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장길산 8

一字師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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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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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황석영

출판사:창작과 비평사

봉사자:윤동식, 김봉섭

 

3부 잠행()

2장 구월산

1

갑자에 시작된 흉황은 이듬해인 을축년에도 계속되어 한양에 난민이 나타난 지 몇 달이

안되어 황해도에는 염병과 소의 전염병이 창궐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문화와 안악 등지가 가

장 심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이세백은 해서의 참상을 계언하여 수안, 곡산, 서흥 등지의 읍

이 거리가 멀어 전세의 운반에 비용이 많이 들어서 백성들의 불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면포로써 대봉해주지 않으면 더 이상 다스리기도 힘들다고 아뢰었다. 삼월에는 황해도 관

찰사로 윤반이 나아갔으나, 이미 거칠어져 난민으로 변해가는 백성들을 다잡지 못하였다.

세백이 재임할 적부터 구월산 일대에서 일어난 명화적이 활빈당을 자처하며 해서의 전역은

물론이요 도계를 넘어서 서북이나 관동지방에서 심지어는 송도 부근에서까지 발호하여 왔는

, 수괴는커녕 그 졸당도 얻지 못하였다. 때가 흉년에 역병까지 나돌아, 다른 수많은 난민

들이 저들 명화적을 행동을 본떠서 스스로 활빈무리임을 자처하였으므로 실로 조압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주감영은 물론이고 산간 벽지의 작은 읍에 이르면 관가는 마치

성난 폭도들에 둘러싸인 작은 섬과도 같았다. 병인년에 으르러는 흉황과 전염병의 악순환으

로 참상은 고질화되어 나라에서는 장기 대책으로 송엽을 먹는 방법과 식량이 될 수 있는 풀

뿌리를 가려내는 것을 지방 관리들을 시켜 광유토록 하였다. 그해 여름에 난데없는 눈이

내렸고 제비까지 얼어 죽었으며 해일이 크게 일어났으니, 이 모든 괴변은 주상이 장씨 성

을 가진 궁녀를 가까이하여 실덕하였던 탓이라고 조정의 의견이 일어나 정국은 혼란하여지

고 있었다.

여름에서부터 군도가 횡행하여 포교와 군사들은 각처에서 살해당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두

어 자루의 곡식이나 한 필의 무명 때문에 서로 죽이고 죽고 하였으나, 전장을 드넓게 차지

한 토반이나 향족들은 창고에 그들먹하게 곡식을 쟁여놓고 예년과 다름없이 호화롭게 지내

었다. 그들은 스스로 재물과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무사와 역사들을 집안의 식객으로 거느

리고, 좀도둑이라도 인근에서 잡히면 명화율로 다스린다 하여,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참혹하

게 처단하였다.

예성강은 마식령산맥의 언진산 계곡을 근원으로 하여 오백여 리나 흘러 해서와 경기를 가

르고 있었다. 군이 일곱이나 걸쳐 있고 들판은 광활하였다. 금천읍은 오조천의 북쪽이며 돼

지여울의 남쪽인 광복산 아랫녘에 있었다.

말여울 하류에 조읍포가 있었으니 읍에서는 이십여 리 떨어졌고 해서에서 가장 큰 포장이

있었다. 동남방으로는 송도에 통하고 남쪽은 배천, 서쪽은 해주와 통하며 서북쪽으로 재령

방면에 닿았으니 실로 그물의 코와도 같은 곳이라 수륙의 교통이 서로 마주 닿았다. 이 조

읍포창은 강음현을 비롯하여 황주 서홍 평산 곡산 수안 안악 재령 신계 우봉 토산 등지의

열두 군현의 조세 양곡이 모두 수납되었다가, 수운판관의 지휘에 의하여 예성강 수로를

통하여 교동 강화 수로를 돌아 경강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아무리 흉황이 극심하다

하지만 나라 살림이 전폐될 수는 없는 일이라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조읍포는 차차 활기를

띠어가기 시작하였다. 각처에서 온 아전들과 세곡선들이 포구의 넓게 패여진 선창에 줄지

어 늘어섰고, 주막에서는 밥짓는 연기와 장정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이곳만

은 마치 태평성대를 만난 잔치를 벌이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포창에서 천신산

이나 구봉산 같은 나직한 고개를 하나 넘어가도 굶주린 유랑민들의 무리가 산야에서 먹을

것을 찾아 떠돌고 있었다.

포창의 서남쪽은 넓은 예성강이라 그곳만을 빼고는 곳곳에 나졸들이 지켜 서서 걸식하는

유민들을 돌아가도록 하였다. 조읍포의 언덕에서 동북편으로는 예전의 읍치였던 강음 즉

금교역말이 있었다. 포창에서 역말까지가 오 리도 못 되어서 역마와 행인의 왕래가 빤히

내다보일 정도였다. 금교역말은 새서의 가장 번화한 역참이었다. 찰방이 있는데 그는 평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금교역은 서신과 봉물을 전달하고 역마를 세내어주는 등으로 역졸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곳이었다.

가위 북으로 오르는 관문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었다. 이러한 역참과 해서의 세

곡을 관장하는 거대한 포창인 조읍로가 있으니, 물화는 풍부하고 장사치들도 각처에서 오

고 갔으며, 따라서 금교역서 흥의역에 이르는 삼십여 리지간에는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도적이 둔취하여 백주에도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였다. 정덕 경오에 군영을 설치하여

상인과 세곡을 보호하여 지키게 되었으나 난이 두 차례난 휩쓸고부터는 군영의 관리도 흐

지부지해져버려 다만 옛말처럼 전해올 뿐이었다. 포창에만 평산과 금천에서 군관이 나와 지

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때가 극심한 흉황이라 칼이나 몽둥이를 가진 난민들이 저마다 산곡에 지켜 서서 남의 물 것

을 빼앗는 형편이었고 장사치들은 그들대로 칼이나 화승총을 가진 무사 포수들을 세마를 내

듯이 고용하여 역에서 역으로 또는 저자에서 대처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때마침 밀물 때라 강물이 불었고 넓고 흰 기운이 포창에 가득한데 자욱한 연기와 안개가

아침 강변에 흰 베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고성산 봉수가 똑바로 내다보이는 포창의 나루터

에는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란이 일어났다.제일 먼저 군관들과 군졸들이 뛰어갔고 아이들도

떼를 지어 몰려갔으며먼길을 가는 숙박객들은 무슨 일인가 하여 주막을 울타리 밖으로 고

개를 내밀고 있었다. 소나 말까지도 실어나르는 큼직한 거룻배가 천천히 강변에 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천신산 아랫녘의 문수골 사는 유사과라면 금천서는 알려진 부가옹으로 찰

방이나 판관 따위는 모두 수령보다도 그의 명을 받들 정도의 세력가였다. 유씨가는 예전에

천신산의 문수암을 중건하여 부처님의 공덕으로 가세가 불어났다는 소문이 전해 내려왔다.

유씨 댁에서는 조읍포창에서 가장 큰 여각을 경영하였고, 신천 재령 등지에 흩어진 전장이

있었고, 세곡선도 수십 척이나 가지고 있었다. 실로 유씨가의 번성은 조읍포창의 세곡에 의

한 것이었다. 세곡의 운반과 또한 경강과의 미곡 교역으로 큰 이익을 얻었으며, 세곡 운임

의 막대한 수입은 오랫동안 유씨가에 독점되어 왔었다.

얼마 전부터 금교역과 흥의역 사이의 광복산 골짜기에는 유민들이 스며들어 길목을 지키

며 행인의 물건을 약탈하여 큰 골칫거리였다. 유씨가과 댁에서는 송도로 보내는 봉물을 탈

취당한 일이 있어 달포 전부터 준비를 해오더니, 드디어 광복산의 병풍 같은 산줄기들을 뒤

져서 화적을 잡아낸 모양이었다. 배에서 내린 장정들은 제각기 환도며 장창이며 활과 화승

총의 각색 병장기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대략 스무 명이 넘어 보였다. 유사과의 큰아들과

포창에 나와 있는 행수가 고용된 장정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결박된 화적들

이 차례로 끌려 내려왔는데, 모두 여섯 사람이었고 그중 하나는 여자요 또 하나는 십사오세

의 아이였다. 그들은 모두 누더기 차림에 맨발이었는데, 청년과 중년 사내들은 부상을 당하

여 허벅지와 팔에 피가 배어나왔으며, 노인은 머리를 얻어맞았는지 찢은 옷으로 이마를 동

였는데 몹시 쇠약하여 보였다. 그리고 성한 사람은 나이가 한 오십이나 되었을까 초로의

사나이로 아무렇게나 틀어롤린 상투머리가 희끗희끗하였고, 눈빛은 성난 짐승의 눈처럼 이

글거렸다. 누가 보더라도 이들이 한가족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모여든 구경꾼들은 설마

저런 것들이 광복산 골짜기의 화적당이랴 싶은 의아스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서 걸어라."

장정들은 갯가에서 포창거리 쪽으로 그들을 내몰았다. 장정들은 가끔씩 창끝이나 환도로

그들 초라한 도적들의 등을 밀거나 발길로 걷어 차는 것이었다. 포창 군관과 군졸들은 포창

거리의 초입에서 그들의 행렬과 마주쳤다. 군관은 유사과네 큰아들과 행수에게 치사를 드렸

.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이까. 이제 적당이 모조리 잡혔으니 백성들도 안심을 하겠지요."

유사과네 큰아들은 명색이 사과의 아들이라지만, 머리에 두건을 질끈 두르고 배자 걸치고

토시와 행전을 치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단검, 어깨에는 화승총을 메고 있었다. 행수는 역시

같은 차림에 장창을 짚고 있었으니, 호환이라도 일어나서 범사냥을 나가는 듯한 법석이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을 우리가 하는 걸세. 아무튼 우리가 이것들을 잡아왔으니 창고에 가

두어두었다가 사또께 아뢰고 나서 처참 효시하도록 하지." 포창 군관은 제깐에 멋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였다.

"이놈들, 예가 어떤 고을이라고 함부로 작당하여 강도질이냐."하면서 주먹을 쥐어 앞에 선

노인의 뺨을 치니, 어이없게도 그는 땅바닥에 나뒹구는데 코피가 터져 있었다. 아낙네가 묶

인 채로 노인의 몸위에 엎드러지며 외쳤다.

"아버님...:

초로의 사내가 두 팔이 묶인 채로 군관을 들이받을 듯이 달려들었고 군졸 두 사람이 좌

우에서 그를 붙잡았다.

사내는 고함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는 것이었다.

"이놈들아, 먹을 것이 없어 화적질은 나허구 내 아들이 하였다. 아녀자와 노인네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사람들은 서로 눈짓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장정들이

광복산을 이곳 저곳 쏘다니다가 정작 잡아야 할 녹림당은 놓쳐버리고 산야에 움막을 파고

살면서 좀도둑질이나 하던 유민 일가를 취조하여 끌고 온 모양이었다. 달아나던 사내들은

그들 가족이 잡히자 순순히 포박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포창으로 끌고 가라."

군관은 씨근대며 군졸들에게 명하였다. 유사과네 장정들은 포창지리에서 자기네 여각으로

몰려들어갔고, 군졸들은 포창을 향하여 도적들을 끌고 올라갔다. 노인은 더 이상 걸음을 옮

길 수가 없어 군졸 둘이서 양쪽 겨드랑를 끼어 올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끝까지 따라갔을

뿐이요 어른들은 대부분 포창거리에서 멈추었고 밖을 내다보던 주막과 객줏집의 손님들도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저 사람들이 분명히 도적질을 했다던가?"

객줏집 마루에 앉았던 사람이 물었고, 밖에 나갔다가 들어온 하인차림의 사내는 혀를 찼

.

"웬걸요, 저런 노인네와 아이허구 아주머니가 무슨 힘이 있어 남의 물건을 빼앗겠수. 아마

세 부자간이 살 길을 찾노라고 가끔 흥의역지간에 나타난 장꾼들의 양식자루라도 빼앗아 먹

었던가 봅니다." 하인 차림은 얼굴이 해사하고 영리해 보였고, 선비 차림은 수염이 검고 안

색이 청수한 중년이었다. 그들은 객줏집의 방 둘에 널찍한 마루가 딸린 별채를 빌렸는데 그

선비와 하인 외에도 건넌방에는 사내들이 더 있었다. 그들은 건넌방에서 겸상을 받아 아침

을 먹는 중이었다. 하나는 얼굴이 메기탕으로 세수하였는지 반들거리는 흑빛이요, 다른 하나

는 나이가 듬직하나 눈매며 두툼한 입술이며가 성깔깨나 있어 보이는 사내였다.

"뭐래, 어디 것들이래?"

나이 든 사내가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하였고, 하인 차림은 마루로 올라앉았다.

"보나마나 유민들인갑디다."

"아니, 거 잡아온 패거리들 말야."

"구경꾼들에게 물으니, 유사과네라면 모두 안다는데." 낯바닥 검은 사내가 수저를 놓으면

서 되씹었다.

"유사과라구?"

하면서 그는 선비 차림에게 물었다.

"성님, 우리가 대용이 성님께 들었던 그자가 아닙니까?" 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명쯤 되던가?"

"한 스물 남짓 되는데, 우죽했으면 저런 사람들을 녹림당이라고 잡아왔겠수." "그럴테지."

"아니야. 병장기는 제법 굉장하던걸. 환도에 장창에 활과 총포까지 지녔더군." 선비가 말하

자 밥 먹던 두 사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선비란 바로 김기였으며 하인은 오공랑 강말득이

었고 얼굴 검은 사내는 마감동 나이 든 사내란 변가였다. 초여름부터 대동강 어귀의 가도에

서 구월산으로 여러번 사람을 보내왔던 것이다. 조읍포창에 관하여 정탐을 해두었으니, 수로

쪽은 우대용의 식구들이 담당하고 평산 배천 등지의 내륙 쪽으로는 구월산이나 자비령 식

구들도 같이 맡아 도모한다면 일이 수월하겠다는 것이었다. 구월산에서도 그 일을 크게

보아 자비령에 사람을 보냈고, 마감동이가 변가와 더불어 신천을 거쳐 평산에 당도하였던

것이다.

우대용이네서는 아직 사람이 오지 않았으니 아마도 예성강으로 해서 당도할 모양이었다.

그들은 거사를 하기 전에 미리 인근의 지형과 병력의 많고 적음이라든가 그 허실을 살피기

위하여 왔던 것이다.

"아마 다른 고을에서 그러듯이 저 일가족을 저자에서 효시할 모양인데, 그냥 내버려두려

?" 말득이가 마감동에게 물었다.

"그러니 우리가 다른 일로 왔거늘 어찌 위험을 무릅쓰고 섣불리 달려들 수가 있겠는가.

아마 내일쯤엔 목이 잘려 장대 위에 걸린 터인데."

말득이는 손바닥에다 침을 뱉어 부비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내게 허락만 해준다면 성님들이 없어두 나 혼자 할 수 있수. 자고를 날려서 몇놈 쓰러뜨

리고 산골짜기까지 데려다 주면 아무데로든 무사히 달아날 게요." 김기는 담배를 피우며

아무 말이 없었다.

"어쩌시려우. 제가 맡기지 않으시려우?"

말든은 감동과 김기의 눈치를 살피며 다그쳐 물었다.

"우리가 일없이 그냥 지나가는 길이라면 모를까... 여기서 한 댓새 묵게 될 것이고 또한

도모할 일이 있잖으냐.

그때까지 별일이 없으면 다행이구..."

감동은 다시 적당하게 얼버무렸고 말득이는 혀를 찼다.

"떡 삶은 물에 속곳 데치기 아니우. 우리가 도모할 일은 벌써 시작한거나 매한가지요."

김기가 담뱃대를 놋재떨이에 두들겨 떨었다. 그는 식구들을 둘러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하긴 김서방 말이 맞아. 우리는 오는 날부터 시작하고 있는 게야. 방금 좋은 생각이 났

. 가도에서 우두령이 오기 전에 미리 준빌 해둘까?" 김기는 아우들을 방안에 모이도록

하였다.

"자네 혼자서 포창을 뒤집어놓을 자신이 있는가?"

김기의 물음에 말득은 자고 표창 꾸러미를 쳐들어 보였다.

"판수가 산대 잡듯이 눈감고도 훤합니다. 포창의 골목이며 산으로 오르는 길은 모두 보아

두었지요. 지키는 놈들이 있으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면 오늘밤에 저 사람들을 빼내도록 하지. 자네는 당분간 조읍포창 주변을 시끄럽게

해주어야겠어." 김기는 말득이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낮에는 여기서 내 하인 행세를 하고 밤에는 슬슬 놀러 나가서 말썽을 부리라는 말일세."

"그런 놀음이라면 염려 마우. 내 별호가 오공량이우." 지네가 밤에 나오니 그럴 듯허군.

가 연전에 길산이 성님을 골탕먹인 적이 있지요. 그 선일이 안댁하고 둘이서 말입니다." "

끝춘이의 별호가 서녀였든가?"

"말씀 그대로 생쥐였지요."

김기가 다시 어조를 고쳤다.

"그러나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는 말고 하루에 한 사람쯤만 병신을 만들어놓아. 포창 군졸

이나 유사과네 불한당들만 골라서... 양민들은 절대로 건드려선 안되네." "안심합쇼. 제가

이래봬도 자비령에서 가장 인정 많은 사람이우." 김기가 마감동과 변가에게 일렀다.

"자네들은 아침도 먹고 하였으니, 금교역으로 가게." "? 갑자기 금교역엔 뭣하러 갑니

?"

"가서 도적이 들이칠 것이니 방비하도록 일러두란 말이야." 감동은 김기의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조읍포창은 각처의 녹림당이 넘보는 곳이라 경계가 심한 곳인데 우리가 부러 적

경을 고하고 일을 그르칠 이유가 뭐요?"

김기는 수염을 내리쓸었다.

"도적만 방비하면 되지 않나? 경계가 심하니 적경을 고하여 더욱 굳게 해두어야지. 자네

들은 한양서 올라온 포교들이 아니던가?"

마감동과 변가는 서로 마주보았고, 감동이 말득이를 손가락질하였다.

"이를테면 오늘밤에 저 애가 소동을 부린 뒤에 우리가 금교역말에서부터 들이닥치잔 말씀

이구려." 김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번 일은 도적을 역을 하는 패와 토표하는 역을 하는 패로 나누어 맡아야겠네. 양식은

쥐가 훔친다네. 그래서 쥐를 잡으려고 고양이를 기르지. 고양이는 언제나 쥐가 오지 않나 망

을 보고, 제놈이 으스대고 있는 한은 한 마리의 쥐새끼도 나타나지 못한다고 믿고 있지.

데 쥐 대신 고양이가 나온단 말이거든.: 변가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는 차마 김기에

게는 묻지 못하고, 마감동의 눈치를 살폈다.

"난데없는 고양이 재담은 또 뭐요?"

마감동은 웃으며 대꾸하였다.

"정작 재물을 터는 쪽은 그것을 지켜야 할 포도 군사들 쪽이란 말이여." ", 세상에 그

런 일이 있을라구."

"변두령이 포교라는데두?"

변가는 그제서야 알아들었는지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하였다.

"자네들은 일이 벌어질 때까지 포창과 유사과 댁을 왕래하며 실정을 자세히 알아두게.

득이가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은 그저 놓칠 뻔하였는걸. 그리구 자네들은 동네를 집뒤짐할

때 나를 만나면 신승지 댁 샌님이라구 안 체를 하란 말일세." "신승지라뇨?"

", 일전에 문화에서 관보를 얻어 읽고 몇사람 외어두었다네. 신엽이라구 사간에서 집의

로 그리고 승지로 오른 이가 있더구먼. 그리구 자네들이 나를 유사과에게 소개해주게나." "

대용이 성님이 오시면 어쩌시렵니까?"

김기가 빙글거리며 말하였다.

"우두령은 늦은 죄로 도적의 역을 해내어야겠지. 구월산과 자비령의 식구들께는 강서방에

게 전갈하여 털벙거지에 더그레를 준비하라구 이를 참이네." 마감동과 변가는 벌써 봇짐

을 꾸려 등에 걸머지고 금교역말로 나갈 준비를 하였다.

"가만있게. 내가 우두령의 용모파기를 적은 문건을 써줄 테니까." 말득이가 먹을 갈았고

김기는 붓을 들어 대강 생각나는 대로의 우대용의 인상이며 체격을 적어나아갔고, 전국에

수배된 흉적이라 썼다. 곁에서 지켜보던 감동이가 어이가 없는지 따라 읽으면서 변가에게

설명하여주었다.

"대용이 성님이 이걸 알면 성님의 수염을 뽑으려 덤빌 거유." "그 못생긴 사람을 이렇듯

훤칠한 대장부로 적어두었으니, 이다음에 자손들 제사 지낼 때 쓰라구 잘 간직하도록 일러

주게나."

김기는 용모파기서를 접어서 마감동에게 내주었다.

"언제쯤 들어오리까?"

"글세... 내일은 너무 빠르고, 모레쯤이 어떨지?"

"천상 역말에서 말똥 냄새나 실컷 맡게 생겼는걸. 아예 평산이 어떨까요?" "평산은 안되

. 장두령이 그곳을 지나올 테니까."

"그럼 길산이 성님이 포도군의 토포사가 되나요?"

김기는 기왕에 내킨 김이라 다른 백지에다 뭐라고 써갈려나갔다. 글을 쓰면서 김기가 손

짓을 하였다.

"국록을 먹는 자들이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어서들 가게나. 장두령을 토포사로 만들 수야

없지. 재간으로는 최흥복이를 따를 사람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저 성님만 믿구 가겠습니

."

변가와 마감동이 바삐 나가고 나자, 김기는 말득이에게 말하였다.

"여기 어디 정자에나 나가서 바람이라두 쐬어야겠다. 필통과 필랑을 급에 꾸리고 찬합을

챙겨 나서자꾸나." 포창의 언덕바지 전망이 좋은 자리에 벽파정이 있었는데 금교역 객사의

누각과 더불어 예성강과 주변의 산야를 바라보기에는 근처에서 달리 비할 곳이 없었다.

줄기들이 사방으로 구불거리며 달리고, 먼 산은 가느다란 띠처럼 허공중에 떠 있는데 들판

과 언덕이 오르내린 모양은 살아 있는 짐승들과도 같았다. 갠 날은 가슴까지 툭 트이는 듯

시원하였고, 비가 오면 온통 들판이 부옇게 되어 안개가 산등성이에 걸렸다가 강물 위로 끌

려 내려가는 모양 또한 정취가 있었다. 아침놀과 저녁 황혼이며 들판 마을들의 밥짓는 연기

가 자못 볼 만하였다. 맑은 바람이 늘 난간에 가득하여 원로의 더위와 먼지를 씻을 만하였

고 밝은 달이 정자 위로 떠오르면 구부러진 강물에는 은조각들이 부서졌다.

말득이는 문방구와 찬합을 등에 걸머지고 있었으며, 김기는 어제 조읍포에 들어오던 행색

대로 나귀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었다. 마주 오던 농군들이 김기의 차림새로 양반임을 알

고서 스스로 길에서 비켜나는 것이었다. 말득이는 이러한 꼴들이 보기가 싫어서 김기와의

동행을 꺼려하였으나, 실정을 살피고 일의 계획을 세우는 데는 김선비만한 이가 산채에 없

었던 것이다. 오공랑이라는 별호대로 지네의 독침 대신에 그는 자고 표창 쓰는 재간과,

이 여럿 달린 듯 걸음 걷는 재간은 말득이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러니 정탐꾼으로서는 그

들만한 짝이 없었고 남들에게도 쉽사리 주인과 하인으로 보여서 더욱 수월한 노릇이었다.

그들이 포창의 늘어선 창고 앞을 지날 적에 돌아보니, 군중들이 모여 있고 그 가운데에는

아침에 잡혀온 가족이 꿇어앉아 있었으며 포창 군관과 유사과 댁의 사람들 몇이 앞에 나와

앉아 심문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찌되려는지 구경 좀 하구 가요."

말득이가 고삐를 잡고 소곤거리자 김기는 말하였다.

"어느 양반이 저런 따위 행사에 관심을 보이더냐. 우리는 지금 정자로 올라야지. 가서 시

도 짓고 풍광도 즐기며 놀자꾸나."

구경꾼들이나 군졸들도 나귀에 올라 지나가는 선비의 행차를 힐끔거리며 돌아보았다.

"하긴 나중에 주막거리에 나가면 소상히 알아볼 수가 있수." 말득이는 그들 초라한 도적

일가가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혀를 찼다. 김기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나서 일부러 딴청

을 하였다.

"바람이 아주 상쾌하고나. 벌써 물비린내가 코 안에 가득한걸." 그들이 정자에 다가가니

주변은 청소가 깨끗이 되어 있었고 마루도 드문드문 새로 깔아둔 것이 누군가 임자라도 있

는 것 같았다. 김기는 백지를 펼쳐 서진으로 단단히 눌러두고 잠시 난간에 기대어 포창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아 시흥에는 취흥이 짝이니라. 우선 술 한잔 먹어볼까." 찬합을 열고 건어포와 말린

홍합을 내었으며, 허리춤에 달아온 호리병의 마개를 열어 화주를 몇모금 들이켰다.

"커어, 혀끝이 짜르르하는구나."

김기가 슬슬 기분을 돋우는 양을 보고 말득이는 먹을 갈면서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시를 지을 거유? 내 아무리 대솔하인 행각이라 하나, 성님께서 먹물 튕기며 거드름

빼는 장난을 하면 더 못 참겠수."

김기는 난간에 걸터앉아서 경치를 바라보다가 대꾸하였다.

"이 녀석아, 시방 주종이 엄연히 다른데 웬 잔말이 많으냐. 시도 지어보고 먹물도 마셔봐

야 나라를 다스리는 귀한 어른들의 은혜도 아느니라. 혹시 알겠느냐... 내가 벼슬이라두 하게

된다면 네게 비장직이라두 내릴지." 말득이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벌리고 김기를 올려다

보다가 심술이 나서 먹을 집어던졌다.

"완전히 실성하셨구먼. 길산이 성님께서 들었으면 당장에 목을 베자구 달려들었을 거유."

김기는 껄걸 웃을 뿐이었다. 그는 우선 운을 붙여서 오언절구를 입속으로 중얼거려 본 뒤

에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휘둘러 썼다.

"거 무슨 미꾸리가 팔팔 뛰구 지나간 듯허우."

말득이가 비양거리며 호리병을 집으려 하니 김기가 슬쩍 채가는 것이었다.

"이 녀석... 어느 하인놈이 주인의 술을 마시더냐."

김기가 술병을 들고 다시 난간에 가서 걸터앉으니 말득이는 약이 올라 시문을 척척 접으

며 투덜거렸다.

"언놈은 뭐 재간이 없어서 글 못 배운 줄 아슈. 다 세상 잘못 만난탓이지. 이러니 글 모

르는 놈들 서러워 어찌 사나?"

"그거 그냥 펼쳐두어라. 누가 와서 보면 읽게..."

김기가 저액으로 말하였으나 말득이는 아직도 그가 자기를 골리는줄로만 여겼다.

"보긴 제미럴... 나 외에 어느 시러베아들놈이 본단 말유." "그냥 놔두어." 김기가 말투를

바꾸어 얘기하니 말득이도 영문을 모르는 채 서진으로 잘 눌러두었다. 김기는 난간의 좌우

를 서성이며 사방을 모두 살피고 나서, 이번에는 다른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산과 강이나 마을이 제 모양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약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게 뭐유. 가만있자... 이게 아마 포창인가?"

김기는 다시 확인하려고 난간에까지 나갔다가 돌아가 계속하여 그리곤 하였다.

"네가 이 부근서 살았다구 했겠다."

"그럼요. 구봉산 너머 온정 오거리가 우리 남매 밥 벌어먹던 길목이었수." "그럼 바로 저

금교역말 뒤에가 무슨 산이냐?"

"저건 천신산이우. 그 옆 산줄기가 닿은 봉우리는 취적산이구." "저 개천은 뭐냐?" "

건 쌍봉내요."

"아니... 저기 왼쪽 말이여. 천신산 뒤루 빠졌구먼." 말득이는 김기의 손끝을 따라다 내다

보았다."

", 그게 아마 사매내일 거요."

"사매내라... 깊은가?"

"밀물 때면 배가 드나들지요."

김기는 만족하였는지 몇번이나 되뇌어보고 나서 적어 넣었다. 그는 백쥐 위에 점과 선으

로 집과 길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때 정자 아래에서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아니, 이거 누가 함부로 정자에 오른 게야. 기껏 청소하였더니 나귀는 똥을 싸고...

누구슈. 허락두 없이 남의 정자엔 뭣하러 올라와."

김기는 짐짓 모른 척하며 이제까지 그리고 있었던 약도를 척척 접어서 소매 속에 넣고는

먼저 지어두었던 시문을 펴쳐두고 들여다보았다. 말득이가 난간 너머로 쓸쩍 내다보니 화가

치민 정자지기가 그에게 삿대질을 하며 쫓아 올라왔다.

"여보, 여기 정자의 임자가 누구라구 감히 허락두 없이 올라가는 게야?" 말득이도 욕지

거리로 대꾸할까 하다가 김기의 눈치가 어쩔지 몰라서 굽신하여 보였다.

"경치가 하두 좋아서 잠깐 바람을 쐬는 중이우. 우리 나귀가 오물을 내었다면 내 돌아가

는 길에 깨끗이 치워드리리다."

정자지기가 눈을 부라리며 정자로 오르다가 김기를 발견하고는 제법 기를 내어 핀잔하였

.

"보아허니 양반이신 모양인데, 우리 상전들께서두 양반이시우. 요아래 제 집이 있는 걸

보셨을 텐데 미리 말씀이라두 하구 오르시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김기는 시문을

되읽어 살피는 척하다가 그를 힐끗 보고는 말하였다.

"여보게, 이 연적에다 물이나 좀 채워오게."

역시 정자지기도 오랫동안 남의 아랫것 노릇이나 해온지라 말득이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물 떠오라구 그러시잖나?"

하였고 말득이는 일부러 못 들은 척 계단을 내려가버렸다.

"이 정자가 누구늬 것인가?"

김기가 조용하게 물으니 그가 자랑조로 늘어놓았다.

"금천시 유사과 댁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고, 한양 궁가와 경강에서도 다 알구 있수. 조읍

포창의 여각과 세곡선두 모두 우리 주인댁 것이우."

"그래 자네 주인도 사과나 된다는 양반이 풍류를 모르실 리가 없지. 내가 마침 조읍포창

에 그럴 듯한 정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시흥이 나서 올라왔네. 나는 한양서 내려와 잠시 머

무는 사람일세." 김기는 여러 말 앉고서 다시 연적을 내주었다.

"물이나 떠다 주게나."

정자지기는 아무 소리 못하고 내려가더니 연적에 물을 채워가지고 돌아왔다. 말득이가

계단 아래 있으려니 그자가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저분이 어떤 분이신가?"

말득이는 코웃음을 날리고 나서 대꾸하였다.

"단지에 좁쌀 두 홉 모아두면 정승을 이 사람아 부른다더니... 기껏 시골 장사치로 사과

네 선달입네 사고 팔아 눈에 보이는 게 없구먼. 저이가 벼슬길에는 안 나가셨지만 신승지

댁의 아우 되시고 명년에는 어디 수령으로 나가시게 되어 있다네. 하긴 촌개가 준총을 보고

짖으니 옆구리나 챌밖에 별 일이 있겠는가마는." 말득이의 얘기에 정자지기는 에그, 잘못

걸렸구나 싶어진 모양이었다. 곧 동작이 정중하여지고 김기에게 연적을 바치는데 마루에 무

릎을 꿇고 엎드려 올렸다. 김기는 다시 그럴 듯하게 시문을 적어두고 실피는데, 아예 정자지

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였다.

"저희 상전의 분부가 지엄하여 근처에 잡인을 금하려 하였기로, 소인이 조금 시끄럽게 하

였습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하였으나 김기는 여전히 시문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괜찮네, 괜찮어."

김기는 붓을 놓고 호리병을 기울며 한잔 마시고 나서 안주를 집었다.

"자네 상전이 누구라구?"

", 문수골 사시는 유사과 어른이십니다."

"어느 해에 사과를 하셨는고?"

"한 오년 전에 흉년이 들었을 제 권분하시어 나라에서 내리게된 것이지요." 김기는 멋쩍

게 얘기하는 정자지기의 말에 조롱하는 빛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한가. 우리 가문에서 이장을 하려는데 내가 명당을 보러 다니는 길일세. 일간 자

네 주인댁에도 한번 들러볼 것이니, 나중에 내가 정자를 빌려 쓴 일을 치사드리도록 하지."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만한 지체에 계시면 저희 상전으로서두 송구스럽지요. 아마

제가 아뢰면 대번에 집으로 모셔들이라구 하실겝니다." "유씨 댁이 소문처럼 대단한 부자

인가?"

그에 이르러는 정자지기도 신이 나서 지껄이기 시작하였다.

"아이구 대다한 정도가 아닙지요. 사실 여기 조읍포창은 그 댁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말득이가 곁에 있다가 코똥을 뀌었다.

", 제 것이든 뉘 것이든 창고에 쌓인 것이 비록 태산이라 하나 곡식이거늘 몇푼어치가

되겠어." 그는 말득이와 싸울 듯이 언성을 높였다.

"함부로 말하며 다야? 저 문수골 대저택에 가보아. 정승 집도 그만이나 할까. 바다로 당

화가 속속 들어오는데 청국 비단이 수천 필이지. 녹용에 인삼에 별의별 희귀한 약재가 가

득하고, 그뿐이야, 은자가 항아리마다 가득 찬 골방두 있지. 또한 그 댁에서 지어놓고 대대

로 관리하는 문수암에 올라보아.거긴 중은 한 사람두 없구 장정 서넛이 지키구 그 댁 큰마

나님이 종년들 두엇 데리구 올라가 계시는데, 참 늙마에 상팔자지. 거기 금불상을 셋이나 모

셔두었단 말이거든. 나두 지난번에 백일재 올릴 제 중을 안내하노라구 가봤는데 정말 금이

. 종년들이 어찌나 매일 열성으로 문질렀던지 눈이 부셔서 바로 못 볼 듯하더군." 역시

정자지기의 말은 한마디도 놓칠 것이 없었다. 김기가 은근히 물었다.

"사사로이 병을 기르면 우환이 될 터인데, 어찌하여 그 댁에서는 장정들을 거느리고 있다

든가?" "그야 감영에서두 모두 알고 있고 허락이 내린 일입지요. 조읍포가 이렇게 번창한

데 금교역에 역졸들 몇 명과 수운판관이 군졸 두 오를 거느리고 있을 뿐이라 명화적이 나

타나면 재물을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실상 무예를 아는 이는 그 댁 도련님 세 분과

서북 사람 두엇, 관동 포수 셋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예성강 선단의 사공들이며 민병을 지고

있는 작인들입니다."

"음 그렇다면 보통 때는 장정들이 병장기 들고 모이지 않겠구먼." "그러믄요. 병자년 난

리 때에두 저희 댁에서는의병을 모으다가 시기를 놓쳤지요." 김기와 강말득은 서로 의미있

는 눈짓을 교환하였다.

"자아 우리는 내려가서 점심이나 먹어야지. 잘 놀았네." 정자지기가 따라 나서며 주뼛주

뼛 말을 꺼내었다.

"정자에 들러 가시는 명사 어르신들의 글을 받아놓으라는 분부가 있어서..." 김기는 시문

을 선선히 내주었고, 정자지기는 몇번이나 꾸벅이며 인사를 드리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

지 바삐 쫓아 내려와 다시 물었다.

"나으리, 어느 곳에 사처를 정하셨는지요?"

"저어기... 포구 초입에 느티나무 있는 곳... 별채가 따로 있더구먼." 말득이가 손짓으로

가리켜 보이자 정자지기가 알아차린 듯 말하였다.

"어어, 딱부리네 집이로군."

언덕을 거의 내려와 말득이가 고삐를 잡은 채로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나귀가 갑자기 고

개를 쳐들며 갈짓자로 발짓을 하였다. 김기는 몸을 뒤로 잔뜩 버티고 균형을 잡았다.

"난마할 뻔했네. 이거 마부가 시원찮아 볼기라두 맞아야겠는걸." 말득이는 연신 싱글벙글

하고 있었다.

"성님, 들으셨수? 금부처가 셋이랍디다, 셋이오."

"그것도다두 수일 내로 기름진 저녁을 먹는 날이 오겠는걸." 김기가 엉뚱한 말을 하였다.

"뭐요... 주막에서 닭이라두 잡으시려구요?"

"글쎄, 갈비나 너비아니를 뜯겠는걸, 게다가... 인삼주나 계당주를 마시겠고." "포수야 밤

에는 장님이니 상대할 것이 없고, 무예를 아는 자는 듣기로는 모두 다섯이우. 나머지는 잡동

사니들이라 입바람 한번 불면 개미처럼 흩어지겠네요." 그들은 포청 앞을 지나왔는데 모였

던 사람들은 모두 가버렸는지 창고 앞 빈터는 한적하였다. 어느 창고 앞에 더그레에 털벙

거지 쓴 군졸둘이 장창을 짚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안에 갇혔구먼."

김기가 그쪽을 돌아보고 말하자, 말득이는 땅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자고를 쓸 것까지두 없겠수. 그저 두 팔로 그러잡아 되우 박치기를 시키면 사흘 밤낮으

루 염라국 문고리 만지고 돌아올 게요."

"가서 낮잠이나 자두어라."

"혼자 마셨으니, 이번엔 나두 혼자 마실 테유."

김기는 껄걸 웃었다.

"사람이 그래서 쓰느냐. 원래 봉놋방의 술이란 낯선 사람들끼리도 가은 술잔에 입 대는

재미로 마시는 게야." "거 뭐 시흥이네 취흥입네 하는 양반의 주법과 봉노에서 탁배기잔을

드는 상놈의 주법이 다르우?" "암 다르지."

그들은 주막으로 돌아왔다. 주인이 반겨 맞으면서 나귀를 끌어다 구고 돌아왔다. 김기는

짐짓 건너방을 넘겨다보면서 물었다.

"저쪽이 비었군. 모두 갔나?"

"아니, 모르시는 분들인가요?"

김기는 마루에 오르며 말하였다.

"얘가 어쩌니저쩌니 하데마는 아이들이야 길에 나서면 모두가 동무지." "허허, 그렇겠습

. 아침에 황황히 떠났습니다."

"그 사람들 저희끼리 얘기가 누굴 잡으러 온 모양이데." "그럼 그이들이 포교입니까?" "

좌우간 잘 갔어. 어찌나 코를 고는지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주인이 상을 올릴

때 말득이가 따로 돈을 주어 은근히 청하여 탁주도 올라왔다.

"오늘은 일찍 잘 테니까 다른 손님 받지 말게. 내가 방값은 후히 줄터이니." 김기는 넌지

시 말해두었다. 말득이는 저녁 먹을 때가 다 되로록 낮술에 취하여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다.

이윽고 밤이 깊었는지 주막 주인네도 불을 껐고, 멀리서 짖어대던 개 소리도 그쳐갔다.

산 숲속에서 고즈넉하게 울어대는 부엉이 소리만이 들려왔다. 김기가 자리에 누우며 말하였

.

"나는 그만 자야겠다. 어서 나가서 한바퀴 돌고 들어오지." "아마 새벽녘이나 되어야 일

이 끝날 듯허우."

"날 새기 전에 들어와야 한다."

"내일은 포창이 발칵 뒤집히겠군."

말득이는 자고를 허리에 두르고 미투리를 조여 신고 주막을 나섰다. 마침 하늘에는 구름

이 잔뜩 끼어서 코앞도 안 보일 듯이 캄캄하였다. 사방에서 풀벌에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주막거리에서 큰길을 따라 곧장 올라가다가 오른편으로 돌면 창고들이 줄지어 늘어

서 포창이었다. 군관이나 수운판관이 있는 곳은 절수처라고 하여 초가에 토벽인 창고와는

달리 돌담을 두른 와가였다. 말득이는 낮에 보아둔 대로 군졸 둘이 지키던 창고 쪽으로 다

가갔다. 절수처의 바로 곁에 있는 창고를 돌아서 맞은편 창고의 벽에 찰싹 붙은 말득이는

벽의 끝까지 살금살금 나아갔다.

바로 그 길은 그들이 벽파정에서 내려오던 길이었다. 앞에 널찍한 빈터가 보였고, 군졸들

이 장창을 짚고 서 있던 창고가 내다보였다. 창고의 문 앞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말득

이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창고의 오른편 끝에 한 사람은 장창을 벽에 세워두고 앉은 채로

졸고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아예 땅바닥에 길게 누워 잠들어 있었다. 말득이는 맞은편으로

달려가 창고의 벽에 기대어 섰다가 벽을 따라서 문까지 다가갔다. 역시 맹꽁이자물쇠가 채

워져 있었다. 말득이는 예전에 하던 솜씨대로 쇠끄틀을 꺼내어 열쇠구멍에 넣고 이리저리

비틀었다. 이윽고 찰캉, 하는 투명한 쇳소리가 들리더니 쉽게 열렸다. 말득이는 자물쇠를

따내어 땅에다 살그머니 내려놓고 문고리를 벗긴 다음에 문을 당겼다. 그러나 슬쩍 당겼을

뿐인데도 돌쩌귀가 거칠었던지 요란한 마찰음이 나면서 뒷전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 누구냐?"

말득이는 멈칫하였다. 벽에 기댔던 자가 벌떡 일어나 장탕을 잡는 순간이었다. 누워 있던

자도 얼결에 일어나고 있었다. 소리만 지르면 만사가 끝나는 판이었다. 말득이는 얼른 허리

춤을 더듬었다. 우선 죽이기는 싫었으므로 대나무 자고를 뽑았다. 군졸이 장탕을 곧추 겨누

는 찰나에 말득이가 팔을 휘둘러 곧게 뿌리치듯 하였다. 희부윰한 저고리 동정의 반뼘쯤

높은 곳이 눈짐작이었으므로, 군졸은 바로 목에 자고 박혔을 것이었다. 그가 창을 내던지고

목을 움키면서 넘어졌고, 다른 자가 소리를 버럭 내지르며 창을 찔러 들어왔다.

"네 이놈, 꿈쩍 마라."

말득이는 미처 겨냥할 틈도 없이 자고를 날렸다. 배에 가서 침이 박혔는지 주춤하면서도

그대로 쫓아들어오는 것을 비켜나면서 창자루를 잡아 더욱 앞으로 당겨주니 군졸이 제풀에

앞으로 넘어졌다. 말득이는 사정없이 달려들어가 한 발로 그의 목덜미를 밟고 창대로 뒤통

수를 내리쳤다.

", 사람 죽는다."

다급해진 말득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군졸을 연거푸 내리쳤다. 그가 늘어져버렸으나

이제부터는 급한 판국이었다. 말득이는 창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곡식섬과 겨가 수북이 쌓

여서 어둠 가운데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어디요, 어디 있소?"

말득이가 다급하게 불러보니, 왼쪽 구석에서 누군가 대답하였다.

"여깁니다. 대체 누구시우?"

말득이는 더듬거리며 다가갔다. 그는 어둠속으로 손을 내밀었고 상대편에서 덥석 잡는 것

이었다.

"뒷결박이우."

말득이는 연신 꽁무니가 근지러워서 얼른 쇠 자고를 뽑아 그쪽 사내의 뒤로 결박지은 밧

줄을 잘라내기 시작하였다. 자고의 날이 뾰족하기는 하여도 날카롭지는 못하여 한참이나 비

벼대어서야 끊어졌다. 사내는 스스로 발목의 끈을 풀었다. 말득이는 자고를 그의 손에 쥐여

주며 속삭였다.

"어서 식구들부터 풀어주시우. 아마 놈들이 깨어났을 게요." 말득이가 창고 밖으로 나와

보니 아직은 잠잠하였다. 그는 절수처 쪽으로 달려가보았다. 역시 방안에 불이 켜져 있었

. 말득이는 쌈지를 꺼내어 불을 일으켜서 섬을 뜯어서 불을 살렸다. 불이 활활 일어나자

그대로 창고의 지붕 위로 던졌다. 작은 불이 점점 번지더니 벌겋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번에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찼다. 말득이는 다시 그들이 있는 창고 쪽으로 뛰어갔다. 그들은

모두 나와 있었다. 아들이 노인을 업고 있었으며, 아낙네는 소년이 부축하고 있었다.

", 날 따라 뛰시우."

"어디루 가려우?"

사내는 말득이가 길안내를 서는 것이 마음놓이지 않았는지 미처 따라올 염을 않고서 물었

.

"내 고향이 천신산 너머요. 어서 따라오우."

그제서야 사내가 식구들을 데리고 뒤를 따랐다. 몰려나온 군중들은 우선 창고에 번진 불

을 보자 물을 추고 나르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군관은 두엇을 데리고 도둑이 갇혔던 창고로

달려왔다.

"저기... 저기."

끝에 있던 군졸이 손가락질을 하여 바라보니 일렁거리는 불빛 가운데 뛰어가고 있는 흰

옷자락들이 보이는 것이었다.

"잡아라, 그 혈당들 짓이다."

그리고 나서 군관은 법석대는 군졸들에게로 달려갔다.

"도적들이 달아난다. 너희들은 남고,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 이렇게 되어 군졸 다섯이

환도와 창을 번뜩이며 말득이 일행의 뒤를 쫓아 올라갔다. 말득이는 낮에 지났던 길이라

익숙하게 바위와 나무를 돌아서 올라가건만 아무래도 노인을 업은 젊은이와 아낙네가 자꾸

만 뒤쳐졌다.

"어서, 벽파정만 넘어서면 산이오."

그러나 노인을 업었던 젊은이가 돌부리에라도 걸렸는지 넘어지더니 하소하는 것이었다.

"아버님만 모시구 가요. 이러다간 어제처럼 온 식구가 다시 잡히구맙니다." 말득이는 하

는 수 없이 되돌아 내려왔다.

"일으켜서 모셔가시우. 뒤는 내가 잠깐 감당할 테니까." 사내가 노인을 일으켰으나, 노인

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는냐. 어서 너희들이나 피하여라." 말득이는 그들에게 관

심을 돌릴 틈이 없었다. 비탈 아래를 내려다보니 군졸 둘이서 헐떡거리며 쫓아 올라오는

중이었다. 열 걸음이나 될까말까 한데, 말득이는 길 가운데로 나아가 양손에 자고를 뽑아들

었다.

"쫓아오면 죽는다. 어서 내려가거라."

우선 앞장선 자를 향하여 자고를 날리니 군졸 하나가 어이쿠, 하며 주저앉았고 뒤에 섰

던 놈은 영문을 몰라서 올려다보고 뒤돌아보고 하는 것이었다. 저 뒤쪽에는 일렁이는 횃불

이 보였고, 웅성대는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뭘 꾸물대느냐, 어서 내려가지 못할까..."

말득이가 다시 자고를 던졌다. , 하는 바람소리와 더불어 다른 하나도 아랫도리를 감쌌

.

"이번에는 대갈통에다 박아주랴?"

하면서 말득이가 헛손질을 해보이자, 두 군졸은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더

니 절뚝이면서 아래로 구르듯이 달려 내려갔다. 말득이가 뒤돌아보니 그들은 이미 정자에

당도하였는지 캄캄한 가운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군졸들이 뒤쫓아오던 자기네 동료들을

만났는지 뭐라고 시끄럽게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말득이는 다시 벽파정을 향하여 뛰어올

라갔다. 식구들은 정자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 바로 저 숲속에 숨어들면 이 밤중에 누가 찾겠소마는, 우선 뒤가 급하니 아예 이리

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혼뜨검을 내줍시다."

"우리두 돌팔매라면 제법 날립니다."

"옳지, 온 가족이 어지러이 팔매를 날리시오. 다만 내가 뛰어올라올제 손을 맞추어 일제히

던지시우/" 말득이가 아래로 몇걸음 내려가 넓다란 바위 위로 올라보니 횃불을 앞세운 포

창 군졸들이 한데 몰려서 오르는 중이었다. 말득이가 고함을 내질렀다.

"끼놈들, 모두 죽고 싶으냐. 우리 혈당들이 새카맣게 엎드려서 너희를 기다린 지 오래다."

"저놈부터 잡아라."

군관이 소리를 지르자마자, 말득이가 횃불 가진 놈을 향하여 자고 표창을 날렸고 이번에

는 스스로 불까지 밝혀주었던 셈이라 정통으로 눈을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다음번은 누구냐?"

횃불은 땅에 떨어졌고 군졸들은 제각기 머리를 두 팔로 감싸고 엎드렸다.

"한발짝이라도 떼었다간 순서대로 박아주마."

소리를 지르고는 말득이가 다시 뛰어오르니 식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할아버지를 제외하

고는 소년과 아낙네까지도 함께 그러모은 돌을 집어서 아래로 일제히 날렸다. 주먹만한 돌

멩이가 투덕이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들은 계속하여 돌무더기가 바닥이 날 때까지

집어던졌다. 엎드려 있던 군졸들은 어둠속에서 어지러이 날아오는 돌을 피하기도 하고 등

판이나 머리를 얻어맞기도 하다가 쫓긴 개미새끼 흩어지듯 우 하니 아래로 몰려내려갔다.

정말 온 산에 적당이 가득한 듯하여 군졸들은 감히 오를 생각이 달아나버렸고 군관 혼자서

환도를 빼어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호통을 질렀다.

"이제는 되었소. 어서 숲속으로 뜁시다."

말득이는 다시 그들을 이끌고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인제사

한숨을 돌리게 된 것이었다. 숲으로 들어가니 길이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말득이는 어

쨌든 고개를 넘어야겠으므로 산 위를 향하여 오르기를 재촉하였다.

"뒤따라오지 않을지라도 날이 밝기 전에 산을 넘어서 금천 지계를 벗어나가야 허우."

러나 사내는 헐떡이며 말하였다.

"아버님 때문에 도저히 빨리 뛸 수가 없소이다. 잠깐 숨을 돌렸으면 하오." 그들은 다시

어두운 숲속에 주저앉았다. 말득이가 동정을 살피느라고 맞춤한 나무에 올라가보니 정자

주변에 횃불이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쪽에서도 감히 산속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는 모

양이었다. 말득이는 안심을 하고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대체 누구십니까. 어째서 이 위험을 무릎쓰고 저희를 구해내셨습니까?" 사내가 말하였

, 그의 큰아들도 물었다.

"고향이 천신산 너머라면 평산 분이십니까?"

말득이는 그들에게 되물었다.

"금천이 원래 고향이우?"

"아닙니다. 저희는 배천 살다가 흉년으로 소출이 전혀 없어 결식을 하면서 송도에까지 들

어갔다가, 광복산 기슭으로 흘러들게 되었지요. 송도 대흥산 골짜기와 금천 광복산 골짜기

에는 유민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이제 한 해가 다 되어가니 서로 아는 이도 많이 생기

고 마음맞는 축도 생기에 되어 자연히 삼삼오오 작당이 되었지요. 저희들도 연안서 온 유민

몇가구와 작당이 되어 광복산 일곱 골 중에 한 군데를 정하였지요. 그리고는 홍의역 어름에

나아가 목을 잡고 장사꾼들을 몇번 털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조읍포창의 금교역과 송도로

나가는 해서의 관문인 흥의역 사이에는 장사치들의 내왕이 빈번하고 물건도 아주 비싸고

귀한 것들이올시다. 우리네야 워낙 무예도 모르고 병장기도 없어서 세 가구에서 나온 장정

여덟이서 떼만 믿고 몽둥이나 작대기로 위협하여 곡식이나 해물 등속을 털어먹고 살았지

. 마침 다른 패거리들이 유사과네 행상단을 건드린 일이 있어 토포군이 모집되었습니다.

막상 명화적 행세를 하던 자들은 대흥산 청속골 깊숙이 숨어버리고 저희들 유민들만 남았다

가 토포를 받게 된 것이지요. 저희 식구들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로잡히게 된 것입

니다." 말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 부근에 흩어져 있는 유민들이 대략 몇이나 되우?" "글쎄요. 산야에 널린 것

이 땅도 없고 집도 없는 유민들이라 하나, 저희가 알고 있는 수만 하여도 오백 수는 넘겠지

."

"해서에 활빈당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수?" 말득이가 물으니 가족 중의 큰아

들이 대답하였다.

"들어도 수십 번을 들었습니다. 재령 서흥 등지에서 부호의 광을 열어 기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우리 광복산 골짜기에도 그때에 직접 활빈당의 행적을 보고 쌀을 나눈어 받았다는 식구

들이 있습니다." 말득이는 차츰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었다.

"그래, 그 활빈당들을 뭐라고 합디까. 명화적이라구 그러지는 않습디까?" "어이구 원...

화적이라니요. 의적이라 하여도 우리는 성을 낼거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다는 소문은 못

들었소?"

말득이는 자꾸만 얘기를 시키고 싶었다.

", 해서 어디 큰 산골짜기에 수천 군사가 있다고도 하지만, 직접 본 사람들 말로는 아무

데나 불쑥 나타나는데 모두 천하 장사랍디다.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을뿐더

러 오히려 도와준다구 허지요. 가만있자, 구월산에 있는 장길산이란 두령이라구 합디다."

사내의 두 아들이 번갈아 말하였다.

"그래요. 장길산 두령이라구 했지요."

"감영에서 그리를 죽이려고 검객이 송화 무더리까지 올라갔다가 단칼에 목이 달아났다구

합디다." 말득이가 들어보니 마감동과 이세백의 무사 김식이 무더리 다리 아래서 싸웠던

소문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말득이는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나는 그 장두령 수하에 있는 사람이오."

사내가 말득이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그러면 그렇겠지. 범상한 분이 아니라구 생각은 했었소이다. 우리 식구들두 그 휘라로 들

어가기를 원합니다." :저희들두 남 못지않게 사내 구실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말득이는 사

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일어섰다.

"자아, 일어섭시다. 당신은 어서 식구들을 데리고 산을 넘어 평산지계로 넘어가야 하오."

"아니오, 우리를 장두령께 데려다 주시오."

"정 그러시다면 사흘 안으로 구봉산 굼벙이터에 동무들을 모아놓을수가 있겠수?" "저희

가 이틀만 뛰어다니면 이 일대의 동무들 백여 명은 삽시에 모여들 것이오." 말득이는 김기

의 의견을 물을 것도 없이 포창은 당연히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여두었다.

"일단 장정이 모아지면 기중 행색이 깨끗한 자를 포창의 주막거리에 있는 딱부리네 집으

로 보내주시우." "시키시는 대로 틀림없이 해놓겠습니다. 두령께서도 이미 포구에 들어와

계시겠지요?" 말득이는 빙긋이 웃었다.

"장두령은 마음만 먹으면 한양에도 들어가시우."

그들은 일어나서 천천히 산으로 올랐다. 말득이는 산 너머 캄캄한 어둠속을 가리켰다.

"저 아래가 평산이오. 무음내를 건너면 이맘때쯤이면 쥐새끼 한 마리 없을 거요." "이 은

혜는 이번 일을 도와드려 꼭 갚겠습니다. 모레나 글피에 우리 동무를 딱부리 주막으로 보내

지요." "어서 가보시오."

아낙네와 노인과 소년이 차례로 말득이에게 인사를 올렸고, 그들은 곧 산 아래 어둠속으

로 사라졌다. 멀리 유사과가 사는 문수골의 집들에서 반짝이는 불빛 몇점이 보였다. 차츰 날

이 밝으려는지 동쪽 하늘이 부옇게 퇴색하고 있었다. 말득이는 재빨리 사매내를 따라서 자

갈밭이 이어진 강변에까지 나갔다가 천신산의 언덕을 돌아서 조읍포로 구부러져 들어갔다.

포창 안은 연기 냄새와 곡식이 타는 구수한 냄새가 가득하였다. 말득이는 큰길을 피하여

이리저리 돌아서 딱부리네 주막에 이르렀다.

김기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발짝 소리가 들리자 문이 살그머니 열리고 김기가 고개

를 내밀었다.

", 별일 없었느냐?"

김기가 나직한 소리로 물으니 말득이는 흙투성이가 되어버린 버선발과 바짓가랑이를 쳐들

어 보였다.

"뭐 이디 가서 월장의 연분이라두 맺구 오는 줄 아시우. 하마터면 성님두 못 보구 산속에

서 죽을 뻔하였는데..." "쉬이..."

김기가 말득이의 손을 잡아 안으로 끌어들이며 주의를 주었다.

"건넌방에 손님이 들었다. 지금 곤하게 잠들었는데 깨울 수가 있겠느냐." "? 손님을 들

이지 말라구 그렇게 주인에게 일렀는데요?" "내가 들이라구 했어. 바로 우두령 식구들이

밤에 도착하였다." "대용이 성님이 오셨어요?"

"내가 일러서 다른 주막엘 찾아갔다. 저 방엔 홍서방하구 석서방이 잔다." 말득이도 곁에

따라서 누우며 말하였다.

"날이 밝으면 포창이 발칵 뒤집힐 게요. 창고에는 불을 지르고 수직군사들은 자고에 맞아

여러 명이 상하였거든요."

"잘하였다."

"그리구 유민 일가의 말을 들어보니 이 일대에만도 오백여 명이 산골골마다 스며들어 산

답디다. 포창을 그 사람들에게 내맡기리라 생각하고 한 백여 명쯤 모으라고 일러두었습니

." "믿을 수 있을까?"

"믿구 말구가 없지요. 그 사람들이야 꼼짝없이 호적두 없는 타관에서 굶어죽게 되었는데

활빈당이 났다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활빈당 얘기까지 하였구나!"

"뭐 다 알구 있습디다. 해서에 소문이 요란한 모양입디다." 김기는 걱정이 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이 성사되고 나면 필시 관에서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우리를 잡으러 나설 게다."

"날이 밝자 읍에서는 수리가 나왔고, 유사과네 장정들도 모여들었으며, 포창 부근에는 구

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운판관과 사과의 맏아들이 나서서 천신산으로 올라갈

토포군의 대오를 짜고 있었다.

"틀림없이 광복산에서 온 명화적들의 패거리입니다." "대담하게 포구 안에까지 들어와 방

화하고 인명을 살상하였으니, 전군의 병력을 일으켜서라도 잡아야만 하오." "우리 군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개성부에 알려서 대흥산 청석골부터 쓸어내려야 합니다." 그들의 의견이

분분한 중에 금교에서 역졸과 함께 두 사내가 나타났다. 역졸이 판관에게 다가가 뭐라고 알

렸고 장교와 판관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미꾸리 빛깔로 시커먼 자가 나서며 군례를

올렸다.

"한양의 우포청 부장 마포교올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늙수그레한 키 크고 떡벌어진

사내도 군례를 드렸다.

"변포교요."

마포교가 소매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수운판관에게 내밀었고 변포교는 장교를 돌아

보며 물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적환이 있었소. 명화적 수십 명이 쳐들어와 사람을 상하게 하고 불까지 놓았다오." 조읍

포창의 관리와 사과네 장정들은 그들이 포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금교말에서 직접

역졸이 안내를 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자네들이 찾는 도적이 우리 포창에 숨어들었다는 말인가?" 판관은 용모파기서

를 들고 흔들어 보이면서 되물었다.

"틀림없이 포창 내에 있거나, 아니면 며칠 내로 나타날 겁니다. 우리네가 일찍이 모의한

일당 중의 하나를 잡았는데 금천서 거사를 할것이라고 실토를 하였소이다." 군관이 아는

체를 하였다.

"그러면 필시 어제 나타나 불을 지르고 달아난 자들이 분명하오." "아니 포창에 쌓여 있

는 것이 모두가 곡식인데 이를 어찌 훔쳐간단말인가?" 수운판관은 자기 책임소관인 창고들

을 팔을 휘둘러 가리켜 보이면서 코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마감동은 팔짱을 지른 채로 그들

의 앞을 우왕좌왕하다가 고개를 흔들며 말하였다.

"여기가 아니오."

"아니 금천을 도모한다면서 포창이 아니라면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뭣허러 도적이 조읍

포에 숨어들겠나." 마감동은 사과네 식솔들을 노려보았다.

"도적들이 노리는 곳은 바로 유사과 댁이오."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군관과 수운판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희끼리 수군거리고는 이제

는 유사과네 맏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놀라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우리 세가 금천서 어떠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알고 있소. 감히 한양의

좀도적들이 몇 명 작당하여 왔다가는 공연히 우리 아이들 밥맛이나 돋구러 오는 게지." "

여하튼 우리는 저들을 잡는 게 목적이니까... 이미 어젯밤에 적환이 있었으니 이제부터라도

경계를 늦출 수는 없소이다. 벌써 감영에도 들러서 토포할 안을 아뢰었으니, 곧 군사가 당

도할 겝니다." 마감동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니 군관은 다시 아는 체를 하였다.

"감영에서 토포군이 나온다면 정말 큰 명화적당이로군." 마감동은 다시 말하였다.

"우리에게 군졸을 몇 명 붙여주시우. 이제부터 포구를 집집마다 뒤지고 다녀야겠소."

과네 큰아들도 포구의 행수와 더불어 나설 기색이었다.

"어느 놈이든지 지목만 해주시오. 우리가 잡아 족칠 터이니." 그러나 감동은 녹녹치 않게

대꾸하였다.

"댁네는 달아나지만 못하게 허시우. 어디까지나 잡힌 도적은 우리 소관이라는 걸 잊지 마

." 변가에게도 군졸이 셋이나 배당되었다. 수운판관이 말하였다.

"토포가 모두 끝날 때까지 아이들 부리는 일이며 숙식이며 걱정을 말게. 자네두 따라가보

." 군관은 변가에게 따라붙었다. 그들은 포창을 윗거리와 아랫거리로 나누어 집뒤짐을 하

기로 의논이 되었다. 윗거리는 변가 일행이 맡아서 절수처 부근 민가부터 뒤져 내려오게 되

어 있었고, 아랫거리는 마감동일행이 맡아 포구의 사공들이 묵는 어계방에서부터 시작하여

주막거리에서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이 집뒤짐을 벌이자 조읍포는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

작하였다.

우대용은 조읍포에 늦게 당도하였는데 그는 일당들과 함께 용선을 타고 일단 교동에까지

왔다가 셋이서만 중선을 갈아타고 예성강을 거슬러 들어왔던 것이다. 밀물 때가 맞지 않아

약조하였던 날짜를 맞추지 못하였던 터였다.

우대용은 지정된 주막으로 가기 전에 어계방에서 기다렸고, 홍천수가 김기를 만나고 와서

는 몹시 당황하여 그의 용모파기를 올리고 도적으로 몰아칠 계책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우

대용은 껄걸 웃으며 회자수 노릇까지 하였거늘, 까짓 잠시 포박되는 일이야 심심파적으로

좋겠다고 대답하였었다. 홍천수와 석범철이 아예 김기가 묵은 주막으로 가버린 되에 대용은

어계방에서 뱃사람들과 어울려 투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창 왁자지껄하며 동동이를

잡았느니 한짝이 모자라니 다투는 판인데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털벙거기가 고개를 들이밀

었다.

"모두 밖으로 나서거라."

사공들은 아직도 판돈에 시선을 모은 채로 누가 뭐라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놈들, 귓구멍이 막혔느냐. 어서 썩 나서지 못할까?" 그제서야 그들은 마당에 여럿이

늘어선 것을 보고 질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거 왜 이러슈. 물 때 기다리느라구 손목 좀 풀어보는 중인데, 동동이투전을 국법

으로 금지시켰소?" 군졸들이 방문 양쪽에 지켜 섰고,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마당을

둥그렇게 둘러싸고는 사과네 맏아들이 말하였다.

"적당이 있다는 발고가 들어와서 그런다. 모두들 나와서 얼굴만 보여라." 사공들이 그 말

을 듣자 저희끼리 수근거리며 밖으로 나서는데, 우대용은 미리 듣고 있었던 참이라 혼자 빙

긋이 웃고는 허리끈을 졸라맸다. 기왕에 순순히 잡히도록 의논이 되었으나, 흥이나 돋우어주

자는 심사였다. 그는 사공들 틈에 섞여 나서자마다, "에랏차차..."고함을 내지르며 양측에

서 있던 군졸의 멱살을 두 손아귀로 틀어쥐어 맞박치기를 시켰다.

그리고는 옆으로 뛰는데 뭔가 번 듯 지나가면서 벌써 겨드랑이 밑이 시원하였다. 사과네 아

들이 잽싸게 환도를 뽑아 그었던 것이다. 마감동은 그의 칼솜씨를 눈여겨보면서 중얼거렸다.

"사로잡아야 허우. 뛸 데가 없수."

우대용은 감동이를 골려줄까 하고는 벼락같이 소리치며 발을 휘둘러 내차면서 그에게 달

려들었다. 하마터면 턱이 걷어채어 뒤로 방아를 찧을 것을 감동은 슬쩍 주저앉았다가 대용

의 배를 바라고 달려들며 껴안고는 함께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감동이는 대용의 옆구리를

힘껏 쥐어비틀었다. 대용은 어이구,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고 눈살만 잔뜩 찌푸렸을 뿐이었

. 감동이가 다급하게 뒷전에 대고 말하였다.

"어서... 포승으루 묶어라."

군졸들은 이제는 마음놓고 달려들어 감동의 밑에 깔린 우대용의 두손목을 비틀어 오라를

칭칭 감았다. 대용이 한번 꿈틀대며 일어나 줄을 잡은 채로 맴돌이를 시킬 수도 있었건만,

순순히 팔을 내주고 말았다. 감동은 일부러 대용의 궁둥이를 호되게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이렇게 잡힐 놈이 남의 조반을 띠로 만들어주는구나." "일으켜 세워라." 사과의 아들은

칼집에 칼을 쫒아넣으면서 명령하고는 군관에게서 용모파기를 받아 번갈아 대용의 용모를

살폈다. 용모파기에 적혔으되, 얼굴은 쟂빛이고 가느다란 수염이 뻗쳤으며 턱이 네모나서 다

부지게 보이며, 어깨가 아래로 처진 채로 넓직하고, 중키에 호리호리한 편이며 눈빛이 쏘는

듯하다고 되어 있었다. 사과 아들은 우대용을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뺨을 치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우리 집을 도모하겠다며? 네 일당들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우대용은 의논

때문에 억지로 잡혀주었으되 면전에서 욕먹고 손찌검까지 당하니 당장이라도 한바탕 휘두

르고 놓여나고 심어서 팔에 힘이 들어갔다. 마감동이 눈치를 채고 그를 가로막았다.

"우리가 다 알아서 심문할 것이니 내버려두시오."

", 어서 절수처에 끌고 갑시다."

마감동과 군졸들이 우대용을 밀며 어계방 마당을 나섰고, 사과 아들과 포창 행수는 그들

의 뒤를 따랐다.

"만약 오늘 안으로 모든 사실을 실토하지 않으면, 그놈의 고깃덩이를 우리가 가져다 회를

쳐 먹을 테니 그리 앗아슈."

사과네 사람들은 뒷전에서 그렇게 씨부리며 절수처까지 따라왔다. 그들은 주막거리에서

변가와 군졸 일행을 만났다. 변가는 예전에 재령 나무리벌의 악덕 집강 동춘만이네 집을 들

이친 이후로 우대용을 처음 만나는지라 하마터면 반색을 할 뻔하였다.

"어이구, 부장께서 벌써 잡으셨구려. 네 이놈, 한양서부터 갖은 말썽을 다 부리더니 이제

는 서리 맞은 뱀 대강이 꼴이로구나."

우대용은 하도 더럽고 아니꼬워 어디 두고 보자는 시선으로 변가에게 입을 앙다물어 보였

. 그러나 변가는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데 날개가 벌쭉하여진 꼴이 웃음을 억지로 삭이려

는 모양이었다.

"헌데 요 위 주막에 낯선 한양 사람들이 묵었다 하오. 그 집이나 뒤져보면 혹시 이들 혈

당이 나올지두 모르겠소."

변가가 말하여 마감동이는 이제 김기에게 자기네 맡은 일의 진척을 선보여주게 생겼구나

싶었다. 변가가 앞장을 서고 마감동이도 슬슬 뒤따라가다가 모두가 듣고록 중얼거렸다.

"이 집은 먼저 와서 하루 묵었던 곳인데, 혹시 그 선비님을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닌가?"

딱부리라는 주인이 두텁게 늘어진 눈커풀을 젖히고 흰창이 드러난 눈을 굴리면서 그들을

맞다가 앞장선 변가를 보고 아는 체를 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포교 나으리들께서 아예 떠나신 줄 알았더니 여태 계십니다." "그래,

양 선비님께서는 아직 묵고 계신가?"

"예예. 지금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니 제가 가서 아룁지요." 마감동의 곁에 있던 군관이

중얼거렸다.

"거 뭐 갓 쓰고 도포 입었다고 모두 글 하는 선비인가. 뭔지 알게 뭐야." 그러나 마감동

이 미간을 모으며 군관에게 주의를 주었다.

"허허, 함부로 말하다가 저분이 들으시면 어쩌려우. 저분은 우리를 몰라도 우리는 잘 아

. 도승지 신대감의 친아우 되시는 분이오."

"아아, 저분이 그 양반이시군."

꼬장꼬장하고 오만하기로는 가장 으뜸이던 유사과의 큰아들이 의외에도 강한 호기심을

나타내며 앞장을 섰다.

마감동은 그자의 이러한 변화가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안이 벙벙하였다.

주막 별채의 마루에서는 말득이가 네 활개를 펴고 잠들어 있었고 두 방은 미닫이가 닫힌

채로 조용하였다.

"샌님 계십니까."

변가가 조심스럽게 불러보자 말득이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총명한 눈을 굴려 그들을 차

례차례 둘러보았다.

", 샌님 계시느냐?"

마감동이 물으니 말득이는 일부러 입을 삐쭉였다.

"나 참 꼴값을 보네. 남의 집살이를 하려니까 아무나 제 종놈 부르듯 하는구나. 왜 그러

, 어제는 온다간다 없이 나가더니 제법 당상이라두 땄나?" 주막 주인이 공기가 험해질

까 염려하여 거들고 나섰다.

"쉬이, 이분들은 도적 잡으러 나온 포교라오."

그러나 말득이는 일부러 코를 힝 하니 풀었다.

"포교면 포교지, 이 댁이 누구시라구 함부루 몰려와서 대거리르 하려구 들어." 마감동이

가 제법 도량있게 너털웃음을 날렸다.

"대거리를 하려는 게 아닐세. 우리두 샌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은 잘 알구 있다네."

러는데 미닫이가 천천히 열리며 김기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났다

는 듯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하품을 하였다.

"왠일이냐. 누가 왔는가?"

"샌님, 단잠을 깨워드려 죄송합니다. 급히 여쭈어볼 일이 생겨서..." 김기는 시치미를 떼

고 그들을 둘러보았다.

"자네들이 누구던가?"

", 왜 제가 말씀드렸지요. 한양 포교들인 것 같다구요. 이제 보니 포도하러 조읍포에 내

려온 모양이지요.

주막 주인이 다시 거들었다.

"요 옆방에서 하루 묵고 어제 나가지 않았습니까?"

", 그랬군."

마감동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다시 말하였다.

"그제 여기서 뵙자마자 알아뵈었으나 맡은 임무가 있어 감히 내로라 현신하여 아룁지 못

하였습니다. 몇 달 전에 이문 밖 대장 댁에 들르신 것을 먼발치로만 뵈었습죠." 김기는 무

심하게 대꾸하였다.

"그랬든가..."

", 한양서부터 추적하던 명화적의 일당들이 이곳을 도모하려고 집결중이라는 적경이 들

어와서 우선 제가 부장인지라 먼저 당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정탐하러 들어와 있

던 자를 잡아냈습지요." "허허, 이런 태평성대에 큰 우환이로구나. 나두 볼일이 많은데 이

거 큰 낭패로군." "염려 마십시오. 한 사나흘만 지나면 도적들은 잡히거나 스스로 물러가겠

지요. 헌데 이 주막에 새로 장정 둘이 들어왔다는데 샌님께서 아시는 사람들입니가?"

가가 물으니, 김기는 웃음을 지으며 몸소 건넌방의 미닫이를 열어보였다. 두 사람도 자고

있었는지 부스스 깨어 일어났다.

"이 아이들은 우리 집 것들일세. 사실은 집안에서 이장을 하려는데, 명당을 보아달라 하

여서 내가 예성강 이북을 정하고 맥을 보러 원행하여 나오지 않았는가." 모인 사람들은 서

로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하였다.

"감히 문안 인사 올립니다."

사과의 맏아들이 중얼거리더니 마루 위로 올라 큰절을 넙죽 하였다. 김기가 받는 둥 마

는 둥하면서 그를 내려다보니 사과의 아들은 엎드린 채로 말하였다.

"진작에 벽파정에 오르셨다는 전갈을 받고 아직 아버님께 사뢰지 못하였습니다. 문수골

사는 사과 유아무의 장자올시다."

김기는 반색을 해 보였다.

", 일전에 아주 바람을 잘 쐬고 오랜만에 청정한 기분을 즐겼다네. 경치가 훌륭한 곳에

정자를 지으셨더군." "시골 정자로는 풍광이 과히 나쁘지는 않습니다. 계시는 동안 언제든

지 오르셔서 즐겨주십시오." "자네 엄친께서 사과시라면, 자네도 과거를 하였는가?" 흉년

에 권분으로 겨우 체아직을 얻은 허울만의 사과임을 잘 알면서도 김기는 일부러 넌지시 던

져보았다. 역시 사과의 아들은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아니올시다. 무과나 한번 하여볼까 하여 활터 출입이나 하구 있습지요. 워낙에 미천한

가문이니 지벌을 따질 형편두 못 됩니다."

김기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만한 재산을 쌓은 이로 조정에 아는 이가 없단 말인가?" ", 아버님께서 늘 한탄하시

는 바가 당대 명문 대가와 내왕이 없으신 점이올시다. 청컨대 어르신께서는 저희 집에도

오셔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허허, 내가 뭘 알아야지. 이 근방의 산은 모두 그 댁의 것인가?" "천신산과 용두산에 저

희 숲이 한 두어 봉 됩니다만, 어디다 명당을 쓰시든 저희들이 대납을 하든지 모두 감당해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아아, 그건 안되네. 공연히 나중에 산송에 휘말리면 가세를 의거하여 남의 것을 침탈하였

다고 악평이 돌 게야." "원 천만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과의 아들은 이런 좋은 기

회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당장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부디 사양하지 말아주소서. 아버님께서도 평생

에 이런 광여이 없을 것입니다. 저희가 산역을 주선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김기는 그제

서야 신통찮게 말하였다.

"아무튼 말이라두 고맙네."

마감동이 자꾸 길어지는 자리를 끝내느라고 뒷전에서 인사를 올렸다.

"샌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모쪼록 야밤에는 출입하지 마시고 어디 산에 오르시더라도

깊은 골에는 들어가지 마십시오."

"그래, 알았네."

유사과네 맏아들은 다시 정중히 절을 하고 일어섰다. 그는 김기를 명문세도가의 사람이

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어제 정자지기가 보내온 시문은 그의 높은 문장의 경지를 보여

주었으며, 또한 한양서 나온 포도부장이 알아 뵙고 인사를 올리는 데에는 더 이상 의심할

바가 없었고, 그의 언행도 높은 선비로써 빈틈이 없었던 것이었다. 사과의 이들은 어떻게 하

든지 연을 맺어 한미한 시골 부자로부터 권세가로 일어설 기회를 얻어보고자 생각하였다.

그들이 몰려나가자 말득이는 주인이 밖으로 따라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돌아와 혀를 회

회 내둘렀다.

"성님, 저는 본색이 탄로날까봐 간이 오그라듭디다. 그런 거짓 행세하는 법도 공자님게서

다 가르치셨수?" "이 녀석아, 내 본색이 책상물림이지 별것이 있겠느냐?" 김기는 껄걸 웃

으며 의관을 다시 벗어 걸었다. 홍천수는 자자한 이마빡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두건으

로 아래를 넓직하니 둘렀는데, 도회지 왈짜로 해사하던 얼굴도 그간의 풍상을 겪어 거칠게

변하여 있었다. 홍천수와 석범철이는 저희 두령이 묶인 꼴을 보고 나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홍천수가 자못 배알이 틀린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하필이면 저희 두령이 잡히는 역을 맡아야 합니까?" "그럼 누가 맡겠나?" 김기가 되물

으니 홍천수는 투덜댔다.

"일테면 구월산 마두령이라든가... 아니 두령들은 빼고... 저기 저 강서방을 시키든지..."

그 소리에 말득이가 이죽거렸다.

"기왕에 경친 놈이니 자네가 하지 그랬어?"

"뭐라구, 어린 것이 위아래도 모르고 함부로 지껄일테?" 그만들 두게나. 우두령이 늦게

왔고, 나중에 할 일이 있어 그런게야. 마두령이나 변두령도 욕보기는 마찬가지야." 석범

철이도 천수와 더불어 불평하였다.

"저희 성님을 포박되게 하셨으니,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중에 선비님께서 단단히 책

임을 져야 할 게요." "염려 말게나, 단단히 앙갚음할 기회를 줄 터이니, 그리구 말득이는

내일 평산에 다녀오너라." "횡하니 갔다가 중화참에는 돌아오지요." "그래야지. 오후에는

문수골 유가네 집에 들어갈 작정이다. 아마 아침부터 사람을 보낼 게다." 말득이가 물었다.

"오늘밤두 마실 나가서 한바탕 북새통을 벌일까요?"

"그만두거라. 내일 평산 가거든 이제부터 내가 이르는 말을 하나도 잊지 말고 시행하도록

전하여라." 김기는 세 사람에게 가가각 맡을 일에 대하여 얘기하였다.

 

우대용은 두 동료와 군졸들에 둘러싸여 절수처로 끌려갔다. 그는 절수처 마당에 꿇려지

고 변가와 막담동이 번갈아 묻기 시작하였다.

"이놈, 네 혈당들이 어디 있느냐?"

우대용이도 뜸을 들이노라고 처음엔 입을 다물고 완강히 버티었다. 사과네 포창 행수가

소매를 걷고 나서면서 불끈거렸다.

"시방 도적을 심문하는 게요, 아니면 서당에 데려다 글 가르치는 게요? 내가 사람을 좀

다룰 줄 아니 내게 맡기시우."

마감동이가 손을 내저었다.

"비켜라, 자네가 뭔가. 관원 이외에는 아무도 도적을 다루지 못한다." 변가는 그를 사람

들의 울타리 가로 밀어냈다.

마감동이는 이번에는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자세히 이실직고하면 죄도 모면할 뿐 아니라 공에 따라서는 나라에서 내리는 가자도 받

고 상급도 후하게 받을 수가 있다. 어떠냐 말하겠느냐?" 수운판관이 말하였다.

"적인이 당을 같이하여 만약 자기와 상대자를 발고하여 자수를 하고 법에 굴복하는 경우

에는 면죄하고 은 오십 냥을 내린다. 또한 칠팔 인 이상의 적을 잡게 하면 면죄하고 가자

할 뿐만 아니라 은 백열냥을 내리게 되어 있느니라."

우대용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모두 말하겠소."

"유사과 댁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마감동이 물었고 우대용은 슬슬 불기 시작했다.

"그러하오. 오는 스무하루가 큰 물때인데 그날 급습을 하기로 의논이 되어 있소이다.

희 동료가 먼저 다섯이 당도하여 형편을 살피고 나서 어젯밤에 떠났지요. 저는 거삿날까지

별일이 없는가 지켜보기 위하여 남아 있었쇠다."

우대용은 그럴 듯하게 둘러대었다.

"네 혈당들이 어디서 모익디로 하였느냐?"

"광복산 골짜기에 모이기로 되었사오나 제가 잡힌 것이 알려졌을 터이니 아마도 장소를

바꿀 것입니다." "대개 몇 명이나 되느냐?"

"한양 인근의 패거리와 송도 패거리 등등이 합세하였으니 적어도 삼십 여명은 되겠지요."

"병장기의 규모가 어떠한가?"

"병장기라야 두령급들이 환도를 가진 것이 고작이고 나머지는 몽둥이나 농기구를 되는

대로 찾아 지녔을 것입니다."

곁에서 듣던 사과의 아들과 포교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까짓 것들, 나 혼자서라도 상대해줄 수가 있겠구나." 사과의 아들이 말하고 행수가 맞장

구쳤다.

"물론입지요. 서방님 삼형제께서 떨치고 나아가면 그따위 난적 수십명이야 구렁이 앞에

개구리 꼴이 되어 흩어질 겝니다."

마감동은 다시 물었다.

"앞으로 도적을 잡는 일에 협조를 하겠느냐?"

우대용이 머리를 조아리고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기왕에 잡혀서 명화율로 죽게 되었은즉 어찌 공을 이루는 일을 마다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나도 남김없이 잡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그러면 너는 변포교와 더불어 절수처에 머물면서 군졸들이 수상한 자를 잡아올 적

마다 혈당인지 아닌지 가려내는 일을 도와주어라."

우대용의 자복으로 명화적들이 유사과의 집을 노리고 있음이 밝혀졌고, 사과네에서는 새

로이 장정들을 모으고 단속을 하게 되었다. 수운판관은 그러나 조읍포창의 경비를 허술히

할 수 없다 하여 군졸을 내주기는커녕 민병의 동원도 허락하지 않았다.

"포창은 어느 사사로운 개인 재물이 아니라 나라의 살림을 위한 조세를 관리하는 곳이니

조읍포의 방비가 우선되어야 하오."

라는 것이 수운판관의 말이었다. 마감동이 사과네 사람들을 안심시켰으니 곧 관군들이 토

포를 위하여 파견되어 올 것이라는 말이었다.

"토포할 동안의 모든 군비는 우리 집안에서 담당하겠소이다." 사과의 맏아들이 말하였다.

그들은 우대용은 절수처의 골방에 가두었고 마감동과 변가는 관군이 올 때까지 초구에 드

나드는 자들을 빠짐없이 기찰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다 말득이는 김기에게 알리고 주막을 나섰다. 평산까지 오십여 리 길

을 단숨에 당도하여 살여울나루에 들어가니, 약속대로 뜸지붕을 올린 중선이 다섯 척이나

대어 있는 주막이 보였다. 말득이가 마당에 들어서니 마침 큰돌이가 방에서 나서는 참이었

.

"형님들 오셨수?"

"말득이 오느냐."

굵다란 목소리가 들리며 안에서 구레나룻이 뻣뻣이 일어선 강선흥이의 얼굴이 내밀어졌

.

"어서 들어가자."

큰돌이가 말득이의 등을 밀었고, 방안에서 최흥복이와 기선일이도 내다보며 반색을 하였

. 길산은 목침을 베고 누웠  일어나 앉았다.

"언제들 오셨수?"

"어젯밤에 왔다."

큰돌이가 말하였다.

"구월산에서는 두령이 둘이나 출타하여 만석이는 식구들과 남고, 내가 아이들 여덟을 데

리고 왔지. 바로 옆집에 묵고 있다.

길산은 큰돌이가 자랑스레 하는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그래... 포창이며 유아무의 집은 자세히 보아두었느냐?" 말득이는 지난 며칠간에 일어났

던 일들을 대충 전하고 나서 김기의 계획을 말하였다.

"우리는 토포 군사가 되어 사과네 집을 지키러 가는 겁니다. 포창은 감동이 성님과 변두

령이 맡아서 약조가 되어 있는 유민들과 더불어 도모한다는 말이죠. 조읍포 일대를 꼭 이

틀 동안 완전 점령을 하게 된답니다. 김선비가 약도를 그려놓고 안을 짜기를 포구와 금교

역으로 나가는 길을 잘나놓고 사매내와 천신산 고개를 막으면 쥐새끼 한 마리 새어나갈

틈이 없어요. 한편으로는 포창의 양곡을 유민들게 풀어내주고 우두령이 사매내로 하여 문

수골의 재물을 실어 썰물을 타고 예성포구 팔십 리를 쏜살같이 빠져나간다고 말이우. 우리

는 일이 끝난 다음에도 포구를 지키다가 일단 퇴로가 안정된 때를 어림하여 구월산 식두들

은 온정 오거리로 빠지고 자비령 식구들은 다시 이곳 살여울로 되돌아오면 됩니다." 길산

은 묵묷히 듣고 있었으며 최흥복이 말하였다.

"엉뚱한 골에서 성님에 토포사로 출신하게 되었구려." "토포사는 성님이 아니라 자네가

맡으라데."

말득이가 말하였다.

"아무리 술책이라고는 하나, 큰성님이 철릭에 구슬상모 쓰고 토포사 노릇을 해서야 되겠

. 성님은 포창에서 유민들하고 창고나 도모허시우."

"글세... 일이야 같지마는... 유아무네 수하 사람들이 만만하지 않다며?" 길산이 물었고 말

득이는 웃었다.

"듣기보다는 별게 아닙디다. 그 집에 아들 삼형제가 있는데 활도 다루고 환도를 조금 휘

두르는 모양입디다. 그밖에 무예를 안다는 자들은 서북 사람이 둘 있고 포수가 셋이랍니다.

이미 우두령이 거짓 귀순하여 적경을 할렸으니 이들 다섯은 아마도 문수함을 지키겠지만..."

"다 내게 맡겨. 엄파 쇠몽치로 쓸어버릴 테니까."

선흥이가 투덜대자 길산은 말득에게 물었다.

"문수암이라니?"

"유아무가 사사로이 산에다 지어놓고 제 어미를 살게 하는 암자올시다." "그런데 그런 작

은 암자를 무예를 아는 자들이 지키게 한다든가?" 말득이가 빙글거리며 말하였다.

"금불상이 세 분이나 계시답니다."

"유아무가 탈없이 재물을 쌓은 게 바로 그 마신들 덕이었군." 길산도 처음으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부처님이야 무슨 죄가 있수?"

흥복이 농조로 말하니, 길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시는 놈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으로 부처님이 되기도 하고 마신이 되기도 하는 게여.

자 그러면 모두 들었을 테니 준비를 해야지. 말이 두어 필 있어야겠고, 더그레며 벙거지 등

속은 우리와 줄이 닿는 서흥으로 가서 일습을 만들거나 사들이도록 해야겠지. 하루가 급하

니 큰돌성님과 흥복이가 아이들 몇을 데리구 가서 아전들과 흥정하도록 해보게. 우리는 늦

어도 모레 아침까지는 포창으로 들어갈 테니까." ", 나는 이만 일어서겠수. 중화는 포창

서 식구들과 함께 들기루 했수. 다른 일이 생길지라도 감동이 성님과 변두령이 포교 역이니

염려 마우."

말득이는 선일이가 그래도 제 처남이라고 점심이라도 먹고 일어나라는 것을 끝내 뿌리치

고 방을 나섰다.

역시 김기의 예상은 적중하여 말득이가 포창 딱부리 주막을 나간지 얼마 안되어, 유사과

네서 하인과 청지기가 육포와 감흥로가 든 부담을 말에 싣고 찾아왔던 것이다.

"저희 상전께서 이르시기를 누추한 집이오나, 정원과 다락이 제법 한적하고 아늑하여 나

으리께서 노독을 푸시기에 적합한 곳이오니 사양마시고 행차여줍시사는 말씀을 전하라셨습

니다. 저희 댁에 계시면서 산도 둘러보시고 안내도 받으시지요." 김기는 선뜻 허락하고 나

서는 것보다는 처음에는 사절하는 태도를 보이는 게 순서라고 생각하였다.

"가서 주인께 전하게. 간곡하신 뜻은 잘 살펴 짐작하겠으나, 때가 궁핍한 시절이요, 내가

한양서 널리 알려진 집안의 사람이고 주인은 향곡의 부호로서 서로 삼가지 않으면,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세상에 번거로이 구설에 오를 필요가 없겠네." 청지기는 자기가 더 이상

간곡히 여쭐 입장이 못 되는지라 황송하게 굽신거리다가 돌아갔다. 그러나 김기는 그가 다

시 되돌아올 것이며 이번에는 그의 아들이 동행할 것을 미루어 짐작하였다. 배가 출출하

여 주막 주인에게 중화 준비를 이를 참인데, 말득이가 어김없이 평산서 돌아왔다.

"식구들을 만났느냐?"

", 모두 당도하여 있습니다. 이르신 대로 빠짐없이 일러드렸지요. 더그레며 벙거지 등

속은 서흥서 마련이 될 거유. 큰돌이가 하는 이가 아전들과 거래하는 일에는 이력이 난 사

람이니까 먹구름에 번개치듯 후딱 해치울 테지요."

"잘 되었다. 옷을 짓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릴 테고, 돼지털 벙거지를 스물 남짓 한꺼번

에 준비하려면 봉산 서흥 재령 장을 차례로 보아야 할 게다." "모레 아침에 조읍포에 들어

오기로 하였수."

홍천수와 석범철이가 포구를 둘러보고 들어왔다.

"배는 모두 열다섯 척인데 모두가 세곡선입니다. 규모는 작아도 가볍고 빠른 야거리를

두 척쯤 구해야 되겠어요. 사공들게 물으니, 돼지 여울로 올라가면 금천 관아에서 쓰는 배

가 있답니다. 삯을 후하게 주고 빌려다 놓을 작정입니다." 김기는 주의를 주었다.

"배를 빌리는 것은 토포군이 들어온 다음날에 착수하도록 하게." 점심상이 들어오는 바

람에 그들은 하던 말을 끊고 명당 얘기로 바꾸었다.

김기는 윗방에서 독상을 받았고, 말득이, 천수, 석서방들은 아랫방에서 밥을 먹었다. 조읍

포의 쏘가리탕이 얼큰하게 올라왔고 오전에 사과 댁에서 보내온 감홍로는 말득이 등의 차지

가 되었다. 서로 권커니잣거니 하면서 오랜만에 호강을 해보는 판인데, 누군가 마루 아래 비

치더니 안을 기웃이 넘겨다보는 것이었다. 술을 한모금씩 혀 위에서 굴리다가 커어, 하면서

목젖을 간질여보던 그들은 모두들 고개를 돌리며 낯선 자를 바라보았다. 말득이가 갯가 사

람들보다는 눈치가 제법 돌아간다고 믿었던지 툭 하며 한마디 던졌다.

"뉘를 찾우?"

사내는 비록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느라고 고름도 매고 행전도 쳤건만 바지는 찢어졌고

저고리 소매 끝이 새까맣게 더럽혀져 궁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밥 좀 얻어먹읍시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쌀이 포창에 산처럼 쌓였는데, 주막에서야 한술 뜨고 나면 저녁에는 다시 고플 거 아니

?" 홍천수가 말하자 말득이가 눈을 끔벅해 보이더니 마루로 나섰다.

"주인장을 불러서 밥 한상 차려오라구 해야겠군."

그러나 사내는 말득이의 바짓가랑이를 슬쩍 당기는 것이 아닌가.

"장두령 식구 되는 이를 찾소."

말득이는 그제서야 깜짝 놀라서 그를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중화는 자셨수?"

"요즘 시절에 중화가 다 무어요. 나물죽도 간간이 얻어걸리면 다행입지요." 천수와 석서

방이 조가 나우 섞인 밥을 상추에 얹다가 차마 입 안으로 넣지는 못하고서 자리를 내었다.

"어서... 같이 한술 뜨십시다."

사내는 사양하지도 않고 그들이 덜어내는 밥을 숟가락에 한주먹만큼 뭉쳐 떠서는 미처

반찬을 집을 새도 없이 욱여넣었다.

"어찌되었소. 광복산 골짜기 살던 식구들은 모두 무사한가요?" "예예..." "사람들이 얼마

나 모였소?"

사내가 흘끔거리자 석서방이 바닥에 남았던 감흥로를 따라주었다.

"이게 화주인가요?"

"천천히 드시우."

말득이가 보기에 민망하여 슬그머니 수저를 놓고 물러나 앉으며 그의 배가 차기를 기다릴

자세를 취하였다. 사내는 밥 한 그릇을 삽시에 비우고 나서 국이며 물까지 한 대접씩 들이

켰다.

", 잘 먹었다."

사내가 아직도 상머리에 붙어앉아 그들에게 물었다.

"산에서는 언제나 이렇게 배불리 먹을 수가 있나요?" "굶주리지는 않소." 말득이는 그렇

게 얼버무리면서 말을 흐렸다. 어쩐지 이 사내의 허겁지겁한 배고픔 앞에서 뭐라고 나대

기가 부끄러워졌던 것이었다. 밥보다 더욱 귀한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몇자 안되는 육신을 땅 위에 떠받칠 한줌의 밥덩이야말로 가장 뚜렸하고 믿을 만한 뒷배가

아니던가.

"아이들만 없다면 나두 녹림당에 들어갈 텐데..."

말득이가 답하였다.

"당이 따루 있소? 배고픈 동류들끼리 모여서 먹으면 되지. 구봉산에 모인다던 사람들은

어찌되었수?" "그 굼벙이터에 말이지요. 지금 오륙십 명이 모였는데 내일이면 거의 백 명

가까이 모여들 게요." 그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듣고 김기가 아랫방으로 건너왔다. 사내는

갓 쓰고 도포 입은 김기의 행색을 보고 놀랐는지 머리를 조아리고 자세를 바로 하였다.

"편이 앉으시우. 우리 성님이니 반상을 가릴 게 뭐가 있수." 말득이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양반을 그렇게 두려워하기만 하니 배를 곯고 흘러다닐밖에 별 도리가 있겠소?" "산속에

유민들이 모여 있다고 그랬는가?"

"그제 내가 구해준 사람들이 동무를 모으로 나서 우리에게 알린다구 그랬거든요." "모렛

밤 이경쯤이면 천신산 벽파정 부근에 불이 보일 걸세. 그 불을 군호로 하여 일대는 그대로

포창 안으로 들어와 절숴를 점령하고 이어서 포구의 배가 뜨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며,

다른 패는 조읍포의 뒤편을 돌아 금교역말로 나가는 퇴로를 끊고 사매내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키게. 그리고 손목에 검은 천을 묶은 이는 모두 활빈당이니 서로 착오 없도록 하고, 비록

군복을 입었을지라도 검은 천을 묶었으면 역시 우리 혈당이니 충돌하지 않도록 전하게."

"잘 알겠습니다."

"모렛밤에는 싸울 수 있는 장정들만 먼저 들어오도록 하고, 그 이튿날 오전붜는 되로록

여러 식구들은 빠짐없이 동원하여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양곡을 운반해갈 수 있도록 준비하

." "여부가 있겠습니까? 조읍포창을 빈 쭉정이로 만들어놓고 말겠습니다." 말득이가 바

깥을 살펴보고 나서 사내에게 나직하게 일렀다.

"만일에 주인이 이상스럽게 여기면 걸식을 왔다가 서울 양반으로부터 중화를 얻어먹었다

고 그러시우." 사내가 주막을 나간 뒤 얼마 안 있다가 주인이 앞장을 서고 그를 따라서 깨

끗하게 차려입은 유사과의 큰아들이 하인 두 사람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샌님,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 잘 쉬었네."

"가친께서 샌님을 뵙고자 하여 별당을 치워두시고 기다리신 지 오래이십니다. 저를 보내

어 굳이 모셔오라 하시니 사양하시지 마십시오. 궁벽한 곳이지만 또한 인정이 있는 고장이

니 뉘라 구설에 올리겠습니까. 샌님께서 교유를 허락하신다면 저희 가문에도 영광이올시

."

사과의 아들이 간곡하게 권하자 김기는 마루를 서성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 내가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닌데."

"가친께서는 명당을 구하신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이 부근의 어느산이든지 샌님 뜻대로 보

아 쓰시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외숙이 또한 풍수의 묘리를 조금 아시는 분이라 일부러 집에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기는 짐짓 마음이 끌리는 척하면서 당장에 태도를 바꾸었다.

"내가 이번 길에 운이 좋았네. 자네 가친의 성의가 이러신데 내가 황차 무슨 고귀한 것이

라고 거드름을 부린단 말을 듣겠는가. 시골의 인심으로 서로 마음을 허통하여 우리 집안과

자네 집안이 교유하는 것은 세상에서도 아름다운 일로 얘기될 게 아닌가." 김기는 벌써 마

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말득이가 대솔하인으로 따라 나섰고 홍천수와 석서방은, "잘 다녀

오십시오." 하며 문간에까지 나와 인사를 하였다.

서북으로 평산 가는 길로 한 오 리 쯤 가노라면 흰돌재가 나오고 그너머 사매내를 앞에

둔 마을이 유사과네 문수골이었다. 십 리가 미처 못되는 거리라 요전처럼 말을 가져오든가

아니면 자비령에서 김기가 타고 온 나귀를 끌고 와도 되었으련만, 사과의 아들이 올 적에

인인교를 가지고 와서 김기는 그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맨 앞에는 사과 아들이 길라잡이를

섰고 남녀 옆으로 말득이가 따라갔다.

"여기가 흰돌재올시다. 천신산의 등성이로 오르는 초입이지요. 산줄기가 취적산과 구봉산

에 연이어서 황의산 모란산 그리고 멸악산에 닿습니다." 사과 아들이 손가락으로 산줄기와

멀리 보일 듯 말 듯한 준령들을 가리켜 보이며 설명하였고, 김기도 산을 휘둘러보고 벼랑

아래로 감돌아 흘러가는 예성강을 내려다보았다.

". 강이 없었더면 송도까지 닿을 뻔하였겠네."

과연 흰돌재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시원하고 가슴이 훤칠하니 터져나갈 듯한 기분이

들었다. 푸른 강물에는 바야흐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천신산의 그림자가 울긋불긋 어리었

고 배를 띄운 사공들의 노래와 빨래를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가 어우러져 들려왔다. 강 건너

는 흰 자갈밭과 띄엄띄엄 늘어선 갈대숲이 고검산 봉수대의 드넓은 벌찬에까지 닿아 있었

. 몇점 구름을 이고 벌판 끝에 길게 누운 광복산 줄기는 마치 가을 들판의 곡식더미나 새

로 초가지붕을 올린 농가의 낮은 토담처럼 보였다.

"벽파정같이 끝없는 강줄기를 내다보는 것 못지않게 정이 넘치는 풍경이로다." 김기는

손짓하여 남녀를 움직이게 하며 중얼거렸다. 흰돌재를 넘어 구부러진 사매내와 두 산의 등

성이가 오목한 곳으로 돌아 들어가니 제법 널찍한 벌판이 나오면서 숲 가운데 아늑하게 자

리잡은 마을이 보였다.

"여기가 바로 저희 동리올시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네."

맏아들과 김기가 수작을 나누는데 벌써 그들을 본 유씨 댁 장정들이 들길로 마중을 나오

고 있었다. 그들은 곳곳에 병장기를 들고 서 있다가 남여로 다가왔다. 한 열댓이 넘어 보였

.

"저희 집 사람들입니다. 샌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명화적당이 노린다는 적경이 들어온지라

사공들까지 모두 불러들였지요."

남녀가 마을로 들어가는데 문수골은 유사과의 저택 외에는 모두 초가뿐이었다. 실로 뒤

편 골짜기로는 거느린 홑집이 사오십 채가 넘는듯하여 유씨 집안의 살림 규모를 짐작할 수

가 있었다. 유사과가 정자관을 쓰고 대문 밖에까지 내달아 나왔다.

"원로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주 훌륭한 고장이로군요."

우선 대문간에서 간단한 예를 주고받고 나서 김기는 그들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랑채 앞에는 하인과 장정들이 섰다가 모두 허리를 굽혔고, 중문을 지나니 안채와 사랑채가

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며 따로이 별당과 정자가 있었다. 그들은 먼저 사랑채에 올랐고

서로 정중하게 맞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유사과가 아들 삼형제를 들어오게 하여 김기에게

인사를 드리도  하였다. 첫째와 둘째는 상투잡이라 두어살 터울이 있는 듯 보였고 막내는

떠꺼머리였다.

"훌륭한 자제를 두셨습니다."

김기가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은 세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와 둘째는 기골이 장대하여 키도 큼직하고 어깨도 벌어졌으며 제 아비처럼 코가 넓

죽하고 입술이 두툼해 보였으나. 막내는 안색이 파리하고 여위었으며 곱상하게 생겨서 전혀

달라 보였다.

"이거 미거합니다만 저희 잡안의 가풍대로 부과를 보이려고 제각기 연마하는 모양입니

." 유사과가 자랑삼아 말하자 김기는 맞장구를 쳤다.

"근자에 아조의 시속이 무를 천하게 여기는 풍조가 널리 퍼져서 두차례의 국난 겪는 중

에 외적을 막을 인재가 드물었던 것이 참으로 통탄할 일이지요. 효종대왕 이래로 새로이 인

재를 찾고 젊은이들의 심신을 단련토록 한 것은 늦으나마 다행한 일이지요. 또한 무과에서

도 활만을 중시할 것이 아니라 단병접전에 유리한 제반 무예를 훈련원에서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니, 방포술과 더불어 좋은 변화라 할 것이오." "허허, 어쩌면 저와 그렇게 생각

이 같으십니까. 싸움의 양상이 날로 변하여 전차가 기병을 이기지 못하고, 기병은 다시 밀

집된 보병을 다룰 수가 없으며 공성구와 활은 화약과 조총에 상대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지금 시행하는 무과의 궁술과 기마술은 실낱 같은 것이지요. 거기에 또한 단병접전에 능할

수 있는 십팔반 무예가 연마되어야 할 것입니다."

권분으로 얻은 사과직이라 하나 유가는 그동안 병사나 첨사 등등의 무관들에게서 귀동냥

이 많았던 듯 제법 아는 체를 하였다.

"그러면 자제분들에게는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활터에는 모두 나갔으나, 큰아이가 조금 쏠 뿐 아직 과녁의 중핵을 꿰뚫지는 못하는 실

력입니다. 그러나 몇가지 재주는 꽤 터득하였다고 봅니다." 김기는 유가네 삼형제에 대한

소문을 여러번 들었는지라 그들의 솜씨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직접 보고 싶던 차였다.

"그래, 자네들은 각기 무엇을 연마하였는가?"

김기가 물으니 그들은 차례로 답하였다.

", 저는 환도를 조금 휘두를 줄 압니다. 쌍수도와 예도를 모두 씁니다." "봉술을 배웠다

고는 하나 그리 깊지는 못합니다."

사과의 맏아들과 둘째가 대답하였고 막내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김기는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이 아이는 몸이 약하여서..."

제 아비가 말하였고 막내가 우물쭈물 대답하였다.

"총을 약간 놓을 줄 알지요."

김기는 그것이 궁한 끝의 대답인 줄만 여기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밖에서 기침소리

가 들리고 마르고 얼굴이 긴 선비 행색의 사내가 들어와 공손히 절하였다. 그는 유가의 처

남 된다던 자칭 풍수가로 체신머리없이 보이는 사내였다. 안에서ㅏ 후원에 주안이 마련되었

으니 그리로 납시라는 전갈이 왔다. 그들은 사랑채를 나와 후원으로 나갔는데, 수목이 울창

하고 여러 꽃나무의 향기가 가득하였고 너른 마당과 연못이 있었다. 담밑으로는 감나무,

행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오동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소나무 등이 운치있게 둘러 있고

별당 아래로는 매화며 부용이며 서향, 모란, 국화 등의 화초와 이끼를 입힌 괴석이 서 있었

.

물 가운데 정자를 지었는데 지붕은 초가로 이었고 기둥은 통나무였으며, 누마루에는 화려

한 화문석 돗자리를 정갈하게 깔아두었으며 자개상 위에다 술상을 보아놓았다. 연잎 위로

가끔씩 떨어지는 노란 감나무 잎이 수목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집터가 아주 좋군요."

김기가 말하니 처남이란 자가 얼른 말하였다.

"썩 길한 터는 아니올시다."

"글쎄요, 대개 길흉을 볼 적에는 상지상의 길상은 범인으로는 감당치 못한다 하여 오히려

길하게 보지 않는 법이오. 길흉에는 분수가 있게 마련이지요. 분수에 맞으면 중지중이라도

분수에 맞지 않는 최길지보다 훨씬 낫지요.

집터는 대개 마당 안에서 집채만 따로 보는 것과, 동리 안에서의 조화를 보는 두 가지가

있는데 대개는 앞의 것만을 보기가 쉽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터에 집을 지었다 할지

라도 동리 자체의 자리가 길지가 아니라면 별로 의미가 없을 테지요." 김기의 꾸며대는 말

의 앞 뒤 이치가 그럴 듯하여 풍수가라고 자랑하던 처남은 그만 입이 막혀버렸고, 유사과는

가장 좋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일례로 동네 앞의 실개천은 원래 있던 것입니까?"

"아니지요. 왼쪽의 청룡이 허하다고 하여 사매내를 파서 끌어들인 것이지요." 주인의 말

에 김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길지라는 것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는 것이오. 따라서 부족함이 있으면

또한 다른 데서 그 손을 메우게 되고 넘치는 데가 있으면 반대로 모자라는 데가 있는 법입

니다. 이 동리를 둘러볼 적에 청룡은 이미 좋은 자리에 있소이다." "그게 어디인가요?"

"저쪽 멀리 흐르는 예성강이 청룡이요, 오른쪽으로는 돼지여울로 나가는 큰길이 있으니

바로 백호요, 사매내가 앞에 있어 주작이요, 뒤에 천신산 줄기가 있으니 현무가 갖추어졌소

이다. 문수골 자체가 사위를 갖춘 길지인데, 그만 손실이 있소이다." "손실이라니요?"

"산을 뒤에 두었다고는 하나 마을이 동북향을 하고 있으니 금교와는 정반대지요. 남북이

좁고 동서가 길어 길지와는 정반대이지요. 그러나 이 댁에서 단 한가지만 고치면 아주 길하

겠지만, 그대로 두면 위험하겠소이다." 처남도 넋을 잃고 김기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유사

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김기의 언변이 워낙 달변인데다 뜻 깊게 얘기하는 것이 그의 마음

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제발 가르쳐주십시오."

김기는 술을 천천히 마시고 나서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가 힘주어 말하였다.

"바로 대문입니다."

"아니... 그 대문이 어때서요? 주작을 피하여 서남방으로 낸 것인데요." 처남이 이견을 말

하였으나 김기는 못 들은 척하였다.

"풍수지리에 있어 실지의 조건과 조화를 보지 않고 책에 써 있는 대로만 운영하는 법을

사법이라고 하지요. 물론 여기서는 동남방과 서남바밖에는 대문을 낼 데가 없으나, 책에는

동남방 대문이 불가하다고 되어 있소이다. 그러나 이곳은 강변이니 세찬 강바람이 서남방

으로 몰아쳐오지요. 따라서 이곳에서는 오히려 동남방을 쓰는 것이 묘책이외다." 김기는

사과의 처남이 입을 열 듯 말 듯 옴찔거리자, 아예 그의 기를 죽여놓으려고 계속하여 말하

였다.

"그러므로 길흉이 아무 원칙 없이 기분에 따라 정하여지는 것은 아니오. 다 경험에 의하

여 이롭고 불리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에 유리한 점을 택하였을 뿐이외다. 대저 여러 사

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시행해온 것들은 거의가 옳단 말이지요. 이를테면 대문을 세울

적에도 계절마다 그 방향을 달리 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공사하는 계절에 불어오는 강한

바람의 방향을 피하려는 것이오. 집 앞에 내는 길이 활처럼 휘어져야 길하다는 것은 큰물

이 닥칠 때 집으로 곧장 흘러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문이 크고 집이 작으면 흉하다는

것은 살림할 능력의 분수를 지키라는 뜻이며, 수목을 집 앞에 심지 말하는 것은 그늘이 져

서 양광을 받지 못함을 경계한 것이며, 우물 근처에 꽃나무를 심으면 흉하다 함은 실제로

벌래가 빠지기 쉽고 화초의 독이 들어갈까 저어함이요, 대문과 광이 맞보이면 흉하다 함은

도둑을 경계하는 것이며, 집 앞의 연못이 길하다 함은 마당과 택지 주위의 습기를 없애자

는 것이며, 이러한 길흉에 대한 옛 사람들의 말은 끝이 없을 지경이외다. 즉 입지조건에 따

라 길흉의 운영을 살려야 하겠지요. 이 집은 대문만 바꿔 내면 아주 아늑한 양택이올시다."

"허허,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내왕하시자마자 누옥을 잘 살펴 말씀해주시니

기왕이면 저희 가문의 음택도 살펴보아주십시오. 사례로 아무데든 귀댁에서 정하신 터의 산

을 송두리째 매입하여 올리겠습니다." 유사과가 취한 듯이 듣고 있다가 김기에게 간곡히

말하였다. 그러나 처남 되는 자는 매우 기분이 상하였는지 볼맨소리로 중얼거렸다.

"[심안요지][지리용혈진]을 보았으나 그런 글은 읽지 못하였소. 모든 풍수가에는 원칙

이 있거늘 감히 동남방의 대문이 무어란 말이오?"

"그뿐 아니라 [감룡경]이나 [의룡경], [뱐장ㅈ;ㄱ헤], [천원오가천], [의원공비지], [설한요

] 등등에도 원칙은 구구하지요. 음양과 오행의 조화는 그때마다 다르게 마련이라, 전후좌

우 청룡 백호의 음양이 변합니다. 크게는 오행은 양으로 산을 합성 조직하며 오행의 이치로

섭리하고, 음은 지지로 방향을 제시 판단케 하며, 방향은 일변사방 이변팔방 삼변십이방

하여 척도를 분별케 하는 것이외다. 따라서 길흉은 큰 덩어리 속에 작은것으로서의 조화를

얻은 지점으로 따져야 하겠지요. 동에서 서로 흘러 내려가던 예성강 물이 완만하게 구부

러져 이 동리 앞에서는 십여 리를 남북으로 흘러내려가니, 간만의 거센 흐름이 조읍포에서

부터 꺽이어 배를 대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서남방에서는 강한 예성강 들판의 바람이 불어

오는데 한낱 지리서의 원칙이 길한 방향을 고집할 수가 없소이다." 과연 김기는 한양서 문

중을 대표하여 명당을 보러 온 사람답게 조화가 맞아떨어지도록 달변을 토하였고, 이제 주

인인 유사과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대문을 옮길 것이니, 집체에 좋은 자리나 정하여 주십시오." 김기는 주

인의 태도를 보고 완전히 자기 수중에 들어왔음을 눈치챘다.

"적경이 있다는데 함부로 대문을 헐 수가 있겠소. 다음에 택일을 하여드리지요. 그보다는

내일부터 산이나 보러 다닐 테니 함께 다니시지요."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올시다. 저희도 길지를 얻으면 이번 기회에 아예 이장을 하렵니

." 사동이 정자에 다가서더니 사과에게 아뢰었다.

"도련님들께서 준비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주인은 껄걸 웃고 나서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이들의 재간이 과연 쓸 만한가 한번 구경이라도 하시지요." 심기는 눈가에 긴장한 기

색이 돌며 후원 마당 쪽을 바라보았다. 주인의 손뼉 소리에 응하여 달려나온 것은, 소매 좁

은 웃옷에 토수를 손목에 끼우고 행전을 단단히 치고 발에는 납작한 가죽신을 신었으며

한손에 환도를 든 맏아들이었다. 그는 환도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머리르 숙여 군례를 올렸

.

"먼저 쌍수도의 기와 종에 이르는 서른 여덟 형의 자세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옛적 한고조

께서 백사를 베인 칼이 칠 척이라 하는데 제 칼은 오 척이올시다." 그는 칼을 뽑아 두 손

에 잡더니 지검대적부터 시작하여 칼을 휘둘러 받아치는 시늉으로 뛰어나갔다가 앉으면서

칼을 등뒤로 돌려 막고는, 왼편에서 치고 오른편에서 치면서 뒷걸음질쳐서 초퇴방적에서

다시 앞으로 나왔다. 찌르고 막고 베고 하는 동작이 춤을 추는 것처럼 부드러워 장검을 휘

두르는데 마치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한점 바람을 희롱하는 듯하였다. 드디어 칼을 역으로

쥐어 어깨 너머로 돌려서 등을 방비하면서, 그대로 팔을 휘둘어서 전방을 베고는 칼이 땅

으로 가도록 하고 두 손을 모으니 장검가용세로 필하였다. 김기가 봉기에 모르긴 하여도

칼 쓰는 법식은 열심히 배웠느나 어딘가 답답하게 여겨겼다. 그 답답함은 동작이 부드럽고

칼짓이 재빨랐으나, 여러 가지의 세가 바뀔 때마다 연결이 물처럼 흐리지 못하고 잠깐씩

끊겼다 이어지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마감동 뿐만 아니라 길산의 솜씨까지 곁에서 보아왔

던 김기가 검법에 대하여 깊이 아는 바 없었으나, 자신의 답답한 느낌은 분명히 검가의

부족한 점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가 칼을 꽂아놓고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둘째아들이 웃통을 벗어젖히고 머리에는 전

건을 쓰고 봉을 양손에 쥐어 빙빙 돌리며 나타났다. 그도 군례를 드리고 말하였다.

"척계광에 의하면 끝에 예도나 갈고리나 꺾쇠를 달아 쓴다 하였으나, 보시는 바와 같이

칠척 이촌의 박달나무 봉이올시다. 봉은 모든 무예의 시원일 뿐 아니라 장창과 편곤의 종

주올시다." 그리하여 둘째아들이 봉을 잡고서 편신중란의 자세로 시작하여 적수와 섬요전

에 이르는 동작을 취해 보였다.

봉을 높이 쳐들었다가 수평으로 찌르기도 하고 뱅글뱅글 끝만 돌리기도 하며, 아래로 찔러

들어가고 좌우로 후려치고 곧게 내리쳤다가, 뒤로 달아나며 갑자기 돌아서며 휘두르고 껑

충 뛰어올라 돌리고 찌르고 때리기를 꼐속하니 작대기 가운데 바늘침 한 개 들어갈 틈이 없

었다. 둘째의 봉술은 제 형의 검술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그러나 김기가 날카롭게 살펴본 바로는 봉이 기장이 긴만큼 공격점의 안으로 적을 용납하

면 잡힐 염려도 많고, 두 손은 막대를 잡고 두 발은 균형을 잡으려 딛고 있으니, 사지가 막

대기에 잡힌 셈이었다. 따라서 봉이 무예의 시원이라 하는 것은 그 앞에 권법이 있은 다음

에라야 가능한 것이다. 우선 사지를 놀려서 걷고 달리고 치거나 잡거나 한 연후에야 나뭇가

지를 꺽어 쥐거나 돌멩이를 드는 법이다. 그것은 한 팔이나 한 주먹이나 자지 중의 어느 일

지를 보강하려는 것이지, 일지에 사지를 맡겨버리자는 노릇이 아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한

손은 봉에서 떼어 자유로이 가깝게 파고든 상대를 잡거나 막거나 치거나 해야 된다. 또한

두 다리도 상대편의 하반신이며 빈 곳을 노려 지르거나 비틀거나 하는 법이다. 만약에 권법

과의 조화가 없이 봉술만 익혔다면 한 팔과 두 다리를 잃고 다만 긴 팔 하나만을 얻은 셈이

. 김기는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내가 무예를 아는 바 없으나, 권법이 앞에 나오지 않던가?" ", 권법을 먼저 익혔으나

주로 봉을 배웠습니다."

김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유사과에게 물었다.

"자제부들의 저러한 재간은 누가 가르쳤나요?"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고 있습니다. 특히 불가의 가르침이 공맹의 학

문보다 월등해서가 아니라, 선대에 부처님이 현몽하여 돌부터를 캐낸 뒤로부터 집안이 흥

성하였던 까닭이지요. 그래서 문중에서 문수암이라는 기도처를 짓고 철마다 재를 올립니다.

그런때에는 명산대찰을 찾아가 고승을 모셔오게 되는데 몇 년 전에 와서 머물던 승려가 승

병도감 출신이라, 제가 부탁하여 아이들에게 재간을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진 편이지만 그때만 하여도 타처의 장정들을 데려다 두었으니 어찌 마음이 놓였겠습니

." 그들이 얘기를 주고받는데 마당에서 기척을 알리려는 듯 가벼운 헛기침 소리가 들리

, "아버님, 저는 그만둘까요?" 하고 말하는데 바라보니 막내아들이 서서 기다리던 중이

었다. 김기도 막내는 허위대부터 보잘것이 없어 별로 신통치 않게 여기던 터이라 잊고 있었

.

"그럴 리가 있느냐. 네 재간이 빠지면 형들의 재간도 빛을 잃구 말지." 아비는 그렇게 추

어주었다. 막내는 가죽 배자 위에 두툼한 띠를 두르고 쇠뿔 화약총과 가죽 주머니를 찼고,

오른편 어깨에 총을 메고, 총 한 자루를 양손에 들고 서 있었다.

"아조에는 예로부터 군기시로부터 나온 천지현황자포가 있었고, 김지가 만든 승자총이 있

었는데 왜란 이후로는 조총의 이점을 살려 승자소총이 나왔고, 지금 화기도감에 나와 있는

화승총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총은 동래에서 들어온 박래품으로 서양 것과 다름없는

왜식 화승총으로 조준 가늠자가 달려 있고 철환이 굵고 크며 멀리 나갑니다. 삼방술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는 담장 끝까지 걸어가서 헌 망건을 하나 알맞은 높이의 나뭇가지 끝에 걸어두고 되돌

아왔다. 그리고는 한쪽 무릎을 땅에다 꿇고 다른 무릎은 세워 그 위에 총을 세웠다.

망건을 잠시 바라본 뒤에 가죽 주머니에서 부시를 꺼내어 총 잡은손에 갖다 대고 시척,

하더니 그대로 총대를 어깨에다 붙였다. 요란한 폭음 소리가 들렸고, 재빨리 방포한 총을 발

치에 놓고는 오른편 어개에 메고 있던 총을 팔굽을 뿌리쳐 쥐고 다시 한번 시척, 하고는

겨누었다. 또 한번 총성에 귀청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이제는 두 자루 통의 약실이 모두 비

었다. 그는 먼저 쏜 총을 잡아 쇠뿔통을 기울여 약실을 채우고 입에 물었던 연환을 총구

에 넣고는 기다란 쇠꼬챙이로 눌러주고는, 다시 처음처럼 시척, 하며 불을 붙여서 어깨에

올려 겨누었다. 그 순간이 여섯을 헤아릴 만큼의 간격이었으니 실로 놀랄 만큼 재빠른 솜

씨였다. 대개 총포란 멀리 있는 자를 쏘기 위한 것이니, 여섯을 헤아릴 사이라면 상대는 사

정거리의 안팎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김기는 참으로 놀라서 벌린 입을 한참이나 다

물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가 망건을 가져다 제 아비에게 바치고 물러갔는데 탄흔을 보고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망건의 한복판에 손가락 한마디쯤의 사이로 구멍이 일렬로 뚫

려져 있었다.

"참으로 신묘한 재간이오."

김기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유사과에게 말하였다. 처남은 싱긋이 웃었고, 유사과는 김기가

놀란 양을 바라보며 유쾌하게 말했다.

"우리 고을에서는 아무도 호환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호환은커녕 범도 기미를 알고 얼

씬하지 못하겠지요." 유사과와 처남은 신이 나서 말하였다. 김기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퇴

로를 한전하게 하려면 필히 사과의 막내둥이가 방포하지 못하도록 미리 손을 써야겠구나 생

각하였다.

다시 술자리가 계속되어 인근에서 불려온 창기가 풍악을 잡히고 소리도 하였다.

말득이는 김기가 주인과 교분을 나누는 사이에 봉노에서 따로이 탁배기상을 받아 얻어먹

었다. 그는 하인들로부터 삼형제의 무예에 대하여 자랑하는 말을 들었고, 문수암에 올라가

있다는 두 서북 사람의 상출에 대하여도 들었다. 그러나 벌써 김기 성님과 자기가 이 집의

울안에 들어와 손님 대접을 받고 있으니, 입에 넣은 떡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말득이는

자신만만하였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김기와 유사과가 말안장을 나란히 하여 천신산으로 향하였고, 말득이

도 수행하였다. 술과 안주가 담긴 찬합을 말 궁둥이에 싣고 하인들은 술 데울 노구까지

짊어지고 따라갔다. 천신산 등성이에서 명당을 본답시고 이리저리 돌다가 오후 내내 들놀

이를 즐기고 돌아왔는데, 유사과는 김기를 사귈수록 얻어듣고 배우는 바가 많아 길지를 얻

을 때까지 함께 다니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다시 하루가 지나서 유사과는 산을 보러 나가자며 재촉인데 김기는 식구들이 나타나지

않아서 은근히 걱정을 하였다. 김기는 중화나 자시고 천천히 나서자고 미적미적하였다.

경이 들어온 뒤로 문수골 일대에는 선단 사공들이 빙 둘러싸고 지켰으며, 맏아들은 조읍

포창에 나가있었고 둘째는 문수암으로 올라갔으며 셋째는 집에 남아 있었다. 중화참이 지

나서 이제는 김기도 주인과 함께 집을 나설까 하는데 사과 댁의 행수라는 사내가 헐레벌

떡 뛰어들어왔다.

"토포 군사들이 당도하였습니다."

"번거로이 하지 않아도 될 것을 공연히 오는 게 아닌가." 유사과는 말하면서도 흡족한지

껄걸 웃었다.

"그래, 평산서 온다더냐?"

"아니올시다. 한양서 종사관 하나가 내려와 감영에서 군사를 내었다 합니다. 장교가 셋이

나 되고 군졸이 이십여 인이라는데 모두가 수년간 조련을 받은 자들로만 뽑았다 합니다."

행수가 말하였고 김기도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종사관이 직접 파견되어 왔다면 큰 적경이네. 틀림없군요." "허허, 모두 조읍포창 덕분이

지요. 어쨌든 국은이 두터워서 앞으로 세곡 운반을 더욱 열심해 해내야 될 겁니다." 유사과

는 김기와 더불어 대문 밖으로 나가 토포군을 마중하였다. 김기가 바라보니 맨 앞에 홀철릭

입고 구슬상모를 쓰고 말 위에 올라앉아 오는 종사관은 바로 최흥복이었다. 그 뒤로는 제각

기 장교 복장을 차린 강선홍 김설일 큰돌이 등이 군졸들을 이끌고 있었다. 검은 더그레에

털벙거지를 쓴 군졸들은 길 양쪽으로 갈라서서 창검을 번쩍이며 행군하여 왔다. 맨 뒤에는

먼저 도착하여 절수처에서 기다리던 한양 포교 두 사람, 즉 마감동과 변가가 평복 차림으

로 따라왔고 사과의 맏아들도 그 틈에 섞여 있었다. 행렬이 동구에 멈추었고 종사관은 말

에서 내려 세 장교와 두 포교와 사과의 아들과 함께 집 앞에 이르렀다. 말을 나누었고 사

랑으로 안내하였다. 사랑에 들어가 앉아 서로 인사가 이루어진 다음에 사과가 입을 열었다.

"종사께서 이렇게 궁벽한 곳에 오셨으니 난적들은 곧 진압이 될 것입니다." "관찰사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이지요. 이번 적경을 일으킨 도적들은 원래가 해서를 본거지로 멀리는 한양

이남에까지도 발호하는 무리들로서 오랫동안 저희 포도청에서 잡으려고 갖은 기찰을 펴오던

놈들이올시다. 아까 포창에 들러서 이미 잡힌 혈당을 잠깐 심문하였는데 놈들이 이 댁을

노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앞으로 며칠 동안 지키다가 아무 일이 없으면 부근에 도적의 은신

처로 알려진 광복산 골짜기와 일대를 모조리 뒤져서 잡아낼 작정입니다." 김기가 궁금하여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여기도 걱정이지만 포창에는 판관 이하 군사가 한 오뿐이던데 도적들이 그쪽으로 들어오

면 어찌하시려오?" 최흥복이는 잠자코 있는데 포교 행세를 하는 마감동이가 나서서 말하였

.

"염려 마십시오. 저희들이 민병들과 더불어 철통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곳을 지키던 자

들 중에 절반은 나누어 포구를 지키도록 하면 더욱 든든하겠지요." 김기가 다시 초를 쳤다.

"도적들이 이 댁을 노린다는데 다시 사람들을 빼어가면 되겠소?" 최흥복이 껄걸 웃으며

장담을 하였다.

"염려 마십시오. 저희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군사들은 모두 호랑이사냥이나 명화적 소

탕에 이력이 난 자들로 뽑혀온 사람뿐입니다."

맏아들이 동의하였다.

"그렇습니다. 포창이 털리면 세곡선을 감당하는 저희들로서도 책임을 면할 수가 없겠지요.

여기는 토포군이 직접 지키고 있으니 전혀 염려할 바 없습니다. 제가 사공들을 인솔하여 포

탕에 나아가 포구를 지키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마을 주변에는 몇 사람이 나가서 지키고

있습니까?" "민병들과 사공들이 십여 명 나가 있지요. 집에도 장정들이 있고." 최흥복이

행수의 말을 듣더니 장교인 김선일에게 지시하였다.

"지금 나가서 군사 셋으로 망보기를 세워두도록 하고 사공들은 거두어 포창으로 내보내도

록 하여라." 사과네 안채 부엌에서는 군사들을 호궤한다고 닭과 돼지를 잡고 각종 물고기

로 전을 지지고 음식을 하노라고 법석이었다. 떡벌어진 점심상이 들어오는데 김기와 사과

가 겸상을 받았고, 종사관과 맏아들이, 그리고 수하 장교들과 포교들, 군사들은 행랑채에서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었다. 상을 물린 뒤에 맏아들은 번을 서던 사공들을 거두어 마장동

변가와 더불어 포창으로 나갔고, 민병들은 무수암으로 올라갔다. 마을 주변에는 군사들이

번쩍이는 창검을 치켜들고 곳곳에 서 있었고 사과네 집 담장 안팎에도 둘러섰다. 종사관은

겸인 방을 내어 사령소로 쓰기로 하였다. 김기가 슬그머니 들러 주위를 살피고 나서 최흥복

이에게 말하였다.

"오늘밤 이경에 유민들이 포창을 덮칠 게야. 장두령은 어디 있나?" "밤에 성님께서 묵으

시던 딱부리 주막에 당도하실 예정입니다." ", 이 집은 이미 점령을 하였고... 세 아들에

대하여는 들었겠지?" "아까 선홍이 성님이 선일이가 있는 데서 말득이가 모두 일러줍니다.

문수암은 맨 나중에 들이칠 작정이우." "알겠네. 나는 사과를 데리고 나갔다가 딱부리 주점

에 끌어다 놓겠네. 내일 아침에 만나지." "조심하십시오." 김기는 겸인 방을 나서려다가 말

하였다.

"집은 사과의 막내가 지킬 모양인데, 얕보지 말게. 솜씨가 대단한 포수야." "이미 손안에

들어온 참새새끼올시다."

최흥복이 빙글대며 대답하였다. 김기는 사랑채로 건너갔고 말득이는 중문 밖에서 기다리

고 있었다.

"말 준비를 시켜두어라."

"난 인제 구종배 노릇 안할라우."

", 버릇 잘못 들었구나."

김기가 농을 치고 나서 안으로 들어가니 사과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말하였다.

"오늘은 안 나가시렵니까? 어제 천신산의 북편 등성이를 보신다더니... 말씀하신 뜻을 곰

곰 생각하여보니 명당이 그곳말고는 달리 없을 듯합니다. 아래로 예성강을 내다보고 뒤로는

취적산의 주능을 타고 앉았으며 고성산의 꼬리가 멸악산의 남은 줄기와 벌려 있어 그만한

데가 없을 것입니다." ", 듣기에는 실로 뛰어난 길지이오나 직접 봐야겠지요. 그러나 이

렇게 집안이 분주한데 나가시렵니까?" 김기가 마음은 내키지만 사양하는 뜻을 비치자 사과

는 고개를 내저었다.

"천만에요. 감영에서 군사들까지 나왔고 노련한 종사관이 지키고 앉았는데 무엇이 걱정할

게 있습니까. 천신산 북편이야 우리네는 마을 동산이나 한가지입니다. 십리지간이니 둘러보

고 돌아오면 저녁밥이 아주 맛이 있을 겝니다."

"주인께서 그러시다면 저야 하루가 급하지요."

김기도 껄걸 웃으며 사랑을 나섰다. 말득이가 사과의 하인과 더불어 말을 준비하여 기

다리고 있었다. 김기와 유사과가 말에 올라 사매내쪽으로 가려는데 막내아들이 쫒아나왔다.

"아버님, 어디 나가십니까?"

", 진사 어른과 산을 보러 나가련다. 왜 그러느냐?" "오늘은 그만두시지요. 도적들이 온

다던 날이 아닙니까." 김기가 대신 말하였다.

"바로 보이는 저 산등성이에 올라 둘러보고만 올 것이니 너무 염려말게나. 도적이 온다

면 한밤중에 움직일 것이라. 이런 벌건 대낮에 바로 토포군의 코앞에서 무슨 일이 있겠는

." 아들은 다시 돌아갔다. 그는 개가죽 배자에 띠를 둘렀고 왜식 총포를 두 자루 메고

있었다. 김기가 돌아보고 말하였다.

"과연 믿음직합니다."

유사과는 뭐라고 보태기도 멋쩍었는지 웃기만 하였다. 그들은 내를 따라서 갈대가 흐드러

지게 피어난 골짜기를 올라갔다. 천신산 갈래는 세 가닥으로 내리뻗어 북으로 곧장 내려간

것과 사매내를 향하여 직선으로 뻗친 것과 사과네 동리로 뻗친 것이 있었는데, 위의 두 갈

래 산줄기는 사실 구봉산과 취적산에서 뻗친 것이 천신산 줄기에 닿고 있었다. 그들이 일

단 산길에 들어서서 산줄기가 갈리는 곳에 이르자, 김기가 남쪽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이리로 내려가면 벽파정이 나오는가요?"

"그렇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멉니다. 오히려 문수골에서 고개를 넘어 포창에서 올라야 가

깝지요." "그러면, 이리로 내려가십시다."

김기가 남쪽으로 말 머리를 돌리자, 사과는 영문을 모르고 중얼거렸다.

"조금만 오르면 북편 등성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는데, 왜 그쪽으로 넘어가려고 하

십니까?" 김기는 말득이를 흘깃 바라보고 나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조로 차갑게 내

뱉었다.

"주인장, 내 말을 들으시오. 벌써 당신의 집과 가속들은 모두 우리손에 들어왔소. 우리는

해서 녹림당으로 오래 전부터 당신네 집안의 재물에 대하여 알고 있었소." 유사과는 안색

이 하옇게 질려서 입을 벌리고 있다가 스스로 고삐를 잡아 말을 돌리려 하였으나 말득이가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사과의 하인은 달려들지 못하고 주춤거리다가 몸을 돌려서 뛰는데

말득이가 한 손은 사과의 말고삐를 잡은 채로 다른 손에 자고를 뽑아 번개같이 날렸다.

덜미에 자고가 꽂힌 채로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하인을 향하여 이번에는 등반테 자고가 날

아가 꽂혔다. 하인은 몇번 신음하면서 한 손을 들어 나무를 잡더니 그 손도 풀리고 고개를

땅에 처박고 말았다.

"시키는 대로 하면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잘 모셨다가 집에 보내줄 것이오." 김기가

말하니 사과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말득이가 끄는대로 안장 위에 얼어붙은 듯

이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천천히 산천경개나 둘러보며 벽파정으로 가자꾸나. 황혼이 자못 아름다울 게야." 그들은

남쪽으로 길을 바꾸었다.

멀리 금교역말이 내려다보이는 산모퉁이에 이르러 김기가 뒷전에 말하였다.

"자아, 이쯤에서 쉬었다 가지."

말득이는 사과를 태운 말의 고삐를 잡고 가다가 멈추어서 유사과를 부축하여 끌어내렸

. 사과는 아까보다는 훨씬 두려운 기색이 풀려 있었으나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기가 말에 실었던 술병과 찬합을 내려 풀밭 위에 벌여놓았다.

"저쪽이 취적산을 넘어오는 길이고, 저 맞은편 길이 구봉산에서 내려오는 길이우." 말득

이가 북쪽과 서쪽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하였다. 김기는 잔을 내어 술을 따르며 말하였다.

"지금부터 밤이 깊도록 여기서 기다리자면 오한이 들 것이니, 적당히 마셔두는 게 좋을

게야." 김기가 가득 따른 화주 한 잔을 유사과에게 권하였다.

"주인장, 한잔 드시오."

유사과는 외면하고 돌아앉았고. 말득이가 대신 받아 마셨다.

"도주공도 스스로의 재산을 마음대로 못하였고, 새옹득실이 전전무상하나니 너무 심려

마시오. 우리가 대의를 위하여 주인장의 재물 약간을 덜어내간다 하여도 전장이며 저택이며

어찌 떠갈 수가 있겠소. 물론 수년간에 모은 재물은 손실이 되겠지요. 그러나 땅을 빼앗아

나누어주지 못하니 댁네는 다시 농민의 등을 치고 관가에 붙어 세곡 운반으로 독점하여 막

대한 이윤을 얻을 것이오. 우리 같은 또 다른 녹림당이나 약한 백성들이 난을 일으키지 않

는 한, 주인장에 집안은 대대손손 아무 탈 없이 일하지 않고 편안하고 호화롭게 살아가게

될 거요. 재물이란 예로부터 천하의 공번된 것이라, 쌓아두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쓰는 사

람이 있고,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역시 가져가는 사람도 생기는 법이외다. 주인장 같은 분

은 쌓아두는 사람이요 지키는 사람이라면, 우리 같은 자들은 쓰는 사람이고 가져가는 사람

들이 분명하외다. 줄어들고 자라나는 이치와 차고 기우는 변화는 곧 조화의 상도라, 주인장

역시 이러한 조화중에 한낱 기생하는 셈이지요. 어찌 자라나기만 하고 줄어들지 않으며 차

기만 하고 기울어지지 않으려 하오? 그동안 힘없는 백성들 가운데서 재물을 모으는 사이에

저지른 죄는 죽어 마땅하겠으나, 본시 이러한 죄는 생명을 빼앗아 값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재물을 옳게 쓰는 일로 값하는 것이라, 목숨은 ㅗ존토록 할 터이니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시오."

단숨에 말하고 나서 김기가 다시 술잔을 내밀어주었고, 유사과는 억지로 받아 마셨다.

"이것도 인연이라 주인장께서 내게 보인 후의는 오래 잊지 않겠소이다. 그러나 나는 신

모의 아우도 아니요 어느 세도가의 사람도 아니오. 나는 그저 낙백한 시골 서생에 지나지

않소이다. 벼슬이다 권세다 하는 것은 멀고 허망하여 오히려 지금 같은 난세에는 화를 불

러들이는 일이라, 조읍포와 금천 지계에 널려 있는 굶주린 백성들이야말로 가장 가깝고 믿

을 만한 인정을 나눌 상대요. 차후로는 권세가와 교분을 나누어 이득을 볼 생각을 끊고 주

변 백성들게 원망 사지 않도록 힘쓰시오. 그것이 가문과 재산을 바르게 지켜나갈 도리인 듯

싶소이다." 아무 말 없이 앉았던 유사과가 용기를 얻었는지 말을 꺼내었다.

"조읍포창은 해서의 세곡이 모이는 곳이요 나라의 근본을 받쳐주는 곳인데, 감히 그 운반

을 맡은 우리 집에 해를 끼치면 나중에 당신들이 무사하겠소? 이것은 역적죄보다 더욱 중벌

을 받을 일이오." 김기는 허공에 너털웃음을 날렸다.

"염려해주어 고맙소이다. 포창은 해서 백성의 원한이 사무친 곳이오. 창고에 쌓인 것은 바

로 저들의 피와 땀이외다. 우리는 주인장의 재물을 가져다가 다음 거사를 위하여 쓸 것이고,

흉년의 기민들은 포창의 곡식을 나누어 가져다가 죽어가는 가족들에게 먹일 것이오. 하늘이

시키는 일에는 국법이 따로 있을 수가 없소이다. 백성은 곧 하늘이지요." 술잔을 털어 놓

고 캬, 하면서 입바람을 불던 말득이가 호기있게 말하였다.

"우리는 구월산에서 일어난 장길산 두령이 이끄는 녹림당이오. 지푸라기 같은 썩은 관군

이 어찌 우리를 칠 수가 있겠수?"

문수골 사과네 집에서는 땅거미가 덮이기 시작하자 안채에서 걱정하는 말들이 나오게 되

었고, 막내아들이 하인과 동네 장정들 몇 명을 거느리고 사매내를 따라 북편 산기슭으로 나

갈 채비를 차렸다. 그들이 대문 앞에서 패를 가르고 있는데 장교로 변장한 큰돌이가 쫓아나

오며 말하였다.

"누구 허락을 받고 병을 움직이는 게요?"

"허락은 무슨 허락이야. 여보슈, 우리 아버님을 찾으러 나가는 거요." 막내가 고까운 기

색으로 퉁명스레 받았으나 큰돌이가 완강하게 말하였다.

"아무리 댁네 집이라 하나 우리는 토포군이오. 사령소에 들어가 종사관께 아뢰고 나가시

." "까다롭기는..."

막내는 투덜거리며 바쁜 걸음으로 행랑채의 끝에 있는 겸인의 방으로 갔다. 안내한 큰돌

이가 미닫이에다 대고 말하였다.

"이 댁 자제분께서 종사께 현신이오."

"안으로 들여라."

미닫이가 열렸고 문가에 앉았던 선흥이가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 막내아들이 들어가 앉

자마자 한양 손님과 산을 보러 나간 유사과가 돌아오지 않아, 찾으로 나갈 뜻을 밝혔다.

사관과 문 옆에 앉은 장교는 서로 눈짓만 주고받을 뿐 말이 없더니, 장교가 중얼거렸다.

"그냥 시작하지..."

"아직 이른걸."

종사관과 장교가 주고받는 말이 알쏭달쏭하여 막내아들이 두리번거리다가 엉거주춤 몸

을 빼어 일어나려는데, 장교로 차린 선홍이가 막내의 목덜미를 우악스런 손으로 꽉 움켜잡

았다. 막내아들은 숨을 쉴 수도 없고 소리도 지를 수가 없어 안색이 까맣게 죽어가고 눈을

흡떠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선흥이는 잠깐 그러고 섰더니 한 주먹으로 총각의 뒤통수

를 내리쳤다. 찍 소리 없이 늘어지는데 충격이 컸는지 코 끝에 피가 흘러나왔다.

"거 죽은 거 아니우?"

"괜찮아, 한참 자다가 깨어날걸."

그들은 막내의 행전을 풀고 다리를 묶은 다음에 입에는 버선을 틀어막고 뒷결박을 지어

이불을 씌워놓았다.

"슬슬 시작해야겠군."

강선흥이는 겸인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는 큰돌이를 앞세우고 막내 아들이 모아놓은 하인

들과 장정들이 기다리고 있는 대문 밖으로 나왔다. 강선흥이가 장정들에게 말하였다.

"출발하기 전에 지시할 말이 있으니 모두 나를 따라오게." 그리고는 그들을 이끌고 사랑

채 마당으로 들어가자 뒤에 섰던 큰돌이가 군사들을 불러모아 중문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강선흥이는 장광문을 활짝 열어놓은 뒤에 허리춤에서 엄파 쇠몽치를 꺼내었다.

"군율을 위반하고 함부로 진을 떠나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다. 토포는 우리가 맡은 일이

고 도적들이 쳐오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니 너희들은 당분간 가두어둘 수밖에 없다.

례로 들어가라." 장정들은 웅성대기 시작하였고 창검을 겨눈 군사들이 몰려들어와 그들을

둘러쌌다.

"모조리 묶어라."

선흥이의 말을 떨어지자마자 큰돌이와 뒤미처 따라 들어온 김선일이가 포승을 내어 그들

을 빠짐없이 묶었다.

"도데체 왜 이러는 거요?"

그들 중에 제법 기골이 장대한 마을 장정 하나가 몽둥이를 들고 앞으로 나오면서 달려들

태세를 보였다. 선흥이가 대번에 엄파 쇠몽치를 휘둘러 등판을 내리쳤고 장정은 묵직한 신

음을 내지르며 엎어졌다.

"어이쿠..."

"뭣들 하는거냐. 어서 병장기를 버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ㅇ." 장정들은 모두들 빠른 동작

이 되어 손에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이며 몽둥이를 내던지고 주저앉아버렸다. 김선일과 큰돌

이가 그들을 빠짐없이 묶어서 광 속에 처박아두었다. 문 앞에 지기를 세워두니 유사과의

집은 완전히 무인지경이었다. 그들은 다시 마을의 집집마다 군사를 보내어 지시가 있을 때

까지 아무나 집 밖에 나오면 크게 다치거나 엄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외양으로

보기에는 유사과네 집은 토포 군사들에 의하여 물샐틈없이 경비되고 있었다. 완전히 어둠

이 깔리자 그들은 집뒤짐을 시작하였는데, 벌써 아녀자들은 안채의 골방에 한데 몰아넣고

밖에서 자물쇠를 채워두었던 것이다. 집뒤짐은 방물과 귀금속이 있을 안채에서부터 시작하

여 바깥으로 사랑채와 별당까지 훑어 나오게 하였다. 멍석 두 장을 사랑채 마당에다 펼쳐

두고 방물과 귀금속과 돈은 오른쪽 멍석 위에, 비단과 피륙은 왼쪽 멍성 에다 쏟아놓도록

하였다. 그리고 갖은 약재와 박래품, 당화 등등은 마루 위에다 모으도록 하였다. 큰자부 방,

중간자부 방, 소실 방, 제수 방, 서부 방, 큰딸 방, 긴 골방, 짧은 골방, 큰 벽장, 작은 벽장,

동편 다락, 작은 다락, 앞곳간, 뒷곳간, 그리고는 큰사랑, 중간사랑, 아랫사랑, 뒷사랑,

, 후별당에 있는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문보다는 실로 어마어마한 재산이었다. 창고

나 광마다 드높이 쌓여진 곡물은 손도 대지 않았건만 벌써 멍석 두 장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실로 두어 식경 만에 유사과네가 누대에 걸쳐 쌓아온 재물이 가을바람에 쭉정이 털리듯

이 말짱하게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선일이와 큰돌이가 그것들을 운반하기 쉽게 섬을 지어

나누어 싸기 시작하였고, 최흥복이와 강선흥이는 다시 한번 마을 주변을 둘러보며 동정을

살피고 다녔다.

최흥복과 강선흥은 포창서 천신간 고개를 넘어 문수골에 들어오는 길목에 망보기를 세워

두었으니, 거기서 내려다보면 먼저 조읍포창의 불빛들이 보였다. 군호는 벽파정이 타오르는

불빛이었으니, 불빛이 보이자마자 강선흥과 최흥복이 복병을 이끌고 문수암 부근의 오솔길

두군데로 나아갈 작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망보기를 문수골의 북쪽 동구에 세워두고 마을

을 빠져나갈지도 모를 아녀자들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세 번째 망보기는 사매내의 작을 모

래톱 부근을 지키게 하였으니, 그곳에는 바닥이 넓은 널판배가 두 척 매어져 있었다. 장을

보러 갈때나 강 건너 말여울에 갈 적에 삿대로 지르며 건너가는 배들이었다. 그리고 돌담

이 꼬불꼬불 이어진 동네의 외곽에 동서남북 사방으로 파수를 세워두었다. 이제는 문수골은

참으로 억센 손아귀 속에 움켜잡힌 작은 콩이나 한가지였다. 대문 양옆에는 창검을 비껴든

군졸이 나란히 서 있었고, 집안의 중문과 마당마다 한쌍씩 지켜 섰다. 사랑채 마당에 늘어

놓았던 재물들은 섬으로 단단하게 포장이 되어 시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떴다!"

졸개 하나가 손가락질하여 모두 바라보니 허공중에 곧추 올라가는 불똥 한 점이 보였고,

그것은 다시 길게 둥근 선을 그리며 어둠속으로 곤두박질쳐서 사라졌다. 이것은 몇가지 의

미가 겹친 군호였다. 천신산 모퉁이 고개에 망을 보던 자가 조읍포창 뒤편의 큰 불길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벽파정에 불이 붙었으므로 구봉상 굼벙이터에서 출발한 유민들의 무리

가 포창 근처에 다가와 기다리고 있다가 포창 안으로 밀고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흥복이

와 선흥은 산속에서 문수암을지키던 자들이 불빛을 보고 내려올 것을 염려하여 미리 매복

하러 올라가야만 하였다. 돼지여울에서는 가볍고 빠른 야거리 두 척을 준비한 홍천수와 석

범철이 때마침 크게 나가는 썰물을 타고 사매내로 당도할 것이었다.

"... 가자."

강선흥이가 먼저 큼직한 짐을 셋이나 얹은 지게를 짊어지고 일어났고, 이어서 달구지와

지게에 짐을 싣거나 짊어진 졸개들 칠팔 인이 따라 나섰다. 그들은 모래톱에 이르러 배를

물가에 바짝 끌어다 대놓고 짐을 실었다. 두 척의 널판배에는 유사과네 집 구석구석에서

털려나온 재물들이 가득히 실렸다. 두 사람이 고물의 덕판에 각각 올라서서 삿대를 잡았다.

그들은 배를 천천히 밀어냈다. 불었던 내술의 흐름이 빨라지는 중이었다.

"서두르지 말구 천천히 나아가게."

최흥복이가 당부하였다. 그들은 다시 고개를 향하여 올라갔고, 두 척의 널판배는 예성강

어귀로 나가는 갈대숲을 헤치면서 흘러갔다. 두척의 야거리가 밧줄에 매어져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배에 타고 있던 홍천수가 죽등을 흔들었다. 그들은 소리없이 뱃전을 옆으로 갖다 대

고 줄로 묶었다. 배들은 서로 부대껴서 끊임없이 부딪치며 삐걱대고 간격이 벌어졌다가는

다시 부딪치곤 하였다. 넷이서 팔을 부르걷고 짐을 야거릿배에다 옮겨 실었다. 포목과 비단

을 제외하고는 짐들이 거의 무겁지 않은 편이었다.

"빠짐없이 실었지?"

서로 점검하여보고 나서 야거리는 줄을 풀고, 강변의 말뚝에 매어진 줄을 널판배에다 옮

겨서 묶어주었다.

"자아, 이다음에 봅시다."

홍천수가 돛줄을 당기고 키를 잡고 앉으며 말하였고, 녹림패도 인사하였다.

"조심해 가슈."

두 척의 야거리는 바람과 썰물을 타고 재빠르게 강심을 엇비슷이 질러가더니 금방 어둠속

에 묻히고 말았다. 그들은 예성강 포구 팔십여리를 빠져나가 예성 십자 수로를 휘돌아 송

도의 서쪽 관문 중 하나인 승천포에 당도할 것이다. 그곳에는 박대근의 상단 차인배들이

마필을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녹림패는 널판배를 가까스로 저어 갈대숲 안쪽에

대어놓고 자갈밭을 건너서 고개로 올라 저희 패거리와 합류하였다.

"모두 싣구 갔지?"

", 썰물이 아주 빠릅디다."

강선흥이는 앞장서서 천신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흥복은 유사과네 막내가 가지고 다니

던 왜식 총포 두 자루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가 자비령서 길산네 패에 흡수된 뒤로 방

포하는 재간을 익히기 시작하더니 스스로 다섯 포수를 조련시켜서는 벽력오라 이름지었다.

이번 기회에 훌륭한 외식 총포가 들어고게 되었으니 최흥복은 말 그대로 벽력장이 된 셈이

었다.

유민들은 포창 서쪽의 억새풀 어거진 쌍봉골 들판에 기어들어와서 엎드려 있었다. 그들은

어둠속에서 탐욕스런 눈길로 포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에 그들 자신과 어린것들 노부

모의 목숨이 걸린 밥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 수중에서 항아리에서 마을에서 연기나 모래처

럼 사라지고 새어나간 곡식이 한양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거대한 도깨비의 뱃속으로 들어가

는 줄 여겼더니 바로 그 새끼 도깨비들이 지척에 있었던 것이다. 곡식을 마음껏 삼켜버린

창고가 마치 사냥감의 미련한 짐승들같이 어둠속에 거뭇거뭇 잠들어 있는 듯하였다. 불빛이

일렁거리더니 드디어 산중에서부터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가자!"

그들은 우 하니 일어섰다. 비록 기세는 당당하였느나 하나 하나 살펴볼작시면 현순백결

헌 의복에 살점이 울긋불긋, 천한각불말 벗은 발 헌 짚신에 지팡이 짚고 절뚝절뚝, 테만 남

은 패랭이에 목만 남은 버선 신고 해어진 전대에는 돈 대신에 송홧가루요, 서 홉들이 오망

자루에는 먼지 바람만 폴폴 나고, 비슥비슥 걸음걸이에 목을 학처럼 껑청하며 눈은 퀭 광대

뼈 불뚝, 다리는 삭정이 같고 두 손은 까마귀 발이렷다. 한데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는지

손마다 작대기 지팡이 몽둥이 낫 작도 호미 괭이 쇠스랑을 이 손 저 손에 치켜들고 으악,

소리 내지르며 일진광풍으로 몰려가는 것이었다. 땅 잃고 마을 떠나 타관 대처 포구 도방

산하 골골, 품팔이할 곳이면 어디로든지 이리 시끌 저리 덤벙 굴러다니던 사람들이라 목구

멍 원한이 해두 되어 나온 능구렁이와도 같았다. 그들은 저마다 손목에 마누라건 딸자식

이건 할머니건간에 검은 베 치맛자락을 찢어내어 질끈 감았으니 활빈도의 신표였던 까닭이

.

절수처에서 들창문 열고 이제나저제나 내다보며 기다리던 마감동과 변가는 벽파정에 불

이 오르자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마당에는 벌써 방문을 부수고 뛰쳐나온 우대용이가 서

있었다. 그는 귀순한 적당이라 낮에는 마감동 변가와 더불어 지내고 밤에는 맹꽁이자물쇠

로 지른 뒷방에 갇혀 있었던 터였다. 그들은 제각기 검은 베를 찟어 나누었다.

그들은 손목에 검은 베를 동이고 나서 수운판관의 거처는 마감동이가 맡고, 창고 부근에

수직하는 군졸 한쌍은 변가가, 그리고 우대용은 긴 회양목 깃대를 뽑아들고 포창 군관과

군좋들이 잠들어 있는 마당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난민들은 각양각색의 꼬락서니로 봇

물이 터지듯 몰려들어왔다. 마감동은 절수처의 윗방에 올라섰다가 소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마자, 미닫이를 벌컥 열었다.

"웬놈이냐?"

이부자이레서 벌떡 일어나며 판관이 외쳤다.

"활비당이다. 꿈쩍 마라."

판관이 속등거리 바람으로 일어나려는 것을 마감동은 칼집채로 후려쳤다. 정수리를 얻어

맞은 판관은 맥없이 뒤로 뻐었고, 마감동이 이불 흡청을 찢어내어 결박하고 재갈을 물려두

었다. 변가는 수직 군사가 바라보이는 창고 모퉁이의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는데 여럿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군사 둘이서 장창을 꼬나잡고 창고를 돌아 나오고 있었다. 변가는

환도를 빼어들고 앞으로 나섰다.

"... 누구냐?"

"도적들이 오는 모양이다. 가자."

군사는 그가 한양 포교이므로 의심하지 않고 창을 거두고는 변가를 앞질러 뛰었다.

가는 그들이 두어 발짝 앞으로 지나쳐 자가마자 뒤에서 칼을 날렸다. 두 군사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우대용은 회양목 깃대를 길게 늘이어 쥐고서 군사들이 거처하는 기다란 토

담집 마당에 섰다가 하나 둘씩 그리고는 우르르 잠결에 뛰어나오는 자들을 향하여 덤벼들

었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불빛에 놀라 깨어나 무조건 튀어나오던 군사들은 다시 어둠속에

서 기다란 작대기가 방향도 모를 곳에서 날아드니 엎어지고 자빠지고 그런 난리가 없었다.

정강이를 얻어맞고 주저앉아 발을 터는 놈, 배를 얻어맞아 입을 벌리고 숨통을 열려고 헉헉

대는 놈, 눈 위에 불이 번쩍하여 땅바닥에서 엉금엉금 기는 모, 아직 맞지 않아 몸은 성하건

만 겁에 질려서 움찔거리며 방문 잡고 휭대는 놈, 마당은 아수라판이 되었다. 우댕용이는 막

사를 가로막고 휭휭대는 바람소리를 내면서 깃대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그러는 중에 횃불

을 켜 든 난민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겁낼 것 없다. 오합지중이다."

장교가 제법 큰소리를 치면서 환도를 빼어들고 앞으로 나섰고, 정신없이 나자빠졌던 군

사들도 그제야 용기를 내어 장창과 환도와 육모방망이를 쥐고 슬금슬을 열을 지으려 하였

. 우대용은 깃대를 내던지고 뒤로 물러섰는데, 난민 중의 누군가가 열에 뜬 음성으로 부르

짖었다.

"몰살해버려라. 우리를 괴롭히던 나졸들이다."

비록 백여 명밖에 안되었으나, 조련이고 군율이고 알 바 없이 양식을 바라고 짓쳐들어온

사람들이라,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마치 폭풍에 아우성치는 산비탈의 나무숲처럼 보였다.

곡괜이며 쇠스랑이며 각종 농기구를 휘두르고 찍고 박으며 일시에 덮쳐드니 빈틈을 본다는

둥 좌우로 피한다는 둥의 법식을 찾을 틈이 있겠나, 난민틀 몇이 앞장섰다가 창에 꿰이고

칼에 베이기는 하였어도 인파가 군사들을 한입에 삼켜버리고 말았다. 마감동과 우대용과 변

가는 조금 떨어져서 잠시 숨을 돌리고 섰을 뿐이었다.

털벙거지와 검은 더그레를 본 난민들은 평소에 사방에서 그들로부터 받은 갖은 멸시와 구

박이 생각났는지 병장기를 내던지고 이리저리 넘어진 군사들을 다시 일으켜 자빠뜨려보기도

하고 밟고, 치고, 또한 상투를 잡아 태기를 치거나 벽에다 처박기도 하고 뒤통수를 때리기도

하였다. 삽시간에 스물 남짓의 군사들을 두들기기를 개 닭 잡듯, 낚아채기를 고양이가 생쥐

나 병아리 다루듯 하였다. 형세는 풍우가 지나는듯하고 빠르기는 벼락치듯 순식간에 절수처

를 온통 쑥밭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군사들은 포창 군관을 비롯하여 하나같이 땅바닥에 뻗

어 있었다. 눈이 빠진 놈, 팔목이 부러진 놈, 코피가 터진 놈, 뒤통소가 깨진 놈, 옆구리를

접질리고 이빨이 빠진 놈, 귀가 떨어진 놈, 뺨이 팅팅 부은 놈, 이마가 부서진 놈, 발을 저는

, 뼈가 퉁겨진 놈, 살가죽이 터진 놈, 숨을 헐떡이는 놈, 눈만 멀뚱멀뚱 뜨고 넋이 달아난

, 쓰러져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놈, 그야말로 형형색색 구구각각으로 다치지 않고 성한 놈

은 없었건만 정작 한 놈도 아주 물고가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마감동이 그들의 앞으로 나

서며 말하였다.

"우리가 여러분을 기다리던 녹림의 활빈당이우."

그들은 ㅈ감동과 다른 두 사람의 손목에 묶인 검은 천을 보았다.

"장사께서 구월산 장두령이란 분이십니까?"

그들 중에 강말득이의 낯익은 얼굴을 찾아보려던 광복산 골짜기의 좀도둑 사내가 물었다.

그가 이들 무리의 우두머리 구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동이 말하였다.

"그분도 와 계십니다. 아무튼 초탕은 이제 우리 손에 들어왔고 양곡도 우리의 것이오.

여기서 열 사람만 우리 뒤를 따르고 나머지는 이 사람의 지시를 받으시오." 감동은 변가를

손짓하여 주었다. 광복산 사내가 제 동료들을 이 사람 저 사람 지적해내어 마감동을 따랐

. 마감동과 우대용은 난민 열 사람을 이끌고 주막거리로 향하였다. 그들이 주막거리의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희끗희끗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쉬이, 포구에서 듣고 나왔을지도 모르니 조용히..." 그들이 길 양쪽으로 흩어져서 살그머

니 다가서는데 앞에서 물어왔다.

"거기 마두령인가?"

김기의 목소리였다. 김기의 곁에는 장길산과 강말득이도 서 있었다. 김기는 산속에서 날

이 어두워지자 곧장 주막으로 내려왔고, 길산은 혼자서 밤에 당도하여 빈 방을 지키고 기다

리고 있었다. 그들은 유사과와 주막 주인 딱부리를 함께 포박하여 건넌방에 처넣었고, 식구

들은 안채에 가둔 채 협밥하여 꼼짝 못하도록 해두었었다. 그리고 이경을 기다려 말득이가

벽파정에 올라 불을 지르고 방금 내려온 참이었다.

"포구 놈들은 미리 알고 빠져나가지 않았을까?"

변가가 강변 쪽의 어둠속을 내다보며 걱정하였다.

"염려마슈. 내가 벽파정에 오르기 전에 여남은 ㅊㄱ이나 되는 세곡선마다 밑창에 구멍을

뚫어두었으니까. 지금쯤은 아마 바닥에 물이 찰랑거릴 테지." 마감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일부러 갯가에까지 나갈 필요가 없겠구먼." "유사과의 집은 어찌되었는가?"

마감동이 물었고, 김기가 말하였다.

"아까 벽파정에 불이 붙고 나서 문수고개를 바라보니 불붙인 화살이 오르더군. 자 우물

쭈물할 틈이 없네. 포구는 두 사람이 맡도록 하게."

길산이 말하였다.

"이제는 끝마무리를 잘 지어야지. 나는 말득이와 함께 문수암으로 올라갈 테니 끝까지 실

수 없도록 해라." "웬만하면 절수처에 가셔서 편히 쉬시우." 마감동이가 말하였으나, "

니여, 무예를 아는 자들과 포수들이 지키고 있다는데 선흥이와 흥복이만으로는 안심이 안

된다.

하며 길산은 김기와 헤어져 문수암으로 향했다.

김기는 한 사람을 시켜서 묶인 유사과를 주막으로 끌어내어 절수처로 업고 가도록 하였

. 마감동과 우대용은 포구로 내려가다가 말여울로 향하는 길과 문수고개로 넘어가는 길이

갈리는 곳에서 서로 약속하였다.

"내가 그들을 이쪽으로 유인할 것이니 성님은 입을 벌리구 기다리슈." "그러면 저 논두렁

에 엎어져 있으란 말인가, 젠장할." 우대용은 난민들 칠팔 인과 더불어 남았고, 마감동이가

두엇을 데리고 내쳐서 뛰었다. 멀리 어계방의 거뭇한 집채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는데 앞에

서 두런데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구야?"

외치는 목소리가 사과의 맏아들이 틀림없었다. 감동은 머뭇거리지 않고 뛰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마포교요. 큰일났소..."

그들 쪽에서도 벽파정의 불을 보았던 것이다. 번을 들었던 자가 불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절수처 쪽에서 들려오는 심상찮은 소리를 듣고는 어계방에서 잠들었던 사공

들을 깨웠던 터였다. 그들은 제각기 병장기를 찾아들고 주막거리를 향하여 올라오던 참이었

. 맏아들이 달려오는 마감동을 막아섰다.

"뭐요... 도적이 쳐들어온 거요?"

"지금 포창 군사들과 접전중이오. 어서 조력해야 하오." 맏아들은 얼결에 마감동의 멱살

을 움켜잡았다.

"어찌된 거야. 우리 집으로 쳐온다더니... 수는 얼마나 되오?" 마감동이 그의 손을 뿌리치

며 말하였다.

"어두워서 잘 모르겠지만, 작대기를 든 것들이 스물은 되는 모양입니다." "작대기 가지고

포창을 점령한다? 그야말로 흉년 까마귀 빈 뒷간 들여다보듯 하는구먼. 누가 송장이 되어

나가나 두고 보라지."

맏아들은 감동을 엇비슷이 바라보며 날리더니 그를 돌려세우고 등을 냅다 밀어냈다.

"그래가지고도 한양서 우리게에까지 도적을 잡으러 왔단 말인가. 얘들아, 가서 오랜만에

칼바람이나 일으키구 오자. 너희들은 예성강 이어 몰 듯이 내 칼날 앞으루 몰아넣기만 하여

." 그들은 주막거리를 바라고 뛰어갔다. 길이 갈리는 곳에 이르러 맏아들이 사공 하나를

불러서 일렀다.

"너는 문수골로 가서 토포군에게 도적들이 포창에 들어왔다고 알려라." 사공은 잡히러

가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사라졌다.

그들은 논을 따라서 뛰는 참인데, 좌우에서 희끗한 사람의 자취가 우뚝우뚝 일어났다.

장서서 뛰어가던 마감동이가 길을 막듯이 가운데에 버티고 서는 것이었다.

감동은 시르릉 하는 쇳소리와 함께 날렵하게 칼을 뽑아 겨누었다.

"꿈쩍 마라. 우리는 활빈당이다. 포창은 이미 수백 명의 백성들 손에 떨어졌다. 뿐만 아니

라 문수골의 너희 집도 우리 손에 들어왔고, 네 아비는 우리가 모시고 있다. 필요없이 살생

하구 싶지 않으니 모두 병장기를 버려라." 사과의 아들은 너무도 뜻밖이어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그들의 앞뒤를 둘러싼 자들을 돌아보고 하면서 잠깐 망설였다.

"거짓말 마라. 문수골은 감영 군졸들이 철통같이 둘러싸고 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좌

우로 벌려선 자들까지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마감동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비양거렸다.

"어리석은 놈, 토포군은 모두 변복한 녹림처사들이시다. 네가 방금 사람을 보냈으나 그들

이 정말 토포군이라면 어째서 우리가 그냥 내버려두었겠느냐." 딴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병장기를 버릴 수는 없었다. 사과의 아들은 잽싸게 칼을 뽑아 땅바닥에 뿌리치고

는 옆으로 쳐들었다.

"다친다. 그 칼 거두고 네 아비 목숨이나 보존할 생각을 하여라." 사과의 아들은 칼을 쳐

든 채로 감히 달려들지는 못하고서 뒤로 두어발짝 물러서더니 갑자기 사공들에게 외쳤다.

"누구든지 강을 건너가서 금천군 관아에 알려라."

두어 명이 뒷전에서 후닥닥 뛰었고, 우대용은 그들을 쫓아갔다. 가치 그것이 싸움의 신호

이기나 한 듯이 사공들과 난민들이 서로 어울렸다. 사과의 아들이 과감하게 칼을 일직선으

로 뻗으면서 뛰어들어왔고, 마감동은 그 칼날을 대수롭지 않게 피하여 엇갈려 빠져나가면

서 다시 회쳤다.

"지금 순순히 항복하는 놈들은 살려주겠지만, 만일 끝까지 저항하면 모조리 죽여버린다."

주막거리 쪽에는 군데군데 횃불이 가득하였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쪽

은 무기라고는 농기구나 작대기를 들고 있는 농투성이들이요, 저쪽은 재를 부리는 사공들

이라 하나 일찍이 유사과가 자위를 위하여 제법 조련을 시킨 민병들이라 그들이 분을 내어

싸운다면 마감동을 빼고는 거의가 다치고 상하는 사람이 많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마감동

의 으르렁대는 위협과 실제로 내다보이는 포창의 형편을 알고는 그들도 오금이 저려서 주

춤주춤하더니 싸울 생각을 버리고 포구를 향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사공들이 등을 돌려

달아나자 난민들은 용기백배하여 제각기 소리를 지르며 추적하였다. 패싸움이란 한번 밀리

거나 쫓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게 마련이라, 일단 전열이 흐트러지고

등을 보이게 되자 그저 달아 뛰기에만 급급하여 뒷전에서 제 동무가 등판을 얻어맞든 머리

가 깨어지든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공들은 거의가 포구에 닿기도 전에 난민들

에게 붙잡혔다. 겨우 두어 사람만이 배를 바라고 물에 텀벙텀벙 뛰어들었다. 갈랫길 위에는

이제 마감동과 사과의 맏아들뿐이었다. 그는 오히려 아까보다 침착해져 있었고, 이제는 상대

를 단 몇합에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자신이 생겨난 모양이었다. 그는 빙글빙글 웃었다.

끔씩 주막거리에서 일렁이는 불빛이 그들의 얼굴 위에 어른거리고는 하였다. 사과의 아들

은 드디어 칼을 두 손에 쥐고 옆으로 비스듬히 세웠다.

김기가 일찍이 유사과네 초당에서 그 장자의 칼솜씨를 보고 느꼈듯이 그의 검술은 마감

동에 비한다면 마치 늑대 앞의 황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록 모양과 자세를 샅샅이

배워서 웃통 벗고 연마하였다고는 하나, 언제나 후원의 화초 사이에서 칼바람에 꽃잎이나

몇장 날리던 무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훈련원 교관이던 임태룡에게서 검법의 기초를

습득한 지가 어언 십 년이 다 되어가는 마감동은 또한 거친 들과 산야에서 대소 수십 전을

겪었고, 해서감영에서 관찰사 이세백의 호위 무사였으며 임진강 북편에서는 아무도 겨룰

자가 없다던 ㄱ미식을 무더리내 사근다리 밑에서 단찰에 베었던 것이 아닌가. 마감동은 그

가 검법의 기본형에 아직도 얽매인 단계에 있음을 알아챘다. 마감동이 조용하게 말하였다.

"내가 열 수만 접어주마."

마감동은 칼을 정면으로 반쯤 늘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어둠 가운데 눈을 부릅떠봐야 정

신만 흐트러질 뿐인 것이다. 사과의 아들은 쌍수도의 정수를 취한답시고 향좌향우 방적의

자세를 보여주고 나서 그대로 격적의 세를 취하고 달려들었다. 칼을 상대편의 좌측과 우측

으로 번갈아 돌려치고 그대로 돌면서 다시 진전살적으로 공격하여, 칼을 옆으로 그어 허리

를 벤 다음에 돌아섰다가 나가면서 찌르기까지가 모두 열아홉 개 동작이었다. 감동은 칼을

들어올려 막거나 받아치거나 하여튼 대적을 않고서 다만, 좌우로 들어오는 칼을 겅중 뛰면

서 두 걸음씩 비켜나기만 하였다. 그자의 검이 오척이나 되는 장검인데, 공격점이 긴 반면

에 무거워서 날렵하지 못하여 미리 짐작으로 그만한 거리만큼 피하여주면 그뿐이었다.

을 써본 자는 알지만 휘두른 칼이 상대의 칼날에 맞아 튀거나 스치거나 하여야 싸움이 몸에

붙어 저절로 동작이 이어지게 마련인데, 헛칼질로 허공을 베는 것처럼 기운이 빠지고 동작

의 중심을 잃게 하는 싱거운 노릇은 없는 법이다.

"아껴서 써라. 벌써 네 수나 허비하지 않았느냐?"

마감동이 좌우 발을 가볍게 굴러보며 약을 올렸다. 사과의 아들은 동작이 이어지지 않고

중도에서 저 혼자 칼을 휘두르고 나니, 벌써 호흡이 흐트러졌고 어디서 무슨 자세부터 이어

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다음은 휘검이니라."

사과네 아들이 막 발을 차고 칼을 쳐들며 나서는데 마감동이 미리 말해주니, 그는 당황

하여 칼을 옆으로 휘두르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위로 번쩍 치켜들었다가 단칼에 두개골을

두 쪽을 내겠다고 뛰어들었다. 마감동은 그의 옆구리로 파고들어 지나가면서 칼자루 끝으로

배를 가볍게 질러주고는 등뒤로 빠져나갔다.

"여섯 수 지나갔다."

이제 그는 마감동의 조롱하는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흠칫하여 제 배에 손을 갖대

대어 보았건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다. 사과 아들은 미심쩍은 듯이 몇번이나 숨을 크게

내쉬어보았다.

", 오랏줄이 나왔느냐? 네 수밖에 남지 않았으니 다 쓰고 나면 칼을 던지고 다시 배워

." 마감동은 연신 웃었다. 사과네 아들은 이제는 검법이고 무어이고 따질 겨를이 없이 함

부로 칼을 이리저리 여덟팔자로 내리그으며 달려들었다.

감동은 몸을 뒤로 바짝 꺽기도 하고 허공으로 껑충 뛰기도 하며 옆으로 비켜나기도 하여

그의 장검을 피하였다. 그러더니 유사과의 맏아들이 앞으로 곧장 찔러 들어오자 처음으로

챙강, 하는 쇳소리를 내면서 아래로 쳐내고는 감동은 바람소리가 나게 칼을 한번 휙 흩뿌려

보이며 말하였다.

"아까운 열 수를 다 써버렸구나. 칼을 어떻게 쓰는지 내가 가르쳐주마." 맏아들은 진땀으

로 온몸이 젖어 잇었다. 그는 어둠속으로 감동의 몸을 살피느라고 너무나 집중하였으므로

온몸은 굳어지고 눈앞은 가물가물하였다. 감동이 천천히 발을 옮기더니 그의 옆으로 파고

들었고, 맏아들은 얼결에 제 왼쪽어깨를 막노라고 칼을 옆으로 비껴서 세웠다. 그러나 감동

은 상반신을 오른쪽으로 숙이면서 가볍게 아래로 칼날을 내리그었다. 맏아들은 얼굴이 화

끈하였고 뒤로 물러서는데 다시 칼을 쥔 두 손목에 타격이 가해졌다. 얼경에 손을 펼치고

힘을 빼니 칼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으며, 마감동이 칼끝으로 그 칼을 끼어 휙 던져버렸

. 맏아들의 칼은 먼 곳으로 날아가 어디 진흙이나 논 가운데라도 꽂혀버렸을 것이었다.

사과의 아들은 손을 얼굴에 가져갔다. 오른쪽 이마로부터 시작하여 눈두덩과 콧잔등을 지나

왼쪽뺨 위로 얖은 자상이 지나간 것을 알았다. 한 치만 깊었던들 그의 머리는 무쪽같이 동

강이가 났을 것이었다.

"수회천의 결을 아느냐?"

마감동이 칼을 칼집에 꽂아넣으며 물었고, 사과의 아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 있었다.

그는 두 손이 저려서 손가락을 움직일 수도 없었는데, 칼등으로 내리친 것이 분명하였다.

그제서야 사과의 맏아들은 상대가 까마득한 고수임을 깨달았다.

"감영 무사 김식이 이 칼에 죽었다."

칼집에 칼을 꽂아넣으면서 마감동이 말하였다. 사과의 아들은 처음에 그가 내뱉었던 말

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고, 그 다음은 대번에 알아들었다. 그도 소문을 들었는데,

장터 왈짜들 사이에 파다하게 얘기가 돌았던 것이었다.

"당신이..."

"꿇어앉아라."

마감동이 나직하게 내뱉었다. 사과의 아들은 자기도 모르게 마치 커다란 바위가 그의 머

리를 짓누르기라도 하는 듯 전신에서 힘이 빠지며 털썩 한쪽 무릎을 꺾었고, 다시 다른 무

릎을 꺾어 주저앉으며 머리를 떨구었다. 겨우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완전한 참패였다.

주막거리 쪽에서 난민들이 달려왔다. 마감동은 그쪽을 돌아보고 나서 물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수룡이오."

"다시 사는 목숨이니 개명을 해야겠다."

마감동은 그때에 유사과 맏아들의 이름을 귓전에 흘리고 말았다. 이는 바로 김식과 동행

하였던 해주 군관들 가운데 두 사람의 생존자와 같이, 구월산 토포군의 앞장을 서게 되는

자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이자를 묶어서 절수처로 끌어가시오."

다가온 난민들에게 마감동이 말하였고 그들은 사과의 맏아들을 이리저리 새끼줄로 사정

없이 묶었다. 마감동은 포구를 향하여 걸어갔다.

우대용은 강을 건너 금천 관아에 적환을 알리려고 뛰어가는 민병을 뛰쫓아 포구로 내려갔

는데, 벌써 배가 물에 잠기기 시작하여 뜨지 못할 것은 알지만 헤엄을 쳐서 건널 것이 걱

정이었다. 강줄기를 휘어들어 좌우로 자갈과 모래를 쌓아 선창을 만들었는데 배들은 아직도

강변을 따르며 삿대를 집어들었다. 몇발짝 앞에서 배의 덕판과 창막이 판자 사이를 건너뛰

는 자를 향하여 우대용은 삿대를 엇비슷이 던져버렸다. 두 다시 사이에 장목이 걸려 발모

가지 부러진 말이 자빠지듯이 그자는 삐끗하더니만 물이 괸 뱃바닥에 머리를 쳐박았다.

용은 그대로 그자를 건너뛰며 반대 방향으로 뛰고 있는 자에게로 쫓아갔다. 그가 강쪽으로

는 제일 가녘에 있는 배로 건너뛰더니 뒤를 힐끗 돌아보고 상대가 맨손인 것을 알자 그 자

리에 멈추었다. 한번 해볼 만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자는 짜른 칼을 들고 있었다. 날이 넓

적하고 끝은 날카로웠다. 뱃사람들이 흔히 쓰는 칼이었다. 대용은 주춤하였다. 그는 배의

덕판에 한쪽이 부러진 채 버려져 있는 닻을 집어 올렸다. 밧줄이 그 아래로 줄줄 딸려 올라

왔다. 대용은 넉넉하리만큼 줄을 빼어 왼손에 감아쥐고 오른손에 닻을 잡았다. 이것은 사슬

낫이라 하여 꺾쇠처럼 휘어진 칼자루 끝에 쇠사슬과 추를 연결한 수군의 무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자가 칼을 앞으로 쥐고 달려들며 몇번 좌우로 돌려 위협을 하더니 대용의 가슴팍

을 바라고 곧장 찔러 들어왔다. 대용은 비켜나면서 밧줄을 그 손목에 감아 잡아채니 앞으

로 고꾸라졌고 닻으로 등판을 내리찍었다.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저기 간다, 물속이

."

"잡아라. 놓치지 마라."

떠드는 소리에 우대용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하나는 바로 물가에서 난민들게 덜미가 잡혔

, 다른 하나가 빠르게 헤엄을 쳐서 선창을 벗어나려는 참이었다. 우대용은 얼른 죽은 자의

짜른 칼을 집어 입에 물고는 그대로 첨버덩, 물에 뛰어들었다. 대용의 헤엄은 이러한 좁다할

고 잔잔한 강물에서 익힌 것이 아니라, 일찍이 해주 용당포에서 산더미 같은 파도를 헤치고

넘나들며 익힌 그것이었다. 물장구도 별반 없이 스물므술 다가드는데 차츰 간격이 좁아졌다.

사공은 몇번이나 뒤를 돌아보았고, 입에 칼을 물고 성큼성큼 다가가는 대용의 모습에 그만

정나미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정작 대용이 다가들어 발을 거세게 튀기며 훌쩍 뛰어 먹이를

채는 숭어처럼 그자의 상투를 잡고 칼을 잡아 번쩍 쳐드니 그는 제풀에 발장구를 그쳐서

물에 잠겼다. 그리고는 말은 못하고 하푸하푸 물을 삼키며 두 손을 조금 내밀어 모아 부

비는 시늉을 보냈다. 대용은 그를 타넘고 지나가서는 물속에서 발로 내지르며 밀어냈다.

이 없건만 뭍에 오르라는 지시인 줄을 어찌 모르랴. 사공은 허겁지겁 대용에게서 멀어진

것만 반가워 선창 쪽으로 되돌아갔다. 대용이 강변에 오르니 오히려 물속은 나은 편이어서

가을바람이 썰렁하게 느껴졌다. 그는 대충 옷을 쥐어짜고 물에 젖어 흐트러진 상투를 위로

끌어올렸다.

"어찌되었소?"

마감동이가 다가와서 물었다.

"한놈도 못 건넜다."

대용은 흐드득 몸서리를 치며 말하였다. 조읍포는 이제 철벽에 둘러싸인 것이다.

길산과 말득이가 문수고개로 올라가니 지켜 섰던 자가 갑자기 어둠속에서 뛰쳐나오며 창

검을 들이대었다. 한식구인 줄 잘 알면서도 길산은 놀라서 가슴속으로 손을 넣었고, 말득이

도 얼결에 허리춤을 더듬었다. 아무리 흑색 더그레에 털벙거지 차림이라 하지만, 그도 역시

손목에 장표로써 검은 천을 매고 있었다.

"문수암은 어찌되었느냐?"

"조금 전에 매복한다고 강두령과 최두령이 두 오를 끌고 올라갔습니다." "유가네 재물은

떠났는가?"

", 우두령 식구 두 사람이 야거리배에다 옮겨 싣고 벌써 썰물을 탔습니다." "자네 혼자

망을 보나?"

"짝이 있습니다만, 방금 문수골로 내려갔지요. 사공 한 놈이 포구에서 이쪽으로 뛰어오길

래 불문곡직 잡아서 한 사람이 사과네로 끌고 갔습니다." ", 삽살개 한 마리라도 고개를

넘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만일 힘에 부치는 상대가 나타나면 하나는 싸우고 하나는 문수

골로 알려라. 밥은 먹었느냐?" "유아무네 집에서 군사를 호궤한다고 돼지를 잡았는데요,

어이구 갑자기 기름진 것을 먹어서 그런지 속이 느끼합니다. 역시 군복이 좋긴 좋습니다."

길산은 패거리들에게 한결같이 친형제 대하듯 하였다. 그는 말득이와 함께 산으로 올라갔

. 좌우로 풀이 우거져 길의 자취가 끊어지기는 하였으나, 걷기에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

. 문수골로 올라가는 산골짜기 아래에는 깊이 팬 개천이 흘러내려갔고, 중턱에는 용바위

개바위 매바위 등의 갖은 형상의 바위들이 둘러선 곳이 있는데, 거기서부터 골짜기를 가로

질러 바위 사이로 오르면 산의 오목한 곳에 문수암이 박혀 있었다.

"불빛이 보여요."

말득이가 말하였다. 컴컴한 산의 자취 가운데 까물거리는 한점의 빛이 떠 있었다.

"길이 외길이더냐?"

"제가 얼마 전에 살펴두려고 부근에까지 올라가보았는데 경사가 매우 급하여 숨이 턱에

닿습니다." "용바위 처음에는 꼭대기에 두 뿔과 같은 바위가 달렸더니, 그중 하나는 왜장

의 총에 맞아 부러졌다는 풍설이 있었고 지금은 뿔 하나만이 있다는데, 용이 사리를 틀고

머리를 쳐든 것과도 같다는 것이었다. 용바위의 중간에는 배꼽 비슷한 모양이 있는데 이

배꼽의 색깔이 평소에는 누런색이지만, 때때로 다른 색깔로 변하기도 하여 그럴 때면 이지

방에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용바위는 아들을 점지한다고 전해져서 부인들은 날을 받아 용

바위 앞에 올라와 절을 하고 아들 낳기를 빌기도 하였다.

그러나 용바위 부근이 문수암의 기도처 중의 한 곳이 되고부터는, 큰마님께서 가끔 산신

기도를 하러 암자에서 내려오기도 하여 마을 여자들의 범접을 엄금하였다. 이유는 부정을

탄다는 것인데 잡인이 기도처를 더럽히고 가면 효염이 없다는 것이었다. 말득이가 가면서

시시콜콜 얘기하니 길산은 빙긋이 웃으면서 녀석이 꽤는 여러 가지로 알아보았구나 생각하

였다.

"어디서 그런 자세한 얘기를 들었니?"

"말두 마우. 내가 선비 성님 구종배 노릇만 맡아놓고 하려니, 유아무네 집에 가서도 행랑

것들하구만 놀았지요.

그 자식들이 외방 사람들게 하는 얘기야 주인네 자랑 아니면 흉입지요." "가만있거라..."

길산이 문득 무엇을 느꼈는지 말득이의 소매를 당겼다.

"부근에 사람이 있다."

길산과 말득이는 거뭇거뭇한 바위가 서 있는 사잇길을 오르려다가 멈추었다. 길산이 바

위에 몸을 기대는데, 느닷없이 바위 위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길산은 방비했던 참이라

슬쩍 비켜나며 그의 두 팔을 마주 잡아 어깨넘이를 하여 맞은편 바위에 처박았다.

"어이쿠."

"누구냐, 이건 우리 식구 아닌가."

그래서 올려다보니 바위의 양편에 하나 둘씩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성님이슈?"

", 선흥이로구나, 하마터면 붙안고 골짜기에 떨어져 죽사발이 될뻔하였고나." 길산은

머리를 흔들며 비틀거리는 졸개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괜찮으냐, 다치진 않았지?"

"골이 깨지는 줄 알았수."

위에서 말하였다.

"이리 올라오슈."

사잇길을 지나 바위의 위편으로 돌아드니 두 바위가 반쯤 묻혀서 훨씬 낮아 보였다. 길산

이 물었다.

"예서 뭘 하느냐?"

"한사람 보내어 동정을 살피구 오라 하였지요."

길산은 말득이를 돌아보았다."

"번거롭게 할 것이 없다. 너 아까 하였던 얘기를 흥복이 선흥이에게도 해주어라." 말득이

가 용바위 얘기를 하니, 선흥이는 이게 느닷없이 웬 옛말인가 하여 시큰둥하였다. 그러나 역

시 당초망 최흥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여기서 기도처를 범하면 되겠구먼. 시끌벅적하면 내려오겠지." "관솔불을 훤히

밝혀놓지."

의논이 이루어지자마자 군복 입은 패거리들은 모두 숨고, 길산이가 나서려는 흥복이를 말

렸다. 흥복은 구슬상모와 철릭 따위를 벗어버렸다. 길산은 그들의 하는 짓이나 구경하러 숲

속에 들어가 나지막한 나무에 올라가 앉았다.

위로 살피러 올라갔던 졸개가 돌아왔다.

"밖에 두 놈이 나와 있고, 방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습니다." "올라갈 필요없다. 이리로

끌어내려야지."

최흥복이 쌈지를 꺼내어 관솔가지에 불을 붙여서는 용바위 아래 이곳저곳에 꽂아두었다.

흥복이와 말득이가 일부러 서로를 부르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

"제물을 어디에다 놓지?"

"성님, 우리 먼저 술 한잔 하구 시작합시다."

"이 녀석아, 그런 버르장머리가 어디 있어, 네 마누라는 안 데려오구 불알 덜렁 찬 놈들만

와서 무슨 효염이 있겠냐."

어쩌구저쩌구 귀 먹은 놈에게 재담 들려주듯 골짜기가 떠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문수암에서도 그 소리를 듣고, 유사과의 둘째가 마루로 나와 귀를 기울여다보다가 수직

하고 있는 장정에게 말하였다.

"이봐, 좀 내려가봐라. 뭣들인가."

그도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더니 대수롭잖게 말하였다.

"용바우에 점자기도 드리러 온 모양이우. 내버려두면 그냥 갈 테지요." "뭐야? 슬그머니

지내고 가도 나중에 할머님께서 아시면 노발대발 하실 텐데, 저렇게 내노라고 떠드는 것

들을 그냥 놔둔단 말인가? 그리구 시방 때가 어느때야, 도적들이 우리 집은 노린단 지가 벌

써 사흘이 지났어." 수직하고 섰던 민병이 대꾸할 말이 없어 환도를 집어들고 일어섰다.

수암은 뒤로 천신산의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등지고 있었으며 오른편으로는 사람 두어 키쯤

의 작은 폭포가 흘러내렸고, 왼편으로는 오솔길이 나 있는데 그것은 오십여 보도 못 가서

경사가 급한 산마루로 오르게 되어 있었으며, 아래로는 전나무와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가파른 비탈이었다. 누가 천신산의 굽이굽이를 돌아 내려오든가, 그 가파른 비탈을 나뭇가

지를 비집으며 밤중에 오르리라고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역시 문수

고개에서 오르는 큰길이었다. 암자 마당으로 들어서는 곳에서 층계가 있었고, 골짜기와 산길

을 건너질러 돌다리를 세워두었는데, 아래는 깊숙한 절벽으로 물이 거세게 흘러 내려가고

있어 골짜기의 냇물에 합류하고 있었다.

"사내건 계집이건 가리지 말구 잡아라."

사과의 아들은 아직도 골짜기의 소란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암자는 일

자의 기와집인데, 가운데가 불상이 모셔진 불당이요 왼쪽이 노마님이 기거하는 방이고,

뒤가 바로 부엌이며 부엌옆에 보살이라 불리는 중년의 여종 방이 있었고, 불당 오른편에

잇대어진 방에는 사과의 둘째아들과 서북 사람 둘이 기거하였으며 그 뒷방에 관동 포수가

셋이 있었으며, 북편의 기다란 토방에는 불목하니로 불리는 노복이 기거하였는데 여덟 명의

마을 민병들은 거기서 지내고 있었다. 사과의 둘째아들이 마루에서 서성대자니 방문이 열리

고 서북 사람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목소리에 가래가 잔뜩 낀 듯하고 눈이 가느다란 사

내인데, 예전에 압록 강변에서 호인과 싸우던 대총이었다. 비록 두 오를 거느리던 자였으나

장창을 쓰는 데는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그와 같이 있는 자도 요도수로서 오랫동안 종군

하였다. 군령을 어겨 군문을 이탈하여 이곳 저곳을 떠돌며 부잣집의 호위도 서고 상고의 호

송도 맡아 하더니, 휴사과가 평양에 갔다가 의주 부상의 소개를 받아 급료를 후히 주기로

하고 데려왔던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일반 왈짜들과는 달랐고 제아무리 사과의 삼형제가

무예의 기본을 배웠다고는 하나, 실전도 겪고 무수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그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판단이 재빠르고 안전과 위험을 한눈에 짐작하여 알았으며 사람을 알

아보는 눈도 날카로웠다.

"뭐요?"

서북인이 가래를 내뱉으면서 둘째에게 물었다.

"별건 아니구, 용바우에 웬것들이 와서 또 점자기도를 드리는 모양이라." "점자기도?" "

기도처를 더럽혀서 엄금시켰더니 밤에도 오는군."

그는 제 동무를 깨웠다.

"이봐, 일어나. 뭔가 온 모양이야."

요도수 다니던 자가 벌떡 일어났다. 둘 다 중년인데 대총 다니던 자보다는 훨씬 해사하

고 젊어 보였다. 그들은 마루로 나섰고 목쉰 자가 중얼거렸다.

"우리더러 내려오라는 수작이로군."

"그러면 저것이 도적들의 꾀임수란 말이우?"

둘째가 그제서야 놀란 듯이 다급하게 물었고, 서북 사내는 방문 옆에 세워두었던 가죽

전대 비슷한 것을 집어들었다. 전대의 위와 아래로 명주줄이 꿰어져 나다닐 때에는 등에 엇

갈려 메도록 되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속에 병장기가 들었을 것으로는 여기지 않을

것이었다. 서북 사내는 전대에서 두 개의 봉을 꺼냈다.

"용바우에 오는 이라면 이 부근 마을 사람들일 테고, 그들은 대게 적경이 일어난 것을 들

었을 겝니다. 때맞추어 일부러 요즘처럼 살벌한 때에 기도를 드리러 왔다니, 적당들 외에는

달리 없소이다." 그는 굵은 봉과 비교적 가느다란 봉을 마주 잡아 서로 끼워 비틀었다.

리고는 옆으로 가로 뚫린 구멍에다 나무로 만든 이음못을 꽂아넣었다. 서북 사내는 봉의

가운데를 잡고 어깨 너머로 앞뒤로 몇번 휘둘러보았다. 그는 봉의 끝에다 뾰족한 창날을

박고 석반을 끼워 단단히 조였다. 대총 지낸 사내가 병장기를 조립하는 모양은 빈틈이 없

었고, 싸움에는 벌써 이력이 나 있는 자가 분명하였다. 사과 댁 둘째도 봉에는 자신이 있었

으므로 칠척 이촌의 박달나무 막대를 집어들고 대총 사내처럼 휘둘러보았다. 뒤에서 바라보

던 해사한 서북 사내가 픽 웃으며 말하였다.

"봉이 매끈하구먼. 칼자루의 금을 보면 얼마나 죽였나 알 수가 있지." "어쩔 셈이우."

째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대총 사내에게 물으니, "우선 관동 포수들을 깨웁시다.

그리고 우리도 경내에다 등을 휘황하게 달아놓읍시다."하며 그는 엉뚱한 말을 하였다.

"우리를 훤히 드러내잔 말이오?"

"내가 진법을 조금 압니다. 이른바 가운데를 공허하게 드러내고 주변을 싸는 것을 언월진

이라고 합니다. 매복에 잘 쓰는 설진법이지요. 언월진으로 있다가 적을 궁지에 몰 때에 예진

으로 화살 모양으로 바꿉니다." 다른 사내가 포수들을, 둘째가 장정들을 깨워서 마당으로

모였다. 그들은 함께 대총 사내의 지시를 들었다. 먼저 포수들이 접근하여 어지럽게 총을 쏜

. 매복하고 있던 적당들은 틀림없이 골짜기를 타고 돌다리를 건너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

이 암자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둘러싼다. 그들의 선두를 끊는데 예진으로 바꾸어 두 서북

사내는 기중 날랜 자들을 맡아 암자 오른편의 산비탈 쪽으로 내몰고, 둘째가 장정들과 더

불어 적당의 끊어진 후위를 암자 앞의 후미진 계곡에다 몰아 처넣는다. 적당들 중에 약산

빠른 자들이 다시 다리를 건너 되돌아 달아날 테지만 이때에 접근하여 있는 관동 포수들이

겨냥하여 방포한다. 이쯤 되고 보면 호구라는 말 그대로 범의 아가리가 된 셈이다. 관동 포

수가 먼저 아래로 내려갔다.

길산이 일행은 어슬렁거리며 내려온 장정을 잡아놓고 문초하여 저쪽의 형세가 오히려 포

창이나 포구보다도 튼튼하게 방비되어 있음을 알았다. 흥보이가 그의 목에 칼을 갖다 대어

시키는 대로 소리를 지르도록 하였다.

"서방님, 큰탈났습니다. 여자가 죽었어요. 서방님... 좀 내려오십시오." 그가 외치는 소리

는 고요한 온 산이 찌렁찌렁 울리도록 의외에도 컸다.

그러나 그뿐, 위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길산은 가까운 곳에서 버것이는 가랑잎 소

리와 나뭇가지 꺽이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에는 쇠가 맞부딪는 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흥복아, 피해라."

당초망 최흥복이가 부시 치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가 재빨리 잡고 있던 장

정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바위 틈에 뛰어들자마자 총성이 두 방 울렸다. 장정이 맞아 쓰러졌

. 길산과 선흥은 식구들을 인솔하여 위로 뛰쳐올라갔다. 말득이가 흥복에게 낮게 속삭였

.

"포수가 셋이라면, 한 방 남았다."

흥복과 말득은 포수들이 수믄 암자 왼쪽의 산등선이를 향하여 기어 올라갔다. 흥복이도

왜총을 환을 재어 하나는 어깨에 메고 또 하나는 옆구리에 끼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자비

령 식구들 가운데서 흥복의 오가 되었던 사람 둘이 또한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가까

이 기어 올라갔고, 흥복이가 말득이를 툭 건드렸다. 말득이도 알아채고는 갑자기 벌떡 일어

나서 뛰어올라가며 외쳤다.

"끼놈들, 게 섰거라아!"

포수들이 급해졌는지 우뚝우뚝 일어났고 흥복이가 기다리고 있다가 놓치지 않고 쏘았다.

하나가 쓰러지자 다른 하나는 아래로 뛰어내렸는데 몇번 구르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흥복

은 다른 총으로 연거푸 쏘았다. 흥복은 스스로도 장하다는 듯이 유사과네 막내에게서 빼앗

은 왜총의 개머리판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움직이지 안았던 포수가 부지런히 약을 재고 환

을 넣어서 다가드는 말득이 쏘아 맞추려고 겨누었다. 말득이는 열 걸음쯤 다가들며 허리에

서 자고를 뽑아서는.

"."

소리를 지르며 날렸다. 포수는 발치에다 꽝, 하고 헛방을 놓으며 넘어졌다. 말득이가 총을

발길로 차 내던지고 달려들어보니 자고가 뺨에 맞아 깊숙이 들어박혀 있었다. 뒤이어 식구

들이 올라와 관동 포수라는 것들은 수습하고 보니, 하나는 숨이 식었고, 둘은 부상을 당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매복했던 관동 포수를 단숨에 무찌른 것이었다.

사실 서북 사내는 적당이라야 시골 왈짜패에 지나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로서

는 해서의 활빈당에 대하여도 어렴풋이 들은 것이 있건만, 서흥에 가서 막상 소문에 접하

고는 노소와 아이들까지 섞인 난민 따위로나 알았었다. 그는 난민들의 틈에 이렇게 무서운

재간이 숨겨져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또한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한양 인근의 도적들이

라 할지라도 단병접전에 관한 무술의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을 듯싶었다. 머리 숫자만 많고

고작해야 짜른 칼이나 작대기를 휘두르겠거니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의 언월진은

전혀 집체적인 조련을 받지 않은 도적들을 양쪽으로 협살하려던 것이다.

선흥이가 앞장을 섰고, 맨 뒤에 길산이 있었다. 길산을 빼고는 그들은 모두 벙거지에 군

복 차림이었다. 암자의 양쪽에 숨어서 언월진을 벌이고 기다리던 문수암 패거리들은 처음에

는 의외에도 관군이라 멈칫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호기를 놓치는 사이에 선흥이는 이미 법

당 앞으로 뛰어올라갔고, 길산은 마당 가운데로 뛰쳐들어왔으며 식구들은 마당 가녘에 들

어서 있었다. 길산은 마당이 텅 비고 등불만 훤히 밝혀진 것을 보자 암자의 층계로 올라서

서 식구들에게 일렀다.

"집을 등지고 돌아서라."

자비령 식구들은 곧 눈치를 채고 마당을 비우고서 암자를 등에 지고 바짝 물러섰다. 마당

에 도적들이 들어서자마자 집 왼편에 숨어있던 사과네 둘째아들과 민병들이 몰려나오게 되

어 있었으나. 그들은 바로 집을 호위하러 왔던 군사들이므로 둘째는 망설였던 것이다. 그가

태평하게 봉을 땅에 짚은 채로 걸어나오는데, 오른쪽에 숨었던 두 서북 사내들은 무기를 휘

두르며 뛰쳐나왔다.

"속지 마라, 도적들이다."

벌써 대총 지낸 사내는 장창에 자비령 식구 한 사람을 꿰었고 다른 사내는 환도를 휘두

르며 층계 오른편에 뚫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선흥이와 식구 서넛이 그들을 맞아 뛰어내렸

, 길산은 남은 식구들과 더불어 왼편을 맡았다. 싸움이 어지러운 중에 둘째가 봉을 좌우로

내리치며 다가들었다. 길산은 맨손으로 비켜나다가 그의 머리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날아오

는 봉을 수도로써 상단에 뻗어올려 막으면서 봉을 잡아 한번 당겨주었다. 앞으로 넘어져오

는 상대를 길산은 손끝으로 쇄골을 찔러 넣어주고 한 팔로 휘둘러서 목을 감아 조였다.

"너희 집이 점령되고 아비는 우리에게 잡혀 있다. 죄없는 마을 사람들 다치게 하지 말고

병장기를 버리게 하여라."

사과의 둘째아들은 그 한마디에 기운이 쭉 빠지는지 다급하게 말하였다.

"모두 그만두어."

그들도 마 에 들어왔던 군사들이 이제 문수암까지 올라왔으니 이미 조읍포가 결딴이 나

버린 것을 눈치챌 수가 있었던 것이다. 뒤미처서 말득이와 흥복과 두엇의 자비령 식구가

올라오는데 하나는 아예 들쳐업었고 다른 하나는 옆구리에 부축받고 그리고 세 번째는 안

면이 온통 피투성이었다. 그자가 바로 말득이의 자고를 뺨에 맞았던 자였다. 동네 장정들은

모두 병장기를 땅에 떨구었으나 오른편의 마당에서는 어지러운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강선흥이가 성난 곰같이 이리 돌고 저리 도는데 두 서북 사내들은 능숙하게 양쪽에서 선흥

이를 몰아치고 있었다.

선흥이가 엄파 쇠몽치를 쓰는데 기운이 누구보다도 세어 일찍이 장연 남대천의 쇠뿔을 뽑

았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나, 변방에서 수십 차례의 전투를 벌인 익숙한 싸움꾼들을 어찌 당

하랴. 벌써 한 팔은 칼에 베어져 피가 배었고 창날이 옆구리를 스쳐서 배자 자락이 크게 벌

어져 있었다. 말득이가 자고를 뽑아 양손에 갈라 쥐고 나서려니 길산이가 제지하였다. 길산

은 가슴속에 언제나 넣고 다니는 반 팔 길이의 예도를 뽑았다. 길산이 층계로 하여 천천히

걸어 내려가며 조용하게 말하였다.

"솜씨가 좋으나 더 이상 싸우면 살려둘 수가 없다. 치워라." 그러나 대총은 돌연 선흥에

게서 장창을 물리자마자 그대로 길산에게로 내뻗었다.

"오냐, 네가 적당의 수괴로구나. 오늘이 네 장삿날이다." 길산은 칼을 들어올릴 것도 없

이 갑ㅂ게 마당 위로 내려뛰었다.

선흥이는 하나가 빠지자 짐이 훨씬 가벼워져서, 제 어깨를 향하여 비스듬히 내려오는 칼

날을 엄파 쇠몽치를 들어 그대로 일직선으로 쳐버렸다. 거센 충격을 이기지 못하여 칼의

중동이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면서 부러지고 그자는 칼자루를 놓치고 말았다. 선흥이가 분

이 코끝에까지 치밀었던 판이라 그대로 으악, 소리 내지르며 달려들어가 쇠몽치를 내리쳤

.

선흥이가 분을 내어 내리친 엄파 쇠몽치라면 소나무 둥치도 꺾어질 판이라,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선흥이는 씩씩거리며 쇠몽치를 들고 돌아섰다. 장창 가진 대총 사내를 맡기 위

해서였는데, 그는 이미 길산이 대적하고 있었고, 흥복이가 그의 소매를 가만히 당겼다.

"그냥 놔두시우."

등불이 훤히 켜진 마당 한가운데에 두 사람은 잠시 서 있었다. 서북 사내는 돌층계에서

뛰어내린 길산의 상반신을 노리며 비파의 자세로 창날을 위로 치키고 다리는 향로의 그것

처럼 구부려서 벌려 딛고 있었다. 길산은 칼을 쥐고 두 팔을 내려뜨리고 마주 서 있었다.

그들의 뒤에서는 구월산의 식구들과, 병장기를 리고 주저앉았던 문수골 민병들이며 사과

의 둘째아들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비파의 자세는 마치 넉 줄의 팽팽한 비파를

손가락 끝으로 둥기듯이 창끝으로 허공을 찢는 창법이었다. 대총을 발을 재게 놀려서 뛰쳐

들어오며 길산의 안면을 노리고 긋고 찌르는 작은 원을 수없이 그렸다. 그러나 길산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귀 옆으로 창날을 흘리기도 하고, 상체를 굽혀 바로 코앞에까지 온 창날을

칼끝으로 살짝 비껴가게도 하였으며, 앞으로 숙여 창날이 어깨 위로 빠져나가게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길산은 결코 그의 창길이인 일장 오척 안으로는 뛰어들려 하지 않았다. 서북 사

내가 약이 올랐던지 갑자기 두 다리를 꾸부리고 주저앉으며 창을 밑으로 숙여 아랫도리를

찌르니 바로 포지금으로써 비단을 땅바닥에 펼치는 듯한 동작이었다. 길산은 펄쩍 뛰었다가

비스듬히 서면서 발로 창대를 밟고는 두 발을 뛰어 디디니 바로 그의 창대를 잡은 손에

닿았다. 서북 사내가 빙긋 웃으면서 창대를 휘꺾어 적수로 고쳐 쥐었다가, 그대로 피리를

부는 듯이 창대의 끝을 나란히 잡고서 길산의 옆구리로 돌연 찔러 들어오는데 철번우가 분

명하였다. 길산이 그대로 반듯이 땅바닥에 나가떨어지는가 하였는데, 어느틈에 다리는 위로

올라가고 허공중에 큰 맴을 돌면서 한칸 폭이 넘게 떨어져서 섰다. 그러니 다시 창길이의

맞춤한 바깥이었다. 이것은 무예에는 나오지도 않는 재주로써 길산이 어려서 광대다닐 적

에 몸에 너무나 오랫동안 익여홨던 근두짓이니 지금 보인 재간은 널뒷근두였다. 비로서 대

총 사내는 당황한 빛을 보였다. 웬만한 상대 같았으면 적수에서 철번우의 급습으로 돌변할

때에 창날에 꿰이거나 적어도 부상당하게 마련이었고, 강선흥도 바로 바로 그 창술에 배자

의 옆구리가 찢어져 나갔던 터였다. 길산은 이제껏 한번도 단검을 휘두른 적은커녕 변변히

창대에 갖다 댄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냥 팔의 일부분인 듯이 들고만 있었다. 대총은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영묘촉서로 앞발을 크게 벌려 뛰고 뒷발을 끌면서 창을 낮게 숙여

맴돌리며 들어왔다. 길산을 팔을 휘돌려 허리를 슬쩍 비틀어 창대를 어깨 위로 얹고는 눈앞

에서 단칼에 내리쳤다. 창날 달린 중동이가 수수깔처럼 깨끗이 잘려 나갔고, 땅바닥에 떨어

진 창날이 쇳소리를 내었다. 서북 사내는 이제 장검만한 길이로 남은 봉만 들고서 당황하여

뒤로 몇걸음 물러났다. 길산이 그의 발 끝에 떨어진 창날 쪽을 발등으로 허공에 차 던지더

니 칼을 좌우상하로 내려치고 올려치고 옆으로 치는데 칼날은 뵈지 않고 등불 빛에 섬광만

이 반짝거렸다.

베어진 창봉이 작달만한 나무토막이 되어 무 조각처럼 땅에 이리저리 흩어졌고, 끝으로

챙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날마저 길산의 칼이 허공으로 날렸는가 하였으나, 길산은 칼

날을 옆으로 하여 수두로 수평이 되게 쳐들고 있던 칼을 손바닥 위로 슬며시 내렸다. 창날

이 그의 손 위에 떨어졌다. 창봉은 원래 자작나무나 단풍나무 또는 박달나무를 쓰는데, 특히

박달나무를 창봉용으로 재배하여 수년이 지나 굵기와 곧기를 가늠하여 뿌리 위로부터 절취

하여 쓰는데, 잘라내어 뜨거운 재 속에서 말려서 다시 동백기름을 속속들이 먹이는 것이다.

습기와 화기에 단련되고 다시 기름을 먹였으니 아무리 나무 몽둥이라 하여도 들어보면 묵

직하기가 그만한 기장의 동철과 맞먹는다 하였다.

새로이 뻗어나간 가지가 아니고 뿌리부터 자라났던 나무라 제법 나이배기요, 굵기가 한줌

이어도 목피를 벗겨냈으니 통나무의 속이나 매한가지로 단단하기가 차돌과도 같은 것이었

. 그런 창봉을 길산이 짜른 칼로 한번 내리쳐서 벤 것은 놀랍기도 하려니와, 설령 베었다

할지라도 한 끝은 제 어깨 위에 얹고 저쪽 끝은 서북 사내가 쥐고 있었으니 중동이를 베기

가 수월했다고 치더라도 도대체 허공에 떠 있는 잘려진 창대를 어찌 무처럼 토막 쳐서 날리

수가 있었는지 더욱 놀라운 솜씨였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힘껏 후려치는 동안에 어찌 창

봉은 칼날의 언저리를 맴돌았겠으며 또한 가뿐하고 고요하게 창날을 칼날 위에 받은 것은

또한 신묘하지 아니한가, 이는 그 재간의 기와 교가 힘이나 재빠름에 치우친 것만이 아니라

완급과 강약이 섬약하나 마치 강인한 명주실처럼,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조화를

이루었던 까닭이었다. 길산은 손에 받은 창날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하였다.

"그동안 이것으로 몇이나 죽였는가. 보아하니 권세가나 부잣지에서 식객으로 드나들며 약

한 백성들깨나 울렸겠구나."

사실 며칠 전에 광복산에서 유민 일가를 코끼몰이하듯 잡아올 적에도, 서북 사내는 노인

의 허벅지를 찔러 상처를 입히고는 달아난 가족들이 하는 수 없이 돌아와 순순히 잡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는 잘려서 짤막한 목도가 되어 있는 봉을 두 손으로 쥐고는 주춤주춤 물러

섰고 길산은 천천히 한걸음씩 쫓아들어갔다. 그가 마당을 다 빼앗겨서 드디어 암자 미틔

벼랑을 등에 지게 되었을 적에 길산은 멈추었다. 그리고는 다시 창날을 보고는 뒤로 던졌다.

"말득아, 네가 써라."

말득이가 허공중에 날아오른 쇳조각을 뛰어서 잡아챘다. 한 자루의 표로서 안성맞춤이었

. 대총 사내는 이제 더 이상 몰렸다가는 안되겠던지 몽둥이를 쌍수도처럼 두 손아귀에

쥐고 야,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뛰쳐들어왓다.

길산은 너른 마당을 비워주면서 비켜섰다. 그는 이제 마당으로 들어서 안심이라는 듯이 층

계를 힐끗 보더니 그쪽으로 뒷걸음질쳤다. 길산은 여전히 똑같은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들

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가 뛰어내리며 공격을 시도했으나 길산은, "말득아!"하면서 그의

등마루를 옆차기로 내질렀다. 사내가 벼랑 끝에 걸릴 찰나에 그 자신의 창날이 덜미에 날

아가 꽂혔다. 그의 몸은 이미 벼랑 끝에 보이지 않았다. 길산은 벼랑 끝으로 걸어가서 캄캄

한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의 일생이란 게 각양각색이로구나. 이러한 목숨이 되지 않기를..." 길산은 허공을 우

러르며 탄식하였다. 속으로는 그릇된 길임을 잘 알면서 자신의 한때의 이익을 위하여 힘이

세고 권력이 큰 자에게 붙어 개의 노릇을 하면서, 스스로 권세를 가졌다고 착각하여 저와

같은 백성을 짓밟는 자는 불쌍한 자가 아니랴. 그는 다만 잔꾀와 기교로써 그 주인을 위하

여 죄업만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옛말에도 세상의 악을 돕지 말고, 세속의 착한 적

이 되라고 하였다.

약하고 보잘것 없는 많은 목숨을 위하여 그 의를 바쳐 스스로 희생하는 자는, 폭포를 거

스르는 고기처럼 스스로의 생명력을 갖추어, 세상 물건과 자신의 목숨을 전혀 새롭고 풍부

하게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아아, 그러함에도 짧은 이를 쫓아 권세영욕의 주구가 되는 자가

끊이지 않음은 어인 연고이뇨, 제가 누구인지 어느 쪽에 서야 할지도 모르고 허망한 물거품

처럼 스러지는 일이야말로 가장 사람답지 않은 삶인 것을.

"성님, 저것 좀 보시우."

강선흥이가 활짝 열려진 법당을 가리켜 보였다. 어린아이만한 금불상이 앉아 있는데 일

렁이는 불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운데는 석가여래요, 왼쪽에는 약사여래,

른쪽에는 아미타여래의 상이였다. 불상의 눈은 가물가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광배는

불꽃 보양으로 번쩍였다.

"들여내라."

길산이 말하자 흥복이가 대꾸하였다.

"부처님을 들어내기가 어쩐지 민망허우."

그러나 길산은 다시 말하였다.

"겉치레일뿐이다. 이미 영험은 예서 떠나신 지 오래이다. 중생은 없이 저희 일문의 안락

과 부귀만을 대대로 빌었으니 이것은 겉만 부처님의 모습이요, 실상은 가귀에 지나지 않는

." 길산이 몸소 머리를 바아 보좌에서 들어냈다.

"이것을 녹이면 수백여 호가 기근을 면할 것이다."

자비령 사람들은 민병과 유사과의 아들이며 노마님과 몸종을 차례로 묶어 건넌방에다 가

두었다. 길산이 들여다보더니 식구들에게 지시하였다.

"우리 식구와 함께 부상당한 사람들은 유아무네 집으로 옮겨 치료하여주도록 해라."하고

나서 그는 다시 말하였다.

"누가 저 할머니와 아주머니를 묶었느냐. 이리 나오시게 하여라." 머리가 하얗게 세고 회

색빛의 긴 저고리에 묵주를 목에 건 노마님과 몸종이 밖으로 끌려나와 결박이 풀렸다.

"그리고 저 유아무 댁의 서방님도 이리 끌어내라. 형제는 집에다 모아놓아야지."하고 나서

길산은 노마님에게 타이르듯 말하였다.

"할머니, 이 금불상 대신에 송도 가셔서 장인을 데려다가 돌부처나 나무 부처님을 모시

도록 허시우. 그리고 혼자서만 불공 드리지 마시고 인근 백성들 누구나가 와서 기도를 드리

도록 해주시우. 이 금부처는 만인에게 보시될 터인즉 모두 할머니의 공덕이니 아까워하지마

시우."

노마님과 몸종은 안색이 파랗게 질려서 벌벌 떨고 있을 뿐 제대로 대꾸도 못하였다.

들은 세 불상을 밧줄에 동여서 기다란 작대기에 꿰었다. 그들은 일단 유사과네로 돌아가기

위하여 문수암에서 소두령과 식구 몇을 남겨두고 사과의 둘째아들을 끌고 내려왔다. 내려가

보니 문수암은 야무지게 단속이 되어 동네 골목에는 인적이 없었고 요로마다 창검을 치켜

든 군복 차림의 식구들이 서 있었다. 군호의 전언과 후언이 엄정하여 그들도 문수골의 도

처에서 군호를 외쳐야 하였다. 이미 사랑방을 치워놓고 선일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식구들은 모두 어디 있느냐?"

"광에다 나누어 감금하였는데 저녁ㅇ로 주먹밥을 한덩이씩 갖다 먹였습니다."하는 선일이

의 말에 선흥이가 내뱉었다.

"기름기가 명치에까지 올랐을 테니 한 사흘은 굶겨두 되겠네." "아니다. 주리는 설움이야

먹던 사람이나 굶던 사람이나 매한가지다. 끼니때마다 꼭 먹여주도록 하여라." 길산이 말하

, 사랑에서 나오던 김기가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도리가 그러하지만, 또한 잡혀 있는 자를 안심시키는 데도 음식을 먹여두는 것이

좋겠지요." 그들은 함께 사랑방으로 올라갔다. 방이 절절 끓었고, 벌써 자비령 식구들이 찬

장을 뒤져내어 갖은 마른안주 등속에다 화주를 내어 한상 조촐하게 차려놓았다. 길산은 김

기에게 물었다.

"포창은 마무리가 잘되었겠지요?"

", 창고는 내일 날이 밝으면 열기로 하였고 우선 밥 구경한 지가 오래라. 절수처의 큰

용가마 둘을 내어 밥과 국을 끓이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포창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은 선

창까지도 샐 틈 없이 수직을 세워두었지요. 판관과 군관부터 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복

을 벗겨내어 난민들이 그 숫자만큼 나누어 입었지요. 내일 아침에 함께 나가보기로 하십시

."

"이제는 유사과네 가산을 몰수하는 일은 모두 끝났고 포창의 쌀을 모조리 내어 기민들에

게 나눠주는 일과, 그 사람들이 안전하게 금천군계를 빠져나간 뒤에 우리가 관군의 추적을

받음이 없이 산채로 돌아가는 길만 남았소." 길산이 앞으로 해야 될 일을 맣하니, 김기는

덧붙여서 자세히 계획을 설명하였다.

"우두령의 식구들은 장물 처분을 위해 승천포로 벌써 출발하였고, 우두령도 내일 새벽에

는 먼저 떠날 것입니다.

나중에 대동강으로 하여 황주로 우리 몫을 실어올 것입니다. 구월산 식구들 몫은 풍천 솔

포로 닿는다 합니다. 우리는 모레 아침까지 포창을 지키면서 난민들을 내일 저녁에 모두

각처로 떠나 보내야 합니다. 하룻밤 동안이면 그들이 해서든 경기든 아무데든지 안전한 곳

으로 빠져나가겠지요. 우리는 구월산 식구들과 자비령 식구로 나뉘어 구월산 식구들은 온정

사거리로 하여 입석을 지나 신천 방향으로 빠지고, 자비령 식구들은 먼저 한밤중에 떠나

살여울에 들렀다가 내쳐서 청산을 돌아서 서흥으로 오르게 됩니다." "자비령 식구들이 먼

저 떠나는 것은 무슨 까닭이요?" 길산이 물으니 김기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 그것은 금교역말과 평산 사이의 빈번한 역마의 내왕 때문이올시다." "역의 통로를

하루 이상 막아둘 수는 없겠지요. 더구나 우리 퇴로가 북쪽이니 평산을 지나가려면 자비령

식구가 먼저 가야 합니다. 구월산 식구들은 멸악산의 깊은 골짜기를 넘어가게 된까 뒤에서

추적한다 하더라도 잡지 못할 테니까요."

"이번 일이 모두 선비 성님의 공으로 이우어졌습니다. 두 산채의 살림은 물론 겨울철의

절량 가호를 여러 집 도울 수가 있게 되었소이다."

길산이 치하를 하니 김기는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한갖 공명이나 꿈꾸던 시골 서생으로 참으로 대의를 위해 조그만 힘을 보탤 수 있도록

끌어준 이가 이갑송 장사요, 또한 내가 철저하게 새로운 세상을 알도록 깨달음을 준 이가

바로 장두령이외다. 이런 일은 어느 한 사람이나 몇몇 녹림처사의 공로가 아니라, 천하의 대

세인즉 모든 것은 하늘이 시켜서 하는 노릇이지요." 길산도 그제는 자세를 바로 하며 말하

였다.

"참으로 저의 편의대로 나온 겉치레의 말을 용서하십시오. 이는 하늘의 운명입니다. 우리

는 다만 그 대세를 쫓아 심부름을 할 뿐이지요. 이러한 재물로써 우리가 산에서나마 세상

의 힘 있고 재물 가진 자들처럼 호화롭게 산다 하면 천벌이 내릴 것이요, 우리가 장한 의기

로 이러한 활빈행에 나섰다는 생각을 먹는 것처럼 교만 방자한 생각이 없겠지요. 저두 이런

데서 남의 방에 앉아 남의 술상에 남의 안주로 도적놈의 이겼다는 의기양양함이나 즐기고

싶지는 않소이다. 사내자식이 세때 밥을 배불리 먹고 속도 삭이기 전에, 또 무슨 주제넘은

향기로운 술과 귀한 안주로 녹적지근하고 한가한 풍류로 흥청거리겠습니까?" 기기는 이번

에는 풀린 얼굴로 환히 웃었으나 말은 더욱 맵게 하였다.

"술을 물리시는 것은 너무하지만, 역시 이런 말씀이 있고 보니 두령께 제가 잔을 따르지

못하겠소이다. 역시 장두령께서는 한번도 자신을 늦굴 적이 없는 분이시오." 그때 밖에서

선일이가 들어와 말하였다.

"광에 갖힌 것들이 춥다고 이불이나 덮어달라고 보챕니다." ", 노약자나 부녀자는 모두

안채에 재웠거늘 펄펄 뛰어다니며 유민들을 못살게 굴던 녀석들이 무에 이런 날씨에 춥단

말인가?"

김기가 그렇게 말하였으나 길산이 너그럽게 대답하였다.

"좋다. 그러면 모두 행랑채의 큰 방에다 옮겨주어라. 사과의 아들들은 다 잘 있느냐?" "

둘이 있습니다."

김기가 껄걸 웃으며 말하였다.

"큰아들인가 하는 자는 제법 이 고장 왈짜패들 사이에 칼깨나 휘두른다고 소문이 났던 모

양인데 그만 마두령에게 혼뜨검이 났지요. 지금 절수처에 가두어두었으나 내일 식전에 이리

로 데려다 놓을 것입니다." ", 그러면 내일 유사과의 집은 선흥이와 선일이 흥복이에게

맡기구 우리는 나가서 난민들을 만나보십시다." "그러지요. 담배나 한죽씩 태우고 일찌감치

주무십시다."하여서 그들은 실로 오랜만에 부잣집 찬광에서 나온 노루고기포며 홍합말림이

며 부각이며 약과며에 손도 대지 않고 주안상을 물리고 말았다.

이튿날 새벽에 변가가 유사과의 큰아들을 묶어서 문수골로 데리고 넘어왔다. 그는 집안

에 검은 장표를 손에다 묶은 군사들만 득시글거리는 꼴을 보고는 한결 풀이 죽었다. 길산은

말없이 내다보았고 김기가 사랑채 마루로 나아가 타일렀다.

"어제 내가 사과 어른께도 말씀드렸지만, 재물이 집 밖으로 나가서 널리 세상에 쓰여지는

것은 비록 잃는다 할지라도 [주역]의 산택손괘상과 같이 스스로 주어서 덕을 얻는 일일세.

손익과 영허는 모두 시의와 함께 행하여지는 것이야. 상에 말하기를 산 밑에 못이 있는 것

이 손인데 군자는 이를 보고 분을 경계하고 욕심을 막는다고 하였네. 손하여 성실함이 있

으면 크게 길하고 허물이 없을 걸세. 아버님은 번잡하고 피로한 때를 당하여 혹시 노구에

건강이 나빠질까 우려되어, 우리가 조용한 곳에서 쉬시도록 권유하였네. 그러니 공연히 딴

마음 먹지 말고 가친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기까지 아우들과 함께 근신하고 있도록 하게."

김기가 눈짓을 하니 최흥복이와 선흥이가 그를 작은사랑으로 끌고갔다. 김기와 길산이 조

읍포창으로 나가기 전에 사과네 집을 점령하고 있는 식구들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길산이 말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불편하더라도 내일 아침까지 집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

고 빈틈없이 살펴라. 오늘 하루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뿐만 아니라, 이제 인

근에 널려 있던 수백여 명의 난민들에게 양곡을 풀어 먹여야 하므로 그들의 안전에 든든한

뒷보가 되도록 지켱 한다. 그러니 추호라도 실수가 없도록 하여라.

저녁이 되면 문수암에 연락하여 거기 갇혀 있던 자들을 모두 이 집으로 끌어와 함께 가두

어놓고 나서 우리가 포창에 당도하면 즉시 함께 떠난다." 김기가 덧붙였다.

"내가 서신 한 장을 써두었는데, 그것은 이 댁 형제들에게 쓴 것이오. 만약 우리의 뒤를

쫓거나 관군에 연락하면 저희 아비의 목숨을 빼앗겠노라고 하였으니 감시 선뜻 나서서 쫓

아오지는 못할 거요. 헌데 이 앞의 사매내에 널판배가 있는가? 흥복이 대답하였다.

", 아까 우두령 식구들께 물건을 넘겨줄 때 쓰고 나서 문수고개 아래의 갈대밭 가에 매

어두었다 합니다." "잘했네, 그러면 부처님 세 분은 배로 살여울까지 모시고 가도록 하지."

김기와 길산과 변가는 다시 한번 문수골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문수고개를 넘어 포창으로

나아갔다. 포구에는 가군사 한 오가 지키고 있었는데 모두 군복을 빼앗아 입은 난민들이었

. 배는 말득이의 솜씨에 의하여 거의 침수된 채로 기울어져 있거나 가라앉았다. 거룻배

한 척만이 온전했는데, 그것은 예방 앞의 가갈밭에 끌려 올라와 있던 배였다. 거룻배를 띄

워놓고 저쪽 강안에서 사람이 부르면 오늘은 배가 뜨지 않는다고 떠들어놓았다가, 관리나

아전 나부랭이들이 와서 찾으면 태우러 건너갈 판이었다. 물론 그들을 포구에다 실어놓으면

금방 돌변하여 절수처로 끌고 가 심문한 뒤에 일이 끝날 때까지 가두어놓을 셈이었던 것이

. 그리고 포창 주막거리의 문은 모두 잠그고 바깥 통행이 금지되어 있어서 저자에 보이는

백성들은 모두가 흉년의 난민들이었다.

변가는 금교역말서 들어오는 길목에 군복을 빼앗아 입은 난민들과 더불어 나갔고, 말득

이는 조읍포창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연락을 맡았으며, 서북쪽 구봉산으로 나가는 길

에는 역시 군복을 빼앗아 입은 난민들이 나가 있었다.

절수처에서 마감동은 광복산 사내와 더불어 난민들을 질서정연하게 열지어 세워두고 길

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산과 김기가 앞에 나서자 마감동이 난민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기다리던 해서 활빈당의 두령님이시오."

난민들은 그 보통 몸집의 눈매가 날카로운 젊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길산은 맨상투에

흰 두건을 질끈 동였고 저고리 바람이었다. 겉으로 보아 그가 난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곁에 섰는 김기는 오히려 품위가 있는 흰 얼굴에 수염이 보기 좋았고 갓 쓰고 도포를 입고

있어 진사 행원 나으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길산의 볼 것 없는 옷치레와 체구는 이들 피로

한 백성들에게 만만한 느낌을 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네와 똑같은 천민으로서 어찌 나

라를 등지고 기민을 구휼하는 일을 여러 차례 해내었을까 하는 감탄과 격려를 주는 것이었

. 길산은 어젯밤 포창을 단숨에 점령해버린 무리들이 이제는 소처럼 순하게 자신을 향하

여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길을 대하자 콧날이 시큰하였다. 더구나 그들의 더럽고 남루한 옷

과 호적도 없이 각처를 배회하는 동안에 별로 얻어먹지도 못하여 광대뼈와 목젖이 삐죽이

솟은 꼴을 대하니 명치끝이 묵지근하였다.

"간밤에 밥을 지어 잘 드셨지요?"

길산이 할말이 없어 불쑥 물으니, 난민들이 여기저기서 대꾸하기 시작하였다.

"실컷 먹었습니다."

"쌀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수."

"이 쌀이 전부 우리 것인가요?"

"식구들 생각이 나서 밥이 안 넘어갑니다."

길산은 그들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나서 말하였다.

"여러분, 조읍포창은 해서의 세곡이 모이는 곳입니다. 이 쌀은 여러분과 같은 가난한 백

성들이 관의 강징에 이기지 못하여 반은 전주에게 떼이고 그 반에서 다시 떼어서 물어낸

쌀이지요. 실로 한톨한톨이 우리 백성의 피와 땀이올시다. 이 쌀이 한양에 올라가 가난하고

맑은 관리의 녹이 되기도 하고 군량이 되기도 하지만, 거의 반 이상은 부당한 이득이 되어

장사치와 권세가의 배를 불리게 될 게요. 아마 이들은 떡을 해먹고 술을 빚어 수백 가호가

목숨을 이을 양식을 순식간에 허비하여버리고 말 것이오. 여러분은 일찍이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무전지민으로서, 흉년을 만나 양식을 찾아서 도처의 고을이나 저자 근처로 흘

러왔을 줄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쌀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것을 찾기는

하였으나, 손쉽게 먹고 살 방도가 생겼다 하여 일도 않고 늘 활빈의 방책이 또 어디서

없을까 기대하는 것은 스스로 살아감에도 아주 불리한 폐단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

이 기근을 면하기에 족할 만큼 나누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시오. 돌아가서 명년에 살아갈

대책을 세워야겠지요. 정 못 견딜 적에는 뜻맞는 이들끼리 모여서 스스로 활빈의 길을 찾

, 절대로 몇몇의 이익을 탐하려 하지 말고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겠지요. 이 일은 우리 몇

사람이 재간이 좋아 벌이는 일은 아니올시다. 되도록 이면 많은 식구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도록 인근 사방에 널려 있는 빈민들의 움에 가서 알려주시오." 무어라 달리 할 말이 있

을 것인가. 길산은 자기도 모르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얼굴을 붉히며 비켜섰다. 김기가

안을 짜내어 구휼과 조읍포창의 봉쇄에 관하여 마감동에게 자세히 일렀다. 마감동은 광복산

사내와 더불어 난민들을 질서정연하게 열 명씩 패를 지어주었다. 인근에서 서로 연락을 받

아 몰려든 난민들이 삼백여 명이었다. 아직은 아침나절이라 그들은 주로 강의 북쪽 조읍

포창의 외곽을 떠돌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각 길목에서는 모여드는 난민들을 정돈시켜

놓고 몸뒤짐을 하여 병장기나 관의 문서를 소지한 자가 없는가를 샅샅이 조사하였다. 일단

절수처로 모인 사람들을 양곡을 날라오는 역을 맡기도록 하였다. 김기가 절수처의 윗방에

길산과 함께 좌정하여 오전에 배급할 사람들을 대장에 올리고 나서 지표를 나누어주었다.

지표에는 그들의 식구 수가 적혀 있어서 저마다 양식의 양이 많고 적었다. 대게 같은 동

네나 가까운 지역에서 떠나온 사람들끼리 함께 타가도록 하였으니 서로 협동하여 운반해가

기에 편리하겠기 때문이었다. 배급이 끝난 사람들은 대장에 ㅍ를 하여 다시 타가지 못하도

록 하였다. 오전 내내 진휼이 계속되는데 일단 조읍포창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해가 질 때

까지 나갈 수가 없게 되어 있어서, 포창의 여러 빈터에는 곧 유민들로 가득 차서 큰 장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민들이 한시라도 바삐 밥을 지어 먹으려 하였으므로 주막거리에서

용가마 열 개를 징발하여 그들이 배급받은 쌀을 조금씩 내어 사이좋게 나누어 먹도록 하였

. 그들은 모두 양식을 가지고 식구들에게 돌아가려 하였으나 포창의 안전을 위하여는

이 많은 사람들이 각처로 흩어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이 어느 고을

의 아전이나 관리나 군관에게 귀띔을 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후가 되자 말득이가 포구로부터 달려왔다. 그는 절수처에 와서 길산과 김기에게 보고하

였다.

"강 건너에서 수십여 명이 늘어서서 배를 태워달라고 부르고 있는데 어찌하우?" 김기가

되물었다.

"행색이 어떠하더냐?"

"그냥 이쪽에서 바라보자니 굶주린 꼬락서니들이 난민들이 분명합니다." 길산이 말하였

.

"배를 보내주어라. 그렇지만 일단 선창에 닿기 전에 모두 손을 들고 서 있게 하였다가,

맨손으로 내리도록 한 다음에 병장기가 없는가를 확인하고 나서 데리고 오도록 하여라."

말득이는 포구로 뛰어나갔다. 포구로 나간 말득이는 배를 보내고 나서 군사들을 선창에

다 늘어세웠다. 배가 거의 선창에 가까이 왔을 때 노를 잡은 난민에게 배를 세우도록 명

하고 나서 모두 손을 들고 일어서도록 하였다.

그들은 이십여 명이 넘었는데 모두 손을 들고 일어났다.

"그대로 배를 대이게."

말득이는 병장기를 일제히 배를 향하여 겨누도록 하고서 한사람씩 뭍에 오르도록 하였다.

두 번째로 내린 사내가 말득이의 곁을 지나가면서 소곤거렸다.

"저 뒤에 네 놈이 있소이다."

말득이가 바라보니 역시 맨 뒷전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은 거룻

배의 고물 근처에 몰려 서 있었다. 말득이의 눈에도 그들이 여느 유민들과 다른 것은 얼굴

에 제법 핏기가 돌았고 머리가 단정하였으며 몸집이 건장한 것이었다. 눈이 또렷또렷한 것

이 굶주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득이는 손을 허리춤에 찔러넣어 자고를 잡은채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꾸물대지 말구 어서 내리슈."

앞에 섰던 사내가 슬그머니 어깨를 숙이더니 자리에 둘둘 말아 묶은 짐을 쳐들었고 뒤에

섰던 자들이 그 속에서 쇳소리를 내며 환도를 뽀아들었다. 삿대를 쥐고 있던 유민은 겁에

질린 나머지 물에 뛰어들어갔으며 말득이는 자고를 날렸다. 환도를 빼들었던 자가 눈에 자

고가 박혀서 뒤로 너어졌고, 말득이는 틈을 주지 않고 다시 한 대를 연달아 던졌다. 앞으로

나섰던 자가 목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군복 입은 난민들이 장창을 겨누며 배로 올라섰

. 말득이가 나머지 둘에게 말하였다.

"칼을 버려라."

그들은 환도를 내던졌다. 난민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묶었다. 물에 빠졌던 자도 끌어올렸

는데 그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말득이는 부상당한 두 사람과 다른 둘을 절수처로 끌

고 갔다. 그들의 짐 속에는 비수와 환도가 각각 두 자루씩 들어 있었다. 절수처의 마당에 이

르러 난민들이 그들을 꿇어앉혔고 김기와 길산이 나와 앉았다. 먼저 말득이에게 일러주었

던 유민이 나서며 말하였다.

"우리가 양곡을나누어준다는 소문을 듣고 고성산 고개를 넘어오는데, 이 사람들이 관리들

과 함께 강변에 서 있었습니다. 배를 타기 전에 병장기를 감추는 것을 보고 수상하게 여겼

지요." 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천 관아에서 나왔는가?"

사내들은 주저하며 말하려 하지 않았는데, 말득이가 곁에서 발을 굴렀다.

"어서 바른 대로 대지 못하겠느냐. 어느 쪽 눈을 빼주어야 얘기를 하겠는가." 제 동료의

처참한 꼴을 잘 복도 알고 있는지라, 그들은 두 손으로 머리를 휘감으며 황급히 말하였다.

", 우리는 금천 관아의 장교 사령들이올시다."

김기가 다시 물었다.

"누가 보내어 왔느냐?"

"비장이 보냈소."

길산이 물었다.

"너희들이 민간복을 입고 병장기를 감추고 왔을 적에는 무엇인가 들은 마리 있었겠지?"

장교가 대답하였다.

"어떤 자가 삼문 앞에 와서 고하기를 지금 유민 패거리 사이에 조읍포창에서 양식을 나누

어준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필시 해서에서 활빈당을 자처하며 날뛰던 도적들일 거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비장과 병방이 군병과 민병을 동원하고 있었는데 저희가 먼저 들어

와 동정을 살피려던 것이올시다." "동정을 살핀다는 자들이 병장기는 무엇하러 가지고 왔

는가?" "여차직하면 수괴의 머리를 베어 공을 세우고자 하였소." 길산은 잠자코 있었으나

김기가 껄걸 웃었다.

"그래 뭍에 내리기도 전에 자고에 맞아 병신이 된 것들이 어찌 두령의 목을 베겠는가.

금 금천 관아에서는 여기를 들이칠 작정이란 말이냐?"

그들은 망설이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기가 그들을 둘러보다가 뒷전에 앉아 있는 젊

은 내를 보자 눈짓하여 그를 끌어내도록 하였다. 김기가 그를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네가 만약 바른 대로 얘기만 해주면 여기서 나온 세목 열 동과 백냥을 주겠다. 너는 사

령이지?" "그렇소. 지금 내게 그 물건을 넘겨준다면 다 말해주고 나는 해서쪽으로 넘어가

겠습니다." 김기가 말득이를 불러 일러주었고 말득이는 마감동에게 말하였다. 감동이가 지

체하지 않고 세목 열 동과 돈 백 냥을 봇짐에 싸서 들여보냈다. 사령은 물건을 보자 너무도

좋아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어서 말해보게나."

"금천 관아에서는 아침에 그러한 발고를 받기는 하였으나, 강변에나와 정탐하여본즉 군

사들이 그대로 있고, 다만 양식을 나누어주며 여기저기서 밥을 짓는 꼴이 못내 수상하였습

니다. 그래서 우리가 건너오게 된 것인데 만약에 해질녘까지 우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평산

관아로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금천서 돼지여울을 건너면 조읍포와는 삼십여 리나 떨어져

있으니 아무도 모를 테지요. 만약 적경이 틀림없다면 평산과 금천에서 앞뒤로 퇴로를 끊고

난민들을 잡겠다는 것이지요."

김기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는 말득이를 불러 금천 사령을 난민들

이 떠날 때 놓아 보내도록 하라 이르고 나서 장교와 다른 자들은 절수처의 군사과 함께

가두어버렸다. 그리고는 길산과 의논한 끝에 문수골에 남아 있는 흥복과 선일이를 먼저

돼지여울까지 보내어 지키도록 하고 나서 저물자마자 자비령 식구들부터 빠져나가기로 의논

이 되었다. 그리고 구월산 식구들은 난민들을 먼저 보내고 그들 중에 원하는 자들과 더불어

내일 새벽까지 조읍포를 점령하고 있다가 온정 오거리로 빠져 멸악산 계곡으로 달아날 작정

을 하였던 것이다.

진휼은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이제 조읍포창은 오백여 명이 넘는 유민들로 발들여 놓을

틈조차 없어 보였다. 길산과 김기는 마감동 변가 큰돌이 등에게 뒷일을 당부하고 말득이와

함께 천신산 문수고개를 넘어갔다. 문수골에 당도하니 선흥이가 문수암에 올라 가두어두었

던 자들을 끌고 내려와 있었고, 선일이와 흥복이는 돼지여울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유사과의

맏아들을 불러서 다시 한번 아비의 무사함을 알리고 경고를 해놓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하

자 구월산 식구들은 포창으로 갈려 나갔고 자비령 식구들만 먼저 출발하였다. 그들은 앞서

금불상을 널판배에 실허엇 평산 살여울까지 보냈던 터였다.

그들이 출발한 뒤에 갇혀 있던 문수골 식구들은 가까스로 결박을 풀고 뛰쳐나와 서로를

풀어주고 광에서 끄집어내고 하였다. 사과의 맏아들 유수룡이 뛰쳐나와보니 사랑채에는 불

이 훤히 켜져 있었고 김기가 써두었던 서신이 기둥에 붙여져 있었다.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유사과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다. 유수룡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행수 되

는 자가 말하였다.

"어서 강을 건너가 금천 관아에 알려야 합니다."

그러나 둘째아들이 반대하였다.

"어제부터 일을 진행하는 모양을 보니 저들이 보통 화적당이 아닙디다. 오히려 아버님이

무사히 돌아오시기까지 관망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소이다." 사과의 큰아들 수룡은 한숨

을 내쉬다가 다시 주저앉아버렸다. 그는 마감동의 칼을 떠올렸고 이제 다시는 부딪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여하튼 포창이 어찌되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행수가 말하였으나 수룡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님께서 끌려가셨으니 관군이 달려들면 그들은 틀림없이 아버님을 해칠 것이다. 아버

님께서 무사히 돌아온 뒤에 손을 써도 그리 늦지는 않을 게다." 문수골 유사과네서는 이

리저리 흩어졌던 세간을 다시 정리하고 집안을 치우면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실상 그들은

지난 며칠 동안의 일로 완전히 기가 죽어버렸던 것이었다.

조읍포창에서는 이미 난민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간 뒤에 광복산 사내를 비롯한 이십

여 명의 장정들이 자원하여 지키고 있었고, 마감동과 변가와 큰돌이 그리고 구월산 산채의

식구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포창의 요로를 지키며 밤을 새웠다.

초저녁에 돼지여울로 먼저 나갔던 최흥복과 선일이는 장사치 차림으로 삼거리의 주막에

앉아 있었다. 양식을 내주고 밥을 지어달라 이르니 주인은 매우 반가워하였다. 흥복이가 물

었다.

"해질 무렵 되어서 강을 건넌 이가 있소?"

"요즈음은 행객이 별로 없소이다. 오전에는 조금 보이더니 아직 없군요." "배는 어디 있

?"

", 저 아래편에 사공의 집이 있습니다. 건너가시게요?" "아니 우리는 지금 평산으로 나

가는 길이라... 그러면 저 건너에서 배를 부르려면 어찌하우?" 흥복의 말이 싱겁다는 듯이

주인은 껄껄 웃었다.

"그야 사공도 사람이니, 귀에 들리라고 고함을 쳐야지요." 선일이와 흥복이도 따라서 웃

었다. 선일이가 말하였다.

"우리 귀에도 들리겠구먼."

주인이 밥을 차려오면서 말하였다.

"포창에서 나오는 길이오?"

"왜 그러우?"

"아뇨, 쌀이 하두 귀한 시절이라 혹시 가지신 것이 있으면 무명을 드릴 테니 조금 팔고

가시지요." "이건 길양식 조금 지니고 나온 것이라서 몇되밖에 안됩니다." 흥복이가 자기

봇짐을 내주며 말하였다.

"한 서 되 가웃이 될거요. 주인이 쓰시구려. 그대신 한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얼마후에 포

창을 지나오는 상단이 당도할 터인즉 배를 낼 수가 있겠소?" "몇 척이나 쓰시렵니까?"

"한 두어 척 있으면 되겠소."

"금천으로 건너가시게요?"

"아니, 살여울까지 올라갈 작정이오."

주인이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삯은 두둑히 내리다."

"거룻배가 있긴 있습니다. 한 척은 쓸 만하겠지요. 삿대로 밀고 오르려면 보통 힘드는 일

이 아니지요." 그들이 밥을 먹고 있는데, 바람결에 사공, 사공 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

. 선일이가 수저를 놓았다. 흥복이가 눈짓을 하며 일어났다. 사방은 벌써 어두컴컴하였다.

그들은 삼거리에서 강변으로 내려갔다. 배가 대어져 있었고 감간초가에는 사람이 없는지 불

빛이 보이지를 않았다. 흥복이가 말하였다.

"우리가 건너가 모시지."

그들은 배를 밀어내고 노를 저으면서 돼지여울을 건너갔다. 강폭은 포창 앞이나 말여울

보다 좁았고 물살도 훨씬 느렸다. 그들이 맞은편에 거의 다가가니 과연 털벙거지에 더그레

차림의 사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와주어 고마우이."

사령은 적당한 거리가 되자 훌쩍 뛰어오르면서 인사조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흥복과 선

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헌데 자네 못 보던 얼굴이군. 전에 사공 하던 노인은 어디 아픈가?" 흥복이 삐걱이며

노를 저었고, 우두커니 서 있던 선일이가 불쑥 물었다.

"평산까지 가슈?"

"그렇다네..."

해놓고는 사령은 의아한지 두 사람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뭣하러 가슈?"

선일이가 다시 묻자 사령은 점점 이상해지는 모양이었다.

"뭣하러 가긴... 이봐, 자네 시방 내게 시비를 하자는 건가?" "금천 사는 놈이 한밤중에

평산에는 찾아가 뭐할려구 그래." 흥복이가 뒷전에서 슬슬 가스르며 말하였다.

"... 이놈들 봐라."

하는데 선일이 사령의 멱살을 꽉 움켜쥐었다.

"너 평산 관가에 적경을 알리러 가는 놈이지? 우리는 조읍포창에서 너를 잡으러 나온 사

람들이다. 엿보러 왔던 네 동무들은 모두 잡혔다."

선일이가 씹어뱉자 사령은 마주 힘을 쓰려고 선일이의 두 손을 잡았다. 선일이는 대번에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서북 사내답게 박치기 올려붙였다.

"어이쿠."

두 눈에서 불이 번쩍하는지 사령은 두 손을 늘어뜨리고 주저앉았다. 선일이가 그의 허리

춤을 만져보다가 빨깃거리는 소리를 확인하고는 일봉 서신을 빼내었다. 평산 관아로 보내는

것이 틀림없었다.

선일이는 그의 허리춤에서 다시 오라를 끌러내어 사령의 손발을 묶고 그의 두건을 풀어서

입을 틀어막았다.

"방망이나 칼을 휘둘렀드라면 그대로 강물에 장사를 지내주었을 터이지만, 맨손이어서 살

아난 줄 알아라." 선일이가 뱃바닥에 웅크린 사령을 내려다보며 을러댔다.

"저것을 어찌할까?"

선일이가 물으니 흥복이 말하였다.

"끌어다가 어디 들판에 던져두지."

그들은 배를 대어놓고 그자를 양쪽에서 떠메고 길을 벗어나서 억새가 드높이 자란 곳까지

가서 내려놓았다.

"야기가 써늘하지만 하룻밤 새우고 나면 구들목 지고 자빠져 자는게 얼마나 상팔자인가

잘 알게 될 거다. 다음부터는 밤길 나다니지 말어라." 흥복이가 말을 보태주고 두 사람은

삼거리 주막에 돌아갔다. 배가 한 척뿐이라고 하더니, 사공의 집 뒤에 구멍난 배가 한 척

더 있는데 판자를 갈아대면 쓸 만하리라는 것이었다.

주인은 스스로 앞장을 서서 다시 나루터로 나갔다. 깊이 잠들었던 사공을 깨워 사정을 말하

고 살여울까지만 배를 빌리자고 하여 나머지 한 척을 곧 수리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배의

수리가 끝날 무렵에 자비령 식구들이 밤의 짐승들처럼 소리없이 나루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곧 배를 띄워 평산 살여울까지 나아갔고, 금불상을 실은 배는 벌써 그곳에 당도하여 있었다.

마감동은 절수처의 윗방에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이 되어 안개가 부

옇게 깔릴 즈음 포구로부터 난민들이 달려와 알렸다.

"맞은편 고성산 아랫녘에 군사들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마감동은 군복을 벗어서 방에다

던지고는 일어났다.

"강을 건널 기색입디까?"

", 강 하류에서 배가 서너 척 올라오는 게 보입니다." "모두 절수처로 모이시오." 감동

이 전령하여 요로에 나가 있던 변가와 큰돌이와 구월산 식구들과 군복 입은 난민들이 절

수처로 모여들었다.

",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소. 여러분들은 각자 안전한 방향으로 달아나시오. 여러분 덕

택에 다른 수백 명의 유민들이 무사히 군계를 넘어갔소이다." 그들이 제각기 군복을 벗어

던지고 법석을 떨 때 광복산 사내가 마감동에게로 나와 말하였다.

"저희들도 식구들이 있기는 하나, 함께 따라가서 녹림의 일당이 되고자 합니다. 받아주십

시오." 그러나 마감동은 고개를 흔들었다.

"산채의 형편이 옹색하여 진작부터 분가를 하기까지 하였으나, 이제 더 이상 식구들을 늘

릴 수가 없소. 어디 깊은 골에 들어가 별대를 이룬 뒤에 구월산으로 기별해주시우. 힘껏 도

와드리리다." 마감동은 변가와 큰돌이를 불러 지시하였다.

"달아나기 전에 창고와 절수처를 불지르도록 하게. 그리고 유사과는 끌고 나와 말에 태

우도록 하고, 일대가 먼저 떠나고 이대가 뒤에 쳐졌다가 모란산 어귀에서 만나도록 하세나."

마감동과 큰돌이가 구월산 식구들 몇 명과 더불어 말에 태운 유사과를 끌고 먼저 출발하였

. 조읍포에서 구봉산까지는 이십 리 길이니 산마루를 넘어가면 곧 평산 구내가 되었고 그

북방의 멸악산맥은 거의 무인지경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이 구봉산을 넘으면서 포창 쪽에서는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오르고 있었다. 후발대

는 관군을 유인하여 취적산을 돌아서 무음천을 건너 모란산 어귀에 이르도록 되어 있었다.

마감동 일행은 거기서 다시 시오 리 길인 온정 오거리를 돌아서 모란산 어귀까지 이십오 리

길을 단숨에 내달았다. 여기부터가 첩첩한 멸악산맥의 초입인셈이었다. 구월산까지는 실로

해서의 초입에서 거의 막다른 끝까지 종주해야 될 판이었다. 재령과 신천 경내를 지날 것인

데 그곳은 일단 구월산의 판도 안데 드는 셈이라 그들을 잡을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란산 어귀에 이르러 그들은 나무숲에 앉아서 식구들을 기다렸다. 두어 식경이나 지나서

무음천을 건너오느라고 하반신이 다 젖어버린 변가 등 일행이 당도하였다.

"불을 지르고 취적산까지 십리 길을 뛰었는데 관군이 새카맣게 포창안으로 들어섭디다.

무음천까지 추적해 왔는데 아직은 보이지 않는데요."

", 그렇다면 어서 떠나야겠군. 이 늙은이는 이제 돌려보내주어야지." 마감동이가 유사

과가 탄 말을 들판 쪽으로 끌어내어 말의 볼기를 힘껏 갈겨주니 말은 놀라 부르짖으며 달

려갔다. 그들은 여유있게 모란산을 넘어서 멸악산맥의 깊은 골짜기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2

승지 신엽은 이른바 청직이라 하여 응교 교리 집의 사간 등의 요직을 거쳤고 품계는 정

이품에 이르렀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정세 판단이 민첨하여 소론 중론에서도 남을 탄핵

하고 벌주는 일에는 마치 칼날과도 같았다. 황해도 관찰사로 임규가 되어 나가더니 그 두

달도 못 되어 감사의 겨질이 거론되고 있었다. 이유는 이세백이 감사를 하던 당시로부터 문

제가 되었던 해서의 명화적당 때문이었다. 특히 구월산에서 일어나 스스로를 활빈의 녹림

처사라고 부르는 장길산 일당은 조정 중신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디. 사실 이름없는

포악무도한 도적떼들에 대하여는 걱정이 없었으되, 스스로 의적을 자처하면서 빈민을 규휼

하는 활빈행을 실천하는 무리들처럼 국체에 위험을 끼치는 자들은 없었다. 그런 부류들이야

말로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아 드디어는 조정에 대하여 창끝을 들이대는 무리로 변할 가능

성이 컸다. 큭히 최근에 일어난 조읍포창의 점령은 그것이 국본을 떠닫칠 세곡에 대하여

난민에게 나누어준 행위로 지극히 위험하고 방자한 짓었다. 임규는 질책을 받고 곧 감사자

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었다.

해서에는 화적당뿐만 아니라 광범하게 퍼져나간 유민들로 하여 고을마다 크고 작은 민요

가 그치지 않고, 인심이 차츰 관으로부터 이반되어간다는 급한 장계가 속속 들어오니 주상

이 크게 근심하여 편전으로 중신을 모으로 진무할 도리를 물으리 영상 김수항이 말하였다.

"화적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령 방백이 정치를 잘못하므로 참자 못한 백성들이 그

리 떨어지는 것이오니, 수령과 서리들을 단속하고 백성을 무마하여 화적을 토벌하여, 나라의

근심을 없앨 단호하고 결단성 있는 자를 감사로 택인하여 상하를 진무함이 좋을까 합니다."

여러 중신들도 그런 말밖에는 다른 소리가 없었다.

"택인을 어찌하면 적당한 인물을 얻어 해서에서 일어나는 민요를 무마하겠소." 주상이

물으니 여러 중신들이 일시에 안이하게 아뢰었다.

"이것은 승정원으로 하교하시어 이품 이상의 조관에서 시원임대신에게 공천을 받도록 하

는 것이 합당한 줄 아뢰오."

주상이 승지 하나를 불러서 각 시원임대신에게 나아가 사흘 안으로 공천을 하도록 지시하

였다.

실상 정치가 잘못되었다면 사람 하나를 갈아 쓰는 것으로는 성난 백성이 진정될 리도 없

, 근본적으로 백성을 편하게 보살필 정책의 변동이 있어야 하거늘, 언제나 조정에서는 그

러한 근심이 생겨날 적마다 누가 억누르고 압박하는 데 그 술수가 능한 사람인가부터 의논

하던 것이었다. 만약 백성 자신들에게 진무할 책을 직접 물었다면 그들만큼 자기의 처지를

몸소 겪어서 알고 있는 사람이 따로 없는지라 자연히 가랑ㄴㅈ게 되련만, 착취와 압제의 기

구는 그대로 남겨둔 채 또다시 우두머리만을 새로이 갈아치우려는 것이 아닌가.

중신들이 승지의 전명하는 하교를 받고 공정하게 택인하여 천서를 정원에 올리니 그 가

운데에는 승지들 중의 하나인 신엽도 끼어 있었다. 개봉이 되고 본즉 승지 신엽을 황해감사

로 지목한 이가 다섯이나 되었다. 신엽은 입궐하여 주상께 승후하였다.

"신은 백의 자격이 없고 그러한 중임을 맡을 덕이 부족합니다." 주상이 그의 사양을 물

리치며 하교를 내렸다.

"이번 일은 대신이 다섯 사람이나 공천한 것이요, 백성을 구제하고 나라의 근심을 없이

하려는 것이니, 경은 번거로이 사양하지 말라."

신엽으로서는 임금의 곁을 지키는 승지의 자리를 내놓고 외방의 도백으로 나가는 일이

, 그렇지 않아도 정국이 하룻밤새가 다르게 바뀌어가는 판이라 어쩐지 내키지 않는 자리

였다. 한번 더 사직하는 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대신들의 중론이 분분하였다. 공천을 무시하

고 도탄에 빠진 해서의 백성을 생각하지 앟는 것은 신하 된 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책을 가진 조정 신하가 외방에 나가기를 꺼려하는 것은 정국에 대한 야심이 있어서가 아닌

가 하는 극언까지도 나올 판이었다. 신엽은 하는 수 없이 황해도 관찰사의 직을 제수받게

되었던 것이다. 애초에 신구 관찰사의 경질 문제가 나오게 된 것이 해서 각처의 난민들과

화적당의 발호 때문이었으므로, 신엽이 관찰사로 부임하자마자 처리해야 할 일은 적당의 토

벌이 급선무였다. 이제 해주에서 신연이 오기 전에 신엽은 제일 먼저 만나보아야 할 사람

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전 관찰사였던 승지 윤반과 또한 그 전의 관찰사로 재임기간이 길

었던 한성판윤 이세백이었다. 이세백은 우암의 사람으로서 노론이었으되 암행어사를 거치고

평안 황해 양도의 관찰사로 오래 나가 있어서 그쪽 지방의 민심에 가장 밝은 사람이었다.

신엽은 하인 하나만을 앞세우고 호마에 타고서 삼청동 이판윤의 집으로 나아갔다. 솟을대문

안에는 초헌과 남녀가 놓여 있어 어느 댁 대감인가가 먼저 방문한 듯 싶었다. 신엽은 사랑

으로 바로 들지 않고 아랫방으로 건너가서 책방에게 말하였다.

"손님들이 와 계신 모양인데 나는 은밀히 뵈올 일이 있어 여기서 기다리겠네." "판서 대

감과 전 좌윤 이인하 대감께서 와 계십니다." 신엽이 어차피 자리를 같이하게 될 판이라

그냥 기침을 하면서 이세백의 사랑으로 다가섰다.

"승지 신대감께서 오셨습니다."

신엽이 들어가자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반색을 하였다.

"어쩐 일로 오늘은 신대감까지 이런 누옥을 찾아주셨소." 신엽이 두 사람을 보니 이인하

는 동색으로 소론이라 어언 허심탄회한 마음이 되었다.

"해서로 나가시게 되었다지요?"

"모두 공천 덕분이올시다. 그러나 이러한 막중한 일을 어려운 시절에 감당을 해낼까 걱정

이지요." ",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신대감이야 오랫동안 안의 청직만을 맡아 하셨으니,

오랜만에 민심도 살피고 치민에 대하 경력도 쌓아야 이 다음에 국정을 잘 살펴 주상을 보필

하게 될 것이 아니오니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올시다. 때가 더욱이 흉황이라서..."

엽이 속시원하게 말하자 이세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기도 작을 때에 짜버려야지 키워놓으면 목숨까지 위험하지요. 제가 해서에 있을 적에

도 가장 큰 두통거리가 몇가지 있었소이다. 그 제일 첫 번째가 감영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후미지고 궁벽한 곳의 백성들이 언제나 나라를 등진다는 점이지요. 그 다음에는 아

전 소리 자리가 위태로운 기색만 보이면 이내 등을 돌리고 마는 것이오. 그리고 세 번째로

는 바로 그 장씨 성을 가진 자가 이끄는 자칭 활빈당이란 무리요. 일찍이 들으셨는지 모르

나 장아무개란 자는 전에 해주감영 옥을 탈옥한 살인수였다고 합니다. 그자와 구월산의 적

당들에 관하여는 각 지방 수령들의 밀계에 여러차례 나오고 있거니와, 수년 전에는 문화 재

령 신천 등지에서 관리를 모칭하거나 관민을 여럿 살해한 일이 있소이다. 구월산 인근 읍의

관아에는 슬며시 일러주는 백성과 하리배들이 있어서 더욱 토포하기가 어렵지요. 그렇다고

따로이 토포군을 대대적으로 일으키자니 이 어려운 시절에 군비도 문제려니와 백성이 더욱

난경에 빠질 처지라 큰 골칫거리지요."

이세백이 관찰사로 재임시에 겪은 일을 요점을 들어 말하였고, 신엽이 재차 따져 물었다.

"감영에서 단호하게 나가지 않으면 점점 자라날 것입니다. 이제 보니 해서는 아예 적당들

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그려. 대감게서는 재임시에 그들 혈당의 근거지초자 한번도

탐문해보지 않으셨나요?" 이세백은 미간을 찌푸리고 열을 내에 얘기하는 신엽의 얼굴을 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글쎄요... 아무리 화적의 무리라고는 하나 그들은 일테면 수목이 되지 못하고 버섯이 되

어버렸거나 음식이 상하여 곰팡이가 되어버린 자들이니, 원래는 순한 백성들이 변하여 그리

된 것이지요. 헌데 저는 무리하여 치민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상하 명복에도 각박한

것은 취하지 않으려 하지요. 무리한 거병을 피하여 도적의 우두머리를 제거할 계책을 세워

보았으나 예상보다는 대단한 무리들이었소." 곁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이인하가 말하였다.

"김식이라는 자가 그때에 살해되었지요."

이세백은 무장으로서 서반인 이인하를 돌아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대감은 김모라는 자를 잘 아시겠지만 칼솜씨가 훈련원에서 으뜸이라던 무사

였소. 제가 해서로 부임할 제 그 고장에 난민과 도적이 끊이지 않는다 하여 특별히 뽑아

막하에 두고 든든히 여겼던 사람이오. 그 김식이와 표한하기로 이름난 감영의 장교들을 뽑

아서 화적괴수의 목을 베어오라 하였으나,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송화 저자에서 참살당

하였소."

신엽은 혀를 찼다.

"허 저런... 아니 훈련원에서 뽑힌 으뜸 무사라는 자가 일개 도적의 칼에 맞아 죽었단 말

인가요?" 이세백이 그것 보라는 듯이 신엽의 놀란 표정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도적 괴수가 아니라 그의 부하라는 자에게 당하였소." "그렇다면 훈련원 포도청

오위영 등의 각 군영에는 그까짓 들쥐 하나 잡을 무사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요?" 이인

하가 신엽의 말을 받았다.

"해서 전체를 적굴로 본다면 그들 도적과 맞서서 몇몇 장졸이 대적한다는 것은 스스로 함

정에 빠져드는 일과도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예전 효종 연간에 나라에서 민간에 숨어 있

는 기이한 재목들을 널리 찾게 하였는데, 스스로 뛰어난 재간을 터득한 자들이 무수히 있

었다고 합니다. 그런 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익숙한 지형에 의거하여 숨어 있으면, 제아무리

효용이 절륜한 무장이라 할지라도 싸우기가 매우 곤고한 노릇이지요. 그러니 이런 일은 나

라 안의 근심이라 하여 가벼이 할것이 아니라, 북관에서 여진을 토벌하듯 감영과 군읍의 군

병을 일시에 을으켜서 오랜 기간을 두고 토포하여 아예 적굴을 쓸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내통이 된 듯한 관민을 탐색하여 잡아내고 그들과 연락이 있는 마을을 초토

화하고 적당을 고립시켜야 하겠지요." 이인하게 무장답게 얘기한즉 이세백은 침통하게 말

하였다.

"거병이란 태평성대에도 국난이 아니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요, 지금같은 흉황에는 더욱 못

할 노릇입니다. 비록 도적은 잡는다 할지라도 우매한 백성으로 군졸에 뽑혀서 무고히 죽는

것과, 군졸이 한번 지나가면 마을 촌촌이 개견까지 화를 당한다고 고금에 널리 알려져있소

이다. 저는 화적당이 완전히 소탕되지도 않으려니와 오히려 백성들 사이에 원한이 커져서

급기야는 더욱 큰 우환이 생기리라고 봅니다. 덕이 있고 넉넉한 정사를 펴서 그들이 스스

로 양민으로 돌아오도록 순치시켜야겠지요."

그러나 강경하게 조처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이인하와 신엽이 같았다.

"해서의 근심뿐만 아니라 삼남에서도 도적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이번에 구

월산을 샅샅이 뒤져내서라도 도적의 씨를 말리지 못하면 근심은 더욱 커져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될 것이오." "군령을 엄히 세워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고 암행하여 탐

색하는 한편 정확하게 적굴을 찾아내어 불시에 급습하는 것이 관민에게 모두 유리하겠지

."

이세백이 절충하여 말하였고 신엽이 그에게 물었다.

"그렇게 강대한 무리를 능히 제압할 지모와 무예에 뛰어난 자가 혹시 없겠습니까?" "

쎄요. 감영에는 장교들이 있지만 김식과 같은 재간을 능가할 자는 없는 없는 줄로 압니다.

혹시 이대감께서 눈여겨보신 무장이 있으면 천거하시지요." 이인하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아까부터 토포에 관한 말씀이 있고 나서 저는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만, 몇가지

거리끼는 바가 있어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근심을 제거하는 일에 가릴 것이 무엇이오." 신엽이 재촉하였고 이인하는 머뭇

거리다가, "근년의 소연한 정국과 관련이 깊은 사람이라서..."하며 털어놓았고 당색이 다른

이세백이 얼른 눈치를 챘다.

"혹시 광남과 관계 있는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갑자년에 한양에 살주계와 검계라는 난민이 횡행하였을 때에 조정쟁론의 불

씨가 될까 하여 병판과 좌우 포도대장이 논의하고 일단락을 지었지요. 그때에 바로 수습하

지 않았다면 조정은 피바람이 몰아쳤을 겝니다.

전에 포도 종사관을 지내던 자인데, 김익훈이 어영대장을 하던 시절에 그 댁의 식객으로 있

었답니다. 문제가 미묘하여 그자는 피혐하노라고 관직을 사직하였지요. 통제영에 도목을 올

렸으나 그자는 끝내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벌써 햇수로 두 해가 지났는데 그러한 미관말

직의 사람에 까탈을 잡아 이러쿵저러쿵할 사람이 누가 있겠소. 나중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

면 나도 나서리다."

당색 다른 이세백도 스스로 난처함을 털어내려는 듯이 말하였고 신엽도 거들었다.

"광남의 일이라면 우리가 다시 거론할 이유가 없소이다. 그리고 이것은 도적을 토포하는

일이라 그 일이 끝나고 나면 제가 그 사람을 끝까지 거둘 필요도 없이죠. 그 사람의 수완

여하에 따라서 나중에 영전을 시키든 상급을 내리든 할 게 아닙니까. 대감은 천거만 하시지

. 쓰는 것은 제가 알아서 하고 토포가 끝나면 적절히 대우하여 돌려보내겠습니다." 이인

하가 침착하게 말하였다.

"전 포도 종사관 최형기라는 자가 그자입니다. , 배오개 누렁다리 부근에 산다는데 사람

을 보내어 수소문하시면 즉시 닿을 것입니다.

"최형기라... 어디서 많이 들었는걸."

이세백이 중얼거리자 이인하가 말하였다.

"원래 그자의 가계가 아전붙이라 무과를 하였어도 제 길로 환로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습

니다. 사실 포도청에서는 그만큼 민첩한 자가 없지요. 이대감께서 해서로 데리고 가셨던

김식이도 최형기의 아랫사람입니다. 최형기는 나는 제비를 단칼에 베인다는 소문입니다."

"미거한 출신이 공에는 급급하기 마련이지만, 자못 불안한 데가 없는 것도 아니지요.

쓰고 적당한 때에 버리면 이런 일에는 아주 적합할 것 같소이다." 이인하는 신엽의 너그럽

지 못한 말을 듣고 공연히 얘기를 꺼냈나 하며 후회하였으나 이미 늦은 일이고,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 치부해버렸다.

"오늘 대감 댁을 방문하기를 아주 잘하였습니다. 요행히 이대감도 여기서 뵙고 아주 유익

하였습니다. 해서에 부임하기 전에 다시 들르겠소이다." 신엽은 이세백의 집을 나와 홀가분

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는 집에 가자마자 책실을 불러 분부하였다.

"너 내일 일찍 배오개로 나아가 누렁다리 사는 종사 다니던 최형기라는 자를 수소문하여

데리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모대감이 추노하는 일인데 급료를 두둑히 내련다고만 말해주어라." 신협은 일단 자기가

쓰기로 작정하였으니 급료는 후하게 내릴 생각이었다. 그의 전정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겠

다면 넉넉히 먹고 살게는 보살펴주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는만큼 그자가 가진 기량을 남김

없이 발휘시켜서 적당을 끈내 소탕해야 될 것이다. 신엽으로서는 해서의 치민이 문제가 아

니라, 그의 부임의 목적이 온통 구월산의 토벌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초토의 책을 꺼내던

이인하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가혹하더라도 능력이 쉽게 드러나 인정받는 것은, 이세백

, 윤반도, 임금도 끝내 해내지 못했던 일을 자기가 수삼개월 만에 해치워버려야만 한다고

신엽은 생각하였다. 이번에 그가 가사의 제수를 받은 것은 그의 단호한 결단성 탓이었다.

그는 일찍이 남형과 가혹한 조처로 남구만의 탄핵을 받은 적도 있었다. 신엽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결연한 생각으로 신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형기가 포도청을 사직하고 나온 것이 검계가 나던 갑자 가을이었고 을축을 지나고 벌써

병인 시월이니 꼭 들어찬 두 해가 되는 셈이었다. 그는 사직하고 나서 이듬해 봄에 도목에

올라 통제영으로 발령이 났건만 여러 가지로 사양하였다. 파직이 되었던 사람이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복권되게 마련이지만, 최형기로서는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그가 그렇게

조심하여 처세하였음에도 정국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버렸던 것이다. 그는 김익훈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주위에서는 최형기가 한때 그의 막하에 있었다 하여 아예 광

남의 파로 여기고 있는 듯하였다. 만약에 최형기가 조금의 지벌이라도 있거나 뒤를 보아주

는 중신이 있었다면, 그런 문제는 아예 거론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미한 출신이어서 극히

조심하여 지내온 처세가 오히려 그를 궁지로 몰기가 더욱 용이하도록 만들었다. 소론뿐만

아니라 광남파의 사람들도 최형기가 분명 그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표리가 부동

한 자라고 괘씸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물론 이것은 그와 같은 직계의 무관이나 부장들이

수군대는 소리지만, 위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 자네의 전정을 내가 책

임질 테니 내 사람이 되어라 하며 손길을 내밀어주는 이가 없었다. 이는 세상 구설에 오른

자로 택인하여 구태여 자기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는 사대부들의 전통적인 기휘의 탓이었다.

그들은 아예 어린아이 적부터 그 총명과 임기응변을 보아 인재를 길러내어 특채시켜서 조

정에 자기 세력을 심기도 하였으니, 천생으로 상전을 잘 만나서 서로 상부상조하여 정국의

소용돌이를 뚫고 나간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최형기는 김익훈이 완전히 영락해버리든지

아니면 스스로 수습하여 복권이 되든지, 결판이 나야만 자신이 환로에 다시 발을 디딜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김익훈이 다시 영달한다면 최형기는 이제라도 그의 허

리끈을 단단히 붙잡을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최형기의 판단에 의한다면 그는 조정 중신들

을 여럿 죽게 했던 고변자였다. 언제 입아과 처지가 바뀔지 모르는 것이었다. 눈짓으로 주

고받는 싸움이라면 모르되 피를 본 싸움은 피를 부르게 마련인 것이다. 충천하던 김익훈의

기세는 이제 한풀 꺾였고 그는 날로 몰리는 중이었다. 최형기는 그가 처참한 최후를 마치게

될 것을 미루어 짐작하였다. 그러나 재산이든 권력이든 마찬가지이지만 그 끝이 지루하게

끌면서 오래가는 법이 아니던가. 최형기는 마치 까마귀처럼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그가 죽

기만을 기다릴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는 환로에 대한 정이 뚝 떨어져버린 듯이 안면을

익힌 서반 대신들의 문간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권토중래하려면 옥당 청

직의 문사들과는 다른 입장이라 꾀죄죄한 처지로는 어림도 없을 듯하여 재산 경영에 몰두

할 생각이었다. 자고로 무장이 되려면 호방하고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포도청의 부장이

나 종사관들 가운데 최형기만큼 시정에 밝은 자가 따로이 없었다. 최형기는 시정아치들의

약점이나 어두운 속내를 훤하게 꿰고 있었고, 시정배들도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잘 알았다. 이제 포청을 물러나온 처지에 그들을 핍박하거나 위협하여 이득을 보는 것은 천

만부당하니, 그들을 슬그머니 손아귀에 넣어 자기를 돕도록 만들 셈이었다.

최형기가 맨 처음에 손을 댄 것은 역시 그의 집동네 부근인 배오개였다. 소의문 쪽은

관직에 있을 때도 그의 구역이 아니었고, 종루시전은 워낙 뿌리가 완강하기 때문이었다.

는 배오개에서 아무것도 벌이지 않은 빈 점포를 내어놓고는 준수하게 생긴 기민한 사동 하

나를 고용하였다. 그리고 그는 점포 안쪽의 깊숙한 방에 화로를 끼고 앉아 담배나 태우고

팥죽이나 비우고는 하였다. 원래 기방은 그의 기찰 요소라서 최형기는 퇴기들을 여럿 알고

있었다. 대개 아전붙이나 별감이나 역관의 처첩으로 들어앉게 마련이라, 최형기는 광통방

과 다방골 등지에서 이름을 드날리던 퇴기들을 수소문하여 주로 역관들에 줄을 넣기로 하였

던 것이다. 의주나 해서로 일 년에 한번씩 사신이 내왕하며, 동래에서는 아예 왜인과의 교역

이 사시사철 허가되어 있으니 모든 당화와 왜화가 그런 물길로 흘러들어오는 것이었다.

인들이 미리 자금을 넣어 사행에 끼어 직접 무역도 하지만 역관 자신들이 사대부의 청탁을

받거나 스스로 무역을 하여 역관이 대물림되면 장안에서 거부가 되지 않는 이가 거의 없었

. 그러나 물화란 서로 소통되어 사고팔게 마련인데 이런 물건이 공공연하게 매매될 수

없음은 뻔한 이치였다. 누군가 팔아 거대한 이윤을 얻은 것이 회자되면 노리는 이도 생길것

이요, 질시하는 이도 있을 것이며 탄핵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물건을 산 쪽

에도 구설이 그치지 않아 분수에 넘친 사치라거나 재물의 출처를 깨끗지 않게 여길 것이며,

사헌부나 조정 중신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 내리막길이 되기가 십상이었다. 자연히

뒤로 숨어서 매매가 이루어지던 것이다. 최형기는 부장들이 그런 기미를 알면 중개자에게

압력을 넣어 기찰전을 심심치 않게 뜯어 쓰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형기는 바로 당왜화

의 매매 거간이 되었던 것이다.

역관의 처첩으로 들어앉은 광통방의 창기들에게서 통자가 들어오면 우선 찾아가 물건을

확인하고 나서 원매자를 물색하였다. 궁중 나인들이나 각 권세가의 하님들에게 물품의 물

목을 들여보내면 사람이 점포로 기별을 하였다. 날짜를 맞추어 양쪽에서 물품과 은자를 가

지고 오면 그가 중개하여 흥정을 붙이고 구전을 먹었다. 포교들도 최형기가 예전의 상관이

라 알고도 기탈전을 요구하지 못하였고, 최형기는 또한 그 나름대로 한철에 한번씩 담당구

역의 포교 몇과 부장을 불러 용채도 쥐여주고 새옷도 지어주고 하였다. 그러니 자연히 어

느 점초에 가면 당홰화의 매매가 틀림없이 소문도 안 나고 잘 풀린다고 알려지게 되어,

오개에서 그의 점포가 가장 명색이 없어도 속으로는 알심이 두둑하였다. 이렇게 되니 자연

히 요령을 모르고 노는 돈을 가진 장사치가 대금을 내놓으며 이윤을 반분할 것을 들고 나왔

. 최형기는 단골에게는 적당히 물목을 들여주고 자기가 사서 직접 매매할 것은 모조리

사들였다. 물건은 절대로 점포에 두지 않고 이른 아침이나 땅거미 내린 뒤에 누렁다리 그

의 집 광에 재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객이 오면 필요한 물건만을 전에 내려다 보이고 팔았

. 두 해 사이에 그는 옆집을 사서 담을 터버리고 광을 신축하고 하면서 착실히 경영을

하였던 것이다. 최형기는 그러나 점포에서는 수수하게 중치막에 사방관을 쓰고 곰방대를

물고 앉아서 술값이나 얻으로 오는 활터 한량들과 바둑도 두고 한담도 하였다.

그의 점포에서는 당왜화는 무엇이든지 취급하였다. 일광단 월광단 공단 대단 모초단 한단

왜단 영초단 우단 모단 등등의 각종 비단과 낭릉 화릉 추릉 항라 갑사 생초 숙초 등의 청

나라 비단에다, 금패 호박 밀화 산호 진주 청강석 유리 진옥 수만호 대모 서각 사향 용뇌

우황 녹용 용주 한충에다가, 천은 화대모 한중향 회서피 등의 진귀한 물품을들이 손님의

청에 따라서 사흘 말미만 주면 즉각 당도하였다. 최형기는 한량들과 마주 앉아서는 절대로

조정이나 관청에 관한 이야기는 비추지도 않았다. 혹 누군가 무과에 대한 얘기나 무장에

관하여 말을 꺼내어 이러쿵저러쿵하면, 그는 잠자코 턱이나 쓸고 있든지 문득 시정의 얘기

를 꺼내어 딴청을 펴는 것이었다. 몰이에 쫓겨 궁지에 빠진 짐승은 결코 섣불리 덤벼들거나

움직이지 않고 덤불에 숨어서 급박한 위기가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가 비록 이전에 종사관이었다 할지라도 저자에 나와 시정배가 되었으니, 아무도 그가

다시 환로에 나와 승급과 출세를 바라리라고는 여기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세월이 재물 또

한 권력에 못지않아 부가옹응 어느대든지 놓은 공명을 따낼 수가 있었고, 조정 대신이라 할

지라도, 그의 수하에 이재의 능력이 있는 자를 두어 치부하기를 꾀하였다. 형기의 장사라는

것이 곡물이나 어염이나 채소를 쌓아두고 번거롭게 이리 다투고 저리 외치는 열립 장사도

아니고, 뒷전에서 수군수군 해치워버리는 거래라서 표도 나지 않고 남들이 능멸할 바의 것

도 아니었다.

최형기는 그날도 청룡정 활터에서 내려온 한량들과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곁에 앉

아 들여다보던 한량이 말하였다.

"이병사 댁에서 우황을 구한답디다. 그 댁의 손자가 경란기가 심하다지요." 그자는 무심

코 말하였지만 최형기는 놓치지 않고 바둑돌을 쥔 채로 바깥에 앉은 사동에게 일렀다.

"경상도에 나간 이병사 댁이다. 남부에 있으니까 찾아가서 우황이 있노라고 전하고 오너

." "우황이 떨어졌을 텐데요."

하니까 최형기는 문갑 서랍을 열고 치부책을 이리저리 들추더니 한곳을 손가락으로 짚어보

며 말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작년에 사행 나갔던 김동지 작은댁네 들러라. 작은마님에게 하인을 보내

면 즉시 지불을 하겠으니 우황을 전부 내달라고 하여라." 사동이 급히 뛰어나가자 그제사

최형기는 손에 쥐었던 바둑돌을 쳐들고 이리저리 둘 곳을 찾았다.

"가만있자... 아까 어떻게 두었더라..."

이제까지 지켜보고 있던 두 한량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먼저 입을 뗀 사람이 말하였

.

"말을 꺼내기가 무섭군요. 선다님은 우리에게 팥죽 한그릇 내시고 큰 수지를 맞추십니다."

"자아... 이거 꼼짝없이 죽었는걸."

최형기는 바둑돌을 놓으면서 딴전을 피웠다. 처음에는 한량들이 저희들의 활터 선배랍시

고 앞으로 승진이 된다는 의미로 최선전님이라 부르더니 조금 가까워지자 전직대로 종사님

이라 불렀다. 최형기가 자기는 이미 시정에 나와 앉은 사람이라 종사라고 불리는 것은 가

당치않다 하여 그냥 무과를 하였다고 선달로 부르게 하였고, 거래차 그를 찾아오는 이들도

자연히 그를 선다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계십니까?"

누군가 밖에서 찾는 소리가 들려 최형기가 내다보니 처음 보는 손님이었다.

"누구를 찾으시는지."

최형기는 그의 복색과 인상을 보고 대뜸 그가 어느 정도의 신분에 있는 사람인가를 알아

차렸다. 얼굴이 곱상하고 얌전하게는 생겼으나 선비라기에는 눈빛과 입언저리에 위엄이 없

으니 책상물림이기는 하되 남의 밥을 먹는 자가 분명하였다.

"포청 다니던 최종사라는 분을 뵙고자 합니다."

최형기가 그의 아래위를 쓱 훑어보고 일부러 들어오란 말도 없이 장자꾼 티를 내었다.

"무슨 물건을 찾으시나, 아니면 내놓을 물건이 있소?" "그런게 아니라 저..."하면서 그는

방안을 기웃거리고 사내가 둘이 앉아 있는 것을 살피고는 머뭇거렸다.

"이 사람 물목도 알아보지 않고 온 모양이군. 다시 가서 자세히 알아가지고 나오시오.

기는 당왜화의 거래만 하는 곳이니까."

최형기가 문을 닫고 들어오니 그자는 밖에서 서성대며 말도 못 꺼내고 안절부절 못하였

.

"저어 사실은 승지 신대감 댁에서 왔습니다만..."

최형기가 안에서 물었다.

"헌데 종사는 왜 찾나?"

"긴히 부탁하실 게 있으시다고..."

", 괴이한 일이로군. 거래할 물건도 없으면서 사람을 보내다니."하면서도 최형기는 공연

히 마음이 설레었다. 승지라면 임금의 무릎 아래 있는 사람이고 웬만한 무관의 앞길은 혀끝

으로 간단히 좌지우지할구가 있는 것이다. 그가 거래도 아닌 부탁의 말을 하기 위하여 자기

에게 사람을 보냈다면 심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최형기는 안쪽에 따로이 거래를 하기 위한

응접실이 있었건만 한량들을 따버리느라고 돌을 떨어뜨리며 말하였다.

"오늘 바둑은 내가 졌네. 그만 두도록 하지."

"선다민, 술은 어찌됩니까?"

"밖에 낯선 이를 세워두고 우리만 마실 수가 있겠는가?"하자 그들은 금방 눈치를 채고 옷

을 털며 일어났다.

"에이, 공연히 골마리만 앓았군. 오늘 술은 빚이올시다?" "그리고 말 보태드린 빚두 있구

."

그들이 나가자마자 최형기는 신승지 댁에서 온 사람을 들어오도록 하였다.

"그 댁의 책방으로 있습니다. 다름아니라 대감께서 이르시기를, 최종사가 기찰에는 워낙

명자가 난 사람이니 긴한 부탁을 드린다구 하시면서 뵙자고 여쭈랍니다." "이미 저자에 앉

아 시정아치가 되어 손득이나 따지고 있는 사람에게 기찰이 다 무어요." "추노할 일이

있는데 푸청에는 알릴 수 없어서 부탁드린답니다. 보수는 얼마든지 내시겠답니다." 최형기

는 추노라느 말이 나오자 그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임을 알았다. 적어도 그쯤 되는 집

안의 노비라면 한두 해에 박힌 것이 아니요, 대물림이기 쉽고 노비들도 권세가에는 그를 뒷

대어 자세하며 이를 취하여 살아가기가 편한즉 구태여 달아날 리도 만무한 것이었다. 몰락

한 양반이라면 몰라도 당대의 세도가 댁에서 추노란 당치 않은 말이었다.

"허허, 보수를 얼마든지 내겠다니 어디서 왕소군만한 미색을 종년으로 두었는가." 최형기

는 어이없는 웃음을 웃고 나서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가서 너희 주인에게 말해라. 아무리 포도청 종사관이 종육품의 미관말직이기는 하지만

세도가의 노비나 잡으러 다니려고 저자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해라. 어서 냉큼 일어나지

않으면 무관을 능멸한 값으로 모가지를 비틀어서 천변에 내칠 것이다." 신엽의 책방은 낯

이 파랗게 되어서 오금을 못 펴다가 최형기가 손가락으로 방문 밖을 가리켜 보이자 얼른 일

어나 신도 제대로 꿰지 못하고 저자의 사람들 사이로 숨듯이 사라져버렸다. 최형기는 결코

화를 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짐짓 화를 낸 척했을 뿐이었다. 최형기는 그가 승지 신엽의 대에서 왔다고 말을 꺼

냈을 때부터 뭔가 특별한 일이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까짓 추노하는 일이라면 그짓만 언

제나 맡아놓고 해오는 별감배 출신이나 포교 출신의 무뢰한이 한양 성내에 한둘이 아니었

.

신엽이 승지쯤 되는 사람이니 전 종사관이 사노비를 잡으러 나서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면 우엇일까. 반대당을 기찰해달라는 것인가. 그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일이라

면 자기가 오랫동안 아래에 두어 부리던 자가 아니라면 맡기지 알을 것이다. 최형기는 빙긋

웃었다. 그렇군. 도적을 잡는 일이렷다. 한양은 또한 아니다. 한양이라면 구태여 자기를 은밀

히 부를 필요가 없이 포청에서 나서서 토포나 해나갈 것이다. 외직이로군.

승지에 걸맞는 외직이라면 관찰사밖에는 없었다. 신엽이라면 명민한 사람으로 주상의 무

릎 언저리로만 돌던 사람이 갑자기 격하되어 군수나 현감이 되어 나갈 리는 없을 것이었다.

"관찰사라..."

잘하면 줄을 잡게 될지도 몰랐다. 조보를 살펴보면 알게 되겠지만 집의와 사간에서 교리

승지까지 지내던 이가 밖으로 급작스레 나가는 것은 무엇인가 외방에 큰 근심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누구나 걱정스러운 일에는 측근자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시켜야 마음이 놓이

는 법이다. 그래서 그런 대명을 받잡고 나가면서 자신의 일을 도울 사람을 찾는 것이 분명

했다. 아마도 큰 도적이 일어났을 것이다. 최형기는 얼핏 삼남 지방과 해서 지방을 떠올렸

. 혼자서 이 궁리 저 궁리 하고 앉았는데 심부름 갔던 아이가 돌아왔다.

"시키신 대로 다 해두었습니다. 동지 댁에서 곧 우황을 가지고 오니까 값을 준비하라는

데요. 돈을 싫고 왜단을 구해달랍니다."

"응 그래 잘하였다. 그것보다도 너 얼른 요 건너 좌포청으로 달려가서 부장포교에게 내가

그러더라고 요새 나온 조보가 있으면 좀 보자구 그래라." 아이놈은 휭하니 달려나갔다.

방대 한 죽을 태우는 사이에 아이가 헐떡이며 돌아왔다.

"갑자기 웬 조보를 찾으시느냐고 묻데요."

"그래 뭐랬느냐?"

"셈이 안된 분이 계시는데, 갑자기 부지거처가 되어 시방 어디쯤 가계시는가 알아보신다

구 그랬지요." 아이가 눈을 동그라니 뜨고 최형기를 들여다보았다. 형기는 흡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잘 대답하였구나. 어디 좀 보자."

조보를 펴들고 이리저리 들춰보던 최형기는 역시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고개를 끄덕였

. 신엽위황해도관찰사특수라고 박혀 있었으니 그가 필요한 사람은 해서를 소연케 하는 명

화적을 토포할 사람일 것이었다.

"좋다... 외직에 나아가 공을 세우고 돌아온다면 광남과의 연루는 깨끗이 잊혀지겠지."

보를 들여다보며 최형기는 혼자 중얼거렸다. 최형기는 곰방대를 화로 위에다 탕탕 떨어버리

고 재를 덮었다.

"삼종아, 가게 문 닫아라."

"?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는데요."

"이 녀석아, 닫으라면 닫아."

최형기는 사동에게 일었다.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자."

사동이 영문을 모르는 채 가게의 덧문을 안으로 걸어 잠갔다. 그들은 장바닥의 혼잡을

지나 누렁다리로 하여 집에 이르렀다. 식구들은 그가 돌연 일찍 들어오는 것에 놀란 모양이

었다. 그의 아내가 말하였다.

"아직 저녁 준비가 멀었는데 벌써 닫구 들어오셔요?" ", 그럴 일이 있소." 그는 들어

가 앉기도 전에 사동 삼종이에게 일렀다.

"너 흥인문 밖으로 나가서 좋은 호마 한 필만 세내어오너라." ", 늠름한 구렁말을 빌려

오지요. 그리고 가죽 안장에 은동자 올린마구 제속까지 일습에 빌려올까요?" 삼종이는 역

시 빠른 아이라 제가 알아서 대꾸하는데 형기는 부드럽게 웃었다.

"허 그놈... 그래라, 네가 다 알아서 해오너라. , 어음이다." 형기가 소매 속에서 보름

짜리 어음을 내어 수결하여 주었다. 삼종이는 원래가 광통교 밑에서 깍정이들과 더불어 자

라났는데, 좌포청에서 꼭지단과 상번수들이 도적에 연루되어 잡힐 적에 불쌍하여 거두었던

아이였다. 얘기를 들으면 누군가가 거적에 싸서 철물교 밑에다 던진 것을 깍정이들이 밥찌

끼로 암죽을 내어 길렀다고 하였다. 그래서 철물교가 종루의 제삼교이니, 삼종이라고 지었

던 것이었다. 삼종이는 눈치가 빠르고 빈큼이 없어서 좌포청서 부장포교들의 사동 노릇을

하면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최형기는 기찰을 나다닐 때 삼종이를 여러번 데리고 다

녔고 그 아이도 형기를 매우 따랐던 것이다. 형기가 포청을 사직하고 나올 때 삼종이를 데

리고 나왔던 것이다. 눈치를 보면 삼종이는 유능한 포도장교가 되는 것이 원이었고, 어린 소

견에도 최종사가 아무리 못해도 나중에 병수사는 해먹을 사람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가

갑자기 세마를 내어오라 하였고, 때가 마침 시월 초의 도목철이라 어디 현감직이라도 하나

따낸 줄로 지레 짐작하는 듯했다. 외관의 발령은 정원 사월 칠월 시월에 걸쳐서 일 년에 네

차례가 있게 마련이었다.

"저녁 먹고 곧 나갈 것이니, 당신은 구군복과 전립을 손질하여주오." "구군복이오? 아니

당신... 출관하시는 거에요?"

최형기의 아내는 반색을 하면서 물었다. 그러나 그는 혀를 찼다.

"손질이나 해주어요. 출관을 하든 않든 그런 일에는 상관말고." 아내가 장롱을 열면서 혼

잣소리로 중얼거렸다.

"포청 일은 이제 그만 하셔요. 차라리 살아서 부귀를 누리는 게 낫지요." "포청이 아니오.

내가 아주 시정배로 평생을 보내는 것이 좋겠소?" 최형기가 말하니 그의 아내는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럼 승급이 되셨나요. 여보 그렇다면 통제영 같은 데로는 가지 마시구 경기도 어느 고

을 자리나..." 최형기는 아내의 호기심을 털어버리려고 슬쩍 말을 돌렸다.

"저녁에는 꼬리고음탕이나 한번 끓여보우."

"먼 변방에 나가신다면 차라리 그만두셔요. 지금 장사만으로도 수년내에 누만 전의 부자

가 될 수 있잖아요." 최형기는 대답을 않고 새로 낸 별채의 사랑으로 올라갔다. 저녁을 먹

고 있으려니 삼종이가 돌아와 말을 끌어다 놓았다고 아뢰는 것이었다. 최형기는 다시 안방

에 들어가 홍철릭을 입고 그 위에 남빛 협수 걸치고 검은 전복을 입었다. 상모와 구슬이

달린 전립을 쓰니 어느덧 늠름한 무장이었다.

"여보, 어디 신례라도 드리러 가시지요? 어느 댁에 가셔요?" 아내가 걱정 반 기쁨 반으

로 이리저리 묻는 것을 최형기는 모르는 체하고 밖으로 나와 목화를 신었다.

"제가 수종할깝쇼?"

삼종이가 문간에서 매었던 말고삐를 풀어다 끌어놓으며 물었고 최형기가 말하였다.

"괜찮다. 집에 있거라."

최형기는 대문 밖에서 말에 올라 천천히 종루거리로 나아갔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저

자는 파장이 되어 한산하였다. 제용감고개를 넘어 사직골로 들어갔다. 인왕산록과 백악산록

에는 문관들이 많이 살았고 조정 중신들은 대개 백악 근처의 삼청동이나 순화방이나 가회방

진장방에 많이 살았고, 사직골 필운대 옥류동 등지에는 맑은 선비들이 많이 산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궁에 가까워 궁인들이나 주상의 행차가 빈번한 곳이라 그럴 뿐이지 실은 맑은

선비가 그러한 요지에 살 수는 없었다. 그들은 문밖이나 문안이라 하여도 남산골 낙산 아

래녘 등의 변두리에 살았다. 최형기는 사직골 승지 댁에 멈추고 하마하여 솟을대문 앞에서

외쳤다.

"이리 오너라."

문이 열리더니 하인이 나와보고는 의젓한 구군복 차림의 무장이라 얼른 비켜서서 한 손으

로 대문 옆에 있는 허술청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안으로 듭시지요."

청지기가 앉았다가 일어나 예를 드리며 붓과 명함을 내놓았다.

"여기다 명자하여주십시오."

최형기는 전 종사관 최형기라고 썼고 청지기가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자마자 책방이 바삐

뛰어나왔다.

"이렇게 오실 것을 가지고 공연히 소인의 애를 태우십니까?" "아까는 피차 그리되었네."

최형기가 안으로 따라 들어가니 신엽은 무엇인가 쓰고 있다가 다 그만두고는 그를 반겨

맞았다.

"전 종사 최형기 현신하였습니다."

최형기가 장지 밖에 꿇어앉으며 공손히 절하였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최형기는 일어나서 방안에 들어가 단정하게 앉았다.

"그렇잖아도 아까 사람을 보냈더니 그냥 왔길래, 내일은 내가 한번 찾아가 만나려던 참일

." "황공합니다."

하고 나서 최형기는 당당하게 말하였다.

"해서로 나가신다는 것을 조보에서 보고 알았습니다. 막중한 직무가 계시온데 저 같은 한

미한 무장을 부르심은 대감께나 저에게나 또는 감영에서 보더라도 결코 흘려서는 안될 기

밀이라 일부러 책실을 꾸짖어 보냈습지요. 만에 하나라도 교만 방자하였다면 죽어 마땅한

죄올시다." 신엽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과연 듣던 대로군."

그는 설렁줄을 당겨서 술상을 내오라 일렀다.

"자네 예기는 벌써 이좌윤에게 들었네. 내가 이번에 임관찰사 대신에 그의 과만은커녕

석 달밖에 안되어 새로 관찰사로 제수받는 것은 해서지방의 끊임없는 민요때문일세. 자네

의 역량은 무장을 지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더군. 나를 도와서 민요를 가라앉히고 화적

을 토포하지 않겠는가?" "소인이 비록 포청을 물러나왔다 하나 대감을 부르심을 받고 이렇

게 구군북을 갈아입고 달려온 것은 관직에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올시다. 소인은 삼문에서

나온 뒤에 저자에 나가 앉아 요족하게 평생을 편안히 지낼 만큼 돈을 벌 기틀을 잡아두었

습니다. 그러나 짐작컨데 해서의 도적은 장차 나라의 큰 근심이 될 것입니다. 소인의 수하

장교인 김식이라는 자가 살해되고부터 언제가 기회가 닿으면 꼭 토포군의 앞장을 서리라 생

각하였습니다." ", 그랬었군."

신엽이 처음 듣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형기가 다시 말하였다.

"소인이 호종 무사로 대감을 모셔도 좋고, 아무런 직함도 없어도 좋습니다마는 한가지 설

원한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미관말직의 신변 잡사에 관한 일이로라 일일이 기억하시고 유념하시지 않을 줄 압니다.

소인은 일찍이 광남 김익훈이 어영대장을 지낼 때 그 댁의 식객 노릇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제가 광남의 일파인 읏이 여기는 이가 많사옵니다. 그러나 저는 광남이

고변하고 훈척이 되어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날로 득세하는 것을 보고 지감이 따로이 있

어서가 아니라 문벌도 지벌도 없는 자로서 근신해야겠다고 생각하여 그의 극성기에 떠났습

니다. 그리고는 제 힘으로 관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온데 연전에 한양 성내에 살주계라

느니 섬계라느니 하는 난민들이 일어나 소인이 기찰하고 잡아들였사온데 난민들은 거의가

시간배들이라 관청의 동향을 훤히 알고 있었사옵니다. 그들의 모략에 걸려 광남과 은밀히

소론을 도모할 계책으로 검계를 날조하는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그저 근신하며 울울이 지내고 있었습

니다. 대감께서 소인을 해서로 데려가려거든 소인의 전정도 열어주십시오. 모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소인의 후사를 위하여도 분골쇄신하겠나이다." 신엽은 최형기에 관한 다 알고

있는 얘기를 들으면서 그가 어쩐지 당돌하고 반지빠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미천한

출신을 벗어나려는 강하고 끈질긴 야심이 감출 수 없이 번뜩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저런

자는 내가 몰락할 조짐만 보이면 칼로 무를 베듯 할 사람이로구나, 라고 신엽은 혼자 생각

했다. 우선 도적을 토포할 의논부터 하고 일이 끝난 뒤에 은근히 꺼내어도 늦지는 않을 터

인데 참으로 영리하되 박덕한 자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글쎄 자네에게 그런 일이 있었던가... 어쨌든 나는 자네를 호종무사로 데리고 갈 수는

없네. 자네가 종사로 지냈으니 감목관이 마땅하겠지만, 그동안 승급이 되었을테니 만호가 어

떠한가. 내가 우선 데리고 가서 감영 외곽에 있는 등산곶 만호로 천거하여 명년 정월 도목

에 올리도록 해주지." 만호라면 첨사 병사 수사로 오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무관직이었다.

"소인에게는 과남합니다."

그때에 술상이 들어왔다. 신엽이 은잔에 술을 따라 최형기에게 내밀자 그는 극구 사양하

였다.

"먼저 대감께서 받으소서."

"아닐세, 오늘은 내가 아주 요긴한 사람을 얻었으니 특별히 권해야지." 최형기가 공손히

두 손으로 받들어 돌아앉아 마셨다. 신엽이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허 그 사람 참... 파격을 해야지. 이런 자리에서 그러면 내가 불편해서 안되겠네." 술이

몇순배 오가고 나서 신엽이 물었다.

"그래 아까 도적을 잡으려다 죽었나는 자의 얘기도 했네만, 자네 같으면 어찌하겠는가?"

", 김아무의 잘못이 몇가지 있습니다. 도적을 잡으려면 먼저 그 정황을 샅샅이 알도록

면밀한 기찰이 있어야 합니다. 도적의 수는 몇인가, 그의 장단처는 무엇이며 호불호는 무엇

인가, 도적의 내통자는 누구인가, 혹시 가족은 없는가. 그들은 어떠한 병장기를 쓰며 어떠

한 전술을 쓰는가 등등을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도적이 있는 적굴과 그가

빠져나가고 숨을 지형을 샅샅이 익혀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일시에 병력을 동원하여

에워싼 다음에 재빨리 적굴을 급습해야만 할 것입니다. 물론 유인해내거나 적당을 매수하

여 수괴를 죽이게 하거나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릴뿐더러 다

른 혈당을 일망타진할 수가 없게 됩니다. 원래 고금에 토포는 겨울철이 적합하다 하였지요.

대게 겨울에는 녹림이 헐벗어 굴혈과 골짜기가 드러나며 눈에 자취가 남아 도주하기가 어

렵고 불때는 연기가 몇십 리 사방에서 보이고, 도망하여도 추워서 노숙도 못할 뿐 아니라

식량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적당이 그 본거지를 일단 빼앗기면 그 다음에는 마치 토끼몰

이를 하는 것과도 같지요.

적지와 그 부근에 대한 기찰도 없이 적은 수로 도적과 직접 맞붙으려 하였다면 김아무개라

는 자는 죽여달라고 제발로 찾아간 격입니다. 소인 같으면 전 토포기간이 열 이라면 기찰을

아홉으로 잡겠습니다. 그리고 살수와 포수로 모든 군사를 채우고 단병접전은 되도록 피하는

것입니다. 일방 섬멸시키는 가운데 실로 무예에 자신있는 자들이 몰이에 지쳐서 피곤해진

적당을 하나씩 때려 잡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동절의 호랑이사냥 때에도 쓰는 전술이올시

."

과연 최형기의 말을 듣고 보니 앞뒤가 맞고 이론이 정연하며 용병전술의 하나 하나가 일

목요연하게 눈앞에 떠오르는 듯하여 신엽은 근심이 일시에 가시는 기분이었다.

", 이제 해서에 비로서 성은이 닿겠구나."

신엽이 술잔을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내일부터 떠날 준비를 하고 집안 정리를 해두게나." ", 분부대로 거행하오리다." 최형

기는 공손히 대답하고 나서 이어서 말하였다.

"몇가지 대감께 부탁이 있습니다."

"무언가?"

"호종 무사가 되었든 등산곶 만호가 되었든간에, 적당을 토포하자는 것이 대감과 소인의

뜻이 아니오리까?" "그래서..."

"이런 일은 면밀히 해야 될 줄 압니다. 절대로 소문이 돌아서는 안됩니다. 시정에 나가

있던 전 종사관 최아무가 승지 대감을 따라 해서로 나간다네, 하구 말이 돌면 일을 그르치

게 됩니다." 그것은 신엽도 바라는 바였다. 그렇잖아도 무엇을 모르는 친척붙이들과 연줄이

닿는 중인배들이, 하다못해 찰방에서 비장에 이르기까지 한 직임이라도 얻어 나가려고 뻔

질나게 사랑채 주변을 드나들며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처가나 혹은 외가 시골 작은집, 그리고 책방과 겸인이나 심지어는 유모 종년에 이르기까지

청탁을 한두 번 받아 보지 않은 사람은 그의 집안에 없는 듯하였다. 신엽은 남의 과만과

교대하여 부임하거나 특별히 도백을 하려고 나가는 게 아니라, 오로지 해서의 들뜬 민심을

진무하라는 주상의 특병을 받잡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간에서 쉽사리 생각하듯 감

사자리 한번은 영상을 바라볼 기틀을 닦는 기간이라는 말과는 실상 거리가 먼 외임이었다.

신엽은 그런 생각을 내색하지 않고 덤덤하게 대꾸하였다.

"그래야지..."

"신연이 당도하면 소인께 기별하여주십시오. 소인이 감영에 관하여 미리 알아볼 일도 있

고 또한 당부해둘 일도 있습니다. 일단 부임날짜가 정해지면 소인은 먼저 출발하여 벽란나

루에 가서 대감을 기다리겠습니다." "어째서 하필 또 벽란도인가?" "거기가 기순의 끝이올

시다. 강만 건너면 연안 배천이라 해서의 관문이지요. 소인은 강을 건너면서부터 등산곶 만

호 노릇을 하겠습니다. 절대로 소인이 포도청의 종사관이었다는 사실이 주위 아전이나 군

중들에게 알려져서는 안되니까요." "다 자네가 알아서 하도록 하게."

최형기는 덧붙여 말하였다.

"그리고 소인이 포청에 있을 때 함께 데리고 다니며 기찰을 시키던 명민한 포교가 두엇

됩니다. 이번 토포에도 그자들을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신엽은 붓과 종이를 밀어주며 고

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의 명자를 적어놓고 가게. 내가 대장께 일러 그 사람들을 호종 무사로 데리고

가는 형식을 취할 터이니."

최형기는 염두에 두고 있던 포교들의 이름을 써넣었다. 단병접전에도 능하고 기찰에도

민첩한 자가 필요할 것이다. 신엽은 명자를 받아서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그래 얼마나 걸릴 듯한가?"

"준비하고 기찰하는 데 넉넉자고 석 달은 잡아야겠지요. 동지섣달이 토포기로는 아주 최

적기입니다." 신엽은 최형기의 잔에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수괴의 목을 베면 자네는 병수사일세. 나는 자네만 믿네." 최형기는 다시 돌아앉아 술을

넘겼다. 이제부터 그의 전정은 신엽에게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튿날부터 최형기는 주변의 정리를 해나가는데, 고향 파주로 통기하여 아전으로 있던 삼

촌을 올라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물목이 적힌 지부책과 당왜화를 들여오는 역관들

의 명단이며 단골인 궁중나인들이나 각 권세가의 하님들에 관하여 상세히 알려주었다. 광에

재어둔 물건과 부탁받은 물건들, 또 아직 청산되지 않은 어음, 외상 같은 것들이 모두 수수

될 때까지만 맡아주는데 그 이익은 반분하자고 최형기는 제안하였다. 삼촌 되는 이가 워

낙 파주 양주 바닥서 이재에 빠르기로 둘째 가라면 서럽다 할 아전 출신이라 쾌히 응낙하

였고, 나아가서는 그의 가게를 아예 떠맡겠노라는 것이었다. 이제 뒷보는 든든히 받쳐둔 셈

이었다. 최형기는 삼종이에게는 따로 지시하여 거래는 꼭 네가 나서서 하되 언제나 반분하

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아내에게는 북관으로 올라 큰 이윤을 올릴 물

건에 대하여 살필겸 직접 청인과 거래할 길도 틀 겸하여, 서너 달 가있다가 해동이 되어 돌

아오겠노라고 적당히 꾸며대었다. 무변의 여편네들이란 오지랍이 넓어놔서 바깥일에 이리

저리 참견이 있을 뿐 아니ㅏ, 이번 일을 발설했다가는 틀림없이 부근에 사는 포청 부장들

의 여편네들에게 자랑조로 늘어놓을 것이었다. 최형기는 아내에게 다만 포청의 붕포교 아무

개를 일러주고, 가게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가서 부탁하면 될 것이라고만 말하였다. 그리고는

그가 언제나 데리고 다녔던 포교 두 사람을 퇴청후에 은밀히 가게 방으로 불러다 놓고 해

서로 나가게 된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들은 검계 살주계 등의 난민을 잡을 적에도 그의 손

발이 되었던 자들이었다. 하나는 훈련원 출신이요, 다른 하나는 시정 왈짜출신으로 완력이

세어 웬만한 낭관은 우습게 보는 자였다. 반완식이 백섭이 등인데환도와 철퇴를 제법 휘두

를 줄 알았고 전형적인 경아리들이었다. 그들은 최형기가 매우 유능한 포도관이라는 거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당대의 신엽 대감이 직접 지휘하는 일이고 오랜만에 외방 바

람을 쏘이는 것도 또한 해롭지 않은 일이라 자기들이 뽑힌 것을 고맙게 여기는 눈치였다.

"너희들은 신연이 당도하자마자 대감 댁으로 가 있다가 출발할 때 관찰사를 모시고 감영

으로 가는 것이다. 내 일에 관해서는 절대로 발설치 말고 모른 척해야 한다. 나는 먼저 출

발하여 벽란나루에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 한양을 떠난 그날부터 우리는 토포를 개시한 날

이라고 여겨야 한다." 신신당부하고 나서 최형기는 말 두 필과 짐을 꾸려놓고서 기다렸다.

짐이란 관복과 그가 아끼는 왜단검과 길양식과 노자 삼십 냥뿐이었다.

닷새쯤 지나서 신대감 댁 책방이 가게로 찾아왔다. 그는 지난번처럼 마구 지절대지 않

고서 주위를 살핀 뒤에 가만히 들어와서 조심스럽게 전하였다.

"신연이 당도하였습니다."

"어디에 있는가?"

"대감께서 숙소를 일러주었습니다. 제가 얼굴을 아니까 앞장을 서지요." 최형기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나섰다. 돈의문을 나서서 홍제원에 당도하니 번창하던 주막거리는 한산

한데 경주인에 앞에는 말과 사람들이 시끌벅적하였다. 역졸들이 바삐 들락거리고 사령배

들은 떠들썩하게 농지거리를 나누고 있었다. 책방이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수리의 사처를 물

으니 그들은 대번 조용해지면서 공손히 일러주었다.

"계시오?"

하는 책방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방문이 밖으로 및져지더니, 아전으로는 아깝다 싶을 정

도로 수염을 짙게 드리운 풍채 좋은 중년의 사내가 허리를 숙이며 나왔다. 신대감 댁 책방

이 뭐라고 말을 보태기도 전에 그는 마루 아래로 내려서며 말하였다.

"순사또께서 분부가 계셨습니다. 진장 어른입지요?"

수리가 한껏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최형기는 마루로 올라서며 책방에게 말항ㅆ다.

"자넨 가보게나. 대감께는내가 명일 새벽에 떠난다고 여쭙게." "그럼 또 뵙겠습니다."

아랫것들끼리도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책방은 밖으로 나갔고 수리는 안으로 들어와 아

랫목에 앉은 최형기를 향하여 문안을 올렸다. 평소같으면 형기의 성미로 그런 예는 폐하도

록 하였겠으나, 워엄을 보여야 할 외지로 나가는 길이라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여 보일 뿐이

었다.

"승지 대감의 이번 부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최형기가 틈을 주지 않고 그에게 갑자기 물었다. 수리는 얼떨떨한지 곁에 누가 없는데도

한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명색이 작은 고을이나 목의 수리가 아니요 관찰사가 있는

감영에서 올라온 수리인데, 고작해야 진장보다도 아래인 만호나 되는 자세 공연히 자세를

부린다고 아니꼬워하는 눈치가 역력하였다.

"어찌 생각하다니요?"

"전 관찰사가 과만인가?"

그제야 수리는 깨달았다.

", 본관께서는 주상 전하의 특명을 받잡고 나가십니다." 최형기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

수리를 노려보았다.

"우물쭈물하지 말라. 그저 관가에 앉아 딴생각이나 하면서 방백의 일기가 끝나 갈려 가기

만을 기다린다는 것인가? 나는 당장이라도 네 모가지를 베어 들판에 던져버릴 수가 있다.

등산곶 만호란 한낱 모칭에 지나지 않는다." 수리가 급해졌는지 고개를 숙여버렸고 방바닥

을 짚은 두 팔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상명은 새서에 들끊는 명화적을 토포하라는 분부시다. 안전께서는 임금의 명을 받잡은

토포사이시다. 그리고 나는 토포장이다. 이것을 명심하되, 발설하지 말라. 오늘부터 토포가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어기면 군형으로 다스린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최형기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편히 앉게."

이방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최형기는 그의 오금을 질러놓고 나서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나는 도적들만 기찰하고 다니던 종사관일세. 내가 일부러 신연을 나온 자네를 만나고자

한 것은 다름이 아닐세. 도적을 치려면 거병을 해야 하고 거병을 하려면 군기가 누설되어

서는 안되는 걸세. 군기를 지키려면 시정과 긴밀한 자네와 군병을 맡은 내가 손발이 맞아

야 하겠기 때문이네. 순사또께서 부임하는 즉시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네."

"분부만 내리십시오."

수리는 최형기의 호흡에 완전히 끌려들어와 있었다.

"인근 산촌에 호환이 났음을 널리 알리고, 사냥을 탄원하도록 해주어야겠네. 그리고 해주

를 자주 내왕하는 장사치들에 관해서도 알아야겠네."

"장사치들이야 해주뿐만 아니라 들고 나는 행상 차인배들까지 뜨르르 꿰고 있지만, 갑자

기 호환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리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자네는 시키는 대로만 하게."

최형기는 그렇게 윽박지르고는 넌지시 물었다.

"구월산의 장적에 관하여 요사이 새로 들어본 소문이 있는가? "글쎄요... 조읍포창이 결

딴난 뒤에 가산을 털린 집의 아들 형제가 감영에 찾아와 거병을 해달라고 탄원한 적이 있

습니다."

"감히 초야의 백성이 관가에 찾아와 병에 관하여 이러쿵저러쿵하다니... 그래 관찰사는 어

찌하였는가?" "때가 흉황이고 감영의 군졸들은 요미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군기는 노후

하고 군량의 염출도 어려웠습니다.

촌중에서 속오군을 동원하자 하여도 백성의 생계가 피폐하여 나올 자가 없는 실정이었습니

." 최형기는 수리의 말을 듣고 빙긋 웃었다.

"털을 뽑아 제 구멍에다 박을 양반이로다. 바로 그와 같이 기량도 권도도 없어 두 달도

못 되어서 감사자리를 물러나오게 된 것이야."

"그러믄요, 오죽하면 유가 형제가 사병이라도 동원하겠다구 그랬겠습니까? 허락만 내려달

라구 그랬지요." "그건 안될 일이고... 어찌 도적들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다는가?" "

리저리 수소문하여 짐작을 한답니다. 감영의 군관 중엣도 송화싸움에 나갔던 장교들이 있는

데요." 최형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 안전께서는 미세한 일에까지 골몰하실 여유가 없으시니, 이번 토포는 자네와 내

손에 달렸네. 힘껏 나를 돕는다면 자네 공으로 미루어 해주서 향리하 해먹지 않아도 될 게

." 수리는 급히 읍하며 다짐을 하였다.

"뭐든지 시키십이오. 착오없이 시행하겠습니다."

", 첫째로 이런 자리는 나와 자네만이 알아야 할 일일세. 앞으로 자네게 지시를 내리더

라도 한양서 안전을 따라가는 책방을 통하여 할 것이니 그리 알게. 둘째로 만약 자네의 실

수로 감영의 토포 계획이 민간에 새어나간다면 자네는 죽네. 나는 흐리멍덩한 사람이 아니

.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 포흠을 씌워도 될 것이고 아니면 뒷전으로 무뢰배를 사서

박살할 수도 있을 게야. 셋째로 자네를 시켜 군비 염출을 해낼 것인데, 장사치와 토ㄹ호들

중에 그럴 듯한 자들을 골라내어 도움을 받을 작정일세. 명분이 물론 있어야겠고, 그들의 이

해와 맞아떨어져야겠지. 그런데 만일 자네가 사사로이 배를 채워 물의가 일어나거나 시비

가 생기면 그때엔 자네 식구들까지 모두 화를 당할 게야. 명심하도록 하게."

소리는 최형기가 말을 한가지씩 덧붙일 적마다 지금 그런 일을 당하기나 한 듯이 화들짝

놀라며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그대신 적굴이 소탕되고 나서는 포도논상이 떨어지면 내가 앞장서서 자네의 공을 품하겠

. 화적 오구를 떼어주어 가자를 받도록 할 것이며, 적의 장물은 무훈을 세운 장교들과 똑

같이 나누어 가지게 할 것이다. 내가 자네와 은밀히 만나려던 것은 바로 이런 점을 서로 다

짐하걔 위해서이다. 잘 봉행하렷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수리는 근심으로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었다. 최형기가 차근차근 말하였다.

"호환을 알리고 범사냥 나갈 준비를 해두라는 것은 토포군의 조련을 은폐하기 위함일세.

자네가 감영에 당도하자마자 몇몇 양민을 시켜서 호소하도록 잊지 말고 시행하게. 그리고

벽란나루에 이르면 아랫걸들 중에 충직한 자를 시켜서 조읍포창에 산다는 그 부호의 형제들

을 급히 감영으로 오도록 해두게. 또한 향천에서 발령하여 올라온 쇄마전이 사백여 냥 될

터이나, 이는 안전께서 따로이 받지 않고 물리치실 것이라, 자네가 간직하고 있다가 며칠

뒤에 기찰의 명을 받은 장교들에게 나누어 지급하도록 하게." 수리는 황황히 붓을 들어 비

망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삼일점고 지낸 뒤에 열 읍 수령의 연명이 끝나고나서 그 자리에다 땅마지기에 돈냥깨

나 있는 첨지 도지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 것이다. 어디가 좋겠나?"

", 부용당에서 해왔습니다."

"부용당에서 부가옹들을 위한 간략한 주석을 여는데, 멀리 벽지나 도계에서까지 여럿을

불러 올릴 것은 없고 , 해주 근처의 으를테면 연안 배천이라든가..."

"평산 재령 신천 장연 강령 등지 말입지요."

"거기서 신천과 재령 장연 등 지방은 빼게."

수리가 붓을 멈추었다.

"어째서요?"

최형기는 잠깐 묵묵히 있다가 중얼거렸다.

"구월산에서 가까워..."

최형기는 구월산에서 백 리 이내에 들어 있는 지역은 모두 적당이 활동하고 있을 곳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지역에는 틀림없이 정탐꾼이 있을 것이고 관가나 향반의 작은 움직임

까지도 그들 귀에 닿을 것이었다. 수리가 적은 것을 들고 읽어나갔다.

"자 그러면 연안 배천 평산 강령이올시다."

"뭐라고 했던가, 조읍포창의 유가라구 했던가?"

"유사과입죠. 거기는 그러니까 금천입니다."

"다섯 고을이로군. 그만하면 한 열 사람은 충분히 되고도 남겠는걸." "스물쯤 추릴 수가

있습니다."

"아닐세, 한 고을에서 둘 이상은 무리야. 해주 목내에서도 서넛은 될 테니까." "용댕이 결

성포에서 하나, 들머리서 하나 그리고 새벌이나 대냇벌 아니면 돌장승에서도 토호를 골라낼

수가 있습지요."

"그들에게서 토포전을 기부받는다. 다만 겉으로는 다른 명목을 내세워야지..." "제게 맡기

십시오. 각 지방마다 형편에 맞을 그럴 드산 구실을 찾아내겠습니다." "이제 내 얘기는 모

두 끝났네."

최형기가 일어서자 수리가 따라나오려 하였다.

"아니 그저 대감 댁에서 전언 나온 사람으로 여기도록 그냥 앉아 있게나." "하오면 토포

장 나으리 멀리 안 나갑니다."

"... 내 직함을 잊었나. 등산곶 만호일세."

최형기는 슬그머니 경주인 집을 떠났다.

신엽은 임금께 하직하고 집 안팎에도 두루 하직을 하였는데 부인과 자제는 부임지에 동

행하게 되어 있었고 노부모 또한 함께 모시고 나가도 되건만, 특명을 받은 임무가 무겁고도

촉박하여 가정세사에 매달릴수가 없어 홀홀단신의 집의 책실만을 데리고 떠났다. 문밖으로

발정할때에 육방 비장이 역마를 타고 앞에 서고 오 척이나 되는 해서제군사명이라고 쓴 사

명기를 앞세웠다. 신엽은 평교자 위에 호수립을 쓰고 남철릭을 입고서 한 손에 등채 쥐고

걸터앉았다. 그 좌우로는 호종 무사로 가는 자들이 구군복에 환도를 차고 걸었으며 신연맞

이 관속들과 사령배는 뒤를 따라왔다. 전도가 앞에서 외치는 권마성이 시끌벅적하였다. 전도

는 길을 살피면서, 에라 물렀거라 떠들면서 나아갔다. 이 정도면 관찰사의 도임 행차로는 검

소한 편이었으나, 신엽은 다시 수리에게 마을이나 역원을 지날때에만 한번씩 소리를 지르라

고 일렀고, 말짐을 살피고 나서 마필을 줄이도록 하였다. 이런 것은 모두 조용한 기순 어름

을 벗어나려는 뜻에서였다. 북으로 오르는 첫 숙박지인 고양까지는 오십 리가 채 못 되는

,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그대로 발정해야 하므로 고양서 어스름녘을 맞게 되는 때문

이었다. 새벽 일찍 고양을 떠나서 파주서 중화 치르고 돼지포 얼른 건너 장단에서 여장을

풀었으며, 이튿날은 장단서 송도까지 사십 리를 단숨에 내달아 유수가 보낸 다담을 들고 작

별이 늦어져 객사에 머문 뒤에 나흘째가 되어서야 예성강 벽란나루로 행차가 나서게 되었

. 나루는 물살이 빠르고 조수가 세차서 제법 위험하였으나 또한 진흙 갯벌이 없어서 타

고 내리기가 다른 나루터보다 수월하였던 것이다. 초루에는 관원들이 나와서 나루터를 관

장했고, 벽란정은 오가는 벼슬아치들이 잠시 다리쉬임을 하고 가는 곳이었다. 강은 서로 바

다와 하늘에 잇닿았고 산은 들판에 가로놓여 잠룡처럼 구불구불하였다. 언덕의 곳곳에는 개

암나무와 가시나무가 무성하였는데 철성 이공이 지은 식파라는 정자가 그럴 듯하였다. 벌써

부터 배천과 연안에서는 나루에 관찰사께서 탈 배와 수행원들이 탈 배며 짐 실을 거룻배들

을 대기시켜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전도 비장이 말을 달려와 감사께서 당도하실 것을 알

렸고 취타소리로 강 건너에 대기하고 있던 연안부사와 배천군수 일행에게 알려주었다. 이제

부터 신엽은 그가 통치할 지방의 관문에 들어선 것이다. 벽란정에서 기다리던 최형기가 내

려오는데 구슬상모 달린 전립을 쓰고, 붉은 호의 위에 검은 전복 걸치고 단검을 찼다.

아래에는 가죽 안장을 얹은 여진 구렁말을 대기시켜두었으며 또 다른 말에는 부담과 짐이

얹혀 있었다.

관찰사의 행착다 이르자, 최형기가 바삐 내달아 군례를 드리며, :등산곶 만호 최형기 현신

이오."

아뢰니 신엽은 그저 끄덕할 뿐이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로부터 최형기가 도강과 행차의

전열을 모두 지휘하는데 이제까지 검박 일변도로 해왔던 것을 돌연 화려하고 떠들썩하게

바꾸었다. 삼현육각에다 기치 창검을 늘이고 각 고을에서 행차를 인계받아 무장한 군병이

호위하고 나가도록 하였다. 이는 바로 신구 감사가 갈릴 때 큰 도적이라면 반드시 염탐자를

연도에 풀어놓을 거이라 짐작하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해서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행차가 떠들썩하고 화려해진 것은 바로 염탐자나 구경

꾼들에게 관찰사의 도임 자세를 속이려는 데 있었다. 한갓 아이들과 부녀자의 눈요깃감으로

휘황 찬란한 깃발과 요란한 풍악을 잡히면 위세나 보이려 드는 수령 방백일수록, 과감한 개

혁이나 어진 통치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고을의 수령과 아전들이 보기에도 이번 관

찰사께 봉물이나 푸짐하게 보내고 진상품을 철철이 놓치지만 않으면 그리 나쁜 점수는 받

지 않겠구나 하며 안심을 하였다. 사치하고 안일 무사에 젖은 늙은 관료가 오는 것이다.

런 점은 백성들 또한 잘 아는 바였다. 최형기는 신엽과 의논하여 연도의 보이지 않는 눈을

속이고, 신임 관찰사의 인품에 관한 그릇된 소문이 퍼져나가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그렇다

고 그런 행차가 다른 도백들에 비하여 눈에 띄도록 지나친 광경은 아니었다. 그저 누구나

어슷비슷한 행차인데, 평소 간원과 헌부에 봉직했던 신엽으로서는 용납할 수가 없었달뿐이

었다. 그는 좌우로 무장한 병사를 늘어세우고 위엄있게 들어가기를 원하였으나, 최형기가 반

대하였다.

"순사또께서는 그저 임기나 채우러 외직으로 나오시는 분이라야 합니다. 공연히 숙연하고

긴장된 빛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지나는 고을의 객사마다 떡벌어진 다담상에 관기와 악공들을 좌정시켜서 신임 감사를

맞이했고, 신엽은 가장 풍류를 즐기는 듯이 풍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산천의 수려함을 칭

송하고는 하였다. 연안서 하루 자고 느지막히 출발하여 낀다리에 당도하니 청단역 찰방이

중화 준비를 하여 내를 건너와 기다리고 있었다. 노구에 술을 데우고 갖은 육포를 벌여놓고

끼끗한 농가의 사랑에 화문석을 내다 깔고서, 감사는 먹고 마시고 쉬고 나서 저녁녘에야

청단역의 객사에 들었다. 감영까지 남은 거리가 사십여 리 되지만 오후 늦게 들어가는 법

도 아니고 때마침 시월 하순이라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싸락눈이 날리기 시작하였던 것이

. 전도는 먼저 해주감영으로 들어가 신임 관찰사의 당도를 알리면 준비하고 있던 구관은

명일 하침에 즉시 떠나 중도에서 만나 간단한 송구영신의 예를 치르는 것이다. 최형기는 다

시 한번 순사또의 사처에 올라가 아뢰었다.

"선화당에 듭시면 점고는 간단히 끝내시고, 사흘 후 수령 연명 뒤에 시골 부호들과의 연

회가 있사오니 잊지 마십시오. 또한 각군 순력이나 기민의 진휼 순서는 생략하십시오."

엽은 그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허허, 자네가 아예 나를 무능하고 형편없는 방백으로 만들 작정이로구나." "잠룡은 엎드

려 있으되 때가 되어 풍우가 몰아치면 승천합니다." "어쨌든 빈틈없이 토포를 진행하게."

드디어 도임 행차가 들어가는데 해운정에는 대강의 예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전 태조가

큰 화살로 적장을 쏘아 죽이고 말을 솟구치게 하여 뛰어 건넜다는 약마지의 언덕 위에 여섯

칸까지 정자가 서 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하고 앞에는 큰 들이 펼쳐졌으며 뒤로는

연못이 시원스레 패어져 있었다. 으레 그러듯이 촌로들이 흰 수염을 날리며 원류를 하소하

는 흉내를 내고 있었으며, 정자에는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여기서 임규와 신엽은

서로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치하하는 인사가 오가고 신구 감사는 인부를 주고받았다. 동정송객이 있고 나서 신

엽은 성내로 들어갔는데, 연도에는 많은 백성들이 나와서 읍하고 있었다. 삼현수와 취타수들

이 어지럽게 때리고 불고 비비고 하였고, 전배 후배 사령 군노는 삼승 섭수 노랑 홍의 남전

대를 눌러 띠고 털벙거지 굴깃 달아 날랜 용자 적게 붙여 쓰고 장창 주장 비껴들고 쌍쌍으

로 늘어서서, "에라, 물렀거라 비켜라."

"훤화를 금하라 쉬이..."

이리 윽박지르고 좌우로 권마성을 부르는데 물색 좋은 청일산에 세악성 취타성은 원근 산

천 성 안팎에 떠들썩하여, 니나노 나노 뚜따뚜따처르르, 그런 야단이 없었다. 동문 안 큰길

ㄱ에는 오색 기치가 휘날리고 있었다. 신엽은 객사에 들러 옷 갈아입고 다시 남녀 바꿔 타

고서 선화당으로 올라갔다.

역시 좌기를 차리자마자 아직 피로도 가시지 않았는데 점고를 차분히 받고 나서 신엽은

주위에 물어보았다.

"이 고장에 가장 급한 폐단이 무엇인가?"

새삼스럽게 수리가 나서며 아뢰었다.

", 얼마 전부터 수양산과 북숭산 불족산 등의 산줄기를 타고 범이 넘나들어 산간 백성

이 죽고 상하였으며 가축을 여러 마리 잃었다는 급보가 와 있습니다."

신엽은 혀를 끌끌 찼다.

"... 흉년에다 호환까지 당하였으니 백성들이 얼마나 고생이겠느냐." 그는 좌우를 둘러

보았다.

"최만호가 마침 나를 따라온 게 다행이로구나. 자네가 감영 군사를 데리고 산야로 나가

범사냥을 하도록 하여라."

"곧 잡아 올리겠습니다마는, 아직 군영에 화포가 쓸 만한 것이 몇자루나 되나 알지 못하

니 자세히 점고한 뒤에, 사냥에 나갈 장교와 군사를 뽑을까 합니다."

신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만호는 등산곶으로 나가지 말고 감영에 머물러 있도록 하라."

찰사가 내아로 들어가자 최형기는 군사들을 모아 좌우 병방 비장들과 더불어 병장기와 인

원을 점검하였다.

수리는 또한 최형기의 지시대로 금천 연안 배천 강령 다섯 고을과 해주목의 결성포 들머리

새벌 돌장승 등지의 부호들에게 비관을 보내어 수령들의 연명연회에 참석하라고 전하였다.

그날로 급주로 달려가게 하였으니 삼일전고가 끝나는 글피까지 당도할 시간이 넉넉하였다.

최형기는 객사에 거처를 정하고 관찰사의 호종 무사로 따라온 포교 박완식이 백섭이 등

과 함께 지내기로 하였다. 그날 밤이 되어 최형기는 송화 무더리의 싸움에서 살아 돌아왔

다는 감영의 장교 두 사람을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불러 계시오니까."

밖에서 기척이 들리자 최형기는 조그맣게 말하였다.

"어서 들어오너라."

그들이 아무 영문도 모르고 들어와 앉자 최형기가 물었다.

"군영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

키 큰 장교가 먼저 말하였다.

"예ㅡ 올해로 꼭 십일 년이 됩니다."

얼굴이 붉고 목소리 걸걸한 자도 대답하였다.

"팔 년째올시다."

최형기가 다시 물었다.

"조련 점수는 어떠한지 모르겠다마는 병장기는 다룰 줄 아느냐?" 키 큰 자가 자신있게

말하였다.

"소도리깨 철퇴 환도 무엇이든 조금씩 다루는데, 저는 환도를 약간 쓸 줄 압니다." 안색

붉은 자가 덧붙였다.

"저는 철퇴를 조금 휘두릅니다. 호랑이 사냥에는 병장기보다두 몰이를 잘해야 합니다.

여러 곳에 함정을 파고 산 둘레와 골짜기 어귀에 인성을 둘러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고함

을 지르면 되지요. 요처마다 포수와 살수를 매복시키면 어디에든 걸리게 되어 있지요."

최형기는 빙그레 웃었다.

"참으로 네 말은 요긴한 말이다. 달아나는 호랑이야 그렇겠지만 꾀를 가지고 숨기도 하고

달려들기도 하는 호랑이는 어찌하겠느냐?"

"일단 궁지에 몰려 사냥이 시작된 것을 알면 호랑이는 활로를 뚫을때에만 덤벼듭니다." "

그것 보아라."

최형기는 부시를 쳐서 장죽에 불을 붙여 몇모금 빨았다.

"너는 환도 쓰는 법을 누구에게서 배웠더냐."

키 큰 장교가 시무룩해졌다.

"김식이라구 전에 이판윤께서 호종 무사로 데려왔던 사람이올시다. 김부장은 무참하게 죽

었지요." 최형기가 눈을 빛내면서 다가앉았다.

"그 얘기를 해보아라. 김식이 죽던 얘기를..."

장교들은 서로 바라보았다. 얼굴 붉은 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실은... 그 얘기는 오랫동안 감영에서 발설을 엄금해온 것이라..." "내가 김식에게 검술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최형기가 입을 떼자 그들은 놀란 모양이었다.

"내가 순사또를 따라 등산곶 만호라는 자리를 얻어 해서로 온 것은, 구월산을 들이치기

위함이다. 군영의 기밀이니 누설하지 말라. 너희들은 몇 명이 기찰에 나섰더냐?" 키 큰 자

가 말하였다.

"저희 임무는 기찰이 아니었습니다. 순사또께서 김부장과 저희들 장교 몇을 추려서 적당

의 수괴의 목을 베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감영 장교였고, 이사람은 평산에서 뽑

혀 올라왔었습니다." "아니... 기찰이 아니라 목을 베어오라고? 서책만 읽던 양반들이니,

도하는 것을 알겠느냐." "저희들은 여섯이서 무기를 감추어 가지고 구월산 인근에서 가장

소문이 낭자한 송화로 나갔는데, 생상단들이 몇번 털린 적이 있다는 수랫고개의 도적들 매

복처로 찾아가 접전을 벌였습니다." 최형기가 혀를 찼다.

"마치 스스로 죽여달라고 찾아간 것이나 한가지로군." "김부장이 말하기를 적의 수괴가

제접 칼을 쓴다 하니, 그를 자극하여 끌어내려서 일전을 겨루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희들

은 워낙에 그분의 재간을 믿고 있어서 마음을 놓았습니다." "관록을 먹는 자로서 적당을

잡으려 할 때에는 공명심은 금해야 하느니라. 칼은 함부로 빼는 게 아니다. 도적이 피로하여

충분히 이길 수 있을 때에 캉을 들어 대적하는 것이다. 어찌 함께 솜씨를 겨루어 도적을 대

등하게 대하겠느냐."

"무더니내라고 했던가?

", 세간에서 그렇게들 말합니다."

"거기서 싸울 때 보았던 바를 빠짐없이 얘기해 보아라." 장교들은 서로 삼 년 전의 기억

을 더듬어 다리 위에서 부딪치던 것이며 장창을 조자룡처럼 잘 쓰던 도적 얘기며를 늘어놓

았다. 최형기가 그들의 얘기를 중도에서 끊었다.

"가만... 도적들이 앞뒤를 둘러쌌다고 했겠다? 마을에 내통자는 없었느냐?" "내통자와 둘

이나 있었고 나중에 보니 온 마을의 백성들은 물론이려니와, 고을 아전이며 사령배들까지도

구월산의 적당들을 두려워하여 서로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최형기가 계속하

라고 그들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그들은 다시 일행중에서 둘이 죽고 하나가 다치던 것이며

자기네가 사로잡히던 순간의 얘기를 하였고, 구월산 두령과 김식이 맞붙던 얘기를 계속해

나갔다. 김식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것이며 도적이 움직이지 않고 다만 받고 가끔씩 칼을

휘두르던 것을 말하자 최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도로군. 칼 쓰는 데 웬만한 자신이 없고서는 함부로 취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그

가 달이 지고 어두워지고부터 김식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는 말이 나왔다.

"거기서부터 김모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나니라." 최형기는 시종 깊은 생각에 잠겨

서 두 장교의 말을 듣고 있더니, "헌데 부장이 죽고 나서 시체를 수습하는데 그자가 인정

을 보였소이다. 의리대로라면 장사를 지내주겠으나 자기들은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이

라 그럴 수 없다면서 비용을 내주었지요."하는 대목에 가서 그는 담뱃대를 놋재떨이에 놓고

숙연하게 말하였다.

"검이 그 정도라면 사람도 이루어지는 법이다. 때가 난세라 아까운 자들이 들판을 헤매

고 있구나. 하지만 그럴수록 그런 자를 내버려둘 수는 없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도적처럼 나라에 무서운 적은 없는 것이야." 최형기는 위엄을 얼굴에 드러내며 말하였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그 도적을 치기 위해 준비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정예군 이백을 뽑아내는 일이다. 그중에 오십여 명은 따로 포수로 채운다. 얼마나

걸리겠느냐?" "한 닷새면 되겠습니다."

"좋다. 그 일이 끝나고 나서 따로 지시를 내릴 것인데 아까도 말했듯이 기밀을 엄수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최형기는 토포군이 편성되고 나면 자신이 직접 조련을 시킬 셈이었다. 그리고 한양서 온

두 포교와 감영 장교 두 사람과 금천서 내일쯤 당도할 유가 형제들을 묶어서 기찰조를 편

성할 생각이었다. 경험 많은 두 포교가 그들을 지히한다면 구월산의 형세는 손바닥 안으로

들어올 것이었다. 적들의 기침소리까지 앉아서 들을 수가 있을 것이었다. 구월산 인근 사 읍

가운데 가장 적들의 손길이 잘 닿지 않을 만한 곳에 집 한채가 필요하리라고 그는 생각하였

. 최형기느는 거의 새벽닭이 울기까지 화로를 끼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장길산,

는 어떤 자인가.

공연히 재물을 털어 기민들에게 나누어주는 행위를 최형기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임 관찰사 신엽의 행차가 당도할 때 연도에 늘어서 있던 시정의 백성들 가운데에는 박

대근네 송방의 차인들도 끼여 있었다. 각도에 흩어져 있는 송방 가운데서도 평양과 의주가

있는 서북 송방과 사행의 왕래가 잦은 해서 송방에서는 관가의 동향에 가장 민감하였다.

구 감사가 갈릴 적마다 도백의 사람됨이며 정책의 변동에 따른 물산의 움직임과 백성들의

소문 따위를 낱낱이 탐문하여 송도의 사대전을 운영해나가는 임방에다 알려주게 되어 있었

. 임방 좌장으로 있는 박대근은 송도에 앉아서도 관가의 세밀한 사무를 훤히 알 수가 있

었던 것이다.

특히 해서에 관하여는 그의 형제들의 청에 따라서 강말득이 다녀갈적마다 낱낱이 알려주

었고, 급한 일이 있으면 심복 차인을 직접 보내기도 하였다. 해주의 해서 송방 차인들은 연

도의 백성들 틈에 끼여 서서 신엽의 행차를 끝까지 구경하였다. 행차가 지나가는데 감사는

온갖 호사한 비단 철릭에다 호수 주립을 쓰고 기치 창검으로 울긋불긋 화려하게 장식하여

그런 구경거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연의 행차라면 돈 수천 냥이 소모되었을 것이었

.

"앉아서 연회나 베풀고 시나 짓다가 가실 분이군."

"한양에서 온갖 호사를 하셨을 테니 우리 사정을 어이 아실까." "지난번 임관찰사의 행차

보다도 몇배나 더욱 장하고 번거로우니 순사또의 위인됨을 알겠구나. 아마도 뼛기름까지

짜겠는걸."

"저기 비장들 좀 보게. 말이며 의복이며 얼마나 화려한가. 저것들이 틀림없이 들인 돈을

뽑으려 할 것이라 우리 백성들만 죽어나겠고나."

이런 속삭임이 군중들 틈에서 수런수런하였다. 송방 사람들도 그런 얘기를 듣지 않았다

할지라도 눈에 보이는 일이라 오래 서 있지 않고 곧장 삼문 밖으로 나가 점고의 내막이 나

오기를 기다렸다. 사령 하나가 퇴청하여 나오면서 그들에게 일러주었다.

"별반 색다른 것은 없고, 순사또께서 도내에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이냐 물으시데, 허 참,

내 어이가 없어서..." 사령은 혀를 차더니 입맛을 다셨다. 차인은 그에게 은근히 물었다.

", 무슨 황당한 명이라두 떨어졌는가?"

"황당하다뿐인가. 이방인지 수리인지 하는 사람이 나서서 고작 한다는 말이 수양산록에

호환이 잇달아 일어나니, 호랑이 사냥이 가장 촉급한 일이라는 게여. 그러니 지금 때가 어

느 시절인가, 팔도에 흉황이 들어 사방에서 기민들이 난리를 치는 판인데, 진휼하거나 비축

미를 풀어 환자를 낼 의논은 않구 무슨 난데없는 호랑이여? 이제 우리 군노 사령들만 공연

히 찬바람 부는 산야에서 시달리게 되었다구." 차인은 함께 혀를 차며 말을 보탰다.

", 인자한 수령 방백이란 부임시에 제일 먼저 홀머니와 고아의 처지를 묻는 것이 도리

인데, 고작 호랑이 사냥이 무언가. 이제 해주목내에 급기야 난리가 나겠구먼." ", 아니래.

수령들의 하례가 끝난 뒤에 으레 각 고을을 순방하여 백성들의 참상을 살피고 쌓인 형옥도

처리하여 덕을 보이는 것인데, 아무 지시가 없으시니 비장들 등쌀에 우리만 혼이 나게 생겼

다니까." 송방 차인은 사령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원래가 탐욕한 관

리한 장사치들에게 만만한 상대여서 그가 부정을 저지를 기회가 많을수록 상인들 또한 이를

얻을 틈이 많은 법이었다. 그러한 관리가 무슨 엉뚱한 짓을 벌이건간에 장사치를 끼워넣지

않고서는 원망이 드러나거나 세상에 알려지게 마련이었다. 송방 차인은 이런 사정을 해서의

차인 행수에게 자세히 알렸고 행수도 또한 만족하였다.

"사행은 물론이요 봉물건에 관하여도 우리가 들어갈 자리가 많아지겠구나. 올해의 사행선

은 모두 우리가 무역별장을 따내야지."

"봉물도 우리가 각 수령들에게 위탁받을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은밀히 이방을 통하

여 신연 선사를 하시지요."

행수는 흡족하여 임방에 보내는 통문을 쓰도록 하였다. 그들은 황해도 관찰사의 사람됨

이며 신구의 교체에 대하여 느낀 바를 낱낱이 적어서 송도로 보냈던 것이다. 박대근이 통문

을 받아본 것은 그로부터 닷새가 지나서였고 별로이 관심을 두지 않고, "비단과 산삼 몇근

을 준비해서 해서에 보내도록 하게. 전례에 준하되 따로이 은자를 마련해두는 것도 좋으렷

.

신임 감사는 탐욕스런자라니까."

라고 무심히 지시를 내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또 한 달포쯤 지나서 송도의 관아에서 나온 자들과 술을 먹다가 신임 송도유수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해서의 신임 감사에 대하여 얘기하다가 그가 신엽이라는 전 승지벼슬

에 있던 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 자리에서는 무심하게 신대감이 간원과 헌부에서도 청직만

을 돌았다는 얘기를 한쪽 귀로 흘렸던 것이다. 이튿날 박대근은 술이 깨어 오전 내내 보료

에 기대앉아 쉬다가 같은 임방에 있는 송상의 방문을 받았다.

"허허, 좌장께서 오늘은 한가하십니다."

", 어제 관아것들과 인사술을 나누었더니 아직껏 뒷골이 멍한 것이 정신이 들지를 않소

그려." "그럼 잘되었습니다. 오후에 전의 아이들을 데리고 삼뜯기 외입이나 갈까 하지요."

박대근이 껄걸 웃었다.

"난데없이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겨울철에 몸풀이 놀ㄹ음으로는 매사냥이 으뜸입지요. 제게 해동청이 두 마리 있는데 모

두 탐을 낸답니다." "얼마나 기을 들였는지."

"세 해가 지났는데 쌀 열 섬에 연평서 구입해왔습니다. 좌장께서는 그냥 구경삼아 오시지

. 들판에서 꿩고기에 화주를 해장으로 몇잔 들고 오면 심신이 아주 상쾌합니다." "그러십

시다. 나두 지금 무료하던 참이오."

"기방에두 알려서 아이들 서넛을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몰이는 좌장댁에서도 내셔야 합니

." "뭐 두어 사람 데리구 가면 되겠소?"

입방 사람은 고개를 내저었다.

"두엇이라뇨. 제가 차인들 중에 젊은 사람들로 추려서 여덟을 데리고 갑니다. 매가 두 마

리니 꿩을 튀기려면 스물은 되어야겠지요. 사냥은마치 진전과도 같아서 책상물림들은 어림

두 없습니다." 임방 사람이 자신의 호방함을 자랑하는 조로 말하였으나, 그 순간에 박대근

은 무엇인가 불빛처럼 눈앞으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호랑이 사냥이라니..."

박대근은 생각을 가다듬기 위하여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임규의 재임 기간은 겨우

다 달 동안이었고, 신엽이 갈려 오기 전에 조읍포창은 결딴이 나버렸던 것이다. 듣자하니 신

감사가 헌부와 간원을 거친 사람이며 승지로서 임금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던 사람이라는데,

그가 구태여 다른 사람이 과만을 채우기도 전에 외관직으로나온다는 것은 특명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무엇인가 매우 중대한 상명을 받잡고 특파된 관찰사일 것

이다. 헌부와 간원을 거치고 임금의 신임을 바도 있는 중신이라면, 결코 백성들이나 향리 아

전들에게 책잡힐 짓은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해주 송방의 통문에서 그렇듯 탐욕

스럽고 무능한 관리처럼 적혀 올라온 것에는 무슨 깊은 까닭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부임

점고 때에 처음 꺼낸 시책이 고작해서 호랑이 사냥이란 말인가... 호랑이 사냥이란 병을 일

으켜 산을 둘러싸듯 하고서 방포하고 몰이를 해야 하는 일종의 군사 조련과도 같지 아니한

.

"그렇군... 토벌이다."

박대근은 나직하게 중얼거리고는 앞산을 내다보았다. 나뭇가지들은 바늘끝처럼 날카롭고

앙상하게 겨울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으며 골짜기에는 희끗희끗 얼음이 덮인 곳이 한눈에 바

라보였다.

"어쩌시렵니까... 안 나가시겠소?"

", 아무래두..."

박대근은 펀뜻 정신이 들어 얼버무렸다.

"오늘은 그냥 누워서 지내야겠소. 두통이 매우 심한걸." 임방 사람은 자못 실망이 큰 모

양이었다.

"허허, 그냥 방안에서 누워 계시면 생병이 든다니까요." "다음에 가겠소. 꿀물이나 마시고

쉬는 것이 낫겠소." 박대근은 매사냥을 조르던 이를 그렇게 따돌리고 나서 다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보았다. 틀림없이 신엽은 해서를 진무하기 위하여 내려온 토포사가 분명하

였다. 호환이란 병을 일으켜 조련시키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장길산이란 이름

은 저들의 활빈행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있었다. 송도에서도 주먹깨나 휘두른다는 활짜패

들은 모두들 길산이 어느 고을에서 어찌하였다더라 하는 얘기를 풍을 쳐서 신명을 올리고

떠들고는 하였다.

장적 토포가 시작될 것이다. 조읍포창의 기습은 실상 작은 형세의 화적들로서는 엄두도 내

지 못할 거사였다. 드디어 조정에서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대근은 근심에 잠겼다

가 다시 스스로 떨쳐버렸다. 앞으로 형세가 커지려면 필히 겪어야 할 시련이 아닌가. 활빈

행을 한다면서 어찌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피하며 토포를 두려워하야 관가를 들

이치지 못하겠는가. 이제부터 싸움의 시작이 아닌가. 박대근은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하인이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 임방 행수 들어오라구 하여라."

박대근은 임방에서 그의 일을 도와주고 시행하는 심복 차인을 길산에게로 보내어 자기

의견을 알릴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애초부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장길산이라는

도적이 관에 탐문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으되, 그의 은신 장처는 구월산으로 되어 있음을

대근은 생각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는 구월산의 마감동 오만석과 은율 탑고개의 마을은 까

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대근은 길산에게 토포군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전하는 데에만 마음이 급하여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임방 행수를 자비령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예전

에 그의 일을 도와주었던 송도 청교방 못골에 터를 잡고 있는 이학선에게 사람을 보내어 급

히 들어오라고 일렀다. 못골 학선이라면 일찍이 해주감영 옥에 회자수와 대사수로 떨어져

있던 우대용과 장길산을 금부도사로 가장하여 빼내었던 자였다. 한양에서 판서 댁 청지기

로 밥을 먹다가 거기서 보고 익힌 벼슬아치들의 흉내를 내어, 가어사로 어수룩한 북관을 돌

아다니며 밑구린 수령 토호들에게 돈푼깨나 우래내던 바로 그 이학선이었다. 학선이도 이제

는 색주가를 열어놓고 투전판을 벌여서 그런대로 옹색하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으나, 역시

예전 버릇은 버리지 못하여 밑의 아이들을 시켜서 남을 속이고 위협하여 잇속을 채우는 짓

은 여전하였다. 그는 송상이 가는 곳마다 제 식구들을 보내어 관차들 상대를 대행하여주었

, 아직도 그는 박대근의 말에는 거역치 못하였으니 서강의 모신이처럼 장물이나 밀상의

물건들을 매매 또는 알선하여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조읍포의 유사과네

재물도 우대용이가 예성강 어귀를 감돌아 선편으로 승천포에 대었던 것을, 박대근이 학선

이를 시켜서 거두고 타처에 먹이도록 했었다. 학선이는 받대근과 비슷한 연배였지만 수염

이 짙고 잘생긴 모양이며 희고 칼칼한 인상은 여전하여, 그가 그토록 못된 짓으로 반평생

밥을 먹었음에도 학문이무르익은 선비나 사대부터럼 보였다. 대근은 학선이에게 해주감영의

토포 계획 여부를 탐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으니 박대근이 감

영의 수상한 기미를 알아채고 자비령에 소식을 보낸다, 정탐을 시킨다, 하여 손을 쓰기 시작

한 것은 신엽과 최형기가 해주에 부인한 지 스무 날이 훨씬 지나서였던 것이다. 어쨌든 한

발이 늦어져 있었고, 그맘때에 최형기는 벌써 신천에다 기찰소를 열고 정탐하는 포교와 장

교들을 보내어 송화와 은율 일대를 샅샅이 살피고 있을 무렵이었다.

최형기는 부임한 다음날 저녁에는 금천서 비관을 받고 먼저 올라온 유사과네 형제들과

객사에서 만나고 있었다. 맏아들 수룡이와 둘째 수호가 찾아왔는데 그들은 최형기를 만나

자마자 먼저 구월산의 화적당에 관하여 얘기를 꺼냈고, 임규에게 거병토포를 탄원하였던 것

도 밝혔다. 최형기는 일부러 무덤덤하게 듣고 있었다.

"만약에 감영의 군사를 일읠 수 없다면 만호께서 장교 몇사람만 저희에게 붙여주십시오.

저희 집안은 원래가 포창의 미곡을 경강으로 실어 보내고, 해서의 물산을 경향 각지로 크

게 거래하는지라 밥을 먹이는 젊은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하도 어처구

니없이 기습을 당하여 가산을 반나마 잃고 말았습니다. 다른 패물이나 돈 따위야 또 벌면

되겠지마는 저희 집안은 대를 이어 문수암이라는 암자를 지어 부처님을 모셔오고 있사온데

지난번 적환에 법당에 모셨던 금부처 세 분을 빼앗겼습니다. 조모님께서 아침 저녁으로 공

양을 드리며 치성을 바쳐오던 터라 실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시지요. 저희가 구월산의 장적

을 토포하지 못한다면 그런 불효가 없고 조상님께도 면목이 없는 노릇입니다. 저희들은 도

적들의 식구가 사는 마을도 염탐해내었습니다." 최형기는 조는 듯이 눈을 감고 앉았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곳이 어딘가...?"

수룡이와 수호는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것에 놀랐는지 서로 마주보았다.

", 은율에 탑고개라는 광대들의 마을이 있습니다." 수호가 먼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

었고, 수룡이가 덧붙였다.

"저희는 이 포한을 갚고자 사방으로 아이들을 보내어 알아보도록 하였는데, 문화에서 그

런 뒷소문을 들었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다녀오기도 하였지요. 원래는 문화에 재인말이

라구 창우 패거리가 살던 마을이 있었다는데, 예전에 군외로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탑고개라는 구월산 골짜기에 은밀히 마을을 이루어 산답니다." "마을이 크던가?"

"크지는 않았으나, 골짜기의 입구가 비좁고 가파른지라 적당이 미리 알면 들이치기가 쉽

지 않을 듯합니다." 최형기는 눈을 빛냈다.

"그곳에 도적들의 식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아냈나?" "송화 무더리 장에 가면 가

끔씩 촌에서는 볼 수도 없는 진귀한 물건들이 풀려나올 적이 있답니다. 바로 도적의 졸개

들이 지나는 행상단이나 양반의 행차를 덮쳐서 탈취한 물건들이라지요. 이것은 모두 장사치

를 통하여 수소문한 얘기들이지요. 고을 하속들은 물론이려니와 아전들까지도 그들은 눈감

아주고 있답니다. 탑고개마을을 먼발치서 내려다보기만 하였는데, 동네가 깨끗하고 집집마다

기름이 반지르르 흐르는 듯하였습니다. 저녁에는 모든 집에서 연기가 올랐고, 닭울음 소리

와 개 짖는 소리도 들렸지요. 이는 흉황이 휩쓸고 지나간 다른 인근 촌락에서는 들을 수

없게 된 지 오래입니다."

최형기는 소매 속에 두 손을 넣고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탑고개라... 자네들 아주 중요한 곳을 알아냈구먼. 그렇지 않아도 본도 감영에서는 구월

산 토벌을 준비하고 있네. 내가 수리를 시켜서 자네 집에 비관을 보내도록 일렀지. 토포하기

전에 자네들의 힘을 빌릴까 하던 참일세." "무슨 일이든지 시켜주십시오. 수괴의 목을 반드

시 베고 말겠습니다." 유수룡은 그에게 개명을 하라면서 조롱하던 낯빛 검은 사내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그자의 머리를 베어 조읍포의 선창에 장목을 세우고 매달아놓는 것

이 소원이었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기찰조가 떠날 제 동행하도록 하게. 그리고 거병을 하자면 군비의 조

달이 시급한데 감영에는 그러한 재물이 없네. 여러 지방 부호들로부터 다른 명목을 내세워

기부를 받으려는데, 자네집에서도 좀 도와줘야겠네."

"저희는 군량을 대겠습니다. 우선 감영의 비축미를 얼마든지 쓰십시오. 나중에 포창에서

그 결손을 메우도록 하겠습니다."

최형기는 다시 그들 형제로부터 포창과 문수골이 점령되던 전말을 빠짐없이 들었다.

들의 말에 의하면 도적들의 용병하는 재간과 나아가고 물러가는 전술에 빈큼이 없었고,

력도 수백 명이 되는 듯하였다. 최형기는 물론 그런 병력이 모두 구월산에 들어가 있지는

않는다 치더라도, 사방의 산협에 흩어진 여러 갈래의 도적들을 한 손에 움직이는 자들이

틀림없이 구월산 속 깊이 웅거하고 있으리라 여겼다.

각 고을 수령들의 연명 연회가 파하고 나서 선화당 뜰 안의 부용당에서는 최형기의 계획

대로 군비를 걷기 위한 인근 고을 부호들의 잔치자리가 마련되었다. 얼어붙은 못 위에 수

석들이 쓸쓸한데 예전 선조대왕께서 행재소로 쓰셧던 부용단의 주적당이라는 사랑에는 병

풍이 펼쳐졌고, 미닫이를 터서 넓고 기다란 방으로 꾸며놓았다. 각 고을에서 올라온 부호들

이 모두 스물넷이나 되었는데, 그중에는 하루 전에 금천서 유사과 대신 올라온 그의 맏아들

유수룡이도 끼어 앉아 있었다.

관찰사도 뒤늦게 연회에 참석하였으니 수리와 목사의 귀띔에 의하여 백이 숙제의 사당을

창건할 뜻을 밝히게 되었다. 전조에서부터 해주를 고죽으로 불렀고 고을의 진산을 수양산이

라 이름지었으며, 동남해 가운데의 두 섬을 형제도라고 불러 백이와 숙제가 당도하여 죽은

고장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으되 허격이라는 팔순의 노인이 있다는

데 성종조의 우의정이었던 허종의 오대손으로서, 그가 서른살 적에 남한산성이 청병에 함

락되고 임금이 치욕을 당하자 그는 세상을 버리고 일찍이 산곡에 숨었다 하였다. 허격은

해주 수양산에 백이 숙제의 고사가 얽힌 것을 항ㄹ고는 굴욕적인 강화가 이루어지던 매해

삼월 열아흐레가 되면 산에 올라가 분향하고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해주의 유림들이 이를 알고 감영에 여러 차례 백이 숙제의 사당을 건립하여줄 것을 건의

해왔고 진작에 우암 송시열이 맹자 가운데서 백이성지청자야라는 글귀를 따서 청성묘라고

묘호까지 붙여두었던 터였다. 이번에는 터를 닦아 사당을 창건하는데 광척선 일대와 수양산

남록에 그에 따른 정자도 세우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 고장 백성들에게 나라에 충성을 바

치는 것과 절개를 숭상하는 일을 가르쳐 교화하려면 기왕에 얽힌 고사를 드러내주는 사적

이 있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유림들의 그러한 건의를 받아들이면서 신엽은 부호들로 하여금

그 건립비용을 자진하여 기부하도록 권유하였다.

실상 사당 건립이란 겉으로의 명목이요 구월산 화적당의 토포를 위한 군비의 염출이 급

선무였던 것이다. 부용당 연회에서는 관민의 의견이 일치되어 부호들은 기꺼이 기부할 재

물을 미곡 몇석, 포 몇동 돈 몇냥이라고 적어냈다.

최형기는 한양서 관찰사의 호종 무사로 따라왔던 포도청의 박완식 백섬 두 포도부장과

유가 형제 수룡이 수호를 사처로 불러들였고, 감영 수리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최형기는

따로이 감사가 신천군수로 보내는 비관문서를 지니고 있었으니, 감영서 내려가는 기찰조가

집 한채를 구입하고 활동할 때 은밀히 뒤를 밀어주라는 명령서였던 것이다.

"내가 곰곰 따져보니 도적의 일당이 내왕하는 곳은 송화와 은율인듯하고 신천 안악 등지

에는 별반 문제가 없는 듯하다. 나중에 구월산을 포위할 제 송화 문화 은율 안악 등지에서

군병을 동원하여 각 요로를 지킬 더인즉 지형 탐색이 중요하다. 기찰조의 오장은 박포교가

맡고, 섭이는 지형의 탐색을 샅샅이 해두어라. 그리고 자네 형제들은 송화 무더리 일대와 은

율고개 일대의 내통자와 가족들과 산에 왕래하는 내막이며를 빠짐없이 정탐하여 그 허실을

파악하게. 앞으로 한 달 동안에 모두 알아내야 하고, 나중에 내가 몸소 찾아가 점검할 때에

미욱한 구석이 없도록 명심하게. 기찰이 모두 끝나면 여기 토포군이 출발하여 불시에 적굴

을 들이친다. 이번 일의 성패는 자네들의 손에 달렸다. 가지고 왔겠지?"

최형기가 수리에게 묻자, 그는 전대에 꿰어 담은 돈을 내밀었다.

"향청 발령의 쇄마전이올시다. 순사또게서 물리치신 것을 만호께서 분부하신 대로 기찰용

전으로 보관하구 있었지요. 모두 사백오십 냥이올시다."

유수룡이 사양하여 말하였다.

"저희는 돈이 필요없습니다.상단의 어음을 내어관가로 돌리면 전환이 되니까요. 그리고 기

찰조를 따로 편성했으면 합니다."

"그 이유는...?"

"소인이나 우리 아이들은 남의 간섭을 받고 일해보지 않아서 부장들과 함께 하기가 불편

할 듯합니다." 최형기는 빙긋이 웃었다. 유수룡이가 아무리 시골 토호의 아들이라고는 하

, 한낱 포도부장으로부터 이래라 저래라 명을 듣기가 거북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네. 이 사람들은 십여 년 이상씩 포교질로 한양서 도적과 무뢰배들

을 족집게로 집어내듯 하던 사람들이고, 기중 유능한 탓으로 부장에까지 오른 사람들일세.

도적을 기찰하는 일이라면 이들을 따라갈 사람은 아무도 없지. 그리고 자네 형제 외에는

한 사람도 기찰조에 더 넣을 수가 없네. 공연히 머릿수만 많아져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다

보면 남의 의심이나 사고 공론이 많아져서 일에 차질이 오기 십상이야. 기찰조는 믿을 만하

고 열성 있고 수완이 있는 자네들 넷이면 충분해. 그리고 자네 집안에서 군량미를 내기로

하였으니 기찰전을 보탤 필요가 없어. 돈이 많아지면 편해져서 일에 빈틈이 생길 뿐만 아

니라, 돈을 쓰다 보면 자연히 도적들의 눈에 뜨이게 마련일세. 기찰하려다가 오히려 기찰당

하지 말고 고생할 생각을 해야지." "옳은 말씀입니다. 돈은 작은 집을 구입하고 장사 밑천

을 하는 데 들일 것이고, 주로 아낙네들을 상대로 수소문할 것입니다. 또한 만만한 자가 있

으면 매수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매수는 위험한데... 저들은 보통 도적들이 아

니라 민심을 휘어잡고 있다." "염려 마십시오. 곤경에 처한 자나 저들에게 원한을 가진 자

가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발설해놓고 나서 변심할 뜻이 조금이라도 비치면 가차없이 죽

여버리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라에서 도모하는 일이라 성사 후에 포상을 앞세워 제안

한다면 대개는 기꺼이 달려들 것입니다." "하여튼 착오없이 하라."

최형기는 박포도부장에게 기찰의 세부적인 요건들을 모두 일임하기로 하였다. 이들 기찰

조만큼 토포에 열성인 자들은 따로 없을 성싶었다. 유사과네 형제들은 집안 재물은 물론이

요 가보로 내려오던 문수암의 불상들까지 탈취당하였으니 설원하고자 하는 열성이 대단할

것이었다. 포도부장들은 그들대로 이번 토포 계획이 조정 중신들간에 깊이 논의되어 주상께

서 승지 신엽에게 해서 관찰사를 특수하면서까지 당부한 일인만큼 이번만큼 공을 드날릴 기

회가 평생에 다시 있을까 말까하다고 여기고 있을 터였다. 그것은 최형기도 마찬가지의 느

낌이었다. 예전에 양주 백정 임꺽정을 구월산서 토포했던 무장 남치근의 얘기는 아직도 잘

알려져 있었다. 기찰조는 그날 밤으로 아무의 눈에도 뜨이지 않게 해주감영을 빠져나갔다.

광석내는 꽁꽁 얼어붙었고 그 위에 눈이 덮여 바야흐로 설경이 한창이었다. 고목과 노송

들은 가지마다 흰눈을 얹고 신서너럼 둘러서 있었으며, 수양산은 구름같이 푸르게 씻겨진

하늘 높직하니 솟아있었다. 오층탑이며 석불이 새겨진 음비가 서 있는 옛 절터에서 수양산

의 남록을 따라 올라가면 높직한 곳에 돌연 너른 마당이 펼쳐지는데, 그 앞의 전망이 좋은

곳에 탁열정이 지어져 있었다. 탁열정은 성의 근양문을 나서서 동편에 있는데 감영에서 가

까운 곳이다. 정자에서 동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수양산성에 이르는데 이 부근의 너른 마당

과 계곡과 언덕은 예로부터 감영의 습진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최형기는 정자에다 승창을 놓고 앉아서 감영의 두 장교가 뽑아놓은 이백여 정병 군사들

의 조련받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곁에는 병방 비장이 서서 최형기의 지시를 받고 있었

. 오십 명은 따로 떼어 스물다섯씩 두 대를 짰으니 우대는 포수요 좌대는 궁수로 편성하

였다. 다시 스물다섯을 뽑아 유군을 삼았으며 나머지 백이십오명 전원으로 여를 삼아서 스

물다섯의 오로 나누었다. 키 크고 환자를 쓴다는 자는 전가요, 얼굴이 불고 목소리 걸걸하

며 철퇴를 쓴다던 자는 하가였다. 전군관이 여를 맡아 지휘하고 하군관이 유군을 지휘하도

록 하였으며 포수와 궁수의 좌우대는 병방 비장이 맡도록 하였던 것이다. 최형기는 이러한

편제가 실제 토포전에서는 변화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바로 감영의 이백여 명의 정병

이 선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중에 발제군병을 할 것인데 그들은 주로 요로를 막아

봉쇄하는 임무만을 맡길 작정이었다. 접전이 벌어지면 스물다섯 오로 편성된 일개 여의 장

창수들이 열진하는데 북소리에 따라 처음에는 두 죽의 학익진으로 벌여 서서 앞으로 창을

겨누고 돌진하다가 다시 꽹과리소리에 따라서 다섯 오씩 전후좌우중으로 나뉘어 고기비늘처

럼 서로 엇갈려 서는 어린진으로 변한다.

전오가 적의 진의 중심을 자나자마자 접전하며 벌여 서면 좌오 우오가 그 옆으로 잇달고,

궁오는 왼편 줄로, 후오는 바른편 줄로 잇달아 구부러진 추생달 같은 언월진으로 적을 둘러

싸서 후방으로 내몰아친다. 뒤에 대기하던 유군 일대가 어지러이 유격하면서 언월진의 입

구를 막으며 짓쳐들어간다. 그때 그때 적의 형세에 따라 곡진 직진 예진 방진 원잊ㄴ으로

바꾸는 조련을 하였고, 장창수들에게는 오와 열의 엄정함을 알게 하고 유군들에게는 단병

접전의 기술을 각자 연마토록 하여 자기가 맡은 병장기의 형과 세를 철저히 익히도록 하였

. 포수와 궁수는 후위와 전위를 맡아 진이 변화하며 빠져나가거나 접전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방포하서 나중에 활을 쏘는 법을 가르쳤다. 군령은 엄했지만 병사들이 질리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최형기는 장교들에게 화기애애하게 졸을 다루도록 주의를 주었고, 매 오전

오후 조련이 끝날 적마다 이런 흉년에는 맛도 볼 수 없는 고기와 술을 먹였다. 황우 두

마리를 잡았고 개를 열 마리나 잡았으니 실로 습진 조련에 장졸들은 때아닌 잔치를 만난격

이었다. 매 삭마다 피아로 나뉘어 승패를 가르는 대습련을 가졌다. 그에 덧붙여 야조라 하여

밤에 기습하고 추적하는 조련까지 빠뜨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구월산에는 겨울이 깊어져 골짜기마다 인적이 끊긴 지 여러 날이요 가끔 산짐승들이 눈

덮인 등성이를 넘어 마을을 찾아 내령고는 하였다. 탑고개의 겨울은 외방에 나갔던 자들이

모두 돌아오는 계절이라 어느때보다도 번거롭고 아낙네들도 이때에 잉태하며 젊은 것들은

이맘때 정분이 나기도 하였다. 길산의 양부모 장충과 안무당은 여전히 그 갑송이네 집 옆의

삼간초가에 살았다. 갑송이네 집은 일시 폐가가 되었다가 이제는 달마산이 관군에 함몰될

때 강선흥이 변가와 함께 옮겨왔던 업복이네 식구들이 살고 있었고, 김기의 노모와 아내도

여전이 다음 집에 살았으며 변가네 식구들도 있었다. 탑고개에는 그동안에 달마산 식구들이

롬겨오고 괴뢰배와 사당패들이 늘어나서 제법 호수가 많아졌다. 김기는 한 달이나 달포에

한번쯤씩 들러보고는 하였으며 대개는 자비령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때에는 길산이

가 말득이나 흥복이를 데리고 된목이골 마감동이네 산채에 들렀다가 탑고개의 양부모들을

찾아보고는 하던 것이다. 탑고개 아래 동네는 사선골인데 이웃 동네라고는 하여도 워낙 나

한암의 바위넘이고개가 험하여 겨울철에는 오가기가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사선

골에도 관대들이 나가 살았고 송화 까막내나 한가지로 장인들이 모여서 살았다. 가재는 게

와 한통속이라고 그들도 구월산 패거리에 관하여 은밀히 눈치를 채고 있었으며 구월산 졸

개들 중에 사선골에 살림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자연히 탑고개와 사선골은 너나들이로 스

스럼이 없어 산속에서 가장 절친한 이웃 마을이었다. 장충은 근력은 없었지만 건강은 여전

하여 자리도 삼고 눈 속에 덫도 놓으러 다니고 있었다. 가끔씩 까막내에서 갖바치 박서방

이 그의 딸과 번가아서 들여다보기도 하는데, 회손자가 함께 올 적마다 장충은 혼잣소리로,

"우리 수복이... 많이 컷을 텐데."

하며 섭섭한 듯이 중얼거렸다. 안무당도 그런 때는 마음이 안 좋아져서 돌아않는 것이었다.

"여기가 얼마나 살기 좋아. 저어 가까운 안악이나 문화 고을이라면 모를까 월당강을 훨

씬 넘어가니... 봉순이가 오지 못하니 수복이 보 생각은 아예 맙시다."

장충은 곰방대를 문 채로 눈 덮인 골짜기를 내다보았다.

"거참 무심한 사람일세. 이럴 줄 알았으면 길산일 쫓아가 자비령 가서 살 걸 그랬지." "

아예 그런 말씀 마슈. 그애는 식구고 집안이고 정신이 없는 아이예요. 공연히 우리 늙은 것

들이 쫓아가봤자 짐이나 되지 뭘."

안무당은 술을 거르다가 한 바가지를 푹 떠서 장충 노인에게로 내밀어주었다.

"예 있수. 아주 맞춤하게 익었수. 누룩내가 다 가시진 않았지만 잡숴보우." "... 도네 말

나겠군. 길산이가 제일 걱정하는 것이 이런 흉황에 배부르게 술 담가 먹는 짓이야." 안무당

은 바가지를 도로 거두어가는 시늉을 하며 말하였다.

"싫으면 그만두시구랴. 늙마에 살림이 조금 요족하니 이런 술 몇잔이야 못 먹겠어요?" "

허허 괜히 목젖만 세워놓구 그래. 기왕에 푼 술을 다시 쏟겠나." 장충이 마누라의 손을 잡

은 채로 끌어다가 꿀꺽이며 마셨다.

"커어, 시원하다. 이게 구월산 물맛이지."

"지난 달에 보내온 미곡이 남았길래 술을 담갔어요. 내가 오늘 사선골 나갔다가 이틀 지

내고 돌아올 테니까 당신은 김선비 댁에 가서 진지를 드시구려."

안무당이 술을 따로이 항아리에 걸러서 유지로 주둥이를 밀봉하였다.

장노인은 시무룩해서 말하였다. 사선골이라면 한걸음에 오락가는 이웃골인데 드틀씩이나

새우고 온다구? 까막내 가려구 그러는 게 아니오. 달포 전에 아이들이 다녀갔는데 그간에

별일이 있겠다구 쪼르르 내려가구 야단인가."

안무당이 술항아리를 들어나 툇마루에 놓았다.

"참 당신두... 아 내가 뭣하러 박서방 집에 내려가서 이틀이나 지낸다우. 거기두 요즈음은

산에서 보태주는 양식으루 지낼 텐데."

"그러게 미안허단 얘기지. 큰돌이가 노상 드나들며 살림을 보아준다는 모양이여." 안무당

이 옷을 갈아입으면서 안방에서 말하였다.

"신맞이가 있어요. 내가 들이는 딸은 아니지만, 그래두 구월산 일대에서는 내가 제일 연로

한 내림당골이라고 나를 불러가는 거에요. 아이가 열예닐곱 되었다는데 총기가 대단하구 영

력이 신총하게 씌었다지 뭐에요." 장충은 남은 술을 조금씩 마시고는 옛날 일이 생각나서

빙긋이 웃었다.

"자네두 그런 말을 들었지. 내가 선을 본다구 우리 식구 패거리를 따라서 까막내로 가보

니까 신통은커녕 몽당치마에 머리는 까치집이지, 알 수 없는 소리만 혼자 중얼중얼하더구만.

내가 아녔으면 누가 자네 같은 자를 아낙으로 용납했을꼬."

안무당은 그날 따라 홍상에다 녹색 저고리를 걸치고 머리에는 붉은 댕기를 드렸는데,

처음 굿에 나가는 애무당과도 같았다.

", 내가 요꼴이 된 게 다 누구 때문인 줄 알아요. 신장님들만 모시구 우리 몸주께 치성

이나 드리며 살았다면 나는 아마 서북이나 해서에서 제일 큰 만신마마님이 되었을 거에요.

당신 모시고 애 낳구 사라는 바람에 몸주님이 떠나신 거에요."

"공연히 그런 소리 말게. 내 덕분에 신병앓이를 면한 게여." 늙은 광대와 무당은 이렇게

다정하게 농지거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어머니 계셔요?"

삽짝 밖으로 소리가 들리더니 절믕 ㄴ여자 하나와 중년 여인 둘이서 안으로 들어섰다.

중년의 여자 둘은 봉순이 뒤에 문화와 은율서 신딸이 되어 무당이 되었던 여자들이었고,

른 하나는 월정사 사당공에 살던 백련이었다.

벽련이는 도화와의 인연으로 탑고개 출입을 하다가 아예 안무당에게서 무녀의 수업을 받았

던 터였다.

"어서 가십시다. 저녁부터 시작인데 점심때가 지났으니 모두들 준비를 해놓구 기다리구

있겠지요." 장충은 여자들이 몰려들어오는 바람에 슬그머니 방을 쫓겨 들어갔다. 여인들이

장충에게 제각기 인사를 하였고, 백련이는 술항아리를 보자 반색을 하였다.

"에그머니, 이게 뭐야. 왕가뭄 들고 나서 저승으로 떠나셨던 회광탕이 예 있네요. 나두 오

늘은 이걸 한잔 잡숫고 구월산 산신님과 합환지사를 엮어야겠네."

안무당이 신발을 꿰며 그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애 이름이 뭐라구 그랬지?"

"원향이라구 하든가...?"

중년 여자 중의 하나가 말하였다. 백련이도 거들었다.

"왜 보셨잖아요. 예전에 월정사서 춘궁 진휼을 나갔다가 부황이 들어 다 죽게 되었던 식

구를 살렸지요." 안무당이 생각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 이제 생각이 나는구나. 내가 계화 때문에 한번 불려갔었지. 계화는 예사로 알았지

마는 그애가 신병을 알고 있는 걸 내가 알아챘지. 그래 말을 시켜보지 않았든가. 어디서 오

신 뉘시냐구 그랬더니 오락가락하는데, 덕물산 최장군이라구 했다가 안악 운암이 고갯마루

기시다가 해전에 큰물에 떠내려가신 앉은 미륵이라구두 하더구만. 아직 제 몸주를 잡은 것

은 아니지만 여러분이 들락날락하시는데 그냥 배버려두었다가는 살을 맞아 넑을 잃고 말 지

경이라 계화를 시켜서 치성을 드려주라구 했지. 눈매나 귓바퀴나 입매를 보아하니 넔이 들

면 아주 큰 무당이 될 아이야. 계화가 견디지 못할 게야. 나 같은 것이야 신맞이굿이나 열어

주고 물러날 그릇이지." 그들은 한참이나 굿판 얘기를 더 늘어놓다가 일어났다. 창충이 미

닫이를 열고 말하였다.

"모두들 조심해여. 바위넘이 아래 논이 쌓여 그렇지 한번 굴러서 빠지면 해동 때까지는

머리털 한가닥도 못 찾는다구."

안무당이 대꾸하였다.

"그런 염려 놓으슈. , 우리가 누구라구 구월산 산신님이 골짜기루 밀어넣겠수?" "거 날

씨가 꾸물꾸물하는 것이 눈발이 날릴 듯한데. 하여튼 모레는 무슨 일이 있어두 돌아와야 허

." 안무당 대신 백련이 삽짝을 나가면서 농을 쳤다.

"아이구 나두 어디서 서방님이라두 하나 얻어 들여야지. 염라전 아랫동네 사는 이들두 하

룻밤을 못 참아 저 난린데, 백련이 사타구니에만 거미줄만 슬었고나."

"예끼... 이 버르장머리..."

장충은 정말로 화가 나서 아낙네들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그들은 각자 해가지고 가는

물건들을 머리에 이고 조심하여 나한암의 비탈길로 올라갔다. 그들이 고갯마루로 올라서는

, 왠 사내가 느닷없이 바위 뒷전서 튀어나오며 냅다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 참빗이여 귀이개 뒤꼬지 쪽지게에 감사댕기 금박댕기 은박댕기 없는 게 없습니다."

사내는 머리에 개잘량을 깊숙이 눌러 썼고, 등뒤에 커다란 버들고리를 메고 있었으며 다

리에는 털 날린 행전 치고 짚신에는 감발을 쳤다. 백련이가 곁으로 물러서며 쫑알거렸다.

"에그 깜짝이야. 갑자기 오줌 쌀 뻔하였네. 아니 손님이라군 너구리에 토끼들밖에 없는

데 어디서 소리를 치는 거에요?"

"허허, 말씀 맙쇼. 그럼 아주머니들이 너구리 여우님이란 말유? 내 여기서 다리쉬임을 하

다가 맞춤한 손님들을 먼발치서 찍어놓고 기다리던 참이외다. 자아, 구경들 하십시오."

무당이 혀를 끌끌 차면서 개잘량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이런... 보아허니 방물장사인 모양인데, 장사를 하려면 대처 돵으루나 가야지 지금 같은

보릿고개에 이런 화전골엘 찾아모년 뭘 하우?"

개잘량의 사내는 희멀쑥한 얼굴에 웃음을 가득 내보이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거 모르시는 말씀 맙쇼. 도방에서야 이런 것을 진작에 구해놓았지요. 이런 물건은 한번

장만하시면 만년묵기올시다. 아무리 보리 흉년이라지만 우리는 곡물도 받지 않고 면포도

받지 않습니다. . 이런 골에서야 그 귀한 족제비나 너구리나 여하튼 온갖 피물이 많겠습

.얼마든지 가져오세요. 자아 바늘에 분에 거울에 장도에 떨잠을 댕기며 화관에다 얼레빗

달빗 참빗 노리개 향갑 없는 게 없습니다. 지금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댁이 어디신지 알

려만 주신다면 나중에 제가 찾아갈 제 털가죽이나 몇장 얻어 가지겠습니다." 사내가 고리

짝을 열러 갖가지 희한한 향화를 들추며 보여주자 그들은 역시 아낙네들이라, 고갯마루에

쭈그려앉아 이것저것 집어다 옷에 대보거나 머리에 꽂아보거나 만지작거리기 시작하였다.

안무당은 어서 사선골에 가서 굿판 준비할 마음만 빠빠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얘들아, 이렇게 지체하다가 눈보라가 몰아치면 어쩌려느냐. 구월산에서 겨울 해가

노루꼬리인데 금세 어두워진다. 어서들 일어나."

"가만있으슈. 나는 이 향갑이나 하나 가졌으면 했어. 어머니두 하나 골라봐요." 백련이가

매듭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향갑을 골라 가슴 아래 대보면서 종알거렸다.

", 이건 어떠십니까?"

사내가 달빛을 들어 안무당의 머리에 슬쩍 꽂아주는 것이었다.

"아니 이이가..."

"염려 맙쇼. 지금 돈 달라구 손벌리는 게 아니올시다. 덫에 걸린 짐승의 가죽이나 몇장 주

시면 됩니다." 사실 안무당도 그 달빗이 탐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갖겠다는 것

보다도 까막내 사는 딸이 놀러오면 내주고 싶었다. 더구나 탑고개에서는 집집마다 흔해빠진

털가죽으로 치러달라는 게 아닌가. 안무당은 달빗을 빼내어 손에 쥐고는 저도 모르게 주저

앉아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당화인 듯한 쇠바늘이 열 개쯤 꽂힌 바늘통을 골라냈다.

"헌데 어디서 오시는 깅이우?"

안무당이 태도를 바꾸어 묻자 장사치 사내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송화서 자고 방금 들어오는 길입지요. 우리는 송도 임방서 차인질을 다니다가 아무래도

내 장사를 벌리는 게 입에 풀칠을 하더라도 낫겠구나 싶어서, 직접 한양에 올라가 물건을

떼어다가 동절에는 주로 피물로 바꾸어 잦다 팝니다. 이 골엔 방금 첫발이지요."

안무당이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골에 산짐승 안 남아나겠군. 여보슈, 여기가 어딘 줄 알어. 이런 물건 밝히는 아낙들

이 떼로 있는 동네여." "그럴 줄 알았지요. 우리는 동네의 지붕을 먼발치서 척 보기만 해두

장사해먹기가 어떠한가 대번 알아냅니다." 안무당이 다시 재촉하였고 백련이와 다른 무당

들도 일어섰다. 그들은 알기 쉽게 장충의 초가지붕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고, 사내는 연신

빙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를 제가 새달에 찾아뵙지요. 지금 마을에 내려가서 한바퀴 돌아볼 터인데 어느

댁 아주머니께 가서 부탁하면 제일 좋을까요?"

방물장수 사내가 바위넘이를 내려가는 안무당 일행에게 외쳐 물었다. 아무리 외상거래라

지만 녀석이 끈을 잡아물고 들어가려는 것에는 역증이 나서 안무당이 중얼거렸다.

"그 사람... 이제는 우리까지 엮어서 팔아 넘길 셈인가." 향갑을 품에 지닌 백련이가 신이

나서 목청을 돋우며 대답했다.

"저어기 고사목 있는 모퉁이에 변서방네가 있어요. 동네 아낙들이 저녁에는 그 집에 모여

서 유기를 짠답니다." "예예, 고맙습니다."

고개 아래로 싱글거리며 연신 허리를 굽혀 보이던 사내의 얼굴이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그는 다시 날카로운 눈매로 변하여 눈에 덮인 탑고개마을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고개의 사방이 한눈에 보이는 곳은 나한암 바위엄이가 기중 나은 장소였던 것이다. 그는 먼

저 안무당이 내려간 곳으로 눈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저기가 아사봉 줄기의 끝이로군. 그러면 사선골이 이 골짜기의 입구가 되는 셈이렸다."

그는 아사봉의 산맥을 따라서 위로 죽 시선을 끌어올렸다. 골짜기 양편으로 향나무와 잣나

무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었으며, 골짜기는 가운데로 삐죽이 솟아오른 나한암으로 해서 막

혔다가 다시 안쪽으로 터져 들어간 것이었다. 나한암 아래는 가파른 계곡이 벼랑이 되어

입을 벌리고 있었고 바위넘이를 내려가면 이쪽과 저쪽의 협로가 두 가닥의 통나무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래쪽은 바위넘이에서보다는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았으나 거의 열 길 높

이는 되어 보였다. 아름드리의 통나무 두 개를 칡덩굴로 엮어놓은 다리인데, 만약 그것을

태우거나 들어내버리면 사선골과 탐고개는 길이 끊기는 셈이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서서 나한암의 뒤편을 내려다보니 골짜기가 넓어져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나한암 아래편에서 보면 탑고개와 아사봉 등성이로 하여 가파르고 비좁은 골짜

기만이 계속되고 있을 듯한데 그 뒤편에 이렇게 너른 분지가 벌려져 있는 것이었다. 골짜

기를 따라 흘러내려오던 시냇물은 나한암 아래의 깊숙한 벼랑 아래를 흘러내려가는 게 지금

은 꽁꽁 얼어붙어 흰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그렇군!"

방물장수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스스로 감탄하였다. 미끄럽기는 하겠지만 저 계곡의 시

내야말로 들어가는 가장 안전한 길인 것이다.

"일단 이곳을 적이 모르게 지나고 나서 마을 나쪽에 들어가 있다가 들이치면 될 것이다."

방물장수는 다시 자봐 방물이 들어 있는 고리짝에 멜빵을 걸어 짊어졌다. 이제부터 각 집

마다 사내들이 있는 집과 없는 집을 가려내고, 소문과 같이 산속의 명화적당과 괴뢰배 사당

패들이 섞여 살며 내통하고 있는지도 알아낼 작정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그들만의 지름길도 답사할 작정이었다. 얼굴이 희고 손매가 고운 방물장수는 바

로 유사과의 맏아들 유수룡이었다. 그들 형제는 며칠 전에 신천을 출발하여 송화 무더리에

봉노를 잡고 기찰을 시작한 것이다.

사선골은 읍내에서 들어오자면 이십여 리 길이요, 곰너미고개를 넘어서 구월산의 서록에

닿는 깊은 골짜기 사이에 있으니 이웃 탐고개 마을과는 오리지간이었다. 사선골의 깊숙한

골짜기는 십리장곡이라 하였다. 사선골 너머로 정곡사가 있었는데 이 역시 월정사의 부속

사찰이었다. 사선골은 골짜기 양쪽에 억지로 틀어박혀 행겨난 동네였고 처음에는 산 위의

사노비들이나 화전꾼 또는 수상한 유민들이 서너 십씩 들어와 살다가 어느결에 마을이 도이 

. 그들 역시 탐고개 사람들처럼 다른 마을과는 별로 왕래하지 않고 살아갔다. 안무당 일행

이 사선골 훤향의 집을 찾아가니 때마침 계화가 길 저쪽에서 마주 오다가 반색을 하는 것이

었다.

"아이구 성님 내려오슈. 나는 우리 원향이가 신어머니를 못 만날까봐 얼마나 걱정을 했는

." "뭘 자네가 대신하지."

안무당이 말하자 계화는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당치두 않는 말씀이우. 내야 어디 만신의 자격이 있나요. 다 성님 덕에 대무 노릇이나 하

는 게지." "아이가 어떻든가?"

"틀림없어요. 이따가 몸주가 하강하면 말씀 나눠보시구랴. 아직은 갈피를 못 잡고 그냥 비

지땀이나 흘리고 몇마디 중얼거리다 맙디다."

"말은 해서 뭘 해... 내가 보면 다 아네."

원향이네 집은 골짜기의 끝집이었다. 역시 가난한지 낮은 초가인데벽이 헐어서 수수깡이

드러난 곳도 있었다.

이를테면 남자가 없는 집안이었다. 삽짝도 여기저기 망가져서 집안이 들여다보였다. 여인들

이 들어가니 먼저 와서 기다리던 사내 둘이 일어나 안무당에게 뚜벅해 보였고, 주인 아낙네

가 반기며 뛰쳐나왔다.

"만신님 오십니까. 이 눈길에 우리 원향이 때문에 어려운 걸음 하십니다." 안무당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계화가 말하였다.

"이제부터는 자네 딸이 아니여. 몸주님께 바쳤으니 섭섭타 생각 말구 신어머니 모시도록

허게." "자네들두 수고가 많구먼."

안무당이 사내들에게 아는 체를 하였다. 두 화랭이 역은 하나는 오계손이란 신천 박수인

데 원래는 월정사 사당골에서 모가비 임가와 더불어 출행을 다녔던 자였고, 또 하나는 계화

의 남편인데 예전에 문화 재인말서 큰돌이와 장충의 중간 또래로서 경기지방에 나다녔던 광

대였다. 계화 남편은 아내의 좌무 역을 맡아서 살아가고 있었는데 모두들 부엉이 박수라

불렀지만 김승운이 그의 이름이었다. 계화는 안무당이 등장하자 장고를 맡았고 백련이는

신딸 원향이를 곁에서 돌보아주기로 하였으며 두 무녀들은 각각 부고가 꽹과리를 맡았고

오계손이가 해금을, 부엉이 김승운이가 피리를 맡기로 하였다.

건넌방에서 단장하고 기다리던 원향이가 나오는데 노랑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었고 그

위에 남빛 동달이를 걸쳤으며 털벙거지를 엇비슷이 쓰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눈썹은 가

늘고 눈은 꼬리가 긴데 눈자위가 불그레하고 시선이 멀었다. 입술은 쫑긋하고 머리털에 반

쯤 가리운 귀는 엽전처럼 작고 동그랗게 찰싹 붙어 있었다. 몸은 길로 말랐으며 손가락들

역시 희고 길었다. 안무당의 눈이 긴장하여 그 모든 것을 훑어보고 있었다.

"잘 놀겠구나!"

안무당은 예전에 봉순이를 일곱 살에 신딸로 들이던 때가 생각나서 무심결에 중얼거렸고

김승운이가 함께 눈을아래로 내리깔로 중얼거렸다.

"만신감이오."

"귀와 눈은 너무 좋은데... 턱이 너무 박하구나. 명이 짧으려나..." 안무당은 어딘가 그 계

집아이에게서 섬뜩하는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해말갛고 가녀린 것이 마치 가을 물과도 같

았다. 두 손으로 떠올리기도 아까운 작은 샘이었다. 어느 신장님께서 묘하게도 짚어냈구나

싶었다. 백련이가 옆에서 부축하여 원향을 데리고 들어왓고 다른 부당 하나가 잽싸게 일어

나 그 왼편을 부축하였다. 신딸로서의 예를 올리는 것이니 만신께 뵈는 것이다. 안무당은 아

미를 숙이고 고요히 무너져 앉듯 절을 하는 원향이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이 뭐라구 했더냐?"

"원향입니다."

안무당이 다시 물었다.

"너 어디서 낳았니?"

원향의 생모가 곁에서 공손히 말하였다.

"풍천 여기포에서 낳았습니다."

", 바닷가에서 낳았구나. 사주는?"

", 경술 유월 스무이레 축시올습니다."

안무당은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꼽으며 주여으로 따져보았다.

"천택화뢰풍수산지. 경술이 열하나요, 유월에 스무이레 진이로구먼, 축시면 여섯 수에 감

이로다. 합하면 뇌수해, 그동효를 보아하니 지수사로다."

손가락을 꼽던 안무당이 멈칫하였다. 왠일일까, 불운이 닥쳐오지만 풀리고 다시 큰 싸움을

겪는다. 위험하다, 이 작은 소녀에게 장수의 괘는 당치 않다고 여겼으나, 역시 큰 무당은 신

장의 혼령을 받지 않는가, 고쳐 생각하고 나서 안무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오늘부터 용녀라 하여라. 수변지처에서 낳았으니 진은 곧 용이니라. 네 무명은 이

미 받아서 태어났느니라."

원향은 그린 듯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 아직도 그녀의 시선은 저 끝없는 어딘가에 멎어

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원향을 앉혀두고 안무당은 내림굿의 절차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부정거리가 시작되어 먼저

집안의 구석구석을 깨끗이 하고 나서 가망거리로 들어가는데 이때에 안무당은 철릭을 입고

주립을 쓰고서 손에 방울을 들었다. 그때부터 원향의 눈은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합장하고

있던 손이 떨리는 것이었다.

"아아..."

원향의 뺨에 홍조가 번져갔고 이마에는 땀이 송송 솟아올랐다.

"성 주신 가망 본 주신 가망이여 씨 주신 가망이요, 도당으루 살융 가망 사해루 용신 가

망 성주루 어비 가망 안당으루 불사 가망 만신 몸주로 대신 가망 수본향 수천왕 육본향 육

천왕 가망이여..." 안무당이 서서히 공수를 받을 기색을 보이면서 목소리가 높아지고 열에

뜨기 시작하는데, 원향은 이미 벌벌 떨고 있었다. 눈은 광희로 빛나고 입술을 붉어져서 무엇

인가 말을 할 듯 말 듯 조금씩 달싹였고, 드디어는 입을 딱 벌리고는 하였다. 그리고 긴숨

을 오랫동안 토해냈다.

원향은 풍천의 여기포에서 군관 홍봉기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미는 신량역천인

염간의 딸이었다. 홍봉기가 읍성인 추성 기패관으로 있다가 장교가 되면서 사행선이 닿는

여기포의 진영 당관으로 나가게 되어 원향은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던 것이다.

그의 어미 후례는 조모에게서 배운 대로 날마다 새벽이면 뒤란에 정화수를 떠놓고 끓어앉아

빌었다. 사행 행차의 송영을 맡아 순서와 법도에 맞추어 진행하는 일은 진영 장교와 같은

말단에게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역별장을 비롯한 장사치들

은 흔히 감영이나 중앙으로부터 청탁을 넣어 온 자들이라 자세가 심하였고 걸핏하면 소리들

을 궁지에 몰아 넣기가 일수였다. 진장은 또한 장교들을 통하여 장사치들과 손을 잡아 이윤

을 올릴 것을 원하였다. 홍봉기는 걸핏하면 군문에서 곤장을 맞고 나왔다. 원향의 어미 후

례는 어서 남편이 이곳을 떠나게 되는 것과 재임 동안에 제발 무사 건강하기를 날마다 빌었

고 그에 덧붙여 홍봉기를 닮은 씩씩하고 강직한 사내아이를 갖게 해주십사고 치성을 드렸던

것이다. 산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는데 또한 여아였다. 후례는 너무도 분해서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은 군영에서 열흘째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미는 갓난 살덩이를 안고 바람

이 부는 바닷가로 뛰쳐나갔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아랫도리는 피투성이의 속곳바람이었다.

그날은 폭풍우가 몰아쳤고 온 바다가 끓는 가마솥과 같았다. 하늘에서는 우렛소리가 요란하

였고 온 바다가 끓는 가마솥과도 같았다. 하늘에서는 우렛소리가 요란하였고 번개가 삭정이

가지처럼 구불거리며 하늘의 곳곳을 찢어발겼다. 후례는 바닷가의 비바람치는 모래 위에다

아이를 던져두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해변을 달려서 되돌아왔던 것이다. 얼마쯤이

나 뛰었을까, 뇌성벽력이 길게 소리치며 지나갈 때 후례는 못내 뒤를 돌아보고야 말았다.

백하게 드러난 백사장 너머로 벽처럼 일어서서 몰려오는 큰 물결이 달려오고 있었다. 후례

는 심장이 멎는 듯하였다. 아이를 향하여 뛰었다. 물결과 그녀는 서로를 향하여 달려오고 달

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후례가 아이의 몸 위를 감싸며 엎드린 것과 파도가 덮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이었다. 후례의 잔등을 후려때리며 폭포수처럼 쏟아졌던 물결이 그 가랑이 사이로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후례는 이미 차디차서 시체나 다름없는 살덩이를 끌어안고 집으로 돌

아왔다. 아기의 맥박은 이미 사그라지기 시작한 잘은 불티와도 같았다. 후례는 아기를 감싸

고 입김으로 불어서 녹여주었다. 폭풍이 가라앉고 나서 사위가 고요해진 새벽녘이 되어서야

아기는 숨통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맛나게 젖을 빨았다. 이튿날은 정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평하고 청명한 아침이었다. 보통 날처럼 소금기 걷힌 순풍이 어루만지듯 불어 지나가고

있었다. 후례는 미륵님께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였다. 홍봉기가 돌아왔고 그는 또 딸을 낳은

것을 보고도 실망하기는커녕 벙글대며 좋아하였다. 홍봉기는 요미를 두어 말 자루에 담아서

들고 나왔던 것이다. 남편이 돌아왔으므로 후례는 그날은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다. 땔감을

주우러 나갔던 봉기가 물에 젖은 나뭇가지들과 함께 사랑스럽고 요염하게 핀 해당화를 한묶

음 꺾어가지고 들어왔다. 간밤에 물에 쓸린 모양인걸... 꽃은 방금 번진 피를 머금은 듯하

였다. 후례는 그냥 넋을 잃고 문가에 기대 앉아 있었다. 봉기가 마당에다 꽃들을 아무렇게나

던졌고 흩어진 꽃잎들이 정말 피처럼 뚝뚝 떨어져서 젖은 땅 위에 달라붙었다. 꽃의 잔해는

참으로 참혹하게 보였다. 지금 문득 생각이 났네.. 고년 이름을 으뜸 원 향기 향, 원향이라

구 짓지. 후례는 원향이가 자랄 때 언제나 그 돌벽처럼 서서 덮치려 달려들던 파도를 잊지

못하였다. 그래서인지 후례는 원향이가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울거나 혀면 견딜수가 없었다.

큰딸 인향이는 말수가 적고 책임감이 강한 아이였다. 저희 애비를 닮아서 고통스럽거나 즐

거운 일이 있을지라도 쓰다 달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들은 거의 같이 붙어 지냈다.

기가 군영에서 닷새 열흘 보름씩 틀어박혀 지내면 후례는 어려서부터의 버릇대로 갯가에 나

가 조개를 줍고 미역도 뜯었다. 어린 인향이가 언제나 원향이를 안고 업고 재우고는 하였다.

어린 인향이가 열일곱살, 원향이가 열두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는 준보가 갓 태어난 때였다.

사행이 있었고, 봉기는 여기포에 나와 눈코 뜰새가 없었다. 그래도 밤이 되면 들어왔다가 닭

이 울자마자 포구나 당관으로 뛰쳐나가기는 하였어도 날마다 들어오는 것만이 온 식구에게

는 반가운 일이었다. 상행선 호위로 따라나왔던 선전관 하나가 술이 취하여 하는 수 없이

군관 홍봉기가 집으로 모셔오게 되었다. 상방을 치우고 다시 술상을 보아서 그에게 극진히

대접을 하였다. 실로 선전관이라면 입술 한번 달싹이는 것으로 이러한 한벽한 진이 장교쯤

은 지옥과 극락을 멋대로 골라서 던져버릴 수가 있는 처지였다. 선전관은 무과를 한지 얼마

안되어 새파랗게 젊은 한양의 낭관이었다. 위이니 어찌나 호방한 테하고 놀기를 좋아하던지

홍봉기를 앞세워다니며 여기포로 몰려나온 관기들을 모두 한번씩 집적거렸다. 술상을 들여

오는데 아내를 들이기도 뭣한 일이라 봉기는 인향이에게 가지고 들어오도록 이른 것이 잘못

이었다. 문이 열리고 어린 인향이가 제법 예의를 갖추어 머리를 수그리고 두 손으로 공손히

상을 받쳐 들어서자, 선전관은 펀뜻 정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자는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앉았다가 몸을 바로 세우며 취한 목소리롤 중얼거렸다. ... 자네 여식을 잘 두었네.

아직 어려서요. 미거합니다. 봉기는 그냥 인사치레거니 여기고 그렇게 받았을 뿐이었다.

잔이 거듭되고 나서 봉기도 몹시 취하였고 선전관은 더욱 인사불성이 되었다. 봉기가 비틀

거리며 일어나 금침을 피려하자 선전관이 그이 소매를 잡고 턱짓으로 앉으라는 것이다.

전관은 눈에 노기를 띠고 말하였다. 자네 이런 비례가 어디 있는가? 무슨 말씀이시온지

소인은... 자네 집엘 가자고 한 것이며 술상을 들이게 하여 선을 보인 것이며 다 저의가 있

을 터인데, 이제 내 곁에 누우려 하니 자네는 상관을 희롱하려는가? 홍봉기는 깜작 놀랐다.

아니올시다. 전혀 그런 게 아닙니다. 저것을 아직 어린것이라 전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

습니다. 선전관이 더욱 노하여 말하였다. 양반의 법도로는 미혼 처자를 외간남자에게 뵈이

는 것을 훼절이나 한가질세. 홍봉기는 선전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어찌해야 하올지

? 어찌하기는 뭘 어떻해 해. 너는 물러가고 여식으로 하여금 잠자리를 보살피도록 하여

야지. 홍봉기는 기가 막혔다. 나으리, 제 딸은 기녀가 아니올시다. 나도 아네. 그러니 내

가 소실로 데려가면 되지 않겠는가. 병수사가 아직 아니되었다고 자네가 이러는가? 홍봉기

는 그의 말에 감복하는 마음이 되었으니, 언감생심 자신과 같은 군관으로서는 선전관 사위

란 꿈도 못 꿀 처지였던 것이다. 아내와 의논한 뒤에 대령하겠습니다. 하여튼 속히 하게.

닭이 울면 끝나는 게 아닌가. 술상도 다시 보아오고... 봉기가 그의 아내 후례와 더불어 인

향이를 소실로 들일 일을 의논하는데 그 아내는 아무리 상한의 딸이라고는 하지만 느닷없이

취한 양반에게 소실을 구실삼아 잠자리 시중감으로 내보내기가 원통한 모양이었다. 가서

저만 호강하면 되었지. 까짓 성대한 예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옷 갈아입혀서 들여보내게.

봉기가 달래자 후례는 고리짝에 깊이 넣어두었던 그녀의 예전 혼수 옷을 꺼냈다. 제가 일

러줄 말이 있어요. 눈시울이 벌써 그렁그렁한 아내가 옷자락을 쓰다듬는 꼴을 보자 홍봉기

는 밖으로 나왔다. 부엌에 희끗한 인향의 자태가 보였다. 봉기가 기침을 하고 나서 그리고

다가서니 인향이는 흙벽에 기대 서서 쾌활하게 말하였다. 아버지, 염려 마셔요. 사창 군관

이 둔별장이 되셔서 동생들 쌀밥 실컷 먹고 살도록 할 테야요. 나는 저 양반께 소실로 가겠

어요. 봉기가 어리게만 생각하다가 또라지게 종알거리는 딸의 말을 듣고는 스스로 대견하

여 그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 너는 참말로 효녀로구나. 봉기는 뒷짐을 지고 묵묵히 섰

다가, 어서 느이 엄마에게 들어가보아라. 하였을 뿐이었다. 인향이가 아내와 나직하게 소

곤거리는 말을 듣자니 아마도 제 나름의 내훈을 가르치는 모양이었다. 이어 선전관이란 자

의 높다랗게 코를 고는 소리가 봉창 너머로 들려오고 있었다. 봉기는 뒤돌아서서 하늘을 올

려다보았다. 별이 그 밤따라 또롱또롱하게 가까워 보였다. 살그머니 미닫이가 열리고 인향이

가 마루를 건너는 것이 아마도 제 어미의 한 벌뿐인 혼수옷을 내림으로 얻어 입은 모양이었

. 미닫이가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창호에는 그린 듯이 앉아 있는 인향이의 그림자

가 비춰 보였다. 봉기는 더 이상 보기가 민망하여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불은 거의 동이 터올 무렵까지 그대로 켜 있었고 두 내외도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세웠

. 두런거리는 얘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 도대체 내가 언제 너를 들어오라고 그랬단

말이냐? 하는 선전관의 목소리를 들었다. 홍봉기가 마루로 뛰어나갔다. 그자는 의관을 차려

입고 불쾌하다는 듯이 툇마루로 나서는 참이었다. 나으리, 어디 가십니까? 그자는 멀뚱한

시선으로 홍봉기의 아래위를 흝고 나서 물었다. 저 애가 자네의 여식인가? 어제 안전께서

저 아이를 소실로 들이시겠다고 하옵기로... 선전관은 화들짝하며 놀라는 양을 보였다.

허 큰일날 사람이로고, 연경에 가는 상행의 절차 때문에 온 내가 그럴 경황도 없으려니와,

더욱이 출사한 관리로 작첩하여 돌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일세. 자네의 뜻이 아무리

그러할진대 취중의 상관을 이런식으로 우롱한단 말인가? 봉기는 기가 턱 막혔다. 후례는

안방에서 나서지도 못하고 쥐죽은 듯이 앉아 있었고, 인향은 어젯밤 그 자리에서 목석처럼

붙박혀 있었다. 홍봉기는 말을 더듬었다. 제 뜻이 아니오라... 그건... 안전께서 그렇게 지시

... 여러 말 말게. 자네가 아무리 양반 사위가 소원이라지만 내가 청혼한 지도 십년이 못

된 사람이야. 만약 이런 일로 나를 번거롭게 하면 상관을 능멸한 죄로 다스리겠네. 선전관

은 찬바람이 쌩 하니 돌도록 혼자서 잘라 말하고는 뒤로 돌아 보지 않고 말 위에 올라 포구

로 나가버렸다. 봉기도 처자를 대한 면목이 없어 그대로 여기포로 나와 관가의 잡색들과 어

울려 탁배기나 마시며 울분을 달랬던 것이었다. 저녁녘에 아내가 한 손에는 원향이를 끌고

등에는 준보를 업고서 달려왔다. 홍봉기는 공연히 가슴이 철렁하였다. 아침부터 인향이가

보이지 않아요. 어디 갈 데가 따루 있을라구... 그는 내색을 않으면서도 속으로는 짐작이

갔다. 인향이가 열일곱이니 이미 과년한 나이였고, 저 나름대로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인향

이 스스로 말했듯이 한벽한 포구의 군관으로 박료에 고생하는 아비를 세곡을 담당하는 사창

군관이나 역시 군량을 책임지는 둔별장의 직임으로 바꾸어 놓고 말겠다는 것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의 고생을 함께 겪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언한 양반은 취하여

코를 골고 잠들었고 그런 굳은 결심으로 소실이 되겠다며 제발로 들어간 새색시는 등잔 곁

에서 말뚝처럼 뜬눈으로 새웠다 하였어도 이튿날 선전관이 실언을 뉘우치고 장부의 언약을

지켰더라면 그러한 곤욕은 저절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는 당황하고 발뺌에 급급하여 심한

모욕만을 남기고 돌아갔고, 인향이의 스스로를 던지겠다는 갸륵한 마음은 우스꽝스럽게 짓

밟히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봉기는 처음에는 그의 딸이 부끄러움에 견디지 못하여 어디 산

이나 들판에 나가 혼자서 삭이고 있으려니만 여겨졌다. 그날 밤 늦게까지 인향이는 돌아오

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가 되어 포구에서 나갔던 주낙배들이 물결에 떠밀린 처녀의 익사체

를 건져가지고 돌아왔다. 인향이의 시신은 너무도 가엾고 처참하였다. 후례의 곡성은 하늘을

찢는 것 같았다. 원향이도 언니가 죽어서 돌아오던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언니는 상

반신에 헌 자리를 덮고 마당에 누웠는데, 새옷을 입고 있었고 버선코가 예쁘게 솟아오른 것

이 보였었다. 홍봉기는 식칼을 품고 군영으로 찾아가 선전관의 가슴팍을 바라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좌우의 비장들이 말리는 바람에 겨우 그의 손가락을 베었을 뿐이었다. 상관을 살해

하려 하는 행위는 군문에서 즉시 참수하여 효수하게 되어 있것만 봉기의 사정이 알려져서

태형을 받고 원격지에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그는 처자식을 그 고장에 두고 떠날 수가 없

었다. 봉기는 매를 맞고 나서 군영 밖으로 내처졌고 후례가 수습해다가 집으로 데려갔다.

그 길로 북관의 유배지로 떠나야 하건만 동료장교들이 사정을 알아서 모두들 모른 척하고

있었고 개중에는 어서 달아나 버리라고 슬그머니 일러주는 이도 있었다. 여보, 당신을 두고

갈 수는 없소. 어디 간들 여기보다 못하겠고. 봉기는 후례를 달랬다. 딸의 시신을 묻자마자

남편의 비참한 꼴까지 보게 된 후례는 거의 미친 여자와 같았다. 봉기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나귀에 가장집물을 골라 싣고서 절뚝거리며 풍천계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한내를 앞에

두고 은율의 조산틀에 이르렀다. 후례는 실성하였는지 준보를 등에 업은 채 걷기만 하였고,

철없는 원향이는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렸다. 봉기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온몸은 장독으

로 부어올라서 열에 들떠 있었다. 그는 한내의 자갈밭에 지쳐쓰러지고 말았다. 물을 먹고 싶

어서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아내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였다. 원향이가 봇짐 속에서 사발

을 꺼내어 한내의 물을 떠다가 아비에게 먹였다. 꿀꺼대며 실컷 먹고 난 봉기는 원향에게

가느다랗게 말하였다. 원향아, 저어기 큰길이 보이지? 그리로 죽 올라가거라. 아무 집에나

가서 우리 식구 얘기를 하고 살려주시면 은혜를 갚겠다구 해라. 원향이는 큰 눈에 그렁그

렁한 물기를 담고 신음하는 아비를 향하여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는 타박타박 읍내

를 향하여 걸어갔다. 원향이느 큰 솟을대문이 달린 집은 무서웠다. 아비가 군영에서 반죽음

이 되어 실려 나오던 광경을 엄마와 함께 똑똑히 보았던 터였다. 원향이는 장림을 지나갔다.

마침 숲 안에서는 선비들의 답청놀이가 한창이라 기생들이 드높은 소리로 태평가를 노래하

고 있었고 삼현육각이 흐드러지는 판이었다. 원향이는 기름진 음식내음에 취하여 저절로 발

길이 그리고 향하였다. 기생 하나가 일어나 자리 위에서 치마를 날리며 춤을 한바탕 추고

있었다. 원향이는 홀린 듯이 그런 광경을 보았다. 얘얘, 저리 가거라. 노구에 술을 데우고

앉았던 하인이 몰골이 초라한 계집아이가 넋을 잃고 구경하는 것을 보자, 쫓으려고 손을 홰

홰 내저으며 다가왔다. 원향이는 문득 가슴에 뭉쳤던 것이 터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

로 울음을 터뜨렸다. 어허 이거 야단났네. 여기서 우물쭈물하면 네 부모가 단속하지 못한

죄로 혼쭐이 난단 말이야 원향이는 그 말을 듣고는 등을 돌려 정신없이 달아났다. 장터에

이르러서야 아버지가 하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원향이는 팥죽을 팔고 있는 아낙네의 앞으

로 사거 말을 걸었다. 우리 식구 좀 살려주셔요. 우리 식구가 죽어가요. 죽 파는 아낙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구걸을 다녀도 식구 걱정까지 하는 애는 첨 보겠네. 옛다,

이나 한그럿 먹구 가거라. 하면서 구기로 듬뿍 퍼서 죽 한 그릇을 내미는 것이었다. 원향이

는 아버지의 말밖에는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랬어요. 살려주시면

은혜는 갚는다구요. 지나가던 장꾼들이 원향이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 너 왜 그러느

? 원향이가 돌아보니 가사 장삼의 스님 한 분이 사람들 틈에 끼여 서서 묻고 있었다..

은 머리가 희끗희끗했고, 눈자위에는 인자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길에서 넘

어졌어요. 엄마하구 동생두 거기 있었요. 살려주세요. 유민인 모양이군... 다른 장꾼이 중얼

거렸다. 원향이는 눈물을 쫄쫄 흘리며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그 스님이 원향이의 조막손을

살그머니 잡았다.

그래 느이 식구들 있는 데로 가자. 원향이는 어쩐지 마음이 놓이고 아버지가 그럴 때처럼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동안 스님은 내내 원향이의 손을 가만히 잡고

있었다. 식구들 있는 한내의 냇가로 와보니 준보는 엄마의 등에서 악을 쓰며 울고 있었고,

아버지는 물가에 하늘을 바라보며 반듯이 누워 있었다. 원향의 기억으로는 아버지는 다가

오는 그들은 아래로 눈을 깔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스님이 멈칫 섰다. 나무 관세

음보살... 그는 합장을 하고는 뒤전에 멍하니 앉아 있는 원향의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후례

는 입을 반쯤 벌리고 머리는 사방으로 흐트러진 채 먼 장림의 숲 언저리를 내다보는 양이었

. 원향이가 홍봉기에게로 가서 손을 잡았다. 아부지, 사람을 불러왔어요...

손은 뻣뻣하고 차가웠는데 장작개비 같은 것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스님이 가까이 다가앉

더니 봉기의 아래로 뜬 눈 위에 손을 갖다대고 쓸어내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원향이는 아

비의 옷자락을 잡아 흔들었다. 일어나요, 일어나라니까. 아가야, 아버지는 잠이 깊이 들었

. 스님은 잠시 그 자리에 앉아서 중얼거리며 염불을 외고는 세 번 합장 배례를 하고 일

어났다. 원향이도 언니의 죽음을 보았으므로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이제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땅속에 묻히는 것이다. 너 여기 있거라. 내가 가서 사람들을 불러와야 할

테니까. 무섭지 않니? 원향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스님이 내를 건너 사라지고 나서

그애는 엄마 곁에 가서 띠를 풀고 준보를 떼어냈다. 준보는 원향이가 가슴에 안자 울음을

그치고 입술을 달싹였다. 배가 고파 젖을 찾는 것이었다. 원향이는 그냥 준보를 토닥였다.

아이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 울다가는 또 잠이 들곤 하였다. 한참 뒤에 얼굴

이 준수한 젊은 중과 거사들이 내를 건너왔다. 풍열스님, 저 어린 것 좀 보십시오. 세상에

저렇게 야무질 수가 있나. 거사들 중의 하나가 감탄을 하였다. 사람들은 봉기의 시신을 무

명에 감아 둘러멨고 젊은 스님은 원향이를 등에 업었으며, 큰스님은 엄마를 부축해 일으켰

. 그들은 우선 월정사의 사당말로 갔다. 젊은 스님은 땀과 먼지와 눈물로 범벅이 된 원향

이를 냇가로 데리고 가서 머리를 감아주고 낯도 씻겨주었다. 아이 착하다. 네 이름이 뭐니?

원향이... 나는 여환이라구 한단다. 나두 너만한 누이가 있었다. 여환이라는 스님은 풍열스

님의 상좌였다. 언제나 말이 없고 사람을 보면 빙긋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이곤 하는 것이

었다. 원향의 어미 후례는 나흘 만에 제정신이 돌아왔다. 후례는 월정사의 보살 노릇을 하면

서 스님들 빨래도 해주고 부엌일도 맡았다. 원향이와 준보는 걱정없이 뛰놀았다. 원향이는

곧잘 풍열스님이 계신 암자에 올라가 놀았고, 상좌인 여환스님을 친오빠처럼 따르기 시작했

. 하루는 암자에 놀러 갔더니 여환이 보이질 않았다. 거기에는 얼굴이 험상궃고 기골이

장대한 못생긴 중이 상좌로 와 있었다. 원향이가 풍열에게 물었다. 스님, 작은스님 어디 갔

나요? 풍열은 빙긋 웃더니 곁에 무릎을 끓고 앉아 있는 못생긴 중을 바로 보았다. 작은중

... 여기 있구나. 코는 주먹만이나 하고 눈알은 부릅떴고 콧수염이 벌써부터 거뭇거뭇한

것이 꼭 법당에 세운 사천왕의 목상 비슷하게 보였다. 원향이는 다시 쳐자보기도 만정이 떨

어졌다. 여환스님 말이어요. 원향이가 새침하게 말하자 풍열이 덤덤하게 말하였다. 여환

은 갔다. 어디로요? 원향의 물음에 풍열은 대답이 없었고 험상궅은 중이 물었다. 스님,

이 애기가 누굽니까? , 뒷방 보살의 딸이니라. 원향이는 여환스님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

고는 금방 울음이 터질 듯하였다. 언제 갔어요? 새로운 상좌가 말하였다. 방금 내려갔

. 너 여환스님하고 동무 했구나? 피이! 나는 욕여라고 부른다. 이제는 나허구 동무로 지

내자꾸나. 가만있자... 못생긴 중은 돌아앉아서 꿈지럭거리더니 바랑 속에서 무엇인가 한보

따리 꺼냈다. 유지를 펴자 강정이 그듯하게 들어 있었다. 스님, 드십시오. 금강산 실백강정

입니다. 옛다, 너도 먹어라. 옥여라는 스님이 강정 한 개를 내밀었지만 원향이는 샐쭉해져

서 일어났다. 누가 그따위 것 먹는대나. 어어... 왜 화났니? 풍열이도 웃으면서 옥여에게

말하였다. 그냥 두어라. 저것이 여환이가 갔다고 저러지 않느냐. 허허, 살아있는 것들은 모

두 정에 부대끼는구나. 원향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암자에서 뛰어내려왔다. 아무 스님이

나 붙잡고 혹시 여환스님이 지나는 것을 못 보았느냐고 물었다. , 아까 사당말에서 인사

들 나누고 하던데, 그리루 가보아라. 원향이는 부리나케 월정사 경내를 빠져나가 사당패가

살고 있는 아랫마을로 달려갔다. 여환스님은 보이지 않았다. 마당에서 키질을 하고 있던 사

당에게 원향이 물었다. 보살님, 여환스님 보셨수? , 원향이로구나, 아이 이쁘기도 해라,

어서 들어오너라, 내가 밀전병 부쳐주께. 아이, 여환스님 못 봤냐니깐. 누구? , 작은스님

말이야. 방금 수렛고개로 나간다고 저기 가던데, 조금 아까까지도 모퉁이에 보이더니만...

 

원향이는 숨이 턱에 닻고 옆구리가 걸려서 더 이상 뛸 수가 없었다. 허위허위 산 모퉁이를

돌아가니 산 아래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는 바랑을 짊어지고 송낙을

쓴 호리호리한 여환스님이었고 다른 두 사람은 전송을 나가는 거사들이었다. 원향이는 두

손을 모아 여환을 불렀다. 여환스님... 원향이의 쨍쨍한 목소리가 골짜기에 길게 퍼졌다.

세 사람이 멈추었고, 여환이 돌아보았다. 여환은 대답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스님. 다시

한번 부르니까 여환은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계속 걷는 것이었다. 원향이는

이제 엿말 해주는 사람도, 등성이에 올라가 산천을 보여주는 사람도 뒤에 와서 깜짝 놀라게

왁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없어진 것이었다. 세 사람은 다시 한 굽이의 산모퉁이를 돌아가버

렸다. 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향이는 입을 삐쭉거리며 서 있었다. 치이, 누가 뭐 쫓

아간댔나. 원향이는 바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여기는 가끔 와서 앉아 있던 곳이다. 여환스

님과 엄마가 문화나 은율 장을 보고 돌아오는 초입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월정사에서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길목인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며칠 전에 여환이 은율 다녀온다고 나갈

때 원향이도 따라나온 적이 있었다. 여기쯤에서는 원향이가 돌아서야 되건마는, 그날따라 스

님을 쫓아서 장 구경을 하고 싶어서 몸을 젖히며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여환이는 가

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된단니까, 지금 상목을 팔러 나가는 길이란다. 늦으면 장거리서 자

게 될지두 모르는데 어딜 쫓아간다구 그래. 싫어, 나두 갈 테야. 여환이가 걸음을 옮기면

원향이도 옮기고 우뚝 서면 따라 섰다. 여환이가 화가 치밀었던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 이러면 나는 안 올 거야. 동무도 안해주고 담부터 너 혼자 놀아. 원향이는 그 말에 놀

라서 입을 벙긋 벌리고 있다가 고래를 끄덕여 보이고는 돌아었다. 한참 타박타박 걷다가 돌

아보니 이번에는 여환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여환이가 원향이에게로 와서 부드

럽게 말하였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우리 원향이한테 괜히 소리를 질렀구나. 너 사당말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거기부터 혼자 절까지 돌아가야 한다. 원향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걸으

면서 여환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스님 말이 맞는가 보다. 사문은 개도 닭도 새 한 마리

라도 길러서는 안된다더니. 여환스님의 청수한 이마는 잠깐 흐려졌다. 그는 길에서 작은 돌

멩이를 주워 들었다. 한참 가지고 걷다가 그것을 원향이엑 내밀어 주었다. 이 자갈돌이 참

예쁘다. 꼭 참새알 같지 않는냐? 너 갖구 놀아라. 원향이는 별로 맘에 없었짐반 돌을 받아

쥐었다. 축축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여환은 말하였다. 내가 예말 해줄까? , 긴 걸루. 토막

잘라서 내일 해주면 싫구. 그래 길지두 짧지두 않은 것으로 해주마. 옛날에 칠 년 왕가뭄이

나서 갑자기 중천이 뚫어지더니 비가 많이 쏟아졌대. 하늘에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글쎄 연

못을 지키는 천관이 물꼬를 터놓고는 잠이 들었다지 뭐야. 천관이 한번 자고 석달 열흘을

깨어나지 않으니까., 이 세상은 온통 홍수가 져서 물천지가 되었지. 들도 높은 산도 물속에

파묻혔으니 논밭이나 마을도 온통 남김없이 떠내려갔단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죽고 둘만 살아남았다는구나. 누가 살아남았어? 부모님도 친척들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죽고 오누이만 살아남았다지. 그 아이들은 다행히 홍수를 피해서 높은 산으로 올라갔었는데,

물이 발목에까지 차올라올 때 천관이 잠을 깨었다는구나. 천관은 허겁지겁 물꼬를 막았지.

그래서 살아난 거야. 물이 빠져서 오누이가 마을로 내려왔지만 산야는 모두 버려지고 사람

은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 적막한 강산이었다. 그래서 살 길을 찾으려고 오누이는 집도 새로

짓고, 농사도 지으면서 열심히 일했지. 그런데 오누이끼리라 자식이 있어야지. 자식이 잇어

야 세상에 사람이 퍼져갈 게 아니냐? 그래서 둘이는 멧돌님께 빌었단다. 우리는 오누이라서

혼인할 수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했지. 오라버니는 수멧돌을 동쪽으로 굴리고 누이

동생은 암멧돌을 서쪽으로 굴려 보내고 나서 둘이는 산에서 내려왔대. 산을 내려와서 보니

까 이상하게두 해가 뜨는 쪽으로 보낸 멧돌과 해가 지는 쪽으로 보낸 멧돌이 만나서 합쳐져

있었다지. 그래서 오누이는 아, 하늘이 우리더러 혼인하라구 그러는구나 생각하고는 그렇게

했단다. 그래서 예전부터 사람들은 부부는 오누이라고 말하는 거야. 얘기들 들은 원향이가

아무 생각 없이 종알거렸다. 나두 크면 스님한테 시집갈 테야. 여환이는 웃으면서 아무렇

지도 않게 말했다. 그건 안된단다. 어째서 안돼? 전생 때문에 안된다. 그게 뭐야? 여환

이는 다른 말을 물었다. 너 아까 그 돌멩이 어쨌니? ... . 여환의 얘기에 팔려서 걸어

오는 사이에 원향이는 손에 쥐고 있던 돌맹이를 어디다 흘린 모양이었다. 돌아보았으니 저

수많은 길위의 잔돌들 가운데서 다시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여환은 원향이의 등을 가

볍게 밀어주면서 말했었다. 이젠 혼자 갈 수 있지? 원향이는 바위위에 꼼짝도 안고 앉아

있었다. 그 뒤로 차츰 철이 들고 처녀로 커가는 동안에도 원향은 여환을 잊지 않았다. 뒤에

들으니 감영이 있는 해주 수양산의 어느 절에 있다는 것이었고 원향이는 어머니와 더불어

종곡사 아랫동네로 이사했다. 사선골에서 산 지가 어언 다섯 해 였다. 절 땅을 부쳐먹고 어

머니는 절의 대소사를 도우며 살아갔다. 지난해의 흉년을 힘겹게 넘기다가 그들 모녀는 다

시 풍열스님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원향이는 꿈에 자주 죽은 인향이가 보이는 것이었다.

인향은 바다 위에서 금빛 찬란한 덩을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열이 나서 머리가 지끈거리

며 온몸이 알 수 없게 나른하더니,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후례는 일을 나가면서도 어린

준보에게 누나 곁을 떠나지 말라고 몇번이나 이르고 나가는 것이었다. 자기가 예전부터 실

성기가 있다가 부처님을 모시게 되면서 가라앉았듯이, 딸도 그런 몹쓸기질을 물려받았다고

후례는 마음 아파하였다.

어느날 한동네에 사는 계화라는 무당에게 보였더니, 그는 와서 눈을 한번 맞춰보고는 부

들부들 떨며 운신을 못하였다. 계화는 구슬같은 땀을 흘리며 말하였었다. "나는 대가 약해

서 못 당하겠네. 탑고개 만신님께 뵈어야겠어."

한편 유수룡은 방물고리를 메고 탑고개마을로 내려갔다. 슬그머니 집 안팎을 살펴보니 마

당에는 쌀겨가 흐트러져 있었고 닭과 개는 살이 졌다. 마루는 기름을 바른 듯이 반들거리

고 문청호는 깨끗하게 발려 있었다. "틀림없군..." 그는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것

을 빼앗아 살아가는 자들고 내통하지 않고서는 도방 대처도 아닌 이런 화전촌 같은 데서 근

년과 같은 흉년을 고이 넘겼을 리가 없을 터였다. 싸릿대 사이로 사람의 자취가 희끗하였다.

유수룡은 일부러 헛기침을 해보았다. "누군가, 임서방인가?" 늙으니가 갑짝을 밀고 내려

보더니 그를 아래위로 흝었다. "누구슈... 이 돈네 사람이 아닌데?" ", ... 이것 보십

. 방물 황호올시다."

"안 사오. 이 동네에서 누가 그런 물건을 사겠소." 늙은이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 고리ㅏ를 멘 멜빵천을 두어번 추스르고 돌아서는 수룡을 불러 세웠다. "우리 동네루 들

어오면 먼저 이정에게 가서 알리구 나서 돌아다니구. 동네를 나갈 때도 알리고 나가야 하

." 수룡은 짐짓 괴이쩍다는 얼굴을 지었다. "행상 다니는 사람을 나라에서 막는답디까?

이정의 허가를 다 받게요." 늙은이는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그런 게 아니라니

. 나라에서 등짐장사 다니는 것을 막는다는 게 아니라. 다 동네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구

약속이 있는 게야. 세상이 어수선한테 낯선 사람이 동네를 드나들면, 안 그렇겠소? 다큰 처

자들두 있구, 또 우리게에는 빈집에 많아. 남정네 없는 집이 많단 말야." "오라, 그러니까

저처럼 행상길이라두 나갔군요." "비슷하지, 여긴 쟁인들이 많이 사니까..." :어이구 그럼

장사 잘 되겠네. 가만있자. 이 집 마누라님두 내 달빛을 하나 사셨지요." 집을 둘러보니 세

여자가 찍어주던 곳이 분명하였다. "누가 무슨 돈으루 샀다구 그러나?" "아 예, 우리는 돈

이나 상목으로 받는게 아니로 피물로 받습니다. 너구리 오소리 따위의 가죽 몇장이면 됩죠.

아까 저기 고개마루에서 세 아낙을 만나서 마수걸이를 했습죠." 장충은 혀를 끌끌 찼다. "

그러게 여편네들이란 꼭 아이들 같단 말이야. 어느 겨를에 방물을 벌써 사가지구 갔단 말인

" 유수룡이 껄걸 웃었다. "말씀 맙쇼. 견물생심이리고 하잖습니까. 보세요. 자아, 이 쌈

지주머니는 어떻습니까.? 이 은 달린 담뱃대는 어떻구요." "필요없어, 나는 잘 모르겠으니

나중에 피물이 안 나오면 당신이 그 여편네들하구 오소리굴에 불때러 가시구려." 장충도

웃으면서 그런 농을 던졌다. 유수룡은 두리번거렸다. "고사목이라... 음 저기로구나, 저 집이

변서방 댁이지요?" "거긴 왜?" "아까 그 마누라님들이 하루 묵어 갈 집을 가르쳐주던데요

" "허긴 그 댁에서 저녁마다 동네 여편네들이 모여서 노닥거리지." " , 그 쌈지는 어르

신께서 하십시오. 말 보태주신 값이우." "어어 나는 쓸데없대두." "가지시라니까요. 이 댁

대문에 마수를 하구 그랬으니 이렇게 드려야 잘사가 더 잘됩니다." "허 그 사람..." "장충

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몇번이나 쌈지를 들여다 보았다. 유수룡이 동네로 올라가면서

말하였다. "여기서 묵게 되면 이정을 찾아뵐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과연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산하게 아이들이나 부녀자만 있는 집들이 여러 채 되는 듯하였다. 대개 산골마을의

겨울철이라면 사내들이 농사일을 놓고 어울려서 시끌덤벙할 텐데 농번기처럼 적막한 것이

치채로웠다. 수룡은 고사목이 섰는 집앞에 이르렀다. 안을 들여다보니 몸집이 크고 괄괄해

보이는 여자가 절구를 신명나게 찧고 있었다. 아이는 마당에서 뛰놀았고, 노파는 양지쪽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처마에 주렁주렁 달린 고드름 끝에서 쉴새없이 물이 떨어지고 있

었다. "평안합쇼." 사립짝을 벙긋이 열고 수룡이가 말하자 아낙네가 절굿공이를 쳐들었다

가 떨어뜨리고는 제풀에 놀랐다. "에그머니나." 아낙네는 공이를 뒤로 감추면서 물었다.

"뭐유, 누구슈?" "예예 참빗이 귀이개에 뒤꼭지 쪽집게 갑사댕기 금박댕기 청국바늘에 분

에 거울에 장도요 얼레빗 달빗..." 부지런히 주워섬기는데 아낙네가 화를 냈다. "안 사요

안사. 지금 세월이 어너때라구 그런 걸 산담?" 그러나 유수룡은 변죽좋게 사립작 안으로

들어서면서 궁둘이를 돌려 대고 고리짝을 두르렸다. "아무거나 골라보시지요. 방금두 저 윗

집 사시는 마누라님들께서 달빗에다 향갑에다 바늘통에다 노리개, 세분이서 골고루 사셨지

. 예가 변서방 댁이지요?" "백련이가 다녀갔는데..." 노파가 곁에서 참견하였다. "그러면

무당 댁 아니냐." ", 맞습니다. 그분들이 이 댁에 가보라고 해서 왔지요." 변서방댁은 공

이를 절구에 넣고는 유수룡의 등에 짊어진 고리 앞으로 다가섰다. 사실은 궁금하여 떡이라

도 한둘레 쪄먹으려고 미곡을 찧던 중이었다. 그러나 산에서는 엄금하고 있는 터요, 누구 눈

에 띄어 말이라도 나면 산에 가 있는 변서방이 난처할 것 같아 조심조심하여 절구질을 했던

것이다. 수룡이가 절구 속을 놓치지 않고 들여다 보았다. 백옥 같은 쌀이었다. "어이구,

흉년에 떡을 찧는 댁에서 방물을 안 산다니 말이나 됩니까?" 변서방댁이 당황하였다. "

기 암죽을 끊일려고 그러는 거예요" "걱정 마십시오. 그저 하룻밤 재워주시고 저녁하구 아

침만 먹요주시면 그 값으로 두 가지 고르셔두 좋아요." 변서방댁은 수룡이가 자연스럽게

마루에 내려놓은 고리짝 앞으로 쫓아가 걸터 앉았다. 아이와 노파까지도 다가와서 신기한

듯이 눈을 빛내며 구경하였다. "아이 곱기두 해라." 댕기를 집어들고 들여다보던 병서방댁

은 다시 빗도 집어보고 노파는 역시 바늘통을 집어보고, 아이놈은 잽싸게 은장도를 집더니

가지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아니 저 자식이... 이리 가져오지 못해?" 저희 어미가 쫓아가

더니 은장도를 빼앗아서 고리 안에다 던졌다. "이게 얼만 줄이나 알아." "... 이깟 것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반나마 소용없는 것들이다. 나는 바늘이나 한통 사야겠다." 노파가

말하였다. 아이는 마당에 털퍼덕 주저앉아 발버둥을 치고 울었다. "잠깐 가지구 놀게 하

." "안돼요, 때 부리면 다 될 줄 알구?" 변서방댁은 얼레빗과 거울을 골라 들었다. 수룡

은 속으로 역시 박색이 다르구나 싶었다. 아까 그 해끔하던 여자는 향갑을 골랐던 것이다.

"헌데... 어디 마땅한 방이 있어야지." "마두데나 좋습니다. 장광두 좋구., 부엌두 좋구, 다락

두 좋구, 마루 밑두... 아 거긴 안되구." 타령을 하듯이 늘어놓으니 변서방댁은 박장대소를

하였고, 노파도 입을 흐물거리며 웃었다. "삽살인가 마루 밑을 찾게..." "다락을 찾았으니

마루 밑인들 어때." "예예, 이 석 남짓 거추장스러워 못살겠으니 잠만 재워주고, 저는 멜빵

을 한 손에 쥐고서 밖에 서 있어두 좋구요." "아이구 우스워라, 재담두 잘하오." 수룡이는

그들의 경계하는 마음을 풀어주려고 너스레를 떠는 중이었다. "방물장사 반평생에 남은 것

은 재담뿐이올시다." "저 골방이 어떻겠느냐?" "아이, 거긴 지저분한데." "눕힐 수만 있다

면야..." "어디 와보세요." 북쪽으로 문이 난 뒷방으로 가서 변서방댁이 방문을 열어 보여

주었다. 천장에 종자가 매달렸다. 종자까지 먹어버린 가호가 흔한 시절에 방안에는 미곡섬이

석 섬이나 구석에 쌓여 있었다. "어때요?" "아이구, 이만허면 훈련원 앞마당이올시다."

"짚 한뭇만 넣어두 아랫목이 절절 끓어요." 유승룡은 슬쩍 퉁겨보았다. ", 이 댁 농사가

실한 모양입죠?" 변서방댁은 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문을 탕 닫았다. "조산틀에 친정이

있는데 거기서 갖다 줘서 먹지요. 우리네야 하루갈이두 못 되는 조밭뿐이지요." 둘러대는

말인 것이 뻔하였다. 조산틀에 친정이 있는 여자가, 이런 외떨어진 산골짜기로 시집을 왔을

리가 없었다. 유수룡은 멍충이처럼 입을 헤벌리며 끄덕여 주었다. 그날 저녁이 되자 역시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고리를 짜는 여자도 있었고, 바느질감을 가지고 온 여자도 있었다.

유수룡이 또 재담을 풀어놓으면서 방물을 펼쳐놓자 여자들은 다투어가며 골라 가졌다. 수룡

이 물건만 팔고는 얼른 뒷방으로 넘어와버렸는데, 자리를 피하여 아낙네들이 지껄이는 얘기

들을 엿들어보기 위해서였다. 바로 벽 하나 사이인데다 아낙네들의 재깔거리는 소리가 높아

서 잠이 들어도 들릴 만하였다. "또 산에서 부르러 내려왔으면 좋겠네." "왜 마음에 드는

이가 있어?" "아이구 못하는 소리가 없네. 출행나간 서방 돌아오면 길길이 뛰라구. 그게 아

니라, 노루포에다 화주 한잔 얻어먹구 싶어서 그러지, ." "지난번에 된목이골서 두령들

계회가 있을 적에 노루 두 마리 산돼지 한 마리를 잡았는데 우리는 뼈를 가져다 국물을 맛

나게 끓여 먹었다구." "노루뼈 국물이 노인들에게 좋지." "된목이골에는 잘난 사내들도 많

." "마두령은 아마 고자인가보데." 아낙네들이 깔깔대며 손뼉을 치며 웃었다. "고자는

털이 없는 법이래. 그 사람 가슴팍을 보았지? 냇가에 왕골처럼 수북하다구. 그런 장사가 고

자라니..." "팔에 알통 배긴 것 하고 거기에 뼈 있는 것하군 다르다니까." 아낙네들은 다시

박장대소를 했다. "이제 춘궁 보시철이 되어가는데 마을로 한떼거리 내려오겠군." "그 오

둘령도 마두령처럼 계집이라면 질색인 모양이데. 그래 우리 고개에는 쓸만한 처자가 없다는

거야?" "사당말에 가보게. 얼마나 이쁜 애들이 많은가." ", 고것들이야 도방 대처 뭇 잡

놈들하고 살을 섞고 노래가락에 술추렴으로 날을 보낸 것들인데, 답답해서 어찌 한 사내 섬

기며 살림을 하겠어." "도화란 년이 생각나네. 참 그 갑송이라는 사내가 불쌍하지." "아이,

그 얘기는 동네서도 다시 하지 않기로 하였잖아. 그 집 사람이 모두 떠났는데 자꾸 꺼내면

뭘 하누." "기가 막혀 하는 얘기지. 며느리가 시어미를 해코지하고 외간 사내와 배가 맞아

버렸으니." ", 그 사내가 은율 읍내에 사는데 여간한 인물이 아니랍디다. 옥 처럼 훤하게

생겼다지." "하긴 이두령이야 텁석부리에 휜자위 드러난 꼴이며 꼭 낮도깨비 같은 얼굴이

." "사내가 그렇게 생겨 먹어야 도량도 넓고 마음씨가 서글서글한 게야. 계집처럼 생긴

사내치고 옹졸하고 잔망스럽지 않은 녀석 못 봤다니까." "은율 읍내의 누구라고?" "한량이

라지, 근방에서도 소문난 외입쟁이랍디다."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꼴이나 보아둘 걸 그랬

." "아니할 말이지만 그 녀석들이 서넛씩을 짝을 이루어 술동이 지고서 탑고개로, 사당말

로 자주 오르내렸다구. 그래서 한번은 우리 애기 아부지서껀 된목이골 장정들 여럿이서 혼

을 내준 적도 있지." 벽 바로 뒤의 골방에서 유수룡은 탑고개의 아낙네들이 무심코 주고

받는 얘기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된목이골이 바로 구얼산 화적당들의 본거지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고, 이 마을에는 그냥 내통자 정도가 아니라 적당들의 가족들이 모

여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던 것이다. "사선골에서 보시를 시작한 모양인데 우리도 나

가야지?" "아무렴, 밥두 하고 국두 끓이고 며칠 동안 눈코 틀 새 없을 게야." "사선골 보

시는 구월산 인근 사 읍의 기민들이 해마다 겪어서 잘 알고 있으려니와 다른 고장에서도 넘

어온다지요." "관가에서도 으레 그러려니 하니까 우리네는 걱정할 게 없네." "월정사서 큰

일을 치르겠네." "월정사서 큰 일을 치르겠네." "월정사 스님들이야 솥만 빌려주는 게지.

벌써 세 해전부터 된목이골에서 구휼미가 나오고 있잖아." "그 장두령이 참 큰 인물이야."

"누가 아니래. 그렇게 잘난 사내도 드물지." 장모의 얘기가 나오자마자 유수룡은 긴장하였

. 해서 화적당의 수괴라는 장적이란 바로 그가 아닌가. "이젠 그런 얘긴 그만하세." "

, 옆방에 아까 그 장사치가 있다고." "아이구 그걸 깜박 잊었네." 낮은 목소리가 들리더

니 저희끼리 무엇인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있게. 내가 가서 살피구 오지."

낯익은 변서방댁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 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신 끄는 소리가

뒤꼍을 돌아왔다. 발자국 소리가 바로 방문 밖에서 멈추었고, 유수룡은 가늘게 코바람을 내

었다. 밖에서 잠시 엿들어보는 듯하더니 잠시 후에 옆방에서 저희끼리 소곤대는 소리가 들

려왔다. "아주 곯아떨어졌데. 정신없이 자구 있어." "그러게 산사람들 얘기는 하지 말자

." "아이, 계집들이 모이니까 사내 얘기말구 할 거리가 있어야지." "자네두 서방한테 머

리끄덩이 잡혀서 질질 끌려다니구 싶어?" "에그머니, 별소릴 다 듣네. 도화말구 그런 년이

탑고개에 어디 있어." 아낙네들은 뒤이어 시끌덤벙하며 사내들 얘기를 늘어놓다가 한밤중

이 되어서야 흩어졌다. 유수룡은 처음부터 들었던 아낙네들의 이야기를 대충 머릿속으로 되

뇌어보고 나서 잠이 들었다. 이튿날 일찍 일어나보니 밤 사이에 누가 왔는지 집안이 술렁

술렁하였다. 유수룡은 슬슬 앞으로 돌아 나와 짐을 마당 구석에 갖다 놓고 물건을 다시 챙

기는 척하였다. 방문이 열리더니 구레나룻이 희끗희끗하고 어깨는 떡벌어졌으며 턱에 심술

살이 붙은 초로의 사내가 마루로 나섰다. 그는 아마 밥을 먹다 말고 나왔던지 입을 우물거

리고 있었다. ", 이녁이 방물장수여?" "... 하룻밤 신세를 졌습니다." "올라오수. 아직

안 일어났다길래 먼저 수저를 덜었던 참인데 같이 먹지." "뭘요, 괜찮습니다. 나중에 얻어

먹지요." "에이 여보, 아무리 장사차 내 집에 묵었다지만 손님인데 그럴 수가 있소, 어서

올라오슈." 하는데 부엌에서 변서방댁이 나오며 거들었다. "그렇게 허슈. 자아, 다 차린 밥

상이니까 밥만 한그릇 갖다 놓으면 돼요." "그럼 실례허겠습니다." 변두령이 신새벽에 된

목이골서 내려온 참이었다. 며칠 뒤에는 사선골서 월정사의 춘궁 보시가 있으므로 구월산

두령들이 내려올 판인데, 그가 먼저 내려와 일읭 앞뒤도 맞춰좋고 월정사의 옥여스님과도

의논을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는 우선 낯선 외방 장사치가 자기 지벵 묵고 있는 사실을

알고는 자못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건넌방에 맡겨둔 문고리짜긍ㄹ 조사해보니 모두

가 아낙네들이 쓰는 장신구며 치장물이며 화장물 등속이라 께름하였던 생각을 애써 지워버

렸던 터였다. 마당으로 돌아 나오는 작자의 몰골을 보아하니 해끔하고 유순해 뵈는 것이 꼭

방물장수감이었다. 변가는 탑고개서 과객이나 나그네를 재우는 일이 흔치 않은 일이고, 세상

에 산골 인심이란 것이 있는 터에 자기가 너무 의심이 많다고 오히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

었다. "자아 앉으수. 나는 이집 주인으로 변씨 성 가진 사람이우." "어이구 이거 실례가

많소이다." 변가의 앞에 마주 앉아 수저를 들면서 유수룡은 너스레를 떨었다. "역시 산골

루 와야 인심이 남아 있지 도방에서야 찬밥 한술도 어림없습죠. 좌우지간 여러 골을 다녀봤

지만 이렇게 포실한 동네는 처음이우." 변가도 요즘같이 어려운 시절에 이밥 먹었다가는

남의 눈총도 있고 산식구들이 말도 많을 것이라 약간 조심스러웠다. 메조가 나우 섞이긴 하

였으되 희끗희끗한 쌀이 보이는 밥을 내놓고 변가는 변명하듯이 말하였다. "허허, 아녀자들

이란 기분만 좋으면 별짓을 다하는구려. 어제 뭐 황화인가 방물인가를 몇점 사놓더니 친정

붙이라두 찾아온 날처럼 이 밥을 내놓았어." "그저 황감할 뿐이지요. 이 댁에서는 물건값을

안 받겠습니다." "어이 그러며 뭐 남는게 있겠수?" "실은... 제가 그전에 잠상질두 많이 다

녔지요. 의주서 월강질을 여러번 다니다가 관에 포촉되어 치도곤이를 당하고는 아예 손을

떼었습죠. 이까짓 장사라구 다녀봐야 그 시절에 비기면 그야말로 도주공과 옹기장이의 차이

입죠." 유수룡은 확증을 잡기 위하여 변가를 슬쩍 떠보느라고 그렇게 얘기하였다. 아이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미닫이를 열고 나갔고 부시럭거리며 고리짝을 뒤지는 모양이었다.

변가는 조밥이 흐트러지지 않게 숟가락으로 주발의 모서리에 꾹꾹 눌러서 퍼올렸다. "그런

시러베아들놈들 같으니라구. , 자기네들은 갖은 못된 짓으루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이익을

보면서, 까짓 잠상들의 부스러기 돈을 너는 것에 배가 아파서 그 야단이 아니겠소." "엄청

나지요. 하다못해 비장이나 별장은 물론이려니와 대삭집 종놈이라두 되어보슈. 사행에 끼이

가만 하면 수천냥을 법니다." 하다가 유수룡이 미닫이를 열고 마루를 내다보았다. 변가의

아이가 고리짝에서 막 은장도를 집어내어 마당으로 내려뛰는 찰나였다. "... 얘얘, 그거

갖구 놀다 다칠라." 역시 아이놈은 어제부터 그 물건이 몹시 탐이 났던 모양이었다. "저런

배라먹을 자식 같으니. 기어이 손을 대는구나." 변가의 아낙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부엌에

서 쫗아나가더니 아이의 귀싸대기를 철썩 때리고는 은장도를 빼았았다. "그냥 주시지요.

러잖아도 저 애가 갖고 싶어하여 오늘 주고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유수룡이 말하자, 변가

는 손을 내저었다. "어유 그게 말이나 되어? 은장도를 아이들 장난감으로 내주다니..."

고 나서 변가가 제 아내를 향하여 말하였다.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물건두 사구 그러시겠

구료." "그러믄요. 어떤 때에 궁벽한 고장에서 훌륭한 당화나 왜화를 사들일 적두 있습니

. 저희는 일단 물건을 보구 나서 돈을 장만하여가지구 찾아와 사가니까 틀림이 없지요."

"가만있자..." 변가가 아예 수저를 놓고 일어나더니, 농문을 열고 뒤적이다가 작은 보퉁이를

꺼냈다. 변가를 보를 끄르자, 섬세하게 만들어진 수정 갓끈과 옥합과 옥지환이 나왔다. 유수

룡은 한눈에 그것이 자기네 집에서 나온 물건들임을 알았다. 수정 갓끈은 아버지 유사과의

것이요, 옥합 역시 큰 사랑에서 나왔을 테고, 옥지환은 모친의 것이 틀림없었다. 유수룡은

분이 나서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마음을 꾹 눌러앉히고 갓끈을 들어 수정알을 만지작거리면

서 중얼거렸다. "호오, 이게 모두 당화가 분명합니다. 제가 값을 정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모두 합하여 천 냥돈어치는 되겠습죠." 변가의 입이 딱 벌어졌다. "... , 천냥?" 사실

화적질을 다니다 보면 집쥐짐을 할 때 이러한 귀중품은 두령 되는 자가 얼마든지 빼돌릴 수

가 있었다. 구월산 식구들은 그래도 서로간에 신의가 있어서 동료들 몰래 물건을 혼자 가로

채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재물을 탈취하면 장물아치를 통화여 셈이 치러진 다음에 산살림

이며 활빈할 몫이며를 제하고 나서, 마감동 이하 모두 똑같이 나누어 가지던 것이었다. 변가

는 원래가 달마산서 선흥이의 부하가 되기전에도 학령에서 행인들 털이를 해왔던지라 손버

릇이 쩨쩨하였다. 그는 졸개 두엇을 데리고 지나다가 만만한 행인이라도 지나치면 구월산

녹림당답지 않게 빼앗아서 챙기고는 하였다. "허어 그렇게 비싼 물건인 줄은 몰랐는걸?"

유수룡은 수정 갓끈을 들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부르는 게 값이지요. 이런 갓끈은 한양으로

가지고 가면 사대부 양반 댁에서 서로 다투며 흥정하자구 할 겝니다. 그야말루 대물림할 물

건입지요." "사시려오?" 변가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묻자, 유수룡이 그제사 물건을 내려놓았

. "사다뿐입니까. 허지만 제가 가진 돈이 없으니 돌아가서 물주를 구하여 어음을 떼어다

가 사지요. 한 달 뒤에 꼭 찾아오겠습니다." "내가 구정은 톡톡히 내리다." "구전은 필요없

습니다. 사는 쪽에서 받을 테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자만, 천 냥은 충분히 받고도 남습니다."

"천냥이면 도대체 논밭이 몇결이나 되는ㄴ 게요... 하여튼 기다리겠소. 한 달 뒤 오늘쯤이 어

떨까. 오늘이 그러니까 초이레 아니우?" ", 그렇게 하시지요." 하고 나서 유수룡은 소리

를 낮추어 말하였다. "도대체 이런 물건을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다른 물건이 있다면 소개

좀 해주시지요. 큰돈을 만지도록 해드리지요." 변가는 이익고 경계하는 빛을 띠었다. "

두 우연히 얻은 게요. 다음에 오면 그때 가서 봅시다." 변가의 생각으로는 혼자서 거래할

장물아치를 정하는 것도 해롭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유수룡은 그가 더 이상 입을 열 기색

이 아니라서 밥상머리에서 일어났다. "여러가리주 신세가 많았소이다. 사흘 뒤에 피물을 거

두러 이 동네에 올 터인데 또 뵙겠수." 변가는 따라오면서 다짐하였다. "아니 그때는 내가

집을 비울지도 모르오. 한달 뒤에 꼭 오시오." 유수룡이 변가네 집을 나와 골목을 돌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 집의 아이놈이 양지쪽에서 코가 죽 빠져서 서 있는게 보였던 것이다.

", 너 이리 좀 와봐라." 아이는 제 엄마에게 귀쌈을 얻어맞아서 주둥이가 비죽이 나와 있

었다. 유수룡은 변가의 자식을 어제부터 눈여겨 보아두고 있던 터였다. "내가 좋은 것 주

?" 그는 팔을 돌려서 고리짝 속을 더듬어 아이가 그렇게도 탐을 냈던 은장도를 꺼내들었

. "옛다, 이것..." 아이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는 못 믿는 듯한 표정이더니 잽싸게 달려와

손을 뻗쳤다. 아이가 은장도를 덮치기 직전에 유수룡은 그 조막 손이 닿지 않을 만큼 위로

살짝 치켜들었다. "아니 잠깐만... 내가 네게 물을 말이 있다. 내가 일러주면 얼른 주지."

아이는 타는 듯한 시선으로 작은 칼을 올려다보았다. 유수룡은 장도를 뽑아서 날을 보여주

기도 하고 다시 꽂아서 장식된 술을 손가락으로 쓰다듬기도 하면서 걸었다. "느이 아부지

가 어디 산에 있느냐?" "저어기..." 아이가 손가락질을 하였다. 구월산 아사봉의 눈 덮인

흰 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뭐라구 그러더라... 그 무슨 목이라구 그러던데?" "된목이골"

"응 그래, 된목이골이랬지?" "너 아부지를 따라서 산에 가본 적이 있느냐?" "없수." "

럼 어디만큼 따라가본 적두 없구?" "어머니를 따라서 저 윗길까지 가본 적은 있수." 유수

룡이 싱긋 웃었다. "옳지 착하다. 오늘 나를 거기까지 데려다 주면 당장에 이걸 네게 내주

. 이 아저씨는 산으로 장사하러 찾아갈려구 그런단다." 아이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앞장을

섰다. 나한암 바위넘이 쪽으로 오르다가 왼편에 가파른 바위로 굽어지는 작은 길로 들어섰

. 바위를 쪼아서 디딤대를 만든 흔적이 보였다. 웬만큼 높은 곳에 이르니 눈 위에 발자국

이 보였고, 그 비좁은 길은 여러 굽이를 돌면서 산줄기의 등성이에까지 닿아 있었다. "저기

서 어디루 가니?" "월정사 뒤를 돌아서 간대요." 유수룡이 아이에게 얼른 은장도를 내주

었다. "옛다, 이런 얘기는 어른한테 하지 마라. 괜히 혼날 테니까." 아이가 참새를 채가는

매처럼 은장도를 탐욕스럽게 움켜가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내려갔다. 유수룡은 반사

된 눈빛으로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골짜기와 승성이를 휩쓸며 지

나가자 눈보라가 하얗게 일었다가 가라앉곤 하였다. 수룡은 이마에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가리우고 먼 곳을 내다보았다. 절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목측으로도 어디쯤인가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소나무 숲이 빽빽하나 아사봉의 서북편이 바라보였다. 그러니까 이쪽 산등성이

가 마주 닿을 그 어름이었다. 그는 일단 여기서 되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산중을 기찰하

는 일은 한양서 왔다는 두 포도부장이 해내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수룡은 다시 산

을 내려와 이번에는 조산틀의 넓은 벌판을 삼십 리나 걸어서 끼치내를 건너 송화 무더리로

돌아왔다. 봉보에는 그이 아우 수호가 먼저 돌아와서 뜨뜻한 구들장을 지고 누워있었다.

"인제 오우?" "그래 좀 다녀보았니?" ", 어제 수럿고개라는 데를 다녀왔지." "구월산

놈들이 목 지킨다는 곳 말이냐?" "그런데 거긴 손을 댈 필요가 없을 것 같던데. 왜냐하면

놈들이 언제나 번의 교대를 할 터인데 공연히 건드려놓았다가는 산에서 미리 알아버릴게란

말야. 그러니까 이곳 무더리에서 내통하는 놈만 잡아버리면 수렛고개의 정탐하는 놈들은 눈

뜬 장닌이나 한가지여." "그래 그자를 알아냈니?" "그야 떠나올 제부터 들었던 얘기가 아

니우? 주막 주인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저기 높은 언덕바지에서 주막을 하는 큰 돌이란 놈

이고 또 하나는 예전에 해주 군관들이 와서 묵었던 집의 좀 미련하게 생긴 녀석이야. 큰돌

이만 잡아놓으면 구월산에 전해지는 소식이 끊기는 셈이지." "그리고는 또 내통자가 없을

?" "있지. 이 고을 이방하구 군관 두엇이 뇌물을 가끔 얻어먹는 모양이야. 군병을 동원할

제 그점을 미리 최만호께 알려드려야 해." 수룡은 만족한 웃음을 떠올렸다. "수고했다.

두 건진 게 많다. 사선골과 탑고개는 도적들과 한통속이가 그들이 식구가 사는 데야." "

작대로군." "지형과 동네 사람들을 샅샅이 살펴봤지. 사선골에서는 월정사 중들을 앞세워서

화적당들이 활빈하답시고 춘궁 보시를 하는 모양이더라. 우리가 가볼 필요는 없고, 한양 포

도부장들게 맡기면 된다. 월정사 뒤로 된목이골이라는 도적들의 소굴로 오르는 길이 있는

모양인데 거기까지는 답사하지 않았다. 그리구 매수를 하거나 사로잡을 녀석도 대강 점 찍

어두었다." "어떤 놈이우?" "도적의 일당인 변서방이는 자를 잡아 달래어도 될 듯싶더라.

그놈이 얘기 끝에 아버님의 수정 갓끈이며 옥합을 내놓은데 어찌나 분통이 터지든지..."

"우리 동네에 왔던 놈들이 틀림없구려." "그뿐인 줄 아니? 어머님의 옥지환도 가지구 있더

." "저런... 육시를 할 놈들." ", 이젠 슬슬 여기를 떠날 때가 되었다. 이제부터는 문화

와 안악쪽을 살펴보아야지. 이제 한 열흘 있으며 최만호가 직접 찾아오실게다." "언니가 먼

저 나가우. 청송사 만나 함께 가십시다." 하여서 유숭룡이 먼저 주막을 나섰고 한참이나 지

나서 수호가 집을 나서며 그동안의 숙식비를 치렀다. 값을 후하게 쳐주니 주인은 다음에 들

르면 곡 이집에 다시 오십사고 신신 당부하는 것이었다. 그들 형제는 무사히 청송에 당도하

여 맡겨두었던 말을 타고 반나절이 못 되어 신천에 당도하였다. 기찰소롤 정한 곳은 신천

남산 아랫녘에 있는 외떨어진 초가집이었다. 박완식과 백섭의 두 포도부장은 오후 내내 유

가 형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신군수에게 은밀히 부탁하여 영리한 포졸

두사람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부처고개와 안악의 배고개에 각각 정탐소로 쓰는 초막과 주

막집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던 터였다. 유가 형제가 기찰해온 내용을 정리하여 들려주자 부

장포교들은 그것을 대충 간략하게 받아 적었다. 그리고 나서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이번에

는 하나는 포졸을 데리고 떠났고 다른 하나는 혼자 길을 떠났다. 박완식이는 두꺼운 털로

된 발감개를 둘렀다. 허리에는 장약이 담긴 염소뿔을 매달고 부시쌈지며 총포를 메었다.

가 보더라도 영락없는 포수였다. 두 사람의 신천 포졸들도 장창을 들고 털로 감싼 차림이었

. 그들은 길양식으로 찰떡을 해서 짊어졌고, 마른 육포에다 화주도 두어 병 넣었다. 그리

고 산중에서 밤을 맞을 채비로 두꺼운 산토끼 가죽을 이어서 만든 따스한 동달이를 한벌씩

갈아서 짊어졌다. 이들 포수 일행은 월정사를 목표로 구월산의 남록을 넘어갈 셈이었다.

들은 문화의 장재이벌을 지나지 않고 인적이 뜸한 전산 줄기를 타고 구구월까지 나아가기로

하였다. 또한 부장포교 백섭은 찢어진 옷을 입고 등에는 뚫어진 자리와 식시 나부랭이를 짊

어지고, 뒤축 없는 짚신에다 빈 자루를 허리에 차고 지팡이를 짚은 차림이니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는 각설이였다. 그는 사선골과 탑고개를 살피고 월정사까지 들어갈 셈이었다. 기찰한

바에 의함변 월정사가 도적들과 무엇인가 긴밀한 연관이 있는 듯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

. 그들은 각각 닷새를 기한하여 떠나는 길이었다. 이제 황주 쪽의 통로만 알아두면, 물샐

틈없는 구월산 기찰이 모두 끝날 판이었다. 신천서 은율가지 팔십리 길이니 백섭이는 문화

를 북쪽으로 지나서 내고개를 넘어 은율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백포교는 걸인 행색으로 곰

미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금방 심신유곡에라도 들어선 기분이었다. 그는 추위에 떠는 듯이

두 손을 호호 불면서 사선골로 들어갔다. 개나리로 울타리를 두른 집 앞에 이르러 그는 안

에 대고 외쳤다. ", 밥이 되나 미곡이 되나 좀 보태줍시오." 부엌에서 달그랑 거리던 그

릇 씻는 소리가 멈추더니 삽작문 틈으로 어릿어릿 여자 옷자락이 보였다. 문이 열리자 백포

교는 눈앞이 아찔하는 것만 같았다. 얼굴과 목덜미가 희었고 표정은 무심하며 눈은 새까맣

고 몸은 가녀린 젊은 처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백섭은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았는데, 처녀

의 눈이 저쪽 먼곳에 가 있는 듯 해서였다. "지금 막 치웠는데, 어쩌나... , 수수개떡이라

두 드시려오?" 처녀가 나직하게 물었다. 백포교는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어서 대꾸하였다.

"지금 세 끼를 굶었은즉 무얼 못 먹겠소. 아무거나 좀 주시우." 안에서 묻는 소리가 들려왔

. "원향아, 밖에 누가 왔니?" ", 시주 다니느 거사님 한분이 오셨어요." 후례가 고개

를 내밀어보더니 역시 딸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우리두 개떡으루 아침을 들었다

. 다행이 남은 게 있으니 드시구 가시구려." 백포교는 삽작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우." 툇마루에 걸터앉는 그를 보고 후례가 물었다. 포교는 추위에 떠는 시늉으

로 온몸을 웅크리고 두 손은 간간이 떨었다. "말두 맙시오. 문화서 잤는데 어지나 인심이 야

박하던지 잘 곳이 없어서 그냥 퇴락한 비각 안에 들어가 바람만 피했지요." 원향이가 새다

리 소반에다 개떡과 따듯한 국을 올려 들고 오면서 말하였다. "인심이 야박한 게 아니라,

지금 석삼 년 흉년이라 이런 시절에 먹을 것이 남아 있기도 흔한 일이 아니어요." "우리두

정곡사와 월정사에서 도와주어 이나마 먹고 견딘다오." 후례도 그렇게 말하였고, 부장포교

는 상이 놓여지자마자 덥석 수수개떡을 집어 입 안에 넣어 아귀아귀 틀어넣고 우물거렸다.

원향이가 국그릇을 밀어주며 말하였다. "저런...목메시겠네. 국을 마시면서 천천히 드셔요."

백포교가 그리 기한이 든 것은 아니지만 유랑 걸인의 입내를 똑같이 내려니 일부러 허겁지

겁 씹어 삼키는 중이었다. "식구들은 없수?" 후례가 물었으나 포교는 일부러 못 들은 척하

다가, "홀몸이냔 말이우." 하는 물음에 우물거리기를 잠깐 멈추고 허공을 우러르는 척하였

. "말은... 꺼내면 하 기가 막혀서... 모두 노중 객사하구 말았지요." 포교가 단숨에 개떡을

먹어치우고는 속으로는 억지로 집어넣어서 가슴이 무둑한 판인데도, 두리번거리며 못내 아

쉬운 꼴을 지었다. 후례가 말하였다. "양에 차지 않는 모양이구려." "무슨 맛인지두 모르

겠군." 포교가 국사발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고. 원향이가 딱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어쩌

... 그게 마지막인데." "웬걸요, 이제 겨우 살 것 같습니다. 저는 배천서 남의 땅을 부쳐먹

구 살았는데, 재작년 흉년부터 도무지 작료도 물어낼 수도 없고 소출만 바라고 굶기도 지겨

워서 온 식구가 걸식이라도 하려고 해주로 나갔었지요. 저는 갖은 품팔이를 다니고 아내도

아이들을 데리고 구걸을 하러 다녔습니다만 점점 시절이 궁핍해지니 누가 선뜻 도와둬야 말

이지요. 지난번 추위에 온 식구가 얼어 죽었는데, 저는 다행히도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 한

사날 뜨거운 미음 마시며 드러누웠다가 기사회생이 되었습니다. 목숨은 모진 것이라, 온 식

구가 죽어버렸는데도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그려. 이제 이 고장에 오게 된 것은 사선골

에서 언제든지 굶주린 유민들게 보시를 해온다길래, 혹시나 하여 한철이나 넘겨보려고 찾아

왔습지요." 백포교가 한숨을 섞어서 담담하게 얘기를 하니, 후례는 옛날 저희 식구들이 은

율 한내 가에서 쓰러져 있다가 풍열스님에게 구원을 받던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옷고름

으로 눈을 씻었고, 원향이도 지난 가을에 온 마을이 겪던 굶주림이 생각나서 고개를 떨구었

. "철이 좀 이르오, 앞으로도 한 달은 지나야 춘궁 보시가 있을 터인데, 그동안 어디 가

서 몸붙여 일해줄 곳이나 찾아보시려오?" "고을마다 장정들이 병들고 굶주려 넘어가는 판

인데, 저와 같이 오래 걸인으로 떠돌아다닌 자가 어디 가서 뭘 하겠소이까? 정말 이렇게 살

바에는 어디 산곡에라도 들어가 도적이 될밖에 없겠지요." 백포교가 그들 모녀에게서 무엇

인가 들어보려고 한마디 던졌다. "그것두 쉬운 일이 아니니 모양입디다." 후례가 무심코

말하였고, 원향이가 덧붙였다. "뭐 도적이 따루 있나요. 우리네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이

들이 고맙기까지 하지요." 백섭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고맙다니요. 사람을 죽이

고 물건을 빼앗아가는데두 괜찮단 말이우?" "우리 모녀처럼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사

람들이야 무서울 게 없답니다. 관차가 더욱 무섭지요. 벼슬아치들은 하늘이 놀랄 일을 저지

르고도 수염 하나 까딱 않고 오히려 호통을 치고, 그럴 듯하게 둘러대지요. 감쪽같이 양민의

고혈을 빨아 먹고도 오히려 벼슬아치 해먹기가 어려운 노릇이라구 발뺌을 해대지요. 여우

같은 놈은 우리의 등을 토닥이며 골을 빼먹고, 호랑이 같은 놈은 무섭게 으르렁거리면서 혼

쭐을 내어 한꺼번에 깨물어 먹고, 뱀 같은 놈은 찰싹 달라붙어 갖은 아양을 다 떨어가며 혀

혓바닥으로 핼끔거리다가 천천히 삼켜 먹고, 하는 판이니 아예 우리 대신에 그런 것들을 쉽

쓰러버리는 이들이 나와야지요." 후례에게는 여기포에서부터 쌓인 원한이 뼛속 깊이 맺혀

있어 저도 모르게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입술이 얇아지면서 치를 떨었다. 백포교는 여자

의 독기 어린 목소리에 어쩐지 뒷덜미가 서늘하였다. "어머니... 내 백일기도두 안 끝났는데

그렇게 말하시면 어떡해요?" "신령님들두 다 아신다. 내가 무슨 말인둘 못하겠니, 인향이와

네 아버지의 원혼이 계신데 산천이 이대로야 있겠느냐." "어서 드시구 일어서세요. 저희 어

머니 심기가 이러시니..." 원향이가 그에게 나가달라는 눈치를 보였고, 백포교도 앉아서 마

주주고 받기도 민망하여 슬그머니 일어섰다. 실로 무엇인가 관가에 대하여 깊은 포한이 샇

여 있음이 분명하였고, 화적당들에 관하여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 잘 얻어

먹구 갑니다. 헌데 혹시 월정사나 정곡사로 찾아가 시노라두 살 길이 없을까요" 원향이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 절에는 시노 따위는 없답니다. 도망쳐오는 사람들을 받아주

기는 하지요. 하지만 사당말에 가면 받아줄지도 모르지요." 백섭이는 허리를 굽신거리고 나

서 돌아섰다. 그의 뇌리에는 아낙네의 서서히 강렬해지던 목소리와, 어딘가 이세상 사람 같

지 않은 이상한 눈매를 가진 처자의 하얀 얼굴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부장포교의

기찰중에 우연히 지목된 후례와 원향 모녀는 상상할 수 없는 환난이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백섭 포도부장은 사선골을 이리저리 돌아다녀보고 나서 월정사의 사

당말로 찾아갔고, 유수룡의 말대로 그곳에 화적당들의 기맥이 닿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사당말서 이틀이나 묵으면서 품팔이로 밥을 얻어먹다가 떠났다. 최형기가 신천으로 온다는

날짜가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적당들의 소굴이 있다는 된목이골 부근을 정탐하러 갔던

박완식도 사냥꾼으로 변장한 신천 군졸을 데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기찰조가 감영을 떠나

온 지 한달 만에 어언 최형기가 찾아올 날짜가 다가왔다. 백섭과 박완식의 부장포교와 유수

룡 유수호 형제는 이미 그들이 원하던 바를 샅샅이 알아내고 등산곶 만호가 오기를 기다렸

. 저녁때가 되어 마을의 초가 위로 연기가 실오라기처럼 피러오르고 있을 때 다락다리 쪽

에서 말을 탄 행객 세 사람이 나타났다. 남산의 서편을 돌아가는 모퉁이 길에는 박포교와

유수룡이 나가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들 앞에는 수철원까지 마중을 하러 보냈던 신천군졸

이 앞장서서 견마를 잡고 있었다. 최형기는 풍류 나온 선비인 듯, 털 달린 개잘량 위에다 갓

을 쓰고 도포 입고 짚신 신고 안장 뒤에는 찬합과 호리병을 매달았다. 나머지 두 사람은 수

행한 하속처럼 패랭이에다 털배자를 걸친 차림이었으니, 탁열정 습진자에서 감영 정벼을 조

련시키던 전군관과 하군관이었다. "원로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유수룡이 아나기 말아래서

문안을 드렸고 박포교도 군례를 올렸다. ", 모두들 무사한가?" ", 분부하신 대로 기찰

을 모두 끝냈습니다." 최형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아에서도 알고 있느냐." "알리지 않

았습니다." "잘하였다." 그들은 기찰소로 정한 집에 당도하였고, 상방은 께끗이 치워졌으

며 발을 씻을 더운 물과 정갈한 다담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고 둘러앉자마자 유가

형제와 두 부장포교가 제각기 자기들이 정탐한 바를 낱낱이 보고하였다. 최형기는 담뱃대를

물고 상체를 천천히 흔들면서 그들의 얘기를 들었다. "된목이골이라..지세는 보아두었느냐,

약도를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이다." "다녀오자마자 이렇게 그려두었습니다." 박완식이가 준

비했던 간지를 꺼내어 펼쳤다. 월정사에서 오르는 비좁은 조도와 투구봉과 아사봉 사이의

골짜기며 그 은밀한 장처인 된목이골이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된목이골의 주위는 적송의

빽빽한 숲이라 점이 무수히 찍혀 있었다. 최형기가 흟어보더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참으

로 요충이로구나. 그러나 요충일수록 허점이 많은 법이다. 자고로 용병에 있어서 요충이란

막아 지키는 곳이라. 본진이 힘을 비축하고 공격의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에 적의 예봉을 꺽

는 목이니라. 일단 그곳을 떠나거나 빈 곳이 뚫어지면 삽시에 궤멸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환

적당은 뒷보가 없고 숨어 있는 것들이라 스스로 구멍을 뚫고 들어앉은 짐승과 같다. 먼저

송화의 내통자를 없애버린 뒤에 구월산사 읍에 통문을 돌려서 산줄기의 요로를 끊고, 우리

감영 토포군은 막바로 사선골과 탑고개를 점령하여 들어간다. 탑고개를 토포용으로 하여 포

수와 궁수를 조도의 앞에다 매복시키고, 전군관이 여를 이끌고 된목이골을 급습하고 하군관

은 유군관을 데리고 패하는 잔당들을 잡아낸다. 그런데... 그 탑고개에 산다는 도적의 혈당이

누구라구 했느냐?" 유수룡이 얼른 대답하였다. "변가라고 하였습니다." "변가에게 물건을

사겠다고 하여 송화로 유인해내어라. 잡아서 마음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필시 은자를 주고

전비를 묻지 않는다면 쉽게 변심할 자가 틀림없다. " "그자와 약조한 날이 이제 보름 남았

습니다." 유수룡이 자랑스럽게 말하였고, 최형기도 빙긋이 웃었다. "우리가 예정한 토포

기와 딱 맞아떨어지는구나. 숲에 나뭇잎이 돋아 날 일도 없을 테고 산에 눈이 녹을 리도 없

. 섣달 중순이라... 범도 옴치고 뛸 수 없는 철이로구나." 박완식이 말하였다. "된목이골

을 잘 살필수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토포장께서 한번 살피시렵니까?" 최형기는 아사봉

부근의 약도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달 열슬깨에 토포군이 출발한다.

장호령에 나와 기다리고 있거라. 그리고 너희는 그돌안 구월산에 별다른 동정이 없는지,

환이 일어나지 않는지를 면면히 살펴보록 하여라. 사선골은 은율 읍내와 고개 하나 사이라

철통같이 도모하지 못하면 적당과의 내통자들을 놓치기 쉬울 것이다." ", 사선골과 탑고

개는 아예 쓸어버려야만 합니다. 그들은 원래 터를 잡고 살던 양민들도 아니고 유민 따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수가화랭이 광대 거사 등속의 상것들이지요." "이번 토포는 도적들뿐만

아니라, 그와 엇비슷한 것들을 쓸어버려서 아예 화적당이 일어날 근거를 없애야 한다. 그리

고 장모라는 수괴는 필히 사로잡아야 한다. 백섭이 물었다. "야습이 좋겠습니까?" "아니

. 신새벽부터 개시하여 중화참쯤에 된목이 골을 들이쳐야지, 때를 놓치면 사 읍의 군졸이

한달쯤 고생하게 될 것이다." 이제 기찰이 물샐틈없이 끝났으니 구월산의 식구들은 관군의

손바닥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해주의 해서 송방에는 얼마 전부터 송도 사대전 임방

에서 좌장을 대신하여 감역이 나와 있었다. 송방의 운영을 살피고 장부를 수거하여 상거래

가 어찌되는가를 파악하자는 것인데, 이번에 나온 사람은 생기기는 준수하고 얌전하게 보이

는 자가 주색을 즐기고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였다. 송방의 행수도 처음에는 긴장

하고 잘 대접하였으나 그만 감당할 수가 없어서 장사일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슬그머니

발뺌을 해버렸다. 감역은 또한 송방과는 아랑곳 없이 제 돈을 쓰면서 주야로 술판을 벌였

. 그는 감영 아전붙이와 관속들을 위무하고 인정을 쓴다고,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오늘은

어느 기방이다, 내일은 어느 포구다 하면서 놀러 다녔다. 자연히 관속들이 술잔이나 걸치고

창기들과 노는 재미에 별일이 없어도 감역의 처소를 드나들었다. 그는 바로 박대근의 지시

를 받고 감영의 이상한 기미를 살피러 온 사또 이학선이었다. 송도 못골의 학선이는 말투와

눈짓 하나를 보아 관청의 돌아가는 공기를 훤히 알아내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이 처소에는

향청의 좌수와 호방 비장이 찾아와 함께 간밤의 해장을 겸하여 중화를 들고 있었다. ",

, 이해할 수가 없네. 요즘처럼 재미난 때에 병방 비장은 한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니...

내가 평안도로 나갔을 제는 병방과 사귀어 사냥도 나가고 심심치 않았소이다." 학선이가

슬쩍 퉁겨보니 좌수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감영이 관찰사가 있는

곳인지, 엽사가 있는덴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니까."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학선이

가 묻자 호방은 시큰둥하니 말하였다. "이런 섣달에는 각 포창의 미곡도 파악하고 신년 봉

물도 준비하고 눈코 뜰 새가 없는 철인데, 신관 순사또께서는 선화당에도 납시질 않소이다.

그리고는 등산곶 만호짜리 온 무장이 공연히 장졸을 들볶아치면서 습진 조련을 시킨다고 온

통 삼문 안팎이 뒤숭숭하지요." 학선이는 바로 그 점을 알고 싶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저런... 어리석은 일이로군. 태평성대에 더욱 격에 맞지 않는 노릇이우. 이러한 흉황에 각

고을의 백성들이 산다 못 산다 하는 판인데 진휼은 고사하고 병졸의 조련이 다 무에요.

슨 난리가 난답디까?" "내 원 참, 그 형방이라는 사람 입을 꾹 다물고 쉬쉬하는 꼴을 보면

마치 비국의 군기라두 담구 있는 척하거든. 수양산 인근 촌에서 호환이 났다구 호랑이를 잡

는답디다." "허허, 호랑이 사냥을 한다면 습진까지는 필요가 없을 너인데." 참견 않던 좌

수가 상머리로 고개를 숙이고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사냥은 무슨... 그게 다 핑계지요.

랑이는 잡으러 가지 않고 달포 가까이 조련만 하는데 자그마치 국사가 이백여 명이오. 그래

그것들이 사냥에 나갈 군사라 합시다. 언제는 호랑이 사냥에 동제 주민을 동원하지 않은 적

이 있습디까. 주민들을 뽑아 인성을 둘러쳐야만 몰이를 할 수 있고, 산세나 지형을 아는 백

성이 향도를 해야 되는게요. 저어 광석내 어귀로 가보아. 나무꾼도 얼씬을 못하지. 절터에는

수직하는 군사가 장창을 치켜들구 잡인의 출입을 막구 있습디다." 호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가 바루 습진하는 탁열정 앞마당의 아래턱이지." "호랑이 사냥 때문에 병을 일으킨

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에다 용병을 하자는 거겠소?" 학선이가 묻자, 오히려 좌수가 되물

었다. 학선이는 잠시 생각해 보는 듯 하다가 근심을 가득 담아서 중얼거렸다. "글세, 어디

서 역란이 일어난 것도 아닐테고... 혹시 어려서부터 어르신들게 말씀하시던 대루 북벌이 시

작되는 게 아닐까요? 강을 건너서 짓쳐들어가자는 비관이 떨어진 모양이지요." 호방과 좌수

가 서로 힐끗 바라보고 나서 어이가 없는지 너털웃음을 웃었다. 학선이는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리고 함께 따라 웃었다. "우리네야 나라의 돌아가는 사정을 알겠습니까. 하지만 송도 임

방에서는 누만 전을 던지는 장사일이라, 국변에 대해서는 소슬바람에 문풍지 떨리듯 세세히

살피지요. 의주나 동래에서도 늘 그런 걱정입니다." 좌수가 웃음을 지우지 않고서 말하였

. "임방에서 감역으로 나왔으니 글러 만도 하겠소. 그러나 너무 불안해하지 마오. 도대체

이런 시절에 도백이 두 달 만에 갈려 나가고 도승지를 하던 이가 의지로 갑자기 나왔다면

무슨 일이겠소. 임금의 특명을 받잡고 나온분이지요. 우리는 지난번에 임관찰사께서 금천의

장계를 받고 당황하여 고을 수령들을 모아 논의하던 바를 잘 알지요." 학선이는 눈을 가늘

게 뜨고 좌수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천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호방이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스스로 말을 꺼냈다. "지금 그 일의 뒤 처리를 하느라고 몇번이나 왕래하였

는지 모르겠소. 하필이면 포창이 화적들에게 결딴이 나버렸지요." ", 그렇다면 조읍포 말

씀이로군요."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방은 상인들과 직결되지 않고서는 떨어지는 이문

을 얻어먹을 수가 없는 입장이었고, 향청 좌수 또한 여러 고을의 토호 부자들이 앞을 서주

어야 그 자리를 지키며 재물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송방에서는 도백이 있는 감

영마다 이들을 매우 중시하였다. 말하자면 손발이 맞는 자들끼리 만난 격이었다. 학선이는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는 듯이 방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차, 그걸 몰랐군. 바로 토포를

하려는 모양이군요." "왜 아니겠소, 저희끼리 돌부처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우리 눈을

속이지는 못하오. 내가 그러잖아도 조련에 나타나는 사령 아이에게 가만히 물으니 그 녀석

도 영문을 모르고 있습디다. 아 글쎄, 소를 잡고 술을 빚어 군사를 호퀘한답디다. 원래 주육

이란 접전 전에 병졸의 사기를 위해서 내는 것이라, 곧 토포가 시작된다고 보아야겠지요.

아이 하는 말이 습진뿐만 아니라, 피아로 나뉘어 승패를 겨루는 대습련에다 야조와 추적까

지 익힌다지 않소." 학선이는 그 이상 그들의 입에서 자세한 얘기가 나오지 않을 줄을 알

았다. 도대체가 그들의 소임이 아니었시 때문이다. 학선이가 밝은 얼굴로 말하였다. "그 참

잘되었군. 화적이란 장사치에게는 천적인데 진작 관가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잡아냈어야 할

일이지요. 도대체 화의 소굴이 어디길래 감영에서 이런 법석인가. 행상단이 이달에 돌아오는

, 피하여 오라는 전갈을 보내야 되겠군. 가만있자... 내가 병방이라두 만나뵙구 송방에서도

군비를 내겠다고 여쭈어볼까요?" 호방이 펄쩍 뛰면서 내저었다. "어이구, 큰일날 소리를...

그랬다가 누가 알려주더냐고 말을 캐면 우리 처지가 매우 난감하오. 아예 내색도 하지 말고,

더욱이 어디 가서 말을 내서도 안되오." "저런... 장사치가 도적을 잡는 일에 조력하려는 것

을 스스로 몸속의 이를 잡아내려는 경우와도 같거늘 참으로 답답하오." 군비를 내련다는

말에 좌수가 구미가 동하는지 슬그머니 얘기를 꺼냈다. "혹시 모르지요. 수리가 그런 일을

맡았을 것이니 넌지시 가서 의논해 보시오." "자아, 이젠 그 얘기는 걷어치웁시다. 해장술

앉히겠소." 학선이가 술잔을 들고 말하였다. 시끌벅쩍한 중화 자리가 엄벙덤벙 끝나고 나서

손님이 돌아가자, 학선이는 구종배로 따라온 부하 중의 하나를 불렀다. "너 지금 즉시 광석

내로 나가서 탁열정 부근을 살피구 오너라. 수직하는 군사들이 있다고 하니 길을 잘 물어서

멀찍이 살필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이런 일이라면 못골 사또 학선이이를 따라다니며

여러번 해치웠던 부하라 찍짹 소리 없이 사라졌다. 학선이가 다시 나머지를 불러서 지시하

였다. "감영으로 나아가 수리 되는 자에게 송도 임방서 감역으로 나온 이가 저녁에 조촐한

자리나 함께 하잔다고 전하여라." 학선이의 지시를 받은 그의 부하는 탁열정을 찾아서 근

양문을 나섰다. 그는 길을 물어서 광석내로 오르지 않고 수양산성 쪽으로 오르지 않고 수양

산성쪽으로 올라갔다. 지게를 지고 손에는 건성 낫을 들었으니 만약 들킨다 할지라도 나무

꾼으로 뵈일 셈이었다. 수양산성이 내다보이는 등성이에서 다시 서쪽으로 굽돌아드니 눈 아

래편에 탁열정의 기와지붕이 내려다보였다. 벌써부터 군사들이 기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

고 있었다. 그는 지게를 벗어놓고 앉은걸음으로 비탈을 슬슬 미끄러져 내려갔다. 탁열정의

너른 마당에는 창날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고, 검은 더그레와 털벙거지를 쓴 군사들의 자세

는 엄숙하고 절도가 있었다. 계곡 건너편에서 일시에 방포 소리가 울려퍼지자 학선이의 부

하는 하마터면 벌떡 일어나 달아날 뻔하였다. 실로 간이 벌벌 떨릴 듯한 폭음이었다. 화약

연기가 매캐하게 피오올랐다. 학선이 부하는 다시 고개를 들고 살펴보았다. 맞은편 계곡의

숲속에 포수들이 줄지어 엎드려 있었다. 다시 방포 소리가 일제히 들려왔다. 그는 눈을 꼭

감았다. 습진장 끝의 무너진 언덕에는 커다란 나무둥치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어서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지나갔다. 한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화살이 소나기처럼 몰려서 습

진장 끝에 날아가 쳐박히는 것이 보였다. 그 안에 사람이 서 있었다가는 머리털도 온전하지

못할 듯싶었다. 북소리가 긴 간격으로 삼세번씩 아홉 번 들리자, 이십오 명씩 대를 나눈

군사들 열 오가 장창을 지남침 세로 겨누어들고 앞서 나아가고 나머지 열다섯 오는 철우경

지 세로 종렬을 지어 마당의 측면을 질러 나아갔다. 종렬의 끝과 횡렬 우측의 끝이 만나자

북소리가 두 번 울리고 종렬의 끝 오가 십면매복세가 되어 오른편으로 돌아서 짓쳐나아갔

. 종렬의 끝과 횡렬 우측의 끝이 만나자 북소리가 두 번 울리고 종렬의 끝 오가 십면매

복세가 되어 오른편으로 돌아서 짓쳐나아갔다. 나머지 각각 두 오는 그 뒤로 벌려서 다르니

화살 모양의 극진이 되었다. 그들은 마당의 끝에 으르러 북소리 두 번과 함께 일시에 장사

진으로 변하더니 어지러이 각자의 형과 세를 취하여 찌르고 돌리면서 나왔다. 그리고는 둥

그런 언월진으로 마당을 둘러싸고 정자 아래 열지어 섰던 스물다섯 명의 유군이 환도와 쇠

도리께를 휘드르며 그 빈터를 어지러이 치며 나아갔다. 유군이 나가자마자 다시 화살이 날

아오는데 빙 둘러싼 저희 편에게는 닿지도 않게 정확히 원의 한 가운데에 날아가서 쏟아졌

. 군사 조련법이나 습련을 모르는 학선의 부하가 보기에도 등이 서늘할 정도였다. 이것은

싸움을 하자는 것이지 결코 사나운 짐승 몇마리를 잡으려는 습련이 아니었다. 군관들이 그

중에 몇을 골라내어 맞으편을 가리키자 비호처럼 날쌔게 뛰었고, 뒤어이서 군사들이 소리도

없이 중 좌 우로 세 갈래가 되면서 지형에 따라 한편은 등성이를 향하여 달리고 다른 쪽은

뒤를 끊으려고 언덕을 넘어갔으며 가운데만 그대로 뒤를 따라갔다. 추적을 습련하는 모양

이었다. 그들이 꼭대기까지 올랐다가 다시 날쌔게 골짜리를 타고 내리는데 포수들이 일시에

흩어지더니 활로를 열어주고 양쪽에 포진하는 것이었다. 세 군사가 뛰어내려와 진을 통화하

자마자 양쪽에서 높직하게 방포하였다. 소나무 가지에 철환이 맞아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

리며 꺾어지며 땅에 늘어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학선의 부하는 다시 앉은걸음으로 비탈

을 올라 수양산성의 동편을 돌아 내려왔다. 수리에게 보냈던 자가 먼저 돌아와서 학선이에

게 알렸다. "퇴청하자마자 남정 부근에 있는 기방에서 만나겠답니다. 낙락장송 두 그루가

서 있다지요." "그래 눈치가 어떻드냐?" "반색을 합디다. 아전들치고 송방 사람들 싫어할

자가 어디 있겠수. 송도 임방에서 감역차 나왔다가 감영 수리께 인사나 하시겠다구 그랬더

, 그렇잖아두 말은 들었다면서 궁금하게 여겼답니다. 그자가 자기는 한번도 불러주지 않

은 것이 꽤나 섭섭했던 모양이올시다." 학선이는 빙그레 웃었다. "내일 떠난다. 마필이며

짐이며 다 챙겨두어라." "아니... 일 다 보셨수? 좌장께서 뭐라구 안하실"까요." 학선이는

껄걸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이미 다 끝난 일이다. 감영에서는 토포군을 조련시키구 있다.

너두 생각이 나느냐? 연전에 우리가 의금부 도사가 되어 감영을 휘젓고 나오지 않았더냐."

부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속삭였다. "어이구... 그럼 장길산이 말이우?" "그래. 그 아이

를 잡겠다구 난리라는 구나. 조읍포서 우리에게 먹인 물건을 너두 봤지. 참 그렇게 뱃보 큰

녹림당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길산이는 그 때만 해두 코흘리개였어." 학선이는 감개

가 무량하다는 듯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가 구해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해서가 떠들썩한

활빈당의 수괴는 주내방 사거리 저자에서 아이들의 구경거리로 효수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광석내로 나갔던 부하가 옷이 흙투성이가 되어 빈 지게를 덜그덕거리며 돌아왔다. "가보았

느냐?" "성님, 말두 맙쇼. 내가 아주 혼이 다 달아났소이다." 그는 흐르는 땀을 소매로 연

신 씻어냈다. "이 녀석아, 덤비지 마라. 우리 식솔들은 자다가 찬장이 무너져두 놀라지 말

아야 입에 밥이 들어가는 업이 아니냐." "습련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는데 정말 찬바람이 일

어납디다. 그것은 분명히 범이나 서너 마리 잡자는 놀음이 아니올시다." "어떻드냐?" "

람을 잡자는 게 아니고서야. 궁수에 포수에 단병접전까지 아예 이건 진전입디다." "모두 몇

명이나 되더냐?" ", 유군이 스물다섯 그리고 진을 짜는 오가 스물다섯, 그리고 궁수 포수

가 다섯 모였습니다. 사람을 뛰어 달아나게 하고 뒤로 쫓아 몰아서 살진 속으로 넣는 것까

지 조련하고 있습디다." 학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수고했다. 그런데 그 옷꼴

이 왜 그러냐?" "아이구 사자가 떨려서... 나무 뒤에 앉아서 보다가 가까스로 일어나 내려

왔지요. 그만 딴 데 정신을 파구 오다가 비탈에서 두 번이나 나뒹굴었습니다." 학선이가 농

기를싹 거두고 말하였다. "너는 구경이나 했지. 이제 당하는 사람들도 있을 게 아니냐."

"... 당하다니요?" "아니다. 저녁에 놀러 나갈 것이니 사방등이나 준비해두어라." 학선이

는 역시 길산이가 자비령 근처에 있다는 것만 알 뿐, 구월산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

던 것이다. 학선이는 기방으로 사람을 먼저 보내어 안채의 은밀한 곳에 자리를 마련하도록

해두었다. 저녁이 되어 학선이는 하인에게 사방등을 들려서 남정거리로 나아갔다. 최초 담장

이 둘러 있고 홍등이 내걸린 기루에 당도하니 기모가 나와 반기면서 안으로 안내를 하였다.

"손님이 오시면 이리루 안내하게." ",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인물이 가

장 뛰어난 동기를 둘여 시중을 들게 하고 손님을 여기서 주무시고 가도록 해야 하네. 그래

도 이 고장은 해서의 수부가 아닌가. 그만한 일을 해낼 계집이 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

. 감영 객사의 손님이 아니면 웬만한 향리의 부자들도 저희 집에서는 받지 않습니다. 송방

에서 나오셨으니 일반 손님들과는 다르지요. 비용이 좀 과중합니다마는 머리를 얹어야 할

아이가 있습지요. 가야금을 제법 할 줄 알지요. 해우채가 좀 과해서요..." "해우채는 얼마나

주면 되겠나?" "지난해 봄에 의주에서 사향이 들어올 제 한 역관이 역시 동기의 머리를 얹

어주었는데 삼백 냥과 비단 패물을 주셨지요." "알았네. 이런 자리가 모두 이문을 보자는

일이라, 자네의 이문에 대하여도 박할 수가 있겠는가. 송도 임방에서 수결한 오백 냥짜리 어

음을 돌려줄 것이니... 알아서 쓰도록 하게. 그대신 내가 몇가지 부탁이 있네." 학선이가 당

장에 임방의 직인이 찍힌 어음을 내어 수결하고 내어주니 주모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앞으

로 다가 앉았다. "아이구, 어느 분부시라고 어김이 있겠습니까." 학선이가 목소리를 낮추

어 속삭였다. "다름이 아니라, 요즈음 감영에서 군사 조련을 한다. 군기를 지킨다, 하며 뒷

전에서 뒤숭숭하게 돌아가는 모양일세. 자네가 알다시피 우리네는 장사치가 아닌가. 손짓 하

나로 누만 전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판일세. 북방에서 변이라도 일어난다면 보통 일이 아

닐세. 만약에 출병하게 된다면 언제쯤이며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알고 싶네." 주모는 주의

깊게 듣고 나서 고래를 끄덕였다. "대인께서는 염려를 놓으십시오. 향기로운 술과 담콤한

말로 물으면 사내의 간장도 녹여낼 수가 있습니다." "자네만 믿겠네." 학선이가 송도서 하

던 대로 처리를 해놓고 나서 잠시 기다리려니 수리가 헛기침을 하며 마루로 다가오는 기척

이 들렸다. 문이 좌우로 열리고 그가 들어서자 학선이는 벌떡 일어났다. "어서 오시지요.

이거 한번 모신다 하면서도 그동안 향리 저자를 돌아보느라고 틈이 없어서 결례 이만 저만

이 아니올시다." "원 별말씀을... 호방에게서 얘기는 벌써부터 듣고 있었지요." 그들은 좌

정하여 흉황에 대한 이야기며 풍천서 해마다 떠나는 사행에 관한 일낒 시시콜콜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학선이는 그를 꾀느라고 슬쩍 미끼를 던져보았다. "결성포의 신대인께서도 평안

하시겠지요?" 수리는 이마를 잠깐 찌푸렸다. "연전에 그 어른이 작고하여 자제 되는 이가

물려받았지요. 그렇지만 송방하고야 이제 비교가 되겠습니까?" "무역별장직이 송방에 떨어

지도록 해주신다면 따로이 짐을 마련하겠습니다." 이방이 시큰둥하게 받았다. "실상 사행

철이 되면 눈코 뜰 새가 없어서 일일이 분별하여 대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짐도 짐 나름

이라 뭐 별게 있어야지요." 학선이가 얼른 눈치를 채고 말하였다. "송방의 짐이라면 다릅

니다. 인삼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돌아올 제의 이문을 송두리째 드리지요." 이방은

과연 놀란 표정이 되었다. "하기는 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만, 안전이나 목사

께서는 대략 그러한 일은 제게 일임을 하시지요." 얘기가 그럭저럭 풀려나가는데 술상이

들어왔디. 감영의 수리로서는 조금 과분한 자리였다. 조촐한 주안상이 벌어지고 나서 주모가

문을 열더니 단장시킨 동기를 데리고 들어왔다. 황의 홍상에 보름달 같은 얼굴이며 옥 같은

목덜미와 조금 수그린 이마 아래서 가"끔씩 위로 치켜드는 눈이 부끄러운 듯이 추파를 던지

는데, 벌써 수리는 좌불안석이 되는 것이었다. 주모가 곁에서 부축하고 동기는 나비가 내려

앉은 듯 절을 하였다. 수인사의 수작이 오가고 나서 재간을 묻고 곧 가야금이 들어왔다.

릎에 얹고 한 가락을 타는데 수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하였다. 벌써 주안상이 세 찰례

나 갈려 나가자 수리는 동기의 잘룩한 허리를 안고 인사불성이었다. 학선이가 시간이 된 것

을 알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여 다시 주모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 기루를 나섰다.

제 명일 식전에 더나기 전에 사람을 보내어 말을 캐어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튿날 일

찍 일어나서 말에 안장을 얹고 짐을 싸는 동안에 학선의 부하가 남정거리로 나갔고, 학선이

는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부하가 웃는 얼굴로 들었다. "그래, 알아냈

느냐?" ", 석불이라 할지라도 웃고, 봄볕에 고드름이 될 터인데 제까짓것이 입을 다물고

배겨내겠습니니까?" "언제 출병한다더냐?" "앞으로 보름 뒤에랍니다. 아직 장적의 굴혈은

알아내지 못하였으나, 벌써 한달 전에 기찰하는 자들이 좍 깔렸다지요." ", 그렇다면 알

아냈을 것이다." "아주 중요한 것을 알아냈습니다. 서흥에서 토포군이 집결을 한답니다."

학선이가 무릎을 쳤다.

"되었다. 보름 뒤에 서흥에서 토포군이 집결한다? 수는 이백이요. 궁수와 포수, 그리고 스

물다섯 오의 유군으로 짜여진단 말이렸다. 자아, 임방 박좌장께 비용을 더 내라 하여도 되겠

구나." 학선이가 기뻐하며 해주를 떠났으나, 사실은 최형기의 철저한 계획에는 미치지 못하

였던 것이다. 그는 어느 시기가 자나면 탁열정 습진장에서의 조련에 관한 갖가지 소문이 퍼

지게 될 것을 걱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토포에 참가하는 자들에게도 날짜와 집결

지를 틀리게 알려놓고 있었다. 보름 뒤라면 그때에 비로서 싵언에서 기찰이 끝나 철수하게

될 무렵이었다. 그때쯤에는 습진 조련도 일시에 중지할 계획이던 것이다. 그랬다가 정작 토

포할 때가 되어 야밤에 느닷없이 거병하여 송화의 무더리로 나아가고 구월산 사 읍에서

감영의 비관을 돌릴 셈이던 것이다. 학선이가 송도로 돌아가 박대근에게 사실을 알렸고

자비령의 길산에에게 즉시 전해졌다. 길산은 식구들과 둘러앉아 대책을 의논하게 되었다.

채의 큰사랑에는 박대근이 보낸 임방 차인이 와서 앉아 있었고 길산을 위시하여 강선흥 최

흥복 김선일 강말득 그리고 김기 등등이 둘러앉았다. 길산이 입을 열었다. "나라에서 우리

를 잡으려고 토포군이 온다는데 우리가 무턱대고 산채를 비우고 달아난다는 것도 우습

, 그렇다고 이 골짜기에 틀어박혀서 관군을 대적한다는 것은 더욱 불리하다. 너희들 생각

은 어떠하냐?" "이제 겨우 자비령에서 자리가 잡혔고 해서뿐만 아니라, 고나북과 서북지

방에서도 우리가 널리 알려진 판인데, 변변히 관군과 맞서보지도 않고서 종적을 감춘다는

것은 말도 안되우." 선흥이의 아내는 해산달이 가까워져 있었고 길산의 아내 봉순이도 딸

을 낳은 지가 두어 달 전이었다. 산채에는 식구들가지 붙어서 살고 있었으니 싸우는 것은

물론이요 떠난다 할지라도 이런 겨울철에 또 어느 산골짜기로 가족을 끌고 다니며 고생을

시켜야 할지 그것이 더욱 걱정이엇다. 최흥복이 말하였다. "맞뭍어 싸울 수는 없수. 정작

감영서 자여진 토포군이 이백여 정병이라지만 저들은 틀림없이 군현의 군노 사령들과 민병

을 동원할 게요. 이번 토포는 아마도 국가의 조세를 관리하는 조읍포창을 습격한 때문이겠

지요. 저들도 나라의 기강을 세워 보이려는 것이 아니우? 우리가 일시에 숨어버린다면 헛되

이 산골자기나 뒤져보다가 물러가겠지요. 녹림당은 관군이 두려워서 이미 흩어져버렸고,

적을 찾지 못하였다 하게되면나라의 체면도 세워주는 셈이우. 이번에는 한판 싸움으로 토

포군을 꺾어버린다 할지라도 다음번에는 더욱 강대한 관군으로 우리를 쓸어버리려 할 게요.

차라리 싸움을 피해서 잠시 숨어버리는 것이 나을 겁니다." 선흥이와 흥복이의 의견이 이

렇게 엇갈리자 김선일, 강말득 또한 서로 다른 의견을 내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었다.

기가 고개를 숙이고서 한참이나 그들의 갑론을박을 듣고만 있다가 송도에서 온 박대근의 차

인에게 물었다. "앞으로 보름이란 말인가?" ", 한달 저에 기찰이 끝났답니다." "그렇다

면 관군은 벌써 우리들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겠군." 김기가 말득이에게 물었다. "만동이

네서두 오늘 올라온다고 하던가?" "형제가 모두 봉산서 겨울을 나니까 요즈음 집에 있지

." 김기가 말하였다. "되었네... 우선 토포 기간이 지날 때까지 식구들을 만종이네로 맡

겨서 도계의 너머로 피해 있도록 하지.

우리는 그냥 물러설 수도 없고 또한 정면으로 부딪쳐 싸울 수도 없는 형편일세. 관군을 하

늘이 내린 천군이나 도깨비의 군사로 보아서는 안되네. 저들은 지금 성난 개에 지나지 않아.

개는 이빨을 드러내고 어깨를 움추려 털을 곤두세우고 다가서는 중일세. 개라고만 똑똑히

알고 자세를 취하면 두려울 것도 없고 물리지도 않는 게야. 개는 도깨비와 달라서 언제든

빈틈이 생겨나게 마련이야. 그런데 우리가 돌아서서 뛸 태세를 취하자마자 개는 덥석 우리

의 발과 뒤꿈치를 물 게 아닌가. 등뒤에다 넉넉하게 뛰고 피할 길을 내두고서 성난 개에게

먼저 달려들어 기를 꺾어놓아야 겠네. 일단 기가 꺽이고 나면 다음 공세를 바로 잡을 때까

지는 시간이 걸린다네. 장두령, 개가 꽁무니를 사리고 뛰었다가 되돌아올 무렵에 우리는 천

천히 뒤로 물러서서 숨어야 하오. 그러고 나면 스스로도 별로이 신명도 나질 않고 맥이 풀

려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 길산이 김기의 말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서흥에서 토포군이

집결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관군이 미처 포진하기도 전에 서흥을 들어쳐서 그들의 예봉을

꺾어 놓는다. 그러고는 자비령으로 물러나면서 가끔씩 토포군의 진군을 방해하고 괴롭히며

끊임없이 달아난다. 산줄기를 타고 북관으로 잠적한다. 우리는 산에서 단련된 수십여 명의,

이를테면 유군이라, 동 출몰 서 잠적이 기민하고 간편하여 추위와 험한 지형이 오히려 도움

이 되지만, 관군은 워낙 숫자가 많고 산세와 지형에 서툴러서 군량의 조달도 어렵고 눈 덮

인 산속을 진군해 오기도 힘겨울 것이다. 사나흘만 행군한달지라도 거의 반나마 낙오해버리

겠지. 하는 수 없이 토포군은 철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완전히 감영으로 돌아갔다

는 연락을 받고 나서, 다시 산채로 돌아온다. 감히 토포를 하려는 자가 없게 될 것이다."

모두들 주의 깊게 길산의 말을 듣고 있었다. 김기가 연이어 말하였다. ", 오늘부터 아녀

자들을 두어 가구씩 만동이 식솔들에게 보낸다. 언제나 밤중에 하산시켜서 그들의 안내를

받도록 해야 하네, 한 댓새면 모두 빼돌릴 수가 있겠지. 그리고 사방에 번을 들어 요로를 살

피며, 강서방은 아이들 몇을 데리고 서흥으로 나아가 관군의 동태를 살피게." "그리고 집결

한다던 날이 앞으로 보름 뒤, 초닷새쯤이니까 우리는 행상단으로 꾸며서 초사흘쯤에 서흥

인근에 나아가 기다리고록 하지." "직접 관아로 짓쳐들어갑니까?" 선일이가 물었고 김기

가 대답하였다. "아마도 관아 앞이나 객사 부근에 진영을 세우겠지. 저들의 간담이 서늘해

지도록 진영의 한가운데를 무너뜨려버여야지. 지난번에 마련하였던 군복이 있지 않은가.

리는 관군의 일대로 변복하여 그들의 영에 바짝 다가들어 불시에 치고 베고 쓰러뜨리고 불

지른 다음에, 미처 적이 정신을 수습하기 전에 빠져나오는 것일세." 이제는 모두들 걱정하

던 기색이 사라져버렸다. 그날로 의논된 일이 시행되는데 만동이네서 사람이 오자 아녀자들

두어 가족을 딸려서 선일이가 함께 봉산으로 나갔다. 늙은이나 선흥의 아내 춘척댁처럼 몸

이 불편한 사람들은 세마에 태워서 보낼 참이었다. 길산은 제 식구를 맨 마지막에 보내기로

하였다. 봉순이가 길산에게 안을 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지내고 오는니, 탑고개

에나 다녀오구 싶어요. 어머님과 아버님 뵈온 지도 오래되었고, 도무지 어떻게나 지내시느지

궁금해서 그래요. 성님네두 한번 들러보구 싶어요." 그러나 길산은 고개를 저였다. "다른

식구들이 모두들 북으로 떠났는데 자네만 혼자 탑고개로 나가는 것을 안될 말이야. 노상에

서 고생도 함께 하고 춘천댁의 해산도 보살펴주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러잖아도 해동이 되면

함께 탑고개에 가 볼 셈이었어. 자네가 일행을 따라가서 아우들의 식구들을 잘 살펴주어야

." 길산의 바른 생각으로 결국 그이 처자녀는 구월산 토벌의 와중을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관군의 토포가 시작된다는 소식이 구월산의 마감도 오만석에게도 전해졌으나 그들

은 토포군이 서흥에 집결한다는 말을 따져보고는 이는 틀림없이 자비령 길산이네 산채를 노

리고 있는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하였던 것이다. 마감동이네서도 서흥 관아를 들이칠 때 합

세하기를 원했으나 김기가 만류하였다. 그는 일단 관군의 추적이 시작되어 자비령 일대를

뒤지고 있을 즈음, 봉산이나 재령의 변두리에 출몰하여 토포군의 배후를 어지렵혀달라는 부

탁을 하였던 것이다. 관군의 포진에 혼란이 올 것이며 각 지방 수령들과 소리들 사이에 무

사 안일하게 토포의 기간을 넘기겠다는 생각이 퍼져갈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관군에 협조

하던 자들도 언제 어디나서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자비령 식구들이 서흥을 들이치고 나

서 재빨리 산속으로 잠적하여 토포군을 깊숙이 끌어들일 즈음에 구월산 식구들이 엉뚱한 곳

에서 출몰하여 외떨어진 현이나 관군의 일대를 급습하여 괴롭히기로 전략이 세워졌다.

말득이가 졸개 세 사람을 거느리고 서흥의 같은 식구가 열어둔 주막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고 돌아다녀보아도 관군이 집결할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 이상한

. 토포군이 집결하려면 이맘때쯤에는 서흥 관아에 무슨 변화가 있을 너인데..." "혹시 관

군은 변복을 하고 벌써 들어왔는지도 모르오. 이제는 인근의 다른 군까지 살펴보십시다."

그러나 강말득과 졸개들이 사방을 살피고 돌아다녔어도 언제나 삼문 근처는 조용하였고,

논 사령배들도 전혀 긴장하거나 대비하고 있는 기색이 엿보이지 않았다. "아직 날짜가 안

되었으니 더 기다려보기로 합시다. 우리가 떠나버린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그런 낭패

가 다시 없지요." 강말득이 부하의 말을 받아 들여 약조된 날짜까지 기다렸다. 초이틀에 김

기와 길산이가 말을 타고 한가한 행색으로 주막에 당도하였다. 강말득이는 고개르 연신 기

웃거렸다.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집결한다던 날이 이틀 남은 셈인데 저렇듯이 관

아가 무슴하게 보이니 오히려 함정이 아닐까요?" 김기가 빙긋 웃었다. "아직 날짜가 이르

니 좀더 기다려보지. 함정이라면 벌써 들어와서 매복한 군사가 있거나, 아니면 우리 산채 가

까이까지 토포군을 숨겨놓고 우리를 꾀어내거나 했을 터인데 아무런 사람의 기척을 보고 듣

지 못하였네. 아마 토포를 하려는데 군비며 병력이며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모양일세.

이러한 흉황에 나라에선들 즐겁고 편한 일이겠는가." 관아를 살피러 나갔던 자와 멀리 해

주로부터 오는 길을 살피러 갔던 자들이 돌아와서 언제나처럼 관군은커녕 행객조차 드물었

다고 말하였다. "만약에 초닷새까지 아무 일이 없으면 우리는 그냥 여기서 노리고 있다가

헛물만 켜고 돌아갑니까?" 말득이가 심드렁하게 물으니 길산이 대답하였다. "어찌됐든 서

흥 관아를 들이친다. 만약 토포군이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가 미리 알고 있었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관군은 틀림없이 당황하겠지.." 이튿날 봉산에서 행상단이 내

려왔다. 그들은 오후에 서흥에 닿자마자 뒤떨어진 다른 일대를 기다린다며 읍의 외곽에서

짐을 풀고 앉았더니 사방이 어두어지자 삼삼오오 작을 갈라서 흩어졌다. 철에 맞지는 않았

으나 서흥 봉산 사이로 행상단이 떼를 지어 왕래하는 것은 이 골안에서는 너무도 흔한 일이

라서 아무도 주의를 돌리는 이가 없었다. 강선흥 최흥복 김선일 강말득 등이 대개 칠팔 명

씽르 데리고 외곽의 여러 마을에 흩어져나가 방을 잡고 들이칠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토포군이 집결한다던 초닷샛날 아침부터 길산이네 식구들은 읍의 남녘 길로 나아가 살폈으

, 저녁때가지 관군은 커녕 일반 행객들도 열손가락으로 접을까 말까 한 정도에 지나지 않

았다. 김기는 내심 매우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으나, 기와에 식구들을 몰고 병장기를 갖추

어 내려온 참이라 헛걸음을 칠 수도 없었다. 김기는 길산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렇지...

다 썩은 관리들이 입으로 내뱉은 것을 제대로 실현할 리가 있나. 아마 계획이 변경되었을게

. 명년 봄이나 다음 겨울이나... 그렇게 미루다 보면 이번 관찰사도 과만이나 별일없이 넘

기고 내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소?" 길산이도 웃으면서 말하였다. "좋다, 관군이 약조

를 어겼을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어김없이 해낸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오. 오늘밤에 서흥

관아를 들이치고 창고의 미곡과 병기를 모두 탈취하여 돌아가십시다." 그날 밤으로 여러

곳에 흩어져서 기다리고 있던 혈당들에게 거사의 자세한 순서가 정해져서 시달되었다.

방향으로 진로를 잡았으니 서쪽으로는 강선흥이 거느린 일대가 군영을 덮치고 들어가며 동

쪽으로 객사를 덮치는 것은 김성일의 대가 맡으며, 최흥복의 벽력오는 군영과 객사에서 쫓

기는 자들을 총포와 활도 살상하면서 가운데로 곧장 삼문을 향하여 달려들고, 길산과 말득

이가 거느린 일대가 동헌의 북쪽 담장을 넘어들어가 관가를 장악한다는 안이었다.. 그들은

조음포창을 들이치던 때와 마찬가지로 군복을 입기로 하였고, 이번 거사에서는 주로 병고의

무기들을 탈취하기로 작정이 되었던 것이다. 자정이 넘어서 사늘한 겨울바람만이 얼어붙은

땅위로 스쳐 지나갈 즈음에 그들은 각기 정하여진 길을 따라서 읍내로 스며들었다. 강선흥

이는 장교 복색을 하고서 손에는 엄파 쇠몽치를 움켜쥐고 군영으로 달려들었다. 뒤에는 장

창을 잡은 군졸의 복색을 한 졸개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장교와 군졸들이 자고 있는 기다란

격자 창문 앞을 가로막아섰다. 선흥이가 다짜고자로 마루에 올라 방문을 벌컥 잡아당기고

큰소리고 외쳤다. "이놈들, 지금이 어느때라고 자빠져 자구 있느냐?" 숙직하던 장교 하나

가 가까스로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으니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장교가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놈, 적환이 일어나 온 군내가 벌집이 되었는데 너는 잠이나 자면 되겠느냐?

어서 이놈을 묶어라." 곁방에서도 자고 있던 군졸들이 웅성대며 일어나는데 졸개들이 우르

르 달려들어 창날을 겨누고는 꼼짝을 못하도록 해놓았다. "어느 고을의... 장병들이오?"

결에도 수상하다고 느꼈는지 서흥 장교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예기 이놈, 무슨 잔말이 많

." 선흥이가 벼락같이 소리치며 엄파 쇠몽치로 장교의 어깨를 내리치니, 봉순 수숫대 동

선령 바람에 휘어지듯 모로 넘어져버렸다. ", 그놈 힘도 못 쓰는 것이 호통만 살았고나."

졸개들은 장창을 겨누고 선잠에서 깨어난 서흥 군사들을 이리저리 묶었다. 그야말로 된불

만난 고드름 막대기 꼴이었다. 김선일이는 객사인 용천관으로 달려가 세 채의 집과 정자를

둘러싸고 그 중에 서북으로 가던 무장 하나와 부사의 친척 되는 자와 그들의 하인들을 잡아

냈다. 강말득과 길산은 관가의 북편 담을 넘어들어가 부사의 침소를 손쉽게 점령하였다.

기가 최흥복과 더불어 삼문 앞의 매복을 풀고 안으로 들어왔고, 길산은 점잖게 기침을 하면

서 부사가 자고 있던 방의 미닫이를 열었다. "사또, 평안하시오?" 부사는 가가스로 일어나

부들부들 떨면서 뒤로 물러나 앉았다. "...누구야, 너는 뭣하는 놈이냐?" 길산은 우두커

니 선 채로 한 손에는 짜른 칼을 들고 부사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놀라지 마시오. 나는 해

서 활빈도의 수령 되는 장모라는 사람이외다. 우리들의 행적을 들어서 잘 알 것이오만 무시

로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빼앗거나 하지는 않소. 잠깐 앉아도 되겠소?" 길산이 정중하게

물으니 부사가 우물쭈물하면서 길산의 손에 쥐어진 짜른 칼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공사 분주하시다가 곤히 주무시는 잠을 깨워드려서 미안허우." 길산은 단검을 곧추 쳐들

어 연상 위에 떨구었다. 칼이 푸르르 떨며서 박혔다. 길산은 이불을 걷고 부사의 맞은편에

천천히 앉았따. "오늘 내가 불시에 서흥부를 방문한 것은 사또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부사는 길산의 정중한 태도에 두려움이 많이 가셨는지 자세를 고치고 앉았다. "때가 흉황

이라 우리 고을에는 가져갈 물건이 없네. 미곡이 있다 하나 그것은 몇 달 뒤에 환자로 나갈

것이라, 활빈을 칭하면서 어찌 그런 재물을 가져가겠는가?" 길산은 손을 내밀려 말하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종이 한 장이오." 부사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길산이 재촉하였다.

"감영에서 내려온 비관 문서가 있겠지요?" "비관이라니..." "토포군이 서흥에 집결하기로

되어 있지 않소. 사또의 측근에는 우리와 통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고, 감영에도 우리에게

수식을 전해주는 관리들이 있소이다." 부사는 더욱 당황하였다. "신임 순사또께서 부임하

신 뒤로 비관은커녕 아직 장계도 드리지 않았네" 길산은 잠깐 부사의 안색을 살폈다. 송방

에서의 정탐이 어긋났던 게 아닐까. 아니면 아직 시기가 이르거나, 계획이 변경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서슬이 퍼런 자의 수염이나 미리 베어 전의를 꺾어두는 것이 필요할 터였

. "감영에서 공연히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토포하려는 조련을 시키고 군비를 모으고 법

석인 모양인데, 우리 녹림당은 해서 골골의 산마다 틀어박혀 관굼의 움직임을 훤히 보고 있

소이다. 만약에 우리를 잡으려면 전 해서가 들고 일어나 동서남북을 한꺼번에 뒤져내고 둘

러싸도록 하시우.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공연히 마른 틀에 쥐불 놓기요. 지금 서흠은 우리들

이 완전히 둘러싸서 바람 샐 틈도 없소. 이런 일쯤은 하룻밤 사이에 어느때든지 해치울수가

있수. 오늘 관군이 모여들지 않았기 망정이지 우리와 맞붙었다면 관가는 벌써 불바다가 되

었을게요. 만약에 토포군이 당도하면 우리는 다시 올것이며, 남쪽으로부터 해주 감영을 들이

칠 수도 있소. 백성이 무서운 줄 알면 섣불리 나서지 마시우. 토포를 한다면서 공연히 금령

이나 발동하여 못할게 구는데, 금령이엄할수록 우리들 녹림당에게 이롭지요. 금령에 시달린

백성들이 급기야는 관군에게 대적하기 때문이지. 우리를 치시우. 몇몇이 잡히고 죽고 다치겠

지만, 백성들은 우리를 딛고 일어설 게요. 잔꾀를 써서 속이려 하지 마시우. 우리가 오늘은

한판 싸움을 못하고 물러가지만, 꼭 다시 오리라." 길산은 일어나면서 연상에서 단검을 뽑

았다. 그리고는 와룡 쌍촛대 위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고 수평으로 싹 그었다. 심지가 잘

려나갔는지 불이 이시에 꺼지고 방안은 캄캄했다. "해 뜨기까지 푹 주무시우. 병고의 병장

기들은 이러한 태평성대에 쓸모가 없을 것이니 우리가 가져가겠수." 길산은 조용히 미닫이

를 닫았다. 김기가 밖에 서 있었다. "감영에서 아무런 소식도 없는 모양이지요?" ",

사는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어쨌든 토포군의 창끝을 잘라준셈이오. 병장기나 걷어갑시다."

자비령 식구들은 일사불란하게 각자 흩어져서 지킬 곳은 지키고 살필 곳은 살피면서, 병고

와 세곡이 쌓인 창고를 열었다. 우선 장창이며 삼지창을 서른 자루쯤 걷어내고, 활 십여 자

루와 화승총 네 자루, 그리고 쇠도리깨며 육모방망이 등속을 꺼내 놓으니 대번에 백여 명의

군사가 무장할 수 있는 양이 되었다. 하지만 총구는 녹슬고 창자루는 오래되어 상했으며 환

도는 잘 뽑아지지도 않으니 결국은 쇠도리깨며 육모방망이만 사용할 수가 있었다. ", 이러

니 외침이 일어날 적마다 늘 파죽지세로 밀리는게 아닌가." 김선일이가 발길로 쓸모없는

병장기들을 내지르니, 김기가 말하였다. "총포는 못쓰게 되었지만 창은 창날을 뽑아 다시

재생할 수가 있고, 환도는 숫돌에 갈고 바르면 다시 명검이 될 걸세." "미곡은 어찌할까

?" 최흥복이 길산에게 물었다. 길산은 하늘의 별자리를 한번 살펴보고 나서 말하였다.

"아직 닭이 울려면 멀었다. 인심이나 쓰고 가지꾸나. 서너 섬씩 말꽁무니에 끌어다가 뿌려두

어라." 말 세 필을 내어 안장에 줄을 매고 쌀섬을 묶은 다음에 멀리 삼문밖으로 끌고 나가

섬의 한끝을 터뜨려놓으니 흰쌀이 땅바다에 줄은 그리며 흘러나갔다. 동녘이 부옇게 트도록

읍내의 사방으로 말을 끌고 다니더니 행길이며 골목마다 때아닌 곡식이 길을 낸 것이다.

속들보다 먼저 일어난 양민들은 돌이 많이 섞였을지언정 오랜만에 밥을 그득히 먹게 될 판

이었다. 숙종 십이년 이월의 서흥지변이 바로 이것이었다. 장실산의 혈당들은 관가의 서슬을

꺾어놓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비령 깊숙이 퇴각하였다.

최형기는 신천의 기찰소에서 돌아오는 길로 탁열정에서의 군사 조련을 중지하였다. 그러

나 이백여 명의 군사들을 감영 안에 풀어놓지는 않았다. 병방과 하군관 전군관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화산으로 나아가 대기하도록 지시하였다. 화산은 결성포의 깊숙한 만을 휘돌아 서

북방을 병풍처럼 막아선 암벽 줄기였다. 화산의 끝과 용댕이 사이는 가까워서 거룻배가 넘

나들 수 있었다. 취야정에서 서쪽으로 치닫는 기다란 산줄기를 따라서 갈숲과 송림이 오십

여 리에 걸쳐서 계속되는데, 인가는커녕 아예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곳이었다. 산줄기를 타

넘으면 곧바로 강령 지계였다. 강령의 서쪽 끝인 등산꽂은 최형기의 부임지기도 하였다.

평이 바로 앞바다에 떠 있는 곳이었다. 감영의 정병 이백여 명은 야간에 행군하여 취야정에

서 일박하고 내쳐서 화산 아랫녘에 있는 해남창에 나아가 머물렀다. 그들은 황당선의 출

몰에 대비한다면서 날마다 사창 앞벌에서 조련을 계속하였따. 최형기는 그맘때에 관찰사

신엽이 급히 불러서 선화당으로 올라갔다. 신영은 최형기의 절을 받는 둥 마는 둥하면서

조용하지만 차디찬 음성으로 말하였다. "자네는 아직도 범 사냥중인가?" "..." "읽어보

." 신엽이 연상에 들었던 문서를 집어서 최형기의 무릎 앞에 던졌다. 최형기는 송구스러

워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것을 펼쳐들었다. 읽어나가는 중에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뢰배들이

깊은 산골골마다 떼를 지어 인가를 약탈하고, 백주에 행길에 나타나 나그네의 전대를 터는

가 하면, 웬만한 주군을 치는짓도 쉽사리 하는데, 최근에는 서흥에서 해서 활빈도를 자처하

는 적당이 야간에 관가를 급습하고, 하리배와 병졸은 거의가 달아났으며 병고와 미창이 유

린을 당하였고, 수령을 우롱한 뒤에 새벽이 되어 종적을 감추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평산부사가 올린 밀계였다. 최형기는 말미를 흩어보고 신엽에게 물었다. "장계가... 서흥에

서는 없었습니까?" "없었네. 추궁당할 것이 두려워서 서흥의 수령은 적환을 당하고도 숨기

고 있는 게야. 그러니까. 평산서 뒤늦게 밀계가 올라왔지. 당장에 감영으로 소환할 생각인

... 자네는 뭘 그렇게 꾸물대고 있는가?" 신엽이 눈을 크게 뜨며 최형기를 노려보았다.

"도적들이 이제는 관가 알기를 마치 솔가한 종놈의 집 드나들 듯 하고, 관리와 수령 보기

를 대호가 삽삽개 어루듯 하니, 내가 욕을 당하려고 외임으로 나왔단 말인가. 주상의 특수를

받잡고 해서에 나와 이렇듯 서적의 무리에게 조롱을 당하니, 목이 잘려도 후대에 발명할

말이 없을 만큼 불충한 노릇이다. 이렇게도 내외에 인재가 없으니 나라일이 장차 어찌되려

는지 통탄할 노릇이야." 최형기는 관찰사의 싸늘한 질책을 받으면서 등줄기에 식으땀이 배

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실로 그가 붙잡은 마지막 동앗줄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우졸한

자를 등용하여 나라의 중임을 맡겨주신 순사또의 은의를 잊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 막

구월산 화적굴과 그 혈당들에 대한 기찰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소인이 기밀을 지키기 위하

여 바로 초닷새에 토포군을 서흥에 집결시킨다고 소문을 냈더니, 바라던 대로 도적들의

귀에 들어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감영 주위에도 도적들의 내통자가 있다는 증거이니 섣불리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순사또께서는 고정하시고 수일간만 기다려주십시오. 도적들이 초포군의 예봉을 꺽고 사기를

죽이려고 서흥을 급습하였으나, 이제 우리가 좀처럼 병을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아예 토포

가 없을 것으로 믿고 만심할 것입니다. 소장은 이미 그런 것을 눈치채고 병력을 화산의 해

남창으로 옮겨 심장하여두었습니다. 이 모둥가 책략과 용병에 연유한 일이오니 순사또계서

는 아직 서흥에 대하여 질책하지 마시고 모른 척해두십시오." 신엽의 곤두선 눈썹이며 찌

푸린 미간은 아직 훤하게 펴지지 않았다. 그는 잘라서 말하였다. "여하튼... 장적을 소탕하

지 못하게 되면, 자네하구 헤어질 수밖에 없네." "명심하겠습니다." 최형기는 두 손을 모

으고 답하였다. "반드시 사로잡아 선화당 아래 끓이고 공초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심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태평성대에 감히 활빈도를 자처한 발칙한 놈, 수괴의 목을 베어

장대에 놓이 달아 백성들에게 꼭 보여주어야 한다." "며칠 내로 곧 출정하겠습니다." 최형

기는 무거운 마음으로 관찰사의 방을 물러나왔다. 그는 신천으로 사람을 보낼까 하다가 마

음을 돌렸다. 기찰조가 살피는 동안에는 도적들이 구월산에서 움직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틈에 구월산에서 안악과 재령을 지나 서흥까지 출몰한 것인가. 최형기는

그때까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적당들의 기민하고 비틈없는 활동에 대하여

은근히 두렵고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해서 도처에 도적의 내통자들이 속속들이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 송화에서부터 은율의 사선골과 탑고개에 이르기까지 물샘틈없는 공격이 동시

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특히 도적의 혈족들이 모여 산다는 두 마을에 대하여는 가차없

는 보복과 제재로 관군의 엄혹함과 두려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었다. 최형기는

이번의 임무가 한양에서 종사관으로서 범법 무뢰한이나 왈짜를 잡아내던 일과는 전혀 다르

다는 것을 느꼈다. 열하룻날에 발병 명령이 떨어졌다. 최형기는 오후 늦게 감영을 나와 취

야정까지 혼자 말을 타고 갔다. 물론 관복은 벗고 평복에 갓을 쓴 차림이었다. 토포군은 미

리 연락을 받고 화산 해남창으로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졸은 모두 저녁을 든든히

먹고 흰 두건이나 패랭이 차림에 길양식을 간단히 짊어진 보부상의 행색들이었다. 말이 오

십여 필이요 병장기를 감추어 싣기 위한 수레가 두 대였다. 최형기는 우선 백 명씩 나누어

서 선진과 후진으로 정하였다. 선진은 돌못을 지나 문산 뱀고개를 넘어서 해지점 사거리로

하여 학령을 넘고 장호령에서 신천 기찰조와 만날 예정이었다. 후진은 곧바로 복숭산을 넘

어 수철원을 지나 신천을 경유하여 문화로 잡입할 것이었다. 선진이 송화에, 후진이 문화에

당도하자마자 쌍주급로 호마를 탄 장교 둘이 연락할 것이었다. 선진과 후진이 동시에 행동

을 개시하지마자, 구월산 인근 사 읍에 관찰사의 비관이 돌아서 군병을 일으키게 될 것이었

. 선진이 일단 송화로 들어가 후환을 없이한 연후에 후진은 구월산 내고개를 넘어 아사

봉의 남쪽을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된목이골에서의 퇴로는 구월산 서북쪽인 은율과 동북쪽

의 안악이 열려 있게 되는 셈이었다. 안악은 서쪽으로 월당강에 길이 끊겨 있고 바로 남쪽

이 재령의 나무리벌과 신천의 어루리벌이니 숨을 데가 없을 것이다. 산세가 험한 은율 쪽이

가장 맞춤하 노티로가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내통자와 그들 혈족이 사는 사선골과 탑고개

는 저들의 마지막 방어진이 되기가 십상이었다. 선진은 송화에서 수렛고개를 덮치고 나아가

사선골과 탑고개를 급습한 연후에 선 후진이 된목이골의 사방을 포위하고 공략할 셈이었다.

아니면 후진이 아사봉의 남록으로부터 몰고 내려오면 선진은 탑고개를 미끼로 삼아 쫓겨 내

려오는 도적들을 함정에 몰아넣을 작정이었다. 선진은 최형기가 신천의 기찰조들과 함께 인

솔하여 가고, 후진은 병방과 두 군관이 인솔하기로 되었다. 앉은개로 나온 감영정병 이백 명

은 돌 못을 지나자마자 반으로 나뉘었다. 거기서 선진은 서북방의 뱀고개로, 후진은 수철원

쪽으로 갈라져 행군하는 것이다. "되도록 야간에 행군토록 하고, 낮에는 큰길을 피하여라,

또한 십리나 오 리 간격으로 두 오씩 떼어서 가도록 해야 한다." 최형기가 병방에게 주의

를 주었다. 병방은 패랭이에 개잘량 덮어쓰고 털배자를 입은 간편한 차림이었다. 매서운 겨

울바람이 코를 베는 듯하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쌍급주가 가자마자 아사봉으로 오르라.

그때에는 사 군의 군병들이 퇴로를 철통같이 둘러쌀 것이다." 후진의 긴 행렬이 문산의 동

쪽 산굽이를 돌아서 어둠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최형기는 지켜보았다. 그는 고삐를 잡아채며

군졸들에게 외쳤다. "자아, 어서 떠나자. 낮에 해남창서 푹 쉬었겠지. 오늘밤 안에 학령을

넘어야 한다." 기패관 하나가 엄두가 나질 않는지 놀란 목소리로 받았다. "어이구 그러면

해지점에서 자구 가는게 아닙니까?" "해지점에서 겨우 삼십리 길이다. 어디 놀이 가는 줄

알았느냐?" "이런 추운 밤에 학령에는 눈이 산처럼 쌓였을 텐데요." 최형기는 채찍을 들

어 잔말이 많은 기패관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 어찌나 호되게 맞았는지 그자는 고개를 홱

돌리면 얼어붙은 눈고랑에 고꾸라졌다. "자아, 행렬에서 낙오하는 자는 이 벌판 아무데서나

목을 베고 묻어보리구 간다. 감발을 단단히 해두어라." 뱀고개서 미룩산 고개까지가 십리인

데 길은 별로 험하지 않았다. 군사들은 긴장하였고 최형기의 단오한 행동과 어조에 무엇인

가 건성조련이 아니라 싸움터로 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선두가 꾸물거리면 최형

기는 말을 달려 나아가 꾸짖었고 후미가 뒤떨어지면 다시 쫓아가서 앞으로 몰아내고는 하였

. 해지점의 희민한 불빛이 까물거리는 것이 멀리 보이자, 최형기는 향도를 선 군졸에게 명

하였다. "저 달마산 쪽으로 돌아서 간다." 향도가 말을 멈추고 섰다. "만호, 그쪽은 길이

없습니다." 최형기는 그의 말 궁둥이를 채찍으로 내리쳤고 말은 크게 울면서 사정없이 시

내와 얼어붙은 논을 건너 내달려갔다. 최형기가 인솔하는 선진은 강행군으 학령을 넘어갔다.

학령에는 예상대로 눈이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덮여 있었다. 그들은 고나솔 횃불을 밝혀 들

고 행군하였다. 병장기며 군량을 실은 달구지가 눈길에 빠졌을 때에는 온 장정들이 앞뒤와

바뮈에 달라붙어 밀고 들어올리고 하였다. 황우는 지쳤는지 코뚜레가 빠지도록 당겼으나 비

척거리며 오르지 못하였다. 군졸들이 교대로 멍에와 원에 매달려 끌어야만 하였다. 학령을

넘어 십 리를 더가서 큰어미고개에 이르니 짙은 어둠이 바래지면서 하늘이 부옇게 터왔따.

고개를 넘으면 바로 신천 기찰조와 만나기로 정한 장호령이었다. 최형기는 거기서부터 두

오씩 출발을 시켰다. 최형기는 향도를 남겨두고 혼자사 말을 달려 고개를 넘어갔다. 오른펴

은 달마산과 용문산을 잇는 구이령 줄기가 뻗쳐 있고, 왼쪽은 탑벌이 펼쳐져 있었다. 장호령

사거리로 들어가는데 인가가 너덧 채 보였고, 길가 쪽으로 있는 집의 사립문 앞에 마늘등이

걸려서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최형기는 말에서 내렸다. 사립문 앞으로 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리 오너라." 하자마자 맞은편에 불이 켜져 있던 방문이 열리면서 누

군가 황급히 뛰쳐서 나왔다. "어이구 샌님, 이제 오십니까?" 하는데 살펴보니 백섭 포도부

장이었다. 그들이 마당에 들어서니 주인은 미리 귀뜀이라도 받았는디 마루에 나와 있다가

아래로 내려와 문안을 드리는 척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어한이라고 하시게 국이

라두 한그릇 데울까요?" "그만두게." "과연 양반네들이라 약조는 어김이 없으시군..."

인은 들으라는 듯이 중얼대며 방으로 들어가고 최형기도 문간방으로 들어갔다. 유수룡이 방

문을 열고 내댜보고 있었다. 방문을 닫고 최형기는 따뜻한 아랫목에 내려 앉았다. "급주의

전갈을 받구 왔겠군." ", 어제 식전에 받고서 오후에 출발하여 이집에서 저녁을 먹었습니

." 유수룡이 말하였고, 백포교가 이어서 말하였다. "서흥에 변이 있었다는 전갈을 받고

저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신천서 서흥까지 백오십 리 상거라 모르고 있을밖에요. 헌데 거

참 알수가 없습니다. 구월산에서 화적들이 작당하여 나갔다면 우리 기찰에 걸렸을 터인데,

안약 동방의 나루나 재령의 당여울을 건넌 흔적이 없었습니다. " "큰길이나 인가가 있는

곳을 피아여 재령의 남쪽을 우회하여 빠져 나갔는지두 모른다. 하여튼 날짜를 따져보니 도

적들은 이제 한시름 놓고 막 구월산 소굴로 들어갔을 게다. 설마 코앞에 우리가 숨어들었는

지는 모르겠지." "군사는 어찌되었습니까?" 유수룡이 물었다. "큰어미고개에서부터 차례

로 오를 나누어 오는 중이다. 은둔처는 물색을 해두었느냐?" "가화마을에서 은둔하기로 정

하였습니다. 송화의 동창이 있는 곳이라 사창 군관에게 명하여 군기를 엄수케 한다면 오늘

하룻동안은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백포교가 말하자 최형기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

. "그러면 밖에 나가 기다렸다가 군졸들을 향도하도록 해라." 백포교와 유수룡이 사거리

로 나아가 기다렸다가 먼저 당도하는 오를 시오 리 떨어진 가화마을로 인도하였다. 유수룡

은 가서리에 다른 오가 당도할 적마다 앞서간 오의 방향을 일러주었고, 그동안에 최형기는

잠시 방에서 몸을 녹였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대로 희부옇게 밝아 왔고 지붕마다 연기가 피

어올랐다. 유수룡이 들어와서 최형기에게 알렸다. "방금 마지막 오가 지나갔습니다." 최형

기는 일어섰다. "여보게, 우리 가네." 유수룡이 이르자 주인이 말 두 필을 끌고 나왔다.

 

"여물을 먹였나?" ", 굽도 다 살폈지요. 북방마인지 이렇게 다리가 잘록한 놈들은 처음

봅니다." 유수룡이 숙식대로 양곡과 상목을 주인에게 내주었다. 흉황이라 시골의 주막에서

는 돈을 잘 받으려 하지 않았따. 벌판 위에는 달구지 자국과 여로 군사의 발자국이 어지럽

게 찍혀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말을 타고 군사들의 뒤를 쫓아갔다. "토포장, 소청이 한가

지 있소이다." 유수룡이 최형기에게 말하였다. 최형기는 그를 돌아보았다. "뭔가?" "이번

에 사로잡을 자가 한명 더 있습니다." "장적말고 또 있는가?" ", 조읍포에 도적들이 들

어왔을 제 소인과 대적하였던 자가 있습니다. 소문에는 그가 장적의 부장이라고 하는데,

굴이 시커먾고 날래기가 표범 같았습니다. 저는 그자에게서 갖은 조롱과 수모를 당하였지요.

무더리에서 김군관을 베어버린 장본인입니다." 최형기는 불현 듯 어떤 생각에 미친 것 같

았다. 그는 중얼거렸다. "김신을 벤 자는 장적이 아니라 그의 부하였따. 그래... 전군관과 하

군과 등이 장적을 바라고 구월산에 갔을 적에 그는 몸소 내려오지 않았지. 자네는 조읍포에

서 장적을 보았는가?" 유수룡이 자신있게 말하였따. "소인은 못 보았으나 포창 군사들이

나 제 아우 수호의 말을 들으면 장적은 몸이 마르고 눈매가 사나운 자라고 들었습니다.

는 소인의 집에서 고용한 서북 무사 둘을 간단히 처치하였지요." " 그 애기는 자네 아우에

게서 들었네." "제가 생각하기로 부하보다도 장적은 더욱 고수이고 게다가 재간까지 있다

고 합니다. 땅재주 넘는 재간이 어찌나 비상하지 허공을 나는 듯하더랍니다." "그야... 그는

창우였으니까. 자네 소청이란 무어야?" "예 조읍포서 저와 대적하였던 자를 사로잡게 해주

시고, 소인이 직접 문초하고 참수하도록 해주십시오." "선비 차림의 글줄이나 안다는 자는

부장이 아니던가?" "그자는 가친의 말씀대로 모사인 듯합니다." "그들 셋은 반드시 사로잡

아 감영으로 압송해야 할 것이다. 참수는 허락할 수 없으나 추국에는 자네가 사령들을 지휘

해도 좋다." 건성으로 중얼거리면서 최형기는 다른 생각에 골똘하여 있었다. 그는 감영을

나올 때부터 무엇인가 꼭 집어낼 수 없는 의심 때문에 짙은 먹구름 속으로 휩싸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혹시 장길산은 구월산에 없는 게 아닐까. 벌떼가 분봉하듯 당세가 커지면 산태

가 나뉘는 일도 생각해 볼 수가 있었다. 구월산의 수괴는 김식을 베었다는 얼굴 검은 그자

가 아닐까. 그들은 여러 곳에 산채를 나누어 숨어 있다가 조읍포창을 결딴낼 때처럼 유사시

에는 서로 회동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세상 소문에는 길산이 문화 광대말에서 몸을

일으켜 구월산에서 혈당을 모았다는데 아무래도 그의 근거지는 구월산을 바탕으로 하지 않

고는 생각할수 없었다. 그러나 최형기는 기찰에도 걸리지 않고 백오십리 밖에 있는 서흥까

지 쳐들어간 적당들의 행동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 유유상종이라 하였으니

각처의 도적들끼리 결맹이 된 것이다." 해서의 골짜기마다 틀어박힌 도적떼가 사발통문하

여 결맹을 함직도 하였다. 그들은 장적의 동당인 활빈도를 자처할 것이다. 본산은 역시 구월

산 된목이골이다. 이른바 머리인 것이다. 머리를 베면 사지 수족은 스스로 멈출 것이 분명하

였따. 그러나 또다시 의심이 뭉게뭉게 일어났다. 아무래도 최형기의 마음은 개운치가 않았

. 그러면서도 이런 느낌은 한양에서 오랫동안 포도 종사관으로 일해온 몸에 밴 습관이러

니 싶었다. 수룡과 최형기가 가화마을로 들어서니 이미 큰 집 세채를 비워서 군사들이 짐

을 풀고 있었다. 사창 군관과 마을 이정이 헌신하였고, 최형기는 병부를 보여주고 나서 신천

으로 호랑이 사냥을 나가는 감영의 군사들인데 하룻동안 마을 사람들의 바깥 출입을 금지시

킨다고 알렸따. 그리고 이제 각 고을 수령에게 비관이 돌려질 것이나 감영에서 관찰사의 명

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관가에 알리지 말 것을 지시 하였다. 마을 어귀에는 금줄을 치고 노

란 기를 내결었으니 역병이 발생하였다는 표시라. 얼씬을 못할 것이었다. 최형기는 군사들

을 푹 쉬도록 해주었다. 가화서 무더리까지 삼십여 리요. 무더리에서 수렛고개까지가 이십

, 그리고 거기서 사선골과 탑고개까지가 삼십 리 길이었다. 그날 밤에 송화로 들어가 비관

을 사읍에 돌리고 내통자를 처치한 뒤에 다시 밤을 기다려 수렛고개 토막을 덮치고, 이어서

새벽녘부터 사선골 탑고개 된목이골에 이르는 구월산 지경을 휩쓸 것이었다. 우차를 끌고

온 황우를 잡게하여 군사를호궤시키고 따뜻한 구들목을 지고 하루 종일 늘어져 자도록 내버

려 두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꼼짝을 않다가 자시가 넘어서야 군사들을 깨워 일으켰다.

도에는 백섭이와 유수룡이 나섰고 행렬 후미에 최형기와 박완식과 유수로가 따랐다. 그들이

마을 곁을 소리없이 지나칠 때 동네 개들이 기척을 알고목청을 드높여 짖고는 하였다. 멀리

무더리 장터의 불빛이 보였고, 최형기는 행군을 멈추게 하였다. 유군 중에 한 오를 내고 최

형기는 유수룡 유수호 형제만을 데리고 몸소 앞으로 나섰다. 무더리를 장악하는 일은 이번

토포의 가장 중요한 첫째 임무였던 까닭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말을 타지 않고 걸어서 갔다.

물론 제각기 환도며 쇠도리깨며 알맞은 병장기를 가지고 있었다. 최형기는 언제나 애지중이

하는 동래의 왜단도를 도포 자락안에 차고 있었다. 무더리의 다리를 건너자, 유수룡이 장터

뒤편에 엇비슷이 솟은 낮은 비탈을 손가락질 하였다. 제법 큼직한 초가가 보였다. 추운 날씨

에다 밤이 깊으니 모두 문을 꼭꼭 닫고 잠들어 있는 모양인지 사방이 괴괴하였다. "저 접

이 맞습니다. 대추나무집이란 곳인데 구월산의 가자가 열고 있는 주막이랍니다." 유수룡이

전군관과 하군관의 귀뜀에 따라서 이미 기찰 대상을 샅샅이 살펴두었던 터였다. 무더리의

대추나무집과 우물집이 도적들의 내통자가 열고 있는 주막이며 부근에 이상한 일이 있으면

그들은 곧 수렛고개의 토막으로 연락한다는 것도 유가 형제는 알아냈던 것이다. 최형기는

손짓으로 군졸들을 언덕 위로 오르도록 일렀다. 무더리 저자의 주막과 가가들이 줄지은 초

입에 높직이 자리잡은 큼직한 초가집이 세 채가 있었는데 대추나무집은 그중 첫 번째 집이

었다. 유수룡이 맨 앞에 섰고 군졸들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삽짝의 나무빗장을 빼어내고

문을 살그머니 밀었다. 의외로 놋쇠방이 달려 있어 딸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방안에서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사내의 졸린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왔나.. 거 누구요?" 유수

룡이 마루로 후닥닥 뛰어올라갔고 군졸들 다섯은 마당에 둥글게 섰으며 최형기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방문이 밖으로 벌컥 열리면서 사내가 뛰쳐나오는데 유수룡이 칼을 뽑아 그의 목

덜미에다 갖다 댔다. "꿈쩍 마라!" "...?" 큰돌이는 얼결에 앞으로 넘어져버렸다. 그때에

건넌방의 툇마루 쪽으로 난 방문이 우당탕 열리면서 또 한사내가 뛰쳐나왔다. 그는 맞은편

에 서 있는 군졸의 배를 발길로 내지르면서 문을 향하여 뛰었고, 최형기는 옆으로 슬쩍 비

켜나가면서 한 손을 가볍게 위로 쳐들었다. 끊기는 듯한 숨소리가 들리면서 사내는 싸리 울

타리를 부여잡았다. 최형기가 쳐들었던 팔을 이번에는 아래로 내려뜨렸다. 군졸들은 사내의

희끗한 저고리가 좌우로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사내는 옆으로 털썩 넘어졌다. 최형기는 피

묻은 비수를 넘어진 자의 옷에다 닦아내고는 천천히 도포를 젖히고 꽂아넣었다. "모두 잡

아버려라." 최형기가 말하자 유수룡이 대추나무집 주인 큰돌이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마

루 아래로 밀어버렸다. 큰돌이는 개구리처럼 마당에 나가떨어졌다. 방안에서 영문을 모르던

큰돌의처가 뛰쳐나왔다. "여보..." 방안에는 아이들만 있는지 울음소리가 왁 하고 일어났

. 유수룡이 아낙네에게 말하였다. "누구시오... 왜 이러시오?" 큰돌이가 마당에 질펀히

주저앉아 그르 둘러싼 때아닌 장덩들을 올려다 보며 더듬었다.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느

?" 최형기가 그의 머리 위로 다가서더니 조용하게 되물었다. 큰돌이가 얼이 빠진 뜻 둘

러선 자들을 이리저리 돌아보아따. 모두가 행상 차림으로 간편한 옷차림에다 휜 두건이나

패랭이를 쓰고 털배자를 입은 자도 보였다. "이 집이 어떤 집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당신

들이 가져갈 물건도 없으려니와 나중에 후회하게 되리다. 어느 산에서들 내려왔소?" 큰돌

이는 앞 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잠자다 당하는 일이라, 괴한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지 못하

였다. 그는 요즈음 산야에서 작당하여 외떨어진 인가나 만만한 행객의 봇짐을 터는 근거없

는 좀도둑이려니 여겨졌던 것이다. 둘러섰던 자들이 껄걸 웃었고 최형기가 대답하였다. "

리는 구월산에 웅거하고 있는 장길산 두령의 활빈당이다." 큰돌이는 저도 모르게 울컥하였

. "어라... 이놈들이 바루 호가호위하는고나. 내가 구월산 활빈도의 소두령 되는 큰돌이란

사람이다." "바로 맞췄다." 최형기가 날렵하게 큰돌의 볼때기를 손끝으로 후려갈겼다. "

네는 두 사람을 데리구 가서 우물집을 없애게." 최형기가 유수룡에게 이르자 수룡은 밖으

로 나가기 전에 물었다. "모두... 말입니까?" "본보기니까." 최형기는 부옇게 동터오는 하

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군졸 하나에게 일렀다. "가서 조용히 들어오게 하여라." 사근다

리 밖에서 기다리는 선진을 마을로 들어오도록 하려는 것이다. 최형기가 다시 큰돌이에게

물었다. "이제는 대강 눈치를 채었느냐? 여기 서있는 사람들은 인정이란 쥐뿔도 없는 사람

들이다. 네 혀끝 하나 놀리는 데 따라서 너의 처자가 살고 죽는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으니 바로 댈 수가 있겠는냐?" 큰돌이는 제법 눈을 똑바로 뜨고, 갓 쓰고 도포 입

은 최형기를 노려보았다. 그가 아무리 재간 없고 수완 없는 재인말의 광대 였다할지라도 숱

하게 겪어서 생각은 있는지라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잘 알았다. 큰돌이가 길산이 갑송이

들과 출행을 나다니면서 호형호제할 적부터 의기와 신명은 가장 앞섰던 터였다. 그도 이제

는 중년 고개를 넘어 구월산의 녹림당의 어깨 너머로 알아온 협기가 온몸에 배어 있는 것이

아닌가. "너희들이 관군이냐?" ", 그넘 잘 맞춘다." 최형기가 다시 큰돌이의 입을 손끝

으로 후려갈겼다. 무예를 아는 자의 솜씨인지라 뺨 두 대에 벌써 큰돌이의 입 안이 터져서

입술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최형기가 물었다. "송화 관아에 산과 내통하는 자가 누군인

?" 큰돌이는 눈을 부릅뜨고 최형기를 노려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모르쇠라.. 좋다. 그러면 입찬 말은 묘 앞에나 가서 하려느냐?" 최형기가 남은 군사 둘 중

의 하나에게 물었다. "이자의 자식이 몇인가 들여다보아라." 그가 안방을 기웃하여보더니

대꾸한다. "둘에다가 갓난쟁이 하나 더 있소." "그러면 네 마디를 물으면 다 죽겠고나."

최형기가 혼잣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더욱더 조용하게 물었다. "관아의 내통자를 말해보아

." "모른다." 큰돌이는 고개를 숙인 채로 말하였고, 최형기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 갓난애를 끄집어내다가 이 자가 말을 않거든 태기를 쳐버려라. 큰돌의 처가 비명을 질

렀다. 군졸은 벌에 쏘인 듯이 울어대는 갓난애를 쳐들고 마루로 나섰고, 큰돌의 아내가 울며

사정하며 쫓아나왔다. "우리는 아무것두 모릅니다. 제발 아이를 돌려주어요. 여보 어서 말

해요." 최형기가 한 손을 쳐들고 큰돌이에게 다시 물었다. "누구냐... 이름만 대라." 큰돌

이는 눈을 감았다. 귓전에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아내의 거의 미친 듯이 사정하고 애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나으리... 살려주셔요. 제가 다 말할게요. 호방어른이 가끔 다녀갔고

그 조장교란 이가..." 최형기는 놓치지 않았다. "그 둘이 맞느냐?" 큰돌이가 희미하게 고

개를 끄덕였다. 그의 두 눈은 꾹 감겨진 채였다. 최형기는 이런 마당에는 더 볼일이 없다는

듯 삽짝 곁으로 가서 마을길을 살펴보았다. 새벽 안개 속으로 토포군이 조용히 들어오는 중

이었다. 그들은 순서있게 마을의 이곳저곳으로 오를 나누어 흩어지고 있었다. 마을은 철통같

이 봉쇄될 것이다. 토포군은 화적당이 도읍포를 도모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마을에서 한 사

람도 나가지 못하게 할것이며 들어오는 자는 무조껀 하룻동안 감금해둘 것이었다. 집뒤짐이

시작되는 모양인데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최형기는 고개를 돌려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큰돌이에게 물었다. "네가 만약 토포군의 길라잡이를 해준다면 살려주마." 그러나 큰

돌이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벌써 최형기가 다른 자를 우물집으로 보내면서 이르던 말

을 귀담아들었던 터였다. 기왕이 죽은 목숨이 아니던가. 그는 철모르던 어린 시절에 무동이

역으로 광대인 아비를 따라 나섰다가 병신이 되도록 얻어맞는 아비를 보았다. 저보다 어린

것이 양반이라 하여 아버지는 사가에 끌려가 멍석말이를 당하였던 것이다. 대개 천생 광대

는 누구나 그런 꼴을 많이 겪으며 살아왔고, 큰돌이는 언제나 재인말서 함께 자란 길산을

마음속 깊이 자랑으로 여겨 왔었다. 큰돌이는 재인말이, 그의 정다웠던 고향 마을이 관군에

의하여 폐허가 되는 꼴도 보았었다. 이미 이렇게 드러난 이상 자신이 사람의 대접을 받으며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았다. 난리가 일어나면 적보다도 평정하러 온

관군이 또한 얼마나 무서운가를 백성들은 사방에서 겪고 들었다. 큰돌이는 결정하였다. 바위

처럼 소리없이 죽으리라. "장적의 일당은 모두 역률에 해당된다. 그의 처자녀 역시 매한가

지다. 살고 싶으면 일어서라." 최형기는 말을 던져보고 나서 잠깐 기다려보더니, 드디어 고

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이들은 모두 본보기다. 알겠느냐?" "예이." 최형기의 말에 군졸

들이 환도와 쇠붕치를 치켜들었다. 최형기는 울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언덕

위로 군졸들이 내려가니 박포교가 말을 대기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말에 오르며 박

포교에게 일렀다.

"송화 관아로 가자." 그들은 토포군이 하얗게 깔린 무더리의 장터를 달려 지나갔다.

더리서 관아까지는 십 리가 조금 못되어 그들은 곧 삼문 앞에 이르렀다. 삼문 밖에 이르러

두 사람이 말에서 내리지 수직하던 사령이 쫓아나왔다. "어인 일이오?" 최형기는 바삐

서둘며 말하였다. "너희 안전께서는 기침하셨느냐?" "아직 조례도 멀었소.

등청하시려면 해가 더욱 높이 떠야 하니 어디 주막에라도 가셔서 길청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가 예방을 통하여 청알하시우." 박포도부장이 곁에서 말하였다. "우리는 감영에서 군무로

관찰사의 영을 받들어 밀행하여 오는 사람들이다." 최형기가 도포를 들치고 병부를 보이니

사령은 곧 엄숙한 얼굴로 바뀌었다. "안으로 듭시지요." 사령이 그들을 데리고 동헌을 지

나 현감의 숙소인 정당으로 올라갔다. 사령은 정당이 가까워지자 박포교 쪽을 자꾸만 돌아

보았다. "여기는 야복 입은 이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실상 현삼이 고을의 수령되는 자리

라 적절한 예의가 따르는 것이지 사실상은 부장과 같은 종육품이었다. 박포교는 귀찮은지

상을 찡그리고 말하였다. "나는 포도부장 되는 사람이고, 이분은 등산곶 만호이시다." "

아 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사령은 대번에 공손하여졌으니 만호가 종사품으로 현감보다

서품이 위인 까닭이었다. 다만 문무가 다르고 함께 고을의 수령이라 대등하게 예를 보일 따

름이었다. 사령이 정당의 미닫이 앞에 가서 읍하고 아뢰였다. "사또, 감영에서 만호 어르신

께서 오셨습니다." 곧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안에서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잠깐 기

다리시라고 여쭈어라." 현감은 의관을 갖추어 입는지 잠시 지체되었다. 그러나 최형기로서

도 아무리 이른 아침일지언정 별로이 결례가 될 바도 없었다. 원칙이 조례는 동틀 무렵에

하는 것이요. 밤 이경에야 퇴청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방문이 열리고 마루로 나오는 현

감은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었다. 그는 관복 대신에 사방관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는 마루 아래로 내려서며 권하였다. "어서 오르시지요." 최형기는 목례만 보내고는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현감과 마주 앉자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최형기가 말을 꺼냈다. "구월

산 인근에 화적이 들끓어 관민을 해치고 활빈을 빙자하여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다는 것을

동관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나라에서는 지나번 금천 조읍포의 적환으로 조정이 소연합니다.

주상께서 깊이 근심하시어 도승지 신엽 대감을 본도 관찰사로 특수하신 것이오. 본관은 이

에 비밀히 토포장으로 임명받아 등산곶 만호의 직임으로 순사또를 따라나왔소. 토포군이 이

미 송화 무더리를 점령하였은즉 동관께서는 감영의 비관을 받아 봉행하시오." 박무장이 품

안에서 송화현감에게 보내는 비관을 내어 전하자 현감은 자세를 고치고 두 손으로 받아 읽

었다. "이 늙은 몸이 송화에 나와 나라의 근심인 적당을 토멸치 못하여 이러한 불충이 없

습니다. 감히 어느 영이라고 봉행치 않으리까. 지금 곡 수교를 불러 거병하겠습니다." 최형

기가 설렁줄을 당기려고 일어나는 현감에게 손을 제지하였다. "그전에 먼저 호방과 수교를

잡아들이게 하시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솔과 가까운 친척들가지 모조리 잡아들이시오. 군기

를 지미려면 읍내의 봉쇄가 긴요하니 토포군이 무더리를 떠날 제까지 읍을 둘러싸고 한 사

람도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해주시오. 그리고..." 최형기가 손을 내밀자 박포교가 다시 눈치

를 채고 품안에서 풍천부사에게 보내는 비관을 꺼내어 최형기에게 내밀었다. 최형기가 그것

을 들고 말하였다. "송화의 군졸만 가지고는 포위성을 두르는 것이 어려울 터이니, 풍천부

의 군사를 진주하도록 해야겠소. 송화에서 급주를 내어 전화게 하시오. 이 모든 일을 동관께

서 차질이 없도록 봉행하시오." 현감이 그들을 동헌에 나가 있도록 하더니 이윽고 호수립

쓰고 철릭을 입고 위엄을 갖추고 나왔다. 이미 뒷전에서 은밀하게 영이 떨어졌는지 군노 사

령배들이 삼문 밖으로 풀려나갔다. 곧이어 수교와 호방이 잡혀 들어왔다. 그들은 제각기 어

리둥절하여 동헌을 우러르며 하소하였다. "사또, 무슨 죄가 있다고 소인을 이렇게 잡아들이

라십니까." "쇤네야 영을 어겼으면 군영에서 태형을 받겠으나 마누라에 어린것들까지 잡아

오라시니 이게 무슨 변입니까." 현감은 최형기에게서 그자들이 구월산 화적당의 내통자라

는 것을 들었으므로 위엄을 세워 한마디 던질 뿐이었다. "니놈, 네 죄를 알렷다." "사또,

억울합니다. 제가 호방으로서 장세를 횡류 하였거나 세곡에 차질이 있었습니까. 포흠진 일도

없거늘 어찌하여 사람을 이리 다루도록 하십니까?" 장교도 또한 오라로 뒷결박이 된 채로

팔에다 힘을 주면서 몸부림을 쳤다. "소인이 수교를 하는 동안에 이 고을서 적환이 있었습

니까, 아니면 민변이 있었습니까, 무슨 죄로 이리하십니까, 사또," 최형기가 조용하지만 매

섭게 한마디하였다. "시끄럽다, 너희 죄는 역률에 해당한다." 수교가 최형기의 평복을 보

자 기가 죽지 않고 말하였다. "단신은 누구요. 댁이 나를 잡아오라고 시켰수?" ", 저놈

..." 현감과 최형기가 나란히 앉은 뒷전에 서서 내려다보던 장교가 눈을 부릅떴다. 최형기

가 그를 돌아다보았다. "둘 다는 필요없다. 하나면 충분하니까." 하면서 그는 수교를 내려

다 보았다. 박포교가 뛰어내려갔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쇠몽치를 꺼내더니 우선 송화 수교

의 어깨를 내리쳤다. 어이쿠, 소리를 내지르면서 그자가 무릎을 끓었고 어깨뼈가 부러졌는지

팔이 축 늘어지며 저고리가 불쑥하니 통겨져 올라왔다. 위에서 최형기가 말하였다. "너는

누설 군기하였고, 국록을 얻어먹는 자로서 수령뿐만아니라 너를 믿는 수많은 백성들을 배신

하였다. 내가 몇마디 국문할까 하였으나 우선 본보기로 처단하다." 최형기가 고개를 끄덕이

자마자 박포교는 쇠몽치로 수교의 머리를 박살하였다. 그는 비명 한번 못 지르고 땅바닥에

꼬라박혀버렸다. 피가 마당 위에 번졌고 수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현감 이하 모든

아전과 형리 사령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최형기는 그러한 숨막힐 듯한 침묵을 깨뜨리고

말하였다. "나라에서 구월산의 화적을 토벌하랍시는 영이 내려 이제는 토포군이 진주하고

각 읍의 군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함부로 소문에 휩쓸리거나 적에게 밀통하는 자는 이런 꼴

이 될 것이다. 그의 가솔은 역률에 따라 관노비로 묶이고 모든 전장과 가옥과 재산은 몰수

한다. 구월산의 화적당이 명화율에 저촉되지 않고 역률로 다스려지는 까닭은 그들이 감히

흉황의 활빈당을 자칭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시킨 때문이다. 이미 적굴이 관군에 의하여

포위되었으나 군령을 엄수하고 군기를 누설치 않도록 명심하라." 이르고 나서 최형기가 다

시 호방에게 물었다. "이 고을에 너희들말고 다른 동류가 없느냐?" 호방은 수교가 단매에

맞아 죽는 꼴을 보고 벌써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끓어 엎드려 어깨를 계속 떨고 있었다.

", 없습니다. 은율에는 있는 줄로 아오."

"그가 누구냐?" "은율 예리와 좌수의 아우와 사령 잡배가 두엇 있습니다." "문화에는 없느

?" "문화에도 둘이 있습니다. 형리와 통인입니다." "백성들 중에는 없는가?" "그것은

쇤네도 잘 모릅니다." "구월산 된목이골에 간 적이 있은가?" "저들은 우리를 밎지 않아서

탑고개로 오게 하였습니다. 탑고개에 두 번 갔던 적이 있습니다." "돈을 받았느냐?" "가끔

포전을 말짐에 실어 사가로 보내오곤 하였습니다." 최형기는 마루에 엎드려 받아 적고 있

는 서리를 잠깐 돌아보고서 계속 말하였다. "장적을 만난 적이 있는가?" "누구 말씀이오

니까?" "길산이란 적의 수괴 말이다." 호방은 말하였다. "길산이는 송화에서 모르니 이가

없습니다." 그가 어렸을 적부터 쇤네는 여러번 보았습니다." 지금 군졸들 중에도 소싯적에

그 아이가 광대 재간 부리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살려주면 지금 이 길로 은율에 가서

밀통자를 잡아내도록 돕겠느냐?" 호방은 금방 울음이 터졌다. "아이구 어느 명이라고 거

역하겠습니까. 모조리 잡아내겠습니다. 소인은 백번 죽어도 마땅한 일이나 처자식은 아무것

도 모르오니 제발 덕분 은의를 베풀어주옵소서." 최형기가 그를 끌고 가라고 손짓하였다.

그는 문화와 은율의 내통자를 비관이 돌자마자 잡아낼 작정을 하였다. 그는 박포교와 함께

다시 무더리로 나갔다. 마을 입구의 사근다리 밑에는 큰돌이네 식구들과 우물집 주막 주인

네 식구들의 시신이 나란히 뉘어져 있었다. 장터는 병장기를 들고 지키는 토포군만 보일 뿐

깨끗하게 인적이 끊겨 있었다. 황혼녘이 되자 문화에서 급주가 당도하였고 안악과 문화에도

비관이 전해졌으며 내통자들이 잡혔다는 전갈이 왔다. 최형기는 후진의 구월산 봉괘를 명하

였다. 그러나 무더리에 들어왔던 선진은 해시 무렵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한밤중에 그들으

군복을 떨쳐 입고 대오를 지어 까막내를 따라 올라갔다. 온정을 지나니 바로 수렛고개의 턱

밑이었다. "길로 올라가서는 안됩니다. 여기서부터 오른편 등성이를 타고 올라야 합니다."

유수호가 나서며 말하였다. 송화 수렛고개를 그는 세 번이나 오르내렸던 터였다. "앞장서

." 그리고 최형기는 백섭 박완식 두 포도부장과 유슈룡과 군졸 두 오를 보냈다. 그는 수슬

상모에 구군복을 입고 손에는 팔지 조이고 발에는 두툼한 목화 신고 허리에 단검을 찼다.

그는 지금 구월산 사 읍의 모든 병력을 손에 쥔 토포사인 것이다. 그의 채찍이 한번 가리킬

적마다 마을이건 사람이건 온전할 수가 없었다. 녹림당은 물론이려니와 토포 지역의 백성들

에 대한 생사를 그의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 최형기는 말 위에 올라 앉아 입을 다물고

서 있는 토포군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유군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으니, 도망하는 자들은

그들이 추적하여 잡아 낼 것이었다. 유수호는 그들을 이끌고 산등성이를 타고 올랐다. 눈이

몹시 미끄러워서 그들은 병장기를 지팡이 삼아 짚고 올랐다. 왼쪽은 고갯실이었고 산등성이

는 위로 뻗어 올라가 내고개의 척추능선과 만나고 있었다. 내고개의 줄기가 끝나는 데서 구

월산의 본줄기가 시작되는 셈이었다. 그 후미진 뒤편에 아사봉이 있고 아사봉 아래가 구구

월이며 그 밑에 탑고개와 사선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등성이의 끝까지 올라가

서 다시 송림이 빽빽한 작은 골짜기로 내려갔다. 그들은 거의 미끄러지다시피 하면서 골짜

기로 올라가서 다시 송림이 빽빽한 작은 골짜기로 내려갔다. 그들은 거의 미끄러지다시피

하면서 골짜기로 내려갔다. 유수호가 손을 쳐들었다. 모두들 그의 주위에 모여앉았다. "

기 보이지? 저 거무스레한 것이 도적들의 토막이우. 여기서부터 조심해서 다가들어 에워싸

고 들이치면 될게야."

수룡이 물었다. "모두 몇 명이나 될까?" "다섯이우." "한 오로군."

백포교가 말하였다. "그중에 하나는 살려두게." "알았습니다." 그들은 비탈을 조심해서 기

어 내려갔다. 스무 발짝이나 될까 한 공터에 바위절벽을 뒤에 토막이 서 있었다. 아무 소리

도 들리지 않았다. 백포교가 환도를 살그머니 뽑았고 유수룡이도 환도를 빼어들었다. 수호는

철봉을 가졌고 박포교는 쇠몽치를 들었다. 군사들은 모두가 장창을 꼬나들고 있었다. 군사들

은 익숙하게 집을 둘러싸고 창을 지나침으로 곧추 겨누었다. 토막의 방문 양쪽에 수룡과 백

포교가 붙어섰으며 박포교와 수호는 군사들의 양 끝에 서있었다. 박포교가 헛기침을 해보았

. 그러나 그들은 깊이 잠들었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때가 겨울의 한 가운데라 행객도

없었으며 산에 오르는 이도 드물었던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덫이나 놓으러 다니고 송화에

내려가 놀고 오기도 하면서 한가하게 지내던 중이었다. 설마 이런 추운 겨울밤에 관군이 바

로 방문 밖에까지 기어들어왔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할 노릇이었다. 백포교가 이번에는 우

렁우렁한 목소리로 얼러댔다. "도적둘, 꿈쩍마라. 관군이 왔다." 아니나다를까 후닥닥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방문을 차면서 뛰쳐나왔다. 뛰쳐나오는 것을 맞받아서 유수룡이 성

급하게 베었다. 설맞았는지 그느 펄펄 뛰면서 땅바닥에 굴렀고, 지남침 자세로 창을 겨누고

섰던 군사들 중의 하나가 그를 찔렀다. 밖에서 당하는 소리를 듣고 구월산 패들은 처음에

는 꼼짝도 않는 눈치였다. "불을 질러버릴까?" 수호가 박포교를 돌아보며 중얼거리자 그는

말하였다. "안돼네... 불빛은 멀리서두 보이니까." 백포교가 다시 얼러댔다. "너희들은 관군

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병장기를 버리고 하나씩 나오너라." 이윽고 투덕투덕 무엇인가 마루

위에 떨어졌다. 툇마루에 올라서 있던 유수룡과 백포교가 칼이며 쇠옹치 등속을 발로 밀어

냈다. "항복이우, 베지 마오." 방안에는 중얼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도적들은 두 손을 쳐들

어 보이며 나왔다. 세 사람째 나오는 중인데 뒤편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놓치지 말

. 뒤로 달아난다." 백포교가 외치자 박포교는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을 들

어 막았다. "내게 맡겨라." 남은 사람 하나가 집 뒤의 들창을 열고 빠져나가는 참이었다.

박포교가 환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그의 역시 환도를 들어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박포교

는 사정없이 다가들어 도적의 머리를 바라고 내려쳤고, 그는 얼결에 주저 앉으며 칼을 위로

쳐들었다. 칼날이 마주쳐서 끼꺽대는 소리가 들렸다. 박포교가 그대로 칼을 위로부터 내리누

르며 발길로 도적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벌렁 나뒹굴었고

박포교는 그대로 칼을 그의 옆구리에 꽂아넣었다. 박포교는 도적의 죽음을 확인하고 나서

토막 앞으로 돌아나왔다. 이미 모두 해치워버렸고 그 중에 하나만 무릎을 끓려놓고 있었다.

군졸이 아래로 향하여 두 손을 모으고 부엉이 울음소리를 흉내내어 몇번 군호를 보냈다.

시 후에 말발굽 소리와 인기척이 들리며 토포군이 올라왔다. 군졸들은 토막 마루위에 관솔

횃불을 밝혀두었다. 최형기가 말에서 내려와 시체를 둘러보더니 생존자에게 물었다. "번의

교대가 언제냐?" 그는 거의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사흘 뒤입니다." "너희 패거리들은 지

금 모두 된목이골에 있느냐?" ", 모두 있습니다." "탑고개에는 너희 패가 내려자기 않았

느냐?" "거기 집에 있는 사람들은 수시로 오르내리니까 누가 내려갔는지 잘 모릅니다." "

사선골에두 너희 패거리가 있는가?" "그 동네 사람들은 우리 산에서 대사가 있을 적마다

울라와서 도와주곤 합니다" 최형기는 그이상 묻지 않고 박포교에게 말하였다. "토막을 그

냥 비워두어도 별일이 없겠구나. 이길로 사손골을 들이친다. 저 자에게 묻도록 하여 적군과

왕래하던 자들은 남김없이 잡아내야 한다." 토포군은 지체하지 않고 수렛고개를 넘어 조산

틀을 가로질렀다. 모을산 굽이를 돌아서 사선골이 보이는 곰너미에 이르자 별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골짜기는 꽁꽁 얼어붙었고 눈이 무릎에까지 빠졌다. 읍에서부터 이십여 리 떨어진

정곡사 계곡은 수석이 다양하고 십리장곡이라, 입구를 막아놓으면 구월산 서록 외에는 나갈

곳이 없었다. 이른바 운하동천이라 하여 정곡사 사선골 일대의 구곡경을 일컬었다. 잣나무와

상수리나무 그리고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계곡의 양편에 바늘끝처럼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곰너미에서 사선골까지가 오 일쯤 되는 거리였다. 토포군은 거기서 잠시 지체하였으며 이윽

고 동이 훤히 터오면서 북서쪽으로부터 행군하여 오는 군졸이 보였다. 말에 올라앉은 장교

가 토포군을 보자 곧바로 달려왔다. 그는 말에서 내려 토포장을 찾았다. 최형기가 답하였다.

"그래 너희는 은율의 군병이냐?" "은율 영군 수교 임원진이라 하옵니다. 군병과 향군 합하

여 삼백을 이끌고 관찰사의 밀령에 응하여 오는 길입니다." 금일 미명이 거병의 시각이었

던 것이다. 최형기는 고개 아래 늘어선 군사들과 창검 기치를 내려다보았다. ", 그러면

너희는 좌대와 우대로 나누어 좌대는 탑고개와 사선골어귀가 되는 건지산과 모을산 사이를

막고 우대는 아사봉의 북록인 갈래물 아래를 막도록 하여라." 최형기가 명을 내리자 은율

의 수교는 제안하였다. "안악과 경계 되는 버들재는 어찌됩니까?" "버들재와 배고개는 안

악의 군병이 봉쇄하도록 되어 있고 남록의 부처고개는 문화 군사가 막는다." "알아서 봉행

하오리다."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구월산 쪽에서 나오는 모든 백성들

은 일단 잡아서 한곳에 모아 두었다가 잘 심사하여 적당의 동류를 가리도록 할 터이다.

항하거나 달아나려는 자는 가차없이 죽여라. 알겠느냐?" "영대로 하오리다." 수교는 말에

올라 고개 아래로 내려갔다. 은율의 군사들은 두 패로 나뉘어 한 패는 고개 아래에서 다시

멀찍이 건지산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른 한 패는 들판을 지나 갈래물을 향하여 갔다.

그들의 행렬이 동쪽 숲속으로 사라지고 나서 최형기가 등나무 채찍을 쳐들었다. "일시에 사

선골을 휩쓸고 나서 막바로 탑고개로 넘어간다. 관군의 엄혹함을 잘 알게 해주어라." 말에

올라앉아 유군이 앞장을 섰고 보군은 뒤를 따랐다.

우너향이는 주위가 아직 컴컴할 때 깨어 일어나 있었다. 준보와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지만

원향이는 아침마다 뒤란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렸던 것이다. 원향은 샘에서 물을

떠서 두 번을 가지고는 세 번째의 물을 대접에 떠서 소반에 올려두었다. 별빛은 수저로 때

리면 딸그랑하면서 부서져 떨어질 듯 초롱초롱하였다. 원향은 두 손을 모으고 마음을 가다

듬었다. 이상하게 몸 한구석이 짜릿하더니 등덜미로 소름이 끼쳐왔다. 마치 뒤에 무엇인가

서서 막 자기를 덮어 누르는 것 같았다. "..." 원향이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깨어난 참새들이 잔솔밭에서 우짖어대고 있었다. 원향이는 심기가 어쩐

지 불안하여 좀처럼 정신을 모을 수가 없었다. 원향은 계화에게서 배운대로 예경을 올렸다

"옴바아라 도비아훔, 옴바아라 도비아훔, 옴바아라 도비아훔. 지심귀명례 현거도솔 당강용화

자씨미륵존여래불." 두 손을 모으고 일어났다가 절을 올린 원향은 이어서 다음 절을 왼다.

"지심귀명례 복연증승 수량무궁 자씨미륵존여래불." 두 절을 더 외고 원향은 물을 버리고

소반을 치웠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아침거리를 안쳤다. 뒤란에서 솔가지를 날라오려다가

원향이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원향은 발을 돋우고 뒤란 쪽의 울타리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원향이네 집은 사선골에서도 골짜기의 안쪽의 깊숙한 끝이라 왼편으로 휘어져

나간 동구가 보이자 않았다. 연기가 자욱하게 동네를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겨울 안개인가

싶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동네의 지붕들위로 불길이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말발굽 소리

가 가까워지며 한 손에는 횃불과 또 한손에는 칼을 쥔 벙거지와 더그레 차림의 군사들이 보

였따. 그들은 마을의 큰길로 질풍처럼 달려오면서 지붕 위에 횃불을 던지고 있었다. 어느결

에 기마군이 원향이네 집 앞을 달려 지나갔다. 원향이네 집의 지붕 위에도 횃불은 어김없이

날아들어 흰 연기를 내기 시작하였다. 원향이는 정신없이 마당으로 뛰어가며 소리질렀다.

"어머니... 어머니, 어서 피해요!" 문이 열리며 원향의 모 후례가 주위를 살폈다. 벌써 바깥

은 시끌쩍하였다. 후례는 준보를 껴안고 맨발로 뛰쳐나왔다. 마당은 맵싸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군사는 일단 불을 지르며 두 갈래로 갈라져서 마을을 횡단했다. 일대는 용연으로

오르는 계곡을 막아섰고, 다른 일대는 정곡사로 오르는 고개를 막았다. 그리고 보군이 한 오

씩을 짝을 지어 동구로부터 짓쳐나왔다. 그들은 집의 마당이나 마을길로 뛰쳐나온 사람들을

일단 마을의 동북쪽 좁은 골짜기를 향하여 몰아붙였다. 군사들은 끝없이 밀리는 파도처럼

일파가 밀고 나가면 다시 일파가 쓸어왔다. 군사들이 오를 지어, 타오르기 시작한 집으로 몰

려들어가서 수색하였고, 마당에서 가재를 꺼내어 나르고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았다.

떤 사람은 겁도 없이 관군의 창날을 뿌리치며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고 짐과 곡식을 꺼내

는 일을 계속하였다. 관군은 다시 방으로 뛰쳐들어가는 그 사람의 등에 창을 꽂았다. 관군은

다시 방으로 뛰쳐들어가는 그사람의 등에 창을 꽂았다. 관군은 그대로 불 속에 밀어넣었고

아낙네ㅓ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군사들은 다시 그 여자마저 찔러버리고는 불더미 속

에 넣었다. 마을은 온통 지옥과도 같았다. 외떨어진 곳에 있는 집에서는 요행히 군사들의 눈

을 피하여 울타리 뒤쪽으로 빠져나온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은 산비탈을 허겁지겁 올랐다.

사선골과 구월산이 맞닿은 놓은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던 최형기가 그쪽을 가리키자, 포수와

궁수들이 어지럽게 쏘았다. 사람들은 수숫대처럼 넘어졌다. 몇사람이 총포와 화살에 맞지 않

고 이번에는 정곡사로 가는 고개를 향하여 뛰었고, 막아서 있던 가마군 중에 하나가 마주달

려 내려오며 환도로 베어 넘겼다. 이제는 온 마을이 연기에 휩싸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

. "애그머니나... 우리 집이 타는구나." 마당으로 뛰쳐나온 후례는 지붕이 타는 꼴을 보

자 눈이 뒤집히는 모양이었다. 후례는 준보를 놓고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불을 꺼야지.

꺼야지. 세간을 꺼내야지." 후례는 대독에서 바가지 하나 가득 물을 퍼올렸다가 그대로 쏟

아버리고는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멱서리, 멱서리." 후례는 곡식이 담긴 멱서리를 찾았다.

멱서리로 둘쯤 저장된 메조는 그들의 생명이나 한가지였다. "어머니, 여기 있어요." 원향

이도 정신없이 뛰쳐들어가 곡물이 담긴 멱서리를 들고 나왔다. 벌써 불은 지붕을 활활 태우

고 천장과 대들보에 붙어 있었고 열기로 온몸이 달라올랐다. 연기 때문에 그들 세 식구는

눈물과 기침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불똥이 튀더니 어느곁에 울타리에 옮겨 붙어 탁

탁거리며 보기 좋게 불길이 오르고 있엇따. "또 하나... 또 꺼내야 한다." 벌써 문짝이 활

활 타고 있는데 후례가 정신없이 뛰어들려는 것이었다. 원향은 제 어미를 뒤에서 꼭 껴안

았다. "안돼요, 어머니, 타죽어요." "에그, 우리 무명 다 타버린다. 춘궁을 어찌 넘기려느냐,

놓아라." 그때에 관군들이 마당에 들어섰다. 오장이 외쳤다. "뭘 하느냐. 모두들 집 밖으로

나가라." 후례는 관군쯤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원향은 올른 손을 내밀어 동생 준보

를 허리 아래 껴안았다. "어서 내몰아." 관군들이 그들의 가슴을 밀어내려고 손을 대자 준

보가 냉큼 뛰어올라 손을 물어버렸다. "아야, 이손을 놔라." 사정없이 발길로 준보를 걷어

찼다. 어린 것이 어른의 발길에 걷어채었으니 그대로 성할 리가 없어서 금방 안색이 파랗

게 죽어서 늘어졌다. 후례가 마구잡이로 손을 휘저으면서 군사에게로 달려드니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자가 사정없이 창대를 내밀었다. "어머니." 원향이가 달려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후례의 아랫배에서 창날이 빠져나가는 참이었다. "끌어내라." 오장이 외치자 다

른 군졸들이 원향의 머리채와 저고리 갓을 잡아끌고 갔다. 원향의 머리는 산발이 되고 눈동

자는 격정으로 이상스럽게 번들거렸다. "준보야, 분보야..." 길에 나서자 마을 사람들이

관군에 쫓겨서 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서로 식구를 찾으며 울부짓는 소리가 사방에 가

득하였다. 원향이는 다시 몸을 돌려 집 쪽으로 다가샀다. 관군들이 창을 곧추 겨누고 마주

오고 있었다. "어머니, 준보야..." 군사들은 원향이의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속살과

가슴을 보고는 마을의 샛길 쪽으로 밀어던졌다. 군사들 셋이서 몸부림치는 원향이를 솔밭쪽

으로 질질 끌고 갔다. 적당한 장소에 이르자 그들은 원향이를 눈 위에 그대로 내던졌다.

향이는 미친 듯이 동생을 부르며 일어났고 군사 하나가 원향이의 명치깨를 호되게 내질렀

. 원향은 숨을 헉 들이마시고는 뒤로 넘어졌다. 군사들은 서로 아무 말도 주고 받지 않았

. 그들은 차례로 바지를 끌어내렸을 뿐이었다. 군사들은 허기진 듯이 원향에게 차례로 덤

벼들었다. 원향은 눈을 멍하니 뜬 채로 허공만 올려다볼 뿐이었다. 옥인형 같은 원향의 몸은

질퍽하게 녹아내린 눈 위에 내던져져 있었다. 군사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다

시 벌거벗겨진 원향의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잡아 질질 끌고 갔다. 탐스럽게 널름거리고 있

는 불 속에 던져 버려 자취를 없애려는 것이었따. 그들이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말을 탄 군

관이 지나갔다. 그는 한손에 낭창낭창한 싸릿대를 쥐고 이리저리 몰리는 마을 사람들의 등

줄기나 면상을 후려치면서 내몰고 있었다. 그가 원향이를 끌고 돌아 나오는 군졸을 보고는

말머리를 돌려 달려갔다. "이놈들, 무슨 짓이냐." 그는 회초리로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후

려갈겼다. 군사들은 별로 겁도 먹지 않고 두팔을 들어 들어 가리는 시늉을 하면서 달아났다.

마을은 그들의 완전한 먹이였다. 사냥감을 어떻게 요리하여 먹든 아무도 말릴수가 없었다.

어떤 군사는 재물 훔치기에 바빴고 어떤 자는 곡식을 져 나르기에 정신이 없었으며 혹은 반

반한 여자를 마당이나 부엌이나 돌담 아래서 거리낌없이 범하였다. 자고로 난을 평정하러

출전한 관군들은 거리낌없이 악행을 저질렀으니 토포 평정이 있을적마다, 무고한 양민이 살

해되어 한 고장이 일시에 결딴이 나버리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였다. 그래서 속있는 벼슬아

치들은 일단 거병하는 일은 백성을 괴롭게 하는 일임을 잘 알고, 치민에 있어서 가장 하책

으로 여겼던 것이다. 백섭 포도부장은 말 위에서 그 낯익은 처녀를 내려다보았다. 한눈에 그

아이가 무슨 일을 당하였는지 알아볼 수가 있었다. 치마는 갈기 갈기 찢어졌고 머리는 산발

인데 저고리의 고름은 뜯겨져서 가슴이 다 풀어 헤쳐졌다. 다리며 무릎이며가 돌과 나무에

긁힌 상처투성이였다. 백포교는 눈살을 찌푸리고 내려다보다가 말에서 천천히 내렸다. 원향

이는 뒤로 반듯이 넘어진 채 사지를 던지고 눈을 멀뚱히 뜨고 있었다. 백포교는 부근에 가

서 거적을 가져다가 처녀의 몸 위에 덮었다. 그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는 얼른 말에 올랐

. 그리고 그는 한끼니의 먹을 것을 대접받았던 고마움에 보답이 되었으리라고 자위하였다.

원향이는 거적을 뒤집어쓴 채로 아무의 눈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누군가 보았다손 치

더라도 거적 밖으로 비죽이 내밀어진 버선발과 두 손을 보고는 시체로 여겼을 것이었다.

군은 다시 한번 마을을 샅샅이 수색하고 나서 한 곳으로 몰아넣은 마을 사람들을 끌고 곰너

미 고개로 갔다. 그리고 최형기는 내쳐서 토포군을 이끌고 나한암으로 올랐던 것이다. 관군

두 오가 사선골 사람들을 은율군에 넘겨주기 위하여 뒤처졌던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한번

이라도 적굴에 갔었거나 그들과 내왕했던 사람들은 가차없이 처형하였다. 사설골에서는 오

랫동안 연기가 올랐다. 타서 주저앉아버린 지붕은 잿더미가 되었고, 타다 남은 기둥들이 뒤

늦게 넘어가기도 하였다. 마을은 파괴하였따. 어디선가 까마귀들이 날아와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솔밭 가운데서 누군가가 기어나왔다. 그것은 사선골

은 무당 계화였다. 계화는 공포에 질린 눈을 들어 사방을 살피고는 원향이가 쓰러진 돌담

아래로 뛰어갔다. 그리고 원향이를 끌어안아 올리고는 아직도 숨어서 동정만 살피고 있던

남편 김승운을 불렀다. "여보, 어시 이리 좀 나와봐요." 그러나 부엉이 박수 승운은 대답

도 못하고 솔밭 깊은 곳에 콱 처박혀 있었다. "어이구 저런 겁쟁이... 관군은 다 물러갔단

말예요."

계화는 하는 수 없이 원향이를 가까스로 일으켜서 팔을 제 목에 두르고 겨드랑이를 어깨로

바치고 일어섰다. 원향이는 뼈가 없는 사람처럼 두 다리로 버틸 힘을 잃었는지 자꾸만 흘러

내렸다. 몇걸음 걷다가 주저앉고 하면서 솔밭 가까이 가자 그제서야 김승운이 고개를 내밀

었다. "어서 와서 좀 잡아줘요. " 승운이 달려오더니 차마 원향이를 잡지 못하고 두 손을

뻗친 채로 비죽비죽 울음을 터뜨렸다. 계화도 묘하게 일그리고 울음을 씹어 삼켰다. "어서

잡으라니까..." 김승운이 원향의 허리를 잡고 팔을 자기 목덜미 뒤로 돌려 감았다. 그들 부

부는 솔밭으로 들어갔다. 한참이나 들어가서 큰 고목이 있는 바위 아래에 이르러 원향이를

내려놓았다. "내가 가서 물을 떠올게요." "나가지 말게. 관군이 되돌아올지두 몰라." "

니에요. 관군은 탑고개로 갔어요." "갑자기 온 세상이 미쳐버린 게 아닐까." "보면 모르우?

관군은 구월산의 녹림당을 토포하러 온 거예요." 김승운이 원향의 눈앞에다 손을 흔들어보

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예 청맹이 되어버린 모양이야. 이 아이는 지금 아무것두 못 보는게

."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얼이 빠진 거예요. 그전부터 이런 기색이 가끔 있었는데 이

젠 좀처럼 안 돌아올 거예요." "나는 다 봤어.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있나." "토포군이 아

니라 악귀 같았어요. 나는 안 잊어버릴 거야." "신천 오박수한테 찾아갈까." "그래요, 밤이

되면 떠납시다." 원향이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마치 모양만 있고 알맹이는 없어진 매미의

허물과도 같았다. 최형기가 이끄는 토포군의 선진은 사선골에서의 방화와 살육을 통해서 군

사 전원이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창칼은 벌써 피맛을 듬뿍 보았던 터였다. 바위넘

이를 급히 넘자마자 협로를 잇는 통나무 다리가 나왔다. 유수룡이 말하였다. "저것을 없애

버리면 탑고개는 완전히 고립되고 맙니다." "굴려버려라." 최형기가 명하자 몸집 좋은 군

졸들이 대여섯 명 달라붙어 통나무 둘을 엮은 다리를 계곡 아래로 밀어냈다. 눈보라를 하

얗게 일으키며 통나무가 굴러내렸다. 그들은 유수룡이 이끄는 대로 나한암의 벼랑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시내를 길로 삼았다. 바닥은 꽁꽁 얼어붙었고 눈은 허벅지에 차오도록 쌓여

있었다. 시냇물은 가파른 나한암 아래를 지나서 차츰 탑고개의 널따란 분지로 스며들어가

고 있었다. 여름 같으면 급류로 발 디딜 틈도 없는 곳일 터이었다. 그들은 아무의 눈에도 띄

지 않고 스며들 듯이 탑고개마을의 턱 아래로 접근하였다. 사선골에서는 어둑어둑한 새벽

이었으나 여기서는 벌써 겨울 해가 비스듬히 솟아올라 햇빛은 눈 덮인 빈터에 새하얗게 반

사되고 있었으며, 나뭇가지에서 녹아 떨어지는 눈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최형기가 등채

를 들어 가리키자 궁수와 포수들이 먼저 얼어붙은 시내를 따라서 탑고개마을의 안쪽으로

깊숙이 뛰어들어갔다. 그들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쪽의 비스듬한 언덕에 올라

달아나거나 방어 저항하는 마을 사람들을 쏘아 죽이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보군이 양

쪽으로 갈라져서 시내의 동서쪽에 늘어선 마을의 집집으로 몰려들어갈 참이었다. 말을 끌고

온 유군들은 나한암 바위넘이에서부터 일제히 휩쓸고 내려오면서 저항하는 자들을 살수의

진 속으로 몰아넣을 모양이었다. 탑고개마을 초입에 있는 장충네 집에서는 마침 두 양주가

함께 일어나서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장충은 툇마루 아래 쭈그려앉아서 굵은 장작을 안무

당이 쏘시개로 쓸 수 있도록 잘게 쪼개고 있었으며 안무당은 밥을 안치고 부엌 앞에 나와

앉아 곰방대를 빼물고 있었다. "인제 겨울이 다 갔나, 눈도 올 만큼 왔지?" 장충이 말하자

안무당은 곰방대를 입에 문 채로 중얼거렸다. "어이구, 어림없는 말씀 하지두 마슈. 꽃 피

고 새 울어도 얼음 녹으려면 한참은 걸릴 거예요." "우리 수복이 많이 컸겠네." "인제 곧

그믐인데 언제 한번 안 올려나. 이름도 짓고 치성도 올려야죠." "딸이라면서?" "김선비가

그럽디다. 아주 에미를 쏙 빼었다고 그러든데..." "이제 일간 강서방이 들르거나 김선비라도

오겠지." 곰방대를 물고 있던 안무당이 갑자기 일어섰다. "가만... 이게 무슨 소리유 ?"

충도 칼질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보았다. "무슨 소리." "얼음이 갈라지는... 자갈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것은 개천을 따라서 마을 북쪽으로 올라가는 궁수와 포수들의 발자

국 소리였다. 장충이 다시 칼질을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간밤에 꽁꽁 얼어붙었

다가 풀리는 소리 아니여." 그러나 안무당은 느낌이 안 좋은지 으쓱 진저리를 치고 나서

울타리 쪽으로 걸어갔다. 장충의 집은 나한암에서 돌아오자 첫 번째의 집이었으므로 바위넘

이가 훤하게 보였다. 안무당이 바라보니 그쪽에는 흰눈이 경사진 비탈 위에 밋밋하게 쌓여

있었다. 그때에 안무당은 푸르륵 거리는 말의 콧김 소리를 들었다. "저봐요... 뭔가 이상해

. 간밤의 꿈도 이상하고..." 안무당은 지난밤 꿈에 마을이 온통 부서진 절터로 변해버리고

하늘에는 까마귀떼가 새까맣게 떠 있던 광경을 보았던 터였다. 새벽에 잠이 깨니 어쩐지

으슬으슬하고 맥이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안무당은 아무래도 목욕재계를 하고 스스

로를 위하여 치성굿을 한판 벌여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번 이상스럽게 느껴진 사

람의 눈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일들이 의외로 또렷하게 보이는 법이라서 안무당은 바위넘

이 옆의 계곡 사이에 어지럽게 짓뭉개진 눈자취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자들이 많이 몰

려왔나..." 그렇게 혼자 중얼거려보다가 안무당은 허리를 굽히고 시내의 한 굽이를 슬쩍 돌

아 사라지는 옷자락과 털벙거지를 똑똑히 보았다. "에그머니... 관군이에요." "뭐야 ?" "

금 봤어요. 저 아래 개천 속에 관군이 떼거리로 숨었어요." "뭐가 있다고 그래..." 긴가민가

하여 두리번거리던 장충은 아내가 손가락질하는 대로 바위넘이 옆으로 보이는 어지러운 눈

자취를 보았다. 장충은 이어서 부근의 다른 곳에 있는 등성이나 빈터에 편편하고 매끄럽게

눈이 쌓인 모양을 보고는 안무당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누군가 여럿이 왔네. 엊저녁에도

아무렇지도 않았으니... 아마 조금 전이거나..." 장충은 무조건 안무당을 잡아끌고는 뒤꼍으

로 돌아갔다. 울바자를 뜯고 나가려는 중인데 일시에 북소리와 함성이 일어났다. "관군이

!" 장충은 아내의 손을 끌고 달려가 부엌으로 데려갔다. 그는 대독을 기울여 부엌 밖으

로 물을 쏟고는 아내의 겨드랑이를 잡았다. "... 왜 그러셔요." "둘이 함께 있으면 안되

. 자네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안에서 나오면 안되네." "아이구, 무슨 말씀이셔요." "

어서..." 안무당은 장충이 시키는 대로 대독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갔으며 장충은 큰 함지를

내려 위를 덥고 시래기나 마른 나물 등속을 함지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장충이 부엌에서

마당으로 나오는데 창을 치켜든 군졸 둘이 뛰쳐들어왔다. "꿈쩍 마라." 장충은 그들을 멍

하니 바라보며 서 있었다. "웬일들이시오 ?" 장충이 침착하게 묻자 다른 군사는 방문을

이리저리 열어젖히며 돌아다녔다. "아무도 없는데" "모두들 어디로 갔느냐?" 군사가 장충

에게 창끝을 들이대며 물었다. "이 집에 내자와 내가 살고 있소. 우리 두 늙은이뿐인데 마

누라는 딸 집에 가서 아직 안 들어왔소이다." "밖으로 나가라..." 군사들이 밀어내자 장충

은 순순히 마을길로 나왔다. 연이어서 군사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뒷전에 쳐졌던 군졸이

아궁이에서 불붙은 장작을 꺼내어 지붕의 여러 귀퉁이에다 불을 붙였다. 사방에서 요란한

울부짖음과 집이 타는 연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시내의 건너편에서도 여러 집에서 쫓겨나

온 사람들이 마을의 끝을 향하여 몰려올라가고 있었다. 업복이네와 변가네는 다른 집과 달

리 두 오가 달려들었다. 업복이는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나, 변가는 간밤에 내려와 곤한 잡

에 빠려 있었다. 북소리와 함성이 울릴 때, "관군이 와요." 하는 아내의 찢어지는 듯한 비

명소리에 그는 벌떡 일어났다. 바지춤을 여미고 벽에 걸어두었던 환도를 빼어들고 마루로

뛰쳐나오니 벌서 장창수 다섯이 우르르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변가는 앞장서서 들어오는 평

복 차림의 사내를 보고 흠칫 놀랐다. "주인장, 안녕하슈. 당화를 사러 왔소이다." 수룡이

한 손에 환도를 세워 들고 말하였다. 변가는 빠져나갈 곳을 이리지러 살펴보았다. 아내는

아예 자지러져서 부엌 문지방 위에 주저앉았고, 안에는 노모와 아이가 있었다. 그는 혼자서

라도 빠져나가 된목이골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변가는 오른쪽 담 밑에 있는 헛간

을 눈여겨보았다. "칼을 버려라." 유수룡이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리며 으르대었다.

가는 칼을 발 앞에 내던졌다. 쇳소리를 내면서 칼이 떨어지자 앞으로 치켜졌던 창끝이 잠

깐 거두어졌고, 변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한걸음에 내달아 마당에서 발을 구르며

나지막한 헛간의 지붕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군사들이 그를 향하여 우르르 몰릴 때 변가는

이미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잡아 죽여라." "도적이다." 유수룡과 군사들은 제각기 외치며

바깥 길로 뛰쳐나갔다. 변가는 한 눈에 마을을 휙 둘러보고는 바위넘이 쪽을 향하여 뛰었다.

그는 구월산 아사봉으로 오르는 그들만의 길을 향하여 뛰었다. 바위 사이에 뚫린 협로를

지나면 곧 월정사로 오르는 길이고 거기서부터는 온통 사방에 숨을 곳이 있었다. 그러나 변

가는 바위넘이의 중턱에도 오르지 못하고 주춤 서버렸다. 위에서부터 말 탄 군사들이 눈보

라를 하얗게 일으키며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변가는 돌아섰다. 마을 쪽에서는 유수룡과 군

사들이 뛰어왔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서쪽의 건지산 능선을 바라보며 뛰었다. 그러나 말의

거친 숨소리가 그의 등뒤에서 드려왔고, 뒤를 돌아보니 기수가 팔을 위로 뻗친 찰나였다.

가는 상반신을 굽히며 납죽 엎드렸다. 칼바람이 그의 머리 위를 가르며 지나갔다. 변가는 눈

에서 스스로 몸을 굴렸다. 위험을 벗어났는가 싶어서 무릎을 세우려는 순간, 무엇인가 후루

룩하는 바람소리가 들리며 등판에 끔찍한 타격이 가해졌다. 마치 아름드리 쇠뭉치가 둔탁하

게 그의 몸 전체를 두드린 듯한 느낌이었다. 변가는 이를 막 물었다. 그의 등뒤로부터 꽂

힌 창끝이 가슴께로 비죽이 솟아나와 있었다. 변가는 아사봉을 오려다보면서 꺼져가는 소릴

간신히 내질렀다.

"관군...이다." 변가는 앞으로 얼굴을 박고 넘어졌다. 창대가 그의 등뒤에 곧추서서 떨리고

있었다. 말에 탄 유군들이 천천히 그의 곁을 지나 마을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유수룡과 함

께 그를 추적했던 보군이 달려와 자신의 창을 뽑았다. 그는 발로 변가의 시신을 뒤척여보았

. "수급을 벱시다." 그가 손을 벌려 유수룡에게서 환도를 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

룡은 줄을 내어 변가의 목에다 맸다. "일단 끌구 가게. 토포장 어른께 보고를 해야지."

 

달아나려 하거나 조금이라도 반항하려는 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

져 있어서 군사들은 그야말로 남살을 하였다. 시신이 너저분한 곳마다 불을 지르고 몰아 처

넣고는 하였다. 사선골에서처럼 관군은 마을을 깨긋이 청소하고 나서 생존자들을 북쪽의

골짜기 끝쪽에다 모으려는 것이었다. 김기의 집에서는 관군이 들이닥치자 김기의 아내가

한 손에 식도를 치켜들고 안방 문앞에 버티고 섰다. 관군들은 서로 돌아보며 픽픽 웃어댔다.

"어찌할까, 침이나 한번 발라볼까." 마루 앞에까지 다가섰던 군사가 농지거리를 던졌다.

 

"이 녀석아, 보아하니 현부인이신데 모가지 달아나고 싶은가." "아이구, 나는 모가지 아니라

아랫도리가 잘리울까 걱정이여." 김기의 아내는 식도를 치켜들고 부르르 떨었다. 뒷전에서

김기의 노모가 다가서더니 며느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치욕을 당하면서 살겠느냐, 차라리

그 칼로 나를 찔러다우." "가만 계세요." 김기의 아내는 침착하엿다. 언제나처럼 무명옷 단

정히 입고 얹은머리 단정히 빗어 올렸고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네 이놈들, 아무리 무지

한 사령배라고 하나 위로부터 법도를 배웠을 터이다. 너희 관장 수령이며 너희 고을 양반들

은 부녀자에게 그따위 짓거리를 하라고 가르치더냐. 비록 우리가 나라를 등지고 숨어 산

다고는 하나 사족의 피붙이거늘 당장 죽을지언정 욕은 볼 수 없다. 죽이려면 단칼에 곱게

죽일 것이요, 함부로 농락하여 하지 마라." 군사들은 멈칫하여 얼굴이 굳어졌다. 오장이 뒤

에서 듣고 있다가 외쳤다. "뭘 꾸물대느냐, 사족이고 뱀의 발이고 명화율에 적당의 처자녀

는 관비로 박는다 하였다. 천한 상것들이다." "몰아내라." 군사들이 타오리는 장작개비를

들어 방문이나 지붕이나 울타리에나 집안의 이곳 저곳에 닥치는 대로 불을 당겨놓았다.

문의 창호가 타면서 김기의 조촐한 초가집은 곧바로 불길에 사였다. 그러나 두 여자는 밖으

로 뛰쳐나오기는커녕 안방으로 뛰쳐들어갔다. 군사들은 잠시 둘러서서 바라보다가 연기 때

문에 기침을 몇번 터뜨리곤 울 밖으로 물러섰다. "어머니, 이걸 둘러쓰셔요." 연기와 열기

속에서 김기의 아내가 노모의 머리 위에 이불을 들씌웠다. "아니다. 내게 가까이 오너라."

며느리가 시어미를 껴안았다. 나무와 집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새하얗게 그들의 주

위를 뒤덮었고 차츰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면서 옮겨 왔다. "봉산 백학동 여서방에, 우리 외

손주 보고 싶구나." 노모가 중얼거렸다. 김기의 아내는 때마침 남편의 없음을 다행으로 여

겼다. 그녀는 글을 읽어 나라에 벼슬을 하겠다던 남편이 녹림당의 일원이 되어버린 것을 처

음에는 절통해하고 수치스럽게 여겨왔던 터였다. 그러나 막상 탑고개에 들어와서 산사람들

과 내왕하고 마을의 괴뢰배나 월정사 사당들과 이럭저럭 지내다 보니 그만 저들의 순박하고

꾸밈없는 정에 젖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탑고개처럼 이웃과 이웃이 서로를 아끼고 아무 차

등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이 모든 세상에 걸쳐서 이룩되어야 할 것이었다. 길산이나

갑송이나 감동의 반생에 대하여도 익히 들어온 김기의 아내로서, 글을 읽은 자의 식솔로서,

떳떳하게 이 참담한 마을의 환란 속에서 죽어갈 수가 있었다. 김기의 아내는 열기로 찢어

질 듯한 아픔 때문에 이를 악물었다. 불길이 천장에 번지자 그녀는 방바닥을 더듬었다.

기의 아내는 내던졌던 식도를 찾아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노모의 얼굴을 더듬었다. 질식하

여 실신해버렸는지 노모는 축축한 이불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김기의 아내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느라고 순간적으로 저 불길 밖을 돌아다보았다. 마당에 몰

린 연기가 바람에 불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칼을 거꾸로 쥐

어 스스로 가슴에 힘껏 박았다. 김기의 아내가 노모의 몸 위에 넘어졌고 잠시 후에는 불꽃

의 일렁이는 이빨들이 그들을 삼켜버렸다. 탑고개에서 저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가 동절이라 마을에는 먼 출행에서 돌아온 괴뢰배와 걸립패들이 돌아와서 해동을 기다리

고 있었던 것이다. 맨 처음에 보군의 집뒤짐이 시작되었을 때 마을 장정들의 대부분은 공

포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관군의 남살과 방화가 자행되자 그들은 어차피 욕스럽게

목숨을 부지하거나 살해당할 것이라는 눈치를 채게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저항은 총대가

사는 집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행중에서 서로의 안전을 위하여 방비하고 습련하던 패거리답

게 곧 가족을 포기하고 울타리를 빠져나가 장정들 서넛이 몰려서 총대네 집으로 뛰어들었

. "싸우다 죽자구." "마을이 어육이 되는 판이우." "찍 소리라도 하고 갑시다." 총대인

초로의 사내는 괭이를 잡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제작기 몽둥이나 낫이나 쇠스랑 따위를

집어들고 있었다. 밑에서부터 훑어 들어오던 보군들 한 오가 그 집으로 자신만만하게 들어

왔다. 문 양편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고 헛간 뒤에 두 사람, 그리고 총대 노인은 보라는 듯

이 괭이를 들고 기다렸다. 군사들은 돌아볼 사이도 없이 마당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그들이 일단 등을 돌려대자마자 좌우전후에서 일시에 달려들어 등판이건 어깨건 닥치는 대

로 후려쳤다. 토포군으로서 처음 당하는 반격이요, 군사들은 사선골에서부터 일방적으로 온

갖 행악을 벌여왔으므로 느닷없는 공격에 창대 한번 세워보지 못하고 자빠졌다. 장정들은

그들의 병장기를 집어들고 집 뒤로 빠져나갔다. 그들은 아직 불붙지 않은 집으로 뛰어들어

가 패거리들을 끌어모았다. 어어간에 십여 명으로 불어났던 것이다. 처음에는 관군 쪽에서도

눈치를 체지 못하였다. 말에 탄 유군들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마을 앞을 지나는 얼어

붙은 시내를 따라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최형기는 그 행렬의 중간쭘에 끼여 있었다.

는 자기가 점령한 마을의 담한 꼬락서니를 아무 감정 없이 둘러보았다. 뒤처진 생존자들이

보군의 창 끝에 밀려서 마을의 안쪽으로 뛰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에 쫓긴 보군들이

사람들에게로 합세하여 길을 끊었다. 뒤에서 몰고 가던 보군들은 주춤하였고 일시에 와 하

는 함성이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 최형기가 알아보기 위해서 열을 빠져나가려고 말고

삐를 채는데 무엇인가 후두둑거리며 날아왔다. 앞 줄에 있던 유군 몇 명이 말에서 떨어졌던

것이다. 말 한 마리가 굽을 모으고 울부짖으며 곤두서는 바람에 장교 하나가 굴러 떨어지는

게 보였다. 돌멩이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보군들이 허둥지둥 쫓겨 내려왔다.

일단 흐트러지자 보군의 전열과 유군이 한 덩어리가 되어 뒤엉켜버렸다. "뭐냐, 뭣들인가

?" 최형이가 등채로 보군의 등줄기며 털벙거지를 마구 후려치며 물었다. "도적들입니다."

"어디서 병장기를 들고 일시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와 열을 갖추라." 최형기가 소리를

질렀으나 돌멩이는 점점 더 치열하게 날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남녀노소 합하여 서른

명 가까이 되었다. 그들은 가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도 보았고, 정든 집이 불더미에

휩싸이고 가재가 무참하게 타는 꼴도 보았던 것이다. 한 덩어리로 몰리게 되자마자 그들은

이것이 마지막 저항임을 알았다. 아낙네들은 길양편에 있던 집에 들어가 장독을 깨어 날랐

고 그릇을 박살내어 사금파리를 그러모았다. 그들은 돌담이나 나무를 의지하고 정신없이

던졌다. 아이들도 눈물과 그을음이 범벅이 된 얼굴에 홍조를 띠고 어른들의 앞으로 뛰쳐낙

팔매질을 하였다. 그들은 앞에 있는 무리가 사람이라기보다는 흉년의 역병이나 해충이나 사

나운 짐승으로 보였다. 보가 타질 때 그러하듯이 그들은 둑을 쌓고 흙과 돌을 나르고 물길

을 내고 하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뒤로 물려라..." 최형기가 유군에 명령을 내

렸고, 그들은 주춤거리며 마을 어귀로 퇴각하였다. 장정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나왔다 .

그러나 총대 노인은 이 자리를 잃어서는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곧 그들을 거두어들였다.

"월정사 가는 길로 오릅시다. 그쪽으로 가면 산속에 숨을 수가 있어요." "된목이골로 갑시

." "사람들을 산으로 보냅시다." 제각기 떠들었으나, 총대가 말하였다. "아닐세, 저들은

토포군이 분명하네. 산에도 벌서 관군이 휩쓸었을 거야. 관군의 토포가 시작되었다면 사방의

군병들도 일어나 구월산을 둘러쌌을 걸세." 걸립패 중의 하나가 외쳤다. "우리가 비록 고

개에서 녹림당과 함께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는 한, 우리는 양민이오. 공연히 관군의 토포

를 받을 이유가 없소이다. 우리가 화적의 동류가 아님을 밝히고 살 길을 찾읍시다." 그러

나 총대는 괭이 자루로 땅을 치면서 말하였다. "살 길은 없네. 우리가 비록 구월산 녹림당

과는 다르나 하나 나라에서는 수상한 유민으로 여겨 트집만 있으면 이 마을을 쓸어버리려고

집적거렸어. 이 중에 구월산에 한번도 오르지 않았거나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있으

면 나와보게나." 모두들 잠잠하였다. "관군은 처음부터 방화하고 살육하며 이 마을을 급습

하였네. 우리를 양민으로 여긴다면 그러지 않았을 게야." "좋소, 끝까지 싸우다가 죽읍시

." "그렇지만 아녀자들은 내보냅시다." "피아가 군사를 갈라서 싸우는 게 아니오. 저들은

코웃음을 치고 말거요." 마을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였다. 마을길은 텅 비어 있었고 불

길은 차츰 잦아들기 시작하여 연기가 더욱 뽀얗게 탑고개를 삼키고 있었다. 북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서로 돌아보며 불안하게 귀를 기울였다.

"나는 녹림당이 아니여. 관군에 맞설 이유가 없소." 몇몇 사람들이 동요하였다. "우리가

먼저 나서서 된목이골로 오르는 길을 가르쳐주겠다면, 관군이 우릴 해치지 않을지두 모르

." 처음부터 저항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던 걸립패 중의 하나가 말하였다. 그의 집에는

아직 보군이 닿지 않아서 가족들도 집도 상하거나 불타지 않고 말짱했던 터였다. 괴뢰배

중에서 덜미 놀리는 젊은이가 울부짖었다. "이 자식아, 느의 집이며 식구며가 아직 무사한

것은, 우리가 병장기 빼앗아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여. 우리는 식구가 바로 눈앞에서 죽는 꼴

을 겪었다. 어서 쫓아가서 관군의 길라잡이가 되어 동네 사람들 가슴에다 창날을 들이대어

." 그는 총대의 집에서 관군으로부터 빼앗아 들었던 장창을 겨누며 걸립패 사내를 찌리

려 하였고, 총대 되는 이가 괭이 자루로 그것을 가로 막았다. "지금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

었는데 서로 싸우면 무얼 하나. , 누구든지 관군에게로 갈사람들은 돌담 밖으로 나가게.

길을 비켜줄 테니까." 총대가 사람들을 비켜나게 했건만, 아무도 감히 움직이려 하지 않았

. 북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뒤에서 군사들이 오구 있어요." 어느 아낙네가

외쳤다. 그 북소리는 실은 마을의 북쪽으로 올라갔던 나머지 보군들과 궁수 포수들의 재전

열을 재촉하는 신호였던 셈이었다. 선진의 보군은 모두 열 오였고, 포수 궁수가 합하여 스물

다섯, 말 탄 유군이 스물다섯이었던 것이다. 저항하는 마을 사람들이 점건한 총대네 집 근

처의 돌담 안쪽은 마치 포위된 작은 성곽처럼 되어 버렸다. 북쪽 골자기로 쳐들어갔던 보

군은 세 오가 채 못 되었다. 포수 궁수들은 제일 먼저 탑고개의 얼어붙은 시내를 따라 북

쪽 등성이를 타고 올랐으니, 박포교가 지휘하고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을 수색하여 내몰아

나갔던 선두의 오들은 유수룡 수호 형제가 맡았던 것이다. 그들은 조련받은 대로 북소리가

들리자, 창을 지남침으로 겨누어 잡고서 둥그렇게 언월진을 치고 마을로 내려오다가 북소리

와 함께 멎었다. "군사들이 막고 섰어요." 어느 아이가 다시 외쳤다. 아무리 분김에 일어

섰다고는 하나 그들은 역시 스스로 방어하기 위하여 일순간에 병장기를 들었달 뿐 용병이

나 진법은 알지 못하였다. 총대가 지시하였다. "돌멩이와 사금파리를 더 모아두게." 그는

다시 장정들로 길의 양편에 가서 막아서도록 하고 나머지 노약자 아녀자들에게는 관군이 접

근하면 팔매를 날리도록 일렀다. 그러나 관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늘은 푸르게 갰고 산간

의 찬바람이 시시때때로 불어와 골짜기 속으로 눈가루를 날려 보냈다. 겨울의 멧새들은 여

전히 먹이를 찾으러 부산을 떨려 날아올랐다. 탑고개의 생존자들은 굳어진 얼굴로 흰눈 위

에 벽처럼 서 있는 관군의 엄숙한 전열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직도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

는 마을의 지붕들이 불길 속에서 하나 둘씩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연기가 냄새

에 목이 메는지 기침을 터뜨렸다. 최형기는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제법 능선 위

로 서너뼘 솟아올라 있었다. 아마도 지금쯤은 병방과 두 군관들이 지휘하는 후진이 아사봉

의 남쪽을 넘어 된목이골로 쳐들어갈 즈음이었다. 그는 백섭 포도부장에게 말하였다. "귀순

하도록 권유하여보아라." "그냥 밀어버리지요. 저것들은 실로 한줌도 안됩니다." 백포교는

빼어들고 있던 칼자루에 건성 침을 뱉어보았다. 최형기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저 순서

일 뿐이다. 어차피 저들을 모두 살려둘 수 없다." 최형기는 귀순 권유도 전투의 한 가지라

고 생각했다. 누구나 의심하고 요행을 바라고 흔들리고 매달릴 수가 있는 법이다. 이 정도쯤

이면 살아남지 않을가, 그저 이렇게 하면 용서받을지도 모른다,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

등등으로 심기가 복잡할 때 상대는 이미 두 손을 들어 투항해버린 포로보다도 더욱 다루기

가 쉬워진다. "가라 !" 최형기가 짧게 내뱉자 백포교가 말을 천천히 몰아 나아갔다. 그는

등자로 말의 옆구리를 차기 전에 이미 칼을 꽂아넣고 있었다. 돌팔매가 날아오다가 그쳤다.

전투는 한번도 해보지 못한 마을 사람들이었지만 그가 맨손이었고 그들에게 살의를 보여주

지 않았던 탓이었다. 백포교는 적당한 거리에서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우고는 외쳤다. "

우리는 왕명을 받잡아 구월산의 명화적당을 토포하러 온 감영의 토포군이다. 너희가 나라의

은의를 잠시 저버리고 도적들을 비호호가 불고지한 죄는 적당과 동률로 다스려질 죄이나,

토포장께서는 특히 사선골과 탑고개의 백성들 중에 죄질이 뚜렷한 자만을 가려내어 벌주

, 나머지는 진무하여 착한 백성으로 생업을 잇도록 하려 하시니 관군의 용병작전에 협조

하라. 심지어 돌과 병장기를 들어 대적하려 함은 하늘을 모르고 어버이를 모르는 극흉한

짓이니 즉시 항복하라. 만약 듣지 않으면 본인은 물론이요. 그 처자녀까지 모조리 도륙당할

것이다." 거기까지 계속되었을 때 누구인가 길 가운데로 뛰쳐나가며 날카로운 사금파리의

조각을 날렸다. "이크..." 백포교는 질겁을 하면서 말 잔등에 찰싹 엎드렸고 사금파리는 날

카로운 바람소리를 내면서 그의 털벙거지 위로 아슬아슬하게 날아 지나갔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말머리를 돌려서 달아났고, 뒤이어서 돌맹이들이 비 쏟아지듯 떨어졌다. "저것들은

양민이 분명 아니올시다. 필시 적당들이 끼여 있는 모양입니다." 백포교는 이마에 맺힌 땀

을 씻으면서 최형익의 곁으로 돌아왔고, 최형기는 고수에게 일렀다. "살수들에게 알려라."

북소리가 길게 삼세번씩 아홉 번 울렸다. 문득 솨아,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다섯의 궁수들이 일시에 살을 매겨 쏘았던 것이다. 화살을은 정확하게 총대네 돌담 안으

로 쏟아져 들어갔다. 마을의 뒷산 등성이에서 아래를 훤히 내려다보며 쏘는 화살이라 길과

마당에 섰던 마을 사람들이 각각 등판이나 어깻죽지를 맞고 쓰러졌다. "나무 밑이나 처마

밑으로 피하시오. 마당에 나서지 마오." 그들은 제각기 외치며 쓰러진 사람들을 부둥켜안아

다가 총대네 말나 벽 앞으로 끌고 갔다. 화살은 계속 쉭쉭 소리를 내면서 날아와 집의 이곳

저곳에 닥치는 대로 박혔다. 다시 화살이 날아오는데 이번에는 끝에 황을 바른 것인지 불

똥이 되어 박히고 있었다. 지붕과 울타리가 타오르기 시작했으며 연기와 불기에 견디지 못

한 사람들이 길 쪽으로 우르르 뛰쳐나갔다. 방포 소리가 들렸고 그들은 몸을 뒤틀며 쓰러

졌다. 탄환이 날아와 박히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자아, 나갑시다. 죽기는 매일반이오."

 

총대가 괭이를 쳐들고 외치면서 뛰어나갔고 마을 장정들도 그 뒤를 따랐다. 최형기가 등채

를 들어 흔들자 유군이 말고삐를 잡았다. 방포와 활쏘기가 그치고 말 탄 유군들은 길 좌우

로 벌려 섰다. 백포교가 환도를 뽑아 쳐들며 외쳤다. "전진..." 그들은 농기구와 병장기를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달려오는 군중들의 가운데를 향하여 말을 달려 나아갔다. 유군은 두

줄이 되어서 기수 한 사람씩 엇갈려 나아가는데 군중들과 부딪치자 사정없이 환도를 휘둘렀

. 위에서 익숙한 솜씨로 내려치는 칼날을 어찌 당하랴. 뒤이어 유군은 계속 쓰러지는 군

중들 틈을 뚫으면 밀려들었다. 최형기는 무표정하게 마상에 올라앉아 일사불란하게 벌어지

고 잇는 살육을 바라보았다. 유군 이십오 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칼 맞은 시체가 즐

비하였고, 부상당한 자들의 신음소리가 드높았다. 보군들은 창을 겨눈 채로 양쪽 길을 막아

서서 부동의 자세로 바라볼 뿐이었다. 최형기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낮빛이

완연하였다. "뭣들 하느냐, 다 끝났다. 앞으로 나아가라." 뒤처졌던 보군들이 오와 열을 맞

추어 걸어갔고, 최형기도 맨 뒤에서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보군들은 저항하던 자들을 처치

하면서 나아갔고 비교적 가벼운 자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자들은 일으켜 세워서 골짜기 끝

으로 몰아갔다. 어깻죽지에 깊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던 총대를 군졸이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잠깐... 놓아두어라." 최형기는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 마상에서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머리가 희긋희끗하고 억센 주름이 잡힌 총대 사내의 얼굴에는 그을음이

시커멓게 묻어 있었고, 어깻죽지에서 흐른 피가 흰 저고리의 오른편을 흠벅 적시고 있었다.

"네가 누구냐?" 최형기는 나직하게 물었다. 그는 고통을 참으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열기 어린 눈빛을 쏘아 보냈다. "너도 활빈당이냐?" 곁에 섰던

군졸이 그를 창대로 질러주며 말하였다. "어서 대답해라. 토포장 어른이시다." 총대는 비

틀거렸다가 두 다리에 꼿꼿이 힘주어 버티면서 중얼거렸다. "나라에서 버린 백성이다."

형기는 참을성 있게 다시 나직하게 물었다. "어찌 나라에서 버린 백성이라 자처하는가?"

"나는 꼭두각시나 놀리러 다니는 쟁인이다마는, 일찍이 내가 태어난 고장의 산과 강과 초

목을 미워한 적이 없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온 세상이 우리에게 발붙이고 살 데를 아무 곳

이든 하락하여주지 않은 것이다. 이제 구월산의 녹림의 무리를 친다는 핑계로 우리네 천한

백성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상하였으니 어찌 버림받은 백성이라 자처하지 않겠는가?"

최형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이치에 닻은 말이다. 그러나 병은 부득이하여 일으키는

일이되, 피할 방도가 있다면 반드시 피햐야 할 일이다. 지작부터 구월산 명화적당의 폐해가

날로 심해져서 저들은 방자하게도 국본을 바치는 조세 포창을 겁탈하였다. 어진 백성은 환

난을 미리 알아서 극흉한 무리들에 섞여 살지 않는다. 너희들이 은근히 나라에 반심을 먹고

저들 패거리를 비호하고 내통하며 살지 않았는가?" 최형기의 말에 총대는 더 이상 대꾸하

려 하지 않았다. "사선골과 탑고개 두 마을을 본도의 향리로서 인정치 않는다. 다른 고장을

정하여줄 터이니 네 식솔들과 더불어 양민이 되어 살아가겠는가?" 총대는 최형기에게서 먼

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이윽히 내다보았다. "이미 늦었다. 만약에 너희가 조용히 들

어와서 그런 말을 먼저 꺼냈다면 우리 동네의 노유가 모두 순응하였을 터이다." 그는 흐트

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최형기를 내다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어서 죽여라." 최형기의 마음

속에 잠간의 동요가 일어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한줌도 못 되는 감정일뿐이다. 그는 벌

써 예전에 벼랑의 저쪽으로 건너 뛰어버렸던 것이다. 최형기에게는 저쪽은 전혀 상상이

닿질 않는 전인미답의 세계였다. 최형기는 말고삐를 당기며 군졸에게 명하였다. "그자를 죽

이지 말고 끌고 가라." 그는 마상에서 길 양편에 무참한 모습으로 타고 있는 초가를 이리

저리 둘러보았다. 이 나라는 내가 선택한 사람들의 나라이다. 지금 나는 뚫어지고 금이 가기

시작한 집의 담벽을 수리하러 파견된 자가 아닌가. 더욱 견곡하게 빈틈없이 막아야 할 것이

. 그러나 최형기는 어쩐지 마음이 허전하고 참을 수 없도록 답답하였다. 정말 내가 택한

사람들은 하늘이 용납한 자들인가? 하늘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수백 년간이

나 굳건하게 수천리의 국토를 다스려왔던 것일까. 최형기는 그의 전립 꼭대기로 아득하게

뻗어나간 조정의 불가항력적인 힘과 높이를 가늠해보는 것이었다. "무도한 도적들은 반드

시 평정되어야 한다." 그는 또 하느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탑고개마을은 이제 완전히

없어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포수와 궁수들은 북편 언덕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고, 보군

두 오가 다시 불타는 마을의 골목마다 샅샅이 뒤져왔다. 탑고개마을의 생존자들은 관군의

지시에 의하여 모두 땅바닥에 모여 앉아 있었다. 유가 형제와 박포교가 관군을 돕겠다고

나선 칠 팔 명의 사내들을 최형기에게로 끌고 왔다. 최형기가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도적

의 가족을 골라내는 일과 된목이골로 오르는 지름길의 아내자였다. 관군은 업복이 변가네

가족을 따로 세우고, "장적의 가족이 있습니다." 하는 발고에 따라서 장충 노인을 군중들

틈에서 골라냈다. 장충은 곧 최형기에게로 끌려왔다. "그대가 장길산의 아비인가?" 장충

은 대답했다. "길산이는 내 자식이오." 최형기는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는 스스로 흥분을 삼키고 나서 물었다. "지금 장길산은 어디 있는가?" 역시 장충은 입을

다물고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였다. 최형기는 어조를 바꾸었다. "물론 그대의 자식이

나라에 큰 죄를 저지른 자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소문과 같이 그가 의협 남아이고 도량이

큰 인물이라면, 본도 토포사이신 순사또께서는 조정에 아뢰어 지난날의 죄를 사하게 해주시

고 나라에서 쓰도록 천거해주실 것이다. 명화율에도 스스로 동당을 모아 귀순하여 오면 그

인물을 보아서 죄를 사함은 물론이요, 가자를 내리고 등용할 수 있다 하였다. 어찌 스스로

몸을 버려 잠룡이 되어 나라에 해악을 끼치는 짓을 하겠는가. 그대가 자식을 찾아내어 설득

하고 바른 길을 일러주도록 하라." 장충은 웃을을 머금으며 태연하게 말하였다. "일찍이

길산이는 내가 낳은 자식은 아니로되, 이 손으로 직접 핏덩이를 받아내어 태를 잘라 키운

자식이라 살 한점 피 한붕울도 내 정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소. 길산이는 그대가 보기에

는 극악한 명화적이라 하나, 인근 사방의 모든 백성들은 대의를 아는 사람이라 하오. 그라

나라를 등진 것은 나라가 버린 백성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고,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이 끊임

이 없기 때문이오. 그애가 토포를 받을 지경으로 큰 도적이 된 것은 스스로 활빈도를 행

하였던 까닭이라, 그렇게 키우고자 한 아비로서 여한이 업소. 길산이가 대죄를 범한 것이 애

초부터 이 아비의 뜻이니 그 죄는 내가 받아 마땅하오. 나는 그대들 손에 떨어졌고 아비가

죽을지언정 자식을 사지로 끌어들이지 못함이 인지상정이거늘 더 이상 묻지 마오." 최형기

는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없는 것이다. 백섭 포도부장이 물었다. "어찌합니까?" , "도적의

식솔들은 모두 송화로 압송했다가 감영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하면서 그는 관군에 대항

하였던 무리를 지휘한 마을 총대 사내를 돌아다보았다. "저 자는 모두 보는 가운데 참수하

." 백포교가 지시하여 군졸들이 총대를 끌어냈다. 그는 군중들 앞에 꿇어앉혀졌다. 최형

기가 말하였다. "양민이 되어 이 고장을 떠나 살겠다는 사람들은 모두 구휼미와 무명과 돈

을 받을 것이다. 그대들은 일단 송화 관아로 가서 심문을 다시 받고 마을이나 땅을 지정받

을 것이다. 차후로는 나라의 은혜를 뼛속 깊이 알고 부지런히 생업에 힘써서 호적에 들지

않은 무리가 되지 마라. 이 자는 관군의 명에 거역하여 감히 병장기를 들고 맞섰으므로

너희가 보는 가운데 처단한다. " 좌중에서는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최형

기가 눈짓을 하자 백포교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환도를 뽑아 두 손에 쥐고 치켜들었

. 획 하는 칼바람이 일었는가 하자, 총대 사내는 앞으로 쓰러졌다. 최형기가 거느린 토포

군은 지체하지 않고 바위넘이 곁은 지나 월정사를 향하여 물밀 듯이 몰려올라갔다. 보군의

앞에는 마을에서 뽑은 길라잡이와 유가 형제와 박포교가 따랐고, 그 뒤에 포수 궁수들,

리고 유군들은 이제 말에서 내려 후미에서 걸어갔다. 토포군이 바위넘이로 사라져버린 뒤

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오라에 뒷결박이 되었다. 장추을 비롯한 변가네 업복이네 식구들과

구월산 졸개 몇의 식구들이며, 달마산에서부터 강선흥을 따라 왔던 패거리의 식구들이 모두

수물 남짓 되었는데, 그들은 따로이 뒷결박과 함께 굴비두름 엮이듯 목에 줄이 걸려졌다.

충은 목에 올가미를 쓰면서 둘러보았다. 김기의 노모와 아내가 보이질 않았다. 아마... 목숨

을 잃었을까, 차라리 그편이 깨끗했을 것이다. 그는 물독 속에 숨은 마누라 안무당을 생각

하였고, 그리고 수복이를 생각하였다. "우리 수복이.. 이담에 커서 아비나 할애비처럼 쫓기

지 말구 살아야지..." 장충은 갑자기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가슴과

명치 끝에 찢어지는 한 압박이 왔다. 그는 입을 벌리고 가쁜 숨을 토해냈다. 눈앞에 검은 천

이 펼쳐져 그를 덮어씌우는 것만 같았다. ", 수복아..." 장충 노인은 허물어지듯이 주저

앉았고 이내 모로 넘어졌다. 그의 입가에 거품이 일어 있었다. 앞뒤에 섰던 다른 이들이 엉

거주춤 서버리자 그들의 압송을 위해 남았던 보군 열명과 유군 다섯은 일제히 멈추었다.

말에 탄 유군의 장교가 말하였다. "일으켜 세워. 우리는 은율 읍내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와

야 한다." "일어나, 이놈의 늙은이." 보군이 달려와 장충의 옆구리를 내질렀으나 그의 다리

는 뻣뻣해지는 참이었다. 말 위에서 내려다보던 장교가 중얼거렸다. "허허 낭패로세. 그거

졸사가 분명하구나." 보군은 어떻게 하랴는 듯이 장교를 올려다보았다. "하는 수 없다.

신을 가져다 보여야 할 테니 줄을 풀고 말에다 실어라." 그는 유군 기패관 하나를 마라에

서 내리게 하고 축 늘어진 장충의 시신을 안장에 걸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떨어지지 않도

록 오라로 엮었다. 벽란날에서 길산을 밴 여비를 만나서 그 여자를 구해준 인연으로 자갈

목마을의 헛간에서 스스로의 이빨로 탯줄을 끊어주며 길산을 받아냈던 늙은 광대는, 그런

모습으로 마지막 정처를 떠났다. 그는 색주가 창기보다도 더욱 더럽고 천한다는 여사당에

게서 아비가 어느 거사였는지도 모른 채 길산일처럼 길바닥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장충이

어미의 시신 대신에 모가비로부터 한줌의 머리카락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 그의 시신은 식

구를 떠나 관청으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길 위에 묻히면 창부라도 되겠건만, 명화율에 걸

린 범법 대죄인의 시신으로 죽어서도 놓여나지 못할 것이다. 관군이 온 마을 사람들을 끌고

사라진 뒤에 탑고개에는 적막이 내리덮였다. 가끔씩 마른 나무가 불에 타면서 튀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꺼진 지분의 잿더미에서는 흰 연기가 끊임없이 오르고 있었다. 무심한 새떼

가 요란하게 지저귀며 겨울의 헐벗은 나뭇가지 위로 날아다녔다. 아무 자취 없던 골짜기의

눈밭에는 어지러운 발자국과 핏자국이 여기저기 번져 있었다. 안무당은 거의 혼절할 정도

로 지쳐서 타버린 집터로부터 기어나왔다. 그녀는 끔찍한 모양의 시신을 이리저리 피해가

면서 남편을 찾으러 다녔다. 충혈된 안무당의 눈에서는 소리도 힘도 없는 눈물이 스멀스멀

솟구쳐 흘러내렸다. 월정사의 원주승 옥여는 사당말 거사들의 전갈에 의하여 구구월 쪽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공양을 끝내고 묵상에 잠겨 있는데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스님... 큰일입니다. 지금 구구월에 난리가 벌어진 모양

입니다요." 사당말 모가비 임가의 목소리였다. 옥여는 미닫이를 열었다. "난리라니... 아침

부터 그게 무슨 소린가. 아침 공양은 마쳤지?" "하이고 스님, 농이 아니올시다. 지금 당장

나가서 보시라니까요." 옥여가 영문을 모르고 그를 빤히 바라보는 중인데 아득하게 바람을

가르고 들려오는 투명한 소리가 한 번 두 번 그리고는 연이어서 들려왔다. 옥여는 고개를

갸웃하였다가 물었다. "저게 무슨 소린가?" "그렇다니까요, 방포 소리입니다." "뭐라구?"

옥여는 벌떡 일어났다. "저희 마을에서는 더 잘 들립니다." 옥여가 마루에서 내려서 신발

을 꿰는데 임가가 연신 말을 이었다. "탑고개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합니다." 옥여는

임가의 앞으로 나서서 바삐 걸었다. 그는 절 마당을 지나서 문루를 나섰다. 거기서 부터는

사당말로 내려가는 가파른 비탈길이었고, 비탈을 내려가지 않고 앞으로 비죽이 솟은 바위의

끝까지 걸어가면 구구월 쪽이 훤히 내려다보였던 것이다. 임가가 이번에는 옥여의 앞을

질러가서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저 자욱한 연기를 보십시오." 구구월에서부터 건지

산 마루턱가지 서북방으로 뱀처럼 길게 뻗어 내려간 능선이 내려다 보였다. 그 중간 어름

께가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 탑고개가 분명하네." "저희들도 처음에는 산불인가 싶

었습죠마는 방포 소리에 기겁을 했습니다." "관군이로군." 옥여가 중얼거리자 임가는 믿

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녹림당까지 싸우는 게 아닌가요?" "녹림당을 토벌하러 온 관군

일세. 자네 얼른 내려가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이끌고 올라오게." 임가가 뛰쳐내려가려고

하니, 옥여는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세간 건질 생각은 말고 양식이

나 간수해 오도록 하게. 그리고 모두 나오면 자네와 거사들이 손을 써서 마을에 불을 질러

버리고 올라와." "? 내 집에다 불을 질러요 ?" 임가는 펄쩍 뛰었다. "살구 싶으면 내

가 시키는 대루 하게. 그리구 이제부터 월정사가 온전하게 남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야.

어서 가서 시행하라구." "허 아무리 그렇기로 저 살던 집에 어찌 불을 놓겠습니까?" 옥여

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밑에서는 집만 타구 있는 게 아니야. 탑고개 사람들은 거의 죽었

을 걸세." 임가는 그 말에 그제사 놀란 듯이 후닥닥 몸을 돌려서 뛰어내려갔다. 옥여는 급

히 돌아와 대중방에다 승려들을 모이게 한 뒤에 계곡을 따라서 풍열스님이 기거하는 달마암

쪽으로 올라갔다. 선방에는 풍열싐도 상좌도 보이질 않았다. 옥여는 다라마암의 비좁은 뜰

을 돌아서 등성이를 타고 올랐다. 풍열의 장삼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게 보였다.

열스님이 속세를 내다보는 유일한 다락인 너럭바위 부근에서 상좌를 데리고 서 있었다. "

스님... 보셨습니까?" 옥여가 위를 향하여 물으니 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밤내 잠자리

가 편치 않더니만, 저런 환난이 오느라구 그랬나 보다." 옥여가 너럭바위에 올랐고 풍열은

먼 들판 거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너머는 벌써 다 타버리고 남은 연기가 오르고

있다. 아마 사선골이겠지. 저쪽 탑고개는 금부터 불타기 시작했느니라." 옥여는 모을산으

로 하여 읍내의 동북방을 휘돌아 뻗어나간 산줄기의 중간에서, 안개처럼 피어올라 흩어지

고 있는 흰 연기를 보았다. "사선골두 타구 있습니까?" "그래... 관군이다. 다음엔 우리 차

례가 될 테지. 너는 어찌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느냐?" 옥여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

"환난은 우선 옆으로 피해야 합니다." "관군이 사다아말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둘 성싶으

?" "그래서 난피를 시키노라고 마을에 불을 먼저 지르고 월정사로 올라오라 하였습니

." 풍열은 허탈하게 껄걸 웃었다. ", 그러면 우리가 겪을 차례로구나." 그의 얼굴에서

일시에 웃음이 사라지면서 단호하게 말하였다. "관군이 거병하여 산중에까지 이른 것은 녹

림의 무리를 토포하기 위함이다. 전의와 살기로 가득 찬 군사들을 우리 부처님이 계시는 법

당 경내로 들어오게 할 수는 없다." "스님, 그러면 불자로서 관군과 싸웁니까?" "아니다.

우리는 예전부터 해서 승병으로 여러 차례의 외침에 맞서 싸워왔다. 온 나라와 백성들이 겪

는 환난에는 우리도 저 세속에 내려가 싸워야 할 것이나, 피비린내가 산사의 부처님께로 다

가들면 문루를 막아 지켜야 하느리라." "잘 알겠습니다." "어서 내려가자. 칠성암 수련장에

서 병장기를 꺼내어 무장을 갖추어라. 그리고 사당말 사람들이 다 올라오고 나면 문루를 굳

게 닫고 산비탈을 지키도록 하여라. 용병은 네가 잘 알아서 할 줄 믿는다마는..." "활이 유

용할 것입니다." 옥여의 말에 풍열은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풍열이 대웅전에 들더니

붉은 가사를 걸치고 앉아 목어를 때리면서 낭랑하게 염불을 시작하였다. 옥여는 모인 대중

들에게 지시하여 칠성암의 병장기를 모두 꺼내오도록 하고 나서, 창이며 봉이며 철퇴 환도

등속을 제 기량껏 나누어 갖추고, 그 위에 모두 활과 전통을 메었다. 예로부터 월정사의 승

려가 무예를 잘하기로는 원근 사방에 알려져 있었으며 호란 때에도 평안도 지경까지 나아

가 청군을 괴롭혔던 것이다. 젊고 늙은 승려들이 모두들 한가닥씩 하는 터에 월정사는 지

형이 험한 곳에 있는 요충이라 간단히 해넘길 수는 없을 거였다. 드디어 사당말에서도 연

기가 피어올랐고 그들은 간단한 보퉁이를 꾸려지고 남부여대하여 월정사로 몰려들어왔다.

모두 들어온 것이 확인되자 문루는 굳게 닫혔다. 최형기는 구구월을 벗어나 톱니 같은 구월

산의 연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아사봉 계곡으로 들어서면서 갑자기 치솟는 연기를 보고

당황하였다. 그가 손짓하자 행군이 잠시 멈추었고 백포교가 재빨리 곁으로 다가왔다. "

리 후진이 아사봉을 넘어와 공격한 것은 아닐 것이다. 후진이 적굴을 들이치려다 오히려

역습을 당한 것은 아닌가?" 최형기가 걱정하니 백포교가 답하였다. "글쎄요... 하긴 벌써

된목이골을 들이쳤을 시각입니다. 일이 잘못되면 월정사 쪽으로 퇴각하게 되어 있으나 워

낙에 조련을 많이 받고 역습 준비를 해왔는지라 빈틈이 없을 것입니다." "여하튼 어서 올

라가 된목이골 계곡의 어귀를 막아야 한다." 토포군은 월정사로 오르는 산길을 거의 뒤다

시피 하여 강행군하였다. 사당말에 이르자 움은 벌써 거의 타서 주저앉았고 집들도 불길

을 올리며 반나마 타고 있는 참이었다. 주변의 나무에 앉은 눈이 열기에 녹아 물을 흘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백포교가 지시하여 포수와 궁수들은 뒤에 남아 마을 주변을 노리게

하고, 먼저 보군들이 마을의 길로 두 오씩 나누어 뛰었다. 그리고 유군들은 최형기가 직접

인솔하여 사당말의 좌측을 돌아갔다. 혹시 복병이 있을까 하였으나 마을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온통 연기와 불길뿐, 짐승조차 보이질 않았다. 최형기는 그제서야 월정사와 깊은 관

계가 있는 사당말 사람들이 탑고개에서의 불타는 연기를 보고 미리 마을에 불을 지른 뒤에,

절 안으로 피하였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가파르고 비좁은 길이

되었다. 최형기는 매우 초조하였다. 된목이골로 넘어가는 조도(鳥道)를 한시바삐 점령해두어

야만 그쪽에서 쫓겨오는 도적들을 빠짐없이 해치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올라라."

최형기의 영이 떨어지자마자 보군들은 미끄러운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일부

러 계곡의 비탈을 깎은 곳이라서 겨우 두어 사람 비켜나갈 만큼 비좁았으며 층계처럼 되어

있어 이리저리 휘돌아가게 되어 절을 도무지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보군 뒤에 유군, 그 뒤

에 포수 궁수들이 오르는 순서였다. 아직 보군의 꼬리는 비탈을 채 오르지도 않았는데,

자기 위에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리더니 화살이 열을 지어 날아왔다. 애초부터 겨냥은

하지 않았는지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 맞은편 등성이의 눈 속에 처박히는 게 보였다. 살이

박혀 있는 곳은 마치 고슴도치의 잔등처럼 보였다. "엎드려라!" 백포교가 외치면서 두줄로

엎드린 보군들이 사이로 뛰어올라갔다. "뭐냐, 도적들이냐 ?"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

두 보이질 않습니다." 백포교는 비탈길이 휘돌아간 굽이의 끝가지 바짝 기어 올라갔는데,

거기서는 월정사의 문루가 올려다보였다. 아마도 궁수들이 다락의 난간 뒤에 숨어 있는 듯

하였다. 뒤따라서 최형기도 뛰어올라왔다. "뭔가, 어디에서 날아오는 거냐?" 백포교가 엎

드린 채로 절의 문루를 손가락질해 보였다. "보십시오, 여기서는 꼼짤할 수도 없습니다.

통 산을 돌아 넘지 않는 한 이 길밖에는 없습니다." 최형기는 잠간 기다려보다가 산등성

이로 엇비치는 햇살을 바라보곤 하였다. 오전의 햇살이 빽빽이 늘어선 노송의 가지 사이로

줄지어 비치고 있었다. 최형기는 벌떡 일어섰다. 그는 여차직하면 다시 엎드릴 셈이었으나

화살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문루 아래로 굳게 닫힌 홍문과 돌담이 보였다. 최형기는

몇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누군가가 다락의 가운데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것은 회색 장삼의

키가 크고 몸집이 떡벌어진 옥여였다. 최형기는 중의 복색을 보자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우리는 관군이다. 어째서 산간의 승려가 감히 활을 쏘며 관군에 대적하는가?" 중은 두 손

을 모아 배례하고 나서 답하였다. "우리는 과군에 대적한 적이 없소이다. 다만 사찰은 부처

님이 계신 곳이오라 싸움하는 분들을 들일 수가 없어서 짐짓 경고하였을 뿐이오." 최형기는

발을 굴렀다. "우리는 구월산의 명화적당을 토포하러 온 것이다. 어명이다. 문을 열고 관

군을 들이도록 하여라." "아무리 어명을 받잡고 나오셨어도 사찰 경내로는 들일 수가 없

소이다." 중은 여전히 정중하고 침착하게 말하였다. "만약에 우리를 막고 지체시켰다가 토

포에 차질이 오면 어명을 어긴 죄로 엄중히 다스릴 것이다." "월정사는 적굴도 아니려니

, 관군의 토포에는 길라잡이를 서는 한이 있더라도 싸움하던 군졸을 정결한 불당에 들여

서는 아니됩니다. 장수께서 부득이 군사들을 들이시려 한다면 저희들은 막을 수밖에 없겠지

. 나중에 저희를 문책하신다 할지라도, 세간에서는 도적을 토포하러 간 관군이 도적들은

다 놓치고 애꿎은 백성들과 산간의 수도승들만 토포하였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장수께서는

노하지 마시고 저희 대사님의 말씀도 잠깐 들어보시지요." 하더니 그의 곁에 붉은 가사를

두른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이 낱났다. 그도 역시 최형기를 향하여 정중하게 합장 배례하였

. "전 해서 승군의 중군이었으며, 지금은 월정사의 주승인 풍열이 문안드립니다." 최형

기도 두 손을 까지 끼어 군례로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서 감영서 나온 토포장 등산곶

만호 최형기란 사람이오." "막중한 임무로 일각이 급하시겠으나, 잠시 논의를 드릴 것이 있

으니 안으로 드시지요." 하는 노승의 말에 최형기는 불쾌한 어조로 말하였다. "대사의 말은

그러하나, 과군을 가로막고 함부로 살을 날리니 내가 어찌 걸어 들어가겠소?" 풍열스님

은 그 말에 잔잔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테면 부처님의 집을 지키는 금강역사

의 현신이라 여기시고, 차 주전자 잠시 끓일 사이만 주옵소서.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얘야,

문을 열어드려라." 최형기의 뒤를 따랏 보군들 두엇과 백포교가 일어서서 몇걸음 나서니,

 

 

 

 

다락에 섰던 몸집 큰 중의 손짓에 따라 화살이 날아왔다. 최형기가 돌아보니 그들의 발치

쯤에 화살 네 대가 나란히 박혀 있었다. 최형기는 이를 물려 중얼거렸다. "여기서 기다리

도록 하여라." 최형기가 홍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문 앞에는 동승을 거느린 주승 풍열이

마중 나와 있었다. 한눈에 훑어보니 활에다 살을 메긴 중이 십여인이요. 문 양옆에는 장창

과 환도 월도 철퇴를 든 건장한 중들이 또한 십여인이나 눈을 불릅뜨고 버티고 있었다.

최형기가 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육중한 문짝이 삐걱이며 닫히고 한아름 되어 보이느 빗장

이 걸렸다. 아까의 그 사납게 생긴 중이 앞으로 나와 정중하게 두 손을 쳐들고 말하였다. "

죄송하오나 장수께서는 환도를 잠깐 맡기십시오." 최형기가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

며 물었다. "자네의 직임이 바로 금강역사 자리인가?" "아니오, 소승은 원주를 맡고 있소

이다." "내 칼은 임금께서 친히 내리신 칼이라 내줄 수가 없네." "그렇다면 부처님의 법력

으로 잠깐 맡아두어야겠습니다." 옥여는 고지식하게 중얼거리더니 솥뚜껑 같은 손을 들어

최형기의 겨드랑이에 매달린 환도 자루를 잡았다. 최형기가 팔굽을 들어올려 옥여의 면상

을 바라고 내지르니 옥여는 손바닥 바탕으로 턱 막으면서 칼을 중간까지 뽑았다. 최형기는

그냥 내버려둔 채 두어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서 몸을 휘익 돌려서 옥여의 팔뚝을 찼다.

여는 칼을 놓치면서 성큼 뒤로 물러났고, 떨어지는 칼을 최형기가 날렵하게 잡아채어 손에

그러쥐고 옥여에게로 나섰다. 누구인가가 옥여에게 철퇴를 던졌고 옥여는 그것을 쥐고 물러

서며 중얼거렸다. "여기서는 살전을 할 수가 없소." 풍열이 조용하게 거들었다. "옥여야,

어서 거두어라. 만호 어른의 칼은 그냥 차고 계시도록 해드려라." 최형기가 풍열을 한번 돌

아다보더니 빙긋이 웃고는 칼을 휙 돌려서 자루가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내밀었다. "맡아

두게." "죄송합니다." 옥여가 두 손으로 칼을 받았다. 최형기는 풍열의 안내로 바깥 선방에

올랐고 이미 차주전자가 달각거리면서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동승

이 차를 냈다. "이렇게 지체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관군을 사찰 경내로 들일 수

없는 데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물론 구월산사 읍 인근에서는 어린아이들까지 모

두 알고 있는일이지요. 그러니 관가에서도 잘 아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저희 월정

사는 이 곳에 자리잡은 지 벌써 천여 년이 넘습니다. 도적들이 있기 가마득하게 훨씬 오래

전부터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지요. 새삼스럽게 이제 토포군이 당도하여 경내로 들어오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계속되려는 풍열의 말을 최형기가 잘라냈다. "우리가 기찰한

바에 의하면 저 아래 구구월의 사선골과 탑고개와 월정사에 도적들이 드나들고, 백성들 중

에 그들과 내통이 되어 있는 자가 많다는 것이었소." 풍열은 태연하게 껄걸 웃었다. "저희

는 누구든지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고 참회하고 기도드리는 이에게는 언제나 법당 문을 활

짝 열어주지요. 만호께서도 오신 김에 잠시 뵙고 가십시오." "지금 대사와 말재간을 다투러

온 게 아니오." 최형기가 무릎을 틀면서 단호하게 말하였고 풍열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 알겠습니다. 물론 도적들 중에 몇몇이 찾아온 적이 있소이다. 그러나 저들은 본시 제

고장에서 생업을 잃고 이리저리 쫓겨다니던 양민들이었지요. 예전 효종 연간에는 그렇게 세

상에서 숨어 빛을 못 보던 인물들이 많이 등용되어 북벌군의 장교들이 되었지요. 아시는 바

와 같이 이곳은 부처님의 자비와 법력을 널리 축생들에게도 미쳐야 할 곳이여, 하물며 저들

이 아무리 도적이라 하나 춘궁의 보시에 구휼미를 내어 공양을 드리는데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물론 노중이나 대소 저자에서 도적들로 인한 폐단이 없는 것은 아닐 테지요마는

그것은 엄연히 국록을 먹는 장졸 군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관군이 도적들

을 잡겠다면 길안내를 해드릴 수가 있다는 것이며 그대신에 불공을 드리겠다면 무운도 빌어

드리겠으나, 엉뚱하게 도적을 수색한다며 살기 띤 군사가 경내로 진입하는 것은 막겠다는

것입니다." 풍열의 잔잔한 말에는 앞뒤에 정연한 이치가 있는지라 최형기가 비집고 들어갈

빈틈이 없었다. ", 저희 식구들이라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만호께서도 짐작을 하시겠지

, 저들은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버림받은 것들이라 아무데서도 거처를 빌려주거나 받아주

지를 않습니다. 오직 부처님 발 아래서 지내는 지가 어언 수십 년이올시다. 거사패라 하는

부류가 세간 저자 객점에 떼지어 몰려다녀도 으레 그러려니 하여 민적을 따지고 하지는 않

습니다. 민적을 주려면 살 터를 나라에서 보살펴주어야겠지요." "하물며 그러한 자들이 도

적과 내통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글쎄요... 내통이 되었거나 아니거나 저들은 일 년

에 한 철만 여기서 보내고 평소에는 노약자들만 남아서 빈 귀틀집을 지킵니다. 저자에서 재

주를 팔아 호구하는 것들이 도적질을 한다면 사당말에 살 리도 없을 테지요." 최형기는 입

맛을 다셨다. "관군이 들어오기 전에 마을에 불을 지른 자가 누구요?" 풍열은 찻잔을 들

어 한모금 마시고는 최형기에게 권하였다. "차가 알맞게 식었습니다. 드십시오." 최형기가

찻잔을 드니 풍열은 이어서 말하였다. "예로부터 병이 일어나면 지혜로운 장수는 제일 먼

저 백성의 노고를 살핀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근년에는 난리만 일어나면 군

사가 지나간 곳마다 민폐가 극심하여 안팎의 두 난리를 겪게 된다지요. 소승의 암자에서 방

포 소리를 듣고 산에 올라 구구월을 보았습니다. 연기가 대단하더군요. 나라에서는 토포를

명하셨으니, 인근 촌락을 다 불태우라고는 않으셨겠지요. 그야 물론 용병하는 장수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요." 최형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풍열이 찻잔을 내려놓더니 중얼거

렸다. "일각이 급하니 어서 토포를 하셔야 될 겁니다. 길안내를 할 승려가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형기는 고요한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눈빛만 쏘는 듯한 괴이한 노

승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좋소이다. 그런데.. 사당말의 유민들이 모두 여기 있겠지요."

", 월정사에는 암자가 모두 다섯이올시다. 그 어느 골짜기에 난피하였겠지요." "그들 중에

적당과 내통된 자가 있다면 대사께서 책임을 지겠습니까?" ", 큰 죄를 내리셔도 제가 받

겠습니다. 민변의 경우에도 수모자 외에는 묻지 않고 양민으로 살게끔 도와주는 법이거늘,

하물며 명화적의 토포에 인근 양민을 괴롭히는 것은 대명률에도 없는 일이올시다." 최형기

는 처음보다는 많이 누그러졌고 무엇보다도 그는 햇빛을 올려다볼 적마다 안달이 났다. "

길안내를 서도록 해주시오." 최형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풍열이 죽비를 들어 두 번 두드

렸고, 이어서 승려 하나가 솜배자에 행전 치고 누빈 휘양을 쓴 차림으로 나타났다. "부르셨

습니까?" "관군을 된목이골 어귀까지 안내해드려라." 최형기는 그제사 생각이 났다는 듯

이 벌떡 일어났다. "멀리 안 나갑니다. 살펴가십시오." 풍열이 합장하며 말했고, 최형기도

이번에는 허리를 굽혀 공손히 대꾸하였다. "차 대접을 잘 받았소이다. 며칠 뒤에 은율 관이

에서 뵙게 되겠지요." 최형기가 밖에 나오니 역시 문루에서 활과 병장기로 잔뜩 무장한 승

군이 꼼짝도 않고 지키고 있었다. 그가 문 앞으로 다가서자 옥여가 두 손에 왜단검을 받들

고 달려왔다. "아주 명검이올시다." "원주는 무예를 아는가?" 최형기는 칼을 집어들어 옆

구리의 빈 집에 꽂아넣으면서 물었다. "무예랄 것도 못 됩니다. 큰스님께서 약간 일러주어

시늉만 낼 정도이지요." "언제 한수 배우러 오겠네." "언제든지... 그러나 불자라서 소승은

살전은 사양하겠습니다." "죽는 건 두려운 모양이군." 최형기는 소리내어 웃었고 험상궂게

생긴 옥여도 입을 주욱 찢어 보였다. 그렇게 하여 관군은 월정사에는 범접도 못하고 절 앞

의 소로를 지나 아사봉으로 오르는 조도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관군의 후미가 멀리 사

라지자 옥여는 바깥 선방으로 풍열을 찾아갔다. 그는 화가 나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옥여는 제 동무들이나 매한가지인 된목이골의 활빈당이 이제 승려의 길안내로 어육이 되어

가는 꼴을 상상만 하여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님, 어쩌자구 산식구들을 잡으러 온

놈들에게 길안내까지 붙여줍니까?" 풍열은 눈을 감고 묵주만 헤아리고 있다가 옥여를 지그

시 건너다보았다. "이제까지 꿈쩍도 않던 관군이 토포군이 되어 몰려온 것은 감영의 영이

아닐 게다. 조정에서 의논이 있지 않고는 토포장이 저렇듯 당당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저

들은 이미 구월산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고 물샐틈없는 기찰을 끝냈을 게야. 구월산은 마치

엎어놓은 항아리 속처럼 되어버렸다. 된목이골은 끝났다. 탑고개나 사선골과 같은 참극이 일

어나서야 되겠느냐? 버려서 죽을 자가 있으면 사는 자도 있게 마련이다." 선진이 한발 앞

서 탑고개를 급습할 무렵에 후진은 구월산의 남족 골짜기를 올라 투구봉을 넘었다. 인솔자

인 병방 비장은 최형기의 지시에 따라서 구얼산에 들어서기까지 대오를 나누어 접근하였다.

투구봉의 북편에 바늘끝처럼 뽀족한 기봉이 서 있으니 바로 아사봉이었다. 선진의 군사들

은 그곳에서 모두 관복을 입고 병장기를 갖추었다. 군관들과 유군들과 빙장은 문화에다 군

마를 기탁하여 보군과 함께 걸어서 행군하였다. 후진이 문화에 들어설 때 이미 거병하라는

감영 비관이 파발로 돌아서 문화 군병이 수렛고개 추산 마루턱에서 부처고개에 까지 나와

봉쇄하였다. 그 무렵에는 송화 은율 안악의 군병이 구월산 주위의 요로를 둘러쌌던 참이었

. 고갯길과 골짜기와 들판을 인근 사 읍의 군병 및 민병들이 구역을 나누어 막아섰으니

그야 말로 인성을 쌓은 셈이었다. 사방에 눈이 쌓이고 나무는 잎을 떨구고 앙상하여 멀리까

지 내다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눈밭에는 도주하는 적당들의 발자취가 뚜렷이 남을 것이었다.

투구봉과 아사봉 사이에는 박달나무 오리나무 숲이 대단한데 거기서부터 험로가 시작되었

. 계곡의 후미진 곳은 눈이 허리에까지 빠질 정도로 두껍게 쌓여 있었다. 병방은 뒷전에서

재촉하였다. "선진의 군호를 받자면 먼저 아사봉에 올라야 한다. 낙오하는 자는 군율로 처단

한다." 감영 백여 군사들은 가까스로 아사봉의 정상 아래를 돌아 서북쪽으로 넘어갔다. "

바로 저곳입니다." 향도와 앞서 나갔던 하군관이 병방에게 와서 손짓하였다. 골짜기의 오

르막이 끝나는 곳에 통나무로 얽은 귀틀집이 보엿다. 지붕은 초가요 위쪽은 훤히 내다뵈도

록 툭 터져 있었다. "모두 엎드려라." 그들은 제각기 나무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목이골의 남쪽 망루인 셈이었다. 안에는 분명히 수직하는 망보기가 있을 것이다. "우선 망

보기를 해치워야 한다. 자네가 몇사람을 데리구 가게." 병방이 전군관에게 지시하였고,

군관은 유군 중에서 기패관을 포함하여 넷을 골라냈다. 그들이 정탐한 바로는 남족에 망

루가 있고 서북쪽 월정사로 가는 조도의 어귀에도 또 망루가 있으며 동쪽에도 망루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월정사 쪽에서는 선진이 올라와 새납을 길게 세 번 부는 것으로 공격

군호를 정해두고 있었다. 이쪽에서는 된목이골을 들이치면서 동쪽 망루 아래의 안악 배고개

로 빠지는 퇴로를 차단할 셈이었다. 전군관 일행이 귀틀집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아무런 기

척이 없었다. 때가 한창 엄혹하게 추운 계절이고, 또한 인근의 정탐꾼들에게서는 관가의 미

세한 움직임까지 알려오는 터이라 망루의 정탐꾼은 아예 방심하고 잇는 것이 분명하였다.

물론 수괴들도 졸개들을 그리 단속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은 통나무 벽에 찰싹 달라붙어

서서 안의 동정을 살폈다. 전군관이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안을 넘겨다보니 번드는 졸개는

아예 초소의 바닥에 털가죽을 깔아놓고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전군관은 칼을 빼어들고

졸개의 목 아래로 칼끝을 대어 눌렀다. "... 누구..." 그가 눈을 뜨자마자 다른 곤사들이

달려들어 입을 막고 결박을 지었다. "조용해라,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목숨은 살려준다. 지금

관군이 온 구월산의 사방을 철통같이 둘러싸고 있다.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 수직하던 망

루의 졸개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의 병장기인 장창은 아예 벽에 세워져 있었다.

전군관이 아래를 향하여 손을 흔들어 보였고 골짜기에 숨었던 군사들은 조용히 망루 아래까

지 다가들었다. 병장이 망류 안으로 들어섰다. 벽 다른 쪽의 터진 곳으로 내리막길의 비좁은

골짜기가 보이고 그 아래 널찍한 분지가 내다보였다. "된목이골입니다." 전군관이 말하였

. 사방에 눈이 덮였고 눈을 이고 있는 칠팔 채의 초가가 보였다. 된목이골의 동북쪽 울퉁

불퉁한 암벽 뒤로는 벌겋게 아침놀이 번져 있었다. "바로 코밑에 온 셈이로군." 병방은 중

얼거리고 나서 사로잡힌 구월산 졸개에게 말하였다. "너는 천운을 타고 난 놈이구나. 우리

에게 협력면 전죄를 묻지 않고 상을 내릴 것이다." "...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번의

교대가 언제인가?" "아침을 먹을 때까지입니다." "지금 도적들은 몇 명이나 있는가?"

개가 잠깐 생각해보고 나서 대답하였다. "한 서른댓 됩니다." "백여 명은 넘을 것으로 아

는데 그것밖에 안되는냐?" "저두 백운산에 있다가 변두령을 따라서 옮겨왔는데 그전에 산

채가 갈려 나갔습니다." 병방은 군관들을 돌아보았다. "산채가 갈리다니... 지금 장적은 있

는냐?" "장두령 말입니까?" "그렇다." "진작에 자비령은로 옮겼습니다. 저는 변두령 수하

사람이라 여기 남았지요." 병방은 환도에 손을 대어 자루를 두르리며 탄식하였다. "장적이

없다면 이번 토포는 허사일세. 완전히 빈집을 들이치는 격이다." "장적이든 무엇이든 명화

적을 토포하는 일이지요." "두령들을 잡으면 곧 장적의 은신처를 알 수가 있겠지요." 병방

은 다시 졸개에게 물었다. "두령이 몇 명이나 되는가?" "지금은 셋밖에 없습니다." 하군

관이 물었다. "얼굴이 시커멓고 칼을 잘 쓰는 자가 있는가?" "마두령입니다. 지금 공회소

로 쓰는 저 큰 집에 오두령과 같이 기거 하고 있습니다." 졸개의 말을 듣고 전군관이 말하

였다. "그자가 키크고 창을 잘 쓰는 놈인가?" "맞습니다." 하군관과 전군관은 일찍이 수

회천에서 김식이 줄을 때 구사일생하였던 터라 그 두사람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할 수가 있

었다. "그러면 두령은 둘뿐인가?" "변두령은 며칠전에 탑고개로 내려갔고 업복이라구 달

마산서 소두령하던 이가 있습지요. 칼을 제법 씁니다." 병방이 군관에게 물었다. "자네들

은 멀리서도 그 마가 오가 두 놈을 알아보겠나?" "아다뿐입니까. 우리는 아마 평생 잊어버

리지 않을 거요." "두령들은 토포장의 명에 따라 사로잡는다. 나머지는 항복하는 자외에는

모두 처치해도 좋다." 후진의 군사들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기다렸다. 아래쪽에서 연기가 오

르기 시작하고 초가에서 사람이 나타나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자 병방은 차츰 초조해졌다.

 

"후진의 공격이 왜 이리 늦춰지느가. 이러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당하겠는걸." "염려 놓은십

시오. 여하간 식전가지는 아무도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을 겁니다." 전군관이 말하였다.

"올라온들 별수 있습니까. 대번에 달려들어 소리없이 베어버리지요." 군사들은 행군할 적에

는 몰랐으나 눈 쌓인 골짜기에 가만히 엎드려 있자니 마치 살이 찢어져나갈 듯이 추워져서

차차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쨌거나 어서 싸움이 일어나는 게 얼어 죽는 것을 면하는 방책일

듯 싶었다. 그때에 날라리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들립니다. 선진이 왔습니다.!" ", 내려

가자." 새납 소리는 연이어 두 번에 끊어서 이어졌다. 병방이 손짓하자 골짜기에 웅크리고

있던 군사들이 원기가 나는지 일시에 몰려왔다. 포수 열 명과 궁수 열다섯이 기패관 두 사

람의 인솔로 나섰고, 그 뒤에 보군 오십 여명이 하군관의 지휘를 받고 있었으며 유군 스물

다섯으로 전군관이 선봉이었다. 그들은 질서있게 된목이골을 향하여 내려갔다. "퇴로는 어

찌합니까?" 살진에는 활로는 터주고 뒤를 시살해 들어가는 법이라 전군관이 물었고 병방이

답하였다. "월정사 쪽은 열어준다." 포수가 앞서고 그 뒤로 궁수가 따랐다. 모두들 탄자

술과 궁술이 감영 군사 중에 좋은 점수를 얻은 군졸들이고 또한 그간에 조련을 통하여 방포

속하하는 재간도 익히고 있었다. "유군은 동루를 점령해라." 병방의 말이 떠렁지기가 무섭

게 전군관이 환도를 빼어들고 담병접전에 능한 군사들을 이끌고 된목이골의 동쪽을 향하여

뛰었다. 동쪽에도 역시 귀틀집의 망루가 있엇으니 퇴로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 너는

어서 가서 관군이 왔다고 알려라." 병방이 사로잡혔던 졸개의 등을 밀어내니 그는 어리둥

절한 모양이었다. "셋을 헤일 때까지 뛰쳐나가지 않으면 벤다." 병방이 환도를 뽑아들자

그제사 정신이 들었는지 그는 분지 아래로 미친 듯이 뛰어내려갔다. 마감동은 잠에서 깨어

나 아직 이부자리 속에 있었다. 한겨울이라 산채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가금씩 산 아래

에서 올라오는 세상 소식이나 전해 들으며 가끔 사냥이나 나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초

에 자비령 식구들이 탑고개에 다니러 오면 그때에나 사냥도 나가고 술도 마시며 회포를 풀

작정이었다. 간방에 땐 군불로 방안은 절절 끓었고 마감동은 머리맡에 놓인 자리끼의 식은

숭늉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디선가 야릇한 호족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문득 이상한 생각

이 들어 그릇을 내려놓는데 연이어 들려 왔다. "군호가 아닐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

. 그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한편으로는 바지를 꿰면서 미닫이를 열었다. "만석이...

구 있나?" 그가 마루 건넌방에 대고 물으니 오만석이도 마침 옷을 꿰고 일어나는 참이였

. "날리리 소리 아닌가?" 마감동이 물으니 만석도 불안하게 되받았다. "나도 방금 들었

. 이런 산속에서 갑자기 날라리 소리라니 뭔가 이상허우." "나가보자." 마감동은 재빨리

환도를 찾아 들었고 오만석이도 자기 병장기인 일장 오척의 장창을 집어들었다. 그들이 마

루에서 내려와 신을 꿰는 데 돌연 온 산이 울리면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관군이다. 관군

이 왔다!" 그들은 잠시 멈칫하였다. 산채의 초가에서 방마다 들어앉았던 구월산 식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저쪽입니다." "관군이다." 졸개들이 떠들며 손짓하는 곳을 바라보니

동쪽 망루를 향하여 달려가는 한떼의 군사들이 보였다. "잡아라" 오만석이가 졸개들을 이

끌고 곧장 눈밭을 뛰기 시작하였다. 마감동은 순간적으로 된목이골이 완전히 포위되었을 것

이라고 느꼈다.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적당한 활로를 찾아 퇴각하는 길이 가장 피를 적게

흘리는 길일 것이라 믿었다. 그는 뛰쳐나가는 만석이를 만류하려 하였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졸개들은 모두 병장기를 갖추고 나왔다. "관군이 둘러쌌다!" 아까부터 고함을 지르며 뛰어

오는 자가 보였다. 그것은 남쪽 망루를 지키던 자가 분명했다. 업복이가 졸개들은 데리고 마

주 달려갔다. "업복이, 돌아와" 마감동이 이렀으나, "골짜기를 막아야 합니다. 두령은 어

서 퇴로를 찾으시우." 외치면서 그는 뛰쳐나갔다. 총 놓는 소리가 온 산을 울렸다. 엎드려

있다가 일어난 포수들이 제각기 화승에 불을 달아 방포하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오만석

이와 함께 동루로 달려가던 자들이 짚단처럼 맥없이 넘어갔다. 그리고 업복이들 쪽에서도

서넛이 쓰러졌고 뒤어어 바람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들었다. "산채로 돌아와라."

마감동이 외쳤고, 와 하는 함성이 들리더니 갑자기 검은 더그레와 털벙거지 차림의 군사들

이 기지 창검을 번쩍이며 나타났다. 그들은 두 줄로 열을 짓더니 창을 곧추어 세우고 달려

내려왔다. 업복이는 부상당한 자나 시체도 거두지 못하고서 쫓겨 내려오는데 화살이 그들은

등뒤에서 비 오듯 하였다. 십여 명이 쫓아 올라갔다가 성해서 뛰어 돌아온 것은 서넛이었

. 오만석이는 역시 십여명을 이끌고 동루를 향하여 달렸으나 첫 번 방포에 대여섯 명이

쓰러지고 보니 싸울자가 없어진 셈이었다. 동루를 대번에 점령한 관군들은 제각기 환도며

철토등속을 가지고 막강하게 대오를 정비하여 아래로 곧장 달려 내려왔다. "돌아와." 뒤에

서 마감동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만석이는 장창을 일단 꼬나들고는 뒤로 물러

설 수가 없었다. 관군 쪽에서는 한 오만 남아서 망루를 지키고, 이십 명의 유군이 살진을 짜

서 넓게 간격을 벌리고 그들을 둘러쌌다. 만석이가 장창을 휘돌리기도 전에 그는 뒤를 찻잔

당하고 말았다. 이는 감영 군사중에서도 단병접전의 조련을 따로 받은 자들이라 병장기를

다루는 솜씨가 제법 예리하고 민첩하였다. 유군은 장신에 환도를 잘쓰는 전군관이 지휘하였

으니 그는 먼저 전방 오를 뒤로 물러나게 하면서 살진을 벌려 쫓아 올라오는 구월산 패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중앙 오가 그들의 가운데를 가르고 나아가면 좌우오가 양쪽을 싸고

나아가며 좌우 오가 양쪽을 싸고 나아가니 몸이 성한 네 사람만이 살진 안에 둘러싸였다.

전방 오가 압축해 나오면서 좌우 오는 일시에 엇갈리면서 시살해 들어갔다. 오만석은 창대

를 영모착서세로 낮게 쥐어 그들의 살진을 흐트러뜨렸다. 오만석은 창대를 군사들의 허벅지

아ㄹ쯤에 겨누어 이리저리 찌르면서 나아갔으나 동료군사들에게는 멀어졌고, 살진은 그를

널찍이 쓰러뜨리기는 충분하였다. 아무리 용맹한 구월산 녹림패라고는 하나 일정 기간 정연

한 군률에 의하여 습진 조련을 받은 관군을 대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들은

허를 찔렸고, 무엇보다도 중과부적이었으며 병법을 찾을 겨를이 없었다. 오만석은 마감동이

돌아오라고 외치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었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 해 동안 구월산에서 한솥

의 밥을 먹으며 살아온 정다운 부하들이 목전에서 쓰러지는 양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오만석은 창의 중간을 잡아 편신중란에서 선인봉반까지의 봉술 동작과 함께 적수에서 십면

매고까지의 창술 동작을 취하면서 국화 무늬로 동작선을 그리며 찌르고 쳤다. 그러나 관군

은 오만석이 공격해 들어가면 물처럼 갈라졌다가는 그의 츠면이나 배후에서 합쳐졌다. 가끔

씩 만석의 창날이 나 봉가운데 군사의 칼이며 철퇴 따위가 가볍게 부딪칠 따름이었다.

루쪽에서느 관군의 공격이 더욱 일사불란해졌다. 마감동이 퇴각하여 쫓겨내여온 업복이와

식구들을 산채 앞마다에서 맞아들이는데 오십 명의 보군들은 일단 비탈의 중간에서 멈추었

. 그 뒤로부터 포수들이 달려나와 전열에 서더니 한 무릎을 끓고 일제히 방포하였다. 우왕

좌왕 하던 졸개들이 또 여러명 쓰러졌고, 마감동은 숨가쁘게 외쳤다. "집 뒤로숨어라."

캐한 화약 연기가 뽀얗게 일어났고, 관군은 숨돌릴틈을 주지 않았다. 이어서 궁수가 달려나

와 활을 메겨서 세 번 연거푸 쏘았다. 그들은 이제 열 사람 남짓이었다. 마감동은 화살에 맞

은 업복이를 끌고 집뒤로 돌아갔다. "오두령... 어디 갔나..." 감동이 문득 동루쪽을 바라보

니 만석이는 완전히 몰이꾼에 몰린 야수처럼 이리저리 돌면서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

, 달아나우. 뒤는 애가 맡겠수." "그래 우리는 이제 틀렸다. 한 사람이라도 많이 살아 나

가야 한다." 마감동은 젖은 눈으로 업복이의 팔에 박히 화살을 비틀어 뽑았다. 업복이가 악

문 이빨 사이로 비명을 내질렀다. "만석이, 돌아와라!" 마감동이 외쳤으나 때가 이미 늦었

. 살진은 오만석을 죄어들었고 대오 중에서 벌써 무엇인가를 꺼내어 머리 위로 빙빙 돌리

고 있었으니, 납편이 달린 오랏줄을 던지려는 것이었다. 납덩이들이 서로 엇갈리면서 오만

석의 사지를 향하여 날아왔다. 그이 창대와 한쪽 다리에 줄이 걸렸다. "어라..." 오만석은

당황하며 창을 당기고 한쪽 다리를 뿌리쳤다. 창에 감긴 줄은 늦춰졌고 다리에 감긴 줄은

오히려 팽팽히 당겨졌다. 그는 균형을 잃으면서 뒤로 몸을 기우뚱하였다. 납덩이가 날아와

그이 뒷덜미로부터 목 앞으로 뱅글 돌아서 매달렸다. 숨이 콱 막혔다. 그는 어김없이 뒤로

넘어졌다.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지막이다 싶어다. 왁 하는 기압소리가 들리더니 칼 부

딪는 수리가 들렸고 목의 압박이 대번에 풀어졌다. 마감동이 살진을 뚫고 뛰어들어 오라를

끊었던 것이다. 감동은 만석의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뛰자, 살아야지."

 

감동이 먼저 날랜 솜씨로 군사 둘을 단칼에 베면서 뛰쳐나갔고 오만석을 고함을 지르면서

청룡헌조세로 살진을 벌리며 나아갔다. 감동의 칼에 둘이나 쓰러졌고 만석의 휘돌리는 창날

에 가까이 대들던 자들이 자상을 입으니 한 오가 무너졌던 것이다. 마감동과 오만석은 동류

에서 산채의 뒤편으로 엇비스듬하게 뛰었다. "월정사로 물러나라." 마감동이 업복이에게

외치며 뛰자니 유군들이 된목이골 북편의 구월산성으로 통하는 암벽을 막으려는 듯 일렬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열린 곳은 단 하나 월정사 계곡으로 내려가는 조도 뿐인데

어쩐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관군은 남루와 동루의 문화 안악군계로 가는 골짜기를 먼저

막았고 이제는 장연계로 빠지는 구구월의 북쪽 능선도 막으려는 것이다. 그 능선 아래가 구

월산성의 옛터였고 남은 것은 은율계인 탑고개로 빠지는 월정사의 골짜기뿐인데 관군은 그

쪽으로 퇴로를 터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함정이다..." 마감동은 다급하게 오만석에게 말하

였다. "저 바위 봉우리를 넘어가면 산다. 나를 따라와." 마감동이 이번에는 곧바로 북쪽의

암봉을 바라고 뛰었으며 오만석도 나란히 뛰었다. "저놈들을 놓치지 마라." 유군을 이끌고

산채의 뒤편을 우회하던 전군관이 외치자 십여명은 산채로 덮쳐 들어가고 나머지는 곧장 북

편으로 뛰었다. 보군 오십 명이 창검을 곧추세우고 물밀 듯이 밀려들자 된목이골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되었고, 업복이와 남은 패거리들은 그대로 월정사로 내려가는 조도를 바라보고

뛰었다. "궁수와 포수는 저 두놈을 잡아라." 병방도 이제는 그들이 두령인 줄 아는지라 발

을 구르며 외쳤다. 바위 봉우리의 바탈은 엎드려 기어야 할 정도로 경사가 급하였다. 산을

기어오르는 데는 워낙 산사람인 마감동과 오만석을 아무도 당할 수가 없었다. 관군은 촉급

하던 추적은 차츰 뒤떨어지고 있었다. 그때에 총성이 요란하게 일어났다. 마감동보다 위쪽에

서 기어오르던 오만석이가 주춤하더니 맥없이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왔다. 감도이 얼른 어깨

로 받치고 치켜올리며 부르짖었다. "뭐야, 왜그래." "맞았수." 숨을 헐떡이며 엎어진 만석

을 일으키며 감동은 숨을 몰아쉬었다. "길마재로 빠져서 봉황산 능선을 타면 산다. 여길 넘

어야 한다. 힘을 내라." 만석을 일으키자 그는 비틀거리며 감동의 팔을 움켜잡았다. 만석의

등 오른편 죽지 부근에 피가 번져 있었다. 그의 검은 솜배자위가 손바닥만하게 피로 젖어

있는게 보였다. 벌써 오만석이 놓쳐버린 창대가 바위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고 관군은 함성

을 지르며 새까맣게 쫓아 올라왔다. 병방은 맨 뒤에서 몇번이나 눈에 미끄러지며 군사를 독

려하였다. "도적의 수괴다. 이번 토포의 성패가 걸렸으니 꼭 사로잡으라." 마감동은 아래

를 내려다보고 나서 주변에 이리저리 걸리고 박힌 큰돌들을 집어던지기 시작하였다. 바윗돌

은 던져서 바로 맞추지 못한다하여도 다른 바위에 부닺쳐 튀고 구르며 내려가게 마련이라

한두 사람이 상하는 게 아니었다. 워낙 무더기로 몰려서 오르던 군사들이 돌에 맞아 외마디

소리 내지르며 구리기도 하고 가파른 곳에서 줄줄이 미끄러져 버리기도 하였다. 여러명이

심하게 다치자 추격을 곧 주춤해졌다. 마감동은 오만석을 겨드랑이에 끼고 계속해서 위로

올랐다. 눈앞에 바위 사이의 비좁은 통로가 보였고 된목이골 식구들이 매둥지넘이라 부르는

마루턱에 가까워졌다. 총소리가 콩 튀듯이 들려왔다. 감동은 만석을 껴안고 통로 안에뛰어들

며 납죽 엎드렸다. 탄환이 암벽에 맞아 튀는 소리가 귀전에 맴돌았다. 총포는 한번 쏘고 나

면 많이 지체 되어 각이 뜨게 되고 까짓 활이야 밑에서 위로 쏘아서는 잘 맞추지 못한다는

것을 감동은 잘 알고 있었다. 관군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가슴이 터지는 듯하여 차

가운 얼음 위에 볼을 대고 숨을 가라앉혔다. 오만석이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중얼거렸

. "성님, 나는 틀렸수. 어서 혼자 빠져나가시우." "아니가. 군계만 넘어가면 어디 숨어

있을 인가가 나올게다. 탄자만 빼버리면 열흘쯤 고약 붙여 나을 상처다." "가슴속에 불이

난 것 같소. 숨을 못쉬겠어." 하면서 만석이는 약하게 기침을 하였고 이어서 입술위로 피가

흘러 내렸다. 감동이 보기에 연환이 폐부에 박힌 모양이었다. 요행이 빠져나간다 할지라도

그를 구할 길은 없는 셈이었다. ", 가자." 마감동은 다시 만석을 추스려 그의 팔을 둘러

목에 감고 허리를 껴안아 일으켰다. 두 사람은 간신히 매둥지넘이에 올라섰다. 올라서자마자

저 아래로 눈부시게 흰 구구월과 그 갈래의 봉황산 능선이 도도히 구부러져 흘러가는 게 보

였다. 눈을 덮어쓴 소나무 잣나무의 물결이며 멀리 장연계로 나가는 들판이 내다보였다.

마디로 그 도정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들은 어깨 동무를 하고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오만석

이 스르르 주저앉더니 바위 위에 넘어졌다. 마감동이 그를 다시 일으키려고 두 손을 내밀려

허리를 굽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감동은 일순 동작을 멈추었다. 오만석이 희미하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잘 알지 않우. 나는 못 가. 어서 뛰시우." "오두령..." "

다 잡히구 말거유. 자비령까지 가면 길산이 성님이랑 식구들게 말이나 전해주슈." 마감동은

그렁그렁한 눈을 돌려 그를 외면하고서 다시 한번 눈 덮인 산천을 내다보았다. 그는 제 털

가죽 배자를 벗었다.그리고는 만석의 머리 밑에 고여주었다. 이제까지 풀잎처럼 잔기가 가녀

리게 보이던 오만석이 어더서 그런 기운이 생겼는지 마감동의 멱살을 와락 틀어쥐었다.

"성님... 그 칼로 내 급소를 한번만 찔러주고 가슈." 감동은 번들거리는 만석의 눈빛을 감당

치 못하여 얼결에 눈을 내리 깔았고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감동은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타일렀다. "그래, 이 손 놔다우. 한발 물러나야지." 오만석이 감동의 멱살을 탁

풀어주었고 그는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잘 가거라." 마강동은 시르릉 쇳소리가 나도록

한번에 칼을 뽑았다. 그는 칼을 거꾸로 쥐고 오만석의 명치를 노려보았다. 감동은 만석이 얼

마 남지 않을 것을 그의 눈에서 총기가 걷혀가는 모습으로 알았다. 그는 아우의 피를 차마

자신의 칼날에 한방울도 묻힐 수가 없었다. "치워..." 오만석이 기침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만석은 픽 웃었고 감도은 힘없이 칼을 내려뜨렸다. 만석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하였다.

 

"어서 멀리 달아니..." 마감동은 눈물을 닦지도 않고 몇발 뒷걸음치다가 돌아서서 아래를

향하여 뛰었다. 어어서 만석의 포효하는 듯한 부르짓음이 귓전으로 생생하게 들려왔다. "

!" 고함소리에 온 산이 찌렁찌렁 울리는 듯하였다. 감동은 환도를 쥐고 몇번이나 눈 속에

나뒹굴면서 산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는 곧 숲 안으로 들어섰고 마루턱은 나무에 가

려서 보이지 않았다. 전군관을 선두로 두 사람의 뒤를 쫓았던 유군 십여 명은 숨을 헐떡이

며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그들은 대번에 바위에 털배자를 베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오만석과

그 앞에 어지럽게 흐트러진 눈 자취를 발견하였다. "이 자는 총 맞은 놈이다." 전군관이

한 손에 환도를 쥐고 다가섰다. "네가 구월산 화적당의 괴수냐?" 전군관의 물음에 오만석

은 아까보다 더욱 기침을 심하게 터뜨리더니 중얼거렸다. "그렇다. 어서 내 목을 베어 공이

나 세워라." 전군관은 그가 장창을 다루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서 끊임없

이 흘러나온 피가 눈 위에 흥건히 번져가고 있었다. 군관은 도적이 곧 죽을 것임을 알았다.

그는 무릎을 굽혀 만석의 머리맡에 앉았다. "장적은 어디에 있느냐?" 만석은 빙긋 웃었을

뿐이었다. "달아난 자가 된목이골의 두령인가?" 오만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의 이름

?" "한양 사람... ... 감동이다. 경서를 읽은 사람이지." 만석이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군관이 다시 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평안 진군의...장교...안주 사람 오만석이다."

만석이 다시 기침을 하는데 핏덩이가 울컥 쏟아지더니 눈의 초점이 가셨다. 바람이 무심하

게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날렸다. 전군관은 일어섰다. "시체를 아래로 운반해라. 끌지

는 말고 어깨에 메어라." 병방은 전군관에게 유군 다섯과 포수 다섯을 따르게 하여 계속해

서 눈 위에 남은 마감동의 발자취를 추적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나머지 몇 명과 함께 먼

저 뒤를 치며 내려간 군사들을 쫓아가 월정사 계곡으로 가는 조도에 들어섰다. 조도의 오른

편은 북봉의 암벽이 가파르게 서 있고 눈과 얼음이 틈틈이 박혀 매우 위험하였다. 조심조심

널찍한 산길로 들어서는데 아래쪽에서 방포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선진입니다." 포수

하나가 말하였다. "놈들은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겠구나." 그들이 더욱 아래로 내려가니

모든 것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관군은 계곡의 사방에 쓰러진 자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큰 바

위에 우뚝 올라서서 뒤처리하는 군사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최형기의 구군복이 선명하였다.

병방 비장은 뛰어내려가 군례를 드렸다. "만호, 다끝났습니다." "두령들은 잡았는가?" 최형

기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병방이 우물쭈물 답하였다. "장적은 여기 없답니다." "알고 있

. 마감동이와 오만석이란 자를 잡았느냔 말이다." "오만석은 총포에 맞아 죽고... 마감동

이는 도망하여 전군관이 지금 뒤를 쫓고 있습니다." "그를 꼭 사로잡아야 한다. 장적의 굴

혈을 찾을수 있을 것이다." 하고 나서 그가 등채를 쳐들어 흔드니 곧 부장포교 백섭이 달려

올라 왔다. "부상자가 셋이고 넷은 죽었습니다. 네 명은 주저앉아 항복하여 사로 잡았습니

." "산채와 이곳의 뒤처리는 후진에게 맡긴다. 선진은 곧 이동할 준비를 하라." "알겠습

니다" 최형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선진의 군사들은 대열을 갖추었고 유가형제 백포교 박

포교 등이 앞에 섰다. 최형기가 병부 주머니에서 구월산 지세도를 꺼내어 바위 위에 펼쳤다.

그리고는 병방에게 물었다. "기찰조에게서 받은 된목이골의 약도를 가지구 있겠지?" 병방

이 품에서 얼른 꺼내어 펼쳤다. 최형기가 물었다. "도적이 달아난 곳이 어느 쪽인가?" "

여기, 이 북봉을 넘었습니다." 최형기가 구월산 지세도에서 아사봉의 북쪽에 있는 산줄기를

짚었다. "이곳이로군. 탑고개와 버들재가 좌우에 있고 이 산줄기는 바로 장연 봉황산으로

뻗어나가는 능선이다. 건지산 봉수에서 모을산 까지의 어귀는 은율 군병의 좌대가 막고 있

, 우대는 탑고개와 봉황산 줄기사이의 갈래물 아래를 지키고 있다. 그가 빠져나갈길은 단

하나... 여기다." 그곳은 장연 군계와 안악 군계가 은율 군계와 맞닿은 곳이었다. 양쪽으로

산줄기 사이에 개천을 낀 협곡이 대동강변의 갯볼에까지 이어져 있었다. "여기가 어딘가?"

최형기가 물으니 박포교가 사로잡힌 구월산 졸개 하나를 끌어 왔다. 버들재에서부터 안악서

장연으로 통하는 큰 길이 나오게 되어 있었고, 그 십리 쯤 안쪽에 협곡의 첫 번째 마을이

있었다. 끌려온 졸개가 말하였다. "큰샘이란 동네가 있습죠." 최형기는 만약 자기가 도망

한다면 틀림없이 큰샘이라는 은촌에서 한숨을 돌릴 것 같았다. 만일에 후일의 보상을 약속

하고 숨겨주는 자가 있다면 이삼 일 묵는 것은 촌지에서 손쉬운 일이 아닌가. 길어봤자 사

흘 밤낮이면 인성을 친 사군의 군병과 민병들도 포위망을 풀고 물러가거나 해이하여질 것이

. 더구나 요즘 같은 추위라면 밤새 요로를 지킨다는 것은 아무리 군율이 엄중하여도 어려

울 것이었다. 아니, 사흘이 아니라 하루 저녁 잠시 은신하였다가, 한밤중에 시오 리 길인 장

연읍으로 스며들어 봉노의 장사치들틈에 끼이면 모래알에서 좁쌀 줍기나 마찬가지다. 최형

기는 마감동과 자기의 내기는 오늘에서 좁쌀 줍기나 마찬가지다. 최형기는 마감동과 자기의

내기는 오늘 해가 떠 있는 동안에 결판이 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어두워지기 전까지 그

의 종적을 잡지 못한다면 이번 토포는 완전히 실패였다. 그는 초조했고 자신의 운이 별로

밝지 않음을 느꼈다. 우선 장적이 없고 보니 빈집을 들이치며 법석을 떨어댄 꼴이 되어버렸

. 사실 나라에서는 세간에 낭자한 해서 활빈도의 명자나 다름없는 장모의 수급을 원하고

있었다. 장길산이라는 자가 실제로 있기는 한 것인가. 최형기는 문득 구월산에서 저쪽 월당

강 건너편 자비령에 가 있다는 또 다른 장실산 패거리들에 생각이 돌려졌고 그곳에도 그는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서흥을 먼저 앞질러서 들이쳤던 흉적들이란, 바로 그들이었다는

것을 최형기는 사로잡은 도적들을 심문하여 알고 있었다. 구월산의 삼십여명 되는 일당을

잡기 위해서 온 해서르 북새통으로 만들었으니, 이제 또 어떻게 하여 자비령 일대를 뒤질

것인가. 이미 활빈도의 토포가 시작된 것을 천하가 다 알고 있어서 산간의 작은 무리를 이

룬 좀도적들도 든든한 방비를 해두었을 터였다. 최형기는 순간 엄청난 느낌이 들었다. 온 세

상이 그들의 패거리를 은근히 돕고 편들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형기는 무력감 때문에 견

딜 수가 없었다. "꼭 잡아야 한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구월산의 연봉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만약에 마감동이가 잡히면 그를 이용하여 장길산의 소재지를 알아내고,

엽의 발치를 떠나더라도 재물과 인력을 써서 끝내 장적을 잡아내리라고 작정하였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둘러보았다. 박포교가 물었다. "행군할까요?" 최형기는 등채로 사로잡힌

졸개의 턱을 치켜올렸다. "고향이 어디냐?" ", 해주계 백운산 아랫녘이올시다." "가족이

있느냐?" "노모와 처자가 저 아래 사선골에서 살구 있습니다." 졸개는 사선골과 탑고개가

어찌되었는지 알 리가 없었다. "식솔을 생각해서라도 살 궁피를 하라. 네 관군을 돕겠다면

양민으로 처리해줄 터이다. 어찌하려느냐?" 졸개가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애걸하였다. "살려만 주신다면 백골이 먼지가 되도록 장군을 받들어 모시리다. 어찌 하명 받

잡지 않겠습니까." 최형기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물었다. "여기서 큰샘까지 제일 가까운 지

름길이나 없느냐?" "두군데가 있습니다. 하나는 산성으로 내려오는 골짜기요. 다른 하나는

바로 갈래물 못미처서 있는 고개입니다." 최형기가 포교들과 유가 형제를 둘러 보았다.

 

"모두 들었겠지?" 그는 다시 병방에게 일렀다. "된목이골과 월정사, 그리고 탑고개와 사선

골에 수직을 세워두고 토포가 완료될 때까지 경계한다. 자네가 투항한 적당이며 부상한 자

들과 시신 수습을 빈틈없이 하여 인원을 맞추어두라. 나중에 점고할 것이다." "잘 알아 봉

행하오리다." 후진을 남겨놓고 선진의 백여 군사들은 급히 산성으로 넘어가는 능선을 타고

올랐다. 월정사와 된목이골 사이의 계곡에 누인 시체 중에는 업복이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사로잡힌 자들 가운데도 없었다. 부상자들 속에도 역시 없었다. 병방은 나중에 된목이골로

그들을 몰고 가서 여러 가지로 묻고 따지고 점고한 뒤에야 업복이라는 소두령의 행방이 희

미하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가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으며 조도를 함께 내려갔고 관군

의 급습을 받기 전까지 계곡의 초입에 있었다는 얘기였다. 점심때가 지나서야 월정사 아래

계곡의 재수색이 있었으나 그의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업복이는 마감동의 고함소리를 듣고

조도를 타고 내려갔다. 그는 가운데쯤에서 서 있었다. 그들이 아래로부터 완전히 노출되었을

적에 총포가 터졌으며 뒤에서는 유군들이 계속 추격하였다. 첫 총성이 울릴 때 업복이는 이

곳이 바로 함정임을 깨달았따. 그는 여기서 어정거리다가는 몰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문득 계곡 아래편을 내려다보았고 두 번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궁둥이를 아래로 하여 미끄

러졌다. 그는 몇번 부딪치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하절기에는 깊고 빠른 여울이 되는 좁은

물길이었다. 다행히 눈이 계속 쌓여서 돌 틈바구니에 심한 충격을 받지 않고 나뒹굴었던 것

이다. 그는 잠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어나려고 상체를 일으키고 다리를 버둥거렸으

나 오른쪽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누군가가 곁에 털썩 떨어졌다. 총에 맞은 식구였다. 돌아다

볼틈도 없었다. 계곡의 틈틈이 매복하여 있던 관군들이 이리저리 수색을 사직하고 있었다.

그느 무조건 눈을 헤치며 기었다. 화살에 맞은 왼팔은 팔굽을 굽히거나 펼 수가 없어서 그

저 어깨에 달렸을 따름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관군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왔다. , 틀렸다...

하면서 그는 돌아누워 관군의 칼을 보면서라도 받겠다고 몸을 뒤집었다. 업복이는 비좁은

시내의 한쪽 끝에서 몸을 버둥거렸다. 팔이 저쪽으로 쑥 빠져나가는데 이상스레 허공이었다.

바라보니 눈속에 깊이 박혔다. 업복이는 혹시나 하여 팔을 휘저었다. 역시 공동이었다. 바위

틈바귀가 씻기고 밀리면서 아늑한 구덩이를 만들어 처마밑처럼 된 곳이었다. 물이 범람하면

안쪽 끝까지 차오를 것이다. 업복이는 눈을 헤치고 안쪽으로 기어들어 다시 눈을 밀어붙였

. 깊숙한 안쪽에는 제법 보송보송하게 마른 왕모래가 깔려 있었다. 그는 위를 바라고 반듯

이 누웠다. 관군들이 부상자와 생존자를 잡아내는 동안 그는 부상당한 팔을 묶었다. 구월산

패들 중에서 업복이 단 한사람 만이 무사했던 것이다. 마감동의 도망로를 차단하려는 선진

의 행군은 민첩하게 계속되었다. 최형기도 부하 장졸들과 더불어 얼음 덮인 바위를 기어오

르고 눈비탈에 미끄러지며 계속 뛰었다. 군사들은 모두 뛰다가 걷다가 하였다. 새벽부터의

행군이라 지칠 대로 지쳤으나, 구월산이 완전히 소탕되었고 가는 곳마다 불지르고 살해하여

군사들의 전의와 살기가 날카롭게 곤두 서 있었다. 구월산성은 주위가 삼십리에 높이 열다

섯 척으로 구월산 상봉인 사왕봉을 북한으로 하여 은율읍 동쪽 시오리 지접에까지 이르렀

. 원래 호란이 있던 정묘 연간에 증축하였으나 차츰 해이해져서, 성채가 많이 퇴락하였다.

별자이 있었고 수성군졸과 지방 모군을 두어 지키도록 하였으나, 수성장을 겸임한 은율현감

들도 갈려 오고 갈 적마다 별반 관심을 두지 않게 되어 역을 진 민병 두 오가 번갈아 지키

게 했었다. 그 뒤로 역을 진 민병들마저 무명 대납으로 때우게 되어 완전히 돌보는 이가 없

게 되었던 터였다. 사방에 문이 있으나 동서 양문에만 문루가 있었고 북에는 작은 석문이

있고 남문은 폐쇄되었다. 관군 선진은 동문이 있는 바위 벼랑 아래를 지나 북문 쪽으로 계

속 나아갔다. 방향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지만 최형기는 혹시 몰라서 동문으로 가는 산협에

두 오의 군사를 해질녁까지 매복하게 하였따. 그리고는 산성의 부쪽 성줄을 돌아서, 서쪽으

로는 길마재가 보이고 북으로 봉황산 줄기가 보이는 골짜기와 북문 부근에 포수와 유군을

포함하여 삼십여 명을 매복시키고 박포교를 지휘자로 떨구었다. 여하튼 계속 북으로 나아가

지 않는다면 새어나갈 요로마다 봉쇄한 셈이었다. 암벽과 산비탈이 가파른 급경사를 몇번이

나 기어오르고 달려내리며 넘고 나니 어느덧 해의 꼴로 보아 오후가 되어 있었다. 겨울에는

노루꼬리인데 더욱이 북녘 산협의 해는 더욱 짧은지라 벌써 계곡에는 짙은 음영이 드릳워져

있었다. 다행이라면 눈이 쌓여 박명이 길것이라는 점뿐이었다. 안내를 서던 구월산 졸개가

침엽수림 너머로 드넓게 펼쳐진 동북쪽과 서북쪽을 번갈아 가리켰다. "저쪽이 갈래물이고

이쪽이 큰샘으로 가는 방향입니다." 최형기가 지세를 살피며 물었다. "아까부터 보이던 저

능선이 봉황산 줄기인가?" ", 바로 우리와 함계 왔습죠. 요 밑에서 계곡이 합쳐집니다."

", 거길 막는단 말이렷다?" "역사가 있을 적마다 부역나온 백성들이 서로 미루고 관리들

도 군계를 다툰다는 곳이지요. 안악 장연 은율 군계가 나뉘는 곳입니다. 그래서 시내도 갈래

물이라고 합니다." 최형기는 다시 그곳에서 사십 명의 군사를 내어 좌우를 나누고 갈래물

길목과 봉황산 능선의 북방로를 끊었다. 물론 각 대에 포수와 궁수를 배치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포수 세 사람과 백포교와 유수룡과 유군 십오 명뿐이었다. 최형기는 그들을 데리고 봉

황산 능선을 타넘어 큰샘골로 내려갔다. 그들은 마을 백성들이 미리 보게 될까 하여 산협의

서쪽 가녘으로 바짝 붙어서 눈밭을 뛰었다. 그들은 마을 초입에서 촌민 한 사람을 잡은 다

음에 그를 앞세우고 조용히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열두어 채의 귀틀

집마다 철저한 수색이 시작되었다. 한겨울이라 마을 사람들은 거의 가 집안에 있었다. 관군

은 노유를 가리지 않고 그들 모두를 북쪽 동구로 끌고 갔으며 집두어 채를 비워 수용하도록

하였다. 그중에서 젊은 장정들 칠팔명을 가려내어 마을의 서북쪽으로 오르는 비탈길을 막

도록 하였으니 마감동에게 스스로 마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하려는 것이었다. 쫓기는 자

가 나타나면 고함을 지르며 막아서라고 일러두었던 것이었다. 최형기는 큰샘의 이정격이 되

는 중년 사내를 불러다가 메조를 군량으로 징발하도록 명하였다. 토포군은 아침부터 끼니르

거르고 전대에 차고 있던 볶은 곡식과 눈을 뭉쳐서 넘기고 허기를 달랬던 터였다. 최형기는

포수 세 사람을 측근에 데리고 큰샘의 남서쪽 동구에 있는 외떨어진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

었다. 백포교와 유수룡은 유군들을 둘씩 짝지어 마을의 비워진 집에 적당한 간격을 두어 배

치하였다. 해는 차츰 봉황산 줄기의 허리를향하여 처지고 있었다. 마감동은 뻑뻑한 송림 사

이를 뛰었다. 어디를 보아도 흰 눈, 눈뿐이었다. 그는 골짜기로 내려갔다가는 붙잡히고 만다

는 것을 잘 알았다. 능선에서는 겨우 무릎에 오는 눈이 골짜기로 내려가면 허리에까지 차오

를게 뻔했다. 뒤쫓는 자들은 마치 백포와 같이 펼쳐진 눈 위에 찍힌 어지러운 자취로 금방

따라잡을 것이다. 감동은 정신없이 미끄러지고 다시 일어나 뛰면서, 그의 귓전에서 아지 

아득하게 들려오는 듯한 오만석의 고함소리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길산이 성님이며 갑송

이 대근이 성님들과 어울려서 노가를 제거하고 구월산 산채를 잡을 적에 끝까지 저항하였던

오만석의 고지식함도 되새겨졌고, 그와 더불어 해서 각처에서 행하였던 활빈행의 신명나던

일들도 지나치는 소나무 가지들과 더불어 흘러갔다. 감동에게 만석은 참으로 아우와 같은

동반자였다. 또는 그의 그림자요 등과도 같았다. 감동은 숨이 차서라기보다는 형언할 수 없

는 슬픔으로 명치끝이 찢기는 것 같았다. "살아야 한다. 잡히지 말아야 한다." 혼자 중얼

거리는 목소리 가운데 만석의 울부짖는 소리가 우렁우렁 겹쳐져서 들려왔다. 감동은 자기가

계속 능선을 곧장달려가고 있음을 깨달았고, 관군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쫓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는 구월산 인근의 지형을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였으며 자신이 서있는곳이

어디만큼이고 전후 좌우에 어떤 곳이 나올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 어서 은율 군계를 빠져나

가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봉황산의 끝에 다다라 대동강만 넘으면 그느 토포군의 손아귀

를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을거라고 믿었다. 그렇다. 밤이다. 어두워지기만 하면 살아남는 것

이다. 갈래물인나 버들고개까지 가면 빠져나갈 기회는 얼마든지 생겨날 것이다. 우선 저 뒤

쫓는 자들은 아예 엉뚱한 곳으로 따돌리고 한숨을 돌려서 은신처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마감동은 일부러 봉황산 능선에서 왼쪽으로 몸을 굴려 골짜기를 허우적거리며 건너고, 다시

나뭇가지들을 움켜잡고 맞은편 능선으로 기어 올랐다. 뒤쫓는 자들과 거리를 정확하게 가늠

해보려는 것이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구월산성의 한 길이 넘는 성줄이 계속되고 있

었다. 숲이 가끔식 성기어진 곳으로 돌 성벽이 달리고 있는 게 보였다. 감동은 문득 산성의

동문을 지나 작은 북쪽 석문으로 빠져나가는 샛길이 떠올랐다. 감동은 그 샛길로 하여 사선

골과 탑고개 너머에 있는 소금산 줄기를 타고 갈래물까지 나아가는 길을 그려보았다. 그러

나 탑고개에서 너무 가까운 것이 불안하였다. 이를테면 그는 식구들과 함께 나다녔던 동절

기의 사냥을 떠올렸다. 달아나는 멧돼지나 사슴을 함정에 몰아넣기 위하여 어찌하였던가 생

각해보았다. 우선 짐승이 잘 지나다닐 길목을 터주고 군데군데마다 사수를 숨겨두고 뒤를

바짝 쫓는다. 그리고는 길목의 끝에 막다른 곳을 정하여 짐승을 몰아넣고는 포위망을 서서

히 죄어가던 것이다. 감동은 어쩐지 구월산성은 항아리의 속과도 같다고 느꼈다. 한번 발을

들여놓은면 조롱에 든 새처럼 될 것이다. 그 너른 산림에는 단 네 군데의 활로만이 남을 뿐

이고, 그나마 문을 막고 지키게 되면 스스로 성벽안에 갇히는 셈이었다. 성벽을 돌아서 소금

산 줄기를 따라가다가 다시 골짜기를 가로질러 봉황산 등성이를 탈 작정을 하였다. 털가죽

감발을 하고 그 위에 행전을 단단히 쳤으며, 미투리에 가죽끈을 칭칭 동여매니 원래가 산을

타는데 익숙하던 차림새였다. 무릎까지 눈 속에 빠지면서 뛰는 사이에 발등과 행전에는 온

통 얼음이 달려들었다. 마감동은 나뭇가지 사이로 자기가 방금 미끄러져 내려온 능선을 건

너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털벙거지가 보이는 듯하더니 검은 더그레가 올라섰다. 손에는 총

포를 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여덟 아홉... 매둥지넘이를 바짝 따르던 군관이 그가

어지럽힌 눈자국을 손가락질하며 뭐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포수 다섯에 단병접전을 할 군사

다섯, 그리고 환도를 제법 씀직한 군관 하나, 감동에게는 너무 벅찬 상대였다. 포수 둘만 있

든지 아니면 병장기 가진 자들만 있다면 비좁은 골짜기에서 맞서 베어 넘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접전하는 사이에 방포를 해올것이고, 포수들에게 접근하려면 군사들이 막을 것이다.

눈이 없거나 아니면 어둠이 깔리기 전에는 그들은 발자취를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ㅣ감동은

슬며시 나무 뒤에서 나와 산등성이의 끝으로 걸어나가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앞서 오던 자들

이 뭐라고 소리치며 무릎을 세우더니 팔을 잽싸게 놀리고 나서 총을 어깨위로 올렸다. 총성

이 들렸다. 그 소리는 여음을 길게 끌면서 골짜기의 저 끝까지 비집고 나가는 듯하였다.

동이가 섰는 산등성이 훨씬 못미쳐서 흰눈이 풀썩하는게 보였다. 연환이 닿질 않는 것이다.

감동은 눈대중으로 사정이 어느만큼인가를 뇌리에 새겨두었다. 그는 소금산 줄기와 잇닿은

성줄을 따라서 뛰었다. 눈은 더욱 깊숙하였고 움직이는 데 힘이 들었으나 잡목이 뻑뻑하여

몸을 숨기기에는 맞춤하였다. 눈을 헤치며 겅중걸음으로 뛰던 감동의 귀에 역시 가까운 곳

에서 여러 사람이 뛰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눈 밟는 소리와 거친 호흡 소리며 나뭇

가지 꺽이는 소리 따위가 들여왔던 것이다. 감동은 동작을 멈추고 잡목 사이에 엎드려 주위

를 살폈다. 성벽과 소금산 줄기가 간격을 두어 차츰 둥글게 벌어지는 산협으로부터 한떼의

군사들이 달려오는 중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입김이 길게 토해지고 있었다. 성줄의 서쪽은

길마재요 북쪽은 탑고개로 나가는 소금산 줄기이며 바로 건너편이 봉황산 줄기였다. 역시

산성에는 매복 군사가 물샐틈없이 박혀 있었다. 감동은 뒤에서 쫓는 군사와 지금 엇갈려 오

는 군사가 합대하기 전에 뛰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발자취를 남기지 않으려면 허공을 걷는

수밖에 없었다. 머리 위로 매달린 나무 다리가 있으면 싶었다. 감동은 손으로 성벽을 더듬었

. 가녘에 늘어진 나무가지를 잡고 울퉁불퉁한 돌을 디디며 한 길의 성벽위에 오를 수 있

을 것 같았다. 그는 뒤에서 쫓는 자들이 잡목을 헤치고 여기까지 이르려면 제법 오래 지체

될 것이라 여겼다. 감동은 환도를 등뒤로 엇비슷이 찔러넣고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발로 성

벽을 차고 올랐다. 간신히 맨 위의 돌에 손을 걸고 상반신을 끌어올려 얹었다. 안쪽에는 흙

을 돋우어 사람 두엇 지나칠 정도의 통로가 성벽을 따라 오르내리면 계속되고 있었다. 눈발

을 맞기가 어려운 곳이라 발목에 닿을까 말까 하는 깊이로 눈이 얕게 쌓여 있었다. 감동은

성 안쪽의 좁은 길을 따라 정신없이 뛰었다. 어느결에 두어 번 산굽이아래 쪽에 북문이 자

그맣게 내려다보였다. 감동은 본능적으로 반달 같은 북문의 구멍이 범의 아가리 같다고 느

꼈다. 자기가 토포군의 장교라 할지라도 그곳에 군사를 매복시킬만 하였다. 사실 최형기는

그곳에 포수를 포함하여 유군과 보군 삼십여명을 배치하고 박완식 부장을 남겨두었던 터였

. 마감동은 다시 성벽 위에 올라 살펴보았다. 눈을 수북이 덮어쓰고 눈꽃을 화려하게 달고

있는 잣나무 등속이 솜 위에 수없이 꽂힌 바늘처럼 수해를 이루어 계속되고 있었다. 관군의

추적은 완전히 따돌린 듯 싶었다. 감동은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소금산 줄기를 버리고

다시 동쪽 골짜기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맞은편의 봉황산 능성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비탈을 내려갈 때 마음놓고 높이 치솟았다가 줄줄 미끄러졌다. 얼어붙은 시내를 건너서 능

선으로 오르기 전에 잠깐 쉬기로 하였다. 그는 눈의 거죽을 쓸어내고 속에서 곱고 깨끗한

부분을 파내어 주먹만하게 뭉쳐서 감자를 씹듯이 먹었다. 마감동은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지친 그의 눈앞에 의형의제로 결의한 식구들의 부릎뜬 눈이 차례로 지나갔다. 그들

부릅뜬 눈들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는 것만 같았다. 절대로 잡혀서는 안된다. 이대로 죽어서

는 안된다. 또는 용기를 잃어서는 안돼라고 씹어뱉는 듯이 보였다. 까마득한 옛날 여비로 늙

은 그의 노모가 담장 아래서 외치던 소리도 들려왔다. 감동아, 멀리 가거라! 그는 일어났다.

다시 산등성이를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왜 그런지 무릎에서 힘이 빠져 몇번이나 주

르르 미끄러져 제자리로 돌아오곤 하였다. 뒤쫓는 자들을 따돌렸다 싶으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던 것이다. 그는 쉬고 싶었다. 따뜻한 온돌을 등에 지고 잠깐만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

었다. 아침부터 먹은 것이라곤 냉수 한 대접뿐이었다. 장연으로 어서 빠지려면 버들고개 십

리 길을 넘어야 하고, 거기에 이르면 대동강 갯벌은 인적이 없는 곳이고 하루밤이면 충분히

도계를 넘을 만하였다. 그렇지, 큰샘에 가서 밤이 되기까지 요기도 하고 좀 쉬어야 겠다.

감동은 그런 후미진 산협에 화전갈이 하는 십여 호의 작은 동네가 있다는 사실을 산식구들

외에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였다. 구월산 녹림패나 인근 약초꾼들만 알고 있었다면 유

능한 장수가 반드시 그곳에 군사를 심장할 법하건마는, 마감동은 그만큼 지쳐 있었다. 식전

부터 그는 오후 늦게까지 계속 숨가쁘게 쫓겨왔고, 식구들의 패망은 물론이요 만석의 최후

는 그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스스로 관군의 살진 속으로 찾아들

어가는 줄도 모르고 마감동은 봉황산 줄기를 오른쪽으로 벗어나 큰샘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가 왼편의 갈래물로 내려갔어도 그는 스무명이나 되는 관군과 대적해야 되었으며, 그대로

능선을 타고 북쪽으로 나아갔다면 맥을 끊고 기다리는 매복군사들을 만났을 터였다. 나무꾼

이 오르내리는 오솔길이 나왔고 멀리 경작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눈을 덮어쓴 초가지붕들

이 비좁은 계곡 안에 어린 짐승들같이 엎드려 있었다. 감동은 최형기의 일행이 그러했듯이

동구에 이르러 큰 길을 피하여 밭의 가녘을 돌아갔다. 밭 건너편으로 외떨어진 집이 보였다.

감동은 마을 가운데로 들어가려고 계속 길 오른쪽의 밭을 질러가고 있었다. 송판을 내려치

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감동이 멈칫, 하는데 연이어 두 방이 터졌다. 종아리의 소퇴가 타

는 듯이 아팠다. 감동은 목을 움추리고 허리를 낮추고는 밭고랑을 뛰어건넜다. 거의 다 건넜

을 무렵에야 왼쪽 다리에 힘줄이 서지 않는 듯함을 느꼈다. 무엇인가 다리 힘이 허순하게

풀려버린 느낌이었다. 관군이다... 생각하면서도 아래를 살피니 연환이 얕게 할퀴고 지나갔는

지 바짓자락이 벌곃게 물들었다. 마감동은 환도를 빼어들고 재빨리 주의를 살폈다. 뒤로 집

이 세채, 앞으로 길 오른편에 두 채, 왼편에 한 채가 보였다. 생솔 울타리가 이어진 길 가

운데로 나가면 그 양쪽에 집이 벌려 서 있었고 조금 더 올라가면 널찍한 공터가 나왔다.

동은 이미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남은 것은 사로잡히지 않고 죽는 길이었다. 뒤에서

하나 둘 씩 관군이 나타났다. 그보다 조금 떨어져서 포수 세 사람을 거느린 무장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쪽에 기울어진 해가 산마루에 걸려 있어서 검은 자태만이 보였다.

감동은 이마 위에 손을 대고 눈을 찡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구슬상모와 구군복이 보였다.

길 건너

편 집에서도 칼과 창을 가진 군사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

들었다. 마감동은 한편으로는 군사들을 살피면서 넓게 트인 마을 한복판의 공터를 내다보았

. 관군은 그곳으로 감동을 몰아넣어 사로잡으려는 것이다. 만약 빈터로 나가게 되면 힘껏

싸우다가 기진하여 스스로 살고 싶어지게 되고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마감동은 오만석이

된목이골의 마지막 싸움에서 투승에 걸리던 광경을 떠올렸다. 투승을 던지지 못하도록 장애

물이 많은 장소를 택하여 무엇인가를 등지고 싸워야 할 것이다. 그는 좌우를 돌아보면서 천

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길 건너편에 외떨어져서 앞으로 비죽이 나와 있는 집을 향하여

뛰었다. 마당 한쪽에는 땔나무가 두어 길쯤의 높이로 쌓여 있었고 삽짝으로 들어서자마자

문간에 헛간이 있었다. 비좁은 툇마루에 이어진 방문이 두 짝 보였고, 끝에는 부엌이었다.

해서의 촌에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자집이었다. 대여섯 명이서 좌충우돌 날뛰기에는

좀 불편한 공간이었다. 마감동은 아예 칼집을 내버리고 칼날을 역으로 가도록 쥔 채 툇마

루 앞에서 집을 등지고 섰다. 되도록 많은 적을 가까이 끌어들여 막고 베기에는 거꾸로 칼

을 잡는 것이 이로울 듯하였다. 밖에서 수군거리며 이리저리 뒤는 발작 소리가 들리더니 생

솔 울바자 사이로 군사들의 더그레 자락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선뜻 안으로 들어서

려고 하지않았다. 마감동은 발을 몇번 굴러보았다. 장딴지가 시큰거리기는 했지만 아직은

뛰고 차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는 잠깐 호흡을 가누려고 하랫배에 힘을 주고 천천히 들

이마셨다가 길게 토해냈다. 누군가가 들어서더니 헛간 앞에 섰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평복에 솜배자 입고 남바위를 눌러 쓴 사내가 환도를 아래위로 간들거려 보이면서 말하였

. 그 뒤로 군사들 셋이 들어와 마당 가운데 벌려 섰다. 감동은 그들의 위치를 가늠하노라

고 자기 발치 끈에서 그들까지의 발짝을 마음으로 헤아렸다. "벌써 잊은 모양이구나."

복의 사내가 말하였고, 감동은 그제서야 그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그래 네가 누구냐?"

마감동은 아무렇지도 안하게 물었다. 사내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그의 뒤로부터 군관 복

색을 한 자가 환도를 그냥 칼집에 꽂은 채로 들어서서 마당을 지나갔다. 그가 걸으면서 중

얼거렸다. "조읍포에서 검을 가르쳐준 사람을 잊었는가?" 장교는 잔솔가지를 쌓아놓은 곳

에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올바자 밖에는 군사들이 집 주위를 둘러쌌는지 솔가지 사이로 옷

자락이 보였다. 감동은 다시 사내를 힐끗 보였다. "오라, 네가 포창 사과의 자식이로구나.

나를 베러 왔느냐? 털도 안 난 것이 날기부터 하려는구나. 오늘은 내가 갈 길이 멀어 한 수

도 접어주지 않을란다." 감동은 칼을 거꾸로 쥐고 허리 아래로 느슨히 늘어뜨리고서 침착

하게 말하엿다. 말에는 농기가 있었으나 표정은 빈틈없이 날카로웠다. "네가 검법을 가르쳐

준 덕분에 배운것이 있다. 뭔지 알겠느냐?" 유수룡이 말하였고, 마감동은 장교 쪽을 슬쩍

보고 나서 답하였다. "염라대왕이 임진년 도깨비를 알겠느냐?" "검을 들어 싸우되, 꼭 죽

여야 한다는 게다." 마감동은 씁쓸하게 웃었다. "범이 나비를 먹겠느냐, 양에 차지 않는

고기는 입도 대지 않는다. 오늘도 살아 돌아가 늙은 아비나 봉양하여라." 땔나무 더미 앞에

섰던 장교가 정중하게 말하였다. "나는 좌포청 포도부장 백섭이란 사람이다. 약간 쓰리고

몇수 배워볼까 한다." 마감동은 칼을 늘어뜨린 채로 말하였다. "원하는 대로..." 백포교는

감동의 칼보다 한 뼘쯤 더 긴 화도요 유수룡은 늘 쓰던 장검이었으며, 마감동은 예도였다.

사들 역시 백포교와 규격이 같은 환도였다. 유수룡은 잠검을 쌍수로 잡고 몸 정면에 세워

들고 있었고, 백포교는 환도를 어깨높이 수평으로 쳐들었다. 그의 동작과 함께 군사들도 제

각기 칼을 잡아 달려들 자세를 취하였다. 감동은 자신의 행동 반경을 이미 정하여두고 있

었으니 삼간초가의 부엌에서 끝방까지가 좌우요, 솔가지 더미와 부엌의 사이가 전후인 셈이

었다. 그 안으로 들어오는 상대르 맞아 싸울지언정 스스로 그 밖으로 뒤쳐나가지 않을 셈이

었다. , 헛간앞의 유수룡은 끝방 앞에 이르면 그의 지경을 범하는 셈이고,군사들은 땔나무

와 나란한 거리, 장교는 부엌 앞에 이르면 그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셈인 것이다. 감동은 그

들의 공격은 좌우 측면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공격의 중심은 백포교가 될 거라고 어겼다.

룡의 검의 정도를 자신이 잘 알거니와 그족에는 언제나 새로운 상대가 등장할 삽짝문이 있

었다. 정면에 마당을 막아서서 벌여 있는 세 군사들은 그의 행동을 교란하거나 압박하기 위

한 것이 분명하였다. 유수룡이 칼을 두 손에 쥐고 진전살적으로 발을 떼어 나섰고, 군사들은

제각기 금계독립과 맹호은림의 자세를 취하면서, 얼굴 옆으로 비스듬히 칼날을 세우거나 어

깨 위로 쳐든 모양으로 마당 가운데로 뛰쳐나왔다. 마감동은 컬을 허리 뒤로 꼬리처럼 늘

어뜨려 감추듯이 한 요락을 취하여 튓마루의 턱이 다리 오금에 닿을 정도로 한발 물러났다.

백 포교가 칼을 수평에서 서서히 거두어 정면에 뻗치면서 전기를 취하면서 그의 좌측으로

파고들었다. 유수룡이 먼저였고, 군사들은 거의 동시였으며, 백표교의 그것은 유수룡과 두어

동작 차이가 나는 급습이었다. 수룡의 동작은 그의 주위를 오른쪽으로 분산시키려는 것이며

군사들은 그의 행동반경을 줄이려는 것이고, 실제 공격은 백포교의 급습에 있었던 것이다.

마감동은 검술의 기본은 물론이려니와 살전을 여러 차례 겪은지라 첫 호흡에 그런 점들을

즉각 알아차렸다. 감동은 백포교가 칼을 수평에서 정면으로 거두자마자 앞으로 다가선 군

사들의 가운데로 파고들었다. 그는 칼을 아래에서 사선을 그으며 위로 치켜올려 몸을 반쯤

돌리는 은망을 취하였으니, 칼날이 둥글게 틀어 공격하는 구렁이의 이빨과도 같았더ㅏ. 감동

을 급습하려던 백포교는 제 편인 왼쪽의 군사 측면에 서게 되고, 수룡은 깁숙이 들어와 백

포교의 두에 있었고 감동은 그 동작에서 연이어 좌익이 되어 오른편 끝에 있던 군사의 좌측

을 빠져서 다시 집 쪽으로 들어가며, 그의 어깨를 재빨리 찔러 빼고는 툇마루 앞으로 돌아

섰다. 셋에 군사 하나를 베었고 다섯에 다른 하나를 질렀으며 여섯에 돌아섰으니, 유수룡과

백포교와 나머지 군사는 솔가지 더미와 툇마루 사이에 일직선으로 몰려 있었다. 감동은 수

룡을 우선 쫓아내느라고 돌아서면서 백사농풍으로 칼을 휘돌리며 그의 감슴에 파고들었고,

수룡은 향우향좌 방적하여 칼날을 세워 몸 바깥으로 걷어내노라고 안간힘을 썼다. 수룡이

뒤로 물러나면서 백포교가 감동의 오른쪽 어꺄ㅐ를 바라고 칼을 머리 위로 번쩍 쳐들어 조

천을 취하여 크게 베었다. 감동은 솥을 쳐들듯 어깨 위로 칼날을 쳐든 거정으로 막아냈다.

칼날이 부딪는 소리가 나고 엇갈리는 소리도 들렸다. 감동은 처음에 섰던 자리고 빠져나가

섰으며 수룡과 백포교는 서로 바꾸어 섰다. 마감동은 아까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들 셋을 단칼에 베어버릴 수도 있었다. 만일 적이 그들뿐이었다면 첫 합에 연이은

동작으로 모조리 베어 넘겼을 터였다. 그러나 적은 또 밀려들어 올 것이다. 밤이 되면 이 포

위당한 집을 떠나 산으로 달아나 군계를 넘어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삽짝문 밖에 붙어서

서 그들의 대전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최형기는 내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한수 이북에서는 아무도 꺾을 자가 없으리라던 김식을 단칼에 베어버릴 만한 솜씨였다.

형기가 보기에도 그자느 ㄴ자기 재간을 충분히 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개를 놀리는

교활한 살쾡이 같았다. 때로는 그들을 끌어들이고 때로는 내몰고 하면서도 가장 유리한 지

점은 그의 차지가 되는 것이다. 잔나비의 목에 끈을 매어두고 당기고 풀어주고 하며 재간을

보이느 저자의 환술자와도 같았다. 최형기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삽짝을 밀고 한

발을 내디뎠다. 쏘는 듯한 시선이 맞부딪쳐 왔다. 세 사람을 상대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삽작

에 들어선 사람의 동작을 얼어붙게 할 정도로 빈틈없고 찌르는 듯한 눈초리를 던져왔다. "

야이..." 백포교가 칼을 백원출동으로 그으면서 몸을 구부정히 앞으로 숙이며 달려들 때,

동이 흔격으로 그의 허리께로 파고 들면서 다리를 구부리고 좌우로 재게 움직여나가는 호보

의 동작으로 상대의 배를 베었다. 최형기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참으로 털 하나만큼도 차

질이 없는 솜씨였다. 백포교는 감동의 오른편 어깨 근처에서 동작을 멈춘 채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칼이 떨어지고 한족 다리가 휘청하였다. 감동은 다시 두 다리를

세우고 제 키로 돌아가 유수룡의 왼쪽으로 빠져나갔다. 감동이 동작을 그쳤던 자리에서 떠

나자마자 백포교의 다리가 꺾이면서 아픙로 무너지듯이 엎어졌다. 수룡은 감동에게 자리를

빼앗겨 다시 최형기가 서 있는 방향으로 돌아왔고, 군사는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동료들의

시체 뒤에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그는 최형기가 들어선 것을 보자 용기가 났는지 아니면 질

책을 받을까 두려워해서인지 칼을 곧추 찌르며 달려들었다. 감동은 아예 받지도 않고 몸을

슬쩍 ㅓ구부려 피하면서 발을 날렵하게 들어올려 오금을 내질렀다. 군사가 에이쿠, 하면서

한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그 발을 그대로 뻗어서 위로 차올렸다. 군사는 정확하게 멱통을 맞

고 뒤로 벌러 나자빠졌다. 최형기는 칼을 겨드랑 밑에 찬 로 한 손에는 등채를 쥐고 아프올

몇걸음 나섰다. "대단한 솜씨다. " 최형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마감동은 칼을 늘어

뜨리고 그를 독바로 내려다보며 말하였다. "알아주어 고맙네." 최형기는 유수룡과 군사에

게 등채를 휘저어 보였다. "칼을 거두고 물러가라." 그들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로 숨

을 거칠게 내쉬면서 삽작 앞에까지 물러가서 섰다. 최형기는 감동의 행동은 아랑곳 않고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앞으로 넘어지 백포교의 덜미를 잡아 쳐들어보았다. 동공이 크게

열려진 채로 백은 절명하여있었다. 최형기는 몇번 혀를 찼다. "네가 마감동이냐?" 감동은

그자의 복색으로그가 군사들의 지휘자임을 알아보았고, 눈매로 보아 보통의 상대가 아니리

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마는 너는 누구냐?" 최형기는 여유있게 웃었다. "

양주 사람, 최씨 성 가진 형기라는 사람이다." 저자 무뢰배로 보내온 사람답게 최형기는 그

런 식으로 자기르 밝혔다. "겨우 십 합도 안되어 감영에서 단병접전에 능하다는 군관을 모

조리 베어 넘겼군. 이러다가는 해서에세 무술을 아는 자의씨가 마르겠다." 최형기는 여전

히 마감동의 몇발작 앞에서 서성거리며 부하들의 주검을 확인하였다. 상처는 모두 치명적이

었고 정확핟게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어떤가..." 최형기가 고개를 들고 마감동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칼을 버리고 관군에게 항복해라. 네 졸개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거나 사로잡

혔다. 너희 퇴로에 고나하여 낱낱이 일러준 것도 바로 투항한 너의 졸개들이다. 나는 상감의

어명을 받잡고 해서 고나찰사의 명에 의하여 너희를 잡으로 나온 토포장이다. 내 권한으로

너를 살려줄 수도 있으려니와 위에 아뢰고 무장으로 중용할 수도 있다. 늦게나마 관군에 협

력하여 국은에 보답할 길을 찾으라." 마감동은 대답 대신에 먼저 칼을 수두로 곧추세워 대

번에 최형기의 목줄을 쩌ㅣ를 듯하였다. 최형기는 실로 얼음이 목젖에 닿은 듯하고 한기가

끼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그러나 살기에는 원래 고요하고 무거운 것으로 맞서야 하는지라,

최형기는 몸을 흐트러뜨리지않고 등채를 천천히 들어서 한 뼘쯤의 거리에 곤두세워진 칼끝

에 엇갈려 세웠다. 그리고는 가볍게 옆으로 밀어냈고, 힘을 조금 더 주기도 전에 감동은

칼날을 휙 거두어버렸다. "두로 세 걸음 물러가라. 이번에는 베겠다." 마감동이 칼을 아래

로 내리고 말하였다. 최형기는 그가 말한 대로 하리라는 것을 알았다.그래서 최형기는 부하

들의 넘어진 몸을 넘어서 뒤로 물러났다. 마감동이 다시 말하였다. "나를 욕되게 하지 마

. 어찌 그대는 내 아우들의 주검을 얘기하면서 내게 목숨을 구걸하라고 말하는가. 그대가

우리르 잡으러 온 토포장이라면 의당 구월산 활빈도의수령인 나와 겨루어야 할 것이다.

한 그대가 주인으로 섬기는 양반들은 우리가 알기로는 우리 같은 천민의 적이니 네가 받았

다는 가엾은 권한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나는 굶주리고 핍박받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일

어난 군사의 장수이다. 이미 작은 활빈행으로 평생의 직분을 세워 심지르 굳혔으니, 은혜란

너희들께 입은 것이 아니라 강산에 즐비한 약한 배것ㅇ들로부터 입은 것이다. 내가 피를 뿌

려 땅 우에 쓰러질지라도 저들에게 입은 은혜를 다 갚지 못할 것이다. 죽리로 마음을 정하

였으니 사로잡으려 애쓰지 마라. 검에 자신이있으면 어서 칼을 뽑아 앞으로 나서라. 지지재

재 대꾸할 흥이 남지 않았다." 최형기는 등채로 한쪽 손바닥을 찰싹찰싹 두듣리면서 참을

설 있게 그의 얘기를 듣고 잇었다. 가엾은 권한이란 말에 이르러는 자부심이 강하고 문벌

없어 언제나 그쪽이 허하던 최형기로서 참기가 어려웠는지 눈까풀이 파르르 떨렸다. 감동의

말이 끝나자 최형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는 사사로이 네게 빚을 받을 것이 몇가지 있다. 네가 송화 수회천에서 죽인 김식은 훈련원

에서부터 내 심복 무사였다. 그리고 방금 베어버린 이 사람은 좌포청에서 내가 뽑아온 가장

유능한 포도부장이다. 나는 그들의 식솔들에게 너의 수급을 보여주며 위무할 책임이 있다.

그뿐 아니라 나느 내게로 병장기를 겨누어 대적한 자를 살려둔 적이 없다." 최형기는 등채

를 내리고 뒷짐을 지면서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사로운 빚은 받지 않아도

좋다." 최형기는 눈초리를 싸늘하게 한 채로 빙긋이 찡그려 애써서 웃는 낮을 보였다. "

, 목숨은 귀한 것이다. 네 말의 앞뒤 이치로 보아 너는 과연 포부가 큰 대장부다. 네 뜻의

여하에 따라서 나라에 범한 죄는 물에 씻긴 티끌처럼 사라질 것이다. 논공행상의덕을 입을

것이다. 너는 도적의 수령이 아니라 전복에 전립 쓰고 호마를 타고 나와 어깨를 나란히 개

선하게 된다. 한양에 올라가면 서반에 너희호나로는 널찍하게 열려 있고, 아늑한 집안의 규

수를 아내로 맞게 될 것이다. 이야말로 조변성응이요 어변성룡이 아닌가." "닥쳐라!" 감동

이 발을 구르며 말하였다. "그러면 내 말을 듣겠느냐. 이미 이 나라는 근본부터 썩어서 고

약한 냄새가 난다. 사민이 있다 하나 글 읽고 벼슬하거나 전장이 많고 권력있는 자들만이

나라의 주인이요, 나머지 백성들은 낳고 살고 죽기가 금수보다도 못하다. 임진난리 대에도

병자난리 때에도 약한 백성들에게는 야차와같이 굴던 것들이 바깥 도적들에게는 기도 못 펴

고 꿈쩍도 못하면서 온 나라를 내주고 말았다. 그러고도 이제껏 조정의 귀하고 높은 자리는

저희끼리 다투어 들어앉고 내려오고 하면서, 입으로만 백성이요 실상은 대롱을 꽂아 고혈을

빠는 먹이로 여길 뿐이다. 어찌 하늘이라 편안하게 머리를 쳐들어 살아갈 수 있으랴. 이제라

도늦지 않았다. 그대가 몇품 벼슬을 지내는가? 고작해야 병수사자리라도 기다리고 있는가?

그 칼을 뽑아 너를 보낸 자들에게로 돌려라. 네 등뒤에는 팔도의 촌촌마다 피눈물로 포한

맺힌 황민의 믿음이 있다. 이 땅에서 살다 죽어진 수도 없는 백성들의 원혼이 있다. ,

와 함께 먼저 해서감영을 들이치자." 마감동의 눈에는 이상스런 빛이 번뜩이는 것 같았

. 그의 목소리는 차츰 열기를 띠어갔고 마지막 마디에서는 최형기도 알지 못할 어떤 힘이

뜨겁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최형기는 그러한 열기가 돋대체 산간의 명화적에 지나지 않는

이런 저의 어디에서 솟아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줌도 못 되는 서적의 무리로서

말이 너무 방자하다. 내가 찾는 것은..." 최형기는 그의 약을 올리려는 어조로 말하였다.

희들의 두령으로 알려진 장길산이다. 네 따위야 그자의 손아래 졸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누구의 종자인지도 알 수 없는 광대 창우배의 자식이다. 너 같은 검의 고수가 기껏 창우의

졸개란 말인가. 더구나 그는 구월산이 어육이 되고 있는데도 쥐처럼 숨어서 나오지도 않는

구나." "내게 욕을 보이되 우리 성님께는 그럴 수 없다. 우리 성님을 만나지 않은 것을 처

핸으로 알아라. 내가 너를 베지 못한다면 너는 길산이 성님께 죽을 것이다. 백성이 무서운

것을 알라. 지금은 한줌에 지나지 않되 멀지 않아 질풍이 되어 뒤덮을 것이다." 마감동은

조금도 어조가 변하지않았다. 눈빛만이 더욱 번뜩일 뿐이었다. 정말 죽기로써 싸우겠는가?"

최형기가 뒷짐을 풀고 단호하게 물었다. 마감동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대가 대장부라

면 나를 더 이상 조롱하지 마라." "총포를 쏘아서 너를 상하게 하여 사로 잡을 수도 있다."

마감동이 그 말에 처음으로 진노하여 부르짖었다. "이런 오입쟁이 같은 자식." 무뢰배들의

요중에서도 기부와 오입장을 빗된 욕이란 계집애게나 사내 구실한 놈이라는 소리로 가장 듣

지 못할 소리였다. "내 이미 뜻한대로 살기를 원했거늘 죽음이 무슨 상관이랴. 차라리 자진

할 것이다." 감동이 칼을 획 돌려 스스로를 찌르려 할 때 형기가 얼른 손을 들어 말하였다.

"기다려라! 구태여 스스로 죽을 필요가 있겠느냐. 내 칼에 죽는 것이 더욱 대장부 다울 것이

." "나와 겨루겠는가?" "이미 말했다." 하고 나서 최형기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삽짝

을 향하여 걸었다. "저 동네 공터에서 겨루자." 그러나 마감동은 따르지 않고 말하혔다.

"우리 중에 누군가와 쓰러질 때 까지 아무도 끼여들지 않고, 내가 네 칼을 맞기 전에는 함

부로 총포나 활 따위를 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최형기는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침

이 말랐다. 오랜만에 살전이었던 것이었다. 훈련원 마당에서 목검으로 대련을 하던 것과도

달랐고 겁을 모르는 자들을좌충우돌 베어 넘기던 것과도 달랐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답

하였다. "약속한다. 사내로서 약속하겠다." 마감동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삽짝

을 나서자마자 유수룡과 군사들 두엇이 등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마감동은 허리를 굽신

하면서 칼을 피하고 몸을 돌려서 위에서 아래로 그어내렸다. 앞섰던 군사의 벙거지 차양이

두쪽으로 베어지고 얼결에 처든 칼날에 부딪쳐 쇳소리가 울렸다. "물러서라." 최형기가 엄

하게 명령하자 군사들은 주춤주춤 마감동의 주위에서 물러났다. "내가 상대할 동안 아무도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그는 앞장서 설으면서 기패관에게 외쳐 물었다. "조밥이 다 되었는

? 기패관이 얼른 알아듣고 대답했다. "끓는 중입니다만 대전하고 나서 드십시오." 최형

기는 등뒤에서 환도를 든 채로 따라오는 감동에게 중얼거렸다. "조밥의 뜸이 들기 전에 너

를 베어 넘기련다." 이제 마감동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이 바지가랑이는 벌겋게 젖었고 상

투는 느슨해져 사방으로 흐트러졌으나 피로한 기색은 보이질 않았다.

 

마감동은 그가 토포장이란 자를 죽일 수 있다 할지라도 자신은 살아 나갈 방도가 없다는 거

을 새삼 실감하였다. 그는 처음에 군계를 빠져나갈 수도 있으리라던 헛된 기대와 아예 끊어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공터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와 느트나무가 길 옆에 서 있었다. 마을

길은 서남쪽의 동구에서부터 구불거리며 그대로 계속되어 있으나 집을 뒤로 물려 지어서 자

연스럽게 너른 마당이 된 셈이었다. 동제를 지내거나 마을의 크고 작은 모임이 여기서 이루

어졌을 것이다. 마당의 네 귀에 집이 한채씩 있었는데, 서남향이나 동남향으로 지었으되 길

가 쪽에는 방문을 내고 툇마루를 붙인 집도 있었다. 최형기가 앞장섰고 그의 몇발짝 뒤에

마감동이 따랐다. 그들의 양옆에는 유수룡과 군졸 십여명이 병장기를 빼어들고 따라갔다.

위에는 드문드문 발자국으로 다져진 곳도 있었지만 눈이 발목까지 빠지도록 쌓여 있었다.

마을은 골짜기에 따라서 서남방으로부터 동북방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었다. 서쪽에는 봉황

산 줄기가 꼬리처럼 흘러가고 있었으며 개천을 건너 일직선으로 막아선 버들고개의 능선이

보였다. 두 산줄기는 큰샘 근처에서 매우 가까워졌다가 구월산에 이르러는 십여리 쯤 멀어

지고, 다시 장연 쪽으로 빠지면서 아예 들판을 가운데 끼고 성큼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들고개는 안악과 장연의 군계를 가르는 울타리와도 같았다. 봉황산 산줄기 위로 기울어가는

해가 달랑 매달려 있었고, 햇빛은 빈터의 절반쯤에 눈부시게 내려앉았다. 눈을 하얗게 덮어

쓴 소나무가 북쪽 귀퉁이에 있는 집의 삽짝 옆에 서 있었으며 그늘은 빈터의 동북쪽 윗부분

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소나부보다 훨씬 크고 우람한 느티나무는 개천을 등지고 오르

편의 두 집 사이에 있었는데 기다랗게 늘어난 나무 그림자가 얼어붙은 개천 위에 떨어져 있

었다. 최형기는 앞장서서 가다가 가운데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발로 땅을 몇번 차보도니

돌아섰다. 그가 멈추는데 따라서 마감동도 섰다. 군졸들은 두 사람을 가운데 두고 좌우의 집

사이를 메우고 일렬로 늘어섰다. 최형기는 전립과 전복을 벗었고 군졸이 재빨리 달려와서

받아갔다. 그는 목화를 신은 것만 다를 뿐 마감동과 마찬가지로 상하의 바람이었다. 마감동

은 앞으로 내딛는 발의 일직선으로 칼을 늘어뜨리고 최형기의 정면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

. 그들은 예도와 단검으로 맞섰다. 최형기의 왜단도는 마감동의 칼보다 짧아 보였다. 최형

기는 팔을 앞으로 쳐들고 짧은 칼날을 이빨처렴 세워들고 끝에 시선을 주었다. 두 사람이

빈터에 당도하자마자 뇌리에 새긴 것은 바로 흰눈의 젖은 부분과 깊숙한 부분이며 다져진

, 그리고 빈터에 비낀 저녁햇살의방향, 나무 두 그루가 만들어낸 그늘, 마당의 넓이, 따위

였다. 최형기는 소나무 앞에 마을의 동북쪽 길을 등에 지고 서 있었으며 마감동은 느티나무

를 오른쪽에 두고 빈터의 가운데서 서 있었다. 최형기는 발꿈치를 들고 몇번 무릎을 달싹여

보왔고, 마감동은 내려뜨린 칼의 끝을 미세하게 간들거리고 있었다. 마감동이 동작을 그쳤을

, 갑자기 상반신을 낮게 숙인채로 최형기가 제비처럼 두 팔을 뒤로 숙이고 날쌘 동작으로

다가섰다. 호흡을 가눌 사이도 없이 형기가 감동의 왼편을 치며 지나갔다. 다만 햇빛에 반사

된 칼날이 번득였고, 직선으로 내리그으며 떨어진 최형기의 칼이 밑에서 밖으로 밀어내는

마감동의 칼날에 부딪쳐 미끄러지는 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최형기는 연이은 동작으로 마감

동의 오금을 뒷발로 차면서 돌아섰다. 마감동은 주춤하면서 오른쪽 다리가 꺾여 하마터면

넘어질뻔하였고, 최형기의 칼이 어김없이 위에서 아래로 그의 어깨를 버개려는 듯이 날아왔

. 마감동은 옆으로 상체를 굽혀 피하면서 적을 보기위해 몸을 돌리면서 서너발짝 멀찍이

물러났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최형기는 다시 공격하지 않고 짧은 칼을 옆으로 약간

벌린 손 끝에 느슨하게 쥐고 몇번 흩뿌려 보였다. "어떠냐... 비도는 내게 통하지 않을걸."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빈터의 왼쪽 가녘으로 천천히 우회하기 시작했다. "방금 쓴 검은 비

연작충이란 것이다." 나는 한번 취한 검은 다시 쓰지 않으니 잘 새겨 두어라." 마감동은 대

꾸하지 않고 천천히 움직여가는 최형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물론 최형기가 무더리의 사근다

리에서 죽은 김식과는 비교가 안될 고수 임을 느낄수 있었다. 최형기는 서로 마주 서는 첫

순간에 칼을 고르고 호흡을 맞출 틈도 없이 정확하게 마감동의 옆구리를 베었다. 그가 손가

락 한마디 길이만큼 다가섰더라도 감동의 내장을 줄줄 흘러 나오게 했을 것이다. 마감동의

두툼한 솜배자는 갈빗대 근처에서 허리까지 찢어졌고 베어져, 칼 끝에 긇힌 살은 쓰리고 피

에 젖었다. 대개 검으로 겨룰적에는 서로 마주서서 눈 싸움이라도 하다가 얼핏 주고 받은

눈짓에 의하여 약속이나 한 듯이 치고 막고 하는 법인데, 최형기는 감동의 칼을 관찰하기는

커녕 아예 무시한 채로 기격으로 나왔다. 제비가 땅위를 스칠 듯 날아가다가 선회하여 급히

내리 꽂으며 나비를 잡아채는 듯한 동작이었다. 이를테면 그쪽에서 딴전을 피워 공격을 않

으려는 듯하다가 일시에 돌변하여 덮치는 것이다. 최형기는 이미 김식과 같은 격식 같춘 검

기의 단계를 넘어서 있었다. 최형기의 불의의 웅면은 마감동의 왼쪽 옆구리를 급습한 직후

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마감동이 왼쪽에 칼날을 의식사면서 몸을 트는것과 동시에 최형기는

그의 뒤로 빠져나가면서 다리를 베려고 연결된 동작으로 칼을 그었던 것이다. 단칼에 베고

떨어지고 다시 틈을 노리는게 아니라 접전했을 때에 끊임없이 틈을 만들어 예측하지 못할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를 테면 한 호흡속에 전혀 다른 공격을 연거푸 하 해내느 것이

. 마감동이 보통의 겸객이었다면 옆구리는 요행이 피했다하더라도 불시에 날아드는 칼에

다리를 잘렸을 터였다. 마감동이 저도 모르는 곁에 안에서 밖으로 밀어낸 칼날에 최형기기

의 칼은 미끄러져 나갔고, 그는 다시 연이어서 등을 돌려대고서로 떨어져 가는 자세에서 발

뒤꿈치를 들어 마감동의다리 오금을 내질렀다. 처음에 다짜고짜 파고들었을 적부터 떨어져

나갈 때까지 최형기는 세 번의 전혀 다른 공세를 취하였고, 그중에 두 번 성과를 얻었다.

마감동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최형기가 계속해서 몰아쳐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절대

로 맞받아 공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최형기가 오면서 감동은 물러나고 뛰어들면 뛰어 물

러나고 내려치면 뒷걸음질치고 우회하면서 질러서 피할 생각이었다. 최형기는 이를테면 먹

이를 앞에 둔 굶주린 범과도 같았다. 그의 검은 능숙하고 힘이 있으며 자신에 넘쳐 있었다.

감동은 최형기를 기필코 베어 넘기고 싶었다. 또한 부상을 입고 사로잡혀서도 안된다고 생

각하였다. 그를 베어 넘기고 나면 군졸들은 자기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녹림에 숨은 이름

없는 자가 조정에서 보낸 두 명의 고수를 베고 죽었다면 또한 구월산 활빈도의 힘을 백성들

에게 알려주게 될 것이다. 토포는 이루어졌으되 토포장은 녹림 화정당에게 살해되었다는 것

처럼 좋은 소식이 있겠는가. 마감동의 마음은 처음보다 훨씬 침착해졌다. 대개 칼을 아는 자

는 그 칼 날속에서 상대방의 기량은 물론이요 습성을 짐작하게 마련이었다. 어떤 검법에서

든 그 검을 쓰는 자의 냄새가 나는 것이다. 최형기의 화려하고 기만한 기격의 검술은 마치

동남풍에 나부끼는 깃발과도 같았다. 손톱만한 틈이나 흐트러짐도 놓치지 않고 파고들 것이

었다. 포효와 도약을 자신있게 해내면서 먹이를 던지고 몰고 놓아주고 어르는 호랑이 처럼

최형기의 검은 일시에 몰아쳐서 혼을 빼놓는 그런 식이었다. 거기에 활발한 동작의 신명까

지 붙어 실로 춤추는 듯하였다. 우선 신명을 죽이고 그가 전혀 낯선 이상스런 것과 마주친

느낌을 주어야 한다고 감동은 생각하였다. 가령 범이 길 위에서 남생이를 만났다. 먹을 것

인가하고 건드려 보니 머리가 숙 들어가버리고 다리도 움추려버린다. 범은 도대체 알 수 없

는 그 딱딱한 남생이의 껍질을 이리저리 건드려보고 기다리기도 하다가, 멱기에 적당치 않

으리라 여겨져 돌아선다. 돌아서자마자 남생이는 긴 목을 빼내어 범의 꼬리를 문다. 범은 혼

비백산하여 달아난다. 또는 범도 이미 일고 있는 고슴도치가 될 수도 있었다. 고슴도치의 가

시는 어떻해 해볼 도리가 없어서 여러번 실패해본 범인지라 그냥 슬그머니 피아혀 가버린

. 가시 때문에 물지도 건드리지도 못한다는 것을 범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것이 그의 약점이다. 그 약한 곳이나 방도로써만 적을 대한다. 적은 지치고 싫중이 나버리

, 드디어 결저적인 기회가 생길 것이다. 태공망이 '육도'에 쓰기를, 사나운 새가 다른 새를

쳐서 잡을때에는 낮게 날아 날개를 충분히 펴지 아니하고 맹수가 뛰어 덤빌 때에는 귀를 늘

어뜨려 엎드리고 약함을 보여 적으로 하여금 방심하게 하면서 공격한다 하였다. 최형기가

망당의 왼쪽 가녘으로 움직여가는 것은 유리한 공격점을 갖추기 위한 것이라고 마감동은

생각하고 있었다. 앞장서서 그를 빈터로 끌고 갔던 최형기가 돌아서자마자 그를 치고 등뒤

로 지나갔고 감동은 마당 한 복판에 서 있게 되었으며, 거기 최형기는 다시 얘기를 걸면서

서넘쪽의 집 앞을 슬슬 지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확하게 서향이 되는 봉황산을 똑바로

등뒤에 짊어지는 자리에 서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역시 역광을 타고 마감동에게로 쏟아져

들어오려는 것이다. 최형기는 첫 합이 이루어 졌을 때 마감동은 과연 김식을 벨 만하였구

나라고 스스로 감탄하였다. 사실 첫 합에서의 그의 급습은 기선을 잡으려는 것이지 검으로

는 매우 비겁한 짓이었다. 애초에 같은 고수끼리 그런 검을 쓰는 일은 위험이 더욱 큰 것이

. 최형기는 비연착충세를 쓰면서 이것이 공격중에 일어난 자세가 아니라 느닷없이 취하였

기 때문에 방어동작을 유념하면서 조심스럽게 나아갔던 터였다. 그 동작은 허장성세라 하여

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형기의 첫 번 동작보다는 그 다음이 더욱 중요하였고 공격의 실은

그곳에 있었다. 최형기는 그의 칼날이 밖으로 퉁겨져 나왔을 때 놀랐다. 이러한 연달은 기격

은 훈련원 습련시에 그가 즐겨 쓰던 법이다. 대개는 첫 합에 대련이 끝나고 말던 것이다.

감동은 검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의 기를 잡아 쓸 줄 아는 자가 아닌가. 그러나 세 번째로

그가 물러서면서 감동의다리 오금을 뒷발꿈치로 내질렀을 때, 최형기는 상대가 살전은 많이

겪어 칼을 무념으로 쓰는 데는 능할지 몰라도 잇따른 웅변의 기술에는 서투르다는 것을 깨

달았다. 이런 상대에게는 사이를 많이 둔 공격보다는 현란하고 그침없는 공격으로 미세한

기예를 써서 실수하도록 해야겠다고 최형기는 판단하였다. 최형기는 자기의 기다란 그림자

가 마감동의 몸을 어루만지며 지나가 눈 위에 미끄러져 나가는 모양을 보자 바로 공격점에

두 다리르 붙였다는 것을 알았다. 최형기는 짜른 칼을 얼굴 정면으로 비스듬히 내밀고 두

발검음에 솟구쳐 뛰었다. 칼은 탄복이야, 도약은 창룡출수였다. 그는 마감동의 한발 못미처

떨어지며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다른 다리는 뒤로 뻗쳐 자세를 낮추며 감동의 허리를 베려

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감동은 그 자리에서 최형기의 칼을 막거나 기합소리가 울려퍼

지고 있었다. 참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최형기가 허공에 솟구치자마자 마감동은 부모의 매를

피하는 겁쟁이 아이처럼 주르르 소나마 있는데로 달아나버렸던 것이다. 최형기는 칼을 휘두

를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는 어이가 없어져서 짧은 순간 마감동과의 거리를 눈대중하여보

였다. 아직은 그가 공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마감동은 예도를 잔뜩 세워들고 긴장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형기는 칼을 머리 위로 치켜들어 표두를 취하고 감동의 두개골을 내리

치며 뛰어들었다. 감동은 뒤로 크게 몇발짝 물러났고, 칼을 찔러들어가자 소나무 뒤로 피하

였다. 구경하고 섰던 군졸들이 그 꼴을 보고는 맥도 빠지고 우스워져서, "자식이 똥 마려운

게로군." "저런 것이 어찌 화적의 수괴 노릇을 하였을꼬." 주고 받기도 하였으나 어떤 자

는 아예 크게 외쳤다. "그만 칼을 거두시지요. 소인이 단 세합에 목을 베겠습니다." 최형

기는 칼을 내리고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가운데로 나와서 싸우자. 꽁부니를 빼려면 관군에

투항해라." 최형기는 마당의 가운데로 나섰고, 마감동은 아직 안심이 안돤다는 듯이 조심스

런 걸음으로 소나무 밑을 떠났다. 그는 짜른 칼을 굽힌 팔에 세워 들고 측면으로 서 있었으

, 전혀 공격할 자세라기보다는 우선 막아내기에 급급한 자세였다. 마감동은 우선 최형기

의 무예의 신명을 죽이는 데 성공하였고, 그의 화려한 동작의 연결을 토막토막 끊어놓은 것

이다. 최형기가 숨기고 있는 응변의 기교는 무예 동작의 연결 가운데서 나오는 법이었으니,

마감동은 받아주는 동작이 없으면 제풀에 투박한 헛손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감동은 그를

베어 버릴수 있는 지점을 두 군데에다 정하고 있었다. 최형기가 그의 다채로운 기교를 펼칠

수 있으려면 그는 이 빈터를 떠나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익힌 무예는 훈련원 마당이나 진

영의 습련장처럼 땅이 평평하고 널찍한 곳에서 자우롭게 익힌 것이었다 그에게서 종횡무진

할 터를 빼앗으면 그의 칼은 무디고 둔하게 변할지도 모른다. 몰아넣는게 아니라 짐짓 패하

여 허겁지겁 달아나 유인하여 바짝 끌어들여서 돌연 공세를 취하면 그는 무력해질 것이다.

그장소란 느티나무 아래의 비탈이었다. 거기서 미끄러지면 눈이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눈밭

이고 바로 몇 걸음 아래 얼어붙은 시내가 있었다. 눈밭이 그의 마지막 구덩이가 될것이었다.

그 다음 장소는 소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동북쪽 마을의 길 가운데였다. 길을 벗어난 빈터

의 땅에 내려앉은 눈들은 발목을 덮일 만큼 쌍여 있어서 디딜 적마다 뽀드득거리는 부드러

운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거의 미끄럽지 않았다. 그리고 길이 되어 있는 곳은 사람이 많이

다녀서 다져지기는 하였으나 역시 표면이 울퉁불퉁한 채로 녹고 얼고 하여 미끄럽지 않았

. 그 길 위쪽에는 소나무 그늘에 언제나 가려져 있어서 다져진 채로 미끄러운 빙판이 되

어 있었던 것이다. 최형기를 그곳에 끌어들여 발밑을 불안하게 해주고는 역습하는 방법도

있었다. 마감동은 몇번 더 최형기의 신명을 맥빠지게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의 공격

의 예기를 꺾어줄 필요가 있었다. 최형기는 그를 정면 공격해서는 별로 소득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역시 저꼭에서 노리는 것은 단칼에 베는 일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단처를 잘 알

고 여러 합으로 부딪쳐 싸우기보다는 자기의 동작이 흐트러져 허점이 보일 찰나를 노리려는

게 아닌가. 좌우 포청의 포도관이나 젊은 낭관들이 일세의 검객이라도 혀를 차는 최형기로

서는 마감동의 재간의 깊이나 수준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최형기는

마감동이 한번도 검법을 쓴 적도 없고 아예 칼을 휘두르지도 않았던 데에 생각이 미치자 의

심하는 마음이 벌컥 일어났다. 좋다, 그에게 공격하도록 해주자. 그에게 허를 내보여 그의

칼날이 어느만큼이나 되는가 가늠해보자. 최형기는 아까보다는 동작이 훨씬 신중해졌다.

는 마감동에게 직선으로 달려들지 않고 칼을 천천히 휘돌리며 한발 두발 다가섰다. 그는 하

반신을 드러내면서 수두를 취하여 단검으로 마감동의 가슴을 찌르며 달려들었다. 상대는 옆

으로 몸을 비키며 그의 허리나 배를 베거나 찌를 것이며, 아니면 은망으로 구렁이처럼 그의

측면으로 피해 나가면서 목이나 어깨를 종 또는 횡으로 벨 것이다. 그때에 최형기는 자신의

장기인 기격을 할 생각이었다. 수도로 허를 보이며 달려들어서는 그의 동작이 나오자 마자

무릎을 바짝 구부려 쭈그리고 찰싹 붙어 양각으로 아랫배를 찌를 셈이었다. 연이어 다리를

넣어 딴죽을 걸면서 그의 칼을 머리 위로 걷어내어, 다른 다리로 낭심을 차올리면서 앞으로

숙이는 상대의 목덜미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감동은 찔러

들어가는 최형기의 칼긑을 옆으로 두어 걸음 성큼 비켜났다. 그는 최형기가 다시 가까워지

는게 두렵다는 듯이 뒷걸음질로 미리 멀찍하게 물러났다. 최형기는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솟구쳤다. 혹시 김식은 실수하여 뒤를 당한게 아니었을까. 최형기는 의심을 하면서 마감도

으이 신통찮은 동작에 이끌려 들어갔다. 의외로 검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자일지도 몰랐

. 최형기 자신도 모원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즉 단병접전에서 조급하게 이기려 하는

자는 실패가 많고, 적을 무서워할 줄 아는 자는 강하며, 나만한 재간이 없다고 자만하면 반

드시 패한다. 적을 공격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고 적의 속임수는 역으로 이용하며, 강건한 적

은 느긋하게 다룬다. 특히 검의 대결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의 부딪침이니 기예를 다투기 정

에 먼저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최형기는 돌아볼 사이도 없이 마감동에게 육박해

들어갔다. 마감동은 당황한 얼굴로 칼을 쳐들어 측면을 가리우듯 하면서 돌아보았다. 최형

기는 응익으로 날아들어가듯 하면서 날개로 참새를 후려치는 매같이 칼을 수평으로 그었다.

칼이 이미 앞으로 나가는데 최형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하였다. 발이 허청하였던 것

이다. 그의 몸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쏠리는 듯할 적에 불에 타는 충격이 앞으로 지나갔고

그는 반사적으로 다리르 뻗으며 나자빠졌다. 이번에는 숙이는 머리 위로 싸늘한 칼바람이

쌩 하고 지나갔다. 소나무 그늘 아래의 빙판으로 최형기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마감동은

그가 들어서자마자 몸을 돌리면서 좌요격하였고, 이어서 다른 발을 떼어 반대로 돌면서 후

일격하였던 것이다. 최형기는 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다리를 굽혀 재주를 넘었고, 마감동은

으레 대련에서 그랬듯이 검을 거두고 기다리지 않고서 냉혹하게 내려 찍었다. 방금 최형기

가 누웠던 자리에서 얼음 조각이 튀어올랐다. 유수룡은 손을 슨들었다. 궁수들이 얼른 전통

에서 살을 뽑아 활에 메기고 시위를 힘껏 당겼고, 유군들은 칼을 뽑았다. 그러나 최형기가

빙판을 벗어나서 허리를 굽신하더니 날렵하게 뛰어 일어났다. 마감도은 몇발짝 움직였을

분 그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최형기는 온몸이 갑자기 땀으로 젖은 듯하였다. 무섭고

도 정확한 칼 솜씨였다. 그느 가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옷이 베어져서 너덜거리고 있었는

데 자상을 입었는지 하반신이 축축했다. 최형기는 미간이 좁아졌고 이마에 밴 땀을 소매로

쓱 닦았다. 그는 이 싸음에서 처음으로 바짝 긴장했다. 최형기는 칼 쥔 손을 바꾸어 바지춤

에다 손바닥의 땀을 닦고 나서 칼을 고쳐 잡았다. 마감동은 다시 몇발짝 움직이더니 마당

가운데로 들어오지는 않고 천천히 가녘을 오른쪽으로 돌았다. 느티나무 있는 쪽에 그가 이

르면 서쪽의 지는 해를 정통으로 받게 되어 있었다. 초형기도 신중한 동작으로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 마감동이 막 느티나무께에 이르렀을 때 최형기는 맨 처음처럼 벌레를 쪼려는

제비같이 낮은 자세로 달려들었다. 마감동은 옆으로 비켜났고 최형기는 변형시켜서 마강동

의 옆구리에 칼을 꽂았다. 그러나 감동은 그 칼날을 제 허리 아래로 끌어올린 예도의 칼로

막고 밀었다. 감동은 발을 들어올려 무릎으로 옆구리를 지르는 최형기의 동작을 다른팔로

막고는 힘껏 밀어냈다. 최형기는 비탈에서 주르르 미끄러져서 마감동이 바라던 바로 그 눈

밭에 깊숙이 빠지고 말았다. 최형기는 가가스로 일어나면서 마감동의 칼을 막기 위해 위를

올려다보았다. 두 무릎은 재빨리 움직일 수가 없게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마감동은 곧 먹

이를 감키려는 백사처럼 입을 활짝 벌리고 달라들었다. 최형기는 위를 바라보았으나, 바로

역광이 똑바로 눈에 들어와 그의 거뭇한 몸짓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때에 마감동의 몸이 멈

, 하면서 잠깐 기울었다. 최형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칼에 검은 형체를 가로 그었다.

사람의 살을 베는 약간 묵지근하고 말랑한 무게가 손아귀에 실려왔고 붉은 반점들이 칼끝에

서 뿌리쳐져서 눈밭위에 흐트러졌다. 마감동의 몸은 빈 자루처럼 풀썩 꺽여서 넘어져 왔다.

그이 어깨 옆을 지나서 마감동은 눈 우에 처박혔다. 최형기는 칼을 허공에 치켜 채로 옆에

쓰러진 자를 내려다보았다. "내가...졌다." 최형기는 얼결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감동의

등에는 화살이 반 넘어 깊숙하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위기를 보고 궁수가 재빨리 화

살을 날려 마감동의 등을 꿰었던 것이다. 그때가 바로 마감동이 주춤하면서 하반신을 재보

인 순간이었다.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최형기는 위로부터 직도로 내려치는 감동의 칼날에 어

깨가 잘려나가며 쓰러 졌을 터였다. 최형기는 바싹 말라붙은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는 하늘

을 올려다보았다. 이 싸움에서 그는 너무도 많은 것을 배웠던 것이다. 그는 시신을 다시 내

려다보고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어디서 이런 자들이 생겨나는 것일까. 그는 어디서 이렇게

훌륭한 재간과 싸우는 궁량을 배우고 터득했던 것익ㄹ까. 실로 거의 검숨은 춤에 지나지 않

았다. 달리 말하자면 최형기는 검술에서는 이겼으나 싸움에서는 참패했던 것이다. 최형기는

허청거리며 비탈을 올라갔다. 군졸들이 달려와 그를 위로 끌어올렸다. 유수룡이 앞장서며 말

하였다. "수급을 제가 베겠습니다." 최형기는 찡그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시신이

따로 있으니 따로이 수습은 벨 필요가 없다. 산협의 매복을 풀도록 하고 모두 여기서 쉴 준

비를 하여라." 최형기는 찢어진 옷자락에 감동의 피가 묻은 칼을 닦고 나서 칼집에 넣었다.

"시신을 어찌할까요." 기패관 하나가 물어왔고, 최형기가 말하였다. "감영에까지 끌고 간

. 화살ㅇ르 뽑고 촌가에서 섬을 내어 싸서 묶어 두도록 해라." 최형기는 빈터의 끝에 툇

마루에 가서 털썩 걸터 앉았다. 빈터에는 방금 그들이 남긴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그는 물끄러미 그 흔적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번 토포는 실패였다. 구월산 인근 사 읍을 벌집

쑤신 듯 만들어 놓고 산협의 두 촌락을 초토화시키고서, 민심은 얻지 못하고 원망이 하늘까

지 쌓이게 된 것이 아닌가. 최형기는 기지맥진해서 아득한 한양을 머리에 떠 올렸다. 그에

게는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군사들은 마감동의 몸을 뒤집었다. 최형기에게서 입은 상처

는 매우 깊어서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군사들은 그러나 그 끔찍한 상처보다도 강렬하게

쏘는 듯한 눈빛 때문에 섬짓하였다. 그 두 눈은 아직도 타오르는 듯이 크게 뜨고 허공을 노

려보고 있었다. 8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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