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이사 편-제2회: 부귀영화를 누리며 전전긍긍하다
(사진설명: 진시황제와 신하들의 동상)
제2회 부귀영화를 누리며 전전긍긍하다
이사의 장남 이유(李由)는 삼천군(三川郡)의 군수(郡守)로 있었다. 이유가 휴가차 함양으로 돌아오자 이사는 자택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자 조정의 모든 문무대신들이 잔치에 참석해 축하하는 바람에 천 여대의 마차가 이사저택 근처의 거리와 골목을 가득 채웠다. 이사가 진나라 조정에서 최고의 관직인 승상을 맡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공주와 혼인하고 딸들은 모두 왕자에게 시집을 갔으니 이런 명문가가 함양에 또 있을까?
저택 문밖의 도로를 가득 채운 마차와 저택 홀을 꽉 채운 빈객들을 바라보며 이사는 스승인 순경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생각하며 탄식했다.
“스승님께서는 세상 만물은 지나치게 성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원래 상채(上蔡)의 일개 무관직의 선비였던 나를 폐하께서 오늘의 이 직위에 올려 놓으셨다. 오늘날 조정의 문무대신들 중에서 나를 초과할자 누구인가? 그야말로 나는 최고의 부귀를 누리고 있다. 아, 사물은 극에 이르면 반드시 반전하기 마련이고 번성도 극에 달하면 반드시 쇠락하기 마련이니 권세는 대단하지만 마음은 서늘하구나. 나의 삶이 이제 어디로 갈지 정말 모르겠다!”
이사의 머리는 부와 명예에 뜨거워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맑아졌다. 갑자기 지난 일이 떠오른 그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날 나는 교외에 단풍 구경을 갔는데 나를 따라 나선 마차가 아주 많았다. 여산(驪山)을 지나며 수십 리를 뻗어 있는 황금빛으로 눈부신 진나라의 궁궐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시황제가 너무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궁전에 머무는 시황제는 외출도 삼가고 그 누구도 그가 밤이면 어느 미인을 불렀는지 구경 어디에서 잠을 자는지 전혀 모르게 했다. 가끔 급한 일이 있어서 보고하러 가면 내시도 그를 찾지 못했다. 나는 시황제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날 집에 돌아오니 한 환관이 몰래 달려와서 그날 황제가 여산의 누대(樓臺)에서 나의 차량 행렬을 보고 “기세가 엄청 나네. 황제의 행렬도 이 정도에 불과하겠는데”라고 말했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등골이 서늘해져서 급히 마차의 수를 반으로 줄였다. 하지만 이 일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내 곁에 이사의 사람이 있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이사가 금방 알게 되는구나”라고 말하며 대로했다. 그리고 시황제는 그날 그와 함께 있었던 모든 사람을 죽여버렸다…
이 일을 생각한 이사의 마음이 어찌 서늘하지 않을 수 있고 온 몸에 식은 땀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사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폐하께서 오늘 우리 집의 광경을 보셨더라면 기분이 아주 안 좋으셨을 것이다. 안 돼. 앞으로는 이런 잔치를 최대한 줄여야 하겠다. 안 그러면 뜻밖의 화를 불러올 수 있겠다.”
이사는 자신의 직위가 높아질수록 더 외로움을 느꼈으나 이미 탄 배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이 때 갑자기 내시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승상은 어지를 받으라!”
이사가 급히 무릎을 꿇자 내시가 어명을 전했다.
“폐하께서 내일 순시를 나가시는데 승상 이사가 배시(陪侍)하라.”
내시를 배웅한 이사는 그날 밤 또 잠을 설쳤다. 그는 비록 더 없는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매 순간 살얼음을 밟듯 전전긍긍했다. 잠 못 이룬 그날 밤 이사의 머리 속에는 승상이 된 후 발생한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진 왕은 천하를 통일한 후 나라의 모든 대사를 나와 의논했다. 나라의 중대한 의사결정은 모두 내가 내렸고 심지어 ‘시황제’라는 명칭도 내가 제출하고 그가 흔쾌히 윤허한 것이다.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분서갱유(焚書坑儒), 그리고 사숙(私塾) 금지와 같은 우민정책은 민심을 얻지 못했지만 군현제(郡縣制)와 의법치국, 수레바퀴 사이즈와 문자, 도량형을 통일한 것은 천추 만대에 복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춘추(春秋) 시대 이래 세상의 제후국들은 각자 나라를 다스려 천자의 나라 주(周) 왕조는 사실상 수백 개의 소국으로 찢어진 셈이었다. 또 수백 년 동안 이어진 혼전으로 인해 각 지역의 언어가 다르고 문자도 달라 서로 간의 교류에서 큰 불편을 겪었다. 심지어 각지에서 올라오는 문서도 형형색색이어서 시황제는 그런 문서를 볼 때마다 머리를 앓았다. 시황제는 각지의 서로 다른 서체를 통일해 표준 서체를 만들기를 희망했다. 이 때도 행운은 나를 찾아왔다. 승상인 내가 멋진 전서(篆書)체를 썼기 때문이었다. 시황제는 나에게 필획이 복잡한 대전(大篆)체를 줄여 필획이 심플하고 모양이 정연하고 아름다운 문자로 정리하라고 말했다. 내가 고안한 이 새 서체는 진전(秦篆)체라고 부르거나 소전(小篆)체라 부른다. 시황제는 또 나와 조고(趙高), 호무(胡毋) 에게 <창호편(倉䪽篇)>과 <애력편(愛歷篇)>, <박학편(博學篇)>을 쓰게 한 후 이를 표준으로 삼아 세상 사람들이 모사하게 했다. 시황제는 또 전국적으로 표준적인 소전체만 사용하고 각 제후국들 기존의 문자는 사용을 금지한다는 어명을 내렸다.
이 십 년간 시황제는 도처로 순시를 다니면서 천하에 위엄을 떨쳤다. 시황제가 이르는 곳마다 바위에 글을 새겨 시황제의 공덕을 칭송했다. 태산(泰山)에 올라 봉선(封禪)하고 바위에 황제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겼으며 지부(之罘)에 올라 황제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바위에 새겼고 랑야(琅邪)에 올라 랑야대를 쌓고 황제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바위에 새겼으며 갈석(碣石)에서는 갈석맹(碣石盟)을 맺고 황제의 공덕을 바위에 새겼다.
나는 역시 행운아였다. 이 모든 석각은 전서체로 씌어지고 그 문장은 모두 내가 지었으며 그 글자 역시 내가 썼기 때문이다. 석각은 길이 길이 전해지니 전서체의 비조가 된 나도 길이 길이 명성을 떨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사는 머리가 훨씬 개운해졌다.
“살아서 더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어서도 이름을 길이 길이 남길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은 시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것이다. 시황제의 은덕은 이 한 몸 다 바쳐도 다 갚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폐하께서 죽음을 내려 천수를 다 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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