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조조가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 아니라 절세의 영웅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글 : 上善若水
오랜만에 글을 다듬어 본다. 옛날에 한 번 조조(曹操)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 때도 많이 부족했고 지금도 많이 부족하다. 2010년에 썼던 것이니 벌써 3년이 흘렀다. 아직도 할 말을 다 넣지 못했다. 그렇게 공부해 나가는 것이지만... 글을 쓴다는 게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게 절실히 느껴진다...
2009년 12월 28일, 조조는 다시 세상에 그 이름을 알렸다. 바로 조조의 무덤이 발견된 것이다. 그동안 숱한 전설을 남기며 오랜 세월동안 후세 사람들 상상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조조의 무덤이 마침내 발견됨으로써 새삼 조조 연구가 다시 시작되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삼국시대의 인물 중 가장 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은 바로 조조였다. 그만큼 많은 일화를 남겼고 평가도 극명하게 갈렸다.
"그대는 청평한 시기에는 간적이요, 난세의 영웅이라(君清平之姦賊,亂世之英雄)."는 『후한서』 「허소전」에 실린 허소(許劭)의 평을 동진의 역사가였던 손성(孫盛)은 『이동잡어異同雜語』에서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治世之能臣,亂世之姦雄)"이라 바꾸었다. 이후로 1800여 년 동안이나 "난세의 간웅"이라는 수식어는 조조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문구가 되었다.
왜 손성은 영웅을 간웅으로 바꾸었을까.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조조를 폄하하기 위해서였다. 배송지는 손성의 글을 이렇게 평가했다.
“무릇 손성은 글을 쓸 때 『좌씨전』을 많이 이용하면서 옛 문장을 바꾸었으니 이 같은 저서가 1개가 아니다, 슬프구나! 후세에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취하고 믿어야 하는가(凡孫盛製書,多用左氏以易舊文,如此者非一. 嗟乎,後之學者將何取信哉)!”
기본적으로 손성의 글은 오류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송지의 주라고 해서 주석에 인용된 전거가 되는 기록들을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 된다. 손성 같이 임의대로 바꾼 글이 있기 때문이다. 손성은 역사가로서 기본적인 의무를 지키지 않은 인물인 것이다. 비단 손성 뿐일까. 인용된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저 손성이 말한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도 잘못된 표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손성이 개작해낸 간웅이라는 수식어로 인하여 후세 사람들은 조조에게 간사함이라는 이미지를 넣었다. 지금까지도 조조를 떠올리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간사한 꾀를 내는 인물로 생각한다.
조조는 분명히 임기응변에 통달하여 예측불허의 계책을 내놓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단순히 간사함이라는 이미지로만 조조를 평가할 수는 없다. 조조는 주지하다시피 간웅이 아닌 "난세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조조는 한나라 개국공신인 조참의 후예라 하지만 본래 조조는 하후씨(夏侯氏)이다. 『삼국지』 「위지 무제기」에 인용된 『세어』에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曹嵩)이 하후씨라 나온다. 조숭은 환관이었던 조등(曹騰)의 양자로 들어갔고 그것이 본래 조조의 가계가 되었다.
조조의 모친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 조조가 어린 시절 일찍 세상을 떠났을 거라 추측된다.
이는 조조가 자신의 시 「선전행善戰行」에서 "일찍이 삼사교(三徙敎)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旣無三徙敎)"라고 읊은 데서 알 수 있다. 삼사교는 말 그대로 ‘세 번 이사한 가르침’ 즉, 유명한 맹모삼천지교이다. 자신이 어린 시절 어머니의 가르침을 못 받은 안타까움이 잘 드러난다.
『세어』의 기록이 얼마만큼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몰라도 조숭이 하후씨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조조가 하후돈(夏侯惇), 하후연(夏侯淵) 등 하후씨를 특별히 총애한 점이나 하후씨 가문이 위나라의 중진이었다는 점들을 통해서 봐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조조는 어린 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 시기에 원소(袁紹) 등과 어울리며 많은 사고를 쳤다. 『세설신어』 「가휼편」에는 어린 신부를 겁탈하려고 모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가 되면서 점차 철이 들고 시국을 걱정하는 혈기가 넘치는 청년으로 바뀌었다. (철이 들고 나서 옛날 생각을 할 때마다 자다가도 하이킥을 날렸을지도...) 조조는 효렴에 추천되어 낭관을 거쳐 낙양의 북부도위가 되었다. 그 때 매우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세도가였던 소황문 건석(蹇碩)의 숙부가 통금시간을 어기자 가차 없이 처벌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조조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이후 돈구 현령, 의랑 등을 지냈다. 중평 원년(184)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로서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주준(朱雋), 황보숭(皇甫嵩)을 도와 영천에서 황건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제남의 상이 되었다.
조조는 비록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당시 탁류 출신이었지만 행동만큼은 청류파 못지않았다. 젊은 날의 조조는 그야말로 청의를 빛내고자 하는 애국지사였다. 제남의 상(相)이 되었을 때 그 지방에서 부정부패가 심한 것을 알고 이를 모두 근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삼국지』 「위지 무제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직위가) 옮겨져 제남국의 상이 되었다. 제남국에는 10여 개의 현이 있었는데 장리(長吏) 가운데 대부분이 귀족, 친척에게 아부하며 뇌물을 받고 매관매직하는 일이 횡행했으므로 상주하여 그 중 8명을 파직시키고 음사(淫祀)를 금단시켰으니 간사한 자들이 달아나 자취를 감추어 제남국의 군의 경계가 숙연해졌다(遷為濟南相,國有十餘縣,長吏多阿附貴戚,贓污狼藉,於是奏免其八, 禁斷淫祀,姦宄逃竄,郡界肅然).”
다음으로 조조는 허례허식과 음사를 모두 근절시킴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었다. 한나라 성양경왕 유장(劉章)의 제사를 근절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배송지의 주에 인용된 『위서』에도 이 유장의 제사를 받드느라 백성들의 삶이 나날이 피폐해져 조조가 유장을 추모한 6백여 개의 사당을 모두 헐었다. 그 전까지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제남의 토착 귀족들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던 것을 조조는 과감히 깨부순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에서 조조는 용기를 냈지만 마음 한편에는 기득권층으로부터 보복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양현자명본지령讓縣自明本之令」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제남상으로 있을 때 음사를 제거하고 공평한 마음으로 인재를 천거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중상시들을 거역하게 되었다. 이에 혹여 집안에 화를 초래할까 두려워 칭병하고 낙향했다”
조정에서는 조조를 동군태수에 임명하였지만 조조는 낙향했다. 그리고 은둔하는 동안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마음먹고 부단히 노력했다. 나날이 독서를 하고 사냥을 하며 문무를 키워 나갔다. 조조에게 새로운 세상이란 왕조 교체라 봐도 될 것이다. 단순히 왕조 교체가 아닌 새로운 통치 사상을 추구했고 조조는 거기에서 난세를 평정할 사상으로 법가적 요소를 많이 수용했다.
동탁(董卓)이 낙양을 점거하고 이어 반(反)동탁연합군이 일어났을 때 연합을 한 제후들은 모두 자기 이권 챙기기에만 바빴다. 조조만이 유일하게 분전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반동탁연합의 수장이었던 원소부터 이미 다른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 연합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조조는 홀로 동탁을 추격하다 동탁의 부장 서영(徐榮)에게 패하고 말았다. 조조를 물심양면 도와주던 포신(鮑信)의 동생 포도(鮑韜)도 전사했다. 가까스로 조홍(曹洪) 등이 도우러 와 살아났을 정도로 첫 번째 패배는 뼈저리게 아픈 것이었다.
조조는 가까스로 재기하여 양주(揚州)에서 3천의 병력을 얻어 산조에 주둔했다. 조조와 원소가 갈라지게 된 사건이 있었다. 초평 2년(191). 반동탁연합군이 헌제를 폐위시키고 유주목 유우(劉虞)를 옹립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조조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배송지의 주에 인용된 『위서』에는 조조가 반대한 이유가 나와 있다.
“동탁의 죄악이 사해에 드러나 우리들이 사람들을 규합하여 거병하니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호응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대의를 좇아 움직여서입니다. 지금 어린 황제가 미약하고 간신에게 눌려 있지만 아직 창읍왕처럼 망국의 단서를 보인 적은 없습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천자가) 바뀌면 천하 사람들 중에 누가 동의하겠습니까. 제군들이 북면(北面)하면 나는 서향(西向)하겠습니다(董卓之罪,暴于四海,吾等合大眾、興義兵而遠近莫不響應,此以義動故也. 今幼主微弱,制于姦臣,未有昌邑亡國之釁,而一旦改易,天下其孰安之. 諸君北面,我自西向).”
조조는 천자의 중요성을 알았고 원소는 몰랐다. 결국 원소의 계책을 이뤄지지 못했다. 유우 스스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원소는 다음 계책으로 기주를 먼저 공략했다. 원소의 세력은 커졌지만 조조는 의기소침해 하지 않았다. 근거지가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을 때 포신이 조언했다.
“잠시 황하 이남에서 시세의 변화를 지켜보며 때를 기다립시다.”
조조는 포신의 조언에 따라 잠시 원소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면서 복양에서 흑산적의 백요(白繞) 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원소는 조조에게 동무양 일대를 맡겼다. 비로소 기반이 생긴 것이다.
이듬해인 초평 3년(192). 흑산적의 우독(于毒)이 동무양으로 진격해오자 조조는 과감하게 역으로 우독의 본진을 공격했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손빈(孫臏)이 구사한 위위구조(圍魏救趙)였다. 조조는 이렇게 탁월한 용병술을 발휘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이내 곧 진궁(陳宮), 포신 등의 도움으로 유대(劉岱)가 죽은 이후 빈 곳이나 다름없던 연주를 얻음으로서 본격적인 군웅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조조는 이제 막 창업을 시작한 작은 기업의 사장과도 같았다. 비유를 하자면 책상 하나, 전화 한 대. 겨우 얻은 기반과 적은 자본으로 천하를 평정하는 큰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하지만 조조는 여느 군웅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조조는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황건적에서 찾았다. 황건적의 잔당이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투항자들을 받아들였다. 흔히 후세 사람들이 "위 무제의 강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 때 투항자들을 받아들여 다시 정예병으로 태어난 "청주병"은 위나라의 주요 전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 때 가장 든든한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포신이 전사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조조는 매우 슬퍼하면서 나무로 포신의 형상을 만든 뒤 제사를 지내고 통곡했다.
조조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단련했다. 세력이 강대한 원소, 원술(袁術) 등을 이기려면 능력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서 온갖 위기상황을 넘기고 목숨을 걸었다. 그러면서 조조는 한걸음씩 계속 성장했다. 결국 난세를 평정한 데에는 끊임없는 자기 노력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조조의 독서량이 누구보다도 훨씬 앞섰던 것도 이를 증명한다.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 정도로 조조는 당대 최고의 실력가였던 것이다.
두 번째로 조조는 인재를 포용했다. 조조의 천하 평정의 가장 큰 힘은 조조의 인재 등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시대의 그 어는 군웅들보다도 조조의 인재 등용, 용인술을 뛰어넘는 사람은 없었다. 조조의 "장자방"이라 할 수 있는 순욱(荀彧), 순유(荀攸) 등의 책사들은 물론 과감히 적진에서 발탁한 용장들, 신분이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능력만으로 파격적인 등용을 감행했다. 조조의 용인술은 중국사 전체에서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이다. 『삼국지』 「위지 무제기」에는 원소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 원소가 조조와 함께 거병했을 때 원소는 조조에게 물었다.
"만일 이 일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어느 곳을 근거지로 삼을 수 있소?"
조조가 말했다.
"그대 생각은 어떻습니까?"
원소가 답했다.
"나는 남쪽으로 황하에 의지하고 북쪽으로 연(燕), 대(代)에 의지하여 융족을 제압한 후 다시 남쪽으로 진군하여 천하의 패권을 노릴 것이오."
조조가 답했다.
"나는 천하에서 지혜롭고 용기있는 인재들을 임용한 후 왕도로써 그들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리하면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吾任天下之智力, 以道御之, 無所不可)."
여기서 조조와 원소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원소는 천하를 얻는데 지리를 중요시한 반면 조조는 무엇보다도 결국 일을 이룰 수 있는 요소는 바로 인재에 있다고 여긴 것이다.
세 번째로 헌제를 맞이한 것이다. 한나라 권위가 무너지긴 했어도 황제의 권위를 감히 넘보지 못했다. 그만큼 황제는 신성한 존재였다. 원술이 멋대로 황제를 칭하자 가장 먼저 군웅들의 타도 대상이 된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건안 원년(196), 조조는 모개(毛玠) 등의 조언을 받아들여 장안에서 탈출한 헌제를 맞이하고 허현에 정도함으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정통성 있는 정권을 창출해내었다. 조조는 조정에 불복하는 군웅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명분이 앞서니 다른 군웅들보다 훨씬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조조는 남다른 지략과 결단력을 갖춘 지도자였다. 난세라는 시대적 배경은 바로 조조에게 걸맞은 무대였다. 특히 결단력은 조조를 강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결단력이 빨랐으니 속전속결로 상대방을 빠르게 제압하는데도 능했다. 하비에 주둔하던 여포(呂布)를 단지 3개월 만에 멸망시킨 게 이를 증명한다. 특히 이 때 『손자병법』 「모공편」에서 일러준 "적이 10배이면 포위한다"는 손자의 이론에 조조는 "2배라도 가능하다"라는 주장으로 반박하여 훌륭하게 수행해내었다.
“그러므로 용병의 법칙에서는 10배이면 포위한다(故用兵之法, 十則圍之).”
-조공(曹公)이 말하기를 , 10배이면 포위한다는 것은 (적과 아군의) 장수의 지략과 용맹이 대등하고 병사와 예기와 무기가 대등한 경우이다. 만약 적이 약하고 아군이 강하면 10배를 쓸 필요도 없다. 나 조조는 2배의 병력으로서 하비성을 포위하고 여포를 생포했다(曹公曰, 以十敵一則圍之, 是將智勇等而兵利鈍均也. 若主弱客强, 不用十也. 操所以倍兵圍下邳生擒呂布也).
“5배이면 공격하고 (五則攻之)”
-조공이 말하기를, 5배로 하나를 대적할 때는 3은 정공법으로, 2는 기병(奇兵)으로 한다(曹公曰, 以五敵一, 則三術爲正, 二術爲奇).
“2배이면 (적을) 분산시킨다(倍則分之).”
-조공이 말하기를 2배로 하나를 대적할 때는 하나는 정공법으로 하나는 기병(奇兵)으로 한다(曹公曰, 以二敵一, 則一術爲正, 一術爲奇).
조조는 단 3개월만에 여포를 멸망시켰다. 잠재 위협세력을 제거함에 있어 탁월한 속전속결을 보여준 것이다. 조조는 진등을 앞세워 여포를 하비성 안에 가두는데 성공했고 성 둘레에 참호를 판 뒤 기수, 사수의 물을 끌어들여 수공을 펼쳤다. 구원병도 없고 식량도 떨어진 여포는 그렇게 망한 것이다.
『손자병법』 조조의 주석에서 보이듯 조조가 여포를 토벌할 때 동원한 병력은 여포의 2배라고 본다. 손자도 10배여야 적을 포위한다고 말했는데 조조는 나아가 이를 응용하여 최소한의 병력으로 최대 효과를 낸 것이다. 그가 실전에 얼마나 강한가를 방증하는 셈이다.
조조는 그러면 병력을 어느 정도 동원했을까. 『후한서』「여포전」에서는 당시 여포로부터 혼사를 거절당한 원술이 여포를 칠 때 여포에게는 남아 있던 병력이 3천이고 말 4백필이라고 했다(布時兵有三千,馬四百匹). 진등이 조조로부터 광릉태수에 임명되었던 시기이므로 그 때가 건안 2년(197). 여포가 죽기 1년 전이다. 그러므로 아마 여포가 병력을 다시 회복했다고 쳐도 얼마 충당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넉넉잡아 여포가 병력을 최대 5천을 회복했다고 한다면 조조는 그 2배쯤 되는 대략 1만 이하에서 1만까지 동원하지는 않았을까라고 나름 추측해본다.
조조는 "병력 차이가 2배가 나면 군사를 나눠 하나는 정공법, 하나는 기병(奇兵)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실제로 조조는 하비성을 공격하는 정공법을 사용하면서도 여포의 부장들을 투항하게 하는 기병을 사용하였다.
조조가 『손자병법』에서 이렇게 여포 토벌의 사례를 넣은 것은 그만큼 병법의 응용에 자신이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여포를 토벌할 때는 물론이고 관도대전에서도 조조는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원소의 군량이 있던 오소를 급습하여 승리의 쐐기를 박았다. 처음 원소와 대적할 때 조조는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순욱, 곽가(郭嘉) 등은 모두 조조의 장점을 들면서 조조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그 때 공통적으로 언급된 사항이 바로 조조의 결단력이었다.
조조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원소는 결단력 부재로 결국 조조에게 패망하고 말았다. 상대방의 심리를 읽고 사물을 바로 보며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지 않는 모습은 관도대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포와 원술을 차례로 무너뜨린 조조는 하북 4개 주를 차지한 원소와 일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모든 면에서 조조는 열세에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조조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책으로 백마에서 첫 승을 거두었고 이후 후방을 교란시키던 유비를 속전속결로 무너뜨린 뒤 온 전력을 관도에 집중했다.
원소는 전풍, 저수의 계책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 뜻만 밀어붙였으나 조조는 순욱, 곽가, 가후(賈詡) 등의 계책을 채택하고 결정적으로 투항해온 허유(許攸)를 받아들임으로서 마침내 승리를 하게 되었다. 둘의 승패는 이미 갈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조는 관도대전 이후 하북을 평정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형주를 치러 남하하자 유종(劉琮)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형주를 얻자 교만함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가후는 형주의 백성들을 위무하면서 천천히 강동을 압박하면 강동의 손권(孫權)이 저절로 투항해 올 것이라 진언했지만 조조는 이를 듣지 않았다. 결국 섣불리 출정한 결과 적벽에서 참패를 당했다.
관도대전이 최고의 정점이었다면 적벽대전은 가장 비참했던 전투였을 것이다. 하지만 조조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패전으로 정신차린 조조는 자신의 경솔함을 제어해 줄 인재를 원했고 건안 15년(210)에는 「구현령求賢令」을 발표해 널리 인재를 구했다. 이후로도 “선비를 등용할 때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칙유사취사무폐편단령勅有司取士毋廢偏短令」, “도덕에만 얽매이지 말고 오직 재능만으로 등용하라”는 「거현물포품행령擧賢勿抱品行令」 등을 발표했다. 여기서 "오직 재능만으로 천거하라"는 유재시거(唯才是擧)라는 말이 나왔다.
노나라의 시조 주공(周公)이 "토포악발(吐哺握發)"했던 것처럼 현능한 인재를 등용해 자신도 대업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드러내었다. 조조는 천하를 얻는다는 것은 곧 인재를 얻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조는 기본적으로 법가적 통치를 사용했다. 삼국시대라는 난세는 질서가 혼란스럽기 때문에 빠른 결단력과 냉철한 판단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조조는 법가를 위주로 하여 패도정치를 구사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조조는 왕도정치를 펼치고자 했다.
이는 조조가 『논어』를 자주 인용한 것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난세를 평정하는데 법가를 사용하고 난세가 평정이 되면 자연스레 유가사상으로 왕도정치로 세상을 감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조는 왕도와 패도를 적절히 구사한 탁월한 리더십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조조는 나이가 들어도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냉철했다. 원소나 손권, 유비가 말년에 판단력이 흐려져 일을 그르친 것과는 달리 조조는 말년에도 그 총기를 흐리지 않았다. 다만 젊은 시절처럼 모험을 감행하는 면은 줄어들었다. 한중의 장로(張魯)를 정벌한 다음 바로 촉으로 진격하자는 사마의(司馬懿)의 의견에 반대하여 하후연, 장합(張郃) 등을 주둔시킨 뒤 돌아간 것이 이를 말해준다.
만약 조조가 사마의 의견대로 촉으로 진격했다면 유비는 패퇴했을지도 모른다. 후세 사람들은 이 때문에 조조의 실수로 이것을 들지만 당시 손권이 합비로 쳐들어와 위협을 가했고 후방 내부에서도 조조를 몰아내려는 움직임 등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 조조가 더 깊숙이 들어가지 않은 게 결과적으로 옳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손권이 북상했을 때 조조는 합비에 전령을 보내 장료(張遼), 이전(李典), 악진(樂進) 3명의 역할을 부여하여 적은 병력으로 손권을 크게 무찌르게 했다. 나이가 들어도 판단이나 예측에 있어서는 절대 그 실력이 녹슬지 않았던 것이다.
조조의 마지막 용병술은 번성전투 때이다. 우금(于禁), 방덕(龐德)이 실패하자 한 때 천도를 고려하기도 했지만 관우가 손권과 사이가 안 좋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손권과 밀약을 성사시켜 관우의 배후를 치게 하는 동시에 서황(徐晃)을 파견하여 관우를 격파하게 했다. 서황은 과감히 돌진하여 관우를 몰아붙였다. 관우는 서황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주했다. 그 사이 손권은 여몽(呂蒙)을 보내 형주를 접수했다. 갈 곳이 없어진 관우는 손권에게 거짓투항을 하고 빠져나가려다 붙잡혀 참수당했다. 직접 관우를 치기보다 손권의 손을 빌려 관우를 제거하는 "차도살인(借刀殺人)"까지 성사시키는 모습은 노회함 자체이다.
조조는 앞서 봤듯이 용병술의 기재였고 계략에 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군사전략가가 아니었다. 조조는 새로운 시대를 세우기 위한 비전을 가진 정치가이기도 했다.
조조의 대표적인 정책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둔전제"이다. 후한 말 제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을 벌이는 통에 백성들의 생활은 파탄이 난 지 오래였다. 『삼국지』 「위지 무제기」 에 인용된 『위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난리를 만난 이래로 식량이 부족했다. 군사가 나란히 일어나니 난세를 끝낼 계책은 없었다. 배고프면 침략하고 배부르면 남은 것을 버렸으니 와해하여 떠돌아다니고 대적하지 못하여 스스로 붕괴한 자가 셀 수 없었다. 원소가 하북에 있을 때 군사들이 뽕과 오디를 따 먹었고 원술이 강회에 있을 때에는 부들과 어패류로 허기를 채웠다. 백성들은 서로를 잡아 먹으니 주(州)와 마을이 황량했다(自遭荒亂,率乏糧穀. 軍並起,無終歲之計. 饑則寇略,飽則棄餘,瓦解流離,無敵自破者不可勝數. 袁紹之在河北,軍人仰食桑椹. 袁術在江、淮,取給蒲蠃. 民人相食,州里蕭條)."
조조가 다스리던 지역 역시 상황이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헌제를 맞이한 이후 헌제에게 「진손익표」를 올려 민생문제를 논했고 예전부터 시행되던 둔전제를 본격적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진손익표」는 지금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경제 문제가 가장 중점적으로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호(韓浩)와 조지(棗祗), 임준(任峻) 등은 조조의 둔전제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조조의 둔전책은 군민의 식량조달 문제를 해결하는데 탁월했다.
조조는 「치둔전령置屯田令」을 내려 둔전을 시행했다.
“무릇 나라를 안정시키는 방법은 군대를 굳세게 하고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데에 있다. 진(秦)나라 사람(商鞅 : 상앙)은 농사일을 가장 급하게 여겨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한 무제는 둔전으로 서역 일대를 안정시켰다. 이는 앞서 살아간 사람들의 훌륭한 본보기이다(夫定國之術,在於彊兵足食,秦人以急農兼天下,孝武以屯田定西域,此先代之良式也).”
처음 실시된 허현 지역에서는 황건적 잔당인 하의, 유벽 등을 격파하면서 그 투항자들을 확보하여 실시가 된 것인데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조조는 둔전책의 실시를 더 강하게 하기 위해 조지를 둔전도위, 임준을 전농중랑장에 각각 임명해 사무를 총괄하게 했다. 조조는 조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곡물 확보방안을 마련했고 허도의 민둔에서 1백만 곡을 비축하게 되었다. 조지가 죽은 뒤에는 임준이 그 임무를 맡아 마침내 둔전제를 완성하게 되었다.
『삼국지』 「위지 임준전」에서도 이렇게 기록했다.
"군국의 풍요는 조지로부터 일어나 임준에 의해 완성되었다(軍國之饒,起於棗祗而成於峻)."
조조는 허도의 민둔이 성공하자 계속 유지시키고자 민둔을 전국적 단위로 확대실시하게 했다. 국연(國淵)을 시켜 토지에 백성을 정착시키게 했다. 국연은 임준의 뒤를 이어 민둔을 전국 단위로 개편해 성공을 거두었다.
『삼국지』 「위지 국연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태조는 널리 둔전을 실시할 생각으로 국연을 시켜 이를 총괄하게 했다. 국연은 누차 손익을 진술하여 땅의 형세를 살피고 백성을 두어 백성의 수에 따라 관원을 두고 공과(功課)와 법을 명백하게 했다. 이에 5년 만에 창고가 가득차고 백성들은 즐거이 일을 했다(太祖欲廣置屯田,使淵典其事. 淵屢陳損益,相土處民,計民置吏,明功課之法,五年中倉廩豐實,百姓競勸樂業).”
여기서 조조는 둔전을 하는데 그 인원을 황건적 투항자들과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유복(劉馥)이 합비에 도착하여 이를 개간할 때 강남에서 귀순한 유민들로 둔전을 시행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민둔과 달리 군둔은 한나라 때의 것을 발전시킨 것으로 조조가 창자(倉慈)를 수집도위로 임명하여 회남에서 처음 시행했다. 조조의 군둔은 군민에 결합해 변경을 둔전, 개간하는 방법이었다. 조조 시절에 완비되고 위나라가 건국되자 위 문제가 이를 계속 시행했다.
조조는 둔전을 행하면서 백성들의 기아문제를 완벽히 해결했고 변경의 군둔까지 완비되어 군량 걱정도 덜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식량이 남아돌게 되었다. 『진서』 「고조선제기」를 보면 건안 말기에 20만 명의 군사가 농사를 지으면서 수비에 나서니 곡식이 쌓이고 그 수요가 남아돌았다고 할 정도였다.
둔전제를 시행하면서 황건적 잔당들을 투항시켜 이들이 둔전에 종사하게끔 하니 난세의 통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조는 둔전제를 통해 강력해진 경제적 기반으로 주변 군웅들을 소탕하는데 한결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조조는 앞서 얘기했듯이 법가적 패도주의를 실행했던 인물이다. 법가의 기본적인 요지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이다. 조조는 누구보다도 신상필벌에 정통했다. 진수 역시 조조를 평할 때 "신불해와 상앙의 법술을 구사했다"라고 했다. 사마광도 『자치통감』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공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었고 천금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 공도 없이 상을 받으려는 자에게는 한 오라기 실도 주지 않았다. 법을 집행하는 것이 엄하고 각박했는데 범법자는 반드시 처벌 받았다. 범법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애석해했지만 끝내 형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조조의 법 집행력이 얼마나 확실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조는 그만큼 원칙을 고수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그 덕분에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다.
조조 전반적인 일생을 보더라도 그가 법술을 구사한데는 별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유가에서 말하는 인, 예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조조는 왕도주의와 패도주의를 적절히 사용했었다. 단지 난세가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조조는 법가에서 주장하는 엄격한 형벌을 다소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조는 궁극적으로 유가를 지향했던 인물이다. 조조는 자신의 시 「추호행秋胡行」에서 "인의를 명분으로 삼고 예악을 번영하게 하네(仁義爲名 禮樂爲榮)"라고 했었다.
그의 시 「선재행善哉行」에서는 고공단보(古公亶父), 백이(伯夷), 숙제(叔弟), 중산보(仲山甫), 관중(管仲) 등 왕도를 행한 인물들의 정치적 업적을 노래한데서도 조조의 정치 철학이 드러난다. 단 관중은 왕도에 가까운 패업을 행하여 법가의 시조로 추앙 받기도 하나 관중 역시 왕도와 패도를 겸용한 정치가라 보는 게 맞다.
이는 조조가 유가를 소홀히 했다는 얘기가 틀렸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북을 평정하자 건안 8년(203)에 발표한 「수학령修學令」에서 학교를 세우고 예악, 문학을 가르치게 했다는 사실에서도 그가 궁극적으로는 난세를 평정한 이후 유가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란(喪亂)이 있은 이래 15년이니 후생(後生)들이 인의와 예양(禮讓)의 풍속을 보지 못하여 나는 이를 매우 아프게 여겼다. 이제 명하니 각 군국은 각기 문학을 닦고 각 현은 5백 호당 교관을 두어 마을의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후생들을 가르치도록 하라. 그러면 거의 선왕의 도가 폐해지는 일은 없고 천하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喪亂已來,十有五年,後生者不見仁義禮讓之風,吾甚傷之. 其令郡國各脩文學,縣滿五百戶置校官,選其鄉之俊造而教學之,庶幾先王之道不廢,而有以益于天下).”
조조는 유가의 근본인 "효"를 매우 중시했다. 진궁을 참수할 때도 진궁의 노모를 극진히 모셨으며 부모가 여포에게 인질로 잡혀 배반했던 필심(畢諶)을 다시 등용하여 노국(魯國)의 상(相)으로 삼았다. 나관중은 조조가 서서(徐庶)의 노모를 인질로 잡고 서서를 불러들였던 것처럼 묘사했지만 이는 나관중의 왜곡이다. 그렇게 따지면 『삼국연의』에서 강유(姜維)의 어머니를 먼저 잡고 강유의 투항을 유도한 제갈량(諸葛亮)도 비난 받아야 할 일인데 나관중은 그 점은 무시했다. (물론 강유의 어머니가 제갈량 진영에 잡혀 강유가 투항했다는 건 허구이다.)
이밖에도 조조는 군신간의 의리를 중요시 여겼다. 원담(袁譚)이 죽자 왕수(王修)가 곡을 하고, 원상(袁尙)이 죽자 견초(牽招)가 상복을 입었던 사실, 유표가 죽은 후 한참 뒤에야 투항을 한 문빙(文聘)도 모두 충신이라 칭찬하면서 관대하게 그들을 중용했다. 이처럼 조조의 기본적인 통치는 유가에 입각한 것이었다.
또한 조조는 매우 검소한 성격이었는데 이도 유가의 영향 때문이었다. 서진 때 육기(陸機)는 "조조가 사용하던 그릇을 보니 동오 지역의 노인들이 사용하는 질박한 그릇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라고 말했으며 위기(衛覬)가 위 명제에게 올린 상소에서도 "무제께서는 후궁의 식사에는 고기반찬이 한 가지 뿐이었고 기물에는 붉은 칠을 하지 않아 이로써 천하를 평정하고 자손에게 복을 남기셨습니다(武皇帝之時,後宮食不過一肉,衣不用錦繡,茵蓐不緣飾,器物無丹漆,用能平定天下,遺福子孫)"라고 말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조조는 엄격한 법을 집행하면서도 관대한 유가의 도를 같이 수행했었다. 왕도와 패도를 적절히 구사한 탁월한 통치술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조조는 기존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를 꿈을 꿨기에 기존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제도를 과감히 정착시켰다. 신분에 관계없이 과감히 인재를 발탁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옛 관습에만 물들어 있던 제후들은 이러한 조조에게 질 수 밖에 없었다.
조조는 잔인한 면모를 보인 적이 많았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할 때만 보였다. 그러나 나관중이나 모종강 등은 조조의 이러한 모습을 부각시켜 한층 더 조조가 교활한 인물이었다는 이미지를 완성시켜갔다. 조조와 대적했던 정적들은 결국 대부분 죽음을 맞이했다. 공융(孔融)이 그러했고 양수(楊修) 등도 결국 조조의 눈 밖에 나서 죽었다. 물론 순욱이나 최염(崔琰), 등 조조가 판단을 잘못하여 죽인 예도 있다.
후세 사람들은 조조가 남들의 재능을 시기해서 인재를 죽였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친 해석이다. 조조는 누구보다도 재능을 아꼈던 인물이다. 앞서 얘기한 공융 등은 자기 자신이 죽음을 자초했다고 봐야 한다. 교만한 모습을 보이며 실속이라곤 전혀 없던 예형(禰衡), 허유 등도 공융과 마찬가지 원인으로 죽었다고 볼 수 있다. 철저한 실리주의자였던 조조는 궤변만을 일삼으며 새로운 정책에 반하는 이들이 걸림돌이라 여겼던 것이다.
물론 순욱을 결국 자살하게끔 한 것이나 최염, 모개 등이 억울하게 옥사한 것에 대해선 조조 역시 비난을 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조가 남의 재능을 시기해서 인재들을 죽였다는 것은 조금 억울한 일일 것이다. 인재를 활용한 사례가 더 많기 때문이다.
조조는 수많은 시를 지었는데 이러한 시 속에서는 조조의 애민정신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백성들이 가난하게 헐벗고 굶는 모습을 아파했다. 비록 정적을 제거할 때는 잔인한 면모를 드러냈지만 백성들 앞에서는 관대했던 지도자였다.
물론 초창기에 서주를 공격할 때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한 정당하지 못한 행위를 벌여 후세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는 확실히 조조가 저지른 잘못 중 하나이다. 도겸을 토벌할 때 “나에게 저항하면 그 대가를 톡톡히 맛 볼 것이다”라는 일종의 경고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되었건 백성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서주 사건을 제외하고 조조 일생을 통틀어서 볼 때 조조는 대체적으로 백성들의 생활 안전에 최대한 힘을 썼다. 위에서 얘기한 둔전제도 그렇고 전란으로 희생된 병사들의 가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복지에 신경을 기울였다. 건안 23년(218)에 발표한 「섬급재민령贍給災民令」에는 백성들의 복지에 대해 각별히 신경쓰고 있음이 보인다.
“지난겨울 전염병이 돌아 병든 백성이 있고 군대도 밖으로 나가 농토가 적게 개간되었으니 나는 매우 우려한다. 지금 명을 내리니 백성 남녀 중에서 여자는 70살 이상인데도 남편과 자식이 없거나 12살 이하인 어린이인데도 부모형제가 없거나 또는 눈을 보지 못하거나, 손을 쓰지 못하는 자, 다리를 못 쓰는 자, 처자나 부형이 없어 생업이 없는 자는 조정에서 죽을 때까지 식량을 주도록 하라(去冬天降疫癘,民有凋傷,軍興於外,墾田損少,吾甚憂之. 其令吏民男女, 女年七十已上無夫子,若年十二已下無父母兄弟,及目無所見,手不能作,足不能行,而無妻子父兄產業者,廩食終身).”
조조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시켰다. 「억겸병령抑兼倂令」을 내려 호족들의 토지 겸병을 막고 백성들의 조세를 면제시켜주었다. 백성들은 과도한 조세에서 해방되자 기뻐했다.
또한 건안 4년(199)에 위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소금을 전매하고 그 수익으로 밭갈이 하는 소를 사서 귀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관중 일대는 그렇게 안정이 되어갔다. 조조는 정혼(鄭渾)을 시켜 관중 일대의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도록 지시를 내리고 도적들을 토벌하게 했다. 『삼국지』 「위지 정혼전」에는 이 때 확보된 군량이 한중 정벌 때에도 활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동태수였던 두기(杜畿) 역시 마찬가지로 하동을 평안케 하여 20만 곡이라는 엄청난 식량을 확보해내었다.
조조는 이외에도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계속 내놓았다. 『삼국지』 「위지 조엄전」을 보면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중일 때 원소는 별동대를 보내 조조의 후방을 교란시키려 했다. 그 때 각 고을이 불안해하였는데 양안만은 동요하지 않았다. 양안을 지키던 이통(李通)이 가구별로 징수명단을 작성했는데 이통을 보좌하던 조엄(趙儼)이 징수를 늦추라고 진언했다. 세금을 징수하면 백성들이 어려운 와중에도 더 곤궁하게 만든다며 불만을 표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욱에게 편지를 써 양안군 일대의 백성들에게서 솜과 비단을 징수하지 말고 오히려 백성들에게 돌려주자고 진언했다. 순욱이 조조와 상의하였고 조조는 백성들에게 솜과 비단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조조의 문학성이 탁월하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론이 없다. “건안문단(建安文壇)”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조조는 매우 탁월한 문학성을 자랑했다. 그 시 속의 주인공은 대부분이 백성이었다. 조조 자신 또한 시 속에 등장하여 자신의 정치적 포부, 태평한 세상을 원하는 바람 등을 묘사했다. 조조의 사고를 알기 위해선 그의 시를 잘 봐야 할 것이다.
만약 조조가 손권, 유비를 제압하고 천하를 완전히 통일했었더라면 후세 사람들의 그 평가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불완전한 하북 통일에 그치고 후손들이 사마씨에게 정권을 빼앗김으로서 조조는 서서히 간웅으로 자리잡아갔고 지금도 조조는 영웅이 아닌 간웅의 대명사가 되었다.
조조가 살아 있을 시기나 삼국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조조는 영웅이라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일찍이 그를 알아본 허소, 교현(橋玄), 하옹(何顒) 등의 당대의 대학자들이나 청류파의 거두 이응(李膺)의 아들 이찬(李瓚)은 모두 그를 영웅으로 간주했다. 조조의 옛 친구였던 왕준(王雋)도 조조를 인정했다. 사마씨의 서진이 들어서고 이후 5호 16국시대,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조금씩 간웅으로 인식되었지만 대체적으로 그의 능력에 대해선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당시 적이었던 촉나라의 제갈량도 조조를 평가할 때 "지혜와 계책이 뛰어나고 용병술은 손자, 오자에 버금간다." 라고 평가했었고 오나라의 손권도 "장수를 부리는 재능이 뛰어나다"라며 조조의 용인술만큼은 인정했다. 또한 오나라 명장 육손의 손자이자 서진 시기 당대 시인이었던 육기도 「조위무제문弔魏武帝文」을 지으면서 "성인의 덕정을 베풀고 신령한 바람을 타며 위엄을 떨쳤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남북조시대 때 편찬된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漢晉春秋』 등에서는 조조의 부정적인 면모가 다소 늘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당나라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조는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유의경은 그렇다 치고 습착치는 본래 역사가로서 큰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이다. 당나라 때 역사서를 총망라하여 『사통史通』을 편찬한 유지기(劉知幾)도 습착치의 저서는 “어쩌다 하나 볼만한 글이 있을 뿐”이라며 그가 기재한 역사서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조조평전』을 지은 장쭤야오(張作耀) 선생도 정통성에 치중한 나머지 역사를 곡해하는 일도 있었다고 지적을 했으니 습착치의 말은 크게 영향력이 있다고 볼 수 없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도 조조에 대해선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평가를 내렸으며 그 중에서도 난세를 종식시킨 공은 분명히 인정을 했다. 물론 간사하다는 이미지를 씌우기는 했다. 당나라의 시성인 두보(杜甫)의 절친한 친구였던 조패(曹覇)가 바로 조조의 후손이었다. 조패는 대장군을 지내다가 은퇴하여 조용히 지냈는데 두보는 조패의 공을 기리는 시에서 "영웅 위 무제의 후손"이라고 칭찬을 한 것으로 보아 당시만 하더라도 조조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더 각인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송나라가 들어서고 조조는 한나라를 찬탈한 인물로 서서히 자리잡아갔다. 소식(蘇軾)도 「위무제론魏武帝論」을 지으면서 재능은 인정했지만 인간성은 간사하다는 입장을 표했다. 사마광이 그나마 『자치통감』에서 나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이후 남송 조정은 금나라의 침공으로 받아 강남으로 밀려났고 상대적으로 같은 처지였던 촉나라와 동질감을 느꼈다. 촉 정통론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조조는 간사한 인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또한 왕도주의 이외의 다른 사상을 배척하는 성리학으로 인해 조조는 완전히 간웅이 되어버렸다.
남송 때에는 이미 촉나라가 정통이 되어 조조는 매도당했지만 그러나 홍매(洪邁)는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조조의 용인술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고 인정을 했다. 조조가 간웅으로 낙인이 찍혔지만 조조의 능력은 그를 적대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분명 비범한 것이었다. 그의 글을 잠시 보자.
"조조는 한나라 입장에서는 역귀이지만 사람들을 적절하게 다스리고 활용하는 점에서는 이는 후세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수준이다. 순욱(筍彧), 순유(筍攸), 곽가(郭嘉) 등은 모두 조조의 두뇌와 같은 책사들이다. 이들과 큰 일을 논의했는데 이들의 훌륭한 점은 굳이 말로 칭찬할 필요가 없다. …(중략)… 관중(關中)의 여러 장수들이 자신에게 위험한 존재가 될까 염려하여 사례교위 종요(鍾繇)에게 이를 맡겼는데 마등과 한수는 서로 아들을 인질로 보내 복종했다. 천하의 난리가 그치지 않아 식량이 부족해지자 조조는 조지(棗祗)와 임준(任峻)을 시켜 둔전을 세우니 군대와 나라가 모두 충족되고 넉넉해져 마침내 여러 군웅들을 토벌할 수 있었다. 위기(衛覬)에게 소금을 관리하게 하고 관중일대를 다스리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복종했으며, 하동지역이 평정되지 않자 두기(杜畿)를 하동태수로 임명해 마침내 평정되었다. 병주지역이 처음 평정되자 양습(梁習)을 병주자사로 삼으니 변방이 안정되었고 양주지역이 손권에게 점령당하고 오직 구강군 하나만 남았을 때 유복(劉馥)을 파견하여 조정의 교화를 크게 시행하게 했다. 풍익군에 도적이 일어나 소란스럽자 정혼(鄭渾)을 파견하니 도적들이 사라졌으며, 대군지역에서 흉노가 세력을 믿고 오만하게 굴자 배잠(裴潛)을 보내 유세하게 하니 흉노가 복종했다. 한중지역을 얻었을 때 두습(杜襲)을 보내 그 일대를 감독하게 하고 지키니 백성들이 앞다투어 복종해왔으며, 마초의 군사들이 변란을 일으키려 하자 조엄(趙儼)을 보내 이들을 투항시켰다. 무릇 위에서 말한 10가지 사례들을 따져볼 때 조조가 나라를 위해 만들어낸 이익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장료(張遼)가 합비에서 손권을 물리치고, 곽회(郭淮)가 양평에서 유비를 저지하며, 서황(徐晃)이 번성에서 관우를 격파한 것은 모두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무찌른 경우로서 해당 지역의 근심을 푼 일이다. 건안시기에 조조에게 적수가 없었던 것은 조조가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曹操為漢鬼蜮,君子所不道,然知人善任使,實後世之所難及. 荀彧, 荀攸, 郭嘉皆腹心謀臣,共濟大事,無待贊說. (중략) 恐關中諸將為害,則屬司隸校尉鐘繇以西事,而馬騰, 韓遂遣子入侍. 當天下亂離,諸軍乏食,則以棗祗,任峻建立屯田,而軍國饒嵒,遂芟群雄. 欲復鹽官之利,則使衛覬鎮撫關中,而諸將服. 河東未定,以杜畿為太守,而衛固, 範先束手禽戮. 並州初平,以梁習為刺史,而邊境肅清. 揚州陷於孫權,獨有九江一郡,付之劉馥而恩化大行. 馮翊困於鄜盜,付之鄭渾而民安寇滅. 代郡三單於,恃力驕恣,裴潛單車之郡,而單於懾服. 方得漢中,命杜襲督留事,而百姓自樂,出徙於洛, 鄴者至八萬口. 方得馬超之兵,聞當發徙,驚駭欲變,命趙儼為護軍,而相率還降,致於東方者亦二萬口. 凡此十者,其為利豈不大哉. 張遼走孫權於合肥,郭淮拒蜀軍於陽平,徐晃卻關羽於樊,皆以少制眾,分方面憂.操無敵於建安之時,非幸也)."
원나라, 명나라 때에는 이미 『삼국연의』가 장악하여 조조는 거의 역적 취급을 받았다. 청나라 때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객관적으로 조조를 평가한 사람이 있었다. 왕부지(王夫之)가 바로 그렇다. 만년에 「독통감론 讀通鑑論」을 지었는데 조조의 지략과 재능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왕부지는 「독통감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조가 일찍부터 천하를 독차지하려는 속셈이 있었다고 여기는 건 훗날의 일을 가져다 넣은 것에 불과하다.”
조조가 일찍이 찬탈을 꿈꿨다는 당시의 통념을 깬 발언이다. 하지만 왕부지와 같은 의견은 당시에는 소수에 그치고 말았다.
오랫동안 조조는 왜곡되었지만 현대에 들어 재평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장타이엔(章太炎)이 최초로 조조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궈모뤄(郭沫若)보다 앞선 것이다. 장타이엔은 「위무제송魏武帝頌」에서 조조의 지략, 용인술, 검소함, 중농정책 등을 높게 평가하며 “속임수를 썼어도 정도를 걷고자 했다.”라고 했다.
2천 년 가까이 지속된 조조의 폄하가 반격을 당하는 순간이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서 궈모뤄(郭沫若)이나 루쉰(魯迅)과 같은 지식인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조조의 재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비록 사회주의의 유물론적 사관에 입각한 평가였지만 조조의 긍정적인 평가가 등장했다는 것만으로 조조는 오랜 세월의 간웅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시작할 수 있었다.
조조는 사실 단점도 있었지만 장점이 더 많은 인물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언젠가 한번 한, 중, 일 세 나라의 학자가 동아시아에서 탁월한 정치가를 선정하는데 조조를 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조조가 재평가가 이루어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조조가 이제 간웅의 이미지를 벗고 진정한 지도자로 재평가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조조가 지녔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지금도 난세와 다름없다. 복잡한 정국을 극복하는 길은 바로 조조에게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조조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었다. 조조의 그 업적이나 공은 삼국시대의 인물 중 단연 최고이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조조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나라 말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영웅호걸들이 일시에 일어났다. 그 중 원소는 4개 주를 차지하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며, 그의 강성함은 대적할 자가 없었다. 태조는 책략을 이용하고 계략을 써서 천하를 평달하고 신불해와 상앙의 법술을 받아들이고 한신과 백기의 기발한 책략을 사용했다. 재능이 있으면 관직을 주고 사람마다 가진 재능을 살려 자기의 감정을 자제하고 냉정한 계획에 따랐다. 옛날의 악행은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마침내 국가의 큰일을 장악하고 대사업을 완성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오직 그의 명석한 책략이 가장 우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비범한 인물이며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漢末,天下大亂,雄豪並起,而袁紹虎眎四州,彊盛莫敵. 太祖運籌演謀,鞭撻宇內,擥申、商之法術,該韓、白之奇策,官方授材,各因其器,矯情任算,不念舊惡,終能總御皇機,克成洪業者,惟其明略最優也. 可謂非常之人,超世之傑矣)."
유비와 손권은 모두 조조를 역적이라 비난하고 성토했다. 비록 손권이 용인술만큼은 조조의 재능을 인정했지만 기본적으로 둘다 조조를 매도하기 바빴다. 그러나 조조는 유비에게는 “영웅”이라 해주고 손권에게도 서신을 보낼 때 “대장부답다”, “손권 같은 아들이 있었으면…….”이라며 손권을 높게 평가해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유비, 손권은 조조를 능가할 위인이 되지 못한다. 이미 도량에서 지고 들어갔으니까. 조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영웅의 자질이 있었다.
曹操用人政策的核心就是天下可用的力量,为我所用
东汉末年,天下大乱,群雄各肆互相讨伐,曹操挟天子以令诸侯,军事上四处讨伐不臣,政治上加强中央集权,抑制地方豪强,经济上大办屯田,发展农业生产,不但统一了北方,逐步恢复了地方经济制度,也形成了自己的用人政策。
早先曹操与袁绍还是盟友时,曹操就发豪言,”吾任天下之智力,以道御之,无所不可“,通俗总结起来就是将天下可用的力量,为我所用,事实上他一直就是这样做的,而且做得极其彻底、非常成功,留下了很多可以学习警句和断语。
曹操把网罗人才、驾驭人才,作为争夺天下的最重要的筹码。他不断的选贤任能,麾下飞快聚集了荀彧、荀攸、郭嘉、张辽、张郃、夏侯渊等一批文才武将。
同时一下《求贤令》首次提到“唯才是举”,希望得到人才,共同管理国家,二下《举士令》强调有缺点、有过错的人只要有真才实学,都要挑选出来,三下《举贤勿拘品格令》表明不讲门第,不问旧怨的用人标准。
求贤三令不但注释曹操用人政策的核心思想,而且为曹魏政权用人制度提供了理论依据,更从根本打破了汉朝留下的门阀孝廉举荐制度,为天下寒士提供了晋升的渠道。
曹操用人选拔的特点有三,其一是招贤纳降,不念旧恶。官渡之战时,曹操以少敌多,粮草又不多了,此时袁绍谋士许攸来投,并献策偷袭粮道,曹操临阵敢于信任降将,结果火烧乌巢,大败袁绍;更有张绣贾诩,曾两败曹操,杀死其亲子侄,投靠曹操后,都得以高官善终,贾诩还多次为曹操出谋划策。
其二是在实践中选贤用能。曹操认为,宰相必起于州郡,猛将必起于卒伍,实战是选拔和使用人才的唯一标准。于禁等五子良将个个勇猛且善于将兵,曹操就一一提拔。在讨论天下大事时,曹操觉得郭嘉的见地非常,且对天下形势一针见血,于是提拔为司空军师祭酒,带在身边。
其三就是不拘一格用人才。曹操提出不要过分要求每个人十全十美,允许贤人志士有品行上的缺失,目的就是打破门阀制度,让每个人各展所长。
同时曹操在用人艺术上也有几个特点,其一是依法治人。为充分调动积极性与主动性,曹操的奖惩是严格分开的,出台了《军谯令》《败军令》《论吏士行能令》《封功臣令》等。
其二宽容待人。曹操认为只要为己所用的人,天大的罪都可以宽恕。张绣贾诩虽然杀了曹操亲生儿子和侄子,还有爱将典韦,但是在曹操最需要的时候投靠过来,而且都是猛将谋臣,于是曹操不计前嫌,重用两人。
其三扬人责己。表扬他人功绩,检讨自己的过错是曹操用人艺术中极具特色。官渡之战,战后将功劳归为大家,封赏众人激励大家多多献策;三郡之战,曹操因不用郭嘉之言,没有预料北方的寒冷,造成无功而返,之后对谏言之臣大肆表彰,同时检讨错误。
其四珍惜人才。最有名的就是曹操收刘备而不杀,怜惜人才,而且给兵给粮,并委以重任,希望感化英才;关羽被擒后,也是备受关照,直到其杀颜良立功而走。
其五各展所长。曹操对于人才的特点极善于把握,尽量施展其所长。有名的合肥之战,曹操运用了张辽李典的勇猛无双,乐进的沉稳持重,直接密令张李出战,乐进守城,十万孙权军被一城守兵击退。
无论是选拔,还是用人艺术,曹操都完美地实现了他当初的目的,所以其用人核心就是天下可用的力量,为我所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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