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산 5
지은이:황석영
출판사:창작과 비평사
봉사자:조정현, 신중갑
제 2 장 귀 소
1
은을 장림은 구월산 서쪽에서 흘러내린 물과 묵산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쳐져 한내
를 이루고 가녘에 보를 쌓았는데 그 위로 자라난 숲을 이르는 것이다. 이 숲은 울창하기가
큰애기의 삼단 머리카락 같아서 햇빛도 들지 않도록 빽빽한데 바람맞이인지라 나뭇잎과 가
지가 서로 비벼대는 소리가 항상 파도와도 같다.
곳곳에 소로가 있기는 한데 휘늘어진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젖히며 근 오 리 사방의 승을
헤집어 나가야만 하였다. 봄에 답청철이 되면 숲가에는 술자리가 여기저기 벌어지고 여름철
에는 더위를 피하는 한량들이 모여들었고, 가을 또한 단풍이 그럴 듯하여 좋은 정치를 이루
던 곳이다. 또한 그뿐이랴, 활달하고 거칠 데 없는 상것의 남녀가 제멋대로 눈맞고 배가 맞
아 통정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연중에 가장 심할 적이 단오절이니 그날은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천예 노비들도 모두 쏟아져 나와 각색 놀이를 즐기고 구경하니 자연히 장림에서는
음사가 심심치 않게 벌어지곤 하였다. 그래서 말매나 한다는 한 잡배가 일컫기를, 장림춘색
은 운우지수로 번창한다 할 지경이었다.
따라서 일반 부녀자가 그 근처에서 얼씬하기라도하면 실절이나 한 것처럼 쑤군거렸다. 장
림에 바야흐로 추색이 깃들어 나뭇잎은 각색으로 변하였는데 들새가 가득 날아들어 지저귀
고 있었다.
도화는 읍내를 벗어나서 역참거리로 내려가다가 누가 보는 이가 없는가 살피고 나서 얼른
숲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숲으로 뛰어들고 나서 할딱이는 숨을 진정시키노라고 잠깐 주저앉
아 있었다. 숲속에는 켜켜로 낙엽이 떨어져 폭신하고 그것의 썩는 싱그런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도화는 갑송이가 집을 비우기만 하면 잇달아 탑고개를 내려오는 버릇이 들어 있었
다. 그 버릇은 날이 갈수록 심하여졌고 갑송이가 집에 있을 적이면 공연히 짜증을 내고 한
숨을 쉬고는 하였다. 탑고개의 다른 식구들이 대강눈치는 채고 있었으되 갑송이에게 넌지시
일러주지 못하였던 것은 그가 제 처를 남달리 끔찍하게 사랑하는 때문이었다.
도화는 아직도 아이를 낳지 못하였으며 봉순이가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남아놓은 뒤부터는
갑송이도 더욱 안달이 나서 은근히 아내의 몸에 이상이 없는가를 묻곤 하였다. 그러나 갑송
이의 성격이 자상하지를 못하고 정을 표함에 있어서도 우악스러우니 온갖 남자를 접했던 사
당인 도화가 안타까워지는 것도 당연하였다. 다감한 도화로서는 무지하고 바위 같은 갑송이
가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도화는 얼굴이 곱상하고 말씨 부드러우며 태가 점잖고 손길이 은
근한 서생을 좋아하였다. 그녀의 첫사랑이던 유도령이 그러하였거늘 어찌 갑송이께로 마음
이 기울어지겠는가. 공동이, 밥쇠, 못난이 하면서 제풀에 노여워 애꿋은 주발을 동댕이치기
도 하고 혼자서 가승을 쥐어 비틀며 달래고는 하였다.
도화가 읍내의 배서방과 통정하다가 그가 얼씬도 않게 되자 등만 있으면 탑고개를 내려가
기웃거리더니, 다시 만나게 되었었다. 그자는 집을 떠나는 길산에게 마침 적발되어 혼찌검이
딘 뒤로는 아예 탑고개로 얼씬하려 들질 않았다. 그리고는 주변의 한량들에게 도화와 통정
하기를 권하였으니 나중에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면 혼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도화는 처음에는 빼는 체하다가 다른 사내와 한번 그러고 나서는 별로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중에 제일 마음이 가는 사내가 있었는데 조산벌 부자의 데릴사위인 안시
방이었다.
안생은 배서방처럼 은율서 방매나 먹고 지내는 처지인데 본시는 처갓집 서기의 아들이었
다. 궁중미가 나는 조산틀 쌀이라면 차지고 기름진 것으로 유명한데 이 조산들에 수백 결의
토지를 가진 그의 처가에서 더부살이로 자라난 자였다. 그러니 원래부터가 남의 행랑붙이였
던 셈이다. 주인에게 외동딸 하나만이 있고 후사가 없더니, 하는 수 없이 그래도 한울타리
사람이 믿을 만하다 하여 영리하고 인물도 잘난 제집 서기의 아들을 사위로 삼았던 것이었
다.
'명심보감에도 졸부귀불상이라고 하였거늘 갑자기 행랑채에서 작은사랑으로 올라앉아 부
가용의 유산을 상속받을 유일한 사위님이 되었으니 몸은 편할망정 마음에 병이 들었던 것이
다. 아내가 은근히 그를 멸시하며 집안 천예들까지도 그의 말이라면 슬슬 코방귀를 뀌는 것
이었는데 안생이 어려서부터 그들과 함께 자라났고 동무였던 까닭이었다. 그는 차츰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여 도저히 견디지를 못하였고 읍내의 할일 없고 신관 편한 한량들과 어울
리다 보니 집을 메로 삼게 되었었다.
그의 동무들이 집안 내력을 잘 알면서도 안생을 받아주었던 것은 그가 놀이 비용의 대부
분을 대었기 때문이었다. 체면 때문이라 하여 서기 하던 그의 아비와 가족들은 솔가하여 따
로 나강는데, 그 직임을 자연히 안생이 맡아서 미곡 수십여 석쯤은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
다. 이러한 은율의 한량잡배가 대략 칠팔 인이 되었는데, 시회 핑계로 주연이요, 활쏘기 핑
계로 외입질을 하며, 인근 사방을 몰려다녔다.
배서방은 길산에게 들킨 뒤에도 정작 도화의 서방인 갑송이는 전혀 눈치도 모르는 벽창호
임을 알고 나서, 차츰 기탄이 없어져 무시로 사람을 보내어 도화를 내려오도록 하였었다. 재
미있는 여인이 있으니 국초의 어을우동이 환생한 듯하다고 말하여 주위에서 모두들 군침을
삼켰다. 그들은 시회를 한답시고 탑고개 가짜이의 계곡에 나아가 도화를 불러오게 하였고,
도화 역시 갑송이가 된목이골에 나아간 참이라 기꺼이 놀러 나왔다. 그리고는 노래와 춤으
로 즐긴 연후에 그자리에서 눈맞은 안생과 더불어 물가에서 어울렸다.
안생이 말하기를, 만약 그대의 맛을 음식에 비하자면 팔진미나 표태와 같고 우리 집 년은
명아줏국이나 보리밥과 같네, 하였다. 그러나 안생은 역시 데릴사위인지라 소문이 나는 것을
두려워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날이면 날마다 도화를 만나고자 애를 키우는데, 마침 그
서방이 멀리 출타했다는 것을 듣고는 대뜸 사람을 보내어 내려오라 일렀다. 그는 행음도 행
음이려니와 우선 급한 의논이 있었던 것이다. 도화가 몇번 만났던 장소에 맞아 있으려니 기
침소리가 들리며 천 옷자락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여기예요."
알려주며 일어나니 키가 훤칠하고 눈은 어글어글하며 낯빛이 희멀끔한 사내가 술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그는 계집의 손목을 잡아 끌어안으려 하였다. 도화가 허리를 틀며
그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아이, 백주 대낮에 선비님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얘 말 마라, 나는 아예 숨넘어갈 뻔하였다. 이제 벌써 한 달이 지났지 않느냐. 느이 서방
은 어디에 갔니?"
"송도 댕기러 갔나 본데, 한 달포 집을 비울 거예요."
"거참 잘되었구나."
"마을 사람들 눈두 있으니까 대낮에 사람을 보내구 그러지 말아요. 만약에 우리 집 곰퉁
이가 알면... 나는 물론이구 선비님두 맞아 죽을 거예요."
도화가 눈을 흘기며 말하였고, 안생은 껄껄 웃었다.
"도둑놈은 한 죄요 잃은 놈은 열 죄라구 않더냐. 제놈이 서속밥 먹고 팔심이 약간 세다구
하나 천생 광대가 우리를 어찌하겠니. 은율 읍내에 내려와 활개만 치면 즉시루 잡아다가 관
가에 떨굴 작정이다. 그래두 너를 보아 모른 척하는 것이지만 탑고개에 수상한 자들이 모여
산다는 건 우리두 대강 알구 있다. 구월산의 화적 당들과 한통속일 것이다."
도화가 아무리 다른 사내와 배가 맞았다손 치더라도 그런 말에 함부로 끄덕일 수는 없었다.
"아이 참 뻔뻔하기는... 남의 계집 후려내구, 화적당이 따루 있답디까?"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너를 만나 우리 집 것은 서방 두고 홍살문 세우게 되었구나."
"안에서 아시면 쪽박 들고 쫓겨나는 신세이시니, 사내 대장부가 배알 없이 그런 더부살이
를 어이 하시겠수."
두 사람은 낙엽을 잘고 누워서 서로 툭툭 치며 이런 농을 주고받았다. 도화가 한숨을 폭
쉬고는 하늘 위에 떠가는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이년의 팔자 기박하기두 하다. 어쩌다 산중에 묻혀서 먹는 것은 서속밥이요, 입는 옷은
무명치마, 서방이라는 게 아내 괼 줄 모르는 반편이니, 차라리 시집 못 가구 연희나 나댕기
던 사당질이 좋았구나. 백련이가 부러워 죽겠네. 이것 봐요, 날 데리구 어디 해주나 송도나
한양 같은 대처루 가서 살아요. 한 몇백 냥 준비하여 떠나면 우리 둘이
서 끼니 걱정 않구 유복하게 살수 있다우."
안생은 옷과 도포를 벗어 나뭇가지에 걸고 도화의 치마를 슬슬 걷어올리며 말하였다.
"내게 다 생각이 있다. 오늘 그렇지 않아두, 우리 집 아이를 보내어돈을 치르게 하였는
데... 너두 마음에 들 게다."
"그까짓 패물이나 옷감 따위는 사주어포 가질 수가 없어요."
"우리가 만날 집을 구해두었다."
안생은 한내를 북쪽으로 올라가 그의 집동네가 있는 반대편의 건지산 아랫녘에 방이 세
칸 딸린 아담한 초가를 구입 해놓았던 것이다. 원래 누가 살다가 옮긴 빈집이었던 것을 싸
게 사들여 수리 해두었던 것이다. 위치가 마을에서 벗어나 으슥한 산길 초입에 있으니 밀회
를 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잘하셨어요. 그 집에 입 무거운 할미나 데려다 놓으면 좋겠네요."
"다 조처 해두었다. 네가 집에서 나을 수 있을 제 언제든지 산을 내려와 알리면 된다. 우
리가 만나고 싶거나 같이 지내고 싶으면 그 집에 가서 열흘이구 보름이구 함께 살수 있게
되었다."
"동무들께 알려주지 말아요. 번거롭고 또 한입 건너 말이 퍼지면 큰일나요."
"이건 아무도 모른다."
안생이 더 참지 못하고 도화의 치마를 걷어올리고 속곳을 벗기니 희고 따스한 배와 쟁쟁
한 허백지가 드러났다. 도화는 백주가 부끄러워 두 다리를 오므리며 낙엽 위에 드러누웠는
데, 안생이 바지를 급히 내리고 엎드렸다.
안생이 도화에게 오금을 못 쓰고 빠져버린 것은 그의 성정이 원래 음탕해서가 아니었다.
행랑살이로 잔뼈가 굵어 대번에 데릴사위가 되고 나서 생전에 겪어보지 못한 운우를 도화로
부터 겪게 되었고, 집안에서는 늘 기를 펴지 못하는데 도화는 심정으로 만만하였던 것이다.
처음에 읍내의 악우들과 놀러 가서 도화와 어울릴 제 그녀가 남의 처라는 기이로움과 또한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요기에다 능숙한 행음질에 중도에서 토설하고 말았었다.
안생의 어린 처는 다만 사지를 내던지고 죽은 듯이 누워 있거늘 웬일인지 양물이 움츠러
들어 방사가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연히 새벽잠을 설치고 찌뿌듯한 몸으로 아침을
맞곤 하였다. 그것은 아가씨로 대하였던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탓이기도 하였다. 도화
가 안생을 접하고 보니 배서방이나 그의 동무들과는 달리 사람이 유순하고 야무진 데가 없
었다. 도화는 본시 색정이 강하고 나긋나긋한 괴임을 목마르게 원하는 여자인지라 맞춤한
상대를 만난 셈이었다.
사내의 무뚝뚝함과 정 없음과 무심함에 진저리를 치는 여자란 본시 과도히 사내를 겪은
여자들에 흔히 있는 법이다. 도화는 저도 모르게 안생의 어수룩한 구석에 끌려들어 남편보
다도 정이 들고 말았다. 사람이 제 성정의 근본을 따지면 모두 핑곗 거리도 있고 너그러이
용납할 면도 있건마는 하늘에서 정한 인연이 서로 남의 처와 남편이니 위태롭고 사악한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안생이 도화와 행사하는데 구렁이 만난 쥐와 같았다. 온몸이 떨리고 초조한 기색은 말잠
자리가 수면을 적시는 것과 같은 바쁜 태깔이라 도화가 거조를 보아하매, 용두질 외에 아무
것도 모르는 시골 선머슴이나 다름없었다. 음사의 횟수가 잦아질수록 안생은 차츰 능숙하여
졌고, 도화는 갑송이 따위는 까맣게 잊을 정도로 탐닉하였다.
도화는 낙엽 위에 드러누워 안생의 허리를 안고 입을 맞추고 혀를 물며, 또한 체질하듯
흔들어서 허리를 가볍게 놀려 엉덩이가 자리에 붙지 아니하였다. 자연히 안생은 않는 소리
를 내고 정신이 흩어지고 혼백이 날아가서 길게 한숨과 신음을 내지르고는 옆으로 넘어졌
다. 그들은 나란히 누워서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었는데, 흠뻑 젖은 땀이 가을바람에 썰렁히
식어갔다. 계집이 아직도 음기가 남아 다정하게 사내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목을 쓸어안
으며 푸념하였다.
"우리 이렇게 죄짓고 만날 것이 아니라, 어디 먼 대처에 나가서 살자니까... 노상에 주막을
내고 당신은 청주가 되고 나는 주모가 되면취재가 쏠쏠할 거예요."
만약 음사 직전에 계집이 말하였다면 사내는 진심으로라도 반드시 한번 어울린 연후에 그
렇게 결행하리라 마음먹겠지만, 이미 탕정한 바라 이기심만 바닥에 조금 괴어 있게 마련이
었다.
"조산틀의 기름진 논밭을 버리고 너와 달아나면 내 일신 패망은 물론이요, 부모님들은 어
찌되겠느냐. 어서 옷을 입구 우리 집으루 가보자꾸나."
"나는 그럼 고양이처럼 몰래 암행만 하란 말이우."
"그러면 나두 사내 대장부라, 너희 주인에게 가서 이러저러하였으니 내 소실이나 삼겠노
라고 얘기하란 말이냐."
도화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일어나 치마끈을 죄어 감으며 종알거렸다.
"범의 코털을 뽑는 격이지..."
"오늘 집에 돌아가지 않아두 되지?"
안생이 아직도 음욕이 미진하여 옷매무새를 고치고 흐트러진 머리와 붙은 나뭇잎을 털어
내며 쓰다듬는 도화를 가볍게 안으며 물었다.
"안돼요. 늙은이가 어제나 입이 잰지 동네방네 나다니며 지껄이는 것은 물론이요, 주인이
돌아오면 낱낱이 일러바칠 거예요."
"젠장할, 그렇다면 집칸을 마련하나마나 아닌가."
"흥, 꼭두새벽부터 저녁녘까지 붙안고 계시구리."
두 사람은 아쉬운 대로 일어서기로 하였다. 도화가 곧 돌아가기 전에 안생이 구하여둔 집
도 알아둘 겸 둘러보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장림숲의 반대편 쪽으로 나아가 한내를 따라서
자갈밭을 올라갔다. 한내가 합고개 쪽과 읍내 쪽으로 갈라지는 어름이 곧 건지산의 뭉뚱그
린 마지막 봉우리가 멈춰진 곳이다. 앞서서 걷던 안생이 개천을 건너려고 옷자락을 걷고 버
선을 벗었다. 그는 등을 돌려 대고 쭈그려앉았다.
"자, 이리 와서 등에 업혀라."
"남이 봐요. 그냥 건너지 뭘."
"보긴 누가 본단 말이냐."
둘이서는 싫지 않은 실랑이를 하다가 안생이 도화를 업고 첫물을 건너갔다. 매사에 이러
하니 도화는 언제나 읍내에 내려오면 합고개를 까맣게 잊어버렸고, 더구나 갑송이의 얼굴조
차 떠오르지를 않았다.
동구 밖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집이라 임집으로 쓰기보다는 주막에 걸맞을 집인데, 그들
에게는 꼭 알맞았다. 싸리울을 허물고 대신 토담을 쌓았으며 부엌 옆으로 안방과 윗방이 나
란히 달렸고 방 앞에 비좁은 툇마루가 나 있는 초가가 마당 가운데 덩그러니 있었고, 그 건
너편에 사랑채가 있었는데 방이 한 칸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쓰지 않은데다 수리도 하지
않아서 벽은 무너져 수수깡이 드러났고 구들도 꺼져있었다.
결국은 안방과 윗방만 쓰게 되어 있는데 밀회 처로서는 충분하였다. 도배도 깨끗이 되어
있고 세간살이도 필요한 것만 간추려서 부엌에 들여놓았는데 도화는 여기가 안생과 도방살
림을 차리는 자기 집만 같았다. 집 마당에만 싫으면 은율인지 어딘지 알 필요가 없었다. 도
화가 툇마루에 걸터앉으며,
"아... 이게 우리 집이었으면..."
하였다.
"그럼 뭐 어디 봉노에라두 온 줄 아느냐?"
"어쩌면 저럴 때엔 우리 집 밥쇠하고 똑같을까."
안생이 도화의 손을 끌었다.
"잠깐 들어가서 다리쉬임이라두 하구 가자."
"얼마나 걸었다구 쉬어요. 난 빨리 가야 해요. 저녁을 지어야지."
도화가 손을 뿌리치며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안생은 금방 기겁을 하였다.
"한달 만에 겨우 만났는데, 벌써 가겠다니... 이젠 네가 식었구나."
"아이 참, 어린애같이 굴지 말아요. 그렇게 안달이 나면 날 데리구 뛰라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 가보세요. 집에서도 기다릴 거예요. 내가 내일 아침 먹자마자 내려올게요. 그리구 어서
집 보는 할미 하나 데려다 놓아요."
"알겠다, 내일 일찍 와야 한다."
그들은 서로 눈짓으로 헤어지기 싫은 정을 주고받고 한내를 사이에 두고 헤어졌다. 이튿
날 도화는 합고개에서 일찍 내려왔고 저녁녘에 다시 올라갔다. 도화는 하루도 탑고개에 붙
어 있는 날이 없었다.
"얘, 오늘도 바위넘이에 나가느냐?"
갑송의 모친은 설거지를 끝내고 툇마루에 앉아서 머리를 빗고 있는 도화에게 물었다. 그
러나 도화는 못 들은 체하고 머리를 틀어올리고 있었다. 겨우 아침밥을 디밀어놓고는 밥 한
그릇 따로이 아랫목에 넣어 두고 휘적 나가서는 땅거미가 질 무렵에 돌아오는 며느리가 못
마땅하기보다는 불안하였다. 모친은 갑송이가 출타할 적마다 집을 비우는 며느리가 처음에
는 심심하고 답답하여 그런가 보다 하였으나, 차차 이상스런 기미를 알아채게 되었었다. 어
디선가 불쑥 떠꺼머리 아이놈이 나타나 며느리를 불러내어 쑤군거리다 갔는데, 누군가 물으
면 된목이골에서 전갈하러 온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된목이골에서 온 사람이라면 자기
를 꺼릴 까닭이 없다고 생각한 모친은 그의 며느리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구나 밭을 매러 나간다는 년이 곱게 세수하고지분을 바르고 머리를 감으며 단장을 하는
것이라, 언젠가는 갑송이에게 넌지시 말해주리라 하면서도, 제 처를 끔찍이 귀여워하는 기색
을 알고는 또한 입을 떼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얘야... 사람이 말을 시키는데 어찌 대답이 없느냐?"
모친은 드디어 짜증이 나서 빼꼼히 열었던 방문을 바깥으로 탁 쳐냈다.
"에그 깜짝이야..."
질겁을 하며 비켜앉은 도화가 눈꼬리를 치켜뜨며 시어미를 노려보았다.
""아이 참 못살겠네. 왜 또 아침부터 절 들볶으셔요?"
"뭘? 들볶는다구... 그래 젊은 년이 가장두 없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싸돌아댕기니 잘하
는 노릇이냐?"
"왜요, 가장이라구 맨날 할일 없이 동분서주 다니면서 떼돈을 벌어다 줍디까. 바위넘이 걷
이를 끝내야 하잖아요."
"내가 다 보았다. 사람 손 간 흔적두 없는데 멀써 며칠째나 그 핑계를 대련?"
"난 물라 정말..."
도화가 발을 구르더니 얼굴을 두 손에 가리우고 우는 시늉이었다. 모친은 한숨을 길게 내
쉬고 나서 방문을 닫고 중얼거렀다.
"에그, 인연 없는 부부는 원수보다 더하다더니 너희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얘, 장서방댁
좀 보아라. 남편이 집을 비운 지가 벌써 몇해째더냐? 그 집엘 가보면 부엌 안방 사랑 할 것
없이 포실한 살림 기운이 넘치더구만, 그게 다 아낙네의 할 탓이다. 우리 집을 보아라, 썰렁
하고 적막하기가 꼭 원의 객사방 같으니..."
"어머니는 그저 툭하면 그 집을 들어 저를 꾸중하시지."
"눈에 뵈는 대루 하는 얘기다."
도화는 일부러 싸리비를 들고 마당을 홱홱 쓸어내면서 못 듣는 양을 하였다. 그리고는 부
엌으로 들어가서 공연히 그릇들을 왈강달강하며 심사를 부리는 것이었다. 며느리가 아무리
그리해도 모친은 단 한마디만은 참았다. 바로 노류장화 사당년이란 말이었는데 언젠가 야단
을 치다가 그 말이 입 밖에 나오자 도화는 감나무 가지에 목을 맸던 적이 있었다. 갑송이가
끌어내려 손발을 주무르고 코를 빨아서 구명해내었는데 갑송이는 제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
해하였고 모친은 그런 꼴이 불쌍하여 다시는 입 밖에 내지 않았었다. 모친은 질금거리며 눈
시울을 씻고는 혼자서 탄식하였다.
"에유... 불쌍한 내 새끼..."
갑송의 모친은 무력하게 도화의 안달을 말리지도 못하고 한탄하였다. 잠시 후에 아무런
기척이 없어서 방문을 열고 내다보니 이미 도화는 살짝 빠져나간 뒤였다.
"이것이 분명히 샛서방이 생겼고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미친 꼴을 보일 리가 있을까."
갑송의 모친은 시름에 겨워 앉았다가 가끔씩 도화가 되돌아오는가 하여 귀를 기울여보고는
하였다. 며느리는 포악을 부리며 나갔으니, 공연히 빈집에 올데갈데 없이 떨어진 것만 같아
서 갑송의 모친은 저도 모르게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삽짝을 열고 마을길을 거슬러 올라
갔다. 때는 가을철이라 괴뢰배 사람들은 거의 연희 출행을 나가서 마을에는 아녀자들만 남
았다.
그전 재인말 사람들도 몇몇이 된목이골에 들어갔을 뿐 나머지는 대를 지어 연희를 나갔던
것이다. 갑송의 모친은 길산네 집으로 갔다. 재인말에서부터 친척처럼 가까이 지냈고 길산
의 양모 안무당이 언제나 성님이라 부르며 잔시중도 들고 걱정도 해주던 것이다. 그녀가 길
산네 삽짝 안으로 들어서니 장충은 툇마루에서 담배를 썰고 있었고 안무당은 손자를 안아
어르고 있는데 봉순이는 절구질을 하는 중이었다. 안무당이 아기를 어르다가 들어서는 갑송
모친을 보고 반겼다.
"성님, 어서 오슈. 우리 수복이 웃는 것 좀 보우. 수복아, 큰할머니 오셨다."
길산의 아들 수복이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가무잡잡한게 판박은 듯이 제 아비를 빼었다.
수복이는 뭐라고 흥얼거리면서 손을 뻗쳐 갑송모의 손을 잡았다.
"갑송이 집에 없지요?"
장충이 물으니 갑송모는 지레 한숨부터 내질렀다.
"에그 속상해, 그저 이 집에 오면 사람 사는 집 같구먼. 어디 보자 수복아, 큰할머니가 안
아주라."
갑송모가 수복이를 안고 어르니 수복이는 깔깔거리며 좋아라고 다릿짓이었다. 저도 따라
서 웃던 갑송모가 다시 혀를 차니, 안무당이 아이를 도로 데려가며 물었다.
"아니 성님은 서방 생각이 나서 그러우. 웬 한숨이 그리 청승맞어."
"늙마에 혈육이라고는 갑송이 하나뿐인데, 그 녀석이 무심하여 에미 속을 썩인다네."
"아니 갑송이가 왜 성님 속을 썩이우. 그런 효자가 없는데... 무심하기는 제 새끼 태어난
줄도 모르고 소식 한번 없는 우리 길산이가 더 무심하지."
안무당이 말하자 장충이 작두질을 멈추고 말하였다.
"그 댁 며느리 집에 있소?"
"에이 집이 다 뭐예요. 갑송이가 출타하면 덩달아 어디론가 내빼서는 저녁에야 들어오군
하지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심란허우."
안무당이 안심을 시키노라고 말하였다.
"다 젊고 철이 없으니 그러는 게유. 기운은 남아도는데 펄펄한 것들이 서방두 없는 집에
박혀 있을라나."
"아니... 그럼 이 댁 며느리는 기운이 쇠진한 늙은이라든가. 아무래두 그년이 셋서방을 보
는 모양이야."
절구를 찧고 있던 봉순이가 소매로 땀을 씻으면서 일손을 놓았다.
"아이 참 별생각을 다하셔요. 아무러면 아우님이 그런 짓이야 하겠어요. 어디 산에 약풀이
라도 따러 다니겠지."
갑송모는 어림없다는 듯이 손을 홰홰 내저었다.
"약풀 따러 댕기는 년이, 분단장을 해?"
봉순이는 어려서부터 길산의 동무로 자라난 갑송이에게 오빠라며 흉허물없이 지내오던 터
에, 또한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함께 혼사를 치러 은근히 도화에게는 친동기간 비슷한 정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음식을 하면 서로 나누어 먹기도 하였고, 바느질을 하면서 둘이 밤
도 새워보았다. 길산이 집을 떠난 뒤에 혹시 적적해하고 상심할까 염려한 갑송이가 저녁마
다 봉순이에게 마실을 보냈던 것이다. 봉순이는 애무당으로 자랐으니 곁으로는 비록 평범한
아녀자로 보였으나 안으로는 거센 열정과 신명을 담고 있었으며 물건을 볼 줄 아는 눈도 날
카로웠다. 바느질을 할 제 보아 알지만 도화는 참을성이 없고 손길이 세밀하지 못하였다.
감치기를 하는데 실밥이 사선으로 총총 박혀야 하건마는 첫 실부터 중간쯤까지가 고작이
고 그뒤부터는 줄이 비뚤어진다든가 사이가 뜨거나 사선이 길어지고 짧아지고 들쭉날쪽해지
던 것이었다. 얹은머리에 스리슬쩍 맺어두고 걸을 때나 바람이 불 적마다 한들한들 볼을 스
치는 제비댕기가 있는데, 봉순에는 금박에 은장식이 달린 호사스런 것을 가지고 있었다. 무
더리 나갔던 안무당이 혼사 전에 송도 보부상에게서 방물을 사올 적에 큰맘을 먹고 사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봉순이는 가장도 없는 집에서 구태여 단장이 무슨 소용이랴 하고 함에다
넣어두었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참빗에 물을 발라 단정히 빗어올리면 그뿐이었다.
어느날 도화가 제비댕기를 보고는 눈을 빛내며 머리에 달아보고 고개를 흔들어 나풀대는
댕기끝을 보기도 하며 탐하는 기색을 보고는, 봉순이는 마지못하여 시어머니 몰래 내주고
말았었다. 바위넘이 나한암 뒤의 밭을 매러 갈 적에도 도화는 그 댕기를 매달고 나다녔다.
봉순이는 그외에도 여러가지를 보고는 도화가 여느 사내를 만날 것이 아니라 다감한 외입장
을 만나 도방살림을 해야 성정에 맞을 것이라 짐작하게 되었다. 어느 봄날인가 둘이서 산나
물을 캐러 나갔었는데 골짜기를 다니다 보니 도화의 행적을 잃고 말았었다. 한참이나 아우
님을 부르며 이골 저골을 찾다가 혼자서 나물바구니를 채워가지고 돌아오는데 동구에 이르
러 잡가를 흥얼대는 도화의 목소리를 들었다.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보니 도화는 흐트러진 매무새로 네 활개를 펴고 누워서 봉순이가 오
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눈자위가 발그레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이 술잔이나 좋이 들
어간 듯하였다.
아마도 어느 시냇가에 답청 나온 한잡배들 틈에 끼여 잡가타령으로 흥을 돋우고 한바탕
신명을 달랜 모양이었다. 아우님, 날 저물면 호랑이가 나온다우 어서 가십시다, 하였으나 도
화는 코방귀를 뀌었다. 나올 테면 나오라지 차라리 총각 호랑이면 좋겠네. 날 업어다 호강시
켜줄 테지. 봉순이가 억지로 일으키려니 도화는 막무가내로 뿌리치고 드디어 조용히 꾸짖으
니 갑자기 어린애처럼 달려들어 봉순이의 가슴을 두드리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봉순
이는 어쩐지 가없고 애처로워서 취한 도화를 부여안고 느껴 울기도 하였다. 사내들은 도둑
질을 하여도 뜻이 있다는데 계집의 님에 대한 야무진 기갈은 어찌하여 티끌과 같다 할 것인
가.
봉순이는 남의 분을 빌어서 제 마음을 풀었다. 가끔 된목이골에 강말득이란 총각이 들러
서 금강산에 다녀온 소식을 전하더니 길산이 아버지가 되었고 수복이라 이름지었다고 전언
한 뒤에도 식구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도화가 논다니 버릇이
있음은 마을에 알려져 있었고, 갑송이조차도 아내가 사당 시절의 신명을 아주 떼버리지 못
하여 마음이 울타리 밖을 배회함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지만 탑고개는 괴뢰배들이
모여 이루어진 마을이고 갑송이 또한 재인말 출신이라 아이를 낳게 되면 저절로 까라지려니
여겨왔다. 아마도 여염 향리였다면 도화는 벌써 통장고 메고 돌림을 수십 바퀴 당하였을 터
이다. 도화가 산기가 없었으니 어려서부터 사당으로 팔려 팔도를 누비며 몸을 마구 굴린 탓
이었다.
간장을 마시고 지치를 몇 사발이나 마셨는지 몰랐다. 모가비는 출행날부터 돌아올 때까지
매 끼니마다 지치 달인 쓴물을 들이켜게 하였으니, 만약 손님의 아기라도 가지게 되면 행하
가 줄고 공밥 식구가 늘기 때문이었다. 과묵한 갑송이는 성미 한번 내지 않고 노모가 건강
이 좋지 않음을 도화에게 사정도 하고 은근히 달래기도 하였다. 그럴 때에는 도화도 눈물을
글썽이며 제 서방이 미륵이라도 된 듯이 섬기는 빛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딴에는 금실을 도
탑게 하느라고 갑송이와 더불어 정다운 농지거리도 하였다. 하지만 그럴 때뿐 며칠 지나면
다시 남편을 원망하고 탑고개를 벗어나려는 마음이 가득해져서 혼자서 가슴을 꽁꽁 치며 안
절부절 못하였다.
"아마 심을 보러 다니나 봐요."
봉순이가 느닷없이 그런 얘기를 꺼내었으니 도화의 출타벽을 발명도 해줄 겸 갑송모의 근
심도 덜어주려는 뜻이었다.
"심... 제깟 것이 신령이라두 보았나. 도라지 한뿌리 캐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제 저녁에 날 찾아와 하는 말이, 어머님이 근력이 없으셔서 아무래두 한뿌리
드셔야 회춘하시겠다면서요 심을 보러 다닌대요. 나더러 산신경을 가르쳐 달래서 배워줬지
요."
장충은 헛기침을 하면서 담배 썰기에 주의를 돌리는 척하였고, 안무당은 수복이를 안고
마루를 서성거렸다. 갑송모가 믿기지 않는 안색이다가 봉순이를 살피며 찬찬히 되묻고는 한
결 수심을 더는 듯해 보였다.
"정말이라면 거참 신통한 일두 있구나. 어디 그애가 산삼을 캐오면 내야 먹을 수가 있나.
젊은 것이 여태 산기가 없으니 제가 먹어야지."
비로소 갑송모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되어 주변 사람들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수복이와
어르고 놀다가 봉순이 해 내온 수수범벅을 얻어 먹고는 갑송모는 다른 얼굴이 되어 돌아갔
다. 안무당이 갑송모가 삽짝 멀리 가버린 것을 확인한 뒤에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얘, 무슨 쓸데없는 말을 그리 하느냐. 행여 그애가 심을 캐러 다니겠다. 읍내 출입에 눈
이 뒤집힌 걸 온 동네가 다 아는데 오히려 어른을 속이는구나."
봉순이는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섰다가 어쪈지 콧마루가 찡하여 조그만 소리로 대답하였
다.
"불쌍해요."
"어이구, 저애 말하는 것 좀 보아라. 그년이 늙은 시어미를 독방에 버려두고 읍내 내려가
서 슨 음행을 하구 다니는지 모르는 터에 불쌍해?"
안무당이 손가락질을 하며 혀를 차니 장충은 곧 봉순이를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오늘 저녁이라두 네가 마실 가서 슬쩍 귀띔해주어라. 티눈은 일찍 빼면 발을 절
지 않느니라, 경제가 되면 삼가겠지."
장충은 또한 갑송 어미의 실심보다는 파가한 갑송이의 절망을 염려하였다. 갑송의 모친은
이미 해가 서쪽 모을산 너머로 사라진 뒤에 방에서 나왔다. 골짜기라서 해가 일찍 지는데
오늘은 어핀지 봉순의 말이 믿어져 자기가 미리 저녁을 지으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모름지
기 혈육의 정도 징표가 그때마다 드러나고 쌓여서 눈송이처럼 불어나는 것이라, 하물며 고
부지간이겠느냐. 산을 헤매다가 물먹은 숨처럼 피곤하여 돌아올 며느리에게 배고프지, 어여
따듯한 밥 먹어라, 해준다면 식후의 등잔 밑에서 나누는 한담은 또한 얼마나 돈독하라 싶었
다. 모친은 쌀과 서속을 함께 일어 안쳐두고 땔나무를 부엌 봉당에 주워 오는데 문득 감탄
하였다.
아마 갑송이 손길일시 분명하였다. 장작뿐만 아니라 그것을 때기 좋도록 갑송이는 아내를
위하여 밥짓기 맞춤한 크기로 잘게 쪼개어두었던 것이다. 군불 지피는 용으로는 한손아귀쯤
의 장작으로, 취사용으로는 관솔 섞여 기름지고 속이 찬 땔감을 따로이 쌓아두었다. 과연 불
을 붙여보니 바지직거리며 좋은 불길이 솟고 솔가지처럼 매운 연기도 일지 않았다. 아궁이
를 들여다보느라고 불눈에 익어서인지 돌아다본 바깥이 어느결에 새까맣게 변하였다. 갑송
모는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에이 속없는 년, 심을 보든 서방질을 하
든 시어미가 이럴 제야 마음에 고이는 구석이 있겠지.
갑송이놈의 간절하고 애틋한 굄을 보아 나두 지난 건 모른 체하리라고 넉넉한 마음이 되
어갔다. 뜸이 다 들고 밥을 푸는데 발짝 소리가 삽짝 밖에서 다가들더니,
"에그 어머니, 이러시면 어떡해요..."
하는 자지러진 목소리가 들렀다. 돌아보니 도화는 손으로 치마를 감싸쥐고 부엌 앞에서 어
절 줄 몰라하였다. 찬찬히 훑어보는데 도화는 머리도 단정하고 옷매무새도 흐트러진 데가
없으며 한 손에 새끼줄 감은 호미를 들고 있었다. 갑송모가 그것을 보고는 역시 봉순의 말
이 틀림없음을 확인하고 얼른 주걱을 솥에 꽂으며 말하였다.
"그냥 있기가 갑갑하여 내가 지었다. 원, 해주는 밥만 얻어먹으니 살루 가지 않는 듯하구
나. 어서 올라가 쉬어라."
도화는 육신이 그렇다 치더라도 인정은 있는 계집이라 얼른 그 얄미운 호미를 던져두고,
바가지에 물을 떠서 손을 씻는데 마음이 볶이어 견딜 수가 없다.
"들어가셔요. 제가 반찬해서 상 들여갈게요."
고부간에 서로 들어가라거니 안 들어간다거니 실랑이를 하다가 시어미가 들어가 앉고 며느
리가 저넉상을 보았다. 두 여인이 마주 앉아 전에 없던 환담을 나누는데 밖에서 계시냐는
소리가 들리고 바느질감을 챙겨가지고 봉순이가 들어섰다. 도화는 오히려 이런 때에는 마음
씀새가 지나치다고 은근히 부아를 내면서 봉순이를 맞았다.
도화가 바쁜걸음으로 나한암을 허위허위 오르는데 봉순이가 누구인가를 마중 나와 있는
양하였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집에서 어머님 근심이 대단하시더라고, 산삼을 캐러 나다
닌다고 근심을 덜어드렀으니 호미나 가지고 들어가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해주던 것이다. 그
리고는 집 앞에 이르러 봉순이가 등을 밀어주면서 내일부터는 심 보기는 그만두고 우선 어
머님 새옷이나 지어드리자고 뜻있게 말하였다. 마침 겨울이 가까우니 솜을 두툼히 넣은 누
비옷을 장만할 철이었다. 도화는 갈팡질팡 탑고개와 건지산 아랫녘 밀회처로 마음이 뜬구름
같이 넘나들더니 이상스럽게도 제 집에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도화가 며칠간 집에 붙어 있더니 바느질에 그만 역증이 나고 말았다. 골무를 끼운 손가락
이건만 몇번이나 마음이 산란하여 찔리기도 하고 바느질 감을 밀어두고 눕기도 하고 일어서
기도 하며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차마 집 밖에 뛰쳐나가지는 못하고서 방문을 열어두고 삽짝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는 것이었다. 밤이 깊어져서 산새들이 고즈넉이 울부짖고 갑송모는 숨
결도 잔잔하게 잠이 들었는데, 도화는 윗방에 홀로 앉아 서성거리다가 그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다. 그녀는 기다리다 애가 단 안생이 하인을 탑고개로 올려 보낼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
셋별이 돋아나자마자 아침을 짓는다고 샘과 부엌을 공연히 오락가락 하였고, 연신 바위넘
이 고갯길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삽짝 밖에 인기척이 들리며 사람의 머리가 보였는데 의
관도 걸치지 않은 맨상투 바람의 안생이었다.
"아니‥‥‥ 웬일이셔요?"
"도화야, 너를 기다리느라고 어제는 그 집에서 한잠두 못 자구 뒤척였다. 어찌된 거냐. 내
가 싫어졌느냐?
도화는 얼른 손짓하여 그를 안으로 들여 뒤꼍에 세워두고 얘기하였다.
"늙은이가 어찌나 눈을 부릅뜨고 살피는지 문 밖에 나설 수도 없어요. 차라리 죽어버렸으
면 좋겠어."
"얘, 네가 죽으면 바로 그 뒷날이 내 장삿날이다."
하면서 안생은 정을 이기지 못하여 마주 서 있는 도화의 잘룩한 허리를 안고 으스러뜨릴 듯
이 껴안았다. 도화가 안겨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안방의 기척에 두 귀를 곤두세웠다가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안생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쉿... 늙은이가 일어났어요. 어서 돌아가시 라니까..."
"어찌하겠느냐. 오늘 내려올 테냐?"
"이따가 저녁에 갈게요. 낮에는 동네 사람들 눈이 많아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이제부턴
밤에 만나요."
안생이 그럴 듯이 여기고 삽짝을 재빨리 빠져나가면서 다짐하였다.
"오늘밤에 기다리겠다. 만약에 오늘도 오지 않으면 아예 그 집을 폐하여 버리고 나는 당
분간 어디 유람이나 다녀올까 한다."
그 소리에 도화는 더욱 안타까웠다. 오죽 애가 달았으면 스스로 끊고 집을 떠나려 하겠는가
마는 사실 그렇게 된다면 더욱 못 견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 요즈음의 도화는 애처로울
정도로 안생의 손길에단단히 붙들려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이 적막한 탑고개의 나날을 이
겨낼 수가 있었던 터였다. 안생을 보내고 나서 도화는 부엌에 쪼그려 앉아 잠깐 울고 있었
다.
"얘야, 웬일로 그러구 랄았니...?"
언제 일어났는지 갑송모가 부엌을 들여다보며 물었고, 도화는 얼른눈을 비비며 돌아앉았
다.
"아궁이 속을 불다가 터가 날아들었나 봐요."
"이리 좀 와보아라, 어디 보자꾸나."
"괜참아요."
남의 속도 모르는 갑송모가 딴에는 며느리 사랑함을 보이느라고 도화의 손목을 잡아끌어
눈을 까뒤집어 혀로 티를 핥아내려 하였다. 도화는 저도 모르게 손을 뿌리치며 내쏘았다.
"괜찮다는데 왜 이러셔요. 제발 좀 괴롭히지 마셔요. 저하구 무슨 원수가 졌다구 날마다
들볶아요."
하고 나서 어리둥절한 갑송모의 시선을 느끼며 도화는 제 잘못을 알아 차렸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간밤에 잠을 설쳤더니 너무 피곤하여 그 랬나 봐요."
갑송모가 도화의 이상스런 짓에 놀랐다가 제풀에 화를 삭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몹쓸 것... 무얼 하노라구 잠을 설치구 야단이냐. 네 서방이 집을 비운 지가 이제 겨우 열
흘두 못되는데 벌써 사내 생각이 나는 모양이구나. 너는 피가 많아서 큰일이다."
갑송모가 더이상 콩이네 팥이네 따지기가 싫었는지 연신 혀를 차면서 돌아섰다. 안생과
약속한 도화는 저녘을 먹고 나서부터 더욱더 조바심을 치며 안절부절 못하였다. 도화가 윗
방으로 들어가려니 갑송모가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얘, 오늘부터는 나허구 같이 자자. 윗방에는 아무도 없는데 너 혼자 자기가 더욱 썰렁할
게다. 내가 간직한 단주(短珠)가 있는데... 옛다, 이걸 갖구 자거라."
하면서 농에서 보리수 단주를 꺼내어 내밀며 다시 말하였다.
"내가 네 남편을 낳고 나서 곧 혼자가 되었는데 그뒤 몇해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많았느니라. 어찌 그것을 말루 얘기할 수야 있겠느냐. 잠이 안오는 밤마다 단주를 손에 쥐고
보리수를 헤아리면서 밤을 새우다 보면 새벽녘에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들곤 했단다. 서방두
없는 년이 그렇게 하였는데, 너야 남편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어 며칠 참으면 돌
아을 텐데 못 참겠느냐. 에그... 아기라두 하나 낳아서 볶이구 시달리면 그런 생각이 한결 덜
할 텐데. 너는 너무 복에 겨웠다."
도화가 품에 안길 서방이 출타하여 허전해서 잠을 못 이루는가 싶어서, 갑송모는 제 곁에
이부자리를 펴주고 도화에게 단주까지 내주면서 권하였다. 그러나 해 저물 녘에 아래로 내
려가리라고 안생과 약속한 도화로서는 단주 따위가 더욱 못 견딜 형틀이나 다름없었다. 마
다하지도 못하고 갑송모 곁에 따라 누운 도화는 터지려는 한숨을 씹어 삼키느라고 목구멍에
돌이 걸린 듯하였다. 갑송모가 잠들기를 기다리는데 단주는 두 손아귀에 쥐고 있건만 전혀
헤아려지지 않고 눈앞에 안생의 해사한 얼굴만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몸은 스스로 열이 올
라 가슴이 답답하고 아랫배는 오줌이 마려울 때처럼 근지럽고 다리가 저절로 이리저리 이불
자락을 헤치며 맴돌았다.
갑송모의 숨결이 고르게 되어가자 도화는 살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버선을 째고 벽에 걸
린 치마를 두르고 저고리를 입었다. 그리고는 벽을 짚으며 어두운 방안을 더듬어 문쪽으로
다가서는데 등뒤에서,
"네 이년... 어디 가니?"
하는 갑송모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고 도화는 얼어붙은 듯이 벽에 두 손을 대고 딱 멎어
버린다. 갑송모가 누운 채로 덧붙었다.
"서방질하러 가는구나..."
도화는 돌아서서 누워 있는 시어미에게 발작적으로 달려들었다. 아니 이년이 미쳤나.. 중얼
대며 일어나려는 갑송모의 머리 위로 도화는 제가 밀었던 이불을 들씌웠다. 손을 허위적거
리고 머리를 들려고 꿈틀거리는 시어미를 도화는 사정없이 덮어씌운 이불 위에 베개까지 얹
고는 깔고 앉았다. 그리고는 온 힘을 다하여 갑송모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짓누르고 있었
다. 이불자락 밖으로 늙은이의 손이 빠져나오더니 도화의 저고릿고름을 부여잡아 당겼다. 도
화는 놀라서 무릎을 베개 위에 대고 힘껏 타눌렀다. 도화의 옷고름을 잡았던 손이 스르르
풀려지더니 아래로 툭 떨어겼고, 두어 번 위로 치켜질 듯이 오르다가 아귀를 풀면서 요 위
에서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도화는 전신에 땀을 흘리며 한참이나 그 자세로 꿇어앉아 있
었다.
도화는 한숨을 토해내고 머리를 흔들고 나서 그제서야 제가 깔고 앉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황급히 무릎을 세우고 베개를 집어던지고 이불을 젖혔다. 얼굴을 더듬다가 스스
로 소스라쳤다.
"어머니..."
어깨를 잡아 흔들었건만 이미 절명한 사람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도화는 다시 이불을 시체
위에 들씌워버리고는 문을 차고 나왔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우선 그 집에서 별리 떠나야만
두려움이 가실 것만 같았다. 도화는 허위적거리며 나한암 바위넘이를 올라갔다. 발을 헛딛고
넘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 허둥지둥하면서 달려 내려가는데, 등뒤에서 되살아난 갑송모의
손길이 곧 뒷덜미를 잡아채는 느낌이었다. 건지산 아랫녘까지 도화는 오로지 밀회처의 안생
을 바라고 뛰었다.
어서 누군가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감추고 두려움과 자책감을 달래야 할
것 같았다. 도화는 열려진 삽짝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안방 문이 열리면서 초조하게 기다리
던 안생의 짜증스런 얼굴이 내밀어겼다.
"뭘 하다 인제사 오는 거냐..."
신짝을 발로 뿌리치며 도화는 뛰어들어가 엎어겼다.
"난 몰라... 나는 어떻게... 몰라요."
안생이 도화를 잡아 일으키며 물었다.
"뭘 모른다는 게야, 무슨 일이야?"
"무... 무서워요."
안생은 자기도 당황하여 우선 문 밖을 살피고 나서,
"느이 남편이라두 쫓아온다더냐, 왜 이러느냐?"
"시어머니가 죽었어요..."
도화가 말하자 안생은 난 또 뭐라고 하는 표정이 되어 굳게 잡아 흔들던 손을 놓고서 물
러나 앉았다.
"늙은이가 죽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도화는 울기를 멈추고 오히려 안생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몰래 빠져 나오려다 들켜서... 놀란 김에 나두 모르게 이불자락으루 덮었더니 그만 숨이
끊겼나 봐요."
"뭐라구?"
안생이 다시 물었다.
"네가 눌렀단 말이냐?"
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결에... 베개루 타눌렀어요."
안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도화의 등을 토닥여 달래주었다.
"분명히 누르기만 하였다면 상처는 나지 않았겠구나."
"자던 채루 이불을 썼으니까 말짱해요."
도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생은 벽에 걸린 도포를 내어 걸치고 갓을 졌다.
"안되겠다. 지금 당장 돌아가야지."
"아니 이이가... 이제 알구보니 제 발뺌만 할려구..."
안생이 도화의 손을 잡으며 타일렀다.
"찬찬히 생각해보아라. 우리가 나중에라두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이럴 때일수록 너는 집
에 있어야 한다. 집에 돌아가서 이웃집에두 알리구 머리 풀고 방성대곡하여 상 입은 양을
해내야 하는 것이여. 홀홀 단신두 아니구 범 같은 아들이 있으니 나중에 밝혀지게 되면 너
와 나는 곤쟁이젓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만 바라구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그 무서운 길을 어찌 가오, 난 못해요. 제발 우리 달
아나요. 은율서 떠난다구 설마 굴어 죽을까봐."
도화의 말이 심히 맹랑하여 안생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앉았다가 다시
설득하였다.
"죽은 것이 어찌 네 죄라고만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늙어지면 숨이 절로 넘어가고 자다
가 고요히 죽는 것은 또한 복 중에 하나이다. 지금 네가 돌아가서 상을 알리면 동네 사람들
이 몰려올 터인즉 뭐가 무섭겠냐. 그리고 집안 정리가 된 다음에 네 남편이 돌아오고 나서
한참 있다가 떠날 때 떠나더라도 의심받지 말아야 한다. 나두 당장 널 데리고 해주나 송도
루 나가고 싶다만 이번 겨울만 넘기자는 것이다. 그러니 나허구 살구 싶으면 이를 악물구
돌아가서 초상을 치르도록 해라."
도화가 냉정하게 얘기하는 안생의 말을 듣고 보니 이치가 정연하여 마다고 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도화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서 나가려다가,
"그런데 무서우니 나한암까지만 바라다 주실 테유?"
하였으나 안생은 손을 홰홰 내저으며 펄쩍 뛰는 것이었다.
"얘, 그런 정신 없는 소릴랑 하지 마라. 그러다가 누구 눈에라두 뜨이면 대번에 지목을 받
을 게다. 오늘처럼 일이 생긴 날 그리되면 꼼짝 없을 것이다. 내가 아이를 보내어 별일이 없
는가 살피도록 할 테니 어서 돌아가거라."
"언제 봐요?"
"좀 동안을 두었다가 네 남편이 집을 비우면 이 집 할멈에게 통기하여라,"
밀어내듯 하고서 안생은 잽싸게 걸어가버렀고, 길 위에 남은 도화는 오도카니 서서 갈피
를 잡지 못하고 발을 구르다가 탑고개로 돌아섰다. 나한암을 돌아 고개를 넘어 내려오는데
온 동네는 캄캄하고 더구나 자기 집 쪽은 더욱 컴컴한 것 같아서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후닥닥 울타리 밖을 지나쳐 수복이네 집 쪽으로 가서 동정을 살폈다. 잠시 망설였다가 도화
는 목을 쥐어짜듯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성님 성니임...문 좀 열어요. 큰탈이 났어요!"
"거 누군가?"
놀라서 잠에서 깨어난 장충의 목소리가 들리고 잇달아 속곳 바람의 봉순이가 마루로 뛰쳐
나왔다.
"아우님 아니우"
"예, 저희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나 봐요."
그 소리를 듣자 봉순이는 오한이 온몸으로 쭉 훑고 지나가는 듯 하였다. 도화의 비명이 어
딘가 예사롭지가 않았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봉순이는 어려서 신이 들렀다 하여 안무당
이 데려왔던 신딸 출신이었으며, 그런만큼 직감이 빨랐다.
"갑송이댁 아니냐?"
장충이 방문을 연 채로 물을 제에야 봉순이는 언뜻 대답할 수가 있었다.
"네, 아버님... 그 댁 모친이 별세하셨다는군요."
봉순이가 뛰어나가 사립을 여니 도화는 곧장 쏟아져 들어와 봉순이의 어깨를 부여안았다.
"아이고, 어쩔 거나 어머님께서 숨을 끊으셨어요."
장충과 안무당도 깨어났고 이웃집에서도 술렁술렁하는 인기척이 들렸다. 장충이 앞장서서
갑송이네 집으로 달려잡고 안무당과 도화를 부축한 봉순이가 그뒤를 따랐다. 건넛집 사람들
도 깨어나 하나 둘씩 갑송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장충이 불을 켜고 방안에 들어서니 젖혀진
이불자락 아래로 험상궂게 일그러진 갑송모의 얼굴이 보였다.
"허허... 괴이하다."
두 눈은 감고 있었으되 반중 벌려진 입술 사이로 악문 이빨이 보였으며, 이빨 사이에는
뜯긴 천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경직하고 있는지라 우선 손을 가지런히 하여 몸 위에 올려두
고 머리 아래 얇은 옷을 접어 받치고 다리를 안치해서 어그러지지 않도록 해두었다. 그리고
는홑이불에 싸서 누이고 초종을 치를 준비를 해두었다.
"상주가 출타중이니 큰일일세. 호상은 역시 김선비가 맡을 수 있겠고 우리가 곁에서 도우
면 되겠지만 갑송이가 돌아오면 얼마나 애통해할 것이냐."
즉시 마당에 나가서 고인의 옷을 들어 지붕 위로 던지면서 초혼하고 나서 염습은 날이 밝아
시행하기로 하였다. 김기가 와서 이리저리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나서 된목이골에도 사람을
보내어 마감동과 오만석을 내려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강말득이를 불러서 송도 박대근이
네집에 있을 갑송이에게 모친상을 알리도록 하였다. 삼일장이지만 상주가 없는 판이니 날짜
를 조금 늦추기로 하였고, 염습만 해놓았다. 나흘이 지나토록 소식이 없더니 강말득이가 돌
아와 전하는 말이 박대근과 갑송이가 함께 집을 나갔는데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때에 그들은 달마산에서 장선흥, 우대용들과 오랜만의 회포를 풀고 있었으니 갑송이는
모친의 급서를 모를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입관이 치러지고 발인하여 상여가 나가는데
탑고개 사람들이 상여꾼이 되었고 장충이 향도잡이가 되었다. 머리 풀고 상복을 입은 도화
는 구슬피 울면서 상여의 뒤를 따랐다.
초상을 치른 뒤에 도화는 줄곧 빈집에 처박혀 있었다. 탑고개 사람들은 갑송모가 잠자다
죽은 것은 복이라지만 그 아들의 치송을 받지 못하고 묻힌 것은 역시 과수댁의 박한 팔자소
관이라고들 말하였다. 도화는 마치 빈 절에 홀로 남은 상좌처럼 적막하고 두려워서 대번에
집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워낙에 저지른 죄가 있는지라 쪽 눌러 배기는 중이었다. 바
로 근처의 야산 양지바른 곳에 묘를 썼으니 도화는 아침마다 올라가 곡을 하는 양을 보이기
도 하였다.
도화가 드디어 좀이 쑤셔서 상복 입은 채로 단장하고 머리 빗고 저녁녘에 집을 빠져나가
는데 누구인가 사람의 그림자가 울 밖에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도화는 제풀에 켕겨서 스
스로 기침을 하고 나서,
"게 누구요?"
해보았으나 아마도 저넉 먹고 마실 나왔던 모양인지 대꾸 없이 지나쳐 버리는 것이었다. 도
화는 집 밖에 나서서 누가 없는가를 재삼 확인하고 나서 나한암을 올라갔다. 그때에 갑송이
네 집 울 밖에 숨어 있던 사내가 도화의 행방을 살피고 나서는 곧장 김기네 집으로 달려갔
다. 그는 김기가 합고개에 머문 뒤로 된목이골과 연락하기 위하여 붙여둔 졸개였다. 그는 김
기의 방문을 열고 급히 말하였다.
"방금 이두령댁이 집을 나와서 나한암으로 오르는 걸 보고 오는 중입니다."
김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쫓아가서 누구와 어디서 만나는가를 자세히 알아보고 오너라."
졸개는 김기의 지시를 받자 나는 듯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김기는 책상 위에 펼쳐진 병서
위에 한손을 누른 채로 까물거리는 등잔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갑송이의 신
혼 초부터 그들 부부의 장래에 대하여 은근히 근심해오던 바였다.
김기가 본 상으로는 도화의 눈자위에 어린 불그죽죽한 기운과 입술의 색이 몹시 음란해
보였으며, 특히 둔부가 뒤쪽으로 치켜올라간 형상은 더욱 색정 강한 여인의 태였기 때문이
었다. 그에게는 갑송이가비록 의제이긴 하지만 그의 생명을 구하여주고 헛된 반생을 되돌이
키게 하였던 은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구월산에서 형제지의를 맺었던 어느 사람보다도 갑
송이는 그에게 소중한 아우였다. 비록 갑송이가 우직하고 무식한 천출 광대이긴 하였어도,
생각하는 도량과 인정은 책상 물림으로 소심하고 주변없는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되었다.
우선 그는 봉산에서 침탈당한 딸마저 저버리고 찾지 못하였으며, 나라에 거역하고 있다는
불안스런 마음을 아직도 끝내 저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된목이골에 올라가
감동이나 만석이와 더불어 벌이의 의논 상대도 하여주고 대작도 하면서 왕후장상들의 일화
도 지껄이며 곡식섬과 돈냥이나 얻어 쓰고 살지만, 낙백선비 시절의 회한은 떨쳐지지가 않
았던 것이다.
그에게는 우울한 날마다 갑송이가 나타나 유쾌한 농지거리로 수작해 주는 것이 유일한 낙
이었다. 갑송이는 때로 김기에게 드러내놓고 불평도 하고 핀잔도 주면서 유생의 습성을 탓
하였으며, 은근히 그의 넓은 지식을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언젠가 갑송이가 아내와 다투
고 을적해서 술을 마시는 들을 보고 김기가 슬그머니 말을 떠보았던 적이 있었다. 차분히
집안살림을 꾸려나가기에는 너무 화려한 듯하니 소담하고 어리석은 듯한 여자를 구하여 새
장가를 들고 도화는 어디 도방에다 내려보내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던 것이
었다. 갑송이가 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부라리고 질그릇 째어지는 소리로 주정을 할 줄 알았
더니 정반대였다.
이 사내는 어디에 그런 가녀린 정이 당겨 있는지 고개를 숙이는데 제비 알만한 눈물이 무
릎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연신 주먹으로 눈을 씻으면서 그 가없은 년이 나만한 사내
라도 만났으니 일부종사를 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노류장화로 떠돌다가 어느 봉놋방에서 하
혈 서 말을 쏟고 객사했을 게요, 라는 것이었다. 정기는 갑송이의 심정을 알 듯하여 오히려
제 소견없는 발설을 수습하노라고 술잔이나 좋이 비워낼밖에 없었다. 갑송이가 또한 제 어
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진 효자였다. 갑송의 어머니도 다른 광대들의 아낙과 마찬가지로 거의
반평생을 길 위에서 보낸 여자였다. 아버지가 노중에서 악질에 걸려 약 한첩 병구완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비를 맞아 쓰러진 뒤에, 갑송이는 어려서부터 살판꾼으로 뛰어돌아다니며
오직 어머니만을 등대고 자라났던 것이다.
김기는 장충에게서 그 노모의 운명 모습을 전해 들어 대강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악물린
입에 이불자락을 뜯어물고 있었다니 틀림없이 누구에겐가 숨이 막히어 고통 속에서 살해된
것이다. 김기는 떠나간지 달포가 되어오는 갑송이가 곧 돌아올 듯하여 아침마다 삽짝 밖을
내다보는 것이 못 견딜 고통이었던 것이다. 김기는 장충의 귀띔을 전해 듣고 나서 당장이라
도 마을 사람들을 들썩여서 도화의 죄상을 밝히고 처단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부부의 일이란 하늘도 모른다 하거늘 지아비의 손을 떠나 누가 마음대로 생사를 결정하겠는
가. 더구나 갑송이는 노모 못지않게 제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확증이 없이는 도저히 믿
지를 못할 게 분명하였다. 김기는 갑송이가 돌아와 노모의 급서와 함께 아내의 악행을 알게
되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까 안타까웠다.
"아... 몹쓸 짓이다!"
그는 병서를 덮고 물러나 벽에 기대어 앉으면서 탄식하였다. 갑송이로 하여금 아내를 스스
로 죽일 수밖에 없도록 몰아댈 자신의 처사가 참으로 통탄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일이 그
렇게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녹림에 묻혀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무리라고 하나 어
떻게 무릎을 비비며 마을을 이루어 오순도순 살아갈 것인가.
"다녀왔습니다."
밖에서 헐떡거리는 졸개의 숨찬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들어오너라."
김기는 방으로 들어오는 졸개를 향하여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노려보기만 하였다.
"원 세상에... 별꼴을 다보았구먼요. 바로 턱밑입디다. 고개 넘어 한내를 따라가다 건지산
옆길루 접어들었지요. 북바위골 쪽으루 가더군요. 헌데 동구 밖에 외딴집이 있어요. 거기서
부터는 연신 뒤를 돌아다보는데 혹시 눈에 띌까 조심하노라고 아주 진땀을 빼었습니다. 숲
속으루 길두 없는 데루 바짝 붙어서 가다가 옷을 모두 찢겼습니다."
"잔소리 말구 어떤 놈이던가 말해 보아라,"
졸개는 집안으로 도화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후에 토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에 딸린 방 쪽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서 가까이 다가들어 창호를 뚫고 들여다보니
도화는 어느 훨칠한 선비의 가슴에 안겨 있더라는 것이다.
"아, 그것들이 얘기를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분명히 그년이 이두령의 모친을 눌러 죽인
모양입디다. 계집은 이두령이 돌아을 일을 걱정하여 안달이고 사내는 연신 달래며 이릅디
다."
"그래 뭐라더냐...?"
"두어 달만 참으라고, 그 안에 모든 채비를 차렸다가 송도루 달아나자구 그럽디다."
"그런 천하에..."
정기가 책상을 두들기며 수염을 떠는 양에 졸개는 깜짝 놀라면서 덧붙였다.
"그뿐입니까. 그런 말두 사그라지더니 종내에는 상복을 훨훨 벗어던지구 두 연놈이 불을
켜놓은 채로..."
"그만... 그만해두 알겠다."
김기가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중얼거렀다. 졸개는 다시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고 김기는
한참이나 눈을 감은 채로 자제하는 것 같았다.
"건너가서 쉬어라. 그리고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나한암고개를 지키구 있거라."
"예... 그년의 모가지를 비틀어 죽여버릴까요?"
"그런 게 아니다. 계집이 몇번을 넘나들든 모른 체하구 내버려두어라. 다만, 하루 이틀 새
로 이두령이 돌아올 것인즉 아무 말 말고 그저 내가 급히 보잔다구 모셔오너라. 절대로 입
빠른 소리를 미리 내어서는 안된다."
갑송이는 달마산에서 강선흥, 우대용, 박대근 등과 같이 오랜만의 회포를 풀고 일단 송도
로 박대근과 동행하였었다. 송도에 가니 구월산에서 이미 사람이 다녀갔다는 전갈이 기다리
고 있었다.
"내 그날 밤 꿈이 꼭 맞았구나..."
갑송이는 허탈하여 마루에 무너질 듯이 주저앉았다. 날짜를 따져도 딱히는 모르겠으되 대
취하여 달마산의 선흥이 방에서 잠들어 있을 적에 꺼림칙한꿈을 꾸었던 것이다. 길에서 어
느 여인을 만났다. 여인은 낮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집에서 노시다가 며칠 묵어 가라고 하
였다. 함께 가는데 깊은 산중이고 골짜기 사이에 묘지기의 집 같은 초막이 보였다. 방이 두
칸인데 한 방에는 불이 꺼졌고 다른 방에만 잔등이 까물대고 있었다. 들어가 앉았는데 여인
이 잠시 나갔다가 오겠다더니 종내 소식이 없었다. 창호지가 부옇게 보이는데 누군가가 밖
에 서서 울고 있었다.
갑송이가 요사스런 생각이 들어 고함을 버럭 지르며 문을 차고 나가보니 집안은 괴괴한데
건넌방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방안에 누가 있는가 하여 들여다보니 뜻밖에도 노모가 곱게
단장을 하고 젊은 여자처럼 황의홍상을 입고서 앉아 있었다. 어디 가시냐니까 시집을 가신
다면서 가마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가마가 들이닥쳐 노모가 가마에 오르는데 갑송이는 그
뒤를 물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점점 멀어져 갔었다. 갑송이는 악을 쓰고 허위적거리다가
문득 잠이 깨었다. 눈을뜨고 천장을 올려다보니 온몸에는 땀이 흘러 축축하고 손을 뻗칠 수
가 없도록 딱딱하게 경직되어 풀어지지가 않았다. 눈을 멀뚱히 뜨고서 끙끙거리다가 드디어
박대근이 잠을 깨어 흔들어주는 바람에 겨우 후유 하면서 한숨을 토해냈었다. 모두들 속이
불편하여 가위를 눌린게라고 말하였다.
박대근이가 마주 암은 갑송이의 어깨를 두드렀다.
"아우님, 이 길루 떠나게. 나두 평양에 갈 일이 있으니 북상하다가 들르지."
대근은 갑송에게 돈꿰미를 내어주며 상비에 보태 쓰라 하였다. 갑송이는 허둥지둥 왔던 길
을 되짚어 은율로 돌아갔다. 탑고개에 당도하여 저절로 애통한 마음이 일어나 훌쩍이며 코
도 풀고 스스로 불효하였던 자신을 탓하면서 나한암을 지나는데, 된목이골 졸개가 등성이에
우두커니 앉았다가 황급히 뛰어내려오는 것이었다.
"이두령님..."
갑송이가 발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인제사 오십니까?"
"글쎄나 말이다. 이런 불효가 어디 있겠느냐."
"장사는 무사히 치렀습니다."
갑송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래... 어디 모셨느냐, 앞장을 서라."
하였으나 졸개는 단단히 다짐을 받았는지라, 갑송이의 소매를 끌었다.
"아니오, 그것보다 김선비님께서 꼭 보시 잡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구, 일부러 길목
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뭐라구... 아니 상 입은 놈이 산소에 가는 길이 더 급하지 무엇이 그리 바쁘단 말이야?"
졸개는 갑송이가 급히 서두르는 기세를 막을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말을 꺼내었다.
"실은... 저... 모친께서 돌아가신 것이 어딘가 괴이한 일이올시다. "
갑송이는 눈을 번쩍 뜨고 졸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게 무슨소리냐, 다시 한번 말해보아."
"이... 이것 놓으십쇼. 그래서 김선비님이 꼭 보시자는 겝니다."
갑송이는 졸개의 말을 더 들을 생각도 않고서 잰걸음으로 정기의 집으로 들어가니 마침
마당에 나와 있던 김기가 마주 달려와 갑송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시는가. 어서 안으루 들어가세."
"어머니가 괴이하게 돌아가셨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우?"
김기는 아무 말 않고 그의 방으로 갑송이를 이끌고 들어갔다.
"그래 형제들은 모두 별고 없으시던가?"
말머리를 돌려놓고 나서 김기는 갑송이의 욱하는 성미를 진정시키려 하였다.
"성님, 딴소리 마우. 우선 그 얘기부터 들읍시다."
"아우님이 낭패당하지 않으려면 성미 부려서는 안되오. 무슨 말이 나오더라두 진득이 마
음을 가라앉히구 나허구 의논하겠다면 말을 해주지."
김기는 첫마디에 도화의 얘기를 꺼내었다.
"내가 계수씨에 대하여는 일전에두 말한 적이 있지마는 아우님의 아내로는 매우 적당치
않은 여자였소. 전부터 아우님이 집을 비우기만 하면 늘 읍내 출입이 잦더니 어머님과 가끔
다툰 모양이오."
갑송이는 고개를 숙이고 듣다가 수긍을 하였다.
"그건 나두 알구 있소."
"새벽에 계수씨가 수복이네 집을 찾아가서 모친께서 임종하셨다고 알렸지. 수복이 할아버
지께서 초종을 치르고 내가 호상이 되었는데, 그이가 임종하신 모친의 시신이 좀 이상스럽
다구 그러시더군. 이불자락을 뜯어 꼭 다문 이빨 사이에 물고 계시더란 말이야. 그래서 나
혼자 생각하기를 누구인가 이불을 덮어 누른 게 아닌가 의심이 들더군."
거기서 김기는 차마 얘기를 계속하지 못하였다. 갑송이가 조용히 되물었다.
"우리 집 것이 그런 짓을 저질렀습니까?"
"그건 아직 모르지. 내가 된목이골 아이를 시켜서 계수씨의 거동을 살펴라 하였더니 아
마... 간부가 있는 모양이데."
"간부라..."
"북바위골에 사통하는 집까지 구해놓은 듯하오."
갑송이의 눈에 사뭇 불이 붙은 듯이 이글이글 타올랐고, 주먹을 쥐는데 저절로 관절마디
꺾이는 소리가 우두둑 들려왔다.
"그 집이 어딥니까, 아니 그것보다 먼저 이년을 당장에..."
"이두령, 내 얘기를 더 들어 보라니. 간부간부는 등시포착이라 하였소. 우선 두 연놈의 사
통하는 현장을 덮쳐 나란히 놓고 문초한 다음에 처단하여도 늦지 않아. 그렇지 않으면 누구
의 죄인지도 밝힐 수가 없고 사내는 놓치구 마네. 알다시피 놈은 은율 읍내에서 버젓이 고
개 들고 사는 놈이고, 우리는 숨어 사는 산럼처사란 말야. 내가 미리 아우님을 불러 말을 하
는 것은 일을 잘 도모하기 위해서요. 지금 집에 가면 계수씨가 없을 테니 침착히 기다렸다
가, 저녁에 오더라도 절대루 내색하지 말고 모친의 죽음이나 슬퍼하는 양만 보이면 충분하
오. 그리구 나서 이틀쯤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구월산에 한 열흘 다녀오겠다며 집을 비우란
말이지.
집에서 나와서는 곧장 우리 집으로 오시게. 틀림없이 계수씨가 건지산 아래로 내려갈 테
고, 우리는 뒤를 밟을 필요두 없이 한밤중에 그 집을 덮치는 게야."
갑송이는 눈앞이 그렁그렁하여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김기가 갑송이의 무를 앞으로 다
가앉아 팔을 잡아 흔들었다.
"아우님, 제발 내 시키는 대루 하시게."
갑송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기가 술을 마시고 가라는 것을 억지로 뿌리치고 집에 돌아
온 갑송이는 천하에 홀로 남아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는 듯 여겨졌다. 빈 방안에 망연히 앉
았으려니 배신당한 사내의 고독이 뼈저리게 마음에 젖어들어왔다. 부엌에는 벌써 며칠이나
불을 땐 흔적이 없는지라 그릇과 선반에는 먼지가 앉았는데 왕거미가 아궁이 앞에 그물을
쳐놓았다. 옹색하고 을씨년스런 세간살이들이 더욱 갑송이의 빈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이윽
고 신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도화가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에그, 한숨 짓고 나서 도화는 툇
마루에 걸터앉아 가뿐 숨을 달했다. 버선을 벗어서 탕탕 털고는,
"이놈의 집구석.."
하는 종알거림이 들렀다. 갑송이는 열화 같은 분노가 치밀어 대번에 끼년, 외치고 뛰어나가
한 주먹에 대갈통을 으깨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침을 꿀꺽 삼켜서 치미는 분노를 함께 넘겨
버린다. 이제 도화가 의심하지 않도록 이틀을 보내야 할 텐데 그것은 도화를 한 손아귀에
비틀어 죽이는 일보다 더욱 어려운 노릇일 것이다.
"여보..."
"아이고 깜짝이야!"
도화는 그야말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주저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을 메로 삼아 싸
돌아다니다가 겨우 싫은 걸음을 떼어 돌아왔는데, 빈 집안에 사람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 놀람은 무념중에 놀람이요, 그가 갑송이임을 알고는 이제 뭔가 드러난 게 아닌
가 하여 입술을 달싹거렀다.
"어, 언제, 오, 오셨수?"
"응, 방금 왔네. 어디 갔다가..."
갑송이는 어쩔 줄 몰라하는 도화를 보니 저도 모르게 침착해지고 있었다.
"아, 저, 성님하구 마실 갔더랬어요."
도화는 급할 때마다 하는 버릇대로 봉순이를 끌어대어 변명하였다.
"혼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초상을 치르노라구 혼났지?"
도화는 키득키득 어린애처럼 비쭉거리더니 허리를 구부리고 방바닥을 치며 곡성을 읊조렀
다.
"아이고오, 우리 어머님 불쌍도 하시지. 당신이 곁에 계실 젠 그리 정정하시더니 꼭 집을
떠나신 날을 택하여 혼자 쓸쓸히 가시다니, 아이구, 우리 어머님 어찌 눈을 감으셨나."
갑송이는 한참이나 도화의 사설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그만해둬. 사초는 잘 입혔는가?"
"예... 모두들 팔을 걷고 나서서 봉분도 그럴 듯하구 자리두 아주 좋아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갑송이는 짐짓 말하였다.
"내가 집을 자주 비워서 미안하오. 집에 혼자 박혀 있으려면 갑갑하구 월정사 옛날 동무
들 생각두 나겠지. 나두 이제는 산골 사는 것이 싫어졌으니 어디 도방에 나가 장사라도 하
며 살아볼까."
그런 말에 도화는 눈을 빛냈다.
"여보, 지금 하신 말 정말이셔요?"
"음... 내가 이번에 나가서 살 만한 곳을 알아보구 왔지."
도화가 허리를 굽히고 문턱을 넘어오더니 갑송의 무릎을 안으며 엎드러져 애걸하였다.
"제발 탑고개를 떠나요. 내가 살림 잘할게요. 바느질, 물긷기, 방아찧기 아니면 머리라두
잘라 팔아서 돈을 벌게요. 이 산골 구석만 면한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미칠 것 같아요."
"작은 주막집 하나를 보아두구 왔지, 내가 내일이나 모레나 된목이 골에 올라가서 한 열
흘쯤 뜸을 들였다가, 감동이에게 돈을 돌려보도록 하겠어."
산골에서 밥짓고 물긷는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여자가 어찌 눈코 뜰 새 없는 도방의
살림을 해내겠는가. 이는 다만 도화가 죄를 저지른 집과 탑고개에서 배겨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이 시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의혹을 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튿날 갑송이는 뒷산의 모친 묘에 올라 늦은 인사를 드렸고, 새삼 마음속으로 불효를 자
탄하였다.
"내 오늘 올라가면 적어도 열흘은 잡아야 할 테니 집 비우지 말구 참구 있어, 내려오는
길루 이사를 해버립시다."
"예, 저두 대강 이삿짐을 꾸려놓구 기다릴게요. 송도라구 하셨어요, 해주라구 하셨어요?"
"멀리 갈 것 있나. 은을 읍내 역전거리에 내려가지..."
도화로서는 더욱 잘된 일이었다. 안생이 술손님으로 드나들게 되면 아무의 눈총도 받을 필
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요, 은을 읍내만 나가두 가슴이 탁 되어질 듯해요."
도화의 기뻐하는 꼴을 음울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갑송이는 노기를 참느라고 이빨을 지
그시 물고 있어야만 하였다. 도화는 남편이 구월산 된목이골에 오르는 것이려니 여기고 집
앞에서 대강 배웅을 하였다. 갑송이는 산길로 접어들어 더이상 오르지 않고서 후미진 숲속
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다시 내려가 김기네 집으로 숨어들 작정이었
다. 한편 마음속으로는 도화가 제발 집에서 참고 진득이 있기를 간절히 바랄다. 이제라도 마
음을 바꾸고 바른 아내가 되어준다면 갑송이는 저간의 악행을 모두 용서해줄 마음이 들었
다.
주위가 어두컴컴해져서 갑송이는 탑고개로 내려와 김기네 집으로 스며들었다. 김기는 저
넉상을 받지 않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둘이 마주앉아 저녁을 먹는데 망보러 내보냈던 된목
이골 졸개가 돌아와서 방금 갑송의 아내가 건지산 아랫녘으로 내려갔다고 알렀다. 갑송이는
마치 마음 한구석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년을 당장에 쫓아가서..."
갑송이가 벌떡 일어서려니 김기가 그의 손을 잡아끌어 앉혔다.
"참으시게. 일을 빈틈없이 끝내려면 성질 가지군 안되어."
김기는 말없이 담배를 담아 퍼졌고 갑송이는 공연히 앉았다가 일어설다가 마당으로 나섰
다가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였다. 밤이 제법 이슥하여 졸개를 앞세우고 김기와 갑송이는 집
을 나섰다. 갑송이는 제 집앞을 지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캄캄한 마당 안으로 들어갔
다.그는 선반을 더듬어 먼길 갈 적에 품고 다니던 비수를 찾아내어 가슴에 넣었다. 건지산
줄기를 따라서 걷는데 졸개가 들판 끝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바로 저 집입니다."
집 앞에 이르자 김기는 갑송이의 등을 밀어주며 속삭였다.
"우리는 밖에서 기다리겠소."
갑송이는 이미 노기로 전신이 타올라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가슴에서 비수를 꺼
내어 들고 불빛이 비치는 방문 앞으로 다가설다. 창호를 뚫어 들여다보니 희미하게 등잔불
이 밝혀져 있는데 사내의 상투꼭지가 보였고, 그의 팔베개 안에는 벗은 어깨를 드러낸 도화
가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갑송이는 저도 모르게 문을 벌컥 열었다. 불빛이 몹시 흔들렸고
인기척에 놀란 도화가 먼저 눈을 띤다가,
"에그..."
자지러지면서 이불을 끌어 가슴과 어깨를 가리우고 일어났고, 멍달아 사내도 상반신을 일
으켰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딱 멎어버렸다. 갑송이는 성큼 방안으로 들어서서 뒤로
방문을 닫았다. 그의 손에 들려진 비수를 보자 사내가 목을 움츠리고 흘러내리는 이불자락
을 끌어다 가슴을 가리면서 중얼거렸다.
"주, 죽을 죄를 지었소. 하, 한번만사, 살려주오."
도화는 아예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갑송이는 가슴이 천 갈래로 찢
어지는 듯하였다. 우뚝 서서 내려다보던 갑송이가 조용히 말하였다.
"옷을 입어라."
갑송이는 윗목 쪽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옷꾸러미를 내려다보았다. 치마며 속곳이며
바지며가 한 뭉치로 엉켜 있었다. 계집은 한 손으로 옷을 집어다가 이불 속에서 부시럭거리
며 꿰었고 사내는 바지를 입고 나자 반벌거숭이로 일어나 부지런히 옷을 걸치는데 저고리의
팔을 끼우지 못하고 몇번이나 허위적거쳤다. 그들이 옷을 다 입고 나자 갑송이는 말쪽처럼
서 있는 채로 말하였다.
"거기 앉아라."
사내는 저절로 무릎을 끓고 맞았으며 도화는 방구석에 벽을 향하여 돌아앉았다.
"언제부터 이런 사이가 되었느냐?"
"지난 여름에 읍내 배서방이 탑고개에 놀러 가자구 하여서 소개를 받았습니다."
"배서방은 또 누구냐?"
"이쪽과 가깝던 사람입니다."
갑송이는 그런 얘기를 서슴없이 지절이는 사내 앞에서 부끄러워 견딜 도리가 없었다. 사
내는 발각된 창피와 욕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면하기 위하여 도화의 음란함을 은근히 빗대어
말하였다.
"노는 여인은 하나이고, 상대하는 사내가 열이라면 어찌 그중 열 사내가 죄이겠습니까?"
"닥쳐라..."
갑송이가 안생의 가슴팍을 걷어차버리자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뒤로 넘어갔다. 갑
송이는 다시 묵묵히 선 채로 그가 숨을 돌릴 때까지 기다렸다.
"이 집은 뉘 집이냐?"
"자꾸 도방으루 달아나자고 하여 제가 빌려두었습니다."
"그래... 네가 진정 내 마누라를 데리고 달아나서 살 작정이었느냐?"
사내는 고개를 떨구고 아무 대답이 없었다. 갑송이는 차라리 그가 물불 가리지 않고 도화를
사랑하여 당당하게 이 여자는 내 계집이니 앞으로는 내가 데리고 살겠노라고 말해주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갑송이 보기에도 도화는 그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고, 그런만큼 갑송이는
도화가 찢어 죽일 듯이 미워지는 것이었다.
"앞으로 이 계집을 도방으루 데리구 가서 잘 살 테냐?"
사내는 잠잠히 있다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두고 집을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더니 갑송이에게로 앉은걸음으로 다가들어 올려다보며 애걸하였다.
"돈을 원하신다면 드리지요. 미곡을 원하시면 당장 실어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갑송이는 칼 든 손을 늘어뜨리고 두 사람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너희 둘이서 공모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느냐?"
안생이 필적 뛰며 도화를 가리켰다.
"아, 아니올시다. 저 여자가 하루는 허겁지겁 달려와서 엉겁결에 노모를 이불과 베개로 눌
러버렀다구 그랬지요. 저는 얘기를 듣고는 어서 올라가보라구 타일렀습니다."
사내가 다급하게 얘기하더니 눈을 번적 뜨고 노려보는 갑송이의 시선과 부딪치자 안절부
절 못하다가 어처구니없게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저는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요. 배서방과 동무들이 원망스럽습니다. 한번만 용서
해주신다면 다시는..."
갑송이가 침착하게 도화를 향하여 물었다.
"이자가 말한 것이 틀림없겠지?"
도화는 나란히 세운 무릎 위에 팔을 얼고 고개를 파묻고 있었으며, 간간이 어깨가 떨리는
것으로 보아 조용히 울고 있는 듯하였다. 갑송이가 안생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도화의 어깨
를 잡아 흔들었다.
"일어서, 집에 돌아가자구."
도화는 차가운 시선으로 안생을 노려보더니 발딱 일어났다. 갑송이는 다시는 사내를 바라
보지도 않았다. 안생이 믿어지질 않는지 몇번이나 주춤거리더니 그들 부부가 등을 보이자
얼른 일어나 들창문을 열고, 혹시나 그가 돌아오면 이번에는 잡히지 않고 달아날 태세를 취
하였다. 그러나 갑송이는 더이상 아무 말도 없이 방문을 닫았다. 도화가 그 집을 나서려다가
돌아다보았고 갑송이는 나직하게 말하였다.
"어서 걸어..."
어둠속에서 기다리던 김기와 졸개가 그들 앞으로 나타났다. 정기는 방안에서 갑송이가 칼
날을 날리고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시체만 둘이 남은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를 앞세운 갑송이의 행색은 마치 나들이라도 가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어찌하오?"
갑송이가 대답이 없자, 김기는 졸개에게 다시 일렀다.
"쫓아들어가 해치워버려라."
졸개가 등을 돌리려는데 갑송이가 고함을 꽥 내질렀다.
"그만 두지 못해?"
김기와 졸개는 어리둥절하였다. 갑송이가 말하였다.
"먼저들 가우. 우리끼리 할 말이 있으니까."
김기는 갑송이의 괴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 만했으므로 묵묵히 돌아서서 그들과 갈라섰
다. 갑송이와 도화는 건지산을 따라 걸으며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풀벌레가 요란하
게 울었고 초승달이 구월산 아사봉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갑송이는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밤새껏이라도 도화와 더불어 산길을 걸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 길은 그
들 부부에게는 되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길이어야 하였다. 갑송이는 목쉰 소리로 도화의 등
뒤에다 말하였다.
"자네가 가고 싶다면 보내줄 테여. 어디로든지 가겠다면 말리지 않겠어."
도화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결에 나한암에까지 와 있었고 바로 그 너머에
모친의 새로 쓴 묘지가 있었던 것이다.
"왜 말이 없나. 나허구 사는 게 원수 같아서 이런 짓을 저질러놓구..."
"어디루... 가란 말예요."
"저엉 탑고개에서 살겐단 말이지?"
"아무 데서두... 살 수 없어요. 용서해주셔요. 나두 모르게, 아마 팔자에 액이 든 모양이어
요. 당신은 나허구 살면 안돼요. 또 죄를 저지를 거예요."
도화는 고개를 들고 갑송이의 무뚝뚝한 얼굴을 마주보았다. 온 얼굴에 눈물이 번져서 어
지러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화의 어조에는 이상스런 열기가 있었다.
"해만 지면 미치겠어요. 마음은 공연히 떠돌고 세상 만사가 미워져요. 당신은 바위 같은
내 남편인데, 나중에는 당신까지 미워져요."
갑송이가 소매를 들어 눈시울을 쓱 닦았다. 그리고는 아내의 손을 잡아끌고 야산으로 올
라갔다. 등성이 위에 달빛이 희게 내려않았다.
"어머니께 인사드려."
도화는 남편을 등뒤에 두고 무덤 앞에서 삼배를 올렀다. 그녀가 절을 마치고 일어나는데
갑송이가 뒤에서 가슴을 껴안으면서 오른손으로 비수를 들어 옆구리에 깊숙이 박았다. 도화
가 입을 딱 별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마른 풀 위에 넘어졌다. 도화는 고통으로 일그러
진 입을 가까스로 다물고 젖은 눈을 들어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흰 소복 위에 피가 검게 배
어나왔다. 갑송이는 아내를 껴안은 채 다시 비수를 쳐들어 한번 더 찔렀다. 도화의 몸이 움
칫했다가 아아, 하면서 짧은 비명을 지르고 축 늘어졌다.
갑송이는 아내의 시신을 안고 허공을 향하여 누워 있었다. 초승달이 검은 구름의 자취를
헤치며 하늘 위로 달려갔다. 그의 뺨에 찰싹 대어진 아내의 볼이 차차 식어갔고 몸이 굳어
지고 있었다. 그의 옷자락으로 스며들던 도화의 뜨뜻한 피가 바람결에 축축해져갔다. 갑송이
는 이를 물고 터져나오려는 오열을 씹어 삼켰다. 그는 아내의 몸에서 칼을 뽑아내어 머리
위로 던지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뜬 채로 멎어 있는 눈시울을 내리쓸었다. 갑송이는 아내의
다리를 가지런히 놓고 두 손을 모아 배 위에 얹어준 다음에 산을 뛰어 내려갔다. 그의 집으
로 들어가니,
"이제 오시나..."
하는 김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기는오랫동안 갑송이네 집 툇마루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
고 있었던 것이다. 갑송이는 방안으로 들어가 등잔불을 밝혔고, 김기는 온통 피로 얼룩진 그
의 옷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갑송이가 고리짝을 뒤져서 아내의 화사
한옷을 꺼내었다. 김기가 서성거리며 말을 던졌다.
"뭐 도울 일이라두 없겠소?"
"없수."
갑송이가 통명스레 대꾸하고 방을 나서며 괭이를 찾아 들었다.
"그대신 소문내지 마우. 누가 물으면 집을 떠났다구만 말허우."
김기는 미친 듯이 뛰어나가는 갑송이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갑송이는 다시 아
내 곁으로 돌아가 피 묻은 옷을 벗기고 상처에마다 무명옷을 찢어 싸맨 다음에 새댁 시절에
입었던 푸른 저고리 붉은 치마를 입혔다. 그리고는 무명을 필째로 풀어 시신을 감싸주었다.
갑송이는 새벽 동이 훤히 틀 무렵까지 땅을 깊숙이 파헤쳤다. 그는 무명포에 감싼 도화의
시신을 구덩이에 누이고는 차마 흙을 덮지 못하여 곁에 주저앉았다. 새벽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아내의 시신을 덮은 천이 한들거리며 나부꼈다. 젖혀진 천 사이로 도화의 검은 머
리카락이 드러나 바람에 흩날렀고, 갑송이는 얼결에 아내의 상반신을 잡아 흔들었다.
"여보..."
그러나 이미 차디차게 굳어버린 시체가 대답할 리 만무하였다. 갑송이는 제 손을 펼쳐들
고 들여다보았다. 검게 말라붙은 피가 손바닥에 남아 있었고, 손톱에는 온통 검붉은 피의 흔
적이 보였다. 갑송이는 다시 천을 시체의 머리 위로 당겨서 감싸고는 흙 한줌을 집어 그 위
에 흩뿌렀다. 그는 발치 끝에서부터 한줌 두 줌 흙을 뿌렸다. 뒤에서 누군가 그의 어깨를 짚
었고 갑송이는 흠칫 놀라서 돌아다보았다. 김기가 한 손에 호리병을 들고 서 있었다.
"어한이나 하라구... 가져왔지."
갑송이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무심하게 술병을 건네 받았다. 김기가 그의 겨드랑이 사이
에 팔을 끼워 올리며 말하였다.
"저리루 내려가서 잠깐 기다리시게. 매장은 내가 할 테니..."
갑송이는 멍하니 김기를 바라보다가 허청거리며 산비탈을 내려갔다. 그는 언덕 아래 쭈그
려앉아서 병나발로 소주를 들이켰다. 그동안에 김기가 괭이로 흙을 밀어 덮기 시작하였다.
흙덩이들이 투덕투덕 떨어져 시신을 덮더니 드디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김기는 흙무더
기를 재빨리 쏟아 넣었고, 곧 구멍이는 메워졌다. 김기가 땅을 다져 밟는데 허기진데다 화주
를 마시고 눈자위가 불콰해진 갑송이가 다시 올라왔다. 김기는 못 본 체하고 땅을 다지고
나서 둥글게 봉분을 올려 쌓았다. 아침놀이 구월산 위로 번져가고 있었으며 잠 깬 산새들이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우리 집으루 가지. 아니면 나하구 같이 된목이골에 오르든지, 아이들 데리구 멧돼지몰이
나 가게."
김기가 땀을 씻으면서 갑송이에게 말을 던졌건만, 그는 비워진 술병을 불쑥 내밀어주고는
앞장서시 야산을 내려갔다. 김기는 못내 걱정이 되어 부지런히 그의 걸음을 따라잡았고, 갑
송이는 썰렁한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나올 기색이 아니었다. 김기는 뒷짐을 지고 마당을 서
성거릴 뿐이었다. 잠시 후에 새옷을 입고 행전 치고 머리에 두건 질끈 동인 갑송이가 작은
보퉁이를 옆에 끼고 마루로 나왔다. 보아하니 먼길 갈 차림새였다.
"아니... 어딜 가시게?"
"탑고개를 떠날라우."
김기는 갑송이의 보퉁이를 잡으며 다급하게 말하였다.
"아우님, 이러시면 안되네. 비록 이런 끔찍한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란
다 음양이 있게 마련이오. 며칠 동안 한바퀴 획돌고 오면 모두 잊어버릴 것이고 그 다음엔
다시 정숙한 아낙을 맞아 새 장가를 들구 정 붙여 살면 되는 거야. 이제 장서방두 없는데
아우님까지 휑하니 떠나버리면 나는 누굴 믿구 탑고개에 눌러 있으란 말인가."
갑송이는 슬며시 김기의 손을 잡아 떼어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성님 볼 면목이 없수. 곧 돌아올 게요. 누구에게두 아무 말 마우."
갑송이는 충혈된 눈으로 김기를 한참 건너다보더니 등을 돌려 집을 나갔다. 갑송이는 고
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바위넘이를 올랐다. 그는 모친과 아내가 나란히 묻힌 야산을 돌
아다볼 수가 없었다. 구구월의 산줄기가 갈리는 등성이까지 갑송이는 아무 생각도 없이 걸
었다. 얼른 참혹한 기억이 남은 집을 떠나고자 달아나다시피 나선 길이라 뚜렷한 방향이 있
을 리가 없었다. 갑송이는 등성이의 끝에 불쑥 솟아나간 바위에 걸터앉아 다리쉼을 하였다.
울창한 송림의 바위가 층층이 연잇고 있었다. 그런 바위 틈으로 섬처럼 붉은 흙을 드러낸
밭뙈기가 보이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었다.
갑송이는 탑고개 마을의 낯익은 지붕들을 내려다보면서 언젠가의 적막하던 느낌과 똑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재인말의 빈집들에다 불을 싸지르고 광대산 마루턱에서 뒤돌아보던
때처럼, 이제 사람 사는 마을에는 마지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에 육신을 담을
데 없이 인간세의 밖으로 내쳐진 듯하였다. 이러한 파가의 설움을 누구와 나눌 수가 있겠는
가. 뼈저린 설움도 잠들면 코를 골고 배가 고파지면 허겁지겁하는 법이다. 갑송이는 밤새 분
노와 슬픔으로 시달리고 두 끼니나 걸러서 기진맥진해 있었다. 뜨거운 국에 밥을 말아 훌훌
들이켜고 구들을 지고 한숨 자고 나면 살 것 같았다.
"월정사에나 들렀다 갈까..."
갑송이는 이런 때에 중놈들을 만나 집안 얘기를 꺼냈다가는 또 알쏭달쏭한 말이나 지껄이
며 곤한 사람을 어지럽히기나 할 것이라 전혀 내색하지 않기로 하였다. 다만 느긋하게 웃을
듯 말 듯한 부처님 무릎아래 절이라도 하고 나면 들볶이는 마음이 편해질 듯도 하였다. 옥
여에게 재나 올려 달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갑송이는 구구월을 지나 구월산 본령으로 들
어서서 아사봉을 올랐다. 된목이골의 반대편 북록에 월정사가 있으니 암벽 사이의 조도(,島
道)를 지나야 하였다. 암벽 아래 편에는 아사봉에만 자라는 적송들이 지옥의 바늘천지처럼
솟아올랐고 언제나 그렇듯이 바람 새나가는 소리가 떠도는 넋들의 아우성처럼 들렀다. 조도
를 지나자 계곡 아래로 월정사의 기와지붕이 보였다. 갑송이는 문루를 지나 월정사 경내로
들어갔다.
절 뒤편에는 여전히 사당패들의 통나무 귀틀집이 틀어박혀 있었으나 마침 때가 때인지라
모두들 출행을 나가고 몇몇 저 승패들이 집을 보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백련이나 각
심이 같은 도화의 동무 사당들과 부딪치면 어찌 견딜까 두려워했던 갑송이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대웅전과 명부전을 돌아서 대중방이 잇단 곳에 가니 마침 행자 하나가 나오다가 그
를 보고 합장하며 반겼다.
"옥여스님 계시우?"
행자가 마루를 걸어나가 끝방 문을 열고 갑송이가 찾아왔음을 알렸고, 옥여가 텁석부리의
얼굴을 내밀었다.
"이처사, 어서 오시오. 통 발길을 않길래 어디 송도에 가셨나 했소."
"송도에 갔었지요. 스님과 곡차를 나눈 지두 오래 되어서... 주지스님두 별고 없으시지요?"
"된목이골에는 더러 올라가시우?"
"예, 자주 갑니다. 그나저나 이 절 공양참이 아직 멀었나. 절밥 한번 얻어먹게."
"허... 벌써 지났는데 설마하니 이처사 밥이야 굶기겠소?"
옥여가 밖으로 나가 행자승에게 점심상을 이르고 돌아왔다.
"이제 문득 처사의 몰골을 대하니 깃 잃은 새 같고 굴 떠난 범 같소이다. 안색이 초췌하
고 눈빛이 불안하니 마음이 평안하지 않은 듯하오."
옥여는 역시 승려라 갑송의 어딘가 흐트러진 기색을 잘 알아보았다.
그러나 갑송이는 우물쭈물,
"몸이 안 좋아 그런가..."
하였다. 밥이 들어와 갑송이가 달게 먹느라고 숟갈로 듬뿍 떠넣고 손으로는 나물을 쥐어 볼
을 부풀리며 우물대는데 갑송이를 이윽히 바라보던 옥여가 중얼거렀다.
"공양 들구 나서 큰스님에게나 가보십시다."
"가만있수, 한숨 자구 나서 스님을 뵙든지 말든지."
"곤하고 배고플 제 월정사에 찾아와 아주 잘되었소."
갑송이가 물을 부어 훌훌 들이마시면서 농을 던졌다.
"압다, 이 잘난 서속밥에 산채 나부랭이를 한그릇 먹인다구 너무 부처님 공덕 찾지 마슈.
실은 내 먹구 싶은 건 너비아니 안주에 술 한말이우."
옥여는 빙긋 웃었다.
"그럽시다. 사당말에 내려가 닭이나 잡지 뭘. 곡차두 있을테니
까... 나두 오랜만에 이처사 덕으루 파계하겠는걸."
밥그릇을 모두 비우고 나자 갑송이는 입가심질을 하고 중얼거렀다.
"어휴, 이젠 좀 살겠고나."
옥여가 앞장을 서면서 갑송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사당 마을로 내려갔고 모
가비 임가네 집으로 갔는데 노파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곡차 남은 거 있으면 한잔 먹읍시다. 그리고 닭두 한 두어 마리 잡아 주오."
"에이그 술도 있고, 닭도 스무 마리 남짓 있건마는 알이나 걷어오라면 모를까 우린 차마
잡지 못허우. 요 아랫집에두 늙은이들이 몇이 있는데 와서 잡아달래지요."
"그럴 거 없네. 오늘은 이 처사께서 내 파계를 도우려고 오셨으니 내가 잡아야지."
"저런... 스님이요?"
"못할 게 무어요. 내가 극락세계로 보내주면 내세에는 봉이 되어 태어날 게야."
옥여는 갑송이를 바라보며 절절 웃었고, 갑송이가 맞받았다.
"여보, 아무리 스님이 땡초라지만 그럴 수가 있나. 내가 잡을 테니 스넘이 고기 한점 주워
먹는 것은 모른 체할 테유."
그러나 옥여는 승복을 벗어 던지고 털로 가득한 가슴을 드러내고 뒤꼍으로 돌아 나갔다.
잠깐 동안 푸드득거리는 소리와 물기는 울음소리가 부산스럽더니 옥여가 우악스런 양손에다
두 마리의 닭을 잡아들고 마당을 돌아 나왔다.
"나무아미타불... 방금 열반하였으니 어서 피를 뽑으시우."
목이 비틀려 축 늘어진 닭을 부엌으로 들여주며 옥여는 몸소 술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
다. 소반 위에 양푼으로 그득히 거른 탁주와 나물한 대접이 전부였다. 사발을 양푼에 담그어
그득히 술을 떠서 서로 한잔을 주고받았다. 갑송이는 곁으로는 쾌히 농도 지껄이고 산천경
개를 둘러보러 나온 풍류객인 듯하였으나 속마음은 차차 끊기 시작하여 옥여를 바라보던 눈
도 흐려지고 술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옥여는 이미 그런 기색을 아는지라, 말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지 한 양푼의 술이 다 비워지도록 술잔만을 건네었다. 백숙이 되어 들어온 닭을 한
마리씩 차지하여 승속이 함께 뜯었다. 옥여는 침울한 얼굴이 되어 있는 갑송이에게 다시 말
을 걸었다.
"내가 어째서 중이 되었는지 그 사연이나 한번 들어볼라우. 일찍이 천성이 게으르고 우매
하여 땅뙈기 조금 있던 것을 갈아보지도 못하고 집을 떠났소. 내가 건망병이 들기 시작하여
골수에 병이 스며서 아내가 누구인지 자식이 몇인지 집은 어디인지도 다 잊어버렸지요. 그
러니 이웃 마을에 마실을 나왔다가 영영 집을 다시 찾아가지 못하구 만게요.
찾을 생각도 안 나더구먼. 어디엔가 발길이 멎어야 할 텐데 내가 소중히 여기던 오죽 담
뱃대를 잃어버려서 그걸 찾노라구 백리 길을 헤맸으니 발길이 멎을 게 춰요. 그냥 걸었지.
헌데 실상은 내 오른손에 그 귀물을 꼭 쥐고 있었단 말야. 그런데 걸어가노라면 팔이 앞뒤
로 휘저어지거든. 팔이 뒤로 가면, 아, 내 담뱃대 어디로 갔나?하였다가 다시 팔이 앞으로
나을 제, 응, 요기 있구나, 하면서 내쳐 길을 걸었단 말이지. 그러니 잃었다가 찾았다가 하여
내손에 쥔 것인지 없어졌는지 분간이 되어야지.
내 담뱃대... 아 여기 있다. 내 담뱃대 어디 값나, 아 여깄네.
계속 그렇게 씨불거리면서 걷노라니 어느 중놈과 동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자가 내 짓거리를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라. 담뱃대를 잃었다가 찾았다가 하면서 꼬박 하루를 걸어 드디어 날이
저물었지. 하는 수 없이 길에서 노숙을 했는데 잠이 들어서야 귀물 찾는 일을 그쳤지 무어
요. 내가 잠이 든 사이에 중놈이 내 꼴을 보고는 그만 크게 깨닫고는, 이놈의 건망병이 이제
나을 것이고 나는 대오각성하였고나, 그했다지. 중놈이 내 머리를 깎아버리고 내 몸에 승복
을 입히고 저는 내가 썼던 갓에다 도포 입고는 날이 밝자마자 내 궁둥이를 호되게 질러서
잠을 깨워놓고 휘적휘적 걸어갔소. 그때 내가 춰라구 했는지 아시우.
이렇게 하였지.
어라, 같이 자던 중놈만 여기 있고, 나는 어디로 갔나.
그러고 보니 앞에서 누가 걸어간단 말이야. 나는 소리 지르며 쫓아갔지.
옳지 내가 저기 있나 보다. 여보 여보 거기 가는 사람... 혹시 나 아니우?
한데 아무리 쫓아가두 내가 잡혀야지. 고개를 넘는 사이에 나는 어디론가 달아나버려서 영
영 놓치구 말았소. 그래서 중놈만 남았거든. 하는 수 없이 절을 찾기루 하였지. 어절 수가
있어야지. 남들이 날더러 모두 중이라구 합장두 하구 공양도 해주며 산사로 오르는 길을 가
르쳐주더구만. 이게 내가 중이 되어버린 내력이우."
그들은 거듭 양푼의 술을 비워 어지간히 취기가 올라 있었다. 갑송이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만 둥하고 있다가,
"여보슈, 그럼 나허구 그 승복이나 바뀌 입을까?"
"좋지..."
"그럼 내가중이 되고 당신은 도적놈이 되겠구먼."
"그래서 중이 살생을 하구 이렇게 희희낙락하는 거 아니우. 자 내옷을 입으라니..."
옥여가 회색 저고리와 바지를 벗어 던지니 갑송이도 술김에 모든 것을 잊고 아이처럼 히
히닥거리며 옷을 바꿔 입었다. 옥여가 갑송이의 옷을 입고 머리에는 두건까지 질끈 동이고
나니 텁석부리며 큰 눈알이며가 어찌나 험상궂은지 속한 중에도 쓰잘 데 없는 개백정놈이
되어버렸다.
"헤헤, 이녁이 바로 나로구먼..."
"거긴 옥여라는 땡초중이지."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웃어대다가 갑송이가 문득 입을 다물고 옥여를 멀뚱히 들여다보았
다. 옥여도 표정을 고치고 뭔가 기다리는 듯하는데, 갑송이가 어이없게도 입술을 일그러뜨리
더니 비죽비죽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옥여는 눈시울을 가라앉히며 중얼거렸다. 옥여도 월정사에 오기까지 숱한 수도의 날을 보
냈고, 불심도 어지간한 승려였던지라 첫눈에 갑송이의 열기 띤 눈초리와 지치고 수심 깃든
안색을 보아 심상치 않게 여겼던 것이었다. 마치 아들의 간난을 살로 아는 어버이처럼, 그리
고 외양간 결에 두어 그가 스스로 깨달아 알 때까지 기다리는 장자처럼 옥여는 손수 갑송이
이게 닭도 잡아주고 어서 무슨 말이든지 나오기를 기다렸었다. 갑송이가 제 옷을 입은 옥여
의 몰골을 보자 어쩐지 자신의 모습이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보였고, 새삼
홀홀단신으로 내쳐진 듯하여 울음이 나오는데 제 모습의 옥여는 다시 눈을 감고 조용히 염
불을 외고 있었다.
"스님, 나 중 될라우..."
갑송이가 연신 소매로 눈시울을 씻으며 불쑥 말하니 옥여가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구려."
갑송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하였다.
"집사람을... 찔러 죽였수."
"왜 죽였소이까?"
"내가 못나서 사내 구실을 못하여 그만... 죄를 짓게 하였지요. 그래서 살려두느니 차라리
저 세상에서나 청정히 되라구..."
"잘하셨소이다."
옥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렇게 대꾸하였다. 갑송이는 양푼째로 들어서 벌컥이며 들이
마셨다. 그가 비척거리고 일어났다.
"풍열스님께 갈라우. 나두 중을 만들어달라구 해야지."
"이처사는 벌써 중이 되었소."
하면서 옥여가 갑송이의 손을 잡아끌어 앉혔다.
"까짓 속세에서 마지막으루 먹는 술인데 계를 받자마자 곡차 먹자구 조를려우. 실컷 마셔
둡시다."
갑송이와 옥여는 마주 암아 사당마을에 묻힌 술독을 거의 비우고 대취하였고, 피로에 지
쳤던 갑송이는 뒤로 넘어져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갑송이는 드높게 코를 골며 네 활개를 펴
고 뻗어 있었다.
"이처사... 이처사."
옥여가 갑송이의 몸을 흔들어 보았으나, 그는 바윗덩이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옥여는 빙긋
웃고 나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마당으로 나가서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이제껏 마
신 술을 시원스레 좔좔좔 토해냈다.
"오늘은 터줏대감께서 맹초의 복중주를 공양받으시도다! 이게 모두 새로 오신 행자의 덕
이니 흔쾌히 마시구 취하소서."
옥여는 중얼거리고 나서 샘에서 물을 떠서 달게 먹고 입가심하였다. 옥여의 걸음걸이가
비로소 꿋꿋해겼다. 그는 방에 들어가 갑송이의 팔을 들어 등에다 걸치고 끄응, 하면서 일어
났다.
"육근이 들어 몹시 무겁도다!"
옥여는 갑송이를 등에 업고 대웅전 앞마당을 질러갔다. 옥여는 구척 장신에 기골이 떡벌
어진 장한이었으나, 워낙에 축 늘어진 갑송이의 몸이 무거워서 몇번이나 바위 모통이에 걸
터앉아 숨을 돌리곤 하였다. 갑송이는 팔을 늘어뜨리고 옥여의 등에 얼굴을 대고 깊이 잠들
어 있었다. 그는 월정사 뒤편 계곡 사이의 달마 암으로 올라갔다. 선방의 문을 여니 풍열은
간 곳이 없고 동승만이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의 꼬락서니를 올려다보았다.
"스님 오시거든 행자가 새로 왔다구 말씀드려라. 아마 이 사람이 일어나기 전에 스님께서
돌아오실 것이니라."
"꾸중 들으면 저는 모르겠수."
"큰스님은 날마다 이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취한 사람을 선방에 들여놓는 연유를
잘 아실 게다."
옥여는 대강 이르고 나서 달마암을 내려와 갑송이의 옷을 벗고 다시 승복으로 갈아입었
다. 그리고는 법당에 나아가 조용히 진혼하는 독경을 읊기 시작하였다. 취한 세상에서부터
깨어나자마자 갑송이는 불자로 바꿔 자기를 보게 될 것이다. 옛글에도 세상사의 허랑함을비
긴 것이 많지마는 기장밥의 꿈이란 얘기도 있으니, 노생이 여옹에게서 얻어 베고 갔던 부귀
영화의 꿈이 서린 베개가 그러하다. 그 베개 위에서 노생은 영화가 극성한 일세를 꿈꾸고
깨어났으나 잠들기 전에 짓기 시작했던 밥이 아직 익지도 않았다는 얘기이다.
근거 없는 광대패로 험상궂게 자라나 어머니는 아내 손에 죽이고 다시 그 아내를 제 손으
로 절러 죽인 갑송이가 다시 어느 곳에 넋 한 끄틀이라도 매어볼 데가 있을 건가. 갑송이는
지친 몸에 옥여의 회색빛 승복과 장삼을 걸치고 풍열의 선방에서 열반이라도 한 듯이 곤하
게 잠들어 있었다. 얼만큼이나 잤을까, 오줌보가 가득 차서 저절로 눈이 떠져 방안을 둘러보
고 스스로 소스라쳤다.
"아니..."
갑송이는 어제의 참사를 깜박 잊고는 이곳이 여전히 탑고개의 정다운 삼간초가이려니 생
각했고 목청을 돋구면 도화가 부엌에서 예쁜 웃음을 흘리며 나설 듯하였다. 정수리가 찌르
르할 정도로 차가운 냉수사발을 받쳐든 도화의 흰 손에서 뿌려지는 한기가 얼굴에 떨어질
것만 같았다. 두리번거리며 자기 주제를 살피니 엉뚱하게도 승복을 걸쳤고 얼결에 놀라서
머리를 만지니 상투꼭지가 잡히는데 그제서야 갑송이는 옥여와 장난하던 생각이 났다. 그리
고 끊겨서 없어진 줄 알았던 어젰밤의 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갑송이는 한숨을 내쉬고 나
서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 아직 초저녁인 듯 아래편 월정사의 낮은 굴뚝마다 청솔
타는 연기가 안개와 더불어 자욱하였다. 하늘에 드문드문 별들이 또랑또랑 밝게 박혔다. 갑
송이는 계곡 아래편에 대고 길고 긴 오줌발을 날리면서 서 있었다. 소피를 끝내고 돌아서니
등뒤에누구인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이 깨었느냐?"
나적한 목소리와 단단해 보이는 체구의 주지스님인 풍열이 마당가에서 있었다. 아마도 마
당을 거닐며 행선에 잠겼던 듯싶었다.
"이리 와서 물 좀 마셔라."
풍열은 샘에서 표주박 가득히 물을 떠서 내밀고 있었다. 아마도 갑송이가 자는 동안에 돌
아와 줄곧 마당을 거닐었던 모양이었다. 갑송이는 제 꼴아 좀은 부끄러워 머못거리면서 허
리를 숙이고 어색하게 합장해 보였다.
"큰스님, 그동안 별고 없으십니까?"
"그래 네가 웬일이냐. 나는 어떤 객승이 유숙하러 온 줄 알았구나."
"아닙니다... 저 옥여스님하구 농을 좀 했었지요."
갑송은 거의 바닥이 비워지도록 마셨다. 물맛이 달고 시원하여 정신이 번적 드는 듯하였
다. 갑송이가 우물쭈물하다가 말하였다.
"스님... 저는 인제 그만 내려갈랍니다."
"어디루 가겠느냐?"
"글쎄요... 옥여스님 방에서 함께 자든지 아니면 된목이골에 들렀다가..."
하다가 갑송이는 말을 멈추였다.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갈 것인지 작정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
이었다. 풍열이 선방으로 들어가며 말하였다.
"들어오너라. 오늘은 나하구 얘기나 하다가 같이 자자."
갑송이는 풍열을 따라서 잠자던 방으로 들어갔다. 풍열이 불을 켜고 갑송이와 마주 앉았다.
"승복이 썩 어울리는구나, 잘되었다. 여기서 얼마 동안 상좌 노릇이나 하며 지내거라."
풍열이 제 마음대로 결정을 내려 말하니 갑송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 절더러 중이 되라구요?"
"그래 내가 일찍이 뭐라구 그랬느냐. 너는 불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다. 이제 옥여가 네게
승복을 입혀 내 방에 재운 걸 보니, 네가 부처님과 인연이 닿을 모양이다."
"에이 저 같은 도적놈이 어찌 승려가 된답디까?"
풍열은 고개만 흔들고 더이상 갑송이에게 권하지 않더니,
"거의 평생을 살생으로 보낸 자가 부처님의 이적을 나타낸 적두 있다. 이건 내가 묘향산
있을 때 겪어서 아는 일이다. 자비사의 상좌로 있을 때인데 어느 백정 하나가 중이 되겠다
구 찾아왔었다. 주지스님께서는 기특하긴 하여도 바탕이 백정인지라 받아들이시지는 않고서
다만 절의 불목하니로 지내게 하였다. 절의 다른 중들이 모두 그를 무지하고 어리석다 비웃
으며 별호를 대덕이라고 붙였는데, 절의 대소사는 물론이요, 농사라든가 벌채라든가 모든 잡
일에서 힘드는 일까지 그를 시켜 부려먹곤 하였고, 동승들도 그를 업수이여겨 함부로 해라
를 하였다.
재를 올릴 적은 물론이요 작은 불사가 있을 때에도 그는 얼씬도 못하였고 십여 년이 넘을
때까지 염불은커녕 독경 한 줄을 외지 못하였다. 늘 누더기의 베옷에 삭발한 머리로 대덕이
란 그럴 듯한 별호만으로 불자임을 겸손하게 자처하였느니라. 절에서는 물론이요 아랫 마을
에서도 그는 널리 알려져서 동네에 돼지를 잡는다든가 집을 고친 다든가 걸핏하면 대덕을
빌려다 부리곤 하였다. 그래도 그는 늘 합장하고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그가 절딴을 매러
아래로 내려가면 아이들이나 부인네들까지도 농을 걸며 그의 바보스런 대답을 듣고 배를 잡
노라고 법석이었더니라.
대덕은 소처럼 일이나 하고 장마에 물이 불으면 새로운 징검다리를 놓고, 누가 아프면 쫓
아가 시중들며, 초상나면 몸소 염해주고, 연고 없는 이의 장사를 치르고 호곡을 하기도 하였
다. 그러다가 뒤에 들으니 병들어 굴고 있는 이를 위하여 품을 팔아 도와주고 산을 넘어오
다가, 눈 속에 묻혀 얼어 죽었다 한다. 사람들은 그이가 살았을 때엔 여러가지 도움도 받았
으나 아무도 돌보지 않아 대덕은 골짜기에 파묻혀서 그대로 이듬해 봄에는 풀숲에 덮이고
말았지.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러면 그렇지 대덕이 어디서 연
고 없는 과부라도 만나 함께 떠났을 게라구 생각들을 했다. 대덕이 자비사에서 없어지니 나
무할 사람도 밭맬 사람도 거름 치울 사람도 없어 그제서야 그이가 얼마나 귀한 사랑이었는
가를 알았지. 사람들도 귀찮고 번거로운 일거리를 맡아줄 사람이 없고 보니, 장마에 물이 불
어도 대먹이 없어서 징검다리를 놓을 이가 없다며 아쉬워 하였다. 헌데... 대덕이 얼어 죽었
던 그 자리에서 보리수 나무가 자라났지. 대먹은 언제나 누더기 옷에다 그래도 제깐에는 중
이랍시고 목에 백팔염주를 소중히 걸고 다녔는데 그 말라붙은 염주알에서 싹이 트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게다.
어느 객승이 지나다가 보리수 나무를 보고 그 아래서 반쯤 묻힌 형해를 발견하고 느낌이
있어, 바위에다 불상을 쪼아놓고 갔다지. 내가 나이 들어서 다시 그곳을 찾아갔더니 다치고
병든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그 골짜기에 모여 있더구나. 미륵의 영험이 대단하여 누구든 기
도만 드리면 어떤 불치병이나 고질병도 씻은 듯이 낫는다는 것이었다. 대덕은 자비사의 주
지와 그를 비웃던 다른 어느 승려들보다도 훨씬 진여의 경지에 있어서 미륵으로 현신한 것
이다. 대덕의 실행은 내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어떤 묵정밭이든 부지런히 갈고 거름을
주면 옥토가 되느니라. 병이 낫고나서 약을 제하면 바로 이전의 그 사람이니라. 갑송이는 이
미 근실한 비구이니 독실하게 행하면 대사가 될 것이다."
갑송이는 풍열의 말을 듣고 공연히 목구멍이 뿌듯하고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마음이 움직
였으나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공연히 빈 웃음이나오는 것이었다.
"부처님께 절이나 하구 오겠습니다."
풍열은 갑송이가 이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것을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갑송이는
선방을 빠져나왔다.
"젠장, 저녁두 안 먹구 시장한데 또 술 생각이 나는구나."
갑송이는 월정사로 내려가 대중방을 기웃해보니 불이 켜져 있는데 옥여도 잠이 든 모양이
었다. 그는 사당말로 내려가 모가비 임가네 집을 찾아들었다. 노파는 등잔을 돋우고 앉아 바
느질을 하고 있었다. 내일 가기 전에 무명을 내어주기로 하고 술과 밥을 청하니 방안에 들
여 주었다. 갑송이는 낮에보다 훨씬 더 많이 술을 퍼마시고는 주홍이 도도하여 월정사로 다
시 올라가는데, 옥여를 깨워 지분덕거릴 작정이었다. 낮잠을 늘어지게 잤으니 새삼 잠이 올
리도 없었고 어핀지 마음이 정하니 비어서 실없는 웃음만이 새어나왔다. 그가 절 마당 앞을
지나는데 어둠속에서 우렁우렁하는 소리가 들린 듯하였다. 누가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왜 그래..."
또 부르는 듯하여 갑송이는 혼자 주절거렸다.
"가면 술 줄 테여..."
그러마고 들은 듯해서 갑송이는 대웅전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 문을 열었다. 법당 안
에는 등잔이 켜져 있고, 세존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어이구 부처 성님... 여기 계시구먼요."
갑송이는 저 혼자 꾸벅해 보이고는 불단 앞으로 다가섰다. 불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갑송이를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님, 절 받으슈."
갑송이가 중얼거리더니 불상을 향하여 합장하고 넙죽 엎드렀다. 다시 일어나 합장하고는
또 엎드리고 삼배를 드린 연후에 불상을 마주하여 자리잡고 앉으니 세존은 정말 갑송이의
큰성님이라도 된 듯이, 어디서 헤매다가 이제야 온단 말이냐 하는 표정이었다. 절을 올리고
가부좌하니 갑송이는 절망과 자책으로 들끓던 마음이 편안해지고 전신이 놓여나는 듯한 기
분이었다. 갑송이는 이제 혼잣소리를 지절이지도 않고 세존의 느긋한 눈길을 바라보기만 하
였다. 그는 예불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혼자 앉아 있었는데 저절로 술이 깨고 머리는 차
차 밝아졌다. 계명 무렵에 옥여가 법당에 들어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린다.
"오늘 예불은 벌써 끝났군."
옥여는 갑송이 모르게 법당 문을 다시 닫고 탑돌이를 하면서 염불을 외었다. 그날 갑송이
는 월정사를 떠나지 못하였다. 풍열에게 중이 되겠노라고 하여 삭발하고 계를 받으니 법명
을 대성법주라 하였다. 법주스님은 겨울이 깊어갈 때까지 월정사 선방에 박혀 있다가 금강
산으로 운부를 찾아 떠났다. 갑송이가 승려가 된 것은 된목이골에서는 물론이요, 김기도 알
지 못하였다.
2
함경도와 평안도를 가르고 달리는 낭림산맥은 높고 깊기가 백두산에
버금하는 무수한 봉우리들이 다투어 연이어서 남북으로 서 있는 벽과
도 같았다. 양덕에서부터 북으로 치달리는 산맥을 따라서 박달
령, 운령, 오강산, 병풍산 등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맹산에 이
르러 두무령 철옹산으로, 다시 안도리산과 만건덕산등의 지류가 갈리
며 황천령에서 동북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그 가운데 철웅산 채 못 미쳐서 우뚝 솟은 운봉산은 그야말로 이들
산줄기 중에서는 가장 험하고 높은 산이었다. 가깝기는 맹신에 사오십
리 상거이나 그보다 훨씬 먼 영흥에 속해 있었다. 운봉산 바로 남동쪽으로
나란히 숨은 병풍산은 봉우리가 많으나 산세가 부드러워서 곳곳에 넓은
분지가 많고 산정에는 큰 못이 있었다.
길산은 이미 지난 여름에 금강산을 떠나 바닷가를 따라서 북으로 을
라 묘향산을 향하여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그만 도중에서 발을 멈
추었던 것이다. 운부에게서 떠난 것은 혼자 수도하기 위함이었고 기왕
이면 묘향산에 있을지도 모르는 친부 보의 뒷소식이나 수소문하려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어언 사라지고 길산은 명산을 향하여 두
무령을 넘다가 그만 운봉산에 발을 들여 놓았던 것이었다.
산세에 반하여 심메마니들이 모여 사는 부락에서 여름을 보내고는
병풍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지 가까이의 분지에 오두막을
짖고 거기서 기거하였다. 그는 수락사까지의 계곡을 따라서
오르내리며 폭포도 맞고 밤이라든가 송실 따위의 산과도 채취하여 겨
울을 나기 위한 갈무리를 해두었다. 길산은 금강산에 있을 적에 운부
로부터 밤마다 천자를 배우고 '소학'을 떼어 겨우 글을
읽을 줄 알게 되었다. 그저 늙은 광대들에게 춤사위를 배우는 틈틈이
익혔던 태껸은 이제는 내공으로부터 시작하여 외공으로까지 나아가는
선법의 권술로 익어져서 제 몸의 분수껏 향상되었다. 원래가
수도란 저 혼자 떨어져 자기 자신과 대면할 때부터가 가경인지라 질산
은 병풍산의 오두막에서 겨울을 날 작정이었다.
만폭동의 운부암에는 각처에서 불경고승의 무리가
모여들었는데, 삼십여 명이나 되었다. 뒷봉의 오두막은 여러 채로 늘
어났고 서속밭도 많이 개간되어 있었다. 최헌경과 정학, 정신 형제들
은 수시로 운부암에 드나들었으며, 설유징은 비록 강릉으로 이사를 하
였으나 정학 형제들과 자주 만났다. 운부암이 자리가 잡혀가자 길산은
유정사의 일여가 알선하여 깊은 골의 석굴 암자에서 줄곧 수도하였다.
처음 일 년 동안은 운부와 길산이 둘이서 암자에 같이 기거하며 글도
배우고 틈틈이 무술도 익혔으나, 다음 일 년은 길산이 혼자 수도하는
사이사이에 운부가 가끔씩 나타나 잘못을 고쳐주기도 하였다. 삼 년
기한이 가까워졌으므로 길산은 운부대사에게 금강산을 떠나겠다고 아
뢰었다. 운부는 길산이 떠날 때 그가 명심해야 할 바를 몇가지 일러주
었다.
지나간 몇해의 수도 생활이 네게 많은 힘을 주었으리라 믿는다. 지
금 암자에는 보살 중생의 도를 구하는 이들이 많이 모여 있으나, 길산
이 너와는 다르다. 너는 네 말처럼 천한 백성이요, 나라를 등진 도적
놈이니라. 실상 네가 천민으로 살면서도 그 안에서 깨우치지 못하고
무엇인가 배우겠다며 나를 찾은 것을 혹자는 평하여, 스스로 성품을
잃고 배운 놈들께 투신하였다고 탓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탓하는 이들이야말로 책상물림의 그럴 듯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인가 의지는 있건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에
얼마나 안타깝더냐. 사랑이란 모두 계기가 있어야 하나니, 저 숱한 백성들이
원통하고 억울하게 살면서도 언제나 막연할 뿐 종잡히는 생각이 없을
제 또한 어찌하더냐. 길산이 네게는 스스로를 먼 데서 바라보는 지난
몇해였구나. 네 모습이 어떻더냐? 너는 바로 우리가 도모해야 하는 일의 중심
이 되어야 한다.
너는 팔도 천민들의 중심이요, 그들을 위해서 배운 것이다. 늘 너와 같은
백성들과 함께 있고, 언제라도 교만하고 잘난 자들과 같은 느낌이 들 적엔
차라리 자진하든지 너와 같은 자들의 조별을 받아야 한다. 나 같은
사람은 네 이루어짐과 더불어 죽을 것이다. 우리는 거름이요, 너희는
씨앗이며 뿌리와 같으니라, 언제 어느곳에 가 있더라도 잊지 말아라.
너는 천대받는 백성들의 울분이 화한 마음이요, 그 손발이고, 그 머리며,
그 무기가 되어라.
길산은 운부대사와 하직하고 내쳐서 묘향산을 향하여 고원,
안변을 지나 영흥으로 해서 맹산을 거쳐서 북상하는 길을 잡았었다.
길산은 병풍령을 넘어 맹산을 향하다가 하늘을 찌를 듯이 구
름 위로 솟은 운봉산을 바라보고 그쪽으로 발길이 끌렸다. 백두산 다
음이라는 운봉산의 산세는 과연 낭림산맥의 콧마루라고 할 만하였다.
길산은 산삼 채집꾼들이나 화전민들이 두어 집씩 모여 사는 골짜기들
을 헤맸고 여러 곳에서 끝을 알 수 없는 자연 동굴도 보아두었다. 그
러나 운봉산은 험하고 깊어서 혼자 지내기가 어려웠다. 거기서 가을을
보낸 뒤에 길산은 같은 산맥의 동남 지류에 오 리쯤 내려가서 있는 병
풍산으로 옮겨 갔다. 산의 연봉이 고만고만하게 동서로 펼쳐져 다시
그 남은 줄기가 육십여 리나 계속되어 철수내에 닿아 있어 병풍을 세
워둔 것과 같았다. 특히 병풍산의 위쪽에는 드넓은 초원이 있고 가운
데 못이 있어서 대지봉이라 하였다.
길산은 못이 바라보이는 초원 가녘에 통나무 귀틀집을 지었다. 나무
들을 엇갈려 차곡차곡 묶고 틈바구니마다 진흙을 이겨 발랐다. 그리고
지붕 위에는 나무껍질을 벗겨서 너와를 얹었다. 땅을 파고 진흙을 개
어 고래를 만들고 그 위에 편편한 돌을 덮은 다음에 다시 진흙을 발랐
다. 그리고는 마른 풀을 덮었으니 훌륭한 온돌이 마련되었다. 단칸방
이었으나 아궁이 쪽은 침소로 쓰고 윗목에는 갈무리한 양식을 쌓아두
었다. 길산의 일과는 이러하였다. 만물 조생시에 눈을 뜬다.
조생하는 때란, 별이 빛을 잃기 직전에 더욱 투명해지며 하늘에는 부
연 빛의 전조가 퍼지기 직전인데 음이 양과 바뀌기 전에 세
상의 기가 고요히 가라앉는 때이다. 모든 산짐승도 그때쯤 눈을
뜨는데 초목도 그때에 숨결을 바꾸고 바람도 방향을 바꾼다.
눈을 뜨면 잠시 누운 채로 어제 일을 차례로 하나씩 되살려 기억해
낸다. 잘못이 있었으면 곧 염두에 둔다. 일어나서 곧 밖으로 나와 오
두막 앞의 바위 위에 대지 쪽을 향하고 정좌한다. 양무릎을 바위에 붙
이고 등은 꼿꼿이 펴며 두 손을 겹쳐서 배꼽 아래 단전에 올려
놓고 눈은 내리깔아 삼 보 거리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태가 생겨날 때
부터 배꼽 중심으로 상체와 하체에 이어서 머리가 형성되나니, 탯줄이
란 자양과 숨을 받는 생명줄이고 열 달이 찬 연후에 탯줄을 달고서 태
어난다. 배꼽이야말로 사람이 가진 생명력의 근원이요, 기혈의
중점이며 예로부터 제하단전기해라 하여 선의 요체로 알려져 있다.
길산은 천천히 숨을 쉬며 단전에 기를 들어모은다.
외계의 대자연은 대아요, 자기 몸은 소아라 여겨 자연속에
흩어진 기를 흡수하여 몸에 축적한다. 자연의 기는 대자연
의 법도대로 움직이고 변화하나니, 아침놀이 번지고 초원에는 이슬이
내리며 짐승들은 물을 마시러 못가로 나오고 새는 날아오르며 안개와
바람은 들판을 향하여 움직인다. 천하의 영기를 단전에 끌어모
아 조식으로 교류하는 데 세 가지가 있다. 조식이란 조화된 숨
결이란 말이니 한 숨을 한 식이라 한다.
첫째로 복식이 있으니 한번 내뿜고 한번 들이쉬는 숨결에 능
히 배를 채운다. 들이마시면 공기가 폐부에 들어가 두루 충만해져 다
시 그 아래로 늘어나 넘쳐 내리는데, 폐부를 거친 기가 가슴을 비우고
배를 팽창시킨다. 또한 공기를 토할 때에도 배는 줄어들고 가슴을 압
박하여 그속의 흐린 공기를 전부 밖으로 몰아낸다. 숨결의 출입은 극
히 미세하여 비록 자기 귀라 할지라도 분간하기 어려을 정도이다.
둘째로 체식이 있나니, 자세는 태산처럼 묵중하게, 생각은
깃털처럼 가벼이 하고 참선을 계속할 적에, 호흡이 더욱 가늘어져 한
번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이른다. 어언
호흡이 없는 듯한 상태로 들어가 비록 몸이 있을지라도 없는 듯하여
숨결이 마치 전신의 땀구멍으로 드나드는 듯하다.
셋째로는 족심식이라는 것이 있는데 마음과 기를 두 발의
용천 중심에 모은다. 몸의 기혈을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좌선을 마치고 나서는 입을 열어 몸의 열기를 밖으로 흩어지게 한
연후에 몸을 천천히 흔들고 어깨를 풀며 목을 움직이고 손과 다리를
펴서 편한 자세로 고쳐 앉는다. 그리고는 안면과 양손과 몸을 이리저
리 비벼주고는 일어나 천천히 걷는다. 곧 행선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잠시 동안 선 채로 배꼽 아래에 힘을 주고 숨을 쉬는데 머리는 쳐들
어 세 길 높이의 허공을 바라보아 잡생각이 들지 않게 마음을 다잡는
다.
발을 떼어 걷는데 마치 학이 외다리로 서듯이 걸을 때마다 한쪽 다리
끝에 힘을 주고 배꼽 아래로 힘과 정신을 모아 숨쉰다.
발끝에 온몸의 무게를 모아서 단전에 힘을 주고 위로 오르는 듯 걷는 중에 배에
더욱 힘이 들어가게 된다. 몸의 기혈이 눈깜짝할 사이에 전신을 두루 돌아감을
알고서, 모든 정신과 말초 감각을 한 점으로 통제한다는 생각을 지닐
적에 신목이라 한다. 배에 힘을 주고 단전이 걸어가는 듯이 생각하면서 걷는다.
행선이 끝나고 나서는 곧 오두막 앞에 직립으로 꽂아 세운 오행목
위에 올라선다. 사방 네 귀퉁이에 수화목금의 나무 기둥을
세우고 중점에다 토의 기둥을 세웠는데, 같은 높이로 기둥을 박아 토
기둥을 안으로 하고, 이 다섯 지점을 기둥으로 연결해 두었다.
그리고 다시 바깥 둘레 수와 화의 중간, 화와 목의 중간에서부터 중
점을 향하여 기둥의 열을 지으니 모두 열두 줄의 기둥들이 서로 엇갈
리게 되었다.
이 네모난 기둥 위에서 처음에는 한발짝씩 걸어서 중점의 토 기둥에
까지 밟아 들어가고 다시 바깥으로 나오면서 속도를 빨리한다. 기둥을
건너뛰기 시작하면 화와 목의 중간에서 다시 목과 금의 중간 하는 식
으로 건너뛰고 차차 간격을 넓혀 화에서 목으로 목에서 금으로 단번에
뛰었다가, 더욱 간격을 넓혀 사선으로 화에서 저쪽 금으로 목에서 저
쪽 수로 건너뛴다.
두 다리로 건너 뛰기가 다하면 왼다리로 걷고 왼다리로 뛰어다니기를
한다. 그리고는 중점인 토 기둥에 서서 아무 곳이나 화, 또는 금이라
부르짖으며 중점에서 몸을 뒤집어 그 마음먹은 기둥 위에 선다. 마지
막으로는 땅 위에 내려서서 정좌하고 앉았다가 짧은 기합소리를 내지
르며 토 기종에 가서 올라앉고 다시 앉은 자세로 상체를 흔들어 다른
기둥으로 건너뛰기를 한다. 이 운신으로 오행목 수련을 끝낸다. 다음
엔 권고의 수련이니 고정된 것과 움직이는 것이 따로 있다. 풀
밭 가운데에 기둥을 꽂고 꼭지에다 격점을 둔다. 그리고 둘레에는 움
직이는 권고를 여섯 세웠는데 기다란 나무 봉 둘을 나란히 세워 그 가
운데에 짤막한 봉을 매달아둔 것이다.
한번씩 건드려 놓으면 단봉들은 춤을 추듯이 전후좌우로 흔들거리는
데 높낮이가 모두 다르다. 길산은 호흡을 재고 나서 재빠르게 단봉을
치거나 찌르며 둘레를 돌고 나서 중심의 고정된 권고를 향하여 파고들
어간다. 어느때는 단봉이 뒤통수를 노리며 달려들고, 등덜미 또는 옆
구리, 명치, 다리, 면상으로 날아드는데, 일방 피하며 한편 팔굽과
다리로 막아내는가 하면 흔들리는 단봉의 폭은 더욱 크고 거세어진다.
그리고는 복판의 권고를 타격하고 다시 단봉을 피하여 빠져나오기를
거듭한다. 더욱 들고 나기를 재빨리 계속하고 드디어는 단봉의 난무에
사지를 접촉함이 없이 권고를 치고 나오는 데까지 이른다. 이러한 단
련은 운부암에서도 계속해오던 것이었다.
왕모래를 깔고 잘게 쪼갠 나뭇가지들을 총총히 박아놓은 땅 위에 곧
게 편 손을 절러 넣는다. 큰 돌의 윗부분을 뽀족이 갈아서 그곳을 엄
지나 검지 또는 약지와 새끼손가락으로 집어 올려서 수평으로 들었다
가 놓기를 거듭한다. 한아름드리 통나무를 절구통만한 크기로 잘라 줄
에 매어 다리에 달고 그것들을 끌고 폭포 있는 곳까지 재빨리 걷는다.
폭포에 이르면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뒤통수에다 받고 두 손은 기
혈을 장심에 모으듯 하면서 정좌한다. 찬물을 맞아서 온몸은 저려오고
폭포의 거센 흐름 때문에 곤두박질칠 것 같지만 열기를 스스로의 몸에
서 내고 척추를 굳건히 지키면, 어느결에 두 손과 배가 더워지고 등판
은 굳건해지는 것이다.
내공과 외공의 단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곧 허기가 지고 미칠 듯이
시장하지만 눈은 만 리를 바라보듯 깨어 있고 정신은 잔잔한 천중수
처럼 밝다. 길산은 잣과 송화와 은행, 밤 등의 산과로 영이
의 조반을 든다. 그는 봄까지의 양식을 장만해야 되었으므로 병
풍산의 연봉을 오르내리며 산과를 채집하러 돌아다닌다. 땔나무도 하
고 양식도 장만하며 돌다가 오후에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운부가
내어준 책을 펴놓고 글자의 한 획 한 자를 새겨서 읽고 생각하노라면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고, 방에 불을 지피고는 저녁을 좁쌀죽과 산과로
든든히 먹는다. 다시 정좌하여 예전의 자기를 되씹으면서 유래를 살펴
따지고 반드시 여러 방면으로 그 일들을 생각해본다. 북두칠성이 오두
막 앞에 비칠 적에 마른 풀 위에 누워 잠든다.
길산의 풀어 헤쳐진 머리는 어깨를 덮었고 수염은 자랄 대로 자랐으
며, 과묵한 표정 위에 눈만이 번쩍였다. 어느덧 화려하던 단풍은 산천
마저 소롯이 잎을 벗어 겨울로 접어들었다. 길산은 오직 산, 하늘 그
리고 별 가운데 녹아 있어서 제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북도의
겨울은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가 섣달에서 정월까지 끊이질 않았다. 낭
림산맥은 마치 빙한지옥처럼 얼음과 눈에 뒤덮였고 맥맥한 침엽수립들
도 눈 속에 거의 파묻혀 애송이 도령의 턱밑 수염과도 같았다.
길산은 눈보라 속에서도 정좌와 수련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게도 정다운 벗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주먹만한 눈송이들이 아
예 하늘과 땅의 중간에서 비껴 쏟아지듯 하던 날 밤의 일이었다. 길산
은 잠들어 있었는데 원가 머리꼭지와 귓가에 끼쳐오는 남의 기색이 있
어 눈을 떴다. 누운 채로 얼굴을 정면에 둔 채로 이 어둠속에 무엇인
가가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것을 보았다. 상대방에서도 길산이 잠을 깨였
다는 것을 알아챈 듯하였다. 두 개의 푸른 안광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
었다. 길산은 그게 무엇인지 알았고 대번에 일어나 그 머리를 잡아 목
을 조이며 미간을 부숴버릴까 하였다. 그런 적의를 갖자마자 그르렁하
는 낮은 소리를 내면서 상대편이 움찔하였다.
길산은 그대로 얼굴만을 돌린 채로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바라
보는 사이에 그는 어쩐지 무관심해져서 그것이 윗목에 놓인 곡식자루
처럼 여겨겼다. 길산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잠들었다. 조생시
가 되어 그가 잠에서 깨어나보니 그것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어져
있었다. 아마도 폭설에 몰려 잠잘 곳을 찾다가 맞춤한 곳을 발견하고
기어든 모양이었다. 오두막의 입구에는 마른 풀로 판 엉성한 거적 비
슷한 것을 막아두었는데 그 아래로 기어든 것 같았다. 짐승은 아마도
안에 사람이 있는 냄새와 기색을 알고 있었으나 스스로 자신이 있는
데다가 인가 없는 산중에 홀로 있는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이다. 아니, 그보다도 취락의 생활 냄새가 가셔버리고 낭림산맥의 일
부분이 되어버린 그를 경계하지 않았던 까닭인지도 모르겐다.
이들날 저녁에 길산이 관솔불을 켜두고 정좌하여 지난 일 살피기를
계속중인데, 뭔가 커다란 덩치가 거적 아래로 꾸무럭거리며 스며들어
왔다. 황갈색에 검은 줄무늬가 얼룩진 송아지만한 칡범이었다. 턱 아
래로 수염처럼 털이 늘어졌고 꼬리는 뒷전에 비스듬히 서 있으며 눈이
호박을 박아놓은 듯하였다. 범은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고 나서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배를 깔고 엎드린다. 회색 털의 토끼를
물어온 것이다. 어젯밤을 자고 나가 온종일 싸다니다가 역시 따뜻하고
아늑한 오두막을 못내 버릴 수가 없어 다시 찾아들었다는 꼴이었다.
그는 먹이를 뜯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고 정좌한 길산을 빤히 올려다보
고는 하였다.
길산은 아무 생각 없이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범이 먹이를 다 먹
고 나더니 발등을 핥고는 턱을 올려두고 길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짐승은 다른 것은 다 좋은 잠자리인데 저 자가 버터고 있는 것이 마음
에 걸린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길산이 정좌를 풀고 움직이자 범은
조금 긴장이 된 모양인지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어 어제처럼 낮게 그
르렁거렸다. 길산은 혼자 있는 듯 예사롭게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 잠
들었다. 새벽에 범은 없어져 있었다. 그날 길산은 하루 종일 큼직한
활덫을 여러 개 만들어 눈 쌓인 골짜기의 바위 틈과 등성이에다 장치
하였다. 동숙하는 것에게도 식량이 필요하겠기 때문이었다. 길산이
만약 수도하는 도중이 아니라 산속에서 길을 가다가 범을 부딪쳤다면
자신의 기량과 담력도 시험해볼 겸하여 싸움을 벌였을 것이다. 견물필
찰십방, 처사필찰유래의 정진을 하는 그로서 비록 자신을 해칠지도 모르는
맹수라고는 하여도 마음으로 다스리지 못하고서는 모든 내공은 수포로
돌아갈 듯하였다. 며칠 동안 범이 보이질 않더니, 어느날 밤인가 손님은
또 불쑥 거적 아래로 기어 들어왔다. 역시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이었다.
그동안에 덫에 결렸던 노루를 오두막 밖에 두었더니 눈에 쌓인 채로
주인을 찾지 못하고 버려져 있었다. 범이 그것을 먹고는 남은 것은 다시
제자리에 갖다 두고 돌아와 거적 옆의 윗목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길산이 소피가 마려워져서 정좌를 풀고 일어났지만 범은 고개를 들
었을 뿐 그르렁거리지는 않았다. 그는 곧장 출구 쪽으로 갔으며 범이
슬쩍 일어나서 거적 아래로 새어나왔다. 길산이 소피를 보고 다시 들
어와 앉으니, 잠시 후에 자리를 비켜주었던 범도 도로 들어와서 제자
리를 차지하였다. 그로부터 범은 아예 길산의 오두막을 제 집으로 알
게 되었고 날마다 찾아와서 폭설과 폭풍을 피하여 한식구가 되어버렸
다.
어느때는 길산이 골짜기를 돌아다니다가 그 짐승을 만나는 때도 있
었는데, 그것은 한참이나 길산의 주위를 가까이서 배회하며 먼 산을
노리기도 하고 언덕을 뛰어오르기도 하며 그르렁거리기도 하면서 머물
다가 제 볼일을 보러 일단 헤어지는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함께
귀가하는 날도 있었다. 길산은 범이 누운 자리를 슬쩍 건너뛰어 오두
막 밖으로 나가기도 하는데 짐승은 미동도 않고 먹을 받치고 엎드려
있었다.
어느덧 따뜻한 온돌에 맛을 들였는지 범은 거적 밑이 아니라 길산이
자리한 아랫목 가까이로 옮겨 왔다. 그것은 마른 풀과 따뜻한 흙바닥
이 몹시 좋은 모양이었다. 정월이 다 가도록 둘은 함께 기거하였는데,
둘 다 쾌적하게 지내었다. 그들은 서로 기분의 반응을 재빨리 알았고
상대방에 대하여 예의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날은 범의 털이 길
산의 등에 닿아 모처럼 따뜻하게 자는 때도 있었으며, 범의 허리에 팔
을 올려 둘 때도 있었다.
눈이 걷히고 날씨가 따스해 지자 범은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어느날 길산이 대지봉 너머 병풍만의 지류인 다른 골짜기에서 무수한
칡의 밭을 알아냈는데 거의 팔뚝만한 굵기에 모두 하나같이 알을 배고
있었다. 그것은 마르고 딱딱해진 산과로 겨울을 넘긴 길산에게는 훌륭
한 양식이었다. 하루 종일 칡을 캐고 있었는데, 벌써 여러 날 보이지
않던 짐승이 맞은편 골짜기에 나타나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길
산은 반가워서 스스로 정한 아묵의 율을 깨뜨릴 뻔하였다. 그
는 입을 벌리다가 스스로 멈추고 범에게로 쫓아 올라가니 범도 마주
내려와서는 주위를 배회하며 꼬리를 빳빳이 쳐들었다. 길산이 칡을 한
점 그득히 캐는 동안 범은 바위에 올라앉아서 사방을 바라보고 있었
다. 길산이 한참 만에 작업에서 놓여나 바라보니 이미 법은 간 데가
없었다. 길산은 기다렸으나 짐승이 어디론가 거치를 옮겼음을 알았
다. 길산은 그 밭에서 커다란 동자삼을 두 뿌리나 캐었다. 그러나 그
는 먹지 않고 다음에 활인할 때를 생각하여 낡은 바랑 속에 넣어두었
던 것이다.
북관의 겨울은 천천히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갔다. 아직도 골짜기
마다두찌운 얼음이 남아 있었으며, 눈이 쌓여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 아래쪽에서는 벌써 푸른 새싹들이 돋아나와 봄을 반기고 있었다.
길산은 대지봉서 내려와 산줄기를 타고 운봉산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
가 처음에 운봉산에 있을 적에 사귀었던 산삼 채집꾼들의 귀틀집 동네
를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그나마 저녁마다 죽이나 끓여 먹던 서속이
다 떨어져서 간직하고 있던 무명 끝동과 바꾸어 오려는 참이었다. 그
가 진대골로 들어가니 마침 봄철 첫심을 보러 나가는 산신제가 벌어져
서, 서낭목 아래 노구메와 폄을 벌여놓고 또한 흘림까지 따라놓고 경
을 읽는 중이었다.
"유세차 운봉산 진대골서 메정성 드리오니 소레로 드리는 정
성 대례로 받으시구, 대례로 드리는 정성 소례로 받으시구 눌
러 짐작하을 적에 정성이 부족타 하더라도 부족타 마옵시구, 내루 희
망하옵시구, 빛으로 운감하옵시구, 짚음으루 희망하옵시구, 감사히
받으소서. 축원 발원하옵니다. 축원 발원하올 적에 미련한 인수 인간
은 소지 한 장으루 앞을 가려두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이 되오니
풀어 해갈하옵시구, 인간은 산삼이 귀한 고로 산삼을 많이 점지하여주
시옵소서."
소지하고 사례치성을 드리고 나서 그들이 뒤늦게 길산이 온 것을 보
고 아는 체를 하였는데 길산이도 오랜만에 수수떡을 맛보았고 술도 한
잔마셨다. 존장인 어이님이 길산을 보고 말하였다.
"산에서 혼자 공부하려거든 심이라두 보러 다니지."
길산은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였으니 이미 그가 칡밭에서 동삼을
캐었단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근년에는 반들개가 고작이고 세닢붙이 이상은 보지두 못하였네. 강
계에서두 향산 삼보다 우리를 더 알아주지만 그만큼 희귀하거든."
"요새는 제값두 많이 떨어졌지."
"어제 꿈 잘 꾸었거든 장서방이 내게 파시구랴."
심메꾼들이 음복하면서 떠드는데, 소장마니 하나가 앳된 목소리로
불평을 하였다.
"그런데요... 우리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육구만달을 다섯 뿌리나
캐어내셨다는 데가 바루 서산이목인데 거기가 심밭이란 말이에요. 내
가 보기에두 골이 깊어서 햇볕이 잘 들지 않구 나뭇잎이 켜켜로 앉아
음이 보이질 않는데 반음 반양이라고 바람이 들질 않아서 골짜기 속이
푹 싸여 있거든요. 그 앞의 서산이 바위가 아주 좋은 바람막이니까요.
우리가 그 골에 못 들어간 게 벌써 하메 보냈죠, 달메 보냈죠. 인제
눈이 녹았는데 두 또 들어가지 못하지요."
젊은이가 말하니 제주를 썻던 어이님이 혀를 찼다.
"죽고 싶으면 들어 가려무나."
그리고는 모두들 더이상 말을 않고 침통한 얼굴이 되는 것이었다.
길산이 궁금하여 물었다.
"거긴 왜 못 들어갑니까. 누가 해치기나 하나요?"
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린들 아오. 작년 봄부터 어디선가 장정들이 몰려와 산에다 구멍
을 들고 온통 뒤죽박죽을 만들어 놓고는 목책까지 둘러놓았는데, 그 안
에 얼씬거렸다가는 온전히 나을 수가 없쇠다."
"깊은 산에서 뭘 한단 말이오?"
길산은 차차 의문이 나서 자꾸 물었다.
"잠채꾼들인 모양이지, 아예 풀뭇간도 지어놓고 마바리로 실어내는
눈치더군."
"아니 그러면 잠채하러 다니는 놈들이 땅이나 열심히 팔 일이지, 뭣
땜에, 남의 생업은 방해하구 사람까지 해친단 말이우?"
"글쎄, 우리네야 뭘 아는가. 군관들이 창검으로 엄중히 지키는 것을
보면 나라에서 하는 일 같지만, 꼭 짐을 은밀히 실어내는 꼬락서니를
보면 그렇지두 않은 모양이데. 하여들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아."
길산은 슬슬 거기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여 잠자코 앉았다가
그들이 후하게 되어 준 서속 두어 말을 자루에 받아 넣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먼저 발설하였던 소장마니를 슬그머니 잡아당겨서 물었다.
"서산이목이 어디요?"
"왜요... 거기 가시게요?"
"사람 해친단 말을 들으니 구경이나 하구 싶어서... 또 알우, 나두
금 쪼가리나 주워 가지게 될지. 거긴 육구만달을 열 뿌리중 캘지두 모
르고..."
"연봉을 주욱 타구 한 사심 리쯤 올라가서 철옹성 있는 곳이에요."
길산이 돌아서서 진대골을 나서려니 뒤에서 소장마니가 따라왔다.
"나두 붙여 주세요. 거길 못 가면 늘 꿈자리가 께름칙할 것 같아서
혼자서라두 가려던 참이거든요."
"같이 가봅시다."
길산은 젊은 심메꾼과 동행하여 산줄기의 북쪽을 타고 내려갔다. 사
십여 리라고는 하나 길이 험하고 숲이 빽빽하여 자작령을 넘어서는 평
지로 내려갔다가 다시 산으로 오르기로 하였다. 운봉산, 병풍산이 그
러하듯 철옹산도 함경도의 영흥도호부에 속하여 있었으나, 기실 평안
도의 맹산 양덕에 가까웠고, 이들은 두 도의 사이를 가르는 담과도 같
았던 것이다.
철옹성은 그 암벽의 둘레가 육백오십여 척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
이 항아리의 입같이 솟았는데 그 위에 토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었다.
진장 하나가 있고 그 밑에 진군이 주둔하였다. 서산이목이란 두무령
에서 철옹성에 닿는 말뚝벙거지 모양의 뾰족한 골짜기의 끝을
이르는데 거친 바위와 전 나무들이 가득 찬 곳이었다. 은광이나 금광이
발견되면 수령이 즉시 장계하여 산금처에다 점을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건만 수세를 피하여 발견자들이 직접 은밀하게 캐어먹는 잠채잡
이가 한창 성행하였으니 특히 동북지방과 평안도지방이 극심하
였다. 땅 없고 집 없는 유민들은 물론이요, 도망친 남의 사천들도 맨
손에 곡괭이 한 자루면 밥을 먹을 수가 있었으므로 채굴광을 찾아들게
마련이었다. 이것이 나라의 금점 설치에 따라서 공개가 되어 있는 곳
이라면 또한 모르되, 돈냥이나 있어 금맥이나 은맥을 보고 투자하여
잠채꾼들이 일꾼을 부리니 자연히 폐단이 자심하였다.
서산이목의 금줄을 쥔 것은 맹산 고을 현감과 평안도 일대에서 유명
한 잡채잡이로 알려진 유복령이었다. 그들이 우연히 금맥을
찾게 되었던 것은 유가의 아랫사람들이 양덕에서부터 사금의 원류를
훑어 오르다가 바위 밖으로 노출된 원광석을 발견한 뒤부터였다. 유가
는 곧 몸소 맹산을 찾아가 현감의 동업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워낙 궁벽한 산골인데다 철옹성 가까운 곳에 있으니 현감이 진장과
더불어 눈가림만 해준다면 그냥 산에서 돈농사를 지을 수가 있다는 제
의였다. 현감은 그리 부패한 관리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청렴은 더욱
못하여서 결국은 재해시의 진휼비를 비축한다는 구실로 유가와 손을
잡았다. 우선 유복령이 밑도 끝도 없이 대처를 바라고 모여들어 유리
걸식하는 무리들을 장터에서 그러모았다. 돈은 충분히 낼 터이니 일꾼
을 산다는 말에 무의무탁한 자들이 모였고 그중에서 가장 팔팔하고 기
운이 넘치는 자들만을 삼십여 명 모아서 서산이목으로 끌고 왔다. 그
리고는 일을 시키는데 노임은커니와 죄수처럼 다루어 골짜기 안에 가
축사 같은 오두막을 지어두고 골짜기 어귀에는 목책을 두른 다음, 산
성을 수비할 진군들이 둘러싸고 지켰다. 아무리 유민의 무리라 하나
개중에는 제법 사리 판단에 밝고 바르게 처신할 줄 아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김선일이란 자가 그들 억울하게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버
린 잠채 광부들 가운데 끼여 있었으니 그는 정주에서 응모하여
속아서 끌려온 사람이었다. 김선일은 남의 고공살이를 하다가 사천으
로 떨어지지는 않고 새경을 모아 정주로 나와서 장사를 하였었다. 그
러나 남의 밥으로 머리가 굵어진 놈이 도방 장사꾼의 수완을 따를 수
가 없어 한 달 만에 다 털어먹고 부근의 부잣집을 찾아다니며 날품을
팔아 연명하였다. 그러는 중에 장터에 나타난 유복령이의 잠채꾼들을
만나게 되었고, 하루 열 푼씩 준다는 바람에 그들을 따라 나섰던 것이
다. 그가 다른 응모자와 함께 봉놋방 신세를 지며 두무령까지 와서 서
산이목으로 들어가니 군복 차림들이 창검 엄정하게 비껴들고 요소마다
서 있었으므로 더욱 안심이 되었다.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니 부역이 아님만 다행이라 여겼다. 골짜기는
손바닥을 벌리고 손가락의 끝만을 붙인 듯한 형상인데, 골짜기가 삼각
으로 삐죽하게 좁아진 끝에 입을 검게 벌린 굴혈 두 구멍이 보였다.
김선일은 목책을 지나 안으로 끌려갖고 거기에는 풀과 나무로 엉성히
지어진 광부들의 오두막이 있었다.
그는 유복령의 수하 사람 앞에 끌려잡는데, 웃통을 벗기고 체격을
조사받고 풀뭇간에 배치되었다. 맨흙에다 마른 짚더미를 깔아놓았고,
문은 단 하나였다. 그리고는 당장에 작업장에 끌려들어 갔는데 저와
같은 자들을 만나고 나서야 그들이 사노들보다 더 비참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일할 때 외에는 어둡고 냄새나는 오두막에 갇혀 있어야
하였고, 품삯은 아예 없었으며 고작 후한 것이 밥뿐이었다. 나물국에
짠지와 밥은 양껏 먹을 수가 있었다.
굶주리던 자들은 그런대로 배나 곯지 않고 지내게 된 것에 스스로
자족하는 축도 있었으나 김선일은 두 번이나 도망을 시도하였다가 기
등에 매달리고 압슬을 당하였다. 그리고는 풀뭇간에서 쫓겨나 채굴광
으로 들어가게 되었었다. 가끔씩 몇명이 깔려 죽고 병신이 되어 나왔
으며 잠채잡이의 장정들이 그들을 데려가서 어디론가 보내고 돌아왔
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니 분명한 것은 그들이 목책 밖
으로 나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겨을 동안에 작업은 부진하
였으나 계속된 추위에 시달린 그들은 하나같이 발에 동상이 걸려 발가
락이 몇개씩 떨어져 나갔다. 김선일은 날씨가 따뜻해 지면서 이제는 도
망이 아니라 서산이목을 뒤엎을 궁리를 하게 되었다. 김선일은 혼자서
빠져나가면 반드시 잡혀서 실패해버리고 만다는 것을 깨달았고 우선
동참자들과 더불어 저들과 싸울 준비를 할 작정이었다.
원광석을 캐내는 굴속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으며 가끔씩 천장이
무너져 내려 깔려 죽거나 다쳐서 실려 나갔다가 은밀히 매장되기도 하고
산골짜기에 버려지기도 하였다. 김선일은 총명하고 언변이 좋은데다
한번 탈출에 실패하고 쫓겨서 굴광에 들어온지 라 모두들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아니하였다. 선일이 안을 내어 우선 지키는 장정들이며 진군과
맞서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나니 곡괭이와 자루정이라든가 쇠메를
한가지씩 빼돌리기로 하였다.
식전에 일어나면 잠채잡이 무뢰배가 들어와 그들의 족쇄를 풀어주고
나서 한 줄로 서서 국밥 한 사발씩을 나누어주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작업대가 갈려 나가는데 대개 삼 오가 합쳐서
한 대를 이루었고, 한 대에는 두 명의 장정이 감시 역으로 따라붙었다.
첫 오는 막장 끝에서 원광석을 캐는데, 우선 자루정을 대어 쇠메로 치
면서 암벽에 구멍을 뚫고 구멍을 중심으로 하여 각자가 끌과 끌망치를
가지고 암벽을 떼어냈다. 삼십여 보 간격으로 횃대가 밝혀져 있어 굴
속은 어둠침침하였다. 둘째 오가 원광석을 칡바로 싼 채롱에 걸머지고
허리를 굽힌 채 낮은 굴을 지나 널찍한 입구로 져나르면, 이어서 셋째
오가 지게에 져다가 도가니가 펄펄 끓고 있는 풀뭇간까지 운반하는 것
이었다. 제련장에는 다시 감야하는 장정들이 있고, 광석을 잘게 쪼개고
나서 잡석을 골라내는 오와 신탄을 대는 오와 제련한 금을
다시 되풀이하여 녹여내는 오가 있었다.
그들의 감시의 눈이 소출한 곳은 역시 막장에서부터 광굴의 입구까
지여서 채금터 안에서 도구들을 하나씩 빼돌려 약속한 장소에 파묻어
두기로 하였다. 점심때 오가 바뀌게 되는데 하루 걸러 채롱짐을 지게
되었으며, 대개 오전에 막장에서 암벽을 깨는 작업을 하고 나면 오후
에는 굴 입구에서 지게짐을 나르게 되어 있었다. 저녁때에 작업이 파
하여 광구에 도열하여 서서 인원 점검을 받을 적에 작업도구들을 장정
들에게 반환하였다. 장정들은 그것들을 모아다가 자기네 숙사로 운반
해가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각 채금굴마다에서 도구가 한가지씩 모자
라는 일이 빈번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러졌다든가 잃었다는 식으로 넘겼으나 저들의 추궁이 심
하여지자, 고의로 암반을 건드려서 막장을 무너뜨리고 피하여 빠져나
오는 위험한 일도 감행하게 되매, 저들은 구태여 잃어버린 작업도구들
을 파내어 오라고는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곡괭이가 스무 자루, 쇠메
와 자루정이 각각 대여섯씩 모이게 되었다. 원래 수가 적고 약한 쪽에
서 강대한 쪽을 꺾으려면 정면으로 대들어서는 불리한 법이니 저들이
병장기 겨누고 지켜보는 친한 대낮에 일어났다가는 서산이목 안에 갇
힌 채로 협살을 당할 것이 뻔하였다. 일시 그들을 누르고 채금터를 벗
어난다 할지라도 사방의 바위와 입구의 목책을 둘러싸고 지킬 진군에
게 모조리 잡혀버릴 것이었다. 김선일은 우선 밤을 택하기로 하고서
아침 저녁으로 움막에 들어와 그들에게 족쇄를 채울 적에 그 열쇠를
유심히 보아두기로 하였다.
한 줄로 늘어져서 자게 되는데 그들의 왼발목에 고리를 끼우고 거기에
기다란 쇳대를 가로지른 다음에 끝에다 자물쇠를 채워두는 것이었다.
그러니 일시에 일어나서 다같이 움직이면 몰라도 하나씩 제각기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김선일은 일부러 순서를 바꾸어 자물쇠를 달게 되는
끝자리에 누워 지내는데, 장정 둘이서 들어와 하나는 장창을 비껴들고
그들이 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다른 하나가 그들의 발목고리에
쇳대를 질러놓고 자물쇠를 채줬다.
누워 있는 자리에서 머리만 조금 움직여도 창끝을 갖다 대고 발길로
내지르니 꼼짝할 도리가 없었다. 김선일이 날마다 잠깐씩 내밀어지고
허리춤으로 사라지는 열쇠를 관찰하여 그 모양을 자세히 알아냈다. 열쇠는
완자처럼 구부러져 있었는데 그 기장이 검지손가락의 한 배 반쯤이었다.
자물쇠에 그냥 밀어넣으면 받침쇠가 빠져나오고 자물쇠의 몸체가
반으로 갈라지게 되어 있었다. 기장과 모양을 보아두 고 나서 선일은
열쇠구멍에다 진흙덩이를 말랑말랑하게 뭉쳐서 붙여두 였다가 밤을
새우고 나서 장정들이 오기 전에 떼었다. 흙덩이에는 훌륭하게 열쇠구멍이
새겨졌고, 그는 풀뭇간에 있는 자들에게 기장과 모양을 꼭 같이 하여 판을
짜서 움막의 수에 따라 부어 내도록 하였다. 까짓 일은 풀뭇간에서 틈틈이
눈을 피하여 이삼 일이면 녹여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열쇠를 쥐고 나서도 그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였다. 눈이 내려서
멀리 달아나지 못하여 발자취로 잡히거나, 아니면 다행히 벗어난다 할
지라도 길을 잃어 눈밭에서 얼어 죽기가 십상이었던 것이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푸릇푸릇 나뭇잎이 돋아나자 그들의 마음은 차차 조급하여
졌다. 이름없는 노비로 전락하여 짐승처럼 아무도 모르는 산골파기에
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들은 예전에 고향에서 땅을 갈고 씨뿌리며
들판을 걸어다니던 생각으로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봄비가 촉촉히 내
리던 날 오후에 그들은 그날 밤에 결행하기로 의논이 되었다.
우선 움막마다 신호를 정하여 선일의 움막에서 소리가 들리면 일시
에 밖으로 뛰쳐나와 숨겨두었던 도구들을 들고 절반은 유복령이네 패
거리가 있는 숙사를 급습하고 나머지는 번을 서는 자들을 처치하고 나
서 목책을 넘어 달아나기 로 하였다. 밤이 되어 밖에서는 보슬비가 내
려 별빛도 없이 캄캄한데 선일은 모두들 지켜보는 가운데 자물쇠를 열
었다. 몇번이나 열었던 터라 틀림없을 터인데도 공연히 실패할까 하여
가슴을 졸였다. 자물쇠를 빼어 던지고 선일이 쇳대를 뽑으니 모두 자
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들 중의 하나가 밖으로 고개를 뽑고 휘파람 소
리를 내었다. 한참 뒤에 잇달아서 마주 신호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들
은 하나씩 움막을 빠져나가 차례로 채금터까지 뛰어갔다. 번을 서는
자들도 그들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채금터에 들어가 파묻어두였던 도구들을 캐내어 저마다 하나씩 손에
들고 나오니 이곳 저곳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자취가 보였다. 그들은
대를 나누어 민첩하게 장정들의 귀틀집으로 내려갔고 한편은 번 서는
곳곳마다 셋씩 다섯씩 기어들었다. 그들이 숙사에 이르니 사방은 괴괴
한데 깊은 잠에 빠졌는지 가끔씩 바람에 들창문이 삐걱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김선일이 문을 살짝 밀어두고는 곡괭이를 치켜들고 뛰어들
었다.
아뿔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방 저방을 차고 다녔건만 모
두 비어 있어 뛰쳐나오는데 벌써 밖에는 화광이 휘황하였다. 눈앞은
훤하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살수가 숨어 있었는지
화살이 비 오듯 날아와 그들을 꿰었다. 화광이 빛나는 그 너머의 캄캄
한 어둠속에서, 무릎을 꿇으면 살려준다는 호통소리가 들리며 일단 화
살이 그쳤으며 팔이나 다리에 살을 꽂은 채로 그들은 땅에 주저앉았
다. 그제서야 십여 명의 살수들이 걸어나왔고, 환도를 빼어든 군관이
나서서 그들을 포박할 것을 명하였다. 망보기들을 해치우러 갔던 사람
들도 오히려 유복령이네 장정들에게 맞고 깨어지거나 붙잡혀서 서산이
목의 오두막 앞으로 끌려왔다. 풀뭇간의 번수로 있는 평안도 사내가
가까이 와서 김선일이며 그와 동모하였던 사람들 몇을 집어냈으니, 이
미 열쇠를 부탁했을 때 미리 야장에게 알리고 그는 곧 감관과 유가의
점장에게 일러바쳤던 것이었다.
유복령은 그들이 도망하려는 뜻을 발본색원한답시고 진군을 불러다
매복시켜놓고 그날 밤을 기다렸던 터였다. 대여섯 사람이 살상되었으
며, 김선일 이하 세 사람의 모의자들이 잡힌 뒤에 서산이목의 소요는
간단히 진압되었다. 유복령은 친히 나와서 진군들과 함께 있더니 풀뭇
간의 번수는 자기네들 잠채배의 한 사람으로 넣어주고 나서, 김선일
등 나머지 세 사람을 더불어 녹로에 거꾸로 매달아두라는 명을
내렸다. 녹로란 두 개의 나무 기둥을 세운 뒤에 가로지름대에다 도르
래를 달고 아래편의 활차에 밧줄을 연결시킨 두레박틀이다. 흙과 바위
나 광석이나 무거운 것들을 위로 끌어올리는 데 쓰는 기구였다.
그것은 바로 채금광의 작업장 가운데 놓여 있어서 그곳을 오가며 일
하는 자들이 하루 종일 코앞에서 바라볼 수가 있었다. 유복령은 그들
이 피로와 허기에 지쳐서 굶어죽을 때까지 거기 매달아두려는 생각이
었다. 김선일과 세 사람은 녹로의 줄에 발목이 묶인 채로 허공중에 끌
어올려졌다. 가끔씩 잠채배의 장정들이 곁으로 지나가며 발길로 면상
이건 등판이건 가리지 않고 올려차거나 목을 잡아 좌우로 흔들어놓기
도 하고 돌려서 맴돌이를 시키곤 하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 오후
가 되자 그들은 모두 기력이 쇠잔하여 거의 죽은 사람과도 같았던 것
이다.
길산과 젊은 심메꾼이 두무령과 철옹산 사이의 비좁은 골짜기에 들
어선 것은 늦은 오후였다. 전나무와 잣나무들이 빽빽한데 바람소리가
스산하였다.
"서산이목에 다 왔수?"
"거기 빙 둘러서 있는 것이 철옹산성 쪽이구요, 이 골짜기의 안으루
들어가다 보면 끝에 서산이목이 있지요."
길산과 소장마니가 더욱 골짜기를 따라서 들어갔건만 사람의 자취도
없고 숲은 더욱 울창하며 양옆의 암벽들이 깎인 듯이 험하여질 뿐이었
다. 계곡 사이에 통나무 여럿을 묶어 걸쳐놓은 다리를 지나면서 야 길
산은 과연 그 골짜기 안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숲 사이나 계곡의 가녘으로 길을 낸
흔적을 역력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던 길산이 잠
깐 귀를 기울이더니 젊은 심메꾼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들은 얼른
숲 사이로 들어가서 엎드렀다. 잠시 후에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망
구를 앙쪽에 달아맨 작달막한 과하마 일곱 필쯤이 지나갔다.
아마도 제련이 끝난 금을 모아두었다가 내어가는 모양이었다. 짧은 행
렬이 지나간 다음에 그들은 다시 일어났다. 길산이 중얼거렀다.
"아주 가까이 온 모양이니 들키지 않게 암벽으루 올라가지..."
"내가 길을 잘 알구 있습니다."
소장마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곧 낯익은 바위를 찾아내고는 재
빠르게 기어올랐다. 과연 바위 뒤편으로 돌아가니 굴 비슷하게 위로
열린 통로가 있고 잔돌과 흙이 쌓여서 고사리가 그득한 틈서리가 있었
다. 그곳을 통하여 그들은 절벽 위로 비스듬히 올랐고 연이어 아래로
늘어진 마른 덩굴을 붙잡고 바위 절벽의 불쑥 튀어나온 곳으로 오를
수가 있었다. 그들은 한참이나 절벽 위를 오르내리며 걷다가 드디어
눈 아래 넓게 벌어진 빈터를 발견하였다. 서산이목이었다.
그들은 먼저 양쪽에 지켜 서 있는 군사를 발견하고 몸을 납죽 엎드
렸다. 맞은편으로 검은 굴혈이 보이고 아래편 빈터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오두막과 그들을 부리는 자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길산이 무
엇보다도 주의 깊게 보았던 것은 두레박들에 거꾸로 매달린 네 사람이
었다. 그들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시체인가 싶었으나 잘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매달린 사람들은 뭐요?"
"글쎄요... 아마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이겠지요. 지나치다 몇번
훔쳐보았는데 일꾼들을 마구잡이루 부려먹습디다."
"군사가 지키는 걸 보니, 경치는 죄수들인 모양이네."
소장마니는 혀를 찼다.
"저 아래 낮은 솔밭이 보이지요? 거기가 바루 심밭입니다. 그런데
코앞에다 두고 들어가질 못하니... 이 뒤의 골짜기라두 뒤져봐야겠어
요."
길산이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젊은 심메꾼에게 물었다.
"거 망태기에 부시 가지구 있수?"
"염려 마세요. 모래미에 질과 백사는 이삼 일분씩 가지구 다니니까
요. 실리기 없이 어찌 산속에서 며칠씩 다닐 수가 있나요."
곡식에 장에 소금에 부시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젊은 심메꾼의 대답
이었다.
"오늘 저녁은 생식하게 되었구먼."
길산이 엉뚱한 소리를 하자, 그는 영문을 모르고 말하였다.
"산에서 먹는 메맛으루 심을 보러 다니는데 생곡식을 씹는다니요?"
"이 근처에서 밥을 짓다가는 연기 때문에 들켜서 곧장 잡혀 들어갈
걸세."
"저쪽 골루 내려가지 않을래요?"
"어두워지면 가도록 하지."
길산은 그전에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거꾸로 매달려 늘어진
사람들을 보자마자 그들을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에게서
이곳의 실정을 소상히 알고 나면 또한 다른 사람들까지도 구해낼 묘책
이 생길 듯도 하였던 것이다.
그는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굴혈에서 사람들이 나오고 그들이 밥을
나누어 받아 오두막 안으로 밀려들어 가고 빈터 가운데에는 모닥불이
타올랄다. 잡판 어둠침침했다가 산곡에는 순식간에 짙은 어둠
이 내리덮였다. 길산은 망보는 자리를 자세히 보아두었으므로 우선 번
을 서는 군사를 해치우기로 하여 먹이를 덮치려는 호랑이처럼 잽싸고
날렵하게 그곳으로 다가간다. 서너 걸음까지 다가들었다가 획 뛰쳐오
르면서 상대의 목덜미를 수도로써 짧게 끓어 내리쳤다. 캑 소리를 뱉
으면서 주저앉는 것을 그대로 한 팔로 안아 뒤로 운반해다가 뉘어두었
다. 길만은 군졸의 더그레를 벗겨서 걸치고 머리에는 털벙거지를 썼
다. 그리고는 놀라서 숨을 죽이고 있는 소장마니에게 차분하게 일렀
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저런 꼴을 보구 모른 체할 수야 있겠소. 내가
저기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구해낼 것이니 좀도와줘야겠소."
길산은 역시 자세히 보아두어 알고 있는 큼직한 오두막을 가리켰다.
"저기에다 불을 지르며 소란을 부리는 사이에 이녁은 매달린 사람들
을 끌어내려만 두시우 그중에 두엇쯤 업어 나르면 더욱 좋겠수."
잠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장마니가 응낙을 하였다.
"해보십시다. 하지만 급해지면 나는 덮어놓구 뛸라우. 그나저나 이
절벽 아래루 어떻게 내려가요?"
"나만 따라오면 되오."
길산이 군졸처럼 버젓이 허리를 펴고 걸었고 상체를 숙인 젊은 심메
꾼이 뒤를 따랐다. 길산은 군졸이 망을 보던 곳에서부터 비스듬한 바
위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가파른 곳에는 깊이 홈을 파서 발디딤을 만
들어놓았으며 그곳이 통로였던 듯싶었다. 마당에는 화톳불이 훤하게
밝혀졌는데 군사 하나가 장창을 들고 불가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들은 태연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심메꾼을 어둠속에 남겨두고, 길산
이 혼자 빈터를 돌아 나가는데 지키는 군사는 무심하게 그를 바라보는
양이었다.
길산은 우선 오두막들의 뒤편으로 돌아가 나지막한 너와지
붕에서 바싹 마른 나무껍질 한 조각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깃털에다
부시를 쳐서 불을 일으켜 나무점질에다 불을 당겼다. 불이 제법 커진
다음에야 다른 나무껍질 하나를 또 벗겨내어 불을 붙여서 지붕에다 얌
전히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불씨는 옆집 지붕 위에 던졌다.
길산은 다시 빈터의 주위를 돌아서 굴혈 쪽으로 가서 그 안으로 댓 걸
음 들어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처음에는 오두막의 지붕들 위로 작은 불똥들이 보이더니 워낙 오랜
날에 바싹 말라 있던 나무껍질이라 대여섯 자의 높이로 불길과 연기가
치솟으며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때는 벌써 집안에 들었던 자들도 알고
있어서 소리들을 내지르며 밖으로 쫓아나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어찌할 바를 몰랄다.
"물, 물이 어딨나? 물을 끼얹어라."
진군들은 망보기만 남겨두고 대부분이 산성으로 돌아가버렀으니 족
쇄를 풀어 광부들을 시켜서 불을 끄지도 못하고 잠채배들끼리 목책 밖
에 있는 물을 길러 달려나갔다. 길산은 굴혈 안에서 그들의 분주한 무
리가 불난 집 주위에 쓸리는 것을 보자 친친히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매달린 자들을 바라고 뛰어간다. 심메꾼이 겁을 먹었는지 얼씬하지도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아직도 매달려 있는 채였다. 길산이 다급하여 맨
손으로 줄을 잡아당기려니, 그중에 하나가 눈을 또렷이 뜨고 잔뜩 쉰
목소리로 중얼거렀다.
"화톳불에서 나무 하나 빼어 오슈."
길산은 바로 맞았다며 달려가 모닥불에서 불타는 나뭇가지를 뽑아
되돌아갔다. 밧줄에 갖다 대니 줄이 타면서 끊어지는데, 물론 먼저 말
을 걸었던 자였다.
"뛸 수 있으면 저쪽으루 곧장 가오."
길산이 다시 다른 자의 묶인 줄을 태우는데 벌써 풀려난 자는 절뚝
이며 절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길산이 다른 자를 풀어낼 때 잠채배들
중에 하나가 뒤늦게 발견하고는,
"저놈 봐라..."
소리를 쳤다. 불난 곳에서 서성대던 군졸이 길산을 바라고 달려왔으
며 길산은 의식 없이 축 늘어진 자를 들쳐업고 뛰었다. 긴가민가하던
다른 자들도 와, 몰리면서 뒤를 물기 시작하였다. 소장마니가 먼저 김
선일을 부축하여 암벽의 발디딤을 타고 오르는데, 길산은 다급하여 한
사람만을 들쳐업고 뛰었다. 장정들의 일부는 불을끄고 진군들과 몇몇
이 쫓아왔다. 길산은 위로 오르다가 그들이 바로 발뒤꿈치에까지 다가
온 것을 알고는 돌아싫다. 돌아서니 장창을 겨눈 자가 멈칫거리다가
창으로 아랫도리를 바라고 찔러 들어왔다. 길산은 껑충 뛰면서 뒷걸음
질로 물러섰다. 몇발짝 위로 오르니 그쪽에서도 발디딤을 디디며 한걸
음씩 다가드는 데 뒤로는 환도와 몽둥이를 가진 자들이 차례로 서 있었
다. 길산이 등을 보이기만 하면 벌떼처럼 기어올라 그를 뒤로부터 찌
르거나 벨 것이 분명하였다.
"뭣하는 게냐, 맨손이다."
"한 놈을 두고 진을 친단 말이냐."
밑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자 아무리 위치가 불리하다 한들 참으로
맨손에 혼자인 놈이 어쩌랴 싶어서 앞장섰던 자가 창으로 길산의 배를
꿰려고 앞으로 내달았다. 길산은 등에다 혼절한 광부를 업은 채로 몸
을 비켜서 창이 빠져나가게 한 다음에 잇달아 일보 내려서면서 올려차
기로 그자의 턱을 내질렀다. 정확하게 발끝이 날아가 붙자 돌무더기
무너지듯 불안스럽게 몰려 섰던 자들이 아래로 와그르르 쏟아져 내려
갔다. 길산은 등을 돌려 재빨리 암벽 위로 뛰어올랐다. 밑에서 화살
몇대가 날아와 바위에 맞고 퉁겨져 나갔다. 위에 닿으니 젊은 심메꾼
이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올려주었다. 아래편 빈터에는 그들이 싸지른
불길로 화광이 어른거렀고, 다시 진군과 장정들이 망대에 오르려고 모
여 섰는 게 보였다. 길산은 벙거지와 더그레를 벗어 던졌고 곁에 누워
있던 김선일이 목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놈들이 거의 올라을 때까지 기다렀다가 바위를 내려굴립시다. 감
히 뒤를 따르지 못할 거요."
길산도 딴은 그럴 듯이 여겨 그와 나란히 엎드려서 아래를 내려다보
았다. 무기를 든 자들이 잽싼 동작으로 허리를 굽히고 암벽을 뛰어오
르고 있었다. 칠팔 보쯤 왔을까 할 적에 길산이 앞에 있던 바위를 들
어 암벽의 턱을 넘겨버리니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아래로 굴러 내려갔
다. 심메꾼도 길산을 따라서 바위를 굴리는 데 신이 낮다. 무지막지한
바윗덩이들이 굴러 내려오니 당황한 그들 중에 어떤 자는 지레 손을
앞으로 뻗치고 줄줄 타내려 미끄러져갔고, 어떤 자들은 아예 그 자리
에 오금을 박고 찰싹 붙어버렀다. 김선일이가 피로한 음성을 돋우어
으르대었다.
"어서 내려가지 않으면 젓 담글테."
그들은 두려운 듯이 움직이지 못하다가 길산이 다시 바위 하나를 받
쳐드는 시늉을 하자 벌벌 기어서 뒷걸음질을 하였다. 그들이 암벽에서
자취를 감춘 다음에 길산은 들었던 바위마저 굴려버리고는 두무령을
넘을 채비를 하였다.
"괜찮겠수?"
길산이 묻자 선일은 연신 침을 삼키며 대답하였다.
"물 한 모금만 들이켜면 기력이 돌아올 게요. 양식 가진 거 있으
슈?"
길산이 대답 대신에 심메꾼이 메고 있는 망태를 툭툭 두드려 보였
다. 선일은 비틀거리며 일어났고 소장마니가 그의 겨드랑이를 껴안았
다. 길산은 아직도 혼절해 있는 광부의 얼굴을 토닥여보았으나그대로
늘어져 있으므로 손목을 잡아보니 맥은 뛰고 있었다.
"숨이 끊기진 않았구먼."
그는 다시 광부를 들쳐업었다.
"길을 잘 알우?"
선일이 물으니 소장마니가 말하였다.
"염려 놓으슈, 서산이목이 원래 우리 골이었수. 당신들 땜에 나는
우리 조상께 원풀이를 못해드리구 있지요."
길산이 벼랑 위를 걷다가 목책 부근에서 일렁이며 움직이는 횃불들
을 바라보고 말하였다.
"아까 보아두었는데 잔교가 있으니, 그 아래 계곡 어디루 가
야 허우. 필시 다리는 저놈들이 막을 테구 우린 그 아랠 지나야지."
"참 그렇지요."
그들은 벼랑의 반대편으로 더듬어 내려갔는데 어둠속에서 길 없는
길을 찾노라고 옷이 찢어지고 피부가 벗겨지는 신고를 치렀다. 드디어
바닥에 닿으니 숨은 턱에 닿았으며 땀이 전신을 흠뻑 적시었다.
"나는 이젠... 서 있을 기운도 없소."
김선일이 돌밭 위에 누워서 중얼거렸다.
"잠깐만 쉽시다. 저 너머에서는 아마 우리를 잡으려고 모두 풀려나
왔을 텐데, 되도록 멀리 가서 아예 밥이나 지어 먹지."
길산이 말하니 선일이도 잠자코 대답이 없었다. 그들은 다시 계곡을
내려갔는데 아직 물은 대여섯 자의 넓이에 지나지 않았다. 선일이 물
가에 다가오자 그대로 엎어져서 손으로 움켜서 오랫동안 마셨다. 심메
꾼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올렀다.
"어지간히 마셔요. 물로 배를 채우면 금방 지치니까."
과연 그들이 다리가 걸린 곳 가까이 가니 횃불 가진 자들이 웅성거
리고 있었다. 서너 길밖에 안되는 높이에 다리가 걸려 있어 무슨 기척
이라도 있으면 곧 들릴 만한 거리였고 횃불만 아래쪽으로 비추면 골짜
기가 환히 보일 듯하였다. 물살은 거세었다. 길산이 망설이다가 지나
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서 쓰러진 나뭇등걸을 끌고 왔다.
"하는 수 없지. 물길을 타구 지납시다."
길산이 앞을 들고 한 팔은 혼절한 사람을 끼고 물에 들어갔으며 가
운데 선일이, 그뒤에 소장마니가 붙었다. 제법 넓어진 시내의 경사가
급하여 그들이 물에 들어서자마자 거세게 휩쓸려 내려갔다. 길산이 앞
을 바라보니 거뭇한 물체가 다가오는 데 바위였고 그 주위를 헤치고 내
려가는 물의 소용돌이가 대단하였다. 부딪치지 않으려고 발을 허위적
거리다가 바위를 내지르니미 끈하면서 비켜났다.
그러나 소용돌이에 휩쓸려 곤두박질을 쳤고, 나무만을 죽어라고 붙
잡고 놓지 않았다. 산협의 물이 뼈를 녹이는 듯 차가운데 몇번 더 이
리저리 부딪치면서 다리 아래로 빠져나갔다. 길산이 악물어 참았던 호
흡을 다시 터뜨리며 물 위로 고개를 들고 보니, 두 팔 모두 나무둥치
를 적안고 있었다. 그의 왼팔에 끼었던 사람은 이미 온데간데가 없었
다. 아마도 첫번째 물굽이에서 놓친 것 같았다. 그들은 한참이나 떠내
려가다가 물살의 흐름이 비교적 완만해진 곳에 이르러 가녘으로 헤쳐
나왔다.
선일은 물 밖에 나오자마자 온 기력이 다하였는지 엎어져서
꼼짝도 못하였다. 길산이 그를 업었다. 이제 서산이목의 골짜기 초입
은 지척이었다. 두무령 고개 아래 이르러서야 그들은 숙영할 자리를
잡았고, 길산이 선일의 배를 문지르며 또한 인중의 수구혈을
힘껏 눌러주며 소생을 시켰다. 소장마니가 젖은 깃을 버리고 나뭇잎으
로 가까스로 불을 일으킨 것과 거의 동시에 선일의 숨통이 터졌다. 모
닥불이 피워지자 소장마니가 서속을 씻어다가 밥을 지었고, 길산은 겨
우 기색을 되찾은 김선일을 간호하였다. 탈출할 때 마지막 남아 있던
힘을 다 쏟아냈는지, 그는 입을 벌리고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었으며
온몸이 냉천에 젖어서 싸늘하였다. 선일의 팔다리를 비벼주는데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길산을 바라보았다.
"정주 살던 김선일이라구 합니다. 이렇게 살려주시니 정말..."
"장길산이우. 뭣 좀 먹고 기운을 차려야 할 텐데."
"내야 이렇게 살아났으나, 뒤에 남은 사람들이 걱정이지요."
길산은 은연중에 선일의 동무 걱정하는 마음씨를 알고 가슴이 뭉클
해졌다.
"헌데...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 산중에 갇혀서 고초를 겪으시
우?"
"모두 끼니가 간데없어 산지사방을 떠돌다가, 잠채배들의 감언에 속
바서 끌려온 사람들이지요. 죄라니 당치두 않습니다."
소장마니가 불씨를 옮겨다가 모닥불을 그들 근처에 다시 피웠고, 한
기가 훨씬 덜해졌다.
"일부러 물을 많이 부어 죽을 끊었어요."
시냇물 흘러내려가는 소리와 침엽수립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가 마치 아우성치듯 하였다. 산협의 밤은 아직도 차가웠고 그들의 젖
은 몸은 모닥불로도 쉬 녹여지질 않았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소이다. 오늘밤을 넘기고 내일 저녁때쯤에는
아마 기력이 다하였겠지요. 매달려 있던 자들 중에서 하나는 이미 죽
였습니다."
"무슨 일루 뽑혀서 벌을 받는 게요?"
김선일이가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였고, 길산은 끄덕이며 듣기만 하
였다.
"지금 서산이목에는 금맥이 다하였다구 합니다. 그래서 아래로 파구
내려가서 다른 맥을 잡는다는데, 그리되면 사람도 더욱 많이 상하고
또한 우리 인원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요. 차라리 위에 고하여 나라에
서 금점을 설치함만 같지 못합니다."
"모두들 거기서 달아나기를 원하구 있겠군."
"그렇지요. 이제는 더욱 어려워질 길입니다. 우리가 한번 소란을 일
으켰으니 잠채배들이 눈에 불을 켜겠지요."
"진군들은 몇이나 되오?"
"산성에는 원래 유사시에 삼백여 명이 수비를 하게 된답니다. 그러
나 모두들 역을 지는 인근 백성이 대부분이라 실제 군졸은 오십 명도
채 못 되지요. 그러나 십여 명 거느린 장교 하나가 파견을 나와도 우
리는 꼼짝을 못합니다. 대적할 병장기두 없으려니와 마음이 맞지를 않
습니다. 이번 일만 성사하였더라면 간단히 서산이목을 뒤집고 모두 고
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 포한을 갚기 전에는 고향에 가지
않으렵니다. 풀뭇간의 번수로 있던 자를 박살내야지요."
"요기나 좀 하십시다."
죽이 끊는 단지를 내려놓으면서 소장마니가 권하였다. 숟가락이 없
으니 나무껍질로 죽을 떠서 적당히 식혀서는 길산이 선일의 입으로 넘
겨주었다. 선일은 간신히 몇모금을 넘긴 뒤에 고개를 저었다.
"자꾸 물만 먹고 싶소."
"너무 곤하여 그런 모양이우. 새벽까지 쉬었다가 운봉삼으루들어갑
시다."
김선일이 손을 들더니 길산의 손을 잡고 꼭 움켜쥐었다. 김선일이
눈을 스르르 감더니 잠시 후에 깊은 잠에 떨어졌는데, 길산은 일어나
맞아서 가끔씩 그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어 아직 숨이 들고 나는가를
확인하였다. 마른 나뭇잎을 긁어다가 그의 몸 위에 수육이 덮어주고
나무를 모닥불에 얹어 불을 더욱 일구었다. 혼자 불을 향하여 앉으니
일렁이는 화광이 그의 얼굴에 어른거리고 주위의 바람소리는 더욱 스
산하였다. 그 소리는 먼 데서 수많은 군중이 목청을 합하여 지르는 함
성과도 같이 길산의 가슴을 적시었다. 함성은 끊이질 않고 불길은 그
의 눈앞에서 활활 타올랐다. 길산은 손에 무심히 들고 있던 나뭇가지
를 꺾어 불 속에 던지면서 중얼거렸다.
"구월산으루 돌아가야겠구나."
그의 눈앞에는 병장기를 든 장정들의 행렬이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굽힌 채 가파른 산비탈을 지나고 있었다. 행
렬은 길게 계속되었다. 여러 마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행렬에 섞
이기도 하고 손을 흔들기도 하면서 그들을 따라왔다. 그리고 어둠 가
운데서 그들이 밝혀 든 횃불들이 들꽃처럼 피어나서 흔들거리고 있었
다. 함성소리는 길산의 귓가에 꽉 차서 가슴을 뒤흔드는 듯하였다. 길
산은 깜박 졸다가 소스라치고는 하였다.
새벽 동이 트자마자 소장마니와 길산은 나뭇가지로 담기를
만들었다. 김선일을 일으키려 하니 그는 나약한 숨을 내쉬며 의식을
돌이키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선일을 담기에 태워 운봉산 심메마니
마을로 돌아갔다. 진대골에는 산행에서 아직 내려오지 않은 심메꾼들
이 많아서 오두막들이 반나마 비어 있었다. 길산은 선일을 소장마니에
게 맡겨두고 일단 병풍산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제 산 아래 마을과 저
자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지난 밤에 길산은 서산이목
의 사람들을 구원해낼 작심을 하였으며, 그로써 세상에 내려가는 첫발
을 디디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길산은 겨울을 보낸 오두막과 대지봉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분
지에는 파릇파릇한 신록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는 보퉁이를 꾸려서 등
에 엇갈려 메고는 그곳을 떠났다. 길산이 진대골에 돌아가니 젊은 심
메꾼이 선일의 곁에 붙에 앉아서 억지로 미음을 떠넣어주고 있었다.
길산은 보통이 속에 간직해두었던 산삼뿌리를 꺼내었고, 심메꾼이 눈
을 빛내었다.
"육구만달은 못 되어도 젖솔배기는 되겠네요. 이거... 어디서 보았
어요?"
"서산이목보다두 더 좋은 심밭을 가리켜주지. 병풍산 대지봉 됫골에
내려가면 칡밭이 천여 평이나 밀생하였는데 그 주위에 심이 많을 게
요."
소장마니는 얼른 부산스러운 동작이 되면서 망태와 꼬챙이를 챙겨
들고 일어났다.
"얼른 가서 캐어야지, 말 새구 부정타겠네."
"거기가 호랑이 사냥길이니 조심허우."
길산이 빙긋 웃으며 말해주니 소장마니는 더욱 기뻐하였다.
"코짤맹이께서 다니는 길이라면 틀림없이 심밭이 있겠네. 후미진 골
이 대개 반음 반양이거든요."
"오늘 돌아올 거요?"
"글쎄요...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산신께서 삐치기 전에 모두 재어
와야죠."
소장마니는 망태 속에다 식량과 취사도구를 챙겨서 진대골을 떠났
다. 길산은 산삼을 찧어서 선일의 입에다 흘려 넣었다.
선일에게 삼 한 뿌리를 다 먹이고 나서 길산은 군불을 넉넉히 때주
었다. 그리고는 마을에 남아 있는 젊은 심메꾼들에게 가서 대지봉 됫
골의 심밭에 대하여 가르쳐주었는데 모두들 즐거워하며 진대골을 나서
는 것이었다. 저녁녘에 원기를 회복한 선일은 길산이 먹여주는 미음
한 그릇을 다 받아먹고 나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내 목숨은 이제부터 당신 것이나 마찬가지요. 이 은혜를 어찌 잊겠
습니까?"
"그런 소리 말고 어서 나을 생각이나 허우. 맥의 몸이 나아야 서산
이목에 붙잡힌 사람들을 건질 수가 있을 테니까..."
"여기서 혼자 무얼 하며 사시우? "
선일이가 심메꾼도 사냥꾼도 아닌 길산의 산생활이 못내 궁금하여
물었으나 길산은 웃을 뿐이었다.
"산림처사로 슬슬 나물이나 캐어먹고 살지."
그러나 선일은 길산이 그럴수록 더욱 그의 본색이 알 수 없어지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자기를 구해내었는지
또는 무엇 때문에 서산이목의 사람들을 구하자는 것인지 납득되지를
않았다.
"금 때문이우?"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쨋든 내가 일어나야 할 텐데..."
선일이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며 걷다가 아랫도리에 힘이 빠져서 주저
앉아버렸다.
"한 사나흘 지나야 기운을 차리겠지요. 그동안에 나는 여기 심메꾼
들 중에 젊은 사람들 몇을 가담시킬 테니 서산이목을 뒤집어버리고 떠
납시다."
"고향이라야 찾아가 만날 사람도 없습니다. 저두 여기서 나물이나
캐며 살지요."
"아니우, 나두 여기서 떠납니다."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그러나 길산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녘에야 대지봉에
나갔던 소장마니가 앞장서서 돌아왔다. 그는 오자마자 길산에게 불평
을 털어놓았다.
"아니... 내게만 심밭을 가르쳐준다더니 온 동네에다 장광설을 퍼
뜨려서 저자바닥이 되었어요."
"그래서 한 뿌리도 못 캐냈수?"
"허긴 육구만달 하나에 세닙붙이 두 뿌리를 캐었지요."
그의 뒤따라 마을의 젊은 심메꾼 너덧이 희희낙락하여 돌아왔다. 그
들은 모두들 삼을 한두 뿌리씩 캐어냈던 것이다. 소장마니는 마을 사
람들이 돌아오자 더이상 투덜거리지 못하게 되였다.
"어디 심을 그토록 캐냈으니 기분들이 어떠시우. 내가 보아둔 심밭
이 한두 군데가 아니오만 역시 가장 풍성한 곳은 두무령이 제일이오."
이미 심을 캐어냈는지라 진대골의 심메꾼들은 길산의 말에 혹하여
눈을 크게 뜨고 기다렀다.
"그곳이 어딥니까?"
"일 년에 두어 차례 이런 심밭을 보면 우리는 심메마니를 때려치우
고 인가 마을로 내려가 살 수가 있을 겁니다."
길산이 잠깐 뜸을 들였다가,
"서산이목의 심밭이 그중 으뜸입니다."
말하니 모두들 놀랐고 그중에서도 소장마니가 가장 놀란 듯하였다.
"아니 거기가 어딘데 심밭이라고 하는 겁니까? 발을 들여놓았다가
는 진군들께 잡혀서 경을 치는 판인데 까짓 것 그렇다면야 북관으로
나아가 월경하는 게 낫겠소."
"서산이목에서 진군을 쫓아버리면 되지 않소."
"진군이 물러 가보아야 철옹성인데 나라님 말씀도 아니고 어찌 쫓아
낸다구 허우."
길산은 소장마니에게 되물었다.
"거기가 잠채광산이니 금점을 설치하라고 감영에 진고하여도 될 것
이며 그러한 기색만 보여도 현감은 일단 군졸을 물리겠지. 그 다음에
십여 명 되는 잠채배들은 우리가 힘으로 하여도 못 쫓아내겠소?"
모두들 듣고 보니 이치가 분명하지만 원래가 심메꾼들이란 일찍이
속진을 떠나서 세상사와 등지고 살아온 사람들이라, 그것이 노루몰이
라도 된다면 몰라도 직접 나라의 일에 끼여드는 일은 저어하는 터였
다. 더구나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심 한뿌리 캐내려고 목욕재계에 백
일기도까지 드리며 치성하는 그들로서는 공연히 티격태격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심메꾼들중의 하나가 말하였다.
"심이 꼭 그 골짜기에서만 나오라는 법두 없구요, 우리가 구태여 서
산이목을 찾아들 필요두 없지요.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외다."
길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글쎄 상관이 되나 안되는가는 두고 보아야지. 여기서 서산이목이
삼사십 리 길이요, 산줄기가 같으니 북으로 횡천령, 남으로 오강산까
지가 이 진대골에서 발 닿는 길이올시다. 이제 두고 보시우. 두무령을
넘지 못하게 될걸."
그러나 모두들 믿기질 않는지 심드렁할 뿐이었다. 소장마니가 말하
였다.
"어쨌거나 이렇게 대심을 재게 해주었으니 우리 진대골에 이런 경사
가 없어요. 강계 나갈 제 함께 가시면 노자나 두둑히 드리지요."
길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좋다 싫다 표시를 하지 않았다. 이들날 그
는 망태에 취사도구와 양식을 챙겨 넣고 진대골을 떠났다. 선일에게는
한 사나흘 어던가 다녀올 터이니 기다리라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길산은 그 길로 두무령을 넘어 서산이목의 골짜기가 지척에 보이는
곳까지 나아갔다. 골짜기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서 일단 멈추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어둠이 깔리고 조각달이 산허리에 비스듬히 떠올랐
을 무렵에야 처음에 갔던 길을 따라서 잔교 아래를 지나 서산이목의
울타리 옆으로 접근하였다. 서산이목의 병 주둥이 같은 입구에 높다란
통나무 목책을 세우고 문을 만들어 밤낮으로 열고 닫고 하는 곳이었
다. 길산이 살펴보기에도 손발 맞는 자들 대여섯이면 능히 벌집을 만
들 수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한번 성사한다 한들 아예 싹을 근절치 못한다면 잠채배들의
악행은 더욱 계속될 것이었고, 더구나 그들은 부근의 관리들과 결탁하
고 있는 게 아닌가. 목책의 틈으로 엿보니 번드는 자가 문 앞에서 십
여보 떨어져 쭈그려앉아 졸고 있었다. 길산은 가로지른 나무를 딛고
담장의 꼭대기에 올라섰다가 사뿐 뛰어내렀다.
그리고는 발끝걸음인 채로 구름을 밟듯이 네댓 걸음에 뛰면서 졸고
있는 자의 목덜미를 껴안아 죄었다. 목젖을 움켜잡아 한번 힘을 주니
그는 대번에 기맥을 잃어 늘어져버린다. 그대로 질질 끌어다가 허리에
껴안고 목책 위로 올라 꼭대기에 걸쳐두고는 길산은 다시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길산은 그 이튿날 밤에도 오른편 절벽을 기어올라
수직하는 자를 해치우고는 골짜기 바깥으로 급히 물러나왔다. 이틀 밤
사이에 연거푸 두 사람이나 급사를 당하였으니, 서산이목은 발칵 뒤집혔다.
장교와 잠채배의 감장은 서로 이마를 맞대고 걱정들을 하였다.
"틀림없이 그날 밤에 여기 스며들어서, 불을 지르고 김선일이란 놈
을 구해간 놈들이 분명하오."
"진에 알려서 군사를 더욱 늘리게 하고 우리 유행수께도 알려서 대
책을 의논해야겠소이다."
장교가 또한 진군을 더욱 늘릴 수는 없음을 밝혔다.
"원래 삼초는 수성 군사로 있어야 하건만 때가 태평성대인지
라 요리조리 다 빠져나가고 겨우 일 초의 절반인 오십여 명이 될까말
까 하오. 더구나 산성군사를 마음대로 움직이려면 현감도 어쩌지 못하
여 관찰사의 승낙을 받아야 하는데, 무슨 핑계를 댄단 말이오."
"그야 호환이 났다거나 도적이 출몰하여 토포하기 위하여 거병하였
다면 되지 않겠소. 내일부터라도 군졸 십여 명을 내어 두무령 근처를
샅샅이 뒤져서 수상한 놈들을 잡아다가 문초를 하십시다. 뭔가 얻어
걸리는 게 있을 게요. 아직도 금맥이 노출하여 있는데, 이런 거재를
두고 물러난단 말이오."
"지난번에 김선일 일당의 시체를 남쪽의 급여 울에서 건져냈으니, 이
들이 틀림없이 남쪽의 연봉을 타고 도주했을 것이고 또한 그쪽에서 오
는 게 틀림없소이다. 내일 우리 아이들을 이끌고 두무령까지 나가보겠
소."
그들은 산성에서 십여 명의 군사를 보충받아 서산이목의 방비를 강
화하고, 다시 장교가 친히 나서서 군사를 이끌고 두무령까지 나가게
되었다. 그들이 골짜기에 이르러 한오라기의 연기를 발견하였고 조를
나누어 양쪽으로 에워싸고 접근하였으나 이미 꺼진 불에 잿더미만 남
아 있고 낟알이 흩어져 있어서 사람이 있던 자취가 역력하였다. 장교
는 부하들을 격려하여 말하였다.
"얼마 달아나지 못하였을 것이니 급히 뒤를 쫓으라!"
그들은 여울의 양쪽으로 갈라져서 시냇가를 샅샅이 뒤지면서 나아갔
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더니 군사 하나가 오른편 산등성 이에 우
쪽서 있는 사람의 행적을 발견하고 손짓하며 외쳤다.
"저기 원놈이 보입니다."
마침 두무령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장교가 아침부터 한나절을 쏘다
니다가 겨우 용병거리가 생겼으므로, 감격하여 환도를 빼어들고 외쳤
다.
"저놈 잡아라, 먼저 잡는 자는 상을 내리겠다."
군사들이 제각기 소리 지르며 산 위로 들아 올라가건만 그자는 먼산
을 바라보는 듯 꼼짝을 않고 서 있었다. 잠시 숲속에 가리워져 근거리
가보이지 않다가 활짝 트인 바위에 이르니 인적이 간데 없었다.
"방금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저기다 저기..."
그는 벌써 등성이를 타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보고 있었다. 십
여 명의 군졸들은 더그레 자락을 펄럭이며 다시 뒤를 쫓았다. 이렇게
잡힐 듯 말 듯 숨바꼭질하기에 여러 시간을 허비하고 나자 군사들은
어언 쫓는 일에 역증이 나고 말아 그가 앞에 가끔씩 나타나서 먼산 바
라보듯 우뚝 서 있어도 격하지 않게 되어값다. 어느덧 쫓는 걸음이 두
무령을 지나 자작령의 동서로 가로지른 나직한 연봉이 울타리처럼 펼
쳐진 곳에까지 이르렀는데 두 연봉이 맏닿은 후미진 술은 심메꾼들이
초산이터라 하는 곳이었다. 초산이 터란 낙엽이 수백 겹으로 쌓여 오랫
동안 썩어 내려서 땅이 기름지고 음습하여 심밭이 되기에 적당한 곳이
라는 말이었다.
북으로 향하여 터진 모퉁이였으니 햇볕도 일찍 사라지게 되고, 높은
산맥과 낮은 산맥이 합쳐진 곳이라 또한 그 냉한이 적합한 곳이다.
영흥서 맹산으로 가는 세 갈래의 길이 있으니, 한 길은 병풍령을 지나는
길이며, 또 하나는 자작령을 지나며, 그리고는 두무령을 지나는 길이었다.
일단 낭림산맥의 등골인 이곳 세 길을 지나고 나면 대개가 평야지대라
안주, 영변 등지에 가기까지는 별로이 험한 길이 없었다. 추적하던 군사들은
두무령의 보행로가 나오자 앞에 보이던 자의 행적을 잃어버리고 아예
주저앉아버렸다.
산성에 박혀 지내다가 돌연 읍내로 나가는 길을 만나게 되니 모두들
인가에 내려가 따뜻한 밥 한술이라도 먹었으면 하였다. 그때에 남쪽 숲의
허공으로 곧게 올라가고 있는 두어 오라기의 흰 연기를 모두들 바라보게
되었다. 그곳은 인가는커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저기가 어딘가?"
"예, 자작령의 초입이올시다."
"한두 놈이 아닌 모양이다. 급히 쫓아가 잡아내자."
그들은 다시 힘을 얻어 초산이터까지 내려갔다. 길산은 진대골의 심
메꾼들이 그들이 자주 다니던 초산미터에 있을 것을 미리 알고서 군사
를 유인하였던 것이다. 길산은 뒤를 물던 군사들이 그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운봉산 진대골로 돌아갔다.
초산이터에는 진대골의 심메마니 여러 명이 모여서 산뒤짐을 하고
나서 안침하고 있었다. 그들은 심을 보지 못하고 다른 약초들만을 캐
고는 사오십 리에 걸친 골짜기를 이 잡듯이 뒤질 작정이었다. 노구를
걸어두고 밥을 짓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더그레에 벙거지의 군
사들이 병장기를 삼엄하게 겨눠들고 양쪽으로 갈라져서 몰려왔다.
그들은 지은 죄가 없으므로 달아나지 않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오
는 양을 보니 장교가 환도를 빼어들고 그들을 잡으라고 외치는 것이었
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에 머리를 박고 그저 살려줍시사
고 빌었지만, 몇몇은 산 타던 솜씨를 그냥 썩이라 노루처럼 잽싼 동작
으로 숲을 향하여 뛰었다. 군사들은 잡힌 사람들을 지키고 몇명은 죽
어라 하고 달아난 심메꾼들을 쫓아값다. 그러나 덩굴과 나뭇가지를 잡
고 가파른 토벽을 이리저리 기어오르는 심메꾼들을 끝내 잡지 못하였
다. 장교는 남아 있는 자들은 모두 뒷결박짓고 한 줄에다 엮도록 하였
으니 그 수가 여섯이었다.
"너회놈들은 어디서 온 뭣하는 놈들이냐?"
"예... 저희는 운봉산에 부락을 이루어 사는 심메꾼들이올시다. 여
기 초산이 터는 우리가 하메철 달메철로 드나드는 곳이라 이번이 초행
이 아닙니다. 전부터 아무 일 없더니 새삼 무슨 죄로 저희를 포박하십
니까?"
진대골의 촌장 어이님이 하소하였으나, 장교는 코웃음을 치는 것이
었다.
"너회 중에 누군가가 서산이목에 몰래 숨어들어 불을 지르고, 사람
을 죽였다. 그놈들을 잡아낼 때까지 너희를 초달할 것이다."
위험을 모면하고 달아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꼭 확인하려
는 것이거늘, 산등성이에서 그들의 마을 사람들이 끌려가는 모양을 보
게 되었다. 또한 장교는 진대골의 소재를 물으니 산길로 이삼십 리를
남하한다 하였으며 이에 땅거미가 졌는데, 무엇이 있는지도 모를 곳으
로 찾아들었다가 화를 당할까 염려하였다.
십여 명의 병력으로는 잡은 여섯을 거느리기도 쉽지 않은 일이라
그 길로 곧 서산이목으로 갔다가, 이튿날 장정들까지 휘동하여 진대골을
뒤질 작정이었다. 그들이 서산이목에 돌아간 것은 늦은 밤이었고 군사들은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장정들이 심메꾼들을 넘겨받아 몇마디
문초하였으나 길산의 일을 모르는 그들의 입에서 분명한 대답이 나을
리가 없었다.
길산은 곧바로 진대골에 돌아왔는데 선일이 일어나서 밥을 젓고 있
다가 그를 반가이 맞이하였다.
"벌써 기운을 차렸소?"
"그럼요, 식욕이 동하여 오늘 아침부터 이 댁에 있는 곡식은 모두
바닥이 날 판입니다. 버섯과 고사리 맛이 꼭 쇠고기 같으니 목구녕에
켜로 앉은 때가 비로소 벗겨질 모양이우."
"내 서산이목에 다녀오는 길이지."
"예... 흔자서요?"
길산은 그와 마주 맞아 저넉을 들면서 이제까지의 행적을 대강 얘기
하여주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진대골이 술렁술렁할 게야. 우리는 모른 척하구
구경만 하구 있습시다."
선일이가 길산의 도모한 일에 일변 감탄하면서도 진대골의 순박한
심메꾼들에게는 미안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말하였다.
"우리를 돕자구, 세상을 등지구 순박허게 사는 사람들을 꾀었구먼
요."
그러나 길산은 냉담하게 대꾸하였다.
"순박하기로는 노루나 사슴이 제일이지. 그놈들은 일가를 이루어 몰
려다니면서도 호랑이는 물론이려니와 늑대나 승냥이 한 마리두 당해내
지 못하거든. 제 코앞에 위험이 닥치기 전에는 멀뚱히 보거나 달아나
는 게 고작이오. 마을에서 살지 못하고 숨어 사는 자들이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나. 언제 진대골 사람 중에 누군가가 서산
이목의 잠채배들에게 해를 당할지 모르는데 한사코 모른 성하다니...
두어 치 앞의 산삼꽃만 살피고 인간세는 살피지 않으니 산삼이 보일
리가 있나. 원래가 삼이란 하늘이 산에 정기를 내려 불쌍하게 죽어가
는 인생을 구완코저 함이거늘 이번에 못 배우면 평생 도라지뿌리나 보
구 다닐 게여."
그들이 저녁을 마치고 오두막 안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바깥이 소란
하여지고 이어 서로 떠드는 소리들이 들렀다. 김선일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자꾸만 거적을 들치고 내다보려니 길산이 말했다.
"내다보지 마오. 나두 자는 척할 터이니..."
길산이 팔베개를 하고서 짚더미 위에 벌렁 드러누웠고, 선일도 곁에
가서 누워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잠시 후에 거적을 들치며 소장마니가
들어싫다.
"대지봉 아저씨 큰탈입니다!"
소장마니는 다짜고짜로 길산의 다리를 잡고 흔들었다.
"큰일이 벌어졌어요. 초산이 터에 나갔던 어이님이랑 모두들 군졸들
에게 잡혀갔답니다."
길산이 짐짓 졸음이 아직 깨지 않은 듯이 하품을 하면서 일어나 앉
았다.
"상관할 바 아니라면서 뭘 걱정하우?"
"아니... 진대골의 어른들이 모두 잡혀갔는데 상관을 않아요?"
소장마니는 곧 울 듯한 목소리였다.
그에 뒤따라서 아마도 초산이 터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성싶은 심메꾼
이 쫓아들어 와 장황하게 그들이 붙들려가던 일을 말하였다. 선일도 길
산을 따라 시큰둥하니 앉았고, 길산이 오히려 그들에게 물었다.
"그래... 진대골에서는 어찌들 하시려우?"
"어찌하다니요, 어르신들을 구해 내든지 관가에 가서 직소해야지
요."
길산은 그들의 말을 듣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관가에 간다구? 아니 잠채배들과 손잡은 놈들이 바루 쥐를 지킨다
는 고양이인데 이미 양편이 한통속이 되어 있거늘 병아리의 하소를 듣
겠소. 냉큼 잡아먹구 말지."
모두들 입을 다물고 길산의 말이 계속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지키는 열 놈이 한 도적을 못 잡는다구 하였소. 저쪽은 병장기에다
힘도 우리보다 세고 수도 많지만, 서산이목의 좁은 골짜기에 갇혀 있
는 형국이고 우리는 사방천지에 온 산줄기가 우리 안마당이나 다름없
지. 한번 상대할 만허우. 더구나 그곳 사정에 통한 사람이 여기 있으
니 아무 염려할 게 없소."
심메꾼의 하나가 우물쭈물 대꾸하였다.
"설령 싸움에 유리하다 한들 우리는 여기서 계속하여 살아갈 터인
즉, 그 후환을 어찌한단 말이오?"
"그 후환은 바로 허를 찔러서 실을 얻는다는 말이 있으니, 내가 맹
산현감을 만나 담판을 하리다. 그리고 호되게 혼뜨검이 나면 저들도
산속에 은거하는 이들을 두려워할 게요. 저 아래에서 조세를 바치며
아전들께 시달리지도 않는 당신네 같은 유민이 어찌 썩은 관리의 후환
을 두려워하우."
진대골 사람들이 걱정중에 길산의 장당을 듣고 보니 마치 암흑천지
에 한점 등불을 바라본 듯하였다. 김선일이 비로소 길산을 거들고 나
섰다.
"나둔 정주서 품팔이 일을 하다가 대금을 만지게 해준다는 잠채배들
의 점에 빠져서 응모하여 끌려왔지요. 그러나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고
나 같은 몸붙일 데 없는 사내들이 각처에서 끌려와 사천보다두 더욱
험한 학대를 받으며 갇혀 있습니다. 보아하니 진대골의 댁네들도 저
아래 세상에서는 떳떳치 못하여 식솔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왔겠지요.
당신네들 존장을 구하는 일 못지않게 죄없이 축생 같은 목숨을 연명하
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또한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소."
의분이란 처음에는 제 코앞의 이해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넓혀져가는
것이라, 어느덧 진대골 심메마니들의 마음속에는 분끄러움이 퍼져가
고 있었다. 그들은 서산이목의 심밭을 버리면서까지 그 아수라장 같은
곳을 외면하였고, 질산이 대지봉의 심밭을 알려주고 나서 도움을 청하
였을 때에도 자기네와 상관없는 일이라 하여 발뺌들을 하였던 것이다.
발뺌이 거듭되더니 이제는 모가지까지 거머잡히게 되었으니, 뒤늦게
길산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길산이 다시 말
하였다.
"아마도 내일 오후쯤에 는 서산이목에서 군사들이 진대골로 들어을
게요. 그전에 우리가 일단 여길 떠나야 되우. 늦어두 내일 새벽에는
이곳을 비워야지. 어서 의논을 끝냅시다."
먼저 길산이 몇가지 안을 내었고 선일이가 그 안들 중에서 가장 맞
춤한 묘책을 택하였다.
서산이목에서는 진대골 사람 하나를 앞세우고 장정 대여섯에 군즐
다섯이 합세하여 운봉산을 향하였다. 즉 서산이목 채금터가 며칠 사이
에 시끄러워지니 아예 불안의 연원을 없애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자작령에서 점심 요기를 하고 나서 진대골로 들어가니 심메마니의 마
을은 온통 쥐죽은 듯하였다. 귀틀집 오두막마다 텅텅 비어 있고, 그들
의 초라한 살림도 다 없어져버린 듯하여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라고는
아궁이에 남아 있는 잿더미 속의 온기뿐이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집뒤짐을 하던 군졸 하나가 일렀으므로 장교가 달려가보니 노파와
소년이 제각기 거적을 쓰고 숨어 있거늘 끌어내어 문초하였다.
"너희들은 왜 숨어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바른 대로 말하여라."
노파는 이마를 조아리고 연신 치하를 드리면서 말하였다.
"예, 나으리들이 아니었으면 저희는 짐승들의 밥이 되거나 굵어죽었
을 것입니다. 어찌 속여 말을 하겠습니까. 한 닷새 전에 어디서 왔는
지도 모를 사내들이 운봉산에 나타나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는 것을 보
았지요. 그러나 철마다 나타나는 포수들이 사냥을 하러 왔거니만 여겼
습지요. 그런데 저희 마을 식구들이 산신제를 지내고 심을 보러 떠나
자마자 그날 밤중에 무리지은 놈들이 마을로 들어왔지요. 그리고는 모
두들 끌어내어 묶어놓고 오두막에다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더니 며칠
전에는 거의 빈사지경에 이른 사내를 끌어다가 간병하였습니다. 제가
미음을 쑤어 먹였고 그놈들의 시중을 들어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습니
다. 운산서 왔다는데, 두무령에 좋은 잠채터가 있다니 빼앗아야겠다
구 그럽디다."
거기까지 얘기하자 장정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주고받았다.
"운산 패거리들이 냄새를 맡았군."
"그놈들이 여기까지 나설 리가 없는데... 모를 일이로군."
노파는 얘기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로 수없이 마을을 들락거리며 서로 모이고 흩
어지기를 여러 차례 합디다. 어제 초산이터에 나갔던 우리 마을 사람
들이 잡혀값다구 알리러 왔던 사람들 말을 듣고는 저희끼리 마을 사람
들을 모두 옮겨두어야 한다구 식전에 떠낮지요. 아무레두 저희가 마음
이 놓이질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는 무서워서 슬그머니 손자를 데리고
빈집에 들어가 여태껏 숨어 있었던 거예요."
"그놈들이 어디루 간다구 하더냐?"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만, 식량을 모두 옮겨다 숨기는 것으로 보
아 다시 돌아오겠지요."
노파의 말에 장교가 그제서야 믿기었는지 주위의 장정들을 둘러보았
다.
"식량을 찾아냈다지?"
"예... 저 아래 풀숲에다 땅을 파서 숨기고 그 위에 나뭇잎을 덮어
놓았습니다."
"잘되었소. 그놈들은 우리가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돌아을 거
요. 모른 체하구 마을에서 나갑시다."
장교도 그럴 듯이 여겨, 장정들에게 노파와 아이를 빈 오두막에 처
넣고 빗장을 질러두도록 하였다. 그들이 물러가 부근에서 매복을 하는
한편 노파로 하여금 그들이 서산이목으로 물러갔음을 거짓 알리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진대골 심메마니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
비탈에 매복하고서 타처에서 왔다는 잠채배들이 올 것을 기다린다. 현
감과 수성장과 유복령이가 이해를 같이하여 잠재의 이를 나누는 터에
어찌 넘보는 자들을 내버려둘 수가 있겠는가. 털벙거지가 굴광 부근에
깔려 있는 셈인데도 담대히 침범하는 것으로 보아 저들은 오래 전부터
서산이목의 금을 노려온 듯하였다. 그들이 관군마저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불법의 채금터임을 아는 까닭일 것이었다.
장교는 그들이 마을로 돌아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 연후에 둘러싸고
모조리 잡아내거나 도륙할 심산이었다. 수성직이란 춥고 배고픈 것에
못지않게 도방과 밀리 떨어져 외롭기가 한량없는 직임이니, 돈을 차고
평양에라도 나아가 색주가의 광유라도 하였으면 원이 없는 군졸들이었다.
만일에 수상적은 잠채배들을 잡아내면 그런 은급이 올지도 몰랐다. 처
음에는 모두들 눈과 귀를 잔뜩 긴장시키고 노리다가, 시간이 흐르매
차즘 피로해져서는 나무 위에 망보기 하나만을 세워두고 기다렸다.
한편 길산과 선일은 진대골의 젊은 심메마니 칠팔 명과 더불어 이미
서산이목의 계곡 어귀에 이르러 있었다. 강대하고 움직이지 않는 상대
를 깨뜨리자면 우선 속여 교란시키고 움직이게 하여야 되는 것이니 기
병이 즉 그것이다. 서산이목에는 물론 관군 십여 명과 장정들
이 그만큼 있으나 그들에게 포한을 가진 광부가 삼십여 명이니 이를
테면 남의 진중에 들어가 있는 복병과도 같았다.
길산과 선일이만이 잔교 아래로 하여 서산이목까지 잠입하여 목책
가까이 스며들고, 진대골 사람들은 한 식경이나 지체했다가 제각기 흩어졌다.
서산이목에서는 바야흐로 작업이 끝나서 굴광에서 광부들이 끌려나을 무렵
이었는데, 양쪽의 벼랑 위에 섰는 수직 군사가 둘뿐이고 하나는 목책
근처에 있었으며 나머지는 모두들 저녁밥을 먹는 중이었다. 갑자기 양
쪽의 벼랑가에 사람의 흰 자취가 나타났고, 조롱하고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아, 지금부터 너희를 어육으로 만들겠다. 죽고 싶으
면 덤벼보아라."
"방금 너희 산성 군졸이 두무령서 떼죽음을 하였다. 살고 싶으면 그
자리에 엎드려 빌려무나."
두 손에 입나발까지 만들어 떠드는 판이라 목책 안의 모든 사람들이
들었고, 오두막 안에서 겸상을 받고 앉았던 감장과 군졸의 오장이 함
께 뛰쳐나왔다. 마침 맥놓고 앉았던 망보기들이 저만치서 떠들어대는
두 사람을 잡으려고 황급히 벼랑 위를 뛰는 게 올려다보였다. 고함치
던 놈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군졸도 그 너머로 없어졌다. 오장이 장
교도 없는 판에 당황하여 잠채배의 감장에게 물었다.
"어쩌려오, 싸울 태세를 갖추리까?"
"까짓 두어 놈에 싸우기는..."
하다가 감장은 그들이 외치던 말을 되새겼다. 산성 군사가 두무령에서
때죽음을 하였다니 믿기지는 않으나 지난번에 소요가 있었고 밤에 수
직하는 자가 둘이나 희생을 당했으니 역시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었
다.
"지난번에두 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었는데..."
오장의 생각도 같은지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꺼림칙한 게 아니라 숫
제 공포에 질린 어조였다. 그들은 초조하게 벼랑 위를 바라보고 있었
다.
"잡았나?"
벼랑 위로 검은 더그레 자락이 너풀거리며 나타나자마자 오장이 외
쳐 물었다.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없네."
"동작이 어찌나 재빠른지 꼭 산토끼들 같은걸."
감장은 그들과 상대 않고 수하 잠채배들께 일렀다.
"이놈들 모두 집안으로 들여보내구 족쇄를 채워라."
장정들이 칼과 창을 겨누어 광부들을 집안으로 몰아넣는데, 평상시
와는 달리 두 명이 열다섯씩을 다루는 게 아니라 모두 풀려나와서 거
들었다. 며칠 사이의 분위기가 어느덧 무르익어 광부들 자신도 슬슬
분이 일어나 술렁대는 판인데, 지척에서 정체 모를 자들의 고함소리를
듣고 보니 더욱 부풀었다. 그자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되 이들 잠
채배를 적으로 삼은게 틀림없다면 자기들의 편인 것이다. 광부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몰아대는 장정들을 향하여 피식 웃거나 비양대
는 소리도 하였다. 그들은 오두막 안에 들어가서도 좀체 짚더미 위에
누우려 하지 않았다. 장정들은 겉으로는 서슬이 시퍼랬으나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보통 때와는 달리 무기만 쳐들 뿐 욕설이나 발길질을
못하였다. 가까스로 쇳대가 걸리고 자물쇠가 채워진 다음에 오두막의
문은 닫히고 통나무의 빗장이 걸렸다. 그제서야 잠채배들은 겨우 안심
이 된 듯하였다. 오장은 벼랑 위의 수직에게 동요치 말고 살피라 이르
고는 군사들을 데리고 목책 앞으로 나아가 지켰다. 감장이 수하들을
모아두고 일렀다.
"그놈들이 길 위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급여울이나 계곡
의 어디엔가 숨어 있겠지. 지난번에도 벼랑으로 오른 걸 보면 틀림없
이 계곡으로 숨어든 게 분명하다. 짝을 나누어 양쪽 절벽 뒤의 후미진
계곡을 뒤져라."
벼랑 위에서 떠들던 두 사람은 소장마니와 또다른 심메꾼이었다. 워
낙 산을 오르고 벼랑을 타며 바위를 건너뛰는 일이 생업인 사람들인지
라, 뛰어 달아나도 그만이고 나무숲이나 바위 틈에 숨으면 범도 알아
채지 못할 정도였다. 길산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적에 싸우라기보다
는 바로 그 산 타는 걸음걸이로 상대를 현혹시키기를 바랬던 것이다.
장정들은 즉시 두 사람이 숨어 있음직한 곳을 찾아서 목책 밖으로 우
르르 쏟아져 나갔다. 나갈 때 감장이 오장에게 당부하였다.
"이쪽으로 쫓겨 나오거든 얼른 가서 다리 위와 아래를 막으슈. 그러
면 꼼작없이 잡힐 테니."
"몰아만 내우. 산돼지 때려 잡듯 할 테니까."
장정들은 곧장 벼랑 뒤의 비좁은 골짜기로 들어가 훑어 나을 모양이
었다. 오장은 군졸들과 함께 목책의 문을 활짝 열어두고서 앞으로 사
람이 뛰쳐 지나가지 않는가를 살렸다. 그때에 이건 웬일인지, 지나가
는 것이 아니라 앞쪽 길 위에 세 사람이 버젓이 걸어오고 있었다. 오
장은 주위의 동료를 둘러보았다.
"저게 웬놈들이냐?"
제각기 나갈까 말까 미적미적하는 중인데, 그들은 적당한 거리에서
멈추더니 악을 쓰며 욕설을 피부여대는 것이었다.
"에이 이 오장육부가 썩어 문드러져서 쭉정이만 남은 허채비야."
"너희가 어디 군사냐, 동촌 서촌의 병정잽기 하는 애새끼들이냐. 고
추를 뽑아서 술안주를 해버릴라."
"아니 저놈들이... 구목에 갈그랑 낫질일세."
하도 어이가 없으니 오장은 저만치서 욕설을 퍼부어 대는 자들을 멀뚱
히 바라보았다. 군졸들은 제각기 열이 나서 병장기 쳐들고 어깨를 추
스르며 연신 욕지거리인데 곤장 맞은 놈 볼기짝처럼 불그락푸르락하였
다.
"허, 저놈들 아무래두 간에 곰팡이 슬었구먼."
"뭘 이러구 섰어. 쫓아가서 한 창에 산적꽂이를 만들지."
"얘, 물개똥을 톱으로 썰라, 창까지 쓸 것이 무에 있니, 한 주먹감
두 안되는 놈들인데."
군졸들은 그러면서도 대등 목책 밖으로 뛰쳐나가지는 못하고서 우물
주물하였으니,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대수가 했다고 별스
런 저넉에 낮선 놈들이 동서남북으로 나타나 얼러대고 욕설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장도 저놈들이 우리를 꾀려들지 하며, 돌아서서 상
대를 않으려고 아예 동료들을 엉성한 문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제풀에 지치도록 놓아두어라.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저리 지랄들이
지. 대체 어디서 온 놈들일까."
"아마 채금터를 노리는 놈들인 모양인데 우리에게 무슨 포한이 있다
구 까스르구 그래. 신새벽에 참새 외입질하듯 요란하군."
군즐들이 목책 안으로 들어가자 멀리 떨어져서 욕설하던 자들 중에
하나가 겁도 없이 발짓을 까불대면서 다가왔다.
"얘 이놈들아, 갑자기 소금 먹은 푸성귀가 되었느냐, 회초리 맞은
좇자루가 되었느냐. 나는 맨손이고 너희는 병장기 가겼으니 대로에서
무더기로 덤벼보아라. 사추리를 훑어서 새 털벙거지 만들어 주랴."
그자는 목책 십여 보 앞에 주저앉더니 다리를 꼬고 두 무릎을 손바
닥으로 두드려 장단을 맞추면서 노래하였다.
"수수개떡 해먹고 키 사러 갔다 골 샀네, 골 사러 갔다 키 사지, 골
났다 불났다 뒷간에 호박국 띠 말아줄까, 에이 구려."
웃음이 터지다가 바로 수염 터럭 끝에서 간들거리는 꼬락서니를 보
자니 손찌검 올려붙이지 않고 눌러 배길 재간이 없는지라. 에잇 망할
하면서 오장이 벌떡 일어나 목책의 문을 밀었다. 그야말로 오소리 굴
을 쑤셔놓고도 그자는 일어서기는커녕 연방 무릎 박자였다.
오장이 칼을 빼들고 쫓으니 다른 군줄들도 우르르 몰려나갔고 놀리
던 자는 활시위 퉁겨지듯 일어나서 후닥닥 뛰어 달아났다. 군졸들은
뒤를 쫓아서 치달리는데 아무래도 잔교에까지는 나가려던 판이라 내쳐
서 달려갔다. 세 사나이는 연신 웃는 얼굴로 뒤들어보며 달아났고 오
장 이하 여러 명의 진군들은 쫓는 중에 더욱 결기가 탱천하여 잔교를
건넜다.
그들은 계곡을 건너 나무숲이 울창한 곳에 이르러서도 숲속에 숨거
나 산비탈로 오르지 않고서 내쳐서 한길로만 뛸 뿐이었다. 그러니 군
줄들은 잡힐 등 말 등한 놈들이 안달이 나도록 얄미워져서 정말로 잡
혔다가는 두부처럼 물크러지고 으깨어질 판이었다. 그들이 잔교를 건
너서 길을 감들아 가버린 뒤에 바위 뒤에 숨어 있던 길산과 선일이가
슬적 나서더니, 재빠르게 준비해두었던 덤불을 다리 위에 수북하게 얹
고서 불을 질렀다. 마른 덤불과 다리는 바자작거리며 탐스런 불길을
올리고 타올랐다. 그들은 훤하게 열려진 서산이목의 목책 안으로 들어
갔다. 목책의 문을 닫고 통나무 빗장을 질러두고는 선일이 나무 위로
타고 올라간다. 그는 길산에게 빈터의 가운데에 지어진 두 채의 오두
막을 가리켰다.
"저기가 광부들 숙사요."
"알았소, 잠채배들이 곧 몰려올 것이니 크게 소리쳐 알려주오."
"여긴 일백 수를 헤아릴 만큼은 지체시킬 수가 있는데 정말 열쇠 없
이족쇄를 풀겠수?"
"어떻게든 되겠지."
길산은 오두막을 향하여 달려갔고, 선일은 문 아래를 한눈에 그을
만한 나무의 안전한 가지 사이에 앉았다. 그는 허리에 묶어두었던 팔
매를 한손 그득히 쥐었다. 길쯤하고 맞춤한 차돌멩이를 가늘게 엮은
칡줄에다 묶어 매단 것이니, 선일이 소싯적부터 익혀오던 물건이다.
줄의 기장은 한 팔굽만큼이며 머리 위로 돌려 방향에 따라 뿌리쳐서
던지는 것이었다. 선일이 진대골에서 나서기 전날 밤을 새워 줄을 꼬
아만들어 지녔던 팔매였다. 길산은 그가 만든 팔매를 보고 엄지 검지
로 이리 흔들 저리 흔들흔들해보면서 과히 신통치 않게 여기더니, 선
일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멧새의 대갈통을 박살내어 떨구자 머리를
흔들며 감탄하였다.
길산이 굳게 잠긴 오두막을 빗장이 걸린 채로 곧장 차고 들어가니,
문짝이 와지끈하면서 부서져 나갔다. 광부들은 족쇄에 가로지른 쇳대
때문에 움직이지는 못하고서 깜짝 놀라 여기저기서 상반신만을 일으켰
다.
"나는 며칠 전에 김선일이를 구해낸 사람이우. 쇳대를 뽑을 터이니
동요하지 말구 기다리슈."
길산이 그들을 안심시키고 나서 쇳대의 끄틀에 걸린 자물쇠를 보아
하니 무지막지하여 비틀어질 물건이 아니었다. 다만 쇳대를 끼운 꺾쇠
는 판자에 고정되도록 굵다란 꺾쇠로 박았으니 그것은 뽑아볼 만하였
다. 그러나 꺾쇠를 뽑는 동안에 맨 가녘의 사람은 발목을 상하게 될
것이었다. 길산은 망설였다. 족쇄를 찬 발목의 살갗이 버들피리 꼴이
될지도 몰랐다. 그가 쇳대의 끄틀을 잡으며 바라보니 누웠던 사내는
곧 알아채고 눈을 크게 뜨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뭘 하려는 게요?"
길산은 부드럽게 되물었다.
"발목을 조금 다치려우, 여기서 평생 하천으루 바깥 세상 안 보구
지낼려우?"
사내는 주저하면서도 대답할 말을 잊고 도로 누웠다. 그 곁의 광부
가 제 몸을 일으켜 동료의 몸을 눌러주었다.
"명당 자리라 하더니 이제 공평히 되었네. 고향 갈 제는 내가 업구
가지,"
길산은 쇳대와 족쇄를 잡은 채로 일각 노했다가 힘을 주여 당겼다.
역시 사내가 비명을 드높이 내질렀다.
"입을 막아, 입을...
"모조리 잡힌다."
동요가 심해지는데 길산이 꺾쇠 뽑기를 잠깐 멈추고,
"서산이목에는 우리들뿐이오. 도망칠 틈이 충분하니 걱정들 마시
우."
하여 안심을 시켰다. 꺾쇠를 비트는데 사내의 살이 족쇄에 찢겨서 피
가 흘러나왔다. 길산은 대번에 힘을 주어 꺾쇠를 뽑아내고 가로질렀던
쇳대를 줄줄 잡아빼었다. 다리를 다친 사람만을 남기고는 모두 자유로
운 몸이 되어 일어났다. 그들은 제각기 다리를 움직이고 만져보고 하
였다.
"아... 이제 풀렸구나,"
"놓여났어, 뛰어봐야 믿어질까."
벌써 약삭빠른 자들은 출구로 몰려 나가느라고 법석이었고 발을 다친
자의 곁에 누웠던 자도 어느결에 약조한 소리를 까먹고 우선 제 자유
부터 실감하려 하였다. 문으로 몰려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산이 외쳤
다.
"여러분, 아직 풀린 게 아니우. 잠채배들이 서산이목 됫골에 있으니
지금 몰려을 거요. 싸우지 않으면 잡히고, 잡히면 다시 묶입니다. 모
두들 양쪽 바위 위로 올라가서 내가 이르는 대루 따르시우. 그리고 두
어 사람은 나를 도와주오."
"나두 데려가주오. 나는 어찌허우."
발을 다쳐 누웠던 자가 깨금발로 일어나 길산의 목을 얼싸안았다.
길산은 그를 곁의 사내에게로 밀어주며 말하였다.
"식언할라우? 댁네가 맡으시우."
길산은 얼른 뛰쳐나와 다른 오두막으로 달려갔는데, 이미 그들은 낌
새를 알아채고 있어서 놀라기는커녕 소리를 지르며 어서 구원해주기를
하소하였다. 놓여난 광부들은 풀뭇간으로 달려가 잡혀 있는 자가 아닌
일반 야장들 중에 잠채배들께 붙었던 자들 두엇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는 잠채배와 수직 군사들이 묵던 오두막에서 진대골의 어이님을 비롯
하여 지긋한 심메마니들을 구출해냈다.
몇몇은 벌써 좌우의 벼랑 위 망대로 오르는 길로 뛰어올랐으나, 마
음이 급한 자들은 목책을 향하여 뛰어갔다.
목책 앞에는 잔교가 타는 연기를 보고 됫골에서 달려 내려온 잠채배
들이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이나 계곡
을 뒤지고 다니다가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야 서산이목에 심상치 않
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았고, 외계와 잇닿는 유일한 통로인 다리가 타
는 연기임을 알고 나서 뒤늦게 속임수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
장은 우선 급한 대로 가까운 곳에 있던 졸개들을 불러모아 내려왔는데
네댓 명이었다. 호기있게 칼을 휘두르며 책문으로 다가섰던 자가 에쿠
하면서 이마를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그뒤로 따라붙었던 자도 볼따구
니를 두 손에 움키며 넘어졌다. 목책 너머 나무 위에서 시윗시윗 하는
소리가 들렸다.
"팔매입니다!"
다친 자가 터진 이마에 피를 줄줄 흘리며 달아나오면서 외쳤다. 우
연히 맞았다기에는 두 사람의 면상은 너무 정확히 터져버린 것이다.
감장은 울타리 너머에서 시끌벅적한 광부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자
초조해졌다.
"아니, 수성 군졸은 모두 어디로 꺼졌나."
뒤미처 뒷골에서 내려온 잠채배들이 합하였으나 고작 열 명이 되지
않는 숫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진작에 장교의 인솔을 받은 군졸과
함께 팔팔한 자들이 진대골을 수색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
었다. 뿐만 아니라 채금터를 지키고 있을 줄 알았던 군졸 몇사람마저
간데가 없으니, 목책 안에는 자기들 편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살수 한명 없으니 돌팔매에두 꼼짝을 못하지."
"달아나십시다. 폭도들에게 잡혔다간 우리는 죽음이라도 예사 죽음
을 당하진 않을 거요."
찬뜩 움츠러든 졸개들이 말하였으나 감장은 서산이목이 어찌 자기들
손에 들어왔는지를 잘 알고 있는 터여서, 차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곳은 유복령과 자기네 식구가 마지막 운을 걸고 있는 광맥이었던 것
이다. 이제 저들 광부들이 풀려나가 밝은 세상에 서산이목의 소문을
퍼뜨리거나 감영에 나아가 진고하면 일시에 무너질 탑이었다.
"좋다, 들어 가지는 말고 오히려 우리가 여길 지키자. 뒤에 수성 군
줄들이 오면 합세하여 들이치면 된다. 저들은 무기두 없는 오합지중이
아니냐."
감장은 맹산 객사에 머물러 있는 유복령이에게 이 낭
패한 소식을 가지고 달려가 벌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어 칼과 몽둥이를 벌여놓고 밖으로 쏟아져 나을지도 모르는 광
부들의 무리를 안으로 쓸어넣을 태세를 갖추었다. 감장이 길 위로 나
파서 소리치며 잡채 배들을 격려하는데, 선일이 이번에는 팔매를 두동
무니나 잡아서 그를 노리며 휘둘렀다.
원래가 서북지방의 석전은 고래로부터 드센 터인데, 특히 평
양, 안주, 정주, 가산 등지에서는 아예 대보름, 단오마다 편싸움이
가열되어 째어지고 상하며 심지어는 죽는 자마저 있으되, 토민의 풍습
이라 하여 나라에서도 어쩌지 못하던 것이다. 김선일이 소싯적부터 투
석전의 본고장에서 옹기 파편께나 좋이 얻어맞고 자란데다 남의집살이
에 잔뼈가 굵었으니 팔매질이라면 밥먹기보다도 즐겨 하였었다. 서북
사람치고 이마로 박치기 하는 것과 돌팔매 못해본 사람이 없는 터였
다.
비록 한양의 만리재 석전이 장하다 하여도 서북에는 미치지 못하
였으니, 전자는 성 밖이나 마을 부근에서 풍농기원 비슷이 행하였으
나, 후자는 아에 자갈 많은 강변으로 풀려나가 물속이고 사장이고 가
릴 곳 없이 싸우는 까닭으로 자못 사생결단이었다. 변경지역이니 오히
려 진에서는 권장하기도 하였다. 팔매질에도 뛰어난 재주를 가진 자가
있게 마련이니, 눈 겨냥이 정확하고 침착하며 손짓 빠르며, 손목과 팔
심이 제법 남달라야 하였다.
선일이 정주에서 한창 팔매질에 골몰할 적에는, 옆구리에 전대를 차
고 그 안에 아귀에 맞춤한 차돌을 가득히 넣고 또 한 손에는 줄에 맨
팔매를 여럿 들고서 장수의 반열에 섰던 것이다. 먼저 늘지래기로 휘
휘 돌려서 상대편의 수장 되는 선머슴의 마빡을 깨고 나서 차례로 전
열을 흐트러뜨린 뒤에는 한 손 전대에 처박고 한 손은 돌을 받아 쥐어
던지면서 앞으로 뛴다. 석전에는 우박 쏟아지듯 하는 적방의 돌을 요
리조리 깨금발로 피하면서 예봉으로 뽀족하게 적진에 파고드는 선두가
있으면 이기는 법이었다. 그러면 좌우에서 와아, 하는 함성을 내지르
며 쫓아가게 되고 적진은 이내 좌우로 갈라지고 흩어지던 것이다. 돌
을 던지던 무리가 흩어지면 싸움은 다 이긴 것이다.
선일이 감장을 노리다가 돌팔매를 날리니 돌 두동무니가 한번에 날
아가 눈두덩과 코잔등에 정통으로 틀어박혔다.
"어이쿠..."
눈앞이 아득한 것은 고사간에 충격으로 뒤로 넘어지더니 곧 의식 불
명이 되었다. 눈은 망울이 터졌을 것이고 콧잔등은 내려앉았을 것이었
다. 이어서 선일이 다시 팔매를 들어 휘두르니,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
던 잠채배들이 이마와 콧잔등, 앞니빨 모두 새근거려서 더이상 참지
못하고, 차라리 등판에 맞고 말지 하는 심사가 되어 발을 거꾸로 돌렸
다.
선일이 나무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책문을 열었고, 목책으로 다가왔
던 광부들이 기세 좋게 소리를 내지르며 몰려나갔다. 잠채배들은 칼과
몽둥이를 휘둘러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뒤를 돌아볼 사이도 없었다.
광부들이 일단 잠채배들의 뒤를 쫓으니 마치 보가 터진 듯하고 맞바
람을 받은 불길과 같아서 걷잡을 수 없는 기세였다. 광부들은 선일의
본을 따라서 돌을 집어 던지는데, 손이 한둘이 아니라 돌멩이가 우박
처럼 잠채배들의 달아나는 등덜미 위에 쏟아겼다. 그들은 잔교에도 채
못 닿아서 모두 광부들에게 하나 둘씩 잡히고 말았다. 이미 선일의 정
확한 팔매에 맞은 감장을 뭇사람들이 짓밟고 차고 지나가는 바람에 그
는 혼절이 지나쳐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었다. 다른 잠채배들도 광부
들에게 잡히자마자 면상이 터지고 배와 가슴을 사정없이 얻어맞아 모
두들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중에 채금터에서 광부 하나를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암장해버린 자가 있었는데 모두들 그를 단매에 때려 죽인
다며 왁자지껄하였다. 책문 밖으로 다가왔던 길산이 큰 소리로 외쳤
다.
"우물거릴 틈이 없으니 어서들 돌아오시우."
그러나 선일은 못 들은 체하고는 곁에 섰던 광부의 몽둥이를 때앗아
잠채배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가 아래로 풀썩 주저앉자 그것이 신호라
도 된 듯이 다른 사람들이 쓰러진 자를 마구 때리고 짓밟았다.
"죽었거나 살았거나 모두 끌고 안으루 들어가세."
선일의 말 한마디에 따라서 모두들 붙잡은 잠채배와 늘어진 자들을
끌고 떠메고 목책 안으로 돌아갔다. 길산은 그들의 행동을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길산이 선일에게 말하였다.
"다리를 건너간 놈들이 반드시 지금쯤은 계곡 물을 건너 되돌아오거
나, 기미를 알아채고 산성으로 달아났을 것이오. 어서 우리두 빠져나
갑시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서쪽으로 대로행을 하다가는 모두
잡히구 말겠수."
"잠깐이면 끝낼 터이니 너무 재촉하지 마우."
선일이 잡혀 있는 잠채배들 등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지난번의 모의
때에 그들을 배신하여 일을 그르치게 했던 풀뭇간의 번수 사내의 멱살
을 잡아 끌어냈다.
"이놈, 겨우 한 열흘 번수를 면하였으니 아주 장하구나! 그래 잠채
배의 무리에 들어 겨우 이밥에 술잔이나 몇번 얻어 켠 것이 번수 노릇
보다 낫더냐. 함께 도모하여 사나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동무들과의
약조를 저버리지 못할 터인즉, 오히려 유가 패거리에 일러바쳐 일을
그르치고 네 사람이나 숨지게 하였다. 너 같은 놈을 살려두었다가는
또 어디 가서 우리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못살게 할 것이다."
"선일이, 한번만 용서해주게나. 살려만 주면 내가 금을 밀장해둔 곳
을 가르쳐줄 테여..."
"그까짓 것 쓸데없다."
선일이 잠채배들에게서 빼앗은 병장기를 치켜들어 번수를 바라고 힘
껏 내찔렀다. 그러나 창은 놈의 몸에 닿기도 전에 빗나가서 길산의 손
아귀에 꽉 잡혀버렸다.
"금이 어디 있단 말이냐?"
길산이 창을 잡고서 번수에게 물었고, 그는 선일과 길산을 번갈아
살피면서 미적미적하였다. 길산이 기다리다가 창 잡았던 손을 놓으
며,
"하는 수 없군."
하면서 놓아주니 번수가 다급하게 외쳤다.
"우리 숙사의 마루 판자를 들어내면 그 안에 보름 밀린 금이 있수."
말이 끝나자마자 선일이 사정없이 번수의 가슴을 찔렀다. 창을 받고
쓰러지자마자 다른 광부들이 양편에서 또한 맞창을 내버렸다.
"어서 금을 찾아내어 맹산 경계를 빠져나갑시다."
길산이 선일에게 말하였고, 광부들 몇이 달려가서 금이 들어 있는
자루 둘을 꺼내왔다. 오두막마다 불을 지르고, 목책에도 불을 지르니
서산이목은 일시에 화광이 휘황하였다. 길산과 선일은 풀려난 사람들
을 이끌고 서산이목의 벼랑 뒤로 돌아갔다. 거기서 서쪽 계곡의 험한
길을 내려가니 이미 주위는 캄캄하였고, 물소리와 바람소리만이 가득
차 있었다. 계곡을 벗어나자 바로 지척에 두무령이 있었고 맹산현 동
창으로 나가는 길이 나왔다. 그곳에 이르니 진대골의 심메마니
들은 벌써 당도하여 기다리던 중이었다. 소장마니가 반가워하며 말하
였다.
"우리는 성사하지 못한 줄 알구 걱정하던 참입니다."
풀려난 사람들 사이에서 진대골의 어이님과 어른들이 나서서 서로
손을 잡고 무사한 것을 반겼다. 처음에 서산이목의 벼랑 가에 나타나
잠채배들을 됫골 계곡으로 유인하였던 것은 길을 아는 소장마니와 다
른 심메꾼이었으며 나머지 세 사람이 진군들을 잔교 너머로 유인하였
는데 그들은 한참이나 물다가 다리가 타는 것을 알자 되돌아섰다는 것
이었다.
"계곡을 건너는데 하마터면 오장이란 놈이 떠내려갈 뻔하였지요. 우
리는 그놈들이 어디로 가는가를 알아두려고 숨어서 지켜보았지요. 그
자들은 산등성이로 올라 산성으로 돌아갑디다. "
"진대골에는 별일 없을까?"
어이님이 걱정하니 소장마니가,
"아마 거기서 숨여서 우릴 잡겠다구 지키다가 내일 아침중이면 제풀
에 식어서 산성으로 돌아가겠지요."
하면서 장담을 하였고 길산이 덧붙여 말하였다.
"너무 염려 마시우. 내가 현감을 혼구멍을 내놓을 테니까, 다시는
산성 군졸들이 꿈적하지 못할 게요."
"어서들 가십시다. 내가 길안내를 서서 오강산 너머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소장마니가 계획된 대로 장부들을 안내하기로 하였다. 산을 넘기만
하면 맹산계이니 거기서 산지사방으로 갈 곳을 찾아 흩어지면 무사할
듯하였다. 길산이 안을 내어 두 자루의 금을 내어 서너 조각씩 나누어
지니도록 하였다. 길산이 선일이와도 헤어지려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하였다.
"고향에 가면 황당한 생각 말구 잘 사시우."
선일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섰더니 길산의 손을 잡았다.
"나두... 성님을 따라갈려우."
"따라와봤자 밝은 세상살이두 못하구 평생 숨어서 살아야 할 터인
데, 날 따라와서 뭘 허우. 정주에나 가시우."
"까짓 어딘들 밝은 세상이 따루 있답디까, 성님이 날 데리구 가지
않으려면 차라리 여기 선 채루 죽여주시우. 성님이 살려놓은 목숨이
요, 성님이 다시 보도록 해준 세상이니 맘대루 허우."
길산은 대답 않고 서산이목에서부터 끌고 내려온 감장을 데리고 오
도록 하였다. 그는 면상이 피투성이였으나, 이제는 정신이 들었는지
살려달라고 애걸이었다. 길산을 따라가려는 광부가 선일이뿐만 아니
라 다섯 사람이나 되었다.
"너희 광주가 어디 있는지 알구 있느냐?"
앞으로 끌려나온 감장에게 길산이 물었다. 그는 고개를 조아
리고 엎드린 채로 간신히 대답하였다.
"예, 말씀드릴 터이니 제발 덕분 살려주십시오. 큰샘 객사에 있는데
보름은 머물고 또한 보름중은 안주 본댁으로 나갑니다."
"그래, 지금 객사에 있느냐?"
"금이 나가지 않았으니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길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광주에게로 안내하라. 속이려 하지만 않는다면 살려주겠다."
라고 엄히 다짐하였다. 길산은 선일을 위시한 다섯 사람들에게 물었
다.
"당신들은 정말 나를 따라가기를 원하오?"
"저희들은 고향에 돌아가보았자 집도 가족도 없는 놈이고, 남의 고
용살이나 사천으로 지낼 신세입니다. 차라리 작당하여 산에 남을지언
정 돌아갈 곳이 없으니 장사님의 처분만 바랄 뿐이지요."
모두들 머리를 조아려 물러가지를 않으므로 길산은 그들과 더불어
구월산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김서방만 나서고, 다른 이들은 읍치를 빠져나가 매화령에
시 기다리시오."
길산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복창까지 나아가 그 길로 남하하여 강동,
수안으로 닿아 해서로 들어가는 남행로를 택하기로 하였다.
길산과 선일은 감장을 앞세우고 밤길을 십 리쯤 걸어 맹산 읍내
로 들어갔다. 남천의 돌다리를 지나 큰샘에 이르니 느티나무가 무리를
이룬 가운데 밀리 향교와 성황사가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 객관의
기다란 집채가 있었다. 관아는 건너편의 송림 가운데 있으니 뛰어서
지척이었다. 객사의 숫을삼문을 바라고 다가들어 돌담 가에 이르러 길
산이 감장을 윽박질러 물었다.
"어느 방이냐?"
"뒤꼍의 누마루가 길게 달린 방입니다."
"혼자 있느냐?"
"저희 아이들 둘이 건넌방에 함께 있습지요."
길산은 선일에게 일렀다.
"이자를 데리고 기다리오. 내 잠시 다녀오리다."
"염려 없겠수?"
길산은 대답 대신 몸을 가벼이 날려 답 위에 뛰어올랐다가 고양이처
럼 사뿐히 마당 안에 떨어졌다. 마침 보는 자가 없어서 별 말썽 없이
뒤꼍으로 돌아 나가니 정원이 있고 못이 있는데 객관치고는 집이 낡았
다. 등불이 훤히 켜져 있거늘 슬그머니 다가가 들여다보니 유복령이는
관기로 보이는 계집이 쳐주는 술잔을 들고 있었다. 길산은 미닫이를
쓱 열며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계집은 놀라서 입을 가리며 물러앉고
유복령이도 술잔을 떨어뜨렀다.
"네가 서산이목의 광주냐?"
느닷없이 물으며 유가의 도포 멱살을 움켜쥐는데 그도 소싯적에는
주먹깨나 쥐어본 잠채배의 수령인지라 상대가 맨손인 것만 얕보고,
"내가 유복령이다. 이놈, 너는 웬놈이냐?"
외치며 벽살 잡은 손목을 뿌리치려고 잡아채는데, 길산의 정권이 유가
의 정수리에 기합 들려 꽂혔다. 찍짹 소리 없이 유가가 늘어지고, 길
산은 관기의 목젖에 손가락을 질러 기를 뽑았다. 그때에 마루에서 삐
걱이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방문이 벌컥 얼렀다. 유복령이의 목소리
를 들은 부하들이었다. 앞섰던 자가 들고 나온 환도를 급히 뽑았다.
"웬놈이냐?"
길산은 말없이 비켜서며 틈을 노리다가 방바닥을 차고 올라 그의 왼
편 가슴을 내지르면서 뛰쳐나갔다. 길산이 정원 가에 서서 바라보니
누마루에서 길산의 발에 걷어채어 떨어진 자는 숨통이 막혀 질려 있었
고 그 뒤에 섰던 자는 한팔 길이의 쇠몽치를 들고 달려들었다. 길산은
방심한 듯이 정원을 뒤로 두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쇠몽치 가진 자는
동료가 한 발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감히 함부로 달려들지는 못
하고 측면으로 돌면서 쓰러졌던 자가 다시 일어나는 꼴을 돌아다보았
다.
그들은 유복령의 부하들 중에서 가장 날렵하고 무예에 자신이 있
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서산이목의 잠채배들 가운데서 뽑힌 표한한 자
들이었다. 금의 호송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으며, 웬만한 노상 강도
들은 둘이서 해치울 수가 있었다. 검과 단봉뿐만 아니라 태껸도 제법
익힌 자들이었다.
"흥, 어디서 발길질은 조금 배운 모양인데 당장 꺾어서 방아깨비를
만들어주마."
쓰러졌던 자가 숨을 돌리고 일어나 신중하게 칼을 두 손으로 잡고
비스듬히 세워 천유류의 자세를 잡고 길산의 오른쪽으로 돌
았고 쇠몽치는 왼편으로 다가서며 획획 소리가 나도록 단봉을 천천히
머리 위로 돌렸다. 길산은 그들과 우물쭈물할 겨를이 없었으나, 제법
무예를 아는 것으로 보이는 자들과 마주 서고 보니 오랜만에 몸을 풀
어보고 싶은 근지러운 전의가 전신에 퍼져나갔다.
길산의 서 있는 왼쪽 서너 걸음 곁에는 연못이 있고 오른편으로 열
발짝중에 담장이 가로막혔으며, 뒤로는 괴석이며 정원수들이 있는 정
원과 그 훨씬 뒤로는 역시 담장이었다. 후원을 등진 셈이었다. 길산은
손가락을 펴서 슬슬 놀릴 뿐 미동도 않고 정면을 향하여 서 있었다.
칼이 앞으로 내찔러지면서 길산의 오른쪽을 급습해 들어오는데 쇠몽치
가 상취분익의 세로 허공중에서 아래로 휘돌려 찍으면서
길산의 왼편으로 들어왔다. 길산이 비록 맨손이었으나 운부암과 대지
봉에서의 내공 외공에 단련되어 이미 광대 시절 태껸의 경지를 넘어선
기량인지라, 온 전신이 병장기나 다름없었다. 길산은 그들이 공격의
기세로 호흡이 바뀔 때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자연스럽게 전우의
자세로 들어갔다.
손을 주먹 쥐지 않고 열어둔 채로 공격 방향을 향하여 날개처럼 펼
쳐 올리는 것이다. 마치 큰 새가 날개를 펼쳐서 뿌리쳐 날아오르려는
듯한 자세인데, 양팔로 원을 그려서 상대의 공격을 물리치는 것이다.
자기의 몸을 원의 중심으로 삼고 자기 팔이 그리는 원의 선 안에 들어
온 상대방의 공격을 걷어내는 것과 동시에 공격으로 나서는 자세이다.
상대방에서 보면 평화스럽고 원만해 보여서 날카로운 공격이 가해올
것 같지 않은데, 실은 두 팔의 안에 숨겨져 있는 발이 반격의 무기이
며 마치 발톱을 감춘 맹수가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평화로운 자세를 대한 상대가 빈틈으로 알고 예봉을 날카로이
하여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칼과 쇠몽치가 길산의 두 팔이 그리는
원 안으로들어왔다. 쇠몽치가 길산의 머리를 바라고 공중에서 비스듬히
휘둘러져 내리찍혔고 칼은 허리를 바라고 수평으로 들어와 용약 일자로
베었다.
양쪽의 공격이 수직과 수평으로 엇갈려 나가니 제아무리 바윗덩이나
깃털 같은 몸이라 하여도 새어나갈 틈이 없었다. 길산은 전우의 몸을 풀면서
안쪽으로부터 바깥으로 손을 휘둘러 허공을 걷어내면서 손바닥 바탕을
높이 치켜들었으며, 단봉이 걸렀는데 아무리 힘껏 내리쳤으나 팔뚝이
휘청하면서 일단 약세를 시키니 마치 짚단 위에 떨어진 조약돌과도
같았다.
길산은 손바탕에다 쇠몽치의 무게를 실은 채로 원을 그리며 아래로
하여 자기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이것이 반호흡이요, 나머지 반호흡에
두 공격을 방어하지 못하면 두 사람의 한호흡 공격에 지고 마는 것이다.
쇠몽치를 잡은 채로 끌면서 상대방과 위치를 바꾸고 살점을 빠져나가며
무릎으로 그 안면을 차올리며 한바퀴 몸을 돌려서 마주 섰다.
그러나 그 서 있는 틈 역시 반호흡이었다. 전우의 자세는 무서운 공
격을 감춘 세여서 방어는 곧 공격으로 이어져 있었다. 사이를 준다면
두 사람의 적은 다시 양편으로 갈라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안면에 무릎 공격을 받았으나 혼절한 것은 아니니 완전히 기능을 잃지
않았다. 칼을 휘둘렀던 자는 앞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동료로 하여 길
이 막혔으므로 길산을 베어버리려던 일각을 놓쳤던 것이다.
첫번 공격에 실패한 상대는 잇달아 대격으로 칼을 곧추세워 들어
왔고 길산은 미린의 자세로 수도를 엇갈려 겨누고 앞의 관수를
생선의 꼬리처럼 날카롭게 흔들며 짓쳐들어갔다. 공격에서는 길산이
두어 발 빨랐다. 칼이 길산의 어깻죽지를 노리며 엇비슷이 베어나가는
데 길산은 한 발을 옆으로 뻗어 무릎을 구부리며 피하니 작지라
는 것이다.
참새가 사뿐 앉았다가 날아오르듯이, 굽혔던 무릎을 펴서
퉁겨져 일어나며 공격에 실패한 상대가 대격에서 휘도로 바꾸
어 칼을 휘두를 찰나와 마주쳤다. 칼이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내면서
허공을 가르자마자 길산의 순란부를 취한 발짓이 상대의 왼
편 옆구리가 훤하게 드러난 곳을 놓치지 않았다. 나뭇잎이 베어져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날렸고, 길산은 차고 나서 복호로써 엎드렀
으며 상대는 뒤로 나가떨어져 있었다. 상대가 칼을 치켜든 것과 길산
일 두발모둠이 날아가 엇갈려 차는 것이 거의 동시였다. 상대는 칼을
놓치고 맨손인 채로 제 손목을 쥐었고, 길산은 숨결 하나 흩트리지 않
고서 가볍게 일어섰다.
제법 몸을 풀었다고 여기는 참인데 객관의 안마당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길산은 우물거릴 여유가
없다고 느꼈는지라, 맨손인 상대의 팔을 잡아끌면서 계구로써
닭이 모이를 쪼듯이 머리의 총회혈을 모은 손가락 끝으로 찍
었다. 그리고는 터진 얼굴을 감싸쥐고 달아나려는 자의 뒤를 쫓아가
곰손으로 관자놀이가 있는 승령을 휘둘러쳤다.
길산은 쓰러진 자를 하나씩 일으켜 정원 속에다 던져주고 칼을 집어들었다.
누군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당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그는
칼을 들고 얼른 유복령이가 혼절하여 쓰러진 방으로 들어가 방문 곁에
바짝 붙어섰다. 얘기 내용으로 보아 객관의 손님을 찾는 역졸
들인 듯하였다. 길산이 문 뒤에 숨어서 기다리노라니 발자국 소리가
다가와 밖에서 물었다.
"행수 어른 계십니까?"
길산은 당황하지 않고 우선 기침소리를 내었다.
"무슨 일이냐?"
역졸은 밖에서 유복령이가 내다보지 않는 것이 이상하였던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니까..."
길산이 재촉하고서야 역졸은 당황하여 얼른 대답해왔다.
"동헌에서 하명하시기를 내일은 서산이목으로 말을 보내랍니다."
"알았다."
길산이 목소리를 감추려고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하였고, 역졸은 발
자취가 멀어겼다. 방금 그가 알린 말로써도 현감과 유복령이가 잠채에
함께 가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길산이도 갈 데 없는 백
성들이 몇몇씩 짝을 지어 알려지지 않은 깊은 골짜기의 광맥을 캐러
다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해서의 북부와 관서 관복의 내륙에는 그러한 잠채꾼들이 많았
다. 그러나 기댈 곳 없는 가난한 백성들을 잡아다가 천예로 묶
어 부려먹는 무뢰한도 용서할 수 없거니와 더구나 그들을 보호하고 애
잔히 여겨야 할 고을 수령이 함께 가담하여 몰래 착복하고 있음은 더
욱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길산이 일단 서산이목의 광부들을 자유로이 풀려나게는 하였으나 그
대로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사라진 다면 폐단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
었다. 즉, 현감과 유복령이는 다시 인근 지방으로부터 잠채 광부를 끌
어다가 묶어두고 일을 시킬 것이며, 살인하고 집단으로 항거하였으며
뿔뿔이 달아난 자들을 잡는답시고 운봉산 두무령 일대의 산간 백성들
을 괴롭힐 것이 뻔하였다. 그들은 먼저 진대골 심메마니 마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현감을 대번에 참수하고 싶었지만 길산은 그런 뒤에 더욱 큰 후환이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 고을의 수령이 이름없는 백성에
게 살해당하였다면 감영에서 토포군이 나와 맹산 음치를 쑥밭으로 만
들지도 몰랐다. 길산은 계획하였던 대로 수령에게 다시는 잠채배들의
악행을 묵인하거나 협조하지 않을 만큼의 혼구멍을 내줄 작정이었다.
길산은 칼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정수리를 맞고 혼절하여 쓰러진
유복령이의 상투를 한 손으로 끌어당겨 올렸다.
신명께서는 살생을 용서하소서.
마음속으로 외고 나서 길산은 칼을 그었다. 끔찍한 것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가 장지를 열고 홑이불을 뜯어내서 둘둘 감아 쌌다. 길산은
다시 바깥의 동정을 살피고는 마당으로 나와 눈여겨보아두었던 담장으
로 달려가 훌쩍 뛰어넘었다. 잠깐 두리번거리는데 어둠속에서, 성님
나 여기 있수, 하는 선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짙은 느티나무의 어둠속
에서 나무둥치에 몸을 가리고 섰는 김선일은 혼자였으므로 길산은 물
었다.
"헌데 감장은 어찌되었나?"
선일은 우물쭈물 대답을 미루다가,
"달아나려 하길래 잡아서 목을 졸랐더니 그만 저기 잡초 사이에 누
워 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길산은 선일을 데리고 향교의 기다란 담장을 붙어 돌
아가 송림으로 들어섰다. 관아에는 드문드문 등롱이 처마끝에 걸려 있
고 수직하는 자도 없는 모양이었다. 맹산현감은 방이 이슥하여 벌써
자리에 누워 잠에 떨어져 있더니, 홀연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
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그를 흔들어 깨우니 현감은 처음에는 실눈을
떴다가 얼굴 위로 드리워진 낮선 사내의 모습을 보고는 소스라치며 일
어났다.
"누... 누구냐?"
머리는 아무렇게나 풀어 헤쳤고 수염이 터부룩이 자랐는데 한 손에
칼이요, 또 한 손에는 피가 배어난 보퉁이를 들고 서 있었으며 안광이
날카롭게 번적이고 있었다. 현감이 바깥을 향하여 아무도 없느냐고 소
리치려는 판인데 아래로 늘어져 있던 칼끝이 불쑥 올라와 그의 가슴에
차갑게 닿았다. 현감은 입을 벌린 채로 할말을 잃고 뒤로 자꾸만 밀려
나갔고 사내는 칼끝을 겨눈 채로 한걸음씩 다가서서 현감을 벽에다 밀
어붙었다.
"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구..."
체통이라도 남아 있어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사내는 들고 온 보통이
의 끄트머리를 잡아 책 던지니 보가 풀어지면서 뭔가 불길한 것이 현
감의 발치에 굴러 떨어졌다.
"에크..."
진저리를 치면서 뒤로 물러나는데 이불 위에 피비린내가 낭자하였
다.
"현감은 내 말을 들으라! 나는 낭림산맥의 어름에 있는 산간 백성
으로 서산이목 잠채 금점의 참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혼자의 원
한이 아니라 의분으로써 일어나 서산이목의 무뢰한들을 징치하였다.
비록 나라에서 금점을 설치하써도 그런 비정의 일이 없을진대 하물며
관장이 몰래 숨어서 악소 패거리들과 결탁하여 갖은 악행을 하였으니
단칼에 죽어 마땅하다.
이것은 유복령의 목인데 그대가 관장의 책임으로 알고 장사를
치러줘라. 만약에 차후로 백성들을 침탈한다든가 우리를 잡는다는 구실로
산간의 사람들을 핍박하면 언제라도 관아를 습격하여 목을 베어줄 것이다.
이따위 담장과 좁은 마당이면 한식경에 점령한다. 너는 지키는 자이고
우리는 산을 타고 돌아다니는 자이니 언제가 장삿날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내 비록 이름없는 백성이나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너희 더러운
관리를 토멸시키리라 결심한 바이더니, 수령을 죽여 감명의 초달에 읍민이
시달림을 바라지 않는 터이라 그대의 목숨은 살려주겠다.
차후 근신하여 우리의 포한 맺힌 칼을받지 않도록 하라."
길산이 낮빛도 엄정히 꾸짖고는 원래가 언변이란 칼 들고 일어선 자
의 장기가 아니매, 제 느점대로 수월스레 말을 끝냈다. 비록 관장 된
자로서 나라를 속여 금점을 알리지 않고 잠채의 이를 취한 바를 꾸짖
고는 싶었으나, 과연 누구를 위한 나라인지 길산에게도 스스로 애매하
여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한양은 너무도 멀고 아득한데 핍박받는 백성은 도처 골골이요, 적은
수십 수백 겹으로 둘러친 담장과도 같았다. 일시에 일어나서 이것을
허물어뜨릴 날은 언제련가. 눈앞에 닿는 가까운 적부터 싸워서 무너뜨려야
하였다.
곳곳에서 농기구를 병장기로 치켜든 백성들이 제 가까운 적을 향하여
항거할 날은 언제인가. 곧은 관리나 바른 선비가 청정과 달문으로 느릿느릿
시정을 펴나간다 한들 암벽에 부딪는 물방울이요, 이제 노도처럼 때리고
밀어닥칠 저들의 함성만이 그것을 뛰어넘고 부숴버릴 수가 있을 것이었다. 피
묻은 칼을 내려다보는 길산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길산은 칼등으로 맹산현감의 뒷덜미를 가벼이 내리쳤고, 그는 정말
목이 달아난듯이 머리를 이불 위에 박고 엎어졌다. 길산은 관가를 빠
져나와 망을 보던 선일과 함께 북창을 지나 매화령으로 향하였다.
"성님, 이제 어디로 가오?"
선일이 따라 걸으며 길산에게 물었다.
"곤하겠지만 강동까지는 부지런히 가야겠네. 거기서 봉노를 잡아 하
루를 즉 쉬고 해서로 내려가야지."
"정말 우리가 따라가도 되우?"
길산은 선일의 새삼스런 물음에 슬그머니 짜증이 나서 불쑥 말하였
다.
"고향에도 못 가겠다 하는 사람이 할 짓이 따로 있을까. 나는 화적
질하러 고향에 가네만..."
"화적이오?"
"구월산에 있는 녹림패에 들어가려구 돌아가는 길이지."
그러나 선일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신명이 나는 모양
이었다.
"알고 보니 성님이 두령이구려."
"왜 께름헌가. 지금이라도 등을 돌리면 홀가분하겠는걸."
"허허 우리는 시방 몰린 신세요. 성님이 아니더라도 몽둥이를 꺾어
들고 두무령 고개를 잡을 판이었수."
길산은 약속대로 매화령 굽이에서 기다리던 광부들을 만났고, 쉬지
않고 강동을 향하여 내쳐서 밤길을 걸었다.
고향이라야 구월산 기슭의 은신처에 불과하고, 이제부터 지난 삼 년
동안의 묵힌 뜻을 펴나가야 할 길산으로서는 발길이 가볍지만은 않았
다. 그는 부모들과 아내와 그리고 새로 태어났다는 아들을 잠깐 떠올
리고 나서 누구보다도 갑송이와 박대근이가 보고 싶었다.
드문드문 불빛이 반짝이는 마을들을 지날 적마다 길산은 그곳 인가
의 낯모를 식구들과 따스한 사연들을 상상해 보고는 공연히 빙긋빙긋
웃는 것이었다.
아, 나는 이제부터 수도자가 아니며, 혼자가 아니며, 광대도 아니
다. 나는 지금부터 칼을 들고 일어선 도적이며, 아이를 가진 아버지
며, 숱한 힘없는 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미풍이 귀향하는 길산의 얼굴에 간지럽게 부딪쳐왔다. 그는 어느결
에 무르익은 성년이었다.
어와 동무들아, 각각 동서 우리들이 수심 년 헤어져서 상사지심
간절터니 향산에 봄이 와서 괴형지사 새롭도다. 천천기수 먼
먼길에 재촉하야 돌아오니 낙금선 빛난 곳에 학발이 무강
하고 그리던 동기 숙질 몇몇이 반기누나. 그간에 사생지몰
감구지호 없을손가. 일촌을 회고하니 후진이 장왕일세,
석양에 산에 올라 남은 경개 다시 보니 산회수곡 있는 곳에 낙이망반
되었도다. 낙조서천 저문 날에 목적소리 자욱하네. 오던 배 다시 오라고
창강을 건너서니 노정에 술을 부어 헛부기 작별이라. 고우금수 허사로다. 풍전에
낙화같이 동서로 흩어진 뒤에 음영이 막연하고 서신이 돈절하면
상사불견 그리던 정 풍편에 물어볼까. 어와 허사로다. 귀거래사 한 곡조에
만사가 부운이다. 이제야 생각하니 일과 일몽 황홀하다.
바람소리, 개 짖는 소리, 어린아이 우는 소리, 그리고는 가끔씩 길
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시냇물 소리, 풍편에 전해오는 세상의 기척은
자못 다정하였다.
구월산에는 온통 신록이 파릇파릇 퍼져나가고 있었으며 골짜기마다
진달래가 불타는 듯이 활짝 피었다.
봉순이는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나서 수복이를 들쳐업은 채 삽짝을
나섰다. 장노인은 밭에 나갔고 안무당은 박서방네로 나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쑥을 캐겠노라고 집을 나서긴 하였으나 산에 피어난 꽃들을 바라보
는 봉순이의 마음은 어쩐지 심란하고 허전하였다. 뒤에서 웅얼거리던
수복이는 팔랑대며 공중에 떠도는 나비를 손가락질하며 엄마, 엄마 소
리를 하는데 봉순이는 평소처럼 잡는 시늉을 하거나 호들갑을 떨어 아
이를 웃길 일도 잊고서 물끄러미 진달래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도화는 좋겠다..."
봉순이는 폭 한숨을 내쉬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한암 바윗더미 초
입에 있던 갑송이의 삼간초가는 이제는 폐가가 되어 있었다. 지붕은
새 이엉을 덮지 않아서 잿빛으로 폭싹 주저앉았고 문짝은 떨어져 바람
에 삐걱이고 짐승들이 인기척에 놀라서 후닥닥 달아나고는 하였다.
갑송이가 사라진 뒤에 김기를 통해서 길산네 식구들은 전말을 들어
서 사연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봉순이는 도화가 꼭 자기 때문에 죽은
것만 같아서 눈이 통퉁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아내를 칼로 찌르고 탑
고개를 떠난 갑송이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로되 세상 사내들의 우둔
하고 야멸찬 행사가 미워져서 남의 일에 공연히 원망도 하였다.
봉순이는 제 남편에게 죽임을 당한 도화가 이제는 부럽기까지 하였다. 얼
마나 모질게 고와하였으면 죽이기까지 하였겠는가. 무심한 구름처럼
훌쩍 떠나가서 제 아이의 탄생조차도 감응하지 못하는 길산에 비긴다
면 찔러 죽이고 몸소 파묻어주고 갔다는 갑송이 오빠가 훨씬 다감한
듯 여겨졌던 것이다.
봉순이는 나한암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올라서서 수복이를 안전
한 곳에 풀어놓고 풀 사이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나물을 캐면서 수심가라도 한곡조 흥얼거리노라면 요즘 같은 날의
시름도 잠시나마 잊혀졌다. 봉순이는 낭랑하게 곡조를 높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면서 진달래 그루 사이를 헤치고 다녔다.
봉순이는 갑자기 수복이가 왁 울어대는 소리에 소스라쳐서 벌떡 일
어났다. 수복이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고 봉순이는 가슴이 철렁하여
나뭇가지를 젖히며 달려갔다.
웬 사내의 등판이 보였다. 봉순이는 문득 심장이 딱 멎은 듯했다.
숨을 들이켜고 선 채로 입을 벌렸으나 말이 나오질 않았다. 등만 보이
던 사내가 슬며시 돌아섰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흐트러진 머리에 아무
렇게나 무명 두건을 동였으며 얼굴은 검게 그을었고 옷차림도 남루하
였으나, 그는 분명히 수복이 아버지 그 사람이었다. 예전의 앳된 기는
어느결에 가시고 날카롭던 눈은 한결 부드러워졌으며 이마에 깊은 주
름이 잡혀 있어 실로 장부의 표정이었다. 길산은 우는 아이를 서투르
게 안고 있었다.
"아이 받게..."
수복이를 봉순이 쪽으로 내미는 길산의 몸짓과 얼굴은 마치 아침에
함께 자고 난 듯이 범연하여, 봉순이도 애틋한 상봉의 정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봉순이가 얼결에 수복이를 받아 안는데 길산이 아내의 어깨
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반가우이."
서투르게 말하였고, 그 말이 서운하고 또한 고마워서 봉순이는 그대로
길산의 넓직한 가슴에 이마를 묻어버렀다.
길산은 제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봉순의 어깨를 슬그머니 안아
주었다. 아내의 어깻죽지가 만져져서 얄팍하게 느껴지니 남편의 사랑
에 주린 아녀자는 마치 마른 잎인 듯하였다. 길산이 봉순이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말하였다.
"어서 집으로 가세..."
봉순이는 잠판이나마 남편에게 안겼다가 눈물 자국을 내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얼른 돌아서서 치맛자락으로 훔치면서 한손으로는 수복이를
등에 업고 추스렀다.
길산이 산비탈을 지나는 봉순의 자태를 보고 쫓아 올랐다가 나무 아
래 뉘어진 아이를 보고 그것이 자기 아들인 줄 알아보았다. 아이는 방
금 강보에서 빠져나와 나무를 잡고 걸음마를 하던 중이었다. 길산은
모르는 결에 와락 아이를 안아 올렸던 것이다. 그것이 제 아들이라니
믿어지질 않았다.
"이제는... 집에 계실 건가요?"
봉순이가 뒤따라오면서 길산에게 물었다. 물으면서 자기 질문이 아
무 쓸 데가 없음을 봉순이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저런 사내가 아내와 자식에 눈이 팔려 구들목장군이 될 리가 없었
고, 실상 길산의 그런 변모도 그녀는 참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마
음 한편으로는 아들을 대하는 길산이 기껍고 대견한 듯한 모양이어서
혹시나 그가 울안에 만족할 범상한 가장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
대가 솟아올랐다. 길산은 대답을 바꾸었다
"이서방은 무고한가?"
"어느 이서방 말이어요?"
"내가 찾는 이서방이란 갑송이말구 누가 있나?"
"시방은 탑고개에 안 계셔요."
"음, 된목이골에 올라가 있나?"
봉순이는 미적미적하다가 말하였다.
"구월산을 떠났어요."
길산은 멈추고 돌아서서 놀란 듯 되물었다.
"아니, 그럼 아주 여길 떠났단 말이오?"
봉순이는 차마 도화의 일을 말하지 못하였다.
"몰라요. 아마 김선비님께서 잘 아시겠지요. 강서방이 알리러 금강
산에 갔었는데... 얘 이름 아시지요?"
그러나 길산은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식구들이 모두 떠났단 말이지?"
"글쎄... 저는 잘 몰라요."
길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허, 이렇게 답답할 데가 있나!"
길산의 걸음은 조금씩 빨라지더니 아예 뛰는 걸음이 되어 산비탈을
내려갔고 아래에는 동행인 듯한 여러 사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이 사라져간 동구로 봉순이도 타달타달 걸어 들어갔다. 그는 구월산의
동무들께로 돌아온 것이지 자기에게나 또는 식구들에게 돌아온 게 아
니었던 모양이었다. 봉순이가 아기에게 속삭였다.
"수복아, 아부지가 오셨다. 인제는 우리들하구 맨날 같이 사신단
다. 아부지가 업어주고 무등도 태워주고 우리 수복이는 인제 좋겠구
나."
봉순이는 오늘밤에 작은 무꾸리를 준비할 참이었다. 가장이 돌아왔
으니 무리떡이라도 하고 고사 천신을 해서 부정을 없앨 작
정이었다. 봉순이가 집으로 나는 듯이 돌아오니 장노인은 밭을 매고
돌아와 있다가 며느리의 희색을 보고 의아해하였다. 봉순이는 외쳤
다.
"수복 아부지가 돌아와요."
"응? 길산이가..."
장노인은 방금 며느리의 뒷전에 아들이 따라 들어오는 줄로만 여기
고, 얼른 마루에서 신발을 거꾸로 끌며 문께로 갔다가 어안이 벙벙하
였다.
"어디 돌아온단 말이냐?"
"방금 김선비님께 갔으니 곧 올 거예요."
장노인은 어서 아들의 모습이 보고 싶은지 대문을 나서서 김기네 집
으로 달려갈 양을 보였다.
"아버님, 어디 가셔요?"
"응, 김선비네 가볼란다."
"가지 마셔요. 수복 아부지 열쩍어하겠어요."
봉순이는 거기서 그쳤으나, 집에 돌아와 일단 부모님을 뵙고 나서
동무들을 찾아보는 것이 상례인데 길산이 그 일을 거꾸로 하였으니 아
버님은 모른 척하시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봉순이는 장충이 노여
워하거나 섭섭해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덧붙었다.
"갑송 오빠 소식을 듣고는 참지 못하구 급히 달려갔어요."
장노인도 길산이 능히 그러리라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마루로
올라왔다.
"느이 에미는 어딜 가면 이렇듯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보내어 곧 오시라구 그러지요. 형님 댁에 가셨으니 별일 없
으면 저녁에는 돌아오실 테구요."
"얘, 수복이 이리 다우. 그리구 길산이 저녁 준비해라. 닭도 두머
마리 잡구."
봉순이는 분주하게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수복이는 풀어놓지 않았
다.
"애나 이리 달라니까."
"애가 번잡스러운데 그냥 업구 하지요 뭐. 남들은 두셋씩 데리고도
밥하구 빨래하구 밭매구 못하는 일이 없던 걸요."
장노인은 아이를 빼앗듯이 띠에서 뽑아갔다.
"그래 너희두 한 서넛만 더 낳아라. 이제는 길산이두 애비가 되었으
니, 아이 기르는 맛을 배울 게다."
"아버님두... 별말씀을 다 하셔요."
봉순이는 일부러 큰 소리로 그릇을 챙기고 씻으면서 부끄러움을 감
추느라고 애썼다. 공연히 볼이 화끈거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밖에
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길산이 들어서는 게 보였고, 마당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하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앉았더니
곧 나오는 것이었다.
"오자마자 어딜 간단 말이냐. 저녁이라두 먹구 나가거라."
하는 장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행한 이들 때문에 날이 저물기 전에 된목이골에 올라가야겠습니
다."
"원 사람두 무심하기두 하다."
장노인의 말에 길산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봉순이는 물 묻은 손인
채로 삽짝 밖으로 뛰어나갔다. 길산은 김기와 또한 몇사람의 사내들과
아사봉으로 오르는 길로 접어들어 있었다. 장노인이 보고 막하였던지
위로를 하였다.
"된목이골에 가보았느냐?"
"예, 그전에 두 번 갔었어요."
"바람이라두 쐬일 겸 하여 수복이 데리구 올라가봐라."
봉순이는 그냥 웃고 말았다. 칭얼대는 수복이를 안아 젖을 먹이면서
그녀는 툇마루에 시름없이 앉아 중얼거렸다.
"우리 수복이는 좋겠네. 아부지가 와서 안아주고 업어주고 얼러줄
테니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집안에 길산이 돌아온 흔적은 마치 바람이 지나간 듯 자취도
없었다.
김기와 길산이 된목이골로 향하는데 미리 앞질러 갔던 졸개의 연락
을 받고 마감동이가 마중을 나왔고, 그들은 조도께에서 서로
마주쳤다. 감동이가 달려나와 길산의 소매를 부여잡으며 외쳤다.
"성님, 어째 이제서야오시우."
"그간 별고 없는가?"
"여전히 이나마 형세를 유지하노라고 옹색합니다."
길산은 싱긋이 웃었다.
"밥 세 때 놓치지 않고 먹으면, 이런 세월에 정승 팔자보다 낫지.
굶주리는 백성들은 힘이 없어 작당두 못하지 않는가."
마감동이는 길산의 남루한 차림과 깊은 주름살이 팬 얼굴을 바라보
며 열쩍게 끄덕였다.
"딴은 옳은 말씀이우."
길산은 부두령 오만석이가 안 보이는 것을 알고 물었다.
"만석이는 산채에 있나?"
"말득이네 주막에 나갔습니다. 상고 한 패거리가 온다는 기별이 와
서 정탐하러 갖지요."
오공랑 강말득과 그의 누이 끝춘이는 진작부터 안악에 나아가 주막
을 열고 있었던 터였다. 수렛고개와 배고개에 소두령들이 나아가 목을
잡고 있었으니 앞은 은율 송화 방면이며 구월산의 서쪽이요, 뒤는 안
악 방면인데 구월산 동편이다.
"말득이가 작년에 금강산 행보를 하였더니 이미 떠나셨다구 그럽디
다. 그래 우리는 성님이 엇갈려서 이리 오시는 줄만 여겼지요."
마감동이 길산의 뒤를 따라오는 사내들을 눈여겨보며 계속 말하였
다.
"어디 가서 무얼 하시다 오는 길이우. 만석이는 성님이 아예 산생활
에 역증이 나서, 송도 대근이 성님께루 가신 줄로 알고 있수."
"어서 산채에 가서 천천히 얘기하세. 내가 아까 김선비께 대강 들었
지마는 갑송이가 구월산을 떠났다며?"
"예, 우리두 선비님한테서 듣고 알았수. 사람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습디다. 아무리 세상이 싫어졌다 한들 설마하니 우리에게까지 싫증
이 났겠수. 차라리 우리께루 와서 술이나 실컷 퍼마시구 주정이나 횡
포를 부렸어두 이렇게 섭섭하진 않을 게유. 성님이 산에 계셨다면 모
른 체 사라지진 않았을 테지요."
"임집 살림이란 살아본 놈들만이 아는 걸세. 자네두 장가가서 계집
거느려보아."
"아이구... 그런 말 하지두 마슈. 혼잣몸두 부잡스러운데 계집은
둬서 무엇에 쓴답디까."
산채에 당도하니 된목이골에 자리잡을 무렵부터 길산을 알고 있던
졸개들은 모두 달려나와 그를 반겼다. 길산의 일행이 회당에 들어갔고
감동이는 그를 상석에 권하였으나 길산은 김기에게 앉기를 다시 권하
였다. 김기는 건성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낯빛을 고쳐서 정연히 말하
였다.
"차서를 새삼 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장두령은 이제 구월산 식솔들
의 대 가장이오. 처음부터 우리가 혈당하였던 뜻에 따라서 이끌어나가
야 할 책임이 있소이다. 마땅히 상석에 앉고 의논을 정하며 결정을 내
리되 나 같은 자는 두령의 생각을 도울 뿐이외다. 그리고 나를 선비라
부르는 것두 당치 않은 노릇이니 그저 김서 방이라 불러야 하오. 이곳
은 저 아래 있는 촌락이 아니라, 녹림 산간의 의협을 펴나갈 산채요."
"그러구 참... 이번에 북관에서 나허구 동행한 사람일세."
하면서 길산은 김선일을 마감동에제 소개하였다. 선일과 김기는 먼저
인사를 나누었으므로 감동이와 선일이만 둘이서 좌정한 채로 꾸뻑하였
다. 김기가 상좌에 앉은 길산에게 말하였다.
"장두령, 우리가 결의형제를 맺으면서 모여 맞았던 것이 벌써 삼 년
전이외다. 그동안에 서로 나누었던 얘기를 하나도 실행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있었지요. 강선흥이는 그뒤 한번도 구월산에 오른 적이
없었고 우대용이두 마찬가지요. 안악 나간 강서방이 송도까지 행보를
하여 박대근 성님으로부터 뒷소식은 듣구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
형세를 펴나갈 때가 온 것 같소."
길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더니 의견을 말하였다.
"산채의 형세를 늘리느니보다는, 여러 곳으로 나누어 긴밀한 연결을
가지는 것이 유리할 듯하오. 선흥이가 해서의 서쪽 불타산과 달마산을
점하고 있으며, 대용이는 선단을 끌고 북으로 올라 평안도 어름의 해
안에 있다구 그럽디다. 우리 구월산에서는 애초의 예정대로 자비령을
먹어야 허우."
"참으로 나는 봉산을 떠나 여기 입산하고서도 스스로 의심하는 바가
많었수. 장두령이 떠난 뒤로 이두령과 더불어 아무 일도 해보지 못한
채 마두령이 보태어주는 양식만을 축내고 있었지. 선흥이가 아무런 기
별도 없이 산에 올라 수돌이네 패와 심백이 패를 쫓아내고 두령이 되
었단 소식을 듣고는 더욱 허송세월인 듯 안타까웠수. 박대인께서 오셔
서도 늘 말씀이 길산이가 곧 돌아을 것이니 산채나 잘 지키라 하였소
이다. 작년에 이두령까지 집안일로 구월산을 떠났을 적에는 실로 이
쓸모없는 김기도 산을 떠날 작정이였지요."
길산이 말하였다.
"김선비님은 갑송이가 어디로 떠났는가를 아시지요?"
"또 선비라고 부르는구려."
"허허, 정말 잊어버렀소이다. 성님은 갑송이가 금강산의 운부대사
님을 찾아 떠났음을 아시지 않소. 갑송이는 우리에게서 떠난 것이 아
니올시다. 오히려 거기 가면 할 일이 많이 있지요. 아마 정학이와 좋
은 짝패가 되겠지요. 우선 자비령을 점령하기 전에 강서방을 보내어
대근이 성님이며 선흥이, 대용이를 모두 산채로 오도록 하십시다."
"강말득이 말을 들으니, 선흥이헌테 전갈하면 나머지 두 사람께는
즉각 연락이 닿는갑디다."
마감동이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성님이 여기 계시지만... 그 사람들 나허구 만석이헌테는 정이 없
는 모양이우."
섭섭한듯이 돌아앉으며 말하였고, 김기도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
이는데 길산이 말하였다.
"사람은 나서부터 자라며 사는 동안에 성품이 천차만별로 바뀌어지
고 또한 몇번이나 제 성품을 버리기도 허지. 내 아는 바로는 잘 다니
는 길로 거듭 돌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 사귀고 정을 주는 일
도 그런 것이오. 대용이나 선흥이가 비록 저희끼리만 의기투합하여 구
월산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만석이와 감동이는 어찌하
였나.
달마산에 한 번이나 들러보았나. 그러면 그들과 다정히 지내는
대근이 성님이 여기에는 발길을 끊었던가. 대근이 성님은 두루 같이
생각하는 것이니 어느 쪽에도 차별이 없겠지만 자네들은 공연히 저희
끼리 시뜩하는 것이 꼭 계집들 같구먼. 서로 이웃에 마실이나 댕기듯
이 할 수 없는 처지이니, 마음으로라도 곁에 있거니 여겨야지, 하물며
곁에 두고 보지두 못하면서 멀리 두고 정이 있느니 없느니 해서야 될
말인가. 우리가 녹림처사로서 무에 잘난 노릇이라구 결의형제를 하였
겠나.
비록 그뜻이 잘 펴나가지 않을지라도 잊지 말자는 얘기 아니겠
는가. 백성들과 더불어 썩은 세상을 바로잡아보자는 것이지 서로 다투
어 도적질하여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결의한 게 아니여. 내가 북관에서
해서로 내려오자니, 마침 춘궁기라 백성들의 참상이 말로 할 수가 없
데. 이렇게 우리가 산간에서 밥이나 배불리 먹고 있으니, 대의를 잊기
가 쉬운 법이여. 이번에 강서방을 내보낼 적에는 마두령과 만석이두
동행하여 아우들도 만나고, 세상도 둘러보아.
그리고 성님도 나하구 같이 봉산에 나가보십시다. 아까두 들었지만,
예전의 기막힌 포한을 풀지 못하였다는데... 여기 산채의 사람들을 일으킬
일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성님 개인의 일이외다. 내가 성님 집안일을
도와드릴 것이니우리 둘이서 내려가면 족할 듯허우."
길산이 말하니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였다.
길산의 얘기가 모두 대의를 들어 말하는 것이나, 그중에서도 세심한
대목들을 잊지 않고 경우와 뜻에 따라서 다시 자상히 얘기하여 모두들
더 할 말이 없었다. 김기도 길산의 말을 듣는 동안에 서선비께 언제든
포한을 갚으리라 먹었던 마음도 부끄러워지는 것이었다.
"집에는 들르셨수?"
감동이가 물으니, 길산이 빙긋 웃었다.
"갑송이네 허물어진 초가에두 들렀지. 사람 사는 일이란 다 그런 게
여."
마감동이가 졸개를 불러 안악의 강말득이와 정탐하러 내려간 오만석
이를 산에 오르도록 지시하였다. 그날 방은 정기와 길산이도 산채에서
자고 월정사에 들르기로 하였고 이튿날 아침을 먹고 났을 때 만석이와
말득이가 돌아왔다. 말득이는 여전히 깡마른 몸매에 영리한 얼굴이었
고, 만석이는 전보다 몸이 좀 나았다.
"아이구 성님, 제게 헛걸음시키구 어디루 사라졌다 이제 오셨수."
하며 강말득이 반겼다.
"그래 우리 오공랑 자고 쓰는 솜씨는 여전하신가. 끝춘이두 잘 있
구, 노모께서두 정정하시구..."
"끝춘이는 성님께서 오셨다니까 떡을 해서 갖구 오르라구 붙듭디
다."
"끝춘이두 시집을 보내야겠지. 어찌 마음에 드는 장정이 없다던
가..."
"성님, 애비 되신 기분이 어떠시우?"
오만석이가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네니 길산의 얼굴에 잠깐 그늘이
지나간 듯하였다. 길산은 말을 바꾸어,
"그동안 탑고개 식구들 돌보느라구 골치 아팠겠네. 산채를 이만이나
지켜왔으니 수고가 많았어. 우리는 이제 월정사에 들렀다가, 봉산으
로 나갈 터인즉 자네는 감동이허구 말득이 따라서 달마산에나 다녀오
게."
하고 일렀다.
"달마산에요...? 선흥이헌데 말이지요."
"싫은가...?"
오만석이는 별로 달갑잖은 눈치였다.
"싫은 건 아니지만, 정말 우리는 그렇게 생각허지 않는데 그쪽에서
우리를 별루 반기지 않을 겝니다."
그러나 곁에 있던 마감동이 좋게 말하고 김기도 권하여서 만석이도
응낙하였다.
김기가 봉산을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한번도 월당강
의 풀나루를 건너지 아니하였다. 갑송이가 그를 산채로 데리고 들어을
때 피맺힌 몰락의 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연을 알던 갑송이나 길산
이가 몇번은 서좌수와 여침지를 징벌하러 간다고 나서기도 하였었다.
길산이 구월산을 떠난 직후에 마감동과 갑송이 사이에 계획이 이루어
져 막상 진행을 시키려 하였으나 김기는 못내 사양하고는 하였었다.
그 이유는 빚보로 여첨지 집에 끌려간 딸 때문이었다. 만약에 여럿이
몰려가서 여가와 서가를 살해하고 그의 딸을 데려오게 되면 모두들 은
밀히 봉산을 떠났던 김기의 짓임을 누구나 알게 되겠기 때문이었다.
봉신에는 그의 선영이 있었고 아직도 김씨 문중의 일가 친척들이 살았
다.
그는 되도록 산 아래의 세상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백지로 돌리기
로 작심하고 있었다. 때때로 화적당의 군사 비슷한 처지가 되
어 있는 자기를 돌이키고는 죽어도 조상엘 뵐 면목이 없고, 살아서 제
사에도 참가하지 못하는 신세를 한하였다. 아마도 지척의 고향에서는
그가 욕스러워 더는 살지 못하고 어디 가서 일가 자진하였거나, 인가
를 떠난 깊은 산골에 은둔하며 화전민이 되었다고 여길 것이었다. 그
러한 김기가 딸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지난 겨울이었다.
말득이가 봉산 만동이 천동이 형제의 풀뭇간에 다니러 갔다가 우연히
얻어온 소문이었다. 그의 딸이 두 해 가까이 여침지네 안채에서 기식하더니
어언 식구들과 정이 생기고 드디어 안주인의 눈에 들어 아예 여가의 장남과
혼인을 맺었다는 소식이었다. 여가가 원래 내수사 노비였다는 소문이
고 보면 비록 가난하나마 양반의 가례 규범을 배운 김기의 딸이 과분
하달밖에 없었다. 소식에 접한 김기는 턱을 떨며 분하게 여겼다.
그 지체의 다름으로 능욕당하였다는 느낌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철
모르는 계집아이라 하나 제 부모의 원수임을 사무치도록 알련마는, 오
히려 죽지 않고 살아서 그 집 대를 잇게 하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봄이 되어 그의 딸이 임신하였다는 전갈이 오자 김기는 그만
심한 번뇌에 빠지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제발 딸아이에 관하여는 잊어버리고 봉산 쪽으로는 아예
생각조차 돌리지 마시라고 몇번이나 애원하였다. 기왕에 남의 집 귀신이
되어버렸는데, 무엇 때문에 고이 살고 있는 아이와 그 집에 여한을 갖느냐는
것이었다.
김기도 이제는 여가의 목을 친다든가 집안을 구몰시킨다든가 딸년을
데려을 생각은 가셨다. 오히려 딸아이를 한번만 보고 싶었고, 그애가 낳을
건강한 외손자라도 안아보고 싶은 심경도 들었다. 그러나 김기는 다시 김씨
문중과 고향에 남아 오랫동안 떠돌아다닐 모욕스런 풍문을 떠올렸다. 내로
라 하던 책상물림 김기의 딸년이 빚보에 잡혔다가 여가놈의 며느리가
되었다더라 하는 중문은 오랫동안 문중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었다. 드
디어 길산이 당도하기 전에 정기는 스스로 어떤 결정이 내려져 있었
다.
길산과 만났을 때 김기는 그런 뜻을 비쳤고 길산은 종내 묵묵부받이
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와 단둘이서 봉산에 나
갈 뜻을 내 보였으니, 모를 일이었다. 갑송이의 얘기가 먼저 나왔지만
그때에도 길산은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였다. 그들은 월정사로 내려
가 함께 풍열스님을 뵈었다.
풍열스님과 옥여와 길산 김기 등이 둘러앉아 밤 가는 줄 모르고 여
러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특히 풍열스님은 갑송이의 얘기를 꺼내어 짤
막한 설법을 하였다.
"내가 뭐라더냐. 갑송이는 좋은 사문이 될 성품을 가진 사람
이다. 그 녀석이 속진을 빨리 면하게 하시려고 부처님께서 깊은 번뇌
를 주셨으니 파가가 오히려 그의 출가를 도운 셈이니라. 세존
께서 일찍이 반특의 선량함과 정직함을 보시고 그가 깨달을 것을 미리
아셨다. 반특은 다른 불자들이 모두들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하던 사람
이다. 그가 계승을 외지 못하여 수도장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세존은
그를 거두셨다. 걱정 말고 내게로 오너라. 제 어리석음을 스스로 아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니라,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지혜롭다고 스스로 말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세존께서는 타이르시고 아난타에게 그를 가르치도록 하였으나 도무지
우둔하여 가르쳐줄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짧은 글 두 줄
을 가르치고 외우게 하셨으니 티끌을 털고 때를 닦아 없애리라 하는
글귀였다. 그런데 그 짧은 글귀조차 반특이는 외우지 못하였다. 모두
들 반특이 불자의 그릇이 전혀 아니라고 하였지만 세존께서는 저버리
지 않고서 다른 비구들의 신발을 닦고 소제하는 일을 시켰느니라. 비
구들은 제 신을 닦는 것도 수행이었으므로 반특이 신발을 닦으러 을
적마다 거절하니, 세존께서 반특을 위하여 신발 닦는 일을 거절하지
않도록 해주었다.
반특이 비구들의 신발을 닦으러 가면 모두들 그의 우둔함을 동정하여,
티끌을 털고 때를 닦아낸다는 글귀를 가르쳐 주었다. 반특이는 열심히
신발을 밖으며 혼자 글귀를 되뇌어 마침내 외울 수가 있게 되였다. 그리고 그
글의 뜻도 깨닭게 되었으니, 티끌이나 때는 안과 밖에서 오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밖의 때는 재와 흙과 기왓장 등의 눈에 보이는 먼지요,
없앤다는 것은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다. 안의 티끌과 때는 마음의 속박이니
지혜는 이것을 풀어 없애어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뜻임을 스스로 깨닫고,
반특이는 마음이 밝아져서 더욱 나아가 생각하였다.
티끌은 탐욕이니 지혜로운 자는 이 탐욕을 없애야 한다. 이것을 없애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가 되고 여러가지 귀찮은 인연이 생겨서 사랑을
속박하고 움직일 수 없게 하며 이윽고 불행 속에 떨어지게 한다. 반특이는
애증이 없는 평등한 마음을 가지고 무명의 껍질을 벗어 모든 만물을 투시할
마음의 문이 열렸느니라. 아무리 학식이 넓다 한들 그 참된 뜻을 깨닫지 않으
면 무익한 것이며, 그것을 실행치 않으면 헛된 것이다. 우리 대성법주
는 참으로 큰 불기이니 운부께서 필찰하시고 긴히 쓰실 것
이다."
말없이 고개 숙여 듣고 있던 좌중에서 길산이 조용히 말하였다.
"그것은 불자뿐만 아니라, 우리 같은 자들에게도 합당한 이치올시
다. 탐욕의 근원으로 하여 제 마음에 속박되면 모든 일을 그르치고 말
겠지요. 비록 악덕한 자의 목을 베는 일각에도 탐욕이 깃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할 ! 불법을 빌어 살생을 말하다니 고이한 놈이로다."
풍열은 껄껄 웃었다. 풍열선사는 할을 부르짖고 나서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이제는 구월산에 있을 작정이냐?"
"금강산에 머물던 만큼은 있게 되겠지요."
"너는 다시 금강산에 가게 되지는 않으리라."
풍열스님의 말을 길산은 금방 알아들었다.
"갑송이가 돌아간 것처럼 저는 여기 돌아왔습니다."
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전보다도 너는 우리에게서 훨씬 먼 곳에 있구나. 내려가거
라. 거기서 떠나지 말고..."
풍열이 묵주를 헤아리며 눈을 감았으므로 길산은 옥여, 김기와 더불
어 조용히 물러나왔다. 선방에서 묵은 김기와 길산은 봉산을 향하여
부처고개를 넘어 큰내를 건너갔다. 길산은 흩어진 머리를 질끈 동인
두건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으며, 김기는 갓과 도포의 차림이었
다.
"말득이네 주막에 들러서 행장이나 다시 갖추고 갑시다."
김기가 말하여 그들은 안악 읍내로 들어가지 않고 배고개 쪽
으로 나아갔다. 길이 세 갈래로 나뉘는 곳에 인가가 몇채 있었고 제법
울타리가 크고 기다란 방이 딸린 초가가 보였다.
용주 씌운 장대와 술 주자가 뚜렷하여 한눈에 그곳이 말득이네
집임을 알았다. 길산은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먼저 술청으로 들어갔고
김기는 바깥에서 뒷짐을 지고 기다렸다. 길산이 끝춘이를 시험해보고
싶어 김기에게 청하였던 것이다. 길산은 일부러 다리를 절면서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응당치마에 수수한 차림새로 나물을 다듬고 있
던 끝춘이가 인기척을 반기며 부엌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신통치 않은
행색을 보고는 떨떠름하니 물었다.
"무슨 일이오?"
길산이 고개를 숙인 채로 공손히 말하였다.
"예... 점심이나 하려구 왔소마는..."
"그런데요..."
"돈이 없수."
끝춘이는 배시시 웃고 나서 길산의 행색을 찬찬히 훑었다.
"별일이네. 아직 마수도 못했는데 첫 손님이 빈손이라니,"
끝춘이는 부엌으로 들어가며 종알거렸다.
"나중에 형편 피면 갚으셔요. 설렁탕 말아드릴게."
길산은 절뚝거리며 마루 위로 올라가 맞았다. 부엌 안에서 끝춘이가
물어왔다.
"어디서 오우?"
"관서에서 옵니다."
"에그, 먼 데서 오시네."
끝춘이는 더운 물 속에서 설거지할 식기들을 모두 꺼내더니, 개숫물
함지를 들고 문 밖으로 나가서 요란하게 퍼붓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설렁탕을 말아가지고 개다리소반에다 받쳐 먹음직한 무청나박김치와
함께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길산이 잔뜩 기다리고 있는데, 가까이 서
서 상을 내려놓으려던 끝춘이가 애걔걔 하면서 상째로 들러엎었다. 길
산은 뜨거운 국물이 허벅지에 떨어지는 바람에,
"에크크..."
하면서 벌떡 일어나 두머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끝춘이는 얼른 길산
의 바짓가랑이에 묻은 밥알과 건더기 따위를 털어내는 시늉을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마루에 윤이 나서 동짓달 얼음판 같네,"
끝춘이는 다시 길산의 미투리를 집어서 섬돌에다 탁탁 털었다.
"에이그, 사람 괄시한다구 그른 맘을 먹지 마시우. 이녁이 마수로
와서 대신 일진을 때웠으니 매일 이런 마수걸이라면야 누가 쌀 한 톨
인들 아까워하겠나요."
길산은 어찌나 짓을 고자고 팔장을 끼고서 무덤덤히 앉았다. 끝춘이
가 다시 소반을 들고 와서 조심스레 내려놓는데, 이번에는 술 한 병이
더 얹혔다. 끝춘이가 술을 찰찰 부어놓는다.
"반주로 드시우. 그러구 내가 찬감 때문에 방금 다녀올 곳이 있으니
앉아서 천천히 드시구려."
끝춘이는 안방으로 들어가 뭔가 수군덕거리고 나서 집 밖으로 나갔
다. 김기가 그 나가는 양을 보고는 들어와서 길산과 마주 앉으니 길산
은 참았던 웃음이 절로 터져나왔다.
"역시 서녀라는 별호대로 깜찍한 아이요."
"눈치를 챕디까?"
"글쎄 두고 봅시다. 하는 꼴에 옹이가 배겼으면 함께 데리구 봉산으
루 나갑시다그려."
김기와 길산은 술잔만 나누며 끝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국물 위
에 기름이 허옇게 둥둥 뜨고 나자 울타리 밖에서 검정 더그레에 육모
방망이, 털벙거지 갖춘 포졸 하나가 썩 들어섰다. 김기는 놀란고, 길
산은 대수롭지 않은 중에도 너무 의외라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마당으
로 들어섰던 포졸이 역시 영문을 모르는 듯하였다.
"아니‥‥ 김선비님 아니슈. 난 또 누구라구."
김기가 찬찬히 바라보니 그는 분명 배고개 산막에 나와 있는 졸개들
의 한 사람이었다. 포졸 행색이 울타리 밖으로 내밀고 외쳤다.
"여보게 들어오게, 산채 김선비님이시네."
뒤따라 들어서는 것은 역시 산막의 졸개들이었다. 포졸 복색이 말하
였다.
"끝춘이가 사람을 보내어 잡을 놈이 있다기에 부라부랴 달려 내려오
는 길이올시다. 어유 숨차다..."
뒤따라 숨이 턱에 닿아서 들어오던 끝춘이가 그런 판을 보고 당황하
였다가 김기의 곁에 앉아 싱글거리는 길산을 보자 그만 주저앉아버렸
다.
"어머니나... 난 몰라. 장두령님일세."
"잘 있었느냐. 어때 이번엔 자네가 헛걸음하였군."
"몰라뵈었습니다."
길산은 그제서야 안방으로 들어가 눈 어둡고 귀 어두워 노망기로 오
락가락하는 말득의 노모를 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래도 총기는 남아서
곧 길산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산막 패거리들은 곧 돌아가고 다시 중
화상이 들어와 끝춘이가 몸소 길산과 김기에게 술을 따랐다.
"하마터면 내가 포졸에 속아 삽짝을 나가다가 머리가 깨어질 뻔하였
다."
"정탐꾼이나 다른 패에서 나온 줄만 여겼습니다."
"그래 어찌 수상적게 보았더냐?"
끝춘이는 배시시 웃고 나서 또라지게 대답하였다.
"처음에 절름거리는 다리를 성하게 쓰는 것으로 알았고, 그 다음에
는 가까이서 몸을 보아 걸인이 아님을 알았으며, 끝으로 신발을 보고
알았습니다. 더구나 밖에 인기척이 있는 듯하여 물을 버리는 척하고
나가보니 한 사람이 등을 돌리고 서 있겠지요. 원래가 사람을 대할 적
에는 한번 언뜻 보고 그 인상을 새기는 법이니 두령께서 마루로 올라
설 때까지 남는 얼굴이 없기로 께름칙하였습니다.
이는 그 얼굴을 은연 감추려는 심사가 제게 전해진 것이지요. 또한
걸식하는 자는 음식이 나오는 것도 확실히 모르고서 마루 위로 올라가
앉지는 않습니다. 음식 먼저 그 다음에 사람이 오르는 법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소반을 엎었습니다. 신을 보아하니 아직 삼올이 생생한데, 대개
동냥아치나 떠돌이들은 육바라기를 신지요. 생생한 미투리란 관서에서
오지도 않았을뿐더러 각설이도 아니란 뜻입니다."
이번에는 김기가 혀를 찼다.
"거 상당하구나. 내 강서방 누이가 재주가 있단 말은 들었지만, 오
늘에사 알았구나."
길산이 물었다.
"그만하면 우리와 동행하여도 되겠다. 주막 지킬 이는 있느냐?"
"오라버니도 어제 산에 오르시고 저뿐이 지만 멀지 않다면 산막 장정
들 중에 중노미 구실할 사랑이 있겠지요."
김기는 점점 영문을 모르게 되었다. 그가 애간장이 타서 일단 길산
이 앞에 발설을 하여 놓고는 막상 월정사에서 밤을 지새며 곰곰 생각하
노라니 차츰 후회되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 와서 가문이란 무엇이며,
여첨지의 목을 베어 어쩌자는 것인가. 그뿐 아니라 딸년을 죽여 이미
깊은 상처로 남은 치욕의 흠집이 사라질 것인가. 그러나 어떻든지 실
정과 마주치면 판단이 확실해질 것이로되, 지금은 그 자신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봉산 서쪽의 백학암은 월당강을 마주한 너른 평야에 있으
니 백학동은 부촌이었다. 장리며 고리며 닥치지 않고 재물을 그러모은
여침지네는 백학동의 마을 한가운데 주인처럼 들어앉은 기와집이었
다.
여침지가 빚보를 핑계로 김기의 딸을 데려을 때에는 사실 그 인물이
나 재주를 알지 못하고 다만 김기 식구들이 야반도주하지 못하도록 묶
어두자는 데에 있었다. 김기의 딸은 십사세였으나 어려서부터 글을 읽
고 쓰며 운자에 붙여 시도 지었고, 비록 가난하게는 자랐으나 범절과
기품이 숙성하였다. 가족들과 떨어지고 여첨지네 하인배들에게 업혀
온 뒤에도 두 번이나 자진을 시도하였다.
여가네서는 공연히 처녀 귀신이나 생겨서 집터를 버릴까봐 밤낮으로
감시하는 하녀를 붙여두고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였었다. 처음에는
미음도 먹지 않고 눈만 멀거니 뜨고서 벽에 기대어 앉았더니, 가엾이
여긴 여첨지댁이 아예 안방으로 데려다가 말을 시키고 우스갯소리도
하며 달래었다.
여첨지댁은 소탈하고 입담 좋고 인정이 많은 아낙네였고, 김처자도
한 달이 못가서 팔다리도 주물러주고 얘기책도 읽어주며 마음을 차차
돌이키게 되었던 것이었다.
여첨지에게는 열세살짜리 아들이 있었고, 자연히 제 집에 들게 된
김처자에게 소년다운 정을 지니게 되었으니 맛있는 것이 생기면 계집
중들 몰래 고의춤에 감추어 와서 씩 웃으며 쥐여주고 가던 것이었다.
여도령이 워낙에 글공부를 싫어하여 영민하긴 하여도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제기차기는 동네 첫째요, 연 끊어먹기도 백학동을 위세
한 인근에 당할 아이가 없고, 닭서리도 선봉을 섰다. 그렇게 놀이에
정신이 없던 여도령은 김처자가 안방에 들게 된 뒤로 안채의 마당 주
위를 떠나지 않았다.
마음이 어언간에 풀린 김처자는 쾌활하고 순진한 여총각으로 하여
그 집에 스스로 동화되어갔었다. 혼인을 치르게 되기까지는 또 한 번
의 고비가 있었다.
막상 날짜를 받아놓고 아무리 반 식구가 되어 있는 사이라 할지라도
단자를 들이려니, 색시네 양친부모가 간데없어 그런 쓸쓸한 노릇이 없
었다. 공연히 덧들인 셈이랄까, 부모에 대한 포한과 그리움이 되솟아
난 김처자가 돌연 식음을 전폐하고 골방에 숨어버려서 여침지네서는
다시 소동이 벌어졌다. 여도령이 따라서 식음을 물리치고 또한 작은사
랑에 틀어박혔던 것이었다. 여침지네서는 공연히 집에 화를 불러들인
꼴이었다.
신분의 차이는 그나마 여가네서 첨지 직함이라도 얻어두었으니 그렇
다 치고, 불화는 고사간에 빚돈으로 전답문서를 빼앗았으니 원수끼리
사돈이 되는 셈이며, 행방이라도 안다면야 여첨지 부부가 달려가 이내
빚청산하여주고 전답 문서를 돌려주어 화해를 틀 수도 있었다. 원한을
품은 채 봉산을 떠나 지금은 어던가에서 유리걸식할 사돈네를 모른 성
해버린 채 그의 딸을 며느리로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첨지네서는 김기 가족의 행방을 찾아보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되었다.
그러나 설령 김기를 찾는다 한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렀으니, 당신네 딸을
주소 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냥 사이좋게 지내온 집안들이라 할지라
도, 유학으로 세습하여 내려온 양반가에 고리대금업과 장리로 악착스
레 돈을 모은 허울만의 첨지네서 통혼을 넣지는 못할 입장이었다.
하물며 한 집안을 망쳐버린 원수임에야 어찌할 것인가. 여첨지네집
에서는 사람을 놓아 백방으로 찾는 듯하다가 일가가 연안 쪽에서 자진
하였다는 그럴 듯한 소문을 지어 봉산 일대에 널리 알렸고, 인정으로
그럴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심심산골에 가매장하였다는 유골을 수습하
여 봉산에 장사지낸다 하였다.
그리고 여첨지네서는 잡아두었던 전답과 가옥에다 또한 많은 토지를
덧붙여 김처자 앞으로 내주였으니 겉으로나마 체면은 차린 셈이었다.
부모의 유골을 모신 상여가 들어오는 날 김처자는 소복을 입고 며칠
동안이나 목놓아 울었었다. 이미 죽은지가 두 해나 넘었는데 한 해만
넘기면 상도 벗게 되어 이듬해에 서둘러 혼인을 시켰던 것이었다.
김처자가 원래 제 부모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고 효도가 무엇인지
도 엄정한 가훈으로 몸 깊숙이 배어 있었건마는 여자란 출가하면 외인
인지라, 어느덧 부모의 포한과 가족의 슬픔을 잊고서 아기까지 배어
완전히 여첨지네 식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도령도 제 아내의 총명함
과 정숙함을 사랑하여 아버지인 여첨지에 대해서는 야속한 생각과 멸
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이 알려지자 여도령은 손수 보약을 지어
다 먹였고, 좋다는 것은 무엇이나 구하려고 인근을 뛰어다녔다.
여첨지는 읍내로 출타하고 여도령도 마름들을 만나러 이웃 고을에
나가 갔는데, 누군가 퇴창 앞에 와서 여침지댁에게 알렸다.
"마님, 누가... 왔습니다."
여첨지댁이 문을 열고 보니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무명 치마 저고리
에 흰 수건을 쓰고 목에 염주 걸고 작은 보퉁이를 들고 서 있었다. 여
첨지댁은 의외의 얼굴에 어리둥절하였고, 하녀는 어쩔 줄을 몰라하였
다.
"자꾸 들어오지 말라는데 두 이 댁에 산모가 있다며 뵙자구 합니다."
"댁은 어디서 오신 뉘신가?"
첨지댁은 곧 퇴할 태세로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자가 공손히
합장하며 인사를 하였다.
"예, 저는 자비령 지장암에서 공부중인 우바이올시다. 약간의 역술
을 배웠는데, 우연히 이 집을 지나다 보니 문가에 검은 구름이 잔뜩
끼었기로 근심이나 덜어드릴까 하여 문안 올리는 것이지요."
첨지댁은 역술이라는 소리와 검은 구름이란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
랄았다.
"아니 아침부터 게 무슨 요사스런 소린고..."
"나무관세음보살. 그렇게 보인달 뿐 어떻게 되어 그러한지는 이제
알아보아야겠지요. 보고 짚이는 대루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댁
에 며느님께서 아기를 잉태하지 않았습니까?"
첨지댁은 이것 봐라, 하였다가 어디서 소문을 주워듣고 왔는지도 모
르겠다 싶어져서 태연스레 말하였다.
"성혼한 지 해를 넘긴 아이들이니 임신하는 게 당연하잖은가."
우바이라는 젊은 여인은 계속 공손히 중얼거렸다.
"이 댁 며느님은 살이 끼어, 그 살을 풀지 않으면 서방님은 물론이
요, 아기까지도 해를 입게 되겠습니다."
살이라니. 좌우지간에 나쁜 인연이 맺힌 바 틀림없고, 보살짜리로
보이는 여인의 말이 하도 의미심장하여 첨지댁은 저도 모르게 기가 팍
죽어버렀다.
"어서 안으루 드시게나...:
"죄송합니다."
여자는 공손히 들어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고, 첨지댁은 벌써부터 주
눅이 들어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까 조마조마하였다.
"보살님! 어서 속시원히 말이나 해주소."
반말이 하소로 바뀌며 보살님자가 붙여졌다.
"사주를 알려주십시오. 주인 어르신과 마님과 서방님과 며느님의 것
차례로 알려주셔요."
첨지댁이 일일이 알려주는 대로 여자는 단주를 주물럭거려서 사주를
뽑아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래살래 젓기도 하고 천장을 우러러 한숨
을 토하기도 하며 제 가슴을 치며 답답하다는 시늉도 내었다. 그 모양
에 첨지댁은 차차 좌불안석으로 연신 방바닥을 두 손으로 토닥거렸다.
"생병을 않겠고만, 어서 알려주오."
"하... 사정이 아주 위급하군요."
보살이 종알거리며 알아본 결과를 토설하였는데, 첨지가 갖은 방법
으로 돈을 모은 것이며 그들 부부가 석삼 년을 허리띠 졸라매고 걸식
하며 지낸 것, 그리고 여첨지네와 며느리 친정 사이에 풀지 못할 원한
이 맺혀진 것,
그러나 그 부모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 등등을 소상히 풀어내는
것이었다. 그 부모들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꿰어내는 실력으로 보아
세상 소문과는 무관한 족집게임을 알 수가 있었다. 첨지댁은 완전히
젊은 보살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래서 주인 어르신께서는 지난 세월 동안 쌓인 악이 있어 그것을
풀어야 하며, 또한 이 댁 며느님께서는 다 조상의 앙화를 미리 막아야
합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아이와 며느넘이 죽고 주인 어르신은 전신불
수가 되겠으며, 그 남은 적악이 미쳐서 서방님까지도 괴질에 걸리실
터이오니 어서 살풀이 재를 올려얍지요.
서두르십시오. 날짜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저희 암자에 와서 재를
한번만 올리시면 모든 살이 풀릴 거예요."
첨지댁은 그제서야 한숨을 쉬면서 마음을 놓았다.
"액땜이 된다면야 백일기도인들 어렵겠수. 더구나 하루만 채를 올리
면 된다니 지금 당장 나섭시다. "
그리고는 곧 일어나서 나갈 기색이었고, 젊은 보살이 만류하였다.
"가만 계십시오. 아무 때나 가는 게 아니라 좋은 날을 받아야만 합
니다."
"어서 그럼 택일을 하시우."
보살은 손을 꼽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내일이 좋겠군요, 그러고 나면 한 보름은 기다려야 좋은 날이
오겠는데요."
"아이그 참 잘되었수. 내일 당장 오르기로 하고, 공양미는 얼마나
준비할까?"
보살은 방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 비용도 들지 않습니다. 그저 며느님과 주인 어르신과 서방님
이 평소에 입으시던 겉옷 한 벌씩이면 되겠어요. 그리고 초와 향만 준
비하십시오."
"어디 그런 쓸쓸한 재가 있을까, 염려 말구 말해보우. 내가 암자의
불사를 도와줄게."
"아닙니다. 그러시면 액땜이 되질 않습니다. 그저 아무도 모르게 다
른 가난한 이들께 보시나 해주시지요. 겉옷에다 식구분들의 함자와 사
주를 적어 법당에 올려 재를 올리면 되겠어요."
공양을 따로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모르는 이들께 보시를 하
라니 여첨지댁은 젊은 보살을 굳게 믿어버리고 말았다. 보살은 다시
주의를 주었다.
"제가 이 댁의 불운한 조짐을 미리 알아본 것은 천기와도 같으니 절
대로 밖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이웃이나 집안 하인들은
물론이요, 식구들 당사자간에도 절대로 눈치채도록 하셔서는 안됩니
다.
만약 알려지면 정성스런 기도에 부정이 들어 아무 효험이 없지요.
그리고 며느님은 함께 오도록 하십시오. 태 안의 아기도 살을 풀어 안
산하도록 해야겠으니까요."
"잘 알었수, 일가를 구하는 일인데 열 손가락에 불을 달라면 못할
까. 뭐든지 해야지."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보살이 일어서니 첨지댁은 그가 어디로 달아나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만 같아 와락 옷소매를 붙잡았다.
"가긴 어릴 가우. 아예 우리 집서 푹 쉬고 내일 같이 절에 오릅시
다."
"아닙니다. 제가 이 댁에 머물면 다른 사람들 눈도 있거니와 기도에
좋지 않습니다. 내일 식전에 올 터이니 걱정 마십시오."
첨지댁은 한사코 마다하는 보살에게 돈 한 꿰미를 무명끄틀에 둘둘
감아서 들려주었고 보살도 못 이기어 받아들었다. 첨지댁은 집안 사람
들이 의아하여 바라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보살을 대문 밖에까지
전송하며 내일 올 것을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보살은 학암에서 읍내로 들어가다가 인적이 드문 들판에 이르러 수
건을 벗고 염주도 벗어버리고 회색의 긴 저고리도 벗었다. 그러고 나
니까 그것은 여염 여자의 모습이었다. 보살은 끝춘이였는데 읍내의 호
젓한 객줏집에서 기다리던 길산이, 김기와 더불어 만났다.
여첨지댁은 보살이 돌아간 뒤에 며느리를 안방으로 불렀다.
"그래 몸은 어떠냐?"
"입맛이 없고 헛구역질이 조금 있을 뿐 괜찮은 것 같아요."
"조심해야 한다. 내가 널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젯밤 내 꿈자
리가 몹시 뒤숭숭하기로 절에 올라 기도나 드려볼까 하여 그런다. 여
기서 산수원까지는 말이나 가마를 타고 갈 수가 있겠지마는, 그 다음
부터는 산으로 올라야 하는데 네가 걸을 수 있을까 걱정이다."
김규수는 총명한 눈으로 첨지댁을 건너다보았다.
"아니... 안 가시던 절에는 뭣하러 오르시려구요. 저두 가풍이 절
에 다니는 집안이 아니라서 그런 일은 생소합니다. 아버님이나 서방님
께도 의논하여 허락을 맡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첨지댁이 보통 때 같았으면 이년 양반 집 자식이라고 함부로 시어미
께 내댄다고 은근히 아니꼽게도 생각하였겠지만 지금 그럴 계제가 아
니었다.
"내 기분이 하도 심상치 않아 그러는 것이다. 설사 네 아버님께 말
씀드리면 쾌히 승낙할 듯 싶으냐. 그 어른이야 쌀 한톨 돈 한닢에도
가슴을 졸이는 분이시니 틀림없이 펄쩍 뛸 것이다. 또한 안채 일에는
나름대로 아녀자들끼리의 일이니 사랑채에서 모르시게 하여도 무방하
니라.
아무 말 말고 이것은 네 시어미의 부탁이니 내일 채비를 해두었다가
살그머니 둘이서 다녀오기루 하자. 아예 네 남편에게도 발설하지
말아라."
김규수도 내키는 일은 아니건만 그렇게 간곡히 부탁을 하니 며느리
로서 주장을 세울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무렴 그래야지. 다 집안을 위해 하는 일이고 네 서방과 자식을
위한 일이거니 하여라."
첨지댁은 생각하기를 아무래도 가마를 내었다가는 구설이 많을 듯하
여 읍내까지 나아가 객주의 세마를 내어 산수원으로 하여 자비령 근처
까지 타고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집안 사람들께는 읍내에 용한 의원
이 묵고 있어 며느리의 진맥이나 잡히고 온다고 할 작정이었다.
보살은 약속대로 식전에 찾아왔고 은밀히 찬방에 안내되었다. 첨지
댁은 일단 마음을 놓았다. 여느 때처럼 주인의 밥상머리에 앉아 시중
들어주고, 그가 사랑으로 건너간 뒤에 며느리와 더불어 보살을 따라
나섰다.
읍내까지 시오 리를 쉬엄쉬엄 걸어서 세마 놓는 집에 당도하니 아직
이른 오전이었다. 말을 타기는 하였으나 워낙에 견마 잡은 마부에
주의를 주었던 탓으로 김규수가 탄 말은 뒤로 멀찍이 떨어지곤 하였다.
걷는 것보다 별로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힘은 덜 드는 셈이
었다. 며느리가 지체되면 청지댁과 곁을 따라가는 보살은 한참이나 기
다리곤 하였다. 산수원을 지나 적암산의 산줄기를 따라 샛길을 오르게
되어 세마를 뒤에 머무르게 해놓고 보살이 김규수를 부축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김기와 길산은 계획한 대로 송림이 울창한 산길 모퉁이에서 여자들
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풀 위에 드러누웠던 길산이 무슨 소
리를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서 잠깐 노려보았다.
"오는군."
김기도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내다보니 희끗희끗한 옷자락이 나무
사이로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김기는 어쩐지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
하였다.
김기는 딸의 모습을 보자 길 위로 뛰쳐나가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
이 일어났다. 딸은 무거운 걸음걸이로 끝춘이의 부축을 받으며 올라오
고 있었다.
"차라리 죽지 못하고."
그들 일행이 가까워질 때까지 김기는 길 위로 나서지를 못하였고,
길산은 이것이 혈육지간의 일인지라 뭐라고 조언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김기의 표정만을 주의 깊게 살필 뿐이었다. 정기는 바로 눈앞으
로 여자들이 지나기까지 차마 뛰어나가지를 못하였다. 끝춘이도 어느
쯤에서 그들과 마주칠지 모르므로 자꾸만 주위 숲과 골짜기를 두리번
거렸다. 여자들이 멀어진 뒤에 김기는 길 위로 나섰다가 길산에게 말
하였다.
"그 단검 좀... 주시오."
"뭣하시게요..."
"저년을 내 손으로 베어버리려오."
길산은 아무 말 없이 품안에서 반팔 길이의 예리한 짧은 환도를 꺼
내 주었다. 김기는 칼을 뽑아서 서투르게 잡고 잠깐 서슬이 퍼런 칼날
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지나간 여자들의 뒤를 잰걸음으로 쫓아갔다. 얼마 가지 않
아서 여자들의 모습이 보였고, 김기는 차마 쫓아들어가지는 못하고 고
함만 질렀다.
"게 섰거라!"
여자들이 뒤를 돌아다보자마자 자지러지는 소리를 지르며 먼저 여첨
지댁이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며느리는 망연히 돌아서서 김기를 바라
보았다. 끝춘이는 얼른 김규수의 손을 놓고 몇걸음 물러났다.
김규수는 낮익은 목소리와 모습에 얼이 나간 듯, 반쯤 입을 벌리고
두 손을 올려 뭔가 잡을 듯이 휘젓더니 김기의 앞으로 치달아왔다.
"아버님..."
딸은 김기의 가슴에 안길 듯이 달려들다가 부릅뜬 눈과 꼭 다문 입
술에 질려 몇 발짝 앞에서 멈추었다.
"아버님..."
중얼거리는데 벌써 눈물이 비 오듯 하고, 그대로 서러운 양을 받아줄
데를 찾지 못하여 제풀에 김기의 발 아래 엎어지며 느껴 울었다. 아무
려면 김기에게 부녀의 정마저 없을쏘냐, 가슴에 울컥 치밀어오르는 격
한 감정을 눌러 앉히노라고 김기는 이를 지그시 물고 눈을 감았다. 밑
에서는 딸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을 떠난 뒤로 부모님의 가신 곳을 몰라 애를 태우더니... 돌아
가셨다는 소식만 듣고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였습니다. 이미 장사까지
치어 불효하였음을 땅속 깊이 깨닫고 있었어요. 이렇게 정정하신 모
습을 뵈오니 앉아 죽어도 한이 다 풀린 듯합니다."
김기는 칼을 늘어뜨리고 서 있었고 길산은 멀찍이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내 일찍이 네게 어찌 가르쳤관대 이다지도 뻔번하냐. 누가 널더러
욕되게 살아 원수놈의 자부가 되어 그 씨를 배라더냐. 애비가 못나서
가산 구몰되고 너까지 이 모양이 되어 욕된 목숨으로 살아서 봉산 고
을을 휘젓고 다니니 가문을 위하여 없애버림만 같지 못하다."
김기가 소매를 걷고 칼을 치켜들었다. 딸은 타는 듯한 시선으로 애
비를 올려다보면서 울부짖었다.
"진작에 죽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더니, 이제 아버님 손에 죽
으면 여식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칼을 치켜들고 성큼 말의 머리 위에 다가선 김기의 눈에는 드디어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렸다.
그때에 외마디 소리가 들리더니 여첨지 댁이 달려와 김규수의 몸을
감쌌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위로 쳐들어 막는 시늉을 하고 몸으로 자
부를 가리고는 하소하였다.
"비록 우리 주인이 몹쓸 짓으로 선비님께 원한을 샀다 하나, 사람의
일은 하늘에서 주관하는 것이라 우리 며늘아기가 된 것도 양가의 운세
요, 악연은 연이 아니랍디까. 이제는 댁네 따님만이 아니라 우리 맏며
느리에 우리 손을 배고 있는 여씨집 여인이외다.
차라리 원한이 있다면 우리에게 있으니 우리 두 늙은 양주 죽어지면
젊은 것들이라도 대를 물려 살아갈 터이온즉 어서 원한 풀이를 하시우."
김기는 쳐들었던 칼을 차마 내려찍지 못하고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
리고는 한동안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김기는 스스로 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벼슬을 한답시고 고향을
떠나던 날이며, 자진하려고 봉노에서 목을 맸다가 갑송이를 만나던
날이며, 딸을 여첨지 댁 장정들에게 빼앗기던 날들이 두서없이 스쳐
지나갔다.
하늘에는 드문드문 송 같은 구름이 바람에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구름의 속은 깊고 정결하였고 그 모양은 바람결에 따라 일그러지기도
하고 뭉뚱그려지기도 하였다. 김기는 돌연 눈앞이 아득해겼다. 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렀다. 어느결에 그가 손을 내려뜨렸고 손길을 벗어난
칼은 땅바닥에 맥없이 떨어져 있었다.
길산은 그렇게 될 줄을 알았다는 듯이 김기의 뒤에 와서 속삭였다.
"따님의 손이라도 잡아보우."
김기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을 리가 없었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서서 산을 내려갔다. 갑자기 실신한 듯 늘어져 있던 김규수가 땅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들었다. 목을 찌르려고 칼날을 거꾸로 세운
것과 길산이 그 여자의 손목을 휘어잡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길산은 슬쩍 비틀어서 칼을 떨구게 하고 나서 칼을 집에다 꽂았다.
"끝춘아, 돌아가자."
길산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끝춘이에게 말하였으나 끝춘이는 고
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지경을 버려두고 어찌 가겠어요."
며느리의 손발을 주무르고 있던 여첨지댁이 김기를 쫓아서 달려 내
려가더니 그의 발을 가로막고 붙잡았다.
"못 가오. 선비님... 아니 이제는 바깥사둔입지요. 사둔 어른, 이
대로 훌쩍 가버리시면 우리 아기는 못 삽니다. 그러잖아도 식음전폐하
고 부모를 그려 애태우는 정경을 보다 못하여, 우리가 그애 정을 떼노
라고 거짓 장사까지 지내었소. 하물며 이런 질책 끝에 가버리시면 그
냥 애가 달아 실심하여 죽고 말 것이니 우리 새끼는 또 어찌한단 말이
우. 제발 우리 죄 용서하시구... 잃은 재산도 저애 앞으로 모두 돌려
주었어요. 마음을 푸시우."
김기는 까짓 첨지댁의 손을 뿌리치고 그 자리를 피해버릴 수도 있었
으나, 못박힌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산속에 들어와서 바깥 세상
의 전례를 들어 양반의 처신만을 염두에 두었으니 이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랴. 징벌하고자 하였다면 구월산의 녹림당으로 하여금 여첨
지의 곡간과 돈궤를 털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였으리라.
아, 이것은 이미 내가 몸담은 세상 밖의 일이로구나. 김기는 벌써
오래 전에 봉산땅에 묻힌 백골이다. 김기가 방금 칼로 쳐낸 것은 저
세상의 삶에 대한 미련이었다고나 할까.
"놓으시오."
김기는 제 발을 붙잡고 엎드린 첨지댁에게 말하였다. 첨지댁은 그를
올려다보며 애소하였다.
"저 아이는 어쩌라구 이러시오, 밭사둔님."
김기는 다시 냉정하게 중얼거린다.
"내가 관여한 혼사도 아니고 나의 딸도 이미 아니니 사돈이라 함부
로 부르지 마오."
여첨지댁은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여자가 아니었다. 과연 치가치산
하여 집안을 일으킨 여첨지의 아낙답게 과감한 데가 있었고 끈질겼다.
그 여자는 더욱 김기의 발목을 끌어안았다. "그렇다면 한걸음도
떼지 못하십니다. 도대체 원한 때문이라면 이제 앗긴 재산을 다 물려주고
복구할 터이요, 양반의 지체 탓이라면 요즘 시속에 아무리 첨지라지만
남부끄러울 것이 무에 있소.
김씨 댁에 현관이 나온 지 몇 대가 되었다구 그러시우. 우리 아이
가슴에 못박아 놓고서 혈육지정을 끊고 가실 수는 없습니다."
한참이나 굳어진 얼굴로 묵묵히 서 있던 김기가 내외마저 잊어버린
이 아낙네에게 아까보다는 한결 부드럽게 말하였다.
"어서 놓으시오. 댁네 며느리나 주인이나 모두 내 칼에 의당 죽어야
할 것들이지만 그냥 돌아갈 테니..."
아낙네는 김기의 다리를 놓으며 뒤로 물러나 앉는데 이마에는 땀이
번지고 입술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아이고 우리 가장이야 찌르시든 베이시든 뜻대루 하시구려. 늙은
것들이야 살 만큼 살았으니 이것과 함께 죽여주십시오마는, 제발 저
애들에게는 포한 갖지 마시우."
김기는 조용히 말하였다.
"제가 낳은 자식을 죽이려는 미움도 어버이의 정이요, 또한 차마 그
러지도 못하고 돌아서는 것도 같은 정일진대 어찌 댁네가 아들을 생각
하고 자손을 걱정함과 다르겠소.
이미 우리는 봉산을 떠나고 세상을 떠난 사람이지만 여서방이
개과천선할 기미가 보이질 않으니 다른 이들의 손에 죽기 전에 차라리
내 혈육이라도 몸소 베이려던 것이오. 이제는 눈에 흙이 들어갈지라도
당신들 앞에 나서지 않을 테니..."
하다가 김기는 말을 끊고 뒤를 돌아보았다. 끝춘이가 김규수를 부축하
여 가까이 오고 있었으며 길산은 팔장을 낀 채로 서서 그들을 바라보
고 있었다. 김기는 딸이 창백한 얼굴로 다가서는 모습이 두려운 듯 얼
른 고개를 돌렸다.
"다시 말하지만 여서방에게 내 말을 전하시오. 나는 예전 김씨 문중
의 사람이 아니외다. 능멸을 당한 양반으로는 다시 여서방을 죄주지
않으려니와 만약에 악독한 소문이 들리면 내 대신 사람을 보내어 목을
베이겠소."
비틀거리며 다가서던 딸이 넘어지듯 김기에게 달려왔고 돌부리에라
도 걸렸는지 기웃하면서 주저앉으려는데, 김기가 얼른 안아서 일으켰
다.
딸은 아비의 손에 잠깐 잡혀 있었지만 김기는 그 손을 얼른 놓았다.
그리고는 엇비슷이 누구에게 하는지 방향없이 말하였다.
"집안에 악한 일이 성하면 곧 실인의 잘못이니 규간하여 안되
면 죽음으로 바로잡으라. 그리도 못할새 불효와 부정을 거듭
저지르게 되니 짐승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김규수는 눈물로 얼룩진 고개를 숙이며 단정하게 김기 앞에 인사를
올렸다.
"아버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딸을 죽이려던 아버지가 내훈을 던지고 돌아서게 되니 그것
은 김기의 성정이 뒤가 물러서도 아니요, 혈육의 정이 강렬하여서도
아니었다. 김기는 칼을 쳐들었던 순간에 여염 세상의 허무한 법도가
이미 자기에게서 사라져, 스스로 새로운 윤리에 따르지 않으면 바로
살 수 없음을 깨달았던 때문이었다.
그때에 김기는 길산이 자기와 단둘이 내려오자던 뜻을 깊이 생각하
였다. 나는 아직도 글 아는 사람이며, 글을 아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자각이 이마를 쳤던 것이다. 김기는 걸음을 재촉하여 산모퉁이를 돌아
나갔고 끝춘이와 길산은 그뒤를 쫓았다. 김기의 딸은 하직 인사를 하
던 채로 땅에 엎드려 있었고, 망연해진 첨지댁은 넋이 빠져서 그 옆에
다리 뻗고 주저앉아 있었다.
"이런 일 다시는 못하겠어요."
끝춘이가 길산을 따라 걸으면서 말하였다.
"낮 모를 행인의 보퉁이를 털구 말지 이 무슨 애잔한 노릇인가요?"
길산은 침통하게 대답하였다.
"어려운 일이구나, 원한이란 저렇듯 애매한 것이다. 알고 보면 티끌
보다두 하찮은 것이고, 작은 것이지. 나두 이전엔 그랬었다. 김선비
께서는 이제 완전히 구월산의 녹림당이 되었구나. 봉산에 함께 오길
잘했는걸."
그러나 끝춘이는 무슨 소리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길산은 또 말
하였다.
"원한 가지고는 안된다. 원한은 안되어. 마치 캄캄한 밤중에 코끝을
베는 것과도 같구나. 광명 천지에 태산을 무너뜨리는 것이 되어야 한
다. "
김기의 뒷모습이 보였다. 도포 자락이 바람에 한껏 부풀어 나부끼고
있었다. 산수원으로 향하는 길에 이르러 길산은 끝춘이에게 말하였
다.
"너는 먼저 돌아가거라, 우리는 봉산에서 볼일이 있으니."
"예, 그러잖아두 주막이 걱정되어 돌아가려던 참입니다. 구월산 가
실 적에 다시 들르셔요."
"그래, 네게 물어볼 것두 있구. 꼭 들러야겠다."
끝춘이는 산수원에서 그들과 헤어겼고 길산은 아까부터 아무 말이
없는 김기와 동행하였다. 남의 눈도 있고 하여 길산이 김기의 뒤에 하
인 모양 몇걸음 떨어져서 걸었다. 김기는 멈추더니 길산을 돌아다보았
다.
"왜 뒷전에 따라오시오?"
"당연하지요. 복색이 다르지 않습니까?"
"나두 갓을 벗어 던지고 도포두 벗겠소."
"아닙니다. 김 선비께서는 그런 차림을 하는 게 여러가지로 유리합니
다. 갓에 도포 차림이 제일 잘 맞지요. 억지로 무리하는 것은 무엇이
나 좋지 않습니다. 포졸의 눈을 속이기도 쉽지요. 우리 사이에 반상이
따로 없으니 새삼스레 짓지 마십시다. 지금 내가 선비님 뒤를 따르는
것은 남들의 유별난 눈길을 받지 말자는 외에 다른 뜻이 없소이다."
"내가 어디루 가는지 장두령은 아시오?"
"글쎄요... 나는 읍내에 가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되어서."
"우리 동접들을 무고하여 장형당하게 한 서가놈을 처치할 작정이
오."
길산은 싱긋 웃었다.
"실은 그 일이 남은 듯하여 끝춘이를 먼저 보냈지요. 아마 서가는
몸소 베이셔야 될 겝니다. 배신은 고사간에 가난한 벗들을 팔아 영달
한 자를 살려둘 수는 없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김기가 말하였다.
"삼 년이 지난 이제 와서 뒤늦게 포한을 풀고자 함이 아니라 대의를
스스로 세워 앞으로 바로 살아가겠다는 작심을 굳히기 위해서라오. 이
런 작심이 없이 내가 어찌 두령들 같은 녹림처사가 될 수 있겠소. 비
록 우리 부녀지간의 일은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여첨지에 대한
징치를 잊은 것은 아니외다.
그자의 횡포는 봉산 고을 일반 백성들게 널리 알려진 일이오. 아이들을
시켜서 그 집의 재물과 차용증서들을 탈취하게 할 작정이오. 그 일은
김기가 하는 게 아니라 활빈당이 하는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여식을 살려둔 명분도 없어지고 말겠지."
"내가 알아서 하리다. 헌데 서 선비라는 자는 어찌 징치하시려오?"
길산이 물으니 김기는 차갑게 내뱉었다.
"목을 베어야지요."
하고는 덧붙여 말하였다.
"먼저 그자를 잡아내어 끌고 갈 데가 있소이다. 동접들의 산소에 참
배를 시키고 그동안의 죄를 낱낱이 따져서 스스로 죄상을 알게 하고
나서 죽여야겠지. 그러고는 죽은 벗들의 넋과 천지와 더불어 그자의
죽음을 흠향케 해야지."
길산과 김기는 비로소 다시 만나는 듯하였다. 어느 한 사람의 평생
에도 태산 같은 세상의 바른 도리가 깃들여 있나니, 나라를 구하고 민
생을 건지는 일만큼 중대한 일이다. 더구나 백성들을 위하여 살겠다는
사람들끼리 바른 관계를 다져나가지 않고는, 애초부터 아무런 행적도
이를 수가 없으리라.
"봉노에 가지 말구 만동이네 집으루 가십시다."
길산이 제의하여 그들은 읍내의 만동이네 풀뭇간으로 찾아갔다. 만
동이네 풀뭇간은 듣던 대로 번창하여 있었고, 음통을 벗어부치고 풀무
질하던 번수 중에 김기의 얼굴을 아는 자가 나와서 반가이 맞았다. 그
자가 알려서 곧 구월산의 소두령 하나가 뛰어나왔다. 그는 길산을 보
자 곧 예를 올리며 반가워 하였다.
"관서에서 이제 돌아온 참입니다. 내일중에는 여기 성님을 모시구
산에 오를 작정이였지요."
"그래, 이번 잠채는 많이 하였나?"
"예, 은이 좀 나왔지요."
길산이 그와 수작하며 안으로 들어가는데,
"아이구, 성님이 언제 오셨습니까?"
하면서 천동이가 맨발로 뛰쳐내려왔다.
"그래 무고한가?"
"이게 몇년 만입니까. 소문도 없이 해서를 떠났다더니 이렇게 또한
슬그머니 나타나시다니요. 언니... 이리 나와 보우. 길산이 성님이
오셨수."
천동이가 안에다 대고 외치자, 비단 배자에 잔뜩 도주공의 풍채를
갖춘 만동이가 뛰쳐나왔다.
"아주 팔자가 피었네."
길산이 놀리듯 말하니 만동이가 뒤통수를 긁적거린다.
"다 구월산서 염려해준 덕분이올시다."
그들은 잠채를 오갈 때 구월산 장정들로 호송을 하던 중이었다. 모
두들 안으로 들어가 둘러맞아 시시둥한 장사 얘기로 한바탕 돌아갔다.
길산이 만동이를 한쪽으로 불러 은근히 말하였다.
"자네 손을 빌릴 일이 있는데..."
"무슨 일입니까. 성님이 시키기만 허시우."
"사람 하날 잡아와야겠어."
길산이 서좌수에 관하여 물으니 만동이는 너무나 소상히 알고 있었
다.
"시방은 도림골에다 일대 장원을 차려 살지요. 그깟 일이라면 여럿
이 나설 것두 없겠습니다. 천동이께 말해두지요. 그런데 잡아다가 몸
값을 받아낼려구 그러시우?"
"아니..."
길산은 손바닥을 제 목에 갖다 대어 보였다.
"허어, 그러면 천상 아무도 모르게 덮쳐서 끌어올밖에 없겠는걸."
"그럴 필요 없네. 산채 아이들을 시켜서 꾀어내두 되겠지."
"오늘이오?"
"오늘밤까지, 우리는 내일 산으로 올라가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헌데 저희 집에는 워낙에 눈들이 많아서 곤란합니다.
아예 목을 끊어가지구 오게 하지요."
"아니야, 꼭 살려서 잡아와야 허네. 그러니까 천동이더러 산으루 끌
구 오라구 하게."
반동이는 곧 천동이와 졸개를 불러 이러쿵저러쿵 저희들끼리 안을
내어 의논들을 하였다. 그들은 날이 저물 때까지 노닥거리며 운신할
기미가 없더니 저녁을 먹고 나자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정기와 길산은
둘이서만 도림골 뒷산으로 나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길산은 김기의 청에 따라 화주 한 병을 들었고, 김기는 마른 육포와 잔
으로 쓸 사발 두어 개를 지니고 있었다. 김기는 어둠속이나마 고향의
살던 마을 가까이 다가와 낯익은 바위와 나무와 길을 대하니 마음이
착잡하였다. 그는 눈물을 뿌리며 떠나던 동구 밖에 이르자 갑자기 길
산을 불렀다.
"장두령... 생명이 귀한 것이라구 생각허우?"
"귀하지요."
길산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을 귀히 여기지 못하는 자들의 생명은 귀하지가 않겠
지요.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하고 저 혼자만 잘살겠다는 자들의 생명
은 가치가 없지요."
"내가 평생을 배운 바로는 인명처럼 귀한 것이 없었건마는..."
"그런 자들을 없애버릴 제 우리는 굶어죽은 아이나 병들어 죽은 아
낙네, 맞아 죽은 종, 억눌린 채 헛살아버린 숱한 세월들을 생각해야
허우. 죽이지 않고 무엇이 얻어지며 창칼 없이 잃어버린 것들을 어찌
빼앗을 수 있겠소이까."
김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구월산 소두령에게 지시하였소. 그애들은 여첨지네 집을 털어
월당의 풀나루로 나올게요. 여첨지의 목을 치라구 하고 싶었으나 여식
을 생각하여 차마 그러지는 못하였소. 그러나 서가놈은 꼭 내 손으로
죽여야겠소이다."
"일에는 모두 구분이 있는 듯허우. 여식을 위하여 원수를 베이지 못
함과, 벗을 위하여 원수를 죽이는 일은 얼핏 공평하지 못한 듯하나 잘
고른 듯합니다. 우리가 남의 목숨을 빼앗는 짓은 어린아이가 벌레를
발로 뭉개버리듯 하는 게 아니지요.
사람의 정은 버릴 수도 없고, 또한 버려서도 안됩니다. 내가 김선비와
관계없이 여가를 들이쳤다면 죽였겠지요. 그러나 김선비는 그를 죽이지
못함이 마땅합니다. 대의를 내세워 처자를 베이는 일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명리를 위한 짓이지 사람의 짓이 아닙니다.
부자에게 재물이란 더러운 목숨과도 같은 것이니, 그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께 보시하는 것도 죽이는 일만큼의 징치가 되겠지요.
그렇지만 글을 읽고 세상의 도리를 아는 자의 죄는 더욱 용서할 수
없이 큰 듯합니다. 이런 일을 잘 분간하여 행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길산이 잔잔하게 이야기하니 김기는 스스로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내 이제껏 코끝의 일만을 생각하였더니, 언제나 가야 망상
이 걷히랴."
그들은 도림골의 뒷산에 올라 천동이 일행을 기다렸다. 초경
무렵이 되어 먼 곳에서 부엉이 울음소리 스산하고 비는 계속 뿌려졌
다. 주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 칠흑이었다. 이윽고 밑에서 인
기척 소리가 들리고,
"천동인가?"
하며 길산이 불러보니 곧 대답해왔다. 그들은 모두 셋이었는데 천동이
가 앞장을 섰고 둘은 희읍스름한 것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길산이 나
서면서 물었다.
"어찌 하였나?"
"말두 마시우. 들킬까보아 조마조마하면서 오는데 다행히 비 오는
날이라 행인이 없습디다. 입에다 재갈을 물리고 손발을 돼지 엮듯이
했지요."
등에 메고 오는 자들은 킬킬 웃었다.
"처음엔 요동을 치구 꿈틀거리길래 골통을 한대 쥐어박았더니, 이렇
듯 잠잠합니다."
"수고했다."
"관아에서 급히 좌수의 현신을 기다린다구 전하고서 나오는 걸 뒤쫓
다가 냉큼 업어 왔습니다."
"분명히 서좌수더냐?"
천동이가 대답하였다.
"그래서 내가 따라갔지요. 좌수놈이 분명합디다."
김기는 마음만 급하여 도림골 뒷산의 벗들이 묻힌 묘지를 찾느라고
이쪽 등성이로 올랐다가 저쪽으로 내려가고 하더니 드디어 찾아내었
다. 부슬비에 그들의 옷은 폭삭 젖어버렸고 길산의 머리는 봉두난발이
아니라 아예 두건 아래로 흘러내려 산발이 되었다.
"이리 내려놓게."
김기가 가만히 속삭였고 졸개들은 허연 물건을 내려놓았다. 그 안에
서 울뚝불뚝 움직이는 걸로 보아서 아마도 잡힌 자가 정신을 차린 모
양이었다. 김기가 칼을 뽑았다. 길산은 곁에 서고 천동이와 졸개들은
저희 손으로 붙들어 오긴 하였으나 거기 머물기가 꺼림칙한 모양이었
다.
"우린 그만 가볼라우."
"잠깐 있거라. 너희들 할 일이 있느니라."
길산이 그들을 머물게 하였고, 김기가 홑청을 칼로 주욱 찢었다. 그
는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서좌수인가를 확인하고 나서 조용히 말하였
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네 말처럼 역적의 동접 동무이던 김기다."
김기는 서좌수의 입에 물렸던 무명근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서좌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내가 굶어죽은 줄로 알았겠지. 동무들을 팔아 혼자서 영달하
였다는 것이 고작 시골 좌수냐. 여기가 어딘지나 아느냐. 관가에서 장
형에 못 이겨 죽어 나오던 날 그의 식솔들이 몸부림을 치면서 여기에
묻었다. 그리고 또한 저쪽 마을에는 다른 동무가 달포나 혈분을 내며
신고 끝에 죽어서 묻혀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봉산 고을 사람들도 모
두들 네놈의 뒤꼭지에 침을 뱉을 게다. 어째서 아무 말이 없느냐?"
"무슨 말을 하겠나..."
서좌수가 중얼거렸다.
"죽기 전에 네 속셈이나 털어놓아보아라. 너는 잊지 않았겠지, 둘이
서 동선방 외딴 암자에서 두 해나 함께 글을 읽었다. 그때에 우리는
어떤 약속을 하였더냐, 성현의 도를 입으로만 욀 것이 아니라,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학문하는 자의 길이 아니니, 차라리 무명의 선비로 죽
을지언정 그릇되게 입신하지 말자고 아니 하였더냐?"
서좌수가 문득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왜 웃느냐?"
"자네들이 내 가난에 대한 탄식에 그렇듯 야박하게 성을 내더니, 그
뒤 어찌하였던가. 자네는 자모전가에서 빛들을 내어 벼슬을 구하러 한
양가지 가지 않았는가. 일찍이 감영에 투서할 제 자네의 이름은 없어
서 빠졌으나, 나는 서명을 했었지.
그때에 이름이 올라 우리 동접들이 모두 잡혀갔을 제 나는 구명할
길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지. 자네가 나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걸세.
아마 더했을 게야. 나는 동무들을 모역죄로 발고해버리고 살아났지.
이미 우정도 선비로서의 처신도 모두 빼앗긴 내가 뭣하러 도리를
지키노라 헛고생할 것인가.
나는 자네들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네. 명리와 허울 좋은 선비의
아름다운 행실을 허심탄회하게 내던지고 작은 것에 족하기로 하였어.
그래서 나는 향소의 좌수를 자청한 것이네. 지금 같으면 이방을 못할까,
호방을 못할까.
지금 보아하니 자네는 무뢰배와 동류인 듯하니 무슨 대단한 서릿발로
나를 감히 베려는가."
김기는 참을성 있게 서좌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네 말은 옳다. 허나 그것은 허욕에 눈이 가리워졌던 그 예전의 김
기에게 하는 말이고, 이제 나는 세상을 버리고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
내가 너를 죽이려는 것은 첫째로 혈육 같은 동무들을 무고하여 죽인
죄를 갚자는 것이요,
둘째로 탐욕으로 관명을 얻어 고향의 백성들을 착취한 죄를 징치하려는
것이며 셋째로는 너 같은 자들이 쉽사리 악행을 저지르고도 버젓하게
잘산다는 전례가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서다.
이 김기는 너의 목숨을 벗들의 혼에 바치고 맹서하리라. 바른 도리가
떳떳하게 밝혀질 세상을 준비하기 위해서 나머지의 인생을 살아갈 것
이다."
김기는 칼을 쳐들었다. 그제서야 서좌수가 두 손이 묶인 채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살려주게."
김기가 차마 찌르거나 베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내게두 노부모와 처자식이 있네."
"식솔은 누구에게나 있지. 죽은 벗들에게도 헐벗은 식솔들이 있었
고, 너희 처자가 호강할 제 그들은 슬픔과 굶주림으로 고향을 떠났
다."
김기가 두어 발 다가서며 서좌수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제발..."
그러나 김기는 서좌수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기다란 비명소리가 들
렸다. 김기는 칼을 꽂은 채로 엉겁결에 서좌수의 몸을 떼밀었고, 그는
뒤로 나자빠졌다. 어둠 가운데서 허위적대는 그의 팔과 다리가 보였
다. 김기는 두 손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길산이 성큼 다가 들어 구부리더니 서좌수의 몸에서 칼을 뽑았고,
어떻게 하였는지 그의 잔명이 완전히 끊어진 듯하였다. 길산은 김기를
모른 체하고서 졸개들에게 말하였다.
"저 아래쪽에 구덩이를 파두어라."
김기는 초라한 무덤 앞에 술잔과 육포를 벌여 놓고는,
"칼 좀 주오."
하며 길산에게 청하였다. 길산은 미리 알고 있었으므로 김기를 위하여
그가 필요로 하였던 것의 상투 끝을 잡아서 주효의 곁에다 놓아
주었다. 김기는 얼이 나간 듯이 아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그리
고는 술잔 그득히 술을 부어놓고 삼배를 정중히 올리고 나서 엎드린
채로 중얼거렸다.
"뜻을 펴보지도 못한 채 간악한 자의 배신과 무고로 말미암아 분사
한 원혼은 이제 한을 풀고 고이 눈을 감으소서. 간인의 목을 베어 바침은
우리들의 우정에 대한 것만이 아니요, 자연의 밝은 덕을 본받아 가라지를
제거하여 곡식을 가꾸려는 이치와 같소이다.
간활한 자의 목을 베는 것은 또한 세상에 경계하여 이른바, 매가
화하여 비둘기가 되게 하고 사나운 범을 살쾡이가 되게 한다는 것과
같은 일이매 우리들의 통분스런 원한이 더욱 넓고 편편해지도록 해주소서.
벗들끼리의 원한을 갚는 일로 그치지 말고 이런 짓이 세상의 정의를
드러내는 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혼자 살아남은 나는 오늘밤의 일로 벗들과의 약속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요, 더욱 굳게 맺어졌으니 내 스스로 배신할 제 누가 나의 목을 베리까.
부디 그대들의 넋이 굽어살피사 신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행사하시고
구천에서도 중벌을 사양치 마소서."
말을 마치자 김기는 나직하게 곡을 터뜨렸다. 벗을 위하여 배신한
벗을 죽이고 엎드린 김기와 마음은 실로 처연하여, 수년간이나 쌓여왔
던 잘못 살아온 세상살이에의 회한이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이미 자정
무렵인지라 비 오는 밤의 야산에는 부엉이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길산이 서좌수의 목과 몸을 함께 수습하여 아래 편에다 암장하고 김기
와 더불어 술을 음복한 뒤에 그들은 만동이네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두 사람은 월당강을 건너 풀나루에 이르렀는데
나무리벌의 넓은 들을 가르고 지나는 강의 지류까지 내려가야 하였다.
마침 물이 불어서 물살이 세고 강변에는 물이 범람하여 있었다. 나루
를 지키는 안악의 군졸들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장사군들 틈에 섞여
있었다. 중화는 아직 멀었건만, 어제 맞은 비로 젖은 옷이 채 마를 사
이도 없이 비를 맞았으므로 어한이나 하느라고 길가의 동이술깨나 마
셨다.
나룻배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지류를 타고 비스듬히
대어졌고, 거기서 구월산 소두령 이하 졸개들 다섯이 장사꾼 차림새로
마바릿짐과 등짐들을 가지고 내려왔다. 서로 눈짓으로 안 체를 하고서
그들은 앞뒤로 멀찍이 떨어져서 월호산 봉수대까지 진흙길을 걸었다.
"구월산으로 갈 거요?"
김기가 물으니 길산은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었다.
"나와 함께 내려왔으나 김선비께서는 먼저 오르시렵니까?"
"아니 좋을 대루 허우."
"그렇다면 나허구 구월산 인근 사읍의 촌가나 둘러 보십시다."
으슥한 산길에 와서 김기, 길산은 소두령 일행과 합하여 둘러앉았
다. 김기는 아무 말이 없고 길산이 물었다.
"그래 일은 잘해낸 모양이군..."
소두령이 피로한 기색으로 충혈된 눈을 비비며 말하였다.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은 사람을 상하지 않도록 하면서 화적질하는
노릇입디다. 천상 임집털이처럼 은밀히 숨어들어 야반에 자는 사람들
을 덮칠 수밖에 없었지요. 그 통에 저희는 밤새껏 비를 맞으며 한숨도
못 잤습니다."
"안채도 건드렸는가?"
"예, 아무리 뒤져도 큰 재물이 없기에 부득이 거기가지 집뒤짐을 했
습니다."
김기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졸개가 나서며 말하였다.
"그 댁 며느리는 참으로 담대한 계집입디다. 저희들이 혼이 났습죠.
돈을 뒤지네 피륙을 꺼내네 하였더니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께 내어줄
지언정 화적당에게는 줄 수 없다고 한사코 발악입디다."
"보통 때 같았으면 단칼이나 단매로 치워버렸을 것을 두령님의 분부
를 생각하여 꾹 눌러 참았지요. 그래서 제가 차용증서와 어음이나 그
런 것들을 찾으니 왜 그러냐구 하더군요. 빛진 자들을 위하여 태워 없
애련다고 하였더니 그제사 기쁜 낯이 되어 숨겨진 농짝 속을 들추어
가르쳐줍디다."
길산이 김기의 안색을 넌지시 살피니 김기는 표정이 굳어져 입은 국
다물었으되 눈시울이 이리저리 씰룩이고 있었다. 길산이 또 물었다.
"여첨지라는 자는 어찌하였는가?"
"몹시 인색한 놈입디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 사족을 못 쓰고 엎드려
서도 무슨 물건이든 우리의 거친 손길에 닿기만 하면 어이구 그건 어
디의 어느 물건인데 값이 얼마요, 또는 제발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으
니 증서만을 돌려주오, 그러고는 제 코앞에서 그것들을 태우자 그만
흔절하여버립디다."
"죽지는 않았겠지..."
"모르지요. 안색이 퍼렇게 되어 쓰러지더니 손발을 부들부들 떠는데
아녀자들을 불러 간병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떠나도록 깨어나
지 못합디다. 저희끼리 하는 얘기가 머리로 피가 몰렸다는데 아마 늙
은이들 잘 일으키는 풍이 들어간 모양입디다.
나올 제 그 집 젊은주인되는 자의 태도가 정대하여 우리두 관군의
추적을 그리 염려하지는 않았습니다. 묶인 채로 말하더군요. 자기네
가진 농지가 제법 광활하여 요식에 부족함이 없으니 자모전을 놓지도
않으려니와 다시 들이칠 생각을 말라구요."
길산은 쾌한 얼굴로 그자들의 말을 들으며 일변 김기를 돌아보곤 하
였다. 그리고는 지시하기를,
"너희는 앞서서 안악의 말득이네 주점에 가 있거라. 그리구 거기에
짐을 풀고 먼저 산채로 돌아가두 좋다."
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마두령께는 어찌 아뢸까요?"
"마두령과 오두령은 얼마 동안 산채를 비울 게다. 내가 며칠 사이로
곧 올라가지."
얘기가 끝나 그들은 앞서서 월호산 기슭을 지나 배고개 아래쪽의 말
득이네 주막으로 나아가고 길산과 김기는 산촌을 찾아서 과객질을 하
며 사나흘 돌아보기로 하였다. 이번 일이란 길산의 의중으로 김기를
구월산의 참 모사로 되게 하려는 뜻이 있었으니 동지를 얻는 일
이란 천하를 얻는 일만큼 무겁고도 귀한 일이었다.
김기는 갑송이가 떠난 다음에 비워졌던 허전한 마음에 수많은 민생을
담게 될 터이었다.
3
후선방의 용두원 원사를 사이에 둔 천불사 주지의 사삿집에는 밤이
이슥하였건만 전 부치는 냄새, 그릇 씻는 소리로 제법 소란하였다. 방
안에는 주지와 몇사람의 사내가 둘러앉아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평복 차림이었건만 그중에 기골이 떡 벌어지고 눈매가 사납게 생긴 구
군복 차림의 군관 하나가 동석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음식이 날라 들여질 적마다 말을 멈추었다가는 다시 조심스럽게
계속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밀담을 나누는 것 같았다. 군관 곁에는 갓
쓰고 도포 입은 자가 둘이 마주보고 앉았는데 주지는 주인이면서 말석에
앉아 있었다.
"어서 얘기를 계속하오. 용두원 사찰 장토의 마름들이 도적들이라면
어째서 여태껏 발고치 않고 내버려두었단 말이오."
군관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주지는 얼른 말을 내지 못하고 대신에
갓 쓴 자가 말을 거내었다.
"장토를 운영 해나가려면 여간 수완으로 곤란할 뿐 아니라, 우리 관
내에서도 대사의 부조에 의하여 관아의 급한 결손을 메꾼 것이 한두
번이 아니외다. 이제까지는 잘해 나왔으나, 돌연 그놈들이 뛰어들어
장토 관리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인근 산골로 나다니며 버젓이 화적질
까지 한답니다."
또 한 갓 쓴 자가 덧붙였다.
"소문에 의하면 저쪽 달마산에도 근년에 화적패가 웅거하였다는데
같은 패거리라고도 합디다. 이쪽 불타산 놈들을 토벌해놓지 않으면 나
중에 무슨 후환이 될지 모르지요. 대사가 우리에게 아뢰기로 하고 우
선 별장 어른과 의논하려는 것이외다."
별장은 대답하였다.
"이방, 별장의 말을 듣고 우선 탐문해 보려고 내가 왔은즉, 대사는
나라를 위하여 도적들을 토멸시키는 데 앞장을 서시오. 산채의 내막을
소상히 듣고 나서 진군과 군병 휘동하여 한놈도 남김없이 잡아
냅시다. 그렇게만 되면 대사도 도적들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를 풀게 될
것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대사는 미닫이를 열고 설렁줄을 당겼다.
"실은 이번 거병시에 곡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현신을 시키지
요. "
관리들은 놀라고 의아하여 서로 눈짓을 교환하였다. 전갈을 받은 하
인이 물러가고 나서 뜰 안으로 사람의 자취가 나타나는데 계집이었다.
계집은 수수한 무명옷에 첫눈으로도 대수롭지 않아 보였으나 인사할
제 방안의 불빛으로 드러난 자태가 제법 요염하였다.
"문안드리오."
하면서 살짝 아미를 들어 방안의 사람들을 살피자 그 눈매는 더욱 색
기가 있어 보였다. 이방이 먼저 말하였다.
"아낙에게 동석하자는 것은 예가 아니다만, 워낙 우리 일이 중하고
보니 기밀을 지킴이 먼저인지라 안으로 들어와서 아룀이 어떠할고?"
"그렇지만..."
계집은 한 손을 쳐들어 입가에 가져가면서 수줍은 양을 하였고 별장
이 자못 음침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서 안으로 들라. 예를 따지는 자리가 아니니라."
"얘, 괜찮다. 안으로 들어와 아뢰어라."
대사가 덧붙여 권하여 계집은 수줍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치마를
잡고 방안으로 들어와 윗목에 현신하였다.
"그래 네가 도둑의 소굴로 길안내를 서겠다니, 너는 어디 사는 누구
이며, 어찌 그곳을 아느냐?"
궁금증을 참지 못한 별장이 대사의 소개가 있기도 전에 물었고, 계
집은 더이상 머뭇거리지도 않고서 또라지게 대답하였다.
"예, 저는 본시 탑벌 두내리에 살던 양민이올시다. 일찍이 상부를
하고 나서 살 길이 없더니 장연 장터에 나가 행상을 하였지요. 연전에
오라비를 따라서 도적당에 입당하였습니다."
계집은 돌연 눈물을 닦으려는 듯 마른 얼굴을 감추고 옷고름으로 찍
어내는 시늉을 하였다. 대사가 곁에서 말을 거들었다.
"전에 심백이라는 가승이 저희를 핍박하고 갖은 악행을 저지
르던 중에, 허초봉이란 조니포의 잠상놈이 당을 모아 불타산 자리를
빼앗았지요. 헌데 이는 바로 그 허가놈의 내자나 다름없는 여자입지
요."
"사실 그렇다면 네 서방을 발고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계집은 연신 어깨를 들먹이며 우는 흉내를 내었다.
"제가 도적들의 싸움에서 오라비까지 잃고, 이 천한 몸을 의탁할 데
가 없더니 허가와 부부의 악연을 맺구 말았습니다. 그동안 수적들도
무시로 드나들고 달마산 패거리가지 이러쿵저러쿵 산채를 두고 말들이
많은데, 벌이는 신통치 않아서 겨우 밥술이나 먹구 지냈지요. 그런 판
에 이제는 불타산을 폐하고 달마 산으로 들어간다니 그 고생이야 겪지
않아두 훤하옵니다. "
"잠깐... 달마산 산채에 대하여도 잘 아느냐?"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거기 살았으니까..."
별장의 물음에 천불사 주지가 대꾸하였고, 말을 끊었던 계집이 다시
종알거려 얘기를 계속하였다.
"몸을 빼쳐 나오려 하여도 혼잣몸이 오갈 데가 없고, 장연에 있다가
는 되잡혀 올라가 반죽음이 될 것이라 죽지 못해 살구 있었지요. 다행
히 대사님께서 저를 거 두어주셔서 용기를 내어 발고를 하려는 게올시
다."
관리들은 서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계집의 얘기를 들었다. 별장이 술
상을 탁 치면서 말하였다.
"좋소, 까짓 내응이 있는 터에 뭘 망설이겠소. 이미 공은 따놓은 것
이나 다름없소이다. 내 수하 군사 십여 명만 데리고 가도 섬멸할 수가
있소이다. 불타산 토벌이 끝나면 까짓 달마산은 저절로 손안에 들어오
겠지."
이방이 곁에서 달싹거리며 말하였다.
"사또께 먼저 아뢰고 별장은 첨사게 아뢰시오. 이번 일은 백성들도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하십시다. 그리고 토벌이 끝난 다음에는
감영에 장계하여 장연 고을의 선정현치를 알려얍지요."
"하여튼 대사의 공이 크오. 우리는 이만 일어서 겠소이다. 내일밤에
다시 와서 상세히 의논하기로 하고 이번 달 안으로 들이칠 날짜를 잡
읍시다."
별장과 고을 관리들이 일어났고 주지는 그들을 안마당에서 배웅하였
다. 혹은 문간으로 몰려나가면 누군가의 눈에 띄겠기 때문이었다. 주
지가 방에 돌아오니 계집은 아무 거리낌 없이 질펀히_앉라서 자작 술
을 따라 마시는 중이었다. 주지가 껄껄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계집
을 뒤에서 껴안았다.
"이제는 고만이와 내가 살 길이 열렸구나."
"그러게 생불이 되려면 내 말을 잘들어야 한다구..."
계집은 술을 홀짝 들이마시고 안주를 집었다.
"온 징그럽게 치근덕거리기는, 저리 좀 비켜요."
"고만아, 오늘도 산에 올라가기는 영 글렀으니 이부자리나 펴라."
주지는 여전히 뒤로부터 고만이를 껴안고 한 손은 젖가슴에 다른 한
손으로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쳇, 나 기가 맥혀 ! 온통 도가 고것으로만 통했는가베. 이거
못놔?"
하더니 고만이는 손을 돌려서 서슴지 않고 주지의 다리를 힘껏 쥐어
비틀었다. 호되게 엄살을 부리면서 뒤로 벌렁 자빠지는 주지를 곁눈질
로 돌아보는 고만이의 시선은 냉혹해 보였다.
"괜히 섣부르게 주인 행세 하지 말어. 내 입방아 잘못 놀리면 대사
구 목탁이구 꿈꾸는 사이에 골루 가는 게야."
야무지게 중얼거리는 고만이를 주지가 잠깐 멍하니 바라보았고, 고
만이는 술을 따라 그 입술에 대어주었다.
"자 마셔 생불님..."
주지는 엉겁결에 꿀걱이며 마시는데 고만이가 그 삭발한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머리 한번 잘생기셨어. 이러니 내가 생불님이라면 사족이 노골노골
하지."
"얘, 제발 얼 좀 빼놓지 마라."
고만이가 뭐라고 말을 계속하려는 주지의 입에다 전 조각을 물려버
렸다.
"내가 들어앉기 전에 저년들 피 토하구 쓰러지는 꼴들 보기 싫으면
어서 내보내라구요."
"차마 인정이 그럴 수 있겠느냐."
"흥, 나를 셋쨋집으루 들어앉힐 생각이겠지만 그냥 안 놔둘 테야."
고만이는 연거푸 술을 들고는 양볼이 발그레해지고 눈이 가물가물해
지는 것이었다. 고만이가 첫봉이로부터 지레 물려버린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는 산채의 형세가 좁아서 벌이가 신통치 않은 점이었다.
벌이가 좋지 않은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으나 우선 장연 읍치의
배꼽이라 할 중앙에 우뚝 솟은 불타산하고도 잘 알려진 천불사 부근이라서
함부로 집털이나 노상 약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용두원의 마름직만 바라다가는 가을까지 별로 할 일이 없어
고기맛을 보려면 노루 사냥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고만이가 불평이 끝
까지 치달았던 때는 바로 우대용이네 식구들이 더부살이를 했던 무렵
이었다. 그들이 재물을 내가고 들여올 적마다 인사조로 몇가지의 짐을
내주기는 하였으나 실로 별의별 진물들이 많던 것이었다.
고만이는 그때에 우대용에게도 몇번 후리는 추파를 던져 보았으나 우
대용이란 자는 아예 거기에 바윗덩이가 달렸는지 꿈쩍도 않는 벽창호
였다. 수적들이 산채를 관서로 옮겨가자 불타산은 흥청대던 분위기도
가시고 갑자기 적막해졌다.
둘째로는 고만이와 허두령의 아우 둘봉이의 불화였다. 둘봉이는
백운산에서 제 형이 고만이와 배가 맞았을 적에도 몹시 창피하게
여겼고, 더욱이 불타산에 자리를 잡은 뒤에 그들이 완전히 부부 행세를
하는 꼴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둘봉이는 고만이를 한번도
형수 대접 한 일이 없었다.
언젠가는 첫봉이가 달마산으로 출타했을 적에 고만이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퍼부은 일도 있었다. 물론 취중의 주정 비슷은 하였으나
기실 그것이 둘봉이의 속마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셋째로는 장래라고는 전혀 없는 생활이었다. 달마산에서는
언제 산채를 폐하고 입산하랄지 몰랐다. 진작부터 달마산 두령 강선흥이는
불타산이 별로 유리한 곳이 아니며 형세가 궁하여 몰리면 꼼짝없이
관군에게 당하리라 믿고서 첫봉이에게 달마산 입산을 자꾸 권유하였다.
고만이의 생각으로는 만약 달마산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와 첫봉이와의
관계는 여지없이 깨어질 것이 눈앞에 훤히 보였다. 선흥이는 둘봉이보다
더욱 고만이를 마뜩찮게 여기고 있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근래에 와서 첫봉이는 달마산출입이 잦았고 은근히 고만이를 멀리하는
듯한 기색이 보였다. 벌써 두 달째나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 고만이는
초조할밖에 없었다.
졸개들끼리의 숙덕공론에 의하면 그들은 곧 달마 산으로 옮겨 가고 수
확철에만 용두원으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네댓 명을
거느린 소두령이 불타산에 남는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근년 들
어서 해서에는 녹림당들이 곳곳에 일어났고 감영에서도 골치를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가까운 시일 안으로 각 고을마다에서 장정과 포도 군사들을 동원하여
차례차례 토벌이 시작되리라고도 하였다. 고만이는 고기가 역류를 타고
뛰어오르듯 거친 장바닥과 무뢰배들의 사이를 헤치고, 오직 나긋나긋한
허릿짓과 음탕한 눈웃음을 밑천으로 살아온 여자였다. 고만이는 한시바삐
태도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녀는 드디어 첫봉이와 갈라서기로 작정하였고, 갈라서되 빈손으로
장연 저자의 들병 술장수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오냐,
기왕지사 버려질 몸이니 내가 모질게 먼저 버려주마. 고만이는
첫봉이를 팔아넘길 마음을 먹었다. 문득 겁 많고 탐욕스러운 용두원
원주 불타산 주지인 늙은 중놈이 떠올랐다.
그는 심백이네 대신 들어선 첫봉이네게로 꼬박꼬박 관리전을 냈다.
관가에 찔러박을 생각은 늘 가득 차 있겠지만 후환이 무서워서
옴쭉달싹을 못하였다. 고만이는 스스로 쓴웃음을 짓고 탄식하였다.
계집이 그릇되다 보니 드디어 중놈의 셋째 첩이 되려나 보다 하였다.
너른 장토가 있으니 아무도 파내어가거나 빼앗아갈 염려도 없었다.
이제 나이도 차차들면 어느 놈이 거들떠보기나 하랴 싶었다. 고만이는
첫봉이가 출타한 어느날 곱게 단장을 하고서 탑벌에나 갔다 오겠다며
산채를 빠져나왔다. 그 길로 고만이는 용두원을 찾았던 것이다.
주지는 고만이의 말을 듣고 벌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만이는 늙은 중을 후려서 그날 밤 끌어안고 정을 통한 뒤 제 주장대로
실행하도록 윽박질렀다. 주지는 완전히 고만이의 손안에 들어왔던
것이다. 고만이는 첫봉이에 대한 증오가 더욱 터져나왔다. 고만이는
후환거리인 불타산 산채를 싹 쓸어버리고 달마산까지도 소탕이 되면
주지를 한 손에 쥐고 실상 용두원 안마님이 될 셈이었다.
주지에게는 가끔 허리를 받쳐주고 틈틈이 젊은 장정들과 살 붙이
는 재미도 보면서 나이를 먹어갈 것이었다. 떡도 해 먹고 엿도 고아
먹고, 술도 빚어 먹고, 꽃놀이도 다니고 뱃놀이도 다니고 도방에 나들
이도 나가보고, 그런 호강이 어디 있으랴 싶었다.
되도 않은 화적 와주의 마누라가 되고 보니 호강은커녕 음습한
산골짝에서 날이면 날마다 하품에 기지개밖엔 할 노릇이 없고,
무엇보다도 심사가 불안하여 밖에 무슨 소리만 들려도 정탐군인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는 하던 것이다.
"어서 자리에 들자꾸나."
곁에서 주지가 치근덕거리니 고만이는 눈을 곱게 흘겨 주지를 후리
면서 슬며시 치마를 무릎 위로 들쳐 보였다.
무릎과 허벅지가 드러나자 주지가 더 참지 못하고 움켜쥐면서 사뭇
애걸조인데 이미 눈가는 흐물흐물 짓물러져 탐심이 탱천하는 참이었
다.
"홍 나 이외에도 계집이 둘씩이나 되는데 정 생각이 나면 건너가시
구랴. 나는 별로이 생각이 없수."
하면서 슬그머니 요 위에 자빠지는데 그 비스듬히 꼰 다리며 저고리
사이로 살짝 매져나온 젖가슴에 주지는 눈이 뒤집히는 양이었다. 혹
불어서 등잔을 끄고 주지는 옷을 벗어 팽개치며 잠시 고만이의 몸을
내려다보았고, 고만이는 저고리를 벗고는 스스로 치마를 걷어붙였다.
달이 만정하여 방 가운데 비치는지라 고만이가 젖힌 치마 아래
하체를 드러냈는데 바야흐로 뜨거워서 풍만하고 팽팽한 살이 닿으면
녹을 듯 한 번 보매 정신이 아찔하고 두 번 보매 혼백이 꺼질 지경이
었다.
고만이가 음사에는 그 어느 년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데다 이제부터 주지의 얼을 쑥 빼내어 용두원의 실권을 장악하려 할
즈음이라 속으로 생각하기를 행방의 표리가 각기 다름을 보여
주어야 유리하겠다 싶었던 것이다.
"나 좀 살려다우..."
간신히 더듬거리며 열에 들떠서 고만이의 위로 엎어지니 고만이는
몸을 잽싸게 비틀며 다리로 주지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주지가 다시
허겁지겁 달려드니 고만이는 다리를 잔뜩 오므리고 모로 돌아누웠다.
주지는 빳빳해진 양물로 고만이의 둔부를 눌러대면서 연신 살려달라는
말이었는데 고만이는 음기를 가득 실어서,
"어서 벗겨주오."
속삭이니 주지가 다시 분심을 일으켜 벌떡 일어나 고만이의 다리께에
걸터앉아 위로 젖혀진 치마며 고쟁이를 벗기려 드니 다리를 오므린데
다 치마몰이 단단한 옭매듭이라 벗겨지질 않는다.
일찍이 주지란 놈이 아무리 계집을 둘씩이나 원사 근처에 두고 탐색
을 하는 처지지만 두 여인이 모두 시골의 양가 과부들이라 행방술이
따로 없어 서로 끌어안으면 말뚝이나 고작해야 뻣뻣한 죽은 고기 정도
인데, 고만이의 하는 짓거리는 펄떡이며 살아 꿈틀거리는 장어와 한가
지였다.
드디어 고만이가 완전한 나신으로 다리를 열어주니 중놈은 얼른
넣기만 바빠서 고만이의 아래께에 겨냥하고 힘을 주었으나 요리로
비틀 저리로 배틀하여 허무하게 요 위에다 박치기만 시키는 것이었다.
주지가 안타까워 입에 침이 마르고, 소리는 목구멍을 채 넘지 못하는
데 고만이는 슬쩍 허리를 들어 용납하여 주었고, 주지가 그제사 남의
몸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는 갑작스런 포만감으로 으흐흐 하면서 푹 잠
겨버리는데 아뿔싸, 그만 실정하여 꽁무니의 근력을 놓치고 만다. 이
런 망신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온몸이 녹적지근하여 퍼져 있으려
니, 고만이가 샐쭉하여 정 없는 손으로 밀쳐내며 빠져나가버렸다.
"흥, 공연히 깎은 독두만 장대하고 그것은 초봄의 고드름 아녀?"
쫑알거리지만 주지는 은근히 열쩍어서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을 이기
지 못하여 얼굴에 홍조가 오르고 수족이 떨리며, 그 초조한 행사는 마
치 말잠자리가 물을 차는 듯이 바쁜 태깔인지라 행방에 죽을 쑨 것이
었다.
고만이가 원래 그럴 기미를 알고 기를 죽여놓자는 짓이니 어찌 뉘를
원망하랴. 스스로 뒤늦은 색욕이 발동하여 이제는 달려들어 엎드린
주지의 허리를 안고 제가 뒤에서 이리저리 비벼대었다.
주지가 고만이를 감당하려고 돌아누우니 입을 맞추고 혓바닥을 물며
발가락으로 곰실곰실 주지의 사타구니 주위를 어루만졌다. 어느덧 양물이
부풀어 하늘로 치키게 되자 고만이가 발랑 뒤집어지면서 통나무를 얼싸안듯
주지의 몸을 얽고는 한다는 소리가,
"외눈박이를 죽입시다!"
였다. 드디어 합환이 되었는데, 고만히가 허리를 상하 좌우로 틀고 두
손으로는 주지의 겨드랑이에서 옆구리까지 살근살근 어루만지며 허리
뼈를 받쳐주기도 하고, 또한 손바닥을 펴서 구르는 일을 도와주느라
주지의 궁둥이를 꽉 눌러대니 주지는 그 행방술에 마치 열반이 이미
가까운 듯하였다.
고만이의 행방술에 이미 고기 맛을 보아 천하의 외입쟁이로 여겨오
던 주지는 완전히 사지가 녹아버렸다. 부처고 석가고 모두 귀찮아 이
대로 고만이의 몸과 더불어 열반에 상주하고 싶은 것이었다. 주지가
아직도 색에 젖어 후줄근히 늘어져 있는데 고만이가 슬슬 그의 사타구
니를 쓸어주며 종알거렸다.
"어떡헐 거야. 불타산이 말끔해지면 저년들을 모두 쫓아낼 거야?
안 그러면 감영으로 달려가 관찰사에게 직소한다고... 승려가 도적들
과 내통하고 관리와 결탁하여 양민들을 괴롭힌다고 한마디하면 당장에
참수형을 받겠지."
주지는 만정이 떨어지는 소리에 소스라쳤다.
"어이구 이거 홍시 먹다가 이 빠지겠구나! 설마하니 네가 나를 그
렇게 할 수 있겠느냐. 닭이 천이면 봉이 한 마리라는데 다른 년들은
진작부터 닭은커녕 참새도 못 되는데 봉 하나만 품에 들어도 불감당이
고 선경이 적실하다. 저런 년들과 오래 몸을 섞지 않아 좀이 쑤실 지
경이더니 이제사 네가 내 때를 싹 벗기는구나. 대번에 신발을 거구로
신겨서 행방도 못하는 년들을 쫓아내리라."
고만이는 그제서야 주지의 겨드랑이 밑으로 파고들며 아랫배를 싹싹
붙여서 비벼대었다.
"아무렴 그렇지. 보살 많은 절의 화상 성불할 날 없다더니 이제사
내 지성을 입어 득도하시겠구랴."
그리하여 고만이와 용두원 불타산의 주인인 주지승과의 결탁이 이루
어졌던 것이다.
이튿날 그들은 남의 눈에 띌까 하여 우선 은밀히 읍내로 나가 별장
이며 하리들과 모의하여 손발을 맞춰놓은 다음에 고만이는 황급히 창
암골의 불타산 천년암으로 돌아갔다. 첫봉이는 며칠이 지나서야 천년
암 산채로 돌아왔다.
거병하기로 모의된 날 별장은 군졸 이십여 인에 변복을 시켜서 곁에
는 주지가 붙여준 길 안내인을 이끌고서 사슴 사냥이라도 나가는 행색
으로 불타산에 들어섰다.
그들은 실지로 사슴 사냥을 하면서 불타산의 동편으로 접근해 올라
갔다. 마침 산봉우리 하나만 넘으면 불타산성의 옛터였으니 거기서 날
이 어둡기만을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우선 군졸 하나가 등성이에 올라 정탐하고 돌아와 붉은 치맛자락이
천년암 곁의 나뭇가지에 걸려서 펄럭이더란 얘기를 했다. 그것은 즉
아무 때나 밀고 들어와도 된다는 군호였던 것이다.
첫봉이도 둘봉이도 그밖에 졸개들도 관군이 밀어닥친 것을 알지 못
하고 망보기조차 세우지 않았다는 군호였다. 관군은 지체하지 않고 봉
우리를 넘어서 산채로 다가들었다.
관군은 미리 고만이로부터 천년암 부근의 지세와 허실을 샅샅이 들
었던 터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탈출로가 될 수 있는 불타산의 동쪽
연봉인 백운산으로 잇닿는 목감원 부근을 미리 끊어놓았다.
별장은 도적을 잡아 가자 받을 일에 몰두하여 현감에게는 호언
장담하며 감영에의 장계를 미루었다. 원래 같은 적당으로서 도적을 잡
는 데 공을 세우면 면죄하고 은 백여 냥을 지급하는 것이니 고만이가
그에 해당되나 얌전하게 사양하였다. 이는 목감원의 안마님이 그녀의
원래 소망이었던 탓이었다.
별장이 지시하여 관군의 반수는 천년암을 마주 바라볼 수 있는
맞은편 등성이에 오르기 위하여 골짜기로 내려갔고, 반수는 그대로
암자와 귀틀집들이 자리잡은 불타산성의 유지 후면으로 내려갔다.
차츰 날이 저물기 시작하여 어둠침침한 그늘이 창암골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산채에서 저녁을 먹을 참이라 가장 방심할
무렵이었다.
고만이는 평소와는 달리 곱게 단장하고 산채의 아낙네들과 더불어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골짜기 건너편의 맞은편
등성이를 내다보곤 하였다. 이윽고 여러 점의 불빛들이 어둠 가운데
반짝이는 것이 보였으니, 오십여 보 밖의 숲속에 매복한 진의 포수들
이 부시를 쳐서 신호한 것이었다.
고만이가 태연자약하게 아궁이에서 조약돌 만한 숯덩이를 부젓갈로
집어내어 슬쩍 치마 뒤에 가리우고 나와서는 빈터에 높다랗게 쌓아둔
땔나무 더미로 다가갔다. 그녀는 솔잎을 수북이 긁어 잔솔가지 밑에
깊고 우묵한 구멍을 만든 뒤에 그 안에다 숯덩이를 던져넣었다.
살살 타들어가는지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고만이는 지체 않고 그곳을 떠나 겉모양만 암자인 천년암의 두령
방으로 들어섰다. 둘봉이는 아래채에 살고 있었으니 이 집은 고만이와
첫봉이의 살림집이었다. 첫봉이는 방금 낮술에서 깨어나 저녁밥을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요즘 들어 그는 술을 먹고 소일하거나 장연
읍내의 색주가를 출입하는 적이 많았다.
첫봉이는 언제부터인가 예전에 조니포에서 가족과 더불어 오순도순
살면서 잠상질로나마 편히 밥 먹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양이었다.
고만이가 활짝 웃으며 들어섰건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팔베개를
하고서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배고프지요. 저녁밥 다 되었수."
하였으나 첫봉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고만이는 다시 아양을 부리는
데,
"낮술에 아직두 곤한 모양이구려. 팔다리 좀 주물러 드릴가요?"
첫봉이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고만이는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하
였다.
"여보게, 아무래두 달마산으루 옮겨야겠어. 산채의 형세가 이렇게
궁박해서야 까짓 숨어살 바에 이게 무슨 꼴인가."
고만이는 그깟 말은 이제 들으나마나 옆으로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정 그러시면 마음대루 하셔요."
첫봉이는 의외라는 얼굴로 고만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구 말이지... 내 주지에게 말하여 돈을 좀 우려낼 테니, 자네
는 탑벌에 알뜰한 초가라두 한채 장만하여 내려가 있게. 달마산에 선
흥이가 혼자인데 내가 버젓이 산채 살림을 할수야 있나."
첫봉이는 고만이의 순순한 응답에 내쳐 의견을 내었는데 역시 침묵
을 지키는 꼴이 그에 따르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래서 한밑천을 잡으면 나두 녹림당에서 발을 뽑으려네. 둘이서
아무두 모르는 고장에 가서 버젓하게 밝은 세상을 살며 부부해로하면
좋지 않어?"
하마터면 고만이는 그게 진심이냐고 물을 뻔하였다. 그래서는 그의
손목을 쥐고 목전에 어떤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알려주고도 싶었다.
하나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고만이는 스스로 생각을 다지기를 이제
와서 자기를 버리려고 갖은 감언을 다 꾸며댄다고 여기기로 하였다.
고만이는 복잡한 생각으로 괴로워하며 대답 않고 첫봉이의 다리만을
주물렀다. 처음엔 매캐한 청솔 타는 냄새가 산간의 저녁에는 으레 있
는 일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이윽고 화광이 크게 일어나 창문이 벌겋게 물들었을 때, 밖에서
불이야!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첫봉이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암자를 노리던 포수들이 그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연이은 방포 소리 서너 방이 한꺼번에 들렸고, 잇달아서 총성이
계속되었다. 탄환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들이 날카로웠다. 고만이는
방바닥에 납죽 엎드려 있었다. 열어젖혀진 암자의 마당에는 총에 맞은
첫봉이가 피를 흘리며 넘어져 있었고, 귀틀집과 바위굴에서 뛰쳐나왔던
장정 몇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게 보였다.
산채의 한가운데에 붙은 불기등은 마치 쥐구멍을 비추는 횃불과도
같았다. 고만이는 첫봉이가 아직 죽지않은 것을 보았다. 그는 일어날
기운이 없는지 두 팔로 몇번이나 긁어대어 앞으로 기어나갔다.
한 댓 발짝쯤 기었을까, 기운이 다하였는지 첫봉이의 몸이 땅 위에
털썩 늘어지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고만이는 그런 꼴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젖고 목구멍이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고만이는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씻으면서 흥, 코웃음을
날렸다.
"잘 뒈졌다. 아이 잘코사니야."
산채의 혈당들은 탄환이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를 알고는 빈터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화광 안으로 몸을 드러내면 쏘아달라고 스스로 표적을
자청함과 다름이 없었다. 둘봉이는 아직은 제 형이 이미 사살당한 것
을 몰랐다. 그는 총성이 들릴 때 집 바깥으로 뛰어나가려다가 불리함
을 알고 뒤편의 들창으로 빠져나갔던 것이었다.
둘봉이처럼 뒤로 빠져나온 자들이 제법 되었으니, 열댓 명의 혈당들
중에 대략 네댓이 상하고 죽은 듯하였다. 제각기 경황중에도 산림처사답게
환도와 몽둥이를 가지고 있었다. 둘봉이는 비좁은 골짜기를 건너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적이 어떤 자들인 지도 알지 못하고, 몇이나 되는지도 모르는 일이라
우선은 건너편 산등성이의 포수들을 해치워야만 하였다.
둘봉이는 산채에서 그중 날래고 병장기개나 휘두르는 자들을 지목하
여, 집들의 뒤편으로부터 화광이 미치지 않는 숲 그늘까지 단숨에 달
릴 셈이었다. 그리고는 눈짐작의 방향을 목표로 뒤에서 덮칠 판이었
다. 지세에 밝은 것은 이쪽이니 수가 적더라도 일단 어두운 숲속에서
는 승산이 있을 듯하였다.
"총포에는 단병접전이 상수다. 어서 나가자."
둘봉이가 앞장서서 빈터를 빠져나가는데, 어쩌랴... 벌써부터 관
군은 양편을 둘러싸고 장창과 칼을 부르쥐고 기다리던 터였다. 한 오
는 산채의 오른편으로 짓쳐들어오고, 다른편에서는 달려 지나가는 둘
봉이 일행의 배후를 급습하였다.
관군은 비록 평복 차림이었으나 머리에 붉은 천을 묶어 표를 하고
있어 피아를 알아보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무턱대고 붉은 헝겊이 없
는 자들은 도륙을 할 모양이었다. 일단의 장정들이 달려오자 관군들은
기다렸다가 옆에서 창으로 찌르고 뒤에서 칼로 베었다.
돌아볼 틈도 없이 둘봉이 일행이 죽어 나자빠지고 둘봉이도 허벅지를
창에 찔렸다. 둘봉이는 앞으로 고꾸라졌다가 일어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머리를 처박고 고통을 깨물며 엎드려 있었다. 서로들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계곡 건너편의 포수들이 산성터로 을라오는 듯하였으며 이미 산채는 완
전히 점령당한 게 분명하였다. 주고받는 말로 보아 그들은 토포군인
모양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포승으로 엮어라."
"죽은 자들은 확인하여 한군데에 모아놓고 수급을 베어라."
"두령을 찾아내라."
지시하는 소리가 요란한데 실눈을 뜨고 살피니 오락가락하는 평복
차림의 관군들만 보이고 혈당은 반 넘어 살상된 듯하였다. 한데 마당
에서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와 함께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은 고만이가
아닌가. 그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번 토벌은 자네의 공이 크네. 아마 은급을 받을 것이고 친히 관
찰사께서 포상을 하실 게야."
"저기 있는 게 적괴 허가놈이어요."
"수고하였네. 얘들아 어서 수급을 베어라. 산채에는 불을 지르고 재
물은 모두 관아로 나른다. 너희들이 나누어 가지게 될 테니 한 점도
빼놓지 말라."
둘봉이는 불길이 타오르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마지막임
을 알았다. 그는 관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성한 팔과 한쪽 다리로 기
었다.
힘줄이 땅기고 목이 타는 듯하며, 귓속에서는 쉴새없이 벌의 날개짓하는
소리가 들렸다. 둘봉이는 댓 발짝 앞의 계곡을 바라고 몸을 굴려서
주저함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저놈 살아 있었다."
"놓치지 마라."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포수들이 계곡 위에 서서 어둠을 향하여 총을
놓았다. 골짜기가 찌렁찌렁 울렸다. 둘봉이는 온통 돌에 부딪치고 미
끄러져 상처투성이인 채로 계곡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나무를 잡고
일어나 둘봉이는 필사적인 힘을 내어 절뚝이며 뛰기 시작했다. 저쪽에
서 연달아 총을 쏘았고 탄환이 허공을 스치며 지나갔다.
둘봉이는 두어 식경은 허겁지겁 달렸는데 드디어 온몸이 땀과 흙으
로 범벅이 되고 입안은 갈증으로 찢어지는 듯하며 하체에 디딜 힘이
없어져서 몇번이나 넘어졌다가 일어나곤 하였다. 차츰 땅바닥에 넘어
져 쉬는 간격이 길어졌다.
"살아야 한다. 달마산에 알려야 한다."
둘봉이는 넘어져 쉬면서도 그렇게 수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달마산
으로 가는 지름길을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
처를 입고 백운산 줄기로 하여 학령의 연봉에 닿는 산등성이를 타고
갈 자신이 없었다.
무려 팔십 리 길이라 보통 때도 하루 종일이 걸리던 것이었다.
더구나 토벌이 시작되었다면 곳곳의 산협에는 포도 군사들이 번을
설 것이다. 둘봉이는 눈물을 머금고 길을 바꾸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는 막내아우 네봉이가 동승으로 있는 연지봉 아랫녘 금사사로
몸을 의탁할 작정이었다. 둘봉이는 중얼거렸다.
"원수 갚은 응보가 이것인가..."
장교가 거느린 관군 삼십여 명은 대를 나누어 학령에 나아가 달마산
을 들이칠 태세를 갖추었고 그중 칠팔 명의 관군은 해지점 주막을 덮
치게 되었다.
그들은 산마루에서 일단 평복으로 바꾸어 입고서 육모방망이나
쇠도리개 등속을 옷자락 안에 감추어 넣고서는 해지점 주막 나무리집으로
하나 둘씩 기어들었다. 해주에서 출발한 각종 상고들이 붐빌 시간이었다.
"여기 밥 한상 올리게."
"청어도 구울까요?"
"술도 두어 되 주고..."
포도 장교가 주인과 수작하며 둘러보니 술청에는 보부상들이 떼지어
앉았고 건넌방에 장정 두엇이 앉아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피
고 있는 듯하였다.
중노미라는 자는 허위대가 크고 손이 오동잎새처럼 너부죽하고 두툼
하여 완력깨나 쓸 듯싶었다. 포도 장교의 생각에도 그들 셋과 주인만
때려 잡으면 별로 대들 놈들이 없을 것 같았다. 포교가 군졸 하나를
턱짓으로 불러서 속삭였다.
"아이들 셋쯤 데리고 뒤꼍으로 나가서 적당히 막아두어라."
"점심은 안 드시게요?"
"잡아놓고 느긋이 들도록 허지."
그들이 슬슬 기동을 하려는 참인데 다부지게 어깨가 바라지고 얼굴
은 진한 잿빛이고 광대뼈가 불거진 자와 키가 구 척 가까이 되어 보이
며 등이 구부정한 두 사내가 나무리집 안으로 들어섰다.
포교가 그들을 살피자니 모두 패랭이에 흩저고리 차림인데 짐을 진
곁군 하나가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보부상들 가운데 끼여들었는데
혼잡한 마루에서 사람들을 건너 가느라고 연신 인사를 차렸다.
"저 자들을 잘 노리고 있어. 여차직하면 포승을 던지도록 하여라."
포교는 곁에 앉은 오장에게 넌지시 일러 두었다. 마침 중노미가 뒤곁
으로 돌아 나간 뒤에 포교는 마루 쪽을 내다보고서 썩 일어났다.
보부상 차림의 두 사내는 주인에게 주문을 하는 것인지, 뭔가 긴요
한 얘기를 하는지 쑥덕이고 있었다. 포교가 일어나니 뒷전에서 포도
군사 넷도 따라 일어났다. 포교가 성큼성큼 마루를 뛰어 건너자 술청
엔 작은 혼란이 일어났고, 서로 밀쳐서 상이 엎어지고 욕설이 터져나
왔다. 포교는 이미 짤막한 쇠도리개를 쳐들고 있었다.
"도적들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건넌방에 앉았던 달마산의 정탐군들은 잠시 어리벙벙하여 포교의 짓
거리를 바라보더니 그중의 하나가 후닥닥 뛰어 마루에서 술청 아래로
내려가는데 포교는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건너 뛰어가면서 쇠도리개를
후려쳤다.
대번에 등줄기를 얻어맞고 질척한 술청 위에 엎어지고 나머지 사내는
군사들을 가로막으며 맨손으로 주먹을 휘두르다가 순순히 오라를 받았다.
포교는 아까부터 마음에 걸렸던 자들을 돌아보았는데 그들은 이미
마루에서 술청으로 빠져나가 있었다. 사람들이 일어서고 떠들고 하자
포교가 호통을 쳤다.
"우리는 포도 군사들이다. 아무도 기찰을 받기 전에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 움직이는 자들은 누구나 체포한다."
사람들은 움칫하고서 제자리에 앉았다. 일단 술청으로 내려섰던 두
사내는 포교가 아래로 내려서자 서로 눈짓을 하더니 짐을 지고 따라왔
던 자에게 외쳤다.
"칼 던져라!"
입구 쪽에 섰던 자가 보퉁이에서 짤막한 환도를 꺼내어 새까맣고 다
부져 보이는 사내에게 던졌고 그는 곧 한 손으로 칼을 받아 쥐자마자
칼집에서 뽑아 포도 장교에게로 나서다. 키가 큰 다른 사내는 재빨리
밖으로 나가더니 주기를 걸게 되어 있는 장목을 거두어 들고 입
구에 버티고 섰다.
나무리집의 달마산 정탐꾼 둘을 손쉽게 잡았으나 이렇듯 행동이 민
첩하고 담대한 자들에게 기가 질려서 포교는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음, 이제 보니 너희도 적당이로구나. 어디 해지점을 빠져나갈 듯싶
으냐?"
비좁은 주막 안에 사람은 가득 찼으니 어디서 합을 겨루랴. 그러나
환도 가진 사내가 뒷전에다 나직하게 말하였다.
"만석이, 아랫것들을 맡아라."
입구에 섰던 키 큰 사내는 오만석이었고 칼 가진 자는 마감동이었
다. 그들은 달마산의 강선흥을 만나기 위하여 해지점 주막에 들렀던
것이다. 곁군 차림의 사내는 길안내로 나선 강말득이었으니 제아무리
포도 군사들이라 하나 그들이 수걱수걱 포승을 받을 리가 없었다.
마감동은 칼을 정면에 세워 들고 포교를 노려보았고 포교는 쇠도리개를
쥐고 연신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다른 사람들이 상한다. 밖으로 나가서 결딴을내자..."
감동이가 말하였다. 평복의 포졸들은 칼 가진 자와 육모방망이를 가
진 자들로 왼쪽 방에 서 있었다. 때마침 뒤곁에서 중노미를 잡아끌고
나오던 포졸들이 그 광경을 보자 슬그머니 뒤꼍으로 다시 빠져나갔다.
나무리집 주인은 마루 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람들 틈에
웅크리고 있었다. 마감동이가 말하였다.
"손님들은 양편 벽으로 물러서시오."
일시에 술청 안의 손님들이 양쪽으로 비켜났다. 이제 술청 가운데와
마루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마감동이는 일찍이 훈련원 교련관 임태룡
에게서 검을 배운 바 있었고 도적질 수년에 대소 수십 전을 겪은 터라
검을 잡으면 웬만한 상대는 물론이요 병장기 가진 자 서넛을 너끈히
해낼 수가 있었다.
더구나 오만석이가 장창 대신에 주기의 장목을 잡고 버티고 섰는데
어찌 포도 군관 따위에 뒷걸음을 치겠는가. 말득이도 별로 조바심치지도
하고서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말득이는 허리에 자고를 열 대쯤
차고 다니는데 여차직하면 눈이나 정강이에 던져줄 참이었다.
감동이가 칼을 쥐고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몇걸음을 크게 떼어 앞으로
다가들면서 봉두의 자세로 칼이 부리인 듯 찔러들어갔고 포교는 마루에서
뛰어내리면서 쇠도리개를 휘둘러 좌외대당으로 칼날을 쳐받으면서
마감동이와 엇갈려 지나갔다.
오만석이가 마루를 향하여 날렵하게 뛰어올라 장목을 곧추세워서 칼
가진 자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가슴에 타격을 받자 그가 헉하고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고 이어서 만석이는 장목을 수평으로 주마회두로써
휘둘렀다.
다른 포졸들이 머리와 등줄기를 얻어맞고 나뒹구는데 이어서 틈을 주지
않고 넘어진 자들의 머리통을 한번씩 질러주었다.
벌써 뒷전에서는 포도 군사 셋을 장목으로 해치운 오만석이가 마루
를 건너 왼쪽 방에 묶여 있던 달마산 정탐꾼을 풀어주었다. 문 앞에
강말득이가 버티고 서 있는데다 술청 가운데에서는 멍석 위로 이리저
리 뛰고 도는 두 사람 때문에 손님들은 모두들 나갈 염도 못하고 양편
가녘에 몰려 있었다.
포교는 차차 초조해지는지 연신 마른 입술을 핱았고, 쇠도리개의 가죽끈을
꽉 움켜쥐고는 감동이의 측면으로 돌았다. 감동이는 그의 방향을 따라서
칼을 한 손에 쥐어 비스듬히 겨누고서 몸만을 돌렸다. 그때에 포도
장교는 편신중란의 세로 쇠도리깨를 좌우로 휘두르며 감동이의 오른편
겨드랑이로 파고들었다.
감동이는 뒤로 물러나며 칼을 아래로 늘어뜨려 허리를 막는 은망의
자세를 취하며 몸을 돌려 역린으로 포교의 목덜미를 내려치려는데
그만 무엇인가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먼저 포교의 쇠도리깨에
등줄기를 맞고 널브러진 자의 몸이 가로걸린 것이다.
감동이는 미처 일어날 겨를이 없었다. 마루 위의 오만석이가 주춤하였고,
강말득이는 허리에서 자고 표창을 날쌔게 빼었다. 마침 뒤 곁으로부터 술청
안을 치려고 앞으로 돌아 나온 포졸들이 문 앞에 보였고 말득이는 재
빠르게 좌우를 둘러보았다.
술청에서는 포교가 사정없이 쇠도리깨를 휘둘러 마감동이를 후려치려는
순간이었다. 강말득은 자고를 곧게 편 손바닥에 거꾸로 쥐고서 날릴 참이었다.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포졸들이 들어섰다. 포교가 감동이의 안면을
바라보고 쇠도리깨를 대당으로 번쩍 치켜든 일각에 무릎을
꿇은 감동이는 훤히 비어 있는 포교의 복부를 안에서 바깥 쪽으로 흔
격하여 베었다. 옷이 북, 찢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피가 마감동이의
가슴에 흩뿌려졌다.
감동이가 칼을 날릴 적에, 강말득이는 두손에 뽑아들었던 표창 중의
한 대를 문 쪽으로 던졌다.
"싯..."
이빨 사이로 날카롭게 소리내며 던지는 것이 오공랑 강말득이의
버릇이었다. 날아간 표창이 앞장선 포졸의 정강이에 가서 박히자
그자는 펄쩍 뛰었다가 곤두박질처서 죽는소리를 내었다. 말득이는
남은 자고 표창을 눈앞에 세워 보이며 문 앞의 포졸들을 얼러댔다.
"이번에는 어디다 박아주랴. 눈에다 박아줄까, 배꼽에다 박아줄
까."
하면서 말득이가 이빨 사이로 새는 소리를 내니까 포졸들은 손을 앞으
로 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말득이가 돌아서려는데 감동이가 급히
외쳤다.
"멀리 가지 못하도록 해줘라."
"알았수. "
말득이가 문 밖으로 쫓아나가 자기도 달리면서 자고 두 대를 연달아
던졌다. 하나는 허벅지에, 또 하나는 종아리에 맞고 포졸들은 깡충거
렸다.
"손님네들, 중화참을 망쳐놓아 대단히 죄송허우. 우리가 멀리 갈 때
까지 밖으로 나오지 마시우."
마감동이가 나무리집의 손님들에게 인사를 차렸다. 오만석이는 포
졸들에게 묶인 동안 방망이에 얻어맞아 이마가 깨진 정탐군을 부축하
여 마루에서 내려왔다. 만석이가 술청에 쓰러진 자를 턱짓하며 물었
다.
"이 사람은...?"
"밥술 놨네. 혈당이 몇인가?"
마감동이 정탐꾼에게 물었다.
"중노미 구실까지 셋입니다."
"가서 데려와."
감동이가 말득이에게 지시하여 그가 뒤곁으로 달려가보니 중노미는
포졸들에게 몰매를 맞아서 혼절한 채로 묶여 있었다. 어느틈에 술청을
빠져나와 헛간에 숨어 있던 나무리집 주인이 평소에 말득이와 안면은
있다고 부스스한 꼴로 나왔다.
"가, 강서방 아니슈? 이게 무슨 변이란 말입니까."
"이녁이 발고한 것은 아니겠지."
매운 눈초리로 말득이가 노려보니 주인은 소스라치며 질겁을 하였
다.
"어이구, 날벼락허구두 오뉴월 우박이우. 내가 달마산 장사들 덕택
에 이만한 주막이라두 일으켰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까 송화서
내려오는 상고들한테 들었는데 장정들이 학령에 하얗게 섰더랍니다."
말득이는 주인에게 물을 청하여 바가지째로 혼절한 자에게 들씌웠
다.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가물가물하였으나 앓는 소리를 내며 운신을
못하였다. 그냥 두고 가자니 나중에 관군들이 몰려오면 꼬리를 밟힐
듯하여 무리를 해서라도 데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말득이가 중노미를 등에 업고 나서며 주인에게 다짐을 주었다.
"관가에서 나오면 무조건 모른다구만 허시우."
"그나저나 이거 큰일입니다. 갖은 악형을 당할 터인데... 우리 식
구들은 어찌하랍니가. "
"이보시우, 주막 주인이 겪는 게, 술손님, 밥 손님, 노름 손님, 잠
손님, 외상 손님에다 각설이까지 온갖 사람을 상대하는 터에 언놈이
녹림당인지 장사치인지 개코나 알겠느냐구 발명하면 될 거 아니오."
말득이가 중노미를 업고 나오니 손님들이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환도를 들고 가로막고 섰던 감동이가 물었다.
"중상인가?"
"온몸을 되우 얻어맞아 몸을 쓰지 못허우."
그들은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주막 앞에 즐비하게 매어놓은 부담마
를 한필 골랐다. 우선 짐을 내려놓고 정탐군과 중노미를 태웠다.
"잠깐 기다려."
감동이가 말득이의 짐 속을 뒤져 엽전꿰미를 내더니 다시 주막 앞으
로 갔다. 안에서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가 그가 나타나자 모두들
말을 뚝 멈추었다.
"밖에 있는 말 중에 한 필만 끌어가겠소. 말 임자는 받아두슈."
감동이가 돈꿰미를 술텅 안으로 휙 던져넣고 돌아섰다. 그들은 급히
해지점을 떠났다. 말득이가 말하였다.
"주인에게서 들으니 학령에 장정들이 하얗더랍니다. 그게 아마 관군
들이겠지요."
"그렇겠지... 이제 토벌이 시작되는 모양인걸."
오만석이가 걱정스럽게 말하였으나 마감동은 태연해 보였다.
"걱정할 거 없다. 아마 장면서 공명심깨나 있는 장교 나부랭이들이
일을 벌인 모양인데 감명에 장계하여 군병을 움직이려면 보통 일이 아
니다. 관찰사가 선뜻 토벌에 나서려 할까. 아마 벌집 건드리지 않으려
고 흐지부지할 게 틀림없어. 허나 경계는 해두어야겠지."
그들은 학령으로 오르지 않고 검단내의 상류를 따라서 막바로 지름길로
향하였다. 말득이가 견마를 잡고 부상당한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이리저리
길안내를 해주었다.
"바로 저곳입니다."
말 위의 졸개가 가리키는 데를 모두들 바라보니 골짜기를 막아선 언
덕이 수풀 사이로 보였다.
"언덕빼기에 아무것두 없는데."
"저게 토벽이지요. 나무와 풀을 입혀서 언뜻 보면 언덕 같습니다.
저쪽에서는 아마도 우리가 오는 것을 보았을 겝니다."
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골짜기 훨씬 위쪽에서 화살이 비 오듯이 날아
왔다. 그들은 황급히 바위 뒤에 흩어져 숨었으며 말득이는 고삐를 쥔
채 엉거주춤하여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활쏘지 마라. 손님이다."
안내한 자가 외치니 곧 위에서 응답이 왔다.
"신표 있느냐?"
"신표구 뭐구 나를 보면 될 거 아니냐?"
"잔소리 마라. 시방 관군들이 쳐온다는 기별이 와서 쥐새끼 한마리
못 들어온다. 해지점에두 관군들이 내려갔다는데 어찌 무사히 나왔느
냐. 돌아가지 않으면 죽는다."
바위 뒤에 숨어서 서로의 얼굴만 살피노라니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
니었다. 마감동이가 외쳤다.
"우리는 구월산 녹림당이다. 같은 처지에 이럴 수가 있느냐. 정 그
렇다면 우리는 맨손이 될 터이니 너희가 산채까지 잡아가거라."
그 말이 곧 이치에 맞는다고 여겨졌던지 달마산 패거리들은 잠깐 대
답이 없었다. 살펴보니 가파른 벼랑의 바위 틈에 일대의 사수들이 숨
어 있는 모양이었다. 과연 고슴도치 꼴이 되기 전에는 안으로 들어가
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기다려라."
위에서 소리가 나고 한참 있다가 멀리서 고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무도 없다. 뒤에 따라온 놈들이 안보인다."
아마도 골짜기 너머를 살피느라고 더욱 위쪽으로 감시자를 올려 보
낸 것 같았다.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고 있는 물건을 전부 길 밖으로 버려라."
그들은 보퉁이를 밖으로 던졌고 감동이가 혀를 찼다.
"과연 조련이 잘된 녹림당이다. 저자가 소두령이겠지?"
"업복이라구 여기 그전부터 있던 터줏대감입니다."
관군을 막기 위해 달마산의 셋째 두령 업복이가 십여 인의 사수를
이끌고 좁은 길목을 수비중이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와서 한 줄로 서라."
그들은 모두들 한 줄로 나와서 섰다. 그제서야 가까이 왔던 업복이
와 졸개들이 숲으로부터 나타났다. 그들은 재빨리 살피고 무기를 거두
었다.
"죄송합니다. 워낙 급박한 기별을 받아놔서 결례가 이만저만이 아니
올시다."
감동이는 털털하게 웃을 뿐이었다.
"우리는 해 지점에서부터 쌈복이 터진 사람들일세. 강두령 계신가?"
"예, 벌써 알고 계실 겁니다. 화살을 날렸으니까요."
과연 그들이 토성 아래로 가까이 가니 좁은 문에는 돌이 쌓여 들어
갈 수가 없었고 위에서 사다리가 내려졌다.
"허, 달마산의 형세가 이런 줄은 몰랐는걸."
오만석이가 감탄을 하였다. 그들이 성벽을 넘어가니, 선흥이와 변
가가 나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이건 구월산 성님들 아닌가."
선흥이는 몰라보리만큼 변하였다. 장난기 어렸던 눈가에는 불그죽
죽한 살기가 어렸고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으며 의젓하게 상투까
지 올렸다. 맨살에 노루가죽 등거리 걸치고 허리에는 띠 두르고 엄파
쇠몽치를 찼다.
마감동과 오만석이는 일찍이 길산과 더불어 결의형제하였음에도
선흥이께는 아직 서먹서먹하였다. 결의 후에 선흥이는 구월산에
한번쯤 들렀을 뿐이었고 그것도 박대근, 이갑송, 우대용 등과 동행하여
탑고개에만 들렀던 것이다.
"아우님 보구 싶어 왔네."
마감동이는 길산이 일러주던 말을 스스로 되새기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말득이가 참지 못하고 먼저 발설하였다.
"길산이 성님 오셨수. "
과연, 선흥이는 깜짝 놀라서 두리번거리다가 말득이의 손을 잡았
다.
"어디... 어디에 오셨단 말이냐?"
"구월산에 계시네."
마감동이가 먼저 대답하였고, 선흥이는 평소처럼 벌써 덤벙대기 시
작하였다.
"허 이것 참, 지금 당장에 길 떠날 채비를 해야겠군."
"두령,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하며 변가가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선흥이는 벌써 길 떠날 준비를 했
을 것이다. 마감동이가 말하였다.
"그래서 아우님을 데리러 왔네만, 사실은 우리두 산채 구경을 한번
도 못해봤기에 이렇게 때늦은 걸음을 하였네. 아우님이 용서하시게."
선흥이는 아무런 사심 없이 그들을 반겼다. 예전에는 어리고 그만큼
자만심이 많았으나, 신생활을 겪은 지도 어언 삼 년이나 되어버린 선
흥이로서는 그들이 어제 헤어진 형제들처럼 느껴졌다.
"내가 하도 뜻밖의 일이라 성님들을 이렇게 세워두었구려. 안으루
드십시다."
선흥이가 감동이와 만석이의 등을 밀어주었다.
"성님은 키가 더욱 자란 것 같소. 꼭 우리 옛날 집 대추나무만이나
허우."
선흥이가 만석이에게 농을 걸었고 만석이도,
"소금짐 내던지더니 이제는 바루 도깨비 삼촌이 되었군."
하며 받았다. 선흥이가 그제사 생각이 미쳤는지 그들과 부상당한 졸개
들이 동행한 것을 되돌이켜서 감동이께 물었다.
"헌데 해 지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우? 틀림없이 관군이 거
길 덮쳤을 텐데."
"왜 아닌가. 우리가 거기서 한바탕 벌이고 피를 좀 보이구 오는 길
이지."
선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저께 불타산 쪽에서 졸개 두엇이 간신히 빠져나왔습니다. 목감원
쪽에 내려가 있던 아이들인데 다행히 잡히지 않은 모양이지요. 내 동
무가 죽고 거의가 잡혔지요. 이번에는 우리 차례인 모양이라 이렇게
법석입니다.
학령에 나가 목을 잡고 있던 아이들은 정탐할 망보기만 남고 모두
돌아왔지요. 만약에 대병력이 토벌해 오면 하는 수 없이 송화 쪽으루
달아날 수라에 없지만 좀 버티어볼 작정이우."
오만석이 말하였다.
"우리두 곁에서 형편을 두고 보다가 아우님을 돕겠네."
그들은 산채의 바깥쪽으로 둘러싼 두어 길쯤의 돌담을 지났는데 짚
더미들이 한 줄로 주욱 늘어놓여져 있었다. 아마도 바같 토벽이 점령
되면 안에서 화공으로 시간을 끌며 탈출하려는 계획인 듯하였다.
"제놈들이 짓쳐오면 얼마나 오겠나. 우리도 돕겠네. 정 버티기 힘들
면 까짓 우리 산채루 이사오게."
오만석이가 말하였고, 곁에 앉아 의형제끼리의 얘기에 끼여들지 않
고 있던 변가가 말하였다.
"아니올시다. 겨울이면 몰라두 지금 같은 녹음지절에 달마산을 토벌
하진 못하지요. 온 산골짜기와 등성이와 바위가 모두 우리들 은신처
요, 우리는 숨어서 저쪽의 일동 일정을 한눈에 바라보며, 저쪽에서는
어림짐작으로 산채를 안다 할지라도 우리를 볼 수가 없으니 벌써 싸우
나마나 합지요. 관군이 학령서 구이령 줄기를 지났다 하면 우리는 매
복을 하러 나갈 참이니까요."
"야습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말득이가 말하니 감동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더욱 어렵겠지. 이쪽에서 이미 알고 있는 이상 들어왔다가는
오히려 저희가 함정에 빠지니까. 내 보기에두 달마산의 이만한 형세라
면 토포군이 삼백여 명은 와야겠는데, 그리구 호랑이 포수들이 한 오
십여 인 있다면 모를까."
강선흥이가 대강의 방어진의 형세를 알려주었는데, 산채의 서쪽 골
짜기 앞에는 사수를 거느린 업복이가 매복하여 있으며 학령의 목지기
로 있던 일오는 구이령 줄기와 닿은 등성이까지 철수하여 관군의 행방을
탐지중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그대로 구이령을 넘어설 때는 달마산패의 정수만 추린
십여 명이 강선흥이의 인솔로 동편 골짜기 너머에 매복하고, 변가는 만일을
위해서 산채 식구들을 이끌고 산태 뒤편에서 북으로 흘러나간 산줄기를
타고 신천 방면으로 빠져나갈 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선흥이들이 격파되고 관군이 외다리 앞에까지 이를 경우였다.
"우리는 식솔들이 있어놔서 산채를 절대루 호락호락 내놓지 않을 작
정이우."
변가가 얼굴이 굳어져서 말하였고 선흥이는 공손히 사죄하였다.
"먼길 오신데다 해 지점에서 봉욕을 당하시고, 이제 남의 집 우환에
갔지 동참하시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총포는 없수?"
말득이가 물었다.
"두어 자루 있다 하지만 장약도 연환도 없으니 쓸 수 없지. 예전에
심백이란 놈들에게서 빼앗은 것인데 까짓 없어두 된다. 우리는 기왕지
사 근병접전을 벌일 테니까."
관군의 내습을 대비하는 터에 술을 마실 수가 없어서 해 지점에서 놓
친 중화를 뒤늦게 들었다. 과연 변가의 보필과 선흥이의 치가 통솔이
흘륭하여 달마산 산채의 음식은 정갈하고 짜임새가 있어 보였다. 박주
라고 머루주 한 병을 내왔는데 산채의 아낙네들이 담근 듯하였다. 상
을 물리고 감동이, 만석이, 말득이 그리고 선흥이 등이 둘러앉아서 형
제들의 근황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근이 성님은 안녕하시다든가?"
"나두 못 뵈온 지가 근 일 년이나 되었수. 아마 혼례를 올린 것 같
습디다. 송도 임방에서 올렸으니 우리네 처지로야 가볼 수도 없었고.
아마 대용이 성님이 의주 상인들 틈에 끼여 참례했다지요."
선흥이의 말에 감동이가 나섰다.
"참 그 대용이 성님두 우리가 만나든지 기별을 주어야 할 터인데.
시방 어디서 뭘 하고 있다든가?"
"평안도 어름에 계시지요."
선흥이가 더 말을 꺼내려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뛰어와 전갈하였다.
"관군이 구이령에 닿았답니다."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긴장하여 일어섰고, 강선흥이는 벽에 세워두
었던 엄파 쇠몽치를 다시 허리에 질렀다. 마당에는 칼과 창을 가진 십
여 명의 장정들이 모여 있었다. 선흥이가 산채에 남을 변가에게 당부
하였다.
"망보기를 세워두었다가 관군이 서편 계곡까지 나타나면 다리를 끊
어버리시우. 그리구 업복이를 시켜서 막아 싸우게 하고 변두령은 산채
식구들부터 우선 안전한곳까지 피신을 시키도록 허우."
변가는 어쩐지 비감해져서 선흥이의 손을 확 잡고 놓지를 못하였다.
"두령은 어쩌시려오?"
"염려 마오. 관군도 대병력은 아니고 사오십이 미처 못 된다니까,
물리칠 수가 있겠지."
"뭐 병장기 남은 것 없나?"
오만석이가 중얼거리자,
"참, 성님은 장창을 잘 쓰시지요."
선흥이가 말하고는 졸개들 중에서 장창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감동이
는 이미 산채를 떠나올 때 지녔던 짜른 환도가 있었고, 말득이도 늘상
길을 다닐 적마다 허리에 자고를 두르고 다니는 처지라서 별다른 병장
기가 필요치 않았다.
매복할 소부대는 곧 산태 서쪽 계곡 위에 걸린 외나무다리를 건너
구이령을 바라고 행군하였다. 구이령에 닿기 전에 달마산의 산줄기가
해지점 쪽으로 삐쳐나간 지점이 있었는데 그 골짜기에는 송림이 하도
빽빽하여 낮에도 해가 들지 않고 음습하며 길도 없는 곳이었다.
나무숲의 아래쪽에는 또한 풀이 키가 넘도록 자라나 가히 범이 숨을
만한 장소였다. 선흥이가 이끄는 일당은 전혀 그쪽 호림에는 주의를
돌리지 않았으니 워낙 가파르고 깊은 골인데다, 구이령 쪽에 관군이
있다는 전갈을 받았으므로 다른 곳은 살필 겨를이 없었다.
사실 구이령을 넘어서기만 하면 곧 달마산 연봉의 초입이라 어물거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구이령과 학령이 만나는 산줄기에
이르자 기다리고 있던 학령 목의 졸개들이 반가이 맞았다. 그들과 합쳐서
스물이 못 되는 인원이었으나, 산길에는 워낙 익숙한 그들인지라 사기가
높았다.
만약에 들판에서 대군과 부딪쳐 진을 친 형세라면 그렇게 유유하지 않을
듯하였다. 모두들 사냥이라도 나온 듯 농지거리들이 한창이었다.
"관군이 어디로 갔는가?"
"구이령을 지나서 이쪽으로 들어오다가 멈추었습니다. 살피시렵니
까?"
"어디 좀 보자."
선흥이가 졸개와 수군거리고 나서 비탈 위로 오르니 감동이도 얼른
엿듣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앞선 졸개가 하는 대로 그들은 등을 잔뜩
구부리고 뛰어가 편편한 바위에 가서 엎드렸고 그 끝까지 기어나갔다.
바위가 끝난 곳은 아슬아슬한 벼랑이었는데, 저 아래 툭 터진 저지대
가 내려다보였으며 희끗희끗한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가끔씩 번쩍하면서 빛을 내는 것은 아마도 창날인 듯싶었다. 관군은
첫봉이네 불타산을 들이칠 때와는 달리 검은 털벙거지에 더그레를 걸
치고 있었다.
그들은 엎드려서 잠깐 동안 이곳 저곳을 관측하였다. 관군들은 쉬고
있는지 띄엄띄엄 흩어져 앉아 있었고 주위에는 높고 낮은 산과 구릉이
둘러싸여 있었다. 선흥이가 대강 눈짐작으로 헤아려보니 겨우 삼십여 명이
될까말까 하였다.
"참으로 모래로 방천한다더니, 저깟 소병력으로 우릴 어쩌겠다는 건가?"
잔뜩 긴장을 하고 관군과의 대접전을 각오하고 왔던 강선흥이는 맥
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대오는커녕 싸울 기강도 없어 보이는 무리였
다. 마감동이가 곁에서 중얼거렸다.
"뭔가 기다리고 있는 듯하군."
"기다리다니..."
"뒤에 대병을 숨겨뒀는지두 모르니까."
졸개가 말하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학령에 몰려 있던 것은 군복을 입은 저 자들
과 인근 촌락에서 부역을 지구 끌려나온 민정들이 있었지요. 처음에는
우리두 산채의 연락을 받기 전에는 장연 고을에 호환이 난 줄로 알았
지요. 그래서 호랑이 몰이에 동원된 줄로만 여겼습니다.
불타산이 떨어겼다기에 우리 산채가 다음 차례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번을 들며 쭉 지켜보았는데 구이령 초입에서 민정들은 모두
해산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리구 저것들만 고개를 넘은 셈이지요."
"아마 감영에서 무슨 하달이 있었던 게로구먼. 토포군의 대병이 올
모양인가?"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듯합니다."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놈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두 그렇구... 시방 급습하여 뜨거운 맛을 보여주는 게 상책이겠군."
선흥이가 결정을 내려버리자 감동이는 오랫동안 산사람 생활을 해
왔는지라 아무래도 꺼림칙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듯하였다.
"혹시 복병이 없을까?"
"복병은 없습니다. 우리가 정오경부터 한눈을 팔지 않고 지켜보았으
니까요."
"관군 쪽이 너무 태평해 보이는데, 우리를 꾀어들이자는 계략이 아
닐까. 내 생각으로는 산채로 돌아가 계속 관군의 동향이나 주시하며
방비하는 것이 나을 듯한데."
그러나 선흥이는 이미 작정을 내린 이상 여러 말을 듣고 싶지가 않
았다.
"여하튼 달마산 경계로 들어왔으니 고스란히 걸어 들어오도록 할 수
는 없지. 덮쳐 버려야지."
감동이 편에서도 남의 집 일이라 육고간의 중처럼 이래라저래라 하
지 못할 입장이었다. 선흥이는 아래로 내려와서 졸개들에게 지시를 하
였다.
"이 너머에 관군이 스물 남짓 있는데 보아하니 군율도 없는 오합지
졸이 적실하다. 우리가 습격하면 패주는커니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항
복을 하게 될 것이다. 정 대드는 놈들은 살상하되, 되도록 사로잡도록
하여라. 저들의 속내도 캐어보고 인질로 삼아 관군을 기롱하는
데 써야겠다."
우선 졸개들을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마감동, 오만석이가 인솔하
여 곧바로 산을 넘어 쫓아 내려가기로 하였으며, 선흥이와 말득이는
구이령 줄기를 향하여 돌아 저들의 배후를 치기로 하였다. 이른바 협
살하려는 안이었다.
먼저 선흥이, 말득이 등이 출발하여 산을 돌아 나가 관군이 머문
저지의 뒷산 등성이로 올라갔고 마감동과 오만석 등은 산마루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맞은편 산 위에 졸개가 나타나 손을 휘저었고
감동이가 인솔한 일대는 소리를 내지르며 산비탈을 달려 내려갔다.
맞은편에서는 선흥이가 앞장서서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관군
들은 부리나케 일어나더니 언제 그런 대오라도 짜두었는지 반수는 골
짜기 아래로 달려 내려가고 나머지는 살을 메겨서 일시에 쏘아댔다.
졸개들 중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자도 있었으나, 워낙에 공격의 예
봉이 곤두서 있어서 그들은 멈추지 않고 다가들었다.
사수들도 뛰어 달아나기 시작하여, 양편으로 갈렸던 달마산 패는
자연스레 합대하여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기민하게 뜀박질 잘하는
자들을 뽑았음인지 그들은 민첩하게 숲 사이로 빠져 달아나고 있었다.
역시 말득이의 발이 기중 재빨라 맨 선두로 뛰어가며 양손에 자고를
뽑아 날렸다. 자고에 맞은 관군 서넛이 고꾸라졌으나 그들을 중도에
수습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흥이는 그들을 인솔한 장교를 사로잡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들도 관군의 뒤를 따라서 숲 안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골짜기의 다른
지류였고 바로 호림이었다. 숲 안에 들어서자 주위는 갑자기 어두워졌으며
서늘한 냉기가 가득 차 있었다. 방금 앞서서 숲으로 쫓겨갔던 관군들은
일순에 종적이 없어졌다. 달마산 패들은 섬뜩하여 그 자리에 주춤 서버리고
말았다. 사방이 괴괴한데 바람소리만이 송림에 가득 차 있었다.
"속았다!"
뒷전에 섰던 마감동이가 외치자마자 총성이 귀청을 에며 일어났고
사방에서 와 하는 함성이 그들을 에워쌌다.
그야말로 호랑이몰이와 똑같은 살진이었던 것이다. 말편자 형으로
벌려두고 열린 배후에서 방포를 하게 되면 울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이었다. 방포 소리가 다투듯이 일어났고
주위에는 비명과 매캐한 화약 연기가 가득 찼다.
포위망을 뚫고 숲 밖으로 나가려고 앞장을 섰던 선흥이가 총알을 맞고
튀어오르듯이 댓 걸음 앞으로 나가떨어졌다. 화살이 전면에서 날아왔는데
오만석이도 왼쪽 팔이 꿰이었다.
"선흥이 구해내라. "
마감동이가 큰 고목 뒤에 숨어서 외쳤고 말득이가 납죽 엎드린 채
뛰어가 선흥이의 팔을 잡아 옆구리에 끼듯이 부축해 올렸다. 그동안에
도 총성이 연이어 들려왔고 연환이 나무에 날아와 박히는 소리가 날카
로웠다. 말득이가 다가오자 감동이가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을 끌어들이
고 나서 외쳤다.
"오두령, 저쪽을 뚫자."
감동이는 칼을 잡고 두어 번 추스리며 말득이에게 당부했다.
"우리가 활로를 뚫을 테니, 자네는 선흥이만 맡아라."
"염려 마우. 한 손을 쓸 수 있으니까."
말득이는 한편 어깨에다 강선흥이를 부축하고 한 손에는 자고를 뽑
아들고 있었다. 만석이는 왼팔쪽에 박혀 있는 화살을 부러뜨려놓기만
하고서 한 손으로 창의 중동이를 잡아 휘두르고 있었다. 역시 감동이
가 앞장을 섰다. 말득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부축당한 선흥이는 오
른쪽 허벅지와 종아리에 총알을 맞았던 것이었다.
"나두... 싸워야지."
그러나 아무리 황소의 뿔을 뽑은 남대천 장사 선흥이라 할지라도 다
리를 쓰지 못하여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이미 그들이 몰려 섰던 공터에
는 죽거나 다친 자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고, 요행 살아남은 졸개들
도 이리저리 뛰어나가다가 둘러싼 민정들의 작대기나 쇠스랑에 얻어맞
고 나뒹굴었다.
마감동이는 칼을 역으로 쥐고 수비의 자세를 취하면서 뛰었다. 역시
그가 고른 곳은 횐옷 입은 부역꾼들의 무리가 막아선 곳이었다. 감동
이가 칼을 익숙하게 휘두르고 파고들자 만석이도 창대를 휘둘러 닥치
는 대로 후려갈겼다. 역시 사람의 벽은 휑하니 열리고 그들은 재빨리
키를 넘게 자라난 잡초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포수와 민정을 지휘하던 것은 역시 첫봉이의 불타산 산채를 함몰시
킨 별장이었다. 그는 해지점에서 장교 이하 포도 군사들이 오히려 패
한 뒤에 정탐군을 잡아 앞세워 산채를 들이치려던 계획을 바꾸게 되었
었다.
불타산 일당들 중에 생존자의 추국을 통하여 달마산 형세에 대하여는
소상히 알고 있었던 터였다. 그는 우선 저들이 관군을 얕보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으며 그들이 달마산 초입에 이르면 분명히 적의
주력이 매복을 하거나 공격해올 것을 알았다.
그는 인근 촌민으로부터 호림의 지세의 유리함을 듣고는 몇몇 관군을
미끼로 오히려 그들을 유인하였던 것이다. 도적들의 주력을 꺾은 뒤에
산채를 쳐부수는 일은 이빨과 발톱 빼고 범 잡는 격이었다.
목숨이 두려워 궁지에 몰린 자들의 칼날을 피하여 우 하니 비켜났던
민정들이 별장의 호통에 다시 돌아섰다. 그러나 그들은 필사적으로 달
아났는지라 키를 넘게 자란 풀숲의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 길이 없
었다.
"그 총 맞은 자가 달마산 화적 두령 강선흥이다."
별장은 강선흥에 관한 소문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그가 입산한
뒤에 그들의 식솔도 어느날엔가 슬그머니 장연을 떠나버렸는데 어디에
선가 고대광실을 짓고 호강한다는 뒷소문이었다. 그를 잡아야 이번 토
벌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산 채로 못 잡겠거든 시체라도 찾아라. 상금이 은자 백 냥이다."
별장은 포수들을 앞세우고 풀숲 안으로 들어갔다. 댓 발짝 간격으로
나란히 벌려 서서 그들은 숲을 샅샅이 뒤져 나아갔다. 호림은 위로 갈
수록 가파르게 되어 곧 달마산 연봉의 한 지류에 닿게 되어 있었다.
저들이 아무리 날래다 할지언정 그렇게 쉽사리 경사가 급한 비탈을 넘
어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포수들 앞에는 민정들이 늘어서서 풀숲의
사방을 작대기로 두드리며 나아갔다. 드디어 비탈에까지 이르렀으나
별장은 민정들만을 되짚어 수색해나가도록 하고 포수들을 이끌고 비탈
로 올라갔다.
연신 미끄러지며 나뭇가지를 잡고 오르는 데도 한참이나 걸려 겨우
전원이 등성이에 올라보니 눈앞에 보이느니 나무와 바위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저편 골짜기로 몸을 감춘 듯하였다.
"다 잡은 고기를 비늘만 떼고 놓아버렸구나."
"과연 산에 사는 놈들 걸음은 당할 수 없소이다. 그토록 재빨리 산
등을 타고 넘었으니 꼭 노루새끼나 같지요."
관군들은 하는 수 없이 호림으로 되돌아 내려왔다. 그러나 감동이,
만석이, 말득이, 그리고 부상당한 선흥이는 아직 호림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감동이는 첫눈에 함정에 빠졌음을 알아차리자마자 탈출로를 그려보고는
혼자라면 몰라도 부상한 사람이 있는 처지에서는 호림 끝의 산마루를
대번에 타넘기가 불가능함을 알았다. 그렇다면 인근에 숨을 수밖에
없는데 맞은편에 바위 벼랑이 막아선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곳이라면 서너 사람이 숨을 만한 바위 틈이란 쉽게 찾아질 것
이었다. 감동이는 풀숲에 숨자마자 그쪽 방향을 잡아 우회하였다. 과
연 네 사람이 몸을 붙이고 엎드려 있을 만한 바위 틈이 있었고, 그들
은 그 속에 비집고 들어갔다.
물론 앞에는 우거진 잡초가 가려 있었으나 저쪽의 동정이나 말소리는
환히 들을 수가 있었다. 수색하는 자들은 그들이 숨은 바위 옆으로 여러번
지나쳤건만 위쪽에서 볼 때는 그저 편편한 암벽이라 송곳 들어박힐 틈도
없어 보였을 것이었다.
한참이나 어수선하게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부상한 자들만 추려
서 압송해 가는 모양인데, 별장은 곧이어 산채를 들이치자고 큰소리를
쳤고, 수하 장교들은 감영의 거병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의논들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공격의 세를 늦추어서는 안된다며 별장은 내일 날이 밝자마자
진의 군사를 더 내어서 산채를 들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일단
학령 부근에서 숙영을 할 모양이었다. 관군들이 호림을 빠져나갔을 때
숲속은 이미 캄캄하고 풀벌레들만이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그들은 바위 틈으로부터 기어나왔는데, 선흥이는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을 정도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우선 상의를 찢어서 묶도록 하고
오만석이도 부러뜨린 채 박아두었던 화살을 제 손으로 뽑았다.
"산채로 가야지..."
선흥이가 땀에 젖은 얼굴을 찡그리며 힘없이 중얼거렸으나 마감동이
가 설득하였다.
"우선 아우님이 살아야 하네. 산채로는 말득이를 보내어 연락하도록
해두고 우리는 일단 신천 방면으로 피하여 어디서 치료를 해야겠네.
우리 연줄이 닿는 주막이 있으니까 거기까지만 무사히 간다면 별일은
없을 걸세."
"이대로 달마산을 내놓구 어디루 간단 말이우?"
선흥이가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며 비통하게 뱉어냈다.
"달마산만 산인가, 해서에는 여기보다두 깊구 크구 안전한 녹림이
여러 곳일세. 오히려 이만이나 당하구 그쳤으니 다행일세. 예서 거기
까지 대략 얼마나 될까?"
감동이가 물으니 말득이가 잠간 생각하고 나서 대답하였다.
"글쎄요... 탄다릿내가 삼십 리니까 그쯤 될 겁니다."
"삼십리쯤 걸을 수 있겠나?"
"걸어보겠수. 헌데 배 아래로 기가 싹 빠져나가버린 듯허우."
"오두령은 어떤가?"
감동이가 물으니 만석이는 씩 웃어 보였다. 걷는 데는 지장이 없을
듯하였다. 감동이가 다시 말득이에게 말하였다.
"네가 또 수고를 해야겠다. 우리는 곧 구월산으루 돌아가겠지만, 너
는 산채에 가서 알려주고는 곧 송도루 내려가거라. 대근이 성님게 길
산이 성님이 돌아왔다구 전갈하구 대용이 성님 소식까지 알아가지구
오너라."
"쳇, 또 다리품 팔게 되었군. 자 이러니 나는 언제 어엿한 객줏집
주인 노릇을 하룬들 해보겠수. 득달같이 달려갔다 오지요. 아마 성님
들 우물쭈물했다간 내가 먼저 구월산에 가 있게 될 걸요."
"그래 어서 가거라."
말득이가 휑하니 어둠속으로 사라진 뒤에 그들은 서로 부축하여 달
마산을 넘었다. 그리고는 탄다릿내의 거친 들판을 절뚝이며 걸었다.
감동이의 어깨와 만석이의 어깨에 거의 매달려 가듯 하던 선흥이가 문
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떨군 채 말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성님들게 너무 서운하게 하였수. 요즘 와서야
겨우 녹림처사루 살아갈 마음이 잡혔는데, 전에는 주제넘게 내가 실은
천인 잡배의 소생이 아니라구 은연중 자부했었지요."
그러나 마감동과 오만석이는 아무 말 없이 빙글대며 웃기만 할 뿐이
었다.
4
풍천에서 북쪽으로 시오리쯤 나아간 바다 한가운데에 주위
가 이십여 리나 되는 초도가 있었고, 그 훨씬 위로 삼십여 리쯤
올라간 곳에 돛점이라 불리는 석도가 있었다. 초도와 풍천과는
좁은 해협을 끼고 있어 대개들 초도수도라 하였는데 섬 안
에는 산악이 중첩하여 이 산악 위를 검은 구름 흰구름이 언제나 감돌
고 있어서 풍천 팔경의 제일경으로 초도춘운이라 하였다.
병풍처럼 둘러싼 춘운산의 암벽이 바다를 면하여 가파르게 막아섰
고, 그 아래로는 푸른 솔숲과 목초지가 넓게 끝간 데 없이 펼쳐졌다.
따라서 일찍이 풍천감목관이 읍치의 안에 상주하고 있으며 진첨사가
나와서 해상 경계를 감시하였다. 더욱이 부근은 각종 어류의 산란장이
라 조기철이 돌아오면 서해안 각처의 대소 선박들이 고기 떼만큼 몰려
들어 일일이 규찰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중국의 신동성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 탓으로 중국 사신의 행차와
무역 선들이 당관포에서 떠나고 돌아오고 하였으니, 가장 선박의 출입이
잦은 곳이었다.
초도의 서북쪽 은율군과 경계 지점에 있는 돛점은 마치 합죽
선을 펼쳐서 물 가운데 던져놓은 것과 같은 섬이었다. 짧은 모래사장
이 잇달아 있으며 대부분이 가파른 바위와 울창한 송림으로 이루어져
아무도 감히 근처에 얼씬하지 못하였다. 벼랑을 때리고 돌아오는 파도
도 문제려니와 암초가 곳곳에 일어서, 일부러 비파곶이나 허사포로 가
려면 멀리 우회하여 가는 곳이었다.
돛점의 가운데는 드높고 가파른 바위 벼랑이요, 양편으로 산고리가
미인의 눈썹처럼 잦아지면서 바닷속으로 감춰지는데, 서편 고리 부근
에 비좁은 수로가 있었으며 이 수로는 배 두어 척이 간신히 닿을 만한
모래사장에 이어지고 있었다.
일단 좁은 수로 안으로 들어가면 그렇게도 포효하고 일렁이던 물결이
거울처럼 맑고 잔잔해지면서 산에서 흘러내리는 담수와 만나고 있었다.
앞으로 길게 뻗어나간 고리가 일종의 방파제가 되어지는 모양이었다.
먼 해상에서 쌍돛을 올린 배가 나타나 일로 동북쪽을 향하여 치달려
오더니, 돛을 하나씩 차례로 내리고 천천히 노를 저어서 다가들었다.
수로의 훨씬 위쪽에 높은 바위 벼랑이 있고 편편한 반석이 있어서 요
망대라고 하였는데, 그 위에서는 한 사내가 앉아 있다가 마치 만장처럼
생긴 기다란 깃발을 장대에 달아 올렸다.
남색, 다홍색, 노란색, 횐색 등등의 사명기가 있는데, 그 깃발의 색깔로써
배가 들어오거나 피하거나 기다리거나 멀리 가거나 등등으로 통신하게
되어 있었다. 배는 남색 깃발을 보자 서슴없이 돛점을 향하여 저어 왔
다.
배가 일단 산고리의 울퉁불퉁한 암초에 이르자 수로를 잡고서 아주
조심스럽게 바위를 피해 들어오더니 바위와 바위 사이로 뚫린 천연의
월문 앞에까지 이르렀다. 파도가 이리저리 일어나 자칫하면 배
가부딪쳐 산산조각이 나버릴 판국이었다.
그러나 월문 안쪽의 수로에서 기다리던 작은 배들이 나타나 배의 머리
양쪽에 줄을 걸고서 팽팽히 당겨놓은 다음 장정들이 나타나 수로 안쪽으로
배를 끌어들였다.
일단 월문을 통과하자마자 배는 마치 극락계로 들어온 망령처럼 고즈
넉하게 한 점의 미동도 없이 미끄러져 가는 것이었다. 배는 천천히 수
로 안쪽으로 깊숙이 끌려들어가 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민물과 바닷
물이 합쳐진 인공의 연못에 이르렀다.
모래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안으로 석축을 쌓고 아래로는 바닷물이 넘쳐
들어오는 수로를 뚫었으며 위로는 시냇물이 흘러와 괴도록 잔돌멩이로
하상을 깔았다. 천여 평 넓이의 연못에는 야거리배 한 척과 거룻배 두 척이
정박하여 있었다.
배를 끌었던 장정들은 연못 가녘의 말뚝에 밧줄을 잡아매었으며, 휘청거
리는 나무다리를 뱃전에다 걸쳤다. 발을 절름대면서 박성대가 앞장서
서 내려왔고, 마중 나온 자는 석범철이었다. 박성대의 뒤에는 돛점 일
당이 아닌 패랭이의 사내가 따라 내리고 있었다.
"어찌... 벌이는 좋았든가?"
석범철이가 물으니 하역을 지휘하던 자가 대답하였다.
"말도 마시우. 경강 수로에는 기찰이 심하여 범접을 못하고 그저 외
롭게 항행중인 평안도의 상선을 한척 털었는데 모두가 피혁류뿐이라,
하는 수 없이 빼앗기는 하였으나 이번 출행은 죽을 쑤고 말았습니다."
"허허, 그러면 이번에두 송도나 서울 갈 일이 없겠구먼."
"안녕허시우?"
"아이구 난 또 누구시라구. 송도 재미는 어떠시우?"
석서방과 패랭이의 사내가 반기는데, 그는 송도 박대근 상단의 곁꾼
을 맡아보는 좌장이었다. 석서방이 다시 박성대에게 물었다.
"천수 안 왔지?"
"경강 나갔다가 강화에 눌러 있는 모양이야. 두령은 계신가?"
"음, 누군가 기다리는 참이라 여기서 벌써 열홀째 꼼짝두 않으시
네."
"우두령 좀 뵈입시다."
그들은 돛점의 바위 산으로 뚫린 고불고불한 길을 따라서 석도산의
깊숙한 골짜기로 올랐다. 그들의 뒤에는 배에서 내리운 짐을 부리는
장정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돛점의 수적 산채는 짙은 송림과 기암에
가리워져 전혀 바다 쪽에서나 육지에서나 눈에 띄지 않도록 되어 있었
다.
배가 대이는 곳도 좁은 수로여서 앞이 바위산으로 가리워졌고 잇
달아 두 갈래로 갈라진 언덕빼기 사이에 깊숙이 박혔으니 산채는 마치
계집의 옥문처럼 돛점의 최심처에 박힌 셈이었다. 위로 오르면 석도산
중턱의 짙은 송림이 둘러싸인 곳에 넓은 터가 있고, 가운데에 우대용
과 오가는 손님들이 묵어 가는 집이 한채 있었고, 그 옆으로 기다란
창고와 맞은편에는 방이 십여 칸이 달린 행랑채 비슷한 집이 있었다.
그들 집 주위로 나직한 돌담을 쌓았으니 여염의 부잣집과도 같은 모
양이었다. 오른쪽 돌계단으로 오르면 요망대가 있어서 섬 주변은 물론
이요, 먼 바다와 삼십 리 안쪽의 육지 방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다른 방비가 필요없고 다만 요망대에다 번드는 자만
하나 올려 보내면 족하였다.
마당 안에도 꼿꼿한 해송이 빽빽이 늘어서서 서늘한 그늘이 드리워졌고
골짜기를 휘돌아온 해풍이 송림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벌써 배에서 내린
그들 일행이 오는 것을 알고 우대용은 아까부터 마루에 나와 서성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서늘한 삼베 등거리에 잠방이 차림이라 드러난 팔다리가 마치
고등어의 등처럼 잿빛으로 반들거리고 있었다. 머리는 흐트러진 채로
아무렇게나 넘기고 띠를 질끈 동였다.
"그래 별일은 없었느냐? "
"예, 공연히 기일만 보름씩 잡아먹으며 강화 수로와 교동 수로를 맴
돌기만 하였습니다. 해가 지면 나아가 돌고 낮에는 반니도로 돌아가
숨었지요."
"방갑을 내리고 돛을 바꾸며 노를 빼면 그 누가 우리 배를 알아보겠
느냐. 선창의 수많은 배들 사이에 끼여 있는 게 더욱 안전할 게다."
우대용은 벌이에 대하여는 전혀 묻지 않았고 곧 그를 찾아온 송도
상단 사내를 발견하고 반색하였다.
"자네가 웬일인가?"
"저희 대인께서 전하시는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억지로 승선하여 오
는 길이올시다. 강화의 석서방과 홍서방 객주에 통자하여 사흘이나 묵
었다가 배를 탔지요."
"요사이 기찰이 심해서 그런다네. 헌데 대근이 성님 전갈이란 뭔
가?"
"곧 구월산으루 떠나셔야겠습니다. 구월산에 장두령이 오셨다구 합
니다."
우대용은 눈을 크게 떴다.
"장두령이라니... 길산이 성님 말인가. 아니 언제?"
"누군지 저야 알겠습니까. 그렇게만 전하면 아실 게라면서 구월산서
만나자구 하십디다. 새달 초하룻날 구월산으루 오시라구 하십디다."
우대용은 공연히 마음이 설레는지 뒷짐을 지고 마루를 서성대었다.
"새달이라면 이제 겨우 열흘도 못 남았군. 구월산이라면 여기서는
한발만 성큼 내디디면 산의 초입인데 어서 야거리를 띄워라. 허사포
로 오를란다."
대용이 일찍이 해주감영 옥에 갇혀 있을 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대
시수로 함께 지내었고, 또한 같이 대근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생사지경
을 겪었으니 길산과는 남다른 우애와 실로 혈육 같은 정이 있었다. 대
용이 보기에도 길산이 몇몇 의형제와 다른 점은 그가 뭔지 이해 못할
어떤 뜻을 향하여 꾸준하게 자기를 성숙시켜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 때
문이었다. 옥에서 나왔을 때 길산은 그전의 죄수 시절보다 훨씬 다른
사람으로 변하였고 그가 돌연 집을 떠나 금강산으로 향했던 일도 예사
스런 일로 보이질 않았었다. 그는 늘 녹림당 이상의 무엇인가를 염두
에 두고 있는 듯 여겨졌다.
"허사포에 가시려면 해가 진 다음이 안전할 듯합니다. 거기는 진영
이 있어서 해안을 파수하고 있습니다."
대용은 자신이 말을 꺼내놓고도 박성대가 그렇게 일러주는 소리를
듣고서야 펀뜻 깨달았다. 뒤늦게 석범철이가 그가 잊고 있던 일을 환
기시켜주었다.
"물치가 곧 돌아을 텐데 사행선 일은 이제 와서 그만두지는
못하십니다."
"그렇군... 앞으로 날짜는 넉넉하니 일을 마치구 떠나도 별 차질이
없겠구먼."
하고 나서 대용이 송도 상단의 사내에게 물었다.
"우리 아주머님은 아직 산달이 멀었다던가?"
"웬걸입쇼, 아주 국색으로 자랄 귀한 따님을 보셨지요."
귀례 아씨는 이미 박대근의 아내로서 딸을 낳았고, 대근은 배대인의
뒤를 이어 임방의 태행수가 되어서 각처 상고들을 지휘하고 감독하느
라고 송도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성님만 응달장군으로 남겠습니다. 피차에 열없는 노릇
이올시다."
석범철이가 은근히 우대용의 미혼을 놀려대었다.
돛점에 배가 귀항한 뒤에 한참이나 지나서 요망대에서 외치는 소리
가 들려왔다.
"동남방에 거룻배 한 척이오!"
우대용이가 고개를 들어 산채 뒤로 우뚝 솟은 망대를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허사포에 나간 정탐선인가..."
곁에 앉았던 석서방이 마루 끝으로 나아가 입에 손나발을 대고 되뇌
었다.
"우리 정탐선인가?"
"기다리오."
잠시 살피던 망보기가 다시 외쳤다.
"검은 신표를 휘두릅니다. 우리 배요."
거룻배에는 사공과 정탐꾼 둘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돛점이 가까
워지자 품에서 검은 수건을 꺼내어 머리 위로 휘저었던 것이다. 거룻
배는 역시 돛점의 서편 수로를 타고 월문을 통과하여 선착 연못으로
빠져들어왔다. 정탐군은 오솔길로 뛰어올라와 산채 본채의 사랑 마루
앞에 부복하였다.
"사행이 당관 객사에 당도하였습니다. 글피 아침에 허사포
를 떠날 예정이랍니다."
우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였다. 헌데 어찌 날짜가 늦춰졌다더냐?"
"감영에서 은의 차용이 늦어진데다 해주 부상 신복동의 차인들이 역
관들의 종인으로 가담하여 인가를 받는 데 시일이 걸렸답니다."
우대용과 송도 곁군 좌장과 박성대는 서로 마주보며 빙긋이 웃었다.
"역시... 대근이 성님의 제보가 틀림없었군. 글피라면 배를 정비하
고 총포를 단속하며 아이들이 쉴 여유는 충분하다. 너는 지금 곧돌아
가라. 석서방도 함께 가도록 하게.
상부사와 서장관과 역상들은 따로 배를 탈 터이니 어떤 모양의 배가
준비되어 있는가를 탐지하고, 물화의 내역은 어떠하며 수비하는 군사는
얼마나 되는가를 자세히 살폈다가 출범하기 전 미명에 돌아와 알리라."
석서방이 말하였다.
"저는 그럼 이번 일이 끝난 다음에 송도로 나가야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대근이 성님이 이번 사행에서 빠진 것은 그 신가놈
때문이고, 예전부터 구원이 많다네. 또한 사행선을 먹지 않구 우리 같
은 수적이 무엇을 먹겠는가. 다만 정부사는 나라의 중책을 지니고 가
는 것이니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안될 것이고, 물화도 전혀 상고들의
것이니 우리는 상고들의 배만 골라서 습격하면 되지."
곧 돛점의 정탐선이 석서방과 정탐군을 태우고 허사포로 되돌아갔
다. 우대용과 박성대는 졸개들을 독려하여 배를 끌어올리고 뱃전을 불
에 그슬리고 석회와 마유를 개어 곳곳을 바르도록 하며 돛대도 새것으
로 갈도록 하였다.
그리고 십여 일 동안 바다의 누습한 장기를 쐬어서 녹슨 호포와
총기들을 기름칠하고 화약을 새로 조제하였다. 우대용은 졸개들을
격려하여 말하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전원이 강화에 나가 달포쯤 놀고 오도록 해준다.
그뿐 아니라 산채의 경제가 좋아지면, 관서의 한적한 해변에 우리가
여염 살림을 할 만한 마을도 이루어낼 수가 있을 게다."
졸개들은 모두 우대용의 그러한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수적으로 결
당이 된 뒤로 대용은 부하들에게 한번도 식언을 한 적이 없었고 재물
분배에서도 공평무사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안전하
고 확실한 대상만을 손쉽게 습격하여 한번도 실패가 없었다.
사행이 부상들의 좋은 돈벌이 구실이 되었던 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다. 일찍이 역관의 과거인 역과도 역시 문무과와 다른
잡과와 함께 삼 년에 한번씩 치러졌는데, 삼 년마다 십구명의 역관이
쏟아져 나오게 되니 어언 육백여 명이 넘게 되었었다. 그러니 일일이
그들 모두에게 실직을 내릴 수도 없었고, 직제를 늘릴 필요도 없었다.
정직의 녹봉을 지급할 재정 능력도 없어서 권장지도라 하여 체아직
제도를 실시하였다. 명예직으로써 임시직을 준 것에 불과하였으니 녹봉은
전혀 없어 오로지 사행으로 나갈 기회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
이는 연경에 가는 역관이 사행 중에서 모든 재정적인 준비 감독의
직책을 맞게 되기 때문이었다. 사행에는 매행과 절행, 별행이 있었으므
로 몇년에 한번씩의 차례가 돌아왔던 것이다.
역과 출신이 대폭 늘어나 역관에게 실직 정관을 내려서 생계를 보장
해주지 못하고 임시로 사행이 있을 때 체아직으로서 대기시킴으로 해
서 몇년에 한번 돌아오는 사행 기간에는 그들은 큰 이익을 취하기 위
해서 대규모의 밀무역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서 그치지 않고 역관들은 그들이 직접 가지 않더라도 부자 형제간이면
물론이고 친척이나 동료 중에서 연경에 가는 편을 이용해서도 서로
모리를 탐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종자와 수행원들은 모두
명칭만 그럴 듯할 뿐이요 실상은 이들과 결탁된 사상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이 거의 나라에서 조장하고 오히려 도와준 결과로 이루어진 일들이었
다. 세종조에 금은의 세공이 면제되면서부터는 은으로 비용을
쓰지 못하게 금지시키고 한 사람에 인삼을 열 근씩 지니고 가도록
규정하였다. 그것은 일정액의 한도안에서 사무역을 허용한
셈이었다.
다시 인조조에 이르러 매인당 열 근의 정액을 괄십 근으로 증가 책
정하였고, 그 인삼을 열 근씩 여덟 꾸러미로 배정하니 이를 팔포무역
이라 부르게 되었다.
즉 팔십 근의 인삼 정액을 한계액으로 사행원에게 허용했던 사무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팔포의 정액은 반드시 팔십 근의 인삼만으로
따져지는 게 아니었고, 다만 당시에 인삼이 국내 생산물 중에서 가장
가격이 비싸고 교역상 유리한 물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이르러, 인삼이 비록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고는
있으나 상고들이 북경과 동래로 모두 빼내어 여염의 약용이 떨어져서
남북 두 곳 중에 어느 하나는 금지시켜야 한다고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종래의 인삼으로 충당되었던 팔포 정액은 은으로 충당하게
되었으니, 은은 당시의 시가에 맞추어 인삼 한 근당 스물다섯 냥으로
환산하여 팔십 근의 인삼 대신에 이천 냥의 은으로써 정액을 삼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무역자금의 전부는 아니었다. 각 군 아문에서 별포라
하여 따로이 무역자금을 내어 참가하거나, 공사를 빙자하여 무역
허가장과 같은 증빙 서류를 역관에게 만들어주고 역관들로 하여금
사무역을 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므로 막대한 자금이 정액 외에 더 첨가되었다. 이러한 각 아문의
무역권은 돈으로 사고 파는 이권이 되어갔다. 또한 국가재정의 공용 은을
빌려서 이자를 붙여 몇번에 나누어 갚아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근래의
사무역의 자금 융통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개 저들의 무역자금을 식리로써 빌려준 부서는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수어청, 호조, 병조와 진휼청을 비롯하여 개성부, 강화부,
평안감영 병영, 황해감영 병영, 의주부 등이었다.
이번에 해로로써 별행이 떠날 것이라는 소문이 송도 부상들간에 진작부터
낭자하게 나돌았다. 박대근은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않아서 개성부에
통자하여 무역권을 얻고자 하였으나 이미 해로 사행이니 장연이나 풍천서
떠날 것인즉 황해감영에서 자금도 나갔고, 그쪽의 해주 부상이 무역별장직을
따냈다는 것이었다.
무역별장이란 부상중에서 임시로 별장을 뽑아 재화를 관장케 하고 면세
거래하도록 해주는 특혜였으니 송도에서는 모두들 분히 여겼던 터였다.
아무튼 박대근은 돛점 일당들에게 진작부터 해로 사행의 일을 알려
두었으니, 해주 부상들이 낭패를 보고 우대용은 손쉽게 대금을 쥐게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실상 풍천이나 장연서 바닷길로 떠나는 일이
공공연해지면, 그가 의주와 동래로 대청, 대일 무역의 길을 넓히는 데
있어 지장이 많을 터였다.
우선 해로 무역의 길이 끊기고 육로 쪽이 번창해야만 더욱 많은 상고가
참여하여 외국인과 직접 무역을 하게 될 것이었다. 대근은 길산이
구월산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접하고는 당장 대용과 합류하여 함께
입산하고도 싶었으나 기간을 넉넉히 잡아 구월산에서 만나자 하였으니,
사실은 길산이 산채의 형세를 늘리고 주변백성들의 민심을 사는 데
그 탈취한 자금의 일부가 필요하겠기 때문이었다.
대근은 자신의 재화가 무역권을 획득하여 북에서 의주, 남으로
는 동래에 이르기까지 거대하게 늘어날 때면 가히 대병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우대용으로서도 일반 상선이 아니라 나라의 사신 행차를 습격하는
일이 어떤 결과가 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단순히 해안을 기찰하고
전선이 출동하여 여러 곳의 섬을 뒤지는 일로는 끝나지 않을 듯하였
다. 당분간 연안 해로에 출몰할 수도 없을 것이며 수적질은 적어도 일
년쫌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정탐군 물치와 석범철은 거룻배에 늘 지니고 다니는 어망과 고기망
태를 각각 짊어지고 허사포에 올랐다. 객사는 운유방에서 당고개를
넘어서 있으니 포구에서는 이십여 리쯤 떨어져 있었다.
객사주변에는 고목들이 울창하고 그 아래 빈터가 널찍하여 인마 수백
이 머물기에 맞춤하였다. 환관교목이라 하여 객사 주변의 은행나무숲은
풍천서도 가장 볼 만한 것들 중의 한 가지였다.
은행나무 뿌리 근처에는 간혹 불탄 자리가 남아 있는 곳도 있었으니
성종조 육년 단옷날에 왜구들이 배를 타고 포구에 들어와 밤에 읍내를
들이치고 방화 약탈하였던 흔적이었다. 또한 이쪽 해상에는 청이나 왜
의 황당선의 출몰이 잦았고, 간혹 외떨어진 마을이 약탈을 당하는 경
우도 있었다.
상사와 부사는 해주감영에서 송영 겸 수검 나온 도사와 더불어
풍천부사의 주연에 나가 있었다. 객사 앞의 숲에는 곳곳마다 모닥불이
피워져 대낮같이 밝았는데 마필과 봉물짐과 선적할 물건들이 종류대로
분류되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역관과 상고들이 객관 마루에서 기생들과 술을 마셨고, 또한 아랫것들은
그들대로 사행을 바라고 몰려든 창기들과 노닥거렸다. 물치와 석서방은
객사 앞에 임시로 차일과 멍석만으로 개점한 가가 들어가 저녁밥과
술을 청하고는 노자들과 슬슬 안면 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진안주는 바닷가인지라 주로 해물인데 생선 굽는 냄새가 진동하였고
기다란 흙화덕 위에는 석쇠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행을 따라온
상것들로 보이는 사내들이 몰려와 주모와 농지거리들을 하였고 중노미
대신 시중들러 나와 앉은 창기들은 무슨 음담을 들었는지 자지러지며
꼬집는 모양이었다.
"아니다, 이건 정말이라니까. 이 코를 봐라. 자고 이래로 상말에 코
가 크면 양물이 크다는 것은 첫말이 아니니라."
"아이그, 그래서 내가 진작부터 코 큰 사내 한번 만나서 어우러지기
가 소원이더니 코 큰 놈 코값 못한다고 생기기는 곡 대추알 모양인데
그것마저 풀기가 죽어서 손가락으로 정기면 툭 터져버리겠습디다."
곁에 앉았던 자가 초를 텄다.
"얘얘, 그런 소리 말아. 옛말에도 코로 한다구 되어 있느니라. 코
큰 놈은 원래가 그 코로 방사하는 게야."
창기들이 갈갈대며 요절을 하며 뒹굴었다.
"그러면 코 박고 미음 뒤집어썼다는 말이 맞는 게요."
코 큰 사내가 양물 자랑을 하려다가 오히려 망신당할 참이었다.
"예기 이년들..."
하며 코를 킁킁대는데 곁에 앉은 동료들이 떠들었다.
"허, 이 사람 미음을 먹었으면 입맛을 다셔야지, 코는 왜 킁킁대
나."
"쇤네가 비단중치를 예쁘게 만들어드릴 테니 그 귀한 코를 싸고 다
니시옵소서. 난다 하는 계집들이 줄을 설 테지요."
곁에 앉아서 참예할 기회만 노리고 앉았던 물치와 석서방은 슬쩍 그
쪽 좌석으로 다가앉으며,
"거 재담이 아주 걸찍하외다. "
"나두 한마디 거들어 볼까."
각각 한마디씩 하노라니 모두 사행길에 따라 나선 상것들로 여기고
금방 걸걸대며 자리를 좁혀준다.
"내가 고향이 강화요. 형제가 셋이 되는데 저는 그중에 둘째지요."
석범철이가 마포 서강지간을 휘젓고 다니며 봉놋방에서 패설깨나 씨
부린 솜씨로 점잖게 운을 떼었다.
"우리 형제가 일찍이 송도의 가난한 행상집 딸 삼형제에게 한날 한
시에 장가를 들었거든. 아우가 이십이요, 내가 삼십 줄인데 형님은 오
십이 넘었소그려.
하루는 큰댁 제사에 모두 모이게 되었는데 아녀자들끼리 저희 서방
얘기들을 합디다. 우리 계수씨가 말하기를, 남자의 양물이 반드시 뼈가
있더라고 그럽디다. 헌데 우리 여편네가 종알거리기를, 아니다 나는
심줄이 있는 것 같든데, 하니까 형수님이 나서며 손을 홰홰 젓습디다.
너희들 모르는 소리 말아라. 남자의 그것은 오직 껍데기와 고기뿐이니라.
그때 나하구 나란히 앉아 그 얘기를 들었던 장인이 한숨을 쉬며 말합디다.
우리 집안 형편이 일시에 기울었는지라 둘째와 셋째가 모두 뼈맛을
보지 못하니 참으로 한스럽도다."
석범철이가 능청스레 주워섬기니 모두들 손가락질을 해대며 박장대
소를 하였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상사람들끼리의 인정에 횝쓸려 들어
갈 수가 있었다. 물치와 석범철이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섞여 들어갔는
데 그들 중에 거먹초립에 무릎치기 차림의 역졸인 듯한 자가 맞장구를
쳤다.
"좌중에 내 재담을 알아들을 자가 있을까는 모르겠소만, 한마디 하
지. 호주 봉당묵이요... 술을 좋아하며, 만나면 마땅히 먹고, 미인
견즉필이라... 미인은 보면 곧 붙더라. 평생에 차사연이러니... 평생에 이
일을 벼르더니, 금일 양득지라... 오늘 둘 다 얻으니 좋의. 대개 문자
속이라면 이 정도는 있어야지."
좌중 사람들이 개중에는 어안이 벙벙한 자도 있었으나 몇몇 노자와
마부는 연신 바닥을 치며 웃어대었다. 석범철이가 은근히 목소리를 낮
추어 말을 캐어본다.
"보아하니 이렇게 저희들과 동석할 분이 아니신 듯하오."
"뭐 우리 같은 잡배가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
"실은 저희는 강계의 상고들이올시다. 혹시 사행에 연이 닿을까 하
여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만..."
석범철이가 미끼를 던지니 그자는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먼저 술자
리에서 일어났다. 석서방도 소피를 보는 척하고 그를 따라 나섰다. 그
사내가 객사 앞을 떠나 으슥한 나무 밑에 가서 기다리고 섰다가,
"용무가 무엇인가?"
묻는데 다짜고짜로 또라진 반말지거리였다.
"나는 해주 상단의 차인 행수 되는 사람이다. 어서 말해보라."
그는 아까 좌중에서 하던 태도와는 달리 우락부락하고 예의없이 말
하였고, 석범철이는 당황하지 않고 공손히 대답하였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는 봉산서 그저 돈 백 냥이나 들고 나는 물상
객주를 하고 있으나 이번 사행에는 감히 수행을 넣을 길이 없어 이렇
게 구경이나 해보겠다구 온 것입니다. 차인 행수로 오셨다니 이에서
더욱 반가을 데가 없습니다그려."
"우리 상단에서 수행한 것은 관에서 모두 허가된 일이고, 우리 상단
서 별장직까지 따내었으나 남의 눈도 있어 피치 못하여 종자의 시늉을
하는 걸세, 무슨 물건인가?"
"예, 인삼 백 근이올시다."
"무어, 인삼 백 근?"
차인 행수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차근차근히 물었다.
"강계라면 의주 육로를 바랄 터인데 어찌 해로를 뚫으려는가?"
"그러니 이렇게 행수 어른과 은밀히 줄을 달려고 하는 게 아닙니까.
해서의 사행은 송도와 해주에서 주도권이 있다고는 하나 저희가 어찌
사행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있겠소이까.
행수 어른 혼자만 아신다면 나중에 당물을 무역하여 오실 제야 어느
댁으로 가는 짐인지 모를 것입니다. 슬쩍 객사나 역에 떨구고 가시면
되겠지요."
"인삼이 백 근이라... 무슨 물건을 원하는가?"
"물론 백사와 주단입지요."
"좋다. 물건은 지금 가지고 왔는가?"
"사처방에 보관해두고 있습니다. 문서나 직접 수결하여 써주시면 곧
내드립지요. 나중에 돌아오실 제 제가 직접 마중 나왔다가 물건을 받
고 곧 문서를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차인 행수라면 상단의 봉물과 인원을 관리 감독하는 처지라 무역의
이익은 상단의 이익이요 그 개인의 이득이 아니었다. 그런 고로 대개
들 자기 나름대로 다른 상고들의 무역을 대행하여야 사리를 취할 수가
있었다. 행수는 역관들이 그러는 대로 위탁해오는 각 중소 상인들의
무역 위임을 맡게 마련이었다.
"사처가 어디에 있는가?"
"운유방의 차가 객주입니다."
"내일 그리로 찾아가겠다."
일단 첫번째 타협은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석범철이가 정말로
인삼 백 근을 무역해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사행 날짜와
물품의 내역이며 사행 인원과 수행원의 승선 배치 등을 자세히 알아내
려는 꾀였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해서 가장 물품이 실하고 정사와 부사가 타지 않은 실속
있는 무역선 한 척만을 습격하려는 것이었다.
이튿날 석범철이는 물치를 허사포로 보내어 정박한 배를 탐지케 하
는 한편 백 근의 인삼을 준비하기에 고심하였다. 우선 돛점으로 사공
을 보내어 인삼 열 근을 급히 내오도록 하고, 나머지 구십 근의 인삼
은 굵기와 모양이 그럴 듯한 도라지로 채우도록 하였다.
열 근의 인삼을 포장하지 않고 채롱에 보기 좋게 벌려두고 나머지는
잘 포장하여 섞어두었다. 과연 중화참이 지나서 차인 행수 되는 사내가
사처방에 찾아왔다.
"어이구 어서 오십시오. 오전 내내 좌불안석하며 기다렸습니다."
사내는 얼른 들어와서 문을 꽁꽁 닫고 문고리까지 걸어 잠그고는 다
짜고짜로 채롱을 끌어당겼다.
"이게 모두 인삼인가?"
"보십시오. 아주 상등입니다. 강계에서두 기중 약이 탄 골짜기에서
취한 물건입지요."
차인 행수라면 첫눈에 물건의 질을 알아보는 게 직업이라 얼른 한
뿌리를 들어 뿌리와 몸통이 상한 데가 없는가를 살피고 냄새도 맡아
보았다.
"중품이로군."
석범철이는 펄쩍 뛰었다.
"인삼 처음 보십니까. 강계 상이라면 연경에서는 송도 삼보다두 높
이 쳐줍니다. 굵기를 보십시오."
"속이 실한 것 같지 않은데."
"찐 것이 아직 덜 말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행수가 방안의 포장된 물건들을 죽 둘러보았다.
"저것들도 모두 이와 같은가. 좀 봐야겠네."
석범철이는 채롱을 탁 거두어가면서 역증을 참지 못하는 시늉을 내
었다.
"허... 답답한 일이로군. 가져 가셨다가 시세가 맞지 않거나 물건이
좋지 않다면 돌려주면 되지 않습니까. 저희가 어르신께 물건을 위탁할제야
서로 믿고 살자는 것인데, 그리 의심이 많아 무슨 무역을 하겠다구
그러십니까. 자, 보십시오."
하면서 단단히 포장된 꾸러미들을 거칠게 뜯어 보였다. 쌓여 있던 도라지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게 상등품이 아니라면 백년 묵은 산삼도 보기에 따라서는 칡뿌리
가 되겠지요."
차례로 뜯어 보이는데 한결같이 굵기가 실해 보였다. 행수는 자신의
공연스런 까탈이 열쩍어져서 턱을 쓸며 앉았다가 자신없이 중얼거렸
다.
"내가 의심하여 그리하는 게 아니라, 장사 흥정이란 다 그런 거 아
닌가. 마음을 풀게. 지필묵을 가져오게. 물품 보관증을 써주고 인삼
은 내가 맡을 테니."
해주 상단의 차인 행수가 까다롭게 굴었던 것을 계면쩍어하면서 당
장 매듭을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석범철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것이었다.
"기왕에 이렇게 꼼꼼히 따지시니 오히려 우리 쪽에서 트미하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아직 수검도 끝나지 않았고 날짜가 있으니 배에 오
르실 제 넘겨드리도록 합지요. 보관증은 미리 써서 지니고 계십시오."
"허 이 사람, 내가 좀 따졌다구 그러는 겐가?"
"아니올시다. 저화들이 따져보건대 만일에 승선 인원에 차질이 생긴
다면 물건은 넘겨드리나마나 아닙니까?"
행수는 까짓 이틀간을 참지 못하는 바 아니고 물건만 받으면 되는데
흥정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에라 그만두어라, 하고 싶은 것을 국 참
고 말하였다.
"여보게 자네두 딱하네, 수검받지 않은 물건을 어떻게 배에 싣는단
말인가? 내일 오전에 수검이 시작되니 우리 물건 틈에 끼여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럼 이렇게 하십시다. 우리 차인을 하나 붙여드립지요. 그가 우리
물건의 수검을 받도록 해주십시오. 물건을 넘겨드렸다가 행수 어른께
서 승선 인원에서 빠지면 피차 낭패가 아닙니까?"
"좋도록 하게. 여하튼 보관증을 써두어야지."
석범철이가 지필묵을 내었고 행수는 보관증을 썼다. 석범철이가 말
하였다.
"반쪽씩... 어떻겠습니까."
"그러지."
행수는 방금 써갈긴 보관증을 반으로 잘라서 내밀었다.
"제가 물건을 넘겨드리면 나머지 반쪽을 넘겨주셔야 합니다."
"아무튼 임자는 송상 뺨치게 따지는군. 장사는 그렇게 해야지, 승선
하는 날 포구에서 만나세."
행수가 일어나자 석범철이가 말하였다.
"우리 차인을 시켜서 곧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무역해올 물건의 흥정을 않는 것은 따지나마나 반분하게 되
어 있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었다. 백사와 주단을 현지 가격에 따라
바꾸어 오면 화주와 무역인이 번씩 물건을 나누어 갖게 되어 있었다.
석범철이는 무역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고 그래서 애초부터 도라지
뿌리를 포장하였던 것이다. 사행 전반에 걸친 내막을 소상히 알아낸
다음에 보관증이 어쨌건 물건을 넘기건 알 바가 아니었다. 물치가 객
주로 돌아오자 석서방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였다.
"해주 신생원의 물건이 어느 배에 실리는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
한 일이다. 그리고 정사와 부사 및 서장관은 어느 배에 오르는가도 알
아내야 한다. 그 다음에 호송하는 수군의 배가 어떤 규모이며 어느 만
큼 따라가는가도 알아내야 하고, 배에 탄 군졸은 몇이며 배의 무장은
어떤 것인가도 알아야지."
"염려 마십시오. 수검장에만 참례하여 있으면 물품의 내역이나 신
생원네 봉물짐은 어떻게 구분될지 소상하게 알게 되겠지요. 그리고 될
수만 있다면 포구에 대어진 사행선에 올라 샅샅이 살퍼겠습니다."
"어서 인삼짐을 싣구 가게."
그들은 흐트러진 가짜 인삼짐을 다시 탄탄하게 포장하여 열 꾸러미
로 나누었다. 물치가 말 두필에다 다섯 꾸러미씩 싣고서 객관으로 나
아갔다.
인삼 백 근이면 이천 냥이 넘는 큰 재물이고 쌀로 따져도 천오백 석
쯤 되는 셈이었다. 아무리 사행에 따라붙은 상단의 차인 행수라 할지
라도 그만한 재물이면 역관들도 잡지 못할 자금이었다.
따라서 행수혼자서 입송시키기에는 어려웠고 어차피 역관과 짜고서
관문을 받아내야 하였다. 그러므로 사행의 직접 관장 부서인 해주감영의
임시 무역 별장으로 수행하는 신생원에게는 알리지 않아야 행수가 남겨
먹을 수 있었다.
즉 역관과 행수와 화주가 짜고서 삼분하려는 생각이었다. 물건은
도착되어 객관 앞의 사행 봉물짐들 틈에 섞였고, 물치는 행수의 차인을
빙자하여 마음대로 사행하는 노자나 수행원 틈에 끼여 이리저리 살피고
다닐 수가 있었다.
인삼은 원래 은으로 대치시킬 정도로 국외로의 유출을 절약하게 되
어 있으므로 간단히 포장하고 겉에는 면포로 싸서 다시 포목인 듯 가
장하였다. 물품의 내역을 살피니 은과 피물, 한약재, 지방 특산물,
잡물 등속이었다.
돛점 일당들이 노리는 것은 무역 은이니 그 은이 어느 배로 실릴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 물치로서는 급한 일이었다.
여하튼 별행의 수검 때에 꼭 살펴두어야 하였다. 사행선 출발 전날에
물건은 미리 배에 실어두어야 하므로 수검이 시작되었다.
서장관과 해주감영의 도사 풍천부사 등이 함께 입회하여 짐을 살피
는데 공용 은과 방물 등은 따로 두었으므로 무역별장이 관장하는 물품
과 관문을 가진 각 군 아문의 물품을 조사하였다.
대개 사상 무역은 거의 묵인된 일이었으므로 그 물품의 내역
만을 적고 통과되었다. 그들은 일일이 화주가 되는 아문의 머리 글자
를 포장한 짐 위에다 적어넣었고 번호를 붙여나갔다.
그 다음이 인원점검이었다. 그것은 부서가 셋으로 나뉘는데 참사와
역관직과 잡직이었다. 참사에는 정사와 부사, 서장관이 각각 한 명에다
일곱 명의 군관이 따랐다.
역 관직에는 당상관 두 명과 통사 두 명, 질문종사관 한명과 그리고
물건을 관장하는 종사관이 여덟 명에 무역 은을 관장하는 종사관 세 명,
식량을 관장하는 종사관이 두 명과 청학직과 별차와 군관이 각기
한명씩이었다. 그리고 잡직에는 의원과 화공필사며 노자와 종복, 마부, 사공
등속이 딸려 있었다.
수검이라 해보았자 정사, 부사는 그들 나름대로 한양 궁가와 세가의
무역 위임을 받았으며 역관은 하나같이 사상인과 결탁되었고, 이에 사
행 전반의 뒷바라지를 해주고 무역별장으로 뛰어든 해서감영 파견의
상단까지 있었으니 서로가 피차일반이라 형식에 불과한 절차였다.
다만 승선하는 데 편리하도록 미리 준비하는 일이었을 따름이었다.
허사포에 들어와 있는 배가 세 척이라 하니 정사와 부사는 외교문서
를 각기 일 부씩 지니고, 제일 사행선과 제이 사행선에 나누어 타도록
정해졌는데, 이는 유사시에 다른 한 사람이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서장관은 제삼 사행선에 타도록 정해졌는데 이 배에 무역별장이
동승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상 무역품의 전부가 그배에 실려질 것이었다.
서장관과 무역별장이 타는 배가 돛점 수적 일당의 목표가 되는 셈이었다.
수검이 글나자마자 포구까지의 봉물 운반작업이 시작되었고 물치도
차인들 틈에 끼여 인삼짐을 마필에 싣고서 허사포로 나아갔다.
행수가 봉물 운반 행렬을 지휘하는데 행렬의 앞과 뒤로는 풍천부의
군졸들이 나와서 혹시 허가 없는 무역품이 중도에서 끼여드는가를 감
시하였다. 허사포에는 사행선 세 척과 수군의 전선 한 척, 병선 두 척이
함께 떠있었다.
수군의 함선들은 아마도 사행선을 호위할 모양이었다. 사행선은 모두
조선이었으니 상장 부분이 닻판밖에 없었으며 선미 부분은 오리의 꽁지처럼
빠져 있고, 본판의 길이가 오십칠 척, 선복 부분의 넓이가 십삼 척, 선두
부분의 넓이가 십 척, 선미가 칠 척 오 촌이며 높이가 십일 척, 선두 높이가
십 척, 삼판이 열한 장에 본판이 열한 장이요 가로 지름대가 열일곱 장으로
되어 있는 규모였다.
물치는 다른 짐꾼들을 따라서 가짜 인삼짐을 짊어지고 널판자를 타
고 배에 올라 화포나 그외의 무장이 없는가를 살폈다. 수군 화포장이
셋이 있었는데 낡은 포가 선두에 장치되어 있었다. 포는 육척짜리 한
대뿐이었다.
물치가 선복에다 짐을 쌓으면서 살피니 선미 부분에는 격벽으로 갑조되지
않은 단조 널판자였다. 아마도 속도를 고려하여 그렇게 건조한 모양인데
정통으로 후미에서 맞기만 하면 첫 방에 뚫어질 듯하였다. 행수가 갑판에서
내려오는 물치를 기다렸다가 말하였다.
"자아 틀림없이 실었겠지. 돌아가서 주인께 알리고 사행이 돌아오려
면 석 달은 걸리니 일단 의주로 가 있다가 석 달 뒤 그믐께에 객주를
잡아놓으라고 하여라. 보관증의 반쪽이 여기 있다."
"예,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리겠습니다. 모쪼록 좋은 물건 많이 만나
서 횡재하시고 원로에 몸조심하십시오. 헌데... 저쪽 수군배들은 호
송해주지 않나요?"
"너희 물건 잃을가봐서 그러느냐. 염려 마라, 수군의 함선들이 적해
까지 호송하고 그 다음 백해에서는 우리만 건너간다."
"적해는 무엇이고 백해는 또 무엇이오?"
"적해는 초도를 훨씬 지나 중국의 산등과 해서의 중간 지점에 바다
가 붉은 황토빛으로 보이는 어름이요, 백해는 그 너머부터 뿌연 탁줏
빛으로 바뀌는 어름이라 거기서부터는 마중 나온 청선이 우리를 인도
하게 된다."
"그러면 비용이 많이 들 텐데 어찌 해로를 탑니까?"
"별행이라 날짜가 촉박하기도 하거니와 비용은 육로와 비슷하다. 다
짐하니 아예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행에 물건을 보냈다구 떠벌이지 말
아야 한다."
물치는 수군 함선이 먼 곳까지 호송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만 낙담이
되었다. 아무리 날래고 무장 든든한 용선을 가졌다고는 하나 돛점 수적의
배 한 척이 수군의 전함 세 척을 당할 수는 없겠기 때문이었다.
"저 배 세 척이 모두 수행합니까?"
"아니다, 병선 두 척은 초도가지만 나갔다가 돌아오고 전선만이 호
송한다."
물치는 그제서야 일단 해볼 만하다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물치는
또 캐물었다.
"병선은 어째서 돌아가지요?"
행수는 약간 짜증난 듯 눈살을 찌푸리고 대답하였다.
"보면 모르느냐? 저런 배로서는 대해를 가는 것이 무리다. 병선은
원래가 연안의 기찰선이니 당연하지 않느냐. 이제 물건도 실었고 무역
도 잘되겠으니 마음놓고 돌아가거라."
사행선은 명일 미명에 출범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물치의 보고를
받은 석범철은 허사포에서 우물거릴 필요가 없었다. 곧 거룻배를 띄워
일로 돛점으로 향하였다.
저녁 하늘에 고기비늘 같은 구름이 가득하였으니 아마도 내일의 날씨는
바람도 잔잔하고 쾌청이 될 듯하였다. 돛점으로 돌아가 우대용에게
정탐한 바를 낱낱이 아뢰었다. 우대용이도 호위선이 전선 한 척이라는
말을 듣고는 안색이 밝아졌다.
"그만하면 우리가 한번 대적할 만하다. 용과 고래의 싸움이 되겠고
나."
벌써 며칠 전부터 배를 빈틈없이 보수하고 어유와 석회를 새로 발랐
으며, 호포에는 기름을 치고 포구를 번쩍이도록 닦았는데 화승총 열
자루도 잘 손질 해두었다. 박성대는 석서방과 물치가 정탐하러 뭍에 오
른 뒤로 수적 일당을 배에 태우고 정박한 채로 조련을 시켰다. 맨 처
음에 돛을 내리는 것이 순서였다.
"돛을 내려라."
두 사람이 각각 돛대에서 용총줄을 끌어당기면 도르래를 통하여 줄
공불락이올시다. 가까울수록 우리가 유리합니다. 전선은 바람이 자면
움직이지 못하고 또한 바람이 거세면 조종하기가 힘이 듭니다. 적이
둔하고 우리는 민첩하니, 공격할 적에는 전후 좌우로 방향을 바꾸어
적의 화력을 분산시켜야겠지요. 전선은 모두 갑조법으로 건조되어 격
벽 처리가 되었으니 포 단방으로 침수를 시키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우대용이 말하였다.
"첫 방은 사행선의 선미를 부수어놓고 두 방은 전선의 다락을 날려
버린다. 황룡포와 청룡포를 다시 장전할 동안에 우리 배는 적의 화력
을 피하면서 접근하여야 한다. 적의 총통을 피하려면 선미로 다가들어
가야겠지.
총통은 무겁고 동차가 달려 있어 함부로 옮기기가 어렵다. 대개
좌우 뱃전에 두 대씩 설치되어 있으니 먼저 적이 방향을 바꾸지 못하게
하려면 닻판 부분을 부수어야 한다. 키가 떨어져 나간 뒤에는 선복에다
겹사를 두어 차례 퍼붓고 나서 배의 밑창이 뚫어져버리면 우리는 그
배를 버리고 사행선에 오르면 된다."
공격의 순서가 정해졌고, 공격 지점은 초도를 지나 삼십여 리쯤 나
아간 큰 바다 한가운데로 정하였다. 나머지 두 척의 병선은 초도 어름
에서 되돌아갈 것이며, 그만큼 나간다면 접전이 일어나 포성이 울린다
할지라도 육지에서 알아채지 못할 것이었다.
우대용은 관과 직접 대적하는 일이 전에 없던 노릇이라 전투보다는
뒤에 닥칠 기찰이 마음에 걸렸다. 대용이 중얼거렸다.
"우리 복색으로는 나중에 기찰이 귀찮을 텐데..."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제가 벌써 검은 천으로 청인의 의복을 준
비시켰습니다. 그러니 청인 시늉을 내야지요.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일이 끝난 뒤 달아날 때에도 서방으로 나아가서 완전히 수평
선 너머로 자처를 감춘 뒤에 멀찍이 돌아서 방향을 돌이켜야 할 것입
니다."
그들은 습격의 계획을 빈틈없이 마무리지었다.
동녘이 부옇게 밝을 즈음하여 허사포에서는 사행선이 닻을 올리고
있었다. 풍천부사와 해주도사가 부두에 배웅 나왔고 악공들은 타루악
을 연주하였으며 기생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배따라기를 불렀다.
금년 신수 불행하여 망한 배는 망했거니와 봉죽 받은 배 떠들어오네
봉죽을 받았단다 오만칠천 냥 여덟 곱절 받았다누나 지화자 좋다 어그
야 더그야 지화자 좋다
돈 얼마나 실었음나 돈 얼마나 실었음나 오만칠천 냥 여덟 곱절 받
았다누나
월명 사창 달 밝은 밤에 안팎 인물이 처절철 넘누나
뱃주인네 아주머니 인심이 좋아서 금가락지 팔아서 술 받아 오누나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만경창파에 배 띄워라 어그야너야 아하 어그야
너야 아하 어그야너여 어허어허 어허어허야
간간 간다 아하 배 떠나간다 아하 순풍이 분다 아하 돛 달아라 아하
어야어야 어그야디야 어그야디야 어야어야 어그야차 어그야차 어야
어야 어야차어야 어그야디여 어허어허야
요내 춘색은 다 지나가고 황국 단풍이 돌아를 왔구나 지화자 좋다
천생 만민은 필수 직업이라 각각 벌어먹는 꼴이 달라
우리는 구태여 선인 되야 타고 다니는 것은 칠성판이요 먹고 다니는
것은 사잣밥이라 입고 다니는 것은 매장포로다
요내 일신을 생각하면 불쌍코 가련치 않단 말이냐 지화자 좋다
이선하여 배를 타고 만경창파 대해 중에 천리 만리로 불려를 갈 제
양쪽 돛대는 지끈 뚝딱 뱃머리는 빙빙 정신은 아득하야 삼흔 칠백이
흩어질 제 난데없는 해풍이 일어나 파도소리는 천지를 뒤집는데 동서
남북이 어디로 붙었으며 평양에 대동강은 어디로 간단 말이냐 지화자
좋다
점점 휘어 내려를 갈 제 닥치나니 섬 중이로구나 그곳을 바라보니
별유천지 비인간 지화자 좋다
도로 휘어 내려를 갈 제 일주야 십이시에 향방을 못 찾으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제 상어란 놈은 발목을 잡아댕기고 갈매기는 떼를 지어
요내 일신 생각하니 어찌 아니 가련탄 말이냐 지화자 좋다
점점 휘어 내려를 갈 제 천행으로 지나가는 배를 만났구나 사람 살
리소 달려를 드니 무지한 선인들은 상앗대로 밀치면서 하는 말이 선중
에는 무인정이라 도로 나가라 하는 소리 일촌 간장이 봄눈 녹듯 하도
다 지화자 좋다
점점 휘어 내려를 갈제 비회심사 우울한데 팔다리는 늘어지고 배는
고파 기진한데 고성대곡하는 소리에 해중이 뒤눕는 듯
집에서 풍편에 넌짓 듣고 자는 장손아 일어나 나가를 보아라 저기서
강중으로서 너의 아바지 음성이 나나보다 네 가보아라 지화자 좋다
부모동생 일가친척 처자권속이 다 나오면서 여보 여보 이게 웬일이
란 말요 지화자 좋다
여보 급급한 말로 이내 말씀 들어보소 이제는 밥을 빌어다 죽을 쑤
어 먹고 삼순구식은 못할망정 다시 수상 장사는 돛 감아둡시다 지화자
좋네
여편네의 말을 듣고 뭍웨 올라 살림하니 대해가 눈에 삼삼 에따 모
르겠다 선인이 배를 버리랴 다시 타고 나오는구나 지화자 좋다.
풍악과 노래가 부두에 낭자한 가운데 두 척의 병선이 좌우에서 출범
하였고 잇달아 세 척의 사행선은 차례로 떠나갔으며 맨 뒤에 수군이
도열하여 기치창검을 번쩍이며 전선이 떠나갔다. 선단은 포구를 따라서
우회하여 만을 천천히 벗어나갔고 돛은 바람에 한껏 부풀어서 펄럭거렸다.
선단이 접도를 지날 때 건너편의 초도 춘운산 위에는 붉은 아침놀을
담뿍 받은 구름이 높은 봉우리를 이루어 떠 있었고 푸른 솔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사행선단이 초도를 지날 즈음하여 돛점에서는 요망대로부터 전갈을
받아 뒤늦게 용선이 떠서 수문을 빠져나갔다. 가볍고 날렵한 용선은 돛
두 폭에 바람을 받자 살처럼 치달려갔다. 돛대 위에는 박성대가 몸소
올라가 있었으며 우대용은 이물간의 사령석에 앉아 있었다.
"사행선의 자취가 보입니다."
"어느 방향인가?"
"서남방입니다."
박성대와 우대용이 위와 아래에서 서로 주고받았다.
"속력을 늦춰라. 그리고 이 간격을 유지하도록 해라."
용총줄을 당겨 앞돛을 줄였다. 박성대는 뒷돛에 올라앉아 사행선 쪽
을 놓치지 않으려고 주시하고 있었다. 병선이 되돌아갈 때까지 그들은
접근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서방으로 갑니다."
"정서 방향이다."
용선은 선단과 수평선이 육안에 들어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계
속 추적하였다. 이윽고 박성대가 외쳤다.
"선단의 좌우로 병선이 방향을 돌렸습니다. 되돌아옵니다."
"어느 방향인가?"
"선수가 동북방입니다"
우대용이 키잡이에게 지시하였다.
"서남방으로 돌려라. 돛을 모두 올리고 전속으로 병선의 시계를 벗
어난다."
접혀졌던 앞돛이 다시 팽팽하게 당겨지고 배는 왼편으로 주욱 빠져
나갔다
"거리는 얼마쯤인가?"
"겨우 돛대가 보입니다."
"계속 서남방으로."
한참 뒤에 박성대가 외쳤다.
"병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다시 서 북방으로 돌려라."
그들은 병선이 방향을 돌려 뒤로 빠져나갔음을 알고는 다시 추적하
였다.
"보이는가?"
"안 보입니다."
"계속 서북방으로 나가자. 놓치면 공연히 뱃놀이나 하고 돌아가는
셈이다."
그러나 용선은 한참이나 우회하였고, 처음부터 일정한 간격을 유지
하였으므로 선단은 훨씬 앞서 가 있거나 또는 전혀 틀어진 방향에 있
는 모양이었다. 우대용이 외쳤다.
"다시 정서 방향으로 계속 항진해라."
큰 바다로 나올수록 파도가 높아져서 선수에 부딪치는 물결이 뱃전
으로 넘치고는 하여 대용의 옷은 흠뻑 젖어버렸다. 박성대가 외쳤다.
"좌현 서남방에 선단이 보입니다."
"거리는?"
"수평선에 닿았습니다."
"인제 됐다. 다시 앞돛을 내리고 간격을 유지해라."
우대용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정오가 지나서 노리던 먹이를 천
천히 요리할 작정이었다. 박성대는 여전히 돛대 위에서 감시를 계속하
였다.
사행선단은 일단 방향을 잡고는 오후까지 정서 방으로 곧장 항해중이
었다. 해가 중천으로부터 차차 선수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을 올
려다보던 우대용이가 드디어 지시하였다.
"앞들을 올려라."
그것은 속력을 내어 접근하여 전투를 개시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돛대가 세워지고 돛이 팽팽하게 펴졌다. 바람을 받은 배의 속력이 외
돛을 올렸을 때보다 훨씬 빨라졌다. 처음에는 수평선 위에 거뭇한 점
으로 보이던 사행선단이 차차 삐죽삐죽한 돛대와 배 모양으로 변하였
다. 그때쯤에는 저쪽에서도 이미 이쪽의 배를 보았을 것이 틀림없었
다.
"엎드려라!"
우대용은 저들이 가까이 갈 때까지 육안으로 이쪽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뱃전 너머로 쭈그리고 앉았다. 양쪽의 노
꾼들과 상갑판에 섰던 포수들도 모두 뱃전에 등을 붙이며 몸을 감추었
다. 선미의 키잡이만이 전방을 관찰하고 있었고, 돛대 위에 올랐던 박
성대도 내려와 우대용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사행선에서는 갑자기 나타난 배 한 척이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것에
아연 긴장하였다. 언뜻 보아서는 방패선 같기도 한데 그보다는 좀 크
고 또한 병선 같기도 한데 쌍돛이라 어떤 배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전선의 영장과 장교들이 이마에 손을 가리고 자세히 살폈으나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저것이 무슨 배인가?"
"모르겠습니다. 모양은 관선 비슷도 하고 아주 독특합니다. 선체의
폭이 좁고 길군요."
"제법 빠르게 오는군. 혹시 청선이 아닌가?"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하라."
"사람이 보이질 않습니다."
"북을 울려도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신포로써 알려주고, 그 다음에
총통을 방포한다."
사행선단은 마름모의 대형으로 항해중이었는데 선두가 전선이고 오
른편이 제일 사행선, 왼편이 제이, 후미가 제삼 사행선이었다. 따라
서 제삼 사행 선에서는 그 배의 한껏 펼쳐진 두 돛이 정면에 보였다.
전선이 속도를 늦추며 선두를 벗어나 제삼 사행선과 거의 나란히 되었
으니 대형이 사각형으로 바뀌었다.
그동안에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는 거의 사람의 동정이 보일 만한
거리로 다가들어 있었다. 전선에서 북을 울렸으나 여전히 배 위에는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신포를 터뜨려라."
신포는 원래 척후선에서 쓰는 것으로 적이 발견되면 이를 발사하여
전군에 알리는 신기보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신호용만이 아니라
적을 일단 놀라게 하는 데도 쓰니, 그 소리가 워낙 벼락치듯 요란하기
때문이었다.
신포가 터지자 가슴이 썰렁하게 내려앉을 정도로 찢어지는 듯한
폭음이 들렸다. 그러나 그 배는 여전히 다가왔다. 이제는 공격할 순서이므로
전선은 선수를 돌려서 비스듬히 마중을 나갔다. 전선이 선수를 돌려서
그 배의 우현을 바라며 내려갔는데 이는 총통을 그 오른편 선복에다
쏘아 맞추기 위해서였다.
우대용은 그것을 보자 외쳤다.
"돛을 내려라."
두 돛대가 재빠르게 내려갔다.
"돛대를 접어라."
돛대가 아래로 끌어당겨져서 선미 쪽으로 누웠다.
"노를 잡아라."
양편에 줄지어 앉았던 노꾼들이 놋쇠 방갑의 사이로 노를 내어 젓기
시작했고 대용은 북을 울리기 시작하였으며 박성대가 키를 잡았다. 배
는 아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엇비슷이 틀어져서 다가드는 전선의 방
향으로 미끄러졌다.
즉 전선으로부터 달아나는 게 아니라 선수를 향하여 마주 달려드는
것이었다. 배의 옆구리를 전선에게 내보이려 하지 않는 것이니, 전선의
총통이 좌우 뱃전에 설치되어 공격하려면 언제나 상대편 배와 나란히
서야 하는 약점을 알기 때문이었다.
전선에서 거포인 총통이 불을 뿜었으나, 그때에는 용선이 재빠르게
방향을 틀어 전선의 선수로 곧게 들어섰던 것이다. 포탄이 날아와 용선의
선수를 비껴 지나가 왼편 멀찍이 높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졌다.
"오른쪽이 비었다."
우대용이 외치니 박성대가 전선의 선수를 가늠하였던 방향을 틀었
다. 좌우 뱃전에 장치된 두 대의 총통 중에서 우편은 이미 쏘았으니
장전하는 참에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힘껏 저어라."
노군들은 죽을 힘을 다하여 노를 저었으며, 풍향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용선은 마치 해룡이 머리를 돌리고 구불거리며 나아가듯이 뱃머
리를 틀어서 전선과 엇갈려 지나갔다. 바로 정면에 제삼 사행선의 후
미가 들어오고 있었다. 전선에서는 첫 발이 빗나가자 그 배가 방향을
돌려서 맞은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청인들입니다!"
놀란 화포장이 외쳤고, 모두들 바라보니 방갑 뒤편에는 노꾼들이 보
이지 않았으나, 상갑판과 중갑판에 상체를 숙이고 있는 자들은 검은
청인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청국 수적들이오."
"배를 돌려라."
영장이 지시하였으나 펄럭이는 돛에 의지하고 있는 덩치 큰 배가 갑
작스럽게 뱃머리를 돌릴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가던 방향으로 나아가
며 천천히 큰 원을 그리면서 선단의 외곽을 돌아 다시 들어가는 방법
뿐이었다.
총통 한 방의 소요 화약은 무려 삼십 근이요 십여 리나 날아가는 무쇠
연환을 재야 하였으니 맞기만 하면 용선 따위는 중동이가 부서져 나갈
것이었다.
그러나 포신의 길이가 육 척이요 포의 무게가 천이백구십 근이나 되니
상대의 배를 따라 옮겨갈 수도 없었다. 한번 쏜 포는 동차와 함께 총안
안으로 글어들여지고 커다란 고질대로 포구를 쑤셔 폭발의 때를 닦아낸
뒤에 포구에다 장약을 넣고 그 위에 연환을 재고 다시 동차를 밀어 총안
안으로 포구를 내밀게 하고 나서 화승에 불을 당기게 되는 것이다.
전선을 따돌려버린 총선은 그대로 제삼 사행선의 후미로 다가들었
다. 정탐뿐 물치가 살펴두었던 사행선 후미의 선다리 판을 갈기려는
것이었다. 그쪽에 격벽이 되지 않고 단조로 판자가 대어진 사실을 아
는 까닭이었다.
"청룡포 방포."
선수에서 호포를 장치하고 겨누고 있던 포수 두 사람에게 우대용이
외치자마자 큰 독을 박살내는 듯한 메마르고 깡깡한 포성이 터졌다.
이어서 호포의 연환은 사행선의 고리를 박살내었으며 배가 기우뚱하며
요동을 텄다. 이제부터 서서히 침수가 될 듯하였다. 전선은 이제 한
바퀴 돌아서 용선의 좌편 선미로 방향을 잡는 중이었다.
사행선의 선미를 두들겨 부수어 움직이지 못하게는 하였으나, 이제
뒤편에서는 전선이 다가들고 있었고 앞으로 나아가면 비록 자은 화포
이지만 한대씩 장치하고 있는 사행 선에서 가만 둘 리가 없었다. 전선
에서도 그것을 알고 뱃머리를 돌려 총통의 사선에다 용선을 잡아넣으
려는중이었다. 우대용이 외쳤다.
"모두들 방갑 뒤에 엎드린 채 노를 저어라. 사행선의 우현으로 피한
다."
그들은 용선을 사행선의 반대 방향으로 몰아가 날아오는 포탄이 사
행선에 가리워지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전선에서는 보다 신중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한 방만 맞아도 수적들의 배 따위는 박살이 나겠
으나, 두 대뿐인 총통으로 한번씩 빗나갈 적마다 목표물을 다시 잡으
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용선은 전혀 노꾼들의 손으로 젓고 있으니 우대용의 구령과 지시에
따라서 민첩하게 물러가고 나아가고 돌고 할 수가 있었으며, 전선은
그 거대한 선체로 순전히 바람의 방향을 따라 재빠르게 돌리기는
불가능하였다.
전선이 다가드는 사이에 용선은 선미를 맞고 기울어져 있는 제삼 사
행선의 우현으로 숨어버렸다. 총통을 발사하려면 그대로 항진하여 사
행선과 용선이 대각선으로 마주보이는 곳까지 나아가야만 하였다. 사
행선에서도 그저 방관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십여 명의 군졸과
사공들이 뱃전에 붙어서서 활과 화승총을 쏘았다.
그러나 용선에서는 방갑 뒤에 엎드려 있으니 놋쇠판이 뚫어질 리가
없었다. 포수들과 우대용은 중갑판과 상갑판에 세워둔 방패와 사령대
뒤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곧 호포를 방포하려면 사행선의 난사를 막아야
하였다.
"좌방포!"
우대용이 외치자 노꾼들은 한 사람씩 건너 총가의 총을 잡아 어지럽
게 쏘았다. 사행선의 뱃전에 섰던 포수와 사수들이 쓰러지며 난사가
뜸해질 적에 포수들이 달려나가 선수에다 포를 설치하였다. 총알이 다
시 어지러이 날아와 포수 한 사람을 쓰러뜨렸다.
"좌방포!"
나머지 다섯 자루의 화승총을 잡은 노군들이 쏘았다.
"전진."
사령대 뒤에서 우대용이 북을 재빨리 두드렸고 일단 사행선 뒤에 숨
었던 용선은 방향을 획 돌리며 나아갔다. 전선이 사행선의 뒤편으로
돌아 나오는 참이었다. 전선에서는 맞춤한 방향이 아니었으나 곧 빠져
나갈까 조바심하여 급히 총통을 쏘았다.
온 바다와 하늘을 뒤집는 듯한 폭음과 함께 용선은 거세게 흔들렸고
뱃머리가 획 돌아가버렸다.
선미를 스친 포탄이 먼 곳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졌다.
"계속 전진."
뱃머리를 다시 정면으로 바로잡은 용선은 방금 포를 쏘아버린 전선
의 좌현을 향하여 쑤시고 들어갔다. 용선의 선수에는 호포가 날카롭게
겨누어져 있었다. 전선은 북방으로 빠져나가려고 그대로 항진중이었
다.
그러나 전선에서 총통에 새로 장전한다거나 우현의 포를 쏘기 위
하여 방향을 돌리는 일은 이미 늦었다. 용선은 표적을 발견한 화살처
럼 가차없이 전선의 왼편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가장 정확한 사정 거
리에 들어서자 대용은 자신만만하게 말하였다.
"청룡포... 방포."
포수들은 첫 방에 어느 곳을 때려야 할 것인가를 며칠 동안의 조련
을 통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찢어지는 듯한 메마른 폭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가득 찼다. 전선의 영장이 지휘하던 다락이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우대용이 또 한번 지시하였다.
"황룡포... 방포."
포탄은 정확하게 전선의 왼편 선복을 명중시켰다. 과연 갑조로 처리
된 배여서 그리 치명타는 아니었으나 판자가 뻐개지고 꺾어진 골조가
삐져나왔다. 또 한번만 그 자리에 맞으면 구멍이 뚫릴 듯하였다.
주위가 화약 연기와 전선의 갑판이 타는 연기로 가득 차서 방향을 분간하
지 못할 정도였다. 용선은 가까스로 전선의 좌측으로 빠져나가는데 높
은 뱃전에서 내려다보며 수군들이 총과 화전을 어지러이 쏘았다. 노꾼
몇이 상하였고, 화전 때문에 갑판에는 불이 붙었다. 그러나 우대용은
공격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일단 전선의 왼편을 빠져나가는 사이에 호포 한 대의 장전이 끝났고
선미 쪽으로 옮겨졌다. 전선의 선미와 용선의 선미가 서로 엇갈려 헤어질
즈음하여 방포 지시를 내렸다. 계획대로 전선의 선다리 닻판이 부서져버렸다.
"이겼다!"
"전선을 잡았다."
수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외쳤다. 그러나 전선에는 아직 쓰지 않은
두 대와 총통이 남았고 병력은 백육십여 명이나 되니 완전히 부숴버리
기 전에는 사행선을 덮칠 수가 없었다.
전선은 사령대의 누각이 날아갈 때 지휘계통을 잃었으며 돛대도
부러졌고 닻판까지 날아가버렸으니 완전히 장님에다 앉은뱅이가 되었다.
용선은 전선의 반대편 방향으로 나가면 아니되었으니 몸을 드러내고
쏘아달라는 격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반대 방향의 총통과 선수의 총통은 고철이나 마찬가지였다. 용선
은 유유히 전선의 왼편을 향하여 되돌아왔다. 호포는 용선 우편에 나
란히 장치되어 있었다. 용선은 서행으로 다가들며 전선과 마주섰다.
"겹사!"
두 대의 호포가 불을 뿜었다. 높다랗게 벽처럼 막아섰던 전선의 뱃
전이 보기 좋게 부서져 나갔다. 뻐개지고 부러진 판자와 나뭇조각들이
용선의 갑판에까지 튀어올 정도였다.
용선은 거기서 방향을 바꾸었다. 전선은 침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수적들은 일방 갑판을 정돈하고 총과 포에 장약을 재고 멀리 떨어져서
제법 기울어진 제삼 사행선 쪽으로 다가들었다. 배의 중갑판이
들여다보이도록 배가 선수를 치올리고 기울어지는 중이었다.
전선에서는 아우성 소리가 드높았으나 강 건너 불구경 식으로 사행
선이 습격당하는 꼴을 건너다볼 따름이었다. 나머지 제일 제이의 사행
선들은 설마 전선이 저따위 작은 배쯤 때려잡겠거니 여기고 멀찍이 항
해하였다가, 그 꼴을 보고는 마침내 응원할 뜻을 버리고 달아나기 시
작하였다.
일단 외교임무를 지닌 정부사 등이 안전하였고, 제삼 사행선에는
서장관과 무역별장이 탔으니 당상관들이나 살고 보자는 생각들
이었다. 사행선에 가까워지자 수적들은 우대용 이하 모두들 옆구리에
차고 있던 수건을 풀어 눈 아래를 감쌌다.
복색은 청인이요 안면은 수건으로 가렸으니 전혀 아조 백성이 아니란
것을 저들에게 남겨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근병접전 중때도 미리
조련한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지언정 말은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사행선 옆에 다가들자 좌현에 대어졌던 호포 두 대가 뱃전을 맞추었으며,
칼 들고 창 가진 수군 몇이 나무 판자와 함께 날아가버렸다. 사행 선에는
부상당한 군졸과 역관이며 종자들뿐이었다. 태반이 맨손이었고 이제는
싸울 기력도 없었다. 용선의 좌현에서 일제히 화승총 열 자루가 내밀어지자
서장관이 상반신을 내밀며 소리쳤다.
"항복이오, 쏘지 마오."
그러나 수적들은 모르는 체 겨누었고, 우현에서는 뱃전을 넘어갈 기
세로 칼과 창이며 사슬낫이며를 꼬나잡고 허리를 숙이고 노려보는 참
이었다. 서장판이 다시 외쳤다.
"자... 보시오, 우리는 무기를 버렸소."
잇달아서 장정과 수군들이 투덕투덕 무기를 내던지고 있었다. 수적
들 몇이 사행선의 뱃전에다 꺾쇠 달린 밧줄을 던져 잡아당겼다. 두 배
의 뱃전이 서로 맞붙게 되었고, 뒤편의 수적들이 먼저 칼과 창을 휘두
르며 뱃전을 넘어갔다.
그들은 일단 사행선 사람들을 상갑판에 몰아다가 무릎을 굻려놓았다.
이윽고 총을 겨눈 수적들과 우대용이 사행선으로 옮겨 갔다. 총을 겨눈
자 다섯이 포로들을 지키고 나머지는 모두 선실과 선복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선실에 처박혀 있던 무역별장 신복동이가 끌려나왔다.
정탐꾼 물치가 직접 화물 싣는 작업을 했으므로 앞장서서 동료들을
안내하였다. 그들은 말없이 짐을 날라 자기네 용선에 던졌다. 그들이 찾는
것은 오직 은자와 값나가는 약재뿐이었다. 물치가 빈틈없이 짐 사이에서 은
자가 들어 있는 짐을 골라냈다. 짐을 대강 옮겨 싣자 그들은 늘 하던
대로 포로들을 뒷결박지어서 선실에다 몰아넣었다.
그들은 사행선에 실렸던 갖은 마른 육포 등속이며 고급 감홍로 동이를
함께 운반하였다. 우대용이 마지막으로 배를 떠났다. 지나는 배가 있을
때까지 사행선은 기울어진 채 꼼짝도 못할 것이고 침수가 되어 반쯤 물에
잠긴 전선에서는 수군들이 뛰어내리고 있으니 곧 이 배로 올라와 합류할 것이
었다.
수군과 상인 그리고 역관들은 저희끼리 꾀를 내어 배를 수선하거나 달아났던
사행선이 돌아와 구조할 것이었다. 그들은 용선을 그 배에서 떼어 얼마쯤 저어간
뒤에 돛을 올렸다. 모두들 답답하게 싸맸던 수건을 풀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수적 중에 셋이 죽었고 둘이 다쳤으니 대승을 거둔 셈이었다.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정서 방으로 나아가라."
그들은 짐짓 중국 땅으로 돌아가는 시늉을 할 셈이었다. 박성대가
땀과 그을음으로 더러워진 얼굴에 웃음을 띠고 대용에게로 다가섰다.
"두령, 개끗이 해치웠구려. 이젠 아래 내려가 좀 쉬십시오."
"자네 조타술이 없었다면 우리는 총통에 맞아 고기밥이 되었을 걸
세."
"뭘요, 운이 좋았지요. 헌데 이대로 돛점에 돌아갑니까?"
"일단 밤을 타고 들어갔다가 배를 변조시켜서 어선들이 모인 연평
근해로 나가 숨는다. 방갑을 떼어내고 노를 뽑으면 일반 중선보다는
조금 크고 조운선보다는 작은 어선으로 보일 게다. 그물을 싣고 고기
를 잡으러 가는 시늉을 하면 된다. 오늘밤은 잠을 못 잘 각오를 해야
겠지. 밤새껏 배를 변조하고 새벽에는 곧 출범한다. 그러니 반수는 중
선과 소선에 나누어 타고 강화로 나가 천수네 주막에서 당분간 머물도
록 해야 한다."
"두령은 어찌하시렵니까?"
"나는 구월산으로 형제들을 만나러 갈 참이다. 며칠 뒤에는 곧 송도
를 거쳐서 강화로 나가겠다. 별일이 있기 전에는 관의 기찰이 뜨막해
질 때까지 몇달이고 머문다."
박성대가 서운하다는 듯이 시무룩해져서 말하였다.
"알았습니다. 그럼 돛점은 당분간 비우게 되겠군요."
우대용이가 잠깐 생각하고 말하였다.
"돛점은 이젠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사행선이 습격을 받았는데 우
리가 아무리 청인으로 가장은 하였다지만, 연안의 황당선들을 의심하
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니 맨 처음에는 황해수영의 기찰선들이 떨려 나와서 연안의 섬과
바닷가들을 수색할 것이다. 더구나 허사포와 불과 삼십여 리 해상에 있는
무인도를 그대로 버려두지는 않겠지. 오늘 밤중에 산채를 뜯어놓아야 할
것이며 수로도 터놓아야 할 게다."
"헌데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박성대는 갑판의 여기저기에서 쉬고 있는 수적들의 건장한 어깨와
햇볕에 그을은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저놈들이 그 무료한 몇달을 조용히 보낼까 모르지요. 틀림없이 천
수네 주막에서 도박판이나 벌이거나 아니면 술 마시고 싸움질을 하겠
지요. 어선의 선단에 기우는 놈들은 고작해야 사당 오입질이나 할 테
니 별 걱정은 없겠습니다만..."
"하긴 나두 그게 걱정이다. 어쨌든 어서 빨리 우리가 살 마을을 이
루어 놓아야겠다. 우리도 이젠 식구들이 있어야지. 그래야 마음이 놓
이겠다."
우대용이도 한숨을 쉬었다. 수적들이란 모두 어릴 적에 갯가에서 무
턱대고 포구를 떠났거나 아니면 상단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쫓겨나고
뱃방에서 사람을 치고 행패를 저질러서 관에 쫓기는 자들이 대부분이
었다.
어느 놈이고 세상에 내놓아 버젓이 드러내고 여염 생활을 할 놈
들이 못되었다. 대용이 자신도 일찍이 해주로 나와 선상들 틈에 끼였
던 것은 잔푼벌이라도 하여 작은 고깃배나마 마련해보려던 것이었다.
이제 고향 마을을 찾아간다 한들 그 누구도 아는 이가 남아 있을 듯싶
지 않았다.
"이번에 구월산에 가면 의논을 해봐야겠다. 어디 으슥한 갯가가 있
을 테지."
우대용이는 박성대가 듣든지 말든지 혼자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박성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에 강화로 나가게 되면 석서방하구 둘이 경강에 나가볼까 하는
데... 괜찮을까요?"
"안된다."
우대용은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너희들은 이미 범법 화수꾼으로 호가 났고, 이번 사행선이 털린 소
문은 선상들 사이에 자자할 게다. 만약 누군가 눈치를 채고 한마디만
벙긋하면 모두 기찰에 걸려들 게다."
그들은 이미 어두워진 바다를 헤쳐 나아가 동북으로 항해하여, 이슥
한 밤에야 돛점에 당도하였다.
5
송도 사대전에서도 가장 연로하고 임방회의에서는 좌장으
로 존경받는 배대인은 이제는 모든 일을 박대근에게 맡기고 있었다.
배대인이 대근을 그의 가장 귀애하는 막내딸의 사위로 삼고 아예 가업
까지 맡기게 된 것은 단순히 딸에 대한 애정 때문만도 아니었다. 비록
막내딸이 배냇병신인 외아들이나 두 딸에 비하여 영리하고 이재에 밝
다고는 하나 무턱대고 한 사위를 정하여 가업 경영을 물려줄 배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본래부터 송도의 상권을 휘두르는 거부는 아니었고, 오히려 지
방에 나가 있던 송방 차인의 아들이었다. 그의 먼 친척뻘에 목
화장사로 돈 좀 모은 이가 있었는데, 본이 같은 경주 배씨
일 뿐이지 전혀 남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수성가를 하여 하인 십여명을 거느리고 있는 처지인데 늙마에 고기
반찬이나 먹게 되니 새삼스레 후사가 근심이었다. 부인이 아기를 낳지
못하여 그런대로 우물쭈물 돈벌기에만 한눈을 팔고 쫓기듯 살아오는
사이에, 이제는 몸도 늙어서 첩을 들여도 생산을 못할 처지였다.
하루는 차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인사를 왔는데 그 아이의 용모와
골격이 제법 눈에 들어서 방안으로 불러들였다. 성과 본관은 물을
것도 없이 그 아비가 팔촌은 못 되는 이라서 목화장수는 은근히 그에게
아이에 대하여 물었다.
그리고는 아예 지방의 송방을 떠맡길 테니 아이를 양자로 줄 수 없겠는가
물었다. 차인은 마침 송방을 맡긴다는 것이 반갑고 형제도 그 아이 외에 넷이
나 더 있는지라 오래 생각할 것 없이 쾌히 승낙하게 되었다. 목화장수
배씨는 차인의 아들 배소년을 양자로 삼았는데 아이가 차차 커가면서
양부모에게 정을 붙이니 자기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양자를 들인 지오륙 년 뒤에는 관례를 시켜 며느리도 보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 집안일을 떠맡기지는 않았으니 그의 취재 능력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재산 출납을 관장하는 경리의 직임을 맡겼는데
배서방은 부지런하고 치밀하여 배노인의 뜻에 맞았다.
배서방이 아이를 낳고 나서 양부에게 청하였다.
"저도 이제 장성했습니다. 매일처럼 서기사에 틀어박혀 주판이나 놓
을 수 있나요. 수천 냥을 가지고 한번 평안도 도회지로 장사를 나가보
겠습니다."
배노인은 배서방의 말을 듣자 과연 송상답게 쾌락하였다.
"우리 송도 사람은 소싯적부터 돈벌이로 나서는 게 예사다. 네 말이
옳고말고."
하며 오천 냥을 내주었다. 배서방은 평양으로 가서 기생에게 반하여
수삼 년 사이에 오천 냥을 구름처럼 흩어버리고 눈 녹이듯 날려버렸
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갈 면목이 없어서 기생집에 붙어서 사환 노릇
을 한 것이었다.
배노인은 이 기별을 듣고 양자인 배서방을 다시는 자식으로 보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그의 처자를 집에서 내쫓았다. 며느리와 자식은
성문 밖 토막으로 쫓겨나와 유리걸식할 지경이 되었다. 배서방은
떨어진 옷에 부서진 갓을 쓰고 기생집에 얹혀 있으면서 종내 돌아갈
기약이 아득하였다.
사람이 어려운 일에 닥쳤을 때 그것을 경난해 나아가는 사이에
능력있는 이가 되듯이, 배서방도 그때의 수삼 년이 평생의 이재 능력을
키웠던 것이다.
이로부터 기생어멈의 심부름으로 받은 잔돈푼이며 취객과 기생들의
궂은 뒷바라지로 얻은 선사품들을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백여 냥이 되었을 때 마침 헌옷 구걸을 다니는 자가 있어,
그와 함께 돌아다니며 헌옷과 면화를 거두러 다녔다. 북관의 벽지에는
포목이 희귀하여 거의가 피물이나 짚으로 감싸고 지내는데 배서방은
그곳으로 면화와 헌옷을 가져다가 흔천으로 갈린 피물을 몇곱절 비율로
바꾸었다.
마침 북관 연안에 수달피가 많이 나는데 겨울이면 남바위나 배잣감으로
불티나게 팔리니 수달피 바꾸는 일에 전력한 지 삼 년 만에 만 전을 모으
게 되었고, 이에서 그치지 않고 관서로 올라가 말총을 매점하여 수만
전을 벌었다.
배서방은 이제 부상 대고로서 누구에 못지않은 실력과 금력을 갖추어
가지고 귀향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는 벌써 그가 집을 떠난 지 여러번의
석삼 년이 지나버린 때였다. 바야흐로 연말이었다.
대개 그때에는 송도의 원행 장사 나갔던 사람들이 거의 귀가하는데,
저마다 가족들이 성찬을 차려가지고 오리정에 마중 나오는
것이었다. 배노인도 이때 귀환하는 차인들을 보기 위해서 마침 오리정
에 나와 있었다.
배서방이 떨어진 두루마기에 짚신을 끌고 거기 나타나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배서방은 양부에게 나아가 내로라 인사도 못드리고 한편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거기서 서로 맞이하는 허다한 차인들은 주객간에 모두 희색이 감돌았으나,
배서방에 이르러는 아비는 보고도 못 본 척, 자식은 뵙고도 감히 나서지
못한 것이다. 간혹아는 사람들로부터 배서방은 빈정거림과 비웃음을 받을
뿐이었다.
배서방은 날이 저물어서 성문 밖 토막을 찾아가니, 그 아내와 친지의 원
망하고 탓하는 소리가 귀에 따가웠다. 그는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입
을 봉하고 코를 골며 태연히 잠을 잤다. 그가 수만 전을 들여서 해온
물건이란 바늘 백여 상자였으니 그만하면 팔도의 수요를 충분히 덮을
만하였다.
이튿날 바늘 한 상자를 편지와 함께 포장하여 아내에게 내주며
아버지에게 갖다드리라고 하였다. 배노인은 이른 아침부터 여러
차인들과 한창 회계를 하느라 방안에 있었다. 배서방의 아내는 감히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상노아이를 불러 배노인에게 통자하고 먼저
편지를 들여보냈다.
배노인이 받아서 편지를 펴보는데, 소자의 다년간 소득은 이것만으로도
지난날 제가 가져간 오천 냥의 열 배는 되온데 또 이보다 몇곱절 있삽기
우선 아뢰옵니다라는 사연이었다.
당시의 바늘값이 제법 고가라서 방물 중에도 귀한 것이 되어 있었다.
배노인은 크게 기뻐서 여러 차인들과 미처 말을 끝내지도 않고서 곧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자부를 불렀다. 자부가 방으로 들어오자 배노인의 처가
역정을 내어 욕설을 하며 내쫓았다. 그러나 배노인이 아내를 진정케
하고는 며느리에게 전과 달리 물었다.
"네 남편이 어디 아픈 데는 없다더냐? 탈없이 잠은 잘 잤으며 밥이
나 잘 먹더냐? 너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내 가서 그
애를 보고 오마."
배노인이 성문을 나가 그 양자를 만났다. 양자가 절하고 나니 배노
인은 대뜸 그의 상업 경영에 관하여 물었다. 배서방은 이제까지의 일
을 하나도 숨김없이 대답하였고 그가 헌옷과 피물을 바꾸기 시작한 대
목에 가서는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
"네가 가져온 바늘은 몇 상자나 되느냐?"
배서방은 말없이 양부를 모시고 객주로 나가 맡긴 물건을 보여주었
다. 백여 상자의 중국제 바늘이 차곡차곡 창고 안에 쌓인 것을 보자
그저 중도아 정도였던 양부는 놀라서 졸도를 할 지경이었다.
"상이 틀릴 수가 없지. 네 관상을 보니 만석꾼이 될 상이더구나. 그
래서 양자를 삼았더니 오늘 과연 이 대화를 가지고 왔구나. 이
걸 팔면 우리 집 재산의 열 배는 되겠다. 이밖에 더 무엇을 바라겠니.
지난날 한때의 외도는 젊은이의 항용 있을 수 있는 일이니라. 다시 말
할 것이 없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배노인은 즉시 돌아가 전부 솔가하여 다시 부자간이 처음같이 되었
다. 이는 송상이 원래 친족혈육의 가치보다도 그 상업 경영의 능력에
따라 애정의 경중을 따지던 습속 때문이었다.
비록 야박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너무 계산을 하는 성싶지만 전국의
상권을 주름잡는 송도 상인이 이런 만큼의 매정하도록 경우 밝은 치가
가 없다면 어찌 그러한 능력을 키웠겠는가.
따라서 세간에서도 당연하게 알고 비난하는 자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런 일로 왈가왈부하였다가는 비웃음이나 받기 맞춤하였다. 그는
어언간에 경의난 세월에 닦은 경륜으로 사대전과 임방의 좌장이 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배대인이 박대근을 곁에 두고 보면서 흐뭇하게 생각하였던 것
은 오로지 그의 차인 행수로서 보인 수완 탓이었다. 그가 막내딸 귀례
와 박대근을 성혼시키고 가업을 부탁하게 된 것은 다 그럴 만한 계기
가 있었다. 박대근이 과감하게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것을 본 때문
이었다.
대근은 어느날 아침에, 그날도 배대인 대신 임방에 나아가 회의를
하게 되어 새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마침 대문 밖에서 시끄러운 소
리가 들리고 있었다.
대근이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하니 웬 걸인 하나가 잘못 찾아왔다가
혼뜨검이 나는 중이었다. 원래가 송도에서는 사지가 멀쩡한 놈이 구걸이나
걸식을 하러 다니면, 우선 흠씬 때려준 다음에 하다못해 조기두름이라도
들려서 보내는 습속이 있었다.
다시는 걸식하지 말고 저자에 나가 행상이라도 하여 먹고 살라는 이치였다.
대개 임방 계원들은 그런 약조로써 송도의 인심을 바로잡아나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다른 날 같으면 박대근이도,
"그놈 궁등이가 터지도록 두들겨서 뒤보기가 얼마나 힘들고, 먹고
살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알려주어라. 그리고 닷 냥 주어서 보내라."
하였을 터인데 그날따라 마음이 쓰여서 내다보니 웬걸 작은 계집아이
였다.
"허어, 그 참 저런 아이를 내보내어 앉아서 얻어먹는 부모가 있다니
한심한 일이로구나."
중얼거리고는 하인을 시켜서 소녀를 불러오게 하였다. 소녀는 그가 주
인임을 알고 엎드러지며 하소하였다.
"저는 천민도 아니요 선비의 후손인데, 다만 가산이 몰락하고 양식
이 간데없어 이렇게 나왔는데, 오히려 동정은 못하나마 패악 무도하게
사람에게 봉욕을 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 이 지방 인심은 이리
도 해괴하단 말인가요?"
조금도 두려워 않고 또박또박 얘기하니 박대근이도 은근히 속으로
감탄하였다.
"그래 너는 이 지방 사람이 아닌 모양이구나."
소녀는 그 말에 갑자기 읍소를 하며 말하였다.
"예, 이곳은 천리 객지올시다."
계집아이는 그제사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 일찍이 전라도에서 살다가 어머니와 더불어 아버지를 찾아 이
곳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집안이 기울자 아버지께서는 행상차 송도
에 오르셨으나 삼 년이 지나서도 감감 무소식이라 언니와 어머님을 모
시고 찾아왔지요.
쉽게 찾아뵐 줄 알고 있었지만 워낙에 송도는 대처중에 대처요 전국
각지에서 하루에 들고나는 상단과 행상이 기백 명이 넘습니다. 그러니
어디 가서 아버지를 찾는단 말입니까.
우리가 여기서 호적도 없어 구출도 받지 못하거니와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아버지도 찾을 겸 걸식을 하고 있습니다. 상단에 사환이나
곁군으로 또는 점원으로 들어 가려도, 이곳은 타관이요 아는 이라든가
보를 서줄 분도 안 계시고 나이도 어려서 마땅한 업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밥 한 술을 빌어 어머니와 연명을 하려는 것인데 송도가 저자 대처라고
하여도 이렇게 풍습이 야멸차고 매정한 줄은 몰랐어요."
박대근이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송도의 습속을 들어 이러쿵저
러쿵할 계제가 아니었다.
"얘, 네 안색을 보니 몇끼니나 거른 듯하구나. 우선 요기나 해야겠다."
대근이 아이를 윗간으로 불러들이고는 하인을 시켜서 대궁상이 아니
라 새 상을 차려 내오게 하였다. 아이가 수저는 들었건만 반찬은 이리
저리 그릇 바닥이 보이도록 긁어 먹고 밥에는 손을 대지도 않았다.
"시장하다면서 어찌 국과 반찬만 먹고 밥은 그냥 두느냐?"
아이가 울먹이며 말하였다.
"어젯밤에도 간신히 죽을 쑤어서 어머니를 드리고 남은 것이 두 그
릇인데 한 그릇은 언니와 나누어 먹고 한 그릇은 두었다가 어머니의
아침 진지로 드렸지요. 저는 국으로 양을 채우고 저 밥은 가지고 가서
끓여서 식구들을 드리려고 그럽니다."
대근이 속에 생각해둔 바가 있으면서도 그저 이렇게만 이야기하였
다.
"네 식구들 것은 따로 준비해줄 터이니 걱정 말고 요기나 하여라."
대근이 다시 하인을 불러 쌀 한 말을 가져오라 하여 아이에게 내주
고 또한 일렀다.
"나도 소시에 노인을 봉양하여 보았는데, 노인은 육식을 하여야 기운
을 차리는데 밥도 없는 사람이 노인에게 육것을 드릴 수가 있겠느냐.
닭도 몇마리 가져다가 곰을 내어 드리도록 하여라."
아이는 금방 눈물을 솟구치며 백배사례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돌아
간 다음에 시종 내다보기만 하였던 귀례가 대근에게로 건너와 말하는
것이었다.
"큰 일에나 작은 일에나 기왕에 손을 대려면 발본색원을
하셔야지요. 원래 송도에서 걸인을 때려 쫓는 이유는 한때의 자선이
그의 생업을 오히려 망치기 때문이지요. 서방님께서는 장차 어쩌시려
고 그러십니까. 임방 좌장의 댁을 활인서로 만드시렵니까."
"아니오, 내게 생각이 있어 아이의 뒤를 밟도록 시켰으니 돌아오면
자세히 들어봅시다."
"예전 정나라의 정승 자산은 겨울에 찬물을 건너는 백성을 차
마 볼 수가 없어서 자기의 수레로 건너게 하니 정나라 사람이 다 칭송
하였으나, 뒤에 맹자께서는 이것은 은혜나 인덕이 아니니 여름
에 장마철이 지나거든 곧 다리를 놓으라는 주공의 법률이 있지
않느냐 하였지요.
주공의 정치대로 다리를 놓았으면 비록 그가 안 볼적에도 백성들이
찬물에 발을 담그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그게 바로 인덕이라고 맹자께서
말씀하신 걸 읽으셨겠지요.
한 마리의 닭이나 한 말의 쌀은 그 사람에게 잠시 은혜뿐이요, 그 사람을
아주 구원할 도리를 하지 않는 한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래서 우리
고장에서는 걸인이 오면 매우 치고 행상 밑천이라도 주어 보내는 거예요."
대근이 아내의 말을 들으니 과연 자수성가를 이룬 배대인의 따님답
게 조리있고 생각이 올바른 것이었다. 박대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
하였다.
"옳은 말이오. 내가 그 아이를 보아하니 아직 나이는 어리고 비록
구걸을 다녀도 행동거지가 떳떳하고 영리해 보여서, 문득 그 가족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소. 저런 아이라면 좌판장수라도 시키면 능
히 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겠구려."
"그러시다면 저두 찬성입니다."
귀례는 남편의 말에 곧 순종하였다. 그녀는 대근의 사람됨을 알뿐더
러 어려서부터 배대인의 규훈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터였다.
재물에도 의가 있으니 바른 덕을 갖춘 재물이라야 가치가 있는 것이
요, 비록 만금이 쌓이더라도 천민을 저버리고 모은 것은 강도의 장물
과도 같아서 곧 잃거나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법이라는 것이었다.
송상의 일상사는 제아무리 부상대고라 할지언정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이어야 하였고 만약에 가무와 고기 굽는 냄새가 담장 밖을 넘어가면
손가락질을 받았다. 박대근이 일부러 임방에 나가지 않고 하인을 기다리
는데 그가 헐레벌떡 뛰어와 아뢰는 것이었다.
"뒤를 밟아 따라가보니 서문 밖인데 집이랄 것두 없습니다. 낮은 움
막을 파고 세 모녀가 사는 모양이지요. 그 아이의 언니는 이미 과년하
여 나다니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헌데 이상한 것을 보구 왔습니다. 움
막 뒤편에 한 대여섯 평짜리 묘포가 있었습니다."
"묘포라니..."
"글쎄요. 나지막하게 나무를 세우고 위에다 짚을 걸었더란 말이지
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걸식하며 움막에서 사는 사람들이 농사를 지
을 리도 없고 또한 짓는대야 손바닥만한 그루터기에 뭘 심었겠습니
까?"
"음, 그 집은 잘 알아두었겠지."
박대근은 그저 그렇게 무심하니 중얼거리고는 그 길로 임방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 석상에서 대근은 다른 전의 임방 총대 되는 사람으
로부터 아주 흥미있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의 상단에서 보부상으로 나갔던 타인들이 돌아와 전하기를 요즈음
삼남에서는 산삼의 소출이 부쩍 늘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삼은 같은데
웬일인지 굵기가 일정하다는 것이며, 그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드넓은
삼밭을 발견해내어 조금씩 캐어다 내놓는 모양이라고 하였다.
좌중의 한 사람이 의견을 내어 산삼도 땅에서 자라나는 식물이고
보면 밭에다 심지 못할 게 무어냐, 혹시 그 누군가가 이미 경작법을
알아내어 삼을 기르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느냐고 의견을 내었다.
그러나 대부분 반대하기를, 산삼이 산을 떠나면 영 약으로서의 신통한
효험도 무효가 될뿐더러 약으로서의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대외 무역의 주요 품목이 되어 있는 산삼이 무 자라듯 한다면, 조선의
삼은 가치도 없게 되고 요즘처럼 현금과 같이 거래되지 않을 테니 상업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사대전회의가 끝난 뒤에 온면을 돌려 먹으면서 한담중에 나온 얘기라
모두들 건성으로 듣고 흘려버렸으나 박대근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만약에 산삼을 재배하기만 한다면, 조선의 상고가 문제가 아니라
연시를 한 손에 쥘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다가 대근은 다시 하인이
말해주던 이상한 묘포에 생각이 미쳤고 계집아이가 전라도에서 이사와
호적이 없다던 얘기가 얼핏 뇌리를 스쳤다.
지금 듣고 농담으로 나누던 얘기가 실상은 바로 코밑에서 벌어
지고 있는 사실의 얘기가 아닌가 생각하니, 박대근은 갑자기 초조해지
고 안달이 나서 견딜 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삼포가 아닌
가. 더구나 전라도에서 이사를 왔다던 계집아이가 말하기를 제 아비는
행상할 사람이 아니었지만 송도를 찾아왔었다는 것도 딴은 이상스러웠
다.
혹시 산삼 재배의 비법을 알고는 재정 지원을 해줄 물주를 구하려
고 찾아왔던 것은 아닌가. 박대근은 혼자서 이리저리 망상 비슷하게
헤매다가 스스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장사치란 할 수 없구나!"
하고 나서도 마음은 개운치가 않았다. 일단 일어난 궁금증을 망상으로
돌려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이구 골치가 아파서 집에 들어가 한숨 자야겠군."
박대근은 내색하지 않고 임방 총대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곧장 집으
로 가서 하인을 앞세우고 계집아이의 움막을 방문하려는 생각이었다.
사랑마당에 들어서려니 청지기가 쫓아나와 전하는 것이었다.
"웬 여자가 찾아와 서방님을 만나겠다구 하였습니다."
박대근은 성급하게 물었다.
"아까 아침에 와서 요기를 하구 간 아이하구 함께 왔더냐?"
"모르겠습니다. 의복이 남루한 중년의 아낙입디다."
"그래서... 쫓아 보냈는가?"
"아니오., 하도 막무가내로 버티길래... 아씨께 여쭈었더니 아씨가
서방님 대신 만나보셨지요. 방금 돌아갔습니다."
대근은 마음이 조급하여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안채로 들어갔다. 발
짝 소리를 듣고 그의 아내가 안방 미닫이를 빼꼼히 열었다. 아내는 영
리한 눈으로 대근의 기색을 살피며 방그레 웃었다.
"방금 누가 왔었다며?"
"왔었어요. 보시하려면 자리 찾아 던지라더니, 이런 수도 있군요."
대근은 아내의 앞에 다가앉자마자,
"혹시 삼을 심었다구 안 그럽디까?"
하고 얼토당토않게 물었고, 아내가 오히려 놀랐다.
"아니 그것을 당신이 어찌 아셨어요?"
박대근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으니, 스스로 물어 놓고도 설마하
였다가 들어맞으니 들뜬 감정을 대번에 눌러버리지 못한 때문이었다.
어안이 벙벙,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대근이 드디어 한숨을 토해냈
다.
"오늘 전회의가 어쩐지 시큰둥하고 예감이 이상한 게 자꾸 집에만
오고 싶더라니까... 어서 자세히 얘기해보오."
"처음에는 또 무슨 구걸을 하러 이번에는 그 아이 어미가 나타난 줄
여겼지요. 그러다가 밖에서 옥신각신하는 말을 들으니, 하도 고마워
서 이 댁 서방님께 좋은 것을 가르쳐드리려고 병든 몸을 끌고 왔다잖
아요."
"그래 바로 삼을 심어놓았다구 그럽디까?"
"아이, 서두르지 마셔요. 아무리 취재가 중하다고는 하지만, 저쪽
사람들에게 무겁고 믿음성 있는 태도를 보여야지요. 문득 그런 말을
듣자마자 그 댁을 찾아나선다면, 아마도 함게 신중히 도모하지 못할
사람으로 여기겠어요."
박대근은 아내의 말게 분명한 조리가 있어 저절로 설레던 가슴이 진
정되고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나는 뭐... 하도 믿기지 않는 일이라서, 그렇지 않아도 임방에서
사대전 총대들이 삼 얘기를 실컷 하였거든. 당신도 아지 않소. 조선의
상업 판도란 분 안의 난초와도 같아서 한계가 눈 아래 보인단 말요.
우리가 한양을 꺾고 나라 밖의 상권까지 잡는다면..."
"어째요, 천도하시게요?"
"쓸데없는 소리..."
귀례는 정색을 하고 단정하게 말하였다.
"아직 아버님께 허락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 세 모녀를 우리 집에 데
려다 놓아야겠어요. 제가 쓰던 별당이 비어 있으니 마침 잘되었군요.
개끗이 치워놓고 그이들을 안돈시킬 때까지 머물도록 하지요."
"오늘밤에 당장 데려오도록 하겠소."
대근은 그저 오후 내내 무료하게 앉았기도 무엇하여 오랜만에 활터
에 나갔었다. 어찌된 일인지 화살이 자꾸만 과녁을 빗나가 그마저도
때려치우고 선술집에 들어가 탁배기를 들이켰고, 사방이 어두컴컴해
질 무렵이 되어 그 모녀의 집을 아는 하인을 앞세워 청교방
쪽으로 나아갔다.
성내를 벗어나니 벌써부터 인적이 끊기고 송악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밭둑 너머에 가득한데, 들판을 가로막고 진봉산과 덕적산 봉수대의
낮은 산봉우리만이 노적 낟가리처럼 봉긋이 솟았다. 그 주위로 안개가
엷게 깔려 달빛에 희부옇게 드러났다.
하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되니 드문드문 낙락장송이 서 있을 뿐 헐벗은
비탈에 간신히 알아볼 정도의 불빛 몇점이 흩어져 있는 것이었다. 다
가서자 그와 같은 불빛들이 산비탈 위의 여러 군데서 가물거리고 있었
다.
"허, 이런 곳에 임집이 생기다니 송도가 과연 대처는 대처로다!"
박대근은 성 밖에 이런 유민들의 마을이 여러 군데 생겨난 것을 알
았으나 청교방 쪽에는 오랜만이었다.
"바로 이 집입니다."
움집과 토막이 군데군데 모여앉은 곳을 지나 하인이 외따로 떨어진
낮은 움집 앞에서 손가락질을 하였다. 박대근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앞으로 나서며 헛기침을 하였고 안에서,
"게 뉘시우?"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근은 말없이 그냥 서 있었는데 이윽고 부인
네가 거적을 들치고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에그머니..."
부인은 얼핏 사내들의 모습을 보고 놀란 듯하였다. 대근은 공손히
말하였다.
"남산골 사는 박가 성 가진 상고외다. 오전에 부인께서 제 집에 들
렀다는 말을 듣고는 이것이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찾아왔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부인은 당황하여 얼른 거적을 도로 내렸다.
"지금 시각도 시각이려니와 이 안은 누추하고 과년한 아이도 있어놔
서 들일 수가 없습니다. 내일 밝아서 제가 찾아뵈오면 안되겠습니
까?"
박대근은 그냥 거적 앞에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이렇게 밖이라도 좋습니다. 실은 뭣 좀 의논드릴 게 있어서요."
"어머니, 뭐가 어때서 그러셔요. 점잖은 분이셔요. 어서 들어오시
게 해요. "
계집아이의 높다란 목소리가 들리고 그 어미는 우는 모양이었다.
"이 댁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저희가 힘이 돼 드렸으면 하여 찾아온 것
입니다."
박대근이 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리는데 계집아이가 쑥 나오더니 그
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어머니는 공연히 내외를 따지십니다. 이미 가문은 구몰하여 진창에
묻혔고, 가릴래야 가릴 울타리도 없는데 어르신네를 못 들일 까닭이
있나요. 아흔 칸 대가의 사랑이려니 여기시고 어서 들어오셔요."
"허허, 그래두 이러면 못쓴다."
대근이 버티는데 안에서 부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애 말이 맞습니다. 몸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오히려 손님을 밖에
서 계시도록 하는 것이 예가 아니겠지요."
대근은 못 이기는 체하고 허리를 굽혀 거적 안으로 들어싫다. 움집
안은 좁고 길었다. 맨땅에 너덜너덜한 거적을 깔았고 입구는 그대로
부엌이나 마찬가지라 아궁이가 있으며 그 위에 노구 하나 덩그러니 올
려져 있었다.
빈 방에 관솔불이 켜져 있는데 안쪽에 등을 돌리고 앉은 처녀가 보였다.
부인은 안쪽으로 비켜나며 몸둘 바를 몰랐다. 대근이 구부정한 태로
인사를 올리고 이내 옆으로 돌아앉았다.
"식전에 댁에 가서 우리 아이가 폐를 많이 끼쳤지요. 잇달아 댁의
하인까지 찾아와 쌀과 닭을 놓고 갔습니다. 우리두 그리 넉넉히 살지
는 못하였으나 가장이 계실 적에는 삼시 세때를 놓치지는 않았건만 이
런 낯선 도방에 흘러와 천지가 막막합니다. 요즘 세상에 그렇게 고마
울 데가 없어서 사람이 아무리 없이 살아도 어떻게든 인사는 드려야겠
기에 무턱대고 댁을 찾아갔었지요.
저희는 일찍이 전라도 화순에서 살았습니다. 선대부터 글을 하는
학생이셨고 저희 주인께서도 땅마지기나 가지고 글을 읽으셨습니다.
그러나 농사는 돌보지 않아 남에게 맡기고 과거를 보러 한양 천리
길을 몇번 오르내리는 동안 가산이 차츰 줄어든데다, 삼의 재배를
연구하시는 바람에 더욱 탕진이 되었지요.
저희 이웃 고을인 동복에서는 어떤 이가 벌써 산삼 모종을
내었습니다. 바깥 어른도 재배법을 익히셔서 삼포를 마련하시고는 다
달이 적어놓으셨어요. 드디어 첫 재배에 성공하셔서 열 뿌리를 견본으
로 골라 지니고 송도로 떠나오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루가 한달이요 한달이 일 년이 넘어 어언 삼 년이
넘도록 종무소식이라, 저 혼자 저것들을 데리고 무작정으로 송도엘
왔지요.
아마 노상에서 앓다가 돌아가신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제가 주인의
어깨 너머루 보아두었던 묘포재배를 해보구 있었습니다. 가장이
돌아오지 않으니 우리두 살 방도를 찾아야지요. 그러나 피땀으로
이루어놓은 비법을 아무에게나 알릴 수도 팔아 넘길 수도 없었습니다.
절대로 남에게 알려서는 안된다는 주인의 부탁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다 죽어가면서 어린것을 구걸을 시켜가면서도 저 묘포가 한
가닥 희망이었습니다. 오늘 저것이 돌아와 울며 하는 말이, 그까짓
묘포만 바라고 있다가 언니는 처녀 귀신이 되고 어머니는 돌아가시면
아무 데도 쓸데없는 재배의 비법은 함께 사라지지 않느냐구요.
차라리 믿을 만한 분을 만나서 도움을 받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저두 하루에 수십 번 해보았어요. 저 큰애가 금년에 스물둘인데
배필은커녕 옷가지 하나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의 말씀을 어
기더라도 그 댁을 찾아가 도움을 청해보리라 작정하게 된 것입니다."
부인은 얘기하면서 숨이 차는지 몇번이나 말을 끊고는 하였다.
"비록 아이의 말을 듣고 인자하신 분이라 여겨 찾아가 발설은 했습
니다만, 어쩐지 세상살이가 허무하여 이렇게 심란하게 앉았던 참이지
요."
박대근은 이런 경우에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이 가족에 대
한 진정을 표하는 것이 되리라 여겼다.
"저는 어쨌든 장사아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문이 되는 일이라면
염라대왕의 수염이라도 베어야겠지요. 허나 저는 이날까지 이문도 중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이 가장 귀한 것으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이문
이 쌓여서 재물이 되는데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위하여 쓰여
져야 하리라고 믿지요.
우리 송상은 비록 사대부의 반열에도 들지 못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귀한 지체도 누리지 못하지만 모두들 도주공 범여 같은 경륜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늘을 등지고 사민을 짓밟는 짓으로는 결코 큰 재물을
바랄 수가 없지요.
저는 이제 겨우 차인 행수를 면하고 임방 일을 보고 있습니다. 전국
각지를 상단을 이끌고 돌아다니면서 보았는데 좁은 팔도의 저자만을
왕래하여서는 절대로 국법의 간섭을 벗어나지 못하고, 국법의 간섭
아래서는 언제나 문어가 제 다리 끊어먹듯 할밖에 없지요.
의주와 동래를 이어서 청과 왜를 상대로 다리 구실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유리한 상품은 뭐니뭐니 하여도 역시 인삼입니다.
산삼의 소출은 때에 따라 불규칙하여 믿을 수가 없어서 가장 유리한
품목임에도 무역상들은 꺼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산삼을 밭에다
재배할 수만 있다면 청왜의 물산은 모두 우리 송상의 것이올시다.
저는 이런 말씀을 듣고 처음에는 너무도 놀라서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방문을 늦추고 찬찬히 생각해보았던 것입니다.
우연히 저 아이에게 인정을 보인 것은 잊어주십시오. 설혹 제가 한푼도
취하지 않더라도 부인의 소망이 이루어져 삼의 다량 소출이 가능해진다면,
그리하여 대외무역의 활로가 열린다면 장사꾼으로서 그에 더한 보람이 없을
듯합니다.
제 힘 닿는 데까지 도와드릴 것이니 삼포를 계속 가쭈어나가십시오."
대근의 힘있는 어조에 세 모녀는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없이 울었다.
오랜만에 든든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던 때문이었을까. 부인은 윗목
에서 보퉁이에 여러 겹으로 싸두었던 책을 꺼내었다.
"저희 주인께서 다달이 적어놓으신 재배법이 여기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병이 회복되지 않으면 우리 큰아이와 상의하시고 이 책을 살펴
재배를 계속하십시오."
박대근이 작은딸의 손목을 잡고서 속삭였다.
"어머니와 언니를 모시고 우리 집에 가서 함께 지내자. 우선 어머니
의 병환이 나으신 뒤에 따로 집을 내줄 터이다. 그런 뒤에는 언니의
혼처도 어디 알아보자꾸나."
딸이 먼저 제 가족에게 대근의 뜻을 알렸고, 그도 덧붙여 청하였다.
"저희 집 별당이 세 분 쓰시기에 별로이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
다. 부인께서는 몸도 정양하시고 저희 실인에게도 많이 가르쳐주십시
오. 이곳은 습기도 많고 외진 곳이라 아녀자들끼리는 지낼 곳이 못됩
니다. 어서 가시지요."
작은딸이 또한 조르니 처녀와 어미도 더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대근
이 움막에서 나오는데 큰딸은 어머니를 부축하였고 작은딸이 책보퉁이
를 옆구리에 끼었다. 뒤로 솥 하나 달랑 얹히고 세간이라야 다 터진
고리짝에 세 모녀 누울 적이면 한구들 확 차는 반칸 움막이긴 하였어
도 막상 떠나자니 아쉬워서 부인은 자꾸만 서성이며 둘러보는 것이었
다.
"염려 마십시오. 나머지 세간은 아이들을 시켜서 가져다 놓겠습니
다."
박대근이 말하니 부인은 그제사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저것들은 그래두 화순에서 떠나올 제 모두 팔아버리고 끝까지 남은
거올시다. 저의 가족들의 손때가 묻은 것이라 차마 버릴 수가 없군
요."
세간이랬자 등짐 한 짐이면 족하도록 이미 거덜난 살림이었다. 대근
이 지시하여 하인은 주섬주섬 도구며 식기 나부랭이를 고리 짝에다 터
넣고 헝겊으로 멜빵을 걸어 짊어지고 움막을 나섰다.
"얘들아, 저것들을 그냥두고 가서는 안된다. 묘포를 없애야지."
"옮겨다가 심어보십시다."
큰딸이 제의하여 위에 덮은 거적을 들어내고 삼의 모종을 캐내었다.
아직은 실뿌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모양은 제법 인삼에 가까웠다. 그들
이 남산골에 돌아오니 하녀가 나는 듯이 안방에 알리고 귀례가 버선발
로 쫓아나와 반기며 부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서 오십시오. 늦어지길래 저는 못오시는 줄 알고 속을 태웠습니
다. 자 이리로 드시지요."
"정말 염치가 없군요. 서방님이 어찌나 강하게 청하시는지..."
"이제는 한식구가 되었으니 그런 말씀일랑 하지 마십시오."
역시 아녀자들인지라 오가는 말들이 부산스러운데 박대근은 바깥주
인으로 그 속에 끼이기도 멋쩍어서 슬그머니 아내에게 맡기고는 별당
일에는 참례치 아니하였다.
별당은 연못을 터놓고 정원수를 다시 이리저리 전지하여 말끔해졌고,
부랴부랴 도배를 서둘러서 마치니 신혼방과도 같았다. 작은딸은 눈을
빛내며 별당 안에 걸린 현판과 시서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방에 가서
둘러앉으니 큰딸이 일어나 귀례에게 정중히 큰절을 드렸고, 귀례는
황급히 답례하였다.
"이렇게 환란중인 저희 모녀를 도와주셔서 백골난망이올시다."
큰딸이 얼굴을 들어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하는데 귀례와 거의 같은
또래요 의복은 남루하나 태가 점잖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보아하니 나하고 비슷한 연배인 듯한데 그냥 동기간처럼 지내지
요."
귀례가 말하니 부인이 극구 만류를 하였다.
"안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주객은 엄연히 다른데 우리는 어
디까지나 귀 댁의 식객입지요."
"아주머니도... 저는 시집 식구 중에 아무도 없으니 고숙주
라 부르겠어요. 저희 서방님의 고모인 셈치시고 편히 계셔요. 이
방에는 작은동생과 아주머님이 계시고 건넌방은 큰동생 혼자 쓰면 되
겠어요."
하고는 귀례가 밖에 대기시켰던 하녀에게 뭐라고 속삭이니 이내 의원
이 들어와 부인의 진맥을 짚고 처방을 내리는데 빈혈을 보하는 대보탕
을 달이도록 하였다.
세 모녀는 박대근 부처가 그들을 친족혈육처럼 봐주려는 뜻을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라도 화순에서 왔다는 세 모녀가 박대근이네 별당채로 이사온 뒤
로 대근은 사람을 시켜 음습하고 토질이 좋은 야산을 낀 집터를 구해
보도록 하였다. 그것은 그들 가족의 거처와 묘포를 마련하려는 생각에
서였다. 또한 별당 앞에도 작은 묘판을 마련하여 이사올 때 뽑아왔던
삼을 옮겨 심었다.
만약 재배에 완전히 성공만 하게 된다면 박대근은 송도 상단의 판도를
하루아침에 바꾸어 놓게 될 터였다.
드디어 송악산의 후미진 골짜기에 터가 준비되어 조촐한 기와집 한 채를
짓고 송림의 한가운데를 벌채하여 삼전을 갈도록 하였다. 이제 곧
가을이니 내년이나 가서야 착수하게 되어 있었다.
어쨌든 그런 단계까지 나아갔으니 박대근은 배대인에게 이 일을 알
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근의 아뢰는 말을 곰곰이 듣고 앉았던 배
대인은 역시 만금을 이룬 부가옹답게 절대로 흥분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좋은 일이군. 이제는 돈이 없는 사람들
도 위급할 적에 인삼을 먹을 수가 있을 것이고, 청왜의 무역에서도 유
리해질 것이다. 다만 나라에서는 그냥 내버려두지 않겠지."
"인삼으로 청의 물산을 바꾸어 왜에 비싸게 넘기고, 왜의 물건 또한
인삼으로 바꾸어 청에 넘기면 결국 이재를 보는 것은 우리 쪽입니다.
나라에서 말릴 까닭이 없지요."
배대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나라에서는 독점을 원한단 말이야. 송상의 재화가 너무
커가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을 게야. 여하튼 중대한 일이다. 아마 내가
죽기 전에 송도가 바뀌는 것을 보게 될 모양이다."
세 모녀가 현신하여 배대인을 직접 뵈었고, 배대인이 재배법이 적힌
책을 대강 살피고 묘판의 삼까지 확인하고는 그제사 놀라는 양이었다.
배대인은 따로 대근을 불러 행상단의 운영은 물론 전국으로 나가 있는
차인 송방의 실태를 묻고 나서 전 재력을 기울여 대외 무역의 통로를
뚫으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는 끝으로 모든 재산의 관리권은 사위인
대근에게 위임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모든 장부와 연말에 계산할 각처의 어음이며 물품 대장이 들어
있는 문서 궤와 인장과 상단의 표신을 찍을 좌장인을 넘겨주었다.
처음에 대근은 극구 사양하였으나 배대인이 말하였다.
"내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들 하나 있는 것이 지금도 코흘리
개들과 제기나 차고 다니며, 다른 사위들도 있건만 모두들 부화
하여 일시에 환로에 나가 고관대작의 반열에 들고 싶어하거나, 아니면
상고에는 뜻이 있으되 경난도 싫고 고생도 싫어서 입으로만 수천 수만
금을 벌어들일 수 있듯이 자본 타령이나 하구 있네.
자네는 내게 와서 묵묵히 곁꾼으로부터 차인 행수로 지방 저자를 안
다녀본 데가 없고 실제로 이재의 능력도 보였지. 오늘 나는 아예 결정을
내렸네.
아직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인삼을 재배할 수 있다면 송도 사대전의
판도가 뒤바뀔 게야. 아마도 생각컨대는 이게 바로 시절이 바뀌는 조짐인데,
시절이 바뀌니 사람도 바뀌어야지. 내 할 일은 끝났어. 이제부터는 자
네가 맡아 해야지. 이 집 재산을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자네 마음대로
하게."
이런 계기로 대근은 배대인에게서 사업권을 물려받게 되었었다. 세
모녀가 송악산 골짜기로 옮겨간 뒤에, 대근은 수시로 찾아가 묘판을
잡을 터를 몸소 그들 모녀와 함께 갈고 엎었다.
어언간에 대근은 부인에게 자연스레 고모님이라 부르며 지내게 되었고,
그들도 모두 한식구같이 대하였다. 큰딸 언실이는 과묵하고 무뚝뚝하였으나
인삼에 관해서는 모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송악산 골짜기로 이사온 뒤부터
부인의 빈혈은 날로 사라져 건강하게 되었다.
작은딸 탄실은 주로 가사를 돌보고 있었다. 대근은 이 집에 사내가 꼭
필요하리라고 여겼고, 부인도 은근히 사위는 대근이가 보아오겠거니 바라는
눈치였다. 귀례도 수소문하는 모양이었으나 그들 집안에서 알려진 낭재라는
것들이 모두 전형적인 송도인이거나 아니면 같잖은 지체를 내세을 자들이었다.
송도인은 싹싹하고 예의 바르고 경우는 있으되 장사치 기질이 있어 경박
하고 매정한구석이 있었다. 도방 대처 사내들이 어디라고 다르겠나마
는 엇구수한 데가 없기로는 송도인이 으뜸일 것이었다. 대근은 그런
혼처보다는 차라리 강직하고 성실한 촌부라도 맺어주고 싶었다. 대근
은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선뜻 이게 댁네 맏사위 감이라고 내대지
는 못한 채로 그해 겨울을 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는 전포나루 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두문동
고갯마루에서였다. 마침 북문 밖에는 나무장이 날마다 서게 마련
인데, 성내 장사치들이 떼어가기도 하고 대가에서는 하인들이 거기까
지 나와서 직접 지고 가기도 하였다. 대근이 가는 앞에 어떤 총각이
참나무 장작을 두어 키가 넘도록 지고 내려가고 있는데 걸음이 전혀
무거워 보이지도 않고 어찌나 빠른지 맨몸으로 걷는 그들보다 훨씬 앞
질러 내려가는 것이었다.
"짐, 짐요, 비킵시다."
외치며 가다가 미처 못 알아듣고 머뭇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두 손으로
허리를 잡아 번쩍 치켜서 옮기며 나아가니 사람들은 조금도 항거하지
않고 비켜나는 것이었다.
대근은 처음에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자가 참나무짐을 산처럼 지고
가는 모양을 신기하게 보다가 그저 무심코 하인에게 저 녀석이 어떤
놈인가 알아보라고 일렀다.
하인이 그 또래의 나무꾼들에게 한참이나 무엇인가 묻고 돌아와서
말하였다.
"그 아이는 만수산 물머리 사는 최윤덕이라는 녀석인데, 과부 어미를
모시고 산에서 화전갈이와 약초 채취를 하여 살고, 장날이면 장작이나
숯을 구워, 지고 나와 팔아서 찬거리며 일용품을 사간다 합니다.
일에도 억척이고 알려진 효자인데 눈매는 어찌나 밝고 빠른지 귀한
약재를 철철이 캔답니다. 송도 바닥을 싫어하여 장사치들을 가끔 두들기고
관가에 잡혀가 혼찌검도 났다지요. 그렇지만 일단 만수산 기슭에 돌아가면
바보처럼 온순하다지요."
대근은 어쩐지 귀가 솔깃하여 그 최윤덕이라는 총각놈의 거동이나
살피려고 나무장을 비집고 돌아다니다가 다른 자들과 뚝 떨어져 앉아
서 곰방대에 담배를 태우고 앉은 총각을 찾게 되었다. 대근은 천변에
멀찍이 떨어져 쭈그리고 앉아서 장작과 숯이 팔려나가는 모양을 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장작은 차츰 팔려나가고 석양 무렵이 되도록 총각
의 장작은 값을 묻는 사람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나뭇짐이 무지막지하게 큰지라 값이 비싸겠거니
여기는 모양들이었다. 대근이 바라보노라니 털벙거지에 검정 더그레 입은
관노놈이 탁주잔깨나 좋이 들이켰는지 볼따구니가 불콰하여 건들거리며
총각 앞에 머물렀다.
"그 장작짐이 과연 송악산만하구나, 얼마를 내랴?"
총각은 일어서지도 않고서 곰방대만 빨아대면서 대답하는 것이었
다.
"꼭 일곱 푼은 내셔야겠수."
"아니 일곱 푼이 어디 봉놋방의 살몽둥이냐, 마구잡이로 들이대는구
나."
"어허, 공연히 심화 돋구네. 이건 뭘 화냥년 흥정인 줄 아슈? 다른
이들은 한 짐에 세 푼씩 받았수. 내 것은 석 짐도 더 되는데 지금 파
장이라 내키는 대루 넘기구 가는 게요. 짚신값두 안 나오우."
그러나 관노 녀석 털벙거지 자세만을 믿고서 우겨대었다.
"가는 똥은 똥이 아니라더냐. 작으나 크나 한 짐은 매일반이니 네
푼만 주마."
이때에 최총각 화가 나서 다른 사람의 장작짐을 사정없이 가로막아
지겟작대기를 걷어차고 제 것도 깻박치기로 엎어놓았다가 다시 지게
위로 쌓았다.
"저 장작은 가늘어도 이백 가지요, 내 것은 굵고도 육백 가지인데
애비가 다른 자식을 한대롱 타구 나왔다구 억지 쓰기가 일반이지 어찌
매일반이우. 나는 여기서 불을 싸질르구 가지 그렇게는 못 팔겠수. 술
냄새 피우지 말구 집에 가서 구들이나 지시우."
대근이 바라보니 고지식하고 우락부락하여도 생업에 대한 자랑스러
움이 있어 티끌만큼도 굽힘이 없어 보였다. 그야말로 너는 너대로 하
려무나, 내 등으로 짊어진 짐이니 포도대장이 온다더라도 이것은 내
몫이다, 하는 기개가 엿보였다. 길가에 나앉아 평생 지낼 행상 좌고라
면 몰라도 대저 큰 장사치는 배포의 싹수나 근본이 저래야 옳은 것이
라고 대근은 빙긋이 웃었다.
그런 배포를 모를 리가 없는 관노가 공연히 오기로 나온 것이다.
"나는 다른 장작은 싫고 네 장작이 좋구나. 두말 잔소리 더 보태지
말고 네 푼을 줄 터이니 지고 나서라."
최총각은 볼을 씰룩거리고는 우선 발바닥에다 곰방대를 탁탁 털어
허리춤에 찌르고 나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아래위로 보아하니 관아치인 모양인데 산에 나무도 육모방망이로
넘길 줄 아슈?"
총각은 손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도끼로 찍어온 게여. 그저 도적놈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랍디다."
관노는 술김에 팔을 부르걷고 총각의 멱살을 잡으러 달려들었다.
"이놈, 너 말 다했것다. 관아치가 어쨌다고? 역적놈의 자식 같으
니."
다짜고짜로 총각의 뺨띠귀를 처얼썩 후려갈겼다. 또 한번 치려고 손을
번쩍 쳐드는데 총각은 그 손목을 틀어잡고 껌벅이는 눈으로 올려다보
았다.
"응, 무고한 양민을 두들기라구 털벙거지를 씌어준 모양인데, 관아
치는커녕 어사또라두 참을 수가 없수."
그대로 팔을 비틀어 개천가로 끌고 가 발길로 내지르니 관노 녀석
털퍼덕 쇠똥 퍼지듯이 진흙에 주저앉았다.
"이놈, 나를 치구 네가 이 고을에서 밥 빌어먹구 살 줄 아느냐."
행악을 떠는데 장 모퉁이로 관노들 서넛이 나오다가 그런 꼴을 보았
다.
"아니 저 친구가 나무 사러 나왔다가 뒤가 급했나, 아니면 술안줏감
을 구하려고 천렵중인가."
"저놈이 발길로 내질렀네."
손가락으로 위에 섰는 총각을 가리키며 외치니 관노들이 잠깐 어이없
이 총각을 보다가, 아무래도 산골짝에서 내려온 어수룩한 불상놈이 분
명한지라 열을 내어 달려들었다.
"이런 고약한 놈을 보게. 감히 우리에게 덤비다니."
총각은 뭇놈을 상대할 길이 없어 뒤로 엉거주춤 물러서고, 대근은
끼여들까 말까 주저하며 일어나는데 총각이 재빠르게 장작개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이놈을 치고 저놈을 패며, 저놈을 후리고 이놈을 두
들기니, 다른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한 가운데 시원하고 재미가 있어서
둘러서서 구경들 하였다. 박대근이 더이상 두었다가는 이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총각이 살인을 하게 될까 염려하여 앞으로 나서기로 하였
다.
"송도 저자에서 흥정 싸움은 금률이니 그만들 두게나."
가운데 끼여든 자에게 관노들은 덮어놓고 욕을 하였다.
"남이야 싸우든 말든 네 코가 성하려면 물러서지 왜 나서는 게여.
별놈이 다 있군."
대근이 서슬이 퍼렇게 꾸짖었다.
"이런 주제넘은 놈들 같으니... 나는 사대전의 임방원이다. 유수께
너희들의 난잡한 일을 여쭈어야겠다. 누가 양민의 생업을 방해하고 저
자에서 매매하는 것을 방해하라 하더냐."
좌장은 영위의 표장을 가지게 되어 있고 임방 참석자는 반수
의 표를 가지게 되는데, 대근이 배대인의 임직을 위임받았으니
영위의 표장을 내 보일밖에.
영위란 사대전 상고들 중에도 으뜸이요 유수까지도 신연 때에는 꼭
순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근의 표장을 보고 관노들은 기가 죽어
물러가면서 으르대었다.
"대인이 아니드면 너는 입을 봉하구 거꾸로 먹었을 게다. 다음에 걸
리면 다리 몽갱이를 분질러다 불쏘시개를 할 테니 아예 장거리로 나올
생각 마라."
"이놈들, 그래두 법석이냐. 저 아이는 내가 버릇을 가르칠 터이니
어서 물러가거라."
관노들이 쥐며느리 홑어지듯 사라지고 나서 대근이 땀범벅이 된 총
각의 등을 두드렸다.
"총각도 그만 돌아가보게."
"우리야 먹구 살려니 당연히 빼앗기지 않으려구 이러지요. 일수가
사나워서 나무도 못 팔았고 어머니가 기다릴 터인데 쌀 한톨 못 사고
어찌 가오."
울먹이더니 두꺼비 손으로 눈시울을 쓱 씻었다. 대근이 처음부터 눈
여겨보고 있던 차라 열 푼을 꺼내어 주면서,
"장작은 내가 사지. 헌데 이미 해가 저물었으니 어찌 범 나오는 고
개를 넘을 것인가. 우리 집에 가서 쉬구 가지."
하였더니 총각이 열 푼을 성큼 받아 세 푼을 떼어 내밀었다.
"처음부터 일곱 푼 흥정을 염두에 두었으니 더는 받을 수가 없수.
시방 시간이 늦었고 손님의 인정이 그렇지 않으니 나무는 댁에까지 져
다 드립지요. 헛간이건 마루에건 재워주셔도 좋습니다."
대근이 남산골 집으로는 데려가지 않고서 점포들 가운데 가장 가까
이 있는 데를 찾아 차인들 방에 들었다. 방에 앉아서도 총각은 멋대로
곰방대를 내어 맞담배질을 하는 것이 거침이 없었다. 대근은 으레 그
러려니 여기고 물었다.
"총각, 술도 좀 먹는가?"
"내 돈으로는 아까워 마시지 못합니다."
대근은 어쩌는가 보려고 차인을 시켜서 주막에서 개 뒷다리에 탁주
한 동이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동이가 찰찰 넘치도록 담긴 술을 보고
총각 녀석은 제법 목젖이 땡기는지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대근은 우선 제가 먼저 한 잔을 떠서 요란하게 넘기고는 내밀었다.
웬걸, 총각은 잔 받기를 사양하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왜 안 먹나?"
"이 술에 아무 내력이 없소이다. 내 장작값으로 치면 모자랄 지경인
데, 다음번에 장작을 저다 드리지는 않을 테요. 또 팔아서 먹구 살아
야지요."
"허허, 참으로 벽창호 같은 총각이로다. 이 술은 아무 값도 없고,
자네를 재우고 또한 나 혼자 심심하여 대작이나 하자는 것이니 무슨
내력이 따로 있겠나."
그제서야 총각이 바가지 잔으로 달게 퍼마시는데 넉 잔을 연거푸 들
이켜고 나서야 대근을 바라보고 내밀었다.
"손아랫놈이 염치가 없어 미안허우. 내가 이담에 일진 좋을 제 곡
찾아와 한잔 사지요."
그러고는 고기를 덥석 베어 찢어서 대근이게로 내밀고 한편 제 입에
다 아귀아귀 처넣었다. 한참이나 먹고 나서 벽에 기대 앉아 씩씩거리
더니,
"잠이 와서 못 견디겠수. 나는 말주변도 없고 하여 얘기 상대도 못
되고 뭐 심부름할 일이나 있으면 지금 다녀와서 자구 싶우."
하는 것이었다. 대근이 그저 끄덕이며 말하였다.
"괜찮네. 어서 자게."
대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총각은 그대로 옆으로 늘어지더니 잠시
후에 코를 드높게 골면서 잠이 들었다. 대근은 그가 잠이 든 것을 확
인하고 머리 밑에 목침을 베어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대근이 한번 마
음먹으면 바닥을 보고야 그치는 성미인지라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거
기서 유하고는 총각의 집으로 뒤밟기를 할 작정이었다.
이튿날 아침동이 트자마자 마당에서 우렁우렁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르신네, 어르신네, 저 이만 돌아갑니다."
대근이 잠이 설깨어 눈살을 찌푸리고 미닫이를 열었고, 총각은 빈
지게를 지고 섰다가 꾸벅해 보였다.
"종종 나무장으루 나오시면 제일 좋은 나무로 드리겠습니다. 재워줘
서 고맙수."
"그래, 잘 가게."
대근은 대문 소리가 나자마자 혼자서 총각의 뒤를 멀찍이 따라갔다.
총각은 성큼성큼 산길을 올라갔고 대근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곤 하면
서 뒤를 쫓았다. 깊은 산으로 들어가 물머리에 이르니 사방은 고요한
데 물소리와 산새 소리뿐이었다. 골짜기 속에 통나무 귀틀집이 박혀
있고 지붕은 너와요 문에는 거적이었다.
대근이 바위 틈에 숨어서 내려다보는데 총각은 어머니를 찾았다. 제
아들과는 반대로 작고 오종종하게 생긴 쉰 남짓 되어 보이는 노파가
나왔다.
"윤덕아, 네가 어째서 이제사 오느냐. 한밤중에도 오던 사람이 오지
않길래 어디 범에 물려갔나 하구 한숨도 못 잤다."
"에이 어머니두, 내 고기를 범이 먹나요. 날이 저물어 장터 점포에
서 자구 왔어요. 앞으로는 아무리 저물어도 돌아올 테니 염려 마셔
요."
대근이 보기에 두 모자의 정이 두텁고 다정하여 훈훈한 느낌이 들었
다. 숨어서 살피던 대근은 슬그머니 일어나 귀틀집으로 내려갔다. 최
총각이 먼저 발견하고는 그가 따라왔으려니 여기지는 않고 신기하게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장터에 사시는 줄 알았더니 물머리 근처에 사시우?"
대근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총각의 등을 밀며 자기도 신발을 벗었
다.
"잠깐 들어가 앉지. 내 자네와 모친께 드릴 말씀이 있네."
총각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요... 나뭇짐을 물르러 왔소, 아니면 술값을 내라는 게요."
대근은 하는 수 없이 크게 웃어버렸다.
"허허 그 사람 참, 내 어제는 호기로 보아 대금을 쥘 사내로 알았더
니 이제 보니 좀스럽기가 참빗장수로구먼."
"그럼 어째 예까지 왔느냔 말이우. 우리네는 갓 쓰고 도포 자락 날
리는 이들은 믿질 않우. 관차들이야 두들기면 그만이지만 한량 어른들
은 마음만 먹으면 대 물림으로 밑을 쭉 뽑아놓는답디다."
"걱정 말게, 내가 자네 장가를 보내려고 중신을 선다면 어쩌겠는
가?"
대근이 운을 떼는데 밖에서 궁금하여 엿듣고 섰던 총각의 모친이 문
을 벌컥 열며 말하였다.
"우리 윤덕이 장가를 보낸다구요?"
"뵙겠습니다. 저는 송도 사대전 좌장으로 있는 박아무올시다."
그러나 노파는 사대전이 무엇인지, 좌장이 어느만큼의 직함인지 전
혀 알아듣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양 되묻는 것이었다.
"그래, 손님네 여식이 있으시우?"
윤덕이는 대근이 장가 이야기를 거냈을 때 할말을 잃고 두리번거리
다가 노모가 다시 쫓아들어와 새겨 물으니 몹시 쑥스럽고 부끄럽던지
토방 위에 갈아놓은 거적대기를 자꾸만 뜯어냈다.
"얘야, 그만 뜯어라. 짚 날린다."
"장가는 무얼... 어디 색시가 있담."
최총각은 벌써부터 볼이 벌개져서 고개를 숙이는데 색시 소리를 하
는꼴이 딴에는 몹시 땡기는 눈치였다.
"제 친척 중에 아직 여의지 못한 여식이 하나 있어 제가 오래 전부
터 신랑을 물색하느라고 사방에 매파를 구하던 참이올시다."
하고 나서 대근은 장터에서 최총각을 보게 된 것이며, 데리고 가서 함
게 술을 마시며 사람됨을 자세히 뜯어보고 찾는 신랑감이라 여겼다는
말을 하였다. 최총각은 더욱 거적을 뜯고 앉았고 모친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저것이 그래도 삼대 독자인데 가장도 없는 집구석에서 혼사 치르자
니 혼수 비용은커녕 세간살이며 땅뙈기며 집도 없으니 어찌 보내겠소.
어느 아이가 들어와 살겠다고 하겠소."
"그런 염려는 놓으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조처하겠습니다. 요즈음
재상 댁에서도 인물만을 보고 사위를 삼는 예가 한둘이 아니올시다.
아드님은 제가 보기에 큰 대상부고가 될 인물입니다."
잠잠히 듣고 있던 최총각이 무슨 용기가 났는지 벌떡 일어났다.
"나 장가가겠수. 어디 색시가 어떤가 보러 가십시다. 까짓 제 따위
가 고작해야 계집인데 마음에 들면 데려다 살지요. 나뭇짐을 하루에
스무 짐씩 해다가 늘어난 식구를 먹이고 차차 땅도 장만하지 뭐."
대근이 하도 어이가 없어 앉으란 말도 않고 혀를 찼다.
"장가가는 일이란 인륜대사라 참나무에 도끼 날리는 일하고 다르네.
어머님 말씀이나 들어보게나."
"가장이 벌써 십오 년 전에 돌아가신 뒤로 남의 행랑에 얹혀 지내다
가 그래도 우리가 양인인데 배를 곯더라도 저 아이 장가갈 때쯤에는
남의 아랫것 소리 듣지 않겠다고 이 산골루 찾아들어와 사는데, 이제
는 저 아이 약초 캐는 일거리와 나무장수 일이 없으면 하루도 밥을 못
넘긴다우.
겨울에는 숯을 굽고 봄 여름에는 약초를 캐며 요즈음은 장작을 패다가
팔지요. 내가 애달캐달 모아놓은 돈이 약간 있어요."
노모는 오종종한 얼굴에 눈물이 글썽하여 돌아앉더니 거적을 들추고
한참이나 더듬어서 엽전을 집어올리는데 오십 푼 반 냥은 좋이 되어
보였다.
"이거면 비단은 못 되어도 상목은 살 수 있을 테니 하다못해 무명
치마라두 해 입히지요."
"혼수는 염려 마시라니까요."
대근이 말하였으나 노파는 막무가내였다.
"아니우, 흔수는 재물이 아닌 정성인데, 이것은 저 아이가 산과 재
를 몇씩이나 넘고 헤매며 캐온 약초를 팔아 내가 모아둔 것이니, 우리
로서는 이보다 더한 정성이 없습네다."
"잘 알겠습니다."
대근이 두말 않고 받아서 챙겨 넣었다.
"저희 집으루 가시지요."
대근이 일어서며 청하니 윤덕의 어미는 상냥하게 거절하였다.
"아무리 가난하다 할지라도 남의 여식을 데려오려면 이 집의 고집은
서 있어야 옳습니다. 그쪽에서 매파를 데리고 와서 선을 뵈인 뒤에 우
리가 색시 집으루 가지요."
대근은 적이 놀랐다. 이렇듯 그 어미가 떳떳하고 심기가 서 있으니
총각이 과연 어떻게 자랐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대근은 그 말에
도 승복을 하고 말았다.
"과연 아드님을 알아본 제 눈이 어긋나지 않은 듯합니다. 말씀이 모
두 옳습니다. 예를 갖추어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대근이 나오려니 최총각은 벙글대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따라나왔
다.
"내가 어르신네 댁에서 대접을 잘 받았는데, 조밥이라도 한술 드시
구 가시지요."
"아닐세... 다음에 와서 술이나 한잔 하지."
대근이 물머리를 나서며 이제까지의 일을 되새겨보노라니 역시 잘되
었다는 느낌이라 마음이 흐뭇하였다. 인삼을 재배하는 일은 우선 근력
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될 일이었다.
또한 약빠르고 탐욕스러운 자는 틀림없이 대금을 염두에 두고 등을
돌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우선 강직하고 정의감이 있으며 신의가 있는
송도 사람이어야 했던 것이다. 인물도 저만하면 서글서글하게 잘생겼고 배포
도 있으며 꾸밈이 없이 솔직하여 간교한 것과는 거리가 먼 위인이었
다.
대근은 물머리에서 나오는 즉시로 세 모녀가 살고 있는 송악산 골짜
기를 찾아갔다. 마침 둘째딸 탄실이는 부엌에서 점심을 짓고 있었으며
큰딸 언실이와 부인은 묘포를 돌보고 있었다. 대근은 방에 들어가 앉
자 서슴없이 말을 거내었다.
"실은 따님의 혼인 자리가 있어서 의논을 드리자구 왔습니다. 그동
안 이곳저곳으로 낭재를 알아보았으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
없더니 고모님이 찾으시던 인물을 만났습니다."
"박서방이 보았다면 틀림없겠지..."
부인은 희색이 가득하여 언실이 쪽을 돌아보았고 언실이는 슬그머니
자리를 떠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대근은 최윤덕이란 아이의 사람됨을
한가지씩 꺼내어놓았다.
"훌륭한 신랑감일 뿐만 아니라, 거금을 쥐고 흔들 부상감입디다."
"내야 뭐 박서방 의견과 같겠지마는 저 아이의 생각이 어떤가도 물
어보아야지. 집안은 어떻든가?"
"양인이지요. 나뭇짐을 져다 파는 살림이니 가난하기야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다구 부자였든가. 박서방이 아다시피 구걸로 연명하였
는데. 어서 그 총각 선이나 좀 보았으면 좋겠네."
이렇게 의논이 정해졌고 언실이도 장터에서의 최총각의 행동을 듣고
는 과히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먼저 언실이 모친이 윤덕이를 보고 와
서는,
"처음에 보니 철딱서니 없는 더펄머리이더니 얘기를 시키니까 아주
사내답고 대범하더구만. 눈매도 총기가 있고 비록 글은 모른다지만 우
리 언실이가 차차 가르치면 될 것이고... 하여튼 늦복으루 장부 사위
를 얻게 되었네."
하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사위 될 총각의 자랑이 한창이었다. 혼수
의 택일단자가 오고 가는데 중간에서 귀례와 박대근이 끼여들어 양가
를 모두 돌보았다.
귀례는 언실이네의 제반 잡사를 정돈해주었고 대근은 윤덕이네 일을
맡아주었다. 최총각 모자와 언실이네 모녀가 한집에서 살기로 작정되었으니
시댁과 친정이 따로 없어 혼례에서 신행까지를 모두 송악산 상수리 골에서
치르었다.
대근은 길산이 구월산에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그런 일에
분주해 있었던 것이다. 지방에서 소집해 들인 송방들과 더불어 각 산지의
사정을 청문하고 돌아와보니 강말득이가 와 있었던 것이다.
"평안합쇼?"
"네가 웬일이냐... 구월산에는 별일들 없겠지."
말득이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별일이 없다뇨, 길산이 성님이 오셨단 말이우."
대근이는 싱긋 웃었다.
"음, 맞춤한 때에 왔구나."
"감동이, 만석이 성님들하구 선흥이 성님이 계신 달마산에 갔다가
하마터면 큰일날 뻔하였지요."
대근의 눈썹이 곤두섰다.
"왜... 무슨 일이 생겼다더냐?"
"달마산과 불타산에 토벌이 시작되어 가까스로 빠져나왔습니다. 선
흥이 성님은 다리를 조금 다쳤습니다."
"그래, 어쩐지 불타산 쪽이 형세가 불리하더구만. 방금 떠날 수는
없고 새달 초하룻날 가도록 허지."
"대용이 성님께도 전갈을 해야겠습니다. 지금 어디 계신가요?"
"음, 그건 내가 알아서 사람을 보낼 터이니 너는 집에서 푹 쉬고 있
거라."
6
길산은 마감동과 오만석이 함께 산채를 비웠으므로 김기와 더불어
된목이골에 머물러 있었다. 길산과 동행하여 구월산 인근 사읍
을 돌아보고 온 김기는 감회가 새삼스러웠다. 그들은 함께 밤을 새우
며 여러가지 의견과 경륜을 주고받았다.
송도에서 강말득이가 예상 밖에 빨리 돌아와 한꺼번에 여러가지
소식을 전하였고, 길산은 특히 강선흥이의 달마산 산채가 실함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걱정하는 한편으로 기왕에 잘된 일이라고 말하였다.
박대근과 우대용이가 새달이 되어 구월산으로 온다는 전갈에는 그들
이 별일 없음을 알고 한시름 놓으면서도, 오직 그 자리에 참례치 않을
갑송이의 일로 서운해 하였던 것이다. 며칠 지나서 달마산에서 빠져나
온 선홍의 식구들이 당도하였는데, 오만석이가 이끌고 왔다.
변가와 업복이와 산채를 수비하다 생존하게 된 자들과 아녀자들이었다.
길산은 일단 졸개들의 집을 비워 그들을 안돈시켰다. 열흘이 지나서야 신
천 주막에서 다리의 총상을 치료하던 선흥이와 마감동이가 된목이골에
올랐다.
길산이 마중을 나가니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산채 경내로
들어서던 선흥이가 아예 지팡이 내던지고 깨금발로 뛰어왔고, 길산이
도 달려들어 그를 붙잡았다. 길산은 선흥의 무거운 체중을 두 팔로 버
티었다. 선흥이는 어린애처럼 길산의 팔에 매달려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구 성님, 어디 갔다가 이제 왔수. 이런 꼴이 되구 말았지요."
길산은 선흥이의 바위 같은 등판을 연신 두드렸다.
"선흥이두 많이 늙었구나 허허. 그래 부모님들은 모두 안녕하시
냐?"
"예, 봉산에다 안돈을 시켜두었기로 이번 화는 피했습니다."
"갑송이가 있었드면 얼마나 반가워 했겠느냐."
이어서 선흥이는 김기와 다시 정의를 표시하고 길산과 함께 상방에
들어갔다.
"두 성님들께 문안 인사 올립니다."
선흥이는 나란히 앉은 김기와 길산을 향하여 큰절을 올렸고, 두 사
람도 일어나 마주 절하였다. 예전 같으면 선흥이 성미가 이까짓 예의
범절 따위는 웃고 넘겼겠지만 그도 어느결엔가 정을 표하는 데도 세상
살이의 방식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선흥이는 내수사 노비를 두드리고 부역터를 떠났다가 태형을 받게
된 일이며, 첫봉이 형제들과 달마산 수돌이, 불타산 심백이 패거리를
내쫓던 일이며, 재령의 집강 동춘만이네 집을 우대용과 함께 털어냈던
일들을 상세히 얘기하였다.
길산이도 지나온 일들을 얘기하는데 밤이 이슥하도록 끊일 줄을 몰랐
다. 오만석이와 마감동이도 그들이 함께 달마산 호림의 포위망을 천신
만고 끝에 빠져나온 얘기를 하였다. 길산이 넌지시 선흥이에게 물었
다.
"그래, 이제 네 식솔들을 수습하여 어디로 가겠느냐?"
선흥이가 막상 생각이 없었는지 눈을 껌벅이며 감동이와 만석이를
돌아보다가 자신이 없는 듯이 말하였다.
"성님들하구 함께 지내면 안되겠습니까?"
길산이 크게 웃었다.
"관군이 내가 온 줄 알구 너를 이리루 내몬 게로구나.이제부터 우리
선흥이하구 부지런히 도적질을 해야겠구나."
"에이 성님, 같은 말이라두 도적 질이란 또 무엇이오?"
선흥이가 기분이 상하여 심드렁히 말하니 길산이 대구하였다.
"그러면 네가 도적놈이지 아직두 어염 행상인 줄 알구 있느냐?"
"말이라두 활빈당이라구 하든지 녹림당이라구 하십시다."
길산은 그 말이 나오자 농담 기색을 일시에 거두고 한참이나 기다렸
다가 얘기를 거냈다.
"이제껏 우리가 살아온 길은 그저 작은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다. 활
빈을 했던 적이 있느냐. 백성들과 더불어 탐관오리를 징치하고자 하였
느냐 이제 우리가 모여 다시 다짐을 하게 되겠지만 구월산 인근 사읍
부터 우리의 판도 안에 넣어야 한다.
여기 성님하구두 돌아보았는데 지금 관아는 병기가 녹슬고 군기는
수숫대처럼 허약하며 수령은 탐욕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이미 백성들이
마음 붙일 데가 없어 하늘을 우러러 탄식만을 하구 있다. 이때야말로
저들의 돌아선 마음을 우리에게로 이끌어을 때가 아니고 무엇이냐."
김기가 다시 곁에서 말하였다.
"이제 우서방과 박서방이 당도하겠지만, 기실 한 사람은 이미 수적
으로 나아가 우리들과 뜻은 같다 하나 실지로 일에 부딪쳐서는 따로이
도모할 사람이고, 또한 박서방만 하더라도 본색이 상인이니 우리들 일
의 뒷바라지라든가 나라 일의 동향을 알려준다든가 하는 일은 몰라도
길은 다른 사람이오. 그렇다면 여기 장두령을 위시하여 마두령, 오두령,
강두령이 합심 전력할밖에 없지.
아마도 활빈행을 해나가려면 우리가 다른 녹림처사들처럼 강탈한 재물을
분배하여 사복을 채운다거나 호의호식할 생각은 버려야 할 테지. 아무래두
군비나 전력은 우서방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할 게요."
길산이 다시 말하였다.
"이번에 성님과 내가 대강 짧은 일정으로 돌아보았는데,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제일 가까운 적들을 하나씩 처단해나갈 일이 급하다. 곡괭이
와 호미로 할 수 없는 일이니 우리가 미리 경고하고 기간을 두고 본
연후에 가차없이 징치한다. 그래서 다른 토호나 관리들에게도 두려움
을 주어야지. 대개 반수가 당하고 나면 나머지는 죽어 있는 거나 진배
없을 게다."
선흥이가 거칠게 말을 꺼내었다.
"먼저 장연을 들이치도록 해주오. 첫봉이의 원수를 갚아야지."
김기가 만류하고 나섰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거병하였다간 낭패를 보구 마네. 우리가 일을
거듭해가노라면 틀림없이 알려지게 될 것이고, 알려진 연후에는 감영
이 문제가 아니라 조정에서 들고일어나 우리를 토벌하려 하겠지.
우선 민심을 얻는 쪽으로 신중하게 일을 벌이고 세력을 키워나가야 할
게야. 내 의견으로는 모두들 모인 다음에 특히 박서방의 요즈음 돌아가
는 세상사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서 일의 규모와 대상을 정하기루 하
는 게 좋을 듯싶소."
길산이 말하였다.
"아직도 인근에 부자들이 많이 사는가?"
마감동이와 오만석이가 차례로 대답하였다.
"근년에 많이 늘었습니다."
"특히 안악, 문화 일대에 부자들이 많이 살구 있는데, 송화에는 장
리 부자와 토호가 많지요."
길산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먼저 징치하고 뒤에 활빈하는 것이 좋겠군. 우리의 위세
를 어느정도는 알려두어야 할 테니까."
마감동은 역시 산채의 오랜 주인 노릇을 해 왔는지라 걱정이 한두 가
지가 아니었다.
"아무래두 겨울철이 문제입니다. 여름에는 구월산이 깊고 험한 산이
지만 겨울에 접어들면 나뭇잎도 다 떨어지고 골짜기도 얼어붙어 산이
휑하니 드러나고 산곡을 오르내리거나 길을 찾기가 쉽지요. 그리고 벌
이도 쉽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징치와 활빈과 또한 따로이 벌이두
해야 될 듯싶소이다. 어찌 이렇게 궁색한 녹림처사로 옳은 일만 할 수
가 있겠습니까."
길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우리 일의 시초는 관이나 권세가를 치는 일과 부자들의
것을 약탈하는 일이다. 징치도 하고 약탈도 하며 활빈도 하는 것은 때
에 응해서 변화시킨다. 다만 재물을 다룸에 있어서 우리가 검소하게
생활할 만큼만 취하고 나머지는 모두 활빈에 쓸 것이다. 탑고개의 식
구들도 차차 생업을 갖도록 하고, 우리도 자생할 방도를 찾아야 할 게
다."
"너무 한꺼번에 징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별로 표나게 활동하지 않은
달마산도 토벌을 받지 않았습니까."
오만석의 말에 김기가 결연히 말하였다.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네. 우리가 비록 구월산의 천험
요새지에 근거를 잡고는 있으나 사방이 적이며 팔도의 관군에 둘러싸
여 있다고 여겨야지. 우리가 주변 백성들의 마음을 잡는다면 약자인
우리를 같은 약자가 도와줄 것이고, 강자인 관군은 백성들의 미움을
받으니 강자는 남에게서 원한이 집중되는 까닭이오.
부드러움과 단단함과 약함과 굳셈이 이해와 선악의 양면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는 산속에 앉아서도 관군의 움직임을 알 수가 있고 어느 쪽이
허하고 실한지 어느 쪽이 강하고 약한지를 상세히 살필 수가 있소. 우리는
감추어 엎드린 승냥이가 양떼를 덮치는 것과도 같지.
달마산이 실함된 것은 천험의 요새지이기는 하였으나 내실이 약하여
안으로 배신한 자가 나왔고, 밖으로는 민심을 얻는 일을 전혀 돌아보
지 않은 탓으로 관군의 동정을 몰랐기 때문이지. 일단 거병할 때엔 과
감하게, 은거할 때엔 깊이 숨고, 마을마다 심복을 두고 하리들 중에
내통자를 얻어야 하며 산채를 굳게 지킬 필요도 없고 산중에만 머물
필요도 없소.
따라서 식솔들도 차차 여염 마을에 스며들어 살게 해야지. 지난 몇해
동안에 마을에 사는 이들 중에서 우리와 투합한 사람도 몇이 있을 텐데."
"한 칠판 인이 됩니다. 그리고 아전과 장교 중에도 우리 물건을 받
은 자들이 있지요."
마감동이 대답하였고 김기는 계속해서 말하였다.
"탐욕스런 자는 뇌물로 잡아두고 불만이 있는 자는 그에 동조해주며
협기가 있는 자는 마음으로 잡을 일이오."
"자, 이제 병담은 그만두기루 하세. 우리가 된목이골에 자리
잡을 적부터 여태껏 그럴 듯한 말만을 해오지 않았던가. 여하튼 맨 처
음에는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부터 차례로 징치한다."
길산의 말처럼 병담은 장황하지 않게 요점만 논의되고 글이 났는데,
이제껏 참고 있던 선흥이가 물었다.
"성님, 그전에 갑송이 성님한테 들으니 맏상주를 보셨다면서요?"
길산은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고, 김기는 갑송이 생각이 나서 침울
한 빛이 되었다.
"이서방은 지금쯤 뭘 하구 있는지, 중으로 오래 배길 사람은 아니건
만..."
"저두 감동이 성님이 얘기해서 알았어요. 패가하시구 탑고개를 떠났
다지요. 그럴 바에야 장가는 뭣하러 가누."
선흥이의 시큰둥한 말에 길산이 나섰다.
"갑송이가 우리에게서 아예 떠나버린 것은 아닐 게다. 금강산의 운
부 큰스님을 찾아갔으니 앞으로 만나게 되겠지. 그래 너는 장가 안 갈
셈이냐?"
"번거롭게 장가는 들어 뭘 해요."
"그 헛상투 꼴보기 싫으니 명년에는 아낙을 얻도록 하렴. 내가 좋은
처자를 중신해 주마."
길산이 말하면서 김기를 돌아보니 그도 슬쩍 눙치는 것이었다.
"저어기 안악 배고개 마루턱에 좋은 주막이 있는데 그 댁에 과년한
처녀가 있네. 인물도 반반하고 궁량이 깊기로는 웬간한 사내보다 낫
지."
김기의 말에 감동이와 만석이도 모두 알아듣고는 실실 웃기 시작하
였다. 뒷전에 앉았던 강말득이가 참지 않고 실토를 해버리는 것이었
다
"허, 산이라구 상피두 없는가베. 성님, 성씨는 같은 줄 알지만 본이
어디요?"
선흥이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얼결에 중얼거렸다.
"배천이라든가, 본은 무에 말라비틀어진 게야."
"우리는 해미라구 하니 상피는 되겠구먼."
말득이의 중얼대는 소리에 선흥이는 그제사 얼굴이 불그레해져서.
"나 원참, 사람 앉혀놓고 이리 팔구 저리 빌리구..."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길산이가 말하였다.
"언제 선흥이하고 배고개에나 내려가봐야겠다. 우리 끝춘이가 좋은 술을
담가놓을 테지."
"끝춘이요? 어디서 꼭 사타구니에 밥알 묻히구 다니는 계집아이 이름이로구먼."
선흥이가 내뱉는 바람에 말득이도 발끈하였다.
"누가 주기나 한대. 저런 뚜껑눈에 순대 입술 닮은 조카를 보았다
간, 나까지 두꺼비 항렬에 들게?"
시시털털하게 농이 오가는데 뒤이어 변가와 업복이도 명색이 달마산
두령인지라 상방에 찾아와 구월산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막걸리
가 나오자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고, 워낙에 세상 풍파를 다양하게
려은 사내들인지라 모두들 별의별 얘깃거리가 끊임없이 풀려나왔다.
동이 부옇게 트일 즈음 해서야 그들은 이리저리 끼여서 함께 잠들었
다.
새달 초하루가 되자 길산은 일부러 수렛고개가지 박대근과 우대용의
마중을 나갔다. 토막의 정탐군이 먼저 발견하고 알렸다.
"누가 말 타구 옵니다. 다른 말에 짐을 실었는데요."
"뒤따르는 자가 없느냐?"
토막의 소두령이 묻자, 없다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길산은 고개 아
래를 살폈고 잠시 후에 말 탄 사람이 지나갔다. 틀림없는 박대근이었
다. 길산은 반가움을 억제하고 졸개에게 일렀다.
"저분을 모셔오도록 하여라."
졸개가 익숙하게 잡초 사이로 난 샛길로 몸을 감추더니 어느틈에 고
개 가운데 서 있었다. 졸개가 읍하며 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된목이골에 가려네. 나는 송도에서 오는 사람일세."
"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오르시지요."
대근이 말에서 내리자 졸개가 고삐 수습을 하였다. 길산은 토막의
툇마루에 앉아서 대근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대근은 토막 앞마당에
들어서다가 앞에 우뚝 선 길산을 마주 바라보았다.
"장.. 두령!"
박대근은 몇년 사이에 한결 성숙하고 침착한 모습으로 변한 길산을
대하자 차마 아우님이나 장서방이라 부르지 못하였다. 길산은 그를 바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성님, 평안하셨소?"
"잘 있었소?"
대근이 다가와 손을 잡았다. 길산은 저도 모르게 선흥이를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그를 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선흥이에게는 거리낌없이 친혈육처럼
대하였으나, 이제 박대근에게는 무엇인가 서먹서먹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그의 도포나 갓 때문이었을까, 그가 전보다 더욱 확실하게 부상의
태를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똑같은 성인의 사내로서 상대하고 싶었던
탓이었을까.
"이게 몇 년 만이오?"
길산은 먼저 툇마루에 걸터앉았고 박대근이도 그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금강산에 쭉 있었소?"
"금강산에 두 해, 그리구 한 해 동안은 운봉산에 있었습니다. 금강산에 있을
적에 한번 소식을 전했지요."
"최만상이란 의원과 고성 산다는 정서방이 들렀던 일이 있소. 그때에 들었지.
이서방까지 구월산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서 걱정했더니... 잘 돌아왔소."
"행수일은 그만두셨다지요."
"사대전 임방의 좌장이오."
하면서 대근은 껄걸 웃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 직함도 번거로워서 물려야겠소."
"송도의 상권만 잡으면 된다는 뜻입니까?"
대근도 그의 이런 모습을 길산이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 나무라지 마오. 내게두 깊은 생각이 있소. 앞으로 할 일은 차
차 의논하기로 하고, 우서방두 왔습디까?"
"기다리는 참입니다. 같이 오실 걸로 알았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알려주긴 하였는데."
길산은 고개를 숙이고 짚신코만을 노려보는 듯하더니,
"전에는 행수였지요. 난장을 트러 다녔으니 우리나 매일반이었으
나, 지금 뵈오니 배대인의 상권을 물려받은 부고의 모양이 역력하오.
우선 아우들을 만나러 왔다면 건성으로라두 그 갓과 도포를 벗어버리
슈."
하였다.
길산이 갓과 도포를 벗어버리라는 얘기의 참뜻은 그 겉보다 안에 숨
긴 의미가 있었건만, 대근은 어두운 표정이 되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
고 나서 갓끈을 끌렀다. 길산은 대근이 갓을 벗고 도포를 벗어 마루에
놓는 것을 내버려둔 채 지켜보기만 하였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
다. 대근이 먼저 입을 떼었다.
"이젠... 되었소?"
길산이 나직하게 말하였다.
"아니우."
길산은 천천히 일어나더니 대근의 발 앞에 무릎을 끓고 큰절을 올렸
고, 대근은 갈피를 잡지 못하여 자기도 쭈그리고 앉았다.
"성님, 아우가 문안 인사 올립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났다 한들 손
가락을 베어 맺은 형제지의를 잊었겠소. 다만 풍편에 듣자하니 성님이
부상대고의 데릴사위로 확정되어 구월산의 아우들과도 그간 뜨막하였
고 임방에 나가서 좌장으로 소일하신다기에 이렇게 만나자마자 경계삼
아서 투정을 해 보았소이다.
사람이란 아무리 굳게 지어먹은 마음이라도 세상살이가 변하면
따라서 변하게 마련이지요. 아침의 주림을 저녁의 다담상으로 잊어버리고,
쓰지 않는 칼은 녹슬기 십상이외다. 내가 성님을 대하는 것은 예전
무더리 장터에서 악소패로 만났을 적의 행수로 여기는 것이오니
명심해주시우."
대근은 콧날이 시큰하여 뭐라고 할말을 찾지 못하고 얼른 일어나 툇
마루에 걸터앉으며 우물쭈물 말하였다.
"낙백시절에 품었던 마음을 아직껏 버리지는 않았소. 그러나 장가를
들고 여식가지 본 뒤로는 잊어버리구 있었지. 장두령이 잘 가르쳐주었
소."
대근은 벗었던 도포를 걸치고 다시 갓을 머리에 얹었다. 선흥이를
두 팔로 얼싸안은 것과 다시 박대근을 만나 은근히 질책한 연후에 예
를 차린 것은, 그 속의 정을 표하는 형식이 달라야 함을 느꼈기 때문
이었다.
사람과 더불어 세상살이를 바꾸겠다는 자가, 어찌 한 사람인들 그
관계를 소홀하게 할 수가 있으랴. 오후 늦게야 우대용이가 도착
하였는데 그의 검은 얼굴은 바다에서 오랫동안 머문 탓으로 아예 반들
반들 윤이 났고 주름살이 많은 눈매는 더욱 살기가 있어 보였다.
맨머리에 두건 동이고 등에 느슨히 괴나리봇짐과 짚신 두 짝을 매어달았는
데 역시 뭍의 행보에 서투른지라 발바닥이 부르텄는지 절름거리고 있
었다. 길산과 대용은 해주감영 옥에서부터 함께 고생하고 탈옥하여 도
주행까지 같이 하였던지라, 성님 아우보다는 동무가 더 걸맞는 사이였
다.
그들은 서로 어깨를 치고 가슴을 때리며 반가워 하였다. 된목이골
에 이르니 가장 반가워하는 사람은 역시 선흥이였다. 마침 저녁때라
기다란 상을 연이어 붙이고 모두들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이번에 우리는 벌이가 좋았어."
우대용이가 뒤늦게 털어놓자 대근이가 덧붙였다.
"요즈음 청국 가는 사행선이 결딴났다고 황당선 기찰에 해서 수역이
시끄럽다더군. 혹시 우두령 짓이 아닌가 몰라."
"남이 말하는데 흥을 잡치면 어떡허우. 전선을 때려잡구 사행선 한
척을 고스란히 먹었지요."
"소문에는 청인들이라든데. "
"그게 다 둔갑술이오."
길산이 귀가 트이는지 재빨리 물었다.
"그 집에 화포가 있어?"
"화포가 두 대에 화승총이 열 자루쯤 된다네."
길산은 다가앉았다.
"화포야 필요없겠지만, 우리두 화승총을 구할 수 없을까?"
"몇 자루나 쓰려고?"
"우선 다섯 자루쯤... 많아도 좋고."
"그래, 나하구 형제처럼 지내는 이가 있으니 곧 사람을 보내도록 허
지."
우대용은 이경순을 생각하였고, 길산은 매우 기뻐하였다.
"우선 다섯이지만, 더 부탁할 수 있겠지. 비용은 얼마나 들까?"
"까짓 돈이야 내가 알아서 하겠네."
우대용이가 대근이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실은 이번에 장서방허구 선흥이두 만날 겸 왔는데, 아예 나선 김에
우리가 자리잡을 마을이 있는가 알아볼 참이우."
대근이 물었다.
"그러면 돛점 산채는 버리게?"
"사행선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그 근처에두 얼씬하지 말아야지요.
배와 아이들은 때에 따라서 강화나 연평 어장으로 흩어져 숨어 지내게
하면 되겠으나, 소문이 나기도 쉽고 관의 기찰에 걸려들지도 모르오.
이번에 나선 김에 서해 쪽을 둘러볼 셈입니다."
대근은 잠시 생각하였다.
"대동강 어귀가 어떻겠소. 그곳은 밀무역선도 많이 드나들고 경강,
송도, 해주로 오가는 상선 미곡선들이 헤일 수도 없다는데."
"우리두 그쯤을 생각하구 있수. 해서 어름에서 털고는 조금만 위로
오르면 곧 관서 경계로 넘어가게 되거든요. 역시 수군은 해서가 가장
세고, 관서라면 무엇보다도 북변 방비가 위주겠지요.
또한 그곳이라면 그대로 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 위쪽은 평양에
이르고, 급수문에서 남으로 꺾어지면 대동강의 지류인 월당강이 되고,
동선령과 자비령, 봉산, 황주의 턱앞에가지 이르는 셈입니다."
길산이 그의 말에 주의를 모으고 있더니 끼여드는 것이었다.
"역시 우리와 닿는군. 아무래도 구월산으로는 형세가 옹색하여 자비
령에도 산채를 둘 생각인데..."
"내가 선상을 따라서 돌아다닌 적이 있어서 그쪽은 손금 보듯 하
오"
박대근이가 설명하였다.
"초도가 너무 크고 돛점은 진영에 가까우니 임시 기착지는 몰
라도 거점으로 정하기엔 불리하지. 아까 말대로 조금만 오르면 대동강
어귀인데, 그중 한적하고 동떨어진 고장이 바로 삼화요.
삼화지경에만 알려진 섬이 자그마치 스물셋이고 큰 섬은 여덟이 된다오.
그러니 일일이 섬을 뒤지거나 살필 수도 없지. 특히 적당한 데가 호도
와 가도인데 두 섬이 모두 적당한 포구와 만을 가지고 있고 숲이
울창하지. 근처에는 내쳐진 놈들이나 사는 부곡 마을이 셋씩이나
된단 말이지.
여차직하면 그 틈에 끼여도 숨을 방도가 생길 게요. 특히 가도는
영에서는 바다로 오십 리 길이나 떨어져 있고, 가까운 해변은 제암과
마지산인데 한적하고 인적 없는 갯벌이니 산속에 마을을 이루어놓고
어촌 비슷이 해놓으면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겠지."
"가도라면 나두 염두에 두고 있던 곳이우. 일단 숨어 있다가 명년에
는 꼭 근거지를 만들어 놓아야지."
대근은 일단 길산에게도 귀띔했던 인삼의 재배에 관하여 이야기하였
다.
"재배에 성공만 한다면 나두 송도에 머물 이유가 없소."
"아마 큰 힘이 될 겝니다."
길산이 말하였고 김기도 반가워 하였다.
"인삼으로 무엇이든 살 수가 있소이다. 화약, 유황, 병기, 동철 등
등의 구하기 힘든 것들을 사들일 수만 있게 되면 한 오천여 명이 무장
을 할 수도 있겠지."
"그런 규모야 지금 생각할 틈이 없고..."
길산은 설왕설래하는 말이 차차 부황해지자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
러나 김기는 줄곧 병서와 사기를 읽어왔는지라 곧 그치지 못하
였다.
"호마도 북관에 가서 사들여야겠지. 전격하려면 기마병이 으뜸이니까."
길산과 박대근이 서로 눈을 맞추고 나서 허허 웃어버리고 말았다.
길산이 얼굴을 바꾸어 말하였다.
"좌우간에 이제 우리가 결의한 지도 어언 네 해가 지나갔소이다. 오
늘 이렇게 만난 뜻은 그날을 잊지 않고 앞으로도 더욱 결속하여 큰 일
을 하고자 함이오.
첫째로는 우리가 활빈당이요 둘째로는 백성들의 병졸이며 셋째로는
어지러운 나라를 평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오. 우리는 첫
번째의 일조차 제대로 해오지 못했소이다. 백성의 병졸이 되려면
이런 식으로 도적질에 그쳐서는 아니될 줄 아오.
우리 구월산에서는 곧 일어나 우선 구월산 사읍에 우리 힘을 보일 작정이
오. 그리고 겨울 동안에는 선흥이하구 감동이 하구 나 이렇게 셋이서
자비령 아이들을 찾아가 합치기를 설득하여 보고 안되면 무력으로라도
점령해둘 셈입니다.
요즈음 감영과 조정의 분위기가 어떤지 대근이 성님이 잘 정탐하여
전해주시고, 우서방은 앞서 말한 대로 총포를 구해주게. 그리구 이제
병담은 그치구 이렇게 만난 것을 기리는 제사나 드리구 나서 실컷 놉시다."
이제 갑송이만 빠지고 나머지 형제들이 모두 모였으니 산신에게 제
사를 드리기로 하여 김기가 탑고개에다 준비를 시켰는데, 이튿날 아침
에 탑고개의 괴뢰배 광대 하나가 올라왔다. 제가 오정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탑고개로 내려갔고 마을 사람들이 나한암 앞에 하얗게
모여들어 있었다. 제주는 김기로 되어 있었고 집사를 길산의 아버지
장충 노인이 맡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니 용기를 흔들며
풍물이 잡혀지고 모두들 길을 비켜주었다.
길산은 못 본 체하고 있었으나 그의 모친은 머리에 횐 띠를 질끈 묶고 통
장고 앞에 앉았고 색동옷에 붉은 철릭옷을 입고 주립을 쓴 봉순
이가 한 손에 방울 들고 다른 손에는 부채 쥐고 겅정겅정 뛰며 마당씻
이를 하고 있었다. 무복을 입은 봉순은 어느때보다도 아름다웠다. 볼
에는 홍조가 가득 차 있었고 눈가에도 불그레한 기가 번져서 이상스런
열기를 띠고 있었다.
장충은 쟁이를 다른 광대에게 맡기고 자기는 다른 이들에게 제물이
며 새옹밥이며를 준비하게 하고 술상 주변에다 술을 뿌렸다. 제상 앞
에 통돼지를 올리고는 청룡, 황룡기를 든 사람들이 앞장서서 나아가고
등롱이 따라가고, 그뒤로 대금, 피리, 해금, 제금, 장고를 갖춘 광대
들이 짓치며 가고 구월산 형제들과 마을 어른들이 나란히 서서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나한암에서 출발하여 동네를 한바퀴 돌고 길산네로 가서
종이로 만든 연꽃을 흰 것 붉은 것 둘씩 받아서 깃대에 달아 나
한암으로 돌아갔다. 봉순이가 그 깃대를 받아 양손으로 휘저으며 춤을
추듯 돌아갔다. 김기가 형제들을 대표하여 술잔을 올리고 삼배한 연후
에 축문을 읽고 소지하였다.
봉순이가 방울과 부채를 흔들며 춤추고 돌고 나서 부정거리를 읊었
다.
"시위들 허소사. 선대루 할아버지도 할머니 양위말명, 이대루 할머
니 할아버지두 양위말명, 삼대루 아버지 업제장 어머니 복말명에 삼사
춘 양위말명요, 사륙춘 양위말명이며, 청춘두 양위말명, 소년두 양위
말명, 이내외말명에 삼내외말명이오. 양가두 말명에 수양가두 양위말명,
행길마루는 꽃밭 되고 썩은 손목을 마주 잡고 유금노에 패문 놓고
읍시사 청작허니 갑시사 패문 오니 한잔 술에 흠향허시구 두 잔 술에
거천하여 아무쪼록 정성 덕 입혀주소사.
시위들 허소사 부리망인은 신에망인 상산망인은 본향망인 부리망인은 신
에망인 열망인 뜬망인에 곽각 선생은 이순풍네 홍계관이 상통천문
에 하달지리 풀어내시구 선생망인이 식구대루 애삼두 저치구 열삼두
저치구 와다락지 쌍다락지 가시눈이면 개씨바리 다 저차주시구 식구대루
면경에 체경 같구 어르세 세경 같구 닦으니 방울같이 눈 밝구 띠 맑게
점지를 허소사."
봉순이 눈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동네 아낙네가 수복이를 데리고
나왔는데 그 아이는 제 엄마가 뭐라고 소리 지르고 될 적마다 깔깔대며
웃었다.
길산은 제 가족들에게는 얼굴도 돌리지 않고 묵묵히 서 있었다.
"시위들 허소사 부리서낭은 신에 서낭 동두길진은 배고개 서낭님 북
두길진에 탑고개 서낭님 서두길진은 장림 서낭님과 남도길진은 모도리
서낭님과 재재봉봉을 넘든 서낭 거리 거리는 노제 서낭 안으루
들어가서 수구군 서낭에 긴대는 목신 서낭이요, 문도지 색도지 빌도지
선전 백묵전 거처다가 문도지 서낭두 저처시구 밤이면 진으루 낮이면
샌너루 요물사물을 부리던 뜬 서낭은 저차내시구 부리 서낭은 아누허
시구 아무쪼록 정성껏 입혀주소사."
봉순이가 계속하여 부정거리를 해나가는데 그들은 자리를 물러나와
멍석 위에 상을 놓고 앉아서 탁주를 들었다.
"거, 형수님 신명이 대단하우."
선흥이가 감탄을 하며 말하였고, 김기도 말했다.
"우리 아주머니께서 장두령을 뵙지 못하여 늘 한숨과 눈물이시더니
이제 춤추는 것을 뵈오니 바로 선녀 하강에 화색이 눈이 부십디다."
길산이도 김기가 공연히 부추기느라고 하는 소리인 줄을 알고 있었
다. 길산은 구월산에 돌아온 뒤 하룻밤도 집에서 묵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김기와 더불어 줄곧 된목이골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귓전에는
저 옛날의 재인말에서 출행제를 지내던 날의 소리들이 겹쳐져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핏속에는 탈을 쓰고 모닥불을 뛰넘던 광대의 신
명이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어느결에 묘옥의 춤추던 손짓과 발짓이 떠
올랐다.
"신상문에 구상문에 해가 묵은 상문에 철이 묵은 상문이요, 날루두
무색허구 달루두 까끄른 상문이며 재수에 꺼린 상문 몸수에 꺼린 상문
몽사에 꺼려 있던 상문이며 구석구석 끼여 있던 상문에 봄편지
통보사에 따라온 상문이며, 머리끝 백나비 쇠나비 따라온
상문이며 소대상 곡성에 따라든 상문에, 침방에서 거닌 상문 내방에서
동한 상문 마루 대청에 거닐던 상문이며 팔만 제주왕에 꺼렸던 상문이
며 마당 지신 네 귀에 헤매던 상문이며, 위 행랑 위 처소에 꺼려 있던
상문이요, 네 행랑 네 처소에 꺼렸던 상문이며 또 팔만 수문장 대문간
에 꺼렸던 상문, 영정 뒤를랑 울리구 부정 뒤를랑 허물을 마오.
영정가망 놀아나오, 부정가망 놀아나오, 열두부정두 놀아나오, 뜬부정두
놀아나오, 피부정두 놀아나오, 돈부정두 놀아나오, 사세당당 구비전
적 대활예루 놀아나소사."
봉순의 청아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소리도 하고 춤도 추며 놀지."
마감동이가 제의하였고 선흥이도 보채는 것이었다.
"성님, 이럴 제 광대 근본 잊어서는 아니되우. 쫓아나가서 굿거리장
단에 맞춰 춤이나 한판 추어보시우."
"뭘 그냥... 술이나 먹지."
길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곧 부정거리가 가망청배로 바커는 모양이
었다. 이번에는 봉순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처녀 무당의 앳된 목소
리인 듯하였다. 정오부터 시작된 굿이 황혼 무렵에도 부정거리, 신장
거리, 말명거리, 조상거리, 상산거리, 별상거리, 대감거리, 창부거
리, 제석거리, 군웅거리, 황제풀이 그리고는 뒷전거리와 무감나서기
로 끝날 모양이었다.
저녁이 되어서도 굿은 계속되었고, 구월산에서 내려온 여러 형제들은
김기네 집에 둘러앉아 얘기를 하며 술을 마셨다.
"자 이렇게들 모였다가 흩어지면 서로 상면하기가 또한 쉽지 않으
니, 이렇게 하면 어떨까. 석 달에 한번씩은 서로 방문을 하든지, 못
오면 사람을 보내든지."
박대근이가 안을 내놓았다.
"그러지요, 구월산에서는 주로 강서방이 나돌아다니니 철마다 들를겝니다."
"이제 내일쯤 헤어지면 내년 봄에나 만나게 되겠구먼."
김기가 박대근에게 물었다.
"요즈음 감영은 형편이 어떠합디까?"
"글쎄요, 이세백이란 이가 관찰사인데 청렴하다고는 하나 무능하고, 덕이
있다고는 하나 우유부단하여 아랫것들이 앞에서는 두려운 체하고 뒤로
속이며 존중하는 척하면서 멸시하지요. 흔히 있는 관리인데 다만
사람됨이 온건하니 시강에서 어사 노릇을 하여 감사에까지 이른 게요.
아마 임기나 마치고 무사히 떠나려 할 것입니다. 우리 송도유수란
자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융통성이 있어서 세사에 밝은 편이지요.
대저 유능하고 수완 있는 관리란 오래 배겨나지 못하거나 조정의 높은
직임에 오르지 못하는 듯합디다. 아무래도 그런 이는 돌출하게 마련이고
적이 많아질 테니까요.
어쨌든 우리 송도 쪽에서는 해서감영에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게라구
믿구 있습니다."
대근의 말을 듣고 김기는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소음이 차
츰 커져가는 것이 뒷전도 끝나 무감으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마감
동, 오만석, 우대용은 나한암 굿터로 가겠다며 일어섰고 길산이도 일
어났으며 김기와 박대근만이 남아 대작하였는데 선흥이와 말득이는 먼
저 곯아떨어져 있었다.
"어디들 가려구?
"이거 뭐 맨숭맨숭하여 재미가 있어야지. 우리는 굿터에나 가볼라
우."
김기의 말에 감동이가 대답하고 우대용이도 말하였다.
"나두 갯것이라서 당제 지내는 건 한번두 구경하지 못했으니 가서
춤판에라두 끼여야겠수."
"제주가 이러고 앉았으니 우리가 염치가 있어야지..."
김기가 쾌히 웃었다.
"다 한번 풀어 헤치구 놀려구 저러는 게여. 우리 핑계루 지내는 굿
인데, 끼여봤자 동네 사람들 흥이나 깨지. 장두령은 뭐... 춤이라두
한바탕 추려는가? 아무래두 신명이 가라앉지 않는 게요."
길산이 말하였다.
"바로 지척에 집을 두고 여기서 잘 수도 없고 해서... 가서 자렵니
다. 내일은 모두 어울려 사냥이나 가든지..."
"나두 내일은 송도루 돌아갈 거요. 술이나 더 드오."
대근이 권하였으나 김기가 말렸다.
"아니... 마침 부정을 피하다가 오늘부터 풀린 날이니 가서 수복
엄마하구 회포나 푸시우."
길살은 그저 빙긋하면서 돌아섰고 두 사람이 뭐라고 더 농을 거는
것을 못 들은 체하며 나왔다. 집으로 가보니 아무도 굿터에서 돌아오
지 않아서 불 없는 집안이 캄캄하고 적막하였다. 길산은 기웃이 안방
쪽을 살피다가 마루에 걸터앉았다. 밤하늘에 또롱또롱한 별들이 나직
하니 빛나고 있었고, 조각달은 훨씬 기울어 앞마당의 감나무 가지 끝
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길산은 저절로 취흥이 일어나서 흥얼흥얼
소리를 하였다.
"내 돌아왔네 돌아를 왔네. 못 올 길을 내 어이 왔나 이별에 두 자
를 깨치러 왔구나. 우리 인생 죽어지면 만수 장림에 운무로구나, 만첩
청산 썩 들어가니 잔디 잎으로 이마를 삼고 두견 접동으로 벗을 삼고
석침 베고 누웠으니 송풍은 거문고요 두견성은 노래로구나.
살은 썩어 물이 되고 뼈는 썩어 황토가 되고 삼혼칠백이 흩어질 제
어느 동무가 불쌍타 할까 생각하면 맘성이 좋질 않아 못 살리로구나.
휑뎅그레 빈방안에 홀로 앉았으니 임이 오며 누웠으니 잠이 올까.
수다하니 몽불성이라 잠을 이뤄야 꿈을 꾸고 꿈을 꾸어야 임 만나보지.
임 사는 곳과 나 사는 곳은 남북간 수십 리에 멀지 않건만 어이 그다지
못 본단 말가 춘수는 만사택하니 물이 많아서 못 오는가.
하운이 다기봉하니 봉이 높아 못 온단 말가. 봉이 높거든 쉬어서 넘고,
물이 깊거든 일엽선 타려무나. 쳐다보니 만학천봉 내려 굽어살피니
백사지로다. 허리굽고 늙은 장송 광풍을 못 이기어 반춤을 춘다. 건각천봉에
올라서서 좌우 산천을 바라보니 송림 취중에 뭇새들은 벗을 찾느라고 다 날아들
고 연상에 나는 백구는 산천경개에 어리었구나.
도화 남수 깊은 물은 침침한 자취뿐이로구나. 황릉 묘상에 두견이 울고
창파 녹림에 잰나비 파람 불고, 소상야반에 시시때때로 오는 비는 아황녀의
눈물이요, 요내 시시로 흐르는 눈물은 눌로 연하여 눈물이더냐, 임으로 연하여
눈물이로다. 백일청천 뜬 기럭아 동으로 왕래더냐, 소상강수로 거래더
냐, 일폭 화전지에 세세사정 기록하여, 네 발에 둥둥 실 매달아줄게
임 계신 곳 가거들랑 우리 임한테로 전하여라.
명춘 삼월 귀소시에 임의 소식 전해주길 주야로 고대로구나. 유유 창천은
호생지덕이요, 북망산천아 말 물어보자, 역대 대왕과 영웅 열사가 모두 네 개로
가더란 말이냐. 우리 같은 초로 인생이야 단불에 나비 몸이 말 다하여서 무엇
할까, 창천은 불로 일생이요 북망산천은 일사로구나 천생지률을 어느
누가 맘대로 할쏘냐."
길산은 문득 노래를 그쳤다. 방안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기 때
문이었다. 혼자 잠들었던 수복이가 그의 노랫소리로 하여 깨어났던 것
이다. 어미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모두 굿터에 나갔으니 누군가에게
맡겼을 터인데 잠이 들어 풀어놓고 간 듯하였다.
수복이는 발발 기어서 마루로 나왔다. 길산은 저도 모르게 아이를
끌어안았다. 수복이는 울다가 길산이 위아래로 추스르자 차츰 울음을
그쳤다. 길산은 아이를 가슴에 안고 저고리 자락으로 아랫도리를
감싸고는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우리 애기 착하다..."
아이가 홍얼거리며 길산의 굵은 손가락을 솜 같은 손아귀에 쥐었다.
길산이 더욱 위아래로 거세게 부추겨주니 수복이는 깔깔대며 좋아하였
다. 길산은 다시 아이를 저고리에 감싸고 마당을 거닐었다. 아이의 물
처럼 녹아버릴 듯한 살의 온기가 길산의 가슴팍에 전해져왔다. 아이를
잠재우고 있는 그에게는 이상스런 감동이 번져오는 것이었다.
만삭의 몸으로 쫓기시다 저를 낳고는 길에 묻혔던 어머니, 그이의 피를
받아 이렇게 또다른 생명이 태어났고 바로 제 가슴에 안겨 있다는 감격이
목구멍을 죄도록 넘쳐왔다.
"우리 수복이 착한 애기..."
아비가 그 자식의 잠을 재우는 일이 당연하기는 하여도 원래 어미가
하는 일이라, 모처럼 아이를 재우거나 업어본 사내들은 모두들 전에
느끼지 못하던 사랑과 슬픔을 동시에 갖게 마련이다. 길산이 아이를
조심조심 방안에 눕히고 나오니 그의 등뒤에 누군가 다가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제사 돌아보니 시커먼 옴탈이 서 있었다.
"아버지,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응... 방금이다."
장충은 건넌방 문을 열더니 선반 위에 얹혔던 고리짝을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통장고를 어깨에 걸머지고 마당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어디 한바탕 해보아라."
길산은 머뭇거리다가 고리짝을 열고 케케묵은 탈박들 중에서 취발이
의 탈을 집어들었다. 이마에는 혹이 돋았고 노총각의 머리타래가 얼굴
위로 늘어지고 안면에는 깨곰보가 역력하며 눈은 놀란 퉁방울눈으로
흡뜨고 있다. 길산은 머리 위로 탈보를 뒤집어쓰고 나서 아버지 앞으
로 나섰다. 아버지가 통장고를 두드리며 불림을 내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
길산은 저절로 어깨가 으쓱여지고 무릎이 올라감을 느꼈다. 타령장
단이 계속되자 길산은 힘차게 깨끼춤을추며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몇
바퀴 돌아가는 사이에 길산의 장딴지와 팔뚝에는 어언 신명이 잡혀서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춤사위가 저절로 풀려나오기 시작하였
다.
조각달은 거의 져서 서쪽 나뭇가지 사이로 빠져나가 서산머리에
쪽배처럼 걸렸다. 길산은 흥겹게 힘차게 취발이춤을 추며 마당을 돌아
갔다.
"어어... 옳지."
장충도 오랜만에 아들의 춤박자를 쳐주는 일에 신명이 잡히는 듯하
였다. 그들의 사이로 하얀 것이 날아들어오는 듯하였다. 주립과 철릭
을 벗어던진 봉순이가 길산의 앞에서 대무하고 있었다. 장충이 잦은박
자에서 여섯박자로 바꾸면서,
"절쑤 절쑤 지화자 절쑤..."
하고 불렀다. 길산의 꺼떡거리는 춤과 차분하게 미끄러지는 듯한 봉순
의 춤이 서로 엉클어졌다가 흩어져 물러나고 다시 합쳐 서로 돌고, 앞
서거니 뒤서거니 그리고는 헤어졌다가 또 만났다.
길산은 돌연 춤을 멈추고 우뚝 섰다. 장충도 장고채를 멈추었다.
봉순이만 계속 춤을 추어나가고 있었다. 봉순이의 귀에는 혼자서만
들리는 어떤 가락이 있는것 같았다. 길산은 탈박을 벗고 소매로 이마에
가득한 땀을 씻었다.
그는 한참이나 빙글빙글 큰 원을 그리며 돌아 나가는 봉순이의 춤을
바라보다가 장충에게서 통장고를 넘겨받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장
충은 슬그머니 그들의 시선을 피하여 마당 가녘을 돌아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길산은 계속 두드렸고 봉순은 우쭐우쭐하면서 그 앞을 맴돌았
다.
길산이 북채를 놓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니 봉순이가 그제서야 멈칫
서버렸다. 길산은 봉순이를 바라보았다. 봉순은 할 바를 모르며 몸을
돌릴 듯 주저앉을 듯 여러 태를 보이는 중인데, 바로 그때에 길산이
팔을 크게 벌렸다.
봉순이 춤사위이기나 한 것처럼 온몸을 던지며 미끄러져 와서 길산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길산은 아내를 두 팔로 가만히 힘주어 안았다.
봉순이도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길산은 그냥 먼 데서 들려오는
송림의 사이를 헤치고 지나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다시 아이가 칭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산은 아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쪽으로 밀었고, 봉순이는 아쉬
운 듯 길산의 품을 빠져나갔다. 이 집을 버릴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으되 그는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는 구월산 탑고개가 영원히 자기
들이 살 곳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때는 숙종 계해 구월이었고, 길산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제 6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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