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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1. 삶에의 의지(제2권)

一字師 2024.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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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1. 삶에의 의지(제2권)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0. 결혼 - 소설게시판 - 모이자 한민족 커뮤니티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0 결혼은 공동의 실존이다 [결혼] “결혼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의 반복이다.” 성행위를 끝내고 나서 허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듯이 결혼을 한 후에 속았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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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1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1

모든 인생사는

수난의 역사다

 

[삶에의 의지]

“도피가 용기라면 자살을 결심한 사람만큼 용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로서 자살을 찬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영웅과 현인이 자발적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마감하지 않았던가.”

 

“분별을 할 줄 알고 솔직하다면 인생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기를 바라기보다 완전히 존재하지 않기를 선택할지 모른다.”

 

인생의 무의미에 대해 고민했던 쇼펜하우어가 남긴 말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자살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인간의 정신이 삶에의 의지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어렵다. 얼핏 자살은 생존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할 만큼 극심해서다. 실제로는 자발적 죽음이 삶에 대한 강한 집착과 열망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자살은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희망을 보여 주는 점에서 삶에 대한 긍정이다. 자살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보여 준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너무나 인생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절망감에 자살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태가 너무 비참해서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는 햄릿처럼 용기 있는 마무리로 볼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누구나 내일이 오지 않길 한 번 이상은 원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쇼펜하우어처럼 신세를 한탄해 봤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그런 투정 때문에 삶은 가장 좋은 것이 된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그래서 이 세계를 “가능한 세계 중 최상의 세계”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그만큼 살고 싶다는 뜻이다.

 

죽도록 잘 살고 싶어서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삶의 긍정이라는

삶의 부정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삶의 부정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삶의 긍정이라고 본다. 자살은 삶의 의지에 따른 고통을 부정하는 것일 뿐 살려는 의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삶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은 지성이 의지를 부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일부분인 뇌는 인간의 의지가 객관화된 신체 전체를 부정하기가 쉽지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정신이 자살을 시도할 때도 우리의 심장은 뛰고, 손은 죽지 않으려고 하며, 죽은 이후 3일은 머리카락이 자라난다. 그만큼 살려는 의지는 너무나 질기고 강한 것이다. 정신은 빨리 죽지만 신체는 그렇게 빨리 죽지 않는다.

 

자살과 해탈을 포함한 많은 형태의 삶의 부정은 역설적으로 삶의 의지를 긍정하는 현상이다. 자살도 생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에 따른 고토을 부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삶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혐오와 후회 때문에 삶의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기를 원하면서 신체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만 이런저런 상황이 꼬여 삶에 고통이 생긴다. 자살자는 멋지게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에 불만족할 뿐이다. 자살자는 그런 삶의 의욕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그만 사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분명한 점은 자살은 무지개의 물방울, 바다의 파도처럼 이 세상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자살은 멍청한 짓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에의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그 결과인 욕망과 번뇌를 없애려고 했지, 삶 그 자체를 없애려고 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식탐이 많으면 살이 찌고 건강이 나빠져서 다이어트를 할수는 있지만 금식을 권장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먹으려는 욕망 자체는 난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삶에 따른 고통을 줄이려고 할 뿐 생존 의지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형식은 끝없는 현재다. 시간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으며 인간은 그 물결에 휩쓸려 사라지는 존재다. 그 영원한 시간 속에서 인간이 살고 죽는 것은 ‘덧없는 꿈’과 같다. 이런 점에서 세상을 부정하는 자살은 무익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행위다.

 

존재하지 않고

행복할 수 없다

 

자살은 관심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에게 S.O.S를 보내는 것이다. 좌절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희망을 알리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살자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OECD 국가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자살의 이유는 다양하다. 삶에 지쳤거나 희망이 없거나 또는 불치병에 걸린 경우도 있지만, 어쩌면 더 좋은 삶에 대한 강한 희망이 좌절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자살률 세계 1위인 국가가 의미하는 바는 그만큼 우리나라에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자살은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영원히 떠나고 싶다는 뜻이다.

 

그러나 ‘죽고 싶다’는 사람은 ‘그만큼 살고 싶다’는 반대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어떠면 삶에 대한 애착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것에 따른 실망과 고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욕심 없이 사는 사람은 실패의 고통도 없어서 자살할 이유도 없다. 자살하는 사람은 그만큼 삶에 대한 희망, 애착, 기대가 컸다고 볼 수 있다. 경제적인 문제로 자살한 사람은 돈이 충분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잘 살았더라면’

‘더 건강했더라면’

‘빚이 없었더라면’

 

삶이 괴롭지 않았다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소망이 남아 있다. 따라서 주위에 죽음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살려고 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은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생겨난 고통이지, 살려는 의지 그 자체는 아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살려는 의지 자체를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우리 인생의 장면들은 거친 모자이크와 같다. 가까이서 보면 제대로 알아볼 수 없고 멀리서 봐야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쇼펜하우어 말처럼 개인의 삶을 일반적으로 보면 슬픈 일이 많지만 자세히 보면 우스꽝스럽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소망과 두려움에 휩싸이는데 그것이 우연에 의한 사건이므로 희극에 가깝다. 그러나 개인의 소망이 성취되지 않고, 노력과 희망이 무의미하게 될 때 끝내 죽음에 이르는 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비극적인 인물의 역할을 맡지만 자세히 보면 하루하루 끊임없는 걱정거리로 살아가며 불안해하는 유치한 희극적 배우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너무 단편적으로 보지 않도록 균형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인생은 어떻게든 끝마쳐야 하는 과제와 같다.

그러므로 견뎌 내는 것은 그 자체로 멋지다.

 

[Epilogue]

“누구나 내일이 오지 않길 한 번 이상은 원했다.”

우리가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그만큼 살고 싶다는 뜻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2. 건강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2

무엇으로 내면을 채워야하는가 3장

 

행복의 90퍼센트는

건강에 좌우된다

 

[건강]

“건강한 거지가 병든 왕보다 더 행복하다.”

 

요즘 많은 사람이 돈과 건강을 맞바꾼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건강을 꼽는다. 건강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것을 추구하는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의 행복은 대부분 건강에 의존한다. 건강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다른 어떤 것도 즐거움이 될 수 없다. 몸이 일단 건강해야 기분도 좋고 웬만한 어려움을 잘 견딜 수 있다.

 

평생 몸 관리를 했지만 일찍 생을 마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라면만 먹고 술과 담배를 해도 90세를 넘기며 장수하는 사람도 있다. 두 가지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명이 짧아도 부자라면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래 사는 이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죽으면 억만금의 돈이라도 소용이 없다. 쇼펜하우어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고대 로마시인 유베날리스가 쓴 시의 한 소절을 들어 옳다고 말한 만큼 건강하게 장수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알려면 오래 살아 봐야 한다.”

 

건강한 정신력을 위해

그에 맞는 노력을 하라

 

쇼펜하우어는 어느 고서를 뒤적이다가 “많이 웃는 자는 행복하고, 많이 우는 자는 불행하다”라는 글을 읽었다. 건강한 사람 가운데는 낙천적인 성격이 많다. 그만큼 살면서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는 것인데, 기질상 타고났을 가능성도 있고 후천적으로 성격이 바뀌었을 수 있다. 웃을 수 있는것도 능력이다. 잘 웃는 것도 타고나는 기질에 속하기 때문에 웃음이 없는 사람이 노력한다고 반드시 잘 웃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격이 좀처럼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은 인간의 주관적인 자산인 ‘고상한 성격’, ‘뛰어난 두뇌’, ‘낙천적인 기질’과 ‘명랑한 마음’에 함께 속한다. 이 가운데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요인은 명랑한 마음이다. 그 명랑한 마음은 외적인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건강이다. 따라서 바깥에서 좋은 것을 찾지 말고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는 데부터 힘을 써야 된다. 그것은 운동으로 만들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의 본질은 운동”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유기체의 전체는 끊임없이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장은 확장과 수축을 통해 끊임없이 혈액 순환 운동을 한다. 운동을 하지않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경우 건강의 균형이 깨져 내적 안정감을 해칠 수 있다.

 

우리의 행복은 명랑한 기분에 좌우되는데, 그 기분은 건강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몸이 건강하고 튼튼하면 기분이 좋겠지만 병에 걸리면 짜증 나고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나무도 튼튼하게 자라려면 바람이 필요하다. 인간도 건강하려면 운동이 필요하다.”

“행복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다.”

 

명랑해야

잘 살 수 있다

 

행복은 젊음, 외모, 부, 명예 등으로 평가하지 말고 얼마나 명랑한지를 확인해 봐야 한다. 마음이 즐거운 사람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명랑한 기분과 긍정적인 생각에 돈이 분명 도움을 주겠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삶에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다고 해서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건강은 필수다.

 

첫인상이 행복한 정도를 보여 주는 척도다. 명랑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늘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온몸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면 좋다. 스트레스를 피하고, 하루에 두 시간씩 야외에서 운동을 하며, 냉수욕과 식이요법에 신경을 써야 한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사물의 객관적인 모습이 아니라 사물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결과다.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의 행복이 “90퍼센트 건강에 의해 좌우”된다면 모든 즐거움의 원천인 건강을 관리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된다. 건강하지 못하면 위축되고 기가 꺾여서 부와 명예를 갖고 있어도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건강을 다른 일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어리석다. 승진, 명예, 공부 등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과로할 이유가 없다. 건강이 있어야 다른 모든 것도 있는 것이다.

 

명랑하고 쾌활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즐거워진다. 낙천적인 사람은 열 가지 일 가운데 한 가지 일만 이루더라도 기뻐하지만 우울한 사람은 열가지 일 가운데 아홉 가지 일을 이루더라도 기뻐하지 않는다. 실패한 한 가지 일에 크게 상심하고 화를 내고 기가 꺾이기 때문이다. 명랑한 사람은 불행한 일을 겪어도 쉽게 화를 내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기질과 매우 관련이 있다. 그러나 꾸준한 운동이라는 노력으로 명랑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 심장과 혈관, 근육을 튼튼하게 하면 우울한 기질의 사람도 어느 정도 쾌활하게 살 수 있다.

 

40대부터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웃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무엇보다 운동을 통해 건강을 챙겨야 된다. 그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는 ‘왕’이 아니라 ‘거지’라도 웃을수 있는 명랑함에서 단번에 볼 수 있다. 항상 긍정적인 기분으로 살면서 늘 웃는 얼굴을 가져야 할 것이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다.

 

[Epilogue]

인간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건강을 다른 일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어리석다.

건강이 있어야 다른 모든 것도 있는 것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3. 평정심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3

마음의 안정이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다

 

[평정심]

“생각의 서랍 중에서 한 개를 열 때는 다른 모든 것을 닫아 두어야 한다. 그래야 무겁게 짓누르는 하나의 걱정거리 때문에 현재의 사소한 즐거움을 위축시켜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밀어내지도 않으며, 하나의 중요한 일을 걱정하느라 사소한 일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건강 다음으로 우리 행복에 중요한 요소는 마음의 평정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익시온이 돌아가는 바퀴에 묶여 있는 것에 비유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익시온은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에 살았던 라피타이족의 왕으로 그에게 관려적인 결혼 선물을 요구한 장인 테이오네우스를 불구덩이에 밀어 죽인 살인자다. 그리스 최고의 신 제우스는 그의 살인죄를 사면하고 그를 신이 살고 있는 올림포스 산으로 그를 초대했는데, 익시온은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에게 반해서 계속 따라다녔다. 아내에게 이 말을 전해 듣고도 도저히 믿지 못한 제우스는 구름으로 헤라와 똑같은 여신을 만들어 놓았는데 익시온이 그녀를 겁탈하고 자신이 헤라를 가졌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이에 분노한 제우스는 익시온을 불타는 수레바퀴에 매달아 영원히 돌아가게 만들었다.

 

인간은 마치 돌아가는 바퀴에 묶여 있는 익시온처럼 삶의 의지의 지배를 받아 끊임없이 움직인다. 불타는 수레바퀴에 매달려 돌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불안하겠는가. 마음의 안정 없이는 결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익시온의 바퀴가 멈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추구하는 행복은 소극적인 입장에서 ‘마음의 평온’이다. 이것은 스토아학파가 주장한 아파테이아와 같다. 아파테이아는 욕구가 없는 금욕의 경지를 말한다. 정념에서 해방됨으로써 평온에 도달하는 것처럼 쇼펜하우어도 마음의 평온을 통해 행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중요한 것은 정념을 없애고 조용함을 얻기 위해 마음의 동요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평정을 찾는

네 가지 방법

 

40대는 사회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로 많은 사람과 접촉한다.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여러가지 예상치 못한 일로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긴다. 시기심, 질투도 겪는다. 자신도 직업과 관련된 공적인 만남뿐만 아니라 동호회나 동창회 등 사적인 모임에서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실언이 많이 오고 간다. 예를 들어 돈 자랑, 자식 자랑, 집 자랑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이런 흔들림 속에서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음식을 절제하면 몸이 건강해지듯이 외적인 자극의 비중을 줄여야 마음의 평정을 얻울 수 있다.

 

첫째,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정리하라.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은 사람과의 불필요한 교제를 줄이는 것이다. 대화할 가치가 없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상하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질투심을 갖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다.

 

나를 얽매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때

평화로운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인간관계를 끊으면 오히려 따분하고 심심한 기분에 시달릴 수 있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피해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를 좁혀서 자신의 생활방식을 단순하게 유지한다면 마음의 동요를 줄일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무료함을 야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될 수 있는 한 관계를 단순화하고 생활 방식을 극히 단조롭게 해야 행복해진다고 했다.

 

둘째, 질투를 경계하라.

질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자신의 것을 남의 것과 비교하지 말고 즐기자. 쇼펜하우어는 세테카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는 자신의 것을 남의 것과 비교하지 말고 즐기자. 다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괴로워하는 자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보다 형편이 나아 보이는 사람보다 형편이 나쁜 사람을 살펴보는 방법도 괜찮다. 우리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 효과적인 위안이 된다. 쇼펜하우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친구 앙티메에게 자신의 상황을 비탄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는데, 그때 앙티메는 쇼펜하우어를 위로하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너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며 불행을 참고 견디기 바란다.”

 

셋째, 큰 희망을 걸지 마라.

우리는 가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를 한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와 같은 존재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서 존재하는 일에 감사해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 없었더라면 이런 한탄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꿈이 깨지고 실패를 겪어도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우리 삶은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

 

넷째, 세상에는 거짓이 많다는 점을 알아라.

이 세상에는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가 더 존경받는 일이 많다. 자식을 가르치는 학교나, 종교를 알리는 단체도 모두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경우가 많다. 알찬 속보다 가짜의 겉모습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행복도 그런 바깥에 드러나는 모습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행복은 그런 화려한 겉모습에 있지 않다. 행복은 학교에서 지식처럼 배울 수 없고 종교 단체에서 경건하게 체험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행복한 사람을 대충이라도 알아보려면 즐거움보다 슬픔을 살펴야 한다고 했다.

 

“행복의 알맹이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 즐거워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일에서 고통을 느끼는 지를 확인해 봐야 한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과

작별하라

 

평정심을 추구한 대표적인 학파가 스토아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우주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렇게 일어나게끔 이미 결정돼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불행으로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우연(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늙어가는 것, 죽어야 하는 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슬픈일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슬퍼하지 않게 된다. 세상의 많은 일이 우연에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면 불안이나 걱정이 줄어들게 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의지와 마음의 동요가 적어야 한다. 사실 너무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너무 행복해지려는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친구가 많을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소망과 욕구의 접촉 범위가 커지면서 불행을 자초하는 기회와 환경이 커진다. 결국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단순하고 단조롭게 사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심플하게 생활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인 소향을 늘 갖춰야 한다.

 

마음의 평온이 행복이라면 마음을 ‘잔잔한 호수’처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외부의 자극도 줄여야 되지만 비교하는 감정, 시기심, 질투, 지나친 기대와 희망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익시온의 수레바퀴가 멈추도록 욕망의 흐름을 잘 제어해야 할 것이다.

 

마음의 평온은 고통이 없는 상태다. 현명한 인간은 무엇보다 고통이 없는 상태,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상태, 안정과 여유를 얻으려고 애쓴다. 우리도 욕망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때론 관심도 없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익시온의 바퀴가 멈추면 에피쿠로스 학파가 말한 완전한 행복의 상태에 이른다. 그것은 감정의 동요나 혼란이 없는 평정심의 상태인 아타락시아다.(아타락시아는 헬리니즘 시대의(기원전 323년에서 146년 사이. 그리스 고전기 이후의 시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근거하여 쾌락의 흭득과 고통의 회피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고 주장한 에피쿠로스 학파가 감정적, 정신적 동요나 혼란이 없는 평정심의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주변을 정리하고, 마음을 비울 때

더 좋은 것이 찾아온다.

 

[Epilogue]

우리는 우주의 먼지와 같은 존재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서 존재하는 일에 감사해야 한다.

너무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너무 행복해지려는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4. 관조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4

예술 감각을

갖춰라

 

[관조]

“음악은 아주 위대하고 대단히 근사한 예술이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참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 세계는 삶의 의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삶의 의지’라는 욕망의 바다,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다. 죽음을 통해서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그 고통의 세계는 불변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을 예술에서 찾는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을 좋아해서 음악의 형이상적 가치를 <<의지와 표상의 세계>>에서 분석하기도 했을 만큼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예술의 미적관조와 음악에 있다고 봤다.

 

자연 앞에 인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작품을 보거나 좋은 음악을 들으면 고뇌가 가라앉는다는 것을 느낀다.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의 역할은 단순히 삶의 고통을 순간적으로 위로하는 도피처가 아니라 고통의 원인이자 세계의 근원인 의지를 인식하고 느끼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음을 비우고 자연의 풍경을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깊이 빠져들어 마음 전체를 채우는 상태를 말한다. 삶에 대한 의지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의지와 고통이 없이 시간을 초월한 마음의 상태가 된다.

 

과학이 이 세계를 인과율(법칙)로 설명한다면 예술은 이 세계의 영원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것을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부른다. 우리는 대상을 사사로운 관심이 없이, 어떤 목적도 없이, 의욕도하지 않고 순수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자연이라는 객관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에서는 개별성이 잊혀지면서 이데아라는 세계를 보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예를 들었듯이 왕이든, 죄수든, 거지든 자신의 신분을 잊고 똑같이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감상하면 삶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게 된다. 고통스러운 자아에서 벗어나 순수한 마음으로 대상과 하나가 될 때 고통의 세계는 사라진다. 구름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폭풍우와 바닷소리를 압도할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을 숭고미라고 부른다. 또는 밤하늘에 별이 총총 떠오를 때 우리가 너무나 작게 느껴져 무로 사라지는 느낌에서 이 세계가 객관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고통은 우리의 마음에서만 느껴지는 것이다.

 

미적 관조란 이 세상을 아무런 관심 없이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익, 계산 등을 따지면 세상의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건강을 위해 산을 오르는 사람은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건강이라는 관심에 자연의 아름다움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올 때는 비로소 꽃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을 비웠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미적 관조는 지옥과 같은 고통의 상태에서 잠시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한다.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삶에 대한 욕망 없이 무관심하게 바라볼 때 영원히 불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음악은

의지를 울린다

 

여러 분야 가운데 의지의 고통을 초월하게 하는 예술의 힘이 가장 뚜렷한 것은 음악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음악은 의지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음악은 회화나 조형 예술과 달리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다. 우리가 바이올린의 소리를 들으면 감동을 받는 이유는 선율이 우리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이때 음악은 세계의 깊은 곳에 있는 의지를 직접 우리의 마음에 전달해 준다. 음악이 “의지 자체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침대로 예를 들면, 그 원형인 설계도가 있고, 그것을 모방한 침대가 있다면, 회화는 모방한 것의 모방이 된다. 이처럼 많은 작품이나 예술은 모방을 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음악은 그런 모방 없이 직접 인간의 심금을 울린다. 음악은 우리가 생각 할 필요가 없이 아름다운 감동을 직접 전한다. 심지어 우리가 가사를 모르더라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 많다. 이것이 멜로디의 매력이다.

 

삶에 대한 의지, 욕망 자체는 신체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통제하기가 어렵다. 음악이 그 욕망의 파도를 잔잔하게 하고, 욕망의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를 진정시킬 수 있다. 마치 폭풍우가 그치면 맑은 하늘이 보이듯이 음악을 통해 우리의 감정은 깨끗해지는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과 경치를 보거나 예술 작품을 감상하거나 클래식을 들으면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나 즐길 수 있다. 특히 음악은 ‘의지의 직접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준다. 웅장한 오페라는 독일어 가사를 전혀 몰라도 큰 감동을 준다. 이렇듯 음악에 몰입하고 집중함으로써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을 수 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와 비슷한 효과다. 그는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비극을 관람할 때의 체험을 카타르시스의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 이런 체험의 본질은 인간을 한계까지 몰고 감으로써 오히려 그로부터 부정적인 체험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을 느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이성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초월을 체험하게 된다. 관객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불안, 우울, 슬픔 등의 감정이 등장인물이 겪는 비극적인 상황이나 비참함에 공감하면서 해소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비극 예술이 가져다준 마음의 정화 작용이다.

 

이런 음악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니체의 예술 철학에 그대로 이어졌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을 구분하고, 각각 멜로디와 가사에 비유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포도주의 신을 뜻하면서 동시에 여러 번의 죽음과 재생을 경험한 이오니소스처럼 인간도 술에 취해 삶에 따른 고통을 잊고 다시 거듭나는 경험을 한다. 덧없는 삶의 시간에서 벗어나 고통을 더 넓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예술은 삶의 꽃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이 너무 힘들어 참을 수 없다면 클래식을 들을 것을 권장한다. 오페라는 가사를 이해해야만 되지만 실내악이나 관현악은 그럴 필요가 없다. 클래식은 이 세계가 의지라는 사실을 직접 느끼게 해 주는 통로와 같다. 이 세계가 의지라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게 해 주는 예술이다.

 

바그너는 1854년 스위스에서 처음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는데 당시 쇼펜하우어는 최고의 명성을 누리는 철학자였다. 바그너는 그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을 여러 번 읽고 쇼펜하우어를 존경했지만, 쇼펜하우어는 정작 바그너를 ‘음악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깎아내렸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가 사망한 1869년에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했지만 찾아가지는 못했다. 독일 음악계를 주도하던 바그너도 쇼펜하우어의 묘를 찾아가기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도 쇼펜하우어를 존경하는 마음은 계속되어 “나는 쇼펜하우어에게 감사하다”라고 말했다고 글로 썼다. 그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작품으로 알려졌다.

 

음악이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고단한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음악을 듣는 것이다. 물론 클래식이 가장 좋겠지만 요즘 음악 장르가 다양하다. LP, CD, 유튜브 음원 등 무엇으로도 좋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삶의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 작품을 돈이나 성공, 그리고 이익에 대한 생각은 미뤄두고 고요하게 바라보자. 변화하는 이 세계의 불변의 것, 보편의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인생의 욕망과 괴로움을 예술을 통해서 가라앉힐 수 있다.

 

자연과 예술은 우리를 해방시킨다.

 

[Epilogue]

고통은 우리의 마음에서만 느껴지는 것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5. 향유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5

인생의 무게 중심을

밖에서 안으로 옮겨라

 

[향유]

“평생에 걸쳐 매일 매시간 그 자신 자체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할 게 없다.”

 

인간은 자신의 타고난 탁월함에 따라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인생을 향유하는(향유: 享有 누리어 가짐.) 방식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재생적 즐거움

먹고 마시는 일, 소화, 휴식, 수면 욕구 등

 

둘째, 육체적 즐거움

산책, 달리기 등 각종 운동, 사냥, 전쟁 등

 

셋째, 정신적 즐거움

사유, 독서, 예술, 명상, 철학 등

 

쇼펜하우어는 세 가지의 즐거움을 모두 알았다. 좋은 음식을 먹었고 건강을 챙겼고 음악을 즐겼다. 그리고 독서와 철학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살았다. 그는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소홀하게 하지 않도록 균형을 갖췄다.

 

인생의 질을

결정짓는 한 가지

 

세 가지가 모두 중요하다고 해도 인생을 향유하는 데는 사람마다 무게 중심에 차이가 있다. 자신의 능력에 맞게 행복의 방향이 달라진다. 쇼펜하우어는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평범한 사람.

무게 중심을 바깥에 두고 만족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소유물이나 지위, 이성과 자식, 친구나 사교계 등에 의존하기 때문에 만족은 외부에 의존한다.

 

둘째, 정신적인 수준이 보통인 사람.

실용 학문에서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무게 중심이 밖과 안에 걸쳐 있다. 식물학, 광물학, 물리학, 천문학, 역사학 등을 통해 대부분 즐거움을 얻지만, 가끔 취미로 그림 연습을 하면서 불만족을 채운다.

 

셋째, 정신적인 능력이 탁월한 사람.

가장 고상한 향유 방식을 통해 무게 중심을 완전히 자신 안에 둔다. 사물의 존재와 본질 자체에 관심을 갖고 예술, 문학, 철학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만들어 간다.

 

정신적으로 고상한 욕구가 없는 사람은 자유로운 여가 시간에 이상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해 무료함에서 빠져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곧 현실에서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사람을 속물로 칭한다.

 

정신력이 압도적으로 발달한 사람은 따분함을 모르며 늘 새로운 관심과 풍부한 생각에 활기차고 의미 있는 생활을 즐긴다. 더 배구고 연구하고 생각하려는 욕구가 강할수록 여가 시간에 혼자서도 맘껏 자유를 즐길 수 있다.

 

인간이 인생을 향유하는 방식, 즐기는 것은 각자의 취향과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여가에 있다.” 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가 “여가를 인간의 소유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칭송”했는데, 행복한 시간은 노동하지 않는 자유 시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행복한 삶이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유능함을 펼칠 수 있는 삶”의 의미는 세 가지 향유 방식 가운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가장 행복한 삶은 철학자의 삶이다. 즉 지적인 능력이 풍부하며 스스로 사색하면서 판단하는 군주같이 ‘유아독존’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을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최고의 행복을 주는 철학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데 매우 중요하다.

 

타인에게

방해받지 마라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지만 회사에서는 다른 직원들이 말을 걸어서, 일을 부탁해서, 회의를 하느라 분주하다. 또한 집에 오면 집안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고 가족 모임에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휴일에는 하루 종일 유튜브나 여러 가지 방송을 보느라 시끄럽게 산만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자극적인 기사는 우리의 신경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경우가 많다.

 

내면이 인격을 좌우하고, 인격이 인생을 좌우한다.

내면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어릴 때는 혼자 있으면 무섭고 불안했지만 나이가 들면 혼자 있는 시간이 편안하다. 20대와 30대에는 경력을 쌓고 경험을 넓히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40대부터는 어느 정도 여유도 있고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기회가 생긴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때다. 마흔 이후부터는 삶의 무게 중심을 점차 밖에서 안쪽으로 옮겨야 한다. 즉 자신의 내면을 더 성찰하여 자기를 더 깊이 알아 가야 한다.

 

무게 중심이 바깥에 있는 사람은 출세, 승진, 명예, 부 등을 추구하며 각종 모임 등에 빠져서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무게 중심이 안에 있는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예술, 시와 문학, 철학 등을 가까이 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Epilogue]

내면이 인격을 좌우하고, 인격이 인생을 좌우한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6. 독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6

인생은 짧고

시간과 힘은 한정돼 있다

 

[독서]

“책을 읽는 시간도 함께 살 수 있다면 책을 사는 것은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책을 구입하는 것과 그 책의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혼돈한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교양’을 꼽았다. 그는 교양을 쌓기 위한 독서가 가치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행복이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냐 하는 것보다는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끝없는 의욕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인생에 대한 지적 관조와 독서를 통한 위대한 사상가와의 대화다. 철학자는 사물을 지적인 대상으로 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갇혀 왜곡된 시각으로 본다. 쇼펜하우어는 사유의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으로 독서를 권했다.

 

“먹은 것이 육체가 되고 읽은 것이 정신이 되어 현재의 자신이 된다.”

 

철학적으로 향유하려면 사고하는 근육을 키워야 한다. 그런데 독자적인 사유에 필요한 독서의 방향이 다르면 이득보다 해악이 많다. 쇼펜하우어는 독서의 장점과 단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양서를 읽기 위한

세 가지 조건

 

최근 우리는 발전한 인공 지능에 생각하는 것까지 맡기고 있다. 키워드 몇 개만 입력하면 정보를 요약해 주고, 해결책도 알려 주는 장점이 반대로 우리의 독자적인 사고력을 잃게 만든다.

 

과거의 독일이나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나 통찰이 없이 지식만 얻으려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쇼펜하우어가 살던 그 당시 학교에서는 철학을 가르치기보다는 돈이 되는 지식을 가르쳤다. 그는 명성과 겉모습을 위해 대충 요약한 내용만 암기한 후 현명한 척하는 잘못된 세태를 비판했다.

 

자신의 생각이 부족한 상태에서 남의 책을 읽는 것은 위험하다. 남의 글을 읽으면서 남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걸어간 사유의 길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지않는 편안함으로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면 자신의 사유의 공간은 점점 사라진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가 권하는 독서법은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고전을 읽을 것을 권하다.

위대한 작가의 저술은 읽지 않고 책에 대한 소개서나 리뷰를 읽는 데 만족한다. 위대한 정신이 담긴 내용보다는 잡답이나 가볍게 정리한 글들을 더 선호하는데,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쓴 작품을 읽어야 된다.

 

둘째, 두 번을 읽을 것을 권한다.

중요한 책은 무엇이든 즉시 두 번 읽는 것이 좋다. 그래야 사물의 맹락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끝을 알고 있으면 처음 부분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작품이란 어떤 정신의 진수”인데 몇 천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정신의 위대함을 경험함으로써 정신적인 교양이 높아져야 독서를 통해서 큰 즐거움을 얻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반복은 연구의 어머니다.”

 

셋째, 악서를 피하라.

쇼펜하우어가 자칭하는 악서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쓴 책이다. 많은 사람이 글을 써서 돈을 벌려고 한다. 대중은 어리석게도 그런 글을 읽는다. 사물 자체에 대한 생각을 다룬 극소수의 책을 읽어야 한다. 직접 사물들을 생각하며 글을 쓰는 사람들의 작품이 영원한 생명과 불멸의 명성을 갖는다. 또한 베껴 쓴 글이나 편찬한 글도 경계해야 된다. 쓰는 이와 읽는 이의 관계를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비유했다.

 

“책에만 매달리는 평범한 철학자와 스스로 사고하는 사람의 관계는 역사 연구가와 목격자의 관계와 같다.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사물에 대해 자신이 직접 파악한 것을 말한다.”

 

군주처럼

사유하라

 

40대는 책을 가장 많이 읽을 시기다. 학창 시절에는 학점을 받기 위해 전공에 맞춘 독서를 하느라 폭이 좁았다면, 40대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면서 관심의 분야도 다양해진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가 좀 더 분명해지면서 집중적으로 독서하는 일이 많아진다. 예전에는 몰랐던 나의 적성이나 취향, 성향을 더 잘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관심에 따라 책을 선택한다.

 

각자의 관심과 필요에 따라 독서를 할 때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도 숙고한 지식만큼의 가치는 없다. 많은 독서는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 데 방해가 된다. 많이 읽을수록 자기 스스로 사고하는 힘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표현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는 것과 남이 입다 버린 옷을 입는 사람에 불과하다.”

 

독서를 해서 오히려 남의 생각에 끌려다니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사고의 샘이 막혀 버렸을 때만 독서를 해야 된다. 독서보다 독자적 사고가 훨씬 더 가치가 있다. 독자적인 사고 없이 남이 모은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사유 없는 다독을 경계했다.

 

“독서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 생각해 주는 것이다.”

 

독서는 다른 사람의 사유의 공간에서, 그들의 사고 틀 안에서 함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것이 나의 것으로 스스로 소화되는 것은 아니다. 소화불량에 걸리면 멍하게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편하게 남의 힘으로 지내는 사람은 스스로 설 힘을 잃게 된다. 남의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는 것은 나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독과 같다.

 

독자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은 군주처럼 스스로 직접 판단을 내린다. 그들이 제시하는 의견은 모두 그들 스스로 사고하여 얻은 결과다. 진정으로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이런 점에서 군주와 같다. 그는 모든 일을 직접 결정하며 자신을 넘어서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마치 군주의 결정이 자신의 절대적 권력에서 유래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서 직접 출발한다. 군주가 타인의 명령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온갖 종류의 권위와 편견에 사로 잡혀서는 안 된다. 잘못된 독서는 이런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게 만들 수 있다.

 

지상에서 가장 큰 행복은 자신의 정신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진정한 사상가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한 것만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철학자로서 그들의 삶의 즐거움과 행복은 사유에 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생각을 영글게 하는 건 다독이 아니라 숙독이며, 독서를 통해 받아들인 타인의 사상을 자신의 사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오랜 사색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너무 많이 먹으면 영양 과잉이 되듯이 책을 많이 읽을수록 독자적인 사고가 줄어들 수 있다. 되새김이 전혀 없다면 남이 간 길을 그대로 따라 걷는 것과 같다. 더구나 좋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쉽게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절제하는 독서법이 필요하다.

 

책으로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길을 걸으며 무엇을 봤는지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눈으로 봐야 한다.

 

[Epilogue]

* 먹은 것이 육체가 되고 읽은 것이 정신이 되어 현재의 자신이 된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7. 글쓰기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7

문체는

정신의 관상이다

 

[글쓰기]

“인간의 생각은 많은 경우 깊이가 없고 단순하며 긴 실을 자아내지 못한다.”

 

사색은 좋은 문장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다. 사색으로 얻은 지식이 진정한 지식이다. 스스로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된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독자적인 사유를 언어로 표현하기 위한 문체다. 쇼펜하우어는 글의 단순함, 소박함, 명료함을 중요하게 여겼다.

 

글쓰기는 자신의 사유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글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글로써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도 간결함과 명료함을 갖춰야 된다. 글쓰기를 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쓰는 것이다. 마치 가발처럼 남의 생각을 잔뜩 집어넣고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박식함을 과시하는 태도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애매하고 어렵고 추상적인 글쓰기를 경계하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글쓰기를 제안한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글쓰기의 중요한 덕목이다.

 

글에 필요한 두 가지,

단호함과 확고함

 

좋은 글쓰기의 원칙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는 것이다.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너무 허세를 부리는 문체를 쓰지 않는다. 문체에 고유한 독자성이 있고 자연스러우며 소박함을 갖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글을 쓰는 것처럼 쉬운 것은 없다. 반대로 중요한 사상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한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자신의 사상을 순수하고 분명히, 확실하고도 간결하게 표현해야 된다. 단순함이 진리의 특징이자 천재의 특징이다. 반면에 사이비 철학자는 불확실하고, 애매하며, 다의적이고, 장황하고, 둔중하며, 딱딱한 문체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멋부리는 표현, 난해한 용어, 애매한 암시는 지양하고 단순하고 명료하고 소박하게 말해야 된다.

 

또한 지나친 장식, 불필요한 수사, 쓸데없는 부연, 과잉 표현을 조심해야 된다. 너무 많은 독서와 배움이 오히려 사고를 중단시키듯이, 너무 많은 글쓰기와 가르침도 지식과 이해의 명확성과 철저함의 습관을 망친다.

 

훌륭한 저술가는 무미건조한 주제마저도 재미있게 흥미롭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라 표현력이다. 진정한 학자에게 학문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탁월한 작품을 얻기 위해 타인의 인식에 신경 쓰지 않고 연구의 직접 목적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얻는 자만이 새롭고 위대한 통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듯하게 보여 주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써라

 

최근 글쓰기를 통해 수익을 내는 방법이 많다. 네이버나 티스토리 등에서 글을 쓰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SNS, 블로그 등에 글을 올려 광고 수익이나 판매 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이런 글쓰기를 경계한다.

 

우리가 글을 쓸 때 피해야 할 ‘저술가’는 순전히 수익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불명확한 글로 보여 준다. 문체에 단호함과 명확함이 결여돼 있다. 반면 가치 있는 생각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달하려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사물 그 자체 때문에 쓰는 사람”이라고 한다. 오직 ‘사물 자체’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만이 쓸 가치가 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위대한 사상가가 쓴 고전의 가치가 다시 강조된다. 천재는 돈을 위해 글을 쓰지 않고 “사물의 전체와 위대함, 본질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을 자기 업적의 주제로 사는 자”다.

 

쇼펜하우어의 이런 입장은 전자 미디어를 활용하는 시대에 고리타분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의미가 있는 이유는 진정성 때문이다. 유튜브의 경우 수익을 노리는 영상은 제목이 실제 내용과 다른 경우가 많다. 구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과장하기 위해 제목부터 내용까지 가짜로 채웠기 때문이다. 또한 남의 글을 가져다 짜깁기하거나 요약한 가짜 지식을 만들어 낸 글도 있다. 내용이 부족하므로 자극적이고 과장된 허위 정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수익 창출만을 위한 글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진솔하게 써야 한다.

 

교양이 있는 대중,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돼라

 

글쓰기는 일상을 기록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자 수익 창출의 방법이 되기도 하면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글의 내용이나 소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표현의 형식, 즉 문체다. 글을 남이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간단명료하게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반대로 어렵고 모호하며 추상적인 글쓰기가 철저히 배제되는 이유는 독자의 이해력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쇼펜하우어와 같은 글쓰기를 고집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좋은 글의 조건과 방향성에 대해 공감할 부분이 많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윤보다는 사물 자체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이 꼭 필요하다.

 

글이 명료해야 쉽게 읽고, 진솔해야 공감된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8. 본능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8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하는가 4장

 

영원을 위해

사랑한다

 

[본능]

“사랑은 수많은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슬픔과 환희, 고통과 즐거움, 천국과 지옥의 경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은 인류가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진 영원한 관심사다.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싸우고, 자살을 하기도 하며, 철학자도 결혼의 유혹에 빠트리기도 한다. 이기적인 사람도 사랑에 목을 매고 까다로운 사람도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일을 보면 사랑은 예측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데이팅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러브라인이 빠진 드라마는 섭섭하며, 불륜이나 출생의 비밀 등 다소 충격적인 소재들이 인기있는 것은 사랑에 대단한 관심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하면 풋풋한 첫사랑, 짝사랑을 떠 올린다. 대부분 이뤄지지 않은 그리움은 고스란히 추억으로 남는데, 이런 실패한 사랑을 ‘플라토닉 하다’고 미화하기도 한다. 영화 <건축학개론>이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던가.

 

사랑은 영원히

살아 있음을 상징한다

 

쇼펜하우어에게 남녀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인 관계를 염두에 둔다. 실제로 남녀의 사랑은 성적 본능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에 얼핏 성격, 경제력, 학벌 등 개인적인 조건이 중요해 보이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인생이라는 무대위에서 각자는 사랑을 하는 단역 배우고, 그 무대의 각본은 종족 보존이라는 목적으로 쓰였다. 개인은 이런 자연의 의도나 계획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성욕은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크다. 이는 자기 보존의 욕망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강렬하게 작용하는 본능이다. 인간이 지닌 욕망 중의 욕망인 셈이다. 우리가 비록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남녀의 사랑에서 최종적인 목적은 후손을 낳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전제는 육체적인 접촉이다.

 

삶에의 의지는 아무런 목표나 한계 없이 계속 노력하며, 그 정점은 생식이다. 정점에 도달하면 모든 것은 급속히 식고 쇠퇴한다. 플라톤은 “백발의 시기가 되면 그때까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성욕에서 드디어 벗어난다는 점에서 행복하다”라고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성욕이 인간을 경미한 망상에 빠트리며, 성욕이 소멸해야 비로소 완전히 이성을 찾는다고도 했다.

 

자연의 새로운 개체인 후손 또한 종을 유지하기 위해 똑같은 사랑을 되풀이한다. 인간의 욕망은 신체와 분리될 수 없는데, 두 가지 큰 욕구는 개체의 유지와 종족 번식이다. 결국 성적 욕망의 충족은 짧은 시간에 이뤄지는 자기 만족이 아니다. 자신의 죽음을 넘어 삶을 긍정할 뿐만 아니라 삶을 연장하려는 행위다. 성적인 만족, 흔히 오르가즘이라 불리는 쾌감은 개인이 한순간 느끼는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미래에 죽어 없어질 자신의 삶을 이어 가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생식은 삶을 유지하고 시간에 무한한 삶을 보증하는 원리다.”

 

성욕은 ‘이 세상에서 내가 영원히 사라져 버릴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죽음이 없다면 남녀 간의 사랑도 없을지도 모른다. 성행위는 개인의 쾌락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으나 나의 삶이 자식을 통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영원히 사는 방법은 자손을 남기는 것이기 때문에 성행위는 죽음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더욱더 살려고 하는 간절한 의지의 표현이다. 내가 죽어서 사라져 먼지가 되더라도 나의 생명은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듯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사랑은 달콤한 환상 뒤에 이 세상에 영원히 남으려는 의지가 강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생식의 목적은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는 데 있다. 또한 그것은 개인의 살려는 의지를 실현한 것이 아니라 종족의 의지를 실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자신의 취향대로 상대방을 골라서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집안의 대를 이은 것에 불과하다. 쇼펜하우어의 주장대로라면 상대방에게 프로포즈를 해서 차이는 경우는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그 집안의 대가 끊길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상처가 된다. 실연은 개인의 아픔이 아니라 그 집안의 생명이 끊기느냐 이어지느냐의 중대한 일인 것이다. 그 바탕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존재하려는 삶에의 의지가 있다.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사랑의 기쁨, 슬픔, 이별, 절망 등을 여러 형태로 접한다. 쇼펜하우어는 그런 달콤한 사랑 뒤에는 종족 보존이라는 자연의 전략이 숨어 있다고 본다. 유기체가 생식의 전략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거미, 말벌, 인간 등 모든 생명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생식이 유기체의 궁극적 목적이자 가장 강한 본능인 이유는 종족 보존을 통해서만 의지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성욕의 실현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이 세상 모든 남녀의 사랑은 아무리 별나라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성욕이라는 본능을 근거로 한다. 즉 남녀의 사랑은 예외 없이 이 본능이 특수화되고 한정되고 개체화된 것뿐이다.”

 

성욕은 영원히 생존하려는 의지의 긍정이다. 이 세계를 삶에의 의지로 본다면, 그 의지가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생식 행위다. 봄날에 벚꽃이 활짝 피는 것, 물고기가 수입억 개의 알을 낳는 것 모두 살려는 의지를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은 영원한 생존에 대한 의지의 발현이다. 우리의 사랑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통해 계속 이어진다. 우리가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인류의 생명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영원한 상징이다.

 

사랑의

형이상학

 

에로스의 어원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에서 유래했다. 에로스는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얼핏 에로틱과 관련된 같지만 오해다. 프라토닉한 사랑의 어원인 에로스는 완전한 지혜를 갖춰 아름다운 영혼이 되기 위한 과정을 일컫는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은 성적인 관계를 전제하므로 단순히 쾌락만이 아니고 죽음으로 끊어지는 생명의 의지를 이으려는 노력으로 봤다. 남녀의 성관계가 사랑의 최초의 행위이자 출발점으로 나타난다.

 

현재의 우리나라는 사실상 유교적인 전통과 남아 선호 사상이 없어지면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남자의 역할이 줄어들고 제사 등 형식적인 의례가 많이 사라졌다. 이제는 생명의 대를 잇기 위해 결혼을 요구하는 것은 구닥다리가 할 일이다. 대가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종족 보존을 위해서 사랑을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유교적인 전통과 비슷한 점이 있다.

 

가장 슬픈 일은 내가 죽어서 이 세상에 나의 유전자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보다 먼저 죽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자식이 자신보다 더 빨리 죽는 것을 가장 큰 고통으로 여긴다. 자식은 나의 삶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출산율이 세계에서 최저 수준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사랑의 목적이 생명의 보존이라는 소펜하우어의 주장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가 경제적인 문제, 교육 문제, 경력 단절 등이 있지만, 나의 삶을 연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체념과 우리 자식에게 미래가 없다는 우려가 크게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성에 대한 의식도 많이 바뀌다 보니 자유롭게 연애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한다. 사랑을 일상의 일부분으로 여길 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랑이 죽음을 넘어서기 위한 행위라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생각해 볼 만하다. 우리가 이런 ‘사랑의 형이상학’을 알면 쾌락과 환상에 이끌려 타인을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사랑하면서 사랑을 배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9. 연애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9

사랑은 이상향이자

현실이다

 

[연애]

“우리의 다른 본능처럼 사랑은 환상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인연이 맺어지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한없이 아름답다.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것이 기쁨과 넉넉함으로 다가온다. 사랑의 환상은 찌릿하면서도 황홀한 기억이 된다. 반대로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은 낙담하여 삶을 포기하기도 하며 이뤄진 첫사랑이 불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사실 사랑은 현실적인 조건이나 미래의 계획을 외면한 환상에 가깝다. 그 환상에 속아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이 위대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연인에 대한 소유욕, 질투심, 증오심 등과 결합하여 사회적 문제를 낳기도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우리가 연애에 빠졌을 때 느끼는 모든 행복 감정은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

 

사랑에 빠지면

콩깍지가 씌이는 이유

 

흔희 눈에 콩깍지가 씌이면 상대에게 없던 매력도 생겨나게 된다. 남자는 자신의 개성과 특질에 잘 적응하는 여자를 바라며, 그런 여자가 나타났을 때 목숨을 바칠 각오로 희생적인 사랑의 전사가 된다. 대부분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면서 연애는 ‘자신의 일’이라고 착각을 한다. 사랑을 쟁취하려는 욕망은 너무나 강하며 그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사랑의 환상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

 

그래서 모든 연애는 성적인 환상을 통해 이뤄지며, 이런 눈먼 사랑의 바탕에는 남성의 성욕이 자리 잡고 있다. 남녀가 데이트를 할 때 잘 차려입고 거울을 보면서 외모를 고치는 이유는 바로 성충동에 있다. 인간은 이런 사랑의 묘약에 속아서 상대방과의 만남을 행복과 만족으로 느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랑의 목적은 현실적으로 2세를 낳는 데 있다. 이런 이기적인 행위를 통해서 자연이 이루려는 인류의 종족 유지라는 목적이 은밀하게 달성된다.

 

정신적인 교감이 바탕인 연애는 쇼펜하우어에게 하나의 환상이다. 실제로 사랑의 본질은 ‘생명의 보존’에 있기 때문에 철저히 신체적인 조건을 따진다. 우선 나이를 볼 때 남자는 가임 기간의 여성을 매력이 있다고 느낀다. 남자들에게는 출산이 불가능한 나이가 된 여자는 성적 매력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미모가 없는 젊은 여성을 본래 타고난 미모의 나이 든 여성보다 더 매력 있게 느낀다. 일단 제외하는 경향을 보이는 셈이다.

 

젊은 여자는 미모가 없어도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력적인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나이가 든 여자는 본래 타고난 미모라고 해도 젊음에 비해서 매력의 대상과 경쟁이 안 된다. 남자는 여성의 몸매에도 관심을 갖는데, 그것은 출산뿐만 아니라 육아의 가능성도 본다는 것이다. 특히 남자가 큰 엉덩이와 큰 가슴에 집착하는 이유는 풍만한 젖가슴이 유아에게 충분한 영양을 제공할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위 에스라인의 몸매는 현재의 남자와는 관련이 없으며 태어날 아이의 생존과 관련된 조건이다.

 

우리는 사랑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도 관언이 아니다.

 

여성의 경우에도 남성의 큰 키를 보는 경우는 장차 아이가 그렇게 좋은 유전자를 받기를 은근히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정신적인 사랑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건강한 아이를 낳으려는 욕망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며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을 사귈 때 재산이나 학력을 포함한 배경은 부차적이다. 그 사람이 본래 갖고 있는 외모와 같은 신체적인 특징이나 성격과 같은 장점이 더 고려되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만 기억한다면

사랑은 행복한 착각이다

 

누구나 소중한 첫사랑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가슴이 설레고 만나고 헤어지면 또 보고 싶어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언어, 욕구, 감정의 차이를 겪는다. 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알아듣거나,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영화 <왓 위민 원트>는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여자들의 생각이 들리게 된 남자를 통해 여자와 남자의 차이를 보여 준다. 광고 회사의 중역 닉 마샬은 새로 취임한 여성 광고 기획자로부터 여성 소비자의 취향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는 여성의 심리를 알기 위해 매니큐어를 칠하고 팬티스타킹을 신고 헤어 드라이를 하다가 욕조에서 전기 감전이 되는데, 그 후에 여자들의 생각이 들리는 신비한 경험을 한다. 그는 여성들의 생각을 알고 훌륭한 광고 기획을 하게 된다.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남녀의 차이를 이해하고 사랑을 유지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존 그레이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행성 출신이라는 비유를 통해 그들의 언어, 감정, 욕구, 행동 등의 차이를 설명했다.

 

이처럼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닌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쇼펜하우어는 출산이라는 목적에 있다고 봤다. 사실 연애 감정은 출산이라는 자연의 목적에 맞지 않다. 사랑을 통해 느끼는 천국과 지옥은 하나의 착각이다. 연애 결혼보다 중매 결혼을 한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연애 결혼을 한 사람은 동물적인 매력에 끌린 후 출산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면 모든 환상이 깨지고 열정은 바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조건을 맞춘 결혼은 현실적이기 때문에 환상이 덜하다.

 

사랑은 완벽함을 위한 갈망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사귀게 될 상대방의 경제적인 조건을 따지든, 외모나 재능을 따지든 나쁜 것은 없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사랑이든 연애든 각자가 선택할 일이기 때문에 강요할 일은 아니다. 가끔 조건이 완벽한 사람이 결혼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인간은 언젠가 혼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도 사랑의 마력에 이끌려 타인에 관심을 갖고 서로 공감하며 함께 인생을 만들어 가고 싶어진다. 사랑에 빠지면 모든 유행가가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늘 변하고 인생은 짧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은 없다. 다만 영원할 것 같은 착각 덕분에 덧없는 인생에 우리는 잠시 웃고 우는 추억의 시간을 함께한다.

 

슬픔과 환희, 고통과 즐거움, 천국과 지옥의 경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Epilogue]

인간의 마음이 늘 변하고 인생은 짧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은 없다.

다만 영원할 것 같은 착각 덕분에 덧없는 인생에 우리는 잠시 웃고 우는 추억의 시간을 함께한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0. 결혼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0

결혼은 공동의

실존이다

 

[결혼]

“결혼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의 반복이다.”

 

성행위를 끝내고 나서 허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듯이 결혼을 한 후에 속았다는 느낌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성욕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기 때문이다. 성욕에 눈이 먼 사람들은 미친 듯이 서로를 갈구하지만, 성욕이 “호사스러운 세계의 모든 속임수 중의 정수”라는 것이 곧 밝혀진다. 성욕은 충족되지 않을 때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무한하며 엄청난 것을 약속하지만, 실제로 그 결과는 보잘것없다. 모든 욕망이 충족되기 전과 충족된 후가 다르지만 특히 성적 만족의 경우는 그 차이가 분명하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그 욕구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정열은 착각하게 하는 환상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종의 목적이 달성되면 기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사랑과 결혼

그 후를 내다보라

 

결혼은 최근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선택지가 됐다. 결혼한 사람뿐만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결혼 이후에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애 때는 다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결혼한 후에 어떻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지 놀라기도 한다. 그 뜨겁던 사랑이 연탄재처럼 식어 버리기도 한다.

 

김종서의 노래 <아름다운 구속>을 꿈꿨는데 현실은 무서운 ‘감옥’을 경험하게 된다. 사랑만 믿고 결혼했는데 돈 문제, 가치관과 생활 습관의 차이로 갈등이 점점 더 심해져 결국 이혼까지 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느 프로그램에서는 결혼을 통해 남성과 여성이 모두 젊을 때의 자유를 빼앗기고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결혼을 ‘지옥’으로 표현하며, 이혼한 부부의 고통을 당당하게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이런 원인에는 무엇보다 사랑에 눈이 멀어서 닥쳐 올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자신의 탓이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사랑은 종족 보존을 위한 자연의 기만이다. 이런 속임수는 아주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인간이 서로 결합하여 사랑하도록 우리의 마음에 심어 둔 자연의 계략이자 속임수다. 우리는 자연에 속아서 결혼을 했는데, 곧 그것이 기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고달픈 현실을 마주하며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인생의 몇 수를 내다보는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니체는 “철학자는 결혼하지 않는다”라면서 독신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다. 그의 후손이 없다. 만약 결혼 이후의 어려운 현실을 알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면 니체처럼 혼자 자유로운 정신으로 마음 편하게 살았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홀로 사는 사람의 마지막에는 행복하지 않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니체의 마지막도 몇 명 남지 않은 친구가 함께했으며 오랜 병간호는 평생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와 누이가 불평 없이 도맡았다. 니체가 이미 정신을 잃을 상태여서 전혀 몰랐지만 힘들 때 도와주는 것은 가족뿐인 것이다.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

행복에 가까워진다

 

사랑이라는 환상에 속아 결혼한 사람이 불행하다면, 그런 환상을 미리 알고 혼자 사는 사람은 행복할까? 어차피 둘 다 불행한 것은 마찬가지다. 차이점이라면 어쨌든 결혼을 한 사람은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지만, 혼자 지내는 사람들은 어쩌면 고독한 죽음이라는 최후를 준비해야 될지 모른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다 알지만, 아기 때 기저귀를 갈면서 부모님의 고충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되고, 아이를 출산해 본 여성은 어머니의 산고를 알게 된다. 그리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사업하면서 고단한 삶을 통해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남자들은 왜 아버지의 어깨가 그렇게 무겁게 느껴졌는지 뒤늦게 알게 된다.

 

결혼을 통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어릴 적 성장 과정을 간접적으로 보면서 우리 부모님의 고충도 알게 된다. 불평불만 없이 우리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부모님의 결혼 생활에도 그늘이 있었을 것이다.

 

결혼하면 불행하고 결혼하지 않아도 불행하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가 자연에 속는 일은 반복된다. 이혼을 한 후 혼자 사는 경우도 있지만 다시 다른 이성의 매력에 빠져 사랑을 하는 일이 흔하다. 세상에는 늘 멋지고 잘생긴 이성이 잇기 때문에 만나기도 하지만 헤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혼을 하면 고생이 끝날 것이라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선가 또 다른 사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과 연애, 결혼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잠시라도 행복했다면 충분하다.

 

사랑의 힘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사랑을 얻는 대신 다른 무엇을 잃기도 한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1. 삶에의 의지(제2권)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0. 결혼 - 소설게시판 - 모이자 한민족 커뮤니티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0 결혼은 공동의 실존이다 [결혼] “결혼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의 반복이다.” 성행위를 끝내고 나서 허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듯이 결혼을 한 후에 속았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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