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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1. 조건(제3권)

一字師 2024.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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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1. 조건(제3권)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9. 자존감 - 소설게시판 - 모이자 한민족 커뮤니티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9 타인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자존감] “자존감을 갖고 살아라.”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흔히 타인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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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1. 조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1

인간은 더 완벽해지기 위해

사랑을 한다

 

[조건]

“결혼은 자신의 권리를 절반으로 줄이고, 의무는 배로 늘리는 행위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결혼하는 비율이 떨어지고 이혼율이 높아지는 이유는 결혼을 통해 자신의 자유가 줄고 구속이 늘어난다는 생각이 보편화됐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 이후 맞닥뜨리는 고단한 현실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다. 특히 자신을 돈 버는 기계쯤으로만 취급받고 가족과 전혀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 그 갈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랑에 누구나 진지해질 수밖에는 없는 이유는 자신의 후손이 만들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을 통해 느끼는 기쁨이나 고통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류의 종족 보존이라는 대전제에서 이뤄진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을 인류 전체의 생존 문제로 바라봤다.

 

“모든 연애는 인류의 생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멸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전 세대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미래의 세대는 우리의 사랑에 의존하고 있다.”

 

나와 반대인 사람에게

끌리는 실존적 이유

 

쇼펜하우어에게 성은 자신의 후손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사실에 목적이 있다. 우리 생명의 유한성은 후손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생명 존속이라는 본능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선행돼야 할 것은 사랑의 진정한 목적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결함과 정반대 성격의 결함을 가진 상대방을 매력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이 반대인 사람에게 더 끌리는 이유일 것이다.

 

키가 작은 남자가 키가 큰 여자를 좋아하기도 하고, 피부가 하얀 사람이 피부가 까무잡잡한 사람을 좋아하기도 한다. 특히 남자는 자기와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하면 굉장한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 여자와 결혼했을 경우에 누리게 될 행복을 아름다운 꿈으로 그린다. 아름다운 이성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다 완전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은 외모를 중요하게 보는 남성과 달리 이성이 가진 내면의 장점을 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성실, 친절, 배려 등을 더 고려한다.

 

이런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채 뜨거운 정열과 무책임한 성적 욕구만을 추구한다면 그 사랑은 공허와 후회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기만 뒤에 남는 진실은 후손이다.

 

처음에 사랑에 빠진 사람은 진지하며 자기의 보존을 위해 열심이다. 사랑과 성욕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후손을 만들기 위해 욕망한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존속하는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출산이 목적인 성적인 사랑은 다음 세대를 구성하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우생학적으로 좋은 유전자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이렇듯 쇼펜하우어는 사랑을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생명을 낳기 위한 행위라고 봤다.

 

따라서 두 사람이 눈길을 처음 주고받을 때부터 이미 미래의 부모가 되기 위한 본능이 작동한다. 처음 눈길을 주고받을 때부터 이미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미래에 어떤 아이를 낳을지 무의식적으로 고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랑을 통해 자신의 결함을 보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좋은 유전자가 매력을 끈다. 오똑한 코, 시원한 눈, 예쁜 이마 등은 남자들이 선호하는 여성의 조건이다. 여성은 자신이 갖지 못한 남성의 고유한 특징을 좋아한다. 딱 벌어진 어깨, 근육, 수염, 곧은 다리 등 외모뿐만 아니라 용기 같은 성격도 고려한다. 그래서 “용기 있는 자가 미녀를 얻는다”라는 속담도 생겨났다.

 

사랑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라

 

쇼펜하우어의 사랑, 연애, 결혼에는 온통 생식 이야기만 나와서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실제로 자연이 인간을 속이는 방법은 고차원적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성애의 형이상학>으로 이름을 붙였다. 만약 처음부터 자연이 인간에게 종족 보존만을 강요했다면 누구나 거부감을 가졌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속이기 위해 10대부터 20대까지 최고의 매력을 줬다. 좋은 피부, 건강한 모발, 밝은 목소리 등으로 이성에게 호감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하나쯤 매력은 있다. 본인만 모르고 남은 아는 그런 매력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젊음이 매력이었다.

 

40대가 되면 나의 청춘 자체가 아름다웠다는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 한 번은 고백을 하거나 고백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전혀 모르는 이성을 보고 첫인상에 가슴이 설레고 잠을 이루지 못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막상 얼굴을 보면 말을 못해서 헤매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진실된 사랑을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사랑의 진정한 목적을 찾으면

사랑이 달라질 것이다.

 

자연에서 보면 진짜로 속은 것이다. 남의 시선을 끄는 것, 특히 이성의 관심을 끄는 것은 남녀의 차이가 있지만 건강한 신체와 외모다. 10대와 20대가 이성을 바라보는 기준은 매우 까다롭다. 나이 차이가 위아래로 한 살인 경우도 있다. 쇼펜하우어의 생각대로라면 더 좋은 유전자도 고려하지만 잘생긴 외모에 끌린 것이다. 물론 각자 취향이 다르고, 쇼펜하우어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두기는 했지만 공통점은 외모다. 여성은 키가 크고 잘 생긴 남자를, 남성은 얼굴이 예쁜 여성을 원한다. 자연이 원하는 바는 다른 것을 덜 고려하고 잘생긴 외모의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감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것이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자연은 인간이 사랑을 할 때 이것저것 따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젊고 예쁘고 멋있는 사람과 정열적인 사랑을 하길 바란다. 비록 결혼을 하면 그런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서로에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지기 마련이다.

 

결혼을 할 때 학벌, 경제적인 능력, 집 등을 꼼꼼하게 따지는 경우는 그런 조건이 없어지면 상황이 더 나빠지기 때문이다. 실망해서 헤어지는 것은 매한가지다. 외모에 속아서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가 외모가 달라지거나 늙으면 실망한다. 돈을 보고 결혼한 사람은 재산이 없어지면 실망한다.

 

구석기 시대라면 몰랐던 현실들을 인터넷이나 TV를 통해서 알게 댔다. 이 세상에 멋진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혼의 현실뿐만 아니라 실패 사례를 보면서 상대방에 대한 조건이 너무 높아지고 있다. 자연은 인간이 눈먼 사랑을 하기를 원하는데, 인간은 너무나 따지려고 든다. 그래서 태어난 아이를 통해 인간을 가족이라는 제도로 구속할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건을 고려해서 이성적으로 선택한 결혼에는 본능에 이끌린 사랑 같은 정열이 없다.” 그러나 “성적인 매력에만 이끌려서 결혼하면 평생 후회와 탄식을 안겨 줄 반려자를 얻을 것이다.”

 

경제적인 조건을 보는 중매 결혼이나 콩깍지에 씌인 연애결혼이나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결혼은 행복을 위한 지름길이 아니며 이혼은 불행의 종지부가 아니다.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분비로 유지되는 사랑의 유효 기간이 18개월에서 30개월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젊을 때 사랑의 감정은 덧없는 것이며 결혼은 현실이라면, 가끔 연애할 때 주고받았던 편지나 문자를 보면서 연애할 때를 기억하는 것도 상대방의 소중함을 다시 확인하는 방법일 것이다.

 

소중한 것은 시공간을 넘어 이어진다.

 

[Epilogue]

누구에게나 하나쯤 매력은 있다.

본인만 모르고 남은 아는 그런 매력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젊음이 매력이었다.

40대가 되면 나의 청춘 자체가 아름다웠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2. 관계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2

당신의 거리를

유지하라

 

[관계]

“서로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간격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정중함과 예의다.”

 

쇼펜하우어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이 혼자 지냈다. 가족도 없었고, 조국도 없었다. 오직 애완견 아트만이 곁에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아트만과 산책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이런 쇼펜하우어에 대해 니체는 저서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이렇게 썼다.

 

“한 명의 친구가 있느냐 또는 한 명의 친구도 없느냐 하는 차이는 무한한 것.”

 

인간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면서도 타인과 어울리는 것도 즐긴다. 고독과 사교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쇼펜하우어는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강조했다. 자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독립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타인에 의존하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나약한 존재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고독의 끝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하려는 욕망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홀로서기’와 ‘함께하는 삶’ 사이의 갈등을 ‘고슴도치의 우화’를 통해 풀어낸다.

 

추운 날씨에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으려고 달아붙어 하나가 되지만, 그들의 가시가 서로를 찌르는 것을 느껴 떨어진다. 그러나 추위를 견디지 못해 한 덩어리가 됐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결국 상대방의 가시를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찾는다. 서로를 따뜻하게 하고 싶어 하지만 서로의 바늘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고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체온을 나눴다는 지혜다.

 

“많은 수의 모임과 헤어짐을 반복한 고슴도치들은 다른 고슴도치와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 것이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꽤나 힘든 과제이기도 하다. 직장에서 상사와 동료,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학교에서 선생과 학생들이 잘 지내는 일은 어렵다. 고슴도치의 딜레마를 통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공조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마라

 

낳고 키운 아이들도 커 가면서 점차 부모의 잔소리나 참견을 싫어한다. 사춘기를 지나는 청소년때 부모와 정신적으로 분리하는 과정에서 이런 갈등이 생겨난다. 사회에서 사업으로 사람을 만나는 경우에도 의기투합을 하면 할수록 사소한 말다툼을 하기 쉽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갈등은 자주 일어난다. 사람은 서로 가까울수록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 많아진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어지는데 나도 다른 사람도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마음의 간격을 둘 필요가 있다.

 

쇼펜하우어의 비유처럼 사회를 이루는 인간은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가시’를 세운다.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면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즉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 시기심, 자존심 등 때문에 서로의 마음에 아픔을 주는 일이 많아진다. 가족, 연인 같은 사랑의 감정으로 맺어진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떻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인가? 고슴도치의 비유처럼 인간은 가깝고 친할수록 상처를 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국 타인을 자신의 욕망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강제하는 것도 폭력이 될 수 있다. 상대방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다 보면 아픔을 주는 막말을 하게 된다. 부모는 자식이 본인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성취하기를 바란다. 남편과 부인은 서로 결혼한 사이라고 해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않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사이도 말 한마디 실수로 만남이 깨지는 일이 생긴다.

 

이와 비슷하게 동양에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远)”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하라는 경고로 중용의 의미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실제 의미의 맥락은 전혀 다르다. <논어> 양화편에 나오는 본래 공자의 말은 “첩과 종은 부리기 어렵다. 잘 대해 주면 기어 오르고 쌀쌀하게 대하면 원망한다. [唯女子与小人难养也,近之则不逊,远之则怨]로, 소인배(첩, 종)를 대할 때 가까이하면 다치기 쉽고, 멀리하면 해코지하니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쇼펜하우어의 “상대를 공경하되 거리를 두라”라는 말은 공자가 말한 “경이원지(敬而远之)”에 더 가깝다. 경이원지 또한 상대를 공경하면서 동시에 거리를 두라는 뜻이다. 그 당시 백성들이 귀신이나 미신을 믿는 경향이 많았는데 위대한 지혜로운 지도자라면 ‘모든 생각에 무조건적인 동의를 하기보다는 불합리하거나 마땅하지 않는것에 적당한 거리를 둘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쓰였다.

 

상대방이 나와 다르거나 잘못된 생각을 갖더라도 그 인격을 존경해야 상처를 주는 가시 돋친 말을 피할 수 있다. 서로 세상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서로를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함께하기와 거리 두기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사회란 모두 필연적으로 서로의 순응과 타협을 요구한다. 강요는 모든 사회에서 뗄 수 없이 붙어 다닌다. 모든 사회는 희생을 요구하는데 자신의 생각이 다를수록, 개성이 강할수록 희생이 커진다.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친구가 많을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접촉 범위가 커지면서 불행을 자초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넓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내면이 공허하고 삶이 단조로울 때 다른 사람의 온기를 필요로 한다. 함께 이야기하면서 공감받고, 지지받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타인과 생각의 차이를 느껴 실망하면 관계가 다시 멀어진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고사성어와 여기에서 유래한 우리 속담이 있다.

 

“불견상견절치(不见想见切齿)”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이 갈린다.”

 

상대편을 몹시 그리워하지만 보고 나면 정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꼭 필요한 약간 냉냉한 거리 두기를 쇼펜하우어는 ‘정중함과 예의’라고 말한다. 거리를 둘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은 비록 따뜻함의 욕망은 충분히 충족되지는 않지만 가시에 찔리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사회를 ‘불’에 비유했다.

 

“현명한 사람은 적절한 거리를 두고 불을 쬐지만, 어리석은 자는 불에 손을 집어넣고 화상을 입고는 고독이라는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불이 타고 있다고 탄식한다.”

 

마음이 춥다고 느껴 타인의 온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내면의 공허, 의식의 빈약, 정신의 빈곤’ 때문에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한다. 유유상종하며 여흥과 오락을 추구하는데, 처음에는 관능적 향락과 각종 즐거움을 맛보려고 하다가 결국 방탕한 생활을 좇게 된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사교의 욕망이 생기는 것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반증이다. 타인을 통해 얻는 가치는 행복의 본질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기억하면 좋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

 

도덕적으로 떨어지고 지적으로 우둔하며 불합리한 사람들과 접촉하면 여러 가지 위험과 해로운 일에 노출될 수 있다. 굳이 그런 사람을 만날 이유가 없다. 화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면이 충분히 따뜻한 사람은 사회로부터 떨어져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나 괴로움을 주거나 받지 않고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부자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외적인 부를 통해 내적인 부를 대신하려고 노력한다. 내면은 빈곤하고 정신이 공허하면 무엇이든지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려 하지만 소용없다.

 

많은 인간관계로 결핍을 채우려고 하지만 인간관계는 자칫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홀로서기’와 타인과 ‘함께하기’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말을 아껴야 되고 마음에 못을 박는 일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예의는 현명함에 속하고, 무례는 어리석음에 속한다.”

 

고슴도치 우화의 예에는 오류가 있다. 실제로 고슴도치는 상대가 찔리지 않도록 가시를 눕힌다고 한다. 다른 고슴도치가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할 줄 알며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바늘이 없는 머리를 맞대며 추위를 이겨 낸다고 한다.

 

이런 과학적 사실을 몰랐지만, 쇼펜하우어가 우리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배려하는 마음을 고슴도치에게서 배워야 할 덕목으로 본 것은 의미가 있다. 너무 지나친 사랑과 관심 또한 상처가 될 수 있으므로 약간의 무관심과 냉정함을 통한 ‘적당한 거리 두기’라는 현명한 방법을 통해 ‘서로의 온기를 적당히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이 공허하고, 의식이 빈약하고, 정신이 빈곤한 사람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한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3. 고독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3

혼자 있는 법을

익혀라

 

[고독]

“인간이 사교적으로 되는 것은 고독을, 고독한 상태의 자기 자신을 견딜 능력이 없어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행복의 조건을 ‘자족(스스로 만족)’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고독의 주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고독과 사교성을 대립하는 것으로 본다. 지적인 능력이 클수록 혼자 지내려는 경향이 강하고 지적 능력이 떨어질수록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독은 위대한 사람의 특성이다.

 

고독은 인간의 본래 모습에 가깝다. 친구든 애인이든 가족이든 나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각자 개성과 취향, 의견이 달라서 늘 불협화음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직 자기 자신과는 유일하게 완전한 융화가 이뤄질 수 있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은 오직 자신의 고독안에 생겨난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그 원천인 고독을 피하지 말고 그것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된다.

 

“누구 나 자기 자신의 고독한 모습일 때 본래 지닌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홀로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가치 있게 살 수 있다

 

고슴도치 같은 사람은 극심한 추위가 닥치면 서로 모여들어 몸을 붙이는데, 스스로 정신적인 온기를 충분히 지닌 사람은 굳이 무리를 지어 모일 필요가 없다. 사교성이 정신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체온으로 충분히 지낼 수 있는 사람의 덕목은 고독이다.

 

인간은 아무리 친한 사람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다. 결국 그런 솔직함이 나중에 뒷담화와 비방의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정과 사랑, 결혼으로 이어지는 밀접한 인간관계도 비밀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런 면을 봐서는 다른 사람과 교제가 적을수록 좋다. 잡담, 유흥, 즐거움 뒤에는 가식적인 모습이 있다.

 

언제 어디에서나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 그럴수록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게 기대할 일도 없고 상처받을 일도 드물다.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굳이 다른 사람과 만나 희생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고독을 견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독한 시간을 생산적으로 잘 활용하지 못하는 무능력, 내면의 공허, 권태감 때문이다. 이럴 때 남과 어울리는 것은 자신의 고독을 혼자 대면하기 두려워 비겁하게 피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단조로움을 피해 외부로부터 강한 자극을 원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요구에 따르다 보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일이 생긴다. 남과 함께하고 싶은 이유는 자신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무능력, 내면의 결핍과 공허감 등이 있다. 이것이 계속되어 외부로부터 끊임없는 자극을 원하다 보면 유흥에 빠지거나 술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가치 있는 삶은 홀로 지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서 결국 되돌아와 만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이다. 다른 사람과 어쩔 수 없는 관계를 줄이면 자신만의 자유와 욕구가 회복된다.

 

온전히 혼자

있어 보라

 

고독은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인간은 홀로 설 수 있을 때 어른으로 더욱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젖을 떼면서 ‘공포’에서 독립하게 되듯이 고독은 각자의 자연스러운 상태가 된다. 다시 말해 고독은 인간의 본성에 맞는 본래 행복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해 준다.

 

인간의 군집 본능은 자신의 고독에서 느끼는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단지 심심하기 때문에 함께 어울려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예시처럼 금관악기로 협연을 하지 못하는 연주가와 비슷하다. 훌륭한 거장은 충분히 독주를 할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도 혼자의 힘으로 잘 살 줄 알아야 한다.

 

40대면 예전의 친구나 동창들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지는 경우가 늘어난다. 연락처에 저장한 친구들이 사라지기도 한다. 나이가 더 들수록 고독은 우리의 친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참된 행복은 자신 안에서 혼자의 힘으로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다수의 의견에 맞춰 희생하거나 눈치 볼 일이 생겨나고 마음을 툭 털어놓지 못하는 상황이 늘어난다. 점점 진실한 관계를 맺기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혼자 있을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해 생각과 지혜 등을 풍부하게 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고독은 ‘솔로’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행복을 바깥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안에서 얻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만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독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유도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4. 공감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4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느껴라

 

[공감]

“동정심이야말로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비이기적 특성이며, 이기주의적 개인이 타자를 도우려하는 것은 기적 같은 일로 찬사를 받아야 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된다. 쇼펜하우어에게 동정심은 세상 모든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낌으로써 이기심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을 뜻한다. 쇼펜하우어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며 그런 동정심만이 비이기적 행위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말한다. 고통은 다른 사람과 나누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연민, 공감, 동정은 쇼펜하우어가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또한 타인에 대한 아량도 필요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기 싫은 사람과 같이 지내야 하는 일이 생기는데, 조심해서 행동하고 아량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조심함으로써 손해와 손실을 막을 수 있고 아량을 베풀어 다툼과 싸움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양가감정

 

쇼펜하우어는 도덕적 관점으로 인간의 행위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인간의 행동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목표로 할 수 있다고 보고, 기본 동기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첫 번째 동기, 이기주의다.

자신의 평안만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며 그 한계가 없다.

 

두 번째 동기, 악의다.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 작용한다.

 

세 번째 동기, 동정심이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인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다.

 

네 번째 동기, 이름 붙여지지 않은 동기(금욕주의)다.

행위자 자신의 불행을 욕구한다.

 

이런 동기 가운데 동정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더 큰 관심을 두는 점에서 다른 동기들과 대비된다. 타인의 불행에 대한 동정심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를 없애 버린다. 연민은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즉 타인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똑같이 여기는 순수하고 비이기적인 인간 본래의 착한 마음씨다. 반면 이기주의나 악의적 행동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욕구한다.

 

동정심과 반대의 감정을 나타내는 ‘남이 안 돼야 행복’이라는 표현이 있다. 독일어에서 유래한 Schadenfreude라는 영어 표현이 있는 것으로 봐서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감정은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감정은 아닌 것이다.

 

40대라면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동물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생명, 가족의 행복, 자신의 성취를 위해 남과 경쟁하면서 살아간다. 남을 짓밟고 올라가야만 자신이 살아남는 살벌한 경쟁을 경험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인해 생명을 잃는 현장을 보면 그 비극에 가슴 아파하고 함께 울기도 한다. 그때 자신을 가두고 있는 이기심의 벽이 한 번에 무너진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어야 하는 존재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잡아 먹어야 되며 다른 사람을 이겨야만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불운의 사고에 희생당한 사람에 대해 가슴이 먹먹해지는 모순적인 존재다.

 

사랑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말 것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경제적인 약자에 대한 사회적인 배려를 강조한다. 그는 초기에는 자유주의 경제학을 주장하면서 시장 경제의 경쟁 원칙을 옹호한 사람인데 나중에 생각이 바뀐 것은 약자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실험이 있었다. 신생아실에서 갓 태어난 아이에게 다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려줬더니 그 아이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가 함께 울기 시작했다. 정작 자신의 울음소리를 녹음해서 들려 주면 반응이 없었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동정심은 타고나며, 다른 사람에게 쉽게 전이 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런 ‘측은지심’은 살아가는 데 늘 강조됐다.

 

동정과 연민에 대해 모든 학자가 찬성한 것은 아니다. 독일 철학자 칸트는 팔이 안으로 굽듯이 동정심과 연민이 너무 자아적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릴 이웃의 피해와 먼 외국의 피해를 비교할 때, 당연히 가까운 쪽의 고통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니체는 동정심도 이타심이 아니라 이기심의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것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약자들의 이기심이라는 것이다. 그는 동고(同苦,Mitleid)는 낮은 동물들도 느끼는 감정이므로 오히려 인간은 동락(同乐,Mitfreude)을 추구해야 된다고 말한다.

 

마라톤을 예로 들면 탈락한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에게 진정한 축하를 건네며 함께 기쁨을 나눌 것을 제안한다. 스토아학파의 학자 에픽테토스는 “너의 콧물은 너 자신이 닦아라”라면서 자립을 강조했다. 콧물을 흘린 사람의 콧물을 계속 닦아 주면 스스로 콧물을 닦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약자에 대한 지나친 배려나 후원은 그 사람이 스스로 인생을 완성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서 고통을 함께 나눌 필요가 있다. 실직자, 장애인, 경제적 취약 계층, 노인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동시에 역차별과 자립심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나라 40대는 무한 경쟁, 적자생존(适者生存), 승자 독식의 논리에 따라 살던 시대를 경험했다. 어릴 때는 학교에서, 졸업 후에는 직장에서 또는 사업에서 남을 이겨야 하기 때문에 패배자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남보다 더 잘해야 인정받는 세상에는 이기심이 가득하다. 이웃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감수성을 키울 필요가 있다.

 

자신에게, 상대에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느껴 보라.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5. 만족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5

어디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가 5장

 

행복한 순간은

너무나 짧다

 

[만족]

“행복은 결핍에서 만족으로 ‘빠른 전이’다.”

 

행복이 짧고 고통이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행복이 찰나의 짧은 꿈처럼 느껴지는 반면 고통은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한국인의 일생이 80년이라고 할 때 평생 웃는 시간은 고작 한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하루에 웃는 시간이 90초뿐이다. 반면 걱정하고 근심하는 시간은 하루 3시간으로 조사돼 평생 10년이나 걱정하며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뇌 과학이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인간은 대개 일생 동안 50만 번 이상 웃는다. 대체적으로 나이가 어릴수록 웃음이 많고 연령이 높아질수록 그 빈도가 줄어든다고 한다. 50만 번이 아주 많아보이지만 생애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웃는 시간은 짧다고 할 수 있다.

 

웃음이 줄어드는 이유는 행복한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뇌의 노화 같은 생리학적 퇴행도 꼽을 수 있고 사회적인 환경도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행복은 항상

과거형이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란 많은 경우 결핍에서 충족으로 넘어가는 ‘짧은 순간’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늘 결핍은 인간에게 고통이지만 충족에서 과잉으로 넘어가면 권태, 지루함의 감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행복은 그 사이의 짧은 만족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행복을 즐기는 순간은 찰나와 같이 금방 지나간다. 영원하고 지속적인 행복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작은 행복감에 만족할 수 있어야 된다. 행복은 멀고 크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가까운 곳에 있다.

 

행복은 결핍이 채워질 때 느끼는 주관적인 만족감이다. 쇼펜하우어는 결핍에서 느끼는 불쾌에서 만족을 느끼는 쾌감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빠른 이행”으로 봤다. 너무나 짧은 순간에 만족이 결정되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기대보다 크지 않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여러 가지 결핍때문인데, 언젠가 그 결핍이 충족되면 행복감으로 넘어갈 수 있으나 그 지속도가 너무 짧다. 그래서 행복의 순간은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는 경우가 많다.

 

영원한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쾌락은 단순히 결핍을 제거하고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으므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성공, 성취, 합격 등 우리가 행복했던 순간을 되돌아보면 너무나 짧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그 기쁨이 몇 달씩 지속되지는 않는다. 인생의 큰 틀에서 보면 대부분 작은 것에서 행복이 이뤄진다. 음식을 먹을 때 첫 숟가락,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설렘, 첫 출근 등등이 우리의 결핍을 채워서 만족으로 넘어가는 단계인데, 이때가 가장 행복하다. 행복은 빨리 잊혀진다. 또 다른 결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을 겪을지 알 수 없으며 그 고통을 견디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너무 큰 행복을 기대해선 안 된다.

 

자신에게 알맞은

행복이 있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이라는 용어가 꽤 유행한 적이 있다. 소확행은 그의 에세이 <<랑케르한스 섬의 오후>>에서 쓰인 말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축약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돼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을 뜻한다.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이나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작은 만족에서 얻는다. 짧은 행복은 작을 수밖에 없다.

 

소식이 몸을 건간하게 하고 폭식이 건강을 해치듯이 ‘행복은 소소한 것’에서 찾아야 작고 짧은 행복을 즐길 수 있다. 행복은 늘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젊음, 모든 것은 잠깐 머무르다 떠나가기 때문에 작은 쾌락에 만족할 줄 알아야 된다. 갈증을 채워 주는 커피 한 잔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짧은 만남, 인연이 주는 작은 즐거움에 감사할 수 있어야 된다. 감당할 수 없는 너무 큰 행복, 만족은 따분함을 가져와 새로운 것을 찾게 만든다.

 

합격, 성취, 젊음, 시간은 순식간이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라.

 

40대는 인생의 고통을 충분히 알기 시작한 나이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인정도 받고 인간관계의 폭도 넓어지고, 결혼하여 자녀가 있는 경우도 있다. 성취한 만큼 책임도 늘어나면서 고통도 많아진다. 40대는 자신의 인생의 전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인생의 시작과 함께 끝을 생각하면서 자신만의 계획이 필요할 때다.

 

시간과 행복은 지체하지 않고 흐른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6. 현재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6

현재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현재]

“오늘이라는 날이 단 한 번뿐이고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것임을 항시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에 있다. 뇌 과학으로 인간의 뇌가 다른 동물의 뇌보다 훨씬 크다고 밝혀졌는데, 사고력이 높은 만큼 고통도 많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신경 세포가 있어야 된다. 따라서 돌이나 식물은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다. 동물 가운데 최하등의 동물은 약간의 고통을 느끼지만, 신경 조직을 완전히 갖춘 척추동물은 큰 고통을 느낀다. 인간은 단순히 고통을 느끼는 능력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도 함께 있어서 그만큼 더 많은 고통에 노출된다. 따라서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즐거움, 그것에 근거한 불행감과 행복감은 동물보다 훨씬 다양하며 지속력이 강하다. 인간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과 지능에 비례하여 동물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큰 감정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다.

 

현재를

살아라

 

동물은 현재만을 살기 때문에 근심과 불안이 없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과거의 고통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동물이 인간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장점을 동물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과거의 일에 대해 후회와 자책하는 일이 많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현재는 더 나아졌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관계나 직업 선택에서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미래에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일이 많다. 불확실한 죽음을 불안해하고, 계획하는 일이 잘되지 않을까 바 쓸데없는 의심을 하기도 한다.

 

동물은 죽을 수 있는 상황을 피하려고 할 뿐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인간은 그런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불안해한다. 인간만이 죽음을 대비하여 막연한 두려움과 지나친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고통의 양이 쾌락의 양을 압도하게 된다.

 

동물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가 없기 때문에 그것에 따른 행복이나 불행이 없다. 인간만이 즐거운 미래를 예상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아름다운 환상에 사로잡힌다. 더 나아가 인생의 전체를 내다보면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동물의 의식은 눈앞에 드러난 대상에 대해 짧게 반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현재에만 한정된다. 그러나 인간이 느끼는 즐거움은 실재하지 않는 미래의 환영이다.

 

감각이 무딘 동물이 현재에만 몰입하기 때문에 행복한 반면, 상상력으로 만든 미래의 환영에 갇혀 사는 인간은 불행하다. 미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나 희망은 행복의 바탕인 마음의 안정을 해칠 수 있다. 과거와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만 충실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미래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으로 급히 쫓아가는 반면에 현재는 거들떠보지도 즐기지도 않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만이 진실하고 현실적이고 확실한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늘은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현재를 의미로 채울 필요가 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현재 그 자체를 기분 좋게 받아들여 즐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이 내일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확신하는데, 그것은 착각이다. 인생 전체를 구성하는 하루하루는 똑같은 것이 아니라 어제와 다른 늘 새로운 것이다. 현재의 가치를 늘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된다. 과거와 미래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는 매 순간의 가치를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많다.

 

동물이 행복한 이유는 인간보다 적은 고통과 적은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성이 없으므로 과거의 고통을 담아 두지도 않고 미래의 환상에 사로잡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동물은 오로지 실재하는 현재의 고통만을 느낀다. 미래와 과거는 우리의 생각 속에만 있고 순간만이 실재한다.

 

쇼펜하우어는 현재의 가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현재만 사는 사람을 경솔하다고 본다.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조절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불만이나 미래에 대한 우려 때문에 현재의 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가 인생을 가치 있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오늘뿐이며 내일이 오늘의 반복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하루하루는

하나하나의 인생이다

 

많은 사람이 1분이 모여 60분이 되고 하루가 쌓여 1년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일 뿐이라고 여긴다. 시간이 마치 무한한 점으로 이뤄진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다 보니 현재에 집중하지 않고 과거의 후회나 영광에 얽매여 살거나, 나중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현재의 행복을 미루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시간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단절된 것이다. 우리는 오직 현재만을 살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데 마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직장에서 나이 든 상사가 ‘내가 왕년에’라고 말하면 ‘꼰대’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과거 자신의 영웅담을 많이 반복하는데 본인만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앞으로’라는 상상속에서 성급히 회사를 관두고 자기 사업을 하는 경우 망하기 쉽다.

 

과거는 지나가서 없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없는 것인데,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 속에서 사는 것은 어리석다. 현재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순간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1년 이상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다 보니 미래에 무한한 시간이 펼쳐질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다. “네가 헛되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라는 말을 다시 새겨 보면 좋겠다.

 

스티브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만일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던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서 만약 노(No)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하루를 자신의 마지막 인생으로 생각한 것은 쇼펜하우어의 명언과 닿아 있다.

 

현재를 과거처럼, 현재를 미래처럼 의식한다면

지금 이 순간을 더 가치 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7. 개성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7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라

 

[개성]

“우리는 의지의 객관성이 높은 단계에서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인간은 개성이 개인적 성격의 커다란 상이함으로서, 완벽한 인격으로서 외부적으로 표현된다.”

 

40대는 가장 열심히 활동할 인생의 전성기다. 그런데 사회적인 기준에 맞춰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워크홀릭은 오히려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 마흔이면 일과 행복감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회의와 절망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사회 집단과 관계에 맞춰 사는 것이 익숙한 40대는 눈치를 많이 보는 세대다. 남의 시선에 갇혀 살면 행복해질 수 없다. 타인의 평가에는 시샘, 질투 등 부정적인 내용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타인의 평가의 틀을 과감히 깰 필요가 있다. 타인의 평가에 휘둘릴 때 떠올려 보라.

 

“너라고 나보다 나을 게 없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생명처럼 살려는 의지에 살아가는 수동적인 존재이긴 하지만 이 세계에서 개성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는 능동적인 존재다. 각자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존재인 셈이다. 남이 시키는 것 말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때 인간은 행복해진다. 남과 다른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 일, 누구나 가는 길이 아닌 내가 가는 길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행복의 길은 천차만별이다. 가장 인간답게 사는 일은 자신만의 욕망을 아는 것이다.

 

원하는 바를 알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

 

왜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살아야 행복할까?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를 네 단계로 구분해 인간과 다른 존재를 비교한다.

 

첫 번째 단계, 돌 같은 무기물.

중력, 전기, 자력이 작용한다. 전기를 예로 들면 우리나라는 회사나 집이나 220볼트로 어디나 똑같다.

 

두 번째 단계, 식물.

매년 새롭게 꽃이 피는 것 같지만 특성상 비슷비슷하다.

 

세 번째 단계, 동물.

충동과 본능이 지배하면서 무리 짓는 특성이 강하다. 다른 말로는 집단주의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단계, 인간.

비로소 각자의 개성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 원하는 바가 다르고 그것에 대한 성취감과 행복감이 차이 나기 때문이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삶을 살 때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낮은 단계일수록 공통점(종적 특성)이 강하고 높은 단계일 수록 차이점(개별적 특성)이 더 도드라진다는 점에서 이 세계에서 인간만이 자신의 색깔을 찾는 삶을 살 수 있다.

 

지식이 발전하면서 세계를 설명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는 하늘의 별과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과 인간에서 작용하는 ‘내적인 힘’이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에너지 같은 물질에서는 화학 작용과 전기 작용을 일으키지만 생명안에서는 영원히 살려는 강한 집착이 일어난다. 물론 영원한 삶은 유한한 인간에게 이뤄질 수 없는 꿈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보다 낮은 고등 동물은 개성을 갖고 있지만 인간만큼 뚜렷하지 않다. 종의 성격이 너무 강하여 개별적 성격의 특성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등 동물로 내려갈수록 개별적인 흔적이 사라지고 종의 일반적인 성격과 그 특징만이 남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생명체가 갖고 있는 고유의 생존 능력을 영혼이라 부르고, j 식물적 영혼(양분 섭취), k 동물적 영혼(느낌), 그리고 l 인간적 영혼(사유) 세가지로 나눴다. 니체도 인간의 진화를 다섯 단계 j 식물(유령), k 벌레, l 동물(원숭이), m인간, n 초인으로 나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여러 것이 혼재한다는 뜻이다. 인간 안에는 이런 여러 충동이 함께 들어있기 때문에 서로 충돌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식물처럼 수면과 영양 섭취뿐만 아니라 동물의 종족보존의 충동이 들어 있으며, 높은 지성이 함께 작용한다. 잠을 잘 때는 돌이나 식물처럼 지내고, 낮에 음식 섭취나 종족 보존을 위해 동물처럼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가끔 지성을 활용한다. 이는 동물에서 인간까지 오랜 진화를 거듭했다 해도 자칫 한순간에 원숭이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경고다.

 

이를 막기 위해 인간 안에서는 가장 낮은 어두운 충동인 의지와 가장 높은 밝은 지성이 대립하는데, 이 둘은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지혜를 갖추는 일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이런 지성을 통해 자신이 진짜 원하는 바를 알게 되며, 자신의 참모습인 ‘개성’이 실현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강조한 ‘개성’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행복하라

 

한국의 행복 지수는 OECD 38개국 중 36위로 최하위권이다. 세계 최하위권을 맴도는 불행감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빈부 격차, 치열한 경쟁, 급속한 고령화, 열악한 환경, 물질 만능 주의, 외모지상 주의가 행복을 방해한다. 무엇보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살면서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144위로 최하위라는 점이다.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들에게 가장 후회되는 일, 또는 다시 태어나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을 꼽으라고 하면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죽음을 앞둔 말기암 환자들의 첫 번째 소망이라고 브로니 웨어가 <<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에서 말한다.

 

누군가가 행복한지 보려면 얼마의 자산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어떤 고통을 잘 견뎌 냈는지 봐야한다. 노년에 가장 후회되는 일,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과거에 내가 원했던 것을 남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주위 눈치를 보며 남이 정한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하는 삶은 답답할 수밖에 없다. 내 마음대로 살기 어렵고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은 집단주의, 평준화된 교육 방식, 출세 지향주의 등에 원인이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몇 가지 대상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행복도를 낮추는 중요한 요인이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사회적 비교가 심한 편이며 그것에 따라 행복도가 낮아지는 경험은 노인 층이 가장 많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할수 있는 것,

내가 타고난 것을 긍정하는 것이

나대로 사는 것이다.

 

한국인이 꼽는 행복의 조건은 가족의 행복, 건강, 그다음이 부와 명예다. 다행스럽게도 경제적인 조건은 어느 정도 선진국 수준이라 물질적인 결핍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금수저, 흙수저 등으로 계급을 나누며 남의 태생적 운을 부러워하는 일들이 생겨나 불행감이 커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타인과 비교함으로써 생겨나는 상대적인 박탈감은 행복을 갉아먹는 벌레와 같다. 플라톤은 <<행복론>>에서 재산, 외모, 명예, 체력, 언변에서 조금은 “부족함을 느끼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객관적인 평가보다 자신의 주관적인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보다 다소 부족하다고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요즘 잘생긴 사람보다 개성 있는 사람이 더 인기 있다. ‘너는 인상이 좋다’, ‘웃을 때 예쁘다’, ‘카리스마 있어 보이다’, ‘걸 크러쉬’, ‘차도남’ 등이 개성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의 고유한 색깔이 꽃보다 더 다채로울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잠재적인 가능성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마흔부터는 개성이 뚜렷한 삶을 살아야 된다. 남의 기대와 욕망에 맞춰 살아선 안 된다. ‘삶을 위한 삶’이라는 생존을 위해 자아 실현이라는 가장 높은 욕구가 잊혀지면 안 된다. 겉보기에 사람들은 같은 지향점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다른 곳을 보고 싶어 한다. 동일화되고 표준화된 대중 문화의 영향력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같은것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런 행복은 기만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10조에 보장된 ‘행복 추구권’은 독일 헌법에서 유래한 것으로 독일어 ‘인격의 자유로운 전개(die freie Entfaltung der PersÖnlichkeit)’를 번역한 것이다. 일본이 독일의 헌법을 받아들이면서 변형된 용어다. 국가는 국민에게 행복의 가치를 위해 어떤 것도 강요할 수도 없다. 놀든 일하든 각자 개인의 선택이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다가 실직을 선택해서 행복을 느껴도 관여할 문제가 아니며 국가는 노동에 대한 동기 부여를 위해 지원할 수 있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행복 추구권은 개성의 다양함을 반영하는 것으로 똑같은 영원 불멸한 행복을 전제하지 않는다.

 

행복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가령 인터넷의 인격 침해, 비방과 모욕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할 권리가 행복 추구권에 덧붙는다. 행복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확장된다. 행복의 내용은 각자의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개성이다.

 

세상에는 늘 잘 알려진 유혹의 길이 있다. 성공, 행복, 명예, 부 등 행복으로 이끌 것으로 확신하는 통로다. 남들이 가는 길을 무작정 쫓는다면 적성도 맞지 않고 강요된 삶을 살게 된다. 결국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남을 따라서 ‘같음’을 추구하는 것은 낮은 단계의 욕망이다. ‘다름’을 추구하는 것은 높은 단계의 욕망이다.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 살면 갑갑하고 답답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비록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큰 부자가 아니더라도 타인의 시선에 맞추지 않고 자기 자신에 흡족한 삶이면 충분하다.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은 나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가는 것이다. 개성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태도다. 우선 남들이 전혀 알 수 없는 바, 나 자신만이 원하는 바,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타고난 재능과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마흔이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기 위한 시행착오와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충분해 보인다.

 

자신이 원하는 한 가지만 찾아보라.

원하는 바가 없는 인생은 타인에게 휘둘린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8. 돈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8

얼마나 소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돈]

“돈은 바닷물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

 

얼마를 벌어야 행복할까? 그 한계를 정하는 일은 어렵다. 연봉과 재산, 주택 등과 관련해 절대적인 기준은 제시할 수 없다. 사람마다 행복을 위해 갖춰야 할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상대적이다. 재산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가난만 피한다면 만족하는 삶을 살고,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하면 불행하게 여길 수 있다. 각자의 욕망과 만족에 따라 달라지는 부는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이 될 수 없다. 부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더 심해질 수 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주식 재산을 물려받아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쇼펜하우어는 부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쇼펜하우어는 상속받은 주식 재산을 팔아서 평생 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조건을 만들었다. 그 덕분에 많은 철학자가 돈을 벌기 위해 강의를 한 반면 쇼펜하우어는 평생 돈 걱정 없이 당당하게 철학공부와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그는 돈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진짜 부자였다.

 

쇼펜하우어는 아버지 회사의 주식을 상속받아 여기서 생기는 수입으로 조촐하게 살았지만, 금융쪽도 나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주주로 있는 어떤 회사가 파산했을 때 다른 주주들은 70퍼센트의 지불에 동의했으나, 쇼펜하우어는 전액 지불을 우겨서 모두 받아 냈을 정도다. 부는 누가 소유하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보인다. 쇼펜하우어는 많은 사람이 부를 인생의 목적으로 잘못 생각한다고 했다.

 

행복한 부자,

불행한 부자

 

부가 인간의 본래 소유물이 아니라 운에 의해서 줄어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부에 대한 욕망이나 집착이 줄어든다. 부에 대한 갈증이 줄어들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다. 따라서 부에 대한 욕심을 줄이면 행복감이 늘어날 수 있다. 이를 아는 사람은 돈을 잃어도 행복감을 되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부는 관리가 중요하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를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생명’처럼 지켜서 검소한 생활을 한다. 태어나면서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진정한 부자에게 부는 향락이나 낭비의 대상이 아니다.

 

많은 상속을 받은 경우 자신의 재능에 따른 창조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은 돈벌이 걱정 없이 평생 연구하면서 보낼 수 있다. 반대로 불행한 경우도 있다. 돈을 많이 물려받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빈둥거리면서 밥만 축낸다. 교양이나 지식이 없어서 정신적인 활동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부자의 고통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돈을 낭비하다가 빈곤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필요 이상으로 많은 부를 가진 사람 중에는 그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걱정하느라 행복하지 못한다. 그런 부자는 불행하다고 느낀다.

 

돈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점에서 행복의 상대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이미 부를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가진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시야에 갇혀 있다. 부에 대한 갈증은 절대로 채워질 수 없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재산이나 부의 가치와 비교해 더 가치 있는 것은 지적인 교양이다. 돈을 채워도 정신이 텅 비어있으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은 소유하는 사람보다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에서 그 가치가 달라진다. 쇼펜하우어처럼 부모로부터 많은 자산을 상속받아 돈 걱정 없이 철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 그가 생각한 행복한 부자의 전형이다.

 

돈의 크기보다

돈의 관리가 더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부에 집착하는 경향이 커졌다. 주로 모든 관심이 돈을 향해 있고, 돈이 인생의 목적인 사람이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큰 역할을 하지만 최근에 천민자본주의 흐름이 더 강해졌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투자 폭등으로 대박 신화가 생겨나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벼락거지’라는 말은 그런 박탈감을 대표한다. 한탕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것이 현실이다.

 

부가 나쁜 것만은 아니고 쇼펜하우어가 강조하듯이 자신이 그런 부의 혜택을 보면서 자유로운 삶을 산 것을 보면 부는 분명히 행복의 한 가지 조건이다. 그러나 진짜 부자와 가짜 부자의 차이는 분명하다. 진짜 부자는 부를 자신의 장점을 계발하는 데 최대한 활용한다.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얻으면 유흥이나 과시, 소비보다 자신의 교양을 쌓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 독서, 음악 감상, 여행 등을 통해 아름다움을 찾고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가짜 부자는 시간을 생산적으로 쓰지 못하고 남에게 과시하거나, 낭비와 방탕으로 돈을 쓴다. 쇼펜하우어의 진짜 부자는 경제적인 자유를 뜻하는 개념과 닿아 있다. 진짜 부자는 돈의 가치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검소한 경우가 많고 돈 관리에 철저하다고 한다. 문제는 돈의 노예다. 가난했다가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경우, 부자가 되기 위해 비열한 방식으로 출세한 경우에는 탕진할 가능성이 높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무지한 자가 부자가 되면 그 무지가 품격을 떨어뜨린다.”

 

진정한 부자는 재산을 재난이나 불행을 위한 방호벽으로 여기지, 즐거움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졸부는 저축하지 않고 낭비해서 번 만큼 쓰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결국 다시 가난해 진다. 상속으로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은 자본을 안전하게 관리하며 돈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졸부처럼 낭비하지 않고 미래를 생각해서 경제적이며 부의 소중함을 무엇보다 잘 안다. 즉 부는 없어서는 안 되는 공기와 같은 것이므로 부를 생명처럼 지키며 신중하고 검소하다.

 

반면 가난했던 사람은 빈곤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어쩌다가 우연히 굴러들어온 부를 향락과 낭비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다시 가난해지면 예전처럼 재산 없이 그럭저럭 살 수 있다. 결국 돈이라는 걱정거리가 사라진 것처럼 살아간다. 부자는 재산을 유지하려고 한다. 타고난 재산을 가진 사람은 고된 일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창조적인 재능에 따라 살 수 있다.

 

진정한 부자는 돈을 다루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9. 자존감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9

타인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자존감]

“자존감을 갖고 살아라.”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흔히 타인의 평가는 직장에서, 사업에서, 만남에서 객관적인 조건이 된다. 하지만 참된 행복의 조건을 안에서 찾아야 한다면 타인의 평가는 어쩌면 행복과는 무관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명예, 지위, 명성, 출세 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늘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하고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만큼 인간은 혼자 뭔가를 이루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지지와 호의를 이끌어 내려고 한다. 그래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속임수를 사용하기도 하고 가면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남에게 너무 잘 보이려고 의식하다 보면 눈치를 보게 되고 대화가 부자연스럽게 된다. 본래 자신의 모습보다 더 좋게 평가받으려는 허영심이 커지게 된다. 우리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타인의 의식이 얼마나 편협하고 변덕스러운 기분에 좌우되는지를 알게 되면 타인의 평가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도 남을 평가할 수 없고

남도 나를 평가할 수 없다

 

나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는 타인의 마음은 피상적이며, 천박하고, 왜곡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대 이상의 좋은 평가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타인은 정작 나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을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제삼자의 판단은 객관적이지 않다. 특히 칭찬이 아니라 비난인 경우 그 사람의 사고방식을 보면 무식하고, 편견이 있고 좁고 빈약한 경우도 있다. 그런 평가는 아예 무시하는 것이 더 낫다.

 

쇼펜하우어는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잘못된 예로 어느 죽음을 앞둔 사형수 이야기를 한다. 1846년 3월 31일 자 <타임스>에 실린 토머스 워크스는 사형이 집행되는 날 자신의 수치스러운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온 참관인들에게 의연한 모습을 보여 주는 데 성공했다. 죽음을 앞두고 구경꾼들에게 마지막으로 멋진 모습을 보이고자 한 것은 끔찍한 명예욕의 본보기다.

 

명예나 출세를 중시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걱정에 살고 있다. 자신이 지닌 참된 모습보다는 남의 마음속에 깃든 자신의 모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산다면 불필요한 불안은 사라질 것이다.

 

인간의 많은 고뇌와 번민은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잘못된 태도에서 유래한다. 그 바탕에는 질투, 증오심, 허영심, 자존심 등이 있다. 즉 남과 비교하여 더 좋게 평가받고 싶으면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증오하게 된다. 또한 실재의 자신보다 더 좋게 평가받고 싶은 허영심은 무시받지 않으려는 자존심을 나타낸다. 이 가운데 불행감을 가져오는 허영심을 없애는 일이 가장 어렵다.

 

호감 가는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라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의 마음에 들까’ 고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래 갖고 있는 자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명예, 지위, 명성은 예를 들면 나의 목숨이나 건강보다 결코 중요하지 않다. 건강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가장 어리석은 일이 명성과 명예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일이다. “명예가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격언은 타인의 견해를 자신의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망상에 불과하다.

 

타인에게 더 많은 존경과 지지를 받아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게 해서 관직, 훈장, 칭호를 얻는 일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의 마음에 기대하는 망상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오히려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평가에 속아 자신의 건강이나 목숨을 바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 바탕에는 탐욕과 집착이 자리잡고 있다. 결국 그런 노력이 아무런 실속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된다.

 

자긍심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쇼펜하우어는 명예욕, 허영심과 구분되는 자긍심의 중요성을 말한다. 허영심이 본래 모습보다 더 좋게 타인으로부터 갈채를 받으려는 욕심이라면, 자긍심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장점에 대한 확고한 확신이다. 허영심이 타인의 마음에 기대하는 희망이라면, 자긍심은 자신의 마음에서 자신에 대해 내리는 직접적인 높은 평가다. 자신만의 장점과 가치에 확신이 있다면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자긍심은 손상되지 않는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자긍심을 갖기 위해서는 타인의 호감을 얻으려는 허영심을 없애야 된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허영심이 들면 말을 많이 하고 자긍심이 들면 과묵해진다.”

 

사회생활을 할 때 중요한 것이 소위 ‘세평’이다. 늘 평가는 이뤄지고 그것에 따라 승진과 출세 그리고 명예가 결정된다. 타인의 거울에 비친 모습대로 살지 말고 자신의 기준에 맞게 당당하고 기죽지 말고 살도록 해야 된다. 자신이 자신의 가치를 긍정하는 흔들리지 않는 자긍심은 행복의 조건에서 가장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게 확신이 생기는 순간 인생이 달라진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1. 조건(제3권)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9. 자존감 - 소설게시판 - 모이자 한민족 커뮤니티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9 타인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자존감] “자존감을 갖고 살아라.”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흔히 타인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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