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설근의 가세家世와 홍루몽의 창작은 어떤 관계가 있나?
조설근曹雪芹의 가세를 말하려면, 입신출세와 번성과 부패와 몰락의 3 단계로 개괄하여야 한다.
조가曹家의 본적은 요양辽阳(일설에는 하북의 풍윤丰润이라는 주장도 있음)이고, 본래 철령铁岭에 살았는데, 잡혀서 료양으로 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떻든 간에, 동북 변경 지방이고, 여진족이 거주하는 지방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서기 1616년, 여진女真부락의 수령 노이합적努尔哈赤이 혁도아라赫图阿拉(지금의 요녕성 신빈新賓)에 후금后金을 건립하고, 명 왕조를 향하여 도전을 시작하여 5년 후에는 료양과 심양을 점령하였다.
조설근의 5대조 선조 조세선曹世先(후에 석원锡远으로 개명)이 대략 이 때에 여진인에게 잡혀갔는데, 정백기正白旗에 편입되어 포의기包衣旗의 하인으로 있을 때에 만주족 주인을 따라 정벌 전쟁에 나갔다가 공을 세워“신분身分”을 취득하였다.
조설근의 4 대조 선조 조진언曹振彦은 이미 산서성山西省의 대동지부大同知府와 절강성浙江省의 염법도盐法道를 지낸 바 있는데, 노예의 신분에서 “입신출세”하였으니, 그간의 고충은 비록 전하여 지는 바 없어도 알 수가 있겠다. 『홍루몽』에서 조가의 하인 초대焦大가 한 말을 빌면, 선조가 전쟁터에서 사경에 처한 주인을 요행히 구하여 집안을 일으켜서 남긴 가업이다’라고 말한 것은 그냥 헛되게 떠다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조가는 조설근의 증조부 조새曹玺와 조부 조인曹寅 때에 번성하였다. 그 기간의 연유는 조가는 정백기正白旗에서부터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기旗는 여진인의 군사조직을 8 기로 나눈 것인데, 정황正黄(깃발 면 전체가 황색인 황기), 양황镶黄(깃발의 테두리가 황색인 깃발), 정백正白, 양백镶白, 정홍正红, 양홍镶红, 정남正蓝, 양남镶蓝이고, 각 기는 7,500 명으로 되어 있고, 노이합적의 자제가 수령을 맡았다.
정백기는 본래 노이합적의 막내아들 다이곤多尔衮이 통솔했는데, 한동안은 다이곤의 권력이 강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이 부대의 가장 중요한 군대를 순치황제가 친히 장악하여, 정황과 양황을 합쳐 “상삼기上三旗”라고 부르고, 황제의 친위대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조가는 왕야王爷의 가노家奴에서 황제의 내신內臣으로 변하였는데, 이것은 순치 8년 1651년의 일이다. 순치 11년, 황제의 셋째 아들 현엽玄烨이 태어나자, 조설근의 증조모 손孙씨가 그 황자의 “유모”로 선발되고, 조새의 아들 조인도 뽑혀서 입궁하여 현엽을 수행하여 같이 공부하였다.
이런 일단의 관계로 인하여, 현엽, 즉 강희 황제는 제위에 오른 다음 해인 1663년에 그의 “유모의 남편”조새를 강녕직조江宁织造로 보내 관장시키고, 3 대를 계승하게 했다. 조설근의 조부 조인曹寅의 뒤를 이어 강녕직조를 맡은 조부曹頫는 1727년 옹정 5년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64년 동안 맡아온 직분에서 해임되었다.
강녕직조는 본래 대단한 직무는 아니나, 황실을 대신해 강녕 일대의 직물을 왕실에 제공하는 일이다. 그러나 조가와 강희 황제는 이렇게 “황제폐하와 호흡이 맞는”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강남에 있는 관리와 민정에 관한 상황을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고, 심지어 지방행정 장관의 상주문도 어떤 때는 조인의 상주문 안에다 동봉하여 헌상하기도 하였다.
조인이 그 직분에 있을 때에, 강희는 6 차례나 강남을 순례하는 중에 4 차례를 강녕직조서江宁织造署에 머물렀다. 조가는 행차를 맞을 때면, 은자를 바닷물이 흘러내리듯이 썼는데, 당시의 조가가 정말로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가세가 왕성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런 번영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강희가 죽은 뒤 5년이 되던 해, 옹정황제는 조부의 가산을 차압 하고, 북경에 있는 집만 남겨 주었다. 60여 년간 있던 남경南京에서 북쪽으로 옮긴 조가는 이때부터 몰락하여 조설근의 때에는 이미 “온 집안이 죽과 술을 때때로 외상으로 얻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가가 차압된 것은, 당시의 황권 쟁탈과 관련이 있을 것이나, 또 다른 관점도 있다. 조가는 그렇게도 혁혁하게 빛나고 득의양양한 권력을 누리다가 몰락했기 때문에, 이런 흥성에서 몰락한 처지가 된 조설근에게 『홍루몽』의 창작을 촉발했을 것이고, 또 그에게 풍부한 창작 소재를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루쉰은,‘누구든지 중류가정에서 곤궁한 처지로 떨어지게 되면, 그 과정에서 대개 세상 사람들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내한呐喊·서언自序』)라고 생각하였다. 조설근도 부유한 가정에서 곤궁한 처지로 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홍루몽』은 어느 시대에 세상에 나왔나?
대략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 북경성에서는 문화사적으로 큰 일이 발생하였다. 큰일이란 바로 당시 서쪽 교외에 있는 한 초라한 초가집에서 나온 원고가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인데, 이 원고를 친구들 간에 경쟁적으로 베껴서 빌려 읽었다.
당시에 이 원고를 본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하고, 책도 다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저작자는 안타깝게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유감으로 생각하였다. 이 원고가 바로 나중에 땅속에 묻혀 있는 한 하찮은 늙은이가 전국을 진동시켜 천만인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 세계를 휘황하게 빛나게 한 거작 『홍루몽』으로 전해졌다.
『홍루몽』은 대략 건륭 10년에서 30년 즉 1745년에서 1765년 사이에 책으로 쓰여졌다고 하는데, 강희, 옹정과 건륭의 3 대의 사회역사를 배경으로 반영하였다. 그것은 중국 봉건사회에서의 마지막으로 번영한 시기이다.
청 왕조는 서기 1644년에 산해관으로 들어와, 대략 40년을 걸려서 저항과 반역을 진압하고 정권을 공고히 하여, 사회와 경제면에서 번영하고 발전하는 시기를 얻었다. 건륭 연간에, 전국에서 거둬들이는 조세 수입은 순치顺治 때의 2천만 량에서 4천여만 량으로 증가(일설에는 7천만 량)했고, 인구는 명나라 말보다 2천만 명이 적은 3억 명 가량 되고, 상공업도 대폭적으로 발전하였다.
경제의 번영은 통치자를 극도로 사치하게 하여, 낭비에 절제가 없었다. 건륭 때의 권신 화신和珅이 가산을 몰수당할 때, 은으로 계산하여 8억 량이나 되었는데, 그가 각료로 지낸 20년간의 국가 수입의 반이나 되었다.
호남포정사湖南布政司 정원상郑源鹴이 혼인을 치르면서 혼수의 일부를 돌려보내는데 대형 선박 12 척의 깃발이 찬란하게 강가에 빛나게 나부꼈다고 한다. 『홍루몽』은 봉건사회의 통치계급의 붕괴하기 전야를 녕국부와 영국부의 일상생활을 통해 세밀하게 묘사했는데, 방탕하게 주색에 빠져 있는 아무 의미도 없는 생활 실상을 생동하게 반영하였다.
당시는 위기가 사면에 잠복해 있는 시대이기도 하였는데, 강희 말년에 황위를 쟁탈하기 위하여 통치 집단 내부의 모순이 격화되어, 부자간과 형제간이 서로 싸움을 도발하고 패거리를 짓기도 하였다. 조가曹家는 이 투쟁 중에 연좌되어 몰락하였을 가능성이 짙다.
당시의 민족모순과 계급모순도 아주 첨예하여, 건륭이 병사한 이듬해인 1796년부터 지속적으로 10년간이나 백련교白莲教의 봉기가 지속되고, 55년 뒤에는 홍수전洪秀全의 봉기도 폭발하여, 청 왕조가 뒤집혀 멸망하는 조종을 울렸다.
『홍루몽』 안에 가부賈府 중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모두가 서로들 원망하는 눈초리로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잡아먹으려고 하였다’라고 했는데, 바로 그 당시의 봉건사회가 분열하여 와해되는 상태의 축소판인 것이다. 조설근은 가부를 ‘바깥의 뼈대는 아직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주머니 속은 오히려 이미 다 차 오른 때’라고 묘사하여, 중국 봉건사회가 천수를 다할 때가 멀지 않았음을 나타냈다.
이때는 또한 사상통치思想統治가 가장 엄하고 잔혹한 시기였다. 강희, 옹정과 건륭의 3 대의 백여 년 동안에 문자옥文字狱이 백여 차례나 일어났다.
조설근이 태어난 갑진년을 근거로 하여 말하면, 조설근이 태어난 지 3년 되던 해, 즉 옹정 4년 1726년에 유명한 “사사정안査嗣庭案”이 발생하였다. 이 과거시험관이은『시경』에 나오는 한 구절인 “유민소지维民所止”를 문제로 냈는데, 어떤 이가 옹정의 머리를 벤 것이라고 말하여 (“옹雍”자에서 머리를 떼어내면 “유维”자가 되고, “정正”자에서 머리를 떼어내면 “지止”자가 됨), 그 결과로 옹정에게 자기의 머리를 베게 만들었던 것이다.
조설근이 세상을 떠나기 6년 전인 건륭 22년, 1757년에도 황제는 반청 서적을 수색하여 찾아내라는 조서를 내렸다. 조설근은 바로 이렇게 법규로 사상을 속박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단에서 조설근이 ‘전혀 간섭을 하지 않는 사회’인데, ‘다만 기분 나쁠 때만 미운 말로 성지를 내린다’라고 『홍루몽』에서 말한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오색찬란하던 대관원이 어찌하여 스산한 기운에 휩싸이게 되고, 자유와 애정의 정당한 추구가 무정하게 짓밟히거나 억눌림을 당하여 발전하게 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홍루몽』이 나온 시대를 말하면서 응당 제기해야 할 것은, 『홍루몽』이 세상에 나오면서 동시에 중국의 문언소설 창작의 최고봉인 『요제지이聊斋志异』와 중국의 대표 풍자소설 창작의 최고봉인 『유림외사儒林外史』가 차례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수호전』과 『서유기』와 『금병매』등을 거쳐 창작을 할 준비를 한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종강毛宗岗과 김성탄金圣叹 등에 이르러 비평자의 이론으로 총결되었으니, 중국의 소설창작의 성숙된 시기가 온 것이다.
『홍루몽』은 바로 이런 시대에 나온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홍루몽』을 읽을 때, 이런 대배경을 염두에 두고 체험해 나간다면, 이 명저의 사상과 내용을 더욱 심층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从《红楼梦》看曹雪芹家族的兴盛与衰落
四大名著之一的《红楼梦》,写于清乾隆年间,该书集思想性与艺术性于一体,是自成书以来就被广大读者喜爱的一部书,先后有过十几个版本,因为流传甚广,读者甚众,从不同角度,不同思想研究这部书的人形成多个派别,直至今日,无论男女老少,对于这部书的喜爱依然乐此不疲。
《红楼梦》写的是以贾家为代表的四大家族的兴衰,现实中正是作者曹雪芹家族生活的缩影,而作者曹雪芹的一生正是经历了曹家从盛极到衰落的过程。
曹家原为汉人,后为满洲正白旗包衣,包衣系满语音译,家奴的意思。曹雪芹祖上曾为明朝下级官员,驻守辽东,后被清攻破辽阳后归附,后随清入关,在多次战役中屡立战功,也就是从那时候起,曹家开始发迹。
중국 4대기서 『홍루몽』 읽기 (6)
조설근의 예술적 솜씨는 사람을 감탄케 한다. 그가 역조해낸 수 많은 문학형상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이 생동할 뿐만 아니라, 이 형상들을 유기적으로 함께 조합하여 동일한 생태生态의 인물 집합체를 이룬 것에 있다.
『홍루몽』 이전에도 중국문학에는 이미 성공한 문학형상이 많이 출현했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단선이 많았고, 대개 한 인물의 주요 행위가 일단락 되고나서 한 인물이 출현했다. 『홍루몽』에서는 일상생활의 자세한 줄거리를 사용하여 이 그물들을 한 화면 위에 조직하여, 누가 무엇을 하던지 간에 여유를 남겨두었다. 작은 일로 큰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하고, 세밀한 줄거리로 인물을 은폐했다. 또 한 가지 재능에만 빼어나게 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역사 중에서 인물 형상을 만들어 낸 경우가 많았다. 창작자는 취사여부를 생각하고 수정하여 지나치게 다듬고 개념화하고 유형화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홍루몽』은 생동한 현실생활 쪽으로 가려했지만, 현실은 조설근을 속박했는데, 그러한 현실이 조설근을 만들게 한 것이다. 『홍루몽』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앞으로도 이런 예를 볼 수 없는 현실주의 문학의 거작이 된 것이다.
『홍루몽』의 묘사는 한 귀족가정의 쇠락에 불과하나, 그것은 사회 전체의 본질을 반영했다. 중국 봉건사회는 비틀거리며 2천여 년을 걸어 왔는데, 『홍루몽』은 그 말기에 탄생했다. 비록 청 왕조가 개국하여 몇 대의 군주는 정신을 가다듬어 나라를 잘 다스려 왔지만, 이미 부패는 “바깥의 가마는 아직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안의 주머니는 맨 위까지 차 오른”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통치계급 중에서 “높은 지위와 영화롭고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방책防柵을 짜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또 “그들의 자제는 이러한 생활 속에서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근력筋力과 예礼가 다 닳아 없어져버려, 대를 내려 갈수록 더 못해졌다.” 그 시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마치 이미 집이 낡아 넘어져 결국은 역사를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제멋대로 방자하게 생활했다. 마치 세계 종말의 전야처럼 미친 듯이 날뛰며 육욕에 빠져 절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부 다른 사람들은 그런 방종한 사람들의 향락에 더욱더 피눈물을 흘렸다. 이런 부패는 전체 사회제도와 심지어 그런 제도에 맡겨진 사람까지 철저히 부패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기의 역사를 자세히 돌아볼 때, 응당 어느 한 곳이나 어느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도록 확실하게 규정지을 수 없다. 아마도 봉건사회는 그 시대의 생존자들이 공동으로 탄식하는 가운데 붕괴되었을 것이다. 이런 어쩔 수 없는 철저한 부패를 느낀 조설근은 그 모든 것을 가부를 통해 필묵으로 투시경을 사용하여 표현해 내어, 불후의 명저 『홍루몽』을 만들어 냈다.
조설근은 녕국부와 영국부의 흥망성쇠를 통해 그 시대의 본질을 진실하고 심각하게 표현했는데, 이것은 그의 가정과 조설근 본인의 경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설근의 선조는 료양辽阳의 한인인데 일설에는 철령이라고도 한다. 후금(청)의 군사귀족이 명 왕조를 쟁탈할 때 관외关外에 들어갔다.
조가曹家의 선조는 비록 내무부의 포의布衣였지만, 그러나 황제의 직속이어서, “제왕의 창업에 참가하여”, 나중에 “신분”을 얻었던 것이다. 특히 조설근의 증조모 손孙 씨는 강희康熙의 유모로 뽑혔고, 조부 조인曹寅은 어릴 때 뽑혀 입궁하여 강희를 수행하고 함께 공부했기 때문에, 조가는 청 왕조의 최고 통치자와 밀접한 사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설근의 증조부 조새曹玺 때부터, 조씨 가문 3대는 강녕江宁(지금의 강소성 남경)직조织造를 60여 년간 맡아왔다. 강희 황제가 남방순시를 할 때에 4차례나 강녕직조서를 행궁(황제가 외출 시에 머무는 곳)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렇게 뚜렷하고 위풍당당했던 흥성한 모습이 연기나 불같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옹정雍正이 제위를 이은 뒤, 황실의 은총을 잃은 조가는 가산을 차압당하고 집안이 몰락했다. 중년과 만년에 북경 서쪽 교외 산촌에서 생활한 조설근은 그림을 그려 팔거나 친우들의 원조를 받으며 근근이 생활했다. 곤궁하게 살아가던 중에, 그는 예전에 진회秦淮(남경성 안을 흐르는 작은 강)에서 있던 번화한 옛집의 정경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철저히 실패하여 돌이킬 수 없는 비참하고 침통한 현실도 인식했을 것이다. 그가 심각하게 인식한 인생과 사회의 본래의 면목을 비교하면서, 『홍루몽』 창작의 원시적인 동기가 생기게 된 것이다. 『홍루몽』중에 ‘글자마다 모두 피가 있다’라는 글귀는 작가의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홍루몽』은 현실주의 문학의 대가로 성공한 작품으로서, 절대로 조설근 개인의 슬픈 마음을 시로 읊은 것만은 아니다. 조설근이 『홍루몽』에 표현한 모든 주제는 “금을 품고 옥을 애도하는” 이전의 옛 창작취지 방식을 훨씬 뛰어넘어 심각한 의미를 지녀 당대에 견줄 바가 없는 경전이 되었다.
애석한 것은 조설근은 세상을 뒤흔든 이 작품을 다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120 회 중에서, 『홍루몽』의 후后 40 회는 고악高鹗이 계속 이어서 완성한 것이다. 비록 대체로 원작의 비극적 결말을 유지했으나, 사상성과 예술성은 모두 크게 원작보다 뒤떨어진다.
조설근은 중국문학사상 봉건사회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첫 번째의 작가이나 역사적인 제한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는 재능이 있으면서 펼 기회를 만나지 못하고, 하늘을 메울 힘이 없는 잡석杂石의 신분으로서, 이 봉건적인 큰 저택이 부패하여 붕괴하는 것을 어찌할 방법이 없이 탄식만 헸다.
그가 생활한 시대에서 그는 선진의 사상적 무기를 찾지 못하자, 최후에는 모든 것을 숙명으로 여기고, “색色”과 “공空”으로 귀결 지었다. 노신鲁讯은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꿈에서 깨어나 갈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설근이 아마도 이런 고통 속에 있었을 것이다.
중국 4대기서 『홍루몽』 읽기 (5)
가부의 제 5 대 사람인 가진의 아들 가용은 바람둥이로, 전처 진 씨가 시아버지와 간통하여 발각되어 자살하자, 후처로 호胡 씨를 취했다. 가련과 왕희봉의 딸 교저巧姐는 촌부 유 할머니(刘姥姥)가 이름을 지어주었다. 가부가 몰락한 후에, 교저는 유 할머니의 도움으로 구조된다. 요절한 가주의 아들 가란은 홀어머니 이환이 어려움을 감내하며 잘 길러 관리가 된다. 모친을 정경부인까지 되게 하지만, 이환은 이미 너무 심혈을 기울인 나머지, 황천길이 가까워진 상태였다. 이상은 녕국부와 영국부 내의 통치자에 속한 인물들이다.
소설 중에는 큰 두 저택 안에서 상층 사람들을 시중드는 하층 사람들 한 무리가 있는데, 중요한 사람으로는 각 방에서 시중드는 몇 사람의 시녀들이 있다.
원앙은 가모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수석 시녀이다. 가모가 세수하고 양치질하는 시중에서부터, 가모를 일분일초도 떠나지 않았다. 골패놀이(牌行令,벌주놀이.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하여 두 사람이 동시에 손가락을 내밀면서 각기 한 숫자를 말하는데, 말하는 숫자와 쌍방에서 내미는 손가락의 총수가 서로 부합되면 이기는 것으로, 여기서 지는 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놀이) 진행조차도 모두 그녀가 해야 했다. 그녀의 남다른 지위는 가련과 왕희봉마저도 몇몇 일의 경우는 그녀와 의논하여 할 정도여서, 그녀의 위엄은 반은 주인 같다.
그러나 가사가 강제로 첩으로 삼으려 했을 때, 비록 가모의 저지로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원앙은 이미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가모께서 돌아가시더라도 저는 평생 남자에게 시집가지 않겠어요’라고 울부짖으며 결국 원앙은 마지막에는 죽음을 선택하는데, 결연하게 자기가 살아 있으면서 지켜야 할 깨끗함과 존엄을 죽음으로 유지하고 보호한다.
평아는 왕희봉이 시집오면서 데려온 시녀인데, 또 가련의 첩이기도 했다. 몸종이고 시녀이면서 첩이라는 것은 바로 남자 주인이 시녀를 점유하여 첩을 삼은 것을 말한다. 그녀는 바람둥이 가련과 음란하고 위협적인 여주인 왕희봉 사이를 조심스럽게 선회하며, 전심전력을 다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의 노기 발산의 대상을 면치 못한다. 왕희봉이 집안을 관장하는 마님의 지위에 있는지라, 평아도 집안의 평상적인 일을 관리하여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위협으로 자기의 복을 추구하지 않고, 여러 가지로 밑의 사람을 배려하고 돌보아 주는 대처를 잘하는 왕희봉의 유능한 심복이다.
청문과 습인은 모두 보옥이 거처하는 곳의 상급 시녀들로, 사상과 성격은 오히려 다르다. 청문은 비록 하녀의 신분이나, 성격이 열화 같아 화를 잘 냈다. “왕부인”에게 밉보여 큰 화를 자초하나 굴복하려 하지 않는다. 온순하고 순종적인 습인은 기꺼이 시녀의 일을 맡아하며 입장을 바꾸어서 언제나 주인 보옥만을 생각한다. 자연히 왕부인 눈에 든 습인은 보옥의 “첩”으로 내정된다. 그러나 청문은 왕부인이 몰아세우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의 젊은 생명을 바치고 만다.
자견紫鹃은 본래 가모의 하녀인데, 나중에 대옥에게 보내져 대옥이 죽을 때까지 시중든다. 그녀는 이 외롭고 오만하고 걸핏하면 고민하는 귀족적인 아가씨와 함께 잘 지낸다. 임대옥은 자견이 보옥을 시험하려고 문제를 한번 일으켰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그녀에게 심한 말을 하지 않는다. 자견은 대옥을 돌보면서 시녀가 아가씨를 돌보듯이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종의 약자를 대하듯이 대옥을 동정했다. 특히 대옥과 보옥의 혼인에 대하여, 그녀는 시녀로서는 드물게 열정을 보인다.
심지어 그로 인한 처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히 더 귀한 것은, 대옥이 죽은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두터운 정감을 가지고 정의를 위하여 공정하게 말한다. 보옥을 오해하여 원망하며 배신을 비난도 하지만, 자견은 바로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한 송이의 자주빛 두견화가 변한 형상인 것이다.
이 한 무리의 시녀들 중에는 사람을 동정하게 하는 많은 인물형상이 있다. 예를 들면 굴욕을 당하고 억울함을 품은 채 물에 뛰어 들어 자진한 금천아, 자유 혼인을 추구하여 쫓겨난 사기司棋, 천진하게 말하여 질투와 미움을 받아 출가한 방관, 못된 가환을 풍부한 동정심으로 이해하는 채운彩云, 무고하게 견책하는 그림을 넣었다가 터무니없이 당하는 유오아柳五儿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행운이 안 따라 주어 몰락한 것이다. 그들의 비참한 운명은 대개 나면서부터 정해진 것이다. 습인처럼 시녀로서 기꺼이 순종하여 하려는 사람 외에는, 대개 다 생각과 감정의 “자아”가 조금은 흘러나왔기 때문에 필연코 손상되기 마련이었다. 『홍루몽』의 작가는 “주인” 중의 한 사람을 이런 하층의 여자들에게 동정을 베풀게 했는데, 하기 어려운 귀한 표현이라 하겠다.
『홍루몽』 안에는 4백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가부의 인물 외에, 수단을 가리지 않고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가우촌, 사람을 여러 번 패서 죽인 우둔한 폭군 설반, 분수를 알지 못해 자기의 생명마저 결국은 죽고만 가유贾瑞, 호랑이 잇새에 낀 것을 먹으려는 가운贾芸, 마음이 선량하고 세상일을 잘 아는 유 할머니, 풍류와 기개가 있으나 냉정한 명문가의 자제 유상련柳湘莲, 어쩔 수 없이 기예를 하는 배우가 된 기관琪官, 눈처럼 흰 피부에 달처럼 새긴 외모에 수양버들처럼 마음이 여려 결국은 생명을 잃고만 우이저, 자기의 결백과 억울함을 뜨거운 피로 증명하려고 한 우삼저, 자태는 부드러우나 광풍과 우뢰와 같은 성격을 지닌 하금계夏金桂 등등, 거의 하나씩 이름을 부르면 곧 독자의 면전에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한 인물형상으로 나타날 것 같다.
조설근은 사회생활에 대하여 깊은 관찰력과 사람을 감탄케 하는 표현력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그 시대의 대중의 생활상을 표현해 냈는데, 인물 군상의 외모와 정신을 특징 있는 모습으로 완성했다.
중국 4대기서 『홍루몽』 읽기 (4)
가부의 식구는 아니지만, 같은 대의 사람 중에, 가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젊은 여성 세 사람을 더 언급하면, 그들은 임대옥, 설보차와 사상운이다.
임대옥은 대관원 안에서 가장 광채가 빛나는 문학형상이다. 그녀는 본적이 소주苏州이고, 모친 가민贾敏은 가모의 막내딸이자, 가사와 가정의 여동생이다. 그녀 본인과 가보옥은 고종사촌이다. 모친이 일찍 사망하고 얼마 안가 부친도 세상을 떠나서, 그녀는 외조모에게 의탁하려고 영국부로 왔다.
남에게 얹혀사는 생활은 그녀를 많이 근심하고 의심이 많으며 민감하게 “팩 하는 성미”로 자라게 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가엾이 여겨 동정을 베푸는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고집스럽고 지나칠 정도로 자기의 존엄을 추구하여, 결국에는 자기를 학대하는 정도에 이른다.
그녀는 보옥이 주는 애정에서도 민감하게 고통을 느낄 때마다, 부단하게 의심, 걱정, 탐색을 시도하고 일부러 다투기도 했다. 본래 연약한 그녀의 마음은 이렇게 어지러워지고 부서졌다. 그러나 누가 그녀의 “팩 하는 성미”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팩 하는 성미 자체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팩 하는 성미” 안에 내포되어 있는 한 소녀가 목숨을 걸고 애정을 추구한 인생이다. 대옥은 마침내 울기를 다하고 죽고 마는데, 그녀는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위하여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른다. 다시는 더 이상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된 것이다.
대옥과 더욱 선명한 대조를 형성하게 한 형상의 인물은 어리석고 졸렬한 것처럼 가장하고, 때에 맞춰 본분에 상응하게 행동한 금릉의 규수 설보차이다. 설보차와 가보옥은 이종사촌인데, 보차의 어머니 설이모와 보옥의 어머니 왕부인은 친 자매로, 구성도검점九省都检点 왕자등王子腾이 보차와 보옥의 외숙부가 된다.
보차는 부유한 황상黄商 가정의 규수로 부친을 일찍 잃었다. 오빠는 쓸모 있는 사람이 못되어서, 어려서부터 모친을 도와 가계를 책임지는 것을 맡아왔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세상일에 능숙하고 처세를 잘한다. 지모에 능숙한 그녀는 보기에는 온유하고 후덕해 보이나, 심사가 주도면밀하고 표현은 너그럽고 커서 작은 일에 구애 받지 않았다.
가모가 그녀의 생일에 연극 제목을 고르라고 했을 때에도, 그녀는 노인이 좋아하는 떠들썩한 연극을 골라서 가모의 환심을 샀다. 오빠 설반薛蟠이 가지고 온 남방의 특산품을 집집마다 돌려 누구에게나 골고루 나눠주어 조이랑까지도 진심으로 감격하게 했다. 심지어 본래 마음속에 맺힌 불만과 ‘간계를 일부러 숨기고 있다’고 그녀를 의심하고 있던 임대옥까지도 나중에는 그녀를 지기로 인정했다.
봉건도덕의 표준으로 자세하게 고려해 볼 때, 설보차는 거의 결점이 없고 박학하고 견식을 갖춘 이상적인 집안 살림을 맡을 사람으로 손꼽을 수 있다. 그래서 병이 난 왕희봉이 집안일을 처리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도, 가부의 안살림 책임자 왕부인은 바로 그녀에게 이환李纨과 탐춘을 도와 공동으로 영국부의 집안일을 관리하게 한다. 그렇게 그들은 보차를 미래의 “보옥의 부인”(宝二奶奶)으로 인정한 것이다.
나중에 그녀는 과연 순조롭게 “보옥의 부인”의 위치를 취득하나, 그러나 그녀는 보옥의 진심과 성의에 찬 사랑은 얻지 못한다. 그녀의 미모, 온유함과 현숙함은 봉건가족의 반역자인 가보옥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가보옥은 그녀의 모든 기대와 희망인 “공부로 도리를 알고, 나라에 보답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사람이 영원히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후에 보옥은 그녀를 방치하고 불문에 들어가 버려, 그녀도 봉건 혼인제도의 순장품이 되어버렸다.
작위를 가진 가문 출신인 사상운은 가모의 친정 손녀인데, 가보옥과도 친척관계에 있다. 그러나 그녀가 태어났을 때, 가문은 이미 영락했다. 얼마 뒤에 어린 그녀의 부모마저 모두 사망하여서, 숙부숙모의 집에서 의탁하여 키워졌는데, 처량한 상황은 상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천생이 명랑하고 솔직하며 호방한 그녀는 학문적인 사유도 민첩하고 천진난만했다. 벌주(划拳,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하여 두 사람이 동시에 손가락을 내밀면서 각기 산 숫자를 말하는데, 말하는 숫자와 쌍방에서 내미는 손가락의 총수가 서로 부합되면 이기는 것으로, 여기서 지는 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놀이) 놀이를 할 때, 그녀는 그릇에 팔찌가 부딪쳐 소리를 내며 재미있게 논다.
술에 취해 작약 위에 누워 꽃이 온 몸과 머리에 가득히 떨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대관원에서 시사诗词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온다. 그녀는 장난으로 보옥을 “사랑하는 오빠”(爱哥哥)라고 혀 짧은 소리로 불렀다. 그녀도 예전에 보옥에게 사대부와 교제하러 다니라고 권한 적이 있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사심 없이 말한다는 인상을 준다.
세상일에 원만한 설보차와 근심이 많아 감정적인 임대옥과 비교해 보면, 사상운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잘 대해서 접근하기 쉬운 사람이다. 그러나 인성이 속박 당하던 그 시대에서, 사상운도 좋은 결말을 보지는 못한다. 그녀는 마음에 맞는 낭군에게 시집을 가서 혼인생활은 비교적 행복했지만, 얼마 후에 남편이 병으로 죽어 처량하기 그지없는 신세가 되고, 심지어 거지로 전락한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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