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홍루몽에 나오는 어휘 전고典故1

一字師 2023.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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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에 나오는 어휘 전고典故1

 

 

구홍학舊紅學

홍학은 생겨나서 이미 지금은 2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간에 몇 가지의 다른 발전 단계를 거쳐 왔는데, 평점評點, 제영題咏, 색은索隱, 고증考證 등의 유파가 있다.

 

그 중에서 평점파와 색은파의 영향이 가장 크다. 그들은 심혈을 기울여서 연구하여 훌륭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작품 속에 있는 함축된 말 속에 담긴 심오한 뜻과 넓게 깔린 복선伏線을 발라내고 후벼냈다.

 

또는 논증을 충족시키기 위해 광범위하고 다방면으로 자료나 증거를 수집하고 인용하여 작품 중에서 감추고 있는 일과 은닉하고 있는 사람을 탐색하기를 시도하였다.

 

두 파의 출발점은 비록 각기 상이하나, 모두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맹목적으로 헛된 것을 쫓았다.

 

20 C 20년대 초에, 호적胡適 선생은 『홍학고증紅學考證』을 발표했는데, 주로 작가의 가세와 경력 및 판본의 원류源流를 고증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서,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曹雪芹이고 자가自家의 일을 쓴 것으로 확정하였다.

 

호적의 홍학 관점은 점차 평점파와 색은파의 대체하여, 홍학을 주도하는 위지를 획득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차츰 호적 이전의 홍학을 구홍학舊紅學으로 하고, 호적과 유평백兪平伯의 홍학을 신홍학新紅學으로 삼았다.

 

신홍학이 출현했으나 구홍학이 하나도 옳은 게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홍학의 연구자에 속한 사람이 200여 명이 되는데, 그들의 관점과 평론이 대부분 편향되어 있어, 견강부회하고 터무니없이 꾸며대었지만, 정확한 인식과 투철한 견해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예를 들면 제련諸聯의 『홍루평몽紅樓評夢』에서는, ‘나는『홍루몽』 120 회를 세 글자, 즉 진眞, 신新, 문文을 말한 것으로 개괄한다’라고 『홍루몽』에 대한 사상적 인식의 가치와 중요한 예술적 특징을 가장 간결하게 개괄했다.

 

이지도인二知道人의 『홍루몽설몽紅樓夢說夢』은 제기하기를, ‘태사공太史公은 삼십 세가世家를 기재했는데, 조설근은 단지 한 세가를 기재했다. 태사공의 책은 고문전책高文典冊(국가 또는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간행된 귀중한 저술)이나, 조설근의 책은 가어촌언假語村言으로 지어낸 내용이여서 고인古人에 미치기는 매우 멀다. 그러나 조설근의 한 세가는 매우 수천 수백의 많은 세가를 포괄하고 있고, 가어촌언이지만 모두가 사람을 깨우쳐 주는 말만 있다!’라고 했다.

 

어떤 색은파 학자는 그 연구 방법이 비록 취할 수는 없으나 출발점은 오히려 적극적인 일면이 있는데, 예를 들면 채원배蔡元培는 『석두기색은石頭記索隱』에서 한족을 존중하고 만주족의 비방을 강조하고, 그 구성은 청 왕조의 구민주주의 혁명에 반대하고, 민족주의를 선전宣傳하는 것에 보조를 맞추었다.

 

그러나 홍학은 발전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런 색은파의 문학 작품 자체에서의 탈피는 주로 문학예술로 눈을 돌리지 않고, 정치와 역사의 비밀을 연구하는 방법은 이미 막바지에 치달아서 역사라고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홍루몽에 나오는 어휘 전고典故(13)

 

홍학紅學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킨다. 작가 조설근曹雪芹의 생애와 가세家世, 작품의 사회적 인식의 가치, 예술의 심미적 가치와 예술 창작의 경험, 『홍루몽』의 판본版本, 작품의 원본의 산실散失, 지평脂評 등등의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홍학”이란 명사名詞가 나온 가장 이른 시기는 청나라 이방李放의 『팔기화록주八旗畵錄注』에 이렇게 나와 있다:

 

‘광서光緖 초기에, 도성의 사대부들이 특히 『홍루몽』을 애독하여, 서로 잘난 체하며 홍학을 말했다.’

 

균요均耀의 『자죽거임묵慈竹居臨墨』에는 또 이런 내용이 있다:

 

‘화정華亭 주자미朱子美 선생은 소설의 애독자였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평생에 800여 종이나 읽었지만, 그 중에서 특히 『홍루몽』을 정말로 좋아하는데, 세밀하게 다듬고 지극히 담백하나 깨달음을 준다. 현 시대의 풍조가 여전히 경학經學을 논하기를 좋아하나, 풍속을 속이고 가리고 있다.

 

혹자는 묻기를, “선생은 경학을 어떻게 연구하십니까?”라고 했을 때,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경학은 일횡삼곡一橫三曲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해를 못하여 다시 묻자,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전공하는 것은, 홍학紅學입니다.”

 

번체자繁體字 “경經”에서 일횡삼곡하면 즉 “홍紅”자가 된다.

 

홍루몽에 나오는 어휘 전고典故(12)

 

장창화미張敞畵眉

규중에서 부부가 사랑하는 풍류에 대한 고사이다. 장창張敞은 서한西漢 선제宣帝 때에 경조윤京兆尹을 지낸 바 있는데, 『한서漢書·장창전張敞傳』에 기재되어 있다.

 

그는 아내를 위해 화미조(畵眉)를 한 적이 있다. 어떤 관리가 이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황제가 그것에 대해 하문하자, 장창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로는 규방 안에서의 일은 부부지간의 사적인 일입니다만, 화미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선제는 그의 재능을 아꼈으므로, 질책하지 않았다.

 

소설의 후後40회 속서에 시녀 원앙鴛鴦이 주령酒令을 행할 때 이 전고를 사용하였다.

 

노어해시魯魚亥豕

고대에 전서篆書에서 “노魯”와 “어魚”, “해亥”와 “시豕”의 글자가 비슷하여 베낄 때 틀린 적이 많았다. 후세사람들은 글자 모양이 비슷하여 생기는 오류를 “노어해시”라고 불렀다.

 

홍루몽에 나오는 어휘 전고典故(11)

 

전설에 나오는 한나라 때의 유신劉晨, 완조阮肇가 천태산天台山에서 우연히 선녀를 만난 고사이다.

 

『태평광기太平廣記·천태이녀天臺二女』에 나오는 내용이 있다:

 

‘유신劉晨과 완조阮肇가 천태산에 약초를 캐러 들어갔는데, 너무 멀어서 돌아오지 못했다. ........ 큰 계곡을 빠져나오니, 계곡 가장자리에 매우 아름다운 두 여자가 보였는데, 그들이 잔(杯)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유신과 완조 두 분께서는 잔을 들고 오셨네요.”

두 여자가 예전에 알던 것처럼 흔연하게 대하는 것에 유·완은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어디서 이렇게 늦었는데 오셨습니까?”

 

동남쪽에 장막이 두 채가 있는데, 각각 진분홍색의 비단 휘장이 쳐져 있었다. ...... 술과 음식을 다 먹자, 시녀들이 복숭아를 들고 있다가 말했다.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술을 마시며 주흥을 즐기고, 밤에는 각기 장막으로 들어가 쉬었는데, 남다르게 부드러운 태도로 대해 주었다. 열흘이 되었을 때, 돌아가려고 했지만, 간곡한 만류에 반년을 더 있었다. ....... 더욱 집이 그리워져 돌아갈 생각만 하게 되자, 여인들은 귀로를 가리켜주며 환송했는데, 고향은 쇠락하여 이미 10 세世가 지난 후였다.’

 

홍루몽에 나오는 어휘 전고典故(10)

 

“타추풍打秋風”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모종의 관계를 이용하여 타인으로부터 증여나 도움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청나라의 적호翟灝의 『통속편通俗編』에 기재되어 있기를: ‘“타추풍打秋風”은 즉 관부官府에 빌붙어서 다른 사람을 속여 재물을 취하는 것으로 “당태세撞太歲”라고도 불렀다’라고 했다.

 

『영헌록永憲錄』 제 3 권에 의하면, 옹정擁正 2 년의 상소문 중에 이런 글이 있다:

 

“내외 대신들이 성省의 관료를 방문하거나, 과거시험의 주무관이 재물을 취하는 것을 금하게 해야 합니다” “

 

“욕심이 끝이 없는 사람들은 문생門生(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주임 시험관에 대하여 자신을 일컫는 호칭)중에서 승급하여 외직外職에 나가려는 사람이 있으면, 스승, 세형世兄(대대로 교분이 있는 동년배 사이의 호칭)과 동년배와 옛 친구들까지 만나서 받아내는데, 이런 것을 추풍抽豊이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제 39 회에서 평아平兒가 ‘먼저 번에 와서 돈 푼이나 받아간 그 유모모劉姥姥와 판아板兒가 갑자기 또 왔네요’라고 했는데, 가난한 자가 관계를 이용하여 부자의 재물을 취한 사례에 속한다.

 

『이소離騷』

전국시기戰國時期에 초楚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대표 작품으로, 고대 중국에서 가장 저명한 장편의 자서전적 성격을 띤 서정시이다.

 

소설 『홍루몽』 중에 ⌜부용여아뢰芙蓉女兒誄⌟에는 여러 방면으로 『이소』의 영향이 드러나 있다.

 

조아비曹娥碑

조아曹娥는 동한東漢의 효녀로 부친이 익사하자, 강 연안으로 내려가 수십 일 동안 소리 내어 울었으나, 부친의 시체를 찾아내지 못하자 강에 투신하여 죽고 말았다.

 

상우현上虞縣의 장관長官이 그녀의 의義를 기려 비석을 세웠다. 나중에 채옹蔡邕이 또 절묘한 사詞로 그녀를 칭찬하는 비문을 지었고, 조아비는 뢰문誄文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소설의 제 79 회에서, 임대옥林黛玉은 ⌜부용뢰芙蓉誄⌟를 듣고, ‘정말 신기한 제문祭文이네요! 조아비와 나란히 전해질 만 하네요’라고 말했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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