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박 108호한의 서열을 정한 잠규칙潛規則
글: 유전록(劉傳錄)
<수호전>은 주로 천강(天罡), 지살(地殺)의 108개 별이 인간세상에 내려와 인간세상에서 체천행도(替天行道)한다는 이야기이다. 작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충의(忠義)는 양산박의 응집력이 아니라, 진정 그들을 양산박으로 와서 반란에 참가하도록 한 것은 책에서 암시하고 있는 천강지살이론이다. 송강(宋江)은 천강지살이론의 신화전설을 가지고, 108명이 하늘의 별의 주인이라고 신격화시켰고, 마침내 각종 수단으로 108명을 양산에 모이게 만든다. 그렇게 하여 천강지살이론의 정확성을 입증했다.
양산에 오르고나서 모든 사람이 별의주인이라는 것은 난제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것도 공손승(公孫勝)은 어렵지 않게 해결한다. 그의 건의와 조작하에 송강이 노력하고, 오용(吳用)의 협조하에 마침내 천서(天書)가 내려왔다는 방법으로 해결한다. 하늘의 뜻은 어길 수가 없다. 송강은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여러 영웅간에 평형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원칙이 있어야 했다. 송강이 자기 마음대로 정했다는 것이 드러나서는 안된다.
말로는 하늘의 뜻에 따라 처리한 것이지만, 모두가 쉽게 받아들일 만한 신비한 형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첫째는 송강과 오용의 기득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송강은 양산의 우두머리이다. 오용은 양산의 군사(軍師)이다. 이것은 다툴 여지가 없다. 바로 송강과 오용의 묵계와 합작하에 양산은 비로소 별 볼일없는 산적무리에서 점차 강호제일의 조직으로 변모하게 된다.
비교해서 말하자먼, 서열2위의 노준의(盧俊義), 서열4위의 공손승(公孫勝)은 어느 정도 얼굴마담역할이다. 노준의는 송강이 일체를 불구하고 양산으로 모셔온 인물이다. 하북삼절(河北三絶)중의 한 명이다. 이것은 양산으로 하여금 세력을 북으로 확장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노씨집안의 모든 재산도 양산에 헌납했다. 이 점은 그 누구도 비견될 수 없다. 또 핵심중의 하나는 노준의의 무공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양산에서 상대할 자가 없다. 공손승이 양산에 대하여 한 가장 큰 공헌은 바로 영웅의 서열을 정한 법단(法壇)을 주재한 것이다.
관승(關勝)이 서열5위에 올랐는데, 이는 임충(林沖)의 팬들이 불만을 가지는 부분이다. 관승에게는 대단한 조상이 있고, 본인의 무공도 뛰어나며, 의표도 당당하다. 게다가 송강이 가려는 초안(招安)의 길에 오호상장의 첫번째는 관승이 아니면 안된다. 만일 임충이 첫번째라면 아마도 고구(高俅)가 더더욱 초안에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명(秦明)은 송강 심복중 최고의 맹장이다. 그리고 송강의 두번째 명장이다. 임충의 뒤에 놓이는 것이 정상적인 자리이다. 호연작(呼延灼)은 명인의 후손일 뿐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양산이 거둔 최초의 정규군의 전투경험을 가진 장수라는 점이다. 실력도 있고 집안도 좋다. 그래서 서열8위에 두는 것이 적합하다.
둘째는 양산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오호장(기실 4호장이다)의 뒤에는 서열9위부터 서열12위까지 양산의 특수한 가치관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보인다. 화영(花榮), 시진(柴進), 이응(李應), 주동(朱仝)등 4명의 양산박 서열은 양산집단의 이익정수를 보여준다.
화영은 송강의 천강지살이론의 최초추종자이다. 게다가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신전(神箭)이다. 9위에 놓는 것도 억울할 지경이다.
시진은 선조가 황족이다. 양산의 모든 영웅들이 내심으로 경외하는 시세종(柴世宗)의 후손이다. 이것은 그가 선천적으로 혈통의 우세를 지녔다는 것을 말한다. 양산의 경제와 혈통에 큰 도움을 준다. 관건은 그가 양산과 조정의 소통에 가장 적합한 중간역할을 할 사람이라는 것이다. 시진은 송강, 임충, 무송등에게 은혜가 있어 양산의 은인이다. 10위에 놓는 것이 적합하다.
주동은 양산의 양대천왕을 구해준 적이 있다. 그리고 관운장과 같은 용모도 지녔다. 주동이 양산에 가입한 것은 양산의 의기(義氣)를 한단계 끌어올려주는 일면이 있다. 그래서 12위에 놓는 것고 말이 된다.
제11위는 이응에게 돌아갔다. 이건 약간 억지스러워 보인다. 이응은 축가장을 진정으로 타파한 공신이다. 또한 양산에 전량을 공급하는 최초의 기둥중 하나였다. 축가장을 치면서, 송강은 양산에서 위명을 세웠고 인심이 그에게 몰렸다. 그가 양산박에서 서열1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모두 이응의 공로이다.
셋째는 마보수(馬步水)의 서열이다. 마보수 삼군 중에서, 양산에서 가장 중용되지 못한 것은 수군(水軍)이다. 대명자자한 수군의 큰형 이준(李俊)은 몰차란(沒遮攔) 목홍(穆弘)의 뒤를 차지한다. 양산에 오르기 전에, 이준(이립, 동위, 동교), 목홍(목춘), 장횡(장순)은 모두 같이 게양령(揭陽嶺)의 삼패(三覇)였다. 이준의 지위가 더 높았다. 관건은 두 사람이 모두 게양령에서 송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목가형제는 하마터면 송강을 죽일 뻔했다. 그러나 이준은 송강의 목숨을 구해준다.
이 몇 가지를 종합하면, 이준의 위치는 당연히 목홍보다 높아야 맞다. 이것이 아마도 이준이 끝까지 송강을 따라 동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배를 타고 떠나버린 원인일지도 모른다. 다만 목홍은 마군(馬軍)의 우두머리이다. 그리고 집안의 전량은 모조리 양산에 바쳤다. 이것도 아마 점수를 딴 점일 것이다.
이준이 좋은 위치에 놓이지 못했고, 왕씨삼웅(阮氏三雄)과 장씨쌍웅(張氏雙雄)도 마찬가지로 좋은 위치에 놓이지 못했다. 주요 원인은 아마도 양산이 수군을 중시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마도 이 점 때문에 방랍(方臘)을 칠 때 크게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넷째는 인품을 고려한다. 양산은 충의를 가장 중시한다. 배반이나 투도(偸盜)는 배척한다. 백승(白勝)은 지취생신강(智取生辰綱)의 참여자이다. 다만 관부에 체포된 후에 조개(晁蓋)와 오용(吳用)을 팔아먹는다. 서열이 끝에서 세번째인 것은 당연하다. 욱보사(郁保四)는 증두시(曾頭時)의 사람이다. 그 주인을 배신하고 양산박의 간첩이 된다. 게다가 증두시에서 일찌기 조해를 죽였다. 그래서 서열이 끝에서 네 번째이다.
시천(時遷)은 놀라운 공을 많이 세웠고, 본인도 정명하고 능력있다. 절대로 수퍼급의 스파이이다. 양산의 스파이두목이다. 양산의 잠규칙은 투도를 폄하하는 것이다. 그래서 닭을 훔쳐서 세번 축가장을 치는 일을 일으킨 시천은 끝에서 두번째, 마적 단경주(段景住)는 서열이 꼴찌가 된다. 이들 4명에 3명의 여장은 바로 양산 잠규칙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다.
송강(宋江)은 북송 사람으로, 1121년에 현재의 산둥성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중국의 사대기서 중의 하나인 《수호전》의 주인공이다.
생애
14세기에 편찬된 《송사》에 따르면, 송강이 거느리는 반란군은 황하 북쪽의 하삭에서 봉기하여, 1121년에 회남의 여러 지방을 휩쓴 후 관군의 토벌을 받아 경동(북송의 수도 개봉의 동쪽으로, 현재의 산둥 성 서부), 장강 북안으로 나아가 열 개의 군을 공략했다.
송강의 세력을 무서워한 북송 조정은 후몽(侯蒙)의 건의에 따라 송강의 죄를 사하고 장군 직위를 주어서 당시 강남을 석권하고 있던 방랍의 반란군을 토벌시키려고 했지만, 후몽의 죽음으로 실현하지 않았다. 그 후 산동 반도의 해주를 침공할 때, 지주의 장숙야에 패배하고 항복했다.
《송사》에 기록된 후몽의 상주문에는 “송강은 36인으로 제위를 횡행하고, 수만 명 있어도 대항할 수 없을 만큼 신출귀몰하다. 송강의 재능이 뛰어난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되어 있다. 《송사》와는 다른 사료에서는 송강 반란의 진압된 후에 방랍 토벌군의 안에 송강이라고 한 이름의 장군이 있던 것이 명백하지만, 이 인물이 《송사》에 기록된 적장 송강과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수호전의 인물
수호전 작품 중의 송강은 자는 공명(公明), 별칭은 급시우(及時雨)또는 호보의(呼保義) 라고 한다. 별은 천괴성(天魁星)으로, 호보의 송강 또는 산동의 급시우라고 불리는데 통상적으로 호보의 송강으로 불린다. 양산박의 호한 108인 중의 서열 제 1위의 인물이다. 원래는 양산박 서열 2위의 인물이지만, 조개가 108위에 포함이 되지 않는데다가 이야기 중간에 죽어서 서열 1위로 정해진다. 삼국지의 유비와 비슷한 인물로 묘사되며 덕이 많은 인물로 그려진다.
실제기록
수호지는 완전한 허구가 아닌 선화유사(1119-1125)의 송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사서에는 송사宋史. 삼조북맹휘편三朝北盟彙編. 심조강요. 동도사략 등에 간단한 기록이 남아있다.
송사宋史에는, 송나라 휘종의 선화연간에, 송강 등 36명의 적도賊徒가 산동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한때 큰 혼란을 빚었으나, 나중에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 선화 3년 2월, 회남淮南의 적도 송강 등이 화양군을 범하다. 토장討將을 보내 토벌케 하다. 또 경동京東 강북江北을 범하고 초해楚海의 주계州界로 침범한 것을 지주 知州 장숙야張叔夜에게 명하여 투항시키다. (徽宗本記)
- 송강, 경동을 침범하다. 몽蒙이 천자께 상서하여 가로되, "송강 등 36인이 제위齊魏에 횡행하여, 관군 수만이 이를 감히 당하지 못하니 그 재능이 반드시 뛰어난 바 있다고 하겠나이다. 지금 다시 청계靑溪에 도적이 일어나니, 송강에게 허락하여 방랍을 치게 함으로써 스스로 속죄케 함이 좋을 듯 아뢰나이다" 하였다. 천자 가로되, "몽이 밖에 있어도 나를 잊지 않았으니 과연 충신이로군"했따. 곧 명하여 동평부東平府의 지사가 되게 했으나 취임하기 전에 죽다. (侯蒙列專)
- 송강, 하삭河朔에서 일어나 계속 열 고을十郡을 침략하다. 관군 감히 도둑의 예봉銳鋒을 막지 못하다. 이 때 숙야 첩자를 보내어 도둑들의 방향을 탐지케 하니, 도둑들은 곧 해변으로 나가 선박 10여척을 뺏아 노획물을 싣고 달아나려 하다. 여기서 결사대 천명을 모아 이를 공략케 하여 부장副將을 사로잡으매 송강이 투항하다.
원나라 초기의 주밀周密이란 사람이 편찬한 [계신잡지癸辛雜識]에 송나라 유민遺民 공성여가 기록한 [송강삼십육인찬(宋江三十六人贊)]이 실려 있는데 이를 좇아 보면 남송 때에 이미 송강의 이야기는 민중사이에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張叔夜列專)
송강들의 이 반란은 우리나라의 동학란 비슷한 농민본기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이야기 자체는 오락적인 야담 비슷하다. 그러나 송강들의 반란사건이 있자 이내 이것이 영웅설화로 발전햐여 민중들에게 파고들어가 공감을 일으켰는데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패한 권력, 관료정치에 대한 민중들의 증오와 원한이 송강을 일종의 민중영웅으로 만들어 갔다고 보겠다.
방랍의 난
방랍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배경을 대충 살펴보면, 왕안석의 신법이 실패로 돌아가고 송나라의 사회·경제적 위기가 심화되어 가고 있을 때 제 8대 휘종(徽宗이 즉위하게 되었다. 휘종은 서화에는 뛰어난 천재적 소질을 보였으나 정치에는 열등생이었다.
게다가 휘종의 총신인 채경(蔡京)이과 환관의 우두머리 동관(童貫)은 다 함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더욱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갖가지 수석(壽石)과 기석(奇石)에 열을 올려 멀리 강남 지방까지 관리를 파견하여 기화 요초와 괴석들을 수집하고 궁전이나 화원을 장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많은 관리들은 눈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궁중 어용품」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누런 빛깔의 종이를 붙여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었다.관리들은 기석을 운반할 때 담장이 방해가 되면 집까지 허물어 버리는 등 그들의 약탈과 횡포는 극에 달했다.
목주 청계현 일대에도 기석의 수집 등으로 관리들의 약탈이 극심했던 지방이었다. 이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농가의 머슴 출신인 방랍이라는 인물을 수령으로 추대하여 반란의 깃발을 들었다. 그들은 1120년 10월의 어느날 밤 칠원(漆園)에 집결하여 반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방랍은 백성들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우리들 백성들은 1년 내내 피땀을 흘려 겨우 약간의 곡식과 피륙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뿐인데 황제의 관리들은 그것을 제멋대로 빼앗아 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있으면 우리들에게 까닭없이 매질을 하고 백성 죽이기를 밥먹듯이 하면서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는 형편이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방랍의 이같은 호소에 백성들이 환호하자 방랍은 말을 이었다.
「그뿐 아니라 또 있소이다. 놈들은 제 벳대지를 채울 뿐 아니라 그 나머지는 우리들의 적인 요나라와 서하에 세공으로 바치고 있소. 우리들의 피와 땀으로 적을 기르고 있는 것이오. 그리하여 그 적이 공격해 오면 우리들을 방패막이로 써먹고 있소. 그러다가 싸움에 패하면 우리들에게 책임을 돌려 우리들을 꾸짖고 있소. 이런 일은 용서할 수 있단 말씀이오!」
흥분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방랍은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우리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무기를 가지고 일어나면 10일이 안되어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들 것이오. 모두가 힘을 합쳐 강남의 각 군을 공략함락 시킵시다. 10년만 고생하면 분명 천하는 우리들의 수중으로 들어올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놈들에게 죽음을 당할 뿐이오. 어떻소 잘 들 생각해 보시오」
방랍의 이야기가 끝나자 청중들 가운데서 일제히 환호와 절규가 일어났다.
「옳소! 자아 무엇이든 명령만 내려주시오!」
방랍이 반란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일어나자 과연 10일이 채 못되어 10여만 명의 무리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반란의 무리들은 대오를 정비한 후 북쪽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이들은 동남지방의 요충지 항주를 공략·함락시켰다. 이러한 사태에 전후하여 절강·안휘·강서 등의 여러 주현에서도 방랍에 호응하여 반란에 가담함으로써 그들의 병력은 1백만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되자 방랍은 자신의 정권을 수립하고 스스로 「성공(聖公)」이라 일컫고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정하였다.
방랍의 반란 보고에 접한 송나라 조정에서는 즉시 요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편성한 동관 휘하의 15만 대군을 출동시켜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악명 높은 기석의 수집을 중지시키는 등 백성들의 회유책을 강구하였다. 반란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전투경험이 없을 뿐아니라 조직력도 없었기 때문에 패전을 거듭한 끝에 다음해 4월에는 반란군의 수령 방랍이 체포되어 8월에는 개봉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방랍 반란군의 공격 목표는 주로 부호나 악덕 관리에게 집중되어 한때 현재의 절강성 대부분 지역에 미치는 6주 52현을 공략·함락시킴으로써 중국 동남지방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동관 등은 방납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무려 3백만 명에 달하는 반란군의 백성들을 살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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