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봉건제왕 주원장은 왜 공신들을 무참히 살육 제거했는가

一字師 2023.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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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왕 주원장은 왜 공신들을 무참히 살육 제거했는가

 

图片来源 明太祖朱元璋画像

 

봉건제왕이 공신을 살육하는 일은 흔히 보는 일인데, 그 중에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유방이 한신韓信, 팽월彭越, 영포英布 등을 죽인 것은 물론 그의 질투 때문이지만, 당시는 시국이 안정되지 않아서 이성왕異姓王(다른 성씨의 왕)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런 이성왕의 대다수는 그가 받아들여서 재편성한 사람들이어서, 그는 자기의 진정한 심복에 대해, 예를 들면 소하蕭何, 장량張良, 주발周勃, 번쾌樊噲 및 진평陳平 등은 그래도 잘 대해 주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는 거의 피투성이가 되어 분전奮戰하며 자기를 도와 강산을 얻게 했던 공신 전부를 죽였던 것이다.

 

그래도 유방과 주원장의 비슷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똑같이 사회 밑바닥에서 한 걸음씩 권력의 최고봉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두 사람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힘써 진력해줄 소형제小兄弟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그런데 이렇게 함께 싸움에 나가 교전한 동료들이 중신重臣이 된 다음에는 매사에 통제를 해야만 했는데, 이것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강력한 황제 중의 한 사람인 주원장은 그 자신은 수하를 통제할 능력이 있었지만, 그의 자손이 그럴 수 있을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황권을 지고무상至高無上하게 공고히 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사가史家들은 통상 주원장이 과잉살육한 것은 바로 그가 계승자를 위해 장애를 제거해서 명나라의 강산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서에는 태자 주표朱標는 그의 과잉살육에 대해 반대하여 수차 그에게 간언했다고 기재했다.

 

한 번은, 주원장이 사람을 시켜 길고 뾰족한 가시나무 한 가지를 가져와 주표에게 잡아보게 했는데, 주표는 두려워서 손을 내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자기가 문무공신을 과잉살육한 것에 대해 설명했다.

 

내가 살인한 것은 바로 가시나무에 있는 뾰족한 가시를 제거한 것과 같다. 그렇게 해야만, 네가 장래에 강산에 편히 앉아 있을 수 있게 된다.”

 

주원장과 공신의 관계에는 점차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홍무洪武 3(1370), 주원장은 이선장李善長, 서달徐達, 상무常茂, 이문충李文忠, 풍승馮勝, 등유鄧愈 6 사람을 공작公爵, 그밖에 28 명을 후작侯爵에 봉하고, 또 대량의 토지를 하사하는 동시에 면사특권免死特權을 주었다. 만약 본인이나 자손이 죄를 범하면, 여러 차례 사형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주원장은 또 황실과 공신이 인척관계를 맺게 했는데, 예를 들면 곽영지郭英之의 여동생을 자신의 영비寧妃로 삼고, 풍승, 람옥藍玉, 서달의 딸을 모두 왕비로 취했다. 이선장, 부우덕傅友德, 호해胡海, 장룡張龍 등의 공신의 자제에게 공주를 시집보내서, 사돈을 맺었다.

 

이것은 당시 주원장이 이런 방식으로 공신의 충심을 확보하여 자기의 황위를 공고히 하려 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사정事情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홍무 5(1372), 주원장은 개국공신 다의공多倚功이 법을 어기고 고향에서 폭력을 행사한 일이 일어났다. 그곳 지방관地方官도 어찌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을 고려하여, 홍무청화집호철방문洪武靑花執壺鐵榜文을 반포하여, 엄격하게 문무공신이 법을 어겨 기강을 어지럽히는 행위를 질책했다.

 

이것은 주원장이 오만하고 방자한 공신에게 일종의 경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홍무 8(1375), 주원장은 자세통훈資世通訓을 제작하고, 홍무 13(1380)에는 신계록臣戒錄을 만들어서 대신들이 만일 천자에게 불충하거나 예제禮制의 도를 넘으면, 엄히 징벌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이것 역시 그런 공작과 후작에 봉해진 개국의 공로에 기대어 위법을 저질러 기강을 어지럽히는 것이 이미 대단히 심각한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른 방면으로는 난세亂世를 다스리는 데는 엄격한 제도나 법률을 사용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주원장으로서는 절대로 그들이 지나치게 방자한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원장은 개국하여 황제가 된 뒤에, 예전에 모사謀士였던 이선장을 좌승상에 기용하고, 맹장猛將 서달을 우승상에 임명했는데, 서달은 군대를 데리고 외지에 나가 전쟁을 수행해서, 실권은 이선장이 쥐고 있었다.

 

이선장은 지모智謀가 많아 주원장이 오왕吳王을 칭하던 때부터 우상국右相國을 담임했는데, 홍무 원년에 순조롭게 좌승상을 맡고, 한국공韓國公에 봉해져 조정에서 첫째가는 자리에 있었다.

 

나중에 그의 아들이 황제의 부마가 되자, 이선장의 권세는 더욱 혁혁해져서, 조정안에서 실권을 쥔 회서집단淮西集團의 수령이 되었다. 주원장은 회서집단의 권력이 지나치게 팽창하여 그의 황권을 위협하게 되자,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일부러 이선장을 대체하여 유기劉基를 기용하려 했는데, 뜻밖에 유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주원장은 유기를 대단히 중시하여, 곧 그에게 알맞은 사람을 인선하라고 했다. 주원장이 제기한 양헌楊憲, 왕광양汪廣洋, 호유용胡惟庸 등 몇 인물 중에서, 유기는 모두 이상적인 인물이 아니라며, 특히 호유용이 가장 형편없다고 했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래도 이선장이 제의한 의견을 받아들여 호유용을 재상에 임명했다.

 

호유용은 바로 호당안胡黨案의 주요 인물이다. 그는 아첨과 권모술수에 정통한 소인小人으로, 주원장에게 총애와 깊이 신임을 얻어 혼자 재상을 맡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대권을 틀어쥐게 되자, 호유용은 독단하며 전횡을 시작하여, 재상의 권력과 황권이 충돌이 나타나게 되었다.

 

호유용 앞에서는 이선장도 조심하며 신중했는데, 서달은 자주 외지로 전쟁을 나가고, 왕광양은 음주와 시를 읊는 것만 알아서, 재상의 권력과 황권의 갈등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재상 호유용이 7 년이나 호유용이 대권을 독점하자, 대권이 남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생각한 주원장에게는 제거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홍무 13(1380) 정월에, 어사중승御史中丞 서절徐節과 상숭商嵩은 호유용이 남쪽으로는 왜구倭寇와 북쪽으로는 옛 원나라와 접촉하여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고 고발했다.

 

주원장은 우림군羽林軍을 시켜 호유용을 체포하고, 심문을 거쳐 처형했다. 홍무 23(1390), 또 이선장이 호유용의 반란에 결탁했다는 고발을 하자, 주원장은 이선장이 이미 77 살의 고령이어서 자결을 명하고, 그의 전 집안을 주살했다. 이때에 이 사건으로 10년 동안에 죄를 받아 연루되어 주살된 사람이 이미 3만여 명에 달했는데, 이선장, 주량조朱亮祖 등 두 명의 국공國公20 명의 열후列侯가 포함되었다.

 

비록 호유용의 죽음은 그 자신이 자초했다고는 하나, 호유용과 연루되어 피살된 많은 공신은 완전히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호유용은 실제로 주원장이 공신을 제거하는 빌미가 되게 했는데, 그는 마음에 원한을 품고 제멋대로 날뛰는 대신이라고 생각되면, “호당胡黨이라는 죄명을 가하여 가산을 몰수하고 처형했던 것이다.

 

이선장이 죄로 다스려진 뒤에, 해진解縉논한국공원사상論寒國公寃事狀을 써서 그 억울함을 상소로 올렸는데, 그중에 이렇게 아뢰었다.

 

이선장은 폐하께서 천하를 취할 때 제일가는 공을 세운 신하인데, 설령 그가 호유용의 일을 도와서 더욱 많은 것을 얻으려고 했다 해도, 이미 나이가 연만하여 전혀 손을 댈 힘도 없었을 것인데, 어떻게 모반하여 난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주원장은 그 상소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유용 사건으로 많은 문신文臣이 죽고, 홍무 26(1393)에 일어난 남옥藍玉 사건은 주로 무장武將을 다룬 사건이다. 남옥은 개평왕開平王 상우춘常遇春의 손아래 처남으로 용맹하고 과감하여 전공이 혁혁해 상승장군常勝장군이라고도 불렀다.

 

홍무 20년에 대장군으로 승진했다가, 2년 뒤에 양국공凉國公에 봉해졌다. 남옥은 개국공신 중에서 신진新進의 우수 인재에 속하는데, 당시의 노장老將은 거의 이미 다 죽고 없어서, 전쟁을 잘하고 강하고 용맹하며 사납고 고집스러운 남옥은 자연히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남옥은 거칠고 상스러운 사람으로 득의得意하게 되면 너무 흥분하여 모든 것을 잊고서 교만하게 날뛰어서, 주원장으로 하여금 장수의 권력과 황권의 충돌을 겪게 했다. 홍무 26년에, 금의위錦衣衛를 지휘하는 장헌蔣獻이 남옥을 무고誣告했는데, 경천후景川侯 조진曹震 등의 공후公侯와 함께 주원장이 적전籍田의식을 거행하러 출궁한 틈을 타서 모반하여 병변兵變을 일으켰다고 했다.

 

그리하여 남옥을 즉시 감옥에 가두고, 결국 이 사건에 연좌된 집안 식구가 15,000명이나 되었다. 명분이 정당하고 조리에 맞게 하기 위해서, 주원장은 특별히 친필 조서 역신록逆臣錄을 내렸는데, 그중에는 공작 1 , 13 명의 후작과 2 명의 백작이 포함되었다.

 

그밖에, 개국 제일공신 서달은 줄곧 호유용을 반대했기 때문에, “호당胡黨에 연루시킬 수가 없었다. 그는 죽을 때 남옥당藍玉黨안건은 아직 폭발하지 않아서, 당연히 남당藍黨과는 무관했지만, 그도 피할 수는 없었다.

 

홍무 18년에 그는 극도로 위험한 등창에 걸렸는데, 중의中醫의 설명에 따르면, 찐 거위를 먹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주원장이 하필이면 거위를 쪄서 그레게 먹으라고 보냈다. 황제의 뱃속까지 훤히 잘 아는 서달은 자기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을 황제가 희망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물을 흘리면서 찐 거위를 먹고,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다.

 

주원장은 자손을 위해 장애를 제거하는 동시에, 화근도 묻어버렸다. 누군가 남옥의 안건에는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옥은 태자비의 외숙이어서 왕세자 지위에 있는 태자 주표朱標를 적극적으로 보호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황위를 얻고자 희망하는 연왕과 서로 미워하는 사이였다. 연왕은 왕세자의 지위를 훔치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며 태조 면전에서 충동질하여 주원장에게 의심을 생기게 하여 남옥당안건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나중에 주원장의 손자 건문제建文帝가 단호하게 번왕藩王들을 제거할 때, 연왕 주체는 즉시 정난靖難의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탈취했다. 만약 당시에 남옥이 생존해 있었다면, 주체는 감히 군대를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고, 역사는 아마도 다른 모양이 되었을 것이다.

 

영락대전永樂大典

영락永樂 원년(1403) 7월에, 명성조明成祖 주체朱棣는 제위에 올라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에 해진解縉 등을 명하고 대형 유서類書(같은 종류의 책을 모아서 일정한 방식에 따라 분류하여 검색에 편리하도록 편집해 놓은 책. 예를 들면, 태평어람太平御覽, 예문유취藝文類聚등이 있음)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겼다.

 

해진 등은 명령을 받들어 각 책의 내용을 모아 종류에 따라 안배하여 기재하고, 운율韻律을 통일하여 이듬해 11월에 편찬 업무를 완성하자, 주체는 문헌대성文獻大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얼마 뒤에, 주체는 누락된 곳이 많다고 생각하여, 또 요광효姚廣孝와 해진 등에게 함께 다시 새로 편집하라고 했다. 또 특별히 왕경王景, 왕달王達 5 사람을 총재總裁로 삼고, 추도鄒韜 20 명을 부총재副總裁, 진제陳濟 등은 군총재郡總裁에 임명하여, 중외中外 관원官員 및 온 나라에서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문학가를 적절히 섞고, 국자감國子監의 선서善書와 군에 있는 생원生員을 선발하여, 광록사光祿寺에서 9,169 명이 함께 기숙하며 베껴 쓰게 하고, 문연각文淵閣을 개관했다.

 

같은 해에 편찬을 완성하고, 또 관원을 민간에 파견하여 유서遺書를 찾아내서 수록시켰다. 5년의 시간을 들여 편찬을 완성하여, 영락대전永樂大典으로 책이름을 고쳤다.

 

영락대전에는 고대의 중요한 전적이 위로는 선진先秦에서 아래로는 명나라 초기까지 8,000 종에 달하는데, 내용은 경, , , , , , 희극戱劇, 평화平話, 공기工技, 농예農藝, 의복醫卜, 문학文學 등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책 전체는 모두 22,937 1,095 으로 장정하고, 글자의 수는 총 3.9억 자가 수록되어 있다. 수집하여 기록한 서적은 글자 하나도 바꾸지 않고 상세하게 원저原著에 따라 부와 편을 정돈하고, 을 정리하고 분별하여 편입編入하여, 완벽하게 문헌 가치가 있는 자료로 보존했다. 그것은 중국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유서類書,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공인하는 첫 번째의 대형백과전서이다.

 

주체朱棣가 영토 관리에 태감을 파견하다

주체朱棣의 연왕부燕王府는 원나라의 수도였던 북경北京에 있는데, 당시 각국을 왕래하던 사신과 상인들이 성 밖에 이국적인 풍치로 지은 건축이 적지 않아, 왕조의 고사 또한 주체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다년간 북방의 몽고인과의 교전은 그에게 적지 않은 서방에 대한 지식을 가져다주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남경南京에 거주하고 있던 부친 주원장朱元璋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홍무황제洪武皇帝 주원장은 천하를 얻은 뒤에 주로 이미 있는 영토의 안녕과 부강을 유지하는데 주력했다면, 주체로 말할 것 같으면, 원 왕조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 가지고 있던 방대한 영토에 마음이 동요되었다.

 

그리하여 주체는 중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다섯 차례나 대막大漠(대사막)으로 친정親征을 나간 황제가 되었다. 비록 주체는 성길사한成吉思汗처럼 승리를 취득하지는 못했지만, 변방을 안정시키는데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

 

주체가 이처럼 원정에 들어가는 인력과 물자의 경비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도 그가 강토에 대한 의식이 농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토지에 대한 꿈과 해양에 대한 꿈을 일생동안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다섯 번째로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서서 몽고蒙古의 대막大漠 군영에서 죽을 때까지 내내 계속되었다.

 

주체는 또 여진인女眞人 출신의 태감太監 역실합亦失哈에게 1,000 명의 병사와 배 25 척을 이끌고 여진인이 있는 곳을 관리하라고 파견하고, 그곳에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여 통할권通轄權을 행사했다.

 

서부에 있는 장지藏地(서장西藏, 즉 티베트)에 관한 문제도, 주체는 마찬가지로 태감 후현侯顯을 파견하고, 활불活佛(라마교喇嘛敎의 수장首長으로 전생활불轉生活佛의 약칭)을 복종시켜 간접적으로 서장西藏을 통치하여 오랫동안 평화를 실현했다.

 

주체는 강역疆域 즉 국가의 영토에 관한 문제도 빈번하게 태감에게 맡겼는데, 첫째로 태감이 정난靖難 전투에서 그에게 막대한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내궁內宮 관원에 속해 있어서, 외신外臣과 결탁하여 반역을 도모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체는 대양大洋의 꿈을 실현하려고 생각 때에도 여전히 태감 정화鄭和를 파견했던 것이다.

 

주체가 황제를 칭한 뒤에, 주변에 있는 국가들은 그가 찬위한 사람인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여전히 조공을 바쳤는데, 다만 수량은 태조太祖 연간에 비해 약간 적었다.

 

동쪽에 있는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은 때에 맞춰 조공을 했는데, 하나는 그들이 명 왕조의 무력을 두려워한 것이고, 둘은 조공하면서 대량의 선물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특히 일본은 중국에서 획득한 대량의 전폐錢幣(화폐인데, 주로 동전 등과 같은 금속화폐를 가리킴)를 심지어 본국本國의 통화通貨로 충당했다.

 

동남아 각국에 대해서도, 주체는 등극한 뒤에 여전히 주원장의 선덕화이유원인宣德化以柔遠人”(덕으로 교화하여 먼 곳 사람을 부드럽게 대한다)의 정책을 실행했다.

 

정난靖難중에 종적이 묘연해진 건문제建文帝

주체朱棣는 주원장朱元璋의 아들 중에서 가장 용감하게 전투를 잘하는 사람인데, 바로 이 때문에 주원장에게 깊은 신임을 받아 북방을 수호하는 중임을 위임받았다.

 

홍무洪武 25(1393)에 태자 주표朱標가 죽자, 주체는 황위를 계승할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아들들이 황위를 계승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주표의 둘째 아들 주윤문朱允炆을 황태손皇太孫으로 세웠는데, 그렇게 해서 아들들이 싸움을 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원장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고 말았다. 제위를 계승한 건문제建文帝 주윤문은 주왕周王, 상왕湘王, 제왕齊王, 대왕代王, 민왕岷王 등의 부친 대의 친왕親王을 차례로 죽게 하거나 축출했다. 자기가 처한 처지를 알게 된 주체는 심지어 일부러 미친 척 멍청한 척 가장하여 건문제가 트집을 잡아 도발하는 것을 피했다.

 

건문제가 조서를 내려 주체가 있는 연왕부燕王府의 시종侍從을 체포할 때, 주체는 군사를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내세운 명분은 건문제에게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정난靖難”---이라는 명목이었는데, 건문제 신변에 있는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 등의 간신을 제거여 안정시키겠다는 것이다.

 

조카 주윤문과 숙부 주체의 숙질叔侄 간의 4년 동안의 싸움은, 주로 화북華北 평원과 황회黃淮 유역이 전쟁터였는데, 마지막에 군사軍事 경험이 풍부하고 군대 전투력이 강한 주체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건문제 주윤문은 황궁에서 불이 난 틈을 타서 종적蹤迹이 묘연해져 찾지 못하고, 단지 불속에서 황후의 시체만 꺼냈다. 건문제는 명대明代에서는 줄곧 인정을 받지 못했다가, 청대의 건륭乾隆 원년에야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로 추서되었다.

 

이 마지막을 알 수 없게 된 숨어버린 황제 건문제는 내내 주체에게 거치적거리는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정화鄭和가 서양西洋 항해에 나서게 된 원인에서, 이 가련한 황제를 찾으러 나간 것이라는 주장이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승리를 취득한 주체는 특별히 간신 명단 50여 명을 공표했는데, 가장 이름난 사람은 처음에 연왕燕王 주체를 폐출하라고 건의한 제태, 황자징과 방효유方孝孺인데, 3 사람은 바로 처형되었다.

 

전조前朝의 구신舊臣들이 잇달아 신황제에게 귀순하자, 주체는 등극하여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정하고, 명 왕조의 저명한 영락성세永樂盛世를 열었다.

 

영락성세永樂盛世에 해양海洋을 꿈꾸다

나라(1206-1368)에서 명나라(1368-1644)로 왕조의 연대가 바뀐 것에 대해 서방인西方人은 말하기를, 동방東方의 조정은 정치적으로 얼굴이 바뀐 것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그들의 생사존망에 관계된 것인데, 다년간 차별대우를 받았던 한족漢族이 정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서방인을 몽고인蒙古人과 한 계층의 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했다.

 

주원장朱元璋이 건립한 명 왕조에 의해 서방인과 몽고인이 중국 영토에서 퇴출됨에 따라, 동서방의 문화교류와 무역 왕래는 자고이래로 가장 심한 정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정화鄭和가 출생하기 3 년 전에, 주원장은 남경南京에 도성을 세우고 국호를 명으로 정하고 연호를 홍무洪武로 사용했다.

 

농민 출신의 황제 주원장의 뇌리에는 농업이 근본이라는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등극한 뒤에 하루 빨리 농업 생산을 회복시키려고 더욱 고심했다.

 

주원장은 해양 무역의 왕래는 대부분 민간에서 사용하지 않는 사치품이어서 소작민의 경제에는 크게 좋은 점이 없고, 교환해서 가져오는 그러한 물품은 백성을 부양하고 강한 군대를 양성하는데 사용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다가 소통疏通 방면은 오랜 전란으로 대운하의 운송 계통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대 통일을 강화하려는 집권통치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다른 방면으로, 주원장이 비록 중원을 회복하여 몽고인을 만리장성 밖으로 축출하기는 했으나, 그 잔여 세력은 여전히 꽤나 강대했으므로, 신왕조를 건립한 주원장은 어쩔 수 없이 서북西北 가장자리 지역이 중원의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첫째가는 큰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동시에 동남 연해 지역의 섬으로 방국진方國珍과 장사성張士誠의 잔여 세력이 도주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육지의 안전에 위험이 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밖에, 왜 구倭寇도 동남 연해를 침범하기 시작하여 상당한 위협이 되어, 육지와 바다 양쪽의 위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원장은 왕조 건립 초기에 수륙 양면에서 동시에 위협을 면대하게 되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수세守勢 전략을 채택했다. 서북이나 동남에서 발생할 수 있는 외래의 침공에 대항할 수 있도록 방어 부서를 일률적으로 배치했다.

 

서북 방면에는 정예병을 파견하여 변방을 수비하고, 동남 방면으로는 연해에 위소衛所를 설치하고, 해방부대海防部隊를 세우는 외에, 백성들이 바다에 나가 외지인과 접촉하는 것을 엄금했는데, 이것은 즉 소위 나무 한 조각도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해금정책海禁政策이었다.

 

명나라 초의 해금海禁은 주로 연해에 사는 민중이 개인적으로 바다에 나가 외국인과 통상하는 것을 금지하고, 동시에 해적과 왜구가 결탁하여 연해 지역을 침략하는 것을 제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중국 대다수의 개국 황제와 마찬가지로, 주원장 역시 정권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필요했기 때문에 사용한 방식도 대동소이했는데, 공신功臣의 힘을 약화시켜서 군정軍政의 대권大權을 고도로 자기 수중에 집중시켰다.

 

주원장은 개국하여 제위에 있었던 30년 동안에, 각종 핑계로 개국공신의 힘을 거의 숙청했다. 당시 군대로 운남雲南을 공격한 전투에서, 남경으로 돌아올 때 정화를 데리고 온 대장 부우덕傅友德과 함옥藍玉 등을 포함하여 처형을 면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방면으로는, “호유용胡惟庸 사건을 통해 승상제도를 없애고, 육부六部의 정무는 모두 황제 한 사람에게 직접 묻고 직접 보고하게 했다. 주원장의 통치 방침은 그 뒤의 명 왕조의 모든 제왕에게 영향을 끼쳐서, 중앙집권을 요구하는 역대 황제에게 가장 중요하고 요긴한 일이 되었다.

 

비록 주원장은 극단의 수단을 통해 대권을 확실하게 자기 손 안에 장악했지만, 그의 행위는 또 객관적으로 수십 년 뒤에 정화가 서양西洋하는데 어느 정도 중요한 준비가 되었는데, 주로 3 가지 방면으로 나눈다.

 

첫째는, 주원장은 칭제稱帝하면서, 해외에 있는 각 나라에 계속해서 조공을 바치라고 통고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조공이 명 왕조에 대해 실질적으로는 별로 경제적 이익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매번 조공을 바치는 시기의 간격과, 인원人員 수와 선박 크기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다. 이러한 것은 정화가 동남아 각국에 서양西洋을 나갈 때 상당히 많은 자료를 갖게 해주었다.

 

둘째는, 홍무 연간 30 년 동안에 가장 중요한 건설은 아마도 농업 건설일 것인데, 지속적으로 농민이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을 격려하여, 건국 20 년이 되었을 때는 전국의 경작지 면적은 이미 개국 때보다 5 배가 넘게 되었다.

 

이것은 정화가 서양을 나가기로 예정된 시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축적된 재원이 이미 풍부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조정에서도 매번 출항에 소요되는 대량의 물자를 지불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셋째는, 주원장은 나라를 세울 때에는 여러 대장에게 의지하여 천하를 얻었지만, 통치할 때는 중요한 권력을 왕자들에게 각각 봉해주었는데, 넷째 왕자 주체朱棣는 원왕조의 수도였던 북경北京 지역을 받고 나서, 더욱 군대를 강화시켰다.

 

이것이 아마도 바로 이 넷째 왕자 주체가 결국 천하를 탈취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주원장朱元璋이 그에게 상으로 하사한 어린 태감 정화가 그의 심복이 되어, 재위를 탈취한 그가 세계 최대의 함대를 사절로 내보내서 서양西洋에 성공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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