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 고통(제1권)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마흔, 왜 인생이 괴로운가
삶은 전부 의지에 달려 있다
[고통]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살려는 의지를 충분히 갖고 있으나 이 의자가 충분히 만족되지 않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가난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고약한 고통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1분 1초가 아까울 만큼 두려운 죽음일 수도 있다. 염세주의 철학자로 불리는 쇼펜하우어에게 가장 큰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삶에 대한 염증만큼 컸던 삶에 대한 애착이었다.
쇼펜하우어는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벨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발사에게 면도를 시키지 않았다. 화재가 날까 봐 2층 방에서는 잠을 자지 않았으며 목숨을 지키기 위해 탄환을 넣고 권총을 침대 옆에 두고 잤다. 그의 나이 43세가 되던 1831년에는 베를린에 콜레라가 퍼지자 프랑크프르트로 도망가다시피 했다.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
40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쇼펜하우어의 깨달음에 공감할 것이다. 삶의 욕망 자체가 고통이라는 가르침을 불교에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로 표현한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기 마련인 존재다. 그러므로 욕망, 집착, 소유욕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명성, 권력, 지식 등은 내가 죽으면 다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욕망의 파도를 잘 다스리는 것이 마음의 행복을 얻는 출발점이다. 어두운 고통의 바다에서 눈을 뜨고 검은 파도를 들여다보라. 행복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가려진 삶의 어 두운 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의 심연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사가 고통의 연속인 이유를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 본성의 욕망 때ㅜㄴ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삶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로 보고, 영원히 살려는 맹목적인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 인간이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밝혔다. 인간 본성의 욕망이 고통만 주는 것은 아니다. 고통과 함께 그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하는 힘 또한 삶에 대한 애착과 맹목적인 열망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런 욕망을 잘 다스릴 때 주체적으로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봤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의 본능이다
삶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다. 잘 살고자 하는 욕구가 타성과 관성이라는 점에서 불행의 원인이 되지만 삶의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행복의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성과 본응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다. 행복도 이 두 원리에 근거해서 주장됐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 행복일 때 그것은 이성에 맞는 삶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의 행복을 정의할 때 식물,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 즉 이성에 주목했다. 지혜로 운 인간의 영혼의 탁월성이 있다고 했다. 즉 이성이 탁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의 탁월성에 따라 이성을 최대한 발휘하며 사는 것이 잘사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행복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본능의 관점에서 환상이잦 이룰 수 없는 망상이라고 봤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인생이라는 기창가 기관사(이성) 없이 삶에 대한 욕망(동력)에 이끌려 달려가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정신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충동에 떠밀려 간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속담이 있다. 천하고 고생스럽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낫다는 삶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과 악착같은 욕망을 나타낸 말이다. 생명력이라는게 얼마나 강인한지를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식물에 비유한다.
"마른 씨앗은 3,000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유리한 환경이 생기는 식물로 성장한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계속 운동하려는 작용의 힘처럼 인간은 태어난 이상 이 세상에서 끝까지 남기를 바란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의 본질이 합리성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라고 말했다.
삶에 대한 애착과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를 달리게 한다.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은 죽음에 의해 좌절된다. 그래서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려고 사랑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얻지만, 그 결과는 완벽한 행복이 아니라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다.
고통을 깨달아야
인생을 깨닫는다
마흔 이후부터는 인생에 대한 생각의 전환, 행복과 고통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다. 쇼펜하우어처럼 행복을 위해 우리도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지혜를 갖출 필요가 있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은 40대 중반이 넘어서야 풀리기 시작했다. 쇼펜하우어에게 마흔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인내하면서 넘어야 할 인생의 위기이자 전환점이었다. 그가 40대에 포기했다면 명성도, 행복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풍부한 경험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시각이 필요하다. 현상을 판단하고 이해하고 자양분으로 만들 수 있는 성숙의 조건이 최소 40년이다. 청춘은 지혜롭지 못하지만 무모한 용기가 있다. 이 질풍노도의 시기에 인생의 쓴맛을 겪고 나면 시선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마흔 이후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다면 경험과 지식을 쌓고, 자기 통찰을 거듭해야 한다.
마흔부터 쾌락의 양을 늘려 나가기보다는 고통을 줄여 나가는 방법이 더 현명해 보인다. 쇼펜하우어는 40대를 견디고 나서부터 70회 생일이 2년 지난 후 1860년 9월 21일 눈을 감을 때까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사후에나 인정받을 줄 알았던 그의 책이 가치를 인정받고 사회적 명성을 얻은 덕분이다. 쇼펜하우어의 생전 마지막 모습은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듯 고통 없이 온화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마흔의 쇼펜하우어가 앞으로 누릴 행복을 전혀 예감하지 못했듯이 우리도 미래를 속단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쇼펜하우어가 노년에 얻은 것은 명성과 부, 사회적인 인정이 아니라 내면의 깨달음, '삶의 지혜'였을 것이다.
인생은 우리가 영원히 고찰해야 하는 대상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 욕망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02
인간은 욕망하기 때문에
욕망할 이유를 찾는다
[욕망]
“인간은 무수한 욕망의 덩어리다.”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식욕뿐만 아니라 수면욕과 성욕 등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견딜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이 기본적인 욕망을 넘어 자기실현이라는 고차적인 욕망도 갖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이런 욕망이 신체와 분리될 수 없다고 했다. 눈은 보려고 하고, 귀는 들으려고 하고, 입은 먹으려고 한다. 이렇듯 신체는 인간의 욕망에 대응한다. 또한 다양한 욕망은 위계가 있다. 가장 낮은 단계의 욕망이 성욕이라면 가장 높은 단계의 욕마이 사유다.(사유: 思惟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 욕망의 덩어리인 인간이 이 양극단의 욕망을 잘 통제하여 균형을 이루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인간은 구체적으로 욕망한다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본질이 “삶에의 의지”이며 인간은 신체 내부적으로 그 의지를 알게 된다고 했다. 신체는 인간의 보이지 않는 욕망을 가장 객관적으로 드러낸다. 즉 삶의 의지를 신체를 통해 객관적으로 발현되고, 신체 한 부위 한 부위가 욕망의 주체다.
“신체의 각 부분을 의지를 발현하는 주된 욕구와 완전히 상응해야 하며, 그런 욕구의 가시적 표현이어야 한다. 즉 치아, 목구멍, 장기는 객관화된 배고픔이고, 생식기는 객관화된 성적 욕망이며, 무건을 집는 손이나 재빠른 발은 그것들이 표현하는 이미 더 간접적인 의지의 노력에 상응(대응)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화 기관이 먹기 위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고 봤다면 쇼펜하우어는 먹으려는 의지가 소화 기관을 만들었다고 봤다. 눈은 보고자 하는 의지가 발현된 것이므로 대상을 보려는 욕망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며, 신체의 각 부분도 의지가 나타내는 욕구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욕망은 신체의 기능과 같이한다.
이런 이유로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비이성적인 조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은 신체의 일부분인 뇌의 기능에 따른 것이고, 인간의 정신이나 이성도 한낱 “욕망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욕망을 완전히 통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욕망은 아무런 이유 없이 생각과 무관하게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욕망의 작용이 지성의 작용보다 먼저 일어나서다. 우리가 배고픔을 느끼는 이유는 맛있는 음식을 봤기 때문이 아니다. 먼저 배고픔을 느끼고 그 상태와 느낌을 충족할 대상을 찾는 것이다. 이렇듯 욕망은 외부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과 관계없이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쇼펜하우어는 욕망과 지성의 관계에 대해 그 당시 헤겔 같은 관련론자들이 인간의 본질을 이성, 정신, 의식으로 규정한 것을 오류라며 비판했다. 대신 의식의 내면에는 무의식적 의지, 집요한 생명력, 욕구의 의지가 우세하게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비유하자면 ‘절름발이(이성)’를 어깨에 메고 가는 힘센 ‘장님(의지)’처럼 의지는 욕구할 이유를 찾아서 욕구하는 것이 아니다. 욕구하기 때문에 욕구할 대상을 찾는다. 욕망이 합리적으로 좋고 나쁨을 선택하는 생각에 앞서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본능이 지성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욕망이 신체적이라는 점은 죽을 때까지 생존을 위한 욕망을 충족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욕망에는
선악이 없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욕구를 세 가지로 나눴다.
첫 번째,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욕구.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욕구다. 충족하기 쉽지만 충족되지 않으며 고통을 야기한다.
두 번째,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욕구.
성적 충족의 욕구다. 이 욕구는 첫 번째 욕구보다 충족하기가 좀 더 힘들다.
세 번째, 자연스럽지도 않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욕구.
사치, 호사, 부귀영화에 대한 욕구다. 이 욕구는 끝이 없고 충족하기도 어렵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환경에 따라 바뀌없다. 동시에 인간은 구석기 시대부터 살아남기 위한 정보를 몸에 남겨 두었다. 먹고 마시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비만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은 생각이고, 이와 별개로 지방은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이 생존을 위협하는 추위와 배고픔을 극복하는 방법은 지방을 몸에 축적하는 것이었다. 또한 인간의 이성은 환경과 피드백을 하며 만들어졌다. 그래서 많은 기억과 상처가 인간의 DNA에 기록돼 있다. 뇌도 생존하기 위해 환경에 따라 발전했다. 즉 지능은 생존 도구로서 발전해 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후손을 남기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진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 따르면 자신의 DNA를 이 세상에 남기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큰 열망이다.
이런 최근의 이론과 비교할 때 쇼펜하우어의 욕망의 철학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인간의 욕망과 지능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실제로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직장에서 돈을 벌고 친구를 만나고 투자를 하는 이유도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함이다. 이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고통을 느끼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 우리는 신체의 각 부분에 맞는 욕망이 적절히 충족됐을 때 만족할 수 있다. 죽음을 통해 신체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우리는 의욕과 결핍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욕망은 신체를 통해 ‘삶에 대한 의지’로 나타나다. 우리는 신체를 통해 ‘삶에의 의지’를 내부적으로 느낀다. 진화론과의 차이점이라면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을 잘 다스려야 행복해진다는 입장이다. 특히 인간의 성욕을 지성으로 잘 제어할 때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 휘둘리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의지의 외적인 자극에서 자유로워야만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자각하지 않으면
고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3. 과잉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03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
[과잉]
“삶은 진자(진자: 振子 진동자의 준말로 고정된 한 축이나 점의 주위를 일정한 주기로 진동하는 추이다)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가 삶의 궁극적인 요소다.”
쇼펜하우어는 불행의 두 가지 원인으로 고통과 권태를 꼽는다.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어서 고통에 시달린다면, 돈이 많은 사람은 넘쳐나는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라서 삶에 권태를 느낀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가 고통과 무료함인데, 우리의 인생이란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외적으로는 궁핍가 결핍이 고통을 낳는 반면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 따라서 하충 계급 사람들은 궁핍의 고통과 끊임없이 싸우는 반면 부유하고 고상한 세계의 사람들은 무료함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
행복과 불행은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달려 있다. 없으면 없다고 불평불만하고 많으면 많다고 지겨워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결핍은 고통이고 과잉은 무료함이다. 인간에게는 배고픔도 고통이지만 포만감 또한 불쾌다.
“모든 의욕의 기초는 결핍, 부족, 즉 고통이다. 인간은 이미 근원적으로 또 그 본질로 인해 이미 고통의 수중에 들어 있다.”
욕망의 최대 만족과
최대 결핍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Stumbling on Happiness)>>의 저자인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2,250명을 대상으로 언제 가장 행복한지 뇌의 상태를 촬영하여 발표했다. 그 결과 뇌가 집중할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 반면 휴식할 때 불행하게 느낀다고 발표했다.
길버트 팀의 연구 결과, 열심히 일에 집중할 때, 운동할 때, 마음이 맞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높은 수치의 행복 호르몬이 나왔다. 반면 휴식을 취하거나 부정적인 생각, 미래에 대한 걱정, 불쾌한 경험을 기억할 때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졌다. 이 연구 결과는 이 세계의 본질이 끊임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의지이며, 의욕과 노력은 동물과 인간 전체의 본질이기 때문에 권태가 불행의 원인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의 인간이 불행한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의욕이 너무 쉽게 충족되어 욕망의 대상이 제거되면 인간은 무서우리만큼 공허와 무료감에 빠진다. 따분함은 감당하기 힘든짐이 된다. 고통과 권태라는 양자택일 앞에 놓여있는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욕망의 최대 만족은 권태이고 욕망의 최대 결핍은 고통이다. 그런데 인간의 감정은 왕복 운동을 하는 시계추처럼 지속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따라서 영원한 충족과 행복감은 없다.
우리가 뷔페에 가면 처음에는 그 식장의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든다. 그러다 점점 허기를 채울수록 포만감이 생기고, 결국 마지막에 배가 꽉 차면 ‘이곳의 생선은 맛이 별로네’, ‘고기에서 냄새가 난다’는 말도 한다. 사람은 배가 고플 때와 배가 부를 때가 다르다.
고통과 무료함 사이에서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외로운 모태 솔로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원하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 신선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며 좋아한다. 반대로 이성에게 너무나 인기가 많은 사람, 예를 들어 카사노바 같은 사람도 나름의 고통이 있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무료함과 따분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모태 솔로는 이성과 함께하길 원하지만 바람둥이는 어장 관리에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은 같다
이렇듯 욕망이 완전히 채워져서 행복의 가장 이상적인 상황에 있다고 해도 이 세상에는 셀 수 없는 고통이 남아 있고, 모든 어려움이 없어져도 권태는 결핌의 고통만큼 견디기 어렵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간이 모든 고뇌와 고통을 지옥으로 보내 버린 천국에는 무료함밖에 남아 있지 않다.”
사람은 꿈을 이루고 성공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꿈을 이루고 성공할수록 권태에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를 증명하듯이 크게 성공한 부자들 가운데 인생의 따분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라는 경제학 용어가 있다. 이 법칙은 어떤 사람이 동일한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함에 따라 느끼는 주관적인 만족도 혹은 필요도가 점차 감소한다는 의미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질리는 것처럼 한계 효용은 반복할수록 점차 줄어든다. 따라서 돈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해도 반드시 액수에 비례하여 행복감이 증가하지 않는다.
일반 시민에게는 1,000만 원이나 1억 원이나 모두 큰돈이다. 하지만 돈을 써도 잔고의 앞자리가 바뀌지 않는 큰 부자들에게는 비슷한 느낌의 액수다. 진짜 부자는 자신이 돈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그만큼 돈에 행복의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돈의 가치가 사실상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특히 큰 노력 없이 경제적인 부를 가졌다면 풍요 속의 공허함은 견딜 수 없다.
내면의 공허감이 클수록 기분 전환을 위해 바깥의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하여 외적인 자극을 갈망한다. 경제적인 자림을 이루고 나면 찾아오는 권태감, 지루함의 원인은 내면에 있다. 양극단의 불행감을 무한히 왔다 갔다 반복하는 인생에서 부자든 빈자든 불행을 피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부자와 빈자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곤궁이 민중의 계속적인 재앙이듯이, 무료함은 사류 사회의 재앙이다.”
“고통과 무료함은 한쪽이 멀어질수록 다른 쪽이 다가온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 내면의 풍요와 정신의 풍요다. 풍부한 상상력, 두뇌 활동력이 뛰어난 사람은 전혀 무료함과 따분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정신이 풍요로워질수록 내면의 공허가 들어갈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구의 결핍과 욕구의 과잉을 피해야 한다. 양극단은 불행이다. 결핍과 과잉의 중간을 택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바깥에서만 차지 않고 자신의 안에서 찾는다. 자신의 고뇌를 객관적인 조건 탓으로 돌리지 않고 고뇌를 바라보는 자신의 관전을 바꾸려고 노력하면서 해결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무려함의 근원인 내면의 공허를 극복하기 위해 외적인 자극 대신 내적인 풍부함을 추구한다.
요즘 누구나 경제적인 자립을 원하며 성공과 행복을 꿈꾼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지적처럼 과잉 충족은 불행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너무 많은것을 갖기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쏟아붓기 전에 욕망의 양극단에는 불행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끊임없는 공부와 사색, 통찰로 욕망을 잘 다스려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게 손 벌리지 않을 정도의 재산이 있고 여가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자다. 우리도 행복을 위해서는 물질적인 결핍이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권태, 따분함, 지루함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고뇌는 한쪽 원인에서 멀어질수록
다른 쪽의 원인과 가까워진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4. 결핍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04
의도적인 배척도 필요하다
[결핍]
“성취된 소망은 인식된 오류고, 새로운 소망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오류다.”
인간은 “무수한 욕망의 덩어리다”. 매일 새로 생기는 요구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간다. 막상 욕망이 충족되면 무덤덤해지면서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기기 변경’의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관계든 직장이든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흥미, 관심이 생긴다. 그 새로운 것에 무감감해지면 또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다.
‘더더더(more and more)’라는 새로운 욕망은 불충족인 경우도 있지만 이미 충족된 상태에서 기인한 권태감일 수도 있다. 휴대폰이나 자전거 또는 차량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오래 사용한 제품에 대한 싫증일 수도 있지만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에 대한 욕망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욕망을 쇼펜하우어는 변신의 신 프로테우스에 비유한다. 프로테우스는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변실술을 갖고 있다. 프로테우스가 자신의 모습을 자유롭게 바꾸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도 늘 새로운 것을 찾아 거듭 변신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은 변하지 않는 본질보다 화려한 겉모양에 속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 준다. 쇼펜하우어는 꼬지어 말했다.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 목적이다.”
변화하는 조건에 의존하는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욕망은 충족하기 어렵지만 막상 충족되면 그 대상에 대해 무관심해지거나 무덤덤해지는 일이 많다. 만족하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뜻이다. 인간의 동기는 완전한 충족을 원한다. 하지만 갈증이 해소되자마자 동기는 곧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 낸다. 결핍에 따른 고통 때문에 욕망의 충족을 추구하지만, 막상 채워지면 당연하게 여기고 다른 새로운 것에 결핍을 느낀다. 이것은 부자나 빈자나,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똑같이 나타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를 망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외적인 것에 행복의 가치를 두기 때문에 일어난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 새로운, 물건, 새로운 사람 등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자신의 내적인 행복감이 부족하다는 뜻이 된다. 변화하는 대상에서 찾는 행복이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의 욕망은 늘 새로운 것을 향해 있다.
쾌락의 선호도는 수시로 바뀔 수 있어서 무한한 욕망 가운데 하나의 욕망을 채워서는 결코 진정한 만족감을 얻지 못한다. 게다가 실현된 욕망이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이 무한히 계속되면서 사람은 불행에 가까워진다. 결핍과 만족을 무한히 반복하는 이간의 변덕스러운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욕망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을 성취하자마자 새로운 대상을 찾아나서는데 고단하지 않을리가 없다. 행복의 가치를 외부에 두고 외적인 자극을 추구하면 결코 내적인 부족함을 채울 수 없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 경향을 하이데거는 ‘호기심’이라고 비판한다. 현대인이 퇴락한 모습이 바로 호기심에서 생겨난다. 세상은 늘 변하고 새로운 것이 탄생하고 기변의 욕망을 분출한다.
그런 호기심은 단순히 새로운 것을 경탄하면서 관찰하기 위한 호기심이 아니라 새로운 것으로 바꿀 때의 초조와 흥분 때문에 보일 뿐인 호기심이라는 지적이다. 호기심은 피상적으로 ‘알아 두기 위한 앎’일 뿐이다. 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은 어디에도 안착하지 않고 이곳으로 쏠렸다가 또 금방 다른 곳으로 쏠려가는 ‘무정주성(无定住性)’이다.
긍정적인 호기심과
부정적인 호기심을 구분하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결핍을 인식하고, 그 결핍된 공간을 채웠을 때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또한 호기심은 자발적인 탐구의 동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로체스터대학교 사회 심리학과 교수 에드워드데시는 “호기심이 새로움과 도전 과제를 찾고,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고 발휘하기 위해 늘 탐구하고 배우려는 인간 고유의 동기도 반영한다”라고 주장했다. 즉 긍정적인 경험을 만들기 위해 호기심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브리타 레너의 이론에서 비롯된 사회적 호기심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말하고 듣고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에 대한 정보를 얻어 그가 친구인지 적인지 판별한다. 정보를 얻기 위해 어떤 이들은 심지어 염탐하고, 엿듣고, 험담할 수도 있다.
문제가 되는 호기심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자극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이런 호기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양하고 복잡하고 강렬한 경혐을 얻기 물리적, 사회적, 금전적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자극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은 새로운 것에 대한 불안을 완화하기보다 오히려 증폭시키려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에는 사람의 말초 신경을 자극해 중독으로 이끄는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Curiosity killed the cat)”라는 영어 속담이 있는데, 뭔가에 지나친 호기심을 보이다가 위험을 겪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즘에는 신상품에 대한 정보가 실시간으로 인터넷에서 광고된다. SNS로 소통하는 사람들은 신상품을 마케팅하며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경우가 많다. 이때 자극을 추구하는 사람은 새로운 제품을 사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뒤처지는 듯한 열등감이 있어서 구입한 지 얼마되지 않은 핸드폰, 차, 자선거 등을 팔고 새로 사려고 한다.
계속 새로운 것을 찾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새로운 사랑을 원하는 것은 행복의 길이 아니다. 밖에서 새로운 것을 찾지 말고 원래 갖고 있던 것의 가치를 되새겨 봐야 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즉 세상을 바라보는 일관된 시야, 마음가짐, 태도다. 오히려 자신 안에 행복의 가치를 둔다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을 늘 새롭게 유지하려는 것이 문제가 되는 호기심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성공하고 싶다면 원하는 바를 가져라.
행복하고 싶다면 가진 것을 즐겨라.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5. 충족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05
욕망은 필연이다
[충족]
“의욕의 주체는 영원히 애타게 갈망하는 탄탈로스와 같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이 ‘채울 수 없는 갈증’이라는 점에서 탄탈로스와 비슷하다고 본다.
제우스의 아들 시필로스의 왕 탄탈로스는 신들이 사는 올림포스에 식사 초대를 받았다. 탄탈로스는 신들의 음식인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훔쳐 발각됐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제우스는 탄탈로스를 지옥으로 떨어뜨린다. 물을 마시려고 하면 물이 마르고, 과일을 따 먹으려 하면 가지가 물러나서 그는 영원한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린다.
인간은 탄탈로스의 운명처럼 목마름을 완벽하게 충족할 수 없기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모든 의욕은 욕구에서, 즉 결핍이나 고뇌에서 생긴다. 이 욕구는 충족되면 끝난다. 그러나 하나의 소망이 성취되더라도 열 개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고 남는다. 더군다나 욕망은 오래 지속되고, 요구는 끝없이 계속된다. 즉 충족은 짧은 시간동안 불충분하게 이뤄진다. 의욕한 대상을 얻지 못하면 확고하고 지속적인 충족은 얻을 수 없다. 이는 마치 거지에게 늘 던져 주는 적선이 오늘 그의 목숨을 이어 주는 고통을 내일까지 연장시키는 것과 같다.”
두려움과 희망의
근원은 같다
우리의 욕망의 만족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우리의 의식이 의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가 끊임없는 희망과 두려움으로 여러 충동에 내몰려있는 한, 우리가 의욕의 주체인 한 우리에게는 결코 지속적인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욕망을 충족해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이 성취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충족된 욕망은 한정돼 있지만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 이뿐만 아니라 그 욕망의 충족도 잠정적인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곧 싫증이 나고, 늘 똑같은 갈증을 느끼며 삶을 갈망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다나이데스 자매의 비극을 언급한다. 다나이데스 자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 왕 다나오스의 50명의 딸로, 결혼하고 첫날밤에 각자의 남편을 죽인 죄로 지옥에서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는 벌을 받는다. 쇼펜하우어가 “다나이데스 자매가 밑 빠진 독에 끊임없이 체로 물을 퍼 올리는 것”에 비유한 이유는 그 행위에 끝이 없기 때문이다. 즉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동은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욕망이라는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는 이유는 미슬로우 욕구 5단계설로 설명할 수 있다. 1단계 욕구는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욕구로 의식주, 수명 욕구 등이다. 2단계 욕구는 안전에 대한 욕구로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다. 3단계는 소속감과 애정에 대한 욕구로 연애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다. 4단계는 존경의 욕구로 명예, 권력, 성취에 대한 욕구다. 마지막 5단계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려는 욕구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쇼펜하우어도 욕망의 여러 단계에 대해 언급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 가능한 건강이다. 살아 있어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면서 잠시 행복의 착각 속에 빠져든다. 명예와 권력의 욕구는 타인의 마음에 비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허영이라며 비판한다. 자기실현의 욕망은 교육과 교양을 통해 반드시 실현해야 할 최고의 가치로 봤다.
프랑스의 정신 분석가인 자크 라캉은 인간의 욕망이 잃어버린 실재계(现实界)를 향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그 이상적인 상황을 일컫는 ‘주이상스’는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품 안에서 수유를 받는 것에 비유되는데, 성인이 되면 죽을 때까지 그런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채워도 채워도 충족을 모르고 결핍을 느끼는 대상은 명예, 돈, 권력, 출세, 성공 등 셀 수 없이 많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최근 경제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 무리하게 빚을 내서 투자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박을 노리다가 쪽박을 차는 경우도 많았다. 주식과 비트코인의 상승과 하락을 보면 사람들이 이성보다 광기에 지배받는 것처럼 보였다. 주식 토론방에서 종목을 추천하는 사람이 사기를 쳐서 많은 사람이 손해를 보는 사례도 있었다. 모두 인간의 탐욕을 보여 주는 예다. 한 방에 부자가 되고 싶은 인간의 절박한 심정을 보여 준다. 권력에 탐닉한 정치인들은 자신의 현재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최고의 권력을 꿈꾼다. 낮은 단계의 욕망은 그나마 충족이 쉬워도 높은 욕망, 인정과 존경과 같은 높은 가치는 혼자서는 성취할 수 없다. 이렇듯 인간은 무한한 욕망의 늪에 빠져든다.
가지면 더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다 쓰지 못하거나 죽을 때까지 다 갖지 못한다. 인간의 욕망이 끝없는 목마름과 같이 영원히 충족할 수 없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면 욕망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다.
풍족하지 않으면 궁핍해서, 풍족하면 권태로워서, 끝없는 욕망을 채우지 못해서 시달리는 것이 인간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6. 행복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06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고통을 견딘다는 것이다
[행복]
“하나의 고통은 열의 쾌락에 맞먹는 힘을 가졌다.”
고통의 힘이 쾌락의 힘보다 더 강하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모든 쾌락과 행복은 소극적인 성질을 띠는 반면 고통은 적극적인 성질을 띠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은 잘 모르지만 불행은 잘 인지한다. 그래서 부와 명예를 가졌을 때는 그 가지를 모르다가 그것이 사라지면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는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건강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고통은 잘 알아차린다. 몸에 작은 상처만 나도 그 통증이 신경 쓰여 불쾌해지기 마련이다. 가령 건강한 위의 상태는 느끼지 못하지만 위에 염증이 생겼을 때는 분명하게 고통을 느낀다. 충치의 고통은 느껴도 나머지 건강한 치아는 느끼지 못한다.
우리나라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속담이 있다. ‘들어온 사람은 티가 안 나지만 나간 사람의 빈자리는 크다’는 뜻이다. 행복도 마찬가짖다. 자신이 갖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 막상 잃게 되면 알게 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행복감에 취하기보다 불행감에 더 휘둘리는 일이 많다.
당연한 것은
세상에 없다
행복은 꿈이지만 고통은 현실이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은 쾌락의 적극적인 추구가 아니라 고통의 감소 또는 결핍의 지양이라는 소극적인 입장이다. 충치가 생겼을 때는 다른 치아를 관리하기 전에 그 충치부터 치료해야 한다는 뜻이다.
행복이 소극적인 성질인 이유는 결핍을 충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핍을 지양하는 것 이상으로 행복할 수는 없다. 많은 장애물을 넘어 선다고 해도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것과 같다. 반대로 고통이 적극적인 이유는 소유물이나 건강처럼 우리가 늘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은 갖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히 지속하는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다만 상실 이후의 회복으로써 순간의 행복이 있을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살아가는 데 최고의 지혜이자 원칙으로 들었다.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
이렇듯 고통의 원인을 먼저 없애는 것이 쾌락을 찾는 것보다 더 현명하다. 불행의 두 가지 원인인 고통과 권태에 직면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소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낫다.
쾌락과 고통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관련된다. 큰 즐거움은 의외로 잘 느껴지지 않느 경우가 있지만 사소한 고통은 늘 의식되면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모든 일이 잘 진행되더라도 하나의 일이 꼬이면 그것에만 온신경이 집중되어 다른 일은 잊게 되는 겨우도 마찬가지다ㅏ. 이렇듯 사람은 고통에는 매우 민감하면서도 쾌락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여긴다.
특히 건강은 더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서 건강한 몸의 상태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상쾌한 기분, 튼튼한 위, 가벼운 발걸음에 감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건강은 모르고 지나가다가 질병을 얻으면 뒤늦게 소중함을 알게 된다. 위암에 걸려서야 비로소 위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음식물을 소화하기 위해 애썼는지 알게 된다. 재물도 잃어 봐야 그 가치를 알고, 인간관계도 깨져 봐야 그 소중함을 안다.
이처럼 쾌락보다 고통의 지속도와 강도가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기보다는 고통을 줄이는 데 힘쓸 필요가 있다. 환상과 같은 향락을 좇지 말고 결핍, 질병, 위험 등 현실의 고통의 원인을 먼저 없애야 된다.
행복에 가까워지는
확실한 방법
행복한 인생을 결정짓는 진정한 가치는 고통을 잘 견뎌 내는 인내력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덜 불행하게 살수 있는 용기가 있고, 고통을 그럭저럭 견뎌 내면서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 평가하는 기준은 성공, 부, 성취, 출세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겪는 고통의 정도다. 따라서 지금 고통이 없다면 지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셈이다. 세상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가지려고 질주하지 않으면 괴로운 일은 막을 수 있다.
열 가지의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한 가지의 고통을 피하도록 해야 된다. 소극적인 행복론의 핵심은 고통의 원인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즉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줄여 나가는 것이 행복을 위한 일이다. 특히 건강에 대해서 병을 예방하는 일이 쾌락을 추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마흔 이후 먼저 챙겨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라.
소중함을 깨닫게 됐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7. 성격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07
왜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가 2장
행복과 불행에 대한
관점을 바꿔라
[성격]
“선량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사람은 몹시 궁핍한 상황에서도 만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인색하고 시기심 많고 못된 성격을 지닌 사람은 아무리 거대한 부를 쌓아 올려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최근 인간의 성격을 16가지로 구분하는 MBTI가 유행했다. MBTI는 융의 심리 이론을 기반에 둔 성격 유형론이다. 모든 유형론이 그렇듯이 16가지로 인간의 유형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성격의 발달이 인간의 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는 데는 의미가 있다.
융보다 앞서 성격을 기질로 구분한 학자는 기원전 5세기 히포크라테스다. 그는 인간의 기질을 네 가지로 나눴다. 1) 혈액(다혈질): 활달한 기질, 2) 점액(점액질): 냉담한 기질, 3) 흑담즙(우울질): 슬프고 생각에 잠기는 기질, 4) 황담즙(담즙질): 흥분을 잘하고 성급한 기질이다.
이런 이론들은 한 개인이 여러 유형에 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타고난 성격이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것은 이미 운명이 결정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타고난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과 불행이 미리 결정되어 인생이 바뀔 수 없다.
기질 속에
나의 길이 있다
고통은 어디에나 있어서 하나의 고통이 사라지면 다른 고통이 들어온다. 고통은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법이어서 피할 수가 없다. 대신 다른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겨도 그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면 고통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도 인간의 성격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인간의 행동 방식이 바뀌어도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성격과 기질은 본래 인격에 속하기 때문이다. 성격은 인간 개개인이 가진 독특한 특성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외모나 체형이 부모를 닮듯이 성격도 부모를 빼닮는다고 봤다. 지성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고, 의지(성격)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다. 따라서 개인의 성격은 타고난 기질에 좌우된다. 특히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명랑한 마음이나 활기가 결정적이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행복과 불해이 인간이 타고난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타고난 기질과 성격은 불변하며 우리의 행복감과 불행감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낙천적인 사람은 세상에서 더없는 행복을 누리고, 할머니가 우울증에 걸리고 아버지가 자살한 쇼펜하우어처럼 우울한 사람은 염세주의자가 된다는 관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행복과 불행은 이미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성공한 사람이든 실패한 사람이든 상황에 관계없이 타고난 성격에 의해 행복과 불행이 결정될 것이다.
모든 개인은 각자의 본성에 의해 고통의 양이 결정돼 있다. 따라서 고통과 행복은 외적인 상황에 좌우되지 않고, 오직 본성의 척도와 개인적 소양에 의해 결정된다. 그릇이 큰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은 고통을 견딜 수 있지만 그릇이 작은 사람은 작은 고통에도 불평불만을 한다.
성격은 타고난 기질뿐만 아니라 고통을 수용하는 능력도 포함한다. 사물을 인지하고 식별하고 기억하고 사고하는 작용뿐만 아니라 고뇌 또는 안녕함의 감정에서도 주관적인 부분이 매우 크다. 그때그때 신체 상태에 따라 고통도 증감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동일하다. 모두 기질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특정한 외적 조건이 제거되면 만족스러워질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고통은 가득 채워지지도 않고 계속 비워지지도 않고 일정한 양으로 유지된다. 그래서 주관적으로 느끼는 불행감이 지속된다. 행복 또한 그 사람의 타고난 마음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의 행복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성격이라고 할 때, 개인은 자신의 성격을 바꿔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성격에 지배받는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이 싫어하는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데 환멸(환멸: 幻灭 꿈이나 기대나 환상이 깨어짐. 또는 그때 느끼는 괴롭고도 속절없는 마음.)을 느낀다.
모든 행위는 자기 본성의 동기에 따라 이뤄진다. 성격의 변주곡에 불과하다. 동일한 성격이 수백 가지의 다양한 인생 행로로 나타날 수 있지만, 결국 성격에 규정된 인생의 행로를 갈 뿐이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도 이런 성격에 지배를 받고 있다.
낙관적인 사람은 고난에서 기회를 보고
비관적인 사람은 기회에서 고난을 본다.
고쳐 쓰지 못하면
바꿔 쓸 수 있다
성격이 체형처럼 한 번 정해지면 본성상 쉽게 바뀔 수 없다고 할 때 행복 또한 개인의 타고난 기질에 지나치게 결정된다는 점은 문제가 있다. 이런 성격이 바뀌지 않는다면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행복과 불행에 대한 관점도 바뀌지 않게 된다.
그리스인은 성격이 풍습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고난 성격이나 소질을 계발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쇼펜하우어도 타고난 성격이 평생 바뀌지 않는다고 전제하면서도 교육 등 노력에 의해서 성격의 후천적인 개선과 변화가 가능하다고 봤다. 우리의 성격을 바꿈으로써, 현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넒힘으로써 세상을 다르고 풍부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빠질 수 있는 성격 유형론의 맹점을 조심해야 한다. 대신 타고난 성격을 교육이나 자기 성찰을 통해 바꾸려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타고난 기질에 의해서만 행복과 불행이 정해진다면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은 바뀔 수 없다는 슬픈 결론에 이른다. ‘하는 누구인가’에 대한 오랜 성찰을 통해 자신의 성격을 개선할 수 있다.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면
갈등과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8. 능력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08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라
[능력]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 또 그런 후에야 진정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
인간이 타고난 성격과 기질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면 행복과 불행은 이미 결정돼 있다. 쇼펜하우어는 성격이 불변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지만, 교육으로 제2의 성격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후천적으로 획득된 성격이다. 후천적으로 성격을 바꿀 수 있다면 노력 여하에 따라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획득된 성격”의 개념에 따르면 행복은 숙명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정확히 알고, 이 두 가지를 일치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는 저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의욕하는지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 나서야 비로소 참된것을 이룰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면, 그리고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면 이외의 것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부, 명예, 지식, 미덕 그 무엇이든 자신이 진지하게 추구하는 목표를 수월하게 실현하고 향유하려면 목표와 무관한 모든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른 목표들도 포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의욕과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서 교육은 자신의 소질과 가능성을 인식하고 계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런 후천적인 성격이 타고난 성격보다 행복감을 느끼는 데 더 중요하다.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욕망)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능력)을 분별하는 자기 인식이 행복의 전체 조건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 아는것은 불가능하며 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이 필요하다. 자신이 원하는 바와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진정 알아야만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데, 그렇지않다면 결국 인생에서 실패하게 된다. 자신에게만 적합하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참된 행복은 성취될 수 없다.
선천적인 성격은 그 자체로 타고나지만 후천적인 성격은 자신의 의욕과 능력을 인식한 후에 나타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통찰할 수 없다면 타고난 기질과 본응에 지배를 받지만, 세상을 경험하면서 통찰력이 생기면 자신만의 행복의 조건을 찾을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의욕(욕망)과 능력을 일치하는 법을 배우면서 획득된 성격으로 자신의 개성을 완전하게 알게 된다.
인간은 각자 서로 다른 갈망과 능력에서 자기의 소질을 발견한다. 그 소질의 수준은 개성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실제로 겪어 봐야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묘사했다.
“물고기는 물에 있어야, 새는 공중에 있어야, 두더지는 땅속에 있어야만 행복하다.”
주어진 개성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하면서 자신의 인격에 부합하는 일에만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자신의 개성에 맞는 일과 생활 방식, 직업을 찾아서 능력을 발휘해야 행복할 수 있다.
그 반대로 자신의 개성에 맞지 않는 일은 피해야 한다. 자신에게 적합하고 자신이 성취할 수 있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을 모른다면 불행해진다. 자신의 개성에 대한 무지, 자기 인식의 결핍이 불행의 원인이다.
인간됨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자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의 인간됨을 자신에게 적합한 교육 방식으로 도야하고, 적합한 직업을 선택해 최대한 유익한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런 삶을 즐겁게 유지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자기 인식을 통한 후천적 성격을 얻기 위해 적절한 교육이 필요하지만, 많은 지식이 인간을 쓸모없고 둔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 때문에 자신에게 적합한 지식을 쌓아야 자신의 개성대로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선택이다
우리나라 교육의 목표는 개성의 설현보다는 성공과 부를 보장하는 직업을 획득하는 데 치중돼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부족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가치의 기준을 타인에게서 구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하고 인격에 부합하는 일에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자신의 탁월성을 키우는 그리스의 교육관과 일치한다. 행복은 자신만의 탁월한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데 있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사람이 하루 종일 앉아 연구를 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낄 것이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하루종일 운동이나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낄 것이다. 행복은 각자의 능력과 개성, 취미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평생 교육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탐구해 세계와 자신에 대해 알아 가야 하다. 무엇보다 내가 갖고 있는 장점과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알아야만 자신만의 행복의 방향이 비로소 정해진다. 능력과 욕구를 일치시키는 적성에 맞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본성을 바꾸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된다. 이처럼 누구나 타고난 욕망과 능력이 무엇인지 오랜 성찰을 통해 찾아낸 다음, 그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된다.
행복이란 자신의 개성과 소질에 맞도록 노력함으로써 다다를 수 있는 만족감이다. 이를 위해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 가운데 자신에게만 적합하고, 자기만이 할 수 있고, 자기에게만 즐거운것을 알아야 된다. 자신의 성격에 맞는 일을 찾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어떻게 해야 인생이 더욱 행복해질지 고민해 보라.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9. 감정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09
행복과 불행을
상상하지 마라
[감정]
“상상력은 아무 할 일 없이 기껏해야 즐거운 공중누각을 쌓아 올린다.”
우리나라처럼 공부를 중요시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드물다. 그런데 머리가 똑똑해 출세하여 성공할 수는 있겠지만, 지능은 행복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지능은 생존을 위한 도구로써 살려는 의지에 봉사하는 보조 역할을 할 뿐이라고 봤다. 지성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좋은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해결되면 작동을 멈춘다. 오히려 행복은 그런 지성이 과도하게 작동하여 생겨나는 상상이나 기억을 제한해야 얻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지능이 발달한 고등 동물일수록 인식이 분명해지면서 고통이 증가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장 고통을 많이 느끼며, 인간 가운데는 천재가 가장 고통을 많이 겪는다. 두뇌가 뛰어난 천재일수록 불행이 더할 수 있다. 정신적인 재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신경 기능이 무척 활발하여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변화나 기복이 크기 때문에 불쾌감이 더 강할 수 있어서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없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천재는 단순히 지능이 좋은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천재는 아이큐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창의적이며 독창적인 결과를 낳는 사람이다. 결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요즘 지능 검사에서 고득점을 받았다고 해서 천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칼럼 <똑똑한 사람이 겪는 10가지 증상>>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더닝 크루거 효과’에서 지적되듯, 더 잘 아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똑똑할수록 자신감이 낮아진다. 고지능자들은 다각도로 문제를 분석하기 때문에 부정 편향의 성향이 나타나 긍정적인 사실보다도 부정적인 사실에서 결론을 끌어낸다.”
또한 대체로 지능이 높을수록 사회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서 인간관계에서 흥미를 잘 느끼지 못해 자신만의 관심사에 몰입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고독을 선호하여 친구를 사귀지 않고 비연애, 비혼을 택하는 등 인간관계를 최소화하여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최근의 주장은 지능이 높을수록, 천재일수록 감수성이 높아서 더 불행할 수 있다는 쇼펜항우어의 이론을 뒷받침한다.
기억과 예견은
착각이다
지성과 이성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질이 원래 비이성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행복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성이 잘못된 환상을 많이 만들어 낸다. 인간은 쾌락을 바탕으로 행복이라는 큰 건물을 짓는다. 그것은 인간이 느끼는 대부분의 즐거움과 쾌락의 원천인 환영이다. 인간이 방대한 지식을 늘린다고 해도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고, 오히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예견으로 불행감을 더할 뿐이다. 쾌락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모든 행복이 환상처럼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성경 구약>> 전도서 제1장 18절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잘 대변한다.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고뇌의 더 큰 원인이 되듯이 인간이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상상력, 회상과 예상이라는 지성 활동에서 비롯된다. 많이 알수록 불행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지식은 쓸모가 없다. 행복은 지식에 비례하지 않는다. 인생살이에 무지한 젊은 사람이 역설적으로 인생의 많은 경험으로 욕망의 탐욕과 충족의 덧없음을 깨달은 늙은 사람보다 더 행복할 수도 있다.
인간이 지성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두뇌가 뛰어난 사람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성과 정신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만, 쇼펜하우어에게 정신은 ‘뇌’라는 신체 기관 일부분이 활성화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형이상학과 논리학을 포함한 모든 지성적 활동을 의지의 차원으로 환원하여 설명했다.
인간의 지성은 단지 생존에 기여하는 도구일뿐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인간이 이성으로 이 세계의 본질인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에게 지성은 이 세계가 무엇으로 돼 있는지, 이 세계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데 이르지 못한다. 지성은 ‘마야의 베일’에 싸여 있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눈과 같다.
쇼펜하우어가 사용한 마야의 베일은 브라만 사상에서 등장하는 용어다. 커튼을 내리면 사물이 가려져 희미하게 보이는 것처럼 마야의 베일 때문에 브라만의 빛이 은폐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베일에 의해 인간은 사물 그 자체를 보지 못하고 인과 법칙(근거율), 공간과 시간 등으로 잘못 식별하게 된다. 이처럼 쇼펜하우어에게 지성은 이 세계의 본질인 의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성은 의지가 객관화되는 단계에서 생존을 위한 도구로 형성된 것에 불과하며, 인간 행위의 동기를 결정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살려는 의지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욕망의 어두운 그림자에 주목한 융이나 프로이트의 이론과 결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지성 활동에 의존하다 보면 우리는 행복을 현실이 아닌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소망’에서 찾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돌아보지 말고
내다보지 마라
인간은 행복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많다. 인간의 삶이 동물의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 때문이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과 관련한 모든 일에 대한 상상력을 억제해야 한다. 지나친 상상력과 추측, 기억은 불행의 씨앗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행복을 미래에 두지 말고, 과거의 고통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된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무엇보다 공중누각을 쌓아서는 안 된다. 쌓아올리자마자 한숨을 쉬면서 다시 허물어뜨리면 그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단순히 일어날지도 모르는 재난을 눈앞에 떠올리며 미리 불안해하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지나간 일과 다가올 일을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일이 크게 증폭되어 나타나는 바람에 걱정이나 두려움, 희망이 실제의 쾌락이나 고통보다 훨씬 커진다. 한편 인간은 반성과 거기에 따르는 심리 작용 때문에 동물도 갖는 쾌락이나 고통에서 발전한 행복과 불행이라는 격상된 느낌을 갖는다. 그 결과 순간적인 환희나 때로는 심지어 죽을 것 같은 환희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절망에 빠져 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다.
작은 것에 만족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해 쾌락과 고통을 바탕으로 행복과 불행이라는 커다란 환상의 건물을 지었다. 인간에게는 고통의 양이 쾌락의 양보다 훨씬 늘어나고, 인간은 실제로 죽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고통의 양이 특별히 더 증가한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은 극심한 감정 변화, 격정, 동요를 겪어 그 흔적의 지속적인 특징을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다.
회상에 근거한 불행감을 갖지 마라. 우리는 즐거운 생활을 할 때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가, 좋지 않은 시기가 닥쳐야 비로소 ‘옛 시절이 돌아왔으면’하고 바란다. 명랑하고 즐거운 순간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언짢은 얼굴을 하고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보내 놓고, 우울한 시간이 찾아오면 좋았던 옛날을 헛되이 그리워하며 탄식을 내뱉는 것이다.
“그때가 좋았는데…”
“앞으로 잘돼야 할 텐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불행의 씨앗을 뿌린다.
지금 행복해야 한다.
괜한 상상으로 예전에 자신이 당한 불의, 손해, 손실, 명예 훼손, 냉대, 모욕 등을 다시 생생히 떠올리거나 마음속에 그리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불쾌한 일은 오히려 될 수 있는 한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있도록 담담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좋다. 분노는 제어해야 한다. 그런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부와 권력이 있다 해도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과거의 행복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에 행복을 미루지 마라.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0. 죽음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0
고통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죽음]
“자살이란 비참한 이 세상에서 실제적인 구원을 받는것이 아니라 단지 엉터리 구원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최고의 도덕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배치된다.”
많은 사람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많은 종교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연구했으며 사후 세계를 지공과 천국으로 나누기도 했다.
현실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면 죽음을 통해서 구원이나 해방을 꿈꿀 수도 있겠지만, 쇼펜하우어는 실패할 것이라고 본다. 죽음을 통해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자살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삶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증가한다. 죽음을 통해 삶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짓이다.
이렇다 해도 살아가면서 가장 큰 고통으로 생각되는 상황에서 벗아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은 죽음이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두뇌와 육신이 노화로 쇠퇴하는 것을 피할수 없고, 모든 현자를 기다리는 운명은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의 유혹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와 상관없이
세상은 잘 돌아간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인 자살이 얼핏 살려는 맹목적인 의지를 꺾는 영웅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착각일 뿐이다.
개인이 몇 명 사라진다 해도 이 세계를 이루는 의지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개인의 고통이 사라졌다고 해도 세계의 고통의 총량에는 변함이 없다. 이 세계는 누군가의 생명이 사라져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는 후손으로 끊임없이 다시 채워진다. 따라서 자발적 파괴이자 자신의 고통만을 제거하려는 자살은 어리석은 짓이다.
“마치 무지개를 구성한 하나의 물방울이 아무리 교체되더라도 무지개 자체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한결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비유한 무지개와 물방울은 자연 전체가 한 개체의 죽음에 상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우주를 가득 채운 삶에의 의지는 개인의 죽음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다. 자연은 개인이 아니라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무수한 꽃씨를 뿌리고 수천 개의 알을 뿌리면서 애쓴다.
물방울이 사라져도 무지개가 변하지 않듯이 나의 죽음으로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우주 전체로 보면 개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개인은 언제나 희생될 수 있고 운명에 의해서 파멸될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우주 전체와 종족은 영원하지만 개인은 무상하다. 자연에서 그런 존재인 인간에게 “죽음이란 개체성을 잊어버리는 잠”이다. 이 세상은 인간 개개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정하다.
죽음은 고통을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그 당시 유럽에 유입된 인도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애견을 ‘아트만’이라고 불렀다. 아트만은 힌두교의 기본 교의 중의 하나이며, 원래 ‘숨쉰다’는 뜻이다. 숨쉬는 생명인 아트만은 ‘나’를 말하는데, 개인에 내재하는 원리를 뜻한다. 반면 브라만은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를 지칭한다. 따라서 아트만과 브라만은 각각 소우주와 대우주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이 우주를 구성하는 ‘개체[我]’에 불과하며 그런 소우주를 포괄하는 브라만(대우주)이 있다는 인식이 생겨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실레노스의 이야기와 지혜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잘 나타나 있다. 숲속의 신 셀레노스는 ‘가장 좋은 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최선의 것은 네가 얻을 수 없다: 태어나지 않는것, 존재하지 않는 것, 무(無)가 가장 좋은 것이므로. 하지만 차선의 것은 네가 얻을 수 있다---당장 죽는 것이므로.”
인간은 죽음보다는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더 고통을 느낀다. 현재를 긍정하는 사람은 삶이 끝이 없기를 기대하지만, 죽음의 공포가 현재를 몰아내 마치 현재가 없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삶에 대한 사랑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살아간다.
살 용기가 없는 사람이 자살을 하지만,
그렇다고 삶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을 힘들어하며 죽음 이후 고통이 엇는 세상을 꿈꾼다. 그래서 신을 믿고 종교를 믿는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설명하는 종교를 통해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라며 인생을 한탄하고 부정하지만 그 결과의 답이 빠른 죽음은 아니다. 단지 믿는 것만으로 종교는 답을 주지 않다.
사람은 자살, 열반, ‘무의지의 평정’을 통해 해탈에 도달하려고 한다. 죽음에 대해 많은 종교와 과학이 설명하려 시도하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아직 없다. 삶에의 의지를 제약하는 죽음의 공포는 철학의 발단이자 종교의 단초다. 불사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죽음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두려움 때문이다.
자발적 죽음이 40대만의 일은 아니다. 세상이 힘들수록, 각박할수록 죽음으로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에는 아무것도 엇으며 종교를 통해 그런 현실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은 어렵다. 세상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것을 잘 견뎌 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의 깨달음에 ‘일체개고’가 있다. (일체개고: 一切皆苦 사람이 무상(無常)함과 무아(無我)를 깨닫지 못하고 영생에 집착하여 온갖 고통에 빠져 있음을 이르는 말). 인도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은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고통에 대한 해법은 해탈이 아니라 ‘태어나지 않았더라면’하는 생각을 지니면서 견디는 것이다.
고통 총량의 법칙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겪을지 예측할 수 없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보라.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 고통(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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