제쳤다.

"그깟 솜씨로 장두령의 목을 바라다니 과연 범 모르는 오소리구나." 마감동이 다시 잠잠

하기를 기다려 물었다.

"김식이란 이에게 가족이 있는가?"

"그런 것은 물어 무엇하느냐. 어서 베어라."

"끼놈들..."

누군가 칼을 쳐들고 앞으로 나서는데 그는 바로 변두령이었다. 변가의 칼날을 오만석이 재

빨리 단창을 쳐들어 막았다. 마감동이 다시 물었다.

"토포군이 아니 오고 어째서 너희들만 왔느냐?"

분을 내던 자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고 다른 장교가 대답하였다.

"때가 흉년이고 관찰사의 임기가 과만이라 감히 거병할 여유가 없소. 그래서 민심을 진정

시키기 위하여 두령만을 도모하려던 것이외다. 당신들은 멀지 않아 한양으로부터의 토포군

을 맞게 될거요. 지금이라두 늦지 않았으니, 귀순하여오면 양민으로 살 수가 있소." 마감동

은 큰돌이를 불러오라 이르고 나서, 두 장교에게 부드럽게 말하였다.

"그 좋은 용력과 재주를 가지고 어찌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가? 댁네

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수령 방백 토호들에 시달리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우리

는 양민으로 살 수가 없어 녹림에 작당하고 옳지 않은 재물과 곡식을 권세가와 부자에게서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일로 업을 삼으려 한다. 우리를 토포하는 것은 곧 하늘을 치

는 것과 같은 일이니, 먼저 진휼과 무마에 힘써서 민심을 등지고 우리를 치는 일을 벌이지

말라."

큰돌이가 나서자 마감동이가 물었다.

"자네는 이제 무더리에서 떠나고 다른 이가 내려와야 할 터인데, 비축한 용전이나 포목이

얼마나 되는가?"

"포 다섯 동에 한 백여 냥이 있소이다."

"그럼 잘되었다. 가서 오십 냥만 가지구 오너라."

큰돌이가 어리둥절해하자 마감동은 다시 재촉하였다.

"어서 가져오라니까. 그리고 이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쪽으루 모셔주어라." 큰돌이

가 돈을 가지러 가고, 구월산 식구들이 둑 위로 올라가 시체를 끌어내렸다. 마감동은 큰돌이

가 가져온 돈을 두 장교에게 내주며 말하였다.

"의리대로 한다면 우리가 자네 사람들을 손수 장사지내주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세상을 등

지고 사는 이들이라 그럴 수는 없네. 곧 날이 밝을 테니 이 돈으로 사람을 사서 매장하도록

하고 부상자는 세마를 내어 해주까지 실어가도록 하게." 그제서야 그들을 살려 보낼 마감동

이의 의향을 알아챈 변가가 시뜩하여 나섰다.

"아니... 마두령, 저것들을 제 발로 걸어 돌아가도록 하겠단 말이우?" "싸움은 끝났네. 사로

잡힌 이들을 해칠 게 뭐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녹림당이라 하나 의를 지켜 세상에 보여주

는 것두 좋은 일일세."

그러나 오만석이도 변가를 거들고 나섰다.

", 성님두 의가 통할 데에 그것을 내세워야지요. 저들은 은밀히 변복하여 구월산 지경에

숨어들어와 우리의 뒤통수를 엿보던 자들이우. 만일 저들이 우리같은 녹림의 무리로서 자리

다툼이나 판도다툼으로 찾아왔다면, 일단 혼을 내고 의기도 보여줄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저것들은 감영의 장교들이우. 지금은 비록 감읍하는 기색이 보인다. 할지라도 일단 관아로

돌아가면 전보다 더욱 이를 갈게 될 게요."

"여하튼 나는 저 사람들과 약조를 하였다. 빈손으로 무력해진 사람들을 어찌 벤단 말이

?"

마감동은 김식의 명을 끊어주며 생각하였던 것을 굽히지 않을 기색이었다. 변가는 답답하

였던지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저것들은 벌써 여러 날동안 구월산 인근의 지세와 형편을 기찰하였고, 우리와 접전하여

실력도 알아챘을겁니다. 마두령 혼자의 일이 아니라, 구월산 식구들 모두의 일이니 절대로

살려 보내 서는 아니되오."

오만석은 더 이상 우기지 못하고서 일당들을 휘동하여 사근다리를 건넜다. 마감동은 큰

돌이가 끌고 온 말에 가까스로 올라타면서 사경을 모면한 장교들에게 다시 물었다.

"김식에게 가족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장교 하나가 대답하였다.

"한양에 아우가 있다고 들었으나, 아직 처자식은 없는 줄로 아오." "다행이로군." 마감동

은 부하들의 뒤를 따라서 사근다리를 건넜다. 이로써 감영에서 나왔던 여섯 명의 자객 가운

데 두 사람만이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 두 사람이

구월 산 일당들에게는 가장 큰 후환거리로 남게 되었다. 뒷날 포도 종사관 최형기는 이들을

앞 장세워 토포군의 길잡이로 삼았던 것이다. 사실 수회천의 결은 구월산 포벌의 초전이었

던 셈 이었으니, 숙종 십년 갑자 유월의 일이었다. 같은 해 시월에는 팔도의 기근으로 조정

에서 장기적인 진휼의 대책을 논의하게 되는데, 가물고 굶주림을 역병이 창궐하기 시작하였

.

자비령 일대의 장길산 일당들은 이곳 저곳에 출몰하여 장토가 드넓은 지주들과 저자의 간

상배들을 괴롭혔고 구월산 일대에서도 활빈행은 계속되었다. -서경-에 나와 있기를,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편하다 하였고, 또한 우리를 사랑해 주면

임금이고 우리에게 모질게 하면 원수이다 하였는데 이처럼 임금과 백성 사이는 매우 두려

운 것이다. 옛날 성왕이 백성 보호하기를 갓난아기같이 하며, 보살피기를 제 몸이 상한 듯하

란 것은 모두 백성을 어루 만지 고 어여삐 여겨 근본을 튼튼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릇 위를 줄여서 아래를 이익 되게 하는 방 법이면 경사에게 의논하지 않고 비용도

걱정하지 않으며, 어진 정사를 펴려는 모든 의 도가 오직 백성을 자기 몸으로 여긴 데

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높직한 궁궐 깊숙이 들어앉아 자리나 보전 하려고 왕권을 굳히

, 그 굳힐 구실과 발판 되는 세력들만 비호한다면, 이는 마치 무너진 흙더미 위에 가까스

로 버틴 바윗덩이와 같아서 조그만 풍우가 닥쳐와도 굴러 떨어지고 말것이었다. 일찍이 백

성 다스릴 자리란 하늘이 내린 바라, 어느 한 필부의 것이 아니요 적선에는 태산도 못 미

칠 높이로 쌓아올릴 수가 있고, 악행은 염병이 옮기듯 두루 퍼져나갈 것이다. 이 무섭고도

엄숙한 자리를 교만방자하게 깔고 앉은 자가 어찌 스스로에게 충성함을 바랄 수 있으랴.

록 착한 임금과 어진 정승이 다스림의 도를 날마다 강구할지라도 혜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

하고 교화가 외방까지 닿지 않는 일이 흔하거늘...

 

3

광주 삼전자루는 흉년이라 장이 한산하여졌지만 그래도 시골과는 달랐다. 도선장에는 여전

히 배가 드나들었고 객줏집에는 비록 서속에 나물죽이나마 사먹을 음식이 있었다. 그 대신

여러 좌판행상의 무리와 가가들이 자취를 감춘 것은 예년과는 달랐다. 송파에서는 아직도

이형 칠 패 그리고 왕십리 흥인문을 통하여 난전을 계속중이라 마포 삼개와 성내의 난전 무

뢰배들이 유일한 경기를 바라고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때가 중화참인데 삼전나루의 객주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술을 버젓이 개다리소반에 얹어두

고 마시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의관도 끼끗하고 갓을 반듯이 썼는데, 연신 윤선을 들어 활활

부쳐대고 있었다. 그는 부들부채로 청 안에 가득한 파리들을 내쫓는 객점 주인에게 볼멘소

리로 말하였다.

"아니, 이자들이 약조를 구워먹은 겐가 회쳐 먹은 겐가. 어찌 아직도 안 나타나는 게여."

주인은 채 알아듣지도 못하고 파리를 몰아내느라고 부채를 위아래로 내저으며 문가에 서

있었다.

"무슨 놈의 파리떼가 이리도 극성인지 모르겠군. 차라리 이것들이 낱알이나 된다면 죽을

쑤어 식량을 하든지 아니면 볶아서 반찬이라도 하지." 갓 쓴 손님은 부채로 상머리를 거칠

게 두드렸다. 주인이 그제사 돌아다보았다.

"왜요, 술은 이제 없소이다. 그저 아는 분에게만 화주로 병들이나 되게 내어 팔고 있으니,

장 것들이나 뱃놈들이 알면 우리도 골치 아픕니다."

"그게 아니라, 어째서 이자들이 안 나타나는가 말일세." "글쎄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렇게 전했지요. 아마 틀림없이 올겁니다. 시절이 어떤 때라고 쌀 두 말에 나서지 않을 놈

이 있겠소?"

손님은 붕어찜을 한술 떠서 천천히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사람이나 올 수 있다던가?"

"한 너덧 사람이 올 테지요."

손님은 다시 땡볕이 하얗게 깔린 모랫길을 내다보고 앉았다. 그는 광주 목내의 몽촌에

있는 한 씨네 겸인으로 있는 자였다. 그는 벌써 이틀째나 삼전나루 부근에 와서 돌며 타

관서 떠돌아 다니다 광주에 들른 낯선 사람들 몇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는 소문이 나지 않

도록 객점 주인에도 단단히 주의를 주었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품삯도 후하여 돈이

아니라 백미로 두 말에 무명 세 필이나 주겠다는 것이었다.

양근에서 올라온 사공 두 사람과 서강에서 왔다는 장사치 두 사람이 겸인과 닿게 되어 그

들은 몽촌으로 금일 안에 들어가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다.

"저기 오는군요."

부들부채로 파리를 쫓으며 문가에 섰던 주인이 반색하여 말하였고 겸인도 고개를 기웃이하

여 바깥을 내다보았다. 모두들 허우대가 큼직하고 어깨가 널찍한데 네 사람이 어슷비슷해

보였다. 겸인은 스스로도 잘 골라내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어이쿠 좀 늦었습니다. 우리도 객주에서 아예 함께 만나가지고 오느라고 지체가 되었지

."

그들은 우렁우렁하는 목소리로 떠들어대면서 청안에 들어와 겸인이 앉은 자리 앞에 나란히

섰다. 겸인은 앉은 채로 말하였다.

"가까이 모여 앉게나."

장정들이 둘러앉았고, 겸인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였다.

"별인은 아니고, 우리가 누구 혼사 좀 거들어줘야겠네. 얘기는 대강들었겠지?" ", 자세히

는 모르지만 삯이 후하다고하여 우리도 만사를 제쳐두고 올라오는 길이우." 겸인은 얼굴이

길고 수염은 듬성듬성하며 코허리가 잘룩하였다. 그는 주위에 권하지도 않고서 화주를 홀

짝홀짝 들이켜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글쎄 우리 집에 왜 장정이 없을까마는 모두들 얼굴을 안단 말일세." "누가 압니까?" "

색시가 알지 누가 아나."

"그 과부 말이지요?"

", 조용히."

겸인은 입에 가져갔던 손가락을 들어 양근 사공의 머리를 통겼다.

"거참, 자네는 상판대기가 꼭 꽹과리 같네그랴."

"그러니까 누군가 겪어내기 힘든 상대가 근처에 있는 모양이구려. 뒤를 다지려고 우릴 불

렀을테지."

과연 대처 무뢰배답게 서강 장사치 중의 하나가 넘겨짚었다. 겸인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

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자네가 으뜸이여. 그 집에 성미가 독하고 개차반인 자가 더부살이를 하는데 그놈만 떼치

면 일은 수월하네."

양근 사공이 잇바람소리를 냈다.

"그까짓 시골 아해 성미란 부려봤자 닭털 세우기요. 그놈 하나에 우리는 넷인데 열 놈에

죽 한 숟갈이우. 차라리 부르지나 말지."

"이봐, 그러니까 무는 개를 돌봐줘야지, 시방 큰소리치지 말고 일이나 틀림없이 해놓게.

일어서지."

겸인이 남은 화주를 호리병째로 들어 콸콸 털어 넣고는 붕어찜을 한입 그득히 씹으면서 일

어섰다. 서강 사람이 투덜거렸다.

"대문 보고 반찬 짐직한다고, 아니 그래 술처에 불러다 앉혀놓고 혼자 다 마시고선 우린

혀끝이나 두드려 털라는 말이우? 그런 인심으로 누굴 부릴려우?" 겸인은 채머리를 흔들 듯

연신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알았네, 알았어. 이제 집에 가면 다담상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을 테니 거기 가서 실컷 퍼

자시게 이를테면 자네들이 중신애비들인데 아무려면 된장국에 조밥 말아 줄까 걱정이여."

겸인은 그들을 이끌고 삼전나구에서 십 리 떨어진 망월봉 아랫녘의 몽촌으로 데리고 갔

. 너른 들판 가운 데 숯내가 흐르고 숲이 울창하였다. 몽촌에는 가장 깊숙한 송림 가운

데 날아갈 듯한 기와집 한 채가 들어앉았으니, 다른 집들은 그 집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엎

드려 있는 것과도 같았다. 한판관이 밥술이나 먹는 정도가 아니요, 농토와 과목이 넓고 수다

하여 과천 수원 공주지간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만년

을 몽촌에서 신선처럼 보내고 있었다.

겸인은 그들을 행랑 안마당에 세워두고 혼자서 후원으로 들어갔다.

한 노인은 별장의 정자에 앉아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겸인이 다가가 읍하며 말했다.

"나으리... 아이들 몇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판관은 반색을 하면서 손짓하였다.

"그래 수고하였다. 오늘밤에 곧 시행하도록 하여라." "오늘밤에요?" 겸인이 주저하는 기

색을 보이자 노인은 갑자기 목소리가 칼칼해지면서 미간을 모았다.

"아니 그러면 어느 세월에나... 날더러 아예 늙어 죽으라는 말이로구나." "다름이 아니오라,

서방님께서 행랑 아이 하나를 보내어 그 집의 동정을 살피라 하였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

았습니다. 앞뒤를 살피고 탈없이 해내야 되겠기에..." "듣기 싫어, 오늘밤에 당장 데려오

지 못하면 모두들 이 집 대문간에 발 들여놓을 생각을 말아라." 겸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뒤통수에 손만 얹고 있다가 나오니, 마침 이 댁의 장남이 그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들어오던 참이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겸인에게 물었다.

"그래 아버님께서 뭐라시던가. 아주 희색이 만면이시지?" "노여우셨습니다." "무엇 때문

..."

"오늘밤에 당장 모셔오라니 글세... 나중에 망신당하면 어쩝니까?" 그러나 판관의 장남은

턱을 들어 껄껄 웃었다.

"허허허, 아버님께서 회춘하시려나보이, 저렇게 다급하시니, 정작 모셔오면 얼마나 기뻐하

시겠는가."

"산진이란 놈이 보통 악소패와는 다르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자가 제 누이 일이라면 사생

결단을 한답디다."

장남은 별당으로 나가면 흡족하게 말하였다.

"염려 놓게, 내가 다 조처를 해두었으니까."

"그러면 어찌... 오늘 해치우랍시오?"

"지당이 물론이지. 달이 지거든 널다리에 가서 냉큼 끌어와. 데려온 자들 저녁이나 먹이구

술시중두 해주어. 절대루 난폭하게 다루지 말구. 어디루 데려와야 할지 잘 알구 있겠지." "

, 반골 젖 어미 댁으루 말씀입죠."

판관이 장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잔뜩 짜증이 나 있는 제 아비에게로 가서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아버님, 오늘은 심기가 어떠하시온지요."

"듣기 싫어. 그래 너희들은 뭐 하는 일이 있다구 내 혼사를 요 핑계 조 핑계로 미루려고

하느냐? 내가 네 에미 세상을 떠난 뒤 뒷방 것들게 다리나 주물리고 사니까 아주 팔자가 늘

어진 줄 아는 모양이구나. 네 요놈, 젊은것들끼리 밤마다 국수나 말아다 먹고 소곤거리고,

나는 뭐 뒷간의 몽당 싸리비라더냐? 오늘부터 이 별당 안으로 출입할 생각마라." "요즈음

계복이년을 보니 갑자기 화색이 돌고 바야흐로 터지는 꽃망울과도 같습니다. 아버님... 계복

이더러 침석 시중이나 들게 할까요?"

늙은 판관은 더욱 성이 나서 그를 흘겨보았다.

"난대기성이로구나 나는 그 널다리 사는 석씨 아니면 안되겠다." 하고 나서 노인이 수염

을 떨며 외쳤다.

"이 불효막심한 놈, 어서 썩 나가지 못해?"

아들이 연신 웃으면서 다소곳하게 말하였다.

"노여워 마십시오. 오늘 혼사를 올리기로 되었습니다. 헌데, 모셔올 분이 과수댁이라 성대

한 초례는 치를 수가 없고, 그저 오붓한 곳에서 은근히 신혼을 보내시고는 내달쯤에 함께

들어오십시오."

그제서야 늙은이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총기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짓무른 눈을 끔쩍이

며 다 가앉았다.

"그래 석씨를 오늘 데려온단 말이야?"

"반골 유모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늙은이가 그 아들의 숙인 어깨를 토닥였다.

"그 참, 기특한 일이다. 어서 내가 먼저 가서 기다려야지." 노인이 나서려는 것을 아들은

간신히 주저앉혔다.

"다 성사가 된 일이니 고정하셔야지요. 해가 지면 아이들이 가자에 태워 모셔다 드릴 겝니

."

"수고하였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어찌나 서운하던지..." "아버님, 그저 오래오래사십시

."

장남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아비를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판관이 이제 나이 칠십

안 팎이언만, 노망기가 있달 뿐 그것에 대한 근력은 끊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젊은 시절에도

광주 목의 한판관이라면 술 잘 먹고 돈 잘 쓰고 인물 훤출한 외입쟁이로 기방에 뜨르르한

사람이었다. 집안의 종년을 건드리지 않은 것이 없고 남의 울안도 엿보는 한량인데, 늙어 잦

아지려니 하였더니 넓어지는 것은 고쳐진 대신에 집안이나 동네에서 소소한 말썽을 부리는

것이었다.

지난봄에 학나루로 뱃놀이를 나갔다가 숯내에 나와서 빨래하던 웬 아낙을 먼발치로 보고

와서는 심사를 끓이고 집안 사람들을 들볶았다. 수소문하여 알아보았더니 널다리 사는 과수

댁인데 아이가 둘이나 있고 살림도 요족하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의 무명 짜는 솜씨가 또한

인근에 알려져 있으니, 감히 단자를 들여 청혼할 수도 없는 상대였다. 비록 판관이라 하나

현숙한 수절 과부에게 재혼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노인네의 꼴이 하도 안

절부절이라 남은 명도 채우지 못할까 하여, 혈족들은 의논끝에 매파를 넣어서 혼담을 꺼내

보기로 하였다.

즉 과수댁이 응해온다면 재취 정실로 맞아들여 집안의 안어른으로 모실 뿐 아니라, 노인이

작고하면 망월산 아랫녘의 기름진 전답을 떼어 주기로 조건을 내었다. 그러나 그 집에 범상

하지 않은 떠꺼머리 하나가 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가 바로 산지니란 총각인데

삼전나루에 나다니며 어릴 적부터 거칠게 자라나 표한하기가 꼭 길들이지 않은 새매 같다는

것이었다.

산지니란 별호가 그대로 산진이란 이름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는 석과부의 작은아버지 되는 이가 송파 객점의 표모에게서 얻은 자식이었다. 과부는 이

손 댈 길 없는 서사촌동생을 친혈육처럼 여겨오더니, 남편을 여의고 그가 드나들며 농사도

돕고 무명도 내다 팔아 살림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주위에서는 그들

사이를 수상쩍게 여겨 입방아도 찧었으나 틀림없는 오누이 사이인데다, 워낙에 석씨가 요

조하니 그런 소문은 암데도 헛나가지 않았다. 매파는 욕지거리만 얻어들었으나, 따라갔던 친

척 사내는 코가 곁으로 옮겨 앉을만큼 얻어맞고 돌아왔다. 그래서 요즘에 생각해낸 것이 바

로 시속에 따른 겁간혼이었다.

기름진 음식과 약주가 다담상에 그득히 차려져서 행랑채로 나갔고, 장남은 친히 나가서 네

사내들에게 일일이 술을 한잔씩 따라주며 격려하였다.

"아무 말썽이 없을 걸세. 너무 난폭하게 다루지 말고 조심해서 모시게." 서강 사내가 닭다

리를 뜯으며 투덜거렸다.

"삯이 너무 박하오. 쌀 두말에 무명 한 필이 뭐란 말이우. 이런 댁이라면 한 섬씩을 내어도

되겠수. 미리 합의가 되어 있는 보쌈도 아니고, 양탈이 심할 텐데 어찌 난폭하게 아니할 수

가 있소이까?"

"아니 까짓 나약한 부녀자를 장정 넷이 없어 오는 게 뭐가 그리 대견한 일이라구." 겸인이

곁에 서 힐책하자 미리 어떤 의논들이 돌았던지 양근 사공이 대꾸하였다.

", 오뉴월 닭이 여북하면 지붕을 쑤시겠소. 이런 흉년에 그래두 먹구 살겠다구 이짓 저짓

가리지 않는 터인데, 우리두 서서 오줌 누는 자식들이 과부 겁간에 쌀 두 말이 뭐요?"

장남이 아무리 잡짓이라 하난 반상이 유별한데 막가는 말로 마주 받기도 뭣하여 일어나

며 다 짐을 주었다.

"그래 알았네, 잘해내면 제 사람에게 백미 한 섬씩 주겠네." "어이구 참말 충신 효자의 집

안이십니다. 어느 말씀이라구 잘해내지 않겠습니까." 장남이 자리를 뜬 뒤에 겸인이 말하였

.

"널다리서 우리 집 아이가 돌 텐데, 그애가 길안내를 설 걸세. 이런 일이 자주 생기면 자네

들은 대번에 형편이 피겠구먼."

서강 장사치가 말하였다.

"내가 그전에 서소문 밖으루 보쌈품을 팔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는 지겟작대기, ,

몽둥이를 들구 들어갔지. 허허 막상 뛰어들어가니까 고것이 샐쭉 웃더니 자루에다 머리를

들이미는게 아닌가, 그저 돈만 안 받았다면 침을 발라보구 싶더구먼." "에이 그 부정탈 소

릴랑 말게. 다시 이르는 말이지만 여자 몸에는 손가락 자국 한군데 나서두 안되네. 그저 등

잔을 들구 오듯이 하란 말일세." 겸인이 안심이 안되는지 제 사람을 노려보며 주의를 주었

. 저물녘이 되어 널다리로 나갔던 하인이 돌아와 아뢰는데, 석씨 댁의 산지니란 떠꺼머

리가 흥인문밖에 다녀오기로 되었다면서 집은 오늘밤부터 비우게 될 거라는 것이다. 판관의

아들이 돈냥이나 내어 널다리의 동네 사람을 끌어 들였고, 그는 흥인문 밖에서 보리 한 섬

을 져올 일이 있는데, 가져오면 반을 나누어주겠노라고 산지니를 꾀었다. 한나절 다리품에

보리 반 섬이 어딘가 산지니는 별로 이상스레 여기지도 않고서 쾌히 응낙하였다는 얘기였

.

"그 업 같은 녀석이 없다니, 과연 이 혼사는 정히 이루어지는 혼사로다." 아들은 곧 다른

하인들을 시켜서 아비를 반골유모 집으로 모셔가게 하였다. 곧 가자가 나오는 데 안석과 들

것만 달린 것인데 앞뒤로 두 사람이 들고 안석에 다리를 들고 앉게 되어 있었다. 아비는

위엄있게 정자관을 쓰고 눈부신 도포를 입고 신랑이나 된 듯이 앉았으니 아랫것들도 대강의

눈치를 아는지라 입을 비쭉거리며 냉소하였다. 아들은 반골까지 따라가서 이 괴이한 혼사

를 주관할 것이었다.

몽촌에서 널다리가 한 십리지간인데 들판 건너 맞은편이요, 널다리는 바로 숯내의 천변

에 붙어 있는 마을이며 지척에 낙생역말이 있었다. 집이 열 칸은 되는 포실한 초가였다.

안은 숯 내의 자갈밭이 내다보이고 흙빛은 생생한 토홍빛이라 주위가 한적하고 깨끗해보였

. 담은 흙담인데 짚을 섞었으며 위에다가는 기와도 얹었다. 밖으로 가시나무를 심어놓았고

길 아래는 꼼꼼하게 석 축을 쌓아 숯내가 범람할 때를 방비하여두었다. 이 모두가 산지니

총각의 수고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석씨 역시 바지런하여 집의 처마에는 거미가 줄을

치어볼 여유가 없고 마당에는 잡초가 자라날 사이가 없었다. 어린아이 둘과 석씨 그리고

산지니가 식구의 전부요 머슴이나 품앗이는 비치지도 않았다.

근검하여 살아가는지라 석씨의 의복은 언제나 수수한 무명옷인데 그것도 해어진 곳은 깔끔

하게 기워 입었다. 석씨는 말수가 적은 편이고 기껏 감정을 드러낸다고 하여도 흰 이가 보

일 듯 말듯 엷게 웃는 게 고작이었다. 이마는 훤칠하고 눈이 기다랗고 코와 입술이 오종종

하여 둥근 볼이 도탑고 부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산지니는 이름 그대로 몸집이 자그마

하고 사지도 가냘프지만, 코가 뾰족하고 볼이 얇고 입이 다부지게 악물고 있어 여간내기가

아님을 누구나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아래에서 위로 쏘아보는 버릇이 있어서

누가 보든지 강렬한 적의를 담은 시선으로 느끼도록 만들었다. 뒤에서 산지니의 걸음걸이를

볼작시면 몸집도 작고 가냘픈 것이 어울리지도 않게 좌우로 어깨를 재며 걷는 버릇이 있었

.

석씨네 집에서도 저녁참이라 산지니는 마당 가운데 모깃불을 지피기 시작하고 석씨는 저녁

상을 차리고 있었다. 산지니는 땋은 머리를 두건에 말아올리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쑥

대를 묶어서는 불씨 위에 성기도록 올려놓았다. 마른 쑥대가 타오르면서 매캐한 연기가 피

어올랐다. 산지니가 기침을 터뜨리고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노라니 석씨가 밥상을 들어 대청

에다 갖다 놓으면서 한마디하였다.

", 모기보다두 네 숨이 먼저 막히겠다. 어서 저녁이나 먹어." 산지니는 못 들은 척 저

혼자 중얼거리듯이, "웬놈의 날씨에 모기는 들끓어서 어디, 이러다가는 사람이 빈 쭉정이

가 될 판이니." 하였다. 상이 나오자 아이들이 모여들어 제각기 수저를 집는데 석씨가 조

그만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삼촌이 드시면 먹어야지."

"... 삼촌은 맨날 늦는걸 뭐."

석씨가 혀를 차니까 아이들도 볼이 부푼 채로 얌전히 앉았다. 산지니가 모깃불을 지피고는

상에 앉으니 석씨는 마루 끝에 가 앉는다.

"오늘은 호박죽이로구나."

산지니는 마치 가장 그대로였다. 석씨는 맛있게 먹기 시작한 그들을 대견스레 지켜보고 앉

았다.

"... 누님은 어째 안 드시우?"

"나중에 먹지."

산지니도 구태여 더 보채지 않았다. 석씨는 언제나 그와는 같은 상에서 먹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잡곡에다 늙은 호박을 쑹덩쑹덩 잘라서 넣고 쑨 죽이라 맛이 달콤하고 구수하였다.

산지니는 단숨에 죽그릇을 비웠다.

"더 먹으련?"

석씨가 말끔히 비워진 그릇 속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니요, 호박이 얼마나 든든하게요. 벌써 속이 더부룩한걸." 산지니는 석씨와 마주보고

씩 웃었다. 양식이 없는 바 아니되 금년이 흉황으로 실농하였으니 명년에 적농기가 올 때

까지는 겪어야 하였고, 사방에서 기근으로 어수선한 판에 밥 세 때를 먹을 수도 없었다.

씨의 소견으로 는 이런 시절에 밥을 먹으면 죄를 간다는 것이었다.

"누님, 나 오늘 다녀올 데가 있수."

"오늘이라니... 이제 다 갔는걸."

산지니는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지금 나가서 흥인문 밖까지 다녀와야 허우."

"글세 홍두깨같이 난데없는 흥인문엔 왜 가니? 그리구 내일 아침에 떠나두 정오 전에 닿을

텐데 그래."

"내일 새벽에 게서 누굴 만나기루 했거든요. 그러니 지금부터 걸어서 한밤중에 당도하여

한 숨 자구 내일 아침에 돌아오면 되지요."

석씨가 아쉬웠는지 쉬었다.

"그러면 오늘은 죽말구 밥을 해줄 걸 그랬구나."

"아니에요. 내가 남태령서 기어가는 시골놈두 아닌데, 까짓 한걸음 거리에 기운 찾겠나요.

, 오늘 운수 대통하였지요. 원림이 아저씨가 작년 이맘때 담배값으로 떨구어둔 보리 한 섬

이 있는데 지난번에 독촉을 갔더니 경주인 하는 이가 내일 오면 주겠다구 하더래요. 헌데

자기는 하루거리가 걸려서 온종일 이불을 들쓰구 꼼짝 못한대나요. 그래서 날더러 그걸 져

다 주면 반 섬이나 나누어 주겠대요 글쎄."

석씨가 깜짝 놀라서 조그만 입을 벌렸다.

"에그머니 반 섬을...?"

"아마 그 아저씨 요즈음 배때가 벗은 모양이지요."

", 말 마라. 날마다 쏘가리나 잡으러 다니는 이가 무슨 대수가 나겠니. 무슨 조가 있을

?"

 

석씨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근실한 노고로 먹고사는 이란 횡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법이

고 경험에 의하여 그런 횡재는 결국은 손재로 변한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그만두지 그랬어."

", 보리 반 섬이 동작진 왕모래라면 또 모를까, 그거면 우리가 여름을 난단 말예요."

지니는 벌써 빈 지게 위에다 삼줄을 칭칭 동이고는 달랑 메고 나섰다. 석씨가 재빨리 들어

가서 농을 열고는 엽전 닷 푼을 내어 그의 손에 쥐어주며 말하였다.

"그러면 낼 아침은 성 밖에서 국밥을 든든하게... 꼭 사먹어라." "싫어요. 경주인 댁에서 얻

어먹지요."

"안돼. 요즘 어느 집에서 손님에게 아침으로 밥을 대접하겠니. 또 죽이 고작이지. 장정이

땡볕에 멀건 죽을 먹고 나다닐 수는 없어요."

실랑이를 하다가 산지니가 늘 그러듯이 석씨에게 지고 말았다.

"내일 일찍 올게요."

"삼춘, 한양 가면 엿 사와."

"나는 약과 먹구 싶은걸."

아이들이 제각기 떠들자 석씨가 오금을 박았다.

"주전부리만 하구 자라면 이담에 커서 풍병 걸린다." 석씨는 지게를 지고 멀어져가는 산

지니의 등을 보며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었다.

자시 무렵하여 네 사람의 장정들은 판관 댁 하인의 인도를 받아 널다리로 나갔다. 그들이

석씨네 집이 보이는 둑에 이르자 하인이 나직하게 말하였다.

"여기서 좀 기다리슈. 산지니란 놈이 출타하였는지 알아보고 오지요." 그러나 서강 장사치

는 처음부터 겸인을 비롯하여 그 댁 서방님짜리와 하인들까지가 모두들 혀끝에 산지니의 말

만 나왔다 하면 어딘가 겁을 내고 불안해하는 듯하여서 어쩐지 아니꼬웠다.

"제기랄... 아 그놈이 무슨 염라 태수나 금강역사라도 된단 말인가. 보나마나 삼전나구에서

탁배 시잔이나 마시구 목소리 좀 높은 놈이겠지. 산지니구 수지니구 모가지를 비틀어서 구

워 먹어버릴테니 걱정말게."

", 큰소리치지 마시오. 이게 다 집안 체모 때문에 이러는 게요." 양근의 사공들도 자못

기분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산지니인지 참새인지는 한번 완력을 보아야 알지 않나, 공연히 병아리보고 지레 겁을 먹

은 듯하군."

"여하튼 기다리슈. 그놈이 아직 집에 있다면 오늘은 그대루 돌아가야 허우." 하인이 네 사

람을 남겨두고 어둠속으로 사라진 뒤에 그들은 우두커니 어둠속에서 기다리고 섰기 도 쑥스

럽고 오기도 치밀어서, "에이,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우선 그 자식부터 물고를 내구 과부

를 들어내세." 하면서 먼저 서강 장사치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자들도 그를 따라 먼발치

어둠에 싸여 있는 석씨네 토담 쪽으로 다가갔다. 마당 안쪽을 넘겨다보니 안방 족에 등잔

불빛이 가물거리고 창호에는 석씨의 기다란 그림자가 비쳐져 있었다. 앞선 자가 제 동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건넌방을 가리켰다. 두 놈이 먼저 발을 들고 걸어가 방문 앞에 가더니

귀를 기울였다.

아무 기색이 없어 그들은 그래도 여럿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던지라, 마당에서 이리저리 더

듬거려 몽둥이나 돌멩이라도 찾으려는데 한 녀석이 잘못 디뎌 장독대의 항아리를 발로 내질

러버렸다. 모두들 움찔하였다가 재빨리 집 뒤의 광문 뒤로 숨는데, 문이 열리고 석씨의 떨리

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 누구요?"

석씨는 잠시 문을 열어두고있더니 차마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고서, 스스로 두려움을 떨쳐

버리려는듯이 헛기침을 콩콩하고는 문을 닫았다.

그래서 사내들은 방안을 엿보게 되어 그 안에 과부와 나란히 누운 두 아이를 볼 수가 있

었고, 산지니란 녀석이 분명히 집에 없음을 눈치챘다. 서강 장사치가 광문 뒤에서 나오며

일행을 향하여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다른 치들도 고개를 끄떡이고는 주저

할 것도 없이 우르르 밀려와 마루 위로 올라섰다.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석씨가 인기

척을 눈치채고 문고리를 거는 참이었다. 사내들이 문을 당기니 안으로 걸려 있었다.

"이 집엔 아무 것도 없고 부엌에 가면 봉당에 묻힌 독에 곡식이 있으니 그거나 가져가요."

침착하게 문 뒤에서 말하는 석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사정없이 문을 잡아챘다.

"이년아, 우리가 낟알이나 주우러 온 줄 아느냐?"

두어 번 당기자 문고리가 숫제 빠지면서 문이 덜컥 열려버린다. 문이 열리자 네 사내가

왈칵 밀려들었고, 석씨는 소리를 지르면서 방구석으로 쫓겨 들어갔다. 두 아이가 깨어나 울

음도 터뜨리지 못하고 제 어미에게로 다가가려고 기어가는 것을 네 사내들은 싱글거리며 서

서 내려다보았다.

"... 왜 이러는 거예요?"

석씨가 얼른 손을 뻗쳐 먼저 큰놈을 끌어다 가슴에 안았으니 우선 아이를 보호하자는 것도

있겠지만, 아이를 앞에다 가리우고 너희들이 아무리 나쁜 사람들이겠지만 설마 아이 어머니

를 어쩌랴하는 태이기도 하였다.

"가만히 있으슈, 우리가 아주머니를 호강시켜드릴 테니..." 작은아이가 뒤따라 기어가는 것

을 한 놈이 답삭 집어다 팔에 안았다.

"메태기를 쳐버릴라!"

석씨는 자지러지게 앞으로 나섰다.

"에그머니, 뭣 땜에 이러는 거예요?"

아이가 불에 덴 듯이 울어댔다. 서강 장사치가 낄낄거리면서 석씨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허 고년 눈매를 보아하니 아직도 음기가 탱중하여 있구나." 석씨가 경황중에도 얼핏 머

리에 스치는 느낌이 있어 눈앞의 봉욕은 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 이제 보니 댁네들이 나를 싸입어 갈려구 품을 파는 모양이지요. 네 발로 갈 테니까

손 저리 치워요."

서강 녀석은 이미 잡은 손이라 내쳐서 가슴이라도 한 번 움켜보려고 다른 손을 내미는데

석씨가 날렵하게 입을 대어 물어버렸다.

다른 손을 내미는데 석씨가 날렵하게 입을 대어 물어버렸다.

"이그그..."

이런 아수라판인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하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뭣들 허슈, 빨리 하지 않구, 동네가 수런거린단 말요." 석씨는 방구석에서 일어나 그들을

독기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너희 상전이 누군지는 모른다만, 내가 겪은 대로 말할 터이다. 합의가 있어 업어가기두 한

다는 데 내가 혀를 물고 죽는 꼴을 볼 터이냐?"

그리고는 머리를 들어 벽에다 세게 부딪쳤다. 다시 부딪치려는 것을 양근 사내 하나가

저고리 앞섶을 왈칵 당겨 끌어냈고, 되는대로 바느질감을 입 안에다 꾸역꾸역 쳐넣고는

가져온 흩청을 씌우고는 둘둘 말아서 앞뒤로 들었다. 아이들이 이제는 숨이 넘어가게 울어

제쳤다.

", 빨리 뛰세."

사내들도 이것이 좋은 짓은 아닌지라 뒤가 켕겨서 얼른 집을 나서서 둑길을 뛰는데,

네 사람들이 평소부터 석씨에 대해서는 좋은 생각을 갖고 있어 두런두런하다가 되는대로 소

리를 지르며 몰려나왔다. 그러나 어떤 놈들인지 몰라 잘못 건드렸다가 되우 경을 치지나

않을까 하여 어둠속에다 대고 소리만 질렀다.

"어떤 고얀 놈들이냐?"

"저놈들 잡아라."

그들은 뛰어가다가 얼른 하인 녀석이 꾀를 내어 돌아서서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아, 남의 걱정 말구 네 집이나 살펴봐라. 우리가 이럴 줄 알구 지붕마다 불씨를 던

져두었다."

하니 마을 사람들은 서로 놀라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집마다 살피느라고 경황이 없었다.

그 틈에 보쌈꾼들은 무사히 널다리를 빠져나왔다. 교대로 석씨를 업고 가는데, 이미 기진하

여 흩청 안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그들이 반골에 들어간 것은 축시 사경 무렵이나 되어서, 사위는 적막하고 풀벌레 소리는

고즈넉 한데 별빛은 달이 지고 나자 더욱 초롱초롱하여 있었다.

반골의 젖어미란 판관의 큰아들이 어릴 적에 삼 년 동안이나 품에 안겨 자라던 여인인데,

외입쟁이 한판관이 그냥 내버려두랴, 몇번 집적거린 적이 있었다. 미리 약조는 해두었으나

막상 늙은이가 새 서방이나 된 듯이 가자에 올라타고 당도한 뒤로 군불을 넣는다. 술상을

차린다, 금침을 낸다 하면서도 늙은 젖어미는 어쩐지 속이 끓어오르는 것이었다. 한판관은

새로 도배하고 병풍 둘러치고 금침이 깔린 건넌방에 앉아 연신 방문을 여닫으며 안절부절못

하였다. 큰아들은 그의 젖어미에게 후한 대가를 치렀으므로 마치 제 집이나 되는 듯이 안방

건넌방 할 것 없이 딸이 거처하는 뒷방까지도 서슴없이 드나들었다.

"도대체 누굴 업어 오길래 이 난리야. 어디 얼마나 미색인지 똑똑히 보아두어야지." 유모

가 마루에서 서성대는 큰아들에게 시샘 비슷하게 말하였다.

"미색이기보다는 아주 복스럽구 끼끗하게 생겼습디다. 어찌나 집안 사람들께 재촉이 심하

신지 이 혼사가 끝나면 저두 발을 뻗구 자겠습니다."

"글쎄 도련님이 하시겠다면 몰라두. 나으라두 무슨 춘정이라구 이런 노망이란 말이우." "

어쩝니까, 심기를 편하게 해들리려니... 헌데 소문내지 말구 한 보름만 여기 모셔두고 시중들

어 주셔야 합니다."

젖어미는 받은 돈이 있어 귀찮은 내색은 하지 못하였다.

"그거야 여부가 있겠수. 한 달 아니라 일 년이라두 모셔야지. 도련님은 집에 돌아가실 게

?"

"될 수 있으면 여기서 함께 모시구 지내야지요. 급한 볼일이 있으면 집에두 다녀오구요."

밖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오고 삽짝이 열리는지 놋쇠 방울 소리가 딸그랑거렸다.

"에그머니, 오는 모양이구려."

사내들 둘이 어깨에다 허연 홑청에 싸감은 사람의 형체를 떠메고 들어섰고 뒤이어 나머지

사내들이 따라 들어왔다.

"별일 없었는가?"

하인이 큰아들에게 말하였다.

", 벼락같이 해치웠습죠. 동네 것들이 쫓아 나올려구 해서 불을 질렀다구 엄포를 놓았더

니 제 집 걱정에 나서는 놈 하나 없습디다."

"잘했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미닫이가 벌컥 열리며 판관이 고개를 내밀었다.

"오는가, 어서 어서 이리 데려와 얼굴이나 한번 보자꾸나." 사내들이 낄낄 웃었고, 젖어미

는 곁에 큰아들이 있는데도 내놓구 푸념하였다.

"쯧쯧, 나으리, 세상에 믿을 수 없는 것이 두고 보자는 이하구 노이네 근력이랍니다. 이리

나와서 천천히 대보탕이나 마시구 따루 주무시게 하셔요." "아니야, 자네가 어찌 내 근력을

탓하나, 대보탕은 우리 아이나 주게. 나는 강변 씨름판에라두 나가야 할 판이여." 사내들이

움직이지 않는 홑청 덩어리를 그대로 들어다 금침위에 놓았다. 큰아들이 달래듯이 말하였

.

"아버님은 나오십시오. 아주머니께서 잠깐 들어가셔야 할 테니까요." "무슨 소리냐? 내가

곁에 있어야지."

판광은 오히려 방안으로 들어가 버티고 앉아버렸다.

"나으리, 이리 나오셔요. 아녀자끼리 볼일이 있다니까요." 젖어미가 말하였으나 판관은 볼

멘소리로 대꾸하였다.

"볼일은 무슨 볼일이 있다는 게야?"

판관이 비단 금침 속으로 기어들려는 것을 큰아들이 어린애 달래듯 하면서 소매를 끌었다.

"아버님, 지금 이분은 혼절하여 있으니 손발도 주무르고 달래주고 해야 됩니다. 그 일은 유

모밖에 할 사람이 없어요."

판관이 아들의 말을 듣자 조금 납득이 갔는지 마지못해 물러나 앉았다.

"엥이 그렇다면 오늘두 그른 일이 아니냐. 내 애간장이 다 타버리겠고나." "달래보아서 고

분고분 듣질 않으면 저희들이 조처를 해놓겠으니 아버님은 심려 마십시오." 유모만 남기

고 판관과 아들은 물러나왔다. 아들은 자꾸만 방안을 기웃거리려는 늙은이를 억지로 안방

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하인을 앞세워 수고한 자들을 몽촌 집으로 보내어 백미 한섬씩

주도록 하였다. 유모는 그들이 나가자마자 홑청을 벗겨 내렸다. 안색이 창백하고 숨을 나약

하게 쉬고 있는 석씨의 입에 물렸던 재갈을 끄르고 입안에서 헝겊뭉치를 꺼내주었다. 손을

만져보니 동짓달 자리끼처럼 싸늘하다. 우선 저고리를 벗기고 치마끈을 푸는데 탐스럽게

속을 젖무덤과 머루알 같은 젖꼭지가 드러났다. 유모는 같은 여자이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야릇해져서 그것을 두 손으로 콱 움켜쥐고 싶었다.

"노망한 늙은이 같으니..."

유모는 혀를 찼다. 노망 든 노인의 늦바람 상대로는 과연 아까운 인물이었다. 속곳을 무릎

위로 들쳐보면서 유모는 저도 모르게 젊을 적에 사내들이 몸달아하던 생각이 떠올라서 볼이

뜨거워졌다. 석씨의 살결은 희고 도톰하며 부드러웠다.

유모는 얼른 속곳을 내리고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주고는 손을 잡아 비벼주었다. 다시 아래

로 내려가 버선을 벗기는데 발은 몸의 어느 부분보다도 가장 은밀한 곳이라, 통통한 발등

이며 매끄러운 바닥과 흰 뒤꿈치와 앙증맞은 발가락을 손안에 쥐고보니, 유모는 다시 야릇

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럴 적에 그의 손안에서 발이 살아난 짐승같이 잽싸게 이불자락

안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가 상반신을 일으켰고 이불을 잔뜩 앞에다 끌어모

아 어깨를 감추고는 옷을 찾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들었수?"

"내 옷... 어딨어요. 어서 내놔요."

석씨가 노려보며 말했고 유모는 윗목에 구겨져 있던 저고리 치마를 얼른 집어다 옆구리에

끼면서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이건 빨아야겠네. 어서 푹 주무시우. 내일 아침이면 녹의홍상 비단옷이 머리맡에 걸릴 테

니까."

"어서 이리 내놓지 못해요?"

유모는 옷 대신에 대접을 쟁반째로 들어 내밀었다.

"목이 갈할 터이니 이 꿀물이나 드우."

석씨가 답답하고 애가 켜이는지 스스로 고개를 젓고 눈을 감으며 차분하게 되뇌었다.

"어떤 이들인지 모르지만 사람을 잘못 봤어요. 공연히 집안에 원혼 불러들이지 않으려면

그 옷 을 이리 내세요."

"마음 한 번 잘 맞으면 북두칠성이 굽어보시는데, 원혼이 웬말이우. 어서 꿀물이나 드시

."

석씨가 쟁반 위에서 대접을 집었다. 이불자락 밖으로 나온 팔의 맨 살이 희고 탐스러웠다.

유모가 옳다 되었다 하고는 이제부터 슬슬 왁새 여울목 넘어다보듯 과수댁을 꾀어 환심이

나 사두자는 속셈인데, 대접이 벼락처럼 날아 미닫이에 맞았다. 꿀물이 창호지에 번져 얼룩

졌고 유모의 안면에도 튀었다. 석씨는 유모에게 달려들어 옷을 빼앗으려는데, 아무리 늙은이

라지만 이곳은 제 집이라 기가 죽지를 않았다. 옷을 잡아채고 한편으로 석씨의 가슴을 힘껏

떠다밀며 일어섰다.

"이런 복철이 여편네를 보았나. 예가 어디라구 함부로 행패야." 석씨는 뒤로 맥없이 넘어

갔다가 어깨와 아랫도리가 드러나 넋을 깨닫고는 다시 이불을 끌어다 가리며 고개를 파묻고

는 울기 시작하였다. 유모가 석씨의 옷으로 방바닥에 번진 물을 훔치며 다시 부드럽게 뇌

까리는 것이었다.

"이것 봐요.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지만 그거야 등 따뜻하고 배부른 양반네들의

얘기구, 우리 같은 상사람은 어디 기대구 살 데가 있어야 되는 게유. 그런다구 망자가 환생

할 리두 없구 또 누가 알아주냐구. 홍살문두 가문 보아 선답디다. 나 같으면 짚신짝 거꾸로

신고 돌아서겠네. 마음만 달리 먹으면 평생 먹고 쓰고도 남을 기름진 전답이 들어오겠다.

비 두 쌍에 온갖 세간이 들어앉은 서른 칸 기와집이 내 차지겠다, 아이들이 있다는데 논에

서 새나 보게 기르노니 까치 두루마기에 복건 씌워 서당에 보내어 사서삼경을 가르치면,

댁의 문벌로 보아 이팔에 과거 급제를 하겠구먼. 난데없는 한림학사의 어미가 되는 게요."

그러나 석씨는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유모를 노려보았다.

"알았어요. 당신네들이 어느 집 사람들인지 다 알아요. 이 수모는 내 동생이 꼭 씻을 거예

."

그때에 기침소리가 들리며 미닫이가 벙긋 열렸다.

"좀 들어가겠습니다."

유모가 나가라고 손짓을 하면서 눈을 끔적거려 보였건만 판관의 아들은 모른 척하고 방안

에 들어섰다. 석씨는 자지러질 듯 놀라 다시 이불을 머리까지 둘러쓰고 벽에 가서 붙어 앉

았다. 큰아들은 유모의 곁에 가서 정좌하고는 점잖게 말하였다.

"요즈음 시속에 따라 무례한 행동을 하였으니 용서해주십시오. 저희 아버지께서 아주머니

를 그리시다 실로 깊은 병환이 들었기로, 어리석은 자식의 마음을 어쩌지 못하여 아랫것들

을 시켰지요. 저희 뜻을 용납해주신다면 받들어 서모님으로 모시겠으나, 만약에 끝까지 마다

하시면 하는 수 없는 일이지요. 다만 걱정되는 것은 아까 보쌈해온 자들이 이미 저질러놓은

일이라, 혼사가 깨어진다면 자기들이 감당하겠노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된다면 너무

도 봉욕이 크실 줄 압니다."

그의 얘기로는 우리의 청혼을 물리치면 이왕에 비례가 저질러졌으니 내쳐서 폭한들이 무리

로 겁간한다더라도 모르겠노라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석씨는 듣는지 못 듣는지 이불을 쓰고

아무 대꾸가 없었다. 큰아들은 유모에게 눈을 끔적였다.

"잘 생각하십시오. 오늘은 피곤하실 터이니 푹 주무시고 내일 저희 아버님과 상면하시기

바랍니다."

유모와 판관의 아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방을 나섰다. 큰아들이 짐짓 큰 목소리로

석씨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이들을 불러다 번을 들게 해야겠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큰아들은 가자를 메

고 왔던 두 사람의 하인을 불러 다시 목소리를 크게하여 분부하였다.

"너는 이 자리에 꼼짝 말구 앉아서 아무도 방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켜라. 그리고 너는

문간에 나가 누가 오는가를 살피다가 별일이 있으면 내게 알려라." 물론 과부를 되업어갈

자를 막으려는 지시이기도 하였거니와, 무엇보다도 여자가 이상한 짓을 하거나 달아나려

는 생각을 아예 포기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모는 마루 끝에다 마늘등 둘을 번

듯하니 매달아두었다. 초상이나 잔치를 만난 집같이 온 마당이 훤해졌다.

석씨는 애가 타서 연신 이불을 쥐어뜯었다. 자기가 치른 곤욕은 고사간에 산지니도 없는

빈집에 남은 두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울다 울다가 지쳐 혼절하였든지, 아니면 캄캄한 어둠

속으로 엄마를 찾으러 나섰다가 시냇물에 빠졌거나 길을 잃어 숲을 헤매다가 짐승에 물렸을

지도 몰랐다. 석씨는 상대가 누구인지 환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칠십 노인을 두고 혼담을

내는 미친놈들을 두들겼다며 주먹을 쥐던 산지니 말이 떠올랐다. 당상관은커녕 목사도 못

되는 판관 댁에서 감히 우리 누이를 넘본다고도 하였었다. 이들은 틀림없이 한판관네 일족

일 것이었다.

그런데 집꼴로 보아 몽촌에 있다는 그들의 궁궐같은 집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기네 집이

나 다름없는 범상한 농가였다. 여기가 어디인지나 알아야 밤을 타고 도망이라도 해볼 것이

. 석씨는 달아나기는 글렀음을 다시 깨달았다. 지키는 자도 그러려니와 이렇게 속곳 바람

으로 여인이 어디를 어떻게 나다닌단 말인가. 산지니는 날이 밝으면 한양에서 돌아올 테지

, 이미 밤을 넘겼으니 자기에게 일이 일어났을 것으로 지레짐작을 해버릴 것이었다. 깨어

진 그릇을 어이 되붙인단 말인가, 하고는 그를 찾으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산지니는

차라리 자기가 자진하여 스스로를 지켜주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 죽어야지."

입술을 옥물고 다짐하지만 눈앞에는 울부짖는 어린것들의 애처로운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석씨는 느닷없이 높은 소리로 부르짖었다.

"여보아요, 게 아무도 없나요?"

마당에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유모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그러우?"

"제발 이렇게... 빕니다. 어린것들을 두고 왔어요. 그애들을 보게 해주셔요." 유모가 혀를

찼다.

"에그 불쌍해라. 에미를 부르며 밤새 울겠구먼. 그렇지만 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동네 사람

들이라두 보살펴주겠지. 글쎄 내일 성혼이 된다면 얼른 데려다가 함께 살면 되지 않우. 어서

응낙을 해요."

"내 수절을 못하는 것두 하늘의 뜻일 터이니, 누구든 지아비로 섬기겠어요." 석씨의 생각

으로는 일단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짐짓 따른 체하였다가 산지니의 구원을 기다릴밖에 도리

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는 어찌하면 그에게 알릴 수가 있을지 궁리하였다. 그는 유모를

어떻게 쓸 방도가 없을까 생각하고 묘안이 떠올랐다.

"이것도 팔자려니 생각하고 마음을 고칠까 합니다. 시방은 놀란 김에 가슴이 뛰고 두통이

심하여 며칠만 여유를 주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해주니 유모는 득달같이 판관과 아들에게 전하였고, 그들도 반 성사가 된 줄로 믿었

.

"이제부터는 당분간 여기가 집이고, 본가에 들어가기까지 푹 쉬시우."라는 얘기가 있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판관은 전보다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옷 갈아입고 공연히 마루를 서성

대며 부산을 떨었고, 유모는 석씨를 위하여 영계를 잡아 수삼과 찹쌀을 넣어 삼계탕을 끓

였다. 탕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판관의 큰아들이 다짐을 주었다.

"기한은 사흘밖에 없다구 말하세요. 저러다가 노인께서 기색이 몹시 상하시면 몸을 해칠까

두렵습니다."

"알았수, 이제 겨우 하룻밤인데 혼담을 받아들이겠다구 했으니 또 마음이 달라질게유. 어느

시러베 미친년이 이런 복을 마다할까."

유모가 탕을 들고 들어가니, 석씨는 벗은 어깨를 어쩌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고 말하였다.

"아무 옷이나 좀 내주셔요."

"몸이 괜찮수? 아무렴 일어나셔야지."

하고는 내달아 준비하여두었던 흰 저고리와 남치마를 갖다 주었다. 석씨는 옷을 갈아입고

유모가 가져다준 삼계탕을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히 비웠다. 유모가 흡족하여 바짝

다가앉으며 말하였다.

"어디 오늘 상면을 하실라우?"

석씨는 유모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꼭 성례를 서둘자는 건 아니구, 노인네가 하두 애달아하시니 서루 얼굴이라두 보자는 게

."

석씨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새를 좀 했으면..."

"아이구 깜박 잊었네. 내가 시중을 들 터이니 어서 하시게." 마루에서는 벌써 이런 수작이

오가는 것을 듣고 별 같은 놋대야에 맑은 샘물 가득 부어놓고, 양칫물과 타구며 무명 수건

에 팥비누 경대와 지분 등속을 준비하였다. 소세도구 일습을 가지고 유모가 들어가니 석씨

는 단정히 얼굴을 씻고 머리 빗고 단장을 하였다. 누가 보기에도 기품있고 의젓한 가문의

부인 모습이었다.

"에그, 저러니 나으리께서 식음을 잊게도 되었지."

유모가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들락거리는데, 석씨는 손수 이불을 개어두고, 유모에게 앉기를

권하였다.

"오늘 뵙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일이 걱정이라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를 않으니

누군가를 보내어 당장 데려오도록 해주십시오."

"아 그야 어렵지 않지. 마음만 정해졌다면야..."

"아주머니께서 다녀오시든지 이 댁 큰아기를 보내든지 하셔요." 그런 얘기가 오가는 것을

듣고 마루에 섰던 판관의 아들이 또 끼여들었다.

"데려오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서사촌동생이 가만있을까요?" "비록 혈육이라고는 하나,

장본인이 저인데 무어라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정 믿지 못하겠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와서 저를 보도록 해 주십시오." 판관의 아들은 그 말에 더는 의심하지 못하고 감복하였다.

"실로 좋은 생각이십니다. 곧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요." 그의 어깨 너머로 늙은 한판관

은 연신 고개를 내밀고 석씨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석씨가 보자하니 노인이 한 군데도

총기있는 구석은 없어 보이고 위엄도 없으며, 터럭은 세었는데 눈가에는 젊을적의 주색잡

기 흔적인 듯 지저분한 음기가 서려 있어 어딘가 깨끗지 못하였다. 눈길은 엇비스듬하고

자꾸만 좌우로 흘깃거리는데 꼭 늙은 쥐 같았다. 젊은것이 그리하여도 꼴불견이거늘 이제

내일 모레 칠성판을 짊어질 산송장이 저러하니 석씨에게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석씨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서리를 치고는 쏘는 듯한 시선으로 늙은이를 지켜보았다.

"에그, 저 으름장 같은 눈을 보아. 나는 못 참겠다."

오히려 그런 눈길에 자극을 받았는지 판관이 뛰어들었고, 그의 아들도 건성으로만 말리는

체하는 것이었다.

"허허, 아버님 왜 이러십니까?"

"잔소리 마라, 이건 내 혼사야. 지아비가 색시의 얼굴을 못 보면 누가 본단 말이야." 늙은

이의 차디찬 손이 뱀의 꼬리처럼 손목에 휘감겼을 때 석씨는 눈을 감고 입술을 꼭 물었다.

절대로 내색을 하여서는 안된다. 섣불리 굴기에는 자식이 둘씩이나 있는 에미가 아니냐.

그렇지만 않다면 이런 봉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치마 허리끈 내어 목을 졸랐든지 혀를 깨물

고 죽었을 것이었다. 석씨는 스스로 침을 꿀꺽 삼키고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하였

.

"지체와 체모가 있으신 터에 이러시면 안됩니다. 일에는 법도와 순서가 있으니 남들 하는

대로 지키십시오."

판관은 그 목소리에 또한 마음이 뛰었던 모양이다.

"그게 옳은 말이다. 참으로 현숙한 사람이로구나."

하면서도 손목을 놓지 못하는데, 아들이 보다 못하여 겨드랑이를 끼어 일으켰다.

"아버님, 그 말씀이 옳다면서 왜 이러십니까. 어서 건너가십시다." ", 홀아비 홀어미끼리

새삼스레 무슨 전안지례란 말이냐, 그냥 작수성례로 해야겠다." 아들이 빙글빙글 웃으며 대

꾸하였다.

", 그리해얍지요."

아들과 유모는 마주 웃고 있는데 고개를 숙인 석씨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신분이

중인이라하여 별것도 아닌 지방 세력자에게 당하는 수모가 뻐저리게 서글펐던 까닭이었다.

"지금 널다리로 가셔서 아이들과 산지니란 녀석을 데리구 오시우. 이미 본인이 혼담에 응

낙하였다고 하시구, 법석을 부려봤자 누님만 괴롭히는 짓이라고 따끔히 일러요. 혼사가 이루

어지면 몽촌서 반골까지 이르는 우리 모든 장토의 마름을 시키겠노라고 전하구요." "염려

말아요. 다 내게 맡기시우."

유모가 자신있게 제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석씨는 산지니의 애통해하고 격노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제서야 그와 자신이 이제껏 혈

육이라는 것만으로 그렇듯 뜨겁게 연결되었던가를 의심하게 되었다. 산지니는 겉으로 서사

촌동생이었을 뿐, 사실은 집안의 소중한 가장이었던 것이다.

흥인문 밖 경저리에게서 약조대로 보리 한 섬을 받은 산지니는 새벽에 출발하여, 왕십리를

얼른 지나 딱섬을 훌쩍 건너고 봉은사 건너편에 당도하였다. 해는 높다라니 떴는데 그는 삯

을 아끼노라고 강변에 걸터앉아, 마포와 삼개나 동작나루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배를 바라

보며 삼전나루의 낯익은 사공을 살폈다. 마침 송파 쪽으로 오르는 배가 있어 외쳐 부르니

사공이 투덜대면서도 안 면을 어쩌지 못하여 강안에 배를 대어주었다. 그가 삼전나루서 제

법 말발깨나 통하고 장정들 사이에 주먹 내력이 있어서 사공들도 산지니를 업수이 여기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삼전나루에서 내려 보릿섬을 지고 널다리까지 삼십 리 길을 걸어오자니

보는 이마다 그게 장에서 오는 양곡이냐고 물어왔다. 다만 심부름을 해주는 게라며 여러번

대꾸를 하다 보니 과연 식량이 귀한 시절이라 훤한 대낮에 곡식섬을 지고 다니기가 민망스

러웠다.

멀리 널다리가 보이는데 건너편에 동네 사람 몇이 나와 섰다가 그를 향해서 뭐라고 외치면

서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러나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양식을 보고

어려운 형편을 하소하고 좀 나누어달라는 것이겠지 생각하며, 그는 기다렸다가 저문 뒤에

동네로 들어올 걸 잘못하였다며 후회하였다.

"이 사람아, 어딜 갔다가 인제사 오는가."

다리를 건너자 동네 사람이 마주 뛰어오며 소리쳤다.

"난데없는 횡재를 만나 흥인문밖에 다녀오는 길이우." "횡재구 횡액이구 큰 난리가 났네,

자네 자주께서..." 산지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하마터면 지게에 짊어진 섬을 내동댕

이칠 뻔하였다.

"뭐라구요. 우리 누님이 무슨 변을 당하셨수?"

뒷전에 섰던 이가 덧붙여 말하였다.

"간밤에 보쌈을 당하셨네."

산지니는 눈앞이 희미해지며 일순 무릎이 꺾일 뻔 하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가 의

외로 별로 내색이 없자 동네 사람들은 다투어 얘기를 해주었다.

"뭇놈들이 내정 돌입하여 홑청에 싸가지고 다리를 건너가더구먼." "우리가 뒤를 쫓으려니

동네에 불을 질렀다구 엄포를 놓아서 모두 속았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놈들은 다리를

건너가버렸네."

산지니는 일부러 장딴지에 힘을 넣고 더욱 어깨를 숙이고는 집을 향하여 걸어갔다.

"어느 동네 것들인지두 모르지요?"

"캄캄한 밤중에 후닥닥 뛰어가는 형체만 보았으니 얼굴은커녕 몇놈인가도 모르겠네."

지니는 머릿속에 피가 몰려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럴수록 주먹에 힘을 주고 걸었다. 동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아이들이 벌떼같이 울어대어 모두들 깊은 잠이 깨었지. 시방 누가 돌보고 있지만 작은 것

은 자꾸만 보채는 모양이여."

산지니가 마음이 바빠서 비척거리며 걸음을 빨리하여 집에 당도하니, 마루에 우두커니 앉

았던 큰아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치며 내달아나왔다.

"어머니가... 잡혀갔어."

산지니는 지게를 받쳐두고 아이를 안아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곧 오신다. 걱정마라."

아이를 달래며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으나 산지니는 미칠 것만 같았다. 벌써 밤이 지나버렸

으니 땅 위에 쏟아진 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다리 사이를 노

려보았다.

"그러니 어쩌겠나. 아무튼지 저쪽에서 무슨 소식이 오기나 기다려야지." "이 고장 놈들이

면야 소식이 있겠지만, 배에 태워 먼 곳으로 데려갔다면 가망 없는 노릇일세." "우선 본인

이 알리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 참 답답한 일이로군." "혹시 이 댁에 드나들던 자가 아

닐까. 보쌈 혼례가 요즘 팔자 고치는 방편이거든." 산지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매서운 눈을 치뜨고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절에 가면 중인 체 촌에 가면 속인인 체 하지들 말구, 어서 가서 피죽이라두 한사발씩 처

먹어. 여기가 무슨 동네 우물가나 구리개 약전의 사랑방인 줄 아슈." 그는 걱정하는 체하면

서 사실은 석씨가 당한 봉욕을 이러쿵저러쿵 즐기고 있는 동네 사내들이 미웠다.

"어서 못 가겠으면 내가 후문을 질러드리지."

아이를 보고 있던 동네 여자도 힐끔대고 눈치를 살피며 사내들 뒤를 따라 나가버렸다.

 

그는 명치끝이 쓰리고 목이 부푸는 듯하였다. 보쌈은 과수댁을 집에서 빼내오는 즉시 겁간

하여 수절을 그르치도록 해놓는다. 그러면 남들에게도 발명할 명분이 서고 여자도 기왕에

그릇된 일이라 포기하고 사는 법이었다. 범하기 전이라면 모르거니와, 일단 남자의 살을 접

하고 나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스스로 자진하기도 못하였다. 자진할 구실이 없는 것이다.

러므로 보쌈해가는 쪽에서는 여자가 스스로 죽지 못하도록 빈틈없이 방비하고 먼저 덮치게

되어 있었다. 산지니는 석씨가 어떤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룻밤이 지났으니 어쩌

면 벌써 차디찬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산지니는 자기가 석씨를 서사촌 누님으로서

가 아니라, 한 여자로서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깨달았다.

어릴 적에 심부름 와서 방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 구석에 섰으라치면 누님이 가만히 손

짓하여 뒤꼍으로 데려가서 떡이나 밤이나 과일 주전부리를 먹여주던 생각이 났다. 송파 객

주의 빨래 어멈이던 산지니의 어머니는 속상한 일이 생길 적마다 무턱대고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때리고 하면서, 이 웬수야 파라리 나가서 강에나 빠져 죽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뇌

까리곤 하였다. 그는 먼발치서 누나를 보기 위해 큰댁의 울타리를 맴돌았다. 이제 다시는 다

른 남자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홀몸이 되어 한 식구로 살아온 석씨를 산지니는 마치 명부에

서 되살아 온 전생의 젊은 어머니처럼 여겼다. 또는 아내로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하도 소중

한 감정이라서 그런 생각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잘라내 버렸을 것이었다.

"만약에 알아낸다면..."

산지니는 이를 꼭 악물었다. 그의 누님을 덮쳐간 장본인을 알게 되면, 일가 몰살을 해버려

서 포한을 갚으리라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그런 소문을 걷으러 다니기 위해 행상이라도 나

설 작정이었다. 흔히 보쌈을 당한 가족들은 관가에도 알리지 못하는 것이 상례였다. 동네에

서 닭서리를 시속 놀이의 한 가지로 묵인하듯, 관가에서도 과부 보쌈을 한풀이의 민원으로

여겼다. 수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반 부녀자들은 음양의 이치대로 따르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여겼던 것이다. 물론 지체 높은 집안의 과부는 함부로 넘보지 못하였고, 석씨

의 경우처럼 양민의 부녀자를 제법 재산이 있다든가 권세가 있는 자들이 강제로 취하게 마

련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맺힌 일이 많아서 그것이 하늘에 닿으면 그 고을에 가뭄이 들거나

질병이 도는 줄로 여겼다. 그러므로 어떤 고을의 수령들은 쟁송이 밖으로 드러날 때 가운

데 들어서 화해를 붙이고 새로운 인연을 맺어주기도 하였다. 산지니는 석씨가 틀림없이 죽

은 것으로 여겼으므로 저도 원수를 갚고는 누님 뒤를 따를 생각이었다. 아이들은 그전에

친가로 통기하여 돌보게 하면 될 것이었다. 산지니는 석씨가 몸을 그르치고 봉욕과 수모를

당한 채로 낯선 사내의 살붙이로 산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삼춘... 배고파."

그는 아이들에게 오촌아저씨뻘이 되건만 석씨가 산지니를 친동생이라 여겨 스스로 삼촌이

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산지니는 중화참이 훨씬 지난 것을 뒤늦게 깨닫고 저도 몹시 시장함

을 느꼈다. 그래, 우선 밥을 지어먹고 기운을 차려야지.

"옳지, 보리 한 섬을 지구 왔다. 삼춘이 밥을 해줄게." 하다가 불현듯 스쳐가는 생각이 있

었다.

이런 흉년에 보리 반 섬을 내어 품을 사는 놈이 어디 있을까. 느닷없이 일이 벌어지던 간

밤에 그런 횡재가 굴러 들어왔던 것이다. 누님이 미심쩍게 중얼거리던 대로 원립이란 자는

요즈음 살기 위해 강변에 나가 고기라도 낚으려고 초췌한 얼굴로 나도는 형편이었다. 무슨

부가옹이라고 보리 반 섬을 공으로 내어주랴.

"이런 망할 자식이..."

산지니는 보릿섬이 얹힌 지게를 돌아보며 얼결에 중얼거리고 말았다. 틀림없이 자기를

집에서 내몰기 위하여 헛다리품을 놓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새벽에 흥인문이라니

난데없는 주문이었다. 새벽까지 대기 위하여 밤중에 집을 떠나도록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산지니는 광에서 낫을 꺼내어 움켜쥐었다.

"삼춘 나갔다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라."

아이들이 우는데도 산지니는 낫을 쥐고 원립이란 자의 집까지 한달음에 뛰어들었다.

"네 이놈, 어디 갔느냐, 한통속인 줄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외치니 부엌에서 뭔가 빻고 있

던 아낙네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내다보았다.

"누구한테 그러우?"

"댁네 서방 말이지 누군 누구여."

완전히 보통 때의 산지니가 아니었다. 그는 분김에 놈의 계집이라도 찍어버리겠다는 듯

낫을 펴 들며 짓씹었다.

"서방이 어디 갔는지 대지 못해?"

"새벽에 어디 간다 말없이 훌쩍 나간 이를 내 어찌 알우?" 산지니는 언뜻 짚히는 데가 있

어 부엌으로 고개를 기웃이하여 넘겨다보았다. 아니다다를까 부엌 구석에 절구를 감춰두고

찧고 있던 것은 백미였다. 산지니는 손으로 쌀을 한움큼 집어 아낙네의 턱밑에 들이댔다.

"이년, 이 쌀 어디서 생겼니. 바른 대루 이르지 않으면 코를 베어버릴 테여." "... 몰라요.

며칠 전에 웬 장정들이 지구 왔어요. 주인이 절대루 동네에서 알면 안되니까 조심하라구 그

래서..."

산지니는 제 짐작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원립이란 자가 곡식에 넘어간 것이다. 그에게 살을

주어 꼬드겼을 것이다.

"얼마나 가져왔길래 죄없는 사람을 짐승같은 놈들에게 팔았느냐?" 산지니가 여자를 젖히

고 부엌에 들어가 봉당을 살피니 독이 둘이나 묻혔는데, 양쪽 다 벼가 가득 차 있었다.

어 섬은 실히 되어 보였다.

"제 배때기나 채우려고 인륜을 그르치는 일을 하다니... 내 이놈을 끝내 하늘 아래 바로 서

도록 내버려둘 줄 아느냐, 만약에 보쌈 패거리가 어느 놈의 집구석에서 나왔는지 바로 대주

면 이빨이 나 몇대 부러지구 말겠지만 오늘 안으루 나타나지 않았다간, 네년이랑 새끼들이

랑 모두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라."

산지니는 독살스럽게 얼러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길은 생겼으니 내쳐 달려들어가

원한을 풀 일이나 생각할 셈이었다. 그런데 울타리로 들어서자 아이들과 웬 할미가 마루

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산지니가 동네에서 못 보았던 낯선 할머니였다. 그가 안

색이 푸르딩딩하여 들어서니 낯선 노파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맞았다.

"아이구 이제 오시는구먼."

"뉘십니까?"

하면서도 산지니는 아이들이 조용한 연유을 살폈다. 아이들은 보기에도 탐스러운 백설기를

목이 메어지게 먹고 있었던 것이다.

"댁이 산지니란 총각인가베."

노파가 여유있게 한마디 하고는 마루 위를 가리켰다.

"좀 앉읍시다. 할 얘기가 있으니..."

산지니는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엉거주춤 걸터앉자 노파는 서슴없이

말을 꺼내었다.

"댁의 서사촌 자씨가 되시지 그이가...보내어 온 사람이우." "누님이..." "그러우. 날더러 집에

가서 아이들이랑 총각을 데려오라구 이르십디다." "어느 놈이우?" 노파는 산지니의 험한 어

조에 당황하지 않았다.

"보아허니 세상사에 어두운 모양이구려."

노파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팔자 지키는 일이란 제 마음먹은 대루 되는 게 아니여. 본인두 아지 못할 일이지. 댁이 어

찌 자씨의 속내를 알겠수. 아무리 분하다구 펄펄 뛰어두 이건 어디까지나 당사자들끼리의

일이우. 자씨는 개가하시기루 마음을 정하셨수."

산지니는 온몸에 끓던 피가 이제는 바람이 되어 빈 가슴을 따라서 헤실헤실 새어나오는 듯

하였다. 죽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이들과 자기를 부르다니, 산지니는 끓던 원한을 붙들어매어

둘 데가 없어졌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자 어서 가십시다. 가서 자씨를 우선 만나 말씀을 들어보시우." 산지니는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믿었던 석씨마저 이러하니 세상의 계집들이란 것은 모두 노류장화임을 감추

고 겉으로만 현숙한 듯이 꾸미는 듯 여겨졌다. 산지니는 일어났다.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나서 그는 누님이 보는 앞에서 댓돌에다 머리를 박고 목숨을 끊을 작정이었다. 그는 더 이

상 애간장을 태울 근거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자 어머니께 가자."

마음을 정한 산지니는 작은아이를 들쳐업었다. 큰아이의 손목을 잡고 나서니 유모가 일이

뜻대로 되어감을 보고 깔깔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래야지요. 동기간이 다르긴 다르구먼. , 혼자 공규로 말라죽느니 팔자를 고쳐야 하는

건데... 좌우간 거기 자씨는 복이 터진 사람이구먼."

산지니가 돌아서서 노파의 주름살투성이인 목을 잡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이제는 모든

집착을 놓아버렸는지라 그저 고개 숙여 땅만 내려다보며 걸어갈 뿐이었다.

반골 유모네 집에서 석씨는 애를 태우고 있었다. 산지니가 노파를 따라올지도 모르는 일이

고 자기의 속마음을 어떻게 전해주어야 할까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방문 밖에는 두꺼

비 같은 하인놈이 버티고 앉아 있었고, 아들은 산지니가 혹시 행패를 부릴까 하여 몽촌 본

가로 하인배를 대여섯 사람 불러오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초조하였는지 연방 마루 위를 서

성대고 있는 눈치였다. 판관 늙은이는 오전 내내 보채다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자는 모양

이었다. 석씨는 무엇보다도 산지니가 섣불리 성깔을 내어 이 집 마당에서 몰매를 맞든가 장

살을 당하든가 하는 일이 걱정이었다. 이미 재가하기로 정하였다고 말이 갔을 터이니 산지

니의 낙망과 분을 짐작해볼 수가 있었다. 석씨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방안을 두리번거렸

. 역시 농아래 반짇고리가 보였다.

얼른 끌어다 보니 가위며 실패며 바느질거리들이 들어 있었다. 석씨는 얼른 가위를 집어냈

. 무엇인가 써서 산지니에게 전해주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글을 몰랐다. 중인의 딸로

서 석씨는 천자문에 <소학>권이라도 떼었다지만 산지니는 천자는커녕 언문도 배워본 바가

없었다. 석씨는 망설였다. 산지니는 그러나 영리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무엇인가 써서 내준

다면 틀림없이 알 만한 사람에게 물을 것이었다. 석씨는 글자를 생각하자마자 가위를 펴들

어 손가락을 힘껏 찔렀다. 피가 장판 위에 방울져 떨어져 내렸고, 석씨는 속치마 자락을 찢

어 내어 손가락으로 썼다. 하얀 무명 위에 번지면서 구자가 나타났다.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고 석씨는 그것을 치맛자락 안에다 넣고, 속치마로 방바닥을 얼른 훔쳐냈다. 피가 연신

흐르는 손가락을 버선발 뒤꿈치로 꼭 밟았다.

"서동생이 와서 그쪽에서 혼사에 응할 눈치가 아니면 절대로 나오지 마십시오." 방문을 열

고 큰아들이 말하였고 석씨는 침착하게 대꾸하였다.

"그러지요. 아이들만 만나겠어요. 그리구 저희 집에 양식이 떨어졌을 테니 아이들이 돌아갈

때 쌀이나 한섬 보내주셔요."

큰아들은 석씨의 의외의 부탁에 놀라서 논을 둥그렇게 떴다.

"아이들을 보고 싶으시다더니... 집에 돌아가다니요." 석씨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 집의 살림을 하려면 아이들은 떼어두어야겠어요. 동네에 양식만 보내주

면 돌볼 이들이 있을 테니까요."

큰아들은 금방 안색이 달라지며 허리를 구부렸다.

"네 그러셔야지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잘 보살펴두겠습니다." 판관의 큰아들은 이

제는 완전히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석씨는 미닫이가 닫히자마자 찢은 치맛조각을 얼른 소매 속에 넣고 나서 다시 자락을 뜯어

다친 손가락에 감았다. 하인들 대여섯이 몽촌서 내려왔고 그들은 모두 덩치가 그럴 듯한 장

한들이었다. 산지니가 호락호락 넘어갈 상대는 아니므로 판관의 큰아들은 하인들을 마루 양

쪽과 대문 앞에 세워두었다.

망보러 나갔던 자가 동구 밖에서부터 뛰어와 산지니와 유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타났음을

알렸다. 판관의 아들은 몽둥이를 짚고 선 하인들을 벌려 세우고 마루 위에 점잖게 앉아 있

었다.

산지니가 아이를 업고 한 손에 다른 아이의 손목을 잡고서 문안으로 들어섰는데, 그의 얼

굴은 핼쑥하였고 어딘가 풀이 죽어 있었다. 산지니는 좌우에 널려 선 하인들은 거들떠보지

도 않고 마루를 향하여 곧장 걸었다.

"어서 오게나."

큰아들이 무덤덤한 듯이 앉은 채로 말하였다.

"애들 에미 되는 사람 어딨수?"

산지니는 누님이라는 말을 올리지 않았다.

"우리 서모님은 자네와 아이들게 할 말이 있으시다네." 판관의 큰아들이 산지니의 말을 되

짚어서 받았다. 산지니는 온 얼굴에 바늘이 박힌 듯이 따갑고 수치스러워서 아이를 마루

위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할 말이 있으면 아들께나 하라고 그러지... 내가 아무리 곁다리로 태어났으나 핏줄은 있는

놈이여. 어떤 년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니까." 판관의 큰아들은 마음이 자못

통쾌하여 산지니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허허, 객줏집 외입에도 피가 있는가. 새벽참에 논둑에 나가보면 동네 워리는 모두 동서라

더니."

그 말은 표모에게서 태어난 산지니를 개에다 비유한 것이었다. 산지니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봉놋방에 드나드는 년의 자식이 이간지 김간지 어디 알 수가 있나." 판관 아들 농지거리

가 너무 지나쳤다. 그는 지난번에 혼담을 넣었다가 호되게 당한 산지니가 풀이 꺾인 것을

보고는 신바람이 났던 것이다. 산지니가 이빨 사이로 식, 하는 소리를 내고 마루 위로 한발

올려놓는데, 하인들이 좌우에서 몽둥이를 치켜들고 막아섰고, 큰아들은 재빨리 일어나 마

루 안쪽으로 피하였다. 아이들이 겁을 집어먹었는지 울음을 터뜨렸고 안방의 미닫이가 열렸

. 이미 신방에 들었던 색시차림으로 비단옷을 입고 나타난 석씨와 마주치자 산지니는 스

스로 고개를 떨구었다.

"얘들아, 가자."

산지니가 아이의 손을 잡았고 아이들은 엄마를 보자 반기면서 소리쳤다.

"저건 늬 에미가 아니다."

산지니는 아이를 잡아끌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설마했던 것이다. 이미 밤을 치르고 나서 저

렇게 기방물림과 같은 꼬락서니가 되어 식구들 앞에 나타나다니... 석씨는 그에게 헝겊조각

을 전해주기 위해 한 걸음씩 접근하였다. 석씨는 한편으로 아이들을 끌어안고 다른 쪽으로

산지니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산진아..."

산지니는 벌레라도 닿은 듯이 몸을 피하면서 석씨의 가슴을 홱 떠밀었다.

"세상에 더러운..."

석씨가 마루에 나뒹구는데 판관의 아들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저놈을 매우 쳐서 쫓아내라."

하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달려들어 산지니의 어깨와 등판을 몽둥이로 타작하였다.

둔중하게 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섬돌 위에 엎어졌다.

"... 안돼요."

석씨가 재빨리 비집고 들어가 산지니의 등뒤에 엎어지며, 한 손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

고는 헝겊조각을 쥐여주면서 손등을 꼬집었다. 매를 맞아 정신이 없는 중에도 그는 역시 빠

른 총각이라 무엇인가 석씨에게 다른 의중이 있었음을 눈치챘다. 뿐만 아니라 지금 그로서

는 무너진 비탈 끝에서 밀려 내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중에 풀뿌리라도 잡고픈 심정

이었다. 산지니는 그것을 받아 손안에 꼭 쥐고는 벌떡 일어났다.

"후살이를 하든지 겹재가를 하든지 내가 알 바 아니다." 하면서 산지니는 떨어지지 않으려

는 작은아이를 끌어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큰아이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석씨는 두 뺨에 눈

물을 흘리면서 이 답답하고 하소할 데가 없는 통분을 삭였다.

"진작 분수를 알아 그렇게 나와야지."

큰아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섰는데, 유모가 가장 장한 듯이 종알거렸다.

"이번 혼사에 내가 없었더면 연분이 끊길 뻔하였수."

석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산지니의 뒷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스스로 몸을 돌려 안방

으로 뛰어들어가 방바닥에 엎어졌다.

산지니는 몽둥이에 설맞은 어깻죽지가 터져서 피가 배어나온 채로 아이들과 더불어 반골을

나섰다. 손안에 쥐여준 물건을 살피니 치맛자락이 분명한데 검붉게 말라붙은 피로 무엇인가

글자가 씌어 있는 것이 아닌가. 산지니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 누님..."

피로 썼을 제야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누님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더러운 생각을 떠올린

스스로가 오욕스러웠다. 산지니는 걸음을 빨리 하였다.

"어머니는 곧 오신단다. 걱정 마라."

산지니는 널다리로 오자마자 글을 아는 이를 찾아가 사연을 말하고 표를 보여주었다.

"앞 뒤 전말의 사정으로 보아 구할 구자가 씌어 있으니, 자네 자씨께서 어떻게든지 구하여

달라는 뜻일세."

산지니는 더 이상 설명도 듣지 않고 달려나갔다. 이제 밤이 되기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이 오면 그는 반골도 되돌아가 어떻게 해서든지 누님을 업어 올 것이었다. 그는 마을의 마

음 맞는 총각들 두엇을 만나 도움을 청하였고, 그들도 보쌈을 당한 뒤에 산지니를 보기가

민망하였던지라, 곧 응낙하였다. 산지니는 숫돌을 꺼내어 낫을 갈아두었다. 그는 단호하게

결심하고 있었다. 그 늙은이가 다시는 여염 아낙네를 탐내지 못하도록 없애버릴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쥐꼬리만한 세도를 가진 시골 향반들을 태어나서부터 겪어 잘 알고 있었다.

석씨의 요구대로 다 들어준 판관네 사람들은 어서 혼례를 치르고자 서둘렀다. 먼저 유모가

들어와 방에다 화문석을 깔고 뒷전에는 열두 폭 병풍을 둘러치고 눈앞에 학무늬 발을 쳤다.

석씨는 뜻을 이루었는지라 태도가 돌변하여 벽을 향하여 돌아앉아 있었다. 벌써부터 늙은이

는 애가 달아서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는데도, 관과 도포를 벗어 던지고 자꾸만 안방으로

넘나들었다. 석씨는 어쨌든 오늘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짐작하고서 판관의 일속들을

달래었다.

"그동안 이리저리 마음을 쓰다 보니 이제는 심기가 기진하여 도저히 앉아 있을 수도 없습

니다. 내일 맑은 정신으로 모실까 합니다."

"두 분은 곧 주무실 것이라 뭐 따로이 기력이 필요하겠수? 오늘부터 다정히 동침하시지."

유모가 은근히 말하였고 큰아들도 이제는 더 이상 아비를 달랠 자신이 없어 오늘밤에는 그

들이 함께 자기를 원하였다. 석씨는 더 버틸 수가 없었다. 만약에 늙은이가 제 몸에 손을 댄

다면 석씨는 대번에 늙은이를 이불로 눌러 죽이든지 하고서 스스로 치마끈을 풀어 목을 맬

생각이었다.

이윽고 저문 하늘에 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유모네 집에서는 청사초롱에 불을 밝혀 대

청마루에다 걸었다. 본가에서 큰아들 또래의 혈족 두엇을 데리고 겸인이 찾아왔고 그들은

건넌방에서 오붓이 앉아 술을 마셨다. 모두들 판관 아들의 효성을 극구 칭찬하는데 또한 석

씨를 엿보고 와서는 인물이 아깝다고 시샘도 하였다. 저녁이 끝나고 안방의 발이 걷혀졌으

며 혈족들은 마루에 둘러앉고 큰아들이 제 아비를 가운데다 앉혔다. 유모 딸이 늙은이 앞에

정화수 한 그릇 올려놓은 소반을 갖다 놓았고 양쪽에 와룡촛대를 두어 불 밝혔다. 유모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나가서 맞절을 합시다."

"제발 오늘만은..."

유모가 다시 속삭였다.

"이봐요. 그까짓 맞절 한번 꾸뻑하고 나서 오늘은 피곤하다며 그냥 누워버리면 될 텐데 뭘

그러우."

석씨는 피하지 못할 일임을 알았다. 석씨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일어섰다. 어쨌든 욕보지 말

고 이 집을 빠져나가야만 하였다. 석씨의 팔을 곁에서 부축하며 나선 유모가 팔꿈치를 지그

시 당기며 주위에서 다 듣도록 말했다.

", 인사를 드려야지."

석씨는 숫제 눈을 감고 좌중의 사람들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아래로 끌어내

려 큰절을 했다. 석씨에게는 다만 늙은이의 답삭거리는 수염 끝이 보일 뿐이었다. 늙은이도

마주 인사를 하였던 모양이다. 나란히 앉은 그들 앞으로 먼저 큰아들이 나와 큰절을 올렸다.

"두 분, 백년해로하십시오."

석씨는 귀뿌리에서 뺨으로 퍼져가는 수치스러운 느낌을 감추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뛰어들어 문을 닫았다.

"허허, 이럴 수가..."

주위의 혈족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는 잠시 아무런 기척이 없더니 누가

밀어 넣었는지 늙은 판관이 엉거주춤하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윗목에는 감주에 화채에 약과

며 감로주 등속이 그득한 통영반이 놓였고 그 반대쪽에는 신방답게 놋요강이 반짝였다.

"여보게, 우리가 이렇게 속현하고 보니 천생연분이군. 아이들 보기도 부끄러우니 어서 불이

나 끄지."

늙은이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석씨에게로 다가앉으니 석씨는 놀라서 늙은이의 손길을 뿌리

치며 벽 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허허, 내가 그리도 싫은가?"

석씨는 타는 듯한 시선으로 늙은이를 노려보았다.

"가까이 오면 죽어버릴 거예요."

늙거나 젊거나 사내란 마찬가지여서, 계집의 독을 뿜는 모양에는 더욱 자극을 받게 마련이

었다. 늙은이가 와락 달려들어 석씨의 가슴을 움켜쥐는데 두 손이 와들와들 떨리고 숨은 벌

써 턱에 닿았다.

"요것을..."

"에그머니."

석씨가 뱀이 엉기는 듯 늙은이의 마른 손목을 잡고는 사정없이 발길로 헹가래를 쳐버렸다.

늙은이는 가슴을 채고 벌써 안색이 하얗게 되어 마른기침을 터뜨렸다.

"저것이 나으리를..."

하면서 문틈으로 들여다보던 유모가 안달을 하였고, 큰아들과 혈족들은 제 아비가 기운이

쇠잔하여 과수댁의 혈기를 꺾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저것을 어찌할꼬."

"기운으로는 안 되겠수."

"그렇다고 서모가 될 사람을 여럿이 함부로 다룰 수도 없지 않소." 유모가 문득 무슨 생각

이 들었는지 손뼉을 마주쳤다.

"진작 그 생각을 못했구면, 몽혼탕을 먹여 잠을 재울 걸 그랬네." "내게 맡기면 저것을 대

번에 요절을 낼 터인데..."

침을 꿀꺽 삼키면서 다른 사내가 말하였다.

"오늘은 이미 늦었소. 그냥 내버려둡시다."

과연 잠시 후에는 방안이 조용해졌다. 늙은이는 금침 위에 엎드려서 숨을 헐떡이며 흥분을

가라앉히는 중이었고, 석씨는 벽에 바짝 기대앉아서 한 손에는 베개를 들어 방비하고 있었

.

"내 그냥 잘 테니... 염려 마라. 네가 아무래도 오랫동안 수절하고 운우의 정을 멀리하더니

이렇게 갑자기 그럴 수야 있겠느냐. 오늘은 이만 잘란다." 석씨는 아직도 안심을 못하고 벽

에 기대어 있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도 여기서 이렇게 앉아 새우렵니다." 늙은이는 한숨을 푹 몰아쉬며

천장을 향하여 돌아누웠다. 방안에서 기척이 없어지자 마루 위에서 두런거리던 사람들은

서로 입가에 손을 갖다 대고 옆구리를 찌르고 킥킥거리면서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둘이 나란히 누웠겠거니, 그리하여 새벽녘에는 살을 대게 될 것이고 내일 아침이면 나란히

한 베개를 베고 잠을 깨겠거니 하였던 것이다. 석씨는 여전히 구석에 베개를 가슴에 안고

쭈그려 있었고 늙은이는 엉금엉금 기어가서 상을 끌어당겨 화채를 벌컥이며 들이마셨다.

이때쯤 산지니는 벌써 담을 넘어 이 집의 뒤꼍에 들어와 있었고 문을 따주어 함께 온 두

총각을 끌어들이는 참이었다. 산지니는 별빛에도 날이 새하얀 낫을 들고 있었으며, 두 사람

은 제각기 큼직한 작대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얘기 소리가 들려오는 건넌방을 눈

여겨보았다. 산지니는 몇 번이나 의논한 대로 낮에 눈여겨 두었던 뒷방 쪽을 손짓하며 총각

들 중의 하나를 밀어냈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 건넌방의 뒤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동안 부엌

문 뒤에 바짝 붙어서 동정을 살폈다. 뒤로 돌아갔던 자가 살그머니 되돌아 나왔다.

"들여다보니까 늙은 것은 아직 깨었고 처녀는 자더구먼. 하인 녀석들은 없던데..." 그가 속

삭이자 산지니는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고 낫을 고쳐 쥐었다. 하인들이 돌아갔던지 아니면

인근에 발을 빌려 자고 있을지도 몰랐다. 산지니는 눈으로 신발을 헤아려보았다. 짚신 둘과

가죽신이 셋이었다.

하나는 늙은이 것이라 치고서 건넌방에는 모두 넷이 있는 듯하였다. 기운 쓰며 달려들 놈

이라고는 판관의 큰아들 녀석밖에 없을 것이며, 그 또한 아랫것들 앞에서나 호통칠 뿐 그리

버틸 힘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갓 쓰고 도포 걸친 녀석치고 팔씨름이나마 제대로 용쓰

는 놈을 보지 못했던 산지니였다. 그는 마루 위로 가벼이 올라서서 미닫이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두 사내는 이미 술이 과하였는지 하나는 아예 목침 베고 드러누었으며 다른

하나는 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술상을 마주하고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판관의

아들과 그 친척 젊은이는 아직 상머리에 붙어 있기는 하였으되 눈시울이 게슴츠레하였다.

저것들을 모두 한 낫으로 찍어버릴까... 산지는 혼자서 생각해보다가 다시 마루 아래로 내려

섰다.

"뒷방 것들이 깨어나 동네로 달려나가지 못하게 가서 지켜라." 일행에게 이르고는 다른 총

각을 손짓하여 둘이 문가에 붙어섰다. 산지니가 일부러 헛기침을 하고 나니 안에서 거나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밖에 누구냐?"

산지니는 대답 대신 미닫이를 벌컥 열어젖혔다. 판관의 아들은 그의 짚신부터 무릎 위로

멍하니 훑어 올라갔다.

"... 저놈이."

산지니가 성큼 달려들어 낫을 치켜들었다. 방금 내리찍으려는 자세였다.

"죽을테?"

그의 등뒤로 쫓아 들어온 총각도 신이 나서 우선 마주 앉았던 자의 갓을 작대기로 후려쳐

서 찌그러뜨려 놓았다. 그들은 닭서리라도 나온 듯 제법 재미가 들어 있던 중이었다.

"살고 싶으면 모두 방바닥에 엎드려라."

모두들 허리를 낮추어 방바닥에 엉거주춤 엎드리는데 비죽이 위로 솟은 궁둥이를 산지니의

동행이 쿵덕쿵 밟아놓았다. 판관의 아들만은 비록 상대가 살기에 차 있어도 이미 구면인지

라 엎드리기는 너무하였던지 머뭇거리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자가 나를 어쩌랴 하

는 표정이었다.

"이러고도 뒤에 광주 목내서 살기를 바라느냐?"

산지는 낫을 허공으로 몇 번 찍어보며 코웃음을 쳤다.

"내 걱정은 말구 네나 살 생각을 하여라. 나 같은 천출이야 이미 내놓은 목숨이고, 요조하

신 우리 누님 강상의 법도에 따라 수절하였으니 오히려 나라의 치하가 있을 것이다. 빨리

엎드리지 않으면 낫으로 방바닥에 네 등판을 박아놓을 터이다." 산지니의 독살스러운 어주

에 판관의 아들은 흠칫하면서 엎드렸다. 그가 엎드리자마자 산지니는 낫의 자루로 그의 뒤

통수를 호되게 내려쳤다.

그가 늘어지며 혼절하는 꼴을 보자마자 산지니는 다락을 열고 이불을 꺼내 즐비한 네 사람

의 머리 위에 마구 덮어버렸다. 꿈틀거릴 적마다 곁의 총각이 몽둥이로 이리저리 어지러이

두드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아예 해골을 바수어버린다."

총각이 그러고 있는 동안 산지니는 얼른 안방으로 건너갔다. 문을 열어보니 불은 꺼졌으나

건넌방에서 비추인 불빛으로 방안이 어슴푸레하니 보였다.

"누님... 저 왔습니다."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늙은이의 끝없는 시달림을 받고 있던 석씨가 일어나 문가로 뛰

어나왔다. 여태 치근덕거리다 잠시 쉬고 있던 늙은이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석씨의 치맛자락

이라도 당기려는 양으로 손을 쳐들었다. 그때 석씨의 머리카락은 어수선하게 흐트러져 있었

고 두 손으로 감싸쥔 저고리의 고름은 다 뜯겨져 나갔다. 산지니는 제 누님을 등뒤로 돌려

세우며 발을 쳐들어 늙은이의 팔을 막았고, 얼결에 늙은이가 산지니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쥐

었다.

"끼놈..."

산지니가 터져 나오는 분노를 그대로 늙은이에게 퍼부으면서 낫을 곧추세워 내리찍었다.

낫이 판관의 가슴 복판 흉당에 정통으로 찍혔고 그는 바람에 불린 빈 자루처럼 비스듬히 넘

졌다. 산지니는 누님이 볼까 하여 얼른 돌아서서 석씨의 등을 한 팔로 감싸안았다.

"어서 가십시다."

마루로 내려서며 손짓으로 재촉하니 총각은 산지니가 사람을 죽인 것도 모르고 재미가 들

려서, 다시 몇 번 이불 밑의 사람들을 작대기로 후려 패고는 돌아섰다. 산지니가 대문을 나

서서 석씨의 팔을 당겨 재촉하며 물었다.

"뛸 수 있지요?"

"뛰다마다... 내 걱정 마라."

그들이 어둠 속으로 치달리다 보니 어느결에 반골의 동구 앞인데 뒷전에서 동행 총각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일단 걸음을 멈추고 동행을 기다렸다. 가까이 온 총각들이

킬킬대면서 엮었다.

"어이, 이거 재미나는데 가자구 보채나. 우리두 이 동네서 과부 하나 요절내구 가자꾸나." "

나두 늙은 것만 없었드면 그 처녀하구 정분이 날 뻔하였다." 그들이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

고 산지니가 오금을 박았다.

"여기 사람들이 보통 상사람들인 줄 알았니. 한판관네 일속들이다. 잡히면 멍석말이에 난장

으로 맞아 죽는다."

다른 총각은 입을 다물어버렸지만 방안에서 작대기로 두들겨대던 총각은 더욱 신명이 넘쳐

서 떠들었다.

"진작 가르쳐주지 그랬어. 그런 줄 알았드면 모두 바지를 벗기구 물볼기를 때려주고 오는

건데. 자넨 소문두 못 들었어. 미구에 양반은 상사람이 되고, 상사람은 양반이 된다더라."

지니는 동무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길을 빠져 산굽이로 들어섰다. 지금쯤은 반골에서 큰

소동이 일어나 있을 것이었다. 이 길로 널다리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널

다리 부근까지 아무 말 없이 가다가 숯내에 이르자 먼저 다리쉬임이라도 하려는 듯이 주저

앉았다. 그는 석씨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누님, 내가 할 말이 있수."

산지니는 먼저 석씨의 손을 잡았다.

"놀래지 마우. 내가 사람을... 죽이구 말았어."

석씨가 잡힌 손을 흔들었다.

"죽이다니... 네가 언제 그랬어."

"아까 늙은이가 잡으려고 하길래 낫으로 가슴팍을 찔러버렸어요." 석씨는 그 말이 떨어지

자 산지니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래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차라리 내가 혀를 깨물고 자진해 버렸더면 네가 이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걸."

"아니에요, 잘되었어요. 이제는 누님을 모시고 집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독 사람들이 널다

리로 쫓아올 거예요."

"집을 떠나면 어디로 가겠단 말이냐?"

"일단 송파로 가서 숨어 있다가 경강을 떠나겠습니다. 사공들이나 난전꾼들하고 의논하면

좋은 곳을 알려주겠지요. 누님은 오늘밤 집으로 가지 마십시오. 내일 날이 밝자마자 관아로

찾아가 형방을 만나셔요. 돈 스무 냥만 주면 송사도 맡아줄게고 관문도 유리하게 써줄 거예

. 저는 사람을 죽였으니 잡히면 곧 죽게 되겠지요."

산지니는 석씨가 먼저 관가로 가서 수절하는 과부의 설움을 하소하고 억울하게 침탈 당했

던 일과 서사촌동생이 격분하여 살인하게 된 일을 밝히면 주위의 소문을 동정적으로 끌어모

을 수가 있으리라 믿었다. 산지니가 없어지면 누님은 오히려 비슷한 신분의 사람들에게서

보호를 받게 될 듯했다. 석씨는 산지니의 어깨에 이마를 얹고 하염없이 느껴 울었다. 산지니

는 이제까지 뭉쳤던 정한이 스르르 녹아서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너를 못 만나겠구나..."

"누님..."

산지니는 망설였다.

"나루터에서 어머니에게 쫓겨났을 때 큰아버지 몰래 밥을 갖다 주시곤 하였지요. 누님이

시집가실 때 저는... 숯내 건너편으로 줄곧 따라왔었어요." 석씨가 산지니의 어깨를 꽉 잡았

.

"나도 보았단다."

"누님도 보셨어요?"

산지니는 목이 터질 것 같아서 침을 삼켰다. 그들은 그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동행한 총각

들도 심상치 않은 기미를 눈치채고 곁에 묵묵히 서 있었다.

"자네들께는 이번 일이 누가 되었네. 이 길로 동네에 가면 다른 이들께 절대로 발설하지

말고 조용히 들어가서 자는 게 좋을 거야. 내일 아침 포졸들이 나와서 조사할지도 모르지만

시치미를 떼구 있어. 누가 갔었는지 모를 테니까. 나중에 내가 잡히게 되더라도 자네들은 곤

장 한 대 맞지 않도록 할 테야."

석씨는 산지니의 손을 잡고 놓지를 않았다.

"누님, 너무 염려 마세요. 제가 살 만한 동네로 가게 되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차라리...

나도 아이들 데리고 따라 나서겠다."

"땅이 있는데 항산을 버려 두고 어디로 가시겠어요. 저도 어딘가 찾아가서 장가도 들고 아

기도 얻어야지요."

"가장이 없는 집을 어이 지킨단 말이냐."

산지니는 누님의 잡은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제가 가장이라니 될 법이나 합니까. 여보게들, 우리 누님 좀 잘 보살펴드리게." 산지니는

얼른 돌아서서 숯내를 따라 북쪽을 바라보고 뛰었다.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뛰고 나서 뒤

를 돌아다보니, 이미 사방이 캄캄하여 석씨의 모습은 어둠 속에 잦아들고 말았다.

삼전나루로 가면 널다리서 가깝고 동네 사람들도 만날 듯하여 봉수대를 돌아 송파나루로 빠

졌다. 날이 새기 전에 거여 객점거리로 들어가야 하였다. 여름밤이 짧아서 송파나루가 내려

다보이는 야산의 중턱에 오르니 이미 푸르스름하게 하늘이 터지고 있었다. 산지니는 거여

객점의 사공들이 묵는 봉노나 난전꾼들이 모이는 화초방을 찾아가 도움을 청할 작정이었다.

그들은 서로 관에 대하여는 구린 구석이 많아서 되도록 이면 상대방이 무엇을 하는지 애써

알려 하지도 않았고,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면 자신에게 해가 미치지 않는 한 적당히 도우

려 들었다. 산지니는 화초방을 찾기로 하였으니, 사공들보다는 난전꾼들이 더욱 약점이 많았

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여 객점거리의 복판에 있는 화초방을 찾아갔다. 바야흐로 아침술국을

끓이는 구수한 냄새가 마당에 맴돌았고, 화초방 삼촌은 푸석푸석한 얼굴로 그날 나갈 약주

를 거르는 중이었다.

"아저씨, 안녕하우?"

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는 집에다 투전 벌이는 화초방을 두엇 차려놓고 자릿돈도 받

고 뒷시중도 들어서 먹고 살았다. 누구든지 이초로의 사내에게 삼촌이나 아저씨라고 불렀으

며 한결같이 반말을 주고받는 처지였다. 화초방 삼촌은 가끔 돈을 잃고 난동을 부리는 시골

무뢰배나 장꾼들을 눌러놓으려고, 장거리에서 주먹다짐깨나 한다는 악소패들에게 공술도 내

고 돈도 나누어주곤 하였다. 비록 출입이 뜸해졌다고는 하여도 산지니를 모르는 악소패는

거여 객점거리에 발을 붙이지 못함을 아는 그는 언제나 친절히 대하였다.

"떠꺼머리가 어디서 삼패 외입이라두 하구 오는가. 아예 화초방엔 들어갈 생각을 말어.

정 탄다구 소금을 덮어 띄울게야."

"막장일 텐데 개평이나 볼까 하구 오던 참인걸."

"이거 또 살인 나겠구먼, 시방 까마귀가 전대를 몽땅 털리구 내게서 어음까지 빌려쓰고 눈

에 불이 났는데. 자네가 개평을 뜯으면 응하긴 하겠지만 공연히 다른 아이들을 달달 볶을

텐데."

산지니는 자기도 술광의 문턱에 쭈그려 앉으면서 한바가지 떴다.

", 시원하다."

"웬일이여?"

"기러기 좀 잡아야겠어."

"기러기..."

삼촌은 산지니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요새는 장거리에두 발길을 끊었다든데 무슨 잘못이 있다구 달아나?" 산지니는 그냥 뱉어

버렸다.

"물고장을 썼지."

삼촌은 그제서야 일하던 손을 멈추고 광문을 닫았다.

"누군데?"

"한판관."

"몽촌 산다는 늙은 대인 말인가?"

"낫으루 뚫어버렸어."

삼촌이 혀를 끌끌 찼다.

"저런... 너무 비싸구먼, 가만있어, 이럴 게 아니라 뒷방으루 들어가지." 하면서 그는 산지니

를 돌아보았다.

"며칠이나 있게?"

"하루가 급하지."

삼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은신할 데를 찾아보자구."

산지니는 화초방 삼촌의 뒤를 따라 그 집 뒷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방안에 들어가 앉으니

삼촌은 방문을 닫아주며 당부하였다.

"절대루 밖에 나오지 말어. 다른 이들 눈에 띄면 위험하니까." "우선 시장해 못 견디겠으니

뭐든지 먹을 것을 좀 주어." "아따 이런 흉년에 맨손으로 찾아와 음식을 찾네..." "송파 화초

방에 술밥 떨어지는 날두 있던가."

산지니의 이죽이는 말은 맞는 얘기였다. 송파에서나 삼개 동막에서나 화초방이란 난전꾼들

의 소굴이고 보면, 언제나 물자가 풍부하여 성내의 권세가에서 구하지 못할 진물이 흔하게

마련이었다. 이런 흉년에도 하다못해 닭다리에 소주 한 잔쯤은 있을 법하였다. 한참이나 기

다리는 중에 밤새 잠을 못 잔 산지니는 절로 눈이 감겨져 팔을 베고 모로 쓰러져 잠이 들었

. 방문이 열리는 기척이 있어 눈을 게슴츠레 뜨는데 두 사내가 밖에 보였다. 산지니는 얼

결에 벌떡 일어나 벽에 기대어 앉았다. 밖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족제비 난장 맞구 홍문재 넘어가듯 왜 그렇게 펄떡거리나?" 산지니가 올려다보니 다래목

의 깍정이패 꼭지인 까마귀가 빙글거리고 있었다.

"누가 보겠다. 어서 들어가 앉어."

삼촌이 그의 등을 밀어 방에 앉히고 문을 닫았다.

"죄진 놈 옆에 오면 방귀도 못 뀐다더니, 이거 복철에 문 닫아 걸구 한증을 하겠는걸."

지니는 까마귀의 입담에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까마귀가 저고리를 헤치고 옷깃을 잡아 부

채처럼 활활 부쳐대면서 물었다.

"물고장 냈다지?"

산지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이나 냈어?"

"늙은이 하나여."

"제길 난 또 행역질하는 타관 것이나 몇 명 비틀어버린 줄 알았더니, 고작 저승패 하나를

치우구 그렇게 코가 쑥 빠졌구나. 잘되었다, 우리 다래목에 가서 내 밑에 상번수나 하지."

산지니는 잠자코 앉았는데 삼촌이 토를 달았다.

"저승패라구 다 송장인 줄 아나, 바로 몽촌 한 대인이란 말여." 까마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검계라는 당이 있다는 걸 들었나?"

"그게 뭔데..."

"지금 한양성 밖 백여 리에 홍동계다 검계다 하는 당이 퍼져 있는 줄을 모르는 모양이군."

화초방 삼촌이 까마귀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경칠 소리를 하는구나. 나라가 뒤집어진다구 날뛰는 녀석들이나 그러는 게야. 나는 상관없

는 일이니 자네들끼리 이야기하지."

삼촌이 일어나려고 하자 까마귀가 그를 주저앉혔다.

"이거 왜 이래, 지난번에는 솔부리에 같이 가놓구선..." 삼촌이 하는 수 없이 도로 눌러앉았

고 까마귀는 말을 이었다.

"명년에 나라의 주인이 바뀔 것이라네. 그래서 우리 같은 상것들이 서로 모여서 준비를 하

구 있는데 자네두 들겠다면 솔부리에 데려다 주지."

날이 밝자마자 석씨는 아이들을 동네 사람들에게 맡기고, 광주목으로 찾아갔다. 석씨는 집

에서 짰던 피륙과 돈을 스무 냥쯤 준비하였고, 발고가 들어오기 전에 형리를 만나려는 것이

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길청은 문을 닫았고 관노가 나와서 길철 뜨락을 쓸고 있었다.

"원서를 내려 하는데 형방의 댁이 어딘가 가르쳐주오." 관노는 아직 졸음이 덜 깼는지 푸

석푸석한 눈두덩을 열고 석씨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아직 삼현육각도 없거늘 때 아니게 무슨 원서란 말이우?" "나중에 문책받지 말구 어서 알

려주오. 살변이오."

석씨의 살변이란 말에 그는 화들짝 놀랐다.

"그런 변이면 길청에 오지 말구 대번에 삼문 앞으로 가서 발고하시우." "사또께 직소할 것

이나, 아녀자로서 글을 아지 못하여 개청 전에 형방을 만나 원서를 써서 내려는 거예요."

씨의 말이 그럴 듯하다 여겼는지 그가 이리저리하며 형방 집을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석씨

는 한달음에 내달아 성내에 있는 형방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그는 방금 일어나 마당에서

양치질을 하던 참이었다. 석씨가 하인을 부를 것도 없이 그대로 열린 문으로 들어가 허리를

굽히니, 형방이 제깐에는 중인이라 내외가 있어 등거리 바람에 여자를 대하기가 난처하여

황급히 물을 뱉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웬 여자가 내외도 없이 이러는지..."

"식전부터 비례가 이만저만이 아니올시다마는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여쭙니다." "얘 개

암아..."

형방이 여종을 부르려는 것을 석씨가 만류하였다.

"사랑에 들어가 긴히 아뢸 말씀이 있사온데 구태여 내외를 가르다보면 늦어지고 맙니다.

살변이 있어서..."

하니까 형방은 머뭇거리다가 앞장을 섰다.

"들어오시오."

등거리 위에 저고리를 입고서 형방이 말하였다. 석씨가 들어가 한편 눈물짓고 또한 비분한

어조로 혼자 살아온 얘기며 서사촌동생 산지니의 얘기를 하고 나서, 전 판관 한노인의 가속

에게서 피침 당하였던 전말을 상세히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지루하였는지 하품을 하며 코

나 어루만지던 형방이 얘기가 한판관에 이르고 그들이 사람을 보내어 보쌈하던 대목에 가서

부터는 무릎을 조이며 상반신을 숙이고 연방 허허, 그래서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관가에서 보쌈을 묵인한다 하지마는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는가?" 원래가 아전이란

같은 중인이면서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천시를 받는 업이었다. 그들은 뇌물에 약하고 권력

에 아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양반과 권세가에 대하여 깊은 증오를 감추고 있기도 하였다.

아전이 앙심을 품으면 고을 원의 감투가 흔들거린다는 말은 그들의 보복이 교묘하기 때문

이다. 어쨌든 형방은 전 판관 한가의 말이 나오자 눈을 빛냈으니, 바로 제 아비 적의 상관

이어서 치죄도 받고 다스림을 받아 식구들이 얼마나 두려워하던가를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

던 탓이었다.

"그래서 제 동생 산지니가 저를 구하려다가 부지중에 한 노인을 죽이고 말았어요." 석씨의

하소 끝마디에 형방은 자못 실망하는 눈치였다.

"보쌈된 즉시로 관가로 와서 직소하였더면 그 늙은이 망신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서리들도

가만두지 않았을 터인데 잘못되었소."

"관가에서도 큰 죄를 주지 않을 것이고 저희들만 망신하지 않겠습니까." 형방은 고개를 저

었다.

"그렇지를 않소. 처지가 같으면 몰라도 한쪽은 전에 관인이었던 사람이고 이쪽은 약한 백

성인데, 일단 동네에서 여럿이 연서하여 소를 올리면 한가를 치죄하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

물론 매는 다른 자가 맞겠지만 그런 망신이 또 어디에 있겠소." "이제는 살변의 죄를 면할

도리가 없을까요?"

"나를 찾아오길 잘했소. 물론 동생의 살인죄는 모면할 수 없소. 잡히면 목숨값을 치러야지

. 그렇지만 나라에서는 수절하기 위해 스스로 기개를 가지고 범간하려는 자를 해치는 일

은 의기로 여겨 죄를 주지 않습니다. 이번 일은 서로가 불리하고 서로의 잘못이 있으니,

선 원서를 내고는 집에 돌아가 저쪽에서 발고받은 포교가 잡으러 갈 때까지 기다리시오.

는 그전에 목사의 제사 판결을 받는다는 빌미로 원서를 읽게 해두겠소. 이미 마음이 움직인

쪽을 편드는 것이 사람 상정이 아니겠소.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근에 소문을 내어 댁네가 옳

음을 진정하도록 해야 되오. 촌로들 여남은 명이 함께 진정한다면 비록 동생의 죄는 남지만

한가는 광주서 얼굴을 들고 나다니지 못하게 될 거요." 석씨는 형방의 의중이 판관네 일속

을 망신 주려 함에 있는 줄도 모르고 산지니의 죄는 모면하지 못한다는 얘기에 안타까워서

부르짖었다.

"저는 비록 죄를 받게 되어도 좋으니 동생을 살릴 길이 없을까요?" "글쎄, 상대방이 죽지만

않았다면야 무슨 방법이 있겠지만... 정상을 본다 하여도 장형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런 모

진 매에 살아날 수는 없을 게요. 이 고장을 떠나 살게 하면 되지 않소. 여하튼 홍살문은 세

우지 못한다 하더라도 댁네가 동정받을 길은 얼마든지 있으니 염려 마시오. 그럼 함께 의

논하여 원서를 써보십시다."

하고는 형방이 지필묵을 꺼내들고 머뭇거리니 영리한 석씨는 가져왔던 보퉁이를 풀어 보였

. 돈과 피륙을 본 형방이 거리낌없이 그것을 끌어당겨 문갑 안에 넣었다.

"진정이 오르려면 비용이 좀 들 게요. 이쯤이면 충분할 듯하오." 석씨와 형방이 일의 자초

지종을 의논하면서 원서를 적어나갔다.

원정하올 일은 몽촌 전 판관 한이서가 그 호부함을 믿어 홀홀단신으로 향곡에 유락하여 근

검하게 살아가는 이 몸 석분이를 범간하려다가, 이 몸의 서사촌동생인 석산진에게 피살된

일에 대해 아뢸까합니다. 이 몸의 선벌은 삼 대 전에 충익위의 신분으로 유학도 있더니 가

산과 문벌이 구몰하야 광주로 와서 고임자생 채초자생으로 겨우 일가를 이뤄 양심으로 가산

을 지키며 근근히 살아오고 있던 중. 이 몸의 하늘같은 가장이 병을 얻어 가신 뒤로 두 아

이와 서사촌동생과 살아오고 있습니다. 지난봄에 전 판관 한씨 댁에서 매파를 보내어 통혼

하여왔으나, 강상의 도리가 충신 불사이군이요, 열녀 불경이부라 하였으니 거절하였습니다.

그때에도 이 몸의 동생은 크게 놀라고 분하여 동행하였던 한가의 가속을 때려 쫓은 적이 있

습니다. 그 뒤 아무런 기미가 없더니 나흘 전에 한판관가에서 강상무뢰배를 시켜, 산지니가

흥인문 밖으로 출타한 틈을 타서 이 몸을 강제로 보에 씌워 반골에 사는 판관의 유모가에

끌고 갔습니다. 이미 범간할 계책이 서 있는지라 아녀자의 정절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어

서 스스로 죽는 길밖에 없었으나, 또한 이 몸에게는 두 자식이 달려 있어 차마 목숨은 끊지

못하고 모면할 방도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 몸의 서사촌 석산진이 저를 구하고자 달려왔다가 때마침 겁간하려는 한이서를 보고는

분심을 누르지 못해 낫으로 가슴을 찌르게 된 것입니다. 이미 수절한 여염과부의 내정을 짓

밟았으니 저들의 패륜무도한 행위는 두말 할 필요가 없지마는, 그 위에 혼인을 구실로 하여

자식 있는 어미의 정을 끊으려 하며 음욕을 채우고자 핍박하니, 예의와 풍속이 엄연한데 상

민의 위에서는 양반으로서 차마 하지 못할 악행이로소이다. 고을의 규모를 세우고 법령을

밝히며 예의를 숭상하고 염치를 장려하면 퇴폐한 풍속과 기강이 바로 설 것인즉, 시속에 이

르는 보쌈이라는 행태는 요순 이래로 부모 없는 어린것들과 지아비 없는 계집을 긍휼히 여

겨 보살펴주는 아름다운 풍교를 더럽히고, 오히려 겁간을 용납 선양시키는 짓이 아니고 무

엇이오니까.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는다지만 이 몸의 동생 산진이 한이서를 살해한 것

은 분심에서 나온 충동이며 양민의 수절과부를 겁간하려던 한가에 먼저 죄가 있으니, 그들

부자를 주종범으로 하여 죄를 주어 이 포한을 풀어주옵소서. 이 몸의 서사촌동생 석산진은

그날 이후로 도주중이지만 사죄만은 모면케 하고 자수를 시켜서 다시 양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대전을 훤히 알고 있는 형리가 낱낱이 법을 밝혀 원서를 썼다. 아마도 등청하면 한씨가에

서 벌써 살변의 발고가 들어왔을 것이었다. 형방이 아침을 먹는 동안 석씨는 안방에 가서

들 가족에게 끼여 밥을 먹고 나서 형방과 더불어 관가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형방의 지시에

따라 삼문 밖에서 기다렸다.

그날 사또의 판결이 떨어지는데 이미 죽은 자의 죄는 물을 수 없고, 아무리 보쌈에 항거하

였다지만 역시 사람을 죽였으니 석산진은 죄를 면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살변 도주한 죄인의

예에 의거하여 숨겨준 자는 장닉죄에 연루되며 죽거나 살거나 그를 잡는 자는 논상하리라

하였다.

또한 스스로 수절하려던 과부 석씨나 그 아비를 위하여 저지른 한씨네 장남의 행위는,

인이 모두 본래 뜻이 풍교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 저들의 죄에 연좌시킬 수는 없다고 하였

. 다만 석씨가 석산진의 장처를 발고하지 않거나, 젊은 한씨가 그 아비에 대한 복수로 석

씨에게 어떤 침탈을 하면 모두 중죄로 다스린다는 판결이었다.

각 진과 역과 나루에는 산지니의 범행 사실과 용모파기가 회람되었으며 기찰포교들이 경강

일대로 풀려나갔다. 석씨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널다리로 돌아오니 인근에 벌써 소문이 자자

하여 그네들을 동정하고 한판관 댁을 비난하였다. 판관의 일속들은 우선 석씨를 벌주지 못

함을 한탄하더니 기찰포교들을 따로이 불러 사비를 들여 수색하였고, 민정들에게는 현상금

을 걸어 발고를 재촉하도록 하였다.

산지니는 화초방 호의로 그날 하루만은 뒷방에서 문을 꼭 닫고 숨어 있었다. 어두워지면

까마귀와 함께 다래목으로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벌써 산지니의 수패가 역과 나루터

마다 내려진 뒤라, 송파에 나와 있는 별장과 포졸들은 들고 나는 행각들을 살피고 호패를

조사했다. 기찰포교들은 적경이 있을 적마다 객주 여각과 봉노와 화초방을 뒤지게 마련이었

. 갓 쓰고 도포 입은 자와 긴 저고리에 띠를 매고 패랭이를 쓴 두 사람이 송파 화초방에

들어섰다. 삼촌은 첫눈에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아차렸다.

"여보, 방 하나 내주오."

그러나 삼촌은 툇마루에 앉아 곰방대를 빨면서 시큰둥하니 대꾸하였다.

"여긴 주막이나 객줏집이 아니우."

도포 입은 자가 패랭이 쓴 자에게 슬며시 눈짓을 하자 그가 어슬렁거리며 집 뒤로 돌아갔

. 삼촌은 애가 달았으나 그것을 얼굴에 나타내지는 않고서 중노미의 이름을 불렀다.

"이손이, 어디 갔나?"

뒤꼍에서 장작을 패던 중노미가 구슬땀을 흘리며 돌아 나왔다.

"왜 그러우?"

삼촌은 곁에 서 있는 낯선 사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하였다.

", 어서 나가서 별장께 알려서 몇 사람 나와보라구 해라." 중노미의 표정이 벙벙해졌다.

삼촌은 곰방대를 마루 끝에 요란하게 털면서 다시 말하였다.

"영업하는 집이 아니란데두, 나가지 않구서 빙빙 돌며 살피니... 어찌 요즘 세상에 마음을

놓겠느냐?"

그러자 뒤꼍으로 돌아 나가던 패랭이가 돌아왔고,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도포가 말하였다.

"다 알구 왔는데 이러긴가?"

삼촌이 발끈하였다.

"뭘 안단 말이우? 댁네가 어떤 시러베아들놈인지, 명화적인지 어찌 알겠소. 공연히 여염집

에 와서 행패 부리지 마우."

"허허, 이자가 언제 뒤꿈치 물리려구 이렇게 잡아떼는가." 도포가 혀를 차더니 허리춤에서

통부를 꺼내서 슬쩍 비쳤다. 삼촌은 미리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보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래 포교면 다요?"

패랭이가 뒷짐을 지고 마당 가운데를 어슬렁대면서 말하였다.

"이 집이 뭐 송파서 제일 큰 화초방이라면서?"

포교가 말을 이었다.

"기찰해볼 일이 있어 왔으니 앞장을 서게."

삼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기찰이구 찰떡이구 간에 이 집은 여염집이오. 지은 죄두 없으니 댁네 맘대루들 허우."

는 뻗대었으나 한편으로는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낯선 것들이니 목내에서 일하는 자들이

분명하였고, 삼촌은 설령 송파 것들이 나온다 할지라도 두려울 게 없었다. 그들도 매 보름

마다 찾아와 인정전을 거두어갔기 때문이었다. 패랭이가 삼촌을 젖히고 툇마루로 오르며

중얼거렸다.

"투자나 지패나, 하여튼지 골패한 조각이라두 나오기만 했단 봐라. 당장 모양을 내어 끌구

갈 테니깐."

삼촌은 얼굴이 상기되어 벌떡 일어났다.

"어어... 남의 집에 마구... 어디 두고 봅시다. 이런 행패를 부리고도 관문을 넘나드는가."

찰포교들은 날카로운 눈을 굴리며 화초방 여러 곳을 뒤졌다. 삼촌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

이 되어서 그냥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포교들이 바깥채를 다 뒤지고는 뒷마당으

로 돌아가는데 그곳은 정말 살림집이라, 삼촌이 아무리 산지니를 숨겨놓고 뒤가 구리다지만

분이 안 날 도리가 없었다.

"여보, 이제는 아주 내정 돌입까지 하겠단 말이우?"

"그러니까 자네더러 앞장서라구 하지 않았는가."

"만약에 이 집에서 댁네가 바라는 것을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면 그때엔 어쩌려구 이러

?"

삼촌은 되도록 시간을 끌어 뒷방에 숨은 산지니가 달아나도록 하자는 생각이었다. 척하면

삼척이니 갯가에서 굴러먹은 산지니가 요령껏 알아서 하리라고 믿는 때문이었다.

"이거 보슈, 술을 한잔 들겠다면 마다하지 않을 수도 있고, 용건이 필요하면 내줄 수도 있

. 내가 이래봬도 송파 살림이 대물림이오. 괜히 이러지들 말구 안면 좀 익히구 사십시다."

뭔가 구리긴 구리구나, 느끼고서 포교는 삼촌의 가슴을 탁 일어냈다.

"이거 왜 이러시나. 우리가 바지저고리인 줄 아는가, 하여튼 털어봐서 서캐 한 마리라두 나

오면 사돈댁이 봉변이야. 어서 뒤져라!"

패랭이가 거침없이 안방문을 열어젖히니 가족들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뒷방 차례가 되었다. 문을 벌컥 열어본 패랭이가 떠들었다.

", 이것 봐라."

그가 들고 나온 것은 아투전 짝들이었다.

", 이래두 여기가 화초방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삼촌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여염집에 지패나 골패 없는 집이 거여 객점거리서 어디 있나 찾아보슈. 댁네들은 동무끼

리 한번두 놀지 않았단 말이우?"

딴은 그럴 듯한 말이었다. 포교들도 집뒤짐을 하고 나서 좀 미안했고 이런 때에는 삼촌도

슬슬 눙치게 마련이라, "좋게 술 한잔 먹자 하면 나두 옹색한 놈은 아니라 그런 말이우."

버렸고 포교들도 객점거리 화초방이라면 이곳에 나와 있는 포교들과도 따로이 거래가 있겠

거니 싶어서 더 이상 따지려 들지 않았다.

"좌우간 우리 성내에서 나왔으니 서루 얼굴이나 익히자는 게 아닌가." 이런 수작들이 오고

가면서 그들은 바깥채로 나갔고, 툇마루에는 어느 틈에 조촐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

나 인사조로 한잔씩 들이켰을 뿐 곧 이런 자리는 서로가 계면쩍은 자리라, 다음날에 와서

사귀기로 하면서 포교들이 물러갔다. 삼촌은 한숨 돌리고 나서 뒷방 쪽으로 다가왔다.

"이 사람 어디루 갔나..."

툇마루가 통통 울렸다. 마루 밑에서 손가락으로 퉁기는 소리였다.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보

니 안쪽 끝에 산지니가 바싹 쭈그리고 엎드려 있었다.

"어서 나와. 나는 그동안 불알이 녹는 줄 알았다."

"화초방 삼촌이 다르긴 달러. 그나저나 한번 들렀으니 오늘은 오지 않겠지." 저녁이 되어서

다래목의 깍정이패 꼭지인 까마귀가 상번수 두 사람을 데리고 화초방에 나타났다.

"어이, 아무래도 안되겠는걸. 우리 동네에 벌써 두 차례나 다녀갔다네. 오늘밤에 아예 강을

건너야겠어. 헌데 포교들 하는 말이 자네가 아직 광주에 있을 거라는 얘기여. 돈 백 냥이 걸

려 있다더군."

삼촌이 농을 던졌다.

"예미랄 거, 그런 줄 알았으면 아까 슬며시 일러주고 백 냥을 버는건데." "우리 누님이 어

찌되었다던가?"

"그건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솔부리까지는 못 가더라도, 일단 노적사로 가야겠네. 통기는

해두었으니 그쪽에서도 기다릴 걸세."

그들은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까마귀가 기우는 달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올 때가 다 되었는데, 이년이 뭘 하구 있는 게야."

"누굴 기다리나."

"우리 여편네를 기다리네."

삼촌이 혀를 끌끌 찼다.

"잘하는구나. 살림 차린 지 달포두 못 되어 이런 일에나 끌어들이다니." "그럼 깍정이 꼭지

여편네가 무슨 안방마님인 줄 알았담." 까마귀는 거여 객점거리에 창기를 서넛 거느리고 있

었다. 물론 머리 얹어준 인연밖에는 없지만 이들 모두를 마누라라고 불렀고, 그쪽에서도 까

마귀에게 싫은 내색이나 덤덤한 기미를 보였다가는 손님 받는 일은 끝장이었다. 달이 까무

룩하게 지고 나서 얼굴이 해끔한 어린 창기가 화초방으로 찾아왔다. 까마귀는 대뜸 욕설부

터 나왔다.

"이년아, 한시가 급한데 왜 이제 오는 거야?"

"아이 참, 저 성미 좀 보게. 나두 먹구 살려면 끝손님 보내구 술상 치우구 와야 되잖아요."

"가져왔어?"

"이거 구하느라 아주 혼났네."

창기는 보퉁이를 옆에 끼고 있었다. 까마귀가 보퉁이를 끄르자 그 안에서 먹물들인 장삼과

염주와 송낙이며 단주에 목탁까지 일습이 쏟아져 나왔다. 까마귀가 그것들을 걸치고 뒤집어

쓰고 하는 동안 여자는 노랑 저고리 다홍 치마를 흰 소복으로 갈아입었다.

"어디... 어디 보자. 저런, 머리에 달린 댕기를 풀어야지." "에그, 내 정신 좀 보아." 여자가

얹은머리에서 나풀거리는 금박댕기를 풀어버렸다. 삼촌과 산지니는 이게 모두 무슨 소란한

광대놀음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산지니가 얼떨떨하여 물으니 까마귀는 싱글거리면서 받았다.

"동무 잘 두어 자네 호강하네. 자네는 염라 태수 앞으루 가줘야겠어." 뒷전에 있던 그의 상

번수들이 킬킬 웃었다.

"염라 태수라니..."

"송장이 되어야겠단 말이야."

하고 까마귀가 돌아보니 둘이 달려들어 그에게 무명을 씌우고 밧줄로 발끝에서부터 머리까

지 칭칭 동여매는 것이었다.

"... 이게 무슨 짓인가?"

"오늘밤 장사를 지내러 가는 게야. 송장을 잡으려구 그러진 않을 테니까." 산지니는 알아듣

긴 하였으나 불안하여 연신 꿈틀거렸다. 까마귀가 걷어차면서 일렀다.

"밖에 나가면 방귀 새지 않게 힘주고 있어야 하네."

송장치레를 끝마치고 나서 상번수들은 산지니를 허술한 송판으로 만든 관 안에다 뉘었다.

산지니가 덥고 답답하여 머리를 움찔거리며 우물우물 입안엣 소리로 웅얼거렸다.

"이 송장 좀 보게. 자칫하면 포졸들이 도깨비 잡으라는 방을 놓겠네. 꼼짝 말라니까." 상번

수들은 다시 관 위에다 송판 두 장을 얹고서 귀퉁이에만 못을 쳤다. 그리고는 둘이 어깨에

둘러메고 마당으로 나섰다. 화초방 삼촌이 따라나오며 관 뚜껑을 토닥였다.

"잘 가, 이 사람아. 가서 자리잡으면 송파루 기별두 해주어." "허 북망에 가는 놈 보구,

작년 그러께 뒈어진 둘쨋놈 돌잔치에 술 먹으로 오라는 격이로군." 송낙에 가사 장삼을 입

은 까마귀가 앞장을 서면서 농을 쳤다.

"배는 준비해두었나?"

"수장을 지내는가, 배는 찾아서 뭘 해. 아예 들판에서 장작불로 화장을 시켜버릴 텐데,

무아미타불."

여하튼 이렇게 묘한 장례 행렬은 곧 거여 객점거리로 나왔다. 앞에는 발등거리를 들고 까

마귀의 첩이 소복에 머리를 풀고 걷는데, 뒤로는 관을 둘러멘 상번수들이요, 맨 뒤에 송낙을

내려쓴 까마귀가 목탁을 두드리면서 따랐다. 객점거리를 지나 장터를 내려오는데 행인이 끊

겨서 한산해진 주막에 앉았던 기찰포교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술청에 앉아 장터를

빠져나가는 자가 없나 살피던 중이었다. 하나는 술청에 그대로 앉아 있고 다른 하나가 검정

더그레를 입은 포졸을 데리고 길 복판으로 나섰던 것이었다.

"뭐냐...?"

포졸 대신 평복 차림의 기찰포교가 턱을 올리며 물었다. 앞에서 관을 들고 가던 상번수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허허, 밥상머리에 앉아 쌀이 무슨 곡식이냐구 물어보슈." 포교가 발칵 화를 냈다.

"곁말 쓰지 말구 그 관이나 내려놓아."

발등거리를 위로 비춰보면서 까마귀의 첩이 쫑알거렸다.

"오오, 이제 보니 사근내서 남태령 기찰하던 박포교시구랴. 세상에 인심이 이럴 수 있수.

청에 와서는 날마다 공술이요, 적경이 있으면 실정을 캐달라구 온갖 감언으로 구슬리더니...

이제 노류장화 청산하고 들어앉아 아이 낳고 남편 섬겨 살렸더니 이렇게 한 삭도 못 채워

관격으로 숨졌으니, 이 괄세 받는 설움을 어디 가서 달랠꼬." 과연 송파 거여 객점거리서 물

장수로 이력이 났던 창기라 광주 목내의 수십 명 포교들을 뜨르르 꿰던 모양이었다. 포교

가 입맛을 다시면서 그래도 켕기는지 청에 앉은 자를 돌아보았다.

"이것 참 난처하군. 적경이 있을 적마다 이렇게 인심 잃다가는, 아예 자리 내놓구 나가서

동냥은커녕 발가벗고 맞아 죽게 생겼구먼."

포졸은 땅에 내려놓은 관을 멀거니 내려다보면서 실상 어찌할까를 모르는 양이었다.

"저승길이 바쁘오. 차사가 노하시겠소이다. 나무관세음보살." 뒷전에서 잠시 목탁 두드리기

를 멈추었던 까마귀가 염불을 나직하게 엮어 내리며 은근히 재촉하였다. 술청에 앉았던

자가 어슬렁대며 나오더니 대뜸 한다는 소리가, "관뚜껑을 열어라!"하는 것이었다.

"인두겁을 썼구먼!"

상번수가 투덜거렸고 까마귀의 첩은 이내 곡성을 터뜨렸다.

"아이구나 원통하여 어찌 사나. 천한 년은 남편이 죽어도 장사나마 마음대로 지내지 못하

니 이런 법이 어느 세상에 있을까."

낯선 포교는 기가 죽기는커녕 매우 차갑고 침착하게 뇌까렸다.

"지금 목내에 살변이 일어나, 그 대죄인을 잡으려고 경이 도처에 풀려 있거늘, 상시에 장사

지내지 못함도 또한 악운이라 어찌하오. 죽은이도 나라에 죄지은 자를 잡으려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이라 공이 없겠소. 어서 잠깐만 열어 보이고 가시우." 까마귀가 첩에게 넌지시 말하

였다.

"그러게 내가 뭐라 하였소. 의원을 통하여 관가에 알리자구 하지 않았소. 어서 열어 보입시

."

상번수들이 대강 쳐두었던 못을 뽑고 송판을 떼어내는데 혹시나 산지니가 재채기라도 터뜨

릴까 하여 모두들 조마조마하였다. 뚜껑이 젖혀지고 보니 흰 무명에다 밧줄까지 칭칭 동인

시체의 모습이 분명하였다. 이때에 까마귀가 송낙 아래로 두 팔을 가져가 장삼자락으로 코

와 입을 가리우며 물러서는 시늉을 해 보였다.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보던 포교들이 불안한

기색이 되어 물어왔다.

"아니, 왜 그러는가?"

"관가에 알리자던 일이 무어야."

까마귀가 뒷걸음질로 물러나서 코와 입을 가린 채로 중얼거렸다.

"역병이오. 관가에 알리자 하였더니 한 달간 금줄을 치라고 하면 생계가 막연하다기에..."

포교들은 본능적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물러났다. 그리고 말은 하지 않고 손으로만 어서

가라고 앞을 가리켰다. 상번수들이 다시 꾸물대며 뚜껑을 덮자 포교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외쳤다.

"인가를 피하고 물을 피하도록 하게, 어서 가지 못하구 뭘 하나?" 그들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면서 송파 장터를 지났다. 장터를 나서면 곧 나루터라, 별장이몸소 나와서 요소마다 포

졸들을 풀어두고 들고 나는 선창의 거룻배 야거리 주낙배까지도 샅샅이 조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광나루와 송파나루 사이의 인적이 드문 곳에다 주낙배를 대어놓았던 것이다. 이제

는 여기가 관문인 셈이었다. 나루터로 내려가면서 까마귀가 주의를 주었다.

"이번에는 아예 여기서부터 울고 가야겠어. 잘해, 눈치채지 않게. 관을 열어 보이라면 군말

없이 보이잔 말야. 설마 염병 걸려 뒈진 놈의 상판대기를 상면해보자는 놈은 없겠지." 그들

은 아까와는 달리 곡성을 드높이 목탁소리도 요란하게 나룻가로 내려갔다. 나룻가에는 장대

위에 횃불이 달려서 주위가 벌겋게 밝혀져 있었다. 모든 사공들과 장사치와 포졸들의 시선

이 쏟아져왔다. 그들은 전혀 개의하지 않고서 강변을 따라 오르는 소로에 접어드는데,

니나다를까 별장이 소리를 질렀다.

"게 멈춰라."

그들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여자는 푸념도 않고 흐느끼기만 할 뿐이었다. 상번수들이 다가

오는 포졸들에게 말하였다.

"과연 이 사람은 염라국 가는 길이 험하군. 벌써 장터에서 기찰을 받구 오는 길이외다." "

이번에 관을 또 열면 송장이 일어설지두 모르겠는걸." 포졸이 되물었다.

"벌써 기찰을 받았소?"

", 죽을죄를 지었소이다. 그만 금줄이 두려워서 관가에 알리질 않았는데 염병이오." 상번

수가 말하니 나루터의 포졸들 역시 모두 놀랐다.

"삼남에 염병이 창궐한다더니, 이제 경강에두 큰 변이 났군." 별장은 황급히 손짓하였다.

"어서 물러가라. 그리구 너희들은 따라가서 시신을 어찌하는가 확인하고 오너라." 나루터를

빠져나가는 것은 좋은데 포졸들이 화장을 지켜보기 위해 따라 나선다니 더 곤경이 되는 셈

이었다. 까마귀가 별장에게로 다가가니 별장은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하였다.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어서 지나가도록 하라."

"원래 염병에 죽은 시체는 들판에 내려다가 바람을 쐬어 악한 기운이 다 날아간 뒤에 화장

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방금 포교 나으리가 그리하라구 이르고 명일 개청이 되는대로 혈속들에게 죄를 내린다 하

였습니다."

별장은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어서 가보게."

화장에 입회하여 검시하겠다던 서슬이 도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들은 광나루 쪽으로 한참

이나 올라가서 인적이 완전히 끊긴 들판에 나와서야 관을 내려놓았다. 산지니도 거기가 어

디쯤이라는 것을 대강 짐작하였는지, 관 안에서 우우하는 소리를 내면서 무릎을 굽혀 관을

두드렸다.

"가만 좀 있어. 열어줄 테니까."

까마귀가 송낙을 벗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쯤이 맞을 텐데... 그 발등거리 좀 주어."

까마귀는 여자에게서 등불을 받아 위로 쳐들고 좌우로 여러 번 흔들었다.

"우리 계원이 나오기루 하였으니 곧 나타나겠지."

아직도 관속에서 산지니가 꿈틀대며 관에 몸을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열어줘라."

송판을 떼어내고 나서 상번수들은 묶었던 밧줄을 풀었다. 아래를 채 풀기도 전에 무명을

헤치고 산지니가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강바람을 맞으며 몇번이나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송장 노릇 하다가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잘 참았네."

"배가 오는 모양이우."

상번수가 까마귀에게 말하였다. 어둠속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주낙배 한 척이 강심으로 저

어 나오는 중이었다. 배가 닿자마자 까마귀가 갯가로 나갔다.

"빠져나왔네."

"모두들 기다리구 있어."

"달근이 성님은 한양서 돌아왔나?"

"어제 왔지. 양주 사람들도 몇 사람 보이던데."

까마귀가 산지니를 불렀다. 그리고는 첩과 상번수들에게 일렀다.

"여기서 관을 태워버리구 돌아가 있으라구. 너희들은 다래목에서 며칠간 나오지 말구 처박

혀 있어."

산지니가 배에 오르자 그들은 강 건너편으로 배를 저어 나갔다. 산지니가 불안하게 물었다.

"어디루 가는 게야?"

"노적사로 가오."

낯선 사내가 말하였다.

광나루 어름에서 배를 띄어 옥산내를 지나서 평구역말에 이르는데 물길이 완만하고 강폭도

드넓게 휘돌았다. 산지니는 배를 타고 경강이나 양근 가평까지 다녀보기는 하였으나 바로

지척인데도 강 건너에 발길을 대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마을의 불빛을 짐작하

여 조금 아래쪽에 배를 대었다. 강변을 따라서 중량포와 양근을 잇는 길이 뻗어나가 있었다.

"잘되었네. 오늘이 바로 광주 장날 전날 밤이지? 우리가 모이는 날이여." "... 검계 말인

?"

까마귀의 말에 산지니가 물었다. 까마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에는 홍인문 밖이나 왕십리에서 모임이 있고, 경강에는 내달이지. 경강 검계에는 따

로이 살주계라는 별대가 있네."

그들은 자갈밭을 건너 묘적산 계곡으로 가는 삼십여 리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들판에는 개

똥벌레들이 반짝이며 날아다녔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내 얘기를 했던가?"

산지니가 불안하여 물으니 까마귀는 껄걸 웃었다.

"전부터 자네를 끌어들이라구 말이 있었네. 헌데 마음 고쳐 먹구 밥보가 되어 초군질이나

다니는 자네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살변이 나게 되어 내가 산으로 아이를 보냈더니 곧 데

리고 오라구 하더구먼."

"누가 우두머리여?"

까마귀는 잠깐 대답이 없었다.

"광주에서는 정원태가 제일이고, 경강에서는 모신이가 제일이고, 양주에서는 이도장이라는

사람이 제일이고, 교하에서는 홍서방이라데. 헌데 실상은 한양 성내의 벼슬아치와 선비들 몇

이 우리하구 연락이 있다던데 우리는 거기까지는 잘 모르네." 산지니는 어쩐지 자기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같이 여겨졌고, 이미 세상의 판국이 이쯤 돌아가고 있다면 자기가

전 판관짜리 하나 죽였단들 두려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부터 일당이 되었더라면 이번 일도 그렇게 서투르게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한밤중이나 되어서 그들은 묘적산의 광활한 계곡에 이르렀다. 퇴계원으로 내려가는 계곡의

개천이 있었으나 가뭄으로 한팔 정도가 될까말까 한 실개천이 되어 있었다. 물이 지나던 곳

마다 잡초가 자라나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주위는 짙은 송림의 어둠이

둘러싸고 있었다. 송림 사이로 가까이 불빛들이 번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앞서 가던 자가 말

하였다.

"벌써 회의가 시작된 모양이우."

"이번에 무슨 일이 있다든가?"

"흥인문 밖에서 거사할 일이 있다는 것 같던데."

그들은 송림을 베어 넘긴 공터에 이르기 전에 좌우에서 파수보는 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마귀 일행인 것을 알자 그들은 공터로 안내되었다. 낮은 초막들이 세워져 있었고 가운데에

는 장작불이 타올라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모두들 열기와 불빛으로 번들거리는 상반신을

돌려서 그들이 오는 것을 돌아보았다.

"성님들, 안녕허우?"

까마귀가 인사하니 좌중에서 제각기 아는 체하는 말이 나왔다. 스무 명 남짓한 사내들이

웃통을 벗고 탁배기라도 마시는지, 자리 앞에 대접과 동이가 놓여 있었다. 까마귀가 산지니

의 팔을 이끌고 중앙으로 데리고 나아갔다.

"이 사람이 바루 전 판관 한이서를 찍어 죽이구 달아나온 널다리 사는 석총각이우." 까마

귀가 스물 남짓 되는 사내들에게 인사조로 말하였고 산지니는 어디라 할 것 없이 막연한 곳

에다 대고 장바닥 인사로 머리를 껍죽 흔들었다.

"산지니라구 허우."

"대덕님께 인사를 드려야지."

좌중에서 누군가 말하자 여기저기서 암 그래야지, 어쩌구 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까마귀는

산지니의 팔을 끌어 흰옷에 흰 건을 쓰고있는 사내 앞으로 데려갔다. 검은 수염이 흰 저고

리 위로 자못 위엄있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산지니를 보고 까마귀가 팔을 건

드리며 속삭였다.

"어서... 큰절을 올리게."

그러나 산지니로서는 아무리 사세부득하여 남의 굴에 더부살이 들어온 처지라고는 하나,

코빼기도 모르는 자에게 국궁 배례한 적은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역시 장터에서 무뢰배들

인사 트는 식으로 고개를 까딱하며 내뱉었다.

"객주거리서 산지니라면 대강들 압니다."

건을 쓴 자는 웃는지 찡그리는지 알 수가 없는데, 누군가 킥킥 웃더니 드디어 여럿이 껄껄

대는 웃음으로 변하고, 대덕인지 장떡인지 하는 이도 고개를 뒤로 젖힌 것으로 보아 따라

웃는 모양이었다. 까마귀가 대신 허리를 굽히고 말하였다.

"장터에서 싸움질로 뼈가 굵어 버릇이 요 모양입니다." "기개가 그래야지. 땅바닥에 엎드리

라는 것부터 잘못이 아닌가?" 건을 쓴 자가 말하였다. 그는 제 앞의 사발을 들어 산지니에

게 내밀었다.

"한잔 들구, 어서 끼여 앉게."

다른 자가 동이에서 술을 한바가지 떠서 산지니의 잔을 채워주었다. 산지니는 선 채로 단

숨에 들이켜고 대덕이란 사람에게 도로 내밀었다.

"잘 먹었수. 이렇게 오갈 데 없는 놈을 받아주어 고맙소." 서슴지 않고 한바가지 떠서 술이

철철 넘치도록 따르고는, 돌아서서 어디에 끼여 앉을까 망설이니 웬 사내가 그의 바짓가랑

이를 당기며 말하였다.

"총각, 여기 앉게나."

산지니는 거기가 휑하니 비어 있는 것을 보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게 자리를 내주던 사

내가 말하였다.

"사람이 지렁이 갈빗대처럼 물렁해서는 못쓰지. 자네가 까마귀의 동무인가?" 산지니가 돌

아보니 사십대의 중년 사내인데 얼굴이 가물치 빛에다 박박 얽은 곰보였다. 제 마음대로 말

을 놓는 것도 배알이 꼴리거니와 무엇보다도 까마귀의 동무라는 말이 아니꼬웠다. 사실 까

마귀가 송파 다래목의 깍정이패 꼭지이기 하지만, 나루터에서의 두 번 싸움으로 완전히 짓

눌러놓았던 것이다. 장터 난전꾼들과 다래목 깍정이 상번수들이 둥글게 둘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를 타누르고 모래에서 강물까지 끌고 가 물을 실컷 먹여준 바 있었다.

그래서 떠꺼머리 산지니는 상투잡이에 첩까지 있는 까마귀와 말을 트고 지냈던 것이었다.

실상 대처 여염 동네가 아니라 녹림에서라면 까마귀는 산지니를 성님으로 받들어야 할 처지

였다. 곰보는 산지니의 떱떠름한 침묵을 보더니, 제 동무인 듯 퉁방울눈에 텁석부리 사내를

연신 돌아보며 큰 입을 주욱 찢고 히죽거렸다.

"사내자식이 이만해야지. 호기가 오패부장이로군."

그러나 곁에 있던 퉁방울눈은 마뜩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갯가 망둥이가 용궁 소식을 알까."

엇비슷이 대놓고 산지니를 깔아뭉개더니 이내 반말지거리였다.

"자네 광주 토박이여?"

"건 왜 물어?"

"나는 동작진 사람인데 아마 자네 애비 뻘이 될 듯해서..." 산지니는 픽 웃었다. 그리고는

아예 상대를 않으려는 눈치였다.

"어어, 그러다 정말 애들하구 싸움 나겠다. 내가 자네 얘기를 까마귀한테서 듣고 만나구 싶

었네. 나 안성 달근이여, 내가 자네를 데려오라구 까마귀에게 일렀지." 산지니는 모닥불빛에

붉은 기가 일렁대는 중년 곰보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가끔

장물을 먹이러 드나들던 것이며 화초방에도 끼이던 것이 생각났다. 산지니는 고개를 까딱하

였다.

"생각해줘서 고맙수. 헌데 이건 뭐... 만만찮기가 꼭 사돈 댁 안방 같아서 무슨 속내가 있는

질 알아야지."

고달근이는 얼른 산지니의 어깨에다 손을 얹고 툭툭 두들기며 그와 퉁방울눈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염려 놓게. 우리두 거북하기는 매일반이니까. 자네는 애초부터 까마귀가 데려왔으니 우리

식구일세. 오늘 모임이 끝나면 내일루 당장 우리하구 같이 솔부리에 들어가세." 산지니는 기

왕에 몸 붙일 데 없는 신세라 한식구라는 말에 풀이 꺾였다. 고달근이가 제 동무의 잔을 걷

어다가 내밀었는데 그는 다름아닌 동작진 출신의 황회였다. 황회가 원래 사람이 붙임성이

없어서 그렇지 산지니에게 무슨 뚜렷한 유감이 있는 바도 아니었다.

", 한잔 들게. 요즘 바깥 세상에서야 어디 냄새나 맡을 것인가. 이게 이래봬두 곡주일세."

산지니는 수걱수걱 잔을 받았다. 그가 무심결에 내려다보니 옆에는 짧은 환도가 놓였고,

희의 궁둥이께로 비죽이 나와 있는 것은 분명히 화승총 대가리였다. 얼른 주위를 둘러보니

제 옆자리에 앉은 자는 외팔인지 저고리 소매를 접어서 돌띠에다 질끈 매어두고 있었는데,

그의 곁에도 길쭉한 화승총의 총열이 보였다. 예사 무리가 아닌 것이다. 달근이가 산지니의

왼편 사람을 불렀다.

", 전생아, 서루 턱인사라두 맞춰라."

그가 산지니를 돌아보는데 팔 하나 없는 것은 고사하고 왼쪽 눈도 질끈 감겨 있었다. 그는

두건을 둘렀는데 머리타래가 두건 속으로 접혀 올라간 것으로 보아 저 같은 총각이 분명하

였다. 그자가 무뚝뚝하게 말하였다.

"파주 사는 전생이라구 허우."

산지니는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이런 자들이 어디서 이렇게 모여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술이 대강 몇순배 돌아가고 나자 건을 쓴 대덕이라는 사람이

일어나 말하기 시작하였다.

"미륵의 마음은 곧 백성의 마음이오. 세상에서는 미륵의 마음이 원래 자기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모르오. 이것은 세상의 권세와 물욕이 저들의 눈을 가리우고 있기 때문이오. 도솔천의

극락계란 하늘 아래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고 누구나 미륵의 자비로운 마음이 되어 온갖 천

지만물도 평등히 사랑하게 되는 세상이 올 적에 실현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는 그릇된 세

상을 건지고 도탄에 빠진 창생을 살려야만 합니다. 묵은 세상이 망할 때에는 권세를 믿는

자들의 압박이 태산처럼 무거워지고, 금력을 누리는 자들의 욕심이 강처럼 그침이 없을 적

에 미륵의 마음이 상하여 백성을 성나게 하고, 백성에 의해 새 세상이 오게되는 것이오.

제 온 나라는 기근에 빠지고 조정은 붕당의 폐가 극에 달하여 서로 몰아내고 죽이는 일이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보살피기보다 더욱 중한 일이 되었으며, 왜국에서는 다시 난리를

일으키려고 청국의 형편을 은밀히 살피고 있소이다. 이제 더 기다렸다가는 몇 안되는 양반

들 때문에 나라는 망하고 다시 왜의 침탈로 모두 죽게 되었소. 우리가 미륵님을 어서 불러

모시지 않으면 도솔천을 이룰 날은 그만큼 멀고 늦어지게 되오. 이제 양주의 대사께서 말씀

하시기를 무진에는 양반은 상사람이 되고 상사람은 양반이 된다 하셨으니, 바로 하늘이 때

를 알린 것이오. 우리가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았다가 그때에 이르러 수백 번 후회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미 세상은 바뀌게 되어 있소이다. 근자에 한양에서 우리 계의 통문이

온 것을 보니, 왜국 국서로 시국에 대한 논의가 들끓어 권세가와 부자들이 날마다 흥인문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이오. 아마도 조정에 실직이 없는 양반들이 시골의 장토를 찾아 피난

하려는 모양인데, 저들은 일찍이 우리의 고혈을 빨아 권세와 금력을 누린 자들이고, 앞으로

도 우리의 것을 더욱 빼앗아가고 우리의 거사를 가로막을 자들이오. 이들을 모두 잡아서 재

물을 빼앗아 우리의 거사에 쓸 병장기와 마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통문에서는 우리

에게 중량포와 왕십리 광나루의 길을 막으라고 알려왔소. 경강의 용상과 마포에서는 동작나

루와 노량나루를 맡을 것이고, 서강에선 청파의 살주계와 협력하여 서대문과 남대문 그리고

경강 수로를 맡는다고 알려왔소. 오늘 모임에서는 교하 파주를 위시하여 양주 분들도 오셨

으니 북로에서는 우리와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오."

고달근이가 벌떡 일어났다.

"우리 솔부리에서는 직접 흥인문 앞에까지 나아갈 참이오. 중량포는 군영이 동서로 오리지

간에 둘러싸고 있어서 세가 불리하고 광나루 또한 별대가 지키는 곳이라 차라리 왕십리가

훨씬 유리합니다. 그러니 노적사의 식구들은 왕십리로 나가시우." 정작 실권 없는 솔부리의

두령으로 밀려난 복만이가 달근이의 말에 트집을 잡았다.

"그러면 흥인문 앞에서 먼저 한 패거리를 겪은 사람들이 왕십리로 나오게 될 테니 그들의

목숨이나 내놓으랄 밖에 할 일이 없겠구먼."

"광주로와 과천로가 갈려 있으니 서로 상관이 없을 거요." 곁에서 황회가 달근이를 거들고

나섰다.

"하여튼 우리가 맡은 곳은 한양 동편이니 일단 흥인문서부터 왕십리까지로 정합시다."

을 쓴 자가 말하자 모두들 별 반대가 없었다. 조금씩 마음도 놓이고 뭔가 알지 못할 뜨거

운 느낌이 가슴에 닿았던 산지니가 고달근에게로 숙이며 가만히 물었다.

"저기 건을 쓰고 있는 이가 누구요?"

"글세... 우리하구 상관이 전혀 없달 수야 있나. 미륵도를 한다는 도인이지. 정원태는 한양

에두 연줄이 많다네. 천지가 개벽한다구 날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구먼." "천지 개벽이

라뇨? 구름을 일으키고 바람을 몰아오는 도술이라도 부린답디까?" 산지니의 어수룩한 물음

에 고달근은 웃음을 터뜨렸다.

"안개와 이슬만 처먹구 사는 신선이란 묘한 물건이 있다면 모를까, 마누라 데리구 이따금

그짓두 벌이구 곡물은 물론이요 간장, 된장에 썩은 물까지 들이켜는 사람이 어찌 구름과 바

람을 부릴 수 있겠나, 하늘 자리와 땅 자리가 엇갈려 바뀐다는 소리겠지. 아까 못 들었는가.

이를테면 나라의 주인이 바뀌고 양반이 상놈 된다는 말이여." 산지니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러면... 역적질 아니우?"

황회와 전생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산지니를 노려보았다. 고달근이는 다시 웃는 얼굴이

되었다.

"살인되에 쓸 모가지 따로 있고 역적죄에 쓸 모가지 따루 있나. 여벌 모가지를 여러 개 보

퉁이에 싸서 짊어지고 다니다가 패랭이 바꿔 쓰듯 하면 되겠구먼." "그래두 임금을..." "나라

훔친 놈에게서 대대로 태어난 놈들이 임금이지."하고 나서 달근이는 산지니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자네는 그저 나만 따라다니면 되는 게야. 천지가 바뀌든 뒤집히든 나는 알 바가 없다네.

한양 성내가 무슨 산간에 암자는 아니란 말여. 그렇게 쉽게 깨어질 리가 없지." 달근이는 썩

은 입내를 산지니의 코에다 내뿜으면서 나직이 일렀다.

"이보라구, 내가 저따위 귀신 세워 들구 나오는 작자들허구 같은 줄 아나. 하여튼 시골 상

머슴이나 왈짜 아이들은 정가의 말만 들으면 곧바로 자기가 삼정승 육판서나 되는 줄로 알

구 신바람을 내거든. 우리는 부지런히 재물이나 모으는 게야. 보아허니 기가 있어서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을 듯하군. 이봐, 언제나 산골짜기 은신처에 박혀서 검은 옷자락만 보아도

혹시 포교가 아닌가 간을 졸이구 살겠나. 기름진 전장에 제비 날개 같은 기와집을 마련하구

노비에 소작에 마름 두고서 살아봐야지."

산지니는 어쩐지 그의 친근하게 대하려고 애쓰는 태도가 못 미더웠고, 우선 구취가 고약하

여 어깨에 돌린 달근의 팔을 잡아 내리며 고쳐 앉았다.

"이녁이야말로 모가지 개수가 여럿이구료. 나는 죄없수. 우리 누님을 겁간하려던 반송장 늙

은이를 죽였는데, 나라의 법이 반상에 구별없이 고르게 퍼져 있다면 그 늙은이는 양가녀 겁

간죄로 타살되어야 마땅허우."

"허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구먼. 여기 죄 있는 놈이 어디 있나. 다 세상 잘못 만나구 부모 잘

못 만난 탓이지. 우리 검계에두 자네같이 수배된 사람두 있구 이미 경을 치구 나온 사람두

많어. 서강 모신이네 드나드는 홍가란 자도 일찍이 경을 치고 이마빡에 자자되었다가 내빼

온 사람이라 상주처럼 방갓을 깊숙이 눌러 쓰고 다닌다네. 내 말은 제 속두 차리구 계에서

하는 일에 발을 맞추잔 소리지."

이때에 건을 쓴 정원태라는 이가 까마귀를 불러 뭐라고 이르더니 그가 산지니 앞으로 다가

섰다.

"잠깐 나오게."

산지니는 그저 어리둥절하여 고달근이 쪽과 까마귀를 번갈아 바라보는데, 달근이가 빈정대

듯이 중얼거렸다.

"또 그 신입례인지 무슨 푸닥거리인지를 벌이는 모양이로군." 산지니는 까마귀가 이끄는

대로 둥글게 모여 앉은 사람들의 가운데로 나아갔다. 집사는 복만이가 맡을 모양인지 그도

나와서 산지니의 옆에 섰다.

"오늘 우리 계에서는 새로운 계원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연당에 연꽃봉오리가

만개하여 새 꽃으로 피어나는 일과 같이 경사스런 일이올시다. 우리 검계는 백성을 괴롭히

는 양반 부호들을 징치하고 그 재물을 빼앗으며 이제껏 겪어온 수모를 그들에게 되돌려주

, 드디어는 진인을 찾아 상감을 바꾸고 천민들의 나라를 세우자고 모였소. 미륵의 뜻에 따

라 석산진을 동무로 받아들일 제 다른 생각이 있으면 말허시우." 좌중의 사람들이 제각기

중얼거렸다.

"이는 미륵의 뜻이외다."

집사인 복만이가 산지니를 향하여 말하였다.

"땅에 엎드리라."

산지니가 제사 지낼 때처럼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리자 그의 이마 앞에 흰 간지를 덮은 소

반이 놓여졌다. 정원태가 일어나 산지니의 앞으로 가서 역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미륵의 가르침에 따라 서원하옵니다. 이제부터 죽는 날까지 이는 검계의 혈당으로 기쁨과

고통과 두려움과 용기를 함께 나누어 가질 동무이오니 받아 안으소서." 정원태가 같은 억양

으로 중얼거리고는 말하였다.

"머리를 들라."

산지니가 머리를 들었고, 정원태는 소반 위에 얹은 대접 안에 손가락을 담그었다. 소의 피

가 맞겠지만 아마도 닭의 목을 따냈던 모양이었다. 그는 먼저 자기의 입술에 피를 바르고

나서 산지니의 입술에도 발랐다. 비릿하고 역한 피냄새 때문에 산지니는 입을 꾹 다물고 있

었다. 정원태가 중얼거렸다.

"그대는 미륵의 세상이 기필코 찾아온다는 것을 믿으며, 미륵이 내려주신 힘은 어떠한 것

으로도 꺾을 수 없고, 미륵의 뜻은 크고도 넓다는 것을 믿는가?" 까마귀가 산지니를 툭 치

면서 대신 예,라고 말해주었다.

"그대는 온갖 멸시와 천대로 죽어간 백성들이 도솔천을 준비해온 것을 믿는가?" "그대는

미륵의 군사로서 양반과 부호를 미워하며 계원을 혈육같이 사랑하고 천민을 위하여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

"그대는 이 일을 계원이 아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며, 계의 명령과 규율에 복종하니,

키지 못하면 목숨을 바치겠음을 맹세하겠는가?"

산지니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온몸의 혈관이 부풀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답이 끝나자 까마귀가 그의 저고리를 벗겼다. 정원태가 말하였다.

"돌아앉아 미륵의 응답을 받으라."

산지니는 시키는 대로 등을 돌리고 돌아앉았다. 정원태가 손을 내밀자 복만이가 모닥불 속

에서 기다란 작대기를 빼어서 건네주었다. 끝에는 걸쇠 모양의 동그란 쇠꼭지가 달려 있었

는데 불속에서 이미 벌겋게 달구어져 있었다. 정원태는 그것을 산지니의 오른 어깨에 대고

눌렀고 산지니는 뜻밖의 아픔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정원태가 다시 틈을 주지 않고 왼쪽

어깨를 지졌다.

"이제 그대는 검계의 혈당이다."

정원태가 말하였고 좌중은 함께 중얼거렸다.

"미륵의 뜻이외다." -7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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