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紅樓夢) 머리글(序言) | 홍루몽 연구
图片来源 | 红楼梦课件
"홍루몽"은 18세기 중엽(청나라 건륭 시기)에 지어진 중국 고전소설이다. 도합 120回로 장회소설인데 1회부터 80회까지는 조설근(曹雪芹)이 쓰고, 후반부 40회는 고악(高鶚)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은 잃을지언정 '홍루몽'은 잃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은 평가는 인기에서뿐만이 아니라 작품성이나 문학사적 의의에 있어서도 '홍루몽'은 단연 획기적인 것으로 4대 기서(奇書)들에 비해 한 시대 늦게 출현한 '홍루몽'의 인기는 전시대의 책들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홍루몽을 다각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홍학(紅學)'이라는 국제적 학문 영역을 이루게 된 것으로도 증명된다. 실로 '홍루몽'은 중국의 고전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백과전서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홍루몽(紅樓夢)의 개요(槪要)
‘홍루몽’은 청대 대귀족(大貴族)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청춘남녀의 애정관계를 통하여 가문의 몰락과 시대의 비극을 묘사한 장편 백화소설(白話小說)이다.
‘홍루몽’에서 ‘홍루(紅樓)’는 귀족 여인들이 살던 곳을 일컫는 말이다. ‘홍루몽’은 가보옥(賈寶玉), 임대옥(林黛玉), 설보채(薛寶釵) 세 사람 사이에 벌어진 연애비극에 대한 묘사를 통해 가(賈)․설(薛)․사(史)․왕(王)씨 4대 봉건귀족가족의 흥망의 역사를 기술함으로써 청대 봉건사회 말기에 처해있던 중국사회의 온갖 모순을 재현해 놓았다.
‘홍루몽’은 이런 허다한 모순들 가운데 봉건제도(封建制度) 수호자와 반역자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중심에 놓았기 때문에 그 비극적 색채가 보다 더 선명해지고 사회적 의의가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이러한 모순과 갈등을 인물형상을 통해 표현하였고, 그 중심인물로 가보옥(賈寶玉), 임대옥(林黛玉), 설보채(薛寶釵), 왕희봉(王熙鳳) 등이 있다.
‘홍루몽’은 가, 사, 왕, 설씨의 4대 가문에 대한 흥망성쇠 과정의 묘사를 통하여 형상적으로 이 시기의 복잡한 계급투쟁(階級鬪爭)을 반영하고 광범위하게 당시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법률, 도덕, 교육, 종교, 혼인, 부녀 등 각 방면의 문제를 다룬 위대한 정치 역사소설(歷史小說)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홍루몽'의 이야기는 한 가문의 몰락사를 엮었다. 5대에 걸친 세도 가문의 몰락 과정이 사실적 시각과 필법으로 생생하게 그렸다. 역시 조설근의 뛰어난 기량(技量)과 문학적 의식에 의해 이야기는 한 가정사의 범위를 뛰어넘어 당시의 사회와 역사적 상황을 그대로 드러냈는바 '홍루몽'은 문학 작품으로서 불후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봉건시대의 한 세도가문의 귀족일가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은 그대로 당시의 지배계층의 생활 모습이었다. 극데 달한 호사(豪奢) 속에서 미움과 사랑, 음모와 저주, 주색과 불륜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생활상은 독자들에게는 흥미진진함을 넘어 한 시대의 멸망의 원인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하게 한다. 노신은 이것을 "'홍루몽'이 나온 뒤로 전통적인 사상과 습작법은 모두 타파되었다"고 단적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이 귀족들과 얽히며 보여주는 갖가지 모습들은 또한 당시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가난과 눈물로 요약되는 당시 서민들의 삶은 곧 사회의 모순과 역사의 부조리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가난했고 인격적으로는 늘 억울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되는 피해의 대상이 되었다.
만리장성과도 바꿀 수 없는 중국 문학의 보배
'홍루몽'은 1740년경에 조설근이 지은 작품으로, 중국 전통 시대의 문화, 풍속, 사회상이 집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를 산 남녀의 내면 풍경까지 섬세하게 담아내어 중국 고전 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장편 장회 소설이다. 원래의 제목은 '석두기(石頭記: 돌 위에 씌어진 이야기)'였으며 초기 필사본은 총 80회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훗날 40회가 덧붙여져 120회가 되면서 이름도 '홍루몽(紅樓夢: 홍루는 ‘붉은 누각’이라는 뜻으로 아녀자들이 거처하는 규방을 말한다. 홍루몽은 ‘규방 속의 꿈’이란 뜻이다)'으로 바뀌었다.
'홍루몽'은 북경의 일부 문인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직후부터 필사본 형태로 유통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통계에 따르면 1754년 필사본이 처음 세상에 나온 이래 100여 종의 간본이 발행되었고 '후홍루몽(後紅樓夢)', '속홍루몽(續紅樓夢)', '홍루복몽(紅樓復夢)', '홍루중몽(紅樓重夢)', '홍루재몽(紅樓再夢)', '귀홍루(鬼紅樓)' 등 다양한 이름의 속작들이 30종을 훌쩍 넘는다.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중국 대륙을 뒤흔들던 여걸 서태후(西太后)도 '홍루몽'의 애독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고 한다. 서태후는 가끔 자신을 '홍루몽' 속의 가모(賈母, 대부인)로 자처하곤 했으며, 그가 거처했던 자금성의 장춘궁(長春宮) 회랑에는 아직도 10여 폭의 거대한 '홍루몽' 벽화가 남아있다.
'홍루몽'은 비단 청대에만 유행한 것이 아니다. 비록 200여년 전의 고전소설이지만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은 원본을 그대로 애독하고 있다. 한 외국인 학자는 중국요리집 젊은 종업원이 카운터 아래에 숨겨 놓고 틈틈이 읽고 있는 책이 현대소설이 아니라 이 <홍루몽>인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중국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암흑기로 기록되고 있는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홍루몽>은 다행히 마오쩌둥의 비호 아래 금서(禁書) 목록에서 제외되는 행운을 누리며 많은 독자층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는데, 시골 산간벽지에 강제로 파견된 지식인들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이 이 작품에 갖는 애정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4대기서('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각별하다.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듯이 중국에는 “'홍루몽'은 만리장성과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며, 이 작품에 관한 연구에 많은 학자들이 매달려 ‘홍학(紅學)’이라는 독립적이고도 전문적인 학문 분야를 형성하고 있다.
문필이 뛰어난 조설근은 이러한 이야기를 아주 생생하게 꾸밈없이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홍루몽'에는 무려 48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귀족은 물론 수많은 하인, 시녀, 그리고 일반 백성들이 포함된다. 조설근은 이 인물들을 모두 살아 움직이는 개성 있는 인물상으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당시의 중국 소설에서 흔히 보여지는 영웅호걸의 활약상이나 기상천외한 사건 대신 평범한 사람들의 잡다한 일상사들을 이야기의 주류로 전개함으로써 조설근은 '롱루몽'을 보다 실감 있는 현실적인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이러한 점에서 '홍루몽'은 실로 훌륭한 사실주의 작품이고, 작가 조설근은 뛰어난 사실주의 작가였다.'홍루몽'이 중국문학사에서 한 획을 긋는 기념비(紀念碑)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이기 때문이다.
조설근이 이처럼 뛰어난 사실주의 작품을 써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생애와 연관을 갖고 있다. 조설근의 집안은 일찍이 황실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귀족가문이었다. 그의 증조부, 조부, 백부 그리고 부친은 모두 황실 사무를 맡아보는 내무부 소속의 강력직조라는 관직에 있었다. 또한 그의 증조모는 한때 강희 황제의 유모였으며 조부는 강희황제의 글동무였다. 이처럼 권문세가의 아들로서 조설근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때 그는 '홍루몽'에서 나타나는 귀족 집안의 모든 생활상과 일상사들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뒤에 조설근 일가는 직조서의 자금을 탕진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고 이때부터 그의 집안은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작가의 삶을 배경으로 '홍루몽'은 씌어졌다. 조설근이 '홍루몽'을 집필할 당시에는 모든 가산을 몰수당한 후 그는 온 식구와 함께 죽으로 배고픔을 달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설근은 지나간 날에 대한 반성적 회고(回顧)로 자신이 보고 들었던 그대로를 작품 속에 담았던 것이다. 조설근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던 귀족일가의 흥망과 성쇠는 그대로 봉건시대의 융성(隆盛), 몰락과 궤(軌)를 같이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홍루몽'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훌륭한 현실문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홍루몽'이 가지는 문학적 의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홍루몽'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볼 때 하나의 성장소설로도 보여진다. 보옥과 대옥, 보채라는 성장기에 있는 세 인물의 사랑과 우정, 그리도 이들의 주위에서 보여지는 여러 인간상과 그들의 삶의 모습이 이야기의 주축(主軸)이 되고 있다.
'홍루몽'에서는 마음 졸이는 연애와 짙은 육적인 사랑, 원한과 질투, 모함과 같은 인간의 미묘한 심리적 변화가 섬세하고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와 함께 무수한 등장 인물들의 생동하는 움직임은 이 소설을 거대한 한편의 인간 드라마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렇듯 '홍루몽'은 한 소년의 성장소설로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펼쳐보이는 인간 드라마로서도 뛰어난 작품이다. 이러한 측면에서의 이해와 감상은 '홍루몽'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작가 조설근은 1715년에 태어나서 1763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홍루몽'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하고 마는데 이후 고악(高鶚 1763-1815년)이 뒤를 이어 대미(大尾)를 봄으로써 오늘과 같은 '홍루몽'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현재 '홍루몽'의 판본은 '석두기'라는 제목으로 조설근이 쓴 80회까지를 주로 손으로 베낀 것들과 고악이 쓴 부분을 합쳐 120회로 된 인쇄본들이 있다. 이중에서 본 역서가 원본으로 삼은 것은 북경인민문학출판사의 1973년판과 1959년판 인쇄본이다. 1회에서 80회까지는 1973년판에 의했으며 나머지 40회는 1959년판에 의했다.
이 번역본은 안의운(安義運: 1940년 중국 길림성에서 태여남. 북경 중앙민족학원 漢語言文學系를 수료, 현재 북경 외문출판사에 근무함. 西遊記 등을 번역하고 아라비안 나이트 등을 合譯함)과 김광렬(金光烈: 1939년 중국 요령성에서 태여남. 북경 중앙민족학원 漢語言文學系를 수료, 현재 외문출판사 朝文組에 근무함. 草野 등을 번역하고 아라비안 나이트 등을 合譯함)이 합역(合譯)하였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여러 번 '홍루몽'이 번역 출판되었으나 거의다 초역(抄譯)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문학성과 학술성이 다 함께 문제가 된다. 이 양자 중에 어느 것이 선행해야 하느냐를 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독자들이 고전을 대할 때 느끼게 되는 생경함과 어색함을 줄이기 위해 어휘와 문장을 손질해야 하고 원본이 뜻을 가장 적절하게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안의운과 김광렬 두 분이 이 '홍루몽'을 번역하면서 이 판본에서 잘못 나타난 부분이나 누락이 틀림없는 부분을 다른 판본과 비교하여 바로잡거나 수정 보안하였다. 이에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시간이 허락되는대로 "홍루몽" 에 대한 저의 분석을 기재하려고 하니 여러분들의 구독과 공감을 부탁드리는바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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