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인간세계에 대관원大觀院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一字師 2023. 7. 5.
반응형

인간세계에 대관원大觀院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佳園結構類天成 (아름다운 정원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나니)

快綠怡紅別樣名 (시원한 푸르름과 보기 좋은 붉음은 서로 다른 모양일세)

長檻曲欄隨處有 (긴 난간과 구부러진 난간은 어디든지 있건만)

春風秋月總關情 (봄바람과 가을 달은 모두 정을 머금고 있네)

 

이것은 청나라 사람 부찰명富察明이 “대관원大觀院”의 의미를 노래한 시인데, 『홍루몽』이 세상에 나온 지 오래지 않아 지은 것이다.

 

시인은 시의 서문에서, “소위 말하는 대관원은 즉 지금의 수원随園 옛터이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정말 그럴듯하게 수원은 작가 조설근曹雪芹이 “계획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홍루몽』이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바로 “인간세계 어디에 대관원이 있을까?”에 대한 쟁론이 시작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대관원은 소주蘇州에 있는 졸정원拙政園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북경에 있는 공왕부恭王府의 정원이라고 하고, …….

 

그렇다면 인간세계에 도대체 대관원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이 문제는 기실 “가보옥賈寶玉은 작가 조설근 자신인지 아닌지”, “가부賈府는 조씨 집안인지 아닌지”의 문제와 같은 것이다.

 

만약에 “대관원” 중에 수원, 졸정원, 공왕부의 정원이나 기타 어떤 정원의 그림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수원의 전신前身은 수隋나라의 직조원織造園인데, 바로 조부曹頫가 강녕직조江寧織造를 하던 수혁덕隋赫德의 정원이다. 남경南京에 있던 조씨 집안의 가산은 모두 옹정雍正 황제에 의해 신임 강녕직조에게 하사하였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이 수원이 “예전에는 조가曹家의 옛터”라고 말한 것을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다.

 

수직조가隋織造家의 정원은 후에 “성령파性靈派 시인 원매袁枚가 소유하여, “隋”를 “随”로 바꿔서, 수원随園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대관원과 확실히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소주는 조설근의 외삼촌 이후李煦의 임지로, 소주직조서는 졸정원과 멀지 않아서, 조설근은 거기에 가보았을 것이고, 또 인상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조설근은 공왕부 정원도 가봤을 수도 있어, 『홍루몽』에서 “방원芳園은 황궁의 서쪽을 향해 지었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바로 “황궁 서쪽”에 있는 것이 공왕부이다.

 

조설근은 대관원을 구상하면서, 터무니없이 날조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인데, 유년시절의 옛집의 정원에서 보았던 남북 정원의 좋은 구조가 “모두 그의 눈과 마음속에 담겨 있던 것을 의도적으로 찾아서 그가 자기도 모르게 원고에 써넣은 것 역시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 때문에 대관원이 바로 수원이나 공왕부 정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사실상 『홍루몽』에서 묘사한대로 사람이 인공적으로 건축한 현대의 “대관원” 이외에, 어느 곳에서도 소설에 나오는 대관원과 똑 같은 정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대관원 도형의 모양을 그리기 시작할 때에 나온 표현이 있다.

 

제 16 회에 지연재脂硯齋는 자신이 쓴 비어批語에서 “대관원은 보옥과 열두 아가씨들을 연결하는 태허환경太虛幻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가정賈政을 따라 대관원의 정전正殿에 이르른 가보옥은, “홀연히 마음속에 동요가 일어나, 도리어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다”라는 표현에서 대관원은 바로 태허환경이 변하여 된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다 하늘의 경치를 모두 구비하고 있는 대관원은 조설근의 붓 아래서만 존재하고, 이 세상에는 출현한 적이 없는 것이다.

 

몇몇 연구자들은 제기하기를, 대관원 안에는 남방南方에 있는 홍매, 취죽翠竹, 마름 열매, 계화나무 등이 자라고 있고, 또 북방의 것으로는 온돌과 창호지만 있을 뿐이라고 했는데, 제 49회에서 “유리琉璃 세계의 백설과 홍매”의 경치 역시 현실생활 중에서는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대관원이 조설근의 예술적인 창작이라는 것을 설명하여 주는데, 가보옥과 열두 아가씨들에게 제공된 전형적인 환경으로, 금을 품고 옥을 버리는 『홍루몽』의 주제를 이 무대 위에 연출하였던 것이다.

 

세간에 이런 곳이 있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고, 문장 창조의 효과를 내려는 배경으로 해 놓은 것이다. 작가 조설근은 그 당시에 “인간세상 어디에 대관원이 있나?”라는 쟁론을 예견한 것은 아닐 것이나, 이미 사전에 대답을 만들어 둔 것이다.

 

홍루몽에 나오는 명언

과목성송過目成誦 (한번 보고 외우다)

 

[명언이 나오는 『홍루몽』 본문]

林黛玉笑道, “你說你會過目成誦, 難道我就不能一目十行麽?” (第 二十三回)

 

[해석문]

임대옥林黛玉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빠는 자신이 한 번에 다 외울 수 있다고 말하는데, 아무렴 나도 한 번에 열 줄은 못 외울 것 같아요?” (제 23회)

 

[명언고사]

삼월 어느 날에 아침밥을 먹고 나자, 보옥은 『회진기會眞記』를 들고 심방원沁芳園 다리 옆에 복사꽃이 떨어져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읽고 있었다.

 

잠시 후 임대옥이 어깨에 꽃 주머니를 매단 꽃삽을 메고,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다가왔다. 대옥은 보옥의 손에 든 책을 잡아채서 읽어 보았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어 순식간에 여러 장을 읽었는데, 문장이 민감하고 의미도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옥은 웃으면서 대옥을 놀려댔다.

“내가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근심도 많고 병도 많은 사람’이고 ‘나라도 성도 무너뜨린다는 경국지색’이 바로 너야.”

 

그 말을 들은 대옥은 얼굴이 빨개지며 보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못 말리겠네! 또 헛소리하는 거예요? 멀쩡한 사람이 그런 책을 어디서 구해가지고 그런 못된 말만 배워서 나를 업신여기고 모욕하는데, 내가 가만있을 것 같아요? 외숙부와 외숙모께 가서 일러바칠 거예요!”

 

그렇게 ‘모욕’이란 두 글자를 말하더니 대옥의 두 눈은 이미 발갛게 충혈 되어 눈물을 글썽거리며 몸을 홱 돌리더니 가려고 했다.

 

다급해진 보옥은 얼른 앞을 가로막았다.

“왜 그래, 대옥아, 정말로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줘! 내가 일부러 너를 모욕했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저 연못에 뛰어들어서 머리는 등에 울퉁불퉁 부스럼이 난 왕거북한테 잡혀 먹혀서 결국은 나도 커다한 거북이가 되고 말거야. 먼 훗날 대옥이 네가 정일품 정경부인이 되어 한 평생 잘 살다가 승천하게 되면, 그때 나는 너의 무덤 앞에 세운 비석을 한평생 등에 지고 있겠어.”

 

그 맹세를 들은 대옥은 너무나 황당한 말에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는 한편으로 젖은 눈을 비비면서 웃으면서 말했다.

 

“놀라게 하려고 한 말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황당한 말만 계속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 겉만 번지르르해서 잘 자란 것 같이 보이는 묘목에 이삭은 안 달리고 은빛 창끝은 백랍처럼 흐물거리는 꼴이네요.”

 

보옥은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너 방금 전의 그 말은 『서상기西廂記』에서 배운 말이지? 나도 어른들한테 일러바칠 거야.”

 

대옥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빠는 자기가 한번 보면 다 외운다고 허풍을 떠는데, 나라고 한 번에 열 줄을 못 외우겠어요!”

 

보옥은 책을 받아 챙기면서 말했다.

“우리 여기까지만 말하고, 얼른 꽃잎들을 모아서 땅에 묻어주자꾸나.”

 

홍루몽에 나오는 명언

흘불료도착주吃不了兜着走 (먹던 밥그릇을 싸들고 도망치다)

 

[명언이 나오는 『홍루몽』 본문]

茗烟又囑咐他不可拿進園去, “若叫人知道了, 我就吃不了兜着走呢。(第 二十三回)

 

[해석문]

명연茗烟은 또 그에게 대관원 안에는 절대 가지고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저는 먹던 밥그릇을 싸가지고 도망쳐야 합니다요.” (제 23회)

 

[명언고사]

보옥은 고요함 속에서 번뇌가 일어나, 까닭 없이 우울해지며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고 하며 들락날락거리면서 답답해했다.

 

대관원에 있는 대부분의 여자애들은 천진난만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앉았다 누웠다하며 무심하게 농담을 지껄이며 아무도 보옥의 심사를 헤아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마음이 편치 않은 보옥은 원내에 있기가 지루하여 밖으로만 싸돌아 다녔지만, 오히려 더 머릿속은 흐리멍덩해지는 것이었다.

 

그의 시종 명연은 보옥의 그런 모양을 보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보옥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생각이 한 가지 떠올랐다.

 

그는 곧바로 길거리 책방으로 달려가서 고금소설에서 이름난 조비연趙飛燕과 조합덕趙合德 자매의 이야기, 측천무후則天武后 이야기, 양귀비楊貴妃 이야기 등의 야사와 희곡 대본을 많이 사들고 와서 보옥에게 보여주었다.

 

한 번도 그런 책들을 본 적이 없는 보옥은 보자마자 마치 보배를 만난 듯이 진귀하게 여겼다. 명연은 또 그에게 절대로 그것들을 대관원 안으로 가지고 가지 말라고 수차 당부했다. “누군가 알게 되면, 저는 먹던 밥그릇을 싸들고 도망쳐야 해요!”

 

그러나 보옥은 그것들을 떼어놓고 가기가 서운하여 여러 번 생각하다가 문장이 좋고 짜임새가 있는 몇 가지를 골라서 가지고 원내로 들어가서, 책상머리에 놓고 아무도 없을 때 몰래 꺼내서 읽었다.

 

홍루몽이야기

조마마趙嬤嬤가 가부賈府가 소주蘇州와 양주揚州에서 어가를 영접했었다고 말한 것에 실제적인 근거가 있나?

 

『홍루몽紅樓夢』 제 16 회에 가부賈府는 원비元妃의 성친省親을 준비하는데, 가련賈蓮의 유모 조씨(趙嬷嬷)가, 가부가 소주蘇州와 양주揚州 일대에서 조선을 감독하고, 방파제를 수리하던 때의 일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단 한 차례의 어가 영접을 준비하는데, ”은자를 바닷물이 흐르는 것처럼 썼어요!”

 

“은자가 흙더미처럼 쌓여 있고, 온 세상의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고 바다를 메꿀 수 있을 만큼 많았는데, ‘죄과가석罪过可惜”(죄가 너무 안타깝다)이라는 네 글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답니다.”

 

지연재脂硯齋는 이 구절 아래에다 비어批語로, “정말로 사실이고, 본적이 있다”라고 썼다.

 

같은 회에 또 비어로, “원비가 가부에 성친省親온 광경을 묘사하여 황제가 남순南巡했던 일을 쓴 것인데,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지난날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현재에서 보는 것을 많이 토로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조씨 유모의 말은 실제적인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강희황제康熙皇帝는 재위 61 년 동안에 강남 순시를 여섯 차례나 했는데, 그중에 다섯 차례를 강녕직조江寧織造의 관아 행궁에서 묵었고, 이 다섯 차례 중에서 또 네 차례는 조설근曹雪芹의 조부 조인曹寅이 맡았다.

 

이에 대해 조씨 유모는, “지금 강남에 있는 진甄씨 댁인데, 아이구, 그 집의 권세가 아주 대단했지요! 그 댁에서만 무려 네 차례나 어가를 영접했다는 것을 아세요?”라고 말했으니, 분명히 헛된 말은 아닐 것이다.

 

조 씨 집안의 당시의 겉치레는 지금은 이미 세밀하게 조사할 수도 없지만, 당시 어떤 이가 이런 시를 읊었다.

 

三漢河干筑齊家 (삼한의 강물로 황제의 집을 지어)

金錢濫用比泥沙 (돈을 쓰기를 진흙이나 모래처럼 썼다네)

 

이런 시를 쓴 것은 바로 강희황제가 남순南巡한 것을 쓴 것인데, 조인 등이 강남의 염상鹽商들이 나서서 황제의 행궁을 건축한 일을 말한 것으로, 조씨 유모의 말이 허언은 아닌 것이다.

 

『성조오행강남공록聖祖五幸江南恭錄』의 기재에 의하면, 황제가 과주댐(瓜州閘)에 이르렀을 때, 조인 등은 “황제에게 요리상을 일백 개나 차려 올리고, 골동품을 나란히 진설하였다”라고 했다. 다음날에 황제가 소주蘇州에 행차했을 때도 조인 등은 또 일백 개의 요리상을 차렸다”라고 하였다.

 

당시 조인은 태반으로 만든 백자 그릇을 세 개 사는데, 120 냥이나 되는 은자를 썼다고 하는데, 일백 개의 요리상을 차리는 데는 얼마나 많은 경비를 썼을 지는 능히 추측할 수 있고, 그리고 이것은 어가 영접의 일 중에서는 하찮아서 말할 가치조차 없는 일에 불과하다.

 

만약에 조씨 집이 어가를 네 차례나 맞았다고 한다면, 은자는 아마도 바닷물이 흐르듯이 썼을 것인데, 직조랑중織造郞中이라는 직책이 필시 대단히 수입이 좋은 관직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 안 것이다.

 

조인의 연봉은 백은 105 량에 지나지 않아, 소위 말하는 쓰고 남는 것을 더하여 셈한다고 하여도, 얼마 되지 않는 수백 량의 은자로는 어쨌든지 간에 어가를 한 차례 맞이하기에도 부족한 돈이다. 그 중의 오묘함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조 씨 유모는 한 마디로 진상을 밝힌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황실의 은자를 가져다가 황제에게 쓰는 것뿐이지, 뉘 댁에 그런 눈먼 돈이 있어 헛되게 흥청망청 야단법석을 떨었겠어요?”

 

강희황제도 자연히 이 이치를 알게 되어, 제 4 차 남순 이후로는, 조인과 그의 처형 이후李煦에게 회남淮南과 회북淮北의 염정을 교대로 관장하게 하였다. 회남과 회북의 매년 세금은 나라 전체 세금의 반이나 되어, 그 손익은 국가 경제를 움직일 정도였으니, 염정이야말로 천하제일의 수입이 좋은 관직인 셈이다.

 

조씨 집안은 비록 이런 수입이 좋은 관직을 얻었으나, 황실의 낭비를 메우고, 직조織造의 적자를 보충하고, 또 궁정의 독촉으로 여러 곳으로 금전을 보내다보니, 수입이 아무리 풍부하다고 하여도 채우기가 어려워져서, 조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누적된 적자가 마침내 32만 량에 달했다.

 

강희황제의 재위 시에는, 그래도 사정을 봐주었지만, 강희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회계장부를 따져야만 하게 되었다. 비록 조씨 집안에 대한 차압몰수의 원인이 다 다르지만, 그러나 내탕금을 낭비하여 적자를 조성한 것이 분명히 그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五色雲霞空外懸 (오색의 구름과 안개가 허공에 걸려 있는데)

可憐錦綉欲滿天 (가엾게도 아름다운 것들은 세상을 채우려고 하네)

 

조설근이 다른 책보다는 떠들썩하지는 않게 어가를 맞는 일을 묘사하였지만, 작가의 친구였던 돈성敦成은 일찍이 그의 선조 조인이 강녕직조를 맡은 바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진회秦淮강변에 있는 직조織造 관아 안에서의 호화스런 생활은 분명히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어서, 그로 하여금 분발하여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민 거작을 창작해 내게 하였던 것이다.

 

홍루몽이야기

“이아두二丫頭”는 조설근曹雪芹의 지울 수 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일까?

 

소설 『홍루몽紅樓夢』에 나오는 이 “이아두二丫頭”는 사람들이 “이목두二木頭”라고 부르던 가부賈府의 둘째 아가씨가 아니고, 가보옥賈寶玉이 진가경秦可卿의 장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농가의 어린 소녀이다.

 

그녀의 성과 이름을 아무도 모르지만, 한 노파가 그녀를 “둘째야”(二丫头)라고 불렀으니, 둘째는 곧 그녀의 이름이 된다. 이 인물로 말할 것 같으면, 세심하지 못한 독자는 심지어 생각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인데, 분명한 것은, 『홍루몽』에 출현한 인물들 중에서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도 소홀히 다루어졌다.

 

초대焦大는 비록 잠간 나왔지만, 작가는 그래도 그가 “마음대로 트집잡도록”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신들이 어디서 이것을 해본 적이 있겠어요, 서 있는 자리에서 물러나 있으면, 내가 실을 짜서 보게 해 줄게요”라고 마침맞게 한마디만 하고는, 곧 소리쳐 부르는 바람에 그 자리를 떠나서 가버리고 말아, 구름 속으로부터 비친 한 줄기 햇빛같이 사람들이 그 따뜻함을 미처 느낄 새도 없이 구름 뒤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한 줄기 햇빛은 오히려 가보옥의 마음의 문을 비추었다. 가보옥은 비단 옷에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부유한 생활을 하고, 대관원大觀院 창밖의 세계는 본 적이 없어서 삽과 호미나 쟁기 같은 물건을 보고, 기이하다고 느끼고, 방직기를 봤을 때는 더욱 신선하게 생각되어 참지 못하고 앉아서 돌려보는 장난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대략 17,8세 되어 보이는 농촌 여자아이가 뛰어 오더니, ‘건드려서 망가뜨리지 말아요!’하고 소리를 질렀다.

 

대략 가보옥은 출생한 이후에, 엄한 아버지의 책망이외에는, 그 어떤 사람도 그에게 이와 같이 당면해서 소리 지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이 방직기는 소녀가 아끼는 물건이거나, 아마도 그녀 일가는 이 방직기로 생계를 유지하는 기계였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성질이 급한 사람인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 거칠고 억척스러운 농촌 소녀의 토속적인 풀향기가 홀연히 뿜어져 나왔을 때에, 지분향 속에서만 자라난 보옥 도련님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구름 속에 비친 한 가닥의 햇빛을 본 것처럼, 눈앞이 갑자기 밝아졌을 것이다.

 

가보옥의 생활은 지나치게 편협해서, 신변의 자매들과 하녀들 외에, 게다가 그는 지분냄새가 안 나는 소녀는 본적이 없었을 것이다. 습인襲人의 집에 한 번 갔었을 때조차도, 마치 북극탐험을 하는 것같이 흥분하던 보옥인데, 당시 이 직설적이고 대담하며, 시골정취가 넘쳐흐르는 촌 아가씨를 보고서, 어떻게 신선함과 흥분을 안 느낄 수가 있었겠는가?

 

城中桃李愁風雨(성안에 있는 복숭아와 오얏은 비바람을 근심하고 있는데)

春在溪頭薺菜花(봄은 시냇가의 냉이꽃에 와있구나)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여인들의 무리 속에서 생활이 습관화된 사람이 일단 자연을 거닐어 보니, 자연의 질박한 아름다움에 몹시 놀란 것이다.

 

가보옥이 당시에 느낀 모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일종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이며, 진종秦鐘이 불량한 의미로 그를 잡아끌며 “너는 괴상한 취미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했을 때에, 보옥은 뿌리치며: “망할 것, 다시 그 따위로 말하면, 때려주겠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한 가닥 구름 속에 비친 태양은 하필이면 아주 잠간 만에 멈추어 버렸는데, 가령 그 ‘둘째’ 라는 소녀가 보옥 도련님에게 같은 신기함과 호감을 가졌다 하더라도, 생활적으로는 그들에게 긴 기회와 인연을 주어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소녀가 매우 빨리 불려서 가버린 것은, 아마도 가사를 돌보는 일이 그녀에게 맡겨져 있었을 지도 모른다. 보옥 도련님이 농가를 떠날 때에, 그녀가 가슴에 어린 동생을 안고 있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17,8세는 당시 농촌에서는 이미 출가했어야 하는 다 큰 처녀인데, 이것은 그녀 가정 살림의 어려움을 설명하여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작가 조설근의 붓 아래에서 출현한 그 농촌 소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기 위해서 총총히 왔다 갔을까? 어떤 사람은 작품이 다 난처한 시대에 창작한 것이고, 가보옥의 반역적 성격은 노동인민의 아름다운 품성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마치 그 소녀는 가보옥을 “재교육” 시키려고 온 것 같이 생각되는데, 조설근은 이런 의식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작가의 생활 경력 중에서 분명히 그에게 극심한 인상을 남긴 농촌 소녀가 있어서, 창작을 할 때에 자기도 모르게 써넣은 것일 수도 있다. 일부러 여유 있는 장면에다 안배하여, 나중에 마치 가운賈蕓과 홍옥紅玉이 옥신묘獄神廟에 나타나는 것처럼, 가보옥이 출가한 뒤에 다시 나오게 하려고 한 것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지연재脂硯齋의 비어批語에는 이 장면에서 “뒷글이 또 있다”라는 암시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당연히 모두 근거 없는 상상이고, 사실이 아니라고 비방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기왕에 조설근이 이러한 인물을 만들어 냈으므로, 다른 사람이 끊임없이 공상을 떠올리는 것도 막을 수 없으며, 이것은 독자의 권리이고 즐거움이기도 하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