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의 건축 원림園林 희곡 미술
당백호唐伯虎
당백호는 이름이 인寅이고, 자는 백호伯虎, 자외子畏, 호는 육여거사六如居士, 도화암주桃花庵主, 노국당생魯國唐生이다.
명나라 중엽에 오현吳縣(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의 저명한 화가이다. 자칭 강남 제일의 풍류재자風流才子라고 했는데, 나중에 민간 예인藝人과 『구미도九美圖』와 『삼소인연三笑姻緣』 등의 탄사彈詞(설창 문예의 일종으로 ‘삼현三絃’, ‘비파’를 위주로 반주하며 남방의 각 성省에서 유행했음)를 공연했는데, 그 영향이 매우 컸다.
그가 그린 산수山水, 화조花鳥, 인물人物과 미인화 등은 모두 대단히 세밀하다. 그의 미인도로는 『추풍환선도秋風紈扇圖』, 『맹촉궁기도孟蜀宮妓圖』 등이 있다.
『해당춘수도海棠春睡圖』는 기록이 없는데, 『홍루몽』에서 작가의 허구虛構로 진가경秦可卿의 침실에 화려하고 정교한 분위기를 과장하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안노공顔魯公
당나라의 저명한 서예가 안진경顔眞卿을 가리킨 것이다. 안진경의 관직이 평원태수平原太守에 이르고,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안평원顔平原, 안노공으로도 부르는데, 그 필체가 힘차서 세간에서는 안체顔體라고 부른다. “묵적墨迹” 즉 친필로 비석에 필체를 새긴 것도 있다.
단청丹靑
단丹은 적색이고, 청靑은 청록색으로 모두 그림을 그리는데 항상 사용하는 색이므로 널리 회화예술에 사용하고 있다.
미양양米襄陽
미불米芾은 자가 원장元章이고, 북송의 이름난 화가이다. 대대로 태원太原에 거주하다가 양양襄陽으로 옮겨서, 스스로 “양양만사襄陽漫士”라고 호를 붙였으므로, 세칭 “미양양米襄陽”이라고 했다.
미불의 산수山水는 수묵水墨으로 색칠하고, 안개비는 망망하게 표현하여서, 화사畵史에서는 그것을 “미씨운산米氏雲山”이라고 칭했는데, 『운산도雲山圖』로 세상에 전해졌다.
사의寫意
중국화의 일파로 간결하고 세련되게 구애 받지 않는 필묵으로 사물의 형상을 오묘하게 그려내어, 흡사 의지와 취향이 숭고하여 짜임새가 세밀한 공필화工筆畵(세밀화의 화법으로, 사의는 사물의 형태보다는 그 내용이나 정신에 치중하여 그리는 화법)와는 상반된다.
구십주仇十洲
명나라 중엽에 오군吳郡의 유명한 화가 구영仇英로 자가 실부實父, 호는 십주十洲이다.
심주沈周, 문정명文征明, 당인唐寅과 함께 “명사가明四家”로 불린다. 주신周臣에게서 그림을 배워 원체院體(중국 궁중의 화원畵院에서 발달한 독특한 양식의 그림으로, 주로 화조와 산수, 종교적인 내용을 제재로 삼았음) 공필工筆로 유명하다.
청록산수靑綠山水, 계화界畵를 잘 그려서, 동기창董其昌은 그를 “조백구趙伯駒의 후신後身이라고 불렀다. 특히 정교한 미인화는 수려하고 섬세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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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몽南柯夢』
명나라 전기로 탕현조湯顯祖가 지은 “임천사몽臨川四夢”의 하나이다. 당나라 때의 이공좌李公佐의 전기소설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에서 소재를 취했다.
순우분淳于棼이 재능이 있으나 불우한 것을 쓴 내용으로, 어느 날 술에 만취하여 늙은 회나무에 기대어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대괴안국大槐安國에 들어가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하고 남가태수南柯太守를 맡았다. 공을 세워 좌상左相으로 부름을 받아 조정에 혁혁한 업적을 쌓았는데, 결국 교만하게 사치와 음란하고 안일하게 살다가 축출당당하여, 속세의 덧없음을 깨닫고 앉은 채로 입멸하고 말았다.
『홍루몽』 에서는 이 극으로 가부의 번화한 꿈이 마침내는 파멸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부형청죄負荊請罪』
여기는 원강진元康進의 잡극 『이규부형李逵負荊』을 가리킨다. 악역 배우 둘이 송강松江과 노지심魯智深의 이름을 사칭하여 술집 주인 왕림王林의 딸을 납치했는데, 정말이라고 믿은 이규李逵가 산으로 돌아가서 충의당忠義堂에서 소란을 피웠다.
나중에 진상을 알고 난 이규는 송강에게 부형청죄(스스로 형장刑杖을 짊어지고 처벌을 요청하다. 전국戰國 시기에 조趙나라의 염파廉頗가 웃통을 벗고 형장을 짊어지고 인상여藺相如에게 자기의 잘못을 뉘우친 고사에서 유래함)를 했다.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
칠현금의 곡명으로 그 노래가사는 동한東漢의 채염蔡琰이 지은 것으로 모두 18 장章이고, 1 장章을 1 박拍으로 했으므로 얻은 이름이다.
노래가사는 문희文姬가 한 왕실이 쇠퇴하여 멸망하여 전쟁이 자꾸 일어났을 때, 흉노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12년 후에 조조曹操에 의해서 되찾아오게 되었는데,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낳은 자식과 생이별하게 된 슬픔을 구성지게 구성한 그 정감이 뜨겁다.
타십번打十番
십번十番은 역시 열 번을 북을 치고, 열 번 피리를 불고, 열 번 징과 북을 친 것인데 일종의 타격악打擊樂과 관현악의 합주의 횟수를 나눈 악곡이다.
『홍루몽』 제 11 회에서 ‘진영부辰寧府가 생신축하연을 열다’에서 떠들썩한 장면이 요구되었을 때, 나고취타鑼鼓吹打 연주단을 청했다.
홍루몽의 건축, 원림園林, 희곡, 미술 ⑦
명나라의 전기傳奇(명·청 시대에 성행한 장편 희곡)로, 작가 탕현조湯顯祖(1550년-1616년)는 자가 의잉義仍, 호는 약사若士이고 강서성江西省 임천臨川 사람이다.
명나라 만력萬曆 11년에 진사에 급제하고, 만력 26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목단정』을 이때 창작했다.
이 극의 기본 줄거리는 명나라의 화본소설話本小說(송宋·원元 대에 민간 설화인說話人이 설창說唱하던 저본底本) 『두려낭모색환혼杜麗娘慕色還魂』에서 내용을 취한 것이다.
『목단정』은 강렬하게 진동시키는 역량을 가진 애정극이다.
『홍루몽』 제 23 회에서 임대옥林黛玉이 우연히 이향원의 담 모퉁이에서 『목단정·경몽驚夢』 중에 있는 노래 구절을 듣고, ‘마치 술에 취한 듯 멍청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비통하여 정신이 나간 듯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라고 했는데, 예술적인 감동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회진기會眞記』
즉 원元 대의 왕실보王實甫의 『서상기西廂記』 잡극雜劇(원대에 대도大都에서 성행하던 중국 전통극의 형식으로, 일반적으로 한 편이 4 절折로 되어 있고, 도입부와 절折 사이에 설자(서막이나 막간극에 해당함)가 있은 경우도 있음. 음악은 북곡北曲을 사용하며, 곡사曲詞의 중간에 대사가 끼어 있음. 명·청 대에도 잡극이 있었으나, 절折의 수가 일정치 않음)이다.
『서상기西廂記』 고사의 가장 이른 출현은 당나라 때 원진元稹의 전기소설傳奇小說 『원앙전鴛鴦傳』인데, 내용 중에 “회진會眞” 시詩 30 운韻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회진기』라고 말한 것이다.
금나라와 원나라원 시기에 이 고사는 제궁조諸宮調와 잡극으로 공연했는데, 문인은 여전히 『회진기』로 불렀다. 『홍루몽』 제 23 회에서 쓴 것이 즉 그 예를 든 것이다.
『만상홀滿床笏』
청대의 전기傳奇이다. 작품 중에서 이곳은 가부賈府의 가장 융성한 국면을 은유한 것이다.
홍루몽의 건축, 원림園林, 희곡, 미술 ⑥
적취정滴翠亭
대관원 경물 중의 하나로, 행엽저荇葉渚 일대의 연못 중에서 산비탈 가까이에서 멀지 않은데, 복도 사면에 구부러진 다리가 있고 조각을 새긴 격자 창문이 있는 사각형의 정자이다.
농취암櫳翠庵
묘옥妙玉이 서문 밖 비구니 암자에서 대관원으로 들어와서 이곳에서 수행한 곳이다.
대관원의 대주산大主山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는 곳으로, 산비탈을 따라 이홍원의 북쪽으로 멀지 않다.
원내에는 동선당東禪堂, 정실靜室 등이 있는데, 가모가 대관원에서 처음 연회를 열었을 때에 이곳에 와서 차를 마신 적이 있다.
제 40 회에서 묘옥은 동선당에서 좌선을 하다가 납치되어 행방불명되고 만다.
행당行當
중국 전통극(전국적으로 유행하는 경극京劇과 평극評劇 월극越劇 등의 지방극의 총칭)의 배역의 격식으로 부색部色, 가문家門, 각색행당脚色行當이라고도 부르는데, 행당이라고 간략하게 부른다.
행두行頭
전통희곡 복장의 총칭으로, 금원金元 시기에 이미 “행두”라는 호칭이 출현하여 지금까지 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배우가 걸치는 회盔(투구 모양 혹은 반구형의 모자), 모자, 망蟒(망포蟒袍), 고靠(희곡에서 무장이 입는 갑옷), 관복, 습자褶子(주름을 잡은 옷), 신발 등을 가리킨다.
연극반에서는 흔히 전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을 두는데, 그것들을 구분하여 큰 옷상자 여러 개와 회두盔頭 상자 안에 간수했다가, 연기할 때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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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루大觀樓
대관원 행궁에서 가장 나중에 지은 정루正樓로 그 양쪽의 동쪽에 있는 비루飛樓를 철금각綴錦각이라 부르고, 서쪽으 사루斜樓는 함방각含芳閣이라고 부르는데, 원춘이 귀성歸省했을 때 “대관루”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자릉주紫菱洲
대관원 경물 중의 하나로, 요서蓼漵 일대에 있다. 가영춘賈迎春의 거처인 철금루綴錦樓가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제 37 회에서 해당시사海棠詩詞의 별호를 정할 때, 보차가 ‘그녀가 자릉주에 거하고 있으니 그녀를 릉주菱洲라고 해요’라고 말한 것이다.
제 79 회에서 영춘이 출가한 뒤에, 보옥이 날마다 이곳을 배회한다.
우향사藕香榭
대관원의 경물 중의 하나로, 북쪽에 인접해 있는 요풍헌蓼風軒이다.
그것은 연못 안에 있는 넓은 홀인데, 사면에 있는 창은 물 가까이에 있고, 좌우로는 복도가 있으며 물 건너로는 길에 연결되어 있다.
뒤로는 구불구불한 죽교竹橋가 있는데, 철벽산장凸碧山莊과는 물을 격하여 건너편에 있고, 물가를 따라 산장 아래에 요정계관凹晶溪館으로 통한다.
제 38 회에서 사상운史湘雲이 손님을 초대하여 이곳에서 게 요리를 대접하고 국화시회菊花詩會를 열었다.
추상재秋爽齋
가탐춘賈探春이 거처하는 곳으로, 그 근처에 우향사, 호설암芦雪庵과 원내院內 정방正房 세 칸이 있는데, 탐춘은 원래 넓고 환한 것을 좋아하여 가로막아 놓지를 않았다.
앞에는 파초, 뒤에는 오동나무가 심겨져 있는데, 원춘이 귀성歸省했을 때 “동도추풍桐剪秋風”이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건물 안 가운데에 화리대리석花梨大理石으로 된 긴 탁자가 있고, 유명한 서예가의 명필 서첩과 진기한 벼루, 붓통, 화낭花囊 등이 놓여 있고, 벽에는 대련對聯이 양쪽에 걸려 있다.
제 23 회에서 원춘의 명을 받고 대관원에 들어와 이곳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제 37 회에서는 이곳에 해당시사를 개최했고, 제 40 회에서는 가모賈母가 원내의 효취당曉翠堂에다 연회를 열었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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