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찬 장편신화소설 오승은吳承恩 作 서유기西遊記
1960년대 후반, 대학 선배이시고 중국어를 가르쳐주신 N교수님이 한 번은 이런 제안을 하신 적이 있었다. “우리 둘이서 중국 ‘사대기서(四大奇書)’를 한 번 완역해보면 어떨까? 지금 시중에 나도는 책들은 모두 일본어판을 중역(重譯)한 것이라, 우리 손으로 제대로 번역한 것이 없으니 말이야……”
40여년이 지난 요즘 서점에 나가보면 훌륭한 번역가의 손으로 출판된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이 여러 종류 나와 있어 반갑다. 그런데 이상한 노릇은 유독 『서유기』 만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조사해 보았더니, 그동안 시중에 나왔다가 실패하여 절판된 것이 네댓종 보였으나 그것마저 모두 단권 아니면 2~6권 짜리 불완전한 축약본이 전부다. 제대로 번역된 것은 1965년 J출판사에서 나온 김광주씨 역본이 하나 있었을 뿐인데, 그것 또한 출판사의 도산과 함께 절판되어 시중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 출판계가 『서유기』 완역 출판에 인색한 까닭은, 물론 그 방대한 분량도 문제려니와 복잡다단하게 전개되는 내용 중 어린이들에게 흥미있는 대목 만을 손쉽게 간추려 읽히기에 급급한 탓도 있다. 그래서 우리 출판계에는 이제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시리즈만 있을 뿐, 완벽한 내용의 『서유기』를 구경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다소 자조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유기』는 일반인들이 인식하듯 그런 동화책이 아니다. 중국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사대기서’로 손꼽는 고전 명작소설 가운데 하나다. 이들 네 책 중에서 『금병매』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는 여러 형태의 전통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소설로서, 수백년에 걸쳐 직업적 이야기꾼과 문학인, 설화와 연극 과정이 반복적으로 가공되고 나서야 내용을 확정짓고 책으로 집대성하여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나 『수호전』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거나 배경으로 삼고 있는 데 비해 『서유기』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이 소설에서 당나라 승려 현장(玄裝)이 불교 경전을 가지러 인도로 여행했다는 사실(史實)은 단시 하나의 기인점(起因點)이 될 뿐, 역사소설의 장르에서 완전히 벗어나 ‘신괴(神怪)’ 또는 ‘신마(神魔)’소설이라는 독창적이고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서유기》(西遊記)는 중국 명나라 시기의 장편소설이다. 전 100회로, 오승은(吳承恩, 1500-1582)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오승은은 회안(淮安) 사람으로서 그의 시문집도 남아 있으며, 서유기 작가라는 증거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천축(天竺)으로 가는 길을 답파하여 중국에 경전을 구하여 온다는 이야기의 골자는 당의 고승인 현장(600-664)의 역사적 장거 실록으로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혜립(慧立)의 〈대자은사 삼장법사전〉 (大慈恩寺三藏法師傳) 등에 따른 것으로, 소설의 대부분(제13-100회)은 요마(妖魔)에서 발을 씻은 손오공(孫悟空), 저오능(猪悟能), 사오정(沙悟淨)의 세 제자가 연달아 나타나고 기상천외의 요마들과 갖가지 싸움을 벌이는 '81난(難)'의 이야기이다. 토속의 환담(幻談)에 문인의 각색이 첨가되어 공상 세계가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태 인정을 파헤치고 정치의 비판에까지 이르는 성숙된 인간학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의 토대가 된 것은, 당나라 승려 현장이 629년 당시 서역 천축(天竺)으로 일컫던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지역 50여 나라를 17년간 편력하며 천신만고 끝에 경전 657부를 구해 가지고 돌아온 여행기와 그의 제자들이 쓴 전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두가지 사실 기록에는 그가 구도행(求道行)의 여정에서 보고 들었던 서역 제국의 지리 풍토와 아울러 기괴한 전설, 경전에 담긴 고사(故事), 기적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들이 허다하게 서술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다분히 전기적(傳奇的)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 내용이 민간에 유전되면서 마침내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 차츰 신비스러운 전설과 신화로 채색되었다. 이것이 명나라 중엽 오승은이라는 작가의 손에 의해 집대성되어 장편신화소설 『서유기』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대체로 이 소설은 중심 스토리가 현장 스님이 불경을 가지러 가는 과정이긴 하나, 저자의 상상력 또한 실로 적지 않다. 현장 스님의 고사가 주는 암시를 받고 금-원대 희곡에서 소재를 취한데다 저자의 상상력을 보태 엄청나게 큰 신화소설을 빚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 소설은 모두 1백회로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1회~7회)은 제천대성 손오공의 전설이 주류를 이루는 신화로서, 인도에서 전래되어 민간에 유포된 2500여년 전 인도 최고(最古)의 서사시 『Ramayama(拉麻傳)』 속의 원숭이 임금 ‘Hanuman(哈奴曼)’이 바로 손오공의 초기 형태였던 흰 옷 입은 선비 ‘후행자(猴行者)’ 모델이 된다.
둘째 부분(8회~12회)은 당태종이 불교경전을 구하게 된 사연과 그것을 가지러 떠날 현장법사의 출신 내력이 소개되는데, 북송 때 이방(李昉)이 수집 정리한 고대소설집 『태평광기(太平廣記)』 500권과 당나라 장작(張鷟)이 쓴 『조야첨재(朝野僉載)』 등, 여러 종류의 문헌자료에서 힌트를 얻어 가공한 것이다.
셋째 부분(13회~100회)은 현장법사 일행 네 사람이 서역으로 가는 도중 81차례 재난을 겪는 과정인데, 그 소스는 불교경전 『화엄경(華嚴經)』의 가장 큰 마지막 부분 「입법계품(立法界品)」이 주류를 이루며, 구도행(求道行)을 떠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110개 성(城)을 편력하면서 선지식(善知識)을 방문한 끝에 정과(正果)를 얻는 과정이 바로 『서유기』 내용의 주류를 이루는 81차례 재난 실루엣에 해당한다.
저자는 소설의 주인공인 제천대성 손오공을 비롯해 저팔계, 사오정과 곳곳에 등장하는 요괴들에게 짐승의 형상을 부여하고 각각 그 동물적 특징에 어울리는 캐릭터를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천국, 용궁, 지옥, 화염산 등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데도 성공했다. 이처럼 의인화된 짐승들과 환상적인 세계야말로 동화 속의 주인공이요 배경이며, 이래서 『서유기』는 자연스럽게 동화적인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우여곡절 투성이의 기구한 여정을 아름답고도 유머러스한 언어로 운치있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표현해낼 수 있었다는 것은, 저자가 천부적인 재질을 갖추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서유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저자가 주인공들을 통하여 구사하는 익살과 해학, 그리고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당시 암울한 사회 현실 부정(否定)과 사람들의 염원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종교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 속에 신(神)과 마(魔)의 개념은 한결같이 정사(正邪), 시비(是非), 흑백(黑白), 선악(善惡), 광명과 암흑의 종교적 관념과 사회 의식의 긍정․부정적 측면을 초월하고, 어느정도 익살스러운 뜻을 지니게 만들어 독자들을 웃지 않으면 안되게 했다는 점이다. 이 ‘일소(一笑)’가 곧 신화를 ‘인성화(人性化)’시키는 원동력이었으며, 『서유기』의 신화는 곧 ‘인간적인 의미’를 지닌 신화로서, 그런 익살과 해학 속에 인간세상을 웃어넘기며 업신여기는 날카로운 페이소스, 염세주의, 냉소주의가 담겨 있다 할 것이요, 『서유기』가 한낱 동화나 신화문학이 아닌 저항문학의 값어치를 지닌 명작이 된다는 점이다.
명나라 불교문학 : 최고봉 당나라 배경 손오공.(서유기)
당나라에 이르러 당나라의 개방성과 외교정책에 힘입어 굽타왕조(불교창설 및 전파에 힘쓴 인도 왕조)시대때.
남북조시대의 달마대사등 인도천축국에 대한 유학열풍이 일어나기 시작하며 많은 이야기가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런 천축국의 여정은 과장성이 많아지며 소설의 분위기를 풍기게 되며, 결국, 삼장(불교의 3개의 장을 정통한 고명한 스님이라는 뜻) 법사의 천축국 여행기를 쓴 소설이 등장하게 된다. 불교는 당대에 이르기까지 중간중간에 도술과 결합하게 된다.
도교는 중국 민간의 핵심사상으로 남북조의 세상회피적 생활에서 많은 교류를 통해 사상적 체계를 발전시켜 완성을 이루게 되는데, 그 사상을 바탕으로 도술이라는 마술 등이 유행하게 된다. 향후 도교는 많은 실험을 통해서, 화약을 개발하게 되며, 인류역사에 커다란 변화를 남기게 된다. 불교에서 불법으로 토속신앙의 신들을 제거하거나, 불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나온다.
- 티베트 불교전래 신화 - 티베트의 사자의 서를 쓴 저자 이야기. (고승)
서유기(西遊記)는 중국 명대의 장편소설이다. 전 100회로, 오승은(吳承恩, 1500-1582)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오승은은 회안(淮安) 사람으로서 그의 시문집도 남아 있으며, 서유기 작가라는 증거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천축(天竺)으로 가는 길을 답파하여 중국에 경전을 구하여 온다는 이야기의 골자는 당의 고승인 현장(600-664)의 역사적 장거 실록으로 현장의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 혜립(慧立)의 <대자은사 삼장법사전 (大慈恩寺三藏法師傳)> 등에 따른 것으로, 소설의 대부분(제13-100회)은 요마(妖魔)에서 발을 씻은 손오공(孫悟空), 저오능(猪悟能), 사오정(沙悟淨)의 세 제자가 연달아 나타나고 기상천외의 요마들과 갖가지 싸움을 벌이는 '81난(難)'의 이야기이다. 토속의 환담(幻談)에 문인의 각색이 첨가되어 공상 세계가 크게 팽창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태 인정을 파헤치고 정치의 비판에까지 이르는 성숙된 인간학이 담겨 있다.
구조
서두 부분(제1-9회)은 오공의 전신인 제천대성(齊天大聖)이 천계(天界)를 대혼란에 빠뜨리는 통쾌한 이야기로서 여래(如來)의 법력(法力)에 의한 조복(調伏)에서부터 서천취경(西天取經)으로 연결되는데, 제천대성이라는 요원(妖猿)에 대해서는, 인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원장 오공(猿將悟空)과 별개의 전승(傳承)을 외국의 소설이나 설화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 소설에도 그 긴 형성사(形成史)를 증명할 자료가 몇 가지 남아 있으며, 가장 주목할 것으로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 3권이 있다. 남송의 간본(刊本)으로 추정되며, 매우 간략한 행문(行文)이면서도 백의수재(白衣秀才) 모습의 '후(=원숭이) 행자(行者)'가 삼장법사를 도와 신통력(神通力)을 발휘하는 이야기를 17회에 걸쳐서 엮고 있다. 그 후 명초 양경현(楊景賢)의 희곡 <서유기>에 이르러 소설의 줄거리는 이미 대강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후에 신선과 요마가 싸우는 연극이 유행하고 있는 것은 유(儒)·불(佛)·선(仙)의 '삼교합일(三敎合一)'이라고 하는 통속 신학의 침투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소설 <서유기>의 완성도 그 풍조에 따른 것으로서, <봉신연의(封神演義)>나 <평요전(平妖傳)>을 포함한 이 계열을 루쉰(魯迅) 이후 신마(神魔) 소설이라고 부르고 있다.
등장 인물: 서역으로 불경을 가지러 떠나는 삼장법사 일행
손오공(孫悟空): 삼장법사를 모시는 종자이다. 그 이전에는 원숭이 나라의 왕이었으며 각종 요술에 능해 삼장법사 일행 중 최강자이다. 원숭이의 왕 시절 옥황상제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패해 산에 깔려서 무려 500년동안 갇혀있다가 삼장법사에 의해 구출되었다. 삼장법사는 손오공의 엄청난 요술의 달인으로 통제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손오공의 머리에 링을 씌운다.
저팔계(豬八戒): 돼지의 괴물이며, 덤벙거리기를 자주 하며, 음식 앞에서 맥을 못 춘다. 단순한 낙관자. 원래는 저오능(猪悟能)이라는 이름으로 천계의 장군이었으나 죄를 짓고 옥황상제에게 2천 대의 매를 맞고 쫓겨난 이후 삼장법사를 만나 삼장법사가 팔계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사오정(沙悟淨): 하천의 괴물이었다. 역시 저팔계와 마찬가지로 천계의 장군이었으나 죄를짓고 옥황상제로부터 8백 대의 매를 맞고 하천으로 쫓겨났다가 삼장법사를 만났다.
현장 삼장
옥황상제: 하늘과 땅이 아직 분리되지 않고 혼돈 상태에 있을 때에 최초로 생겨서 신(神)으로 된, 말하자면 천지의 정(精)이며 세계의 개창자(開創者)이기도 하다. 자연히 화생(化生)한 태원옥녀(太元玉女)와 통해서 천황씨(天皇氏)를 낳고 지황씨(地皇氏)·인황씨(人皇氏)…를 거쳐서 황제(黃帝)가 된 때에 국토가 열리고 인간이 번식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요컨대 《도덕경》에 서술된 '도(道)'가 신격화된 것으로서 천지만물 생성의 시원(始源)이며 인과(因果)의 법칙을 초월해서 영원히 존재하는 절대자이다. 그가 살고 있는 장소는 36천(天) 가운데 최고의 천인 대라천(大羅天)의 옥경산(玉京山) 꼭대기에 있는 현도(玄都)로 여기에서 제신(諸神)을 거느리고 있다고 전한다. 또 도교의 교주(敎主)로서 도교의 가르침은 원시천존의 가르침이라는 설(說)도 있다. 원시천존의 신앙은 남북조 시대 초기에 발생하여 당대(唐代)에 완성되었다. 처음부터 불교 사상의 영향을 볼 수 있었는데 당 말기의 천존 상(像)은 불상(佛像) 바로 그것이었다.
줄거리
서유기는 손오공이 하늘나라에 죄를 짓고 오행산에 감금되는 이야기와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제자로 삼고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도중에 벌어지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손오공은 돌에서 태어난 원숭이의 왕으로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며 갖가지 도술을 하는 영물이었다. 용궁에 가서 여의봉을 얻고 하늘의 신선과 천신들과 맞써 싸워도 물러서지 않을 정도였기에 옥황상제가 제천대성으로 봉하고 달래었으나 오히려 더욱 오만하게 되어 석가여래에 의해 오행산에 감금되었다.
오백년이 흐른 뒤 현장은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손오공을 제자로 삼아 같이 가게 되었다. 여정 중에 저팔계, 사오정 등을 제자로 두고 우마왕과 같은 요괴들을 물리치며 천축에 도착하여 석가여래를 만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삼장법사
현장(玄奘, 602년 ~ 664년)은 당나라 초기의 고승이자 번역가로 흔히 현장 삼장(玄奘三藏)이라 한다. 10세 때 형을 따라 낙양의 정토사에서 불경을 공부하다가 13세에 승적에 이름을 올려[1] 현장이라는 법명을 얻게 되었다. 그를 부르는 또 다른 명칭은 삼장법사인데, 삼장(三藏)이란 명칭은 경장(經藏) · 율장(律藏) · 논장(論藏)에 능하여 얻게 된 별칭이다.
현장은 당시의 한문 불교 경전의 내용과 계율에 대한 의문점을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의거하여 연구하려고 627년 또는 629년에 천축(天竺, 인도)에 들어가 645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사망시까지 만 19년에 걸쳐 자신이 가지고 돌아온 불교 경전의 한문 번역에 종사하였다.[2] 그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며 당시까지의 번역법이나 번역어에 있어서 커다란 개혁을 가져왔다. 이 때문에 종래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부르고, 현장 이후의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현장은 중국 불교의 법상종 · 구사종(俱舍宗)의 개조이다.
또 그는 자신의 천축 여행의 견문기를 《대당서역기》에 통합 정리하여 태종에게 진상하였다. 이 책은 당시의 인도나 중앙아시아(서역)를 알기 위한 제1급의 사료이다. 또한 문학적으로는 현장의 천축 여행을 모티브로 하여 명나라 시대에 《서유기》라는 소설이 생겨났다.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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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에 의하면 현장 승려는 모험심이 강한 승려였다고 전해진다. 본래 중국의 승려들은 법에 의해 모여 살아야 했는데, 현장 승려는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장안을 출발하여 천축에 이르는 현장 승려의 행로는 그의 여행기 《대당서역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만화 십팔사략》에 의하면 불교를 믿는 관리들이 통행증을 내주고 위험한 길을 미리 알려주었다고 한다.
627년 (일설에는 629년) 천축으로 출발하여, 쿠차와 투르판 등의 서역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의 행로를 거쳐 천축의 나란다 사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저서는 명나라 때 오승은(吳承恩)에 의해 《서유기》라는 소설로도 각색되었는데, 그의 흔적인 쿠차와 투르판 등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현장법사가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국문태의 초대를 받아 630년 2월경에 도착하여 1개월간 고창국에 들러 이 곳에서 법회를 열어 한 달 동안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했는데, 그때 법회를 열었던 건물은 복원이 되어 있다. 고창국의 왕 국문태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노잣돈으로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그 후 10여 년 유학을 끝내고 불경을 가지고 다시 고창국에 들러 당나라로 귀환을 하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현장법사의 모국인 당나라에 멸망한 뒤였고 사람들도 다 떠난 뒤였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현장은 고창국에 들러지 않고 바로 당나라로 귀환하게 된다.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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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서역기》: 총21권이며, 그의 17년간(629-645)의 구법 행적을 정리한 것으로 그가 정리하여 그의 사후 646년에 완성되었다. 대당서역기에는 현장의 직간접 경험을 한 138개국의 풍토와 전설, 관습 등이 정리되어 있는 방대한 서적이다. 이것은 고대 및 중세 초의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역사나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문헌기록이 미흡한 인도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1차적인 사료로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현장은 5천축 80개국 중 75개국이나 역방하면서 사실적인 기록을 남겨놓음으로써 할거로 점철된 인도역사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데 더 없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서유기에서 묘사된 현장: 서역으로 불경을 가지러 떠나는 삼장법사 일행(서유기)
《서유기》에서 묘사된 현장은 삼장법사로서 묘사된다. 불경을 구하러 천축으로 가던 도중 옥황상제에게 싸움을 건 죄로 산 밑에 500년째 깔려있던 손오공의 형벌을 면제해주고 손오공을 통제하기 위해 손오공에게 금고아를 머리에 씌운다. 그 이후 손오공을 데리고 다니면서 천축으로 향하던 도중 저팔계와 사오정을 만나 일행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삼장,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불경을 구하러 천축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여행 도중 여러 요괴들을 만나지만 손오공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런데 일방적인 것은 거의 전부의 요괴는 모두 손오공이 무찌른다는 것이다.
알고보면 범죄자
삼장법사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수하로 두면서 14년간 불경을 구하러 천축여행을 떠난다. 이 과정에서 삼장법사는 손오공 등 일행에게 급여를 지급했다는 기록이 없다. 게다가 각각의 구성원에게 한가지씩 잘못했다.
손오공에게는 머리에 긴고아를 씌워서 반항하지 못하도록 했다. 문제는 불경을 구한 이후에도 긴고아를 해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팔계의 원래 이름은 저오능이였다. 삼장은 그런 저오능에게 술, 여자, 도박, 살인 등 8가지를 못하게 막으려고 이름을 팔계로 지었다. 사오정은 이 세사람 중 가장 서열이 낮았다. 결국 삼장법사는 손오공 등 3명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않은 채 14년간 강제노역을 부과했다.
서유기는 각색되어 현대에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는 이시기에 혜초가 왕오 천축국전을 쓰게 된다. 신라의 승려 혜초가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하고 쓴 여행기.
필사본. 1권 1책. 신라시대의 승려 혜초(慧超:704∼787)가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한 뒤 727년(성덕왕 26)에 쓴 책이다. 이 책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P.펠리오가 중국 북서 지방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 천불동 석불에서 발견하였으며 중국의 나진옥(罗振玉)이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에는 당시 인도 및 서역(西域) 각국의 종교와 풍속·문화 등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때는 벌써 불타(佛陀)의 유적은 황폐하여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있어서 공양미가 매일 15석이나 소요되어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곳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대·소승(大小乘)이 구행(俱行)하고 있으나 곳에 따라 대승만 행하는 곳도 있고, 소승만 행하는 곳도 있으며, 북방에는 사원과 승려 및 신자가 많아서 조사설재(造寺設齋)할 때에는 아내와 코끼리까지 사시(捨施)하는 독신자(篤信者)도 있다고 하였다. 나체 생활의 풍속, 가봉뇌옥(枷棒牢獄)은 없고 벌전(罰餞)만 있는 법률, 장(醬)은 없고 소금만 있으며, 여러 형제가 아내 한 사람으로 같이 사는 것, 살생하지 않는 것, 흙솥에 밥을 짓는 것 등 여러 색다른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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