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장길산 3

一字師 2024.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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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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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황석영

출판사:창작과비평사

봉사자:우상영

 

1장 대소두령

1

안성은 삼남의 육로가 합치는 지점에 있는 대도회요, 위로 수원, 과천에 닿고, 아래로는

천안, 청주에 통하며 서쪽으로는 해로가 뚫렸는데 아산 앞바다를 거쳐서 물길이 진위, 양성

평택, 안성에 닿으니 사통팔달이다. 동으로는 남한강의 지류가 광주를 지나 여주를 거쳐

충주, 청풍, 단양에까지 닿으니 실로 삼남과 경기의 장꾼들이라면 안성을 제 집 드나들

듯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안성의 동촌은 연일 각처에서 모여든 장사치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데, 한양의 거간꾼들도 들끓었다.

청룡사가 있는 사당골에는 사당패 삼 대가 모여 있어는데 그 수가 근 오십 명에 이르고

있었다. 원래가 화주 출신의 모가비 고달근이는 사실상 그들의 총대나 마찬가지였고, 이제

청룡사의 새 동종을 마련한다고 그들 다른 패거리들과 함께 출행을 나가려는 참이었다.

달근이네 행중은 당진으로 나갈 참이었고 다른 패는 여주와 충주로, 또 다른 패는 수원과

공주로 나갈 작정이었다. 마당에다 멍석을 깔아놓고 잡가를 연습하고 있는 사달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고달근이가 물었다.

묘옥이. 묘옥이 어디 갔니?

몰라요. 아까 우리하고 같이 있었는데.

이년 또 어딜 갔나. 손님이 오셨단 말여.

방안에서 낮술을 먹고 늘어지게 잠들어 있는 한 거사를 보자, 달근이는 그의 궁둥이를

호되게 걷어찼다.

이 자식아, 애들 간수하고 연습두 시키라니까 대낮부터 자빠져 낮잠이냐?

남의 서방을 왜 발루 차구 야단예요. 묘옥이야 첨부터 따루 놀게 내버려둔 모가비님이

잘못이지.

그 거사의 짝인 사당이 뾰루퉁해서 내쏘았다. 거사는 그제서야 잠이 좀 깻는지

손바닥으로 마른 세수를 하고 나서 눈을 껌벅였다.

홍련이하구 동촌장에 보냈수.

뭐야. 게다가 짝패 노릇 하는 홍련이라구.. 이 자식아 그것들이 도망치면 어떡헐 테여?

그럼 어쩌우? 애들 옷이 겨울 동안에 남루해졌으니 장사를 시킬려면 옷감이라두

떠와야지.

고달근이가 더욱 다급해졌다.

돈까지 내줬니?

아니우. 방물전, 포목전에다 기별만 해주구 오라구 일렀지요. 돈은 출행에서 돌아와

물기루 하고 지분두 좀 가져오랬수.

고달근이는 곰보의 낯바닥을 연신 비벼대면서 덤비고 있었다.

얘들아, 백선이, 소화 너희 둘이서 손님 술시중 좀 들어드리고 자네는 나허구 같이

동촌장으로 나가지. 이년들을 어찌 믿겠나.

사달들이 북과 북채를 놓고 일어나면서 투덜겨렸다.

도대체 누가 왔다구 그리 부산을 떨어요?

누구긴 누구야. 여주 이도장이지.

애그머니, 이도장이 오셨나요?

말두 마라. 그 껄다리는 벌서 지난 설부터 묘옥이만 찾느라구 안성자갈밭이

빤들빤들해졌지.

시끄러, 어서 술상이나 들여가.

고달근이가 재잘대는 사당들을 윽박지르고 나서 거사와 함게 밖으로 나겄다. 그는 너른

초가 사랑으로 가서 허리를 국ㅂ신대며 들어갔다. 사랑 마루에는 뒤편에 목불상과 제단이

놓였고, 서른 남짓된 패랭이 차림의 상놈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시방 묘옥이가 여기 없습니다. 동촌장에 나갔다는뎁쇼.

고달근이는 상놈 중에도 최하천인 사당 유민지배라 양인인 이도장에게 공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도장은 가져온 부담농을 열어 보이는데 비단은 한 필이요, 금박댕기에다

은가락지 두 쌍, 그리고 엽전 두 꿰미였다. 고달근이의 눈이 휘둥그래져서 벌어진 입을

다물어 질 줄을 모른다.

내 오늘은 아주 해우채 대신에 선사품을 가져왔으니 자네가 받구 묘옥이를 내주게.

자네가 몸주 아닌가?

고달근이는 속으로 봉 잡았다 싶었으나 짐짓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 몸주이긴 하오나 제가 돈을 주어 사들인 아이는 아니올시다. 제발로 들어와 행중에

들었으니, 혼인을 해라 마라 할 수는 없는 입장입지요.

이도장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부담농 뚜껑을 닫았고, 고달근이는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농짝을 주의 깊게 넘겨다보며 침을 삼키는 것이었다. 이도장이 말하였다.

어쨌거나 묘옥이를 데리고 오게. 내가 자세히 일러보고 구슬리면 말을 듣겠지. 자네가

보다시피 나는 사지가 멀쩡한 장년이고 마누라쟁이가 생산을 못하여 씨나 받자는 것인데,

아들만 낳아주면 내 천냥을 주겠다는 걸세. 이걸 마다하면 허는 수 없지. 달근이 자네가

연분을 맺어준다면 무명이든 돈이 되든 톡톡히 주겠다니까, 못 믿어 그러나?

고달근이가 고개와 손목을 설레설레 흔들었다.

말씀 맙시우. 아니 안성 그릇이라면 배냇자식두 알아듣는 판인데, 이도장 어른이

부가옹이라는 것쯤이야 전들 왜 모르겠소이까. 곧 묘옥이를 데려다 놓습지요.

고달근이가 거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사기, 유기, 자기, 옹기그릇이나 항아리, 주전자

등속이라면 경기에서도 광주와 여주를 쳐주었는데, 광주의 분원이 그중에 컸고, 백자와

진사와 분청사기가 많이 구워졌다. 광주 부근은 숲이 좋아서 신재감이 많았던 것이며, 여주

부근은 흰흙과 찰흙이 좋아서 경공장이던 사람들이 역을 벗고 나와서 이곳에 모여들어

가마를 지었다. 그중에 이경순은 자력으로 치가에 힘을 쓰더니 번수 밑에 각종 낭인 백여

명을 거니리는 분원의 주인 나으리가 되었다. 그의 분원에서는 주로 옹기와 잡사기가

나옸고, 따로이 사대부들을 위하여 백자도 구워냈다. 사옹원소속의 관 직영 분원을 빼놓고는

여주에서 가장 큰 공장이었다. 더구나 일반 시장에서는 그의 잡사기와 그릇류가 아래로

삼남을 나가고 위로는 관북에까지 오른 정도였다. 그렇게 되었건만 위인이 기인인지라,

참봉이니 선달이니 하는 공명첩 하나 사들이지 못하여 패랭이 차림의 상인인 채 부호

노릇을 하였다. 그의 처가 워낙에 하초가 약하여 다달이 치르는 일도 막혀서 생산이 불능한

지가 십 년이 넘었건만, 여태껏 치가에 눈이 어뒤워 슬하 없음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지난 설에 분워서 부리는 백여 명의 도공을 위무하고자, 사당패를 안성 청룡사 사당골에서

데려다 놓았을 때 홀로 나와서 여탄가를 부르던 묘옥이를 보자 그만 정이 일어났던 것이다.

묘옥의 수심 깃든 깊은 눈과 썰렁하고 처량한 노래를 듣자니, 문득 가삼이 메어지는 듯하여

곧 달려들어 안고 싶기까지 하였다. 이도장은 혼자서 한숨만을 내쉬고 앉아 있었다.

묘옥을 보고 나자 이도장의 상사는 날로 깊어져서, 그 뒤로 서너 차례나 사당골을

내왕하였던 것이다. 그가 어번에 온 것은 출행을 나간다 하니, 한번 나가면 언제

돌아올는지도 알 수 없고, 출행 나가서 묘옥이 손님을 받게 되면 그로서는 견딜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지난 겨울 동안에는 부근 마을의 대소 잔치에나 나가서놀았으므로 아직은 치마끈을 풀지

않았지만 춘삼월 호시절에 더구나 당진으로 나갈 새면 고기떼를 따라 모여든 뭇 뱃놈들이

묘옥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이도장은 만일 하루에 확답을 듣지 못한다면 당진까지

따라나설 참이었고 고달근이에게 몸값을 내고라도 강제로 여주에 끌고 갈 작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올 때에 번수 되는 자에게 관리를 잘하라 부탁해놓고는 간편한 차림에 말 한

필을 끌고 나옸던 것이었다. 또한 안장에는 그가 손수 만든 윤이 반질거리는 화승총도

매달려 있었다. 이도장은 수년래에 안성을 중심으로 도자의 판매를 휩쓸게 되었던 시초란

사실은 총포를 만들어 은밀히 팔아서 밑천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부호들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인들을 무장시켰으며, 장사치들도 패거리마다 한두 자루씩 가지고 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그가 군기시의 횡간을 본 적도 없고 경공장에서 무기를 제조한 일도 더욱 없으나

눈으로 보고 익히고 기구를 만드는 데는 이도장을 따를 자가 없었다. 이도장이 직접 주물러

만든 백자는 그만큼 고자였다. 그는 어느 포수들의 부탁으로 화승총을 보고 본을 떠서 서너

자루 만들어주었는데, 이제는 그의 머릿속에 총신을 어떻게 다루고 총구를 어찌

단련시키는가 하는 것이 휜히 새겨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약장 출신의 병신 노자가 과천서

걸식하는 것을 보고 면천시켜서 집에다 데려다 놓았는데, 총통등록을 손으로 익힌 자였다.

그는 화약을 만들다가 잘못하여 한쪽 눈이 멀고 왼쪽 손목이 날아가게 되어 일을 못하고

한양 부근으로 유리걸식하던 사내였다. 자신이 공장이 일을 하고 있으니 남의 일 같지 않아

데려다 놓았는데, 화승총에 있어서는 그와 너무도 손발이 맞아 돌아갔다. 사람들이 이도장을

기인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손재주 밖에도 스스로가 총포 놓는데 귀신 같은 재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무 걸음 밖에서 납탄환으로 간장 종지를 맞취서 박살을 낼 수가

있었다.

동촌장에는 객주가 즐비했고, 가게며 노점상들이 들끓었다. 안성의 강변 포구에는

서해에서 들어온 각종 건어와 생선들이며 소금이 배에서 내려지고 있었고, 남한강 줄기를

타고 내려온 경강 상인들은 포구를 오르내리며 물건들을 사 모으고 있었다.

묘옥과 홍련은 방물전과 포목전에 들러 사당골로 화장품과 옷감을 보내달라 이르고는 봄

들어 처음으로 맞은 대그믐장을 구경하며 돌아 다녔다. 돌아다니다가 팥죽을 한그릇씩

사먹기 위해 장바닥에 펴놓은 멍석에 올라가 앉았다.

묘옥 언니가 만일에 이도장께루 첩살러 들어가면 난 죽구 말 테야.

홍련이가 팥죽을 떠먹다 말고 울먹였다. 묘옥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억지로

웃어 보였다.

홍련아, 내가 비록 창기로서 살아오긴 했지만 마음먹은 것은 오직 한곬이란다. 나는

아무에게두 내 몸을 줄 수가 없어. 그래서 이번에 출행 나갈 일이 걱정이다.

언니. 여태껏은 내 짝동무 노릇을 해주었지만 그 딱정떼 같은 고달근이가 언니 같은

미색을 그냥 남복에 무동이 노릇이나 하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유. 우리를 바라는

사내들이야 남의 집 머슴이나 장꾼들이나 뱃놈들이 고작인데, 간혹 시골 한량들두 생대를

한다우. 아마 언니는 그쪽으로 장사를 시킬 게유.

우리 서방님이 아무리 저승에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 몸에 그분과의 정분을

표해놓았다.

언니. 우리 달아나. 한양으로 올라가서 색주가루 들어가는 것이 휠씬 나아요. 또 혹시

알우. 높은 벼슬아치 나으리의 둘째나 셋째 집이 될지.

얘얘, 누렁쇠 거사님은 어지하려느냐. 그이를 만나야지.

홍련은 김거사의 말이 묘옥에게서 나오지 홀로 한숨을 푹내리 쉬었다. 김거시ㅏ는 홍련이

행중으로 들올 때 화방사에서 처음으로 인연을 맺어 머리를 얹어준 젊은 거사였다. 그러나

행중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중매구 패거리는 이쪽 저쪽의 사당패로 섞이고 흘러들었던

것이었다. 홍련은 아직도 첫 남자인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위낙에 장터마다 걸립패며,

괴뢰배며, 사당패, 재인패 등등이 떼를 지어 흘러다니니, 만나보기란 이미 까마득한

일이었다. 집과 땅과 처자권속을 잃은 유민들은 재주를 이것저것 익혀가지고는 광대로

떠돌았던 것이다. 따라서 장터와 향시를 흘러다니는 광대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었다.

이젠 그이를 만나기두 들렀어요. 언니 나 이번 출행에 나가면 경강 상인께 부탁하여 한양

오르는 배를 타겠어.

모가비는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두 너를 잡아낼 거다. 나야 몸값이 없지만 너는 이백

냥이나 걸려 있지 않니.

내가 저 둘글쇠 거사께 빨리운 것만 해두 몸값의 다섯 배는 될게유. 언니 함께

달아나자니까.

네가 아직 색주가의 풍문에 어두워서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우리 같은 하천배는 어딜

가나 마찬가지라니까. 내가 만약에 이 행중을 떠나게 되면 아마도 머리를 각고 중이 될

게다.

두 여자들은 서로의 신세한탄을 주고 받으며 한참이나 팥죽 파는 멍석에 앉아 있었다.

고달근이와 박거사가 두리번거리며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그들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고달근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묘옥에게 몹시 부드럽게 말하였다.

묘옥아 얼른 가자. 반가운 손님이 기다리구 계시다.

반가운 손님이라뇨.

고달근이는 묘옥이 옷소매를 잡아 일으켰다.

여주 이도장 나으리가 너를 보겠다구 기다리신다.

그들은 장터를 돌아 나왔다. 묘옥과 홍련은 말없이 나란히 걸어갔고, 곁에서 고달근이가

연신 주워섬기고 있었다.

얘 좀 좋으냐. 이도장 댁 아씨는 저혀 생산을 못하시니, 네가 들어앉아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나 하나 낳을 적이면, 큰댁은 살림행사는커녕 찍짹 소리도 못할 게다. 그 많은 재산은

다 네 차지란 말야.

묘옥은 아무렇게나 입을 뗀다.

저는 더러운 몸이어요. 사당질이나 해먹으면 맞춤할 계집인데, 어찌 양인의 소실로

들어앉아요. 더구나. 비록 사별하였으나 제게는 정인이 있어요.

고달근이가 코를 킁킁거리면서 못마땅하게 내뱉었다.

얘얘, 그런 말 아예 마라. 부정타겠다. 부정이요, 부정이요 펫! 목이 잘려 저자 네거리에서

죽었으니 염라국에는 커녕 황천두 건너지 못하고 노중에서 떠도는 한스런 귀신이 된 사람을

생각해 무얼 하느냐. 뒷간에 가서 이밥 찾기로구나. 제 복을 떨어내자면 무슨 소리를

못할까.

묘옥이 야무지게 대답한다.

어쨌거나 이도장 얘기는 다신 꺼내지 마셔요. 차라리 출행나가거든 한량들 상대를

하라시면 그게 낫지요.

총대 성님, 묘옥이가 해의 하겠단 소리는 오늘 첨 듣는구려. 그리하라시오. 짝거사는 날

시켜주고.

박거사는 묘옥이 몸을 내놓겠다는 소리를 함부로 해대니 귀가 번쩍한 모양이었다.

고달근이는 박거사에게 곁눈질을 하면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자식아, 공연히 쪽박 깨지 말어. 홍련이는 어쩔 테야. 행중에서 그 따위 의리부동한

짓을 저지를 테면 저승패를 내몰듯이 길가에 내칠테여.

하고 나서 고달근이는 다시 묘옥에게 말하였다.

좋다, 너 손님 ㅏㅂㄷ겠다구 했것다. 오늘 이도장에게서 해우채를 받았으니 청을 들어라.

오늘밤에 당장 옷끈을 풀겠느냔 말이야.

묘옥이는 아무 대답이없었다. 홍련이는 여지껏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고, 박거사는

제딴에 기둥서방 노릇을 하느라 머리에다 알밤을 먹였다.

갈치가 뛰니까 망둥이두 뛴다고, 이년까지 쫄쫄거리구 지랄이네. 이년아, 네 뒤를 대구

다니노라구 내가 술 한잔 맘놓구 먹은 날이 없어.

홍련이의 울음이 더욱 커지자, 고달근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안되겠다. 이런 눈물 바람으루 동네루 들어갔다간 우리 행중이 쑥보이겠어. 박서방 자네가

홍련이를 업어라.

박거사가 앙탈하는 홍련이를 없었다. 고달근이와 묘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들을 쫓아갔다. 묘옥이 중얼거렸다.

만약에 내가 행중을 떠나겠다면 어쩌실 거예요?

누구 맘다루 행중을 떠. 네가 지난 겨울에 들어와서 공밥을 먹은 것이 몇날 몇밤인데,

밥값을 하구 나가야지.

오늘 이도장이 묵으실 건가요?

너를 데려가겠다다라. 내가 반응낙해놓았다.

묘옥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봄이 되어 출행나가게 될 것을

걱정해왔었다. 이제 막상 닥쳐놓고 보니, 어느 한 사내의 첩으로 들어앉는 것보다는 차라리

떠돌아다니며 천하고 가엾은 사내들에게 몸을 내주는 일이 나을 성싶었다. 그녀는 정이란

얼마나 무섭고 끈질긴 것인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룻밤의 풋정으로 툭툭 털어버리고

떠나면 이뜯날에는 사내의 얼굴마저 잊혀질 테고, 길산에 대한 자신의 추억이나 사랑도

소중하게 지켜질 수 있을 듯하였다. 묘옥은 이도장에게 몸을 허락하고는 내쳐서 당진

출행에 끼이리라 작심 하였고, 그렇게 되면 이도장도 아쉽겠으나 순순히 물러날 것으로

생각 되었다.

"어쩔 테냐. 지금 다짐을 받아놓구 가야겠다. 또 딴소릴를 한다면 내가 그 어른께 낯을 들

수가 없단 말야."

묘옥은 고달근이를 똑바로 처다 보았다. 그 여자의 눈에는 야무지고 매우 기가 가득히

어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밤 해의를 하겠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뮈냐?"

"그분의 댁으로 따라가진 않겠어요. 저는 행중에서 떠나기가 싫은 걸요."

고달긴이 생각해보니, 제 욕심에 꼭 들어맞는 대답이었다. 사실 노래가 훌륭하고 용모

빼어난 묘옥이 같은 사당을 남의 소실로 내주느니 보다는 한량들 상대를 시키는 것이

취제에도 더없이 유리한 노릇이었다. 계집 맛을 이미 본 사내라면, 비록 들인 재물이

아까위도 돌아서게 될 것이고 묘옥의 짝거사로는 자기가 합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고달근이의 곰보 얼굴은 흡족해서 금방 헤벌어졌다.

"내가 네 마음을 안다. 역시 묘옥이는 궁량이 훤한 아이로구나."

그들은 더 이상 옥신각신하지 않고, 사당골로 들어갔다. 달근이네 초가 앞 삽짝 밖에는

이동장이 타고 온 말이 꼬리를 휘젓고 있었다. 이도장은 백선이와 소화를 앉혀두고 타령 한

가락을 뽑는 중이었다. 고달근이 마당으로 들어서며 묘옥의 등을 앞으로 밀어냈다. 묘옥이

몇걸음 나아가 읍하면서 인사를 하였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가. 묘옥이 문안드립니다."

이도장 이경순은 술잔을 쳐든 채로 묘옥의 정수리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창황히

일어났다.

"어서, 올라오너라. 내가 묘옥이한테 줄려고 변변치 않은 선물 몇가지를 가지구 왔다."

고달근이도 덩달아 신명이 나서 마루에 오르면서 박거사께 말하였다.

"자네는 얘들 전부 데리구 나가서 제사 준비나 해두게. 내일 출행이니... 오늘은 좀 잘

먹어뒤야지. 그리구 이도장 나으리두 때맞취 오셨으니 오늘밤은 예서 주무시지요. 우리

묘옥이가 모시겠답니다."

이도장은 술이 올라 불콰해진 얼굴로 호기롭게 말하였다.

"좋아, 오늘 자네 행중 제수 비용은 모두 내가 냄세."

하고는 부담농을 열어 돈 한 꿰미를 선뜻 내어던졌다. 고달근이가 굽신거리며 돈꿰미를

받아들며 입을 주욱 찢었다.

"어이구나... 이렇게 많이 내주십니가. 하여튼 요긴히 쓰겠습니다."

하고는 자기도 이도장이 따라준 술 한 사발을 벌컥대며 들이켰다.

"얘 백선아, 아주가 어찌 이리 괴죄죄하냐. 술상 다시 내오너라."

고달근이는 더욱 신명이 나는 것이었다. 술상이 다시 나오고, 백선이와 소화, 홍련이

박거사 등은 모두 출행제를 지낸다는 핑계로 물러 나갔다. 사랑 마루에는 이도장과

고달근이와 묘옥이 셋만이 남이 있었다. 고달근이가 이경순에게 말하였다.

"저 뭣입니까... 인연이란 것이 별것이 아니올시다. 묘옥이가 우리 행중에 들어오게 된 것

두 즈이 서방이 해주 주내방 저자에서 참수를 당하여 갈 데 올 데가 없이 되었다가,

주막에서 저를 만났던 것입지요. 헌데 노중에서 봤던 얼굴이라 쉽사리 말이 통했습니다.

얘가 들어온 뒤로 우리 행중은 여러 곳에서 손님을 많이 끌었습니다. 참말 우리

패거리에서는 보물과 같은 사당입니다. 만약에 도장 어른이 이 아이를 뺴내가시면 우리는

이빨 없고 발톱 없는 범이올시다."

고달근이는 저 혼자 흥이 나서 멋대로 주절대는 중이었다. 묘옥이 비워진 달근의 잔을

잡아 이도장 앞에 놓고 술을 치면서 중얼거렸다.

"모가비 어른은 이제 나가 계셔요."

고달근이가 눈을 휘둥그레 떳고, 이경순도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래 묘옥의 말이 맞네. 나가서 제사나 지낼 것이지 공연히 끼여 앉아 익은 밥에 모래

끼얹지 말게."

"아이구... 나으리까지 얘 편을 드시는 구려. 좋습니다. 소인 물러 가겠습니다. 그 대신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셔야 합니다. 시중들 아이를 하나 보내드리지오."

아직 초저녁이건만, 고달근이는 삽짝을 아예 닫아버리고 물러나갔다. 묘옥이 일어나 방문

곁엗가 등잔을 밝혔다. 바깥은 이제 어둠침침했고 성급한 저녁별이 하얗게 박혀서 깜박이고

있었다. 이경순은 술이 거나하여 혀가 틀어진 소리로 묘옥을 지분거린다.

"얘야, 내 부탁은 다름이 아니다. 아들 하나만 낳아다우. 내 비록 양반두 아니고

신량역천의 도장에 지나지 않지만, 내 사분원을 갖구 있는 부상이다. 안성의 옹기 사기

그릇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것들이야. 너 하나쯤 호강을 못 시킬 리가 없지 않느냐."

묘옥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하였다.

"나으리께 오늘밤 옷끈을 풀겠습니다. 허나, 저는 성질이 방종하여 들어앉아 살림을

해나갈 자신은 없습니다. 저를 여주로 데려갈 생각은 마십시오."

"... 몸은 허락하되, 행중을떠날 수 없다는 말이로구나. 누구... 행중에서 마음 준 사람이

있느냐?"

"아닙닏. 저는 사당골에 들어온 지 반년이 가까워오지만, 사내 근처에두 가지 않았습니다.

아시겠지만, 제게는 몸주도 몸값도 없답니다. 비록 공밥을 먹었다 하나 제 재주를

팔았어요."

이도장은 속이 타서 술을 벌컥 들이켜고 나서 손목을 덥석 잡았다.

"더욱이나 그렇다면 어째서 행중에 남아 뭇 사내들에게 매춘을 하려느냐. 너 같은 아이는

견다지 못할 생활이다. 내게 허락할 것이면, 나와 가연을 맺어서 함께 여주로 갈 것이요,

행중에 남으려면 몸을 허락하지 않든지 할 것인데, 이찌 이런 맹랑한 처신이 있다더냐?"

묘옥은 묵묵부답이었다. 이경순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아 답답하구나. 네가 내게 정을 주지 않으려는 심사임을 알겠다."

묘옥은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이도장은 스스로 묘옥의 손을 놓고 떨어져 앉았다.

박에서는 동굿이 시작되었는지 징과 바라 소리가 요란하였다. 묘옥이 술상을 밀어내고

일어났다.

"일찍 주무시지요."

이경순은 묵묵히 앉아 있었고, 묘옥이 자리를 깔았다. 기다란 두둥달이 베개를 위에

놓는데 묘옥의 명치는 슬픔으로 타는 듯하였고 저절로 눈물이 스며나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서 자리에 드십시오."

묘옥이 말하자 이경순은 옷을 입은 채로 이불 속으로 들었고 답답한 듯이 말하였다.

"내가 강제루 너를 취하려는 것은 아니다. 불 끄고 나가거라. 네가 내게 시집을 오겠다는

마음이 일어날 때까지 나두 너희 패거리를 떠나지 않겠다."

묘옥은 불도 끄지 않고 돌아앉아서 옷을 벗기 시작하였다. 손가락이 떨렸고, 몸은

굳어졌는데, 불을 끄면 더욱 두려울 듯하였다. 그녀는 재인촌에서의 나날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썼다. 먼저 치마끈을 풀고 송상을 벗었다. 다음에는 저고리를 벗고 나서 움츠리면서

이경순의 곁에 누웠다. 이경순이 제아무리 큰소리는 쳤으되 그냥 누워만 있을 재간이

없었다. 이불자락을 들치고 가슴을 더듬는데, 꼭 감은 묘옥의 눈에서는 눈물이 자꾸만

솟아나옸다. 이경순은 이윽히 내려다보다가,

"너 우는 구나. 헌데 어찌 마음에도 없는 이런 짓을 하느냐?"

하며 힐난조로 말하자, 묘옥은 눈을 감고 꼼짝도 않고 반듯이 누운 채로 담담하게

대답하였다.

"쇤네는 사당이고, 나으리께선 손님이십니다. 제가 해우채를 받았으니, 옷을 벗은

것이올시다."

"그것은 해우채가 아닐세. 내가 자네들게 내린 선사품이라니까."

경순이 묘옥의 머리 밑에 팔을 넣어 껴안고 살을 대어보는데, 계집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불을 끄구 그냥 이얘기나 하다가 자자꾸나."

하며 경순은 일어나 불을 끄려고 이불자락을 들췄다가, 묘옥의 가슴에서 이상스런 흔적을

발견하였다. 젖무덤 사이의 골에 거뭇한 글자의 머리가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쉽사리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네 몸에 연비가 있느냐?"

묘옥은 깜짝 놀라서 가슴을 싸안고 돌아누워버린다. 이경순이 이불에서 빠져나갔다. 그는

불을 끄는 대신에 일어선 채로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다. 네 몸에 연비를 할 정도로 깊은 정인이 있을 줄은 모르고 너무

무리한 것만 같구나. 나는 나가서 따로이 사처를 정하겠으니, 염려 말구 푹 쉬도록 해라."

이경순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묘옥이가 가슴에 이불자락을 가린 채로 벌떡 일어났다.

"나으리...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이경순은 주춤 멈춰서 묘옥을 돌아다보았다. 묘옥은 일어나서 별로 부끄러움도 타지 않고

속치마의 끈을 풀고 사슴을 헤쳤다. 불빛 앞에 하얀 유방이 드러났고 그 위에 길자를 새긴

연비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제 혼백을 다하여 사랑한 어떤 사내의 이름이올시다. 저는 죽을 때까지 그 사내의

계집입니다. 하오나, 나으리께서 모가비에게 제 몸을 사신 거나 마찬가지이오니 주무시고

가십시오. 제가 눈물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잘 모시겠어요."

이경순은 정면으로 드러나 보이는 묘옥의 가슴께에서 시선을 거두면서 우물쭈물

말하였다.

"네 속마음이 정히 그러한데, 내가 네 몸을 탐하는 짓은 도리에 어긋나는 노릇이다."

하고 나서 그는 나가려 하지 않고 술상을 앞으로 끌어다가 앉았다.

"옷을 입어라. 여기 술과 안주가 많이 남았으니 내 이것이나 먹구 나가련다."

묘옥은 돌아앉아서 저고리를 꿰고 치마를 둘렀다. 이경순은 말하였다.

"그 죽은 사내는 뭣하던 사람이냐, 한량이더냐?"

"아니오, 저희 같은 하천배인 광대올습니다."

"그 사람 성씨가 길가인가?"

"장길산이라구 합니다 해서의 문화 사람이지요."

이경순은 더 이상 길산에 대해서 묻지를 않았다. 대신에 혼자서 탄식조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거참 잘난 사내두 다 있다. 죽어서까지 너 같은 여자의 마음을 잡구 있다니..."

묘옥이는 말없이 술을 따랐다. 경순이 불쑥 묻는다.

"허나 그 사람을 만나기 전부터 너는 창기였다지 않았느냐?"

"삼패에두 못 끼일 색주가의 더러운 매소부였습니다. 그분을 알게 된 뒤로 쇤네는 남녀의

깊은 정이 무엇인가를 알았어요."

경순은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였다.

"네가 허락하지 않을 때까지는 다시는 내 너를 탐하지 않으마. 그러나 오라비처럼 네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구나. 패거리를 떠나서 어디 조촐한 주막이나 한채 열게 해주랴?"

묘옥은 눈을 반짝이면서 경순의 미간을 노려보았다.

"진정 저를 도와주시렵니까?"

", 도와주다마다."

"제게는 세 가지 소원이 있사옵니다. 그 첫째는 돌아가신 이의 시신이 없어 묘마저 쓰지

못하니, 명패나마 아무 절에나 올리고 백일 부공을 드리는 일입니다. 둘째는 저와 부모님의

원수를 갚는 일이올시다. 그리고 셋째로 조그만 암자를 지어 머리 깎고 비구니가 되어서

부처님을 모시며 여생을 보내는 일입니다."

"그중 첫째와 둘째 소망은 내가 기꺼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나, 마지막 승려가 되겠다는

것은 나두 자신이 없는 일이로구나."

"어찌해서 그렇습니까?"

이경순은 빙그레 씁쓸한 웃음을 띠었다.

"묘옥이를 영영 잃게 되었기에 말이다. 얘야, 이렇게 사고 파는 일로는 하지 말고 나와

혼인해다우. 네 마음이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걸려서 내게로 기얼어지더라두 좋다. 우리

아들 하나만 낳아다오. 내 그사람을 위해서 백일 불공도드려줄 것이고, 연유는 모르지만 네

원수 갚는 일두 도와주마. 그리구 까짓 절두 하나 지어서 부처님을 모시 자꾸나. 너 내일

나를 따라 여주로 가겠느냐?"

묘옥은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이경순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벌떡 일어났다.

"자거라. 네 마음을 꼭 잡아내구야 말겠다. 그전까지는 조선 팔도를 헤매더라두 집으루

돌아가지 않겠다."

이경순은 침착하게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달근테 패가 행장을 차리고 떠나는데, 사당이 여덟이요, 거사가 여섯에 달근이를 포함하여

모두 열다섯이었다. 거사들은 통장고와 북과 꽹가리를 갖추었고 부담도 짊어졌다. 달근이는

식전부터 나와서 동행하려고 서성대는 이경순을 만류하느라고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에이 도장님두 주책이슈. 아니 어쩌자고 우리를 따라가겠다구 그러십니까? 공연히

봉패하시지 말구 여주로 돌아가십시오."

이경순은 말고삐를 끌고 큰마당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두 다 생각이 있네. 이번 출행에는 나두 꼭 끼워줘야겠네."

"허허 이거 큰 야단났데. 같이 가보시면 아시지만 창피가 이만저만이 아니올시다. 글세

집에 기시면 안방에서 두루 걱정없이 편하실분이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시우. , 묘옥이가

말을 듣질 않았다면 사내의 봇장으로 콱 찍어누를 것이지... 그년 따위루 하천배 노릇을

하시려우."

이경순은 더 이상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고달근이는 이도장이 따라오게 되면 묘옥을

장사시키는 것은 이미 그른 일이라,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으나 곧 교활한 쪽으로 생각이

돌아갔다.

"우리를 쫓아오시려면 물주 노릇을 좀 허시우."

"이 사람이, 광대 물주 있단 소리는 들었어도 사당패에 물주 있단 말은 처음 들었네.

그려면 취재는 모두 내가 가질까?"

"그런 물주 말고, 우리들 식대나 물으시우. 당진까지 고작 가봤자 백이십 리 길이우.

하루하고 반나절인데 먹어야 오늘 두끼 하고 내일 두끼니 별것도 아니겠수."

고다근이의 말투가 어제보다는 제법 뻑시게 나오는데, 어제는 제수비용과 부담농의

서사품을 묘옥을 통해 뜯어내기 위해서였으나, 이제는 밑져야 본전이었다. 그러나 이경순은

선뜻 응낙하였다.

"좋아, 당진까지 길양식은 개가 댐세."

"... 미륵불이 인도환생하셨네. 대신에 청룡사에서 팔아오라구 내준 부적은 모두 나으리

드리리다."

그들은 사당골을 나서는데 다른 패거리들은 서로 손짓을 해가면서 지나갔다. 역시 총대는

달근이인지라 각대에 붙은 작은 모가비들은 일일이 찾아와서 그의 지시를 듣고 떠났다.

달근이가 말을 끌고 행렬을 따르려는 이경순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 짐승은 왜 끌구 오시우, 타시게요?"

"암 타야지. 묘옥이를 태우든가..."

고달근이 고개를 홰홰 내두르며 혀를 찼다.

"물정 모르기로는 꼭 성문 밖에 마실 나온 남산골 샌님일세. 볼기에 살점이 얼마나 붙어

있길래 그러는거요. 그 말에 올라 거드럭거리며 우리 뒤를 쫓다가는 행중 전체가 아예

노중에서 거적 쓰고 물고장을 쓰겠수. 관아에서는 물론이고 어디 쬐끄만 시골 읍내

생원한테만 걸려두 꽁부니에 능장 댈 자리가 없이 터질게유. 말일랑 버리든지... 가만있자

아예 읍내에 가서 세마나 놓읍시다."

이경순은 적이 불쾌하였다.

"예끼, 내가 말을 타면 안되구, 세마를 놓으면 괜찮다니 무슨 법인가?"

고달근이가 껄걸 웃으면서 이도장의 패랭이 쓴 머리를 손가락질했다.

"갓도 업소 도포도 없으니 그럴밖에요."

장사치도 아닌 사당패에 상놈이 끼여 말을 타고 거드럭거리며 가기는 어려운 일이고,

말을 당장에 팔아치우기도 곤란한 일이라 역시 세마를 놓기로 하였다. 박거사가 뒤에 남아

동촌장 객주에게 가서 당진으로 갈 손님을 잡기로 하고서 행중은 먼저 떠났다. 박거사가

객주를 돌아다니며 손님을 찾는 중에 마침 작자를 만나게 되었다. 박거사의 손님 찾는

소리를 듣고 주막에서 하인배 차림이 하나 쫓아나오싿.

"여보, 당진까지 간다구 그랬수?"

"당진 채운포 까지 삯이 얼마요?"

"열 냥만 내수."

"예끼, 열 냥이 무슨 뉘 집 삽사리 이름인 줄 아오, 함부로 부르게. 닷 냥만 합시다."

박거사는 그의 아래위를 쓱 훑어보고 나서 말고비를 당겼다.

"싫으면 그만두슈."

하인은 그대로 돌아서서 주막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쫓아나와 박거사의 등뒤에서 다급하게

찾았다.

"여보시게 열 냥 줄 테니 이리 오우."

박거사가 말을 끌고 주막 앞에 대어놓으니, 해장술에 얼근해진 젊은 샌님 하나가 갓을

비뚜름히 쓰고서 나온다. 나오자마자 다짜고짜 장죽으로 박거사의 머리를 내려치는

것이었다.

"이놈, 마부라면 문안을 드릴 일이지 아무리 세마를 탄다 하여도 주종이 엄연하데 말뚝을

삶아 먹었느냐?"

박거사는 깜짝 놀라서 얼결에 하정배를 드렸다. 그리고는 샌님의 발을 받쳐서 말 위로

올려주고 나니 은근히 속에서 밥알이 곤두섰다. 홧김에 고삐를 잡아채니 말이 높이

소리지르며 굽을 들고 뛰어올랐고, 양반은 보기 좋게 낙마를 하고 말았다.

"어이쿠우... 사람 죽는다.!"

"샌님, 어디 다친 데 없으십니까?"

하인이 달려들어 일으키니 양반은 상을 찡그리고 절뚤이며 일어났다.

"안되겠다. 견마는 네가 잡아야지, 이 녀석은 손이 거칠어서 잘못하다간 직산두 못 가서

내 모가지가 부러지겠구나."

아이고 깨소금이야, 하는 기분으로 박거사는 죽을 죄를 졌다는 듯이 말궁둥이께에 서

있었고, 하인은 눈을 부라리더니 말고삐를 잡는 것이 었다. 그들이 직산에 이르니 사당패가

앞서서 가고 있는 게 보였다. 말에 앉았던 양반이 울긋불긋한 계집들의 옷자락을

발견하고는 말하였다.

"저 앞에 웬 계집들이 장옷두 없이 대로를 활보하는구나. 무엇들이냐?"

", 사당년들인 모양입니다."

하인이 말을 하지 양반은 호기심이 동하였는지,

"허허, 거참 심심한 노중에 잘 만났고나. 어서 가까이 가보자꾸나."

하였으니 점잖은 양반의 체며에 사당패라면 피할 일이요, 더구나 그들이 창기보다 하천의

매소부들이니 더욱 외면할 일이지마는 젊은 양반은 풍류가 과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여봐라 비켜라, 물렀거라."

하면서 패거리 가운데로 돌입하며 미처 피하지 못한 사당 하나를 밀어 붙이니 논두렁

아래로 떨어져버렸다. 말 위에 올라앉은 양반은 낄낄거리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멀찌감치 앞지르지도 않고 패거리 근처에서 걸음을 늦추었다. 박거사가 말 꽁무니께에

따라가며 제 패거리들에게, 오뉴월 장마 끝물 오이꼭지를 씹는 상판을 해 보인다. 모두들

괘씸하게 생각하는 참이었으니 그중에서도 이경순은 가장 아니꼽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비록 차림새는 상놈의 행색이되 시골 양반의 부스러기쯤과는 비교도 안되게, 여주에서도

내로라 하는 부자인 이경순이 거드럭대는 젊은 샌님의 행차가 고깝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도 만일에 생각만 있었다면 돈냥을 들여서 선달이나 참봉이나 첨지 같은 공명첩을 사서

양반 행세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사정이 피치못하여 세마를 놓았을망정 자기

말인지라 이경순은 부아가 슬슬 치밀기 시작하였다. 어지 인기척이 끊긴 호젓한 길목만

나타나면 호되게 골탕을 먹일 작정이었다. 말께에 올라앉은 양반이 물었다.

"너희들 어디 사당이냐?"

기분이 기분인지라 모두들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걸었다. 젊은 샌님은 개의치 않고서

사당들을 휘휘 둘러보더니, 고개를 쳐들고 쏘아보는 묘옥의 얼굴과 부딪쳤다. 돌연 섬뜩해진

모양인지 그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다시 짓궂게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 그년 눈빛 한번 매섭구나. 너 나하구 오늘밤 한번 하려느냐. 내가 당인에게 배운

기술로 삭신을 모두 녹여주리라."

아무리 사당이라 하나 백주 대낮에 이렇듯 음탕한 농지거리로 지분거리느 봉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얘야, 이리루 올라오너라. 함께 타구 가자. 내가 네 앙가슴을 부둥키고 가노라면

당진까지 백 년이 걸린들 어떠하냐?"

하는데 드디어 참지 못한 이경순이 성큼 뛰어가더니 양반의 멱살을 잡아 확 끌어내렸다.

그는 말에서 거꾸로 떨어져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 더러운 자식 같으니라고."

경순은 다짜고짜로 뺨을 연달아 두어 대 올려붙였다.

"아이고 상놈이 양반을 친다. 아무도 없느냐?"

뒤에서 하인이 다려들려는 것을 하는 수 없이 고달근이가 어깨를 당겨가지고 돌아보는

놈을 힘껏 머리로 치받았다. 하인은 안면을 감싸고 주저앉아버린다. 이경순은 양반을 멱살을

잡아 일으켜서는 제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꾸짖었다.

"이놈아, 네깐 놈이 무슨 양반의 행세냐. 네 아비가 밥술깨나 먹는 탓으로 한직이나

한자리 샀겠지. 진짜 양반은 아무리 쇠락하여도 피기 있는 법이다. 네 구는 꼴을 자세히

보니 아마도 당진서 배 부리다가 쇠푼깨나 만진 모양이거늘, 글은 한줄도 안읽은

글방도령을 면한지가 엊그제겠다. 네 이놈 아주 불알을 발라버리구 가야겠다."

이경순은 다시 발길로 몇대 차주었고, 고달근이가 안절부절 못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어쩔려구 이러시우. 하여간에 우리는 도장님 때문에 이번 출행은 모두 망치었소.

보아하니 당진서 행세깨나 하는 댁 젊은 서방님인 모양인데, 우리를 그냥 두진 않을 거요."

속삭이는 고달근이의 말을 들어보니 더 이상 때릴 수도 없는 일이라 이경순은 양반의

발치에다 침을 퉤 뱉고는 중얼거렸다.

"내 비록 우연한 일로 사당패와 동행이 되어 길을 간다만, 남의 일 같지 않아 참견을

하였다. 그리고 이 밀은 내가 세마를 놓았던 것인데, 네 따위 불한당에게는 빌려줄 수가

없으니 삯은 반만 받아 두겠다. 당진까지 걸어가든 날아가든 네 발가락 튕기는 대로

하려무나. 얼마에 가기루 했느냐?"

이경순이 박거사에게 물으니, 그가 허루춤에서 열 냥을 꺼내 보였다.

"열 냥 받았습니다만, 까짓 거 그냥 가십시다."

"그걸루는 너희들 양식 노자나 하거라. 그리구 옜다 닷 냥이다. 비록 직산까지 왔다 하나

노중 하마인 셈이니 닷 냥만 받아두겠다. 앞으로는 아무리 지체 낮은 상놈을 만나더라도

체모있이 처신하여라."

하인은 칩술이 터져서 연신 피를 뱉어내고 있었으며, 젊은 양반은 망신에데 겁까지 먹어

얼굴이 붉으락 푸르륵하고 있었다. 경순은 사당패의 짐들을 대강 추려서 말 등에 싣고서

박거사에게 끌리워 따라오게 하였다. 그들이 멀어진 다음에 양반과 항인은 엉거주춤 일어나

요로원 가는 짙은 솔밭길을 막막하게 내다보았다. 하인이 그 주인을 부축하면서 주눅 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방님, 어디 다치신 데 없으십니까?"

"놓아라 이 자식아. 너 집에 가기만 했단 봐라, 물볼기루 똥두 못싸게 해줄 테야."

하며 뿌리치고 나서 그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저자들이 사당패일시 분명하렸다."

", 보아하니 청륭사 사당골 패거리인뎁쇼. 왜 철 들이로 당진 들러가지 않습디까요?"

", 그렇다면 백석포나 개포에서 판을 벌이겠구나. 오늘은 아산서ㅓ 놀이를 할 테니

우리가 먼저 당진엘 들어가겠지. 당진에만 왔따 하면 그냥 두진 않겠다. 먼저 그 비쩍

마르고 키 큰 상놈을 잡아 징치하고, 눈빛 매섭게 생긴 계집은 내가 해의시킨 연후에

아이들에게 돌림을 놓아주겠다."

"헌데 그놈은 제 말대루 사당 거사패가 아닌 모양입니다. 다른 녀석들이 공대를

하던뎁쇼."

"패량이를 썼으니 제놈이 갈 데 없는 상놈 아니겠냐. 이놈들이 우릴 몰라보구 함부로

건드려놓았으니,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야겠다."

"빨리 가식시다. 이러다간 오늘 면천두 못 가서 과객질하겠수."

"무슨 말이냐. 한 십리 길을 가면 요로원인데, 게서 세마를 하여 치 달으면 저녁밥은 집에

가서 먹을 수가 있다."

의논을 끝낸 주종은 쉬엄쉬엄 요로원까지 가게 되었다. 새파란 양반이란 당진 채운포의

주상 유치옥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각처에 여각을 열고 있었으며, 배가 크고 작은 것이 도합

이십여 척이었다. 원래가 파주 사람이더니, 나룻배로 미곡을 싣고 소상 노릇을 시작하여

차차 취재가 커지면서 당진의 부가옹이 되었던 것이다. 원래가 자수성가라는 것은 나라를

새로이 일으킴과  ㅌ은 일이라, 그 주인 된 자의인품이 제법 이루어져야 성사가 되는

일인지라, 유치옥은 배포가 크고 너그러워서 군민의 인심을 잃지 않았다. 특히 유치옥은

사람을 볼 줄 아는 남다른 눈이 있어서, 처음 본 자라 할지라도 취재할 역량이 있어 보이면

서슴지 않고 기천 냥을 내던질 줄을 알았다. 특히 그의 아래에는 강화 출신의 뱃사람들

중에 제법 내로라 하는 장한들이 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고생을 모르고

응석받이로 자란 유필준은 천하에 이름난 한량이었다. 그가 안성으로 원행을 했던 것도

거래인에게는 어음을 수령해온다는 핑계였으나, 실은 안성ㅇ의 가얏고 잘하는 기생

화심이와 하룻밤을 지내고 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내일은 이 분풀이를 할 수 있겠지. 빨리 가자."

유필준과 하인은 요로원에 이르러 말을 세낼 수가 있었고, 아산으로 내달았는데 고달근네

사당패는 이미 개천을 따라 팩석포로 나간 뒤 끝이라 다행이 부딪치질 않았다. 소벌서

면천까지 삼십 리요, 거기서 당진까지 또한 삼십 리 길이니 해질 무렵에는 닿을 모양이었다.

고달근네 사당패는 벌써 연희의시작이지라, 거사들은 모두둘 제 사당을 등에 업었고

풍악을 잡히면서 백석포로 나아갔다. 맨 앞에는 모가비 고달근이가영기를 들고 갔으며,

사당을 업지 않은 자들은 풍악을 잡혔다. 묘옥은 색동 소매를 내놓고 남색 철릭을 입었으며

홍련이는 노랑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었다. 그들은 제각기 거사들의 등에 업혀 있었다.

이경순은 짐 실은 말을 끌고 멀찍이서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사람들이 차츰 모여들었고,

고달근이가일행에 앞서서 포구로 나아가 어례의 총대를 만났다. 그들은 포구에서 놀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고, 열을 지어서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바닷가로 내려갔다. 범선과

나룻배들이 총총히 늘어선 포구의널찍한 모래밭에 판을 벌이고 한참이나 춤들을 추는데,

뱃사름들과 먼 곳에서 고기떼를 따라 내려온 어부들이 신명이 나서 모여들었다.

그들의놀이판 주변에는 곧 사람들로써 큰 울타리가 생겼으며 나이가 제일 어린 홍련이가

먼저 나가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즉 개막 제일사였다.

"한산 세모시 잔주름 곱게 잡아 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나."

하면 다른 사당들이 고운 목청을 합쳐서, 사당질 가세나 하고 노래했다. 그 다음에는

백선이가 나와서 나긋나긋한 몸매를 사내들께로 비틀어 보이면서 수건춤을 추는데, 한창

때에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던 어부들은 저절로 한숨을 쉬거나 눈에 불을 켜면서 흥을

내었다. 백선이가 아무 사내에게나 살살 눈웃음을 치는데 그에 부딪친 녀석은 자지러질

듯하며서 소리를 지르고 공연히 옆엣사람도 건드리고 주저앉기도 하였다.

"하이구 조것을 고대로 벗겨서 초장 없이 생으로 씹어 먹어벼렸으면 좋겠네!"

"오늘밤 물때에 일은 다 나갔다."

"바다 버렸구만 버렸어. 나는 밤새도록 오줌만 졸졸 쌀 테여."

"이 녀석아 너는 상중이니 내대지 말어."

하며 제각기 건 입담을 그치지 않았다. 숫제 백선이는 어떤 사내의 코를 슬쩍 잡아주고는

사람들의 옆을 바짝 지나치면소 손끝으로 사내들의 가슴을 건드렸다. 삼현육각이 그치고

나서 백선이는 땅에 살풋이 앉으며 인사를 올리더니 치맛자락을 걷어 들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안으로 속치마와 속바지 자락이 들춰져 버선위의 속살이 드러나자사내들은

저마다 고함을 지르고 야단이어싿. 백선이가 쳐든 치마폭 속으로 사내들이 엽전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돌아 나가는데, 제법 배포있는 사내가 엽전 두 닢을 입에 물고 기다라고

있었다. 백선이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핼끔 위로 들어서 웃을을 흘렸다.

"얘야 받아라, 빨리 받아라!"

"아니다, 치마 벗구 받아라."

사내들의 왁짜한 소란 속에서 백선이는 열매를 따려는 참새처럼 발끝을 들고 사내의

입가에 제 입을 갖다 댔다. 백선이는 사내가 입에 문 엽전을 빼내려고 제 입으로 물었으니

완전히 입맞춤이 되었고, 불두덩이 뻐근해진 사내들은 저마다 엽전을 입에 물고 손짓하며

야단이었다. 백선이가 엽전을 입에 물었으니 사내는 어금니를 콱 다물어서 빠져나오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백선이가 사내의 겨드랑이에 손가락을 넣어 간질밥을 먹이자

사내는온몸을 진저리치면서 뒤로 물러났는데 엽전이 빠져나왔다.

"얘얘, 내 것은 닷 푼이다. 내 것두 물어가거라."

"아니다. 내 것은 세 닢이지만 내 양물은 홍두깨만하니, 새내가 그것이 좋아야 실속이

있는 게야."

"아이구, 나는 잠깐 대어보기만 하자꾸나."

"이런 망할 자식 같으니... 오늘밤 봉노에서 조심해라. 나는 오늘 콩죽에 냉수 열 사발

먹은 사람이여. 찌르면 그대루 청천강 둑이니까."

백선이는 연신 웃어대면서 사내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다니며 엽전을 거뒤냈다. 여염

향리에서 이런 짓거리와 음탕한 노래를 했다가는 대번에 상풍죄로 관가에 직행하겠으나,

워낙에 장바닥과 포구란 상놈들의 세상이니 점잖은 사라이나 정숙한 부인께서는 올 자리가

아니었다. 흐드러진 풍악소리가 다시 한번 높아졌다가 이번에는 홍련이와 소화가 함께

나와서 엇갈ㄹ 춤을 추면서 노래를 시작했고, 백선이와 입맞춤을 하였던 사내들은 놀이판

뒤로 돌아가 개복청을 찾았다. 모가비를 만나 박치기에 대한 흥정을 벌이려는 것이었다.

홍련이와 소화는 이리저리로 미끄러지고 모이면서 고운 목청을 드높여 타령을 서너 곳

뽑았다.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뒷동산 산등의 도라지. 청치마 홍치마 휩싸들고 도라지 캐러

다니네. 도라지 캐려면 캐고요 지레기를 캐려면 캐었지 남의집 꽃밭을 왜 이다지 들추나.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은율 금산포에 백도라지. 한 포기만 캐어도 광우리 광우리 넘치누나.

도라지 도라지 요 몹쓸 년의 도라지, 하도 날 데가 없어서 두 바위 사에에 났느냐. 도라지

도라지 산에 산 산도라지. 지름댕기 팔랑팔랑 숫기없는 도라지. 네 나이 몇 살이냐 대답해요

살짝 대답해. 아이 답답해 아이 답답해 정말 답답해. 도라지가 좋으니 도라지가 돈도라지가

나는 좋아. 은조록 금조록들 강에 강 강도라지, 파란 치마 한들한들, 임자 없는 도라지.

집에 어데이냐 대답해요 너 사는데. 아리랑 갑갑해 아리랑 갑갑해 정말 갑갑해. 좋구려

도라지가 돈도라지가 나는 좋다."

도라지 타령이 끝나자 홍련이 혼자 나와 매화타령을 부르고, 소화는 사내들 가까이로

다가서서 춤을 추며 돌아갔다. 묘옥이와 백선이와 그외의 사당들은 모두 뒷전에 서서 손을

흔들며 앞가락을 여럿이 싸주었다.

인간 이별 만사 중에 독수공방이 상사난이라 좋구나 매화로다.

에야디야 에헤야 에야디어라 사랑도 매화로다.

안방 건넌방 가루다지 국화 새기의완자문이라 좋구나 매화로다.

에야디야 에헤야 에야디어라 사랑도 매화로다.

나 돌아갑네 나 돌아갑네 떨떨거리고 나 돌아가노라 좋구나 매화로다.

에야디야 에헤야 에햐디어라 사라도 매화로다.

매화타령이 끝나자 묘옥이 앞으로 나와 상사요를 애틋하게 부르는데 듣는 사내들의

애간장이 저절로 녹는 듯하였다.

"산천이라 묘한지라 길주 명천 가시다가, 빨래하네 빨래하네 색시둘이 빨래하네.

냥짜리 거두부채 색시 앞에 던져놓고, 그 부채 주워주면 색시 체면 떨어지나. 도령 집은

어디관대 해 빠진데 길을 가오. 우리 집을 보려거든 한양 땅을 내리달아 정동지네 손자가

내오. 색시 집은 어디관대 해 빠진데 빨래하오. 우리 집을 보려거든 과천 땅에 내리달려

김첨지네 댁이라오. 그로 해서 얻은 병이 무당 들여 굿을 한들 굿발이나 받을쏘냐. 의원

들여 약을 쓴들 약발이나 받을쏘냐. 봉사 들여 독경한들 독경발을 받을쏘냐. 바람 불어 누운

댕기 눈비 와서 일어나리. 임을 봐야 일어나지. 우리 조부 거동 보소 오간청을 우왕좌왕,

우리 부친 거동 보소 외올망건 두루치며 통영갓을 눈에 쓰고 세세 삼사 겹버선에 육양미를

담아 신고, 역말을 잡아타고 마부 없는 말ㅇ르 타고, 과천 땅에 내리달려 김첨지네 대문

밖에 역말일랑 매어놓고 대문 안에 들어서서, 나서거라 나서거라 어서 바삐 나서거라. 삼대

독자 외동아들 널로 하여 얻은 병이 나날이도 깊어가고 다달이도 깊어가네. 한산모시

연반물치마 주름을 잘게 잡아 단장하고 나서거라. 은가락지 쌍가락지 짝맞추어 단장하고,

한양 성중 내리달아 정동지네 대문 안에 사청 앞으로 당도하니 꽃이 폈네 꽃이 폈어,

웃음소리 꽃이 폈네."

이경순은 구경꾼들 틈에 끼여 앉아 묘옥의 노래를 들으면서 가슴이 답답항려 견딜 수가

없었다. 사내들은 역시 고함도 지르고 가락도 맞추면서 법석을 떨었다.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나와서 가무를 펼쳤는데, 개복청에서는 고달근이가 박치기 흥정을 하는 주잉었다.

웬일인지 묘옥이와 백선이를 찾는 사내들이 많았다. 백선이는 워낙에 요사를 떨어서

그랬지만, 묘옥이는 사당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달근이가 연신 변명하였다.

", 안되었습니다. 묘옥이란 아이는 벌써 손님이 들었습죠. 백선 이께루 세 손님만

받습니다."

"누구야, 그 상사요를 부른 아이를 누가 먼저 찝었단 말이우."

", 그야 한량 나으리입죠. 우리 사처는 백석포 어물 객주네 봉놋방인데, 데리구

나가시려면 짝거사의 저녁과 잠자리는 마련해주셔얍니다."

"...외입에두 반상이 따루 있나."

"하여간에 나는 아무 사당이나 좋으니, 동침을 하겠소이다. 까짓, 내 고깃배 안에 자리를

잡으면 되오."

"밤새워 정분을 맺는데는 해우채가 세 곱 됩니다."

이렇듯이 뒷전에서 흥정은 활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포구에 차츰 땅거미가 내리깔리고

바다 위에는 노을의 엷은 자취만이 사라지려는 참이었다. 사당들이 모두 판에 나와서

어우러져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판막음이 되었는데, 이제부터 놀이는 일단

끝나고 한밤중부터 짝을 찾는 매음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백선이는 분단장을 다시 고치고 사처로 정한 어물 객주 봉노에 들었고, 청에서 달근이와

경순과 짝 없는 풍각쟁이 몇이 앉아서 술을 마셨다. 소화는 갯가로 나갔으니 나룻배나

어선들 사이를 누빌 모양이었고, 홍련이는 백선이의 옆방에 자리를 잡았으며, 정심이는

어계방, 홍도는 해변가, 월분이는 사내들의 투전판으로 각각 나아갔던 것이다. 묘옥은

객줏집의 골방에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기에게도 손님을 받도록 해주기를

바랐으나, 경순이 이미 해우채를 치른 모양이어서 고달근이가 묘옥은 제외를 시켰다.

해우채를 치른 이경순은 밤이 깊도록 술청에 앉아 술이나 퍼마실 뿐 묘옥에게 찾아들지

않았다. 묘옥은 경순의 그러한 마음이 두려웠다. 차라리 몸을 섞어 흥정이 이루어지면 한결

가벼울 것 같았다. 묘옥은 경순에게 조금도 마음 한귀퉁이를 떼어주지 않으리라 작정했건만,

어쩐지 그가 돌아오지 않는 빈 골방을 지키고 앉았으려니 왠지 모르게 허전하였다.

백선이는 어부 하나가 저고리를 풀어 헤친 모습으로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손바닥을

짝짝 두들겼다. 잠깐 방문 앞을 비웠던 거사가 달려와 그 사내의 소매를 잠아당기며 은근히

말을 걸었다.

"해우채를 내셔얍죠."

"모가비께 주었는데, 자네한테 또 무얼 주는가?"

"사당 외입이 처음이십니까요? 모가비는 박치기 흥정이나 하구, 해우채는 내가 따루

받습니다."

"그런 법이 어딨어?"

사내가 벌컥 화를 내자, 백선이 또르르 달려와 사내의 가슴팍을 밖으로 밀어냈다.

"아이...싫으시면 그만두셔요. 백석포에 지천으로 깔린 게 님인데, 해당화에 임자가 따루

있나요. 꺾는 게 임자지."

사내는 문득 투덜거리기가 쑥스러워졌는지, 허리춤을 더듬었다.

"내가 맨손으루 올라왔으니...내일 아침에 내지."

거사가 능청맞게 중얼거렸다.

"강물이 위로 다시 흐르는 것 봤습니까? 하룻밤 풋정에 무슨 표시나겠습니까요."

"좋아, 내 당장 표를 해줄 테니까. 조기 다섯 두름이여."

사내는 제 두건자락을 죽 찢더니 두리번거린다. 거사가 숯을 집어주니 주막집 기둥에

그어놓듯이, 거기다 바를 정자 하나를 그려서 내민다.

"당장 어계방에 가서 가져가. 나는 강화 유서방이여."

거사가 방문을 닫으려고 하면서 물었다.

"탁주 두어 되 드실라우?"

"가져와, ㄴ내 앞으로 달구."

"뭐 시킬 일이 있으면 저애 이름을 부르십쇼. 제가 요 문 앞에 섰을 테니."

거사가 해우채를 현물로 받기 위해 밖으로 달려나갔다. 오랫동안 바다에 나가 있었고 집

떠난 지가 오래되어 여자의 살에 주린 장정은 웃통을 벗자마자 바지춤을 풀며 성급하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백선이는 능숙하게 몸을 빼면서 사내의 상투를 잡아 젖히니, 옆으로

넘어져버린다.

"정말 이이가 숨넘어가겠네. 아직 우리 주인이 안 돌아오셨으니... 좀 앉아서 관상이나

봅시다."

" 에구, 죽겠네!"

그들의 지분거리는 소리는 은밀한 중에 묘옥의 방에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백선이는 그

사내와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난 뒤에 밖으로 뛰쳐나왔다. 사내의 요구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흥정이 이루어진 사내만도 네 사람이었다.

지금 떼어놓지 않으면 도무지 사내가 방 밖으로 나갈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기다리던

거사가 백선이를 찾아내라고 법석이었다. 드디어 화가 난 어부는 밖으로 나오더니 다짜고짜

거사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 이 쥐새끼 같은 놈아. 내 사당년을 얻다가 빼돌렸니. 내 해우채 내놓아라."

"! 이놈이 사람 친다."

거사도 뺨을 맞고는 마주 대들어 멱살을 잡고 딴죽을 걸었다. 둘이 붙안고 땅바닥에

뒹구는데, 홍련이에게서도 돌림을 당한 사내 두엇이 함께 달려와 땅바닥에 쓰러진 거사의

등판을 마구 짓밟고 두드려 팼다. 이 소란을 듣고 청에서 술을 마시던 고달근이와 풍각쟁이

하나가 달려나왔고, 앞섰던 악공 거사는 발길질에 걷어채어 뒤로 넘어졌다. 고달근이는

사십줄이건만 싸움이라면 장바닥에서 코피 터지며 배운 몸이라 대번에 발길 내지른 자에게

달려들며 한 손으로 낭심을 훑어버렸다. 에구구 소리 내지르며 주저앉자, 이번에는 거사를

깔고 앚았던 자의 눈두덩이를 주먹으로 내질렀고, 그를 앞에서 껴안은 사내의 볼따구니를

덥석 물었다. 물고느 놓지 않고 이그그그 소리르 내면서 좌우로 흔들어대니, 볼을 물린

사내는 사지에서 힘을 쪽 빼고 진저리치는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앗다. 볼따구니 살이

움푹 패어서 피가 낭자한데, 달그닝가 입을 탁 열고 물러서니 한숨을 모질게 내쉬고는 곧

혼절해버린다. 아무리 거친 어부들이라 하나 싸움질에도 순박한 기가 있게 마련인데,

장거리의 악소패로 자라난 고달근이의 악착스런 싸움법에는 당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늘어진 동무를 버려두고 후다닥 뛰어 달아났다. 고달근이가 씨근거리면서 거사를

일으키는데 그야말로 넙치가 되도록 얻어맞아 몰골이 매추 겉절이 꼬락서니였다.

고달근이는 거사에게 면박부터 주는데,

", 이런 병신아, 고작 갯것들게 얻어텨져가지고야 무슨 사당을 거느린 거사냐. 애들은

다 어디 갔니?"

"홍련이는 아마 박거사가 알 게유. 지금 손님 받구 있지요. 백선이는 묘옥이 방으로 잠간

피했수."

"그럼 청에서 기다리는 자를 또 보낼 테니 빨리 가서 받으라구 해여."

혼자 앉았던 이경순은 뒷집을 지구 슬슬 마당으로 돌아 나오다가 달근이와 부딪쳤다.

"무슨 일인가?"

"...별일 아니우. 늘 있는 일이지요. 술 처먹은 놈들이 행패를 부려서 한바탕 놀았수."

"포구로 나가서 패거리를 데려오는 게 아닐까?"

"아이구, 염려 마십시오. 외입 싸움에 원한 품는 놈은 없는 법입니다. 맞을 때뿐이지요.

뒤를 가질려두 창피하니가 어디 가서 말두 못합니다."

돌아서는 달근이에게 이경순이 조용히 물었다.

"묘옥이는 어느 방에 있는가?"

"저 뒷방이우."

하고 나서 달근이가 속삭였다.

"아니 도대체 남의 판에 끼여서 작파하여도 분수가 있지...오늘 걔를 찾은 손님이

몇이었는지나 아시우?"

"묘옥이 해우채는 그걸루 충분할 텐데..."

"그야 당진까지는 어찌되겠습니다만 우리는 강화루 들어갈 텐뎁쇼. 게가지

쫓아오실라우?"

이경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글세, 가는 데까지 따라감세."

"허허허, 아무렴입쇼. 열 번 찍어 아니 넘어가는 나무가 있겠수.묘옥이 고년이 직심은 참

매서운 데가 있습니다."

"자네 그서방이라는 참형수를 자세히 아는가?"

"글쎄요, 우리가 듣기룬 그자가 구월산 화적이랍디다. 해주에 신부자라구 아주 떵떵거리는

대고가 있습지요. 그자를 야반돌입하여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지요. 해주 바닥서는

장ㅅ길산이라면 짜아허게 소문이 났었수."

"장길산이라...혹시 당진 가면 해서 광대패를 만날 수 있을까?"

"강화 가면 만나게 될 게유. 혹시 모르지요. 당진 광대 물주헌테 물으면 패거릴르 소상히

알 게요."

경순은 묘옥의 방을 향해 돌아섰다.

"난ㄴ 먼저 드렁가 자겠네."

아니 술 더 안 드시게?"

"그만두지. 또 쌈박질 벌이게 되면 날 깨우게나."

고달근이는 얽은 얼굴을 경순에게로 바싹 들이대며 키들거렸다.

"오늘은 그냥 요정을 내시우. 계집이란 그저 백 번 말해야 소용없습니다. 부부지간에도

돌아누우면 남의 살이라니깝쇼. 홍두깨가 약입지요."

경순은 대꾸 없이 뒤뜰로 돌아갔다. 그는 잠깐 동안 문고리에 손을 대지 않고 툇마루

앞에 서서 망설였다. 조용한 어둠 가운데 섰자니, 갑자기 쥐죽은 듯하던 객줏집의 곳곳에서

술렁이는 낮은 소음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여자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며 사내의 가라앉은

목소리와 간간이 신음소리도 들려왔고, 술청에서 들리는 주정꾼들의 말도 군데군데 끊긴 채

또렷하게 드릴고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먼 데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런

소리들의 배후에서 포구에 밀려든 바닷물의 철썩이는 소리가 끊임없이 전해오는 것이었다.

그는 멍하니 방문 앞에 서 있었는데, 창호지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차차 커지면서 묘옥의

흰 얼굴이 빠끔히 내밀어졌다.

"나으리...들어오시지요."

묘옥은 문을 그렇게 조금만 열어 잡고서 속삭였다. 경순은 머뭇머뭇 중얼거렸다.

"내가 들어가두 괜찮겠느냐?"

묘옥은 말이 없었고 경순은 일부러 다시 한번 물었다.

"나를 기다리구 있었느냐?"

묘옥이 잠시 말을 않더니 문을 더욱 넓게 열면서 비켜섰다.

"이 방은 나으리의 사처가 아닙니까."

경순은 신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아랫목에 펴진 이불을

들치고 옷을 입은 채 드러누웠다.

"옷을 벗구 주무십시오."

"너는 자지 않겠느냐."

그들은 얘기를 계속할 수 가 없었으니 뭔가 두 사람의 가슴속에 덧부룩하니 얹힌 것이

있는 듯하였다. 경순이 옷을 벗고 자리에 들자 묘옥은 발치께에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경순은 등을 돌리고 벽쪽으로 돌아 누웠다. 그가 깜빡 잠이 들려는가 했을 적에 등잔불이

꺼지면서 등뒤에 묘옥이 다가와 함께 눕는 것을 느꼈다.

 

달근이네 사당패는 이른 아침에 백석포를 떠나 나루를 건너 소벌에 이르렀다. 소벌서

면천까지는 편편한 들판과 갯가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밭과 나무숲 사이에도 해풍이

불어와 소금기ㅗ아 비린내가 느껴졌다.

경순은 맨 뒤에서 짐 실은 말을 끌고 가는데, 묘옥의 트레머리 사이로 늘어져서 나부끼는

붉은 댕기에 눈을 주고 있었다. 경순은 묘옥의 심사를 아무래도 알아챌 수가 없었다. 어젯밤

묘옥은 그의 곁으로 기어들어 드디어는 경순의 품에 안겼던 것이었다. 어젯밤 묘옥은 그의

곁으로 기어들어 드디어는 경순의 품에 안겼던 것이었다. 경순은 어렴풋한 취기와 잠에서

깨어나 상대를 끌어안으면서도 설마 묘옥이는 아니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곁에서

꼼짝도 않고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히 묘옥이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누눠 있던 묘옥은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더니 불을 밝혔었다. 그리고는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갔었다. 경순은 그녀가 소피를 보러 나갔는가 하여 잠들지 못하고 밤새껏

기다렸지만 묘옥은 돌아오지 않았고, 새벽닭이 울 즈음하여 경순은 잠들어싿. 아침에 모두들

객줏집으로 모여들어 출발 준비를 하고 법석댈 적에 경순은 슬그머니 등뒤에 다가서서

어젯밤에 어디 갔었느냐고 물었으나, 묘옥은 국밥을 뜨던 숟가락을 잠간 멈추었을 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계속 밥을 먹었다. 경순은 혼자서 애가 달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버티던 묘옥이 일단 몸을 주고 나서는 저렇게 돌처럼 굳어져보린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달근네 일행은 면천 못미쳐서 장승백이 고갯마루에 이르렀는데, 역시 광대 차림의

울긋불긋한 복색과 악기를 짊어진 사내들 여남은 명이 웅기중기 둘러앉아 다리쉬임을 하는

중이었다.

"거 어느 행중 동무요?"

풀 위에 비스듬히 누워 등에 멘 짐에 기대 있던 사내가 물었다. 달근이가 그들을

한눈에 쭉 훑어보고는 한마디 엎질렀다.

"! 묻는 동무는 어디 패요?"

"우린 동작나루 사당골서 나왔는데."

"복만이네로구만. 나 달근이여."

"안성 청룡사 말유. 이것 참 잘됐네. 우린 당진이 초행인데."

고달근이는 좌중을 죽 훑어보고는 과천 사당패의 갈림패인 동작진무리들임을 알아쏙,

같은 걸립패 화주 출신인 복만이가 없는 것을 눈치챘다.

"누가 맘대루 남의 동네루 넘어오라구 그랬어."

달근이는 곰보의 면상을 일그러뜨렸다. 모가비인 듯한 우락부락한 자가 되게 쉰 목소리로

투덜댔다.

"압다 그러면...시방 촌은 춘궁기인데, 뭐 쪼아 먹을 낟알이나 한알 있어야지. 우리두

고기떼 쫓아서 갯가 좀 나왔는데 험한 세상에 일가가 제일이라구 함께 먹구 사세나."

달근이는 그들 행중 사이에 끼여 앉은 울긋불긋한 사당들을 하나씩 뜯어보는데, 자기네

패거리만한 인물은 없는 모양인지라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그는 울레줄레 앉으려는 제

패거리에게 호통을 쳤다.

"왜들 이래, 좁쌀하구 멥쌀하구 섞이면 농사 망치는 줄 몰라. 어서 길이나 가자구."

그들이 우우 일어서는데, 여태껏 아니꼬움을 참아온 동작진 행중의 모가비가 침을 퉤

몰아 뱉으면서 중얼거렸다.

"나 참, 광대 소갈머리가 어쩌면 저렇게 빈대 옆구리처럼 좁을꼬..."

"뭐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씨불거리는 게야?"

달근이가 험상궂은 얼둘을 돌리며 묻자, 동작진 행중의 모가비는 상대를 않고 자기네

패거리를 돌아보며 이죽거렸다.

"못된 일가가 항렬만 높다더니, 제기랄 당진에선 안성 계집만 계집이라든가."

"아니 저런 새카만 자식이...언제적 모가비라고 대꾸를 하구 지랄여. 이놈아, 모가비라구

모두 같은 모가빈 줄 아느냐. 내가 바루 안성 달근이여."

"그래, 곰보 상판대기를 보구서 별성마마님이 오줌 싸구 지나간 달근인 줄은 알았다."

달근이가 분을 참지 못하여 달려들려는 것을 박거사와 사당들이 떼말렸고, 동작진

패거리들도 자기들 모가비를 잡아 앉혔다. 뒷전에서 남의 일인지라 우두커니 구경만 하고

있던 경순이 나서서 달근이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이보게, 뭣들 그러나. 함께 얻어먹구 댕기는 처지에 서루 동냥바가지 깰 건 없네."

달근이는 일행이 맹렬하게 뜯어말리는데다, 이경순가지 나섰으므로 뭐라고 더 악다구니

쓰지 못하고 물러서고 말았다. 박거사가 동작진 패거리에게다 대고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유유상종이랬으니, 서루 사이좋게 갑시다. 우린 채운포와 당진포에서 벌일 터인데 댁네는

어디루 갈라우?"

"실상 거기가 두 포구를 잡는다면 우리네야 달리 어디 갈 데가 있겠수. 성당산 줄기를

따라서 갯가를 따라 한바퀴 돌겠수."

"어이구. 그러면 서루 싸울 것까지야 없겠네. 면천 가서 잠시 한나절 판이나 합하여 놀구

갑시다."

동작진 행중에서 좋지, 놉시다,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들도 행장을 수습하여 일어나

달근이네의 행렬 뒤로 따라가게 되었다. 달근이가 화는 냈지만 객지 노상에서 광대끼리

이런 경우는 흔한 일인지라, 속으로화를 삭이고 말았다. 고작해야 모가비끼리 말을 나누지

않는 정도요, 거사와 사당들은 곧 합대하여 서로 풍문도 주고받고 농도 나누는 것이었다.

면천의 뒤로는 산성이 둘러 있어 진군들이 있었는데, 사당패가 지나는 것을 보자

환호성을 내지르며 뒤를 따랐다. 털벙거지에 더그레를 입은 군병들이 사당을 희롱하느라고

법석이었다. 성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몽산산성 아랫녘에 터를 잡아 구경꾼을 끄느라고

오랬동안 길놀이를 돌아다니니 인근의 농군들이며 선머슴들이 일손을 버려두고 몰려들었다.

여기서는 동작진 일행들이 주로 연희를 풀었는데 안성 패거리는 간혹 한사람씩 나서서

노래나 부를 정도였다.

그들이 면천서 일차 놀이판을 벌이고 오후 늦게야 당진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채운포까지

동행은 불가한 일인지라 노은재에서 두 패는 서북으로 헤어지기로 타협이 되었다. 도앚ㄱ진

일행은 북녘의 포구로 올라가고, 달근이네는 붉은고개를 넘어 채운포로 나가는 것이었다.

채운포는 미곡선이 까맣게 몰려드는 곳이요, 보다 서쪽의 당진포는 성채가 있고 각지의

어선단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따라서 채운포에서는 주상들이 상대일 것이고 당진포는 백석포에서 처럼 어부 맷사람들이

그 손님들일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당진포에 더 기대를 걸고 있었으니, 장사치보다는

뱃사람들이 훨씬 손도 크고 도량도 넓어 해우채가 후하기 때문이었다.

유치옥은 일년 중에 가을철에만 당진에 머물렀고, 대개는 마포에서 강주인 노릇이나 하며

지냈었다. 그의 선단은 당진을 사이에 두고 강경과 강화의 한강을 두루 누비고 다녔다. 그가

제물포에서 어염과 미곡 수십 석을 팔고 사는 중도아 노릇을 한 지 십년 만에 당진에다

광대한 전장을 마련한 것은, 흔히 강상의 무뢰배가 그러하듯이 미곡에 물을 타서 불려

근수를 속이는 화수의 이익을 얻은 때문이었다. 더구나 마포 강변에 여각과 창고를

가지고서 춘궁기 때마다 미곡을 동결해두었다가 귀할 때 풀어내는 모리를 취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치옥이가 그의 장지가 있는 당진에서만은 선행도 많이 하여

절량기에 구황곡을 내어 농량을 대어주었으며 군의 크고 작은 일에 경비를 두둑히 내곤

하였던 것이다. 군수의 신연 행차비는 문론이요, 봉물도 철마다 마련하여 당진에서

유동지네집이라면 사또도 인사를 가지 않고 뱃길 수 없는 형편이었다.

유치옥이 당징에섯 이런 터를 잡은 것은 강상의 취재가 손쉬기는 하지만 그 근거를

잃을까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의 전장은 주로 면천 동쪽의 승선천 아래 널린 새벌이 거의

전부였다. 새벌에 부쳐먹는 가호가 이백여 호에 이르렀고 전장은 논밭을 합하여 오십여

결에 미쳤는데 또한 마름만 하여도 다섯이나 되었으니 가위 만석꾼이었다. 해마다의

소출로써 강상의 이를 취하는데 부는 날로 늘어갔던 것이다. 근년 들어서는 그가 경간ㅇ의

여각과 강화의 객주며를 모두 폐하고 당진 본가에 눌러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잦아지더니,

드디어 큰아들과 조카에게 강화의 마포일을 맡기고 자신은 당진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의

아래에는 강상 무뢰배 출신의 도사공 삼형제가 있었는데, 제법 완력이 그럴 듯하여 이제는

유동지를 따라 내려와 한가하게 전장의 마름 노릇이나 하며 지냈다. 소인이 한가해지면

나쁜 짓이나 벌이게 마련인지라, 일찍부터 철딱서니 없이 자라난 둘째 아들 유필준과

어울려 다니며 갖은 행패와 야료가 자심하였다. 그들은 충청도 각지의대처 향시를 누비면서

기루와 투전판을 제 집 안방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진 사람들은 그 아비가 얻은 인심을

차남이 도로 거두어들인다고 손가락질들을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유필준은 우선 사람을 보내어 마름 삼형제를 불러오게 했는데, 노중에

망신당한 일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달근네가 백석포에서 판을 벌이던

날 밤에 필준은 삼형제를 불러 길에서의 일을 대략 이야기 해주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둘째가 방자하게 웃어대며 코웃음을 쳤다.

"아 뭘 그러시우. 서방님은 그저 갯가에서 뒤집지구 구경이나 하시지. 판을 벌였을 적에

둘러싸고 구경꾼인척 섰다가 일시에 달려들어 요정을 냅시다요."

"계집들을 상하게 해선 안돼. 더구나 내가 점찍어 놓은 계집이 하나 있단 말야."

그러나 맏형은 고개를 내저었다.

"판벌임하는데 덮쳤다간 오히려 우리가 봉패합니다. 군민들이 두루보구 있는 데서 밀치구

닥쳤다간 욕이나 먹기 십상이고 아무리 수령이 넘보지 못한다 하니 우리네가 약점 잡히기

십상이우. 나으리마님께서 아셨다간 불호령이 내리셔서 우리는 한양으로 쫓겨 올라갈 게유."

맏이의 말에 동조한 막내가 의견을 내었다.

"언니 이건 어떠우? 관가에 고경하여 그놈들이 상풍음행 한다는 것으로 잡아들이도록

하지요."

"그때위 소릴 하려면 아예 마름 노릇 그만두구 예전처럼 노나 젓구 살아. 나는 분풀이두

해야겠구 그 사당년두 혼을 내주려는 게야. 공연히 사또 생색이나 내게 할 텐가."

다시 맏이가 그중 좋은 의견을 취택하여 내놓았다.

"판막음이되구 나서 우리가 꽃을 삽시다그려. 놈들의사처를 몽땅 차지한 다음에 쥐

잡듯이 잡아들이지요. 별채에 잡아놓고 징치도 하고 재미두 보면 천지두 모를 게요. 설령

나중에 관가에 새어들어간다 할지라두, 군민들의 풍속을 해치는 짓을 자행하여 우리가

징치하였다고 둘러대면 됩니다."

필준은 무릅을 치며 기뻐하였다.

"그래 그래. 까짓 하천지배를 잡아닥 몇놈 대매에 때려 죽인들 누가 뭐라 할 사람두 없을

게야."

"그 패거리가 내일 면천서 놀면 저녁에 당도할 겝니다. 우리끼리 아이들을 모아서

채운포루 나가 놀구 있을 테니, 서방님은 방안에서 쌍륙이나 놀구 계십시오."

"젊구 기운 좋은 녀석들은 모두 데려가. 내일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

이렇게 되어서 채운포에는 달근네가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유동지댁 마름 삼형제가

거느린 하인배 종놈들 수십 명이 해안 곳곳에서 사당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오정 때쯤에 도착한 괴뢰배들을 보자 긴자했지만 안성까지 젊은 주인과 동행하였던 하인이

다른 패거리라 말해서 다시 흩어지기도 하였다. 채운포에는 어염의매매가 활발한지라

사당패와 여타 광대들의 출몰이 잦아서 진작부터 광대 물주를 자처하는 주막 주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달근이와 안면이 두터운 안석근이었다. 석근이는 포구에서 광대들이

놀이를 주선하여주고 연희의 거간비를 받고 술과 밥을 외상으로 주기도 하였다. 괴뢰배의

주연희는 꼭두각시 놀음이니 고작하여야 밥값이나 대는 것이지만, 역시 흥청대기는

사당패가 제일이었다. 젊고 예쁜 사당을 거느린 거사들은 해우채의 벌이도 좋아서 그만큼

씀씀이가 활발한 법이었다. 달근네 행중이 채운포 안석근이 주막에 당도한 것은 아직

저녁살을 안치기 전인 밀물 때였다. 포구에 오후부터 안개가 깔리기 시작하여 고깃배들은

일찍이 뭍으로 나와 어부들이 들끓었고, 북상하거나 내륙으로 빠질 주상들도 많이 정박하고

있었다. 달근이는 포구에 장정들이 우글대는 것을 보자 신명이 나서 영기를 우쭐우쭐

춤추며 나아갔다. 그들은 일단 석근이네 주막에 들렀다가 계에다 놀이를 트도록 하고 나서

길놀이를 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술렁대던 동구의 주막이나 투전판에서 사내들이 쏟아져

나와 사당패의 판을 둘러쌌다. 그중에는 물론 맨 앞자리에 필준이 하인배들이 끼여 앉아

있었다 백석포에서보다 더 흐드러지고 오랜 판이 벌옂ㅆ는데, 어두운 뒤에도 장작불을 키가

넘도록 두 무더기나 피워놓고서 밥때까지 놓치는 정도로 성황이었다.

삼형제들은 나중에 아무래도 회수할 돈인지라 기운깨나 쓴다는 자들만 골라서 해당화를

사도록 하였으며, 달리 껴드는 자가 있으면 협박하여 구슬려서 돌려보냈다.

영분도 모르는 고달근이는 거사들이 받아온 해우채로 들어온 돈닢을 꿰미로 끼우고,

어물은 짚두름으로 엮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허허, 역시 봄장사는 갯가가 제일이라니까. 젠장, 보리 팰 때까지는 물가를 따라서

보령수영을 돌아 강경까지 내칠까부다."

거사 패거리는 모두 숙박비를 아끼느라고 석근이네 주막의왼쪽 끝의 목롯방에 모두 함께

들어 있었다. 몇몇은 이리저리 꼬부려서 잠들었는데, 악기 등속과 봇짐으로 바르게 다리를

뻗을 틈도 없어 보였다.

"아니 그런데 이 망할 자식은 왜 여태 안 오는 게야. 해우채를 거두었으면 반절은

가져와야지, 샛장사시키는 거 아닌가."

바로 곁에 누웠던 박거사가 혼잣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역삼이가 그러는데 소화란 년이 애 밴 듯하답니다."

"뭐라구...?"

"그년이 오늘 아침에두 밥을 처먹다가 모두 토했다지..."

"... 그렇다면 이거 큰일났군. 사당은 줄고 입은 늘어나겠구나. 계집아이라면 색주가에

팔기도 하련만은, 그러게 자네들보구 내가 뭐랬어. 장사 나가기 전에 일일이 경도를

알아보구, 지치를 달여 먹이라구 했잖나. 출행 나올 적마다 공연히 약방 출입을 하는 줄

알어."

"워낙 쓰니까 그년들이 어디 처먹으려구 해야 말이죠. 그래두 미리 방비하는 건 눈치로

보아 백선이하구 묘옥이뿐인 것 같습니다."

달근이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애들은 좀 나이두 들구, 고생을 해봤으니 그렇기두 할 걸세."

방문이 열리면서 역삼이의 앳된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 열 닢이우."

"이 자식아, 네다위두 사당 거느린 거사냐."

달근이는 역삼이가 방바닥에 떨군 엽전 열 닢을 주워 챙기며서 투덜거렸다.

"겨우 쌀 두되 값이란 말이지. 스무 푼은 받아야지, 몇놈 들었어?"

역삼이는 코가 죽 빠져서 문턱에 쪼그리고 앉았다.

"문 닫구 들어와 앉어. 밤바람 들어와 고뿔 들겠다."

"이제 겨우 첫 손님인데 더 못 들이겠수. 소화가 몸이 불편허우."

박거사와 달근이는 서로 시선을 주고 받았다. 달근이가 못마땅한 시선을 거두고

중얼거렸다.

"애 가졌다지... 하는 수 없다. 젊은 년이 벌써부터 애새끼 배고 주저앉으면 저승패 되기

꼭 알맞아. 태를 죽여야지! 낼 하룻동안은 밥 처멕이지 말아. 아니 기운 쇨 때까지 이틀이고

사흘이고 굶기라고. 그러구나서 되지기름에 간장을 섞어서 한되쯤 처멕여. 그래도 안되면

굶겨서 업구 가다가 꼭 한번만 패대기를 치든지."

"인축이 아닌바에야, 어찌 그런 짓을 하겠수."

달근이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역삼을 발길로 내지르며 외쳤다.

"그럼 사람 대접 받구 싶냐? 그래서 니 에미가 핏덩이 채루 너를 청룡사에 내던졌고나."

하는데, 열린 방문 밖으로 거뭇거뭇한 사내들의 그림자가 마당에 줄지어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석근이네 주막은 바다 쪽을 향해 서쪽으로 앉은 가다랗게 구부러진 초가였다.

왼쪽으로 세 칸의 봉놋방이 나란히 붙어 있고, 앞에는 부엌까지 툇마루가 끼여 있었는데

안방이 석근이네 살림방이요 대청 대신에 토방 위에 거적을 깔아놓은 술청이 건넌방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 몇자 떨어져서 봉놋방과 마주하여 독방들이 네 칸이나 달려 있는

집채가 따로 지어져 있었다. 디란에는 창고와 마구간이 있으니 주막치고는 채운포에서 제법

큼직한 사관의 하나였다. 정면 토담 가운데 생솔나무 문으로, 십여 명의 장한들이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제각기 몽둥이와 비수를 들어쓴데 삽시에 마당을 가득 채웠다.

방문으로 역삼이를 차냈던 달근이가 잠시 할짓을 잊고서 멍청한 판인데 서넛의 사내가

툇마루 위로 성큼 올라섰다. 몽둥이 가진 자들은 방문 양쪽에 섰고, 비수를 겨눈 자가

방안에 대고 으르딱딱거렸다.

"빨리 나와서 꿇는 놈은 손대지 않는다. 모두 밖으루 나와!"

다른 자들도 각 방문을 지켜 섰고 관솔불을 쳐든 자가 무슨 일인가 하여 쫓아나온 주막

주인 석근이를 환도로 위협하며 다시 안방으로 밀어넣었다.

"얘들아, 사당년들 모두 끌구 나와라."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손님을 가장하여 들어갔던 유동지 댁 하인배들이 킬킬대면서,

앙칼지게 저항하는 사당들을 끌고 방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달근이는 그 꼴을 보자 갑자기

아득하였다. 웬일인가 놀라 일어나 이직 덜 깬 눈으로 내다보던 거사들이 그제서야 탈이 난

것을 보자 제각기 결기를 내어 밖으로 뛰쳐나갔으나 모두들 득달같이 내리치는 몽둥이에

등줄기며 허리며를 사정없이 얻어맞고 에코지코 소리를 낭자하게 연발하며서 사내들의 발

아래 뒹굴었다. 달근이는 봇짐에서 재빨리 말채를 꺼내들고 노리다가 주춤해버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좋은 말루 할 때 나와서 꿇어라!"

비수를 겨눈 자와 횃불을 쳐든 놈이 제각기 외쳤다.

"그놈이 모가비냐?"

달근이는 말채를 던지고 고개를 푹 숙이면서 방을 나섰다. 곧 그의 옆구리께에 칼날이

닿는 것을 느겼다.

"내가 모가비유."

그는 마당으로 끌려내리어져 발로 걷어채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무슨 포한으로 우리께 이러시우. 재간 파는 일두 죄가 됩니까?"

"유동지 어른께서 향리의풍속을 더럽힐까 하여 너희를 고을 밖으로 내치기 전에 잠깐

징치하려는 것이다. 모조리 묶어라. 계집들은 따로 데려가고..."

달근이가 외쳤다.

"우리는 이미 허락을 받았소이다!"

"잔소리 말아. 얘들아... 그 키 큰 놈을 잡아내어라. 이중에 있느냐!"

필준을 따라 안성 나갔던 하인이 가까이 와서 거사패들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달근이에게 안면을 받혀서 코가 깨진 터이라, 발길로 달근의 등판을 두어 버

내리박았다. 워낙 세가 불리하나 참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어느 방이냐?"

"저기 뒷방입니다."

장한들은 그 방으로 우루루 몰려갔고, 빈틈없이 둘러싸고는 방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고리가 안쪽으로 걸렸는지 덜컹대기만 하자, 머리 되는 자가 일렀다.

"당장에 때려 부쉬라."

몽둥으로 몇번 내려치는데 방문이 박살이 나면서 방안으로 떨어졌다. 웃목에서 묘옥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으며 뒤쪽 들창문이 활짝 열렸으니, 이경순은 이미 뒤뜰로 몸을

피한 모양이었다.

"어서 뒤란과 집 근처를 모조리 뒤져라. 그놈을 잡지 못하면 작은서방님께 경을 칠라."

몇 명의 하인배가 집 뒤꼍으로 돌아갔고, 마름 삼형제의 맏형은 안성갔던 하인을 다시

부러 묘옥을 손가락질하였다.

"저 계집이냐?"

"... 서방님이 잡아오라는 계집입니다."

맏형은 성큼 들어가 무턱대고 묘옥의 머리 끄덩이를 움켜잡고 끌어올렸다. 묘옥은 별로

반항하지 않고 머리칼을 잡힌 채 일어나서 말했다.

"놓으세요. 따라갈 테니..."

묘옥은 머리끄덩이를 잡았던 맏이는 저도 무르게 손을 놓았다. 마당에는 사당과 거사들이

한데 어울려 끌려나와 있었다. 그들은 거사들을 고그 두름 엮듯이 하데 묶었고 사당들은 그

뒤에 한군데 몰려 서게 하고는 석근네 주막을 나서싿. 밖에는 온통 짙은 안개가 깔려서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횃불이 이곳 저곳에서 우쭐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이경순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달근이는 묶인 손을 꼼지락 거려보면서 밧줄의 매듭을

하나씩 점검해 보았는데 일단 줄에서 벗어나면 몸을 상하지 않고 달아날 자신이 있었다.

그는 바로 뒤에 묶여 있는 역삼이에게 속삭였다.

"내 등뒤로 바싹 붙어서라."

달근은 뒤로 묶인 손목을 풀기 위해 채운포 패거리가 보지 못하도록 역삼이를 등뒤에

바싹 붙어 있게 하고는, 확인한 매듭을 침착하게 풀어나가기 시작5했다. 잠깐 행렬을 멈추고

기다리던 맏이가 해변 쪽으로 외쳤다.

"못 찾겠으면 그만 가자. 나루터 세 군데를 막아놓으면 그 녀석 갈데라군 바닷속 밖에

없을 게다."

일렁이며 우왕좌왕하던 횃불들이 다가왔다. 그들이 막 출발을 하려는데, 행렬에 끼였던

달근이와 역삼이가 빠져나오더니 지키던 자의 면상을 질러놓고 양쪽으로 튀었고, 잇달아서

묶이지 않았던 사당들이 흩어졌다. 잠시 멍청했던 그들은 사당이 흩어질 때에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제각기 쫓아가 잡으려고 이리저리로 뛰어갔다. 박거사도 어느틈에 줄을 풀고

바닷가 쪽으로 잽싸게 달아났다.

역삼이는 마침 가까운 곳에 섰던 자의 딴죽에 걸려 나뒹귈어 무지막지하게 얻어맞고는

혼절해 버렸으며, 사당들은 모조리 잡혀서 따귀를 맞거나 머리끄덩이가 당겨져서 산발이

되었다. 그러나 박거사와 고달근이는 어디로 달아났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다시

줄을 단단히 묶었으며 이번에는 사당들도 한꺼번에 어울려 묶어버렸다.

달근이는 안개 속으로 한참이나 뛰어갔다가 밭고랑 가운데 엎드려 있었다. 왁자거리는

고함과 불빛이 부근에서 어른거리더니 차츰 멀어졌고 그는 어둠 속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자세히 살펴보니 석근네 주막집 뒤편에 있는 넓은 채소밭 가운데였다. 고달근이는 잠깐 더

귀를 기울여보고 나서 일단 석근네 주막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몇걸음

떼어놓았을 때, 뒤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 안성팬가?"

하면서 누군가 밭 가운데서 벌떡 일어났다. 고달근이는 상대가 삐끗하면 달려들 태세를

취하고 돌아섰다.

"누구여..."

"음 달근인가. 나 이도장일세."

바짝 긴장했던 고달근은 맥이 풀렸다.

"하이구 난 또 채운포 무뢰배인 줄 알았수. 그나저나 야단났습니다요. 묘옥이두

잡혀갔수."

경순은 앞서서 주막 쪽으로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네. 그놈들이 노중에서 만났던 젊은 양반의 하인놈들일세."

", 유동지라구 아주 떵떵거리는 장자네유. , 이거 어쩌나... 동무들이라두 있으면

짓쳐들어가겠는데."

"자네 혼자 도망쳤나?"

"몇놈이 같이 뛴거 같은데, 나중에 보니 혼잡디다."

이경순은 한 손에 짐 속에서 꺼낸 화승총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들은 주막으로 들어섰다.

"우선 들어가서 숨이나 돌리고 의논을 해보세."

어유 의논할 틈이 어딨습니까, 지금 그런데 우리 애들은 곤장을 맞아 다리뼈라 부러질

게고, 계집아이들은 모두 뭇놈에 짓밟혀 곤죽이 될 게유. 그리구 묘옥이는 먼저부터 그

자식이 찍어두었으니 아마 제일 복욕을..."

"닥치게! 자네나 나나 아무것두 없이 대갓집 내정으로 돌입했다간 오히려 저쪽 좋은 일

시켜주는 게야. 당할 사람을 당하더라도 어디 두고 보지. 단단히 앙갚음을 해줄 테니까."

그들이 두런대고 있는데, 겁에 질려 나오지 못ㅎ던 광대 물주 안석근이가 문을 빼곰히

열고 내다보았다.

"이거 큰일이올시다. 그러잖아두 우리가 예서 장사할 적에는 그자들의 미움을 받아서는

안되는데... 허허, 어쩔 작정들이시우?"

"가만있자, 동작진 패거리들이 지금 어디만큼 가 있을까? 그자들게 도움을 청하면

어떨까..."

이경순은 연환통과 약주머니를 꺼내어 허리에 두르고 화승총을 닦았다.

"아무도 안 가면 나 혼자라두 들어가서 묘옥이를 일단 구해와야겠다."

"그 집에는 사옥두 있습니다. 입게 뵈거나 소작료를 안 내는 농투성이들이  ㅂ혀들어가

갇힌 적두 있지요."

석근이가 그렇게 말하더니 그제사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 이제 생각이 났소이다. 강화에서 어제 도착한 광대패가 여기서 묵고 당핀포로

나아갔는데, 아마 고서방두 알걸."

밖에서 발작 소리가 들렸고, 이경순은 총을 겨누었으며 고달근이는 말채를 꼬나들었다.

삽짝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온몸이 물에 흠벅 젖은 박거사였다.

"두 분뿐이우?"

"역삼이두 뛰었는데..."

"그 녀석은 잡혔수. 나는 바닷가루 뛰어가서 물속에 처박혀 있었수."

이경순이는 총을 들고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나는 먼저 유동지네 집 근처에 가서 동정을 살피구 있겠네."

그럽시다. 우리는 당진포루 달려가서 동무들을 찾아보겠수. 아예 화적질을 해버리든지,

까짓 거 우리네야 마땅한 정처두 없으니 안성에서 떠나버리면 그뿐 아니겠수. 잘됐다...

집에다 불을 싸지르구 취재나 듬뿍 해가지고 북으로 올라가면 되겠네."

이경순은 말없이 밖으로 나섰고, 고달근이와 박거사도 뛰어나갔다.

아직 깊은 밤이었고, 안개는 더욱 짙어져 코앞에까지 분간할 수 없었다.

"새벽까지 기다려서 아무도 오지 않으면 나 혼자 들어가겠네."

이경순이 말하였고, 고달근은 그제서야 역증을 발칵 내었다.

"여러 말 마우. 공연히 노중에서 양반과 시비하여 우리 행중을 이꼴루 만들어 놓은 게

누구요? 내 이렇게 된 바에에 아주 안성을 뜨고 말겠지마는, 이도장두 책임을 지슈."

"알겠네. 자네 행중이 당분간 숨어서 살 곳을 알아보고 내가 양식을 대지."

달근이와 경순은 서로 반대편으로 헤어졌다. 이런 일일 처음 있는 것은 아니라서

달근이는 속으로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유민 패거리들이 여염 마을을

돌아다니려면 갖은 수모를 당하게 마련이었고, 그럴수록 악행을 저지르는 패거리가 많았던

것이었다. 계집아이나 종년을 꾀어내어 다른 행중에 팔아 넘기기도 하고 외딴 동네의

소문없는 부잣집을 털기도 하였으며 대가 모여서 수십여 인이 될 적에는 작당하여 마을에

들어가 양식을 반강제로 거두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 광대들이란 쉽게 단결되게

마련이었고, 같은 하천들 외에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적으로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고달근이와 박거사는 걸음을 빨리하여 당진포로 나아갔다. 채운포에서 당진포까지는 해변을

따라 삼십리 길이니, 가자마자 의기투합하여 돌아온다 하여도 하룻밤이 꼬박 샐 것이었다.

"성님, 당진포까지 가느니 아예 성당산 쪽으로나아간 동작진 패거리를 쫓읍시다."

"가만있자... 우리가 함께 동분서주할 것이 아니라 나는 당진포루 나아갈 테니 자네는

개를 건너 성당산으루 가보게. 오늘밤 계명시에 유동지네 집이 보이는 붉은고개에서

모이기루 하세."

박거사는 동쪽의 수렁과 습지가 계속된 갯가로 나아갔고, 고달근이는 곧장 북으로

올라갔다. 이경순은 채운포 큰어미내를 돌아서 붉은고개를 넘고 성당산 줄기 아래 자리잡은

유동지네 마을로 스며들었다. 그는 유동지네 높다란 기와집을 행해서 걸었다. 깊은

밤이었으므로 개들만이 요란하게 짖어댈 뿐이었다. 그는 유동지네 돌담을 따라서

조심스럽게 한 바퀴를 돌았다. 어느 지점에 가니 두런대는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경순은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 담 위로 열발짝쯤 떨어진 숲에 우뚝 솟은 노송 한 그루를

눈여겨보았다. 그는 담옆에서 물러나가 나무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둥치가 커서 붙안기는

힘에 겨웠으나 워낙에 가지가 많고 울퉁불퉁하여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가 있었다. 나무

위에서 굽어보니 아마도 작은 나리가 쓰는 별채 사랑마당인 모양이었다.

"한놈씩 끌어내어 기절할 때가지 몰매를 쳐라!"

술에 만취한 듯한 유필준이 정자관을 비뚜름하게 쓰고서 마루에 앉아 있었고, 능장을

짚고 선 하인배들은 우람한 몸집이 드러나게 벌거숭이의 웃통을 벗고서 둘러서 있었다.

마당에 널따랗게 멍석이 깔려 있었는데, 형틀에 달아 매를 치려는 게 아니라 멍석말이를 할

모양이었다. 멍석말이란, 성처는 심하게 나지 않되 속으로 알짜 골병이 드는 형벌이니

유필준의 앙심을 대단히 깊은 모양이었다. 이윽고 뒤뜰에서 한 거사가 글려나왔는데, 연실

빌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둘러선 자들이 그럴 넘어뜨리고 멍석을 둘둘 말아갔다.

멍석이 말려지자 머리와 다리만이 양쪽 끝으로 솟아나왔고 장정들이 타작하듯이 능장을

내리쳤다. 투덕투덕하는 둔한 소리와 추위에 떠는 듯한 사내의 신음 소리가 들리다가

나중에는 막대기 소리만이 들려왔다. 한참 뒤에 멍석을 발로 걷어차니 두루루 펼쳐지며서

축 늘어진 시체 같은 거사의 몸이 빵바닥에 뒹굴었다.

"보기 싫다. 어서 광에다 처넣어라. 그리구 다음 놈부터는 입에다 버선짝을 물리고

때려주어라. 집안 시끄러워 밤잠 설치겠다."

다시 다른 거사가 끌려나와서 떡이 되어 나갔고 유필준은 싫증도 나지 않는지 끝까지

지켜보며 호령을 하였다. 거사들의 멍석말이 징치가 모두 끝나자 그는 마름 형제의 맏이를

불러 일으기를,

"이젠 사당년들뿐이냐? 그 키 큰 상놈을 놓쳤단 말이지? 곰보 모가비와 꺽다리 상놈을

내일 정오까지 잡아두도록 하여라. 천하의 외입쟁이 유필준이 안성 행보할 제, 뭇 건달들이

소름 돋아날 정도루 갚아 주련다. 아예 코를 베어버리든지..."

"서방님 염려 마십시오. 날이 새자마자 아이들을 곳곳에 풀어놓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사당년드이나 슬슬 끌어내오너라."

"서방님... 나으리마님께서는 아십니까?"

, 아까 큰사랑에 나가서 마을 계집아이들을 꾀어서 데려가려던 사당패를 잡아 버릇 좀

가르치겠노라고 여쭈었네."

"나으리마님께서 계집들의 고함소리가 들리면 분명히 기침하셔서 이리로 나오실지두

모릅니다."

"그것두 좋은 말이다. 가만있자... 그러면 우선 내가 찍어놓은 년의 손목을 뒤로 묶어서 내

방에 데려다 놓아라. 그리고 다른 년들은 행팡채에 끌구 가서 너희 좋을 대루 해라. ,

해우채는 찾아왔느냐?"

"찾아오기는 했으나..."

"술값으루 내달란 말이지. 허지만 안되겠다. 잡아오란 놈들은 놓치구 거사들만 데려왔으니

상급은 내일 그놈들이 잡혀오면 내주지."

그들의 수작이 그친 것은 하명을 재빨리 받은 하인 두놈이 묘옥의 팔을 묶어서 끌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묘옥은 끌려나오지 않으려고 몸을 흔들며 버티었으나, 껄걸 웃으면서

버선발로 뛰어나온 유필준이가 묘옥의 머리카락을 잡아 와락 끌어내니 줄줄 끌려 올라갔다.

나무위에 올라앉아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경순은 마치 심장이 터져버리는 듯하였다. 묘옥의

입은 목댕기끈으로 질끈 동여져 있었는데, 거칠게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유필준은

여유만만하게 미닫이를 열고 안으로 묘옥을 내던지듯이 휙 떠밀어 넣었다.

", 모두들 물러가거라. 등불도 끄고, 수직하는 녀석 하나만 남겨 놓아라."

유필준이 방으로 들어가고 덩치 큰 하인 한 놈이 남아 마루 끝에 걸터않았다. 이경순은

마음이 급해지고 안달이 나서 급히 나무에서 내려오다가 주루루 미끄러져 떨어졌다. 발을

잘못 짚어 접질린 듯하였으나, 뛰어보니 조금 시큰거릴 정도였다. 그는 화승총을 들고서

담장 쪽으로 뛰어갔다. 경순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끓어오른 분노

떄문에 간장이 타는 것 같았다. 담장을 넘을 만한 적당한 곳이 없어 헤매다가 담 바깥이

비교적 높은 곳에 이르러 팔을 뻗어 겨유 담장 위의 기왔장을 잡을 수가 있었다.

몸을 솟구쳐 간신히 담장 위에 올라선 이경순은 캄캄한 어둠 가운데로 뛰어내렸다.

풀섶의 찬 이슬이 바짓가랑이를 금방 흠뻑 적셨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당의 작은 집채가

빈터 가운데 댕그라니 서 있었다. 사당채가 있으니 이곳은 집의 제일 후미진 동쪽 끝일

것이었다. 낮은 담에 작은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는데, 일 년에 두어 차례 제사를 드리는 때

이외에는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선 아까 보아두었던 작은사랑채를 찾기 위해 집안의 낮은 담에 상반신을 내밀고

두리번거렸다. 밖은 일종의 골목이 되어 있었고 담 너머로 작은 사랑채가 보였다. 대청의

기둥에 사방등이 걸려 희미하게 비치고 있는데 수직하는 하인 한 놈이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경순은 잠깐 망설였다. 그리곤 허리에 차고 있는 가죽 주머니에서 화약을 조금 내고

솜을 꺼내어 뭉쳤다. 부시를 치자 솜이 곧 타기 시작했고 조금 내고 솜을 꺼내어 뭉쳤다.

부시를 치자 솜이 곧 타기 시작했고 그는 그것을 사당의 창호지를 뚫고 던져두었다. 잠시후

퍽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사당 안에는 흰 연기가 솟았다. 잠시 후에는 불이 커지고 온

집채가 불길에 싸일 것이었다. 경순은 다시 화승총에 탄환이 재어져 있는가 확인한 뒤에

담을 뛰어넘었다. 사랑채 바로 곁으 캄캄한 구석 쪽에서 그는 오른편의 마루를 내다보았다.

하인은 기둥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경순은 조그맣게,

"여보게!"

라구 불렀다. 하인이 퍼뜩 놀라서 곁에 두었던 몽둥이를 잡으며 반문했다.

"누구여..."

"나야, ."

하인은 엉겁결에 일어나서 다가왔다. 모퉁이로 다가드는 놈을 기다리던 경순이

화승총으로 힘껏 후려갈겼다. 앞으로 거꾸러지는 자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번 더

처박아주고 나서 그는 단숨에 마루위로 뛰어올라갔다.

유필준은 방금 묘옥의 옷을 갈갈이 찢고 나서 이불 위에 내던진 참이었다. 묘옥의 가슴과

속살이 드러나자 필준은 술이 한꺼번에 깼고, 이제는 얼이 모두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묘옥은 두 손을 뒤로 묶인데다 입에는 목자댕기까지 동여져 가슴만 팔딱이고 다리를

버둥거릴 뿐이었다. 그는 바지춤을 까내리고 묘옥의 속곳을 확 뜯어내는데 등뒤에서 방문이

벌컥 열렸다. 유필준은 머리맡에 세워둔 환도를 집으려고 몸을 돌렸고, 한걸음에 달려든

이경순이 총의 머리판으로 쥐어박았다. 서너 번 쥐어박자 머리가 커져버린 유핀준이 바지를

반쯤 벗은 자세대로 축 늘어져버렸다. 경순은 묘옥의 입과 손목을 풀어주고는 방안을

둘러보고 벽에 걸린 유필준의 도포를 내려서 둘둘 감싸주고는 손을 잡아끌었다. 묘옥은

눈물범벅이 되어 중얼거렸다.

"나으리..."

그들이 마당으로 나섰을 때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사랑채의 두편으로

돌아갔고 경순이 빈 항이를 들어다 담 밑에 놓았다. 장정들이 몰려나왔다.

"불이야... !"

"사당에 불이 났다. 모두들 나가서 불을 꺼라."

이곳 저곳에서 사내들이 뛰쳐나와쏙 담 위에서 안간힘을 쓰는 묘옥을 쉽게 발견하였다.

경순은 하는 수 없이 뛰어내리지 못하는 묘옥을 밖으로 떠밀어낸 뒤에 자기도 담 위에

올라섰다. 한 놈이 쇠스랑을 치켜들고 담으로 곧장 달려왔다.

경순은 총을 겨누어 방포했다. 담을 넘어 뛰어내리니 묘옥은 쓰러져 있었고 이경순이

어깨에 들쳐업자 가늘게 신음하였다. 유동지네서는 사당에 불이 붙었으니 위선 위패를

구해내는 일이 중한지라 그들을 뒤 쫓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달려들던

사람이 총에 무릎을 정통으로 얻어맞아 고꾸라지자 일단은 주춤하였다. 이경순은 묘옥이를

업고 붉은 고개 쪽의 짙은 솔밭 사이로 뛰었다. 유동지네 집이 멀어지자 그들은 숲속에

앉아서 잠깐 숨을 돌렸다.

"어딘 다친 데는 없느냐?"

", 무릎이 조금 벗겨졌어요."

경순이 묘옥의 찢어진 치맛자락을 헤치려 하자 그녀는 감싸고 있던 도포 자락을 꼭

쥐었다. 멀리서 횃불 서너 점이 일렁이며서 나타나고 한데 모아졌다가 움직여 오는 게

보였다.

"저놈들이 또 쫓아오는군."

경순은 다시 총에 연환을 재고 나서 묘옥을 들쳐업으려고 등을 돌렸다.

"아니에요, 걸을 수 있습니다."

"업혀라. 내가 업구 뛰는 게 나을 게다."

묘옥은 일어나서 절뚝이며 뛰어 보였다. 그러나 안감힘을 쓰는 양이 역력하여 경순이

반강제로 묘옥을 업고는 솔바타 사이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을 업은 자의 걸음이

어찌 홀가분하게 달려오는 자의 걸음에 비기랴. 그들의 거리는 좁아졌고 드디어 뛰고 있는

두 사람의 자취를 보았는지 뒤따라 붉은고개의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에이... 안되겠군!"

경순은 묘옥을 길섶에 내려놓고 총을 들었다. 그들의 숨소리가 가까위졌다. 경순은 엎드린

채로 고함을 내질렀다.

"이놈들 더 올라오면 방포하여 해골을 박살내리라."

그들은 더 올라오지 못하고 주춤 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중의 한 놈이 외치기를,

"방포해봤자, 못 맞히면 너는 죽는다."

하고 나서 제 동무를 독려하는데,

"이 깜깜한 데서 총을 놓았자 머리카락 하나 못 다친다. 방포는 한번이고 다시 놓으려면

우리는 닿는단 말이야."

하자 그런 말을 듣고 용기가 솟았는지 앞섰던 자가 기다랗게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

올라왔다 .경순은 호흡을 잠깐 끊고 나서 총을 쏘았다.

총 맞은 자가 환도를 내던지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뒤에서 잇달아 오려는데 경순은

이미 연환을 재는 중이었다.

"또 쏠 수 있다. 이번엔 이마 한가운데를 뚫어주랴?"

그들은 동료의 시체에 머물러 살피는 듯하더니 그를 이끌고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가기 시작하자마자 경순은 묘옥을 다시 업고 길을 피하여 산줄기를 타기 시작하였다.

면천까지 산길을 탈 작정이었다. 산길을 오르내리는 경순의 몸은 온통 땀으로 멱을 감은

듯이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나으리... 내려서 걷겠습니다."

"정말 걸을 수 있겠느냐?"

"천천히 걸으면 괜찮을 거예요."

경순은 묘옥을 내려놓았다. 묘옥은 조심조심 발을 디뎌보았고, 경순이 곁에서 부축을

해주었ㄷ. 그들은 산의 능선을 따라서 오랫동안 걸었다. 어디선가 소쩍새가 먼 곳에서부터

차차 가까워지면서 날아와 끝없이 울어댔다.

묘옥은 문득 재인말을 생각하였다. 까막내의 갈대밭과 물 흐르는 소리도 귓가에

쟁쟁하였다. 묘옥은 조그많게 중얼거렸다.

"나으리... 어디로 갑니까?"

", 여주 내 집으로 가자."

한밤중에 서창에 당도한 고달근이는 번 드는 자에게 물어 강화에서 왔다는 광대패들이

삼봉산 아랫녘에 머물고 있음을 알아냈다. 과연 한 마장쯤 가나 벌판에 일렁이는 모닥불이

보였다. 달근이가 다가갈 때 모닥불 주위로 광대들이 둥글게 발을 모으고 잠들어 있었고

앉아서 불을 지키던 자가 졸음이 가득 찬 목소리로 물어왔다.

"게 누구슈?"

"말 좀 물읍시다."

두어 사람이 더 깨어났다. 고달근이는 불가로 걸어 왔다.

"어디 패거리요?"

"그건 왜 물어... 댁은 뉘슈?"

"내는 안성 사당패 모가비 고달근이란 사람이우."

그때에 어둠속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언놈이 달근이요. , 진작에 논두렁을 베구 밥숟갈 놓은 죽 알았더니..."

"가만있자 듣던 목소린데..."

"듣긴 넨장할... 나 황가여. 이 녀석아 양주 황서방두 몰라?"

달근이는 귀가 번쩍하였다. 가까이 다가들어 마주 앉아 두 손을 덥석 잡는데 커다란

주먹코가 뭉툭하게 솟은 것이 틀림없는 양주 재인 황회 였다. 황회는 원래가 산대도감을

탈광대에 소속된 재인이었으나 일찍이 주막에서 포교를 때려 반병신을 만들고 도주한 뒤에

진관사 걸립패의 화주를 했던 자였다. 진관서에도 사당이 차차 들어오매 그곳을 떠나

잽이와 사니와 덜미꾼 몇을 잡아 제 패거리를 만들어 경기도 외곽을 떠돌았다. 달근이와는

몇 년 전에 함께 겨울을 난 적이 있던 광대였다.

"헌데 니가 혼자서 무슨 꼴이냐?"

"너를 만났으니 이젠 한숨 돌리겠구나, 채운포 유동지 댁 철딱서니 없는 서방님짜리에게

치탈을 당한 중이다. 거사하구 사당년들이 모두 잡혀가서 곤욕을 당하구 있어, 아예 이렇게

된 이상에 짓쳐들어가 화적직이나 하구 내치자는 게야."

황회는 묵묵히 생각에 잡겼다가, 불을 지키던 자를 향해 불렀다.

"얘 시동아, 이리 좀 가까이 오너라."

시동이라는 더벅머리가 앉은걸음으로 다가앉았다.

"유동지네를 털자는데 어떻겠냐?"

"일단은 패거리를 헤칠 각오는 해야겠수."

황회는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까짓 꼭두각시 노는 덜미꾼들이야 우리 식구도 아닌즉, 제놈들을 씌우고 우린

달근이네루 합대하여...가만있자, 어디루 내치지?"

달근이가 자신있게 말하였다.

"내치는 건 염려 마라. 광주 송파에 파묻히면 누가 알겠니? 게서 두어 달 봉놋방

구들장이나 지면서 노닥거리다 보면 포청에 곤두선 적경두 사그라진다. 아니 떠도는

광대패가 어디 우리들뿐이더냐. 저자 장시마다 깔린게 광대 패거리다."

달근네는 안성 청룡사의 신표를 가지고 정연하게 짜여진 사당패이건만, 황회네는 그

성분이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 잡동사니의 식구였다. 황회 자신은 재인과 걸립패의 계열이며,

시동이는 걸립패 사니 출신인데, 또 어떤 자는 전신이 사당패의 거사 출신도 있었고,

꼭두각시를 노는 덜미꾼들은 각지의 향시를 떠돌며 구걸하던 호적도 없는 유민들이었다.

"하긴 우리가 부평서 올 제 장꾼 둘을 죽이구 봇짐을 털었지만, 여태 뒤탈 하나 없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두 내빼겠으나 저덜미꾼들은 잡힐지도 모르거든."

황회가 뒷전에서 자고 있는 자들을 힐끔대며 나직하게 속삭이자, 고달근이는 손으로 제

모가지를 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곁에서 시동이가 고개를 회회 내젓는다.

"안돼우, 아무리 연고없는 식구라 하나 우리 손으로 그럴 수수야 없지. 저 애들은 그냥

놔두구 갑시다."

달근이 말하기를,

"사람 수가 적으면 오히려 잡혀서 경을 칠걸. 하여튼지 집안을 털구나서 달아나는 것은

제각기 요령대루 하지. 관가에 잡히는 것두 다 제팔자니까."

하였고 황회는 둘둘 말린 자리를 끄르고 윤이 반들거리도록 닦은 화승총을 꺼냈다.

시동이도 화승총을 꺼냈고, 자고 있는 잽이와 사니 몇 명을 발길로 걷어찼다. 그들은 놀라서

두리번거리며 깨어 일어났다.

"너희들 총포가 어디서 생겼니?"

달근이가 총을 만져보며 부러운 듯이 중얼거렸고, 황회는 껄걸 웃었다.

", 강화에 가면 포와 화약을 얼마든지 살 수 있지. 보부상 아이들이나 우리 같은

떠돌이들두 요샌 화승총이 두어 자루씩은 된다구."

"다른 병장기두 있니?"

"짜른 환도 몇자루가 있다."

"허허, 산채가 없달 뿐이지 아예 적당이로군!"

"산채는 무엇에 쓰나. 우리네야 당두 그리 많이 필요 없구, 길바닥에 다니면서 틈틈이

벌이하고 사세 부득하면 절이나 한군데 잡아서 공양 좀 하고 숨어 지내다 내려오면 되는걸.

송파루 가두 좋지만 더 좋은 곳이 있지, 한강을 건너 노적사루 들어가두 되어."

"... 우리 거사를 보내어 동작진 패거리두 끌어오라구 시켰는데."

"뭐 복만이가 왔데?"

"복만이네 식구인데 대는 다르더라."

"복만이네 식구라면 믿을 만은 할 게다."

시동이가 덜미꾼들을 깨워 부가를 털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자, 그들은 역시 망설였다. ,

열두 명 중에서 황회가 신임할 만한 자는 시동이를 포함하여 겨우 넷이니 잽이 셋과 사니

하나였다. 달근이가 속삭였다.

"까짓... 동작진패가 오면 저것들은 있으나마나다."

어쨌거나 어르고 달래어 패거릴르 일으키고 모두들 채운포로 나오게 되었다. 큰 어미내를

건널 때 이미 밀물이 시작되어 문수산녘으로 빙돌지 않으면 건널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뻘흙에 발이 푹푹 빠지는 진수렁을 지나서 큰어미내의 상류로 자꾸만 올라갔다. 황회가

달근이에게 소곤댔다.

"실은 말이지, 저어기 덜미꾼 중에서 내가 나중에 처치할 놈이 하나있다. 놈이 꼭두각시는

제법 흥이 나게 잘해서 끌어들이긴 했다만 물욕이 너무 많고 성질이 음험하다. 혹시 나중에

잡히면 제일 먼저 우리를 찍을 게야."

"우리 전신을 알구 있니?"

"... 패거리에서 유명짜한 놈은 모두 아는 척한다. 더구나 노적사에 우리 같은 패거리가

은거하는 걸 안단 말야."

달근이는 뒷전에서 묵묵히 따라오고 있는 상모 쓴 사내를 눈여겨보았다.

"붉은 고개서 달아나기 전에 슬쩍 해치우자."

말은 달근이가 먼저 꺼냈으나 이제는 황회가 습격을 지휘하는 격이 되었다. 붉은고개에

도착한 것은 예정대로 새벽 계명시가 되어서였다. 그들이 언덕을 오르는데, 이미 사람의

기척이 있어 그들에게 누구냐고 물어왔다. 달근이가 들으니 박거사의 목소리였으므로,

"날세, 동작진 식구들하구 같이 왔나?"

하니 박거사 대신 모가비 사내가 걸찍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이럴때는 동무 찾고, 연희할 젠 구역 찾겠수?"

"어이 거 뭐 다 지난 일 가지구... 황가야, 복만이네 식구다."

황회가 따라 올라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안면을 텄다.

"황회여."

"큰쇠라고 허우."

달근이가 대여섯 되는 동작진 사당패를 둘러보니 일행 중에 몇 명만이 온 듯하였다.

"다 오진 않았군."

"사당년들하구 어린 놈들은 성당산녘에 두고 왔수. 일을 치구 나서 남양나루 쪽에

내칠려구 허우."

"그렇지, 배만 탔다 하면 한나절에 당도할 테니까. 우리두 그쪽으로 내치지?"

달근이가 황회에게 의견을 물으니, 황회는 고개를 젓는 것이어싿.

"여럿이서 우우 몰려다닐 것 없다. 우린 평택으루 내쳐서 장꾼 차림으로 광주까지 가자,

일단 노적사에서 몸을 얹히기루 하잔 말야."

박거사가 애가 단 듯이 나서서,

"해 뜨면 어쩌려우, 어서 들이칩시다."

"위치는 대강 알지?"

"정문은 황회가 들이치고 우리는 그 사이에 뒷담을 넘어 별채를 치겠네."

달근이가 생각을 내었다가 이경순의 일에 주의가 미쳤는지 그제서야 박거사에게

말하였다.

"헌데 이도장이 부근에서 기다린다구 그랬는데 안 보이잖아?"

"집 근처에 가까이 가 있는지두 모르니 내려가봅시다."

의논들이 정해지기를 먼저 황회가 시동이와 함께 정문에 가서 과객질을 가장하여 하인을

부르기로 하고서 황회네 식구들이 문이 열릴 때를 기다려 일시에 몰려들어가기로 되었다.

그동안에 동작진 패거리와 달근이는 뒷담을 넘어 별채를 점령한다는 것이어싿. 인근

마을에서 소란을 보고 관가에 적경을 알려서는 안되니까 집안을 송두리째 점령한 뒤에 사람

하나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단속해놓고서 재물뒤짐을 하자는 것이어싿. 그들은 붉은 고개를

내려가 유동지네 솟을대문이 보이는 곳에까지 다가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 집의

곳곳에 훤한 등롱이 내걸려 초상을 치르거나 초례를 지내는 잔칫집 같은 점이어싿.

달근이가 중얼거렸다.

"참 이상한 노릇이군! 온 집안이 대낮처럼 밝으니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박거사도 말하였다.

"혹시 이도장 나리가 월장하여 소란을 피우다가 잡힌 게 아닐까요?"

", 소란을 피운 것만은 분명하다. 그사람이 묘옥이 때문에 애간장이 숯이 되어 있는

판에 곰굴 호랑이굴을 가리겠느냐. 그러나... 잡혔다면 떠들썩할 터인데 이렇듯이 쥐죽은

듯하니 분명히 실패하여 달아난 모양이다."

", 여기서 패를 나누지."

"불이 켜져 있어 속이기는 글렀군."

황회가 난처한 듯이 투덜거리자, 달근이는 껄걸 웃었다.

"까짓 거 낮에두 대갓집 털이를 하는 판인데, 화승총까지 가진 녀석이 겁은 되게 많어."

사당이 불타는 소동으로 잠이 깬 유동지는 그제서야 아들 유필준이 간밤에 치운포

주막에서 사당패들을 잡아들여 징치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 건성 듣기는 하였으나 한

두엇쯤 데려다 혼을 내주고는 곧 돌려보낸 것으로 알았지, 십여 명을 잡아 가둔 것은 전혀

몰랐었다. 유동지는 대강 불 끄는 수습이 끝난 뒤에 유필준을 불러다 자세히 묻고 나서

날이 새면 모두 방면하라 일렀는데 그는 아들의 사람됨을 아느고로 형벌이 지나쳤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몸소 노구를 끌고 거사들이 갇힌 별채 사랑 뒤의

광으로 내려왔다. 거사들의 꼴을 보니 이리저리 널브러졌는데, 모두가 상처는 별로 없건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광에서 끌어내다 행랑에 재우고 계집들은 안채 종년들 방에서 쉬도록 해주어라. 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자는 잡았느냐?"

"... 세 사람이 쫓아갔다가 총에 맞아 하나는 죽고, 이미 집안에서 총을 맞고 다리를

상한 자도 있습니다. 밤이라 뒤를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유동지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모두를 둘러보고 나서 그 아들에게 호통을 쳤다.

"못난 놈 같으니! 안되겠다. 너는 내일 당장에 행장을 수습하여 한양으로 떠나거라. 가서

경강의 일이나 거들며 근신해라. 우리가 불러들인 환난이니 관아에 적경을 고할 필요두

없다. 저자들을 방면할 때까지 이른 뒤에 유동지는 사랑을 나갔다. 모두들 제각기 처소로

돌아갔으나, 아직  ㅁ들어 있는 자는 없어싿. 그때에 대문 쪽에서,

"이리 오너라!"

라고 호기있게 내지르는 굵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쇠 하인이 투덜대면서 대문간에

다가서니 문을 두드리며 서두는 품이 이 댁이 어떤 곳인가를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누구요?"

"문 열어라!"

하인은 화가 발끈하여 문에 바짝 다가서서 물어싿.

"이 댁이 뉘 댁이라구 새벽부터 소란을떨구 지랄이냐?"

"허허 이런 배워먹지 못한 놈 봤느냐. 지나는 나그네가 이 댁 어른의 덕망을 듣잡고 감히

유숙을 청하는 것인데... 문이나 열어라."

"참 나 별꼴이 다 많어. 이 자식아 자빠져 자려거든 주막을 찾아가거라. 예가 네따위 것에

잠자리 내주는 곳인 줄 아느냐?"

이런 거친 수작이 오고가니, 다른 하인 둘이 기웃거리며 문간에 몰려들었다. 마당쇠

녀석이 제 동무들을 보자, 어이가 없다는 드시 턱짓을 해대며 주워넘긴다.

"얘들아 원, 별 말뼉다구 같은 과객놈이 새벽부터 유숙하겠다구 저 소란이다. 잡아다

치도곤이 좀 시켜줄까?"

"그래 상투째 잡아들여 코피나 터쳐서 내몰자."

의논이 되어 세 녀석이 팔뚝을 부르걷고 빗장을 빼내어 문을 열려는 차인데 양쪽 문이

호되게 밀쳐지면서 활짝 열렸다. 세 하인은 문에 밀리고 얻어맞아 뒤로 넘어지고 물러서고

하는 판인데, 어둠속에서 사내들이 우르르 밀려들어왔다. 하인 하나가 일어나서달아나려는데

누구인가의 칼이 단숨에 등판을 베어버리고 만다.

황희가 거느린 여남은 명의 장정들이 행랑채로 돌아드니 그제서야 놀란 하인배들이

퇴창문을 막차며 뛰쳐나와 안채 쪽으로 들어가는 중 문을 막아섰다. 하지만 이쪽은 무기를

가지고 등등한 기세로 짓쳐들어가는 판이요, 저쪽은 자다가 얼결에 뛰쳐나온 뒤끝이라

몽둥이나마 주워든 자가 여럿 되지 않았다.

황희는 그대로 달려들어가며 방포를 하니 맨 앞에 지켜 서 있던 마름 형제의 맏이가

가슴을 맞고 고꾸라져버렸고, 시동이도 방포를 하여 하나를 거꾸러뜨렸다. 이미 화적이

들었다는 것을 안 유동지네 식구들은 모두들 마루 밑으로 기어들거나 다락에 올라 숨느라고

법석이었고, 하인배들만이 이리저리로 몰리면서 도대적하려고 농기구를 찾아 들었다. 황회는

패거리를 이끌고 툭 터져버린 중문을 돌파해서 사랑채로 돌아드는데 유동지는 이미 의관

정제하고 마루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취제로 늙어온 부가옹답게 침착하고 배포있는 태도로

말하였다.

"웬 사람들이오?"

황회는 멈칫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먼저 기를 죽여놓아야겠다고 생각되어 화승총을

똑바로 겨누고 말하였다.

"보면 몰라? 돈궤를 내놓고, 창고 열쇠도 이리 내놓아."

하는데 쪽기는 하인배를 따라갔던 패거리들이 울레줄레 나왔다. 그 뒤로는 뒷담을 넘어서

들어왔던 고달근이와 동작진 패거리들이 하인배들과 유필준이를 잡아서 끌고 들어왔다.

"재물을 달라면 내줄 것이요, 양식을 달라면 광문을 열 것인데 소란을 피우지 마오."

유동지는 점잖게 얘기하고 나서 총을 겨눈 황회를 손짓했다.

"들어오시오, 돈궤는 내게 있고, 광 열쇠는 안채에 부녀자들이 간직하고 있으니 사람들을

보내어 가져오도록 합시다."

황회는 멈칫거리는데 고달근이는 코웃음을 쳤다.

"뭘 하는 거냐. 도적놈에게 예의범절이 있다더냐. 저 늙은이를 묶어라."

하자마자 황회가 달려 올라가 유동지의 멱살을 잡아 줄줄 아래로 끌어 내렸다. 하인배는

끼리끼리 묶어서 거사들과 사당이 갇혔던 광에 가두게 하고는 늙은이는 바깥 사랑 기둥에다

붙들어맸다. 유필준이는 따로 마당에 내다묶어놓고 재물을 모두 털어낸 다음에 혼구멍을

내기로 하였다. 고달근이는 안채로 돌아 들어갔다. 짚신 신은 발 그대로 성큼성큼 마루에

올라서서 미닫이를 홱 열어젖히니 여자들 한 무리가 구석에 이불을 들쓰고 몰려 있었으며,

유동지댁인 듯 늙은 노파만이 고개를 내밀고 연신 합장 배례하는 것이었다.

"살려주십쇼. 다 드릴 테니 애들에겐 손대지 말아주세요."

"패물함과 광 열쇠를 내놓아."

대부인이 일어나 부들부들 떨며 농을 열고 패물함과 열쇠 꾸러미를 내주었다. 그동안에도

패거리들은 이방 저방을 들락거리며 간편히 가져갈 수 있는 비싼 약재며 금박 은박 갖은

비단옷들 그리고 부엌에서 은수저를 모조리 거뒤냈다. 달근이는 한놈에게 안채를 지키도록

해놓고 뒤뜰의 광으로 달려갔다. 광문을 열어보니 역시 미곡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쉽게 가져갈 물건은 비단과 무명 등속이었다. 그들은 집안의 각처에서돈이될 맣아거나

가볍고 부피 작은 물건들만 속속들이 뒤져내어 사랑채 앞에다 쌓아놓았다.

무명이 수십 동이요 비단은 운문단, 몽고단, 모본단, 모초단, 접영, 관사, 길상사, 왜사,

생초 등이 수싶여 필이었다. 패물함은 다섯인데 밀화, 호박, 산호, 금패 등등의 노리개와

비녀와 잠들이 그득 들었다. 일용전 몇천 냥이 유동지 유치옥의 사랑 문가버랍 아래 뱀처럼

서려 있었고, 수결된 어음이 여남은 장 있었으나 그것은 소대지 아니하였다. 대강 집뒤짐이

끝나자 모두들 사랑채 앞으로 모여들었다. 동작진 패거리들이 마방을 열고 말 두필을

끌어내왔고 거기에 옷감 등속을 싣고 다른 자자분한 물건들은 봇짐을 꾸려서 여러 뭇으로

나뉘 놓았다. 서서히 동녘이 터져가는지 하늘 구석이 부옇게 열려가는 중이었다. 고달근이와

황회는 털어낸 물건들을 보고 저절로 신바람이 나서 서로 옆구리를 찔러대며 킬킬거렸다.

"봐라, 만 전어치는 되겠다."

"잘 도망치지만 하면 이걸루 졸부가 되어 남은 평생 느긋하겠구나."

"어서 내빼자. 배를 타야 헌다."

고달근이는 제 패거리의 사당과 서가들을 모두 먼저 내보내고 황회와 동작진 큰쇠네

패거리와 마무리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남자 하인들은 모조리 잡아내어 광에다 처넣고 자물쇠를 잠갔으며, 여인들과

종년들까지 한데 몰아서 작은 광에 처넣었다. 머리가 터진 유필준은 온통 발가벗기고

멍석말이를 하기 전에 고달근이가 한마디 보태는 것이었다.

"예이 이놈아, 네가 어찌 양반이냐. 쌀장수를 하여 네 아비 덕으로 밥술깨나 먹었으면

학문을 배워 높은 손비가 될지언정 시정 무뢰 소악 패거리나 다름없이 죄없는 광대를

괴롭히다니, 네따위는 대매에 때려 죽여 마땅하다. 내 너희 집 재물을 털어가는 것은 매맞고

병신된 우리 아이들 의원비나 대려는 것이니 그리 알아라."

하고는 다시 기둥에 묶인 유치옥에게 말하였다.

"안되었소. 우리두 이런 일을 원하지 않았지마는 동지 어른이 무슨 잘못이 있겠소.

아들 잘못 둔 덕이지요. 동지 영감이 가르치지 못한 놈을 우리가 잠시 징치하고 갈 테요."

고달근이가 말을 끝내자 마자 황회가 멍석을 만 다음에 발길로 뭉개어 밀어냈다. 멍석에

말려지자 황회가 뒷걸음치면서 외쳤다.

"얘들아 닥치는 대로 두들겨라!"

멍석에 말렸으니 사람도 아니고, 이왕에 여러 사람을 베고 때린 도적의 심사에 사정 볼

것이 있겠나, 내려치는 몽둥이가 마치 오뉴월 복철에 개 때려 잡듯 멍석 위로 쏟아져

내려갔다. 에고지고 짹짹 소리 없이 여러 차례를 맞고 난 유필준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달근이가 제때에 달려들어 매를 말려놓고, 무슨 생각이 들었느지

큰쇠에게 명하였다.

 

"여보게, 작은광에 가서 새댁 아씨를 데려오게!"

황회와 큰쇠는 무슨 짓이가 하여 서로 눈을 껌벅이며 마주보았는데, 유동지는 기진한

중에도 눈치를 채고는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부탁이오. 부녀자만은 손대지 마오. 여태껏은 가내의 우환으로 그냥 잊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만약에 우리 아기에게 그따위 짓을 하면 팔도 곳곳을 뒤져서라도 댁네를 잡겠소.

내 온 재산을 다 내놓아도 잡겠단 말요. 그리니 뒤가 무서우면 아예 이 늙은 것의 목을

치고 가오."

그러나 고달근이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어서 끌어내오라니까."

달근이가 한번 더 재촉하자 큰쇠는 그제서야 작은광 쪽으로 달려갔다. 황회가 궁금하다는

듯이 달근이께로 고개를 숙이며 나직하게 물었다.

"무슨 짓을 할려구 그래. 이제부터 꽁지가 빠지라구 내쳐야 될 판인데."

달근이는 황회에겐 대답도 않고 분노를 참느라고 이를 악물고 있는 유치옥 노인에게

말하였다.

"동지 영감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우리가 당진골을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방패막이루

쓰자는 게지, 욕보이려는 게 아니외다. 얌전히 데려갔다가 여길 떠나기 전에 놓아

보내드리리다."

유치옥 노인은 고개를 떨구며 씹어뱉듯 중어거렸다.

"괘씸한 놈들 같으니!"

"아들 잘못 기른 죄여. 우릴 욕하지 말라구."

황회가 그렇게 받고 나서 이번에는 반말로 이죽거렸다.

"재물이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알아? 나두 미곡 장사치가 어찌 취재를 하는지 다

안단 말야. 힘없고 가난한 농사꾼들한테서 빼앗아 모은 재물 아니여. 환자 받는다고 등을

치고, 작미랍시고 소출을 빼앗았지? 장사에선 되질을 속이고, 쌀에 물을 부어 근량을

속이고, 전세 에서는 반은 물에 가라앉히고 수장했다고 허위로 보고한 뒤에 나머지 반은

수세관과갈ㄹ막거 또 걷어내게 하고, 둔별장과 짜고서 나머지 반은 수세관과 갈라먹고 또

걷어내게 하고, 둔별장과 짜고서 역인의 수를 조정하여 남은 미곡은 헐값에 싸고 팔고,

그뿐이야... 춘궁에 쌀을 매점하여 고가로 내어놓아 배고픈 사람의 등골을 빼먹지 않았나.

오늘밤 우리가 털어낸 재물 따위야 한 달이 못 가서 또 장만할 텐데 뭘 그리 샛노래서

지랄이람. 인심이나 얻자는 빈민구제 그만두고 약한 놈들게 행패나 하지 말어. 늙은이니까

따귀 한번 안치구 가는 게야."

유치옥은 황회의 정연한 말에 잠깐 어안이 벙벙했다가 턱수염을 치키면서 대답하였다.

"내가 평생을 먹지 않고 쓰지 않으면서 노력하여 얻은 재물이다."

황회는 노인에게 바싹 다가서서,

"이거 봐, 그 재물이 어디서 생겼어. 먹지 않고 쓰지 않아 생긴 재물이란 제 몸이나 족히

가리면 되는 게야. 경강에 여각이 여러 채, 배가 수십척, 객주가 여럿, 새벌에 전장이 수십

결인데 재물 많은 놈은 원래가 죄인인 법이야, 어째 그런고 하니 재물이란 제 집에서

앞마당을 벗어나게 되면 죄를 짓기 시작하거든. 남의 땅을 밟고 남의 지붕밑을 엿보고, 남의

허리춤을 노리는 게야. 젠장할 새벌 논을 몽땅 먹어들어갈 제 그 땅을 잃구 소작질 하게 된

농투성이들은 그럼 게을러서 그리되었나? 우리네두 걸뱅이루 떠돌아 다니는 놈들이지만

세상 물정은 뜨르르하게 꿰이는 사람들이여. 고이 묶여 있다가 해나 뜨면 들어가 고뿔 들지

않게 구들목 자구 잠이나 자라구. 우릴 잡으려면 대번에 돌아와서 야반돌입하여 아주 씨를

말려버릴 테니까. 이 화승총으루 겨누어 쏘면 깜장 콩알에 벼락 맞듯 뒈어지는 게야."

황회가 그럴 듯이 씨부리는 꼴을 보고 달근이는 놈의 구변이 좋아서 뒤는 든든하겠다

싶어졌다. 동작진패의 모가비 큰쇠가 유필준의 새댁 여편네를 앞세워 끌고 왔다. 여자는

사내들에게 무슨 변이라도 당할까 하여 잘 걷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아씨, 너무 두려워 마우. 우리가 당지서 무사히 빠져나가면 돌려보내겠수."

달근이는 새댁에게 부드럽게 타이르고 나서 유동지 노인을 은근히 협박하였다.

"댁네 며느리는 우리가 잠깐만 데려가우. 만일 관가에 발고하면 시체만 찾게 될 테니까,

돌아올 때까지만 묶여서 고생허시우."

유동지는 처참한 표정으로 끙하는 신음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그들이 나가려는데 바깥을

살피고 있던 큰쇠의 식구들이 뛰쳐들어왔다.

"야단났습니다. 동네놈들이 눈치를 채고 사람을 모으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냐?"

"큰어미내 모래밭입니다."

달근이는 새댁의 등을 밀어내며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걱정할 거 없다. 우린 산줄기를 타고 읍내 쪽을 피해서 곧장 성당산 줄기를 탈 테니까.

빨리 저 앞산으로 올라라."

그들은 짐들을 지고 서쪽에 붉은고개와 이어 붙은 능선을 향해서 걸음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과연 유동지가 동네의 인심을 얻어놓은터라 선머슴과 장정등리 쇠스랑이며

호미며 작대기를 들고 큰어미내 모래밭에 모여 있다가 소리를 지르며 우우 몰려왔다. 이미

해가 뜨기 시작하여 안개는 산산이 흩어지고 하늘은 울긋불긋하였다. 달근이네들은 연신

뒤돌아보면서 능선을 향하여 뛰었다. 그런데 난처하게 된 것은 유필준의 징치한 매로

삭신이 우그러진 달근네 거사들이 달음박질을 잘하지 못하는 점이었다. 비록 다른 패거리가

곁에 붙어서 부축은 한다손 치더라도 그만큼 행동이 느리고 불편하였다. 제 식구가

아닌지라 동작진 패거리와 황회네 괴뢰배는 화나 둘씩 부축했던 손을 놓고 제각기 뛰게

되니 달근네 거사들은 모두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그뿐이랴, 사당들도

숨이 차서 더 이상 뛰지 못하겠다며 거사들 곁에 주저앉았다. 고달근에게 끌려가던

유동지네 새댁도 마침 잘됐다 싶었는지 다리에 힘을 빼고 그냥 넘어져버렸고, 분통이 터진

고달근이는 저만큼 뛰어간 황회에게 고함쳤다.

"아니 촌놈들게 꽁지 보일 게야? 일 그르치기 싫으면 돌아서서 몇놈 죽여보리라구."

황회는 주춤 서서 뒤편을 바라보았다. 마을 장정들은 작대기와 농기구를 휘저으며

밭두렁을 뛰어오는 중이었다. 황회는 한 팔로 둘러멨던 짐을 내려놓고,

"시동아 일루 오너라."

시동이까지 불러 세웠다. 다른 자들은 멀찍이서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다보았다. 마을

사람들이야 한동네 중심 되는 대가에서 적환을 만났으니, 맞아 싸우겠다는 순박한 인정으로

나왔던 것이고, 그리 악착스러운 마음이 들 리도 없었다. 다만 쫓겨 달아나는 도적들을

실제로 보고 의분이 났을 뿐이었다.

"도적놈들 게 섰거라!"

그들이 지척에까지 달려왔을 때 황회가 먼저 총을 놓았다. 작대기를 내던지며 한 사람이

푹 고꾸라졌고, 또 하나가 시동이의 방포로 넘어졌다. 총을 놓으니 일시에 사기가 꺾인 동네

사람들은 주춤대며 물러나기 시작했고, 이 꼴을 본 패거리들이,

"목을 베겠다아!"

"어느 놈부터 죽여주랴."

하고 악들을 쓰며 쫓으니 제각기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공연히 겁을

먹고 내뺐던 것은 도적질을 했던 죄 탓이었다고 생각하며 달근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촌민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먼 곳에서 고함만 내지를 때, 그들은 겨우 행장을

수습하여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거사패들이 도통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자꾸만 뒤로 처졌다. 황회는 몇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돌아다보다가 드디어 짜증이 나서 고달근에게 투덜거렸다.

"제미랄! 그 병신들 끌구 다니다간 광주는커녕 바닷가에 이르기두전에 모조리 오라를

지구 말겠다."

달근이도 역시 애가 타는지 뒤에서 멀찍이 따라오는 거사와 사당들을 돌아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하는 수 없다. 살구 싶은 놈만 따라오고, 잡힐 놈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거라. 후환

없도록 내가 가슴팍을 찔러줄 테여."

이미 동작진 패거리들은 멀찍이 숲 사이로 사라져 보이질 않았고 황회네 패들도 짐을 한

보따리씩 걸머지고걸음을 재게 놀리고 있었다. 시동이만이 황회의 앞에서 걷고 있을

뿐이었다. 달근이는 유동지 댁 새댁의 팔은 부여잡고 뒤에 처지는 제 식구들을

기다리느라고 여러번 쉬고는 하였다. 달근이는 여자를 시동이에게 맡기고 나서 황회를 따로

불러 일행과 떨어져 가서는 의논을 시작하였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해가 높직이 뜨고 나면 우리가 달아날 틈은 점점 없어져버리구 만다.

더구나 저 촌놈들이 그냥 돌아서겠느냐. 분명히 지금쯤 관가에 가서 적경을 알렸을 게다."

"그러니까 달근이 너만이라두 몸을 빼쳐야지."

"이 자식아, 네 식구하고 우리하군 다르다. 너희들이야 어중이떠중이 장마당에서 손발

맞은 대루 재간 따라서 만나구 흩어지구 하는 무리이지만, 우리는 한솥밥을 먹은 지 십

년이 넘었단 말이야."

"그래 여기서 무사히 나간닥, 안성가서 몸붙이구 살 수 있을 거 같으냐. 어림없다. 안성

고달근이 행세는 이젠 끝난 게야."

"안성 청룡사 사당패는 그대루 있겠지. 우리만 빠지면 될 게 아냐."

하긴 고달근이의 말대로 일 년에도 몇대씩 패거리가 갈려 나가는 안성 청룡사에서

달근이네 식구를 못 잡는다고 관가의 피침이 계속될 것 같지는 안았다.

"안성 걱정은 뒸다 하구 어쩔 테여. 나는 시방 웅포루 가야 하고, 너는 네 식구를

수습해서 딴 데루 가든지 혼자 따라오든지 해라."

달근이가 황회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속삭였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사돈 식구는 풍년에 피죽이요, 내 새끼는 흉년에 팥죽이랬다고...

동작진패를 어떻게 생각허냐?"

"내야 네 식구나 그 식구나 모두 사돈에 팔촌지간이지."

달근이는 곰보 얼굴을 잔뜩 일그렸다가 쉰 목소리로 낄낄 웃으면서 횡회의 귀를

잡아당겼다.

"이 자식아, 너두 내 없이는 당진서 옴치구 뛰지두 못해. 내가 이 골서 몇번이나 겨울을

낫는지 아느냐. 예서 웅포까지 갈려면 산에서 내려가 갯벌로 스물다섯 리다. 북창까지도 못

가서 잡히구 말 게다. 저 큰쇠라는 자가 그리루 가자는 것은 제 식구들 때문이여. 더구나

생각해봐라. 남양까지 가려면 천상 물길루 하루 온종일 가야 헌다. 어서 바삐 뭍에 올라

산속에 숨어야 하는데 물길루 하루걸이란 말야."

"그래서..."

"저 자들이 잡하면 우리는 일단 숨을 돌린단 말이지."

황회는 아직 알아듣지 못했는지 멀뚱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저 유동지네 새며느리를 놓아주고 얼마쯤 가다가 저 자들과 헤어진다면,

군병들이 누구 뒤를 좇겠냐. 동작진패의 뒤를 쫓아가겠지. 더구나 배를 타구 바다루 나가게

되면 우리는 저 패들이 달아나는 동안에 아주 편안히 객줏집 구들목을 지구 늦잠 자면서

내빼두 된다. 떼 꿩에 매 놓아봤자 한 마라두 못 잡을 격이여."

황회가 그제서야 고달근이의 묘책을 알아듣고 벌죽이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서로 웃음을

주고받고 나서 일행들에게로 돌아왔다. 읍내와 채운포를 잇는 대로가 내려다 보이는 등성이

숲속에 앞서 간 패들이 둘러앉아 초초하게 그들을 그대라고 있었다. 튼쇠가 코를 헹하니

풀고 나서 제 봇짐을 들면서 말하였다.

"도대체 어쩔 심산이우. 이 대식구를 이끌고 머무적거리다간 당진옥에 갗혀서 객서하구

말겠수."

"패거리끼리 대를 나누어 제각기 뜁시다."

하여 동작진패들도 여기저기서 볼멘소리로 떠들었다. 달근이는 팔짱을 끼고 침통하게

섰다가 박거사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하는 수 없네.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지체시킬 일은 아니니, 계속해서 뒤는

쫓아가되 너무 뒤떨어져서 잡히게 되어도 우리의 운수가 아녀?"

큰쇠가 당연하다고 무릎을 쳤다.

", 거참 사리 분명한 말이로군. 우리는 여하간 웅포까지 달아나 배를 탈 터ㅣ니

부지런히 쫓아들 오시우."

하고는 제 패거리들을 재촉하여 큼직한 봇짐들만 골라서 지고 일어서려는데, 달근이는

서두르지 않고 점잖게 말하였다.

"어허 성미 급한 건 좋은데... 개두 뒤본 자리는 덮구 가는 법이우."

큰쇠는 그제서야 봇짐을 내려놓고 입맛을 다셨다. 황회가 가장 공평한 듯이 모두의

봇짐을 손수 빼앗아다 한가운데에 쌓아놓고는 하나씩 풀어헤쳤다.

"이건 우리가 함께 일하여 번 재물이니 세 몫으로 똑같이 나누지."

큰쇠도 반대하지 못하고 그럽시다 하는데, 횡회네 패에 끼여 있던 덜미꾼의 상모를 쓴

얼굴이 거무튀튀한 사내가 세 사람 사이로 끼여들었다.

"아니우, 네 몫이우."

"아니 자네는 왜 또 싸리울 터진 데 개 주둥이 내밀 듯 끼여들어?"

상모 제껴 쓴 덜미꾼이 제 뒤로 넘겨다보는 같은 패를 슬쩍 돌아보고 나서 뻣뻣하게

대꾸하였다.

"물론 황회 성님과 작당이 되어 연희를 팔구 다녔소마는... 우리 덜미꾼들은 우리끼리

식구요, 성님네 패가 아니우. 아예 말이 난 김에 여기서 갈라서두 좋수."

황회가 뭐라고 말하려고 불근하여 손을 쳐드는데, 고달근이가 황회의 발뿌리를 지구시

밟으면서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 동무의 말을 듣구 보니... 과연 네 몫이로군. 네 몫으로 나누세."

황회가 달근이를 돌아보며 또 뭐라고 말하려는데, 달근이가 엎드려서 비단을 한 필 두 필

나누어 쌓으면서 얼버무렸다.

"넷으로 나누자면 나누는 게지 네가 뭐 여리 두령이여, 이 자식아."

황회는 씨근거리며서 덜미꾼을 노려보았고 가지는 나누어진 장물을 따로 그러모았다.

비단과 무명은 필로 나누고, 돈꿰미는 모두 풀어서 나누었으며, 패물도 원망이 없도록

노끈으로 매듭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졌다. 재물의 분배가 끝나자 그들은 짐을 지고

일어섰다. 큰쇠가 저희 짐을 가장 팔팔하게 걷는 자에게 지우고 귀따라가면서 건성으로

외쳤다.

"웅포에서 기달릴 테니 빨리 따라오우."

"꼭 기다리우. 뒤떨어져봤자 화살 한 대 거리일 테니."

그러나 그들은 마저 대답하지 않고는 일제히 언덕을 내려가 고갯길을 가로질렀다. 덜미꾼

여섯 사람도 구뒤를 다르려는데 짐을 진 자는 역시 상모를 쓴 자였다. 그가 일어서자마자

황회는 총을 겨누고 말하였다.

"여보게, 나 좀 보구 가게."

그러나 그는 뒤를 힐끗 돌아보고는 화승총의 요리를 아는지라 씩 웃어 말하였다.

"승에 불두 안 붙었수. 그 작대길랑 저리 치우구 말해보우."

"너 건너가기 전까진 탄환이 나간다. 내 부시 치는 솜씨 알지?"

"나는 내 봇짐 갖구 가겠수."

그자가 후닥닥 뛰는데 달근이가 등덜미에 꽃고 다니던 말채를 날려서 목을 휘감아

당겼다. 사내가 뒤로 넘어질 때 박거사가 덮치면서 비수로 가슴을 내리찔렀다. 사내는 눔을

희게 까뒤지고 그들을 올려다보다가 절명했으며, 박거사는 칼을 뽑아 시체의 옷에다 쓱

닦고는 일어섰따. 황회는 나머지 덜미꾼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갈 테면 가고, 나를 따를 놈은 오너라."

그들은 길을 건너지 못하고 황회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고달근이가 말채를 말아서

다시 뒷덜미에 꽃아넣으면서 황회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 자식아 털 뽑아서 그 구멍에 다시 박아라. 이런 판국에 광명 천지가 되었는데

총소리를 내면 우린 어디루 달아나니. , 모두들 웅포루 나가자."

달근이가 겁에 질린 유동지네 새댁을 끌어 일으켰다.

"너무 겁먹지 마시우. 여거서 돌려보내들릴 테니... 절대루 관가에 가거나 읍내 나가지

말구 곱게 집으루 돌아가슈. 나중에 말 안들었다간 우리가 다시 짓쳐들어가서 아예

생눈깔을 뽑구 말 테여."

달근악 눈을 부릅떠서 바짝 들어대니 어린 새댁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 더욱 납빛이 되어

오들오들 떨었다.

"예예... 살려주셔요. 절대루 읍내엔 안 나갈게요."

"우리가 웅포루 나갔다구 말하면 일가 몰살을 시킬 테니까."

한번 더 다짐을 하고 나서 그는 여자를 끌고 고갰길 족으로 나려갔다. 황회는 그 뜻을

짐작하는지라 일행을 이끌고 일단 길을 건너 끊어진 맞은편 등성이로 올랐고, 달근이는

여자를 길에서 놓아주었다.

", 빨리 가슈."

처음에 여자는 믿기지 않아서 동그마니 섰더니 놓여난 새가 그러듯이 제자리에서 호흡을

가라앉히고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고친 다음에 한번 더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리고는 몇발짝 조심스럽게 걷다가 또 돌아보고 나서 미친 듯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여자가 고개 아래로 내려가 숲에 가리어 안 보이게 될 때까지 서서 내려다보던 달근이가

맞은편 등성이에대 대고 외쳤다.

"어이, 모두들 내려와. 우리는 큰어미내를 건너야 해여."

유동지네 새댁은 이미 고갯길을 벗아날 때부터 항향을 정하고 있었으니, 당진 관아

쪽이었다. 읍내 거리로 들어서는데 도적들에 쫓겨갔던 마을 젊은이 몇사람이 헐레벌떡이며

뛰어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머리가 흐트러지고 땀으로 얼굴이 온통 얼룩진 유필준의 아내를

보자 기겁을 하였다.

"아이구, 아씨께서 이게 웬일이십니까."

숨이 턱에 닿은 새댁은 조금 마음이 놓였는지 쓰러질 듯이 땅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위낙에 상하가 있고 남녀가 유별한지라 차마 여자를 끌어 일으키거나 부축도 못한 채

엉거주춤 서서 장정들은 저희들끼리 얼굴만 마주 바라보았다. 새댁은 제 가스을

쓸어내리면서 말하였다.

"...집은 어찌 되었느냐?"

", 모드들 몰려가서 광을 부수고 대부인마님과 하인들을 모두 구완해내었습니다. 젊은

사라들인 작당하여 붉은고개로 오르고, 저희는 적겨을 알리러 관가로 가는 참입니다."

"그렇지 않아두 모두들 아씨 일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큰 변을 당하신줄 알았는데,

어찌 용케 빼쳐나오셨습니다그려."

부근 농가에 가서 물을 떠다가 내밀자 새댁은 거푸 서너 모금을 대번에 삼키고 나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방님께서는 정신이 좀 드셨더나?"

", 저는 의원을 부르러 오는 길입니다. 아직도 인사불성이어서 대부인마님께서 곁에

붙어 계십니다."

"아버님은..."

"동지 어른께서는 문을 꼭 닫고 사랑에 계시는데, 아무하구도 통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새댁은 겨우 일어나서 그들의 등을 떠밀었따.

"너희들은 어서 가서 의원을 부르고 관가에 가서 적경을 알려라. 도적들은 저희끼리

의논하는 소리를 내가 들으니, 웅포에서 배를 타고 남양으로 향할 모양이더라."

", 그대루 아괴겠습니다."

그들이 막 돌아서서 뛰는데, 새댁은 그제서야 기가 다하였는지 스르르 미끄러져 길 위에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들 중의 하나가 다시 돌아서서 새댁을 끌어 일으켜서 등에

업엇다.

"나는 이 길루 아씨를 업구 마을에 돌아갈 테니 자네들은 어서 가보게."

하여서 그들은 읍내 거리에서 각각 흩어졌다. 관가에 간 사람이 삼문밖에 이르니 수직

군사가 뛰쳐나왔고, 대강 용뮤를 말해주니 수령께서는 아직 기침 전이라 동ㅎ펀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은 발을 구르면서 서 있었고, 한참 뒤에야 번드는 장교에게

적경이 닿아 마을 사람은 사또에게로 안내되었다. 통인이 들락거리고 사또가 기침을 하고

옷을 입는 사잉에 또한 많이 지체되었다. 간밤에 술이 아직 정신이 똑똑히 들지 않은

군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나서 수청드는 기생년을 발로 지그시 밀어낸 다음에 미닫이를

벙싯 열고 내다보았다.

"식전부터 웬 소란이냐?"

"큰탈이오. 간밤에 도적이 들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마을 젊은이가 먼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자, 사또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장교를 내려다보았다.

"저자는 누구인가."

장교가 머뭇거리면서 아뢰었다.

"붉은고개 사는 농군이온데, 이 사람의 고경에 의하면, 유동지 댁에 도적이 들었다

하옵니다."

그러나 사또는 연방 하품을 터뜨렸다. 사또는 다시 미닫이를 닫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적이 들었으니 어찌되었다는 말인가. 그깟 일루 아침부터 법석을 떠느냐. 이따가

동헌에 나가면 격식을 갖추어서 문서로 보고하고, 장교는 군사를 데리구 가서 무엇을 어찌

잃었으며 도적이 어느 골의 누구인가 탐문할 것이지, 그깟 일로 시시콜콜히 다 내게 알려

귀찮게 하느냐. 물러가라."

장교는 기왕에 수령의 잠을 깨웠으니 자기 체면이라도 세워야 겠기에 감히 물러가지 않고

아뢰었다.

"소소한 물건을 도적질한 조모적이 아니오라, 유민지배들이 작당한 화적떼인 줄로

아뢰오."

"뭣이라구... 화적떼?"

그제사 깜짝 놀란 사또가 미닫이를 벌컥 열었다.

", 화적떼가 간밤에 유동지 댁을 야반돌입하여 가족들을 모두 묶어놓은 뒤에 가산을

털어 갔다 하옵니다."

"인명이 상하였는가?"

"도적들은 총포까지 지니고 있다는데 유동지 댁 하인 몇이 상하고 죽었으며, 붉은고개

사람이 하나 죽었다 하옵니다."

사또는 일의 중대함을 깨닫고 벌떡 일어나 동헌으로 나가면서,

"도적들은 대략 몇이나 되던가?"

붉은고개 젊은이가 대신 아뢰었다.

"한 삼십여 명이 넘는 것 같았습니다. 동지 어른 댁 작은아씨께서 도적들에게 끌려갔다가

간신히 몸을 빼쳐 달아나왔습니다."

"... 이럴 수가 있나. 감영에는 무슨 면목으로 계를 올리겠는가. 도적들의 종적은

알아냈느냐?"

"달아난 유동지 댁 아씨께서는 도적들끼리 의논하는 소리를 들었다는데, 웅포에서

남양까지 배를 타구 간다고 그러더랍니다. 지금이라두 파발마를 놓아 북창에 알려 고직하는

장교를 시켜서 웅포의 진군과 합대하여 길을 막으라 이르십시오. 하오면 저희 군병이 모두

뒤를 쫓아 바다로 빠져나가기 전에 사로잡을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하는 장교의 계책을 듣자, 사또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적들이 총포를 지니고 있다니

포수도 동원이 되어야 했고, 군병뿐만 아니라 군노 사령에 군민들까지 모두 병장기를 들고

삼문 밖으로 집합하였다. 이미 북창과 웅포 쪽으로 적경의 전갈을 가진 파발마가 나는 듯이

달려갔다. 정예 군병들은 산으로 오르지 않고 해번가를 따라서 성당산까지 간 다음에 배를

타고 웅포에 닿게로 했던 것이다. 나머지는 붉은고개 농군들과 합세하여 산등성이를 타고

도적들의 뒤를 쫓기로 하였다.

당신서 웅포까지 산길 삼십리요, 해변으로 사십리가 되건만 큰쇠를 위시한 동작진

패거리들은 북창을 조금 지나서 이제 웅포까지는 시오리 길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도

뒤에서 추격이 있음을 아는지라 한번도 쉴 짬 없이 계속해서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뛰고

걷고 다시 뛰며 달아났다. 그들이 웅포 해변에 도달했을 때 파발에 접힌 북창 고직 군사

서넛과 웅포진군 칠팔 명을 합하여 십여 명을 군사들이 배가 닿는 선창을 점거하고 있었다.

동작진 패거리들은 비록 한바탕 싸울 인원이 충분했으나, 집털이에 가담 핞고 기다렸던

사당들 때문에 달아나기가 거추장스러웠다. 큰쇠는 감히 포에 나가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한가지 궁여지책을 생각해냈다. , 사당들을 버릴 수밖에 없고, 비릴 테면 유용하게

버리자는 생각이었다.

큰쇠의 생각으로는 우선 사당들을 군사들의 눈에 쉽게 띌 만한 곳으로 내몰아 놓은 뒤에,

그들이 쫓기는 동안 포구를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뒤로는 성당산의 짙은 솔밭이요, 앞으로

모래밭을 건너서 범선과 노 젓는 배기 칠팔 척 묶여 있는 선창이었으며, 왼편으로 나지막한

지붕들이 산 밑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선창이었으며, 왼편으로 나지막한 지붕들이 산 밑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포구마을이 내려다보였다. 마을 앞으로 널따란 갯벌이 썰물에

드러났는데 고깃배 두어 척이 모래 위에 기우뚱하게 얹혀 ㅇㅆ었다. 개벌을 지나서는

마을과 지척에 잇는 작은 섬이 보였는데 모래톱이 섬에까지 잇닿아 있었ㄷ. 섬 주위는 온통

바뒤오 돌로 둘러싸였으며 뒤쪽은 솔숲이 울창하여 젭ㅂ 후미졌다. 큰쇠는 주위를 한참이나

살펴보고 카서 거사 하나를 불러 섬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보게나. 저기 섬이 보이지? 포에서 배를 탈 수는 없게 되었으니, 저자들 눈에 뜨지

않도록 갯가로 나가서 섬으로 건너가 기다리게. 그러면 우리들이 군사들을 덮쳐서 배를

빼앗아 몰고 섬 뒤쪽에다 배를 댈 테니..."

"그럽시다. 헌데 어느 쪽으로 가야 저자들의 눈을 피할지 모르겠수."

"이런 어리석긴... 마을쪽으로 해서 곧장 달려나가면 되잖나. 우리와 싸우느라고 아마 고개

돌릴 틈도 없을 걸세. , 싸울 만한 식구들만 남구 나머지는 사당 아이들과 함께 빨리

피하게."

하고 나서 큰쇠가 집털이에 나갔던 자들만 남도록 지적하고 사당들의 등을 밀어냈다.

그들은 허겁지겁 마을 쪽으로 뛰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포를 지키는 군사들게 발각되지 않은

듯하였다. 사당과 거사 몇이 마을 아래로 내려가 갯벌을 뛸 즈음에 해변에 나와 있던 어부

몇이 포구를 향하여 손을 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렀다. 사당들은 갯벌에서 모래톱으로

들어섰고, 먼곳에서도 그들이 섬을 향하여 뛰는 모습이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군사들은

창을 치켜들고 환도를 휘두르며,

"도적들 게 섰거라!"

"한놈도 놓치지 마라."

제각기 떠들며서 갯벌으 ㄹ따라서 우르르 몰려갔다. 큰쇠는 벌떡 일어나 제 패거리들을

재초갛였다.

"빨리 뛰어서 배 한 척만 잡으면 된다."

그들은 제각기 힘을 다하여 포구로 뛰어내려갔다. 범선을 잡아야 했으나, 해안을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나룻배보다 속력이 느리고 손이 많이 가는 때문에 우선 손쉽기는

나룻배가 나을 듯 하였다. 큰쇠가 닻을 뽑아 뱃전에 던지면서 올라탔다.

"어서 밀어내라."

그들이 일시에 밀어내니 배는 곧 물이 허리에 닿을 만한 깊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들은 허위적거리며 배에 올라탔다. 노젓기에 자신있다는 총각 거사가 죽기로 작정한 듯

온 기력을 다하여 노를 저었고, 배는 뒤뚱거리며 물 가운데로 헤쳐 나갔다. 그들이 제법 소

한 울음거리는 됨직하게 나갔을 때에 성당산을 빠져나온 군노 사령들이 하얗게 쏟아져

들어왔다. 선미에 앉아서 노 젓는 자를 독력하던 큰쇠는 그 모양을 보자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주먹으로 널판을 소리나게 내리쳤다.

"아뿔싸! 속았구나."

큰쇠는 그들이 제각기 포구의 배를 밀어내는 광경을 크게 뜬 눈으로 내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우리가 안성패들 도망길을 터주느라구 웅포루 나왔구나."

큰쇠는 그때까지 아성 고달근이 패와 황회 패거리에 관하여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제 식구들을 이끌고 달아나기에 급급하여 그들이 뒤를 따라서 성당산

능선을 타는지 마는지조차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군사들이 몰려나와 나룻배를

밀어내느라고 법석이 아닌가. 그가 제 사당들을 도망의 미끼로 삼았던 것처럼 달근이는

큰쇠네 패를 미끼로 삼아 지금은 어딘가로 편안하게 내치는 중일 것이었다.

큰쇠가 여러 가지 따져보지 못하고 한시바삐 달근이네를 떼쳐보리려 했던 것은 재물에

대한 욕심 탓이었다. 아무리 후회해봤자 이제는 이미 늦은 일이었고, 두 척의 나룻배가

해안을 터나고 있었다. 아직 거리는 멀었는데 뭍을 멀리 할수록 물결이 차차 높아져서 조를

젓던 총각 거사는 벌서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더욱 힘껏 저어라. 웬만큼 쫓아오다 말겠지. 물길루 접어들기만 하면 그 다음엔 남양까지

황포를 달아매어 바람을 타구 내치는 게야."

두 사람이 번갈아 허리를 굽히면서 표주막으로 배 밑창의 스며든 물을 퍼냈다. 워낙에

이쪽은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판이라 아무래도 누 젓는 데 온 힘을 다하였고, 저쪽의 두

배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바다로 나오고 있건만 좀체로 이쪽을 따라잡을 수가 없을

듯하였다. 그쪽에서 하릴없이 고함만 꽥꽥 내지르고욕석을 퍼붓는 것이 고작이었다. 큰쇠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제 조금만 더 저어 나가면 좌우로 불쏙 튀어나온 만의 양쪽

곶머리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섬으로 달아났던 거사 몇 명과 사당들은 군사들에게

잡혔을 것이 분명하였다. 사당년들이야 다시 여염 향리에서 계집종이나 빈농의 굶는 아이를

후려내면 될 것이짐, 기왕에 동작진 복만이네 식구임이 드러날 테니 사당골에 돌아가기도

그른 일이었다.

"제기럴... 꽉 물렸구나. 수원 가서 재물을 팔아 모두 흩어져 살길을 찾아야지."

큰쇠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앉았는데 선수에 앉았던 거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 배가 옵니다."

모드들 그가 손가락질 하는 곳을 내다보니, 곶머리 뒤에서 넓은 돛을 올린 배 한 척이

살같이 돌아 나오고 있었다. 앞에서 청룡 황룡기가 펄럭였고 북소리가 계속하여 울리고

있었다.

"아무리 달아나봤자 글렀소. 저건 병선이우."

"남양까지 갈 것두 없다. 어디 깊은 산이 보이면 아무 데나 갖다 내어라."

그러나 병선은 차차 가까위지고 있었으며 갑판에 벼장기를 세워 들고 삼엄하게 열지어 선

진군들의 벙거지가 또렷하게 보였다.

"도적들 멈추어라!"

"순순히 잡하서 죽음을 면하고 싶은 자는 배에서 뛰어내려라!"

홍철릭을 입은 장교가 선수로 나와 호통을 쳤가. 그들은 북창에서 배로 갈아탄 정예

군병들이었다. 큰쇠네가 아무 대꾸 없이 계속 노를 저으니 이윽고 장교의 모습이 사라지며

총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뱃전에 십여명의 포수들이 붙어서서 총을 놓으니 노를 젓던

거사는 그대로 한꺼번에 서너 방을 맞고 바닷속으로 구꾸라졌다. 날아오는 연환 소리가

귓가를 쨰는 듯 날카로웠고, 그들 중에는 이미 제물에 물로 쮜어드는 자도 있었다. 총포가

없으니 대적하여 쏠 수도 없는 큰쇠네는 모두 뱃바닥에 한무더기가 되어 엎어져 있었다.

큰쇠 곁에 바짝 엎드려 있던 거사 하나가 등판에 총알을 맞고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가자,

나머지 거사들은 엎드린 채로 큰쇠에게 자각기 떠들었다.

"모가비 성님 어쩔라우... 우릴 떼죽음시킬라우."

"공연히 조적질에 가담하여, 이젠 비어먹지두 못하게 되었수."

"어쩔 작정이야. 이젠 용빼는 재주 없이 살아 도망하긴 글러버렸어."

큰쇠는 이를 악물고 나서 뱃전으로 손을 쳐들어 휘저으면서 소리쳤다.

"쏘지 마오. 항복할 테니 살려주시우."

이어서 곧 총소리가 그쳤다. 뒤어세 쫓아오던 나룻배들도 가까이 다가왔다 큰쇠네 패는

모두들 뱃바닥에 죽은 듯이 엎어져 있었다. 장교가 병선 위에서 내려다보며 내룻배를 타고

뒤쫓던 군노 사령들에게 지시하였다.

"몸뒤짐을 철저히 하구 나서 차례로 결박하라. 꿈쩍하는 놈은 단칼에 베어두 좋다."

엎드려 있는 도적들 위로 사령 셋이 달려들어 하나는 창을 겨누고, 다른 하나는 거사들의

단검이며 몽둥이 같은 무기를 거두는데, 또달ㄴ 사령이 그들의 몸을 일일이 뒤졌다 가까이

대어진 병선에서는 포수들이 화승총을 이제히 겨누고 있었다. 장교가 아래쪽에다 고함을

질렀다.

"그 두 번째 있는 놈 창대로 후려 패주어라. 자꾸만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는구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리가 부러지도록 두어 대 얻어맞고는 거사패는 모두들 고개를

처박았다. 오라에 굴비두름 엮듯이 모두 줄줄이 묶어놓고 나서, 그들은 큰쇠네가 타고 왔던

배를 클고 웅포 도선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이 뭍에 끌리어 내려지자 벼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주먹과 발길질을 해댔고, 뒤늦게 도악한 장교가 가까스로

위협하여 그들을 떼어냈다. 큰쇠는 면상을 얻어맞아 코피를 줄줄 흘리고 서 있었다. 섬으로

달아나다 수직 군사들게 잡힌 사당들도 묶여서 그들과 합쳐졌다.

"사또께서 기다리고 계시다. 잡힌 도적들을 우리가 압송한다."

장교는 이르고 나서 길가녘에 창을 비껴든 군병을 삼엄하게 늘어세웠고, 그 사이에

큰쇠네 식구들을 걷도록 하였다. 붉은 고개 사람들과 군노들이 먼저 당ㄷ진 읍내로

달려가니, 벌써 당진 군내에서는 유동지 댁을 습격하였던 화적들이 잡혔다는 소문이 일시에

퍼져서 길바닥은 마치 팔원 대보름장이 선 듯하였다.

 

2

그 무렵 이미 닭 울 녘에 단샘에서 나룻배를 탄 이경순과 묘옥은 백석포를 돌아 평택 앞

의 시포를 거쳐서 내쳐 지류를 거슬러 항곶포로 향하고 있었다. 뱃삯으로 경순이 안성서 묘

옥에게 내주었던 쌍금가락지였으니, 사공은 선가가 위낙에 비쌌던지라 그들을 제 상전 모시

듯 해주었다. 망해산 봉수대까지는 혹시 남의 눈에 듸거나 관의 기찰에 걸릴까 하여 근심하

였으나, 경양을 지나서부터는 긴장이 풀려서 묘옥은 어느덧 경순의 모릎에 기대어 잠이 들

었다. 뱃길 육십리라 하나 상류를 향하여 거꾸로 올라가니 밀물 때는 몰라도 썰물 때에는

거진 강안에 닿을 듯이 하고서 삿대로 앝은 땅과 물풀을 헤치며 나아가야 하였다. 그들이

항곶포에 이른 것은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였다. 경순은 돈 가진 것이 없었으나 양성 까지

가서 옹기 물주를 하는 객주를 찾을 셈이었다.

항곶포서 백운산성 금로치를 넘어 양성까지 삼십 리 길을 경순은 기진맥진한 묘옥을 데리

고 두 끼니나 굶은 채 허위허위 걸었다. 뒤처져 따라오던 묘옥이 풀섶에 주저앉아버렸다.

"나으리, 쉬어 가셔요. 아무래두 다리가 삐었나 봐요."

경순은 말없이 묘옥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묘옥은 제 무릎을 두드리다가 무득 무슨 생

각이 들었는지,

"나으리, 양성에서 여주까지 혼자 가시지요."

하자 경순은 영문을 몰라서 눈만 껌벅였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당진서 ㅃ져나올 제 여주 내 집으로 가기로 작정이 되지

않았느냐?"

묘옥은 거친 경순의 말에 고개만 살레살레 저었따.

"아닙니다. 나으리께서 혼자 작정하신 일입지요. 저는 안성 사당골에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 가보았자 지금 아무도 없을 게다. 그리구 모르긴 몰라두 달근이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인, 곧 기별이 받은 관아에서 사당골을 샅샅이 뒤지게 될 게다."

"안성 사당패 모가비가 어디 고서방 뿐입니까? 다른 식구에 들어가지요."

"아니다, 다른 식구들이 네가 당진서 달근이네 패에 끼여 놀았다구 관원에게 이를 게야."

"저는 어쨌거나 요주 가서 나으리 곁에 주저앉을 수는 없는 몸입니다."

이경순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내 널더러 구태여 소실이 되라구 여주로 가자는 것이 아니니라. 당분간 세상이 조용해지

는 기미가 보일 때까지 여주에서 좀 쉬라는 게야. 그 다음엔 네가 가구 싶은 곳으로 어디든

지 떠나두 붙잡지는 않겠다."

묘옥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고, 경순이 묘옥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어서 양성으루 들어가자. 네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더구나 아침부터 여태 굶었으니 오죽

이나 시장하겠느냐."

하고는 이경순이 묘옥을 업으려 하자 묘옥은 자꾸만 허리를 빼내었다.

"나으리, 걸을 수 있습니다. 괘념치 마셔요."

"너를 업구 가야겠다. 다름아니라 그 꼴로 사내의 도포를 둘렀으니, 누가 보더라도 의심하

지 않겠느냐."

묘옥은 이기지 못하여 다시 경순의 등에 업혔다. 묘옥은 경순에게 업혀 가면서 제 마음을

자기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녀가 이경순을 자꾸 거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굳은 결

심 때문이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경순의 사내답고 부드러운 사람됨에 기울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들수록 겉으로는 자꾸만 도사려지게 되는 것이었다.

저를 찾아서 안성까지 백리 길을 마다 않고 달려온 사람, 또한 양인으로서 천민 패거리인

사당패에 끼여 갖은 욕을 보면서 당진까지 동행한 사람, 목숨을 걸고 대가에 난입하여 자기

를 구출한 사람, 이러한 이경순이가 묘옥에게는 더욱더 두려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저 말바위의 벼랑 끝에서 어두운 바다를 향하여 울부짖으면서 한 젊은 광대를 넋을 다하여

사랑하고 간직하겠다던 마음이 일시에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경순의 뒷덜미에

서 땀이 흘러 등판을 적시고 있었으니, 아마도 허기를 이기느라고 몹시 힘이 드는 모양이었

.

그들은 뱃골서 장터말까지 한산한 들판길을 걸었다. 장이 서질 않아 읍내는 행객이 별만

보이질 않았다. 양성은 원래 안성과 같은 군에 속하여 있었고, 장시는 번갈아 열렸으나 옹기

와 유기가 각지로 매매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경순의 분원에서는 죽산, 안성, 평택, 양성

등지에 거래하는 물상객주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여주 이도장이라 부를 정도로 경순과

친숙하였다. 특히 객주인들은 경순이 돈깨나 있다며 행세하지 않고 언제나 패랭이에 홑저고

리 차림의 상놈으로 자처하는 것을 그럴 듯하게 여겼던 것이었다.

객주는 대개 봉노도 있고, 술청도 있어서 장꾼이 기숙하기에도 불편이 없는데, 광에는 칸

마다 자기네가 주로 취급하는 물건들이 쌓여 있게 마련이었다. 이경순은 묘옥을 문간에서

얼른 내려놓고 장사치 몇사람이 잡담을 하고 있는 술청을 피하여 안채로 돌아 들어갔다.

노미가 마당을 가로지르다가 이경순을 보자 얼른 허리를 굽신하였다.

"아이구, 도장 어른이 웬 행보시우."

"주인장 계시냐?"

", 계시다마다요."

하고 나서 마루로 다가가 찾는데, 똥똥하고 눈이 작게 찢어진 중년의 사내가 반색을 하면

서 쫓아나왔다.

"아니 이게 누구여. 도장 어르신이 먼걸음 하였네!"

"너무 소란 피우지 마시게, 그보다 어디 골방이라도 좋으니 후미진 방 하나만 내어주어."

경순의 나직나직하고 다급한 말에 주인은 영문을 몰라 멀뚱하니 보고만 서 있었고, 이경

순은 밖을 향하여 말하였다.

"얘야, 들어오너라."

묘옥이 마당으로 재빨리 들어서는데 누가 보기에도 몰골이 가관이었다. 머리는 흩어질 때

로 흐트러졌고 저고리에 갯벌흙이 묻어 사방이 얼룩이요, 치마는 찢기어서 사내의 도포를

두르고 있으니 가히 저자바닥의 광녀와도 같았다. 주인은 뒤늦게 경순의 아래위를 훑어보았

.

"무슨 일이 생겼나? 도장은 어디서 오는 길이여?"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기루 하고, 우선 우리가 두 끼니를 걸렀네. 아무거나 요깃거리가

있으면 좀 내주시게. 갈아입을 옷가지두 내놓구..."

"허 모를 일일세. 날마다 고기 반찬에 이밥으로 호강을 할 사람이 지금 어느 참인데 여태

밥 한 술을 못 먹었나. 어서 들어가... 우리방에 묵지 뭘."

주인은 역시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인지라 더 따져볼 염을 내지 않고 안방을 열고 마누라

와 자식들을 불러냈다. 상놈 처지에 예의가 따로 있겠는가. 하지만 제 집 안방을 손님에 내

주는 것은 그만큼 주인이 경순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여싿. 마루에 서서 건성건성 인사

가 오락가락하고 나서 두 사람은 체면 불구하고 남의 집 안방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부산을

떠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인이 몸소 개다리소반에 장국밥 두 그릇을 받쳐들고 탁주도 한병

얹어서 들여왔다. 허겁지겁 요기를 하는 두 사람을 이윽히 바라보던 주인장이 끝내 궁금증

을 못 이기겠던지,

"뭔일이여?"

물었고, 경순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사람을 죽였네."

"...?"

주인은 입에 물었던 곰방대를 얼결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경순이 피식 웃으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조금 있으면 발칵 뒤집힐 걸세."

이경순이 안성 사당패와 동행하여 당진 나갔던 일과 유필준과 노상에서 시비하던 일이며,

한밤중에 사당패들이 붙들려간 뒤에 혼자서 월장하여 사당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일 등을

대략 이야기하자 주인은 그 똥똥한 볼따구니를 더욱 부풀리고는 연신 문 밖으로 귀를 기울

여 보고는 하였다. 경순이 한번 더 다짐을 두었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행색으로 들른 일을 입 밖에 내지 말게. 내일쯤에는 아마 기찰포교

들이 안성 바닥에 쫙 깔릴 걸세."

"암 여부가 있겠나. 오늘밤 여기서 묵어 가시겠나?"

"하룻밤만 신세를 지세. 그리구 내일 식전에 떠날 테니 말 한필 내어주고, 안사람의 입성

과 장옷 한 벌만 마련해주게."

"헌데... 자네가 주구라는 걸 아는 자가 많은가?"

"고달근이네 식구들은 다 알지."

"달근이네 식구들이 잡혔다면 자네두 무사할 수는 없겠네. 그러니 내가 말 두 필을 내어

주고 우리 아이놈을 견마잡이루 딸려 보낼 테니, 자네는 선비 차림을 하고서 밤길을 떠나도

록 하게."

경순은 국밥을 떠넣고 있는 묘옥을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주인의 말이 가장 그럴 듯하

였으나, 묘옥이 노상에서 기진하여 쓰러질까 걱정이었다.

"글세 나 혼자라면 몰라두..."

묘옥이 벌써 이경수느이 마음을 짐작하고서 자신있게 말하였다.

"나으리 염려 마셔요. 아까는 허기가 져서 한 발짝두 걸을 것 같지 않더니, 이제 요기도

하였고 더구나 안장에 올라 길을 갈 터인데 무슨 걱정입니까."

"정말 괜찮겠느냐?"

", 지금 어서 떠나요."

주인이 그 말을 듣자 얼른 일어섰다.

"가만있게, 갈 채비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터이니 그동안 눈이나 붙여두게. 늦은 밤에

달이 뜰 게야. 그리구 나 잠깐 보세."

하면서 객주인이 이경순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마루로 나갔는데, 주인은 그의

귓전에 고개를 숙이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헌데 저 여자는 아마 사당인 모양인데, 자네 어쩌자구 저런 홧덩어리를 끌구 다니는가?"

"홧덩어리라니, 이 사람 무슨 말을 그따위루 하구 있나. 달근이네 사당으루 있었지만 그런

노류장화와는 다른 여잘세."

"다르긴 무에 달라. 계집이 사당패에 끼였으면 못해먹어두 색주가에서 굴렀을 텐데... 고작

저따위 계집에게 눈이 뒤집혀 몸을 망치려나? 내 자네가 청한다면 안성 색주가에게 내로라

하는 미인을 찝어다 바치겠네. 자네 자식 없어 걱정하는 건 잘 알지만 아주머니가 또한 보

통 성깔이신가. 만약에 자네가 저 계집을 데려가서 잠잠하다 하여도 소문이 날 것이요, 더구

나 처첩이 싸움질이라도 하게 되면 사당이라는둥, 안성서 왔다는둥, 고달근이의 계집이라는

, 별의별 소문이 꼬리를 물 걸세. 그러면 포교의 기찰에 들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닌가.

아예후환 없도록 계집에게 몇푼 주어서 저 갈 데루 보내게나."

"주인은 경순의 입장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으나, 그는 묘옥을 제신변의 위험 때문에 떼

친다는 일이 몹시 욕스럽게 생각되어 벌컥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런 것까지 생각해주어서 고맙지만, 말 두필이나 어서 구해주게나. 내 세마비는 두배를

물터이니."

"거참 얘기 못할 사람이로고! 두고 보게, 뒤에 가서 내 말이 생각날 걸세. 사내는 그저 계

집 조심해야 하느니..."

객주인이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중얼거렸으나, 이경순에게 지금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가 없었다. 경순은 다만 묘옥을 데리고 여주로 돌아가는 일이 가슴 뿌듯하도록 흐뭇하기만

한 것이었다.

늦은 밤이 되어 인근 동네에서 이따금씩 개 짖는 소리만이 들려올 즈음하여 길 채비가 되

었고, 경순과 묘옥은 초저녁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곧 양성 물상 객줏집을 나섰는데, 견마

잡힌 묘옥이 앞서 갔고 그뒤로 경순이 말을 타고 뒤를 따랐다. 이경순은 객점 주인이 원행

할 때 여로에 천시받지 않으려고 마련한 테 넓은 통영갓과 도포를 차려 입었고, 묘옥은 새

치마 저고리에 장옷까지 들쳐 써서 양가의 부인과도 같았다. 다만 좀 별스러운 것은 선비

양주가 밤길을 가는 점이었다. 반달이 때맞추어 중천 하늘에 엇비슷하게 걸려 있었는데,

마의 목에 걸린 쇠방울이 끊임없이 달그랑대고 있었다.

"얘야, 마상에서 눈이나 좀 붙여두어라. 음죽 가서 새벽잠을 잠깐 자고 나서, 내쳐 여주까

지 가려면 기력을 많이 남겨야 하느니라."

하는데 묘옥은 대답이 없고 그 대신에 마부가 돌아보며 안 체를 하였다.

"예서 육십 리니까 인시 전에 닿을 게유. 우리말이 이래보여두 한양까지 파발을 뛰던 말

이우. 타보는 손님마다 모두들 적토마에 비길 만하다 합지요. 북관 것이니, 어디 글방도령들

의 남방 나귀에 비기겠습니까요."

"듣구 보니 아마 역의 퇴마를 사들인 모양이구나."

"퇴마라닙쇼! 당치두 않습니다. 시방은 밤이라서 그렇지만 낮에 굽과 갈기를 살피시면 준

마라는 걸 한눈에 압지요."

마부의 말자랑은 과연 당연하진라 경순은 더 이상 오금을 박지 않고 모른 성해버렸다.

테 마부는 일단 입이 터지자 시키지 않은 것까지 참견하기 시작하였다.

"샌팀은 참 이상두 하십니다. 여주까지 가신다면 양성소 하루 푸근히 주무시고, 내일 식전

에 떠나면 까짓 세마두 내었겠다 한나절감인데 어찌 이 밤길을 가십니까."

경순은 속으로 뜨끔하였다. 세마는 그들이 자는 사에에 객점 주인이 중노미를 시켜서 시

오리 길인 안성에서 내온 것이었다. 그러니 양성 객주인의 주의를 준 바와 마찬가지로 입단

속을 아니하면 혹시 후환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견마를 잡았으면 고삐를 단단히 쥐고 마보나 살피어라."

경순이 점잖게 타일렀으나 마부는 깐간하였다.

"글세, 소인이 정수리에 쇠똥 떨어진 직후부터 견마꾼을 해먹었습니다만 이런 일은 처음

이올시다. 샌님뿐이라면 가내 급한 기별두 있겠다 싶지만, 아씨마님까지 동행이시니 더욱 그

렇습지요."

"외가에 초상이 났느니라."

경순은 울컥 솟으려는 역증을 참고서 대답하는데 마부가 다시 말하였따.

"샌님 댁이 그럼 여주가 아니올다그려?"

마부란 놈이 돌부리를 찼는지 주춤하는데 당겨진 고삐로 해서 말이 걸음을 흩뜨리면서 고

개를 뒤로 젖혔다. 마상에서 졸고 있던 묘옥이 소스라쳤고, 경순은 화가 치밀어서 호통을 쳤

.

"이놈, 그러다가 낙마하여 사람이 상하면 네 한 모가지로 감당하기 어려울 줄 알아라!"

마부가 경순에게서 호된 욕을 먹고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견마꾼이란 비록 하인배나

다름없는 천한 신세라 하니 남의 노적에 오른 자가 아니요, 더구나 별의별 손을 겪게 마련

인지라, 마부는 대개 세마낸 손님을 가벼이 알기가 십상이었다. 말깨나 탄다면 거의가 양반

행세인데 견마꾼은 그 언행으로 손님의 실지 신분을 꿰뚫게 되어 있었다. 갖은 무리들의 양

반 행세가 자심한 세월이니 그런 일을 소상히 아는 마부의 배포가 부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제 다시 보랴하는 심저응로 마부는 슬슬 능멸하고픈 간지가 돋기 시작하자, 골탕

먹일 근거를 하나 둘씩 들춰내기 시작하였다. 말하는 푼수로 보아 계집이 양가의 부인은 아

닌 것이 분명하고, 선비가 객점 주인과 하게를 놓으니 차림새는 그럴 듯하여도 상놈일시 분

명하였다. 따져보면 돈이 있달 뿐이지 자기와 다름없는 불상놈이 이놈 저놈 하는 게 고까위

서 견딜 도리가 없었다.

마부는 손목에 힘을 주고 고삐를 갑자기 잡아채었다. 아니나다를까, 재갈에 당겨진 아픔으

로 깜짝 놀란 말이 앞굽을 쳐들며 입을 틀었고, 묘옥은 보기 좋게 말에서떨어져버렸다. 경순

은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묘옥을 부축하였다.

"어디 다치지 않았느냐?"

기실 미리 꾀를 내어 저지른 노릇이라 말이 심하게 날뛴 것은 아니었으니, 사람이 깜짝

놀란 정도였다. 묘옥은 제 가슴을 내리쓸며 도리질을 해 보였다.

", 이놈의 말이 갑자기 암창이 나서 이러나?"

딴전을 펴는 마부의 덧덜미를 경순이 잡아당겼다.

"네 이놈! 내가 뭐라더냐... 마보를 살피랬더니 웬 고삐질이냐."

"어째 이러시우. 말이 성미 부린 게 어디 소인 탓입니까요."

뻣뻣하게 대꾸하는 짓거리가 하도 괘씸하여 경순은 마부의 궁둥이를 죽어라고 차올렸다.

마부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보자, 경순은 기왕에 내친 김이라 아예 죽여버리고 싶어서

안장께에 걸어두었던 돗자리로 말아 감춘 화승총을 그대로 뽑아서 후려치려고 번쩍 쳐들었

.

"나으리!"

뒤에서 묘옥이 허리를 감싸않았고, 마부는 두 팔을 쳐들어 휘젓고 싹싹 비벼대면서 애걸

하였다.

"에고 잘못되었소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샌님 한번만 용서하십시오."

경순은 씨근거리다가 자리에 싸감은 화승총을 슬그머니 내리고는 내뱉었다.

"샌님 소리 집어치워라. 이제 또 한번 그따위 심사를 보이면 아주 길에다 파묻고 갈 테

."

마부는 의외로 불한당처럼 본색을 드러내는 경순의 기세에 완전히 풀이 꺾여버렸다. 돼지

가 목청 때문에 백정 신명을 돋군다고, 순님 대접이나 해주며 모른 척하였다면 탈이 없을

것을 공연히 덧들여서 내놓고 상놈 짓거리로 들볶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경순은 화승총에 둘둘 말았던 자리를 풀어내고 장약과 연환을 재워 겨누고는 얼러

대었다.

"다시 고삐 장난하면 뒤통수에다 대추씨 박아준다."

힐끗 돌아다보니 그게 작대기가 아니라 틀림없는 총포였다. 마부 녀석, 말을 몰아 가면서

도 내내 뒤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털어낼 수가 없었고, 대개 견마잡이란 걸어가면서도 수시

로 조는 법이건만 눈딱지에 아교를 바른 듯하여 눈알까지 뻣뻣이 굳어버렸다.

이미 간교한 마음을 드러낸 자는 주먹으로 일시 고쳐졌다 하여도, 겉으로는 꾸미고 있으

되 속으로는 반심을 품고 약점을 노리는 것이 세간의 이치였다. 권문가의 종살이로 잔뼈가

굵은 놈이나 도회지의 돈맛들인 퇴기년들, 또는 양반만 타고 다니는 세마의 마부 같은 자들

이 그러하니, 밥이 때 지나면 쉬듯이 천한 자 나름의 순박한 본성이 닳아서 없어졌기 때문

이다. 따라서 종놈은 언제나 종놈임을 자랑하고, 갈보는 죽기까지 갈보로서 자족하며, 마부

는 말 부리기를 농군이 보습 대는 일보다 더 높이 여긴다. 권문가의 종놈이 주인보다 더욱

방자하여 양인은 물론 제 동무들에게는 특히 가혹하고, 풍상 겼은 퇴기일수록 동기의 정분

에 매정하며, 마부의 벽제 세도가 과하여 노중 행인에 행패가 자심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은

모름지기 사람이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하늘 아래 똑같다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제가 위로부터 겪은 수모를 남에게 되돌려서 제 신분을 더욱 굳히려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

이다. 그러니 애초에 제 신분을 정하여 수모를 준 쪽에 더욱더 이로울 뿐이며, 기실은 자기

와 같은 자들의 원수가 되고 마는 것이 고작이 아닌가.

그들은 견마잡이의 말대로 인시 무렵에 음죽에 닿게 되었다. 아직은 캄캄한데 봉미산 마

루턱 너머로 밤새 남아 있는 마을의 불빛들이 한두 점씩 깜박이고 있었다. 경순은 이미 저

지른 짓이 있는지라 말에서 내렸다. 마부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

.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하지만, 바꾸어 말하자면 발 있는 말을 데리고 사방 백여 리

를 뛰는 마부도 소문에는 뒤지지 않을 듯하였다. 경순이 묘옥을 안아 내린 뒤에 마부에게

고삐를 내어주며 말하였다.

"예까지 오느라구 수고 많았다. 삯은 양성서 모두 받았겠지."

마부는 아직도 겁을 집어먹고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러문입쇼. 여주까지 가시지 않습니까요."

"... 여주서 배를 타구 경강으로 올라갈 작정인데 이젠 말이 필요없다."

마부는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래두 사십 리는 가셔야 할 걸요. 모셔다 드립지요."

경순이 늘어뜨리고 있던 총포를 들어 배를 꾹 미렁대면서 나직하게 지껄였다.

"안 갈테?"

마부는 흠칫하더니 말을 끌고 재빨리 어둠속으로 멀어졌다. 잠시 후에 먼 곳에서 마부의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 쇠새끼야. 오살할 놈아... 내모를 줄 아느냐. 너 죄진 놈이지. 당장에 관가에 가서

일러바칠 테니 똥구녕에 불 달구 튀어라!"

경순은 입맛을 다시면서 어둠속을 노려보았다.

"죽여버릴 것을 잘못했군."

"나으리, 저이는 우리가 누군 줄 모르잖아요."

"글쎄다... 내일이라두 안성 바닭이 뒤집히면 저놈이 제일 먼저 달려가겠지. 양성 객점주가

닥달을 받겠지만, 그자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과객이라구 우길 테니까. 여하튼 조심해야겠

구나."

경순은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면서 묘옥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는 공연한 역증으로 서투른

짓을 저질렀다고 후회하였다. 그는 황승총을 겨눈 일이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고 생각했다.

음죽서 새벽잠을 자고 난 묘옥과 이경순은 정오쯤에 여주에 도착하였다. 여주에는 당도하

였지만, 남의 눈도 있고 하여 막바로 창골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창골에는 그의 사기전이 있었고, 분원은 월송골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집은 읍내 한가

운데인 창골 사기전 근처에 있으니 그가 묘옥이를 데리고 버젓한 양반 차림으로 들어갈 수

는 없는 일이었다.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겠으나 기이한 일이니 입방아에 오르게 될지도

몰랐다. 우선 갓과 도포를 벗어 던지고 이경순이 혼자서 월송골에 가볼 생각이었다. 경순은

묘옥을 산모퉁이 호젓한 숲속에다 앉혀놓고 혼자서 월송골로 내려가며 말하였다.

"예서 꼼짝 말구 기다리구 있거라. 내가 잠시 후에 사람을 보낼 테니까..."

제 염려는 마시구 나으리 어서 집에 먼저 들러보십시오. 부인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아니다, 내가 장삿길로 한양에 간 줄 알구 있으니 그러려니 할 게다. 며칠 있다가 서루

상면해보아라.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니라."

묘옥은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으리... 부탁입니다. 노자나 조금 주시면 배를 타구 한양으루 가구 싶어요. 제가 화근이

되면 뒤에 나으리께서 후회하실 겁니다."

경순은 길로 나가려다가 그런 얘기를 듣고는 안심이 안되는지 되돌아와서 묘옥의 두 어깨

를 잡았다. 그는 묘옥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말하였다.

"다시 그런 말 하지두 말구, 그런 마음은 아예 먹지두 말아라. 네가 한양엘 간다면 나두

가는 게고, 네가 떠돌면 나두 뒤따라 떠돌게 될게다. 이젠 네가 없으면 나는 파가해버리구

만다."

경순은 묘옥을 흔들면서 다짐하였다.

"부르러 올 때까지 예서 기다리겠느냐. 약속하지 않으면 나두 언제까지나 여기에 지키구

앉아 있겠다."

묘옥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내가 실인을 보내주랴?"

묘옥이 황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천만이올시다, 나으리! 절대루 그러시면 안됩니다. 제가 그댁의 신세를 하루 한나절 진다

하더라도 제 발로 찾아가 뵙고 인사를 드리는 게 법도입니다. 제발 그러지는 마셔요."

경순은 하는 수 없이 묘옥의 손을 잠아끌었다.

"까짓 거 나하구 함께 들어가자꾸나. 내가 언제 남의 눈치 보구 살았나."

묘옥이 뒤로 빼면서 애원조로 말하였다.

"시키는 대루 기다리겠습니다. 어서 혼자 내려가셔요."

"정말이냐?"

묘옥은 경순의 크게 부릅뜬 눈을 향하여 끄덕여 보였다.

"길어야 한 식경이다."

경순은 못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뛰어가싿. 월송골 이도장네 분원에는 가마가 다섯이나

되는데, 장인이 한 가마에 십여 명씩이었다. 번수 밑에 조기장이 있고, 연자매꾼, 흙 고르는

수비, 연정, 도자기 모양을 바로잡는 참역이 있고, 머리가마꾼과 조역과 환장이나 있으니 공

장에만도 오십여 인이 들끓는 셈이었다. 다시 들판에는 도자기에 잿물 올리고 말리느 자,

기를 처분하는자, 신재르 벌채하는자, 흙을 파고 나르는 자 등등으로 나뉘어 있으니 월송골

의 들판 곳곳에는 이도장네 사분원 일꾼들이 들끓는 셈이었다.

이경순은 공장으로 다가갔는데, 이쪽 저쪽에서 장인들이 꾸뻑이며 인사를 하였다. 번수가

뛰어나왔다.

"원주 어른 오셨습니까?"

"별일 없지?"

", 이번에 청화백자가 새루 나왔습니 . 토질이 좋아져서 이번 것은 아주 상품이올시

."

경순이 잡사기와 옹기는 수량만 대강 묻고는 납품해 가도록 하였으나, 백자는 일일이 가

져다가 채색도 보고 모앙도 따졌으니 번수가 그리 말한 것이었다. 사실 경순은 흙의 질과

신재의 종류와 불길을 둘러보면 대강 그릇이 잘 될 것인가 어떨까를 미리 집어낼 정도로 이

력이 생긴 도장이었다. 도장들은 경순이 장사치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가마를 지켰던 도한

출신이라서 그의 말이라면 모두 꼼짝 못하고 복종하였다. 경순은 다른 날처럼 가마가 일렬

로 늘어선 분원 앞마당을 일일이 들여다보거나, 안쪽의 조기, 마조, 화청을 하는 작업방으로

들어가지도 않고서,

"전생이, 어디 갔느냐?"

하고 물었다.

"저 뒷바 제 거처에 있을 겝니다. 얘들아, 누구 가서 외팔이 오라구 그래라."

번수가 일꾼을 보내니, 잠시후에 상투멀가 수세미처럼 흩어진 외눈에 외팔의 젊은이가 뛰

어왔다. 그가 바로 과천서 걸식하던 약장 출신이었는데 아마도 화약을 조제하다 왔는지 숯

검정이 옷의 사방에 묻어 있었다.

"원주님 오셨습니까?"

"그래 잘 있었느냐?"

"요번에 풀뭇간에서 쇠를 잘 다루어, 총신이 아주 좋은 놓으로 나왔습니다."

"당분간 네 작업방은 치워버리도록 하여라. 관의 기찰이 있게 될지두 모르겠다."

하고 나서 경순은 전생이의 소매를 끌고 가서 속삭였다.

"내 안성 다녀온 것을 아무도 모르겠지?"

"입 밖에 낸 적이 없으니까요."

"너 이길루 뛰어가서 박씨 과부를 좀 오라구 일러라. 그리구 월송동구 밖에 솔밭으로 가

보면 아낙이 하나 기다리구 있을 테니 얼른 데리구 박시 과부네루 가거라."

전생이가 신이 나서 들썩였다.

"기어이 모셔오셨군요."

"그래 너두 얼굴을 봐서 알겠구나."

"알다뿐입니까요. 제가 안성 행보를 두 번이나 했는뎁쇼. 그럼 먼저 박씨 과부를 이루루

보내놓고 나서 동구 밖에 나가겠습니다."

경순이 분원 앞에서 초조히 서성대고 있자니 살림하지 않는 일꾼들의 밥을 붙여주고 있는

박씨 과부가 그 뚱뚱한 몸을 흔들며 달려왔다. 그 여자는 한 오십쯤 먹었는데 언청이의 노

처녀인 딸 하나를 데리고 월송골로 들어와 남의 전답을 부치며 먹네 마네 하더니 경순의 후

의로 분원에 밥을 붙이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뒤로는 초가삼간이나마 두 채를 지어 늘려놓

, 일하는 계집아도 하나 들여서 아주 그럴 듯이 풍족한 살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처지

인지라 박씨 과부는 경순의 말이라면 머리털로 미투리를 삼으란다 하여도 들을 지경이었다.

"자네네 뒤채가 어찌... 좀 조용한가?"

다짜고짜로 물으니 박씨 과부는 영무을 몰라서 그 물음을 되씹어보았다.

"조용하다닙쇼?"

"우리 아이들이 게서 밥을 뭍여먹지 않나?"

"조용할 적두 있고 시끄러울 때도 있습지요. 저녁나절에 제일 시끄럽습니다. 술들을 마시

니까요."

"자네와 처지가 비슷한 여자루 혼자 사는 이가 있거든 천거하게."

박씨 과부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경순의 말에 불안해져서 입을 비쭉이 내밀었다.

"뭐하시게요? 쇤네가 무슨 잘못한 일이라두 있습니까?"

박씨 과부는 혹시 경순의 마음이 변하여 밥 붙ㅇ리기를 떨구려는 줄 알고 벌써 눈물이 글

썽해지는 것이었다. 경순은 그런 양을 알고서 빙그레 웃었다.

"자네가 잘못한 일이 뭐 있겠나. 내가 누굴 데려왔는데 잠깐 의탁시킬 데가 없어서 그러

."

"아유 그러시면 저희 건너방을 치울 테니 어서 모시구 오셔요."

"그 방은 우리 아이들이 몰려들어 술을 마시는 곳인데... 실은 사내가 아니라 여일일세."

박씨 과부는 멀뚱하더니 이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서 키릴거리며 끄덕였다.

", 이제 원주님 말씀을 알아들었소이다. 씨받이를 데려오셨구먼요. 진작 제게 부탁하시

면광주서 삼 대째 내려온 아낙을 불러왔을 텐데. 그러잖아두 아씨께서 말씀이 계셨습니다."

"수다 떨지 말게. 씨닫이가 아니여. 우선 자네 방에다 데려다 놓고서 저녁 전에 거처할 곳

을 주선해보게."

"한군데 있긴 있습니다. 고개 하나 넘어 연못골이라구 십여 채쯤 있는 외진 동네가 있는

, 저희 시숙이 살구 계십니다. 초가이지만 집두 깨끗하구 쓸모가 있습니다. 마침 전장이

멀어서 창골에 나가려구 하시는데, 그 집을 사시면 맞춤이겠습니다."

경순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연못골은 아주 조용하지. 잘되었다. 소문나지 않게 하여라. 내 수고비는 톡톡히 낼 테니

. 이사하려면 며칠쯤 걸릴까?"

"넉넉 잡고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이틀만 자네 안방에 두어두고..."

"암 여부가 있겠습니까."

"내가 창골에 나갔다가 저녁 뒤에 은밀히 들름세."

"뒤채가 좋겠습니다요. 제 오셔서 우리 딸년을 부르십시오."

박씨 과부는 분원 주인의 이렇게 막중하고 은말한 일을 맡게 되어 신이 났는지 연방 희죽

대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외팔이 전생이가 묘옥을 데리고 박씨 과부네 집으로 모셔갔고,

을 치워놓고 기다리던 과수댁 모녀는 정중히 모셨다. 묘옥은 양인의 안방에 드는 것이 황공

해서 여러번 사양하였느나, 모녀가 너무 정중하여 마다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새로 깐

자리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불안하기만 하였다. 밖에서는 과부가 신이 나서 인물평을 하는

,

"하유 조렇게 이쁜 각시를 어디서 업어왔을꼬. 우리 원주님이 사람 대하는 건 데면데면한

, 도타운 맛이 없지만서두 계집 후리는 재주는 또다른 모양이니 참 대장부이셔."

언청이 딸이 샘이 나서 주둥이를 내밀었다.

"... 미인은 박명이라는데, 복 없이 생겼더만."

"예끼 이년, 고런 방정맞은 소리 했단 봐라, 당장에 주둥아리를 꼬매놀라. 이년아, 원래가

귀부다남하는 상은 눈초리가 갸름하구 거위나 벼룩상이어야 하는데, 어깨는 둥글고 가슴이

두터우며... 가만있어 옷을 벅겨봐야 다 알겠구나."

경순은 창골로 나아가 제 집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앞의 사기전에는 그의 차인배들

이 안성으로 내보낼 짐들을 쌓아올리고 있었으며 경강에서 내려올 상인들과의 흥정이 한창

이었다. 그의 살림집은 사기전 뒤에 조촐하게 올린 기와집이었다. 계집 하인이 하나요, 늙고

젊은 하인이 각각 셋이엇다. 경순의 아내는 그가 서울서 도장 노릇을 다닐적에 번수의 소개

로 얻은 양인의 여자였느데, 성미가 온순하고 침착하긴 하였으되 고집이 세어서 그도 제 아

내를 꺾기가 힘이 들었다. 여주 내려와 처음 가마를 지을 때엔 아내가 조역이요 가마꾼이며

흙짐까지 지어 날랐다. 이경순의 아내는 그보다 다섯 살이나 위였으니 이제 폐경이 얼마 남

지 앟았건만 피가 고리지 못하여 태기가 있을 가망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마당에 섰던 하

녀 갑이가 안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마님, 원주님께서 오십니다."

안방 문이 급히 열리 서 초췌한 얼굴을 아내가 마루로 뛰어나왔다.

"아니 소리두 없이 불쑥 나갔다가, 이제 어디서 오시는 길이우.?"

", 그럴 일이 있었네."

경순이 마실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처럼 맨상투에 동저고리 바람인 것을 보자 아내는 더욱

기이한 모양이었다.

"아이고 그 주제가 무었이어요? 아주 볼이 움푹 꺼지셨구려. 얘야 병아리에 수삼하구 찹

쌀 넣어서 푹 고아 활개를 내어라."

"내 당신께 이를 말이 있소."

경순이 아내에게 침울하게 얘기를 꺼내자, 아내는 여자답게 눈을 흘기면서 방문을 열었다.

"저두 당신꼐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제 말씀을 먼저 들으셔야 해요."

경순의 아내는 양반댁 규수처럼 법도와 예절을 가려 꼭 막힌 부도를 차즌 아낙네가 아니

었고, 양인 나름의 활달한 성품에 말씨도 엇구수한 여자였다. 마주 앉자마자 경순이 말을 거

내기 전에 먼저 장죽을 끌어다가 물려주고 부시를 쳐주엇다. 경순의 아내는 말하였다.

"드릴 말씀이 꼭 두가지입니다."

경순은 안성으로부터 당진을 헤매고 돌아온 제 행동이 다소 미안하긴 하여서 고개를 숙이

고 아내의 말을 기다렷다.

"첫째는 송파나루에서 씨받이 처녀를 데려오겠단 것입니다. 그의 어미도 또한 아들을 넷

이나 낳아주었다는데, 이번에는 십팔세 먹은 딸이 씨받이로 나섰다는 거예요. 비록 처음이라

서 오백 냥을 주어야 하니 비싸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자손이 바른 집안에서 어쩔 도리가

있겠수? 택일하여 단자를 들입시다. 백면포루 경혈을 받아 그 색을 보면 아들을 밸 날짜를

안답니다. 합방한 뒤에 태기가 있으면 제가 뒷방에다 데리고 지내지요. 아들을 낳아주면 돈

을 주어 송파로 돌려보내면 됩니다. 저두 배를 싸안구 있을 테니, 남들이 알겠어요?"

경순은 묵묵부답 장죽만 빨고 앉았다.

"여보... 제 얘기 듣구 계셔요?"

"씨받이라..."

"그리구요, 유이방이 오셨었는데요, 이 골 사또를 통하여 공명첩을 사두라고요. 무관직이

라는데 선달이랍디다. 이제는 정말 아니꼬워 못 살겠어요. 우리를 드러내놓고 상놈 취급하는

이가 여주서는 없지마는, 그래두 생원네가 제게 또렷이 반말 지껄이는 것을 당신두 들으셨

지요?"

아내의 할 얘기란 전부터 가끔 경순을 졸라대던 일들에 관한 것이었다.

"내게 할 말이란 그건가?"

"제가 한두 번 말씀드렸나요."

경순의 아내는 이윽고 눈물이 글썽해지더니 배어나온 눈물을 옷고름으로 씻었다.

"제가 박덕하여 당신께 걱정만 끼쳐드려 미안해요. 후사가 걱정이시니 집에 들어오셔도

찬바람만 일지요? 이번 장삿길루 나가신 게 아니었으니, 아마 바람을 쏘이시러 나가셨겠지

. 집에서 재롱 부리는 아이라두 있으면 당신이 밖으로 떠돌겠어요? 출타하구 안 계신 동

안 저두 여러 가지루 생각이 많았습니다."

이경순도 돌이켜 생각하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또한 월송골에 데려다 둔 묘옥의 일로

더욱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무덤덤하게,

"내가 잘못했소."

라고 중얼거릴 분이었다.

"양자를 들인다는 것두 그렇지요. 애초에 제 핏줄이 아니면, 지각이 들어 입신하게 되면

자연히 정이 되돌아간다 합디다. 양자에 효자 없답디다."

경순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내가 도장 출신으로 무과도 안한 터에, 공명첩이나 사서 선달을 딴다는 것은 이 나이에

당치 않은 일이야. 비록 벼슬은 없으나 재물이 약간 있으니 양인으로서 분수에 맞는 일ㅇ이

, 남에게 책잡힐 일을 저지른 적두 없으니 공연한 능멸은 당하지 않아요. 신분을 고치기

위해 족보를 사는 장사치들이 많건마는, 제 조상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근원 없는 자를

만드는 짓일세. 그보다두 내가 당신과의 상의없이 저지른 일이 있으니 너그럽게 양해하겠

?"

경순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중에는 알게 될 일이고, 아내가 먼저 꺼낸

말이 아닌가.

"실은 내... 안성 다녀오는 길이오. 거기 가서 여자를 데려왔지."

"여자요...?"

", 묘옥이라구 사당을 하던 여자인데 성품이 착하니, 당신하구두 상하를 가려서 가도를

잘 지킬 게야."

아무리 먼저 말을 꺼낸 터였으나, 겨웃ㄴ의 아내로서는 충결이 아닐수 없었다. 씨받이라는

것은 생산해주고 돈냥을 받아가려는 짓이니 아들을 보자는 뚜렷한 목적이 있음이요, 정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낮는다는 말과 같이 아

무리 활달한 성품이라 하나 경순의 아내는 순간 가슴이 섬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당신의 마음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야. 하지만 당신은 내 조강지처가 아니요."

경순의 아내는 고개를 숙이고 치마 끝만 만지작거렸다. 남편이 안성까지 행보하여 몸소

데려온 여자. 사당이라니 남자를 후리는 것을 직업으로 하던 여자일 테고, 남편은 지금 그

치마폭에 정이 푹 들어 있을 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사당을..."

"사당이라 하나 진실한 마음이 있는 여자요. 당신의 부덕으로 친동기간같이 지내구려."

섭섭하고 돌림받은 듯한 괴로운 심정으로 앉았으나, 경순의아내는 제 남편 또한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식을 낳지 못하여 마흔이 넘도록 아이의 울음소리 한번

들려오지 않는 집구석을 얼마나 고적하게 느끼겠는가 싶었다.

"어디에 데려다 놓으셨습니까?"

"월송골 박씨 과부 집에..."

"어서 가셔서 데려오셔요."

아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경순에게 웃음을 보였다.

"가구는커녕 이불도 없을 테고 옷도 변변하ㅣ 없을 테니 얼마나 심란하겠습니까. 제가 데

려다 놓고, 하인들과 장만을 해놓겠어요. 저 뒷방을 도배두 해놓고 치장두 할 테니까요."

"당신이 그렇게 마음을 쓰니, 내가 더욱 면목이 없군. 당분간은 월송골서 지내도록 하지."

경순의 아내는 속으로 더욱 야속한 마음이 들었으나, 꾹 눌러 참고서 오히려 쾌활하게 말

하였다.

"아니... 제가 데려다 놓고 투기하여 못살게 굴까봐 걱정이셔요?"

"그런 게 아니여. 실은 앞으로 귀찮은 일이 있을지두 몰라서, 그애를 남의눈에 띄지 않도

록 하려는 게요."

"왜요... 그애의 거사가 몸값이라두 받으러 온답디까? 까짓 듬뿍 떼어 주시구려."

경순은 아내가 놀랄까 하여 당진서 화승총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몸값두 없구 서방 거사두 없는 아이니까 그런 것을 걱정한 게 아니라, 그애의 모가비가

죄를 지어 사당패들 모두를 관에서 잡으려 한다오. 당신두 당분간은 입 밖에 내지 말어."

경순의 아내는 잠시 앉았더니 장롱을 열고 비단과 무명 등속의 피륙을 꺼내어 펼쳐놓았고

패물함도 꺼냈다.

"소실 치레는 원래 큰댁이 해주어야 한답디다. 아무리 소문없이 한다더라도 격식이 잇는

법인데, 당신의 자식을 낳을 애를 그냥 벌거숭이루 데려올 수야 있겠어요. 내가 오늘 그애와

상면두 할 겸 의복 지를 옷감두 가져갈 겸 하여 월송골에 가봐야겠어요."

경순이 오늘은 그대로 호자 나가보고 싶었으나 이치가 그러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아따가 날이 저문 뒤에 같이 가보도록 허지."

밖에서 삼계탕이 들여졌다. 경순의 아내가 손을 담가 일일이 삼과고기를 찢어주었다. 경순

의 아내가 방물과 경대 등속을 보겠다고 나간뒤에 경순이 가게에서 올린 장부를 들취보며

손익을 따지고 앉았는데, 하녀가 퇴창 밖에 와서 고하였다.

"유이방 어른 오셨습니다."

기침소리와 이도장 계신가 하는 여주 이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순이 급히 마루로 뛰어

나가며,

"아이구 어서 오시게나."

하는데 비슷한 나이 또래의 유이방이 마당에 서 있었다. 원래 이방은 중인이지만 직책이

있어 장사치가 감히 말을 맞놓는 법이 아니었다. 하나 경순은 여주의 사분원을 경영하는 부

자이며 또한 사람됨이 공명정대하니 자연히 관청의 아전 소리들도 마구 대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유이방은 경순에게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언젠가 상납전에 차질이

생겨서 횡령죄로 탈직, 죽게 된 것을 경순이 대신 납부하여 구해준 일이 있고부터 친구지간

이 되었던 것이다. 장사치와 이방이 한통속임은 지방마다 흔한 일이었고, 팔이 안으로 굽는

다고 이방은 양반보다는 돈냥 있는 아랫신분 사람들게 통하게 마련이었다. 자연히 이방의

백성에 대한 횡포가 자심해지는 거도 사실이었으나, 유이방은 제법 하리의 요령을 아는 자

였다. 방안에 서로 좌정하자마자 유이방이 경순이게 물었다.

"이도장, 어디에 다녀왔나?"

"갑자기 그건 왜 묻나. 하두 답답해서 바람 좀 쐬구 왔지."

유이방은 경순의 말을 듣자 눈을 빛냈다.

"자네 당진 안갔었나?"

"당진이라? 글쎄 무슨 일루 그래. 이건 꼭 국문하듯 하는군."

유이방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사람아 나를 속일 생각은 말게. 나한테 숨김없이 말해주어야 수습이라두 해줄 게 아

닌가. 설마하니 내가 자네를 관에 고발하겠는가. 지금 각 고을마다 용모파기와 도적 잡으라

는 파발이 돌구 있네. 안성은 발칵 뒤집혔다네."

경순은 말을 꺼내고 싶었느나, 처음에 잡아뗀 바 있는지라 얼른 뒤집지는 못하고서,

"안성 적경이 있단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방은 고개를 저으면서 혀를 찼다.

"당진서 동지 댁을 돌입하여 재물을 탈취했던 도적들이 잡혔다네. 헌데... 안성 고뭣인가

하는 모가비가 그 조모인 모양일세. 그자들은 행방이 묘연하다는데, 총포를 가지구 있다는

걸세. 두 차례나 도적들이 그 댁을 돌입하였는데, 처음에 들어갔던 자가 하인 두 사람을 총

포루 쏘아 죽이고 잡혀 있던 사당을 빼내어 달아났다구 하데."

"허허, 안성 사당패를 잡아 족치면 되겠구먼. 내가 안성에 들른 적은 ㅇㅆ지만, 그런 소문

은 처음 들었는걸."

"내가 방금 당진과 안성 관아에서 돌린 기별을 접수하구, 짚이는 바있어서 오는 길일세."

경순은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밖을 향하여 외쳤다.

"얘들아, 술상 들여오너라. 술은 이방 어른 좋아하시는 송엽주로 하여라."

"딴전 부리지 말게. 나중에 안성에서 온 기별에 의하면 양성 객줏집을 거쳐온 남녀가 음

죽을 거쳐서 우리 고을로 들어왔다구 하데. 안성세 세마를 뛰는 마부 하나가 발고를 하엿다

. 청룡사 사당골을 뒤져서 남아 있던 거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는 중에, 그런 발고가 있었

다지. 총포를 가지고 있었고, 용모파기가 자네와 비숫하네. 그래두 나를 속일 터인가?"

경순이 묵묵부답인 중에 조촐한 술상이 들어왓고, 그는 상을 끌어 이방의 앞에 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천천히 술이나 마시면서 내 얘기를 함세."

"내가 빨리 았았으니 망정이지... 일가 구몰될 뻔하였네."

경순은 술을 따라 권하면서 안주를 집적거리고 잇다가 자심하고 말을 꺼냈다.

"실은 내가 안성 나갔다가 사당패와 동행하여 당진까지 갔었네."

하고 나서 경순은 일의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묘옥을 구해내ㅑ려고 담을 넘어 들어갔다가

부득이 하인 하나를 쏘아 상하게 하고, 다시 쫓아오는 자들 중에 하나를 쏘아 죽였다는 것,

그리고 항곶포까지 배를 타고 와서 양성 물상 객주에 들렀던 것, 마부와 시비를 하였을때,

화승총으로 협박했던 일들을 얘기하였다.

"이 사람아,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무엇이 부족하여 남의 재물이나 탐내는 도적질을 하겠

는가. 다만, 아들 하나 보았으면 원이 없어 보아 두었던 사당 아이를 데려오려던 걸세."

이방은 심히 못마땅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앉았다.

"하여튼 당분간 귀찮게 될 걸세. 자네 분원에서 화승총을 만들 수가 있음은 대개의 장사

치들이 아는 일이고, 자네 총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두 잘 알려져 있지. 더구나 도적의

일당으로 보이는 자가 여주로 들어왔다니, 잘못하다간 꼼짝없이 잡히구 마네."

"당분간 한양 올라가서 피했다가 잠잠해지면 돌아올까?"

"아니야, 아직 그 정도루 급박한 것은 아닐세. 고무엇인가 하는 모가비와 그 패거리들을

잡으려고 인근 고을이 법석댈 걸세. 그자들이 강도 살인을 했다니까. 사당패가 피할 만한 곳

을 알면 가르쳐 주게. 그자들만 잡히구 나면 자네 건은 곧 지워지구 말겠지."

"내가 어찌 아나. 나는 그저 좋아하는 아이를 빼내어 달아난 일뿐인데."

"그애가 지금 여기 있나?"

"아니... 월송골에 데려다 두었네."

"절대루 읍내 데려내올 생각 말구, 몇 달 동안 말 나지 않도록 숨겨두게. 내가 알아서 조

처할 터이니..."

"... 내가 후환을 염려하여 마부에게는 경강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가는 양을 하였네."

"잘했어. 나중에 누가 묻더라두 출타했던 시늉은 하지 말구 중병이 들었다구 소문을 내놓

구 집에서 꼼짝두 말게."

"오늠밤에 마누라하고 월송골 나가보기루 했는데..."

경순은 당분간 묘옥을 만나지 못할 것에 애가 달았고, 이방이 다시 혀를 끌끌 찼다.

"에이 쓸개 빠진 사람 같으니! 늦게 배운 도적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더니... 폭 빠졌군.

사람아, 시방 자네는 자칫하면 집안이 적몰되는 판이여. 저자에 모가지 잘리우구 싶어서 그

러는가. 잔소리 말구 잠잠해질 때까지 앓아 누워 있어. 월송골에는 내가 알려줄 때까지는 발

길도 하지 말구."

"허허, 분원 일이 있는데 누가 뭐라겠나."

"분원이나 둘러보면 괜찮게? 이제 자네 꼴을 보니, 분원에 갔다가 소실 못보면 생광증이

일어날 게 뻔하이."

경순은 심란한 김에 술잔을 연거푸 털어 붓는다.

"이방 나으리 분부대루 시행함세."

단단히 다짐을 준 여주 이방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아 나는 어서 가봐야겠네. 내가 이른 말 잊지 말게."

"여라가지루 걱정해주어 고마우이."

이방을 보낸 뒤에 경순은 마음이 몹시 울적하였다. 생각해보면 지난 십오년 동안을 여주

서 살아오면서 겪은 고생이 한갓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가산을 일으키려고 모든 욕심을

끊고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동분서주해온 세월이었다.

스물다섯에 한양을 떠나 적수공권으로 두 양주가 여주 땅에 발을 들였을 때, 그들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재물을 모아 자식에게는 천대받는 공장이 짓을 시키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것

이었다. 이제 그는 나이 사십의 중년이었고, 비록 약간의 재물을 모았다 하나 인생의 즐거운

기간을 다 소비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뭔가 이룩한 사람이 마음에 외로움이 깃들 적마다

흔히 그렇듯이, 경순은 자기가 애달캐달 쌓아놓은 재물이 모두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가짓... 관에 포촉되면 불을 싸지르구 산에나 들어갈까."

중얼거리면서 그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새로 살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묘옥을 통하여 귀여운  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였다.

묘옥은 박씨 과부네 안방에 누워 있었다. 사나흘 동안에 겹친 피로가 몰려와서 잠깐 눈을

붙였으나, 일꾼들이 바깥채에 몰려와서 술을 마시며 법석대는 통에 금방 깨아났다. 그녀의

심중에는 갖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자나갔다. 경순에게는 아무리 사당으로서의 해의라

고 하지만 몸을 한번 허락하였다. 그녀가 일부러 쉼게 몸을 허락한 것은 마음을 지키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흔히 색주가 창기나 사당들 중에는 처음 마음을 준 사내에게 바치는 절개

로서, 가슴에는 사내의 손이 범접을 못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언뜻 보아 쓸데없는 짓

같으나, 사람이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는 쓸데 없는 짓도 필요한 것이다. 가슴을 지킨다고 그

몸이 깨끗하랴마는 그런 작짐이라도 알고서는 사랑도 온전히 지켜질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도 살아갈 길이 없엇을 것이었따.

묘옥에게도 몸을 준다는 일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엇다. 흘러 내려가는 수초가 얹

혔던 바위들을 다시 만날 수 없음과 바찬가지로, 그녀와 몸을 섞은 숱한 사내들은 이제 여

러 부리가 하데 뭉쳐서 바람에 흩어진 연기처럼 기억 속에 가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

나 경순은 묘옥에게는 두렵고 송구스런 사람이었다. 이런 것을 팔자라고 하는지도 몰랏다.

그처럼 자기의 여생을 편안하고 생복하게 해줄 믿음직한 사내를 만났건만, 묘옥은 이런 복

이 자기에는 과분하다고 느겼다. 차리라 이경순이 피죽 한 그릇도 못 먹는 일에 찌든 남의

머슴이나 되었으면 싶었다. 묘옥이 겪은 세상의 풍파는 그녀로 하여금 행복에 익숙치 않도

록 만들었고, 따라서 자기보다 더욱 불행한 사내에게 뜨거운 정을 나눠주고 싶어하는 주제

넘은 여자로 만들었던 것이었다. 묘옥은 언젠가처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으나, 저도 무르게

탄식하였다.

"... 사람의 정이 이다지도 모질구나."

묘옥은 경순을 따라 여주까지 흘러온 것을 자꾸만 후회하는 것이었다. 밖에서 인기척 소

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빼꼼히 열렸다.

"주무시나...?"

박씨 과부가 고개를 들이밀엇고, 묘옥은 당황하여 일어나 앉았다.

"아이그... 그냥 누워 계시지 않구. 나는 심심하실까봐... 누워계슈."

"아니어요."

박씨 과부 보기에 심상한 양가의 여자는 아닌 듯싶었으나. 원주가 데려온 여자이니 작은

아씨 대접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박씨 과부는 산 너머 연못골에 나가서 자기 시숙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내일 이경순이 와서 돈만 치르면 집은 곧 비우도록 작정이 되었었다.

과부가 묘옥의 곁에 앉으며서 수다를 떨었다.

"방금 집을 보구 오는 길이우. 아유 복두 많으시지. 그래 어쩌다 우리 원주님처럼 잘난 사

내를 만나셨수. 재물이라면 여주서 제일 가는 부자요, 인물이라면 진사 생원 나리들보다두

덕망이 있지요. 게다가 마음은 또 얼마나 도량이 넓으시겠수. 좌우지간 잘 모셔드리슈. 아따,

거기서 아들만 낳으면 이 여주 바닥이 모두 자기 게유. 에이그참... 나두 지지리 복도 없는

년이지. 일찌감치 젊을 적에 팔자를 고치는 겐데."

묘옥은 고개를 숙이고 잠잠히 듣기만 하고 있었다.

"나두 저 계집아이 하나뿐인 줄 아시겠지만, 아들을 둘이나 낳아본 사람이우. 내 배를 앓

구 낳았지. 세상에 여탄가두 많지만, 이내 년의 기박함을 엮어보자면 동지섣달 한밤으로두

모자랄 게유."

박씨 과부는 오랜만에 이야기 상대를 만난데다가 젊은 색시가 초라한 꼴로 남의 소실 자

리를 바라고 찾아들엇으니, 자연히 제 사정이 돌이켜졌던 모양이었다.

"저년을 낳은 지 보름 만에 가장이랍시구 나뭇짐깨나 지던 우리 서방이 하룻밤새 급사를

했지 뭐유. 양식이 없어 끼니루 감자를 삶아드렸더니... 그날 하루 온종일 비를 맞구 와서는

그만 명치가 꼭 맥혀서 평위산 한첩 못 써보구 작고했수. 청동 화로 백탄숯에 논용 인삼을

끓인들 무얼 하겠어요, 명줄이 짧은데.. 하여튼지 그담부턴 죽기살기루 풀칠하며 살았는데,

참빗을 팔러 다니던 할멈이 날 찾아왔습디다. 큰 재물 생길 일이 났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

는 중이랍디다."

박씨 과부는 남부끄러워하지도 않고서 혼자 간직해오던 비밀을 털어 놓았다.

"내 그때에 송파나루서떡 팔구 있었는데, 쌀 스무 섬이라니 귀가 번쩍했수. 이천 만석꾼이

아들 하나만 낳아달라는 게요. 개가는 않을 작정이랬더니 세상모르게 아들만 낳아주고 나오

면 된답디다. 내가 재상가나 향족의 규수도 아니고 상년인 주제에 절개 따기게 됐수. 기살

얼굴이나 예뻤으면 후실이라두 들겠건만, 아주 박색이나 누가 데려다 괴이기나 하겠수. 까짓

거 흔계집이라, 애 하나만 낳아달라는데, 가을걷이 끝난 뒤에 무밭이나 진배없겠지. 뭐 흠이

가나 자리가 나나. 응락을 했수."

드디어 양자간에 합방일이 택일되어 단자가 들여졌다. 과부는 매파의 요구대로 월경서답

을 보냈고, 길을은 갑일이라고 정해졌다. 과부는 딸년을 매파에게 맡기고 간단한 보퉁이를

꾸려가지고 흰 소복 차림에 이천으로 갔었다.

"내 넉 달 동안 여섯 번이나 방사를 치렀건만, 애비의 얼굴을 자세히 본적이 없수. 경도가

끊기고 태기가 있습디다. 그댁 뒷방에서 노냥 누워서 열 달을 뒹굴엇지. 아들이지 뭐유.

프고 쓰렸으니 낳은 것은 분명한데 그댁 마님이 날래게 빼앗아가버려서 품안이 허전합디다.

정은 빨리 떼일수록 좋다나. 마님짜리는 내가 갇혀 지내는 동안 배에다 봇짐을 하나 싸매구

나다녔지. 나는 밤중에 쌀섬과 상목을 짊어진 일꾼이랑 그댁을 나왔수. 지금으로부터 십삼

년 전이니까 이젠 그 녀석두 많이 컸겠네..."

박씨 과부는 두 번째로 천안 가서 아들을 낳아주었지만, 아무래도 첫 아이가 생각이 나서

견다질 못하겠더라는 얘기였다.

"내작년에 내가 하두 보고 싶어서 이천으로 가보았수. 서당 앞에 가서 기다리다가 누가

풍헌 댁 도련님이냐구 물었더니 총명하게 생긴 글방도령이 쫄랑거리며서 나오더니만, 글세

신통두 하지, 사추리가 쥐가 나듯이 찌릿하더라니까. 한눈에 척 알아보겠습디다. 내 새끼로

구나 하면서 딴맘으로는 범접이 안되잖아. 죄 때문이우. 떼친 죄 말이우. 고 말간 눈알을 보

니깐 사지가 후둘거리구... 나두 모르는 새 돌아섰지요. 저만큼 갔다가 그냥 가버리긴 너무

서러워서 돌아다 봤더니 아 요것이 쫄랑대면서 쫓아오더니만... 아주머니는 누구십니까 그러

겠지."

묘옥은 어느덧 박씨 과부의 얘기에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글썽해진 눈으로 쉴새없

이 과부의 표정을 더듬고 있었다.

"처음엔 말문이 막혀서 아뭇소리두 안 나옵디다. 헌데 우리 도령이 재차 누구시냐구, 어째

서 날 찾았냐구, 묻질 않겠수 속으로는 요 맹추야 내가 니 에미여 하고 싶었지만 그냥 두

손을 잡아주고 말았지.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흘러내리더만. 쇤네는 도련님의 유모올시다

했지. 차마 그냥 돌아설 수가 있어야지. 등에다 업구서 이천장으루 나갓어요. 장규경두 하구.

호박엿두 사멕이구, 장국두 사줬지요. 어스름해졌는데. 그날 풍헌 댁에서 난리가 났지. 모두

들 찾아 나섰다가 글방 접장놈이 웬 여인네가 와서 업어 갔다구 했으니 궈한 아들 잃은 줄

알고 장바닥을 뒤졌지요. 피가 무섭습디다. 우리 도령이 유모, 유모 하면서 어지나 따르는지

정말 맘 같아선 그 길루 들쳐없구 송파루 달아나구 싶더라니까.

"도련님 이젠 집으루 가셔야 합니다."

그랬더니,

"유모 같이 가서 나하구 살아. 내가 아버님께 여쭈어서 꼭 같아 살도록 할 테야."

한단 말이에요.

안됩니다. 쇤네가 그 댁에 죄를 지어서 들켰다간 혼이 납니다. 도련님, 대에 가시더라두

아예 유모 얘기는 꺼내지두 마십시오. 쇤네가 동구 밖까지 바래다 드릴 테니 가시거든 글

많이 배우셔서 높은 선비님이 되십시오.

그렇게 달래면서 파장을 나서는데 그만 풍헌 댁 하인배들과 딱 마주 치구 말았지 뭐유.

그 길루 잡혀갔지. 장관 깊숙이 갇혔다가 큰마나님이 내놓고는, 매를 치며 문초를 합디다.

네년이 언감생심 행하까지 받아 처먹고서 이제 와서는 이미 족보에 오른 남의 장손을 빼

가려는 게 아니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서 연못에 처넣구 말 테다. 이년 네 자식이라는 증

거가 어디에 있느냐?

아주 반죽음이 되어서 쓰러져 있는데 풍헌이 광문을 열구 들어섭디다. 그제서야 얼굴을

똑똑히 봤지요. 정자관을 쓰고 긴 수염에 눈이 부리부리한 양반이 썩 잘생겼습디다. 그냥 엎

드려서 가죽신 코에 얼굴을 대구 말했지요. 기른 정이 깊다 하나, 낳은 정 또한 하늘도 가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인데, 에미 된 년으로서 제 자식의 성장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년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으리, 잘못이 제게 있다 하나, 도련님을 보셔서 이 불쌍한 년을 살려주

십시오.

풍헌은 뒷짐을 지고 아무 말 없이 섰더니,

아들을 낳아주어서 늘 자네에게 감사하고 있네. 그러나 이것이 모두 내 혼자만의 일이 아

니고, 가문의 일족들이 관계된 일일세. 자네가 낳았지만, 자네 아이가 아니야. 이런 소문이

밖으로 나가면 자네가 제 자식놈의 전정을 스스로 그르치게 되는 게야. 어서 돌아가서 다시

는 이 근처에 얼슨두 말게. 안에서는 자네를 해칠려구 하는 모양인데, 내가 자식늠을 생각하

, 자네가 가긍하여 나왔네.

하시더니 하인 하나를 불러 지게에 태우고 내보내더군. 돈두 오십 냥이나 받았지. 나는 돌

아오는 길루 송파나루를 떠났수. 에이그... 참 미친년의 팔자두 다있지. 이년의 팔자에 비기

면 거기는 정말 싸리울 아래 위리 팔자유."

묘옥은 따뜻한 시선으로 박씨 과부를 건너다보았다. 박시 과부는 방문을 열고 코를 풀었

.

그러다가 그녀는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아니 아씨께서..."

"왜 나는 올 데가 못되나?"

하는 목소리가 들리며, 이경순의 아내가 마루로 올라섰다. 박씨 과부는 당황하여 함께 일

어서는 묘옥에게 눈을 껌벅하면서 혀를 쑥 내밀어 보였다.

"이리 들여놓아라."

경순의 처는 데리고 온 하녀에게 이르고서 방안으로 들어섰으며, 하녀는 보퉁이를 내려놓

았다. 경순의 처가 상석에 앉더니 고개를 숙이고 섰는 묘옥을 올려다 보면서 말하였다.

"자네가 우리 어른을 따라온 묘옥인가? 나는 이도장 나으리의 안사람일세."

묘옥의 곁에 섰던 박씨 과부가 쿡쿡 찔러대며,

"어여 인사드리시우. 아유... 아씨께서 이런 일이라두 있으니, 저희 누추한 집엘 다 오시게

되는군요."

묘옥은 난처했으나 곧 자세를 가다듬고 큰절을 얌전하게 올렸다. 경순의 처가 인사하는

양을 찬찬히 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닥친 일아라 내가 별로 준비를 못하였네.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두 창골 본

가루 자넬 데려가구 싶지만 그럴 사정이 아닌 모양이나 피차에 딱한 노릇일세."

", 그러믄입쇼."

경순의 처는 곁눈으로 앉은 박씨 과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과수댁은 좀 나가 있지. 그리구... 너두 나가서 기다려라.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느니라."

박씨 과부와 하녀가 곧 방문을 열고 나갔다. 경순의 처가 묘옥의 손을 잡아 이끌면서 다

정하게 말하였다.

"이리 가까이 앉게. 과연 나으리가 반하실 만두 하겠구먼."

묘옥은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엇다. 경순이 오게 되면 자기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털어

놓고 안성이든지 어디로든 떠날 생각을 했던 묘옥이었다. 이제 그의 아내가 몸소 찾아와 가

형과 같은 태를 보이니 더욱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았다.

"제가 먼저 찾아뵙구 인사를 올려야 도리인데... 송구스럽습니다."

"아닐세. 도리는 무슨, 다 형편 돌아가는 대루 하는 게 도리이지. 관재가 있다는 걸 나두

알구 있네. 자네두 집안 사정을 나으리께 들어서 잘 알겠지만, 우리가 이 나이가 되도록 자

식을 못 보았네. 나는 그저 자네만 믿구 있어. 아무리 우리가 처첩지간이라 하나 다 집안이

화목하야 복두 있으니까 서루 의논해거며 함께 지내세."

"아니어요... 저는 도장 나으리를 모실 만한 계집이 못됩니다."

", 그이가 자네께 섭섭하게 하시던가.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들진 않아선가?"

묘옥은 대답을 망설이니, 경순의 처는 겸양의 말이거니 하여 잡고 있던 묘옥의 손등을 가

볍게 두드렸다.

"속마음이야 어느 여편게가 젊은댁을 투기하지 않겟나. 나두 자네를 대하지 않았을 젠 나

으리가 어쩐지 야속하기두 하구, 마음이 켕기기두 하데그려. 그저 세상에서는 처첩을 견원지

간이나 되듯이 말하지만, 그게 사람 나름일세. 나두 자네 같은 아우가 생겨서 훨씬 든든하

."

묘옥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서 경순의 아내를 보라보았다. 부가옹의 마누라답게 덕이 있

게 펑퍼짐한 턱이며 가느다란 눈과 입술이 도톰한 것이 푸근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저는 안성 청룡사 사당골에 있던 사당이옵니다."

묘옥의 말에 이도장댁은 놀라지 않았따.

"알구 잇네. 들어낮아 살림을 할 사람인데 전신이야 아무려면 어떻다든가. 우리 식구;끼리

만 알구 차후로는 그런 말은 덮어두세."

"저는 임자가 있는 몸입니다. 나으리와 아씨께 이렇게 두터운 은혜를 입고 있지만는, 저는

내일이라두 당장 여기를 떠나야만 합니다."

경순의 처는 묘옥의 손을 놓고 물러나 앉았다.

"임자가 있다니..."

"도장 나으리께 몸을 의탁한다 하여도 마음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든 거사라두 있는가?"

"더 묻지 마십시오."

도장댁은 묘옥에게 무슨 사연이 있다 싶어서 궁금한 중에도 웬일인지 답답하던 가슴이 풀

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여자는 자기 남편 이경순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

, 남편의 태도로 보아 깊이 정이 들어버린 모양인즉, 자기의 아내로서 남편의 마음으로 이

여자를 대하리라고 생각을 고쳐 먹은 경순의 아내였다.

"사당으로 흘러다녔다면 그 고생이 오죽하였겠나. 이제부터 아예 마음을 달리 먹고 우리

셋이 오순도순 살아보세나. 사실 우리 주인 어른만큼 자상하시구 착한 사내가 드물 게야."

", 도장 나으리는 훌륭한 어른이십니다. 그리구 아씨는 더욱 훌륭하십니다. 제가 떠날

제 떠나더라두 두 분 후의는 절대 잊지 않겠어요."

"가긴... 어딜 가나. 여기가 자네 고향이구, 우리가 모두 자네 식구인데."

이도장댁은 묘옥의 마음을 엿보고 속으로 안심이 되엇따. 사당이라 하나 화냥기도 없었고,

그 순박함이 꼭 나물바구니 끼고 들에 나온 시골 처자에 비길 만하였다. 눈가에 어른 푸르

죽죽한 그늘만 없다면, 그 여자가 거친 세파를 겪은 흔적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아직 정을

붙이지 못하여 공연히 서먹서먹 해하지만, 자기라두 자주 찾아다니며 안돈을 시키노라면 작

은댁으로서 이만한 여자가 없을 것이었다.

"내가 창황중에 급히 옷감 몇가지 끊어왔네. 그리구 보약두 가져왔으니 식전마다 달여서

먹게. 나으리께선 오늘 못 오신다구... 며칠간 못 오시더라두 전생이를 시켜서 거처두 정해주

고 살림두 장만해주신다대."

경순의 아내는 일어섰다. 박씨 과부를 불러서 연못골의 집에 관해 묻고, 옷감과 약재를 가

져왔으니 바늘품을 얻어 옷도 짓고 약을 달여 먹이라 부탁하였다. 묘옥은 마당 밖에까지 나

가서 배웅 인사를 올리고 돌아섰다.

"하여간에 복두 많으시우. 큰댁 마음 씀씀이가 저만하면, 대궐마마두 부러울 게 없겠수.

부잣집 마나님이 되는데는 다 그럴 까닭이 있는 모양이지."

과수댁이 혀를 차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바깥채의 토방에서는 장인들이 투전이라도 벌이

는지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경순은 연못골에 보아둔 박씨 과부네 시숙의 집을 사서 묘옥을 안돈 시키려고 했으나 사

정이 달라져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궂은비가 주룩주룩 내리공  었다. 그는 가게에 나가지 않고, 전날 물건을 하러

와서 비 때무에 유숙한 삼전나루의 객주인 사내와 장기를 겨루고 있었다. 오후쯤에 비가 개

면 아무도 모르게 슬쩍 나가서 월송골에 있는 묘옥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사흘이나 미뤄왔

으니, 애가 달아 견딜 재간이 없었다.

"이 사람, 뭘 하나 포장이여!"

"압다 궁을 틀면 그만이지..."

"그뿐이가, 이번엔 차 들어가네."

경순이 딴 생각에 골몰한 동안에 판국은 어느덧 몰려 있었다.

"허허, 양수겸장일세."

"어때 물려줄까?"

"그만두어. 좀 생각해보구."

"어디 뒷간 다녀올라나. 장기 두는 사람 고택골 갔군."

"넨장맞을... , 담배 한죽 태울 시간은 줘야지. 무슨 놈의 장기가 타작마당에 쌀려 날아

다니듯 촐싹거린담."

경순은 장죽을 당겨 부시를 치고 뻐금대는데, 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 양성에서 사람이 왔답니다."

경순은 장기판에 골몰하면서, 그저 물건 떼러 왔겠거니만 여기고 점원에게 데려가도록 말

하였다.

"그래... 손서방 나와보라구 해라."

하고 나서 언뜻 되새김질하니 양성이라고 했겠다. 그는 얼른 곁창을 열고 내다보았다.

"아니... 네가 웬일이냐?"

도롱이를 둘러쓰고 삿갓을 쓴 총각놈이 빗속에 서 있는데 양성 객줏집의 중노미였다.

"도장 나으리, 큰탈났습니다."

경순은 마루로 나와서 그애를 데리고 급히 건넌방에 들어가 앉았다.

"아이구 나 죽네... 반새껏 걸어왔더니 우선 시장해서 못 견디겠수."

"그래, 무슨 일이 생겼느냐?"

"말씀 마십시오. 우리 주인 어른께서 어제 안성 관가에 끌려가 경을 치구 나오셨습니다.

안성은 시방 발칵 뒤집혔어요. 청룡사 사당패는 모두 출행 나가고 한 대가 남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초주검이 되었습죠. 당진서 유치옥이라는 동지 벼슬 사는 사람이 도둑 하나 잡는

데 백냥씩 걸었답니다."

경순은 험악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게 무슨 상관이길래, 날 찾아왔느냐?"

"어라... 도장 나으리가 모르시면 누가 알겠습니까? 그날 제가 안성 나가서 마부하고 말

한 필을 세내어왔지요. 그러데 그 마부란 놈이, 도둑의 일당으로 보이는 놈을 저희 객주에서

소개받아 음죽까지 태워줬다고 발고를 했습니다. 저희 주인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

아떼면서 지나친는 과객을 어찌 일일이 알겠느냐구 우겼다지요. 곤장 십 도를 맞구 나오셨

습니다. 저희 주인 말이 나읠가 지금 포착되시면 피차에 관재를 입을 것이니 잠간 피하라구

그러십디다. 어디 한양 유람이라두 다녀오시지요."

경순은 이미 여주 이방에게서 경고를 받은 바 있으므로 그리 놀라지는 않았느나, 무엇보

다도 월송골 분원 밥집인 박씨 과부네 집에 숨어있는 묘옥의 거취가 걱정이었다. 여러 사람

들이 드나드는 곳이나 언제 남의 눈에 띄어서 입에 오르내리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수고가 많았다. 점원들 방에 가서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돌아가거라."

"저희 줜어른께서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경순은 그에게 요기를 시키도록 해주고, 안채로 들어갔다. 경순의 처는 노파를 데리고 이

불을 꾸미는 중이었다.

"잘 오셨어요. 어디 이 용봉단 무늬가 마음에 드셔요? 햇솜을 넣니 얼마나 폭신한지 꼭

암평아리 가슴 같다니까. 이것만 시치면 다 끝나요."

"할 얘기가 있는데..."

"에그 이런 눈치 봤나. 내 얼른 자리를 피한다 하면서두..."

노파가 말과는 달리 눈치 빠르게 일어섰다.

"어디 가지 마시구 부엌에나 갔다 오우. 점심으루 닭 고음국에 국수를 말아드릴게."

경순의 아내가 그렇게 외친 뒤 바느질 손을 멈추지 않고,

"왜요.. 당신이 가보시게? 내 그럴 줄 알구 아예 나갈 작정을 안하았다니까. 얼마나 애간

장이 타시겠수."

하며 눈을 흘기었다.

"내가 좀 바쁜 일이 생겨서 월송골에는 못나가게 될 것 같으니... 당신이 가서 앞 뒤 살펴

가며 잘 선처하시게. 연못골 집은 팔십 냥이면 충분하니 그 이상은 주지 말구. 가구 따위는

나중에 옮기도록 하오. 그리구 어쩌면 오늘 이방을 만나보고 어디 원행을 하게 될지두 모르

겠는데."

경순의 아내는 비로서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일손을 멈추었다.

"당신 무슨 일이 생겼구려? 어딜 도 나가신다구 그려셔요?"

", 경주인 이나 만나구 올까 하구."

"그야 손서방을 시켜두 되잖아요."

"... 총포 치워놨지?"

", 장롱에다 깊이 넣어두었어요."

경순이 말없이 돌아서 나오는데, 아내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고 곧 뒤 쫓아 난왔다. 마침 하

녀가 마당을 건너오고 있었다.

"나의리,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

하면서 경순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사랑채 툇마루에 비를 피하여 걸터앉은 양반 차림의

사내와종자로 보이는 젊은이가 서 있었다. 비록 갓에 도포를 걸쳤으나 그 태가 부드러운 서

생이기보다는, 광대뼈며 날카로운 눈빛이 왈짜깨나 부릴 만하였다. 그가 마당을 질러가자 마

루에 앉았던 손이 슬며서 일어났다. 경순은 한누에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상대가 쏘아보면서 되물었다.

"주인장 되시우?"

"그렇소."

"댁이 이경순이란 사람이우?"

경순은 뒤에 걱정스런 빛으로 서 있는 아내를 힐끗 돌아보고 나서 이번에는 정중하게 물

었다.

"제가 이서방인데... 손님께선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들 두 주종 차림의 사내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였다.

"우리가 어디서 왔을 거 같수?"

허허, 거래가 처음이신 모양인데... 가게루 가십시다."

경순이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대문 쪽으로 나가려는 몸짓을 했는데, 손님의

손이 어깨에 얹혀졌다.

"사기 나부랭이나 사러온 게 아니여."

별안간 반말지거리가 튀어나오고 손님은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가 꺼낸 것은 통부였다.

"우린 상성서 왔는데, 거리를 잡으러 왔지."

하자마자 다른 자가 붉은 오라를 경순의 몸에 지우려고 하였다. 경순은 소스라쳐서 몸을

틀어 빼면서,

"아니... 무슨 죄가 있다구 이러시우?"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가보면 아네. 우리는 양성 객줏집을 기찰하구 있다가 저 아이놈의

뒤를 밟아 따라왔지. 계집을 데리구 항곶포에서 내려 객주에 들렀다가 세마를 타구 왔지?"

경순이 우물쭈물하는데 그들은 잽싸게 결박을 해버렸다. 경순의 아내가 맨발로 달려 내려

와 포교의 소매를 잡으며 울부짖었다.

"나으리, 왜 이러십니까. 저희 주인이 무슨 죄를 지었기로 잡아가셔요."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거기 서방께 물어보라구. 이놈은 장진서 작당하여 사람을 죽인 도

적의 패거리란 말야. 얘야, 가자?"

평복한 포교와 포졸은 경순을 당기고 끌면서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의 아내가 쫓아나오

자 경순이 다급하게 말하였다.

"관가루 달려가서 이방에게 알려요."

경순의 아내는 그제서야 생각이 닿아 안으로쫓아들아와 하인들에게 일렀다. 하나는 괄가

로 가고, 다른 하나는 이방의 집으로 뛰어나갔다. 경순이 잡혀 나갈 때 삽시간에 소문이 퍼

져서 사람들이 하얗게 몰려들었다. 경순은 손을 뒤로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걸었다.

포교가 물었다.

"계집은 어디 있지?"

"무슨 계집 말이오?"

"속여봤자 쓸데없네. 마부가 자네 얼굴을 안단 말야."

"누가 나를 알든간에 나는 당진서 나갔던 일이 없소이다."

"허허, 당진 사공과 안성 마부가 함께 발고를 하여, 앞과 뒤가 꼭 들어맞는 터에 우리는

뭐 말뚝이나 장승인줄 아는가. 자네 안성, 청룡 사당골에두 드나들었다며?"

"모를 일이오."

경순은 더 이상 대꾸를 않기로 하였다. 대꾸를 해보았자 불리한 이야기만 더 나올 듯하였

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창골서 나와 음죽 가는 길로 여러 마장을 내려왔는데,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멈추시오!"

그들이 뒤돌아보니, 더그레 군봅 차림의 여주 장교 하나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다짜

고짜로 경순의 결박을 잡으면서 말하였다.

"누구 맘대루 죄인을 포착하여 데려가라구 했소. 이 사람은 우리 관내의 소관이니, 일단

우리에게 와서 알려주기라도 해야 할텐데, 이럴 수가 있소?"

"여보시우, 나는 통부를 가진 기찰포교외다. 도적을 잡는데 일일이 쫓아다니며 보고를 햐

야 하오?"

"만일 이자가 도적이라면, 우리 고을 사람이니 우리가 데려가야겠소."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잇는데, 뒤이어 이방이 달려왔다. 그는 말위에 탄 채로 말하였다.

"우리 고을의 양민을 잡아가는데, 이런 법이 없소. 우리 사또의 분부로 나왔는데 죄인을

곧 여주 관아로 압송해 오시오."

고을 이방과 장교가 나와서 따져대니 그들도 어쩔 수 없는지 발길을 돌려 다시 여주로 돌

아갔다. 경순은 일단 마음이 놓였다.

"내가 여태껏 심기가 불편하여 한번도 출타한 일이 없거늘 어느 겨를에 당진엘 나갔겠

."

경순은 태연하게 꾸며대었다. 안성 포교가 보아하니, 이방과 장교가 몸소 쫓아나와 제지하

는 것으로 보아 비록 몸이 상놈이기는 하나 지방의 권가임에 틀림없었다. 안성 포교는 아까

보다는 훨씬 기세가 누그러져서 중얼거렸다.

"내 어찌 알우? 마부란 자가 발고를 하였는데 양성 갯줏집서 두 연놈을 태우고 음죽까지

나갔는데, 화승총으로 협박을 당했다구 하데. 당진 도적이 총포로 사람을 살상하였고, 그날

새벽에 나룻배로 항곶포까지 태워다 주었던 사공이 적발되었수. 그 도적이 계집을 데리고

음죽까지 와서 여주로 향했다 하는데, 마침 양성 객줏집 아이가 이라로 오게 되어 댁네를

포착하게 된 게요."

"허허, 딱하기두 하십니다. 객줏집 아이가 내게 온 것은을 잇는 일이고, 또한 물상 객주와

공장이가 오삭가삭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 도적이 여주서 배를 타고 경강으로 올

라갔는지두 모르지 않소. 공연히 죄없는 사람을 포박하여 끌고 가니, 우리 사또께서 아시면

좀 시끄러울 거외다."

경순이 은근히 오금을 박아주는데, 포교의 생각에도 자기가 좀 성급하지 않았는가 하는

감이 없지 않았다. 더구나 안성은 일게 군수요, 여주는 경기 삼목의하나이 ㄴ정삼품 목사직

이나, 여주서 문제를 삼아 질책하면 제 나름대로 자신만만하여 달려들었던 포교로서도 뒤가

몹시 켕기는 일이엇던 것이다.

"좌우지간에 발고한 마부놈을 데려다 대면을 시킬 수도 있고, 당진 사공을 그리할 수가

있으니 너무 노여워 마시게."

그제서야 묵묵히 말에 앉아 가던 여주 이방이 태도를 바꾸었다.

"그렇게 경솔하여 무슨 장교 노릇을 하며, 아랫걸들을 어찌 부리는고. 하여튼 상청에 당도

하여 따질 일이로되, 관건에는 순서와 법도가 있은즉 우리 고을의 양민을 아무 통기 없이

마음대로 잡아가는 것은 관장을 능욕한 죄여."

관장을 능욕했다니, 단매에 때려 죽여 삼문 밖에 내치게 되는 중죄이니 포교는 이제 반대

입장이 되었다.

"아니오. 우선 도적을 잡는다는 마음이 급하여 잡아다가 대면을 시키고 나서 차후 계를

드릴까 하였을 뿐입니다."

경순이 팔꿈치를 날개처럼 흔드럭리면서 재촉하였다.

"여보, 이 결박 푸시오. 청천 백주에 달아날 사람이 아니외다."

"풀어드려라."

포교가 지시하니 포졸은 황급히 오라를 풀어버린다. 그들은 창리 탑거리를 지나 관아로

들어갔다. 통인을 시켜서 상방에 사연을 아뢰고 댓돌 아래 부복하여 사또 듭시기를 기다리

는데, 점심을 들던 목사는 경순이 억울하게 잡혀갈 뻔했다는 이방의 전갈만 듣고 급히 동헌

으로 나왔다. 이방은 마루 곁에 부복하여 서 있었고, 안성 포교와 포졸과 이경순은 댓돌 아

래 엎드려 예를 올렸다. 목사가 여주 분원장 이경순을 모를 리 없엇다. 그의 신연 때에도 거

마비를 듬뿍 내었고, 관에 행사가 있을 적마다 적지 않은 전곡을 내었으니 목사에게는 매우

중요한 백성인 셈이엇다. 목사가 좌기하고 문초할 일이건만 집장 사령 군노 하나 거느리지

않고서 한가히 장죽을 입에 물고 통이이 부시를 붙여준 담배를 빨았다.

"내가 듣자하니 안성 군수의 처사라 몹시 가볍구나. 며칠 전에 회람과 용모파기를 보았은

, 당진과 안성에 적경이 있단 것은 알구 있다. 헌데 막연한 심증으로 우리 고을의 양민을

잡아가고 연후에 민원이 있다면, 내가 수령이로서 실덕을 하게 될 일이다. 포교는 전후 사정

을 아뢰어라."

이방이 곁에서 복창하며 다그쳤다.

"어서 아뢰랍신다."

"... 음죽까지 도적을 태워다 주었다는 마부가 발고를 하여 양성 객점주가 장형 문초를

당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내통이 있을 듯하여 객줏집을 기찰하다가 중노미의 뒤를 밟아 이

사람 집으로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하면 객점주가 장사일로 가게 되는 공장이나 집아니 물주인 집에는 모두 쫓아가서

잡을 터이냐?"

"아니... 그런 게 아니오라 다만 음죽서 여주까지가 지척이오라..."

"이런 어리석은 놈을 봤나. 음죽서 지척인 곳이 비단 우리 고을뿐이더냐. 이천도 있고 죽

산 양지 고을도 있다. 더구나 위로는 경강이요, 동으로 원주, 제천 충주, 청풍이니 제 도적

잡늗다는 짓이 마치 바닷가에서 자갈 고르듯 하는구나. 그리고 발고했다는 놈도 마찬가지니

. 아무리 총포가 있다 하나 도적놈이 제 얼굴에 써가지고 다닌다더냐."

포교 듣자하니 둘러댈 말이 없었다. 속셈으로 생각하기에도 자기가 몹시 경솔했음을 뉘우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객점 아이에 연이어 덮치지 않고서 시간을 두고 며칠쯤 기찰

을 해보았다면 혹시 꼬리를 잡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건만, 이제는 영락없이 자는 범에 코침

놓은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째서 대답이 없느냐?"

"황공합니다."

목사는 물고 있던 장죽으로 놋재떨이를 요란하게 두드렸다.

"이 일은 너희 사또가 지시했느냐?"

포교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 아니올시다... 틀림없이 도적을 잡는다는 생각으루 소인이 그만..."

"이런 고이헌 놈 봤나. 위로는 수령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을 보살펴야 할 장교란 놈이,

령의 뜻을 어기고 죄없는 백성을 마음대로 침학하느냐? , 이제 보니 포도한다는 핑계로

재물 있는 자들을 핍박하여 돈냥이나 빼앗겠다는 수작이렷다. 여봐라, 집장사령 들라 하고

형방 대령하여 저놈을 치죄하여라!"

포교가 모골이 송연하여 이제는 울먹이면서 애걸하였다.

", 사또... 소인 죽을 죄를 졌사오나, 다만 직무에 열중한 관원으로서 저지른 일이오니

굽어살핍시오."

이방이 틈을 놓치지 않고 목사에게 간청하는데, 실상은 안성 포교를 구명하였다는 인심을

얻어두자는 속셈이었다. 기실 일이 크게 번지고 나면 밑이 구린 것은 이쪽이 틀림없는 일이

었다.

"아뢰오. 비록 안성의 장교가 월권하였다 하나, 그 일이 백성을 해치는 도적을 잡는 일로

비롯된 죄인즉, 일단 형방을 시켜서 이모와 함게 문초를 하도록 하시고 연후에 벌하여도 늦

지는 않을까 하옵니다."

목사 생각에도 중벌을 내릴 뜻은 없었고, 다만 안성군수에게 목사로서의 위의를 새겨두려

하였은즉, 이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이모란 자는 쟁송이 마무리될 때까지 하옥시켜두고, 안성 관리는 곤장 십 도를 내려

징계하도록 하라."

 

이경순은 일단 하옥되고, 안성 포교와 포졸은 각각 곤장 십 도로써 징치된 뒤에 이방의

선처로 객사에 머물도록 하였다. 여주 이방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는지라 창골 이

도장네 사기전으로 나아가 그의 아내를 찾았다. 경순의 처는 근래 남편의 행적에 짐작되던

바가 있어서 몸져 누워 근심에 싸여 있었다. 이방이 들어서자마자 도장댁은 우선 에고 소리

부터 먼저 내었다.

"우리 주인께서 무슨 중죄를 지었다구 옥에 갇히도록 내버려둔단 말입니까. 사또께서두

그러시구 이방 어른은 더욱 우리와 자별하게 오가시면서 이런 의리가 있단 말입니까?" "

병일수록 극약을 써야 합네다. 시방 이도장을 가둔 것은 바로 그와 같지요. 내가 다 선처할

궁리가 있어서 이러는 것이니 아주머니께서는 너무 심려 마십시오. 내가 온 건 다름이 아니

..."

하면서 이방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댁에 사당 아이를 데려다 놓았지요?"

도장댁은 가슴이 덜컹하여 입을 열지 못했는데, 아무리 주인과 자별한 사이라 하나 그는

관아의 사람이고 경순이 옥에 들었으니 함부로 얘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방은 경순

의 처를 안심시키느라고 껄걸 웃어 보였다.

"아주머니 걱정을 마십시오. 일전에 이서방이 내게 다 털어놓은 사실이올시다. 만약에 그

애가 잡히면 이도장은 꼼짝없이 화적죄를 쓰고 죽게 될 뿐 아니라, 나나 아주머니도 중벌을

면치 못할 게요. 지금이라두 당장 그 계집을 어디 먼 데루 보내버립시다." "... 그렇지만

우리 주인게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으니, 저만 몹쓸 년이 되구 말겠지요." 지금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닙니다. 이서방이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우리를 탓하지는 못하지요. 다 제

몸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월송골 분원 동네에 있어요."

이방은 눈을 크게 떴다.

"... 아직두 거기 두었단 말입니까? 내가 빼돌리라 일렀는데, 그렇다면 이거 더욱 큰일이

로군."

"연못골에 작은집을 두려고 작정하여 돈도 치렀지만,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제가 나가볼

겨를이 있겠어요?"

"그 과붓집에다 두었단 말이지요? 아니 이 사람이 정신이 나갔구. 홀려두 단단히 홀렸어!

, 눈이 몇이며 입이 몇입니까. 안되겠습니다. 당장 가셔서 밤을 타구 떠나도록 이르시오.

그 계집만 없다면 이 서방은 사흘 안으루 무사히 나오게 될 겁니다." 이방의 말은 진정 도

장댁으로서는 그중 반갑고 고마운 얘기였다.아이를 낳지 못하여 도장댁은 남편에게 늘 죄를

지은 듯했고, 씨받이댁까지 주선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친 젊은 여인이 남

편의 정을 독차지해버리고, 남편이 늘 좌불안석이던 것이 못내 섭섭했었다. 더구나 이제 경

순의 몸에 닥친 위급함을 보니, 이방이 말하지 않더라도 어째서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

였나 후회가 되었다.

", 그러면 제가 이 길루 월송골엘 나가겠어요. 그리구... 며칠 계실지는 모르지만 옥내가

불편하실 텐데, 제가 옥바라지르 해야겠어요."

"그건 염려 마십시오. 아주머니가 아니더라도 내가 다 가려서 해놓을 테니까요. 옥사장 아

이들도 이도장이라면 깍듯이 예우를 합니다. 궁금하시면 언제든지 가서 들여다보셔두 좋구

. 허나, 시방은 처지가 처지인지라 남의 눈을 피해야겠습니다. 의심을 받으면 아무래도 불

리하니까요."

"이방 어른만 믿구 있겠습니다."

이방이 헛기침을 하고 나서 잠깐 머뭇거렸다.

"돈 있거든 백 냥만 내놓으십시오. 내가 지금 나가서 객사를 찾아봐야겠습니다. 안성 포교

라는 자가 제법 눈치있는 자이니 입막음을 해둬야 합니다. 사또께는 일이 마감된 뒤에 따로

이 선사품을 마련하기루 하구요."

"주인이 안 계시니 수결 없는 어음을 떼어 드릴 수도 없고... 꿰미는 너무 부피가 크니 은

자를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서슴지 않고 은자 스무 냥 반을 내놓았다.

"더 드릴 수도 있으나, 아직 객주와 경주인의 계산이 떨어지질 않아서요." "아니 이것이

면 충분합니다. 제깟 장교놈 주제에 막걸리 사발 들이켜기두 쉽지 않은 터에 백 냥이면 과

합지요. 그러면 아주머니는 사당 아이 일을 잘 수습해두십시오." 이방과 경순의 처는 의논

을 마치고 일어났다. 이방은 객사에 가서 안성 포교를 끌어내어 술을 퍼먹이고 계집을 안

겨준 뒤에 적당히 돈을 안길 작정이었다. 공연히 까탈 잡히게 뇌물 쓰는 양을 하는 게 아니

라 앞으로 장사차 안성엘 가는 일이 있을 적에 저자일을잘 보아달라더라고 전하는 형식을

취할 셈이었다. 피차에 봉변이니 장사치보다야 관원이 더욱 욕본 게 아니냐, 그러니 이것은

서로 위무하고 잘 지내자는 돈이다. 이방의 머릿속에는 그런 식으로 안성 포교를 무마시킬

생각이 술술 풀려나가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탑골을 지나가다가 이방은 문득 어떤

생각에 부딪치게 되었다.

"젠장할... 평생 요 모양 요 꼴루 여주에 틀어박혀 서리배 노릇이나 하다 죽는가부다..."

하긴 여주 이방은 삼 대째의 향리였다. 원래 아전이라 하는 것은 향소의 직이니, 관장이

부임해 올 적에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관장을 들이고 보내면서 백성들과의 다리를 놓는 역

할을 하느 것이었다. , 지방 사정에 밝은 자라야만 아전배 노릇이 가능하였고, 따라서 서

리는 마음만 먹으면 지방 사정에 눈이 어두운 상사를 속여먹기가 손바닥 뒤집는 일과 같았

. 여주 이방이 본시 순하고 의기를 아는 사람이언만, 그의 경우에 있어서도 목사가 모르는

수입원들을 몇가지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주서 밥술깨나 먹고 지내지만 그렇게 큰 부자는 아니었고, 그도 다른 서리배들의

꿈과 마찬가지로 현감 저옫의 벼슬아치가 되어 보고 싶었다.

아전직이 원래 지방에서 가세를 유지하기에 족한 업이건만, 중인은 물론이요 상놈들 간에

도 관가의 아전이라면 그리 쉬히 여기지를 않았다. 그것으 대개 아전의 급료가 헐하여 백성

과 수령 사이에서 포흠이 많기 때문이었고, 시정 장사치들도 앞에 면대하여서는 가장 존중

하는 듯하나 돌아서면 비웃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여주 이방은 그리 악한 사람은 아니로되

심기가 매우 여린 사람이었다. 그가 객사에 들러 안성 포교와 술을 걸치고 돈냥을 전한 뒤

, "이것은 사또께서 귀관의 충직함을 대견히 여기셔서 내리는 상금일세. 한편 곤장으로

징치하신 것을 수령의 위의를 세우고자 함이었으니 마음을 풀게나." 하고 은근히 달래주었

으며, 촐촐하게 객사에서 죽치고 있던 안성 관원은 의외의 횡재에 감지덕지하여 한사코

물리치다가 받는 체하였다.

"소인이 월권한 죄가 있어 다스림을 받은 터에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이제 위무까지 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를 지경입지요."

남의 고을에 와서 매를 맞고 나서 뜻하지 않은 돈까지 얻게 되었으니, 어느 겨를에 의심

을 가지며 설령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할지라도 누녹듯이 사라질 만하였다. 백 냥이란 시골

장교로서는 제법 큰 돈이었던 것이다. 이방은 안성 과누언을 색주가에 재워두고 거나하여

제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그때까지는 간교한 마음을 먹지 않았었고, 다만 자시느이 입장에

관하여 평상시처럼 가볍게 탄식하였을 뿐이었다.

"젠장할... 나이 사십줄이 넘어서 이게 무슨 꼴이람. 남들은 턱짓으로 아랫것들을 부리며

한 고을의 수령으로 하늘처럼 떠받들려 지나는데, 포교 따위와 냄새나는 술을 퍼먹고 다니

다니!"

이방은 비틀거리며 걷다가 자기 집 문전에 이르러 드디어 견디지 못하고 왁왁 토해냈다.

문득 대문이 삐걱 열리더니 그의 처가 내다보는 것이었다.

", 집안에 환난이 있는 줄도 모르고, 술만 퍼먹구 다니면 제일이오?" "허허, 내가 술 먹

는 일이 어제 오늘이 아니거난 왜 지청구가 이리 심한가?" "그야 술도 술 나름이지요.

대부나 토반 향족 어른들과 함게 마시면 약주이지만, 그따위 술을 퍼먹구 다니는 당신이야

말로 술지게미에 취한 술도가의 강아지와 뭐 다른 게 있단 말이우?"

"... 이년이 정말 미쳤군!"

이방이 술김에도 달려들어 한 대 치려고 문간으로 쏟아져 들어가니, 그의 처는 피하여 마

당을 건너지르면서 통곡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아이고오, 분하고 원통해서 이 일을 어디다 호소할꼬. 제 딸년이 살지 못할 능욕을 당하

였건만, 가장이 무능하여 설원할 길이 없고나."

곡성이 요란한 중에 이방은 사랑에 올라 앉아 우선 하녀에게 냉수를 청하였다. 그가 냉수

를 다 마시고는 아무래도 집안 공기가 심상치 않았음을 눈치채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으니, 하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주워섬겼다.

"아가씨가 자진을 하셨더랬습니다."

요란한 소리로 물그릇이 떨어져 댓돌 아래 박살이 났다. 이방은 그만큼 놀랐던 것이었고,

취기가 대번에 가시는 듯하였다.

"뭐라구... 그랬느냐?"

"아가씨가 목을 매셨습니다."

청천에 벽력 같은 말이니, 이방의 얼굴에서는 대번에 핏기가 가셔버렸다.

"골방에서 목을 매신 것을 천행으로 쇤네가 발견하여 끌어내리고 의원을 불렀어요. 침을

맞히고 사지를 주물러서 가까스로 회생을 하셨습니다만, 아직 제정신이 들질 못하였습니다."

이방은 한걸음에 뛰어가 외동딸의 모습을 살피고 싶었건만 꾹 눌러 참으면서 침통하게 한숨

만 내리쉬었다.

"그래... 그 연유가 무엇이라더냐?"

하녀는 옷고름만 비틀고 섰을 뿐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이고 있었다. 이방이 눈을 부릅뜨

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면서 외쳤다.

"말하지 않으면 아가리를 찢어서 내치겠다. 어서 직고하여라!" "... ... 생원 댁 조수재

를 아시겠지요?"

"그놈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하면서도 이방의 머릿속으로 퍼뜩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조생원과는 연즌에 이웃하여

산 적이 있었고, 철없는 아이들은 곧잘 양지바른 그의 집 마당에 와서 함게 놀고는 하였던

것이다.

조도령이 책을 끼고 서당 출입을 하게 되면서부터 내외를 하게 되고 집이 서로 이사를 하

여 떨어져 살게는 되었으나 이방과 생원 사이에도 이웃의 정리가 가신 것은 아니었었다.

즈음도 어쩌다 노상에서 만나면 안부를 묻곤 하는데, 물론 이쪽에서 먼저 하정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저쪽은 깍듯한 반말이고 이쪽은 처음부터 끝까지 양반을 대하는 예의에 어그러짐

이 없었다. 조생원이 그리 부자는 아니었으나, 이 고장에서는 선산도 지녀 있고 제수답도 너

른 터에 밥끼니나 족히 먹을 만하였으니, 엉치뼈가 송곳 같은 샌님은 아닌 셈이엇다. 의식이

족함에 자연히 양반 자세가 은근하게 꿋꿋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이경순의 아내도 조생원

마나님께 능멸을 당했다고 여겨 까짓 것 공명첩이나 사들이리라 작정한 그만큼이었다. 그러

나 이방으로서는 아주 아전 집안으로 삼대를 물려온 터에 향족에게 하정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다 여겨왔던 터이었다.

", 조도령이 우리 아이와 소꿉동무라는 건 아니다. 그래 어떤 일이 있었느냐?" 이방은

한결 침착해져서 나직한 소리로 물었고, 그제사 마음이 놓인 하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울먹

여 말하였다.

"지난해 한가윗날이었습니다. 그날 나으리께서 퇴청이 늦어지신 틈에 아가씨는 달구경을

나가자구 졸라대어 제가 뫼시구 나룻가에 나갔었습니다." 이방은 벌써 일의 내막이 손바닥

에 올려놓은 것처럼 환히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자신도 아잇적에 양가 처녀를 꾄다고 달

밤에 여주 강변에를 나가 휘돌고 다니던 생가이 났다.

"게서 조도령을 만났느냐?"

"... 뒤를 밟은 듯하였습니다. 아가씨가 잠시 비켜 있으라 하거늘, 쇤네는 떨어져서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를 듣지 못하였지요. 그뒤로 두 분 사이에 정분이 나서 글이 오락가락

하였습니다. 어쩐 때엔 방자 대신에 그분이 직접 담 너머에서 휘파람을 불고는 던지고 가는

적도 많았습니다."

"네년두 편지 심부름을 하였겠구나."

"죽여... 줍시오."

"에미두 알구 있겠지?"

", 대강은 아시는 듯하옵니다."

이방은 입맛을 다셨다.

"헛허! 집안 망하는구나. 언감생심 그 댁이 뉘 댁이라고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쳐다봐?

래서 어찌되었단 말이냐?"

"그 뒤로 편지만 오가다가 얼마 전에 조수재가 그만 월장을 해 오셨습니다." 이방은 얼

결에 벌떡 일어났다.

"내 이놈을 단매에 때려 죽이구 올까부다. 아무리 향족이란들 남의 집안을 이리 업수이

여길 수가 있단 말인가."

안방에서 곡성이 멎고 이방의 처가 달려나와 울부짖는 것이었다.

"여보 그리 마오. 당신은 입이 열 개라두 말을 못합네다. 재물이 없으면 지체라두 높든지,

지체가 낮으면 부가옹이라두 될 일이지. 남들은 아전질 삼 년에 만석꾼이 부럽지 않다던데,

당신네 집안에는 되꿰미는커녕 썩은 곶감꼬치 한 줄 들어온 적이 없으니 관노와 무에 다를

게 있단 말요? 이도장을 보우. 비록 신분은 신량역천이건만 누만 전을 쌓아두었으니 고관대

작을 부러워 하겠소. 아마 정스이라두 살 거외다. 그가 돈냥을 써서 동지나 첨지나 풍헌이라

두 될작시면 우리 따위와는 하게도 놓지 않구 살 게란 말유. 공연히 당신만 홍야홍야하면서

그 삶의 동무입네 하지만 이득 본 게 뭐가 있소."

집안일이 이렇게 된 바에 이방은 입이 열 개라도 말을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울화를 짓

씹고 앉아 아내의 험구를 제 몸에 쑤셔박히는 사금파리의 고통인 양 참아 견디는 중이었다.

"조수재인가 도적놈인가 하는 놈이 제멋대로 춘정이나 발동하여 일을 저지르고는 씻은 듯

소식이 없더니, 오늘 성혼을 마쳤다는구려. 상대는 평택의 호통 최풍헌네 막내딸이랍디다.

풍헌이니 선달이니 그것두 공명첩 양반일시 분명하니, 아무려면 우리네 아전배보다 못하겠

. 아이구 원통해라. 이 지지리 못난 가장을 믿고 사는 우리가 모두 쓸개 빠진 년들이지."

"에이... 썩을 것들 같으니!"

울분이 채 터져나오지도 못한 채 이방은 사랑으로 들어가 어둠속에 뻗고 누워버렸다.

참이나 마누라의 지청구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집안이 괴괴해졌는데 잠이 올 리가 없엇다.

그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궁리에 궁리로 머리통이 깨지는 것만 같았다.

약한 사람이 능멸을 받고 그것을 강한 상대에게 풀지 못하게 되면 자신에게로 그 원한을

돌리게 되고, 자신에게 돌린 원한이 깊으면 깊을수록 복수하겠다는 심정이 세상 전반에 향

하게 되는ㄱ 서이 인생살이의이치가 아닌가. 따라서 일찍이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잘 다

스림이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는 첩경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자신과 집안을 모두그리치기가

쉬은 게 심약한 사람을 특징이엇따. 그가 제 집안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지 못하겠거든 차

라리 무면 풍류로 모른척 잘라버리든지, 아니면 생원네로 달려가 당당히 따져서 포한을 푸

는 것이 하책 중에도 해늘 수 있는 샇람의 짓이었따. 그러나그는 엉뚱하게도 자기의 아전

처지를 통탄하였다.

"오냐... 두고 보자. 내 벼슬을 하든지 돈생원 도주공이 되든지 하여 이 포한을 씻겠다!"

새벽녘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허튼 공상을로 새우는

, 문득 생각이 어느 골에 가서 딱 멈추는 것이었다. 아전배란 십 년을 하루같이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도록 차근차근 착복하지 않으면, 결손 때마다 관장에서 의심을 받기가 일쑤요,

무엇보다도 지방민들의입에 오르내리면 재물을 지니기가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에

게는 이제 한가지 신통한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경순의 아내는 여주 이방이 이르고 간 뒤에 변변히 생각할 염도없이 약간의 패물과 돈

을 내어 싸들고 혼자서 월성골로 나아갔다. 사방이 캄캄해진 뒤이라 아무의 눈에도 뜨일 것

같지가 않았다. 월송골 분원 마을에 이르러 행인을 조심하여 박씨 과부네 집에 당도하니 아

무것도 모르는 과수댁은 호들갑을 떠는 것이었다.

"아유 그러잖아두 저희 시숙이 어찌나 안달을 하시는지 쇤네가 창골루 찾아뵈려던 참이올

시다. 연못골 집이야 아주 실하구 주변두 조용합지요." "이 아이 집에 있는가?"

", 방금 같이 저녁을 먹었습죠."

"자네는 들어오지 말게. 내가 은밀히 할 이야기가 있네." "아무렴요, 어련하시겠어요."

벌써부터 밖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묘옥은 옷매무새를 고치며 앉아 잇었다. 도장댁이

들어서자 묘옥은 황황히 일어났다.

"그리 앉게. 우리가 틈이 별루 없으니 어서 얘기를 끝내세나. 자네 어디 갈 곳이 없나?"

묘옥은 어리둥절하여 태도가 표변한 도장댁을 바라보았다. 실로 마음속으로는 떠나리라고

작정하고 있었건만, 며칠 전까지도 저ㅉ고에서 잡아 붙드는 시늉이더니 지금 와서는 곧 찬

바람이 폴싹거리는 듯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두 자네와 다불어 한솥밥을 먹으며 친도기간 같이 지내리라 여겼더니, 우리가 아마 인

연이 없는 모양이네. 만일에 우리 주인께 아무일이 없거나, 또는 내가 혼자가 되었다 하더라

도 사람이 이리 매정하게 나올 수는 없을 걸세. 자네 어디로든 적당한 곳으로 지금 당장에

떠나주어야겠어."

묘옥은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가, "제가 언제 가더라도 갈 적장이었습니다만, 이렇게 갑작

스레 떠나게 되니 혻 도장 나으리께 무슨 변고나 없으신지 방정맞은 생각기 듭니다."

"왜 아니겠나. 그분이 시방 관가에 하옥되어 계시다네. 안성서 기찰포교가 찾아와 자네를

눈이 시뻘개서 찾는 모양일세. 만약에 자네가 잡힌다면 나으리는 말할 것도 어속, 자네는 장

하에 죽고 말 게야. 안성은 시방 발칵 뒤집혔다네. 어서 안전한 길루 여주를 빠져나가도록

하게."

"저 때분에 이런 곤경을 겪게 되엇으니 죽여줍시어도 할말이 없는 터에, 제가 무얼 망설

이겠습니까. 아씨 안녕히 계십시오."

묘옥이 일어나 절을 하였고, 도장댁은 그 정경이 가엾어서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고 오냐

오냐 하며 눈물을 씻어냈다. 도장댁이 싸가지고온 보통이를 묘옥에게 들려주면서 말하였다.

"이건 얼마 되지 않지만, 주인께서 내주셨던 것이니 노자나 하고, 제 몸 하나는 간수할 수

있을 겔세. 언제 형편이 좋아지면 다시 만나겠지. 가만있게... 내가 사람을 하나 붙여줄 테니

길안내를 받도록 하게."

"아닙니다.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그게 아닐세. 자네가 무사히 빠져나가야 우리 주인께서 탈이 없을 테니 이러는 게야."

묘옥이도 그 말엔ㄴ 항거치 못하고 다소곳하니 앉아서 기다렷다. 박씨 과부가 분원에 가서

전생이를 데리고 왔다. 전새이는 이에 눈치가 있는지라 말없이 보퉁이를 받아 지고 앞장을

섰다. 전생이의 뒤로 묘옥이와 도장댁은 따라붙어서 말없이 걸었다. 드디어 창골과 나룻가

로 갈라지는 길에 이르러 도장댁은 묘옥의 손을 잡아주었다.

"잘 가게나. 내가 할말이 없네. 나중에 도장 어른이 나와 아시게 되면 심려가 많으실 테지

, 어쩌겠나. 우리에게는 하늘 같은 가장이데..."

"아씨! 평안히 사십시오."

묘옥이 ㅇ찌 여인이 그 지아비를 사랑하는 마음을 모르랴. 더구나 지금 딱히 편을 들라면

이경순 쪽이 아니라, 그의 남편으로 하여 애를 태우로 시앗에게마저 정을 보이며 아기를 낳

지 못하여 끝내 죄스러워하는 도장댁의 편을 들고 싶었다.

"그래, 어서 가게."

묘옥은 전생이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달은 초승달이었으나 별이 총총한 밤이었다.

염없이 뻗어나간 길을 타박이며 걷고 잇는 묘옥의 가슴에는 웬일인지 썰렁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는 듯하엿다. 이적막강산 아래 다시 몸붙일 데 없는 신세가 되었고나 하는 외로움이 서

서히 밀려오는 것이엇다 여자의 마음이란 또한 얼마나 얄궂은 것이까. 경순이 곁에 있을 적

에는 그의 다정함이 짐스럽고 송구하여, 자기는 그 사람의 계집이 아니라고 수십 번 외게

되더니 이제 돌아서서 떠나오자마자 그가 그리워지는 것이엇다. 길산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스스로가 길가의 돌맹이처럼 구르며 살아왓던 세월을 씻기 위하여 정분을 끝내 지켜내리라

작정하엿으나, 생시의 사람은 아니었다. 이미 저승의 사람임에 틀리없고, 너그러운 아버지

같던 경순이야말로 묘옥에게는 매우 또렷한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묘옥은 새

로이 다짐하는 것이었다. 자신에게는 아직도 길산이라는 광대의 넋이 소중하였고, 그의 넋을

간직하는 중에 심신이 저화되고 오히려 모든 험난한 세상살이를 견딜 수 잇을 것만 같앗다.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으리, 제발 무사하십시오."

묘옥과 전생이는 도사공을 깨워 배를 띄우도록 하였다.

"제가 모셔다 드리고 싶지만, 우리 원주 어른 일이 걱정인지라 갈수가 없습니다. 나중에라

두 혹시 주인께서 찾으실지 모르니 행선지나 말하여주십시오." "글쎄요... 한양으루 가겠습

니다."

전생이가 도사공에게 뱃삯 닷 냥을 내어주니 보통 때의 거의 다섯배가 넘는 돈이어싿.

"마포나 동작진까지 대어주시우."

"우리 배는 어제 선적한 화물이 있는데, 송파에 부려놓아야 합니다. 거기 이르러 배를 갈

아타시도록 하시우."

"하긴 송파까지만 가면 배는 지천으루 깔렸으니까. 그럼 잘 부탁하우." "우리가 시방 배

를 띄울 시각은 아니오만 돈을 받았으니 아무려면 어떻겠소. 잠 좀 덜 자구 돈을 벌어야지."

도사공은 집에 들어가 아들인 듯한 떠꺼머리를 깨워서 데리고 나왔다. 총각은 연방 투덜

거리면서도 닻줄을 풀엇다. 전생이가 묘옥에게 당부하엿다.

"동작진이니 마포의 유기와 사기를 취급하는 아무 여각에나 찾아가셔서 통기해놓으십시

. 서루 대번에 연락이 닿을 겝니다."

전생이가 꼼꼼하여 제 주인의 뒷일까지 모두 거두려 하였다. 묘옥은 아무 말 없이 뱃전에

올랐다. 경강 사공이라면 그 물길 타는 재간이나 노지이 전국의 하천에서 으뜸이었고 화물

을 실어나를 사공 정도라면 수로를 제 안방 처럼 훤히 아는 사람들이었다.

여주서 한밤중에 밸르 띄위 경강으로 오르는데, 북한강과 남한강의 지류가 모이는 분원까

지는 강물을 거스르는 셈이었다. 분원을 지나고부터 강물은 서쪽을 바라고 완만하게 흐르다

, 송파를 넘어서면서 바로 도도하게 한양성 밖을 싸고 돌아 서해로 빠지는 것이었다. 비록

물길이 백여 리가 넘는다 하지만 육로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광주의 송파와 삼전도는 동북

지방과 삼남에서 한양으로 등러오는 목구멍과 같았으니, 이현 칠패에 직접 통하는 가장 큰

장시였다. 밤배가 여주서는 몇척 없더니 이천장을 지나며 한두 척씩 늘고 양근을 휘돌고 부

터는 어느덧 십여 척의 줄이 이루어졌다. 배는 안개를 뚫고 경강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갔다.

강위에는 새벽 바람이 가득 차 있고 노를 올리고 돛을 올린 배들이 돛대마다 매달린 등불빛

이 반작거렷다. 사공은 고물에서 키를 잡고 앉았으며, 묘옥은 닾개가 씌워진 선복의 쌀섬 위

에 푹신한 멍석을 깔고 누워 있었다. 앞으로는 덕판에 앉아 물길을 내다보는 젊은 사공이

있었다 묘옥이 가끔 고개를 들어 내다보노라면 늙은 사공이 말하는 것이었다.

"분원을 지나고도 한참 갈 테니 푹 잠이나 자두오."

했으나 묘옥은 잠들 수가 없었다. 자신을 태운 배는 끝도 없는 어둠속으로 한없이 흘러가

는 것만 같았다.

별빛이 희미해지고 수면 위로 안개가 퍼져나갈 무렵에 배는 북한강의 지류가 합치는 봉안

앞의 분원목에 이르렀다. 물결이 세 갈래로 갈리면서 강복판에 지라잡은 모래섬의 주위를

거세게 맴돌았다. 이번에는 두 사공이 노를 젓는 참이었다. 배가 전혀 물결을 헤치고 나갈

기세를 보이지 않아싿. 북족에서도 줄이은 상선들이 불을 달고 나타났다. 한참을 허위적거리

던 끝에 배가 소여울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섬을 한바퀴 돌아서 서편에 머리를 돌릴 수가

있었다. 배들은 서로 엇갈려서 제각기 방향을 달리하였다. 일단 소용돌이를 지나자 얼마 동

안은 급류가 계속되었다. 광주를 지날 대 해가 뉘엿뉘엿 떠오르고 있었다.

밤새껏 시달린 사공은 피로했는지 아들과 바꾸어 덕판에 반듯이 드러누워 잠들었고, 아들

이 대신 키를 잡았다. 실로 하룻밤 사이에 배는 덕풍말을 돌아서 송파나루로 흘러드는 중이

었다. 묘옥은 이제껏 이렇게 많은 배들을 보지 못하였다. 돛단배와 나룻배, 병선을 개조하여

높이가 사람 키는 훨씬 넘는 상선들이 그물이라도 짜는 듯이 송파와 삼전도와 학여울에 걸

쳐서 오르내리고 있었다. 강변에 다닥다닥 붙여 지은 가가에서는 아침을 짓는 연기가 안개

와 휩싸여서 양쪽 강안이 자욱할 지경이었다.

"저기가 한양인가요?"

묘옥이 묻자, 젊은 사공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어떠우... 장관입지요? 저기가 송파 장터랍니다. 마포나 서강보다두 물자 많기로는 경강서

으뜸이지요. 한양까지야 한 식경이니 뭐... 다 한울타리입니다. 들고 나는 이가 얼마나 되게

."

"대처로군요."

"대처다마다요. 허지만 인심은 아주 사납수. 모두가 뜨내기들이니 언제 인정 가리게 됐습

니까. 아씨두 조심하슈, 순 날도적놈 판이외다."

"객점두 많이 있을까요?"

"헛허, 맨 천지에 객점이우. 글쎄 한번 뭍에 올라가보시라니..." 송파가 배를 대기에 맞춤

한 것은 굽어도는 물길이 두 섬으로 하여 느슨해지고, 더욱이 봉은사 옆의 학여울 앞은 일

단 주춤해진 물길이 호흡을 가다듬고 그 흐름을 바꾸는 곳이었다.

두 섬 중에 송파를 감싼 것은 상림이요, 그에 연이어져 딱섬이 잇는데 모두 한양성 밖의 왕

십리로 통하여 위로는 흥인문에 닿고, 아래로 광희문에 닿는다. 송파와 삼저나루는 이곳을

근거지로 시정아치들을 피하여 원산지 상인과 직접 교역하려는 강상 무뢰배들의 본거지가

되어 있었다. 아래로 서빙고를 지나 동작나루와 노량나루에는 과객과 보부상들의 주막이 즐

비하고 마포와 서강이야 말로 경강 상인들의 여각이 밀집한 대창고들이 즐비하였다. 서강

건너편의 밤섬에는 이들 주상들이 만든 조선장이 여럿이었다.

송파는 상림과 삼전도와 딱섬 주변으로 거래흔 장시가 다섯 군데가 넘는데. 이미 강안에

서 묘옥이 가가를 보았듯이 장터마다 초막으로 이루어진 간이 집들이 송파와 삼전나루 양쪽

길가에 열을 이루었고, 움으로 지은 창고와 굉장한 객점의 지붕드리 다투어 솟아나 있었다.

묘옥은 백사장에 내려서자, 아치부터 웃통을 벗어젖히고 짐을 실어 내리고 실어 올리는 수

많은 장한들 때문에 길을 잡지 못할 정도였고, 도선장에는 배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혼잡

을 이루고 있었다. 날마다 열리느니 장이요, 특히 닷새 간격마다 어물이며 목재며 곡물이며

소금이며 각종 공산품들이 품목별로 크게 거래되곤 하는 것이었다.

마침 건어의 교역날이라 도선장에서는 온통 마른생선의 비린내가 가득 차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저자 가운데로 걸어 올라갓다. 묘옥은 딱히 어느 곳에 내리겠다 마음먹은 바 없었으

, 배가 그곳에 닿았으니 구태여 한양으로 향할 마음이 아니었고, 이렇게 사람이 들끓는 가

운데 섰으니 어쩐지 마음이 놓이기도 하였다. 우선 요기를 하면서 천천히 거ㅟ를 생각해보

리라 작정하고 묘옥은 탕반집이며 국숫집이나 죽을 파는 가가를 훑어보고 있었다. 누군가

그의 치맛자락을 흔들면서 흥얼거렸다.

"아주머니, 죽 한그릇만 사주오."

묘옥이 내려다보니 나이는 열두어살이나 됐을가 싶은 수세미 머리의 낯바닥이 새까만 아

이놈이었다. 의복은 사방에 꿰맨 자리요, 땋은 머리는 헝클어진 채 쇠똥이 켜로 앉았을 듯하

였고, 맨발이었다. 눈이 반짝이는 것이 몹시 총명해 보였다.

"네가 누구냐?"

아이가 힝 웃으면서 다시 치맛자락을 흔들었따.

"죽 사주면 되었지 누군지 알아 무엇하우."

"나두 시방 요기를 하려구 찾는 중이란다."

"그런 줄 아구 이렇게 개 꽁지에 검불 붙듯 하는 게 아니우. 날 따라오시우. 요기두 하고

잠두 한숨 잘 수 있는 곳이 있으니까."

묘옥은 그럴 듯ㅎ이 여겨 타박거리며 앞서서 걷는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지붕은 초가요

벽은 기둥에 거적을 말아올린 간이 주막이 나왔고, 큰 쇠솥에서는 뼈다귀가 끓는지 냄새가

구수한데 이미 해장을 하는 사내들과 국밥을 먹는 행객들이 멍석 위에 촘촘히 앉아 있었다.

아이는 묘옥을 여자들만 내외하여 앉는 칸막이 뒤로 데려다 주었는데, 훨씬 한적한 곳이

어싸. 묘옥은 선선히 어죽 두 사발은 시켰다.

건어와 민물조개를 넣고 끓인 죽이 뚝배기에 하나 가득 담겨져 나왔고, 묘옥은 우선 아이

에게 그릇을 내밀고 나서 자신도 숟가락을 들었다. 아이는 죽을 떠먹기 전에 휘장 밖으로

소리쳤다.

"아주머니 내가 손님 모셔왔으니 그 맡긴 그릇에 죽 좀 담아놔주오!" "이 녀석아, 아직도

다섯 분은 더 모셔와야지. 아제 겨우 마수거리에 벌써 성화냐?" "내 얼른 집에 다녀와서

부지런히 모시리라. 열 분만 모시면 저녁에 두 주어야 하우." "어쨌든 빨리 나가 모셔만 와

."

묘옥은 아이와 아낙네의 오가는 말을 듣고 대강 짐작할 수가 있었다. 유객으로 가가에서

걸식을 하는 모양이었다. 묘옥은 허겁지겁 죽을 퍼먹고 있는 아이에게 조심조심 물어보았다.

"누굴 갖다 주려구 그러냐?"

"우리 할머니요."

"할머니하구 함께 사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죽그릇에 고개를 처박았다.

"내가 돈을 줄 테니 한그릇 더 사서 갖다 드리려무나." 이윽고 아이가 눈을 빛ㅊ내면서

묘옥을 말갛게 쳐다보았다.

"아주머니 돈이 많소?"

"그래... 어서 더 먹어라."

곁에서 죽을 먹고 있던 아낙네들도 가장 신기하다는 듯 두 사람을 연신 곁눈질하는 것이

었다.

"여기 어디 조용한 객줏집이 없니?"

"장거리를 지나면 객주뿐만 아니라 마방이 딸린 기와집 여각이 즐비하지요. 아주머니는

장사하러 왔나요?"

"아니, 한양으루 가는 길이다."

"그럼 객주는 어찌 찾소?"

"쉬어 갈까 해서 그런다."

"한양이 예서 엎드려지면 코 닿을 덴데, 어서 배나 타요." "어째서..."

아이는 인중으로 흘러내린 코를 기묘하게 훌쩍 들이켜고서 말하였다.

"장거리 새새 틈틈이 깔린 게 알건달 소악패들인데 아주머니처럼 예쁜 각시 혼자 노중에

오가다간 봉변을 당하리다."

딴은 그럴 듯한 얘기였으나 이미 노중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묘옥인지라 웃음으로 넘기

면서 아이의 어른스러운 염려를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노자에서 몇푼을 내어 죽값을 치르고

묘옥은 아이가 손가락질 하는 대로 장거리 쪽으로 향하였다.

"잘 가거라."

", 가시는 길에 무고 평안하십시오."

묘옥은 문득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어니?"

"장쇠라고 부르오, 요기 잘했습니다."

묘옥은 죽그릇을 받쳐들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는 장쇠의 뒤꼭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

. 장거리 양편에는 각종 어물이며 과일이며 채소, 지물, 방물, , 잡곡, 해초, 가죽, 포목,

담배, 사기 소금 등등이 각처에 쌓여 있는 객점과 가가들이 즐비하였다. 상인들이 서로 외치

고 부르며 거래흐는 소리로 장바닥은 떠나갈 듯했고, 가가와 객점 앞으로는 지게를 받쳐놓

거나 보따리를 풀어놓은 좌고들이 또한 촘촘하게 들어앉아 있었다.

가운데의 비좁은 길을 지나치려니 남녀노소가 서로 소매를 얽을 지경이었다. 또한 그뿐

아니라 각 점포에서 목청 좋고 잘생긴 자들을 길가에 내세워 제마다 손님을 불러대니 장바

닥은 마치 설렁탕을 끓이는 가마솥처럼 들끓어대고 있었다.

떡전을 지나 쇠전마당으로 나오니 거기서부터가 장돌뱅이나 저자 소악패들의 올음터였다.

네댓 명이 앉아서 마흔 장 투전의 돌래태기를 하는 패도 있었고, 거의 십여 명이 둥굴게 몰

려 서서 엽전 치기를 하는 축도 있었다. 또 들병좌판 앞에서는 서넛이 웃통을 벗고 고래 고

함을 지르면서 싸움질을 벌였다. 한 사내가 밑에 깔렸는데, 이에 올라탄 자가 주먹으로 연방

내질러 코피가 억수로 쏟아져 나오는 참이었다. 묘옥은 그리 낯선 느낌이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에 해서에서 색주가로 팔린 곳이 철광산이었고, 거기서 광부들의 싸움을 숱하게 보았던

것이다. 어쩐지 그러한 광경을 보니 새삼스럽게 사는 일이 서러운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돌

리는데, "이게 눈알딱지를 얻다 빼놓구 다녀?"

하는 컬컬한 사내의 목소리와 함께 묘옥의 어깨가 거세가 떠밀렸다.

"에그머니나!"

묘옥이 두리ㅗ 넘어갈 듯하다가 몸을 나누었으나, 옆구리에 끼고 ㅇㅆ던 보퉁이는 사람들

의 발 아래 굴러 떨어졌다.

"조금 부딪쳤다구 이러는 행패가 어디 있어요?"

묘옥이도 저자 풍물에는 익숙한 처지라 졸연치 않게 악다구니를 쓰며 마주쳤던 사내에게

대느니, 그는 더욱 성깔을 돋우어 소리쳤다.

"이런 제미할... 댁네는 사지가 멀쩡하지 않아. 저리 비켜." 하며 으르딱딱이고 돌아서는

데 묘옥이 뭐라고 더 해줄까 하다가 제품에 삭아버리고 말았다. 사내는 한족 다리를 심하

게 절면서 사람들 틈으로 헤치고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 미운 벌레 모로 긴다더니..."

묘옥은 그제서야 떨어뜨린 보퉁이 생각이 나서 발 아래를 살피는데, 방금 떨구었던 것이

간 데가 없었다. 허리를 굽혔다가 아예 쭈그리고 앉아서 사라들의 행전 친 다리 사이로 내

다보았건만 모래먼지만 풀썩거릴 뿐이었다. 그래도 행여나 하여 이리저리 앉은뱅이 본새로

옮겨 다니면서 더듬었다.

"어이쿠, 이게 뭐야."

"아니 장터에 앉은뱅이가 났다?"

"재작년 그러께 섣달 그믐에 놓친 방귀 찾는 모양일세." "아니야, 감씨를 빠뜨린 게 아닐

? 이 사람아 자네 여편네두 한양 나갔다가 감씨 빼놓구 와서 딱딱한 것은 못 먹구 부드럽

고 연한 물건만 먹는다며?" "예끼 이 시러베자식아."

지나는 장꾼들이 이렇게 농탕을 치고 가건만 묘옥은 정신이 아뜩하였다. 이제 무일푼이

되었으니, 몸을 올바로 지키기는 적막강산에 벌거숭이인지라 이미 난감한 일이 되어버린 것

이다.

"뭘 찾수?"

떡좌판을 지키던 중년 여인이 고개를 쑥 빼면서 묘옥이에게 물었다. 그 여자는 이미 자초

지종을 다 보아 알고서 짐짓 그렇게 묻는 것이엇다.

"글세 내 보따리가... 종적이 없네요."

묘옥은 멍청하게 중얼거리다가, 말 붙인게 동무라고 좌판 앞으로 다거섰다.

"방금 떨어졌는데... 잠깐 사이에..."

떡장수 아낙이 혀를 끌끌 찼다.

"그 보따리 벌써 멀리루 갔수."

"가다니요..."

"누군가 쳤지?"

묘옥은 눈물이 글썽글썽해져서 고개만 끄덕였다.

"치기당했구먼."

곁에서 인절미를 먹고 있던 노인이 동정조의 말을 던졌다.

"이 바닥에서 돈 잃은 사람이 댁뿐만이 아니오. 땅을 치며 주저앉아 우는 사람들 여러번

봤지."

"어쩌나..."

묘옥이 기가 막혀 털썩 주저앉으니, 떡장수 아낙네가 말하였다.

"일부러 와서 부딪구 나서 시비 벌이는 사이에 보따리를 채간다우." 노인이 물을 마시고

나서 수염에 붙은 콩고물을 털어내면서 곁달았다.

"그래두 채가기나 하면 창황중이라 견디기나 낫지. 나는 작년에 그만 서너 놈이 작당한

장기수에 녹아서 깨 닷 말 판 돈을 몽땅 떼였지. 백주에 눈을 뻔히 뜨구 당했더니, 다리가

후들거리데."

"돈이 많우?"

묘옥이는 대답할 기운도 없이 절름발이 사내가 헤치고 간 강변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은

묘옥이가 방금 지나친 혼잡한 장거리이니 사람들의 법석대는 고함소리와 몸짓이 가득 차 있

을 뿐이었다.

"그 다리 저는 사내가 장바닥에 늘 다니지요?"

묘옥이 묻자, 떡장수 아낙네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시큰둥하니 받았다.

"글세 우리야 뭐 떡이나 팔지, 일일이 장꾼들을 봤어야지. 근데 무슨 떡 드릴까? 인절미두

있구, 시루떡두 있꾸, 백설기, 대추떡, 절편, 뭐든지 있수." 돈 잃은 사림이 떡 먹을 리 없음

을 잘 알면서도 떡장수가 길을 틔우려는 수작이매, 묘옥은 일어나서 오던 길로 돌아 올라가

보았다. 뒤에서 노인이 일러주는 말도 귓전으로 흘렸다.

"저 아래 여각거리에 가면 포교가 나와 있으니 가서 발고하오." 묘옥은 장거리를 쑤시고

지나는데 숱한 사내들이 모두 맨상투에 두건 차림이니 하나같이 어슷비슷해보였다. 다만

그자의 특징이 다리를 전다는 것밖에 가려낸 재간이 없었다. 묘옥은 사라들의 걸음걸이만을

살피고 다녔다. 설사 포교가 있다 하여도 묘옥으로서는 관아의 기찰대상이니 쫓아가 발고할

수도 없는 입장이엇다. 그렇다고 보퉁이를 찾을 것 같지도 않았다.

반대로 포교에게 면박에니 당하거나 운이 나쁘면 잡히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묘옥은 도

선자에까지 와서 하역하는 곁꿀들 사이를 살펴도 보았고 음식 파는 가가에 대고 장바닥에

돌아치는 절름발이에 관하여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답은 한결같이 모르쇠니 이제 타관

도방에 내친 신세가 되어버린 묘옥은 말 그대로 몸뚱아리밖엔 후구지책이없는 셈이었다.

묘옥은 물가에 주저앉아 다리쉬 도 할 겸 흐트러졌던 마음도 가다듬을 겸 하여 인적이

뜸한 나룻가 위쪽으로 올라갔다 강변을 바라보니 딱섬을 바라고 내려가는 강원도의 원목 뗏

목들이 지나치는데 물길잡이늬 배따라기가 청승맞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묘옥은 강변에 바

싹 다가앉아 물속에 잔돌멩이들을 하나씩 던지면서 풀어졌단 마음을 다잡았다. 어딘가에 색

주가가 있을 테니 몸을 던지기도 하려니와, 까짓 강변에서 뱃놈들게 초저녁 거더머리나 팔

든지 하여, 노자 장만해가지고 어디 아늑한 암자라도 찾아가면 그뿐일 거이었다. 작심중에

묘옥의 물성질은 살아온 습관대로 약한 듯 모질게 다져졌다. 수초가 물 위에 맡기고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좁은 곳에서 너른 곳으로 얹혔다가 다시 흐르고 하는 것처럼 묘옥은 여

주에서의 기억을 활활 털어내고 송파에 몸을 얹을 작정이엇다.

묘옥이 물가에서 하염없이 돌멩이를 주워던질 적에, 나루에서 일을 하던 인부들과 곁꾼들

이 수군수군하고 사공들도 희희닥거렸으며 강변에서 거래하던 차인 나부랭이들이 드디어 의

논을 내었다.

"저거 어디서 굴러온 작부인지 모르지만 아주 배꼽이 곤두섰군." "글세 작부라면 색주

가에서 횟박을 뒤집어쓰고 앉았을 텐데 차림새는 여염 여인 같구만." "미친년 아닐까?"

"미친년은 더욱 좋지. 이놈아 오입쟁이 반팔십에 그것쯤은 알아야지. 모름지기 팔희가 있

느니라. 제일이 유부녀요, 제이가 하님이요, 제삼이 과부요, 제사가 기생이요, 제오는 첩이요,

제육은 처녀요, 끝이 마누라인데, 최고가 바루 광녀란 말여." "저 자식은 꼴값에 광통교서

별감배들게 들은 풍류랍시구... 오살할 놈." "그나저나 세다리 난장판에 두 다리 들고 앉았

으니 홀림은 분명한데." "수작이나 걸어볼까아."

저희끼리 쿡쿡 지르고 낄낄거리면서 초상난 데 개 몰리듯 차인들이 묘옥에게로어슬렁대며

다가들었다.

"저어... 여보십시다?"

그중 농탕질 좋아하는 자가 헛기침부터 서두를 떼고서 한량풍으로 능숙하게 끌어보았다.

"그 마누라 어디 기시우?"

묘옥이 놀라서 모래를 터고 일어나며 대꾸가 없는데, "혼자 수심이 깊어 뵈는 것이 민망

하여 무례를 하였수. 송엽주와 육포가 있으니 뱃놀이라두 가시려우?"

딴에는 멋들어지게 오입쟁이의 격식을 보였으니 추파와 대꾸가 있으련만 묘옥은 무표정하

게 나룻가로 올라올 뿐이었다.

"저봐 실성했지."

"노류장화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니 집적거릴 문자속이 있어야지." "인석아, 기왕지사

내친 김에 저자의 개가 되는 판인대, 뭘 우물거려." "아따 길에 떨어진 홍합에 임자 있나?

주워 먹는 놈이 살루 가지." 동무들의 격려에 힘을 입어 먼저 수작 붙이던 자가 묘옥의 손

목을 덥석 잡았다.

"돈이 되나 쌀이 되나 행하는 줄 터이다."

묘옥이 사내를 아는지라 대번에 뿌리치며 앙탈하지 않고, 동요없이 잠깐 잡힌 손을 내려

다보다가 사내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앙탈을 하면 도리어 사내들이란 자극이 되

어 더욱 거칠어지고 분을 넘기가 쉬운 일이었다.

"이 손 놓으시오."

침착하게 말하면서 묘옥은 손을 뿌리쳤다. 뿌리치자마자 묘옥은 사내에게로 대들어 태도

일변하여 목청을 돋우었다.

"네 이놈, 어느 세상이라고 백주 대낮에 여염녀에게 행패하느냐. 너어느 상고의 차인이냐.

내가 모년 모월 모처를 들어서 관아에 직소하겠다."

사내들은 묘옥의 또라지게 따지는 말투에 고기눈깔이 벙벙하여 멀뚱거리며 서 있었고,

는 자도 없엇다. 묘옥은 뒤돌아보지 않고서 나룻가를 떠나 다시 장거리로 향하였다. 묘옥은

자기의 행동에 스스로도 적이 놀랐고, 역시 예전처럼 색주가에 몸을 던질 수는 없다고 생각

했다. 뭔가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 방도는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이 송파 안

에서 찾아야 한다. 만약 못 찾게 되면 구걸이라도 하리라 생각하며 묘옥은 쇠전마당을 지났

. 쇠전 앞을 지나자 길이 어느만큼 한산해졋고, 객주와 여각이 줄을 지어 서있었다. 여각

을 창고와 마방과 숙박하는 방이 딸린 깨끗한 초가들이었고, 객주는 역시 비슷하건만 집은

조촐하게 작았다. 그러나 장사치들께는 우선 객줏집이 여각보다 웟등급이니, 그 취급하는 물

품이 다양하고 고가였기 때문이다. 객주에서 지방산물을 모두 제한없이 위탁 판매한다면 여

각은 주로 쌀과 소금과 해산물을 거간해주었다. 또한 여각에서는 부피가 큰 상품들을 다루

어 그 이익이 객주보다 실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건물이 큰 것은 상거래 이외에도 세마

라든가 숙박이라든기 창고 대여 같은 것을 하는 때문이었다. 묘옥이 사고 팔 물건이 없으매

덮어놓고 숙박하기도 어려운 일이니 천상 싸구려 봉노를 찾아야겠지만, 봉놋방이란 보부상

같은 거친 사내들이나 끼여서 뒹구는 곳이니 갈 곳은 보해 객주뿐이었다. 보행 객주는 여행

하는 자만을 상대로 숙식으로 업을 삼는 집이었다. 객주거리를 지나면 장대가 내세워진 색

주가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고기와 전을 지지는 기름진 냄새가 길 좌우에 가득하였다. 묘옥

은 보행 객주를 물어 찾아갓다 .대처답게 토담이 둘러 잇고 마당은 발간빛으로 깨끗하여 밥

알이라도 주워 먹을 만하였다. 문은 나무 문짝으로 쉽게 열지 못할 듯한데 밀치니 놋쇠방울

이 요란하게 딸랑거렸다. 문간의 마루에 한가히 앉았던 주인장이 아녀자임을 보자, 사환을

불렀다.

"야야, 손님 모셔라."

얼굴이 해사한 사환 아이가 뛰어나와 인사를 하는데, 묘옥은 냉큼 들어서지 못하고 자신

없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댁에서 혹시 부엌댁이나 빨래어멈이 필요치 않은가 여쭙지." 사환 아이는 먼쩍은 김

에 은근히 열이 나서 문을 쾅 닫으며, "원 손님은 안 들구 어디서..."

씨부리며 돌아가는데, 주인장의 구가 보배라 어느결에 알아들었던지, 바깥에다 외쳤다.

"여게, 잠깐 들어와보오."

묘옥은 들어서니 주인은 우선 용모와 의복을 살핀 연후에 괴이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

를 갸우뚱하였다.

"보아하니 젊은 색시가 무슨 사연인가?"

", 원행을 하던 중 요기나 하려고 장에 들렀다가 노자를 몽땅 치기다하여서..." "운 저

런 죽일 놈들이 잇나. 날마다 늘어가느니 좀도적뿐인데, 포교란 자들은 우리 같은 장사해

먹는 양민들 돈이나 울궈내려 하니 큰 문젯거리일세. 내가 보행 객주를 해봐서 잘 알지만

어느때는 손님인 체 들어왓다가 방방이 털어가질 않나, 몰래 들어와 투전판을 벌여서는 시

골 사람들 생눈을 뽑지 않나, 거참 봉변일세. 어디서 오는 길인가?" 묘옥은 잠시 생각하고

서 대답하였다.

", 이천 친정에 들렀다가 옵니다."

"허허 남의 일 같지 않고... 그래 원행에 바깥사람은 어딜 두고 혼자서 나댕기나?" ",

군막에 들어 자유롭지 못합니다. 시방 변방에 상전을 모시러 따라가 계십니다." "마침 잘되

었네. 우리집에서 그러잖아두 이불 홑청을 모두 새로 갈려는 판인데 표모가 없던 참이야.

닷새만 일해주게. 내 먹여주고 두 냥 줄 테니 어떤가?" 묘옥이 처지에 아랫목 윗목, 서속밥

에 뜨물을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묘옥은 그날부터 보행 객줏집에서 닷새를 기한으로 표모

질을 하엿다. 아침에 일어나면 걸레로 훔치며 총채로 떨어 방소제를 마치고, 온갖 사내들

의 땀과 때에 절은 흩청을 뜯어 함지에 담아 이고서, 등에는 쇠솥 지고 한 손에 점시이 든

바구니 도시락을 들고 숯내로 나갔다. 숯내는 삼전나루와 송파나루 사이에 흐르는 샛강이

엇따. 바윗돌에 디디고 앉아 맑은 강물에 빨래를 헹구고 방망이로 두드리노라면 갖은 시름

이 다 사라지는 것이엇다.

제 몸에 스몄던 온갖 더러움이 그 빨래처럼 희디희게 정결해지는 것만 같았다. 숯내에는

여러 객주와 여각에서 나온 표모와 품팔이 아낙네들이 강안에 울긋불긋 수를 놓았는데,

망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강심이 경쾌하게 꽂히는 듯하였다. 묘옥이도 이웃한 아낙네들과 동

무가 되어 함께 머리도 감고 장딴지의 때도 벗기면서 시름을 잊었다. 솥을 걸고 잿물 뿌려

발래를 삶을 적에는 몰래 내어온 건어도 구워 먹고, 푼돈으로 탁주로 받아다가 나누어 마시

며 잡가를 부릭도 하엿따. 특히 왕십리의 미나리가 한창이어서 점심참에 둘러앉아 고추장에

듬뿍 찍어 먹는 맛이 그만이었다. 닷새를 한다는 일이 열흘이 넘게 되었는데, 그것은 묘옥이

일을 깔끔하고 부지런히 하여 주인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경강 쪽으로해라 탐스런 연시처럼 익어 떨어지는 저녁에 묘옥이 물먹은 솜처럼 피

곤한 몸을 이끌고 객주거리로 올라가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 나 좀 보구 가오."

묘옥이 무심히 들어 넘기고 그냥 걷자니 누가 뒤에 와서 치마 허리띠를 당기는 것이엇다.

"아이 깜짝이야!"

돌아보니 송파나루에 내리던 첫날 나루 가가에서 죽을 사먹엿떤 장쇠라는 아이였다.

"아주머니 이게 웬일이오?"

묘옥이도 타곤 도방에 구면이 내 식구라는 것처럼 우선 반가웠다.

"너 참 안 보이더니... 보구 싶더라."

"내야 매일 장바닥을 쏘다니며 쬐끄매서 어디 보이기나 하겠수. 헌데 왜 여태 송파에 계

시며 이게 웬 빨래요?"

묘옥이 천천히 걸으며 저간의 사정을 얘기해주니 장쇠는 발을 구르는 것이엇다.

"저런... 그놈은 절름발이가 아니오. 일부러 아주머니 눈을 피하느라구 거짓거리를 했어

."

"네가 그자를 아니?"

"알다마다요. 내 동무 아버지거든요. , 이제 보니 새옷 입고 떡해 먹고 그게 다 그 돈이

구먼."

"그 사람이 너희 동네 사니?"

"바루 우리 이웃인 걸요. 우리 동네선 모두 방아깨비네라구 그러지요. 그냥 깨비라구두 하

구요."

"그이가 도둑인지 네가 어찌 아니?"

"아유 왜 몰라요. 온 장바닥이 다 아는데요. 깨비네 부자가 손맵시가 제일 빠르다구 하는

데요."

묘옥은 그러나 반색도 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이젠 잃은 돈인걸..."

"아니우, 가서 빨래 얼른 내려놓구 나하구 우리집에 가요. 아직 다 쓰지 않았다면 찾을지

두 몰라요."

묘옥은 한숨 섞어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다, 그걸 찾아서 네 할머니 죽이나 많이 사다 드렷으면 좋으련만." "아주머니, 어서

가재두."

"그래, 빨래 갖다 두고 올게."

장쇠의 재촉으로 따라 너선 묘옥은 거의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행여나 돈과 패물의 일부라

도 찾을 수 있었으면 하엿따. 빨래를 객줏집에 두고 나서 저녁도 먹지 않고 묘옥은 장쇠를

따라 나섰다.

"너희 동네가 어디냐?"

"광나루 못미처 봉수대 아랫녘 다래목이란 동네요."

그들은 장거리르 벗어나 강변을 따러서 내려갔다. 수수밭이 계속되어 있고 경강 쪽에 떨

어지고 있는 석양이 강물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강변에서 가끔씩 고기 광주리와 어망

을 짊어진 사람들이 지나쳐갔다. 얼마쯤 가다가 장쇠가 강변을 떠나 후미진 골짜기길로 접

어들었고 땅거미가 짙어졌는데 그ㅈ고에서는 불빛조차 보이질 않았다.

"아직두 멀었니?"

"이제 다 와가요."

"아니... 캄캄한데 어디 동네가 있어."

장쇠는 명랑하게 웃고 나서, ", 마을이 버젓하게 자리잡은 줄 아슈. 다래목이는 양인들

은 얼씬두 않은 천골이어요." 묘옥은 해서를 떠돌아다닐 저에 보아서 그런 마을을 잘 기

억하고 잇었다. 이름난 저자가 있는 대처 언저리에는 수 쩍은 놈들이 모여 사는 골자기가

있게 마련이엇다. 그런 마을에는 얼굴에 먹물 자자 찍히 경친 놈들인, 퇴무당이며, 도망친

관노비, 사천들 따위가 움을 파고서 걸식과 도적질로써 살아가는 것이었다. 대저 장시의 무

뢰배라든가 각설이, 노름꾼, 좀도둑들이란 모두 그러한 움동네에 모여 있게 마련이었다.

"... 내가 가두 별일 없겠니?"

"그럼요, 우리 동네 꼭지가 내게는 삼촌뻘이지요. 우리 아버지가 예전에 수구문 밖 꼭지딴

솔개미였거든요. 왕십리에서 이리루 나온 뒤에 아버진 돌아가시고, 아우 하던 이가 꼭지가

되었지요. 우리 할머니보구 까마귀 꼭지가 노상 모친이라구 불러요." 아이의 말을 듣고 보

니 어쩌면 돈을 찾는다는 일이 그리 허황한 노릇 같지는 않았다. 다래목이는 나무 한그루

없는 황토 야산의 듬성듬성한 골짜기 양쪽에 자리잡은 움동네였다.

자갈와 잡초뿐인 야산에는 뱀과 개구리만 사는 듯하였고, 풀벌레 소리만 가득 차 있엇다.

우 땅 위로 솟아오른 초가의 이엉 사이로 불빛들이 드문드문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을에는

뒤편에 비교적 넓은 공터가 있는데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몇몇 사내가 앉아서 두런거

리며 이야기들을 하고 밥을 짓는 모양이었다. 장쇠는 한 움집의 거적을 들치고 들어가며 묘

옥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거적대기 바로 옆의 흙벽에 꽂아놓은 관솔불이 간신히 좁다란 움막을 비추고 잇었다 .

닥에는 맨구덩이에 짚을 깔았고 웟목쯤에 따로 흙을 파서 바깥쪽으로 구멍을 낸 화덕이 보

였다. 화덕 위에 거미줄 친 뒤로 오래된 것 같은 녹슨 쇠솥이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묘옥은

허리를 꾸부정히 하여 입구 쪽에 섰고, 누워 있던 노파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할머니 이것 드시우. 그리구... 손님 오셨어요."

"평안하셔요?"

묘옥이 먼저 인사를 하는데 노파는 기침부터 요란하게 터뜨렸다.

", 누구요?"

"왜 저번날 고기죽을 사주었다던 젊은 아주머니 말이야요." 장쇠가 설명하니 노파는 고

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기침이었다.

"아이구 이놈의 해수가... 어서 이리루 들어와 앉우." 묘옥이 머뭇거리고 있는데, 장쇠는

장어서 가져온 뚝배기의 구걸한 음식을 할머니 앞에 내밀어놓고는 밖으로 나가면서 말하였

.

"예서 우리 할머니랑 얘기나 하구 계시우. 내가 까마귀 꼭지를 만나서일러주고 돈 찾아올

테니."

묘옥이 하는 수 없이 짚 위에 앉자 노파는 뚝배기를 끌어다 숟갈을 뜨기 전에 묘옥에게

이사를 건넸다.

"저녁은 들었소?"

", 어서 잡수시지요."

"에이, 목숨이 참 모질기두 하지. 손주놈에 이 늙은 목숨을 매어놓구 연명중이라오."

옥은 노파가 저녁을 드는 동안 무료하게 앉아 잇었다.

"세상의 화복길흉이란 참말 무상한 것이라오. 그래두 저애 애비가 수구문 바깥서 서울 깍

정이패의 꼭지 노릇을 할 적에는 의식이 대갓집 마나님 부럽지 않더니, 게서 내몰려 송파로

나와서는 저 어린 것을 누가 돌봐주는 이나 있나."

묘옥은 이미 장쇠에게 들어 알고 있엇으나 그냥 앉아있고도 뭣하여 물었다.

"장쇠 어머니는 어디 갔나요?"

"윗강 새남터 꼭지란 놈의 첩으루 들어낮구 말았지. 깍정이 마누라는 계집 중에 그중 물

성질이라오. 젊은댁은 송파서 장사허우?"

"아니요, 거기 보행 객줏집서 표모 노릇으루 밥을 부쳐 먹습니다." "에이그... 서방은 없

?"

"혈혈단신입니다."

"나두 나이나 젊구 기운이라두 있으면 저자에 나가 밥값이라두 할터인데." "이 동네 사신

지 오래되셨나요?"

"한 삼 년 되었소."

"여긴 광대패가 안 살아요?"

", 두 패거리나 있었는데 모두들 흩어지구 요새는 그이들의 궁량이 트여서 절가엘 찾아

가지 구태여 천골에 머물지를 않지. 가끔 묵어 가는 패가 있긴 있는 모양이오만, 괴뢰배나

몇사람 아니면 가객하구 잽이 같은 단출한 식구들이지." 묘옥이와 장쇠의 조모가 얘기를

하는 중에 장쇠는 꼭지가 살고 있는 움 앞에 잇는 모임터로 올라갔다. 화톳불이 타고 잇는

마당이엇다. 걸식해온 음식 중에 가장 맛난 것은 따로 상을 보아 꼭지의 움막에 들이고,

머지는 모두 한솥에 넣어끓이는 것이다. 꼭지의 움막은 말 깍정이 움막이지 버젓한 온돌망

에 세간도 깨긋하였고, 각지에서 쟁여다놓은 장물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꼭지 아래

기운 좋고 주먹깨나 날리는 상번수들이 늘 모임터에서 함께 기거하는데, 장쇠가 올라가자

저녁을 먹고 있다가 안 체를 하였다.

"장쇠냐? 저녁 먹어라."

"장에서 먹엇다. 삼촌 계셔?"

"음 강 건너서 손님이 오셔서 시방은 안된다."

장쇠가 문틈으로 움 안을 들여다보니 건장한 사내들이 등을 돌리고 앉았는데, 벽 가에는

윤이 반질거리는 총포를 세워두었다. 얘기하던 사람 중에 하나가 험상궂은 얼굴을 돌리며,

"게 어떤 놈이냐?"

하고 부르짖었고 장쇠는 얼른 비켜났다. 까마귀가 뛰쳐나오더니 두리번거렸다. 장쇠가 풀

죽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요, 장쇠란 말유."

꼭지 까마귀는 입맛을 쩝쩝 다시고는 아무 말 없이 도로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상번수 장

정들이 말하였다.

"그것 봐라. 볼일이 있으면 이따가 저 손님들 모두 나가구 나서 뵈어라." ", 잔칫집서

달아온 대추떡이 있다. 이거나 먹어봐라." "아저씨들 깨비 요새 봤어?"

"깨비란 놈, 요즘은 송파 안 나오구 삼전나루에 나가는 모양이던데." ", 그래서 두 부자

가 장거리엔 보이질 않았군."

"왜 그러냐, 깨비가 널 괄시라두 하더냐?"

"그게 아니라... 이놈이 며칠 전에 장바닥에서 어깨치기를 했거든." "뭐라구... 그러구선 강

원도 포수처럼 입을 싹 씻어? 꼭지 어른께 일러줘라. 아주 돌림방을 내어서 근거 없는 외톨

이를 만들어야지."

깍정이가 패거리에게 돌림방을 당하면 발을 붙일 저자바닥이 없는 법이었다. 구역 잃은

자는 산솔에 들어가 두더지나 뱀 잡는 일밖에 할짓이 엇ㅂ었다. 손님과 함께 까마귀가 나오

면서 상번수들에게 지시하였다.

"얘들아 깨끗한 움 하나 비워드려라. 손님들이 여기서 며칠 묵어 가실 예정이다." "저 아

래 거북이네가 새 살림을 내어서 가장 조촐합니다." "거긴 길가라 사람의 눈이 많다."

까마귀 뒤에 섰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패랭이에 중치막까지 입었는데 얼구이 얽은 드하

였고, 그보다 땅달막한 텁석부리는 눈이 화등잔같이 크고 어깨가 딱버라졌는데 한 손에 화

승총을 들고 있었다.

"그럼 천상 두꺼비네 집을 쓰시지요."

", 거기가 후미져서 좋겠군."

까마귀는 그들에게 사람을 딸려주면서 깍듯하게 허리를 굽실거렸다.

"성님들 그럼 가셔서 편히 쉬시우."

화승총 가진 자가 거친 음성으로 물었다.

"여기서 며칠이나 묵으란 건가?"

"사흘이오. 구저 세 밤만 주무시면 물건은 득달같이 처분해 올리겠습니다. 약속대루 구전

은 열에 세 몫입니다."

"알았어. 시세대루 해야지 괜히 헛손질하려구 그러면 재미없네." "암 여부가 있겠습니깡.

노적사 원태 성님이 보내신 일인데 제가 어느 앞이라구 헛손질하겠습니까. 송파서는 저만

옆에 끼면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한양두 그렇지요. 수구문이나 왕십리에두 모두 제가 번수

시절에 같이 놀던 아이들이 꼭지를 잡구 있는뎁쇼." "포교 냄새 맡지 않도록 잘하게."

"헛허 참 그애들 기찰은 우리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정탐해 주어 나눠주지 않으

면 중장을 면치 못하여 아이들까지 임시 범인으로 빌려가는 판에 어찌 알겠습니까?" 얘기

가 오가는 꼴이 손님들은 깍정이들의 웟손 가는 대적들이요, 장물 처분을 하러 흥정차 들

른 모양이었다.

"술 좀 올려 보내게."

"예예, 소주가 좋겠습지요. 얘들아, 낼부터는 행수상이랑 손님들게 올려드려라." 손님들이

물러간 뒤에 장쇠가 나아가 찾아온 자초지종을 말하고, 물건 임자가 고모라고 이르니 까

마귀는 노기가 등등하여졌다. 깍정이의 의리로 예전 두목의 누이 되는 사람이 물건은 잃었

으니 의당 식구들을 단속하여 찾아낼 일이요, 무엇보다도 상번수도 못되는 일개 깍정이의

헛손질은 꼭지의 권위를 무시한 처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놈을 단매에 때려 죽여야겠다. 어서 가서 잡아와라. 흥 이놈들이 당분간 단속을 풀어주

었더니 누구 밑에서 밥을 먹기에 천신도 하지 않고 넘어가느냐. 아주 돌림방을 내리라."

번수들이 득달같이 내려가서 마침 삼전나루서 돌아와 술에 곤드레가 되어 자고 있는 방깨비

부자를 끌어닥 모임터에 굻렸다. 이미 장문 설치를 하여놓고 둥그러게 둘러섰는데, 모두들

굵기가 한뼘 가웃의 몽둥이를 들었으니 장문법이란 깍정이들의 율령인지라 장살이 되어도

말릴 이가 없었다. 오자마자 까마귀는 달려들어 짚고 섰던 지팡이로 가슴팍을 쿡 찌르면서

외쳤다.

"네 이놈 깨비야, 송파 장거리서 헛손질을 하였다니 그게 사실이냐?" "아니오, 금시초문

이올시다. 제가 어깨치기나 봇짐털이를 하였은즉 당일로 행수 어른께 반절 상납을 올리지

않았습니까? 절대루 그런 일이 없습니다." "이놈을 매우 쳐라!"

꼭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매를 들고 둘러섰던 상번수들이 몸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무지

막지하게 어지러이 내려쳤다.

"아이구우... 사람 죽네."

깨비라는 깍정이의 아들은 곁에서 죽는소리로 외쳐 울다가 엎드려지며 애걸하였다.

"행수 나리 과연 저희 부자가 한 열흘 전에 어깨치기로 보퉁이 하나를 낚은 적이 있수."

"잠깐 매를 멈추어라."

이미 초주검이 되어 기어 다니는 깨비를 번수들이 발로 지끈지끈 밟고 섰고, 꼭지는 아이

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제 아비가 시비를 트고 저는 떨어진 보퉁이를 찍어 날랐소이다." "보퉁이 속에 뭐가 있

더냐?"

"은자 백 냥과 금가락지 두 돈쭝과 호박가락지 한쌍, 칠보잠이 있었어요." "지금 그대루

다 있느냐?"

아직도 입을 굳게 다문 깨비를 툭툭 건드렸으나 대답이 나오질 않자, 꼭지는 매정하게 내

뱉었다.

"더 물을 것이 없겠다. 이제부터 그치지 말고 난장으로 돌린 뒤에 거적에 싸서 광나루 모

래밭에 암장해 버려라."

"행수... 살려주요. 삼십 냥은 노름으로 쓰고 나머지는 귀향할 준비로 움 뒤에 파묻어 두었

."

"음 잘하는 짓이다. 네가 수해로 삼남서 올라와 온 가족을 굶겨 죽이고 수구문 밖 동활인

서에서 겨죽이나 얻어먹고 연명할 제 꼭지딴 솔개미가 데려다가 상두꾼이라두 시켜주었으니

네 명줄이 붙은 것이다. 남의 초상에 나가 곡재인 노릇이나 하며 쌀되를 얻어올젠 가장 깍

정이인 척하더니, 네 이놈, 송파 나온 뒤 장거리에서 치기일을 벌이고는 예전 의리를 잊었고

. 그리구 어쩌다 대금을 보았으면 부모 없이 떠들어온 애들 각설이나 먹이고 입힐 것이지

어느 앞이라고 속이느냐. 그런 심보루 귀향한들 너를 못 잡을 줄 아느냐. 내가 전국을 돌아

다니는 유민 부랑 동무들게 사발통물하여 잡아다가 동티낸 놈 급살 맞듯 해주리라, 보기 싫

. 어서 거적말이하여 내쳐라."

"아비를 살려주오, 돈 다 내드릴게 제발 덕분 살려주요." 깨비의 아들이 울부짖으니 장쇠

가 곁에서 까마귀를 달래었다.

"삼춘, 이왕에 돈을 찾았으니 죽이지는 마시고 축출이나 하시지요." 까마귀는 두 손을 들

어 제게 빌고 있는 아이를 보고는 엔간히 성이 풀린 듯하였다.

"네놈이 장쇠네 손님 돈을 털었으니 장쇠의 처분대로 하리라. 부자를 내쫓아라." 송파의

꼭지가 깨비를 내쳤으니, 그것은 물론 송파와 광나루와 삼전나루, 동작나루, 노량나루는 말

할 것도 없거니와 한양근터의 깍정ㅇ 패들게 끼일 자격이 없어진 셈이었다. 내쳐진 깍정이

는 다시 정처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달려갔던 자가 묘옥의 돈과 패물을 찾아오니 장쇠는

두말 낳고 거기서 셈하여 절반을 끊어 까마귀에게 바쳤다.

"이건 뭘... 내가 솔개미 성님께 입은 은혜로서 너를 돌봐야 할 것인데 그건 너무 무심하

였다."

"아니우. 법도대루 일을 처리해야 기강이 서지요."

까마귀가 못 이기는 체 받아넣었으나 장쇠의 난데없는 고모가 아무래도 궁금하였던지, "

네 고모라 하는데 어디서 무엇을 하던 사람이관대 이렇게 큰 돈과 패물이 있다더냐?" 물었

, 장쇠도 워낙에 깍정이 판에서 소악동으로 굴러먹은 아이라 거짓소리가 척척 쏟아져 나

왔다.

"일찍이 한양서 선혜청 서리의 첩 노릇을 하고 있더니, 이번에 그자가 결손에 올려 집안

이 구몰될 적에 관재를 피하여 세간을 정리하고 우리 할머니를 찾아오셨수." 들어보니 그

러 듯하여 꼭지는 더는 의심 않고 횡재한 것만 기뻐하였다.

"내 오늘은 삼전나루에 나갈란다."

그것은 좀 전에 찾아온 손님의 잔물건도 있고, 또한 뜩밖의 돈이 생겼으니 그의 살림집이

잇는 삼전나루로 나갈 법도 하였다. 꼭지는 홍제원 은근짜 기녀 출신의 여자와 삼전나루 주

막거리에서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한달에 절반은 거기 나가 살았다. 그는 상번수 둘을 데리

고 헌 거적에 싼 물건을 지게에 지워 내려갔다. 강 건너 노적사에서 찾아온 두 사내란 다름

아닌 안성 청룡사 사당패의 모가비였던 고달근이와 떠돌이 거사 황회였으니, 당진서 강도질

했던 유치옥의 장묵을 처분하러 송파 꼭지를 찾아온 것이엇다. 고달근이가 묘옥을 보앗다면

반가워했을 테고 이경순의 후문도 물었으련만 피차에 이런 곳에서 만날 것은 꿈같은 일이었

던 것이다. 장쇠도 두 손님들을 보았으나 묘옥이와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 턱

이 없었다. 장쇠는 돈과 패물을 찾은 것만 대견하여 은자와 패물을 싸들고 움막으로 달려

내려갓다.

"아주머니, 이게 다 돈이우."

"맙소사 어찌 찾아냈니?"

장쇠는 곡지가 제 부하 징치하던 것을 낱낱이 일러주고, 반절 상납한 것으며를 얘기하였

. 절편만큼 네모반듯한 은자가 도합 삼십 개였으니 삼십 냥이엇다. 은자 삼십 냥이라면 살

이 삼십 섬이엇다. 묘옥의 표모질로는 것삼 년을 하루같이 일해야 받을 만한 돈이 아닌가.

게다가 금가락지와 호박가락지가 각가 하나씩이니 그도 또한 큰 돈인지라 옆에 앉은 노파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연신 에고 소리였다. 묘옥이 장쇠의 손을 맞잡으면서 말하였다.

"얘야, 이 돈으루 우리 송파 장거리에다 장사를 벌이자." "송파는 터가 드세니 거여에다

작은 주막을 내세요. 거여 떡전거리에 가면 맞춤한 자리가 많을 거요."

"그래 그래, 할머니 모시구 나하구 함께 살자."

묘옥이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중얼거렸다.

 

이경순은 사흘을 기한하고 하옥이 되엇건만, 아무 혐의가 없다고 해놓고서도 어인 일인지

풀려나지를 못하엿다. 옥에는 일체 잡인을 금하여 도장댁도 애가 타지만 떡쪼가리 하나 넣

을 수가 없었다. 여주 이방은 제 여식이 조생원네 아들에게서 당한 모욕 때문에 울분을 풀

길이 없더니 이제껏 동무 하여 지내오던 이경순의 재산을 탐하게 되엇던 것이다. 물론 목사

는 대수롭지 않았던 일로 경순이 옥에 갇힌 것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경순의 아

내는 날마다 전생이를 이방 집으로 보내어 관아의 동정을 알아보려 하엿으나, 별무 소득이

었다. 그날도 전생이가 코를 쪽 빠져서 돌아왓길래 애가 단 도장댁은 반색을 하면서 달려나

갔다.

"그래 어찌되었느냐. 이방 어른은 만나 뵙고...?"

"참 모를 일입니다. 어른께서는 날마다 어딜 사다니는지 댁에는 통 붙어 계시질 않는구먼

. 그저께 겨우 뵈었을 때는 오늘은 꼭 나가시게 될 거라구 하더니만." "목사께 선사품이

라두 올려야겠다. 필경 안성 포교가 물고 늘어지는게 틀림없는 모양이여."

"그게 아니랍디다."

하고 나서 전생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방 나으리의 말이, 한양 포도청에까지 장계가 올라갔는데 무슨 하달이 잇을 게랍니다.

여주 관아의 히으로도 어쩔 수 없답디다. 오늘 못 나오시면 포도청에 가서 국문을 받을지두

모른대요. 주인 어른께서 당진 나가셨던 것은 사실 아닙니까?" "... 누가 듣겠다. 에그머

니나 포도청 추국청에서 경을 치면 살아두 병신이 된다든데, 이 일을 어쩌느냐?"

"여기서 묵인을 할려구 그래두, 안성서 발교했던 마부놈과 대질을 하게 되면 끝장이랍니

. 더구나 당진서 동작진 사당 패거리가 잡혔다는데 이방의 말이 우리 주인의 출신을 다

안다누먼요."

그들이 걱정하고 있을 적에, 갑자기 때문 부서지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장교와

나졸 서넛이 자못 서슬이 시퍼래져서 마당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집뒤짐을 하라는 지시가 있으니, 아녀자는 잠깐 피하라. 얘들아, 방안과 광을 샅샅이 뒤

져라!"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으리?"

전 같으면 이경순네 집에 와서 술 한 잔을 먹고 가도 굽신대던 장교가 으르딱딱이는 것이

고까웠으나, 워낙 다급한 사정이라 도장댁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낸들 아느냐. 찾을 물건이 있어 그런다."

전생이가 외팔을 흔들면서 대들었다.

"여기가 감히 어느 댁이라구 함부로 행패요. 이방 어른 가만 계실줄 알우?" 장교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전생이의 가슴을 떠밀어내고는 코방귀를 뀌는 것이었다.

"이방? 잠자쿠 있어. 공연히 다치지 말구. 관가에서 다 공론이 돌아서 집행하는데 무슨 애

들 장난인 줄 아느냐."

신을 신은 채로 이방 저방을 들락거리다가 나졸이 벙거지 쓴 대가리를 내밀며 외쳤다.

"장롱만 남았느데 잘 열리지 않습니다."

장교가 경순의 아내에게 물었다.

"농이 잠겼는가?"

그제서야 도장댁은 그 안에 무엇을 숨겨놓았는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고 가슴이 털커덕

내려앉았다.

"아니 그건 왜 열어보려구 그러세요. 남의 안방의 세간을 함부루 들추라는 법두 있나요."

"얘들아, 부숴라."

장교가 말하니 육모방망이로 농짝을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경순의 처는 죽는소리를 내지르면서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장롱을 가로막고 엎어졌고,

생이는 다시 장교에게 달려들다가 이번에는 호되게 발길에 걷어채어 나뒹굴었다.

"끌어내고, 어서 부숴버려라."

자개 장롱이 무참하게 부서져 나가고 갖은 피륙과 옷이 넝마처럼 마루에 던져지는데 도장

댁은 체념을 하고서 마루에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여기 있다!"

나졸이 장롱 밑바닥 깊속한 곳에서 무명에 싸놓았던 화승총을 꺼내어 번적 치켜들었다.

전생이가 마당에서 악다구니를 썼다.

"우리 주인이 총포를 잘 쓰신다는 건 인근 사방에 알려진 일인데, 그것이 새삼 무슨 죄가

된다구 내정 돌입이오?"

"잔말 마라. 우리는 시키는 대루 이걸 찾아다가 형방에 내밀면 그만이여. 우릴 원망 말구

네 주인의 죄나 원망하여라."

한참 북새통을 들쑤셔놓고 나서 관원들은 모두 몰려나갔다. 한참이나 넋고 잃고 앉아 있

던 경순의 아내는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일어났다.

"안되겠다. 내가 직접 이방을 만나서 수습할 방도를 물어야지." "저하구 같이 가십시다."

전생이와 도장댁은 관원들이 달려간 창골 큰길을 허겁지겁 올라갔고, 길가 주막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던 이방은 기들이 지나치자마자 곧 달려나가서 외쳐 불렀다.

"전생아, 전생아!"

도장댁과 전생이는 공교롭게 만나게 된 이방을 보자 곧 달려와 소매를 부여잡으며 창피한

줄도 모르고 방성통곡을 하였다.

"아이고오 이방 어른, 이런 원통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무슨 역적 죄를 지은 것두 아닌

, 관원이 안방을 돌입하여 세간을 모두 부시구... 관가에 가서 사또게 직소하려는 길이어

."

"허 이건 큰탈이 났군. 내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가는 길이올시다. 문득 바라보니 아주머

니께서 황망히 지나길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긴 하지만 이거 급박하게 되었군요."

"저희는 가장을 옥에 두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렸건만 나으리두

무정하십니다그려."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관가의 일이니 전들 애가 타지만 어찌하겠습니까. 우리 이럴 게

아니라, 댁으로 돌아가십시다. 가서 차근차근하게 수습할 방도를 의논해보셔야지요. 사또께

직소한들 공연히 노염이나 더하여 이서방에게 해를 주게 되면 그 더욱 낭패스런 일올시다."

이방은 침착하게 아낙네를 달래어 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총포를 찾아내었으니, 이제는 안성의 마부와 대질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그려. 그러면 틀

림없이 명일에는 안성으로 압송되었다가 당진서 잡힌 도적들과 더불어 한양 포청으로 추국

을 받으러 올라갈 것입니다."

"어찌 살려낼 방도가 없겠어요?"

도장댁은 사색이 다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매달렸다. 이방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담배 한

죽을 다 태울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더니, "꼭 한가지 방법이 있긴 있소이다. 헌데 그것

은 이서방에게는 몹시 어려운 일일 게요." 이방의 말에 도장댁은 더욱 애가 달아서 말하였

.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어서 말씀하시지요." 이방은 잠시

망설이는 체했다가 더듬더듬 얘기를 꺼냈다.

"이서방이 도적들과 같이 한양 포정에 올라간다면 다시는 못 볼 사람이 되구 맙니다.

적질을 하엿으며 인명을 살상하였으니 자신은 죽거니와 아주머니두 관노비가 될 거외다.

러니 차라리 여주를 떠나 세상에서 숨어 사는밖에 도리가 없겠지요. 돈이나 패물 등속을 갖

추어서 관의 손길이 닿디 않는 곳에 가셔서 사셔야 겠지요. 그러자면 여기서 이루어놓은 가

세는 모두 물거품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혐의가 불확실하여 이서방이 추국중에 완강히

버티다가 절명한다면 가세는 보존이 되겠지요마는 이미 동참한 자들이 잡혔으니 그것두 어

려운 일입니다."

도장댁이 이방의 얘기를 듣고 보니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어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하나 우선은 사람이 살고 볼 일인지라, "우선 사람이 살구 봐야지 까짓 재물이 무슨 소용

이겠어요. 유랑걸식하는 신세가 되더라도 살아나야지요."

하고 답하였다.

"아주머니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내가 오늘밤에 이서방을 내놓을 터이니 준비를 해두셨다

, 밤을 도와 달아나시우. 허나 여주 지경을 벗어난 뒤에 일어나는 일은 나두 어쩔 수가 없

겠소이다."

"알겠습니다. 그이를 갯가루 데려다만 주셔요."

"오늘밤 자정 무렵에 내가 이서방을 데리고 양화 어름으루 나가겠소이다. 참으로 사람의

운수는 헤아릴 길이 없는 모양이지요."

"글세 말이에요. 수년래 온 집안에 봄빛이 가득한 듯하더니 단 것이 진하면 쓴 것이 온단

말이 맞은 듯싶어요. 이게 모두 이년의 조가 맣은 탓이지, 제 주인의 잘못은 아닙니다."

방의 마음속에는 자별히 지내던 동무를 곤경으로 몰아넣는다는 가책이 있었으나, 세상살이

란 으레 남의 불리한 허점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세울 기회를 잃어버리는 법이라고

스스로 다짐을 하였다. 운이 나쁜 놈은 제 운을 다라서 몰락하는 것이고, 이제부터는 그자

의 운이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이 아닌가. 그만한 재산을 가지고 편안히 여생을 즈렸으면

아무 탈이 없었으련만 공연히 사당년에게 눈이 뒤집혀서 못된 자들과 어울린 것은 그만큼

제 운수의 관리를 소홀히 했던탓일 것이었다. 이방은 가장 애석한 듯히 혀를 차면서 한탄하

였다.

"계집은 만사 재앙의 근본이라더니 이서방의 패가는 오직 그 사당계집 때문입니다. 다른

고장에 가시더라도 외입 단속 시키시고 가세를 다시 회복할 궁리나 하도록 하십시오." "

게 다 이년의 자식 못 낳은 죄 때문입니다.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러면 저는 다시 길

청에 나가보아야 겠습니다. 내가 일단 퇴청하였다가 이서방의 탈옥을 도모할 것이니, 착오

없이 준비하시구 양화로 나가 기다리시오." "이방 어른의 이런 은혜는 정말 잊지 않겠습니

."

심란한 중에도 가장이 살아난 길이 생긴 것만 감지덕지 하는 도장댁이었다. 이방이 나간

뒤에 경순의 아내는 한참이나 시름없이 앉았다가, "아씨, 그리구 앉았으면 어쩌시렵니까.

준비를 하셔얍지요." 라는 전생이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글쎄다, 갑자기 어디루 간단 말이냐. 이 모든 것을 버리구 떠나려니 도무지 넓고 넓은 세

상 천지가 막막하기만 하구나."

"저두 월송골 분원에 나가서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챙겨가지고 오겠습니다." 너는 그

냥 여기 남았거라. 우리가 떠난 뒤에 너라두 분원을 떠맡아야지 생판 관계두 없는 자가 차

지해버릴 게다. 또 우리를 따라다니며 고생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아니우, 내가 오늘

날 이렇게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은 전혀 도장 나으리 덕분으루 구사일생을 했던 것이데,

여기 남아서 뭘 한단 말입니까. 그리구 내 소견으로는 이방이란 자의 눈치가 이미 나으리

와 의리로서가 아니라 남의 재물에 마음이 있는 듯하니 은근히 열이 납니다."

"사람이란 다 그런 법이니라. 그래두 다른 사람이 차지하느니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자연

히 그리될 일이다. 그럼 월송골에 갔다가 오너라. 나두 그동안에 대충 짐을 꾸리고, 길양식

할 떡두 해놓아야겠다. 아무두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도장대긍 ㄴ포졸들이 들쑤셔놓

은 방안을 치우지 않은 채, 우선 벽장 속에서 물품장부나 토지무서 따위는 제쳐두고 은자

와 돈냥과 패물만을 꾸려서 부담농 두 짝에다 넣었다. 그리고 비단과 무명도 따로 보퉁이

에 차곡차곡 꾸려놓았다. 부담이 두 짝이요, 큰 보퉁이가 하나니 짐이 제법 커졌으므로,

주 고급의 비단만을 다시 추려내어 작은 보따리로 쌌다. 그리고는 나머지는 모두 둘로 갈라

서 마루에다 내놓고 영문을 몰라 부엌에서 쥐죽은 듯이 섰던 하녀와 점원을 불러 그들에게

내주면서 일렀다.

"가장에 위급한 일이 생겨서 우리는 여기를 떠난다. 너희들도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것은 내가 그저 서로 마음이나 나프지 않게 헤어지자는 뜻으로 주는 것이나 받아두고, 우리

가 떠난 뒤에 세간까지도 너희 마음대로 나누어 가지고 여길 떠나거라. 그리고 우리가 떠난

뒤에는 너희들도 관의 독촉에 귀찮아질 것이니 아예 오늘밤이 새기 전에 가는 게 가장 이로

울 것이니라."

점원과 하녀는 대강 집안 분위기를 짐작하고 있던 터라 소매를 적시며 울 뿐이었다. 경순

의 아내는 차츰 마음이 가라앉더니, 떡쌀을 안칠 때부터는 더욱 침착해져서 앞으로의 생계

에 대하여 궁리도 해보게 되었다. 창황한 중에 어느덧 저녁이 되어서야 전생이와 도장댁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였다. 양화에서 주인을 만난다 할지라도 그저 유림이나 나서는 길

이 아니요, 관의 추적을 피하여 달아나는 길이니 방향이 확실하여야겠기 때문이었다.

"내 친정 작은 오리비께서 양주에 사시는데, 도장 어른을 좋아하시고 또한 올케 성님도

도량이 있으신 분이니 우리를 그리 박대하지는 않을 듯하다. 양주의 저자가 또한 번성하니,

상리를 꾀할 수도 있을 게야."

"관의 기찰이 닿지 않겠습니까?"

"내 친정은 고양인데, 설마 양주로 분가해 나간 작은 오라비댁이야 저희들이 알겠느냐.

리루 가기루 정하자."

이방은 사또 모르게 형방과 미리 짜고서 경순을 달아나게 한 뒤에 그 재산을 나누기로 하

였던 것이다. , 그의 전답은 형방이 차지하고 분원과 가게는 이방이 맡기로 하였었다.

중에 소문은 경수니이 이방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한양 여각으로 나간 듯이 퍼뜨릴 작정이

엇다. 애초에 혐의 없이 경순은 처리하였고, 실상 관아에서도 그들 이외에는 이경순이 하옥

된 사실을 기억하는 자는 형방과 옥사장뿐이었다. 옥사장이라야 장교이니, 그들의 지시를 따

를 것이 뻔했다. 그러나 형방은 이경순을 그저 달아나도록 하고 말자는 이방의 의견에는 반

대하였다. 그들은 저녁 늦게까지 주막 뒷방에 앉아서 경순의 건을 숙고하였다.

"후환이 있으면 안된단 말일세. 아예 없애버리는 게 나을 게야." 형방은 역시 이경순을

죽여버릴 것을 고집하엿다. 그러나 아직도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은 이방으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 일인지라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이도장이란 자가 제 꽁무니가 뜨거워서 달아나는 판인데 설마 뒤에가서 누구를 원망하겠

. 죄가 없으면 모르되 제 죄가 명명백백히 드러난 마당에 구명하여 달아나는 것으로도 감

지덕지할 걸세. 죽일 필요까지야 있을라구."

"허허, 모르는 소리 작작 하시레. 자네는 아전의 우두머리로서 그만한 궁량도 없단 말인

. 이보게나, 이서방이 달아낫다가 관아에서 저를 찾는 기색이 없으면, 그제서야 우리 일을

깨닫고 되도아올지두 몰르잖나. 그러면 사또에게 이 일이 알려질지도 모르고, 우리는 끝장나

는 걸세. 또한 무사하다 하더라도 모처럼 차지했던 이서방의 가산은 모두 사또의 차지가 될

테니, 죽 쑤어 개 주는 격이 아닌가. 예전부터 큰 일을 도모하려면 철저히 마무리를 해야지,

어물쩡했다간 낭패를 보구 마네. 자네도 아마도 예전의 정리 때문에 망설이는 모양인데 내

야 무슨 상관이 있나. 자네는 그저 모른 척하면 되네. 내가 아까 낮에 보냈던 아이들을 시켜

서 양화의 강변에 매복시켰다가 단칼에 베어버릴 테여. 이서방의 일행을 모두 베어 죽인 다

음 다리에 돌을 매어 강물에 가라앉히면 여주목사가 알겠는가, 다른 아전들이 알겠는가.

마 물귀신도 잠자느라구 모를 게야. 자넨 그저 하직 인사를 각별히 하고 따뜻이 한 연후에

돌아서서 여주로 오면 되는 게야. 뒤는 내가 맡지."

"글세... 인명은 재천이라니 이서방의 목숨이 경각이로구먼." 이방은 딱히 뭐라고 의사 표

시를 하려 들지는 않았으나 대강 저와 같은 말로 형방에게 찬동하는 뜻을 비쳤다. 나는 모

르고 하늘만 아는 일이니 책임이 없다는 말이 바로 그 얘기였다.

"그러면 내가 아이들을 먼저 보내두겠네. 자네 옥으루 가려나?" "... 모두 일러놓았겠

."

"염려 말게. 옥사장은 자네가 가면 곧 이서방을 내놓을 테니까." "이서방의 여편네가 준

비하여 양화루 나가겠지?"

"만일을 염려해서 미리 아이들을 집 앞에 세워두었다가 따르도록 하게." "그게 좋겠군.

지니구 가는 돈냥은 아이들게 모두 나눠주도록 하면 좋아들 할 게야." 이방은 형방과 주막

에서 헤어져 여주 옥으로 향하엿다. 그는 날이 새기만 하면 여주 고을에서도 알려진 사분원

의 재산을 고스란히 차지하게 되엇으니, 이경순이 죽을 일보다는 자신의 흥분으로 온통 가

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이방은 동헌에서 멀직이 떨어져 있기는 하나 남의 눈에 띄어 좋은 일이 아닌지라 우선 담

장에 붙어서서 동정을 살폈다. 옥 앞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소슬한 바람이 일어 빈 땅에

머지만 일어난 따름이었다. 우선 옥사장을 찾아야겠기에 두리번거렸으나 주위에는 등롱 한

점 보이질 않았다.

"옳거니... 형방이 미리 다 조처하여 어디 주막으로 술이나 마시러 나갔겠지, 헌데 옥문은

무슨 수로 깨뜨린다."

중얼거리며 옥으로 다가들자 축창틀 사이로 옥 안이 보이는데 칼도 쓰지 않고 질펀히 누

워서 자는 이경순의 몸이 짐작되었다. 이방이 목소리를 낮추어서 경순을 깨웠다.

"여보게 이도장, 어서 일어나게!"

처음에는 뭐라고 대답하는 듯하더니 문득 벌떡 일어난 경순은 잠결에 큰 소리로 물었다.

"거 누구야? 옥사장인가."

"쉬이... 날세."

이경순은 목소리를 알아듣고 창틀 앞에 다가섰다.

"아니 이 밤중에 웬일이며, 왜 그간 꼼짝두 하지 않았나?" "얘기는 나중에 하기루 하고

지금 그럴 경황이 없네. 내가 자네를 빼가려구 며칠 전부터 기회를 엿보던 참일세."

"나를 빼가다니... 현으진 일이 없는데, 그 무슨 말인가?" "안성 포겨가 마부의 일으 ㄹ물

고 늘어졌다네. 아무튼지..." 하면서 이방은 혹시나 하여 밖으로 빗장을 지른 자물쇠를 더듬

어보니, 아니나다를까 열려진 채로 헛되이 걸려져 있었다. 그는 자물쇠를 돌려 빼고 옥문을

열었다.

"살구 싶으면 어서 나를 따라오게."

옥문을 열어주며 바삐 외치니 이경순오 짐작이 빠른 사람이라 무슨 위급한 이링 생긴 줄

은 알고서 쨉싼 걸음으로 앞서가는 이방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두 사람이 산성 아랫길

로 빠져나와 인가가 없는 강변에 나서자 그제서야 이방은 걸음을 늦추며 입을 떼엇다.

"자네 옥에 그대루 앉았다간 마누라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서울 전옥서의 남칸 귀신

이 될 뻔하엿네."

"서울이라니..."

"자네를 명일 아침에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영이 떨어졌다네." 이경순은 별로 놀라지도

않는 누치엿다. 이미 옥 안에서 편안히 지내기는 하엿으나, 만약의 경우를 생까하느라고 스

스로 시달려왔던 터였다. 그런 불안이 실지로 닥치고 보니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헛허 하는 수 없군. 자네 그동안에 많이 도왓네. 집에는 알려두었나?" "내가 자네 부인

께 밤도망할 준비를 시켜서 양화루 나가도록 해두었네." "고마우이. 내가 없어진 뒤 자네께

해가 미치지는 않을까?" "내가 그래서 지난 며칠간을 칭병하고 꼼짝두 않았네. 옥사장에

게는 돈냥을 두둑히 주어서 피하도록 했지."

이경순은 워낙 깊은 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허겁지겁 달려왔으므로,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

를 갖지 못하였다. 다만 고작 생각이 닿은 것이 월송골 박씨 과부 집에 숨겨둔 묘옥이 일이

었다.

"! 내가 데려온 사당 아이두 함게 다도록 해두었나?" 이방은 이 어리석은 친구를 마음

속으로 한껏 비웃으면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정말 실성한 사람이로고, 이런 곤경을 당해서도 고작 창부 따위의 걱정이나 하는가.

늦바람에 터럭 세는 줄 모른다더니, 자넬 두고 한 말일세. 자네 부인은 애간장이 달아서 산

지사방을 헤맬 판인데 참으로 말 못할 사람일세."

그러나 이경순은 이방의 핀잔을 듣고는 더욱 묘옥의 일이 걱정이 되어 펄쩍 뒤었다.

"아니 그러면 나만 안전하게 달아나고, 사지에다 그 철없는 것을 버리구 간단 말인가.

되겠네... 내가 잡히는 한이 있더라두 월송골에 가봐야겠네." "그 아이는 이미 여길 떠났어."

이경순은 그 말에 맥이 탁 불리는 것 같았다.

"어디루... 보냈다던가?"

"그걸 내가 어찌 아나. 자네 안전을 위하여 부인과 의논하고 배를 태워 보냈다네." 이경

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방은 한편 그의 몰골을 곁에서 바라보니 이왕에 죽을 목숨이라

인생이 가여웠고 또한 스스로의 죄책감도 덜고자 하여 한마디 말을 던졋다.

"그 계집이 자네 신세를 그르쳤네. 이미 엎질러진 물인, 모두 훌훌 털어내고 다른 고장에

가서 소문없이 사소."

이경순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걷기만 하엿다. 양화에 가까워 인가의 불빛이 드문드문

보이는 강가에 이르자 두 사람은 등불이 흔들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게 누구요?"

"전생입니다. 이방 어른이슈?"

전생이가 등불을 흔들며 서 있었고, 경순의 아내가 곤두박질치듯 앞으로 달려나왔다.

"우리 쥔어른두 오셨나요?"

"여보, 나 여기 있소."

경순이 나서니 아내는 그의 소매를 부여잡고 흐느꼈다.

"예서 삯만 주면 배는 얼마든지 있을 걸세. 어서 떠나시게." 이방은 이 난처한 자리를 빨

리 피하고 싶어서 벌서 돌아갈 기색을 하면서 재촉하였다.

"여러가지루 수고가 많았어. 내 사분원은 자네가 맡아서 잘 운영하도록 하시고, 내가 일

년쯤 뒤에 찾아갈 테니 토지나 처분하였다가 돌려줄 수 있겠나?" 이방은 속으로 맹랑하여

말없이 섰고 그의 처가 허리를 떠다밀며 말하였다.

"아이고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어서 가십시다." 경순은 이방과 손을 마주 잡고 작

별을 하였고, 전생이는 한손에 화승총을 들고 등에는 부담농과 보퉁이가 얹힌 지게를 짊어

지고 앞장을 섰다. 경순과 그의 아내는 나란히 그뒤를 따라갔다. 이방은 어쩐지 그들의 비명

이 곧 들려올 것만 같아져서 수렁에 빠지고 넘어지고 하면서 오히려 제가 달아나듯 하엿다.

한편 심정으로는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서 그들을 해치려는 자들을 만류하여보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예 내친 김이라, 그저 오늘밤은 평생에 처음 꾸어보는 악몽이거니 하며

입을 악물었다. 그의 눈앞에는 참혹한 시체와 더불어 높은 마루에 정자관을 쓰고 앉은 모습

과 조생원의 아들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창골서부터 도장댁과 전생이의 뒤를 밟아왔던 털벙거지 세 사람은 그들의 수작하는 양을

보고 미리 앞질러 도사공의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나룻가를 막고 엎드려서 기다리고

있었다. 등불이 흔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첫째로 이경순이었다. 셋이 한번에 달려들어 이경순은 난자하고,

다음에는 병신인 전생이와 아낙네는 별 저항없이 단칼에 베어버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전생이가 짊어진 지게에 부담농이 얹혔고 그것은 적지 않은 돈냥일 것이라는 말을

형방에게서 들은 뒤라 살기가 등등하였다. 그들은 세 사람이 지나자마자 이경순의 등뒤를

덮치기로 하엿다. 하나는 날이 시퍼런 환도를 빼어들고, 또 하나는 짜른 칼을 가졌고, 다른

하나는 한팔 길이의 꺽쇠 달린 쇠도리깨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 경순의 무른 살이 온통 박

살이 날 판이었다. 전생이가 지나고, 이경순이 좀 떨어져서 그뒤를 따르는데, 등롱을 든 경

순의 처가 바로 뒤에 처져 있었다.

이경순이 맨 뒤에 서는 것이 기중 편이한 표적이 되겠으나 까짓 기왕에 죽을 목숨들이니

한꺼번에 두 목숨을 해치울 작정을 하고서 포졸들은 벌떡 일어났다. 인기척에 놀란 경순의

처가 뒤를 돌아보며 으악 소리를 지르는데, 대저 살기라는 것은 그것에 민감한게 반응하는

쪽으로 뻗치게 마련이라 비명소리에 따라서 칼날이 도장댁의 연약한 등줄기로 파고들었다.

그참에 이미 등불을 굴러 떨어지고, 경순은 몸을 날려 한 키는 족히 넘는 언덕 아래의 강물

속으로 첨버덩 뛰어들었다. 칼 든 자가 주춤주춤 하다가 아무래도 어둠을 가늠할 수 없는지,

"저놈부터 죽여라!"

외치고 전생이를 향하여 달려드는데, 이미 사이가 떴으니 가만히 서 있을 그가 아니었다.

지게를 벗어 던지고 옆구리에 총포를 낀 채 냅다 뛰었다. 한 놈이나 노리면 될 것을 뛴 놈

찾으랴 강물을 살펴보랴 우왕좌왕 하는 주엥 이미 넘어진 지게에서 부담농 두짝과 보퉁이가

던져져 있는 것을 보고는, 애초에 재물에 욕심이 앞섰던지라 사람 죽이는일보다도 재물 챙

기는 이리 급하여졌던 것읻. 그들은 다투어 하나씩 짊어지고는 애꿎게 베어버린 도장댁의

쓰러진 몸을 타넘고 되돌아 달아났다.

물속에 처박혀 잡초 사이에 간신히 머리만 내밀고 있던 경순은 발자취가 멀어지는 소리를

듣고 비탈을 피하여 모래밭 족으로 헤엄을 헤어나갓다. 그는 이것저것 돌아볼 사이 없이 우

선 칼 맞은 아내에게로 달려가 목을 끌어안아 무릎에 뉘는데 울컥 솟아난 핏덩이가 하반신

에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여보..."

고개를 뒤로 떨어지고 이미 기맥은 사라져버린 도장댁은 애처롭게 누만을 번듯하니 뜨고

있었다.

"전생아! 어디 있느냐?"

그는 아내의 목을 팔에 안고서 소리쳤다. 어둠속에 숨어 있던 전생이가 달려나왔다.

"아씨는 어찌되셨습니까?"

"너 총포 챙겨 나왔느냐?"

"... 한자루 가지구 나왔습니다."

이경순은 아내의 머리를 내리놓고 전생이에게 화승총을 빼았았다.

"장약 어딨느냐?"

전생이가 앞 전대 아래 차고 있던 쇠뿔 약통을 건네주니, 경순은 연신 떨리는 손으로 탄

환을 장전하였다.

"나으리..."

"너는 시신을 거두어 저어기 풀숲에서 기다리구 있거라. 어찌하든 날이 새기 전까지는 돌

아올 게다. 날이 새어서도 오지 않으면 숲에 양지바른 자리를 골라 묻어주고, 너 혼자 떠나

거라."

이경순은 음울하게 씹어뱉은 것이었다.

"나으리... 저두 갈랍니다."

전생이도 울먹이며서 나서는데, 경순은 그의 가슴을 떼밀어냈다.

"아니다. 저 사람을 노중에 혼자 내버려둘 수야 있겠느냐. 내가 해뜨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거든 기다리지 말아라."

경순은 총을 움켜쥐고 뛰어가는데 솟구쳐 나오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목덜미를 적

시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손목을 부여잡으며 반겨주던 아내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허

무하게 목숨을 잃은 아내를 보자, 애간장을 태워준 자신이 얼마나 몹쓸 사람인가 뉘우쳐지

는 것이었다. 옥을 나서자마자 아내 걱정은 고사하고 묘옥의 일부터 물은 일이 얼마나 매정

하게 여겨지는지 몰랐다. 자식 못 낳은 설움이라면 남정네인 자기보다도 아내 쪽이 훨씬 서

럽고 서운했을 터이었다. 평생을 따라다니며 분원 일으키는 데 조력하여 초년 고생을 겪었

, 이제 밥술이나마 먹게 되니까 자식 낳을 걱정으로 경순이 외방으로 나도는 것을 참아내

던 아내였다.

"가엾은 사람..."

경순은 자꾸만 흘러내려 앞을 가리는 눈물을 연신 소매로 훔쳐냈다.

그는 포졸들이 뛰어간 방향을 따라서 몸을 숙이고 달려나갔다. 강변에는 질척한 수렁이

군데군데 패어 있었고 잡초가 허리만큼씩 자라나 있었다. 강물 쪽에는 별빛이 내려앉아 반

작였으나, 모래밭을 지나 잡초 사이로 뚫린 길은 앞가늠을 할 수 없도록 캄캄하였다. 저쪽은

부담농과 피륙 보퉁이를 나누어 짊어졌을 테니 맨몸으로 뛰는 경순과는 걸음에 차이가 날

것이 뻔했다. 얼마 안 가서 물을 밟는 듯한 찰박거리는 소리를 듣고, 방향을 짐작하기 위해

서 경순은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길 아래편의 모래밭 쪽으로 뛰어가는 사람의 거뭇한 모습

이 느껴졌다.

경순은 허리를 잔득 구부리고 모래밭으로 내려섰다. 군데군데 물이 괴어 있고 물먹은 모

래땅이라 뛰기에 좋도록 편편하였다. 어깨에 부담농을 짊어지고 뒤뚱거리며 뛰어가는 자의

등이 보였다. 경순은 거리를 눈짐작해보고 나서 멈춰 서서 총을 겨누었다. 십 보 밖에서 간

장 종지를 박살을 내는 솜씨인지라 경순이 놓은 총은 그대로 상대를 거꾸러뜨리고 만다.

란한 방포 소리와 함께 포졸이 앞으로 다리를 꺾으면서 쓰러졌다. 잽싸게 달려간 경순이 발

로 놈의 가슴을 밀어놓으며 살펴보니 머리 한가운데를 얻어맞은 자는 그대로 숨이 식어 잇

는 참이엇다. 경순은 다시 비탈 위로 올라 잡초 사이로 간간이 달리고 또한 멈추어 귀를 기

울여 보면서 총에 장약을 재어 넣었다. 그러나 캄캄한 어둠 가운데 들리느니, 도랑물이 강으

로 흘러드는 소리와 가끔씩 먼산 들녘에서 울부짖고 있는 소쩍새 울음소리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호흡을 목구멍 너머로 연신 눌러 삼키면서 온 신경을 두 귀에 집중하엿다.

가까운 곳에서 풀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가 하더니, 과연 어둠속에서 흰빛이 번쩍 빛

나며 한 놈이 경순의 왼쪽을 급습하엿다. 얼결에 치켜든 총신에 맞아 칼날이 쨍 하는 날카

로운 소리를 내며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는 칼날에 경순의 드러난 왼쪽 팔이 자상을 입었고,

그는 오른팬으로 급히 몸을 숙이고 몇발짝 물러났다. 포졸은 급습에 실패하자 상대의 방포

를 피하는 길은 간격을 주지 않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다시 환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엇다.

경순은 미처 총을 겨눌 사이도 없이 총대를 비스듬히 쳐들고 좌우로 몸을 피하였다. 칼날이

총신에 부딪칠 때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더불어 불빛이 반짝였다.

포졸이 단칼에 벨 수 없음에 마음이 급박하였는지 분을 내면서 두손에 잡은 환도의 머리

위로 번쩍 쳐들고 고함을 내지르며 나서는데, 금강보운의 자세였다. 운래가 금강보운 세에는

수두로써 곧장 찔러 가슴을 노리는 것이 공격이요, 양각양천으로 맞받아냄이 방어인데 경순

은 검술을 모르는지라 뒷걸음질로 급히 물러낫다. 물러나는 경순에게 틈을 줄 상대가 아닌

지라 재처 같은 자세로 달려드니 뒷걸음질치던 경순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뒹굴고 말았다.

이제 칼날이 떨어져 이경순의 해골이 두 쪽으로 갈라지려는 찰나에 충구를 앞으로 내밀면

서 경순은 얼결에 내질렀다. 총구에 목을 찔린 포졸이 지탱하지 못하고서 혼절하여 경순의

몸 위로 태산처럼 무너져 내려와서 덮쳤다. 경순은 포졸을 옆으로 밀어내고 비틀거리며 간

신히 일어나 앉았다. 경순은 곁에 넘어진 상대의 멱살을 잡아 치켜올리는데 그자는 잠시 후

에 가까스로 정신이 돌아왔다.

"누가 시켰느냐?"

견순이 거칠게 흔들어대자 그자는 나약하게 쿨럭이며 기침을 터뜨렸다, 그때마다 입속에

서 피가 흘러나왔다. 경순이 거칠게 흔들어대는 것이 몹시 괴로운 모양이었다. 이경순은 그

자의 머리를 내려놓고 곧 내려찍을 듯한 자세로 총을 번적 치켜들고는 중얼거렸다.

"대갈통을 부숴주랴?"

", 살려... ."

"누가 보냈냐니까."

"... 형방... 나으리가."

"그러면 이방은 관계없느냐?"

"있소..."

경순은 부글부글 끓어오는 마음을 억누르며 입술을 깨물면서 벌떡 일어났다. 포졸은 헐떡

이면서 간신히 손을 쳐드는 시늉을 하였다.

", 살려... 주오."

이경순은 총대로 그의 머리를 두어 번 내리쳤다. 경순은 그의 몸 위에 침을 퉤 뱉어주고

서 돌아섰다.

"이런, 도적놈들을 모조리 죽이리라."

경순은 그제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눈치채고 울분의 이를 갈았다. 일단 그를 도우려는 듯

싶던 이방이 자신의 남은 재산을 탐내어 혐의를 걸어 탈옥시킨 듯이 하고서, 후환을 없이하

려는 의사였음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세 놈이었는데..."

이미 둘을 줄였으니, 남은 하나를 처치해야 하건만 한도 가진 자와 싸우느라고 많이 지체

되엇던 것이다. 경순은 다시 장약을 재려고 허리에 찼던 소뿔 약통을 찾았으나 싸우는 사이

에 어디다 떨어뜨렸는지 보이질 않았다. 땅바닥을 더듬거리다가 드디어 그는 총포를 내던지

고 일어섰다. 그 대신에 그는 환도를 주워 들고 다시 여주 창골을 향하여 뛰었다. 앞서 달아

난 마지막 한 놈은 어디 숲에라도 기어들었는지 마을이 다 나오도록 보이질 않았다. 무엇보

다도 경순의 마음에 사무치도록 미운 것은 친한 동무라고 믿어왔던 이방이었다. 그래도 아

전붙이란 중인이니 아무리 자기가 장사치라도 그만은 경순에게서 여러번 도움을 받았고,

골 토반들께 대하는 것과는 달리 두터운 우정을 보여왔던 것이었다.

"내 이놈을 죽이지 않고는, 아내의 눈을 감길 수가 없구나."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기

진맥진한 경순은 강가로 내려가 강물을 펴마시고 우선 타는 듯한 갈증을 면하였다. 시각

은 아직 깊은 밤중인지 파루가 되려면 먼 것 같았다. 그는 산성 아랬길을 휘돌아 산라들의

눈을 피하느라고 논밭길로 질러서 곧장 이방의 집을 바라보고 뛰었다. 객사거리 앞에는 늦

게까지 투전하는 자들이 가끔씩 소피를 보러 나와거나 바람을 쐬러 나오는 적이 있었고,

인적디 잇는 줄을 아는지라 경순은 그곳을 피하여 마을의 좁다란 골목을 비집고 빠져나갔

. 동네 개들이 컹컹 짖어대고 일시에 여러 곳에서 짖어 경순의 마음은 더욱 초조하엿다.

이방의 집 토담 밖에 이르러 고개를 기웃이 내밀이 동정을 살피는데 그가 기거하는 건너편

사랑의 등창문에 불빛이 내비쳤고 창호지에는 사람 그리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 저 죽을 생각은 못하고..."

아내의 참혹한 죽음을 생각하자 경순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환도를 입에

물고 토담을 뛰어넘어갔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이방 혼자 촐촐하게 앉아 소주를 들이켜는

중이었다. 아마도 일을 저질러 놓고서도 심기가 불안하여 여태 잠들지 못하고 술로 잠을 부

르려는 모양이었다. 경순은 슬그머니 문고리를 당겼다.

"...?"

이방이 술잔을 든 채로 고개를 드는데, 경순은 와락 뛰어들어 문을 닫고 환도를 똑바로

이방의 코앞에 겨누었다.

"꿈쩍 말아라."

한눈에 보기에도 경순의 몰골은 참혹하였다. 전신에 진흙과 피투성이요, 상투는 흐트러져

산발이 되었고 독기를 내뿜는 두 눈에는 핏발이 곤두서 잇었다. 더구나 자상을 입엇던 왼팔

에서는 아직도 피가 배어나왔다. 경순은 칼을 켜눈 채로 소반 위의 소주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는 음산하게 속삭였다.

"어째... 내가 죽은 줄 알고 조상 술을 마셨는가?"

이방은 완전히 핏기가 가셔서 입술만 간신히 달싹이며 물러나 앉았다.

"... 자네 이게 무, 무슨 짓인가?"

"무슨 짓이냐구?"

앉은걸음으로 물러나 벽을 등진 이방에게로 천천히 달려들면서 이경순은 재우쳐 물었다.

"우리 죽은 마누라핱네 물어봐라."

"... 내가 시킨 게 아닐세. 나는 반대했어."

이방은 두 손을 쳐들며서 애걸하듯이 중얼거렸다.

"자객들게 모두 들엇다. 재산이 탐이 나거든 고이 말루 달랠 것이지, 쫓기는 놈의 뒤통수

를 치느냐? 더구나 네가 내 덕을 입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 터에 이렇게 악으루 갚는다니...

내 너를 죽이러 아내의 시체를 노상에 버려두고 쫓아왔다." "글세 그런 게 아닐세... 내 자

네의 재산을 탐낸 것은 사실이나 죽이라구 사주한 것은 내가 아닐세."

"분원 재산을 모두 내게 물려주지. 그 대신에 네 목숨을 거두어주고 가겠다. 마누라와 여

식은 편안히 살 테니까, 내 원망은 말아."

경순이 칼을 이방의 가슴에 힘껏 꽂으니 이방은 처절하게 비명을 내지르며 칼을 받앗다.

칼을 꽂아버린 채 뛰어나오는 경수에게로 깨어난 이방의 식구들이 마주 달려오다가 가슴에

채고는 으악 소리를 내지르면서 흩어졌다. 이경순은 대문을 활짝 열고 뛰쳐 달아났다. 경순

이 산성 아랫길을 되돌아 뛰는데 먼 데서 은은하게 파루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무한 일이로다!"

경순은 별이 총총한 하늘을 우러르며 홀로 탄식하였다. 이제 제 손으로 동무를 죽이고 나

온 경순의 마음은 웬일인지 하나도 개운치가 않았다. 오히려 무지근한 분노가 더욱 깊숙이

가슴에 얹히는 듯하였다. 이제는 사람을 한두 명 죽인 것이 아니니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

었고,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주서 이름 높던 분원 재산도, 부덕이 바

다 같던 현숙한 조강지처도, 애틋한 사랑을 일깨워준 묘옥이도, 다정하던 동무도, 고향도 사

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는 되돌아가는 길에 양화 노상에서 포졸들의 시신 곁에 남았던 부담

농 한 짝과 피륙 보퉁이를 수습하여 전생이가 지키고 섰는 아내의 시체 곁으로 돌아갔다.

"나으리...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괜찮다. 우물거릴 시각이 없으니 어서 서둘러야겠다." 전생이가 흐느끼면서 말하였다.

"꼭 생전 그대로이십니다. 방금이라두 일어나셔서 저희를 부를 것만 같은 걸입쇼." "매장

을 해두어야지."

", 제가 저쪽 언덕 위에 대강 구덩이를 팠습니다." "수고했다."

"아무래도 아래쪽은 장마가 들어 범람하면 물이 들겠기에..." 이경순은 보퉁이를 끄르고

아내의 여벌 옷과 무명을 꺼내었다. 피투성이 옷을 벗기고 새옷으로 염습을 해주는데 문득

아내에 대한 죄스러움이 북받쳐서 경순은 잠깐씩 소리를 죽여 오열을 참아야만 하였다.

"제가 거들까요?"

"두어라. 내가 보낼란다."

경순은 아내의 시신을 안고서 둔덕으로 올라갔다. 묘혈에 아내를 누이고는 차마 흙을 덮

을 수가 없어서 경순은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짓씹다가 외면한 채 두 손으로 흙을

덮기 시작하엿다. 봉분이고 무었이고 세울 틈이 없어 그대로 평지와 엇비슷하게 묻고는 구

들돌처럼 널쩍한 바위 하나를 전생이와 맞들어다 눌러두었다. 이것을 표시로 하여 뒷날에

다시 이장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마을의 닭들이 연달아 새벽을 알라며 울고 있었다. 경순은

다시 모퉁이에서 새옷을 꺼내어 갈아입고는 나룻가로 내려갔다.

"사공을 깨워낼 필요 없다. 그냥 배를 내자꾸나."

"어떻게요... 경강을 타구 오르시게요?"

경순은 고개를 내저었다.

"경강을 오르다가는 파발에 뒤처져서 곧 잡히구 만다. 이대루 강을 건너서 지평로를 따라

서 인적이 드문 산골짜리를 타야 한다. 낮에는 숨고 밤길을 걸어야지." "어디루 가시게요?"

"글쎄다... 어디로든 먼 데루 뛰어야 할 텐데."

"아씨께서는 양주로 가시겠다구 하던 걸입쇼."

", 작은처남이 게서 살지. 허나 살인을 한 내게 관의 기찰이 미치지 않을 턱이 있겠느

."

"허지만 어찌 아무 연고도 없는 고장으루 가시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너는 나

하구 퇴계원까지만 하께 가구, 양주로 가거라. 나는 어디 암자에나 의탁해서 네 기별을 기다

리겠다."

 

3

광주 남한산성 건너편으로 북을 향하여 곧게 뻗은 산줄기가 바로 척마산 줄기로서 길운산

과 묘적산이 갈라져 이어졌는데, 묘적산 아랫녘의 깊은 골짜기에 노적사가 있었다. 노적사는

원래 퇴계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나, 절이 항폐해지자 길운산 쪽으로 옮겨가고 다만 절

이름과 자취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정원태라는 기이한 사람이 찾아들어와 터를 닦고 암

벽 아래 석굴 한 칸을 지은 다음에 불상을 모셨다.

그는 삭발하지 않은 장발승이었는데, 목에 염주 걸고 가사 장삼을 걸쳤다. 그리고는 염불

과 더불어 궁궁을을이란 말로 시작 되는 주문을 외는 것이엇다. 그가 늘 기거하는 석굴암에

는 언제나 손님의 내왕이 그치질 않았는데, 가령 명달 쓸 자리를 묻는다거나 점을 치고도

하였다.

일종이 술가와 지사를 자처하는 정원태는 원래 양주 아전의 자손이었다. 어릴 적부터 학

문에 힘을 쓰더니 중인의 자식으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보았자 과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단 출가하여 중이 되었었다.

진관사에 있을 적에 황회는 정원태와 가까이 지내어 스님이라 부르지 않고 성님이라면서

가까이 지냈던 것이었다. 정원태가 절에서 떨어져 나와 노적사를 재건하였던 것은 새로운

뜻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정원태는 사당질을 하다가 신이 내려서 노량나루에서 무당을 하고

있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었다. 그들 부부는 곧 사당패나 괴뢰배, 걸립패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가끔씩 몇패가 오가는 듯하더니 아예 노적사를 중심으로 거점이 이루어져 늘 십

여 대가 들락나락하였다.

세상에서 제외된 자들이었으니 그들의 행각을 아무도 짐작할 수가 없었고, 대개 죄를 저

지르거나 관의 체포 대상이 되어 있는 자들은 노적사를 거쳐서 천마산 은거지로 흡수되고는

하였다. 천마산 북톀 기슭에는 깊은 송림이 십여 리에 걸쳐서 빽빽하였는데, 그 가운데 솔부

리골이란 숨은 마일이 있었다. 솔부리골에 보인 자들은 거의 화적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으

, 그곳을 산채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큰산의 떼도적들과는 조금 다른 데가 있었다.

, 그들은 천마산을 소굴로 삼아서 촌락이나 고을에 나가 강도질을 한다거나, 또는 요로와

고개를 지켜 서서 행인의 봇짐을 털어내지는 않았던 것이다.

한양이 멀지 않은 뿐만 아니라, 천마산이 애초에 웅거할 만한 깊은 산도 못 되었고, 무엇

보다도 그런 우직스런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일부는 한양 외곽의 이름난 저자 무

뢰배로 풀려나가 교묘하게 상리를 도모하거나. 또는 대를 이루어 말을 끌고 행상응ㄹ 다니

다가 여차직하면 그때의 형편에 따라서 화적떼로 돌변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관이 아무 혐

의 없이 솔부리골을 살피기도 어려웠고, 다만 부근 마을에서는 부랑잡배들이 보여서 사는

곳쯤으로 알려져 잇었다.

이런 곳은 전국의 도처에 있었으니 한양 주변을 근거지로 하는 자들은 주로 노적사와 천

마산 기슭에 모여 있었는데, 한 대가 대략 이삼십여 명이요, 무리를 이루면 이십여 대나 되

었으니 그 수가 적지 않았다. 광주 근처의 무뢰배라고 할 적에는, 노적사와 천마산 솔부리골

을 가리킨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순안 법흥사 같은 곳에는 그 패거리가 도합

오십여 대나 모였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삼남에는 만여 명이 들끓어 흘러다니고 있었다.

또한 남해 화방사에는 삼십여 대가 들끓었고, 창평에는 수십대, 함흥 백운사에는 그들의

자체 병력까지 잇었으니, 실로 명화적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결속된 하나의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양인 이상의 신분층에 대하여 몹시 폐쇄적이었던 반면에 저희끼리의 결속력

은 대단하여 아무도 속을 헤쳐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해마다 재해와 학정으로 밀려난 농민들

이 집과 고향을 버리고 이들 부류에 흡수되어 흘러다니니 그 수는 점점 많아졌던 터이었다.

노적사 근거지의 부랑 무리들은 모두 경기도와 도계 어름의 강원, 충청 양도 바깥ㅉ고을

활동 무대로 삼고 있었다. 한양 성내에서 상인들의 돈줄과 별감 따위들의 비호 아래 설치는

무뢰배들은 대개 큰 댁 하인이나 양인 한잡배들이었고, 삼강의 무뢰배들은 깍정이들을 거느

린 경강 장사치들이었으나, 양주의 누원점, 포천의 송우점, 광주의 삼전나루와 송파와 거여

객점의 무뢰배들은 그 정체와 출신을 알 수 없는 부랑 무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른 상

인들이 그들을 겁내는 것은 그 주거를 분명히 알 수가 없었고 보복의 방법도 감쪽같았기 때

문이었다. 그들은 말에 물건을 싣고 한양 외곽의 난장판을 떠돌면서 팔기도 하였고 광대인

듯하면 장사치요, 장사치인 듯 여기면 난전꾼이요, 그런가 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되어서 밤에 부잣집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고달근이와 황회가 당진에서 명화적당을 지은 것은 그때뿐이고, 그들은 노적사로 돌아와

서는 곧 장사를 벌일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들이 도피처로서 노적사를 택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고달근이와 황회는 제 식구들과 더불어 큰쇠네 동작진 패거리를 관의미

끼로 하여 무사하게 당진을 빠져나온 다음에, 버젓이 강경까지 가서 다른 사당패와 합세하

였었다. 질탕하게 연희를 팔고 나서 조심스럽게 육로를 거쳐 광주로 스며들었다가 노적사를

찾았던 것이었다. 거기서 고달근이와 황회는 제 식구들을 다른 대에 붙여주고 박거사와 시

동이만을 거느리고 천마산 솔부리골로 들어갈 셈이엇었다. 조심하노라고 오랫동안 장물을

처분하지 못하더니, 정원태의 알선으로 송파 깍정이패 꼭지인 까마귀에게 연줄이 닿았던 것

이었다. 그들은 까마귀네 움막에서 사흘 동안 기다리며 장물을 처분하여 말 한 필에데 환전

한 돈꿰미를 싣고 노적사로 올라갔다.

평구말을 지나 삼십여 리 등성이를 타고 가면서 넓은 계곡이 떡벌어져 있었고 가파른 절

벽 아래 노적사의 암자가 있었으며, 그 아래편 송림을 베어 넘긴 널찍한 공터에 간이로 지

은 낮은 초막들이 여러 채 있었다. 방금 어디선가 새로운 패가 돌아왔는지, 풀어놓은 짐들이

사방에 널려져 있엇고 계집들의 울긋불긋한 옷자락들이 어지러웠으며 노천에 걸어놓은 쇠솥

에다 대식구의 밥을 짓는 연기가 골짜기 가득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원래 노적사의 절터는

바로 그곳이었건만, 주추만이 남아있엇다. 정원태가 재건한 노적사는 비탈을 더 올라거서 쪼

개진 바위 틈에 석굴을 들여놓았는데, 거기가 법당인 셈이었다. 그리고 이제 터를 잡아 공사

를 시작한 대웅전의 조촐한 얼개가 짓다 만 채로 옆 공터에 서 있었다. 달근이와 황회는 말

을 아래 매어두고 돈꿰미를 싼 봇짐들을 힘들여 짊어지고서 석굴로 올라갔다. 법당 앞에는

짚신짝들이 가득히 널려져 있었다.

 

황회가 앞장서서 큰기침을 하더니, "성님 기시우?"

하였다. 대답 대신에 방문이 빼꼼히 열리며 정원태의 아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그 여자를 원주보살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니 우선 어둠에 눈이 익

질 않아서 그 안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뾰족한 상투끝만 가득히 보일 뿐이었다.

"...황가에 달근이까지 왔구먼."

컬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 누구여?"

달근이가 뒷전에서 고개를 뽑는데 정원태가 상석에 앉았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장발에 가사 장삼을 입고 묵주를 손에 쥐고 앉아 있었다.

"누구긴 누군가, 다 알 만한 식구들이지..."

황회가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이런 제기럴! 복만이 아녀?"

"왜 아니래. 오래 사니까 자네 얼굴 볼 날두 있구만그랴." 동작나루의 가장 큰 사당패 모

가비로 그들 사이에 입담 좋고 수완있고 힘깨나 쓰는 것으로 알려진 복만이가 정원태와 나

란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 천마산 솔부리골에 들어와 두령 노릇을 하고 있었고,

달근이와 황회는 노적사에 도착하자마자 그런 소문을 들었던 것이었다. 복만이도 옛날 동

무들이 일을 저지르고 왔다는 것을 듣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산을 내려왔던 것이다. 그들이

서로 반기는 것을 보자, 정원태는 뒷전에 앉아 있던 새 패거리의 모가비들에게 말하였다.

", 이젠 내려들 가서 저녁 공양이나 허게나. 손님들이 오셨으니..." 모가비들 중에 오래

묵은 자는 두 사람에게 제각기 아는 체를 하고는 물러나갔다. 굴 안에 고달근이와 황회,

만이만 남게되자, 복만이는 대뜸 물었다.

"당진서 큰 손 보았다며?"

"...거 뭐 애초엔 할 맘두 없었는데, 그 집 망나니 같은 애녀석의 행패가 심해서 말이지.

버릇 좀 가르치려다 내친 김에 손을 봤지."

"장물은 처분했나?"

"까마귀가 다 알아서 해 줍디다. 패물을 그저 그렇구, 피륙들은 반값이나 쳤을 게유."

회가 정원태를 향하여 말해주니, 그는 새까맣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세가 그럴 게야. 까마귀는 제법 엇구수한 데가 있는 녀석일세. 하여간 돈이 되긴 되었

으니, 좋은 데만 쓰면 복으루 가는 게야."

"염려 마슈, 대웅전 짓는데 내 사종시주 두둑히 할 테유, 백 냥 내지요." "아무려나 그건

마음대루 하게나."

정원태는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고달근이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지 복만이를 바라보

며 말하였다.

"그 식구에 큰쇠라구 있었나?"

"큰쇠라...옳지, 있었지. 원래 중매구 다니던 녀석인데 사당 가로채기 싸움으루 우리 패를

떠난 지가 몇 년 되는구만. 그건 왜 물어?"

황회가 말하였다.

"실은 이번에 그 사람 식구들이 모두 당진서 결단이 났네." "분명히 패를 떠났단 말이

? 헌데 동작나루 식구라구 하던걸." "한양 근처로는 못 올라오지, 뜨내기 식구니까."

달근이는 복만이의 말을 듣고는 아주 맞춤하게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헌데 솔부리는 들어오겠다며?"

복만이는 여태 참아왔다는 듯이 말을 꺼내었다.

"받아줄 테여?"

"몇 명이야?"

"우리하구 둘 더 있어."

"그러지 뭘."

시큰둥하게 받은 복만이는 상을 찌푸리면서 이어서 말하였다.

"그런데 우리게서는 말야, 모두 똑같이 나눠 먹구 사네. 한 식구건 열 식구건 밥알 하나두

똑같이 먹어얀단 말야. 그래두 살림은 유족허니까."

"몇 가구나 사나?"

"한 마흔나뭇 되지. 자네들두 그냥 혼자들 지내지 말구 이런 때에 계집이나 하나씩 얻어

서 살림해여."

"아이구 나는 계집이라면 신물이 나는 사람이네. 그저 오가는 사당년들이나 가끔 건드리

구 살라네."

"그럼 안 붙여."

복만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안식구 없는 홀애비가 많으면 기강이 없어진단 말이네. 솔부리는 어엿한 임집이 있는 동

네란 말여."

달근이가 황회의 옆구리를 쿡쿡 내질렀다.

"그래 차차 장가라두 들기루 하구."

복만이는 또 다짐하였다.

"그러구...이건 알아두게나. 솔부리 두령은 나야. 우리네는 율령이 엄정하니까 미지근하게

굴지 말아."

"압다 넨장맞을...그래 두령님이라구 불렀다!"

황회가 볼멘소리로 내지르자, 정원태가 껄걸 웃으면서 참견하였다.

"두 사람은 함께 좌우 두령을 하면 되지 않겠나?"

"그게 좋겠군, 난전을 나가는 패와 행상 나가는 패가 있구, 손보러 나가는 패가 있는데...

자네들 시방 올라가면 집털이부터 해야 되네."

", 가장 어려운 짓이나 시키려구 하는구먼. 우린 저자루 나갈까 했더니, 쫓겨 다니는 워

리새끼처럼 화적질이나 댕기란 말여?"

"그렇게 해서 아이들을 잡아놔야 두령 노릇을 해먹지." 의논이 정해져서 황회와 고달근

이는 복만이를 따라서 천마산에 올랐다. 묘적산 척추 능선을 타고 말고개를 넘어 천마산 북

녘을 돌아드니 햇빛도 들지 않을 짙은 송림이 눈 아래 깔리는데, 솔부리골은 그 한복판에

으슥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미 고달근이와 황회의 이름은 솔부리골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좌우 두령이 되어 제 밑에 십여 명씩의 졸개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한달 가까이 방구석에 쳐박혀 술이나 퍼마시고, 가끔 노적사에 내려가거나 송파 나가서

투전이나 하고 돌아오는 날을 보내자니 두 사람은 워낙에 뜨내기 성질이라 좀이 쑤셔서 견

딜 수가 없었다. 복만이는 이틀이나 사흘 걸러서 난전을 휩쓸고 돌아오고는 하건만, 그들에

게는 도통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느날 참다못한 고달근이와 황회는 복만이 일행이 말을 끌

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마중하여 나가면서 불평을 터뜨렸다.

"아니 우린 무슨 오다가다 얹혀 있는 식객이라던가? 솔부리서 나가라면 곱게 나갈 테여."

먼지를 횟박처럼 뒤집어쓰고 돌아온 복만이는 제가 데리고 나갔던 난전꾼들을 흘깃 돌아보

며 서로 웃었다.

"왜 푹 쉬라구 그랬지. 심심하면 낼부터라두 애들 데리구 나가 놀아보게. 하다 보면 안이

생길 게야."

"글쎄 그래서 의논을 해보자는 게 아닌가?"

"그러지. 오늘은 좌우 두령을 모시고 술이나 마셔볼까." 복만이는 그들을 자기 살림집으

로 데려갔다. 그에게는 아내가 둘이 있었으니, 모두 동작나루 있을 때 데리구 다녔던 앳된

사당들이었다. 양갓집 아낙네 같은 모양이었으나 사내들 앞에 거리낌없이 나돌며 수월하게

농을 던지니 예전 자지간나희의 습관이 배어 있는 듯하였다. 술상을 마주하고 앉자, 복만

이가 그들의 일거리에 대하여 말을 꺼냈다.

"내 대강의 요령을 일러줄 테니 잘 새겨 듣고 일해보게. 물론 자네들이 할 일이란 도적질

이나, 여기선 수십여 인이 작당하여 집을 들이치고 사람을 죽이고, 하는 난리를 치러선 안된

다 그 말야."

"그럼 좀도적질밖에 더하겠나."

"허허, 얘기를 들어보라니까. 보통 서넛이 나다니고...고작 작당해야 열을 넘기지 말게.

람을 잡아놨다가 돈과 바꾸어도 되고, 부잣집에 일시에 들어가서 협박하여 돈이 될 것들만

꾸려가지고 나오거나, 손님으로 찾아가서 은근히 위협하여도 되네. 유람 다니는 셈치구 나다

녀보게. 우선 살피는 아이들을 내보내어 몇집 알아두었다가 자네들이 찾아가 직접 확인하고

그 다음에 거사하도록 하게. 그렇게만 하면 뒤도 구리지 않구, 벌이두 쏠쏠하단 말야." "

듣고 보니...이제 좀 알겠구먼."

"우린 언제 저자에 나가보나?"

"가만있어. 대목 볼 제 일러줄 테니..."

하고 나서 복만이는 인심을 쓰듯이 일러주는 것이었다.

"달근이 자네는 어느 댁 귀한 장손이나 하나 물어들이고, 그리구 황가 자넨...조상을 사서

팔게."

복만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노라 하는 부잣집의 선산을 파다가 해골바가지만 떼어두고 돈냥하구 바꾸자구 그런단

말야."

달근이와 황회는 역시 그럴 듯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절대루 그런 일감을 솔부리까지 묻혀 오면 안되네. 거기 가까운 고을의 객줏집이나

주막에 묵으면서 일을 다 마치고 밑까지 닦구 나오란 말야. 그러구 일테면...갈 적에는 하인

거느린 양반 차림을 하든가, 그리구 돌아올 적에는 행상으로 바꾼다든가 해서 남의 눈에 유

독 뜨이지 말란 얘길세."

"알겠어, 낼부터 슬슬 시작을 할 테니까...이력이 날 때까지 너무 괄시하지 말게니." 달근

이와 황회는 역시 복만이의 두령 자격을 수긍할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안

을 내는 데엔 고달근이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위인이었으므로 복만이의 그러한 거드름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저놈 어디 얼마나 오랫동안 두령 노릇 해처먹는지 두구 봐야겠다." 황회도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으나 달근이와는 성깔이 다른 데가 있어놔서, "뭘 우두머리 노릇을 해먹자니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눌러두고 말았다. 복만이가 안을 내어준 대로 그들은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서 제각기

박거사와 시동이를 불러 이러저리 하라고 지시하였다. 제각기 나갔던 박거사와 시동이는 소

견대로 적당한 곳을 물색하여 잘 살피고 돌아왔고, 먼저 고달근이가 솔부리골을 출발하게

되었다.

고달근이는 박거사에게 견마를 잡혔으며 장죽 물고 통영갓에 도포를 떨쳐 입었고, 졸개

둘은 교꾼으로 꾸며 빈 가마를 메도록 하였다. 누가 보기에도 점잖은 댁의 부부가 나들이를

가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말고개에서 가평가는 길로 들어서서 북한강 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육십 리 길을 중화참에 가평에 대고는 동떨어져 한적한 주막을 찾아서 사처를 정하였다.

"내행이 오셔 계십니까?"

"아닐세. 안사람을 친정으로 데리러 가는 길에 내가 여독이 들어 잠깐 쉬었다 가려는 겔

. 예서 한 사날 묵을 것이니 돈은 미리 받소."

하며 달근이는 숙식대를 후하게 내주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달근이는 박거사만을 데리고

바람을 쏘인다며 주막을 나섰다.

"게가 어디라구 했지?"

"포천 못미처서 연골이라구 있습니다. 동학산 굴재 아랫녘이우." "그 집의 내막을 이틀

사이에 어찌 알아냈냐?"

"성님 내가 왜 모르우. 곰뱅이 트러 다닐 제 내가 매번 촌의 장로들을 찾아뵙구 간청하구

안했습니까? 웬간한 시골 부자들 집구석 사정은 내가 뜨르르 꿴다우." "그 집서 괄시받았

구나."

"괄시 정도가 아니우. 시골서 농사깨나 지어 먹는다구 관을 쓰구 젠척하는데, 도의 풍속은

족보 어엿한 양반보다두 더 따집디다. 그 집구석 머슴놈이 우리 애를 샀는데, 내 참, 끌려가

서 행하기는커녕 볼기를 맞은 적이 있수."

"거 아주 잘되었다."

"자손이 바른 집안이라니 우리가 맞춰놓은 자리나 매한가지유." 그들은 가평서 연골까지

나아가 노리는 집이 있는 동네를 살펴보았다. 제법 전장이 기름지게 정돈되어 있었고 뒷산

의 숲이 울창하여 먼데서 보기에도 그럴 듯이 포실한 마을이었다. 닭 우는 소리와 소의

울음이 어우러지니 농사는 제법 풍요한 모양이었다. 삼십여 호가 옹기종기 자리잡은 가운

데 덩그렇게 치솟아올라간 기와집의 지붕이 보였고, 솟을대문 앞에는 둥치가 아름은 되는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도령이 서당에 가는 길이 어느 쪽이냐?"

"내 그저께 하루 종일 버티구 앉아서 살폈더니, 회산 쪽으루 동무들과 어울려 갑디다.

기 서당이 있는가 보우. 한 오릿길 될 게요."

"길은 살펴봤니?"

"까짓 거 아무데서나 콱 덮쳐서 업어 오면 되는데 살피구 자시구 할거 없수." 고달근이

는 역정을 내었다.

"이런 망할 자식 같으니...이놈아, 시골 종년 훔쳐오는 일이 아니여. 그래두 명색이 시골

양반의 씨종손을 도적질하는 일인데 그런 채비도 없어 되겠니. 섣불리 하다가는 가평서 오

도 가도 못하구 잡히구 만다."

"딴은 그렇구먼요."

고달근이는 앞서서 길을 따라 내려갔다. 회산을 향하여 한참을 내려가니 기다란 내가 흐

르고 있었고, 소나무 가지를 엮어놓은 다리가 나왔다. 달근이가 문득 냇가에서 걸음을 멈추

더니 혼자서 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한길까지 나가려면 저 냇가를 주욱 따라가면 되겠군. 북한강으루 흘러들 테니까.

아주 좋은 길목이로구나."

고달근이가 다시 박거사에게 물었다.

"도령의 얼굴은 아니?"

"알다뿐이우. 더구나 그놈만 복건에 철릭을 걸쳤으니 십리 밖에서두 알아보겠수." "집안

의 어른이 조부냐?"

"아비는 아마 일찍 죽은갑디다. 그러니 더욱 금지옥엽이지요." "자 어서 돌아가자. 낼 식

전에 나오려면 일찍 자두어야지." 그들은 다시 가평으로 돌아와 이튿날 날이 새기가 무섭

게 찬밥을 말아 먹고 주막을 출발하였다. 주인에게는 내자를 데리러 간다고만 말해 두었다.

처음 떠나올 때처럼 달근이가 견마 잡혀 앞에 갔고 빈 가마가 그뒤를 따랐다. 그들은 한

아비내에 이르러 가마를 숲속에 숨겨놓고 다시 모자란 아침잠을 잤다. 해가 높직하니 떴을

때 달근이는 졸개들을 시켜 소나무 다리를 걷어내도록 했고 걷어낸 생솔가지들은 무릎 깊이

로 콸콸 흘러가는 개천물에 모두 떠내려 보냈다.

아이들이 서당에 갈 시간쯤 임박하여 밭 보러 나온 농군처럼 두 졸개는 개천 가에서 서성

거리고 있었다. 망을 보던 박거사가 손을 내저으며 뛰어와, "애새끼들이 몰려옵니다."

다급하게 외쳤고, 달근이와 함께 숲 사이로 숨었다. 잠시 후에 과연 아이들 댓 명이 재잘거

리면서 길을 따라 오는데 그 가운데 복건에 남철릭을 입은 도령이 보였다.

"어이구, 고뿔이라두 들려서 못 나올 줄 알았네."

"이 자식아 그랬으면 네놈이 여기서 노숙하면서 기다렸을 게여." 박거사와 고달근이는

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일단 일이 잘 풀려 나가리라 안심은 되었다. 아이들이 손마다 천

자문책을 끼고 졸음이 방금 가신지라 귀엽게 통통 부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개천가에 옹

기종기 몰려 서 있었다.

", 다리가 떠내려갔으니 어쩌니."

"이거 큰일났구나. 옷이 다 젖겠네."

하더니 총각 꼴이 박혀 뵈는 아이놈 하나가 도령에게 말하였다.

"내가 댁에 가서 먹쇠를 불러올까요?"

"도련님은 예서 기다리시지요."

아이들은 제각기 떠들었다. 그때에 냇가를 서성대던 두 졸개가 앞으로 나서면서 허리를

굽신하였다.

"어유 도련님 평안하십니까?"

"소인들 문안 올립니다."

아이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고, 도령은 제법 야무지게 물었다.

"자네들은 누군가?"

"저희를 모르십니까요. 소인들은 도련님을 잘 알지요. 광악골 사는 사람들이올시다. 재넘

이 논에 두레 나가서 샌님두 모셨구요, 잔치 때마다 나뭇짐두 해다 그리구 술두 여럴번 얻

어먹었습죠. 작은나리마님이 살아계실 제는 소인들이 그 댁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다리

가 떠내려갔구먼이요. 까짓, 저희가 회산까지 업어다 드리지요." 아이들은 모두 반가워하였

고 도령도 적이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자네들을 월천꾼으루 부려서 안되었네."

"에이 월천꾼이라닙쇼. 서당에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먼저 한 놈이 도령을 덥석 업고서

텀벙대며 내를 건너갔다. 다른 자는 바지를 추스른다 신들메를 고쳐 신는다 하면서 엔간히

지체한 다음에 남은 아이들을 하나씩 업어 건넸다. 아이들은 제 동무가 건널 때까지 모두

기다리게 되었는데, 도령을 업고 간 자는 이미 길에서 벗어난 뒤였다.

아이들은 모두 도령이 광악골 농군의 등에 업혀 사당으로 앞질러갔거니만 여기고 뒤에 남

았던 자에게 인사하고는 다시 평화롭게 재잘거리며 멀어져갔다. 달근이와 박거사는 벌써 졸

개가 업어 온 도령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발을 묶은 뒤에 여자의 장옷을 두텁게 씌워놓은

뒤였다. 가마 속에다 도령을 쳐넣고 나서 그들은 서둘러 한아비내를 따라서 가평으로 되돌

아갔다. 주막으로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라 그들을 가평 읍내 가까운 야산에다 가

마를 내려놓고 낮잠을 자면서 하루 낮을 보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호랑이밥이 되게 깊은 산속에다 버린다. 소리를 지르지두 말구, 울지두

말어라."

하면서 그들은 번갈아 아이에게 어지간히 공갈밥을 먹여 주눅을 들게 해두었다. 인가에 가

서 낭패할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눈은 가린 채 재갈만을 풀어주어 요기를 시키니, 역시 아이

가 영리하여 주는 대로 다소곳이 받아 먹었다.

그날 밤이 이슥해서 그들은 가평 주막으로 돌아갔고, 주인은 손님들이 어김없이 되찾아오

매 넓고 깨끗한 부부 방을 치우고 법석대었다. 그들은 주인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옷을 씌

운 도령을 업어다가 방에 누이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들씌워두었다.

"아씨께서 불편하신가요?"

"신열이 보통이 아니라네. 어차피 며칠 더 쉬어야 길을 떠나겠는걸." "의원을 불러다 드

릴까요?"

"괜찮네. 나두 의서를 봐서 약간의 진맥은 할 줄 아니까. 그보다두 아내가 몹시 아프니 이

쪽엔 잡인이 얼씬하지 않도록 해주게."

주인도 함께 걱정스런 빛이 되었다.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손님이 와두 이쪽으로는 들이지 않겠습니다." 일단 일이 반

쯤은 성사되었으므로 고달근이는 매우 흡족하였다. 밤을 새워 번을 바꾸며 파수를 드는데

지장이 있을까 하여 그는 먹고 싶은 술도 참았고, 졸개들을 몹시 단속하였다.

"내일 하루가 고비여. 하룻밤만 눈뜨고 새울 작정들을 해라." 이튿날 오후에 느지막이 졸

개 한 놈이 연골 도령네 집을 향하여 출발했다. 고달근이는 그에게 이리저리 하라 이르고,

다시 그에게 반복해서 말해보도록 시켜놓고야 마음을 놓았다.

졸개는 한달음에 뛰어서 연골에 도착했고, 생원 집의 솟을대문 앞에 이르렀다. 하인을 찾으

, 그의 차림새를 보고는 더 이상 말도 않고 대문을 닫으면서, "집안이 우환중인데...구걸

하려면 똑똑히 알아보구 다녀라."하며 투덜대는 것이었다. 졸개가 목청을 높여서 오히려 그

하인을 꾸짖었다.

"이런 쓸개 빠진 놈아, 이 댁 도령이 없어졌으면 산지사방으루 찾아다녀도 아랫것 노릇이

부족할 텐데, 공밥이나 처먹구 축객이나 하려느냐?"

하인의 귀가 번쩍하여 대문을 열었다.

"시방 뭐랬어?"

"이 댁 도령을 맡았다는 사람이 보내어 찾아왔다. ?" "...이건...!"

갑자기 하인이 안으로 달려들어가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샌님, 아씨, 찾았습니다. 찾았어요. 도련님을 찾았습니다."하자마자 사랑의 문이 열렸고

안채에서는 부녀자들이, 부엌에서는 계집종들이며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하인은 문

밖에 섰는 졸개를 연방 가리키는 것이었다. 사랑 마루로 뛰어나오는 늙은이가 생원인 모양

인데 도포에 유건을 쓰고 풍채가 제법 그럴 듯하였다. 노인은 다급했는지 버선발로 댓돌까

지 내려섰다가 다시 마루 위에 오르며 졸개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아이가 어디 있느냐?"

"...이 사람이 안답니다."

"자네가 안다구...어디 사는 누구길래..."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면서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졸개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말하였다.

", 저는 시방 영평까지 서신 급주를 뛰는 방자이올시다. 방금 굴재를 넘어오는데 험상궂

은 장정들 서넛이서 앞길을 막아서더니 다짜고짜로 몸을 뒤지데요. 품속에서 서신이 나오자

그것을 빼앗고는 칼을 들이대고 핍박하여 말하기를, 저희들 심부름을 먼저 해주지 않으면

서신도 내주지 않으려니와 다시는 굴재를 넘을 생각을 말라구 합디다. 그리고는 돈까지 닷

냥을 주었습지요."

생원이 다급하게 물었다.

"우리 집 아이가 그놈들게 잡혀있던가?"

"....그자들이 손짓하는 곳을 바라보니 나뭇가지에 매달아놓았는데 허기지고 피로하여

사색이 다 된듯하더이다."

이때 사랑 마당에 모여 서서 주시하던 아낙네 중에 늙은이와 젊은 여자가 함께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통곡을 터뜨렸다. 하녀들도 저희끼리 소리를 질렀고, 마루 위의 생원은 털썩 주

저앉았다.

"누가 관가루 달려가서...포도 군관을 데리구 오너라." 그러나 졸개는 그런 말을 놓치지

않았다.

"소인이 알기로는 만약에 관에 알리면 머리만을 베어, 이 댁 담장 너머로 던져버리겠다구

하더군입쇼."

생원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넋이 빠진 듯이 입을 벌리고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자들의 전갈을 말씀해 올리겠으니 좌우를 물리치십시오." 졸개의 말에 정신이 번쩍

난 생원이 그제서야 마당에 주저앉아 땅을 치는 안식구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소란들인고? 모두들 물러가 있도록 해라." "아버님 제발 덕분 저희 모자 살려

주십시오. 재물이든 무엇이든 다 내어주고 그애를 데려오게 해주셔요."

"여보, 그애는 우리 집안에 하나뿐인 종손이어요."

"모두들 물러가 있소. 자넨 잠깐 들어오게."

졸개는 생원의 뒤를 따라서 사랑으로 들어갔다.

"자네두 고생이 많네, 그래 그놈들이 뭣 때문에 우리 아이를 잡아두고 있다던가?" "돈 삼

백 냥을 원한답디다. 삼백 냥을 소인 편에 건네주면 아이를 다시 소인이 데려다 드리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삼백 냥이라...우린 장사하는 부상대고가 아니니 갑작스레 그 많은 돈이 집안에 쌓여 있

을 리가 있나? 있다면 창고에 쌓인 미곡뿐인데."

"그놈들은 돈이거나 돈이 될 만한 금붙이, 은자, 패물 따위를 보내라구 합디다. 도련님을

살려내셔야지요."

"...기한은 얼마나 주겠다던가?"

", 하루 길어야 이틀 말미를 주는데 그 이상 늦어지면 굴재에다 죽인 시체만 남겨두겠

다구 그랬지요."

생원은 연상 안절부절 못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는 급히 안채로 들어가 부인과

의논하는 것 같더니 피농을 들고 돌아왔다.

"우리 집에 있는 금붙이와 패물과 돈의 전부인데 삼백 냥어치는 될게야. 내 사람을 딸려

보낼 테니 어서 전해주어. 아이가 돌아오면 너에게 따로 수고비를 주겠다." "아이구 뭐 수

고비랄 것두 없습니다. 저두 갈 길이 바빠서요. 헌데 그자들과 내일 정오에 한아비내 건너

편 숲에서 만나기루 했습죠. 돈하구 도련님하구 바꾸는 겝니다." "어찌 이 긴긴 밤을 새운

단 말이냐. 어린 것이 두렵고 배가 고파서 기진하여 죽은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생원은 탄식을 연발하며 오락가락하였다. 생원은 끝내 관가에는커녕 마을의 그 누구와 상

의 한마디 할 수 없는 채로 달근네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기로 하였다. 졸개는 그 댁에서 융

숭한 대접을 받고 하룻밤 묵은 뒤에 길안내를 섰고 건장한 하인 두 사람을 거느린 생원이

뒤를 따라왔다. 약속한 시각쯤에 그들은 한아비내를 건너 전나무숲에 이르렀다. 그들이 숲

어귀에 이르니 길 쪽을 망보고 있던 자 하나가 튀어나와 외쳤다.

"돈을 가지구 왔느냐?"

앞섰던 졸개가 손을 흔들어 보였고, 달근이는 도중에 가마를 골짜기에 처박아두고서 걸려

왔던 아이를 데리고 나와 그들에게 내보였다.

"돈을 가지구 오너라."

졸개는 생원의 떨리는 손에서 피농을 받아들고 제 일당들에게로 달려갔다.

"금붙이하구 패물이며 돈꿰미가 들었수. 삼백 냥이 넘었으면 넘었지 모자라진 않을 게유."

달근이는 곰보 상판을 일그러뜨리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가만있자, 아이놈을 여기서 보내놓고 나면 뒤가 뜨거울텐데..." 고달근이는 잠깐 생각해

보고 나서 생원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댁의 손자를 굴재까지 데리구 갈 테니 거기 와서 찾아가오." 우리 퇴로를 안정시켜놔야

겠으니 굴재로 오시우. 거기다 두고 갈테니..." 고달근이는 아이를 덥석 안고 숲으로 뛰쳐들

어오며 졸개들을 재촉했다.

"어서 내치자!"

"도령은 어쩔라구?"

"그야 아무 데나 한적한 곳에다 버려두면 울며불며 인적을 찾아갈테지." 그들은 부지런

히 뛰어서 회산의 줄기가 끝나는 데까지 가서 아이를 길에다 내려놓았다.

그들은 다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가평을 지나면서부터는 말에다 피농을 싣고 달근이는

도포와 갓을 벗어 던지고 맨두건 바람이 되었으니 모두들 행상 나갔다 돌아오는 장사치의

모양이 되었다.

"사나흘 고생하구 삼백 냥이면 첫손치고는 과히 부끄럽지 않구나." 달근이는 천마산 솔

부리골로 돌아가며 은근히 황회의 일이 궁금하였다. 곁을 따르던 졸개가 맞장구를 쳤다.

"아무렴입쇼. 하루벌이 백 냥씩이면 천릿길 행상의 상리보다두 월등합죠. 대개들 이런 벌

이를 하구 나면 한달씩 쉽니다. 우리 솔부리 들어가지 말구 한양 성내 색주가에나 들러 한

번 노십시다."

"이번만은 참고, 다음부터 그렇게 하지. 솔부리에 갔다가 아예 송파 나가서 한 보름 뒹굴

다 오자꾸나."

고달근이가 첫 번 일을 나가 보기 좋게 해치우고 의기양양하여 솔부리골에 돌아오니,

회는 이미 먼저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달근이와는 달리 못시 시무룩하였다. 좌우 두령

이 함께 쓰는 초막에 들어 고달근이는 털어온 물건들을 피농에서 꺼내어 값을 따져보고 있

었다.

", 금부처 하나, 옥지환 한쌍, 은 백 냥, 돈 열 냥짜리 다섯 꿰미, 삼백 냥이 넘었으면

넘었지 모자라진 않겠다. 복만이에게는 백오십냥이라구 말하구 나머지 졸개들게 오십 냥,

가 백 냥을 먹으면 좋겠구나."

곁에서 시무룩하고 있던 황회가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에이 넨장맞을...나는 이게 무슨

꼴이야."

하면서 앞에 놓인 제 보퉁이를 발길로 걷어찼다.

"그게 뭔데?"

"...오백 냥짜리 물건이다. 풀어볼 테면 한번 봐." 달근이는 그 보퉁이가 궁금하기도

하여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었고, 두터운 한지에 여러 겹으로 싼 둥근 물건이 나타났다.

"그래 이번에 일 나가서 이걸 가지구 왔단 말인가?"

"글쎄 펴보라니..."

"이게 뭔데?"

달근이는 한지를 벗겨내다가 깜짝 놀라서 내동댕이를 치고 말았다. 그것은 노랗게 퇴색한

사람의 두개골이었던 것이다. 그는 건성으로 퉤하며 침 뱉는 흉내로써 부정을 털어버리고

나서, "도대체 이 해골바가지를 어쩌자는 게여?"

물으니 황회는 벽에 세워둔 화승총을 들어 그것을 부숴버리려는 시늉으로 번쩍 치켜들었다.

"아아, 얘기나 좀 들어보자."

고달근이가 씨근거리는 황회를 만류하고 이번엔 그가 일 나갔던 전말을 물어보았다.

"우리는 수원 쪽으루 일을 나갔지. 시동이놈이 일거리를 살피구 왔다구 그래서 나는 믿었

단 말야. 우리네야 밤중에 지키는 이 없는 모이를 파헤치는 짓인데 뭐 식은죽 먹기라구 생

각했다. 점찍은 수원 부상의 삼대조가 묻힌 선산을 파헤치구 저 해골바가지를 끊어냈지.

이를 쓰길 잘 썼더구만, 하여간 봉분을 헤쳐내는데 넷이서 꼬박 하룻밤을 새웠으니까."

개골을 끊어낸 뒤에 그들은 과천으로 돌아가, 수원으로 사람을 보내어 조상의 두개골을 오

백 냥에 사가라고 전언을 했던 것이다. 수원과 과천 사이에 있는 백운산에서 만나 돈과

해골을 맞바꾸기로 하였으나 사근내와 가을재에 수원의 관병들이 나와서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변변히 대면하여 흥정도 붙여보지 못한 채 숯내를 따라서 광주까지 겨우 내

빼왔던 것이었다.

"복만이 말만 듣고 나섰다가 돈은커녕 몰이꾼에 쫓긴 들토끼 신세가 될 뻔했다. 나는 아

예 길목에 나갔다가 행상들이나 털든지, 십여 인 작당하여 명화적 노릇이나 할란다. 제길 당

장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게 더 신이 나지."

"이 사람아 명화적이 되려면 산이 높고 골이 깊은 델 산채로 삼아야지, 까짓 솔부리 같은

데서 관에 기찰되었다간 갈 데 없이 잡혀 죽구만다."

고달근이도 한번 일을 나갔다 와서 이곳의 형편을 대강 이해하게 되었고, 그에게는 아주

맞춤한 도적질이라 여겨져서 당분간은 솔부리를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복만이가 돌아오고 나서 달근이와 황회는 그들이 겪었던 일을 모두 얘기해주었다. 복만이

는 이제 포도 군관이 설칠 것이니 당분간 솔부리를 떠나지 말고 근신하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고 황회에게는 역시 이런 일이 맞지 않겠다고 말하고 나서, "나허구 난전이나 나가세.

맛들고 보면 그 일두 아주 재미가 있지." "제길할 나는 난전두 별루 재미가 없으니...화적질

이나 해야겠네." "가만있어, 우리두 사세 부득하면 식솔들 데리구 운악산으루 들어가 산채

를 정할까 하는데...그때까지는 큰 일을 못 치르네. 운악산과 화악산은 쌍둥이처럼 서로 마

주보고 있으니, 그뒤로 계속 산줄기가 뻗쳐 있어서 산지사방에 튈 데가 맨천이란 말야.

리 재물이 좀 모이면 거기에 산채를 닦아놓을 생각일세."

고달근이가 말하였다.

"난전은 재미있을 듯하니 나두 좀 데려가 배워주게." "그래, 다음에 양주 나갈 때 같이

나가보지."

"하여튼지 나두 맨손가락 빨구만 있을 수는 없으니 술값이라두 벌어야지. 퇴계원 나가서

살폈다가 호젓이 지나는 행객의 보따리나 털어볼라네." 황회가 투덜거리자 복만이는 여지

없이 면박을 주었다.

"그런 위험한 짓은 말라니깐. 정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자네 혼자 나가서 해보게.

아이들은 한 사람도 데려가선 안돼."

"좋아, 시동이만 데리구 가지. 그애는 원래 내 식구였으니까." "자아, 우리 술이나 먹지."

복만이가 제안하였으나, 황회는 못마땅하여 말이 없었고, 고달근이가 말하였다.

"싱겁게 솔부리에 앉아 무슨 술을 먹어. 나두 그동안 몸을 풀지 못했더니 사지가 욱신거

려서 못 참겠는걸. 우리 송파 나가 색주가에 가서 묵은 때를 말짱하게 벗기구 오지." "송파

는 사람 눈이 많은데..."

"압다, 술 먹는데 무슨 죄짓구 다니나. 제 돈 내구 제 술 사먹는데." "정 그렇다면 나는

안 갈 테니 자네들이나 다녀와. 달근이 자네 이번 들여온 돈에서 사종으로 오십 냥 떼고 백

냥은 솔부리골에 내는 것으루 하겠네." "? 백오십 냥씩이나 떼어. 그럼 나는 뭘 먹구..."

"듣자니까 삼백 냥이라던데. 반절 가지고 애들 나눠주고 자네가 쓰게." 달근이는 불만스

럽게 복만이를 흘겨보다가 쓰다 달다 말도 없이 황회를 잡아 일으켰다.

황회도 말없이 따라나왔다. 달근이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주먹을 쥐어 부르르 떨면서 중얼거

렸다.

"내 복만이 자식을 죽여버리지 않으면 이 드러운 솔부리에서 더부살이는 안할란다." "

근이, 우리는 운악산에 나가 산채나 열지 그래. 뱃보가 맞아야지." "가만있어. 당이 이루어

져야 산채구 뭐구 정하지...둘이서 숯이나 굽구 살잔 말이냐?" "그럼 어쩔테."

"자네는 그냥 잠자코 보고 있으소. 내가 저놈을 감쪽같이 해치우고 패를 떼어 운악산에

산채를 열 테니깐..."

"정원태가 좋아하지 않을걸."

"그까짓 가짜 땡초중이 무슨 상관이냐?"

황회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정원태는 우리들 사이에 아주 중한 사람으루 알려져 있지." "기왕에 사당패 모

가비질을 때려치웠으니, 되려면 대적당의 화주가 되어야지. 정원태구 뭐구 저 복만이 자식은

내 손에 죽을 게여."

"사람 성미두 참 급하긴...압다 자네를 누가 믿구 졸개들이 순순히 따르겠나?" "송파 내려

가서 술이나 퍼 마시고 오세."

그들은 노적사로 내려가는 길을 피하여 곧장 평구말로 질러가서 광나루까지 오르는 나룻

배를 타고 송파로 나갔다. 송파의 거여 객점거리에는 한창 땅거미 덮일 무렵인지라 손님을

부르는 선소리꾼들은 물론이요, 색주가의 홍등 아래에서는 유객을 하는 작부들의 교태와 웃

음이 시끌작하였다.

"손님 이리 들어오시지요. 꽃 본 나비인 듯 물 본 기러기인 듯 잠깐 걸쳐서 쉬어 가셔요."

"손님 삭신을 촛물에 푹 담그었다가 내드릴 테니 어서 이리 들어오셔요."하면서 계집들이

문간에서 내달아 이놈 저놈의 팔뚝을 잡아 흔들고 난리였다. 달근이와 황회는 사당패를 떠

나고 계집을 대한 지 달포가 넘었는지라 과연 불두덩이 욱신거릴 만하였다.

"어 그년들 자못 음탕하다.!"

"급한 놈은 문간에 들어서기도 전에 탕정하겠는걸."

작부가 돈 가진 놈팡이를 몰라볼 리가 있나, 역시 두 사람의 지분대려는 태를 대뜸 짐작

하고 치마꼬리를 감싸쥐며 달려들어 가슴에 안기는 것이었다.

"아이구 서방님 얼마만이십니까요. 쇤네는 기다리다 지쳐서 애간장이 좁쌀만큼 닳았다우."

"그래 평안한가. 오늘 우리 두 사람인데 술도 술이려니와 하룻밤 질탕히 구르다 가련다.

뒷물은 쳐놓았느냐?"

"아이 무슨 말씀을 그리 우악스레 하십니까."

"내 주장군이 색심에 주려서 성이 날 대루 났으니 어디 고분고분하겠느냐. 본시 성정은

봄바람 같은 우리지만 하루만 더 넘겼다가는 득도하여 성불할까 걱정이다." "재담이 그럴

듯 하오."

한눈에 그자들이 예사 양인이 아님을 눈치챈 작부들은 화방 물림과는 원래가 한통속이라

더욱 즐거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주막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선래자가 두엇 앉아서 계집

들과 잡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전대 꼴이며 배자 걸친 모양이 부상들의 차인일시 분명하

여다. 고달근이와 황회는 건넌방으로 들어가며 그 편을 향하여 주석의 예로 알은 체를 하였

.

"같이 놉시다. 실례하우."

"태평하우. 좀 섞입시다."

하고 나서 자리를 잡고 앉자, 번듯한 통영반에 조촐한 안주 올린 술상을 맞들고 작부 두 년

이 들어왔다. 잡가도 듣고 타령도 주고받으련마는, 고달근이는 이짓저짓 다 마다하고 우선

계집의 치맛귀 속으로 손을 넣어 사타구니를 덥석 움켜쥐었다. 계집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질렀고, 달근이는 다시 저고리 앞섶에 손을 넣는데, 계집이 요동을 치는 것이었다.

"거 보자하니 너무들 허시우."

맞은편에서 흥얼거리고 앉았던 자들이 불쾌하다는 듯이 이쪽을 건너다보면서 상을 찡그리

고 있었다. 황회는 잠자코 있었으나 성정이 제법 불량한 달근이가 잠자코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곰보 상판을 잔뜩 찌푸리며 턱을 치켜 들었다.

"뭐라구 하셨수?"

맞은편에 앉았던 술꾼이 제법 점잖게 고달근이를 나무랐다.

"여보, 아무리 색주가에 동석하여 사내끼리 허물이 없다지만 남들 다 보는 데서 그 짓이

무어요? 참으로 안하무인이로군."

"내가 언제 네놈더러 술값 내랬어?"

다짜고짜 놈자가 떨어지니 상대는 아연하여 입만 벙벙히 벌리고 앉았다.

"계집도 네 것 내 것이 다르고, 양물도 네 것 내 것이 다른데 웬 참견이냐?"하자 상대는

벌써 마음을 다잡고 술잔을 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 그놈 말본새 한번 봐라."

이렇게 시비가 일어나니 난처한 것은 그래도 성질이 좀 눅은 편인 황회 쪽이었다. 송파는

솔부리와 천마산에서 바로 코 닿을 데가 아닌가. 제 동네서 혼난 놈치고 발붙이는 놈이 없

는 법이다. 황회가 달근이의 벌떡 일어나려는 어깨를 눌러 앉히고 일방 떠들며 또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 참 사람두, 동석에 예의가 있는 법인데 벌써 술 취했나? 이봐, 여기는 송파 거여 객점

거리여, 솔부리가 아니란 말일세."

하고는 마주 일어나려는 자에게 공손히 사과를 하였다.

"죄송허우. 이 사람이 원행에 하두 적적하여 실행을 하였으나, 본시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

마음 푸시우. 술 먹자면 성깔있는 놈두 끼여있어야 먹는 맛이 나지 않우." "엥이...드러워서

같이 못 앉아 있겠네. 어이 가세나." 그자가 제 동무를 잡아 일으켰다.

"아직 초저녁인데 벌써 자리를 뜰 테여?"

"아이, 그러시지 마시구 푹 쉬시고 내일 떠나셔요."

만류하는데, 그자는 막무가내였다.

"까짓 것 술집이 어디 여기뿐이더냐...거여에 깔린 게 색주가요 주막이다. 묘옥이네 주막으

루 가지."

"거기 가면 온갖 한량 잡패가 몰려와 있을 텐데 우리 따위가 눈에 뜨이겠나? 예서 그냥

마시다 일찍 뜨지."

"아냐, 묘옥이네 주막에서는 술값두 싸구 안주두 맛깔스럽다네. 그러구 손님은 또 얼마나

점잖은가?"

이렁저렁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들은 시비 튼 것을 거두지 않고서 그냥 주섬주섬 일어났

. 뒤따르던 계집이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쫑알거렸다.

"그년을 객점거리서 몰아내든지 해야지, 이러다간 작부질도 못해먹겠네." 손님들이 욱하

여 자리를 떠버린 다음에 고달근이는 벌써부터 귀가 번쩍했던 터였으므로 곁에 머쓱하여

앉아 있는 계집에게 물었다.

"묘옥이라니...그게 누구냐?"

"글쎄 우리가 어찌 안답디까? 어디서 묻혀 들어왔느지두 모를 년이 갑자기 가게 세를 내

어 작은 술집을 차리더니, 한다 하는 오입장 어르신들이 모두 그 집으로만 모인다우." "

릇된 기생년...노상에 탁주장사라더니 소박맞은 한양 첨년이겠지요." "그 집이 어디 있느냐."

"왜요, 가시게요?"

고달근이는 상을 밀어내며 일어섰다. 황회도 영문을 모른 채 따라 일어서는데 달근이가

말하였다.

"잘되었다. 그렇잖아두 여주 이경순이란 작자에게서 몸값을 받아올 참이었는데, 그년이 여

기 있다니..."

"당진서 헤어졌다는 그 사당 아이 말이로군."

달근이는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한 작부들을 뿌리치고 바깥으로 나오자 가가들이 늘어

선 밥집과 주막집들 쪽으로 재빨리 걸었다. 달근이는 반평생을 모가비로 지내왔건만 묘옥이

와 같은 사당을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선 제 발로 찾아들었고, 한번도 모가비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도 연희에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달근이로서는 묘옥의 어딘가가 범접을 못

하게 하는 묘한 구석이 있다고 느낄수록 얄미웠던 것이다. 그도 몹시 반가웠으나, 반가웠던

그만큼 울화가 치미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년 만나기만 해봐라!"

고달근이는 마음이 급해져서 황회를 멀찍이 떼어두고 있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저녁

후에 바람이라도 쐬러 나왔을 성싶은 맨상투 바람의 시장 상인에게 물으니, 과연 묘옥이네

주막은 유명짜하였던지 데꺽 손짓하여주는 것이었다.

"저어기 싸리울 안으루 들어가보우. 앉을 자리가 있을라나 모르겠군." 달근이는 그 집으

로 다가서서 싸리울 안을 기웃거려보았다. 안에서는 술 먹는 자들의 웃음소리와 얘기하는

소리들이 시끄러웠고, 요란하게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며, 중노미를 부르는 소리로 한창 시

끄러웠다. 문간에 들어서는 마당에 멍석 두장이 깔렸는데 술 먹는 패거리가 서넛씩 다섯 패

나 되었다. 마당에는 뒤늦은 자들이 차지한 멍석 주석이요, 기다랗게 트인 토방의 거적 위에

는 앉을 틈이 없이 술상이 벌여져 있었다.

옆에 잇달린 방문이 닫혀 있는데, 주막 사람들이 기거하는 방인 모양이었다. 방에 붙여진

부엌에서는 쟁개비에 물이 끓고 있었으며, 부엌의 벽 한쪽을 헐어 목판을 여러 개 세워두었

는데 각종의 마른안주와 진안주가 담겨 있었다. 흙으로 만든 화덕에서는 숯불이 타고 있고,

그 위에서 너비아니 고기가 지글지글 맛좋은 냄새로 구워지는 중이었다. 바침술집에서 갖다

놓은 술독이 반쯤 채워져 있는데 술국자가 쉴새없이 들락거리며 술잔을 채워내고 있었다.

달근이는 한눈에 주막 안에서 묘옥의 모습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묘옥이는 녹의홍상 입고

서 얹은머리 위에 붉은 금박댕기 매고 치마꼬리를 잘잘 끌면서 술상 사이로 다니며 농도 받

, 술잔도 쳐주면서 손님 접대에 분주하였다. 과연 송파의 한량들이 한번쯤 집적거려보고

싶을 만큼 예쁜 모습이었다. 이경순의 모습을 찾으니 그는 보이지 않고 부엌에서 칼질을 하

거나 고기를 굽는 할머니가 있었고 상을 내가고 빈 술병을 날라오는 아이놈이 토방과 마당

을 오르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손님네들 앉으시지요. 저어기 멍석에 상 하나 더 나갑니다."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문가

에 섰는 고달근이와 황회에게 청하였으나, 달근이는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우리는 술 손님이 아니다. 네 주인 아주머니의 작은아버지 되는 사람이니, 이리 불러라."

아이는 얼른 그들을 바라보고 토방에서 술을 차고 앉았는 묘옥의 등뒤로 올라가 뭔가 말을

전하였다. 묘옥이 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놀란 듯 해 보였다. 그러나 묘옥은 침착하게 아

이에게 무슨 말인가를 전하였다. 아이가 달려오더니 말을 전하는데, "아주머니께서 뒷방으

루 모시랍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고달근이와 황회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나서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뒷방이래야 부엌 옆에 붙은 방이건만, 출입문이 앞쪽은 막혀 있고 뒷마당

쪽으로 나 있으니 뒷방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부엌 뒤로 돌아서 가니 작은 퇴창문이 달

리고 앞에는 툇마루가 붙여져 있었다.

"들어가 잠깐만 기다리시지요, 곧 술상을 내겠습니다." 고달근이와 황회가 방에 들어가

, 제법 도배의 형색이 깨끗하였고 온돌도 반듯한데 농이며 반닫이, 경대 등의 세간이 정연

하여 살림에 규모가 있는 듯하였다. 달근이는 담배쌈지와 놋재떨이를 끌어당겨 곰방대에

부시를 치고서 혼자 중얼거렸다.

", 이년이 이경순이에게서 단단히 우려낸 모양이로군." 둘이서 담배를 태우고 앉았는

, 퇴창이 빼꼼해지면서 몸소 술상을 받쳐든 묘옥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이 모가비님이 이 누추한 집구석은 어찌 알구 찾아오셨습니까?" "왜 못 올 데를 왔는

. 조선 팔도 사방 삼천리에 달근이 발 안 닿은 데가 있는 줄 알았느냐?"

"곤경은 치르지 않으셨나요?"

"너희 때문에 내가 오늘날 이 지경이 되었다. 안성 청룡골에는 다시 발두 못 붙이고 패거

리는 산산이 흩어졌지. 게다가 여럿이 관에 잡혀서 죽었다." "저는 이처럼 술장사에 여념이

없습니다."

"일어이폐지하고, 이경순이 어디 있느냐? 내 좀 만나야겠다." 묘옥이는 상머리를 내려다

보면서 대답이 없었다. 달근이가 술 한 잔을 마구 쭉 들이켜고, "가끔 들르느냐, 아니면

여기 함께 있느냐?"

재촉하니 묘옥은 그 뜻을 짐작하고 차차 마음을 다잡는 눈치이더니, 예의 그 매정하고 독살

스러운 눈길이 되었다.

"이도장님은 만나서 무엇하시렵니까? 모가비 어른께서 작당 화적질하여 오히려 그분을 봉

패하도록 했지요. 지금 여주 옥에 갇혀 계십니다. 그 안댁께서 노자로 주신 돈으로 술집을

내었는데, 제게 놀러 오신 게라면 몰라두 뭘 바란다면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어요." 달근

이는 실상 할말이 없었다. 그저 묘옥의 모습을 대하니 역시 손안에 닿지도 않아 그것이 얄

미울 뿐이었다.

"...몸값은 어쩔 터이냐?"

"몸값이라구요? 제가 언제 모가비님 사당패에 팔려서 갔던가요? 해주서 내 발로 찾아들어

갈 제 밥값으로 연희나 팔아드리고,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 패를 나가겠다구 하지 않았나

?"

"그래, 니가 가을에 들어와 겨울 한철 공밥으로 세월 보낸 뒤에, 연희 한 차례로 패를 떠

났으니, 밥값을 했단 말이냐? 더 여러 말 할 거 없다. 우리 있는 데루 가서 시중이나 들어

."

달근이의 말이 떨어지자 묘옥은 목청을 드높여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를 뭐 여염 향리의 촌년이나 종년으루 알았다간 큰코 다칩니다. 나두 명색이 작부질

석삼 년으루 궁둥이가 큰 년이어요. 가서 포교를 불러오지요. 어디 두구 보십시다. 나를 데

려가나, 고거사님을 데려가나."

묘옥이가 자리를 뜨려니 어마 뜨거라 한 것은 물론 고달근이었다.

"아니 이년이 시방 누굴 놀리나?"

달근이가 일어나면서 묘옥의 소매를 잡았다.

"왜 이러셔요?" 내 몸값을 받으러 오셨다니, 포교를 불러다가 판결을 해달라구 그래야지

."

"앉어, 앉으리니."

묘옥은 달근이를 흘겨보면서 독살스럽게 내뱉는다.

"술값을 내셔요. 한 돈이니까."

"제길헐!"

달근이가 꿰미에서 열 닢을 꺼내어 방바닥에 내 던진다.

"아무리 그렇기로니, 예전 안면두 있는 터에 참으로 못된 년이로구나." 덤덤히 앉아서

두 사람을 관망하던 황회가 보다못하여 거들었다.

"내 보아하니 두 사람의 타시락거리는 양이 친척붙이들 같군. 이 사람아 반가우면 반갑다

고 반색이나 보일 게지 이게 무슨 장난이야? 자네두 이리 앉아 술 좀 들게." 황회가 자기

잔을 비우고 묘옥이에게 내밀어주니, 묘옥은 대꾸 없이 잔을 받았다. 황회가 따르고 묘옥이

마시는 사이에 세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혹시 이도장님 소문 듣지 못하셨습니까?"

"못 들었다."

달근이가 대답하였고, 묘옥이는 그렁그렁해진 눈시울을 옷고름으로 씻어냈다.

"탈옥하신 뒤에 관원들을 죽이고 이방까지 죽인 다음에 종적을 감췄다구 합니다. 집안은

온통 적몰이 되었다지요. 제가 사람을 사서 보냈더니, 며칠 전에 살피구 와서 전해주어 알았

지요. 여주에서는 이도장이 몸을 망친 것은 늦바람 탓이라구 합답디다." "그렇게 되었군.

그러면 너는 먼저 여주를 떠났더냐?" "이년의 죄가 크지요. 제가 그분을 찾아서 모셔야 죄

를 벗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강 건너 천마산에 있다. 여기 와서 솔부리라구 들은 적이

있느냐?" 달근이가 참지 못하고 발설을 했고, 묘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 장쇠가 얘기를 합디다."

"장쇠라니...아까 그 아이놈 말이냐?"

", 그애가 송파 깍정이 꼭지의 조카 행세를 한답니다." 황회는 고개를 끄덕였고, 달근

이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허허, 참으로 좁은 세상이로구나. 이제는 장물을 그놈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겠군. 묘옥아,

우리하구 손을 잡지 않을래? 주막벌이보다야 불어나기두 쉽구, 또한 포교의 기찰에 걸리지

두 않는다. 우릴 좀 도와다우."

"무슨 일인데요?"

"별루 어려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처분할 물건들을 좀 맡아주고 아이를 시켜서 거간을

붙여주면 되는 게야. 그리구 장바닥에 무슨 소문이 있으면 솔부리에다 귀띔만 해주면 되어."

묘옥이 잠시 생각하더니, "그런 일이라면 해보겠어요. 헌데 저두 청이 한가지 있군요." "

문은 두둑히 내주마."

"구문두 좋지만, 이도장 어른을 찾아주셔요."

"이 너른 천지에 그 사람이 어디 있는 줄 알구 찾아내겠느냐." "아니오, 그이는 세상을

등진 분이니 분명히 숨어 살 것이어요. 숨어서 사는 사람끼리는 소식이 잘 닿을 듯도 합

니다. 혹시 솔부리의 소문을 들으시면 찾아오실지 누가 알겠어요?" 곁에서 황회가 참견을

하였다.

"딴은 그렇지, 여주서 도망을 쳤다면 혹시 강원도 쪽의 산사에 숨었을지두 모르고 오히려

저자에 훤한 사람이라면 장시 바닥에 틀어박혔는지두 모르네. 사람이 많은 데가 숨기에는

더욱 편할 테니까. 아무튼 서울 근처에서는 우리 패가 줄줄이 꿰고 있으니, 언제든 소식이

닿을지두 모르겠군."

"그래 우리두 이도장을 만나면 반가울 게다. 그건 어려운 청이 아니고...할 테냐 말 테냐?"

"도와드리면 몸값 내란 말은 다시 하지 않으시려요?" 묘옥이 말하자, 황회와 고달근이는

어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밖에서 젊은 주모를 찾는 소리가 요란했으므로 묘옥이 자리를

뜨려는데 마침 장쇠가 부르러 왔다.

"아주머니 손님들이 찾고 야단이우. 모두들 자리 폐하고 돌아가신다구 법석입니다." "

겠다, 곧 나가야지. 그리구 장쇠야 너 이리 좀 들어오너라." 장쇠는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방안으로 쭈뼛쭈뼛 들어섰고, 묘옥이 인사를 시켰다.

"너두 솔부리를 알지? 거기 두령님들이시다. 인사를 올려라." "평안합쇼?"

장쇠가 제법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으며 꾸뻑하였다. 달근이가 말하였다.

"천마산에 가본 적이 있니?"

"얘기루만 들었습니다."

", 그러면 오늘은 우리허구 솔부리 갔다가 내일 내려오너라. 산길두 알아야 하구...앞으

루 심부름하는 일이 생길 테니."

장쇠는 대답 대신 묘옥을 바라보았고, 묘옥이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들은 그날 밤 늦

게까지 묘옥이네 주막 뒷방에서 술을 마셨다. 간간히 묘옥이 드나들며 끊겼던 얘기를 계속

하는데, 황회가 보기에도 졸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서 함부로 대하지를 못하였다. 둘만이 앉

았을 때 달근이가 황회에게 얘기를 털어놓았다.

"내가 몇가지 계획을 해두었네. 첫째는 복만이란 놈을 없애버릴 일이야." "정원태가 가만

있지 않을걸. 정원태는 복만이를 신임하구 있거든." "그자가 무엇인가? 그자두 쳐죽여버리

지 뭐."

"아닐세. 정원태는 우리네 무리에게 모두 존경을 받는 인물이지. 또 그만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인심 잃구 두령짓은 못해먹네."

"그러면...정원태의 신임을 우리가 얻구 나서 복만이를 해치우지. 그리고 소굴을 화악산으

루 옮기는 게야. 솔부리서는 아무래두 애들 장난밖에 할 짓이 없거든. 그리구 셋째로는 송파

와 삼전나루의 주막 색주가들을 우리 손아귀에 넣어두는 일이지." "욕심이 너무 크네."

"젠장할 같은 값에 화적이라면 대적당이 되어야지, 저자 무뢰 잡배나 협잡꾼으로는 조상

뵈일 면목두 없지."

고달근이와 황회는 그날 밤 묘옥이네 집에서 장쇠를 데리고 천마산에 올랐다. 장쇠가 온

것과 묘옥이가 장물 거간을 맡게 된 사실을 복만이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하였으며,달근이와

황회는 수단 있는 졸개들을 제 편에 차차 끌어넣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해 여름이 다 지날

동안 솔부리에서는 별 변화가 없었고, 황회와 달근이는 좀도적질로 가끔 원근에 나갔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묘옥이네 술집은 점점 번성하여 색주가로 전신하게 되며 달근이의 도움이

많았던 것이다.

 

가을로 접어든 금강산은 풍악산이란 별칭대로 천산만봉이 단풍으로 온통 타는 듯하였고,

골짜기의 깊고 얕음과 봉우리의 높낮이와 하천의 넓고 좁음에 따라서 그 붉은 색깔의 차가

천차만별이었다. 검정에 가깝도록 짙은 색으로부터 놀빛처럼 새빨갛게 타오르다가 엷어져서

노랑빛이 되는 나뭇잎의 변화는 마치, 천상 선녀가 섬세하게 수놓은 옷자락을 펼쳐놓은 것

같았다. 물빛마저 산 그림자에 물들어 속끝까지 젖어든 단풍의 빛이 일그러졌다가 펴졋다가

하면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길고 짧은 폭포에서 일어나는 물안개가 골짜기의 여기저기 뽀얗

게 드리워졌다.

길산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끝에 앉아서 이러한 산수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

었다. 장안사에서 사십 리, 유점사에서 이십 리, 북록으로 들어간 만폭동 골짜기의 아득한

절벽가에 겨우 주추랍시고 닦아 세운 운부암에는 이제 추색이 완연하였다. 아침마다 좁은

마당에 서리가 엷게 깔렸고, 흩날려 떨어진 낙엽이 발밑에 밟혀 부서지는 것이었다.

몇 달 동안이나 길산이 혼자 지내다 보니 스스로도 사람 같지 않아 이제는 제 몸짓마저

구르는 잎새나 이끼 낀 돌이나 산짐승처럼 무심하여진 듯하였다. 처음에 얼마 동안은 나뭇

짐을 지며 어이 무거워라든가, 배고프네 밥이나 지을까, 또는 혼자 방안에 앉았다가 먼산에

서 포효하는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놈 참 울음 한번 장하고나, 하는 등으로 제 자신

과 얘기를 지껄여보고는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짓마저도 어느결엔가 잊어버려 모든 것에

무심하여졌다.

그는 뒷봉 밭에 내려가 조밭을 매거나 마를 캐어다 쟁이면서 하루해를 보내곤 하였다.

끔은 덫에 걸린 작은 짐승들로 고기 맛을 볼 때도 있었건만, 어쩐지 송구하여 암자 아래로

내려가 귀틀집에서 모닥풀을 피우곤 하였다. 그는 거의 반년 가깝도록 운부를 대하지 못하

였고, 봄에 여기 왔을 때 한 보름 남짓 뵈었을 뿐이었다. 운부대사는 언제 온다 간단 말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길산이 운부에게서 배운 바란 아무것도 없었다. 운부대사는

길산이에게 말도 몇마디 해준 적이 없었고, 처음 며칠은 줄곧 법당에서 참선하다가 뒷봉 너

머 밭에 나가 농사일을 며칠 하고는 어느날 밤에 없어져버린 것이었다. 길산은 자기가 제자

로 받아들여졌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운부대사가 돌아오면 높은 공부를 배우리라 벼르면

서 무작정 기다릴 뿐이었다.

 

길산이 단발령을 넘어 장안사에 이르러 일여를 찾으니, 그는 풍열스님의 서찰을 읽고 나

서 곧 배례하며 운부암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대사께서는 산사의 주지들을 싫어하시고, 그들 또한 당신을 기승이라 하여 질시하니 전

혀 내왕이 없으시고, 소승 같은 젊은 승려는 몇몇이 가끔 암자를 찾아가 뵙지만, 거동이 과

연 구름 같으신 분이라 종종 헛걸음을 치는 적이 많습니다." 만폭동 어귀에서 길산은 운부

암을 찾느라고 반나절을 꼬박 허비하고 겨우 절벽 가녘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앉은 퇴락한 암

자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길산은 오르는 길을 찾지 못하여 막바로 보이는 절벽에 겁도없

이 대들었던 것이다.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돌부리에 매달리며 주르르 미끄러졌다가 간신히

올라 드디어 암자의 앞마당 쪽으로 기어오르니 팔꿈치는 모두 벗겨져 피투성이가 되었고

얼굴도 나무에 긁혀서 상처가 가득하였다. 숨을 헐떡이며 절의 꼬락서니를 보자니, 진흙에

이겨 바른 구들돌로 지붕을 이었고, 기둥은 껍질이 그대로 붙은 통나무요, 흙벽이 군데군데

떨어져서 다람쥐새끼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마치 거북의 등껍질 같은 지붕의 구들돌 기

와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고총과도 같았다. 암자는 댕그라니 법당 한 칸뿐인데 불상

도 없었고 향로도 없는 토방이었다. 그 토방 한가운데에 지붕 꼴처럼 여러 가지 베조각으

로 누덕누덕 기운 걸승 차림의 노인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 흰머리는 뒤러 치렁치렁 늘어졌

, 흰수염이 가슴께에 가지런하였다. 언뜻 보아서는 그가 중인지 속인인지 별 구별이 가

지 않았다. 다만 가사 장삼 모양을 한 누더기가 승복 비슷하여 중일 듯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눈을 번 듯 뜨고 있건마는 앉아 있는 태가 바위처럼 굳건하고 엄중하여 감히 말을

건넬 기분이 들질 않았다. 길산은 그가 참선에 잠긴 것이라 믿고서 토방 아래 맨땅에 털썩

주저앉아 그가 물어오기까지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 식경이나 쭈그리고 기다려보

아도 말을 붙여오지 않았다. 길산은 번 듯 뜨고 있는 중의 시선을 따라서 그곳에 무엇이 있

는가를 바라다보았으나 절벽 앞으로 드높게 펼쳐진 만폭동 위의 빈 하늘만이 닿을 뿐이었

.

"스님...스님!"

길산이 참지 못하고 불러보았으나 중의 그 바위 같은 앉음새는 고쳐지지를 않았다. 차츰

배가 고파지고 갑갑증이 났던 길산은 암자의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부엌이나 곡간은 물론

화덕조차 보이질 않았다.

"젠장 뭘 먹구 살길래 곡기의 흔적이 없나."

길산은 다시 법당으로 돌아가 안쪽을 기웃해보니 토방 구석에 바랑이 던져져 있는데 나무

탁발이 두 개 놓여 있건만 오래 쓰지 않았음인지 윤기가 없고 먼지만 수북하였다. 하는 수

없이 길산은 뒤편 길을 찾아보았는데, 암자 뒤의 보다 높은 바위 절벽을 간신히 돌아 나가

는 조도가 내다보였다. 어찌되었든 먹을 것을 찾아야겠으므로 조도를 따라서 봉우리를 돌아

나가니 움푹 꺼진 너른 분지가 나타났다. 그곳은 참으로 으슥하고 은밀한 곳이어서 아래편

에서는 다만 사방 주위로 삐죽삐죽한 연봉만이 보일 뿐이었고, 마치 그릇의 안쪽처럼 둥글

고 편편하였다. 그 넓이는 가히 한 부락을 이룰 만큼 아늑한 초원지대였다. 거기서 길산은

제법 널찍하게 일구어진 밭고랑들을 발견하였고 나지막한 귀틀집 한 채도 보았다. 화전갈이

인지 불탄 자취가 군데군데 검게 나타나 있었고 밭에서는 뭔가 푸릇푸릇 자라나고 있었다.

"화전꾼인가. 어디 찾아가서 뭣 좀 얻어먹을 게 없나 물어봐야겠다."하고서 길산은 초원으

로 내려갔다. 밭은 사방으로 네모반듯하게 가꾸어졌는데 호미의 자국이 생생하였으며, 골마

다 거름도 충실하게 뿌려져 있었다. 길산은 귀틀집으로 가까이 갔으나 인적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통나무의 문을 여니 안은 컴컴한데 맨땅바닥이요, 오래된 건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

. 그러나 벽에는 버섯말림도 걸려 있었고 곡식 자루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자루를 열어보니 기장과 좁쌀이 그득하였고, 그외에도 잣과 밤이며 도토리 또한 독에 가

득 차 있었다. 아마도 지난해 가을에 갈무리한 모양이었다. 우선 시장할 대로 시장하였으므

로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밥을 지어 먹을 궁리를 하였는데 오지 그릇과 돌솥이 뒹굴어 있었

. 길산이는 마당에 나와 퍼질러앉아서 밥을 지어 오지 그릇에 우선 한사발 떠놓고서 맛난

저녁밥을 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집이로군!"

그렇게 오래 지체하였건만 화전민인 듯한 귀틀집의 주인은 종내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산이 다시 운부암으로 돌아가보니 대사는 아직도 그 모양으로 움직이지도 않고서 어둠속에

앉아 있었다. 길산이 지어온 밥그릇을 토방 귀퉁이로 내밀면서, "스님 공양 드십시오."

라고 불러 보았건만 역시 대답이 없었다. 혹시 연로하여 앉으신 채 열반하신 게 아닌가 살

펴보았으나 아랫배께가 아주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으니 숨은 쉬는 모양이었다. 길산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법당 아래 자기도 꿇어앉아서 스승이 말을 붙이기를 기다려보았으나 아주

캄캄하여 먼 산사에서 쇠북소리가 들리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길산은 온몸이 근질거리

고 답답한데다 수마가 씌워서 눈꺼풀이 떨어져 들러붙고 도저히 견딜 재간이 없더니, 그대

로 모로 넘어져서는 드높이 코를 골면서 잠들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일을 겪기를 사흘이나

계속한 뒤에 길산이 잠을 깨어 일어나보니 그날은 곤했던지 벌써 해가 높직하게 떴는데 마

루 위에는 말뚝처럼 박혀 있던 대사가 보이질 않았다.

"어이쿠...이 어른이 날 떼칠려구 몸을 피하셨고나." 길산은 허둥지둥 일어나 운부암의 둘

레를 휘둘러보기도 하고 뒷길로 해서 골짜기를 내려가 만폭동 어귀까지 달음질쳐보기도 하

였으나 운부대사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길산은 울화가 치밀기도 하였고 또한 낙심이 되어

, 제미랄 것, 이놈의 땡초를 붙잡기만 하면 아예 허리뼈를 분질러주리, 수없이 중얼거리

면서 암자로 되돌아왔다. 점심때가 가까웠는데 아직 식전이었으므로 문득 귀틀집 생각이

나서 그날도 다른 때처럼 밥을 해 먹으러 뒷봉을 넘어서 분지로 내려갔다.

귀틀집에 이르러 역시 좁쌀을 푸짐하게 내어 밥을 지으려고 불을 지피는데 문득 뒷전에서

불이 번쩍하는 것 같더니 정신이 아득하여졌다. 몽둥이로 사정없이 얻어맞았던 것이다. 길산

의 성질로는 당장에 한주먹으로 때려누일 것이로되 돌아보니 누더기의 대사가 눈을 부릅뜨

고 서 있었다.

"네 이 버러지보다두 못한 놈! 어찌 곡식을 축내려느냐?" 대사의 첫 번째 말이 바로 그

러한 일갈이었다. 길산은 하도 어이가 없어져서 입을 딱 벌리고 그 초라한 노인의 완고한

표정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일두 하지 않는 놈이 쳐먹으면 그 곡식은 누가 길러내겠느냐. 이놈...썩 없어져라." 길산

은 다시 호미 자루를 쳐드는 운부대사의 손짓을 피하여 냉큼 달아나면서 대답하였다.

"소인은 주인의 응낙을 받고자 하였습니다만, 주인이 돌아오질 않아서요." 대사는 흙이

묻은 제 옷을 털면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이 밭의 임자는 운부이니라."

"어이구 대사님, 그렇다면 진작에 제가 밭을 매어드렸을 겝니다." 운부는 다시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호미를 들고 밭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길산이도 함께 김을 매려고 뒤

를 쫓으니, 운부는 다시 호통을 쳤다.

"이건 내가 일군 밭이니라. 네놈은 네 밭을 일구어라." "?"

"저어쪽 풀밭을 들어내고 흙을 일구어서 네가 먹을 곡식을 가꾸어라." 길산은 멍청해 있

다가 그제서야 운부대사가 하는 말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귀틀집으로 돌아가 농기구들을

꺼냈다. 오랜만에 허리를 구부리고 땅을 파헤치며 농사일을 하자니, 원래가 훨훨 싸돌아다니

며 재간이나 팔던 광대 성질에 참으로 배겨나기가 힘들었다. 정오가 되니 배는 고프고 허

리가 짓눌린 듯하였고, 땡볕에 땀이 비 오듯 하였는데, 건너편의 운부대사를 돌아보니 이제

는 재와 거름을 지고 밭고랑 사이를 내왕하고 있었다. 길산이 당장에 호미를 내던지고 욕설

이나 퍼붓고 돌아서고 싶었으나, 아무리 야속하다 하여도 만폭동 운부암을 찾았을 때는 단

단히 결심했던 바가 있는지라 감히 운부에게 밉보일 짓은 할 수 없었다.

"대사님, 소인은 아직 식전인데 밥이라두 지어 먹구 일을 하지요." 운부가 밭에다 거름을

뿌리면서 중얼거렸다.

"한 끼니 먹기두 어려운 세상인데 꼬박 세 때를 찾아 먹으려느냐. 하루에 두 번 먹어두

사느니라. 두어 사래 더 갈구 나서 밥을 짓도록 하여라." 길산은 별수없이 일을 계속하였

, 밥을 짓기 시작했을 때에는 거의 배고픔을 잊을 정도로 허기가 졌었다. 밥을 지어 운부

대사와 마주 앉아 먹는데, 운부는 아까보다는 훨씬 고집이 풀린 듯한 표정이었다.

"어때...일을 하구 밥을 먹을 먹으니 좀 맛이 있느냐?" 길산은 워낙에 양이 큰데다 허기

가 졌으므로 조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하고는 다시 솥바닥에 남은 누룽지까지 긁었다.

운부는 바윗돌에 앉아서 길산의 그런 양을 웃음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쪽에는 차를 심어야겠구나. 아직도 이 묵정밭을 옥토로 만들려면 품이 많이 들어야겠

."

길산과 운부대사는 서로 어디서 온 누구임을 밝히지도 못한 채 자연스레 한식구가 되었으

, 길산이 운부대사에게 그런 말조차 꺼낼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길산이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입을 열었다.

"대사님, 큰 절루 내려가셔서 젊은 것들의 공양이나 받으시든지, 아니면 행자 두엇 데려다

가 인가에 내려가 시주를 거둬오게 하시지요."

운부는아까처럼 노염을 보이지는 않고, 고개만 흔들었다.

"일을 하지 않는 자는 먹어선 안된다. 승려가 참선을 하더라도 일을 하지 않고 한다면,

것은 참선이 아니라 도적질이니라. 송홧가루 한줌이라도 거저 먹어선 안된다. 모두 하늘이

낸 것이니 수고 없이 어찌 공으로 먹을 것이냐. 너는 무엇으로 생업을 삼았는고?" "...

재간을 팔았습니다."

", 창우였더냐?"

", 문화 고을서 살다가 구월산에 있습니다. 풍열선사께서 대사님을 찾아가 공부하라 하

셨습니다."

"풍열은 아직 월정사에 있는가?"

"저희들을 늘 염려해주시지요."

운부는 별로 유념하지도 않는 듯이 보였다. 운부대사는 자기가 먹은 식기를 들고 도랑물

로 내려가 씻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불쑥 말하였다.

"내게 배울 것이 뭐 있겠느냐. 예서 배곯지 말구 내려가 농사나 짓거라." 그러잖아도 허

송을 하는 듯하여 답답하던 길산은 무슨 검술이라든가 기운 쓰는 비결이라도 얻어들을까

하였더니 점점 맹랭한 말이 나오는 지라 역증이 발칵 치솟았다.

"농사요? 아니 농투성이가 되러 금강산 만폭동 골짜기루 찾아오겠습니까?"하니 운부는 대

답이 없었다. 니미랄 것. 농사를 배우려면 어루리벌을 찾아가 머슴을 살 일이지, 얼턱이 빠

졌다고 금강산을 찾아왔겠나 싶었다. 제 따위 쇠어빠진 늙은이가 무엇을 가르쳐줄까 의심

스럽더니, 불목하니로 부려먹으려는 수작이 분명하다고 길산은 생각하였다.

"일손이 늘었으니 아주 잘되었다. 이 뒷봉 풀밭을 올해에는 모두 개간해놓을 참이다. 내년

부터는 사람이 많아질지두 모를 테니..."

운부는 다시 거름 바가지를 들면서 일어섰다.

"자아, 그만 쉬었으면 일을 시작해라. 네 밭을 일굴 때까지는 내게 얻어먹는 격이니까."

길산은 혼자서 한숨을 푹 내쉬고는 호미를 들다가 참지 못하고 말을 뱉었다.

"대사님...저는...높은 공부를 배우고자 여기에 찾아온 거올시다. 저두 맨손으루 댓 놈은 상

대할 재간두 있습니다."

운부는 못 들은 체 밭고랑 사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길산은 밭 가녘에 서서 계속 이야기

하였다.

"실은 제 동무들은 모두 구월산 화적당이우. 소인은 그냥 도적놈이 되기보담은 대적이 되

어 큰 일을 해보겠다구 여길 왔는데, 묵정밭이나 개간하며 허송세월을 하란 말이우?" 운부

는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어리석은 놈...예서 썩 내려가거라."

운부는 밭고랑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또 일군이 온 줄 알았더니 아주 못된 도적놈이 왔구나." 길산이 비록 성품은 좋은

바탕을 갖고 있었으나, 운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니 그저 의심스럽기만 하였다. 마음은 성

급하였고 무엇인가 자기를 이루려는 욕심만 급급하였던 것이다.

운부대사의 단호한 말에 길산은 예도 올리지 않고서 돌아섰다. 그는 투덜대면서 법당으로

돌아가 봇짐을 찾아 들고 운부암을 내려왔다. 운부암을 내려와 만폭동의 귀를 가득 채우는

물소리 가운데 잠깐 앉았으니 심경이 착잡하였다. 어디로든 찾아갈 데가 없었고, 구월산에

이 꼴로 되돌아가 동무들을 대하기도 쑥스러운 노릇이었다.

"정학이나 찾아가서 이 울적한 심사를 풀고, 북관으루 올라가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단발령을 넘을 떄 만났던 고성 사는 정학이 제 동네 자랑을 하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

. 서로 힘자랑 내기로 맞붙었다가 사귀게 되었던 터였다. 그는 만폭동 계곡을 내려와 유

점사 쪽으로 트인 길로 걸었다. 고성 수자리골의 정학을 찾아가 보려는 것이었다. 산길 팔십

리를 걷기에는 해가 짧았으나 길산은 유람이나 ㄴ온 기분으로 느릿느릿 걸었다. 금성산 아

랬녘을 지나노라니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숲 가운데는 벌써 어둠이 가득 차기 시작하였

. 그러나 혼자서 걸어오는 동안에 길산의 마음속에는 차차 운부대사의 백발이 또렷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땡초 같으니라구...가르칠 게 없으니까 농사나 지으라구?" 투덜거리는 길산이었으나,

편으로는 월정사 풍열선사의 일러준 말이 떠올라 운부의 괴이한 언행을 웃어 넘길 수가 없

었다. 어딘가 알수는 없지만,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고성포로 흘러가는 남강이 지는 해에 곱게 물들었는데 벌판에는 인적이 없고 해송들이 구불

구불한 자태로 드문드문 서 있었고 단정학이 흰 나래를 펴고 내려앉곤 하였다. 멀리 고성

외곽의 작은 마을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우선 한동안 민가를 보지 못하였던 길산은 반가

워하였다.

"에라! 오랜만에 술이나 실컷 퍼마셔야겠다."

길산이 비록 옥에 갇혔을 때에 천한 백성들의 고난을 보고 깨달은 바도 많았으며 그런 이

유로써 입산하였던 것이었으나, 어찌 갑작스런 깨달음이 일관될 수가 있으랴. 생각은 앞서

있고 몸은 따르지 못하니, 대개 제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것은 뜻에 합당하게 사는 일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용기가 있으나 너그러움이 없고, 어질지만 지혜가 없으며, 절개가 있으나

남을 포용 못하고, 신의가 있으나 여럿을 다스리지 못하고, 충절은 있으되 경륜은 없는,

러한 넘치고 처지는 사람의 일들은 모두가 제 뜻과 사는 일이 한결같지 않음에 연유하는 것

이다. 마치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은 낭이란 이리와, 그와는 정반대인 패라는 이리가 서

로 부축하고 걷다가 사이가 떨어지게 되면 서지 못하는 관계와도 같다.

길산이 수자리말을 찾아가려고 길 물을 사람을 찾노라 두리번거리는데 마을 어귀에서 울

고 섯는 아이를 만났다. 큰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은 아니지만 길가에 주저앉아 연신 소매로

얼굴을 닦아내며 어깨를 떠는 것이었다.

"총각 말 좀 물어보세."

했으나 아이는 고개를 파묻고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길산이 더 묻기도 민망하여 잠시

서 있는데 아이는 한참 뒤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왜 그러우?"

"수자리말이 어느 쪽인가?"

"저쪽 삼일포 쪽으로 나가요."

하고는 다시 고개를 떨구는데, 길산은 그냥 돌아서서 가지도 못하고, "무슨 일로 그리 울고

있나?"

묻고 말았다. 아이는 대답 대신 빈 자루를 쳐들어 보이면서 푸념을 터뜨렸다.

"아이구, 이젠 우리 식구 어찌 살거나, 꼼짝없이 죽게 되었네." "총각 무슨 일인가, 혹시

내가 도움이 될지 아나?"

", 우리 아버지는 지난해에 고기잡이를 나가셨다가 폭풍을 만나 돌아가시고 모친과 어

린 동생과 제가 밭 몇뙈기와 고공살이로 연명하여왔는데, 지금 보리가 여물기도 전에 양식

이 간데없수. 종자까지 죽 끓여 먹고 나서 굶은 지가 이미 사흘째인데, 구휼미라두 얻어볼까

하여 관가에 갔더니 호적에 들어 있지 않다고 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호적이 있는 강릉까

지 가려면 도중에 모두 굶어죽게 되었고 또한 곡식을 조금 타낸다 한들 여기 있는 밭농사는

누가 짓습니까?"

때는 바야흐로 진달래 먹고 목이 멜 보릿고개였던 것이다. 길산은 왠지 모르게 가슴 언저

리께가 싸늘해지는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굶주림의 고통을 잘 아는 길산이었다. 굶은 배를

간장을 탄 냉수로 채우고서 탈박 속에서 울음이 나오는 채로 온 기력을 다하여 춤울 추던

저자바닥이 한꺼번에 지나쳐가는 듯하였다. 길산은 두말 않고 보퉁이에서 엽전꿰미를 꺼내

어 총각의 발 아래 던져주었다. 그리곤 휘적휘적 걸어가는데, 아이가 꿰미를 주워 들고 그의

뒤를 쫓아왔다.

"이렇게 많은 돈을 그저 받을 수 있습니까. 은인의 함자라두 알아얍죠." "나는 그저 놀러

다니는 놈이니 자네가 알 거 없네. 쌀이 되나 반찬이 되나 그걸루 가족 부양하구 연명하

."

자꾸 붙드는 총각을 뿌리치고 걷는 길산은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귀밑이 뜨듯하였다. 급한

마음으로 운부가 글이나 무술이나를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성을 냈던 자기가 참으루 운부의

말대로 버러지보다도 못한 놈인 듯이 여겨졌다. 길산은 굶주림을 알지언정 곡식을 얻기 위

하여 땀을 흘리는 일의 고된 것은 채 느끼지 못하였고, 수업에는 몸 공부와 마음 공부가 있

음을 알지 못하였고, 따라서 운부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광대란 흘러 다니는

자이니 몸도 마음에도 뿌리가 없으며, 살기 괴로우면 훌쩍 떠날 따름이었고, 따라서 울음보

다는 냉소가 어울리는 셈이었다. 광대란 유동하는 자이니 굳건한 땅과 이웃이 있는 마을을

알 리가 없었다. 그가 밥 먹고 잠자는 방안 또한 저자바닥과 무엇이 다르랴. 우선 농군이 되

는 수업을 하여야만 마을의 사정을 알고, 마을의 사정을 알아야만 백성의 참사정을 겪어서

아는 것이 아닌가. 광대에게도 고통은 있으되 자기를 파는 자로서의 씁쓸한 자조가 있을 뿐

이다.

"운부대사는 내 궁둥이를 꾹 눌러두려는 모양이여..." 길산은 수자리골에 이르러 정학의

집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벌써 저녁때가 지난 즈음이라 관솔불이 기둥에서 까물대며 타

고 있었고 웬 건장한 사내가 외양간 앞에서 쇠죽을 쑤고 있었다.

"여기가 정학이란 사람의 집이우?"

길산이 묻자, 그는 여전히 쇠죽을 저으면서 대꾸했다.

"우리 가형이신데, 왜 찾수?"

"동무 되는 사람이유."

"읍내 나가셨는데...뉘십니까?"

"길산이라구 허우. 금강산에서 왔다면 알 게요."

떠꺼머리는 벌떡 일어서더니 주춤거리며 되물었다.

"운부암 기신다는 길산이 성님이슈?"

하고 나서 떠꺼머리는 마당에 넙죽 엎드렸다.

"우리 언니가 성님 말씀을 여러번 하셨습니다. 저는 신이라구 하우." 길산이 당황하여 함

께 엎드리려다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일으켰다.

"언니께 성님뻘 되시니 제게는 큰성님 되지요. 제가 얼른 읍내 나가서 모셔오겠수." "

닐세...그럴 건 없구 함께 가보지."

"그게 더 좋겠군요. 학이 성님은 포구에 계실 거유." 길산이 정학의 아우 정신의 모습을

보니, 학이처럼 기골이 장대한데 그의 형보다는 훨씬 쾌활해 보이며 아우답게 가벼운 데가

있는 듯하였다. 두 사람이 포구로 나가자니 어촌이 나오는데 어딘가 주막이 있는지 왁자지

껄 사내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주막이 있는가?"

길산이 물으니 정신은 바닷가에 되따로 떨어진 기다란 초가집을 손가락질해주었다.

"저어기 어계방이 있수. 뭐 주막이나 매한가지유."

그들은 고성포의 어계방으로 들어갔고, 안에는 칠팔 인의 사내들이 떠들썩해서 탁주를 돌

려 마시고 있었다. 갑오잡기를 했던지 지패가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고, 그 가운데서 정학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경이 성님, 그 구수한 얘기나 소리 한가락 해보우." "압다, 투전판에서 무슨 옛말이

?"

"최서방이 안 왔다면 모를까, 기왕에 어려운 걸음 했는데 그냥 보내?" "허긴 그렇군.

주에서두 이름난 전기수를 공으루 보낼수야 있는가." 이런 말들이 시끄럽게 오가는데 신이

가 나서면서 말하였다.

"언니...길산이 성님이 왔수."

정학은 술잔을 쳐들다 말고서 아우의 등 너머로 고개를 기웃해보더니, "아이구 이게 누

구요. 아니 성님이 산에서 공부는 않구 어찌 이런 속세엘 다 내려오셨수?"

법석대면서 일어나 길산의 손목을 덥석 잡아서는 좌중의 가운데로 질질 끌어가는 것이었다.

"농번기에 팔자들 늘어졌네."

"어촌에서야 농사철 따루 있습니까. 고기데 몰려올 때가 제철입지요. 인석들아 인사들 올

려라. 내가 늘 얘기하던 천하장사 길산이 성님이여."

"장사는 무슨...내 기운이야 아우님보다 훨씬 못 쓰지."하며 대강들 인사치레를 차리고 나

니 길산이보다 방금 앞서 들어왔던 갓 쓴 자는 덤덤히 말이 없다.

", 두 분 인사허슈."

정학이 나서서 소개를 시키는데, 길산은 그자의 머리에 쓴 갓이 고까워서 선선히 인사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그러한 눈치를 채고서 학이는 웃으면서, "하하, 이제 보니 갓 쓴 양반

인 줄 알구 그러시우. 고작해야 [소학]권이나 뗀 불상놈이우.

소싯적에 양주목에서 통인 노릇을 한 적이 있어서 관가 냄새가 조금 배었지."사정 두지 않

고 지껄여대니 갓 쓴 사내는 열쩍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과연 정서방 말이 맞소. 나는 작년에 삼일포에 이사온 최헌경이란 사람이우." "장길산이

."

최헌경과 길산이 인사를 하고 나니, 곧 다른 사람들이 떠들썩하며 최헌경에게 얘기를 하

라고 성화였다.

"세상에 공것이 어딨나?"

"제길..., 얘기를 팔면 우리가 산다는데 그러슈."

최헌경은 살집이 좋고, 코는 감자처럼 둥글고 투박해 보이는데 작은 눈이 영리하게 반짝

이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댓쯤 되었을까?"

"내가 다른 일루 여길 찾아오긴 했지만, 그러면 딱 한 자리만 하구말 테요." "에이 기왕

에 보따리를 풀려면 세 자리는 하셔야지." 잠깐 좌중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최헌경은 몇

년 동안 전기수의 노릇을 해본 입담으로 얘기를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객주라면 저어기 송파 거여 객주가 제일이지. 추석 대목이 코앞에 있는지라 손님들이 갯

것전에 쉬파리 끓듯 하였지. 그래놓으니 나중에는 청마루에까지 손님을 받았는데, 늦게서야

신혼으로 보이는 남녀가 또 객주를 찾아왔거든. 방 있습니까, 하룻밤 묵어 갑시다 하니까...

아이구 방이 다 찼소이다. 요즘 추석 대목장이라 그렇지요. 내외분이시니 청에서는 주무시지

못할 테고, 하면서도 손님을 놓치기는 싫었단 말이여. 아니나다를까, 거여거리의 객점이 모

두 그러하니 신랑 되는 자가... 청에서라두 자구 가겠소, 병풍이 있거든 하나 가려주시우.

부자리하구요."

하고 나서 최헌경은 탁주를 부어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의 뜸을 들이는 것이었다. 사내들을

킬킬 웃기 시작하였다.

"객점 주인은 손님이 그렇게 청하는 바에야 마다할 수가 있나. 그래서 병풍을 마루 구석

에 둘러쳐주니까, 젊은 내외는 그 병풍 뒤에 이부자리를 깔고 들어간단 말이렷다." "거 요

정낼 판이로군."

"허허, 병풍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것들이 옷을 척척 벗어서 병풍 밖으로 걸어놓는데, 아낙

네의 속치마까지 걸리는 게 아닌가. 이러니 집 떠나 고적하기가 이를 데 없던 봇짐장수 생

홀아비들이 참을 도리가 있어야지. 그중 숫기 좋고 장난 좋아하는 보상 두엇이 서로 눈을

끔쩍이더니 모기작모기작 병풍 곁으루 기어갔거든."

최헌경은 얘기를 끊고 담배 한 죽을 담는데, 듣는 사람들은 재촉도 못하고 침만 꼴깍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온 마루에 있던 사내들이 한놈 두놈씩 기어가서 병풍 밑틈으로 들여다보질 않

겠나. 그뿐야, 무슨 구경거리가 있는가 싶어서 이방 저방 누웠던 젊은 사내들이 이놈 저놈

또 기어와서 병풍 아래를 들여다보려고 서로 머리를 들이미니, 어깨가 부벼지고 다리가 뒤

엉켜 병풍 밑은 틈도 없는 대만원이 되었거든. 그때 제일 늦게야 알고선 한놈이 저두 좀 구

경해볼까 하여 기어왔는데, 이놈이 아무래도 주변머리가 없었지. 병풍 밑에는 아무리 끼일려

두 비좁아서 못 끼겠으니, 에라 모르겠다. 체면 불고하고 벌떡 일어서서 병풍 너머로 넘어다

봤다네그려. 그러니 아래서 대가리 싸움하던 놈들은 참지 못해 킥킥거리고, 서로 더 많이 보

려고 어깨를 부벼대니 그만 병풍을 밀어서 사정없이 자빠져버렸단 말이지. 젊은 내외가 한

창 재미를 보려다가 병풍이 내려덮쳐 파흥이 되니 자네들이라면 성이 안 날 텐가? 사내가

벌떡 일어났지. 제 서슬에 놀란다고, 병풍 밑에서 들여다보던 놈들이 모두 그 자리에 발딱

뒤집혀서 자는 척하노라고 코를 더럭더럭 골았거든. 코고는 놈들을 바라보고 사내가 더욱

성이났지. 이놈들아 병풍 쓰러뜨리고 무안해서 자는 척하려고 생코를 고는구나, 하는 중인데

아까부터 서서 병풍 너머로 들여다보던 놈은 하두 갑작스런 일이라, 넘어질 사이가 없어가

지고 그만 그 자리에 선 채로 눈을 감고 코를 골거든." 어계방에 모였던 자들은 모두들 배

를 잡았고, 길산이도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최헌경 본인은 멀뚱하니 과연 전기

수의 능청은 대단하였다.

"그래 사내가 서서 코고는 놈에게, 너는 왜 서서 코를 고는가 물었더니 서 있던 놈이 입

맛을 다시면서, 나는 내일 아침에 갈 길이 바빠 일찍 떠나려구 서서 잔다. 왜 잘못되었냐?

하더라네."

어계방의 분위기는 점차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거 이야기 한자리 더하세."

"투전돈 걷어드리께."

하며 제각기 떠드는데, 최헌경은 담배만 뻐끔대며 태우더니 놋재떨이에 탕탕 떨고는 앉음새

를 고친다.

"실은 내가 여러분 손을 좀 빌릴려고 찾아온 겔세. 꽃재에서 괴질이 발생하였다네. 우리

마을에두 한 집에 환자가 생겼는데, 우선 꽃재마을에 불을 지르고 성한 사람은 이주를 시켜

야겠는데, 모두 한식구들이니 쉬쉬 하구 있단 말여."

"소문 비슷이 듣긴 하였으나, 꽃재에는 경친 놈들이 내쳐서 저희끼리 살아가는 부곡이나

진배없는데, 누가 갈려구 하겠나."

"관가에는 알렸수?"

"며칠 전에 아전 몇이 들러보구 갔다지만 별 대책은 없구, 동구 밖에 번을 드는 나졸 두

엇이 통행을 막는다네."

정학이 최헌경에게 말하였다.

"그럼 성님은 뭘 바라는 게요. 우리가 도와드릴 일이라두 있겠수?" ", 우선 환자네 가

족을을 산으루 내몰구 마을에 불을 지르기 전에 환자들만 추려서 움에다 몰아넣고, 시체는

집과 함께 태워버리잔 말일세. 그냥 두었다가는 고성 일대는 아주 쑥밭이 될 테니까."

"관에서 못한 일을 우리라구 해서 뭣하게?"

"그래야 고장을 지키지. 한 사날 앓다가는 열이 가라앉으면서 피를 토하구 죽는데 한번

걸렸다 하면 가망이 없는 모양이여."

"우리까지 옮으면 어쩌게..."

"그야, 다 예방이 있으니 내 말만 듣소."

최헌경이 끝내 꽃재말을 쓸어버려야 고성은 안전하다고 우겨대었다.

"가십시다. 까짓 것, 인명은 재천이라는데 설마 뒈어질까." 정학이 선선히 말하였고, 몇사

람도 쾌히 응낙을 하였다. 달리 더 사람들을 모아보기로 하고서 두엇은 포구마을로 풀려나

갔다. 정학이 길산이에게, "성님은 우리게 사람이 아니니 어서 우리 집에 가셔서 신이 하구

놀다 올라가슈. 내 변변히 대접두 못해서 죄송허우. 만폭동으로 놀러 갈 테니." 길산은 차

마 운부대사께 꾸중을 듣고 하산하였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나두 가보겠네.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야지." 길산이 말하니, 최헌경이는 감자코를

만지작거리며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럼, 하나라두 더 손이 필요한 판인데, 모두들 관솔 횃불을 준비들 하게. 그리구 무명

수건으루 입들을 막고, 시체는 절대루 다쳐선 안되어. 환자들도 손대면 안되네." 마당에 어

계 사람들과 농부들이 모이니 여남은 명은 족히 넘을 듯하였다. 제마다 무명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손에 손에 싸리나 관솔의 횃불을 들었다. 그리고는 작대기며 낫이며를 들었으니,

가 보기에도 그 서슬이 무서운 화적떼들 같앗다. 그들은 최헌경이를 앞세우고 괴질이 발

생한 꽃재말로 몰려들 갔다. 꽃재말은 불빛 한점 없이 캄캄하였고, 번을 드는 군사들도 어디

로 꺼져버렸는지 동구 밖은 쥐죽은 듯하였다. 마치 도개비가 나올 듯싶은 마을에는 질병의

암울하고 음산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듯하였다. 최헌경이 말하였다.

"장로네 집으루들 가세."

그들은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의 골목길에 횃불빛이 휘황해지니 놀란 마을 사람들이 뛰쳐

나옴직도 하건만, 집집마다 불이 꺼진 채 적막하기만 하였다.

"누가 촌장의 집을 아나?"

"아무 집에나 들어가 끌어내어 인도하랍시다."

"넨장할 이렇게 괴괴할 수가 있나."

그들이 마을 복판에서 술렁대고 있는 참인데, 드디어 골목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 둘

씩 나타났다. 그들도 수군거리며 접근을 꺼려하였고 이쪽에서는 더욱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

하여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최헌경이 횃불을 들어 그들을 비춰보면서 몇

걸음 나아가 외쳤다.

"우리는 포구 어계 사람들인데, 이 마을 장로를 만나야겠소." 그들이 다시 수군대더니,

한 사람이 맥없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촌장께서는 어제 작고하셨소이다."

"그러면 아무나 마을을 대표할 사람과 의논을 좀 해야겠소." 다시 그들끼리 뭔가 수군대

는 것 같더니 질문에 응하였던 자가 물어왔다.

"어계 분들이 꽃재엔 무슨 일루 오셨소이까?"

최헌경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누누히 일러주었다.

"우리 고장에서 꽃재말이라면 수자리 따라왔다가 면천한 사람들이 모인 동네인데, 하여간

에 내왕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고성 땅의 같은 백성일세. 이제 듣자하니 이 동네서 괴질이

창궐한다는데 관가에서도 속수무책이요, 의원도 기피한단 말을 들었네. 고뿔이나 배탈도 아

니요 역병임이 적실한즉, 꽃재만의 화가 아니라 우리 고성의 화라 할 게여. 아무 방비두 없

이 있다가는 다른 마을로 번져갈 것인데 이 마을을 폐하려고 왔네. 의논이 정해져야 할 테

니 어서 마을 총대 될 사람과 만나게 해주소."

그들은 말없이 횃불 든 사람들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등뒤로 아낙네들의 그림자가 어른

거리고 있었다.

"의논을 않겠다면...우리 뜻대루 할 테여."

일행 중의 누군가가 거칠게 말하자, 마을 사람 하나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부러러 갔수."

이쪽은 일렁이는 불빛 아래 몽둥이며 농기구를 들었으니, 모양이 더욱 험상스럽지만 어둠

속에서 산 송장처럼 흐늘거리며 움직이는 듯한 꽃재말 사람들이 더욱 흉하게 느껴졌고 오히

려 건장한 사람들 쪽에서 두려워할 만하였다. 이제 꽃재말은 캄캄한 명부와도 같았던 것이

. 잠시 후에 노인 한 사람이 그들 속에서 걸어나왔다.

"의논할 말씀은 무엇인지요?"

"마을의 촌장 되시우?"

"나이로는 제가 기중 연장이오만..."

최헌경이는 횃불을 들어 그를 비춰보았다. 수족이 삭정이처럼 깡마른 노인이 잔약한 몰골

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병에 죽은 자가 몇이나 되오?"

노인은 잠시 뒷전에다 묻는 듯하더니, "오늘까지 스물둘이외다."

"시방 환자는 몇이오?"

"우리네가 서른두 가호인데 한 마흔 명은 되는갑소. 한 살마두 앓는 이가 없는 집두 있

."

"장사는 어찌 지냈소?"

"집집마다 다르긴 하오만 뒷산에다 버려두었지요. 바람맞이를 해줘야 된다기에...역병도 역

병이지만 이젠 꼼짝없이 굶어죽는 판이외다. 화전갈이두 못했거니와 관가의 구호도 없지요."

"어떻소? 우리가 십시일반으로 구호곡도 거둬 내고, 나중에 마을도 다시 세워줄 터이니

여길 떠나겠소?"

"여길 떠나서 어디루 간단 말입니까. 우리말이 한두 해에 생겨난 것두 아니우." "우리계

에서 모두 의논이 정해져서 이렇게 몰려온 게요. 이 마을은 이미 괴질의 병독이 속속들이

범하였으니, 태워버려야겠소. 그리구 환자들은 나올 때까지 식구들과 따로이 지내게 해야

됩니다. 마을 사람들게 이 뜻을 알리고 우리 의논에 따르시우. 만일 듣지 않으면 이 사람들

은 사정없이 불을 지를 테니깐."

최헌경이는 조금치의 틈도 보여주질 않고서 단호하게 말하는데, 곁에 섰던 포구의 장정들

이 제각기 으르딱딱하였다.

"다 죽게 되는 판인데 사정 볼 거 있나. 타 죽기 싫으면 몰려나올테지..." "말 안 들으면

아주 물고장을 내버릴 테여."

이렇게들 두런대니, 맨주먹으로 맞서지 못할 판에 굶주리고 병약한 사람들로서 뭐라고 대

구할 엄두가 나질 않는 모양이었다. 저희끼리 둘러서서 얘기하는데 따르자거니 못한다거니,

제법 격론이 오갔고, 아낙네들의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이쪽의 뒤편에

서 있던 길산이는 그 울음소리를 듣자 어쩐지 낯익은 기분이 들었고, 설움이 척추 끝까지

스며오는 듯하였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최헌경의 처사가 이치에 닿는 일이라, 역병을

막자는 뜻이고 보면 매정하달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꽃재말 사람들이 당한 환난이 지겹

도록 싫어지는 것이었다. 길산은 이 자리에 잘못 끼여들었다고 후회하였다.

"어서 결정을 하시우."

최헌경이 재촉하자, 아까 그 노인이 나서더니 말하였다.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환자들에게는 간호할 식구나 남도록 해주시오." "안되오. 성한 사

람들은 모두 마을을 나와서 꽃재 위에 모이고 환자들은 우리가 집 하나를 정하여 따로 모

아두겠소. 그리고 버린 시체는 당신네들 중에 몇이 나서서 화장하고, 집들은 그런 일이 모두

끝난 다음에 우리가 태워버릴 테요. 구호곡은 우리두 낼 터이오만, 관가에 진정하여 구휼토

록 하겠소."

하고 나서 최헌경이 정학 형제를 불러 마을의 성한 사람들을 모아 꽃재로 데려가도록 지시

하였다. 그들은 한밤중이 되서야 간단한 짐을 꾸려가지고 나왔는데, 반수 정도만이 마을의

공의의 겨우 따른 눈치였다. 그러니 나머지는 제 집에 눌러 있거나, 환자와 더불어 떠나지

않을 뜻을 고수하는 모양이었다. 따라 나선 사람들 중에도 아낙네들은 서로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들이 정학 형제와 몇사람을 따라서 꽃재로 오른 뒤에 어계 사람들은 집뒤짐

을 시작하였다. 두셋씩 짝이 되어 집을 뒤지는데 길산이도 최헌경과 더불어 한 집에 들어가

게 되었다. 입에는 수건을 두르고 횃불을 들고서 싸리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주인 되는 남자

가 마루에 큰대자로 넘어져 있었고, 계집아이 둘과 사내아이가 토방에 나란히 누웠는데,

낙네는 앓는 아이를 안고서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모두 끌어내세!"

최헌경이 말하였으나 그들은 서로 선뜻 나서지를 못하였다. 주인 사내는 목을 간신히 쳐

들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보 너무 그러지들 마우. 아무리 꽃재말이지만 같은 백성들 아니우." "병이 퍼지면 온

고성 마을이 결딴날 판인데 우리 원망 말게." 주인 사내는 일어나 앉아 울먹이면서 항의하

였다.

"당신들이 관원이요? 나졸이라두 이리 심하진 않을 게요." "관에서 방치하니 할 수 없이

우리가 나선 게야. 우리 어계가 고성에서는 유일하니 이건 향법이여!"

아이들이 말다툼 소리에 놀라 깨어서 울고 그 어미까지 통곡을 하였다.

"아이고오, 이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구 버리구 가란 말유. 난 내 집에서 병들어 죽을

테요. 내 집에서 내가 죽는단데 웬 참견들이어요."

최헌경과 다른 사람이 아이를 빼앗아 밀어놓고 아낙네를 끌어내는데 아이들이 울면서 기

어 붙으니 좀체로 손을 쓸 수가 없었고, 길산이는 비틀거리는 주인 사내의 허리를 깍지 껴

서 쳐들어 집 밖으로 몰아냈다.

"에잇 빨리 불을 붙여버리게."

최헌경이 아낙네를 끌어내며 소리치자 장정이 횃불을 초가에 당겨버렸다. 연기를 올리며

지붕은 타들어가기 시작하였고, 제 집이 타는 꼴을 본 주인이 쇠잔한 기력을 다하여 돌을

싸쥐고 덤벼드는 것을 길산은 하는 수 없이 한 주먹에 때려 뉘었다. 실신한 가장 옆에 모인

식구들이 악머구리 끓듯 울어대는 사이로 그들은 앓는 아이를 안고 빠져나갔다. 사방에서

화염이 오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격리되기를 원하였던 자들을 동원하여 환자들을

한 집에다 운반하여 모아두게 하고서는 그들은 계속하여 집뒤짐을 하고 불을 질러나갔다.

한두 집에서는 그래도 인정이 발동하였으나 서너 집을 거치게 되니 자연히 정이 마르게 되

, 우선 불을 질러놓고 가족들이 다급하여 뛰쳐나오게끔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병

자의 식구들과 충돌도 일게 되어 어계 사람 하나가 돌에 맞아 상하자, 상대를 몽둥이로 타

살하게 되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길산과 헌경이 어느 집엘 들어가니 다른 가족은 모두 피

하였건만, 노파가 죽은 노인의 시신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방금 숨을 거둔 모양이었다.

얼굴에 반점이 돋아나 있었고 열에 떴던 안색은 옹기처럼 탔는데 백태가 잔뜩 낀 입이 흉칙

하게 벌려져 있었다. 헌경이 노파를 떼어내려니 노파는 막무가내로 시신의 뻣뻣한 두 손을

잡고 놓지를 않았다.

"주인을 혼자 두고 나는 못 간다. 곁에서 같이 죽을 테야. 놓아라, 이놈들아." "살구 싶으

면 어서 나오시오."

길산이 보다 못하여 노파를 번쩍 들어 마당을 지나는데, 장정은 집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금방 대들보와 벽을 태우더니 시체가 있던 방안에 곧 불길이 가득 찼다. 길산이 한눈을 파

는 사이에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가 싶도록 재빠르게 노파는 곧장 집을 향하여 뛰더니 불

길 속에 몸을 던져버리고 만다. 길산은 불길 속으로 뛰어들 듯이 서두르는데 최헌경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만두오. 거기가 바루 극락이우."

길산은 험상궂은 시선으로 최헌경을 흘겨보다가 소매를 탁 뿌리쳤다.

"이거 놓아! 단매에 대갈통을 부숴버릴 테여."

현경이 소매를 놓으며 혀를 끌끌 차는 것이었다.

"이제 보니 마음보가 참새보다두 작구먼."

길산은 더 대꾸하기도 피로하여져서 터덜터덜 골목을 걸어나오는데, 길 양쪽에서 집들이

타느라고 열기가 후끈후끈하였다. 드디어 매운 연기로 눈을 뜰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그

는 발을 돌려 되돌아왔다. 사람의 나고 죽음이 어찌하여 이다지도 참혹한가. 굶주림은 고사

하고 또한 병고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혹독한 것일까?" "여보 장서방, 장서방, 나 좀 보우."

최헌경이 뒤따라오다가 멈춰 서서 길산을 부르고 있었다. 길산은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갔

.

"활인에는 인도두 있구, 권도두 있는 법이랍니다."

길산은 말없이 서 있었고, 이어서 최헌경이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하였다.

"남은 식구들이 몹시 험악해진 모양인데, 데리구 꽃재로 올라갈 테요? 우리는 뒷산에 버

려진 시체를 모아 화장하고 그리구 가겠소."

길산은 역시 최헌경에게 아무 대답 없이 동구 밖으로 나갔다. 먼저 와 있던 장정들이 마

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군중 가운데서는 나직한 오열과 호곡소리가 잔잔하

게 일어나고 있었다. 길산과 댓 명의 장정들은 그들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꽃재로 올라갔다.

꽃재 위에서는 밤새껏 마을이 타는 불빛과 연기가 내려다보였다.

날이 밝자, 폐허가 된 마을에서는 불터에서 끊임없이 흰 연기가 올랐고, 나뭇가지마다 송

장 타는 냄새로 모여든 까마귀들이 음산하게 앉아 있었다. 하늘에는 뒤이어 모여드는 까마

귀들의 무리가 점점이 떠 있었다. 최헌경은 마을 장로를 데리고 고성군수에게로 진정을 하

러 갔고, 몇몇 사람은 어계에서 당분간의 끼니를 때울 양곡을 거두러 갔으며, 나머지는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괴질이 물러갈 때까지 기거할 움을 파는 일을 도왔다. 오후가 되어 군수가

아전을 데리고 와서 먼 곳에서 마을과 이재민을 둘러보고 간 뒤에 구휼미가 몇섬 나왔는데,

무엇보다도 환자를 돌볼 의원이 문제였다. 어계 사람들은 밤새 시달리고 이제는 병에 대한

공포가 되살아나서 모두들 포구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사또는 구휼미 내는 것이 아까워 더 이상 관심을 쓰려 하지 않을 게요." 최헌경은 간밤

의 일도 있고 하여 그냥 손을 털어내고 돌아가기도 개운찮은 모양이었다.

정학은 말하기를, "그러니...이런 보릿고개에 우리 같은 사람들도 간신히 농량이나마 축내

구 있는 판에 남 줄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어찌어찌 연명을 한다지만, 의원이 오려 하질 않으니 걱정이네. 역병을 막는다구 일을 저

질러놓았으나, 책임이 없달 수야 있겠는가."

이때에 어계 총대가 나섰다.

"내가 적당한 이를 아네. 안창 고을에 설선비라구 계신데, 의술을 깊이 아신다네." "설선

? 그런 이가 안창에 있었던가?"

토박이인 정학이 고개를 흔들었고, 어계 총대는 다시 말하였다.

"그이는 원래 강릉분이신데, 안창이 처가라고 하데. 내 어찌 아는고허니, 우리가 송도서

상한 고기를 먹고 모두 복통이 일어나 죽을 판에, 그이가 약초를 달여 주어 마시고는 토하

고 씻은 듯이 나은 적이 있지."

", 그 참 잘되었군. 자네가 가셔 모셔오게나."

모두들 걱정거리 하나가 줄어든 것 같았다. 꽃재에서는 해금강의 기암괴석들이 아침 햇빛

을 받아 바닷물에 기다란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훤히 내다보였다. 금강산의 뻗친 줄기가 붓

끝의 마지막 획처럼 동편으로 그어져서 그 끝이 고성의 금성산으로 이어졌다가 꽃재에 가서

끊기면서, 남은 힘이 바다에 돌출하였으니, 바로 해금강이었다. 죽음과 병고만이 뒤덮인 폐

허의 마을과 아침 햇볕에 찬란하게 드러난 해금강의 경치는 참으로 묘한 조화를 이루어 길

산의 피로한 심신에 이상스런 감동을 주었던 것이었다. 길산은 간밤에 동네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삭정이와 솔방울들을 그러모아 불을 지피고 아침밥을 짓고 있

었다. 죽은 사람은 불에 타고 병마가 깃든 집도 타버렸건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명력은

끈질긴 것이기도 하였다.

다시 어제와 같은 구휼이 시작되는 중이었다. 환자를 돌보러 내려가기를 원하는 가족들이

많이 있었으나, 최헌경은 그들 중에 서너 명을 뽑고 다시 어계 사람 둘을 보태어 하루씩 일

을 보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의원을 부르는 일이 시급한 일이었다. 최헌경은 어계 사람들의

반수를 돌려보내면서 옷을 벗어서 빨고 개천에서 깨끗이 목욕하도록 당부하였다. 최헌경이

길산에게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어떠우...암자로 돌아가실라우?"

길산은 그때에 운부대사의 노한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민생을 모르는 자가 한갓 칼재주나

손재주를 익혀서 무엇에 쓰랴. 다시 운부를 뵐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활인하는 사업이나 구경해볼라우."

퉁명스러운 길산의 대답에 최헌경은 그 엇구수한 얼굴을 온통 일그러뜨리며 껄걸 웃어대

는 것이었다.

"말로는 그럴 듯이 활인이라 하지만, 우리가 무슨 성인이우? 해를 버려두면 그 독이 우리

에게까지 미치는 일을 막아내잔 것이지."

"이런 일은 세상 공부두 되우."

", 그렇구말구...허나 어제 내가 일렀듯이 권도를 잊으면 송양지인이 되고 마는 법이우."

길산은 무슨 소린가 하여 의아한 눈빛으로 최헌경을 올려다보았다.

"대적이 강을 건너올 제 한번 쳐서 이길 수 있음을 간했는데도, 그것은 어진 일이 아니라

하여 적이 대오를 정비할 때까지 기다려서 싸웠다가 패망했다는 옛말이 있소이다. 인정에

맺고 끊음이 없으면 바른 인정이 아니오, 세상 사람 모두 그렇지요." 길산은 묵묵히 앉아 있

었다. 그릇된 정에 치우치는 것도 실수요, 정이 고갈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은 참으로 큰 덕을

갖추어 행하는 자만이 알 수 있는 뜻일 것이었다. 최헌경이 비록 도방 저자의 얘기꾼으로

떠돌던 자라 하나 필시는 매우 지혜있는 자일시 분명하였다.

일찍이 운부가 아무런 내색 없이 농지 개간을 지시하였을 때는 몸으로 그 고와 충을 알라

는 말없는 가르침이었을 것이었다. 이런 환난 앞에서 자신은 침착하지 못한 광동이 되어서

공연한 칠정의 노리개가 되었다. 길산은 스스로를 깊이 반성하였다. 그러나 어찌 사람이 제

자신을 속속들이 알아채랴. 길산이 세상사에 총명한 것은 사실이어서 잘못을 뉘우침이 그리

도 빠르건만, 우직한 기가 없고 그만큼 경활하다는 것은 역시 저자에서 자라난 광대 근본의

성품이랄까. 운부가 첫눈에 길산을 몰라보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어계 총대는 설선비를

찾으러 떠나려는 참이었다. 어계 총대가 꽃재를 내려갈 때 길산이도 따라서 뒤쫓아갔다.

"의원 부르러 가시우?"

", 갯가에서 배를 내어 송도가지면 삽시간에 이르지요." "나두 갑시다."

"그러지요. 마침 혼자 가기가 객쩍은 판인데."

길산과 총대는 그대로 꽃재의 동편으로 내려가 꽃재말의 고깃배들이 늘어서 있는 갯가로

내려갔다. 과연 우환중이던 마을이라 배들을 오랫동안 손보지 못하여 널판이나 돛대가 성한

것이 없었다. 돛을 올리고 용총줄을 고물에 친 다음에 총대가 익슥한 솜씨로 아딧줄을 틀어

쥐어 방향을 정하니, 아침 바람을 받은 배가 해금강 기슭을 헤치며 내닫기 시작하였다. 길산

은 선수의 덕판 위에 앉아서 옆으로 스쳐가는 뾰족뾰족한 바위 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구가 해송 끝머리에서 바위 사이로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해가 높직이 뜬 오정 채 못미친 시각쯤에 그들은 울모래에 닿아서 안창 고을의 설유징 유

학의 집을 찾았다. 그들이 집 앞에 이르러 삽짝 안을 들여다보니, 바깥사랑 비슷이 꺾어진

초가 마당에서 유건을 쓴 사내가 말린 갈대를 흐트러놓고 자리를 엮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

는 꽃무늬를 넣은 돗자리 두어 장이 완성되어 있었다. 선비치고는 얼굴이 검게 그을었고 몰

골이 구차해 보였으나, 다만 몸매가 가냘프고 눈빛에 총기가 있어 먹물이 든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의 아내인 듯한 아녀자가 젖먹이를 등에 업고서 나무절구에 공이질을 하고 있

었다. 처가살이가 신통치 않음을 한눈으로 알아볼 수가 있었다. 총대 사내가 머뭇거리다가

삽짝 안으로 들어서며 허리를 굽혔다.

"유학 어른 평안하십니까?"

설유학은 문득 일손을 멈추더니 바지에 묻은 검불을 털어내며 일어서서, "자네가 뉘시더

?"

"고성포 어계 총대 되는 원가올습니다."

"오오, 자넨가? 그래 계원들 모두 무고한고?"

"예예, 염려 덕분에 모두 건강합지요. 그때 송도에서 복통 구완을 해주지 않으셨다면 모두

저승객이 될 뻔하였습죠."

설유학은 총대와 인사말을 나누면서도 그 뒷전에 섰는 키가 크고 눈이 뚜릿뚜릿한 길산을

쏘아보곤 하였다.

"그래 무슨 일인가?"

"급히 유학 어른을 뫼셨으면 합니다. 저희 고성포 꽃재말에서 괴질이 발생하여 수십 인이

병사하였습니다. 헌데 관에서는 접근을 꺼려하여 인근 동민들이 모두들 걱정하던 차에, 의논

이 정해져서 환자와 식구들을 격리시키고 마을에는 방화하여 예방을 대략 해놓았습니다.

을 저질러놓았는데 군내 의원은 아무도 오려 하질 않으니 속수무책이올시다. 남은 환자를

버려두었다가 역질이 창궐할까 근심거리지요."

설유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큰 우환이군. 허나 내 따위가 무슨 의술을 알아야지. 처방이나 좀 아는 걸 가지구

무슨 도움이 되겠나?"

"아유 겸양의 말씀이 지나치시오. 일찍이 저희들을 활인해내지 않으셨습니까." "글쎄...

우간 내게 온 손님들이니 점심에 박주나 한잔 하구 기다려보우. 나두 무턱대구 떨치구 갈

수야 있겠는가. 무슨 방처를 하구 가야지. 어디 그럼 그 괴질의 내력이나 한번 들어볼까?"

설유학은 두 사람에게 토방으로 들어갈 것을 권유하였다. 설유징의 방에는 건재 약초들이

정성껏 포장되어 그 품목이 씌어져서 천장마다 가득히 매달려 있었고, 윗목에는 침쌈지며

작두며 탕기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랫목에는 거적을 깐 이런 방에는 어울리지도 않을 오

동나무 자줏빛 문갑이 놓였고, 구서랍 책상 위에는 지필묵과 호남간지가 펼쳐져 있었다.

을음이 가득 찬 등잔의 화선을 보아하니 그가 밤늦게까지 무엇인가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

었다.

", 방을 아직 치우지 못해서 앉을 자리가 없구려. 거기 잠깐 섰지." ", 저희는 아무

데나 관계없습니다요. 마당이면 어떻겠습니까." 설유징은 방바닥에 널린 한서와 종이들을

차곡차곡 챙겨서 문갑 안에 넣었다.

"과거 준비를 하십니까?"

어계 총대가 그런 방안 모습을 둘러보면서 아는 체를 하자, 설유징은 빙그레 웃었다.

"글쎄...그것보다 더욱 긴한 일이 있지. 까짓 썩어빠진 조정에 나가면 무얼 할 건가. 강릉

서 이리루 떠나올 제 그런 생각두 모두 털어버렸네."

"그럼 이 무슨...글공부를 허시우."

"...내가 도모하는 일이 있어서 그러지. 어디 거기 씌어진 글들이 진서인가 보게나. 나는

성인의 도를 읽구 있는 게 아니야."

길산과 총대가 기웃하여 들여다보니 역시 종이에 자디잘게 씌어진 것은 아녀자들의 내간

비슷하여 보이는 언문체였다.

"어디 영매시라두 기십니까. 먼 데루 시집을 가셨나요?"하면서 글자를 짚어보다가 총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농사잡록이라...어이구 이건 편지가 아니라 농사책이 아닙니까?" 설유징은 책상위에 펼

쳐져 있는 종이들을 마저 곱게 접어서 문갑에 넣었다.

"강희맹의 사시찬요는 사실은 중국의 한악의 그것을 가려서 엮은 것인데, 근년에 신속의

[농가집성]도 훑어 보았건만 시대적으로두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실제의 농군들 사

정과도 다르고, 도 지세 산세에 따라서 달라야 할텐데 한결같이 취급하구 있네. 그래서 내가

전에 정선 살 적부터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유의해 보았지." 총대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머리를 기우뚱거렸다.

"유학 어른께서 의리 염치에 대한 공부는 않으시구, 뭣하러 그런 농투성이의 일에 골몰하

십니까?"

"자넨 흙 먹구 사는가?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두 몰라." 총대는 자기도 모르게 방자한

콧소리를 내고 말았다.

", 예가 어디라굽쇼. 전장이 드넓은 고장두 아니구 비옥하기는커녕 바닷바람과 소금기에

제대루 되는 곡식이 있나요. 그저 산간에서 화전갈이하여 조나 서속밥 먹는 것이 고작인뎁

. 고성서 철에 따라 이밥이라두 놓치지 않구 먹는 건 둔전붙이 해주는 작인들 몇일 게유.

정학이네가 대대루 둔별장하구는 가까웠으니까. 딴 놈들은 모두 명태잡이나 나가면 풀칠을

합디다."

", 그래서 내가 논을 산간에다 만드는 법과 척박한 땅에 콩과 보리를 심을 궁리를 하구

있었네. 책이 묶어지면 몇권 더 베껴서 동계마다 돌릴 작정일세. 그래 이젠 어디 그 괴질 내

력이나 듣지."

", 실은 깜박 잊구 있었구만유."

총대도 그가 안창골에 왔던 이유를 그제야 깨닫고 제 무릎을 두드렸고, 설유징은 농을 던

졌다.

"사람이 실없기는...꼭 중하구 옷 바꿔 입은 과객 본세로군. 어제의 계장되는 이가 그러하

니 독 있는 고기를 먹구 모두들 그 고생을 했지."

"어유 우리네는 얘기에 팔리다 보면 정신이 이렇게 대추를 홀딱 삼키듯 하오. 헌데 거 무

슨 약인지 신통두 합디다. 복통을 일으켜서 우리 어계서 떼과부가 날 뻔했습죠." "별게 아

닐세. 까막사리 열매를 우황에 개어 환을 만든 게야. 육류해독의 처방이라구 본초강목에두

나와 있지. 그나저나 도대체 괴질 내력은 언제 꺼내려는가?" "...또 대추시를 넘겼네!"

이제까지 뒷전에 물러앉아 입을 다물고 있던 길산이 얘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고뿔처럼 앓다가 차츰 열이 나고 피를 쏟으면서 헛소리를 하다가 죽는다고 합

니다."

설유징의 눈에 긴장의 빛을 띠며, "입에 허연 백태가 끼고, 아구창이 터지며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고 토하고 설사하지 않든가?"

",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다."

설유징은 눈살을 찌푸리고 입맛을 다셨다.

"허허, 그 참 탈이로구나! 보통 역질이 아니라, 그게 바루 염병이여. 올여름까지는 고성에

큰일이 나겠구먼."

두 사람 모두 놀랐다. 염병이라면 가족의 씨를 말리고 사방 십 리에 인적을 끊어놓는다는

무서운 재앙이 아니던가. 총대는 말이 떨어지자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염병이라면...이거...우리는 손으루 만지구 끌어내구 하였습니다."

 

"그 동네서 뭘 먹은 건 없겠지?"

"그러믄요. 저희는 모두 식전이라 시방 아귀가 될 판이올시다." "하면...그 옷을 벗어서 마

당에 널어두게. 아예 삶아도 좋을 것이고. 그리구 앞내에 가서 말끔히 씻구들 오게."

두 사람은 엉거주춤 서 있었다. 설유징은 갑자기 엄하게 소리를 질렀다.

"이자들이 지금 얼이 있는 게야 뭐야. 귀신 붙었으니 빨리 부정을 떨어내야 한다!" 퇴창

문을 밖으로 차면서 설유징이 다시 외쳤다.

"부인 거기 있으면 다른 데루 좀 피하시오."

길산이와 어계장은 엉거주춤 마당 가운데로 쫓겨났다. 설유징이 다시 쫓아나오더니 마당

에서 그가 짜두었던 자리를 걷어 세워주면서 재촉했다.

"어서 바지두 저고리두 벗으라니..."

길산이와 어계장은 귀신의 부정이 붙었다는 기분 나쁜 말만을 듣고서, 후다닥 몸놀림도

잽싸게 저고리를 벗었다. 상놈의 의복이니 바지와 저고리를 벗어젖히면 속곳뿐이라 금방 덜

렁 두 쪽이 되어버린다. 설유징은 나무엮음 송곳으로 중간에 두 번 찢고서 두 사람의 머리

위에다 헐렁하니 씌워버렸다.

"어여 앞내에 그대루 뛰어가서 말끔하게 씻구 와."

총대가 앞에 서고 길산이 뒤를 따르니 돌연한 메 남생이 한 마리가 웅기적웅기적 기어가

는 꼴이었다. 둘은 우선 하반신을 감추는 일이 급하여 수초 사이로 풍덩 뛰어들자마자, "

그그그 차거워라!"

하며 자지러지고 말았다.

"사내 대장부들이 까짓 봄개천이 무에 차거워. 낭심을 차게 해주면 양기에두 좋은 게야."

따라나온 설유징은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아무튼 기왕에 옷 벗고 개천에 뛰어들었으니,

목욕을 않을 재간이 있나. 퉁탕거리며 개천에 잠겨 있자니 제법 신명이 나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는 조금 숫기가 생겨서 두 사람은 천천히 설유학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방안에 들어서자 설유징이 또 밖에다 외치는 것이었다.

"거 밖에 벗어놓은 옷들은 푹 삶아주오. 그리구 농에서 내 헌 옷가지 있으면 두 벌 꺼내

오구."

마당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벌거숭이 몸으로 방안에 섰자니 송구하기도 하고

우선 체면이 말이 아니라 두 사람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설유징은 연신 즐거운 모양이

었다.

"이 사람들 귀신에 부정이 붙었다니까 돌집 하인 뒷간 가듯 하데그려." "우리가 무슨 콩

가루 훑은 줄 아십니까. 뒷간엘 가게요." 밖에서 미적미적하더니, 자신없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옷이 여벌루 딱 한벌 있기는 한데요. 너무 누추해서..." 선비의 아내가 문틈으로 밀어넣

은 옷을 보니 누덕누덕 기웠는데 너무도 낡아서 손가락만 닿아도 푸석하며 찢어질 듯하였

.

", 이건 아주 훌륭한 옷이고, 또 없소?"

", 베잠방이가 있어요."

"그거라두 가져오시오."

"요즘은 입을 수가 없습니다."

"어 괜찮아. 아무래두 저녁녘에 나갈 테니, 춘풍에 다 마르겠지." 베잠방이가 또 들여졌

. 둘이서 제각기 주워 입은 꼴을 보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래도 손위라고 어계장이 바

지 저고리를 입었는데 어깨가 좁아서 가슴이 곧 터질 듯하고 소매가 팔굽 근처에까지 껑

충 올라갔다. 그 대신에 기장은 늘어져서 사타구니까지 덮을 만하였고, 바지는 숫제 몇걷

이를 해야만 되었다. 마치 막대기에 끼운 개꽁지 빗자루 꼴이었다. 그래도 그 몰골은 조금

나은 것이, 길산의 모양은 더욱 꼴불견이었다. 달랑 잠방이뿐이라 무릎 위로 올라간 바짓가

랑이는 다리 근육에 찢어질 듯하였고, 속곳이 없는지라 밑천이 훤히 들여다보일 지경이다.

웃통은 아예 벗었으니, 더구나 체모있는 선비의 공부방에서 결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어리둥절 서 있는 사이에서 설유학이 먼저 폭소를 터뜨렸고 급기야는 길산과 어계 총대

도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웃었다.

"자 이쯤 되었으니 벌써 이놈에 방안은 잡놈의 방이 되었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학 어른."

"어허 이 사람아, 잡놈의 동무는 잡놈이 아니라던가. 자아, 이젠 슬슬 요기나 해볼 참인데

이거 우리가 이런 꼴이니...내 집이 집이 아니로구먼. 내외 술집해야겠어." 설유징은 다시

밖에다 대고 외쳤다.

"이보우 부인, 요기는 뭐가 있수?"

"나물죽이나 끓일까요?"

"아니야, 메밀이 있을 게요. 그걸루 국수나 눌러 주오. 술은...가만있자 당신 안집에 가서

소주 한 병만 걸러오구려."

"집에두 탁주가 조금 있어요."

"글쎄, 그건 의당 내오구. 소주두 가져오라니까요."

"아버님만 드시는 걸, 집안 어른들 눈치두 있는데 어떻게 내옵니까?" "글쎄 가져오라면

가져와요."

설유징의 아내는 딱했던지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쉬고 돌아서는 기척이 들렸다. 입장이 난

처했던 둘 중에 어계장이 말하였다.

"아니 저희 같은 불상놈이 술의 청탁을 가려서 마십니까. 너무 그러시면 황공합니다." "

그따위 술 가려 먹을려구 무리한 일을 시키는 게 아닐세. 자네들 독을 씻어줘야 되니까 그

러네."

둘은 역시 잠자코 앉아 있었다. 한참 기다리자니 모두 말이 없는데, 설유징은 딴에는 좀

서운한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처가살이가 할 짓이 못되는 건 누구나 잘 알 게야. 더구나 장인 어른께서는 아직두 나를

모르시는 겔세. ㅇ러마 전에는 돈 삼십 냥을 내주시면서 행상이나 나가보라구 하데. 허나,

내가 물화를 팔아서 상리를 남겨 돈푼이나 쥐었다구 해서 무슨 큰 이익이 되겠나. 글 읽는

자는 글 읽는 구실이 있는 법일세. 나두 자리를 짜다 내다 팔아서 근근히 양식두 보태구 처

갓집 담배밭을 매어주기도 하네만, 도무지 사나이는 불편한 살림이라네." "그만한 학문을

꿰시구 어찌 과거를 안하십니까?"

하는 어계 총대의 맹한 물음에 침울해 보였던 설유징은 빙긋 웃었을 따름이었다. 점심상이

들어왔는데, 방금 목판틀에서 빼낸 메밀국수가 비벼져 나왔고, 무짠지와 탁주 한동이, 그리

구 소주 한 병이 얹혀 있었다. 설유징이 빈 대접을 달래서 갖다 놓고는 소주를 콸콸 부어놓

고 약봉지를 내려 백반 한 덩이를 꺼내서는 옴폭 팬 박달나무 음판에 양바퀴로 눌러서 빻았

. 곱게 빻은 백반가루를 소주에 타서 한참 젓고 나서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 한모금씩 물고 양치질을 하게. 넘기지 말고 목 넘어 턱까지 보냈다가 다시 입안에 물

고 흔들기를 다섯 번 하게."

둘은 시키는 대로 하는데 소주의 쏘는 맛과 백반의 신맛으로 온 입안이 우그러지는 듯하

였다. 그리고 설유징은 깨끗한 백지를 네모반듯하게 접어서 대접의 것을 흠뻑 묻혀서는 두

사람의 손을 깨끗이 닦아 내었다. 그리고 자기도 그렇게 했다.

"이젠 예방이 다 되었네. 귀신 부정은 멀리 달아났을 게여." 설유징과 길산과 어계장은

국수에 탁주를 들면서 뒤늦게 각각의 말들이 나오게 되었다.

길산이 통성명 뒤늦은 것을 사과하고 내력없이 그저 금강산의 운부 앞에 공부하러 와 있단

말을 비치자, 설유징은 수저를 멈추었다.

"운부라고...운부대사!"

하고는 그는 잠깐 천장 쪽에 시선을 두고 몇번 더 중얼거려보았다. 길산이 말 꺼냈음을 후

회하며 머뭇거리는데 설유징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계장은 자작하여 마시느라고 그들 사

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가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부터 잘 아나?"

설유징이 묻자, 길산은 부끄러움을 참으며 시원하게 대답해버렸다.

"아니오, 이제 금강산에 들어간 지 열흘도 못 되어 제가 어리석은 탓으로 쫓겨서 내려오

구 말았수."

그러나 설유징은 혼자 중얼대는 것이었다.

"그렇지...내 스승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그때에는 소백산에 계신다더니...내가 그분의 내

력을 조금 아네.자네들이야 붕당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설유징은 문득 탄식하면서 한숨

을 깊이 내쉬었다.

"대저 세상이 암울할수록 숨어 있는 인재가 많은 것은 고금에 걸친 일이어니와, 더욱 지

금 세상이 그러하네! 웅대한 포부와 경륜을 지닌채로 산산에 숨어 헛되이 일생을 마친 이들

이 얼마나 되었을꼬...말 좋아하는 자들 중에는 그런 이들의 은거를 가피켜 명리를 바라는

짓이라거나, 보명이 나약한 처세라고 비웃기도 하지. 하나 그러한 포부를 지닌 이가 그릇된

제도 속에 들어가 어찌 살기를 바라며, 경륜을 펴지 못하고 절개나 버려져서 드디어는 썩은

제도의 제물로 되고 마는 것이 통례인즉, 차라리 초야에 앉아 백성의 고락에 동참하는 편이

깨끗하지. 선비로서 말을 달리고 칼을 뽑아 구세하는 길은 택할 수가 없으니, 민생을 위해서

학문을 쓰고 펴갈 수밖에 없구먼."

설유징은 두 사람이 전혀 안중에 없는 것만 같았다. 그는 천장을 우러르며 혼자 중얼거리

는데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하더니 곧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길산은 설선

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분명히 알 수가 없었으나 뭔가 깊은 인상을 받게 된 것이었

. 더구나 운부에게 쫓겨 내려온 그로서는 설유학이 운부의 속세 내력을 안다 하니 귀가

번쩍 트일 정도로 이야기에 집중되었다.

"운부대사님을 아신다구 했수?"

"그이가 강진 사람이시고 전에 소백산에 계셧다면 틀림없을 걸세." 길산은 풍열선사가

일러주던 말을 기억해내어 맞장구를 쳤다.

"본향이 강진이랍디다. 소문에는 당사람이라구두 한다지요. 대명이 망한 뒤에 배를 타구

건너왔다구 하데요."

설유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켜고 나서, "오랑캐가 중원을 유린한

뒤 대명의 망국민을 자처한 이가 하나 둘인가. 그이가 워낙에 재주 있는 기인이라서 수도

승이 된 뒤에 기담 좋아하는 이들이 조작해낸 이야기일세. 나는 정선 살 제 내 스승님을

찾아오신 그분을 먼발치서 뵈온 적이 있었네. 그때 이미 누더기 장삼에 송낙을 쓰고 계셨

."

설유징은 거기서 말을 끊고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의 스승 이수는

환로에 나갔던 초년에 주상께 직소하여 삭탈관직되어 귀양을 갔다가 낙향해서 끝내 벼슬에

다시 나가지 않았다. 설유징의 외가 쪽과 연줄이 닿아서 그의 조부가 교육을 부탁했었고,

에게 과거의 무망함을 깨우쳐주었으니 기실은 부모가 바라던 스승은 아니었던 셈이었다.

유징과 동접으로 용인사는 조종석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과거에 실패하였으나, 그들을

아는 선비들은 모두 재주가 아깝다고들 소문이 자자하였던 것이다. 운부의 속명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가 김씨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의 조부가 서애 대감 쪽의 사림에

들었었고, 왜란 때에 의병으로 분기하였다가 순사하였는데 부친은 광해조에 벽지인 강진으

로 이사를 왔다 한다. 강진은 즉 격변의 시기에 벼슬길에서 쫓겨나 귀양온 자들이 한번씩

거쳐서 가는 고장이 되었으니, 그들과의 교류가 또한 없었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유

징의 스승 이수가 그때로부터 강진에 묻혀 있던 선비의 풍문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한통속이라는 말이 있듯이, 남인계의 인맥이 닿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유징의 스승 이수가 정선에 틀어박혔을 때 태호 이원진과의 교류가 있었고 원진이 삼사

를 거쳐서 부사로 오를 적에도 인편으로 가끔씩은 안부를 물을 정도였던 것이다. 설ㅇㅎ징

은 가끔 그의 스승이 몰하기 전까지 얘기해주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 환로에도 나가보고 여러 사림의 인물됨도 접하여보아 알지만, 일찍이 놀랍고도 두려

운 수재들은 두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태호의 조카 되는 유형원이라는 선비와 강진

출생의 승려 운부이니라."

유형원이 광해군 십사년 임술에 나고 운부가 인조대왕 사년 병인이 났으니, 네 살 차이가

되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수같이 의를 신조로 살아온 대쪽 같은 선비의 눈에 당대의 천재로

비쳤던 두 사람은 과연 어떠하였는가. 유형원은 서른두살의 젊은 나이로 과거를 퇴하고 전

라도 부안에 숨어 살다가 책을 쓰는 것을 유일의 일로 삼아 깨끗이 목숨을 거두었다. 운부

는 삼십여 세가 되도록 지사 노릇으로 연명하다가 삼 년 동안을 전국 각지를 방랑한 뒤에

예송이 벌어지던 경자년에 입산, 승려가 되었으니 그때가 삼십 오세였다. 일찍이 승려로서

양생을 잘했던 탓이었을까, 그러한 울분의 세월 속에서 기맥을 잃지 않아 수를 누리는지도

몰랐다. 설유징은 그러한 얘기를 밖으로 꺼내어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세상의 얘기를 하자면 그들에게 조정의 얘기를 해야만 되었고, 썩어빠진 구중궁궐

의 탐욕서런 권세다툼에 관하여 얘기해주기에는 너무도 순박하고 무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

이었다. 그들은 양반의 연원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붕당의 유를 모르는 것이다. 그저 태

어나면서부터 엄청나게 짓누르는 신분의 숙명적인 중압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꿈결처럼 나

라의 소문에 접할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자기의 나라가 아니라는 느낌을

가진 데에 있었다. 난리가 터지면 벼슬아치의 집과 왕궁에 불을 지르는 백성들이었다. 이게

어디 내 나라냐, 양반놈들의 나라지 하는 감정은 변방에 이를수록 더욱 심하였다. 마치 조정

에 있는 자들이 백성들의 나라를 독점하고 빼앗은 것과도 같았다. 글 아는 자의 소임이 있

으니, 백성들이 빼앗긴 나라를 그들에게로 되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설유징이 정선에서 농사를 지을 적에, 벼슬아치의 핍박을 받았고 심지어 수세하러 온 나

졸에게서 모욕까지 받았으니, 땅 파먹는 일반 백성의 억울하고 슬픈 원한을 어찌 모르랴.

릉으로 이사할 때 의생으로 직을 바꾸면서 다시 과거 공부를 해보기도 하였다. 선비로서의

대우라도 받으면서 응시라도 해야겠지만, 정작 기일이 닥쳐서는 상경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

았다. 헛되이 마흔줄로 접어들어 진사나 따낸다고 그의 여생이 값어치 있을 듯하지는 아니

하였다. 그는 그때로부터 무엇인가 글을 아는 자로서 백성들에게 돌려줄 일거리를 찾게 되

었으니, 산간에서 계곡의 물을 둑으로 막고 수차로 물을 대어 층으로 논을 개간하는 것과,

에우디며 구뢰찰이며 하는 왜품종을 자채, 저광, 차한도 등의 조기 재배에 적당한 것에 대치

하는 것이며, 보리와 벼를 번갈아 두 번 심어 먹는 삼남 쪽의 이앙법을 자세히 고구하여 처

갓집 담배밭 귀퉁이에 자그마한 종전을 갈아 두었던 것이다.

그러한 일이 과연 얼마나 백성들을 돕게 되는 일인지는 모르되, 스승 이수께서 언제나 한

탄하시기를 유자는 유자이니 그들의 생업을 돕는 유자라야만 유자가 아니니라 하셨던 말을

잊을 수가 없는 설유징이었다. 그가 의술을 널리 아는 바 아니로되, 지금도 틈틈이 갈대나

왕골을 꺾으러 가거나 산에 나무를 하러 가면 약초 모으기에 보다 더 치중하여 모아두고 말

려서 간직함은 인근 이웃 촌민들을 활인할 기회라도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한 설유징이 아

무리 심성이 고매하다 한들 가난의 핍박을 어찌 다 견디랴. 더구나 처가 식구들과 알력이라

도 있으면 더욱 외롭고 약해져서 홀로 산에 올리 시경을 암송하곤 하였다. 암송하다 보면

저 기천 년 전에 잘못된 제도의 그늘에서 백성을 근심하고 자기의 나약한 외로움을 달래며

분노를 씹던 선비들의 끈질긴 힘이 되살아나곤 하였었다. 그러한 설유징에게 스승이 그리도

말씀하시던 운부라는 이가 바로 지척에 있다는 것은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일이기도 하려니

, 새삼 스승과 동접들의 생각이 나서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스승의 임

종 때에 마지막 외던 말은 끝내, ", 답답하다."

라는 부르짖음이었다. 당신이 숨을 거두실 제 아무도 들이지 말라던 것은 욕되게 살고 가는

자의 죽음을 배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운부게서 강진에 살았고 반계 선생께

서 부안에 계셨는데 생전에 두 분이 만나셨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학 어른, 어째 그리 애통해하십니까?"

설유징이 얼핏 눈을 떠보니, 길산의 순박한 눈동자가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는 그제서야 소매를 들어 볼에 가득한 눈물을 씻었다.

"아닐세...내 잠시 스승의 생각을 하니 자신이 너무 부족하게 살아와서..."하고 나서 설유징

은 길산에게 물었다.

"아까 잠깐 들으니, 자네가 운부 대사님께 공부를 하러 왔다지?" ", 그러하우."

"뭘 배워 가려나?"

길산이는 겸연쩍어서 제 뒤통수를 몇번 긁적이고 말았다.

"글 같은 것 배우지 말게. 식자에 밝으면 교해지느니." 길산은 고개를 떨구고 잠자코 앉

았다. 설유징이 다시 말하였다.

"자네 뼈대를 보니 힘꼴이나 쓰겠군. 장서방 같은 이가 우리네보다 많아야 허네. 생업이

무엇인가?"

길산은 광대임을 밝히기가 싫어졌다. 그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무뚝뚝하게 뱉어냈다.

"화적질이우."

"아니 이 사람이..."

하는 것은 술을 마시던 어계 총대였고, 의외로 설유징은 놀라는 기색이 아니라 오히려 고개

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대적이란 궁핍한 양민들의 율화일세. 기가 격하여 몰린 불덩이란 말여. ,

곤들 할 텐데 잠깐 쉬구들 있게나. 내가 나가서 고성포에 갈 준비나 해가지구 깨우러 올 테

니까."

설유징은 술상을 들고 밖으로 나가면서 길산에게 말하였다.

"산에 다시 올라가야지?"

"...그럴밖에요."

"갈 때 함께 가세나. 이것두 참으로 기연일세."

설유징은 다시 담담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잠깐 낮잠 든 사이에 설유징은 대

략 필요하리라 짐작되는 승마와 백작약, 갈근, 감초, 생각, 계지 등등의 액재를 내다가 달이

기 좋도록 작두에 썰었다. 대개 열이 심하고 오한이 나며 두통이 심한 염병의 처방으로 설

유징이 가지고 있는 약재 중에서 급히 취한 것들이었다. 백반과 화주는 고성에 가서 구하기

로 하였고, 그밖에 염병이 창궐했던 꽃재말 부근을 소독할 방법은 쑥불을 지른 뒤에, 조개껍

질을 구워서 빻아 고운 석회를 내어 쓰리라 생각해두었다. 이런 일들을 준비하며 마당에 헛

간을 오락가락하는 설선비는 어느덧 몸에 활기가 가득하였다. 앞의 채전에 나가서 밭일을

하고 들어오던 아내가 그의 돌연한 활기를 보고 말하였다.

"무슨 좋은 일이라두 있으셔요?"

약재를 통틀어 내다가 일일이 섞고 나누던 설유징은 그런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

양이었다.

"저 손님들은 오래 유하실 건가요?"

"? 우리는 곧 고성포루 나갈 게유. 며칠 동안 나가 있게 될 테니, 아이들 잘 보살피고

안에다가는 잠깐 동접들을 만나러 출타했다고 말해두시오." 설유징의 아내는 아직 영문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모레에 아버님 모시구 강릉 나가기루 하시구선 어쩔 작정이셔요?" "그건 장인어른 당신

혼자의 생각이시구...나는 애초부터 강릉 나갈 생각이 없었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소

이다."

장인이 설유징을 데리고 강릉에 가려는 것은, 강릉 토호의 십육세짜리 아들의 덕선생으로

일자리를 구해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쪽에서는 일 년에 살 스무 섬과 무명 한 동을 주리

라 하였으니, 그만큼 설유징의 문자속에 대하여 은근히 존중해오던 까닭이었다. 설선비의 처

가에서는 인편으로 그런 제의가 왔을 때에 딸을 불러다가 남편은 훈장질로 양식을 벌고,

내는 삯바느질을 하여 가산을 일으켜서 살아갈 것을 엄중하게 타일렀던 것이었다.

이제 날짜까지 정하여둔 이상, 만일 기일을 어기게 되면 처가에서의 입장도 몹시 난처해

질 설유징이었건만, 난데없는 상한들의 방문으로 생각을 바꾸었으니 그 아내는 가슴이 철렁

할 노릇이었던 것이다.

"강릉 나가실 일말구 또 뭐가 중요하단 말입니까?"

"허허..."

설유징은 손을 털고 일어나며 혀를 찼다.

"고성포에서 역질이 창궐하여 사람이 죽어간다는데...의서깨나 읽었다는 내가 그냥 앉아서

고갯짓이나 하란 말이오?"

아내는 한숨을 쉬며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글쎄, 당신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아버님께서 자꾸만 몰아대시니 그게 걱정이어서

그래요."

"허긴 치가를 못하면 치세도 못한다 하지만, 우리 식구가 부황이 들어 죽을 정도는 아니

, 처갓집두 안창서는 굶지 않구 살만하니 설마 아이들과 당신을 모른 성이야 하겠소. 더욱

급한 측은지경이 있으니, 만사 제치고 그곳을 돌보는 것이 바루 꼭 들어맞는 치가올시다."

설유징의 아내는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지라, 역시 부부는 닮는다는 말처럼

제 남편의 의사에 순종하는 뜻을 보였다.

"하긴...저두 당신이 강릉 나가서 헤어져 살게 될 것이 걱정스러웠어요. 까짓 부잣집 독선

생보다야, 심산의 화전민이 낫겠어요. 그러니...제발 고성포 가셨다가 돌아오시면 여기서 나

갈 작정이나 해두셔요."

", 그건 차차 생각해봅시다. 나두 안창서 오래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아이들은 밭에 나

갔소?"

"큰애는 밭에 나갔구요, 둘째는 나무하러 갔어요. 그리구 계집아이는 안방서 자구 있어요.

양식 준비 안해두 될까요?"

"그렇지, 양식 준비를 해야지. 공연히 환난 중에 빈촌에 가서 활인 한답시고 군입이나 더

늘면 안되지요."

"콩이 서너 되 잇으니 아껴 잡수셔야 해요."

"그건 너무 많아, 반만 주시오. 여기 먹을 양식은 충분하오?" ", 조가 반 뒤주 있으니

햇곡 나오기까진 이럭저럭 연명이 되는걸요 뭐. 아버님께서 여름 전에 양식을 끊겠다 하셨

어요."

"장인께서 반년이나 우리 식구를 살리셨으니...이젠 내가 다른 이들의 환난을 구할 수라도

생기게 된 게요.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소. 작은 음덕이 모여서 대덕이 된다지 않았소?"

유징이 껄껄 웃으니, 빈처는 잠깐의 시름을 잊고서 조용하게 웃었다. 그녀도 제 지아비의

쾌활한 모습을 대하니 폭풍우 전에 둥지를 튼 제비처럼 작은 가슴이 푸근하게 가라앉는 것

이었다.

"그러면 집 걱정은 마시구 잘 다녀오셔요. , 손님들의 옷은 다 말랐습니다. 아버님께 선

비님들 시회에 함께 나가셨다구 해두지요."

그러자 설유징은 고개를 흔들었다.

"시회 따위의 말씀은 하지 마오. 장인어른께서 그런 말을 들으시면 혹시 잘못 생각하시겠

. 그렇지 않아도 우리 식구 때문에 심려가 많으신 터에, 이제 아주 잊어버린 벼슬에 대한

미련을 돌이키신다면 또한 효도가 아니외다."

아내는 채소를 다듬다 말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설유징은 공

연히 촌에서 밥술깨나 먹는다는 자들이 너덧식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답청이다. 화전이다.

시회다 하여 풍류를 즐기고 돌아 다니는 것을 몹시 고까워하는 터였다. 촌것들이 어깨 너머

글줄이나 읽어가지고는 아득한 한양 세도가들의 풍문에 관하여 소갈머리 없는 입담이나 나

누며 원님이다 좌수다 진사다 하는 것들의 사랑을 기웃거려 지방에서 행세나 하려 하고,

없는 양민들에게는 근거없는 상전 노릇으로 하정배나 받으려 하니 이런 자들은 노중에 선

말뚝장승보다도 필요없는 물건들이 아니던가. 풍류라는 것은 제가 가꾼 뒤꼍의 채마밭에서

아침 이슬을 함뿍 받고 열린 외를 따서 안주로 하여 소주 한 잔을 든다든가, 풀어놓은 소를

타고 돌아오며 퉁소라도 한가락 분다든가, 사이참을 들다가 논두렁에서 농주에 흥이 나서

꽹매기라도 한가락 돌린다든가, 글 읽던 밤에 달이 떠 있는 우물물을 깨뜨리고 정갈하고 시

원한 냉수를 뜨며 마당가에서 잠시 바람을 쏘인다든가, 이를테면 물이 맑아 갓끈을 빨고,

이 흐리면 발을 담그는 그런 것이다.

한가함이 따로 없고, 풍류가 남의 것을 빼앗거나 집어삼켜서 생겨나는 것이 아닐진대 선

비의 풍류라 함도 제 독서하는 방과, 제 집 마당과, 제 일을 넘어서는 것이 아님에도...못된

습속은 저와 같아서 풍류 다니는 자에 권세가 붙어 있게 되고,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곧 과거 하는 자들의 사교라 여기는 것이었다.

설유징과 길산과 어계 총대는 오후 느지막하여 배를 타고 고성포로 올라갔다. 꽃재 위에

올랐던 마을 사람들은 어계 사람들과 합력해서 움집을 팠고, 최헌경은 환자의 식구들을 데

리고 마을에 내려가서 환자를 돌보는 중이었다. 설유징은 마을에 들어서자 공중에 가득 찬

까마귀의 떼를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송장을 태운 노린내가 아직도 마을 주변에 남아 있

었다.

타버린 마을의 집에서는 연기가 오르고 있었는데 깨어지고 그을린 세간들이 보기에 매우

참혹하였다. 그들은 마을 가운데 덩그러니 홀로 남은 촌장의 집으로 갔다. 최헌경이 환자들

을 거두기 위하여 남겨놓은 집이었다. 마침 그들이 다가가는데 토담 안에서 들 것을 앞뒤로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개를 푹 처박았는데 입에다 수건을 칭칭 동여매어 누군지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나뭇가지와 멍석으로 엮은 들 것 위에 엎어놓은 시체의 뻣뻣한 팔다

리가 땅으로 늘어져서 꺼덕거리고 있었다.

"인제들 오슈?"

앞섰던 자의 목소리가 바로 정학이었다. 그는 수건을 풀지 않고서 주춤하니 서 있었다.

대가 말했다.

"죽었는가?"

"벌써 여섯 번째요."

하는 소리가 학의 아우 정신이다.

"어디다 버리는가?"

설유징이 묻자 이미 들은 말이 있는 정학이는 입막음한 채로 꾸벅하면서 말하였다.

"의원이슈? 저쪽 어젯밤 화장한 곳에 구덩이를 팠수." "그 수건 필요없네. 공연히 숨만

가쁠 테니."

설유징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더러운 물이 괴어 있는 웅덩이와 사방에 널린 인분을 가

리켰다.

"시체를 태우고...저런 것들도 태워야지. 그리구 자네들은 재 위에 올라가 사람들을 시켜서

갯가에 나가 조개껍질을 많이 주워오도록 하게. 그리구 아낙네들은 쑥을 캐오도록 시키고."

정학 형제는 분부를 알겠다고 한 뒤에 시체를 맞들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길산이 앞서서

촌장 집으로 들어가니, 마당에 여남은 명의 환자가 때묻은 이불을 둘러쓰고 늘어져서 서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꺾쇠 모양의 집인데 왼편에 나란히 두 칸의 방이 붙었고, 그 다음엔

부엌이요, 그리고 안방, 안방과 건넌방의 두 칸 붙은 방들 사이에는 맨봉당 위에 거적을 깔

아놓았다. 방마다 서넛씩 누워 있고, 봉당에도 대여섯 명이 나란히 누워서 헛소리를 하고 있

었다. 환자들의 머리맡에마다 토해놓은 토사물들이요, 방분하여 냄새가 고약스러웟는데 가족

들이 그것을 치우고 있었다.

"...물 좀 주오."

"아이구 내 골이 깨어지네. 저놈...저놈이 내 골을 뻐개려 하는고나." "아버님 아니시오.

날 데려다 어지할려구 이리 잡아당기나요. 날 놓아주오." 환자들의 헛소리들이 비통하였다.

마당에서는 열을 내리게 하려고 석간수를 길어다가 환자들의 머리에 얹을 수건을 적시고

있었다. 웅크리고 앉아 있던 최헌경이 그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자 녹초가 되어버린 얼굴로

마주 일어섰다. 어계 총대가 먼저 나서며 말하였다.

"안창골의 설유학 어른이시네."

"최가에 헌자 경자 쓰옵니다."

최헌경이 차림새는 비슷하나 중인짜리이니 설유징에게 하정배를 올렸다. 설유징은 고개만

끄덕하고서 말하였다.

"우선 일을 나눠야겟네. 예방을 하고 재민을 돌볼 사람들과 환자를 구완할 사람들을 엄격

히 구분해야지 아무나 들락거리고 섰이우고 하다간 모두 죽고 마는 판일세. 어찌 이리되도

록 관가에서는 아무 조처도 없었는가?"

"조처가 다 무업니까. 처음에는 풍문만 들리더니 차츰 병자가 많아져서 바로 이웃 마을에

서는 당분간 마을을 비우겠다는 공론까지 있었소이다. 저희 계서 참다 못하여 이러다가는

온 고성 군내가 쑥밭이 되고 말겠기에 작당하여 일을 저질러버린 게올시다." "쓸개 빠진

놈들 같으니! 백성의 딱한 정경은 바로 고울 수령의 죄인데 이럴 수가 있나.

병 구완도 구완이지만, 먹지 못하면 죽는 자가 더 늘어날 게야. 구휼미가 얼마나 되나?" "

아침에 아전이 와서 닷 섬을 떨궈주고 갔습니다." "안되겠군. 오늘밤만 어찌 보내고서 내

가 직접 군수를 만나러 가야겠네." 설유징은 중치막을 벗고 길산과 총대에게 지워온 약재

보퉁이를 끄르도록 하였다. 최헌경이 물었다.

"이걸 달여 먹이면 곧 낫습니까?"

"아니야, 역병이란 보통 병과는 달라서 일단 들러붙으면 사람의 기맥이 완전히 쇠잔할 때

까지 떨어지지 않는 법일세. 병마와 싸우는데 그 기력을 좀 도와줄 뿐이지. 운이 나쁘면 죽

는 수도 있고, 제 몸이 강인하고 돌보는 이가 끈기가 있으면 많이 살려낼 수 있을 거야.

두 몇 명인가?"

"서른여덟이올시다. 오늘 여섯 죽고, 둘이 늘어났소." 설유징은 잠깐 동안 궁리해보았다.

"여기 장서방과 계장은 내 일을 좀 돕고, 한 두엇만 더 붙여주게. 그리고 병자의 가족은

필요없고, 아낙네 두 사람만 있으면 될 게야. 최서방은 우선 마을 사람들을 모아다가 예방을

해주게. 쑥불을 지펴서 그 연기를 쐬고, 목욕을 깨끗이 하고 마을 근처의 물은 절대로 먹지

말고 흐르는 물을 식수로 쓰도록 하며, 구덩이나 우물마다 회와 백반으로 독을 없애놓도록

하게. 그리고 전할 일이 생길 적마다 다른 자가 드나들게 하지 말고, 최서방이 직접 와서 의

논하도록 하게."

최헌경이 대강의 뜻을 이해하고 말하였다.

"시방 나가서 모두 시행하여 놓겠습니다. 헌데 어계 사람들 중에 돌아가려는 자가 많습니

."

"예방을 끝낸 뒤에 돌려보내두 좋을 게야. 여기 필요한 것은 모두 사람을 시켜서 전할 테

니 좀 구해주게."

그들이 얘기를 하는 도중에도 환자들의 앓는 소리와 헛소리하는 부르짖음이 지옥의 아귀

들처럼 들끓었다. 풍로를 내어 세 개의 약탕관에 계속해서 약을 달이도록 하고 부엌에는 쇠

솥을 걸어 물을 끓이도록 하였다. 설유징이 오자 일에 구분이 생기고 조리가 서게 되어 혼

잡스럽던 구완 일이 차차 바로잡혀졌다. 길산은 마당의 환자를 맡고, 총대는 방안의 환자를

맡게 하였으며, 아낙네 두 사람은 부엌에서 물과 죽을 끓이고 약 달이는 일을 담당하였고,

정학 형제는 물을 긷거나 주변을 치우거나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설유징은 그중 증세가

악화된 환자들 곁에 붙어 앉아 먼저 달인 발한하열탕을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끓인 물로 환

자의 몸을 씻겨주고 백반 섞은 소주로 아구창과 입 안을 닦아내었다.

저녁때가 되어 마을의 사방에서는 쑥불의 매캐한 연기가 타올랐다. 구덩이와 뒷간마다 조

개껍질을 태워서 빻은 생석회가루와 재가 뿌려졌고 뒷산 등성이에서 화장한 시체들도 모두

땅속에 깊이 묻었다. 저녁이 되자 환자들의 열은 급히 올라가 앓는 자들의 신음이 더욱 높

아졌다. 배가 팽팽하게 불어난 사람, 열에 들떠서 연신 물을 달라고 조르는 사람, 환청으로

광증을 보이는 사람들로써 촌장네 여섯 칸 초가는 음산하게 들떠 있었다. 기둥마다 꽂아놓

은 관솔 횃불이 휘황하건만 오히려 널브러진 병자들로 해서 집안은 어쩐지 썰렁해 보였다.

길산이 환자를 간호할 때, 냉수에 적신 수건을 갈아주기도 하고, 하열탕도 먹였고, 방뇨한

자리를 치우기도 하였다. 환자 하나가 제 옆을 다리짓하면서 열에 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죽었수. 부정타지 않게...좀 빨리 치워주오." 길산이 홑이불을 들춰보니 동공이 멎

어 있고 벌린 입에는 백태가 두텁게 끼었는데,안색은 완전히 흑생이고 가슴과 목 언저리에

는 울긋불긋한 두드러기가 돋아나 있었다. 길산은 죽은 자의 몸 위에 홑이불을 뚤뚤 감아서

방 밖으로 끌어냈다.

"정서방, 어디 있나?"

정학이 달려왔다.

"또 한사람 나가네."

"이거 의원두 소용없으니...이러다간 모두 죽고 말겠군. 혹시 우리까지 고택골 가는 거 아

니우?"

"신이는 어디 갔어?"

"헌경이 아저씨께 유학님 분부 전달하러 갔는데."

"하는 수 없지. 나하구 같이 들구 나가세."

길산이 거적과 나뭇가지로 엮은 들 것 위에 시체를 누이고 앞에서 들었으며 정학이 뒤를

들었다. 토담 안으로 최헌경이 들어섰는데, 그뒤에는 사람을 등에 업은 정신이가 보였다.

헌경은 마루 위에서 조제를 하고 있던 설유징에게 말하였다.

"유학 어른, 야단났소이다. 어계원들이 모두 돌아가버려서 꽃재엔 마을 사람들뿐입니다.

모두들 마을로 내려오겠다면서, 집에다 불을 지른 놈들에게 앙갚음을 하겠다구 야단입니다."

설유징은 침착하게 물었다.

"어찌하다 일이 그리되었소?"

", 아까까지두 아무 일이 없었는데, 저녁나절에 환자 한 사람이 생겨났지요. 시름시름

오한이 있다고 드러눕더니 갱신을 못하구 앓기 시작했소. 모두들 귀신이 꽃재까지 붙어 올

라왔다구, 소란이 일어나 계원들은 말릴 새두 없이 하나 둘씩 빠져 달아났습니다. 그리구 마

을 사람들두 기왕에 병에 걸려 죽을 것을 집 잃고 한데서 고생하지 않겠다며 술렁입니다."

"그 사람이 오늘 앓기 시작한 환자인가?"

설유징은 정신이 업고 들어왔던 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또 누가 앓게 될지 모를 일이올시다."

"예방을 철저히 하고 조금만 조심하면 걱정없네. 병독이란 입으루 들어가는 게니까."하고

나서 설유징은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는 다시 토담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더니, "몰려들 오

는군.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

하는 설유징의 말을 듣자 최헌경과 정학 형제와 길산은 모두 담 밖으로 나가보았다. 어둠속

에서 움직여 오고 있는 무리들이 보였다. 설유징이 말하였다.

"내가 저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얘기하지. 만일 듣지 않으면 장서방 하구 정서방 형제가

맡아서 적당히 몽둥이 찜질을 해줘두 좋아."

설유징은 벗어두었던 중치막을 입고서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로 걸어갔

. 그뒤를 길산이와 정학 형제가 뒤따랐고, 최헌경이는 설유징의 왼편에 나란히 따라갔다.

설유징이 그들ㅇ르 막아서서 말하였다.

"왜들 내려오나?"

꽃재말 사람 중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우리는 이미 살기는 틀린 사람들이우. 병독이 퍼져서 모두 앓아 누울 판인데 이제 이슬

을 피할 집까지 잃었으니, 어디 타다 남은 집에라도 찾아들어가야겠소." "식구들을 데려갈

테야요."

"이러다간 모두 죽고 맙니다.|

제각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잠잠히 듣고 있던 설유징이 고함을 크게 내질렀다.

"예끼! 이 어리석은 놈들 같으니. 염병이란 병독이 옮아서 퍼져나가는 병이니 성해 보이던

자도 갑자기 앓게 마련이다. 또한 앓던 자도 병마와 싸워 이기면 살아날 수가 있지. 이제 너

희들이 이렇게 동네루 내려와서 섰이면 그야말루 모두 병에 걸려 죽게 될 게야. 활인은 우

리에게 맡기고 한 달포쯤만 동네에서 떠나 있으라구 그랬잖느냐." "달포 동안 뭘 먹구 살

란 말이우."

"내가 내일 여기 최서방과 함께 관가에 가서 군수를 만나 구휼미를 더 풀어내도록 할 터

이다. 어서들 올라가지 못하겠느냐!"

마을 사람들이 술렁이는데 그중 제법 혈기 남은 자가 있었던지 불끈거리며 나섰다.

"우린 못 올라가겠소, 죽어도 동네에서 죽을 테유."

"어째서 남의 동네에 들어와서 감 놓아라 배 벌려라 한단 말이우. 염병두 우리가 걸려서

우리가 죽을 텐데..."

"당신들이 무슨 관원이요, 상전이요?"

설유중은 앞에 섰는 마을 젊은이들이 떠들어대는 것을 보자, 옆으로 물러서면서 중얼거렸

.

"장서방, 치도곤이를 좀 해주게."

정학이가 먼저 나서더니, 그중 시끄러운 자의 멱살을 잡아서 벽에다 힘껏 밀쳐버렸다.

"말 안 들을 테여? 정말 죽구 싶다면 내 보내주까."

길산이도 옆에 섰던 자의 가슴팍을 거세게 밀어내었다.

"말 듣구 올라들 가시게."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린 자들이 더구나 힘깨나 쓰는 정학 형제와 길산을 어찌 당하랴.

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물러가버리고 만다.

"어서 안심들 하구 며칠만 올라가서 고생들 하게. 이제 두고 보아, 모레쯤 되면 여기서 다

나아서 그리루 올려 보낼 사람들이 많이 나올테니까."

마을 사람들은 다시 꽃재 쪽으로 물러갔다. 설유징은 그들을 안돈시키기 위해 최헌경을

보내어 잘 타이르도록 하고서 정학 형제를 딸려 보냈다. 길산과 어계 총대가 교대로 밤을

새우면서 환자들을 돌보았고, 설유징은 마루 끝에 기대어 앉아 졸다가는 증세가 나쁜 환자

를 돌보고는 또 잠들면서 밤을 지새웠다. 아침에 설유징은 진미를 청원하러 관가에 가기 전

에 최헌경과 의논을 하였다.

"내가 안창 고을에서 왔으니, 군수가 나의 청원을 몹시 고까워할지두 모르겠네. 그렇지만

드러내놓고 화를 내거나 하지는 못할 터이지."

"저희 같은 상한이 얘기하는 것보다야 낫겠습지요. 고성군수는 부임이래 선정은 하나두

하지 못한 아주 용렬한 사람이올시다. 송사를 가리지 못하여 처리에 공평하지 못하였고,

연히 가벼운 죄를 범한 양민을 끌어다가 장형을 가하여 몇 명이 목숨까지 잃었다는 것입니

. 특히 환곡을 빌려주었던 일이 트미하고 구휼미도 쓸데없는 일에 낭비한 것이 틀림없소

이다. 그리고 끛재말 사람들게 들으니, 진영의 수군역이 혹심하여 돈으로 무명을 사서 대납

한다는 것이오. 이러한 비위 사실이 있으니, 낱낱이 알아두셨다가 만약에 군수가 구휼미를

낼 뜻을 보이지 않으면 은근히 뒷전으로 협박을 해두 좋을 듯합니다." 설유징은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게 용렬한 자일수록 뒤는 질긴 법이니, 만약에 구휼미를 내어주고 나면 동네 사람들

을 시켜 선정가라도 지어 부르게 하지. 겉으로 모른 성싶어도 뒤에 가서 까탈을 부릴지두

모르잖겠나. 꽃재말말고도 산협에 기민은 많을 걸세. 자네두 함께 가겠나?" "그러지요.

마을 촌장두 데리구 가도록 하시지요." 구휼미를 더 청원하기 위하여 설유징과 최헌경과

촌장이 관가로 나갔고, 길산이와 총대와 정학 형제는 하루 종일 환자를 돌보았다. 열이 내린

환자가 있더니 저녁나절부터는 차츰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꽃재에서 가족을 데려다

상면시키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병이 나은 듯한 모양을 보고는 기뻐서 부여잡고 우

는 것이었다. 두어 사람이나 열이 내려서 모두 가족을 데려다 뵈었다.

저녁대가 다 되어서야 설유징 일행이 돌아왔는데 의외로 일은 수월히 해결된 모양이었다.

총대가 물으니 최헌경은 대답하였다.

"조목조목 따져 들어가니 사또가 좌불안석이더구만. 설유학 어른이 참...말씀은 청산유수더

라구. 사또가 책방을 시켜서 군내 부호들을 모두 끌어들여 진미를 재량껏 내게 하더군. 지필

묵을 내어놓고 적어대라 하니 허는 수 있는가. 모두들 적어내데. 내일 아침까지 하인들을 시

켜서 미곡을 보내올 걸세. 사또 눈치가 진미를 낼 것이 창고에 있긴 하지만 부호들에게서

빼내구 관곡은 제가 착복할 기미더군. 우리야 무슨 상관 있나, 구휼미만 타내면 되었지." "

어이구 공연히 성님께 부추김당해 쫓아와가지구 제대루 좋은 일두 못하구, 오늘은 여차직

하면 팽개치구 달아날 참이었소."

정학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말했고, 길산은 설유징에게 오늘 원기를 회복한 환자들이

있어 분부대로 가족을 데려다 보여주었다고 말하였다. 설유징은 그자들에게 가서 진맥을 해

보고 나서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이제 병후 조리만 잘해낸다면 이 사람들은 완전히 쾌차한 사람들일세. 내가 독서하는 틈

틈이 익힌 의술이지만 이처럼 보람을 느낀 적이 없었네. 참으로 좋은 일을 시켜주어 자네들

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네."

열흘쯤이 지나서 네댓 명이 더 죽었으나 시초부터 병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부분 쇠약해진 대로 염병을 떼쳐버린 듯하였다. 아직 앓는 이들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았으

, 병후 조리를 제대로 못해낸 탓인 듯하였다. 그동안 함께 활인에 나섰던 설유징과 최헌경

과 길산과 정학, 정신 형제들 사이에는 각별한 정이 생겼다. 꽃재말 사람들도 유학 어른이라

부르며 무슨 일이든 가지고 와서 상의하였고, 최헌경이는 특히 노인네와 아이들이 좋아하였

으니 옛말 재조가 구수했기 때문이었다. 원근 사방에는 꽃재말에 역병 돌았단 말과 도사가

와서 활인했다는 과장된 소문까지 떠돌았다. 처음에 내빼버렸던 고성포 어계 사람들도 나중

에는 하나 둘씩 되찾아와 마을에 새 집을 세우는 일을 도왔다. 정학 형제는 그냥 헤어지기

가 못내 섭섭하다며 길산과 최헌경과 설유징을 수자리골 제 집으로 데려갔다.

간혹 형제가 집에 왕래는 하였어도 농사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건만, 사정을 아는 어계 동

무들이 품을 내어 밭을 갈고 두엄도 내고 하였었다. 정신이가 먼저 가서 어머니를 도와 닭

을 잡고 소주를 걸러 손님맞이 준비를 했고, 점심때쯤 하여 그들은 수자리골로 나갔다. 집에

당도하니 오랜만에 맡아보는 고기 냄새라 그들은 회가 동하였다.

"살진 마늘에다 톡 쏘는 소주를 마시면 장내가 시원히 뚫리겠네."하면서 최헌경이는 주먹

코를 킁킁거렸고, 설유징도 술 생각이 간절한 모양이었다.

"허허, 술 냄새를 맡아본 지가 벌써 십 년은 되는 것 같군." 부엌에서 도마질을 하던 학

의 모친이 바깥을 기웃이 내다보니 하나는 유건 쓴 선비 행색이요, 또 하나는 갓 쓴 양반

차림인지라, 주눅이 들어 뭐라고 맞이할 말을 찾다가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 눈치를 채고서

최헌경이 주변 좋게, "자당께서 이런 걸귀들 치레하시노라 욕보십니다."

라고 풀어놓았다. 그제서야 학의 모친은 웃음기가 돌며 건성 치마를 싸쥐고 물 묻은 손을

닦는 시늉이었다. 설유징이 두 손을 맞잡고 공손히 인사 올리니, 모친은 매우 당황하였다.

"태산 같은 아드님을 둘이나 두셔서 얼마나 믿음직하십니까." "아직 철이 없지요. 나으리

께서 꾸짖구 가르쳐주셔요." 설유징은 아직도 그 공손한 태도를 고치지 않고서 말하였다.

"저는 정서방의 동무 되는 사람입니다. 비록 먹물은 조금 먹었다 하나, 나으리란 말씀을

들을 위인이 아니올시다."

설유징이 껄걸 웃자, 정학의 모친은 더욱 송구스러워서 연신 허리를 구부렸다. 정학이 다

시 길산의 어깨를 밀면서 말하였다.

"어머니 들으셨지요? 지난번에 공수원서 매부를 살려주신 성님입니다. 왜 나허구 기운자

랑 했다구 그랬지요."

"오라 장서방이로구나."

하는데 길산이는 맨땅에 넓죽 엎드려 문안 인사를 드렸고 모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게. 땅바닥에서 큰절은 원..."

이렇게 수월하고 편하게 인사가 오가는 모습을 보고 최헌경과 설유징은 얼결에 눈을 맞추

었다.

"얘야, 그런데 아까 관가에서 나졸이 왔더라. 꽃재에서 아직 안 돌아왔느냐구 묻던데..." "

제놈들이 우린 왜 찾어...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 앉읍시다. 어머니, 아무거나 빨리 좀 주시

. 출출해서 회가 요동이우."

"너는 나와서 물 좀 길어라."

모자간의 오가는 말을 들으며 그들은 형제들의 방에 들어가 앉았다.

"헛허, 뭐니뭐니 해두 효도하려면 우리 정서방 얼른 장가가야겠군." 최헌경이가 그리 깨

끗하지 못한 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말하였다.

"밥 잘 먹구 일 잘하겠다, 인물 훤칠하구 기운이 장사요, 사내 중에 사내인 학이를 내가

중신이나 좀 들까아?"

빈 상을 들고 오던 정신이가 최헌경의 말을 듣고 끼여들었다.

"어유 말씀 마시우. 우리 언니는 처자만 보면 염라국의 귀졸이 되지요." "아니...그러면 정

서방이 부끄럼을 탄다는 말인가?"

설유징도 웃으며 한마디 하니 정신이 손을 홱홱 내저었다.

"그 반대입죠. 우리 언닌 여자를 뱀보다두 싫어합니다. 그래서 애꿎은 저까지 몽달귀신 될

모야이우."

물을 긷고 손을 닦으며 들어와 앉던 정학이가 아우를 타박하였다.

", 참말 내 평생에 어디 너 장가드나 두구 봐야겠다." 술과 안주와 밥이 들어와 객쩍은

농담이 잠깐 끊기는데 밖에 더그레자락이 보이더니 나졸들이 쑥 들어선다. 뒤를 따라서 갓

쓴 채수염쟁이가 헛기침을 하면서 들어섰다.

"정서방, 책방 어른 오셨네."

정학이 한참 국밥을 뜨다가 엉거주춤 일어나며 허리를 굽신해 보였다.

"아니 어르신이 우리 집엔 웬일이슈?"

책방은 다시 밭은기침을 하고 나서, "손님이 오셨다지?"

"그러우...이거...올라와 점심 좀 드시지요."

"손님들 중에 어느 어른이 유학님이십니까?"

하다가 책방은 설유징의 머리에 얹힌 유건에 눈이 멎자 허리를 급히 숙이고 머리는 치키면

서 말하였다.

"문안이오. 소생 이 고을 사또의 책방으루 지내는 송가올습니다." 설유징은 소주잔을 기

울이면서 말하였다.

"그런가? 자네가 어째 나를 찾나?"

",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꽃재에서 병자를 진휼 활인하신 것을 사또께서 아시고 좀 뵙

자 하십니다. 관의 일로 그리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시회나 함께 하면 뱃놀이를 가시자는

것입니다."

설유징은 멋쩍게 픽 웃었다.

"모를 일이로군. 사또께서 이미 내 청원을 들으시구 구휼미까지 거두어 주신 터에 부르실

일이 어디 있겠나?"

"그저 샌님과 교유를 하자는 뜻입니다."

"내야 원래 안창에 잠시 머물고 있지마는 글이나 읽는 사람이 고을 수령과 교유하다니...

안될 말일세. 사또의 후의를 감사드린다구 자네가 잘 아뢰어주시게." 책방은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글쎄요, 사또께서 요즘 군내에 돌아가는 공론을 들으시고 샌님께는 공명의 계자를 내리

신답니다. 그리고 저희를 비롯한 향리들이 이번 진휼에 관한 사또의 선정을 기리는 비를 세

울까 하여..."

책방의 말이 거기까지 갔을 때에 설유징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최헌경도 빙긋 웃고

있옸고, 책방은 영문을 모르겠던지 멀뚱한 시선으로 설유징을 쳐다보았다.

"그래! 내게 계자를 내린다면 직함은 무엇이라던가?" 웃음을 그치지 않고서 설유징이 묻

, 책방은 얼김에 따라 웃으며 말하였다.

", 풍헌을 드린다 하옵니다."

"그리고 사또게서는 선정비를 세워드린단 말이렷다." "지금 좌수와 아전들이 전곡을 염출

하구 있습니다. 선정비에는 샌님과 최서방 등의 일도 올라갈 것입니다."

거칠게 어깨를 떨며 웃어대던 설유징이 웃음을 뚝 그쳤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책방을

노려보았다.

"이리 좀 가까이 오게. 내 자네에게 줄 것이 있어."

책방은 가까이 다가가서 상놈들 사이에 동저고리 바람으로 동석하여 술을 마시고 있는 이

괴이한 선비의 곁에 고개를 내밀었다.

"네 이놈!"

다짜고짜로 욕설이 떨어지며 설유징이 책방의 채수염을 힘껏 죄어 잡았다.

"......이게 무슨..."

책방은 하도 놀랍고 창피하여 눈을 희뜩이며 입을 벌렸다.

"네 이놈 듣거라. 이 설유징이가 꽃재말에 가서 진휼한 것은 한고장 사람 사이의 의리로

한 짓이요, 전혀 허명을 탐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환로에 나가는 것조차 버린 내가 글깨

나 읽는 유자로서 공명의 계자를 얻겠느냐, 내가 무슨 초상집 개라더냐. 이것은 필시 너희

사또의 생각이 아니라 너 같은 쥐새끼들의 간계이리라. 나라의 하늘 같은 녹을 받고 백성을

자식같이 아실 관장께서 그런 용렬한 안을 내실 리가 없다." "...이것...놓구 말하시우."

"가만히 있거라, 더구나 선정비를 세운다고? 아무리 명관이 다스리는 고을이라 하더라도

폐단이 있게 마련이다. 이미 관장 된 자는 자기의 잘못을 드러내어 고치고 잘한 것은 스스

로 감추는 법이다. 어버이가 자식 사랑한 것을 자랑삼는 꼴을 보았느냐. 대개 선정비나 세우

는 짓은 백성들의 피와 땀을 그것으로 가리워보고자 함이다. 벌거벗고도 제 눈만 가리면 수

치스럽지 않다는 어리석은 짓이다. 너희 아전 향품배들이 쥐새끼처럼 나서서 남징하려는구

. 이것도 필시 사또의 뜻이 아닐 게다. 위로 임금을 섬기고, 학문을 쌓아 관직에 오른 사

람이 그렇게 뻔뻔할 수는 없다. 내가 네놈의 똥이 가득 찬 뱃속을 청정한 샘물로 씻어줄 터

이니, 보약인 듯이 좀 마시구 가거라."

하고 나서 설유징은 곁에 놓였던 대접을 들어 책방의 수염을 힘껏 당긴 뒤에 벌려진 입에다

사정없이 부어버렸다. 꿀꺽이며 묘한 소리를 내면서 냉수 한 사발이 책방의 목구멍을 넘어

갔다. 설유징이 수염을 탁 놓아주니 책방은 얼른 소매로 입언저리를 닦아내고 숨이 찼는지

열이 났는지 거칠게 헐떡이더니 재빠르게 달아나버렸다. 이윽고 여럿의 웃음이 한꺼번에 터

져나왔다.

"보았나, 보았어? 꼭 홍수 때 건져낸 새앙쥐 꼴이더라, 눈알도 동글동글하고 코는 뾰죽,

수염은 성긋성긋, 영락없는 쥐새끼여."

"쥐가 아니라 고게 여우요."

최헌경과 정학이 주고받았다. 설유징이 술잔을 학이에게 건네주면서 말하였다.

"내 분김에 욕은 주었으나, 자네네를 해코지하려 들지 않을까 그게 걱정일세." "아닙니다.

고성서는 저희 어계를 그리 깔보지 못하지요." "아따 큰소리치기는...그야 우리끼리나 그렇

."

최헌경이가 장담하는 정학에게 말하였고, 신이가 되받았다.

"우리 언니하구 나하구 둘이서...벌써 정수리에 쇠똥두 떨어지지 않았을 제, 진의 수군 장

교놈들을 두드려 잡았습니다. 우리가 심하게 말썽만 피우지 않으면 대개 관원이란 왈짜에게

는 너그러운 법이유."

설유징이 웃음을 머금었다.

"허긴 그럴 법하이. 그게 너그러운 것이 아니라 화근이 될까 귀찮아서일세. 내가 강릉 있

을 제도 감영진의 군문을 도끼루 뽀갠 자가 있었는데 취중이라 하여 곤장 십 도루 방면되었

. 관이 백성들게 떳떳하면 그렇지두 않지. 오히려 어둡고 허술한 관장일수록 그런 사람들

에겐 별로히 까다롭게 하지 않네. 자네처럼 생업에 힘쓰며 양순하면 모르되 공연히 마을 사

람들게 행패나 하러 다니는 놈들도 대개는 나졸배나 비장 무리들과 한통속이지. 그러니 완

력이라두 있어야지."

최헌경이가 말하였다.

"유학 어른 이제 저희 집으로 가셔서 저녁 들고 밤새 술 먹으며 세상 이야기나 해주시지

."

"뭐 기왕에 주저앉았는데...우리 집서 푹들 주무시구 가시우." 정학은 손님들을 놓칠까 조

바심하는 것이었다. 그때에 잠잠히 앉아서 술만 마시던 길산이 불쑥 말하였다.

"나는 산에 오를랍니다."

"아니 게가 어디라구 이맘때에 오른단 말이우?"

"아무래두 걱정이네. 대사님께서 워낙 정처가 없는 분이고 보니 지금쯤 암자를 비우고 어

디론가 떠나셧을지두 모르지. 내 광동 같은 꼬락서니를 보셨으니 용서를 해줄 리가 없지."

길산이 운부암을 뛰쳐내려오던 전말을 꽃재말에서 함께 밤새우며 들었던 설유징은 말하였

.

"그분은 자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구 계시네. 아마 속으로는 장서방보다두 애를 태우실지

모르지."

"우리두 찾아가 뵈울라네."

최헌경이 그렇게 말하자, 설유징은 고개를 저었다.

"대사님께 여쭙고 허락하시면 가 뵙도록 하게나. 이번엔는 나하구 장서방만 올라가 뵙지.

장서방은 게서 뫼시구 몇 년을 지날지 모르지만 내게두 기연이 있어서 예전 스승님의 일도

있고 하여 꼭 뵈어야겠네."

길산이 말하였다.

"그러지요. 유학 어른과 함께 가십시다. 나두 혼자 올라가서 대죄하기두 그렇구...곁에 계

시면 좀 낫겠지요."

그들은 정학의 집에 술이 떨어지자 정신을 보내어 읍내까지 나아가 탁주를 받아오게 하였

. 최헌경은 술이 거나해지자 계속 우스갯소리를 하여 사람들을 웃겼다. 설유징은 그들과

동석하여 차차 기탄없는 말들이 오가게 되자 몇 년 동안의 외로움이 씻은 듯이 가셔지는 것

만 같았다. 설유징은 패설에도 한몫을 거들었다. 드디어 최헌경이가, "유학 어른이 이제 보

니 학문은 안하시구 저자의 음담만 귀동냥한 모양일세."하게끔 되었는데 설유징은 그 말이

더욱 기분에 맞았던지 껄걸 웃었다.

"고린내나는 한서를 읽어 뭘 해. 나는 이제부터 이따위 유건은 쓰지 않겠네." 설유징이

흥이 났는지, 유건을 벗어서 마당으로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길산과 설유징은 함께 금강산 만폭동으로 올라갔다. 유점사 계곡의 물빛과 산색은 길산이

내려올 때와 다름이 없었건만, 길산의 발걸음은 만폭동 어귀가 가까워올수록 점점 무거워지

기만 하였다. 무슨 낯으로 운부대사를 다시 대하랴 싶었다. 운부암의 가파른 절벽 가녘을 돌

아 올라가니 토방에는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이번에는 뒷봉 귀틀집에 가셨나 하여 암자 뒤

편의 조도를 돌아 나가니 길산이 처음에 헤쳐 일구었던 밭에는 고랑이 정연하게 패어 있었

고 뭔가 자라나고 있었다. 운부가 그 밭의 나머지를 개간했던 것이었다. 길산은 귀틀집에 들

어가보니 곡식 자루가 많이 없어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대사님께서 출타하셨나?"

힘없는 법당으로 돌아오는 길산에게 설유징이 물었다. 길산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번 획 나가시면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는 분이니...아무래도 나는 대사를 뫼실 놈이 아

닌가 보우."

설유징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손가락질을 하였다.

"헌데...저것 보게."

토방 구석에 구겨져 놓여 있는 바랑과 탁발이 눈에 띄었다. 설유징이 말하였다.

"운부의 성미를 모르긴 하여도, 승려가 먼길을 떠날 젠 저 바랑과 탁발을 지니는 법일세.

아마 인근에 출타하셨는지두 모르겠네. 너무 낙심 말어 이 사람아. 자네가 암자에 하루 이틀

기거하려구 금강산에 온 사람두 아니잖나."

"그러우...설사 운부께서 암자를 버리구 떠나셨을 리는 없겠지요." 그들은 귀틀집에서 저

녁을 지어 먹고 법당으로 되돌아와 그날 밤을 함게 지냇다. 설유징이 여러 가지 얘기 끝에,

"뒷봉을 둘러보니 매우 은밀하구 맞춤한 곳일세. 만약에 저쪽의 땅을 모두 개간해놓는다면

한 부락이 충분히 웅거할 만하더군."

길산이도 대사 말이 생각났다.

"운부대사께서 올해 안으루 저 풀밭을 모두 개간하시겠다 하셨수. 내년부터는 사람이 많

아질지두 모른다구 그러십디다."

", 내가 보기에두 이곳은 사람을 기를 만한 곳일세." 설유징은 운부의 궁량을 헤아려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밭을 개간하여 식량을 구하고, 그를 찾는 인재들을 가르쳐서 무엇인가

큰 일을 도모하려는 것이 분명하였다. 아마 병을 기르려는 뜻이 아닐까?" 백성들의 참상을

도와주는 것에서 더욱 한걸음 나아가, 이런 세상을 혁파해보려는 뜻은 아닌지. 결국 운부의

숨어 사는 연유가 이러하다면, 세상을 등지고 홀로 앉아 글이나 읽으며 세월을 보내는 자기

와는 다를 것이 분명하였다.

"어쨌든 하루가 되든 열흘이 되든 운부를 만나구 내려가겠다."라고 설유징은 중얼거렸다.

며칠 동안 그들은 함께 기거하며 뒷봉밭의 풀밭을 개간해나갔다.

일손이 서툴던 설유징도 차차 익숙해져서 보름이 지나자 두 사람의 일손은 척척 맞아 돌아

갔다. 밥을 먹으면 꿀맛이요, 밤에 토방에 와서 쓰러지면 수심걱정 없이 대번에 잠이 들어

평화로운 밤을 보내곤 하였다. 설유징의 창백하던 얼굴은 볕에 그을었고 단정하던 상투도

봉두난발이 되었다. 하루는 그들이 저녁을 늦게 지어 먹고 어둑어둑해져서야 법당으로 돌아

오니, 토방에는 희미하게 관솔불이 켜져 있었다. 길산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당에 누군가의 기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반백의 머리를 늘어뜨린 운부

의 자태가 보였다. 길산은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리면서 문안 인사를 올렸다.

"대사님 기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저녁 먹구 오는 길이냐?"

운부의 첫마디는 마치 엊저녁에 헤어졌다가 만난 동네 사람끼리의 말투처럼 범상하였다.

길산의 뒤에서 머뭇거리던 설유징도 함게 엎드려서 인사를 드렸다.

"인사 올립니다. 안창 사는 설유징이올시다."

운부는 그저 무심하게 끄덕일 뿐이었고, 길산에게 손짓을 하였다.

"이리루들 올라오너라. 어디 네 얘기나 좀 들어보자." 길산은 토방 위로 올라가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설유징도 섬돌에 올라 방 덕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그래...산을 내려간 뒤 한 달이 되어 돌아왔으니 그동안 어디서 뭘 했느냐?" 운부는 미

소를 띄우고 길산에게 다정히 물었고, 길산은 뒤통수를 긁으며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하였다.

"..., 고성에 나갔었습니다."

운부는 길산의 겸연쩍어하는 표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고성 나가서 좋은 일이 있었

던 모양이로다. 네 얼굴에 길기가 떠 있는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운부는 잠시 눈을 감고

묵주를 헤아리고 있더니, 설유징을 향하여 불쑥 물었다.

"그래, 고성서 이 아이와 사귄 동무냐?"

"......"

하면서 설유징이 머뭇거리는데, 길산은 말하였다.

"아닙니다. 이분은 선비님이십니다. 대사님을 뵙겠다구 해서 소인과 동행했지요." 운부는

설유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징이 길산의 도움을 얻어 말을 넣을 틈을 잡으니, 다소

성급하여졌다.

"예전에 정선에서 대사님을 뵈온 적이 있습니다."

"정선에서?"

", 먼발치루 뵈었습니다."

운부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월초선생 문하인가?"

"그렇습니다. 스승님은 저희들에게 늘 반계 선생과 대사님과 말씀을 하셨지요. 그때엔 소

백산에 계시다구 들었습니다."

"반계...그이두 이미 작고했지. 그래 월초 선생은 혹시 아직 살아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아무도 들이려 하시질 않아서 식구들까지 그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

지요."

운부는 다시 아무것도 물으려 하지 않았다. 염주를 헤아리고 앉은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미동조차 엿보이질 않았고, 손가락만이 규칙적으로 염주알을 넘기고 있었다. 길산과 설유징

은 그렇게 앉았기가 몹시 무료하였다.

"대사님...저희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면서 길산이 드디어 일어나려 하는데, 운부가 눈을 감은 채로 말하였다.

"그냥 앉았거라. 길산아 너는 고성에서 뭘 했느냐?

길산이는 다시 제 뒤통수를 긁었다.

"......고성 꽃재말이란 데에 역병이 돌아서, 어계 사람들과 활인하는 사업을 도와주었

습니다."

"그래, 지금은 역질이 돌기를 멈추었느냐?"

"다행히 여름철이 아니라서 많이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설유징이 대신 대답하였다.

"길산이는 어찌 생각하느냐?"

운부가 물었으나, 길산은 어리둥절해서 멀뚱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꽃재말에 가서 활인을 해본즉, 무슨 생각이 나더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다구 여겨졌습니다." 길산은 제가 느낀 대로 말하였건만 운부는 그때에 눈을

번쩍 뜨고 재우쳐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느냐?"

"소인이 여기 유학 어른과 함께 밤을 새우며 간호를 했건만, 기력이 남은 자들은 병고와

싸워서 희생되었고, 쇠잔한 자는 죽었습니다. 애를 써서 살려보려고 하여도 죽는 이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운부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몇 사람이나 죽었는고?"

"한 여남은 명이 치유 도중에 절명했지요."

설유징의 대답에는 아랑곳없이 운부는 계속해서 길산에게만 말을 던졌다.

"길산아, 네 일찍이 광대의 업으로 살아왔다 하니 잘 알겠구나. 빈촌에서 굶어 부황이 들

어서 죽는 자들이 어떻드냐?"

길산이 잠깐 자신이 어릴 적부터 각처를 흘러다니며, 굶주림에 시달렸던 일과 산골 곳곳

에서 목격한 기민들의 참경을 떠올려보았다.

흉년은 물론이어니와, 대풍이 들었다는 해에도 봄부터 여름까지에 노인과 아이들이 많이

죽습니다. 산에서 풀뿌리를 캐다가 그대로 절명하기도 하며, 냇가에서 붕어를 잡다가 혼절하

는 것두 보았는데, 어찌 다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운부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봐라, 굶주림이란 가장 혹심한 역질이니라. 지난 계묘년의 역질에 겹친 기근 때에는 수만

명이 죽었다 한다.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내리는 재해라구 하겠느냐, 오히려 사람이 내린 재해

이다. 가렴주구의 폐해는 고쳐지지 않고서 다만 환난 때에 죽을 끓여서 구호한다며 나누어

먹이니 이것은 독약과 같은 것이니라. 오히려 죽을 얻어먹기를 바라는 백성들은 거의가 목

숨을 잃고 만다. 애초부터 주린 창자라 텅비었는데 묽은 죽이 무슨 활인을 해내겠느냐. 심사

원려라는 것은 바른 정사와 뚜렷한 제도가 쌓여야만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근본이 엄중히

서 있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잉어가 자라는 연못에서 가물치가 함께 자라면 잉어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 연못 모두가 가물치의 연못이 되는 것이다. 그럴 적에 한두 마리를

잡아 없앴다 하여 달라지겠느냐. 모두 남김없이 잡아내야 하느니라. 더러운 옹기를 씻지 않

고 샘물을 길어다 부으면 그 물은 더러운 물이니라. 물이 깨끗해지려면 먼저 그 담는 곳을

깨끗이 하여야만 한다. 그처럼 죽이나 끓여 먹이는 활인은 아무것두 바꾸지 못하는 법이다.

죽을 얻어 먹느라고 분주하여 밭고랑을 갈 겨를이 없게 되면, 금년에 비록 살아 남을지라도

명년의 기근을 넘길 수가 없음과 같다. 꽃재말의 재난만을 보고 흔해빠진 빈촌의 굶주림을

잊어서는 안되느니라. 그러나 역시 활인은 좋은 일이다. 제 식구를 도운 듯이 여겨야 할 것

이다. 절대루 뽐내는 마음이 있어선 안된다."

길산이 고지식하지만 순박하게 말하였다.

"헌데 담부터는 그런 일 안할랍니다."

운부는 껄걸 웃었다.

"허허, 그 녀석...농투성이가 되러 금강산에 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루, 의원이 되려 고성

에 내려간 것은 아닐 텐데...게서두 성깔을 부렸느냐?" "진휼미가 안 나올 적에는 마음 맞

는 동무들만 있었다면 관아를 들이치구 싶었습니다. 까짓 불을 싸질러버리지요."

운부는 법당 밖의 어둠속을 내다보았다.

"이제 세상은 너무 낡아서 못쓰게 되어버렸다. 사람이 만든 것은 무엇이나 못쓰게 되고

부서지도록 인과가 정해져 있느니라."

운부는 설유징에게 말하였다.

"월초 이수는 청정한 선비였으나, 조정에 대하여 삐쳤던 분이다. 받아들여지지 못하므로

원망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러나 반계 유형원은 내가 만났던 어떤 선비보다도 높은 뜻을 가

졌던 사람이다. 대저 글 읽는 자들의 양심이란 한편으로는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이 그 원천

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허심탄회할 수가 없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기가 내놓은 안을 통

하여 제도만을 바꾸어보자는 데에 있다. 그들이 기대는 것은 끝까지 백성이 아니라 임금이

. 그러니 애처롭게 꺾어져 숨어서 사는 일로 그치느니라. 그대가 날 찾아온 것은 숨어서

사는 도리를 물으러 찾아온 것인가?"

설유징은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대답하였다.

"아니올시다. 그저...이 사람에게서 대사님의 말씀을 듣고 전에 스승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

도 생각났고, 요즈음 제 살림살이가 매우 적막합니다. 스승님 뵈옵듯이 간절하게 뵙고 싶었

을 뿐입니다."

", 정선에서 월초 선생을 찾아갔던 것은 부안 소식을 들어볼까 해서였지. 그때에 자네는

홍안 소년이었겠군. 물론 과거는 오래 전에 폐하였겠군." "...강릉 살 제 이미 치웠습니

. 스승님의 영향두 많았습니다만 그 뒤로는 집에서 농사잡록이나 한책 꾸며볼까 하여 종

묘판을 꾸미고 그런 것에 소일하구 지냅니다. 실은 이번에 고성 나와서 활인을 해보게 된

것도 틈틈이 약재를 모아두고 의서를 보아두었기 때문이올시다. 이제 남은 세월은 헛되이

보내다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운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상놈이 되어야 하지, 유생의 버릇이 추호라도 남아 있어선 안되어. 자네 같은 이는

상인 동무를 많이 사귀어야 하네. 백성들의 순박한 뜻을 배우지 않으면, 농사잡록이든 의술

이든 활인이든 아무 쓸모가 없네."

"대사님은 어찌 불가에 드셨습니까?"

운부는 대답을 않다가 다시 길산에게로 말을 돌렸다.

"그래...올라와서 밭은 좀 둘러보았느냐?"

", 유학 어른과 둘이서 한 두락을 개간해놓았습니다." "내일부터는 내가 몇가지 일러

줄 테니 그대루 시행하도록 하여라." 운부는 더 이상 입을 떼지 않고 고요히 앉아만 있었

. 운부가 다시 입을 떼지 않으니, 두 사람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설유징도 욕심 같

아서는 밤새껏 운부대사의 말씀을 듣고 싶었으나 얘기를 할 기색이 엿보이질 않았다. 드디

어 길산과 유징은 서로 눈을 맞추고 나서 길산이 말하였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디서 자겠느냐?"

"뒷봉 귀틀집서 쉬겠습니다."

운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칸 토방에서 운부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기도 두 사람에게

는 오히려 송구스러웠던 것이고, 운부도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길산과 유징이 나간 다음

에도 운부는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강진의 쓸쓸한 바닷가가 운부의 뇌리에 떠올랐다. 낮은 산과 좁다란 들판, 밑바닥에 펼쳐

지던 남해의 쪽빛 물결, 그리고 탱자나무들. 운부의 부친은 가끔 그를 찾아든 한양 손님들과

박주를 나누며 시를 짓고는 하였다. 강진에 귀양와서 동네를 격하여 지내는 이들도 있었고,

제주로 귀양가는 길에 거쳐서 가는 이도 있었다. 배다리내에 있던 그의 집은 언제나 손님으

로 들끓었다. 조부가 왜란 때에 강진, 장흥, 영암 등지에서 십여 인의 유생들과 거병하였고

정유년에 장렬히 산화하였으니, 강진 일대에서는 일컬어 충신열사의 집안이라 하여 선비들

의 왕래가 잦았다. 운부의 부친은 광해조 때에 천거가 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

, 이미 조정은 권세다툼에 의한 혈족의 살륙장으로 화하여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많은 양심적인 관료들이 벽지로 귀양올 때 자연히 강진에 오거나, 거쳐가는 자들

은 운부의 부친과 친교를 가지게 되었다. 월초 이수가 태호 이원진과는 같은 문하였는데,

연히 운부의 부친 김유학을 알게 되어 그의 해박한 지식과 재주를 흠모하게 되었었다. 태호

이원진은 그중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당대의 낙백하였던 선비들 중에 몇사람만

이 벼슬길에 올랐는데, 그중에서도 이원진의 출세는 감사에까지 오를 정도로 으뜸이었다.

계 유형원은 네살 적부터 삼촌 이원진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운부가 일곱살 적에 부친의 친

구들이 찾아왔을 때 큰사랑에 불려나가 경서의 문답을 했었고, 시를 지었는데 운자를 불러

주던 선비들이 모두들 신동이라고 혀를 찼었다.

"내 여지껏 재주 있는 아이들을 여럿 보았으나 그 이치의 깊이까지 꿰뚫는 소년은 역시

태호의 조카와 이 아이로다. 유도령은 일곱살 적에 이미 [서경]의 우공기주편을 읽으며 무릎

을 쳤다지만, 이 아이의 문장과 해박한 견해는 또한 조숙한 경지를 넘어섰으니 놀랄 만한

일이다."

하며 이수는 감탄하였던 것이다. 운부가 소년 유형원의 재주를 풍편으로 들었던 것은 그때

가 처음이었다. 그가 아홉살 적에 호란이 일어나매 운부의 부친 김진사 역시 전라도의 유생

들과 힘을 합쳐 임금을 구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북상하다가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

는 말을 듣고 허탈하게 돌아왔었다. 김진사는 임금이 청태종으로부터 받은 모욕을 국치라

하여 화의를 주장하는 일파들은 오랑캐에게 간을 떼어 준 자들이라고 타매하였다. 운부 십

오세 때에 김진사가 세상을 떠났고, 운부는 그의 유언대로 학문에 정진은 할지언정 벼슬길

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운부는 삼년상을 벗던 십구세 때에 부안의 유생 집안의 장녀인 한씨

와 결혼하였다.

운부는 어찌하여 출사하지 않은 선비로서 그치지 않고 불승이 되는 것으로 철저하게 세상

과 인연을 끊게 되었던가. 효종 육년 을미 팔월께에 그는 강진에서 홀연 자취를 감추게 되

었고 소백산과 지리산을 넘나들며 홀로 수도의 길에 나섰던 것이었다. 그에게는 가친이 물

려준 전장이 얼마간 있어서, 그것으로 굶지는 않을 정도의 생계가 되었었다. 그러나 둘째아

이가 태어나던 스물여섯살 적에 지팡이 하나만을 들고 팔도 섭렵에 나섰으니, 그 기간은 이

년간이었다. 누구든지 젊은 날은 고뇌의 세월이요, 더군다나 큰 뜻과 재주를 가슴에 간직한

운부로서는, 책상물림으로 세상에 이름없이 살다가 돌아간 수많은 선비의 한 사람이었던 부

친의 생애를 뛰어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집 사랑에 몰려와 울분의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을 비관하던 선비들의 영향이 더욱 깊어졌던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운부는 우선 팔도 섭렵을 통하여 백성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였고, 세상을 개혁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배우고자 하였다. 방랑의 이 년 동안 그는 시골 향반

의 집 사랑에 식객으로 얹히기도 하고, 풍수질도 하였으며, 사군자를 쳐서 밥값을 때우기도

하였다. 그가 돌아왔을 때 운부의 세상을 보는 눈은 원속해 있었고, 그런만큼 집에서 농사난

짓고 있을 적보다는 훨씬 강경해져 있었다. 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아전 서리배들의 횡포

가 너무나 잘 보였고, 고향땅의 주민들이 시달리고 있는 사정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던 것이

었다. 상기 을미년 유월께에 때는 큰 가물이 겹쳐서 온 마을 사람들이 타들어가는 벼를 보

고 망연히 한탄만 하고 있을 적에, 공물 진상을 서두르던 관헌과 몇몇 의기있는 상민들 간

에 작은 충돌이 있었다. 이것은 뒤에 반계도 그의 책에서 날카롭게 지적한바, 지방 향촌에서

는 공공연한 횡포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진상이란 일정한 기준이 있는 공납도 아니요, 그것을 맡고 있는 관청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매일 차려 올리는데 서울의 각 관청이 저마다 나서고, 달마다 진상을

하는데 외방의 각 고을이 저마다 분주하여, 국가 만사에 진상 관계의 사무가 십중 팔구는

될 법하다. 임금으로서 구중궁궐 고운 담요 위에 앉아, 내가 임금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어떻

게 이런 진상의 폐단을 아실것인가. 거기에 눈앞에 얼씬거리며 아첨이나 하는 신하들은 우

리만큼 임금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만일 어느 누

가 이런 말을 내어 그런 짓이야말로 나라를 병들게 하고 덕을 망치는 일이라고 하는 이가

있다면, 당장에 임금께 불경한 짓이라고 지목을 할 것이다." 반계도 저와 같이 왕권에 대

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는데, 백성들의 뜻은 바로 이대로였다.

공납 진상물을 점고할 때, 이서배가 점퇴의 권한을 쥐고 있으니 퇴당하지 않으려면 공물 이

외의 뇌물을 따로 준비하여야 되었고, 흉년에 앞날이 감감한 터에 아무리 순박한 사람들이

라 할지라도 참지는 못하였다. 여럿이 달려들어 농기구를 들어 아전들을 두들겨 몰아내니,

그 책임은 모두 운부가 자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운부는 고향의 전장을 버리고 어

디론가 피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가솔들은 부안의 처가로 보내고 자신은 다시 정처없는 방

랑의 길을 떠났던 것이었다.

이후 운부는 그의 김아무개라는 속명을 버리고 스스로 하늘 위에 정처없이 떠서 흘러가

는 구름임을 자처하여 운부라는 호만을 가지게 되었었다. 운부는 충청, 전라도의 여러 고을

을 전전하며 지사 노릇을 하였는데 이때로부터 장발에 남루한 도포를 걸치고 불승들이 쓰는

송낙을 깊숙이 눌러 쓰고 다녔으니 모두들 그를 도사라고 여겼다. 운부는 많은 사람들이 있

는 자리에서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고, 피할 수 없으면 지필묵을 청하여 필담을 하였었다.

그리고 명당의 터를 잡아준다든가, 도가에 대한 얘기 외에는 일체의 답변도 언급하지 앟았

. 이른바 청맹이나 청농, 청광은 세상을 거역하여 피해 살려는 선비들의 소극적인 편법이

었으니, 청맹은 눈뜬 장님이요, 청농은 거짓 귀머거리요, 청광은 생으로 미친 짓을 하는 것

을 가리킨다. 조선 초에 이성계의 입국에 대하여 스스로 저항하였던 정온은 진주에서, 조운

흘은 광주에서 장님 노릇을 하였었다. 이미 후한 시대에 이업이 청맹을 자청하며 숨어 사았

으니, 이것은 일정의 선비들의 고독한 항거였을 것이다. 특히 조운흘의 침묵으로 일관한 생

애에서 남겨진 절명시는, 누런 소를 타고 청산 옆에 있으니 추하고 추한 그 풍신은 베 한

필의 가치도 없구나.

라고 읊었으니 스스로 오욕의 일생임을 뼈저리게 한탄하였던 것이었다. 그러한 행동은 식구

들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철저하게 지켜져서 임종 때에나 가서야 밝

혀지곤 하였다. 청농의 전통을 이은 사람은 이조절의팔현으로 불린 김시습, 남효온, 원호,

생전, 조려, 정보, 성담수, 권절 등이었으니, 수양이 득세 집권하고 단종을 죽인 뒤에 스스로

숨어 살았던 선비들이었다. 특히 김시습은 청농에 청광까지 겸하여 베옷에 산발을 하고 세

상을 비웃으며 살아갔었다.

절개를 굳건히 지켜나가기 위한 방편으로써 제 육체의 어느 곳을 자해하여 스스로 그런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형태였던 것이다. 벙어리나 장님이나 미친놈의 행세가 자기 보존에만

있음이 아니라, 그런 짓을 지켜나가는 사이에 절개도 잃지 않을 수가 있었다.

운부가 귀머거리 행세를 하며 필담이나 하였으니, 자연히 이 기이한 도사를 사람들은 제

각기 상상하였다. 멸망한 명나라의 학자로서 우리나라에 표류하여 왔다고 여기거나 권토중

래를 꿈꾸는 명의 유신들이 많이 입국하였는데, 그중의 한 사람으로 다른 패거리들과 모인

다거나 하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더구나 언젠가 남원 고을에 머물렀을 때 한밤중에 일어나

한어로 한시를 노래한 일이 있었는데, 소문은 더욱 확실한 것이 되고 말았다.

실상 명이 망한 뒤에 중국에서 표류해 왔던 중국 사람들이 많았는데, 세상의 분위기가 또

한 오랑캐에 대한 적개심과 대명에 대한 왜란때의 의리 감정이 점증하여 그들을 대하기를

잃은 형제 반기듯 하였다. 서해한에는 가끔씩 명나라의 표류민들이 상륙하였고 관에서도 몹

시 동정적이었다. 그래서 운부는 그 기이한 행색으로 알려지게는 되었으나, 명나라의 유신이

라는 설이 굳어지게 되었었다.

효종 십년 기해에 운부는 드디어 반계와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처가에 머문 식구들을 상

면코자 부안에 들렀던 것이다. 운부의 처가는 부안 한씨네 종가로서 배벌에 너른 장토를 가

지고 있었다. 운부의 장인은 다행히도 너그러운 사람이어서 운부의 출사하지 않음에 대하여

그리 섭섭히 여기지는 않았다. 다만 처자식을 버려두고 강산을 헤매다니니, 전답을 넉넉히

떼어주고 노비도 붙여주겠는데 이젠 그만 정착함이 어떠하냐고 조심스럽게 운부를 달래었

. 운부는 짐짓 못 들은 체하며, 대풍이 일어나니 구름이 날리도다. 위력이 해내에 더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다.

라고 읊으니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정복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서 여러 어른과 형제와 식구

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며 부른 시였다. 즉 천하를 평정한 제왕의 시였으니, 방랑하던 운부

가 읊기에는 너무나 호방한 시였다. 운부는 즉 사나이가 집을 떠나 흘러다님은, 바르지 못한

세상을 평정해보려는 포부 때문이다라는 뜻을 장인에게 전하려는 은근한 의도가 숨어 있었

. 운부는 집안 식구들에게까지 전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장인은 운부에게 부인 한씨를 통

하여 몇번이나 주유천하의 생활을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운부는 돌로 깎은 불상처럼 단정히

앉아만 있었다. 드디어 장인은 운부가 일얼 저질러 집안을 망칠지도 모르는 놈이니 절연하

자며 노기를 터뜨렸다. 그의 본심을 아는 사람은 역시 부인 한씨뿐이었다. 남편의 정경을 보

다 못하여 노자와 길양식을 챙겨서 서둘러 떠나도록 해주었다.

"출사하시란 건 아닙니다. 저 변산 아랫녘에두 반계라는 높은 선비가 계신다는데 당신은

굳이 집을 떠나 객지 사방을 떠돌아다니실 필요가 무에 있습니까?" 운부는 변산 아랫녘의

반계라는 말을 듣고는 귀가 번쩍 틔었다. 그는 말없이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아내가

지어준 새옷에 역시 송낙을 쓰고 대지팡이 짚고 부안 한씨네 종가를 나섰다. 이것이 운부와

가족의 마지막 상면이었다.

운부는 처음에 전주 쪽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 서해를 향하여 치달린 변산을 바라고 걸

었다. 배벌서 변산까지는 이십 리 상거였으니 반계의 집을 찾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운부가 물으니 들에서 일하던 농부는 공손히 하정배를 드리며 가르쳐주었다. 반계 유형원은

보안에서 변산 쪽으로 나아간 우반골의 삼간초가에 살고 있었다. 붉은 흙이 말끔하게 다져

진 소로가 솔숲 사이에 뚫렸는데 집 뒤편은 굵기가 두어 뼘 되어 보이는 울창한 대숲이 빽

빽하였고 참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가끔씩 서해의 바닷바람이 대나무의 가지 사

이를 스칠 적마다 싱싱한 푸른 잎사귀들이 팔랑거리면서 솨아하는 소리를 냈다.

반계가 부안에 칩거한 것은 계사년이었으나, 나이 이미 삼십 팔세요, 칩거한 지는 육 년이

되는 셈이었다. 반계는 스물세살 적에는 조모상, 스물일곱에 모친상을 당한 뒤에 탈상되면서

연이어 두 번이나 과거를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서른 살 되던 해에 조부상을 당하여 탈

상된 이듬해인 서른세살에 다시 과거를 보아서 겨우 진사과에 급제 하였었다. 그러나 그뒤

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선비의 최하 직함인 진사로서 만족하여 일찌감치 세속의 출세와 명예

에 등을 돌려버렸던 것이다. 반계란 옛날, 시대를 기다리던 태공망이 곧은 낚시를 담그던 곳

의 지명이었으나, 유형원에게는 꼭 들어맞는 호였다.

운부는 닫혀 있는 사립문 밖에서 잠깐 서 있었다. 대숲이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와 집 앞

을 휘돌아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집 주위에는 청정한 기운이 감도는 듯하

였다. 운부가 울타리 사이로 안을 살피니 따로 지은 마구간이 보였고, 하인인 듯한 자가 말

털을 빗겨주고 있었다. 조랑말이 아니라 다리가 길고 가슴이 떡벌어진 준총이었다. 선비의

집안에 준마가 매어져 있으니, 기이하게 보였다. 운부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하인을 불렀다.

"주인장 계시느냐?"

", 어디서 오시는 뉘시옵니까?"

"지나가던 나그네인데 너희 주인의 함자를 듣고 만나뵈러 왔다고 여쭈어라." 하인이 들

어가서 아뢰는데 잠시 후에 유건 쓰고 도포 입은 준수한 선비가 방물을 열고 나왔다. 키는

후리후리하게 컸고, 넓은 이마와 정기에 넘치는 눈과 칠흑처럼 윤기나는 수염이 가슴에 드

리워졌는데, 첫눈에 보기에도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몸소 삽짝문을 열고, 바깥에 서 있

는 괴이한 차림의 운부를 내다보았다. 넓은 이마 아래서 빛나는 안광이 마치 운부의 속을

꿰뚫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일로 이런 천유를 찾으셨습니까?"

공손히 말하는데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힘이 있었다. 운부도 예의를 갖추어 고개를 숙이

면서 말하였다.

"전부터 반계 선생의 덕망을 듣고 한번 뵈오려 하였더니, 이제 우연히 처가에 들렀다가

소문에 접하였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오."

반계의 안내로 운부는 그의 서재에 들어갔다. 사방 벽에 서가가 올려져 있었는데 책이 빈

틈없이 쌓였고, 한쪽에는 거문고가 기대어져 있으며 어옹이 강심에 배를 띄우고 앉아 있는

산수화 한 폭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또한 강궁이 전통과 함께 걸렸다. 책과 거문고와 활은

그이 드넓은 관심을 말해주는 듯하였다. 서로 맞절을 하고나서 좌정하자 운부가 자기 소개

를 한다.

"저는 아이 때부터 선생의 학문에 대하여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본가가 강진에 있었는데

태호 선생이나 월초 선생께서 저희 부친과 교유가 있었지요. 부안에 칩거하신단 얘기는 전

혀 몰랐소이다."

"강진에 사셨다면 저두 삼촌과 월초 선생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운부 선생님이시지요?"

"천학을 기억해주시니 부끄럽습니다."

반계는 몸소 화로에 불을 붙여 차를 달여서 내었다. 차를 마시면서 그들은 처음에는 각자

의 생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계가 책상 위에 펼쳐진 것들을 바라보며 자탄하였

.

"여기에 머문 지 벌써 여섯 해가 되었건만 하나두 제대루 이루어놓은 것이 없소이다.

리는 무궁하고 세월은 한도가 있는데 옛사람들은 무슨 정력으로 저 같은 업적을 이루었는지

실로 놀랄 뿐입니다. 저야말로 밥버러지입니다. 이렇게 나날을 허송하구 있지요." "저두

고향을 떠나 단신으로 객지를 헤맨 지 어언 반십 년이올시다." "왜 방랑하십니까?"

"선생께서야 마음이 침잠되어 이렇게 고요히 앉아 저술에 힘을 쏟으시지만, 저 같은 천학

은 성품이 조야하여 한 곳에 칩거하지를 못합니다. 세상 공부두 할 겸 지기두 만날 겸 하여

팔도 섭렵을 하는 중입니다."

반계는 웃음을 머금었다.

"실은 저두 모양이 머물렀을 뿐이지 이미 떠난 사람이올습니다. 부안은 제 고향두 아니지

. 다만 저와 같이 당세에 대하여 낙을 잃은 사람이 숨을 만한 외진 곳이어서 잠시 의탁하

고 있소이다. 이미 칠 년 전부터 쓰기 시작한 책이 있는데 생전에 완성하게 될지 모르겠습

니다."

"그것은 어떤 책입니까?"

운부의 물음에 반계는 슬며시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무슨 주장을 세상에 내세우는 게 아니라, 그저 혼자서 생각하는 바를 기록해두어 스스로

검토해보려는 뜻으로 적고 있습니다."

"임금께 상주하실 책입니까?"

"저는 왕권에 대하여는 잘 모르겠소이다. 이렇게 초야에 파묻혀 숨어 사는 자가 무슨 자

격으로 그런 일을 하겠소. 그저 백성의 복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할 뿐이외다.

가 촌에서 살며 느낀 바대로 적을 뿐이지요."

그 무렵 반계는 수록을 칠 년째 집필하고 있었는데. 틈틈이 농사일을 돌보고 마을 사람들

에게 만일의 일을 당하여 대비할 수 있도록 활과 조총 쏘는 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뿐만 아

니라 청의 지리요새 등을 기록한 중흥위략을 쓰기도 하였다.

"제 집에는 낮에도 인기척이 없으면 사슴이 울안으로 찾아들어오고, 밤에는 거문고를 뜯

기도 하는데, 선조의 공음으로 이나마 독서에 풍류에 편안히 지냅니다. 그러니 공밥 먹는 버

러지가 되지 말아야겠는데.백성들이 땀흘려 일하는 동안 저는 책을 써야지요. 선비가 무엇

때문에 글을 읽는 자인가 하는 것이 희미해진 세상입니다." 운부는 반계가 그저 은사인

체하며 사실은 허명을 바라는 그런 류의 선비가 아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얘기를 듣

는 동안에 운부는 반계의 원대한 경륜에 접할 수가 있었다. 선비들은 저마다 시문이나 공

부하여 과거를 보아 관직에 듣용되는데, 관리가 되면 실제의 정사는 서리나 아전에게 맡기

, 스스로는 허망한 수신만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비들은 으레 성리학이나 논하며

실제로는 대체만을 강구하면 된다는 것이 일반 사류들의 태도였다.

"독서를 하는 자들이 고담준론은 그럴 듯하고 도니 이니 다퉈대지만, 실제로 사람과 물건

의 일에 적용하지 않으면 모두 허황한 물거품이 아니겠습니까. 저울이나 자의 눈금이 올바

로 찍혀지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대목이 집을 지어도 기둥이 서지 못함과 같지요.

비는 백성을 위하여 이런한 눈금을 정해주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선비가 독서한 것

을 남을 위하여 쓰지 못한다면 그는 남에게서 곡식을 빼앗아 먹는 도적놈이지요. 놀고 먹는

한유의 선비는 농업이나 상공업에 종사시켜야 합니다." 반계의 얘기는 선비들의 소명에

대한 것에서 곧 국정으로 옮아갔다. 나라의 법과 제도가 백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권력

을 차지한 자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라서, 그것이 오래되어 돌이킬 수 없도록 혼란

되었으니 뿌리부터 뒤흔들어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백성의 대부분이 농군인데 땅의 경계를 바로잡지 못하면 민산이 떳떳해지지 못할 것이며

부역이 끝내 고르지 못할 것이요, 호구가 끝내 밝혀지지 않을 것이요, 징병이 정비되지 않을

것이며, 송사가 끊이지 않으니 형벌이 그침없을 것입니다. 자연히 뇌물을 막을 수 없고,

속이 후하지 못하겠고, 이런 처지에 정치와 교화가 있을 수 없으니, 그 까닭은 땅이 대본이

기 때문이지요."

운부도 고개를 끄덕이며 반계의 말에 찬동하였던 것이었다.

"그렇지요. 대저 아조의 붕당이란 것이 그런 세도의 혼란으로 생긴 것이죠. 관직의 수는

정해져 있는 터에 벼슬을 살았던 사대부들만 늘어가니 그들은 모두 드넓은 전장을 마련하여

제 혈족의 연이 닿는 고장을 만듭니다. 자연히 유파가 생겨서 밀고 당기는데, 이가 적고 취

할자는 많으니 싸움이 생기는게 아니겠습니까."

"능력이 없는 자가 너른 땅을 물려받고 계속하여 불려나가니 소작하는 자들은 물론이요,

땅 한뙈기 붙여볼 수 없는 무전지민은 기근 때마다 수없이 죽어갑니다. 부자의 땅은 경계가

서로 닿아 끝이 없고, 빈자는 송곳 하나 세워놓을 만한 땅도 없게 되어, 부익부 빈익빈으로

모리하는 무리들이 땅을 모두 차지하며 양민은 식솔을 이끌고 저자를 구걸하며 헤매거나 남

의 머슴살이로나 들어갑니다. 양반과 천인은 갈수록 많아지고 양인은 점점 줄어 십에 일이

되는 괴이한 형편이지요. 그 다음엔 공납을 고르고 가벼이 해주어야 합니다. 진상 때문에 빈

한한 촌라가에 관리들이 들이닥쳐 남녀 불문코 묶고 때리고 아우성을 쳐도 어디 호소조차

할 수 없으니, 이런 실정을 임금이 안다면 아무리 마음에 합당한 진상물이라도 두려운 생각

에 그것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겠지요. 수세가 문란하니 지방 사창의 고지기가 일 년만 술수

를 쓰면 곧 삼사십 석의 횡령을 하고, 둔별장이 백여 석을 남긴다 합니다. 서리의 횡령 부정

은 또한 수령이 조종하는지라 기탄이 없어 민생은 그야말로 암흘과도 같소이다. 또한 역은

어떠소이까. 군병을 보비하는 남은 군사는 보포를 내어 병의 비용을 대고, 출병자도 군포를

내어 출병을 면하는데 이것이 문란하여 군역이 가장 썩어서 혹독한 부역이 되었습니다.

병이 너무 적으면 유사시에 쓰기가 부족하지만, 반대로 너무 많으면 백성이 멍들어 나라가

무너지게 됩니다."

한참이나 잠잠히 듣고 있던 운부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반계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물었

.

"선생께서 그러한 경륜을 가지셨는데, 세상에 널리 펴서 시행시켜야 되지 않겠소이까?" "

글쎄요...제 생전에 그러한 모든 제도의 혼란을 수습할 방책이나 마련할까 하지요." "반계

선생! 아무리 광대한 포부가 있다 한들 시행치 못하면 뭣에 씁니까. 나는 이제 글을 버릴

작정입니다."

반계는 잔잔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글을 버리시면 무엇을 하시렵니까?"

"백성들과 더불어 세상을 바꾸겠소이다."

반계가 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을 내리쉬었다.

"그것은 운부 선생의 길이올시다. 비록 천학이나마 죽을 때까지 글이나 쓰다가 가는 것도

또한 제 길입니다."

운부는 말하였다.

"선생의 경륜은 오래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에게는 두루 미치지 못하겠지요. 선생을

따르는 선비들 사이에서만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선생께서 계시니, 운부 같은 자도 있어야

되겠습니다. 제도는 소처럼 나아가고 인간세는 바람같이 달립니다. 혁파의 길을 가는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

운부의 단호한 말에 반계는 잠시 침묵하였다. 대숲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던 반계가 운부와는 정반대로 부드러운 어

조로 입을 떼었다.

"무엇을 이루어낼 수가 있을까요? 아마도 이 천유의 몫이 있다면, 보를 터서 물줄기를 바

꾸는 데나 비할 겝니다. 아무튼 누구든지 물길을 내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나는 살아 있는

날까지 저술을 할 작정입니다만, 그것이 허송이 되고 말지도 모르지요. 오직 하늘 같은 백성

의 마음만이 그 성패를 알려줄 따름일 게요. 내가 글을 쓰는 자로 있는 것이 어느 경우에나

세상을 가장 이롭게 하는 일인 듯합니다. 늘 생각됩니다만, 경륜은 근본을 백성에 두었다면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출사를 않는 것은 아직 혁파할 시류가 아니기 때문입니

. 좀 전에 선생께서 말씀하신, 제도는 소처럼 나아가고 인간세는 바람같이 달린다는 뜻과

같지요. 정사로써 베풀어지지 않는다면 당세의 문란은 종내에 빈핍한 민생을 낳고 세상이

끝없이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백성이 거역하는 일이 반복되겠지요. 그런 실제의 민생과 더불

어 선비들의 경륜도 함께 자라날 것입니다."

운부는 다시 의미심장하게 말하였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원망과 함께 서 있는 신하라면, 이미 불충이 아니올시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니까요. 오랫동안 선생의 서재를 시끄럽게 하였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송낙을 머리에 깊숙이 눌러 쓰고 일어서는 운부를 반계는 말리지도 않고 따라서 일어섰

. 운부가 방에서 나가는 걸음을 그치지 않고 삽짝 밖으로 나서려는데 반계는 그의 소매자

락을 가만히 잡아당겼다. 운부가 돌아보니 미목이 수려하고 풍채가 좋은 반계는, 이글거리는

안광으로 운부를 깊숙하게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신민에는 교가 방편이외다. 우선 화목해져야 마음을 얻지요." 운부는 방랑중에 작심한

바 있었으므로 말하였다.

"그래서 저는 속명도 버리고 이제는 글도 버립니다." "어디루 가실 작정이오?"

"행운유수, 발 가는 대루 갑니다. 불자가 되려 합니다." 운부는 우반골의 송밀을 휘적휘

적 헤치고 나왔다. 사립문 밖에는 키 큰 반계가 수염을 날리며 서 있었는데, 운부를 전송하

는 것인지, 아니면 껍질이 벗어진 듯한 모랫벌과 서해바다를 내다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

. 그 뒤 십사 년 동안 반계는 변산반도 부안의 우반골을 떠나지 않고 청정하게 책 속에

파묻혀서 살아갔다. 그의 생활은 비록 유유자적한 전원생활이었으나, 그가 부안 시대의 전

기간을 통하여 십구 년 동안 저술한 수록에는 치열한 개혁의 의지가 번뜩이고 있었다.

는 스무 가지가 넘는 책을 썼고 수십여 문집을 써냈는데, 한유 선비로서의 자책과 각고의

나날 끝에 해놓은 업적이었다. 운부는 그 길로 소백산으로 들어가 삭발하고 불문에 들었다.

처음에 그의 뜻은 불도를 빌려, 천민들과 가까운 승려로서 무리들의 마음을 잡는다는 생각

이었으나 차츰 고승으로서의 수도 생활에 더욱 깊이 몸담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차츰 종

단 내의 젊은 승려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운부는 언제나 객승일 뿐이었다. 그가 묘

향산에 있다가 해남 대흥사로 내려갈 때 드디어 반계가 이미 작고하였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반계의 말년에 대하여 사람들은 이렇게 전하였다.

"고사께서는 부안에 계시는 이십여 년 동안을 한결같이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셨습니다.

그리고 부근의 백성들을 제 혈육처럼 아끼셔서 관과의 쟁송에 늘 나서시곤 하셨지요. 그뿐

입니까, 중원을 정벌할 적에는 몸소 나서시겠다며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군사 조련도 하셨

는데, 언제나 대의명분에 좇아서 언행을 하셨습니다. 마흔 네 살 되던 해에는 재상들의 묘

당천으로 벼슬에 나가도록 천거되었으나,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내가 재

상들을 아지 못하는데 그들은 어찌 나를 안다는 것인가, 라는 것이었지요. 이듬해에 다시 별

천이 되었으니 끝내 나가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안에 칩거한 지 이십 년 되던 계축년 삼월이

었지요. 선생께서는 쇠잔한 병석의 몸을 일으켜 깨끗이 목욕하시고 옷을 갈아입으시더랍니

. 그리고는 아직 이루지 못한 초고를 가져오라셔서 태워버리고는 그대로 운명하셨습니다.

끊임없는 방대한 저작 생활이 건강을 해치신 게올시다." 운부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넋을

잃은 듯이 방성통곡을 하였다. 장시간의 곡을 하고 나서 운부는 목욕재계한 뒤에 백일기도

에 들었던 것이었다.

"그는 이루고 갔다. 허나 나는 지금 준비조차 못한 채 득도하지도 못하고, 백성의 생활 바

깥에서 한없이 맴돌기만 하였고나!"

운부는 법당에 가부좌하고 앉아 참선 대신에 반계의 평생을 되새기면서 한탄하였다.

"나는 부처님에게도 중생들에게도 마땅하지 않는 가승이다." 그러나 운부가 자신의 한탄

대로 헛되이 세월을 보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소백산의 오 년 참선을 통하여 자신의 길

이 보살행임을 때달았고, 당시에 두 차례의 전란을 통하여 팔도도총섭으로 삼천 의승의 대

장이었던 벽암 대사를 지리산 화엄사로 찾아가 문하에 들었다.

벽암은 고승이었으나, 백성의 참상보다는 왕실에의 충성을 더욱 중하게 알았던 사람이었으

니 운부와는 애초 출발부터가 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벽암은 운부의 뛰어난 재주를 아껴서

문하에 두려 하였고, 운부는 학문, 병법, 무술의 다방면에 걸친 편력으로 당시에 이미 와룡

선생의 현신이라는 찬사를 들었었다. 운부가 후세에 위로는 천문에 통하고 아래로 지리에

통하며, 가운데로는 인간세를 꿰뚫는다는 말을 들었던 것은 사실 수십여 년에 걸친 정진 연

마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가 승병 도감으로 있을 때 어찌나 젊은 승려들에게 엄격하였던지 추상천왕이란 별호를

얻었을 정도이다. 그러다가 홀연히 벽암 문하를 떠나 전국의 명산 대찰을 찾아다니며 각 선

방마다 활기를 불어넣고 구태의연한 숭려들의 수도를 질타하였으며, 물처럼 흐르는 강론으

로 청년 승려들을 매료시켰다. 일컬어 조선 십이대 명산이라는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

,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 칠보산, 묘향산, 가야산, 청량산 등지를 두루 섭렵하며,

특히 불법에 영험이 있다는 금강산과 지리산과 구월산과 묘향산에 오래 머무니 철저한 객승

으로 일관하였던 것이다. 그가 금강산에 들어온 지는 오 년째이지만, 그를 흠모하는 청년 승

려들을 모두들 운부 문하에 모이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점사의 일여는 운부와 승려

들 간의 유대를 맺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운부가 고승들로부터 외면되고, 오히려 소장 승려들 사이에서 흠모를 받았던 것은 그가

조선 불교의 나태한 전통을 뒤집으려 했던 데에 있었다. 운부는 백성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

인지를 자세히 살펴서 부처님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 도회로부터

쫓겨나서 천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있는 부처를 유현한 극락세로부터 생생한 현실세

로 끌어내려야만 하였다. 언제로부터 연유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되, 백성들 사이에서는 정진

인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 연달은 외침으로 혹심한 고난에 시달리고 부패한

관료 제도에 의하여 수탈당하고 정치에서 소외된 양민들은 제각기 이러한 고난의 삶을 견디

기 위하여 선경비향을 정하여 꿈꾸더니 남조선이라는 낙토가 있다고 믿게끔 되었던 것이다.

미래의 영원한 조선을 이룩할 구세자는 정씨 성을 가진 진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뿐이랴, 도선국사로부터 비롯된 갖가지 비기가 나돌아서 함께 어우러졌으니 이 모두가

호랑이보다 더욱 무서운 압정의 고통에서 정신으로만이라도 해방되어보려는 백성들의 덧없

는 희망이었다. 운부는 그 점을 잊지 않았고, 그러한 백성들의 뜻에 부응하여 미래에 말세를

건지러 나타난다는 구세불 미륵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지금이 말세라면 미

륵이 나타나는 시기는 오늘이다. 기다리던 미륵이 낡은 세상 멸하고 새 세상을 세우기 위하

여 나타났다 하자마자 이제까지 제 거울 닦아 제 혼자의 모습이나 자세히 들여다보겠다던

수도의 자세가 곧 생생한 중생의 그것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의외로 소장 승려들 가운데는

그런 생각을 가진 수도자들이 많이 있었으니, 그는 두 차례의 난리 속에서 제마다 고난을

겪었고 또한 종이나 천역에 있던 자들이 산간으로 숨어 흡수되면 은연중에 퍼졌던 것이다.

운부에게는 극락을 현세화하겠다는 뜻이 시대적인 요구로 비쳐졌던 것이다. 그는 반계가 헤

어지기 전에 해주던 말을 뇌리 깊이 새겨 잊지 않고 있다. "신민에는 교가 방편입니다."

란 무엇인가, 그것은 백성들의 기원과 소망이 뭉쳐진 것 자체이다. 운부는 서낭목과 돌무더

기와 빈촌의 솟대와 신당 모두를 이 땅의 소산으로서, 백성들의 기원의 덩어리로서 귀히 여

겻다. 그 가운데서 소용돌이쳐서 뭉친 덩어리가 뜨겁게 폭발할 것이다. 운부는 느닷없이 찾

아온 낙백 선비 설유징의 방문으로 해서 젊은 날의 강진 시절과 부안의 반계를 떠올렸고,

끝내는 잠들지 못하여 앉은 채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 길산과 설유징이 뒷봉에서 암자로 내려오니 운부의 자취는 보이질 않

았다. 그의 탁발과 바랑도 없었다.

"대사님께서 우리가 귀찮으신 모양이우."

길산이 낙담하여 투덜대니 설유징은 조용히 말하였다.

"대사께서는 이미 자네를 받아들이셨네. 계신 것으로 알고 혼자 수도하시게. 나두 틈나면

가끔씩 올라오겠네."

설유징이 내려간 뒤에 두어 달쯤 지나 최헌경과 정학 형제가 방문하기도 하였으나 길산은

그해 가을이 깊을 때까지 홀로 암자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강선흥이는 가을 들어서는 장사를 나갈 수가 없었다. 함께 장사를 나가던 형이 앓아 눕

게 되어 대신 장산곶으로 나무 베는 역일 지러 나갔던 참이다.

장연은 읍내의 판도가 적지만 열한 방으로 나뉘어 있으니, 대개 관할 관청이 많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어청, 총융청,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 감영, 병영 등의 일곱 영에서 둔

전을 설치한데다가 또 서울의 여러 궁가에서 절수처를 설치한 곳이 열 세 군데나 되었다.

수령인 장연현감말고도 백령첨사, 오차포만호, 풍천감목관들도 모두 이곳에 있으니 각 아문

에서 소용되는 둔전과 절수처마다 제각기 백성들을 모집하여 부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느 집에도 역을 짊어지지 않는 백성들이 없을 지경이었고, 생업에 종사하랴 부

역에 나가랴 혹심하게 시달려야만 하였다. 게다가 일 년에 두 차례씩 신곶과 장산곶의 재목

을 벌채하는 일에 겹치기로 동원되어 가을이면 눈코 뜰 새가 없었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노

역에 종사하였다. 장연의 부역이 심하여 일찍이 타읍으로 이사 나가는 자들이 많더니, 감영

에서도 요해지의 부역은 감할 수 없다 하여 타읍에로의 이사를 엄금시키는 형편이었다.

연이 일직이 중국에서 막바로 내다뵈는 곳이니 황당선의 출몰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해상에

출몰하는 낯선 선박들은 무시로 푸구를 드나들며 해물을 도적질 할 뿐만 아니라 가금은 외

떨어진 마을을 침범하여 노략질도 하였던 것이다.

강선흥의 집안은 일곱 식구였는데 노부모와 형 부부와 조카가 둘이었다. 아버지와 큰조카

는 만석골 궁방전에 가을걷이하는 부역에 나가 있었고, 강선흥은 형의 역으로 장산곶에 나

가 재목 베는 일을 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역으로는 원래 염장의 염간들 모두가 수군의 역일

지고 있었으니 멍구미로 나아가 추기 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군포를 대납하여 모면했던 것

이다. 선흥이는 이까짓 못살게 구는 고장을 떠나 어디 구월산이라도 들어가 박히고 싶었지

마는 역을 버리고 달아났다간 가족이 받게 될 곤경 대문에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선흥

이는 소금짐을 지고 훨훨 나다니며 여러 고장을 떠돌 대가 제일 좋았다. 어쨌든 역이 끝날

때까지는 장연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산곶은 곧 불타산의 서쪽 지맥이니 둘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뾰족뾰족 높게 치솟아 구름

사이를 이어서 바다 가운데로 처박힌 곳이었다. 고산서 곶의 끝까지의 연봉이 백여 리나 되

는데, 조수를 따라서 들쑥날숙한 바위벽 때문에 물길이 거슬러 휘돌고 부딪치고 깨어져서

배가 감돌아들 수가 없었다. 깊은 골짜기와 산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빽빽하여 낮에도

햇빛 한점 들 새 없이 어두컴컴하였다.

선흥이는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감영에서 나온 관리 아래 소속되어 다섯이 한 오가 되어

서 하루 종일 톱질을 하고 나무를 날랐다. 둘씩 짝지어 앉아 긴 톱을 맞붙잡고 톱질을 하여

밑둥이 거의 잘렸을 무렵에 반대편을 쳐서 넘어뜨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열 둥치 한

뭇이 되면 아래의 벌채장 마당에 끌어내려 쌓아놓았다.

대개는 세 뭇이 하루의 몫이었으니, 벌채의 양은 막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장산곶 초입서

부터의 울창하던 송림은 누에 먹은 뽕잎처럼 잠식되어 있었다. 선흥이 워낙에 기운이 장사

인지라 밑둥이 웬만큼 잘려지면 줄을 걸거나 여럿이 달려들 것도 없이 두 팔로 밀어 넘어뜨

리니 일손위 수월하고 빨랐다. 또한 잘려진 나무들을 벌채장 마당에 끌고 내려가는 일이 나

무를 베는 일보다 더욱 고된 일이었지만, 선흥이 혼자서 작대기를 끌듯 하여 내려다 쌓으니

그와 한동아리가 된 오부 사람들은 몹시 다행으로 여겼다.

"슬근슬근 톱질이여 시르릉 화릉 톱질일세. 접군님네 일심동력 하다 말면 허사로다. 먹통

줄을 선생삼아 요 산중에 놀던 나무 세상 천지로 내보낼 제. 서른닷 자 장근목을 나라에 진

상하고, 강태공 서목시는 이 친정에 오각집에 연주문을 지어 달고 인간 백성 집을 지어 천

대 만대 유전하고 날아가는 뻐국새야 주작이나 쫓아가라. 슬근슬근 톱질이여 시르릉 화릉

톱질일세."

나무 베는 활목군들은 이렇게 타령을 읊조리며 가락에 맞추어 앞뒤로 톱을 밀고 당겼다.

"여보 오백, 여기 나무 다 켰으니 밀어 넘어뜨리소." "예에, 갑니다."

동아리 사람들은 모두들 선흥을 다섯의 우두머리로 뽑았다. 일의 순서는 먼저 둘씩 짝지

어 나무를 켜고 선흥이 혼자서 밀어내어 넘어뜨린 다음 한쪽에다 한 뭇으로 모아 놓는 것이

었다. 열 둥치가 이루어지면 다시 선흥이 혼자서 산비탈 아래로 굴려 내려가 벌채장에 쌓아

놓는 것이었다. 벌채 감관은 숫자를 헤아리고 바를 정 표시로 뭇을 적어놓는 것이었다. 삼십

뭇이면 그들 다섯 사람의 역은 끝나는 것이니 일손이 다른 오보다 빨라서 하루에 여섯 뭇은

해낼 수가 있었다. 선흥이가 두 손에 침을 퉤 뱉어내고 나무를 밀어내는데 곧 우지직거리며

장척의 나무가 쓰러졌다. 선흥이는 앞쪽을 끄응하며 쳐들어서 기운을 쓰며 끌어다가 나무둥

치 모인 곳에 굴려놓았다. 또 한 나무를 넘어뜨려 옮기고서 통나무의 숫자를 헤는데 스물두

개였다.

"두 뭇이 넘었수."

"허허, 벌써 두 뭇이란 말여?"

"한뭇 더해놓고는 슬슬 밥이나 먹으러 내려가지."

"그러면 몇 둥치 더하면 되겠나?"

"여덟이우."

"자 그럼 담배나 한죽씩 돌려 태우구 일 마치지."

"그리합시다."

의논이 되어 웃통을 벗은 장정들은 제각기 잘려진 밑둥에 걸터앉아 한 사람이 쌈지에서

부시와 죽을 내어 담배를 담아 태우기를 기다렸다. 한모금씩 태우며 죽을 돌렸다.

"그래두 우리가 일이 제일 먼저 끝나겠네."

"감관이란 놈두 우리께는 별 잔소리가 없습디다. 다른 데서는 굵기가 틀리고 굽었다고 퇴

가 심하여 헛수고가 많은데 우리는 모두 점고에 합격이오." "열흘 부역이 댓새면 끝나겠는

."

하며 얘기들을 주고받는데 작년에도 나왔었다는 솔내 사람이 말하였다.

"부역이 끝나면 또다른 일거리를 지울 텐데 뭣허러 빨리 돌아가려구허우. 끝판에는 슬슬

놀기나 해야지."

"하긴 둔전에 내보낼지두 모르지. 서둘 것 없겠소."

"궁방전에 나가면 마름들 성화에 어디 견디겠어? 그래두 감영 감관이 점잖지." "저어쪽

벼룻돌 캐는 녘에서는 둘이 빠져 죽었다구 그럽디다." "좌우간에 우리 고을만큼 진상 품목

이 많은 데는 없을 게여. 재목에 녹용에 벼루에 해삼까지 모두 바치라니 차라리 특산물이

안 나는 게 낫지." "오늘밤에는 우리 멍구미로 나아가 꽃게를 잡아 술이나 먹읍시다." "

네는 기운이 넘치는 모양이군."

강선흥이의 술 먹자느 말에 연장자인 중년 사내가 말하였다.

"나는 며칠 동안 밤이슬을 맞구 노숙을 했더니 온 삭신이 저린걸." 담배 한 죽을 더 담

아서 돌려 태우고 다시 일들을 시작하는데, 선흥이는 모아두었던 통나무들을 양겨드랑이에

끼고 벌채장까지 날랐다. 선흥이가 역사임은 장연 고을 사람 모두가 다 아는 처지라서 그

의 기운에 새삼스레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비탈에서는 한꺼번에 굴려버리는데, "저리 비

키시오, 나무 내려가우!"

하고는 한 뭇의 통나무들을 와르르 밀어내는 것이었다. 굴려 내려진 통나무들을 양쪽에 껴

들고서 벌채장 앞에까지 가는데, 보통 사람들은 한 오가 모두 달려들어 비지땀을 흘려야만

하였다. 선흥이가 한 뭇을 시원스레 쌓아놓고는 두 손을 털어댔다. 감관하는 장교가 점고를

하다말고 혀를 내둘렀다.

"강총각네는 벌써 세 뭇인가?"

", 하루 일 다 끝냈수."

"아니...아직 점심 전인데..."

"일 끝내구 멍구미 나가서 술이나 좀 먹을라우."

"그건 안되겠네. 부역 나온 놈들이 무슨 놈의 술이여." "부역 나와서 남만큼 일을 못했단

말유, 빈둥거렸단 말유? 하여간에 우리 몫의 일이 끝나면 집에 보내주슈."

", 그야 일이 끝난 다음이지."

감관과 선흥이 수작하고 있는데, 숲속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치면서 뛰어왔다.

"강총각 어디 있소?"

"무슨 일인가?"

감관이 묻자, 그 사내는 숲속을 손짓하며 말하였다.

"나무가 넘어져서 사람이 깔렸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가십시다."

선흥이가 따라 나섰고 그들은 사내와 함께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두 아름은 되어 보이는

소나무가 넘어져 있는데 솔잎 사이에 깔린 사람이 버둥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선흥이가

달려들어 나무둥치 밑에 손을 넣어 기운을 썼으나 워낙에 굵기가 두 아름이라 힘쓸 곳이 잡

히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곁가지를 잡고 당겨올리니 나무가 쳐들렸고 쳐들린 나무 아래로

선흥이는 등판을 밀어넣었다. , 하면서 상반신을 일으키는데 밑에 깔렸던 자의 몸집이 드

러났다. 깔렸던 사람의 가슴에는 소나무의 굵다란 가지가 박혀 있었고 거기서 피가 울컥울

컥 솟아나오는 중이었다. 모두들 얼굴을 돌리는데 선흥이가 나무를 등에 짊어진 채로 외쳤

.

"아니 뭣들을 하는 게여, 끌어내잖구."

"틀렸구먼, ."

"아직 숨통은 붙었는가부네."

제각기 수군거리며 사내를 끌어냈다. 상처가 깊은데도 아직 절명하지 않은 사내는 눈을

멀뚱히 뜨고 있었다. 장산곶 부역장에서도 이제 죽는 사람이 생길 모양이다.

모두들 상한 사내를 앞에 두고 망연히 서서 내려다볼 뿐이었다. 감관이 고개를 기웃이 해

보다가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 밥숟갈 놨군!"

사내의 가슴에서뿐만 아니라 입에서도 피가 덩어리져서 솟아나왔다. 벌채를 처음에 시작

했을 때에는 비교적 널따란 평지라서 별반 사고가 없었건만, 굵은 나무를 찾아 골짜기로 파

고들고 비탈을 오르다보니 차차 일하기가 까다로워졌던 것이었다. 선흥이가 보다 못하여 찢

어진 저고리 앞섶을 헤쳐주려는데 기침을 나약하게 내뱉던 사내가 입을 벌린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

"부정을 탔으니, 인제 산신이 발동할 때가 되었지."

"뭘 차라리 편허게 되었구먼. 철철이 부역두 안 나오것다, 식구들게 진미 양식두 내주것

. 죽은 사람이 편한 게야."

"자아, 뭣들 구경하구 섰어. 빨리들 가서 일하잖구." 일손을 멈추고 여기저기서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을 향하여 감관이 떠들었다. 그러나 한 입 건너 두 입이라, 사람 죽었단 말

이 삽시에 퍼져서 구경꾼이 자꾸 늘어갔다. 한양서 온 내수사의 서리도 사공들을 데리고 올

라와서 시체를 구경하였다. 시체는 일단 솔잎으로 가리워놓았고, 오전 일은 마무리가 되었

. 벌채장 노천에 커다란 쇠솥을 몇군데 걸어놓았는데, 인근에서 역시 부역 나온 아낙네들

이 점심을 짓는 것이었다. 부역 나올 때 저마다 양식을 가져와 내었으니 장산곶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었다. 원래는 인근 부락에서 나오게 되어 있었지만, 워낙에 장연은 부역의

종류가 많고 이리저리 겹쳐 사람 수가 모자란 까닭이었다.

특히 해안 지방일수록 수군의 역이 가장 혹심하였다. 제 땅을 가졌던 자들도 가혹한 조세

에 못 이겨 궁방전이나 내수사 장전에 올려버리니, 이제는 제 땅을 가진 자가 거의 없다시

피 되어버린 것이었다. 벌채장에는 이곳 저곳에 임시로 지어놓은 막들이 세워져 있었다.

귀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벽 대신에 생솔가지를 얼기설기 둘러놓고 잇달아 지붕을 얹은 꼴이

었다. 관원들은 통나무 귀틀집을 지어놓고 철마다 거기서 기거하였다. 인근에서 나온 사람들

은 해질 녘에 일이 끝나면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으나, 강선흥이는 용우물서 왔으

니 근 팔십 리 길을 오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겉으로 드러내놓고 불평하

는 사람은 없었다.

아낙네들이 밥을 푸는데, 식기가 따로 있을 수 없으니 모두들 두어 오가 합하여 소쿠리에

다 밥과 장을 받아다가 나뭇가지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낱낱이 흩어지는 조밥

이건만 오전 내내 일한 사람들에게는 꿀처럼 달았다.

"어이 이거 갯가에 사는 놈들이 비린 반찬 하나 없이 되겠나. 다른데서는 일짬을 내어 갯

가에 나가 꽃게라도 주워오던데."

"반찬 타박이야 해서 뭘 해. 것보다는 이거 술 마시구 싶어서 목젖이 곤두서는 판이로군."

오후에 다시 일이 계속되었는데, 비탈 쪽에서 사고가 났던 것을 아는 사람들은 산으로 오르

려 하질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아래쪽의 가느다란 나무나 베어내는 것이 고작이었고, 감관

서리들의 점고가 까다로워 장작감으로 퇴를 당하는 오가 많아졌다. 일을 하여도 헛수고였

으니, 부역 나온 사람들은 위험하더라도 다시 산 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산 위로 오를수록 벌채장 빈터가 멀어지니, 또한 자른 나무를 끌어 내리기가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마다 벌채장이 가까운 곳의 나무들을 베려 하였고, 따라서 자기네끼리

그어놓은 판에 다른 오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느라고 경쟁이 치열하였다. 선흥이네 오부

사람들도 자꾸만 그를 부추겼다.

"여보게 강총각, 이쪽 골은 우리가 맡아두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오면 좀 쫓아내어." "

서 서른 뭇을 해놓아야 집에 가서 가을걷이라두 해놓지." "염려 마우, 설마 내가 섰는데 누

가 덤벼들어 베겠수." 선흥이네가 맡은 곳은 둥치가 굵고 곧은 나무들이 빽빽했는데, 두 언

덕 사이에 끼여 있는 제법 너른 골짜기의 저지대였다. 나무를 두어 그루 베어내고 선흥이

가 넘어뜨려서 열 둥치 한 뭇을 쌓으려고 끌고가는 중인데, 등성이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

.

", 여기 좋은 나무들이 많으이."

"전부 아래루 내려오게나."

선흥이네가 치켜다보니, 십여 명이 뛰쳐내려오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선흥이만 바라

본다.

"여보 뭣들 하는 거유?"

선흥이가 위를 쳐다보며 묻자, 맞춤한 장소를 발견하여 제일 먼저 외치던 자가 무심하게

대꾸하였다.

"뭣하긴..나무 베려 하우."

"올라들 가슈, 어서 올라가."

", 거 무슨 말인지 통 못 알아듣겠구먼."

선흥이는 일부러 통나무를 머리 위에 번쩍 쳐들어 쌓아놓은 재목 위에 쿵 내던지고 말하

였다.

"여긴 우리가 맡아노 골이니, 딴 데 가서 베란 말요." 다른 오 사람들이 못 들은 체하고

제각기 짝지어 나무그루를 끼고 앉더니 톱날을 들이대는 것이어싿.

"거 톱날 치우지 못해?"

선흥이의 말씨가 거칠어졌고, 그쪽에서도 뭔가 믿느 구석이 있었던지 피식거리며 서로들

스리슬쩍 뭉개버리는 눈치였다. 이윽고 역시 선흥이 또래의 건장한 녀석이 두 손바닥에 침

을 퉤 뱉어내고 쓱쓱 비비면서 일어섰다.

"이 산 임자 따루 있단 소리는 못 들었는데?"

하긴 그 말도 일리가 있었으나, 선흥이는 은근히 배알이 섰다.

"이거 보우, 모두들 끌려나와 고생하는 건 피차에 같은 신세지만, 일에는 구분이 있는 게

. 우리는 이 골을 첫날부텀 골라잡구 일했어. 댁네들 일하던 데서 베란 말여." 사내는 코

를 헹 푸어서 바지에다 문대는데 선흥이의 말 따위가 우습지도 않다는 투였다.

"여기가 무슨 사냥터야. 뛰어댕기는 사슴이나, 토끼새끼두 아니구 혼자서 땅에 백혀 있는

나무를 맡아놓았다니...공연히 억지 쓰지 말어."

선흥이가 다른 때 같았으면 그 말에 선선히 수긍하고 너털웃음이나 날렸을 터이나, 여럿

이 지켜보고 있으니 욱하는 총각 결기를 누를 수가 있나, 금방 볼을 부풀리며 욕설이 터졌

.

"아니 저 자식이 내가 그렇대면 그런 줄 알구 순순히 물러날 것이지, 어디서 턱을 주억이

며 곤댓짓이야."

상대편은 목덜미를 한번 으쓱하고는 슬슬 걸어 내려왔다.

"촌개가 건성 짖는다더니, 시끄러 죽겄네."

"...촌개?"

같은 무리끼리 이런 일이 났다면, 곁에서 끼여들어 뭘 그러나 어쩌구 하면서 말려놓기도

하련만, 오가 다르고 역을 진 부담이 다르니 서로의 잇속대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만틈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지리한 부역에서 놓여나 하루라도 빨리 생업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

이었다.

"용우물 선흥이를 모르는가베."

"남대천서 소뿔 뽑았단 소문을 못 들어서 저러지."

선흥이의 뒷전에서 그의 오부 사람들이 기세를 꺾어주느라고 부추겼느데, 저쪽에서도 몇

마디가 건너오는 것이었다.

"한양서 온 사람이 시골 김풍헌을 모른다고 대술까?" "대갈통으루 솟을대문을 부수느 장

산데 큰코 다치겠군."하는 꼬라지가 역시 뒷대는 느낌이 애초부터 있었던 것이었다. 어슬렁

대며 내려온 사내가 두어 발짝 앞에서 팔을 벌리고 섰다.

"너 같은 놈이 있을까봐 전화 나으리가 몫을 잡아주라구 딸려 보내더라. 내가 부역나온

줄 알았니?"

선흥이가 화난 김에 알지도 못할 관명을 중얼거리는 자의 말을 새겨들을 사이가 없어 다

짜고짜로 어깨와 허리를 끼어 잡으니, 사내는 이마빡으로 선흥이의 가슴팍을 처박아 들어왔

. 숨통이 컥 막혀 주저앉는 것은 정말로 장터의 촌개나 그럴 법한 일이지 선흥이가 끄떡

할 리가 없었다. 선흥이는 곧이어 사내의 목덜미를 팔꿈치로 죄어 잡았다.

"아이구, 하마터면 요놈의 뿔상투에 오랏줄 나올 뻔했네!" 자신만만하게 상대의 목덜미를

휘어감은 강선흥이가 여유작작 농담 한 마디를 날리고, 별 기운도 쓰지 않으면서 이리로 비

틀고 저리로 비틀었다. 죽는 듯한 비명은 참지만 그래도 견디기는 대견한지 목에 걸린 신음

을 내면서 사내는 마주 기운을 썼다. 선흥이가 몇번 좌우로 비틀다가 주먹을 들어 정수리를

가볍게 내지르니 사내는 손바닥 짚을 새도 없이 땅 위에 꼬라박혔다. 선흥이가 더 이상 손

도 대지 않고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사이에 사내가 얼굴을 쳐들고 두리번거렸다. 코와 입

에서 피가 흘렀다. 그는 갑자기 후닥닥 일어나 등성이를 바라보고 냅다 뛰었고 나무그루를

차지했던 사람들도 덩달아 뛰었다. 그들의 등뒤를 향하여 선흥이가 외쳐주었다.

"웬간하면 자리를 내주고 싶지만, 내 코가 석 자니 안되었수." 그들이 몰려가버린 다음에

선흥이네 오의 연장자가 걱정스런 듯이 말하였다.

"가만 듣자니까 저쪽 패는 내수사 부역인 모양일세. 전화 나으리가 어떻구 하는 말본새가

내수사 종놈인 모양인데 말썽 없을까."

"젠장할 종놈을 패줬다구 무슨 일이 있을까. 다같이 부역 나와서 시달리는 판인데." 선흥

이는 잠자코 있는데 사람들은 제각기 걱정들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등성이 위에 감영

장교의 융복 자락이 어른거리더니, ", 거기 선흥이 있는가?"

"왜 그러슈. 나 여깄수."

"이리 올라와 어서..."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선흥이가 아직 결기가 삭지 않은데다 오라 가라 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코대답을 하였다.

"올라가면 집에 보내줄 테유?"

"이 자식아 올라오라면 올 것이지 감히 누구 말이라구 대구야." 감영 장교가 성을 벌컥

냈고, 선흥이는 제미, 하면서 등성이로 올라갔다. 선흥이가 곁으로 다가가자마자 장교는 우

선 귀쌈을 한 대 올려붙였다.

"부역 나왔으면 고분고분 일이나 할 것이지, 왜 사람은 패구 난리냐?" 선흥이가 얼얼한

뺨을 매만지면서 눈을 부릅떴다.

"다 쳤수? 예가 해주 바닥인 줄 알아, 장산곶 벽처요. 그러잖아두 애꿎은 부역에 끌려나와

심화가 죽 끓듯 하는 판인데...수틀리면 다 때려엎겠수." 선흥이가 장연서도 이름난 장사인

줄 아는 감관은 조금 수그러지면서 말을 돌렸다.

"이놈아, 내수사 노비는 왜 두들기구 지랄이여?"

"내수사 노빈지 뭔지 내가 알 게 무어요. 망할 자식이 오에 끼여들어 일을 훼방놓길래 꿀

밤을 한 대 주었을 뿐이오."

장교는 답답하다는 듯이 손가락질을 하였다.

"허허, 참으로 네놈은 망종이여. 내수사에서 조선목이며 정자목을 구한다구 직접 사람을

내려보냈는데, 비록 우리하구 역은 같지만, 관할은 다른 법이다. 전화라는 이가 네게 형장을

매긴다구 불러 오라는구나."

전화는 궁에서 쓰는 여러 잡화와 일용품을 구하고 관리하는 직함이나, 대개는 직권을 남

용하여 왕실을 대고 적당히 벼슬아치들과 결탁하여 사복을 채우는 것이다. 장산곶 활목장에

서도 그들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좋은 재목을 벌채하여 가는 것이지만 반쯤은 궁가에 올리

고 나머지는 장산곶 재목이 전국에 으뜸이니 저희들이 나누어 팔아 쓰려는 것이었다. 전화

와 서리가 내수사 노비랍시고 장정 몇을 데려왔으나 기실 그들은 한양 세도가들의 사노였었

. 일찍이 벼슬아치들이 이재를 취할 때 사노를 지방에 내려보내어 부리는 것은 흔한 일이

었던 것이다. 선흥이가 그런 까닭을 알 리가 없었고, 그저 부역 나온 놈들기리 목 다툼을 하

였기로 무슨 형장이냐 싶었다. 그들이 벌채장 빈터로 넘어 내려가니 전화라는 자가 기다리

고 있었고, 그와 동행인 서리가 장정 몇 명을 거느리고 둘러서 있었다.

"그놈을 꿇려라."

갓 쓴 자가 말하자 두어 놈이 달려들어 선흥이를 눌러 앉히려고 어깨를 눌렀다. 선흥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뻣뻣이 서 있는데, 매달린 자들이 기를 쓰는 것이었다.

"어허! 저놈이 죽지 못해 안달이로구나. 그놈을 때려서 꿇려라." 양쪽에서 선흥이를 향하

여 몽둥이가 날아드니, 그는 두 손을 척 올려서 손바닥에 받아 쥐고는 잡아당겨버렸다. 몽둥

이를 빼앗아 쥔 선흥이는 무릎에 대고 단숨에 꺾어서 뒤로 팽개쳤다.

"내가 꿇겠소."

강선흥이가 스스로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이미 그의 기운을 보았던 자들은 은근히 기가

죽어 있었다.

"이놈, 부역을 나왔으면 고분고분 일이나 할 것이지 네 무엇인데 감영과 내수사의 구역을

따지며 일을 못하게 하느냐. 너 같은 놈은 버릇을 고쳐주어야 일이 고르게 될 것이다." "

대 치시려우?"

선흥이가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물었고, 전화는 몹시 화가 나서 손으로 선흥이를 가리키

며 외쳤다.

"그놈의 등판을 사정없이 매우 쳐라."

전화의 말이 떨어지자 내수사에서 나온 자들이 달려들어 꿇어앉은 강선흥의 등에 몽둥이

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강선흥이는 눈을 부릅뜬 채 입을 꾹 다물고 매를 견디었다. 몽둥이질

서너 번에 에고 소리를 내지르며 엎어질 줄 알았던 사람들은 그가 버티는 모양을 보자 은근

히 두려워진 모양이었다.

"이젠...고만 때리시우."

강선흥이가 벌떡 일어서버리자, 둘러섰던 자들이 사방으로 멀찍이 비켜섰다.

"어허, 저놈이 아직두..."

"나 매 못 맞겠수."

강선흥이 제 벗겨진 등과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돌아섰다. 전화가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어딜 가느냐?"

"집에 가우."

장교는 강선흥이의 말을 듣자, 전화에게 속삭였다.

"저자는 장연서두 이름난 장사랍니다. 섣불리 다루다가는 오히려 관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겝니다. 그보다는 잘 꼬드겨서 복종을 시키구 위엄을 보이는 게 나을 겝니다." "뭐라구...

깐 놈이 시골 무뢰배인 주제에 관노를 함부로 패는데, 역을 감독하러 나온 자네까지 두둔

하는 건가?"

"두둔이 아니라, 다스리자면 그렇단 얘기올시다."

"어디 내 말을 듣나, 안 듣나 두고 보자. 초죽음을 시켜서 하옥시키리라." 멀찍이 걸어가

는 강선흥이를 손짓하면서 전화가 장정들에게 지시하였다.

"저놈을 붙잡아다가 형장을 주어라."

장정들이 전화의 지시로 몰려가기는 하면서도, 한편 마음 구석으로는 붙잡혀서 어디 꺾어

지거나 터지지 않는가 두려웠다. 선뜻 달려들지는 못하고 선흥이를 에워싸는데, 이 소동을

알아챈 부역 나온 백성들이 숲의 어귀마다 몰려나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선흥이가 처음에는

꾹눌러 참고 일이나 무사히 끝내고 가려 하였건만, 큰 죄도 없는 터에 몽둥이로 마구 두드

려대니 참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에라, 이왕 내킨 판이니 그냥 부역 때려치우고 집에 가

는 길로 봇짐을 꾸려서 송도 박대근에게나 갈 셈이었다. 저지를 죄는 나중에 받더라도 예서

아니꼬운 일을 당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소란을 피울 생각보다는 빠져나갈 생각이 앞섰던

선흥이는 그를 에워싸는 장정들을 보자,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싸움꾼이란 상대방

이 싸울 기세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전의가 북돋워지게 마련인지라, 에워싸고 몽둥이를 치

켜든 자들을 본 강선흥이는 열기가 머리에 뜨겁게 솟아올랐다.

", 나를 둘러싸구 어쩌겠다는 게야?"

"어서 가서 전화 나으리의 형장을 받아라."

"안 가면 우리가 두들겨서 끌고 갈 테다."

"순순히 포승 받구 꿇어앉아라."

선흥이는 우선 앞에 서 있던 자의 멱살을 와락 잡았고, 그자를 번쩍 치켜들어 저희 패들

에게 던졌다. 세 놈이 한꺼번에 땅에 넓죽 주저앉는데 선흥이의 등뒤로 몽둥이가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선흥이가 몇대는 피하고, 또한 몇대는 맞으면서 돌아서서 양손에 한놈씩 상투를

그러쥐니, 다른 자들이 비켜섰다. 선흥이는 상투꼭지를 잡아 힘을 주어 뺑뺑이를 시켜주었

. 선흥이를 에워쌌던 자들이 그를 잡기는커녕 좌우로 패대기쳐지자 비슬비슬 일어나서 감

히 달려들지 못하였다.

"비켜라. 다시 막아서면 이번에는 참말 모가지를 뽑아놓는다." 강선흥이가 두 팔을 우악

스럽게 펼치며 나아가니 그를 막아서던 장정들은 얕은 물에 송사리 흩어지듯 하였다. 선흥

이가 벌채장 빈터를 떠나 산 아래로 내려가는데 등뒤에서 함께 일하던 오부 사람이 쫓아왔

.

"강총각, 내 말 좀 듣구 가게."

"무슨 말이우?"

"부역을 버리구 갔다가는 나중에 온 식구들이 달달 볶일 텐데 어디루 간단 말인가." "

럼 죄없이 형장을 맞구 있으란 말유? 나중에사 어찌되건 드러워서 못 참아내겠수. 나는 조

니포 나가서 놀다가 집으루 돌아갈라우."

"허허, 그 사람 성미두...내수사 관인이 그냥 둘 성싶나." "그냥 안 두면 대수요. 그러잖아

두 일 년에 서너 달 집에서 보내는 놈인데, 봇짐 꾸려서 장사 나갔다면 제놈들이 어디서

잡을 게요?"

힝하니 코웃음을 날리며 강선흥이는 장산곶 벌채장을 떠났다.

"어이구, 착한 백성이랍시구 부역질 참아내노라구 목구멍에 때 한번 못 벗겼구나." 선흥

이는 멀리 멍구미가 내다보이는 해변길을 신이 나서 걸어갔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멍구미의 가는 모래가 뽀얗게 일어나고 있었다. 선흥이는 한편 마음속으로 꺼림칙한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자기야 장연서 떠나버리면 되지만, 애초부터 형 인흥의 역을 대신하여

나온 것이었으니 그가 몹시 추궁을 받게 될 일이 걱정이었다.

 

선흥의 형 인흥은 이름 그대로 어질고 착한 사람이었다. 원래 그의 집안은 장연서 대대로

살아온 중농이었는데, 선대에 용우물 만석골에 궁방전이 생겨나고 점점 지역을 넓혀가매,

세는 혹심하고 농경이 안되어 논밭을 궁가에 흡수시키고 소작농으로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

었다. 인흥은 선흥이보다 열 살이 위였다. 어째서 이렇게 나이 터울이 큰가 하면 가운데 남

매들이 둘이나 있었건만 하나는 수군역을 지던 중 연지봉 앞바다에서 황당선을 쫓다가 침몰

되어 죽었고, 또 하나는 풍천으로 시집가서 살고 있었다. 소작질로는 형네 식구들과 부모와

선흥이 간신히 기한이나 면할 뿐이었으므로, 인흥은 아내의 권유를 따라서 염장에 나가 소

금꾼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처는 손톱에 피가 맺히도록 길쌈을 매었고, 늙은 부모님들도 밭

두렁에서 허리 한번 제대로 펼 수없이 농사를 지었다. 선흥이도 철들기 전부터 초군 어부질

로 인근 산과 해변을 싸다니며 일을 하였다. 그런데 호란 때에 성고개서 혼자 바윗돌을 굴

리며 버티었다는 조부를 닮았는지 형제들 중에서 기운이 으뜸이었던 것이다. 선흥이의 힘이

알려지게 된 것은 남대천 모랫벌에서 싸움하는 소의 뿔을 잡아 뽑았다는 일이 처음이지만,

그전에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소래에 들어온 중국 장삿배와 싸움이 났을 적에

선흥이는 혼자서 닻줄을 당겨 배를 끌었던 것이었다. 장연 고을 수령과 관아 아전들도 은근

히 선흥이를 두려워하고 꺼림칙하게 여기게 되었고 반대로 시골의 왈짜패들은 선흥이와 말

이라도 한마디 붙여보기를 원하였다. 선흥이도 철을 따라 인흥이처럼 염장에 나가게 되었다.

선흥이가 원래 성미가 쾌활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니 산지사방을 떠돌며 장사하는 것

에 이력이 나서, 말수가 적고 소심한 인흥이보다 상리가 많았다. 소금과 어물을 지고 내륙의

고을을 돌아다니며 직전을 받기도 하고 외상을 놓기도 하여 이르는 곳마다 친지가 생겨나니

모두들 장연 강총각의 물건을 기다리는 단골도 생겨났다. 또한 그뿐이 아니라 산골 처처에

목을 잡고 들어앉은 도둑들도 장연 강선흥이의 기운을 직접 당하고서는 그와 교유가 있게

되었고 아무도 감히 빼앗으려드는 자가 없었다. 강선흥이가 박대근이를 통하여 구월산 패거

리들과 형제지의를 맺게 된 것은 실로 그의 전력이 이러함에 연유하는 것이었다. 선흥이는

이미 수상한 녹림처사들과 마음놓고 사귀고 다툼질해오며 장삿길을 다녔으므로 박대근이가

구월산 두령들의 얘기를 해주었을 적에 별로 거리끼지도 않았었다. 더구나 갑송이의 기운을

보고 가그 제 윗길이라는 것을 알고는 더욱 마음이 흔쾌했던 것이었다. 허나 선흥이는 혈육

과 식구들에 대한 정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차마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녹림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집을 떠나면 우선 가족들은 양식 벌어오는 사람을 하나 잃게 되고 늙

은 부모와 처자식 봉양에 인흥이는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인흥이의 소망은 조랑말 한 필을

사서 짐을 지워 장사를 다니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하면 등짐보다 각 해물과 소금을 많이 실

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행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대근이가 선흥이의 기운에

탄복하여 송도 상단 차인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하였으나 선흥이가 선뜻 나서지 못했던 것은

부모가 대대로 살아온 장연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그들 형제에게 철마다 근

심이 있었으니 바로 장연 백성 누구나가 시달리는 부역이었다. 장사 다니기에 맞춤한 때마

다 부역 탓으로 짧으면 보름, 길면 한달 이상씩 각종 부역에 동원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훨

훨 나돌아다니기를 천성으로 아는 선흥이에게는 참으로 못 견딜 고역이었다.

 

강선흥이는 조니포의 첫봉이네로 가볼 참이었다. 첫봉이는 선흥이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았건만, 염장의 거간꾼이었고 또한 다른 이들 말대로 술 먹으면 개차반인 왈짜였다. 선흥

이에게 한번 두들겨맞은 뒤로 사화술을 먹고 동무가 되었던 것이었다. 첫봉이 밑에 둘봉이,

세봉이들이 선흥이 또래였고, 네봉이는 그들 말처럼 아직 쇠똥이 떨어지지 않아 나무나 하

러 다닐 소년이었다. 첫봉이네도 부역은 나갔겠지만, 워낙에 살림에 기름기가 돌아가니 돈으

로 대납하고 형제들 중에 한두엇은 집에 남았을 것이었다. 첫봉이네 형제들은 낮에는 염장

에 나가서 소금을 부리고 내주고 하지만, 역시 밤의 밀상질이 그들 생업의 중요한 일거리였

. 조니포 맞은편에는 멍구미섬이 송낙처럼 떠 있었다. 멀리 금사 해변에 일어난 모래 바람

이 조니포의 북편에 안개처럼 뽀얗게 떠서 흘렀다. 해변에는 황포의 돛배와 나룻배 몇척이

모래톱과 해중에 얹히고 떠서 철썩대는 물결에 흔들거렸다. 나지막한 어촌의 지붕들이 내려

다보였고, 포구는 한산하였다. 선흥이가 첫봉이네 집으로 들어가니 마당에서 작살을 벼리고

있던 둘봉이가 반색을 하였다.

"아이구 선흥이가 웬일이냐? 부역 나갔다면서..."

"첫봉이 집에 있니?"

"시방 뒷방에서 한잠 자구 있어. 간밤에두 꼬빡 새웠거든. 부역이 다 끝났냐?" 선흥이는

볼멘소리로 말하였다.

"부역인지 뭔지 드러워서 그냥 내빼 오는 길이다. 느이 수군역은 어찌됐니?" 둘봉이가

작살을 쳐들어 뾰족한 끝을 벼리어보면서 말하였다.

"대납했다. 무명을 사다가 냈어."

"허긴 나두 대납했는데, 언니가 아파서 할 수 없이 나갔었지. 장산곶 벌채장에 갔었는데,

내수사 관아 부스러기들이 어찌나 사람을 업수이 여기는지 몇대 패주고 오는 길이여."

봉이가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러면 관리들을 때렸단 말인가. 거 큰일냈군. 부역에서 빼쳐 나온 것만두 죽을 죄

인데 관원을 두들겼으니 몹시 시끄럽겠는걸."

강선흥이는 마루에 가서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하였다.

"제길...시끄러워봤자 나는 장연서 떠날 텐데, 맘대루들 하라지." "자네야 훌쩍 없어지면

괜찮지만, 자네 부친이며 인흥이 언니는 곤경을 치르게 될걸." 걱정스럽게 말하는 둘봉이의

입을 막듯이 강선흥이가 대뜸 말을 바꾸었다.

"이런...남의 초상에 효자 난다더니, 느이들 걱정이나 해둬라. 요즘 밤장사는 잘되냐?" "

인들두 요새는 약아서 값이 그리 후하질 않다."

"여러 말 말구 탁주나 한잔 있으면 마시게 해주어."

선흥이의 재촉에 둘봉이가 작살을 놓아두고 일어섰다. 그는 뒤꼍으로 돌아가서 열려진 방

문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첫봉이를 불렀다.

"언니, 선흥이 왔수."

첫봉이는 깊이 잠들었는지 끙하면서 돌아누웠다. 선흥이가 다가와서 버럭 고함을 쳤다.

"이 자식아, 아주 염라 태수짜리 해먹기 싫으면 눈을 떠라." "어유, 시끄러..."

첫봉이가 게게 풀린 눈을 간신히 열어 선흥이를 올려다보았다.

"니가 불쑥...웬일이냐?"

", 나 느이 집에 한 이삼 일 신세지러 왔다."

선흥이가 방으로 들어가 웃통을 훌떡 벗고 앉으니, 첫봉이는 기지래를 켜면서 일어나 앉

았다.

"쌀 귀하고 돈 귀한 세상에 너 같은 밥장군이 오면 우리 식구는 어쩌니? 무슨 일이 났구

."

"벌채장에서 내수사놈들을 두들겼대는군."

곁에서 둘봉이가 대신 말하였다.

"잘했다. 그러잖아두 밤에 배 부릴 일손이 하나 필요하던 참인데." "장사는 잘되니?"

첫봉이는 싱글싱글 웃었다.

"뭣 그럭저럭...나 따라와봐라."

첫봉이의 뒤를 따라서 강선흥이는 뒤꼍에 따로 지어진 광으로 갔다.

광문을 여는데 허공에 기다란 줄이 매어져 있고 말린 해삼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저게 뭐야...해삼인가?"

첫봉이는 다시 버들 광주리에 가득 담긴 말린 해삼을 만져보면서 말하였다.

"이게 전부 돈이여. 한철 열심히 캐내면 이쯤은 장만할 수 있지. 당인들은 흑충이라구 해

서 제일 좋아하는 해물이란 말야. 그뿐인가 다른 물건두 있거든." 첫봉이가 부담을 들어내

더니 뚜껑을 여는데, 나무뿌리 같은 것이 스물 남짓 들어 있었다.

"이게 뭐냐?"

"인삼이다. 강계에서 온 것을 간신히 받아놨지. 이걸 당인들게 넘겨주면 대금이 들어오지.

아마 오구쌍대나 네닢붙이 정도로 보아줄 게다. 너두 할 일 없이 무거운 소금짐 지구 산간

으루 헤매지 말구 나하구 밀상이나 하자."

"소문났다간 코를 베일 텐데, 조심해야지."

강선흥이가 순박하게 말하니 첫봉이는 그의 어깨를 치는 것이었다.

"돈 버는 일이 술 먹기처럼 쉽다면 온 천지에 부가옹이게? 여기서 거래만 잘 트이면 오히

려 의주나 동래보다두 짭짤하다. 청국이 바루 코앞이여." 두 사람은 광문을 닫고 나섰다.

첫봉이의 말에 의하면 중국 배가 해삼 채취를 할 수가 없어서 가끔 연안에 대었다가 수군에

쫓겨가고 잡혀가고 하는데 이제는 상인들이 장삿배를 타고 와서 거래를 하자고 거간을 넣는

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첫봉이네 형제들이 하는 일은 내륙쪽 잠상들의 거간 노릇인 셈이

었다. 선흥이가 첫봉이에게 물었다.

"거래를 해주면 구전은 넉넉히 받니?"

"받다뿐이냐. 내게 밑천만 조금 있다면 직접 배를 타구 청국으루 건너가볼 텐데..." 둘봉

이와 첫봉이 선흥이 셋은 점심을 함께 들고 나서 우선 잠을 자두기로 하였다. 물때가 밀리

는 자정 무렵에 깨어나 밤일을 해야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에 배가 오기로 약속이 있

었던 것이었다.

밀물 때가 되어 그들의 모친이 형제들을 깨우러 왔다. 셋은 일어나 야참으로 술과 밥을

든든히 먹고 갯가로 나갔다. 말린 해삼이 가득 들어 있는 광우리와 부담을 짊어지고 있었다.

첫봉이가 배를 끌어내어 짐을 싣고 나서 둘봉이에게 말하였다.

"나머지 물건들은 차례로 바위틈에 박아놔라. 선흥이가 와서 실어갈테니까." 둘봉이는 집

으로 되돌아가고 첫봉이와 선흥이만 배를 타고 멍구미섬으로 나아갔다. 첫봉이가 후미에서

노를 저었다. 나룻배보다도 훨씬 작은 편주인데 물결에 끊임없이 뒤뚱거리고 있었다. 노도

앉아서 젓는 짤막하고 넓적한 것이었다.

"노 저을 줄 알지?"

", 아무리 장사질 다녔어두 장연서 갯장구치고 자란 사람이닫." "수군 진의 기찰선에게

들키면 막바로 감영에 압송되어 옥귀신 되구만다." 그들은 멍구미섬을 돌아 나갔는데, 워낙

에 바위를 때리는 물결이 거세어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였다. 선흥이가 캄캄한 섬의

숲 사이를 살피면서 물었다.

"거간패는 느이뿐이냐?"

"몇무리가 있었지만, 외방 머슴이 동네 개 등쌀에 동구 밖 출입이라지 않더냐? 우리가 쫓

아버렸다."

그들은 배를 저어 섬의 뒤편으로 돌아 나갔다. 첫봉이는 노를 올리고 삿대를 들어 좁은

바위틈을 요리조리 빠져나갔고, 이윽고 비좁은 모래사장이 나왔다.

"물길 잘 봐두었겠지?"

"대강은 봤는데...오늘밤 잘못하면 물귀신 되겠구나." 그들은 배를 뭍에 끌어올렸다. 선흥

이와 첫봉이는 배에 실었던 집을 모래밭에다 차례로 운반해놓았다.

"아무두 없잖아."

"저어기 어디엔가 있을 게다."

첫봉이는 캄캄한 바다 쪽을 가리켰다.

"그믐이라 다행이지 달이 뜰 적엔 새벽 장사가 기중 낫다. 안개가 자욱히 끼니까..." 첫봉

이가 쌈지를 꺼내어 부시를 쳤다. 그리고 준비해 온 기름 먹인 솜뭉치에 불을 붙였다.

그는 횃대를 들어서 머리 위에 쳐들고 천천히 흔들었다. 몇번을 걸고 나서 불을 모래 속에

푹 박아서 꺼버렸다.

"너는 어서 가서 남은 짐들을 날라와라."

선흥이는 첫봉이가 시킨 대로 배를 띄워 물길을 찾아나갔다. 역시 첫봉이보다는 길눈이

어두워서 바위에 부딪치곤 하였으나, 삿대로 버티어 뒤집어지는 것은 간신히 면할 수가 있

었다. 선흥이가 멍구미섬을 돌아서 갯가에 닿으니 둘봉이가 짐을 모아다 놓는 중이었다.

봉이는 짐을 배에 실으면서 말하였다.

"어쩐지 기분이 매우 켕기는데..."

"왜 무슨 일이라두 났니?"

"그게 아니라, 보통 땐 인적이 끊긴 곳인데 오다 보니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혔더라." "

고기잡이 나온 사람들이 지나갔겠지."

둘봉이는 자기도 배에 올라타면서 말하였다.

"아무래두 첫봉 언니께 말해줘야 되겠어. 멍구미 밀상질 목이 짭짤하단 것은 불한당들끼

리 대략 눈치들을 채구 있단 말이거든. 다른 패거리일지두 모르지." "까짓 거 모조리 오라

구 그래, 내가 하백이 사춘을 만들어줄 테여." "환도라두 가지구 나올 걸 그랬군."

그들은 배를 저어 다시 섬의 뒤로 돌아 나갔다. 그들이 물길을 찾아서 모래사장으로 들어

가는데 뒤편에서 노 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앞에도 먼저 닿은 중국인들의 배가 보였

. 아마도 큰 배는 멀찍이 바다 가운데 떠 있는 모양이었다. 첫봉이는 세 사람의 사내와 함

께 물건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배를 대어 광우리들을 내려놓았고 뒤에 따라오던

배도 대어져 두 사람이 작은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사장에 올랐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은 서

투른 조선말을 지껄이며 첫봉이와 흥정을 하였다. 말린 해삼은 적정가격이었는지 수월하게

타협이 되었으나, 역시 인삼 흥정이 오래 걸렸다. 그들은 기름등을 켜서 발 아래 내려놓고

일일이 인삼들을 살펴보았다. 흥정이 이루어졌는지 상대방이 작은 상자를 첫봉이에게 건네

었다. 첫봉이가 상자를 열고 절편만한 은자를 꺼내어 수효를 헤아렸다. 그들은 서로의 배를

끌어내어 짐을 싣고 있었고, 첫봉이가 서둘렀다.

"얼른 가자. 다음 기일은 내달 그믐이다."

첫봉이가 거래한 상대도 큰 상인은 아니고 또한 상대를 유일하게 첫봉이로만 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첫봉이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듯하였다. 첫봉이가 바라는 것은 다른

잠상들과도 거래를 트는 일이었으나 그들은 첫봉이와의 관계를 독점하려 하였던 것이다.

라서 첫봉이는 그들의 신임을 얻고자 성실하게 거래에 응하였다. 그들이 배를 띄우려는데

모래사장 뒤편의 숲속에서 나무를 헤치는 듯한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이놈들, 꿈쩍 말아라!"

그들의 등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리면서 여러 놈들이 모래밭으로 뛰어 내려왔다.

"...?"

첫봉이는 순간적으로 생각하였다. 지금 배를 띄워 달아나버리면 돈냥은 무사하게 보존할

지 모르나 당인들에게 신용을 잃게 되어 밀상질은 댜해먹는 것이었다. 비록 불리하여 돈을

빼앗기더라도 거래자들에게 이것이 계획된 것이 아니요, 패가 다름을 보여주어야만 하였다.

뒷전에 섰던 청인들도 놀라서 제각기 비수를 빼어들었다. 그러나 선흥이와 첫봉이 형제는

셋 다 맨몸이었다. 둘봉이가 재빨리 배에서 해삼 캐는 작살을 집어서 제 형과 나누어 가졌

. 그들은 물을 등지고 숲을 향하여 활처럼 둥글게 막아섰다. 숲속과 바위 뒤에서 몰려나온

놈들이 칠팔 인은 되는 것 같았다. 첫봉이가 작살을 쳐들고 물었다.

"웬놈들이냐?"

"느이 밀상질을 단속하러 나온 어른들이다. 물건과 돈을 이쪽으루 던지면 무사히 돌려보

내 주지."

"어디 빼앗아보아라!"

어둠속에서 껄걸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 그놈, 아무리 돈이 귀신을 부린다지만 싸워서 이길 것 같으냐. 우리가 누군 줄 알

..."

강선흥이가 두 팔을 벌리고 앞으로 나가면서 얼러댔다.

"누구긴...네깐 놈들이 누구겠니. 고작해야 좀도적놈들이겠지. 어디 나는 맨손 들구 바람을

쥐는 사람이니 덤벼보아라."

외치던 사내가 좌우를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안되겠다. 얘들아, 콩알을 먹여줘야겠다."

양쪽 끝에 섰던 자가 동시에 앞으로 불쑥 나서는데 그들을 겨눈 작대기의 끝이 보였다.

"칼이구 뭐구 다 귀찮다. 움직거리는 놈은 사정없이 구멍을 뚫는 총포란 게여." 총에 장

사가 따로 없으니 선흥이도 감히 달려들 수가 없었다.

"손에 가진 걸 모두 버려라!"

첫봉이 형제가 하는 수 없이 작살을 모래밭에 힘없이 내던졌다. 청인들도 눈치를 챘는지

짜른 칼들을 떨어뜨렸다. 첫봉이가 말하였다.

"부탁이 한가지 있다. 당사람들은 그냥 보내다우."

"어째서..."

"남의 밥줄까지 끊어놀 테냐? 물건을 빼앗았다간 거래는 끊기구 만다." "그런 걸 우리가

알 게 뭐냐?"

일당들 중에서 두 놈이 나와 물가에 대어진 첫봉이네 배에서 은자가 들어 있는 상자를 날

라갔고, 다시 해변에 쌓아놓은 부담과 광주리를 운반하여 갔다. 그리고는 가라고 청인들의

등을 떼미니, 그들은 황급하게 배에 올라 뭍을 떠났다. 첫봉이가 애가 달아서 미칠 지경이었

지만 총포가 계속 겨누고 있으니 달싹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자들은 배를 타고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놈들을 묶어라."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지시하여 선흥이와 첫봉이 형제는 밧줄에 꽁꽁 묶여서 숲속으로 끌

려갔다. 그들은 세 사람을 이끌고 섬의 소나무 숲으로 가서 다시 나무에 한무더기로 묶어놓

고는,이리저리 흩어져 앉았다.

선흥이는 실로 가소로웠다. 총포에 움찔하여 주먹 한번 제대로 쥐어 보지도 못한 채 산짐

승처럼 묶이고 말았으니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판이었다. 선흥이는 묶인 팔과 등판에 은

근히 힘을 주어보았다. 되시근하기는 하였으나 일시에 힘을 주면 끊길 듯도 하였다. 그는 틈

만 엿보면서 나란히 양옆에 묶인 첫봉이와 둘봉이의 발등을 가만히 밟았다. 밀상 목을 덮친

사내들은 흡족했는지 제각기 떠들었다.

"이제 썰물 때만 되면 슬슬 떠나기루 하자."

"내가 뭐랍디까. 기일을 맞추어 배가 들어오는 걸 봤다고 안 합디까. 어제 해질 녘에 덮개

를 씌운 청국배가 먼 데 떠 있는 걸 봤지요. 좌우간 이번 일엔 내 공이 제일 큽니다." "

아 이젠 물이 썰 때까지 한숨 자둡시다."

"저놈들 괜찮을까?"

곁에서 주억거리던 자가 냉소를 날리는 것이었다.

"금강역사라 할지라두 저 구렁이 같은 바를 어찌 끊겠수. 틈틈이 살펴볼 것두 없겠네."

그들은 나무에 한놈씩 기대어 다리를 길게 펴고 앉았다. 짙은 안개가 섬 주위에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총총하던 별빛이 차차 빛을 잃어가는 참이었다. 건너편 산에서 밤새들이 고즈

넉하게 울고 있었다. 선흥이는 그들이 누구인가를 대략 눈치챌 수가 있었다. 그들은 불타산

심백이네 일당들이 분명하였다. 그들 중에 서넛이 먹물 들인 중옷을 입고 있었으니 천불사

에 있는 놈들인 모양이었다. 심백이라면 선흥이가 벌써 오래 전에 혼을 내준 일이 있는

자였다. 심백이는 선흥이를 몹시 두려워하여 남대천 항우라고까지 불렀던 것이었다. 그의 졸

개들이니 더 말할 나위도 없는 노릇이었다. 선흥이는 몇번 힘을 넣다가 일시에 팔굽에 힘을

모으면서 위로 쳐들고 어깨를 부풀려 앞으로 당겼다. 팽팽한 그의 근육 위로 밧줄이 쓰라리

게 파고들었다. 계속 힘을 쓰며 어깨를 좌우로 뿌리치니 팔 근처의 줄이 느슨해졌고 이어서

두어 가닥이 툭 끊어져버린다. 다시 한번 힘을 쓰니까 줄이 스르르 풀어지며 흩어져 내렸다.

선흥이는 잠깐 그러고 서서 잠자는 도적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을 감시하고 앉았던 자도 무릎에 화승총을 얹은 채로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선흥이

가 첫봉이 형제의 줄을 풀어주려 하나 칼이 보이질 않았다. 더듬더듬 나무에 기댄 자들 앞

을 앉은걸음으로 살피면서 다니는데 한 녀석이 등에 환도를 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선흥이

가 호흡을 삼키고 슬그머니 자루에 손을 대어 뽑아내는데 그놈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오른

쪽으로 넘어진다. 다시 느긋하게 다져먹고 선흥이는 환도를 뽑았다. 뽑자마자 재빨리 되돌아

가서 첫봉이와 둘봉이가 묶인 밧줄을 끊었다. 형제들이 나무에서 몸을 막 떼어내는 찰나인

데 등뒤에서 누군가 부르짖었다.

"저놈들 봐라!"

선흥이가 돌아서니 도적들이 우르르 일어나고 있었다. 앞 뒤 챙길 것 없이 한달음에 달려

들어 화승총 가졌던 자의 가슴팍을 발길로 내차고 총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등뒤를

덮치려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던 우두머리 사내의 면상을 총대로 후려갈겼다.

"에쿠!"

소리를 내지르며 그자는 얼굴을 감싸고 뒤로 넘어졌다. 선흥이가 어둠속에서 닥치는 대로

총대를 휘두르는데, 워낙에 도적들이란 형세 판단에 빠른지라 뿔뿔이 흩어져서 섬의 언덕을

넘어갔다. 첫봉이도 환도로 한 사내를 베어 넘겼다. 첫봉이는 우선 물건 찾는 일이 급하여

주위를 더듬거려보는데 해삼을 담았던 광주리가 엎어져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삼이 들어 있을 부담과 은자가 든 상자는 보이질 않았다. 도적들이 달아나면서 챙겨가지

고 뛴 모양이었다.

선흥이가 씨근거리면서 도적들의 뒤를 쫓아갔다. 언덕을 넘어서니 이미 그들은 섬을 빠져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바닷물이 제법 썰었는데 섬에서 사선 방향으로 모래톱이 쌓여 있었

, 도적들은 모래톱을 따라서 뛰는 것이었다. 물이 겨우 정강이에 찰까말까 하였다. 선흥이

가 뛰쳐내려가는데, 방포 소리가 들려왔다. 탄환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는 듯한 날카로운 소

리가 들려왔다. 뒤미처서 따라오던 첫봉이가 언덕 위에서 외쳤다.

"선흥아...이리루 올라와라."

선흥이는 물에 내려서지 못하고 멈칫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첫봉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

.

"그만 쫓아라."

선흥이는 다시 섬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첫봉이는 급히 말하였다.

"빨리 예서 빠져나가야 한다. 우리두 이젠 저놈들과 마찬가지다." "곧 쫓아가서 뒷덜미를

덮치려는 참이었는데..."

"아니야, 방포 소리가 들렸으니 수군 진에서 들었을 게다. 아마 장교가 군사를 인솔해서

기찰을 나올 게다. 그러잖아두 멍구미섬이 의심을 받던 터였다." 그들은 섬 뒤편의 모래사

장으로 되돌아왔다. 둘봉이가 우두머리 사내를 밧줄로 단단히 비끄러매고 있었다.

"몇 놈이냐?"

"네가 때려 잡은 놈이 소두령인 모양인데, 나두 한놈 베었다." 첫봉이의 말에 둘봉이가

침을 탁 뱉으면서 덧붙였다.

"살펴보니 어깻죽지에서 허리까지 깊숙이 베었어. 버얼써 고택골 갔는데..." 선흥이는 소

두령의 머리를 발로 건드려보았다.

"이놈은...?"

"비슬비슬 일어나는 걸 메어치구 묶어두는 중이야."

"빨리 서두르자. 의논은 집에 가서 천천히 하기루 하구...관군이 오기 전에 얼른 없어져야

."

첫봉이가 배를 끄러올렸고, 둘봉이는 모래밭에 사방으로 흩어진 물건들을 그러모아다가

광주리에 담고 배에 실었다. 선흥이가 잡힌 소두령을 번쩍 들어 배에 태우고 뭍에서 밀어냈

. 그들은 곧 섬을 벗어나, 이제는 바닥이 얕아져서 모래에 가끔씩 쓸리는 배를 삿대로 밀

고 나갔다. 거의 뭍에 이르러 선흥이가 배를 끌고 갔다.

"저 봐, 진에 불이 휘황하다. 곧 기찰선이 뜰 거야." 그들은 재빨리 포구를 벗어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첫봉이네 집에 이르니 노모는 잠이 깨어 두 아들을 기다리던 중

이었다. 첫봉이가 말했다.

"이제부터 저놈에게 일의 속내를 캐어보자."

"정신 차릴까 모르겠군."

그들은 광문을 따고 들어갔다. 선흥이가 묶인 소두령을 사정없이 내던졌다.

"어 그놈 뭘 처먹었는지 똥집 한번 무겁네."

끄응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관솔 불빛이 눈에 거슬리는지

자꾸만 고개를 돌렸다. 첫봉이가 비수를 뽑아서 그자의 살에 슬슬 비벼보면서 말했다.

"우리가 누군 줄 아니...아마 모를 게다. 이쪽 분은 남대천 항우되시는 강총각되시고, 나는

조니포의 봉이 형제 중 맏이 되는 사람이다."

소두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장사님과 첫봉이 성님 선성은 산채에서두 압니다. 살려주오." "느이들 멍구미 밀상 목

이 누구 밥줄인지 알구 왔겠지." 소두령 사내가 말을 못하고 고개를 푹 박았다. 첫봉이가

칼끝으로 사내의 턱을 치켜올리자, 사내는 안면을 잔뜩 찡그리고 그를 마주보았다.

"우리 목인 줄 알았지?"

"..."

"심백이가 느이보구 시키더냐?"

소두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첫봉이는 이를 갈았다.

"죽일 놈...감히 나를 넘봐? 여기는 갯가인데, 녹림패가 산을 버리구 남의 구역으루 들어와

분탕질을 했것다. 그래 거래가 있을 줄은 어찌 알았느냐?" ", 정탐꾼을 내려보내어 멍구

미섬을 지켜보게 하였습니다." "물은 어찌 건넜느냐?"

"밝을 때 조개 줍는 사람들인 척하구 섬에 들어가서 기다렸지요. 물이 썬 뒤에 모래톱을

건넜습니다."

첫봉이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 여우 같은 놈들!"

하고 나서 첫봉이가 선흥이에게 말하였다.

", 내가 네 동무인 줄 번연히 알면서 심백이놈이 이럴 수가 있냐?" 선흥이도 그런 말

에는 은근히 불쾌하였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글쎄나 말이다. 당장 산채루 쳐들어가서 모조리 때려 죽이구 말아야지." 첫봉이가 사내

의 얼굴을 다시 치켜들었다.

"어쩔테? 여기서 물고기 미끼가 될래, 아니면 순순히 산채까지 우리를 모셔갈 테냐." "

려주신다면 여부가 있겠습니까. 불타산까지 모셔드립지요." "만일 부담과 은자를 찾으면 네

게두 두둑히 나눠주겠다. 이 길루 산채에 가는 거다. 그리구...느이들 화승총은 어디서 생겼

?"

", 몇 달 전에 심두령이 양주에 장물을 넘기러 갔다가 비싸게 주고 구했답니다." 첫봉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자루나 있느냐?"

"다섯 자루가 있는데, 일을 나올 때만 두령이 한두 자루씩 내줍디다." "하나는 내가 부숴

버렸다."

강선흥이가 아쉬운 듯이 말했으나, 첫봉이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그들이 광문을 굳게 잠가 놓고 마당으로 나서보니 과연 멍구미섬을 한바퀴 돌아 나오는

기찰선의 횃불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모래톱 가까이 대어진 배에서 군사들 여럿

이 내려서 해변으로 건너오는 것이었다.

"이쪽에두 꼭 올 게다. 선흥이 너는 안방에 들어가 있어." 둘봉이가 곁에서 투덜거렸다.

"드럽게 됐네. 벌이두 없이 상납전 내게 되었는걸."

선흥이는 안방으로 들어가 봉이네 모친이 시키는 대로 이불을 들쳐 쓰고 누워 있었다.

참 뒤에 밖에서 두런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니나다를까, 삽짝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첫봉아, 첫봉이 자느냐?"

그러나 방에 몰려들어간 형제는 일부러 코를 드높이 골면서 못 들은 체하는 모양이었다.

"얘 첫봉아, 진에서 나왔다."

한동안 떠들썩한 뒤에 먼저 둘봉이가 나가서 일부러 어물쩍하게 물었다.

"제미헐! 어느 시러베아들놈들이 아닌 밤중에 몰려와서, 동네 워리 새끼 찾듯 하누?" "

, 그놈 잠이 덜 깼군."

"웬일이슈..."

"느이들 멍구미섬에 갔었지?"

둘봉이는 볼멘소리로 혼잣말하듯 씨부렁거렸다.

", 수군이라면 최하천인데 제가 장교면 장교지 누구게 놈자 붙여 해라야, 해라가..." "

구미섬에 갔었느냐구."

"갔었수."

둘봉이의 대답이 너무도 태연자약하니, 오히려 말문이 막힌 것은 장교 쪽이었다. 그는 우

선 삽짝을 와락 밀고 마당으로 몰려들어갔다. 이리저리 군사들이 흩어졌다. 이때에 코를 골

고 있던 첫봉이가 제 방문고리를 잡아당긴 군사에게 벌떡 일어나서 불문곡직하고 주먹다짐

으로 받아쳤다. 군사가 얼결에 궁둥방아를 찧는데 무르팍에 코피가 주르르 흘렀다.

"...아무리 약한 백성이라지만, 이거 너무 행패가 자심하구나. 야반에 집뒤짐을 하다니..."

"첫봉아, 느이들 멍구미섬에 갔었다구?"

"갔었수."

"누가 총을 놓았느냐?"

"언제요?"

"조금 전에 총을 놓는 소리며, 고함소리를 여럿이서 들었단 말야." 첫봉이는 완전히 동문

서답에 견이서풍이었다.

"우리는 초저녁부텀 술 먹구 세상모르게 잤는걸."

"그럼 왜 섬에 갔다구 했니?"

"사흘 전에 게 잡으러 갔었수. , 게두 조세 물구 잡아야 허우?" 장교는 갑자기 맥이 풀

렸다. 그렇다고 조니포 토박이요 주먹깨나 날리는 봉이네 형제를 막볼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군사 하나가 코가 터져서 얼굴을 싸쥐고 있건마는 제 상관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못된 자식 같으니...그럼 그렇다구 진작 말해줘얄 거 아냐." "아니 조니포 사람들치구 멍

구미섬에 안 가본 놈 어딨수. 공연히 남 잠두 못 자게 들볶지들 말구 어서 가서 벙이나 잘

스슈. 또 알우? 황당선을 잡아 포상을 받을지."하면서 첫봉이는 슬그머니 허리춤에서 엽전을

꺼내어 장교에게 찔러주었고, 장교는 공연히 헛기침만 터뜨리는 것이었다.

"좌우간에 수상한 놈들을 보면 알려주어."

장교가 어물쩍 넘기면서 말하였다.

"염려 마슈. 내 눈에 띄기만 한다면 작살루 산적꽂이를 해서 끌어다 줄 테요." "얘들아,

포구 안을 샅샅이 살펴보구 돌아가자."

장교가 첫봉이의 밀상질을 눈치 못 채는 바 아니로되 평소부터 수시로 뇌물을 받아왔으니

겉으로 드러내기도 난처한 노릇이었다. 하룻밤 기찰 나와서 한 꿰미를 얻어냈으니 별 군소

리가 있을 수 없었다.

"잘 자게."

", 내일 낮에 번이 빠지면 놀러들 오슈."

첫봉이가 시큰둥하니 군사와 장교를 배웅하였다. 그들의 인기척이 멀리 사라지자, 안방에

서 이불을 들쳐쓰고 숨어 있던 선흥이가 뛰어나왔다.

"어이 졸려 죽겠네. 하마터면 코를 골구 잠들 뻔했어." 둘봉이가 광을 살피고 나와서 말

하였다.

"어쩔 테유? 저 자식을 바다에 쓸어넣어버릴까."

"아니야, 저놈을 앞잡이로 세워서 산채루 숨어드는 게다." "산채에는 패거리가 많은데 우

리 셋이서 대적하긴 힘들걸." 둘봉이가 말하자 선흥이가 껄껄 웃었다.

"걱정 없다. 심백이만 잡아서 족치면 물건을 찾을 수 있어. 심백이놈은 내게 맡겨두어라.

헌데 언제 올라갈려구?"

"날이 밝는 대루 곧장 올라갈까...?"

둘봉이의 말에 첫봉이가 반대하였다.

"아니다, 저녁때가 좋아, 아무래두 방에 두령의 침소를 덮쳐야 할 테니까." "그럼...나는

용우물 집에 다녀와야겠는걸."

선흥이가 아무래도 집 걱정이 되어서 집에 들를 것을 비쳤다.

"부역을 빼쳐 달아났으니, 어쩌면 인흥이 언니가 곤욕을 당하게 될지두 모르겠다. 관아에

줄을 넣어 돈냥이라두 주고 수습을 해봐야 되겠어."

"그렇게 해라. 이놈아, 그럴 일을 뭣허러 저지르구 다녀. 너는 네 성깔하구 기운 땜에 늘

골칫거리다. 내가 열 냥을 줄 테니 잘 수습해 놓구 저녁때까지 돌아와라." "스무 냥만 다

. 아무래두 내가 장연서 당분간 떠나야 되겠으니, 식구들 양식이라두 넉넉히 팔아주구 가

야겠어."

첫봉이가 두말 없이 스무 냥을 꺼내 주었다. 그들은 저녁때에 다시 모여서 불타산에 오르

기로 단단히 약속을 하고서, 선흥이만 첫봉이네 집을 나섰다.

조니포에서 게나루 쪽으로 사십여 리를 가면 왜성과 용우물로 갈리니, 용우물은 해변을

낀 너른 들판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만석골은 특히 사방 십여 리에 가로 거칠 데가

없는 들판인데, 그 들판의 끝에 성곽과도 같은 불타산의 이빨이 아득하게 섰는 것이었다.

선흥이가 새벽녘에 용우물로 들어가 퇴락한 집으로 찾아들어가는데, 원래가 선흥이, 인흥

이 형제가 행상아치이니 농사꾼들처럼 집안을 가꾸거나 돌보지 않아서 집 꼴이 말이 아닌

것이었다. 집안은 괴괴하였다.

"용선아, 용선아."

선흥이 문득 불안하여 큰조카의 이름을 부르는데, 안방 문과 건넌방 문이 동시에 열어젖

혀지고 아버지의 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도대체 정신이 있는 놈이냐? 아예 집에서 없어져버리든지, 죽어서 꼴을 안 보면 다

른 식구들 속이나 편하겠다."

안방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건넌방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은 형

수였다. 형수는 아마도 근심 끝에 밤을 새운 듯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이, 무슨 일을 저질렀어요? 용선이 아부지가 나졸들에게 끌려가셨답니다." 강선흥이는

식구들께 면목이 없어서 마루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혀를 찼다.

"네 형이 앓아 드러누워 있는 걸 보구 부역을 대신 나갔으면, 일이 끝날 때까지 착실하게

일하구 돌아와얄 거 아니냐. 차라리 수군역이야 군포를 내어 면했다지만, 장산곶 벌목 부역

을 어찌하겠느냐. 도무지 빠질 길이 없어 너를 보냈는데, 어디 네 몸이 네 몸인 줄 알았니.

느이 형의 몸이여."

선흥이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형수에게 물어보았다.

"언제 잡혀가셨수?"

"어제 한밤중에 나졸들 서넛이 나왔습디다. 앓는 사람이니 어찌 사정 좀 보아달라구 애걸

했지만 부역 나가서 관원을 두드리고 빼쳐 왔으니 본을 보여야 된다구 한대요." "그럼 날

잡아가지, 어째서 언니는 잡아가구 법석이람." "이 녀석아 그 역이 인흥이 역이 아니냐.

러잖아두 앓느라구 심기가 쇠잔한 사람이 태형이라두 맞아봐라."

어머니가 선흥이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꾸짖는 대신에 스스로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장연 고을을 떠나든지 해야지 그놈의 부역 등쌀에 이거 살 수가 있나. 농사라야 궁방전

에 붙여 겨우 끼니를 에우고, 자식놈들은 타관객지에 보내어 행상아치를 시키니 어디 가선

들 요따위 살림보다 못할라구."

선흥이가 한편 마음으로는 후회가 되면서도, 평소부터 관아 알기를 도야지 우리쯤으로 알

고 있던 판이라 절로 코웃음이 터져나왔다.

", 쫓아가서 아예 삼문을 와그르르 무너뜨리구 언닐 업어 오지요." "허어!"

어이가 없는지 선흥의 아버지는 마루를 연신 두드리며 앉았다.

"이놈아, 약한 백성이 죄가 없어도 간이 두근반 세근반 하는 터인데, 자수를 하여 벌받을

생각은 않구 집안 망칠 궁리나 하구 앉었어?"

"죄두 없이 벌을 받는단 말여요?"

"니 아비는 그럼 너보다 못해서 마름놈의 사나운 닥달을 받으며 용선이랑 추수 부역을 나

가는 줄 아냐. 다 살자니 어쩔 수 없어 그러는게야. 늙은 아비는 하루 종일 낫질을 하느라구

허리앓이에 잠들지 못하고, 어린 조카는 곤하다 못해 입술에 헌 데가 가득한 판에 너는 뉘

댁의 도령이길래 그나마 부역을 못 참아서 말썽을 부려." 선흥이가 묵묵히 앉았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마루에서 내려 미투리를 꿰었다.

"어디 가니?"

"관가에 가우."

"거긴 뭣하러 가?"

선흥이가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언니가 잡혀갔다니 개청을 하면 형을 받을 거 아니우. 그래 빨리 쫓아가서 내가 벌을 받

겠수."

가족들은 잠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 잠깐 내 말 좀 들어라."

선흥의 어머니가 말했다.

"느이 형이 잡혀가서 하룻밤을 새웠는데 혹시 아니? 아픈 사람을 설마 태장이야 치겠느

. 형방이나 이방이나 모두 생각은 있는 이들이니 방면해줄지두 모른다." 선흥의 어머니에

겐 손가락처럼 사랑이 더하고 덜함 없는 내 살이요 내 자식인 것이었다.

일단 인흥이가 잡혀갈 때 애간장을 태웠던 마음은 이제 또 둘째아들이 형장을 맞으로 가겠

다니 더욱 애처롭고 안쓰러웠다.

"기다려보았다가, 용선이를 보내어 관가의 형편을 살피구 나서 은밀히 이방 어른을 뵙구

사정해보려무나."

"그렇지만...매를 맞으면 그분이 기가 쇠하여 견디지 못할 텐데..."하면서 형수는 그 나름대

로 나서지는 못하고 은근히 선흥의 등을 밀어내듯 말하였다. 하나 역시 아버지의 생각이

늘 공평한 법이라서, 그는 절충한 생각을 끄집어냈다.

"용선이를 데리구 가거라. 둘이서 관가 사정을 알아보고, 그저 무마될 일이라면 무명이라

도 갖다 바치고 인정을 통하여 볼 것이요, 만약 형편이 급박해서 느이 형이 매를 맞게 되면

지체없이 자수를 하여라."

"알겠습니다."

선흥이는 가족들의 애정에 갑자기 송구스럽고 격한 느낌이 들어 코허리가 시큰하여 고개

를 수그린 채 마당에 서 있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형수가 쫓아들어가 부리나케 용선이를

깨웠다. 용선이가 할아버지와 함께 만석골 궁방전에 나가 노역에 시달린 태가 역력하여 선

흥이는 가엾어서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입술이 부르터서 딱지가 더덕더덕 앉았고,

린것이 새까맣게 그을린데다 바싹 여위어 있었다. 아직 곤한 잠이 덜 깼는지 마루 끝에 다

시 걸터앉아 끄덕끄덕 조는 놈을 선흥이가 덥석 끌어다 등에 업었다. 그런데도 용선이는 부

끄러워하기는커녕 정신없이 매달려 잠을 자는 것이었다. 선흥이가, "그냥 자게 내버려두고

혼자 갈 테요."

하였으나 식구들이 모두 데려가라고 권유하여 그대로 업고 나설 도리밖에 없었다. 게나루

갈대밭을 지날 때 용선이가 서늘한 강바람에 잠이 깨어 그의 등뒤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삼춘, 어디 가는 거유?"

", 잠이 깼구나. 읍내 나간다."

"아부지가 어젯밤 잡혀갔어요."

"그래서 관가에 가는 길이다."

선흥이는 용선이에게 이방에 통기할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남대천의 자갈밭에는 물이 썰

기 시작하여 젖은 바닥이 널따랗게 드러나 있었다. 방게가 이리저리로 그들의 발길을 피해

달아났다. 그들은 배를 타고 남대천 건너 읍내로 들어갔다.

우선 객사 부근의 주막에 선흥이 혼자만 남고 용선이가 길청을 찾아갔다. 개청이 일러서

아전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는데, 용선이가 오락가락하노라니 때마침 형리가 들어서는 중이

었다.

"나으리, 이방 어른 아직 안 나오셨습니까?"

", 안 나오셨다. 무슨 일루 찾누?"

", 저희 아비가 걱정이 되어 왔습니다."

"느이 아비가 누군데 여기 잡혀왔느냐?"

"어젯밤에 부역 까탈로 잡혀오셨습니다."

"강인흥이 말이로구나."

형리는 어제 저녁때에 장산곶 벌채장에서 내수사 전화가 장연현감께 올린 보장을 접수하

여 이방에게 올렸던 것이다. 관내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간단히 처리할 수가 있었으나, 주무

가 다른 곳에서 올라온 것이니 현감께 보고하고 명에 따라 강인흥을 잡아들였던 것이었다.

인흥은 관가 옥에 하옥되어 앓고 있었다. 용선이는 형리에게 매달렸다.

"나으리, 죄를 진 사람은 우리 아비가 아니라 대신 부역을 나갔던 삼촌이 저지른 짓이올

시다."

"알구 있다, 느이 삼촌이 시방 어디 있느냐?"

"이방 어른을 은근히 만나고자 하십니다."

"이방 어른두 별루 손을 쓸 수가 없을 게다. 우리 관내 일이라면, 사또께서 모르시니 소리

들이 적당히 해서 넘기겠으나, 다른 부처에서 넘어와 우리는 하명대루 봉행할 뿐이다. 그래

느이 삼촌이 어디 있느냐?"

용선이가 대답을 망설이는 중인데, 이방이 길청에 들어섰다. 그는 관가에 아이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자, 대뜸 형리를 쏘아보면서 물었다.

"웬 아인가?"

"어젯밤에 잡혀온 강인흥이의 자식이랍니다."

"죄인의 자식이 뭣하러 관부에 와서 기웃거리는가?"

용선이가 머뭇거는데, 형리는 수리의 의심을 덜고자 말하였다.

"강선흥이의 전갈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

이방은 아직 청탁이 받아들여지거나 돈냥을 주고받은 것이 아님을 눈치채고 적이 마음을

놓았다.

"오늘중으로 온 고을에 나졸을 풀어 잡아들이려 했는데, 제발루 찾아왔군." 용선이가 꺼

림칙하면서도 제 아비의 일이 오로지 걱정인지라, 말을 꺼냈다.

"혹시 자수를 하면 저희 아비가 풀려나오겠는가 삼촌이 여쭈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흥이가 근처에 와 있느냐?"

", 객사거리 주막에서 기다리십니다."

"어디 만나볼까. 앞장서라."

용선이는 이방을 데리고 객사거리로 나아갔다. 주막집의 술청 구석에 앉았던 선흥이가 주

뼛거리며 일어나 인사하였다.

"나으리 평안합쇼?"

"오냐...이놈아 부역 나간 놈이 관노들은 왜 두들기고 내수사 전화 어른께는 어째서 행패

를 놓았느냐."

선흥이는 묵묵히 도로 주저앉았다.

"고을에서 일반 왈짜들과 주먹다짐 벌인 것과는 경우가 다르니, 자네두 이젠 정신 바짝

차려야 되어."

"그래 선처하여 줍시사구 이렇게 달려오지 않았수."

"허어! 내가 다른 일이라면 장연서 못헐 일이 없지마는, 내수사라면 왕실에서 쓰는 각종

재물을 관리하는 곳인데 더구나 재목 조달을 나온 전화에게 내 따위의 허통이 닿겠는가.

대가 안되네. 하여튼지 이 골 이방 노릇은 골치가 아파서 못해먹겠군. 도무지 상전이 많아서

땅에 떨어진 밥알 하나 줏어 먹을 수 없으니..."

"우리 언니는 어찌됩니까?"

"벌을 받아야지."

"어찌 빼낼 수 없습니까? 죄는 모두 제게 있는데요." "인흥이두 죄가 있어. 부역에 아우

를 대신 내보냈으니 신역의 율을 문란시켰거든." 강선흥이는 애가 달아서 자기 가슴을 연

신 두드렸다.

"이렇게 자수를 하러 왔는데두 언니가 벌을 받아야만 합니까?" "자네가 벌을 받는 건,

노를 치고 관원을 욕보였으니 마땅한 일이고, 인흥이 죄는 또 따루 있단 말일세. 자네에게

벌을 내리지 못하면 아마두 전화가 펄펄 뛸 게여. 더구나 내수사 관노처럼 따라온 자들은

한양 대갓집에서 내려보낸 겸인이나 사노란 말이거든. 그자들의 입방아란 나 같은 아전은

말할 것두 없고, 현감도 앉아 계신 자리가 들썩들썩하는 판이란 말야. 만약 판서나 대감들

께 저기 장연 고을에서는 백성의 기강을 잡지 못하여 제 마음대루 부역에서 빠지고 관원

을 능멸합니다라구 여쭤보란 말이지." 이방은 자상히 얘기하고 나서 꾸짖었다.

"무지한 것이 힘만 믿구 날뛰니까 그렇지. 이젠 자네두 세상이 무섭다는 것두 알구 좀 느

긋해져야겠어."

"젠장할...약한 놈들은 꼼짝없이 죽을 고장이로군!"

"하긴 타도보다두 이 골엔 궁의 입김이 드세어서 고을 수령들 모가지가 추풍에 떨어지는

알밤이여."

선흥이가 만약에 제가 받는 형벌뿐이라면, 까짓 거 매맞아 죽을 셈치고 떳떳이 큰소리를

칠 수가 있었겠으나 우선 앓는 몸으로 갇힌 인흥이가 태형을 받지 않고 무사히 나오는 것이

중요하여, 보통 때의 선흥이와는 달리 여물 먹는 소처럼 양순한 것이었다.

"어찌...안되겠습니까? 언니만 빠지면 저야 걱정없습니다." "나두 자네 형제들과는 원래

안면이 두터우니 보아주고 싶으이." 선흥이가 허리춤에 두르고 왔던 돈꿰미를 풀어서 상

위에 올려놓았다.

"제발 부탁이우. 우리 언니는 시방 병고에 시달려 기력이 없습니다. 저 같은 놈이야 글도

모르고 머리엔 똥만 들었다 하지만, 우리 언니는 글두 알고, 우리 집안의 기둥이지요. 비록

잘못 태어나 해물행상을 다닙지요만 천하 군자입니다. 만약 태형을 받아 돌아가시면 나는

조상뵈일 면목은커녕, 당장에 부모님들께 막심한 불효를 저지르는 것입지요." 이방은 잠깐

돈꿰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큰 소리로 주모를 불렀다.

"여보 주모, 이 돈 맡아놓게, 술값은 거기서 제해두어." "예예, 술값이 닷 푼이올시다."

이방이 먼저 일어섰다.

"자아 가지. 내 어떻게 해봄세. 인흥이는 환자니까 돌려보내구, 자네가 대신 태형을 맞도

록 해주지. 견딜 수 있겠는가?"

"매 따위야 뭐 대숩니까?"

선흥이는 이방의 뒤를 따라갔다.

"삼춘 어쩌시려구 관가엘 들어가우?"

용선이가 제 아비 나올 기미를 알고 기쁘기는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흥이의 태형 맞는

단 말에 풀이 죽는 모양이었다. 선흥이가 말하였다.

"너는 삼문 밖에서 기다렸다가, 아부지 모시구 돌아가거라." "그래두...태형은 어찌 받아

?"

"아부지가 집에 못 가시면 어머니가 걱정하시구, 할머니 할아버지두 심려하신다. 내 저녁

때나 내일 아침쯤에 돌아갈 테니 술이나 듬뿍 걸러놓으라구 전하여라." 뒤를 따라오던 용

선이는 관가 솟을대문 앞에서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선흥이가 이방을 따라 들어가니,

삼현육각 치고 나서 이내 개청이 되어 있었다. 동헌에서는 각종 쟁송과 원소를 판결하느라

고 정신이 없었고, 판결받은 자들은 뒤뜰에 나아가 형리와 집장사령에 의하여 곤장을 맞는

것이었다. 이방이 선흥이를 뒤뜰로 데리고 가서 형리에게 뭐라고 이르자, 사령들이 달려들

어 선흥이를 형틀에 매었다.

"그냥 엎드릴 테니 치시우."

선흥이가 바지를 까내리고 형틀 위에 올라 엎드렸고, 형리가 말하였다.

"용우물 만석골 강인흥이 곤장 십 도요."

능장과 곤장을 골라내어 집장사령이 매를 후려치기 시작하였다. 매때리는 소리와 검장소

리에 에구구 하는 비명소리가 나올 법도 하건만 선흥이는 잠잠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혹독

한 매가 떨어졌다하여도 견딜 선흥이였으나 대신 맞는 매임을 아는 형리인지라 눈짓으로 가

벼이 치라 이른 것이었다. 매 십 도를 순식간에 맞고 나니 뒤에도 선흥이처럼 부역 까탈에

잡혀온 백성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선흥이는 형리에게 물었다.

"인제 우리 언니는 나가게 되우?"

"이방 나으리가 이미 방면하였네. 헌데 이제부터는 자네 벌을 받아야지." "어서 시행하여

줍시오."

그러나 형리는 대꾸 없이 사령들에게 일렀다.

"여봐라, 전화 나으리께서 직접 오실 때까지 이 죄인을 엄중히 가두어두어라. 내수사에서

다스릴 것이다."

사령들이 선흥이께 달려들어 이리 감고 저리 묶어 결박을 지었다.

그리고는 옥으로 끌려갔다. 형리의 말이, "우리두 이 일을 어찌할 수가 없네. 전화가 보장

을 올려 엄중히 다루도록 해달라고 고을 수령에게 공문까지 띄웠고, 잡히면 통기를 해달라

하였으니, 곧 장산곶에서 내수사 사람들이 몰려올 걸세. 글쎄 어느 안전이라구 그이들을 건

드리는가. 형국을 받게 되면 그저 목숨만 살려주십사 빌게나."

하는 것이었다.

선흥이가 텅 빈 옥방에 앉았으려니, 새삼 분노와 서러움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아직 총각

혈기에 울뚝불뚝 싸움질도 벌일 만하건마는 권부의 체통은 그만큼의 아량도 허용하지 않는

듯하였다.

"내 이 더러운 장연골서 사나 봐라. 제길...한놈씩 때려 죽이구 달아날까."하는 것은 어쨋

든 기분으로 그럴 뿐이었고, 식구들 뒷감당할 걱정이 더욱 커져서 선흥이는 마치 함정에

빠진 호랑이처럼 이만 갈고 앉았을 뿐이었다.

선흥이는 그날 밤을 옥에서 새우게 되었다. 그러니 첫봉이와의 약속은 어그러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튿날 정오 무렵이나 되어서 전화가 말을 타고 관노들을 거느리고 장산곶 벌채장

에서 장연 관가에 도착하였다. 전화가 비록 관직은 장연현감의 아래이나, 내임직인데다가 왕

실의 주요직이니 현감께 은근한 자세가 대단하였다. 전화가 선흥이를 다루려고 동헌에 드니,

현감도 동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관내에서 일어난 일이라 전화의 심기를 살피느라고 여념이

없을 정도였다. 선흥이가 결박지워져 동헌 댓돌 아래 끌려나왔다. 전화는 별로이 흥분하지

않고 현감과 조정 일을 이러쿵저러쿵 수작하다가 끌려나온 선흥이를 보자 말을 던졌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느냐?"

선흥이는 불량한 눈길을 들어 전화를 흘깃 노려보고는 대답이 없었다.

"저놈의 목자 부라리는 꼴을 봐라."

"뭣들 하느냐. 어서 형틀에 달아매라."

곁에 앉았던 현감이 자리를 들썩이며 외쳤다. 사령들은 선흥이의 성미를 아는지라 곁에서

부축하는 시늉만 해보이니 선흥이는 투덜투덜 뭐라고인가 연신 중얼거리면서 형틀에 올라

엎드렸다.

"맞아 죽을 놈이 무슨 소리를 그렇게 중얼거리는가." 전화는 역시 침착하게 물었다. 선흥

이는 고개를 떨구고 땅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놈의 머리꼭지를 잡아 치켜라!"

하는 호령이 떨어지고 선흥이는 사령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네 이놈, 뭣 때문에 태형을 받는지 한번 네 입으루 들어보자." 전화가 선흥이의 뻣뻣한

태도에 드디어 침착했던 마음이 흐트러져 눈꼬리가 빳빳해졌다.

선흥이는 역시 불량한 눈길로 동헌의 두 관리를 노려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어서 치시우."

"네 죄를 알구 벌을 받아야 한다. 만일 입을 다물고 버티면 압슬에다 단근질루 다룰 테

."

보다 못한 집장사령이 관장의 앞이라서 한마디 거들었으나, 선흥이는 또 뭐라고 투덜투덜

하였다.

"그자가 뭐라구 그러느냐?"

"한 주먹감두 안되는 것들인데, 벼슬이 아까워 참구 있다구 말했수." 선흥이가 말하자 전

화는 턱을 부르르 떨더니 한참만에 진정을 하고서, "내수사 아이들을 불러들여 집장하게

해주시오. 내가 친국했으면 싶소이다."하고 현감에게 진정하였고 현감도 이 자리가 몹시 민

망하여 자리를 뜨고 싶어 안달하던 참이라, 아뢴 대로 거행하라 하고는 곧 동헌에서 나가버

렸다. 선흥이가 손이 발 되도록 빌었어도 일단은 악형을 면할 수가 없던 터에 겁없이 입놀

림까지 하였으니 꼼짝없이 관부 귀신이 되어 버릴 모양이었다.

득달같은 하명을 받든 내수사 노비들은 그러잖아도 갈아 마시고 싶던 참이라, 얼씨구나

하며 동헌 마당으로 몰려들어온다. 거의 반나마가 한양 대감댁 사노들로 내수사 관노를 빙

자하고 영업 행위를 하던 자들인데, 원래가 한양 대가의 사노라면 대처 무뢰배나 다름없는

자들이다. 저자 뒷마당에서 지방 무뢰배에게 치도곤이를 올리던 솜씨에, 이제 관가의 동헌

마당까지 빌렸으니 악형에 기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선흥이에게 호감을 가진 장연의 이서

배들은 모두 아까운 장사 하나가 숨지겠다며 가슴을 졸였다.

"곤장이구 형틀이구 소용없다. 난장으루 다루어라."

전화가 이르자 둘러섰던 관노들이 사령의 능장을 골라잡고서 강선흥이께 달려들었다.

흥이가 그런 경황중에도 벌떡 일어서며 사람들의 울타리를 빠져나가려고 머리를 숙이고 꼬

라박았으나 날아든 능장 하나가 선흥이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선흥이가 앞으로 고꾸라지

자마자 등과 허리와 다리에 매타작이 우박 쏟아지듯 하였다. 선흥이는 두 팔이 등뒤로 바짝

묶였으나 아직 다리는 자유로워서 몇번이나 매를 맞받으며 무릎을 세워보았으나 발길질에

다시 넘어지곤 하였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한들 십여 인의 매를 어찌 견디랴. 이윽고 맥을

잃어 풀썩 꺾어지고 만다. 그뒤에도 맷발은 그치질 않았으며 선흥이의 꿈틀거리던 몸이 축

늘어져버리자 전화가 당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선흥이의 목숨을 빼앗아버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화는

선흥이의 머리털을 잡아 치켜들어보았다. 선흥이가 정신을 차리려는지 안면을 일그리고 좌

우로 거칠게 흔들었다. 선흥이는 희미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네 죄를 알겠느냐?"

"...모르우."

", 이놈 봐라. 매에 장사 없다던 말을 모르는 모양이로다. 모르쇠에게는 몽둥이가 약이

."

전화는 물러났고, 다시 둘러섰던 자들이 개 잡듯이 두드려 팼다. 선흥이의 옷은 맷발에 갈

갈이 찢기고 터진 상처에서 흐른 피가 등과 다리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끝내 비명을

지르지 않으니 매를 치는 쪽에서도 고역이었던 것이다. 맞는 놈이 비명이라도 지르며 펄펄

뛰어야 매를 든 놈도 활기가 돌련마는, 너무나 참는 정경이 악착스러우니 가슴이 섬뜩해질

만도 하였다. 선흥이는 기절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드디어 때리는 놈들도 땀으로 흠뻑 젖

었으며 하나 둘씩 능장을 늘어뜨리고 숨을 몰아쉬며 서 있게 되었다.

"그놈을 젖혀봐라."

관노들이 달려들어 발길로 선흥이의 몸을 뒤쥐집어놓았다. 선흥이는 눈꺼풀을 반쯤 내리

깔고 입은 벌린 채 잔약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넘어다보는 전화

에게 관노들이 제각기 말하였다.

"나으리, 이러다간 물고장을 내버리겠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벌써 세 번은 혼절했을 겝니다." "우리두 무뢰배를 적잖이 다루어보

았으나, 이런 놈들은 죽어두 께름칙합니다." 전화가 내려다보자니 거의 반죽음이 되었는데,

놈이 아직도 수그리지 않는 기색에 처음보다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관노들의 말이

맞는 성싶은 것이 죽이면 속만 꺼림칙할 것이고, 이런 자의 원한이란 앙화가 된다는 세간

의 말도 떠올랐다.

", 그놈 참 모질구나."

"더 두드릴깝쇼?"

전화는 선흥이의 발치로 눈을 거두면서 헛기침을 하였다.

"그만하면 다시는 주먹다짐할 생각이 가셨을 게다. 이곳 관장께 처분 맡기구 우리는 돌아

가자."

전화가 이방을 불러 장연현감께 선흥이의 뒤처리를 넘겨준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들은 장

연 관가를 뒤숭숭하게 뒤집어놓고는 장산곶으로 돌아갔다.

선흥이 형제가 이미 벌을 받았고, 선흥이가 내수사 사람들에게 반죽음이 되었으므로 관가

에서는 방면하도록 영이 떨어졌다. 이방이 그래도 돈 먹은 의리도 있고, 선흥이에게는 동정

적이라 삯꾼 하나를 사서 선흥이를 그의 집까지 업어다 주도록 하였다. 삯꾼이 선흥이네 집

으로 가는데 벌써 들판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알아보고는 몇은 선흥이네 집에 알려주고,

엇은 달려와 선흥이를 받아서 떠메었다. 이제나저제나 관가로부터 하회를 기다리던 선흥이

네 식구들은 그가 맞아서 초주검이 되어 업혀 온단 말을 듣고는 모두들 삽짝 밖으로 뛰어나

왔다. 선흥이의 모친은 허위허위 두 손을 내저으면서 마주 달려왔고, 부친은 체통이 있는지

라 울 앞에 서 있는데 용선이와 형수가 모친의 뒤를 따랐다. 선흥의 어머니가 그의 찢어진

옷자락과 피범벅인 상반신을 보자 통곡을 터뜨렸다.

"아이고오, 우리 선흥이가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느이 형 대신 곤장이나 두어 대 맞구

올 줄 알았더니 어느 야차를 만나 포쌈이 되었고나. 이 끔찍한 몰골을 어느 귀신에 하소할

."

선흥이는 희미하게 앓는 신음소리만 간간이 내뱉을 뿐이었다. 그가 집안에 들어서자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인흥이가 방에서 기어나와 마루를 두드리며 울음을 터뜨렸고, 형수는

가장을 다시 누이려고 겨드랑이를 낀 채 숨죽여 울었다. 온 집안이 가위 초상난 집의 초혼

제하듯이 되어버렸다. 선흥이의 아버지는 사람들께 부탁하여 점심참 뒤의 궁방토 부역에서

빠지기로 하였다. 모두들 선흥이가 장산곶 부역 때문에 관가에 가서 곤죽이 되도록 맞아 병

신이 되어 돌아왔다고 수군수군하였고, 용우물의 궁방전에 제 땅을 넣어버린 약한 백성들은

제마다 남의 일 같지 않다며 수군거렸다.

선흥이를 안방에 뉘어놓고서 식구들은 모두들 갈팡질팡 어찌 손쓸 바를 몰랐다. 장독이란

과연 무서운 것이어서 선흥이의 몸은 퉁퉁 부어 상한 자반비웃처럼 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찾아와 위로의 말을 하는데 소주를 가져오기도 하였고, 달걀이나 백미 한 주발을

들여밀기도 하는 것이었다. 용우물서 아이들이 아프거나 아낙네가 해산할 적에 곧잘 불려

다니는 마마할미가 쫓아왔다. 예전에 해주 양반 댁의 유모였다는 마마할미는 곧잘 병자를

구완해내어 용우물서 추수 뒤에는 동네에서 떡을 한시루 하여다가 행하조로 치르기도 하였

. 마마할미가 와서 인사불성인 선흥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한 사나흘만 잘 넘기

면 기력을 찾을 걸세. 워낙 기운이 장사인데 상처야 무슨 문제가 되겠냐마는 오직 홧병으루

도질까 그것이 염려로구먼. 멍울이 진 곳이며 뼈가 상한 곳에는 팥을 삶고 파를 잘게 썬

다음에 식초에 하룻밤 담가두었다가, 뜨겁게 국물을 끓여내어 그물에다 찜질을 하면 되네.

그리구 우선 터진 상처가 급하니 들깻잎을 따다가 볶아서 칡뿌리와 함께 붙이도록 하구."

일러주었다.

마마할미의 지시대로 형수는 부엌에서 찜질시킬 물을 우려내고, 용선이와 아버지가 칡을

캐러 갔다. 선흥이는 열이 놓아졌고, 얼굴에 열꽃이 피어 입을 벌리고 뜨거운 호흡을 간신히

토해내는 것이었다. 마마할미가 돌아가며 일렀다.

"오늘밤이 고비여, 내일부터는 차츰 미음이라두 쑤어 먹이게." 조니포 첫봉이 형제들은

불타산에 잠입하여 심백이를 혼뜨검내주자 약속한 선흥이가 밤을 넘기도록 오지 않자, 일단

산에 오르는 일은 중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광에 가두어둔 소두령이란 자가 골치였으니,

화승총에 깨어진 머리에 두창이 번져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우선 임시로 된장을 퍼다가

머리에 싸매어주기는 하였으되, 매끼마다 굶길 수는 없는지라 귀찮은 노릇이었다. 세봉이도

수군역을 끝내고 돌아왔고, 이제는 선흥이만 오면 곧 입산을 할 계획이었으니 첫봉이가 은

근히 조바심치는 것은 당연하였다.

"선흥이 자식이 아무래두 집에 가서 무슨 일을 당했나 보다. 약조를 어길 놈이 아닌데..."

"그건 어쨌거나 저놈을 어쩔 작정이우. 공연히 광 속에 터줏대감이나 하나 더 늘리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세봉이도 말하였다.

"언니들...저 자식 밥수발은 이젠 도저히 못하겠수." 첫보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우들

에게 말하였다.

"자 이거 큰 낭패로구나. 저놈을 놓아 보내자니 가는 즉시루 우리 모의를 알릴 게 아니냐.

심백이가 그런 말을 듣구 가만히 자빠져 있지는 않을 게다. 그리구 없애버리자니 불타산 산

채를 영 모르게 된단 말이야. 이번에 잃은 물건을 되찾기는커녕, 앞으루 밀상질은 번번이 저

놈들 때문에 파탄이 날 게여."

"수군 진영에 가서 알릴까..."

세봉의 옅은 말에 둘봉이가 코웃음을 쳤다.

"얘얘, 하나는 알구 둘은 모르누나. 도적을 잡았다구 발고하면 저놈이 수걱수걱 우리 시키

는 대루 말할 듯싶으냐. 대번에 멍구미 밀상 목에 대해서 발설할 게다." "오늘 하루 더 기

다려보자꾸나. 내일두 오지 않으면, 내가 선흥이네 집으루 찾아갔다 와야겠다."

"관밥을 먹거나 곤장에 몸을 못쓰게 되어버렸는지두 모르우." 첫봉이와 둘봉이는 애가

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계에서 삼장수 거간이 돈을 받으러 올 날짜가 임박했던 것이다.

물론 뜨내기 장사꾼이 아니요, 저들 나름대로 뒷보도 든든하고 패거리도 있으니 첫봉이네

형제의 실책을 그냥 보아넘기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물주와 거간에 당할 핍박쯤이면 까

짓 거 두 번 저녁 짓고 밤도망을 해버려도 되겠으나 아까운 장삿길은 아예 끊기고 마는 것

이 아닌가.

이튿날도 선흥이는 조니포 첫봉이네 집에 오질 않았다. 첫봉이는 용우물까지 선흥이를 찾

아나섰다. 밤 이경이 되어 둘봉이는 포구의 주막으로 수군들과 돌려태기를 하러 가서 돌아

오지 않았는데, 멍구미 앞바다 갯벌에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다가들고 있었다. 그들은 제각

기 환도와 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대략 칠팔 인은 되어 보였다.

인삼과 은자를 빼앗아갔던 불타산 패거리들은 아무래도 첫봉이네에 잡혀 있는 자가 걱정

이었고, 감히 불타산 패거리에 맞서 싸운 그들을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후환은 물론이요,

불타산 인근 마을에 위세를 보이려는 뜻도 있었다. 심백이가 친히 팔팔한 자들만을 골라 산

을 내려왔던 것이었다. 그들은 산골짜기에서 노숙하였다가 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조니포를

향하여 내려왔던 것이다. 심백이는 삭발한 머리에 회색 승복을 입고 한 손에는 화승총 잡고,

허리에 짜른 칼을 차고 있었다.

"바로 저 집이우."

일행 중의 하나가 심백이에게 첫봉이네 집을 가리켜 보였다.

"불이 꺼졌군."

"지금쯤 곯아떨어졌겠지요."

그들은 잠깐 해변가의 바위 뒤에 몰려서서 부근에 인적이 없는가를 살피고 의논들을 하였

.

"여기서 진영이 가깝다며?"

", 장교 한 놈이 나와 있습니다만 모두 허재비 같은 것들입죠." "하여간 부딪치면 낭패

보기 십상이니 아뭇소리 들리지 않도럭 해라." 심백이가 한 사람을 뽑아내 첫봉이네 집을

염탐하라 일렀다. 그자는 어두운 해변을 따라 조니포마을 어귀로 스며들어갔다.

"오장을 구해내구 형제놈들을 어찌할라우?"

"그 녀석들이 완력깨나 쓴다며? 그냥 앉아서 당하지는 않을 터이니 대적하려 들겠지.

조리 죽여버려. 그리구 선흥이란 놈두 여태 함께 있으면 몽치로 때려서 기절시키구 사로잡

아라. 내가 몸소 모가지를 베어낼 테니까. 그놈께는 빚이 많단 말이야." "자칫 실수하면 도

리어 우리가 큰코 다치기 쉽습니다." "염려 없다. 이게 무슨 지겟작대긴 줄 알았니. 기운

믿구 날뛰는 놈의 뒤통수에 한 방만 놓으면 되는 게야. 콩알에 장사 없지. 너희 셋이서 선

흥이놈을 맡고 너희들은 첫봉이네 형제를 맡아라. 나는 삽짝을 부수구 들어가서 선흥이놈이

설치기만 하면 총을 놓을 테니까." 이윽고 어둠속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탐

갔던 자의 군호 소리였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몸을 낮추어 재빨리 외떨어진 첫봉이네 집

으로 다가들었다. 울 밖에 모여 서자 기다리고 있던 정탐자가 속삭였다.

"울을 뜯구 들어가보니, 식구들이 모두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안방에는 늙은이가 있고,

윗방은 비었습니다. 뒷방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데 누군가 있는 듯합니다. 아마 오장은

광에 갇힌 것 같소이다."

심백이가 졸개들을 나누는데 셋은 울타리 뒤쪽으로 들어가 뒷방을 덮치게 하고 하나는 안

방의 노모를 맡고 심백이 자신과 두 부하들은 광과 윗방 사이의 좁은 길목 양편에 숨었다가

뒷방에서 앞마당으로 나오는 자를 급습하기로 하였다. 먼저 세 놈이 울타리를 뜯고 뒤꼍으

로 들어가서 뒷방의 문을 막아섰고, 심백이와 부하들은 삽짝문을 조심하여 뜯어낸 뒤에 마

당으로 들어섰다. 심백이는 화승총을 거머쥐고 광뒤에 붙어 섰는데, 하나는 툇마루에 올라섰

으며, 두 놈은 윗방 앞에서 뒤꼍을 노리고 서 있었다.

그때에 어린 네봉이는 뒷간에 앉아 있었다. 초저녁부터 배가 살살 아파오는 것을 참고 잠

이 들었었는데, 한밤중에 설사가 터지게 된 것이었다. 네봉이는 두 번째로 일어나 뒷간에 갔

, 앉아서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그러다가 울의 싸릿가지가 버석이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

. 희끄무레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는데 가끔씩 번쩍이며 빛을 내는 환도를 알아볼 수가 있

었다. 네봉이는 숨이 턱 막혔다. 떨리는 다리를 버티고 일어서서 간신히 옷단속을 하고는 흙

과 돌로 쌓은 뒷간의 토담 벽을 돌아보았다. 천상 빠져나갈 데라고는 짚이엉을 얹은 지붕

쪽밖에 없었다. 괴한들이 뒷방 문을 살그머니 열어젖히는 것이 보였다.

네봉이는 이미 사태가 글러버린 것을 알아채고 울 바깥쪽을 향하여 지붕의 이엉을 헤쳐놓

았다. 그들은 뒷방으로 올라서자 자고 있는 세봉이를 사정없이 칼로 쑤셨다. 세봉이가 기다

란 비명을 내지르자 도적들은 제각기 세봉이의 가슴과 배를 난자하였다. 비명소리를 신호로

하여 안방 앞에 섰던 자가 달려들어가 비명소리에 놀라 깨어나는 노모를 간단히 해치웠다.

뒷방에서 세봉이의 처참한 시체를 끌고 앞마당으로 돌아 나오는 자들을 보자 심백이는 당황

하여 외쳤다.

"아니...이놈뿐인가?"

"혼자 자구 있습디다."

"형제가 넷이구 선흥이놈까지 와 있다더니 설건드렸구나!" 졸개들이 광 속에서 앓고 있

는 오장을 업어 왔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라. 자칫하다간 우리가 오히려 당하겠다. 인기척을 알구 빠져나갔는지

두 모른다."

심백이는 초조하여 안달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미 가족을 몰살시키기로 작정은

했으되, 씨를 말리지 못하였으니 남은 자들이 가만있을 리 없는 노릇이었다. 첫봉이와 선흥

이가 장연서는 세상이 다 아는 막역지우이니 가장 골칫거리가 선흥이었다. 설마 산채에까지

야 쳐들어오랴마는 언제 노리고 몰래 스며들지 알지 못할 일이므로 공연히 불안하였다.

뒤짐을 하던 자들이 돌아와 다급하게 말하는데, "누군가 달아난 듯하우."

"뒷간 지붕이 뻥 뚫렸습디다."

"방금일 테니 뒤쫓아가봐라. 잡을 수 없으면 총을 놓아버려." "군졸들이 총소리를 듣고

달려올 게요."

"달려와봤자, 산마루가 지척이다. 일단 솔밭으로 들어서면 감히 뒤따르지 못한다. 어서 잡

아 죽여!"

졸개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가 조니포의 풀밭 사방으로 흩어졌다. 네봉이는 모래밭을 뛰고

있었다. 둘봉이가 노름하러 간 진영 앞의 주막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멍구미 앞의 움푹 팬

좁다란 만을 빙 돌아서 뛰는데 드디어 그를 따라잡은 도적들이, "저기다 저기!"

"이놈, 게 섰지 못할까."

외치며 달려왔다. 한 놈이 무릎을 꺾고 총을 받쳐 겨누고 한 방을 놓았다. 총소리의 여운이

포구 안에 기다랗게 울려퍼져갔다. 네봉이는 폴짝 뛰었다가 이번엔 물을 바라보며 절뚝이며

뛰었다. 도적들이 서른 발짝 가까이 다가들었으나, 네봉이는 주저하지 않고 곧장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아무리 아이라지만 멍구미섬을 여러 차례 오가는 머구리이니 헤엄질에는 자신

이 있었다. 이미 총소리를 내어버린 도적들은 물위로 재빠르게 사라져가는 네봉이를 안타깝

게 바라보기만 하다가 되돌아섰다.

"갯가놈들이니 헤엄질을 따라잡을 수가 있겠수. 놓쳐버렸습니다." "어서 내치자."

기왕에 임집을 덮쳤으니 맨손은 불타산 패거리의 체통에 관계되는 일이라, 첫봉이네 장롱

을 뒤져서 돈냥과 쓸 만한 가재들을 추리고, 광에서는 장사하다 남은 해물 부스러기들을 거

두어 봇짐을 꾸려서 제각기 메고 나섰다. 가위 첫봉이네 집은 쑥밭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백

이 일행들은 조니포를 빠져나가 불타산에 연이어 닿은 갈재마루를 타고 올랐다. 그러나 심

백이는 어쩐지 뒤가 미적지근하여 못내 개운하지를 않았다.

네봉이는 정신없이 헤엄을 쳐서 진영 근처의 주막 쪽으로 올라갔다.

뭍에 올라서서 걸음을 걸으려 하니 발에 힘이 없고 시큰거려서 디딜 수가 없었다. 네봉이는

그제서야 왼쪽 허벅지가 쑤셔오는 것을 깨달았다. 총에 맞았던 것이다. 방금 셋째 형과 모친

이 한꺼번에 살육당하는 자리에서 빠져나온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네봉이는 주막을 향해

서 절뚝이며 뛰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곤 하였다. 그때에 어둠속에서 몇사람이 마주 걸

어오다가 고함을 질렀다.

"웬놈이냐?"

이젠 다 틀렸다고, 네봉이는 기운이 쪽 빠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벌렁

드러누워서 죽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조심조심 네봉이의 곁으로 다가섰다.

"아니...이게 누구냐, 네봉이로구먼."

그들은 총소리를 듣고 포구로 나온 군졸들이었다. 네봉이가 고개를 들어 살피니 벙거지에

더그레 차림인지라 벌떡 일어났다.

"우리 둘째 언니가 어딨어요?"

", 시방 돌려태기하느라고 정신이 없더라. 무슨 일이 났니?" "도적들이 몰려와서...식구

들을 쳐죽였어요. 나는 다리에 총을 맞았어요." 그들은 네봉이를 업고 주막으로 갔다. 주막

문을 열어제치자, 호롱불 밑에서 지패를 펴들고 노려보던 사내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아이구 둘째 언니!"

방문턱에 엎어지면서 네봉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몰골을 보니 옷은 흠뻑 젖은데다 왼쪽

다리는 흘러내린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어린 네봉이의 끔찍한 몰

골에 둘봉이는 놀라서 우선 부축하여 어깨를 끌어안기부터 하였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도적들이 몰려와서 셋째 언니와 어머니를..."

"뭐라구?"

"방금 총소리가 들렸길래 나가봤더니 저 모양이여."

네봉이는 곧 기진하여 혼절해버렸다. 둘봉이가 아우를 주막에 부탁해놓고서 수군 진영의

군사들과 함께 조니포 끝쪽의 집으로 달려갔다. 집 모양은 그대로였으나 마당에 들어서자마

자 둘봉이는 심장이 멎는 듯하였다. 광문이 열려져 바람에 흔들흔들 삐꺽이고 있으며, 안방

의 미닫이가 열렸는데 어둠속에서는 피비린내가 전해져왔다. 장교가 횃불을 밝혔고 집안에

는 음산한 불빛이 일렁이며 내리덮였다. 안방의 문께로 다가섰던 둘봉이가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탄식을 첫마디로 하여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의 등뒤로 몰려 서서 구경을 하는데 불에 비친 안방에는 이불이 온통 피칠이 되

어 있었다. 첫봉이네 모친은 눈을 번 듯 뜨고 있었으며, 어깨에서 허리로 깊숙이 베어진 상

처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방바닥에까지 번져 있었다. 인기척에 놀라서 깨어 일어나는 것을

위에서 칼을 그어내린 모양이었다. 뒤꼍을 살피러 나갔던 군사들이 이번에는 세봉이의 난자

된 시체를 이불에 싸서 마당으로 들고 나왔다. 한참이나 방성대곡을 터뜨린 둘봉이는 멍청

하게 아우의 시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도적들의 행방을 살펴보아라."

장교는 그렇게 외쳤으나, 소용이 없는 짓인 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너른 천지에

어느 산 어느 골짜기로 숨어버렸는지, 그들을 찾는 일은 전혀 가망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지 사람이 둘씩이나 처참하게 죽었으니 모두들 병장기 꼬나잡고 인근 산과

숲으로 몰려갔다. 한참 뒤에 첫봉이네 집으로 장교와 군사들이 되돌아가보니, 둘봉이와 네봉

이가 대강 시체 수습을 끝내고 마을 아낙네들을 불러다 수의를 짓고 음식을 장만하는 중이

었다.

"사방을 다 찾아보았건만 종적이 묘연하네그려."

"그만두슈. 불타산 패들인 모양인데 만났자 대적하지두 못할 게요." 둘봉이가 은근히 결

이 나서 장교에게 퉁명스레 말하자. 장교는 눈을 번쩍 떴다.

"불타산 놈들인 걸 자네가 어찌 아나? 아무래두 무슨 사단이 있긴 있었구만..." 둘봉이는

실언했나 싶어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여보게 어떻게 된 거야. 불타산 패들이 그 많은 임집들은 버려두고 하필이면 자네 집을

야습한 이유가 뭔가?"

"아 시끄럽소. 환난당한 집에 와서 왜 이리 보채시우." 둘봉이의 꽥하는 소리에 장교는

찔끔했다가, 다짐을 두고 돌아갔다.

"하여튼지 날이 밝으면 진영으루 좀 나오게. 우리두 보장을 올려야 할 테니 자네가 이실

직고를 해야지."

그날 둘봉이는 뜬눈으로 날을 밝혔다. 이튿날 해가 높직이 떠서야 용우물 나갔던 첫봉이

가 돌아왔고, 첫봉이는 거지반 미친 사람이 된 것처럼 눈에 핏발이 섰다.

"...심백이놈, 사노질해서 연명하던 놈이 이제 내 식구들을 죽이구 얼마나 사는가 보자.

심백이놈의 간을 꺼내어 씹지 못하면 구구히 밥알이나 넘기며 살지는 않을 테다." 서둘러

서 모친과 아우의 장사를 지내니 졸지에 당한 변인지라, 첫봉이네 집은 더욱 을씨년스럽고

황폐하였다. 관가에서 자꾸만 오라 가라 하여 그때마다 구변 좋은 첫봉이가 가서 그럴 듯

이 둘러대었다. 만약 관에다 이실직고한다면 첫봉이네 형제의 밑구린 사연만 드러날 것이요,

실제로 불타산에 군병을 보내어 도적들의 산채를 토벌할 기미라곤 없기도 하였다.

저쪽에서는 백성들의 가산이나 털고 가끔 행인을 뒤짐하는데, 관군과 부딪친 적이 없으니

건드려서 터뜨리지 않겠다는 눈치가 보였다. 거병하면 감영을 거쳐 보고해야 하며, 일단 거

병하여 도적을 친다는 것이 알려지면 승패가 어찌됐거나 장계를 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노

릇이었다. 다행히 토벌한다면 모르되, 오히려 패한다면 상부의 문책은 물론이려니와, 수령의

치적에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이 찍혀지게 마련이었다. 불타산은 깊은 산이요 멀리 달마산까

지 그 능선이 백여 리에 잇닿아 있었다. 산채를 안다 하여도 협공을 도모하려면 해주와 문

화 관계에서 서로 막아주어야 할 테니 병이 한 고을의 군노 사령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노릇

이었다. 도둑놈 하나에 잡는 놈은 열 놈이라는 얘기가 맞는 일이었다. 그러니 관가에서 이실

직고하라는 것은 형식일 뿐이요, 첫봉이 쪽에서도 그런 것을 모를 바보가 아니었다. 어느 고

을에나 깊은 산이 있으면 수상한 녹림처사가 있는 것은 당연하게 아는 세상이 아니던가.

첫봉이는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고 강선흥이와도 의논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는 부글부

글 끓는 속을 드러내지 않고 갯가에 게나 주으러 다니는 것으로 매일을 소일하였다.

선흥이가 매를 맞고 자리에 드러누운 지 달포가 지났다. 과연 체력이 있는 사람인지라 상

처의 회복이 빨랐고, 뼈를 상한 것처럼 보이던 곳도 대개 아물고 거뜬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선흥이는 앓고 누워 있던 사이에 다른 사람처럼 과묵한 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이제

는 눈치나 보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양민의 삶을 내던지기로 작정하였다. 그가 우대용과

더불어 구월산에서 내려올 적에도 자기가 녹림당의 일원이 되었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

었다. 그저 저자의 왈짜패로 자라난 제 성깔에 맞는 이들과 의리지정을 맺었거니만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하여도 국법을 등지고 살아가는 자들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마음

보다는, 어쨌든 잘못이라고 여기기도 하였다. 선흥이는 여태까지와 같은 비굴하고 천대받은

생활을 감내할 듯싶지 않았다. 다행히 관가에서 뭇매를 맞고 나오는 것으로 그쳤지만, 어느

때에 자기 성미를 못 이겨서 큰일을 내게 될지 모르는 일어었고, 설혹 자신만은 몸을 빼쳐

고향을 등진다 하더라도 남은 식구들에게는 화가 미칠 것이었다. 기왕에 양민의 생활을 견

디어낼 자신이 없으면 일찌감치 사라져 버리는 것이 상수일 듯싶었다. 그러나 강선흥은 장

사치로 떠돌기 이전부터 농부의 자식이었고, 그 자신이 넓은 들판 끝에 초가삼간을 짓고 소

를 몰아 밭을 갈고 김을 매는 농군의 생활을 원해오던 터였다.

소학권이나마 떼어 나라가 무엇이며 임금이 무엇인지를 제법 조리있게 말할 줄 아는 형인

인흥이보다는 못했으나, 선흥이는 그런대로 충효가 어떤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제

충효 따위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음을 선흥이는 깨달았던 것이다. 사람다운 생활을 하고 사

람다운 대접을 받는 이들에게나 가당한 것이리라 느껴졌다. 다시는 고향 땅에 발길을 내딛

지 않겠다고 작정하였다. 땅은 모조리 궁방전에 흡수되어 땅임자는 궁의 환관과 계집들이

차지하였고, 이제는 그들의 먹다 남은 찌꺼기나 핥는 노비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 고향 사

람들이었다. 실상 기부에서 멀리 떨어진 북변이나 산골짝에 은거하기를 대부분이 바라고 있

었으나 마음대로 이사를 할 수도 없었고, 그나마 정들었던 산천과 조상이 물려주었던 땅뙈

기를 잊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왕실의 사돈의 팔촌이 되는 것들까지가 해서 곳곳에

전장을 마련하고 있었으니, 평생을 부역의 뼈저린 노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느결에

중농이었던 선흥이네는 궁의 소작인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그의 아버지나 형은 마치 그런

사실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고, 오히려 선흥이의 울뚝불뚝하는 짓을 철없다고 핀잔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선흥이가 마당에 나와 앉아 장작을 패고 있는데, 그 사이에 수척해지

고 폭삭 늙어버린 것 같은 둘봉이가 울 너머로 기웃이 들여다보았다.

"이제 좀 나았냐?"

"...어서 와라. 조니포엔 별일 없지?"

선흥이도 도끼를 내려놓고 웃으면서 안부를 묻는데, 곁에 와서 털썩 주저앉은 둘봉이는

공연히 나뭇조각을 만지작이면서 대답이 없었다. 선흥이가 찬찬히 살펴보자니 녀석이 콩알

만한 눈물을 두 발 사이에 뚝뚝 떨어뜨리고 앉았다.

", 왜 그러니...무슨 일이 생겼구나?"

둘봉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두 못 들었니? 심백이놈이 와서...세봉이하구 어머니를 해치구 갔단다. 우리 언니 여

기 오던 날이다."

둘봉이는 한참이나 말을 못하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린 연후에 거칠케 코를 풀어 땅에다

뿌리쳤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그날 밤의 일을 얘기하였다. 선흥이는 눈을 부릅뜨고 그 얘기

를 듣더니, "그 돌중놈이 이제는 아예 사람 백정으로 나섰구나, 느이들 조니포를 정 못 떠

나겠니?" 하고 입을 떼었다.

"떠나다니..."

"나는 이따위 장연엘 다시 발 들여놓지 않을라구 작정했다." "그럼 어디루 갈 테냐?"

"글세 차차 생각해봐야지."

"구월산에 의형들이 있다며?"

"거긴 안 간다. 남의 마당에 불쑥 끼여들어 공연히 눈치 대접 받기 싫어." 선흥이는 둘봉

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형수나 모친이 있으니 마음놓고 얘기할 수가 없는 까닭

이었다. 그들은 텃밭가에 서로 쭈그리고 앉아서 의논을 하였다.

"우리끼리 밤에 잠입해서 심백이놈의 모가지를 도려낼 수는 없을까." "요행히 성사하면

몰라두, 그르치면 개값두 안되는 게다." "하여간에 우리두 조니포를 떠야겠어. 어디 뭐 맘

붙일 구석이 있어야지." 선흥이가 둘봉이를 밀어내며 말하였다.

"오자마자 냉수 한그릇 못 먹이구 보내어 안되었다. 허지만 오늘밤에 집을 떠나려는데 어

머님께 눈치를 채이기 싫어서 그래. 내가 집으루 간다구 첫봉이한테두 얘기해두어라." "

직 몸이 불편한 건 아니냐?"

"이놈아, 까짓 몽둥이 매 몇대에 강선흥이 삭신이 녹을 줄 알았니? 며칠 누워 지냈더니

뼈마디가 부대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여."

강선흥이는 어깨를 부풀려 보이며 껄껄 웃었다. 둘봉이가 다짐에 또 다짐을 두고 선흥이

와 헤어져 간 뒤에, 그는 한참이나 밖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형수가 물동이를 이고

오는 것이 보였으므로 그는 재빨리 일어나 마주 달려가서 물동이를 받아 끼었다.

"아이...몸두 불편하신데."

"허허, 형수님두 나를 아주 병신 취급 하시는구려."

"어서 어서 한바퀴 빙 돌구 오셔요. 용선이 아버지두 삼촌이 어서 장삿길에나 내보내신다

구 오늘 염장에 나가셨어요."

", 언니가 염장에 나가셨구먼. 된병을 치르셨으니 당분간 집에 계셔야 할 텐데. 그나저

나 제 병치레 하느라구 형수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수."

선흥이는 가난에 찌든 형수의 몽당치마 자락이 갈갈이 해어진 것을 모고 몹시 송구스러웠

. 어머니는 텃밭에 웅크리고 앉아서 김을 매고 있었다. 용선이가 나무를 높직하게 한짐 그

득히 짊어지고 돌아왔고, 아버지는 읍내에 환자를 갚으러 갔다가 녹초가 되어서 돌아왔다.

선흥이는 그날따라 온 가족들과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어쩐지 목이 자꾸만 막히는 것이

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금방 밤이 깊어지게 마련이었다. 기침소리가 들리고 나직한 말소리가 들

리는데 인흥이는 제법 기분이 좋은지 소리를 나직하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염장에

나가 염꾼들과 탁배기라도 한잔씩 돌려 마신 모양이었다. 선흥이는 잠들지 않고 밤이 깊어

지기를 기다렸다. 선흥이는 뒷방에 홀로 누웠다가 부모님들이 계시는 안방의 동정을 살핀

뒤에 건넌방 앞으로 갔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인흥이를 찾았다.

"언니, 언니...주무시우?"

"...선흥이냐?"

"좀 나와보우. 할 말이 있소."

인흥이가 미닫이를 열며 고개를 내밀었다.

"낼 아침에 얘기하자. 밤이 늦었는걸."

하면서도 인흥이는 돌아서지 않는 선흥이를 바라보다가 저고리를 걸치며 나왔다. 그들은 선

흥이 기거하는 뒷방에 마주 앉았다.

"실은..., 나는 집을 떠나려구 하우. 언니한테만 알려드리구 갈까 했지요." "떠나다니..."

"집에 다신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우. 느긋이 눌러 배길 팔자가 아닌 모양입니다. 내까짓

게 집에 있어봤자, 식구들게 걱정이나 끼치구요. 어디 산골에 들어가 살든지, 대처에 나가서

장사나 해볼라우."

인흥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에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아우였고, 부모님들이 선흥이가

없어지고 나면 얼마나 낙망하실지를 잘 알고 있었다.

"너 지난번 관가 일루 그러는 모양이로구나. 다 참구 살아야지, 어딘들 네 성미대루 살 고

장이 있겠느냐. 가산두 없구 뒤댈 친척두 없으며 근근히 나라의 땅이나 매어 먹구 사는데,

이제 너의 행상벌이마저 끊어지게 되면, 부모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니. 관가에 가서 매를

맞은 것은 올해 신수가 나빠서려니 여기구 잊어버려라. 내 오늘 염장에 나갔더니 직전 없이

한해 동안 소금을 내주겠다더라. 그리구 열 냥짜리 암말 한 마리 있는데 배내기를 시켜준다

하니 우리가 맡아다 기르면서 세를 조금만 물면 새끼를 낳을 게다. 그것이 성마가 되면 등

짐을 지지 않아두 행상을 다닐 수 있지 않니. 일 년만 참구 있자. 나두 이젠 몸이 꽤 좋아졌

으니 장사를 바꿀란다. 면화를 사서 북관이나 나다녀야겠다. 그래두 우리는 소작붙이 외에

형제가 행상을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식구들이 그나마 굶주리지 않구 살아가는

데 어찌 너만 빠져나가기를 바라겠니."

인흥이가 간곡하게 만류하였으나 선흥은 이미 결심이 굳어졌던 터여서, "당분간 어려우

시더라두 나는 찾지 마십시오. 내가 어디엔가 자리를 잡게 되면 부모님을 편안히 모시겠습

니다."

하며 잘라서 말하였다. 인흥이는 마음씨가 부드럽고 연한 사람이었으므로, 아우의 끊어내는

듯한 말에 대번 마음이 상하여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이었다.

"이 녀석아, 네가 집을 나간다면 필시 날불한당들과 어울릴 테고, 아예 세상을 등지구 살

아갈 게 뻔하구나. 우리는 대대루 양인을 면치 못하구 살아왔지만, 국법을 등지는 사람은 하

나두 나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남대천 밖에서 왜구들의 목을 십여 급이나 베어 나라에서

시호까지 내렸던 분이시다."

"하여간...나는 장연서 못살아요. 그러잖아두 관가를 싹 쓸어버리구 싶은 걸 참구 있단 말

. 도대체 언니는 어릴 적에 서당이라두 댕겨서 글을 배웠다지만, 서은을 입은 적이 있습니

. 해마다 모 가을로 부역에 시달리구, 환자 갚기가 늦든지 세포 바치는 것을 미루든지 하

면 느닷없이 잡혀가 옥에 갇혀 굶주리고, 이놈 저놈에게 천대받구 능멸이나 당하며 살았지

. 차라리 산속의 적당이나 대처의 돈 많은 상놈들은 이따위루 살지는 않습니다. 그저 약하

구 용기 없는 놈들이나 소처럼 미욱하게 살구 있단 말이우." 인흥이가 아우의 말에 답답함

을 참지 못하여 칼칼한 목소리가 되면서 방바닥을 두드렸다.

"그래서 너는 도적이 되겠단 말이냐?"

"아무거나 되려오."

"이 자식!"

선흥이의 뺨에서 찰싹하는 소리가 들렸다. 인흥이가 귀쌈을 호되게 후려갈긴 것이었다.

"남은 식구는 어찌 살라구 너 혼자 도적이 되어? 누군 산속에 들어가 부잣집 재물이나 털

어 배불리 먹고 편안히 살구 싶지 않아서 철철이 원행장사루 병을 얻어 고생하는 줄 아느

. 그래두 우린 이 나라의 백성이구 임금의 은혜루 쌀알을 넘긴다. 집안을 망칠 작정이면

어서 의절하구 나가거라."

"...도적놈들게 시달리면서 무슨 임금의 은혜람. 산속의 도적은 부자나 노리니 그래두 분

별이나 있지. 언니는 그럼 내가 억울하게 내수사놈들에게 반죽음이 되어 돌아온 것두 나라

의 은혜란 말이우?"

선흥이도 지지 않고 대드는데, 인흥이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언니 대답해보시우. 나두 황소보다 힘이 세단 말을 듣는 장사요. 한번 힘만 불끈 주었다

면 그따위 형틀은 반짇고리 밟아 뭉개듯 했을 터이고, 오랏줄은 지푸라기 끊어내듯 했겠지

. 내수사 노비들이나 전화 따위는 한 주먹 두 발길질에 피곤죽이 되었을 겝니다. 나두 가

슴에 몽아리져서 올라오는 울분을 씹어 삼키느라구 매가 아픈 줄을 몰랐수. 오죽하면 내 성

미루 그 모진 매를 맞으며 참았겠수. 이젠 이런 살림은 정이 뚝 떨어졌어요. 내 마음대루 살

아갈 테니 언니두 참견 마시구, 그저 부모님들 걱정이나 안하도록 해주시우." 선흥이는 맨

몸 그대로 문을 열고 방을 나섰고, 인흥이는 아직도 고개를 푹 숙인 채 말리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였다. 선흥이가 미투리를 신고서 다시 돌아서더니 허리를 굽혔다.

"하직 인사 올립니다. 언니, 부모님들 모시구 부디 무사허시우." 인흥이가 고개를 들더니

이제껏 참아왔던 격한 감정이 터져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쫓아나왔다. 인흥이가 덥석 달려

들어 아우의 손을 잡았다가 어깨를 안았고, 선흥이는 형의 등을 툭툭 두드리면서 낮게 말하

였다.

"언니, 이 아우가 죄가 많소. 무모님들 깨시지 않게 슬그머니 나갈라우." "이 녀석아,

자두 한푼 없이 어디루 가려느냐. 내일 떠나거라. 내일 염장에 나가서 네 노잣돈이나 몇냥

돌려 오마."

"집에 계신 분들이 걱정이지, 나야 기운 펄펄하겄다 나이 젊겄다 무에 걱정입니까. 어서

들어가요. 밤공기가 찬데 고뿔 드시겠수."

선흥이는 형을 밀어내고 달음질하듯 삽짝을 빠져나와 동구 밖을 향하였다. 형제의 작별이

어려워 뒤통수가 간질거리고 명치가 무둑하였으나 집을 떠나는 선흥이의 발걸음은 역시 가

벼웠다.

선흥이는 첫봉이네 집에서 이틀을 보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심백이 들이칠 일을 벌이기

전에 우선 달마산 수돌이네 산채를 방문하기로 의논이 되었다.

"심백이를 죽이구 나서 나두 불타산에 들어앉을란다." 첫봉이가 말하였고 선흥이는 고개

를 끄덕였다.

"우선 집을 떠나야지. 여기서야 눈이 많으니 아무 짓두 할 수 없잖아." 첫봉이는 말하였

.

"오늘 떠나자. 네 말대루 장연을 넘어서 백운산에 오르지." 둘봉이가 말하였다.

"언니, 저 네봉이는 어떻게 하우. 어린것이 다리를 다치구 누웠으니 끌구 다니기두 애처롭

구 어디 맡기기두 안쓰럽소."

"네봉이는 당분간 금사사 원주스님께 맡겨놓았다가 나중에 데려가기루 하자꾸나. 우리는

짐을 꾸릴 테니 네가 업어다 맡기구 오너라. 한 스무 냥 내어주면 아마 상방에 모셔줄 게

."

둘봉이가 네봉이를 금사사에 데려다 주러 간 동안에 선흥이와 첫봉이는 작은 봇짐 셋을

꾸렸다. 그리고 포구에 나가서 기다렸다가 돌아오는 둘봉이와 만났다. 세 사람은 산으로 곧

장 오르지 않고 들판을 따라서 걸었다. 원통산 아래 사금터에 도착하여 지척에 보이는 백운

산에 오르지 못하고 그 밤을 금골서 묵었다. 이튿날 새벽에 이슬을 가득 머금은 풀숲에 바

지를 흠뻑 적시면서 그들은 백운산으로 올랐다. 강선흥이는 언젠가 학령을 넘으면서 혼찌검

을 내주었던 세 도적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들만 수하에 넣으면 달마산 산채는 물론이거

니와, 불타산 심백이네 산채의 허실까지도 소상히 알아내겠기 때문이었다. 수돌이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고 심백이네를 들이치자고 할 수도 있었지만, 제 산채를 차지한 두령이란 흔히

권세를 빼앗길까 두려워하게 마련이었으며, 강선흥이를 기피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선흥

이가 안면은 있으되 수돌이를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적당의 두령이 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첫봉이의 말대로 우선 형세가 기중 약한 백운산의 좀도적들을 수하에 넣기로 하였

. 백운산은 산줄기도 장하지 못하고 그리 깊지도 않건만 유리한 점이 있었다. 즉 송화와

해주와 장연의 세 관계가 갈리는 지점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뚜렷이 어느 고

을의 관할인지 분간이 안되어 세 군을 수시로 넘나들 수가 있었다. 백운산은 동편이 울창한

숲이요, 서쪽에는 바위와 황토가 드러난 곳과 사태난 등성이가 길게 뻗쳤다가 툭 잘라지며

원통산에 잇닿아 있었다. 세 사람은 안개가 자욱히 발 아래 깔린 백운산 정상에 닿은 능선

을 한 줄로 서서 걸었다. 한참 걷다가 경계가 한눈에 펼쳐지는 곳에 이르면 차례로 절벽 끝

으로 나아가 후미진 골짜기들을 살펴보고는 하였다. 백운산 연봉의 세 번째 능선을 타고 넘

어가며 다시 아래를 살피던 첫봉이가 손가락을 쳐들었다.

"저게 뭐냐?"

둘봉이와 선흥이가 시선을 모아 내려다보았다. 동편 숲 사이로 한줄기의 파아란 연기가

바람 없는 공중에 길게 피어올라가고 있었다. 선흥이가 내려다보다가, "분명히 인가가 있겠

구먼."

"혹시 사냥꾼이나 초동이 아닐까?"

"어쨌든 헛걸음할 셈치구 내려가보자."

하니 첫봉이가 먼저 비탈 아래로 내려갔고 두 사람도 그뒤를 따라갔다. 차차 다가가니 역시

인가가 있는데 갈라진 두 바위 사이에 흙으로 개어올린 집 비슷한 곳이 보였으며, 그 주위

에 서너 채의 움집이 낮게 꺼져서 자리를 잡았다. 척 보기에도 바위와 숲과 물뿐이니 농사

를 짓는 이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낙네가 두엇이 나와 나물을 시냇물에 씻으면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선흥이는 서슴지 않

고 아래로 내려갔고 물가의 아낙네들이 제각기 뭐라고 고함을 치면서 집 쪽으로 달아났다.

아니나다를까 바위 밑 토굴과 움집에서 몇몇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세 사람은 그들을 향

하여 천천히 다가갔다. 사내들이 제각기 몽둥이며 쇠스랑이며 무기를 집어들고 달려나오는

데 토굴 앞에서 환도를 빼어들고 나오던 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선흥이가 멀찍이 떨어져 서

서 외쳤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학령에서 만났던 장연 강선흥이가 바로 내다." 그러나 그는 경계를

풀지 않고 되물었다.

"헌데 여긴 어쩐 일이슈. 피차에 원한이 없소이다."

"느이를 해코지할려구 온 게 아니다. 바루 입산할려구 왔다." 두목은 칼을 거두어 집에

꽂으면서 다시 말하였다.

"거 뒤에 두 사람은 뭐요. 혹시 기찰포교가 아니우?" "내 동무들이다. 느이들하구 의논할

일이 있어서 그런다. 봐라, 우리는 모두 맨손이다." 두목은 학령에서 묘옥이를 덮쳤다가 때

마침 행상길을 가던 선흥이의 눈에 띄어 혼찌검을 당한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으

르렁거려 보았자 자기네 같은 오합지졸의 적수가 아니었다.

"이리 들어오시우."

그들 세 사람은 두목의 안내로 토굴로 향하였고, 늘어섰던 자들 중에서 두 놈이 고개를

비쭉 내밀더니 선흥이께 아는 체를 하였다.

"어서 오슈."

", 잘 있었느냐. 요새두 학령에 목을 잡으러 나가니?" 낯익은 졸개 대신에 두목이 말하

였다.

"웬걸요, 수돌이네 식구들 행패에 그만 학령을 빼앗기구 말았습니다." "그럼 무얼 해서

먹구 사나?"

"그러니 이렇게 죽을 맛이지요."

두목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안은 컴컴하였다. 아이들 둘이 윗목에서 칭얼거리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부담농 몇짝과 원앙이불 한 채가 구석에 놓여 있었고 열두 폭 병풍이 반쯤

펼쳐진 채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다.

"이거 원 산살림이라 뭐 대접할 게 없습니다. 조반들은 드셨습니까?" "천천히 먹기루 하

. 그보다 어째 산채의 형세를 늘릴 생각은 없는가?" 강선흥이가 말하자 두목은 놀랐다.

"형세를 늘려요? 그렇지 않아두 이나마 식구들이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는데요. 좌편에는

수돌네가 달마산을 차지했고, 우편에는 불타산을 점거한 심백이가 있는데 저희들 따위야 정

말로 개뭣에 보리알이올시다. 겨우 탑벌이나 금동에 내려가 밥술 먹는 농군들의 나락이나

거두어오는 게 고작이지요."

"그래서 내가 왔다네. 수돌이네 달마산을 함께 빼앗아보자는 게여." 두목은 뛸 듯이 기뻐

하며 선흥이의 무릎을 와락 부여잡는다.

"참말...강장사께서 우리를 통솔하신다면야 달마산쯤 문제겠습니까." "달마산 패는 몇이나

되는가?"

", 한 이십여 명이 됩니다. 모두들 제법 병장기를 다룰 줄 아는 모양입디다..." "까짓 작

대기 따위는 문제가 없네, 자네는 졸개가 몇이여?" ", 모두 여섯입니다. 군식구들이 여덟

인데 모두 아내와 식솔들이니 어디 한군데두 쓰잘 데가 없지요."

강선흥이가 옆에 앉았던 첫봉이와 둘봉이를 돌아보았다.

"우리들 셋에다 여섯이면, 합이 아홉이로군."

첫봉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그 아홉에 여덟을 더 보태야지. 모두 자그마치 열일곱이여." 백운산 두목은 상

대방이 말귀를 잘못 알아들은 줄로 믿고서 다시 말하였다.

"여덟은 저희 식솔들이라니까요. 여자가 셋에 늙은이 하나 그리구 갓난애와 아이들이라

."

첫봉이가 말하였다.

"싸우는 데 병장기만 쓰란 법은 없소. 속임수에 여기 식구들을 씁시다." "좋은 꾀가 있습

니까?"

"이제 차차 안이 나오겠지."

백운산 두목이 먼저 방바닥을 짚으며 인사를 건넨다.

"탑벌 두내리 살던 변가올습니다. 앞으루 잘 부탁허우." "허초봉이우, 얘느 내 아우 이봉

이라구 허우."

강선흥이가 백운산 변가를 안심시키느라고 곁에서 덧붙였다.

"이 사람들은 지난번에 식구들을 잃었네. 불타산 심백이네가 야습하여 살륙을 하구 갔지."

"아이구 저런..."

"그래서 우리 의논이 처음에는 달마산 수돌이를 찾아가 합세하여 심백이를 들이치자구 그

럴까 했었네. 허나 가만 생각해보니 수돌이란 놈이 호락호락 남의 일에 나서서 의리를 앞세

울 듯싶지도 않고 무었보담두 큰일을 저지르구 나서 우리두 산채에 주저앉아야 되지 않겠

. 그놈의 소갈머리를 내 아는데...오래 붙여줄 것 같지 않더군." 변가가 연신 맞장구를 쳤

.

"아무렴입쇼. 그 수돌이란 놈이 저희 같은 오갈 데 없는 놈들의 목까지 빼앗아가구, 늘 정

탐꾼을 보내어 감시를 하구 그럽니다. 아주 쩨쩨한 놈입니다." "졸개들을 이십여 명이나 거

느리구 산주 노릇을 한다니 그냥 우습게 보아넘길 놈두 아닐 듯한데..."

첫봉이가 신중하게 한마디하였고, 변가는 코웃음을 쳤다.

"누군들 손발 맞는 이들만 있다면 그만한 통솔을 못하겠소이까. 입산한 놈들이란 모두가

살 방도를 잃고 못 먹어 배곯고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놈들입지요. 이판사판에 어찌됐든 밥

이나 한번 배불리 먹어보자구 올라온 놈들입니다. 산채 두령이란 안을 잘 내구 좋은 목을

잡아서 졸개들의 배를 곯리지 않으면 그만이지요. 달마산 수돌이가...강장사두 알다시피 어디

몇 년 전만 하여도 이름이나 있었습니까."

"그렇지, 가끔 사금터에 나와서 행패나 놓던 왈짜였지." "놈이 사금터에서 잠채를 따라다

니다가 관에 쫓기기 시작했지요. 수돌이가 다른 건 몰라두 꾀가 많습니다. 소문나지 않는

벌이만 골라서 할 뿐만 아니라, 크게 털구 나면 각군의 장교들게 사람을 보내어 은밀히 선

사품을 보냅니다. 그러니 보장이 대수롭지 않게 올라가거든요. 헌데 여우는 꼬리 감추기가

고역이라고, 약점이 있다구 합디다." 첫봉이가 문득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뭐라던가?"

변가는 낄낄거리며 혼자서 한참이나 웃었다.

"새벽 물건 꼴리는 건 애비두 못 막는다는데, 그 자식은 바루 끓는물에 데친 무를 달구

있습지요. 무골 대감입지요."

변가의 말을 되씹던 첫봉이도 빙그레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래, 수돌이가 고자란 말이로군."

", 우리네두 계집이라면 저자바닥의 홍합만 봐두 고이춤이 보릿자루가 되지만서두...

자식은 못쓸 것 중의 바닥 첫쨉니다. 어린애 배 큰 것, 노인 부랑한 것, 처녀 발 잰 것, 맏며

느리 입 빠른 것, 사발 이 빠진 것, 중 술 취한 것, 지어미 거기 헐렁한 것, 그리구 바루...

자가 계집 밝히는 거올시다."

변가의 말에 모두들 껄껄대며 배를 잡고 웃었다. 변가는 이어서 말하였다.

"놈이 깐에는 장가를 들구 싶어서 몇번 계집을 들인 모양이오만, 첫째는 샛밥 먹다가 들

켜서 수돌이 칼날에 죽었고, 둘째는 산채를 비운 사이에 패물을 챙겨가지고 졸개와 달아났

답디다. 그러고도 수돌이가 계집을 잊지를 못한다구 합디다. 며칠 데리구 살다가 밤 사이에

죽여 암장해버린다지요. 생각이 나면 마을에 나가서 업어오기를 하거나, 목을 지켰다가 길

가는 여인네들을 잡아가기두 하는데 달마산의 큰 일거리가 되구 말았지요." "그것 참 우리

에게는 달마산이 거저먹기의 논두렁 콩이로다!" 첫봉이가 무릎을 치고 나서 이리저리 하자

며 의논을 내니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고 변가는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준비하랴, 일을

꾸미랴, 한 닷새 걸릴 터인즉 마을에도 내려갈 일이 있고 정탐꾼도 뽑아야 하였다. 변가가

나가서 제 졸개들 다섯을 모두 들어오게 하고 대략 이야기를 해주니 도적들은 희희낙락이

었다.

"여기 이 둘은 저희 탑벌 두내리 한고장 사람들이구, 나머지 셋은 노비 노릇 하다가 도망

친 사람들입니다."

"자네들 병장기 다룰 줄 아나?"

첫봉이가 물으니, "그저 우격다짐으로 두들겨 팰 줄은 압니다."

하며 자신들이 만만해 보였다. 둘봉이가 말하였다.

"언니, 뭐 힘쓰기가 꾀쓰기를 당합니까. 시골 왈짜 무뢰배라는 것이 부딪치면 다 어슥만

하지요."

"허긴 그렇다."

"자아 그런데 대접해드릴 게라곤 산채와 서속밥뿐이니 장사님들께 죄송해서 어쩌우?"하며

변가가 인사치레를 하자 첫봉이가 선뜻 봇짐에서 열 냥을 꺼내고 둘봉이는 삼목을 한 끝동

내주었다.

"이걸루 준비두 하구...그러구 술에다 돼지 한 마리 사올려오시우. 실컷 먹구 놀면서 운기

조섭두 해야지."

그때부터 한산하던 오두막집들에서는 부산한 활기가 감돌았고, 아래로 서넛이 물품을 구

입하러 내려갔다. 다시 첫봉이 둘봉이 선흥이 변가 네 사람이 토굴 밖에 자리를 깔고 나앉

아서 점심상을 받는데, 상을 맞들고 오는 아낙네 중에 한쪽의 얼굴이 제법 해끔하였다. 비록

누더기옷에 뒤꼭지 없는 미투리를 끌고 있었으되 눈이 검고 콧날이 오뚝하며 입술이 쫑긋한

것이 마치 산에 핀 도라지꽃같이 함초롬하였다. 상을 받으니 서속밥에 더덕구이와 고사리에

마른자반이 곁들여졌다. 첫봉이가 찬물에 서속밥을 말아 흩어지지 않도록 그릇에 대어 떠먹

다가, 슬쩍 고개를 들어 계집의 뒷모습에 눈을 견주었다.

"저게 누구요?"

변가는 싱긋 웃었다.

"아까 제가 말했던 고만이라구 합니다."

변가의 말에 의하면 고만이는 그의 졸개 중의 하나인 칠성이의 누이였다. 고만이는 탑벌

두내리에서 시집가서 살다가 남편을 여의고 칠성이를 따라서 입산해 들어온 여자였다. 변가

가 그런 얘기까지는 하지않았으나, 고만이는 칠성이네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장연 장터에

나가 앉아 들병장수를 하였었다. 장터에서 들병에 술을 담아 한두 잔씩 장꾼들에게 파는 것

인데, 파장될 적에는 꼭 먼 곳에서 온 차인들을 후려내어 두견산 깊은 숲에 끌어들여 실컷

사내를 녹여서, 취하여 잠든 사내의 봇짐을 털기도 하였다. 고만이가 칠성이를 따라서 산채

로 올라와서도 남의 눈을 피하여 변가와도 지분거렸고, 졸개들 몇과도 그런짓을 벌였으나

아무런 말썽이 없었다.

그 연유란 고만이 자신이 늘 치맛귀가 너른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보가 소탈하여, 남자와

몇판을 얼려도 도무지 마음을 한군데에 모아주지 아니하였던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만이가

다른 놈과 그짓을 벌이고 볼따귀와 귀밑이 발그레해져서 숲속을 나오면 모두들 저 녀석이

또 양기를 빨리었거니 우스개로 넘기고 말던 것이었다. 변가가 실실 웃으면서 첫봉이께 물

었다.

"허서방, 고만이와 정분 한번 맺어볼라우?"

첫봉이도 빙글빙글 웃었다.

"그럴까...아무래두 수돌이네로 갈려면 저애와 내가 부부궁합을 맞춰야겠으니 실지 겪는

것이 이롭겠지."

"이 자식아, 공연히 사타구니가 근지러우면 버젓하게 드러내고 긁어라. 핑계는 그럴 듯이

돌려대누나."

강선흥이가 첫봉이를 놀렸으나, 첫봉이는 한참이나 고만이의 호리호리한 허리께에 눈을

박고 떼지 않고 있다가 부지런히 밥술을 떠넣었다.

저녁때가 다 되어 아래로 내려갔던 졸개들이 제각기 커다란 짐들을 지고 올라왔다. 수돌

이네를 치러 갈 때 쓸 물건들과 술과 돼지 한 마리를 짊어졌으니 고기에 주리던 판이라 모

두들 군침들을 삼켰다. 돼지를 잡고 칼질을 하고, 음식을 부치느라고 백운산 골짜기에 갑자

기 대갓집이 선 듯하였다. 그 소란중에도 첫봉이가 놓치지 않고서 아낙네들 틈에 섰는 고만

이를 노리고 다가갔다. 고만이는 쌀을 일어 함지에 담아 절구로 찧을 자세를 하다가 첫봉이

가 다가들어 말을 붙이는데, "그 아주머니 태 한번 곱소이다."

하니까 눈을 흘깃 떠서 연신 추파를 흘리면서 대꾸하였다.

"고우면 뭘 하우, 임자 없는 개꽃이라 나비두 없는데..." 첫봉이가 속으로 허허 그년 말

받는 솜씨로 보아하니 보통 자지간나희가 아니로다 하며 감탄을 하였다.

"얘기나 좀 물읍시다."

첫봉이가 고만이의 뒷전에 다가서니, 고만이는 떡쌀을 턱 내려놓고는 공연히 나물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는 쫄랑쫄랑 시냇가로 내려가는 것이다.

"! 날더러 따라오라는 수작이렷다."

첫봉이도 이름난 왈짜패라 고만이의 샐쭉거리는 짓에 더욱 몸살이날 지경이다. 큰기침 공

연히 두어 번 뱉고 나서 고만이의 뒤를 따라 시냇가로 내려갔다. 고만이란 년이 나물을 시

냇물에 담가 씻었다가 건져내는데, 치마를 무릎 위로 넌지시 끌어올려 백옥 같은 속살을 드

러내어 물에다 척 담그는 것이었다. 첫봉이는 서슴지 않고 바로 곁의 바윗돌에 가서 걸터앉

았다.

"이 사람은 아직 총각이라 그렇지만 댁은 꽃다운 나이에 홀몸이라니 참으로 가긍하오."

첫봉이가 능글맞게 후리는 말을 던지니 고만이가 아미를 들어 곁눈으로 곱게 흘기면서, "

내 홀몸 걱정해주시니 어디...중신 서줄라우?"

하였다. 첫봉이가 음심을 참지 못하여 시냇가로 내려와 고만이의 곁에 바싹 붙어 앉는 것이

었다.

"중신할 틈이 있나, 그만 내가 직접 나서기루 함세." 첫봉이가 고만이의 물 묻은 손을 잡

, 한 팔로 잘쑥한 허리를 덥석 안으니 고만이는 방긋 웃으면서 궁둥이를 빼었다.

"아이 차암...백주에 이게 무슨 황당한 짓이오."

허리를 틀면서 두 손을 들어 첫봉이의 가슴을 밀치는데 이것은 사뭇 잡아당기는 것보다

더하게 보였고, 첫봉이는 끙하는 신음소리 내고서 더욱 억세게 고만이의 허리를 휘감았다.

"아이...정말 이이가..."

고만이는 숨을 발딱이며 첫봉이의 거친 손을 허리에서 잡아떼느라고 몇번 꼬집고 할퀴는

시늉을 하였다. 첫봉이는 총각이니 여유가 있을 리가 있나, 겁없이 치마를 걷어올리면서 고

만이를 쓸어넘기려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고만이가 첫봉이의 등을 두 손으로 안고서 다리

는 꼭 오므린 채 뒤로 넘어갔다. 고만이는 첫봉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면서 달랬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우. 이곳은 자리가 합당치 않으니...저쪽에 조용한 곳이 있어요.

? 잠깐만 참아요."

첫봉이는 머릿속에 열기가 터질 듯이 찼지만, 조용한 곳으로 가자는 말에는 귀가 번쩍하

여 힘을 풀고 반신을 일으켰다.

"다른 데루 가자구?"

고만이가 검은 눈을 똑바로 뜨고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첫봉이가 엉거주춤 일어나는데,

잽싸게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고만이가 느닷없이 첫봉이의 사타구니 아래로 손을 넣었다.

고만이는 첫봉이의 물건을 둘 다 한꺼번에 움켜잡고 놓지를 않았으며, 첫봉이가 때리려고

주먹을 쳐들자 그것을 쥔 고만이가 사정없이 힘을 주면서 쫑알거렸다.

", 손을 내려, 내리라구. 어디서 함부로 내대는 거야?" "아아아...에그그그."

첫봉이는 꼼짝 못하고 신근을 잡힌 채로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입을 쩍 벌리며 아픔을

참고 있었다.

"내가 누군 줄 아니? 아무리 양물이 좋다 하나 차서가 있는 법이야. 누가 생쌀 씹는대?

떡해 먹는댔지. 네 따위는 공연히 나대다가 문전이나 어지럽히기 똑 알맞겠다. 어찌...아예

터쳐줄까, 아니면 한 달포 그 맛이 싹 달아나서 오줌두 못 싸게 해주랴." ", 한번만...놓아

다우. ...제발이다."

"한번에 놓지 그럼 두 번에 놓아? 놓아주자마자 달려들려구." "아아...아니여, 사내가 한입

갖구 두말하겠니. , 놓아다우." "생각 있으면...이따 어두울 적에 내가 찾아가 부르면 고분

고분 따라나와. 노는 계집이라구 그릇 마음먹구 설치면 아예 쌍둥해버릴 테야."

그때에 뒷전에서 변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만아, 그 손 못 놓겠니?"

고만이는 연신 코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과연 장연 저자에서 원방 차인배들을 두견산으로

끌어들이던 솜씨가 있었던지라, 고만이가 남자를 다루기를 마치 관운장이 청룡도 휘두르듯

하였다.

"옜다, 뜨거울 젠 식혀야 오래 사느니."

하면서 고만이가 첫봉이의 사타구니를 놓아주는 것과 함께 가슴팍을 억세게 떠밀어냈다.

봉이는 뒤로 벌렁 나자빠지면서 무릎까지 오는 시냇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변가가 황급

히 내려오는데 웃음을 참느라고 입은 꾹 다물었고, 콧날개가 연신 벌죽거렸다. 고만이는 나

물 담긴 바구니를 옆에 끼고 태연히 일어나 돌아섰다.

"그래두 서루 아는 처지라길래 그만이나 하였지...두견산 기슭에서 만났더면 장도루 싹 잘

라버렸을걸."

하는 말을 종알거렸고, 변가는 고만이에게 노한 기색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산채 두목

의 체면이었던 것이다.

"예끼 년, 그분이 뉘시라구 감히 어디를 잡아당기느냐. 네 이제 죽음을 면치 못할 게야."

그러나 고만이는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두령님, 양물두 양물 나름입디다. 길고 굵어야 할 것은 작아서 쓸데가 없구요. 마땅히 크

지 않아야 할 발은 나날이 크니 어디에 쓴단 말이우. 그러니 똑 도적의 팔자지." 고만이가

계속 깔깔대며 달아나는 꼴을 변가는 더 나무라지 못하고 겸연쩍게 서 있었다.

변가는 고만이와 두어 번 어울렸으나 늘 시시껍절하게 해내어 주눅이 들어 있던 참이었다.

그때에 첫봉이가 엉기적거리며 시냇물 속에서 일어나, 오만상을 찌푸리며 물가로 걸어나왔

. 그는 한숨을 푹 내리쉬며 땅바닥에 주저않아버린다. 온몸이 물에 젖은 것은 고사하고,

도무지 아랫도리가 뻐근하고 맥이 풀려서 걸을 재간이 없는 것이었다. 변가는 웃음을 간신

히 참고 첫봉이를 일으키려고 팔을 겨드랑이에 끼는데, 그가 가까스로 뿌리쳤다.

"아이구...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군."

", 참으로 죄송허게 되었수, 이런 봉변을 당하시다니! 그 고만이란 년이 합환에만 능수

가 아니라...아예 여우인 걸 몰랐구려."

첫봉이는 대꾸할 기운도 없어서 한참이나 사타구니를 잡고 헐떡이고 있었다. 지분덕거릴

때 몰려왔던 정기가 마치 가물 만난 보릿대처럼 새까맣게 죽어버린 것은 물론이요, 자라 모

가지가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듯이 사타구니 깊숙한 곳으로 잦아들어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

. 첫봉이가 마냥 그러고 앉았기도 쑥스러워서 일어나는데, 역시 걸음이 벌려져서 여덟팔자

모양이었다. 보기 딱해진 변가가 그를 곁에서 부축하고, "여럿을 불러 모은 뒤에 그년을 치

죄하실라면 하시우."하며 위로하니 첫봉이는 더욱 맥살이 빠지는 것이었다. 어찌 남들의 앞

에 드러내어 자기의 부끄러운 봉변을 광설하랴 싶었다.

"내버려두우. 조금 있다 술이나 한잔 들어가면 낫겠지. 그보다는 고만이란 년이 아무래두

일을 잘해낼 듯싶소."

"아무렴입쇼. 그러게 내가 뭐랬소. 저 애만 잘해주면 수돌이를 수중에 잡아넣는 것은 그저

누워서 떡 먹기라니까요. 어쨌든...저년두 허 서방께 마음이 있어놓으니 이런 장난질을 했을

테지요. 오늘밤쯤에 흐드러진 일이 있을 것이니 봉변당한 것은 그때 가서 때우시우." 변가

는 연신 웃음을 실실 흘리면서 첫봉이를 달래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토굴 앞마당에 멍석이 깔리고, 산사람들에게는 과분하리만큼 떡벌어진

상이 차려졌다. 선흥이와 변가가 함께 마주보고 앉았으며, 첫봉이, 둘봉이와 변가의 졸개들,

칠성이와 개바우를 비롯한 나머지 세 명의 졸개들도 차례로 끼여 앉았다. 변가의 아내가 돼

지고기를 삶아 내왔고 떡에 산나물에 화주가 한 동이나 나왔다. 변가가 화주를 연거푸 들이

켜서 불콰해진 얼굴로 큰 소리를 질렀다.

"어이, 이제는 모두 한식구가 되었으니, 이만한 형세라면 우리두 수돌이놈께 학령을 빼앗

기지 않겠네."

칠성이와 개바우도 옆에서 장담을 하였다.

"학령이 다 뭐유. 아예 달마산이며 어루리벌을 우리 구역에 넣어야지." "강장사님만 계시

면 항우나 장비가 쳐들어와두 겁날 게 없지요." "이 사람들아, 강장사가 아니여. 이제부터

는 우리 두령님이시다." 변가가 먼저 나서서 술잔을 치켜들며 강선흥이를 추켜댔다. 선흥

이는 첫봉이를 돌아다보며 말하였다.

"제기...집 떠난 지 사날 만에 적괴가 되다니."

"우리가 집이 어디 있나. 인제는 산 높고 물 좋은 데가 모두 우리 집이지." 그들이 얘기

를 나누는 중에 화주가 가득 담긴 술항아리를 이고 왔던 고만이에게 변가가 일렀다.

"고만아, 여기 강두령부텀 차례루 술 한잔씩 따르어라." 고만이는 방글거리며 술상머리에

앉더니, 일당들의 사발잔에다 화주를 떠서 차례로 부었다.

"사내 식구가 늘어서 고만이가 제일 좋겠구나."

개바우가 킬킬거렸고, 칠성이는 제 누이인지라 떱떠름하게 앉았는데, 변가가 비워진 첫봉

이의 잔을 턱짓해 보이며 한마디 던졌다.

", 저 허서방 잔은 왜 채우지 않느냐?"

고만이는 손을 탈탈 털고 일어나며 종알거렸다.

"이따 야참을 드실 텐데 초반에 만취하시면 나는 어찌해요." 첫봉이는 공연히 콧잔등을

쓸며 앉았는데, 좌중에 웃음이 터지는 것이었다. 선흥이가 첫봉이를 놀려대었다.

"이 자식아, 신근을 뽑힌 고자가 대장부들 술자리엔 어찌 어울렸니? 달마산 수돌이는 아

무리 고자라지만 덜렁 달구 있다는데, 너는 이제 두 다리뿐이니 오줌 눌 때는 꼭 앉아서 싸

질르렴."

"내 온 참! 재수 옴붙었어."

하며 입맛을 쩝쩝 다시는 첫봉이를 그의 아우 둘봉이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언니, 장손이 조상 뵈일 면목이 없게 되었으니...후사는 내나 바라구 사시우." 변가가 첫

봉이에게 잔을 권하면서, "이 잔 마저 드시구 어서 쫓아가보슈. 저애가 아마 안달이 나서

허서방을 기다릴 게요."하자 핑곗김에 잘되었다 싶었는지 첫봉이는 침을 탁 뱉으며 일어섰

.

"엥이, 술맛 떨어져 못 앉아 있겠다. 가서 일찌감치 잠이나 자야지." 첫봉이가 술상머리

를 떠나 어둠속으로 사라지자, 화제는 다시 강선흥이가 부역 나가 일 치르던 얘기로 돌아

갔고 해서지방의 부역이 역시 혹심하던 판이라 모두들 입을 모아 땅 빼앗기던 얘기들을 나

누었다. 첫봉이는 슬그머니 일어나 고만이의 자태를 찾으면서 움집 쪽으로 내려갔다. 첫봉이

가 움집이 있는 아래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내려갈 때, 아낙네와 아이들은 이미 집집으로 들

어가 초저녁잠을 청하는지 가끔 어린애 달래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가 두리번거리는데 뒷

전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뭘 찾어?"

첫봉이가 돌아다보니 고만이는 움집에 드리운 거적을 들치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첫봉

이가 우물쭈물하자, 고만이가 손은 내밀어 첫봉이의 저고리를 잡아당겼다.

"밤참 생각이 났으면 어서 들어올 것이지...포도청에 송사 구경왔나, 어째서 주뼛거리는 게

."

첫봉이가 움집에 들어가니 거적이 깔린 방안은 말끔히 치워져 있고, 구석에 관솔불이 까

무룩하니 타오르고 있었다. 고만이가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고 넌지시 첫봉이를 끌면서 뒤로

반듯이 자빠져버렸다. 첫봉이가 서슴지 않고 고만이의 치마를 걷어올리려니 고만이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짝 밀어냈다.

"아이 참...내가 벗을게."

첫봉이가 저고리를 훌훌 벗어 내던지고, 중의를 끌러 덥석덥석 뭉쳐서 저쪽 구석으로 던

져버렸고, 고만이도 홑것뿐인 저고리와 몽당치마를 훌훌 벗어버렸다. 워낙에 첫봉이가 색주

가 출입은 장삿길에 가끔 해보았으되 아직 내로라 하는 외입쟁이는 아닌지라, 벌써부터 마

음이 급하여 숨이 턱에 닿아 덜덜덜 떠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만이는 침착하게 손을 놀려

첫봉이의 양물을 잡으며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아이구...네나 있으니 내가 살지, 우리 주장군이 없었드면 어이 살았을꼬." 첫봉이가 고

만이와 어울려 대사를 치르는데 아래 깔린 고만이가 그래도 제 성에는 흡족한 사내인지라

좋은 김에 마음놓고 요분질과 감창이 대단하여 그런 법석이 없었다.

첫봉이와 고만이가 연거푸 두 차례를 뛰고 나니 둘 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버렸다. 첫봉이

는 갈증을 이기지 못하여 소반을 끌어다가 술을 병째로 들어 꿀꺽이며 마셨고, 고만이는 눈

자위와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서서히 밀려나가는 색정을 간수하는 모양이었다. 첫봉이가 안

주를 집는데, 고만이는 다시 뒤에서 치근덕거렸다.

"어찌 그리 장사야? 까무라칠 뻔하였네."

"야야, 이러지 마라. 이제 탕정이 되었으니 숨 좀 돌려야겠다." "아이 한창때의 총각이 무

슨 고따위 두 번으루 탕정이 되어. 내가 오늘밤에 잠을 재울 줄 알아."

첫봉이가 다시 곁에 드러눕자, 고만이의 팔과 다리가 뱀처럼 휘감기며 아랫배를 찰싹 붙

여오니 첫봉이는 어쩌지 못하여 다시 손으로 가슴을 만져주고 궁둥이를 쓰다듬었다. 첫봉이

가 아무리 한창때라고 하나, 아직 정기가 오를 때까지는 생각이 없었다. 고만이의 손이 슬슬

자신의 사타구니로 파고들자, 첫봉이는 고만이의 손을 우악스레 쥐었다.

"저리 치워라. 그 손버릇 고치지 않았다간 아예 부러뜨릴 게여." "술도 많이 남았고, 밤도

깊지 않았는데, 벌써 식었수." "네 궁둥이가 촛궁둥이가 아니라, 네 손찌검 탓에 지레 겁

먹은 탓이여, 끄떡하면 양물을 잡아 뽑으니 색정은 고사하고 지레 풀이 죽는단 말야." "

살 부추겨주려구 그러는데..."

하고는 고만이가 한숨 푹 몰아쉬며 다시 발랑 자빠져버렸다. 불도 끄지 않은 방에서 두 남

녀의 음탕한 장난이 그칠 줄을 모르는데, 고만이가 다시 한숨을 쉬며 이불자락을 발 끝에

걸어 주욱 밀어내버리니 알몸이 훤히 드러난다.

"고뿔 들겠다."

"몸으루 덮어주어."

"온 제기랄..."

고만이의 가무잡잡하고 팽팽한 몸이 좌우로 뒤틀리는데, 가랑이를 벌렸다가 오므리기를

몇차례 하였다. 저도 모르게 발동해버린 첫봉이가 다시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고

만이를 올라탔다. 고만이가 다리를 활짝 벌려 첫봉이의 허리께를 휘감고 삭신을 부숴버릴

듯이 억세게 조이면서 장딴지 아래로 훑어내렸다. 둘의 두덩이 서로 부딪쳐 뜨거워졌고 숨

결이 턱에 닿았다.

"아이구 나 죽는구나!"

고만이가 땀범벅이 된 첫봉이의 등판을 손톱으로 찍어누르면서 열에 뜬 소리를 냈다.

봉이의 머리통은 곧 터져버릴 듯이 팽창되었고, 발끝에서부터 뿌리 끝까지 신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첫봉이는 궁둥이를 조여 힘줄에 정기를 모으며 더욱 거세게 두드려댔다.

그날 밤이 거의 새도록까지 두 연놈은 밀린 색정을 모조리 탕진하는데, 첫봉이는 사추리

가 뻐근하고 눈이 가물가물하여 오랜만에 죽은 듯한 깊은 잠이 들었고, 고만이도 의외로 흡

족한 상대를 만나 십여 차례 가까이 풀고 나니 더는 생각이 없으되 첫봉이의 살에 정이 붙

어 가슴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선흥이 일행이 백운산에 머문 동안에 첫봉이와 고만이는 드

러내놓고 움집을 함께 썼으니, 자기들도 모르는 결에 부부지간처럼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칠성이는 원래 제 누이의 음탕함을 아는지라, 오히려 첫봉이를 제 식구같이 대하였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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