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에서는 여인의 향기가 난다
역자에 따르면, 중국에는 “<홍루몽(紅樓夢)>은 만리장성과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난 지금 그 문학적 만리장성의 어느 언저리에 있는지 방향감각을 잃었다. 역시 역자에게 주워들은 것으로, 마오쩌둥 주석이 “<홍루몽>은 적어도 다섯 번은 읽어야 그 진수를 알게 된다”라고 했다는데, 그 전체 윤곽을 파악하는 데만 해도 최소한 두 세 번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자연스레 궁금해졌던 것은, 이 대작을 혼자서 써내려 간 조설근이라는 사람 또는 그로써 대표되는 중국인의 정신 세계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몰락한 권문세가의 자제로서 초야에 묻혀 평생을 지냈다고 하는데, 그러한 외적 환경이나 조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요즘 한국 소설 영역에서 삶의 전체성을 담아 내는 장편 소설보다는 산발적인 단편에 치우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번 <홍루몽>의 출간을 계기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홍루몽>에서는 짙은 여인의 향기가 난다 (“야릇한 향내가 코를 쿡 찔렀다. 무슨 향기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으나 온몸에 깊숙이 스며들면서 전신이 구름 위에 둥둥 떠오르는 듯했다”: 제6회에서 인용, “누나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무슨 향기인가요? 아직 한 번도 맡아 본 일이 없는 향기니 말이에요”: 제8회에서 인용). 이와 더불어 갖가지 이미지가 다채로운 빛깔을 드리운다(“보옥의 떼에 보채는 하는 수 없이 옆구리 단추를 풀고 속에 입은 붉은 비단 저고리 염낭에서 아롱진 주옥과 눈부신 황금으로 만든 목걸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제8회에서 인용). 따라서 <홍루몽>을 읽는 일은 일차적으로 그 향기를 ‘맡고’ 그 빛깔을 ‘음미’하는 일이 된다. 이것은 분명 색다른 체험이다.
‘금릉 12채’(남경의 열두 미인이라는 뜻)로 풍부하게 구현된 여성성이 중심에 놓여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소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번 새 번역판의 추천 글을 쓴 서경호 교수는 “대중적 인기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자기성찰과 인생에 대한 관조를 글로 써낼 수 있는 작가의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그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이 글에서 중국이 유가 사상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는 상식을 일단 깨어진다. 중국인의 외면적인 생활은 유가 사상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내면세계, 혹은 넓은 의미에서의 세계관은 불교와 도교에 의해 지배되는 숙명론에 더 접근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도입부에 불교와 도교를 대표라도 하듯 도인과 스님이 짝을 이뤄 등장하는데, 이 대목에서 저자는 나중에 사람(가보옥)으로 환생하게 될 이 소설의 본래적 주인공인 바위의 입을 빌려 자기 소설의 차별성을 간접적으로 선언한다. “… 지금까지의 이야기책들은 전부 판에 박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그런 케케묵은 냄새는 피우지 않는 것이 도리어 새 맛이 나지 않을까요? … 게다가 도회지의 속된 사람들 가운데는 정치에 관한 딱딱한 책을 즐기는 이보다 인정에 맞고 생활에 가까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 소설을 보면 그 태반이 임금과 재상을 비방하거나 남의 집 아녀자의 행실을 힐난하는 것이 아니면 남녀간의 치정 관계를 취급한 음탕한 이야기들뿐이거든요. 그리고 연애 소설이라는 것은 색정적인 저속한 필치로 더럽고 부정한 것들을 글에 담아서는 젊은 남녀들을 그르치고 있는데, 그 예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지요. 이야기마다 번안이 아니면… 어느 것이나 잡스러운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과연 읽어갈수록 여기 그려진 남녀간의 사랑과 애정 표현, 심리 묘사는 그토록 자연스러워 ‘인정에 맞고 생활에 가까’우며, 자칫 음탕함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 전개를 갈무리하는 ‘절제의 미덕’이 돋보인다. 그리하여 이 소설을 읽는 십 대는 핑크 빛 첫사랑을 꿈꾸게 될 것이며, 이십 대는 무분별한 열정에 가리워진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고, 삼십 대는 더 성숙한 사랑의 완성을 향해 매진할 힘을 얻고, 40대를 비롯한 중년의 사람들은 시들해진 사랑의 감정을 소생시킬 묘약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으로 노년에 이른 사람들은, 책 서두에 언급된, 우주만상의 실체도 필경은 텅 비어 있다는 공(空)에 대한 이치를 더 한층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물 흐르는 듯 줄줄 읽히는 한글 문체 곳곳에 백두산에 핀 꽃송이처럼 자리잡은 북한 말투가 눈길을 머물게 한다 (“돈냥이나마 선심을 쓰면 그 집으로선 솜털 하나 뽑는 거나 다름없지만 우리에겐 허리통 맞잡이가 될 게 아닌가?”: 제6회에서 인용, “그런데 그 절의 스님인가 뭔가 하는 요강 대가리 악당은 어디로 꺼지고?”: 제8회에서 인용).
조선족으로서 베이징에 근거지를 둔 역자가 번역 작업을 시작할 당시 지리적, 외교적으로 가까운 북한의 언어 문화를 1차적 자료로 참고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대목을 만날 때마다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써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는 그 주위에 어린 남다른 의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도 쪽에 치우친 남한 문학이 북녘 사투리와 결합될 때 우리 문학도 온전히 회복될 것이다.
대돈방 화백의 삽화 중에서 가장 뇌리에 남는 것은 제6회에서 습인이 살뜰하게 보옥을 보살피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비슷한 나이이지만, 계급적 차이와 성별을 넘어서는 어떤 애틋한 정이 차고 넘친다. 이 두 남녀의 만남과 여성성을 발휘한 습인의 보살핌은 언제나 모성에 지배 받는 남성의 역설적 연약함 내지는 열등함, 남성을 따뜻하게 보살핌으로써 남성에 대한 자신의 대척적 의미를 확인하는 여성성의 따사로움 사이의 긴장과 보완을 보여 준다.
이 문학적 만리장성의 어느 한 구석에서 한 측면에 집중해 들여다 볼 거리들이 많기 때문에 홍학(redology)이라는 집약적인 학문 분야가 성립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런 학문적 노력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독자들의 일차적 의무는 오직 즐기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과 달리, 전체적 윤곽을 굳이 파악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갈피갈피에서 풍기는 향취와 일화, 풍경, 정물, 현대적 심리 묘사 등을 따라가며 마음껏 즐기는 것이 <홍루몽>을 처음 읽는 사람들의 자유이자 특권이 아닌가 싶다. 꿈은 사실 깨고 나면 다 잊어버리게 마련이지 않은가!
홍루몽은 진한 사골국물이다
중국의 고대 장편 소설 홍루몽. 한국 사람들 대부분에게 '중국 소설의 대표작'을 물어본다면 대부분 '삼국지'나 '수호지', '서유기' 정도까지 밖에 대답하지 못한다. 그에 반에 중국 내에서는 3대 고대 소설 중에 하나로 꼽힐만큼 굉장히 문학적 가치도 높게 평가되고 있고, 중국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있는 이야기가 홍루몽이다. 얼마전 가수 유승준이 '드라마 홍루몽은 한국의 대장금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라는 발언에 모든 중국인들이 발끈하였고, 일본에서 홍루몽 성인게임이 출시되었다는 소식에 중국인들이 분노하였다는 이야기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의 완소(완전소중) 고대 소설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옆에 붙어있는 한국에는 소설의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했을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제대로 된 번역본이 지금껏 없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사람들이 홍루몽을 접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홍루몽 완역본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 12권 중에 1권과 2권을 접하게 되었다. 전권 12권에 등장인물 500명에 달하는 대장정에 돌입한 것이다.
1,2권의 내용은 이 소설의 도입부분을 차지한다. 홍루몽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배경을 시작으로 하여 주인공 가보옥과 그의 여인 보채와 대옥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거의 대부분이 가씨 집안 내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어 다른 소설들에 비해 좁은 배경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수 많은 인물들이 소개되고 들어가면서 엄청난 스케일이 펼쳐진다. 각 인물들의 개성있는 캐릭터와 그 안에 사랑과 욕망들이 담긴 소재들이 담겨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1권과 2권에서는 주인공 가보옥과 보채, 대옥의 약간의 러브라인을 암시해주면서 마무리가 지어진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앞으로의 이야기는 가보옥의 복잡한 사랑이야기와 가씨 가문의 부흥과 몰락의 내용이 담겨있다고 한다. 비록 대작의 앞부분만 살짝 맛보았지만 왜 홍루몽이 극찬을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 듯 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엄청난 분량으로 반지의 제왕 저리가라 할만큼의 스케일을 지니고 있음에도 인물 하나하나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들의 섬세한 감정들을 살려내면서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전달해주고 있다. 이 사람의 이야기가 지루해질 때 쯤이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색다른 흥미를 제공해준다. 물론 인물들이 헷갈리기 시작하면 정신없어지기는 하지만 반복해서 읽다보면 홍루몽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을 것이다.
리뷰를 끝맺으면서 드는 생각은 굉장히 부끄럽다는 것이다. 24시간 끊임없이 우려낸 사골국물을 혀 끝으로 한방울 맛보고는 '맛있다'고 평가하는 듯한 기분이다. 언젠가는 24시간 우려낸 사골 국물 진국에 쌀밥 한그릇 가득하게 말아서 '정말 맛있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나머지 3권부터 12권까지를 읽어보려 한다.
홍루몽은 특별한 소설이다
전혀 쓸모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는 누군가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화를 낼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의 계곡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일희일비(一喜一悲)할 부분도 있다. 사람 사이를 다루는 내용은 재밌다. 곰곰이 생각하며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맛이 난다. 많은 인간들이 등장하는 <삼국지>나 <수호지>, 또는 여러 장회소설도 비슷한 풍미가 있다.
<홍루몽>은 특별하다. 서양과 동양의 대립 구도를 만드는 게, 이젠 식상하지만 그만큼 또렷하게 드러나기에 나도 비춰 보아야겠다. 지금도 책장에서 거꾸로 뒤집힌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나를 노려본다. 오로지 그 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묘사라든가, 인간관계 구도를 그려내는 작업에 있어서는 조설근과 셰익스피어 두 사람을 동격에 두고 싶다.
언젠가부터 중국에 대해 많은 말들이 돌아다닌다. 새로운 세기에는 중국이 세계를 이끌어 갈 것이라는 따위의 말이 넘쳐난다. 물론 나도 그 말을 비난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누구의 꾐이든, 스스로의 선택이든 나도 중문학과에 진학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5년간의 대학생활에서 ‘전문가’가 되라는 주문을 받았다. 중국은 매우 넓은 영토와, 굉장히 많은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의 지역을 선택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설이었다.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셨다. “한 나라의 문학 전반을 훑어 읽고 그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면, 그 나라 민족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중문과 불량 학생이었지만, 조설근과 <홍루몽>은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이 하신 저 말씀도 기억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지만, 백 번을 듣는 것보다 한 번 직접 보는 게 나았다. 이번에도 옛말은 적중하다.
중국 것은 엄청난 스케일인 것이 많다. 1권의 맨 뒤를 들춰보면, 가나다 순서로 된 등장인물 안내와 이 책의 얼개를 이루고 있는 4대 가문의 가계도가 수록되어 있다. 중국 전토를 휩쓰는 <삼국지>도 그렇고, 서역까지 불경을 찾으러 가는 <서유기>도 그러하고 주체할 수 없는 중국인들의 스케일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가 보다.
<홍루몽>을 읽을 때 인간들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이야기 전반을 제대로 좇기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내용 대부분이 바깥일과는 거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사건들은 홍루(紅樓, 여인들이 기거하는 처소)에서 벌어진다. 우리 문학의 ‘몽자류 소설’인 <옥루몽>이나 <구운몽>과는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전쟁터에서 무공을 세우는 장면이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느낌으로 그칠지 모르겠지만, 세 소설의 주제가 한 곳으로 모여드는 느낌이다. 마치 탄천과 중랑천, 양재천이 한강으로 모여드는 것처럼.
반갑다. 아직까지 <홍루몽>은 깨끗한 완역본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상세한 각주와 한시를 맛있게 번역해 둔 부분은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중국어와 한문을 할 줄 안다면, 역자의 노력을 좀 더 보람 있게 느끼게 될 것 같다. 장회 소설의 백미는 “다음 회를 보시라”에 가득 담겨 있었다. 다시 군침이 돈다. “다음 회를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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