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선화유사 이야기 수호지 이야기

一字師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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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유사 이야기 수호지 이야기

 

휘종의 숨겨둔 여인 - 이사사

 

선화유사

오늘날 까지 전해지는 그 당시의 송강 설화로서는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가 있다. 이 책은 송인宋人의 글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 내용에 원대의 말이 석여 있는 것으로 보아 원인元人이 썼거나, 그렇지 않으면 송인이 쓴 것을 원인이 손을 대었거나 그 중 하나로 헤아려진다. 상고上古에서 당에 이르기까지의 역대흥망을 약술하고 나서, 다음에는 송태조에서 철종에 이르는 칠대의 사실을 약기한 뒤, 휘종 때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조정에는 간신이 들끓어 황제는 현량賢良을 물리치고 향락에 잠기니 국정은 문란할대로 문란해졌다. 드디오 수도 변경까지 금군에 의하여 함락되고, 휘종과 흠종은 포로가 되어 북변으로 사라졌다.

 

그 일부로서 기록된 송강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수호지 이야기와 반드시 일치되지는 않으나 그 모체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 대강을 옮겨 본다.

 

(1) 선화宣和 2년 양지, 이진의(李進義=수호지의 노준의), 임충, 왕웅(王雄=양웅), 화영, 시진, 장청(張靑=張淸), 서령, 이응, 목횡穆橫, 관승, 손립 등 12인은 주면 화석강花石綱의 재령宰領에 임명되었다. 이 때 열 두사람은 형제의 의를 맺고 화를 당할 때는 서로 돕기로 서약했다. 이진의 이하 열 사람은 무사히 화석을 운반하여 서울로 돌아갔으나 양지는 영주潁州에서 손립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눈에 길이 막혀 부질없이 날을 보내다가 노자마저 떨어져서 거리에 칼을 팔러나갔다. 그 때 우연히 어떤 불량배와 다투게 되어 양지는 그 자를 죽여 버리고 위주衛州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위주로 귀양을 가는 길에 손립을 만났다. 손립은 불철주야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이 일을 전했다. 이들 열 한 사람은 황하黃河가로 나가 양지를 기다려서 방송공인을 죽이고 양지를 구출하여 함께 태행산太行山으로 들어갔다.(이상 12)

 

보검을 팔기 위해 길바닥으로 나온 청면수 양지

(2) 동년 5, 북경 유수留守 양사보楊師寶는 채태사의 생일 축하로 10만관의 금은주옥과 값진 보물을 현위縣尉 마안국馬安國에 맡겨 서울로 보냈다. 일행이 오가영五家營이란 곳에 쉬고 있는데 한짝의 술통을 멘 여덟 명의 사나이가 와서 함께 쉬었다.

 

마안국 일행이 그 술을 사서 마셨더니 모두 눈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 잠이 들고 말았다. 여덟명의 사내는 금은주옥과 보물을 몽땅 털어서 달아났다. 술통을 근거로 조사를 한 결과 그들은 조개, 오가량(오용), 진명, 유당, 원진(院進=院小二), 원통(院通=완소오), 원소칠, 연청 등임을 알았다. 곧 포리捕吏를 뒤쫓게 했으나 押司官員인 송강의 내통에 의하여 태행산으로 들어가 먼젓번의 열 두사람과 어울리어 양산박(태행산)의 일당이 되었다.(이상으로 20)

 

(3) 어느날 조개는 송강에 대한 구명지은救命之恩을 갚기 위하여 유당을 시켜 한쌍의 금채(金釵=금비녀)를 그에게 보냈는데, 송강은 이것을 단골 창녀인 염파석閻婆惜에게 맡겼기 때문에, 그가 도둑들과 통했다는 것을 염파석이 알게 되었다.

 

그뒤 송강은 부친의 병환으로 귀가하는 길에 고기잡이 두천(杜千=杜遷)과 장령(=장횡)이 삭초라는 거구의 사내와 함께,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만났다. 여기에다 포리 동평까지 끼어서 네 사람이 모두 양산박을 동경함고 있음을 알고 조개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을 양산박으로 들여 보냈다.(이상 24)

 

부친의 병이 완쾌하여 송강이 포청으로 돌아가는 도중 정부 염파석에게 들렀더니 염파석이 다른 남자와 동침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죽이고 집에 가 숨었다. 포리가 닥쳤으므로 집뒤의 구천현녀모九天玄女廟에 숨었다. 포리들은 그를 찾지 못하고 대신 부친을 잡아갔다. 송강이 구천현녀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향탁 위에 두루마기가 떨어졌다. 펴 보니 36인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고 송강이 그 수령임이 시부詩賦로 적혀 있었다. 거기서 송강은 주동, 뇌횡, 이규, 대중, 이해(李海=이준), 사진, 공손승, 장순, 무송, 석수 등 10명을 거느리고 양산박으로 들어갔다.

 

양산박에 가 보니 그때는 이미 조개가 죽고 오가량과 이진의가 수령으로 되어 있었다. 송강이 구천현녀묘에서 얻은 기록을 말했더니 그들은 곧 송강을 수령으로 추대했다. (이 때 이미 조개가 죽고 없었으므로 양산박의 적도는 송강 이외에 33인 이었다.)

 

양산박의 도둑들은 경셔京西, 하북河北, 회양淮陽3지구地區 2480여 현에 걸쳐, 여자와 금백金帛을 무수히 털었다. 조정에서는 호연작을 대장으로 삼고 해적질하다 투항한 두령에게 명령하여 송강등을 잡게 하였으나 번번이 싸워서 패했을 뿐이므로 조정의 책망을 감당치 못한 채 도리어 양산박의 적도에 가담하고 말았다. 이 무렵 불승 노지심이 또한 도당이 되었다.(이상 송강 외에 36)

 

(4) 조정에서는 송강 외 36인을 어찌할 수 없어 원수元帥 장숙야를 산채로 보내어 그들을 귀순시켰다. 조정에서는 그들에게 무공대부武功大夫의 관직을 제수하고 순검사巡檢使로 각지에 파견했다. 나중 송강은 방랍을 토벌한 공으로 절도사節度使에 봉해졌다.

 

이상이<대송선화유사>에 기록된 송강설화의 전모다. 앞에 말한 <송강삼십육인찬>36인 속에는 송강이 포함되어 있고 오늘날의 수호지에도 송강을 포함한 36인으로 되어 있으나 이 <대송선화유사>36인엔 송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성명에도 이동異同이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골자는 거의 같다.

 

수호지의 의문점 수호지 이야기

 

수호지의 의문점들

휘종과 이사사의 이야기는 사실인가?

수호전에는 휘종이 등장, 81회에 '연청이 한밤중에 도군을 만나다'라 되어 있다.

 

즉 송강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미청년 燕靑(온몸에 파란색으로 문신, 피리를불고 노래를 부르는 반면 무예에도 뛰어남)이 돈많은 상인행세하면서 이사사에 접근 그녀의 소개로 도군제와 회견하여 송강 등의 본심은 조정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귀순하여 황제에 충성을 다하고 싶다는 고충을 전함 결국 휘종 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70회본이라면 별다른 사족이 필요없었겠지만, 100회본이라면 과거 반정부행동으로부터 일전하여 정부군에 편입되 는 전환점으로서 그들의 귀순을 묘사설명하는 부분이 반드 시 필요한 부분이다.

 

사실 남송이 되면 반란군의 귀순은 다반사이다. 그러나 수호전은 처음부터 대의명분을 내걸고 시작 즉 폭군과 탐관오리를 공격한다는 것이었으므로 간단히 귀순하였다고 처리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사사라는 여인을 빌어 양산박의 대표와 도군황제사이에 직접 거래를 추진, 최고 우두머 리간의 담판을 맺었따. - 그런데 이는 완전한 상상의 산물은 아니다.

 

첫번째, 휘종의 개봉의 청루(기녀거리) 잠행 습관, 절색인 이사 사라는 미녀와의 만남이라는 사실 당시 개봉의 경기가 매 우 좋아 인심이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두번째, 여기에 더해서 남송 장유의 [유이집]이라는 수필속에 보면 하급관리인 주방언이 이사사의 집에 있을 때 휘종이 들어왔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래서 침대밑에서 이사사와 휘종간의 대화를 듣고 이를 글로 남김 나중에 이사사가 이를 노래로 부르자 크게 화가나서 잡아들이라고 명했으나 이사사가 슬퍼하자 용서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송강은 실존인물인가?

宋江은 실존인물이었다. 역사 기록에는 송강 등 36인이 하북·경기 일대에 횡행 관군 수만인도 진 압 불가능.최후에는 해주에서 관군에게 투항' '그 재능이 과인하여 죄과를 사하고 투할시켜 방납의 난을 평정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그런데 송강이 항복한 것은 방납토벌 이후이기 때문에, 그는 방납정 벌에 출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방납 토벌에 참여한 동관의 부하에 송강이라는 자가 있 었지만 양산박의 송강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의견이다.(동관의 부하에도 宋江이라는 동명을 지닌 자가 있었지만 그는 양산박의 송강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 뿐이라는 견해이다. 이러한 주장을 편 학자는 오랫동안 京都大學에 재직한 바 있던 저명한 동양사학자 宮崎市定인데 그의 송강이인설은 아직까지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

 

방랍의 난을 토벌하여 공을 세움 방납이 패전하여 포로 가 된 것이 선화 3(1121) 426일 귀한 도중에 절하 존에게 송강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기록이 그의 묘비에 남겨져 있다. 송왕조는 유능한 장군이라도 권력을 주지 않고 모반 등의 혐의를 씌우는 것이 상례, 송강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에 죽을 때를 느낀 송강이 반란을 일으킬 것 같은 이규를 불러 함께 자결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상한 점은 송강이 방납의 난을 토벌하는 기록이 2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한번은 4, 또한번은 6, 그렇다면 2인 일 수 밖에 없음, 송강이라는 이름은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이 송강이인설의 근거가 된다.

급시우 송강은 실존인물일까? 그러면 송강에 대한 기록과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겠다.

 

송강이라는 이름이 사서에 나타난 것이 선화1년에서 선화3년까지 단 3년에 불과, 그래서 한 사람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송사]에서는 송강이 선화32월 회양군 지방에 나타났 다고 기록한 뒤 바로 이어서 조정이 장숙야에 명하여 송강을 투항시켰다고 기록 따라서 함께 읽으면 투항한 것이 바로 2월 이후라고 생각된다.

 

[선화유사]}라는 책을 지나치게 신봉한 결과, 이 중에 송강등 36인의 이름을 들고 이들이 일 단을 결성하였던 경로를 기록하고 최후에 송강이 방랍 토벌군에 참여한 공이 있다고 결론을 냄, 원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 물론 수호지보다는 빨리 만들어졌다.

 

[송사] 등에 조정이 송강을 초항시켰다든가 송강이 출항하였다든가 하는 표현이 많다. 그런데 이들 표현은 마치 송강이 선택의 여유가 있었던 뉘앙스를 주지만 송강의 출항 상황은 [송사] 장숙야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어(장숙야가 결사대 1000여명을 해주에 복병시켜두고 경장부대로 하여금 싸우게 한 뒤 거짓 패주, 복병들이 송강의 배를 불태워 대패, 부두목이 생포되자 송강도 항복) 차이를 보인다.

 

결론적으로 수호전의 송강 묘사는 상당부분이 과장 된 묘사로 송강 자신은 방납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고 초조정에 이용당한 초적일뿐이라는 것을 얻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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