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장편대하소설 임꺽정 봉단편 8 -홍명희

一字師 2023. 11. 13.
반응형

장편대하소설

임꺽정 봉단편 8

-홍명희

임꺽정 : 봉단편:벽초 홍명희 소설

제 9장 두집안

1

선이는 돌이가 편히 앉는 것을 보고 다시 삭불을 향하여 “요지막도 한선달님 생각이 가끔 납디다.” 하고 한치봉의 말을 꺼내니 삭불이가 “그렇겠지 죽은 사람은 죽고 사는 사람은 살고 늙은 사람은 늙고 자라는 사람은 자라는 것이 이 세상이니까.” 하고 될 듯 말 듯한 말을 늘어놓아서 또 선이의 말을 가로막고 “애기야말로 몰라보게 자랐어. 올에 열 몇 살인가?” 하고 말을 돌리니 “열여덟 살이오. 아차, 잊었소. 와서 보이랄걸!” 하고 건넌방을 향햐여 “아가, 아가!” 하고 부르다가 돌이를 한번 흘끗 보고 조금 거북한 눈치를 보이었다.

삭불이가 장난의 말로 “여보게 임도령, 남의 집 색시를 앉아 보기가 면난하거든 밖으로 나가시게.” 하고 하하 소리를 내서 웃으니 선이는 정말로 듣고 “별소리를 다하오. 관계없어. 나가기는 어디를 나가?” 하면서도 말이 이에 물이었다 나오는 것을 보면 맘에는 신통히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돌이는 김서방이 장난의 말을 하거나 말거나 주인이 신통히 여기거나 말거나 색시를 가까이 보게 되는 것만 다행하게 여기어 아무 소리를 아니하고 앉아 있었다.

애기가 그 아버지에게 불리어 건너오는데 안방 외쪽문 밖에 와서 주저주저하니 선이가 되창으로 기웃이 내다보며 “어서 들어와서 이 어른께 뵈어라.” 하고 재촉하여 애기가 외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와서 삭불이를 향하여 절하는데, 그 절이 서울 절과 달라서 두 팔은 무릎 밖으로 벌어지고 궁둥이는 들리고 머리는 자리에 닿을 것 같았다. 삭불이가 웃으며 절하고 섰는 애기를 치어다보고 “퍽 컸다. 너 나를 알겠니?” 하고 물으니 애기가 나직이 “녜.” 하고 대답하였다. 선이가 “열두서너 살까지 뵈온 어른을 설마 모를라고.” 하고 삭불이를 보

고 말하고 나서 “고만 건너가거라.” 하고 애기를 보며 말하였다.

그 동안에 애기가 속눈질과 겉눈질로 앉아 있는 총각의 인물을 보니 심술궂어 보이나 밉상은 아니었다. 그 총각의 눈이 자기의 몸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 같아서 괴난하게 생각하였다. 사실로 돌이는 염치불고하고 애기의 아래위를 샅샅이 보았다. 애기는 가까이서 보아도 멀리서 볼 때나 다름없이 어여뻤다. 가다롭게 흠을 잡아 말한다면 키가 너무 커서 맨드리가 없고 귀가 쪽박귀에 눈에 독살이 들어 보이고 목소리가 새될 것 같았다. 치마 밑에 나온 발이 모양 없이 크나 봉단이의 발보다는 더 클것이 없었다. 돌이는 만족하였다. 눈치 잘 채는 삭불이는 애기가 돌이 맘에 드는 것을 벌써 짐작하고 있는 터인데, 돌이는 인제 혼인말을 해달라고 싶어서 삭불이에게 여러 번 눈짓을 하다 못하여 “여보, 김서방. 아니 가시려우?” 하고 말하니 선이가 “가자시니? 김서방이 내게 와서 밥 한 끼 안 자시고 갈 터수가 아니어.” 하고 가로맡아 대답하는데 삭불이는 웃고 있었다.

삭불이가 선이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애기의 혼사를 정한 곳이 있느냐고 물은즉, 선이는 자기 형편으로는 데릴사위를 얻어야 할 터인데 가근방 백정의 집에 사위로 데려올 만한 아이가 없어서 지금 광구하는 중이라고 말하였다. 삭불이가 이 말을 듣고 “내가 혼처 한 곳을 지시할까?” 하고 ‘훌륭한 총각 하나가 있다. 그 총각이 외모도 준수하고 심지도 굳건하다. 나이는 올해 스물다섯이다’ 말하고 혼인 정할 생각아 있느냐고 묻는데, 아무 말 아니하고 앉았는 돌이는 낯이 간질 간질하였다. 선이는 그 사람이 어디 사람이냐고 묻는다. 삭불이는 “이왕 말이 났으니 내가 말하지.” 하고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함흥으로 도망갔던 유명한 이승지의 외사촌 처남 되는 사람인데 지금 서울 와서 있다고 말하니 선이는 “그러면 함흥 양주삼네 일지요그려.” 말하고 삭불이가 “잘 아는군.” 말하니 “양주삼의 딸 봉단이가 숙부인 바친 소문이야 누가 모르겠소. 더구나 백정의 집에서야.” 말한다. 삭불이가 선이에게 혼인 정할 의향이 있는야고 묻는데 돌이는 간지러운 낯이 따끔따끔 따가울 지경이었다. 돌이는 그대로 앉아 배길 길이 없어 뒤 좀 보고 오겠다고 일어섰다. 삭불이는 돌이가 헛뒤 보러 가는 줄까지 짐작하면서 “아까 이리 네려올 때 보았지? 길가에 한데뒷간이 있지 않디? 그리로 가게.” 말하는 선이는 “우리 집에는 진디기만 사는 줄로 아우? 그렇게 멀리 갈 것이 무어요.” 하고 삭불의 말을 나무라서 말하는데, 돌이는 건성으로 ‘네’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2

돌이가 나간 뒤에 삭불이가 선이의 의향을 다그쳐 물으니 처음에는 선이가 신랑감을 한번 보고야 말하겠다고 잘라 말하지 아니 하였다. 삭불이가 고개를 젖히고 천정을 치어다보고 짧은 휘파람을 불다가 홀저에 혼잣말하듯이 “신랑감을 한번 보아야 한다것다. 막중 대사에 그럴 테지.” 하고 고개를 다시 바로 세우고 선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신랑감은 벌써 보아 둔 줄로 알았더니 인제 볼 터이란 말이야?” 하고 고개를 까닥거렸다. 선이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떤 신랑감을 누가 보아 두어요?” 하고 삭불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이때

껏 시치미를 떼고 있던 삭불이는 픽 하고 웃음을 터치며 한참 동안 하하 소리를 걷잡지 못하였다. 선이는 또 그 웃는 까닭을 알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다가 삭불의 웃음이 어지간히 끝날 때 “여보, 웃는 까닭아니 좀 압시다.” 말하니 삭불이는 웃음 반 말 반으로 “알리다뿐이야. 아까 그 사람, 같이 온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신랑감이야.” 하고 또 하하 웃었다. 선이가 “무어요?” 하고 눈을 끄게 뜨니 삭불이가 웃음을 그치고 “놀라지 말고 내 이야길 들어.” 하고 한번 큰기침을 하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첫 머리에 이승지를 쳐들었다.

이승지가 외사촌 처남을 장가들여 주려고 색시를 구하는 중에 자기에게 문의을 하기에 자기가 애기 말을 하였고 이승지의 말이 너 친한 사람이면 나 친한 사람이나 다름이 없는 터에 너 친한 사람의 딸이라니 두말 할 것 없이 좋다고 곳 정혼하도록 주선하라고 하는데, 자기가 볼일 때문에 좀 늣었고 신랑감 총각과 같이 오기는 선보고 선보이고 하는 폐를 덜려고 자기가 주장하였고, 자기로 보면 양편이 다 친한 까닭에 중매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거짓말에 참말 섞은 이야기를 자기가 중매된다는 것으로 마치었다. 그리하여 다시 선이의 의향을 물으니 선이는 한참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그 총각 같으면 좋소이다. 애기 어머니 오거든 다시 이야기합시다.”하고 반허락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에 해가 거의 저녁때가 다 되었다. 선이가 삭불이를 보며 “시장하시겠소.”하고 밖을 내다보며 “어째 이렇게 아니 오나? 이애, 너의 너머니가 오기 기다리다가는 손님 곯리겠다. 어서 나와서 밥 지어라.”하고 그 딸이 들으라고 크게 말하니 애기는 “녜.”대답하고 건넌방에서 밖으로 나왔다. 애기가 물을 이어 들이고 솥을 가시고 쌀을 안치고 밥솥에 불을 지핀 뒤에 애기 어머니가 돌아왔다. 문간에서 들어오는 길에 부엌에 있는 애기를 보고 “밥을 안쳤니? 너의 아버지 방에 계시냐? 누가 왔니?”하고 묻는데 애기가 부엌에서 나와서 고기 함지를 받고 소곤소곤 몇 마디 말을 한즉 애기 어머니가 반색하며 “무어? 김선배가 오셨어?”하고 안방문 앞으로 와서 미처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에그머니.”를 찾아가며 삭불이와 인사하고 “왜 이렇게 늦었나?”묻는 남편을 보고 “조금조금 하다가 늦었어.”발명하고 “저녁을 얼른 지어야겠군.”하고 바로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선이가 “거기 잠깐 앉게나.”하고 나가려는 안해를 주저앉힌 뒤에 김서방이 애기 혼인 까닭으로 전위하여 왔다고 말하고 신랑감의 나이와 고

향과 및 친족 관계를 말하고 신랑감 총각이 밖에 나갔은즉 들어오거든 보라고 말하니 애기 어머니는 자기의 남편을 보며 “지금 문 밖에 낯선 총각이 서성거리더니 그게 그 총각이군. 잠깐 보아도 사내답게 생겼든데.”하고 다시 삭불이를 보며 “애기 혼인 까닭에 일부러 양주 걸음까지 하셨으니 고맙기 짝이 없소. 전에 정답게 지내든 김선배가 아무래도 다른 사람과 다르구려.”하고 수월수월하게 말하였다. 삭불이가 손뼉을 치고 웃으며 “인제는 두말할 것 없군.”말하는데 선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애기 어머니는 “이야기들 해서 정하시지요. 이

승지의 부인만은 못해도 이승지의 처남의 댁도 좋구먼요.”하고 곧 뒤이어서 “나는 몰라요. 나는 나가서 저녁이나 할래요.”하고 일어서 나가더니 자기의 이고 갔던 고기 함지에서 남은 고기를 꺼내서 뱀장어칼로 저미고 예고 하여 저녁 반찬을 장만하였다.

방에 앉았는 삭불이는 선이를 보고 “총각 녀석을 불러들여야겠군.”말하여 선이가 문 밖에 나가서 돌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삭불이가 돌이를 보며 “자네, 뒤를 굉장히 오래 보네.”하고 바로 옮겨 선이를 보며 “훌륭한 사윗감이지. 천하 일등인 뒤보는 것만 가지고도.”하고 하하 웃으니 돌이도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웃었다.

 

3

그날 밤에 돌이와 삭불이가 선이의 집 안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선이 내외가 돌이를 유심히 보는 까닭에 돌이가 얼마 동안 겸연쩍어서 말이 적었으나 선이의 안해가 “총각, 이리 가까이 오구려.” “총각, 이야기 좀 하구려.”하고 연해 ‘총각, 총각’하며 다정하게 구는 까닭에 돌이가 마침내 조심성이 풀리어서 너털웃음을 치며 반죽 좋게 이죽거리게까지 되었다. 삭불이가 간간이 실없는 말을 던지어 여러 사람을 웃기었는데 돌이를 가리키며 “저 함흥 떠꺼머리가 인제 양주 대적이 될 터이야. 요지왕모 같은 색시를 훔치려는 것을 보지.”하고서 ‘하하’하기도 하고 “저 떠꺼머리가 맘속에 큰 걱정이 있는 모양이야. 옥황상제하고 벗 못하는 걱정.”하고서 ‘하하’하기도 하고, 선이의 안해가 돌이더러 총각, 총각 하는 것을 보고 “총각은 다 무어야. 고만 사위라고 하지. 그래도 사위라기는 좀 이를까? 그러면 밋사위라고 하지. 민며느리가 있는데 밋사위라고 없으란 법 있나.”하고서 ‘하하’하기도 하여 그 하하 할 때마다 돌이든지 선이 내외든지 따라서 ‘허허’ ‘허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선이의 안해가 “고단들 하실 걸 고만 주무시지.”하고 건넌방으로 건너가고 삭불이와 선이와 돌이가 차례로 누웠다. 돌이는 누운 뒤에 바로 코를 골기 시작하였고 삭불이와 선이는 전날 이야기도 하고 지금 이야기도 하는 중에 대사를 지낼 이야기까지도 얼추 작정하고 닭 울 무렵에 잠들이 들었다. 밤 늦게 잠든 까닭으로 삭불이가 이튿날 해가 한나절이 지난 뒤에 일어났다. 일찍 일어난 돌이가 삭불이를 보고 “김서방도 서울 사람이라 게으름뱅이로 한골 나갈 만하구려.”하고 웃으니 삭불이가 “암만, 함흥 사람은 모두가 부지런하지. 서울 사람은 게으름뱅이 사위로 조명이 났다니까 인제 함흥 사람은 부지런뱅이 사위로 유명할걸. 아따, 이 사람아, 자네 코 까닭에 나는 잠 못 잤어. 그리고 무슨 염치에 남더러 게으름뱅이라나?”하고 웃었다. 선이의 안해가 밥이 굳어 떡이 되었다고 말하며 밥상을 갖다 놓았다. 삭불이와 돌이가 늦게 아침밥을 먹고도 다시 한동안 주춤거리다가 선이 내외를 작별하고 떠나서 그날 해지기 전에 서울로 돌아왔다.

돌이의 혼인날이 사월 스무날로 작정되었다. 혼일은 주팔이가 받았고 혼수는 이승지 부인이 장만하였다. 삭불이는 신부의 집 일을 거들려고 며칠 전기하여 양주로 내려가고, 주팔이는 위요가 되어 혼인 전날 신랑과 같이 떠나 내려갔다. 귀엣머리를 푼 애기의 태가 색시 적과 달리 아리따운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상투를 쪼진 돌이의 모양도 떠꺼머리 때와 달라서 의젓하게 보이었다. 신랑 신부를 구경 왔던 사람이 “신부가 참말 이쁘군.” “신랑도 그만하면 훌륭하지.”하고 구석구석 모여서 칭찬들 하였다. 과년한 신랑 신부의 첫날밤 이야기는 자세히 말할 것이 없으나, 그날 밤 신방 지키던 사람이 나중까지 두고 웃음거리로 이야기하게 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신랑이 신부 옷 벗기던 사단이다. 돌이가 첫날밤에 옷 벗긴다는 말만 들었지 어떻게 벗기는지를 몰랐던 까닭에 애기의 옷을 속속들이 발가벗기려고 들어서 속적삼의 단추 고가 쪼개지고 속속곳의 고름이 떨어졌다. 애기가 손으로 밀막아서 잘 벗기지 못하게 하니까 돌이가 무식스럽게 애기의 팔목을 꽉 쥐었다. 애기가 무심결에 “아야.”하면서 팔을 뿌리친다는 것이 돌이의 면상을 후려치게 되어서 돌이도 무망결에 “아이구”하고 볼멘 소리로 “팔목 좀 쥐었다고 사람의 얼굴을 치는 법이 어디 있어?”하고 물러앉았다. 애기가 암상이 나서 입속말로 “무식스럽게...”하고 종알거리니 돌이는 골이 나서 “누가 무식스러운지 모르겠네.” 하고 두덜거렸다. 그리하여 신랑 신부가 한참 동안 소가 닭 보듯 닭이 소 보듯 하고 있다가 나중에 돌이가 “첫날 저녁부터 쌈질은 재미가 없는데 내가 지지.”하고 단추를 끼지 못한 속적삼과 고름을 매지 못한 속속곳은 입은 채로 애기를 들어다가 자리에 누이었다. 신방을 지키던 사람들이 이것을 알았다. 그중에 “변이야, 첫날밤 색시가 신랑과 말다툼을 하다니.”말하는 여편네도 있었고 또 “애기가 제법 무어라고 종알거리니 망측도 하지.”말하는 여편네도 있었다. 첫날밤에 신랑 신부가 말다툼하였다는 것이 나중까지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주팔이는 성례한 그 이튿날 곧 서울로 올라가고 삭불이는 뒤떨어져서 잔치 나머지 술에 취하여 신랑 신부를 못살게 굴다가 이삼 일이 지난 뒤에 서울로 올라갔다.

 

4

돌이가 장가 온 뒤 처음 얼마 동안은 하는 일이 없었다. 장모와 같이 앉아 이야기하는 이외에는 애기 뒤를 쫓아다니었다. 애기가 우물에 물 길러 가면 붙어가서 두레박질을 하여 주고, 애기가 부엌에서 밥을 안치면 따라들어가서 불을 지펴 주었다. 이리하여 애기가 돌이를 보고 “너무 쫓아다니지 마시오. 남이 부끄럽소.”하고 말한 일까지 있었다. 어느 장 안날 식전이다. 선이가 소를 잡으러 포줏간으로 나가기 전에 돌이를 불러서 “너도 인제는 일을 좀 배워라. 사나이 자식이 밤낮 계집의 궁둥이만 쫓아다니면 쓰겠느냐.”하고 이른 까닭에 선이의 뒤를 따라 나가서 소 잡는 것을 구경하였다. 그날 잡은 것은 큰 암소였다. 처음에 선이 집의 심부름꾼이 그 암소를 끌고 포줏간으로 들어오는데, 그 암소가 외양간으로 끌려오는 줄로 아는 것같이 순순히 따라오다가 포줏간 가까이 와서 포줏간에 배어 있는 피비린내를 맡고야 죽는 줄을 짐작하였는지 들어오지 아니하려고 머리를 흔들고 뒷걸음질을 치려고 하였다. ‘메, 메’하는 소리가 사람 같으면 ‘살려 주시오, 살려 주시오’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힘으로 말하면 심부름꾼 열이나 스물이 덤비어도 끌어들이게 될지말지한 암소가 고삐를 몇 번 채치다

가 웅숭그리고 끌려들어왔다. 짐승이라 죽는 것을 잘 모르리라 하나 그렇지도 아니하였다. ‘메, 메’하는 소리와 웅숭그리는 모양은 고사하고 그 눈이 사람을 원망하는 것같이도 보이고 신세를 슬퍼하는 것같이도 보이고 또 미련하게 ‘잡아 잡수’하는 눈치도 없지 아니하였다. 아무리 암소라도 힘이 있는 대로 날뛴다고 하면 포줏간에서 죽게 되지 아니할 것인데 힘을 써볼 생각도 못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짐승이다.

심부름꾼이 고삐를 잡고 있는데 선이가 넓적한 도끼를 둘러메었다가 도끼 머리로 벼락같이 내리쳤다. 눈썹 있는 사람이면 양미간이라고 말할 곳을 똑바로 내리쳤다. 단 한번에 암소가 ‘끙’하며 넘어졌다. 눈을 껌벅거리고 몸을 벌떡거리는 것이 아직 다 죽지는 아니한 것이다. 어느 틈에 고삐를 놓은 심부름꾼이 선이의 도끼를 받아들고 도끼질을 익히듯이 바로 비뚜루 여러 번 내리쳐서 소가 영영 꿈쩍 못하게 되었다. 돌이는 죄도 없이 참혹히 죽은 소를 불쌍히 여기느니보다 힘도 못 써보고 허무하게 죽는 소를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선이가

칼을 잡고 나서서 멱을 질러 선지를 뽑고 뱃가죽을 다 젖히어 놓고 가죽을 벗기는데 가죽에 뒷고기 한점이 붙지 아니하고 선뜻선뜻 놀리는 칼이 실룩거리는 살결을 따라들어가서 뼈마디에 다치지 아니하였다. 돌이는 도끼질을 심부름꾼보다 낫게 하기는 용이하지만, 칼질을 장인같이 능란하게 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하였다. 돌이는 소 한 마리를 다 잡도록 서서 보다가 소머리, 족, 갈비, 양지머리, 등심, 내장 등속을 심부름꾼과 함께 날라 옮기고 선이 손 씻은 물에 손을 씻으려고 하니 선이가 “이애, 한 그릇 물에 손을 씻으면 싸움한단다. 너는 안에 들어가 씻어라.”하고 말하여 돌이는 피묻은 손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선이의 안해가 그 손을 보고 “일했네그려. 장인이 좋아하겠네.”말하고 나서 “이애 아가, 네 남편 손 씻게 물 떠다 주어라.”말하여 애기가 옹배기에 물을 떠가지고 와서 돌이 앞에 놓으려고 할 때, 이때껏 두 손을 거북살스럽게 내밀고 섰던 돌이가 손바닥을 벌리어 애기의 얼굴을 만져주려고 하니 애기가 “에그머니!” 하고 소리를 지르며 뒤미처 “미쳤나? 무슨 짓이야.”하고 포달스럽게 말하였다. 돌이가 허허 웃고 앉아서 옹배기 물에 손을 넣으며 "쇠피 묻은 손이 눈에 익었을 터인데 그래도 보기가 끔찍스러운가?"하고 섰는 애기를 치어다보니 애기가 "끔찍스럽지 않대도 얼굴에 칠하는 것이 좋을 게 무어야. 내가 좀 칠해 주리까?"하고 씽긋 웃는데 돌이는 "아니, 나는 쇠피 묻히기가 처음이야. 일은 망했어. 이에다 대면 고리일은 정하지. 그리고 고리일은 사내 여편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같이 하는 것이 좋거든. 빙부님더러 고리일 하자고 해볼까?"하고 의논성 있이 말하였다.

애기의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 애기가 대답하기 전에 "이 사람아, 그런 말은 할 생각도 말게. 자네 고향에서는 그렇지 않다데만 여기서는 고리일을 세우지 않네. 고리일 한다면 대접이 떨어질 지경일세."말하니 돌이는 "백정이면 대접이 끝가는 세상에 올라가고 떨어지고 할 대접이 무어 있어요! 고리백정이나 개백정이나 백정은 마찬가지지요."하고 두덜거리었다.

 

5

돌이가 일을 배우기 시작한 뒤 한 달이 못 되어서 선이의 집에 의외의 큰일이 생기었다. 유월 초하룻날의 일이다. 아침에 선이가 볼일이 있어서 같은 포주하는 사람의 집에를 갔었다. 그때 그 사람은 상제요, 그 포줏간은 객사 너머 큰거리에 있었다. 선이가 볼 일을 보고 곧 일어서려고 하다가 주인 상제에게 붙들리어 삭망 지낸 음식을 얻어먹게 되었다. 선이가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여러 잔 받아먹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까 갈 때까지 평탄하던 길이 갑자기 울퉁불퉁하여져서 걸음을 바로 걷지 못하였다. 이때 양주목사가 객사에서 망배하고 나오다가 앞길에서 길을 휩쓸고 가는 술 취한 사람이 있는 것을 바라보고 남여에 올라앉으며 "아침부터 큰길에 비틀걸음을 치며 다니는 놈이 있단 말이냐? 네 저놈 붙잡아 가지고 들어가자."하고 분부하여 전배사령 하나가 분부를 시행하려고 비틀걸음치는 사람에게로 쫓아왔다. 선이가 뒤에서 나는 "게 있거라!"하는 소리에 발을 단단히 디디고 서서 뒤를 돌아볼 때, 사령이 달려와서 "이놈아, 무슨 술을 아침부터 처먹었니?"하고 어깨에 손을 대니 선이는 술김이라 "내게 생긴 술 내가 먹는데 무슨 상관이요?"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이놈아, 무어 어째! 무슨 상관? 주릿대 밀 놈 같으니."하고 선이의 빰을 보기좋게 내갈기니 선이는 비슬비슬하다가 간신히 비스듬히 서서 "뉘게다 함부로 손질이야? 제미."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사령의 발길이 선이의 앞정강이에 다닥치며 선이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창 받은 미투리 신은 발에 선이는 차이고 밟히고 하여 "에구, 사람 죽인다." 소리가 입에서 그치지 아니하였다, 좌우에는 구경하는 사람이 웅긋쭝긋 섰었으나, 사령이 백정을 치는데 나서서 말릴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또 다른 사람 하나가 쫓아와서 두 사령이 선이를 잡아 일으켜 양쪽 팔죽지를 갈라잡아 들고 달리어갔다.

선이의 집에서 소문을 듣고 선이의 안해와 돌이가 숨이 턱에 닿도록 달음박질하여 와서 보니 벌써 관가로 들어간 뒤라 돌이가 관가로 쫓아들어가려고 하니 선이의 안해가 "자네는 집에 가서 있게. 내가 알아보고 감세." 하고 돌이가 가려는 것을 말리었다. "왜 그러세요?" "자네 같은 곰살궂지 못한 사람이 갔다가는 말도 못 붙여보고 귀퉁배기나 쥐어백히네. 아무 말도 말고 집에 가서 있게." 돌이는 장모의 말을 유리하게 생각하여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선이의 안해는 친한 아전에게 가서 알아본즉 식전 술 먹고 길에서 주정한 까닭이라 좀 있다 매깨나 맞고 나가게 되리라고 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딸과 사위에게 이야기하고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리었다. 해가 다 저녁때가 되어도 선이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선이의 안해는 남편이 이때나 나올까 저때나 나올까 기다리다 못하여 이방의 집을 쫓아가서 어찌된 일을 알아보았다.

선이의 안해가 이방 집에서 돌아왔을 때 애기가 내달아서 "아버지 어떻게 되었답디까?" 하고 물으며 어머니의 얼굴을 치어다보니 그 어머니는 대답이 없이 고개만 가로 흔들고 눈에 눈물이 고이었다. 마루에 있던 돌이가 마당에 섰는 모녀에게로 뛰어내려와서 어서 마루로 올라가자고 말하여 애기 모녀와 돌이가 마루에 올라앉은 뒤에 애기 어머니가 애기를 향하여 듣고 온 일을 이야기하는데 "너의 아버지가 오늘 곤장을 삼십 개인지 사십 개인지 맞고 옥에 갖히었단다." 하고 비칠비칠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서 "안전께서 처음에는 식전 주정한 죄로 매깨나 때려 내보내려고 하셨는데, 너의 아버지를 잡아간 사령놈 그 망한 놈이 무슨 원수가 졌는지 너의 아버지가 욕설을 했다고 안전께 고자질을 해서 안전 말씀이 관포주 백정놈으로 관 하인을 능욕하다니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옥에 가두라고 하셨단다. 이방 말을 들으면 지금 안전이 인정이 없는 이라 자칫하면 귀양 가기가 쉽겠다고 하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니 애기는 소리를 내서 울고 돌이는 입맛을 다시었다. 애기 어머니가 눈물을 씻으며 돌이를 향하여 "여보게, 자네가 서울 가서 이승지의 편지 한 장을 맡아 부치게. 그러면 혹시 놓을 수가 있을 것일세." 하고 돌이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돌이는 "이승지요?" 하고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주팔이나 삭불이를 보고 말하면 이승지의 편지 한 장쯤은 얻으리라 생각하고 "그래 보지요." 하고 이왕 서울을 갈 바에는 오늘 밤으로 간다고 돌이는 총총히 저녁밥을 먹은 뒤에 밤길을 떠나갔다.

 

6

이튿날 새벽에 돌이가 서울 들어오는 길로 주팔이의 집을 찾아왔다. 돌이가 주팔을 보고 밤길을 걸어온 급한 사연을 말하고 이승지의 편지를 얻어 달라고 청하니 주팔이가 "자네가 이승지를 모르는 터이면 내라도 말하겠네만 자네도 친한 터에 내가 중간에 들어 말한다는 것이 우습지 아니한가? 그러고 자네가 이승지가 되어 생각해 보게. 자네 친한 사람이 나제를 와보지는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중간에 놓고 무슨 청을 한다면 자네가 그 청을 들어 주겠나? 두말 말고 자네가 이승지를 가보게." 하고 사리를 타서 말하므로 돌이는 다시 입을 벌리지 못하였으나 속으로 생각하기를 '서울 온 뒤로 한번도 만나지 아니한 이승지를 갑자기 찾아보고 청하기가 맘에 창피하고 또 무슨 토심을 받게 될지도 모르니까 김서방이나 가서 보고 말하겠다.' 하고 주팔이를 보며 "그러면 나는 대안동으로 가겠소." 하고 바로 일어서려고 하니 주팔이가 "아직 이르네. 내게서 아침 먹고 그러고 가게." 하고 돌이를 붙들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도 주팔이가 "이때쯤 아침 먹느라고 수선할 터이니 좀 있다 가게." "지금쯤은 손님을 볼 때니 더 있다 가게." 하고 몇 번 가려고 일어서는 돌이를 붙들었다. 돌이가 앉았다가 조급증이 나서 "인제는 가보겠소." 하고 일어서는 것을 주팔이가 "아따 이 사람, 지금 가야 만날 수가 없어. 조급하더라도 조금만 더 참아." 하고 또 붙드니 돌이는 "김서방은 만나겠지요." 하고 더 앉았지 아니하려다가 "김서방은 요새 청지기 노릇하느라고 주인보다 더 바쁘다네. 지금 가야 만나지 못하네." 하는 주팔이의 말에 다시 붙들려 앉았다.

해가 거의 이른 점심때나 된 뒤에 주팔이가 "지금쯤 가보게." 말하여 돌이는 대안동을 오게 되었다. 솟을대문 앞에서 주저주저 하다가 문안에 들어서서 구종 하나가 잡잇간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구종에게로 가까이 가서 "삭불이 김서방을 만날 수 있소?" 하고 물으니 그 구종이 "김서방이 아까 어디 나갑디다." 하고 대답하는데 그 말씨가 돌이의 묻는 말씨보다 더 고분고분하였다. 돌이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삭불이를 만날 것을 공연히 주팔이게게 붙들려서 낭패 보았다고 생각하였다. 삭불이를 기다릴까 이승지를 만나볼까 어찌할까 망설이다가 "주인영감은 계시우?" 하고 물었다. 그 구종이 "계시지요." 하고 "어디서 오셨소?" 묻는데 돌이가 "양주서 왔소." 대답하였더니 그 구종이 "양주요?"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것같이 고개를 기울이고 있다가 "네." 하고 고개를 끄떡이고 나서 "잠깐만 가만히 계시오." 하고 어디로 가는데 바로 보이는 큰중문 아래 모로 붙어 있는 일각중문으로 들어갔다. 돌이는 '거기가 사랑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얼마 있다가 그 구종이 아이 하나와 같이 나오더니 돌이를 보고 "이 상노를 따라가시오." 하고 친절하게 말하였다. 돌이가 상노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데 상노가 나오던 중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그 건너편에 있는 일각문으로 들어와서 따로 떨어져 있는 집 한 채를 안고 돌아서 어느 방문 앞에 와서 "방에 잠깐 들어앉으세요." 하고 방문을 열어 주고 갔다. 돌이는 상노의 말대로 사람 없는 방에 들어앉았다. 이승지가 지기 집에 왔다가 욕본 것이 가엾다 말하고, 자기가 여러 차례 만나자는데 한번도 오지 아니한 것이 괘씸하다고 말한 뒤에 "안해가 이쁘다지? 이쁜 색시 이쁜 색기 하더니 소원 성취했구나. 너의 장모는 너의 고모같이 거실거실하지 않으냐?" 하고 허허 웃고 나서 "홀저에 무슨 맘이 나서 이렇게 찾아왔니? 무슨 일이 있어?" 하고 묻는데 그 말보다도 돌이를 보는 눈이 더 정다워 보이었다. 돌이는 주저주저하다가 청할 일이 있어 왔다고 말하고 선이의 소조를 이야기하였다.

 

7

이승지가 돌이의 청하는 말을 들은 뒤에 "편지해 주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나 내가 양주목사와는 친분이 없으니까 내 편지가 효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고 한동안 고개를 기울이고 앉았더니 "어떻게든지 할 수 있겠지. 걱정 마라. 내가 출입했다 올 것이니 그 동안 여기 있거라." 하고 일어서 나가고 돌이는 혼자 앉았었다. 얼마 뒤에 계집아이 하나가 나와서 갸웃이 방을 들여다보고 가고, 또 얼마 뒤에 늙은 할머니 하나가 방 앞을 지나서 돌아가더니 일각문을 닫아 거는 소리가 나고, 그 할머니가 도로 들어가는 길에 빠끔히 방을 들여다보고 가고 또다시 한참 동안이 지난 뒤에 그 할머니가 두번째 나오더니 돌이를 바라보고 마님이 나오신다고 선통하고, 그 뒤에 이승지 부인이 나오는데 뒤에는 계집아이가 따라섰다.

돌이가 방안에 일어서서 마당에 걸어오는 부인을 바라보니 몸치장은 고사하고 몸을 놀리는 것까지도 처음 보는 양반의 부인이나, 그 얼굴만은 같이 자라던 봉단이가 틀림없었다. 돌이는 그 얼굴이 반가웠다. 이승지 부인은 툇마루에 걸터앉으며 "여보, 오빠?" 하고 뒷말을 잇지 못하는데 돌이는 섰던 자리에 다시 앉으며 "오래간만이오. 그렇지만 얼굴은 몰라보지 않겠고. ” 하고 부인의 얼굴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인이 한동안 말이 없다가 "오빠가 장가를 들었다지?" 하고 입을 열기 시작하여 애기의 말을 묻고 또 선이 내외의 인품을 물었다. 돌이가 그 묻는 말을 대강대강 대답하고 "이번에 빙부님의 일 때문에..." 하고 서울 오게 된 사유를 이야기하려 한즉 분인이 "아까 영감께 다 들었세요." 하고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번 일이 끝난 뒤에 내외분이 한번 같이 오시구려." 하고 돌이를 바라보았다. 돌이가 "와도 좋지만 그렇게 올 수가 있소. 그러고 이번 일이 무사하게만 되면 내가 한번 고향에를 다녀올 터이오." 하고 말한즉 부인이 "고향에도 갔다오셔야지요. 요사이 집에서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퍽 고적들 하실 터이지. 딸자식이란 소용없어요." 하고 손으로 턱을 고이는데 그 손이 분결 같았다. 손의 살이 통통하여 전날 울퉁불퉁하던 손마디가 묻혀 보이지 아니하였다. 얼마 있다가 부인이 "할럼." 하고 기둥 옆에 서 있는 할머니를 부른더니 무어라고 두서너 마디 속살거리었다.

그 할머니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며 그 뒤에 계집 하인이 장국상을 들고 따라나왔다. 또 다른 계집 하인 하나가 우는 아이를 안고 나와서 "애기가 배가 고픈가 봐요."

하고 그 아이를 부인에게 주니 부인은 "젖 먹은 지가 얼마나 되어서." 하고 아이를 받아서 젖을 물리었다. 돌이가 젖 먹는 아이의 얼굴을 내다보며 "잘 생겼소." 하고 칭찬하니 부인도 아이를 들여다보녀 "이까짓놈이 잘생기긴 무얼 잘생겨?" 하고 웃고서 돌이를 보며 "인제 돌 지난 지 두어 달밖에 안 되는 것이 어떻게 서낙한지 몰라요." 하고 다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귀여워하는 빛이 눈에 가득하게 보이었다. 돌이는 부러운 맘이 없지 아니하였다.

저녁때가 다 된 뒤에 이승지가 집으로 돌아와서 돌이를 보고 "긴한 청편지 한 장을 맡았다. 양주목사와 정약형제한 사람의 편지다. 이 편지만 갖다 그리면 무사타첩될 것이다." 하고 현지 한 장을 내주었다. 돌이가 편지를 받아가지고 곧 떠나겠다고 말하니 이승지가 "해가 다 졌는데 어디를 간단 말이냐. 내일 가거라." 하고 말리다가 돌이가 밤길을 걸어가겠다고 고집하는 것을 보고 "너의 맘대로 해라. 밤길을 걸어갈 터이면 내가 삭불이와 같이 가도록 해주마. 삭불이가 가면 양주목가에게 편지 드리기도 편할 것이다." 하고 곧 삭불이를 불러다가 오늘 밤에 돌이와 같이 양주를 가라 일렀다. 삭불이는 밤길을 걷는 것이 맘에 달지 않지마는, 주인 영감의 말을 거역하기 어려워서 "네." 하고 대답하였다.

돌이가 삭불이와 같이 이승지에게 하직하고 떠나서 동소문 밖으로 나가는 길에 잠깐 주팔에게 들이었다. 주팔이가 "일이 잘 되었나?" 하고 묻는데 돌이가 다른 말이 없이 "이승지가 고마운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주팔이는 "그거 보게." 하고 허허 웃었다.

 

8

돌이가 삭불이가 이튿날 새벽에 양주를 도착하였다. 선이의 안해와 애기는 돌이의 이야기를 듣고 여간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그 편지만 들어가면 선이가 곧 나오려니 생각하고 삭불이에게 식전 일찍이 편지를 가지고 들어가 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삭불이는 아직은 이르니 눈 좀 붙이고 일어난다고 바에 들어가서 목침을 베고 눕더니 곧 잠이 들었다. 곤하게 자는 양이 한밤중만 여기는 것 같았다. 선이의 안해가 "이때쯤은 안전이 기침하셨을 터인데." 하고 삭불이를 불러 깨우고 또 얼마 뒤에는 "지금쯤은 식전 조사가 시작될 터인데." 하고 삭불이를 흔들어 깨웠다. 삭불이는 부르면 '흥, 흥' 대답하며 도로 자고 흔들면 '왜 이래, 왜 이래' 말하며 도로 자고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애기 모녀는 밖에서 조바심을 하는데 삭불이는 방에서 코를 골았다. 나중에 선이의 안해가 돌이를 보고 "김선배가 일어나지 아니하니 어찌하면 좋은가? 자네가 편지를 가지고 가보지." 하고 말하니 돌이가 "잠깐만 가만히 계시우." 하고 방을 들어와서 다짜고짜로 삭불이를 잡아 일으켰다. 삭불이가 일어 앉아 눈을 비비면서 "아이고 곤해." 하고 다시 몇 번 하품을 하고 나서 "늦었나?" 하고 물으니 돌이가 "늦고말고. 여보 해 좀 보오." 하고 방문을 열어놓았다.. 선이의 안해가 삭불이를 들여다보며 "일변 당부한 보람도 없이 무슨 개잠이오?" 하고 나무라듯이 말하는데 삭불이는 무안해하는 빛도 없이 "어젯밤에 잠을 못 잤으니까 첫잠이지 개잠인가?" 하고 재담하며 웃었다. 삭불이가 세수하고 옷을 고쳐 입고 하느라고 다시 한동안 지체하고 그제야 편지를 가지고 관가로 들어갔다.

선이의 집에서는 삭불이 나올 때 선이가 같이 나올까 하고 기다리었는데 얼마 뒤에 삭불이가 혼자 나와서 목사가 편지 보고 그대로 나가라고 말하고, 그러면 점심때나 나올까 하고 기다리었더니 아무 소식이 없이 점심때가 지나고, 설마 저녁은 나오겠지 하고 기다리는 중에 저녁때가 다 되었다. 선이의 안해가 "나오지도 않는 것을 헛 기다리고 있다가 저녁 굶기겠다." 하고 심부름꾼에게 저녁밥을 들려 가지고 옥에를 가니 옥사장이가 내달아서

"선이는 오늘 저녁 굶긴다. 안전 분부다." 하고 말을 물어볼 사이도 없이 어서 가라고 쫓아서 그대로 돌아왔다. "밥을 받아 주지 않는 것이 무슨 까닭인가?" 그 까닭을 알아내려고 이 사람이 이 말하고 저 사람이 저 말하다가 "아마 곧 내보내려는 것이다." 하고 공론이 일치하여 선이의 집에서는 선이 나오기를 또다시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때믄 벌써 어두컴컴하였었는데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었다. 관가에서 폐문하는 삼현육각 소리가 풍편에 들리었다. 선이의 안해가 기다리다 지쳐서 애리를 보고“인제 오늘은 고만이다. 저녁이나 한술 떠먹어 치우자.” 말하여 애기 모녀는 마루에서 밥을 먹고 저녁을 먼저 먹은 삭불이와 돌이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서 청편지 이야기를 하였다. 이승지가 자기 편지로는 효력이 없겠다고 어디 가서 일부러 맡아다 주더니 그 편지 역시 효력이 나지 않는 모양이오그려.” “글쎄, 청편지 잘못 부치면 볼기 한 개 더 맞는 수도 없지 아니하니...” “밤길 걸어서 서울 왕래한 보람으로 매 한 개 더 맞힌다면 탈인데요.” “탈은 무슨 탈, 보람이 뒤쪽으로 날 뿐이지.” “여보, 뒤쪽 보람이란...” 문간에서 “다들 집에 있나?”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며 큰 키를 구부정하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선이다. 이야기하던 돌이와 삭불이는 벌떡 일어서고 밥 먹던 애기 모녀는 진둥한둥 뛰어내려왔다. 애기 모녀가 눈물을 이리저리 씻고 하고 삭불이가 밤길 걸은 공치사를 끝낸 뒤에 선이가 멍석 위에 앉으면서 “안전 말이 죄는 귀양 보내 마땅하나 처음이라 십분 용서하니 나가라고, 서울에 반연 있는 것을 믿고 분수 밖에 짓을 하면 두 번은 용서 않는다고 하기에 돌이가 이승지 편지를 맡아온 줄 짐작했어.” 하고 말하니 돌이가 “제기, 개새끼에게라도 두들겨 맞기만 하는 것이 경칠 분수란 말인가.” 하고 혀를 찼다.

 

9

선이가 갇히었다 놓여나온 뒤 이삼 일 동안 선이의 집에는 어지간한 경사가 난 것과 같았다. 음식도 흔하고 오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선이의 세력이 좋다는 소문이 나서 전에 오지 않던 사람들까지 찾아왔었다. 삭불이는 대접 잘하는 맛에 또 붙드는 맛에 일없이 묵었는데, 애기 모녀에게 너무 실없게 구는 것이 돌이 눈에 거칠어서 “여보, 이승지 궁금하겠소. 고만 올라가 보시우.” 하고 쫓다시피 말하여 사흘 만에 올라갔다. 십여 일이 지난 뒤에 돌이가 선이 내외를 보고 고향에 다녀올 말을 내니 선이의 안해는 “부모님도 아니 계신데 다녀올 것 무어 있어.” 하고 가는 것을 긴치 않게 말하나 선이가 “산소에라도 한번 다녀와야지, 이 담날 살림에 얽매게 되면 가기가 쉬운가? 맘 내킨 김에 갔다오너라.” 하고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선이의 안해가 남편의 말을 좇아서 사위를 떠나보내기로 작정하고 행장으로 괴나리봇짐을 만들어 주는데, 땀이 배거든 갈아입으라고 빨아 다린 고의 적삼을 두어 벌 개켜 넣고 발감개를 끄를 때에 신으라고 볼 받은 버선과 새 버선을 섞어서 서너 켤레 집어넣고 또 길에 가다 시장할 때 먹으라고 흰무리 몇 덩이를 피딱지에 싸서 넣고 봇짐을 동인 뒤에 위에 매어단 표주박 한 개는 목마를 때 물 떠먹으라는 것이었다. 돌이가 떠나던 전날 밤에 애기가 돌이와 마주 앉아서 긴 사설로 짧은 작별을 하는 중에 “아무쪼록 하루라도 속히 오시오.” “아무리 속히 온대도 한 달은 걸릴걸.” “한 달씩이나? 한 보름 동안에 다녀오시구려.” “오고 가고 하는 데만도 이실 일이 걸려, 이 사람아.” “그러면 한 달 안에는 꼭 오시오.” “그리하지.” “한 달에 하루만 넘어도 다시 안 볼 테야.” “안 보면 어쩔 텐가?” “내쫓지.” “내쫓는다? 제기 아니꼬워 데릴사위 노릇 못하겠군.” 이와 같은 같잖은 말로 말이 길어져서 한동안 애기는 포달을 부리고 돌이는 이죽거리게 되었다. “나 죽는 걸 보고 싶소?” “어떻게 죽어?” “죽으려면 어떻게든지 못 죽을까? 우물에라도 빠져 죽지.” “우물 버릴라구?” “그러면 비상도 못 먹을까?” “누가 갖다 주나 말이지.” “우물 버리는 것을 무서워서 못 죽을까? 풍덩 빠지면 고만이지.” “풍덩 빠지게 두나? 내가 이렇게 꼭 붙잡지.” 하고 돌이가 붙잡는 시늉한다고 애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시답지 않은 닭싸움 같은 내외의 말다툼이 끝이 났다. 애기가 다시 “한 달 안에는 꼭 오시지요?” 하고 기한을 다지니 돌이는 “오고말고. 꼭 오지.” 하고 대답하다시피 말하였다. “오실 때 함흥 소산이나 많이 가지고 오시오.” “함흥 소산이 무엇 있어야지. 어물이나 가지고 올까?” “무었이든지.” “그래.” “잊었다만 보아.” 하고 애기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니 돌이는 “또 내쫓나?” 하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이튿날 식전에 돌이가 괴나리봇짐을 지고 길을 떠났다. 주팔이와 이승지 부인에게 간단 말이나 하고 가려고 서울을 들렀더니 주팔이는 “동행 좋은 김에 나도 고향에나 다녀오겠다.” 하고 갑자기 길 떠날 차림을 차리고 이승지 부인은 돌이와 주팔이가 고향에 간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가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여 눈물방울이나 좋이 지었다. 이승지가 그 부인의 맘을 위로하기 겸하여 주삼이 내외의 사철 의복차를 보내는데, 한 짐을 만들어서 짐꾼 하나를 따라가게 하였다.

돌이와 주팔이가 짐꾼 하나와 셋 동행으로 길을 떠나서 십여 일 만에 고향에를 득달하니 주삼이 내외의 반가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동네 사람들까지도 정답게 맞아 주었다. 서울 짐꾼을 이삼 일 묵혀서 떠나 보낸 뒤에 돌이가 노독과 몸살로 누워 앓게 되었다. 평소에 병 없던 사람이 않으면 몹시 앓는 법이라 돌이는 죽도록 앓았다. 주팔의 약효험으로 십여일 만에 간신이 머리를 들고 일어났는데 병으로 지친 끝에 학질이 들어서 또 여러 날을 앓게 되었다. 돌이가 학질도 앓는 중에 애기에게 다짐두다시피한 한 달 기한이 지나갔다.

 

10

주팔이가 시골 내려간 동안에 주팔의 집에는 주팔의 첩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삭불이가 놀러오는 외에는 별로 오는 사람도 없었다. 주팔의 첩이 나이 삼십이 넘었으나 맘은 새파랗게 젊은 까닭에 혼자 지내기가 고적하였다. 삭불이가 주팔이 있을 때보다 더 자주 오게 되고 낮에 올 뿐이 아니라 밤에도 오게 되었다. 밤이 늦도록 더위가 물러가지 아니할 때 두 사람이 사발정에 물 먹으러 올라가다가 이웃 젊은 사람들 눈에 뜨이어서 뒷손가락질을 받은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식전부터 날이 흐리더니 해집 무렵에 비가 오기 시작하여 좍좍 내리는 빗줄기가 놋날 드린 것 같았다. 주팔의 첩은 해먹기가 귀찮아서 찬밥술로 저녁을 때우고 바깥문을 일찍이 닫아 걸고 방안에 들어 앉았다. 삭불이가 낮에 왔다 갈 제 밤에 다시 오마고 말하였지만, 무서운 달구비를 맞고 올 것 같지 아니하였다. 초저녁이 지나서 바깥은 캄캄한데 퍼붓듯이 쏟아지는 빗소리와 반수 도랑의 물소리가 천지를 뒤덮을 것 같았다. 주팔의 첩은 맘이 송구하였다. 동네가 만리 같고 이웃이 천리 같아서 사람의 소리는 고사하고 개짐승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다. 주팔의 첩은 혼자 있기가 무서웠다. 방구석에 있는 등잔거리를 머리맡으로 옮겨다 놓고 등잔 접시에 기름를 붓고 쌍심지를 켜놓았다.

줄곧 퍼붓던 비가 다음 준비로 쉬는 것같이 그만할 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었다. 주팔의 첩은 이웃집 문간에서 나는 줄 알고 “이런 밤에 어디 나갔다 오는 사람이 다 있는가베.” 하고 혼자 지껄이었는데 두들기는 소리가 가까이 들리어서 “김서방이 와서 집의 문을 두들기나?” 하고 닫히었던 방문을 열고 귀를 기울였다. 문 밖에서 문이 부서지라고 박차는지 문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주팔의 첩은 삭불이가 온 줄 짐작하고 맘에 반가웠다. 한 손에 관솔을 켜들고 다른 손에 전모를 치어들고 문간으로 나와서 “김서방이오?” 하고 물으니 밖에 있는 사람이 “네”하고 대답하는 모양인데 목소리가 분명히 돌리지 아니하였다. 주팔의 첩이 들었던 전모를 벽에 의지하여 세우고 나서 빗장을 빼고 문을 열자, 밖에 있던 사람이 황망하게 문 안으로 들어왔다. 주팔의 첩이 들어오는 사람과 마주치지 아니하려고 얼른 몸을 피하는데, 그 사람의 팔이 공교히 관솔 든 팔을 톡 치며 관솔이 떨어졌다. 주팔의 첩이 “애그머니.” 하고 다시 집으려고 하였으나 마당에서 넘치어 들어온 물이 땅바닥에 고이어 있어 피시시 소리 한번에 꺼지었다. “이것을 어떻게 하나? 아이 깜깜해라. 좀 찬찬히 들어오지요, 이 양반아.” 하고 주팔의 첩이 더듬더듬하여 문 빗장을 지르는데 그 사람은 아무 소리 없이 서 있었다.

주팔의 첩이 손대중으로 전모를 찾아들고야 “올라갑시다.” 하고 그 사람 옆으로 가서 “가만히 있소. 내가 앞설께. 마당에 물 고인 데가 있세요.” 하고 앞서서 발대중으로 살살 걸어오는데 그 사람은 털벙털벙 몇발짝을 떼놓더니 겅청겅청 뛰어서 마루 앞 댓돌에 올라섰다. “보선 꼴은 잘 되었겠소.” 하고 주팔의 첩이 따라오는 동안에 그 사람은 벌써 갓모와 유삼을 벗어 마루에 놓고 마루 끝에 걸터앉아 진 버선을 빼고 있었다. 주팔의 첩이 댓돌 위에 올라서서 전모를 세우며 “날비를 맞고 와서 입이 굳었구려.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다.” 하고 먼저 마루로 올라왔다. 주팔의 첩이 그 사람의 뒤에 서서 방안에 있는 등잔불 빛에 입은 고의와 적삼을 보니 낮에 입었던 것이 아니라 “어디 가서 우장을 얻어 입었소?” 하고 말하면서도 김서방이 아니고 딴 사람인가 의심을 내서 겁결에 얼른 방에 들어왔다.

그 사람이 뒤미처 방으로 뛰어 들어오는데 몸에서 풍기는 바람이 등잔에 닥치었는지 불이 꺼지며 방안이 지옥이 되었다. 모진 매의 발톱과 같은 사나이의 손이 참새 새끼같이 떠는 여편네의 몸을 움키며 “나도 김서방은 김서방이다.” 하고 범이 차반감을 놓고 으르렁거리듯 하였다.

한동안 번개가 번쩍거리고 우뢰가 우르르거리더니 한밤중이 지난 뒤에 번개와 우뢰가 그치며 비도 그럭저럭 그치었다. 도랑에 물내려가는 소리는 밤새도록 요란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주팔의 집에서 사나이 하나가 나가는데 그 사나이는 삭불이와 같이 외모가 해사하지 아니하고 거무스름한 얼굴에 목자가 우락부락하였다. 주팔의 첩도 그 사나이가 관 근처에 사는 김서방인 줄 아는 외에 더 아는 것이 없었다.

 

11

선이의 집에서는 돌이가 온다는 때 오지 아니하여 한걱정을 삼았었다. 선이의 내외는 말이나 하며 걱정하지만 애기는 말도 못하고 속으로 걱정하느라고 얼굴까지 야위었다. 선이의 안해가 저녁거미 내리는 것을 보고 “내일은 오려는 게다.” 또 식전 까치 짖는 것을 듣고 “오늘은 오는 게다.” 말하면 애기는 종일 맘을 졸이며 기다리었다. 나중에 애기가 그 어머니 보고 “아무래도 무슨 일이 난 것이에요.

서울은 혹 소식을 알는지 모르니 아버지가 한번 갔다 오시면 좋겠네요.” 말하여 선이가 서울 와서 주팔의 첩을 찾아보고 또 삭불이를 만나보았다. 그리하여 짐군 편의 소식으로 무사히 간 것을 알고 또 주발이가지 오지 아니한 것으로 아직껏 고향에들 있는 것을 짐작한 뒤에 선이의 내외는 돌이나 주팔이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고향에서 병이 난 것이라고 추측하였는데, 애기만은 돌이가 병이 난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돌이가 동행한 사람의 병 까닭으로 자기에게 다짐하다시피 한 기한을 어길 리가 없고 어긴다고 하여도 하루 이틀이지 십여 일씩 오래 될 리가 없으리라는 것을 이유삼아 정녕 돌이가 병이 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느 날 식정에 애기가 그 어머니를 보고 “그가 죽은 게요.” 하고 밑도끝도 없이 말하니 “그건 무슨 소리냐?” 하고 그 어머니가 애기를 나무랐다. “어젯밤 꿈에 죽은 것을 보았세요.” “네가 너무 걱정하니까 그런 꿈이 꾸이는 게다.” “꿈이 맞으면 어떻게 하나?” “맞기는 무얼 맞아?” 하고 애기 모녀가 꿈 이야기를 하는 중에 밖에 나갔던 선이가 들어오며 “기다리는 사람이 왔다.” 하고 소리를 쳐서 모녀가 일시에 문간을 바라보니 얼굴이 해쓱한 돌이가 그 뒤를 따라 들어섰다.

선이의 안해가 쫓아니려가서 “웬일인가? 어데서 자고 이렇게 일찍 들어오나? 어서 올라가세.” 하고 돌이를 붙들어 올리다시피하여 선이의 내외는 돌이와 같이 마루에 올라앉고, 애기는 그 어머니 뒤에 서서 돌이를 바라보았다. 돌이가 고향에 가던 길로 중병이 나서 앓은 것을 이야기하고 떠날 때에 고모부가 팔월 추석을 지내고 가라고 붙드는데, 자기가 간다고 고집을 세울 뿐이 아니라 고모가 병 구원에 몸서리를 내서 하루바삐 가라고 말하여 쉽게 떠나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두 손을 내저어 가라고 말하던 고모의 흉내를 내어서 여러 사람을 웃기었다.

이야기가 대강 끝난 뒤어 돌이가 선이를 보고 “짐을 어째 아니 들여오나요?” 말하자 심부름꾼이 짐을 갖다가 마루 끝에 놓았다. 그 짐이 갈 때 괴나리봇짐과 달라서 어지간한 등짐꾼의 짐만 하였다. 선이의 안해는 “무슨 짐이 이렇게 많은가?” 하고 짐을 안으로 끌어당기고 돌이는 그 짐을 풀려 “소산을 가지고 오라는 분부가 있었세요.” 하고 애기를 치어다보이며 웃으니 선이의 내외도 웃으며 애기를 돌아보았다. 애기는 치마끈을 입에 물고 고개를 숙이었다.

돌이가 짐을 풀고 오미자 봉지와 지치 뿌리와 광어 조각, 홍어 조각과 홍합 꼬치를 내어놓았다. 선이의 안해가 봉지를 펴서 보고 꼬치를 들어 보고 하다가 짐 속에 남아 있는 기름한 궤를 가리키며 “그것은 무었인가?” 하고 물으니 돌이가 “이것이오? 이것은 우리 조상님이에요.” 하고 웃엇다. “조상님이라니, 신주말인가?” “아니요, 신주가 다 무어요.” 하고 돌이가 궤 뚜껑을 열더니 활 하나를 꺼내놓고 활의 내력을 이야기하였다. 선이는 “그래, 이 활이 최장군이 아이 적에 쏘던 활이란 말이냐?” 하고 활을 만져보고 선이의 안해는 “이 다음 아들 낳거든 주지.” 하고 활을 들고 애기를 돌아보았다. 어물 등속은 선이의 안해가 마루 선반에 집어 얹고 활궤는 애가 자기 방에 갖다 두었다.

그 날 밤에 돌이가 애기를 보고 “한 달 기한에 못 대어 와서 자볼기를 맞을 작정을 했어.” 하고 웃으니 애기는 “병환이 다 나시기나 했소? 얼굴이 지금도 몹시 해쓱하시구려.” 하고 돌이의 몸을 걱정하고 돌이가 “나는 않기나 해서 해쓱하다지만 않지도 않은 사람이 얼굴이 왜 조 모양이야.” 하고 애기의 야윈 얼굴을 가리키는 애기는 “말을 마시오. 그 동안 걱정으로 맘 썩인 것이 십년 살 것은 감수하였을 것이오. 인제 고향에 다 가셨소. 나하고 같이 가기 전에는 못 갈 것이니.”하고 웃었다.

 

12

돌이와 주팔이가 고향에 다녀온 뒤에 애기와 주팔의 첩이 각각 태기가 있어 이듬해 사월달에 주팔의 첩이 먼저 해산하여 아들을 낳았다. 돌이가 이 소식을 들은 뒤에 밤에 내외 앉았을 때, 애기의 배를 가리키며 “저 속에 들어앉은 것도 아들일 터이지.”하고 욕심을 말하니 애기가 “그걸 누가 알아요?” 하고 대답한 뒤에 “말들이 아들 배는 절구통배라 배가 두리두리하게 부르고 딸 배는 바가지배라 배가 앞산만 부르다는데 배부른 것도 아들 같고 사내아이는 왼손편에서 놀고 계집아이는 바른손편에서 논다는데 노는 것도 사내아이 같지만 낳아

놓기 전에야 알 수가 있어요?" 하고 의심을 말하였다.

돌이가 이 말을 듣더니 “내가 전에 등어 둔 법이 있는데 그 법이...” 하고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옳지, 알았어. 내일 한번 써보아야지...” 하고 웃으며 애기가 그 무슨 법이냐고 물어야 내일 가르쳐 주마고만 말하고 그 법은 이야기하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애기가 장독간으로 장 뜨러 가는데 돌이가 뒤에서 “이것 좀 보아.” 하고 갑자기 부르니 애기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돌이가 “아들이야, 아들.” 하고 허허 웃는데 부엌에 있던 선이의 안해가 마당으로 나오며 “무엇이 아들이란 말인가?” 하고 물은즉 돌이는 또 허허 웃으며 “뱃속 아이의 남녀를 아는 법인데 아이 밴 여자를 뒤에서 무심결에 불러서 바른손편으로 돌아보면 아들이래요.” 하고 지금 애기가 바른손편으로 돌아보았다고 말하였다.

방에 있던 선이가 되창문으로 내다보며 “이애, 잘못 알았다. 남좌여우라니 왼손편으로 돌아보아야 아들이지.” 하고 말참례를 들어서 돌이가 “그러면 내가 잘못 알았나?” 하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돌이가 법을 안다고 코큰 체하다가 코를 싸쥐고 나가는 꼴이 우스워서 애기는 웃느라고 장물을 엎지를 뻔하였다.

오월은 애기가 만삭이라 선이의 집에서 초생부터 해산 준비를 해놓았다. 쌀은 말로 찧어 두고 미역은 춤으로 구하여 두고 첫국밥 담을 새 사발, 새 뚝배기와 아이 씻길 새 옹배기가지 따로 얻어두고 아이 낳기를 기다리었다. 보름이 지난 뒤에 어느 날 애기의 모녀가 “어머니, 무엇이 보이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요?”

“이슬이다. 희더냐 붉더냐?”하고 군호와 같은 문답을 하더니 그 이튿날 꼭두새벽부터 애기가 배를 앓기 시작하여 온종일을 신고하였다. 선이가 불수산 첩이나 지어 왔지만, 애기가 초산으론 순산으로 그날 저녁때에 아이를 낳았다. 선이의 안해가 아이를 받아서 구정물을 씻겨 누이고 후산을 곧 시켜야 한다고 애기를 바로 앉힌 뒤에 무릎으로 아랫배를 적이더니 후산까지 탈이 없이 잘하였다. 선이의 안해가 외할미가 삼할미 노릇까지 한다고 말하고 탯줄을 들고 아이 배꼽에서 한뼘쯤 되는 곳을 서너 번 훑어내린 뒤에 실로 앞뒤를 동이고 수숫대 껍질로 동인 중간을 잘랐다.

갓난아이가 “으으”하고 울으니 선이의 안해가 “어미 닮았어.”하고 대답하는데 선이의 옆에 섰던 돌이가 이 말을 듣고 정이 떨어지는 듯이 입맛을 다시니 선이가 가장 미립이 있는 듯이 “아니다, 아직은 모른다. 아들을 딸이라고 속여야 수명 장수한다고 속이는 버릇이 있으니까 두고 보아야 한다.”하고 말하여 돌이가 맘이 너누룩할 제, 선이의 한해가 방에서 나오며 “속이고 아니 속이고 할 것도 없어. 순산한 것만 다행이지. 어미 닮아 이쁘긴 해.”하고 말하였다. 돌이는 낙심하는 중에 슬그머니 골이 나서 “이왕이니 남처럼 아들이나 낳지.” 하고 툴툴거리었다. 그리하여 아이의 삼이 나가기 전에 돌이는 남의 아들이나 보러 간다고 주팔의 집에를 올라왔다.

 

13

이때 주팔의 집 아들아이는 낳은 지 삼칠일이 지났었다. 아이가 원래 크기도 하거니와 우락부락하게 생긴 살갗 검은 얼굴이 백일 지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돌이가 주팔이를 보고 “아이가 크구려. 그런데 부모와는 딴판이니 누구를 닮았을까?” 하고 아이의 닮은 사람이 없는 것을 말하니 주팔이는 “그걸 낸들 아나. 사람의 자식이니 사람을 닮았겠지.” 하고 허허 웃고서 돌이에게 “그래, 자네 딸은 자네 닮았든가?” 하고 물으니 “나는 보지도 아니했소. 말 들으니 제 어미 닮았답디다. 그까짓 딸자식이 누구를 닮거나 상관이 있소.” 하고 돌이가 딸이라고 하치 않게 말하는데 주팔이가 “딸자식은 자식이 아닌가? 그러고 딸 낳으면 아들도 낳지.” 하고 위로조같이 말하였다. 돌이와 주팔이가 둘이 앉아 이야기하는 중에 삭불이가 애기의 딸 낳은 말을 듣더니 “한 집에는 아들 낳고 한 집에는 딸 났으니 장래 사돈하기 좋겠네.” 하고 하하 웃고 나서 돌이를 보고 “자네 언제 가려나? 갈 때 나하고 같이 가세. 내가 국밥을 얻에 먹으러 갈 터일세.” 하고 말하니 돌이가 “그까짓 국밥 먹으러 멀리 가려고 하는구려. 내가 이번에는 서울서 좀 놀다 갈 터이오.” 하고 속히 가지 아니할 것을 말하였다.

유월에 이승지가 직품이 올라서 벼슬이 예조참판이 되고 그 부인은 따라서 정부인을 바치게 되었다. 대체 육조 여섯 마을의 큰일은 판서들이 결처하고, 마을 안 작은 일은 참의들이 알음하여 참판은 따로 맡은 일이 없는 터에 예조는 육조 중에 청한무사하기로 이름난 마을이라 예조참판이란 늙은이 낮잠자기에 좋을 만한 벼슬이었다. 이참판이 이때껏 벼슬 다니던 중에 가장 몸이 한가하였다. 이참판이 어느 날 부인과 공론하고 주팔이와 돌이를 불러다 저녁밥을 같이 먹기로 하고 안방 모방의 마루를 치우고 주팔이와 돌이를 불러들이고 사랑에 오는 다른 손은 병이 있다 핑계하고 보지 아니하였다. 이참판의 부인까지 그 마루로 나와서 네 사람이 각기 자리를 잡고 앉은 뒤에 이참판이 먼저 입을 열어 “함흥서 떠난 뒤에 이렇게 한 자리에 앉아보기가 처음이지?” 하고 부인을 돌아보니 부인은 “서울 온 때가 어제 같아도 벌써 사 년이에요.” 하고 주팔이를 바라보았다.

주팔이가 돌이를 가리키며 이참판을 향하여 “이 사람이야말로 딸 낳고 골이 나서 서울로 뛰어왔답니다. 장인 장모가 사람이 좋아서 같쟎은 버릇을 잘 받아 주는 모양이에요.” 하고 허허 웃으니 이참판이 “너는 게으름뱅이 사위라고 지칭구를 받지 않는 게로구나.” 하고 빙그레 웃었다. 이때껏 한 무릎을 세우고 앉았던 돌이가 책상다리로 고쳐 앉으며 “내가 영감 팔자 같소? 그런 소리를 딛게.” 하고 그 말끝에 “우리가 작년에 고향에 갔을 때도 게으름뱅이 사위가 지금 벼슬이 정이니냐 무어냐 묻고 봉...” 하고 말하다가 뚝 그치고 다시 말을 돌려 “누이 이름을 부르며 지금은 무슨 마님이냐고 묻는 사람이 더러 있습디다.”하고 자기 말에 입증하라는 듯이 주팔이를 돌아보았다.

이때 아이종 하나가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의 손목을 끌고 와서 부인을 보고 “애기가 영감마님께 가겠다고 떼를 써서 데리고 왔습니다.” 말하는데 부인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이참판이 “오, 이리오너라.” 하고 두 손을 벌리었다. 이참판이 아들을 안아주며 “이 애놈은 함흥 태생이라 이름을 함동이라고 지었다.” 하고 아이를 들여다보며 “함동아, 너는 함흥 사람이야.” 하고 어르듯 말하는데 아이가 “아니야, 서울 사람이야.” 하고 골부림하듯 말하니 “함흥 사람의 자식이 함흥 사람을 언짢게 하는 모양이야.” 하고 이참판은 허허 웃었다.

얼마 아니 있다가 작은 잔치와 같은 저녁이 벌어져서 배불리 먹은 뒤에 주팔이와 돌이가 같이 일어서는데 돌이는 일간 내려갈 터인데 다시 오지 못한다고 이참판 내외에게 작별을 말하였다.

 

(봉단편 끝)

 

[출처] 임꺽정 봉단편 8 - 모이자 커뮤니티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