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장길산 7

一字師 2024.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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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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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황석영

출판사:창작과 비평사

봉사자:김선용, 임흥태

 

1장 황민(계속)

4

경조를 중심으로 하여 이전부터 행정의 그늘 아래서 여기저기 사는 터전 나름으로 패거리

를 가져오던 천류와 무뢰지배자들은, 드디어 조정이 혼란해지고 왜국이 재침한다는 소문으

로 양반들이 동요하자, 제각기 천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모여들게 되었던

것이다.

검계에서도 한양에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의 모임은 따로이 살략계를 이루었다. 난리 때에

왕궁에 불을 지르고 부잣집을 습격하던 난민들이 실상은 다 이러한 무리들이었으니, 고금에

대처 저자란 모두 이러한 불씨를 안고 있는 셈이었다. 겉으로는 눌려서 눈도 제대로 치뜨지

못하고 대청 아래에서 설설 기며 죽는 시늉을 하고는 있으나, 그들의 가슴속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물려 내려오던 불덩이가 이글이글 타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나 남의 세상에 얹혀서

제대로 숨 한번 크게 못 쉬고 살았으니, 혼란한 때만 오면 자기를 제외시켰던 그 세상을 되

찾으려는 그들이었다. 옛글에 이웃의 설움은 안락한 자의 가슴에 꽂히는 비수와 같다더니,

저들 한줌도 안되는 양반의 무리들은 시국이 날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면서 종이나 상한들

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하였다.

산지니는 고달근의 일당을 따라서 묘적산으로부터 산줄기를 따라 천마선 북녘으로 내려갔

는데 으슥한 계곡에 솔부리골이 있었다. 복만이가 명색이 두령이었으나, 사실 모든 일은 달

근이와 황회가 맡아서 처리해나가고 있었다. 복만이는 그들이 솔부리로 들어온 뒤부터는 어

찌된 셈인지 졸개들이 대단치 않게 여기는 눈치여서 체모가 말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지

만 사내들끼리 겨루고 뻗대고 하는 판에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 있으니, 우두머리 되는 자가

계집을 밝히면 아랫사람이 믿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왈짜패들끼리 농지거리가 오가다가

불끈 화를 내는 경우란 상대가 외입쟁이라고 이죽거릴 적이었다. 여하튼 색을 드러내놓고

좋아하는 놈치고 아랫것의 배신을 당하지 않는 자가 드문 법이다. 그럴 때 우두머리는 그런

약점을 덜어버릴 만큼 다른 수완이 있어서 부하들의 배를 불려주거나, 아예 다른 마음을 먹

지도 못하게 짓눌러버리거나 하면 몰라도 마음을 놓으면 곧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계집 밝

히는 일이 몰락의 원인이기도 하고 몰락하면서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색을 찾아 나서기도 하

였다.

복만이도 일찍이 황회를 거사로 거느리고 있던 동자나루 사당패의 모가비였다. 황회와 고

달근이가 스스로 거느리고 있던 사당들에게는 비교적 담백하였으나, 복만이는 조금 해끔하

고 나이 어린 사당만 들어 와도 꼭 먼저 잡아먹곤 하였다. 복만이는 황회와 고달근이가 당

진서 한바탕 일을 치르고 쫓겨 들어올 때 그들을 꺼려하여 받으려 하지 않았으나, 황회와

정원태와의 관계 때문에 반대할 수가 없었던 터였다. 황회는 진관사에 있을 적부터 정원태

의 아내를 보살님이라 부르며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복만이 혼자 솔부리를 통솔하고 있을 때에는 졸개들이 다소곳하더니, 고달근이와 황회가

들어온 뒤로 과연 복만이는 빛을 잃었다. 우선 배포가 적어서 고작 벌이는 일이 난전치기요,

언제나 노적사 정원태의 턱짓에 놀아나는 것이었다. 복만이는 사당을 둘씩이나 노적사에 들

어 앉혀두고 드나들었고, 졸개들은 그가 흥인문 밖에도 은근짜를 박아두고 있음을 눈치챘다.

복만이가 솔부리를 비우는 날이 차츰 많아지고, 고달근이는 그를 부하들과 떼어놓기 위하

여 벌이에서 얼마를 나누어두었다가 복만이에게 내밀었다. 복만이는 자기가 솔부리의 두령

이라는 것을 실감하였으며 노적사나 숭신방에서 달포씩 처박혀 있다가 마지못해 솔부리로

기어드는 형편이 되었다. 산지니가 노적사에서 검계에 들고, 고달근이를 따라 솔부리에 왔을

적에도 그는 노적사에 남았다. 자기네들이 흥인문 밖으로 피난 봇짐을 털러 가면 사람을 보

내라는 정도였다. 그는 고달근이가 사람을 보내지도 않을 것이며 나중에는 탈취한 재물의

얼마를 떼어 그의 몫으로 내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달근이는 산지니를 여러 졸개들

에게 인사시키고 나서 그를 따로이 자기 침소로 불렀다.

고달근과 황회는 집 한 채에 마루 하나는 같이 쓰고 방을 각각 차지하여 지냈는데, 황회는

시동이와 함께 있고 달근이는 안성에서부터 따라다니던 박거사와 같이 지냈다. 박거사는 윗

목에서 잠들었고 달근이와 산지니는 목침을 나란히 하여 다정하게 누워 있었다. 달근이가

비록 이익에 밝고 야박하기는 하여도 일단 자기 사람이라 하면 간이라도 떼어주듯 하는 자

, 산지니에 보이는 태도가 그리 곰살맞고 다정할 수가 없었다. 우선 달근이는 산지니에게

새옷을 갈아입혔고, 아랫것들 보이기가 민망하다 하여 그의 떠꺼머리를 틀어올려 상투잡이

로 만들어 주었다. 고달근이는 그렇지 않아도 박거사가 충직하기는 하여도 영리한 구석이

없고 대가 약하여 늘 등뒤가 허전하던 판이었다. 황회와 시동이는 서로 그림자 같아서 누가

보아도 동기간처럼 든든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자네 말을 들어보면 평생 소원이란 게 간단하구먼, 누님을 모셔다 편히 살도록 해

드린다는 얘기 아닌가. 그까짓, 재물만 모은다면야 저어 북관의 수자리 동네나 찾아가서 의

젓하게 유건 하나 쓰고 책 읽는 시늉이나 하며 살면, 무변들이 찾아와 굽실거릴 터인데 무

에 걱정인가. 이제 양반을 쳐 없애는 일이야 자네의 평소 성미에도 맞는 일이것다. 저절로

재물이 들어오것다, 아주 검계에 맞춤할 시절에 입당하였구먼."

산지니는 갑작스런 변화에 자기를 어디다 맞춰야 할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

치 양어깨에 찍힌 낙인같이 어딘가 불편하고 남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원태의 언변은 바

늘처럼 심장을 쿡쿡 찔러대었건만, 고달근이의 어물쩍하는 말은 어딘가 가슴에 와닿지 않았

.

"재물은 있으나 없으나 마음이 편해야지요."

하고 나서 산지니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우리 수가 많고 용맹하다면 한양을 뒤집을지두 모르잖소."

"그야..."

고달근이는 이마를 찌푸리며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든 재물은 있어야지. 내일 슬슬 올라가볼까 하는데... 자네는 무슨 재간이 있나?"

"재간이라니요?"

"그럼 웃는 얼굴하고 비쩍 마른 두 손바닥 가지구 흥인문 밖으로 가려나?"

산지니는 그제서야 씩 웃었다.

"별다른 재간은 없고... 그저 어릴 적부터 대가리 터지고 사지가 성한 데 없이 장바닥에서

싸우며 자라다 보니 싸움이라면 조금 하지요."

고달근이도 그의 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아무렴, 치고 박는 게 무슨 법식이 따로 있나. 그러나 털벙거지를 상대하려면 간단한 칼쓰

기는 알아두어야 하네. 나는 사당패에 있을 적부터 말 채찍 한벌을 지니고 다니며 곧잘 휘

두루는데 가지 위에 내려앉은 참새 정도는 떨어뜨리지. 요즈음은 계에서 창포검을 지니게

하여 칼두 지니고 다니지만, 내야 어디 쓸모가 있어야지. 자넬 주겠네. 칼쓰기가 따루 있나.

결국은 단병접전이니 역시 해본 놈이 이기는 게야. 병장기 잡든 맨주먹이든 매일반으로 싸

움질이니까. 아침 저녁으로 작대기 써먹듯이 휘둘러보란 말야."

달근이가 벽에 걸어두었던 짜른 환도를 내려서 산지니에게 건네주었다.

산지니는 고달근이가 그것을 내밀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으니, 가끔 대상 부고의 차인패

들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것을 보기는 하였으되 제 손에 쥐어보는 일이 처음인 때문이었다.

"풀뭇간에서 나온 뒤로 썩은 등걸 하나 베지 않은 새 칼날일세. 한 번 뽑아보지 그래."

산지니는 조심스럽게 칼자루를 쥐고 천천히 뽑았다. 시르릉 하는 쇳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

왔다. 칼날은 새하얗고 차가웠으며 칼끝은 예리하게 곤두서 있었다. 혈조가 칼자루에까지 패

어 있는데 날부분은 가파르게 두드러져 있었다. 산지니는 칼을 얼굴 정면에 세워들고 위로

부터 아래로 찬찬히 훓어내렸다.

"살 뻗치네. 얼른 집어넣어."

산지니는 칼을 집어넣었다.

"진기를 쓰게 되면 사람이 무서워진다더니 그럴 법하군."

산지니가 혼자 중얼거렸고 달근이는 미처 알아듣지 못하여 덧붙였다.

"칼 든 놈이야 총 든 놈밖에 무서운 놈이 있을라구."

이튿날 동이 트자마자 솔부리의 계원들은 제각기 행장을 수습하여 산을 내려갔다. 고달근,

산지니, 황회, 시동이와 십여 명의 솔부리 사람들은 모두들 괴나리봇짐이며 부담 실은 마필

과 지게로 인근 난전꾼이나 장돌림의 모양을 내었다. 그들은 중량포를 넘어 청량사 어름에

있는 돌곶이 주막에 들어 정세를 살필 작정이었다.

흥인문 밖에서 탈취한 물건은 동활인서 밖에 모여 사는 깍정이패들의 움에 숨겼다가 밤을

타고 송파 까마귀에게로 빼낼 것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렇게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시구

문 밖의 황량한 들판을 뒤지러 다닐 포교는 아무도 없었다.

성내에서는 풍문이 돌기를 미구에 난리가 일어나 성중은 물론이요, 인근 백여 리에 닭의

울음소리가 끊길 것이라 하여 드러내 놓고 가장집물과 가족을 빼돌리는 양반가의 짐과 가마

가 동대문 밖으로 잇달았다. 그래도 체면은 있어서 그들은 주로 이른 새벽에 성문을 나서거

나 황혼 녘에 성문이 닫히기 직전에 빠져나간다. 돌곶이 주막에 이르러 사정을 들으니 남쪽

보다는 역시 동쪽으로 나가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유언비어에 들뜬 자들은 거의가 재산 있고 귀한 자들이요, 일반 백성들은 불안해하면서도

시절이 흉황이라 그날 그날 호구하기에 발치를 바라볼 힘도 없었다. 달근이가 실정을 알고

나서 고개를 끄덕여 장담하였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하루 두 차례씩 여러 대를 모아다 털어먹으면 되겠구먼."

"새벽에 나오는 자들은 대개 전날에 짐을 꾸려두었다가 먼길을 가려고 나서는 자들이니,

흥인문 밖에서 세마를 빌리거나 교꾼을 사려고 할 게야. 크고 작은 피난짐을 모조리 빼앗을

수는 없으니 살펴보다가 그 중에서 짐이 가장 많은 일행을 노려야지. 저녁 무렵에 나오는

것들은 일단 성문을 나와서 왕십리를 지나거나 돌곶이 주막거리로 나오거나, 퇴계원으로 빠

져서 한숨 돌리고 이튿날 모두 수습 정리하여 떠나겠지. 그럴 때는 밤에 주막을 들이치거나

아니면 길 떠난 직후에 호젓한 곳에 앞질러 가서 해치우도록 하지."

황회가 말하니 시동이가 일깨워주었다.

"헌데 말이우, 흥인문 밖을 나와서 일단 동이나 북으로 오르는 것들은 우리 솔부리와 양주

계의 차지가 되겠지만, 왕십리나 한강진 광나루 등지로 빠져나가는 것은 노적사계에서 맡기

루 하였수. 공연히 뒤에 가서 서로 차 치고 포 치고 할까 걱정이우."

고달근이는 시동이의 말에 발끈하였다.

"문은 하난데 사방에서 지신에 붙이고 성주에 붙이면 남는 떡이 있냐. 여하튼 흥인문에서

우리가 보아둔 것들을 따라가다가 여의치 않으면 강원도까지라두 가야 할 판이다."

"거 뭐, 예에 따라서 하지. 우리가 맡은 데를 벗어나면 그쪽 아이들께 상주물림을 하면 되

."

상주물림이란 한 지역의 도적이 다른 지역의 도적에게 노략질할 상대를 돈 받고 팔아 넘기

는 것을 뜻하였다. 이렇게 들어오지도 않은 재물을 두고 이론이 분분한데, 산지니는 제 봇짐

을 메고 드러누워 아무 말이 없었다. 고달근이가 그를 발로 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이봐, 자네는 어찌했으면 좋겠나?"

"걱정 마우. 나는 내일부터 문안으로 들어가 손님이나 끌어올 테니 성님들은 좋은 자리나

보아두시우."

말이 오가는 중에 자연히 서로 맡은 일이 정하여진 셈이었다. 이튿날은 하늘이 맑게 개고

날씨도 제법 선선하여 지방으로 빠져나가는 이들이 더욱 많을 듯하였다. 그들은 인시 무렵

에 일어날 돌곶이를 출발하였다. 두어 식경이 되어 숭신방에 당도하니 이미 성문은 열어 젖

혀져 있었고, 문루에 수직 군사들도 두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원래 수직은 장교 하나에

스무 명의 군졸이 문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황회와 고달근이는 동묘 앞에서 먼길 가다가 뒤

처진 일행을 기다리는 것 같은 행색으로 짐을 풀고 기다렸으며, 산지니와 시동이가 대여섯

을 데리고 흥인문으로 왔던 것이다. 일단 문안으로 들어갈 때는 시동이와 산지니 둘뿐이었

. 그들은 종루 이교까지 나아가 돌다리 난간의 좌우에 걸터앉았다. 가끔씩 내행을 거느린

단출한 행차가 지나갔고, 그들은 그때마다 비켜서며 허리를 굽혔다. 드디어 먼 데서 행렬이

오는데, 앞에는 짐을 짊어진 하인배들이고 뒤에 노인 한 사람만이 말을 탔으며 다른 가속들

은 모두 걷고 있었다. 이인교가 두 채, 사인교가 한 채였다. 그 가마들마다 여종들이 역시

보퉁이를 들고 따르고 있었다. 시동이와 산지니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임자가 온다는 뜻이었다. 눈으로 대충 헤아려보기에도 짐보따리가 여섯은 되어 보였

. 그들은 일단 다리 한쪽에 허리를 굽히고 서 있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연신 눈을 들어 수

노가 누구인가를 살펴보았다.

내행이 셋이나 되니 일가가 통틀어 하향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 집안은 지금쯤 텅텅

비어 있고 청지기가 행랑것들 몇 명을 데리고 남았을 것이었다. 산지니가 일단 예를 보이고

는 재빨리 짐을 짊어지고 걷는 자들의 틈에서 나이가 들고 기중 행색이 나은 중년 사내를

점찍고 물었다.

"여보, 문밖에 미리 맞춰둔 경주인이라도 있소?"

사내는 흰창이 많은 눈으로 곁눈질하면서 대답하였다.

"이제 십여 년 만에 내려가시는 길인데 경주인이 어디 있겠소?"

산지니는 슬그머니 행렬에 끼여들며 말을 걸었다.

"아무래두 모두 가시는 게 아니라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가겠지요. 우리는 세마와 짐꾼을

데리구 있는데 나는 갈라잡이오. 산길 들길이 어찌될지 누가 알겠수. 우리는 장사차 왔다가

때가 흉년이라 거래가 한산하여 재미도 못 보고 돌아갈 판인데, 요즈음 하향하는 댁이 많다

고 하여 노자나 뽑을 겸 곁꾼으로 나섰소이다."

수노가 그럴 듯이 여기는지 반색하는 표정이 완연하였다.

"횡성까지 얼마면 따라 나서겠소?"

산지니는 장바닥에서 자란 사람이라 흥정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너무 눅게 부르면 의심할

터이고 저희들께는 이틀 품을 셈하여 한 사람에 열 냥씩만 주십시오."

수노가 속으로 중얼중얼 따져보더니 마상의 늙은이는 놓아두고 젊은 주인에게로 뒤처졌다.

그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는 모양이더니 수노가 그를 손짓하여 불렀다.

"이리 좀 오우."

젊은 주인은 번듯한 통영갓에 명주 술띠를 매고 갖신을 신고 있어 돈푼이나 있는 집안이

틀림없었다.

"마침 문밖에서 곁꾼을 사려던 참인데 잘되었다. 허나 품이 좀 비싼 걸. 우리가 시세는 잘

모르지만 말 한 필에 십 리마다 열두 푼이라면 과하지 않겠느냐."

산지니는 능숙하게 대꾸하는데 곁눈질로 평생을 보낸 사람 같았다.

"아이구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횡성까지가 이백오십 리 길인데, 십 리마다 열두 푼이라

면 겨우 삼십 냥이올시다. 두 필을 쓰시면 육십 냥이지요. 그리고 저희 일행이 모두 여섯이

라 이틀로 쳐서 하나에 열 냥씩이면 역시 육십 냥입지요. 겨우 백이십 냥이올시다."

"백 냥에 갈 테면 가고 싫으면 그만두어라."

"허허, 양근서 숙박하실 일은 생각 않으십니까. 마필을 마구간에 맡기고 꼴도 먹여야지요.

저희들이 봉노에 들어 서속밥이라도 사먹어야 되지 않겠어요."

"문밖에 나가면 경주인의 말과 곁꾼이 쌨는데 너희뿐이라더냐."

"글세 나가보십시오. 말 두 필에 곁꾼 여섯을 구하시려면 아무리 못 주어도 백오십 냥은

드십니다. 그러면 백 냥을 주시고 양근 가셔서 저녁에 술이나 한잔 내십시오."

젊은 주인이 껄껄 웃었다.

"그까짓 탁주에 비기겠느냐. 우리 짐에 백로주가 여러 준 있으니 염려 마라."

산지니가 속으로, 백 냥이든 이백 냥이든 네 멋대로 하여라 생각하니 그자의 쩨쩨한 흥정

이 새삼 얄미워 보였다. 젊은 주인은 늙은이에게도 뭐라고 말을 하는데, 아마도 곁꾼과 세마

구한 일을 자랑하는 양이었다. 산지니가 다시 수노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그게 어느 댁 행차요?"

"어느 댁이라면 당신이 알겠소?"

수노가 거만하게 되물었다.

"그 정도의 가세라면 당상관은 되겠지요?"

"전 호조판서 대감이 이 댁의 작은집 되시고 사위가 좌포도대장이이여."

산지니는 입을 벌리고 멍청한 얼굴로 우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실 그도 놀랐던 것이다.

간 큰 도적이 호조의 담을 뚫고 포도청 문고리를 뺀다더니, 이건 제대로 짚은 셈이었다.

포도대장 이인하라면 우대장 신여철과 함께 한양 인근의 왈짜와 무뢰배들이 개가 호랑이 여

기듯 하는 터였다. 산지니는 판서니 참판이니 하는 벼슬아치가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

었지만, 포도대장이라면 너무나 실감을 하고 있었다. 홍의에 남빛 동달이 전복 걸치고, 구슬

상모에다 환도와 병부를 비껴 차고, 팔목에는 팔찌 한 손에 등채 들고, 마상에 올라앉아 포

도부장들을 거느리고 지나는 행차를 성내에서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

는 까짓 거, 기왕이면 포도부장의 수염을 뽑더라도 두려울 게 없었다. 산지니는 뒷전에 처진

시동이를 기다렸다.

"자네는 어서 문밖으로 나가서 동무들께 준비시키고, 누굴 보내어 동묘에 알리도록 하게."

"앞뒤로 찬찬히 살펴보니 큰 짐이 다섯이요 작은 짐이 여덟인데, 또 한 가마 안에는 패물

함이 있을 것이니 누천 냥의 재산일세."

", 조용히... 어서 가라구, 이 댁 사위가 좌대장 이인하라구 하데."

"뭐라구..."

시동이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앞서서 뛰어갔고, 산지니는 행렬로 되돌아갔다. 흥인문을

나서니 먼저 나온 사람들이 제각기 경주인들과 흥정하느라고 법석이었다. 시동이가 일행들

과 말을 데리고 길가에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주인이 말을 살펴본 뒤에 다른 사람을 불러

먼저 태웠다.

"견마 잡히겠습니까?"

"필요 없다."

그는 하인들을 불러 세워 자기들이 없는 동안 집안을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가를 자세히 가

르치고 나서, 산지닌 이하 솔부리의 여섯 식구에게 짐을 지도록 하였다. 시동이가 분주하게

나다니며 지게를 걷어왔고, 부상들 모양으로 그들은 산더미 같은 짐을 지게 위에 얹고 걸머

지었다. 다시 행렬이 출발하는데, 길라잡이로 나선 산지니는 기중 작은 짐을 질빵 걸어 메고

앞장을 섰다. 동묘 앞에 이르렀으나 고달근과 황회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저희들

간에 다 꿍꿍이속이 있겠지 여기면서도, 산지니는 애가 달아서 연신 주위를 둘러보고 시동

이에게 눈짓으로 묻기도 하였다. 동묘의 앞길은 돌곶이와 중량포 나가는 길과 왕십리로 나

가는 세 갈래 길이 나 있어서, 도대체 이 자들이 어디로 앞질러 갔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래여... 아랫길."

시동이가 턱짓하는 곳을 바라보니 길가에서 신들메를 고치고 있는 시늉을 하고 있는 고달

근이가 보였다.

", 자칫하면 묘적사 식구들께 넘어가겠는걸."

시동이가 중얼거렸다. 활인서 앞을 지나면 곧 왕십리인데, 왕십리와 한강진은 묘적사에서

나오기로 의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죽 쑤어 코 빠뜨리겠어."

그들이 아랫길로 접어들자 고달근이는 뒤를 힐끗 돌아보고는 휘적휘적 앞장서서 걸어갔다.

오간수에서 흘러내린 물은 동으로 중량포에 닿는데 동묘에서 내려가다 보면 영도교가 걸려

있었다. 영도교 아래에서 오간수교까지에는 깍정이패들의 움이 많았다. 산지니는 길라잡이로

맨 앞에서 갔으므로 고달근이가 멀리서 걸어가는 양을 자세히 살필 수가 있었는데, 영도교

를 지나더니 다시 털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산지니는 그때에야 비로소 이들을 덮칠 장소가

다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실로 백주대로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았다. 바로 성문의 코앞이었다. 그런데 왕십리

로 내려오는 길은 훤한 들판이라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인적도 드문 편이었다. 재빨

리 움직인다면 다른 상대나 행인이 오기 전에 해치울 수가 있었다. 설령 상대나 몇몇 행인

이 오더라도 그들은 두려워서 피하거나, 당하는 쪽이 양반의 행차이니 못 본 듯이 지나칠

게 분명하였다. 산지니는 다리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다리를 건너고 이제

막 맨 뒤의 젊은이가 탄 말이 다리를 벗어났는데. 길 옆에 비켜섰던 고달근이가 내놓고 소

리지르며 늙은이가 탄 말께로 달려들었다.

"어어... 저놈, 저놈이..."

젊은 주인이 놀라서 손짓을 하는데 고달근이는 노인을 말에서 우악스럽게 끌어내렸다. 마상

의 젊은 사내가 길 떠나며 차고 나온 환도를 빼어들고 서투르게 달려드는데 시동이가 뒷전

에서 먼저 칼을 날렸다. 도포 자락 뒤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다리 밑에서도 서너 명이 우르

르 몰려나왔고 곁꾼으로 따라왔던 자들도 칼을 빼들었다. 그러고 보니 일행이랬자 가마를

짊어진 교꾼 여덟에 남은 젊은이 하나와 수노를 비롯한 하인 셋, 그리고는 여종 둘이었다.

황회가 약을 잰 화승총을 겨누며 남은 젊은이에게 지시하였다.

"살고 싶으면 네 아비와 하인들을 데리구 다리 아래로 내려가거라."

교꾼들은 물론이려니와 하인들은 모두 맨손이었고 우선 첫판에 기가 콱 질려서 눈도 제대

로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젊은이가 사색이 다 되어버린 노인을 부축하여 앞장서고 하인들

은 시동이와 산지니가 칼로 내몰았다. 그들을 다리 아래 으슥한 구석으로 데려가자 일당들

은 손을 다투어 그들을 차례로 묶어나갔다. 다리 밑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고달근이

는 다시 짐을 나누어 비어 있는 마필에 실었고, 교꾼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만약 가마 옆에서 한발이라도 떼거나 어깨를 빼면 대번에 칼 들어간다. 꿈쩍말고 섰거라."

가마 안에서는 겁에 질린 분자들이 숨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어이 빨리 해라. 눈에 띌라."

고달근이는 짐을 둘러보며 흡족한 중에도 불안한지 들판 주위를 휘둘러보고는 하였다.

디어 다리 아래서 황회 이하 식구들이 모두 올라왔다.

"에이 시원하다. 모두 굴비두름으로 엮어놓았지."

담배 한 죽을 태울 참도 채 못되어서 약탈이 모두 끝난 것이다.

고달근이는 넘어진 젊은 주인은 내려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죽진 않았군. 마주칠 때 매운 맛을 보아야 아예 기가 죽거든. 얘들아, 어서 밑에다 치워두

어라."

일당들 둘이 아직 신음하고 있는 젊은 주인을 끌어다가 다리 아래로 옮겨두었다. 그리고는

황회에게 뭔가 이르고 산지니와 시동이와 다른 식구 셋을 더 불러내어 가마 주위를 둘러쌌

.

"우리가 가자는 데까지 가야 된다. 만약에 길가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허튼 짓을 하면 남김

없이 베어 죽이겠다. 알겠느냐?"

교꾼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가마 안에서 훌쩍이는 소

리를 들었다.

"이년들, 조용히 하지 않으면 가마째로 개천에다 던져버린다."

고달근이는 걸으면서 연신 난봉가를 흥얼거렸다. 그들은 가마를 이끌고 들판을 가로질러

안정사 계곡까지 올라갔다. 몇 사람의 행인과 지나쳤으나 하인배를 거느린 어느 대가의 내

행이 재를 올리러 절에 가려니 여길 것이었다. 이 길은 그런 모습에 늘 익어 있는 곳이 기

도 하였다. 계곡에 이르러 고달근이는 교꾼들을 하나씩 나무둥치에 다 묶었다. 그리고 가마

는 차례로 져다가 가파른 바위 위에 올려두었다.

"나오려구 요동하면 지켜 섰다가 발길로 내질러 버릴 테여."

이제 뒷수습이 모두 끝난 것이다. 그들은 동활인서로 이르는 진창길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올랐다. 아직 중화참도 이르지 않은 시각이었다. 개천가에 이르니 저쪽 둑 위로 황회와 깍정

이 하나가 마중 나와 있었다. 장물 운반이 시작될 것이었다. 달근이는 시동이와 산지니만을

데리고 오간수의 깍정이패 꼭지 두꺼비를 만났다. 두꺼비는 말 그대로 눈덩이 아래로 축 처

지고 코는 뭉뚝하며 입술은 잘못 썰어놓은 홍어 토막 같았다.

"요즈음은 기찰이 심하여 여기다 물건을 둘 수도 없고 이 길로 성안으로 가져가 칠패 중도

아들께 넘기겠수."

"그러면 우리는 돌곶이로 나가 있을 테니 그리로 보내주어."

"곡식으로 하리까, 돈으로 하리까?"

"그야... 돈이 좋지 않을까."

황회가 말하니 산지니가 반대하였다.

"흉년에 돈은 있으나마나요, 역시 곡식이 유리할 듯 허우."

"그러면 곡식으로 운반하기가 난처할 것이니, 마포 동막 앞으로 송증이나 떼어주어, 배로

실어나를 테니까."

"패물이나 포목은 어찌하려우?"

", 그것은... 여기서 해치울 필요가 없겠군. 우리가 알아서 할 것이니 내어주게."

따로이 두 짐이 남은 것을 먼저 돌곶이로 보내고 그들은 따로따로 흥인문 앞길을 피하여

돌곶이로 돌아갔다. 그들은 성내에 물건을 먹이고 셈이 끝날 때까지 물주를 기다리는 시늉

을 하였다. 거기서 사흘 동안을 무료히 보내고 나서 고달근이와 신지니는 북어라든가 몇가

지 건어물을 챙겨 등에 지고 정탐을 나서기로 하였다.

"아예 성내에서 적당한 집이 눈에 뜨이면 집털이를 해버려야겠군."

산지니도 이제는 해본 장사라 슬슬 답답해지고 있었다.

"적당한 집이 따루 있소? 담 길구 대문 높직한 집은 우리 거요."

고달근이는 산지니의 그런 양이 자못 귀여운 모양이었다.

그들이 종루 시전거리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곳곳마다 기찰포교와 포졸들이 풀려나와 문에

서 들어오는 행인들을 살피고 있었다. 어딘가 성내의 분위기가 살벌해 보였다. 달근이와 산

지니는 도중에서 보퉁이를 검사받기도 하였으나 누가 보기에도 건머울 장사라 더 이상 들볶

이지는 않았다.

"우선 광통방으로 가자. 거기는 술집이 많고 훈련원이나 포청의 잡색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피령 소문을 들을 수가 있을 게다."

종루에서 서린방 쪽으로 돌아 광통교로 나가니 천변에 기와집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소문

난 술집들이 늘어서 태평방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으스름한 저녁 무렵이라 한산한데, 달근

이와 산지니는 청사초롱이 걸린 술집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앞마당을 중심으로 넓은 대청

이 보이고 돌아가며 미닫이들이 보이는데 그들이 첫 손님인 모양이었다.

"손님이 오셨다."

하며 마루 위에서 내다보던 주모가 외우다가 그들의 행색을 보고는 어이가 없는지 아래위

로 재삼 훑어보았다. 맨상투에 두건을 질끈 동여맨 자와 패랭이 쓴 자이니 뉘 집 아랫것들

이거나 시골 장사꾼이 분명하였던 때문이었다. 사동이 길게 외치며 마당으로 나서다가 역시

그들의 행색을 보고는 기가 질렸던 모양이었다.

"방이 없수. 활터 손님들과 별감 어른들께서 모두 방을 맞춰놓았는데 방금 들이닥칠 거요."

주모는 아예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버리고 사동이 주워넘겼다. 고달근이는 안색이 굳어지

면서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아니... 색주가에서 선래자 후래자가 있고 신입구출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도 술자리를 미

리 맞춘다는 말은 처음이로구나."

"이곳은 은근짜나 삼패 외입처가 아니라 일패 기방이오. 그런 데를 가시려거든 홍세원 색

주가나 잰배로 가보시지요. 들어오시면서 등불도 못 보셨나요. 용수가 아니라 청사초롱이올

시다."

사동이 누누이 설명하였으나 고달근이는 오히려 껄껄 웃었다.

"그런 것을 모르는 무지렁이배들인 줄 아느냐. 우리는 여기서 모낭관과 만나기로 하였느니

. 장꾼 행색이라고 너무 괄시하지 마라."

고달근의 태연한 말에 사동이 허리를 굽혔다.

", 그러면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들어와서 기다리십시오."

그들은 대문 곁에 딸린 길쭉한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먼저 과일 나부랭이가 들어온다.

"술은 무얼 드시렵니까?"

"그래, 어떤 것이 있느냐?"

"시절이 곤핍하여 화주나 백로주는 없고 약주 일색이올시다."

"그것으로 가져오너라."

술상이 들어오는데 이번에도 사동이 다담상에 약주와 서너 가지 안주를 얹어서 들고 왔다.

몽당치마의 계집종은 상을 맞들고 와서는 드러내놓고 아니꼽다는 투로 흘기고 나가는 것이

었다.

"이렇게 불편한 자리에서 굳이 마실게 뭐 있수?"

산지니가 물으니 고달근이는 상머리로 고갤 숙이면서 낮게 속삭였다.

"이곳은 대게 한양 세도가들의 세밀한 소문이 낭자한 곳이니, 우리가 정탐을 하러 들어와

서 이런 술집을 빼놀 수가 있겠느냐."

이윽고 손님들이 들이닥치는데 고달근이 문틈으로 내다보니 활과 전통을 둘러멘 한량패들

이었다.

"헛헛, 오늘은 이 집 술이 좀 친해졌는가?"

"술맛 보고 오나. 소향이 노래 때문에 오는 게지."

"아이구 어서들 오십시오. 얘들아, 청룡정 서방님들 오셨다."

주모가 외치니 안방 쪽에서 화려한 치맛자락을 끌면서 얹은머리에 금박댕기를 물린 기생들

이 제각기 몰려나와 그들을 반겼다. 고달근이가 기방의 풍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은근

히 분통이 터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술이 몇순배 돌아가지 않아서 강8금 뜯는 소리와 단가

의 가락이 건너왔다. 저들은 무장의 혈족들로서 모과하기 전에 사정에 다니며 활쏘기를 익

히는 자들이었다. 청룡정은 목멱산 아랫녘에 있었고 일가정 가회방 뒤에 있는데 모화관의

사정과 더불어 세 패거리의 한량패가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정말로 난리가 나기는 날 모양이더군."

", 그런 소리 말게. 요즈음은 그런 소문을 내거나 거기에 동요하여 우와좌왕했다가는 반

상의 구분없이 장형을 받게 되어 있네."

"갑자년 국서의 내막이 뭐라든가?"

"그야... 왜국에서 청국의 사정을 은근히 물어온 게지. 임자년에도 그랬다고 하지 않던가.

역가에서도 꼭 난리는 난다는 얘기야. 왜국에서 침공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구먼."

고달근이는 산지니에게 들어보라는 듯이 눈짓을 하면서 미닫이를 빠금히 열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젊은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우리 무과는 어찌되는 거야?"

"어찌되긴... 무장이 출사하는 길이란 난리가 나면 더 유리하지."

"이 사람아, 그것도 일단 급제 뒤에 말단 권관이라도 따놓은 다임이라야 전공을 세워 이름

을 내는 게지. 조보에 이르기도 전에 무슨 수로 누구와 거병하여 나라를 지킨단 말인가."

"허허, 그나저나 세상 인심이란 참으로 바람에 불리는 수면과도 같단 말일세. 난리가 일어

난다는 소문을 내면 엄벌을 하겠다. 궁성은 철통같이 지켜줄 것이다. 어쩌구저쩌구 하는 놈

들이 제 일가 친척들을 시골로 옮겨놓고 있단 말이야."

"기호지간에 도둑과 난민의 떼가 끓어 일어나 한양성 밖으로 나가면 온통 환도나 병장기

가진 폭민들로 들끓는다더군."

"실은 말일세... 세곡선도 줄어들고 있는 마포 동막에서도 성내에 댈 양곡이 벌써 달린다는

게야. 난리는 고사하고 이러다가는 한양 성 내가 기근으로 뒤집혀질 걸세. 벌써 무명값이 폭

등했네. 돈 주고 양곡을 살수가 없단 말일세. 이런 술집도 겨울까지에는 모두 끝장이 날걸

."

주모의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믄요, 이제 두고 보세요. 시골에 전장이 있는 사람들만 서울 살림을 지탱할 수가 있을

거예요. 우리 집에서도 이게 작년에 담근 술인데 이미 나라에서 금령이 내렸으나 서방님들

이 아시듯 새로 담근 술은 아닙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우리도 장사를 걷어치우고 양주나

고양으로 나갈 거예요. 한양은 점점 인심이 흉흉해지고 있거든요."

"포도청에는 요즈음 경이 빗발치듯 하여 포도부장들이 모두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는

."

"좌대장 이인하의 처가 식구들이 흥인문 밖에서 적도에게 가산을 탈취당하였다는 소문을

알고 있는가?"

"지금 이 일로 기찰포교들이 숭신방과 왕십리 일대에 나가 있지만, 워낙에 백성들의 인심

이 사납게 들떠 있어서 도무지 발고는커녕 맞아 죽기가 십상이라고 하더구먼."

그때에 갓 쓴 사내 하나가 소리도 없이 들어와 마당에 우두커니 섰더니, 모두들 주고받던

얘기를 뚝 그쳤고 주모가 그를 바라보며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아이, 기척도 없이 들어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어서 오십시오."

사내는 마루의 사내들에게 격식대로 인사를 던졌다.

"평안하오. 무사한가?"

나중의 말은 물론 주모에게 던지는 인사였다.

"나 좀 보세."

주모와 사내는 고달근이와 산지니가 있는 방으로 다가왔다.

"여기도 손님이 있군."

", 옆방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들이 미닫이를 열고 고달근과 산지니가 있는 옆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루에

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누구야?"

"포도 종사관 최형기일세."

", 그 유명짜한..."

"저 사람이 환로에 오를 적의 일은 무장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지."

고달근이와 산지니는 아예 옆방의 벽에다 머리를 붙이고 열심히 들어보려는 시늉을 하였

. 산지니가 못내 불안하여 중얼거렸다.

"슬그머니 나갑시다."

"..."

고달근이는 방 벽에 귀를 찰싹 붙이고 입술에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웅얼거리는 말소리

가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처음에는 한량 패거리들에 관하여 묻는 듯했다. 다시 목소리가 작

아져서 잘 들리게 되자 고달근이는 얽은 낯에 주름을 지으며 침울한 빛을 보였다.

"잘못 들어왔는걸. 이 집이 저런 놈에게 의세하는 집인 줄 몰랐는데."

일패에서는 흔히 무장이나 포청의 장교들에게 연줄을 달아 왈짜나 무뢰배들이 넘보지 못하

도록 하였고, 장교들은 그런 집을 중심으로 자기가 얻고 싶은 소문이나 수상한 자들의 동향

을 살피는 것이었다. 어찌 포도 종사관 최형기가 줄을 댄 집이 한양 성내에 이 집 하나뿐이

겠는가마는 광통교 변이란 언제나 성내의 한량패들이 가장 많이 모여들어 정확한 소문의 진

원지나 다름없었다. 최형기는 종오품으로 한양의 좌우포청에 소속한 여섯 명의 종사관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밑에는 마흔 명 남짓한 부장들이 있었다. 이들 부장들이 그들

의 상관인 종사관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바로 범법자들이 그들을 어찌 여기는가에 달

려 있는 것이었다.

고달근이는 최형기의 소문을 자세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어려운 시절을 보냈고 원래

가 몰락한 중인 출신에서 자라났는데, 소싯적에는 성내의 악소패들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최형기는 무뢰배의 습성이나 약점을 스스로의 경험을 통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

. 고달근이는 잔에 남아 있는 술을 벌컥 들이켜지 않고 한모금씩 천천히 마시면서 불안하

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놈이 나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나가자."

고달근이는 산지니에게 속삭이고는 허리춤에 찔러두었던 말채를 한번 잡아보았다.

"여차직하여 내가 뛰면 너는 일단 나를 바짝 따라붙어라."

"달음박질이라면 염려 마우. 허지만, 성내에서는 뛰는 게 숨는 일보다 못할 거요."

달근이가 일어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말하고 나서 그는 먼저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침착한 몸짓으로 달근이가 보퉁이를 짊어지더니 미닫이를 열고, 툇마루에 나섰다. 산지니도

뒤를 따르는데 아니나다를까 마루 위의 한량들이 일시에 뒤를 돌아다보았다. 고달근이는 그

들에게 등을 돌리고는 신을 꿰면서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서방님이 안 오시니 가야겠군."

산지니도 그 뒤를 따라서 신을 신었고 사동이 달려나왔다.

"셈이 얼마냐?"

"두 냥 반이우."

고달근이는 일부러 천천히 엽전을 빼어 헤아리며 한량패들에게 물었다.

"혹시 박선달님 오시지 않았습니까?"

선달이라면 무과에 일차 급제하였으나 실직도 없는 이를 말함이니, 한량패들은 은근히 기

분이 상하였는지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일패 집의 대문을 밀치고 나섰는데, 그때에

옆방의 미닫이가 한 뼘쯤이나 되게 열려 있던 사실은 알지 못하였다. 최형기는 주모와 얘기

할 적부터 벽에 이상한 인기척을 느꼈고, 주모에게서 그들이 어떤 젊은 무인을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는 어딘가 수상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상위 신분의 사람을 만나려면 적어도 노는 데보다는 활터나 마장으로 나가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울 듯했기 때문이었다. 간혹 패랭이짜리가 일패에 나타나는 일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그들을 두호하는 상전을 따라왔다가 저희끼리 따로 자라를 피하여 술을 먹을 때뿐이

었다. 주모는 나름대로 상것들도 이제는 일패를 우습게 안다고 쫑알거렸다. 여하튼 이런 일

로 불러 세워 주의를 주거나 벌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담이 크거나 무엇인가 믿는

구석이 없다면 단출하게 두상것이 들어올 리가 만무하였다. 최형기는 그들이 문 밖으로 나

가자마자 주모에게 일러 제가 거느리고 온 기찰포교 아이들이 있으니 곧 불러오라고 일렀

. 주모가 대문 밖으로 나가 휘둘러보니 상노 차림의 젊은이 하나와 늙수그레한 자가 말뚝

벙거지에 마부처럼 행전 치고 동달이 입고 서성대고 있었다. 주모는 그들에게 최종사관을

따라왔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기방으로 달려들어왔다.

"방금 두 사내가 나갔는데 심히 수상쩍다. 이미 성문이 닫힐 시각이라 그들은 천상 성내에

서 자고 갈 것이니, 어느 집에 가서 어찌하는지 소상하게 기찰하여 오너라. 만약에 도중에서

몹시 급박하여 놓칠 듯 싶으면 부근의 순라들과 힘을 합하여 아예 잡아두도록 하여라."

두 포교가 허리를 굽히고 물러갔다. 그들은 대문을 나서자마자 좌우로 흩어져갔다. 상노 행

색의 기찰포교는 작은 다리 쪽으로 올라갔고 마부로 차린 중년의 포교는 큰 다리 쪽으로 내

려갔다. 그들은 네거리로 나아가 각기 사방을 살핀 연후에 태평방 삼거리에서 만나기로 하

였던 것이다.

작은 다리로 나아간 포교가 주위를 둘러보니 바로 건너편 길로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내가

보였고, 패랭이와 두건의 꼴이 방금 기루에서 나간 자들이 틀림없었다. 그는 아래쪽 큰 다리

위에서 둘러보는 동료에게 손짓하였다. 그들은 함께 작은 다리를 건너 태평방을 향하여 재

빨리 걷고 있는 두 사내들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행인들이 제법 있는 편이어서 뒤꼭지만 가지고는 구별이 어려워 놓칠 염려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상대가 의심할 것도 잊고 바삐 따라잡았다. 젊은 기찰포교가 투덜거렸다.

"제미랄, 보아하니 별것들도 아니고 남의 하천이거나 잡상배가 분명한데 공연히 꼬리를 달

라고 성화일세."

"최종사가 어떤 분이라고 우리를 헛걸음시키겠나. 그이는 한눈에 턱 보면 새벽녘인지 먼산

인지 다 안단 말일세. 저놈들 보게, 연신 뒤를 돌아보지 않는가. 뭔가 꼬리가 있긴 있어."

", 태평방 삼거리를 그냥 지나치는 것을 보니 오늘 성내에서 잘 판이군."

삼거리에서 오른편을 곧장 나아가면 미동과 남별궁이 나오고, 회현방과 금동이 나오면서

숭례문, 속칭 남대문에 이르게 되는 것이었다. 그들이 길을 건너고 이어서 저동 쪽으로 꼬부

라지는 게 보였다.

"그냥 돌아가지. 명례방, 저동, 초동 등의 동네는 모두 대가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 뒤로는

곧 남산골이니 글깨나 한다는 샌님들 동네일세. 아마 저희 상전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거나 시골서 방자로 올라왔는지도 모르네."

젊은 포교가 말하였으나 그 동료는 아주 열중하여 그들의 뒤통수에 시선을 박고 걸었다.

저동서 골목길이 갈리는데 그들은 계속 초동 쪽으로 올라갔다. 큰길이 나서는데 목멱산을

향하여 오르면 주동과 필동이었다. 시전도가나 점포도 그곳에서는 끊겨 있었고, 여러 수십

칸의 기와집들과 높직한 담장이 연이었으며 소나무와 은행나무가 울창하여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주위는 벌써 어두컴컴하여 집마다 등불이 대청 위에 내걸릴 즈음이었다.

앞서 걷던 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였던지 두리번거리며 집을 찾는 시늉으로 걸음을 멈추었

. 기찰포교 두 사람은 그냥 서서 기다리고 서 있기도 뭣하여 어찌하는가 살필 겸 그들에

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처음에 고달근이는 태평방 삼거리에서 숭례문 쪽으로 나갈 작정이었다. 아직 인정 전이므

로 떳떳이 성문으로 통과하여 삼개나 동막으로 나가면 어디든 안전하게 자고 먹고 할 데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뒤에 따르는 자들이 꺼림칙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단 이들을

성내에서 떼어버리고 광희문을 빠져서 돌곶이로 돌아갈 작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광통방에

서 종루로 나와 흥인문으로 나설 수도 있었으나 종루 중부의 좌포도청에서 포교와 포졸들이

풀려나와 흥인문까지 물샐 틈이 없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좌대장 이인하는 처가의 약탈당

한 일이 있은 뒤부터 적당의 용모파기를 자세히 점고하여 포교들에게 알려 왔던 터였다.

러나 고달근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어두운 뒤의 성내

의 골목과 길은 모두 그의 은신처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포교들이 가까이 가자 그들은 우두

커니 섰더니 말을 걸어왔다.

"여보, 말 좀 물읍시다. 도대체 주동이 어디쯤 되우?"

포교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나서 대답하였다.

"그 오른편 길로 죽 나아가면 주동이우."

"주동의 어느 댁을 찾으시우?"

고달근이가 빙긋 웃으면서 말하였다.

"왜 그 댁 대문 앞에까지 바래다 줄려우?"

", 이사람이..."

"최종사가 우리 꼬리를 밟으라구 그럽디까?"

고달근이 직접 말을 질러 들어가니 포교들은 어이없는 모양이었다.

"공연히 나중에 경치지 말구 돌아가시우. 우리 대감께 직고하면 최종사든 포장이든 모두

삭탈관직이여."

젊은 포교가 발끈하였다.

"아니 이놈아, 남의 하천이나 되는 놈이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중년의 포교도 어찌되었든지 잡아놓고 보자하여 허리춤에서 육모방망이를 뽑아드는데,

지니가 잽싸게 달려들며 포교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뒤로 바싹 꺾어 올리면서 팔굽

으로 포교의 등판은 내려찍으니, 방망이 휘두를 사이 없이 땅바닥에 엎어져버린다. 달근이도

젊은 포교의 멱살을 움켜잡았는가 싶더니 무릎을 들어올려 가슴팍을 쥐어박았다. 숨이 걸려

서 헉하는 소리와 함께 젊은 포교는 기운을 못쓰고 주저앉았다.

"어디 허리춤에서 방망이가 나오던데 또 무엇이 나올지 훑어볼까."

산지니가 중년 포교의 동달이 자락을 들치고 만져보니 아무에다 불로 지친 포청의 통부와

붉은 오랏줄이 나왔다. 고달근이도 젊은 포교에게서 육모방망이 통부 오라 같은 것들을 뒤

져냈다. 그때에 기운을 차렸는지 뻗대며 힘을 써서 일어나려는 기색이 보였다.

"어라, 이놈이 내 성미를 모르는구나. 당장이라두 돌로 바가지를 깨어버릴 수가 있으니 달

아날 생각마라."

하고는 발을 들어 사정없이 젊은 포교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곧 실신해버리는데 그참에 다

른 포교가 틈을 엿보더니 산지니의 다리 사이에 제발을 엇갈려 넣고 일어나며 홱 밀어젖히

고는 어둠속으로 뛰어나갔다. 산지니가 따라서 쫓으려 하니 고달근이가 말렸다.

"어서 없어져야겠다. 이젠 낭심에서 찬바람 나게 생겼구나, 뛰자!"

그들은 재빨리 필동 쪽으로 꼬부라져서 골목길을 뛰었다. 이윽고 먼데서 서로 외치고 부르

며 뛰는 소리가 들렸다. 포청뿐만 아니라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에서 순행하는데, 땅거미

무렵부터 날이 밝기까지 이들 별순라패가 성내의 곳곳으로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

내의 요로에 일곱의 복처가 있어서 다섯 사람씩 배치되어 있었다. 첫 패가 회현방 동구에

있었으니 그 구역은 숭례문에서 타락동까지였다. 둘 패는 위패가 남산방에 있어서 구역은

타락동 동쪽에서 영희전 서쪽까지였고, 아래패가 필동 다리에 있는데 그 구역이 주동에서

생민동까지였다. 아래 둘 패의 복처에서 경을 받고 순라들이 뛰어오는 것이었고, 그들은 요

란하게 목편을 두드려서 근처의 다른 복처에도 군호를 보내고 있었다. 세 패가 청량교 아래

에 있었는데 구역이 생민동 동쪽에서 수구문까지였다. 그쪽에서도 곧 목편 두드리는 군호가

응답해오고 있었다. 그도 부근의 구역마다 복처가 있음을 난전꾼들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

.

"하는 수 없다. 산중으로 들어가 밤을 지새고 숭례문으로 나갈밖에."

달근이 앞장을 서서 목멱산 남별대로 오르는 비탈길을 뛰어올라갔다. 산지니도 부지런히

뛰는데 그들은 남별대의 왼쪽 길에서 떼를 지어 내려오는 장정들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쪽에서도 멈칫하는 것 같더니, 좌우로 넓게 흩어지는 것이었다. 고달근이가 먼저 송림속으로

뛰고 산지니는 뒤로 내뺐다. 그러나 그들은 넓게 원을 벌려 두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달근

이가 먼저 송림으로부터 두 사내에게 몰렸는데 그들은 모두 짜른 환도를 뽑아들고 있었다.

칼날이 가슴에 와서 닿자 고달근은 멈칫 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길 아래로 끌려 내려가니,

산지니도 맨손에 칼날 앞에서는 별수가 없었는지 세 사내에게 둘러싸여 끌려와 있었다.

펴보니 장정들은 열 명이 넘는 듯하였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칼이 빼어들고 있었다.

"보퉁이와 몸을 뒤져보게."

누구인가가 말하자 우르르 달려들어 그들의 괴나리봇짐을 떼어내고 허리춤을 더듬었다.

"아니, 이건 포교의 통부가 아닌가."

암등을 가진 자가 불에 비춰 보였고, 어떤 사내가 말하였다.

"우리 뒤를 밟은 모양이로군. 없애버려."

두엇이 칼을 치켜들며 고달근에게로 다가설 때 그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맨저고리

차림의 장정들이 모두 칼을 차고 야밤에 목멱산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그들이 포청이나 영문

의 군사가 아닌 게 분명하였다.

", 잠깐만... 우리는 포교가 아니라, 광주의 검계 혈당이오."

그들 사이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포교의 통부를 지니고 있는가?"

산지니와 달근이 바삐 대답하였다.

"방금 두 놈이 우리를 따라잡기에 때려눕히고 통부를 빼앗았소."

"한 놈이 달아나 둘 패와 세 패의 복처에 있는 오를 몰아서 쫓아오는 중이오."

그들은 다시 속삭이며 저희끼리 얘기를 나누었다.

"당신들이 광주 검계의 계원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나는 솔부리의 고달근이란 사람이오. 혹시 이 중에 묘적사에 왔던 이가 없소. 나는 서강의

모신이두 잘 아오."

그러자 뒷전에서 계속 물어보던 자가 앞으로 나섰다.

"서강의 모서방을 잘 안다고?"

"그렇소. 보아하니 댁네들은 검계나 살주계 사람들이 아니우?"

다른 사람이 좋은 안을 내었다.

"들으니 광주 검계에서는 양어깨에 낙인을 찍는다는데 흉터가 있소?"

산지니가 서슴지 않고 웃통을 벗어젖혔고 그들은 암등을 비춰보았다. 산지니의 어깨에 찍

혀 있는 동그란 상처를 보자 그들은 반가워하였다.

"하마터면 우리 식구를 죽일 뻔하였군. 우리는 남부 살주계의 계원들이오."

그러자 누군가가 주위를 주어 바라보니 필동 아랫길에 어지러운 목편 소리가 들리고 골목

을 비집고 다니는 발등거리의 불빛들이 내려다 보였다.

"다시 올라가야겠군."

"언제 저놈들 복처를 급습하여 도륙을 내야겠구나. 그래야 야순돌이가 겁이 나겠지."

", 파루 때까지 남별대에 올라가 있을까."

달근과 산지니는 그들의 뒤를 따라서 목멱산으로 올라갔다. 비탈을 한참이나 이리저리 돌

아 올라가니 한 폐사가 있었는데 벽도 다 떨어지고 기왓장이 떨어져 천장 틈으로 별이 내다

보였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암등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았다. 목소리로 보아 뒷전에서

지시하던 장정이 틀림없는데 그가 자신을 밝혔다.

"나는 지금 목대감 집의 하인으로 있는 북성이란 사람이오."

보아하니 나이는 서른 남짓 되어 보이고 새까만 수염이 귀밑에서부터 자라나 온통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깊숙한 눈에 광채가 있고 목소리도 굵직하여 철릭에 상모라도 쓰고 나

서면 누구든지 그를 훌륭한 무장으로 볼 듯하였다. 목대감이라면 전 이조참판 목내선을 두

고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는 일일이 그들 장정들이 어느 댁의 누구라고 소개가 되는데, 그들

모두가 한양 세도가나 벼슬아치들의 내림 종복들이었다. 그 중에는 이미 도망을 쳐서 성 밖

에 숨어 사는 자도 있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목멱산 인근의 동네마다 재산 많고 권세 있는 집안을 들이칠 작정이오.

우리 패의 우두머리는 청파에 있는 중길이란 사람인데 전에 관노였지요. 때가 오면 도성은

우리 손에 떨어지게 될 게요."

북성이가 말을 꺼냈고 고달근이도 말하였다.

"살주계에서 동막과 서강의 검계와 내통이 있단 말을 들었으나 이렇게 든든한 줄을 몰랐소

이다. 우리 계에서도 구역을 맡아 양반들을 습격하기로 정하였는데, 일전에는 좌포장 이인하

의 처가 식구들이 흥인문 밖으로 나서는 것을 유인하여 재물을 탈취하였소. 우선 성안의 내

응이 있다면 밤에 군졸들이 무서워서 나다니지 못하도록 할 수 있겠지요."

"목멱산이 비록 작고 낮은 산이지만 골목이 수십 갈래인 여염 동네와 인접하여 있고, 산에

는 이렇게 송림이 빽빽하니 우리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오. 비록 우리가 남의집살이

를 하고 있다 하나 밤만 되면 마음대로 빠져나와 돌아다니다가, 파루 종이 치면 즉시로 행

랑에 돌아가 있으면 설마 대가의 하인을 누가 의심하겠소. 서로 손발을 맞추어 성내에서 일

어나면 한양은 우리의 손아귀 안에 들어올 것이오."

고달근이가 다시 북성이에게 말하였다.

"파루 치는 대로 우리는 숭례문을 나가서 서강 모신이에게로 잘 참인데, 누구 갈 일이 있

으면 함께 가십시다."

"걱정마우. 그렇지 않아도 우리 계원이 연락을 갈 일이 있으니 동행하시지요."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데, 남별대 아래서 망을 보던 자가 올라와 말하였다.

"순라들이 산으로 오르고 있네, 발등거리가 여럿인 것을 보니 복처의 오가 두어 패거리는

되는 모양인걸."

그들은 무너진 사당의 빈터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고달근이가 손가락질하였다.

"저기 불빛이 움직이는군."

"저쪽 왼편에도 움직이는데."

발등거리의 희미한 불빛은 나무 사이로 가려졌다가 나타났다가 하면서 움직여 오고 있었

.

"안되겠군. 자네들이 저놈들을 이끌고 회현방 쪽으로 달아나지. 그 사이에 우리는 자리를

옮길 테니까."

북성이가 자기 계원들 중 두 사람을 지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서두르거나 두려워

하는 기색이 없었다. 살주계 계원 두 사람이 암등을 받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우리는 산을 타고 쌍이문방에까지 갑시다. 오늘 계회는 매우 번거롭게 되었는걸."

고달근이가 북성이에게 사과를 하였다.

"우리 때문에 공연한 소란이 벌어져 죄송허우."

"염려 마시오. 아무래도 새달에는 검계와 살주계가 합력하여 한양을 쑥밭으로 만들 작정이

니까."

"은신처만 그럴 듯하다면 우리도 성내로 들어오겠소."

아래로 내려간 계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순라들이 그쪽으로 몰리는 듯하더니, 그들

은 산을 미처 올라오기도 전에 방향을 바꾸어 송림 사이로 사라졌다. 남은 살주계원들과

달근이 산지니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송림을 걸어 쌍이문방으로 내려갔다.

쌍이문방의 은신처는 작은 기와집이었는데 겉으로는 바침술집이었다. 이 집의 주인은 오십

여 세쯤 된 여자였는데 예전에 관비였고, 그의 남편은 호조의 관노를 다니다가 상전의 공금

횡류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비명에 죽었으며, 그 뒤로 어린 딸과 함께 바침술집을 하면 살아

오고 있었다. 면천한 지는 오래지만 지금도 관노비들과는 낯이 익어 조정이나 관아의 소식

은 훤히 알고 있었다. 살주계의 총대인 청파 중길이와는 친모자 사이처럼 지내오던 터였다.

"어머니 계시우?"

북성이가 밖으로 난 들창을 두드리니 아직 잠들지 않았던지 여자의 머리가 내밀어지고 불

이 켜지면서 곧 대문이 열렸다. 문을 여는 딸아이의 뒤에서 여주인도 서성대고 있었다. 그들

이 모두 들어서자 비좁은 마당이 가득 차는 듯 싶었다. 북성이가 머리를 꾸벅하였다.

"오늘 멱목산서 계회가 있었는데, 우연한 일로 순라의 추적이 있어서 이리로 급히 피해오

는 길이올시다."

"잘 왔네. 어서들 들어와."

그들은 모두 건넌방으로 안내되었다. 북성이가 고달근과 산지니를 여주인에게 인사시켰다.

여인은 달근이에게는 건성으로 인사를 받고, 산지니에게는 무슨 느낌이 있는지 말을 많이

시켰다.

"젊은이는 한양 사시오?"

"광주 태생입니다."

"지금 몇 살인데..."

", 갓 스물이올시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깐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떠올랐다.

"상은 아주 좋은데 미간이 흉하구먼, 조심해야 되겠수. 특히 올해만 잘 넘기면 장수하겠지

."

그런 일은 신통치 않게 여기는 고달근이가 벌죽이 웃으면서 농을 던졌다.

"이 사람이 진작에 살변을 냈으니 액땜이 되었겠지요. 어디 나는 부가옹이 되어 말년에 호

강이나 하겠는지 보아주슈."

여인은 고달근에게는 역시 반응이 별로 없이 산지니를 보면서 말하였다.

"겨울철에 특별히 조심허우."

하고 나서 한숨을 내쉬고는 일어나며 그제서야 고달근이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댁네는 식복은 끊이지 않겠구먼. 허나 정이 없으면 온 천지가 적막강산이라우."

그것은 고달근으로서도 잘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여자가 국이라도 끓이려는지 부엌에서

달각대는 소리가 들렸다.

"내게는 가을철을 조심하라구 그러더니만 또 허랑한 말씀을 하시는군."

북성이가 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상을 좀 보긴 보는가요?"

달근이가 물으니 다른 계원이 말하였다.

"그럼요, 일찍이 관청에 나다닐 때 나인 궁귀인들과 더불어 절에 많이 다녔답니다. 신심이

깊어 해마다 백일기도도 드리고 하는데, 어언간에 남의 상을 훤히 알아보게 되었답니다.

즈음 조정대신들의 상이 흉하다고 무슨 변고가 있을지 모른다구 그런답니다."

잠시 후에 시원한 우거짓국과 탁주가 들어와서 그들은 돌려 마시고 파루까지 눈을 붙이기

로 하였다. 북성이와 산지니 달근이는 비좁은 방안이 싫어서 대청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살주계 계원들이 댁네들말고 또 많이 있는가요?"

산지니가 물었고 북성이가 대답하였다.

"원계원은 성내에는 서른 명 남짓밖에 안되지만 우리와 통하는 자들은 남녀를 합하여 백여

명이 넘지요. 더구나 큰 일이 벌어지면 지금 아무 것도 모르는 한양의 노비들은 모두 우리

편을 들 겝니다."

"어떻게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그런 계를 짤 수가 있었나요?"

"비록 하천으로 태어나 대물림으로 가축같이 살아왔으나, 우리들도 사람이오. 사람 사는 세

상에 어찌 마음이 없을 수가 있겠으며, 마음이 있는데 어찌 또한 뜻이 없겠소. 우리는 한 해

두 해의 한이 아니라 수대에 걸쳐 양반들께 당한 포한이 맺혀서 서로 팔려가며 헤어져서도

처자식 혈육들께 자기의 설움을 전하곤 해왔지요. 나두 우리 부친이 죽던 일을 생생히 기억

하구 있소이다. 내게는 같은 배로 태어난 아우들도 있지만 모두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고 또

한 철이 들기 전에 헤어져서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를 모르오. 나는 다행히 목씨 가문의 씨

종이라 어머니와 함께 살 수가 있었지요. 어찌 이런 일이 나 하나뿐이겠소. 나는 다른 세도

가의 하인들처럼 주인의 장사일에 나다니기 시작하고 난전을 따라다니며 재산 늘리는 일에

열중하였소. 아다시피 한양 근처의 동막, 삼개, 서강, 그리고 삼전나루, 송파 칠패, 이현 등지

의 나전꾼들의 반수가 우리 같은 남의집살이 하는 종복들이우. 자연히 눈이 뜨여지게 마련

이지요. 살계주가 처음 이루어진 것은 작년 그믐께입니다. 그때에 모신제 주막에서 중길이와

저희들 십여 명이 모여서 고기값이라고 하고 죽으리라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검계

의 계원들과 서로 닿아서 보다 큰 일을 한판 벌이리라 걱정하구 있지요. 저는 잘 모르지만

중길이는 한양에서 울분을 숨기고 사는 선비들과도 안다구 합디다."

산지니는 이제 모든 것이 훤하게 밝아오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어떤 뜻에 닿았는지 전

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짐승처럼 살아오던 노비들이 이러한 마음가짐일

때에야, 산지니와 같은 중인의 의붓자식은 그래도 하천은 아니겠거니 여겨왔던 터인데, 얼마

나 어리석은 삶이었던가.

"재물을 털어내는 일이 위주가 되어서는 안되고, 어떤 놈들을 징벌하는가 하는 게 우선 중

요하겠수."

산지니가 말없이 누워 있는 고달근에게 그렇게 말하였으니, 그도 달근의 잘못 생각하는 바

를 눈치채게 된 것이었다.

포도 종사관 최형기는 경기도 파주 사람이었다. 일찍이 아전으로 다니던 그의 아비가 재

취한 양가녀에게서 났다. 어릴 적에는 세업인 아전의 아들로서 통인으로 파주 관아를 드나

들었던 것이다.

역시 제 아비와 같이 양주 파주의 장사치, 난전꾼들과 어울려 장세 뜯어먹는 방법과 상납

하는 일가 상노들과 더불어 이윤 취하는 일을 밝히더니, 어느때 평안감사가 부임차 서북으

로 오르다가 아비에게 죄주는 것을 본 뒤로 시골 아전이 얼마나 하찮은 직임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그는 늘 말하기를,

"대장부가 태어나서 언제나 당하에 허리를 굽신거리며 사또가 떨어뜨리는 인정 부스러기나

주워 먹으면 쥐새끼처럼 살 수 없다. 나는 어영대장이나 훈련대장이 되기 전에는 환고향하

지 않으리라."

하면서 파주를 떠나 한양으로 오르게 되었다. 지벌도 문벌도 없는 아전의 집안에 태어나 초

시는커녕 무과의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은 그로서는 무인이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노

릇이었다. 한양으로 올 때에 세전의 제위답 몇마지기를 팔아 왔으니, 그런 돈이야 다방골에

비좁은 방 한칸을 빌어 국밥이나 사먹으며 몇달을 보내면 모두 없어질 정도였다.

최형기는 어쨌든 무인이 되리라 작심한 뒤로 활을 쏘러 다녔는데, 한양 색주가나 저자거리

의 무뢰배들과도 사귀게 되었다. 그는 날마다 전통을 메고 남촌 청룡정이나 새문 밖 모화관

사정으로 가서 여러 한량들 틈에 끼여 활이나 쏘고, 남의 점심참에도 끼여들어 허기를 달래

곤 하였다. 그렇게 허송하기를 반십년이나 하며 가끔씩 용전이 궁해지면, 난전꾼이나 무뢰배

들에게 찾아가 두 냥 석 냥씩 취하여 쓰더니 이제는 주위의 한량패들도 그가 형편없는 건달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들 그를 비웃고 상대하지 않으려는 것은 물론이요 나타나면

놀림감을 삼으려 하였다. 최형기가 어느날 젊은 한량들과 더불어 활을 쏘는데 한 사람이 짐

짓 수작을 걸었다.

"사형께서는 식성이 그리도 좋으시니 혹 가리는 음식이라도 있소이까."

"허허, 가리는 음식이야 나도 있소. 개장에 흰밥은 절대 먹지 않소."

이튿날에 한량들은 최형기가 모르게 청룡정 아래 술집에다가 개 한 마리를 잡아서 개장을

끓이도록 하였다. 형기는 이미 개장 끓이는 눈치를 알았으나, 일부러 시치미를 떼고 열심히

활을 쏘아보는 척하다가 채 점심때도 못 되어서 전통을 챙기면서 중얼거렸다.

"오늘은 뒷골이 쑤셔서 활이 잘 안 맞는군."

그리고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술집으로 내려갔다.

"여보 주모, 개장 다 끓었소, 저 위의 사정에서 다 되었나 보고 오랍디다."

", 마침 되었습니다."

"그러면 맛을 좀 볼 터이니 이리 가져오시오."

"맛보실 거 없이 아예 점심으로 먼저 드시지요."

개장과 흰밥을 가져오는데 최형기는 숟가락을 들어 맛보는 척하다가 국이 싱거우니 간장을

가져오라, 간장을 친 뒤이는 너무 짜니 국물을 가져오라, 하고선 밥 한 함지와 끓여놓은 국

을 다 먹어버렸다.

"한 분이 다 잡수셨으니 다른 분의 점심은 어찌합니까?"

주인이 깜짝 놀라서 발을 구르며 화를 내었다. 최형기는 시치미를 떼고 중얼거렸다.

"먹는 죄는 종지굽으로 하나라는 말이 있지 않우. 한량들이 와서 묻거든 다방골 최서방이

다 먹고 갔다고 허우."

그리고는 슬그머니 사정에서 내려가버렸다. 사정에 있던 젊은 한량들이 점심을 먹으려고

술집에 왔다가 이러한 전말을 듣고 속은 것이 분하여 최형기를 욕하는 것이었다. 최형기가

그렇게 음식이나 밝히는 천하고 미욱한 사람은 아니었으되, 워낙 집도 친척도 한양에는 없

어 고기 먹고 술 사 마실 여유가 없던 탓이었다. 무변에게는 기운이 가장 긴요하니 제대로

먹지 않고서는 팔씨름할 힘도 나오지 않을 듯하였다. 최형기의 수련 시절이 이렇게도 곤고

하였던 것이다. 어느날은 사정에서 한량이 최형기에게 말하였다.

"시장하실 텐데 활만 쏘지 마시고 점심이라도 드셔야지요."

최형기는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으나 언제나 점심은 얻어먹거나 아니면 굶는 게 예사스런

일이라서 덤덤하게 대꾸하였다.

"어디 날마다 점심을 먹을 수야 있나, 시장기가 들면 집으로 가야지."

"오늘은 초동 박명사 어른의 생신이랍니다. 그분이 북에 병사 다녀왔다고 하여 올해는 생

일 잔치를 성대하게 차리고 저희들까지 청하여, 저녁때에는 그 댁 작은사랑으로 가려는 참

이올시다."

"속이는 게 아니겠지요."

"천만에 말씀이오, 사형께서 가보시면 알 거 아니요."

최형기는 한량들을 따라 박병사의 집으로 가보니 과연 빈객은 가득 찼고 다담상마다 온갖

음식이 그득하였다. 형기는 활과 전통을 마루 끝에 놓고 사랑으로 들어가 주인에게는 인사

를 건성으로 하는 척하고는, 마루 끝에 놓인 상 앞으로 달려들어 수저를 들자마자 먹기 시

작하였다. 최형기의 먹는 꼴은 연신 두리번거리고 땀을 씻어내며 마치 종아리 맞은 학동이

천자문 외듯 열중하였다. 그는 제자리 앞의 상에만 눈길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에서도 그럴 듯한 음식이 있으면 두말 없이 들어다가 먹는 것이었다. 이윽고 최형기는 네

댓의 다담상 위에 놓인 음식을 거의 휩쓸어버리고 말았다. 주인 병사가 대단히 못마땅하여

불쾌한 기색으로 하인을 불렀다.

"안주가 있어야 술을 마시지 않느냐. 이 상은 다 치우고 육회나 하고 육포나 해서 다시 차

려 내오너라."

분부를 하니 그대로 간단한 주안상이 나왔다. 최형기는 또다시 그 상 위로 덤벼들어 먹기

시작하였다. 주인 이하 모든 손님들이 넋 나간 듯이 그의 꼴을 바라보다가 드디어 병사가

비워진 육회 그릇 하나를 집어들었다.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먹는 것도 염치가 있지 않소."

화를 벌컥 내면서 그가 그릇을 방바닥에다 내팽개치니 손님들이 서로 일어나고 물러나고

하는 바람에 상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최형기는 태연하게 말하였다.

"이 좋은 음식들을 모양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 손님들께 먹어보라구 내놓은 모양이니,

방바닥이면 또한 어떠우."

그러면서 형기는 방바닥에 즐비하게 흩어진 육회 안주를 집어 먹었다. 모두들 묵묵하게 최

형기의 하는 양을 내려다보는데, 방바닥이 말끔해지자 그는 일어섰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게 없다더니 벌써 다 떨어졌군."

뒤에 동접 한량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최형기는 일부러 병판에게 자기 소문이 들어가기를

바라고 기인인 척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사실 그의 파격적인 행동거지가 사람들 입에 오르

내리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 특히 훈련대장 유혁연 같은 이는 최형기가 무변으로서 호방하

고 솔직한 기개가 있는 사내라고 칭찬하면서, 아무리 염치없는 짓을 했다손 치더라도 음식

을 가지고 주인이 좌중에서 손을 면박하는 일은 야박스럽게 쩨쩨한 짓이라고 평하였다.

형기가 무변들 사이에 알려지고 그의 사람됨과 딱한 처지가 이야기되더니, 어영대장 김익훈

이 인재도 기를 겸 그 댁의 집사로 데려다 놓았다. 최형기는 혼자서 검술과 궁술을 여러 해

익혀왔는지라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음을 사냥터에서 내 보였고, 언제나 김익훈의 측근에

서 그를 호위하는 평무사의 일을 맡았다.

병서를 공부하고 천문을 배우더니 그 댁에 기거한 지 일 년여에 무과를 거쳤다. 그리고도

초사 한 장을 얻니 못하였으니 허울 좋은 선달로 어영대장 댁에 기식할 뿐이었다. 어느날

김익훈이 입궐한 뒤에 최형기 혼자서 병서를 읽는데 그의 사위 되는 자가 들어와 자꾸 사정

에 놀러 가자는 것이었다.

"서방님은 공부를 잘하셨으니 놀기도 하시겠지만 저는 무식하여 공부를 더 해야 합니다.

 

다른 이를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시지요."

최형기가 그렇게 점잖게 얘기하니 익훈의 사위는 은근히 기분이 상하여 책을 들어 휙 내던

지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네가 무과 급제한 선달이라 하나, 파주 아전의 집안이라는 걸 잊지 말게."

"좋소, 나는 아전의 아들이니 상놈이오. 그러나 옛글은 양반만 배우고 상놈은 그을 못 배운

다고 써 있는 것은 못 보았소."

"그래, 그러면 다 그만두고, 우리 장기나 한판 두어보세."

비록 무과이기는 하나 그가 선달을 따냈었는데, 익훈의 사위는 아직도 문과 생원이 아득하

였으므로 능멸하고 싶은 심사로 그리하는 줄을 최형기는 잘 알았다. 최형기는 이런 기분으

로 장기를 두고 앉았기가 싫어서 이리저리 마주하다가 주인의 사위가 두자는데 더 피할 수

거 없어서 장기판을 내놓았다.

"서방님, 장기는 내기가 아니면 재미 없습니다. 우리 사이에 내기도 할 수 없으니 다른 이

와 두시면 저는 곁에서 훈수나 하고 구경이나 하지요."

"다른 사람은 싫고, 꼭 자네와 두어야겠는걸."

평소부터 그를 고깝게 여기던 익훈의 사위는 장기판을 끌어당기며 무슨 내기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형기는 장기를 늘어놓았다.

"정 그러시다면 꼭 한판만 그대로 둡시다."

"자네가 내기 아니면 심심하다니 목 베일 내기라도 하자꾸나."

사위가 몇번 독촉을 하여 형기는 응낙하였다.

"그러면 그 내기를 하십시다. 단판으로 할까요. 세 판 양승으로 할까요."

세 판 양승으로 결정이 되어 단번에 익훈의 사위가 지게 되니 분하여 또 두자고 재촉이었

.

"내가 두 판만 이긴다면 자네의 목을 뎅겅 잘라버릴 것이다."

최형기가 관아 뒤뜰에서 장기판 내려다보며 자란 지가 한두 해가 아니니 수가 달릴 것은

없었다. 최형기가 꾹 참고 말하였다.

"서방님, 두 사람이 한번씩 이겼으니 그만둡시다."

그러나 익훈의 사위는 더욱 발끈하여 장기판을 밀어냈다.

"안되네. 내 이번에 자네의 잘난 선달 모가지를 자르고야 말겠어."

최형기는 그가 하도 여러번 목을 벤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오냐 네가 나를 상놈

출신이라고 업신여기는구나, 망신을 톡톡히 줘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서방님이 만일 진다면 어찌하려고 그러우. 그러면 진 다음에 서방님의 목을 베어도 한하

지 마시우."

다시 셋째 판을 두고 나니 그가 졌고, 최형기는 두리번거리다가 김익훈의 남여를 호위할

때 들고 다니던 환도를 집어들어 쇳소리도 날카롭게 쭉 빼어들었다.

"대장부 무허언이니 어서 목을 벱시다!"

익훈의 사위가 다급하여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이때에는 이미 최형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

고 상투를 움켜쥐고 칼을 목에다 대었다.

"원래 목을 베기로 되어 있으나, 내가 이 댁의 식객으로 지내면서 새서방님의 목이야 벨

수 있겠수, 대신에 상투라도 잘라야겠소."

형기는 단칼에 그의 상투를 쌍둥 잘라서 마당에다 내던져버렸다. 아랫것들이며 집안 어른

들이 고함을 지르며 내달아오고 익훈의 처와 딸도 산발이 되어버린 사위의 꼴은 보자 분이

머리끝까지 올랐다. 집안 사람들도 그가 위인이 과묵하고 가장이 제법 신임을 하는 듯하여

어쩌지는 못하고 욕설만 하는데, 최형기는 뜰에 내려가 무릎을 꿇고 김익훈이 퇴궐하여 돌

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영대장이 돌아오자 형기가 아뢰었다.

"소인이 새서방님의 상투를 잘라버렸으니 오늘 문하에서 나가고자 합니다."

김익훈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까닭으로 그 사람의 상투를 잘랐느냐?"

"... 공부중인데 서방님께서 두기 싫다는 장기를 자꾸 두자고 하시더니, 목 베일 내기를

하자고 조르셨습니다. 그래서 두었는데 제게 지셨기로 차마 목은 베지 못하고 상투만 잘랐

습니다."

김익훈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내려다보다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대장부가 내기를 하였으면 목을 자를 것이지 상투만 잘랐단 말인가?"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익훈이 물러가 있으라고 하명한 뒤에 곰곰 생각해보니 비록 그

기개를 찬탄해줄지언정 과히 기분 좋은 자는 아니었다. 딸이 어영대장 김익훈에게로 나와

푸념을 자진이라도 해야겠어요."

김익훈이도 기분이 상하였지만 어영대장의 체모로는 명분대로 얘기할밖에 없었

.

"네 용렬한 남편을 두둔하지 마라. 과거를 본다는 녀석이 글은 안 읽고 장기나 두며 허튼

놀이를 하려는 게 잘못이요, 또 장기를 두려면 동무끼리 둘 것이지 처가의 식객과 두는 것

이 잘못이고, 또 주인의 사위 자세를 하여 목 베일 내기까지 하자는 것이 잘못이다. 남에게

집안 속내를 보여 망신을 샀는데 누굴 야단치란 말이냐."

김익훈의 생각으로는 그가 난세에 났더라면, 제법 반지 빠르고 처세가 내밀하여 남에게 눈

치채이지 않게 실실한 인상을 주니, 병부사에 오르는 일은 잠깐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위험한 자가 분명하다. 이런 사람은 주인을 밟고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냉정히 지나가버릴

위인이 아닌가. 참으로 우직하고 담대한 무변이라면 사위의 목을 쳐버렸을 것이요, 보통사람

은 아예 장기를 뒤지 않으려 뻗대었거나 너그러이 용서하는 시늉을 내었을 것이었다. 상투

는 바로 어영대장 자기에게 내보이는 이 사내의 배포를 뜻하였다. 이 일로 물리칠 수는 없

어도 김익훈은 그를 호위직에서 제외시켰고 사냥에도 동행하지 않았다. 최형기는 그래도 아

직 결정은 못하고 있더니, 어느날 모처럼 김익훈을 호위하기 위하여 벼슬아치들의 잔치에

갔던 적이 있었다. 그는 건넌방에서 다른 무사들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주인과 손님

들이 제각기 떠들었다.

"이 집에 아기가 이름이 났다며."

"어디 청국식 아기 안주를 먹어볼까."

"이왕이면 계집아이가 좋겠군."

최형기가 아직도 먹는 것 밝히는 버릇은 남아가지고 고개를 빼고 높은 주인들의 방을 건너

다보았다. 요리가 들어오는데 바라보니 커다란 접시에 녹의홍상을 입은 미희의 인형이 상

가운데 놓여 있었다. 서로 수저가 오가는데 김익훈은 젓가락을 들더니 인형의 눈깔을 쑥 빼

어 먹는 것이었다. 최형기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무리 요리로 만든 것일망정 사람으로서

어찌 사람의 형상을 먹는가, 사람의 짓이 아니다, 저들은 무소불위하는 권세를 스스로 확인

하기 위하여 저런 방자한 주안상을 즐기는 것이라, 내가 잡을 연줄을 쥐고 있기에는 튼튼치

못하다, 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며칠 안 가서 그는 김익훈에게 정중히 물러갈 뜻을 밝혔고, 익훈도 그가 어쩐지 불

편하던 중이라 무덤덤하게 허락하였다. 때는 이른바 경신 대출척으로 서인들이 남인을 내몰

고 득세충천하던 즈음이어서 김익훈은 날로 그 자리가 굳건해지던 때였다. 서인의 거두요

이이 학통을 계승한 기호학파의 으뜸이기도 하였던 송시열이 배소에서 풀려나왔고, 김익훈

은 송시열의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요 김집의 아들이던 것이다. 최형기는 비록 지벌이 없는

무명의 무인이었으나 이것이 출세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도 스스로 그의 문하를 떠났다.

중에 그는 스스로 자신의 처세가 정확하였음을 눈으로 보게 된다.

최형기는 실로 시정과 관아의 뜰에서 자라며 자신을 세워온만큼, 세상살이의 법도를 환히

꿰는 사나이였다. 이것은 나중에 그가 가장 유능한 포도관으로 출신하는데 큰 보탬이 되기

도 하였다. 최형기는 다시 사정을 어슬렁거리며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 모두들 그를 최선달

이라고 불렀으나, 이는 칭찬이기보다는 조롱에 가까웠다. 최형기는 혼자서 삼청동 뒷산에 올

라 활을 과녁에 쏘지 않고 들에서 아무 데나 쏘아대는 벌터질을 하고 있었다. 한창 열중해

서 쏘는데 사계로 마침 꿩 한 마리가 앞으로 질러가는 것을 보고는 당긴 채로 쏘아 맞혔다.

꿩은 화살에 꽂힌 채로 어느 대갓집 후원 담장으로 달아났다.

형기는 그까짓 꿩보다도 화살이 아까워서 그집 앞 대문으로 찾아갔더니 바로 대사간 유상

운의 집이었다. 대감의 집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쩐지 내키지 않았으나, 최형기는 문득 이곳

이 자기에게는 대단히 중대한 디딤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는 문간으로

들어가 하인에게 말하였다.

"여보시우, 대단히 어려운 청이긴 하나 내가 뒷산에서 벌터질을 하다가 꿩을 쏘았는데,

이 살을 꽂은 채로 이 댁 뒷담으로 넘어왔소. 꿩은 그대가 가지고 화살이나 찾아주오."

하인이 그의 아래위를 훑어보고는 그래도 꿩을 가지라는 말에 비위가 당기어, 무뚝뚝하게

들어가더니 꿩이 없으니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형기가 하인에게 다시 사정을 해보았으나,

래 대신집의 아랫것들이란 말씨도 뻣뻣하고 누구든 아래로 보는 투가 있어놔서 대뜸 거친

목소리였다.

"여보슈, 없는 화살을 날더러 만들라지 말구 궁장에게나 가보우. 낮에 난 도깨비로군. 문간

에서 쓸데없이 떠들다가 대감마님께서 아시면 큰탈나우, 어서 가보랄밖에."

형기가 짐작하던 일이라 대감인지 곶감인지가 들으라고 일부러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 아무리 대신집 하인이기로 그만한 청도 안 들어주느냐?"

형기가 달려들어 하인의 멱살을 잡아 이끌었다가 대문에 힘껏 밀쳐 버리니, 하인은 뒤로

나자빠져 별로 다치지 않았으면서도 일부러 죽어 가는 소리로 엄살 부리는 바람에 온 집안

이 떠들썩하였다. 대사간 유상운이 녹사를 불러서 알아보라고 일렀다. 녹사가 문간에 나오는

것을 보고 형기는 그만 물러갈까 하다가 이미 내친걸음이라 끝까지 버티어볼 마음이 생겼

. 그는 우뚝 서서 녹사가 사유를 묻기도 전에 당당하게 말하였다.

"댁 하인에게 화살을 찾아달라고 여러번 간청을 하였으나, 찾아주지 않기에 그만 화를 냈

소이다."

녹사가 이 말을 그대로 대감께 전하는 주인대감은 스스로 혀를 찼다.

"내가 예전부터 대갓집 하인배의 뻣뻣한 행티를 가장 미워했더니, 내 집의 하인도 어느결

에 그런 지경이 되었고나, 다시 들어가 찾아주도록 하여라."

유대감은 서용된 지 얼마 안되고 또한 남인들에게 받았던 푸대접이 있었는지라, 매사에 신

중하고 겸손하였다.

녹사의 지시에 따라 하인은 엄살도 못하고 할 수 없이 화살을 찾으로 후원으로 들어갔고,

최형기는 문 밖에 섰는데 대감이 다시 녹사에게 일렀다.

"아무리 활 장난을 하는 사람일망정 손님을 오랫동안 문간에 세워둘 수 없으니 불러들여

."

형기가 녹사를 따라 들어가서 마루에 오르지 않은 채로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원래가

당하의 인사란 하속이나 상인의 것이라 유대감은 몹시 의아하여 물었다.

"탕건을 썼으니 무슨 벼슬이 있나 본데, 어찌 하정배를 올리는가, 자네는 누구인가?"

최형기는 역시 마루 아래서 대답하였다.

"소인은 출신 최형기올시다."

"그러면 무과를 하였구먼. 자네 집 세계는 어떠한가?"

형기는 그 물음에 귓전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비루한 안색을 지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지벌이 낮고 처지가 곤궁함에도 무과에 들었다는 것은 대장부의 떳떳한 긍지라고 생각하였

.

", 파주 아전 최모의 자식이올시다."

최형기가 또렷하게 아뢰자 과연 유대감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 아전의 자식이라고."

대감은 최형기의 전통과 낡아빠진 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자네가 마루에 오르지 않았구먼. 하지만 벌써 무과에 올랐으니 겸양하지 말고 어

서 올라와 앉게."

유대감이 웃음을 띠며 이르니 최형기는 사양하다가 다시 장지 밖으로 올라가 앉았다.

"어디 아는 이도 없을 것이라, 아직 궁무로서 고생이 많겠구나, 나도 오늘은 몸이 불편하여

쉬고 있자니 심심한데 나하구 한담이나 하고 가게. 자네는 성내의 사정에 소상할 터이지."

최형기는 더듬거리며 파주서 떠나오던 얘기며, 다방골 기숙시절의 여항 풍류담이며 사정

주변의 얘기, 그리고 박병사 생일 잔치에서 창피당하던 일들을 제법 주변있게 늘어놓았다.

유대감은 시종 그럴 듯한지 장죽을 물고 비스듬히 기대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형기는 그러나 익훈의 집안 얘기는 비추지도 않았다. 그동안에 하인은 온 집안을 돌

아다니며 꿩을 찾다가 찬광에 틀어박힌 산 꿩을 잡아가지고 나와서 사랑 마루에 바쳤다.

 

형기가 살을 빼어 전통에 넣고 주인 대감께 절을 하였다.

"소인 물러갑니다. 화살은 찾았으나 이 꿩은 대감마님의 한때 찬수나 하십시오."

"여보게, 자네가 호의로 주는 꿩을 나 혼자 먹을 수가 있나. 그것으로 안주하여 술이나 한

잔 마시면서 얘기나 더 하지."

형기는 못 이기는 체 다시 주인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에 꿩고기로 만든 안주와 함께

만반진수의 다담상이 들어와 유대감과 최형기는 대작을 하게 되었다. 예전 예규에는 대신이

주는 것은 아무리 싫더라도 사양을 하지 못하는 체통이어서 형기는 주인 대감이 자꾸 권하

는 대로 술을 마신 것이 십여 배가 지나고 주인 역시 칠팔 배 정도에 이르렀다. 주인은 별

안간 형기에게 물었다.

"자네 이인하를 아는가?"

"무변이라는 놈이 어찌 전 통제사이셨고 포도대장이신 이사또의 함자를 모르겠습니까.

직 뵈온 적은 없습니다."

유대감은 기분 좋게 취하였고 앞에 앉은 젊은이가 제법 말주변도 좋고 또한 충직해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이 섣달이고 도목을 꾸며 올리는 중이니 이 기회에 자네 환로에 나가보게나."

형기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지로 참고 공손히 대답할 뿐이었다.

"황송한 분부이올시다."

"내 지금 이대장에게 편지를 함세."

대감은 즉시 서제소에 일러서 단찰로 써 보내라고 이른 뒤에 형기에게 다정히 말하였다.

"오늘 자네를 보니, 속히 보내고 싶지 않으이, 다음날이야 자네가 또 올 수 있나. 술 한잔

더 내다가 마시며 답장을 기다리세."

형기는 술 생각보다도 그 일에 마음이 쏠려 답장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대감은 점

점 소탈해져서 아주 친근하게 형기를 대하더니 드디어 답장이 도착하였다. 주객이 상당히

취하였는데 주인은 편지를 보내고는 적이 실망한 빛을 띠었다.

"여보게, 자네 관수가 없네. 병판에게 올릴 도목에는 벌써 배정이 다 되었다네. 내년 유월

까지 기다릴밖에 없지."

유대감은 스스로 취중임을 그제사 느꼈는지 무색하게 웃었다. 이 말을 듣던 최형기는 벌떡

일어나면서 불쾌하게 내뱉었다.

"소인은 물러갑니다. 그러나 아까 바친 꿩값을 줍쇼."

유대감은 하도 어이가 없어져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체모도 잊고 언성을 버럭 높였

.

"여보게, 자네가 호의로 주어놓고 또다시 값을 내라는가?"

하고는 정말 화가 나서 살림 사는 청지기를 불러 일렀다.

"요새 시장에서 꿩 한 마리에 얼마씩 하는지, 이 사람에게 그대로 주어서 내보내라."

청지기가 돈 서돈을 가져다 형기를 주며 속히 나가라고 재촉이었다. 그는 돈은 받지도 않

고 버티었다.

"장에서 파는 꿩은 죽은 꿩이지만 내 것은 산 꿩이니 석 냥은 내야되우."

대감의 화는 한층 치솟아 석 냥이고 열 냥이고 달라는 대로 주어서 어서 내쫓으라고 야단

이 났다. 최형기는 돈 석 냥을 꽁무니에 차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 벼슬은 다 틀렸고. 이것만 가지면 과세는 넉넉히 하겠군."

형기가 나간 뒤에 유대감은 진저리를 내었다.

"어허, 세상에 고이헌 놈 같으니, 그놈이 신수도 그럴 듯하고 말씨도 공손하기에 소일을 해

서 보냈더니 그런 인사불성의 놈이 있더란 말인고."

내쳐서 이인하에게 아예 벼슬 망에 다시 올리지도 말라고 편지를 하였다. 그날 최형기는

광통교 색주가로 나와 한량패들에게 자기가 환로에 틀림없이 오를 것이라고 흰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기별을 받았으니 포도청 부하가 된 것이다. 최형기는 즉시 철릭을 빌려

입고 삼청동 유대감 댁 허술청으로 가서 대감에게 명자를 드리고 기다렸다. 하인들이 보니

며칠 전에 꿩값을 달라고 생떼를 쓰던 미친놈이었다. 통자는커녕 또 무슨 행패가 나올까 두

려워 문전에서 방한하는 판인데, 녹사가 나오거늘 형기는 대감께서 만나주지 않으면 문간에

서 죽겠노라고 칼을 빼어들었다. 유대감이 이 말을 듣고는 못내 이기지 못하여 불러들여서

못마땅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꿩값은 다 주었는데 왜 또 왔나."

최형기가 부복하고는 청산유슈로 아뢰었다.

"소인이 아무리 변풍상성을 했다손 대감께 꿩값을 받으오리까. 요전에 대감마님께서 약줏

김에 소인을 도목에 올리라고 편지하셨으나, 이대장께서 듣지 않으시니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얻어볼 수도 없고, 대감 나으리도 약주가 깨시면 다시는 소인의 생각을 않으실 것입니

. 그래서 권도로 대감의 분을 돋우면 화가 나셔서 이대장께 도목에 올리지 말라는 분부를

내리실 것이요, 이대장께서는 대감마님의 분부를 거역하신 데 미타히 여기셔서 일부러 시키

지 말라는 편지를 하신 줄로 믿으시고 반드시 올릴 줄로 미리 짐작하고는, 이렇게 대감의

화를 돋우어 포도부장이 되었습니다."

하고는 최형기가 꽁무니에서 돈 석 냥을 내놓으니 유대감은 한참 노려보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숭어가 폭포를 거슬러 오른다더니, 자네는 참으로 대장감이로다. 그러나 자네는 출신지벌

이 전무한데 다만 시세를 살피는 눈과 임기응변이 능하니 자칫하여 출세가 빠르면, 다른 무

인들의 시셈에 시달리거나 남의 모함을 받기가 십상일 것이다. 마흔이 넘어 초사를 따내어

어영대장이 되는 이도 있으니, 모든 처세를 신실하게 돋보이지 않도록 하여라."

실로 유대감의 이러한 당부는 최형기의 통인 기질을 경계하여주는 진심의 말이었고, 최형

기도 역시 김익훈의 집에 있으면서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여 환로를 개척해 나아가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포도부장 최형기는 그로부터 포교들을 데리고 한양의 곳곳을 기찰하여 다니며 범죄인 잡기

에만 열중하였고, 세간에서 말하는 대갓집에는 절대로 드나들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실력을

제대로 알고 있는 대관은 드물었고, 오직 이인하만이 그의 기찰하는 비범한 솜씨를 인정하

고 있었다. 계해년에 그는 어는 중인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포도 종사관에 올랐다. 그는 아

직 자기 나이가 그만한 직함을 가지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몇번이나 사양하였다. 최형기는

한양의 도처에 자기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정탐꾼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대개 잃은 물건이

나 도망한 노비를 찾는 청탁이 들어오면 닷새도 걸리지 않아서 틀림없이 찾아냈던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포도 종사관에 부임했을 적에 그는 부장급들을 모두 개편하였으니, 그의 수

하에는 되도록 출신이 비천하고 여염의 소악패들의 생리에 밝은 무뢰배들을 장교로서 들이

었다. 이세백의 평무사로 해서에 따라갔다가 구월산 마감동에게 죽은 김식이도 역시 최형기

의 그러한 수하노릇을 하였었다. 최형기가 장길산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은 바로 그 무렵

이었다. 그는 김식의 죽음을 이세백 수하 장교로부터 은밀히 전해 듣고는 저들이 보통의 도

적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저들 도적의 형세가 커지게 되어 조정에 논란이

일어나고 나라 안이 소연해질 것을 은근히 바랐다. 만약 토포군이 일어나게 되면 두 종사관

중에서 자기가 토포사가 될 것이며 토벌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공훈을 인정받아 탄탄한 무반

의 열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최근의 한양의 심상치 않은 소문으로 잠을 설치며 고생하던 중이었다. 최형기

는 스스로 다짐하기를 절대로 섣부른 무고나 모역 사건을 다루어 이 백지와 같은 자기의 전

력에 무슨 색깔이 생기도록 처신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최형기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있었다. 정탐꾼들에게서 발고가 있기를, 모대관의 집에 무사와

한량들이 드나드는게 역모의 기지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로서는 먼저 기찰하고 나서

심증이 있으면 의금부에 보고하여야 할 것이다. 얼마 동안 장교들과 더불어 그들을 기찰하

, 다만 그 댁의 새서방 되는 자가 품행이 좋지 않아 성내의 외입쟁이들과 교제가 난잡하

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때가 때인 만큼 조정에서는 어느 세력에 붙어 있든지 서로

적이 없는 벼슬아치가 드물었다. 모역이라면 어느 한 사람에 그칠 일이 아니요, 세력이 바뀌

는 판이라 한두 사람의 추심에 그칠 일이 아니었다. 최형기의 야심이 만일 보다 날렵하고

비정하였다면, 의당 그는 그쪽의 반대파에게로 비밀히 찾아가 의논하였을 터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억제하고 이 거센 파도와 같은 세도 정치의 변화무쌍한 물결을 타지 않기로

작심하였다. 그는 기찰한 결과를 대장에게 알리고 금부에는 그러한 기미조차 새어나가지 않

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장교 하나를 데리고 최형기는 그 대관을 직접 찾아갔다. 대관은 그의

방문을 의아하게 여겼으나 회형기는 갑작스레 자기가 방물에 관하여 특이한 관심이라도 있

는 듯이, 벼루며 연적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벼슬아치는 또한 여염의 돌아가는 시속에 흥

미가 끌려서 그런 쪽으로 최형기의 화제를 돌리려고 애썼다. 이윽고 대관이 묻기를,

"자네처럼 충직한 무인이 어째서 병수사 한자리도 못하고 있는가..."

그때에 최형기는 표정을 굳히고 자세를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저를 천거하시렵니까?"

막상 상대방이 정색을 하고 달려드니 대관은 어쩌지는 못하고 그냥 얼버무렸다.

"헌데 자네가 누구 문하이던가?"

"저는 오직 상께서 내려주시는 녹을 먹고 사는 포도관이올시다. 무슨 문하를 따지겠습니까.

공연히 대감과 통자가 잦았다가 대감께서 역모하실 적에 연좌되어 원혼이 될 수야 있겠습니

?"

벼슬아치는 깜짝 놀라서 얼른 주위를 돌아보고는 스스로 물러나 앉았다. 턱수염이 떨리고

벌써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허... 그대가 이 무슨 방자한 말을 하는고."

"무변이 고관대적들과 공연히 오락가락하였다가는 남의 눈총을 받기가 예사인 시절입니다.

또한 조정대신의 댁에 우락부락한 시정배들이 드나들면 곧 그가 모반할 게라는 뒷공론이 일

어납니다."

하고 나서 최형기는 투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대관은 더욱 사색이 되어 이번에는 앞

으로 다가앉았다.

"어디서 이런 투서가 들어왔는지는 따지거나 묻지 마십시오. 다만 이 댁의 새서방님께서

호방하셔서 한잡배들과 교유가 낭자하게 소문이 났으니, 경계하도록 하시지요. 한두 목숨이

아니라 이것은 용상에까지도 미칠 수 있는 큰 화가 될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자네는 명관일세."

그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양을 보였고, 이러한 말은 절대 함구하는 한편, 스스로 최형기의

사람됨을 깊이 간직하게 된 것이다.

최형기가 한양 인근에 수상스러운 계가 묶어지고 있음을 들은 것은 난전꾼들 틈에서 흘러

나온 소문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계의 규모와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자세히 몰랐다. 다만 무뢰배들에게서 전

처럼 활발한 기찰거리가 새어나오지 않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아직은 살주계라는 조

직이 한양의 노비들 사이에 생겨난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흥인문 밖에서 이대장의 처

가 식구들이 도적들에게서 백주에 습격을 받았고, 노상에서 살인 재물을 탈취하는 일이 여

러 길목에서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게 평상시보다는 다른 일이었다. 무엇인가 그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듯하였다. 그는 아예 등청하지도 않고 광통교 변의 색주가에서 기

찰포교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젯밤 두 사내를 쫓아나갔던 포교들 둘이 밤샘을 하

여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서 들어왔다.

"어찌되었느냐?"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최형기는 그들의 태도를 보고 알아차렸다.

"저희들이 중도에서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냥 흔적을 잃은 것이 아니라, 아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게 아니냐."

젊은 포교가 추궁하는 종사관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아뢰었다.

"방심을 하였다가 그만 얻어맞았지요. 그렇게 날랜 놈들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너희들은 권술이면 오라던지기를 배웠다가 어슬렁거리는 삽살개나 잡아오려는 모양이구

. 내가 첫눈에 살피고서 그자들이 보통 장사치가 아님을 알았다."

늙을 포교가 계속해서 말하였다.

"남별대까지 복처의 순라들을 모아 추적하였는데 수상한 자들이 여럿이었습니다. 그 두 놈

이 회현방 쪽으로 달아나길래 쫓아갔으나 종적이 간데없었습니다. 새벽까지 목멱산 계곡을

이리저리 다니며 뒤졌지만 아루래도 병력이 모자라서..."

최형기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래, 본진은 옮겨 가고 꼬리만 남았다가 너희를 엉뚱한 곳으로 유인한 게 분명하구나.

장할 테니 어서 요기나 하고, 눈 붙이기 전에 칠패 아이들을 데려오너라. 그리구 너희들은

오늘밤부터 남별대에서 매일 밤 잠복해야 한다. 알겠느냐?"

최형기는 그들에게 아침을 먹인 뒤에 칠패의 정탐꾼들을 부르러 보냈고, 최형기의 소집을

받은 자들 세명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종사 나으리, 부르셨습니까?"

"너희들은 요즈음 뭘 듣구 다니느냐. 자네는 지난번에도 장물을 강 너머로 넘겼다면서?"

"아니... 그건 제 물건이 아니올시다. 애오개 딱부리란 놈이 구전을 낸다기에 거간만 섰습지

."

"장물 와주는 어찌된다는지 알겠지."

"나으리... 뭘 물으시렵니까. 요즘은 도통 성내가 어찌 돌아가는지 우리두 짐작을 못하겠습

니다."

"성내에 낯선 놈들이 들어온 것을 아느냐?"

세 정탐꾼은 서로 눈을 맞추고 나서 한 사내가 말하였다.

"실은 저희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한양 인근의 토박이 왈짜나 소악패는 대강 아는

데 방금 말씀하신 대로 보도 듣도 못하던 놈들의 왕래가 잦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대개 어느 부근이 그렇다더냐?"

"딱히 어느 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장물이 부쩍 늘어서 저희가 손을 대보기두 전에 사

라집니다."

"마포 동막이나 서강은 어떠한가?"

"그쪽은 저희 구역이 아니라서..."

최형기는 일부러 다른 데를 빙빙 돌다가 물었다.

"성내에 사는 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목멱산을 오르내리는데, 너희는 잘 알겠지."

"... 저녁때가 되면 성내의 하천배들이 서로 부산하게 마실을 다니구 그럽니다."

최형기는 스스로 가볍게 혀를 찼다.

"그렇군, 그쪽을 생각하지 못하였구나."

그는 등청하자마자 이대장에게 품하고는 다른 종사관 및 부장들과 의논하여 안을 내 놓았

. 포도청의 전 장교들은 변복하여 성내의 모든 복처와 연락하면서 초저녁의 기찰을 강화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양반대가의 행랑을 살펴서 노비들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살피도록 영

을 내렸다.

그러나 흥인문 밖이나 숭례문 밖에서는 아직도 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의 재물을 탈취하

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열흘쯤 지나서 이제는 제법 야기가 싸늘한 무렵인데, 쌍이문방의 바침술집에는

사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북성이는 심복 두엇과 먼저 와 있었고, 산지니는 흥인

문 밖 돌곶이 주막에서 솔부리패들과 더불어 여섯이 와 있었는데 시동이도 함께 왔다. 뒤미

처서 남부 살주계의 계원들의 머릿가 맞춰지고 있었다. 초동의 수노 노릇 하는 자가 들어오

자 바침술집 안은 더이상 들어설 수가 없이 꼭 찬 듯하였다. 북성이가 끝으로 들어오는 수

노를 보고는 산지니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 계원은 다 왔소이다."

"인정이 울리면 곧 떠나도록 하지요. 각각 맡은 일은 알고 있겠지요."

산지니가 시동이를 돌아보며 확인하였다.

"복처의 세 패를 처치하기로 하였지."

"세 패가 어디 있는가, 낮에 둘러보셨소?"

북성이가 물으니 시동이가 대답하였다.

"청량교 아래편입니다. 그 구역이 생민동 동쪽에서 수구문까지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소이

."

북성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댁네 고서방하고 황서방이 청파 실주계의 중길이와 어울려 벌써 숭례문 안으로 들어섰을

게요. 지금 금동 주막에서 기다리고 있겠지요. 그쪽에서는 첫 패를 해치우고 회현방 동구를

지나 타락동으로 들어섰을 게요. 우리는 영희전 서쪽 윗 둘 패를 처치하고 남부로 내려가는

네거리에서 지키고 있으면 태평소 소리가 들릴 거요. 그 소리를 군호삼아서 저동으로 내려

가면서 이지사의 집을 들이칩니다. 그 다음은 다 아시겠지요."

"살주계는 일단 남별대로 물러가고 우리는 수구문을 빠져나간다는 안 입니다."

산지니가 말을 끝내자 북성이는 저희 식구를 돌아보았다.

"집에서 빠져나올 때 아무도 눈치챈 사람은 없겠지?"

살주계 계원들이 서로 둘러보는데 초동에서 온 수노가 더듬거리며 말하였다.

"그런데 좀 께름칙한 일이 있어서... 저녁때가 되면 꼭 찾아오는 깍정이 한 놈이 있는데,

녀석이 밥을 얻어가지고는 꼭 대문 앞에서 먹어치우고 잠을 잔단 말이야. 그런데 아침이 되

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꼭 땅거미 질 무렵이면 찾아오거든. 내가 오늘 모임을 염두

에 두고 내일 나갈 심부름을 아예 해두려고 안국방에 다녀왔는데, 담 밑에서 거적을 쓰고

있던 놈이 슬그머니 일어나 따라오는 거야. 처음에는 따라오는 줄 모르고 그냥 잠자리를 다

른 데로 옮기는가 보다 하고 무심하게 넘겼더니, 종루까지 나오는 도중의 골목 세 갈래가

끝까지 방향이 같더란 말일세, 그제서야 따라오는 줄 알고, 종루 유기전 앞에서는 행인이 많

길래 걸음을 빨리해서 피하는 시늉을 해보였더니, 이놈이 어느결에 내 등뒤에 와 있지 않겠

."

"자네만이 아니군 그래."

북성이가 말하자 수노는 얘기를 그치고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 또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없는가?"

"패랭이 차림의 시골놈이 우리 건넛집에 들었는데, 담배장사라구 합디다. 그놈이 내가 대문

을 드나들 적마다 노려보는 눈치가 심상치 않던데."

명례방 사는 상노 총각이 말하였다. 북성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초동의 수노에게 재촉하였

.

"어서 얘기해보게."

"내 등뒤까지 다가와서 시치미를 떼길래 마침 그 앞이 동이술 파는 곳이라 쭈그리고 앉아

한잔 마셨지. 그리고는 말을 걸었네. 저녁도 주었고 잠자리도 있을 터인데 나를 왜 쫓아다니

느냐구 그랬더니, 이 자식이 실실 웃으면서 좋은 데 가시는 줄 다 아는데 그러시냐구 오히

려 딱 잡아뗀단 말야. 좋은 데가 어디냐니까... 동무들끼리 모여서 무슨 잔치를 하시는 게 아

니냐구 그러던데."

북성이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바로 코밑에까지 당도하였군. 최종사가 보통 나그네가 아니라던데."

"내 얘기를... 들어보게.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려니 이놈이 온데간데가 없어, 집으로 오는

데 수각다리 앞에 이르러 그놈을 또 만났지. 여하튼 나는 모임에 나오기 전에 그 놈이 어디

있는가 살피느라구 아예 대문에다 안면은 붙이구 있었어. 거적을 쓰고 꼼짝 않구 누웠더군.

그래 하는 수 없이 뒷담을 넘었네. 오면서도 그놈이 나타날까봐 일부러 동부까지 나아갔다

가 이리로 건너오는 길일세. 내 생각으로는 그놈이 나그네가 틀림없는 듯하데."

"나그네지, 최형기가 우리를 노리기 시작한 게야."

산지니가 끼여들었다.

"최형기라면 나두 언뜻 본 적이 있소. 그놈이 그렇게 께름칙하다면 아예 야반에 들어가 죽

여버리면 될게 아뇨."

"그놈이 이것을 쓰는 솜씨가 상산 사람 같다구 합디다."

북성이가 허리에 차고 있는 창포검의 칼자루를 건드리면서 조자룡까지 들먹이니 시동이가

코웃음을 쳤다.

"집만 알려주오. 우리에게는 화승총이 있으니 제아무리 칼을 제법 휘두른다 하나 날아가는

콩알을 어찌 막을 것이오."

그러는데 인정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복처에 순라패가 모이고 인적이 끊기며 성문은

닫히는 것이었다. 산지니가 보퉁이를 끌어당겨 검은 보자기 뭉치를 꺼내서 전원에게 일일이

나누어주었다.

"복처를 들이칠 때 꼭 얼굴을 가리시우. 그리고 사정 보면 안됩니다."

"아무튼 조심해야지..."

살주계 계원들은 최형기의 얘기가 거기서 그쳤길래 다행이었다. 북성이까지도 불안한 기색

을 감출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바침술집을 나와 동서로 헤어졌다. 솔부리패들 여섯은

청량교의 세 패를 무찌르고 수구문을 장악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명철방을 돌아 청

량교를 향하여 내려갔다. 낮에 두 번이나 왕래하며 익혀두었는지라 여러 골목과 길바닥이

손금과도 같았다. 복처에 모이는 목편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고 그들은 모두 준비하

였던 검은 보자기로 얼굴을 가렸다. 서슬 푸른 칼이 손마다 쥐어져 있었다.

"자 꼬리를 흔들어 볼까."

산지니가 말하자 시동이가 보퉁이를 짊어졌다. 흰 무명보에 옷가지를 꾸려넣은 것이지만,

제법 큰 짐처럼 보였다. 시동이는 천천히 청량교 쪽아로 나아갔다. 복처에서 수하하는 소리

가 들려왔다.

"누구냐?"

"게 섰거라!"

영락없이 남의 집을 털고 나오는 도적의 시늉으로 시동이는 돌아서더닌 나왔던 골목으로

뛰어갔다. 복처의 순라들이 육모방망이를 흔들며 쫓아왔다. 이미 산지니들은 골목 깊숙한 곳

의 좌우에 숨어 있었다. 시동의 뒤를 따라서 골목으로 들오온 순라패들이 바라보며 뛰어가

다가 헛디뎌 발목이라도 겁질렸는지, 도적은 저쪽에서 죽는시늉을 하면 주저앉았다. 요놈 이

제는 잡았다, 하고는 우르르 몰려들어오는데 좌우에서 기다리던 솔부리 일당이 칼날을 날렸

. 복처의 군사 다섯을 베었으나 그중 하나가 경상이라 신음중이었다. 신지니가 군사들의

그날 언적을 알아내기 위하여 살려두었던 것이다. 산지니는 칼을 군사의 가슴에 대고 꼭 누

르면서 물었다.

"이놈, 죽이기 전에 오늘밤 군호를 말하여라."

", ... 전언은 천둥이오."

"후언은 무엇이냐?"

"땅입니다."

군호는 병조에 입직한 당상관이 친히 써서 봉함하고 매일 신시에 낭관이 받아서 각 군영으

로 나가는 것이었다. 산지니가 군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차갑게 내뱉었다.

"군기 누설은 사죄에 처한다는 것이 군무의 율령이다."

그는 칼을 들어 다친 군사의 목숨을 끊고는, 여럿이 달려들어 시체의 머리와 다리를 들어

기중 담장이 기다란 집을 택하여 담 너머로 하나씩 넘겨버렸다. 복처를 휩쓴 산지니 일당은

내쳐서 하도감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샛길로 하여 광희문으로 나아갔다. 광희문에는 원래 어

영청 수직 구역이라 동소영에서 이십 명의 군사가 나와 지켜야 하는데, 잘 시행되지 않아

호군이랍시고 다섯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민병이 나와서 성벽 아래를 지켜야 하지만 돈을

내거나 신포를 바치고 빠져서 언제나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광화문, 즉 수구문 앞에

까지 별일 없이 당도하였다. 이곳은 한적하여 민가이 불빛도 멀리 있었고, 주위가 캄캄한 어

둠인데, 바람소리만이 스산하였다. 그들은 문 아래까지 상반신을 숨기고 다가갔다. 이제는

보자기를 벗고 무기를 등뒤에 감춘 다음, 산지기가 헛기침을 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성벽에

서 창을 메고 지켜 서 있던 파수병이 수하를 보냈다.

"누구냐, 군호!"

"천둥."

"."

성문에 있던 자들 중에 호장 되는 자가 나섰다.

"웬일들이오?"

"저희는 남촌서 불려 나온 민병이올시다. 적경이 있다고 군문에서 소집한다기에 저희 영소

로 찾아오는 중입니다."

남촌 민병의 직이 광희문의 수직이라 그럴 법도 하겠다고 여겼는지 호장이 물었다.

"몇사람이 왔는가?"

"다섯이 왔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올라오지 않느냐?"

", 점호를 받아얍지요."

산지니는 슬그머니 호장에게 다가들어 속삭였다.

"어찌 여기서 찬 이슬 맞구 밤을 세우겠습니까. 저 아래 민가에다 술과 안주를 장만하였으

니 거기들 들러 태기라두 하다가 돌아가렵니다. 공연히 역을 지워서 달달 볶는 게지 적경은

무슨 적경입니까. 봉수대의 불도 그대로인데 성문을 어쩌겠습니까."

산지니의 말은 역시 태평성대의 군사들 귀에 도르르 말려 들어갈 만큼 달착지근하였다.

장이 무물쭈물 중얼거렸다.

"남촌 사람들이 물정이 훤하다더니... 과연 사귈 줄 아는군."

"잠깐 다녀올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요령을 흔들게."

수직 군사들에게 이르고는 호장은 산지니의 뒤를 따라 나섰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과연

몇사람이 앉고 서고 하여 웅숭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등뒤에 날카로

운 칼끝이 와 닿았다.

"소리치거나 달아나면 죽는다. 우리는 민병이 아니여."

산지니의 음산한 목소리에 호장은 발도 제대로 떼지 못하였다.

"천천히 걸어라."

이렇게 하여 우선 호장을 잡아놓고 나머지 호군들을 꾀어낼 생각이었다.

"여기 술이 있으니 한잔씩 하고 올라가라구 외쳐라."

캄캄한 어둠속에 다섯 명의 장정들이 모두 칼을 빼어들었으니 호장은 연신 침을 삼킬 뿐이

었다.

"벌써 피맛 본 칼이다. 어서 네 동무들을 부르라니까."

"... 여보게, 여기 술이 왔는데... 한잔씩 하구 가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솔부리 일당들은 낄낄대고 웃으며 떠들며 하였다. , 술이 독하군,

이 한잔 더 들어,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들리니 성벽에 섰던 자가 먼저 내려오며 부추겼다.

"젠장 한잔만 얼른 넘기구 돌아오세."

"그러다가 순관이 오면 군문에 들어가 곧장 맞을려구."

"아따 참새 가슴일세. 내려가서 얼핏 한잔 하구 오는데 그동안에 누가 오겠나. 뭐라구 그러

... 밑에서 이상한 기척이들려서 살피구 온다면 되지."

"그래, 호장두 내려갔으니 한잔만 걸치자구."

호군 넷이 방심하고 슬슬 내려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솔부리 일당들은 제각기 달려들어 베

어버렸다. 그들이 무기와 요령을 지니고 있으니 자칫하여 소란해지면 낭패를 보겠기 때문이

었다. 산지니는 의논대로 세 패의 복처를 말끔히 치우고 광희문을 점거하였으니, 이제 저동

을 습격하고 나오는 검계와 살주계 일당들의 퇴로는 훤히 뚫린 셈이었다.

산지니는 성벽으로 올라가기 전에 군사들의 검은 더그레와 털벙거지를 모두 벗겨내어 나누

어 입었다. 성벽 위에는 월도 두 자루가 꽂혀 있고 개문좌부를 받으러 다니는 데 쓰이는 표

신이 있을 뿐 열쇠는 없었다. 원래 개문좌부를 받아 대내에 가서 병조에서 내어주는 열쇠를

받아 열도록 되어 있는 것이었다. 파루전에 나가야 할 작정이므로 줄을 타고 성을 넘을 것

이니 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북성이가 인솔한 살주계 계원들은 쌍이문방에서 묵동과 생민동을 지나 주동 다리를 건넜

. 영희전은 태조의 영정을 모신 곳인데 수직하는 자가 하나 있을 뿐이었고, 더구나 밤에는

텅 빈 사당이나 마찬가지였다. 담장이 주동 어귀에서부터 남부 네거리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들은 얼굴에 검은 복자기를 둘러쓰고 남산동으로 오르는 패와 필동 다리로 내려가느 패로

갈렸다. 위 둘 패와 아래 둘 패를 한꺼번에 처치하려는 것이었다. 위는 북성이가 이끌고 갔

으며 아래는 초동의 수노가 맡기로 되어 있었다.

북성이들이 남산동 초입의 버드나무 아래에 이르렀을 때 이미 순라들은 인정 뒤라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우리가 한발 늦었다."

"까짓 거 딱딱이 소리나는 곳으로 뒤쫓아갑시다."

북성이도 계원의 말이 그럴 듯하여 잠깐 앉아 쉬면서 귀를 기울이는데 영희전 쪽에서 목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운 곳이다."

그들은 골목을 따라서 양편에 찰싹 붙다시피 하여 뛰었다. 영희전의 긴 담장을 돌아서자

멀리서 발등거리의 불빛이 흔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주저할 것 없이 똑바로 달려들

었다. 순라는 둘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앞에서 사람이 뛰어나오자 육모방망이를 쳐들며 소

리를 질렀다.

"왠놈들이냐!"

그러다가 그들의 수가 여럿이고, 얼굴을 살피자 복면이었으므로 발등거리를 내던지고 돌아

서서 뛰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멀리 달아나기에는 때가 늦어 사정없이 덮치는 살주계 계원

들의 칼에 몰고가 나고 말았다.

"남부 네거리까지는 가는 동안에 딱딱이 소리를 쫓아 해치운다."

북성이가 일당들을 이끌고 영희전을 돌아 남부로 가는 동안에 초동수노의 일행은 필동 다

리에서 복처의 순라들과 부딫쳤다. 거기서 그들은 셋을 베고 나머지는 놓쳐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목멱산 아랫동네의 순라들이 모조리 끔찍한 일을 당했으니 거의 무인지경이 되어버

린 것이다.

"군호를 보내지."

북성이가 지시하자 계원 중의 누군가 허리에 차고 있던 날라리를 들어 한 가락을 불어넘겼

. 그러자 서쪽의 어둠속에서도 날라리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 이제 저동으로 내려가자."

그들은 저동의 역관, 이지사네 집을 바라고 뛰었다. 그는 연경을 왕래하여 수의역관을 다니

면서, 성내에서 역관 변부자를 빼고는 그의 재산을 따를 사람이 없을 만큼 이름난 부가옹이

었다. 살주계원들이 이지사의 솟을대문 앞에 이르니 벌써 회현방으로부터 달려온 청파 살주

계와 고달근, 황회 등이 거느린 솔부리 일당들이 당도하였다.

"복처에는 지금 쥐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소이다."

"우리가 필동 다리에서 순라를 놓쳤으니 지금쯤 포도청이 벌집이 되었을 게요."

"올 테면 오라지. 이만한 수이면 아예 포도청으로 짓쳐들어가 대장 종사 이하 모든 부장

장교들을 도륙할 수 있네."

"문을 열어라."

황회가 말을 꺼내자마자 솔부리의 일당 둘이 나서더니 하나가 제동무에게 어깨를 들이댔

. 그자는 냉큼 뛰어 어깨에 올라섰고, 이어서 담장의 기와에 두 팔을 얹은 다음 사뿐히 뛰

어 넘어갔다. 문 빗장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대문이 활짝 열려 젖혀지자 그들은 제 집 드나

들 듯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태평소 불던 자와 두엇이 우울려 집

밖으로 나가 동서의 길을 망보며 지켜 섰다. 그들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마당이 찌렁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방 밖으로 나와 마루에 꿇어앉으라. 듣지 않으면 쫓아들어가 일가 몰살을 하리라."

고달근이가 제일 먼저 사랑으로 들어가 어리 계집종에게 다리를 주물리고 누웠던 이지사를

끌어내왔다. 집뒤짐이 시작되는데, 주로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솔부리의 검계 일당들이 하

였고 사람들의 수습은 살주계원들이 하였다. 돈과 피륙과 방물 이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

으며 재물이 있을 만한 곳은 틀림없이 뒤져냈다. 청파의 중길이는 얼굴에 검은 수건을 두른

채로 그 집의 안팎 노비들을 행랑 툇마루에 일렬로 앉혀놓고 말하였다.

"우리는 양반놈들에게서 평생을 마소같이 부림받던 하천들이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우리

가 나라의 주인이 되려는 기운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너희 중에 우리를 따라가 죽을 때 죽

더라도 사람다웁게 살다가 노비의 원한을 갚고 우리들의 천하를 일으켜 세우는 데 힘을 합

할 자는 나서라. 우리와 함께 가면 누구든지 눌리지 않고 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가 있다."

그러나 겁에 질린 노비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마룻바닥을 향하여 고개를 처박고 있을 뿐이

었다.

"썩어빠진 것들... 상전이 먹다 버린 대궁밥이나 처먹으면서, 이리 팔리고 저리 굴러다니며,

툭하면 매맞고 욕먹는 생활을 버리는 것이 그다지도 두렵단 말이냐? , 어서 나서라."

마루에 앉았던 자들 중에 셋이 슬그머니 일어나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둘은 사내요, 하나

는 머리를 올린 계집이었다.

"저희를 데려가 주십시오."

사내가 먼저 말하였다. 중길이는 그들에게 뒷전에 서 있으라는 표시로 턱짓만 해 보이고는,

"이 집의 수노 되는 자 나서라."

외치니 우물쭈물하면서 한 중년의 종이 일어섰다.

"너는 이 집에 몇년이나 있었는가?"

그는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더니 간신히 대답하였다.

"... 이 댁에서 태어났소이다."

"그러면 너의 어미는 어디 있는가?"

수노가 대답하지 못하자 중길이가 나직이 말하였다.

"내가 대신 말해주마. 네 어미는 일찍이 이 집 주인들이 범하였겠지. 거기서 몇명의 혈육이

생겨났겠지. 너는 씨종으로 그렇게 태어났겠지. 네 어미는 네가 아직 어렸을 적에 안방의 분

부에 따라 팔려갔거나, 시골의 전장이 있는 곳으로 쫓겨갔을 터이다."

수노의 일생을 훤히 눈앞에 보듯 얘기하는 중길의 목소리는 차츰 떨렸다. 수노가 어깨를

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울고 있는 듯하였으나, 이윽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때가 너무 늦었소. 저 사람들이나 데리고 가시오."

뒷전에 서 있던 북성이가 역관네 수노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뜻을 잘 알겠소.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시우. 우리가 양반들을 없애고 다시 태어날

때가 멀지 않았소. 성내가 뒤집어지는 날에 당신들은 모두 주인을 살해하고 밖으로 뛰쳐나

오시오. 그게 우리들의 살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우."

고달근과 황회는 솔부리의 일당들이 모아온 재물을 일일이 점검하고 나서 대강 약탈이 끝

난 것을 알았다.

", 우물거릴 필요가 없다. 어서 수구문으로 나가세."

살주계 계원들은 따라 나서는 세 사람의 노비를 이끌고 대문을 나오는데, 황회가 얼른 그

들을 발견하고 중길이에게 물었다.

"저것들은 뭐요?"

"이 집을 떠나고자 하는 하천들이우."

고달근이가 수건을 벗고 가쁜 숨을 토해내면서 참견하였다.

"뭐라구... 누구 마음대루 데리고 가려는 게야."

"이건 우리 살주계가 알아 하는 일이니 참견마우. 앞으로도 양반 부호의 집을 습겫하면 원

하는 노비들은 누구에게나 자유를 줄 참이오."

"허허, 이 사람이 영 돌아가는 형편에 캄캄하구먼. 아무나 데리구 가서 도대체 어디에다 살

리려구 이러는 게요. 그러다 추노에나 걸리면 공연히 댁네 계의 밑뿌리가 드러나게 될 것

아니오."

중길이도 검은 수건을 목 아래로 벗어 내렸다.

"그런 염려는 마시우. 우리도 중흥동 깊은 골짜기에 은신처를 마련해두었소이다. 돈과 양식

도 넉넉하니 이제는 우리 계원들이 하는 수 없이 종살이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지

."

황회가 고달근에게 말하였다.

"내 이럴 줄 알구 처분 난처한 방물 등속은 따로 꾸려두었다. 아예 여기서 헤어지기로 하

자꾸나."

고달근이도 그것이 가장 안전하리라 여겨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헤어집시다. 우리는 성 밖으로 나가야 할 텐데... 남별대로 오르시려우?"

", 그럴 작정입니다. 나중에 우리 계원을 돌곶이로 보내지요."

솔부리 일당들은 저동에서 살주계 일당과 헤어져 동쪽으로 나아갔다. 광희문에 당도하니

산지니가 문을 점령하여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은 열 수가 없고, 밧줄을 타고 성벽 너머로 내려가면 됩니다."

"수고하였네. 오늘 돌곶이서 푹 쉬고 내일은 하나 둘씩 흩어져서 천마산으로 일단 돌아가

기루 하지."

그들은 차례로 성문을 타 넘었다. 한밤중에 돌곶이에 도착한 솔부리 일당은 밤참을 나누어

먹고는 죽은 듯이 잠들었다. 이튿날 일행들이 흩어져서 상고의 차림으로 떠날 때 고달근과

황회는 양주에 들를 일이 있다며 북으로 올랐고, 산지니는 시동이와 더불어 장물의 처분을

위하여 돌곶이에 남았다. 살주계에서는 이번 이지사네 집의 습격으로 하여 모두들 자신이

붙어서 성내의 봉기를 금년 안으로 해치워야 한다는 의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

의 일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북성이가 가족들 때문에 상전의 집으로 되돌아갔던 탓

이었다.

삼각산은 온통 울긋불긋한 단풍이 들어 햇빛을 받은 곳은 그 빛이 더욱 붉고, 그늘이 진

곳은 쇠녹이 물든 듯하였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노라면 숲 위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마치

물결처럼 파문을 그으며 밀려가고 또 밀려갔다. 중흥골이란 산의 서남쪽 중흥사가 있는 데

서부터 석성으로 하여 산영루까지를 포함시키는 골짜기와 숲을 이르는 것이다. 성 가운데

큰 바위 봉우리를 모두들 노적봉이라고 일컫는데 석문과 석비가 있으며 백제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도성 사람들은 아래편 골짜기와 중흥사까지의 숲과 계곡을 놀이터삼아서 답청

이나 시회를 하러 모이곤 하였었다. 그러나 위로 오를수록 숲이 깊고 바위가 험준하여 감히

오르는 이가 드물었다. 그 골짜기 위편에 제법 큰 암반이 있었는데 아래를 파고 넓은 방을

들이고 주위에는 작은 움집 여러 채를 지었으니, 여기가 곧 중길이 일당이 마련한 은신처였

. 도성이나 한양 부근의 대가에서 달아난 사노비들이나 죄를 짓고 달아난 관노비들이 이

곳에 대를 이루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검계와 연을 맺어 각 지방으로 흩어져 가거나 원하

는 자는 남아서 살주계의 일을 도왔다. 중길이는 어젯밤 늦게 중량포로 하여 돌곶이에 들러

검계의 석산진, 고달근, 황회와 더불어 만나 저간의 형편을 의논하였다. 그들의 의견으로는

뚜렷한 형적이 없는 한 감히 군병을 일으켜 삼각산을 수색하지는 못할 거라는 얘기였다.

강의 모신이가 바꾸어주는 곡식을 중량포에서 받아 삼각산까지 운반하기는 어려웠으므로,

돌곶이 검계의 주막에다 보관하고 수시로 사람이 오르내리기로 하였던 것이다. 고달근과 석

산진은 중길을 따라서 산에 올랐고, 중흥골의 아늑한 은신처를 보고는 더욱 염려할 바가 없

다고 살주계 사람들은 안심시켰다. 아침을 짓는 연기가 안개와 어우러져 골짜기 안에 자욱

한데, 어디 흉년이 있으랴, 맑은 물과 싱싱한 나무들과 이슬 맞은 들꽃이 별유천지인 듯싶었

.

"도성이 코앞인데 이렇듯 으슥한 데가 있는 줄은 몰랐는걸."

고달근이가 말하자 숲 건너 아득히 한양 성내를 바라보던 석산진이 끄덕였다.

"우리 솔부리보다 자리두 좋구 더욱 포실합니다."

아래에서 소세를 하고 올라오는 중길이에게 고달근이 물었다.

"저쪽에 가물가물 보이는 것은 무슨 산이오?"

", 고향으로 통하는 오형제 봉우리입죠."

"그러면 여기서 죽 이어진 저쪽 끝은 양주 쪽인가?"

"그렇습니다. 양주의 도봉입니다. 산의 능선을 타고 나아가면 두어 식경에 닿지요."

고달근이 그 연봉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저런 퇴로가 있는 한 관군 수백이 쳐들어와두 걱정할 것이 없소. 다만 미리 방비하여두는

것이 좋겠소. 저쪽 도봉에다 새 은신처를 마련해두시오. 뒤가 든든해야 나아가기가 겁이 나

지 않는 법이오."

중길이는 곁에 와서 털썩 앉으면서 손가락질을 하였다.

"잘 보셨소이다. 저기 도봉의 이빨처럼 곤두선 봉우리를 넘어가면 평평한 분지가 나오는데

거기에 이미 자리를 잡아두었지요."

"무엇보다도 큰 일은 북성이가 잡혀 죽은 것이지요. 비록 끝까지 입을 다물고 죽었다지만,

남부 살주계는 그 행수를 잃었으니 당분간은 몹시 흔들거리게 될 것입니다."

중길이가 걱정스럽게 말하였고, 고달근이는 이렇게 안심을 시켰다.

"걱정 마오. 우리 검계가 있으니 동아리가 흩어지게 되면 각자 검계로 들어오면 될 게 아

닌가."

밑에서 아침을 먹으라는 전갈이 와서 그들은 함께 동굴로 내려갔다. 그들은 아침을 마치고

움 앞에 모여앉아 계원들과 한양 물정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중인데, 남부 살주계가 박살이

나버렸다는 소식과 함께 계원인 명례방의 상노 총각이 거의 사색이 되어서 당도한 것이다.

"아니, 남부 계원들이 모두 잡혔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중길이는 지금이라도 당장 한양으로 달려갈 듯이 일어나서 죄없는 총각의 멱살을 움켜쥐었

.

"모임이 알려질 리가 있나?"

"잠깐 고정하시우. 우리두 몰랐습니다. 최형기가 미리 포진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북성이가 죽었다면, 억기가 있었을 터인데 그는 뭘 하구 있었던 게야?"

총각은 그제사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글쎄요... 지금 생각하니 억기 아저씨는 안 오셨습니다."

중길이는 서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억기가 붙잡힌 게 틀림없다. 북성이가 죽었다는 얘기를 못 들었나?"

"몇몇은 알구 왔습니다만, 대부분이 그저 막연한 소문만 듣구 있었지요."

중길이는 미리 와 있었던 바침술집의 주모를 불러오도록 하였다. 그 여자는 산의 식구들과

함께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 달려왔다.

"어머니, 북성의 아우가 와서 저의 형이 목내선에게 죽었다구 했지요?"

"그래... 무슨 일이야?"

"남부 계원들이 모두 잡혔습니다. 왜 계원들에게 모이지 말라구 알려주지 않았소?"

"나는 그저 자네한테 어서 알릴 마음만 앞서서..."

중길이는 주모를 붙잡고 뭐라고 더이상 질책할 수가 없었다. 사실 중길은 주모가 전해준

덕으로 청파에서 포교들의 함정에 빠진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계원 중의 누구인가가 총

각에게 물었다.

"억기가 그날 초동에서 나갔다던가?"

"잘 모르겠습니다."

중길은 알았다는 듯이 주먹을 그러쥐고 손바닥을 쳤다.

"그 자식 또 당마을에 나갔구나, 내가 기찰 대상이었다면, 억기라고 모면할 수가 없었을 테

니까. 틀림없이 붙들렸어. 남부계의 모임을 아는 자는 그놈뿐이다."

고달근이 언제나 그렇듯이 침착하게 껄껄 웃어젖혔다.

"보슈... 어떤 사람은 잡혀서 입을 다물고 죽고, 어떤 사람은 잡힌 뒤에 입을 연 덕택으로

살아남는 게여."

중길은 미간을 찌푸리고 달근을 노려보았다.

"이녁은 우리 계원이 잡힌 게 뭐가 그리두 좋소?"

아무리 천지개벽을 바라고 모인 작당이라고는 하여도 버젓이 장사치 행세를 하는 고달근으

로서는, 중길이의 서슴없는 말투에 배알이 꼴렸다.

"이봐, 이미 깨어진 함지박을 어찌하겠단 말인가. 내가 곁에서 듣자 하니 놈이 입을 열어

다른 사람들이 잡힌 모양인데, 이제 와서 그자를 죽이려는가, 아니면 포청을 들이치고 계원

들을 살려내려나. 모르긴 해도 만약에 내가 최형기쯤의 종사관이라면, 잡힌 놈들을 두들겨서

알아내구 말 게야."

"뭘 알아내오?"

중길이 되묻는 말에 고달근이는 약을 올리듯 웃었다.

"바로 여기."

고달근이가 손가락으로 제 앉은 자리를 찍었다. 좌주의 계원들은 제각기 술렁거렸다. 산지

니가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이 덧붙였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요. 북성이처럼 알리지 않고 곤욕을 치를지두 모릅니다."

그 말에 고달근이 성을 발끈 냈다.

"어리석은 소리. 사람 사는 세상에 그런 미더운 의기는 한정이 있는 게야. 일단 잡힌 놈들

은 포청의 포교들과 한통속이 되어버렸다구 여겨야 해. 제 아무리 심기가 굳은 놈이라도.

고기는 못 속여."

하면서 달근은 팔꿈치로 산지니의 옆구리를 질렀다. 산지니가 저도 모르게 어이쿠 하면서

움츠리자 달근은 히쭉 웃었다.

"거 봐, 아프잖어. 누구나 맞으면 아픈 게야. 매가 튀는 장사라두..."

중길은 아직도 서성대고 있었다. 그는 계원들을 몇명 골라내어 저희끼리 수군수군 의논하

고 돌아왔다.

"우리는 중흥동에서 떠나지 않겠수. 그대신에 양주 쪽에다 골짜기를 봐두렵니다. 오형제봉

에 맞춤한 데가 있답니다. 그리고 우리 계원 열 사람이 죽기를 각오하고 한양에 들어갈 작

정이우. 살려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냥 찍소리 없이 숨어 있지는 않을 테요."

산지니는 고달근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말하였다.

"우리 솔부리 검계에서도 당신네들을 돕겠소. 어떤 일을 할 거요?"

중길이는 다부지게 보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곁에서 다른 계원이 말하였다.

"먼저 북성이의 원수를 갚고, 억기를 해치워야죠. 그리고 계원들을 구해보렵니다."

중길은 계원 두 사람을 북쪽으로 나아가게 하였으니, 능선을 타고 도봉과 오형제봉 어름에

있는 새 은신처를 알아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는 중흥골 계곡 입구에 망지기를 내보

냈다. 언제 포교들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에 고달근이와 산지니는 돌곶

이 주막으로 돌아갔는데, 억기가 배신하여 동료들이 잡힌 지 꼭 이틀만인 다음날 아침에 포

교들은 중흥동을 더듬고 올라왔다. 그들은 최형기가 직접 나서서 인솔하고 있었는데, 화승총

을 가진 포도 군사가 열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흑색 더그레나 털벙거지에 장창을

들고 있었다. 최형기는 구군복에 환도만을 차고 있었다. 벌써 그들이 삼각산 서남쪽의 여러

마을을 지나는 사이에 삼각산에 화적 났다는 얘기가 파다하게 나돌았다. 그러나 중길이네

살주계에서도 포도군이 중흥동으로 몰려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중길은 아녀자들을

미리 북쪽 도봉으로 나가는 등성이로 내보내고, 산영루와 중흥사 사이의 짙은 송림에 계원

들을 매복시켰다. 그리고는 은둔처를 버리고 석성으로 올라가 드넓은 비탈과 골짜기를 한눈

에 바라보며 진을 쳤다. 석성 주위에는 골짜기를 향하여 받쳐놓은 바윗돌 수십여 개가 늘어

섰다. 포도군이 산영루로 하여 중흥사로 오르는 송림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날라리 소리가

길게 골짜기에 울려퍼졌다.

최형기도 군사들 틈에서 태평소의 간드러진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적도들은 어디에 숨었

는지 사방에 보이는 것은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단풍나무뿐이고 골짜기에는 낙엽이 발목이

묻히도록 두텁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앞에는 장창을 든 군사들이 나아갔고 뒤에 화승총을

멘 열 명의 군사들이 따랐으며, 부장과 최형기 등의 장교들은 맨 뒤에 환도를 차고 따라갔

. 앞장선 길라잡이는 진관사에서 부역으로 끌려나온 거사였다. 그는 삼각산 인근의 마을이

나 골짜기에 대해서 손금 들여다보듯 안다는 자였다. 거의 숲 가운데 들어섰을까 싶었는데,

다시 기다란 날라리의 가락이 울려퍼졌다.

최형기는 부장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좀 가깝군."

"저기... 보입니까?"

부장이 손가락질하는 곳을 바라보니 골짜기 오른쪽 아득히 높은 바위 위에서 어떤 사내가

위쪽을 향하여 흰 무명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쏘아서 떨어뜨릴 수가 있습니다."

부장이 제의하였으나 최형기는 막았다.

"모른 체하고 내버려두지."

갑자기 매캐한 냄새와 열기가 끼쳐오는가 하는데, 푸른 연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최형

기가 전후 좌우를 둘러보니 앞에서 불붙은 짚더미가 살아 있는 맹수처럼 굴러 내려왔고,

에서는 마른 낙엽과 풀숲 위에 누가 질렀는지 사람의 키만이나 한 불길이 치솟는 중이었다.

불이 붙어도 동작만 빠르면 별로 사람이 상할 듯싶지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매캐한 연기로

앞이 보이지 않고 숨이 막혀서 싸우기가 곤란한 점이 걱정이었다. 최형기는 환도를 뽑아들

었다.

", 위로 뛰어올라라. 창을 가진 살수는 앞장을 서고, 포수들은 양쪽 언덕으로 올라 적장

을 쏘아 맞혀라."

그들은 연기를 뚫고 골짜기 위로 뛰어올라가는데, 가뜩이나 오랫동안 말라 있던 풀과 낙엽

이 일시에 번진 불에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니 우선 공격은커녕 제 몸 하나 지키기에 급급한

형편이었다. 그들이 불 속을 빠져나오자 거기서부터는 나무와 낙엽을 모두 긁어내고 길게

수렁을 파 놓았으므로 불길은 그쳐 있었으나, 장창을 든 군사들은 비틀거리며 뛰어나와 수

렁에 걸려 넘어졌다. 바로 눈앞의 고갯마루에서는 활을 가진 자가 대 여섯이 서 있다가는

틈을 주지 않고 편전을 어지러이 쏘아대는데, 거리가 불과 삼십여 보 안팎이요 피할 사이도

없고 눈뜰 사이도 없이, 코를 싸쥐거나 눈을 씻으며 연기를 빠져나와 허방에 걸려 자빠진

자들이니 상투도 꿰이고 궁둥이에도 꽂히며 비명을 질렀다. 위에서는 뻔히 바라보며 손을

재게 놀려 쏘아 맞히는데, 아이들이 투호놀이 때에 살을 항아리에 던져넣듯이 재미삼아 싸

우는 양이었다. 예봉이 꺾인 것이다. 이미 혼란해진 대오를 정비하는 것은 앞으로 밀어붙이

거나 잠깐 뒤로 몰러나는 수밖에 없었으나, 그때에 최형기는 칼을 빼어들고 뛰쳐올라갔다.

위에서 편전을 쏘아대던 자들은 마음이 먼저 급하여 서투르게 살을 메기고 시위를 당기고

하는데, 최형기는 고함을 내지르며 칼을 휘두르고 달려갔다. 두어 개의 화살이 날아왔으나

하나는 엉뚱한 데로 흘러 지나가고 다른 하나는 휘두르는 칼날에 맞아 비껴버렸다. 살을 더

메기려다가 둘은 자리를 떠나 달아나기 시작하고 나머지 한 명이 담대하게 최형기를 노리면

서 시위를 당겼다. 뒤에서는 불속을 벗어난 장교들이 최형기의 뒤를 쫓아서 언덕으로 뛰어

오르고 있었다. 최형기는 앞에서 활시위 퉁겨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허리를 휘청 숙이면서

뛰어드는데 화살이 전립을 꿰고 멈추었다. 이미 댓 발짝 앞이었다. 활 쏘던 자가 황급히 돌

아서서 위를 바라고 뛰는 순간, 뒤미처 달려오던 포졸하나가 장창을 지남침으로 치켜들더니

곧장 던져버렸다. 장창은 계원의 등줄기에 정통으로 꽂혔고, 그는 멈칫하였다가 앞으로 넘어

졌다. 깊숙이 꽂힌 창대가 수직으로 곤두서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최형기가 먼저 언덕에

올라 쓰러진 자의 등에서 장창을 뽑았다. 그는 발로 시체를 뒤적여 보았다. 이어서 장교들과

창 가진 살수들이며 포수들이 올라왔다.

"길라잡이가 어디 갔느냐?"

"저 밑에 있습니다. 살을 맞았지요."

최형기는 다시 부장에게 말하였다.

"얕볼 놈들이 아니다. 지세를 타고 용병하는 것을 보니, 제법 조련이 된 놈들이로다."

"이대루 밀고 올라가지요."

부장은 전립을 벗어버리고 안면에 줄줄 흘러내리는 땀과 그을음을 소매로 닦아내고 있었

. 최형기가 언덕 아래를 돌아보며 눈짐작을 해 보았다.

"다친 아이들이 몇이나 되는가?"

부장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대여섯이 쭈그리고 앉거나 서 있었다.

"어찌되었느냐?"

부장이 물으니, 아래에서 포졸하나가 대답하였다.

", 그저 팔이나 궁둥이나 허벅지에 살을 두어 대씩 맞았습니다만, 눈에 맞는 사람과 명치

에 맞은 사람은 혼절해 있습니다."

최형기가 물었다.

"길라잡이는 어떠한가?"

"저는 걸을 수 있습니다."

길라잡이로 나섰던 거사가 스스로 대답하며 올라왔다. 살펴보니 그 자는 왼쪽 팔뚝에 꽂힌

편전을 그대로 달고 있었다. 최형기가 살피고 나서 말하였다.

"유엽전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어서 뽑아주도록 하여라."

어리둥절해하는 사내의 양옆에 포졸 두 사람이 달려들더니 그를 꼼짝 못하도록 껴안았고,

포교가 단검을 뽑아서 거꾸로 쥐고 그의 팔뚝을 잡았다.

"촉을 뽑으려면 살을 헤쳐야지."

다른 포졸은 무명 수건을 내어 사내의 입끝에다 물려주었다. 사내가 두 눈을 부릅떴고 드

디어 수건을 뱉어내면서 마음껏 소리를 지른 뒤에 편전이 뽑혀 나왔다. 길라잡이는 긴 한숨

을 토해냈다.

"길이 외줄기뿐이냐, 아니면 저 뒤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

틈을 주지 않고 최형기가 물으니, 사내는 아직도 헐떡거리면서 왼쪽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손가락질하였다.

"저쪽으로 나아가면 석성의 왼편으로 닿게 되어 있습니다."

최형기는 산등성이를 따라서 시선을 죽 돌려보았다. 산줄기는 위로 뻗어나가 골짜기를 막

고는 우뚝 솟은 노적봉의 아래턱으로 모이고 있었다.

"부장은 포수들을 데리고 저 등성이를 타고 적굴의 머리 위에까지 나아가라. 나머지는 나

를 따라서 이대로 밀고 올라간다."

최형기가 부장에게 일렀다. 그들은 골짜기를 가로질러 가파른 바위를 타고 벼랑으로 오르

기 시작하였다. 최형기는 척후를 앞세워 보내고 한 사람에게 열 걸음씩 떨어져서 오르도록

하였다. 골짜기의 간격이 차츰 좁아지면서 길도 가파르고 험해졌다. 오른쪽으로는 중흥사로

오르는 샛길이 트여 있었는데, 그대로 오르니 시야가 툭 터지면서 마른 풀이 자란 넓은 비

탈이 나왔다. 왼쪽 우묵한 곳에 울창한 숲 사이로 움집의 초가지붕들이 보였다.

"저깁니다."

길라잡이 사내가 손가락질을 하였다. 최형기가 영을 내리기도 전에 포졸들은 좌우로 흩어

지더니 창을 겨누고 몸을 낮추어 뛰었다. 뒤따라 뛰려던 최형기는 그때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 정면 노적봉 쪽을 올려다보았다. 석성이 둘러 있었고, 석문이 빼꼼하게 입을 벌리고 있

었다. 최형기는 첫눈에 진법을 아는 자 같으면 그 안에 방어진을 치리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보나마나 비어 있는 껍데기일 것이었다. 그러나 최형기는 모른 척하고 적

당의 은신처를 향하여 뛰었다. 먼저 각 움집과 석굴 안을 뒤지고 나온 포졸과 장교가 고하

였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옷가지 몇벌뿐입니다."

하면서 그들은 아낙네의 치마와 헝겊 보퉁이를 내던졌다. 최형기는 소굴 뒤로 치솟아올라

간 벼랑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당도한 부장이 아래를 향하여 손을 흔들고 있었다. 최형기는

오른쪽의 노적봉 쪽을 가리켜 보이며 몇번 찌르는 시늉을 하였다.

"놈들은 성터에 숨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대를 나눈다. 좌대는 석성의 측면으로 돌고 우대

는 곧장 올라가되 간격을 띄워서 오른다. 위에 포수가 있으니 저항이 그리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형기는 우대를 이끌고 비탈진 풀밭으로 나아갔고, 좌대는 석굴의 암반을 넘어 왼편으로

바짝 나아갔다. 아니나다를까, 그들이 드넓은 풀밭 가운데로 나아가자 태평소 소리가 길게

한번 들렸다. 그리고는 위에서 지축을 흔들면서 큰 바윗돌이 굴러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아서서 뛰려는 포졸들에게 최형기가 외쳤다.

"돌아서면 죽는다. 앞을 보고 피하여라."

산등성이 위에서 부장이 성 안을 들여다보며 화승총을 쏘게 하였는지. 콩 볶듯 한 방포 소

리가 들려왔다. 바위는 쿵쾅거리며 사정없이 굴러내렸고 최형기도 등줄기에 식은 땀이 돋을

정도였다. 그는 방금 제 몸집의 두어 배는 되어 보이는 바위를 피하느라고 오른편으로 납죽

엎드렸던 것이다. 멀리 숲의 나무에 가서 부딪는 소리와 골짜기로 계속 굴러 내려가는 소리

가 요란하였다. 왼쪽으로 석성의 바로 밑에까지 당도한 좌대가 와, 하는 함성을 내지르며 뛰

고 있는 게 보이자 최형기도 벌떡 일어나서 석문을 향하여 뛰었다. 그들은 물꼬를 빠져나가

는 거센 물길처럼 석문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멀리 툭 트인 분지를 달리는 적당들의 모습

이 보였다. 계속해서 화승총 놓는 폭음이 온 산을 울렸다.

중길은 산성을 빠져나가려는 노적봉을 지나 암벽의 동쪽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퇴로가 없다

는 것을 잘 알았다.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다가 다시 북으로 나가는 산등성이를 따라가면 우

이암이 나오는데 거기서부터는 산줄기가 도봉에까지 연이어 있는 것이었다. 관군들이 석성

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그들은 예정했던 대로 노적봉을 바라보고 뛰었다. 벼랑위에서 탄환이

비 오듯 떨어져 내려왔다. 석성의 동문을 향하여 뛰는데 일행 가운데 몇명의 계원이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중길은 계원 가운데 하나라도 산 채로 잡혔다가는 다시 두번째 은신처까지

알려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들쳐업고 뛰게."

중길은 스스로 계원 하나를 부축하여 겨드랑이에 끼면서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 나는 틀렸어요."

명례방 총각이 붉게 물든 앞가슴을 누르면서 뒤로 반듯이 누워버렸다. 중길은 먼저 부축했

던 자를 다른 계원에게 넘겨주고 나서, 총각을 끌어올렸으나 그는 전신에 맥이 없이 흐늘흐

늘하였다. 뒤에서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관군들이 너무도 똑똑히 보였다.

"자네, 포청으로 잡혀가면 알지?"

중길의 말에 총각은 숨은 거칠게 내뿜으면서 중얼거렸다.

"억기 같은 꼴이 되기는 싫어요. 차라리... 찔러주시우."

중길은 서슴지 않고 창포검을 뽑았다. 그는 다시 한번 관군들을 바라보고 나서 총각의 눈

을 바라보며 칼을 쳐들었다.

"잘 가거라. 후생에는 부디 노비로 태어나지 마라!"

그는 칼을 총각의 왼쪽 가슴에 깊숙이 꽂아넣었다가 뽑아내고 다시 턱밑을 찔렀다. 두 번

째 찌를 때에는 칼끝에 아무런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중길은 돌아서서 뛰는데 뜨거운 눈물이 뺨을 적셨다. 저들이 죽은 자의 시신을 어찌할 것

인가. 아마도 그 아이는 약올리듯 무방비한 자신의 몸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적에게 이렇게

알릴 것이다.

그래, 나는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훨훨 자유롭게 놓여났다.

중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탄환이 그의 석 자 남짓한 몸 뒤로 어지럽게 날아 지나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노적봉을 돌아서 성문으로 빠져나오니 곧 눈앞에 깊은 숲이었다. 이제

위기는 벗어난 것이다.

"여기 매복하였다가 관군을 몰살시키자."

계원들이 분이 나서 그렇게 주장하였으나 먼저 보낸 식솔들이 걱정이었다. 아마 이것이 마

지막 싸움이었다면 그가 누구보다도 관군을 맞았을 터였다. 그러나 살주계는 결정적인 때를

위하여 살아남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숲속으로 숨어버리면 관군은 더이상 쫓지 않을 걸세. 어서 우이암으로 내려가세."

그들은 길을 피하여 골짜기를 가로질러 험하고 가파른 산비탈을 타고 내려갔다.

삼각산의 북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니 곧 우이암의 부드러운 능선이 나타났다. 그들은

거기서 한숨을 돌리고 도봉을 향하여 걸었다. 중간에서 먼저 와서 기다리던 아녀자들과 만

나니 중흥동 싸움은 이렇게 반나절 사이에 끝나버렸던 것이다.

5

중흥동 싸움이 있은 지 달포나 지나서였다. 민심은 찬바람이 불수록 더욱 흉흉해졌고,

강의 거래도 이제는 거의 끊겨서 성내에서도 굶주리는 집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아직 아사

자나 동사자는 나오지 않았으나, 나라에서는 각 활인서에다 기민 구제를 지시하고 있는 형

편이었다. 중량포에서 청량고개를 넘어 돌곶이를 건너면 바로 고암 오거리가 나오게 되는데,

이는 양주 포천로와 홍인문으로 들어가는 한양 직로가 나오게 되는데, 이는 양주 포천로와

홍인문으로 들어가는 한양 직로가 만나는 곳이었다. 부근에 동적전과 선농단이 있으니 임금

이 친히 밭을 갈아 여섯 가지 곡물을 천신하는 곳이다. 즉 땀흘리고 수고하는 백성들의 삶

을 나라님이 몸소 겪어 알게 한다는 곳인데, 바로 이 앞에 제기 고개요, 그 아래로는 왕십리

의 드넓은 벌판이었다. 역시 고암 오거리가 동북방이나 동남방으로 나가는 행객의 집결지가

되어 이른바 돌곶이 주막거리는 숭례문 밖의 청파나 석우처럼 저자가 제법 번성한 곳이었

. 예전에 임금이 박은의 청렴을 귀히 여겨 하사하였다는 북바위밭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주막거리는 돌곶이내와 고암 오거리 사이에 줄지어 있는데, 철은 이미 늦가을이요 경기가

없어서 가끔 지나는 원행객이 잠깐 서서 막걸리 잔이나 비우고 떠나는 정도였다. 주막거리

만 벗어나면 답십리와 왕십리의 벌판에서 몰아쳐 오는 바람이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는 쓸쓸

한 곳이었다. 주막거리 뒤에는 드넓은 채소밭이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마저 추수가

끝나서 벌건 흙이 드러났고 군데군데 거름 구덩이만 패어 있을 뿐이었다. 마방이 딸린 큰

주막이 있었는데, 난데 없는 객줏집이었다. 주로 동북방의 물건과 교환되는 곳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집 주인은 최덕구라는 양주의 난전 왈짜출신인데, 서강의 모신이나 고달

근이네 솔부리 일당들과도 친숙하게 지내고 있었다. 비록 검계에 들지는 아니하였으나 그들

과 한통속이 되지 않고는 인근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덕구는 중길

과 달근의 청에 의하여 서강에서 중량포로 실어온 곡물을 밤마다 마필로 실어다가 창고에

은닉하여주었다. 중길은 그것을 다시 양주로를 거쳐서 도봉 서북편의 은신처에 운반하였던

것이다. 고달근이는 그들이 남아 작은 벌이라도 하기를 지시했던 것이다. 마침 중량포에서

간밤에 곡물을 실어나르고 중길이네 살주계 일당들도 덕구네 주막에 묵고 있었다. 산지니와

시동이 그리고 솔부리 졸개들은 뒤꼍에 으슥한 물주의 방을 차지하고 앉아서 둘려태기를 하

는 참이었다. 예순 장을 한 목으로 하여 하나에서 열까지의 수를 매긴 것을 여섯 장으로 구

성하는데 예순장을 다 쓰기도 하지만, 돌려태기나 가보잡기는 마흔장을 쓰는 것이다. 그들은

고작 술 받기 내기나 하는 것이었다.

", 빨리 쳐야 투전이지. 공부하여 과시에 나가려는가."

"이런 젠장맞을... 한 자이 안 맞는데 그래."

이렇게 시시껍절하니 시간을 패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중길이의 꺼칠하고 마른 얼굴이 나

타났다.

"벌써 손돌바람인가. 등짝이 시린걸. 바람 닫아, 문 들어와."

시동이도 곁말을 써가며 중길이를 반겼다. 그러나 중길이는 그들의 한가로운 모습에 불쾌

한 듯하였다.

"배에 발기름이 끼었군."

시동이가 그제사 패에서 눈을 떼며 중길을 돌아다보았다.

"어서 들어오든지 말든지, 문을 닫으라니까. 비싼 광나루 장작 때구 덥힌 구들이여."

중길이는 입맛을 다시며 들어와서 윗목에 앉았다. 산지니가 눈치를 채고 먼저 패를 버리면

서 물었다.

"한양 소식은 어떠우?"

중길이는 안색이 흐려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둘이 국중문에 죽었고, 나머지는 새달에 처형이 되는 모양이우."

산지니는 아무 말이 없고, 시동이가 지패를 때리면서 중얼거렸다.

"언제 그 최가란 놈의 뒤통수에 바람 구멍을 내줘야지."

"언제 말이오?"

중길이가 놓치지 않고 말꼬리를 붙잡았고 시동이는 잠깐 머뭇거렸다.

"글쎄... 집만 안다면야 기다렸다가 한방 먹일 수가 있지."

"집은 알구 있지. 배오개 부근이오."

시동이가 뒤늦게 패를 놓았고 판은 흐지부지되어버렸다.

"가만있자, 배오개라면 더욱 좋은 데가 아닌가. 저자의 한가운데로군."

"이댁 주인장네와 거래가 있는 어물전이 많지요."

시동이는 자신있게 말하였다.

"심심한 판에 그 자식이나 급살을 놓아야겠군."

그러나 중길이는 그를 믿지 않는 태도였다.

"최형기는 그렇게 단숨에 죽일 상대가 아니우. 계획도 세워야 할 것이고 순서가 있어야 될

거요."

"그놈이 칼이나 좀 휘둘렀지. 날아가는 콩알을 젓가락으로 집을 건가 손가락으로 퉁겨낼

텐가. 내게 맡기시우."

산지니가 중길에게 물었다.

"어찌 짐은 다 부려놓았소?"

"어젯밤에야 끝냈지요. 모두들 떨어져서 곤히 자구 있소."

"산으루 올라갈라우?"

중길이는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우리만 편안히 양식 짊어지구 앉아서 겨울을 날 수는 없소이다. 한양으로 들어가서 무슨

짓이든 벌여봐야죠."

산지니와 시동이도 묵묵히 대답이 없는데 중길이가 재촉하였다.

"일전에 여럿이 있을 적에 약조를 했었지요? 검계에서도 우리 일을 도와주겠다구 했는

..."

산지니가 시동이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가 최형기를 맡을 텐가?"

"살주계에서 준비만 해준다면야, 어려울 것이 없지."

시동이는 황회와 더불어 검계에서는 누구보다도 화승총에 자신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삿

자리에다 반들반들하게 닦은 총포를 감추고 다녔다.

"그런데 문제는... 방포를 하고 나면 뛸 데가 없어 걱정이지. 산이라면 몰라두."

중길이가 말하였다.

"단방에 맞히기만 한다면 별로 걱정할 게 없소. 동부 살주계의 태반이 성내에 남아 있으니

까 모두 손발이 되어줄 거요. 최형기는 언제나 야간 기찰까지 끝내고 삼경이 되어서야 돌아

옵니다. 지금 한양은 민심이 들떠서 밤만 되면 모두 대문을 굳게 잠그고 출입을 삼가는 형

편이우. 포도청의 기찰을 잔뜩 혼란시키고 최형기를 곤경에 빠뜨릴 묘안들이 있습니다. 우리

계에서 며칠 동안에 도성을 들끓게 해놓을 수가 있소."

산지니가 물었다.

"그 묘책이란 어떤 거요 ?"

"차차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 해치울 자가 있지요. 억기라구 우리 계원이었고

북성이와 함께 남부 살주계의 모임을 팔아먹었다는 놈 아니오."

"그렇소. 그자가 청파 당마을서 삼패의 계집과 외거하는데, 소문을 들으니 요즈음에 포청에

서 상금까지 받고 나와 거기 박혀 있다는 게요. 내가 가서 그자의 목을 베어 우리 계원들의

원한을 갚아주고 싶지만, 우리는 모두 얼굴을 알아서 어찌 손쓸 방도가 없습니다."

", 팔자 험하군..."

산지니가 픽 웃으며 말하였다.

"한번도 상면하지 않았던 자를 죽여야 할 테니까."

"그놈두 지금 무척 괴로울 겁니다. 차라리 장하에 죽는 게 낫지요. 시일을 끌다 보면 그자

는 아마 처자식을 데리구 한양을 떠나 산간에 숨어 살게 될지두 모르지요."

"내버려두면 안되우. 북성이의 시신이 상전의 손으로 나무에 매달렸듯이. 우리두 억기놈의

시신을 양반들에게 보여주어야 하우."

산지니는 제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게 맡기시우."

중길이는 아까보다 훨씬 얼굴이 밝아지고 있었다. 원래 피를 흘린 자가 일에 열을 내게

마련이고, 그 고통을 많이 당한 편일수록 긴장을 늦추지 않는 법이다. 달근이나 시동이나 재

물 터는 길에 재미가 붙었달 뿐, 그렇게 살과 피가 떨리고 뛰는 명분은 없었으나 노비는 중

길이는 그의 전신이 양반에 대하여 열화와 같이 타는 불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는 중흥골의

석성 안에서 제 손으로 베어 목숨을 끊어주던 어린 총각의 젖은 눈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북성의 죽음은 뼛속까지 사무쳐 있었다. 그는 살아 생전에 도성의 두터운 담장안에서 짓눌

린 한숨을 쉬고 있는 수많은 노비들이 노적을 불지르고 춤을 추면서 달려나올 그 날을 못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살주계는 마른 짚더미에 불을 당길 관솔의 작은 가지가 될 것

이었다.

"제일 먼저 억기를 죽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한양의 민심을 소란하게 하지요. 최형

기는 그쯤에 가서 해치우는 게 좋을 듯하우. 도대체 검계에서는 언제 한양을 뒤집을 작정이

."

"우리가 그런 큰 일을 어찌 알겠소. 아직 때가 익지 않았다고만 합디다."

산지니는 풀어놓았던 행전을 치고 토시를 끼었다.

"행수가 같이 갈 거요?"

중길에게 물으니 그는 손수건에 싼 단도를 내주었다.

"집을 자세히 가르쳐드리지요. 그자에게는 기찰포교인 듯이 행세하시우. 틈을 보아서 찌르

, 여편네를 꼼짝 못하도록 하든지 처치하든지 하고 나서 서강 모신이네로 가십시오. 우리

는 거기 가 있을 작정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일어서지. 중화는 청파역에서 해야겠군."

시동이가 따라 나서며 산지니를 불러 세웠다.

"헌데 달근이 성님이 뭐라구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지사네 집을 들이칠 적에 그런 수고를 끼쳤고, 또한 이번에 저 사람들이 액을

당한 게 우리 일 때문인데 사람이 의리상 어찌 모른 척하겠는가."

"허긴 그렇지. 잘 다녀오게. 나는 탄환이나 잘 재어두었다가 그 종사관 녀석의 해골이나 뚫

어줄 테니까."

"모레쯤 중량포로 하여 돌아오지."

산지니가 마당으로 나가니 중길은 계원에게 봇짐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만져보니 북어인

듯싶은데 포교들의 눈을 속이자는 모양이었다.

"칼은 행전 안에 숨기시우. 요사이 문마다 포교들이 나와서 지킨다는데, 혹시 몸뒤짐을 당

할지두 모르지요."

산지니는 행전을 풀고 바짓가랑이에다 단도를 넣고 칭칭 동여매었다. 머리 위에는 패랭이

쓰고 긴 저고리 걸치고 봇짐을 짊어지고 나서니 그럴 듯한 보부상 차림이었다.

제기고개를 얼른 넘고 안암천을 훌쩍 건너 동모를 지나니 바로 눈앞에 홍인문이었다.

앞에 당도하니 길이 막혀서 사람들이 하얗게 늘어섰고, 산지니는 그들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가 보았다. 역시 중길이의 말대로 포교 두 사람이 나와서 포졸들과 함께 행객의 짐과 몸

을 뒤지고 있었다.

"웬 예미랄 거, 맨날 잡지도 못하고 맨 꽁무니만 당하면서 약한 백성들만 볶아대는 구나."

"누가 아니래. 나는 시방 백여 리를 돌구 겨우 좁쌀 두어 말 구하여 돌아오는데, 아이들이

죽 먹은 지가 근 열흘째나 되었네."

"미친놈들... 이렇게 못살게 구는데 배가 고프지, 나두 눈이 뒤집히면 대관의 집 뛰어넘어

들어가 쌀섬을 지구 나오겠네."

모두들 열지어 서서 이러쿵저러쿵 불평들이 대단하였다. 산지니도 옆에 섰다가 차례가 되

어 앞으로 나아가니 우선 보퉁이를 끌러놓으란다. 곁눈질로 바라보니 상인들이 인정으로 두

고 간 곡물이며 어물이며 시시한 물건들이 제법 더미를 이루고 한쪽에 쌓였다. 기찰한답시

고 핍박하여 스스로 내놓고 가도록 만든 것이었다. 산지니도 눈치가 멀건 송파의 왈짜 출신

이라 보퉁이를 풀면서 손을 넣어 북어 열 마리 꿴 노끈을 들어 슬그머니 무더기 위에다 떨

구었다. 그리고는 앞에 서 있는 포교에게 은근히 말하였다.

"추운 날씨에 고생이올시다. 어한술 한잔 드실 적에 안주나 하시우. 이건 특상의 원산 말뚝

입지요."

", 이 사람 재간꾼이로군."

껄껄대면서 포교는 몸뒤짐은 않고 보퉁이를 들어 내밀었다.

"장사치는 일각이 만 전이라, 어서 가서 장보게나."

산지니는 이렇게 어물쩍하니 홍인물을 지났다. 저러니 아무리 적경이 급박하여도 남한산성

만한 코를 벌린 그물처럼 걸려들 고기가 없는 기찰이었다. 산지니는 예정했던대로 중화참의

시장기가 날 때쯤 하여 숭례문을 나섰고, 배다리를 건너 청파역에 당도하였다. 그는 보행 객

주에 들러 북어 몇마리 내주고 조밥을 짓게 하여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행전에 동였던

비수를 품속에 넣었다. 칼날이 가슴에 닿자, 이제까지 희미했던 살의가 돌연 차갑게 곤두서

는 느낌이었다. 산지니는 이 길로 당마을을 찾아가 결행할 것인지, 아니면 밤이 되기를 기다

려야 할지를 생각해보았다. 밤에 가는 것이 남의 눈에 띌 염려도 없고 달아나기도 수월하겠

지만, 문이 닫혀진 도성 안에서 우물쭈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해치우자마자 도성

을 빠져나갈 일이 제일 중요할 것 같았다. 적경이 나고 보면 성내에 포졸들과 순라들이 하

얗게 깔릴 것이다. 지금 찾아가서 재빨리 해치우고 서강의 모신이네로 달려갈 결정을 내리

고는, 산지니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고 남은 북어를 다 내주고 화주 한 병을 구해다 마셨다.

역시 술이 들어가니까 뛰던 가슴이 착 가라앉았다. 산지니는 품속에 지닌 단도를 다시 한번

매만져보고 나서 주막을 나섰다. 멀리 당마을의 동가가 보였고, 그는 과연 낯도 모르고 원한

도 없는 상대를 죽일 수가 있을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그의 어디를 찌를까. 가슴을 깊숙이

찔러야 할 것이다. 만약 그가 사죄의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한다면 쉽게 칼을 꽂을

수가 있을까. 또한 그의 시구들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억기만을 처치하고 식구들을 놓아둔

채로 달아났다가는 자신의 용모파기가 포도청에 의해서 돌려지게 될 것이다. 그들까지 죽여

야만 후환을 근절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가슴에 묵지근하게 눌러오는 단도의 무게를 실감

하면서 산지니는 당마을로 들어섰다. 그는 살주계에서 알려준 대로 대추나무가 섰는 골목으

로 들어서서 헤아려나갔다. 네 번째 집의 삽짝문이 보였다. 산지니는 긴 숨을 내뿜고 침을

삼키고는 잠깐 멈추어 서서 억기네 집의 울타리를 노려보았다. 산지니는 삽짝 안으로 들어

섰다. 마당에서 절구질을 하던 아낙이 지난번에 혼뜨검이 났던 적이 있는지라 겁먹은 표정

으로 물었다.

"에그머니... 그렇게 아무 기척두 없이 남의 집엘 들어오면 어찌해요?"

산지니는 웃는 얼굴을 지으며 정중하게 말하였다.

"실례가 많네. 나는 좌포청의 나그네인데 주인 좀 만나러 왔네. 억기 있는가?"

안방의 미닫이가 천천히 열리고 억기의 초췌한 얼굴이 내밀어졌다. 억기는 산지니에게 누

구시더라, 하는 낯을 보이면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산지니는 서슴지 않고 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서면서 말하였다.

"최종사께서 좀 다녀오라는 분부가 계셔서 찾아왔네.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억기는 말없이 아랫목의 한편을 비워주고 물러나 앉았다. 산지니는 억기의 풀려진 눈동자

와 꺼칠한 안색에서 요즈음의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읽을 수가 있었다.

"중길이란 자를 잘 아는가?"

산지니가 물었으나, 억기는 얼빠진 모습으로 미닫이의 격자창살을 물그러미 바라볼 뿐 대

답이 없었다. 산지니의 눈꼬리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그는 마당 쪽에다 신경을 곤두

세우고 무릎을 당기며 억기에게로 다가앉았다.

"어디 몸이 불편한 모양이군?"

산지니는 연신 바깥에 주의를 하면서 품속에 손을 넣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때에 억기

가 고개를 돌려 산지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생각이 났소. 나는 댁을 잘 압니다. 남별대에서도 만났고, 쌍이문방 바침술집에서두

뵈었습니다."

산지니는 흠칫하면서 놀랐다. 그는 억기의 눈 속을 노려보면서 공격하려는 짐승이 으르렁

거리듯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두 잘 알겠군."

억기의 눈 속에 물기가 괴고 있었다. 산지니는 먹이가 손안에 들어 온 것을 확인하고는 슬

그머니 품속에서 손을 빼었다.

"중길이의 말을 전하러 왔소. 남별대에서 계원들이 모두 잡혔고, 중흥골도 토포를 받았소.

북성이는 입을 다문 채 장하에 죽어 나무에 매달렸소. 한 목숨으루 갚아질까?"

억기는 탈진한 사람처럼 표정 없는 얼굴 위로 눈물을 흘렸다.

"알구... 있습니다. 그러잖아두 중길이를 만나러 찾아 나설 생각이었습니다."

"중길이가 있는 데를 알구 있소?"

"서강으로 가서 물어볼 참이었죠."

산지니는 흠칫 놀랐다.

"서강의 누구 말이오?"

억기는 다시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턱밑에 번진 물기를 손등으로 훔쳤다.

"서강에 가면 연줄이 닿을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젠 늦었소. 아무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

산지니는 한 손으로 억기의 멱살을 잡아끌면서 단도를 뽑았다. 억기가 그의 손목을 마주

잡으면서 말하였다.

"잠깐만... 제발 저것들은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저는 죽어두 여한이 없지만은 저것들은 아

무 죄두 없습니다."

산지니는 억기의 손목을 뿌리치고는 단도를 그의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억기의 질린 눈이

산지니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으며, 산지니의 손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 수많은 노비들의 원한의 삶을 뭉쳐서 이 비겁한 자를 처단해야만 한다. 그러나

산지니는 억기를 차마 찌를 수가 없었다. 산지니는 얼굴을 거칠게 흔들면서 칼을 방바닥에

다 꽂아버렸다. 억기는 칼이 거두어진 것을 보자, 제정신이 들었는지 뒤로 물러나 앉았다.

"모두 지나간 일이 아닙니까? 이제 한양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고장에 가서 숨어 살렵니

. 포청에서두 더이상 제게 물어볼 말이 없을 겁니다."

억기가 첫눈에 산지니를 대했을 적에는 양심의 가책에 값할 양으로 목숨을 포기했었고 따

라서 의연하고 담담했건만, 이제 삷의 빛이 한오라기 새어드는가 싶자, 거기에 옹졸하고 치

사하게 매달리는 태도가 되었다. 억기는 눈을 빛내면서 벽장을 열고 다급하게 부담농을 꺼

내었다.

"... 이게 제가 포청에서 받은 제물이올시다. 이것을 계원들에게 내놓겠습니다."

차라리 억기가 끝내 목을 떨구고 죽음을 기꺼이 맞는 태를 보였더라면, 산지니는 결코 무

방비한 그를 찌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부담농의 뚜껑이 열리자, 그 안에서 비단과 돈꿰미가

내보여졌고, 그것이 산지니의 수그러졌던 살기를 돋우었다. 산지니는 방바닥에 꽂힌 단도를

집자마자 그대로 억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억기는 짤막한 소리를 내지르고 잠깐 동안

눈을 부릅뜬 채 앉았더니 뒤로 넘어졌다. 산지니도 스스로의 동작에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콸콸 솟아나온 선혈이 부담농 위로 번져 비단을 적셨다. 뒤에서 미닫이가 열리면서 아낙네

가 부르짖었다. 산지니는 아낙네를 떼밀고 신발을 대충 꿰면서 밖으로 달아났다. 산지니는

억기의 처를 죽일 사이도 없이 골목을 뛰쳐나왔다. 그는 얼마쯤 뛰다가 다시 되돌아가서 억

기네 식구를 처치할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때가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산지니는 만리재를

넘고 창천내를 따라서 서강으로 나아갔다. 모신이네 주막에는 중길이와 살주계 계원들 몇이

먼저 당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산지니는 얼굴이 창백했고, 그들을 만나서도 침울하게 말을

않고 있었다.

"억기는 어찌되었소?"

"처치했소."

산지니의 말에 중길은 손목을 덥석 잡았다.

"잘되었습니다. 뭐라구 그러던가요... 아무 말 없던가요?"

산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중길이 다시 물었다.

"그 식구들은?"

"그냥 내버려두었소."

중길이는 팔짱을 끼고 어두운 낯으로 생각에 잠겼다.

", 일이 복잡하게 되겠군. 최형기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중길은 산지니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다. 그에게는 억기를 향한 뚜렷한 증오가 없었을 것이

. 그리고 산지니는 천예로서 상전의 부림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중길이 말하였다.

"억기는 나와 형제간이나 다름없던 사람이우. 누구보다두 내가 잘았지요. 너무 깊게 생각

마우. 오늘 돌곶이로 나가시렵니까?"

"이 집 성님께 물어봐서, 배가 있으면 나갈 참이오."

"가시거든, 시동이에게 사람을 보내겠다구 전해주시우. 우리는 어두워지기 전에 성내로 들

어갈 생각이우. 오늘부터 민심을 일으킬 방문을 곳곳에 붙일 거요. 그리고 틈이 보이면 포청

을 들이쳐서 계원들을 살려내든지."

중길이는 다시는 산지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저희끼리 방 붙일 일을 논의하였다.

"먼저 사람 눈에 가장 많이 띌 곳에 붙여야 하네. 사람의 출입이 번잡한 흥인문과 숭례문

의 성벽이나 바깥 문에 붙이든지, 근처의 가가 담벼락에 붙이면 될 게야."

다른 계원이 덧붙였다.

"원한이 깊은 벼슬아치들의 집 담벽에도 붙여야지. 목내선의 집은 언제 들이칠 작정인가?"

"최형기는 특히 목내선의 집 주위를 엄중히 기찰하고 있을 게야. 그의 혈육붙이로서 그럴

듯한 집을 알아내어 보복을 해야지."

중길이가 어디서 준비해왔는지 여러 장의 방문을 꺼냈다.

"먼저 방을 붙이는 일보다두, 잡히지 않는 일이 더욱 중요하네. 짐승이 사냥을 나가더라도

제 구멍을 먼저 파두는 것처럼 말일세. 자기 안전을 돌아보지 않고는 아무도 싸움을 해나갈

수 없지. 절대로 잡힐 짓은 하지 말아야 하네. 그리고 방을 붙일 장소를 고를 때에도 세 가

지로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있네. 첫째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효과적인 장소인데 위험

이 큰 경우, 둘째는 위험도 있고 효과적인 반반인 경우, 그리고 셋째로 많은 사람이 볼 가망

은 적으나 위험이 없는 경우로 나눌 수가 있겠지. 언제든지 세번째 장소가 가장 맞춤한 곳

일세. 그러한 장소를 보아두고 제각기 두 번 이상씩 주위를 살펴 퇴로와 은신처를 익히려면

미리 연습을 해야 될 것이네. 그냥 무턱대고 아무런 준비 없이는 절대로 방 붙일 생각을 말

. 방을 붙이거나 담장 안으로 던져 넣은 뒤에는 되도록 빨리 위험지역을 벗어나야 하네.

그러나 의젓하고 태연하게 서두르지 말고, 사람들 틈에 섞이는 게 좋겠지. 우리 일은 민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기도 하지만, 적을 괴롭히고 혼란시켜서 빈틈을 얻어내는 도전이기도 한

게야. 오늘은 성내로 들어가서 임시로 서로 연락할 수 있는 곳을 먼저 정해두고, 내일은 우

리가 방을 붙일 장소를 한번 둘러봐야겠지. 위험한 일을 하려면 먼저 계원들을 신뢰해야 될

게야. 적이 우리를 다 알고 있는 듯이 그러지만, 대개는 아무것도 모르거나 아주 작은 단서

를 붙잡고 씨름중이거나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저들을 훤히 볼 수가 있지만 저들

은 우리를 모른단 말이거든. 언제나 사람들 틈에 있을 것, 호젓한 곳은 우리를 튀어나오게

한단 말이야. 절대로 계원 혼자 밖으로 튀어나와서는 안되네. 우리가 앞으로 열흘 동안 뛰는

사이에 절대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같은 장소를 피해야 될 것과, 다른 노비 동료들을 만

나지 말 것과, 연고 있는 집에 불쑥 나타나서는 안될 게야. 각자에게 있을 곳을 지정하여 줄

테고 내가 돌아다니며 연결을 할 테니까, 일이 없을 적에는 절대루 나돌아댕겨선 안되네.

런 일을 하는 동안에 가장 위험한 것은 같을 일을 하는 동료와 서로 만나는 일이니까. 우리

이제부터 서로를 적과 같이 위험스런 상대로 여겨야만 하네."

중길이는 살주계의 행수답게 조목조목을 들어 차분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방문을 한장씩

계원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일어섰다.

"돌곶이 주막과 여기 모서방네 주막은 이를테면 최후의 굴혈인 셈이지. 위험해지면 오히려

이곳으로 돌아오는 일은 피해야 하네. 누군가 잡히더라도 우연히 중길이를 만나 이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먼저 저쪽에서 알고 있는 청파의 난전을 대란 말야. 문어발처럼 하나

씩 떨어져나가두 몸통은 남을 테니까. 자아, 나가세. 한양의 천예들은 지금도 우리의 결행을

날마다 기다리구 있네."

그들은 모신에게 부탁하여 각종의 봇짐과 부담을 준비해두었는데, 모두들 행상으로 차릴

셈이었다. 중길은 그들에게 종루의 시전 객주, 서문 밖의 봉놋방, 이문 근처의 주막 등등으

로 임시 연락 거처를 지정하여주었다. 중길은 남부에 있는 믿을 만한 내수사 노비의 집을

거처로 정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모신이네 주막에서 두셋씩 나누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출

발하였다. 중길이는 일행 가운데 제일 끝으로 나오며 산지니에게 당부하였다.

"너무 심려 마우. 저들이 일년에 장하에 때려 죽인 천예가 수십 명이고, 혈육의 정을 끊고

여러 곳으로 팔려나가는 노비는 또한 수백이며, 접간당한 여종은 이루헤아릴수 없소. 양반에

억눌린 이들이 다만 쳔예들뿐이겠소. 당신들 같은 상한들도 갖은 수모를 겪지 않았소이까.

억기는 빚을 갚은 게요."

"잘 알구 있소."

"이제부터 정말 할 일이 많아질 겁니다. 최형기가 죽고 나면 검계와 살주계가 힘을 합치고

저자의 왈짜들도 끌어모아 큰 일을 도모하여봅시다."

중길은 모신이네 주막을 나섰다. 해가 강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한양의 들판

위로는 저녁 짓는 연기가 자욱하고 새떼가 천천히 날아가고 있었다. 중길이 보기에는 저 궁

궐의 영화도 한움큼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 듯하였다.

중길은 계원 한 사람을 데리고 숭례문을 지났다. 숭례문에서 동부의 연화방까지 가려면,

현방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천을 따라서 광통교에서 합치는 청계천을 가로질러, 종루로 들어

서서 이교를 건너면 바로 직통의 행보가 되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광통교와 종루는 기찰포

교의 복처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연화방에서 좌포청까지가 지척이었는데도 동부 살주계 계

원으로 내수사 노비의 집을 택한 것은, 바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이치를 따른 것이었다.

수사라면 궁의 살림을 맡은 곳이니, 거기 나가는 노비의 집을 아무리 천예라 하여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길이는 일부러 가까운 길을 버리고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회현방에서 남소문동으로 내려가는 목멱산 아랫녘 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서 청계천을 건너

면 동학동이요, 성북동의 매봉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천을 건너자 마자 연화방이 나왔다. 연화

방에는 문묘와 태묘가 있고 과동과 어의동이 있으며 호동과 연동이 있으니, 그중에서 호동

은 누렁다리를 사이에 두고 밀집한 중인들과 상사람들의 집에 몰려 있는 곳이었다. 최형기

네 집 또한 누렁다리 개천 건너 배오개 부근이었던 것이다. 호동에는 옹기전이 많이 있었는

, 중길이가 찾아가는 집의 중인도 내수사의 오래된 옹장으로 외거하는 사람이었다. 깨어진

옹기 파편과 흙을 버무려 쌓은 널찍한 담 안에 초가삼간과 옹기 굽는 가마가 있었고, 지붕

만 이은 기다란 광에서는 흙으로 빚어놓은 옹기가 마르고 있는 중이었다. 중길과 계원이 들

어서니 초로의 집주인은 그의 떠꺼머리 아들과 점토를 고르는 참이었다. 가마 앞에는 생솔

가지 타는 매운 연기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서 오게. 자네가 올 줄 알구 저녁을 미루구 있었어."

검정 묻은 손을 저으며 주인은 그들을 건넌방으로 안내하였다. 그의 아들도 중길에게 싱긋

웃어 아는 체를 하였다. 중길은 아주머니에게 보퉁이에 넣어온 서강의 유명한 간 절인 비웃

을 내밀어주었다.

"여기서 며칠 지내두 괜찮을까요?"

중길이 집주인에게 물으니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였다.

"염려 말게. 우리 집엔 가끔씩 궁의 수레나 드나들지 들여다보는 놈이 하나두 없다네. 그리

구 마음이 안 놓이면 저 뒤에 못 쓰는 가마가 있는데, 거적을 깔아두었으니 지낼만 할 게야.

여차하면 거기 숨어 있게나. 밖으로 볼 때는 시늉만 해놓으면 설마 그 안에 사람이 숨은 줄

은 꿈에도 생각 못할 테니까."

중길이는 성내의 곳곳에 방을 붙일 일과 북성이의 죽음에 대한 보복을 할 일을 말하였다.

옹장이는 불안한 기색도 없이 아무쪼록 오랫동안 자기 집을 이용하여달라고 다짐까지 받는

것이었다. 중길은 한양의 살벌한 분위기에도 이렇게 살주계를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노비가 아직도 끊이지 않는 것이 눈물겨웠다.

"북성이가 맞아 죽어 나무에 매달린 일은 나두 자세히 들었네. 언제나 저놈들을 잡아 대궐

문 앞에 달아맬지, 그것만이 내 소망일세."

옹장이는 글을 아는지라, 언문으로 씌워진 방문을 하나씩 읽어보면서 눈을 빛냈다. 중길이

는 그로부터 호동에서 은신하여 장안을 시끄럽게 할 모양이었다.

도성이 다섯 구역으로 나뉘었으니 중부, 동부, 서부, 남부, 북부가 그것이다. 중부는 건천과

청계천이 합치는 영풍교에서 태묘와 창덕궁을 잇는 직로가 동부와의 경계이며 대광통교에서

안국방과 가회방을 이어서 북부와 경계가 된다. 동부는 배오개에서 누렁다리와 문묘를 잇고

홍인문 안과 타락산 아랫녘과 혜화문 안이 그 구역이다. 남부는 명례방 태평방으로부터 청

계천을 경계로 하여 목멱산 아랫녘과 광희문에서 오간수문까지이다. 서부는 숭례문 안의 서

쪽 남별영과 미동 소광통교에 닿고 서린방에서 경덕궁을 돌아 돈의문에 닿으며 돈의문에서

소의문과 숭례문 서쪽에까지 이르는 구역이 된다. 끝으로 북부는 삼청동에서 진장방과 수동

으로 하여 운종가를 경계로 돌아, 경덕궁 북편과 사직단에서 필운대 인왕산 기슭, 그리고 창

의문을 지나서 백악산에 이르는 지역이다.

흩어진 살주계 계원들은 동부의 연화방 옹장이 집에 중길이가 숨어 있었고, 서부는 이문

안에 숨은 패가 맡았으며, 북부는 소의문 밖 차동에 숨은 패거리가 맡았고, 남부와 중부는

중길이가 데리고 온 계원이 중부를, 이문 안에 숨은 패 중의 하나가 남부를 맡기로 하였다.

그러니 숨은 거처는 모두 셋이었다. 그들은 따로이 고정적으로 연락받을 장소를 정하였으니

서린 전옥서 건너편의 해정교 앞에 벌어진 저자였다. 그 저자에는 연화방 옹장이네 아들이

이른바 혜정교 잡전의 혼잡 가운데 옹기와 뚝배기 등속을 늘어놓고 지켜있었다. 중길은 저

녁녘에 파장이 다가올 무렵 그곳에 들러보았다. 그는 좌판 앞에 주저앉아 항아리 밑을 들여

다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두드리며 고르는 시늉도 하면서 옹장이 아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손님들이 다녀갔나?"

", 오정때쯤에 수렛골 손님과 이문 손님이 다녀갔습니다."

"장소를 보아두었다던가?"

"장소도 보아두고 퇴로로 정하였답니다. 이맘때에 와서 전갈을 받아 가기로 하였답니다."

"내일 파루가 되자마자 시행한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파루를 치지마자 일제히 말씀입죠."

중길은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는 혜정교에서 한구역 내려가 북으로 광화문까지 이어 있는

육조 앞길로 올라갔다. 안국방에서 내려온 길과 삼청동서 뻗은 세 갈래 골목과 사직단으로

나가는 길이 복잡하게 얽힌 쑥다리 앞에 와서 중길은 맞춤한 장소를 골라냈다. 벼슬아치들

은 물론이요 한양의 일반 상놈들의 내왕이 잦은 곳이었고, 관청에서는 떨어지고 저자에는

가까워 유리한 곳이었다. 중길은 퇴로를 살피려고 쑥다리에서 안국방으로 빠져나가다 철물

교로 하여 좌포청이 있는 정선방 파자교를 피하느라고 청계천 쪽으로 올라가 이교를 건너

연화방 호동에 이르는 길을 골라잡았다. 계속하여 관청 부근과 대로를 피한 셈이었다. 중길

이 저녁밥을 먹고 나니 혜정교 잡전에서 옹기짐을 지고 돌아온 총각은 계원들이 연락을 받

고 돌아갔음을 알렸다.

오경 삼점이 되었던지 인정을 치는 서른세 번의 종소리가 종루 쪽에서 들려왔다. 중길은

얕은 잠이 들었다가 퍼뜩 눈을 떴다. 그는 곁에 누워 있는 계원을 흔들어 깨웠다.

"어서 일어나게. 파루가 되었어."

계원은 꿈지럭거리며 일어나 앉더니 등잔을 밝히려는지 쌈지를 찾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곧 나갈 텐데 불을 켜서 뭘 하려나?"

"... 그렇지."

중길은 패랭이를 머리에 얹고 봇짐을 찾아들었다.

"자네가 맡은 장소가 어딘가?"

"중부 철물교 앞일세."

"잡곡전 앞이니 혹시 장사치의 눈에 띌지두 모르네. 자신이 없으면 아예 하질 말든지."

"글쎄 맞춤한 곳을 보아두었다니까."

두 사람은 함께 호동에서 이교 쪽으로 나왔다.

"그럼 나는 종루 앞 네거리에서 안국방으로 오를 테니 철물교까지 동행하세."

중길은 퇴로를 잡기를 철물교를 돌아 나오는 것이 아깝다고 여겼으나, 동료가 고른 지점과

겹치므로 그곳을 피하기로 하였다. 청계천을 따라가다니 수표교를 지나고, 광통교에 이르러

계원은 종루의 철물교쪽으로 올라갔다.

"사람이 없으면, 틈을 놓치지 말구 걸어버리게. 방문을 걸고는 이대로 왔던 길로 빠져나가

."

"알았어, 자네 몸조심이나 해여."

중길은 종루 앞을 가로질러 안국방을 돌아서 쑥다리 앞에까지 왔다. 순행도 그치고 삼거리

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날만 밝으면 관리들의 행차가 빈번히 드나드는 곳이

기도 하였다. 그러나 날만 밝으면 관리들의 행차가 빈번히 드나드는 곳이기도 하였다. 박명

가운데 다리의 돌 난간이 보였다. 다리 난간에 방을 걸면 여러 방향에서 똑바로 보일 듯하

였다. 중길이는 봇짐 속에서 접혀진 방문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폈다. 종이의 사방귀

를 뚫어 각각 작은 목편을 달아놓았는데 아무데나 걸치고 늘어뜨리기에 적당하였다. 중길은

그것을 돌 난간에다 걸었다. 새벽 바람에 팔락이는 방문을 남겨두고 중길은 걸음을 빨리하

여 안국방으로 빠졌다. 하늘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청계천으로 하여 이교를 건너

연화방 호동으로 오르기 전에 어의동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는 기다란 반화방 담장에다

방문을 걸고는 뛰어서 골목을 나와 침착하게 호동 쪽으로 올라갔다. 옹장이 집에 이르니 집

주인은 벌써 일어나 가마에 불을 넣고 있었으며 그 아들은 나무를 알맞게 자르는 중이었다.

"오늘이던가?"

옹장이가 묻자 중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각이 말하였다.

"다음번에는 나두 붙여주시우."

"아직 안 왔습디까?"

중길은 불안한 마음으로 마루에 앉아서 계원을 기다렸다. 중길보다 가까운 장소였고, 중길

이 두곳이나 거쳤는데도 그가 늦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지금 이 시각 한양의 곳곳에는

방이 걸려 있을 것이었다. 최형기의 눈이 뒤집히겠지. 벼슬아치들은 불안하여 포청을 달달

볶을 것이다. 성내로 들어와 일을 해치운 자들은 성문이 번화해질 때까지 새벽부터 붐비는

물다리 좌반전 근처에서 아침을 먹을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뛰어왔는지 중길의 동료는 땀을

흘리고 헐떡거리며 마당 안에 들어섰다. 중길은 마루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발각되었나?"

"아니야..."

그는 우선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바가지에 물을 가득 떠서 허겁지겁 마시는 것이었다.

"방문을 걸었나?"

계원은 한숨 돌리려는지 땅바닥에 질펀히 주저앉았다.

"걸긴 걸었는데 봐둔 곳에는 못했네. 새로 장소를 고르느라구 한참이나 싸돌아다녔지."

"차라리 그만두지 그랬어. 절대루 잡혀서는 안된단 말야."

"잡곡전 앞으루 가서 내가 봐둔 담장에다 걸어보려구 하는데 웬년이 꼭두새벽부터 나와서

키질이란 말야. 그래서 두 번이나 오르내렸네. 날은 훤해오지 안되겠데. 하는 수 없이 교동

쪽으로 올라갔다가 맞춤한 소나무가 서 있길래 가지에다 걸쳐두고 뛰었지."

"따르는 놈이 없던가?"

"길이 텅 비었더라니까..."

중길은 이제 한양 오부에 기찰이 좍 깔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천예들은 기뻐서 은밀히

수군거릴 것이고 상한들은 포청을 우습게 볼 것이며 양반들은 성내의 치안이 완전히 허물어

졌다고 두려워할 것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사흘 동안 은신처에서 꼼짝 않기로 하였다. 옹장

이 아들은 또 혜정교에 나가 좌판을 벌일 모양인데, 수렛골과 이문에서 살주계원들이 찾아

와 전갈을 하도록 되어 있었고 중길은 그들에게도 사흘 동안 꼼짝하지 말라는 전언을 보내

었다.

과연 한양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았다. 방문을 읽은 자는 누구나 주위 사람들에게 쑥덕

거렸다. 말이 옮겨지는 과정에서 방문의 내용은 점점 거창하게 불어났다.

"조정을 뒤집으려는 군사가 벌써 변복하고 양민들 틈에 끼여서 도성안으로 들어왔다는군."

"그 수가 삼천이라는데, 둔갑술에 용하다지."

"지난번에는 대갓집이 털리더니, 이번엔 어느 벼슬아치가 죽으려나?"

좌우 포청에는 위에서 내려온 질책과 압력으로 부장들이 포교와 포졸들이 핍박하여 분위기

가 살벌하였다. 최형기가 등청하였을 때, 대장 이인하는 격노하여 간밤에 분직하였던 부장들

에게 태형을 가하고 있었다. 최형기와 다른 두 종사관이 대장 앞에 나서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방문을 마루 아래로 내던졌다.

"큰 소리로 읽어보게."

서로 주뼛거리자 이인하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등채로 마루를 내리쳤다.

"도대체 종사는 무얼 하라는 직임인가. 성내의 곳곳에 이런 방문이 걸려서 오고가는 행인

과 조정 대신들이 모두 수군거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포청은 이제 무장공자가 되었다.

최종사, 그 방문을 좌우가 모두 듣도록 크게 읽으라."

최형기는 벌써 그 글을 눈으로 읽어서 차마 소리를 낼 수가 없었으나, 거역하지 못하였다.

"너희 양반들이 몇몇 계원들을 포득하였다 하나, 우리를 모두 죽이지 못하면 종말에는 너

희들의 배에다 칼을 꽂고 말 것이다. 성내의 천예와 억눌린 백성은 모두가 한편이니 서슴지

말고 일어나 상사람의 나라를 세우리라."

이인하는 등채로 종사관들을 똑바로 가리키며 외쳤다.

"이 길로 성내에 나가 살주계라는 적당에 든 혐의가 있는 자는 모조리 잡아내라. 닷새의

말미를 준다. 그때까지 방문을 돌린 자들을 잡아 내지 못하면 모두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

사대부의 집도 개의치 말고 수색하라. 자주통부가 선전청에서 내려왔으니, 주상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이다."

종사관들은 대장이 내려주는 자주통부 한 묶음을 받아들고 나와 부장과 포교들에게 단단히

이른 다음 나누어주었다. 자주통부란 나라에 급변이 일어났을 때, 선전청에서 임금께 아뢰고

양반과 벼슬아치를 수사 구금할 권한을 허락받는 것이니, 그만큼 적환이 위급함을 의미하는

표신이었다. 최형기는 간밤에 분직 교대하였던 포교들로부터 자세한 보고를 들었다. 방문은

한양 오부에 빠짐없이 내걸려 있었으니, 먼저 동부는 어의방 골목의 담장에 걸렸고, 서부는

황화방 한길 가에 걸렸으며, 남부는 수직 군사들을 조롱하듯 숭례문에 붙여져 있었으며,

부는 광화문의 코밑인 쑥다리 돌 난간에 걸렸는데, 무엇보다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좌포

청 대문에서 훤히 보이는 맞은편 교동의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최형기는 그것

이 중흥골에서 패퇴한 살주계원들이 다시 성내로 잠입하였다고는 여겨지지가 않았다. 방문

의 내용은 각기 달랐으나, 언문 글씨를 보건대 겉은 자가 쓴 게 분명하였다. 이처럼 한양의

곳곳을 가려서 방문을 퍼뜨린 것으로 보아 저들은 한양서 오래 살아 자리를 익힌 자들이 틀

림없었다. 최형기는 포교들에게 말하였다.

"적당은 성내의 백성들 틈에 깊숙이 잠입하여 있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백성들에게서 원성

이 나오기가 쉽고, 그냥 내버려두면 폭민이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이들은 틀림없이 며칠 전

에 청파의 억기를 죽인자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각 군모에 용모파기를 돌려서 그자를 잡아

내도록 하라. 또한 방문이 나온 곳에서 수상한 자를 목도한 사람이 없는지 알아보아라. 저자

의 주막에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포졸을 배치하여두어라. 모여서 쑥덕거릴수록 유언이

나돌고, 유언이 낭자하면 포적에 막대한 지장이 올 것이다.

포청은 그렇게 북새통이 되었으나, 소문은 성내에서 성 밖으로 그리고 지방으로 퍼져갔다.

중길은 호동 옹장이 집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고 다른 계원들도 은신처에서 나오지

않았다. 성문과 거리의 검색은 점차 강화되었다. 종사관들은 부장을 거느리고 사대부의 집들

을 호마다 방문하여 비복들을 심문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중길은 싸움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지키는 열 놈이 노리는 한 놈을 당하지 못한다는 속언

은 바로 이에 들어맞는 말이었다. 기찰이 강화되면 될수록 더욱 빈틈을 노리기가 쉬운 법이

. 중길은 이번에는 백주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것도 성내의 저자가 한창 붐빌 무렵인 중

화참을 노리자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방문을 노상에다 내걸기는 어려웠다. 상한이 많이 모이

는 주막이나 저자의 가가에 양반 살육이라든가 재물 약탈이라든가 진인 도래, 역성 환국 등

의 짤막한 글을 쓴 격문을 돌리기로 하였다. 옹장이네 아들은 혜정교에 나가 앉아 계원들에

게 다시 연락하였고, 격문은 그들이 짐짓 사가지고 가는 항아리나 옹기 속에 들어있었다.

방문이 내걸린 사흘 뒤에 중길은 계원과 함께 행상 차림으로 호동 옹장이네 집을 나섰다.

그들이 노리는 곳은 어디든 번잡한 저자였으니, 한 계원 앞에 십여 장의 격문을 나누어 가

지고 있었다. 성 안에만 돌릴 것이 아니라, 이른바 후시라고 하는 한양성 외곽의 저자에도

돌리기로 하였다.

종루 운종가와 배오개와 칠패 소의문 밖 등지가 모두 번화한 장터였다. 시전은 혜정교로부

터 창덕궁 입구에까지 이르는데, 국역을 지고 있는 각전의 일꾼들이 모여 있는 유분각전이

있었다.

모두 마흔둘이 가가에서 겨울비단 여름비단 견을 팔았다. 선전은 곧 입전이라고도 불렀다.

종루 서쪽으로 면주전이 있었고 이문 동서쪽에 내어물전 소의문 밖에 외어물전이 있었다.

육주비전은 국역을 지는데, 나라로부터 영업을 허가받은 전이었다. 이 육의전 물목 외에는

대개 난전을 막지 못하였던 것이다.

삼승포와 양털, 모자를 파는 청포전이 종루 동쪽에 있었고, 연초전의 도가가 하량교 남쪽에

있었으며, 말총가죽 초 실 책 휴지 같은 잡물을 파는 상전이 있는데 상자리전이라고도 하며

모두 열세 군데에 있었다. 병문 동남쪽에 생선전이 있고, 미전은 모두 다섯 곳이 있는데 상

전이 의금부 서쪽이요, 하전이 배오개에 있고 문밖 미전은 소의문 밖에 있는데 모두 국역을

지지만, 서강 미전과 마포 미전은 일종의 난전이었다. 잡곡전은 철물교의 서쪽 가와 남쪽에

있고 유기전은 내어물전의 서쪽 행랑에 자리잡았다. 은면전, 의전, 면자전 등이 전의감 광통

교 쪽에 있었다. 신전은 여러 곳에 있으나 종루에서만 유정혜를 팔았다. 화피전은 물감과 외

국 과실을 파는 곳이고, 인석전은 용수석이나 책상 걸상을 파는 곳이며, 진사전은 당사실 갓

끈띠 매듭 따위를 팔며, 청밀전에서는 꿀을, 경염전에서는 서해의 소금을, 체계전은 머리타

래를, 장목전에서는 재목을 팔았다.

철물전 연죽전 신탄전 등이 있고, 쇠전말전이 있으며, 세물전에서는 혼례 상례에 쓰는 기구

들을 세내주었다. 잡철전 백당전 좌반전 닭전 계란전 복마제구전 세기전 등이 있으며, 요리

숙수를 새내어주는 숙수도가까지 있었다. 이렇듯 한양 성내 전체가 번화하고 커다란 저자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길이는 배오개와 혜정교 쪽을 각기 맡아서 계원과 더불어 배오개의 혼잡 속을 뚫고 들어

갔다. 계원이 앞서서 길 왼쪽으로 올라갔고 중길은 오른편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서 저

자 안에 기찰포교가 없는 가를 살폈다. 중길은 높직한 갓에 깨끗한 도포 입고 손에 부채 들

고 소매 속에 격문을 넣고 있었다. 저자의 중심부에 들어가서 중길과 계원은 마주쳤다.

"어떻든가?"

"저어기 도자전 앞쪽에 기찰포교 두 사람이 있네."

", 저기 있군, 자네가 먼저 시작하게."

중길은 그대로 저자 안으로 들어갔고, 계원은 두리번거리다가 종자전 앞으로 가더니, 불문

곡직하고 자빠졌다. 각종 채소와 화초의 씨앗이며 상자와 그릇이 엎어지고 뒤섞여 땅바닥에

흩어졌다.

"아니... 거 눈구녕은 가죽이 모자라서 뚫어놓았나?"

계원은 종자전 주인의 부아를 돋우려는지 오히려 무릎을 부비며 투덜거렸다.

"한 뼘두 못되는 길바닥에다 이따위 것들을 늘어놓았으니, 이건 뭐 날아다니라는 게야."

하면서 엎어진 씨앗 상자를 발길로 내질러버렸다. 주인은 하, 어처구니가 없는지 입을 벌리

고 그에게 삿대질을 하였다.

"저놈이 저저... 똥 뀐놈이 성낸다구, 남의 비싼 씨앗을 다 버려놓고 오히려 눈알딱지를 부

라리는 게 아닌가."

하더니 길바닥으로 주르르 달려나와 두 손으로 계원의 멱살을 움켜쥐었고, 계원도 지지 않

고 주인의 옷깃을 잡아 비틀면서 딱딱거렸다.

"이놈아, 조선 팔도의 길은 네가 다 샀단 말이냐? 오냐, 시정배들이 무리를 지어 양민을 업

수이 본다더니 너 같은 놈은 혼찌검이 나야 되겠다."

이렇게 저자바닥이 왁자지껄 소란해지자 기찰포교들은 도자전에서 종자전 쪽으로 내려왔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그곳에 매달려 있었다. 삽시에 사람들이 하얗게 몰려들었다. 중길은

저자의 위로 오르면서 소매 속에서 격문을 꺼내어 길에다 한장씩 떨구었다. 그는 누렁다리

못미처까지 올라갔다가 옆길로 새어서 파자교 쪽으로 돌아서 종루로 나왔다. 파자교 앞에는

전 같았으면 들병장수들이 멍석 깔아놓고 줄지어 앉아 있었을 테지만, 때가 흉황이라 밀전

병을 파는 아낙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중길은 슬그머니 그들 틈에 끼여 앉았다. 번철에

부쳐진 노릿노릿한 밀전병이 광주리 속으로 쉴새없이 던져지는 중이었다. 중길은 밀전병을

사먹으면서 동료를 기다렸다. 이윽고 파자교 쪽으로 와서 두리번거리는 계원이 보였다. 중길

은 그의 뒤로 따라붙은 자가 없는가를 살피고 나서 손짓하였다. 가까이 다가온 계원을 보니

입술이 터졌고 피가 맺혀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내 드러워서 정말..."

"포교들은 말이 없던가?"

", 그 자식이 북로 장사라두 다녔는지 박치기를 해오는데 피할 틈이 있어야지. 눈앞에 불

이 번쩍하네. 어이쿠, 나 죽는다구 엄살을 피우면서 주저앉았지. 포교들이 나서지는 않고 뒷

전에서 구경하다가 내가 툭툭 털고 일어나니까 그냥 가버리더군."

중길과 계원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주인 녀석 내가 굽신거리며 사과하구 뛰니까, 쫓아올 생각두 않구 뭐라구 떠들면서 젠

척하더구만, 꼴같지 않아서... 이런 일만 아니라면 그저 땅바닥에 메다꼰져서 모가지를 부러

뜨릴 텐데."

"아무튼 고생했네. 여기서 어물거릴 때가 아니야. 격문으로 한양이 또 한번 술렁거리기 전

에 혜정교를 해치워야지."

계원은 터진 입술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소매로 찍어 누르면서 푸념하였다.

"이번에는 자네가 재간을 부려주어야겠어."

"허허, 염려 말구 자네 맡은 일이나 잘 해내게."

중길은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들은 철물교를 지나 종루 운종가를 가로질러 혜정교로 나

아갔다. 혜정교 잡전 옆에는 삼청동서 흘러내리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으며, 백운동 쪽

에서 흘러내린 물과 모교에서 만나 광통교 아래로 흘러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미리

약조한 것이 있는지라 잡전으로 들어서자마자 서로 모르는 척하며 갈라졌다. 중길은 개천이

내려다보이는 축대 가녘으로 올라갔고, 계원은 세물전 쪽으로 슬슬 다가갔다. 행인은 많은

편이었으나 거래가 거의 없는지 상인들은 가게를 비우고 있거나 모여서 잡담을 하는 축이

많았다. 중길은 동료가 저자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 갑자기 비틀걸음

으로 걷다가 고래 고함을 지르고 소리도 읊조렸다.

"어허야, 붉은 나무 가을 하늘에 머리를 돌리고 성채의 옛터는 웅장하구나. 제호 새는 술을

권하며 재깔재깔, 한번 들어 웃음이 나도다."

지나는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돌아보며 한마디씩 하였다.

"지랄 육갑하구 있네. 지금 때가 어느 시절인데 백주에 저 야단이람."

"언놈은 배곯아 죽고, 어떤 놈은 터져 죽는다더니 저놈은 한술 더떠서 썩은 물까지 들이켰

고나."

중길은 비틀거리며 걷다가 아무나 앞에 부딪치면 밀쳐내고 뿌리치고는 하였다. 영문도 모

르고 다가서다가 부딪혔던 사내는 그가 갓 쓰고 도포 입은 꼴에 주정꾼인 줄을 알고는 화가

치밀었던지,

"야 이놈아, 남은 시방 잡곡이라도 몇되 꾸어다가 푸성귀죽이라두 끓여서 병든 처자를 먹

여 살리려는데, 네 따위가 양반이면 얼마나 양반이냐."

"이노옴... 상놈이 감히 어디다 욕지거리냐."

중길이가 떠들자마자 사방에서 시정배들이 우르르 몰려들더니 더이상 말을 시키지 않고,

그의 팔다리를 잡아 쳐들었다가 축대 아래 개천으로 던져버렸다.

"시원한 물에 목요하고 정신이나 차려라."

"술 먹은 놈은 개인데, 반상이 따로 있나."

"그놈 때문에 삼청동 물 버렸다."

중길이는 네활개를 쳐들고 개천물에 텀버덩 빠져버렸고 물보라와 웃음이 천변에 드높이 솟

았다. 중길이는 일부러 물속에 곤두박질쳤다가 일어나 앉아 물장구를 치며 소리를 읊어대니,

장사꾼들과 행인들이 천변에 늘어서서 구경하며 배를 잡고 웃었다. 계원은 세물전에서부터

내려오면서 가슴속에 넣어두었던 격문을 한장씩 꺼내어 가가의 좌판 위에다 떨구었다. 중길

은 물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혜정교 아래로 하여 모교 쪽으로 가다가 얕은 축대 쪽에서 기

어올랐다. 그리고는 물에 흠뻑 젖은 옷을 대강 쥐어짜고는 서린방 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

. 때가 마침 중화참인지라 저자에는 행인들이 많아서 그 틈에 섞여서 걷기가 수월하였다.

중길은 먼저 보아두었던 대로 청계천으로 하여 이교를 가로질렀다. 계원은 가가의 좌판마다

격문를 떨구고 돌아서는데 그때에 막 가게로 돌아오던 장사치가 그의 수상한 거동을 보았

.

"여보슈, 뭘 하는 게요?"

"아니, 뭘 살까 하구..."

그러나 주인은 계원이 떨어뜨린 종이를 집어들고 있었다. 계원은 한 손으로 주인의 목을

치켜올리면서 격문을 다른 손으로 빼앗아 쥐고는 뛰었다. 주인은 영문을 모르게 봉변을 당

하고는 무엇인가 도적이라도 맞은 줄 알았던지 소리를 질러댔다.

"저놈 잡아라..."

계원은 혜정교 앞으로 나오자 그만 당황하여 방향을 돈의문 쪽으로 돌렸으니 호동과는 반

대의 방향이었다. 뒤늦게 다른 가가의 좌판에서도 격문이 발견되었고 저자에 있던 기찰포교

와 포졸은 혜정교로 뛰어나왔다. 그들은 좌우를 둘러보고 나서 포교가 말하였다.

"너는 종루로 올라가보아라. 나는 흥화문 쪽으로 내려갈 테니."

그들은 양쪽으로 갈라져서 뛰었다. 계원은 흥화문이 곧장 바라보이는 경덕궁 앞에 이르자

잘못 뛰어왔음을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인적이 드문 곳이고 경덕궁의 기다란 돌담과 상방원

의 담이 마주 서 있는 비좁은 골목이 돈의문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포교는 얼마 안 가서 앞

서 뛰고 있는 계원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저놈, 살주계놈 잡아라."

흥화문 앞에서 수직하던 군사들이 내다보니 앞에서는 웬놈이 죽어라고 뛰어오고 있으며,

뒤에서 또 한 놈이 소리를 지르며 오는데 살주계라는 것이었다. 그들도 요즘 도성 군사들이

살주계인가 뭔가 하는 놈들 때문에 적경으로 달달 볶이고 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

.

"뭐야. 살주계라고 하는 것 같은데."

"살주계라면 잡고 봐야지."

문 양쪽에 창을 들고 서 있던 군사 두 사람이 마주 뛰어나왔다. 계원은 이제 꼼짝없이 잡

히게 되었으나 무악재로 넘어가는 골목으로 휘었다. 곧이어서 광통방으로 나가는 길이 왼쪽

, 오른쪽에는 황화방 나가는 길이 보였으며 곧장 올라가면 소정동이었다. 계원은 광통방으

로 나가는 길을 택하였다. 군사들은 흥화문을 멀리 떠나지 못하고 서버렸으나 포교는 아직

도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중이었다. 계원은 연신 뒤를 돌아다보며 뛰었다. 이제는 사람이

많은 곳에 섞인다 할지라도 포교의 고함소리를 듣고 그를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는 행인들에게 곧 잡히게 될 것이다. 계원은 죽을 힘을 다하여 뛰었다. 잡히면 그가 죽는 일

은 고사하고 한양성내에서 활동중인 모든 계원이 드러나게 될 것이었다. 그는 끝까지 해보

다 안되면 스스로 자진할 길을 찾아야 했다. 자진은 길에서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얼핏 모교 삼거리 모퉁이에 섰는 초가 몇채를 보고는 길가에 면해 있는 집으로 뛰어들어갔

. 문 앞에 서 있던 사내가,

", , 이게 누구야?"

하면서 따라 들어왔고 계원은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봉당에서 쓰레질을 하던 여자가 남편

과 더불어 부엌을 들여다보는데 포교가 뛰어들었다.

"적이 어디로 갔느냐. 나는 포교다."

계원은 시렁 위에서 식칼을 집어들고 돌아섰다. 집주인과 아낙이 그의 부릅뜬 험한 표정에

겁을 집어먹고 뒤로 멀찍이 물러났고, 포교의 동작이 조심스러워지며 부엌 앞에 멈칫 섰다.

"그래봐야 소용없다. 조금 있으면 인근에 깔린 포졸들이 떼지어 몰려온다. 순순히 포승을

받아라."

계원은 식칼을 겨누고 부엌 안에 도사리고 서 있었다. 포교는 몇번 더 달래다가 안되겠던

지 허리춤에서 쇠도리깨를 뽑았다.

"하는 수 없군. 골통을 깨어버릴 테다."

포교가 좌우로 휘둘러 보이는데 쇠막대기 끝에 달린 철편이 뱅뱅 맴을 돌았다. 계원은 식

칼을 들고 부들부들 떨다가 재빠르게 스스로의 목을 찔렀다. 그는 손쓸 사이도 없이 멀거니

눈을 뜬 채로 부엌 바닥에 나뒹굴었고 포교는 뛰어들어 흐려져가는 계원의 눈빛을 보고는,

"지독한 놈 !"

혀를 찰 뿐이었다.

한양 인근의 백성들 사이에는 양반의 세상이 끝이 났다는 소문이 낭자하여, 천예나 상사

람들은 서로 모이기만 하면 새로 오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 날 새는 줄을 몰랐다. 양반들

은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상것들을 단속하느라고 여러 곳에서 불온한 말을 지껄이는 자들을

잡아다가 태형을 가하고는 하였다.

숙수 개천이란자가 있었다. 그는 혜정교 남쪽의 숙수도가에 나가 상례나 혼례가 있는 대

가에서 청이 오면 응하여 품을 팔아 살아갔다. 그는 세상의 별의별 희귀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재주 있는 감상칼자였기도 하지만 생김새가 준수하여 복색만이 긴 저고리 바람인 천예

의 꼴이었지 옥골선풍이라 할 정도로 미장부였다. 그래서 요리인으로 불려갈 적마다 부잣집

의 하님들이나 사환비들이 그에게 홀딱 반하여 방물을 빼어준다. 음식을 싸준다 법석이었다.

개천은 기질이 활달하여 자기가 숙주라는 천업으로 살아간다.

한양 인근의 백성들 사이에는 양반의 세상이 끝이 났다는 소문이 낭자하여, 천예나 상사

람들은 서로 모이기만 하면 새로 오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 날 새는 줄을 몰랐다. 양반들

은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상것들을 단속하느라고 여러 곳에서 불온한 말을 지껄이는 자들을

잡아다가 태형을 가하고는 하였다.

숙수 개천이란자가 있었다. 그는 혜정교 남쪽의 숙수도가에 나가 상례나 혼례가 있는 대

가에서 청이 오면 응하여 품을 팔아 살아갔다. 그는 세상의 별의별 희귀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재주 있는 감상칼자였기도 하지만 생김새가 준수하여 복색만이 긴 저고리 바람인 천예

의 꼴이었지 옥골선풍이라 할 정도로 미장부였다. 그래서 요리인으로 불려갈 적마다 부잦집

의 하님들이나 사환비들이 그에게 홀딱 반하여 방불을 빼어준다. 음식을 싸준다 법석이었다.

개천은 기질이 활달하여 자기가 숙주라는 천업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그리 개의치 않았다.

개천은 타령도 잘 부르고 목소리가 맑고 부드러워 그가 얘기할 적에는 계집종들이 모두 한

숨을 내쉴 정도였다. 개천은 그렇다고 자기의 용모로 계집을 꾀어 음란한 짓을 벌이거나 바

람을 피울 위인은 못 되었고, 오히려 순박하여 혼자 속을 썩이기나 하였다. 개천에게는 한

쓰라린 정담이 있었으니, 그 일 때문에 다른 계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중인의 외동

딸을 은근히 사모해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품과 학문이 뛰어난 재녀였고, 개천을

가엾게는 여길지언정 사랑의 상대라고는 꿈에도 여기질 않았다. 개천의 상사는 날로 깊어져

그는 요리를 하다가 문득 생각에 잠겨 음식을 태우기도 하고 그릇을 엎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여자에게 정인이 생기고 말았다. 상대는 양반 유생인 심서방이라는 자였다. 그들이 맺

어지게 된 연분의 내력은 이러하였다.

심생은 약관의 용모가 매우 준수하고 풍정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어느날 그가 운종가에서

임금의 거둥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에 어떤 건장한 계집종이 자줏빛 명주 보자기로 한 여

자를 덮어씌워 업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뒤를 한 계집애가 붉은 비단신을 들고 따라가고

있었다. 심생은 겉으로 그 몸뚱이를 겨냥하여보고 어린애가 아닌 줄 짐작한 것이다. 그는 바

짝 따라붙었다. 그 뒤를 밟다가 더러 소매로 스치고 지나가보기도 하면서 계속 눈을 보자기

에서 떼놓지 않았다. 소광통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개바람이 앞에서 일어나 자주 보자

기가 반쯤 걷히었다. 보니 과연 한 처녀라, 봉숭아빛 뺨에 버들잎 눈썹, 초록 저고리에 다홍

치마, 연지와 분으로 가장 곱게 화장을 하였다. 얼핏 보아서도 절대가인임을 알 수 있었다.

처녀 역시 보자기 안에서 어렴풋이 장부가 쪽빛 옷에 초립을 쓰고 왼편이나 오른편에 붙어

서 따라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마침 추파를 들어 보자기 사이로 주시하는 참이었다. 보자

기가 걷히는 순간에 버들눈, 별 눈동자의 네 눈이 서로 부딪쳤다. 놀랍고 또 부끄러웠다.

녀는 보자기를 걷잡아 다시 덮어쓰고 가버렸다. 심생은 어찌 이를 놓칠것인가. 바로 뒤쫓아

서 소공주동 홍살문 안에 당도하자 처녀는 한 중문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멍

하니 무언가 잃어버린 것처럼 한참을 방황하였다. 그러다가 어떤 이웃 할멈을 붙들고 자세

히 물었다. 호조에 계사로 있다가 퇴한 집이고, 다만 십육칠세의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혼사를 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딸이 거처하는 곳을 물었더니 할멈은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조그만 네거리를 돌아서면 회칠한 담장이 나오고, 담장 안의 한글방에 바로 그 처자

가 거처하고 있지요."

그는 이 말을 듣고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 저녁에 집안 식구에게 거짓말을 꾸며대었다.

"동접 아무가 저와 밤을 같이 지내자고 하는군요. 오늘 저녁에 가볼까 합니다."

그는 행인이 끊어지기를 기다려 그 집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때 초승달이 으스름한데 창

밖으로 꽃나무가 썩 아담하게 가꾸어졌고, 등불이 창호지에 비추어 아주 환하였다. 심생은

처마밑 바깥 벽에 기대 앉아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이 방안에 두 몸종과 함께 그 처녀가

있었다. 처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얘기책을 읽는데 꾀꼬리 울음처럼 낭랑한 목청이었다.

삼경쯤에 몸종은 벌써 깊이 잠들었고, 처녀는 그제야 등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

나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뒤척 뭔가 생각이 많은 듯하였다. 심생은 잠이 올 리

가 없거니와 또한 바스락 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그대로 새벽 파루가 울릴 때까지 있다가

도로 담을 넘어 나왔다.

그 뒤로는 이것이 일과가 되었다. 저물어서 갔다가 새벽이면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스무 날 동안 계속하였으나 그래도 그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처녀가 초저녁에는 얘기책을

읽기도 하고 바느질도 하다가 밤중에 이르러 불이 꺼지는데, 이내 잠이 들기도 하고 더러

번민으로 잠을 못 이루기도 하는 것이었다. 대엿새가 지나자 문득 몸이 편치 못하다, 하고는

겨우 초경부터 베개에 엎드려 자주 손으로 벽을 두드리며 긴 한숨 짧은 탄식을 내쉬어 숨결

이 창밖에까지 들리었다. 하루 저녁, 하루 저녁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스무 날째 되는 밤이었다. 처녀가 갑자기 마루로부터 내려와 바깥벽을 돌아 심생이 앉아

있는 처소에 당도하였다. 심생은 깜깜한 어둠속에서 불끈 일어서 처녀를 붙잡았다. 처녀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도련님은 소광통교 변에서 만난 분이 아니세요. 저는 이미 스무 날 전부터 도련님이 다

니시는 줄 알았답니다. 저를 붙들지 마셔요. 한번 소리를 내면 다시는 여기서 못 나갑니다.

절 놓아주시면 제가 뒷문을 열고 방으로 드시게 할게요. 얼른 놓으셔요."

심생은 곧이듣고 물러서서 기다렸다. 처녀는 홱 돌아서 들어가버렸다. 방에 들어가서는 몸

종을 부르더니,

"너 엄마한테 가서 큰 주걱자물쇠를 주시라고 하여 갖고 오너라. 밤이 캄캄해서 사람이

겁이 나는구나."

하여서, 계집애가 윗방 마루로 건너가서 금방 자물쇠를 들고 왔다. 처녀는 열어주기로 약속

한 뒷문에다 아귀진 쇠꼬챙이를 분명히 꽂고 다시 손으로 자물쇠를 채웠다. 일부러 쇠를 채

우는 소리를 찰카닥 내었다. 그리고 곧 등불을 끄고 고요히 잠이 깊이 든 듯하였으나 실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심생은 속임을 당하여 분통이 터졌으나, 그나마 만나본 것만도 다행

이다 싶어졌다. 그는 여전히 쇠를 채운 방문 밖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날에 또 가고, 그 다음날에도 갔다. 방에 쇠가 채워져 있어도 조금도 해이해짐이

없이, 비가 오면 유삼을 둘러쓰고 가서 옷이 젖어도 관계하지 않았다. 이렇게 다시 열흘이

지났다. 밤중에 온 집안이 모두 쿨쿨 잠들었고, 처녀 역시 등불을 끄고 한참이나 있다가 문

득 발딱 일어나서 계집애를 불러 얼른 등에 불을 붙이라고 재촉하였다.

", 너희들 오늘밤엔 윗방으로 가서 자라."

두 몸종이 방문을 나가자, 처녀는 벽에 걸린 쉿대를 가지고 자물쇠를 따고 뒷문을 활짝

열었다.

"도련님, 들어오세요."

심생은 얼떨떨하여 자기도 모르게 몸이 벌써 방에 들어와 있었다.

"도련님, 잠깐 앉아 계세요."

처녀는 다시 그 문에 쇠를 채우고는 윗방으로 가서 자기 부모를 모시고 나왔다. 그 부모

는 두 사람을 보자 어리둥절하였다. 처녀가 말을 꺼냈다.

"놀라지 마시고 제 말을 들어보셔요. 제 나이 열일곱으로 발걸음이 일찍이 문 밖을 나가

지 못하옵다가 월전에 우연히 임금님의 거둥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에 소광통교에서 덮어

쓴 보자기가 바람에 날려 걷히었습니다. 마침 그때 한 초립 도령과 얼굴이 마주쳤어요. 그날

밤부터 도련님이 안 오시는 날이 없이 이 방문 밑에 숨어 기다린 지 이제 이미 한달이 지났

답니다. 비가 와도 오시고 추워도 오시고 문에 쇠를 채워 거절하여도 역시 오셨어요. 저는

곰곰 생각해보았습니다. 만일 소문이 밖으로 퍼져서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되면 밤에 들어왔

다가는 새벽이면 나가는데 자기 홀로 창문 밖에 서 있는 줄을 누가 믿겠습니까. 사실과 다

르게 누명을 뒤집어쓰지요. 제가 필야 개에게 물린 꿩이 되는 셈이에요. 그리고 저분은 양반

댁 도령으로 지금 바야흐로 청춘이라, 혈기가 아직 정치 못하여 다만 나비와 벌처럼 꽃을

탐낼 줄만 알고 바람과 이슬에 맞음을 돌보지 않으니 며칠 못 가서 병이 나지 않겠습니까.

병들면 필야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렇게 되면 제가 죽이지 않았어도 제가 죽인 셈입니다.

록 남이 모르더라도 반드시 음보가 있게 됩니다. 또 제 몸은 한낱 중인 집 딸에 불과합니다.

제가 무슨 절세의 경성지색으로 꽃이 부끄러워할 만한 용모를 지닌 것도 아닌데, 도련님께

소 솔개를 보고 매로 여기서어 제게 지성을 바치되 이토록 부지런히 하옵십니다. 제가 만일

도련님을 따르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싫어하시어 제게 복을 주시지 않을 거예요. 제 마음

을 정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근심하지 마옵소서. , 저는 부모님께서 연로하시고 동기간

이 없으니 시집가서 데릴사위를 맞아 살아계실 때에 봉양을 다하다가, 돌아가신 뒤에 제사

를 모시면 제 소망에 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일이 뜻밖에 이렇게 되었으니, 이 역시

하늘의 지시입니다."

처녀의 부모는 더욱 어안이 벙벙하였으나 달리 할 말이 없었고, 심생 더욱 아무 말도 못

하였다. 같이 동침을 하게 되었으니 애타게 사모하던 끝에 그 기쁨이야 오죽하였으랴. 그날

밤 방에 들어간 이후로 저물게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처녀의 집은

본래 부유하였다. 그로부터 심생을 위하여 산뜻한 의복을 정성껏 마련해주었으나, 그가 집에

서 이상하게 여길까 보아서 감히 입지 못하였다. 그러나 심생은 아무리 조심을 하여도 집에

서는 그가 바깥에서 자고 오래 돌아오지 않는데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절에

가서 글을 읽으라는 엄한 명령이 내렸다. 심생은 마음에 몹시 불만이었으나, 집의 압력을 받

고 또 친구들에게 이끌리어 책을 싸들고 북한산성으로 올라갔다. 선방에 머문 지 근 한달

가까이 되어서였다. 심생에게 처녀의 언문 편지를 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편지를 펴보니

유서로 영영 이별하는 내용이었다. 처녀는 그맘때 이미 죽은 것이었고, 그 편지는 이러하였

.

봄 추위가 아직도 쌀쌀하온데 절간의 글공부에 옥체 평온하시옵니까. 항상 사모하옵는 바

어느날이라 잊으리까. 소녀는 도련님께옵서 떠나신 이후로 우연히 병을 얻어 점점 골수에

사무쳐 백약이 무효하온지라 이제 필경 죽음밖에 없는 줄 알았사옵니다. 소녀처럼 박명한

몸이 살아본들 무엇하오리까마는, 우선 세 가지 큰 한을 가슴에 안고 있으니 죽음에 당해서

도 눈을 감지 못하옵니다. 소녀 본래 무남독녀로 부모님의 사랑하옵심을 받자와 장차 부모

님께서는 적당한 사위를 구하여 만년의 의지를 삼고 후일의 계책을 마련코자 하였더니,

사다마라 뜻밖의 악연에 얽히었군요. 지체 낮은 덩굴풀이 외람되게 높은 소나무에 붙었으나

주진지계가 이제 단망이옵니다. 이는 소녀가 아무 낙이 없이 시름하다가 마침내 병으로 죽

음에 이른 까닭이옵고, 이제 늙으신 부모님은 원인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사오니, 이것이

첫째 한이옵니다. 여자가 출가하면 비록 종년이라도 문에 기대어 손님을 맞는 기생의 몸이

아닌 다음에야 남편이 있고 또 시부모가 있겠지요. 세상에 시부모가 모르는 며느리가 있사

오리가. 소녀 같은 몸은 남의 속임을 받아 몇 달이 지나도록 일찍이 도련님댁의 늙은 여자

하인 하나도 보지 못하였사오니, 살아서 부정한 자취를 남겼고, 죽어서 돌아갈 곳 없는 귀신

이 될 것이라 이것이 둘째 한이옵니다. 부인이 남편을 섬기매 음식을 장만하여 공궤하고 의

복을 지어서 입으시도록 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이 있을까요. 도련님과 상봉한 이후 세월이

오래지 않음도 아니요, 지어드린 의복이 적다고 할 수도 없는데, 한번도 도련님에게 한사발

밥도 집에서 자시게 못하였고, 한벌 옷도 입혀드리지 못하였으며, 도련님을 모시기를 다만

참석에서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셋째 한이옵니다. 그리고 상봉하온 지 얼마 아니되어 문득 길

이 이별하옵고 병으로 누워 죽음이 다가왔으나 대면하와 영결을 못하옵니다. 이러한 여자의

슬픔을 어찌 족히 군자에게 말씀드리오리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 창자가 이미 끊어지고

뼈가 녹으려하옵니다. 비록 연약한 풀이 바람에 쓰러지고 시든 꽃잎이 진흙이 되다 하온들

끝없는 이 원한은 어느날이나 다하리오. 오호라, 창 사이의 밀회는 이제 그만입니다. 바라옵

건대 도련님은 소녀를 염두에 두시지 마옵시고 더욱 글공부에 힘쓰시어 일찍이 청운의 뜻을

이루옵소서. 옥체를 내내 보중하옵기 천만 비옵니다.

심생은 이 편지를 받고 자기도 모르게 울음과 눈물을 쏟았으나, 이제 비록 슬프게 후회의

울음을 울지라도 무엇하겠는가. 그 뒤에 심생은 붓을 던지고 글공부를 폐하였다.

개천이 그 처녀를 알게 된 것은 심생이 북한산성에 올랐을 적의 일이었다. 개천이 숙수도

가에서 손님을 기다리는데, 여인 두 사람이 세기와 숙수를 빌리러 왔다. 하나는 주인마님인

듯하였고, 다른 하나는 살림을 맡아보는 하님인 것 같았다. 도가의 주인이 불러서 나가니 이

미 기명을 빌려서 꾸려놓았고, 이제 그것을 지고 갈 숙수와 일꾼 두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갑연이라네, 다녀오게."

주인이 말하였고, 장옷을 쓴 노마님이 물었다.

"이틀 품이면 되겠는가?"

", 하지만 야반에 해야 되는 일이라서 첫날은 두 배를 주셔야 합니다."

"밤에 일을 하는가?"

"낮에들 잡수시려면 저는 밤에 장만을 해놔야지요."

개천은 그들을 따라 잡일꾼 둘을 데리고 소공주동으로 갔다. 홍살문을 지나 한 곳에 이르

니 번듯한 기와집이 서 있는데, 이런 일로 한양대가의 곳곳을 다녀본 개천은 첫눈에 이 집

이 중인의 집임을 대뜸 알아차렸고, 그런 중에는 꽤 부요한 재산가임을 알 수가 있었다.

양반의 집은 규모와 기품으로 알 수가 있는 것이요, 이 집은 비록 규모는 작으나마 안채

사랑채 별채의 격식을 갖추었고, 집이 대가보다 작기는 하였으나 치장에 공을 들인 것으로

부잣집임을 알았던 것이다. 안 벽은 영롱장으로 장식하고 화초담을 꾸며놓았다. 종은 모두

넷이었으니 마당쇠 하나와 하님 하나 그리고 계집종이 둘이었다.

그들은 마당에서 떡을 치고, 개천은 부엌에 들어가 계집종과하님의 조력을 받아 요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회갑 전날치고는 집안이 어쩐지 괴괴하고 쓸쓸한 듯하여 개천은

일을 하면서도 별로 즐거운 빛이 없는 식구들이 이상하였다. 얼핏 보니 의원이 다녀가는데

노마님과 주인장이 함께 별채로부터 나와서 문간에까지 배웅을 나가는 것이였다.

"이 댁에 누가 아픈가?"

개천이 무심코 물었으나 계집종들은 새침해져서 서로 눈짓만을 교환할 뿐 대꾸가 없었다.

"두 분은 멀쩡하시고, 분명히 초상이 아니라 회갑연이라고 했으니, 이 댁 서방님이 아프신

?"

대답을 기다린 것도 아니요 도마를 두드리면서 개천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곁에서 채소

를 다듬던 계집종이 말하였다.

"무남독녀인데 서방님이 어딨담."

개천은 잠시 칼질을 멈추었다.

"허허, 그러면 이 댁의 아씨께서 편찮으시단 얘기로군."

"쓸데없는 참견 말고 어서 산적 양념이나 해주시게."

하님이 계집종들에게 눈을 흘기고 나서 개천을 나무랐다. 개천은 건성으로 예예, 하고는

중얼거렸다.

"꽃다운 이팔청춘에 무슨 액이 끼었을꼬, 이런 댁의 무남독녀라면한다 하는 총각들이 저

마다 나설 터인데..."

", 상사병이 들었는데 뭐."

아니꼽다는 듯이 계집종이 말을 받았다. 개천은 도마질을 그치고 멍하니 계집종들을 둘러

보았다. 계집종이나 개천이나 그러한 얘기라면 모두 먹던 밥숟갈도 내던지고 일어설 나이인

지라, 더욱 흥미가 솟구쳤던 것이다. 마침 하님이 찬광으로 나가고 그들 셋만 남게 되자 개

천은 다그쳐 물었다.

"이 댁 아씨가 상사병이라면, 혹시 소문 없이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려는 건 아닌가?"

"굿을 벌였다간 우리 아씨는 신병이 더욱 깊어지고 소문이 낭자하여 질려서 죽고 말 거예

. 아씨가 부모님의 회갑연을 보는 게 원이라 하여 이 법석이래요."

개천은 일손을 놓고 아예 부엌 문턱에 퍼질러앉았다.

"도대체 상대가 어떤 사람이오?"

"글공부 하는 양반 댁 초립동이지요."

"임금님 거둥을 구경한다고 괜히 광통교 변으로 나갔지. 요즈음 양반가의 도령들이란 그

저 돈 있는 중인 댁이라면 얕잡고 우선 한번 건드려보기가 일쑤지 뭐."

개천은 은근히 분이 나서 미간을 찌푸리고 말하였다.

"시방 성내에는 그런 한량들이 좍 깔려 있는데 이것들이 저희 집안의 지체만을 믿고 방자

하기가 이를 데 없다네. 그저 내가 이런 몸이 아니라면..."

계집종들이 음성 맞춰 깔깔대며 웃었다.

"그렇지만 않다면 이미 깨어진 그릇이라도 상관없단 말이우?"

개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다시 거세게 칼질을 하였

. 감상칼자가 종년들도 우습게 아는 천직이라 애초에 계집이나 하는 요리로 업을 삼아서,

천예들 사이에서도 사내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하여튼 숙수로는 인물이 아깝수."

"사내로 님을 삼는다는데 우리는 어쩔려고 그러우?"

개천은 종년들의 놀림을 받으며 그저 못 들은 척 도마질에 열중할 뿐이었다. 세간의 패설

로는 계집 없는 홀아비를 놀릴 적에 닭의 서방이라고 하였으니, 얘기인즉 하도 계집에 주려

서 급하면 닭에다 그짓을 한다는 것이었다. 설마 닭에다 그럴 수 있으랴 싶지만, 반문하기를

계란을 낳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개천이 계집종들의 까스름을 받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어떤 때에는 양반의 아낙이 차마 하소는 못하고 짓궂게 나올 적이 있었다. 개천은 그런 일

들에 비추어 양반 댁 여자들을 더러운 것들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날 밤이 되어 개천의 일

손이 쉬게 되자 대충 부엌에서 선 채로 요기를 하고는 중문간에 나가 앉아 스스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다정한 하루 해도 덧없이 넘어간다. 도화낙일 적막한데 두견 소리뿐이로다. 돌아가는 님

의 방에 다시 한번 들어갈까. 날아가는 원앙새야, 너와 나와 동행하자. 노류장화 꺾어지면

뉘를 잡고 희롱할꼬. 느실느실 곱게 핀 꽃 가는 날도 섧게 지네, 북편에 마천령은 머다하고

쉬었더니 모춘삼월 저문 날에 무정한 정뿐이로다. 바람 불고 눈 뿌릴 때 빗이 없어 더욱 섧

. 보경을 열고 보니 부용안색 초췌하다. 비빔밥 즐긴 성정 밤에 둘이 먹고지고, 사시광경

다 지내고 서산낙일 단장시라. 소연장 추빈 방안에 수원수구 내 팔자야, 스스로 먹은 마음

삼순을 잊을쏘냐. 아름답고 고운 태도 어느덧에 늙는구나. 오동추야 성근 뒤에 우는 눈물 끝

이 없다. 은휘 못할 깊은 수심 아미에 걸려 있네."

이때 별채의 문이 슬그머니 열리더니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청승을 떠는 것이 누구냐?"

개천은 얼결에 일어나서 우선 꾸뻑, 인사부터 하고 보았다. 내외를 하려는지 저쪽에서는

문 뒤로 곧 숨는 것이었다. 개천은 서슴지 않고 문 앞으로 달려가 들여다보았다. 흰옷에 머

리를 길게 땋아 늘이고 눈에 총기가 있어 보이는 처자가 오히려 놀랐는지 입을 가리고 서

있었다.

"이 몸은 주인 어른의 회갑연 준비로 불려온 감상칼자 임아무라는 사람이오."

처녀는 그제사 안심이 되었는지 스스로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잔속을 하는 양을 보이며 말

하였다.

"내가 잠을 이룰 수가 없으니 노래는 그만두게."

그러나 개천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가씨의 깊은 근심을 위로하고자 노래를 불렀습니다."

닫힌 문 뒤에서 처녀는 잠깐 서 있는 듯하더니,

"기러기가 울어도 서리 맞은 낙화를 또한 어찌하는가. 그대는 잔치 음식이나 잘 만들고

돌아가게."

말하고는 신 끄는 소리와 함께 별당으로 드는 것 같았다. 개천은 밤늦게까지 중문간과 별채

의 담 사이를 오락가락하였다. 개천은 가슴이 터질 듯하였고, 온밤내 별당에서 풍겨오는 짙

은 꽃냄새로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개천은 회갑연이 조촐하게 벌어졌을 때에도 처녀의 모

습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처녀를 위하여 정성을 기울여서 강정과 향설고를 만들었

. 강정을 만들기는 찹쌀을 물에 담궈 하룻밤 재워 세말하여 그릇에 담고 좋은 불에 쪽박

을 넣어 끓여서, 쌀가루를 먼저 조금만 부어서 술로 저은 뒤에 엿초를 세 사발만 되어서 붓

는다. 손으로 저어 드리워보아 되거든 끓는 물을 더 부어 반죽하여 손에 높이 들어 떨어지

지 않을 만큼 반죽한다. 증편틀 세 틀에 보자기를 빨아 깔고 세 켜에 나누어 큰 시루 속에

세 층으로 안쳐놓고 방석 덮고 그 위에 장독소래 덮는다. 불을 싸게 때다가 또 틀을 두세

번 바꾸되 물이 줄거든 시루 구명으로 막대를 넣어 저어보아서, 물이 줄었거든 물을 시루

구멍으로 솥 속에 채워서 붓고 꽤 찐 후에 뜸들여 떼어내어 함지에 붓는다. 식기 전에 풀젓

개로 힘들여 속히 저어서 꽈리처럼 부풀어올라 물이 잡히게 되도록 저은 뒤에 떡판에 가루

를 펴고 들어부어 넓게 펴가지고 칼로 베어 분가루를 뿌린다. 홍두깨로 도독하게 밀어 음식

덮는 유지 위에 벌려놓아 김이 나가거든 장은 닷 푼, 광은 한 푼 되게 썰어 분가루는 얼멍

이에 치고 시루 찐 방에 겹치지 않게 벌려 깔고 굽은 것은 바로잡고 다 마르거든 그릇에 담

는다. 기름을 끓여서 그릇에 담아두고 통노구를 기울게 걸어 몸 잠길 만큼 기름을 붓고,

정을 한움큼씩만 넣고 검불을 미지금하게 때며 자로 속속히 저어 일 때가 되거든 불을 세게

바꾸어 급히 젓는다. 다 일 만하면 불을 그치고 작은 바구니에 자주 퍼담아 기름을 죄 빼어

그릇에 담아 쓴다. 흰 엿을 양푼에 물기 조금하여 저어 녹여서 강정을 자배기에 담고 엿을

고루 발라 여러 빛깔의 겉껍데기를 입힌다. 참깨를 물에 한나절만 담가 비벼보아서 허물을

벗거든 소쿠리에 건져 절구에 붓고 실한 깨를 체에 담아 하룻밤 재워 솥에 한사발씩 붓고,

불을 미지근히 때며 빛 흰 솔로 속혹히 저어서 다 튀기고 누르기 전에 퍼내어 까불어서 쓴

. 청태 신감초 계핏가루 잣가루 송홧가루 검은참깨등을 묻히고 홍색은 찰벼 뒤긴 것을 빻

아 지초기름에 섞어 쓰는 것이다. 향설고는 시고 단단한 배를 껍질을 벗겨서 꿀물을 타고

퉁노구에 붓고 배에 호소를 많이 박아 생강을 얇게 저며 넣는다. 숯불에 서서히 졸여 빛이

붉고 꿀이 속속들이 들어 씨가 무르거든 내놓되, 배가 시어야 빛이 붉으니 신맛이 적으면

오미잣국을 조금 친다. 마른 정과에 곁들여 쓰려면 국을 졸여서 단단하도록 하고 수정과에

쓰려면 덜 졸여 국을 넉넉히 하여 계핏가루를 약간 타고 실백을 뿌리는 것이다. 개천은 강

정을 나무그릇에 담고, 향설고는 화채그릇에 담아서 받쳐들고 주위를 살폈다. 계집종들은 안

채와 사랑채로 나가 손님 접대에 바빳고 하님도 부엌을 떠난 지 오래였다. 개천은 중문간을

얼른 지나 별채로 갔다. 대문을 밀어보니 슬그머니 열리는 것이었다. 개천은 별채의 마루로

다가가서 얕게 기침을 해보았다.

"게 누구냐?"

개천은 우물쭈물 말하였다.

"아씨, 이거나 좀 잡숴보십시오."

미닫이가 빼꼼히 열리면서 처녀가 핼쑥한 얼굴을 내밀었다. 처녀의 퀭한 두 눈과 창백한

뺨을 대하자 개천의 가슴은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듯이 썰렁했다.

"자네는?"

처녀는 문을 조금 더 열어젖히면서 개천을 내려다보았다.

"어제의 그 사람인가..."

개천은 팔모반을 툇마루에다 내려놓았다.

"드시고 기운을 차리셔야죠."

아가씨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잠깐 떠올렸다.

"두고 가게."

개천은 그래도 멈칫거렸다.

"좋은 인연이 아니라면 작파하셔야 합니다."

처녀는 아무 말도 없었고 개천은 돌아나오려고 몸을 돌렸다. 등뒤에서 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개천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려고 두어 번 침을 삼키고 나서 대답하였다.

", 열릴 개자, 내 천자입니다."

"잠깐 기다리게."

처녀는 개천을 불러 세운 뒤에 방안으로 사라졌다가 나와서 무엇인가를 내밀어주었다.

"오늘 일이 다 끝났겠지? 이건 나를 위해서 과자를 만들어온 감사로 주는 것일세."

개천은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았다. 밖으로 나와 살펴보니 자줏빛 귀주머니였는데, 안에는

두어 돈이 되는 은가락지가 들어 있었다. 저자에 가지고 나가면 한잔 푸짐하게 사먹을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개천은 그것으로 무엇을 사겠다는 생각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개천

은 귀주머니를 허리에 찼다.

그날 저녁 회갑 잔치가 파하여 그는 계사의 집에서 품삯을 받아가지고 나왔다. 혜정교 도

가에 돌아온 뒤에 개천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벽을 향해 돌아누워 눈을 감으면 처녀의 해사한 얼굴과 젖은 눈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

이었다. 그러나 처녀는 이미 누구인가에게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어떤 사내일까.

그러나 개천은 자기의 이런 소중한 감정만큼 깨끗하고 진실한 마음은 그 누구도 품지 못했

으리라고 자부할 수가 있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개천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도

가의 어두컴컴한 뒷방에 틀어박혀 공연히 귀주머니만 만지작거렸다.

", 이놈아. 벌써 몇번이나 얘기를 했느냐. 초동 최병사 댁에 생신잔치가 있어서 숙수가

셋이나 필요하다는데, 너는 인제 일을 하지 않을 참이냐?"

도가의 주인이 와서 호통을 내질렀지만, 개천은 슬그머니 돌아누울 뿐이었다.

"허허, 이 자식이 아주 송도 말년의 불가살이로구나. 이놈 밥값을 안하려거든 아예 솥을

떼어야겠다."

"걱정 마슈, 오늘로 그만둘 테요."

그러나 개천이만한 솜씨의 감상칼자도 구하기가 힘든지라 주인은 쭈그려앉으면서 하소하

였다.

"누가 널 모구 그만두랬냐. 허구헌 날 그놈의 주머니만 싸쥐구 누웠으니, 무슨 도깨비가

씌어두 단단히 씌었구나. 어디 보자, 그 주머니에 도대체 뭐가 들었나."

주인이 틈을 노리다가 슬쩍 귀주머니를 채어갔고, 개천은 그것을 다시 빼앗으려고 두 손

을 휘저으며 안달을 하였다.

"그것 이리 못 내놔요. 어서 달란 말예요."

주인은 저자 쪽으로 나가면서 주머니늘 열어보았고, 그 안에서 은가락지를 발견하고는 대

뜸 코웃음을 날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불두덩이 근질거리는 새봄도 아니고, 대가리에 쇠똥두 진작에 떨어진 놈

이 춘정이 다 무에야. 저 자식이 입에 낟알 들어갈 걱정은 않구, 어디서 또 종년들 장난질에

아랫배의 근기가 헐었고나. 내 어쩐지 네놈이 푸줏간에 들어온 소처럼 비실거린다 했더니..."

"그거 못 내놔요, 이걸 그냥..."

개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귀주머니를 머리 위로 쳐들고 우물거리는 주인에게로 달려들

어 멱살을 움켜쥐었다.

", 이놈이 어른을 다루려 하네."

"에라잇... ."

개천은 주인을 장바닥에 메다꽂았다. 어이쿠, 소리를 내지르며 자빠진 주인은 안면을 땅

위에 갈아 코가 터져서 주홍빛이 완연하다. 개천은 귀주머니를 빼앗아 들고 다른 주인께 뭇

매를 맞기 전에 달아났다. 혜정교서 달아나 갈 데가 있겠느냐, 칠패로 배오개로 어슬렁거리

며 돌아 다니는 중에 피곤하고 허기가 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명절 때마다 불려가던

역관네 집에 찾아가서 잘 통하는 하님에게 저녁을 얻어먹고는 다시 성내로 나왔다. 광통교

변이나 종루에 나가면 어디든 색주가난 기생 청루에서 그의 솜씨를 반겨주겠지만, 그는 오

직 계사댁의 아씨를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경이 되어 행인의 통행이 뜨막해지자 그

는 소공주동으로 향하였다.

개천은 계사 댁의 반화방 담장을 따라서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드디어 뛰어넘을 결심을 하

였다. 낮에 주인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면 엄두도 못 낼 짓이었으나, 이미 그를 패대기치고

일자리까지 떨구고 나왔은즉 이제는 갈 대로 가볼 작정이었다. 까짓, 포도청에 잡혀가 곤장

이나 맞게 될 테지. 아무튼 다시 한번 처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개천은 사방을 둘

러보고 나서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훌쩍 뛰어 담장에 간신히 두 손을 걸었

. 완력으로 상반신을 이끌어 담 위에 걸치고 나서 가까스로 두 다리를 담 위에 얹었다.

가 뛰어내린 곳은 사랑채의 뒷담께였다. 그는 한참이나 정원에서 숨을 죽이고 동정을 살피

다가 별채 쪽으로 옮겨 갔다. 별채 마루에는 등불이 내걸려 있었고, 미닫이에 두 여자의 그

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개천은 차마 부르지는 못하고 별당 앞을 서성였다. 만산 낙엽은 쓸쓸

한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흩어지고 공산명월은 적막한데, 서릿바람에 놀란 새는 공중에 높

이 떠서 구슬피 울며 긴 소리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별당에서 수틀을 들고 앉았던 처녀는

문득 먼 하늘로 날아가는 새울음을 듣고 퇴창문을 열어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창호에 어

리던 달빛이 썰렁한 바람과 더울어 방안으로 몰려들어 처녀의 창백한 얼굴을 더욱 하얗게

비추었다.

"문 닫은 창 앞의 달이라더니, 나는 가위 열어놓은 문으로 들어온 달을 창가에서 바라보

는구나."

그때에 개천은 정원석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달빛에 희게 드러난 처녀의 모습을 훔

쳐보느라고 상반신을 엉거주춤 들었다. 마당을 내다보던 몸종이 제 상전을 일깨웠다.

"아씨, 저어기 누가 숨었어요."

"가만있거라..."

처녀는 침착하게 몸종에게 이른 뒤에 신을 끌며 마당으로 내려섰다. 개천은 송구하고 부

끄러워서 더욱 상반신을 정원석 뒤에다 잔뜩 구부렸다.

"서방님, 언제 오셨어요. 오셨으면 그전처럼 제 방으로 들어오실 일이지 대장부가 이게 무

슨 짓이어요. 산성 선방에서는 언제 내려오셨나요. 지난번에 우리 마당쇠를 시켜서 밑반찬을

지어 보냈는데 받으셨습니까?"

개천은 더욱 고개를 쳐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안타까움과 시샘으로 찢어지

듯 아팠다. 처녀는 드디어 그의 뒤로 다가들어 손을 가만히 개천의 등뒤에다 얹었다.

"저는 서방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반상의 구별이 엄하여 세상에서 우리 연분을 바로 보

지 않겠지요. 그러나 양반이나 중인이나 상사의 정에 다름이 있겠어요. 부모님께서 저를 마

다하시고 출입을 엄금해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서방님, 야기가 싸늘하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

. 글공부에 얼마나 피로하셨어요."

처녀가 개천의 등을 살그머니 두드리는데 손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서 개천은 저절로 눈

물이 나왔다. 처녀가 언뜻 다르다고 느꼈던 것은 그 다음에 개천이 얼굴을 들어서가 아니라,

원래가 정인끼리는 서로의 살에 대해서 정말 살로만 아는 느낌이 있는 터이라, 처녀는 두어

발짝 물러나며 놀라서 부르짖었다.

"... 누구셔요?"

개천은 얼굴을 쳐들고 천천히 일어나 꾸벅 절을 하였다. 처녀가 두려운 중에도 상대의 얼

굴을 천천히 살펴보니 낯익은 숙수의 얼굴인데 두 뺨에 물기가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처녀는 두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우리 집에서 자네를 부른 일이 없을 텐데..."

개천은 그냥 말뚝처럼 우뚝 서서 처녀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여전히 두 눈에서는 눈

물이 흘러내렸다.

"나중에 내가 죽거든... 초상 치를 음식이나 장만하러 오게."

처녀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미닫이를 소리가 나도록 닫아붙였다. 눈치를 챈 몸종이 큰 소

리로 사람을 부르겠다고 나섰으나 처녀는 그를 붙잡아 말리는 듯하였다. 개천은 아무 말도

못하고 처녀의 방 앞에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처녀는 다시 미닫이를 열었다.

"개천이, 아직두 게 있느냐?"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처녀가 그를 부르자, 개천은 방문 앞으로 다가섰다. 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딱한 일일세. 월하노인의 적승은 이리도 엉뚱하게 얼크러지는가. 참으로 남녀의 상사

는 기묘하기도 하지. 나는 이미 몸과 마음을 드린 서방님이 계시네. 우리가 신분이 서로 다

르듯이 자네와 나두 다르네. 설혹 내가 주인이 따로 없다 하더라도 자네와는 안되는 일이

."

개천은 고개를 숙인 채로 말하였다.

"다 알구 있습니다. 그까짓 양반 댁 도령에게 상심하지 마시고, 어서 병이나 회복하십시

."

"그래 고맙네. 내 걱정은 말구 어서 가보라니까. 밤이슬에 오래 쏘이면 정기가 센 나이에

매우 안 좋다네."

개천은 툇마루를 짚고 애걸하듯이 말하였다.

"그저 여기서 하룻밤이라두 새우게 하여주십시오."

하고 나서 개천은 덧붙였다.

"저는 도가에서 쫒겨났습니다."

"갈 데가 없는가?"

"..."

곁에서 계집종이 볼멘소리로,

"공연히 투정 부리지 말구 가봐요. 정말 사람들을 부를까부다."

하는 것을 처녀가 또 말리고는 이번에는 옥지환 한쌍을 뽑아 내주었다.

"옛네... 이걸 갖다 주면 어느 객주에서나 적당한 값을 줄 게야."

",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다만 아씨하구... 어디 먼데로 가서 모시구 살구 싶

습니다."

처녀가 어이가 없는지 기가 막히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두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나만... 이담에 죽으면 자네두 제발 양반으로 환생하게나."

마지막 말은 아예 흐려져서 울음이 섞여 있었다. 미닫이가 닫히고 툇마루에는 옥지환이

남아 달빛에 푸른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개천은 옥지환을 손안에 넣고 만지작거리다가 다

시 슬그머니 내려놓고는 별당을 떠났다. 그것이 개천이 보았던 처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처녀는 이튿날 피맺힌 사연을 적은 편지를 심생에게 전하고는 삼경이 가까워서 답답하다고

문을 열어달라더니 달빛을 보다가 툇마루에 쓰러졌다. 비상을 먹었던지 입가로 피가 흘러나

와 있었다.

처녀를 묻고 오던 날 개천은 대취하였다. 그는 임시로 의탁하고 있던 청루의 골방에 틀어

박혀 죽은 듯이 사나흘을 잤다. 그는 이미 예전의 개천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전보다 더

욱 말수가 적어졌고 갓이나 도포짜리에게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개천은 심생이란 자를 찾

아 내어 그의 비루한 양심을 꾸짖고 처녀의 한을 풀어줄 셈이었다. 그는 계사 댁의 마당쇠

에게 술을 흠뻑 사주고 심생이 있다는 북한산의 암자를 알아냈다. 개천은 그를 죽여버리리

라 작정하고는 갈비를 다룰 적에 쓰는 날카롭고 긴 고기칼을 유지에 싸들었다. 그가 일부러

오후 늦게 출발하여 산에 올랐을 적에는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암자의 창호에는 가물

대는 잔등의 불빛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개천은 법당의 바로 옆에 달린 방에서 낭랑하게 글

읽는 심생의 소리와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문 밖에서 가볍게 헛기침을 하였다. 글 읽던 소

리가 멈추었다.

"밖에 누가 왔소?"

개천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물었다.

"여기 심도령이 있소?"

문이 밖으로 열렸다. 그는 어둠속에 백두의 상한이 서 있는 것을 보자 의아한 모양이었다.

"대체 누군가?"

개천은 산을 오르며 다짐했던 터라 침을 꿀꺽 삼키고는 신을 신은 채로 덥석 방으로 들어

섰다. 그리고는 뒤로 문고리를 당겼다. 등잔불이 펄렁이는 바람에 두 사람의 그림자도 떨리

는 듯하였다. 심생이 놀라서 무릎걸음으로 뒤로 물러나려는데 개천은 유지에 쌌던 고기칼을

빼어 겨누었다. 피를 먹던 쇠붙이라 환도보다 더욱 살기가 뻗쳤다.

"소리치면 죽는다. 묻는 대루 대답이나 하여라. 네가 심가냐?"

"그런데..."

개천의 칼 쥔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계사 댁의 무남독녀 아가씨를 잘 알겠지?"

심생은 차츰 두려움이 진정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노기를 보였다.

"내가 알든 모르든 네깐 놈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어서 그 칼 치우지 못할까?"

개천은 심생의 면전에서 칼을 치켜들었다.

"이놈... 양반이라구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나는 그 아가씨가 피맺힌 원한을 품은 채 땅속

에 묻히는 걸 보구 온 사람이다."

심생은 앞으로 다가앉았다.

"아니... 그렇다면 죽었단 말인가?"

"뻔뻔한 놈 같으니, 양반의 씨알이 따로 있다더냐. 아니 따로 있다면 너처럼 애비를 양반

으로 태어난 놈들의 인면수심한 종자가 따로 있겠구나. 나는 스스로 슬픔과 의분을 참지 못

하여 아가씨의 한을 풀어드리고자 찾아왔다. 네 목을 베어서 아씨의 산소에 갖다 바쳐야겠

."

심생은 멍청히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돌연 상 위에 펼쳐놓았던 책을 미친 듯이 찢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방의 사방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흐트러진 책상 위에 엎드러지더니 나직하게 흐느꼈다. 그의 어깨는 격하게 떨리

고 있었다. 개천은 그를 찌를 것도 잊고서 어느덧 자신에게도 슬픔이 몰려와서 선 채로 소

매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살의는 어느결에 울음으로 변하였고 그 슬픔은 같은 것이었다.

"이까짓 게 다 무어란 말인가. 성인은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경서를 지었거늘, 항차 이것이

무엇을 위한 공부란 말이냐. 나는 싫다, 나는 싫어."

심생은 이어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개천은 온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반 도령의 심사를 헤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 몹쓸 세상이로다.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라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마음에 품은 한은

끊일 날이 없겠고나. 심생은 개천이 염두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과거를 하여 장원급제를 한들, 이 무참한 몸으로 어찌 남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자리에

들 수가 있으랴. 공부란 몸을 닦고 사물을 주재하기 위함인즉, 양반이라 하여 꽃다운 나이의

소녀를 원한에 죽게 하였으니, 나는 이미 그르친 사람이로구나."

개천은 스스로 그 방을 물러나왔다. 그는 고기칼을 계곡 아래로 멀리 던져버렸던 것이다.

자기의 아둔한 상사가 끼여들 틈이 없었던 것이었다.

반상을 구별하여 사람끼리의 정마저 끊는 자들이 과연 누구겠는가. 개천은 그것이 틀림없

는 양반 사대부들의 짓이라고 여겼다. 저희들만 대대손손이 귀하게 살아보려고 구별을 만들

고는, 아랫것들에게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도록 억누르는 것이 아닌가. 개천은 더 이상 도성

에서 신수 편한 자들의 입맛이나 돋구며 살아가기는 싫었다.

그는 당장 청루에 돌아가 붓짐을 챙겼던 것이다.

교하의 숯포에서 주막을 열고 있는 숙수 출신의 주인이 있어 개천은 그와 함께 흰 물결을

날리며 술과 밥을 팔아 돈을 모을 작정이었다.

숯포는 파주 문산포와 더불어 임진 강화 예성 수로가 얽힌 곳이요, 송도로 들어가는 직로

의 나루터였다. 따라서 장사치와 행객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고, 말짐과 뱃짐이 서로 엇갈리

고 모이는 곳이었다. 숯포에는 주로 송상과 경강의 장사치들이 들끓었으며, 주막뿐만 아니라

물품의 위탁도 하는 객주가 번성하였다. 개천은 숯포에서 먼저 자리잡은 숙수에게 얹혀서

돈을 모은 다음에 작은 삼간초가라도 짓고 자신의 주막을 열 작정이었다. 주기는 지붕 위에

높다랗게 걸려 있고, 말을 매는 장목이 울타리 밖에 길게 서 있었다. 개천은 짧은 배자를 걸

치고 행상의 짐바리 수십여 필을 줄줄이 목고 들어와서 짐을 풀고 말을 매어 꼴을 먹였다.

그러고는 이내 부엌에 들어가 붕어찜을 장만한다, 숭어를 회친다, 장어를 굽는다, 정신없이

이 그릇 저 솥으로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요리가 다 되면 개천은 주인과 더불어 상을 이리저리 나르고, 강변에 나가 손님을 끌어오

는 것이었다. 저녁에는 빈방이든 손님이 들어찬 봉놋방이든 가리지 않고 모로 쓰러져 잠들

었다. 명색이 성님 아우로 지내던 사이라 주인은 그에게 용임을 후히 쳐주었고 개천은 백

냥을 바라고 열심히 일하였다. 하루는 일을 끝내고 설거지도 끝나 여러 방마다 곤하게 코고

는 소리가 드높은데, 주인이 개천을 불렀다.

"여보게, 자네 시방 기왓골에 이틀만 다녀와야겠네."

"내일은 경강 배 들어오는 날이라 눈코 뜰 새가 없을 텐데 거긴 왜 가우?"

주인이 술청에 섰던 떠꺼머리를 힐끗 보고 나서 말하였다.

"기왓골 전선달이 첫째딸을 여읜다고 급히 숙수 한사람 보내달라네. 우리 집두 급하기야

하지만, 전선달은 이 골서 보통 분이 아니시네. 기왓골 일대의 너른 전장이며 또한 배두 한

두 척인가. 아무튼 그분 말은 아무두 거역하지 못하네. 이렇게 품삯도 미리 보내셨고 일부러

우리 집을 지적하셨으니 갔다 와."

개천은 주인이 그렇게 말하였으나, 심드렁하니 받았다.

"성님두, 내가 그런 일은 이젠 하기 싫어하는 줄을 잘 알지요. 오죽하면 한양서 이리루 왔

을까."

", 그 사람 참 철없이 구네. 이봐, 자네더러 상전으루 평생 섬기라든가. 가서 음식이나

수걱수걱 만들구 맜있게 배부르게 먹어치우는 사람들게 좋은 일 삼아 하구 오란 게여."

"알겠수."

개천은 떠꺼머리를 따라 나섰다. 아마 그 댁의 마당쇠인 모양인데, 처음에 개천이 꽁무니

를 빼던 것이 도무지 이상스런 모양이었다.

"누가 양반 댁에서 혼구녕을 냅니까, 아니면 품을 잘라먹습디까?"

"얘얘, 넌 참견 마라. 내가 한양서 대갓집에 일 다니노라고 신물이 난 사람이다. 더구나

혼사는 딱 질색이여."

"이 댁은 겉으로 양반이지만, 알속은 그저 장사하여 밥술이나 먹는 집이우. 노대감네 마름

인걸 뭐."

"그러면 그 전장이 모두 남의 땅이여?"

"일테면 예전에 그리하였다는 말이우. 지금은 땅 차지를 많이 하였지요. 나두 한양서 왔

. 십년 전에 그 댁이 번창하여 가산을 늘릴 제 팔려 왔수."

개천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제깟 것들이 양반이라고..."

"... 그런 소리 함부루 하지 마슈. 우리 선달님이 범절은 얼마나 찾으시는데, 공연히 귀

에 들어갔다가는 장하에 죽습니다."

"그러니 짜투리 양반이 더욱 극성이란 소리로군."

기왓골 전선달네로 따라가보니 과연 오십여 칸의 기와집이 번듯한데, 동구 앞에는 미리

소문을 듣고 몰려온 거사패 광대들이 노숙을 하고 있었고, 집안에는 원근 사방의 일가 친척

붙이들이 다 모여든 모양이었다. 개천은 주인마님께 현신하고 나서 정해준 부엌으로 들어가

일을 시작하였다. 삼경이 지나도록 주인들을 따라온 마부와 하인들이 행랑채에서 투전을 하

며 밤을 새웠다. 개천은 그쪽으로 떡이며 묵이며를 내다 주었고, 새벽녘에는 잠깐 눈을 붙이

려고 행랑으로 내려갔다.

"우리게서는 어찌나 신랑 달아먹기가 자심한지 아예 우리 동네 행길로는 혼행이 얼씬을

못한다네."

"어이구, 댕기풀이 적에 동무들이 곯려먹는단 법은 있어두, 생면부지의 동네 사람들이 지

나가는 혼행을 덮친다는 얘기는 또 첨 들었군."

하인 구종배들은 마침 혼사가 난 집에 왔는지라, 신랑 다루는 얘기로 떠들썩하고 있었다.

"특히 글방 도령들의 장난이 심하지. 누가 당해볼 사람이 있나. 우선 좌장이랍시고 나이

먹은 도령이 원님처럼 상좌에 앉는다네. 그러면 다른 이들은 모두 신랑을 말에서 끌어내려

꿇어앉히고는 국문을 하는게야. 사령에 집장사령에다 급창이며 아전들이 늘어선 게 꼭 동헌

마당 꼴이야. 모양을 내어라, 하면 예이 하고 달려들어 신랑의 발목에다 무명끈을 묶어서 덩

치 큰 사람이 어깨에다 턱 둘러멘단 말씀이지. 집 장사령을 맡은 이가 대문 빗장을 빼어다

가 쳐들고 하명만 기다리지. 그러고는 첫날밤에 어찌 행사하였는가를 묻는단 말야. , 그러

니 신부의 가마는 저만치서 기다리지, 해는 차츰 기울지, 발바닥엔 불이 나지, 저고리 옷고

름을 어찌하였느냐, 치마끈은 어떻게 풀었느냐, 시시콜콜히 물어보거든. 그래 차마 대답 못

할 대목에 가서는 누구나 말이 막히는 법이거든. 신랑의 위인이 제법 호탕하고 왈짜기가 있

으면 얘기는 술술 풀리지만, 생겨먹기가 가뭄 끝에 오이꼭지 모양 씁쓸하고 쪼물짝한 사람

은 종내 더듬기만 하거든. 쳐라, 할 적마다 발바닥에 빗장매가 떨어지는 게야."

"그게 다 남의 동네 색시 훔쳐가는 죄가 아닌가베."

누군가 사동인 듯한 어린 하인이 참견하였다.

"우리두 낼 신랑이 오면 달아먹을까?"

그러자 좌중 사람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하였다.

"이 자식아, 공연히 궁둥이 살점이나 떼울려구 그래. 이런 얘기야 밥 먹고 똥깨나 뀌는 집

안의 도령들 얘기지, 너 같은 놈이 누굴 다룬다니?"

윗목에서 팔베개를 하고 있던 개천은 평소의 감정대로 불쑥 중얼거렸다.

"염병할... 똥깨나 뀌는 놈들의 씨가 따루 있다든가..."

그 말에 어찌나 한기가 흐르던지 모두들 무뚜름하니 말을 끊고 있었다. 그들은 차례로 뒷

전을 돌아다보고 그를 둘레에 끼우지 않은 자를 불쾌히 여겼다. 그들의 얘기는 다시 계속되

었는데 이번에는 색시에 관한 얘기였다.

"헌데 색시가 절색이라며?"

"다시 이를 말인가. 이 댁 안마님을 봤지?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살갗이 검든데..."

"이봐, 아니할말로 쇠빛 살을 가진 여자는 득남에 무병장수에 감칠맛이 기가 막히다는 게

."

"감칠맛이라니."

"... 저 자식은 귓구멍이 벽창호군. 타관서 경치구 코 싸쥐구 돌아갈라구 그래? 감칠맛이

라면 알아들어야지."

"게구녕인지 도끼 자죽인지두 모르구 오형제만 믿구 사는 애가 무얼 알겠냐? 오늘 자네

후장이라두 빌려주어."

음담이 슬슬 무르익는 양이었다.

"망할 녀석, 감칠맛이란 새큰새큰하다가 시원하다가 자지러지다가 삭신에 힘 빠질 제 감

질감질 올라오는 맛이여."

"거 무슨 소린지 원..."

"꼭 말로 듣기는, 막걸리 먹구 한밤에 일어나 마루 끝에서 오줌 내 깔기는 양 같군."

"에이, 그만 둬라. 신부가 금년 몇이여?"

"열여덟이라지, 아마."

"열여덟이면 무쇠가 녹지. 헌데 신랑은 열넷이라데."

"오뉴월 풋고추에 가을 피조개로군."

개천은 차츰 분수를 모르고 좌충우돌하는 그들의 음담이 어쩐지 통쾌하였다. 이튿날 신랑

이 온다 하여 일가네 하인배들은 모두 흑철릭을 입고 등롱을 건성 들고 마중을 나갔다.

랑이 들어오는데 아직 코흘리개요, 제깐에는 관례를 하였다고 땋았던 머리를 틀어올리고 그

위에 망건을 죄었다. 망건 자국이 시퍼런데 신랑은 피로와 두려움으로 더욱 볼꼴이 못 되었

. 여기저기서 신랑이 못생겼다고 흉이 나돌았다. 신랑은 사모관대 차려 입고 초례청으로

들어섰다. 신부는 녹의홍상에다 큰머리 틀어얹고 연지 곤지를 찍고 얼굴에다 분을 하얗게

발랐다. 신랑과 신부가 마주서니 대독과 방구리를 세워놓은 듯하여 구경꾼들 틈에서 킥킥거

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선달은 어디서 이런 고얀 웃음이 나오는가 눈을 크게 뜨고 둘레둘레

살피는 것이었다. 개천은 하객들의 점심상과 술상을 보느라고 고개를 돌릴 틈이 없었다.

디에나 대가의 초상 혼례에는 깍정이와 왈짜들이 기웃거리게 마련이라, 잡인을 젖힌다고 송

도로 가던 왈짜들 무엇이 하천들 틈에 끼여서 술에 밥에 떡에 포식하였다. 그들은 노잣돈이

나 얻어가겠다는 생각인지 해가 저물어도 잔칫집에 눌러 배겼다. 밤이 되자 운우행각을 엿

본다고 아낙네들은 창호 뚫기에 정신들이 없었다. 그러나 양가의 하인들과 어거지로 석객이

된 낯선 사람들은 행랑에 그들먹하니 들어앉아 장기를 둔다, 투전을 뗀다, 술을 먹는다,

며 눈붙일 줄을 몰랐다. 연신 밤참 국수와 제육과 전붙이들이 들어오고 술은 아예 동이 안

에 쪽박을 띄워서 방한가운데 놓았다.

개천이 일의 마무리를 하고 뒷일은 계집종들게 맡기고 행랑에 내려오니, 하천들은 아래윗

목에 골을 치고 들어앉아서 떠들썩하였다. 방안에는 제각기 내어 피우는 곰방대의 연기로

때아닌 안개가 자욱하였다. 바야흐로 어떤 사내의 입담이 무르익어 사람들은 그의 주위에서

고개를 빼고 침을 삼키면서 듣고 있었다. 개천은 슬그머니 뒷자리에 가서 벽에 기대어 앉았

. 그는 송도로 간다는 왈짜들 중의 하나인데 행색은 보부상 차림이었으나, 뼈대가 억세고

팔뚝이 참나무 몽치만이나 한 것이 기운도 제법 쓸 것 같았다. 이미 사십줄도 막바지인지

구레나룻에 서리가 하얗게 깔렸다. 굵은 주름살에도 불구하고 어글어글한 눈매와 텁텁한 목

소리로 별로이 노티가 나지는 않았다. 그는 놋재떨이에 곰방대를 탕탕 떨리니 가래를 크윽,

하였다가 두리번거려보고는 다시 꿀꺽 삼켰다.

"따님이 사주만 받아놓고서 얼굴도 못 본 신랑이 죽었다고 수절을 시키려니 대감의 마음

인들 오죽하겠는가."

"그렇지, 쯧쯧."

이야기에는 맞장구가 있어야 신이 나는 것이라 색시 댁의 수노인 듯한 자가 추임새 식으

로 곁다리를 놓았다.

"하루는 대감이 안으로 들어오다가, 아랫방에서 따님이 곱게 몸단장을 하고 얼굴을 거울

에 물끄러미 비춰보다가는 거울을 홱 내던지고 하는 꼴을 보았단 말이지."

"청상의 설움이로군."

"대감이 그 꼴을 보고 어찌나 측은한지 그냥 나올밖에."

"상것이라면 까짓 업어 내올 텐데..."

곁다리 추임새가 길어졌는지, 제각기 눈을 부라리며 사방에서 핀잔이었다.

"이 자식아, 얘기에 쐐기 치지 말어."

그러나 얘기꾼은 허허 웃으면서 잠시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이걸 바로 망문파 당문파나 마찬가지로 망문과라고 하는 게지."

"제길 또 세네. 곁가지 치지 마우."

누군가 성미 급한 자가 코똥을 뀌며 내지르니, 이번에는 좌중이 모두 동감인지 잠잠하였

.

"세상 제도가 그러하니 어쩔 도리가 있나, 그렇기로니 아침 저녁으로 따님을 대할 적마다

부모 동기간에 못할 짓이거든. 하루는 주인 대감이 답청을 가시겠다고 나섰네. 씨종으로 내

려오던 건장한 하인을 불러서 찬합에 노구 짊어지우고 말 견마 잡혀 나섰지. 정작 답청 놀

이판에 와보니 대감과 하인 외에는 아무두 없더라네. 그도 그럴 것이 애당초 아무도 청하지

않았거든."

"에키... 무슨 꿍꿍이가 있었군."

"찬합을 끌러놓고 노구에 술을 데워 하인이 부어 올리는 대로 한잔을 받아 잡숫더니,

무슨 파격인가. 뜻밖에 하인의 손목을 잡으며 잔을 돌리는 게야."

"저런... 수양아들을 삼으려나."

"또 방정 떨구 있네. 가만 좀 있어."

"하인이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하니까 기어코 고개도 돌리지 말고 단숨에 쭈욱 하라는 엄

명이거든. 노인네 장난이겠거니 여기면서 하인이 마시고 나니까 대감이 술병을 들고 부으려

하더라네. 사양하려니까 거푸 붓는단 말이지. 언뜻 보니 대감마님 글썽하던 두 눈에서 눈물

이 쭈르르 흘러내려."

"옳지, 당신 피가 섞였던 게로군."

그 맞장구가 하인들의 숨은 감정을 건드렸다.

"애비 모르는 새끼가 여기 또 있네."

"니 에미한테 쫒아가 물어봐라."

그러나 얘기꾼은 기다리지 않고 그들의 설왈설래를 잘랐다.

"그날 말과 하인은 돌아오지 않았네. 놀이터의 북새통에 훔쳐 타고 달아나버렸다는 게야.

며칠 뒤 별당의 과부 딸 방에서두 곡성이 터져 나왔지. 신세를 한탄하여 자진했다는 게야.

참혹한 꼴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며 수세는 남의 손 빌리지 않고 부모님만이 거두었지.

리고 이튿날 저녁때 쓸쓸한 상여가 집을 나섰네그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속인가?"

얘기의 뜻을 미처 알아듣지 못한 자가 투덜거렸고, 알아들은 자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허

허 하면서 탄식을 하였다.

"속현을 시켜서 내보낸 거 아냐. 열렸다 하면 숭례문이지, 그것두 모르나."

"대감도 어느덧 칠십 고래희에 아들도 장성하여 벼슬 살고, 그중의 하나는 함경도 암행어

사를 다녀와 주상께 복명하였다네. 여러 날 만에 초췌한 얼굴로 돌아온 아들은 온 가족의

환영을 받았는데, 밤도 이슥하여 사랑에서는 난데없이 부자간에 호젓하게 술상을 마주하여

앉았지. 아버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얼굴이더란 말이야. 어사또가 대감께 하는

말이 또한 괴이하거든. 철령을 넘어서니 한양이 천리지간인데, 안변지경의 깨끗한 시냇가 한

적한 마을에 당도했다는 게야. 동네 아이들이 뒤섞여 놀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하거

. 꼭 제 집의 막내둥이와 같더란 말일세."

"핏줄이 끌었군."

알아챈 자가 앞질렀다.

"아이를 앞세우고 들어가니 죽은 누이가 거기 살더란 말이야."

"참 묘하군."

"나두 그런 복이나 굴러들었으면."

"우리 주인 댁 여자들은 모두 박색이여."

제가끔 끼여드니 얘기는 자연히 파흥이 되었고 어느 하인인가 제 동무에게 오금을 박았

.

"이 녀석, 언감생심 어떤 몸이라구 그따위 소리를 하니?"

"어랍쇼... 너 같으면 마다하겠니?"

뒷전에 소리없이 쳐박혀 있던 개천이 불쑥 끼어들었다.

"양반의 음문이 쇠도 녹일 만하고 감칠맛이 있다는데, 나두 좀 해봤으면 좋겠네."

아무리 격의없는 자리라 하나, 그것은 불쑥 내밀어진 욕이나 마찬가지 소리였다. 어제는

비록 이야기의 자연스런 흐름중에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하나 이제 골자를 빼내어 개천이 씨

부리니 특히 색시 댁인 전선달네 하인들은 불끈하였다.

"여보, 댁이 누군데 입이 째졌다구 함부로 혀를 굴려?"

"안 그랬나? 어제 분명히 들었는데."

"아니 저 자식이... 저놈 감상칼자 아녀?"

"왜 아니래. 깐에는 제 따위가 양인이라네."

숙수는 신량역천이었다. 양인이란 말이 더욱 그들을 자극하였는지도 몰랐다. 개천은 더욱

깐죽였다.

"천예 노릇이나 평생 해 처먹어라. 세상이 바뀌면 양반은 상놈이 되고 우리는 양반이 될

판인데, 그러면 나는 이 댁 아씨나 들쳐업구 버젓하게 한양서 살련다."

"어어... 저놈 보게."

"요즈음 한양 소문두 모르나. 살주계다 검계다, 요란 법석이여."

개천은 제 분수에 넘치는 얘기까지 내뱉고 말았다. 실로 그로서는 모가지가 네댓 개나 있

어야 내뱉을 유언이었다. 개천이 스스로도 한양 저자에서 떠도는 말을 그리 깊게 귀담아두

진 않았건만 촌것들 앞에서 제법 담대한 소리를 한다는 것이 지나치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왈짜들이 그를 놓칠 리가 없었다. 대저 잘 나갈 때를 지나 춥고 배고픈 왈짜란 관의 끄나풀

노릇이나 양반의 사랑에서 아양으로 식객 노릇 하여 말년을 보내게 마련이었다. 전선달네서

노자나 나오기를 바라던 그들로서는 좋은 낚시감이었다. 늙은 왈짜가 손아래 동행에게 눈짓

하였다.

"코풀어버릴까."

손아래 왈짜가 속삭이더니 벌떡 일어나 개천의 상투끄덩이를 잡아 우선 기를 죽이느라고

무릎으로 면상을 질렀다.

"끼놈, 하늘을 거역하는 무리가 있다더니 네가 바로 그 혈당이로구나!"

개천이 입과 코가 터져 참혹한 꼴이 되었는데, 왈짜는 그를 밖으로 끌어내며 말하였다.

노는 어리둥절한 채로 따라 나섰다.

"자네 분명히 들었겠지? 이놈이 양반의 부녀자를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능멸했고 또한

적당과 한패거리라는 얘기를 말일세."

"똑똑히 들었소."

"어 그놈, 패악한 놈이로군."

양가의 하인들이 제각기 떠들었다. 그들은 나중에 저희 주인들께 벌받을 일만 두려워서

모두 개천에게 몰아 씌우려는 것이었다. 개천은 어찌해야 될지 몰랐고, 한편으론 증오심과

오기가 들끓어올랐다.

"예이, 이 개만도 못한 놈들아, 뭬가 무섭냐, 무어가 무서워? 양반의 밑구녕에선 옥이 쏟

아진다더냐, 사향이 달렸다더냐?"

"어이구 이놈, 말 잘한다."

"못할 게 어디 있냐. 세상만 바뀌면 양반의 집 년들은 저자바닥에서 줄줄이 겁간을 당해

싸다."

다시 왈짜가 주먹으로 개천의 입을 질렀다. 수노는 급히 사랑에 달려가서 소란에 깨어 일

어난 선달에게 대강 아뢰고는, 개천에게 떠들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려 광 속에 처박아두었

. 그들 대부분은 날만 새면 모두 떠날 사람들이었다.

선행이 떠나고 나서 전선달은 상놈을 치죄하노라고 사랑채 마당 앞에다 형구를 갖추도록

하였다. 신부의 후행으로는 작은아버지인 선달의 아우가 따라갔고, 전선달은 이러한 특별한

날에 불미스런 소문이 밖으로 번져나갈 것이 가장 걱정이었던 것이다. 선달은 아침에 송도

왈짜와 수노를 사랑으로 올라오게 하여 개천의 패설에 대하여 대략 캐보았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소리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었느냐?"

수노는 머뭇거렸다.

"차마... 양반을 욕하는 음담이라서..."

"허허, 옮겨보라는데두..."

송도 왈짜 중의 젊은 축이 말을 꺼내었다.

"그자가 말하기를 세상이 뒤집어지면 양반이 상놈이 되고, 상놈이 양반이 될 터인데 그리

되면 양반 부녀자를 상놈이 차지하게 된다구 그랬습지요. 양반의 음문은 쇠도 녹일 만하고

감칠맛이 있어 좋다더라고 하였습니다."

선달은 눈을 부릅뜨고 장죽을 입에서 빼내고는 허공에다 연신 찔러댔다.

", 저런 고이한 놈을..."

송도 왈짜 중의 나이 먹은 자가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하였다.

"그런 입방아쯤이야 선다님께서 치죄하시면 끝날 일이겠으나, 더욱 중대한 일이 있습니다.

자칫하였다간 누가 선다님께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올습니다."

선달은 자기에게까지 누가 미친다는 소리에 더욱 휘둥그래졌다.

"관재는 피하셔얍지요."

"아니... 관재라니?"

늙은 왈짜가 고개를 끄덕이며 선달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여기서는 어디 한양 성내의 소문을 들을 수가 있나요? 도성은 시방 적경으로 갯것전에

쉬파리 끓듯 하구 있습니다. 좌우 포청의 포졸과 기찰포교들이 저자 골목마다 하얗게 깔려

나와 있습죠. 의금부에서도 그쪽으로 넘기라구 독촉한답니다."

"역모란 말인가?"

선달은 아예 장죽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이를테면 역률에 버금하는 난리입니다. 도성에는 천예들과 정체 모를 상한들이 모여서

계를 만들어 작당하였다는데, 양반을 살육하고 부잣집을 턴다는 것이 계의 약조랍니다."

"그래, 한양서 그런 일이 있다는 것과, 누가 내게까지 미친다는 것은 무슨 관계로 그러한

?"

늙은 왈짜가 수노와 제 동료를 돌아보고 나서 말하였다.

"그 계를 항간에서는 살주계, 검계라구 얘기합니다. 지난번에 흥인문 밖에서 양반의 재물

이 여러 차례 털렸는데 그게 검계의 짓이었고, 성내에서 지사의 댁을 약탈한 것은 살주계의

짓이랍니다. 지금 여기서 잡힌 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가 한양서 온 검계의 일당이라는

것입니다."

"검계..."

"그렇습니다. 만약에 이자를 어물어물 내놓고 나서 다른 데서 잡히거나 못된 짓을 저지른

다면 관가에서는 선다님께 그 책임을 추궁할지도 모르고, 다구나 뒤에서 사주하는 자들을

찾노라고 포도청에서 기찰이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데, 따끔히 하시고 자백을 받아 관가로

넘겨야 뒤탈이 없겠지요."

예로부터 관가에 발고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대저 이익을 탐하거나 소심해서인즉, 선달

은 마음 깊이 이자들에게 고마워할 수밖에 없었다. 개천을 국문하려고 형장을 갖추는데,

달 집 사랑 마당에 공석을 깔고, 물푸레나무를 맷감으로 갖다 놓았다. 마루 위에는 전선달이

앉았고 송도 왈짜들은 댓돌 아래 나란히 섰으며 하인들이 제각기 작대기를 들고 늘어섰고,

동네 사람들이 마당 안에 하얗게 들어서 있었다. 선달은 치죄하는 순서를 어디서부터 시작

할지를 몰라 묶인 채 끌려들어오는 개천을 보자 덮어놓고 호통을 쳤다.

"저놈을 엎어라."

하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개천을 공석 위에다 스러뜨리고 어깨를 작대기로 눌렀다. 개천

은 분노로 하여 눈알이 붉게 충혈되었고 재갈을 물렸던 양볼따구니는 끈 자국으로 부어올라

있었다. 개천은 작대기에 눌린 채로 상반신을 일으키려고 목을 쳐들었다. 그러니 이마에는

주름이 잡히고 치뜬 눈에는 흰창이 드러나 험한 몰골이 되었다.

"... 저놈이, 노려보면 어찌할 테냐?"

전선달이 장죽으로 개천의 면상을 가리키는데, 개천은 악다구니를 썼다.

"일을 시켰으면 그만이지 무슨 죄가 있다구 사람을 가두고 벌주고 한단 말이우. 댁네가

양반이면 얼마나 양반이길래 이러시우?"

"아니, 어서 매우 치지 않구 무슨 구경을 하구 섰느냐?"

왈자가 참견을 하자 하인들은 서로 질세라 물푸레나무 작대기를 바람이 일도록 휘둘러쳤

. 개천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지르면서 사이사이로 행역질을 멈추지 않았다.

"느이 세도가 얼마나 가나 두구 보자. 아이구... 생사람 잡는구나."

개천이 소리를 지르다가 매를 이기지 못하여 쳐들던 고개를 떨구고 코를 공석에 처박고는

울음을 섞어 하소하였다.

"애고, 살려주오."

왈짜가 댓돌 아래서 전선달에게 말하였다.

"몸소 추달하실 것 없습니다. 제게 맡기십시오."

선달은 혀를 차면서 옆으로 돌아앉았고 왈짜가 개천의 머리 위로 걸어가 작대기로 그의

얼굴을 쳐들며 물었다.

"네 이놈, 어느 안전이라 바로 대지 않느냐. 네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패악한 소리로 양

반을 능멸하지 않았느냐?"

개천은 울면서 말하였다.

"느이들이 그랬길래 나두 얘기해본 거여."

", 이놈이 아직두... 다시 한번 말해보아라. 양반의 음문은 쇠도 녹이고 감칠맛이 나는데

세상이 바뀌면 네가 양반이 된다지 않았느냐. 이 댁 아씨두 네 차지라구 얘기하였지, 모두

들었느냐?"

왈짜가 하인들에게 물으니 제각기 들었다는 둥, 분명하다는 둥 대답이 나왔고 개천은 발

명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으로도 너는 대매에 맞아 죽어도 싸다."

구경꾼들도 모두들 개천이 감상칼자로서 분에 넘치는 입방아를 찧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

었고, 주둥아리를 가벼이 놀려서 죽게 되었으니 자신이 자초한 것이라 동정할 필요도 없다

고 여기는 듯하였다. 왈짜는 다시 멀찍이 걸어나가며 말하였다.

"그뿐 아니다. 너는 검계의 혈당이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았느냐."

개천은 기진한 중에도 그 말에는 귀가 번쩍하였다.

", 아니우. 한양에 그런 소문이 있다구 그랬수."

왈짜는 다시 하인들을 돌아보았다. 수노가 나서더니 그를 거들었다.

"이 자식아, 네가 세상이 바뀐다는 말을 하구 나서 검계와 살주계의 얘기를 하지 않았느

. 모두 들었다."

"우리네가 검계니 살주계니 알 게 무어야. 네놈이 지껄여대었으니 알았지."

"양반 댁 부인들은 저자바닥에서 줄줄이 겁간을 당해야 한다구 그러지 않았느냐."

하인들이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데 전선달은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치워라. 대매에 때려 죽인 뒤에 거적에 말아 갖다 버려야겠지만, 적당이라니 관가에서 찾

을 것이다. 죽지 않을 정도로 때린 뒤에 관가에 기별하여라."

매가 어지러이 떨어져 내렸다. 개천은 혼절하여버렸고 옷은 찢어지고 살이 터져 끔찍한

꼴이었다. 관가에서 장교가 나와 선달네서 적은 소장을 접수하고 개천을 지게에 짊어지워

데려갔다. 송도 왈짜들은 선달네서 후한 노자를 받아 떠났고, 선달은 잔치를 치른 뒤에 이러

한 욕스런 일이 벌어져 잡아내어 치죄하였기 망정이지 불미한 소문이 번졌으면 딸의 전정을

그르칠 번하였다고 가슴을 내리쓸었다.

개천은 꼼짝없이 검계의 혈당이 되어버렸고 교하에서 며칠간 조사를 받았다. 개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양반에 대한 욕설은 더욱 그치지 않았다. 원근 사방에서 소문을 들

은 생원 진사 선달짜리들이 연명으로 진정하여 그를 당장에 처단하라고 떠들썩하였다. 주막

주인도 불려갔으나 개천의 무고한 죄를 벗겨주기는커녕 오히려 제 발뺌만 하느라고 그가 한

양에서 수상한 무뢰배들과 몰려다녔다는 둥, 교하에 와서도 주막에 수상쩍은 사내들이 드나

들었다는 둥 오히려 그를 검계의 계원으로 몰아넣는 증언만 하였을 뿐이었다. 개천이 자신

도 처음에는 험구만 하였지 진정 적당은 아니라고 울며 떠들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스스로

검계나 살주계에 진작 입당하지 못하였던 것이 한스러웠다. 기왕에 이렇게 죽을 바에야 실

지로 양반을 살륙하고 재물을 터는 일을 저지르고 싶었던 것이다. 개천은 뒤늦게나마 자기

가 검계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죽어가기를 바랐다. 그가 기왓골에서 느닷없이 적당으로 만들

어져 체포된 지 닷새가 되어 해가 저물었을 무렵인데 옥사정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왔

. 개천은 짚더미 속에 온몸을 묻고 웅크려서 잠들기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자인가?"

하는 낮은 소리가 들렸고,

", 검계의 일당입니다."

대답하는 것은 옥사정이 아니라 목소리로 보아 그를 취조하였던 형방이었다. 옥사정은 개

천에게 어서 일어나 앉으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자물통을 따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개천의

등덜미를 잡아 칸살 앞으로 끌어냈다. 칸살 밖에는 그들이 들고 온 등불빛으로 얼굴은 보이

지 않고 옷자락만 보일 뿐이었다.

"저고리를 벗기고 등을 보이도록 해라."

낮은 목소리가 말하였고, 옥리는 우악스럽게 개천의 저고리를 젖히고 그들에게로 등을 돌

려 세웠다. 형방이 물었다.

"압송하시렵니까?"

낮은 목소리가 대답하였다.

"최종사계서 친히 보실 걸세. 내일 새벽에 가자를 준비하게."

 

호동의 옹장이 집에 시동이가 당도한 것은 중길이와 짝이 되었던 계원이 모교 삼거리 민

가에서 자진한 지 사흘이 지나서였다. 물론 그의 시신은 포청에서 끌고 갔지만 소문은 장안

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중길은 일부러 검계의 소문까지 퍼뜨렸으니, 검계에는 무과를 하

려는 한량들이나 양반 선비들까지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포청에서는 이들의 일당을 캐내

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이미 잡혀 있는 살주계 계원들의 입에서도 검계에 대한 내막이

어렴풋이 풀려져 나왔으나, 그들의 은신처가 어디인지 알아내지는 못하였다. 중길은 목내선

이나 고관 벼슬아치들에 대한 보복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최형기를 처치할 작정을 하였다.

산지니는 돌곶이 최덕구네 주막에 남아 있었고, 시동이만 중길의 부름을 받아서 호동으로

왔던 것이었다. 그는 화승총을 삿자리에다 감춰가지고 왔는데, 골방에 앉아서 총신에 기름을

칠하여 번들거리도록 닦고는 하였다.

중길과 시동이는 행상의 차림으로 배오개에 나가 누렁다리 못미처서 있는 최형기의 집을

여러번 살펴보았다. 시동이는 눈짐작으로 대문 앞에 사람이 서 있다고 여기고는 총을 놓기

에 가장 적합한 장소를 골랐다. 첫째는 빗맞았을 경우에 곧바로 숨거나 뛰어 달아나기 적합

해야 할 것이고, 둘째는 가까워야 할 것이며, 셋째는 이쪽에서는 훤히 내다보이지만 저편에

서는 좀체로 눈에 띄지 않는 곳이라야 할 것이었다. 최형기의 집은 누렁다리와 배오개의 중

간에 있는 샛골목으로 들어가서 개천 가의 두 번째 집이었다. 그의 집 앞으로는 다시 비좁

은 골목이 배오개 쪽으로 뻗어나가 있었다. 배오개 쪽에는 밤늦게까지 행인의 왕래가 잦아

서 숨기에 곤란하고 누렁다리 쪽에서는 그의 대문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므로 개천 건너편

에서 배오개로 뚫린 골목을 향하여 내다보면 최형기네 집 대문간이 측면으로 보이는 것이었

. 마침 개천가에는 느티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나무 뒤에 숨어 있기도 적당하였다.

러나 거기서는 포청에서 돌아오는 최형기가 누렁다리 쪽의 골목으로 들어서는 모양이 내다

보이질 않았다. 만약에 꺾인 골목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저쪽을 내다보고 있다가 신호하여주

지 않는다면, 포수는 줄곧 총포를 겨누고 엎드려 있거나 아니면 그가 대문간에 서 있다가

들어가버리는 짧은 순간에 총을 꺼내고, 겨누고, 쏘고 해야 될 것이었다. 장소는 가장 적합

하였으나 사람은 둘이 있어야 하였다.

"최형기는 내 얼굴을 알지도 모르오. 그런 위험천만한 짓은 못하겠는걸."

중길은 시동이가 고른 개천 건너 느티나무 아래에서 최형기네 대문 앞 골목을 내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시동이는 쭈그리고 앉아서 턱짓으로 말하였다.

"이만큼 좋은 자리가 없수. 저쪽 누렁다리 편에서 쏘려면 최가의 등을 노리게 되겠지만

그는 움직이고 있고, 나는 은신할 데가 종묘의 담밖엔 없단 말이야. 또한 동쪽에서라면 개천

건너가 되겠지만 바로 골목으로 들어오는 최형기의 정면이요, 그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나보다두 잘 알 텐데. 배오개 쪽에서는 행인이 많아서 총을 꺼내들지도 못할 게요. 여기

라면 숨어서 쏘기도 좋고, 거리도 가장 가깝고 뛰면 옹장이네 집이 바로 지척이란 말야."

화승총에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다는 시동이의 말이고 보니, 중길은 반대할 수가 없었다.

까짓 것, 비수를 품고 있다가 골목 안에 들어서는 최형기를 느닷없이 찌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형기는 포청에서뿐만 아니라 훈련원에서까지 그를 따를 자가 없는 출중한 무예를

지니고 있었다. 서투르게 대들었다가는 오히려 이쪽이 당하기가 십상이었던 것이다. 역시 중

길은 빠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시동이는 옹장이네 아들을 데리고 나가 최형기가 포청에서

돌아오는 길을 보여주었다. 정선방 좌포청으로부터 태묘의 앞길을 가로질러 배오개 사거리

를 지나 누렁다리 못미처 동쪽으로 곧게 뚫린 골목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샛골목으로 꺾어져

대문 앞에 서게 되는 것이었다. 시동이와 총각은 누렁다리에 걸터앉아 배오개로 나가는 길

을 바라보며 얘기를 하였다.

", 그러니까 저기 골목 어귀에 올 때까지는 살피지 않아두 된다. 다만, 저 골목에 들어

서자마자 네가 그집 앞의 모퉁이에 섰다가 개천 건너로 신호를 보내면 된다."

"신호를 보내고 나서 나는 어찌하우?"

"최형기에 앞질러 뛰면 눈치를 챌 것이오, 그대로 꺾인 골목으로 뛰면 내가 최형기를 겨

누는데 방해가 될 게다. 그러니 천천히 최가를 향하여 걸어가거라. 그와 엇갈려서 걸어간 뒤

에 골목을 나설 때쯤이면 총소리가 들리겠지."

"총소리가 들리구 나서 배오개로 뛰어가도 늦진 않겠구먼."

"물론이지, 총 놓구 달아나는 사람두 있을라구."

시동이는 총각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자아, 이젠 골목에서 집까지 몇 걸음이나 되나 헤어보자."

그들은 누렁다리에서 배오개로 내려오다가 골목 어귀로 들어섰다. 양편에 중인 동네의 작

은 기와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시동이는 매 걸음마다 수를 헤아려보면서 네 갈래 골목까지

나아갔다. 왼편으로는 개천 건너 느티나무들이 보였고 오른편으로는 꺾인 모퉁이에 최형기

네 집 대문이 보였다.

"몇이냐?"

"일흔넷이우."

"나는 일흔 여섯이다."

그들은 거기서 우물쭈물하지 않고 누렁다리로 다시 나아갔다.

"내가 나무 밑에 가서 각을 헤아릴 터이니, 너는 집 앞에서 골목 어귀까지 나아갔다가 다

시 돌아와보아라."

시동이는 이르고 나서 최형기네 집 대문이 측면으로 내다보이는 나무 밑에 가서 기다렸

. 이윽고 맞은편에 총각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시동이 쪽을 힐긋 돌아보고 나서 꺾인 골

목으로 사라졌다. 시동이는 한걸음 한걸음씩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수를 헤아려나갔다.

"일흔넷, 일흔다섯, 하나아 두울..."

총각이 되돌아서는 데서부터 숫자를 다시 헤아리는 것이다. 일흔 셋만에 총각이 나타났다.

그들은 그날 다섯 차례나 일각씩 헤아리면서 오후를 보냈다. 그리고는 저녁녘에 최형기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보았다. 역시 땅거미 질무렵에 최형기는 나타났다. 문 열어라, 하는 그

의 목소리가 개천 건너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최형기는 문을 향하여 방심한 채로 서 있었다.

시동이는 개천의 이쪽편에서 그의 몸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며 수를 헤아려보았다. 날씨가 제

법 쌀쌀했으므로 마누라가 따뜻한 방에서 나와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기까지는 스물세 각이

나 지나야 하였다.

중길과 시동이와 옹장이 아들은 저녁마다 개천가에 나가서 최형기네 집을 망보았다. 그가

몇점쯤에 돌아오는지, 다시 나가지는 않는지, 동행은 없는지, 주로 규칙적인 일들만 살폈다.

살핀 결과, 그는 유시께 돌아왔다가, 전립과 철릭을 벗고 갓과 도포로 갈아입은 뒤에 초경쯤

에 다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새벽가지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고, 삼경이 다 되어서

포졸과 함께 돌아오기도 하였다. 여하튼 퇴청하고는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를

노린 지 닷새 만에 시동이와 총각은 누렁다리로 나갔다. 시동이는 느티나무 아래 붙어 앉았

고 총각이 골목 모퉁이에서 서성거렸다.

연신 골목 어귀를 살피던 총각이 코를 헹하니 풀고는 배오개 쪽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연습이라 될 수 있는 대로 최형기와 마주쳐서는 안되었으므로 총각을 그대로 골목으로 곧장

내려가게 한 것이었다. 시동이는 저쪽 골목으로 들어서서 걸어오고 있을 최형기를 그리면서

수를 헤아려나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시동이나 총각보다도 훨씬 빠르고 성큼성큼 하여서 예

순다섯 만에 모퉁이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수물 남짓에 대문이 열리고 최형기가 사라졌다.

시동이느 이제 자신이 있었다.

첫방에 치명상을 입히려면 아무래도 귀 옆을 쏘아 맞혀야 할 것이다. 전립 위는 실수하기

가 쉽고 목 아래로는 부상이나 시키기 십상이었다. 느티나무 근처쯤에서 내다보면 어슴푸레

한 저문 빛 가운데 그의 귓바퀴가 손톱만이나 해 보였다. 그러나 시동이는 나는 새를 여러

번 떨구었으니, 그렇게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고 섰는 목표를 맞히기는 너무도 쉬운 일이었

. 매처럼 날래고 잽싼 명포도관 최형기는 이제 끝장이었다.

시동이는 결행하려는 날 오전부터 탄을 재고 장약을 넣고 다섯 각쯤의 화승을 달아두었

. 시동이는 마루에 앉아서 중길이와 총각을 번갈아가며 마당을 돌게 하였다. , 골목을

들어섰다. 총각이 코를 풀어 땅에다 흩뿌리는 동작을 하고 나서 비켜선다. 중길이는 시동이

의 주문대로 성큼성큼 팔을 크게 내휘두르며 걷는다. 시동이는 손가락으로 총신을 톡톡 두

두리면서 걸음을 헤아린다. 그가 대문 앞에 섰다.

"그마안..."

중길이가 멈추어 서고, 시동이는 꺼내들었던 부시를 화승에 대고 친다. 화승이 타들어가

,

"!"

하면서 시동이가 입으로 총 놓는 소리를 내면, 중길은 멋쩍게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보는

것이었다.

"죽어도 열번은 죽었겠네."

중길이가 시동이의 성화에 몇번이나 최형기의 시늉을 내면서 투덜거렸다. 시동이는 이제

앞뒤를 빈틈없이 짜맞추었다. 그는 화승에 부시치는 것만을 다시 몇번이나 연습해보았다.

오후가 되어 시동이는 호동에서 막바로 개천가의 느티나무가 열을 지어 서 있는 곳으로

나갔고 옹장이 아들은 베오개로 하여 최형기네 집 근처 골목 모퉁이로 찾아갔다. 주위가 어

둑어둑해졌다. 시동이는 자리에 싼 화승총을 곁에 놓고 맨상투 바람에 나무 밑에 기대고 앉

았다. 개천 건너편으로 총각이 서성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옹장이 아들이 코를 풀어 땅에다 뿌리는 시늉을 하더니 골목을 꺾어져 사라져버렸

.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시동이는 자리에서 화승총을 뽑아내어 어깨에 받쳐 겨누었

. 그는 차가운 총신에 뺨을 붙이고 골목을 곧장 노려보며 수를 헤아려나갔다. 한손은 총열

을 받치고 한 손으로는 부시를 꺼내들고 있었다. 그의 자태가 나타나는 즉시로 두 손을 그

러모아 부시를 칠 태세였다. 시동은 왼쪽 어깨를 느티나무 밑둥에다 잔뜩 기대고 오른쪽 무

릎을 세워 그 위에다 총 겨눈 팔꿈치를 괴고 있었다. 예순다섯, 예순일곱, 구군복을 입은 키

큰 최형기의 모습이 골목을 돌아 나왔다.

그는 언제나처럼 고문 문고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문 열어라, 하는 것이었다. 시동이는 호

흡을 끊고 부시를 화승 옆에 대고 힘껏 쳤다. 시척, 하더니 단방에 화승에 불이 당겨졌다.

그는 부시를 나누어 쥔 채로 총을 얼굴에 바짝 끌어올리고 총열을 최형기의 뺨 언저리에다

똑바로 겨누었다. 화승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시동이가 속으로 넷까지 헤아렸을 때,

위의 공기를 찢으면서 총성이 울려퍼졌다. 총열 끝에서 최형기가 넘어지는 게 내다보였다.

"해치웠다..."

시동이는 총을 자리에다 둘둘 말아 들고는 호동을 향하여 뛰어내려 갔다. 등뒤에서 싸늘

한 바람이 불어 느티나무 잎새가 어지럽게 흩날려 내려왔다.

그는 어둠속을 내달려 장경교에서 내려오는 길을 돌아 옹장이네 집으로 뛰어들었다. 들어

서자마자 긴장이 풀린 시동이는 마루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길이와

주인은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시동이는 헐떡이면서 내뱉었다.

"처치했네."

"정통으로 맞혔소?"

"여기를 단방에..."

시동이가 관자놀이를 검지손가락으로 찔러 보이고 웃었다.

"잘했소."

", 시원하다."

중길이와 주인은 제각기 시동이의 팔과 어깨를 잡고 흔들며 기뻐하였다. 삽짝이 열리며

총각도 뛰어들어왔다.

"나는 방포 소리만 들었는데... 어찌되었나요?"

"골루 갔다."

시동이는 껄껄 웃고 있었다.옹장이가 삽작 밖을 살피더니 그들의 등을 밀면서 말하였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한참 저녁 먹을 참이고, 이렇게 썰렁한데요, ."

"인제 좌포청두 끝났구먼."

그들은 연신 서로 웃어대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중길이가 말하였다.

"목내선이두 우리 밥이나 한가질세."

그러나 최형기는 흑철릭 앞자락에 묻은 흙을 털면서 일어났다. 대문간에는 그의 아내와

계집종이 함께 뒤어나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정말 괜찮으셔요..."

최형기는 전립을 벗어서 살폈다. 뒷전의 차양에 손가락이 드나들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

었다.

"저 땀 좀 봐..."

계집종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최형기는 그제사 써늘한 이마를 소매로 닦아냈

. 그는 어렴풋이 부시를 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혹시 화승이 아닐까 하면서 고개를 돌

리는 순간에 총소리를 들었고 그는 옆으로 납죽 엎드렸던 것이다 .최형기는 상대편이 몇인

지 알 수 없었으므로 쓰러진 채 잠시 기다렸었다. 그리고 어느 방향이었던가를 가늠해보았

던 것이다.

", 이걸 받아."

최형기는 아내에게 전립을 내주었다.

"에그, 끔찍해. 어서 들어오시래두요."

"괜찮소. 멀리 달아났을 게야."

그는 땅에 엎드린 채로 방포한 자리가 바로 위편에 마주 뚫린 골목 밖의 개천 건너편임을

짐작하였다. 그가 무관이 아니었다면 느닷없는 부시 치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을 리도

없었고 죽은 척하며 자빠질 생각도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바람결에 나뭇잎 밟는 소리를 들

었다. 한 놈이구나. 그때에 대문이 열리고 아내의 높은 비명이 들렸었다.

"잠깐 돌아보고 들어가겠소."

최형기는 질려 있는 아내에게 말하고는 골목을 곧장 올라갔다. 누렁다리 아래로 흘러내린

개천이 골목을 가로막오 있었다. 그는 거기 서서 과동 쪽의 숲이며 태묘의 기다란 담과 건

너편의 숲을 둘러보았다. 자기가 쓰러졌던 지점과 마주어 정면을 바라보니 둥치가 제법 큰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저곳이군..."

최형기는 느티나무를 눈여겨보고 나서 침착하게 누렁다리 쪽으로 돌아서 개천을 건넜다.

느티나무 밑에 이르니 둑이 제법 높직하고 아래쪽에 길이 보였다. 최형기는 나무 밑둥 근처

를 두 손으로 더듬으며 돌아 나갔다. 드디어 그는 부시의 쇠 파편 한쪽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는 쇠를 만지작거리며 나무 아래 서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어둠속으로 훤히 뚫린 골목

이 띠처럼 내려다보이는 것이었다. 최형기는 스스로를 적당이라 여기고서 골목을 노려보았

. 여기서는 대문이 정면으로 보이지는 않고 다만 네 갈래 길의 남북편만이 세로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큰길에서 꺾어서 들어오는 동서편의 가로로 뚫린 골목을 떠올렸다. 그렇다...

한 놈이 더 있었다. 그가 저쪽 길로 막 들어섰을 제 웬 사람이 코를 풀어 뿌리면서 바삐 다

가왔었다. 최형기는 그 소리가 불쾌했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할 수가 있었다. 보통 키에 떠꺼

머리에다 등이 구부정하게 앞으로 굽은 놈이었다. 그놈은 빠른 걸음으로 최형기의 옆을 지

나면서 힐끗 고개를 돌려 바라본 듯하였다. 최형기의 경계심은 바로 그때에 돋구어졌는지도

모른다. 뭔가 낌새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듯하였다. 저놈이 무슨 켕기는 구석이 있지, 하면

서 최형기는 지나쳤던 것 같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최형기가 저쪽 골목에 들어선다는 신호

를 받고 겨누고 기다리던 것이 틀림없었다. 호조의 담을 뚫고 포도청 문고리를 빼는 데에서

한걸을 나아가, 포도관인 자기를 쏘려고 노린다니. 이것은 보통의 적당들이 아니었다. 살주

계말고 어떤 놈들이랴. 최형기는 다시 누렁다리를 향하여 천천히 걸었다. 아니, 이것은 그들

패거리와는 좀 다르다. 최형기는 중흥동 골짜기를 들이칠 제 살주계 놈들이 검과 편전으로

대항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남별대에서 잡힌 자들의 말에 의하면 무기란 창포검이 고

작이었던 것이다. 증언하기를 도적들의 행동이 일사불란하였고 날래고 잔인하기가 꼭 호병

과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살주계의 계원들이란 소문만 높았지, 잡고 보면 보통의 대갓집 노

비들에 불과하였다.

"검계로군!"

최형기는 문득 걸음을 멈추면서 스스로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살주계의 위에는 검계라는

더 강고한 작당이 있으리라 믿고 있는 최형기였다. 최형기가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는 아직

도 두려운지 방문을 꼭꼭 닫고 바깥으로 난 들창을 연신 올려다보았다.

"도무지 무서워서 살 수가 있어야죠. 어디 진장으로나 가시든지 고을살이를 하시든지...

젠 제발 포청은 그만두셔요. 포한을 지닌 사람들이 많으니 당신을 해코지하려구 그러잖아

."

"어서 옷이나 내주게."

"또 나가시게요."

", 며칠 동안 못 들어올 거요."

"아이 참... 저녁두 안 드시구요."

최형기는 더이상 대꾸를 않으려 하였고 아내도 말리지 못하고 의관을 내주었다. 그는 철

릭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훌쩍 나가셔서 안 들어오시면 저희는 무서워서 어떡해요."

"무섭기는... 정 그러면 포졸 한사람 보낼 테니 문간방에 재우게. 그리구 당신이 잘해낼까

모르겠는데..."

최형기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해내다뇨?"

"얘 착실아, 너두 이리 좀 들어오너라."

최형기가 하녀까지 불러 앉혀두고 차근차근 일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시행하도록 하오. 오늘 내가 총포에 맞아 중상을 입은

것으로 할 테니까, 의원을 청해오고 동네에는 목숨이 살아나두 온전한 사람 구실은 못하게

되었다며 소문을 내란 말이오."

"아니... 아픈 사람이 아예 없는데 의원을 청해와요?"

"의원에게는 포청의 지시라고 은밀히 알려준 다음에 주위에 그렇게 퍼지도록 얘기하라구,

그리고 너는 내일 오전에 재오개에 나가 강원도 산삼을 급히 구해야 한다고 풍기고 다녀라.

매가는 누렁다리 사는 최종사 댁이라구 하면서, 목숨이나 살리련다구 그래라."

아내는 점점 영문을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무사하신 것만두 다행인데, 그게 무슨 방정맞은 소리래요. 온전한 사람 구실두 못

하다니요..."

", 이 사람... 포도관의 아내는 이런 일두 능숙하게 해내야 되는게요. 적당을 잡으려고

이러는 게니까, 식구들도 도와야지."

"그러니까 계책이란 말씀인가요?"

"내가 슬그머니 빠져나갈 테니 곡성을 내란 말이오. 너는 의원을 모셔오고."

최형기는 황급히 나가려다가 대문간에서 돌아섰다.

"너 보통 키에다 어깨가 구부정한 총각을 집 앞에서 본 적이 있었느냐?"

따라나온 하녀에게 최형기가 물었다. 하녀는 기억을 되살려보려는 듯 누이 가물가물해지

면서 고래를 갸웃거렸다.

"구부정한 총각이라구요... , 쉰네가 봤습니다. 어제 배오개에 나갔다가 오는데 집 찾는

이처럼 골목에서 기웃기웃하데요. 가만... 아무 생각 없이 봤는데, 빨래를 걷으러 나갔다 오

다가 오늘두 저쪽 골목에서 봤던 것 같애요."

최형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만나면 알아보겠느냐?"

최형기는 자신의 기억보다는 떠꺼머리와 같은 또래의 여자인 하녀의 기억이 더욱 정확하

고 깊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녀는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 금방 알 거예요. 눈이 작고 코가 뭉툭하더구먼요."

최형기는 퇴청하기 직전에 교하에서 압송되어온 숙수를 잠깐 심문하였고, 어디엔가 쓸모

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교하현감이 검계의 일당을 잡았다고 장계를 올렸을 때,

형기는 그 내용을 대충 읽고 나서 이는 볼기나 몇대 맞을 정도의 가벼운 죄인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그자가 진정 검계의 형당이라면 그렇게도 경솔하게 여러 사람 앞에서

발설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최형기의 생각이었다. 잔칫집에 불려간 숙수로서 양반 규수

의 혼인하는 모양을 보고 음담을 지껄였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대소가의

아랫것들이 모이는 행랑에서라면 능히 그럴 법하였다. 최형기는 상사람들의 성정과 시속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요즈음 어느 상놈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충심으로써 양반을

대하겠는가. 그러나 일단 검계의 혈당이라고 지목된 이상 포청으로 압송해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남별대에서 잡은 살주계의 계원들로부터 검계의 혈당들은 등뒤에 불로 지진

흉터가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압송을 나갔던 부장이 돌아와 놈은 가짜라고 말하였고, 최형기도 건성 심문을 하면서 검

계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자 스스로가 검계의 계원이라고 주장

하는 데 있었다. 양반을 모두 죽이고 세상을 바꾼다며 흰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처형당할 것

을 알려주니까 어서 목을 베라고 오히려 열이 나서 대드는 꼴을 보니 뭔가 단단히 씐 게 있

을 듯하였다. 최형기는 포청으로 나가지 않고 포교들이 저녁나절에 들렀다 가는 광통교 부

근의 색주가로 나갔다. 그는 거기서 기찰포교를 만나 이대장에게 자신이 피습당하였음을 알

리도록 하고 당분간 포청에는 나가지 않을 것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른 포교를 혜

정교 숙수도가에 보내어 그전에 개천을 고용하였다는 주인을 만나 개천에 대하여 알아보도

록 지시하였다. 최형기는 일단 마음먹은 계획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저자로 나다니지 않을

작정이었다. 색주가의 뒷방에 기둥서방이나 된 것처럼 들어앉아 며칠을 보내기로 하였던 것

이다. 주모가 저녁 밥상을 들여다 주면서 농을 쳤다.

"아예 여기 들어오신 김에 우리 소정이 머리나 얹어주고 가시우."

"아이구, 무르팍에 꽃이 필라. 연전에 자네 머리를 얹어주었는데, 공연히 생심을 내었다간

나를 그냥 놓아둘까."

"명년부터는 술도 못 팔게 한다는데 우리가 모두 장사를 폐하면 또 어디루 처가를 옮기시

려우?"

"설마 내년에는 풍년이 들겠지. 주모, 내가 와 있단 말은 손님들께 아예 입 밖에두 내지

말게."

"그러믄요, 나으리가 와 계신다구 소문이 나면 어느 한량들이 술 먹으로 오겠습니까."

최형기는 기방에 앉아 밥을 먹기가 쑥쓰러웠으나, 지금 같은 심정으로는 청계천 밑의 깍

정이 삼촌이 된다 하여도 마다하지 않을 형편이었다. 포교가 돌아와 숙수도가에서 알아온

개천의 행적을 아뢰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자에게 사연이 있었구먼."

"도가에 있을 무렵에 아주 인사불성이었답니다. 처녀는 자진해버렸구요."

최형기는 빙긋이 웃으며 말하였다.

"자네 잠자리 꼼자리 노래 아는가?"

"아이들이 암놈으로 숫놈 꾀어서 잡을 때 휘휘 돌리며 부르는 노래 아닙니까?"

최형기는 이제 눈을 부라리고 바삐 뛰어다닐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동적전과 왕십리의 벌판을 하얗게 메우며 싸락눈이 흩날리고 있었

. 산지니는 솔부리 졸개들과 더불어 돌곶이 주막에 남아 있었는데, 시동이가 성내에서 돌

아오면 함께 솔부리로 나갈 셈이었다. 고달근과 황회는 지난 가을에 재물털이를 하고 나서

는 가끔 양주에나 다녀올 뿐이고, 솔부리에 박혀서 나올질 않았다.

"놀기 좋아 넉동치기라더니 어느새 해가 다 갔네..."

마루에서 담배를 먹던 주막 주인 덕구가 제법 시름 섞어 한마디하였다. 그는 건너편 봉놋

방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들아, 낮잠만 자지 막구 나와 눈 구경 해여."

슬그머니 방문이 바깥으로 밀려나오고 눈 주위가 부석부석한 산지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멀뚱하니 덕구 쪽을 건너다보다가 천천히 하늘로 머리를 쳐들었다.

"아직 해장술이 덜 깼군."

덕구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하였다. 그가 아무리 솔부리 사람들의 덕을 본다고는 하여도,

노상 주막에 붙어 있는 것들이 그들이요, 요즈음에는 살주계 종놈들까지 쑥덕쑥덕하며 드나

들어서 도무지 불안하기가 염초에 올라앉아 부시 치기였다. 산지니는 불그레한 눈으로 하늘

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좀 나댕기구 운신을 해야지 노상 쓴물이나 들이켜구 지패나 들어다보구 앉았

으니..."

그러나 산지니는 엉거주춤 일어나 뒷간엘 다녀오는 것이었다. 그는 마당 가운데 서서 멀

리 들판 위로 끝없이 날아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벌써 겨울이네."

산지니가 중얼거렸다. 주인은 낼름 맞장구를 쳤다.

"왜 아냐, 이놈의 장사 때려치우구 나두 솔부리에 들어갈까."

산지나는 부엌에 들어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덕구 옆에 와서 걸터앉았다.

"오늘이 며칠인가..."

"스무이틀 아냐?"

산지니는 손으로 뭔가 꼽아보는 모양이었다.

"그렇군..."

이제 며칠 지마면 곧 사촌매부의 제삿날이었다. 산지니는 그가 어떤 사내인지도 몰랐고

오히려 가장 미워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누님 석씨가 걱정스러웠다. 신통하게도

그는 누님에 대하여 전혀 생각을 않고 있었다. 관가에서 자기 때문에 얼마나 수모를 받았는

, 양식은 떨어지지 않았는지, 한가네서는 괴롭히지 않는지, 그런 걱정들은 처음에 강을 건

너고 솔부리에 들어가고 하던 무렵에나 들끓었던 생각이었다. 한양으로 나온 뒤에 너무도

숨막히게 쫓아다닐 일이 많아져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산지니였다. 이번 제사에 누님은 아

이들을 세워두고 쓸쓸한 방안에서 얼마나 서럽게 우실까. 산지니는 바로 지척에 배가 있고,

그 배만 타면 송파에 당도할 것을 알았다. 밤에 가자. 밤에 찾아가면 설마 누가 나를 알아보

. 산지니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물기가 그렁그렁해졌다.

"왜 그러나, 이 사람아."

덕구가 산지니의 변해가는 표정을 보고 의아하여 물었고, 산지니는 선하품을 해 보이며

얼버무렸다.

"아직 술이 덜깼나. 아유 졸려."

"졸리면 잠 깨게 장작이라도 패어봐."

주인이 이죽이자 산지니는 그 말을 듣고는 소매를 걷으며 나섰다.

"정말 그래야겠구먼."

산지니는 도끼를 들고 나뭇단이 쌓인 곳으로 갔다. 그는 통나무를 보기 좋게 쪼개어내면

서 시름을 털어버리려는 듯이 보였다. 눈은 저녁때까지 계속 내려왔다. 마당에 쌓인 눈이 발

목을 덮을 정도가 되었다. 산지니는 이 길로 나서서 광주로 내려가볼 참이었다. 어두워질 무

렵에 들렀다가 내일 새벽이나 모레 밤쯤에 빠져나오면 아무도 그를 발견할 자가 없을 것이

었다.

산지니는 저녁을 먹고 나서 솔부리 졸개들 중에 연배가 높은 자에게 일렀다.

"내가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시동이가 돌아오면 기다리라고 하게나."

"어딜 가시게?"

", 갑갑해서 서강에 다녀올까 하고..."

"그럼, 급한 일이 생기면 모서방네 주막으로 사람을 보내지."

산지니는 살변을 일으키고 도망 나온 광주 송파에 가겠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신이네 주막 얘기가 나오자 잠깐 다른 말을 해줄까 생각하던 산지니는 고작해야

하루나 이틀 차이가 될 터이라 굳이 밝혀두지 않더라도 별 문제가 없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내일 이맘때 돌아올 테니 염려 말게."

산지니는 주막 주인 최가를 불렀다.

"내가 맡겨둔 포목 잡았다 치고 삼십 냥만 돌리슈."

주막 주인이 돈이 있겠는지 모르겠다며 들어갔다 나오더니, 이십 냥을 긁어모아가지고 나

왔다.

"요새는 돈 보기는 쉬워도 곡물 보기가 어렵지. 왜 그래, 여기선 투전하기가 마땅치 않으

니 경강으로 나가겠다는 거여?"

산지니는 쓰다 달다 말이 없이 돈을 괴나리봇짐에 챙겨 넣었다. 그는 돌곶이를 나서서 중

량포로 내려갔다. 거기서 뚝섬까지 나가 경강에서 오는 배를 얻어 탈 생각이었다. 온 들판이

새하얀 은세계라 날이 저물어도 한참이나 주위가 훤하니 밝아 있었다. 길이 엇갈리느라고

시동이는 거의 성문이 닫힐 무렵에야 흥인문을 나서서 돌곶이에 당도하였다. 그는 이 길로

패거리들과 함께 솔부리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봇짐과 사다리를 둘러메고 털배자에 개잘량

까지 덮어쓴 시동이가 주막에 당도하니 산지니는 이미 나가버린 뒤였다.

"산지니 어딜 갔나?"

"모서방네 주막에 댕겨온다고 횡하니 나가데."

시동이는 개잘량을 벗어 어깨에 내린 눈을 털었다.

"그 사람 참, 진득허니 기다리지 않고 서강에는 왜 갔어. 우린 날이 밝자마자 솔부리로 돌

아가야 할 텐데. 당분간 한양 근처에서 얼씬거릴 필요가 없단 말일세."

솔부리의 일당이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나?"

"몰라서 묻나. 내가 최형기를 쐈지."

"그래, 그 자식이 밥숟갈을 놓았나?"

시동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맞아서 죽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제깐 놈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여. 요행히 목숨을 살려

도 병신이 된다네."

솔부리 일당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에그, 잘코사니야. 재작년 그러께 박힌 티눈이 싹 빠진 기분이군."

시동이는 산지니 생각은 금방 잊어버리고, 최형기를 쏘던 이야기에만 열을 올렸다.

산지니는 송파로 들어갔다가는 얼굴을 알아볼 자들이 많았으므로 삼전나루에서 내렸다.

그는 저고리에 두툼한 개가죽 배자 입고 그 위에 긴 저고리를 걸쳤으며, 등에는 괴나리봇짐

이요 발에다 행전에 감발 치고서 머리에는 상주라도 된 듯이 방갓을 깊숙이 눌러 썼다.

지니의 봇짐 속에는 엿이며 백미 건어물 등속이 들어 있었다. 비록 석씨네가 항산이 있어서

밥을 굶지는 않는다 치더라도, 한양 성내에서는 일반 백성들은 제 끼니를 찾아 먹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라 죽으로 연명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산지니는 숯내를 따라서 널다리를 향하

여 걸었다. 멀리 낙생역말의 불빛이 보이자 산지니의 가슴은 절로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이 저녁에 누님은 무얼 하고 계실까. 굶어 보채는 아이들을 토닥거리며 혼자 어둠속에서

눈물을 짓고 계시는 건 아닌가. 겨울 땔나무는 장만을 해두었는지. 이 산지니가 있었으면 한

닷새 부근 청량산이나 백운산에 올라 산더미 같은 솔가지를 쌓아놓았으련만, 그 연약한 몸

과 고운 손으로 가랑잎이나 제대로 긁어다 두었는지. 산지니는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을 방

갓으로 가리고 눈길을 걸었다. 그는 이참에 누님의 마음만 움직일 수 있다면 아이들과 누님

을 아예 솔부리로 이사시키고 싶었다. 역말을 지나 숯내의 가녘에 자리잡은 널다리로 들어

서니 석씨네 집의 기와 얹은 토담이 나타났다. 산지니는 잠깐 멈추었다가 집으로 다가갔다.

문을 밀어보니 굳게 잠겨 있었다. 전 같으면 송파로 나갔던 산지니가 밤늦게 돌아올 것을

요량으로 삽짝을 열어두련만, 이제는 아녀자뿐인 집안이라 날만 저물면 문단속을 할 것이었

. 문단속이라야 싸리를 엮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누구든 들어갈 염만 있으면 쉽게 부수어

버릴 수도 있었다. 산지니는 싸리를 비집고 안으로 손을 넣어 문에 가로지른 작대기를 뽑아

냈다. 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저항 없는 사리문을 홱 잡아젖혀서는 토담에다 소리나게 밀어

붙였다. 산지니는 마당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을 다잡아 다시 작대기를 질러두었다. 캄캄

한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고 산지니는 우선 기침을 해보았다. 그래도 아무 때꾸가 없

었다. 산지니는 나직하게 불러보았다.

"누님... 산지니 왔습니다."

그러자 뒤꼍에서 희끗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더니 한 손에 있던 괭이를 내던지며 석씨가

달려들었다.

"아니, 이 이게 누구냐."

산지니는 방갓을 벗었고 석씨는 그의 두 손을 잡았다가 얼굴을 더듬었다가 하며 어쩔 줄

을 몰라하였다. 석씨는 보쌈을 당했던 일이 있는지라 인기척이 들리자 뒷문을 열고 나가 대

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서 들어가자, 춥지?"

산지니는 석씨의 뒤를 따르며 두서없이 이것저것 물었다.

"나무는 해두었어요?"

"그럼, 내가 뭐 나무두 못할 줄 알았니."

"양식은요?"

"남들 하는 대루 죽을 쑤어서 그렁저렁 먹는단다."

그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석씨가 부엌에서 관솔가지를 붙여다가 등잔받침에 끼워두자 방

안이 밝아졌다. 아이들이 따뜻한 아랫목에서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산지니는 손으로 조카들

의 뺨을 차례로 쓰다듬어 보았다.

"모레가 매부 제삿날이지요."

"그렇구나. 네 걱정이나 하지 않구... 그동안 어디 가서 뭘 하구 있었니?"

산지니는 불빛에 드러난 누님의 얼굴이 초퀘하고 검게 그을었음을 보고는 마음이 아팠다.

"저야 사내자식이 나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주워 먹고 살았으니 별 걱정이 있었겠어요?

헌데 누님, 여기서 혼자 고생하시지 말구 저 있는 데루 가십시다. 제가 돌봐드려야 누님두

고생을 덜하시지요."

"우리가 무슨 고생이냐. 땅 있고 내 집 있으니 우리 걱정은 마라. 그보다는 네 있는 데를

가르쳐주면 우리카 틈나는 대로 가서 만나보면 좋겠다. 네가 광주로 오는 건 별루 좋지 않

."

석씨는 근심 깃든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놈들이 괴롭히거나 핍박하지는 않습니까?"

산지니가 금방이라도 무슨 말을 들으면 달려갈 듯이 험악한 얼굴로 물으니, 석씨는 배시

시 웃었다.

"네가 시킨 대로 형방에서 원서도 부착하여 오히려 한가네서는 이 고장서 창피만 톡톡히

샀지. 그 무렵에는 기찰포교가 낙생역말에서 노상 붙어 살았단다. 한번은 판관네 큰서방짜리

가 우락부락한 놈들을 데리구 찾아와서 겁을 주면서 네가 도망갔을 만한 데를 대라고 볶아

치더구나."

"내 이놈을 그냥..."

"그렇다고 내가 순순히 당하고만 있겠니? 소리를 질러서 온 동네 사람들을 모여들게 했

. 여러 동네에서두 우리 일을 알고는 모두 한판관네를 욕하던 때이라, 네 동무들이며 촌로

들이 나서서 팔을 부르걷고 대들었지. 그 사람들 모두 혼쭐이 빠져서 달아났다."

"원립이란 놈은 어떻게 합디까?"

", 그 사람두 네가 달아난 뒤에 저희 내자하구 왔더구나. 하도 주리고 배가 고파서 살

두 섬에 눈이 뒤집혔노라고 그러더구나."

산지니는 의외에도 누님이 동네에서 훌륭한 평판을 받아 아무런 침탈도 당하지 않는 것만

다행스레 여겼다.

", 내 정신 좀 보아. 너 저녁 먹었니."

", 돌곶이에서 먹었어요."

"돌곶이라니... 저어기 한양 흥인문 밖이 아니냐?"

산지니는 얼른 말을 돌렸다.

"아직은 제가 마음대로 널다리에두 찾아오지 못하고 그러지만, 이제 마음놓고 모여 살 날

이 올 겁니다."

"글세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니. 네가 어서 자리잡구 사는 날이 왔으면 내야 더 바랄 게

있겠니."

"누님, 이사를 하십니다. 아무래두 여기 이렇게 사시게 할 수는 없어요."

"내가 따라 나서봤자 네게는 짐만 될 터인데..."

산지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저는 누님 때문에 살 수 있는 겁니다. 아이들두 잘 키워서 제 손으루 빌어먹구

살게 해야지요. 누님 저는 지금 세상을 바꾸겠다는 당에 들어가 있습니다."

석씨는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세상을 바꾸다니... 그게 무슨 대감을 믿는 교냐?"

"상놈들은 태어날 때부터 상노믜 씨가 다루 있습니까? 양반의 세상이 끝장이 나야지요."

"그러면 임금은..."

"임금두 바꿔야지요."

석씨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면... 그게 바루 역적질이 아니냐?"

"모두 다 입국할 적에는 역적이었답니다. 승자 즉 충신이요 패자 즉 역적이란 말두 있데

. 저는 무식하여 잘 모르지만 때가 무르익었답니다. 양반들의 세상이 곧 끝장이 난답니

."

석씨는 아직도 산지니가 지껄이는 소리들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가 엄청난

생각에 물들었다는 것만을 느끼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러한 큰 죄는 더 이상 저지르지 않도

록 타이르고 싶었다.

"얘얘, 그게 무슨 소리냐. 비록 네가 팔자 기박한 나 때문에 살변을 저지르고 숨어 산다고

는 하지만, 우리 집안은 원래가 유학도 계시던 어엿한 양반의 집안이야. 향곡에 유락하여 상

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저것들을 잘 길러서 과장에 내보내는 것이 원이란다. 너두 한

번 실수로 세상을 등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너를 욕하는 사람이 없단다. 모두들 한

판관네를 손가락질하더라. 산진아, 네가 작은 아버지의 서자라 할지라도 너는 우리 석씨 문

중의 사람이다. 우리 집안에서 그 끔찍한 역적이 나와서야 되겠니. 너 바른 대루 말해다오.

어디 가서 어떤 사람들하고 어울려 다녔어?"

산지니가 그전 같았으면 고개를 숙이고 누님 석씨의 말에 한마디도 거역함이 없이 수걱수

걱 듣고 사죄하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산지니도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산지니는

눈을 똑바로 뜨고 누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누님, 저는 물론 누님이나 제 아버지, 큰아버지 같은 분들과는 처지가 다릅니다. 그래서

원한도 더욱 깊지요. 누님이 한가네에 끌려가서 받은 굴욕이나 제가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이

모두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지요. 세상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조정에 칼을

들이대는 것은 저들이 보기에 죄가 될 뿐이지, 우리 처지에서는 전혀 죄도 아무것도 아닙니

. 오히려 눌려서 금수처럼 살아가는 많은 상것 천것들의 마음은 우리 편입니다. 호사를 누

리는 양반들만이 우리의 역모를 하늘을 거역하는 죄로 여기겠지요. 조정 권신들에 붙어 재

물을 모은 자들은 징치하고 잃은 것을 찾을 따름입니다. 누님, 안락한 동네를 떠나서 세상을

다른 눈으로 내다보면 하 가지가 백 가지로 그릇되었음을 잘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양반의

세상을 뒤엎고 재물을 탈취하려는 것은 우리 몇몇이 영화롭게 잘살자고 그러는 게 아니라,

사람답지 못한 인생을 살면서도 어찌 살 바를 모르고 벌레처럼 짓밟혀 사는 다른 사람들게

바로 사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을 몸소 겪는 자만이 바로 사는 길을 알 수가

있지요. 이제 저는 한판관 따위나 쳐죽이고 형틀 아래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 거예요. 이런

세상을 만든 자들과 싸우렵니다. 제가 싸우다 죽으면 다른 이들은 제 죽음에서 사람답게 사

는 법을 배우게 되겠지요."

산지니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화끈해졌다. 임금을 치는 일에 대한 정당함을 일반 백성

들 사이에서 어떻게 얻어내야만 하는가. 또한 어째서 부자와 권세가는 제일 첫 번째 적이어

야 하는가를 산지니는 무슨 말로 표현해야 될지 몰랐다.

"요즘 항간에는 갖가지 소문이 나돌고 있지요. 우리 대덕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곧 미륵의

세상이 온답니다. 그분은 말세에 오신다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랍니다. 말세가 오면 상하의

분멸은 없어지고 변은 잇달아 일어나고, 마침내 임금은 어리석고 나라가 위채로워 대대로

국록을 먹던 신하들은 죽음을 못 면하게 된다지요. 우리는 무진을 바라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세의 지향은 이미 시작되었어요. 앞으로 아홉 해 동안이나 흉년이 계

속될 것입니다. 사 년간의 역병으로 인명의 반은 죽고 사대부들은 사치와 호화로운 살림으

로 망할 것이며, 벼슬아치들은 이익과 권세를 탐하다가 서로 싸우는 중에 망한다고 합니다.

혹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금도 별로 나을 게 없는 세상이지요."

산지니의 말에 얼마간 마음이 움직인 듯 석씨는 두려운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세상이 바뀌어 공연히 죄없는 이들이 갇히고 죽는 일보다는 차츰 나아져야지. 우리네야

뭘 알겠냐. 죽으라면 죽고 살려주면 살고 그런거지. 그보다는 이담에 우리 자식들이나 잘 가

르쳐서 과거에 나가도록 하고 또 그 가운데 어진 이들이 많이 나와 순리껏 나라를 바꾸어나

가도록 해야지. 지금 세상이 혼란한 것은 간신들과 탐관오리들 때문이다. 주상께서야 뭘 아

시겠느냐. 너도 그렇게 나대지 말고 네 신변을 생각해라. 제발이다."

"아닙니다, 누님. 미륵이 꼭 오십니다. 늦게 오시든 아니면 아예 오시지 않든간에 우리가

미륵의 세상을 기필코 이루어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다. 대저 아조에서 제도를 바꾸려던 이들이 모두들 임금을 죽이고, 밑에서부터 위에

이르기가지 일시에 혁파할 생각을 먹지 못하고, 어떻게 조정에 기어들어가 콩이야 팥이야

다져서 천천히 고쳐나간다는 생각을 하거나 고작해야 저희 벼슬아치들까지 치고 받아 환국

하는데 그쳤으니, 일반 백성들에게야 두루 미칠 수가 없었고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되고

말았으렷다. 역모가 혁파에까지 이르지 못한 바가 대개 그같은 이유에서였다.

어찌 싸움이 입으로나 글로써만 이루어질 것이겠는가마는, 죽이고 무찌르고 넘어뜨리는

일을 차마 생각지도 못하니 어찌 이겨낼 수가 있으랴. 높은 태산을 오르려는 자가 늘 가던

, 누구나 걷는 대로를 택하여 오르려다가는 미리 방비하고 막아선 편에게 언제나 밀리게

마련이다. 밀릴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로만 모두들 떼지어 오르려는 것을 아예 태산의 정

상에 오르지 않겠다는 뜻이로다.

다른 길, 아무도 뜻하지 아니한 새롭고 험한 길을 만들어 바위를 타넘고 미끄러지는 위험

을 무릅써서 올라야 할 것이다. 어느 쪽 길을 택하는 것이 옳았던지는 태산의 꼭대기에 이

르러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일이다. 길을 새롭게 뚫는 자마니 올라갈 의사를 지닌 자이고

당도하게 될 것이다.

산지니는 부족하나마 미륵의 도당에 들어 정원태에게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누님에게 전

했다. 석씨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세상이 못쓰게 돼버렸다는 것은 삶으로써

실감하고 있었다. 석씨는 산지니가 전에 송파나 삼전나루에 나가 놀 때처럼 짓궂고 철부지

같은 장난기가 싹 가시고, 이제는 사내다운 결의로 뭉쳐진 손위의 어른과도 같게 여겨지는

것이다.

중길은 살주계의 계원들을 모아 목내선의 집을 급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친척붙이 가운데 목대감이 가장 아프게 여길 대상을 고르려다가, 직접 목내선을 들이

치기로 하였던 것이다. 최형기가 총에 맞아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소문이 배오개나 혜정교

또는 사대문 밖의 저자 난전에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모든 왈짜와 무뢰배들은 한결같이

통쾌하게 여기고 있었으니, 그동안 저들은 최형기의 빈틈없는 기찰에 몰려 옴치고 뛸 수도

없었던 탓이었다. 중길은 이제부터 과감하게 활동하여 좌포청을 들이치고 남부 살주계의 계

원들까지도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중이었다. 최형기가 없어진 저자는 이제 살주계와 검계의

손바닥 안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호동 옹장이네 집에는 중길이를 비롯한 계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낙선방의 목대감 집을 며칠 동안 살피던 끝에 대략 급습할 순서

를 정해두었던 터였다. 중길이 말하였다.

"성내에 그럴 듯한 분위기를 준비하는 것이 우리 계가 할 일이네. 검계에서두 성내가 만

만하게 돌아가면 칼을 뽑고 달려올 게야. 양주 검계에서는 우리가 거사할 날만 기다리구 있

. 먼저 우리가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일부터 해나가야지. 억기와 최형기를 검계에서 처치

하여주었는데 우리가 이대로 꿈쩍 않고 넘어갈 수는 없게 되었네. 목내선을 없애버리고 포

청을 덮쳐야 제대루 정리가 될 게야. 바로 저들의 코앞에서 백주에 벌어지면 한양두 끝장일

."

"목내선이가 출차하는 것을 노르는 게 어떨까?"

"지켜본 바로는 목대감이 교자를 타고 나갈 땐 호종하는 무사가 둘이나 따르네. 잘 나타

나지 않지만, 종자 하나만 데리고 나설 적도 있더군."

"저의 집 사랑채에서 목을 베어야지. 그래야 도성 안의 벼슬아치들이 모두 두려워할 걸

."

이와 같이 의논이 오락가락하는 참인데, 옹장이네 아들이 입김을 허옇게 뿜어내며 헐레벌

떡 뛰어들었다.

", 큰일났수."

마루에 둘러앉았던 계원들이 놀라서 모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중길은 벌써 창포검의

칼자루를 쥐고 물었다.

"포교라도 온단 말이냐?"

"지금 저 밖에... 배오개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수."

중길은 침착하게 되물었다.

"천천히 말해보아. 뭐가 큰일이란 말이냐?"

총각은 숨을 돌리느라고 몇번이나 침을 삼키고 나서 말하였다.

"검계의 혈당이 잡혔답니다. 포청 군사들이 죄인을 결박하고 칼을 씌워서 저자마다 조리

를 돌린답니다. 그자를 알거나 그자의 동당을 아는 자는 발고하면 은자를 내린답니다."

중길은 벌떡 일어났다.

"그게 누구냐... 잡힌 사람 얼굴을 살펴봤니?"

"멀리서만 봤으니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머리는 산발이고 얼굴은 흙빛입니다."

좌중의 계원이 중얼거렸다.

"혹시 돌곶이가 들통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시동이나 산지니나 솔부리 사람들이겠군."

중길은 먼저 내려서서 신발을 꿰며 말하였다.

"우리가 다녀올 동안 기다리고들 있게."

"그까짓 포도 군사들이 있으면 몇 명이나 있을 텐가. 우리가 한꺼번에 몰려가서 해치우고

빼내어와야지."

다른 계원들도 중길을 따라 나서며 말하였으나 중길은 그들을 제지하였다.

"기왕에 조리를 돌리는 짓이니 오늘 하루 종일 여러 장터를 돌아다닐 게야. 우리가 가보

고 허실을 알아내어 성문 밖의 장터로 나가면 따라가 습격하여도 늦지 않네."

모두들 그럴 듯이 여겼는지 다시 주저앉았고 중길이와 총각은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들은

호동에서 막바로 누렁다리를 건너 태묘의 담과 나란히 뚫린 길로 뛰어내려갔다. 길 저편에

배오개의 장터가 보였고 사람들이 하얗게 둘러선 것이 내다보였다. 중길과 총각이 가까이

가보니 과연 한 사내가 머리는 산발을 하고 두 손을 올로 결박당했으며 목에는 나무칼을 썼

는데 턱을 판자에 딱 붙이고 쭈그려앉아 있었다. 그 양옆에는 환도 찬 장교와 포졸이 지켜

섰고 둘러싼 사람들 앞으로는 장창을 든 군사 다섯이 버티고 막아서 있었다. 중길은 살피고

나서 빙긋 웃었다. 이쯤이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누가 이자의 동류를 아는 사람이 없는가?" 누구든지 살피고 나서 발고하면 상금을 받을

것이다."

장교는 이따금씩 군중을 향하여 외치고 있었다. 여럿이 빙 둘러선 사람들의 울을 떠나 가

운데로 나아가 죄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이리저리 뜯어보고는 혀를 차거나 침을 뱉거나

고개를 흔들며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중길은 옹장이네 아들을 팔굽으로 툭 건드렸고 총각이

중길을 바라보았다. 중길은 가서 살피라는 뜻으로 턱짓으로 죄수를 가리켰다. 총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때마침 앞으로 몰려나가는 사람들의 뒷전에 따라붙었다. 나무칼 때문에 죄수는

고개를 쳐들 수가 없었는데, 더구나 주저앉혔으니 이쪽편에서는 그의 산발한 머리털만 보일

뿐이었다. 중길은 그가 혹시 시동이나 산지니는 아닌가 하여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군중들 틈에 최형기가 끼여 있었다. 최형기는 누가 그를 알아볼까 하여 토끼털 남바위를

깊숙이 눌러 쓰고 등에는 맞추만 봇짐을 메고 두 손을 엇갈려 소매에 넣었는데 한 손에는

매듭지은 오라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하녀 착실이가 눈을 똑바로 뜨고 이리저리

살피는 중이었다. 군중들 속에는 제각기 쇠도리깨며 육모방망이를 옷 속에 감춘 부장과 포

교들이 최형기의 영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하나씩 지켜보고 있었다.

최형기가 눈을 번쩍였다. 그는 지금 사람들의 열에서 떠나 가운데로 나오고 있는 너덧 사

람 중에 맨 뒤에 서 있는 총각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어깨가 구부정하고 코가 뭉툭한 떠

꺼머리, 착실이가 손가락질을 하며 더듬었다.

", , 저기 그 총각이..."

착실이의 동작은 중길이에게도 똑바로 내다보였고, 중길은 꿈결처럼 퍼뜩 최형기의 날카

로운 눈을 보았다. 중길은 저 자신의 위험을 느끼 겨를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달아나라!"

중길이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의 울타리를 떠난 것과, 옹장이네 아들이 얼결에 중길이 서

있던 자리를 향하여 돌아서서 몇걸음 떼어놓은 것은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최형기는 앞으

로 날렵하게 뛰어나가면서 총각의 머리를 향하여 오라를 던졌다.

총각의 목에 오랏줄이 걸리자, 최형기는 슬쩍 잡아챘다. 앞으로 뛰어나가려는 총각을 뒤로

당기니 매듭이 죄어지며 그는 뒤로 나가떨어져 혼절하였다. 놀란 군중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숨어서 지켜보던 기찰포교들은 중길이를 찾아서 여러 갈래의 골목으로 뛰쳐나갔

. 최형기는 하늘을 향하여 반듯이 누워 있는 총각의 위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형기의 손짓에 따라서 착실이가 다가왔다.

"틀림없지?"

형기의 물음에 착실이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부장이 물었다.

"찾던 자가 이놈입니까?"

", 걸려들 줄 알았지."

최형기는 정신이 돌아와 벌떡 일어나려는 총각의 가슴을 발로 지그시 누르면서 말하였다.

"어서 끌구 가세."

", 이거... 왜 이러슈."

버티는 총각에게 최형기가 부드럽게 일렀다.

"오늘은 또 어느 집을 찾을 테냐. 그 녀석 코를 썩 잘 풀게 생격먹었구먼."

"공연히 생사람 잡지 마슈."

포졸들이 총각의 팔을 뒤로 돌리고 결박을 지었다. 최형기는 칼을 쓰고 쭈그리고 앉은 개

천에게 말하였다.

"고생하였다. 오늘 고생이 많을 줄 알았더니 쉽게 끝났구나."

개천은 영문을 모르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최형기를 쏘아볼 뿐이었다.

"아직도 검계의 혈당으로 죽기를 원하구 있느냐?"

개천은 고개를 푹 숙였다.

"못난 놈... 다방골 수십 처에 갈린 게 계집이니라. 공연히 헛된 상사로 몸 버리지 말구 근

실하게 살아야지. 너는 포청에 들어가는 즉시로 방송이다. 알겠느냐?"

개천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그들은 배오개에서 중부의 정선방으로 올라갔다. 포청

에 들어서니 이인하가 미리 알고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최종사, 수고하였네. 이제 성내에서 적당의 뿌리를 뽑게 되었네."

"어서 저 자를 국문해야겠습니다. 한시바삐 그들 혈당의 은신처를 알아내야지요. 그리고

숙수 개천이란 자는 방송해주어도 괜찮을 듯합니다."

이인하는 안색이 흐려졌다.

"양반을 능멸하고 검계의 혈당이라고 자처한 놈을 어찌 방송하겠는가?"

최형기는 개천에 관하여 조사한 바를 대충 아뢰었다.

"딴은 듣고 보니 가엾기도 하지만, 교하 파주지간의 진사 생원 되는 이들이 양반을 욕하

였다고 처단하기를 바라는 소장을 수십 통이나 내었으니 섣불리 내놓을 수는 없네."

최형기는 빙긋이 웃고 나서 이대장에게 속삭였다.

"우리 좌포청이 죄없는 자를 죽여서 인명을 가벼이 한다는 공론이 돌아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양반들은 또한 그자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구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소문을 잘

조정해야지요. 태형을 가한 뒤에 포청에서는 일단 내보냅니다. 그러구 나서 사람을 뒤따르게

하여 없애버리지요. 우리는 이미 방송하였으나, 양반들이 징치한 것으로 되지요. 방송하여

상민들의 원망을 없이하고 또한 그가 죽으니 양반들은 당연하다 여길 것입니다. 자연히 양

반을 능멸하는 자들에 대한 경계도 되겠지요. 여하튼 우리는 개천을 유용하게 썼습니다."

"양쪽의 인심을 다 거두게 되겠군."

이인하는 그제서야 깨닫고 껄껄 웃었다.

"우물쭈물할 틈이 없다. 국청이고 형틀이고 다 치워라. 빨리 입을 열게만 하여라."

포청 뒷마당에다 옹장이네 아들을 꿇어앉혀두고 최형기가 포졸들에게 명하였다. 그들은

죄수를 다루는 일로 반평생 밥을 먹어온 자들이라 총각의 무릎과 발목을 단단히 묶었다.

리고는 정강이뼈 사이에다 기다란 작대기를 비집어 넣었다. 총각은 벌써 소리를 지르기 시

작하였다. 최형기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네 집이 어디냐?"

", 모르오. 어째서 아무 죄두 없는 사람을 잡아다가 이러시우."

최형기가 등채를 딱 때렸다. 때리자마자 포졸 둘이서 다리 사이에 질러 넣은 작대기를 좌

우로 마구 비틀었다. 주뢰틀기라는 형이니 심해지면 정강이뼈가 부러지거나 살이 묻어나오

기도 하는 악형인데 압슬에 다음가는 고문이었다. 최형기는 먼 하늘을 내다보는 듯하고 있

다가 다시 등채를 올렸다. 포졸들도 작대기질을 멈추었다.

"지난번에 나를 총포로 쏘았을 때, 내 집 대문 앞에서 너희 짝패에게 군호를 보낸 것은

바로 너다. 내가 배오개서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네놈이 짝패에게 내가 나타났음을 알리고

곁으로 지나쳐 가지 않았느냐. 다 알고 있으니 바른 대로 대면 형도 받지 않을 것이요,

동당을 발고하여 잡으면 무죄 방송해주겠다."

최형기는 나직하게 중얼중얼 말하고 나서 눈을 곧추세우고 날카롭게 꾸짖듯이 물었다.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총각은 심히 동요되고 있었다. 그는 곁에서 작대기를 짚고 있던 포졸들을 돌아보고 다시

최형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땀으로 얼굴과 가슴이 온통 젖어 있었다.

"허허, 진정 죽기를 바라느냐."

최형기는 혀를 차더니 슬그머니 등채를 올리는데, 총각이 소리를 질렀다.

", 아뢰겠소."

최형기가 포졸들의 다음 동작을 한 손을 쳐들어 제지시켰다.

"내 모두 다 아뢰겠으니, 제발 저희 부모님께는 죄를 묻지 마시우."

"포청은 죄 있는 자를 다스리는 곳이니 너희 부모들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어서 말

해보아라. 적당이 잡혀야만 네 목숨도 살고 부모님도 사는 게야. 네가 얘기를 안한다 치더라

, 우리는 오늘 해 지기전에 네가 어디서 뭘 하구 사는 놈인지 금방 알아낼 수가 있다."

역시 최형기의 말은 총각의 이지러지는 신념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가 살주계의

일에 가담하였던 것은 젊은 신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저희 집은 연화방 호동에 있습니다. 아비가 내수사에 역을 지구 있는데, 옹기를 구워 살

구 있지요."

총각의 말이 계속되는 중에 기다리던 포교들이 잽싸게 사라졌다. 최형기는 꼼짝 않고 승

창에 걸터앉아 있었다.

"살주계의 계원들이 애비가 내수사의 관노라 하여 친절히 대하고 살림도 도와주었습니

."

"지난번에 성내에다 방을 붙인 것이며, 나를 쏠 때에도 너희 집에 적당들이 숨어 있었겠

. 누구누구가 있었느냐?"

", 살주계의 계주 청파 중길이란 이와 검계의 시동이란 사람과 다른 계원들이 드나들었

습니다."

먼저 총각에게 소리쳐 위험을 알리고 나서 중길은 배오개에서 종루의 넓은 길로 뛰었

.

뒤에서는 행인들의 사이를 헤치고 사방을 살피며 뛰어나오는 기찰포교들이 보였다. 중길은

오히려 뛰는 것이 저들의 눈에 잘 띄려니 싶어져서 사람들 사이에 섞이자마자 빠른 걸음으

로 바꾸었다. 그 옆으로 기찰포교인 듯한 자가 바삐 지나쳐 갔다가 다시 돌아서서 행인들을

샅샅이 살피며 다가왔다. 중길은 일부러 어느 행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물건을 고르는 체

하였으며 기찰포교는 역시 사방을 살피더니 길을 건너갔다. 위기를 모면한 중길은 종루 이

교를 건너 연화방의 호동으로 올라갔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옹장이네 집에 혼자 들어서니

계원들은 마당으로 우르르 몰려내려왔다. 중길이는 맥이 탁 풀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애가 잡혔네. 최형기가 쳐둔 그물이었어."

"최형기가 병신이 되었다더니?"

"밉다고 차니까 떡시루에 엎어졌지. 놈은 여우일세. 자 모두 나서, 곧 이리로 닥칠 게야."

살주계원들은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기와 보따리를 챙기느라고 마루와 건너방

을 오르내렸다. 옹장이가 눈치를 채고 가마를 떠나 중길에게로 걸어왔다.

"우리 아이가 어찌되었나?"

중길은 외면을 하고서 대답하였다.

"최가놈이 그애 얼굴을 보아두고 일부러 검계의 일당을 잡았다고 조리를 돌린 모양이오."

"잡혔나?"

중길은 고개를 숙였다. 뒷전에서 계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갈 텐가? 흥인문을 지나 돌곶이로 나갈 건가, 아니면 숭례문으로 나갈 건가?"

중길은 대답을 않고 옹장이에게 말하였다.

"성님도 어서 피하시우."

늙은 관노는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해져서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식놈은 죽으라고 놓아두고 우리 늙은 것들만 달아나 목숨을 부지해서 뭘 하겠는가.

서들 가게."

그때 중길의 뒷전에 섰던 계원 하나가 슬그머니 창포검을 뽑았다.

"피하지 않으려거든... 죽기는 매일반이오."

중길이 그를 가로막았다.

"위협에 못 이겨 집을 내주었다고 발명하시우. 그리구... 돌곶이가 검계의 집합소라구 대주

시우. 포교들이 달려갈 때쯤이면 그쪽에도 기별이 갈 테니까..."

옹장이의 마른 나뭇등걸 같은 거친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서 가시게. 한시라도 빨리 이 못된 세상을 뒤집어엎고 우리 같은 종들을 풀어내주게."

중길이가 옹장이의 손을 잡으니 그는 중길의 손을 움켜쥐며 부르르 떨었고 두 사람은 터

져나오려는 오열을 참지 못하였다. 뒷전에서 지켜보다 못내 안달이 난 계원이 중길의 옷자

락을 잡아끌며 떼어놓았다.

"가세. 다 잡히겠네."

중길은 그 집을 나서자마자 동작이 기민해졌다.

"자네들은 이 길로 장경교를 지나 순화방으로 하여 혜화문을 나가 북한산으로 오르게.

는 흥인문으로 나가서 돌곶이에다 피신하라고 알려주고 곧장 북한산으로 오를 테니까. 도봉

과 양주지간에 틀어박혀 다음날을 기다려야겠네."

중길은 계원들이 장경교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을 한참이나 살펴보고나서 개천 옆길을 따

라 초교를 건넜다. 다리에서 흥인문 쪽을 내다보니 행인들은 평상시대로 무리를 지어 들고

나며 수직 군사들도 그들을 검색하거나 열을 지어 세워두지도 않았다. 아직 성의 각 문마다

적경이 떨어지지 않은 듯하였다. 중길은 때마침 성문을 향하는 일단의 보상들 틈에 끼여 흥

인문을 나섰다. 거기서 고암 오거리까지 그는 무슨 정신으로 뛰었는지도 몰랐고, 왕십리와

동적전 들판의 싸늘한 바람이 휘몰아쳤는데도 봇짐을 멘 등덜미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구네 주막에 당도하니 집안이 괴괴하여 중길은 부쩍 의심이 들었다.

"주인 계시오?"

방문이 열리며 부석부석한 최덕구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마도 낮잠을 자던 참인 듯하였다.

"새벽길에 수캐모냥 왜 헐떡이구 다녀. 고락서니가 그게 뭔가?"

덕구에게는 중길의 비뚤어진 패랭이와 반쯤 벌어진 저고리, 땀으로 젖은 얼굴이 볼꼴사나

운 것 같았다. 중길은 농으로 툭탁거릴 계제가 아니었다. 그는 봉노 방문을 휙 열어보며 말

하였다.

"솔부리 식구들... 어디 갔소?"

"다들 올라갔지. 왜 그래... 뭐 좋은 벌이라두 생겼나?"

중길은 그제서야 한숨을 돌리며 마당을 휘이 둘러보았다.

"안에 식구들 모두 있겠지. 어서 나설 채비를 하슈."

중길이의 서두르는 양을 보고 그제서야 덕구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눈치챘

. 그는 곰방대를 떨고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최형기가 이리로 오구 있소. 이 집이 발고되었지. 검계의 집합처로 알려졌단 말이우."

덕구는 안색이 싹 바뀌며 욕설부터 나왔다.

"이런 염병 앓다 배창자가 꿰어질 자식들 같으니라고... 기껏 오갈데 없는 무리를 거두어

주었더니 돌아서서 댓진을 먹이는구나. , 이거 작두 위에서 춤추게 생겼군."

중길은 혹시나 그가 박쥐 구실을 할까 걱정이 되어 궁지로 사정없이 몰아세웠다.

"이미 주인장의 이름이 나았을 게요. 검계의 장물 와주라고 발고가 되었을 게요. 어서 식

구들 데리구 솔부리로 떠나시오."

덕구는 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멍하니 섰다가 다시 머라고 욕설을 중얼거리며 안

채로 들어가 부산을 떨었다. 중길은 다시 안에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

"흥인문에서 포도 군사들이 모이는 것을 보구 달려왔으니 곧 들이닥칠 거요. 나는 먼저

갑니다."

"어이, 이 사람... 하여튼 솔부리에서 만나세."

중길은 돌곶이를 떠났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는 가슴이 답

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고암 오거리서 북으로 오르면서 중길은 이제 살주계가 끝이 났다

는 것을 느꼇다. 그는 양주 일원에 번져나가고 있는 미륵교에 관한 소문을 검계 식구들로부

터 듣고 있었다. 중길은 언젠가는 한양으로 다시 돌아와야겠지만, 지금처럼 막연히 벼슬아치

몇이나 혼을 내고 수십여 명이 희생을 당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살주계의 계원들이 빠져나가고 한 식경쯤이 지나 기찰포교와 포졸들이 옹장이네 집으로

들이닥쳤다. 옹장이는 여전히 가마 앞에 앉아 있었고 그의 아내는 방을 떠나 남편 곁에 쭈

그려앉아 있었다. 포졸들이 집뒤짐을 시작하였고, 포교가 옹장이에게 물었다.

"적당들이 어디로 달아났느냐?"

"숭례문으로 하여 남으로 내려간다 하였소."

옹장이는 그들이 틀림없이 북의 혜화문이나 동의 흥인문으로 빠져나갔을 줄을 짐작하고

시각을 벌려주려는 생각이었다.

"이 집이 한양 살주계 놈들의 은신처였음이 사실이냐?"

", 그러하옵니다."

기찰포교가 포졸들에게 명하였다.

"묶어라."

포졸들이 달려들어 두 부부를 뒷결박짓는데 옹장이가 애원하였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소인이 끌어들였지요. 식구들은 모두 우리 독을 내다 파는

생상으로 알구 있습니다."

그러나 기찰포교는 상을 찡그리고 당장이라도 발을 들어 차려는 기세로 욕설부터 터져나

왔다.

"청에 매 하나 더 때린다고, 주둥이 닫고 모가지 기장이나 맞춰두어라. 그동안 네놈들 때

문에 포청의 모든 포교가 단 솥에 들어간 콩의 신세였다. 여기서 모여 앉아 노상 쑥덕였으

니 오래 앉은 새가 살맞은 게여."

그들은 옹장이네 부부를 좌포청으로 끌고 갔고, 이미 주뢰를 틀어 참혹한 꼴이 되어 있는

아들 곁에다 꿇어앉혔다. 최형기가 눈으로 기찰포교에게 물었다. 포교가 아뢰었다.

"벌써 사방으로 달아나버렸습니다. 숭례문 쪽으로 나갔다 하여 아이들을 보내기는 했습니

다만..."

최형기는 가장 시급한 것이 그들이 모여들 수 있는 다른 장소를 알아내는 일이었고, 나아

가 적당의 범위가 얼마쯤 되는지도 알아내야 하였다. 어미는 아들의 지쳐 늘어진 꼴을 보자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이년, 어느 안전이라고 방정맞은 울음소리냐?"

곁에 섰던 포졸이 매를 들어 늙은 아낙의 등덜미를 호되게 내리쳤다.

"애그머니..."

", 그대로 두어라."

최형기가 짐짓 말리더니,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로 옹장이에게 물었다.

"그래 자네두 계에 들었단 말이지?"

그의 말투가 엄한 해라가 아니고 하게를 쓰니, 옹장이는 어리둥절하였다.

"아니옵니다. 계의 행수 되는 중길이란 아이구 소인하구는 어릴 적부터 잘 알지요. 지난번

에 남대별의 일이 있고 나서 소인의 집으로 찾아와 돈과 양식을 내면서 방을 빌리자 하였습

니다."

"그들이 살주계라는 적당임을 알구 있었는가?"

옹장이는 말을 못하였고, 최형기가 계속하였다.

"야간에 당을 모으고 인명을 살육하거나 백주에 저자에서 물화를 약탈한 자들은 명화율로

써 모두 참형에 처한다. 그러나 포도논상에 있어서 적당 가운데 만약 자기와 상대자를 발고

하여 자수를 하고 법에 굴복하는 자는 면죄하고 은 오십 냥을 급하게 되어 있다. 일곱 구나

여덟 구가 되면 면죄한 위에 가자하며 은 백십 냥을 급한다. 신중히 생각하여 처신하게나."

"중길이가 이미 꾀어서 집을 빌려주었다가, 나중에는 당에 들었으니 잡히면 같이 죽을 뿐

이라고 위협하였습니다. 점점 끌려들어가다가 저것이 영문도 모르고 나으리를 쏘는 짓에 동

반되었지요. 저야 이제 다 살았고 천한 몸이니 무엇을 바랄 게 있으오리까마는, 제 자식놈은

철없는 것이니 굽어살피십시오. 저희 집에는 주로 살주계의 계원들만 모여들었고 나으리를

쏘았던 것은 검계의 혈당인 시동이라는 자입니다."

최형기는 답답하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날카롭게 재촉하였다.

"그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돌곶이에 있는 덕구네 주막이 바로 검계의 집합처입니다."

최형기는 눈을 번쩍 떳다.

"돌곶이라면 고암 오거리의 주막거리 말인가?"

"소인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으나 저희끼리 하는 얘기를 여러번 들었습니다."

주위에 둘러서 있던 포교들이 나서는데 최형기가 불러 세웠다.

"서둘 것 없다."

하고 나서 최형기가 물었다.

"살주계의 적당이 중흥골을 떠난 뒤 어는 곳에 은신처를 마련하였는지 말해보게."

물론 옹장이는 도봉의 깊은 골짜기 어디쯤이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관노로서 자기와 같은 신세로 관가와 상전으로부터 짐승처럼 학대를 받으며 살아오던 수많

은 노비들이 처참하게 몰살당할 말은 입끝에 올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죽는단들 천예의 목

숨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떠꺼머리 젊은 자식놈의 꼬락서리는 늙은 관노의 심장을 발기발

기 찢는 듯하였다.

"그것은... 들은 바 없소이다."

"그러한가?"

최형기가 좌우에 눈짓하였다. 포졸들은 서슴지 않고 총각의 다리 사이에 넣은 작대기를

비틀었다. 기다란 비명이 터지고 관노의 아낙이 외쳤다.

"여보, 어서 아뢰시우."

옹장이는 눈을 부릅뜨고 금방 대들어 아내를 쳐죽일 듯이 바라보았다.

"모면할 길이 없네. 저것을 면천시켜주지 못하였으니 차라리 죽는게 나아."

늙은 관노는 엇비슷이 허공을 대고 아들과 아내 두 사람이 함께 들으라는 투로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내 잘못이우."

기진맥진한 총각이 게게 풀린 눈길로 아비를 돌아보았고 옹장이가 중얼거렸다.

"오냐, 잘하였다. 너 혼자 악형을 당하느니 차라리 이렇게 함께 죽자꾸나."

최형기는 세 가족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승창에서 일어섰다.

"적당과 동률로 다루어라."

최형기가 마당을 나오니 부장이 따라나왔다.

"국문은 그만둘까요?"

"누가 그만두라 했어."

최형기는 노기를 띠었다.

"세간에는 어디든 인정이 있고 혈육지간의 애정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은 국본을

지키는 큰 형옥이다. 우리가 국록을 먹는 것은 여러 문물제도를 반석과 같이 탄탄하게 하라

는 소임이 있는 까닭이다. 하물며 주인과 상전을 죽이겠다는 적당을 잡으려는데 한갓 아녀

자 같은 온정을 보이겠는가. 잡아먹지 않으면 잡혀 먹힌다. 포청이 있고 우리가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국문을 그치지 말고 저들의 약점은 혈육지정에 있은즉 그 어미를 다루어 아

비와 아들이 입을 열게 하라."

최형기는 포교들을 모아 일렀다.

"필경 서로간에 약조가 있었을 게다. 살주계의 은신처에 관하여는 굳게 입을 다물고 겨우

돌곶이의 주막을 불어버린 이유는 거기가 이미 비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전한 곳은 내주고

긴요한 곳은 감추자는 속셈이다. 우리가 여태 포적을 만족스럽게 못한 것이 바로 그 때문이

. 언제든지 우리는 한발씩 늦었다. 이제부터 한양 성내는 우포청에서 맡고, 우리는 성 밖

의 경조 인근을 샅샅이 기찰한다. 지금쯤 돌곶이 주막은 틀림없이 비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얼씬거리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동정을 살피러 나타난다. 우리는 기다릴 뿐이다. 바로

검계의 혈당을 비로소 잡게 될 게다. 모두 변복하여 오늘부터 돌곶이로 나가서 그물을 친다.

그리고 나머지는 경강 일대의 난전에 나가 혹시 장물 와주와 연줄이 닿는가를 캐내어라.

장은 은을 내어 적합한 물화로 거래를 하여도 좋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포교들은 긴당하여 최형기의 지시를 듣고 있었다.

"청파 난전은 마포 동막과 서강에 닿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나가렵니다."

부장이 말하였다. 최형기는 몸소 기민한 포교들을 뽑아내어 흥인문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준비한 서산나귀에다 담뱃짐을 싣고 모두들 패랭이와 지팡이로 보부상 차림새를 꾸몄다.

돌곶이의 주막거리에 당도하니 해가 짧아져서 사방이 어둑어둑하였고 뒤편 채소밭은 잔설

이 덮여 희끗희끗하였다. 강바람이 너른 들판위로 몰아쳤왔다. 그들은 덕구네 주막 바로 옆

집에 찾아들어갔다.

"어이 추워, 여기는 꼭 청국이나 한가지로 휑하구먼. 주인장 뜨끈한 방 하나 얻읍세다."

"예예, 아래윗목이 없이 절절 끓습니다. 헌데 다 늦게 성내서 나오십니다."

"계산에 차질이 나서 티격태격했지. 밥 좀 주고, 술 있수?"

주인은 그들의 아래위를 재빨리 훑어내렸다.

"아다, 찔러박지 않을 테니 한잔 먹게 해주오."

"좀 비쌉니다."

"뭐요, 화주요?"

주인은 콧김을 힝 하니 날렸다.

", 요즈음은 삼정승 육판서 댁에서도 화주가 말랐다는데 탁주도 과합지요."

"젠장, 새벽 호랑이가 중을 가리나. 막걸리두 못 마셔본 지가 달포가 넘은 모양인걸."

포교들은 너스레를 떨었고 최형기는 슬그머니 주인에게 물었다.

"헌데 저 집은 지난번에 보니까 아주 방두 많고 마방까지 딸렸든데, 오늘은 어째 불도 안

켜구 캄캄한걸?"

주인도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글쎄올습니다. 참 이상두 하지요. 중화참에 나가보니 집에 휑뎅그레 비었지요. 빚지고 야

반도주를 한 것도 아니구 여기서는 모두들 쉬쉬합지요. 무슨 구린 속내가 있기는 있는 모양

인데."

"여느 때에는 손님이 많습니까?"

", 그러믄요. 돌곶이서 제일 짭짤한 재미를 본 게 덕구입죠. 물주가 노상 붙어서 퍼먹구

살았는데요."

곁의 포교도 거들었다.

"우리네야 양주길을 거쳐 내려가는데, 대개 어디서들 옵니까?"

"글쎄요, 중량포에서 오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디다."

최형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부의 제사를 지내느라고 이틀 동안이나 널다리에 머물렀던 산지니는 새벽녘에 석씨의

집을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한 달포 지내면서 겨울 땔감도 장만해드리고 동네 사람들과 마

실이라도 다니며 탁배기잔이나 들었으면 좋겠건만, 살인한 죄인인지라 남의 눈에 뜨일까봐

제일 걱정이었다. 산지니 본인보다도 석씨가 더욱 단속이 심하여 낮에는 아예 마당에도 나

서지 못하게 하였다. 산지니가 늦은 제사 음식이라고 국에 밥에 양껏 먹고서 새벽이 되도록

누님과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잠들지 않는 김에 출발한다고 나서니 그의 누이도 숯내

를 따라 삼전나루로 향한 길로 배웅을 나왔다.

"누님, 이번 겨울이나 나고 봄에는 꼭 와서 모셔가렵니다. 그러니 적당한 임자가 나서면

농지두 팔아버리세요. 저두 돈을 모으지요. 그래서 장사를 하십시다."

그러나 석씨는 아직도 농사를 지어 근실하게 사는 일 외에는 모든 것이 믿기질 않는 모양

이었다.

"아니야, 땅은 제일 믿을 만한 근본이란다. 여하튼 어디루 이사가서 살더라두 토지를 장만

하여 농사지을 생각을 해야지."

"제가 강원도 쪽에 후미진 고을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구 누님, 형님에겐는 전혀 찾아가

지 않으셔요?"

종가라고 할 수 있는 산지니의 서사촌형님 댁을 이르는 것이니 석씨에게는 오라비가 되

,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친정의 어른이 되는 셈이었다.

"왜 부모님 제사 때에는 가구 그랬었다. 그렇지만 가장을 잃었으니 과부라는 것은 친정에

도 죄인이란다. 남편이 안 계시니 자연히 찾아갈 면목이 없구나. 시집이야 그분이 워낙 자수

성가하신 분이라... 아무튼지 네가 어서 자리를 잡구 살게 되면 나는 아무데구 좋다. 물 있구

산 있는 데라면 어디 가선들 못 살겠니. 제발 이상한 짓은 저지르지 말구 분에 넘치는 생각

두 먹지 마라."

산지니는 대꾸가 없었다. 그러다가 낙생역말을 훨씬 지나서 산성으로 갈리는 네거리에 이

르자 그는 누님의 등을 밀었다.

"어서 들어가세요. 애들 자다 깨면 놀라겠어요."

석씨는 벌써 울먹울먹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때문에 고향을 쫓겨나 험한 곳으로 돌

아다니며 숨어 다니는데다가, 이해하지도 못할 무서운 말을 하는 꼴을 보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몸 조심해라. 나는 네가 늘 건강하게 살아 있으려니... 믿구 사는 게 한가지 보람이

란다. 제발이다. 나를 생각해서라두 몸 조심해라."

석씨는 산지니가 집을 떠난 뒤에 고적한 집을 지키며, 얼마나 그를 친동기간이나 남편보

다 더욱 살갑게 생각하였는지 몰랐다. 어쩌면 제속으로 낳은 자식만큼이었다고나 할지.

"누님, 몸 성히 계십시오. 봄에 꼭 다시 올게요."

산지니는 침울하게 말하며 허리를 꾸뻑해 보이고는 바삐 걸어갔다.

산지니는 숯내를 건너가며 연신 돌아보았고, 아직도 길가에 섰는 석씨에게 어서 들어가시

라는 시늉으로 손을 흩뿌려 보였다. 석씨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못내 돌아서지 못하

였다. 산지니는 어머니와 작별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돌곶이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지니는 삼전나루로 갔다가 누군가의 눈에 발견되

기 맞춤한 시각이라 배를 타지 못하였다.

나루터에는 제법 사람들이 모여들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멀찍이 서서 살피다가,

학나루로 내려갔고 거기서도 배를 타지 못하여 봉은사 쪽으로 강변의 모랫벌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마침 주낙배가 얻어걸려 그는 살곶이벌로 하여 답심리 쪽으로 올랐다. 날씨는 꾸

물꾸물하고 잔뜩 흐려 있었으나 바람은 별로 없었다. 산지니는 돌곶이 덕구네 주막에 가면

고달근이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최형기를 해치운 시동이도 돌아와 있을 테니 곧 지난번처럼 성내의 부잣집이나 벼슬아치

의 집을 습격하게 될 것이었다. 아니, 이번에는 포청을 직접 들이칠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

서 경조 주변의 검계 일당들이 모두 성내로 들어가 버궐하여 수직 군사들을 처치하고, 물밀

듯이 대궐 속의 곳곳으로 짓쳐들어갈 것이다. 용상에는 계원들의 발자국이 찍힐 것이며 내

전은 피로 물들 것이었다.

산지니는 고암 오거리를 지나 돌곶이의 주막거리로 들어섰다. 여전히 행객의 내왕이 끊겨

서 길은 한적하고 쓸쓸하였다. 산지니는 덕구네 주막으로 즐어서면서 큰 소리로 불렀다.

"내 왔네, 모두 잘들 있었나?"

그러나 닫힌 방문마다 인기척이 없고 집안은 괴괴하였다. 산지니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언제나 덕구가 들어앉아 내다보던 문간방의 방문을 잡아당겨보았다. 그러나 방안에는 흐트

러진 옷가지가 널려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방안에는 냉기가 싸늘하

였다. 산지니는 그때야 뒤통수에 인기척을 느끼고는 힐끗 돌아보았다. 눈빛이 날카로운 사내

하나가 마당 가운데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산지니는 가슴이 철컹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른 처마밑으로 비켜서면서 좌우를 돌아보았다. 삽짝 앞에 다른 사내가 나타났고 뒤꼍에서도

둘이 나타나 오른편을 막아섰다.

"덕구를 찾소?"

마당에 버티고 섰던 자가 조용히 물었다. 산지니는 손을 품안에 넣어 비수의 자루를 움켜

쥐었다.

"댁은 누구슈?"

산지니가 옆으로 몇걸음 옮기며 묻자, 그 사내도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떼어 산지니의 앞

을 가로막으면서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앞으로 가져왔다. 사내는 쇠도리깨를 감

추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검계의 계원들을 만날려구 그러우?"

사내는 쇠도리깨를 손바닥에 천천히 때려 꺾쇠가 찰칵거리는 소리를 규칙적으로 나게 하

면서 빙글빙글 웃었다. 산지니는 이들이 포교들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산지니는 품안에서

비수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마당의 사방을 막아선 네 사내를 벨 자신은 없었다. 삽짝 앞에

섰던 자가 조용히 말하였다.

"네가 검계의 혈당임을 잘 알고 있다. 이 집에 있던 너희 일당들은 모두 잡혀서 순순히

자복하였다. 칼을 버리고 오라를 받아라."

산지니는 바로 뒤에 마루를 지나 뒤꼍으로 나가는 쪽문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뛰

쳐나가 뒷담을 넘어 청량사쪽의 숲에까지 달아나, 숨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리면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산지니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산지니가 마

루로 돌아서자마자 단숨에 쫓아들어와 그의 뒤통수나 등짝을 도리깨로 내리칠 것이기 때문

이었다.

"나는 계원이 아니우. 덕구한테 받을 돈이 있어서 들린 게요. 댁네가 계원들인 모양인데

포청에 가서 찌를 테요."

산지니는 짐짓 그들의 주의를 혼란시키느라고 엉뚱한 말을 던져보았다. 앞에 섰던 사내가

자기 동료들을 돌아다보았다.

"뭐하는 거냐. 놈은 틀림없는 혈당이다."

삽짝에 섰던 자가 말하니 그는 쇠도리깨를 쳐들며 다가섰다. 산지니는 슬그머니 손을 내

리고 칼을 발치에다 떨구었다.

"좋소, 묶으시우."

", 그래야지. 공연히 해골 깨지면 곤장 맞을 틈두 없는 게여."

포교가 방심을 하고 쇠도리깨를 내린 채 산지니의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고 산지니는 잽

싸게 그를 잡아 한 손으로 목을 껴안고 조이면서 잡아끌었다. 이런 따위 놀음이야 송파나루

주막에서 산지니가 타관 왈짜들을 다루던 익숙한 솜씨였다. 포교는 순식간에 당하는 노릇이

라 짚단 넘어가듯 맥없이 자빠졌고 산지니는 무릎을 굽혀 비수를 집어들어 포교의 목에다

슬쩍 눌러주었다.

"버둥거리면 구멍 난다."

포교가 쇠도리깨도 놓치고 스스로 사지를 늘어뜨리는데 산지니는 그를 질질 끌고 마루 위

로 올라섰다.

"저놈... , 저런..."

마당에 둘러섰던 세 사내들이 주춤대며 마루로 다가서려는데 산지니가 이를 악물고 내뱉

었다.

"꿈쩍 마라. 거기서 한 발이라도 떼었다가는 이 녀석 모가지를 도려서 던져줄 테니까."

산지니는 마루에 올라서자마자 잡고 있던 포교의 관자놀이께를 칼자루로 힘껏 찔러주고는

뒷발로 쪽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뒤꼍을 단숨에 뛰어 담에 두 손을 걸고 하나 둘 셋, 동작

에 넘어서 밭으로 떨어졌다. 산지니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곧장 뛰려고 밭고랑으로 들어서는

데 집 앞을 돌아 나온 포교들이 좌우로 나타났다. 산지니는 몇걸음 뛰다가 헉, 하면서 멈추

었다. 저쪽 밭고랑 앞에 남바위를 쓴 사내 하나가 팔짱을 지르고 비스듬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예 덕구네 마당에 나타나지도 않고 눈 덮인 밭고랑에 가서 우두커니

기다리고 섰던 모양이었다. 산지니는 그자가 맨손인 것을 알아채고는 그대로 찌르고 뛰어나

갈 작정을 하였다.

"비켜라아..."

산지니가 칼을 휘두르며 뛰어가자 그는 옆으로 훌쩍 뛰면서 비켜났다. 산지니가 그를 지

나쳤다 여기면서 내쳐서 몇발짝 뛰어나가는데, 무언가 그의 몸 위로 날아왔고 어깨에 스치

면서 허리께를 조이고는 힘껏 당겨졌다. 산지니는 몸의 중심을 잃고 헛발을 내디디며 밭고

랑에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오랏줄의 매듭이 날아와 그의 두 팔과 상체를 단단히 조이고

있었다. 그는 버둥거리면서 그의 발치에가지 다가선 키 큰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나를 쏘았느냐?"

산지니는 그 남바위 쓴 사내가 최형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동이는 실패하였구나. 그렇

다면 식구들은 모두 어떻게 된 걸까. 포교들이 제각기 도리깨며 환도며 육모방망이 등속을

휘두르며 달려왔고, 최형기는 땅에 떨어진 산지니의 비수를 주워 포교들에게 내주면서 중얼

거렸다.

"조련은 밥 삭이느라고 받았더냐. 오소리에 긁힌 개 꼬락서니로다."

포교들은 대꾸를 못하고 묶인 채 일어나 앉은 산지니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머리는 성한가?"

앞장서서 산지니를 잡으려다 오히려 혼이 났던 포교에게 최형기가 물으니 그는 혹이 불거

져 나온 머리에 손을 올리며 상을 찡그렸다.

"몸집은 대추알만한 것이 꼭 서리 맞은 독사요."

뒷전에서 주춤거리던 포교가 제 동무를 역성들어 한마디하였다. 최형기는 몸소 산지니의

팔을 뒤로 꺾어 쥐고는 저고리를 당겼다. 산지니는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

. 최형기는 세간에 전하는 말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과연 그자의 어깨에 반질반질하고

동그란 화상이 보였다.

남별대에서 잡은 살주계 일당들의 입에서 검계의 계원들은 어깨에 동그란 낙인을 찍는다

는 사실이 밝혀진 바였다.

"... 틀림없군."

최형기는 뒤로 물러섰다.

"어서 끌고 돌아가자."

산지니는 포교들이 잡아끄는 대로 순순히 일어나 걸었다. 그는 뒤로 멀어져가는 중량포

쪽의 들판을 돌아다봤다. 송파와 삼전나루로 나가는 배가 닿는 곳이었던 까닭이다. 산지니는

홍인문이 모이기 시작하자 스스로를 하나씩 따져보며 궁리를 하였다. 계원의 낙인도 알려졌

고 이제 이리저리 국문이 시작되면 광주 동촌 한판관의 죽음도 밝혀질 테고 변심했던 억기

의 죽음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것만 가지고도 산지니는 목이 두어 개 있어야 할 것 같았

.

눈치를 보아하니 최종사란 자는 아직 주막 주인 덕구를 잡지 못한 것이 분명하였다. 주막

에서 그물을 치고 검계의 혈당들을 잡으려면 덕구가 곁에 붙어서 일일이 얼굴을 보아 확인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종사가 직접 낙인을 살피지 않았던가. 덕구가 피하였다면 솔부리 식

구들은 먼저 떠났거나 덕구와 함게 피하였을 듯싶었다. 또한 시동이도 전혀 잡히지도 않았

으며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 분명하였다.

종사관은 산지니에게 네가 나를 쏘았느냐고 첫마디에 물었던 터였다. 산지니는 기왕에 살

변을 일으킨 도망꾼으로서 목숨을 부지하여왔던 셈이다. 입을 다물고 혼자 죽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 아무도 잡히지 않았다면 산지니 자신의 고기는 매우 처참할 것이다. 그에

게서 모두 짜내어 나머지를 잡으려 할 것이 분명하였다. 어떻게든 빨리 죽는 길을 택하여야

욕되지 않게 자신을 간수하는 길이 아닌가. 최형기는 포청에 들어가자마자 오랜만에 구군복

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추국청을 벌이는데 함부로 매를 치거나 형틀을 준비하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오히려 산지니에게 따뜻한 저녁을 먹이도록 하였다. 의아해하는 부장들에

게 최형기는 말하였다.

"돌부리를 차게 되면 발만 아플 뿐이지. 호미로 살살 파서 들어내야 한다네."

순라들의 복처가 쑥밭이 되고 저동의 이지사네 집이 칼 들고 복면한 도적들에게 털렸다는

소문에 장안에 파다하게 알려졌다. 포도청뿐만아니라 조정 대신들 간에도 요즈음 난민들의

행동이 심상치 않은 데 대하여 신중한 의논들이 돌았다. 각 군영에서도 한양 성내의 군기가

허술하기 이를 데 없음을 알고 스스로 단속하기 시작하였다. 별순라패들도 육모방망이난 딱

딱이 대신에 창과 칼을 지니도록 하였고, 성문에는 수직 군사의 수를 늘리고 민병의 지원을

받도록 하였다. 위에서는 포청의 부장과 장교들에게 엄한 명을 내리고 난민들의 수괴를 어

서 잡아들이라는 닥달이 심해졌다.

종사관 최형기는 복처가 도륙이 나버린 이튿날부터 아예 포청에는 나가지도 않고 부장들과

함께 변복을 하고서 성내를 돌아다녔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에 때묻은 저고리 바람으로 시

전의 기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곰방대나 부시 쌈지 등속을 벌여놓고 행상 시늉을 하고 있었

. 어떤 상한이 다가오더니 곰방대를 고르는 척하면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노비가 가출하여 여태 돌아오지 않는다고 알려온 댁이 몇집 있었습니다. 하온데 초동 교

리 댁의 수노라는 자도 그날 밤에 인정을 치기전에 집을 나갔었지요."

최형기는 얼굴을 찌푸렸다. 교리 댁을 지키던 포교가 깍정이 행색으로 며칠 동안 고생을

하였으나 막상 일이 나던 날 밤에는 행적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놈이 돌아왔단 말인가?"

"아닙니다. 알아보니 그자가 장사를 나다닌 지가 두 해나 된답니다."

한양 세가에서는 장토에서 올라오는 물건이나 곡물들을 필수품과 교역시키기 위하여 노비

들을 저자로 내보냈고, 어떤 집에서는 아예 노비들을 시켜서 큰 밑천을 대어 장사를 벌이기

도 하였다. 종루 시전에서도 그들이 난전꾼들에 섞여 있어, 폐해가 막심하다고 말들이 많았

. 큰 밑천과 세도가 있고, 부리는 사람이 많으니 누구보다도 난전에 유리하였던 까닭이었

.

"난전을 나다니는 노비들이 제법 돈푼을 만지고 삼패 외입에도 능하다는 걸 아시지요?"

최형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연줄 캐낸 모양이구나."

", 바로 그렇습니다. 그놈이 홍제원에서 삼패 은근짜를 빼내어 청파에다 살림을 내었답니

. 방금 그 집을 알아내고 아이들을 먼저 보냈습니다."

최형기는 벌여놓았던 행상 봇짐을 주섬주섬 꾸렸다. 부장이 그 짐을 받아서 짊어졌다. 그들

이 시전을 벗어나자 곳곳에 흩어져 있던 포교들이 각양각색으로 모여들었다. 깍정이 차림도

있었고 도포에 갓 쓴 선비 차림, 마부나 곁꾼 차림도 있었다. 최형기가 그들을 인솔한 다른

부장에게 지시하였다.

"여기서 대를 나누어 집을 떠난 노비들의 뒷조사를 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계속 남아서 장

물이 풀려나오는 것을 감시하라. 그리고 너희들은 우리를 따라오너라."

최형기가 마부 차림과 곁꾼 차림의 포교를 집어냈다. 그들은 부장의 뒤를 따라서 숭례문으

로 나아갔다. 청파 삼거리에서 만리창 쪽으로 가는데 역시 시절이 그러하여 한산하였지만,

난전의 흔적이 역력하여 해물이나 과일 등속이 거래되고 초라한 가게들이 장을 벌여두고 있

었다. 최형기 일행은 청파 난장을 벗어나서 초가집이 다닥다닥 붙은 당마을로 들어섰다.

담이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는데 어디선가 두 사내가 나타나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아직도 오지 않았습니다."

부장이 그들에게 물었다.

"집에는 누가 있던가?"

"계집과 갓난아이만 있는 듯합니다."

부장이 최형기를 바라보았다. 최형기는 그들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리고 인상이 유순하게 생

긴 마부 차림의 포졸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서서 안으로 들어가 계집이 외치지 못하도록 해라. 남의 눈이 있으니까 재빨리 해

야 한다."

"그냥 두고 지키다가 놈이 오면 덮치는 게 어떨까요?"

부장이 말하였으나 최형기는 생각이 달랐다.

"놈은 당분간은 나타나지 않을 게다. 한시바삐 저들의 계가 어찌 엮어져 있는지 캐내어야

한다. 계집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든간에 알고 있는 사실은 한바울이라두 놓치지 않고 짜내

야지."

젊은 포졸이 골목으로 들어가 삽짝을 흔들며 외쳤다.

"주인장 계시우."

안에서 누구냐고 되묻는 소리가 들리고,

"어서 문 좀 엽시다. 전할 말이 있어 왔는데..."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에 삽짝이 빼꼼히 열리면서 포졸이 고개를 내밀고 손짓하였

. 최형기는 골목의 좌우를 살피고 나서 빠를 걸음으로 토담 안에 들어섰다.

"어찌했느냐?"

문 옆에 입술이 터진 젊은 아낙이 반듯이 넘어져 있었다. 포졸이 부장에게 대답하였다.

"들어서자마자 한주먹 앵겼지요. 좀 있으면 툭툭 털구 일어날 겝니다."

최형기는 마루로 올라가 두 칸의 방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안방에 아이가 잠들어 있었고

윗목에는 고리짝과 농이 놓여 있었다. 건넌방은 썰렁하게 비었는데 천장에 약재 봉지가 너

덧 개 매달려 있었다. 최형기는 부장에게 일렀다.

"계집이 바른 말을 할 듯하면, 이리로 데려오너라."

"여기서 말을 시킬까요?"

최형기는 대답 않고 찌푸린 눈을 들어 부장을 바라보았다. 굽든지 찌든지 알아서 하라는

눈짓이었다.

"소란스럽지 않게..."

부장이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최형기는 미닫이를 닫고 앉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금 있

더니 여자의 흐느낌 비슷한 소리가 들리고 마루에서 여럿의 발작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리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부장이 미닫이를 열었다.

"종사, 계집이 입을 열었습니다."

최형기는 눈을 뜨고, 부장을 날카롭게 올려다보았다.

"이리고 데려오라."

미닫이가 열린 채로 여자가 끌려들어오는데, 두 포졸이 여자의 팔을 잡았고 여자는 머리가

산발이며 코피가 터져서 저고리 앞섶이 붉게 젖어 있었다.

"종사관 어른이시다. 바른 대로 아뢰어라."

여자를 꿇리고 목덜미를 눌러놓으면서 포졸이 말하였다. 여자는 소리 죽여 흐느끼늘라고

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최형기는 나직하게 물었다.

"교리 댁 천예와는 언제부터 살게 되었느냐?"

여자가 미처 대답하지 못하자 부장이 주먹을 쳐들었고, 최형기가 손을 쳐들어 내버려두라

는 시늉을 하였다. 최형기는 나직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하였다.

"자칫하다가는 너도 동범으로 되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바른 대로만 얘기하면

호히려 후한 상을 내릴 것이니 주저 말고 직고 하여라. 그자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

, 동류들은 누구누구이지, 어디에 자주 다니는지, 네가 같이 듣거나 본 대로 말해 보아라."

부장이 다그쳤다.

"누가 자주 찾아다닌다구 했지?"

"... 중길이란 사람이오."

최형기가 눈을 똑바로 뜨고 부장에게 말없이 묻는 시늉이었다.

"청파에 산다니 곧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전에 관노로 박혔다가 속량되었답니다."

"난전으로 나가서 찾아두어라."

최형기가 이르자 먼저 와서 기다리던 포교와 포졸이 지체없이 뛰어나갔다.

"그래, 그가 와서 무슨 말을 하더냐?"

"자세히 듣지는 못했사오나... 양반의 욕은 많이 하였습니다."

"또 다른 자가 온 적은 없었느냐?"

부장이 다시 끼여들었다.

"참판... 어느 대감 댁인지 아느냐?"

최형기는 자기도 모르게 여자의 머리 쪽으로 상반신을 굽히면서 물었다.

"모르옵니다. 그저... 잠깐 들른 일이 있는데, 애 아비가 지나는 말로 저이는 참판 댁의 수

노로 있다고만 그랬지요."

"한 달에 몇 번이나 오는가?"

"작년에는 사흘이 멀다하고 자주 왔으나 금년 들어서는 어쩐지 뜨음하여 한 달이면 고작

한두 번이었습니다."

"그래, 근래에는 언제 왔었느냐?"

"열흘 전에 왔다가 하구 자고 갔습니다."

"무슨 말이 없던가?"

"곧 우리를 시골로 데려간다고만 하였지요."

"양식이나 돈을 주더냐?"

"양식은 꼬박꼬박 보내옵니다."

최형기는 한숨을 쉬고 나서 일어섰다. 그제사 여인이 피투성이의 입언저리를 소매로 씻으

면서 고개를 들었다.

"나으리... 우리 주인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최형기는 여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부장에게 일렀다.

"부장은 아이 하나를 데리고 이 집에서 며칠 지내야겠다. 놈이 언제 찾아올지두 모르니까,

잘 감시하도록 하여라."

"이년은 어찌할까요?"

최형기는 여자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자를 잡을 때까지는 함께 있어야 하지 않나. 밥을 집에서 날라다 먹이려는가. , 너는

남아 있거라."

최형기가 젊은 포졸을 지적하였고 곁꾼 차림의 포졸이 따라 나섰다. 최형기는 당마을을 나

서자마자 포졸에게 지시하였다.

"너는 이 길로 포청으로 가서 부장에게 말하여 참판댁 수노 중에 어떤자가 그날 밤에 탈출

하였는지, 그리고 어떤 자가 지금 집을 비우고 있는지 알아가지고 우리 집으로 오너라."

최형기는 달려가는 포졸을 바라보면서 이만하면 작당들은 이미 손안에 들어온 것이나 한가

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흘 동안 장계를 올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청파역 앞은 주막과 가게가 모여 있는 곳인데 동작나루와 노량나루, 마포의 동막과 용산

삼개와 잇달아서, 난전 치는 사내들의 출입이 빈번하였다. 역의 주막거리에서 최형기는 포졸

들을 한참이나 기다렸다. 중길의 집을 찾아 나섰던 두 명의 포졸 가운데 하나가 저자를 따

라 내려왔다. 최형기가 길 가운데로 나가 그를 맞았다.

"어찌되었느냐?"

"중길이란 자는 집이 따로 없답니다. 보통 저자나 난전꾼들이 모이는 화초방에서 자거나,

주막 봉놋방에서 지낸답니다."

"절친한 자도 없더냐?"

"숭례문 밖 죽물전을 물건을 대는 자로, 집이 여기서 활 두어 바탕거리에 있답니다. 요새

물건이 없어 집에서 장죽을 만들며 소일한답니다."

최형기는 땅바닥에 시선을 주고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기고 나서,

"그 녀석을 건드릴 필요는 없겠다. 공연히 소문만 낭자해지면 덫이나 함정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될 테니까. 너희는 우포청의 아이들과 협력하여 저자의 화초방과 봉놋방 그리고 죽물

장사치네 집을 물샐틈없이 감시하여라. 언제든지 한번은 나타나게 되겠지."

자세히 일러둔 뒤에 저자를 떠났다. 최형기의 집은 시전이 즐비한 종루의 배오개 부근에

있었다. 좌포청이 종묘 옆의 정선방에 있었으므로 등청하기도 가까운 거리였고, 배오개가 또

한 성내에서는 시정배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라 포도관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기도 하였

. 그의 집은 안방과 건넌방과 사랑방의 격식을 갖춘 조그마한 기와집이었다. 부근에는 장

사치나 중인들의 어슷비슷한 집들이 많았다. 포도 종사관이 그리 대단한 직업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초라한 집이었다. 동향의 집 앞으로 누렁다리 상루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이 내다보였

.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었다. 광에는 그가 암행 기찰을 할 때

마다 갈아입는 각종 신분의 의관들이 걸려 있었다. 하녀와 그의 아냐는 최형기가 저자에서

미복 기찰하며 뒹굴어 다니다가 돌아오면 언제나 코를 싸쥐고 피하였다. 발 냄새와 땀내가

며칠 동안 진동하기 때문이었다. 최형기는 늦은 점심을 들었고 그의 아내가 밥상머리에 앉

아서 말을 걸었다.

"또 나가셔야 하나요?"

"나가봐야지."

"이번에는 고생이 심하시겠지요."

최형기는 냉수에 만 밥을 건지다 말고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안색으로 그가 포청으로 나갈 것인지 시정으로 나갈 것인지를 분간할 줄 알았다. 아내가 이

어서 중얼거렸다.

"사람이 많이 죽었다면서요?"

"어디서 들었소?"

아내는 진저리를 치며 말하였다.

"저 애가 빨래를 나갔었는데 소문이 파다하더래요. 남부의 다섯 순라패들이 모두 결딴이

났다면서요. 그리고 역관 다니던 부가옹네 집이 화적을 만났다던데..."

최형기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짐짓 물어보았다.

"누구 짓이라구 그래?"

"글쎄요... 뭐라더라, 강화 쪽에서 왜구가 숨어들었을 게라구 하는 말두 있구... 그거야 어디

황당한 말이라 믿을 수 있나요. 헌데 뭐라더라, 무슨 계가 있다던데, 그놈들이 작당하여 일

을 저질렀답니다."

최형기는 문득 수저를 놓았다.

"그런 얘기는... 어디서 누가 하던가?"

최형기는 아예 수저를 놓고 긴장한 빛을 띠자 오히려 그의 아내가 놀란 모양이었다.

"왜 그러셔요. 저 애가 빨래터에서 들었다는데..."

형기는 마루로 나가서 하녀를 불렀다. 하녀도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네가 들은 대로 다시 한번 말해보아라."

"... 저 살주계라나 하는 당이 있는데, 그자들이 남부에서 큰 일을 저질렀다구 하였어요."

누렁다리 밑의 빨래터라면 동부의 여러 집에서 나온 계집종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하천

의 기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지난 여름부터 눈치를 채고 있던 최형기였다. 무슨 작당이

있을 듯이 여겨졌는데 살주계라면, 문자 그대로 주인을 죽이는 모임이 아닌가. 이런 소문이

벌써 하천들 사이에 파다하여 계집종들끼리 주고받을 정도였다니, 포도 종사관인 최형기는

실상 구름을 잡고 다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탈취당한 이지사네 집의 노비들을 심문하였을

적에 어찌된 일이지, 그들은 한결같이 촌에서 올라온 화적당으로 여겨진다거나, 없어진 노비

들에 대해서는 짐을 짊어지워 강제로 잡아갔다고만 얘기하여 종내 미심쩍었다. 최형기가 받

은 느낌은 그들이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을 숨기는 듯 했다는 것이다.

"그렇군..."

최형기는 비로소 납득할 수가 있었다. 바로 살주계였다니, 그렇다면 보통의 명화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역모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예전 임진년에도 노비들은 무리를 지어 궁궐

과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우고, 미처 피난하지 못한 양반 사족들을 해코지하였던 것이다.

녀는 건성으로 지껄일 뿐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게 분명하였다. 아마도 알고 있었

다면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더욱 근거가 확실하였다. 누군가 계에 들어간

하천의 하나가 자랑삼아 발설하여 계집종들 사이에 퍼져나갔을 것이다.

오후 늦게 청파에서 헤어졌던 포졸이 다른 부장과 함께 최형기를 찾아왔다.

"청파에는 좌우포청의 기찰포교들이 깔려 있고, 당마을에는 아예 수직을 세워두었다는 것

을 이대장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참판 댁 말씀인데..."

"그래 알아보았느냐?"

"육조의 어느 참판 댁인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만... 다행하게도 그날 밤에 전 참판 댁을 감

시하던 포졸이 새벽녘에 그 집 수노가 돌아왔음을 알아냈습니다."

"전 참판이라니..."

"전부터 수상한 말이 들리기에 기찰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지중추부사로 있는..."

최형기는 그제사 알아들었다.

", 목내선 대감 말이로군."

목대감은 남인 계열이었으므로 경신년 대출척 때에 파직당하여 실직 없이 충주부사로 지내

고 있었다. 더구나 재작년 임술년의 고변으로 남인의 잔존 세력이 뿌리뽑혀 그 파동이 올해

들어서야 겨우 가라앉았던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나, 그는 당상관을 지내던 이였고 또 언

제 재차 조정에 불려 나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다손 치더라도 수노

를 함부로 다룰 수가 없을 터인데, 하물며 그날 밤에 우연히 집을 비웠다고 해서 무턱대고

잡아올 수도 없었다. 또한 그 댁의 수노가 막무가내로 버틴다면 오히려 최형기 쪽이 파직이

라도 감수해야 될 판이었다.

"수노가 지금 집에 있다든가?"

", 며칠 전에 나가 있다가 이틀 만에 다시 돌아왔답니다."

최형기는 목내선의 집으로 찾아갈 작정을 하였다. 계의 내막이 패흉스럽고 보니 주인 되는

목대감에게도 깊이 상관이 있는 일이고, 수노를 잠깐 데려다가 이미 잡혀 있는 혈당과 대질

을 시켜보겠다면 무슨 반응이 나타날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지금 낙백의 시절이고, 고변 이

후의 흉흉한 분위기가 아직 남았는데, 포도청을 가벼이 대하지는 못할 듯하였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너라."

"어디 가십니까?"

부장이 물었고 최형기가 말하였다.

"목대감 댁 하인을 잡으록 간다."

"저희들은 변복 차림이고... 아무래도 시가가 이르지 않습니까?"

"아니다. 배꼽에 노송 자랄 때까지 기다리겠느냐. 첫 입에 들어올려야지. 두 입질 세 입질

기다리다가는 미끼만 떼인다. 대감과는 나두 안면이 있다."

이미 몰락해버렸지만 전 어영대장 김익훈의 문하가 최형기가 있었고, 남인의 목대감과는

서로 대척 관계에 있어서 주인의 정적을 소상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인을 때려 잡는 고

변을 일으켰다가, 그 일로 파직이 되었으니 김익훈은 정적들에게서 끝내 사람의 대접을 받

지 못할 것이었다. 최형기는 또 언제 뒤집어져서 남인들이 조정에 나서게 될지 모르는 일이

었으므로 자기 같은 무장은 불편당하는 처신이 유리할 것임을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다.

"요즈음 목대감 댁이 어디인가?"

"낙선방 쪽입니다."

"별순라패들이 당한 구역이로군요."

"따지고 보니 그렇군요."

그들은 배오게에서 종루를 가로질러 곧장 개천을 건너 낙선방으로 올라갔다. 부근에는 박

팽년의 집터와 이안눌의 집과 박승종의 집이 있는데, 목내선은 비파정 아래 십 부의 대지에

삼십여 칸짜리 집에서 살고 있었다. 청계천으로 흘러내려가는 두 갈래의 개천이 마주 보이

는 가운데 소나무가 울창한 곳이었다. 최형기는 솟을 대문 앞에서 외쳤다.

"이리 오너라."

어려 보이는 사동이 마침 문을 열었다.

"너희 대감마님 계시느냐?"

"어디서 오신 뉘시옵니까?"

사동은 갓에 도포 차림인 최형기를 살피고 그의 등뒤에 서 있는 자들을 재빨리 훑어보았

.

"포도청 종사관으로 있는 최형기란 사람이구나 여쭈어라."

사동은 그들을 허술청으로 안내하였다. 청지기가 붓과 간지를 내주며 말하였다.

"명자를 드릴터이니 여기 적어주십시오."

최형기가 두말 없이 적는데 뒷전에 앉았던 장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직임도 없는데 재상집처럼 까다롭구먼."

청지기가 내준 명자를 사동이 받아가지도 들어갔다가 나와서 전하였다.

"사랑으로 드시랍니다."

최형기는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기간 평안하였습니까?"

목내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번에 물어왔다.

"그래 포청의 종사가 무슨 이로 내 집에 왔는가?"

최형기는 방안의 사람들 모두가 자기를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중의

하나가 말하였다.

"자네는 김익훈의 문하에 있던 자가 아닌가?"

최형기는 눈길도 주지 않고 목내선에게 말하였다.

"영감께서 아시듯 저는 조정의 형편에는 어두울 뿐만 아니라, 낮고 천한 일개 무장으로서

여러가지 구설은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영감 신변에 위급한 일이 생겼기로 의논드

릴까 하여 감히 찾아뵈옵는 것입니다."

"위급한 일이라니..."

"주위를 물리쳐주십시오."

목내선이 밤문객들에게 눈짓하였다. 그들은 아무 말 못하고 자리를 떴다. 방안에는 이제 목

내선과 최형기 두 사람뿐이었다. 최형기가 서두를 떼었다.

"요즈음 한양의 치안이 혼란하다는 소문을 들으셨는지요."

"나는 거의 출타하지 않고 지내니 무슨 소문을 듣겠는가마는, 며칠전에 역관 다니던 이모

라는 사람의 집이 화적을 만난 것은 들었지."

"그뿐 아니라 숭례문 밖에선느 백주에 적당들이 날뛰고 있어 저희 좌대장의 처가에서도 화

적에게 변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동 이지사 댁이 탈취당할 적에 순라패의 복처 다섯 곳

이 쑥밭이 되었습니다."

목내선은 혀를 차며 얼굴을 돌렸다.

"상의 총애를 받는 정승 판서들은 다 무엇하는 이들인가. 국가의 녹을 받아 그러한 난민마

저 진정시키지 못하고 심지어는 도성안에서 살변이 일어나도록 문란하다니, 모두 파직하고

극변에 원찬될 죄이니라."

최형기는 목내선의 치우친 불만이 계속되려는 것을 가로막았다.

"사태가 급박합니다. 한양의 천예들이 작당을 하구 있습니다."

"지난번에 청국의 형세를 물어 왜국의 국서 때문에 인심이 소연하다는데, 조정 벼슬아치들

은 그것을 수습할 일은 도모하지 않고 오히려 가족들을 시골로 피난시키고 있으니 더욱 한

심스런 노릇이지. 주상의 총명을 가리우고 백성을 편하게 다스리지 못하며 그 위에 하늘의

진노를 사서 흉년까지 당하였으니 천추를 씻지 못할 불충이다."

목내선은 스스로 흥분하여 노기를 띠었다가 최형기의 귀뜸이 그제사 생각났는지 자제하면

서 물었다.

"헌데, 그런 일들이 초야에 있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아뢰옵기기 송구스러우나... 워낙 긴급한 일이라서, 한양의 쳔예들이 살주계라는 당을 모았

는데, 이 댁에 그 혈당의 하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뭐라구... 살주계라? 그게 틀림없는 사실인가?"

"이 댁의 수노 되는 자가 그들과 자주 왕래하였사온데, 대질을 시킬까 하옵니다."

"뭐라구... 살주계라? 그게 틀림없는 사실인가?"

"그러니까... 계에 들었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잡힌 적당과 잘안다는 말이렸다?"

목내선이 침착하게 되물었고 최형기도 조심스러이 말하였다.

"모교리 댁의 수노가 청파 당촌에서 바깥살림을 하는데 계원이 틀림없었습니다. 거기서 이

댁의 수노가 자주 왕래하였음이 밝혀졌지요. 계에 들었는지는 모른답니다만... 모여서 양반의

욕을 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목내선은 별로 시답잖다는 눈치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최형기

를 노려보았다.

"그래, 대질을 시켜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최형기는 오히려 얼떨떨하여 목내선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온지..."

"내가 비록 칩거하여 있다고는 하나, 감히 내 손으로 기른 아이를 데려다가 함부로 국문하

겠다는 건가?"

"대감, 이런 일은 체모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국본이 흔들리는 일인데 어찌 사사

로운 감정일 수가 있겠습니까?"

목내선은 차츰 언성을 높였다.

"혐의가 분명하여 적당한 것인 밝혀지면 이것은 주상께 불충이 되거니와 내 스스로가 실덕

한 자가 되고 말 것이네. 집안의 천예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세상의 조롱

이 없겠는가. 또한 혐의 없음이 밝혀진다 할지라도, 세간에서는 내가 행신이 못 되어 포청의

침학을 면치 못한다고 구설이 따를게야."

"참으로 황공합니다. 하오나 노비가 그 주를 역하고, 아들이 아비를 역하며 신하가 임금에

역하는 것은 천벌이 따르는 중죄이옵니다. 소문에 듣자하니 살주계의 계원들 대부분이 대솔

하인들로서 난 전에 나가 다니던 자들이랍니다. 대가의 수노들은 궁궐의 사정에 밝고 저자

의 무뢰지배들과 가까운데, 혹시 저들이 모역하여 도성 내에서 난을 일으키면 실로 양호유

환이 될 것입니다."

목내선은 빈 잔을 들더니 최형기에게 내밀었다.

"한잔 들게나."

"소인이 어찌 감히..."

최형기가 잔을 잡으려 하지 않았으나 목내선은 침통하게 그를 들여다보며 들고 있는 술잔

을 내려놓지 않았고, 형기는 할 수 없이 잔을 건네받았다. 목내선은 떨리는 손으로 술을 치

다가 넘쳐서 형기의 손등을 적시었다.

"내가 자네의 관무에 충직함을 의심하는 바는 아닐세, 허나 그놈은 우리 집의 내림 씨종이

. 집안의 개가 사람을 물어도 남의 손에 박살되느니 스스로 처치해야 덜 불쾌한 법이야.

강상죄에서 나아가 반역죄에 이르는 일을 어찌 내 집 울타리 밖으로 내보낼 수가 있겠는

."

최형기는 잔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다만 입을 열게 하여 한시바삐 혈당들을 잡아내려는 것입니다."

"계원이 분명한가?"

"아직은 모릅니다. 내왕이 잦았다고 하니 관계가 없달 수야 있겠습니까?"

"노비들이라고 인정을 가진 사람인데, 바깥에 동무가 있겠는가."

"전부터 대설하인의 기미가 수상하여, 기찰해오더니 저동에서 변이 나던 날에 이 댁의 수

노가 집을 비웠다가 새벽녘에 들어온 사실이 있다니까요. 대감, 저희 고충도 굽어살핍시오."

최형기의 간곡한 말이 끝나자마자 목내선은 나직하게 웃기 시작하였다. 형기는 차츰 더 난

처해졌다.

"이 사람아... 그날 일이라면 내가 자세히 기억하구 있네. 동막에서 전갈이 오기를, 우리 향

리의 장토에서 산물이 가지고 마름이 올라 왔다기에 내가 그 녀석을 보냈네. 그깟 일로 흉

모에 동참하였다고 의심을 하다니... 좌우간 이렇게 은밀히 의논해주어 고마우이."

최형기는 답답하였으나 감히 그게 참말이냐고 다짐을 받을 수는 없었다. 아까 청파에서는

사흘 안으로 끝내버릴 일 같더니만, 막상 부딪쳐보니 살주계의 내막을 캔다는 것이 천도를

따내는 일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최형기는 홧김에 술잔을 들어 털어 넣고 일어섰다.

"이 일이 의금부로 넘어가기 전에 포청에서 결안이 되기를 바랍니다만, 수노를 만나지 않

고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의 등뒤에서 목내선이 나직이 말하였다.

"여보게, 종사..."

최형기가 돌아서니 목내선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일 오전에 다시 와주겠나?"

"오전에요...?"

"내가 세사에는 소졸하여 자네와 의논할 일이 많네."

최형기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가 문가에서 다시 읍하며 정중하게 말하였다.

"어느 분부라고 거역하겠습니까?"

"그래, 올 때에 후탁 구군복을 입고 포교 두엇을 데리구 오게."

최형기는 목내선이 마루에까지 나오자 자장 황송한 듯이 허리를 굽히고 뒷걸음쳤다. 목내

선이 댓돌 아래 섰던 사동에게 말하였다.

"대문까지 모셔드리구 오너라."

최형기는 자기가 다른 하인들과 접촉하거나 행랑을 기웃거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임을 너무

나 잘 알고 있었다. 대문간의 허술청에서 기다리던 부하들이 그가 맨손으로 나오는 것을 보

, 놓친 줄 알고서 소매를 걷으며 뛰어나왔다.

"놈이 달아났습니까?"

최형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샌전에 가서 지방이나 얻어와야겠다. 우리가 염이나 하게 될 모양이다."

목내선은 의외의 내방객이 물러가자 스스로의 흥분을 달래기 위하여 방안을 우왕자왕하였

. 이 무슨 불길한 조짐인가. 염통 밑에 수가 스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목내선은

사동의 신 끄는 소리를 듣고는 먼저 미닫이를 열었다.

"차가에서 일러라. 복성이를 장광에다 가두고 추국할 준비를 갖추어 놓도록 하여라."

목내선은 다시 보료에 기대 앉았다. 북성이는 어릴 적부터 그의 둘째아들과 더불어 자라난

종이었고, 입이 무겁고 하는 일에 빈틈이 없어서 벌써 집 밖으로 나돌게 한 지가 이십 년

가까이 되어오는 터였다. 목내선이 아무리 되짚어 생각하여도 그를 학대하거나 미워한 적이

없었다. 그의 할아비는 목내선이 어려서 절에 들어가 공부할 때에 따라 왔었고, 그가 두 달

이나 앓아 다 죽게 되었을 때에는 시구문 밖에 내다 버리자는 것을 목내선이 끝내 말려서

평화스럽게 운명하도록 했던 것이었다. 노복은 숨결이 끊기기 전에 마당에서 목내선의 아들

과 뛰어 노는 북성이의 웃음소리를 듣더니 눈물을 주르르 흘리던 것이었다.

북성의 아비는 목내선이 조정에 나아가 발신하던 무렵에 죽었고, 그의 어미는 아직도 행랑

채에서 살고 있었다. 일찍 장가를 들이려 하였건만 웬일인지 북성이는 끝내 마다하고 바깥

일에만 열중하여 마흔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헛상투만 틀고 있는 총각이었다. 목내선은 끓

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는 동안에 주전자에 남은 술을 모조리 비워버렸다. 밖에서 기침소리

가 들리더니 청지기를 보는 차서방이 아뢰었다.

"대감마님, 분부대로 시행하였습니다."

목내선은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섰다. 청지기는 겁에 질려서 감히 그를 바라보지도 못하

였다.

"안채에서나 아녀자들은 사랑채에 얼씬도 못하도록 하여라."

청지기가 광문을 열었고, 목내선은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침침한 가운데 너덧 명의 하인이

작대기를 들고 섰으며, 북성이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광문을 닫아라."

하인들도 모두 주눅이 들었고, 무슨 속인지 알아채지 못하였다. 추국을 벌이는데 사랑 마당

에서가 아니라 훤한 대낮에 어두운 광에서 하려는 것부터가 어딘가 음산하게 여겨졌던 것이

. 목내선은 북성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먼저 천장의 대들보부터 살폈다.

"이놈을 여기다 매달아라."

그때에 북성이가 머리를 들었다.

"대감마님, 무슨 일로 이러하십니까?"

북성이의 깊숙한 눈은 타는 듯이 빛나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좌우를 뿌리치고 일어날 듯한

기색이었다. 목내선은 함정에 빠진 범 구경이라도 하는 듯이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하인들

을 꾸짖었다.

"어서 시행치 못하면 너희들 모두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라."

북성이가 무릎을 펴려는데 누군가가 작대기로 내리쳤고 그것이 시작이 되어 매가 어지러이

떨어졌다. 북성이의 머리가 터지고 등짝에 매 튀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북성이의 두 손이 묶

이고 다시 밧줄에 연결되어, 줄을 대들보 위로 대롱거리며 달려 올라갔다. 그의 발이 허공에

떴다. 목내선은 청지기가 가져온 호상에 걸터앉았다.

"네 이놈! 이실직고한다면 목숨은 살려주려니와, 속이려 하였다간 네 식솔들까지 모두 죽음

을 면치 못하리라. 지난 그믐에 어딜 갔다가 새벽에 들어왔느냐?"

북성이는 두 손목이 허공으로 쳐들린 채로 아직도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으로 목내선을 내

려다 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와 길고 검은 수염이 얼굴을 거의 가려 눈과 억센 콧날만이 있

는 것 같았다.

"대답하지 못할까?"

목내선이 손가락질하자, 하인들은 다시 어지러이 난타하였다. 북성이가 눈을 감더니 중얼거

렸다.

"소인이 밖에 나다닌 지가 하루 이틀입니까. 시정아치들이 투전을 논다 하여 개평 뜯기나

하려고 나갔었습니다."

"허어, 저놈이 그래도 속이는구나, 네가 모교리네 천예와 더불어 저동의 화적질에 가담한

것을 모르는 줄 아느냐. 벌써 그자가 잡혀서 모두 불었습니다."

"소인은 모르는 일입니다."

목내선은 청지기를 가까이 오게 하여 귀에다 뭔가 속삭였고, 그가 바삐 광 밖으로 나갔다.

목내선의 뺨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네가 나를 죽이기 전에, 네 할애비를 먼저 생각했어야 할 것이다. 내 일찍이 네게 혈육같

이 대하였건만, 이놈 살주계란 다 무엇이냐? 바른대로 대지 못할까. 포청에서 너희를 모두

탐문하여 이리로 너를 잡으러 왔었다. 네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혀를 뽑아놓고 말겠다."

목내선은 두리번거리더니,

"인두 어디 있느냐, 어서 가져와."

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의 흰 수염은 턱끝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대감마님, 고정하십시오.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하인 하나가 뛰어나가자, 엇갈려서 청지기가 보퉁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행랑채 벽장속에서 이런 것들이 나왔습니다."

목내선은 보퉁이를 풀었다. 창포검과 끝이 둥글게 닳아빠진 종이 쪽지와 태평소였다. 목내

선은 제일 먼저 종이 조각을 펼쳐들었다. 언문으로 살주계 약조문이라 되어있는데, 검붉은

색으로 퇴색한 것이 피를 내어서 쓴 모양이었다. 목내선은 그것을 펼쳐들고 차마 다 읽지

못하고 떨기만 하였다.

"그래, 양반을 모두 살육하고 재물을 빼앗으면 세상이 바뀔 줄 아느냐?"

내뱉고는 창포검을 뽑았다. 그는 칼을 치켜들어 북성이를 베려다가 다시 칼집에 천천히 집

어넣었다.

"너는 단칼에 죽이지는 않으리라. 포청에 넘기느니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것이 나을 게다."

하인이 인두를 꽂은 화로를 받들고 들어왔다. 오동 화로 안에는 벌건 숯불이 가득 들어 있

었고 인두 세 대가 꽂혀 있었다. 목내선은 다시 호상에 갓 걸터앉으며 물었다.

"지난 그믐에 어디에 갔었느냐?"

하인 중의 하나가 인두를 뽑아들며 북성이게로 다가섰다.

"네가 수노로서 대감마님의 은총을 받은 위에 피와 살을 주신 부모와 같을진대, 이런 천인

공노할 배은이 어디 있느냐? 너 같은 놈 때문에 우리들까지 부끄러워서, 도성에 나다니지

못하게 하려느냐."

하인이 인두를 쳐들자, 북성이가 고리를 돌리더니 굵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가엾은 놈... 오늘은 나를 잡지만, 다음번엔 너희를 도살할 거다."

목내선이 일어나 다른 인두를 뽑아서 북성이의 배에다 지그시 눌렀다. 북성이는 꿈틀거리

면서 신음을 스스로 억제하였다. 하인들은 아무리 지엄한 주인의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어제

까지도 북성이와 동료지간이었던지라, 그의 눈을 마주치기도 괴로운 노릇이었다. 그들은 아

직은 주인을 죽이고 세상을 바꾼다는 일이 하늘을 거역할 만큼 끔찍하고 엄청난 짓으로 생

각될지언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북성이가 무력하게 두 손이 묶이어

대들보에 매달려 있어도, 어디인가 자기네와는 달리 두렵고 당당해 보였던 것이다. 목내선은

북성이의 몸의 이곳 저곳을 인두로 지져대고소 쇠가 검게 변하자 땅에 내던졌다. 그는 땀을

계속 흘리고 있었다. 누구이긴 하여도 제법 강단이 있는 몸인데 역시 노인네 근력이란 믿을

수가 없어서, 잠시 후에 스스로 기진맥진하여 호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북성이는 입술을 깨

물고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으나, 눈은 벌써 총기를 잃었고 이리 저리 몸을 꿈틀거리노

라고 두 손목은 밧줄에 쓸려서 피가 맺혀 있었다. 목내선은 흐릿해진 북성이의 눈을 바라보

며 달래듯이 물었다.

"내가 너희 세 모자를 은의로 대하였거늘 흉당에 들어간 것은 무엇 때문이냐?"

북성이가 지치고 피곤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였다.

"예부터 우리들 노비란... 당신네 양반들에게는 개 돼지나 우마와 다를 바 없지 않소. 상전

편에서는 은의라 하난 우리 쪽에서는 다만 한때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진정한 은

의라면 왜 진작에 면천시켜주지 않았습니까. 허리가 부러지도록 평생을 댁네를 위해 일하다

가 몸져누운 할아버지를 시구문 밖에 내다 버리라고 했던 것도 당신들이지요. 대감께서 장

례를 치르도록 하였다지만, 집안의 강아지에게 한줄기 인정을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

네는 우리 누이를 삼남 향족에게 팔아버렸지요. 왜 그랬나요. 그때에 내가 어렸으나 누이와

어미가 붙들고 울어서 다 듣고 알았소. 이 집 큰서방님짜리가 음행하여 말썽이 생겼기 때문

이지요. 그때에 누이가 아이를 가져서 값이 후하였다고 댁네들은 지껄이는 소리도 들었소.

나와 내 아우가 자라나며 겪은 온갖 매와 고달픔은 다 잊었으나, 어미가 겪은 수모는 말로

꺼낼 수가 없소. 댁네 양반들은 모두들 음예로 날을 보내며, 부인들은 갖은 포악으로 앙갚음

을 하였으니, 어찌 한두 번 댁네를 죽이고자 작심하였겠소. 어미가 손가락을 작두에 잘리고

골방에 돌아와 울 적에, 나는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어둠속에다 대고 맹세하였지요. 언젠

가는 댁네 양반들을 이 세상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버리겠다고..."

목내선은 북성이의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무슨 감정의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그의 배신에 대한 분풀이는 일단 끝이 났기 때문이었다. 목내선은 싸늘하게

식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까까지는 목내선 개인이었으나 이제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혜

택을 받은 신하이며 대대손손 물려서 빼앗기지 않아야 할 양반이었고, 그와 같은 이들을 대

신하여 여기 앉아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따위 한줌도 안되는 쳔예의 무리들이 몇백 년을

유지하여 온 국본으 어찌 흔들 수가 있으랴마는, 저들은 분명히 가장 질이 나쁘고 위험한

적이었다. 몇몇 노비가 저희 주인을 실지로 죽여버리는 일보다도 살주계라는 이름이 더욱

위험하였다. 보에 뚫린 구멍이고, 축담에 갈라진 틈이며, 마을에 생겨난 역질과도 같았다.

못된 계의 소문이 바람을 타고 팔도 사방으로 번져나가면 역난이나 왜침보다도 더욱 무서운

재앙이 될 것이다. 수백 년이나 묵혀온 싸움인 까닭이었다. 이 반항적인 쳔예 북성이는 목대

감의 재산의 일부분이 아니라, 천지간에 귀와 천의 엄청난 분수룰 혼란시티려는 재앙 덩어

리인 셈이었다.

"이 약조문은 누구와 함께 썼느냐?"

북성이도 목내선의 변한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 북성이는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찡그리고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사람으로 바로 선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희생을 요구하는 일인가.

이제서야 그는 그의 상전과 대등해진 것이다. 주인은 기르는 개가 돌연 이빨을 드러내고 짖

어대면 그때에는 의외의 분노로 마구 두들겨대지만, 다음부터는 지나친 주인 행세를 곧 포

기하고 개의 개다움을 일종의 두려움과 함께 인정하는 법이다. 하물며 같은 사람에 있어서

. 북성이가 사람은 누구나 같다는 것을 알고 계원이 된 이상, 죽어가는 자리에서 다시 옛

날의 천예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목내선이 스스로 자기네 양반들의 세상을 지키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성이도 그의 동료들을 지켜야만 하였다.

"어서 죽이시오. 이 댁의 영화도 얼마 남지 않았소."

목내선은 혀를 찼다. 그는 호상에서 일어나더니 담담하게 말하였다.

"네놈이 입을 열기 전에는 이 집 대문 밖으로 못 나간다."

그는 하인들 중의 하나를 지목하였다.

"오늘부터 네가 수고를 해야겠다. 이놈이 포청에 끌려가 국문 끝에 사실이 밝혀져서는 않

되느니라. 내 집 것이니 내가 밝혀내어 알려주어야겠다. 지금부터 너는 이놈의 목숨이 붙어

있을때까지 캐내어라. 동당이 누구누구인지, 어디서 자주 모이는지, 그리고 우두머리가 누구

인지 샅샅이 알아내어야 한다. 자백을 시작하면 내게 알려라."

갑자기 수노를 지명받은 하인이 겁을 먹은 얼굴로 물었다.

"대감마님... 물고를 내란 분부시옵니까?"

"자백하기 전에는 절대로 죽이지 마라. 저놈은 내가 처치할 테니."

목내선은 광을 나와 어두워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웬일인지 가슴이 답답해오고 온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그는 북성이의 빛을 내는 눈초리와 어처구니없게 당당한 기세를 더이상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대체 무엇이 저런 소 같던 씨종을 미치게 만들었을까.

광에서는 이따금 신음소리가 섞여 비명이 높아지고는 하였다. 계집종들은 아예 사랑채 근

처에는 얼씬도 않았고, 아녀자들도 가장의 하는 일이라 쉬쉬하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다.

랑채의 북성이 어미는 어둠 속에서 소리를 죽여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밖에서 역시 흐느끼

는 소리가 들리며 툇마루에 걸터앉는 듯하였다.

"이리 들어오너라."

북성의 어미가 가까스로 말하니 마루에 앉은 채로 아우는 중얼거렸다.

"언니는 거의 반죽음이 되었수."

"환도가 나왔으니 살려두겠느냐. 이제는 죽은 몸이다."

"모두들 인심이 매정하우. 어제까지두 다정하던 사람들이 야차나 된듯이 악형을 주고 있어

."

북성의 어미는 두 눈을 씻고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었다.

", 좀 들어오라니까. 에미가 네게 긴히 할 얘기가 있다."

북성의 아우는 소매로 얼굴을 가리우고 쏟아지듯이 방으로 들어와 어미의 무릎에 엎어졌

.

"오냐... 오냐."

어미가 아우의 등을 토닥이면서 흐드득하고 숨을 삼켰다. 아우의 울음이 차츰 커지니까 어

미는 그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지금이 어느때라구 소리를 내려느냐, 어미는 살아오면서 이 방에서 입술을 악물고 참은

적인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머니, 언니가 죽으면 우리두 이 집에서 나가요."

어미가 그의 머리를 감싸안으면서 쓸쓸히 물었다.

"속량시켜준다든?"

"달아나지요."

"네가 그렇게 해라. 달아나서 너희 언니 동무들께 알려주어라. 끝까지 입을 다물고 죽었다

..."

"어머니, 지금 나가겠수."

"너는 네 언니가 어디로 나다니는지 잘 아느냐?"

", 압니다. 쌍이문방의 바침술집에 잘 간다고 합디다."

북성의 아우가 일어나려는 것을 그 어미가 잡아 앉혔다.

"오늘은 안된다. 너희 언니는 기왕에 죽을 몸이야. 내일 시신이 나온 뒤에 빠져나가거라.

내가 짐으 다 챙겨놓겠다. 그런데... 너 내가 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겠지."

어미는 작은 아들들의 두 손목을 꼭 움켜쥐었다.

"저것을 그냥 두면 밤새도록 갖은 악형을 당할 게다. 사랑채의 담이 아무리 높고 광문이

철옹성같이 단단하여도 저것의 단련받는 소리가, 너무나 똑똑히 들리는구나. 가슴에다 대못

을 쾅쾅 박는 듯하여 나는 아무래두 이 밤을 넘기지 못하겠어. 너희 형이 죽고 네가 달아나

면 내가 더이상 목씨 가문에 살아남아 무얼 하겠니. 네 언니의 모진 명줄을 끊어줄 수 있겠

느나?"

"언니의 명을 끊다니요?"

"이것아, 전옥서에서도 속참행아가 있고 포청에서는 물고행아가 있는데 이왕에 가는 몸이

고생 끝에 죽어 무얼 하느냐. 우리가 자랄 적에는 요새보다두 노비를 장살하는 상전이 많았

. 멍석말이를 해서 때려 죽이라면 상전이 모르게 머리를 때려서 혼절한 가운데 인사불성

으로 빨리 죽도록 하였다."

"내가 광에 들어가면 저놈들이 그냥 놔둘까요."

어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우리 같은 것들의 속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남에게 매인 몸이니 시키는 대루 할 뿐

이지 저 사람들두 어서 네 언니가 죽기를 바란단다. 다 팔자가 다르려니 하는 게야. 마음을

수천 번 고쳐 먹으며 팔자려니 하는 게다."

"알겠수."

"머리를 힘껏 때려주어라."

북성의 아우가 벌떡 일어났고 그의 어머니 등을 밀어주면서 방바닥에 머리를 박고 오열을

스스로 틀어막았다. 북성의 아우는 한참이나 행랑채 앞을 서성거리다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는 사랑채 쪽으로 향하였다. 중문은 닫혀 있었으나 빗장은 걸리지 않았고 소리 없이 열렸다.

사랑채 마당 앞에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는 광문 앞에 가서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북성이는 걸레 조각처럼 매달려 있었으며, 하인들은 웃통을 벗거나 바짓가랑이를 걷

어올리고 주위에 흩어져 쉬고 있었다. 북성이의 갈갈이 찢어진 옷자락이 젖은 것으로 보아

물을 뒤집어쓰고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듯하였다. 북성의 아우는 광문을 밀었다. 틈이

조금 더 벌어지다가 멈추었다.

"누구야..."

안에서 당황하여 얼어서더니 빗장이 벗겨지고 문이 열렸다. 그들은 안으로 한걸음 내딛는

북성이의 아우를 보자 멈칫하였다. 그는 어느결에 제 언니의 발치로 가까이 다가섰고, 수노

가 된 자는 뒤늦게 소스라친 모양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구 함부로 들어오는 게야."

하면서 그의 뒷덜미를 잡아당겼지만, 다른 자들은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하였다.

"이거 놔요. 죽기 전에 얼굴이나 봐두려구 하는 게요."

하면서 그는 수노의 손을 뿌리쳤다. 북성의 아우는 머뭇거리지 않고서 땅바닥에서 굵직한

몽둥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좌우에서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위로 치켜들고 북성이에게로

달려들었다.

"언니... 잘 가우."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북성이가 게게 풀린 눈을 열어 제 아우를 내려다보고는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아우는 북성이의 시선과 부딪치자 주춤하였다.

"아니, 이 자식이 뭘 하는 게야..."

하면서 뒤에 섰던 수노가 달려들자, 아우는 치켜든 몽둥이를 휘둘렀다. , 하는 소리가 들

리면서 몽둥이가 북성이의 광대뼈에 부딪쳤고 매달린 몸이 허공에서 거칠게 흔들렸다. 아우

는 다시 한번 몽두이를 휘둘렀는데 이번에는 뒤통수가 가서 들어맞았다. 북성이의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하인들은 제각기 멍청한 얼굴로 흔들거리고 있는 북성이있다. 북성이는 피범

벅이 되어버린 얼굴을 가슴팍 위에 처박고 두 발은 빨대처럼 늘어진 채 흔들거렸다.

"언니..."

그의 아우가 부르짖으며 북성의 시신에 달려들어 허리를 감싸안았다. 수노가 외쳤다.

"뭣들 하는 게야. 어서 뜯어말리잖구."

소스라친 하인들이 북성이의 몸을 껴안고 있는 아우를 뒤로 끌어내었다.

"허허, 이거 큰탈이로군. 대감마님께서 자백할 때까지 죽이지 말라구 분부하셨는데."

그들은 북성의 몸을 대들보에서 끌어내렸다. 하인 하나가 코밑에 손가락을 대보고 손목을

잡아 맥을 짚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수노가 험상궂은 얼굴로 북성의 아우를 흘겨보았다.

"아무리 대죄를 지었다지만, 한솥에 밥을 먹구 친동기간이나 다름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이

럴 수가 있수. 우리 언니야 기왕에 죽는 사람인데, 악형을 더욱 주어서 무슨 속시원할 일이

있겠수. , 이젠 그 더러운 손으로 나를 죽이시우."

북성의 아우가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내저으며 부르짖으니, 수노 된자가 귀쌈을 올려붙었

.

"이 자식아, 너희 형제 때문에 우리가 이 곤욕을 치르는데, 누군 이런 짓이 좋아서 하는 줄

아니. 안되겠다. 대감마님께 가서 아뢸 터이니 사지 결박하여 대죄시켜라."

수노가 얼굴이 시퍼래져서 광을 나가려 하자, 하인 하나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여보게, 이런 악형을 배길 사람이 어디 있겠나, 기왕 죽은 사람이야 제 죄값을 하구 가는

거지만 시방 대감마님께서 노여움이 극에 달하였는데 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간 또 생사람

하나 골루 가네."

다른 하인들도 거들어 말하였다.

"그래... 우리야 분부대로 매우 치고 담금질도 하였으나 어느결에 물고를 내고 말았다면 꾸

중이나 하시구 말 걸세."

"정말 사람으로는 못할 짓이로군. 기왕지사 이 아이가 제 형의 목숨을 끊어주었으니 우리

두 홀가분하지 않은가."

수노가 한참이나 망설이더니 북성의 아우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알아서 할 터이니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거릴 생각 마라."

"우리 언니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거요."

북성의 아우는 광에서 밀려나오기 전에 제 형의 마지막 모습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가 행랑채로 돌아가니 어미는 아직도 불을 켜지 않은 어둠속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방문을

열고 속삭였다.

"어머니, 나 달아나우. 인정 전에 쌍이문방까지 가야 해요."

어미의 손이 문틈으로 뻗어와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래... 네 언니는 잘 보내주었니?"

"어머니 원하신 대로 내가 목숨을 끊어드렸지요."

"대번에 말이냐?"

"혼절하면서 대번에 명이 끊겼을 거예요. 내일 날이 밝으면 오히려 기찰이 심해져서 언니

동무들은 모두 잡히구 말 거예요. 나 시방 빠져나갈라우."

어미의 손이 스르르 풀어졌다.

"가거라... 어서."

그는 문고리를 잡고 툇마루 앞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가 떠나고 나면 어미의 평생 소망은

이제 티끌처럼 사라져버리는 셈이었다. 언젠가 속량하는 때가 오면 북성이는 장가들고 세

모자가 함께 강원도 깊은 골로 들어가 숯도 굽고 약초도 캐며 화전살이에 사냥도 해서,

상의 어느 누구 간섭도 받지 않고 살겠다던 옛말 같은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간신히 버티고 일어섰을 뿐, 끝내 벗어나지 못하였다.

"어머니, 함께 갑시다."

대답 대신에 문이 당겨졌고, 안에서 문고리를 걸어 잠그는 듯하였다. 사랑채 쪽이 웅성거렸

, 그는 재빨리 후원 쪽으로 피하였다.

목내선은 북성이가 국문 도중에 죽었다는 것을 알고는 수노와 하인들을 호되게 나무랐다.

그러나 그는 내심으로 포도청에 산 채로 내어 줄 수는 없다고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이가 포도청의 국문을 받았을지라도 입을 다물고 죽었을 위인인 바에야 자기 집안에서 죽

어 나가는 것이 마땅하였다. 목내선은 지필묵을 들어 하늘을 거역하고 주인을 죽이려던 노

비임을 밝히는 방문을 썼다. 시체를 마당으로 끌어내니 참혹한 꼴이라 목내선도 얼결에 고

개를 돌렸다.

"지나는 행인들에게 본을 보여야겠다. 이 방문을 몸에 붙여두고, 길가 버드나무에 매달아놓

아라. 포청에서 수습하여 갈 게다."

목내선은 시체가 들려 나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북성이

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의 가슴에 맺혔던 포한에 그토록 야무지고 깊었던 것일까.

목내선은 그 밤을 꼬빡 뜬 눈으로 세워야 하였다. 하인들은 하인들대로 바깥 한길 가에 매

달려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을 북성이의 시신이 떠올라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사람의 씨가

따로 있지 않은 바에야 팔자 소관이 사나워 남의 종살이를 할망정 주인에게 항거하려는 것

이 어째서 하늘을 거역하는 일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인들ㅇ느 서로 말도 걸지 않았고, 제각기 등을 돌리고 벽을 향하여 누워 있었다. 바람에

불리는 스산한 나뭇잎 소리로 잠들지 못한 하인들은 새벽녘까지 서럽고 고통스럽던 지난 여

러해를 생각하였다. 목내선의 집은 바람 속에 매달린 북성이의 주검보다 더욱 을씨년스러웠

.

북성의 아우가 쌍이문방의 바침술집에 당도한 것은 이경이 가까워서였다. 그는 주위를 살

피고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두드렸다.

"누구셔요, 술 안 팔아요."

대문 안에서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밖으로 난 들창문이 쓱 열리면서 주인 여자의 머

리가 내밀어졌다.

"누굴 찾으슈?"

"... 북성이란 사람의 아웁니다."

"아니..."

여자가 급히 창문을 닫았고 대문간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아직 대문을 열지

않은 채로 문틈으로 속삭였다.

"무슨 일이오?"

"우리 언니가 오늘 살주계 계원임이 밝혀져 주인에게 죽었습니다. 포청에서도 언니 동무들

을 모두 알고 있다하니 어서 피하게 하시우."

대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알았소."

"헌데, 나는 지금 이 소식을 전하려고 집을 빠져나왔으니 다시 돌아가면 추달을 받을 게요.

오늘만 묵어 가도록 해주십시오. 나두 계원이 되려구 합니다."

망설이던 여인이 비로소 결심이 된 듯 문을 열었다. 북성의 아우가 들어서자마자 여인은

문을 닫고 문틈으로 바깥을 살피는 것이었다.

"저것 봐요. 포교가 틀림없어."

북성의 아우도 문틈으로 내다보니 과연 골목 어귀에 맨상투에 두건을 쓴 사내 하나가 서덩

대고 있었다.

"댁네를 따라온 게야. 여하튼 들어가서 의논을 해봅시다."

주모는 깔아두었던 이불을 밀치고 북성이의 아우를 앉혔다. 그는 북성이의 최후에 대하여

빼놓지 않고 말하였고, 주모와 딸은 연신 옷고름으로 눈가를 씻었다.

"종사관이라면 느이 오래비가 얘기하던 최뭐라나 하는 놈일 거야. 기찰이 매섭다고 하지

않든."

"북성이 아저씨가 그리 되었다면, 중길이 오빠에게두 이 일을 알려야 할 텐데요."

"글쎄나 말이다. 파루를 치자마자 집에서 나가야 헌다. 중흥동에 가면 만나게 되겠지."

"짐을 꾸릴까요?"

"그래라, 밥도 좀 짓고..."

하면서 주모는 다시 들창문의 창호를 뚫고 내다보았다.

"아직도 저기 서 있어요. 이 집은 이젠 버려야지. 젊은이두 우릴 따라서 중흥동으로 가십시

."

"거기 숨을 만한 데가 있나요?"

"가보면 다 알게 되요. 북성이 동무들이 여럿 있지. 그런데 혹시... 포교들이 벌써 청파에

있는 이들을 다 알아버린 게 아닐까?"

주모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중길이는 그의 친자식이나 다름없었다.

살주계의 총대 청파 중길이가 잡히면 한양 성애의 모든 계원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들은 지난번 큰 일을 해치우고 일단 중흥동 은신처로 몰려갔지만, 중길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서강 식구들과 거래하는 청파 난전으로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안되겠어. 댁은 새벽에 목멱산을 넘어서 서강으로 나가요. 서강에 가서 모신이네 주막을

찾아가지구. 모두 얘기해줘요. 중길이 만나거든 청파에 가지 말라구."

포교의 눈에 띄었으니 쌍이문방 바침술집은 이제는 빈집이 될 판이었다.

강변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해가 솟은 지 오래였건만, 새벽처럼 느껴졌다. 서강은 흉년을 타

서 그런지 예년의 가을보다는 한산하여 배도 몇척 떠 있지 않았고 문을 닫아버린 객주집이

많았다. 모신이네 주막도 아예 술 팔기를 폐해버리고 쌀을 가지고 찾아오는 화주들을 숙박

시킬 뿐이었다. 모신이는 검계에서 털어낸 재물들을 한양에서 먹이지 않고 삼남으로 오르내

리는 주상들에게 내주었으므로, 창고에는 피륙과 곡물이 그득하였다. 흉년에 재물 마련하는

방법은 곡물과 피륙으로 헐값이 되어버린 옥토를 사들였다가, 나중에 풍년이 들 적에 비싸

게 되팔거나 직접 영농하여 늘리는 것이 있었다. 모신이는 겉으로만 초라한 주막 주인이되

속으로는 삼남에서 북관에까지 가장 수완 있고 신용 있는 장물아치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

.

"그러니까 미곡으로 내달란 말이지?"

모신이는 살주계에서 털어낸 재물들의 셈을 끝내고 돈꿰미를 내놓았으나 중길이도 난장에

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중길이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이거 왜 이러슈. 돈이 천 천꿰이면 뭘 하우, 곡식을 구경하기가 힘든데... 우리 식구가 모

두 몇인지나 알우?"

"알겠네, 헌데 어디까지 실어다 달라는 게야?"

"압구정을 돌아 중량포까지만 실어다 주면 되우. 운임으로 한섬 떼어줄 테니까. 평년이라면

그런 운임이 어디 있수."

모신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껄껄 웃고 말았다.

"그래, 내일 새벽에 중량포루 모두 나와서 기다리게. 대낮에 실어냈다가 사람들 눈에 띄었

다간 자네들이나 내나 기찰에 걸려 포청으루 떨어지는 게여."

중길이는 모신이가 떼어주는 반쪽짜리 송증을 받아 넣고 일어섰다.

"이젠 명년에 햇곡 나올 때까지 그렁저렁 살게 되었군."

"그게 무슨 말이야. 두 손 털구 다시는 일 안할 셈인가?"

중길이는 나직하게 말하였다.

"포청에서 기찰이 날카로워 요즈음 발 디딜 데가 없수. 삼춘네서도 당분간 조심을 해야 될

거요."

"우리야 뭐 이런 짓이 하루 이틀인가. 내가 먹여 살린 장교들만 해두 이만큼이여."

모신이가 열 손가락을 쫙 펴 보였다. 중길이가 창천네를 따라 올라가니 모신이 물었다.

"우리 배가 동작나루까지 올라가는데, 광나루까지 태워달라지 그러나."

"오늘은 나온 김에 청파에 들러봐야지."

중길이가 사라진 뒤에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해서, 북성의 아우가 헐레벌떡 당도하였다.

신이는 그자가 두리번거리며 저자거리에 이르러 모서방네 주막을 찾는 꼴을 보았으므로,

기는 술청 안쪽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고, 곁꾼을 내보내어 말대꾸를 하도록 시켰다. 북성

의 아우는 간밤의 고뇌와 두려움으로 눈이 충혈되었고, 어둠속에서 목멱산을 넘으라고 옷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여기가 모서방네 주막입니까?"

"헌데, 왜 이러슈?"

북성의 아우는 얼른 술청 안으로 들어서더니 바깥을 내다보았다. 곁꾼도 함께 한산한 저자

길을 살펴보며 다그쳤다.

"무슨 일인지 어서 말허우."

"모서방이 지금 계신가요?"

곁꾼은 뒤를 슬쩍 돌아보고 나서 다시 물었다.

"지금 안 계신데... 무슨 전할 말이라두 있으시우?"

북성의 아우는 술청 안을 두리번거렸다.

"위급한 일이 생겨서... 중길이란 이가 여기 왔다는데요."

모른 척하고 등을 돌리고 앉았던 모신이가 그제사 일어났다.

"당신은 누구슈?"

"목대감 댁 북성이가 바루 제 언니입니다."

모신이는 눈짓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고 곁꾼이 북성이 아우의 등을 밀었다.

"따라가보시오."

그는 모신이의 뒤를 따라 안마당을 지나 뒷방으로 들어갔다. 북성의 아우가 방바닥에 손을

짚으며 인사를 차리려 하니 모신이가 제지하였다.

"아니, 갓 쓰고 똥 눌 적도 있는데 지금 그런 인사가 다 우에야. 내가 모서방이란 사람일

."

"제 언니가 상전의 형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계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울먹이며 더듬는 그의 말을 모신이 막았다.

"그보다... 중길이를 찾는 이유가 뭔가?"

"종사관이라는 놈이 살주계의 내막을 대강 알아낸 듯하답니다. 우리 언니가 횡액을 당하신

게 바로 그놈 때문이지요."

"최형기가..."

모신이는 눈을 크게 뜨고 스스로 탄식하였다.

"그자의 기찰이라면 틀림없지. 이거 좀 급하게 되었구먼."

모신은 북성의 아우에게 말하였다.

"보아하니 추노가 있을 법한데, 오날밤에 배를 타도록 하게. 나는 좀 나갔다 올 테니까."

모신이는 서두르고 있었다. 안방에 들어가 머리에는 패랭이 쓰고 저고리 위에 창옷 걸치고

술청으로 내달았다. 그는 곁꾼에게 지시하였다.

"아랫집에 내려가서 아이들 두엇 급히 올라오라구 하여라."

잠시 후에 우락부락한 사내들 셋이 뛰어왔다. 복색은 긴 저고리나 배자를 걸치고 말뚝벙거

지 두건 패랭이 등속으로 각양각색이었다. 모신이가 변을 써서 말하였다.

"한발 더 놓게 생겼다. 청파에 솔개가 떴는데 병아리를 감추러 간다."

"모셨습니까, 흘렀습니까?"

"아직은 모른다. 우리가 쫓아가서 흘리게 해야지."

"짐을 지구 갈까요?"

모신이가 궁리하다가,

"장물 나르듯 해야겠다. 젓독을 내어오너라."

말하니 패랭이 쓴 자가 달려가 대독을 얹어 단단히 붙들어맨 지게를 짊어지고 왔다. 독 뚜

껑을 열어보니 새우젓이 그득하였다. 모신이는 두건과 벙거지에게 일렀다.

"너희는 앞질러 청파저자로 달려가 중길이를 찾아내어 딱부리네 창고에다 은신시켜두어

."

두 사내가 잽싼 걸음으로 창천내를 따라 오른 뒤에 모신이는 지게 짊어진 자와 천천히 걸

었다.

"중길이가 잡히면 물건은 어찌하시려우?"

"계에서 독촉이 오기 전에는 내보내지 말아야지. 물건보다는 그 자식이 입을 벌려 우리에

게서 냄새가 풍기게 될까 걱정이다."

중길이는 청파역을 지나, 죽물을 다루는 공장이질을 하여 먹고 사는 예전 관노 시절의 동

무네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중길은 그를 친형과 같이 여기며 자주 왕래하였는데, 그는 진작

부터 외거하여 자식을 여섯이나 두고 있었다. 그의 집은 배다리 건너서 개천가에 있었다.

길은 청파에 볼 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그 집에 들러 점심도 먹고 가고 물건을 맡겨두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계원은 아니었으되, 중길이가 살주계의 좌장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성내에서 털었던 재물을 이틀 동안이나 숨겨두었던 것도 바로 그 집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서강으로 장물을 운반했던 것이었다. 중길이는 배다리를 건넜는데 청파역 삼거리의

행인들 틈에 기찰포교가 서서 노리고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또한 공장이의 집 부근에도

포교와 포졸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중길이는 저자에서 산 호박엿을 들고 공장이네 집의 대

나무로 엮은 문을 밀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성님 기시우?"

따로 지은 헛간에서 칼질을 하고 있던 공장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며칠 걸릴 줄 알았더니 벌써 오네."

"별일 없지요?"

공장이는 아예 대나무와 도련칼을 내려놓고 거친 손을 비비면서 마당으로 나왔다. 반기는

아이들에게 중길이는 호박엿을 건네었고 그의 아내도 요기를 어찌했느냐고 물었다. 중길이

는 웃으며 대꾸하였다.

"서강에서 늦아침을 먹었습니다. 요즈음은 굴뚝에 연기 내기도 죄스러운 시절이라 세끼 다

찾아 먹기가 너무 뻔뻔해서요."

"하긴 풀떼죽도 과분하지. 동막에두 쌀이 귀해졌다면 알아볼 조가 아니냐. 그런데... 너 화

초방에 들러 오니?"

"아뇨, 서강서 곧장 이리루 오는 길이우."

공장이는 안색이 변하였다.

"그럼 모르고 있구나. 어제 사람이 찾아왔었는데, 저자에 포졸인 듯한 장정들이 깔려 있고

화초방에 수상한 자가 찾아와 너에 관하여 꼬치꼬치 캐묻고 갔다는구나."

"혐의진 꼬리두 달지 않았는데, 제깐 것들이 소경 만지기로 한번 더듬어보려는 게지요.

려 놓으시우."

이러한 수작이 한가하게 오고 갈 때, 곁에서 엿을 빨던 아이 하나가 제 아비에게 이렀다.

"아부지, 저 사람이 슬그머니 남의 집에 들어오네."

중길이가 아차 싶어서 뒤를 돌아보니 기골이 제법 단단해 뵈는 사내가 마당 가운데로 들어

와 있었다. 중길이는 마루에서 슬그머니 일어났고, 공장이가 대신 나섰다.

"여보, 댁은 누군데 남의 집엘 함부로 들어오는 게여?"

사내가 허리춤을 더듬더니 뭔가 한 뭉치 꺼냈는데 얼핏 보아 붉은색이었다. 중길이는 슬슬

옆으로 비켜섰고, 사내가 한 손을 치켜들며 주홍빛 오라를 휙 던졌다. 중길이는 기다리고 몸

을 사렸던 차라, 상반신을 뒤로 젖히면서 두 손을 내저어 올가미를 건어내어 움켜쥐었다.

리고는 사정없이 앞으로 당기니 사내는 앞으로 꼬꾸라질 듯하다가 줄을 놓아버렸다.

"우뚝 솟았다 !"

그의 외마디 소리에 밖에서 서성이던 사내 둘이서 달려들어오는데 중길이는 서슴없이 그들

에게로 마주 뛰어들었다.

"붙잡아라 !"

포교가 외쳤으나 달아날 줄 알았던 상대가 오히려 앞으로 내달아오니, 두 포졸은 얼결에

주춤하였고, 중길이는 그의 가슴과 배를 거세게 밀치고 삽짝문을 빠져나가 배다리쪽으로 뛰

었다. 뒤따라서 포교와 포졸들은

"저놈 잡아라..."

고함을 지르며 뒤쫓았지만 잡히면 죽는 판이라 온 힘을 다하여 뛰는 중길을 쫓을 수가 없

었다. 배다리 건너에서 공장이 집만 노리고 있던 포교가 대번에 알아채고 다리를 향하여 마

주 달려왔고, 중길이는 서슴지 않고 다리 아래로 뛰어내렸다. 미끄러운 돌을 디뎌 옆으로 넘

어지니 온통 물보라가 일어나고 중길이는 온몸이 젖은 채로 자갈밭까지 뛰어 건넜다. 포교

가 가리에서 나와 다시 개천가로 뛰어내려오는데 중길이가 자갈을 한줌 집어서 사정 보지

않고 그를 향하여 팔매질하였다.

포교는 감히 섣불리 따를 생각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중길이 다시 젖 빨던 기운까지

내어 청파저자의 뒷길로 뛰어들었다.

그의 심장은 터질 듯한데 이리저리 담장과 싸리울을 돌고 또 돌았다. 어느 모퉁이에서 마

주 뛰어오는 사내와 마주치자 중길이는 이젠 기운도 없고 돌아설 수도 없어서 그만 잡히는

구나 생각하고는 스스로 무릎을 접으며 주저앉았다.

"이 사람, 정신 차려! 우리가 한발 늦었길래 잡히는 줄 알았네."

다가온 자를 똑바로 보니 바로 서강 모신이네 곁꾼이었다. 말뚝벙거지가 중길이의 겨드랑

이에 팔을 끼고 일으켰다.

"딱부리네 창고루 뛰어."

포교들은 골목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워낙에 샛길이 많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

어 있어서 서너 명으로는 뒤져내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중길이는 곁꾼이 이끄는 대로

바로 저자로 나가는 길이 훤히 내다보이는 널찍한 초가집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집 뒤꼍에

흙벽에 초가를 올리고 육중한 나무문을 달아놓은 창고가 보였다. 중길이는 이젠 더이상 걸

을 수도 없이 지쳐서 입에는 단내가 풀풀 나고 눈에는 노란 안개가 끼어 있는 듯하였다.

신이가 기다리고 있다가 중길이를 같이 부축하여 창고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중길이만 남겨두고 나왔다. 이어서 벙거지와 함께 질러왔던 두건 쓴 사내가 들어왔다. 그도

헐떡거리고 있었다.

"무사히 흘렀지요?"

"그래, 밖은 어떠냐?"

"말씀 맙쇼. 박혀 있던 나그네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해동에 깍정이 속곳에서 서캐 몰려나

오듯 합디다. 글쎄 한 손하구두 엄지 검지 보탰지요."

"일곱 놈이 이 청파 바닥을 어찌 다 막는단 말이냐."

"나는 골목으루 덩달아 뛰었지요. 포졸들이 혀를 빼물고 나를 쫓아 오다가 내가 슬슬 걸어

가니까, 무조건 달려와 뒷덜미를 잡아채데요. 내가 죽는다구 엄슬을 떨었더니 왜 죄두 없이

뛰느냐구 그래요. 여보 죄가 없긴 당신네가 뭔지 알게 뭐요. 나는 저자의 왈짜패가 싸움판을

벌였는 줄 알구 무턱대구 멀리 피하려는 참이라구 그랬지요."

모신은 곁꾼의 말을 그럴 듯이 들어주며 껄껄 웃는다.

", 우리는 나그네 들이 보리방구로 모조리 새어버릴 쯤까지 가보잡기나 할까?"

그는 느긋하게 방에 들어서며 집주인 딱부리를 찾았다.

집주인 딱부리는 잠시 골목 쪽의 동정을 살피고 들어와서 푸념하였다.

"시방 집집마다 뒤지고 호통을 지르며 북새통이 되었는데, 우리 집에 숨긴 게 들통이 나면

일가 구몰이오."

그러나 모신이는 곁꾼들과 가보잡기를 하느라고 패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대꾸하였다.

"저 녀석이 말하면, 내가 계의 장물을 맡은 것이 밝혀지고 자네두 우리와 한통속이라는 게

다 드러나는 거야. 잠자코 시키는 대루 하게. 포교들이 찾아오면 노름방을 내준 것말 죄로

알고 싹싹 빌란 말야."

딱부리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포교들은 아직 옆집을 뒤지는 참인데 다른 포교 하

나가 문 앞을 막아서며 지키는 것이었다. 딱부리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모르는 체 물었

.

"여보슈, 댁이 누구길래 남의 집 문간을 막아서는 게야. 보아허니 멀쩡하여 동냥 다닐 사람

두 아닐 듯한데."

포교는 눈을 부라리더니 허리춤에서 두어 치 되어 보이는 나뭇조각을 쓱 내보였다가 얼른

집어넣었다. 딱부리가 모른 척하고는,

"이 사람이 비켜나라니까 공연히 배꼽을 까구 우물쭈물이야."

라고 까스르는데 실상 그게 통부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나중에 정신을 다른 데 쏠리

게 하느라고 너스레를 떠는 셈이었다. 포교가 하 기가 막힌지 너털대며 웃었다.

"헛허... 삽살이가 궐문에다 오줌싸는 격이로군. 이 자식아, 이게 바로 저승사자의 표신이다.

포청에 끌어다가 네 코앞에다 대줄 테니, 나중에 공부하는 셈치고 실컷 보아라."

딱부리는 무뚜름하여 서 있고 옆집에서 몰려나온 상한 복색의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왔

.

"아니... 왜 이러십니까?"

수염이 그럴 듯하고 키가 장대 같은 포교가 먼저 와서 지켜 섰던 포교를 돌아보고 나서 점

잖게 말하였다.

"청파에 중죄인이 났다. 이 근방에 숨은 것을 잡아내려는 참이니 주인은 놀라지 말라."

"아주 벽창호라고. 통부를 내보여도 무슨 물건인지 모르는데."

"우리는 기찰중이라 변복하였다. 잠시 집안을 살필 것이니 안내하라."

딱부리는 키 큰 포교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아이고, 제발 저희 집은 안됩니다. 한번만 살펴보아주십시오."

포교들의 눈이 번득였다. 일시에 좍 흩어져서 집뒤짐을 시작하는데, 갑자기 노름방의 문이

열리며 사내들 두엇이 버선발로 튀어나와 마당 가운데로 이리저리 흩어졌다.

"한 놈도 놓치지 말라."

포교와 포졸들은 달려가서 그들의 뒷덜미도 잡아채고 허리도 껴안았으며 딴죽도 걸었다.

어떤 성급한 포졸은 허리에서 육모방망이를 꺼내어 잡힌 사내의 등판을 함부로 두드리니,

그는 죽는다는 엄살을 떨었다. 방안을 기웃이 들여다본 포졸이 외쳤다.

"화초방입니다. 판돈이 쌓였는뎁쇼."

포교가 마당에 꿇린 자들에게 물었다.

"여기서 뭘 하는 게냐?"

방에서 끌려나온 모신이와 딱부리가 목청을 모아 빌었다.

"그저 한번만 굽어살피시오. 심심파적으로 푼돈 추렴을 하는 중입니다."

"모두 저희 집에 묵는 물주들이니 어찌 말리겠습니까?"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가 별것 아닌 투전군들이라 모두들 맥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포교

가 꾸짖었다.

"이놈들, 지금 온 나라가 흉황으로 술과 가무를 금하고 온 백성이 근신중인데, 백주에 일없

이 노름이나 벌이다니 모조리 태형감이다.

포졸들은 방과 창고며 뒷간을 대강 둘러보고 돌아와 아뢰었다.

"저놈들 외에는 아녀자뿐입니다."

"매점해둔 곡물은 없던가?"

"보리 몇섬이 있을 뿐입니다."

포교가 보아하니 흉년에 경기가 없어도 밥술이나 먹는 듯하였다. 모신이가 포교에게 굽신

거리며 다가들어 속삭였다.

"어쩌다 예전 손버릇을 잊지 못하여 저지른 장난이니, 판돈 가져가시고 태형만은..."

포교는 못 들은 체하고는 동료 포교에게 말하였다.

"여기서 우물대는 사이에 달아날지두 모르니 자네는 먼저 아이들 데리구 나가서 집뒤짐을

계속하게. 나는 이놈들을 단단히 혼내고 갈 테니까."

동료 포교가 초록은 동색이라 금방 알아채고 포졸들을 휘동하여 나가면서 손발을 맞추었

.

"그놈들 포청에 끌어다 한밥을 두어 달 먹이고, 손모가지를 뎅겅 잘라야 되겠는걸."

키 큰 포교 혼자 남으니, 딱부리가 그러모아온 판돈을 방석째로 내밀었다.

"제발 덕분에..."

"이놈들, 이것은 어디까지나 물증니니 꿰미에 꿰어라."

곁꾼들이 주섬주섬 그러모아 노끈에 꿰어 내밀었고, 포교는 그것을 들어 눈짐작으로 얼마

나 되는가를 살피고 창옷 안쪽에 묶어 넣었다.

"오늘은 바빠서 그냥 가지만, 다음에 찾아와 모두 잡아갈 터이다."

"어이구, 여부가 있겠습니까?"

모두들 두 손을 들어 오뉴월 쉬파리 발장난하듯 싹싹 빌었다. 포교가 휑하니 나가버리자

모신이는 웃는 낯을 싹 없애고 분주해졌다.

"이젠 되었다. 범도 버린 고기는 다시 안 먹는 법이다. , 가자."

모두들 흩어져 그럴 듯한 짐이며 부담을 메고 지고 나서는데, 젓을 담은 대독을 얹은 지게

도 짊어지고 나왔다. 대독에 새우젓 담은 자배기를 끼워놓은 것이니, 겉으로 보기에는 새우

젓이 가득 들었으나 속은 텅 빈 것이다. 그 속에 중길이가 쭈그리고 앉았으니, 설마 새우젓

에 인젓이 담겼는 줄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모신과 그의 곁꾼들은 몇발짝씩 떨어져서 앞서

거니 뒤서거니 골목 밖으로 나섰다.

마침 저자의 임집은 모두 뒤지고 가게마다 눈에 불을 켜고 살피던 포교들과 마주쳤다.

독을 걸머진 자는 일부러 큰소리로 외치며 가는데,

"자아, 추젓이오. 싱싱한 백하젓 사려!"

꼭 이렇게 하니, 넘겨다보아야 독 머리로 넘칠 듯 가득 찬 게 허옇고 굵은 백하젓이 분명

하였다. 포교는 공연히 그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모신이는 연신 웃는 낯으로 굽신겨렸다.

"오전 내내 허탕을 쳤으니 이젠 슬슬 먹구 살아얍지요."

아무도 그들을 다시 보자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이런 모양으로 청파역을 빠져나와 만리창

을 지났다. 모신이가 독 옆으로 붙어서서 걸으며 주의를 주었다.

"서강에 이를 때까지 꼼짝 말게."

창천내가 보이자 모신은 빙긋 웃었다. 온갖 장물을 다 빼돌린 그의 솜씨였으니, 사람 하나

흘려내오는 것은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남부 살주계의 북성이는 죽었고, 살주계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중길이는 가까스로 포교의

코앞에서 빠져나왔으나 북성이와 동무였던 교리네 수노 되는 억기라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

고 있었다.

그는 남별대 패거리와 남아 있었는데, 바침술집 주모가 그에게도 연락을 하였어야 하지만

북성이의 아우는 포교의 기찰을 피하여 서강으로만 가는 것에 급급하여 미처 전하지 못하였

.

억기는 오랜만에 양식을 구해가지고 당마을로 돌아오고 있었다. 억기는 초동서 남의 집살

이로 잔뼈가 굵었는데, 늦게 돌인 정에 푹 빠져 있었다. 아무리 삼패 출신의 계집이었으나,

그를 하늘 같은 가장으로 알았고 더욱이 이제 백일이 갓 넘은 아들까지 두었으니 열흘만 못

보아도 안달이었던 것이다.

당마을 살림집에는 이미 며칠 전부터 최형기의 함정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당마을 동구로 들어가는데 어떤 사내가 길갓집 툇마루에 앉아 장기를 두다

가 벌떡 일어나는 꼴을 억기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느 무심코 그 앞을 지나쳤고 장기 두

던 사내는 바쁜 걸음으로 그를 지나쳐서 동네로 들어갔다. 그는 억기를 따돌리고 먼저 집안

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리기에 지쳐 있던 동료들에게 알렸다.

"집주인이 옵니다."

마루와 방에 질펀히 엎드리고 드러눕고 했던 포교와 포졸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

각자 맡은 자리로 되돌아갔다. 억기는 들어서며 외쳤다.

"여보게, 네 왔네!"

그러나 집안이 괴괴하였다. 그는 마루 위로 오르면서 무심코 중얼거렸다.

"어디 마실 갔나?"

하는데 어쩐지 온몸이 썰렁하였다.

억기는 그제서야 비로소 마루 위에 찍힌 신발 자국을 발견하였다. 아뿔사 누가 왔구나,

기는 저도 모르게 문을 향하여 돌아섰고 마당 가운데 두 사내가 막아서는 것을 보았다.

교가 건넌방 문을 열고 나섰다.

"기다린 지 오래다. 너희 계원은 모두 잡혔으니 순순히 포박을 받아라."

억기는 순간적으로 울타리의 허술한 곳을 살폈다. 발끝은 달싹대고 있었다.

"달아나도 소용없다. 네 계집과 새끼가 대신 고초를 당할 것이다."

억기는 순간적으로 울타리의 허술한 곳을 살폈다. 발끝은 달싹대고 있었다.

"달아나도 소용없다. 네 계집과 새끼가 대신 고초를 당할 것이다."

억기는 그 말을 듣자 다리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양식 자루를 떨어뜨리고 마루

아래로 천천히 주저앉았다. 포교의 제재를 벗어난 억기의 처가 뒤늦게 악다구니를 썼다.

기는 처의 부르짖음을 들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의 팔에 포승이 지워졌고 느닷없는

고함 소리에 갓난애가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하였다. 억기는 스스로 알았다. 그는 이미 끝

난 것이다. 교리 댁의 수노인 그로서는 살주계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기왕에 죽는 몸이다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면 죄를 묻지 않을뿐더러 공을 참작하여 상도 내릴 것이

."

포교가 마루에 앉아 그의 뒤통수에 대고 은근히 말하였다. 억기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마치

제 심장을 마구 후벼파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희 일당들이 있는 곳을 대면,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될 것이다."

억기는 포교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묵묵히 꿇어앉아 있었다. 포교가 눈짓을 보내자 포졸

들은 마루 위로 성큼성큼 올락 여자와 갓난애를 각각 끌고 안고 하여 나왔다. 아기는 더욱

불에 덴 듯 울었고 여자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로 외쳤다.

"여보, 기왕에 잡혔으니 당신 혼자 억울하게 죽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요."

"시끄럽다, 어서 가자."

포졸이 여자의 등을 밀었다. 억기는 무엇보다도 아기의 울음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애새끼를 에미한테 돌려주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버럭 소리를 질렀고, 포교는 손을 들어 포졸들을 잠깐 세워둔 다음에

억기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처자식 생각을 해서라도 어서 말해보라. 너희들 몇명이 작당을 한다구 세상이 일시에 뒤

바뀔 것 같더냐?"

억기는 고개를 떨군 채 머리를 거칠게 흔들고는 긴 숨을 토해내었다.

"저것들에게 손을 대지 마우. 내가 다 얘기하리다."

"좋다, 포청에 가서 딴 수작 하지 말고 어서 직고하여라."

"오늘밤 이경에 남별대에서 모임이 있소이다."

포교는 일어났다.

"포청에 가서 종사께 그대로 아뢰어라. 오늘 네 동당이 잡혀 들어오면 너는 곧 풀려나갈

것이다."

억기는 일단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울음을 터뜨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먼저 배신하

기 전에는 뜻을 같이했던 동료들과 별 차이가 없지만, 한번 등을 돌리버리고 나면 스스로

동료들에게서 필사적으로 멀어지려고 하는 게 사람의 마음인지라, 오히려 전혀 상관없던 자

들보다도 더욱 동료를 해치고자 하는 뜻이 강하게 마련이었다. 억기는 그 처자식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자 순순히 끌려나가면서 포교에게 말하였다.

"청파 난전에 가면 중길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가 우리 계의 우두머리요."

포교는 만족한 듯이 억기의 등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알구 있다. 네가 우릴를 도와주기만 한다면 대장께서도 네게 상급뿐만 아니라 원하는 직

임까지 내리실 것이다."

그들은 억기를 데리고 좌포청으로 돌아갔다. 최형기는 벌써 중길이를 놓친 일을 알고 있었

, 아침에 목내선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이미 북성이가 국중문에 타살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들은 북성이의 참혹한 시신만을 수습하여 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당상관이었던 목내선에

게 사노 때려 죽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형기는 어제 빈손으로 목대감의

집을 나서면서, 미리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최형기는 오후에 중길이까지 놓쳤다는 보

고를 듣고는 완전히 낙망하여 안절부절 못하던 중이었다. 억기가 함정에 제대로 걸려들자

최형기는 그가 중병을 앓던 집에 들어온 명약만큼이나 고맙고 반가웠다. 그들은 부장이며

포교들이 둘러보는 가운데 억기를 심문하여 살주계의 내막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결박을 풀어주고, 술과 고기로 잘 대접하라. 저녁에는 시저에 나가 있는 아이들을 모두 모

아 남별대 부근에 잠복하여 진을 친다."

최형기는 오랜만에 환도를 찾아내어 도포 자락 안에 찼다. 최형기는 부장 두 사람과 함께

활을 메고 목멱산을 먼저 올랐다. 그들은 저물때까지 청룡정에 가서 한량들 틈에 끼여 있을

작정이었다. 청룡정에서 남별대까지는 골짜기 하나 사이였으니, 산등성이를 타고 넘으면 곧

남별대의 뒤로 돌아 들어갈 수가 있었다. 포교가 넷이고 포졸은 이십여 명이 풀려나오게 되

어 있었다. 포교 한 사람에 포졸 넷을 한 오로 하여, 그들은 제각기 흩어져서 어떤 오는 부

상 차림으로 지게에 물건을 짊어지고 생민동과 목동을 오르내렸다. 또 다른 오는 초군 차림

으로 남별대 좌측의 다른 골짜기에 올라 들어박혔다. 그리고 우측에는 산길 초입에 외딴 초

가 한 채가 있었는데, 집주인에게 사정을 이르고 곧 상갓집인 듯 꾸며두었다. 바깥에다 누가

보기에도 알아 보기 쉽도록 마늘등을 달아두고, 포교와 포졸들은 안에서 법석대며 술을 마

셨다. 남별대를 가운데 두고 사방의 퇴로를 끊어두었으니, 지네 잡는 항아리와도 같았다.

제부터 살주계의 모임에 참가하려는 자들이 남별대에 모여들기만 하면 뚜껑을 슬쩍 막아 들

어올릴 판이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먼저 정탐하는 자가 나타나 남별대의 주위를 이리저리

살펴두게 마련이었다. 그는 남별대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사정에는 언제나처럼 한

량 몇명이 활을 쏘고 있었으며, 산에서는 초군들의 타령소리가 들려왔다. 초상집은 아직 그

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상가란 언제 어느 곳에나 흔히 있었던 때문이었다.

초경 무렵이 되어, 남부 살주계원으로 상전의 집에서 가족솨 함께 살고 있는 자들이 하나

둘씩 산을 호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바침술집의 주모에게서 아무런 경도 전해 듣지 못하

였고 전혀 마음을 놓고 있었다. 먼저 와 있던 계원이 인기척을 듣고 앞소리를 보냈다.

"장끼..."

"까투리... 거 누군가?"

", 날쎄."

명례방에서 상노질하는 총각이 제일 먼저 올라왔고, 남별대에 먼저 올라와 동정을 살피던

자는 난동에 사는 중년의 비부였다.

"아직 아무도 안 왔수?"

"북두칠성을 보니 아직 시간이 이르군. 슬슬 모여들겠지."

"올라오다 보니까, 웬 초상이 났습디다. 시끌법석하던데."

", 나두 봤네."

"하여튼 조심해야겠습디다. 지난번 일로 포교들의 기찰이 매서워졌다던데, 장안의 인심이

뒤숭숭하거든요."

"자네 오늘 환도 가지구 나왔지?"

"그럼요, 오늘은 회현방의 부잣십을 들이친다구 약속했잖어요."

이윽고 몇사람이 대 아래로 희끗희끗 나타났다. 그들은 다시 군호의 앞뒤를 맞추어보고 나

, 늘 모이던 폐사로 올라갔다. 누군가 가져온 암등에 불을 켰다. 이윽고 이경이 되었는지

종루에서 인정 치뒤로 여럿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런데 그들의 앞에서 수노 노릇 하는 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올라왔다.

"억기 어디 있나, 억기 안 왔어?"

"아직 안 왔는데, 곧 오겠지. 자넨 왜 그렇게 헐떡거려? 오늘 하루 참지 못하구 마누라 달

래다가 늦은 모양이군."

그는 기가 막힌지 좌중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였다.

"이 사람들아, 농담할 때가 아니야. 북성이가 죽었어."

"북성이가 죽다니 그럴 리가 있나."

비부쟁이가 되뇌었다.

"분명하네. 그의 시체가 상전의 집 앞에 있는 버드나무에 매달려 있는 걸 본 사람이 여럿

이야."

나중에 헐레벌떡 올라와 아무 얘기도 없던 관노도 먼저 올라와서 얘기하던 자에 맞장구치

면서 말하였다.

"나두 들었지. 나는 그게 바루 북성이인 줄은 몰랐어. 어느 모진 상전이 사노를 때려 죽여

나무에 매달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북성이 다음에는 비부 다니는 자와 초동 수노 억기가 남부 살주계를 끌고 가는 부행수 격

이라 모두들 걱정스런 얼굴로 비부의 말을 기다렸다.

"이걸 어쨌으면 좋겠나. 목대감 집으로 누군가를 보내어 알아보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비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렇게 한가한 때가 아닐세, 그자가 당상관이나 지냈는데, 남의 이목도 있지. 아무

리 천한 몸이라고 함부로 죽여서 길가에 내보일 수는 없는게야. 북성이가 죽은 것은... 계 때

문일 걸세."

"중길이는 원래 청파에 나가 있지만, 억기가 모임을 알고도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군."

다른 종들이 제각기 의견을 말하였다.

"오늘 거사는 뒤로 미루기로 해야겠네. 아무래도 낌새가 심상찮아."

"모두 흩어지세. 꾸물거리다가 먼저 순라꾼들에게 발견되면 이번에는 우리가 당하는 게야."

비부가 다시 말하였다.

"만약 중길이와 억기가 포청에 잡혀서 오지 못하는 것이라면, 우리 모임도 이밈 알려졌거

나 신원도 밝혀졌겠지."

"그들이 혀를 깨물고 죽을지언정, 그럴 리가 있겠나. 시간을 끌고 있을지두 모르지."

"집에는 다 갔군. 차라리 여기서 하룻밤을 새우고, 은신처라는 곳으로 찾아가지."

비부가 말하였다.

"은신처는 우리 좌장인 중길이밖에 모르네. 지난번에 아예 따라 나서는 걸 공연히 식구들

때문에 꾸물거렸어."

"오늘 누구 쌍이문방 바침술집에 들러본 사람 없나?"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졌고, 성급한 자는 벌써 자리를 뜨려고 사당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비부가 명례방 상노의 손목을 쥐며 속삭였다.

"너는 우리가 여기서 나간 뒤에 사당의 마루 밑에 있거라. 중흥동에 먼저 간 계원들이 있

을 것이다. 어서 은신처를 옮기라고 전하여라."

비부는 스스로 먼저 폐사를 나서며서 말하였다.

"다음 보름날까지 서로 근신하고 있게. 내가 무슨 소문이 있으면 연락하러 사람을 보낼 테

니까."

그들은 모두들 남별대를 내려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등뒤에서 낙엽 밟는 듯한 부석거

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나무 사이로 희끗희끗한 사람의 자취가 보였다.

"거 누구요?"

앞선 자가 물으니 의외로 군호의 앞소리를 보내오는 것이었다.

"장끼."

"까투리... 우리 계원이로군. 억기인가, 중길이 아니냐?"

그쪽으로 다가서던 자는 나직한 쇳소리를 들었다. 그쪽에서 먼저 칼을 뽑았던 것이다. 그들

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계원들도 대부분이 거사 준비로 창포검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누군가 먼저 칼을 뽑자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숲속에서 나온 자들은 모두 세 사람이었는

, 갓을 벗어 등뒤로 늘어뜨렸고 도포 자락을 묶었거나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비부쟁이가 칼을 그들에게 겨누며 물었으나 그들은 대답대신에 남별대의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천예들은 둥글게 벌려 서면서 그들을 둘러쌌다.

"세 놈뿐이다. 단칼에 베어버리자."

"죽기 전에 뭣하는 놈들인가 알아보자."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데,

"너희 상전의 부탁을 받고 천벌을 내리러 온 사람들이다."

한량 차림의 사내들 가운데 하나가 침착하게 대꾸하였다. 계원들은 모두들 그들이 대수럽

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제깟 것들이 아무리 환도 빼어들고 설쳐보았자 십여 명이나 되는

많은 숫자를 어찌 당해낼 것이며, 모임이 있을 적마다 중길이와 더불어 틈틈이 익혀온 계원

들의 솜씨는 훈련원 군사 못지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비부살이하는 계원의 생각은 달랐다.

저들이 자신이 없는 바에야 태연하게 무리들 틈으로 걸아나올 리가 없었고, 그들에게 싸움

을 걸어오는 자라면 인정이 친 뒤이므로 예사 무뢰한들이 아닐 것이었다.

그들은 포교가 틀림없었고, 이미 부근에 물샐틈없는 포진이 쳐져 있을 성싶었다.

"쳐라~"

"베어라 !"

제각기 외치며 계원 서넛이 칼을 휘두르며 들어가자, 둘러섰던 자들이 일시에 덤벼들었다.

최형기는 당대에 그의 칼솜씨를 당할 자가 없다는 무장이었다. 일찍이 해서에 나갔던 검객

김식이도 그로부터 조련을 받지 않았던가. 최형기는 그에게로 달려드는 자의 칼을 받지도

않고 슬쩍 비켜나면서 가볍게 내리그었다. 칼날을 어깻죽지에 받은 자가 외마디 비명을 내

지르며 달려들던 자세로 최형기의 뒷전에 꼬라박혔다. 최형기는 상체를 굽히고 몇걸음 걸어

나가면서 좌우로 들어오는 자들의 상체나 하체를 베었다. 칼날 부딪는 소리 한번 없이 세

사람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최형기다, 달아나라!"

비부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그들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 칼솜씨였다. 아직도 나머지 두

사람은 칼을 늘어뜨린 채 치켜들지도 않았던 것이다. 비부는 문득 그 사내가 종사관 최형기

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소리를 지르자마자 부장포교 두 사람이 좌우에서 달려들었고,

을 돌리고 뛰어나가려는 그의 측면을 칼날 둘이 동시에 베었다. 그는 허공을 그러쥐며 넘어

졌다. 살주계원들은 어둠속으로 흩어져 뛰었고, 그들은 더이상 추적하지 않았다. 부장 하나

가 남별대 끝의 벼랑으로 뛰어나가 아래를 향하여 외쳤다.

"참새, 몰아라."

제일 먼저 우측 초상집에서 등불이 비춰지며 쇠도리깨며 환도를 든기찰군이 쏟아져 가로막

았고, 이어서 좌측에서 골짜기 입구를 차단했다. 그리고 생민동 어귀에서는 개천을 따라 일

단의 포졸들이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계원들은 갈팡질팡하였다. 제자리에 주저앉는 자도 있

었고 다시 남별대로 뛰어올라오는 자들도 있었다.

최형기는 부장들을 데리고 남별대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계원 두 사람은 그들과 마주치자

아예 미리부터 칼을 내버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장이 그들에게 칼을 거두며 말하였

.

"앞서서 걸어라."

사방에서 왁자거리는 고함소리나 가끔씩 칼날이 부딪는 쇳소리가 들리더니 어느덧 잠잠해

진 것을 보니 결판이 나버린 모양이었다. 초가 앞으로 모두 모아놓고 땅바닥에 꿇어앉힌 다

음 결박을 하는데, 가볍게 다쳤거나 성한 자가 모두 일곱이었다.

"이밖에 달아난 놈은 없는가?"

"부상당한 놈들까지 모두 끌어올까요?"

"죽은 것들도 수습하여 포청으로 끌고 돌아간다."

최형기는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창포검을 모두 수습하도록 하였다. 부장포교가 말하였다.

"종사, 이만하면 두숭숭하던 살주계 건은 마무리지은 셈입니다."

"아니... 이제부터가 시작일세. 저것들의 입에서 어떤 말이 쏟아져 나올지 모르지만, 도성

밖에는 이보다 더욱 큰 작당이 있을 게야."

최형기는 갓을 고쳐 쓰고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고쳤다.

"대장께 들러 아뢰고 내 곧 포청으로 나갈 터이니 국문 준비를 갖추어두게."

"오늘밤 국문을 하신다구요?"

"한시가 급하네. 우리가 저들의 잔당들보다 한발 앞서 가야지."

이미 삼경이 지나서 성내에는 개 짖는 소리와 순라꾼들의 딱딱이 두드리는 소리가 간혹 들

릴 뿐이었다. 남부 살주계의 성원 가운데 절반 이상이 결딴이 났고, 동부와 중부에 몇명의

계원이 있었으나 그들은 일찍이 도성을 떠났으므로, 실상 성내에는 줄이 닿을 만한 계원들

이 남아 있지 않은 셈이었다.

최형기가 거느린 포교 포졸들이 남별대 부근에서 모두 떠나버리자, 바람소리와 달빛만이

뿌옇게 남아 있었다.

남별대의 폐사 마루 밑에는 용케 잡히지 않았던 계원 하나가 숨어있었다. 그는 비부의 말

에 따라 뒤로 처졌던 명례방의 상노 총각이었다. 낯선 사내들이 칼을 뽑아들고 숲에서 나오

자마자 그는 뒤돌아 사랑으로 가서 널판지를 들어내고 어둠속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던 것이

. 잠시 어지러운 칼싸움 소리 뒤에 그들이 모두 잡혀버린 것을 알고 그는 더욱 깊숙이 숨

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포졸들이 모두 비탈 아래로 몰려내려간 뒤에 그는 마루 위로 고개를

내밀고 살피면서 그들이 완전히 멀어져갈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일렁이는 발등거리 불빛

들과 함께 그들이 생민동 쪽으로 사라지자, 총각은 사당 마루 밑에서 기어나왔다. 그는 비부

의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중흥동에 가서 은신처를 옮기라고 전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동안 갈 바를 모르고 폐사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대로 명례방 상전의 집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상노질이나 하다 보면 나이가

들고 눈치 빠르고 부지런하게 상전을 섬기는 중에 난전에 장사라도 내보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 그가 부러워하는 대갓집의 대솔하인이 되어 외거하면서 장가도 들게 될 것이었다.

총각은 슬며시 일어났다. 천예는 내 대에서 끝나야 한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더럽게 살아남

아 자기와 같은 종놈의 팔자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짓은 않으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대고 있었다. 좌포청의 옥은 포청 뒤뜰 안에 있었는데 일단 결안

이 난 죄수들은 서린방 전옥서로 옮겨 가고, 조사받을 일이 남은 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수 개천은 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구석 자리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서 처박혀 있었다. 옆칸에

는 남별대에서 잡혔던 살주계의 계원들이 있어서 그가 검계의 혈당으로 오인되어 들어왔다

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개천은 그들과 이웃하여 지나는 사이에 자기 행동이 얼마나 어

리석었던가를 뉘우치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 살아서 나가게 된다면 그는 어떻게 하든지 검

계와 연이 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갈 결심이었다. 저녁참이 지나고 죄인의 가족들이나 장

사꾼들이 모두 후문으로 쫒겨 나간 뒤에 등불이 개천이 갇혀 있는 옥 앞으로 다가왔다.

"감상칼자 개천이 어디 있느냐?"

포졸이 등불을 쳐들고 물었다. 개천은 짚더미 아래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 저올시다."

포졸은 자물통을 요란하게 따고 칸살문을 열어주었다.

"나오너라, 방송이다."

"예에?"

", 그 망할 자식... 어서 나오지 못하구 뭘 꾸물거려. 날씨두 추운데..."

개천은 옥에서 엉거주춤 나섰다. 갑자기 찬바람이 몰아치는 뜨락으로 나오자 그는 어깨를

웅숭그리고 두 손을 소매 속에 파묻었다.

"앞서 걸어라. 너는 신수가 좋은 놈이다. 비록 양반을 욕보이기는 하였으나 개과천선하여

충심으로 윗사람을 받들고 나라의 은혜를 뼛속 깊이 간직하여 양민으로 살아가라는 위의 분

부시다. 알아듣겠느냐?"

개천은 포청의 후문에 당도하여 귓전으로 포졸의 얘기를 흘리면서 서 있었다. 포졸이 쪽

문을 열어주며 바깥을 손짓해 보였다.

"어디로든 가거라."

개천이 나오자 문은 슬그머니 닫혔다. 이제는 정말 아무데로나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는 파자교 쪽으로 걸어 내려가며 궁리하였다. 어디로 찾아간단 말인가. 혜정교의 숙수도가라

면 가장 만만하기는 하였으나, 그 주인 녀석을 생각하니 쫓아가 죽일지언정 하룻밤 유숙을

청할 마음이 없었다. 또한 교하 숯내의 주막에도 다시 찾아가기는 그른 일이었다. 그렇다면

갈 곳은 돈의문 밖 홍제원뿐이었다. 홍제원에는 색주가가 모여 있었는데 개천은 주모 몇사

람과 잘 아는 사이였다. 거기 가서 어디 부잣집 행랑살이로 들어갈 때까지만이라도 잔시중

을 들며 밥을 얻어먹을 작정이었다. 길가에는 행인들이 별로 없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뒤

흔들어대는 소리가 괴이한 밤귀신의 울음과도 같았다. 그는 종루를 따라서 곧장 서쪽을 바

라보고 걸었다.

개천이 전혀 주의를 하지 않았지마는 그가 파자교를 돌아 나올 때부터 누군가가 뒤를 따

르고 있었다. 중치막에 갓 쓰고 건장한 사내였다. 그는 부장의 지시를 받고 나온 포교였다.

그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개천을 죽이고 돌아오라는 명을 받고 있었다. 개천이

어디인가 들어가 유숙하게 될 것이니 쫓아들어가서 물고를 내버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무엇

때문에 개천이 죽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여러 사람 앞에서 광설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는 중치막 안의 허리춤에 단검을 지르고 있었다. 개천은 경희궁 담을 돌아 돈의문으로 나아

갔다. 새삼스럽게 지난 가을의 소공주동 생각이 났다. 자줓빛 귀주머니에 들어있던 한쌍의

은가락지, 그리고 별당의 달빛, 이 다음에 죽거든 양반으로 환생하라던 처자의 슬프고 다정

한 목소리, 그런 모든 일들이 겨울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되돌아보면 자신의 벌레만도

못한 육신과 목숨은 참으로 모질기도 하였다. 이렇게 죽지도 않고 살아서 갖은 괄시와 오욕

을 당하며 몸을 누일 지붕 밑과 입으로 넣을 밥을 찾아서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게 아닌가.

개천은 자기가 불쌍해서 코허리가 매캐하더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모화관이며 기둥 둘짜리 영은문도 지나서 홍제원에 당도하였는데, 색주가도 시절을 못 만

나 썰렁하였다. 집집마다 등불빛도 보였고 용수를 씌운 장목도 서 있건만 희게 분 바른 삼

패들은 보이지 않았다. 간혹 몇몇이 내다보기는 하였으나 행인들이 없어서 그런지 잡가도

새어 나오지 않았고 불러대는 종지거리도 들리지 않았다. 즐비하던 떡집들도 장사를 폐하였

고 그 대신에 죽을 팔고 있었다. 개천은 한참이나 이 집인가 저 집인가 하여 헤매고 다니다

가 우물과 나무를 확인하고는 대문을 두드렸다. 들창문이 밖으로 열리면서 작부가 내다보더

니 꼴같지 않은 모양이었다.

"누굴 찾아요?"

"이 집 주모를 찾소."

여자는 어디로 보나 비렁뱅이가 분명한 개천이 주모를 찾는데 어이가 없는지 코똥을 뀌었

.

", 술장사를 거두었더니 이제는 깍정이가 촌수 재러 오나베."

"여기가 우리 아주머니 댁이우. 개천이가 왔다구 전해주오."

안에서 들었던지 다른 중년의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 네가 누구냐?"

"내요, 개천이우."

"어서 들어오너라. 이게 얼마 만이야."

주모가 사라지더니 문간으로 뛰어나왔다. 개천은 한숨을 내리쉬었다.

"아니, 교하에 나가 돈번다더니 이게 무슨 꼴이냐."

"그렇게 되었수."

안으로 들어가니 건넌방에는 한 패거리가 들었는지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주모는 개천을 문간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장사는 그만두었나요?"

"에그, 말두 마라. 때가 이러니 무슨 손님이 있겠냐. 술도 진작 말랐지. 나라에서 가무를

금하구 있지 않니. 하는 수 없이 이 봉노를 트고 보행으로 한양 드나드는 이들이나 재우는

데 곡식도 받고 무명도 받아 밥을 해주고 얻어먹고 산단다."

개천은 오랜만에 따뜻한 구들목에 궁둥이를 붙이니 그것만이라도 우선 원이 없는 듯싶었

.

"나 여기 좀 있게 해주오."

"교하서 무슨 일이 있었니. 이 옷 꼴이며 머리 꼴은 그게 뭐냐?"

"말두 마우. 내가 정선방 포청서 나오는 길이오."

주모는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무슨 죄가 있다구 포청엘 갔었어."

"얘기하자면 길지요."

개천은 교하서 선달 댁 혼인 잔치에 숙수로 불려 갔던 일로부터 시작하여 행랑에서 천것

들끼리 나누던 농담이며를 자세히 얘기하였다. 얘기하는 중에 밖에 또 손님이 왔는지 길게

이리 오너라, 하며 찾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너는 고지식한 것이 탈이다. 생기기는 호남자로 영리하게 생겼으면서 세상사에

그렇게도 철이 없는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입조심을 해야지. 배알대로 뇌까리다가는 큰코를

다치게 마련인 게야." 하면서 주모는 일어섰다.

"가만... 손님이 드는 모양인데 내가 잠간 나가봐야지. 너 밥 안 먹었지? 곧 상 들여보낼

테니 염려 마라."

"아주머니, 고맙수. 난 이 꼴이라 혹시 문전에서 쫓겨날 줄 알았지요."

개천이 눈시울이 알알하여 중얼거리니 주모는 혀를 찼다.

"이것아, 고생할 적 옹솥은 버리는 게 아니란다. 하물며 네가 아잇적부터 나하구 객줏집살

이를 하였는데, 내가 금수가 아닌 바에야 그럴 리가 있겠니."

주모는 잔뜩 움츠러든 개천의 등을 토닥여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주무십니까?"

"아니... 요기나 하구 가지."

"성문이 진작에 닫혔을 겝니다."

"무명 끄틀을 내줄 테니 밥이나 먹게 해주게."

길손과 주모가 말을 나누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바로 옆방에 드는 모양이었다. 개천은

몸이 무겁고 사지가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뜨거운 방에 등을 대고 지지며 끙끙 앓았다.

"어서 밥 먹어라."

주모가 옆방에 개다리소반을 들여놓고 나서 개천의 방에도 상을 들이밀었다.

"내 더운 물 들여줄 테니 그 터진 상처에 찜질을 해야겠다."

개천은 그저 고맙기만 하여 대답도 못하고 상을 끌어당겼다. 뜨거운 국밥인데 비록 조가

많기는 하여도 구수한 된장에 그득히 말아놓은 것이, 옥에서 포졸들이 먹던 한밥을 조금씩

얻어먹고 연명했던 참이라, 바로 신선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국밥을 퍼먹고

있었다. 그때에 장지문이 스르르 열렸는데도 개천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찬바람 때문에 그

는 숟가락질을 멈추고 올려다보았고, 낯선 사내가 그를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슈?"

개천은 어쩐지 그자의 시선에서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사내

는 개천이 더욱 뒤로 물러앉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고 한 발을 툇마루 위에 덥석 딛고는 개

천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이놈, 누가 너를 방송했더냐?"

개천은 사정없이 당기는 사내의 힘에 못 이겨 툇마루 아래로 내동댕이쳐졌다.

"댁이 누구요. 뭣 댐에 이러는 게요. 나는 포청에서 허락받고 풀려나온 사람이우."

개천이 부르짖었고 건넌방의 손님들은 방문을 열고 모두들 내다보았으며, 주모와 여자들

은 차마 가까이는 다가오지 못하고 부엌에서 개천을 돕는 말만 던질 뿐이었다.

"포청에서 형을 다 받구 나온 사람을 왜 못살게 하나요."

사내가 한 손으로 개천의 멱살을 잡고는 다른 손으로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들었다.

"나는 모르겠으니 양반 나으리들게 물어봐라. 아무리 포청에서 풀려나왔다 하나, 성내의

양반들은 이런 놈이 살아 댕기는 꼴을 못 보시겠단다."

사내는 그대로 개천의 가슴팍을 찌르고는, 비명을 지른 주모를 밀치고 유유히 대문을 나

섰다. 개천은 그 자리에서 절명하였고, 방안에는 그가 퍼먹던 국밥이 아직도 따끈하였다.

 

6

 

석씨가 아이들만 남겨놓고 나무를 하려고 집을 나서는 참인데 냇가 옆길을 따라서 갓 쓴

사람과 털벙거지에 철릭을 입은 장교가 마주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석씨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갓 쓴 사람은 틀림없이 석씨가 원정을 내러 찾아갔던 고을 형

방이었다.

"게 멈추시오."

석씨가 모른 척하며 지게를 추스르고 돌아서는 참에 형방이 소리를 질렀다. 석씨는 저들

이 산지니가 집에 왔었다는 소리를 들었거나 누군가가 나루터에서 산지니를 보고 귀띔을 해

주었을 게라고 생각하였다.

석씨가 기다리니 먼저 다가온 장교가 물었다.

"이 여인이오?"

"집에 산지니가 왔었나..."

형방은 장교를 힐끗 돌아보더니 석씨에게 묻고 나서 뚫어질 듯이 석씨의 표정을 살폈다.

"잠깐 안으로 들어가세."

형방이 먼저 삽짝 안으로 들어가며 석씨에게 손짓했다. 석씨는 굳은 얼굴로 대꾸를 핞고

뒤를 따랐다. 장교가 먼저 들어가더니 안방의 다락이며 장롱들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도대체 뭣 땜에들 이러십니까?"

"어서 대답하오. 석산진이 이 집에 왔던 사실이 있느냐구?"

석씨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대꾸하였다.

"글쎄요... 누가 그러던가요?"

형방은 답답했던지 스스로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허허, 시방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콱 막혔을 수가 있나. 석산진은 잡혔

."

석씨는 다시 한번 가슴이 내려앉았다.

"지금 포청에 잡혀 있단 말일세. 그것두 지난번 한판관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라, 역률죄를

범한 흉당에 들었단 말여. 공모자로 장하에 죽기 싫거든 사실을 낱낱이 말하오."

장교가 눈을 부라리며 방에서 나왔다.

"언제 왔었어?"

"한 사날 전에요. 그애가 흉당에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산지니는 저 때문에 죄인이 된 거

예요. 형방 나으리두 말씀하셨지요. 한판관 댁에서 아무 소장도 올리지 않는다면, 세월이 지

난 다음에 살변이 일어나게 된 자초지종을 밝히고 원정하면 고작해야 유배 천리형이라구요.

산지니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나라에서는 그 흉당을 역적으로 알고 있는데 당에 들어간 형적이 역력하다네. 지금 관가

에 한양서 온 부장포교가 기다리고 있으니, 가서 순순히 자복을 해야되네. 내가 석씨에게는

인정을 어쩔 수가 없어서 미리 알려주는 걸세. 산지니는 흥인문 밖에서 양반의 행차를 약탈

한 것도 밝혀졌고, 자기네 당을 발고하고 자수한 동료를 죽이기까지 했다는군. 그러니 석씨

까지 해를 입지 말고 누가 드나들었는지 어디로 간다구 하였는지 들은 대로 말해야 되네."

"그렇게 하지요."

석씨가 일어나니 아이들이 눈치는 있어서 징징거리며 울기 시작하였다. 석씨는 일부러 작

은아이를 들쳐입고 큰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장교는 아이를 떼어내려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묶을까요?"

"내버려두게. 아무리 적당의 아녀자라도 동모한 형적이 없으면 죄인이 아니니까."

형방과 장교는 두 아이를 거두어 가는 석씨의 뒤를 따랐다. 석씨는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고 작심하였다. 석씨가 객사에 끌려가니 목사는 나오지 않았고 한양서 내려온 부장이

도사와 더불어 기다리고 있었다. 부장이 심문을 하는데 곁에서 형방과 서리가 거들었다.

씨는 아이들을 옆에 앉히고 단정하게 무릎을 세워 앉았다. 공모한 흔적이 없으니 부녀자를

함부로 칠 수 없었으며, 또한 석씨는 광주 인근에서 여러 촌로들의 동정을 받아온 처지였다.

그래서 관가의 동헌에 들지 않고 객사로 나와 심문을 하는 것이었다. 급창이며 사령들도 없

이 석씨만 마당에 뎅그러니 앉혀두고 심문이 시작되었다.

"적당 석산지니를 아는가?"

"그애는 소인네의 서사촌동생입니다만, 적당은 아니올시다."

형방이 곁에서 말하였다.

"묻는 대로만 대답하게."

"석모가 어찌하여 살변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석씨는 겁을 먹지 않고 당당하게 머리를 쳐들고 말하였다.

"그것은 이 고장 백성들이면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판관 한이서가 이 몸이 과

부임을 기화로 하여 겁간하려다가 산지니에게 죽었습니다. 때마침 위기에서 건져졌으나,

고을에서의 자세하는 신분을 믿고 양가녀를 강제로 겁간하려던 천인공노할 죄는 묻지 않고,

오히려 가엾은 우리 동생만을 살변의 죄인으로 잡으려는 것은 너무나 불공평합니다."

"... 그만. 그가 집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는가?"

"관가에서 그애를 잡아 죄주려 하니 달아난 것은 당연하려니와,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겠

습니까. 갖은 고생을 다하며 밥이나 얻어먹겠지요."

"이 고장에서 누구누구와 자별한 사이인가, 집에 드나들던 자들이 누구인지 말하여라."

"산지니는 예전에는 태어난 곳이 저자의 술청이라 노상 저자것들과 어울려다니며 싸움을

하였는데, 이는 그애가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와 다름없이 자란 탓입니다. 이 몸에게로 와서

부터는 착실하게 양민이 되어 땅을 파먹고 살았으므로, 소악패들과도 잘 섞이지 않았습니

."

형방이 부장에게 뭐라고 귀띔을 해주었는지 그가 고개를 끄떡이고 나서 포교를 불러 무엇

인가 지시하였다. 포교는 나갔다. 석씨는 그들이 산지니의 동무들을 잡으러 나가는 줄을 알

아차렸다.

"집에 왔었다는데?"

석씨는 더 버티지 못할 줄로 알고 사실대로 말하였다.

"망부의 제사를 잊지 않았는지, 때가 흉황이라 제물 약간을 구해가지고 왔었습니다."

"그래, 그것이 언제쯤인가?"

"나흘 전이올시다."

"어디서 온다구 하던가?"

"한양서 온다 하였는데 이틀 밤을 묵고 떠났습니다."

부장은 상을 찡그리고 우선 석씨에게 오금을 박았다.

"속이면 엄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살주계나 검계에 대하여 들은 말이 있으렷다."

"전혀 없습니다."

부장이 마루를 소리나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어느 앞이라고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 포청에서 석모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성내의

노비와 왈짜들이 작당하여 양반을 죽이고 재물을 탈취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석씨는 겁을 먹기는커녕 자기도 얼굴에 노기를 띠고 대들기 시작했다.

"부녀자를 위협하시렵니까? 산지니가 도망가게 된 것은 대체 누구 때문입니까. 어째서 동

죄로서 양반은 잡으려 하지 못하였습니까? 그 애가 밥이라도 얻어먹으려고 한양의 소악패들

에 신세를 지었다면 그것이 어째서 죄가 됩니까. 공연히 죄도 아닌 죄를 씌우려 마십시오."

부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것이 오히려 악다구니를 쓰는구나. 네 동생은 등뒤에 혈당으

로 들어갈 때 찍은 낙인까지 있다. 자칫하면 너도 적당과 같이 죽게 되는 게야."

"차라리 죽여주오. 그애와 함께 참형을 받겠습니다."

"허어..."

그들은 석씨의 대찬 기세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아이들은 석씨의 어조가 높아지자 겁을

먹었는지 큰 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하였다. 부장이 귀찮아졌는지 손을 내저었다.

"돌려보내시오."

"집으로 돌아가게."

형방이 말하였다. 석씨는 인사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객사 마당을 나오는데 다

래목에 상번수로 있는 깍정이들이 포교에게 끌려오는 참이었다. 형방이 귀띔한 것은 산지니

가 다래목 깍정이 꼭지인 까마귀와 동무라는 사실이었다. 까마귀는 진작에 강을 거넜고,

에는 그의 상번수들만 몇사람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석씨는 집에 돌아가자 대번에 봇짐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값이 나갈만한 무명이나 곡식을

내어 따로따로 쌌다. 석씨는 한양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누구인가 산지니의 옥바라지를 해

야 되겠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그동안 친정에 맡겨두기로 하였고, 석씨는 산지니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볼 작정이었다. 큰아이가 눈치를 채고 어미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 어디가?"

", 외가에 간다."

"거기 가면 산지니 삼촌도 있나?"

"외숙부가 계시지. 산지니 삼촌 얘기는 절대로 꺼내면 안된다."

"엄마, 삼촌은 어디루 갔어?"

"엄마가 너희들 외가에 데려다 주고 삼촌하구 함께 올 테니까 숙부 말씀 잘 듣고 동생두

잘 보살펴야 한다."

그리고는 석씨는 마을 어른을 찾아가 부탁을 해두었다.

"제가 산지니 일로 한양에를 다녀오렵니다. 만약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외가에서 사람이

올 것이니 전장을 처분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암 여부가 있소. 그러나 나라에 죄를 짓고 죽는 사람이야 어쩔 수가 있나. 부디 잘 다녀

와야지, 그런 말일랑 하지 마오."

"그러면 아저씨만 믿구 가겠습니다."

석씨는 산지니를 구명하기 전에는 다시 널다리로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것

은 석씨가 산지니를 혈육이라기보다는 남편을 잃은 뒤에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하였던 가장으

로서 믿어왔던 까닭이었다. 석씨는 한 아이는 업고 하나는 손목을 잡아끌고 동네 총각에게

짐을 지워서 널다리를 떠났다. 돌아보니 자기가 시집오던 날이 생각나서 석씨는 소리 없이

울었다. 개천 건너로 누더기를 걸친 어린 산지니가 연신 소매로 얼굴을 씻으며 쫓아오는 것

이 보이는 듯하였다.

 

다래목의 깍정이패 꼭지인 까마귀가 부랴부랴 강을 건넜던 것은 계원의 연락을 받고 나서

였다. 산지니가 돌곶이에서 잡혔으니, 분명히 그와 가깝던 까마귀에게 포교들이 몰려오리라

는 것이었다. 까마귀는 강을 건너 묘적산 계곡의 삼십 리 길을 들어갔다. 노적사의 송림에

이르니 복만이가 계원들 칠팔 명을 데리고 움을 헐어내고 구덩이를 메우는 중이었다.

"복만이 성님, 이게 웬 소란이우?"

복만이는 흙을 메운 움터를 발로 밟아 다지고 있었다.

"못 들었나?"

"산지니가 잡혔다면서요?"

"... 좌포청 최형기의 그물에 걸려들었네. 그래서 대덕님께서 모두들 천마산으로 이사를

가자 하여 새벽에 떠나구 우리는 뒷마무리를 하는 걸세."

까마귀도 복만이와 함께 땅을 다지면서 말하였다.

"산지니는 함부로 입을 놀릴 자식이 아닙니다. 모질고 독하기가 차돌멩이 같습죠."

"누구든지 겪어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게야. 우리 식구가 하나라두 여기서 잡혀보게.

그야 말루 검계는 결딴이 나버릴걸."

"산지니가 잡힌 것을 어떻게 알았수?"

"돌곶이의 최가가 솔부리로 기어들어왔지. 최가는 맨손에 식구들만 겨느리고 똥 누다 주

저앉은 꼴이 되어 도망쳐 왔어. 그래서 내가 대덕님께 살주계 한다는 천예들과는 상종하면

안된다구 말씀드렸는데... 달근이나 황가놈이나 내 말이라면 코똥이나 팡팡 뀐다니까."

"살주계가 어찌되었는데요?"

"검계하구 어울려 양반 댁 재물을 턴 데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자식들이 제 동무를 잡힌

분풀이로 성내어 방문을 돌리고 최형기를 총포로 쏘았다네. 그야말로 자는 범 수염을 뽑은

격이지."

"그래 이제는 어찌할 거요?"

복만이는 불만이 가득 쌓였던 모양이었다.

"어찌하긴 뭘 어찌하나, 솔부리에 틀어박혀 기찰이 잠잠해질 때까지 겨울잠이나 자야지."

"산지니는 버려두구요?"

"그놈은 이제 도마에 올랐는데, 옥황상제라도 별수가 없지."

"다른 데에는 알렸나요?"

"몰라... 대덕께서 알아 하실 테지."

그들은 움을 대강 메우고 나서 벌겋게 드러난 흙 위에 마른 뗏장을 떠다가 그럴 듯이 덮

어두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없이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원태가 기거하던 석굴 앞에

는 바윗돌을 층층이 쌓아올린 다음에 다시 잔솔나무들을 파다가 옮겨 심었다. 오후까지 일

을 하고 둘러보니 골짜기에는 숲과 세찬 겨울바람만이 남았다.

그들은 묘적산에 올라 산등성이를 타고 천마산으로 향하였다. 천마산 북편 골짜기의 솔부

리에 닿은 것은 이미 노루꼬리만한 겨울 해가 저문 지도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솔부리에는

정원태의 미륵교를 믿는 신도들도 여럿이었고, 주변에 나가 솔부리의 일당들이 모두 모여

들어 있었으며, 서강의 모신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고달근이와 황회가 쓰는 집의 큰방에는

정원태를 중심으로 하여 광주 검계의 모든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의견이 제각

기 달라서 아까부터 같은 얘기를 가지고 맴돌이만 하는 참이었다.

"노적사는 깨끗하게 없어졌소이다."

"수고하였네."

복만이와 정원태가 주고받았고 까마귀도 일일이 좌중에 인사를 하고 나서 끼여 앉았다.

"우리 계원을 건드리면 어찌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가만있을 수가 없소이다."

시동이가 말하였다. 고달근이는 의견을 내지 않고 사람들의 오가는 말을 듣기만 하였고,

황회는 성내로 들어가 소란을 피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원태가 말하였다.

"아직은 양주나 고양 쪽에 논의도 하지 않았고 저들이 산지니를 어찌할 것인지도 모르지

않나. 우리는 큰 일을 위해서 명년까지 힘을 아껴두어야 하오. 저들이 세게 나오면 우리는

들어와 숨고, 방심했을 적에는 뒤통수를 치는 게요."

모신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말이 끝나질 않고 자꾸만 제자리서 맴을 도는데... 내 생각에는 산지니는 죽을

듯허우. 우리가 아무리 칼을 들고 일어선다 하나 지금 조정을 뒤엎을 힘은 없소이다. 산지니

는 분명히 죽을 테지요. 그런데 문제는 산지니가 저 혼자서 죽느냐, 혼자 편안히 죽도록 내

버려두겠느냐 하는 점이우. 아마 포청에서는 산지니의 연줄을 캐내려고 갖은 수를 다 쓸 게

. 우리가 힘과 꾀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지는 못하겠으나 몇가지 방법은 있지요. 그것은

좌포장 이인하에게 우포장 신여철로 하여금 압력을 넣도록 하는 겝니다. 신여철이 유리한

입장에 놓이도록 해주는 것이지요. 이인하가 검계의 형옥을 물고 늘어져야 처세에 손해일

뿐이라고 깨닫도록 해주는 게요. 그뿐 아니라 조정의 권신들 몇이 검계의 형옥 때문에 불안

하다든가 귀찮은 일이 생긴다면 틀림없이 이인하로 하여금 손을 떼게 하겠지요."

"그렇다면 산지니가 여전히 죽기는 매일반이 아닌가?"

"죽기는 죽되 속참되겠지요."

"그가 속참되는 것이 무슨 득이 되오."

모신이는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우리 계의 안전에 득이 되오."

모신이의 말에 정원태도 끄덕였다.

"좋은 안이오. 그런데 우포장이나 권신들의 마음이 우리 뜻대로 움직여질까?"

모신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요. 힘쓰는 놈은 미련하기 쉽고 꾀 많은 놈은 오만하기가 쉬우며

독한 놈은 탐욕스럽기가 쉬운 법이우. 그것은 저자바닥이나 양반의 사랑이거나 매한가지요.

재물이든 모략이든 협박이든 사람에 따라 잘 쓰면 되겠지. 내 생각으로는 신여철을 겨누는

게 맞춤할 듯허우. 신여철과 이인하는 같은 무장으로서 세를 다투고 있소이다. 신여철로 하

여금 이인하를 곤경에 빠지도록 하면 어떨까?"

정원태가 시동이를 돌아보았다.

"최형기는 총포로도 죽이지 못하였다면서?""

시동이가 고개를 숙이며 겸연쩍어하는 것이었다.

"그리되었습니다. 나는 꼭 죽은 줄로만 알았지요."

달근이가 끼여들었다.

"최형기가 포청에서 쫓겨나도록 하면 좋겠군. 신여철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되겠지."

모신이가 다시 말하였다.

"돈과 칼이 다 필요한 게여. 염려 마시우. 산지니는 열흘 안에 입을 굳게 닫고 죽을 테니

."

조정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다투더니 경신 대출척 이후 서인이 집권하여 우암 돌아온

지 닷새쯤 지나서 고변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세상에서 말하는 임술 삼고변의 옥이라는 것이다. 신유년에 남인의 대가 열세 집

이 지목된 익명의 변서가 시권을 가장하여 올려졌으니 그때부터 정탐이 시작되었단다. 본래

서인으로서 무를 배워 벼슬을 얻었던 김환이라는 자가 있었으니 병조판서 김석주가 환에게

이르기를, 나라에 큰 변이 있으니 네가 잘 정탐하여 고하라 하였으니, 환이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였는데, 김석주는 위협하면서 만일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베어 죽이리라 하였다.

김환이 명령대로 하겠지만 정탐할 길이 없으니 어찌할까를 물었고, 김석주가 꾀를 내었다.

즉 지금 허새, 허영의 집이 용산에 있으니 네가 전염병이나 집안의 우환으로 떠나는 피접을

빙자하고 그 이웃에 머물면서 교제를 하되 매우 익숙한 뒤에 같이 장기를 두다가, 승패가

결정될 무렵에 네가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도 마땅히 이러하리라고 말하면, 그의 기색을 살

필 수 있을 것이니, 만약에 그가 이상한 기색이 없거든 밤에 동침하면서 비밀히 역모를 같

이 하자고 의논해보면 그의 진의를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김환은 물었다. 그가 반역하려는 뜻이 없고 도리어 나에게 반역한다고 하면 어찌하리까.

김석주가 모두가 내 손에 달렸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하면서 교제할 은전을 내주었다.

환은 그 말대로 하였고, 새와 영이 과연 곧 응하므로 석주에게 보고하였다. 김석주가 또한

유명견을 정탐하였으나, 김환이 명견과는 친할 수가 없어서 다만 명견의 척당되는 전익대와

친분을 맺고 그를 시켜 명견의 동정을 살펴보아도 미처 자세히 알지 못하던 무렵에, 석주가

부득이한 일로 청국에 나가게 되어 김환의 일을 어영대장 김익훈에게 맡기고 떠났다.

김익훈이 명견의 소식을 알아오도록 재촉하므로 김환이 전익대에게 가만히 물었다. 전익

대가 말하기를, 수상한 일로서는 갑옷과 활을 만드는 듯한 기미가 있으나 실상 확실한 정보

는 없다는 것이었다. 김익훈 또한 이덕주를 정탐하게 하였더니, 미처 정탐하기 전에 무리가

생겨서 김환이 거짓 정탐하는 체하고는 실상 자신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말이 안팎으로 떠들

썩하였다.

김익훈이 곧 김환을 불러 그 말을 전하고 급히 고변하게 되니, 김환이 크게 두려워하여

곧 장교들을 청하여 말하였다. 전익대를 잡아서 같이 고변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김환이 어둠

을 타고 익대의 집에 가서 장교들로 하여금 익대를 잡게 하여 제 집에 데리고 와서 내실에

감금하여놓고 위협하였다. 너와 내가 같이 고변하여야 큰 화를 면할 수 있다. 그러나 익대는

, 유명견이 일찍이 반역을 꾀한 일이 없거늘 내가 어지 무고할 수 있겠느냐면서 굳게 거절

하였다.

김환이 김익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어가서 고변하고 국청을 설치한 뒤에 익대를 불러서

그 일을 물어볼 터이니 익대를 가두어놓고 기다려 주십시오 하였다. 김익훈은 전익대를 가

두었고 김환은 곧 고변하였던 것이다. 허새, 허영은 이미 자복하였고 환은 훈신이 되어 뜰에

올라앉았다. 그러나 김환은 익대가 만약에 질정없는 말을 한다면 자기 일에 방해될까 두려

워하여 끌어대지 못하였다.

김익훈은 기다리다가 끝내 소식이 없었으므로 매우 민망하고 난처하여 스스로 국청에 나

가서 그 내용을 고하였다. 그러나 위관 김수항이 말하기를, 국청 일은 임금의 전교나 죄인의

고백하는 일이 아니면 감히 거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익훈이 더욱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때마침 김석주가 외국에서 돌아와 같은 위관이 되어 익훈에게 일러주었다. "아방

에서 밀계하면 주상께서 국청으로 지시가 내릴 것이니 그때에는 조처할 수가 있을 것이오."

익훈이 답하였다. "나는 글을 못하는데, 어찌 아뢰는 말을 쓰겠습니까?" 김석주가 편지 피봉

을 가지고 대략 기초를 잡아주며 아뢰게 하였더니, 곧 국청에 명령이 내렸다. 곧 익대를 잡

아 물으니, 익대가 김환이 이미 훈신 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자기도 만약 고변한다면 역

시 저와 같이 되리라 하고는 이내 유명견이 역모하였다고 고하였다. 변서의 내용은 대강 이

러하였다.

허새 등이 화약 화전 흰옷 등을 준비하여 역모했소. 이에 허새가 김환의 집에 던진 글 두

, 역적의 이름이 쓰인 종이 및 물건 조비의 문서, 문답설화 기찰일기 등의 증거물을 올리

는 것이오. 허새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회를 만나자고 하더니,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였소. 그리고 조정에서는 장차 노계신을 꾀어 상변하게 하고 남인을 다 죽여 없앨 것이다.

앉아서 때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일어나서 그들을 치는 게 나을 것이다. 장사 삼백을 모아

삼공육경 및 미국당상의 여러 대신들을 다 죽이면 나라는 저절로 흩어질 것이라는 둥 말하

였소. 화약 대여섯 되를 구하여 내외의 여러 창고에 불을 지른 뒤에 장사들을 보내어 모두

쳐죽이는 한편, 각처에 귀양가 있는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게 하면 일은 쉽다고도 하

였소이다. 또 한수만에게는 주상이 무도하여 조정이 어지럽다, 인현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면

나라가 태평해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공 또한 클 것이라는 것이었소. 이에 한수만 이회가

일을 같이 할 사람들이 누구냐 물으니, 허새는 회맹도목 석 장을 자기 손으로 써주었는데

그 도목에 씌어 있는 자는 민암 권대운 오시복 김환 오정위 이덕주 이우정 정창도 권대재

유하익 이관징 이운징 윤천뢰 황징 노정등 십육 명이었습니다.

변서에는 격문과 문답설화도 첨부되어 있었으며, 허새가 이회와 함께 김환의 집에 가서

흉모를 논의했다는 내용도 요약되어 있었다. 복평군을 추대하고 대왕대비가 수렴청정하게

하며, 궁중에 들어간 장사 삼백 명은 흰옷에 흰 두건을 두르고 곳곳에 섰다가 만일 흰 옷을

입지 않은 자가 나타나면 다 죽이게 한다는 것이었다.

국청이 벌어졌는데 허새와 이덕주 등의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문초하게 하였다. 이때에 문

초받게 된 허새는 좀처럼 혐의를 시인하지 않더니 심한 고문에 못 이겨 겨우 자백하기 시작

하였으나, 이덕주 허영에게 복평군 추대의 의사를 말하였으나 그 외의 진전은 없었고 더구

나 민암 오정위 유하익 윤천뢰 등과 통모한 일은 전혀 없다고 답변하였던 것이다. 이에 허

새 허영 이덕주 삼인이 잇달아 사흘 동안에 대여섯 차례의 형신을 당하고 나서 사형당하였

.

뒤이어 임술년 시월 말에 무과를 하였던 출신 김중하가 올린 고변서가 있었으니, 삼고변

의 둘째 번 것이었다.

금년 여름에 심삼원이 말하기를 "천재지변이 매우 심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랴. 허적이

박빈을 죽이지 않았다가 도리어 박빈의 손에 죽었으니, 다른 날에 또 허적의 자손에 죽을는

지 어찌 알겠느냐. 박빈 남두북이 지금 부귀를 누리지만, 얻은 재물이 어느때 본주인에게 돌

아갈는지 어찌 알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이숙이 일찍이 폐고되었다가 이제 이조의 주

인이 되었으니, 그대가 만약에 지금 폐기된 사람을 사귀면 반드시 다른 날에 출세하는 길이

되리라." 하기에 신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삼원이 말하기를, 바로 민암이 그 사람이

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민암을 찾아보았는데 그가 반갑게 좌우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지금

천시 인사는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니, 그대와 나라도 알 수 있는 것

이다. 그대와 내가 이미 마음을 허락한 친구인데 어찌 서로 마음속을 숨기겠는가. 우리나라

운수가 이미 삼백 년을 지났으니, 지금은 남아의 출세할 때이다. 내가 권한 낙서령 윤유중과

더불어 죽고 살기를 같이하는 계를 결성하였는데 그 계의 이름은 부운계이다. 여기에 그대

가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마땅히 청밀을 제거하여야 큰 일을 이룩하리라. 의풍 남두북,

성 김석주, 밀림 박빈 등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 일을 정찰하여 그르칠 염려가 있

."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탁남의 한 사람으로 대사헌을 지내다가 경신 대출척 때 파직되었던 민암은 곧

역모의 혐의로 잡혀 들어와 문초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흘 뒤에는 다시 어영대장 김익

훈이 정원에 와서 밀고하여 고변의 마지막인 전 경주부윤 유명견의 옥사를 일으켰다. 김익

훈은 경신 출척 째에 남인을 제거한 공으로 광남군이라는 훈작을 받은 터였다. 그는 대신들

의 휴게실인 이방에서 밀갑으로 아뢰었다.

고변한 김환이 변서를 올리기 전에 신에게 와보고서 허새가 역모를 꾸민 정상을 말하면

, 훈국초관 전익대 유명견 등이 서로 왕래하는 의심스러운 상황도 말하고, 또 낙서령 수윤

이 나라를 원망하는 망측한 말을 한 것을 이야기하였는데, 유명견의 일이 더욱 의심스러우

므로 신이 익대를 불러다가 어영청에 구치시켰는데 옥을 다스린 지 이미 닷새가 지나도록

아직 익대를 심문하는 일이 없었니, 이는 반드시 김환의 생각에 비록 의심스러운 단서는 있

지만, 역모와는 다르므로 고변할 때에 감히 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옥이 바야흐

로 벌어져서 단서가 판명되지 않은 오늘에 이미 의심스러운 형적이 있다면 덮어두고 발표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니, 김환과 익대를 함께 심문하여 사실을 명백히 캐내어 처치하옵소서.

이는 실로 경신 출척 때에 몰락한 남인 및 남인 계열의 군과 역사등이 간혹 임금과 집권

당의 서인들을 비난한 일 때문에 죽음이나 가혹한 고문을 당하게 된 억울한 사건이었다.

러므로 다음달인 십일월에 가서는 고변의 옥에 관련된 자들에 조치가 내려지게 되었다.

새의 옥에 관련된 군관 역사 십여 명은 귀양을 갔으며 그들을 무고하였던 김중하 전익대도

귀양가게 되었다. 본래 김석주는 정세의 부침에 간사한 이라,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서인으로 변하여 경신년의 대출척에서도 이조판서를 놓치지 않고 우의정에 올라 호위

대장을 겸하였던 것이다. 그는 배신자로서 전에 자신의 동료들이었던 남인의 잔존 세력이

남아 있으니 언제 정국이 바뀔지를 몰라 못내 불안하였었다.

그래서 어영대장 김익훈과 더불어 남인의 뿌리를 뽑고자 김환과 김중하, 전익대를 부려서

남인을 함정으로 몰아넣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정에서는 물론이요 저자 백성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중론이 죽은 자들의 억울함을 은근히 비치면서 내외에 퍼져나갔다.

무릇 고변은 역모한 사람만을 고할 것이지, 조정에 대하여 원망하고 비방하여 난언한 자를

모두 급변이라 하여 나라에 고변한다면 앞으로 온 나라 사람이 모두 두려워서 발을 바로 하

고 서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옛 성왕이 비방하고 요언하는 자를 죄주지 않던 도리라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중하의 고한 것이 전혀 사실이 아닌 바가 없다고 하여

중하의 무고죄를 용서하려고 하니 신은 진실로 그 뜻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이 옥사의 단서

가 이러하므로 인심이 불평하여 거리에서 몰래 뒷공론이 그치지 않습니다. 근래 대각의 말

이 너무 함부로 나와서 실로 과격하고 지나쳐 정당함을 잃은 것이 있는데도 조정의 의논이

이 정당하지 못함을 죄로 삼아 배척하지 않는 것은 이 옥사가 실로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

는 때문입니다. 특히 법관에게 명령하여 다시 처리하여 그 실정을 캐내어 곧고 굽은 것을

분명히 해서, 죽은 자를 신설하여주고 산 자를 너그럽게 용서한다면 이것이 진실로 오늘날

의 재앙을 없애고 화기를 가져오게 하는 한가지 일이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차자가 나오게까지 시국의 변화는 진전되었고 김석주, 김익훈 일파는 차츰 몰

리는 형국이 되었다. 집권 세력인 서인 가운데에서도 노장 측은 우암을 선두로 하여 저들을

두둔하였으며, 조지겸 유득일 한태동 등의 소장들은 무고자들을 엄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익훈의 그릇된 세도와 탐욕을 고발한 글들이 뒤를 이었다.

당초에 김익훈이 밀계한 것이 해괴한 일입니다. 전익대 등이 죄를 범한 것을 익훈이 듣고

알았다면 신하 된 자로서 어찌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사로

구류시켜 여러 날 두었다가 끝에 가서 대신 고변하였으니, 그 심사와 태도를 헤아릴 수 없

습니다. 여러 사람을 국문하여도 마침내 단서를 찾을 수 없었으니 내장이 스스로 내다보이

고 수족이 모두 드러난 것과 같아서, 본 사헌부에서 익훈을 삭출하자는 의논은 결코 없는

사실을 덮어씌우려는 근거없는 말이 아닙니다. 간특하다는 말도 신이 홀로이 하는 말이 아

닙니다. 김익훈의 평생의 모든 행적이 사람들의 이목에 퍼져 있으니, 그중 가장 심하고 더욱

드러난 것을 말하면, 익훈이 문벌을 빙자하고 건달로 출세하여, 착한 행위는 한 가지도 기록

할 것이 없고, 약한 것은 갖추지 않음이 없어, 역적 집 재산에 침을 흘리고 그 부녀자를 데

리고 살았습니다. 손으로는 문사의 초고를 움켜다가 그 집에 감추고, 정승의 타는 말에 몸소

가철하기를 청하였으니, 천고에 아첨하는 자로서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으며, 백성들에게 감

하여준 납세를 사사로서 받아서 제 집에 실어들인 일은 한 세상을 탐종한 무리들도 감히 못

하던 일이며, 또한 여러 간음한 짓과 비루한 태도에 대하여는 사람들이 모두 귀를 더럽히지

않으려 합니다. 그중에 더욱 통분한 일은 갑인년 이후 간흉 남인들이 정권을 잡았으므로 당

시의 선비들이 사방으로 쫓겨 나가서 비록 미관말직이라도 집권자에게 붙어서 벼슬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김익훈은 유현의 손자로서 문벌 좋은 집에 태어나 그 조상을 더럽히고 욕되

게 함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적 허적에게 붙어서 노예보다도 더 아첨하고 골육보다도 더

덩이 두터워 반연으로 결탁하고 장수에 뽑혀 올랐다가, 기회를 엿보아 태도를 변하여 허적

과 갈라져서 훈적에 추록되어 외람히 공호를 차지하였습니다. 설사 익훈이 일분의 공이 있

다 하더라도 또한 팽총의 자밀이 훈신의 반열에 두어서 그 녹을 떼지 않게 하면 족하거들,

대장의 직책이 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데 되지도 못한 간비한 사람을 이 자리에 올려 일국

의 장수로 삼아서 삼군의 군사를 지휘하게 하십니까.

좌의정 민정중도 이때에는 김수항과 의견을 달리하였고 소장 측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

아졌던 것이다. 계해 정월에 좌의정의 차자에 따라서 임금도 싸고 돌던 김익훈을 파직시켰

으며, 김중하 전익대 김환등 무고 죄인들을 처단하라 이르게 되었다. 김익훈은 우암 송시열

의 스승 김장생의 손자였으므로, 송시열은 친형제나 다름없는 그를 구해주려고 임금께 그

관계를 아뢰었다.

송시열과 영의정 김수항, 좌의정 민정중, 지부사 이상진 등의 노장들은 그들을 더 이상 벌

하지 말자고 주장하였으나 판의금 여정제, 지의금 박신규, 동의금 김우석, 정재의, 대사간 이

수언, 집의 한태동, 수찬 오도일 등의 소장들은 무고의 사실이 적실하므로 그들을 엄벌할 것

을 주장하며 맞섰다. 이른바 백성들까지도 알게 된 노론고 소론의 분열의 시말이었다.

갑자년이 되어서도 계속 양론은 끊이지 않았다. 구월에 김석주가 죽자 익훈은 점차 더욱

몰리게 된 형편이었다. 이인하는 좌윤에서 좌포 도대장으로 옮겨 앉았고, 소론 측에 가담하

여 있었다. 훈련대장 신여철은 우포도대장으로 옮아갔는데, 그는 또한 김석주나 김익훈의 신

임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가 남인 계통에 혈연이 있다 함이었다. 신여철은 자뭇 심중이 불안

한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것도 실은 집권 세력인 서인 내부의 쟁

론이었고, 남인은 이제 완전히 거세되어 몰락하는 판국이었다. 비록 무고가 밝혀지고 김익훈

이 파직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그들의 뒤에는 송시열을 비롯하여 김수항 민정중 등이 있

었다. 우포도대장 신여철은 좌포도대장 이인하처럼 선뜻 소론에 들 수도 없었고, 김익훈을

두둔하는 노론을 등에 짊어질 수도 없었다. 따라서 신여철은 이인하보다는 무장으로서의 기

반이 약한 형편에 놓여 있었다. 송시열이 여름에 태조의 존호를 추상하는 일로 소론 측과

옥신각신하다가 고향에 내려간 뒤에 구월에는 김석주가 죽었으니, 신여철은 눈치 볼 것 없

이 익훈을 탄핵하는 쪽에 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조정의 돌아가는 형편은 워낙에 네 해를 끌어왔던 사건인데다, 무고에 걸리고 다

친 한량 무인들이나 하급 장교들이 많아서 자연히 저자에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모신이는

서강의 토박이 왈자인지라 강상 무뢰배의 우두머리 중 하나로서 그러한 소문을 놓칠 리가

없었다. 신여철이 검계나 살주계의 흉변에 대하여도 기찰을 그리 심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너그럽다는 평판이 나돈 것은 그의 이러한 정세 관망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었다.

신이는 좌포청 대장 이인하의 밑에 있는 종사관 최형기가 일찍이 광남 김익훈이 어영대장으

로 기세를 떨치던 수년 전에 그의 문하에 있었음을 알아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광남의 문

하를 떠난 것은 경신 대출척으로 김익훈이 훈신이 되어 권세가 날로 육일승천하던 때였으니

실로 알지 못할 일이었다. 그것이 최형기가 앞을 내다본 처세였기는 하지만, 모신으로서는

김익훈의 수하 무사로 최형기가 그 집의 식객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였다. 이제 익훈을 두

둔하던 쪽이 이지러지고 있는데 최형기는 그를 죄주자는 쪽에 가담한 이인하를 상장으로 보

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형기가 익훈의 심복이었다는 여론을 암암리에 퍼뜨려놓으면 이

인하는 난처하게 되고, 신여철에게 이러한 분위기가 만들어주어도 그는 자신의 기반을 위하

여 적절하게 이인하를 몰게 될지도 몰랐다.

기왕에 세상에 알려진 검계와 사로잡힌 산지니를 어떻게 꾸미느냐가 문제였다. 검계는 경

신 대출척 이후 근래에 고변으로 완전 몰락한 남인 측과 깊은 관계가 있다거나, 나아가 김

익훈을 죽이자는 소론편에 닿아 있다는 소문을 낭자하게 뿌려놓으면 산지니를 속참할 수밖

에 없을 것이었다. 산지니는 죽고, 동시에 최형기는 이인하로부터 혹시 익훈의 밀명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아 포청을 물러나게 될지도 몰랐다. 여하튼 하번 꾸며볼

만한 장난이었다.

모신이 천마산 솔부리에서 회합에 참석하고 돌아온 그날부터 산지니와 최형기의 일에 대

하여 책임을 지고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모신은 밤새껏 머리를 자내느라고 홀

로 촛불을 밝혀두고 앉아서 새웠다. 보료에 기대어 잠깐 잠들었다가 깨어나니 이미 벌건 대

낮이었다. 그는 밖으로 나와 강변의 주막으로 내려갔다. 안채에서 할 일 없는 졸개들이 떠들

썩한데 그는 차인으로 늘 나다니던 심복 하나를 불렀다.

"너 태복이 잘 알지?"

"화초방에 놀러 나오는 해끔하게 생긴 자식 말이우?"

"그래 홍천수 동무 되는 자로 훈련원 다니던 녀석 말이다. 그자가 지금도 신대장 댁에서

장사 나오냐?"

", 요즈음은 아예 서강에 나와서 잠은 화초방서 자구 밥은 째보네서 대어먹는 모양입니

."

"요즈음 무슨 경기가 있나..."

"어이구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명색이 포도대장 댁인데 각종 봉물이 심심치 않게 올라

오지요."

모신이가 말하였다.

"가서 태복이 찾아가지구 내게 데려오너라. 긴히 의논할 말이 있다구 하여라."

모신이는 차인을 보내고 나서 텅 빈 술청에 앉아 기다렸다. 그는 졸개를 시켜 귀한 화주

를 떠내오게 하였고, 안에는 초촐한 술상까지 보아두게 지시하였다.

"모서방이 왜 날 찾나."

너스레를 떨면서 신여철의 문하 사람이 모신이네 술청 안을 기웃거렸다.

"어이구 얼마 만인가. 그래 서강서는 아예 손털구 일어선 줄 알았더니."

모신이가 술사 앞을 지키고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 달려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손을 터는 게 다 뭐야. 이제부터 바빠지는 참인데. 인제 곧 섣달이고 세밑이 아닌가.

무리 시절 타령이지만, 그래도 대장의 댁인데 신년 봉물이 끊길 리가 있겠는가."

"아무렴 그렇겠지. 좌우간 반가우이."

두 사내는 술상을 마주하여 앉았다. 난데없는 술병과 잔을 내려다보고 손이 말하였다.

"허어, 삼남에는 절량헌 지가 오래라던데 과연 경강은 다르군. 이게 무슨 술인가?"

모신이 껄껄 웃으면서 잔에다 술을 쳤다.

"술인지 맹물인지 마셔봐야 알 게 아닌가."

"커어, 화주로군. 목젖이 팔팔 뛰는데. 역시 서강의 모서방네 술독이 마르면 팔도에 술 기

근이라더니 아직 술 흉년은 멀었군."

손님은 연거푸 두 잔을 들고 나서야 안주에 저를 대었다. 모신이는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고 빙글거리며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상대편도 훈련원 무사에서 강변 무뢰배로 한강물

거슬러 떠먹고 자라난 사람이라, 쩍 하면 입맛이어서 모신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속으로 짚

어보느라고 말이 없었다.

"요즈음은 장사를 폐하였나?"

그가 건성으로 묻자 모신이는 엉뚱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주인께서는 요즈음 심기가 어떠신가?"

"자네가 우리 대장님 심기를 알아 뭐하려나."

모신이는 나직하게 말하였다.

"자네두 대강 알 것이니 내가 두말 않겠네마는... 우리네야 나그네 눈치 보구 밥 먹는 사

람 아닌가."

나그네란 포청 포교들을 이르는 것이었다.

"요새 나그네 하나 때문에 장사 해먹기두 몹시 귀찮아."

그가 눈을 슬며시 치뜨며 모신이를 올려다보았다.

"밑 구린 짓을 하니까 귀찮지."

", 이 사람... 자네두 알다시피 우리야 술밥 팔아 먹구 사는 형편 아닌가. 가끔 투식한

미곡을 사기두 하지만 경강 장사치 쳐놓고 화수나 투식 한번 안해본 놈들이 어디 있어?"

모신이는 장물에 대한 눈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아도 서로

간에 뒷공론이 오가고 있으니 명절 때마다 적절한 상납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언제는 우리하구 의논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모신이는 그를 무시하고 계속 말하였다.

"장사꾼이야 바람 부는 대로 따라서 날리는 나뭇잎이나 매한가지여. 바람이 바뀌면 다른

쪽으로 날려야지 별수가 있겠나."

그제서야 상대가 대강의 눈치를 챘던 모양이었다.

"주인을 정하겠다 그 얘긴가?"

모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은 갯가 뱃놈 복장으루 밸이 뻣뻣하게 버텼지만, 차츰 경기가 떨어지니 주인을 잡

아야겠단 말일세."

"잘 생각하였네. 감사 덕분에 비장 나리 호사라고 멜바가 있어야 짐을 지지 않나. 우리 안

전께 등을 대면 자네 배도 자연히 부를 걸세."

손님이 자못 거만을 떨며 모신이께 타이르듯 말하였다. 모신이는 예끼 이놈아 내가 검계

의 방물 와주다, 하면서 상대의 볼때기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얼굴에는 아첨하는 웃음을 떠

올리고 말하였다.

"그러니 자네에게 이렇게 부탁을 하려는 걸세. 대장께서 우리를 보아주신다면 내가 서강

은 물론 마포 동막이나 용산 삼개까지의 모든 경강 장사치들을 묶어서 대장께 봉물을 드리

고 기찰에도 도와드릴 생각이야."

"살다 보니 모서방도 철들 날이 다 있군 그래. 천수라는 놈도 우리 안전의 신세를 많이

입었던 놈인데 그만 화수 목동으로 잦아들지 않았던가."

모신이는 잔을 내었고 손님이 그의 잔에 술을 쳤다. 모신이는 술을 천천히 한모금씩 먹으

며 중얼거렸다.

"헌데 내 마음은 그렇네마는 한가지 켕기는 구석이 있지. 우리가 자네 안전께 줄을 대면

바로 우리를 망치려고 덤빌 사람이 있단 말일세."

"아니... 신대장의 수하 사람들을 훼방놓을 간 큰 놈들이 어느 놈들이야?"

모신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네 따위는 말도 못 붙이네."

"여기 이 태복이나 서강의 모서방을 감히 능멸할 녀석이 어디 있어."

모신이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최형기를 아는가?"

"좌포청 종사관 말인가?"

모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는 보통 사람이 아닐세. 소문에는 아전의 자식이라고 하더군. 그는 처세가 매끄러워

서 지금대로 간다면 틀림없이 대장을 바라보게 될 게야. 최형기가 장안 저자의 장사치들을

모두 한손에 쥐고 있다는 것쯤은 자네도 알겠지. 다구나 그와 조포도대장 이인하는 요즘 살

주계라나 하는 천예들의 적당을 검거하여 병조와 형조의 신임이 두터워지고 있네. 자네 안

전께서는 그저 대장의 자리만 지키고 있달 뿐 무슨 공이 있는가. 더구나 이인하는 소론에

강력한 줄을 대고 있단 말이야. 그러니... 이치가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마음으로는 신대장

을 주인으로 모시고 싶지만, 섣불리 손을 내밀었다가는 이대장이나 최종사에게 미움받기 십

상이란 말이야."

손님이 입맛을 다시며 돌아앉았다.

"최형기 그 망할 자식을 내 참..."

"이봐 태복이, 용검도 써야 칼이야. 좌우간 앞으로 나서야지. 뒤전에서 체면치레만 하다가

는 한양 바닥이 좌포청 바닥이 되고 말 거야."

"그거야 세상이 다 아네."

모신이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

"자네 최가가 누구 사람인 줄 알고 있나?"

"그야... 이인하의 오른팔이 아닌가?"

"허허, 역시 그럴 줄 알았네. 그가 누구 때문에 출신으로 나왔는지 모르는군. 그는 바로

광남군 김익훈의 평무사였어."

"진작에 물러나오지 않았던가?"

모신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술잔으로 상 모서리를 두드렸다.

"아하, 자네 서강 바닥 물을 헛들이켰군. 그가 나왔는지 끊었든지간에 익훈의 신임을 받던

식솔이었다는 점이 중요한 게야."

"알았네, 그러니 자네가 원하는 건 도대체 뭐야?"

신대장 댁의 차인 태복이는 다그쳐 물었다.

"최형기를 쫒아내고 신대장께서 인심을 얻으시는 게야."

모신의 말에 차인은 피잉 하면서 말을 뱉었다.

"글세 그걸 누가 모르나. 우리네 따위가 어찌 신대장께 국사를 이러쿵저러쿵 따질 수가

있느냔 말일세."

모신은 빙긋이 웃었다.

"촉중명장이 따로 있다던가. 여럿이 꾸미면 관왕이 되는게야."

그는 상 밑에 두었던 궤를 슬쩍 밀어내고 뚜껑을 열었다. 속에는 반팔 길이의 단검 한쌍

이 들어 있었다.

"왜도일세. 동래에서 들어온 물건이지."

모신이가 자랑스럽게 말하며 그중 하나를 차인에게 던져주었다. 칼집은 향옥과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칼자루는 은으로 용의 몸통과 머리를 아로새겼다. 태복이 칼을 빼어 날을 바라

보니 그 새파란 서슬이 서릿발처럼 차갑고 모신이가 터럭을 빼어 불어주자 슬그머니 잘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보통 명품이 아닐세. 이것은 자웅이 되는 쌍검인즉, 나누어 선사를 하는 게야."

"자웅을 나누다니... 아예 우리 어른께 갖다 드려야지."

모신은 껄걸 웃는다.

"그까짓 아이들 장난감 가지구 뭘 그러나. 경강 장사치들의 봉물이 있는데, 하나는 자네가

주워가고, 또 하나는 최형기네 집에 보내줄 작정일세."

차인이 눈을 빛냈다.

"자네는 저자에서 습득하였다고 대장께 전하란 말야. 내가 이 서찰을 읽어주지."

모신은 궤속에서 편지를 꺼내어 읽었다.

"기간 별고 없는가. 임술 이래로 내외가 시끄럽고 더욱 계해 갑자에 이르러는 조정의 논

의가 분분하여 대감을 무함하는 간흉들의 해괴한 요언이 난만한데, 근자에 이르러 한태동

오도일 등의 경망한 소론 무리들을 믿고 성내 저자의 천예 상한들마저 계를 지어 날뛴다 하

니 실로 나라의 장래가 근심이 되는 바일세. 대감께서도 늘 자네의 안부를 묻고 전정을 염

려하시더니, 어영대장의 직임을 간흉들 때문에 물러나오시고는 언제든 때가 오면 대장 재목

은 최형기가 되어야 한다고 한탄하신다네. 이번의 도성내 작은 소요에 접하고 조정과 백성

들의 안정을 근심하자 특별히 아끼던 보검을 보내드리니 자네가 대감 문하이었음을 잊지 말

."

눈이 휘둥그래져 있던 태복은 그 편지를 빼앗아 들여다보니 일필휘지 진서로 갈겼는데 끝

에는 김만채의 이름과 인이 찍혀 있었다. 김만채는 즉 쟁론의 불씨인 전 어영대장 김익훈의

아들인 것이었다.

"... 이게 정말인가?"

모신은 그 편지를 빼앗아 조심스럽게 접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이 편지 하나 써 받노라고 과장에 나가 거벽 노릇 하는 글씨장이를 사흘 동안이나 헤맸

다네. 모두 서른 냥이 들었지."

모신은 똑같은 함을 준비해두었는데 그중에 편지를 넣은 쪽을 태복에게 내밀었던 것이다.

", 이걸 자네 주인 어른께 갖다 바치면 되는 거야."

모신은 신여철의 차인으로 저자에 나와 있는 태복에게 일을 맡기면서 따로이 대국 비단

몇필을 인정으로 내놓았다. 태복이가 복잡한 내막은 살피지 않고, 오직 그의 댁으로 주인을

삼는다는 말에 최형기를 물을 먹여 더 이상 간섭을 못하게 하려는 것쯤인 줄로 알았다.

무튼 그도 저자에 나와 이를 도모하는 권세가의 수많은 사노나 차인들처럼 최형기가 한양

인근의 저자에 정탐 기찰꾼을 하얗게 풀어두고, 일일이 참견하는 데엔 매우 고깝게 생각하

고 있던 터였다. 어구나 그가 겨우 아전의 자식이란 소문은 못내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대장 댁 차인 태복은 그 길로 삼남서 올라온 봉물 두어 짐을 나귀에 실어 보내고 오랜

만에 대장을 뵈러 남문 밖 잰배로 올라갔다. 이미 신여철은 퇴청하여 집에 와 있었고 두엇

의 방문객과 한담중이었다.. 태복이는 퇴청 밖에 읍하여 현신을 아뢰었다.

"아니... 너 오랜만이로구나. 좀 들어오너라."

신여철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 퇴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반가워하였다.

"그래, 서강에서 지나기는 어떡하냐?"

"사또 덕분에 늘 편히 지냅니다."

"오늘도 말짐이 두 바리나 왔더구나."

", 전라도와 통제영에서 왔습니다."

"음 시절이 이러한데 검박하게 하지 않구... 자네들두 알아두게. 우리 차인으루 있는 임서

방일세."

신여철은 두 무변에게 태복이를 눈짓하여 보였다. 태복이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선전관

이란 자와 선달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또, 실은 긴히 드릴 말씀이..."

별반 볼일 없이 무턱대고 끼여 있을 자리도 아닌데, 더욱이 그냥 일어설 수도 없어 태복

은 우물쭈물 떠보았다. 신여철은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알겠다. 이따 다시 부를 테니 나가 있거라."

"아니, 뭐 그러실 게 없습니다. 저희가 일어서지요."

무변들은 눈치를 채고 스스로들 일어났다.

"그러니까 제 말씀은 이인하만이 대장이 아니란 걸 영감께서 알려주셔야 됩네다."

"내 자네들 심정을 자세히 살펴 알았네."

아마도 그들 무인들은 이인하에 대한 무슨 불평을 털어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여철은

별로 좋은 기색이 아니었다. 손님들이 돌아간 뒤에 신여철은 피로한 듯이 안석에 길게 기대

어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이냐?"

"소인이 어제 동문 밖으로 일을 보러 나갔다가 이런 물건을 주웠습니다."

하면서 택복은 품안에 지녔던 좁다란 종이함을 꺼내었다. 신여철은 무심하게 집어다가 열

어보더니 과연 감탄하며 단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뒤늦게 말하였다.

"길에서 주운 물건이라면 임자를 찾아주어야지."

태복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럴까 하였으나 물건의 사연을 알아두는 것도 또한 기찰이라..."

신여철이 짙은 눈썹을 크게 움직였다. 그는 벌써 편지를 집어들고 있었다. 포도종사관 최

형기의 이름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신여철은 부리나케 알맹이를 꺼내들고 읽어가는데 차츰

눈빛이 달라지고 있었다.

"동문 밖이라면 광남의 집이 영미동일 텐데."

신여철은 편지에서 잠깐 눈을 떼고 중얼거렸다.

"바로 그렇습니다. 소인이 눈치로 알고 직접 사또께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지요."

신여철은 편지를 책상 위에 쾅, 하며 내리눌렀다.

"이런 천하에 간사한 것들. 제 아비가 일찍이 죄없는 자들을 무고하여 어육을 만들어놓고

는 이제 도적들의 무리까지 쟁론에 끼여들도록 하려는구나. 더구나 최형기는 일개 종사롼으

로 앉아 제 상관을 속이고 이런 물건을 받는다니... 여지껏 김익훈과 깊은 내왕이 있었으면

서 겉으로는 처세를 위하여 절연한 듯이 행세하였구나. 이것들이 이런 연고로 난민들을 요

란하게 잡아들이고 그 난리였군."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태복이 좌불안석이다가 이마를 조아리고 나오려니 신여철이 제지하였다.

"가만있거라. 살펴보니 이 물건은 자웅이 있을 것이다."

", 시정 장사치들이 얼핏 단검을 보고는 동래 물건이라 하옵디다. 왜의 방물이온데 짝이

있다 합니다."

신여철은 다시 단검을 살펴보았다.

"하나는 빠트리고 하나는 최형기에게 갔을 터이다."

태복이 거들었다.

"아마도 심부름하는 아랫것이 위로부터 꾸중을 들을까 하여 하나만을 전하고 모른 체하구

있겠지요."

"물러가 있거라. 수고하였다."

신여철은 혼자 앉아서 단검을 빼어 촛불빛에 날을 세워보기도 하고 다시 편지를 읽어보기

도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였다. 이인하를 난처하게 할 물증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익훈

의 세력이 조정에 노론으로 남아 있는 한 이런 따위의 하급 무장에게 보낸 선사품을 들어서

공개하여 이러쿵저러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우선 병판에게 은밀히 얘

기하고 나서 이인하에게 충언하는 듯이 찔러줄 생각이었다. 아마도 소론에 가담한 이인하는

부하의 배신에 대하여 펄펄 뛸 것이었다. 그는 의관 정제하고 하인을 불러 사방등을 켜고

앞서도록 하였다.

신여철은 내디딘 김에 아예 병판 댁을 다녀오려는 생각이었다.

태복에게 일러 보내고 나서 모신은 다른 함에다 나머지 단검을 넣고 아무런 명함도 넣지

않고는 제 집 차인에게 내주며 말하였다.

"너 배오개 좀 다녀오너라. 거기 가서 누렁다리 못미처서 최종사 댁이 어디인가 물어라."

차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왜 이러우. 누굴 날고기인 줄 아슈, 범의 아가리에 집어놓으려구 하게."

"허 그 자식, 내 손가락을 거기다 넣으면 나는 안 아프고 시원하겠냐. 아직 그자가 퇴정하

지도 않았을 테고 너는 선사품만 전하면 되는 게야. 이걸 문간에 들이밀고 배오개 장사치

모대인이 마음으로 감사하여 드린다구 주접을 떨면 아무 일도 없다."

"알겠수. 또 무슨 여우잡이 꾸미시는구려."

차인은 달려나왔다. 모신은 상대편이 모르는 수로 장기말을 살짝 놓고 나서 마음을 졸이

고 있는 장기꾼과도 같았다. 그리고 내일은 사지니가 형조의 서린방 전옥서에 넘어가기 전

에 말 몇가지를 배워주러 포청으로 나갈 작정이었다.

이튿날 황혼녘에 퇴청 시각이 다 되어서 모신이는 반합을 챙겨 차인에게 짊어지우고 성내

로 들어갔다. 정선방 좌포청으로 가는 것이니 산지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철물교에서 파자교, 배오개까지 장사군과 가가들이 즐비한데, 특히 파자교에서 좌포청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좌고행상들이 많았다. 시절을 탄라고 술이 없을 뿐이요, 떡전과 여러가지

허드레 음식을 파는 이들이 많았다.

하루에 두 번씩 개청 전과 퇴청 뒤를 가려서 포청 옥에 갇힌 자들의 가족들이 드나들며

옥바라지를 하는데, 인근의 주막에 묵으면서 밥붙이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 아예 장사꾼으

로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남쪽에 정문이 있으니 삼문이 엄정하였으며, 장창을 비껴든 포졸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고 동북에 측문이 있는데 거기가 옥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밥때가 시작이 되자 비좁은 골목에 그 식구를 면회하려는 사람들이 제각기 밥그릇이며 쟁

반을 받쳐들고 모여들었고, 옥졸이 지켜 서서 출입하는 자들의 음식을 살피고 몸을 수색한

다음에 안으로 들여보냈다.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다른 옥졸이 죄인명부와 대조하여 목패를

내주게 되어 있었다. 그 목패를 받아가지고 다시 옥 마당으로 들어가는 샛문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치옥의 절차를 다 알고 있는 모신은 섣불리 석산진과 수작을 나누지 않고 틈을 엿

볼 작정이었다. 그와 차인이 줄 앞으로 나갔는데 옥졸이 섰다가 모신을 지적하여 물었다.

"당신은 어찌 맨손으로 들어가려오. 음식 가진 이 한 사람밖에는 들어갈 수 없소."

모신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춤에서 돈을 꺼내어 슬그머니 옥졸의 손에 쥐어주며 말하

였다.

"꿈자리가 어수선하여 얼굴이라도 보려는 거요."

옥졸은 모르는 척 받아 넣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이었다.

이럭저럭 안의 샛문 앞에 이르니 죄인 명부를 가진 옥졸이 일일이 죄인의 이름을 대게 하

고는 점고를 하고, 목패를 내주는 것이었다.

모신이는 의생이 저승문 지나듯이 또한 돈을 준비하여 옥졸에게 쥐여주며 우물쭈물하였

.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잊었는데..."

옥졸은 일변 돈을 챙겨 넣으면서 기가 막힌지 턱짓을 하였다.

"허허, 이런 세상에 면회하려는 자의 이름도 모르다니 말이 되오."

내가 고향을 떠날 때 누구의 부탁을 받았기에 인정상 지나칠 수가 없어 한번 들여다보고

가려는 게요."

", 찾아보슈."

"가만있자, 이앤가... 저앤가."

모신이는 옥졸이 내민 명부를 이리저리 제치려고 하는데, 뒤에는 사람이 밀렸다. 옥졸이

이미 돈을 받았는지라 그냥 목패를 내주며 말하였다.

"들어가서 직접 찾아보구려."

"어이구, 고맙소."

이렇게 하여 안으로 들어서니 길게 감옥의 칸살이 마당 앞으로 연이어 있는데, 칸마다 무

장한 옥졸이 한사람씩 지켜 서서 죄인과 가족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제각기 칸살

앞으로 다가서서 이름을 부르며 밥을 안으로 들이미는 것이었다. 모신은 뒷전에 그릇을 기

다리는 가족들 틈에 기여 쭈그리고 앉아 있었고, 차인이 칸살 앞으로 기웃거리며 산지니를

찾아다녔다. 두어 칸을 돌아다니더니 차인이 뒤를 돌아보았고, 모신이는 바삐 칸살 앞으로

다가섰다.

칸살 앞에는 죄수 넷이 나란히 붙어 앉았고 모두들 밥을 떠넣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아낙

네 두 사람과 처녀와 사내가 제각기 뭐라고 연신 얘기를 붙이는 중이었다.

"어디 있나?"

모신이 재빨리 죄수들을 훑었으나 한결같이 산발에 홑저고리 차림인지라 분간을 못하여

물으니 차인이 말하였다.

"저두 모르겠수. 저쪽에서 물으니 석산진이 이 칸에 있답니다."

모신이 구부정하고서 옥졸들이 듣지 못하도록 나직하게 물었다.

"산지니 여기 있나?"

"누구슈?"

가운데에서 한 죄수가 대꾸하였고 그 앞에 앉았던 아낙네도 함게 돌아다보았다.

"날세, 서강 모성방일세."

모신이가 그 앞으로 다가들어 손을 내밀자 산지니는 덥석 잡아쥐며 부르짖었다.

"어이구 성님이 웬일이우. 달근이 성님두 함께 왔는가요?"

"아니, 나 혼자 왔네. 자네를 구명해볼까 하여 밖에서는 안달이 났다네."

앞에서 옥바라지를 하던 아낙네는 일찍이 아이들을 친정에 맡겨두고 널다리를 떠나왔던

석씨였다. 석씨는 낯선 중치막 차림의 갓 쓴 사내가 동생을 구명한다는 말을 하니 귀가 번

쩍 뜨이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어찌 구명할 방도가 있는가요?"

"우리 누님입니다."

모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가 이러하여 예가 아니올시다. 마침 자씨를 만나뵈었으니, 내가 긴 말은 않고 나중에

자세히 알려드리지요."하고 나서 모신이 산지니에게 가장 긴요한 점부터 물었다.

"언제 결안이 되며 어느날 형조로 넘어가는지 알구 있나?"

"새달에 넘어가게 됩니다."

", 며칠 안 남았군."

모신의 어투가 꼭 풀려날 날이 며칠 안 남았다는 뜻으로 새겨겼는지 산지니는 그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나가서 어서 큰 일을 해야지요."

그러나 모신이는 일어나면서 그 잡힌 손을 슬쩍 빼내며 중얼거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의기를 읽어서는 안되네. 내가 나중에 자씨께 이를 터이니 곰곰 생각

하여보고 꼭 시행하도록 하게나."

"염려 마우. 나는 입을 바위처럼 다물고 한마디두 내뱉지 않았수."

모신이는 일어나 칸살 앞을 떠나면서 그렇게 속삭이는 산지니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후

비는 듯하였다. 그렇지만 의논대로 산지니는 검계의 안전을 위하여 속참되어야 하였다. 또한

그의 죽음과 더불어 최형기를 몰아낼 수 있다면 종내에는 그가 이기는 길이 될 것이었다.

모신이 일어서서 감옥 마당을 나오니 잠시 후에 석씨가 쫓아나왔다. 그들은 포청의 옆문을

돌아서 파자요 쪽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일부러 제 동생을 찾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구명할 바도가 있으시다면 가르

쳐주세요. 무슨 일이든지 하겠어요."

석씨는 모신에게 애원하였다.

"어디다 사처를 정하셨나요?"

모신이 물으니 석씨가 앞장을 섰다.

"바로 요 앞이어요. 방을 한칸 얻어 들었지요."

석씨가 밥을 붙이는 집은 떡전이었다. 뚱뚱한 과수댁이 혼자서 중노미 노릇까지 해가며

손님을 맞고 있었다. 대문 옆 안반에 떡시루가 놓였고 국이 큰 쇠솥에서 걸죽하니 끓고 있

었다. 석씨가 빈그릇을 개숫물 항아리 옆에다 내놓으니 주인 과수댁이 와서 들여다보녀 말

을 보태었다.

"에그, 오늘은 어쩐 일로 밥을 남겼구려."

", 손님들이 별찬을 해오셔서..."

모신이와 차인은 먼저 방에 들어가 앉았고 모신이 청하여 인절미를 내오게 하였다. 계피

를 섞은 팥고물에 콩고물에 버무린 큼직한 인절미 몇 개와 국과 침재 보시기가 올라왔다.

그들이 먹고 있는데 석씨가 윗목에 와서 쭈그리고 앉았다. 모신이가 황급히 몸을 도사리더

니 앉은 채로 넓죽이 절을 하였고 석씨도 마주 인사를 나누었다.

"저는 경강서 장사하는 모성방이란 사람이올시다. 송파 장거리서 산지니를 사귀게 되어

아우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을 죄로 포청에 떨어진 아이를 찾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게는 산지니가

유일한 혈육이지요. 그애가 필시 나쁜 사람들의 꾀임에 바져 흉악한 계에 들었는지는 몰라

도 이것이 고향 널다리서 저 때문에 일어난 일입지요. 검계의 혈당이란 죄만 벗는다면 어찌

구명이 될 길도 있을 것 같아요."

모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기로는 검계는 흉당이 아니올시다. 나라를 망치는 간흉들을 제거하고자 몰려난

대감들이 아랫것들을 묶어주었지요. 그분들게 구명을 호소하면 이제 와서 모른 척하지는 않

을 것입니다. 형조롤 넘어가기 전에 목내선 박신규 대감과 병판 남구만, 공판 정윤, 예판 남

용익 등의 이름을 대라 하십시오. 저들이 계를 옹호하던 이들이니 필시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외다. 시방 저자에는 모두 소문이 돌아서 살주계란 남인 댁의 천예들이 몰락한 저의 상

전들 원수를 갚으려 모인 계이며, 검계는 소론과 깊은 관련이 있어 광남군 김익훈을 잡아

죽이려 하여 두 계의 이루려는 바가 같아서 상호 교류한다 합디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 산지니만 억울하게 잡혀 죽는 게 아닙니까. 양반들이 서로 물고 뜯

는데 왜 우리 같은 약한 백성들이 치어 죽을 까닭이 있겠어요."

모신이는 시치미를 떼고 꾸며댔다.

"물론이지요. 내일 아침에 옥에 가시거든 내가 그러더라면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서는 양반들의 이름을 대라 하십시오."

모신이는 석씨가 완전히 그들의 이름을 욀 때까지 여러번 반복해서 가르쳐주었다.

"저는 높은 양반 나으리 댁을 찾아가서 산지니의 구명을 하소하겠어요. 어느 댁이 합당하

겠습니까?"

석씨의 물음에 모신이는 한동안 망설이며 대답을 못하였다. 그는 속으로 이리저리 따져본

뒤에 말하였다.

"한성판윤 박신규 댁이나 우포도대장 신여철 댁에 가서 하소해보십시오. 그러나 산지니가

결안이 되어 형조로 넘어간 뒤에 하셔야지 그전에 도모하셨다간 일을 그르치기가 쉽습니

."

"잘 알겠어요. 이렇게 여러 가지로 도와주시니 산지니가 구명만 된다면 머리로 신이라도

삼겠습니다."

모신이는 일어서기 전에 옥바라지하는 데 보태어 쓰시라며 서른 냥을 내놓고는 떡집을 나

왔다. 최형기는 등청하였을 때 구군복의 겨드랑이에 호사스런 은장식의 단검을 차고 있었다.

포청에 들어가니 만나는 부장들마다 물건을 알아보고 한마디씩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그게 왜도가 아닙니까?"

"배오개 장사치가 보내준 모양인데 아주 명품일세."

최형기는 칼을 뽑아서 예리한 칼날을 보여주며 자랑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무장인지라 역

시 칼이나 활의 명품에는 어린아이처럼 반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물건은 필시 장웅이 있을 터인데요."

어느 부장이 아는 체를 하였고, 최형기도 수긍은 하였다.

"글쎄 내게는 한 자루만 보내왔데."

그가 집에 돌아갔을 때 아내가 자줏빛 종이함을 내주며 배오개에서 장사한다는 이가 보냈

다는 것이었다. 대개 시정배들이 종사관이나 부장포교들의 집으로 소소한 선사품들을 보내

는 일이 다반사인데, 아무 명자도 없이 들이밀었다가 나중에 직접 현신하여 청탁거리를 꺼

내게 마련이었다. 최형기는 그저 그러한 물건이려니만 믿었다. 청탁이야 대부분 시정의 껄렁

한 쟁송이나 금령을 어기고 장형을 치르게 된 일 따위였으므로 가벼이 처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매품 파는 자를 사게 한다든지 속전을 내게 한다든지 좌우간 별로이 골치를 썩일

일이 없었으므로 최형기는 가벼운 마음으로 선사품을 대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보고 나서는

아무 의심도 없이 차고 나올 생각을 하였다. 어쨌든지 최형기가 은장식의 호사스런 왜단검

을 차고 있는 것을 포청의 누구나가 보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장 이인하도 조례시에 그

것을 보고는 일부러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빼어 살피기까지 하였었다. 그리고 이틀이나

되었을까. 좌포장 이인하가 퇴청하여 저녁상을 막 물린 참인데 하인이 들어와 병판 댁에서

좀 들어소시라는 전갈이 왔다는 것이었다. 이인하는 대번 긴장하였다. 늘상 있는 국사라면

낮에 관청을 통하여 내왕이 있겠거늘 병판이 일부러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어 집으로 오라는

것은 예사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인하는 도포에 갓을 쓰고 등불 들린 아이를 앞세워

남구만의 집으로 갔다. 이인하와 남구만은 일찍이 무고자들을 죄주자는 주장에서부터 근래

의 태조 존호 추상의 쟁론에 이르기까지 의견을 같이하였던 소론의 한파였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 처세에 관한 한 이견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이인하가 사랑으로 들어가니 병조판서 남

구만은 안색이 침통하였다.

"이대장, 이런 물건을 보신 적이 있소?"

남구만이 자줏빛 종이함을 내주었고, 이인하는 뚜껑을 열어 단검을 꺼내었다. 그는 짚이는

데가 있어 단검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내려 놓으며 반문하였다.

"무슨 사연이라두 있는 물건입니까?"

"처음 보는 거요?"

이인하는 망설였다.

"글쎄요... 꼭 이와 같은 것인지는 몰라도 본 듯합니다."

남구만은 침착하게 말하였다.

"경신년의 출척 이후로 훈척들의 기세가 끝간 데를 모르더니, 이제 김익훈의 잔여 세력을

조심해야 합니다. 청성도 없고 광남이 권좌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우암이 두호하고 있소이

. 이런 때일수록 정사에 맑고 바른 법도를 잃어서는 안되지요."

이인하는 차츰 당황하였다.

"제 수하에 있는 종사관 최모가 이러한 단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본 듯하온데 무슨 까닭이

라도 있는 물건인지요?"

남구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갑에서 편지를 꺼내어 내밀었다. 읽어나가는 중에 이인하

의 안색은 변하였고 드디어 수염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이런 쥐새끼 같은 것들... 이놈들이 무고로 여러 사람의 피를 보이더니 이제는 난민

들의 일까지 우리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다니!"

남구만이 말하였다.

"이런 일로 조정에 거론하여 갑론을박할 수는 없고, 일단 최모를 형조로 잡아들여 은밀히

심문한 뒤에 파직시켜야 할 겁니다. 잡초는 싹부터 뽑아내야 후환이 없지요."

"이게 사실일까요?"

냉정을 회복했는지 이인하는 다시 차분하게 편지를 펴들어 되씹었다.

"신대장네 차인이라는 자가 동문 밖에서 우연히 습득하였답니다. 신대장도 들르라고 사람

을 보냈으니 곧 당도하겠지요.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이 편지가 사단이 되어서는 낭패입

니다. 난민들의 일로 조정에 구설이 오르내려서는 안됩니다."

남구만의 그러한 의견에는 이인하도 동감이었다. 다구나 자신의 부하가 아닌가. 최형기가

익훈의 문하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구설의 발

단은 충분히 되고도 남음이 있는 때였다.

"최모는 영민한 자입니다. 그자가 김익훈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섣불

리 하는 것보다 제가 은밀히 캐고 나서 사직을 권유하도록 하지요. 저희 포청 내에서 처리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난민들의 옥송은 어찌되었소?"

"잡힌 자들은 죄질이 드러나 거의 결안이 되었습니다만, 잔당들이 많을 것이라 국문을 늦

추고 있습니다."

남구만은 침통하게 말하였다.

"기왕에 이런 일이 있고 보니 매우 복잡하게 되겠소이다. 이대장이 친히 국문을 마쳐서

속참하는 게 좋겠소."

"내일 형조로 넘기겠습니다."

그들이 얘기하는 중에 신여철이 들어왔고, 신여철과 이인하는 서로 이번 일에 대하여 신

중히 처신하기로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저는 처음부터 난민들의 옥송을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만약에 이것이 조정에까

지 번져 권세 다툼이나 쟁론의 거리가 된다면 공연히 죽을 쑤어 개를 주는 결과가 되고 말

겠지요. 옥송은 이것으로 속히 결안이 되어야 할 겝니다. 때가 좋지를 않소이다."

"신대장에게 이 물건이 들어온 것이 천만다행이오. 이번 일은 우리끼리만 아는 것으로 합

시다."

병판 댁을 물러나오며 이인하는 한숨을 돌렸다. 일이 이쯤 되면 종사관 하나 면직시키는

일로써는 새삼 다행스러웠다. 필시 노론이나 김익훈 주변의 장난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러나 애초에 사단의 근거가 될 만한 것부터 송두리째 제거해버린다면 달리 손을 쓰지도 못

할 것이었다. 도대체 종사관 따위의 일로 전정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인하는 다음날 등청하자마자 최형기를 불러들였다. 최형기는 여전히 단검을 구군복 위

에 차고 있었고, 이인하는 짐짓 불쾌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최형기를 노려보았다.

"솔개는 매 편이라더니 자네가 그럴 수가 있는가?"

이인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최형기를 노려보았다. 노형기는 영문을 몰라서 그저 머리

만 조아릴 뿐이었다.

"소장이 우졸하여 무슨 잘못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네 요즈음도 영미동에 드나든다면서?"

최형기는 이인하의 입에서 영미동이 떨어지자마자 불현듯 김익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김익훈의 권세가 날로 충천할 무렵에 주위의 무변들에게 자기가 어째서

그 문하를 떠나는가를 명백히 알리고 발을 끊었던 터였다. 그의 안하무인의 처세가 위태로

원 보였고 벼슬아치들의 미움을 받고 있었음을 눈치챘던 것이었다. 이제 새삼스럽게 그가

김익훈의 문하 식객이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면 너무도 억울한 노

릇이었다.

"소장은 경신년 이래로 광남군 댁에 발길을 돌린 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 댁 사위를 혼내

주고 총애를 잃어 스스로 물러나오게 된 경위를 대장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이인하는 최형기의 허리에 달린 단검을 움켜쥐어 뜯어냈다.

"이건 어디서 났는가. 공연히 소문에 오르내려가지고 어찌 한미한 처지의 관리가 스스로

몸을 일으키겠는가."

최형기는 실로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저두 잘 모릅니다. 제가 누렁다리에 살고 있는데 배오개의 장사치들이 가끔 소소한 물건

을 보내우기도 합니다. 이 단검도 그런 장사치 중의 누구인가가 보내어 아무 생각 없이 받

아두고 있을 뿐입니다."

최형기는 원망의 눈을 들어 이인하를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무슨 연고로 이러시는지 말씀하여주옵소서. 느닷없이 광남군과 저의 일은 왜 말씀하시며,

또한 단검의 출처를 물으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인하는 처음보다 훨씬 누그러진 태도로 변하였다.

"요즈음 소문이 나돌기를 익훈이 환국을 꾀하여 젊은 무변들과 선비들을 수하로 끌어들이

고 있다는데, 그 칼은 익훈의 아들 김만채가 보낸 것이 분명하네. 자네가 알고 받았거나 모

르고 받았거나 남의 구설에 오르내리는 것은 모면하기가 어렵게 되었어."

"저는 전혀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모함이 틀림없습니다."

이인하는 못마땅한 얼굴로 돌아앉았다가 훨씬 부드럽게 말을 꺼내었다.

"병판께서도 알고 계시네. 자네와 익훈에 관한 소문으로 내가 얼마나 난처한 입장이 되었

는가를 자네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네."

"전혀 이것은 모함이올시다."

"가만... 모함이든 아니든... 일이 이쯤 되고 보면 자네와 내가 함께 포청을 지키고 눌러 있

을 수는 없는 일이야. 나는 병판께 물러날 뜻을 벌써 아뢰었네."

최형기는 스스로 고개를 내젓고 나서 결연히 말하였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사직을 하지요. 그렇지만 이런 소문의 진원은 제가 끝내 캐

내구 말겠습니다."

"시방 때가 매우 좋지 않네. 자네가 근신하여 잠시 물러가 있겠다면 나중에 병판께서도

통제영이나 훈련원 쪽으로 도목에 올리시겠다더군. 난민의 건을 결안이나 해놓고 잠시 동안

물러가 쉬도록 하게나."

"난민의 건을 아직 결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 잔당이 성내에 무수히 있다는 것이 밝혀졌

, 국본을 흔드는 중대한 일이거늘 어찌 소홀하게 다루어 그르치겠습니까."

이인하는 눈을 부릅떴다.

"나는 그래두 자네의 총명과 충직함을 믿고 있었으니 어찌 그리도 답답한 소리만 하는가.

지금 정국이 임술 고변 이래로 평지풍파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어육이 되고, 관리로서 높

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바늘로 된 침석에서 뜬눈으로 새우는 판이 아닌가, 난민들의

작당을 저희들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노리는 자들이 있는데, 그 일을 들쑤

셔서 다시 풍파를 일으킨다면 조정은 쑥밭이 되고 마는 게야. 요즘 같은 세월에는 만사 평

안한 것이 상책일세. 무장으로서 잘못 정국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가는 몸을 망치고 목숨을

잃어두 싼 게야."

최형기는 정국이라는 소리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실로 그것은 아무도 가늠할 수가 없었

, 더구나 조정 궁궐의 일은 그와 같은 한미한 무변에게는 너무도 까마득하고 종잡을 수

없는 곳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소장이 어리석어서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습니다. 상장께서 이르시는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내일 당장 결안하여 형조롤 넘긴 다음에 저도 물러가 쉬겠습니다."

최형기는 이제는 완전히 고분고분해졌다. 이인하는 그가 자기 처신을 내놓고 맡기려는 기

색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잘 생각하였네. 병판께서도 한시름 놓으실 걸세. 이런 일로 자네가 쟁론의 주역으로 사람

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가는 구만리 같은 자네의 환도 전정은 어찌할 것인가. 병판께서 잘 알

아 처리하실 것이니, 김익훈이 무고의 죄를 받고 완전히 물러나갈 때까지 지방에 내려가 있

도록 하는 것두 현명한 처세가 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최형기가 머리를 조아리고 동헌에서 나오려는데 이대장은 다시 그를 불렀다.

"이걸 잊었군. 가져가게."

이인하는 단검을 내밀어주었다. 최형기는 묵묵히 되돌려받았다. 이인하가 다짐을 하였다.

"이 일은... 자네와 나밖에는 모르는 일일세."

"알겠습니다."

최형기는 참담한 마음으로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그는 살주계 계원들과 검계의

혈당으로 판명된 산지니들을 차례로 심문하였는데 여태껏 묻고 기록하였던 사실을 재확인하

는 데 지나지 않았다. 산지니의 차례가 되어 그가 옥에서 끌려나와 마당에 꿇어앉았는데 어

쩐지 산지니의 태도가 전과 달랐다. 전에는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딴전을 피우거나 빈정대

는 투였는데 훨씬 겸손하고 얌전해진 듯하였다. 그뿐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며 포도대장의 임석을 청하는 것이었다.

"말해보라. 아무래도 대장께서는 알게 되실 일이라, 말하는 대로 기록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하였으나 죄인은 끝내 대장의 임석을 요구하며 중대한 사실을 밝히겠다는 것이었다. 결안

이나 대강 해놓고 물러가려는 최형기로서는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으로 전갈이 가

고 이인하가 친히 나와서 마루 위의 승창에 걸터앉았다.

"그래, 네가 말하고 싶다는 게 무어이냐? 만약에 잔당을 새로 이끌어내는 일이라면 죽음

은 면하게 될 것이다."

이인하가 곁에 서 있는 최형기를 슬그머니 돌아다보며 말하였다. 그때 산지니의 마음속에

는 일진광풍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누님 석씨를 통하여 그가 전갈을 받았을 때 스스로

깨달은 바가 많았다. 모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감옥에까지 찾아왔던 것은 자기를 구명하기

위한 것이 아닌 듯하였다. 연루된 벼슬아치들의 성명을 듣고서 산지니는 그의 동무들이 자

신의 죽음을 하루라도 바삐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자신이 벼슬아치의 이름을

대면 별 고통 없이 속참되리라는 것은 분명하였다. 모신이 하는 버릇이라면 서강의 토박이

장물아치로서 관가나 조정에서 흘러나온 모든 소문을 들어 모아놓을 수가 있었다. 그가 시

키는 대로 한다면 계는 안전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누님 석씨의 애절한 모습은 차마 대할 도리가 없었다. 석씨는 그대로만 바로 대면

곧 풀려나가게 되리라고 믿고는 옷도 새로 짓고 몸이 쇠약해져 걸음도 걸을 수 없겠다며 세

마도 한필 내어두련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만약에 광주 검계의 소굴인 천마산 솔부리나 또

는 양주 파주지간의 혈당들에 대하여 입을 열면 목숨 하나 살아나는 것은 문제가 아닐 테

, 오히려 상을 받은 뒤에 고작 유배 몇천 리나 받게 될 것이었다. 한껏 원찬 삼수갑산으로

떨어지고 보면 호초 이불에 해송자죽을 마시고 백두산 사슴포와 압록강 한천어회로 입맛을

돋우며 지낼 것이다. 그러다가 왕세자 탄신이나 나라의 경사가 생겨서 팔도사도에 대사령이

내리면 금계방환이겠지. 누님과 조카들을 데리고 상급으로 집안을 일으켜 한 말 뿌려 석 섬

나는 기름진 옥토를 장만할 것이다.

, 산다는 것은 얼마나 즐겁고 좋은 일인가.

"별로 할 말이 없으면 결안을 하겠다."

"저 잠깐! 제가 모두 이르겠습니다."

산지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앞에서 석씨와 조카들의 모습이 사라져갔다.

산지니는 그가 돌곶이 주막에서 잡힐 적에 굳게 결심했던 바를 새로이 떠올렸다. 고기값

이란, 자신을 버려 그의 뜻이 닿아 있는 혈당들이 보존된다면 실로 허무한 죽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째서 그는 처음에 결심했던 생각을 흩트리게 되었는지 돌이켜보았다. 그것은 석씨가 나

타나 새로운 삶에 대한 욕망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었다. 산지니는 자신의 손에 죽은 살주

계의 배신자 억기를 생각하였다. 얼마나 목숨이 더러운 것이라고 느껴졌던가.

"우리 계는 경신년 이후의 훈척들이 정사를 그르쳐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대감들께서 아

랫것들을 묶어주어 생겨난 혈당들입니다."

곁에 앉아 기록하고 있던 서리가 눈을 휘둥그래 뜨면서 이인하를 올려다보았다.

"네 말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아느냐? 만약에 그것이 거짓이라면 너는 사차에 달려 찢긴

."

이인하도 긴장하여 추상같이 엄포를 놓았으나, 산지니는 태연자약 거칠 것이 없었다.

"본시 살주계는 경신에 남인들이 몰려나 죽을 적에 그쪽의 댁에서 밥을 먹던 천예들이 억

울한 상전의 원수를 갚고자 모인 것입니다. 또한 검계는 임술 고변 때에 억울하게 잡혀 죽

거나 귀양간 성내 무사들과 한량들이 김익훈을 잡아 죽이고 그들 일파를 몰아내려고 작당한

무리들이올시다. 그래서 살주계나 검계는 모두 노론의 당과 고변에 가담했던 자들을 죽이려

합니다."

곁에 있던 최형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카롭게 산지니를 내려다보며 쑤시고 들어왔다.

"네 따위들은 시정에서 한갖 골패나 주무르고 탁배기나 마시던 부류들이다. 너 같은 상것

들이 경신 출척은 다 무엇이며 또한 임술 고변이 무슨 상관이냐. 누구의 사주를 받아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 입을 열게 하리라. 여봐라, 화로와 인두를 대령하라."

그러나 산지니는 껄걸 웃었다.

"나는 기왕에 죽은 몸이오. 내가 조정의 큰 의혹을 담은 채로 죽어 버렸다면 목이 제자리

에 붙어 있겠소이까. 어서 나를 의금부로 넘기시우. 어디 양반 벼슬아치와 상것은 역적의 형

이 다른가 한번 겪어봅시다."

", 저런..."

이인하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산지니는 다시 껄껄 웃었다. 이인하가 무슨 생각을 하였

는지 최형기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저것의 말이 심히 해괴하고 무엄하다. 국가의 기밀을 함부로 누설하여서는 안되니 내가

친국할 것이다. 종사관 이하 모두 나가 있도록 하여라. 그리고 부장은 국문의 진행을 위하여

한 사람만 남아 있거라."

최형기와 삼엄하게 마당에 벌여 서 있던 포교 포졸들이 모두 중문밖으로 몰려나갔고,

인하 포도대장과 기록하는 서리와 부장포교 한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이인하는 그의 짐작대

로 이들이 누구인가 권력가의 은밀한 손가락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

. 어느 쪽이F. 만약에 자기네를 끌어들인다면 이것은 분명히 훈척 일파나 노론의 함정

일지도 몰랐다.

"이제 좌우를 물리쳤고, 악형도 받지 않을 것이다. 내게 모든 것을 말하면 너는 사형을 모

면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를 위하여 일해줄 수도 있느니라."

산지니는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나으리와 소인만이 있는데 더 무엇을 주저하리까. 저는 나으리를 위하여 목숨을 던

져버릴 결심이 되어 있는 몸입니다."

이인하는 초조하여 기록하고 있는 서리를 흘끗 돌아보았다.

"어서 말해보라."

"아까 아뢴 바와 같이 본시 살주계와 연줄을 맺고 있는 사람은 중추부 목내선 대감과 판

윤 박신규 대감 등입니다. 그리고 저희 검계와 닿아 있는 분은 병조판서 남구만 대감, 공조

판서 정윤 대감, 예조판서 남용익 대감 등입니다. 이런 일은 한양서 제법 조정 소식에 밝다

하는 자들은 모두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이놈, 누가 그따위 거짓말을 지어내라고 시키더냐?"

"저두 모릅니다. 다만 계에 들어갈 때 어느 혈당이 귀띔해주어 알고 있을 뿐입니다. 직접

그분들께 여쭈어보시지요."

이인하는 어찌해야 될지 난감하였다. 산지니의 입에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이인하와 동류

로서 정견을 같이하고 훈척과 노론을 배척하는 열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면 그 무서운 불기가 자기의 코앞에까지 닥칠 것이다. 함께 있던 부장

포교가 뭐라고 이인하에게 속삭였고 이인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놈, 목내선 대감이 살주계와 닿아 있다면서 어찌하여 그 어른이 친히 가노를 적당

이라 하여 잡아 죽였겠느냐?"

산지니는 막힘이 없었다.

", 그것은 이러하옵니다. 본시 상전 나으리들께서는 못된 양반만을 골라내어 하늘을 대

신하여 벌주자 하였으나, 천예들인지라 군율이 서지 않아 지사 이모의 집을 습격하여 재물

을 탈취하였기 때문에, 상전들이 위험을 느끼고 미리 방비한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목내선

대감은 가노를 포도청에 넘기지 않고 친히 목매달아 가로에 전시하여 엄벌하였음을 성내에

알렸습니다."

그도 그럴 듯한 말이라 이인하는 차츰 난처해졌다. 만약 이자가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게

되어 이런 소리들이 나간다면, 그들 동당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엄중한 문초를 피할 길이 없

게 될 것이었다. 실로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판이었다.

"그러면 너희 검계에서는 흥인문 밖에서 시골로 내려가는 양반들의 이삿짐을 털고 인명을

상해하였는데 그런 짓도 병판이나 공판, 예판 대감들이 시켰단 말이냐?"

",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일단 고변한 무리들과 노론 훈척들을 대상으로 삼았으나,

들에게는 적기를 놓쳤고 거사할 대금은 마련하지 못하여 그저 손에 닿는 대로 탈취한 것이

나으리에게까지 누를 끼쳤습니다."

이인하는 발을 굴렸다.

"발칙한 놈... 이놈, 내가 모른는 계의 작당이 있을 수 있겠으며, 이치로 말하자면 너희들

이 내게는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되겠거늘 내 처가에까지 손을 댄 것으로 보아 너희가 아무

관계 없는 화적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적실하다. 누가 이렇게 진술하라고 사주하였는지

뒤를 대지 못할까."

산지니는 빙긋 웃었다.

"좋습니다. 저희는 대감과 나으리를 위해 말없이 죽겠습니다. 그러나 의금부로 넘어가게

되면 저는 결코 혼자 개죽음당하지 않게 되겠지요."

이인하는 승창에 깊숙이 눌러 앉으며 신음을 발하였다. 잎뒤 이치로 보아 꾸며대는 형국

이 분명하건만, 놈들의 계획은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려는 의도이니 어찌할 방도가 서질

않았다. 또는 자신이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어 그들 대관들 가운데 실제로 연루된 이가 있

다면 그들의 환로는 이미 막혀버릴 뿐만 아니라 환국의 소용돌이가 몰아쳐서 어떤 피비린내

나는 화가 닥칠지 알 수 없었다. 결안을 하여 될 수 있는 한 빨리 처형하는 방법밖에는 없

을 것이었다. 이인하는 말하였다.

"알겠다. 이것은 무장인 내가 알아 처리할 일도 아니고 일단 결안이 되어 형조에서 재차

국문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에 어디서 김만채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는가?"

", 만수라고 송파 장거리서 열립군 하는 자가 있는데 혹시 그 가형이나 되는 자입니

?"

이인하가 단검과 최형기의 일에 생각이 미치어 물었으나, 오히려 신지니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 마치 곁말을 써서 조롱하는 것과도 같았다. 이인하는 민망하여 화도 내지 못하고 승

창에서 일어났다.

"결안을 하여 독칸에 따로이 가두었다가 명일 조례 전에 즉시 형조로 압송하라. 부장이

직접 숙직하면서 포교들로 하여금 차례로 번을 들게 하고 일체 잡인과의 훤화를 엄금시켜

. 당직하는 자들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이자와 함부로 수작하면 태형 백 도롤 처치할 것

이다. 어서 끌어내라."

이인하의 지시에 의하여 포교들이 산지니를 끌고 나갔다. 이인하는 잠시 침통하게 앉아서

생각에 잠기더니 임석하였던 부장에게 말하였다.

"저 자의 말은 대단한 국가의 기밀이라 아무도 누설해서는 안된다. 절대로 머릿속에 새겨

두지 말아라."

부장포교가 머리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종사께서 어찌되었느냐고 물을 것인즉, 소관이 어떻게 대답할 말

이 없나이다."

"최형기는 포청을 떠난다. 기왕에 떠나는 이가 이런 난민들의 일은 알아 무엇하겠느냐.

을 다물고 발설하지 말라는 것은 내 지시이기도 하려니와 병판 대감의 엄중한 분부이시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이인하는 기록하던 서리에게 말하였다.

"어디 죄안을 받아 쓴 것이라면 내가 자세히 살펴보고 없앨 곳은 없애고 첨가할 곳은 다

시 고쳐 쓰도록 할 것이다. 내가 들어가 일러줄 터이니 너는 시행하되 입을 철벽같이 해야

하느니라."

서리도 머리를 조아렸다.

"어느 분부시라고 유념치 않으오리까."

이리하여 석산진은 항쇄 족쇄 차고서 목에는 큰 칼을 쓰고 독칸에 갇혔다.

저녁때가 되어 석씨가 밥을 지어 옥 마당으로 들어갔으나 칸살마다 그의 반기던 얼굴은

보이질 않았다. 한참이나 기다란 옥을 기웃거리며 오르내린던 석씨가 옥리를 서는 포졸에게

물었다.

"우리 동생 석산진이가 어디 있는지 좀 가르쳐주오."

"글세 그런 자가 있었던가."

옥리가 사정에게로 가서 뭐라고 묻더니 하는 말이,

"댁네 동생은 오늘 결안이 나서 독거 수용이 되었다오. 내일부터는 여기 오지 말고 서린

방 형조의 전옥서로 찾아가시우."

석씨에게는 그를 형조로 넘긴다는 말이 어찌나 반가운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훌쩍이며 울

었다.

형조로 넘겨진 것은 이제 산지니가 처형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석

씨로서는, 다만 며칠 전에 찾아왔던 경강 장사치가 귀띔하여준 대로 일의 앞뒤가 척척 맞아

돌아간다고만 여겼던 것이었다. 석씨는 서린방 형조의 전옥서로 찾아가 잡다한 죄수들의 가

족들 틈에 끼여 산지니를 면회코자 하였으나 독거 죄인은 위에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아무

도 만날 수가 없다 하여 음식만을 안으로 들여가게 하였을 뿐이었다.

석씨는 이제부터 산지니의 구명을 하소하러 나설 차례라고 믿고서 이른 아침부터 머리도

감고, 새 무명 치마 저고리를 꺼내어 입었다. 그리고는 온종일을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서성대다가 관리들이 퇴청하였을 즈음을 어림잡아 석씨는 떡점을 나섰다. 그녀의 품속에는

며칠 전부터 이러한 일을 가늠하여 돈 주고 훈장질하는 선비에게서 받아 놓은 원서가 두 통

이나 있었다. 석씨는 광주 동촌에서 자신이 당하였던 억울한 봉변에 대하여 간단히 썼고 뒤

이어 산지니가 한양으로 도망쳐서 검계라는 당에 들었다는데, 사실은 이들이 나라를 망치려

는 간흉들을 제거한다며 조정 대신들이 묶어놓은 무리들이며, 실지로 병판 공판 예판 대감

들이 지시를 내리셨으니, 높고 지엄하신 분들이야 나라를 걱정하고 바로잡으려면 궃은 일이

나 험한 일이나 심지어는 대의명분으로 목숨을 버리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겠으나, 천한 백

성인 석산진은 그런 분들의 명을 받았을 뿐이니 사죄까지 받을 수는 없으니, 엎드려 비옵건

대 잘 굽어살피시고 사실을 알아내어 목숨만은 살려줍시사, 하는 내용의 원서였다. 석씨는

수소문하여 두었던 한성판윤 박신규의 집으로 찾아간다. 판윤의 집이라 여러 층의 내방객들

이 허술청에서 기다리는 참이었다. 석씨는 솟을대문 앞에서 서성대다가 슬그머니 대문간에

있는 허술청으로 들어가려는데, 청지기가 이상스런 행색의 부녀자를 보고는 제지하였다.

"여기가 어딘 줄 알구 함부로 들어오려는 게요?"

"원정할 일이 있어 꼭 나으리를 뵈어야 합니다."

석씨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서 고개를 쳐들고 말하였고 허술청에서 기다리던 사내들이 모

두 눈길을 석씨에게로 모으고 있었다.

"그런 일은 직접 관청으로 가셔야지 이리로 오면 어쩌시려요?"

"아낙의 몸으로 관청 출입을 할 수도 없고,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라 염체 불고하고 찾아

왔습니다."

청지기는 딱딱한 어조로 잘라서 말하였다.

"안되오, 돌아가시우. 지금 이녁이나 만나구 계실 틈이 없으시다구. , 다음 분은 저동 김

참봉이십니다."

지명받은 이가 청지기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데 석씨도 아무말 없이 뒤를 따랐다.

허술청에서 명자를 받던 사동이 어라, 저댁이 미쳤군, 어쩌구 하면서 쫓아나와 석씨의 소매

를 붙잡은 것이 잘못이었다. 석씨는 널다리서도 대가 차기로 알려진 과수댁이라 잘되었다

싶었는지 소매를 뿌리치면서 다짜고짜로 사동의 귀쌈을 보기 좋게 올려붙였다.

"이놈, 남녀가 유별한데 아무리 판윤 댁의 상것이라고 함부로 부녀자의 손목을 잡느냐.

희 상전 나으리께서는 손님들께 그리하라고 가르치더냐?"

석씨의 앙칼진 목소리가 중문 밖에서 낭랑하게 울리는 참이었다.

"허어, 아주 미쳤구먼."

청지기가 돌아보며 혀를 차더니 하인들을 부르는 것이었다. 곧 건장한 하인들이 뛰어나왔

고 청지기가 석씨를 가리키며 떠들었다.

"저 미친년을 밖으로 끌어내라."

하인 셋이 우르르 달려들어 석씨의 몸을 함부로 잡았다.

"네 이놈들, 어디다 손을 대느냐, 놓지 못할까. 판윤 댁에서 가엾은 백성을 이처럼 다루어

도 좋단 말이냐."

석씨는 허공중에 대롱대롱 들려 나가면서 악다구니를 썼다.

"이년아, 이렇게 들어다 던지는 것두 다행으로 알아라. 여기가 어딘 줄 알구 들어와서 행

역질이야. 허옇게 볼기를 까구 엎드려 곤장을 맞구 싶으냐."

사동 녀석이 석씨의 뒷전에 대고 실컷 떠들었다. 석씨는 대문 밖에 던져졌고 문은 굳게

잠겨버렸다. 그녀는 계속하여 문을 두드리며 악을 썼다. 판윤이 이러한 소란을 모를 리가 없

어서 청지기에게 물었고 청지기가 들었던 대로 아뢰었다.

"원정할 일이 있어 찾아왔다지만, 여기가 관사가 아니오라 나중에 그리로 찾아가라 하였

습니다."

박신규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리 그렇지만 내가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로서 저들의 원망을 들어서야 되겠느냐.

어서 들어오게 해라."

"대감마님, 이런 일이 전례가 되면 갖가지 잡색 상것들이 이러저러한 일을 하소한답시고

행패를 놓을 것입니다."

"그때는 또한 따로이 대처하기로 하고 어서 데리구 오너라."

판윤 박신규는 궁금하기도 하였고, 젊은 소복의 아낙네라기에 호기심도 일어났던 것이다.

청지기는 쓸개라도 삼킨 듯한 얼굴이 되어 다시 중문 밖으로 나와 아직도 떠들고 있는 석씨

를 위하여 대문을 열어 주었다. 석씨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거의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대감마님께서 보자 하시니 나를 따라오시오."

청지기가 그러고는 돌아서 안으로 들어갔고 석씨는 허술청의 사동을 향하여 눈을 흘기고

는 뒤를 따랐다. 박신규는 미닫이를 조금 열고 밖을 내다보다가 석씨가 마루 위에 이르자

슬그머니 돌아앉으며 물었다.

"원정할 일이 무언가."

", 제 동생 석산진이가 억울한 죄명을 둘러쓰고 곧 죽게 되어 나으리께 구명을 하소하

러 찾아왔습니다. 원서를 받아주옵소서."

"이리 들이도록 하여라."

청지기가 석씨에게 원서를 받아 안으로 올렸고, 안에서는 한참이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석씨가 참지 못하고 말하였다.

"검계라면 나으리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나라의 큰 일을 맡아 하시는 나으리들은 빼놓고

어찌 약하고 무식한 것만 죽어야 합니까."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더니, 판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잘 알아서 선처해줄 터이니, 너무 염려 말라구 일러라."

석씨는 몇번이나 절을 하고서 물러나왔다. 그러나 석씨가 박신규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렇

게 기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신규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노기와 불안을 스스로 억누르느

라고 입을 꾹 다물었고, 원서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박신규는 영리하고 잽싼

하인을 불러 석씨가 어디 사는지 누구와 접촉하는지 쫓아가 알아보고 오라고 시켰다. 석씨

는 따르는 자가 있는 줄도 모르고 이번에는 작정했던 대로 우포도대장 신여철의 집으로 가

서 또다시 소란을 피웠고 거기에도 원서 한 통을 올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잰배에서 파자교

떡전거리까지 시름에 겨워 걸었다. 판윤 댁 하인은 끝까지 쫓아가 그 여자가 어느 떡집 안

으로 들어가는 것을 살피고 나서 돌아와 박신규에게 아뢰었다. 그때에는 판윤도 마음이 진

정되어 스스로 여러 가지 궁리를 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는 서찰을 써서 자기 파당의 사

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도록 하였고 각 판서 대감들은 신여철과 이인하에게서 대략의 이야

기를 듣고 나서, 하루라도 빨리 결안이 되어 이러한 불미한 사건이 번져가지 않게 되기를

원하였다. 결안이라고 해야 살주계의 혈당들 여덟 사람과 산지니를 곧 처형한다는 것이고,

그중에서도 산지니의 입을 막는 것은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이튿날부터 석씨는 서린방 전옥서 앞으로 찾아가 산지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썼으며,

이어서 형조의 관문 앞에 서서 형판을 만나게 해달라며 목을 놓아 울부짖었다. 형조의 서리

들도 모두 석씨를 알게 되어 욕설을 퍼붓는 자들도 있었고, 동정의 말을 해주는 이도 있었

. 그들 중에 고향이 송파라는 이가 석씨를 알아보고 원정할 제사를 써주겠다고 나섰다.

의 내용을 들어보더니 그도 또한 안색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석씨는 물 가운데서 지푸라기

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 그 서리에게 매달리며 애원하였다.

"제 동생은 저 때문에 저러한 곤경에 빠졌습니다. 그에게는 혈육이라곤 저뿐입니다. 하늘

아래 불쌍한 우리 둘이서 서루 믿구 의지하여 살아왔지요. 힘없는 두 목숨이 이렇게 빕니

."

그러나 서리는 난처한 듯이 앉았더니 주막 안에 누가 있는가를 살피고 나서 나직하게 속

삭이는 것이었다.

"아까 하신 말씀을 절대로 다시 입 밖에 내어서는 안됩니다."

"왜 안되나요, 그럼 이 억울한 노릇을 어찌 가만히 앉아 당하겠어요?"

"그렇게 발설하시면 사실이든 아니든, 아주머니는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아무튼 내가 알기

로는... 명일 오전에 종루 저자로 나가시면 동생을 만나게 될 거요."

서리가 머뭇거리면서 일어났고, 석시가 쫓아가며 물었다.

"그애가 방송이 된다던가요?"

"글쎄요... 아직 잘 모르지만 그리로 지날 것이니 상면이나 하시지요."

석씨는 귀가 번쩍 뜨이는 듯하였다. 그 길로 떡점에 돌아가 갈아입힐 새옷 한 벌을 장만

하였다. 밤늦게까지 옷을 마른다, 바느질을 한다 수선을 피우다가 새벽녘에 누웠는데 전전반

측 잠이 들 리가 없었다. 아침부터 떡점 아낙네가 시루에 떡을 찌는데 붙어 앉아 일을 거들

었다.

"아주머니, 어디서 술 한 병만 구할 수가 없을까요?"

"웬일이슈, 과수댁 동생이 방송되어 나오는 모양인가?"

석씨는 어젯밤에 곰곰이 생각하였던 것을 이제는 스스로 완전히 믿고 있었다. 죄인이 종

루 거리를 끌려 지나간다면 아마도 분명히 흥인문을 나설 것이고 방향은 북관이 될 것이었

.

"아니오, 내일 북관으로 귀양을 간답니다."

"에그, 사람이 살기만 하면 되었지. 잘되었구려."

덕점 아낙네도 좋아라고 반겼다.

"탁배기야 숨겨두고 파는 집이 있지만, 그걸루야 먼길 가는 이들 목이나 적시겠수? 아마

따라가는 이들도 달래야 할 것이니, 내가 화주 두어 병 구해주리다. 그리구 나는 인절미를

낼 테여."

석씨는 오랜만에 활짝 웃는 얼굴이 되었다.

'저두 근교까지만 따라나갔다가, 이제는 널다리로 돌아가렵니다."

"참 잘되었네, 그렇게 애를 쓰더니..."

떡점의 아낙네가 화주를 사보겠다고 집을 비웠는데 웬 건장한 사내들이 울타리 안으로 쑥

들어서는 것이었다. 석씨가 대신 장사를 한답시고 치맛자락에 손을 씻으며 나섰다.

"어서 앉으시지요. 무슨 떡을 드릴까요?"

사내들은 석씨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저희끼리 눈을 맞추었다. 그중 하나가 부드럽게 입

을 떼었다.

"이 집에 죄인 석모를 뒷바라지하는 아낙이 있다든데?"

석씨는 어쩐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낌새로 보아 그들의 눈매가 곱지 않은 것이 포교

가 분명하였다.

"제가 긴데 무슨 일인가요?"

"우리하구 잠깐 동행하여야 되겠소."

석씨는 아무 연고도 모르면서 우선 버티고 말았다.

"저는 오늘 따로이 일이 있어서 못 가겠군요. 동생이 죄를 지었다고 저까지 옥에 가두려

는 건 아닐 테지요?"

먼저 말없이 툇마루에 걸터앉았던 자가 거칠게 말하였다.

"그자는 명화율에 피촉된 자야. 처자가 있다면 노비로 박혀야 될 게야. 이녁이 아무리 출

가녀라 하지만 죄인과 함께 살았으니 동모자나 한가지 아닌가. 어느 앞이라구 뻗대나 뻗대

기를..."

석씨는 포교에게 냉정하게 말하는데,

"명화율이든 역률이든 간에 나는 그의 아내가 아니라 서사촌누나예요. 아무리 국법이 무

섭다지만 다 정해진 바가 있겠지요. 산지니는 총각이랍니다."

이러고는 다른 포교에게 공손히 대꾸하였다.

"오늘 제 동생이 북관으로 귀양을 간다기에 거리에 나가 상면이라두 하려구 그럽니다."

"귀양... 누가 그럽디까?"

"형조의 서리 다니는 분이 가르쳐주었어요."

포교는 잠깐 석씨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안색을 고치며 나직하게 웃었다.

"그것 참 잘되었소. 우리가 그 사람 부탁을 받구 이렇게 나온 거요. 석모가 자씨께 전해달

라며 흥인문 밖에서 우리와 함께 기다리라구 그럽디다. 몇년이 될지 모르니 누님 얼굴이나

뵈면 원이 없겠다구 하여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석씨는 벌써 눈물이 글썽해져서 돌아서서 옷고름으로 눈을 씻었다. 이제 산지니는 먼길을

떠날 것이다. 메마른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북관으로 가는 길에는 얼음에 뒤덮인 고원

이 하늘을 막아서 있고, 기러기는 하늘을 가르며 날아갈 것이었다. 석씨는 눈 속에 엎드린

병든 사람을 떠올리고는 스스로 소스라쳤다.

"솜옷을 장만할 걸 그랬지요?"

석씨는 떡과 옷을 보퉁이에 꾸리다가 포교들을 돌아보며 말하였고, 성질이 느긋한 포교가

일러주었다.

"문밖에 나가서 솜배자를 사 입히면 될 것이니 염려 마시우."

아낙네가 화주를 구하여 돌아왔다. 석씨는 거졌던 돈에서 얼마를 내어 내밀었으나 떡점

아낙네는 술값만을 제하고는 다시 억지로 내주는 것이었다.

"나두 혼자 사는 년이 이녁의 사정을 왜 모르겠수. 이 떡은 내가 거기 동생에게 주는 것

이니 갖다 먹이구려."

석씨는 눈물 반 웃음 반이었다.

"두 분께서 제 동생을 북관까지 잡아가시나요?"

포교는 머뭇거리며 석씨의 말에 응답하였다.

", 그렇지요. 기순 지경까지만 가고 해서 감영에서 나옵니다."

석씨는 포교들과 함게 흥인문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경주인들의 재가가 모인 곳에서 그

중 문이 잘 내다보이는 집에 들어가 앉아서 기다렸다. 포교들은 집주인과 농을 하기도 하고

담배도 태우며 꽤나 지루한 모양이었다.

종루 운종가의 네거리는 마침 중화참이었다. 성내에서도 가장 번화한 장시인데도 네거리

근방의 가가는 모두들 철시를 하였고, 사람들이 길 가운데를 중심으로 빙 둘러서 있었다.

러나 서린방 쪽에서 나오는 대광통교 방향으로 사람들이 길을 훤히 터놓고 있었다. 포청에

서 나온 포졸들이 오전에 주위가 번잡하지 않도록 길의 통행을 막았고, 네거리 가운데에다

곤장을 때릴 때 사람을 결박하는 형틀을 몇대 갖다 놓자 모두들 참형이 집행되리라는 것을

알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포졸들을 거느린 포교가 오더니 군중들을 향하여 둥그렇게 포

졸들을 풀어놓았다. 포졸들은 장창을 굳게 짚고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 있었다.

"온다 와, 저기 봐라."

군중들이 제각기 손짓을 하는데 소가 끄는 함거가 서린방에서 나오는지 광통교 앞에 뽀얀

먼지가 일고 있었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오자 함거에는 굵다란 통나무로 칸살이 세워져 있

었고 안에는 죄수 세 사람이 뒷결박되어서 앉아 있었다. 그들은 번뜩이는 눈초리로 칸살 밖

의 구경꾼들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아마도 그들 중에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나 동료들

이 섞여 있지나 않을까 하여 그러는 모양이었다.

"저게 적당들인가?"

"한 주먹이면 코피 쏟고 뻗겠는데 무슨 도적이 저러한가."

제각기 떠들었고 아이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함거의 주위로 몰려들어 원 안에 들어가

기 직전가지 따라갔다. 아이들은 박자를 맞춰가면서 참형수들을 놀려대는 것이었다.

"모가지 없는 잡놈이 목발 없는 지게에, 길로 길로 가다가 엽전 한푼 주었네, 놓고 보니

공짜요 들고 보니 공짜요 올려다보니 북망산, 내려다보니 청계천, 염라 태수 만나서 엽전 한

푼 바치고 수수 개떡을 샀더니 입이 있어야 먹지요."

그러나 어른들은 잠자코 있었는데, 저자 네거리에서 죽은 귀신은 어느 곳에도 머물지를

못한다지만, 그들의 눈초리가 제법 썰렁하기 때문이었다. 함거는 종각 앞에 세워졌고 감참관

과 망나니 일행이 올 때까지 포졸들이 둘러서서 지키도 있었다. 나무 의자를 갖다 놓은 것

을 보니 포청과 형조에서 곧 감참관이 나올 모양이었다. 형조에서 나온 망나니가 당도하였

는데, 머리는 산발이었고 옷자락은 잔뜩 풀어 헤쳐졌으며 술을 먹였는지 낯이 불콰해 보였

. 감참관으로는 촤포청과 우포청의 종사관이 각각 한명씩 나왔으며, 형조에서도 별제가 한

사람 나왔다. 감참관의 직급이 그리 높지 않은 깐에는 포교와 포졸들이 거의형장을 에워싸

디시피 한 것이 좀 별스러웠다.

"사모관대가 뵈지 않는 것이 의금부 죄인들은 아닌 듯한데 파수경계가 삼엄하구먼."

"글쎄 고작해야 명화적이나 살변을 일으킨 죄인들 아닌가?"

시정배인 듯 패랭이에 개가죽 배자 걸친 사내가 돌아보며 아는 체를 하였다.

"이 사람들 또 벌 타령으루 왱왱하는구나. 건너다봐야 의주서 넘어오는 부담작이란 말이

. 속도 모르고 떠들지들 마소. 저놈들이 양반을 쳐죽이자는 살주계하구 검계 패거리들이

아닌가. 이 속에서 구경하다가 어느 놈이 덤벼들어 채갈지 모른다 그 말일세."

"에그, 그 무슨 탈날 소리여."

누군가가 다시 눈을 흘기며 참견을 하였다.

"오죽했으면 양반을 죽이자구 했겠누."

"하긴 그럴 게야."

이러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와 하면서 뒤로 물러났고 웃음소리와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망나니가 입에다 물을 잔뜩 물고 돌다가 칼날을 쳐들고는 사람들에게 흩뿌렸던 것이다.

"저 희광이들이 오늘은 피맛을 잔뜩 보겠군."

"그러니 이 시절에 독주를 다 퍼먹였겠지."

망나니 두 사람은 자루에 박은 작두를 머리 위로 쳐들고 형장을 빙빙 돌다가는 제 목 위

에 얹었던 칼을 휘두르며 구경꾼들을 몰아내기도 하였다. 구경꾼들은 이리저리 몰려 밟히고

쓰러지면서도 낄낄 웃었다. 망나니는 공연히 히죽거리며 겅정거리기도 하고 형장 위를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저게 일테면 마당씻이로군."

산지니는 먼저 실려온 살주계원들과 칸살을 붙잡고 마당 가운데서 여러가지 광경들을 멍

하니 내다보았다. 아까 대광통교를 건너 종루로 나올 때 처음에 밀리던 인파 속에서, 산지니

는 소복 차림의 여인을 찾노라고 혼자서 칸살 사이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는 하였다.

러나 유두분면한 광통교 변의 색주가 창기들뿐인지 색색가지 장옷 자락만 나부낄 뿐이었다.

삶도 잘 모르거든 하물며 죽는 것이야 어찌 알겠느냐.

산지니 생전에 놀기 좋아하고 싸움질 잘하는 송파 왈짜이더니, 드디어는 백성들의 세상을

세우겠다고 나서서 그 혈당을 위하여 죽으매, 이것이 초라하고 작을지언정 어찌 이루지 못

할 까닭이 있겠느냐. 저 마당에 잠시 세월 지나가면 아이들의 노랫소리마저 텅 비어 있으리

.

옛글에 나오기를, 날 때에도 분명히 생을 따라온 것이 아니고, 죽을 때도 당당하게 사를

따라 가지 않네, 나고 죽고 가고 옴에 관계 없이 정테는 의젓이 눈앞에 있네라고 하였거늘,

열심으로 삶을 가졌던 자에게는 언제나 거울 앞에서처럼 낯익은 손님 같은 죽음이 의젓하게

눈앞에 있는 것이다. 산지니는 문득 어떤 생각이 지나쳐서 그에 어울리지도 않게 아이처럼

빙긋 웃었다. 그것은 이런 저자 한가운데서, 아이들의 조롱 가운데 저희를 내리누르는 관헌

들 앞에서, 영문도 모르고 공구경에만 정신이 팔린 무수한 백성들의 놀란 눈알딱지 앞에 잘

려나갈 그의 몸과 몸뚱이는 바로 미륵의 것이라는 소박한 깨달음이었다. 미륵은 언젠가 오

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넋 가운데 시시때때로 찾아들어 이렇게 잠깐 당신을 현신시키고는

넘어진 내 고깃덩이를 넘어 다른 넋으로 찾아가신다. 미륵은 내게 왔다. 미륵은 언제나 이

자리에 있다. 그의 등판이 어째서 둥근 불덩이로 지져졌는가를 산지니는 겨우 알아차렸던

것이다. 미륵이 두터운 살을 뚫고 전신으로 퍼져가는 아픔이었다.

"누님을 속인 것은 잘못이었다."

산지니는 얼결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하, 만약 그이가 돌아가시면 그이는 구천 하늘에 떠돌아다닐 것이다."

별제가 문서를 확인하고 나서 포교에게 일렀다.

"죄인 석산진부터 끌어내라."

산지니는 포교가 따준 문을 밀고 천천히 함거에서 내려왔다. 그가 감참관 앞에 끌려갈 때

망나니 둘이서 번갈아 엇갈리며 그의 목덜미에다 차디찬 칼날을 슬쩍 스치고는 하였다.

만한 죄인 같았으면 그런때에 그 자리에 앉아 방분이나 방뇨를 해버리고는 기가 죽어 두 다

리로 다시 일어서지 못할 터이나, 산지니는 마치 장난굿판에 들어온 박수처럼 제 마당인 양

하였다.

"호적지가 어디인가?"

"광주목 탄천현 널다리올시다."

"직업은?"

산지니는 픽 웃고 나서 대답하였다.

"예전엔 장터 왈짜, 그 다음엔 농사꾼, 그리고 지금은 양반 잡아먹는 검계의 혈당이우."

종사관이 끼여들었다.

"묻는 말만 대답하라."

"진정 검계의 적당인가?"

"그렇소."

"석산진, 갑진생인가?"

"그렇소, 내가 석산진이오."

별제와 종사관들이 함께 문서를 보고 나서 형조의 인을 확인한 다음, 서로 고개를 끄덕였

. 좌포청의 종사관이 포교에게 말하였다.

"시행하라."

포교가 서릿발 같은 환도를 빼어들고 뒤로 몇걸음 물러나니 희광이 망나니들이 먹이를 본

야수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희광이가 일부러 이빨을 드러내고 웃어대니 산지니는 그가 듣

는 둥 만는 둥 관계없이 말을 걸었다.

"공연히 웃음치지 마라. 밥덩이 찬 술이 그리 배가 부르더냐. 내 목을 단칼에 치지 않으면

전옥서 회자수칸으로 오늘밤 당장 찾아가리라."

과연 놀랐는지 망나니는 잠깐 무뚜름해졌다가 재빨리 감참관 쪽을 바라보더니 소매에 꽂

고 있던 화살 두 대를 꺼내어 산지니의 귀를 꿰려고 달려들었다.

회술레를 돌리려는 것이니 참형수의 귀를 꿰어 구경꾼들에게 돌려보이면서 행하를 받아내

려는 것이었다. 산지니는 그에게 손을 벌리고 다가온 망나니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누구 오늘 이 회자수들께 진주를 내어 위로할 사람이 없소?"

산지니가 또라지게 외치며 둘러보니 구경꾼들은 조용하였고 희광이는 화살을 떨구고 서

있었다. 그때 구경꾼들 틈에서 누구인가 엽전 작은 꿰미를 마당 가운데로 던져 찰그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승 갈 노자를 보태어주었으니 내생에서 갚으리다."

"어서 시행 않고 뭣들 하느냐?"

감참관이 외쳤다. 산지니는 망나니늘 돌아보며 웃었다.

"당신은 여러번 죽는 사람이우."

망나니가 그의 등을 밀기도 전에 산지니는 형틀로 걸어갔다. 가다가 그는 문득 구경꾼들

틈에서 낯선 중이 염불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보통 중처럼 염주를 헤아리거나 목어를

때리며 고개는 숙이고 눈은 감고 중얼거리는 게 아니라, 방갓을 약간 쳐들어 노리는 듯이

강렬한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저때에 미륵이 제자를 위하여 설법하시되 너희들 비구는 떳떳함이 없는 생각과 즐거움에

는 고가 없는 생각과 나를 헤아림에 나라고 할 것이 없는 생각과 실로 있는 것이 공한 생각

과 색깔이 변하는 생각과 퍼렇게 멍이 든 생각과 배가 부른 생각과 먹는 것이 소화되지 않

는 생각과 고름과 피가 흐르는 생각과 모든 세간이 가히 즐겁지 아니한 생각을 깊이 생각하

. 이봐 뜻으로 악한 것을 행하지 말고 몸으로 또한 잘못을 저지르지 말며 마땅히 이 세

가지의 행실을 버리고 속히 생사관을 벗어날지라.

미륵경을 외우는지 스님은 중얼거리면서 산지니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산지니가 뒷몸이

결박된 채로 형틀에 묶이니 이어서 망나닌가 손을 내밀었고 누구인가 묘상전의 장사치인 듯

목침을 내주었다. 이것은 전례였다. 망나니는 산지니의 늘여진 목 밑에 목침을 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두 희광이들의 칼부림하는 장난이 볼 만한 구경거리일 텐데 어찌되었는지 망나

니들은 신명이 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 망나니가 산지니의 뒷전에 섰더니 작두를 높이 치

켜들었다. 그때에 종루의 자자바닥이 쩡쩡 울리도록 산지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누니임!"

곁의 망나니가 재빨리 칼을 쳐들었다가 일격에 내리쳤다. 산지니의 머리는 마치 무 공댕

이처럼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고 아직은 죽지 않은 팔다리의 근육들이 덜덜 떨리다가 멎었

. 피가 목에서 울컥이며 솟아나왔고 차부들이 와서 그것들을 수습하여 거적에다 둘둘 말

아서 새끼로 묶어 뒤로 내갔다.

"여환스님, 가십시다."

"그래... 나는 기도를 마치고 갈 터이니 자네 먼저 서강으로 나가게나."

팔 없는 전생이가 근처에 끼여 서 있던 중년 곰보 사내의 등을 두드렸다.

"가자니까요."

"..."

고달근은 얼이 빠진 듯하였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마당을 손가락질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산지니가 죽었네그려."

오후 늦도록까지 흥인문 쪽에서 귀양가는 귀인의 압송 행렬 비슷한 모양도 비치지 아니하

여 석씨는 차츰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석씨가 문으로 가보려고 가가를 나서려니 포교들

은 서로 눈짓을 하고 뒤따라 나왔다.

"어디 가시우?"

"아무래도 이상해요. 이렇게 늦게까지 상문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아

닌가요?"

포교들은 농치며 말하였다.

"형조에서 결안이 되고 나면 귀양갈 각색 죄인들을 모두 모아서 함께 데리고 나올 것이라

늦는 게요."

다른 포교도 석씨를 달래었다.

"오히려 잘되었소. 늦어지면 근교에서 묵어 가게 될 터이니 우리가 잘 말하여 함께 지내

도록 주선해드리리다."

포교들의 그러한 말에 석씨는 다시 반가운 마음과 오히려 더욱 늦어져서 황혼녘에나 풀려

나왔으면 싶었다. 석씨는 경주인네 가가에 앉아서도 몇번이나 손수 지어온 옷을 펼쳐 다시

살펴보기도 하고 떡보자기도 풀었다가 매었다가 하면서 연신 흥인문을 내다보았다. 근교 사

람들이 문안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기 시작하였는지 문이 제법 번잡해졌고 석씨는 몇번이

나 밖으로 나갔다가 되돌아오고는 하였다. 그럴 즈음에 포교들이 슬슬 신발을 신는다 의관

을 바로 한다 하더니 가가 밖으로 나설 기색이었다.

"못 나올 모양인데 우리가 쫓아가서 이 집으로 빼내왔다가, 내일 날이 밝자마자 다른 압

송수들과 합할 것이라 좀 다녀와야겠소."

석씨는 한시바삐 동생을 만나보고픈 마음에 자기도 보퉁이를 집어들며 일어섰으나 다른

포교가 덧붙였다.

"어허, 왜 이렇게 안달이우. 여러 사람의 눈이 있는데 어딜 함부로 나서려는 게요. 여기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가 데려다 줄 텐데, 저녁에 먹을 술상이나 조촐하게 마련하시우."

석씨는 기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화주가 두 병이나 있고 닭도 잡아놓겠어요. 제 동생만 데려다 주시면 머리를

끊어 팔아서라도 인정전을 쓰겠습니다."

"어디 가지 말고 꼭 여기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포교들이 그렇게 당부하고 나가버리자 석씨는 주인에게 암탉 두 마리를 구해달라고 돈을

내었다. 문안에서 나온 사람들이 지나가다 가가에 들렀는데 그들은 상담을 몇마디 하고 도

성 안 저자의 물가 형편에 대하여 서로 주고받더니 드디어 오늘 보았던 구경거리에 대하여

얘기하기 시작하였다.

", 세상에... 내가 얘긴 들었어도 종루에서 사람의 목을 치는 것은 오늘 처음 보았네."

"나도 어릴 적에 두어 번 보고 이번에 이렇게 떼죽음이 나는 일은 처음 보았구만."

"처음 한두 명의 목이 달아날 땐 구역질이 나더니 한참 보노라니 그게 뭐 소나 돼지 잡는

거나 다를 바 없더구만."

"적당치고는 그래도 대단들하데. 몇몇은 아주 눈도 꿈쩍않고 참형을 받더구만."

그들은 무심하게 지껄이고 있었으나 석씨는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면서 눈앞에 허연 것이

내리깔리는 듯하였다.

석씨는 비로소 깨달았다. 산지니는 석씨가 이곳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에 이미 목이 잘려

나갔던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들이 죽었나요?"

석씨가 모여 앉아 떠드는 사람들 가운데로 얼굴을 내밀며 말하였는데, 안색은 하얗게 질

려 있었고 입술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장꾼들도 석씨의 얼굴을 보고는 주춤하여 저희

끼리 둘러보며 말대답을 못하였다. 석씨는 마치 실성한 듯이 보였다.

"... 그 사람들 중에 광주 널다리 사는 석산진이가 없던가요?"

대꾸를 망설이던 그들 중에 하나가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차례로 셋씩 실어내다가 무려 아홉이나 참하였으니, 우리네야 누가 누군지 알 게 무어

?"

"헌데 아주머니는 뭣 땜에 그러우? 검계라나 살주계라나 하는 적당들이라는데, 그런 흉칙

한 놈들과 무슨 상관이라두 있소?"

젊은 장꾼이 이어서 말하자, 석씨는 정신없이 보퉁이를 끼고 뛰쳐나왔다. 흥인문을 헐레벌

떡 들어서려니 몰아 나오던 행상이며 장꾼들이 미친 여자인 줄 알고서 쑥덕거리며 뒤돌아보

았다. 석씨는 무슨 정신에 종루 운종가에까지 당도하였는지 몰랐다. 석씨는 네거리 가운데로

뛰쳐나가 어디에 동생의 살점이라도 떨어져 있지 않나 두리번거렸다. 이미 길 위에 핏자국

들에는 재가 덮이고 다시 그 위에다 고운 황토흙을 뿌려놓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하게 길을 오가고 있었다. 석씨는 황토흙에 손가

락을 넣고 이리저리 매만지며 허물어지듯이 주저 앉으며 처음에는 웃음소리 같은 맥없는 울

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울음이 일단 터져나오자 통곡이 되면서 석씨는 땅을 힘없이 두드

리기 시작하였다. 가가의 상인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내밀었고 행인들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서로 머리를 모으고 수군거렸다. 상인들은 맨 처음에 목이 잘렸던 당차던 참형수를

너무나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저자 네거리에서 참형당한 죄수들을

보아왔지만, 산지니와 같은 태연하고 당당한 참형수를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더구나 그가

죽기 직전에 돌연 누님 하면서 외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울리는 듯하였다. 그들은 앞뒤

의 정황을 맞우어 이 여인이 바로 참형수의 누님일 것이라고 쉽게 알아챌 수가 있었다.

"여기서 울어봐야 뭘 하오. 연고가 없는 시신은 시구문 밖에 내다버리면 암장이 되고,

고가 있을 때는 형조 앞에 두어 찾아가도록 하니 그리로 가보시우."

인정이 있는 장사치가 일러주었으나, 석씨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석씨는 이제 드넓은 하

늘 아래 아무데도 그 마음을 붙일 데가 없었던 것이다. 어린 두 자식과 갈아먹을 땅뙈기가

있건마는, 석씨는 한꺼번에 그녀가 가졌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하였다. 석씨는 하소하며

돌아디니는 중에 산지니가 꼭 살아나오게 될 줄로 믿었고, 아무려면 터무니없는 사람을 죽

이랴 싶었으나, 이제는 그저 힘없고 어리석은 백성으로 꼼짝없이 속아 넘어가, 자기네가 하

잘 데 없는 버러지처럼 짓밟혔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석씨는 다 저물어서 형장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광통교를 건너서 형조로 가보았다. 삼문

은 굳게 닫혀 있었고, 시신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석씨가 처참한 얼굴로 문지기에게 물어

보니, 명화율에 걸린 참형수들이라 함부러 시신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석씨는 어두워

질 때까지 삼문 앞에 망연히 서 있었다.

스산한 찬바람이 삼문 밖 뜨락에 일진을 날리는데 벌써 주위는 어둑어둑하였다. 석씨는

광통교 쪽으로 어정어정 걷기 시작하였다.

집집마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으며 행인의 내왕도 차츰 끊겨갔다. 먼 데서 인정 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석씨는 종루거리를 따라서 올라갔다.

석씨는 광주로 돌아갈 생각은커녕 가슴에 엉킨 원한과 슬픔으로 운종가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네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저자에 널렸던 허섭쓰레기들이며 지푸라기들이 바람에

불려서 마치 몸을 방금 떠나온 넋처럼 주르르 밀려갔다가는 파르르 몰려오곤 하였다. 석씨

는 반달이 걸린 높다란 은행나무의 앙상한 가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달은 구름을 헤치

고 가다가는 다시 멈추었고 빛을 잃은 별들도 가지에 열린 열매처럼 간간이 반짝이다가 사

라졌다가는 다시 나타났다.

인연이 흐쳤거든 생각지나 말으소서. 기별을 못 듣거든 그립지나 말려무나. 한 달 서른 날

다 보내고 열두 달 지난 후에 옥창에 앵도는 몇번이나 피어진고. 겨울 밤 여름 해에 빈 방

에 혼자 앉아 엄혹삼경야에 자최 눈물 뿌릴 적과, 반야 오동 위 굵은 빗발 흩어질 제 이리

헤고 저리 헤니, 아마도 모진 목숨 못 죽어 한이로다. 도리어 펼쳐 헤니 이리하여 어이하리.

청등을 모두 켜고 녹기름 내어놓고 백련화 한 곡조를 근심조차 섞어 타니 부용화 적막한데

섬섬옥수 맺힌 한이 옛소리 있다마는 누구 귀에 들릴쏘냐. 내 팔자 이러하니 원망하기 허사

로다. 죽은 듯 잠을 들어 꿈에나 보려 하니 광풍에 지는 잎과 월하에 우는 짐승 무슨 일로

나를 미워 이내 간장 다 끊는다. 우리 님 계신 데는 무슨 약수 가렸관대 가면 올 줄 모르는

. 석양이 비낀 후에 죽림 깊은 골에 새소리 더욱 섧다. 나군을 비어 잡고 인간 세상 헤어

보니, 나같은 이 또 있는가 흥인박명 하릴없다.

원부사의 애끊는 가락이 석씨의 귀에 쟁쟁한데 석씨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치마끈을

풀어서 매듭을 짓고는 맞춤한 나무 아래로 가서 키에 만만한 나뭇가지를 겨냥하여보았다.

석씨는 그 너머로 끈을 넘겨서는 당겨 쥐었다. 석씨의 행동은 침착하고 골똘한 듯이 보였다.

그녀는 끈을 몇번이나 당겨서 좀체로 풀어지지 않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매듭 속으로 머

리를 넣었다. 간신히 발돋움하여 버티고 설 만한 높이였다. 돌아선 석씨의 눈앞에 달빛에 드

러난 형장의 컴컴한 공간이 내다보였다. 석씨는 오랍동생 산지니의 마지막 고함소리가 아쟁

의 가장 낮은 음조의 여운처럼 전해오는 듯하였다. 석씨는 마지막가지 산지니의 죽음의 의

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던가. 석씨의 눈앞에는 육조의 기다란 담과 저 멀리 궁궐의 대문이 떠

올랐고 그것들이 불길과 연기에 싸여서 일시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높다란

성채와 제비 같은 추녀와 전각과 주문의 눈부신 단청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에 일그러지

고 있는 중이었다.

산진아, 저 모양이 보이느냐. 저 멸망해가는 도성 궁궐의 장엄한 낙조가 보이느냐. 석씨는

올가미를 쥐고 있던 손을 놓으며 아래로 온몸을 늘어뜨렸다. 그녀의 몸이 늘어지면서 발끝

은 비스듬히 땅을 밀치고 몇번 버르적거리다가 차츰 움직임이 미약해지며 동작이 멈추었다.

찬바람이 아직도 저자의 허섭쓰레기들을 이리저리로 몰아대고 있었다.

(8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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